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신록의 계절 봄. 바람이 불었다.
그때 나는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루크 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계속 하늘을 보았을 것이다.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자 화사한 금발을 하나로 묶고 정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리안이 보였다.
“무엇을 그리 보고 계십니까?”
“아…….”
나는 멍청히 대답했다.
“하늘을 좀 봤어요.”
“하늘이요? 날씨라도 예측하신 겁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고, 어디서 봤던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이맘때의 하늘은 항상 그렇지요. 벌써 봄이구나, 작년에 봤던 하늘이 또 돌아왔구나 싶으니까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닌데. 정말로 본 것 같다고.
하지만 반박할 마음은 없어 그렇다고 대답하자, 리안이 ‘그건 그렇고’라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돌아가시지요.”
“폐하께서요?”
“예. 루크 님을 위해 멧돼지를 한 마리 잡아 오셨습니다.”
멧돼지? 하고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아, 맞아. 사냥하러 왔지. 정복 군주인 황제는 사냥을 즐겼고, 시간이 날 때면 종종 사냥을 하러 황궁을 나섰다.
바보 같으니. 자기가 있는 장소도 모른단 말인가.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참, 기대되네요.”
사실 나는 멧돼지 따위 관심 없었다. 아니, 사냥이라는 것 자체를 별로 안 좋아했다. 화살에 맞아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 가는 동물들을 볼 때면 마치 나처럼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황제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나보고 사내답지 못하다고 비웃었던 게 황제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나를 동행하는 건, 리안 때문이었다. 사냥감을 잡는 자신의 용맹한 모습을 리안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멧돼지도 리안을 위한 거겠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기대된다고 하는 까닭은 리안을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리안이 조금 흐리게 웃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부럽고, 질투가 나고, 그러면서도 질투하는 자신을 치졸하게 여기고 있겠지.
조금 더 긁을까, 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뭐든지 적정선이 중요한 법이다. 너무 긁어도 역효과가 나는 법.
피를 보아 흥분했을 황제를 보러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리안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루크 님, 그런데 망토는…….”
“예?”
망토?
“아까 분명 망토를 두르고 계시질 않았습니까.”
“아…… 그랬나요?”
그랬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리안이 ‘아직 날이 찹니다’ 하며 제 망토를 벗어 내게 둘러 주었다.
아, 아니. 이건 좀 그런데. 황제가 보면 화낼걸?
황제는 내가 리안을 자극하는 것은 묵인했지만, 리안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가도록 행동하면 몹시 분노했다.
그 ‘해가 가도록’이라는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이라 처음에는 그 기준선을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내게 망토를 벗어준 리안이 감기라도 걸리면 그게 바로 ‘해가 되는’ 행동이다.
리안이 잔기침이라도 하면 황제는 내게 쫓아와 분노에 찬 타박을 늘어놓았고, 나는 납작 엎드려 리안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눈치를 봤다.
“아, 괜찮습니다. 저는 하나도 안 추워요.”
“감기라도 걸리실까 저어됩니다.”
“괜찮아요.”
리안의 망토를 벗어 그의 품에 안겨 줄 때였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뭐 하느라 돌아오질 않는 거지?”
황제였다. 그 목소리를 인식한 순간 리안과 내가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오라고 부른 게 옛날인데 오지 않아 심기가 불편한 걸까. 황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황제가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옷차림이 그게 뭐야.”
누굴 말하는 걸까. 나? 리안? 우리 둘 다 망토를 걸치고 있지 않았으니 누굴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흘끗 리안을 돌아보니, 어디서 흙탕물이 튀었는지 바짓단이 얼룩덜룩했다. 그에 비해 나는 멀쩡하니 아무래도 리안을 향한 말인 것 같다.
리안도 본인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느라…….”
“너 말고.”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날이 추운데 왜 망토도 걸치질 않았냐는 말이다.”
나?
나는 무엄함도 잊고 감히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흑갈색 눈동자는 또렷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정말 나한테 하는 소리야?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아, 그것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황제의 잘생긴 얼굴이 찌푸려졌다. 쯧, 하고 혀를 찬 황제가 타박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칠칠치 못하기는.”
“……송구합니다.”
“가만히 막사 안에 있으랬더니 나돌아다니다 망토나 잃어버리고. 잘하는 짓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제가 왜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거든요.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고 하자, 황제가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그리고 무언가 커다란 것이 머리를 덮었다.
“날이 춥다.”
“…….”
“성가시게 하지 마.”
머리를 덮은 망토에서 바람 냄새와 함께 희미한 그의 체향이 느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망토를 슬쩍 내리고 앞을 바라보자, 황제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돌아간다!”
“예!”
그가 멀어졌다. 나는 망토 사이로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한테 망토 씌워 준 거 맞아? 리안이 아니라 나한테? 착각한 거 아니고?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돌려 리안을 바라보자, 묘한 표정의 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리안이 표정을 지워 내고 억지로 웃었다.
“폐하께서 많이 귀애하시나 봅니다.”
“…….”
“……다행입니다.”
혼잣말인 듯 속삭이는 그 말. 그 말에 나는 또 깨달았다.
아, 그렇군. ……리안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모습을 보고 있을 리안을 자극하기 위해서.
