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당장 저 요망한 년을 잡아다 고문하라!」
「폐하! 폐하!」
「감히 내 여인에게 독을 먹이다니…… 이 사특한 계집!」
가게 안은 TV에서 흘러나온 소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무슨 책을 찾느냐는 여자의 물음도, TV에서 흘러나오는 소음도 모두 무시한 채 책으로 손을 뻗었다.
「시드니 카턴.」
그 이름이 먼저였을까, 아니면.
「황제 델루니안.」
그 이름이 먼저였을까. 나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두 이름 중 어느 쪽이 먼저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냥 저 책이 통째로 눈에 들어왔다. 마치 책이 나를 부른 것처럼 말이다.
서가에 꽂힌 책을 뽑아 들자,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여자가 말했다.
“그 책 어제 들어온 거예요. 대학교 전공 서적인데, 안에 필기한 것도 없고 거의 새 책이나 마찬가지야.”
“…….”
“4루블만 줘요. 싸게 드릴게.”
나는 군말 없이 지폐를 내밀었다. 아인의 전화번호가 적힌 지폐였다. 여자는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읽다 가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그녀는 이어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어투로 말하고는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나는 천천히 책을 펼쳤다. 책날개에 시드니 카턴의 이름과 그의 약력이 적혀 있었다.
제국 대학 엘버트 칼리지 전임 교수라고. 최연소 교수라는 평도 함께 붙어 있었다.
몇 장을 넘기자 목차가 나타났다. 제국 통일의 과정과 제국 대내외 안정화 방안. 대내적 안정화 방안에는 ‘역모’라는 키워드도 있었다.
역모!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시드니 카턴…… 아니, 채스터턴이 쓴 역모의 이야기다. 분명 내 사건도 언급되어 있으리라. ‘역모’ 키워드가 있는 페이지로 넘겼다.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황제 델루니안은 전쟁 동안 분산된 권력을 하나로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는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여러 건의 역모 사건을 조작해 내었고, 대다수는 실제로 혐의가 없었다.』
마지막 문장이 머리를 강타했다.
시드니 카턴은 말했다.
‘당신은 무고했습니다. 알고 있어요.’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왜 그랬는데? 내게 혐의가 없었음을 알고 있었으면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됐잖아. 나 그냥 살려 줬음 됐잖아. 근데 왜 죽여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죽음. 나는 오랫동안 고민했고, 시드니 카턴은 이 책을 통해서 대답했다.
네 죽음은 황제 델루니안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함이었다고.
‘당신이 그때 말했죠. ‘폐하의 처분을 기다리겠다’고. 당신은 그 말로 스스로에 대한 권리를 황제의 손에 넘긴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 말은 그런 뜻이었구나. 내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에 황제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나 같은 평민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버렸다고.
허탈하다. 허탈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뭐야, 이게.
……고작 권력을 위해서였다고. 내 비참한 죽음이, 고작 그런 알량한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함이었다고. 그 정도 무게밖에 안 됐다고.
허탈해서 미칠 것 같다. 메마른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하하…….”
그때, 귓가로 찢어지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델루니안!」
그 말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델루니안? 지금 누가 델루니안이라고 하지 않았나?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찢어지는 듯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는, 주인 여자가 보는 TV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가자 화면 가득 한 여자의 얼굴이 비쳤다.
TV 속 금발의 여자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델루니안! 델루니안!」
여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채찍이 날아들었다.
「감히 황제 폐하를 함부로 부르다니!」
「이 저주받을 마녀!」
채찍이 날아들 때마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핏발이 선 눈동자로 소리쳤다.
「저주할 거야! 저주할 거라고! 델루니안 네놈과 그 천한 일리오니쉬 계집을 저주할 것이다!」
그때 지하 감옥으로 한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가 등장하자 고문관들이 채찍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폐하!」
그러니까, 저 남자가 델루니안인 모양이다. 그는 무척 분노한 듯 여자를 노려보다가 파르르 떨며 허리춤에 달린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이 요망한 계집! 내 너를 살려 두지 않으리라!」
그의 검이 허공을 갈랐고, 화면 가득 피가 흩뿌렸다. 델루니안의 얼굴에 피가 묻었고 화면은 가슴이 베인 금발의 여자를 잡았다. 그녀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중얼거렸다.
「델루니안…… 네놈을 저주한다, 네놈은 평생, 자손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었다. 계절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지 황궁을 배경으로 봄꽃이 피었고, 델루니안이 황궁 안을 급히 달리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한 여인의 침소를 박차고 들어갔다. 침대에 누운 파리한 인상의 이국적인 여인은 가녀린 팔을 들어 델루니안을 맞았다.
「…… 폐하.」
「오, 나의 안나! 죽으면 안 된다, 죽으면 안 돼!」
「더 이상은……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사옵니다, 폐하.」
여자의 말에 델루니안이 여자의 손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터뜨렸다.
「제발 나를 떠나가지 말아다오, 내 안타까운 사랑…….」
「이리 떠나는 못난 황후를 용서해 주셔요.」
「안 돼! 너를 잃고 나는 살아갈 자신이 없다, 안나!」
여자의 숨은 가빠졌다. 델루니안은 의원의 멱살을 잡고 자신의 사랑을 살려 내라 윽박지르지만 이미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방도는 없다.
결국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델루니안에게 자신을 보내 달라고 속삭이고, 델루니안은 절망에 찬 비명을 지르며 여자에게 속삭였다.
「그럼, 약속을 해다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다음 생에도 나의 사랑으로 나타나 주렴. 그것 하나로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단다.」
그 말에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다음 생에도 폐하만을 사랑하겠나이다.」
그리고 여자가 숨을 거두고, 델루니안은 비참하게 울부짖었다. 슬픈 음악이 나오고 황궁이 점점 멀어지며 영화는 끝이 났다.
나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광고가 나올 때까지.
주인 여자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순 삼류야. 유치해 죽겠네.”
나는 하얗게 비어버린 머리로 생각했다.
……정말로 델루니안은 그녀를 사랑했을까? 일리오니쉬의 공주를? 나는 혀를 차는 주인 여자에게 물었다.
“……황제는 정말로 공주를 사랑했을까요?”
그러자 여자가 ‘아이, 깜짝이야. 아직 안 갔어요?’ 하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지. 저건 그냥 픽션일 뿐이고, 실제로 일리오니쉬 공주와 금발의 평민 후궁이 있었다는 것만 전해지니까.”
“……금발의 평민 후궁?”
“저 영화 쓴 작가가 그러더라고. 자기는 캐릭터만 따왔다고. 그러니까 공주든 평민 후궁이든 있었던 건 사실이겠지.”
그렇게 말하며 여자가 덧붙였다.
“그나저나 저 평민 후궁도 이해는 가지 않아? 예뻐할 땐 언제고 애 못 낳는다고 구박하고, 그러다가 일리오니아의 공주한테 홀려서는 자기 홀대하고. 그러면 나라도 열 받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안 그래요?”
