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2권) (8/34)

7장

사흘 후, 아인 퍼스가 열일곱 명의 경호팀을 꾸리고 저택을 찾아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상기된 얼굴로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하는 아인 퍼스를 못마땅하게 노려본 황태자는 딱 한 마디 말을 내뱉었다.

“3층은 출입 금지.”

아인 퍼스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얼굴에 물음표가 찍혔다. ‘3층은 왜?’ 그 시선에 황태자가 보란 듯이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우리 둘만 쓰는 공간이거든.”

“…….”

어째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차마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2층이었던 침실을 3층으로 옮기게 된 것은 전적으로 황태자 때문이었다. 외부 경호만 맡던 경호팀이 저택 내부로까지 들어오게 되며 방이 부족해진 것이다.

내가 쓰던 2층까지 경호팀과 아인 퍼스에게 내주어야 한다고 말한 황태자는 ‘그래서 말인데, 3층으로 방을 옮기는 건 어때?’라며 넌지시 제안을 해왔다.

“2층에 방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옮길 필요가 있을까요?”

방을 옮기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굳이 옮길 이유도 없는지라 의아하게 되묻자, 황태자가 툴툴대며 대답했다.

“아인 퍼스랑 같은 층을 써야 하잖아.”

그는 이상하게도 아인 퍼스를 경계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딱히 미운털 박힐 만한 짓도 하지 않았고, 그럴 시간도 없었는데 왜 저렇게 그를 싫어하는 거지?

내가 아인 퍼스와 같은 층을 쓰게 되는 것도 싫다며 툴툴대는 황태자에게 벙찐 것도 잠시. 아나콘다처럼 기회를 놓치지 않는 그는 나를 졸라 대기 시작했다.

“나랑 같이 3층 쓰자. 손만 잡고 잘게. 정말이야, 약속해.”

“……정말요?”

“아니, 어쩌면 키스도 할 수는 있는데. 당신이 싫어하면 하지 않을게. 응?”

3층은 침실이 하나뿐이었고, 침대도 큰 사이즈로 하나밖에 없었다. 손만 잡고 잔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에 진짜로 손만 잡고 자는 놈 하나 없다더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에 헛웃음이 나왔다.

제가 그런 수작에 넘어갈 것 같습니까?

“……좋아요.”

넘어갔다. 좋아요, 라고 대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의아했다.

너 어쩌려고 그래? 황태자한테 안 넘어갈 자신 있어? 자문을 했지만 답은 ‘나도 몰라’로 귀결되었다. 정말 나도 모르겠다.

사흘 전의 그 대화 이후로 황태자는 노골적으로 구애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조금이나마 부끄러워하는 구석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주 거침이 없다.

숨만 쉬어도 예쁘다고 속삭이고 가볍게 손만 스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아채어 손등에 입술을 쪽쪽 찍는데, 그 행동으로 민망해하는 것은 오직 나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행동에 심란해하는 것도 오직 나 하나.

나는 도대체 어쩌고 싶은 걸까.

그를 사랑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가 주는 애정은 받고 싶다. 그것이 나를 향한 애정이었으면 좋겠고, 라파엘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는 그의 말을 믿고 싶다.

이게 이기적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이기적이다 못해 나쁜 마음이지. 사랑을 주고 싶지는 않으면서 사랑을 받고는 싶다니, 이 얼마나 못된 심보인가.

게다가 그는 라파엘의 연인이다. 라파엘이 나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판단이고, 심리적으로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기에 내가 라파엘의 연인을 탐한다는 찝찝한 죄책감이 계속해서 주위를 맴돌았다.

피해야 하는데, 피할 수 없고.

좋아하지 말아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좋아지는.

……역시 나는 구제 불능이야.

각자 자신의 방을 찾아 떠났다. 홀로 남아 제 몸집보다 큰 짐을 옮기는 아인 퍼스를 보고 있자니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와드릴까요?”

내 물음에 황태자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뭘 돕느냐는 듯 곱지 않은 시선이다.