마음이 싸해지고, 손끝이 뻣뻣하게 굳어 갔다.
도대체 무슨 착각을 한 거야. 리안이 없는 자리라면 모를까, 리안이 있는데 내게 그럴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잖아.
“이제 따라갈까요?”
리안이 물었고, 나는 망토를 추스르며 대답했다.
“……예, 그래요.”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바뀐다.
겨울. 그리고 꽃잎처럼 떨어지는 눈송이.
“라파엘!”
여자가 나를 부른다.
“추우니까 안으로 들어와!”
싫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여자가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라며 혀를 찬다. 감기? 그런 거 난 몰라요.
“눈사람!”
나는 그냥, 눈사람이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내 말에 여자가 눈사람? 하면서 고개를 기울인다.
“눈사람 만들고 싶어?”
“네!”
고개를 붕붕 끄덕이자, 여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에휴, 하고 웃었다.
“여보!”
“음?”
“라파엘이 눈사람이 만들고 싶다네?”
여자의 말에 신문을 읽고 있던 남자가 ‘그래?’라며 몸을 일으켰다.
“옷 단단히 입혀요!”
“그래, 알았어.”
남자가 다가와 유리창에 딱 달라붙어 있던 나를 데리고 들어가 외투를 입혔다. 내 심장은 콩닥콩닥 뛰었다. 눈사람을 곧 만들 수 있겠구나!
마당으로 나가자 이미 제법 쌓인 눈이 뽀득뽀득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재미나 방방 뛰며 눈을 밟고 있으려니 남자가 ‘눈사람이 만들고 싶댔지?’라며 눈 뭉치를 만들었다.
“이걸 이렇게 굴리면 눈덩이가 커져.”
“진짜요?”
“응. 해볼래?”
“해볼래!”
눈 뭉치를 받아 들고 바닥에서 굴리자 진짜로 눈 뭉치가 커졌다.
우와, 신기해! 박수를 치며 좋아하자 남자가 씩 웃으며 눈 뭉치를 더욱 빠르게 굴렸다. 순식간에 눈덩이가 내 몸집만 하게 커졌다.
눈덩이 두 개를 겹쳐 올리고 나뭇가지 몇 개를 꺾어 꽂으니 사람 형상이 되었다.
남자는 이걸로는 부족하다며 내게 물었다.
“어떻게 장식할까?”
“응?”
“산타클로스는 너무 흔하지?”
흠. 뭐가 좋을까.
한참 고민하던 남자가 ‘아!’ 하면서 마당 뒤편으로 달려갔다. 그러더니 손에 들고 온 것은 반짝이는 황금색 털실. 지난 밤 파티를 할 때 보았던 것이다.
남자가 말했다.
“이걸로 우리 황제님 만들까?”
“황제님?”
“응! 황제 눈사람 만들자!”
황제.
나는 그 단어가 몹시 좋았다.
“황제 좋아!”
남자가 털실을 눈사람의 머리에 둘렀다. 황금색 털실이 마치 황제의 관처럼 머리를 장식했다.
“예뻐!”
“예뻐?”
“응! 예뻐요! 황제 예뻐!”
너무 예뻐 눈사람을 껴안자 남자가 ‘에이, 그럼 안 돼’ 하면서 몸을 떼어 냈다.
“라파엘, 황제 폐하께는 예쁘다고 하면 안 돼.”
“안 돼요? 왜요?”
“황제 폐하는 멋있다고 하는 거야.”
멋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멋있어!”
“응?”
“황제 안 멋있어! 예뻐!”
반짝반짝 빛나는 나의 황제 눈사람은 멋있지 않아. 예쁘다고.
“고집은 또 세서.”
남자는 허허, 하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황제 눈사람을 다시 껴안았다. 볼이 얼얼했다.
남자가 감기 걸린다며 소리쳤지만, 그래도 나는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추워도 좋아. 나의 예쁜 황제 눈사람인걸.
……예쁜.
“황제…….”
* * *
눈 부신 햇살이 이불처럼 몸을 덮었다. 그 따스한 감촉에 살며시 눈을 뜨자 세상은 아침이었다.
방금 전까지 꿈속에서 헤매던 몽롱한 정신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니 며칠 동안 쓰던 방과는 조금 다른, 낯선 방의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더라.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침대 가장자리에 구겨져서 잠들어 있는 형체가 보였다.
그러니까 저건.
“……전하?”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지만 황태자의 구부정한 등은 미동도 없다. 깊게 잠든 것 같다. 아니, 왜 굳이 저런 불편한 자세로 주무시는 거야. 그냥 편하게 눕지…… 까지 생각하던 나는 침대 위에 펼쳐진 기이한 풍경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침대 위에는 어젯밤 뒤늦게 방으로 돌아온 황태자가 오랫동안 번뇌한 흔적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
울타리처럼 침대 정중앙에 펼쳐진 두 개의 큰 베개와 베개 사이를 말뚝처럼 채운 쿠션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불도 없이 새벽의 추위를 홀로 맞선 황태자의 굽은 등까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의 새벽은 겨울처럼 시리다. 그런 새벽을 이불도 없이 버텼으니 얼마나 추웠을까.