“…….”
나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려 가게를 벗어났다. 뒤에서 여자가 중얼거렸다.
“아무튼 세상이 이래서 그런가. 계속 델루니안 관련된 영화가 나오네.”
책을 품에 넣고 목적 없이 걸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역모.
일리오니아 공주.
금발의 평민 후궁.
……그 저주를 퍼붓던 여자가 나란 말이지?
주인 여자는 영화는 픽션일 뿐이라며, 작가는 캐릭터만 따왔을 뿐이라고 했지만 글쎄다.
나는 모르겠다. 작가가 정말로 캐릭터만 따온 건지, 아니면 300년 뒤의 세상에서 나는 그런 식으로 비치고 있는 건지. 내가 그런 악녀처럼 보였던가.
정처 없이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걷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걸었다.
시드니 카턴의 말과 영화가 계속 머리를 어지럽혔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는데 죽어야 했고, 300년 뒤의 세상에서는 내가 못된 여자가 되어 방송에 나온다.
델루니안과 일리오니아 공주의 사랑을 방해한 악녀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나는 사실 델루니안의 사랑을 이루어주려고 했을 뿐인데.
……나는 도대체 누구지?
우뚝, 걸음이 멈추었다.
나는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보며 생각했다.
정말 나는 누구지?
나는 델루니안의 후궁이었고, 리안의 대용품이었고, 역모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역모를 저질렀다 알려진 사람이고, 그러면서도 일리오니아의 공주와 델루니안의 사랑을 방해한 사람이다.
이젠 정말 모르겠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냥, 이대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양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싶다.
더 이상 ‘루크’로서의 삶을 이어나갈 자신이 없다.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삶을 이어 나갈 수 있겠는가. 나는 나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확신들을 박탈당했다.
“……샤를마뉴.”
……그가 보고 싶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내 곁에 머무는 남자. 내가 있어 행복하다는 그 사람.
지금 당장 당신을 만나고 싶어.
그때 시야 끝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아까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나는 파들파들 떨며 공중전화로 향했다.발
에 철갑이라도 두른 것처럼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간신히 공중전화 부스에 도착해 책을 사고 남은 잔돈을 털어 넣었다. 전화기에 불이 들어왔다.
떨리는 손으로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번호를 눌렀다. 무기질적인 신호음이 흘러나왔다.
뚜르르…….
제발 받아.
뚜르르…….
지금 당장 받아.
뚜르르…….
부탁이야.
뚜르르…….
제발.
끝내 전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손끝이 파랗게 질려 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더 이상 세상을 볼 자신이 없어 눈을 감았다.
힘들어. 이젠 너무 힘들어. 이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어.
돌아오지 말 걸 그랬어.
그냥 죽은 채로, 다시 돌아오지 말 걸 그랬어.
* * *
짙푸른 하늘과 끝 모르게 펼쳐진 검은 대지. 내일 아침이면 소복하게 쌓일 눈발이 막 시작된 한겨울의 어느 밤.
그때, 나는 황제의 집무실에 있었다.
어째서 이곳에?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둘러보지만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이곳에 있었다. 개연성도 인과도 없는 찰나의 존재함.
나는 떠오르지 않는 시작을 애써 떠올리려 하는 대신 그저 이 상황을 관망하기로 결심했다. 시작은 없어도 끝은 있으리라.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널따란 집무실의 정중앙, 두 개의 연단 위에 놓인 금칠한 책상에는 황제가 앉아 있었다.
기다란 양초가 검지 길이만큼만 남을 정도로 늦은 시각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심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
내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나는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혹시라도 그가 발견할까 두려워 빙 에둘러 다가갔지만 역시 그는 내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듯 서류에서 고개를 떼지 않았다.
두 개의 연단 바로 밑에 내가 도착하자, 열심히 서류를 검토하던 그가 갑자기 깃펜을 내려놓고 두 눈 사이를 꾹꾹 눌렀다.
헉.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를 발견한 건 아니었는지, 미간 사이를 주무르던 그가 놓았던 펜을 다시 쥐었다. 역시 나를 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확신을 얻은 나는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일리오니아 광산 채굴과 관련된 서류를 읽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용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어깨 너머로 서류를 훑어보지만 나로서는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때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작게 두드렸다. 황제가 물었다.
“누구냐.”
대답이 돌아왔다.
“리안입니다.”
“……들어와.”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긴 금발을 하나로 묶은 정복 차림의 리안이 들어와 예를 갖춰 인사를 하며 말했다.
“라발트로 넘어가는 국경 지대에서 헤쉬 일당을 목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라발트?”
“예.”
황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잡았나?”
“……불행히도 놓쳤다고 합니다. 인상착의는 헤쉬 일당이 맞는데 귀족 마차를 타고 있고 신분도 확실해서 허가를 안 내릴 수가 없었다고 하는군요.”
“하.”
짧게 숨을 토해 낸 황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얇은 펜이 와작, 하고 부서졌다. 그 소리에 리안이 움찔 작게 몸을 떨고 고개를 숙였다.
분노를 억누르려 했는지 잠시 말이 없던 황제가 곧 사납게 속삭였다.
“꼭 잡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내야 할 것이다.”
“……예, 폐하.”
무릎을 꿇고 복명을 외치는 리안은 충성스러운 신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을 내려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란 내가 옆으로 비켜서기도 전에 그가 나를 통과했다.
헉? 나는 화들짝 놀라 내 몸을 통과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무릎을 꿇은 리안을 지나쳐 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시간이 늦었군. 이만 돌아가야겠다.”
“예.”
그 말에 리안이 무릎을 털고 일어나 황제의 뒤를 쫓았다. 황제는 집무실을 벗어나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나 역시 그들의 뒤를 쫓았다. 굳이 쫓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 황제는 말없이 앞으로 전진하고, 리안은 두어 걸음 물러나 그의 뒤를 쫓았다.
나는 리안과 보조를 맞추었다. 복도를 걷는 사람은 세 사람인데, 발걸음 소리는 두 개만 울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황제 못지않게 입을 꾹 다물고 걷던 리안이 갑자기 입을 떼었다.
“폐하.”
“…….”
황제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왜?’라는 의문이 서려 있다. 리안이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의 침실은 그쪽이 아닙니다.”
그 말에 황제의 얼굴이 멍해진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이 향하던 방향을 바라봤다. 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쫓아가고 있던 길을 살폈다. 그리고 나 역시 황제처럼 멍해졌다.
이 길은, 그러니까.
“……길을 헷갈리다니, 나도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군.”
황제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오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빠른 걸음으로 좁은 복도를 벗어났다.
그러나 이번에 울리는 발걸음 소리는 한 개뿐이다. 리안이 우뚝 멈춰 선 채로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은 어딘지 괴로운 것 같았다.
“그분을.”
리안이 말했다.
