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7/34)

6장

목덜미를 타고 오르는 검은 거미.

내 어리석은 삶의 흔적.

달칵, 화장실의 문을 닫고 나왔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황태자의 말을 듣고 화장실로 달려가 귀 뒤를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설마, 설마 했다.

그게 내 흔적일 리 없어. 하지만 설마는 실제가 되어 나를 치고 지나가고 말았다.

흔적.

나는 멍하니 복도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냥 참을 수 없이 웃겼다. 내 과거가 웃겼고, 살해를 당하고 300년 뒤에 환생한 지금의 내 모습도 웃겼다. 정말 이상하지. 그렇게 구질구질한 삶을 보내 놓고 또다시 아득바득 태어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의 말이 떠올랐다.

‘저딴 것을.’

황제가 맞았다. 내 삶은 ‘저딴’ 삶이었다. 삶에도 경중이 있다고 치면 내 삶은 깃털보다 가볍고, 구정물보다 더러웠으리라.

들판에 그저 피어난 한 떨기 꽃보다도 못 한 내 삶. 그런 삶을 누려 놓고 또 무슨 부귀영화를 보자고 태어났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발걸음을 옮겼다. 뛰쳐나왔던 침실을 향해 돌아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정신은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귓가에서 속살대는 거미가 점점 몸집을 불리는 것 같았다.

‘더러운 것.’

거미가 속삭였다.

‘천한 것.’

앞발을 드러낸 거미가 머리 꼭대기를 향해 기어올랐다.

‘남창.’

거미는 킬킬대고 나를 비웃는다. 남창이 여기 있구나. 평민으로 태어나 스스로 몸을 팔기로 결심한 남창이 과연 여기에 있었구나.

자, 다들 보아라. 여기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가 있다. 고귀한 황제가 성은으로도 감쌀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남창이 여기 있다!

시끄러워.

나는 귀를 막았다. 거미는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남창. 남창. 남창. 남창.

남창이 여기 있다. 가장 추한 자가 여기 있다.

제발, 닥쳐!

간신히 걸어온 긴 복도의 끝. 닫힌 방문은 한 걸음 앞에 있다. 방 안에는 황태자가 있을 것이다.

침대 위에 누워 있을까? 어딜 갔다 왔느냐고 물을까? 그럼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거미를 보러 다녀왔어요.

황태자는 물을 것이다.

무슨 거미인데?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아, 그건 제가 남창이라는 증거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해야 하나? 황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차마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하, 혹시 알고 계세요? 이 거미가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제가 살던 시대에 신체에 낙인을 찍는 것은 노예거나 창녀라는 뜻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남창이었죠. 스스로 그런 삶을 선택했거든요.

전하께서는 제가 평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이 낙인의 의미도 알 수 있겠네요. 맞습니다. 저는 몸을 팔았어요. 당신의 선조, 황제 델루니안에게 말이에요. 그리고 버림받았죠.

그의 시대에도 이런 낙인이 있을까. 나는 문손잡이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만약 황태자가 사는 이 시대에도 창녀라는 것을 나타내는 흔적이 있다면 황태자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점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낙인과 비슷하네, 이러면서 깨달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문을 여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황태자가 방 안에 없으면 어떡하지?

나는 황제가 내게 보낸 경멸 어린 시선을 잊지 못한다.

‘저딴 것을.’

시리도록 차가운 그 말의 온도도 생생하다. 두 번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그 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던 그 말. 그게 다 내 잘못이라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던 그 밤의 고통.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두 번은 견딜 수 없어.

내 삶을 후회하는 것은 그 밤으로 족했다. 몸을 팔기로 결심했던 나 자신을 후회하는 것은,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괴로웠으니까.

그러니까.

방 안에 있어주세요, 전하.

나는 벌벌 떨리는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지옥의 문을 여는 것처럼 심장이 떨렸다. 가벼운 문고리를 잡아 내리는 것이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전하.”

그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있는 것은 오로지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뿐.

나는 멍하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헝클어진 침대 시트, 열린 창문과 햇살, 넓지만 숨을 공간 따위는 없는 방. 안을 둘러보는 내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없네.”

없네.

없어.

