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황태자가 수도로 돌아가는 날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수도 공항에 도착한 후 의전 절차에 따라 황궁까지 모실 예정입니다.”
“동선은?”
“19지구를 통과하여 18과 17지구, 그리고 16지구를 크게 돌아 들어오는 동선입니다.”
“바꿔. 19지구를 통과해서 바로 13, 8, 4지구를 관통하게 해.”
“예?”
“국빈이라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 사람이야. 과시하듯 돌아서 들어오게 할 필요는 없지. 경무청 인력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어차피 대통령 자격 인정해 달라고 오는 거니까 어떤 동선이든 머리 숙이고 들어올 거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
황태자와 아인 퍼스는 근래 계속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아직 라파엘의 기억이 온전히 돌아오지 못한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들이었다.
“오찬 장소는 정해졌고?”
“늘 그렇듯 수정궁입니다.”
“자리는 어떻게 배치했는데?”
“매뉴얼대로 처리했습니다.”
“원형으로 깔아.”
“예.”
원형으로 깔라는 건 또 무슨 뜻일까. 두 사람의 대화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내게 황태자가 고개를 돌렸다. 엄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밝게 풀어졌다.
“뭘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고 있어?”
“아…….”
“심심해? 밖에 나갈까?”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무례한 행동이지만 어차피 황태자는 나의 사소한 무례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가 한층 더 사근사근해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파이는 입에 좀 맞아? 당신이 좋아하는 호박 파이인데.”
“맛있습니다.”
“다행이네. 일부러 하퍼 씨한테 부탁했거든. 요즘 당신이 영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우울…… 내가 우울해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하퍼 씨한테 부탁해서 당신이 좋아하는 호박 파이 많이 만들어 달라고 할 테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거 먹고 기분 풀어. 알았지?”
아무래도 황태자는 자신의 수도행 때문에 내가 우울해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닌데.
요 며칠 계속 나의 신경을 건드렸던 것은 황태자의 수도행이 아니었다. 물론 아예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병원에서 나온 이후로 줄곧 함께했던 사람이 나흘씩이나 곁을 떠난다는데 아예 초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울해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정도로 옹졸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내가 신경 쓰이는 것은.
“전하, 둘째 날 일정 말인데요…….”
이렇게, 중간에 끼어드는 아인 퍼스.
“넌 눈치도 없냐?”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황태자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아인 퍼스를 타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 퍼스는 꿋꿋했다.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이건 일이잖아요. 어쩔 수 없다고요. 그렇지요, 비서관님?”
“……그렇죠.”
묘하게도 나를 엮는 아인 퍼스의 말에 또다시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황태자가 쯧, 하고 한 번 혀를 차더니 아인 퍼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내 쪽으로는 아예 등을 돌린 채다. 그 너른 등판이 알 수 없이 원망스러워서 나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대화는 길게 이어졌다.
황태자는 아예 내 존재 자체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일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이 색달랐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 기분은 회복 불가능한 수준까지 무너져 내렸다.
안 되겠다. 이러다가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것 같다.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킬 때였다.
“어디 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한참 동안 아인 퍼스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황태자가 고개를 돌렸다. 아인 퍼스도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서재요. 책을 좀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아, 그럼 같이 가자.”
“아닙니다. 마저 이야기 나누세요. 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황태자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자리를 피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빠르게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 입구에 다다르자 더 이상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재로 갈까 하다가 속이 답답해서 부엌 쪽으로 난 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계절은 벌써 쌀쌀했다. 외투조차 걸치지 않은 셔츠 차림으로 오솔길을 따라 걷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바람이 불면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상념을 떨치기에는 이런 날씨가 딱 좋다. 황태자가 앉아 있던 흰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아직도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두 사람을 떠올렸다.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꼰 채로 아인 퍼스의 이야기를 들을 황태자. 그의 옆자리에 앉아 조곤조곤 작은 새처럼 나는 모르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아인 퍼스.
일할 때만큼은 진지하게 변하는 황태자는 그 다부진 얼굴로 아인 퍼스를 빤히 바라볼 것이고, 아인 퍼스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수줍게 웃을 것이다.
참…… 싫다.
‘아인.’
아인 퍼스를 ‘아인’이라고 부르는 황태자가 싫다.
‘전하는 참 멋있는 분 같아요.’
언젠가 스쳐 지나가듯 그렇게 중얼거린 아인 퍼스도 싫다.
‘나흘이나 수도에 머무신다고요……?’
‘응, 그렇게 됐어.’
‘……아인도 함께요?’
‘아인은 내 비서관이니까 함께 갈 수밖에 없지. 혼자 둬서 미안해. 그래도 하퍼 씨랑 다른 사람들은 있으니까 너무 외로워하지는 말고.’
내가 없는 나흘 동안 매일 같이 붙어 있을 두 사람이 싫다.
‘루크? 표정이 왜 그래?’
‘…….’
‘어디 안 좋아? 아픈 거야? 응?’
‘아닙니다.’
그리고 제일 싫은 것은, 그런 두 사람을 질투하는 나 자신이었다.
참담한 기분에 몸을 젖히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틈새로 청명한 가을 하늘이 밝게 빛났다. 그 푸른빛조차도 부끄러워서 눈을 감았다.
질투라니. 나도 참 욕심이 많아졌구나.
과거에는 차마 질투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나는 리안의 대용품이었고, 황제는 처음부터 내 위치를 못 박아 두었으니까. 내게 주어진 것 이상을 바란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반역이었다.
그래서 리안을 질투하지 않았다. 부럽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어차피 태생부터 다르지 않은가. 애초에 감히 내 것일 수 없었던 총애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루크.’
‘사랑해.’
‘많이 사랑하고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황태자는 포기하는 데에 익숙했던 나를 뒤흔들었다.
“사랑…….”
전하라고 부르기만 해도 기뻐하는 사람. 먼저 다가가 껴안기만 해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해하는 남자. 내 웃음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말하며 스스로 아침 식사를 만들어 대접하는 샤를마뉴.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평범하게 만나서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게 사랑을 나누는 꿈을 꾸었다.