“그분을 잊지 못하셨습니까.”
그러자 황제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분이라니?”
“…….”
“네가 말하는 ‘그분’이 그자인가?”
황제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깔려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까지 섞여 있는 물음에도 불구하고 리안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대꾸할 가치를 못 느끼겠군. 그런 헛소리를 할 거면 이만 물러가라.”
황제의 목소리는 차갑다.
나는 황제가 리안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매사 차가웠지만 리안에게만큼은 다정한 사람이었고, 어떤 경우에도 그의 의견을 존중했다. 저렇게 그를 무시하는 말투를 구사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황제는.
혼란스럽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리안을 바라보자, 그는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딘가 씁쓸하기도 하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황제가 향한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곧 어둠 속으로 그가 사라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우선 황제를 따라가기로 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리안과 싸우기라도 한 건가?
황제가 리안을 품에 안고 나도 너를 사랑했다고 속삭이던 것이 생생한데, 지금 이 상황은 역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를 따라가 지켜보면 무슨 단서라도 나오지 않을까.
황제의 침실에 다다르자 두 명의 형상이 보였다. 건장한 사내는 황제고, 그 앞을 막아선 여성은 일리오니아 공주…… 그러니까 황비다. 황제가 짜증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
요정 같은 생김새의 황비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동안 한 번도 찾아주지 않으셨습니다.”
황비가 구사하는 제국어는 조금 어눌하지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사이 제국어를 배운 모양이다.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지만,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 몹시 피곤하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시오.”
“폐하.”
“황후를 뫼셔라.”
황제의 명령에 침실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기사가 ‘예!’ 하고 대답했다.
황비는 입술을 꾹 깨물며 황제를 애절하게 바라보지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침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기사 한 명이 다가가 모시려 하자 신경질적으로 그를 뿌리치고는 자신의 침실을 향해 도도하게 걸어갔다.
황제의 침실은 3중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방을 통과하면 황금 문이 있는 두 번째 문이 있고, 그 안에 황제의 진짜 침실이 있다. 세 번째 방을 통과해 들어가자 그는 비단 의자에 몸을 반쯤 누인 채로 시종에게 발을 맡겼다.
어릴 적부터 황제를 보필해 온 시종, 야코비 백작이 황금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 와 그의 발을 씻겼다.
그때 문득 황제가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백작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175년 두 번째 달 13일입니다.”
“……그렇군.”
황제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175년이라는 대답에 나는 내가 죽은 지 1년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내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간 것이 173년 열두 번째 달의 27일이었고 그곳에서 며칠인지 몇 주인지 모를 고문을 받았으니 한 해가 넘어갔을 것이다.
내가 죽은 날짜를 어림짐작하고 있을 때였다.
백작이 물었다.
“혹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말에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백작을 바라봤다. 마치 말해도 될지 가늠하는 것 같다.
이윽고 황제가 물었다.
“황후의 사체는 어떻게 되었지?”
황후?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나는 의아해진다. 황후는 갑자기 왜 찾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황후의 사체라니? 황후가 죽었단 말인가? 나는 야코비 백작을 바라봤다. 그가 대답했다.
“보름 동안 성벽에 매달아 두었다가 벌판에 버렸습니다. 지금은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을 겁니다.”
“…….”
맙소사. 입이 떡 벌어졌다.
황후가 죽었는데 그 시체를 성벽에 매달아 뒀다고? 게다가 벌판에 버려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두었다고?
도대체 왜?
야코비 백작의 대답을 들은 황제는 말이 없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야코비 백작은 노쇠하여 흐릿한 눈동자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보통의 반역자는 그렇게 처리합니다.”
“……그런가.”
“예.”
황제는 잠시 자신의 두 손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알았다. 이만 나가 보도록.”
야코비 백작이 예를 갖춰 인사하고 방을 떠났다. 황제는 자신의 침대로 걸어갔다.
그는 머리맡에 놓인 침향을 켜고는 비단 이불에 몸을 뉘었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는 무척 익숙한 것이다.
수면향. 황제와 리안의 마음이 이어진 이후 알 수 없는 불면증에 시달린 내가 애용한 물건이었다.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전장을 누비던 황제는 언제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잠을 자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수면향을 켜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도 불면증이 생긴 걸까.
수면향의 향기가 짙어졌다. 오래 맡으면 정신이 몽롱해지며 꿈나라로 떨어지는 달콤한 향.
황제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는다. 잠시 뒤척이던 황제가 곧 잠잠해졌다. 잠든 것 같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이제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어디로? 어딘가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근데 그런 사람이 있긴 한가? 음, 잘 기억이 안 난다.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돌아가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도대체 왜 내 곁에서 배회하는 것이냐.”
잠든 줄 알았던 황제가 웅얼거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그 상태로 한숨처럼 속삭였다.
“아까부터 기척이 느껴졌다.”
“…….”
“네 향기도 느껴졌지.”
심장이 쿵 떨어졌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
“…….”
“네가 진짜로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미친 걸까.”
그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내가 자주 짓는 웃음이었다. 자조적인 미소.
“어떤 것이든 좋아. ……유령이라면 더 이상 찾아오지 마라.”
어째서? 생각보다 먼저 소리가 나갈 뻔했다. 어째서?
마치 내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그가 대답했다.
“……널 용서하게 될 것 같으니.”
그러고 숨을 한 번 크게 내쉰 황제. 그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정말로 잠든 것이다.
나는 멍하니 잠든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날, 용서하게 될 것 같다고?
얼굴에 뜨거운 무언가가 흘렀다. 눈물이다. 눈물이 흐른다. 고문을 받을 때 외에는 단 한 번도 흘려 본 적 없는 눈물이, 흐른다.
무슨 의미의 눈물일까. 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절대 고마움은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
……웃기지 마. 당신이 뭐라고 날 용서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당신이 나를 용서해.
내가 당신을 용서해도 우스울 판에, 당신이 무슨 자격이 있다고 날 용서하느냐고.
당신은 날 용서할 자격이 없어. 델루니안. 내가 용서를 구하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나 또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처절하게 울고불고 빌어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당신의 그 알량한 권력을 위해 죽은 내가 가엾고 불쌍해서라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당신을 저주해, 델루니안 멜링턴.
영원히.
설령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 * *
가슴이 화끈했다. 심장이 불에 덴 듯 격렬하게 뛰었다.
나는 ‘허억!’ 하고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세상이 온통 노랗다. 심장이 눈에 있는 것처럼 안구가 펄떡였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아 눈꺼풀을 질끈 감고 숨을 골랐다.
그러기를 여러 번. 잠시 후, 경련을 일으키듯 펄떡이던 육체가 제정신을 차렸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 보인다. 한 사람의 얼굴과 함께.
그는 웃고 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를 보며 바짝 마른 목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채스터턴.”
그러자 그가 물었다.
