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이른 아침. 차가 반파된 관계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지상 주차장에서 울리는 경적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아인 퍼스가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비서관님!”
“너 어떻게 여길……?”
“출근할 때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이 근처에서 살거든요. 어서 타세요.”
그가 재촉했다. 나는 얼떨떨하게 그의 차에 올라타며 물었다.
“내가 여기 사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에이, 그거야 비서관으로서 기본이죠.”
안전벨트를 매자 아인 퍼스가 씩 웃으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오랜만에 하는 출근인데, 어떠세요?”
차가 내부순환도로에 들어서자 아인 퍼스가 속도를 높이며 물었다.
“그냥 그래. 아무 생각 없어.”
“막 스트레스받고 그러지는 않으시고요?”
“아직까지는.”
“다행이네요. 오늘부터 비서관님이 저희 교육하시죠?”
“응. 기대해.”
아인 퍼스가 하하 웃었다. 그는 백미러로 뒤쪽을 흘끗 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비서관님이 참 좋아요.”
그 말은 좀 묘하게 들렸다. 내가 너무 샤를마뉴에게 휘둘렸던 탓일까?
나는 못 알아들은 척, ‘바람직한 후배네’ 하고 말을 잘랐다. 그가 또다시 웃었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엔진 돌아가는 소리만 울리는 차 안, 그는 계속 백미러를 흘끗댔고,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때 아인 퍼스가 뜬금없는 요청을 했다.
“비서관님, 죄송한데요. 제 뺨에 머리카락이 붙은 것 같은데 좀 떼어주실 수 있나요?”
“음?”
“간지러워서 운전에 집중을 못 하겠어요.”
그 말에 그를 돌아보자, 확실히 뺨에 머리카락이 붙어 있긴 했다. 떼어주려고 몸을 기울였다.
결이 가는 머리카락을 떼고 후, 하고 창밖으로 날릴 때였다. 그때, 아인 퍼스가 백미러를 노려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죄송한데 속도 좀 올릴게요.”
“어?”
“그놈들이에요.”
그놈들? 깜짝 놀라 사이드미러로 뒤쪽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차가 부앙, 하고 앞으로 내달렸다. 재빨리 손잡이를 붙들었다.
계기판은 순식간에 90㎞를 찍었다. 아인 퍼스가 굳은 얼굴로 나지막이 욕설을 지껄였다.
“그놈들이라니?”
휘청하는 차 안에서 중심을 잡으려 천장에 붙은 손잡이를 꼭 잡은 채 물어보자, 그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절 미행하는 놈들이요. 지긋지긋한 극우 세력. 소수민족이라면 치를 떠는 그 자식들이요.”
“아직까지 쫓아다닌단 말이야?”
“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이번 테러 때문인지 또 저러네요.”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다가 테러의 범인이 잡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58세의 배관공으로, 일리오니쉬와 비슷한 다른 소수민족 출신이었다.
그는 아인츠만의 집권 시기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아들을 잃었다며, 그에 대한 복수로 장례식 퍼레이드에 앞서 수로 배관 작업을 할 때 폭탄을 설치했다고 자백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웃었다.
“범인은 일리오니쉬가 아니었잖아?”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건 일리오니쉬니까요. 분풀이죠.”
“……너도 고생이 많구나.”
“아니에요.”
그는 옅게 웃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뒤따라오던 검은 SUV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놓친 모양이다.
그는 그제야 속도를 줄였고, 나는 천장 손잡이에서 손을 떼며 한숨을 쉬었다. 속도를 올린 탓에 어느새 황궁에 가까워졌다. 황궁에 도착해 그와 함께 비서실로 올라갔다.
비서실의 문을 연 순간이었다.
“둘이 뭐야?”
전하, 라고 말하기도 전에, 내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던 샤를마뉴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둘이 뭔데 아침부터 같이 출근하는데?”
그는 그렇게 물으며 아인 퍼스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아인 퍼스가 샐샐 웃으며 게처럼 옆으로 몸을 피했다.
“저는 보고드릴 게 있어서 이만…….”
아인이 총무비서관에게로 향하자 샤를마뉴의 이글이글 끓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
“설명해 봐.”
질투 가득한 샤를마뉴의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카풀입니다.”
“카풀?”
