14장
밤이 되자 빗줄기는 거세어졌다. 샤를마뉴는 술을 마셔 운전을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인근 호텔로의 피신을 주장했다.
그의 외가인 채스터턴가에서 운영하는 호텔인지라 보안이 철저한 객실을 구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으나 굳이 피신을 주장하는 것에는 이유가 따로 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를 모른 척하며 대답했다.
“운전하기 어려우시다면 비서실에 기사를 요청하겠습니다.”
그 말에 샤를마뉴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러 그래. 그냥 호텔로 가면 되는데…….”
“호텔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입니다. 최선은 황궁으로 돌아가시는 거고요.”
“아, 자꾸 이러기야?”
“애초에 전하께서 직접 운전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지요. 경호관들도 떼어 놓고 나오셨으니 오늘은 무조건 황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라파엘…….”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는 샤를마뉴의 시선을 피해 지배인을 불러 전화기를 요청했다.
원래대로라면 비서실에서 지급한 전화기를 썼겠지만, 교통사고로 박살 난 이후 아직까지 재발급을 받지 못했다.
지배인이 알겠다고 고개를 수그린 후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샤를마뉴가 초조하게 말했다.
“왜 이래? 정말. 내 마음 다 알면서.”
“제가 뭘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서 이래?”
그가 은근슬쩍 내 손을 잡아 손바닥을 간질이며 속삭였다.
“우리가 다시 한마음이 된 날이라고. 아주 기념비적인 날이란 말이야.”
“…….”
“이런 날에 각자 갈 길 가자고? 너무하잖아, 달링.”
달링? 순간 얼이 빠졌다.
“바, 방금 뭐라고…….”
“달링.”
“전하!”
“그럼 허니?”
맙소사. 나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개조된 박스석인지라 아무도 듣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이건 좀.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제발 공개된 장소에서 이러지 마세요.”
“그러니까 사적인 장소로 가자 이거야.”
“아, 제발, 전하…….”
속이 타는 건 나뿐인가 싶다. 샤를마뉴는 뻔뻔하게 눈웃음을 치며 계속 손바닥을 간질였다.
“호텔로 가자, 응?”
“……안 됩니다.”
“허니, 이렇게 부탁할게.”
“절대 안 됩니다.”
아무리 허니라고 불러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는데 손바닥을 자극하는 손짓에 계속 신경이 쏠렸다.
간지럽다기보다는 애무에 가까운 느낌이다. 이 사람이 정말 어디서 이런 것만 배워 와서는…….
휩쓸리지 않으려 살짝 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지배인이 들어와 전화가 준비되었다고 알렸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1층으로 내려갔다.
샤를마뉴는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차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납니다. 라파엘 드마뉴. 여기 8지구에 위치한 르…….”
그 순간 내 뒤로 샤를마뉴가 빠르게 지나갔다. 잘못 본 건가? 전화기를 붙든 채로 고개를 돌리자 레스토랑을 벗어나는 샤를마뉴의 뒷모습이 보였다.
맙소사. 다음 순간 나는 전화기를 내던지듯 내려놓고 그의 뒤를 쫓았다.
“전하!”
내가 조금 뒤늦게 그의 뒤를 쫓았을 때, 그는 빗속에 서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멀뚱히 비를 맞으며.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짓입니까!”
빗줄기는 굵었고, 정장은 빠른 속도로 젖어 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지? 당황한 손으로 그를 붙잡자 그가 빗속에서 씨익 웃었다.
“아, 시원하다. 그렇지?”
“미치셨어요?!”
“완전 푹 젖었네.”
지금은 10월이었다. 제국의 서북쪽에 위치한 수도는 다른 곳보다 기온이 빨리 떨어졌고, 가을비는 쌀쌀하다 못해 추웠다.
그걸 쫄딱 맞으면서 하는 소리가 ‘시원하다’라니. 미쳤다고밖에 말이 안 나온다.
허겁지겁 그를 쫓아 나온 나 역시 우산이 없었기에 내 옷도 점점 축축해지고 있었다. 춥다.
파리해진 내 얼굴을 본 그가 짧게 혀를 차며 제 웃옷을 벗어 내 머리 위에 씌웠다.
“왜 우산도 없이 나왔어? 춥게.”
“지금 전하께서 할 말이 아닐 텐데요?!”
“음, 그건 그렇지.”
“빨리 들어가요! 미쳤어, 정말.”
기겁한 채로 그를 끌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오자 지배인이 안절부절못하며 수건을 가져와 우리에게 내밀었다.
수건을 받아들고 바로 그에게 다가가 머리와 얼굴을 닦아주었으나 그가 자신은 되었다며 내 손에 들린 수건을 빼앗아 도리어 나를 닦기 시작했다.
지배인과 서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는 표정이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못 살아. 그의 손을 붙잡고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도대체 왜 이러셨습니까?”
“음…….”
“갑자기 왜 뛰쳐나가서 비를 맞으셨어요?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지만 폭우처럼 쏟아지는 가을비를 맞고도 멀쩡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황태자의 몸은 황태자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자산이었다. 다쳐도 안 되고, 아파도 안 된다.