그 순간, 잠시 조용했던 거미가 속삭였다. 남창.

더러운 것. 천한 것. 그것 봐. 황태자도 없어. 더러운 네가 싫어서 떠나 버렸어.

보여? 빈방이라고. 황제랑 똑같네? 황태자도 가 버렸잖아. 이 천한 것아. 간사한 목소리가 정신을 긁었다. 너는 버림받을 운명이야. 알아?

나는 발길을 돌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황태자가 떠났을 리 없어.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나는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예쁘다고 하셨잖아. 내 머리를 직접 빗어주셨잖아. 그런 분이 나를 떠났을 리 없어.

거미는 속삭임을 멈추지 않았다.

남창! 남창!

나를 비웃는 이 악마를 떼어 낼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다.

미칠 것 같아. 살려 줘. 제발 날 이 지옥에서 꺼내 줘.

후들거리는 다리로 1층에 막 내려왔을 때였다.

1층 응접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분명 황태자의 목소리였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빛줄기를 발견한 기분이 이와 같을까.

나는 천천히 응접실 쪽으로 걸어갔다. 반쯤 열린 응접실의 문 너머로 황태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슴 깊숙이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여기 있었구나. 완전히 떠나 버린 건 아니구나. 다행이에요. 저는 전하께서 완전히 떠나 버린 줄 알고,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허물어진 정신을 간신히 추스르며 문을 열 때였다.

“전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응접실의 문을 열던 손이 멈췄다.

열린 틈 사이로 금발이 보였다.

……금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순도 높은 금발은 눈에 익은 것이다. 결이 좋아 찰랑거리는 깨끗한 금빛 머리칼.

그가 몸을 돌렸고, 문틈으로 눈이 마주쳤다.

하늘을 담은 눈동자가 그와 같을까.

바다를 품은 눈동자가 그와 같을까.

숨이 막힌다. 세상이 하얗게 질려 갔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금빛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 그리고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황태자의 차가운 표정뿐.

결국 이렇게.

“……비서관님?”

나는 또, 버림을 받는 건가.

황태자의 차가운 얼굴이 나를 향한다.

저런 얼굴을 언젠가 봤던 것 같다. 언제였지? 굳이 언제라고 따질 필요도 없을 만큼 자주. 아니, 항상.

황제는 항상 나를 저런 표정으로 봤다. 내가 남창이었다는 것을 인지한 이후로는 특히.

그 전까지는 그래도 희미하지만 웃어주곤 했는데, 그 이후로는 일말의 웃음 조각도 주지 않았지. 그랬다. 그 표정이 딱 저랬다.

싫어.

그런 표정은 정말 싫어.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차갑게 식은 손가락 끝이 느껴졌다.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는 만큼 내 마음도 차가워지고, 내 세계가 차가워진다. 북극의 빙하처럼 얼어붙는 나의 세계.

“라파엘?”

그때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자, 그의 차가웠던 얼굴에 잉크가 퍼지듯 웃음이 퍼졌다.

……어라?

그 급작스러운 표정의 변화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응접실의 문을 완전히 열어젖힌 황태자가 만면에 화색을 띠고 다가와 물었다.

“어딜 다녀왔어?”

기다렸잖아. 그가 속삭였다.

“……기다리셨다고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응. 갑자기 뛰쳐나가기에 당황했어.”

“…….”

“거기 서서 뭐 해? 들어와.”

황태자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응접실 안으로 끌려 들어가자 그곳에는 그를 제외하고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명은 갈색 머리에 평범한 얼굴을 가진 남자.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안녕하세요?”

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부신 금발과 깨끗한 파란 눈. 빙그레 웃는 남자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신입 비서관 아인 퍼스입니다. 라파엘 비서관님.”

……리안이 아니다.

남자는 리안이 아니었다. 결 좋은 금발이나 바다를 품은 것처럼 푸른 눈동자는 리안의 것과 똑같았지만, 전체적인 생김새가 리안과 달랐다.

기사 중의 기사인 리안은 혹자가 칼보다 꽃을 드는 게 더 어울릴 정도라고 칭송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자신을 아인 퍼스라고 소개한 남자는 곱게 생기긴 했지만 리안의 미모와 비견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비되었던 이성이 돌아오자 그 차이가 보였다.