“제가 차가 없으니 아인이 배려를 한 거예요.”
“지가 뭔데 배려를 해.”
“후배잖아요. 그리고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나는 눈짓으로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비서실 직원들을 향해 인사했다. 그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샤를마뉴는 내 곁에 바짝 붙어 마치 바람난 아내를 추궁하는 남편처럼 캐물었다.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어? 그때 나 없을 때 친해진 거야? 둘이 저렇게 계속 붙어 다녔어?”
“…….”
“설마 당신 쟤가 좋은 건 아니지? 응?”
“…….”
“왜 대답이 없어? 진짜야?”
대답 없이 샤를마뉴를 돌아보자, 내 표정에서 무엇을 읽은 건지,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저 새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당장에라도 죽여 버릴 것처럼 으르렁대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마치 길들이지 못한 야생동물 같았다.
마냥 개인 줄 알았더니, 이빨도 드러내고 제법이군.
그러고 보면 샤를마뉴도 참 어지간히 질투심이 많다. 나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졌다.
질투라…… 나도 한때 아인 퍼스를 질투한 적 있었는데. 같은 사람을 서로 질투하다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전하.”
분노로 들썩들썩한 그의 가슴팍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부르자, 그가 농도 짙은 연녹색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저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것도 좀 헷갈리지만, 어쨌든.
내 대답에 샤를마뉴가 인상을 구겼다.
“그래서 뭐, 난 안 된다고?”
아니지. 그게 아니라.
“아인한테는 관심 없다고요.”
“…….”
“쟤는 그냥, 착한 후배일 뿐이에요.”
내가 왜 이런 해명을 해야 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들었지만 점차 펴지는 샤를마뉴의 얼굴을 보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샤를마뉴는 아까보다는 펴진 얼굴로, 하지만 아직까지는 약간 찌푸려진 얼굴로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싫어.”
“예?”
“당신이야 어쨌든, 저 새끼는 모르는 거잖아.”
정말 별걱정을 다 한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본인인 줄 아나 봐. 가지가지 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샤를마뉴가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당신은 너무 매력적이라 위험하다고.”
“…….”
그 순간 비서실에 정적이 흘렀다. 아침부터 걸려 온 전화에 전화기를 붙잡고 씨름을 하던 소냐 하워드와 눈 밑에 다크서클을 매달고 돌아다니던 나단도 모두 샤를마뉴를 바라보았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샤를마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미쳤구나.
잠시간의 침묵 후, 나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전하.”
“응?”
샤를마뉴가 은근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하고도 칭찬을 바라는 것인가.
이 파렴치한 인간. 나는 씩 웃었다. 그 웃음에 샤를마뉴의 볼이 발그레 붉어진 순간이었다.
“나가 주시겠습니까.”
차가운 축객령에, 꿈결을 헤매듯 붉어졌던 샤를마뉴의 얼굴이 와장창 구겨졌다.
* * *
테러 사건의 범인이 붙잡히자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정신없던 비서실도 조금 진정되었다.
범인은 샤를마뉴를 포함한 다른 고관들을 노리려 한 게 아니라, 단순히 아인츠만의 시체를 갈가리 찢고 싶었다고 말했다.
검찰에서는 배후 조직이 있는지 조사를 한다고 했지만 경무청에서는 개인의 우발적 범죄에 비중을 두는 것 같았다.
사망한 주요 부처의 장차관 자리는 급하게 채워졌지만, 정국은 한동안 혼잡스러울 것 같았다.
“올해 수확제는 취소되었습니다.”
아침 브리핑을 하던 비서실장이 말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취소되는 것이 당연했다. 장차관이 아홉 명이나 사망한 이 시기에 수확제를 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슬쩍 돌리자 소냐 하워드 비서관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소름 끼칠 법도 하건만, 나는 차마 그녀를 타박할 수 없었다.
수확제와 송년회, 그리고 신년축제는 황실이 주최하는 행사로 전적으로 제2비서실의 소관이다.
경호 인력부터 테이블을 장식하는 꽃 등 사소한 디스플레이까지 제2비서실의 손이 안 닿는 곳이 없다.
황가의 의전과 행사를 담당하는 제2비서실은 평소에는 제법 한가로운 편이지만, 이렇게 대형 행사가 있을 때는 거의 두 달을 철야를 한다.
