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6/34)

5장

나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 밑으로 드러난 남자의 목덜미. 그 목덜미를 길게 타고 내리는 상처가 너무도 익숙했다. 하얗게 표백된 머릿속은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럴 리 없어. 말도 안 돼. 이미 300년 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분명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내뱉었다.

“……채스터턴?”

그 말에 시드니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그 이름은 아주 오랜만에 듣네요.”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앞으로 크게 휘청한 몸을 붙잡은 것은 시드니였다.

“조심하셔야지요.”

그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일었다. 처음 황태자 샤를마뉴를 봤을 때, 그를 황제라고 착각했을 때처럼 몸이 떨렸다.

그때는 착각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이다. 채스터턴이 여기 있다. 지금, 바로 내 앞에. 그 사실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못 하고 몸을 떨자, 시드니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자마자 알았습니다. 당신이 루크 님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나는 황망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얼굴은 분명 다른데, 그 미소가 친숙했다. 그린 것처럼 매끄러운 저 미소. 끔찍하게도 두려운 저 얼굴.

“그래서, 각성하신 겁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각성? 각성이라니?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 각성이 뭔지 모르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난 이게 이해가 안 돼. 어떻게 당신이 여기 있을 수 있지?

그를 잡은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떼어 내며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어?”

300년이나 흘렀는데. 어떻게?

나는 절박하게 물었지만 시드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게 중요한가요? 모든 만물은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오게 마련인 것을요.”

있어야 할 곳……?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뭐?”

시드니가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돌렸다. 서가에서 책 몇 권을 뽑은 그가 내게 다가와 책을 안겨 줄 때까지,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온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되돌아오는 영혼에게는 흔적이 남게 마련입니다.”

“…….”

“2년 전,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그 흔적을 보고 당신이 루크라는 걸 바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신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말을 안 했죠. 어차피 좋은 기억도 아니니까요.”

뭐?

“그래서, 이제는 만족합니까?”

“잠, 잠깐. 방금 뭐라고 했어? 전생?”

“예, 전생이요.”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전생이라니.”

내 말에 시드니가 어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아직도 모릅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전생? 내 전생?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공포가 가신 곳에 혼란이 가득 차올랐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시드니는 ‘흐음……’ 하고 길게 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우선 바깥으로 나가서 얘기하죠.”

무슨 정신으로 출입 통제실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시드니가 안겨 준 책을 동아줄처럼 끌어안고 나오자, 경호관 한 명을 대동한 황태자가 다가와 한참 찾았다며 투덜댔다.

지금은 그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투덜대는 황태자를 본의 아니게 무시하며 시드니에게만 집중했다. 빨리 알아듣게 얘기해 보라고.

시드니는 멋쩍게 웃으며 황태자를 향해 말했다.

“네 비서관님을 좀 빌려도 될까?”

“음?”

“잠시 할 얘기가 있어서.”

그 말에 황태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얘기?”

어쩐지 퉁명스런 목소리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아까부터 어떤 것도 귀에 걸리지 않았다.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시드니가 던진 의뭉스러운 말뿐.

감히 황태자의 질문을 무시한 나를 대신해 시드니가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다고 하셔서.”

“……개인적으로 궁금한 거라니?”

“뭐…… 그냥.”

“…….”

황태자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었다. 그걸 보는 시드니의 표정은 야릇하게 변했다.

황태자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속이 타들어 갔다. 빨리 무슨 얘기인지 들어야 하는데.

내 시선은 시드니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시드니가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나와 황태자를 번갈아 보기를 몇 번.

황태자가 감정을 잔뜩 억누른 목소리로 드디어 허락했다.

“……이십 분. 딱 이십 분이야.”

그러고서는 몸을 휙 돌려 도서관을 빠져나간다.

좋아. 황태자도 갔으니 어서 알아듣게 설명해 봐. 지금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

시드니는 황태자의 뒷모습을 보며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놀랍네요.”

뭐가 놀랍다는 건가.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시드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시드니가 나를 데리고 향한 카페테리아라는 곳은 야외에 있었다.

철제 테이블에 앉자 시드니가 뭘 마시겠냐고 물었고, 어차피 뭐가 뭔지도 모르는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메뉴 고르고 있을 정신도 아니었고.

잠시 후 시드니가 종이컵을 들고 와 내게 넘겼다.

이건.

“엽차?”

“아직도 좋아하십니까?”

물론이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 있을 때 내가 즐겨 마시던 차가 바로 엽차였다.

수질이 좋지 않은 탓에 물을 끓여 마시는 풍습이 있는 제국에서 엽차는 평민들이 즐기는 차였다.

천한 맛이 난다며 황궁에서는 잘 취급하지 않는 차.

홍차처럼 붉은빛이 도는 엽차는 사실 홍차에 비할 맛이 못 되었지만, 나는 엽차조차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황궁에서도 이것만 줄곧 마셔 댔다.

황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엽차의 매력. 그 매력을 아는 사람은 전장에서 오래 구른 리안밖에 없었던 거로 기억한다.

이것까지 기억하고 있었군. 새삼 채스터턴의 기억력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멍하니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채스터턴의 짙은 은발과 달리 옅은 갈색 머리를 한 그는 홍차를 홀짝 마시며 나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당신, 채스터턴이 맞지?”

분명 저 웃음은 채스터턴이 맞는데, 외모가 너무 다르니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시드니는 무슨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저는 분명 채스터턴입니다.”

“…….”

“그리고 시드니 카턴이기도 하죠.”

그게 이상하다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 당신이 300년이나 지난 이 시간에 있을 수 있지?

“당신도 나처럼 누군가의 몸을 빌린 거야?”

내 물음에 시드니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건 꽤 창의적인 해석인데요?”

“아니야?”

“물론 아닙니다. 이건 제 몸이거든요.”

“당신은 채스터턴이잖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채스터턴입니다. 그리고 시드니 카턴이기도 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음악의 도돌이표 같다. 자신이 채스터턴이라고 주장하는 시드니 카턴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까 하려던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겠네요.”

“…….”

“우선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 묻겠습니다. 지금 당신은 누구입니까?”

뜬금없는 물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난 루크야.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루크.”

“그럼 라파엘은요?”

“내가 어쩌다 빌린 몸.”

시드니가 씩 웃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아직 각성이 제대로 안 된 모양이군요.”

“각성?”

“루크, 당신 눈에는 제가 누구로 보입니까?”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하는 건가.

시드니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는 채스터턴과 달랐다. 부드럽고 온화해 보이는 시드니와 달리, 채스터턴은 좀 더 귀족적이고 날카롭게 생겼다. 외모로 놓고 본다면 사돈의 팔촌도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채스터턴이었다. 그런 식으로 그린 듯 미소를 짓는 사람을 나는 단 한 명밖에 모른다. 그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채스터턴. 외모는 좀 달라졌지만 채스터턴이야.”

“예, 그렇습니다. 저는 시드니 카턴이자 루이 채스터턴이죠. ……그리고, 루이 채스터턴은 시드니 카턴의 전생입니다.”

전생. 아까도 들었던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그렇게 따지려던 찰나, 문득 한줄기 의혹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생?

시드니 카턴의 전생은 루이 채스터턴이라고 한다. 풀어 말하자면, 300년의 세월을 두고 루이 채스터턴은 시드니 카턴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소리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설마.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발치로 피가 모두 쏟아져 내리는 듯 아찔한 감각.

그 감각을 온몸을 받아 내고 있을 때, 시드니 카턴이 한숨처럼 말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라파엘, 당신의 전생이 루크란 말입니다.”

시간마저 멈춘 것 같았다.

“라파엘의 전생이…… 나라고?”

“지금 당신은 루크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당신이 라파엘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라파엘이라니. 나는 루크야. 그냥 루크. 어쩌다 이 몸을 빌리게 된 가엾은 한 영혼에 불과한 루크란 말이야.

“아니야. 난 라파엘이 아니야. 난, 난 그냥 어쩌다 이 몸을 빌린 거란 말이야.”

그 말에 시드니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꾸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신 말대로 내가 라파엘이라면, 나는 왜 라파엘의 기억이 없는데?”

“그건 그저 불완전한 각성일 뿐입니다. 전생을 깨닫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일을 겪죠. 물론 저도 겪었고요. 조만간 완전히 깨닫게 될 겁니다.”

각성. 그 말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다.

불완전한 각성이라고? 그럼 완전히 깨닫는 건 뭔데?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어. 300년이나 지났으니까, 죽어서 영혼으로 떠돌아다니다가 어쩌다 이 몸을 빌린 거라고.”

“귀여운 상상이군요.”

시드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영혼은 구천을 떠돌지 않습니다. 영혼은 전체의 일부로 돌아가 쉬었다가 다시 그릇을 찾아 되돌아올 뿐입니다.”

“……되돌아온다고?”

아까도 그렇게 말했지. 되돌아온 영혼이라고.