하지만 저렇게 세간 살림을 다 가져온 것처럼 짐이 차고 넘치는데, 차마 인간이 된 도리로 안 도울 수가 없다.

황태자의 신경질적인 반응에도 아인 퍼스는 환하게 웃으며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라고 대답했다.

그래. 혼자 사는 세상 아니지. 팔을 걷어붙이고 가까이 있는 큰 상자 하나를 집어 들 때였다.

“응?”

불쑥 나타난 손이 상자를 빼앗아 갔다.

“당신은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라니. 눈 깜짝할 사이에 짐을 빼앗긴 나는 눈만 깜빡였다.

내게서 빼앗은 상자 위에 다른 상자 하나를 더 겹쳐 올린 황태자는 벌써 아인 퍼스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보고 돕지 말라는 눈짓을 보낼 때는 언제고? 하여간 못 말려…… 이런 작은 행동에 봄바람이 일듯 가슴이 간지러워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다른 상자를 집어 그 뒤를 쫓았다.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

얼추 짐을 다 옮겼을 때 황태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아인 퍼스가 민망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저는 완전 입주거든요.”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경호팀은 교대 근무인 반면에 자신은 황태자가 황궁으로 돌아갈 때까지 같이 있어야 한단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당연히 짐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는 아인 퍼스를 보며 황태자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럼 퇴근도 없어?”

“예, 뭐 그렇죠.”

“미쳤네.”

“너, 야근 수당은 받아?”

황태자가 진지하게 물었고, 아인 퍼스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뭘.”

“…….”

황태자는 기가 차다는 듯 허, 허 하고 혀를 찼다. 그러면서 나를 흘끗 보면서 중얼거리기를, ‘비서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계약서를 제대로 안 보는 거야?’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따라갈 수 없는 대화에 가만히 입을 닫고 있으려니 아인 퍼스가 씩씩하게 말했다.

“어차피 집에 가도 아무도 없으니 이게 더 좋아요!”

집에 아무도 없다고? 혼자 사는 건가?

“부모님과 함께 안 살아요?”

이 질문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내가 살던 시대에는 자식이 성인이 되었든 혼인을 했든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네, 혼자 살아요. 자취 경력만 10년 차인 걸요?”

“스물다섯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스물다섯인데 벌써 혼자 산 지 10년째라고?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지만 너무 이른 것 아닌가 싶어 묻자, 아인 퍼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앗, 어떻게 아셨어요?”

어? 의외의 대답에 머리가 멍해졌다. 어떻게 알았냐니. 네가 저번에 말했잖…….

…….

…….

말을, 했었나?

이상하다, 고 생각한 순간 물감을 푼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사라졌다. 자신이 스물다섯이라고 아인 퍼스가 말을 했었나?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질 않아. 근데 스물다섯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의 바다에서 갈피를 못 잡고 표류하는 것 같다.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그러게요.”

아인 퍼스가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스물다섯 맞아요!”

이상하네. 어떻게 알았지? 정말 모르겠다. 기이한 현상에 눈만 깜빡이고 있자 황태자가 끼어들었다.

“스물다섯인데 자취 10년 차라고? 왜 그렇게 빨리 나와 살았어?”

그래, 내가 궁금했던 거도 바로 그거거든.

그 말에 아인 퍼스가 ‘아…… 그게’ 하면서 말을 이었다.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니 설명하기 어려운 일인가 싶다.

“……사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든요. 이렇다 할 친척도 없어서 그냥 혼자 살게 되었죠.”

“아…….”

“그래서 저는 차라리 이렇게 함께 있는 게 더 좋아요. 여러 가지 기회도 많고.”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헤헤 웃는 아인 퍼스를 보자니 안 됐다는 생각보다는 동질감이 먼저 들었다.

사랑만 잔뜩 받으면서 큰 것 같은 아인 퍼스에게도 저런 사정이 있었다니. 참 외로웠겠다. 많이 외로웠겠다.

“저도 그랬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인 퍼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알아요.”