황태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나를 향해 웃고 있다. 마치 방금 전의 차가웠던 표정이 모두 꿈인 것처럼 따뜻한 시선에 날뛰던 거미가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얼어붙었던 세계가 녹아내렸다. 한껏 뒤틀린 세계가 원위치를 찾아갔다. 차가운 마음에 한 줄기 햇볕이 찾아들었다.

다행이야.

저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있어서, 그가 떠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남성은 황실의 비서관이라고 했다.

비서관이라. 지난번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왔을 때도 궁금했다.

도대체 비서관이라는 게 뭘까? 시종쯤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라보고 있는데 갈색 머리의 남자가 손을 내밀며 내게 인사해 왔다.

“오랜만입니다, 라파엘 비서관.”

“아, 예.”

“몸은 좀 괜찮나요?”

“예, 괜찮습니다.”

그 말에 나단 비서관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기억이 안 돌아왔어요?‘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저런.”

안타깝다는 듯 살짝 얼굴을 찌푸린 남자가 자신은 나단 호크라고 밝혔다. 라파엘과는 비서실 동기란다.

원래는 황후 전담 선임 비서관이지만 라파엘이 병가를 낸 동안 황태자까지 담당하게 되었다며, 빨리 쾌차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쾌차하라니. 나는 좀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지금 아주 멀쩡하다. 더 이상 좋아질 수 없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이니 ‘쾌차’하라는 말은 제정신으로 돌아오라는 말일 것이다.

제정신.

결국 지금의 ‘나’는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입안이 쓰다. 거미 모양의 점은 내가 라파엘이라는 증거지만 나는 여전히 나와 라파엘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어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하겠는가.

나는 루크고, 라파엘은 라파엘이다. 아무리 라파엘이 내 환생이라지만 별개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루크인 나를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말이 영 씁쓸했다.

그때 아인 퍼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럼 혹시 그때 일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그때 일? 갑작스러운 말에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그때 정말 감사했다고 꼭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그때 비서관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무슨 소리지. 나는 쑥스럽다는 듯 볼을 붉히고 웃는 아인 퍼스를 바라보았다.

말하는 것만 들어 보면 일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라파엘의 기억이 없으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다.

아인 퍼스는 조잘대듯 말을 이었다.

“비서관님께 교육을 받는다고 들어서 기대했는데, 사고 소식을 듣고 너무 아쉬웠어요.”

“아…….”

“물론 지금 나단 비서관님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꼭 다시 뵙고 싶어서…… 정말 기대했거든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로서는 기억에 없으니 맞장구를 쳐줄 수도 없고 영 난감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횡설수설하던 아인 퍼스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지금 제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죄송해요.”

그러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아니, 죄송할 것까지는 없는데.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였다. 황태자가 기가 차다는 듯 하, 하고 혀를 찼고, 아인 퍼스의 맞은편에 있던 나단 비서관이 고개를 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팬미팅은 그쯤에서 끝내자고, 아인. 지금은 업무 중이잖아.”

“아, 아, 예. 죄송합니다!”

아인 퍼스가 죄송하다고 물러나자 나단 비서관이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야기를 마저 하죠.”

그 말에 황태자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분명히 말했어요. 싫다고.”

……뭐가요?

황태자는 떼를 쓰는 아이처럼 뚱하게 입을 내밀고 있었다.

뭐가 싫다는 걸까. 왜 저렇게 골이 난 거지.

두 사람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대충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황태자가 ‘이리와’라며 나를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아니, 전 여기가 편한데요.

하지만 저렇게 부르는데 안 갈 수도 없어서 황태자의 옆자리에 앉으니 나단 비서관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지금의 경호 인력으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건 경호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멀뚱히 앉아 있으려니 아인 퍼스가 다가와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드세요.”

아, 이런 건 집주인이 해야 하는 건데. 물론 내가 집주인은 아니지만 어쨌든 손님이 해야 할 일은 아닌데 말이야.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뭘요. 아, 신문 보실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인 퍼스가 신문을 내밀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흘끗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짓으로 대답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마저 대화하세요.