나는 그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돌아온다는 건데? 그리고, 흔적이라는 게 뭔데? 내 혼란스러움을 읽었는지 시드니가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혼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를 끝내고자 합니다. 끝내지 못한 과제를 마치기 위해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죠. 그리고 자신을 담을 그릇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몸에다가 흔적을 남겨 두고요.”

“…….”

“제 경우에는 이 목의 흉터가 바로 그 흔적입니다.”

시드니가 옷깃을 살짝 내려 목덜미로 길게 내려온 흉터를 보여주었다.

그래. 며칠 전 그의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채스터턴의 몸에도 저 흉터가 있었다.

어쩌다 생긴 거냐고 묻지는 못 했지만, 기사도 아닌 사람이 큰 흉터를 갖고 있어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채스터턴. 당신의 말이 맞는다면 내 몸에도 흔적이 있다는 거야? 내가 라파엘이라는 흔적이, 이 몸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아무리 루크일 시절의 내 몸을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특징이 있었더라? 모진 고문을 겪으며 나도 몰랐던 신체의 모든 부위가 전부 고통을 겪었다. 그러면서 신체적 특징도 다 잊어버린 걸까.

어떻게 23년이나 봐 온몸을 잊어버릴 수 있지? 황제의 탄탄한 육체는 박아 놓은 듯 선명하면서 정작 내 몸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멍한 머리로 억지로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시드니가 말을 돌리듯 물었다.

“근데 델루니안의 기록은 왜 찾는 겁니까?”

“…….”

“아직도 그를 사랑합니까?”

뭐?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아직도 그를 못 잊은 건가요?”

“아, 아니…….”

말이 꼬였다. 아닌데. 정말로 그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그를 못 잊은 것도 아닌데. 난 그냥, 내가 왜 죽었는지 궁금해서. 그래서 델루니안의 기록을 찾으려고 한 것뿐인데.

“300년이나 흘렀는데 아직도 그 감정만은 못 지웠나 보군요.”

“아, 아, 아니야. 난 그저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야. 도대체 왜 죽어야 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래서!”

“아하…….”

시드니가 어느새 다 마신 컵을 한 손으로 구겼다. 그는 흘러내린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은 모를 수도 있겠네요. 왜 당신이 죽어야 했는지.”

“내가 역모라니. 그건 말도 안 되잖아.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300년 전, 수천 번은 더 했을 말을 외치며 시드니를 노려보았다. 시드니는 그런 나를 찬찬히 훑어보며 여상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당신은 아무 짓도 안 했죠.”

그리고 그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당신은 무고했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러면서 웃는다. 그때는 그랬지, 라고 과거 회상을 하는 노인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대수롭지 않은 듯 웃는다.

“……알고 있었다고?”

“물론.”

“내가 아무 짓도 안 했다는 걸, 채스터턴 당신은 알고 있었다고?”

“그럼요.”

눈앞이 새빨갛게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우당탕, 하는 소리가 의식 저 멀리에서 들렸다.

뜨거운 물에 손을 데었지만 아프다고 느낄 새도 없었다. 눈앞이 핑 돈다는 느낌을 받은 순간, 어느새 나는 시드니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당신이었잖아! 모두 말할 때까지 고문하라고 했던 게 당신!”

“아아…….”

“내가 아무리 모른다고 소리쳐도 끝까지, 끝까지 고문했던 게 당신인데, 당신은 알고 있었다고?!”

사실을 토해 낼 때까지 신문하라고 했던 것이 당신이다.

내가 그렇게 당신을 불렀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때 그 지하 감옥에서, 그래도 아는 사람이 그곳에 당신밖에 없어서 그렇게도 당신을 불렀는데. 살려 달라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멱살을 잡힌 채로 시드니가 웃었다.

“그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렇게까지 고문할 줄은 몰랐죠.”

“…….”

몰랐죠, 라고 말하는 시드니는 일말의 미안함도 내비치지 않았다. 안타까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 선량해 보이는 얼굴에 드러난 것은 곤란함뿐. 그 반반한 낯짝을 보고 있노라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미안하다고 말로만 지껄이면 다야? 내가 그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데. 고통스럽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이런 게 지옥이구나, 내가 살아 있는 이 순간순간이 다 지옥이구나. 회개할 것도 없는데 회개하면서, 한 번만 살려 달라고.

절대 나쁜 맘, 나쁜 생각 안 하고 살겠다고. 그렇게 빌었는데. 대상도 없는 누군가를 향해서 그렇게 빌었는데.

……황제와 당신을 원망한 것도 한순간이었어. 그다음에는 그냥, 살려 달라고 빌었어. 나중에는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아서 궁금했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고.

근데 이제 와서 하는 소리가, 뭐?

‘그렇게까지 고문할 줄은 몰랐죠.’

이런 게 살의구나. 처음 깨달았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살의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시드니를 노려보았다.

당장 널 죽여 버리고 싶어.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가 당한 고통의 십 분의 일이라도 당하면서 죽었으면 좋겠어. 평생을 달구어진 지옥 속에서 끓었으면 좋겠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때 시드니가, 나와는 대조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내게 뭐라고 할 처지가 못 되지 않습니까?”

“……뭐?”

그가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내 손을 풀어냈다. 분명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그 멱살을 쥐고 있었는데도 체격 차이는 무시할 수가 없었는지 시드니의 간단한 손짓 한 번에 내 손은 힘없이 뜯겨 나갔다.

그가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때 그렇게 말했죠. ‘폐하의 처분을 기다리겠다’고.”

“…….”

“당신은 그 말로 스스로에 대한 권리를 황제의 손에 넘긴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지만, 고문을 명한 건 황제였습니다. 그도 그렇게까지 고문할 줄은 몰랐겠지만.”

그 말에 맥이 탁, 풀렸다.

‘폐하의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제와 리안이 서로 마음을 확인한 이후로 열리지 않는 문을 보며 했던 말. 어쩌면 조금 씁쓸했을지도 모르는 그 말.

분명 내가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기다린 처분이 고문은 아니었다.

내가 바란 건 그저.

그저.

“……인사, 였어.”

“…….”

“그냥, 잘했다고. 이때까지 고마웠다고. 아니, 그런 말까지도 필요 없고. 그냥 잘 가라고 말해주길.”

그런 말을 기다렸다.

잘 가라는 그 한 마디.

그거면 족했다.

“내가 바란 건, 그거였다고…….”

고작 그거였는데.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거야?

부끄럽게도 눈물이 차올랐다. 울고 싶지 않아. 채스터턴의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아. 절대 울지 않을 거야.

눈에 힘을 팍 줬지만 300년 치의 서러운 눈물은 방울방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에 가려 시드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 또 웃고 있을까? 그 속 모르는 얼굴로 웃고 있는 걸까? 몰라. 알고 싶지 않아. 정말 알고 싶지 않다고. 당신과 황제. 다 죽어버려. 그냥 다 죽어버리라고.

그때 바람결을 타고 시드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왜 되돌아왔는지 압니다.”

“…….”

“그건 아마도 당신의 의지가 아니었겠죠.”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내 발치에 기다란 그늘이 생겼다.

“루크, 당신이 죽고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뭐?”

“지금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당신은 차마 믿지 못할 거예요. 어쩌면 당신은 그 모든 진실을 알기 위해 이곳으로 돌아왔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말한 시드니가 내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눈물로 흐릿한 시야에도 그의 얼굴이 다가온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치 키스라도 할 것처럼 가까워진 얼굴. 나는 그 얼굴을 피할 수도 없었다.

내뱉는 숨결조차도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시드니의 짙은 갈색빛 눈동자뿐.

“……채스…….”

내가 채스터턴, 하고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시드니의 얼굴이 밀려났다. 그리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내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뭐 하는 거야!”

……연녹빛 눈동자 가득 분노를 머금은 황태자, 샤를마뉴였다.

* * *

연녹빛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대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얼굴을 얻어맞은 듯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훔치는 시드니가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하고 멍청하게 생각할 때였다. 뒤로 넘어진 시드니에게 다가간 황태자가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다시 귓가를 때릴 때야 제정신이 들었다.

“전하!”

세 번째로 주먹을 쳐든 그를 다급히 부르자, 마치 정지 마법에 걸린 듯 행동을 멈춘 황태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가슴이 흥분으로 씨근덕대고 있었다.

“그만, 그만하세요.”

분노로 이성을 잃은 황태자의 눈은 말 그대로 광기에 휩싸인 것 같았다. 마치 상처를 입은 야수처럼 번뜩이는 눈동자는 당장에라도 피를 보겠다고 아우성치는 것 같다.

나는 흥분한 짐승을 가라앉히는 사육사처럼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손…… 손 내리세요, 전하.”

그 말에 황태자가 하, 하고 숨을 내뱉었다.

“당신.”