안다고? 의외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안다니, 뭘?

그는 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저런 묘한 웃음을 본 적이 있었지.

그때 시드니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이런 것을 보고 기시감이라 하던가.

그때 황태자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얘기는 이쯤 하고 짐이나 풀지.”

그 목소리에 딱, 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아, 그래. 짐 풀게 비켜 줘야지. 그의 말에 아인 퍼스가 ‘아, 네!’라며 허둥지둥 문 옆에 놓여 있던 상자를 집었다.

황태자는 내게 손을 뻗었다.

“가자.”

내가 반사적으로 황태자의 손을 잡을 때였다. 아인 퍼스가 갑자기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뭐 하는 거야!”

황태자가 짜증스럽게 그를 노려봤다. 황태자의 등을 밀친 아인 퍼스가 허둥지둥 상자를 내려놓으며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고 연신 사과했다.

“앞 좀 잘 보고 다녀. 칠칠치 못하기는.”

황태자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면박을 줬다.

‘칠칠치 못하다.’

나는 그 표현과 무척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다. 황실의 누구보다 절도 있고 품위 있었던 사람.

그러니까, 이건 내 과민 반응이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시드니가 루이 채스터턴이었다고 아인 퍼스가 리안이라는 법은 없다. 그러니까 억측은 그만해야지.

그만.

“전하께서도 당근 못 드시는구나.”

“……뭐?”

“저도 당근 싫어해요.”

……그만해야 하는데.

“브로콜리도 좋아하지 않는 편이고요.”

“나도.”

“하지만 콜리플라워는 또 괜찮더라고요.”

“흠.”

“…….”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건 왤까.

두 사람의 접시 위에는 손대지 않은 당근과 브로콜리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그에 반해 내 접시는 깔끔하기만 하다. 식습관이 비슷한 두 사람과 가리는 것 없이 모두 잘 먹는 나.

문득 옛날의 일이 떠올랐다. 나와 리안, 그리고 황제 세 명이 함께 식사하던 날의 일이다.

“……쯧.”

조용히 식사하던 황제가 갑자기 혀를 차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그의 표정이 가히 밝지 않았다.

왜 저러실까.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갑자기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리안도 조용히 스푼을 내려놓았다.

“요리사가 새로 들어왔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만…….”

“한심하군.”

“잡아다 문책을 할까요?”

“그래야 두 번 다시 이런 멍청한 짓은 저지르지 않겠지.”

그 말에 리안이 시종을 불러 요리사를 잡아들이라 명하였다. 황제의 수프를 살핀 시종이 파란 낯빛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때까지도 나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멀뚱히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황제는 더 이상 식사를 하지 않았다. 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본식도 나오기 전에 끝나 버린 식사에 나 역시 식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후궁으로 돌아가는 길,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묻자 리안은 우둔한 나를 위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폐하께서는 향채를 싫어하십니다.”

“아…… 그러십니까?”

“예. 그래서 폐하께 올리는 음식에는 향채를 비롯한 향신료들을 일절 사용하지 않습니다. 꼭 사용해야 한다면 극소량만을 첨가하지요. 이번에 요리사가 새로 바뀌었다더니, 그 부분을 간과한 모양입니다.”

“…….”

그렇구나. 문책당할 만하네. 감히 황제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을 만들면서 그의 취향 하나 파악하지 못했다니, 손이 잘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황제와 동시에 스푼을 내려놓은 리안이 떠올랐다.

“리안 경께서도 향채를 싫어하십니까?”

“아니요.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폐하를 모신 지 오래되다 보니 그분의 식성을 닮아가더군요.”

“아…….”

그렇게 대답하는 리안은 벌써 황제를 모신 지 7년째였다. 7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타인을 자신의 색채로 물들일 수 있을 만큼의 긴 시간. 그동안 리안은 황제의 색채에 물들었다.

그게 묘하게 부러웠다. 내가 알지 못하는 두 사람만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 같아서였다.

