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장 (13/34)

12장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아인츠만의 장례식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혼란 상황이 그대로 공개되었다.

폭발로 다리가 잘린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 머리가 깨진 아이,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시체들까지 여과 없이 공개된 상황에 당국에서는 부랴부랴 보도를 중지했지만, 방송마저 중지된 상황에 국민들은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까맣게 죽어버린 TV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황실과 전화 통화를 끝내고 병실로 돌아온 나단이 지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4시까지 엠바고입니다.”

오늘 하루 소냐 하워드를 대신해서 샤를마뉴를 보좌하던 나단은 급하게 옮긴 1인실 병실을 둘러보며, 혹시라도 바깥으로 말이 새어 나갈까 작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파악된 바로는 사망자가 총 12명인데, 경호관 2명과 아인츠만의 장남을 제외한 9명이 각 부처의 장, 차관이라고 합니다.”

맙소사.

나는 입을 떡 벌렸고, 그때까지 말이 없던 샤를마뉴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확한 명단은?”

“아직 사망자 수가 확정된 게 아니라 4시 이전에 병원의 팩스로 보내 준다고 합니다.”

“…….”

“폭발물이 귀빈석 가까운 곳에 설치되어 있던 까닭에 피해가 컸습니다.”

샤를마뉴는 대답 없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주먹을 말아 쥔 그의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단 비서관은 샤를마뉴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황에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

“천운이겠죠.”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단 비서관도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살짝 고개를 젓고는, 다시금 걸려 오는 전화를 받기 위해 병실 바깥으로 나섰다.

탁, 하고 문이 닫히자 휑한 병실에는 나와 샤를마뉴만 남았다.

“…….”

도저히 깨뜨릴 수 없는 무게의 침묵. 나는 딱딱하게 굳은 샤를마뉴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샤를마뉴는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광장 분수대 옆 귀빈석에는 황가를 대표한 샤를마뉴의 네임택이 붙어 있었다.

만약 내게 오지 않았더라면, 귀빈석에 앉아 있던 샤를마뉴는 거대한 폭발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의 근처에 앉아 있던 여타의 다른 장, 차관들과 함께.

4시까지 엠바고가 걸린 상황. 온통 까맣게 나오는 화면만 봤을 땐 누가 죽었는지, 누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이 끔찍한 상황.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있었더라면? 상상은 어렵지 않았다. 10여 년 전에 겪어 봤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고, 화국 대통령 취임식에 참여한 부모님은 그날 돌아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날 아침, 화국 국제공항에서 국제전화가 걸려왔었다.

“엘, 엄마, 아빠 곧 돌아갈게!”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했었지?

화국과 제국은 시차가 좀 있었던 터라, 전화가 걸려 온 시간은 이른 새벽이었다.

나는 잠결에 짜증을 부렸던 것 같다. 여긴 새벽이라고요. 응. 응. 알았어요. 부모님은 하나뿐인 아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는 기쁨에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주로 화국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기는 참 특이한 나라야, 라파엘. 너도 같이 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여기는 어떠냐면…… 나는 그런 얘기는 돌아와서 해달라고 말한 후 졸리다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다. 부모님은 영영 내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른 오후, 수업을 듣는 와중에 교장이 헐레벌떡 찾아와 나를 불렀다.

“라파엘, 라파엘이 누구지?”

하얗게 질린 교장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붉었다. 뭔가 이상했다.

왜 저런 표정이지? 나는 여기 있다고 손을 들었고, 그녀는 가방을 챙기고 따라 나오라며 내게 손짓했다.

그 순간의 기이한 분위기를 잊을 수 없다. 교장으로 인해 중단된 수업과 내게 꽂히던 동급생들의 시기, 질투 어린 시선, 그리고 부스럭대며 짐을 챙기던 내 모습.

적막한 교실 안에 울리던 바스락대는 소리. 그것은 참으로 기이했다. 불행의 전초전인 것처럼.

교장실로 불려간 나는 부모님이 탄 비행기가 피랍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피랍된 지 1시간이 흐른 후였다.

교장은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괜찮을 거야, 곧 돌아오실 거란다’ 하고 위로했고, 나는 교장의 위로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현실과 유리되어 그저 TV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1시간 후 속보가 떴다. 피랍된 비행기가 바다로 추락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부모님은 영원히 내 곁을 떠났다.

그때를 떠올리자, 피가 발치로 모두 쏟아져 내리는 듯 끔찍한 느낌이 전신을 내달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게 하는 그 사건은 영원한 트라우마로 남아버렸다.

부모님의 기일이 가까워지면 나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주 울면서 깨어났다. 나이가 들며 강도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땅 밑으로 꺼져 버리는 기분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죽음에 예민해졌다. 가까운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나를 거두어준 외조부가 사망하면서 더욱 뿌리 깊은 것으로 변했고, 나는 마음으로부터 타인을 배척하게 되었다.

사교적으로 대하되, 그 이상으로 친밀해지는 것은 꺼린 것이다.

여자들과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의 연애를 했고, 세 번 다 차였다.

‘자기는 나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

그게 이유였다. 나는 그 말에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미안하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녀들이 보여 준 사랑에 보답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나는 사랑할 수가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만들었다가 또 잃어버리면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마음을 열 수 없었다.

내 말을 들은 그녀들은 울면서 웃으면서 나를 떠나갔다.

‘자기는 평생 그렇게 겁쟁이처럼 살 거야.’