그리고 그런 그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우리 비서관들의 임무였다. 그가 아프면 내가 깨진다는 소리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돌발행동에는 화가 나지만.
샤를마뉴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나 감기 걸리면 어쩌지?”
“…….”
“빨리 따뜻한 곳 들어가서 쉬어야 할 것 같은데.”
“…….”
“마침 건너편에 알맞은 호텔이 있네.”
“…….”
“따뜻한 스위트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그가 장난꾸러기처럼 코를 찡긋하고 웃으며 덧붙였다. 머리가 띵하니 아팠다. 결국 호텔 하나 가자고 이 난동을 부린 거란 말이지.
진짜 내가 못살아.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자 그가 일부러 몸을 떨며 소곤거렸다.
“나 추워, 라파엘.”
“…….”
“푸에취!”
하……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양팔을 들어 항복했음을 알리자 그가 악동처럼 웃었다.
저런 사람이 내 연인이라니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리고 이런 수작질에 넘어가는 나도 참 멍청이 다 되었다 싶고.
아프지 않게 팔을 툭 때리자 그가 피시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라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황궁에 연락해 오늘 황태자가 C&H 호텔에서 머물 예정이라 알렸다. 바로 경호 인력을 보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올 때 여벌의 옷도 부탁했다.
전화를 끊고 또다시 C&H 호텔 총지배인의 직통 번호로 연락해 황태자가 머물 예정인데 지금 바로 객실을 준비할 수 있겠냐 물었더니 조금 당황스러운 듯싶었으나 최상층의 로열 스위트룸이 가능하다는 대답을 얻었다.
참 운도 좋지. 스위트룸이라도 없었으면 그 핑계로라도 돌아갈 텐데 비어도 하필 로열 스위트룸이 비었다.
이거 다 각본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하며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에서 제공한 로얄 스위트룸은 긴 복도 중간에 수행원 침실이 있고, 끝으로는 거실과 응접실, 서재와 회의실이 있으며 제일 안쪽으로 높은 샹들리에가 매달린 침실과 욕실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였다.
샤를마뉴는 안쪽 방으로 향했고, 나는 당연히 수행원 침실로 향했다. 수행원 침실 안쪽에도 욕실이 있으니 그곳에서 씻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디 가?”
샤를마뉴가 황당하다는 듯 내 손목을 붙잡고 물었다.
“왜 그쪽 방으로 들어가?”
“……예?”
“침실은 안에 있어.”
그러더니 내 손목을 붙잡은 채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어? 나를 왜…… 하고 생각하는 사이 안쪽 침실에 도달했다.
내 가방을 빼앗아 의자에 올려 둔 그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더니 드레스룸 쪽으로 밀었다.
“젖은 옷 계속 입고 있으면 감기 걸려. 안쪽에 가운 있으니까 씻고 갈아입고 나와.”
“아…… 예.”
옷을 갈아입기는 해야지. 조금 얼떨떨한 채로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을 벗는데 머리 한구석이 계속 의아했다.
나를 여기로 왜 데려온 거지? 샤워 가운은 수행원 침실 안 욕실에도 있는데.
일단 착실하게 몸을 씻고 샤워 가운을 걸친 후 밖으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샤를마뉴가 휘유, 하고 짧게 휘파람을 불더니 작게 박수를 쳤다.
“잘 어울리네.”
“샤워 가운이 어울려 봤자…….”
“아니야. 정말 잘 어울려. 섹시하다고.”
“…….”
섹시…… 도대체 샤워 가운의 어느 부분에서 섹시함을 느낄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야.
헛소리는 한 귀로 흘리며 수건으로 대충 머리의 물기를 닦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보며 샤를마뉴가 혀를 찼다.
“이리 줘. 내가 해줄게.”
“아니요, 괜찮…….”
“줘.”
내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든 그가 나를 소파에 앉히더니 수건으로 부드럽게 머리를 닦았다. 그 손길이 뭔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익숙하다니. 그가 언제 내 머리를 만진 적이 있었나? ……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꼭 그때 같네요.”
“응?”
“예전에 전하께서 제 머리를 빗어주신 적 있잖아요.”
그 말에 샤를마뉴가 ‘아아’ 하면서 대답했다.
“맞네. 그때 내가 머리 빗어줬지.”
“예.”
“그때 뭐라고 했더라.”
“……글쎄요.”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예쁘냐고 물었던 것 같은데.”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세를 낮추고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묻기를.
“진짜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예뻐?”
“…….”
“응? 대답해 봐, 라파엘.”
나는 조금 부끄러워서 입을 다물었다. 그놈의 예쁘다는 말 좀 그만할 수 없나…….
그가 나를 모욕하려 하는 말이 아님은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거북한 건 어쩔 수 없다. 예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남성성이 부정당하는 기분이란 말이지.
그리고 객관적으로 봐도 내가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남자에 불과하다. 웃으면 그나마 봐줄 만한, 그저 그런 정도의.
나는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대답했다.
“제가 예뻐 보이는 사람은 전하밖에 없을 겁니다.”