팔짱을 낀 채 양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넣은 황태자를 보니 당혹스러웠다. 내 몸을 덮은 이불이 지나치게 크고 따뜻해서 더욱 그랬다.
제 몫의 이불까지 내게 덮어주다니.
“전하.”
“……으.”
잠에서 깨지 않을 정도로 나직하게 불렀는데, 황태자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깊게 잠든 게 아니라 선잠이었나 보다. 연녹색 눈동자가 흐린 것을 보니 정신은 못 차린 것 같다.
나는 울타리 역할을 하던 베개를 빼내어 그의 머리맡에 대어주며 속삭였다.
“편하게 주무세요.”
“……엘.”
괜히 일어날 것처럼 눈을 깜빡이는 그를 위해 캐노피의 줄을 잡아당겨 그늘을 드리웠다.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아침이야?”
“예. 근데 더 주무셔도 됩니다.”
“…….”
그 말에 황태자가 길게 숨을 내쉬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기처럼 꼭 쥐었던 손을 내게 뻗으며 그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졸려.”
그의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
“내가 자도……”
“…….”
“옆에.”
‘옆에 있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황태자는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다시 잠의 바다에 빠졌다.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다.
자유로운 한 손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그의 몸 위로 덮어주며 나는 피식 웃었다.
황태자에게 잡힌 손목이 따뜻했다. 구태여 손을 빼지 않은 채로 다시 몸을 뉘며 마주한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굳게 감긴 두 눈에 맺힌 속눈썹과 미간 사이로 쭉 뻗은 콧대,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 턱 끝에 거뭇거뭇하게 올라온 수염…… 참 다부지게 잘생겼다. 어쩜 저렇게 똑같이 생겼을까.
어지간히 피곤한지 잠결에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그 모습마저도 황제와 똑같았다.
‘잘 때도 웃지 않는 당신은 도대체 무슨 꿈을 꿀까.’
그런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매일 밤 꿈을 꿔. 항상 똑같은 꿈이야.’
잠든 그를 보며 마음으로나마 말을 걸었던, 그런 때가 있었다.
‘별로 시답지 않은 내용이라 당신에게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그래도 만약 당신이 궁금하다면 알려 줄게.’
‘사실 말이야, 내 꿈은…….’
……당신과 평범하게 만나서,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게 사랑을 나누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대용품으로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황제로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서 행복하고 따뜻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때를 회상하며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전하가 옳았어요.”
그래…… 황태자의 말이 옳았다. 그건 정이 아니었으며, 우정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건 사랑이었다. 나는 황제를 사랑했다.
어째서 그를 사랑했을까? 글쎄. 처음에는 동경이었던 것 같다. 만인지상의 황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 권력은 모든 남성이 원하는 것이다.
아무리 비천하게 살았다지만 나 역시 남성이었다. 누구보다 많은 권력을 가진 그가 멋있어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의 보호자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보호자를 가져 본 적 없는 내게 처음으로 생긴 보호자가 아닌가.
나를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 실제로는 소유주와 피소유자의 관계였지만 아무튼 그러한 종류의 관계가 나에게도 생겼다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그러다가 그의 이면을 알게 되고, 동경은 연민으로, 연민은 사랑으로 발전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딱 그만큼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를 껴안아주고 싶었다. 보듬어주고 싶었다.
반평생 전장을 떠돌며 수많은 사람을 베어 넘긴 황제는 그 자신도 온전치 못한 사람이었다.
불쌍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면 상처 입은 짐승처럼 예민하게 가시를 세우는 그가 안타까웠다. 괜찮다고 속삭여 주고 싶었다.
사랑이라고 인정하면 내가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아서 그저 정이 들었을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이제는 부정할 수 없다.
잠든 황태자의 얼굴을 보면서까지 그가 떠오르는데 어떻게 사랑이 아니었다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때가 있었다 해도 이제는 다 끝난 일이다. 이미 흘러 버린 시간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돌이킬 수 없고, 그럴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돌이키고 싶지 않다.
이미 ‘행복’이라는 것의 단맛을 조금이나마 맛본 나는 다시는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정말로 많이 힘들었으니까.
그러다가 문득 지난밤의 꿈이 떠올랐다. 내 비참했던 과거와 함께 불쑥 튀어나온 라파엘의의 과거.
‘라파엘!’
나를 라파엘이라고 부른 여자…… 그녀는 ‘내 어머니’였다.
참 이상한 일이지. 그녀에 대해서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녀가 내 어머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건 본능적인 인지와도 같았다. 그냥 그녀는 내 어머니였다. 나를, 그러니까 라파엘을 낳은 여자.
나는 정말로 라파엘이구나.
그녀를 내 어머니라고 부르는 데에 거부감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던 기억이 남의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라파엘의 기억이자 나의 기억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라파엘이었다.
나와 라파엘, 아니, 나와 루크를 구분했던 경계가 차츰 흐려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라파엘인가, 아니면 루크인가?
라파엘로서의 기억이 단편적으로나마 돌아온 지금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내가 만약 라파엘로서의 기억을 다 찾게 된다면…….
“전하께서는 좋으시겠어요.”
불쑥 원망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다행히도 깊이 잠든 황태자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알 수 없이 우울해졌다.