나는 분노하는 대신 조용히 그 말에 동의했다. 맞아. 나는 평생 그렇게 살 거야.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런데.

“…….”

어째서, 당신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때처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까.

몇 달 전, 그러니까 사고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샤를마뉴는 그저 나를 귀찮게 하는 상관 중의 한 명일 뿐이었다. 그 이상의 감정을 품기에 나는 명백한 이성애자였고, 이성애자가 아니더라도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었다.

그와 웃고 떠들고 울고 싸웠지만, 그것은 감정의 외피에도 닿지 못하는 사회생활의 일부였다. 나는 그를 내가 쓴 가면으로서 응대했고, 그것이 우리 관계의 전부였다.

내 속을 그에게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밖에 없다. 3년 전 부모님의 기일, 그의 품에서 눈물을 훔치던 그 날밖에는.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감정은 그날 이후로 더욱 꽁꽁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도 닿지 못하게, 누구도 심연에 닿지 못하도록 걸쇠를 채웠다.

그렇게 잘 지켜 냈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언제 어느 틈에, 당신은 내게 이렇게 다가왔는가.

루크의 기억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떠다녔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라 그런 걸까. 마음 주면 몸도 준다는 여자들과는 달리, 몸 주면 마음 간다는 남자라서, 그래서 그런 걸까.

루크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루크였던 시간 동안 샤를마뉴와 참 많은 접촉을 했다. 손을 잡았고, 포옹했고, 입을 맞추었으며 종내에는 몸까지 섞었다.

그 시간은 서로의 민낯을 드러낸 시간이었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에게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나는 그와 정신적으로 벌거벗은 시간을 지냈다. 아무런 경계 없이, 단단히 걸어 놓은 걸쇠를 풀어버린 채로 말이다.

이 걸쇠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다시 잠글 수 있을까.

그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는 남자고, 나는 이성애자고,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싶지 않다.

만난 사람은 헤어지게 마련이라지만 이별을 받아들이기에 나는 너무 겁쟁이였다.

문이 살짝 열린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그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만약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심장이 떨어지는데, 그를 완전히 받아들인다면 매일매일이 두려움의 연속일 것 같았다.

“……전하.”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고 조용히 부르자, 그가 천천히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연녹색 눈동자가 나를 직시한다. 그 눈을 보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왜?”

불러 놓고 말은 하지 않는 나를 바라보던 샤를마뉴가 물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2시였다. 엠바고가 풀리기까지 2시간 남은 시점.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황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왜?”

“엠바고가 풀리기까지 2시간 남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오늘 참석자 명단에 올라 있었고, 지금 사망자가 밝혀지지 않아 전하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니 돌아가셔서 건재함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샤를마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당신은 어쩌고. 혼자 남을 생각은 아니겠지?”

샤를마뉴가 물었고, 나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저도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직 검사가 좀 남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 가만히 휴가를 즐길 수가 없어서요.”

“…….”

“그리고 아까 하셨던 얘기 말입니다. 노력하겠다는 말.”

내 말에 샤를마뉴가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도 깜빡 잊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하지. 나는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저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부담스럽습니다.”

“…….”

“전하께서 저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리고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그 마음이 부담스럽습니다.”

“어째서?”

“돌려드릴 수 없으니까요.”

남이 주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무서운 겁쟁이가, 어떻게 마음을 돌려줄 수 있겠는가. 내 대답에 샤를마뉴가 이해가 안 간다고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단정 짓는 건데? 루크인 당신은 분명 나를 사랑했잖아.”

“그랬지요. 하지만 라파엘인 저는 이성애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겁쟁이고요.”

“……겁쟁이?”

당신이? 샤를마뉴가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겠다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모습에 상황이 상황인데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겁쟁이 맞습니다. 마음을 주기 무서워서 받기도 싫은, 지독히도 이기적인 겁쟁이요.”

사랑은 주고받는 과정이라고 한다. 한쪽은 주기만 하고 한쪽은 받기만 하면 관계는 유지되지 않는다. 서로 감정을 나눠야 유지되는 것이 사랑.

나는 샤를마뉴에게 마음을 줄 자신이 없으니 그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원하는 것은 그저 사고가 나기 전처럼 그저 상관과 부하 직원의 관계로 남는 것뿐.

하지만 샤를마뉴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겁쟁이라…… 결국 곧 죽어도 나는 안 된다 이거지.”

“…….”

“기어코 나를 버리겠다고.”

그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이야기를 끝내려고 했다. 사실 이 정도로 말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다. 내가 겁쟁이라는데, 내가 이성애자라는데 뭐 어쩌겠는가.

나는 그가 ‘그럼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며 포기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아팠다.

포기하라고 종용한 것은 나인데, 막상 포기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아픈 것은 내가 아니라 루크 때문이다.

그를 사랑한 루크 때문에 샤를마뉴가 떠나간다고 하니, 괜히 슬픈 것이다. 역시 사랑은 아니야. 사랑은 내가 할 게 못 돼. 그렇게 생각하며 생각을 갈무리할 때였다.

샤를마뉴의 얼굴이 쑥 다가왔다. 음? 하고 생각할 때, 뜨겁고 말랑한 것이 입안을 훑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

잠시 후 입술이 떨어졌고, 나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샤를마뉴가 사납게 중얼거렸다.

“못 준다니, 빼앗는 수밖에.”

“……예?”

“겁쟁이라고 했지? 겁쟁이라서 마음 주기 무섭다고.”