누군가의 대용품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나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내 일생의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그 꿈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졌는데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상처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었다. 그러면서 모든 힘을 다 써 버려 남한테 무언가를 나눠 줄 힘이 하나도 남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사랑하고 있다. 나를 사랑해 주는 그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
그러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욕심내면 안 될까? 나 많이 참았잖아. 많이 포기했잖아. 이때까지 너무 힘들었으니까 단 한 번만.
그 사람, 그냥 내가 다 가지면 안 될까?
* * *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어 산책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자, 황태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어디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묵묵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살짝 올렸다. 황태자가 흠칫 놀라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무어라 추궁하려는 듯 입을 떼었다.
“왜……!”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내가 그대로 다가가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황태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어지간히도 놀랐나 보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나는 입을 떼고 푸스스 웃었다.
“당신…….”
“걱정하셨어요?”
“당연하지! 아니, 그것보다 방금.”
갑자기 그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어라? 말릴 틈도 없이 나는 그의 품에 처박혔다. 그가 한쪽 팔로 단단하게 내 허리를 감싸더니, 다른 한 손은 내 이마에 올렸다.
“전하?”
“……역시 착각이 아니었어.”
“예?”
착각? 무슨 소리지?
“당신 지금 열 있어.”
“아…… 예?”
“열나고 있다고.”
“정말요?”
“그래.”
그가 혀를 차며 이마에 있던 손으로 내 뺨을 쓸었다.
어…… 그러고 보니 그의 손이 유달리 차게 느껴진다.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다.
날이 춥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열이 날 줄은 몰라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온 거야?”
“아…… 산책을 좀 했어요.”
“산책은 왜? 서재로 간다며.”
“좀 생각할 것이 있었거든요.”
내 대답에 그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생각?”
나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일전에 전하께서 제게 그러셨지요. 건방지게 행동해도 된다고요.”
“……그랬지.”
“그 말씀은 아직도 유효한가요?”
“물론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음?”
“그것을 제게 주세요.”
열이 오른다.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황태자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그가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뭔데?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줄게.”
바로 이 대답을 기다렸다. 자꾸 땅으로 쳐지려는 고개를 쳐들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열이 올라 울기 직전처럼 눈가가 뜨거워졌다. 울면 안 돼. 눈에 힘을 주며 마음속으로 준비한 말을 내뱉었다.
“전하를…… 원합니다.”
“……뭐?”
“전하를 제게 주세요.”
아무도 가질 수 없게, 아무도 그 눈에 당신을 품을 수 없도록 당신을 내게 줘. 내가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줘. 당신을 갖고 싶어.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당신의 진정한 연인이 되고 싶어.
“루크, 지금 그 말…….”
황태자가 다급히 물었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예.”
“…….”
“전하를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그건 최초의 욕심이자, 최초의 고백이었다. 나는 이때까지 항상 누군가를 원했으나, 그 사람이 나를 원한 적은 없었다.
나를 버린 부모가 그러하였고, 나를 데려다 키운 양부모가 그러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나를 거둔 황제가 그러하였다.
그래서 당신을 원한다는 말은 내게 있어 금기의 말이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아무리 배알 없는 나라도 상처를 받게 되니까.
그래서 내 첫 번째 고백은 비겁한 고백이다. 그가 나를 원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게…… 꿈은 아니겠지?”
“아니에요.”
“정말 당신이 내게 사랑한다고 한 거 맞지?”
“그렇습니다.”
황태자의 얼굴이 바람에 흩날리는 구름처럼 속절없이 풀어졌다. 그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껴안았다.
“미치겠다.”
“…….”
“어떻게 이런…… 하.”
감격에 벅찬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왠지 모르게 그가 울먹이는 것 같았다. 나는 양팔로 그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울지 마세요, 전하.”
황태자가 목 안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안 울어. 울 것 같기는 하지만.”
맞닿은 가슴으로 빠르게 박동하는 그의 심장이 느껴졌다.
나의 것도 그렇게 뛰고 있을까? 우리의 포옹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나를 껴안은 채로 황태자가 속삭였다.
“나를 원한다고 했지.”
“……예.”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내 전부를 줄게. 내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전부 당신 거야.”
당신의 전부를 준다고?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전부 내 거라고? 정말이야?
살짝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정말 내가 가져도 되는 거구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텅 비었던 양손에 그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가득 들어찼다. 그 무게감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열 오른 머리에 기어코 눈물이 치솟았다.
“루크, 괜찮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나를 보며 황태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러나 그 말만큼은 못 미더웠던 모양이다. 황태자가 손등으로 내 목덜미를 한 번 훑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열이 높은데. 어서 쉬는 게 좋겠어.”
그러면서 나를 품에서 떼어 놓으려 하기에 나는 다급히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황태자가 ‘음?’ 하고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싫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루크.”
“쉬고 싶지 않아요.”
“당신 지금 아프잖아.”
아프지 않다. 전혀 아프지 않아. 그저 열이 올랐을 뿐이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단단히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조금 더…… 조금 더 전하랑 같이 있고 싶어요.”
“…….”
“내 거잖아…….”
그러니까 내 말대로 따라야지. 조금은 고집스러운 말에 황태자가 곤란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이를 어르듯 내 등을 도닥이며 회유했다.
“계속 옆에 있을게. 응? 그러니까 일단 침대로 가서 쉬자.”
하지만 나는 그 말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단 하나.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열 기운을 빌리면 내뱉을 수 있는 본심.
“……전하.”
“응.”
“침대로 가면, 저를…… 안아주세요.”
그 말에 황태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
경악한 듯 ‘뭐?’ 한 글자만 내뱉은 그를 보며 나는 최대한 또렷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안아주세요.”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러면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기억. 황제에게 안긴 그 무수히 많은 밤. 절정에 도달할 때 들었던 리안의 이름.
뒤처리조차 하지 않아 아픈 몸을 이끌고 잠든 그와 내 몸을 닦았던 수치스러운 새벽. 그의 얼굴을 보면서 홀로 속삭였던 상념들.
그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제발…… 안아주세요, 전하.”