“일어났습니까?”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간호사를 부르겠습니다’ 하면서 벽에 붙어 있는 버튼을 눌렀다.
곧 간호사 두 명이 들어와 나를 이곳저곳 살펴보며 ‘몸은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괜찮다는 뜻에서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일단 의사 선생님을 불러올 때까지 기다리라며 손등에 주사기를 꽂았다. 시드니 카턴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간호사가 나가고, 후들거리는 팔을 뻗어 물 한 모금을 삼킨 후에 물었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 있지?”
그러자 그가 킬킬 웃으며 대답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당신이 제 책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
“골목에서 기절한 당신을 지나가던 행인이 발견해서 구급차를 불렀고, 보호자를 찾지 못한 구급대원이 당신 손에 쥐어져 있던 책에서 제 연락처를 보고 전화했어요. 전공 서적 제일 첫 장에 강의계획서와 함께 교수 연락처를 적어 놨거든요. ‘교수님, 학생이 쓰러져 있는데 와 주실 수 있습니까?’ 하고 간곡히 부탁하더군요. 신원 확인이 필요하니 제발 와 달라는 말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왔는데 당신이지 뭡니까.”
그렇게 된 거였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시드니 카턴이 물었다.
“근데 왜 거기서 쓰러져 있었습니까?”
“…….”
“거긴 사람이 정말 안 지나다니는 곳이에요. 조금만 더 늦었으면 당신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심장 발작이 왔거든요.”
“심장 발작?”
“기가 막힌 타이밍이죠. 살아날 운명이었나 봅니다.”
죽다 살아났단 말인가. 참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 어쩐지 심장이 계속 아프다 했어. 나는 가슴 위를 문지르며 어떻게 된 사태인지 생각하려 애썼다.
아인 퍼스와 함께 장을 보러 나왔고, 인파에 떠밀려 길을 잃었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 한참을 빙빙 돌다가 어느 서점을 발견했고, 길을 물으려고 들어간 서점에서 시드니 카턴의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델루니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봤고, 절망을 느꼈던 것 같다.
절망?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무의미함이다. 내가 그때 느낀 것은 무의미함이었다. 왜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거짓이고 무의미함이었고 희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느냐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아니지.”
정신을 잃고 바로 눈을 뜬 것은 아니다.
그사이 나는 꿈을 꿨으니까.
나는 시드니 카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꿈을 꿨어.”
“……꿈?”
“델루니안이 나오더군.”
시드니 카턴의 눈이 재미있다는 듯 빛났다.
“델루니안이요?”
“내가 죽은 지 일 년쯤 지난 후의 일이었어.”
“호오.”
“그는 리안을 시켜 ‘헤쉬’라는 이름의 사람을 쫓고 있었어.”
“그리고요?”
“황후가 죽었더군.”
황후는 도대체 왜 죽었을까. 나는 황후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다.
몸이 약한 황후는 예민했고 신경질적이었으며 나를 경멸했다. 억지로 가져야 하는 사교 모임에서도 나와 이야기를 섞은 적이 없는 황후다.
그래서 그녀에 얽힌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죽음을 신경 쓰는 것은 오지랖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이 약한 황후가 죽는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녀의 시체를 보름이나 성곽에 달아 놓았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
내 물음에 시드니 카턴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황후가 죽으면 황실 묘지에 묻히는 게 일반적이니까.”
“꿈에서 야코비 백작이 그러더군. 황후가 반역자라고 말이야.”
“흐음…….”
“나와 그녀가 비슷한 시기에 반역죄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
시드니 카턴은 나를 바라본다. 만년설처럼 얼굴에 녹아 있던 그린 듯한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전에 하나 물어도 됩니까?”
“얼마든지.”
내 대답은 거침없다.
“……당신은 지금 누구입니까?”
시드니 카턴의 물음은 어딘지 익숙한 구석이 있다.
‘당신, 채스터턴 맞지?’
언젠가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당신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루크야.”
“…….”
“그리고 라파엘 드마뉴이기도 하지.”
씩 웃으며 대답하자 시드니 카턴이 ‘아’ 하고 짤막한 경탄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한 각성?”
“네 용어대로 하자면.”
시드니 카턴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되돌아온 것을 축하합니다. 그래서 기억을 되찾은 소감은 어떤가요?”
연말 시상식을 하는 것처럼 되묻는 시드니 카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기억을 되찾은 소감이 어떻냐고?
“최악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최악이다.
기억은 자아라는 나무의 토양이다. 자아는 기억을 토대로 형성되고 가지를 뻗어 나간다. 그 말인즉, 기억이 없으면 자아도 없다는 뜻이다.
나는 기억을 잃었고, 라파엘로서의 자아도 잃어버렸다. 그리고 라파엘의 자아가 있었던 공간에 루크로서의 자아가 뿌리를 내렸다.
문제는 두 개의 자아가 섞여 버렸다는 사실이다.
라파엘의 자아가 완전히 뽑힌 곳에 루크가 뿌리를 내렸으면 상관이 없는데, 두 개가 같은 공간에 뿌리를 내렸다. 기억을 잃었다고 한 번 자란 라파엘의 자아가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건 그냥 잊혔을 뿐이다.
라파엘은 항상 그곳에 있었고, 루크는 그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가 있었던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두 개의 나무는 한 몸인 것처럼 뿌리가 얽혀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내가 루크인지 라파엘인지 알 수 없다. 사고가 나기 전과는 전혀 다른 내가 된 것 같다.
“네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
“예?”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넌 몇 번이고 자신이 채스터턴이자 시드니 카턴이라고 말했지. 이제는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 같다고.”
시드니 카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그거 꽤 복잡한 문제죠.”
“너도 이랬어?”
“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자살 시도까지 했습니다. 두 명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거든요.”
“…….”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냥, 받아들이세요. 당신 안에 존재하는 루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행동을 분석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게 라파엘의 행동인지 루크의 행동인지 분석하는 순간 미치고 말 겁니다.”
자고로 제일 좋은 충고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인 법이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시드니 카턴이 상쾌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당신은 꽤 재미있는 경우네요. 보통 기억을 되찾으면 한동안 혼란스러워하는데 당신은 바로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혼란스러워. 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까 참고 있는 것뿐이야.”
“해결해야 할 문제요? 아, 그거 말입니까.”
그래. 그거.
시드니 카턴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우선 당신이 꾸었다는 꿈의 정체부터 밝히는 게 좋겠군요. 그 꿈이 그냥 당신의 상상일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개꿈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루크인 나도 그렇지만 라파엘로서의 나도 상상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으니까.”
“냉정하군요. 뭐, 당신의 말 그대로입니다. 그냥 개꿈은 아니죠.”
이제 본론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신은 방금 델루니안과 만나고 온 겁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계속 말해봐.”
“많은 사람은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시간은 그런 단순한 선의 개념이 아닙니다. 기차처럼 앞으로만 향하는 시간은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일 뿐이죠. 영혼의 차원에서 시간이란, 사방으로 트여 있는 회랑과 같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통할 수 있죠.”