너만의 착각이다, 라는 뜻을 담아 한 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샤를마뉴는 그 말을 무척 좋아했다. 그가 눈을 빛내며 말을 받았다.
“그럼 나 좋으라고 이렇게 예쁘다는 거네?”
“……예?”
“완전 내 거네. 내 거.”
왜 말이 그렇게 튀지? 샤를마뉴가 예뻐 죽겠다는 듯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내 뺨을 붙잡고 이마에 입술을 쪽쪽 내리찍었다.
그 뜨거운 감촉에 얼굴이 슬슬 달아올랐다. 정말 애정을 표현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애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할 행동들. 나는 슬쩍 그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 말에 샤를마뉴가 내 얼굴을 당겨 입을 맞추려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가다니, 어딜?”
“……제 침실이요.”
“뭐?”
그가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그 표정에 당황한 것은 나였다. 아니, 왜 저런 표정이야? 샤를마뉴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설마 다른 방에서 자려고?”
“그럼요?”
“말도 안 돼!”
“뭐가요?”
멀뚱히 뭐가 말이 안 되냐고 묻자 샤를마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짧게 머리를 흔들었다.
“오늘 같은 날에 각방을 쓰겠다는 뜻이야?”
“…….”
긍정의 뜻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샤를마뉴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 지나간다.
“맙소사, 라파엘. 당신이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상상도 못 했어.”
“…….”
“내가 당신이랑 각방 쓰려고 여기 온 줄 알아?”
그럼? 나는 내심 당황해서 샤를마뉴를 바라보았다. 그럼 뭘 바라고 온 거야?
지극히 상식적인 남자인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설마 같이 자자는 건가? 말도 안 돼.
나는 마음이 통했다고 바로 잠자리를 공유할 정도로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다.
내가 호텔에 온 것은 그가 비에 쫄딱 젖었기 때문이며, 마음이 통한 날에 쌩하니 갈 길 가는 게 말이나 되냐며 성을 내는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첫날부터 너는 네 갈 길 가라, 나는 내 갈 길 갈 터이니 하면 아무래도 서운하겠지.
같이 잠자리를 공유하기는 좀 이르더라도 밤늦게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졸리면 나는 내 방에, 샤를마뉴는 안쪽 침실에서 잠을 자고 말이다.
그런데 샤를마뉴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럼 뭘 바라고 오신 겁니까?”
“당연히!”
“당연히?”
샤를마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보란 듯 턱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너른 침대는 세 사람이 누워도 충분할 만큼 컸지만 지금 크기는 중요한 게 아니다.
“같이 자자고요?”
“…….”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내가 떨떠름하게 묻자 샤를마뉴가 눈을 껌뻑이며 되물었다.
“뭐가 일러?”
“……연인 관계에도 절차와 순서라는 게 있잖아요.”
“절차? 뭐, 손잡고 포옹하다가 입 맞추고 베드인하는?”
“예. 그런 거요.”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하나하나 시작하자. 응? 그런 의미를 담아 어색하게 웃었더니 샤를마뉴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이봐, 라파엘. 당신이 잊은 것 같은데 우리 이미 그거 다 했거든?”
“……예?”
“손잡았고, 포옹도 했고 키스도 했으며 심지어는 섹스도 했다고.”
“어……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이잖아요. 오늘은 첫날이라고요.”
“정확히는 ‘다시 만난’ 첫날이지.”
이러나저러나 첫날은 첫날이잖아. 그렇게 반박하려는 찰나, 샤를마뉴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어, 어어……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뒤꿈치가 침대가 닿았다. 더 이상 갈 곳도 없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가 팔을 뻗어 내 허리를 낚아채며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으악. 시야가 확 뒤집힌다.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밑으로 보이는 것은 샤를마뉴의 흑갈색 머리통.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휴, 이렇게 보니까 더 섹시하네.”
“뭐 하는 겁니까. 놔주세요.”
“싫어!”
“자꾸 이러면 화낼 겁니다.”
“그거 좋지. 안 그래도 나 당신한테 혼나야 하잖아.”
“예?”
혼나야 한다니? 내가 왜 샤를마뉴를 혼낸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교태를 부리듯 눈웃음을 치며 한 손으로 내 입술을 꾹 눌렀다.
“일곱 번. 내가 미안하다고 한 횟수.”
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맙소사.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어? 내가 루크일 적 내뱉었던 부끄러운 말들이 떠오르자 얼굴이 불타올랐다.
“그건……!”
‘그건 내가 정신이 온전치 않을 때 했던 말이잖아요!’ 하고 반박하려는 순간이었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혓바닥을 꾹 눌렀다. 아니, 이건 또 뭐 하는 짓이래. 확 깨물 수도 없고.
제 손가락을 어정쩡하게 물고 있는 나를 보며, 샤를마뉴가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를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까, 키스만 일곱 번 하는 건 비효율적인 것 같아.”
“…….”
“키스 다섯 번을 체벌 한 번으로 바꾸는 게 좋겠어.”