그랬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샤를마뉴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내 몸에는 탐욕스러운 정복 군주의 피가 흐르고 있어.”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당신이 겁쟁이라면, 나는 약탈자라는 말이지.”

“지금 그 말.”

“당신 마음, 빼앗겠다고. 주지 않겠다니 빼앗는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샤를마뉴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을 허물고 내게 눈웃음을 쳤다.

맙소사.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게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마음이 재물이야? 빼앗고 약탈하고 그러게?

죽다 살아나더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헛소리 그만하라고 고개를 젓자, 샤를마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무튼 기대해. 정복 군주의 후예가 얼마나 약탈을 잘하는지 보여 줄 테니.”

“그러지 마십시오, 전하.”

어차피 그래 봤자 당신만 힘들 거다. 내 만류에 샤를마뉴가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나 이제 당신 말 안 들어. 난 버림받은 개새끼거든.”

“…….”

개새끼라니. 저게 황태자가 쓸 만한 단어인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온다. 제발 언어 선택 좀…….

그나저나 왜 버림받은 개새끼라는 거야? 내가 약간 울컥한 표정을 지었는지 샤를마뉴가 턱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당신이 나 버렸잖아. 전부를 달라기에 몸과 마음을 다 줬건만 필요 없다고 버렸으니 버림받은 개새끼 꼴 맞지.”

“……전하, 그게.”

“몰라. 이제부터는 내 마음대로 쫓아다닐 거야. 원래 주인이 다시 주워갈 때까지 쫓아다닐 거라고.”

아…… 내가 바랐던 건 이런 게 아닌데. 뭔가 본의 아니게 다혈질인 샤를마뉴를 자극한 것 같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전조가 좋지 않다. 이때까지 여자친구를 사귀는 과정도 이런 식이었다. 부담스러워서 거절하는 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다가온 그녀들.

마음을 주지 않을 거면 매몰차게 거절했어야 했는데 그것도 못 해서 결국 어영부영 그녀들과 사귀게 되었다. 그러다가 전부 차였지만.

이러다가 샤를마뉴와도 그런 관계가 되는 건 아닐까? 조금 두려워졌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점심 식사를 사러 나갔던 아인 퍼스가 들어왔다. 그의 방문으로 샤를마뉴와 나 사이에 형성되었던 묘한 기류는 단박에 사라졌다.

“지금 완전 아비규환이에요.”

샌드위치와 수프 등을 깔며 아인 퍼스가 말했다.

“유력 방송사 중 한 곳은 아예 블랙아웃이고, 다른 두 곳은 주야장천 광고만 띄우니 사람들이 항의하고 난리 났대요. 어떻게 상황인지 제대로 보도하라고요.”

“…….”

“지금 엠바고 상태 맞죠?”

고개를 끄덕이고 네 시까지라고 알려주자 아인 퍼스가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샤를마뉴가 혀를 차며 타박했다.

“너는 지금 이 상황에 음식이 들어가?”

왜 잘 먹는 애한테 그래. 눈을 흘겼지만 사실 그가 조금 분위기를 못 맞추는 건 있었다.

그래도 먹고 살겠다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아인 퍼스는 샌드위치를 문 채 눈을 깜빡이며 웅얼거렸다.

“배가 고픈 걸 어떡해요.”

“무슨 네가 임산부야? 한 끼 안 먹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좀 참지?”

“……먹을 거로 타박하는 사람이 제일 나쁜 사람인데.”

샤를마뉴의 타박에 아인 퍼스가 암팡지게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내려놓았다. 목 막힐까 음료수 뚜껑을 따서 주자 ‘감사합니다!’ 하면서 헤헤 웃는다.

하여튼 어느 상황에서도 밝은 녀석이다. 항상 낙천적인 성격은, 가끔은 독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득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본인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도움이 되게 마련이다. 그의 천진한 웃음을 보니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 약탈이고 개새끼고 우선 이 상황을 정리하는 게 급선무다.

“아인, 혹시 나단 봤어?”

“아, 요 앞 라운지에서 통화하고 계시던데요?”

“그래? 고맙다.”

병상에서 일어나자 샤를마뉴와 아인 퍼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먼저 물은 것은 샤를마뉴였다.

“어디 가게?”

“나단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냥 안에서 기다리지?”

“……곧 돌아오겠습니다.”

나단에게서 이때까지 있었던 일의 정황을 들으려면 아무래도 둘이 있는 쪽이 훨씬 편했다.

곧 돌아오겠다고 대답하자 샤를마뉴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호시탐탐 샌드위치를 노리는 아인 퍼스에게 말했다.

“아인, 미안한데 퇴원 수속 좀 해줄래?”

“네?”

“바로 퇴원하고 황궁으로 돌아가게.”

황궁? 그가 눈을 깜빡이다가 되물었다.

“복직하시려고요?”

“응.”

“아직 휴가 기간 좀 남지 않으셨어요?”

“그건 그런데, 아무래도 반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이런 상황에 여유롭게 휴가나 즐길 수는 없지.”

그 말에 아인 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나는 부탁한다는 말을 남겨두고 병실을 떠났다.

라운지에 다다르자 매캐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저런. 인상을 찌푸리고 라운지의 철문을 통통 두드리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있던 나단이 고개를 돌렸다.

“여긴 금연이야.”

밉지 않게 타박하자 나단이 힘없이 웃으며 손을 까딱인다.

“좀 봐주라. 여기 어차피 우리밖에 안 쓰잖아.”

지난번에 봤을 때와는 달리 편한 말투였다. 당연하다. 비서실 입사 동기인 나단과 나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스스럼없는 말투로 서로를 대했다.