황태자가 불퉁하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라진 문자 체계가 낯설었지만 며칠 동안 책을 읽으며 어느 정도 적응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신조어는 좀 어렵지만.

그렇게 펼친 신문의 1면에는 아주 익숙한 얼굴이 실려 있었다.

“……전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황태자가 ‘응?’ 하며 대답했다. 나는 멍하니 물었다.

“혹시 반란이라도 일어난 건가요?”

그 말에 황태자가 피식 웃었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팔락팔락 신문을 넘겼다. 『리퍼블릭』이라는 신문에는 온통 황가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황태자의 폭행 일지부터 시작해 황제와 여비서관의 섹스 스캔들, 황후의 측근이 저지른 탈세 혐의 등등. 다시 1면으로 돌아왔다.

1면에는 대학도시 내 카페테리아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황태자의 모습과 함께 ‘공권력 행사?’라는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제목이 붙어 있었다.

기사는 한 달 전 있었던 교통사고로 칩거 중인 황태자가 대학도시 내에서 일으킨 폭행 사건을 다루고 있다.

공식 행사를 모조리 파투 낼 정도로 몸이 아프다는 황태자가 국민을 두드려 팰 정도로 튼튼하다니 이게 무슨 조화냐는 식으로 쓰여 있는 기사를 보고 있노라니 조금 충격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막 황태자를 조롱해도 되는 건가.

다음 장으로 넘기자 2면에는 이때까지 황태자가 일으켰다고 추정되는 폭행 사건들을 줄줄 적어 놓은 행적 일지가 있었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자, 황태자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믿지 마. 절반은 과장이고, 절반은 아예 틀렸어.”

몇 장을 더 넘기자 논설이 실려 있다. 황실 일가의 무법적 행태에 대한 규탄 논설이었다.

나는 점점 이 기사를 쓴 사람들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써도 괜찮은 거야? 목 안 날아가?

“이래도 괜찮은 걸까요…….”

화가 난 황제가 처벌하지는 않을까. 영 걱정되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황태자가 끼어들었다. 조금 핀트가 엇나간 대답이었다.

“괜찮지는 않지. 이런 언론 플레이가 많아지면 아무래도 황실이 좀 난처해져.”

아니…… 제가 걱정한 대상은 이 기사를 쓴 사람들인데요. 그나저나 언론 플레이는 뭐지? 황실이 왜 난처해진다는 거야?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끔뻑 뜨자 황태자가 친절히 설명했다.

“황실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서 황가를 흔들려는 거지.”

그래도 나는 영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실의 도덕성과 황가의 존속이 무슨 상관이지?

황제 델루니안은 명군이었지만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제일 잘 안다. 사람을 파리처럼 보는 인간이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폐위시킬 수는 없었다. 막말로 황제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사람 위에 군림하는 신과 같은 존재. 평민은 감히 망토 끝자락도 만질 수 없는 고귀한 신분. 그가 곧 법이고 정의였다.

인간적으로야 냉혈한이다 뭐다 욕할 수는 있겠지만, 그 문제로 폐위를 논할 수는 없는 세상이 내가 살던 세상이다.

그때 대학 도서관에서 보았던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실질적 군주제 폐지를 외치던 대학생들. 군림하는 군주의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는 그들. 그리고 황실에 도덕성에 흠집을 내어 황가를 흔들려 한다는 신문. 참 세상이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다.

“아무튼 경호 문제 때문에라도 돌아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황태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라파엘 비서관은 어쩌고요?”

“예?”

“라파엘 비서관은 지금 자기 집도 제대로 못 찾아 들어가는데, 정신도 온전치 못한 사람을 여기 혼자 내버려 둡니까?”

“아, 그거야 사람을 따로 쓰면…….”

“싫습니다. 다른 사람은 못 믿어요. 내가 돌봐야 합니다.”

그때 깨달았다. 아, 황태자의 거취 문제에 관한 얘기였구나. 나단 비서관은 지금 황태자더러 황궁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거고, 황태자는 죽어도 싫다고 우기는 상황인 것 같다. 그리고 그가 거부하는 이유는 아마도 나.