“그래서?”
“당신은 방금 영혼 상태에서 ‘과거’라고 부르는 시간에 존재하는 델루니안과 만나고 온 겁니다.”
하?
“이런 꿈을 몇 번 꾼 적이 있는데, 그럼 그때마다 내가 시간을 넘나들었다는 소리야?”
“그렇죠.”
“방금 그와 만났다는 거고.”
“물론 델루니안은 보지 못했겠죠. 당신은 육체가 없는 영혼의 상태였으니까.”
그 말이 맞다. 델루니안은 나를 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내 기척이 느껴진다고 했지. 시드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제의 육감은 가히 짐승 수준이다. 혼의 기척을 느끼다니.
“당신이 본 모든 것은 300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사실 방금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군.”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시작해 보죠. 아까 황후 이야기를 했었나요?”
말없이 긍정의 뜻을 비치자 그가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천장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후…… 그래요, 당신의 말마따나 그녀의 죽음과 당신의 죽음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제대로 설명해 주면 좋겠는데.”
“당신이 꿈에서 들은 대로, 황후는 반역죄로 처형당했습니다. 그녀의 부친인 레드럼 공작이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는 정황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증거로 인정되었거든요.”
그 설명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레드럼 공작은 황후의 부친이자 황제의 전쟁 공신이었다. 황제와 견줄 만큼 권력이 막강한 사람.
그런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지극히 낮고 실패할 경우의 리스크가 매우 큰 반란을 꾀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그가 미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시드니 카턴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고, 그가 가볍게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그 반란은 사실 조작된 사건이었습니다. 레드럼 공작이 군사를 일으키긴 했지만, 그건 황제를 향한 군사는 아니었어요. 그때 그는 자신의 영지를 약탈해 가는 지긋지긋한 일리오니쉬 도적 떼를 소탕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뿐입니다.”
“음?”
“그의 군사들을 반란군으로 둔갑시키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문서 몇 개만 중간에 가로채어 없애 버리면 되는 일이었거든요.”
그 말은 몹시 괴이쩍게 들렸다. 마치.
“……네가 그랬다는 것 같네.”
내 물음에 시드니 카턴이 난처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가 거슬렸거든요.”
“거슬렸다고?”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복 전쟁을 시작한 선황 때부터 레드럼 공작은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의 군사력은 대단했고 실제로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패가 되었죠. 하지만 전쟁은 끝났고, 그가 움켜쥔 권력과 군사력은 황제의 걸림돌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를 계속 내버려 둘 수 없었어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려면 그를 없애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사냥이 끝난 후에는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더니 네가 딱 그 짝이네.”
“그런 식으로 말씀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채스터턴이었던 그때의 저로서는 그게 최선이었거든요.”
채스터턴은 황제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황제가 죽으라고 칼을 하사하면 웃으면서 심장을 찌를 사람이 채스터턴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레드럼 공작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여지가 있지만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왜?
“레드럼 공작은 알겠는데, 나는 왜 죽였지?”
“음…….”
“나를 죽이는 것도 너의 최선이었나?”
시드니 카턴이 묘한 얼굴로 입을 다문다. 난처해 보이는 얼굴이라, 나는 내 물음이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서 말해봐. 더 이상 물러날 생각은 없어.”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시드니 카턴이 눈을 데룩 굴리며 말을 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게 되면 당신이 저를 더 이상 만나려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당연하지.”
그 무슨 당연한 소릴. 아무리 전생이라지만 나를 고문하라고 명령한 사람을, 아무 이유도 없이 허허실실 웃으면서 만날 정도로 병신 호구는 아니다.
내가 왜 죽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되면 다시는 상종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단호한 대답에 시드니 카턴이 ‘이럴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지만, 비밀입니다.”
“뭐?”
“전 아직 당신을 더 만나고 싶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어이가 없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개소리 작작해.”
“입이 거칠군요. 뭐, 그것도 매력이긴 합니다만.”
“돌았어?”
“아니요. 저는 항상 제정신입니다.”
하. 기가 막힌다. 지금 저게 뭐라고 떠드는 거야.
외투를 꿰입은 시드니 카턴이 침대 옆 탁상에 명함을 한 장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 명함입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이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닥치고 말해.”
“지금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럼 다음에는 말할 수 있단 소리야? 그것참 놀랍군. 나는 두 번 다시 널 만날 생각이 없거든.”
“만나게 될 겁니다.”
“지금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도 혐오스럽다는 사실을 내 입으로 말해야 알아듣는 건가?”
“그것참 유감이군요.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린 운명이거든요.“
운명 같은 소리 하네. 침이라도 내뱉을 것처럼 노려보자 그가 두어 발자국 물러나며 말했다.
“전 이만 가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잠깐!”
말릴 틈도 없이 시드니 카턴은 병실의 문을 열고 나섰다. 저게 어딜 튀려고. 몸을 일으키자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이 따끔하게 쑤셔 왔다.
빌어먹을. 바늘을 뽑으려고 끙끙대는데 시드니 카턴이 농을 지껄이듯 가볍게 말했다.
“아, 당신의 귀여운 후배 비서관에게는 연락을 해놨습니다. 여기 있으니 찾으러 오라고요. 곧 도착할 겁니다.”
“시드니 카턴!”
“그럼 다시 만날 그때까지 몸 성히 계시길.”
쿵, 하고 문이 닫혔다. 묵직한 발걸음이 문에서 점점 멀어졌다. 바늘을 뽑으려고 애쓰던 나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뱉으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시드니 카턴, 이 망할 자식.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며 입술을 깨물었다.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국 제일 중요한 정보는 못 들었다.
황후의 가문이 반역의 누명을 썼고, 그 사건에 내가 연루되었다는 것밖에는 모르겠다. 이것도 나름대로의 수확이라면 수확일까.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헤집어도 나와 황후의 접점을 통 찾지를 못하겠으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빨리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더 이상 루크의 죽음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왜 죽어야 했는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과거의 일에 질질 끌려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3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에 감정을 소모하기에 나는 서른 줄에 가까운 남자였고, 라파엘로서의 삶이 있는 사람이었다.
전생이 가엾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불쌍했다. 어쩜 그렇게 박복하게 살다 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여운 것과 그에 얽매여 사는 것은 다른 일이다.
원망하고 싶지 않다. 탓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진실을 알고 싶다. 과거의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사건을 끝내려면 그 사건에 완전히 파묻혀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끝나질 않는다.
결국 시드니 카턴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소리인데.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명함을 주워 들었다. 그의 풀네임과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걸 어쩌지. 하고 고민하다가 일단 환자복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 * *
아인 퍼스가 도착한 것은 시드니 카턴이 병실을 나선 지 20분 뒤의 일이었다.
“비서관님!”
