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황태자는 이튿날 이른 새벽에 수도로 떠났다.
그때 나는 감기약에 취해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떠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텅 빈 옆자리에 조금 씁쓸해한 것도 잠시, 침대 옆 테이블에 놓여 있는 카드를 발견한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건 뭐지? 손을 뻗어 카드를 집어 들었다. 금테가 둘린 흰 카드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말하지 못하고 가서 미안해. 금방 돌아올게.
사랑을 담아, 당신의 샤를.
추신. 질투도 좋지만, 속앓이는 그만.]
마지막 추신은 무슨 뜻일까. 추신에 대해 고민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푹 자고 일어나서 몸이 개운할 줄 알았는데 어제의 그 무지막지한 정사 때문인지 아직도 곳곳이 쑤셨다.
하지만 황태자도 없는 마당에 침대에서 죽치고 누워 있을 수도 없어 억지로 몸을 이끌어 방을 나설 때였다.
“아, 비서관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방문을 닫고 몸을 돌리자마자 막 수프를 가지고 올라오던 아인 퍼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얘가 왜 여기 있지?
“아인, 너 왜…….”
얼떨떨한 얼굴로 묻자 아인 퍼스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여기에 남기로 했거든요.”
“어?”
“전하께서 그러기를 바라셨어요.”
전하께서? 순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또 제멋대로지. 정말…….
“그럼 전하는 누가 보좌하는데?”
“소냐 하워드 비서관님이요. 수습에 불과한 저보다야 훨씬 적합한 분이니까요.”
소냐 하워드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 그녀는 분별 있는 사람이니까 제멋대로인 황태자를 무리 없이 보좌할 수 있을 거다. 나쁘지 않아.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아인 퍼스가 물었다.
“그런데 많이 아프셨다면서요. 돌아다니셔도 괜찮아요?”
“어…… 어? 아, 응. 괜찮아.”
“어제 한 끼도 안 드셨잖아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어제…… 한 끼도 안 먹긴 했지. 아프기도 했고. 감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내가 말없이 웃기만 하자 아인 퍼스가 ‘그럼 수프는 식당에서 드실래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게 좋겠다며 1층으로 내려갔다.
황태자의 출타와 함께 경호관으로 북적북적했던 저택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아인 퍼스의 말을 들으니 경호관들의 삼 분의 이가 황태자를 따라 수도로 향했고, 최소한의 인원만 남아 저택을 경호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구나. 갑자기 조용해진 저택이 참 익숙하지 않다. 묽은 수프를 삼키며 무심결에 말했다.
“그럼 나흘 뒤에나 전부 돌아오겠구나.”
그런데 그 말에 아인 퍼스가 ‘아…… 그게’ 하더니 곤란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나흘보다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르겠어요.”
“어? 왜? 나흘이라고 하지 않았어?”
“원래 일정은 그랬는데…… 조금 전에 급한 연락을 받았거든요. 아마 내일 기사로 뜰 거예요.”
그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사로 뜰 정도의 일이라니, 설마 황태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무슨 일인데?”
나도 모르게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아인 퍼스가 ‘음……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안타까워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라며 대답했다.
“철혈대신 아인츠만 공작이 세상을 떠났거든요.”
“뭐?”
나는 깜짝 놀라 스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인츠만이?”
“네. 사인은 심장마비래요.”
“맙소사. 평생 안 죽을 것 같던 인간인데.”
아인츠만. 그 이름을 걸고 토론회를 개최하면 2박 3일은 쉴 새 없이 토론할 수 있으리라. 다사다난한 제국의 현대사에 그가 집권한 12년만큼 복잡하고 격동적이었던 시기를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집권한 12년의 기간은 어떤 이에게는 영광의 역사였고, 또 어떤 이에게는 모멸과 치욕과 애환의 역사였다.
아인츠만의 집권 시기 제국은 경제부흥에 성공했고 식민지들의 분리 독립을 저지했다.
제국인들의 입장에서나 ‘저지’지, 식민지 백성의 입장에서는 ‘수포로 돌아감’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종속국들의 시위를 군부대를 투입해 가며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일리오네 사태’였다. 경제적인 부흥을 이끌었던 아인츠만이 제국민의 뇌리에 공포의 상징으로 깊게 새겨지게 된 것은 그 사태 때문이었다.
사망자가 120여 명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진압 과정을 본 사람들은 아인츠만을 경외시하기 시작했다.
‘계속 그렇게 떼를 쓰면 아인츠만이 잡으러 올 거야!’
떼를 쓰는 아이들에게 엄마들이 아인츠만을 운운하며 겁을 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거다.
그 사람도 인간이긴 인간이구나, 죽을 줄도 알고.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국빈 의전은?”
“그건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그래. 부검은 한대?”
“원래 고령이었으니 부검은 하지 않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원래 그런 사람들일수록 몸에 칼 대는 걸 싫어하니까. 장례는 어떻게 진행한대? 국장인가?”
“글쎄요, 아직 확정된 바는 없지만 아마도 국장으로 진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장으로 진행하겠지. 논란은 좀 있겠지만 그만큼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도 없으니 국장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의 정치적 파트너였던 황제도 그걸 바랄 것이고.