나도 작년 수확제 때 쓰러져서 링거를 맞았던 기억이 있는 터라 수확제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마냥 애석하지는 않았다.
비서실장이 날카로운 눈으로 소냐 하워드 비서관을 훑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소냐 하워드 비서관이 뒤늦게 안면을 가다듬었지만, 비서실장은 이미 찬물을 끼얹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대신 추도회가 있습니다. 수확제처럼 대규모 행사는 아니고, 희생자 유가족을 불러 위로하고자 함이니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
“소냐 하워드 비서관은 이 명단에 적힌 사람들에게 일일이 연락하세요. 연회가 아니니까 초대장 같은 것은 보낼 필요 없습니다. 직접 찾아뵙는 것이 좋겠군요.”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은테에 숨겨진 비서실장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은 일견 즐거워 보이기까지 해서, 나는 그가 소냐 하워드 비서관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라파엘 비서관도 함께하면 좋겠군요.”
“예?”
“당분간 전하는 어떤 일정도 없으니 시간이야 괜찮을 겁니다.”
비서실장이 웃었다. 나는 마주 웃으며 생각했다. 아주 뼛골까지 파먹을 기세로군.
황실 일가의 스케줄을 한 손에 꽉 잡고 있는 비서실장이니 바쁘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나는 반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소식에 제일 분노한 것은 샤를마뉴였다.
“당신은 내 비서관이야! 비서실장의 졸개가 아니라고!”
“……졸개라뇨.”
단숨에 졸개가 되어버린 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샤를마뉴는 ‘이건 말도 안 돼!’라면서 씨근덕대었다. 내 옆에 선 소냐 하워드 비서관은 이미 해탈한 듯 허허 웃을 따름이었다.
“내가 허락 못 해!”
“그 말씀을 직접 실장님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싫다고요, 내가 중얼거리자 샤를마뉴가 전투적으로 비서실장을 향해 달려갔다. 쯧쯧, 헛고생이다.
나는 정신 나간 소냐 하워드 비서관을 흔들며 나갈 준비를 하라고 했고, 우리가 대충 채비를 마쳐 갈 때 즈음 샤를마뉴가 웃으며 들어왔다.
“……뭡니까?”
원래 매었던 짙은 청색의 넥타이를 풀고 검은 넥타이를 매며 물어보자, 샤를마뉴가 ‘오, 섹시한데’ 하면서 내게 다가왔다.
“합의를 봤어.”
“합의요?”
“당신과 함께 가는 거로 말이야.”
하?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 샤를마뉴가 넥타이를 묶던 내 손을 치우고 자신이 직접 묶어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위로하려면 그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내가 위로하는 편이 낫잖아.”
“…….”
“그리고 그 사람들을 잘 아는 건 나니까 할 말도 더 많을 거고 말이지.”
그건 그렇지만…… 그럼 소냐 하워드 비서관은 어쩌고? 볼이 작은 구두를 신느라 낑낑대는 그녀를 흘끗 바라보자, 샤를마뉴가 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냐 하워드 비서관은 여기 있어도 좋아요.”
그 말, 언젠가 하지 않았나. 나와 단둘이 차를 타고 가기 위해 소냐 하워드 비서관을 돌려보내던 샤를마뉴가 떠올라 헛웃음을 치자, 그녀가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진심이세요?”
“그럼요. 쉬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어째서 내뱉은 말은 같은데, 반응은 그때와 다를까…… 정말 세상은 요 모양이다.
소냐 하워드 비서관이 만세를 부르며 방을 나가자, 나를 보고 있던 샤를마뉴가 넥타이를 잡아끌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예쁘다, 당신.”
“…….”
“가자.”
예쁘다니 그게 사내한테 할 소리인가.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누가 봤으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휴,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자 그가 푸하하 웃었다. 웃지 마세요. 상사 성추행으로 확 고소하기 전에. 아니, 도대체 멋지다도 아니고 예쁘다가 뭐야. 예쁘다가.
그의 팔에 이끌려 주차장으로 가면서도 나는 내가 입을 맞춘 것이 아닌 엉뚱한 것에 화를 낸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목까지 채운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바깥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안에는 전등 대신 망자를 애도하는 의미의 촛불이 켜져 있는 터라 집안은 어두침침했다.