이때쯤이면 올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병실의 문이 쾅! 하고 큰소리를 내며 열렸다. 소음의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이 아인 퍼스였다.
“왔어?”
창백한 얼굴의 아인에게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그가 소리를 빽 질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쉿.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검지를 입에 갖다 대자 무어라 소리라도 지를 것처럼 가슴을 부풀렸던 아인 퍼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옳지. 말도 잘 듣네.
나는 나와 같은 병실을 쓰는 5명의 환자와 그의 보호자들에게 미안하다고 눈짓을 보낸 후 조용히 물었다.
“많이 찾았어?”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밤새도록 경무청을 뒤졌다고요.”
어쩐지 얼굴이 하얗게 떴더라.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 길을 잃고 정신이 없었어.”
“제 연락처 적어드렸잖아요, 전화라도 하시지.”
“그러려고 했는데 중간에 일이 좀 생겨서 쓰러졌거든.”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하고 덧붙이자 아인 퍼스가 한숨을 푹 쉬면서 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는 중얼거린다.
“비서관님이 뭘 잘못했겠어요. 다 제 잘못이지요. 애초에 길도 모르는 비서관님을 데려가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멍청하게 길을 잃은 내 잘못이지. 그리고 서점을 발견해서 그 빌어먹을 영화를 본 것도 내 잘못이고.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했다. 그때 아인 퍼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시드니 카턴 교수와는 어떻게 된 일인가요?”
“음?”
“어쩌다 그분이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연결 고리가 떠오르지 않아서요.”
아, 그거.
어떻게 대답하지? 있었던 일을 다 말하자니 내가 왜 그의 책을 샀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그래야 시드니 카턴이 연락을 받고 병원까지 온 이유가 설명이 된다.
하지만 책을 왜 샀는지 얘기를 하려면, 나와 그의 관계를 밝혀야 한다.
대학 교수 시드니 카턴과 황태자의 비서관인 라파엘 드마뉴라는 공식적인 관계의 이면에 위치한, 전생의 카르마라는 초자연적인 관계를 말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 미쳤다고 생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눈만 굴리던 나는 결국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우연히 만났어.”
“네?”
“우연히 만나서 얘기하다가 쓰러져서, 그가 병원까지 데려간 것뿐이야.”
아인 퍼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걸 믿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것참 대단한 우연이네요. 대학도시에 거주하는 교수가 굳이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도시의 시장까지 와서 아는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다가 그 사람이 쓰러져서 병원까지 같이 가다니 말이에요. 너무 거짓말 같은 우연이라 차라리 운명 같아요.”
“…….”
“말하기 뭐하면 솔직하게 곤란하다고 하세요. 그게 나아요.”
“그래.”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미안.”
하고 말하자, 아인 퍼스가 고개를 들었다.
“일이 복잡해서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어. 정말 미안하다.”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사실 따지고 보면 제 불찰인걸요. 제가 비서관님을 시장까지 데리고 나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글쎄,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래도. 멋쩍게 웃으며 바라보자 아인 퍼스가 간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빨리 전하께 연락드려야겠네요. 전하께서 어제 아주 난리가 나서…….”
“어? 전하가 아셨어?”
“당연하죠!”
어떻게 알았지? 아인 퍼스가 알렸나? 그때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휴대폰이었다.
나의 외가인 델라윈에서 만든 휴대폰은 황실이 독점권을 가지며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 실무자와 그 외 몇몇 부처의 공무원에게만 지급한 물건이었다. 내 것은 아마도 교통사고 때 부서졌겠지만.
“어제 전하께서 막 노발대발해서 여기까지 오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
“보다 못한 비서실장님이 나서서 말릴 정도였다는데, 그럴 법도 하죠. 정신이 온전치도 못한 비서관님이 갑자기 실종되었다는데.”
……그랬구나. 나는 한숨을 쉬며 아인 퍼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인 퍼스가 ‘응?’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해명할게.”
“하지만…….”
“빨리.”
아인 퍼스가 머뭇대며 내게 휴대폰을 넘겼다. 익숙한 10자리의 숫자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뚜르르…… 긴 신호음이 울렸다.
이윽고 신호음이 끊어졌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샤를마뉴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파엘은 찾았어?
다짜고짜 튀어나오는 ‘라파엘은 찾았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절박한 목소리라니. 이러면 화를 낼 수도 없잖아.
-찾았냐고 묻잖아.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초조함이 묻어 있는 사나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묵묵히 대답했다.
“접니다.”
-……라파, 아니 루크?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다.
“이른 아침에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만.”
그때 아인 퍼스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지. 그를 향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기억이 돌아왔다는 걸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사실 그러려고 전화를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알리긴 해야겠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그가 경악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기억이 돌아왔습니다.”
-잠,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기억이 돌아왔다니?
“말 그대롭니다. 모든 것이 떠올랐어요.”
아인 퍼스의 얼굴도 놀라움으로 물들어 간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병실 가운데에 있는 TV를 바라봤다.
이른 아침의 뉴스 채널에서는 오후 11시에 열릴 철혈대신 아인츠만의 장례식을 생중계하겠다는 배너가 떠 있었다.
아, 그게 오늘이었군. 앵커들은 오늘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들의 명단을 화면에 띄우고 그들과 아인츠만의 관계에 대해 분석하기 바빴다.
그중에는 아는 사람도 있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많이들 참석하는구나. 그 목록의 가장 정점에 샤를마뉴가 있었다.
그는 아마 맨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원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제일 늦게 모습을 나타내는 법이니까. 그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곧 장례식이 시작되겠군요.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하죠.”
-잠깐! 라파…….
샤를마뉴가 무어라 말을 이었지만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인 퍼스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자 그가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기억이 돌아오셨어요?”
“응.”
“와, 정말 축하드려요!”
축하할 것까지야. 내 안의 루크가 사라진 것으로 축하받고 싶지는 않다.
나는 정말 잘됐다고 방방 뛰는 아인 퍼스를 향해 진정하라고 손을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오늘이 장례식이었네.”
“아, 네. 오늘이에요.”
“몇 시에 시작하지?”
“음, 오피셜은 11시요. 경우에 따라서는 늦춰질 수도 있고요.”
11시라. 현재 시각이 8시 10분이니 샤를마뉴와는 적어도 행사가 모두 끝나는 오후 2시 이후에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기에 충분하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때 간호사가 들어와 나를 불렀다. 왜 부르는가 했더니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요?”
내가 왜 쓰러졌는지 모르는 아인 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호사가 해야 할 검사가 많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가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검사가 그렇게 많아요?”
더 캐묻기 전에 나는 곧 따라가겠다는 말로 간호사를 먼저 보내 놓고 아인 퍼스를 향해 말했다.
“아인, 피곤해 보이는데 저택에 가서 쉬다 오는 게 어때?”
“네? 하지만 검사라면 보호자가 있어야…….”
“기억도 찾았으니 검사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어.”