나는 모르는 그들의 세계를 엿보며 남몰래 생각했다. 7년이면 나도 리안처럼 황제와 취향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가랑비에 옷자락이 젖는 것처럼 그렇게 물들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관계에 끼어들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를 모방하고 싶기는 했다.

그때의 내게는 동질감이 필요했다. ‘나도 그런데 당신도 그렇구나. 우리 참 닮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 평생을 홀로 외롭게 살던 내가 바랐던 매개체.

……황제에게서는 끝내 찾을 수 없었지. 나는 끝내 그에게 물들지 못했다. 오히려 동질감을 찾을 수 있었던 쪽은 리안이었다.

“무슨 차를 좋아하세요?”

“저는 엽차면 충분해요.”

“비서관님도 엽차 좋아하시는구나, 저도 좋아해요!”

마치 지금처럼.

“……그래요?”

“네. 저는 비싼 차는 오히려 향이 강해서 싫더라고요. 조금 밍밍하긴 하지만 담백한 엽차가 좋아요.”

“…….”

그렇구나. 너도 엽차를 좋아하는구나. ……리안도 좋아했는데.

황궁에서 엽차의 매력을 아는 사람은 나와 그밖에 없었다. 그런데 너도 좋아하는구나. 참 신기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차를 마실 때였다. 황태자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당신, 엽차 안 마시지 않아?”

“예?”

“몸이 찬 편이라 엽차는 안 마신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제가요?”

멀뚱히 대답했다.

“전 엽차 좋아합니다.”

“……그래?”

“예.”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그랬나?”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려다가 깨달았다.

아, 그가 말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라파엘이구나. 라파엘은 엽차를 잘 안 마셨나 보지. ……그렇구나. 그런가 보다.

오늘따라 기분이 계속 축축 처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기분을 환기시키고자 일부러 주제를 돌렸다.

“근데 몸이 차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황태자가 입을 뗐지만, 대답을 한 것은 아인 퍼스가 먼저였다.

“민간의학에 따르면 사람마다 몸의 기질이 다르다고 해요.”

“…….”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은 찬 성질의 차를 많이 마실수록 좋고, 거꾸로 몸이 찬 사람들은 따뜻한 성질의 차를 마시는 게 좋아요.”

“그럼 엽차는……?”

“엽차는 대표적인 찬 음료예요. 제국민들은 태생적으로 몸에 열이 많아 엽차를 선호하는 편이구요.”

그렇구나. 신기하네. 그러고 보니 내가 살던 시대에도 저런 비슷한 말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때는 체질이라고 했지만.

아인 퍼스가 덧붙였다.

“민간의학이라 주류 의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제국민들은 많이들 믿고 있죠. 몇몇 사례도 있고요.”

“사례요?”

“몸이 찬 편인데 찬 성질의 음식을 많이 섭취하고 건강이 크게 나빠진 경우라든지.”

“……그런 경우도 있나요?”

“있다고는 해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이 차 마셔도 되는 걸까? 라파엘이 몸이 찬 편이라면 엽차는 최대한 안 마시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는 나를 보며 아인 퍼스가 작게 웃었다.

이윽고 대화의 주제는 황태자의 일정으로 바뀌었다.

“당분간은 매체에 노출되면 안 될 것 같아 큰 일정은 잡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정신없을 텐데 뭘.”

“타국에서 일어나는 학살보다 자국에서 일어나는 스캔들에 더 관심이 많은 게 대중이라서요. 아시잖아요.”

황태자가 그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가 하니 지금 언론은 화국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학살극으로 정신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황태자의 폭행 사건이 묻혔다고. 황태자는 어차피 그렇게 크게 다뤄질 사건도 아니었다며, 이래서 공화당파는 안 된다고 혀를 찼다.

“애초에 『리퍼블릭』은 이류 신문사야.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리퍼블릭』은 확실히 이류지만, 장소가 너무 안 좋았죠. 게다가 피해자가 대학 교수였고요.”

피해자?

“피해자라면, 시드니 카턴이요?”