“간호사한테 걸려도 몰라.”

“괜찮아, 이 구역 폐쇄해 놨어.”

하긴. 황태자가 행차하셨는데 터놓았을 리가. 나단의 손에 걸린 담배를 빼앗아 물고 한 입 빨아들이자 머리가 핑 돌았다.

사고가 난 이후로 본의 아닌 금연 생활을 했더니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가 어색하다. 벽을 짚고 서자 나단이 환자는 이런 거 피우는 거 아니라며 담배를 빼앗아 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나단의 입에서 가늘게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야? 오늘 원래 소냐 하워드가 보좌하는 거 아니었어?”

“걔가 어제 발목을 좀 다쳐서. TV에 생중계되는데 절뚝거리면서 다닐 수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니야, 내가 보좌하는 게 나아.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에 걘 이런 면에서는 좀 미숙한 면이 있으니까.”

그건 그렇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나단이 다시금 연기를 뿜어 내며 말을 이었다.

“사건 관련해서는 별로 새로운 건 없어. 방송에서 보던 그대로야. 분수대 안쪽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대.”

“……주변 탐색은 안 한 거야?”

“당연히 했지. 오늘 아침에 최종 점검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다고 해.”

그럼 결국 점검할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점검 이후에 설치되었다는 소리다. 이러나저러나 경호팀의 실수다.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엔 영 미심쩍은 면이 있었다. 점검 이후에는 허가받은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광장 근처에 접근할 수 없다. 경호팀 내부에 프락치가 있는 게 아니라면, 확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누가 범인인지는 찾았고?”

“…….”

나단은 대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는 다 태운 꽁초를 난간에 지져 끄고는 또다시 불을 붙였다.

“조사가 더 진행되어야 알겠지만,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 사망자가 사망자다 보니.”

“그렇겠지.”

“그래도 전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이야. 황태자 살아 있냐고 전화가 쏟아지더라. 나중에는 죽었으면 좋겠냐고 소리칠 뻔했어.”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또다시 침묵. 나단은 메마른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나저나, 너 기억 돌아왔다며?”

“응.”

“상황이 이렇지만, 아무튼 축하한다. 네 덕에 전하도 살아나지 않았냐.”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지. 오늘 내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샤를마뉴는 분명 죽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살아날 운명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단이 물었다.

“근데 너 전하랑 무슨 사이야?”

“음?”

“너 설마 전하랑 사귀냐?”

그 말에 왜 입이 딱 굳었을까. 아니라고 대답하면 되는데, 그 순간 그 말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한순간 망설이며 대답하지 못하자, 나단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결국 넘어갈 줄 알았어.”

음? 이건 또 무슨 소리.

“결국 넘어갈 줄 알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지 뭘. 그래도 너는 완전 스트레이트라 안 넘어갈 줄 알았는데. ……하긴, 스트레이트가 대수겠어. 황태자에, 얼굴도 그만하면 반반하지, 체력 좋고 정력 좋지, 게다가 팔팔한 연하 아니냐. 그런 인간이 3년이나 구애하는데 안 넘어가는 게 비정상이긴 하다만.”

“3년?”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나단의 담배를 부러뜨리며 설명을 요구하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알면서 왜 이래.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설명해 봐.”

내 물음에 나단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너 정말 몰랐어?”

“뭘.”

“허, 참.”

나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하는 표정이었다.

“3년 동안 전하가 너 어떻게 구워 먹을지 고민했다고.”

“…….”

“뭐, 말이 구워 먹는 거지, 사실은 구애였어. 너는 몰랐던 것 같지만.”

구애……?

나는 나단을 따라 인상을 찌푸렸다.

“말이 되는 소릴. 구애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괴롭히냐? 맨날 야근시키고.”

“아, 그건 우리가 생각해도 좀 아니었지. 야근은 좀 심했어.”

“잠깐. 우리라니?”

우리라는 말이 거슬렸다. 나는, 도 아니고 우리라니. 설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단 말인가.

나단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비서실 사람이면 아마 대부분 알고 있을걸? 전하가 너한테 구애한다는 거.”

“……맙소사.”

“우리는 너도 알고 있는 줄 알았어. 알면서 일부러 모른 척한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몰랐단 말이지. 나단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정말 몰랐다. 구애라니. 구애라니! 그게 어딜 봐서 구애란 말인가!

샤를마뉴는 나와 종종 싸웠고, 금발 벽안의 미남만 보면 환장했으며, 행사 파투 내고, 튀어서 나를 야근의 바다에 밀어 넣고는 했다. 그게 어딜 봐서 구애야!

“거짓말하지 마, 나단.”

“사실이야. 음, 예를 들어줄까? 전하가 사고 치는 날은 딱 패턴이 있어.”

“무슨 패턴.”

“네가 휴가를 쓰거나 일이 없어서 일찍 퇴근할 때.”

“……하?”

생각해 보니 그렇긴 했다. 일이 없어 정시에 퇴근하면 샤를마뉴가 꼭 사고를 쳐서 밤중에 불려 나갔다.

그거, 그냥 상관의 부하 직원 엿 먹이기 아니냐. 그때만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고 이를 갈자 나단이 그게 아니라면서 손을 저었다.

“보고 싶은 거지.”

“……뭐?”

“밤은 길고, 보고 싶은 내 임은 해가 떠야 나타나니 좀이 쑤신 거지, 뭐. 게다가 너 합의 볼 때 짓는 웃음 있잖아. 영업용 미소. 너도 보고 영업용 미소도 보고, 일석이조였던 거지.”