우리는 촛대를 든 여인의 뒤를 쫓아가며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심상치 않은데. 그러게요.
“여기…… 변변치는 않지만.”
“아, 감사합니다.”
여자가 홍차를 내왔다. 그녀는 우아하게 앉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한 것처럼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우리는 눈짓으로 괜찮다며 그녀를 위로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을 잃은 부인의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배우자의 사망이 자식의 죽음만큼이나 큰 스트레스라는데, 병도 아니고 테러로 남편을 잃은 부인에게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 비난할 정도로 정신없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샤를마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부인을 위로하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며, 생전에 고인이 얼마나 현명하고 위엄 있는 지도자였는지를 설명했다.
샤를마뉴는 어릴 적부터 그를 알았기 때문에 그에 관해 할 말이 많았고, 죽은 남편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부인의 주름진 얼굴에 언뜻언뜻 미소가 어리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팔이 저려 고통스러워하는 부인의 곁에서 그녀의 팔을 주물러 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부인은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게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아는 나는 그녀의 팔을 주물러 주며 말이 끊길 때마다 그녀의 손을 맞잡고 어설프게나마 이런저런 내가 아는 스트레스 극복 방법을 추천하곤 했다.
샤를마뉴가 추도식에 그녀를 초대하자, 그녀는 물기 어린 눈으로 대답했다.
“……남편을 떳떳하게 추도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아, 그것은 얼마나 괴로운 슬픔인가. 나는 그녀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테러로 사망한 장차관은 분명 유능한 행정가들이었지만, 아인츠만 행정부 밑에서 힘을 기른 권력자들이었기에 국민들은 그들의 죽음을 그렇게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테러범의 행위를 잘했다고 옹호하는 여론도 있었다. 괜히 테러에 휘말린 일반 국민이 더욱 불쌍하다며, 권력자들이야 죽든 살든 무슨 상관이냐는 소리도 숱하게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 노부인은 남편의 죽음을 떳떳하게 애도할 수 없었으리라.
나는 부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차게 질린 그녀의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슬퍼해도 괜찮습니다, 부인.”
내 말에 그녀는 눈물을 터뜨렸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가볍게 껴안았다.
샤를마뉴는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부인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다른 쪽 손을 쥐었다.
죽음에 대한 관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나쁜 놈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누가 나쁜 놈이냐’ 하는 것이다.
절대선은 없다. 절대악도 없다. 누군가에게는 선인이었던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은 그를 악인이라 여겨도, 누군가는 그를 선인이라 여길 수 있기 때문에, 애도에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애도하는 사람을 비아냥대서는 안 된다.
천하의 악인이라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 명 없겠는가. 백 명의 사람이 그를 비난한다 하더라도, 한 명의 사람이 그를 위해 울어주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노부인이 진정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한참 뒤 눈물을 그친 그녀는 조금 전보다 맑게 갠 얼굴로 내 품에서 고개를 들며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녀를 달래며 부모님을 생각했다. 부모님의 죽음을 인식하기는 너무 어렸던 열다섯. 참 많이 울었지만 누군가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았다.
골방에 틀어박혀 이불로 입을 막고 울지언정 밖에서는 태연한 척 행동했다. 혹시라도 누가 나를 동정할까 그게 두려웠던 것 같다.
나는 괜찮다고. 안 운다고. 이 정도 일은 가볍게 넘길 수 있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허세였다. 하지만 그렇게 허세를 부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한순간에 사라진 부모님, 사랑하는 딸을 잃고 심약해진 외조부, 인연을 끊고 사라진 외숙부……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스로 강해져야 했다.
아무에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이때까지 사귄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나의 강한 모습을 좋아하는 거지, 눈물이나 흘리는 약한 모습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었던 눈물인데.
그걸 처음으로 보여준 사람이…….
샤를마뉴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마치 ‘괜찮아’라고 하는 것 같다. 그 웃음을 보며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노부인이 진정하자 샤를마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녀는 정말 고마웠다며, 추도회에 꼭 참석하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어두침침한 복도를 걸어 현관으로 향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그때 노부인이 나를 보며 물었다.
“이런 걸 물어도 되니 싶긴 한데…….”
“예, 말씀하십시오.”
“혹시 부친 성함이 헬베르트 드마뉴인가요?”