“네, 그분이요.”

시드니 카턴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황태자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시드니 카턴이라는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싫은 모양이다. 친구였는데 그러고 싶을까.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아인 퍼스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괜찮은가요?”

“큰 부상은 없고, 치아 몇 개만 새로 해서 넣었어요.”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이야.”

아인 퍼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작게 넘어갈 정치적 스캔들도 크게 부풀려지는 곳이 대학이니까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황태자가 대답했다.

“원래 대학이라는 공간이 그래. 머리에 든 게 많아질수록 기존 체제를 깨뜨리려고 하지. 수많은 폭군과 독재자들이 대학의 기능을 축소시키는 이유도 그런 까닭에서야. 멍청해야 다스리기 쉽거든.”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황제도 그런 소리를 했던 것 같다. 내가 글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그래. 배우면 좋지.’

흔쾌한 허락에 깜짝 놀라 바라보자, 황제가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적당히 하도록. 괜히 설쳐 대면 골치 아프니.’

그런 뜻이었구나.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라 조용히 공부하라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잡은 큰 일정은 뭔데?”

“내달 국빈 방문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어느 나라?”

“화국이요.”

그 말에 황태자가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국민 죽이고 대통령 된 인간이 무슨 국빈이야.”

이틀 전 TV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넓은 공간에 빼곡히 들어차 있던 관과 울부짖는 사람들.

뿌옇게 가려졌지만 누가 봐도 시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의 형상.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우는 건가요?’ 하고 물었더니, 황태자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억울해서 그래.”

억울……? 그렇구나. 억울해서 저렇게 우는 거구나.

그 순간 나는 그들을 완전히 이해했다. 뼈에 사무치는 억울함이 뭔지 내가 당해 보니까 알겠더라.

“……전하는 훌륭한 황제 폐하가 되어주세요.”

“응?”

“억울한 사람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셨으면 해요.”

내 말에 샤를마뉴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할게.”

흔쾌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누구보다 좋은 황제가 되리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튼 내달까지는 큰 행사가 없으니 잠시나마 휴가를 즐기셔도 됩니다, 전하.”

“흠. 이왕이면 내달에 예정된 국빈 방문도 취소되었으면 하네.”

“에이, 그건 좀 힘들지요. 비행기라도 추락하지 않는 이상.”

그 말에 황태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야.”

“예?”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초조하게 나를 바라보던 황태자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시선을 돌려 날카로운 눈으로 아인 퍼스를 노려보았다.

“너, 나 좀 보자.”

“예? 왜요?”

“따라 나와.”

이게 무슨 상황이지?

황태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아인 퍼스가 어정쩡하게 그 뒤를 따랐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 갑자기 왜 이렇게 분위기가 나빠진 걸까. 이해가 안 간다.

나도 쫓아가야 하나 싶어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자 황태자가 다급히 소리쳤다.

“당신은 거기 있어.”

“……여기요?”

“응. 금방 돌아올 테니까 100까지만 세고 있어 봐.”

내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아시나.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나는 열심히 1부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 무슨 얘기일까…… 17…… 하도 조용해서 들리지 않는다.

43…… 무슨 얘기가 이렇게 길어…….

그렇게 88까지 셌을 때, 함께 나갔던 두 사람이 돌아왔다.

“무슨 얘기를 하셨어요?”

“별거 아니야. 그렇지, 아인?”

“아, 예! 그럼요!”

“…….”

정말로 별거 아니었을까. 찜찜하게 웃는 황태자와 아인 퍼스를 보니 뭔가 대단한 이야기라도 나눈 것 같은데 나만 모른다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아인, 너는 이제 올라가 봐야 하지 않겠어?”

“아, 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응, 그래. 가 봐.”

“편히 쉬세요.”

또다. 또…… ‘아인’이라고 했어.

아까까지는 꼬박꼬박 ‘아인 퍼스’ 혹은 ‘너’라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인’이라고 친근하게 이름만 불렀다.