황태자는 말이 없었다. 그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맴돌았다.
나를 안을 수도, 그렇다고 밀쳐 낼 수도 없어서 배회하는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뺨에 문질렀다. 평소 뜨겁게만 느껴졌던 황태자의 손이 지금은 조금 차가웠다.
한참 후, 황태자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는데.”
“…….”
“내게 안기고 나면 당신은 더 아플 거야.”
“…….”
“내가 아무리 조심해서 안아도 결국 아프고 말 거라고. 그래도 괜찮겠어?”
그의 말에는 ‘안 괜찮겠지?’라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 그는 내가 한발 물러서기를 바랐다. 이성적으로는 그게 옳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괜찮아요.”
앞으로 닥칠 몸의 고통보다는 현재 나를 짓누르는 정신적 고통이 더욱 컸다. 한시라도 빨리 7년의 기억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완전히 몸을 기대며 덧붙였다.
“아프면…… 그건 그거대로 좋겠네요.”
“뭐?”
“저번에 약속하셨잖아요. 아플 때마다 옆에 있어주시기로.”
“…….”
“약속…… 지키셔야 합니다. 알겠죠?”
황태자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침대까지는 금방이었다.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그가 캐노피의 줄을 잡아당겨 내리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많이 아플지도 몰라. 그래도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요.”
“못 견디겠으면 말해. 알겠지?”
그럴 일 없을 거다. 팔을 뻗어 황태자의 목을 잡아당겼다. 한순간 균형을 잃은 그가 윽, 소리와 함께 내 위로 무너졌다.
그의 체향이 물씬 풍겼다. 그 향기를 들이마시며 입술을 찾았다. 허겁지겁 입을 맞추자 그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뜨거운 혀가 파도처럼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혀에 혀를 얽으며 그의 상체를 더듬었다. 그의 손은 내 옷자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혀와 혀. 옷을 파고드는 손과 손.
서로의 몸에 겹쳐진 체온과 체온.
파도처럼 내게 밀려오는 샤를마뉴.
……그 밤의 기억은 그게 끝이다.
* * *
나는 어둠 속에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까마득한 어둠 속.
그것은 그 자체로 적막이었고, 무존재였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상한 세계. 그 속에 나는 홀로 서 있었다.
어디로 나가야 할까.
어디로 나가야 다시 빛을 볼 수 있을까.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폐하…….”
한참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검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속살대는 것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 저기구나. 나는 천천히 그쪽을 향해 걸었다.
“폐하, 어수를…….”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가까이 보기 위해 조금 더 다가가자 일렁이던 것이 형체가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더러운 반역자의 피가 묻은 어수를 닦으소서.”
횃불이 듬성듬성 걸린 어두운 지하 감옥 안. 눈앞에 나타난 것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대야였다. 대야 안에는 깨끗한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보기만 해도 청량해지는 맑고 깨끗한 물.
그 수면에 한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어디서 튄 것인지 피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이었다.
“……반역자.”
남자는 지독히도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굴에 튄 피와 차가운 표정 때문에 더없이 잔혹해 보이는 남자가 ‘반역자’라고 읊조리자 주변에 시립해 있던 병졸들이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그래. 반역자였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남자의 흰 손에는 얼굴에 묻은 것보다 더 많은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양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
“이 손으로 더러운 반역자의 심장을 찔렀구나.”
남자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 한참을 웃어 댔다. 남자의 웃음에 시종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남자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남자가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었다.
“이 더러운 것을 씻어야겠지.”
“…….”
남자는 황금빛 대야 속으로 피가 흥건한 손을 집어넣었다. 깨끗한 물에 점점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남자는 천천히 양손을 문질렀다. 손가락을 타고 굳은 피가 점점 물에 씻겨 나갔다.
그리고 한참 후 손을 빼자 다른 시종이 다가와 부드러운 수건으로 남자의 손을 닦았다. 수건으로 말린 남자의 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깨끗했다. 손을 적셨던 피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지독하구나.”
“…….”
“더러운 피라 그런지 닦아도 가시질 않는군.”
“예?”
“물을 더 가져와라. 이놈의 피가 지워지질 않아.”
남자의 말에 시종들이 당황하여 서로 눈치를 보았다. 남자의 손은 깨끗했다. 피가 묻었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 시종들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자 남자가 다시 명령했다.
“물을 다시 떠 오래도.”
“……예, 폐하.”
남자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시종들은 종종걸음으로 물러나 다시 대야에 물을 채워 왔다. 남자가 다시 손을 닦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미 모두 닦아 내었기 때문에 남자가 아무리 손을 문질러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물을 갈아 와.”
“예?”
“천한 것의 피는 다 이런가? 지워지질 않는군.”
남자의 세 번째 명령에 시종 중 한 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말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의 어수는 깨끗하시옵니다.”
“…….”
“더 이상 씻을 필요는 없…….”
그때 피가 솟구쳤다. 시종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몸통과 분리된 머리가 바닥에 채 떨어지기도 전, 칼을 회수한 남자가 속삭였다.
“물을.”
시종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가 물을 떠 왔다. 이후로도 남자의 행동은 똑같았다. 몇 번이고 손을 닦은 남자는 계속해서 깨끗한 물을 요구했다.
아무리 닦아도 깨끗한 손에서는 핏방울 한 점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눈에는 자신의 깨끗한 손이 보이질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수십 번 손을 씻었고, 나중에는 ‘너희들이 떠 오는 물은 깨끗하지 않다’라고 주장하며 직접 내궁의 욕실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계속 손을 문질렀다.
닦고.
닦고.
또 닦고.
나중에는 손이 퉁퉁 부어 피부가 벗겨질 지경에 이르렀지만, 남자는 자신의 손을 계속 닦았다.
“도대체…….”
남자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면 지워진단 말이냐.”
어떻게 하면.
남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남자의 두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당신이 뭐라고 그런 표정을 지어?
나를 죽인 사람이 당신이잖아. 그런데 왜 당신이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느냐고.
내 심장을 찌른 사람이 당신인데.
어째서…….