내가 기억을 다 찾으면 그는 기뻐하겠지. 드디어 사랑하던 라파엘을 만날 수 있잖아. 내가 곧 라파엘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이상하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그에게 잡힌 손목을 조심스럽게 빼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자도 옆에 있어.’
그 말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여기 있다가는 기분이 끝도 없이 나락에 처박힐 것 같았다.
방에서 나갈 때까지 황태자는 미동도 없었다.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스스로 마음을 다독였다.
나는 라파엘이야. 내가 곧 라파엘이라고. 기억을 되찾으면 좋은 거지. 모두가 기뻐할 거 아니야. 드디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이제야 멀쩡해졌네? 하면서.
……마음을 다독이기가 쉽지 않다.
1층으로 내려오자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하퍼 씨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중인가 보다. 식당으로 들어가자 식탁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아인 퍼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네. 비서관님은 편안하셨어요?”
“그럼요! 아, 근데 말 편하게 하세요. 제 선임이시잖아요.”
“음…….”
말을 편하게 해본 적이 거의 전무했던 터라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망설이는 나를 보며 아인 퍼스가 ‘아인이라고 부르시면 돼요’라고 덧붙였다.
“……아인.”
“네, 그렇게요.”
“그래요.”
“‘그래’면 충분해요!”
“……그래.”
어색하게 ‘그래’라고 대답하자 그가 밝게 웃었다. 맞은편 의자에 앉자 아인이 쪼르르 달려와 따뜻하게 우린 엽차를 따라 주었다.
엽차라. 문득 어제저녁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마워. 그런데 나는…… 음, 엽차 말고 다른 게 좋겠어.”
“어, 왜요?”
“그냥.”
몸이 찬 편이라니 엽차는 최대한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아인 퍼스가 ‘그럼 백차로 준비할게요’라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말리려다가 그만두었다. 백차 또한 싫어하는 차는 아니다. 부러 찾아 마시는 차도 아니지만.
“고마워.”
“뭘요.”
자리로 되돌아간 아인 퍼스가 한 손으로는 찻잔을 들고 한 손으로는 다시금 신문을 펼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불쑥 물었다.
“아인, 근데 말이야.”
“예?”
“어제…… 전하와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엽차에 대해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을 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다.
어제 내 배 속을 후끈후끈하게 달군 두 사람만의 대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무슨 대화를 나누었기에 황태자가 그를 ‘아인’이라고 다정하게 불렀던 걸까.
내 물음에 아인이 ‘……아, 그거요’ 하면서 멋쩍게 웃었다.
“별거 아니었어요.”
“……말하기 어려운 거야?”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아무래도 좀…… 전하께서 싫어하실 것 같아서.”
그러면서 ‘죄송해요’라고 덧붙이는 아인 퍼스를 보니 간신히 짓고 있던 웃음마저도 버겁게 느껴졌다.
“그렇구나.”
“정말 죄송해요.”
“……아니야.”
황태자가 싫어할 것 같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아인 퍼스가 정말로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더는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근데 뭘 하고 있었어?”
“아, 신문을 보고 있었어요. 오늘 자 신문에 재밌는 게 실렸거든요.”
그렇게 말한 아인 퍼스가 내게 신문의 한 면을 보여 주었다.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건 알겠는데.
“……미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옛날 사람인지라 어려운 글자는 이해하기 힘들다. 무식해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리자 아인 퍼스가 ‘아, 괜찮아요! 이건 기술 분야라 일반인들은 잘 몰라요’라며 설명을 해주었다.
“음, 간단히 설명하면 금속인데 금속의 특징을 갖지 않는 신소재가 발명되었다는 소리예요.”
“…….”
“말이 좀 어렵죠? 유도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금속 소재라는 건데, 아는 사람이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물어보니까 활용 방안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레이더파가 그냥 통과한다는 소리니까 군사 무기에도 활용될 수 있고요.”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그러냐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이미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든 아인 퍼스가 계속 주절주절 떠들었다.
“물론 악용될 소지도 많죠. 금속 탐지기에 걸리지 않으니 공항 같은 곳에서는 더 촉각을 세워야 할 거고요. 그래서 실용화되기까지는 시일이 좀 걸릴 거예요.”
금속 탐지기는 뭐고 공항은 또 뭘까…… 점점 머리가 텅 비어 갔다.
멍하니 듣고만 있는 나를 본 아인 퍼스가 ‘앗, 죄송해요. 제가 너무 제 얘기만 했죠?’라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 뭐 사과할 필요까진 없다.
“기술에 관심이 많은가 보네.”
민망해하는 아인을 달래기 위해 적당히 주워 말하자, 그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
“…….”
“기술만큼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게 없으니까요!”
‘저는 기계란 기계는 다 좋아요!’라고 소리치는 아인을 보자니 문득 내 시대의 사제들이 떠올랐다.
신에 대한 맹목적 사랑으로 무장한 사제들도 저런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광기에 가까웠을지도 모르는 무조건적인 신뢰와 무한한 애정.
신의 자리를 과학이 대체했다고 하더니 진짜인가 보다. 기술을 맹신하는 아인 퍼스는, 신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보이던 사제와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그럼 아인 너는 누구보다 기계에 대해 잘 알겠구나.”
“누구보다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사람보다는 더 잘 알 거예요.”
“그래?”