그가 으음, 하고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저택에 갔다 오기는 좀 그렇고, 장례식 중계 보면서 여기서 자고 있을게요.”
“그럴래?”
“네. 집에 갔다 오면 장례식의 하이라이트를 놓칠 것 같아서요.”
장례식의 하이라이트?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바라보자 아인 퍼스가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는 일리오니쉬의 쿼터가 아니던가.
일리오니쉬에 대한 편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쪽 피가 섞였으면 아인츠만이 싫을 수도 있겠다 싶어 물었다.
“아인츠만을 싫어해?”
내 물음에 아인 퍼스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음, 아, 네. 뭐, 그렇죠.”
그러면서 주절주절 변명을 덧붙인다.
“아무래도 좋게 보일 수는 없는 게…… 사람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였다는 점에서도 그렇게 존경받을 인물은 아니니까요.”
얼굴이 달아올라 변명하는 아인 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어떤 핑계를 대도 그가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은 정당화할 수 없으니까. 나도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정말요?”
“응.”
아인츠만의 그 무자비한 학살 이후로 제국은 테러와 폭력이 만연한 사회가 되었다.
소수민족들은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테러를 자행했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것이 내 부모님이었다.
“비서관님은 참 독특한 분이에요.”
“……별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아니요. 참 독특해요. ……인 줄 알았는데.”
음?
“뭐라고?”
“아, 아니에요.”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 부…….”
아인 퍼스는 속 모르는 얼굴로 웃고 있다. 분명 부, 뭐라고 한 것 같은데. 그때 간호사가 문을 똑똑 두드리며 말했다.
“환자분, 검사하러 가실게요!”
아, 깜짝이야. 돌아보니 간호사가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따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아인 퍼스를 되돌아보자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
방금 못 들은 말은 뭐였을까. 괜히 찝찝하다.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간호사를 따라나섰다. 다녀와서 물어보면 되겠지.
* * *
이런저런 검사를 받으니 시간은 벌써 12시가 넘었다. 검사를 끝내고 잠시 대기하다가 의사를 만났다. 그는 차트를 훑으며 사무적으로 물었다.
“지금 상태 어떠세요?”
“멀쩡합니다.”
“머리나 가슴이나 다른 곳이 아프진 않고요?”
전혀. 고개를 젓자, 의사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환자분이 발작 직후 호흡을 멈춘 시간이 약 6분이에요. 1분 30초만 숨을 참아도 눈앞이 아득해지는 게 사람인데, 환자분은 6분이나 숨을 못 쉬었으니 분명히 뇌에 손상이 갔을 거란 말이에요?”
마치 손상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말하는 의사 때문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의학적 사실이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뇌 손상으로 기억이 돌아왔나 보죠.”
“네?”
의사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나는 귀찮지만 모든 것을 설명했다.
약 두 달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었다. 그런데 어제 쓰러지고 난 이후로 기억이 돌아왔다.
구구절절한 설명을 끝내자 의사가 이런 경우는 처음 들어 본다며 입을 떡 벌렸다.
“그럼 지금은 기억이 다 돌아온 겁니까?”
“그렇습니다.”
“지각 능력도 멀쩡하고요?”
“……선생님 코에 난 사마귀가 똑똑히 보이는데 멀쩡한 거겠죠?”
그 말에 의사가 헛기침을 하며 코를 가렸다. 그러더니 급하게 화제를 뇌에서 심장으로 돌렸다.
“혹시 가족 중에 심장 질환을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가족이라고 해봤자 부모님과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인연을 끊은 외숙 한 명이 전부다. 외가와 친가 모두 손이 귀한 집안이라 친척이라 부를 사람이 몇 없었다.
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원체 몸이 약한 분이었다고 한다.
친가 쪽은 할아버지도 외동, 아버지도 외동이었던 까닭에 표본이 없었다. 그리고 외가 친가 통틀어 유일하게 살아 있는 외숙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으니 심장병이 가족 내력인지는 모르는 것이다.
“지금 환자분 간 수치가 굉장히 높거든요? 그리고 LDL 콜레스테롤 수치도 상당히 높아요. 이건 무슨 뜻이냐면, 간이 지금 지방 대사를 전혀 못 한다는 소리예요.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면 심장병이 발생할 확률도 높아지고 그렇거든요.”
“간이 지금 제 기능을 못 한다는 소린가요?”
“쉽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제가 직업상 매년 정기검진을 받는데, 올해 5월에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거든요. 근데 갑자기 간 수치가 높아지다니요?”
“그때는 멀쩡했어요?”
“네.”
“흠…….”
그 대답에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의사가 차트에 무어라 적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일 몇 개의 검사를 더 할 거니까 간호사가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한다.
그 말에 기운이 빠졌다. 이 지긋지긋한 검사를 또 하란 말인가. 이래서 사람은 건강하고 볼 일이다.
근데 정말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분명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 없었던 몸에 무슨 괴이쩍은 일이 생긴 건지. 교통사고 때문에 몸이 크게 상한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병실에 다다랐을 때였다. 병실의 문을 열자 검은 형체가 확 튀어나왔다.
깜짝이야. 흠칫 놀라 발을 빼기 무섭게 튀어나온 형체가 나를 힘주어 안았다.
이건 뭐야. 깜짝 놀라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코끝에 익숙한 향기가 스쳤다.
그러니까, 이 향은.
“……전하?”
내 물음에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살짝 풀며 샤를마뉴가 대답했다.
“라파엘.”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뭘 잘못했는지는 아는 모양이지.
나는 천천히 그를 품에서 떼어 놓았다. 샤를마뉴가 연녹색 눈동자 가득 불안을 비추며 내게서 물러섰다.
뭐, 찔리는 건 많겠지. 나는 일부러 무심한 척 시계를 보며 물었다.
“전하께서 왜 이곳에 계십니까?”
“……라파엘, 나는.”
‘나는’까지 말한 샤를마뉴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고개를 돌리자 TV에서는 장례식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아인츠만의 시신을 담은 관은 성당을 빠져나와 광장을 향해 천천히 옮겨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저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다. 이 병실이 아니라 저 행렬의 앞줄에 있어야 할 사람.
“또 멋대로 파투내셨습니까.”
잘하는 짓이다. 한숨을 내쉬자 샤를마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떼며 대답했다.
“당신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내가 뭘? 그때 아인 퍼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고 웃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
“당신이 기억이 돌아왔다는데 내가 무슨 정신으로 저기 있어?”
“……제 기억이 돌아온 것과 전하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요.”
그 말에 샤를마뉴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대답했다.
“관련이 없어?”
없지. 없어야 하지. 나는 나고, 샤를마뉴는 샤를마뉴다.
나는 그의 비서관이며 휴가 중이고, 그는 황태자이며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고작 비서관 한 명의 건강 때문에 일정을 취소할 수는 없단 말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라파엘!”