이러나저러나 황태자는 곤란하게 되었다.
“전하께서도 바쁘시겠네.”
“예. 장례식 참석 여부를 결정하고 동선을 짜야 하니까요. 아마 나흘하고도 며칠은 더 황궁에서 머무르실 거예요.”
어쩔 수 없지. 나는 떨어뜨린 스푼을 집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놀랍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골프 치고 다니고 그랬잖아.”
“원래 정정하던 사람들이 훅 가는 법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나는 괜히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웃었다.
“나도 곧 서른인데 건강관리 잘해야겠어.”
“아, 맞다. 그래서 말인데요, 비서관님.”
“음?”
“보약이라도 드실래요?”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보약? 그 단어를 떠올리자 갑자기 머리 한쪽이 푸시시 꺼지는 것 같았다.
“보약이 뭔데?”
그 물음에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아인 퍼스가 빙그레 웃었다.
“아, 맞다…… 기억 못 하시지.”
“…….”
“보약이란 건, 말 그대로 몸을 보충해 주는 보충제로 소수민족 고유의 의약이에요.”
“음…….”
“제국식 약은 병의 사후 처리 과정이라고 하면, 보약은 병이 생기지 않게 사전 예방을 하는 거죠.”
아, 그런 거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관님은 사고를 겪으면서 몸이 많이 상하셨을 거예요. 감기도 그래서 걸린 것일 테고.”
“그런가?”
“이번 기회에 보약이라도 드시면서 체력 관리하세요. 예?”
보약이라. 굳이 그런 걸 먹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체력 관리 하라는 말에는 약간 혹했다. 하루 종일 함께 뒹굴어 놓고 혼자 멀쩡했던 황태자가 떠오른 탓이다.
보약인지 뭔지 먹으면 좀 비슷해지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그 대답에 아인 퍼스가 활짝 웃었다. 꽃잎이 만개하듯 밝은 미소였다.
“그럼 제가 잘 아는 의사가 있는데, 그분한테 연락드릴게요.”
“응, 그래.”
그리고 이튿날이 밝았다.
아인 퍼스가 부른 의사가 저택을 찾아왔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응접실 안에서 의사의 용모를 본 나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소수민족의 의술을 가진 의사라고 해서 흰 수염을 기른 이국적인 외모의 노인일 줄 알았더니, 웬걸.
설화에 나오는 요정 같은 생김새의 청년이 왕진 가방을 들고 찾아왔다. 깜짝 놀란 내가 눈만 깜빡이자 아인 퍼스가 후후 웃었다.
“꽤 젊죠?”
“……응, 그러게.”
“그래도 실력은 좋아요. 뒤처리도 깔끔하고요.”
그렇구나. 나는 멍하니 의사를 바라보았다. 요정처럼 눈이 커다랗고 코와 귀가 뾰족한 의사 청년은 온화하게 웃으며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얼떨결에 마주 인사하자 의사가 웃으며 아인 퍼스에게 무어라 속살거렸다. 그러자 아인 퍼스가 씩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말이지? 전체적인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억양이 제국어는 아닌 것 같다. 다른 나라의 말인가.
작게 속삭이는 말을 부러 듣겠다고 추궁할 수도 없어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의사가 다가왔고, 아인 퍼스가 의사를 대신해 말했다.
“진료할 거예요, 팔목을 보여 주세요.”
“팔목은 왜?”
“맥을 짚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맥이 뭘까. 궁금하긴 했지만 잠자코 소매를 걷어 팔목을 보여 주자 의사가 조심스럽게 팔목을 받아 들고 두 손가락으로 손목을 짚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그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종이에 무어라 적기 시작했다. 전문용어일까? 아무튼 확실히 제국어는 아니었다.
의사는 몇 가지 진료를 더 했고, 아인 퍼스는 그때마다 의사의 말을 통역했다. 의사는 제국어를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쓰는 말은 딱딱 끊어지는 제국어와 달리 물 흐르듯 부드럽게 귀에 감겼다.
……그런데 저런 억양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어딘지는 확실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진료를 끝낸 의사가 또 아인 퍼스에게 무어라 말했고, 아인 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게 말하길, 체력이 너무 떨어져서 몸이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는 상태이므로 체력을 보충하는 약을 한 달 치나 지어주겠다고 한다. 알겠다고 하자 또 아인 퍼스가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의사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누구를 쏙 빼닮았다기보다는, 그냥 전체적인 저런 외형을 닮은 사람을 본 것 같았다. 외모와 억양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니까, 잘 기억은 나질 않는 누군가가…… 어릿어릿 그 사람의 형체가 머릿속에서 떠오르려고 하는데, 그때 청년이 낮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라쉬네.”
그 순간이었다. 어릿어릿 뭉게구름처럼 불확실하던 형체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은.
“아.”
하고, 내가 멍청한 신음을 흘리자 아인 퍼스가 나를 흘끗 돌아보았다. 나는 아인 퍼스를 향해 물었다.
“일리오니쉬인가?”
그 말에 아인 퍼스가 오, 하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순혈 일리오니쉬를 아는 사람은 많이 없는데.”
“아, 예전에 일리오니쉬를 만난 적이 있었거든.”