기대했던 답변이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네?”
아인 퍼스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들어서 알겠지만 사고를 당하면서 기억이 좀 사라졌거든.”
“아, 그건 들었어요.”
“사실 지금 이렇게 일상적인 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많이 힘들어.”
틀린 말은 아니다. 환생이니 전생이니 떠들어 봤자 어쨌든 라파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지금 기억을 잃었을 뿐이니까.
나는 그의 입장을 대변한 것뿐이다.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건 사실이고.
“처음에는 목욕도 힘들어서 쩔쩔매었거든.”
“아…….”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아인이 안타깝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지금은 아주 기본적인 생활은 할 수 있게 됐는데, 그래도 아직 모르는 게 많아. 특히 기계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모르겠고. 태자 전하께서 몇 개는 알려 주셨는데 역시 어렵더라고.”
“그러시겠네요.”
“그래서 말인데, 내게 기계 사용법 좀 가르쳐 줄래?”
“제가요?”
“전하께 부탁하려고도 해봤지만 내가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집에 들어가는 방법도 몰라서 지금 이렇게 전하의 외조부 저택에서 신세를 지고 있고……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친절한 네가 알려 줄 수 있겠니?”
그 말에 아인 퍼스의 얼굴이 해맑아졌다. 그가 기쁘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아, 물론 저는 괜찮죠! 도움이 된다니 영광이에요!”
“정말?”
“그럼요! 아직 그때의 빚도 못 갚은 걸요!”
그때?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그때 비서관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라고 그가 말했었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아인 퍼스가 ‘아!’ 하더니 말했다.
“기억을 잃어버리셨다면 그때의 기억도 없겠네요!”
“응. 그렇게 됐어.”
“그래서 그때 못 알아보셨구나. 에이, 아쉽다.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잔뜩 아쉬워하는 아인 퍼스를 보고 있으려니 영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때 라파엘과 아인 퍼스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그때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식당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둘이서 뭐 해?”
그리고 잠에서 막 깬 듯, 부스스한 머리의 황태자가 잔뜩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아, 깨셨습니까?”
“응.”
“좀 더 주무시지요. 피곤하셨을 텐데요.”
내 곁으로 다가온 황태자가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허리를 껴안았다. 그러면서 중얼거리기를.
“……눈을 떴는데 당신이 없어서.”
“…….”
“옆에 있으랬잖아.”
아인 퍼스가 묘한 표정으로 나와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때문에 조금 민망해졌다.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몸을 물리자 황태자가 빨갛게 부은 눈으로 불만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그 원망스러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 애써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전하께서 주무시는 데에 방해가 될까 싶어…….”
“방해될 리가 없잖아.”
“그래도…… 아, 차 드실래요?”
말을 돌리기 위해 내가 마시고 있던 백차를 보여 주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난 커피가 좋겠어. 아인, 커피 좀 부탁해.”
“아, 네!”
그때까지 공기처럼 취급받던 아인 퍼스가 재빨리 식당 문을 열고 나섰다. 아인 퍼스가 나가자마자 황태자가 만족스럽다는 듯 피식 웃더니 다시금 내게 몸을 기대었다.
“전하, 이건 좀……”
“왜? 방해꾼은 쫓아냈잖아.”
“…….”
“잠깐만 이러고 있자. 나 정말 졸리단 말이야.”
방해꾼…… 그래, 뜻대로 하셔요. 작게 한숨을 쉬고 몸에 힘을 뺐다. 황태자가 고양이처럼 가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품에 파고들었다.
“전하, 몸은 괜찮으세요? 혹시 감기에 걸리지는 않으셨나요?”
지난 밤, 이불도 없이 잠들었던 것을 떠올리며 묻자 황태자가 잠결에 노곤노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문제없어.”
“다행입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뒷말을 덧붙였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응?”
“이불요. 앞으로는 꼭 덮고 자세요. 감기에라도 걸리시면 어떡합니까.”
그 말에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황태자가 고개를 들었다. 붉게 충혈된 그의 연녹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금 나 걱정한 거야?”
“……예.”
“이거 놀라운데.”
그가 부스스 웃었다.
“당신이 나를 걱정하다니, 아무래도 조만간 한 번 호되게 앓아야겠어.”
아니, 이 무슨 철없는 소리인가.
“그런 소리는 부디 하지 마십시오, 전하. 아프면 얼마나 서러운데요.”
“응? 서럽다니? 어째서?”
“그야 당연히…….”
까지 말하다가 그와 나는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비천하게 살아가던 나라면 몰라도 황태자가 서러웠을 리가 없지.
습관처럼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황궁에 들어오고 두 번째로 맞는 봄이었나, 감기에 호되게 걸린 적이 있었다.
열이 끓어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지. 시종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약차를 내왔지만 속이 좋지 않아 그것조차도 제대로 마실 수 없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물린 뒤 혼자 앓았지.
혼몽한 와중에 리안이 의원을 데리고 왔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리안에게 감기라도 옮기면 황제가 진노할 터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황제가 보였다.
그를 보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오늘도 오셨구나. 예를 갖춰 인사하지도 못 할 만큼 몸이 아팠지만 그가 찾아왔으니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옷을 벗자 그가 잔뜩 굳어 있던 얼굴을 찌푸렸다.