하고 황태자가 나를 향해 입을 열 때였다. 퉤, 하고 피 섞인 침을 뱉은 시드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 아프다.”

“…….”

“너무한 거 아니야, 샤를?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내가 인상을 찌푸린 것과 황태자가 멈추었던 주먹을 휘두른 것은 동시였다. 다시금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문이 낳은 정신적 후유증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누군가 맞는 것도 싫고, 때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싫었다. 나는 다시 소리쳤다.

“전하!”

“말리지 마.”

‘개자식’ 하고 낮게 중얼거리는 황태자의 목소리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어 절로 몸이 떨렸다.

안 돼. 그러지 마. 적어도 내 앞에서 이러지 마. 무섭다고. 두려워서 미칠 것 같단 말이야.

나는 실눈을 뜬 채 황태자에게 다가가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제발 그만하세요.”

황태자의 가슴이 흥분으로 들썩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등을 꼭 껴안으며 다시 한번 제발,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황태자도 차마 나를 밀쳐 내지는 못 하겠는지 씩씩대며 손을 내렸다. 하지만 언제 또 때릴지 몰라 나는 그의 몸통에 두른 팔을 풀지 않으며 말했다.

“정말 별일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아니었어요.”

“거짓말.”

“정말이에요. 그저…… 제 눈에 무언가 들어가서 그가 봐준 것뿐입니다.”

“……하.”

연인의 부정을 눈앞에서 본 황태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냐는 듯 혀를 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진정되는 것 같아서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시드니를 바라보았다.

그때 시드니는 묘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속셈입니까?’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무슨 속셈이냐고? 글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니 황태자가 몸에서 힘을 풀었다.

나는 살며시 팔을 풀어 몸을 떼어 내고 아직도 주저앉아 있는 시드니를 향해 걸어갔다.

그 행동에 다시금 황태자의 눈빛이 매서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모른 척 다가가 시드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세요.”

시드니는 내가 내민 손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아 몸을 일으키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그때 황태자가 다가와 내 다른 편 팔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반대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어? 고개를 돌려 황태자를 바라보자, 단단히 굳은 표정의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다.

나는 다시 시드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묻은 피를 훔치던 시드니와 눈이 마주쳤다.

“다음에 또 보죠.”

시드니가 말했다. 그 뻔뻔한 작태가 우습다. 다음에 또 보자고? ……그래. 다음에 보자, 채스터턴.

“전하, 전…….”

“시끄러워.”

차가 주차된 곳까지 온 황태자는 나를 거칠게 차 안으로 집어넣은 후 반대편에 올라탔다.

앞에 앉은 경호관에게 ‘출발하세요’ 하고 지시한 그가 칸막이를 올렸다. 연녹색 눈이 분노로 일렁인다. 한눈에 봐도 미쳤다는 게 보일 정도였다.

문득 황태자가 운전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가 운전했더라면 대형 사고가 났을 것 같으니까.

마차에 익숙한 나에게 자동차의 빠른 속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다. 사고가 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도 안 된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차라리 안 보는 게 속이 편할 것 같았다.

그때 황태자가 말했다.

“사실대로 말해.”

“…….”

“그 자식이랑 무슨 얘기했어?”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나는 대답 없이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다시 추궁했다.

“도대체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데 입을 맞추려 해?”

“…….”

“눈에 뭐가 들어갔다고? 당신은 내가 병신인 줄 알아? 그 말에, 아, 그랬냐고, 이거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그럴 줄 알았어?”

그 뻔한 말에 속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거칠게 나올 필요는 없잖아.

연인의 부정을 목격한 황태자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추궁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되돌아온 영혼, 전생, 환생, 그리고 라파엘.

시드니는 내 환생체가 라파엘 드마뉴 백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몸에 되돌아온 영혼의 흔적이 있댔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루크일 시절 내 몸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문의 여파도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거울이라는 게 지금처럼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거울은 흐릿하게 형체를 반사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루크일 시절의 내 몸이라고는 전체적으로 선이 가늘었다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평민이었고 후궁이 되기 전까지는 거리에서 막 굴러먹던 놈이었다. 자잘한 흉터 한두 개는 필히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문.

고문을 당하면서는, 뭐, 흉터랄 것도 없다. 온몸이 걸레처럼 찢어졌으니까. 고문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시드니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고문을 직접 지시한 것은 황제라는 말. 그 말을 떠올리자 심장이 차가워진다.

정말 당신이었구나.

나를 찌른 사람이 당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문을 하라 명령한 것까지 당신일 줄은 몰랐지.

그래도 아니겠지 싶었어. 7년이나 품에 안은 사람이니까, 고문까지는 아랫것들이 멋모르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정말로 당신일 줄은 몰랐다고. 모르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말이야.

난 도대체 당신의 어떤 면을 믿었던 걸까. 단 한 번도 내게 다정함이란 것을 보여준 적 없는 당신인데도 믿었다.

그러나 진실의 일부분을 알게 된 지금 나는 내 어리석음에 감탄하고 있다. 천하를 제패했다는 냉혈한 황제를 아무런 증거도 없이 믿었던 나에게 감탄하고 있다고.

“왜 대답이 없어?”

“…….”

“이젠 나랑 대화도 하기 싫어?”

황태자가 이죽대듯 물었다. 제발, 안 그래도 복잡하니까 이러지 마세요. 정말로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요.

“뭐라고 대답을 좀 하란 말이…….”

“전하, 제발.”

“…….”

“저도 생각할 시간이란 게 필요하다고요……!”

말을 거를 틈도 없이 충동적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내뱉고 나서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두려움을 느끼기에는 정말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난 두 팔로 머리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정말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당신, 진짜 너무한 거 알아?”

그때 황태자가 조용히 말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삼킨 듯 잠긴 목소리였다.

“얌전히 책만 찾아오라고 했더니 시드니 그 자식한테 홀린 것처럼 그놈만 보고,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다고 난 귀찮은 존재인 것처럼 쫓아내고, 간신히 20분 채워서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안 오기에 찾아가 봤더니 둘이서 키스라도 할 것처럼 얼굴이나 맞대고 있고!”

“…….”

“그러더니 뭐? 이제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진짜 너무한다’라며 황태자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믿을 수 없게도 울음기가 살짝 섞여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잠시 멍해졌다.

황태자가…… 운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황태자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보지 마.”

“…….”

“우는 모습 보이기 싫어. 보지 마.”

그렇게 말하며 그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어…… 나는 난감해졌다. 왜 울지. 왜 이런 일로 울지. 내가 뭘 잘못했지?

“전하, 저…….”

“됐어.”

“…….”

“당신이 나를 안 좋아한다는 건 충분히 알겠으니까, 말하지 마.”

“…….”

내가 황태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게 저렇게 울 일인가?

“당신은 나보다 시드니가 더 좋은 거지.”

“…….”

“걔가 왜 좋은데?”

아닌데. 나 그 사람 안 좋아하는데…… 좋아할 수가 없잖아.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것 같다. 어쩌지.

“시드니가 당신 취향이야?”

“……예?”

왜 이야기가 이렇게 튀는 걸까. 황태자가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렸다. 어느새 눈물을 갈무리한 그가 원망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난 당신 안 놔줘.”

“…….”

“내가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절대 안 돼.”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어떻게 얻은 기회라니? 아, 정말 모르겠다.

일단 이 오해부터 풀어야 할 것 같다.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망설임 끝에 조심스럽게 황태자의 손을 잡았다. 황태자가 움찔하면서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전하, 어떤 오해를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 사람 안 좋아합니다.”

“……진짜?”

“예, 진짜로요.”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를 좋아할 리 없지.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불안해하실 것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이 몸은 라파엘…….”

그리고 거기까지 말하다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이 몸은 라파엘 드마뉴의 것 아닙니까, 그는 당신의 연인이고요. 저는 아니어도 그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예요.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저 내뱉었을 말이 입에서 맴도는 것은 라파엘 드마뉴 백작이 나의 환생이라는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환생.

……그 말인즉, 나와 라파엘 드마뉴는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도저히 믿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정말로 같은 사람인 걸까. 나에게 라파엘 드마뉴의 기억은 없는데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걸까.

답이 나오지 않는다. 불완전한 각성이랬지. 진정으로 각성하게 된다면 뭔가 떠오를까. 하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황태자가 끼어들었다.

“라파엘, 뭐?”

“……아닙니다.”

“말해봐.”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속 그러기야?”

“아무튼 저는 정말로 그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있던 것은 그저…… 그저 정말로, 눈에 뭐가 들어간 것뿐이었어요. 정말이에요.”

“…….”

황태자가 흥, 하고 코웃음 치더니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안 믿어’라고 작게 속삭이는 말에 노기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슬쩍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런데 황태자가 강한 힘으로 내 손에 손가락을 얽는다. 어라, 싶어서 바라보자 그가 비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날 좋아하는 거 맞지?”

“…….”

“아니야?”