어라. 나는 상황에 안 맞게 튀어나온 아버지의 이름에 깜짝 놀라 부인을 바라보았다.
“제 부친을 아십니까?”
그러자 부인이 놀랍다는 듯 어머, 하고 입을 가리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그는 제 남편의 제자이자 최측근이었던걸요. 당신이 그 아기였군요. 웃는 얼굴이 정말 예쁜 아기였는데.”
“아…… 이거 참,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부인.”
“아니에요. 저도 가물가물했어요. 그런데 정말 부친을 많이 닮았군요.”
부인은 내 얼굴을 보며 아직 물기가 어린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걸음걸이 하며 우아한 손짓 하며…… 정말 많이 닮았어요.”
“칭찬 감사합니다.”
“이런 걸 보고 세간에서는 부전자전이라고 한다지요?”
아. 그녀의 말에 순간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부전자전…….”
그거였구나. 그 말이었어.
부인은 자주 찾아오라는 말을 끝으로 우리를 배웅했고, 나와 샤를마뉴는 차에 올라탔다.
나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조금 당황한 상태였고, 샤를마뉴는 그런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래?”
“……부전자전. 그 말이요.”
“그게 뭐? 부친과 많이 닮았다니 기뻐?”
“아니, 뭐. 그것도 그런데.”
차가 빗길을 가로질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비가 내리는 차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인 퍼스는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걸까, 하고.
‘비서관님은 참 독특한 분이에요.’
‘……별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아니요. 참 독특해요. ……부전자전인 줄 알았는데.’
* * *
유가족 두어 명을 더 만나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을 몰랐고, 비가 오는 까닭에 도로는 차들로 붐볐다.
운전을 못 하게 된 나 대신 감히 핸들을 잡은 샤를마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기운이 쏙 빠진 나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외부 탓에 유리창에는 반사된 내가 비쳤다. 그 얼굴은 내 기억 속 흐릿하게 남은 아버지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부전자전이라.
아인 퍼스는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걸까. 내 아버지를 알고 있기라도 한 건가?
그건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매사 다정하고 쾌활하면서도 경박하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 아버지는 내게 롤모델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젊은 시절 유력한 여당 상원의원의 보좌관이었고, 내가 중학생이 될 때 즈음에는 지략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도 가족 일에는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으니 정말 모범적인 가장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도 어머니와 내 생일은 꼬박꼬박 지켰고, 학부모 참관일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휴가를 내어 어머니와 함께 학교로 찾아왔으며, 가끔 있는 휴일에는 나를 데리고 인근 호수로 가서 낚시와 수영을 가르쳤다.
아버지와의 기억은 항상 따뜻하고 포근한 것밖에 없다. 그러니 닮았다는 말에 기분이 나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영 이상하긴 하단 말이지. 그 노부인이야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다고 하지만 아인 퍼스는 어떻게 아버지를 아는 걸까.
그는 나보다 세 살은 어렸고, 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둘 사이에 접점이 있었다고 해도 벌써 까마득한 옛날이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아버지가 유명인이었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아버지는 전도유망한 인재이기는 했지만 유명하지는 않았으니 더욱 알 길이 없다.
자식인 나조차도 아버지에 관한 정보를 옛날 신문 기사에서나 한 줄 찾아볼까 말까 한 처지인데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샤를마뉴가 정적을 깨뜨리려는 듯 ‘흠,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뇨. 별거 아닙니다. 오늘 있었던 일 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혹시 배 안 고파?”
배? 뜬금없이 튀어나온 물음에 시계를 바라보자, 벌써 저녁 7시였다. 슬슬 식사할 시간이긴 한데. 내가 대답 없이 바라보자 샤를마뉴가 살짝 볼을 붉히며 말했다.
“괜찮은 곳을 아는데, 시간 괜찮으면 함께할래?”
아, 이 말은…… 나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꾹 잡았다. 대학 시절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해오던 여자들이 떠올랐다.
그때와 똑같았다. 그녀들도 얼굴을 붉혔고, 그와 대조적으로 ‘함께할래?’ 대수롭지 않은 척하는 말로 나를 꼬여 냈다.
그들에 비해 나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마음으로 그들의 데이트 신청에 응했고 말이다. 나는 눈만 깜빡이며 샤를마뉴를 바라보았다.