“…….”

“방법이 좀 구리긴 한데, 나름 순정 아니냐?”

그런 게 순정이라고? 진짜 순정도 가지가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도 없거니와,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별로 감동적이지는 않다.

샤를마뉴 입장에서는 그게 사랑이었을지 몰라도 나는 피로한 나날의 연속이었으니까.

내가 ‘그 순정 때문에 죽다 살아났다’ 하고 중얼거리자, 나단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 맞다’ 하고 말을 이었다.

“그때 그 사고 말이야. 너 기억을 잃어서 말을 못 했는데, 좀 이상했던 거 알아?”

“뭐가?”

“사고 현장에 스키드 마크가 전혀 없어.”

“……어?”

“사건 발생 시각이 새벽 3시에 인적이 드문 사거리였으니까 막 달린 것까지는 알겠는데, 네 차에서 나온 불빛과 사고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켜져 있었던 것으로 봤을 때 네 차를 못 봤을 리가 없거든.”

“……그렇지.”

“근데도 스키드 마크가 없이 일직선으로 들이박았다는 게 영 이상해서. 사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차가 보이면 급정거를 하게 되어 있잖아.”

이상하긴 하다. 졸음운전이었다고 해도 차를 들이박을 때 즈음 되면 보통 브레이크를 밟게 마련.

하지만 그런 것도 없이 들이박았다고? 사고 당일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옆에서 반짝이던 헤드라이트 불빛. 망설임 없이 돌진하던 차량. 그리고 샤를마뉴의 연녹색 눈동자. 꽝! 그리고 암전.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라고 고개를 젓자, 나단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던 듯 끄덕끄덕하며 말을 이었다.

“근데 뭐 네가 원한 산 것도 없고, 네 차에 황태자가 타고 있었다는 걸 그 운전자가 알았을 리도 없잖아? 게다가 그 운전자는 그 사고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그렇지.”

“그래서 졸음운전으로 결론을 내리긴 했어. 네가 정신이 없어서 내가 대신 처리했다.”

그래. 졸음운전이었을 거야. 나는 고맙다고 말하며 나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가 여상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세상이 하 수상하긴 한 것 같다. 사건 사고가 계속 터지는 걸 보니.”

“…….”

“너도 몸조심해. 괜히 쓰러져서 병원 오지 말고.”

그러면서 팔을 툭 치며 병실로 돌아가자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쫓았다. 병실로 돌아가는 길에 복직하겠다고 하자 나단이 반색하며 반겼다.

병실로 돌아가자 아인 퍼스는 퇴원 수속을 끝냈다며 내일 하기로 되어 있던 검사를 미루었다고 알려 주었다. 샤를마뉴는 벌써 내 짐을 챙겨 들고 있었다.

병원을 벗어나며 생각했다. 정말 우연이었을까? 스키드 마크가 없었다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린다.

번쩍이는 헤드라이트. 망설임 없이 돌진하던 차량. 차주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은 샤를마뉴의 연녹색 눈동자밖에 없었다.

‘몸조심해.’

나단의 여상한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 * *

한 달 반, 거의 두 달 만에 돌아온 아파트는 사고가 나던 밤 경무청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뛰쳐나간 그대로였다.

여기저기 흩어진 옷가지들과 주방에서 썩어가는 그릇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파트의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드디어 돌아왔군’ 하고 생각했는데, 곰팡내가 나는 집안 꼴을 보니 시시한 감상에 젖을 수가 없었다.

진즉 가사도우미를 쓸 걸 그랬지.

내 집에 남이 드나든 흔적이 남는 게 싫어 가사도우미를 쓰지 않았더니 집이 엉망이다.

먼지 때문에 실내용 슬리퍼를 신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집안은 내일 출근하기 전까지 하루 꼬박 치워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을 보며 회포를 풀 여력도 없이 나는 청소를 시작했다.

환기를 시키고 먼지가 내려앉은 침대 시트를 갈고, 청소기를 돌리고 대충 설거지를 하는 등 청소하고 나니 시계는 오후 7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전 나절에 시작한 대청소는 오후 늦게 끝이 났고, 한숨을 돌린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황혼이 내려앉은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돌아왔군.

멀끔하게 치워진 거실을 보고 있노라니 그제야 잠시 사라졌던 돌아왔다는 느낌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지난 두 달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사고가 나고, 기억을 잃고, 전생을 떠올리고, 그 기억에 잠식되어 절대 얽힐 리가 없다고 생각한 황태자와 얽혔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나를 귀찮게 했던 상사인데.

“라파엘.”

아파트에 도착해 내리려고 하자, 옆에 앉아 있던 샤를마뉴가 내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 예? 하고 고개를 돌리자, 그가 은근하게 손목 안쪽을 매만지며 교태롭게 웃었다.

“꼭 가야 해?”

“…….”

“안 가면 안 돼?”

그는 퇴원한 이후로, 저택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파트로 돌아올 때까지 그런 식으로 나를 압박해 왔다.

복귀할 거라면 뭐하러 아파트로 돌아가느냐, 황궁에도 당신이 쉴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황궁에서 머물러라, 그게 훨씬 편하다.

보채는 듯한 그 말에 나는 싫다고 했다. 저는 제 아파트가 편하거든요. 당직실 같은 곳에서 자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내가 당신을 설마 당직실 같은 곳에서 재울까?”

“…….”