그러니까, 아주 예전에.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 * *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던 시대에서는 일리오니쉬가 흔하지 않았다.
우선 국경을 인접하고 있지 않기도 하거니와 제국민이 종교와 풍습이 다른, 게다가 생김새도 신묘한 일리오니쉬를 꺼렸기 때문이다.
무지몽매한 민중들은 일리오니쉬 상인을 보면 부정 탄다며 눈을 씻기까지 했다.
제국의 반(反)일리오니쉬적 성향을 일리오니쉬라고 모르지는 않아서, 그들도 교류를 하러 올 때면 사막 왕국의 상인들처럼 얼굴을 가리는 터번을 둘러 댔다.
그 때문에 살면서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일리오니쉬를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나도 일리오니쉬의 얼굴을 본 적 없는 대다수 중의 하나였고.
그런 내가 일리오니쉬를 보게 된 것은 죽기 1년 전, 그러니까 황제가 정복 전쟁을 막 끝냈을 때의 일이다.
그날은 참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이 높은 푸른 가을.
지독한 한파가 몰아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한 황제는 산악 국가인 일리오니아와의 화친을 맺었고, 일리오니아는 국가 기반이 인정되는 종속국의 형태로 제국에 편입되었다.
일리오니아는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물자가 풍부하고 지형을 이용한 전술을 잘 구사하는 국가였기에, 겨울까지 전쟁을 끌면 지겠다는 계산을 한 것이었다.
어차피 일리오니아 입장에서도 물밀 듯이 들어오는 제국군을 상대하기에는 영 버거웠으니 나쁘지 않은 화친이었다.
화친하며 일리오니아 쪽에서 내건 조건은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한 가지가 일리오니아 왕국의 공주를 황비로 맞을 것이었다.
일리오니아는 불안했던 것이다. 종속국으로의 화친이기는 하지만 봄이 되고 날씨가 풀리면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제국군이 부담스러웠으리라. 황제 또한 거절하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일리오니아 왕국에서 생산되는 금과 은과 철 등이 혼인의 목적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양국의 합의에 의하여 황제와 일리오니아의 공주가 혼인을 하게 되었다. 황제에게는 여러 명의 여인이 있었지만 그중 정비로 취급받는 것은 황후와 황비뿐이었다.
그들에게는 후궁과 달리 황궁의 중심인 황금 돔에서 황제와 혼인식을 치를 자격이 주어졌다.
일리오니아의 공주는 황비의 자격으로 입궁을 했으니 황제와 혼인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황금빛 돔의 연단 앞에 도열한 후궁들과 귀족들 사이로 일리오니아 풍의 백색 혼례복을 입은 공주가 스쳐 지나갔을 때, 나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기다란 검은 머리에 커다란 눈, 뾰족한 귀와 코라니. 살면서 순혈의 일리오니쉬를 본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그 이국적이 외모에 잠시나마 넋이 나간 것이다.
나는 후궁 중에서도 떳떳하게 앞줄에 설 수 없는 남자 후궁이었기에 먼발치에서만 그녀를 보았지만 그 이국적인 외모는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꽃밭 사이를 뛰어다니는 새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황제의 앞에 다다랐고, 황제는 그녀에게 황비의 티아라를 내렸다.
잘생긴 외모의 황제와 이국적인 공주의 혼인은 퍽 잘 어울렸던 것 같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후궁들은 입술을 꼭 깨물었고, 황후의 표정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 여기까지였으면 그냥 이국적인 공주에 대한 짤막한 기억으로 남겨 둘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날의 기억을 이토록 또렷하게 떠올리는 것은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황비의 혼인식이 끝나고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온갖 귀족들이 다 모인 파티 자리가 나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남자 후궁이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뭇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괜히 어쭙잖게 인연을 쌓겠다고 다가오는 귀족들을 물리치는 것도 힘들어서 미리 들어가고 싶었지만, 황제와 황후가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먼저 돌아가는 것도 예법이 아닌지라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현란한 음악. 적당히 달아오른 분위기. 황제는 황후와 춤을 추고 있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공주는 그들 사이에 있었다. 분명, 내가 봤을 때는 그랬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주가 내 앞에 나타났다.
“…….”
이건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만 깜빡이자, 공주가 수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춤을 추자는 뜻이었다.
지금 나한테 추자고 하는 거야? 무례함을 무릅쓰고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주위에는 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추자고 하는 건 맞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난감함에 그녀가 내민 손을 잡지도 못 하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남자다. 그러니까 레이디의 손을 부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남자인 동시에 후궁이다. 지위로만 보면 그녀와 나는 연적인 셈이다.
물론 그녀는 황비고 나는 후궁이니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위치이긴 하지만, 어쨌든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사람들끼리 춤을 추게 된다니.
잠시 동안 고민하던 나는 결국 공주의 손을 잡았다. 어쨌든 공주를 민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녀의 손을 잡고 중앙 무대로 향하는 순간 주변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경악하는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저 천한 것과 춤이라니……! 황비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니, 이건 제가 추자고 한 게 아니거든요.
중앙 무대에 다다랐을 때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공주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주로 내게 머물러 있었는데,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소요를 만들었다는 데에 대한 질타인 것 같았다.