나는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떨리는 두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두 팔을 뻗어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떨지 마.
모두 당신이 저지른 짓이잖아.
‘델루니안…….’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어차피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흑갈색 눈동자와 나의 눈이 마주친 순간.
“헉!”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밤새 식은땀을 흘렸는지 온몸이 축축한 상태로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방금 이건, 뭐지?
* * *
심장이 아프게 뛴다. 달리기를 막 끝낸 사람처럼 숨이 가빴다.
방금 이건 뭐였지?
헐떡이는 숨을 애써 고르며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피를 지울 수 있겠냐고 중얼거리던 황제. 얼마나 닦았는지 그의 손은 퉁퉁 불어 있었다.
남자답게 굵은 손이 물에 젖어 있는 꼴을 보는 내 마음은 조금 복잡했다.
‘당신이 뭐라고 손을 씻어?’ 그런 마음도 있었고, ‘어차피 일어난 일이니까 그만해, 당신 손만 아파.’ 그런 마음도 있었다.
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어쨌든 확실한 건 그의 손에 마음이 쓰였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이 더 아플 정도로 부어오른 손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자비하게 씻어 대는 황제를 그저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델루니안.’
이제 그만하자, 라고 말하려던 찰나,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그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흑갈색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쳤고, 그가 눈을 부릅뜨는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꿈에서 튕기고 말았다.
마치 누군가가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하고 밀쳐 내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손등에 닿아 오는 식은땀의 감촉이 생생했다.
그러고 보니 열이 식은 것 같다. 정상적인 체온으로 돌아온 이마와 그 촉감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래. 나는 그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 일은 내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이곳에서 눈을 뜬 이후로 몇 번 꿈을 꿨다. 아예 처음 꾸는 꿈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내가 후궁일 시절의 기억이었다. 황제가 나오고 리안이 나오는 기억들.
하지만 어젯밤에 꾼 꿈은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일 수가 없다. 내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그것이 내 기억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기억은 아니다. 그럼 이것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붉은 기운이 얼핏 보였던 황제의 눈과 피에 젖은 손, 이때까지 꿨던 꿈들이 머리에서 뒤엉켜 사고를 방해했다.
도대체 이 꿈은 뭘까.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일까? 그냥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결말을 꾸며 낸 것 아닐까? 근데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결말은 뭔데? 그건…….
복잡한 머리를 억지로 굴리며 생각이라는 것을 하려고 애쓸 때였다. 방문이 열리고 황태자가 들어왔다.
“어, 일어났어?”
목소리가 밝다. 그를 보자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복잡했던 머리가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몸은 어때?”
그 물음에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려다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어떻게 된 거지?
나는 황급히 몸을 살폈다. 홀랑 벗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과는 달리 곱게 잠옷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아픈 곳도 없다. 어라?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황태자가 설명했다.
“어제 아무 일도 없었어.”
“……예?”
“당신이 중간에 기절했거든.”
그러면서 그가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어. 못 버틸 줄 알았다고.”
“아…….”
“아프면 쉬어야지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응?”
결국 하지 못했구나.
열에 들뜬 머리로 아이처럼 보챘던 것이 떠올라 민망한 한편, 안기고 싶다는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기에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함께 찾아왔다.
“그래서 이젠 괜찮아?”
“음…… 예. 이제는 괜찮아요.”
“다행이네.”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트레이 위에 은색 그릇을 내려놨다. 저게 뭘까. 무언가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음식인 것 같다.
하퍼 씨가 만든 걸까? 멀뚱히 바라보자 그가 직접 뚜껑을 열었다.
“짜잔!”
그건 수프였다. 씹지 않고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잘게 찢은 닭고기가 올라간 묽은 수프. 병자가 먹기에 나쁘지 않은 음식이었다.
“맛있겠네요.”
사실 입맛은 없었지만 예의상 맛있겠다고 중얼거리자, 황태자가 가슴을 쭉 내밀며 자랑했다.
“내가 만든 거야.”
“예? 이걸요?”
“응. 어때? 제법 괜찮지?”
괜찮다마다. 맛은 아직 모르겠지만 겉보기에는 요리사 하퍼 씨가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와, 세상에 이루지 못하는 일은 없구나.
“보지만 말고 먹어 봐. 응? 아.”
황태자가 스푼으로 직접 수프를 떠서 내게 내밀었다. 받아먹으라는 걸까. 그건 조금 민망한데…….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민망하게 웃으며 사양했지만 황태자는 끈질겼다.
“내가 먹여 주고 싶어서 그래.”
“…….”
“어휴, 팔 떨어지겠다. 빨리 아, 해봐.”
엄살은…… 어쩔 수 없이 두 눈 꼭 감고 입을 벌렸다. 묽은 수프가 따뜻하게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냄새처럼 고소했다. 이 정도면 맛도 충분히 훌륭했다.
수프를 꼴깍 삼키고 눈을 뜨자 황태자가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귀여워라.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최고예요.”
“진짜?”
“예.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황태자가 조금 부끄러운 듯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열심히 노력했지.”
그러면서 양손을 슬그머니 뒤로 감췄다. ……뭐가 있구나.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가 흠칫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왜, 왜 그래?”
“손 보여 주세요.”
“…….”
“어서요.”
나름대로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 봤자 위엄 따위는 요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내 모습을 처음 본 황태자는 크게 당황한 건지 흔들리는 눈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펼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살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아.”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입을 다문 나를 보며 황태자가 멋쩍게 말했다.
“아니, 양파가 생각보다 엄청 미끄럽더라고.”
“…….”
“그리고 그…… 닭고기도 생각보다 뜨겁고.”
“…….”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라고? 그 손을 맞잡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멋쩍게 웃고 있는 황태자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왜 안 하던 요리를 한다고 설쳐서는 손을 다쳐. 고작 수프가 뭐라고. 괜히 입안이 썼다.
자상과 화상. 이게 그렇게 큰 상처가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과거 황궁에서 지내던 시절에는 이것보다 더한 상처를 많이 보았다.