“뭐 하는 짓이야.”
시중을…….
“지금 그 꼴로 내게 안기려는 건가.”
그럼?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니야?
“어리석은 놈.”
그가 경멸 어린 목소리로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거슬리게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지.”
“…….”
“아파도 조용히 아프고, 죽어도 조용히 죽어. 괜히 여러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말란 말이다. 알아들어?”
아파도 조용히 아프고, 죽어도 조용히 죽어라. 아파서 쓰러진 후궁에게 할 법한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죄송하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감기보다 독한 황제의 말이 가슴에 따끔따끔 박혔다. 그가 트레이를 끌어내 앞으로 당겨 놓은 후 등을 돌렸다.
“끝까지 다 먹어라. 그리고 다 나을 때까지는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마.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긴다면 용서치 않을 거다.”
“……예.”
“쯧.”
그가 방을 떠나고 나 홀로 남은 방 안에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트레이 위에 놓인 맑은 수프를 마시면서 무슨 생각을 했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수프 위로 열에 들뜬 눈물이 두어 방울 떨어졌다는 것만 기억난다. 그게 엄청 서러웠다는 기억도 함께.
“……아프면 외롭거든요.”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황태자가 흐음, 하고 신음을 흘리더니 대답했다.
“앞으로는 외로운 일 없을 거야.”
“…….”
“당신이 아플 때마다 내가 곁에 있을게.”
“……정말요?”
“응. 그러니까 내가 아프면 당신도 옆에 있어줘야 해, 알았지?”
애교라도 부리듯 속살대는 황태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작게 웃었다.
내가 아플 때마다 곁에 있겠다는 황태자는 어느 별에서 떨어진 사람일까. 어느 별에서 왔기에 이렇게 다정하고 친절한 걸까.
델루니안의 피가 섞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내 허리를 감싸 안은 그의 팔뚝을 살짝 도닥이며 대답했다.
“그럴게요.”
“…….”
“전하께서도 꼭 제 곁에 있어주셔야 합니다.”
내 대답에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과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훔쳤다. 내가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것을 알 텐데도 황태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내 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을 조금 더 주었을 뿐이다.
* * *
그날 이후로 며칠이 흘렀다.
황태자가 경호관과 함께 운동을 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는 서재로 향했다.
요 며칠 그와 시간을 보내느라 황립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온 델루니안 시대의 자료들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돌아오면 또 휩쓸려서 놀기 바쁠 테니 지금이라도 봐 둬야 했다.
“음…….”
자료들을 살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내게 익숙한 문자 체계가 아닌가. 당시 황실에서 쓰이던 용어도 내게는 익숙했으니, 가진 자료를 전부 확인하는 데에는 두어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게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읽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 자료의 가죽 표지를 덮으며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없네.”
자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에 대한 언급은커녕, 내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간 해인 173년 겨울에 대한 기록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반역죄로 끌려가 살해당한 것이 나만의 꿈인 것처럼.
……꿈이었나?
‘루크, 당신이 죽고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당신은 차마 믿지 못할 거예요. 어쩌면 당신은 그 모든 진실을 알기 위해 이곳으로 돌아왔을지 모릅니다.’
아니, 꿈이었을 리가 없지.
자연스럽게 시드니 카턴이 떠올랐다. 그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 내가 왜 죽어야 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내게 반역의 죄가 덧씌워진 건지, 그리고 내가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는 전부 알고 있다.
그를 다시 만나야 했다. 얼굴만 봐도 두렵고 몸이 떨리지만, 다시 한번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만날 수 없다면 편지로라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편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아무래도 좀 힘들겠지.”
시드니 카턴의 이름만 나와도 가시를 세우는 황태자를 떠올리니 시드니 카턴을 만나기는커녕 편지조차도 보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우정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겠지. 그렇지만 그 사이에 내가 끼어든다면 말이 다르다.
이를 어쩐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생각에 잠길 때였다. 갑자기 문밖에서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허둥지둥 당황한 얼굴로 찻잔을 치우는 아인 퍼스가 보였다.
“아인?”
“죄, 죄송해요! 차가 식은 것 같아서 물을 갈려다가…….”
“차?”
아인 퍼스가 민망하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엄청 집중하고 계신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문 앞에 차를 갖다 놨거든요…….”
“아…… 그랬어? 고마워, 아인.”
“아니에요. 그런데 혹시 제가 방해한 건가요?”
“아니야.”
“어휴, 다행이다.”
과장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그를 보고 있자니 문득 며칠 전 식당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기술에 유독 흥미를 보이던 아인 퍼스. 그라면 혹시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
“저, 아인.”
“예?”
“너는 기술을 많이 안다고 했잖아.”
“아, 네. 그랬죠?”
“그럼 혹시…… 사람을 찾는 방법이나 기술, 뭐 그런 것도 있니?”
아인 퍼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이요? 누구를 찾으시는데요?”
“아, 그냥 아는 사람이야. 그 사람과 대화를 좀 나누고 싶은데…… 음, 사실 만나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편지라도 쓰면 어떨까 싶었거든.”
그가 어디에 사는지만 알아낸다면 편지를 쓰는 거야 어렵지 않다. 매일 같이 출퇴근을 하는 요리사 하퍼 씨에게 부탁해서 편지를 보내 달라고 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자 아인 퍼스가 대답했다.