음악이 바뀌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예를 갖춰 공주에게 춤을 권했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응답했고 우리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없이 춤에 집중했고, 나 역시 그녀의 발을 밟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며 춤을 췄다. 말을 걸 정신도 없었다. 흘끗 보니 황제는 다른 후궁과 춤을 추고 있었다.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기 전에 공주와 결별의 인사를 나눴다.
“즐거웠습니다.”
의례적으로 말하고 몸을 돌릴 때였다. 갑자기 내 뺨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그리고 귓가를 간질이는 작은 목소리.
“라쉬네.”
헉.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뗐고, 아니나 다를까 우리를 중심으로 한 무리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다들 입도 벙끗 떼지 못하고 나와 공주, 그리고 황제만을 바라보았다.
황비가 남자 후궁에게 입을 맞추다니! 볼에 하는 입맞춤은 인사라고들 하지만, 혼인을 치른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황비가 외간 남자에게 할 짓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외간 남자가 후궁이라면 더더욱.
공주는 소란을 만들었다는 것도 모르는지 후후 웃는 낯으로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나와 얼어붙은 귀족들과 차가운 표정의 황제뿐.
황제는 북국의 빙하도 얼려 버릴 만큼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공주를 쫓아갔다.
연회장에서 황제의 모습이 사라지자 귀족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주로 나와 황비와 황제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조용히 연회장을 벗어났다. 아무래도 황제에게 타박을 들을 것 같다. 억울하지 않게 미리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도 좋으리라.
한숨을 쉬고 방으로 돌아와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웠다.
공주와 황제의 첫날밤. 황제는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오늘 있었던 소란에 대해 혼이 나겠지만 당장 오늘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침대에 누워 머릿속의 상념을 털어 내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얼마나 잤을까.
침대 한쪽이 묵직해졌다. 그리고 이불이 확 걷혔다. 한기가 몸 구석구석 파고들었고, 나는 그 감각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폐하?”
……공주와 밤을 보내야 하는 황제였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얼떨떨하게 그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 없이 침대 위로 오르며 얇은 내 잠옷을 벗겨 냈다.
아니, 잠깐. 잠깐만! 나는 그의 손목을 잡으며 소리쳤다.
“폐하, 어찌.”
“시끄러워.”
“황비께 가지 않으시고 이곳에……!”
그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그리고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휙 젖혀진 고개를 돌릴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방금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
뺨을, 맞았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한 거야.”
“……예?”
“무슨 얘길 했으면 공주가 입을 맞춰!”
나는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눈에서 불덩이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내 대답 따위는 바라지 않는 건지 억센 손길로 내 머리채를 잡아채며 억지로 입을 맞췄다. 입안을 파고드는 혀가 난폭해 물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리고 전희도 무엇도 없이 황제는 으르렁대며 내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천한 것이.”
“악!”
“주제도 모르고.”
향유도 쓰지 않은 구멍은 황제의 것을 거부했으나 그는 무자비하게 내 몸을 꿰뚫었다.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아래로 파고든 황제의 움직임만이 느껴지는 지옥 같은 밤이었다. 황제는 미친 것처럼 화를 냈고, 나는 사고도 무엇도 할 수 없이 그에게 강제로 안겼다.
그러다 까무룩 기절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황제는 없었고 그 대신 의원이 앉아 나를 진료하고 있었다.
의원은 하문이 많이 다쳤다며 당분간 고생 좀 할 거라고 혀를 찼다. 나는 멍하니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술이 터진 것을 보고 주먹을 꾹 쥐었다.
도저히 황제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춤을 신청한 것은 분명 공주였고, 볼에 입을 맞춘 것도 공주였다.
나는 오히려 몸을 피했단 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황제의 분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쏟아졌다.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분노였지만.
황제는 그 이후로 한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어느 후궁에게도 찾아가지 않았고 국정에만 매달렸다.
소문에 따르면 그 지옥 같았던 밤에 황비는 소박을 맞았다고 한다.
나를 가엾게 여긴 시종들은 쉬쉬했지만 그런 소문은 말보다 빠르게 마련이다. 황비로부터 황제를 빼앗아 간 희대의 요부라는 소문이 안 들릴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일리오니쉬 황비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첫날밤을 앗아간 나는 소문 속에서 점점 악독한 남창으로 변모해 갔다.
모순적인 것은,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나를 싫어했던 반면에 그녀는 시종일관 나에게 친절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제국어를 쓸 줄 몰라 의사소통은 거의 안 되었지만, 나에게 종종 다과나 일리오니아산 엽차 등을 보내 주었던 것을 떠올려 보면 그렇다.
비록 호감에서 우러나온 행동 때문에 나는 천하에 둘도 없을 나쁜 인간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 역시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녀와 얽힌 첫 번째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하고 아픈 기억이라 본능적으로 꺼리는 것은 있었지만, 사람 자체의 호불호를 두고 본다면 호에 가까웠다. 어쨌든 황궁 내에서 나에게 잘해 준 몇 안 되는 사람이니까.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내가 반역죄로 끌려갔을 때 그녀는 무사했을까?
이렇다 할 친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종종 선물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그녀가 나로 인하여 화를 입지는 않았길 바랐다.