그러더니 손가락을 빼고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입을 맞췄다. 내가 싫은 소리 하는 것은 아예 듣지도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게 어이가 없으면서 웃기기도 했다. 하여튼 제멋대로지. 일부러 입을 꾹 다문 채로 버티자 그가 내 입술을 핥으며 잘근잘근 깨물었다. 마치 ‘열어줘’ 하고 보채는 것 같다.
그래도 입술을 열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는 그냥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끝까지 입술을 열지 않는 나를 불만스러운 듯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더니 엄지손으로 턱 밑을 꾹 눌렀다.
아.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어진 순간, 그의 혀가 무자비하게 입속으로 파고들었다.
으음…… 주인을 닮아 제멋대로 날뛰는 혀는 입천장을 톡톡 건드렸다가 혀를 빨아올리듯 휘감았다가 아주 정신이 없다.
도망치려는 듯 혀를 물렸더니 집요하게 쫓아와 옭아매었다. 이제 그만……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주먹으로 퉁퉁, 그의 어깨를 두드리자 그가 쪽, 하고 마지막까지 입술을 빨더니 고개를 들었다.
후우, 조금 숨이 차다.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자 샤를마뉴의 입술이 침으로 반질반질한 것이 보였다.
내 것도 그렇겠지 싶어서 입술을 닦으려던 순간이었다. 무언가 휑하다. 추운 것 같기도 하고. 뭐지? 살짝 고개를 들어 내 몸을 살폈다. 그리고.
“헉……!”
뭐야, 이거! 분명 조금 전까지 단단히 동여매고 있던 샤워 가운이 휑하니 벗겨져 있다.
도대체 언제 벗긴 거야?! 경악한 채로 주위를 둘러보자 바닥에 떨어진 샤워 가운이 보였다.
키스할 때 정신없이 몰아치면서 벗긴 모양이다. 속옷만 걸친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때 샤를마뉴가 내 위로 올라탔다. 나는 질겁하여 그를 불렀다.
“저, 전하.”
왜…… 왜 올라타세요. 내려가요. 내 몸 위에서 내려가라고요. 샤를마뉴는 피식 웃으며 제 샤워 가운을 풀었다. 나와는 달리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의 나신을 감싸고 있던 샤워 가운이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안 돼. 벗지 마. 다시 입어!
“주인님.”
그가 손가락으로 소름 때문에 돋아난 내 유두를 꾹 누르며 속삭였다. 주인님이라니…….
유두에 닿는 손가락과 그가 내뱉은 단어, 두 가지 모두에 놀라 굳어버린 내 위로 그가 몸을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진다. 이를 세워 내 코끝을 살짝 깨문 그가 유두를 매만지며 귓가에 후, 하고 속삭였다.
“혼내 주세요.”
“…….”
“진하게.”
삼류 포르노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투였다. 황태자에게 저런 말투가 가당키나 하냐고.
나는 그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왜 내가 더 수치스러운지 모르겠다. 민망함에 얼굴과 목이 달아올랐다.
샤를마뉴는 그런 나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웃지 마. 계속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어느 순간 샤를마뉴의 웃음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가슴께에 닿아오는 따뜻한 감각.
“……!!”
눈이 절로 번쩍 뜨였다. 내 위에 올라탄 그가 유두를 핥고 있었다. 뜨거운 혀가 안 그래도 곤두서 있던 유두를 핥자 온몸이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이러지 말라는 뜻으로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세워 유두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기분이 이상했다. 간지러우면서도 마냥 간지럽지만은 않은 이 느낌은 뭘까.
그때 하체 쪽에서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속옷 위로 부드럽게 내 것을 매만지는 손길…… 으, 이상한 소리가 목구멍에서 튀어나갔다. 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하체에 피가 몰렸다.
그는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내 것을 아래에서 위로 쓸었다. 보지 않아도 성기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안 되는데…… 이러면 정말 휩쓸리고 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만두라는 말을 못 하는 것을 보니 이미 반쯤은 휩쓸린 거였다. 내가 이렇게 쾌락에 약한 인간이었나. 약간 자괴감이 들었다.
그때 내 유두를 핥고 빨고 짓씹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내 기분을 살피려는 듯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살짝 웃으며 몸을 물렸다.
음? 이게 끝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시야에서 벗어난 그를 보기 위해 상체를 일으키자 침대 밑으로 내려간 그의 동그란 머리통이 보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저 자세는, 그러니까…… 그가 내 속옷을 끌어 내리기 직전, 다급하게 외쳤다.
“안, 안 됩니다.”
“응?”
“거긴 좀……!”
“흠?”
좀…….
“……이, 이상하다고요.”
이게 아닌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는 자각은 조금 뒤늦게 찾아왔다. 얼굴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샤를마뉴가 내 속옷을 쥔 상태로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예쁘기만 한데.”
“아, 제발 전하…….”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저번에도 해줬는데.”
“그때는 손이었잖아요!”
“손이나 입이나.”
“다릅니다!”
달라! 전혀 다르다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으나 다음에 이어진 샤를마뉴의 말에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받아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알아.”
“…….”