둘 사이에 무슨 대화를 나누었기에 갑자기 저렇게 친근해졌을까.

“우리도 이만 일어날까?”

“예? ……아, 예.”

뒤돌아 나간 아인 퍼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그런 나를 보며 황태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루크?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이상하게 배 속이 뜨끈뜨끈했다.

* * *

그 밤. 목욕을 하고 나와 방으로 돌아가니, 먼저 씻고 나온 황태자가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내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나를 맞이했다. 그 모습을 보자 저녁 내도록 뜨끈뜨끈했던 배 속에서 열기가 확 치솟았다.

안기라는 듯 팔을 벌린 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터벅터벅 걸어가 그를 마주 안았다. 장난스럽게 키득키득 웃고 있던 황태자가 깜짝 놀라 웃음을 멈추었다.

“어…… 루크?”

“……예.”

“당신 정말 어디 아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프지 않습니다.”

“그럼 왜 방금…….”

“그냥요.”

“그냥?”

황태자가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간다는 표정이다.

“그냥 그러고 싶었는데…… 혹시 무례했나요?”

그 말에 황태자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가 내 손을 잡아채어 다시금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전혀 무례하지 않았어.”

“…….”

“앞으로도 이렇게 안겨 주면 안 될까? 응?”

“…….”

“자주는 아니어도 한 사나흘에 한 번씩이라도…….”

황태자가 흥정을 시도했다. 포옹으로 흥정을 하다니. 그 모습이 우스워 고개를 파묻은 채로 작게 웃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내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믿기지 않아.”

“…….”

“당신이 먼저 내게 안기다니.”

뭐가 그렇게 믿기지 않는 걸까. 이때까지 한 번도 포옹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하는 그가 의아했지만, 그걸 따져 묻기에는 사실 나도 많이 놀란 상태였다.

……충동적으로 행동한 결과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팔을 벌린 그를 마주 껴안았을 때, 어쩌면 그가 싫어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안기라며 팔을 벌린 것은 그였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분명 두려워했다. 건방지다고 밀치면 어쩌지?

그러나 황태자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건방지다고 비웃지도 않았다. 경멸하는 시선도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할 뿐이었다.

다행이다. 안도감이 온몸 구석구석 퍼졌다. 하루 종일 복잡했던 머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저녁 내도록 뜨거웠던 배 속도 이제야 좀 편해졌다.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이렇게 행동해도 당신은 좋아할까?

“음…….”

그 순간 그가 곤란하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나를 살짝 밀어냈다.

……이건 너무 과했나? 간신히 고개를 쳐들었던 자신감이 맥없이 수그러들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마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속삭였다.

“루크.”

“예.”

“잠시만…… 잠시만 뒤로 갈래?”

“……네?”

“내가 일이 좀 생겼거든.”

“일이요?”

갑자기 일이 생기다니? 무슨 일이지? 혹시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키자 그가 이불을 끌어와 자신의 하반신을 가렸다. 하반신은 왜…….

아.

“설마…….”

아니지요?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가 민망하게 웃었다.

“미안해.”

“…….”

“안 그러려고 노력했는데…….”

“…….”

“금방 처리하고 올게.”

노력…… 그게 노력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긴 하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포옹 한 번에 발기하는 건 조금 과하다.

그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차마 이불을 끌고 갈 수는 없는지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그가 양손으로 앞섶을 가린 채 천천히 방을 벗어났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괜히 민망하기도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달칵, 문이 닫혔다. 그가 급한 용무를 처리하려고 나간 방에 나 홀로 남았다. 그가 펼쳐 놓고 간 이불을 개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는 배 속이 뜨끈뜨끈했는데 이번에는 얼굴이 뜨끈뜨끈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등줄기도 간질간질했다.

나는 또 왜 이러는 거야. 정말 알 수 없다.

그냥…… 빨리 자야겠다.

본능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재빨리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 억지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어야 해. 지금 그와 마주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선 안 돼.

한참 후에 내가 진짜로 잠이 들 때까지, 황태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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