그 저녁, 일리오니쉬 청년 의사가 돌아가고 아인 퍼스와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 문득 어떠한 의문이 들었다.
“아인, 그런데 너는 어떻게 저 의사를 알게 되었어?”
아까 그는 ‘순혈 일리오니쉬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했다.
그 청년 의사가 순혈 일리오니쉬라는 뜻이겠지. 그 흔하지 않은 사람을 너는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아인 퍼스가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음, 고향 사람이에요.”
“고향?”
“네.”
아인 퍼스도 일리오니쉬였단 말인가. 근데 아무리 봐도 아까 그 사람처럼 생기지는 않았는데?
내가 눈만 끔뻑끔뻑 뜨니 그가 멋쩍게 웃으며 ‘아버지가 하프세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너는 쿼터…… 인 건가?”
“그렇지요.”
“그럼 일리오니아에서 자란 거야?”
대수롭지 않은 물음이었다. 아버지가 일리오니쉬 하프라고 해서 무조건 일리오니쉬 언어를 잘 구사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냥 그곳에서 자란 거 아닐까 하고.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내 물음에 아인 퍼스의 표정이 흐려졌다.
“예, 뭐…… 그래요.”
이 주제로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혹시 무례한 질문이었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음, 불쾌하게 들렸다면 미안해. 그냥 일리오니쉬 언어를 잘하기에 신기해서.”
“신기할 것까지 있나요? 그들도 똑같은 사람인 것을요.”
“…….”
지나치게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그들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그냥 말을 잘하는 게 신기했을 뿐인데…… 순간 당황해서 입을 다물자, 아인 퍼스도 자신이 지나쳤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하도 당한 게 많아서 좀 날카로웠어요.”
“아, 응. 근데 당한 거라니?”
“……민족 차별이요.”
아인 퍼스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제국 내에 소수민족은 많다지만, 일리오니쉬처럼 차별받는 민족도 없을 거예요.”
“…….”
“저는 제국민에 가까운 외모라 티가 안 나지만, 아까 그분 같은 경우에는 차별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실력이 뛰어난데도 제국 대학에서는 일리오니쉬라는 민족적 특징 때문에 입학 허가를 안 해줬거든요. 아인츠만 집권 시기이기도 했지만.”
아, 그런 사연이.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자 아인 퍼스가 한숨을 쉬었다.
“저도 비서관님이 아니었더라면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비서관님이 제 사격 점수를 높게 평가하셨다면서요? 그게 아니었으면…….”
아인 퍼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하프라는 것은 제법 큰 감점 요소거든요.”
“……그래?”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이런 얘기가 나왔던 것 같다. 그때는 황태자가 들어오는 바람에 듣지 못했는데 드디어 얘기할 수 있겠네. 나는 아인 퍼스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때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니?”
“네?”
“그때도 못 들었잖아.”
그러자 아인 퍼스가 ‘아, 맞다’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얼마든지 말해드릴게요.‘
“…….”
드디어 호기심을 푸는 건가?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아침…….”
* * *
그날 아침, 저는 쫓기고 있었어요. 이렇게 말하니 좀 영화 같은가요? 아, 영화가 뭐냐고요? 음, 영화라는 건요…… 다음에 설명해 드릴게요. 말이 튈 것 같아서.
어쨌든 그날 아침에 저는 쫓기고 있었어요. 저를 쫓는 녀석들은 항상 똑같은 놈들이었죠. 제국을 좀먹어 가는 극우 세력들. 일리오니쉬를 보면 침이라도 뱉어야 속이 시원한 녀석들이요.
제가 일리오니쉬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수도에 올라온 이후부터 저를 쫓아다니더군요. 물론 대놓고 추격을 한 건 아니고 미행 정도였어요. 참 찝찝한 놈들이죠?
아무튼 평소에는 그냥 무시했는데, 그날 아침은 아무래도 최종 면접이고 그래서 신경이 곤두서더라고요. 따라붙는 놈들도 평소보다 많았고요. 쟤들 신경 쓰면 내가 죽겠다 싶어서 일부러 빙 둘러서 길을 나섰죠.
그랬는데 아뿔싸. 길을 잘못 든 거예요. 미행을 나선 놈들은 계속 따라붙고, 저는 길을 잃고. 면접 시간은 다가오는데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고급 주택가인지 택시도 안 다니고 공중전화도 보이질 않고.
이를 어쩌나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그놈들 중 한 명이 저에게 다가오더라고요. 인상도 험악한 것이 분명 시비를 걸려고 온 걸 거예요.
제가 보기와는 다르게 체술을 좀 할 줄 알아서 시비를 걸면 맞받아칠 수는 있는데, 그날은 면접날이잖아요. 옷도 멀끔하게 입고 나왔는데 드잡이라도 하면 다 구겨질까 봐 모른 척 열심히 걸었죠.
가까이 오는 차라도 있으면 얻어 탈 생각이었어요. 물론 세상이 어수선하니 태워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러다가 차 한 대가 다가왔어요. 말할 것도 없이 비서관님 차였죠. 그때까지는 비서관님 차라는 것도 몰라서 그냥 무작정 막아서고 태워달라고 했어요.