황태자가 돌아간다고? 뚱한 표정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황궁으로 돌아간다…… 그럼 나는? 그가 돌아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머릿속으로 라파엘의 위치를 그렸다.

라파엘은 황태자의 비서관이자, 비공식적 연인이다. 남성 간의 결혼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계속 미루었다는 말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남성 간의 결혼이 그리 환대받는 세상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황제의 섹스 스캔들이 문제시되는 세상이니 후궁 같은 것도 없으리라 추측된다.

후궁이 있었으면 황제와 교접을 했다는 그 여비서관이 후궁이 되었겠지. 지금 이 세상은 아마도 일부일처제인 것 같다.

비공식적 연인. 동성애. 일부일처제. 그리고 도덕성. 위의 정보들을 종합해 보면…… 황태자의 귀향길에, 비공식적 연인이자 후궁도 아니며 심지어 비서관으로서의 역할은 수행할 수 없는 나는 동행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건 좀 싫은데.

눈을 처음 떴을 때 본 사람이 황태자라 그런 걸까. 나는 심정적으로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다정한 사람이다. 나를…… 그러니까 라파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내가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믿고, 따르게 되는 존재.

그런 사람이 나를 두고 떠난다니, 생각만으로도 조금 침울해졌다.

돌아가긴 해야겠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도 안 좋다고 하고, 황태자가 황궁을 너무 오래 벗어나면 보기에 안 좋으니까. 알고는 있다. 그런데 그냥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때 황태자가 말했다.

“라파엘 비서관의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해요.”

그 의미심장한 말에 무어라 반박하려던 나단 비서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내가 책임질 겁니다.”

“……전하, 혹시.”

나단 비서관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하지만 물어보기는 해야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입을 떼자 황태자가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비서관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게 맞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거취에 관해서는 말도 꺼내지 말아요.”

“맙소사…….”

그 말에 나단 비서관이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그는 나와 황태자를 번갈아 보며 울상을 지었다. 도대체 왜 저러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역시 경호 문제가…….”

“경호는 지금 인원으로도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하다니요. 이 넓은 저택을 어떻게 지금 인원으로 경호합니까. 그리고 저는 전하의 전담 비서관이 아니라 앞으로 일정을 수행할 때마다 차질이 생길 텐데요.”

‘당장이야 큰 일정이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요’라며 나단이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듯 이어 중얼거렸다.

정말로 곤란해 보였다. 그냥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황태자를 볼 때였다.

“저…….”

아인 퍼스가 끼어들었다.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의 시선이 아인 퍼스를 향했다.

나단 비서관과 황태자의 시선이 마치 ‘넌 뭔데 끼어들어?’ 하고 따지는 것 같다. 그 날카로운 시선을 꿋꿋하게 받아 낸 아인 퍼스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제가 여기 남으면 되지 않을까요?”

“……뭐?”

황태자의 얼굴에 물음표가 찍혔다.

나 역시 의아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인 퍼스가 여기에 남는다고?

“저는 경호도 할 수 있고, 일정도 수행할 수 있는데…….”

그 말에 나단 비서관이 ‘아’ 하더니 말했다.

“네가 이번 합격생 중에서 사격 수석이었지?”

“예.”

황태자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비서관이 사격 수석이야. 경호실 인간들은 발로 쐈습니까?”

“요즘 분위기가 하도 흉흉해서 유사시에는 경호까지 맡을 수 있는 사람을 우선으로 뽑았거든요.”

“…….”

“라파엘 비서관도 그 점을 가장 높게 평가했고요.”

그 말에 황태자가 휙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강렬한 안광은 진짜냐고 묻는 것 같다. 저도 몰라요. 어색하게 웃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단 비서관은 황태자와 아인 퍼스를 번갈아 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황궁으로 절대 돌아오지 않으실 거면 아인도 나쁘지는 않죠. 좀 맹한 구석이 있지만 사격은 최고 수준이고, 또 비서관 일도 적당히 익혀야 하니까…….”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지는 못 하겠지만 어쨌든 아인 퍼스가 있으면 황태자가 안 돌아가도 된다는 거겠지?

나단 비서관이 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은 황태자였다.

황태자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싫어.”