“그럼 편지보다는 전화가 낫겠네요.”
“……전화?”
“예. 전화요.”
그러면서 허리춤에서 커다랗게 생긴 검은색 물건을 꺼낸다. 저건 뭐지?
나는 멀뚱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숫자가 다닥다닥 붙은 저것은 일견 벽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인 퍼스가 그것을 내게 넘겨 주었다.
“이런 거로 전화하는 거예요.”
“그게 뭔데?”
“음……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계요.”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계라고?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정말 놀랍다.
깜짝 놀라 두 손으로 기계를 받드는 나를 보며 아인 퍼스가 짓궂게 웃었다.
“황실 보급품이에요.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서 필요한 부처에 나누어준 거죠.”
“그렇구나…….”
“비서관님은 이걸로 놀라면 안 되는데. 비서관님 외가에서 만든 제품이잖아요.”
내 외가에서 만든 제품이라고? 이토록 경이로운 물건이?
놀라움의 연속이다. 혹시라도 망가질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런데 이걸로 어떻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걸까?
도통 상상이 안 간다. 뭘 누르면 시드니 카턴이 나오는 거야……? 멍하니 기계만 매만지는 나를 보며 아인 퍼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전화기를 사용하는 방법부터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요. 전화기 사용법을 배운 뒤에 비서관님이 찾으시는 그분을 찾도록 해요.”
그래, 그러자. 새로운 기계를 배운다는 흥분에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니 금방 익힐 수 있을 거야. 이제 곧 시드니 카턴과 대화할 수 있겠구나. 모든 진실을 알 순간이 머지않았어.
……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비서관님, 그게 아니라 이 푸른 버튼을 먼저 누르고…….”
“푸른 버튼?”
“네. 그리고 9자리 숫자를 누르고 별표요.”
“9자리 숫자를 누르고 별표…….”
“전화를 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어…… 빨간 버튼을 누른다?”
“맞아요. 이제 다시 해봐요.”
이 전화기라는 것은,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정말로 어려웠다. 빨간색, 푸른색, 별표와 번개 표시…… 아이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파란 버튼을 누르고 아홉 자리 숫자를 누르고 나면 내가 눌러야 하는 것이 빨간색 버튼인지 별표 버튼인지 헷갈렸다.
내가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닌데 아인 퍼스가 ‘이왕이면 제 번호를 외워두시는 게 좋겠죠’라며 아홉 자리 숫자를 외우라고 한 바람에 생각이 엉켰다.
그러니까, 푸른 버튼을 누르고 아홉 자리 숫자를 누르고 그다음에 뭐더라? 빨간색? 별표?
“……별표요.”
아, 이런. 또 틀렸다. 이를 어쩌나……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아인 퍼스를 바라보았다. 아인 퍼스가 마주 웃어주었으나 억지웃음에 가까웠다.
거참, 미안하네. 아까부터 똑같은 부분에서 틀린다. 이 정도면 강아지라도 알겠다. 근데 나는 사람인데 왜 모를까.
“다시…… 다시 해볼게.”
이번에는 잘하자. 스스로 다짐하며 전화기를 고쳐 잡을 때였다.
“나 왔어.”
“아, 오셨어요?”
부드럽게 문이 열렸고, 그 틈으로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이마 위로 시원하게 올리고 있던 머리를 내린 것으로 보아 씻고 온 것 같다. 전화기를 쥔 채로 반갑게 웃자 그가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뭐 하고 있었어?”
“전화기의 사용법을 배우고 있었어요.”
아직 완벽하게 익히지는 못 했지만 하나도 모르던 때보다는 많이 발전하지 않았나 싶어 뿌듯하게 자랑하자 황태자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전화? 전화는 왜?”
“아…… 그게, 그냥요.”
차마 ‘시드니 카턴을 찾으려고요’라고 대답할 수 없어서 그냥 배우기 시작했다고 대답하자 황태자의 등 뒤에 서 있던 아인 퍼스가 내게 찡긋 웃었다. 비밀로 해줘. 눈짓으로 부탁하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시선을 쫓은 황태자가 아인 퍼스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이미 모든 표정을 지운 뒤였다.
“벌써 저녁 시간이네요. 저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흠.”
미심쩍게 바라보는 황태자의 시선을 뒤로하고 아인 퍼스가 몸을 돌려 서재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내게로 고개를 돌린 황태자가 다정하게 웃으며 추궁했다.
“둘이서 뭘 한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이, 말해봐. 방금 눈짓으로 뭐 한 거야?”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하.”
“자꾸 이러기야?”
“…….”
“좀 질투 나려고 하네.”
질투할 게 뭐 있나. 내가 말없이 웃기만 하자 황태자가 흥, 하고 콧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정말 전화는 왜 배운 거야?”
“그냥요. 제가 아직 모르는 게 많잖아요.”
“그럼 나한테 부탁하지. 내가 잘 알려 줬을 텐데.”
“전하께서는 바쁘시니까요.”
“나 전혀 안 바빠. 알잖아.”
“……곧 바빠지시겠죠.”