비서관님은,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이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제가 ‘계속 미행을 당하고 있어요’라고 울먹이면서 말하니까 한숨을 쉬면서 타라고 하셨죠.
그러면서 어디까지 가냐고 물으셨어요. 자기도 가는 길이 있어서 멀리까지는 못 태워다 준다고요.
저는 살았다는 안도와 함께 황궁에 가야 하는데 우선 가까운 지하철역에 세워 달라고 했죠. 그러자 비서관님 표정이 되게 묘하게 변하는 거예요.
“황궁이요?”
비서관님이 물었고, 저는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황궁이라……’ 하면서 말없이 운전하시는 거예요.
저는 몰랐죠. 정말 기가 막힌 인연 아닌가요? 아무튼 저는 지하철역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그리고 지하철역이 나오자마자 여기서 세워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비서관님이 ‘저도 그 근처까지 가니까 태워다 드릴게요’라고 하셨어요.
어쩜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시는지. 물론 그땐 시치미를 떼는지 모르고 ‘와, 감사합니다!’라면서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한참 운전하던 비서관님이 물었죠.
“근데 황궁에는 무슨 일로?”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나불댔어요. 사실 비서관 최종 면접이 있는데 꼭 붙어야 한다고요.
이번에 떨어지면 안 된다고 엄살을 막 떨었더니 비서관님이 조용히 웃었어요.
그러면서 ‘비서관이 되고 싶어요?’라고 물으셨죠. 저는 그렇다고 했어요. 평생 꿈으로 삼은 직장이라고. 그러자 비서관님이 되게 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생각만큼 좋은 직장은 아닐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비서관님의 경험이 녹아 있던 말인 셈이에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래도 꼭 합격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비서관님은 ‘뭐, 잘 해봐요’라고 중얼거렸죠. 그리고 황궁에 다다랐어요. 저는 입구에서 세워 달라고 했고, 비서관님은 저를 내려 주면서 충고를 해주셨어요.
“다 필요 없고, 정신력이 강하다고 하세요. 그러면 될 거예요.”
“네?”
“강한 의지와 잡초 같은 근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라고요. 어떤 막말과 폭언을 들어도 울지 않는 풀뿌리 근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죠. 근데 그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일 줄이야. 최종 면접에서 비서실장님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하고 물었을 때, 비서관님이 알려 준 그대로 읊었어요.
“저는 강한 의지와 잡초 같은 근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막말과 폭언을 들어도 울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대답을 해도 웃지 않던 비서실장님이 씩 웃으시더라고요. 그랬더니 합격했어요.
합격하고 나서 그러시더라고요.
“라파엘 비서관한테 들었죠?”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더니, 비서실장님이 그러셨어요.
“그 말, 라파엘 비서관이 자주 하는 소리인데. 자기는 이제 어떤 막말과 폭언을 들어도 울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그때 알았어요. 아, 그분이 비서관님이셨구나.
* * *
약속된 나흘이 훌쩍 지났다. 그가 저택을 비운 지 열흘째였다. 황태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미안해, 나도 돌아가고 싶은데 너무 바빠서 어쩔 수가 없어.
“…….”
-화났어? 응?
나는 대답 없이 TV를 바라보았다. TV 속에 황태자가 나타났다. 물론 지금 나와 통화하고 있는 그는 아니었다. 저건 아마도 ‘녹화’라는 기술로 그의 모습을 기록한 영상물일 것이다.
요즈음 황태자는 TV 이곳저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자선 행사에 참석했느니 뭘 어쨌느니 뉴스만 틀면 그의 얼굴이 꼭 등장했다.
-루크? 내 말 듣고 있어?
그렇게 멍하니 TV를 바라보는데 황태자가 다시금 대답을 재촉했다.
“예. 듣고 있습니다.”
-다행이다. 난 또 화나서 끊은 줄 알고.
“……제가 왜 화를 내겠어요.”
-내가 약속을 안 지켰잖아. 나흘이면 돌아가기로 해놓고. 화날 만하지.
수화기 건너편에서 그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또다시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
참 미안할 것도 많다.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미안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
-어?
“총 일곱 번이에요.”
-……뭐가?
“지금까지 전하께서 제게 미안하다고 한 횟수요.”
황태자가 입을 다물었다. TV에서 웃고 있는 황태자를 빤히 쳐다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돌아오면 벌을 줄 겁니다. 전하께서 제게 내린 벌과 똑같은 것으로요.”
-아, 정말.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들었다.
-미안하다고 백 번 말해야겠네.
“해보세요.”
-천 번 할까?
“그럼 입술이 남아나질 않을 걸요.”
-다른 벌도 괜찮지. 체벌이라든가…….
“그건 벌이 아니라 상이지요. 저만 힘들잖아요.”
-나도 힘들 때까지 하면 되잖아. 응?
말도 안 돼.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절 죽이시려고요?”
-내가 당신을 왜 죽여? 보기만 해도 아까운데.
“……제가 죽거든 제 무덤에 꽃이나 놔주세요.”
-어, 미안한데 그건 못 하겠다.
“왜요?”
-나도 따라서 죽을 거거든. 당신 무덤에 순장해 달라고 할 거야.
아, 못 살아. 참고 있던 웃음이 터졌다.