싫다고? 황태자가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정말 삐친 아기 같다. 그 모습에 윗선에 얘기를 해봐야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단 비서관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인도 싫으시면 황궁으로 돌아오셔야 하는데요?”

“안 돌아갑니다.”

“……전하.”

돌아가기도 싫고 아인 퍼스도 싫다는 건가. 이러면 안 되지만 문득 황태자가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다른 무언가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포기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황제 델루니안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대륙 통일과 사랑, 그 두 가지를 모두 쟁취한 델루니안 같은 사람은 흔하지 않아.

나는 한숨을 쉬며 아인 퍼스를 바라보았다. 아인 퍼스는 황태자의 거부에 풀이 죽은 듯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그 머리 위로 축 처진 귀가 보이는 것 같다.

아인 퍼스가 서글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열심히 할 자신 있는데요…….”

그 모습을 보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황태자를 불렀다.

“전하.”

“……왜?”

불만에 가득 찬 연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잘생긴 얼굴이 부루퉁하다. 삐친 아이 같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다정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저는 이곳이 참 좋습니다.”

“……근데?”

‘당신은 여기 있을 테니 나보고 황궁으로 가라는 거야?’ 황태자가 그런 눈빛으로 나를 흘겨본다. 그게 아니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전하께서 황도로 안 돌아가시고 저와 함께 있어주셨으면 해요.”

나단 비서관이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인 퍼스도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듣기에 조금 낯부끄러운 말이지. 인정한다. 나도 조금 부끄러웠다. 이런 말은 황제에게도 하지 않았는데. 황태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그거 진심이야?”

말까지 더듬는 걸 보니 어지간히 놀란 것 같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태자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안 웃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입꼬리가 점점 하늘을 향한다. 자세히 보니 귓불이 새빨갰다.

“미치겠네…….”

미치지는 마시고요. 한참을 침묵하던 황태자가 잠시 후 나단 비서관을 향해 말했다.

“좋아요. 이 사람으로 합시다.”

“예?”

“나는 황궁으로 돌아가기 싫고 이 사람은 경호에 업무 수행까지 할 줄 안다니, 대충 합의 보자고요.”

나단 비서관이 두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그는 멍하니 나와 황태자를 번갈아 보더니, ‘아, 아, 예. 상부랑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하고는 몸을 일으켜 응접실 바깥으로 나갔다. 응접실에 남은 것은 나와 황태자, 그리고 아인 퍼스뿐.

그때 아인 퍼스가 말했다.

“저, 이런 말은 좀 이를 수도 있겠지만.”

“…….”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한다니. 그 씩씩한 인사에 황태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그를 대신하여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인 퍼스 비서관님.”

그 대답에 아인 퍼스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 * *

상부와 통화하고 온 나단 비서관은 황궁으로 돌아가 경호실과 인원 조절을 해야겠다고 말하며 아인 퍼스를 이끌고 나갔다.

“경호실 인원이 조정되는 대로 보내겠습니다.”

조정되기까지 며칠이 걸릴 수도 있으니 최대한 동선을 줄여 달라는 부탁에 황태자가 귀찮은 파리를 내쫓듯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알겠으니까 빨리 가세요, 좀.”

나는 거의 쫓겨나듯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두 사람이 저택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황태자가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밝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늦었지만 아침 먹을래?”

요 며칠 나를 괴롭게 하는 저 말에 그저 가만히 웃었다.

이번엔 또 뭘까. 생선 대가리가 둥둥 떠다니는 수프일까, 아니면 버터가 타다 못해 눌어붙은 토마토일까.

멀쩡히 존재하는 황실 파견 요리사를 두고 굳이 제 손으로 아침 식사를 만드는 황태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가 직접 만든 음식을 두고 못 먹겠다고 거절할 정도로 내가 담력이 센 사람은 또 아닌지라 고역의 아침 식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냥 안 먹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오늘은 밖에서 먹자.”

식탁 밑에 놓여 있던 피크닉 바구니를 꺼내 들며 황태자가 말했다.

“밖이요?”

“응, 날씨가 좋잖아.”

“하지만 방금 비서관님이 최대한 동선을 줄여달라고…….”

“저택 밖으로는 안 나갈 거야.”

“그럼요?”