받아본 적 없는 건 또 어떻게 아는 거야. ……물론 내 반응으로 유추했겠지.
받아 본 적 없다는 건 사실이다. 전 여자친구와 관계를 가질 때도 내가 애무를 하면 했지, 받는 쪽은 아니었다. 성욕도 많지 않은 편이라 새로운 체위를 시도한 적도 없었고.
입을 꾹 다문 나를 바라보던 샤를마뉴가 다시금 자세를 고쳐 잡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일단 받아보라고. 응?”
“하지만…….”
“분명 좋을 거야.”
……정말 민망한데. 하아. 볼 자신이 없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샤를마뉴가 낮게 웃더니 내 속옷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약간 휑한 느낌이 드는 하체가 낯설었다.
후…… 가늘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성기 끝에 따뜻하고 촉촉한 무언가가 다가왔다.
“으음…….”
첫 느낌은 간지럽다는 것이었다. 귀두 끝을 핥아 대는 혀의 감각은 쾌감이라기보다는 간지러움에 가까웠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아랫배가 살짝 풀렸다.
나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살짝 내려 샤를마뉴를 돌아보았다. 내 무릎 사이에 앉아 조심스럽게 내 것을 핥는 그의 모습이 약간 낯설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 동시에 그가 아닌 것 같다.
끝부분만을 핥아 대던 애무는 점점 더 깊어졌다. 그는 마치 사탕이라도 핥는 것처럼 귀두를 위아래로 핥다가 동글게 말았다. 그러면서 점점 깊숙하게 내 것을 제 입안으로 넣었다.
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 소리에 샤를마뉴가 내 것을 문 채로 눈을 치켜떴다.
“하으…….”
아마도 내 두 눈은 잔뜩 벌게졌으리라.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성기를 빨아들였다.
쯥,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빨자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이건 뭐랄까. 용암이 들끓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순식간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며 그가 마치 피스톤질을 하듯 머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오, 맙소사. 이건. 이건 정말. 발등이 절로 굽었다. 침대 아래로 내려놓은 종아리가 덜덜 떨렸다. 리드미컬하게 앞뒤로 흔들리는 그의 머리통이 점점 빨라졌다.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내 성기는 이미 잔뜩 발기해서 분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그만!”
이제는 정말 쌀 것 같다. 그만하라고 외치자 샤를마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덮치듯 내 위로 타오르며 입술을 맞부딪쳤다.
조금 전까지 내 것을 빨던 입술이었으나 잔뜩 흥분한 상태라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입술을 뗀 후, 나 못지않게 흥분한 샤를마뉴가 짐승처럼 헐떡이며 속삭였다.
“하고 싶어.”
“…….”
“하게 해줘. 응?”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꼿꼿하게 발기한 그의 성기가 내 아랫배를 쿡쿡 찔렀다.
그 느낌마저도 지나치게 자극적이라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았다.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것을 붙잡고 강하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
몇 번 훑지도 않았는데 이미 잔뜩 흥분해 있던 내 것은 금방 묽은 것을 토해 내었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이런 거구나. 이런 게 말로만 듣던 펠라구나. 멍한 와중에 그런 생각만 들었다.
그때 엉덩이 사이로 무언가 들어왔다. 헉. 흠칫 놀라서 몸을 뒤틀자 샤를마뉴가 괜찮다고 진정하라는 듯 가슴팍을 도닥였다.
항문 주위를 톡톡 두드리는 그것은 그의 손가락이었다. 내 정액만 조금 묻어 있는 것.
“미안. 근데 지금 젤이랑 콘돔 둘 다 없거든.”
“그럼…….”
“절대 안 아프게 할게.”
젤도, 콘돔도 없다고? 그럼 그냥 하겠다는 소리다. 분명 아프겠지. 순간 하지 말까 싶었으나 이미 하늘을 뚫을 기세로 흉흉하게 발기한 샤를마뉴의 것을 보니 나 혼자 편해졌다고 안 하겠다고 하는 것도 좀 미안했다.
결국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의식적으로 몸에 힘을 풀었다. 그래야 덜 아프다.
샤를마뉴의 손가락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처음에는 하나였던 것이 두 개로 늘어나고, 세 개가 될 때까지 내벽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몸에서 힘을 빼려고 했지만 그게 쉬울 리 없다. 입구를 푸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샤를마뉴의 것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꺼떡였지만 결코 사정하지는 않았다.
“들어갈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천천히 제 것을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너무 아프다. 손가락만으로 풀기는 무리였나. 시트를 움켜쥔 손이 덜덜 떨렸다. 눈앞이 깜깜해졌고, 몸이 두 쪽이 나는 것 같은 고통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아파? 응?”
“아…… 아파. 아파. 으…….”
“미안. 미안해, 라파엘.”
그러면서도 그는 진입을 멈추지는 않았다.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지. 괜히 원망스러워서 주먹으로 그의 팔을 퍽, 쳤다. 그가 어설프게 웃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온전히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 숨 쉬어, 라파엘. 샤를마뉴가 부드럽게 엉덩이를 도닥였다.