음…… 왜 이야기가 또 이렇게 흐르지. 내가 시드니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황태자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닌데.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 교육 수준이 낮은 내가 비약이 심하다 느낄 정도의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황태자는 뻔뻔하게 웃었다.

“맞잖아.”

꼭 맞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맞다고 할 때까지 손 안 놔줄 거야.”

“……전하.”

“빨리, 나 좋아한다고 말해줘. 응?”

불안하단 말이야. 그가 보채듯 속삭였다.

나는 정말로 난감해졌다. 도대체 뭐가 저렇게 불안한 걸까. 라파엘 드마뉴 백작은, 아니, 그러니까 나의 환생체는 황태자의 연인이라 하지 않았나.

그가 자신의 연인임을 떠올리면 불안할 것도 없을 텐데, 황태자는 계속해서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아까 사랑받지 못한다 생각하여 혼자 울었던 것처럼.

이를 어쩐다.

나는 루크다. 라파엘 드마뉴 백작의 전생체. 그와 나는 같은 사람이자 다른 사람이다.

사실은 다른 사람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나는 라파엘 드마뉴 백작의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니까.

머릿속으로 아무리 ‘그와 나는 같은 사람이야’라고 되뇌어도, 루크라는 자아는 나는 나일 뿐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곤란했다. 라파엘 드마뉴 백작은 황태자에게 사랑을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루크인 나는, 내 마음은…….

그를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내 손을 덮은 황태자의 손이 뜨거웠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눈을 빛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싫지는 않다. 내게 애정을 바라는 자. 전생의 그 누구도 나를 그런 식으로 바라본 적 없었다. 그래서 가슴이 간질간질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델루니안과 똑같은 생김새를 한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모르겠어요.”

“음?”

“잘 모르겠습니다.”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고. 좋다고 하기에는 꺼려지고, 싫다고 하기에는 당신이 그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마음이 복잡하다. 내 대답에 황태자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더니, ‘뭐 조만간 내가 좋아질 거야’라고 제법 거만한 목소리를 내었다. 흐음, 과연 그럴까요.

“아무튼 아까 나쁜 짓을 당할 뻔한 건 아니지?”

“나쁜 짓이요?”

“시드니가 강제로 입을 맞추려 했다거나…….”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것보다 더 나쁜 짓이긴 했지만요. 무려 300년 전에 일어난 나쁜 짓…… 말없이 고개를 젓자 그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셨어요?”

그 말에 황태자가 냉큼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러면서 그가 열변을 토했다.

“남자는 다 짐승 새끼야!”

“…….”

저도 남자인데요. 저도 짐승 새끼인가요?

황태자는 내 떨떠름한 표정 따위는 읽지 못한 건지 계속해서 열변을 토했다.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바로 무릎으로 급소를 걷어차라, 호신술이고 나발이고 그게 최고로 아프다, 그리고 죽기 살기로 도망쳐라, 당신같이 연약한 사람은 그게 최선이자 최고의 방법이다…… 제가 꽃 한 송이 꺾으면 손목이 아픈 영애인 줄 아시나요. 그 반응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조금 우스웠다. 이런 기분이었나.

누구도 나를 이렇게 걱정해 주지 않았다. 나는 부모도 없고 형제는 당연히 없고, 내가 억울한 일 당하면 같이 화내줄 연인도 없었다.

기사인 리안이 훈련 중 손목이라도 삐끗하면 하루 종일 저기압이던 황제는, 내가 후궁의 아가씨들에게 모욕적인 일을 당하면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알아서 적당히 해결하라고 했다.

내가 일러바친 것도 아닌데 내가 혼났지. 아무도 나를 위해 대신 화를 내주지는 않았다.

리안 정도만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위로를 해줄 뿐. 그래서 항상 궁금했다. 저런 보살핌을 받는 리안은 어떤 느낌일까, 하고.

……이런 느낌이었구나. 봄바람이 코끝을 간질이듯 간지럽고 따뜻한, 그런 거였구나.

처음 받는 ‘보살핌’ 혹은 ‘염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전하.”

“응?”

“……조금 전의 일은 죄송했습니다. 괜히 신경질을 부렸어요.”

그 말에 황태자가 눈을 깜빡였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

“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황태자에게 신경질을 부렸으니 벌을 받아야겠지. 아무리 관대한 사람이라지만 그것까지 용서하지는 못 할 테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황태자가 갑자기 나를 껴안았다. 깜짝 놀라 몸이 굳었다.

“라파엘, 아니, 루크.”

“……예?”

“당신 도대체 왜 그래.”

“…….”

“왜 툭하면 벌을 달라고 그러는 거야.”

어…… 죄를 지었으니까요. 감히 황태자한테 소리를 질렀다. 델루니안이었다면 그 즉시 분노해서 내 목을 쳤을 것이다.

물론 이 자상한 황태자 전하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내 죄가 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벌할 생각이 없어.”

“…….”

“당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벌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내 연인이잖아. 이름을 불러도 되고, 화가 나면 소리를 질러도 되고, 내가 잘못했을 경우 내 뺨을 쳐도 돼.”

뺨을요?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자 그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이 그렇다는 거지’라고 덧붙였다.

“물론 당신이 소리를 지르면 내가 좀 많이 슬프겠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벌하지 않을 거야.”

“…….”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 나를 떠나지만 않으면 돼.”

갑자기 가슴이 뜨끈해졌다.

떠나지만 않으면 된다고?

당신을 떠나지만 않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봐주겠다고?

델루니안의 얼굴로 그렇게 속삭이는 남자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가슴이 술렁였다. 어째서 당신은 내게 그렇게 말하는 거야. 이러면 내가 착각한다고. 달콤한 거짓에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된단 말이야.

그 애정은 나를 향한 애정이 아니다. 황태자의 애정은 라파엘 드마뉴를 향한 애정이다.

같은 사람이라지만 결국 다른 존재인 그에게 향하는 애정을 내 것이라 착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멍청한 짓이며, 가슴 아픈 일일 테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응?”

“그냥…… 벌을 주세요.”

차라리 벌을 받는 게 마음은 더 편할 것 같다. 자유로운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그렇게 중얼거리자, 나를 껴안은 황태자가 한숨처럼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조금 더 건방져졌으면 좋겠어.”

“…….”

“진심이야.”

* * *

내게 건방져도 된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크.”

내 짐을 빼앗아 든 황태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나 생각에 빠진 채 멍하니 그의 뒤를 쫓아가던 나는 쿵, 하고 너른 등에 얼굴을 박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송, 송, 송구합니다.”

반사적으로 사죄의 말이 튀어나갔다. 그런 나를 보며 황태자는 옅게 웃었다.

“송구할 게 뭐가 있어.”

“…….”

“이 책들은 어디에 둘까?”

그가 봉투 가득 담긴 두꺼운 책들을 보이며 물었다. 나는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아, 그, 서재에…….”

“알았어.”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계단을 밟고 2층으로 향했다. 묵직한 걸음이 그의 존재감을 알린다.

쿵, 쿵, 쿵…….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무너지듯 소파에 앉을 수 있었다.

온몸에 힘이 없다. 열이라도 나는 것처럼 몸이 뜨끈뜨끈했다. 감기라도 걸린 걸까. 아닌데. 오늘은 그리 춥지 않았는데.

‘나는 당신이 조금 더 건방져졌으면 좋겠어.’

……그 말 때문인가.

소파에 멍하니 앉아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건방진 것.’

그는 그렇게 말했다.

‘까부는구나.’

후궁에서 지냈던 시간은 내게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뻤던 날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글을 배운 날이 기뻤고, 처음으로 강아지를 주워 기른 날이 기뻤으며, 처음으로 오로라를 본 날이 기뻤다. 그리고 처음으로 잠든 그에게 몰래 입을 맞춘 날도 기뻤다.

기뻤지. 기쁘긴 했지.

……자다 깬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기뻤겠지만.

‘건방진 것.’

‘…… 소, 소, 송구합니다.’

‘까부는구나.’

그렇게 말한 그는 제 입술을 매만지며 어이없다는 듯 낮게 웃었다. 감히 네가 내게 입을 맞추었느냐고 비웃듯.

첫 입맞춤은 아니었다. 그와 정사를 할 때면 종종 입을 맞추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저 거래의 일환이었고, 입을 맞추는 그도, 입맞춤을 당하는 나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밤의 입맞춤은 달랐다. 전세가 불리하다던 전쟁에서 당당하게 승리하고 돌아온 황제.

거친 정사를 끝내고 내 곁에 누워 깊은 잠에 빠진 그의 몸에서 자잘한 흉터를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 왔다.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잘 돌아오셨어요, 그렇게 상이라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입을 맞추었는데 그가 잠에서 깨었고, 그는 나를 조용히 비웃었다. 감히 대용품에 불과한 네가 내게 입을 맞추었느냐고.