그가 손짓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웃었다. 수풀과 개울,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너른 들판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저택에 와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산책을 해본 적이 없구나. 새로운 육체에 적응하기도 바빴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루이 채스터턴의 존재에 놀라 책만 팠더니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바깥 구경을 안 했다.

황궁에서 지낼 적,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 번은 산책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나가고 싶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황태자가 불쑥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가자. 맑은 공기 쐬자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이끌었다.

건물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개울이 가까운 수풀 속에 자리를 잡았다. 언제 챙긴 건지 돗자리까지 야무지게 챙겨 온 황태자가 내게 가장 편한 자리를 양보했다.

이런 호의는 역시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손을 저으니 그가 ‘사양하면 또 벌을 줄 거야’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냉큼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떤 게 좋아? 참치? 아니면, 닭고기?”

“예?”

“샌드위치 말이야. 당신이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서 두 종류로 만들었거든.”

두 종류나? 아니, 그것보다.

“직접 만드셨다고요?”

바구니 안에 든 샌드위치가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기에 당연히 요리사인 하퍼 씨가 만든 줄 알았다.

이건 정말 큰 발전인데? 깜짝 놀라서 되묻는 나를 보며 황태자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퍼 씨한테 지도 좀 받았지.”

“지도씩이나…….”

“당신 입에 들어가는 건데, 이왕이면 맛도 모양도 예쁜 게 좋잖아?”

그 말을 듣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그럼 처음부터 요리사를 시키면 편하지 않았을까’였다.

요리사의 음식이라면 분명 맛도 모양도 훌륭할 터이니, 굳이 힘들게 요리 지도를 배워 가면서까지 만들지 않았을 것 아니야.

“감사히 먹겠습니다, 전하.”

아무튼 나를 위해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는 그 정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감사하다 대답하며 참치 샌드위치를 골라 집자 그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그 시선이 못내 부담스럽다.

나는 원래 거짓말을 잘 못 한다. 굳이 바깥으로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표정만 봐도 속내를 훤히 들키고 마는 그런 성격이었다. 샌드위치가 맛이 없다면 얼굴에 티가 날 터. 황태자는 분명 상처를 받을 것이다. 상처 주고 싶지는 않은데…….

망설임 끝에 간신히 한 입 베어 물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샌드위치지만, 요리 실력이 재앙에 가까운 황태자가 만든 것이니 맛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

“어?”

“어때?”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내가 먹은 게 황태자의 샌드위치가 맞나? 깜짝 놀라서 샌드위치를 살폈다. 맞다. 황태자가 만든 참치 샌드위치다. 황태자가 ‘어때? 응?’ 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정말로 맛있습니다.”

“진짜?”

“예.”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맛있었다. 놀랍다. 어제까지만 해도 재앙에 가까운 요리를 내어놓았던 황태자가 이렇게 맛있는 샌드위치를 만들게 되다니.

정말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나 보다. 다시 한 입 베어 물었다. 역시 맛있었다. 내 착각이 아니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맞이하는 제대로 된 아침 식사인가. 신나서 샌드위치를 해치우고 있는데 황태자가 행복에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드디어 내 꿈이 이루어졌어.”

“꿈이요?”

“응.”

갑자기 무슨 꿈 이야기지?

샌드위치를 문 채로 의아하게 바라보자, 황태자가 손을 뻗어 내 뺨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주며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

“그리고 그게 아침 식사였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지. 아침부터 사랑하는 사람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잖아.”

문득 내 손에 들린 참치 샌드위치가 무겁게 느껴졌다. 먹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며칠 동안 내가 먹은 음식들이 떠올랐다.

생선 대가리 수프와 타다 못해 눌어붙은 버터 토마토. 탄화된 빵과 달다 못해 혀가 아린 잼.

그런 것들을 먹으면서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나와 그런 나를 보며 안타까운 듯, 민망한 듯, 실망스러운 듯 입술을 깨문 황태자.

요리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자란 그가 어설프게 만든 음식들은 모두, 내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함이었다.

‘저딴 것을.’

……아니지. 내가 아니지. 나 같은 놈을 위한 것이 아니지.

“왜 더 안 먹어? 물이라도 줄까?”