후우, 숨을 내쉬고 몸을 약간이나마 진정시키자 내 안에 들어찬 그의 존재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내가 숨을 고르는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샤를마뉴가 물었다.
“움직여도 돼?”
이미 그의 것은 내부에서 움찔대고 있었다. 빨리 움직이고 싶다는 뜻이리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제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양팔로 내 허벅지를 붙잡고 천천히 허릿짓을 시작했다.
“흐…… 아…….”
“하…….”
뱃속에서 앞뒤로 왕복하는 낯선 것이 불편하다. 신음을 참으려고 해도 절로 튀어나왔다.
샤를마뉴는 무척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마치 어딘가를 찾는 것처럼 내 몸 안 곳곳을 쑤셨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찾은 내가 느끼는 지점을 다시 찾으려는 것 같다. 그때 정신은 루크였으나 몸은 내 것이었으니까.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으면서도 꿋꿋이 참고 내가 느끼는 지점을 찾으려는 그가 조금 기특해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가 욕망을 참는 일그러진 얼굴로 웃으며 내 손을 낚아채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정중하면서도 탐욕스러운 몸짓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몸이 크게 떨렸다. 눈앞이 번쩍하고 빛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나는 바들바들 경련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찾아낸 것이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내 몸의 가장 은밀한 지점을.
그의 얼굴에서 정중한 미소가 사라졌다. 이제는 더 이상 욕망을 참을 이유가 없어진 그의 허릿짓이 점점 강렬해졌다.
“아, 아아, 으읏, 아!”
비명이 되지 못한 단적인 신음이 입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아파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쾌감 어린 신음이었다.
신음에 맞추어 침대가 삐걱대었다. 그 소리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 지금 내게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오직 단 하나. 그가 주는 쾌감뿐이다.
이미 한 번 힘을 뺐던 성기는 다시금 힘을 받아 하늘로 꼿꼿이 솟은 채였다. 아무도 만지지 않았는데 저 혼자 힘을 얻은 성기가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지 못할 만큼 쾌감은 벅차게 나를 적셨다.
나를 몰아붙이는 샤를마뉴의 몸짓은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빨랐다. 그가 툭툭 거친 호흡을 내 가슴 위로 내뱉었다.
“라파엘, 후, 대답, 해봐.”
“아, 응, 으……!”
“내가 누구지? 응? 내가 누구야?”
그의 목소리는 분자가 되어 귓가에서 흩어졌다. 그 말이 무슨 의민지는 와 닿지도 않았다. 나는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고, 그는 대답해 보라고 종용하며 몸을 조금 더 세게 흔들었다.
“널 안고 있는 내가 누구냐고, 라파엘.”
움직임은 점점 격해져서 세상이 흔들린다고 착각할 만큼으로 커졌다.
착, 착, 착!
엉덩이와 허벅지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내 비명과 마찰음과 나를 종용하는 사내의 목소리만 존재하는 이 비정상적인 세상. 나는 눈물과 함께 그의 이름을 토해냈다.
“……샤를, 샤를마뉴. 샤를마뉴……!!”
그 말에 샤를마뉴가 짧게 웃었다.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 같다. 눈물로 희뿌예진 시야 너머로 샤를마뉴가 양팔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몸을 내 쪽으로 완전히 기울여 두 다리를 어깨 위에 올렸다. 강인한 두 팔 안에 내가 갇혀버렸다.
그 자세로 인하여 삽입은 더욱 깊어졌다. 그의 것이 찌를 때면 불꽃이 번쩍였고, 내벽을 빠져나갈 때면 하얀 포말이 정신을 가득 채웠다.
이게 무슨 감각인지 모르겠다. 어떤 여자와 섹스를 해도 느낄 수 없었던 지독한 쾌감에, 어느새 나는 스스로 허리를 흔들며 그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그가 나갈 때면 아쉽다는 듯 내벽을 조였고, 들어올 때면 다시는 나가지 못하게 그의 것을 품었다.
샤를마뉴는 나의 변화에 기쁘게 웃으며 입을 맞추었다. 키스는 부드러웠으나 아랫도리는 흉포하기 짝이 없었다.
“더, 더는, 흐윽, 못, 윽.”
“기다려.”
“아, 안 돼, 못…….”
“조금만 더.”
사정감이 밀려들어 이제는 못 하겠다고 울었으나 샤를마뉴는 아직은 아니라며 도리질을 쳤다.
그가 꼿꼿하게 기립한 내 성기를 틀어쥐고 귀두를 막았다. 미칠 것 같다. 아니, 이미 미친 것 같다.
나는 내 성기를 틀어쥔 샤를마뉴의 손을 떼어내려고 팔을 휘저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스퍼트를 올리듯 잘게 허리를 부딪쳐 왔다. 더 이상 들어올 곳이 없는데도 어떻게든 안쪽까지 박겠다는 듯 찍어 올리는 그의 몸짓이 거칠었다.
그만. 그만해.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짐승처럼 울부짖자 그가 짤막한 신음과 함께 허리를 깊이 처박았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파정했구나. 그가 내 성기를 틀어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꼿꼿하다 못해 터질 지경으로 붉게 서 있던 내 성기에서도 희뿌연 정액이 툭툭 튀어나와 그의 아랫배를 적셨다.