그랬던 적이 있는데 이제는…….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해?”

“예, 예?”

“내가 부르는 것도 못 듣고 말이야.”

황태자가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나를 불렀던가.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앞으로는 바로바로 대답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려는 찰나 황태자가 갑자기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겠어.”

“예?”

“앞으로 ‘송구하다’, ‘죄송하다’, ‘잘못했다’는 말은 모두 금지야.”

“……예?”

“나는 당신과 연애를 하고 싶은 거지, 당신한테서 주야장천 사과만 받고 싶은 게 아니라고.”

“어, 하지만…….”

“몰라. 이의는 받아들이지 않겠어. 앞으로 당신이 내게 사과할 때마다 내 방식대로 벌을 줄 거야.”

벌? 무슨 벌? 벌이라는 말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잘못했으니 벌을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황태자가 직접 나서서 벌을 주겠다고 하니 300년 전의 그 지독했던 고문이 떠올라 몸이 벌벌 떨렸다. 아픈 건 싫어. 고통받는 것도 싫다.

그가 말한 세 단어를 내뱉지 않으려 노력했다. 7년의 황궁 생활 속 습관처럼 입에 붙은 사죄의 말은 숨 쉴 때마다 튀어나오려 했지만 나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그렇게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황궁에서 보낸 요리사가 직접 만든 식사는 탄화된 빵과 정어리에 비하면 참으로 훌륭했다.

실수하지 않으려 최대한 말을 아낀 채 식사를 하고 있던 내게 황태자가 갑자기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루크.”

“예.”

“거기, 후추통 좀 줄래?”

검은 후추통은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후추통을 그에게 갖다 바쳤다. 아니, 바치려고 했다. 갑자기 손을 뻗은 그에 의해 후추통을 놓치지만 않았더라면.

챙그랑!

후추통이 떨어져 접시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났다. 나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토록 외치지 않겠다던 사죄의 말을 외쳤다.

“소, 송구합니다, 전하!”

그리고 그 순간, 황태자가 씩 웃었다.

“방금 송구하다고 했지?”

“아…… 예?”

“벌을 받아야겠네.”

끼익,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멍하니 그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연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정한 시선에 장난기가 스며있다.

그제야 나는 후추통을 떨어뜨린 것이 내 사죄를 이끌어 내려던 그의 작은 계략임을 깨달았다. 속았다…… 라고 생각하던 순간이다.

뜨겁고 도톰한 입술이 내 입술 위로 와 닿았다.

어…… 어라…… 멍하니 그 입술의 촉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가 양팔로 내 허리와 가슴을 껴안았다. 몸이 밀착된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깜짝 놀라 아, 하고 입을 벌리자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혀를 밀어 넣었다.

헉…… 그의 혀가 집요하게 내 혀를 쫓는다. 깜짝 놀라 고개를 젖히자 그가 아쉽다는 듯 내 아랫입술을 약하게 물었다 놔주었다.

“이게 벌이야.”

“…….”

“알았지?”

“…….”

“그러니까 앞으로 얼마든지 사죄해도 돼. 나랑 입 맞추고 싶다면.”

그의 말에 하…… 하하…… 나도 모르게 황당한 웃음이 흘렀다.

황태자가 나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왜 웃으세요. 웃지 마세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터질 것 같다.

* * *

“라파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여길 봐, 라파엘.”

커다란 영상기를 든 남자가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내 주의를 끌고 싶은 건지 남자는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나는 멀뚱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다른 손에 녹음기를 쥐고 말하기 시작했다.

“흠흠, 녹화를 시작합니다…… 오늘은 우리 라파엘이 태어난 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 1년 전 이 시간에 태어난 엘은 정말 작은 아기였어요. 몸무게가 3.28㎏이었죠. 아빠는 무척 놀랐답니다. ‘원래 아기들은 이렇게 작은가요?’ 하고 너무 작아서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라파엘을 보며 아빠가 물었어요. 의사 선생님들은 아기가 무척 건강하다며 앞으로 쑥쑥 클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지요. 그리고 1년이 된 지금, 엘은 11.6kg이랍니다. 이젠 제법 묵직해요. 안 그래요, 루이자?”

희극배우처럼 과장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는 남자 옆에서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제 한 살이 된 오늘의 주인공, 라파엘에게 소감을 들어볼까요?”

남자가 녹음기를 내게 들이댔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두 손으로 덥석 잡고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여자가 다가와 ‘아니야, 엘. 이건 먹는 거 아니야’ 하며 빼앗아 간다. 갑자기 서러워지는 어린 마음. 저건 내 건데…… 울음을 터뜨리자, 여자가 나를 안아 들었다.

“우리 왕자님, 또 뭐가 그렇게 서러울까.”

여자는 등을 도닥인다.

울면 안 돼, 라파엘. 생일은 기쁜 날이야. 기쁜 날에는 웃어야 해. 엄마 봐봐. 응? 엄마는 웃고 있잖아.

여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눈을 맞춰 왔다. 그 눈에 가득 찬 것은 애정을 양껏 담은 따뜻한 웃음.

그 웃음을 보던 나는 알 수 없는 충족감에, 울던 것도 잊어버리고 따라 웃었다.

“아이고, 우리 왕자님 이제야 웃네.”

여자가 말하기 무섭게 남자가 카메라를 들이댔다.

“라파엘이 웃는 모습을 놓칠 수야 없지.”

여자가 웃으며 대답한다.

“당신 어머니가 이름 하나는 참 잘 지으셨죠. 웃는 얼굴이 정말로 천사 같거든.”

“내 아들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렇게 웃는 얼굴이 예쁜 아기는 별로 없어.”

맞아, 맞아. 팔불출 부부는 얼굴을 맞대며 고개를 끄덕인다.

“루이자, 파티 준비 끝났어요!”

그때 안쪽에서 여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곧 갈게요!’ 하고 대답하더니 나를 향해 속삭였다.

“네 생일파티 준비가 모두 끝났대, 라파엘. 이제 사람들만 오면 돼. 할머니, 할아버지, 외삼촌, 그리고 이웃들 모두 널 위해 오기로 약속했어.”

나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여자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엄마 먼저 들어갈게, 아빠랑 천천히 와. 알았지?”

그리고 나는 남자의 품으로 옮겨진다. 남자는 영상기로 여자의 뒷모습을 찍으며 내게 말했다.

“라파엘, 엄마 가는데 인사해 주자.”

간다고? 나는 멀뚱히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햇빛 사이로 점점 멀어지는 여자.

탐스러운 금발이 햇빛에 반짝반짝 부서지는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들었다.

지금 헤어지면 영원히 못 볼 것 같은 그런 불안감.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몰라. 이 행복이 영원히 깨질지도 몰라. 평생을, 그렇게 그리워할지도 몰라.

작은 가슴 빼곡히 공포가 몰아쳤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마!”

엄마.

그리고 여자가 뒤를 돌아봤다. 나는 여자에게 손을 뻗었다.

엄마. 돌아와. 나랑 있어. 가지 마. 아무 데도 가지 마.

그러자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엘.”

그리고 다시 등을 돌리는 여자. 그 뒷모습이 시리도록 아프다.

가지 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 * *

눈이 뻑뻑했다. 밤새 운 것처럼 부은 눈을 간신히 뜨자 햇빛으로 가득한 방 안이 보였다.

또다시 아침이다. 나는 멍한 머리로 방 안을 둘러보며, 방금 무슨 꿈을 꿨더라, 하고 생각했다.

좀 슬펐던 것 같은데…… 얼굴을 매만지자 약간 축축한 것이 아무래도 운 것 같다. 안 그래도 사는 게 괴로운데 꿈을 꾸면서까지 울어야 한다니.

나는 눈물 자국을 지우며 잠든 육체를 깨웠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저녁 황태자로부터 벌 같지 않은 벌을 받은 후, 나는 차마 부끄럽고 민망하여 황태자를 마주할 수 없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식당을 벗어나는 나를 보며 황태자는 한참 동안 소리 내어 웃었다.

“귀여워, 정말.”

그 말에 잠시 홀린 듯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입에 붙였다 떼며 쪽! 소리를 내었다. 그 모습에 다시금 얼굴이 불타올랐다.

그대로 방으로 돌아와 숨을 골랐다. 300년 전 황제에게 꿰뚫렸던 심장이 펄떡펄떡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다.

침착해, 루크. 고작 입맞춤일 뿐이잖아. 황제와도 몇 번이나 했던 입맞춤이라고. 비록 그건 거래였고 애정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입을 맞춘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심장이 계속 술렁였다. 내게 건방지다고 타박한 황제 델루니안과 내게 귀엽다고 소곤거린 황태자 샤를마뉴가 계속 눈에 겹쳤다.

똑같은 생김새의 두 사람.