후궁에게 입 한 번 잘못 놀린 죄로 아랫입술이 잘린 이도 있었고, 황후께 실수로 찻잔을 엎질러 손목을 잃고 쫓겨난 시종도 있었다.
무심결에 향채를 곁들인 음식을 올린 요리사는 양쪽 새끼손가락이 잘렸다.
그런 이들도 있는데 고작 손가락 좀 다쳤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정말 별거 아닌데…….”
“제가 싫습니다.”
“…….”
“전하의 몸은 제 거잖아요.”
어제 그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모든 것……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전부 나에게 주겠다고. 그러니까 그의 몸은 내 것이다. 더는 그의 마음대로 다칠 수 없다.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집착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새삼 깨닫는다. 욕심도 많고 집착도 많다니 참으로 못났다. 이때까지 용케도 억누르고 살았다 싶다. 내 집착 어린 말에 황태자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혹시 내 말이 싫은 걸까. 살짝 겁이 났지만 나는 독하게 마음먹었다. 그래도 안 돼. 이미 내게 주겠다고 말했으니까 절대 안 돌려줘.
그때 황태자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루크.”
“예.”
“다시 한번 말해줘. 내가 누구 거라고?”
“제 거요.”
“다시…….”
“제 겁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내 것이라고.
“맙소사.”
스푼을 내려놓은 그가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동그란 양쪽 귓불이 빨갰다.
“……이렇게 들으니까 너무 좋아.”
그가 연신 중얼거렸다.
“좋아서 미칠 것 같아.”
미칠 것 같다고? 그럼 미치지 뭐. 나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에 놀란 그가 손을 떼기도 전에 그를 껴안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고, 나는 서 있었기에 내 가슴팍에 그의 얼굴이 닿았다.
“전하는 이제 제 것이니 다치지 마세요. 아프지도 마시고요.”
“…….”
“저는 제 것에 대한 집착이 아주…… 아주 강한 편이거든요.”
워낙 없이 살아서요. 그렇게 덧붙이며 키득키득 웃자, 그가 끙, 소리를 내며 내 허리를 껴안았다.
“제발 아침부터 이러지 마. 참기 힘들다고.”
“안 참으셔도 돼요.”
“루크…….”
“마음대로 하세요. 제가 허락할게요.”
그가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아픈 사람이랑 하기엔 양심이…….”
“그 양심도 제 거예요.”
“…….”
“제가 괜찮다는데 왜 계속…….”
그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어라, 하는 사이 나는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그리고 내 위를 올라탄 사람은 황태자. 그가 한 손으로 제 몸을 지탱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이마를 만졌다.
“열 없지?”
“아, 네.”
“다른 아픈 곳은?”
“없…… 없어요.”
“기절하지 않을 자신 있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욕망을 억누르는 웃음이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조금 뜨거운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거미 모양의 문신을 찍을 때처럼 이마가 달아올랐다. 아니, 이마뿐만이 아니다.
그의 입술이 닿는 모든 곳이 뜨거웠다. 마치 그가 내 몸 곳곳에 소유의 낙인을 찍는 것 같았다. 그를 가진 것은 나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에서 뺨, 뺨에서 목덜미로 이어지는 키스를 하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한층 달아오른 연녹색 눈동자가 내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그 시선이 민망하고 부담스러웠지만 굳이 피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당하게 마주하며 스스로 다짐했다.
이제 정말로 그를 잊을 거라고.
무정하고 잔인한 황제는 잊고, 나를 사랑해 주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이 사람을 마음에 품을 거라고.
잠옷이 물결처럼 스르륵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민둥하게 드러난 내 가슴 위로 그가 고개를 숙였다. 흑갈색 머리칼이 가슴팍을 간질였다.
그것이 묘하게도 감각을 자극해 나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때 가슴에 뜨겁고 촉촉하며 뭉근한 어떤 것이 닿았다. 두말할 것 없이 그의 혀였다.
이건 좀 이상해…… 그가 강한 듯 부드럽게 유두를 핥고 빨았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악기를 연주하듯 내 허리와 골반을 매만졌다.
아직 쾌감이라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가슴에서 배로 내려가는 그의 입술에 점점 신경이 곤두섰다.
“하아…….”
배꼽 위로 그가 뜨거운 한숨을 토해 냈을 때,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고 말았다. 그 반응에 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씩 웃었다. ‘좋아?’ 그렇게 묻는 것 같다.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다시금 고개를 파묻으며 치골 위를 혀로 농밀하게 핥았다.
“읏…….”
어느새 잠옷 바지는 어디로 가고 없었다. 그가 손도 빠르게 벗겨 낸 것 같았다. 치골에 머무르던 그의 머리가 밑으로 향했다.
내 성기는 이미 반쯤 일어난 상태였다. 발기했다는 것이 민망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어떤 식으로 자극을 줄지 알 수 없어 가슴이 흥분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이윽고 한 손으로 내 성기를 움켜쥔 그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성기의 밑 부분과 고환을 핥는 것처럼 빨았다.
가슴을 애무받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쾌감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절로 앓는 소리가 흘렀다.
“흐으…… 읏, 하아…….”
그의 손은 점점 빨라졌고, 그럴수록 신음은 울음소리처럼 뭉개졌다. 양손으로 시트를 움켜쥐며 밀려드는 쾌감을 참아 냈다. 시트에 휘감긴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안 돼. 이러다가는 금방 싸 버리고 말 거다. 아직 무엇도 제대로 시작한 게 없는데 먼저 쌀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도리질을 치며 사정감을 참는 순간이었다.
“헉……!”
그때까지 내 고환을 핥고 있던 그의 입술이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갔다. 뜨끈한 혀가 곧 있으면 그의 것을 받아들일 구멍 위를 진득하게 핥았다. 일순간 사정감이 사라졌다. 쾌감에 젖어 있던 머리가 당혹으로 물들었다.