황태자가 다정히 물었다. 그 목소리가 퍽 다정해서 가슴이 아파 왔다. 왜 하필 당신일까. 왜 하필 그와 똑같이 생긴 당신이 내게 이렇게 다정한 걸까.

“이러지 마세요.”

“응?”

“저한테…… 이렇게 잘 대해 주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내뱉은 뜬금없는 말에 황태자가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요……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황으로 얼룩진 다부진 얼굴이 두 눈에 가득 들어찬다.

황제는 내 웃는 얼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내가 왜 머리를 잘랐는지, 그 추운 겨울 창가에서 왜 서성댔는지, 어째서 낙인을 찍었는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내 몸. 자신의 정욕을 받아줄 존재로서의 효용 가치를 지닌 내 육체. 그리고 리안과 닮은 얼굴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전쟁으로 지친 그를 위해서 나는 필사적으로 웃었지만, 내 웃는 얼굴은 그에게 아무런 행복도 가져다줄 수 없었다.

그래서…….

“제가 착각할지도 모르거든요.”

“응?”

“……저는 루크잖아요, 전하.”

내 웃는 얼굴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황태자는 내게 지독히도 위험한 존재다.

“뭐?”

“저는 라파엘 드마뉴 백작이 아니에요.”

“…….”

“저는 루크인데…… 제가 감히 착각할까 봐.”

그게 두려워요. 제가 또 어리석은 착각을 해서, 주제 모르고 전하의 애정을 탐했다가 또 그런 결말을 맞게 될까 봐서요.

라파엘 드마뉴 백작이 내 환생임은 알겠다. 귀 뒤에 점처럼 남아 있는 거미 모양의 문신이 그와 내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진실로 라파엘 드마뉴 백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와 황태자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많은 시간과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 있을 터. 그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한 나는 그저 이방인에 불과할 뿐이다.

황태자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라파엘 드마뉴. 그가 원하는 것은 라파엘 드마뉴의 웃는 얼굴.

그의 눈동자에 오롯이 새겨진 사람은 검은 머리의 검은 눈동자를 가진 라파엘이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내가 아니다.

나인데 내가 아닌 존재는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슬펐다.

그때 황태자가 물었다.

“착각하면 어떻게 되는데?”

“예?”

“당신이 방금 그랬잖아. 착각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어떻게 돼?”

……어떻게 되냐고?

나는 멍하니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냐면. 그러니까.

“날 사랑하기라도 해?”

사랑.

그 한 단어에 심장이 바닥 저편으로 데구르르 떨어졌다.

사랑…… 사랑.

“응?”

“…….”

“대답해 봐, 루크.”

대답을 재촉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델루니안과 똑같이 생긴 남자의 얼굴. 짙은 눈썹과 일자로 쭉 뻗은 코, 깊은 눈매와 그 안에 자리 잡은 연녹색 눈동자.

눈동자 하나 빼면 그와 쌍둥이처럼 똑 닮은 당신을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어쩌면요.”

어쩌면, 나는 멍청하게 당신을 사랑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평생 받아 보지 못한 호의와 염려, 걱정과 사랑을 모두 주는 당신을.

……내가 한때나마 마음에 품었던 그 사람과 똑같이 생긴 당신을.

내 대답에 황태자가 환하게 웃었다. 태양처럼 눈부신 미소였다.

“내 애정이 싫은 건 아니지. 그렇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 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두려운 거였으니까.

“그럼 노력해야겠다. 당신이 완전히 착각할 때까지.”

“……전하,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하고 반박하려던 참이었다. 그가 양손으로 내 손을 붙잡더니 손등 위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서 중얼거리기를.

“마냥 착각만은 아닐 거야.”

“…….”

“내 애정은 루크인 당신을 향하기도 하니까.”

“…….”

“어쩌면 라파엘보다 더.”

그가 덧붙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쩌면 라파엘보다 나를 더 사랑할지도 모른다고? 그건 거짓말이야. 속으면 안 되는 거짓말…….

그때 내 손등에서 얼굴을 뗀 황태자가 눈을 맞춰 왔다. 그가 눈웃음을 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달콤한 고백.

“사랑해. 아주 많이.”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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