마치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사정의 여운은 밀물처럼 내게 밀려들었고, 순식간에 하얗게 탈색된 머리로 나는 멍하니 샤를마뉴를 바라보았다.
사정 이후에도 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샤를마뉴는 멍한 내 눈가에 짧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우는 것도 예쁘다.”
“…….”
“마음 같아서는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그 말과 함께 내 속에 있던 그의 것이 움찔, 하고 힘을 얻었다. 그 감각에 약간 정신이 돌아온 내가 슬슬 고개를 젓자 그가 씩 웃으며 알았다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욕심부릴게.”
“……응.”
“졸려?”
졸리다. 길고 긴 하루였다. 추도식 준비부터 호텔에서의 정사까지……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졌다.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몸에서 제 것을 빼내며 말했다.
“졸리면 자. 뒤처리는 내가 할게.”
“하지만…….”
“쉬이. 눈 감아야지.”
무어라 따지기도 전에 그가 큰 손으로 내 눈을 덮었다. 한순간에 세상이 어두워졌다.
뒤처리는 자기가 한다고…… 그때 엉덩이골 사이로 흐르는 정액이 느껴졌다. 이것도 그럼 자기가 빼겠다는 소리겠지.
아, 모르겠다. 알아서 해주겠지. 하루 내도록 쌓인 피로가 눈꺼풀에 매달렸다.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자신이 없어 눈을 감자 그가 내 가슴을 도닥이며 잘 자라고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듣기 좋아 잠들기 직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짝 웃어버렸다.
* * *
한바탕 일을 치르고 기절하듯 잠든 뒤 눈을 뜨니 샤를마뉴는 없었다. 어딜 갔나, 주위를 둘러본 것도 잠시, 탁자 위에 놓인 메모를 발견한 나는 손을 뻗어 메모를 확인했다.
[잠깐 다녀올게. 쉬고 있어.
- 당신의 샤를.]
행선지도 밝히지 않은 메모는 약간 불친절했다. 그것을 잠시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허리께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욕설이 튀어나왔다. 끔찍한 고통이다. 침대에서 벗어나는 걸 포기하고 곧장 몸을 뉘었다.
어제 할 때까지는 참 좋았는데 역시 섹스는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운동인가 보다.
다음 섹스는 좀 나중으로 미루어야지. 한 번 일을 치르고 났더니 안 하겠다는 선택지는 아예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왜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냥…… 좋았으니까. 다시 사귀게 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벌인 일이지만 관계는 내 생각보다 더 좋았다.
루크일 적에도 몸을 섞은 적은 있지만 아무래도 라파엘과 루크의 기억을 모두 가진 채로 몸을 섞는 편이 더 좋았다. 이제야 온전히 그를 차지한 기분이다.
이런 내가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해서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더라?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제는 목요일이었지. 그러니까 오늘은…….
“헉.”
끔찍하게 쉰 목소리가 마른 목을 뚫고 튀어나왔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연습한 성악가가 이런 목소리일까?
그건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목소리가 쉬었느냐 안 쉬었느냐의 여부가 아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망했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시계를 살폈다.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은 오후 3시 33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망했다. 무단결근을 해버렸다. 내가 보좌해야 하는 사람은 샤를마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과 퇴근에 관한 것은 비서실장에게 보고해야 하는 사항이었다.
진짜 망했군.
나는 엉거주춤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단 뒤늦더라도 전화는 해야겠다. 아직 휴대폰을 배급받지 못해서 스위트룸에 비치된 전화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곧장 너 해고, 라고 하지는 않겠지. 해고를 당해도 워낙에 상속받은 재산이 많다 보니 걱정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자존심상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불길한 생각을 저 멀리 집어 던지며 떨리는 손으로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요틴에 오르는 죄수의 심정이었다.
비서실장의 성질만큼 단조로운 신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끊겼다. 나는 최대한 동요한 기색을 숨기며 인사했다.
“라파엘 드마뉴입니다.”
-음? 무슨 일입니까?
너 전화 왜 걸었니, 라는 식의 말투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나 정말 통보 없이 해고당했나?
떨떠름한 얼굴로 해고의 가능성과 앞으로의 미래-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때였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목소리가 아주 별로인데.
“예?”
-또 쓰러졌다고요. 전하께 들었습니다.
“아…….”
비서실장이 낮게 혀를 찼다.
-병원에는 갔습니까?
“아, 아니요.”
-사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바로바로 병원 들러서 진찰받는 게 좋겠습니다.
아, 예…… 나는 눈만 깜빡이며 멍하니 대답했고, 비서실장은 지독히 사무적인 말투로 그 연배의 아저씨들처럼 은근한 잔소리와 걱정을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다음 주 월요일에 보자고 한다. 일단 해고는 면했다. 나는 한숨처럼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샤를마뉴 덕분에 오늘 결근은 해결되었다. 걱정했던 것에 비해 쉽게 해결된 일이 조금 우스워서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허허 웃었다.