하지만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

……당신은 정말로 그의 후손이 맞는 건가요. 아니라고 해주세요. 믿을 수 없단 말이야. 그 잔혹했던 황제와 이렇게 다정한 황태자가 어떻게 같은 핏줄일 수 있지.

황태자가 너무 다정해서 곤란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의 애정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연인인 라파엘 드마뉴 백작을 향한 것인데. 착각하면 안 되는데.

차라리 무심했으면 좋겠어. 차라리 냉정했으면 좋겠어. 건방져도 된다는 다정한 말 대신 델루니안처럼 나를 무시하고, 라파엘 드마뉴 백작을 데려오라고 윽박질렀으면 좋겠어. 그럼 그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가슴 술렁일 일은 없을 거 아니야.

처음으로 불을 발견한 원시의 사람처럼, 처음으로 받는 애정과 호의 앞에서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심란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문을 두드리며 자느냐고 묻는 황태자 때문에 화들짝 놀라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대답이 없자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한 건지 그가 아쉬운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같이 산책하려고 했는데.”

같이 산책이라니. 이것 또한 델루니안과는 한 적이 없는 일인지라 또다시 심장이 아려 왔다. 황태자의 지나친 다정함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것 같았다. 나를 말려 죽이는 독.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일어나니 다음 날이 밝았다.

새로운 아침. 라파엘 드마뉴 백작…… 내 환생체라는 그의 몸도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다. 그가 내 환생체라는 것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지만.

그때 내가 일어난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누군지는 뻔했다.

“네.”

하고 대답하자, 문이 열리고 황태자가 고개를 쭉 내밀었다.

“잘 잤어?”

오늘따라 얼굴이 더욱 밝아 보인다.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예’ 하고 대답하자 그가 발랄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자면서 울기라도 했어? 얼굴 많이 부었네.”

“아, 그런가요? 죄…….”

까지 말하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가 아깝다는 듯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더 해도 괜찮은데.”

“……아닙니다.”

“뭐, 나쁜 뜻은 아니야. 얼굴 부었다는 것도 귀엽다는 뜻이고.”

귀엽다는 말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자 그가 손으로 내 머리를 슥슥 빗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엉긴 부분만 가볍게 빗어 내리더니 나중에는 ‘이쪽 뻗쳤네’ 하면서 드레스룸에서 빗까지 들고 나왔다.

황태자가 빗질이라니. 망극해서 되었다고 물리려 했으나 그는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라는 말과 함께 내 머리통을 붙잡고는 빗질을 이어 나갔다.

“머릿결이 참 좋아. 부드럽고.”

“그런가요?”

“응. 강아지 같아.”

“……예?”

“그리고 당신의 털을 골라 주는 나는 어미 개.”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빗질을 털을 골라 주는 것에 비유하다니. 게다가 스스로를 개라고 지칭했다. 정말 알 수 없는 황태자야. 내가 웃는 것을 보며 황태자도 낮게 웃었다.

“뭐가 이렇게 예쁠까.”

내 몸을 돌려 뒷머리를 정리해 주던 그가 문득 노래하는 것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얼굴만 예쁜 줄 알았는데 다 예뻐.”

“…….”

“손도 예쁘고 발도 예쁘고, 머리도 예쁘고 기다란 목도 예쁘고.”

“…….”

“심지어 보이지 않는 곳에 난 점까지 예뻐.”

“…….”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다 예쁜 거야.”

황태자의 달콤한 말에 조금 낯부끄러워 고개를 돌릴 때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 난 점’이라는 말이 내 신경을 잡아채었다.

……점?

“점…… 이요?”

문득, 어제 시드니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영혼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를 끝내고자 합니다. 끝내지 못한 과제를 마치기 위해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죠. 그리고 자신을 담을 그릇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몸에다가 흔적을 남겨 두고요.’

라파엘 드마뉴 백작이 정말로 나의 환생체라면, 그의 몸 어딘가에는 내가 남겨 둔 흔적이 있을 터였다.

머릿속으로 라파엘 드마뉴 백작의 몸을 떠올렸다. 몇 번이고 씻었던 몸이다. 내 몸이 아닌지라 괜히 민망하여 잘 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파엘 드마뉴 백작의 몸은 생생히 떠올랐다.

수술 흔적으로 보이는 흉터 하나를 제외한다면 탄복할 정도로 깨끗한 그의 몸.

이 몸에는 심지어 점도 몇 개 없었다. 그리고 그 점은 차마 흔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것이었고.

내 물음에 황태자가 ‘응’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당신 귀 뒤에 점 하나 숨어 있는 거 알아?”

“……귀 뒤요?”

“되게 특이하게 생긴 점인데, 그것도 참 예뻐.”

귀 뒤에 있는 특이하게 생긴 점. 순간 손끝이 오싹하게 차가워졌다.

설마…….

“……어떻게 생긴 점인데요?”

싸하게 치밀어 오르는 공포를 억누른 채 묻자, 그가 ‘음’ 하고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그의 연녹색 눈동자가 내 귀 뒤를 향한다.

“거미 모양이야.”

그 순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거미 모양 점. 설마, 그거야? 정말로 그게 내 ‘흔적’이라고? 하고 많은 것 중에 하필 그게? 아니, 아닐 거야. 설마 아니겠지.

나는 도리질을 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럴 리 없어.

그래서는 안 돼.

그렇게 평화로웠던 아침은 악몽이 되어 내게 달려들었다.

* * *

그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

벗겨 먹을 나무껍질도 부족한 겨울. 꽝꽝 언 흙을 파먹기를 수일, 이래서는 죽겠다 싶었던 나는 몸을 팔기로 결심했다.

백성이 굶어 죽어도 유흥가는 잘 돌아가는 법이다. 빨간 등이 켜진 홍등가에는 혹한과 기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남자를 팔기로 유명한 13번가 파란 대문 집에 들어가 나를 사 주십사 간청했다.

그러자 포주치고는 꽤 젊은,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남자가 물었다.

“진심이야?”

남창은 대부분 얼굴이 예쁘장한 노예였다. 귀엽다는 말도 서로에게 하지 않을 정도로 남성성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제국에서 남자가 몸을 판다는 것은 노예가 아니고서야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민도 급이 있다.

남창은 천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이들이었다. 그래서 포주는 평민인 내가 스스로 몸을 판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를 사 주십시오.”

포주가 이해하든 못 하든, 나는 간절했다. 자존심이고 뭐고 배고픔 앞에서는 내세울 것도 없었다.

다른 일을 하려고 시도를 해봤지만, 맥을 못 추게 생긴 외모 때문인지 나를 쓰려는 사람이 없었다.

나라고 좋아서 몸을 팔겠는가. 써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럭저럭 예쁘다는 얘길 들은 외모밖에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를 안으로 끌고 들어간 포주는 옷을 전부 벗으라고 명령했다.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옷을 전부 벗자, 포주가 희미하게 감탄했다. 내 몸을 샅샅이 훑어본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포주는 자발적으로 남창이 되겠다고 한 나를 높이 평가했다. 다른 남창들은 억지로 끌려온 탓에 반항적인데, 나는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나는 도망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먹고 살 수 있게만 해준다면 얼마든지 이 바닥에서 구를 용의가 있었다. 산다는 것, 그 자체가 나의 목적이었으니까.

열흘 동안 포주와 함께 생활하며 살을 찌웠다. 너무 마른 몸은 안기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그로부터 방중술을 배웠다. 남자가 남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써먹어야 하는 기술이니 열심히 배워 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포주는 나를 신기한 녀석이라고 불렀다. 그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성적인 의미의 호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인간적으로 나를 좋아했다.

말도 잘 듣고 스스로 방중술을 익히려 노력하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포주는 내게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려고 노력했다. 남창이라는 낙인을 몸에 새기는 날에도 그랬다.

“어디에 찍을래?”

원래 낙인은 노예에게 찍는 것이다. 그리고 남창은 대부분 노예였기에 포주의 낙인이 찍혔다.

그것이 관례로 굳어져 이제는 신분에 관계없이 남창이라면 낙인을 찍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낙인은 보통 목덜미나 손목 등, 눈에 잘 띄는 곳에 찍었다. 도망을 쳐도 쉽게 잡기 위함이다.

그러나 나를 좋게 평가한 포주는 특별히 내 편의를 봐주었다. 남창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때 숨길 수 있는 곳에 찍어주겠다는 뜻이었다.

어디에 찍어야 할까, 멍하니 생각하자 포주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머리카락으로 가릴 수 있는 곳에 찍는 게 좋을걸?”

다른 곳은 옷을 벗으면 보이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귀 뒤가 좋겠어요.”

……그렇게 불에 달군 인두가 귀 뒤를 태웠다. 13번가 푸른 대문 집의 낙인은 검은 거미 모양이었다.

며칠 동안 귀 뒤의 화상으로 잠을 자지 못했다. 가장 여린 피부가 태워진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처음 남창이 되기로 한 자신을 후회했다.