“그런 무서운 농담은 하지 마세요.”
-진담인데…….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진담이면 더 위험하지. 정말 못 말리겠다. 어쩜 이렇게 매일매일 사랑스러울 수가 있지?
달콤한 한숨이 가슴 속에서 튀어나왔다. 한숨에 색깔이 있다면 이것은 분명 장미보다도 아름다운 붉은 색일 것이다. 심장을 녹일 만큼 달콤한 붉은 색.
대화는 시답지 않은 내용으로 길게 이어졌다. 아인 퍼스가 나를 찾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하루 종일 그렇게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내가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였다.
황태자가 말했다.
-루크.
“예, 전하.”
-……보고 싶어.
아마도 이게 오늘 전화의 핵심이었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많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해.
그가 기습적으로 사랑을 고백했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나는 아직도 그 말에 심장이 아파 왔다.
사랑한다는 말은 백 번 천 번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아니, 평생 들어도 좋을 거야. 나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대답했다.
“저도…… 저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아쉽게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나는 생각했다. 역시 전화로는 부족하다고.
처음에는 전화로 충분할 줄 알았다. 전화하는 동안은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전화를 끊는 순간 깨달았다. 전화를 끊고 돌아선 순간, 그의 색채로 물들었던 세상은 다시금 원래의 쓸쓸한 공간으로 돌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화를 할 수 있으니 되었다는 것은 이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자의 오만이었다.
보고 싶다. 그의 목소리로는 부족하다. TV 속에서 움직이는 그의 형체로는 부족하다. 내 앞에서 살아 숨 쉬는 그를 보고 싶다. 만지고 싶고, 껴안고 싶다. 체온을 나누고 싶다. 설탕물에 빠진 쥐가 바로 나로구나.
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변한 나 자신이 낯설었다.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더니 그게 정말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며 점점 바보가 되어 갔다. 과연 어디까지 망가질까? 모르겠다. 망가지는 내가 싫으면서도 미치도록 좋았다.
나를 부른 아인 퍼스를 찾아갔다. 그는 빨래를 널어 두는 안쪽 마당에서 큰 이불을 든 채 낑낑대고 있었다.
재빨리 다가가 그를 도와 이불을 줄에 걸자 그가 빨개진 얼굴로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쳤다. 인사성도 참 바르다.
“전화하셨어요?”
“응. 방금 끝냈어.”
“전하께서는 잘 지내시죠?”
“응. 잘 지내신다더라. 그런데 TV에서 보니 얼굴이 조금 상하신 것 같아. 제대로 쉬지 못하셨나 봐.”
“으음…… 아무래도 그렇지요. 요즘 한창 바쁘시니까요.”
“황태자의 삶도 쉽지는 않은 모양이야.”
그렇게 중얼거리자, 아인 퍼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저 정도면 양호한 편이죠. 태어나 보니 황태자더라, 우리 아버지가 황제 폐하더라, 그런 경우가 어디 흔한가요.”
그건 또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말이 맞다고 동의를 하자 아인이 ‘그나저나’ 하면서 말을 이었다.
“비서관님, 이거 좀 비뚤어진 것 같지 않아요?”
“응?”
“그쪽이 좀 더 처진 것 같은데.”
그런가? 반대편을 바라보자 확실히 이쪽이 조금 더 길었다. 허둥지둥 반대편을 잡아당기자 그가 뒤에서 지휘했다.
“조금 더, 더요. 음, 좋아요. 그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어휴, 힘들다. 이불 빨래라는 게 쉽지가 않구나. 두어 걸음 물러나 빨랫줄에 걸어 놓은 이불을 보고 있노라니 집안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휘유, 한숨을 쉬며 땀을 닦자 아인 퍼스가 물통을 들고 와 건네주며 물었다.
“힘드셨죠?”
“아니, 괜찮아.”
“여름 이불이 가벼웠으니 망정이지, 겨울이었으면 정말 혼자 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아니라고 웃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인 퍼스는 가사 도우미가 아니고 황태자의 비서관이다.
이 유별난 녀석이 스스로 가사를 해치우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불 빨래 같은 큰일은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물통을 다시금 건네줄 때였다. 아인 퍼스가 ‘아, 맞다!’ 하고 갑자기 생각난 듯 소리쳤다.
“식재료가 똑 떨어졌는데!”
“응?”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지? 아휴, 바보!”
“식재료라니?”
그건 요리사인 하퍼 씨가 담당하는 것 아닌가? 내가 의아하게 되묻자 아인 퍼스가 ‘하퍼 씨 혼자 이래저래 바쁘시길래 식재료는 제가 돕기로 했어요’라고 대답했다.
아…… 정말 친절한 녀석이다.
아인 퍼스는 재빨리 저택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되돌아온 그의 손에는 지갑과 열쇠가 들려 있었다. 그는 빨래하기 위해 걷었던 소매를 내리며 내게 물었다.
“비서관님도 같이 가실래요?”
“어딜?”
“시장이요! 마침 수확제 시즌이라 싱싱한 농산물이 많이 들어왔을 거예요!”
시장? 내가 아는 그 시장? 과일이랑 채소랑 고기 등등을 파는 그곳?