황제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받아들이는 구멍을 혀로 애무한 적 없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 감히 천한 평민 사내가 황제의 혀로 애무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는 향유를 이용해 내 구멍을 넓혔지만, 그건 애무라기보다는 그저 박고 쑤시기 위한 절차에 가까웠으므로 실제로 애무를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을 직접 핥다니, 이건 정말 충격이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전하, 거긴, 거긴 좀…….”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조금 더 깊게 혀로 구멍을 찔렀을 뿐이다. 힉, 하는 이상한 소리가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도망치려는 듯 엉덩이를 들었다. 그러자 그가 양팔로 강하게 내 허리를 감싸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졸지에 그가 애무하기 편하도록 엉덩이를 들어준 꼴이 되었다.
어, 어떡해. 그의 집요한 혀놀림에 엉덩이가 파들파들 떨렸다.
한참 후 그가 내 엉덩이 사이에서 얼굴을 떼었다. 드디어 끝인가? 이제 끝난 건가?
나도 모르게 무릎을 세우고 있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아…… 하…… 괜히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 다리 사이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재빨리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편한 셔츠를 위로 훌러덩 벗고, 꼭 채우고 있던 바지를 풀어 벗어 던지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검정 속옷 위로 그의 것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위로 우뚝하게 선 남성. 그가 속옷마저 끌어 내리자 바짝 곧추선 성기가 퉁기듯 위로 튀어 올랐다.
……그 모든 것이 감탄이 나올 만큼 완벽했다. 나는 도저히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가 엉덩이를 핥느라 잠시 풀이 죽었던 성기가 힘을 받았다.
그가 풀어 놓았던 엉덩이 사이의 구멍이 저도 모르게 움찔대었다. 그 모습을 보며 황태자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 초조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우리 둘 다 알았다. 그가 재빨리 침대 옆 테이블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꺼내는 것은.
“그게 뭔가요?”
알 수 없는 은색의 포장지. 황태자가 성급한 손길로 그것을 찢으며 대답했다.
“콘돔.”
“예?”
“안에다가 그대로 하면 당신 배 아프니까. 이걸 끼우고 하는 거야.”
“끼워요?”
“응, 이렇게.”
그가 포장지 안에서 나온 투명한 무언가를 벌려 제 성기 위에 씌웠다.
어…… 조금 이상하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만져 보지는 않았으나 분명 촉감이 이상할 것 같다. 저게 내 안으로 들어온다니.
“미안한데 젤이 없어.”
“네?”
“그래서 조금 아플 수도 있어. 입구는 풀어 놨지만 안은 못 풀었거든. 최대한 천천히 넣기는 할 건데, 아프면 말해. 알았지?”
젤이라는 것이 향유와 비슷한 것인가?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묵직한 체중에 침대가 약간 아래로 쏠렸다.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그가 한 손으로는 내 허벅지를 잡고, 한 손으로는 제 성기를 붙잡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떨렸다. 이제 들어오는구나. 그의 성기가 입구에 닿았다. 나는 최대한 힘을 뺐다. 그러나.
“으…… 아아…….”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황태자의 성기는 너무…… 너무 컸다. 제대로 풀리지 못한 안쪽이 고통스럽게 입을 벌려 침입자를 맞이했다. 몸이 덜덜 떨렸다. 나도 모르게 팔을 휘저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참지 말고 숨 쉬어.”
“흐…… 으…….”
숨을 쉬기가 어렵다. 절로 눈물이 솟았다. 시야를 뿌옇게 흐리는 눈물을 닦아 내려 빠르게 눈을 깜빡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너무 아프다. 왜 이렇게 아픈 거야. 황제랑 할 때는 이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는데…….
“괜찮아? 응?”
“아픕, 아픕니다. 아파요, 너무 아파.”
“미안. 미안해. 곧 끝나. 다 들어갔어. 응?”
거짓말쟁이. 다 들어갔다고 치기에는 아직도 한 치나 더 남아 있었다. 입술을 앙 깨물자 그가 그 와중에도 입술은 깨물지 말라며 제 손을 대신 물려 주었다.
싫어. 안 물어. 그는 계속 제 성기를 밀어 넣고 있었다. 이 거짓말쟁이. 언제까지 들어오는 거야.
마침내 그가 완전히 내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나도 그도 땀에 젖은 상태였다. 엉덩이 밑으로 딱 달라붙은 그의 고환이 느껴졌다.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피로가 동시에 밀려들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반쯤 감긴 내 눈을 보며 황태자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졸려?”
“아니, 아니요…….”
“자면 안 돼. 이제부터 시작인데.”
“안 잡니다.”
나도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쯤은 안다. 눈이 감기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나 잠들 수는 없는 일. 억지로 눈을 부릅뜨자 그가 서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고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비좁은 내벽을 넓히려는 몸짓에 가까웠다.
그래, 이 정도면 참을 만하다. 조금 느리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몸이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그의 허릿짓에 몸을 맡겼다.
아주 먼 옛날에 배운 방중술이 나도 모르게 나타났다. 박을 때 조이고, 나갈 때 붙잡는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7년 동안 황제를 받아들이며 몸에 익힌 기술이었다. 나를 안는 황제가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그것.
그게 황태자에게는 너무 과했던 것일까.
내 얼굴을 바라보는 황태자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가 갑자기 내 양발을 들어 제 어깨 위에 걸쳤다. 앗, 하고 자세를 갖추기도 전에 그가 쾅! 성기로 세차게 내 안을 찍었다.
“아!”
새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비명에 눈을 홉뜨자, 그가 이를 악물며 양팔로 내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자세의 변화에 결합이 깊어졌다.
아, 이건 너무 깊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그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내 안을 찧기 시작했다.
“아, 앗, 아!”
방중술이고 뭐고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격한 움직임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허리가 찡하고 울렸다. 너무 강하다고! 나는 울면서 토막 난 단어를 내뱉었다.
“전, 하, 너무, 빨! 아!”
그는 내 말 따위는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엉덩이를 쳐올리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고환이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퍽퍽,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이라 차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양팔을 교차해 얼굴을 가렸다. 시트를 쥐고 있던 손이 얼굴을 가리자 몸은 더욱 격하게 흔들렸다.
그때 그가 몸을 내 쪽으로 숙이며 등을 껴안았다. 양다리가 그의 어깨에 올라가 있던 탓에 허리가 완전히 접혔다. 성기로 이어진 엉덩이가 허공에 붕 떠 버렸다.