그리고 통증이 완전히 가라앉은 어느 겨울의 밤.

포주는 처음으로 나를 가게에 데려갔다.

“당장 지명이 안 됐다고 속상해하지 마라.”

첫날부터 지명이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실망하지 말라고 포주가 말했다.

첫날은 그냥 가게 분위기 익히는 정도로만 생각하라고.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래, 설마 첫날부터 지명이 되겠어?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 지명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차라리 안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서로 다투고 있을 때였다.

13번가 파란 대문 집 앞에 고급 마차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옷에 깊은 모자를 푹 눌러쓴, 누가 봐도 귀족임에 분명한 사람이 내렸다.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먼저 다가와 포주에게 귀엣말을 했고, 포주는 나를 포함한 금발의 남창들을 데려와 귀족의 앞에 선보였다.

귀족은 모자 밑으로 진 그늘에 얼굴을 감추고 천천히 남창들을 훑어보았다. 나는 그 대열의 가장 끝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날이 처음이었고, 베테랑 남창들이 귀족을 유혹하기 위해 노골적인 자태를 취하고 있었으니까.

귀족의 시선이 내게 닿았을 때였다.

그가 지팡이를 들어 나를 지목했다.

지명.

나는 화들짝 놀랐고, 포주 역시 나 못지않게 당황스러운 얼굴로 귀족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 녀석은 오늘 처음 일을 시작하는 녀석인데 괜찮으실는지요.”

그 말에 수행원이 그린 듯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 나리께서는 저자가 무척 마음에 드신다고 합니다.”

도대체 내 어떤 점이 좋았던 걸까. 나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몸을 바들바들 떨며 포주를 바라보았고, 포주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준비하여 올려 보내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내게로 다가와 말했다.

“귀족이야. 잘 모셔야 한다. 네가 초짜라는 건 저분도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베테랑인 것처럼 굴어야 해. 절대로 반항하지 마라. 어떤 짓을 하려고 해도 다 받아들여. 알았어?”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손님이 하필 귀족이라니. 나 하나쯤은 날벌레 짓이기듯 쉽게 죽일 수 있는 존재가 귀족이다. 감히 고개를 들어 바라봐서도 안 되는 존재.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나는 바들바들 떨며 포주를 따라 객실로 향했다.

수행원은 어디로 갔는지 혼자 남은 귀족은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라고 말한 포주가 문을 닫기 무섭게 내게 말했다.

“고개를 들라.”

생각보다 젊은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귀족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벗은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젊은 남자였다. 스물셋? 넷? 그 정도 되어 보이는 귀족은 게다가 인물도 훤했다. 저런 남자가 왜 굳이 남창을 찾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남자가 다시 말했다.

“가까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팔 하나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자, 남자가 내 얼굴을 움켜쥐고 품평하듯 이리저리 돌렸다. 남자의 시선이 내 얼굴 곳곳을 훑는다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을 그렇게 얼굴을 뜯어보던 남자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

“나이는?”

도대체 이런 건 왜 묻는 걸까. 그냥 안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열일곱입니다.”

“…….”

남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름은 뭐지?”

“……루크입니다.”

“루크라…….”

‘아주 마음에 들어’ 라고 중얼거린 남자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끌어당김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무너지자 남자가 거칠게 입을 맞부딪치며 혀를 섞어 왔다.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방중술에 키스는 없었던 것 같은데. 포주는 몸을 사기 위해 오는 남자들은 키스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멀뚱히 남자의 혀를 받아들이고 있으려니, 남자가 입을 떼어 내며 웃었다.

“처음이라 했나?”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은 없다. 이런 반응이 더 좋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얇은 옷 안으로 큰 손을 집어넣었다. 낯선 손길에 몸을 떨자 남자가 ‘느끼는 대로 행동해라’라며 관대한 처사를 내렸다.

아무래도 그는 교접에 서툰 내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남자는 포주가 말한 손님들과 너무 달랐다.

남창을 사러 오는 손님들은 서툰 초짜보다는 흥분을 이끌어 내는 베테랑을 선호한다고 했는데, 이 귀족은 달라도 좀 많이 다르다.

남자를 흥분시켜야 하는 것은 나인데, 오히려 남자가 나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정말로 이상했다.

남자는 무척 부드러웠다.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오는 손님도 있으니 미리 이완제를 발라 놓으라는 포주의 충고가 무색할 정도로 남자는 부드럽게 내 하문을 열었고, 연인을 대하듯 다정하게 안았다.

내가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아프냐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내 성감대를 찾아내어 기어코 나를 흥분시키고야 말았다.

정말 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흥분 속에서도 귀족의 비위를 맞출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의 정사가 끝난 후, 인생 최초의 교접을 끝내고 잔뜩 지쳐서 침대 위에 늘어진 나를 보며 남자가 물었다.

“날 따라오지 않겠나?”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예?”

“나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아…….”

당황스러웠다. 정말로 내가 좋았던 건가? 남자는 내 금빛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런 곳에서 뒹구는 것보다, 나와 함께 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하지만, 그것이…….”

이미 계약금을 받았기에.

말을 얼버무리자 남자가 눈을 치켜떴다.

“계약금?”

“예, 이미 포주와 계약을 해놓은 상태인지라.”

“노예가 아니었던가?”

남자는 내가 노예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어느 정신 나간 평민이 포주와 계약을 맺겠는가. 민망함을 숨기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저는 평민입니다.”

“……평민인데 스스로 몸을 판단 말인가.”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웃었다. 남자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래서 계약금이 얼마지?”

설마 나를 사려고? 정말 그 정도로 마음에 든 거야? 놀란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은화 60개입니다만…….”

“좋아.”

남자는 1층과 연결된 밧줄을 당겼다. 곧 포주가 나타났다. 포주는 내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다고 믿는 건지, 사색이 된 얼굴로 땀만 흘리고 있었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이자를 사고 싶네.”

“……예?”

“계약금은 두 배로 갚아주지.”

그 말에 놀란 건 포주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깜짝 놀라 남자를 바라보았다.

은화 120개면 평민의 1년 수입이다. 결코 만만한 금액이 아니다. 물론 귀족에게는 그리 부담이 되는 금액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남창 하나 사겠다고 쓸 돈은 아니었다.

포주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너 뭘 어떻게 한 거야?’ 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부족한가?”

“예?”

“은화 200개는 어떤가?”

그 말에 포주가 입을 떡 벌렸다.

“이, 이, 이, 이백…….”

“난 이자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남자가 웃었고, 포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원하는 대로 하시라고 소리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정말 멍했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처음 몸을 팔았는데, 상대가 귀족이고, 그 귀족은 내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은화 200개를 주고 나를 산다고 한다.

일은 빠르게 진행되어, 나는 돌아가는 귀족의 마차에 함께 타게 되었다.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수행원은 남자와 함께 나오는 나를 보며 묘한 얼굴로 웃었다.

드넓은 마차 안.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고,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행원은 내 앞에 앉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침묵을 깬 것은 수행원이었다. 남자는 눈만 돌려 수행원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알게 될 터이니, 말해두는 것이 좋겠지요.”

나는 그때 ‘이 마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 가문의 귀족인지조차 듣지 못했으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의 규모로 보나, 수행원의 옷차림으로 보나 꽤 지체 높은 가문인 것 같다.

하룻밤 사이에 남창에서 지체 높은 귀족의 남첩이 되다니. 이걸 보고 인생 역전이라 하던가.

“지금 향하는 곳은,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수행원이 나를 향해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감히 망령되게 행동하여도 아니 되고 한 걸음 한 걸음에도 유의해야 하는, 일종의 밀림이지요.”

“……예?”

“일개 평민인 당신이 그곳에서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말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가 작게 웃었다.

“평생의 천운을 다 끌어안았다고 생각하십시오.”

“…….”

무슨 말일까. 천운을 다 끌어안았다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차가 커다란 통로 밑을 지나갔다. 창밖이 어두워지며 남자와 수행원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청각만이 살아 있는 어두컴컴한 통로 속. 황도에 이런 통로가 있었던가?

그때 문득 사방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리는 것은 말발굽 스치는 소리뿐.

어둠 속에서 수행원이 말을 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가문의 영광 아니겠습니까.”

“…….”

“일개 평민의 신분으로, 황궁에 발을 디디게 되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 마차가 통로에서 벗어나며 빛이 마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두운 밤, 황도에서 이렇게 빛이 반짝이는 곳은 단 한 곳뿐.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 손에 횃불을 든 보초병들. 드넓은 광장과 별빛을 반사하는 예쁜 호수. 온통 황금빛으로 가득 찬 세상.

……이곳은 황궁이었다.

* * *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서늘하다. 내가 막연히 지체 높은 귀족인 줄 알았던 남자는 알고 보니 황제였고, 그때 나에게 영광인 줄 알라던 수행원은 국무대신 루이 채스터턴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거의 기절하다시피 놀랐지. 감히 황제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었다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고개를 조아린 내게 황제는 서늘히 웃으며 시종장을 따라가 쉬라고 했다.