“오늘 고생 많이 했잖아. 내가 대접하고 싶어서.”
“……아, 그렇습니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자가 데이트 신청을 해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재빨리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자, 거절이라고 생각한 건지 샤를마뉴가 재빨리 말했다.
“몰라, 거절은 안 받아줄 거야. 난 이제 당신 말 안 듣기로 결심했으니까.”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여기. 약탈자가 사정 봐주는 거 봤어?”
그러면서 바로 나온 코너에서 방향을 틀어 황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꼴을 보며 허허, 하고 황당하게 웃었다. 샤를마뉴는 내가 내리지 못하도록 차 문을 잠그고 비교적 한적한 도로를 냅다 내달렸다.
빗물이 차창을 스친다. 제법 즐거운 표정으로 운전하는 샤를마뉴의 모습이 차창에 비쳤다.
……뭐, 저렇게 즐거워하는데 식사 한 번 같이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못 해줄 것도 없다. 함께 식사를 못 한 지도 꽤 오래되었고.
나는 조금 유쾌한 기분이 되어 조그맣게 웃었다.
샤를마뉴가 데리고 온 곳은 나도 알기는 알되 온 적은 없는 곳이었다. 혼자 오기는 좀 어려운 그런 곳이라 황실 일로 연락할 때 말고는 발도 디딘 적이 없는 이곳.
오페라 홀을 개조해 만든 레스토랑은 1층은 사방으로 탁 트인 테이블이 듬성듬성 있었고, 2층은 박스석으로 1층의 무대를 내려다볼 수는 있지만 1층에서는 올려다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2층 박스석으로 안내되었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 식사가 사전에 예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장 붐빌 이 시간에 1층 무대가 제일 잘 보이는 이 박스석이 비어 있을 까닭이 없다.
나는 ‘그러셨겠다?’ 하는 뜻으로 샤를마뉴를 보았지만 그는 능구렁이처럼 웃을 뿐이었다.
“술 좋아해?”
“싫어하진 않습니다.”
“그럼 우선 가볍게 와인부터 시작하자.”
샤를마뉴의 주문을 받은 웨이터가 와인 한 병을 들고 왔다. ‘왕들의 와인, 와인들의 왕(Le vin des rois, le roi des vins)’이라는 인상적인 문구가 적힌 와인이었다.
“샤토 그뤼오 라로즈(Chateau Gruaud Larose)군요. 황후께서 즐기는 와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역시 당신 눈은 속일 수가 없네. 맞아. 그리고 나도 무척 즐기는 와인이지. 내게 딱 어울리는 문구 아닌가?”
하하. 그 패기 넘치는 발언에 웃음이 터졌다. 틀린 말은 아니지. 황태자 신분이고 언젠가는 황제가 될 몸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이 사람과 데이트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제법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와인이 한 잔, 두 잔, 세 잔 들어가자 세상이 달큰하게 변해 갔다. 1층 무대에서 들려오는 여가수의 아리아가 와인보다 감미롭게 귀를 간질였다.
그리고 내 앞에 앉은 샤를마뉴는 시종일관 유쾌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사내처럼 패기 넘치는 말들로 나를 희롱하고 있다.
모든 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모든 게 좋았다.
“이런, 벌써 다 마셨네.”
어느새 동이 난 와인병을 보며 샤를마뉴가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더니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더 마실래? 이번에는 칼바도스 어때?”
“칼바도스도 드세요?”
“응. 대학 시절 친구들이 좋아해서 같이 즐기게 됐어.”
놀라운데. 황태자가 그 흔한 칼바도스를 마시다니……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잘하지는 않지만 이 분위기가 좋았다.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더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곧 웨이터가 1972년산 칼바도스 한 병을 들고 왔고, 우리는 한입에 털어 넣어야 한다는 칼바도스식 음주법에 따라 주거니 받거니 술병을 비웠다.
사과 향이 코끝을 찌른다.
낮게 시작되었던 아리아는 절정을 향해 치달았고, 이윽고 여가수는 박수를 받으며 무대를 떠났다.
“라파엘.”
무대를 떠나는 여가수의 화려한 잔상을 눈에 아로새기고 있는데 샤를마뉴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함께 술을 마셨음에도 멀쩡한 낯빛을 한 샤를마뉴가 보였다.