접힌 허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결합이 깊어진 데에서 온 충격이 더욱 컸다.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어? 헐떡이며 그를 붙잡았다. 그가 갈구하듯 내 얼굴 위로 입술을 퍼부었다. 나는 그 입술을 피하며 간신히 내뱉었다.
“아파요, 허리가, 허리가 너무 아픕니다.”
그 말에 황태자의 얼굴에 잠시나마 이성이랄 것이 돌아왔다. 그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내 다리를 내려놓았다. 잠시나마 접혀 있던 허리가 고통에서 해방되기 무섭게 그가 내 몸을 뒤집었다.
“이렇게 하면…….”
그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낮았다.
“안 아플 거야. 그렇지?”
엎드린 내 엉덩이 뒤로 그가 다시금 제 성기를 갖다 대었다. 조금 전까지 제집인 양 들락날락한 탓에 구멍은 무리 없이 그의 성기를 빨아들였다.
나는 개처럼 엎드린 채로 엉덩이만 쳐들고 그의 몸짓을 받아들였다.
아까에 비하면 허리는 비교적 괜찮았지만, 그것보다는 자세가 주는 수치스러움이 모순적이게도 나를 달구었다.
그가 양손으로 내 허리를 붙잡은 채 마음껏 허리를 놀렸다. 엉덩이에서 퍽, 아닌 팡, 소리가 났다.
“흐윽…… 흑, 읏, 으흣……”
“후우, 흣……”
이 관계는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그의 욕망은 지칠 줄을 몰랐다. 나는 엎드린 채로 손을 뻗어 내 성기를 만졌다.
반쯤 선 성기는 그의 것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쾌감보다 고통이 더 컸던 탓이리라. 이렇게 나만 못 느낄 수는 없다.
내가 느껴야 그도 더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한쪽 손으로 자위하고 있을 때였다.
“안 돼.”
갑자기 그가 ‘안 돼’라고 중얼거리며 내 손을 낚아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전하?”
의아하게 고개를 돌리자 그가 빠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해줄게.”
그러더니 다시금 몸을 뒤집는다. 그 와중에도 결합은 풀리지 않아 내벽 안에서 요동치는 그의 것이 선연히 느껴졌다.
내 한쪽 다리를 제 오른쪽 어깨 위에 올리며 그가 다른 한 손으로 내 성기를 붙잡았다.
“흑……!”
“같이 가자. 응?”
그렇게 속삭이며 그가 조금 더 빠르게 허리를 놀렸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내 것을 쥐고 흔들었다.
아, 아, 아……!
그 와중의 그의 것이 내가 느끼는 지점을 스치고 지나가 나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성기가 발딱 섰다. 정사의 끝에서야 간신히 내가 느끼는 지점을 찾아낸 그가 기쁘게 웃으며 허리를 박았다.
그 이후로는 엉망진창이다. 앞과 뒤를 동시에 공격당하며 내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곤 고작 시트를 쥐어뜯으며 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가 안쪽 지점을 찌를 때마다 몸이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렸고, 엇박자로 내 성기를 흔들면 나는 그야말로 혼미한 상태가 되어 울부짖었다.
그는 쾌감에 몸을 떠는 내가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고, 허리를 굽혀 입을 맞추며 내 신음을 모두 삼켰다.
그의 허릿짓은 갈수록 빨라졌다. 그가 곧 절정에 도달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덜덜 떨리는 팔로 그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내 안에 허리를 콱 박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잘게 경련하는 그의 성기의 감촉으로 말미암아 그가 사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사정하는 것과 동시에 나 역시도 절정을 토했다. 내 성기에서 뿜어져 나온 흰 정액이 그의 배와 내 가슴으로 튀었다.
그가 가볍게 추삽질을 하며 내 가슴 위로 고개를 숙여 정액을 핥았다. 사정의 여운에 젖어 있던 나는 멍하니 그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정액을 모두 핥은 그가 고개를 들어 내 입술을 찾았다. 혀를 섞자 비릿한 정액 맛이 났다.
한참 후, 내 몸에서 조심스럽게 성기를 빼낸 그가 콘돔을 빼 옆으로 던졌다. 매끈한 재질의 껍데기가 벗겨진 그의 성기는 어느새 다시금 힘을 얻어 하늘로 곤두선 채였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숨을 고르고 있던 그가 ‘응?’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늘로 솟은 것을 입에 담았다. 그가 윽, 하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이러면…… 좀 곤란한데.”
그의 것이 입안에서 다시금 부피를 키웠다. 그것을 정성스럽게 핥고 빨아들이며 나는 예쁘게 웃었다. 곤란하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전하.
몸은 욱신욱신 아팠다. 엉덩이 사이의 구멍도 얼얼했다.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사실은 쉬고 싶었다. 지금 눕는다면 딱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루크…….’
마지막에 사정할 때, 나의 이름을 부른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그 목소리가 눈물겹도록 좋아서, 나는 다시금 그와 몸을 섞고 싶었다. 그로 인하여 몸이 부서진다고 해도 좋았다.
내 이름을 불러 준 최초의 사람.
“한 번만…… 더 해요.”
가능하다면 오랫동안 당신과 체온을 나누고 싶다. 열기를 품은 내 목소리에 황태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실은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 * *
우리는 그날 하루 종일 몸을 섞었다. 처음 불을 붙인 건 나였으나, 끝의 끝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은 건 그였다.
그는 정말 지칠 줄 모르는 정욕의 소유자였고, 한번 불이 붙으면 어지간해서는 꺼지지 않는 기름 같았다.
“……괜찮아?”
그리고 그 결과, 나는 다시금 병자의 신세로 침대에 눕게 되었다.
“……아파요.”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도저히 원래의 목소리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망가진 목소리에 그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내가…… 내가 절제를 못 했어.”
“…….”