그 말에는 할 말이 없는지 황태자가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수도로 떠날 날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내달 예정되어 있었던 국빈 방문이 조금 앞당겨진 것이다.
국빈만 돌아가면 바로 돌아오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완전히 저택을 떠나는 것은 처음인지라 나도, 그도 조금은 울적해하고 있었다.
그때 황태자가 말했다.
“그래서 배운 건 어때? 좀 할 만해?”
“예? 아…… 조금 어렵지만, 음, 금방 익힐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럼 시험해 볼까?”
시험?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황태자가 씩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아인 퍼스의 전화기를 내 손에 꼭 쥐여 주며 말했다.
“딱 기다려.”
“……?”
그러더니 휙 나가 버린다. 기다리라니…… 뭘?
전화기를 든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기를 몇 분. 기다리라고 말한 황태자는 소식이 없다. 도대체 뭘 기다리라는 거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든 전화기를 내려다볼 때였다. 삐리리리, 단조로운 알림이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이럴 때 어떻게 하더라?
‘전화를 받을 때는 파란 버튼을 한 번 누르면 돼요.’
아, 파란 버튼.
황급히 파란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대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이렇게 하는 거 맞나? 자신이 없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때 수화기 건너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가 귀에 익숙하다. 바로 깨닫고 말았다.
“전하?”
-잘 받네.
“전하, 어디 계세요? 안 보여요.”
-당연히 안 보이지. 맞춰 봐. 어디 있을 것 같아?
“모르겠어요. 와, 근데 정말로 대화가 되네요.”
나는 약간 들뜬 상태였다. 무사히 전화를 받았는데 진짜로 통화가 된다.
이렇게 자랑스러울 데가! 내가 들뜬 것을 눈치챘는지 황태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신나?’ 하고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네!’ 하고 대답했다.
“전화란 건 정말 신기한 물건이에요. 이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다니…….”
-그렇지?
“예. 목소리만 들릴 뿐인데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 이걸로 계속 통화할까?
“예?”
-내가 집을 비우는 동안 매일 전화하자고. 그러면 외롭지 않을 거 아니야.
아……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 한 기발한 발상이다. 좋다고 냉큼 대답하자 그가 다시금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전하, 정말로 어디 계세요?”
-맞춰 봐. 어디 있을 것 같아?
“음…… 으음.”
어디 있을까? 아인 퍼스는 이 저택에 여러 대의 전화기가 놓여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한 대도 아니고 여러 대라니 찍을 수도 없다.
내가 음, 으음, 하면서 신음만 흘리자 황태자가 속삭였다.
-일단 서재에서 나와 볼래?
그 말에 전화기를 든 채로 서재에서 나왔다. 아인 퍼스의 전화기는 집안에 배치된 전화기와 달리 선이 없는 것이라 이동하면서도 통화할 수 있었다.
서재에서 나왔다고 알리자 그가 자신에게로 이르는 방향을 속삭였다.
앞으로 쭉 가서 왼쪽으로 돌아. 그리고 계단을 타고 한 층 내려가. 1층에 다다르면 부엌과 연결된 쪽문으로 나와. 그리고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아.”
물이 마른 분수와 그 뒤에 놓인 흰 의자,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황태자가 보였다.
“어서 와.”
“……전하.”
“잘 찾아왔네.”
천천히 다가온 황태자가 물 마른 분수 위에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양팔을 내게 벌렸다.
그의 전화기 옆에 아인 퍼스의 전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겼다. 그가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첫 통화는 어땠어?”
그의 어깨에 이마를 갖다 대며 대답했다.
“……굉장히 좋았어요.”
“그리고?”
“그리고…….”
바람처럼 고막을 훑고 사라지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 목소리에 집중해서 걷다 보니 세계가 온통 황태자로 가득 찼다.
복도에 놓여 있던 장식용 동상과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 고소한 음식 냄새가 흘러나오는 부엌과 귀뚜라미 우는 오솔길. 그 모든 것에 황태자가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더욱, 갈증이 일었다.
“……더 빨리 만나고 싶었어요.”
목소리만 들어도 어떻게 웃고 있을지 생생한데 정작 보이지는 않으니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목소리로는 부족했다.
전화기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동시에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요물이었다.
초조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해 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얼굴을 보자 요동치던 가슴이 잔잔해졌다.
“루크.”
황태자가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연녹색 눈동자 안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일렁이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가 묵직한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어쩜 이렇게 예쁜 말만 할까, 당신은.”
“…….”
“이 이상으로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어.”
그 말에 심장이 기분 좋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가 엄지로 내 입술을 매만졌다. 그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연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입술 위로 황태자의 입술이 닿았다. 뜨거운 혀가 뭉근히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부드러운 침입자가 혀를 옭아매는 감각에 등줄기가 찌릿하게 곤두섰다. 양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자 그가 더욱 깊숙이 입을 맞춰 왔다. 결합은 더 이상 깊어질 수 없을 때까지 이어졌다.
한참 후, 서로의 타액을 나눈 그와 내가 입을 떼었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혀로 살짝 훔치는데, 황태자가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사랑해.”
“…….”
“많이 사랑하고 있어.”
익숙한 고백.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더 무거운 감정의 무게. 둔중하게 나를 치고 가는 황태자의 고백에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어쩌면…….
어쩌면,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