아, 불공평해라. 왜 나만 이렇게 취한 거야. 심장은 쿵쿵 뛰었고, 숨이 조금 가빴다.
누가 보면 나 혼자 다 마신 줄 알겠군. 속으로 투덜대고 있을 때였다. 그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정말 수고 많았어.”
“……예.”
“사실…… 좀 걱정했거든.”
걱정?
“당신한테 안 좋은 기억을 상기시킬까 봐.”
“……아.”
“그런데 생각보다 의연히 대처하더라고. 그래서 안심이 되기도 했는데, 정말 괜찮은 걸까 걱정스럽기도 했어.”
“괜찮았습니다.”
내 대답에 샤를마뉴가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괜찮은 거 맞느냐는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나는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얼굴로나마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이에요.”
나는 정말 괜찮았다. 유가족을 만나며 옛날의 내 모습이 겹치기는 했으나 그때처럼 견디기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보며 ‘내가 더 힘을 내야 해’라는 막연한 책임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들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힘을 내서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괜찮은 이유는 또 있었으니.
“전하도 계시지 않습니까.”
“응?”
“제가 힘들어서 울면 또 빌려주실 거잖아요, 가슴.”
샤를마뉴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심장이 술기운으로 두근두근 뛰었다.
이성을 붙들어두던 고리가 뚝뚝 끊어지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내뱉지 않았을 말들이 제어 불가능한 상태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아닙니까? 안 빌려주실 거예요?”
“아, 아니…….”
“이상하네요. 전하 몸은 제 건데 왜 안 빌려주실 것처럼 말씀하시지.”
나한테 전부 주기로 했으면서.
샤를마뉴가 잔뜩 당황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나 버렸잖아.”
“제가요?”
“…….”
“언제요?”
거기까지 말해놓고 깨달았다.
“아, 그랬지요.”
“…….”
“맞네.”
내가 버렸구나. 맞다. 내가 그런 관계는 싫다고 했지.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턱을 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술이 강했나 보다. 눈꺼풀이 뜨거웠다. 눈을 꾹 감았다 뜨자 샤를마뉴가 손을 뻗어 내 뺨을 매만졌다. 그 손길이 좋았다. 참 좋았다.
“……그럼 나 이제 어디 가서 울지.”
“…….”
“큰일이네.”
내 눈물 본 사람은 당신밖에 없는데, 나 이제 어디 가서 울지. 그 순간 샤를마뉴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내 품에서 울어.”
“…….”
“날 다시 주우면 되잖아.”
자신을 주워 달라고 말하는 샤를마뉴는 정말로 절박해 보였다.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가 자신을 버린 주인을 보며 애처롭게 낑낑대는 것 같다.
나는 궁금해졌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절박하게 만든 것인가.
황태자라는 신분,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용모, 성격은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정도를 가진 남자. 그를 사랑하는 여자만 몇만이라는 제국의 총아.
그는 어째서 하필 나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인가. 어째서 나에게 자신을 거두어 달라 부탁하는 것일까.
“……줍기 무섭습니다. 전하.”
샤를마뉴는 내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나는 술 때문에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야기해도 될까? 이 약해 빠진 속내를 털어놓아도 괜찮을까.
“제가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요…….”
“…….”
“이번에도 그러면 정말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르겠지. 세상의 전부였던 부모님을 어처구니없는 테러로 잃고 아무도 남지 않은 나에게 또다시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일지 당신은 모를 거야.
만약 그런 일이 또 생긴다면……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못 견딜 거다. 사랑하는 사람을 세 번이나 잃고 살아갈 자신이 없다.
속이 울렁거렸다. 사과 향이 너무 지독했다. 입을 꾹 다물자 샤를마뉴가 다급히 물었다.
“내가 안 떠나면 되는 거야?”
“……예?”
“당신 곁에 딱 붙어서 평생 안 떨어지고 함께 있으면 날 받아줄 거냐고.”
“그게 말이 안…….”
“왜 말이 안 돼? 노력할 거야. 죽음조차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게 내가 노력할 거라고.”
죽음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죽음은 불가항력이다. 심장이 터지고 머리가 부서지면 어쩔 수 없이 멈추는 숨.