그가 조금 상처받은 얼굴로 소리쳤다. 그 얼굴을 보자니 마음이 약간 술렁였다. 우습고, 황당하면서도 이상하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왜 안타까운 걸까. 나도 잘 모르겠다.
상처받았어? 하고 도닥도닥해 주고 싶은 이런 마음은 정말 누구의 마음이냐고. 내 마음은 아닌데, 정말 아닌데. 라파엘인 나는 지금 화가 나야 정상인데.
“저는 기회가 생겼다고 얼씨구나 사기 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
“그런 사람과는 엮이기도 싫습니다만.”
복잡한 마음을 끊어 내듯 일부러 차갑게 말하자 샤를마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너도 찔리는 건 있겠지.
기억이 돌아온 이후 그간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니 기도 차지 않았다.
내가 너랑 사귀느라 결혼을 안 했다고? 내가 너랑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내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그저 일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하루도 쉴 틈 없이 사고를 쳐 주는 누구 씨 때문에 정신없이 바빠서!
그 와중에 멍청하고 순해 빠진 루크는 홀라당 넘어가서 그와 그 짓을 했고…… 어휴. 말을 말자. 그때의 일을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일부러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샤를마뉴가 꾸물꾸물 입을 열었다. 아까의 사납던 기색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건…… 절대, 절대 당신을 골탕 먹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
“…….”
“나는 그냥 관계를 바꿔 보고 싶었을 뿐이야.”
아인츠만의 관은 시청 앞을 지나고 있었다. 곧 있으면 광장이다. 광장에서 그를 위한 마지막 퍼레이드가 열리고, 그의 관은 가문 묘지로 향할 것이다. 그거면 끝이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벌써 12시 20분이었다. 아마 5분쯤 뒤면 광장에 다다를 것이다.
아인 퍼스는 예의 그 묘한 표정으로 TV와 우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내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샤를마뉴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너무 틈이 없고, 나라는 인간을 싫어했으니까. 나로서는 방법이 없었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나는 샤를마뉴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아한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인간적인 호감까지는 있었다. 절대로 싫어한 것은 아니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샤를마뉴의 연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드물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은 못 믿을 수 있겠지만.”
“…….”
“정말로 당신을 사랑해. 이것만은 진심이야.”
그 말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좋아한다고, 진심이라고?
“……압니다.”
그런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눈빛을 속이기는 쉽지 않다.
눈은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내보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비록 그가 나를 속였을지라도, 그동안 그가 내게 보여준 것은 명백한 ‘사랑’이었다. 그것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상천지 어느 누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보며 그렇게 꿀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그 정도는 안다.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사기를 친 건 사기를 친 거다.
“전하께서 보여 주신 애정과 노력까지도 거짓이라고 매도할 마음은 없습니다.”
“…….”
“하지만, 그런 노력을 거짓 관계에서가 아니라 진실 된 관계에서 보여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가 보인 애정은, 그것이 아무리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결국 비겁한 진심일 뿐이다.
스스로 관계를 바꿀 용기가 없어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를 틈을 타 어영부영 관계를 변화시키려 한 비겁한 사랑.
하나의 관계를 깨뜨리려면 그만한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나는, 관계를 깨뜨릴 만큼의 용기도, 그런 절박한 마음도 없는 사랑을 위해 내 성 정체성을 바꾸고 싶지는 않다.
법적으로 남성 간의 동성혼이 허용되는 나라라고는 하지만 터부시되는 면이 분명히 있는 험난한 사랑이니까.
이것으로 대화는 끝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샤를마뉴를 지나쳐 침대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불쑥 샤를마뉴가 말했다.
“노력할게.”
“…….”
“이제부터라도 노력할 테니까, 부디 내게 기회를 줘.”
그 절박한 목소리에 문득 내가 기억을 잃고 루크인 상태로 샤를마뉴와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거부하지는 말아줘. 내가 당신한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막지는 말아줘. 내 마음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부정하지만 말아줘.’
그는 지금도 그렇게 속삭이고 있다. 눈으로, 표정으로, 슬퍼하는 몸짓으로, 그리고 절박한 마음으로. 그 당시 루크였던 나는 그의 사랑을 받아주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다.
다른 점이라고는 내가 루크가 아닌 라파엘 본인이라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전부야?
머릿속으로 루크의 기억이 떠올랐다. 루크일 적의 나는 샤를마뉴를 사랑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델루니안에게 받지 못한 애정을 모두 주는 그는 내가 바라던 이상형 그 자체였으니까.
‘전하를 제게 주세요.’
평생 가진 적 없이 살았던 루크가 처음으로 갖고 싶다고 외친 사람. 그 절박한 사랑.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 속이 울렁거렸다.
‘당신 안에 존재하는 루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행동을 분석하려고 하지 마세요.’
시드니 카턴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루크인 걸까, 라파엘인 걸까. 그리고 도대체 이 감정은 뭐지? 인간적인 애정? 아니면, 성적인 사랑? 그것도 아니면 그저 감정의 혼란?
……정말 모르겠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두 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대답 없이 샤를마뉴를 바라보았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내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선을 보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사랑스럽다. 안아주고 싶다. 입을 맞추고 싶다. 체온을 나누고 싶다.
당혹스럽다. 낯설다. 화가 난다. 곤란하다. 멀리 떨어지고 싶다. 상사와 부하, 딱 그 정도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다.
두 가지의 욕망이 가슴속에서 전투를 벌였다.
나는 이러한 혼란이 싫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나는 안정적인 것만을 쫓는 습관이 생겼다. 감정적 혼란은 내게 독만 될 뿐이다.
“전하, 저는……”
‘저는 아무래도 싫습니다. 더 이상 당신과 그런 관계로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 순간.
쾅!
하는 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폭발음의 근원지는 바로 작은 TV에서였다. 화들짝 놀라 TV를 바라보았다.
초조하게 내 대답을 기다리던 샤를마뉴의 시선도 TV를 향했다.
그리고 작은 스크린 안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게 무슨…….”
나는 멍청히 중얼거렸다. 샤를마뉴도 할 말을 잃고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장례식을 생중계하던 리포터가 경악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이게 무슨 상황인가요! 방금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막시밀리안 광장에서 방금 대규모의 폭발이 발생했습니다! 퍼레이드의 막바지, 관이 막 연단에 놓이는 순간 분수대에서 갑자기 굉음이 울리며 폭발이 발생했고, 보시는 것처럼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습니다! 아! 이 무슨 변고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지금 폭발이……!」
비명과 검은 연기, 그리고 산산조각이 난 보도블록의 잔해가 카메라 안에 잡혔다.
그리고 피를 흘리는 남성들, 도망가는 여성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곧 화면 밑으로 파란색 속보 자막이 떴다.
『속보 - 전 국무대신 아인츠만 하이커 장례식 도중 광장 폭발』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저 행사에 참석해서 분수대 앞 귀빈석에 앉아 있었을 사람.
……샤를마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