“원한다면 내 방이라도 내어줄게.”

샤를마뉴는 그야말로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 결국 저랑 같이 자자는 말이 아닌가.

“내일 뵙겠습니다.”

하고 손을 떼어내자 하자, 그가 ‘칼 같긴’ 하고 혀를 차더니 손을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불현듯 진지해진 모습으로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

“예?”

“몸도 안 좋잖아. 괜히 무리하지 말라고. 아직 당신의 휴가 기간은 남아 있으니까.”

“…….”

“물론 나야 당신을 보게 된다니 좋지만, 그래도 힘들 것 같으면 쉬어.”

그래도 괜찮으니까.

그 말을 하는 샤를마뉴가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딱 꼬집어 어떤 느낌이었다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굳이 설명하라면 마냥 철부지처럼 보이던 아이가 어느새 훌쩍 자란 청년이 되어 있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걱정하는 샤를마뉴를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염려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무리하는 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샤를마뉴가 말했다.

“내가 말했던가? 난 당신의 그런 모습이 좋으면서도 싫다고.”

“…….”

“틈을 좀 보여 줘, 라파엘.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무식해서 깨부수는 방법밖에는 모른다고.”

그가 쓰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보자니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런 건 싫다. 내가 그어 놓은 선을 뛰어넘는 샤를마뉴의 이런 모습은 거부감이 든다. 간신히 평온해진 내 세계를 깨부수려는 이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비서관으로서 틈을 보여서야 쓰겠습니까.”

“…….”

“그럼 정말 내일 뵙겠습니다.”

문을 열고 내렸다. 쿵, 하고 닫자 차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출발했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황혼이 내려앉은 거실에 앉은 나는 조금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내일 휴가를 반납하고,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그리고, 그리고 또…….

‘틈을 좀 보여줘, 라파엘.’

틈이라. 멍하니 생각했다. 틈이라는 것은, 결국 약점이다. 오래된 건물의 벽에 난 실금처럼, 조금의 충격만 있으면 우루루 무너져 내리고야 마는 대재앙의 전조.

어째서 그걸 보여 달라는 건가. 당신은 어째서 내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가.

나는 서른에 가까운 사람이고, 부모를 잃은 이후로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너는 지금 나를 붕괴시키려고 하는 거야. 샤를마뉴.

그때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었어요.

그건 누구였을까. 나였을까, 아니면 내 안에 잠든 누군가였을까.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전하.

문득 참을 수 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청소 때문일까, 아니면 거실을 가득 채우는 황금빛 노을 때문일까.

나는 급격한 피로감을 느꼈고, 소파 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창을 통해 부수어진 황금빛 입자는 부드러운 실크 이불처럼 몸을 감싸고, 나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의식 끝자락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은 것 같기도 하다.

* * *

비서실장은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비서관이 그렇게 워커홀릭인 줄은 몰랐는데요.”

별종이라는 식의 말투에 나는 그냥 웃었다.

“다른 비서관들에게만 맡겨 둘 수 없어서 말입니다.”

“몸은 괜찮고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 아주 멀쩡합니다.”

“기억은 다 돌아왔습니까?”

“지나치게 생생해서 탈입니다.”

그 말에 비서실장이 미소 지었다.

“잘됐군요. 안 그래도 비서관이 필요했습니다.”

“예?”

그가 가까이 와 보라는 듯 손을 까딱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책상 맞은편에 앉으라 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비서실장이 서랍에서 갈색 서류 봉투를 꺼내어 넘겨 주었다.

“읽어 보십시오.”

“……이게 뭡니까?”

“비서관의 사고 경위서입니다. 경무청에서 넘겨 줬어요.”

사고 경위서? 어제 나단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는지라 안 그래도 궁금했다.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꺼내자 비서실장이 목소리를 죽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경무청에서는 졸음운전이었다고 발표했지만…….”

사고 경위가 적힌 첫 페이지를 넘기자 사고를 낸 이의 프로필이 나타났다. 평범한 사내였다.

에드가 맥케인.

마흔넷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을 법한 중년 사내의 사진을 보며 비서실장의 말을 들었다.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서 말입니다.”

“……나단 비서관에게서 들었습니다. 스키드 마크가 없었다고요.”

“그것 말고도 있습니다.”

비서실장은 프로필의 한쪽, 사내의 회사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회사, 찾아보니 실체가 불분명하더군요.”

“……그 말씀은.”

“확실하진 않지만 유령 회사일 가능성이 큽니다.”

황태자가 탄 자동차가 새벽에 교통사고가 났는데, 사고 차량의 주인이 유령 회사를 다니는 사람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 희박한 확률에 앞서, 나는 왜 이런 이야기를 비서관인 우리가 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경무청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 말에 비서실장이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별말 없더군요.”

“…….”

“그래서 이상하다는 겁니다.”

황실 일이라면 털어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조사할 조직이 경무청 아니던가.

그런 곳에서 유령 회사일지도 모르는 존재를 덮어 두려고 한다? 확실히 의심할 일이기는 했다. 비서실장은 이제 이해했냐는 얼굴로 말했다.

“경무청에서 꺼리는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는데, 이번 테러까지 있으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더군요.”

“…….”

“조금 위험할지도 모릅니다만, 조사할 수 있습니까?”

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조사할 수 있냐고?

나는 형사가 아니라 일개 비서관이고, 영장도 뭣도 없으며 위급할 경우 몸을 지킬 무기도 소지하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실장님은 이 사고와 테러가 연관이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그 말에 비서실장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확신은 못 합니다. 그냥 추측일 뿐이지.”