나는 내가 살던 시대의 시장을 떠올렸다. 빈말로도 청결하다고는 할 수 없는 그곳.
매번 서는 장날이 아닌지라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런 까닭에 소매치기도 많았다. 하루 일당을 공으로 날린 적도 부지기수. 내 기억 속 시장은 별로 유쾌한 공간이 아니다.
안 가면 안 되나. 내가 꺼리는 기색을 보이며 즉시 대답하지 않자 그가 두 손을 저으며 나를 만류했다.
“아, 저택에 남고 싶으시면 그러셔도 돼요! 먹는 입이 많아서 재료도 많이 필요하지만, 혼자 들고 오기 힘들 것 같아서 차를 가져가는 거니까요!”
“…….”
“뭐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되겠죠! 네! 괜찮아요!”
……음, 그러니까 저건 아무리 봐도.
“……같이 가 달라는 말이지?”
먹는 입이 많아서 재료도 많이 필요하다는 말, 결국 혼자 들고 오기 무거우니 같이 가달라는 말이잖아?
내 말에 아인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티 많이 났나요?”
“응. 많이 났어.”
“이런.”
“제가 연기에는 소질이 좀 없어서요.”
아인 퍼스가 하하 웃었다. 덩달아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맹랑한 아이 같으니. 하여튼 보면 볼수록 정이 가는 녀석이다.
질투가 사라지자 그의 다정한 본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걷었던 소매를 내리면서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같이 가자.”
그의 말마따나 혼자 먹는 음식도 아니고 짐 정도는 같이 들어줘야겠지. 함께 사는 집인데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염치없는 짓이다.
그리고 이때까지 시장에 얽힌 기억이 별로 안 좋았다고 해도 이번에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세상이 많이 변하지 않았는가. 시장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저택에만 처박혀 있었으니 이렇게 한 번쯤 세상 구경을 하는 것도 좋겠지.
……라고 생각했던 몇 시간 전을, 지금의 나는 통렬히 반성하고 있다.
“……여기는 어딜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지만 답을 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속내를 애써 감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적이 드문 골목에는 개미 새끼의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았다. 저 멀리서 왁자지껄한 시장의 소리가 들렸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지 그곳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으로 시장에 도착했을 때, 내가 살던 시대보다 훨씬 커진 시장의 규모에 일차적으로 놀라고, 커진 시장의 규모만큼이나 많아진 사람들로 인해 이차적으로 경악했다.
아니, 이게 시장이라고? 300년 전에도 시장은 사람이 많은 혼잡한 구역이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으냐고 물으니 아인 퍼스는 수확제 시즌이라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 해의 가장 싱싱한 농산물이 시장에 나오는 때라 사람들이 몰려든 거란다. 그러니까 길을 잃지 않게 자신을 잘 따라오라고 했다.
그래서 분명히 잘 따라갔다. 그 화려한 금발을 눈에 새기며 그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그를 놓치고야 말았다. 세상에는 금발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이거 어쩌지? 하고 생각할 때였다. 그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루루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공연이 시작된다는 것 같았다. 어어? 휩쓸린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이미 그들에게 떠밀려 아인 퍼스가 향한 방향과는 정반대로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이곳이다. 시장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는 이곳.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침침한 골목.
“……어쩌지.”
되돌아가긴 가야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시장이 나오는지를 모르겠다. 이곳의 길은 너무 복잡하다. 어림짐작으로 대충 저쪽으로 가면 되겠거니, 하고 골목을 돌았더니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여기서 섣부르게 움직였다가는 더 이상한 곳으로 빠질 것 같다. 나아갈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미묘한 상황.
나는 주머니에서 아인 퍼스가 쥐여 준 지폐를 꺼냈다.
‘혹시라도 길을 잃으시면 공중전화를 찾아서 저한테 전화하세요!’
지폐의 한쪽 귀퉁이에는 그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길을 잃었으니 이 번호를 써먹을 때가 왔다. 그러나 문제는 공중전화였다. 전화번호도 알고, 전화를 거는 방법도 아는데 정작 공중전화가 없다.
……나 어떻게 돌아가지?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못 돌아가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돌아가야지. 황태자가 나를 기다리는데 이런 곳에서 길을 잃을 수는 없다.
나는 결연히 몸을 돌렸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면 어딜 들어가서라도 묻자. 이곳 주민이라면 시장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 주겠지.
그러고 골목을 나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몇 분쯤 뒤에 골목 끄트머리에서 한 가게가 나타났다.
다 낡아 빠진 간판에 유리창에 먼지가 덕지덕지 붙은, 망하기 직전의 가게였다. 희뿌연 유리창 안으로는 낡은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서점인가?
낡은 나무문을 당기니, 다행히 장사하긴 하는 건지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에서는 희미한 TV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그리고 물건을 팔겠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도 들렸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가게 안쪽에 놓인 작은 TV에서는 영화로 보이는 것이 방영되고 있었다.
“무슨 책을 찾아요?”
여자는 TV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으며 물었고, 나는 ‘음……’ 하면서 사실 길을 찾고 있노라고 대답했다. 아니, 대답하려고 했다.
『시드니 카턴 - 제국 통일과 황제 델루니안의 안정화 정책』
……그의 이름이 적힌 책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