“당신이 환자라는 걸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설령 환자가 아니었더라도 이 정도로 해댔으면 환자가 되었을 거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정사는 저녁달이 기울 때까지 이어졌고, 우리는 아침과 점심과 저녁 식사를 모두 거른 채 서로의 몸을 탐했다. 아프지 않으면 이상한 거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황태자는 홀로 멀쩡하다. 원래 받아들이는 사람이 더 힘들긴 하지만 하루 종일 몸을 쓴 건 그도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저렇게 말짱할 수 있지?
“전하는…… 괜찮으세요?”
약간의 질투심을 담아 물었으나 황태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나야 뭐……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해서 이쯤은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그렇구나. 힘들어 죽는 건 나뿐이란 말이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자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부축했다.
“이렇게 아파서 어쩌지?”
“예?”
“가지 말까?”
가지 말까라니? 어딜 가시는데요?
하고 물으려던 순간 어떠한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일이네요.”
황태자가 수도로 돌아가는 날이 바로 내일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그와 뒹구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는 다음 날 새벽 황궁으로 출발한 후 그곳에서 나흘을 머물다가 닷새째인 금요일에나 저택으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수행비서관인 아인 퍼스도 마찬가지. 나흘 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을 두 사람을 생각하자 기분은 다시금 바닥을 쳤다.
“내가 안 갔으면 좋겠어?”
나도 모르게 인상이라도 찌푸렸던 걸까. 황태자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당연히 가셔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빈 방문이면 당연히 가야지. 그가 가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다. 막아서도 안 되는 일이고. 단호한 대답에 그가 ‘하지만……’ 하면서 말을 이었다.
“약속했잖아.”
“예?”
“당신 아플 때마다 내가 곁에 있기로.”
그건 그랬지. 그가 한숨처럼 덧붙였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안 해.”
그 목소리에서 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여 나는 황급히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꼭 가셔야 하잖아요. 전하께서 안 계시면 곤란한 상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저는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황태자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내가 가기 싫어서 그래…….”
“…….”
“이제 간신히 당신한테 예쁨받기 시작했는데, 나흘이나 떨어지기 싫단 말이야.”
그러면서 그가 궁시렁궁시렁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뭐 이런 시기에 오고 난리야, 올 거면 그냥 하루만 있다 가지 무슨 사흘씩이나 있어, 여기가 자기네 집 마당이야 뭐야, 투덜투덜 왱알왱알…….
그 모습을 보자 절로 웃음이 터졌다. 하여튼 귀엽다. 다 큰 사내에게 할 법한 말은 아니지만 정말로 귀여운 사람이다, 나의 황태자는.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이쯤 해서 나는 그를 달랠 필요성을 느꼈다. 침대에 반쯤 누운 채로 나는 조심스럽게 황태자를 불렀다.
“전하.”
“……응?”
“사실은요, 저도 전하와 나흘이나 떨어지는 게 참 싫습니다.”
“정말?”
“예. 그런데 제가 왜 싫어하는지 아세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내 입으로 말하려니 어쩐지 민망해진다. 나는 민망한 웃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제가 질투를 했거든요.”
“……질투? 누구를?”
“아인 퍼스를요.”
“음?”
그의 얼굴이 멍해졌다.
“저는 함께 가지 못하는데 그 사람은 전하와 함께 있을 수 있잖아요. 그게 참 싫습니다. 불안하기도 하고요.”
“왜 불안한데?”
글쎄다. 왜 불안했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처음 본 순간부터 아인 퍼스의 존재를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의 찬란한 금발과 호수를 품은 듯 푸른 눈을 마주할 때면 알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인 퍼스는 분명 좋은 사람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그가 꺼려졌다. 그의 친절함과 다정함이 계속해서 누군가를 상기시켰다.
리안. 다정했던 나의 호위 기사이자 황제가 지극히도 사랑했던 그 남자를.
그래서 불안했다. 마치.
“……전하를 뺏길 것 같아서요.”
“…….”
황태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금발과 푸른 눈이 전하를 앗아 갈까…… 그게 너무 두렵습니다.”
“루크.”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팍이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기뻐서 흥분한 것 같다.
이러다가 ‘안 갈게!’라는 말이 나올까 두렵다. 내게 다가오는 그를 만류하며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지 마시라고 붙잡을 생각은 없어요. 그래선 안 되고요.”
“…….”
“아인 퍼스도…… 전하께서 그가 꼭 필요하시다면 데려가시는 게 옳겠지요.”
황태자가 격렬히 고개를 저었다.
“안 필요해! 전혀 안 필요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에 나는 그저 웃었다.
“거짓말은 좋은 습관이 아니랍니다, 전하.”
“…….”
“아무튼…… 그와 함께 가셔도 좋아요. 그것까지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그럼? 그럼 당신은 뭘 원하는데?”
“제가 원하는 건 단 하나입니다.”
손을 뻗어 황태자의 손을 맞잡았다. 그가 흠칫 놀라며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엄지로 그의 손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자주 전화해 주세요.”
“……어?”
“그러면 저는 어디에서나 전하와 함께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수화기를 타고 넘어온 목소리 하나로 세계가 물들어 가던 기적을 나는 목격한 적 있다.
그의 전화를 받으며 걸은 모든 길이 그와 함께 걷는 길이었고, 그때 맡은 모든 향기는 그의 향기였으며, 그때 본 꽃은 모두 그를 향한 사랑의 부케였다. 전화를 받는 동안 그는 나를 둘러싼 모든 곳에 있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것으로 나는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황태자가 기쁨에 벅찬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그 얼굴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워 나는 오른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매만졌다.
“절대 한눈팔지 마시고요. 그 눈도 제 거니까.”
한눈팔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예요.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무섭지요? 제가 이렇게 집착이 많은 남자랍니다. 황태자가 내 손을 잡아채서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한눈팔 일 전혀 없어. 애초부터 내 눈에는 당신밖에 보이질 않았다고.”
“하하하…….”
“정말이야.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러니까 책임져야 해, 알았지?”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키득키득 웃고 있으려니 그가 몸을 숙여 내 입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매일, 아니 매시간 전화할게.”
“…….”
“그러니까 당신도 한눈팔지 말고 기다려. 알았지?”
그건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다.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며 나는 예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