“그렇습니까.”

“위험할 것 같아서 꺼려진다면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비서관은 말 그대로 비서관일 뿐이니까요.”

비서실장이 벗어 놓은 안경을 다시 쓰며 말했다.

“하지만 염두에 두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겁니다. 어쨌든 라파엘 비서관 본인이 크게 다친 사고 아닙니까.”

“…….”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요. 물론 그때는 늦겠지만.”

이건 앞으로 또 사고당하라는 저주인가? ‘실장님’ 하고 너무하다는 식으로 바라보자 그가 옅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시고. 내일부터 일선에 복귀하는 것으로 처리해 두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상황이 여러모로 복잡해 바로 적응하기는 힘들 테니 급한 일은 나단 비서관에게 맡기고, 라파엘 비서관은 신입 비서관 교육에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급한 일을 대신 처리하는 나단을 위해서 급하게 복귀를 했는데 미안하게 됐다. 최대한 빨리 적응하겠다고 대답하자 비서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만 나가보라고 했다.

탁,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조사를 해봐야 하는 걸까. 돌려주지 못하고 들고 나온 서류뭉치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죽을 뻔한 사고, 사고를 낸 차량 주인은 사망했고, 그 사람은 정체불명의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고 했다.

경무청에서도 조사하지 않으려 하는 일인데 내가 조사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정말 위험해지는 건 아닐까 불안해졌다.

한숨이 흘렀다. 기억을 되찾았는데, 어째 루크일 때보다 더 복잡하게 상황이 꼬이는 것 같아서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한때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몸과 마음을 섞었던 상사는 마음 다시 내놓으라며 주지 않으면 약탈을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고, 일터는 전쟁터다.

게다가 나는 어쩌면 고의였을지도 모르는 생명의 위협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이렇게 안 좋은 상황이 또 있을까.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이었다. 내일부터 복귀하기로 했으니, 우선 하루는 시간이 있는 셈이다. 어떻게 할까…….

나는 고민하다가 서류를 바라보았다. 프로필에는 사망한 이의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황궁에서 멀지 않은 4지구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속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프로필에 적혀 있던 주소를 쫓아가 보니 그곳에는 작은 꽃가게가 있었다. 순간 이곳이 아닌가 싶어 표지판을 찾았지만 이곳이 분명했다.

집이 아닌가?

나무 밑에서 염탐하듯 바라보고 있을 때 가게의 문이 열리고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여인이 가게 바깥으로 나왔다.

“아.”

여자는 능숙하게 화분을 나르고 꽃에 물을 주며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주인인 것이 분명했다.

그 사내의 부인인가? 여자의 얼굴은 조금 수척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밝았다.

뭐야. 괜히 위험할까 걱정했던 것 같다. 나는 천천히 가게로 다가갔다.

“저…….”

“아, 어서 오세요.”

“혹시 여기가 맥케인 씨 댁이 맞습니까?”

내 말에 여자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이를 아세요?”

“아, 예. 맞습니까?”

“제 남편이에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흘낏 훑어보았다.

“그런데…… 누구세요? 혹시 그이 회사 사람인가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눈에는 약간의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노엘 파커라고 합니다.”

회사 사람이냐고 두루뭉술하게 묻는 것으로 보아 여자는 남편의 직장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비서실장의 이름을 대며 반쯤 도박하는 심정으로 대답하자, 여자가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맥케인 씨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서요. 늦게라도 인사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만.”

죽었으니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을까. 내 대답에 여자가 냉소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헛걸음하셨네요. 굳이 올 필요는 없었는데.”

“……예?”

“회사 사람은 아무도 안 왔으니까요. 그쪽도 오지 않으셔도 괜찮았는데 말이죠.”

어라.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정말 유령회사였나? 회사 동료의 죽음에 아무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니.

어지간한 불한당 아니고서야 망자의 가는 길에는 악감정을 접고 대부분 참석하게 마련이다.

정말 이상한데. 내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여자가 차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애도받고 싶은 마음 없으니 돌아가세요.”

“아, 저기…….”

여자는 내가 붙잡을 틈도 없이 쌩하게 몸을 돌리고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이런. 이래서야 글렀다. 풀린 건 없고, 의혹만 늘었다.

정말 유령회사였나. 아무리 유령회사라지만 함께 회사를 설립한 동료들은 있을 텐데 아무도 오지 않았단 말인가.

한 점의 망설임 없이 달려든 차, 번쩍이는 헤드라이트 불빛, 그 자리에서 사망한 운전자 맥케인. 아무도 오지 않은 황량한 장례식.

점점 미궁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이다. 나는 결국 소득 없이 몸을 돌렸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 * *

집으로 돌아오자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이런. 재빨리 슬리퍼로 갈아 신고 달렸지만 전화는 수화기를 집어 들기 전에 끊겼다.

하여튼 이럴 때가 제일 짜증 난다. 괜히 뛴 것 같은 허탈함. 혀를 차며 몸을 돌린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도대체 누구야?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맑은 웃음이 들렸다.

-안녕?

“……전하.”

-뭐 해?

뭐 하긴.

“전화 받고 있습니다.”

-시시한 농담하지 말고. 뭐 하느라 황궁에 안 왔어? 기다렸잖아.

약간 볼멘 목소리였다. 선물을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받지 못한 아이 같다.