그냥 모든 게 꿈같다. 악몽도 길몽도 아닌 그저 행복한 일상의 꿈.
그때, 방문이 열렸다.
흠칫 놀라 돌아보자 샤를마뉴가 보였다. 그는 어제 입었던 것과 비슷한 쓰리피스의 검은 양복을 갖춰 입었다. 그걸 보자 문득 오늘 일정이 떠올랐다. 이런.
“오늘 약속이 있었죠.”
내 물음에 샤를마뉴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목소리 끝내주는데.”
“누구 덕분에요.”
“약속은 걱정 마. 방금 다 해결했어. 유가족 전원이 추도회에 참석할 거야.”
역시. 그래서 상복을 입었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샤를마뉴가 내게 다가와 침대맡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이건 뭐지? 눈짓으로 묻자 그가 봉투에서 흰 통을 하나 꺼낸다.
“약이야. 아플 것 같아서 사 왔어.”
“잘됐네요. 안 그래도 아팠는데.”
“등 좀 돌려봐. 마사지해 줄게.”
마사지? 그가 쥔 통을 보자 근육통에 좋다고 소문난 약이다.
근육통이라. 설마 그곳에도 바를 건 아니겠지. 내가 불안하게 통을 바라보자 샤를마뉴가 살짝 웃으며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허리만 할 거야. 거기엔 다른 걸 발라야 해. 열상이거든.”
“……열상이라.”
치질도 걸려 본 적 없는 내가 항문에 열상이라니. 진짜 남우세스러워서 고개를 못 들겠다.
알아서 하시라고 등을 돌리자 그가 조심스럽게 약을 펴 바르며 허리와 등에 뭉친 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아…….
“제법, 하시네, 요.”
“뭐.”
“어디, 서, 배웠, 습니, 까?”
강약을 실은 손길에 따라 목소리가 끊어졌다. 어쩐지 듣기 좀 민망했다. 슬쩍 입을 다물자 샤를마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예전에 운동하면서 배웠지. 뭉친 근육 풀기에는 제격이야.”
“으…… 응.”
그렇군. 어느새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확실히 허리가 시원해졌다. 악력이 강해서 그런가, 뭉친 지점을 딱딱 누르는 손길이 아프면서도 좋았다.
너무 아픈 곳은 살살 하라고, 그리고 옆을 좀 더 눌러 달라고 주문하면서 마사지 받기를 십여 분.
“라파엘.”
샤를마뉴가 불렀다.
“……네?”
그때 나는 거의 반수면 상태였다. 근육이 어느 정도 풀리자 노곤노곤하게 잠이 몰려온 것이다.
몽롱한 상태에 있던 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고, 샤를마뉴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이제 사귀는 거 맞지?”
음?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가 뭔가 불안한 듯 쓰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건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
“저번에도 이렇게 같이 밤 보내고…… 아니, 아니야.”
샤를마뉴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저번에도 이렇게 같이 밤 보내고……’라니.
설마 저번에 아무 관계 아니라고 한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바라보자 샤를마뉴가 약간 의기소침한 얼굴로 사과했다.
“미안.”
아니, 또 무슨 사과까지……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약간 답답해졌다.
그는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내 등을 마사지하고 있었다. 나는 살짝 몸을 일으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번에는…… 제가 기억을 모두 되찾은 후였잖아요.”
“…….”
“그때는 전하께 속은 줄로만 알았어요.”
“…….”
“그래서 아무 관계 아니라고 한 겁니다. 화도 났었으니까.”
“그럼 지금은?”
그의 목소리에 일말의 희망이 섞여 있었다. 어휴, 이 답답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모른단 말인가.
애초에 내가 싫었으면 이렇게 몸을 섞지도 않았다. 내가 진심으로 반항했더라면 샤를마뉴는 절대 나를 안을 수 없었을 테지.
나는 슬쩍 웃으며 그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참 남자답고 곧은 손이다.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쁜 걸까.
델루니안 그놈은 아닌데. 그놈 손은 어땠더라.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더라도 샤를마뉴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지금은……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응?”
“참 이상하죠. 덩치도 크고 말도 안 듣고 막 주인님 위에서 버릇없이 헉헉대는 개인데.”
“…….”
“그래도 내 강아지라 그런가, 그냥 다 귀엽네.”
그 말에 샤를마뉴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어휴, 울려고 한다. 별말 안 했는데 울기는 왜 울어. 가만 보면 은근히 울보라니까.
“라파엘…….”
“네, 네. 저 여기 있습니다. 울지 마세요.”
“안 울어.”
“거짓말.”
“진짜야.”
“흠. 믿어는 드릴게요.”
그가 앙탈을 부리듯 내 위로 엎어졌다. 어제처럼 성적인 의도를 가진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제가 진정으로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내 어깨에 머리를 부볐으므로.
“나 버리지 마.”
“……그럴게요.”
“절대 버리면 안 돼.”
알겠다니까요. 키득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내 허리를 감싸 쥔 그의 손에 힘이 더욱 강해졌다. 평화로운 금요일의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