아무리 그가 강한 사내라 할지라도 죽음의 신이 손짓하면 강을 건너야 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내가 머뭇대며 차마 쉽게 입을 떼지 못하자 샤를마뉴가 못을 박듯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약속할게. 절대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
“당신을 두고 먼저 떠나지 않아. 저승신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돌아올게.”
“…….”
나를 두고 먼저 떠나지 않는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돌아올 거라고?
거짓말. 믿을 수 없어.
부모님도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나를 맡아 기른 외조부 역시 ‘금방 괜찮아질 거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내게 돌아온다는 약속,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사람들은 전부 떠나갔다.
세 번 속을 줄 알아? 안 믿어. 이제 약속은 신물이 난다.
“라파엘…….”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나를 보며 샤를마뉴가 초조한 듯 간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랑은 두렵고, 상실은 그보다 더욱 두렵다. 일전에 말했던 대로 나는 지독한 겁쟁이였다. 사랑을 주기도 무섭고 받기도 무서운 겁쟁이. 그렇게 주고받은 사랑을 또다시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겁쟁이.
“…….”
문득 가슴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피어올랐다.
-사랑해요.
그렇게 당당하게 말한 사람은 누구였지.
-사랑합니다.
나였던가? 아니면 내 속에 잠든 너였던가. 의심하기 무섭게 또다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알고 있잖아요.
우리는 하나에요.
“하…… 하하.”
갑작스럽게 웃음을 토해 내는 나를 샤를마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웃었다. 자괴감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감정이 얼굴을 달구었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와중에도 웃음은 계속 튀어나왔다.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어. 내가 루크고, 루크가 바로 나라는 것을.
그가 샤를마뉴에게 느꼈던 감정이, 300년 전 끝나 버린 루크의 이야기처럼 사라지지 않았다는걸. 알고 있었다. 그저 모른 척했을 뿐이지.
나는 아직도 그가 좋았다. 그가 하는 ‘사랑해’라는 말이 좋았고. 나를 두고 떠나지 않겠다는 허황한 거짓말도 믿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가 있어서 괜찮았다는 말은 무의식중에 그를 내 사람이라고 생각한 결과였다.
저 사람은 내 사람이니까, 내가 추하게 울어도 나를 사랑해 줄 내 사람이니까 저 사람의 앞에서라면 얼마든지 울 수 있다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사랑하고 난 이후에 사랑하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다.
이 얼마나 헛된 일이었는가.
나는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입을 떼었다.
“전하.”
“……응?”
“전하.”
“왜?”
손을 내렸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나를 향하는 올곧은 시선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나만 바라보는 저 연녹색 눈동자가 기특했다.
문득 다른 사람한테 한눈팔지 말라고 경고했던 과거의 내가 떠올라 얼굴이 다시금 화끈해졌다.
당신 눈도 내 것이니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지.
그게 불과 몇 주 전 일이다. 그때의 나는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장 담대하게.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담대한 사랑을 이어가 보려고 한다. 그때처럼은 못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식으로.
“평생 제 곁에서 떠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어?”
“저보다 먼저 떠나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냐고요.”
내 물음에 샤를마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가늠이라도 하려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던 그가 이윽고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맹세할 수 있어요?”
“내 영혼을 걸고.”
영혼까지 걸 필요가 있을까.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자신 쪽으로 내민 손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뭐 하십니까.”
“……응?”
“안 잡을 거예요? 줍지 말까요?”
화들짝. 샤를마뉴가 말 그대로 화들짝 놀라며 허둥지둥 손을 뻗어 내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진짜로 나 다시 주워 가는 거야?”
제국의 황태자는 자신이 정말 개라도 된 양 내게 물었다. 나는 푸시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귀엽다. 정말 귀엽다. 남자에게 이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정말 귀엽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당신이 이래서 나한테 그렇게 귀엽다고 한 거구나. 이래서였어. 다른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예. 전하께서 약속만 지킨다면요.”
나를 두고 먼저 떠나지 않겠다는 그 약속만 제대로 지켜 준다면 당신과 시작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올랐지만 나는 애써 그것들을 지워 내었다.
오늘만큼은 그러한 문제들을 다 잊어버리자. 오늘은 두렵지만 기쁜 날이니까.
내 말에 샤를마뉴의 얼굴 위로 기쁨이 붓꽃처럼 피어났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