문득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던 어린 샤를마뉴의 사진이 떠올랐다. 그게 언제 적 사진이더라? 꽤 오래전 일이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고 샤를마뉴가 여섯 살인가 되던 해였으니 벌써 이십여 년 전의 일.

트리 밑에 앉아 양말을 거는 샤를마뉴의 사진이 공개되자 그가 입었던 옷이 불티나게 팔렸다.

음, 그리고 부끄럽지만 나도 그 옷을 입었다.

내가 입고 싶어서 입은 것은 아니고, 어머니가 사 왔기 때문이었다. 그 옷을 입고 황태자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저택의 복도를 걸었지.

사실 어릴 적의 나는 황태자의 열렬한 팬이었다. 지금으로선,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땐 그랬지. 그땐 이런 관계가 될 줄 몰랐어. 머나먼 과거를 회상하며 대답했다.

“갔습니다. 전하를 뵙지는 않았지만요.”

-뭐? 왜!

“오늘은 실장님만 뵈었습니다. 복귀한다는 걸 알리려고요. 그리고 바로 돌아왔습니다만.”

-와, 너무해.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했지?

아쉬움이 절절 묻어나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렀다.

“……어차피 내일이면 보지 않습니까.”

-내일까지 어떻게 참아? 우리 며칠 만에 만나는 건지 알아? 열흘하고도 이틀이야!

“음…… 그거야 그렇죠. 열흘하고도 이틀이네요.”

-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무심해질 수 있지? 전화 받을 때마다 나 보고 싶다고 애교 부린 사람 어디 갔어? ‘저도 사랑합니다’ 그렇게 예쁘게 속삭인 사람 어디 갔냐고.

그 사람 제 마음속에 있어요. 피식 웃으며 내가 루크일 적의 일을 떠올렸다.

그땐 그랬지. 황태자의 전화만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벨이 울리면 부리나케 튀어가 받고, 오지 않는 그를 내심 원망하면서도 보고 싶다고 어린아이처럼 칭얼댔다.

그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사과한 횟수를 세며 돌아오면 달콤한 벌을 주겠다고 홀로 다짐도 했었고.

그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인데,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마치 300년 전 끝나 버린 루크의 이야기처럼.

“전하는…… 루크가 좋으셨어요?”

나는 홀연히 감상에 젖어 물었다. 샤를마뉴는 루크를 좋아했을까.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샤를마뉴가 대답했다.

-좋았지. 물론.

“……왜요?”

-이유가 필요한가? 그냥 좋았어. 당신이라서 좋았고, 당신이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좋았고. 또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어.

나라서 좋았고, 내가 아닌 것 같아서 좋았단다.

……이 애매모호한 대답만큼 그의 진심을 잘 나타내는 대답도 없었다. 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러자 샤를마뉴가 말을 이었다.

-루크일 적의 당신 머릿속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힘들어 보여서 마음이 아팠어.

“…….”

-그래서 내 품에 보듬어 안고 다 괜찮다고 토닥여 주고 싶었는데…… 그게 잘 통했을지는 모르겠다. 나 어땠어? 잘했어?

잘했나? 나는 스스로 되물었다. 어땠어, 루크? 그는 잘했어? 마음속에서 조용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주 잘했어. 나는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전하 덕에 그 오랜 시간 동안 고통받고 있던 제가 행복이라는 걸 배웠어요.

전하 덕에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했던 사랑이 아닌 주고받는 사랑을 해봤어요.

전하 덕에 대용품이 아닌 나 자신을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내 안에 있던 루크가 작은 새처럼 속삭였다. 라파엘인 나는 그 소리가 새어 나갈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라파엘의 이성과 루크의 사랑. 둘 중 무엇이 더 강할까? 둘 중 어떤 것이 내 몸을 차지할 수 있을까?

-다행이네.

샤를마뉴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 목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은 싫었다.

라파엘과 루크는 대척점에 서 있다.

처음으로 사랑의 단맛을 깨달은 루크는 사랑받고자 샤를마뉴에게 달려가지만, 사랑하는 것도, 사랑을 받는 것도 두려운 라파엘은 그에게서 몸을 숨기기 급급하다.

이성과 감성의 불협화음. 끔찍하게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를 원하는데, 원하지 않기도 하고. 원하는 감정이 내 것인지, 원하지 않는 감정이 내 것인지 모르겠고.

“전하.”

-응.

“…….”

보고…… 싶습니다.

-듣고 있어. 말해, 라파엘.

아직도 제 세상은 당신의 목소리로 물들어 가네요.

-……라파엘?

그런데 그게 두렵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만으로도 제 세상이 물들어 가는 그게 두려워요. 틈이 자꾸 벌어지는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설마 자는 건 아니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는 내게 샤를마뉴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안 잡니다.”

-뭐야, 근데 왜 대답을 안 해. 사람 불안하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응?

“피곤하네요. 이만 쉬겠습니다. 전하께서도 좋은 밤 되십시오.”

-벌써? ……오, 이런 벌써 8시네. 그래, 쉴 때도 됐지. 잘 자. 내 꿈 꾸고.

예, 전하도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렇게 전화를 끊을 때였다. 수화기를 타고 그가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사랑해, 라파엘.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나는 도저히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사랑해.

사랑해, 루크.

사랑해, 라파엘…….

사랑한다는 말은 백 번 천 번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아니, 평생 들어도 좋을 거야.

……그건 루크의 생각이었지만, 나의 생각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나는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달아오른 귓바퀴를 괜히 쓱쓱 문질렀다.

사랑해.

나는 아직도 그 단어가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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