그때 시종장이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그러자 황제가 대답했다.

“후궁.”

그때부터 나는 황제의 남자 후궁이 되어 황궁에서 살게 되었다.

황제는 제법 살뜰했다. 그는 내가 황궁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사람을 보냈고 종종 찾아와 밤을 함께 보냈다.

냉정한 얼굴은 나를 볼 때면 허물어졌고 아름다운 미소를 띠었다. 그래서 나는, 얼떨떨한 와중에도 황제가 나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지만.

아름다운 기사 리안을 보고, 또 그런 리안을 바라보는 황제의 애틋한 시선을 보고서야 알았다.

황제가 내게 잘해 준 것은, 나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 덧입혀진 리안의 환상에게 잘해 준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황제에게 내가 리안의 대용품이냐고 물었고, 황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의 관계는 허울뿐인 총애 관계로 바뀌었다. 황제는 나를 보고 웃지 않았고, 나 역시 황제에게서 애정을 기대하지 않았다. 있는 것은 육체적 관계뿐.

황제는 리안에게 풀지 못하는 욕정을 내게 풀며 만족감을 느꼈고, 나는 리안인 것처럼 황제를 받아들이며 호화로운 삶을 영위했다.

그래도 가끔 드는 의문.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나라는 사람의 위치는 참으로 애매했다. 겉으로 보이는 나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남첩이다.

후궁의 아가씨들은 나를 질투한다. 황제의 애정을 독차지한 나를 질투해 황제가 오지 않는 밤이면 내 침대에 전갈을 풀어 넣고는 했다.

귀족들은 남첩인 나를 경멸하면서도 어떻게든 친분을 쌓으려고 사시사철 뇌물을 바쳤다. 나의 전부는 황제의 애정이 구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황제의 애정을 받는 사람이 아니다.

황제의 사랑을 받는 이는 기사 리안.

나는 그저 그의 방패막이일 뿐이다. 황제는 자신이 사랑하는 기사가 황궁의 더러운 암투에 휘말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자신의 섣부른 애정으로 그가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도 꺼렸다.

자신의 폭발할 것 같은 정욕과 황궁의 암투로부터 리안을 지킬 사람을 세운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그러니까, 방패 혹은 화살 받이. 혹은, 정액 받이. 내 전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황제인데, 사실 황제는 내게 없다.

그러니까, 진짜 ‘나’는 도대체 누구냐고.

이런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우는 밤이면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테라스를 서성였다. 찬바람을 맞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술렁임이 좀 가라앉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머리를 잘라서 그런지 목덜미를 스치는 찬바람이 더욱 휑하게 느껴졌다.

나는 허전한 뒷덜미를 매만지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평생을 길러 온 긴 머리를 자른 것은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황제가 출정으로 궁을 비운 지 석 달이었다. 며칠 전 승전고가 울렸으니 곧 돌아올 때도 되었다.

황궁은 주인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나 역시 몸단장을 시작했다.

황제가 나를 찾아올 거라는 확신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후궁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 모습이 가소로웠던 걸까. 백작의 차녀라는 후궁의 아가씨가 다가와 친한 척 살랑대더니 머리카락을 화로에 지져 버렸다. 겨울이라 화로를 들여놨던 것이 문제였다.

그녀는 실수인 척하며 화로를 내게 덮어씌웠다. 다행스럽게도 머리카락만 타고 말았지만, 제때 피하지 못했다면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녀는 울먹이며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시켰다.

길고 탐스런 금발을 자르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황제가 좋아할까? 그는 리안과 똑 닮은 금발을 무척 좋아했다. 함께 몸을 섞을 때도 머리카락에 손을 얽으며 쓰다듬곤 했다.

게다가 좋은 냄새가 난다며 머리카락에 코를 파묻기도 했지. 아무래도 황제가 싫어할 것 같아 아쉬운 마음에 짧은 머리끝만 매만지고 있을 때였다.

“날이 찬데 왜 그러고 있는 거지?”

하고,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황궁으로 돌아오고 있어야 할 황제가 눈앞에 있었다. 아니, 어떻게 여기에?

“폐하, 어찌 이곳에…….”

“말을 재촉해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에게서 희미하게 찬 겨울 냄새가 났다. 나는 그의 입맞춤을 받으며 멍하니 생각했다.

그럼 개선식은 어쩌고? 황제는 내 반응이 못마땅한 듯, 내 아랫입술을 깨물며 중얼댔다.

“집중해.”

“아…… 송구합…….”

송구합니다, 라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다시 입술을 삼킨 황제가 성마른 손길로 내 잠옷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이 사람이 왜 이래. 황제의 흑갈색 눈동자를 보니 평소보다 더 일렁이는 것이, 아무래도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서 그런지 더 예민한 것 같았다.

곧 입을 떼어 낸 황제가 내 몸을 이끌고 침대로 향했다.

설마 바로 하게? 씻지도 않고?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할 마음인지 황제는 흙먼지 묻은 옷을 훌훌 벗어버리며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내가 무슨 힘이 있나. 나는 그저 황제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둘 뿐이었다.

“아……!”

황제가 목덜미를 씹었다. 이빨로 강하게 짓씹는 것을 보니 기어코 피를 볼 작정인 모양이다.

정말로 황제는 평소보다 더욱 예민했다. 피를 보고 흥분한 짐승처럼 황제는 평소보다 더욱 본능적이었고, 그래서 조금 두려웠다.

나는 가만히 황제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가 진정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때 내 목덜미를 짓씹던 황제가 물었다.

“머리는 왜 이 모양이야.”

“……예?”

“왜 잘랐지?”

무척 불쾌한 것처럼 으르렁대는 목소리에 나는 아아, 하고 얼른 변명했다.

“더워서…….”

“뭐?”

황제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그 말에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은 한겨울, 그것도 실내에 가만히 있어도 손발이 떨리는 한겨울이다.

그런데 덥다고? 야, 이 바보야. 갖다 댈 걸 갖다 대야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그걸 핑계라고 대는 건가.”

“하하, 그게…….”

“됐다. 말을 말아야지.”

예. 제가 멍청입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고, 황제는 나를 노려보다가 강하게 귓불을 물어뜯었다.

“아!”

“감히 나를 속이려 한 벌이다.”

“폐하…….”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다시는 머리를 자르지 말도록.”

아파라.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리안과 똑같은 금발을 자른 것이 몹시 불쾌한 모양이다.

내가 얼얼한 귓불을 매만지자 황제가 혀를 차며 피가 나는 귀를 핥기 시작했다.

“손 치워. 피 나니까.”

“폐하께서 깨무시고는…….”

“시끄러워.”

퉁명스럽게 대답한 황제는 그러면서도 열심히 귀를 핥았다. 그에 기분이 묘해졌다. 내 피를 핥는 황제라니. 참 기분이 이상하다.

귀한 것, 좋은 것만 입에 담는 사람이 천한 평민의 피를 핥는다니. 어쩐지 가슴이 떨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히 부끄럽기도 했다.

이게 어떤 느낌일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걱정’을 받는다는 느낌이 이런 건가?

알 수 없이 가슴을 간질이는 느낌을 정의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그때 갑자기 황제가 행동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지?

“너.”

“……예?”

“이게 뭐냐.”

황제가 물었다. 그가 손으로 귀 뒤를 꾹 눌렀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거미 모양의 흉터.”

아아. 그것인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예전에 13번가에서 일할 때 받은 낙인입니다.”

“…….”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내가 매음굴에서 굴렀다는 것은 황제도 아는 사실이고, 어차피 이 낙인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첫 손님이 황제였고, 그 이후로도 황제 외에는 받은 손님이 없었으니 낙인을 찍느라 받은 고통만 아깝게 되었다.

어떻게 지울 수도 없고 머리카락으로 가리면 되는 곳이라 거의 잊고 있었는데. 황제가 그것을 본 모양이다.

황제는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폐하?”

나는 그의 반응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도대체 왜? 당신도 알고 있잖아.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 그 13번가였어. 당신은 나를 샀고, 나는 당신에게 처음으로 안겼고. 도대체 뭐가 문제야?

황제가 말했다.

“그랬지. 너는 남창이었지.”

“…….”

“맞아.”

남창이었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황제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폐하?”

“가겠다.”

“어딜 가시겠다는 겁니까?”

황당하다. 나는 일어난 황제의 뒤를 쫓아 일어났다. 황제가 잠옷을 벗긴 탓에 매끄러운 나체가 달빛에 드러났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황제는 차가운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군.”

“폐하.”

“저딴 것을.”

그 말에 황제를 쫓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쿵, 하고 문이 닫혔다.

‘저딴 것을.’

……저딴 것을?

저딴, 것이라.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황제가 핥던 귓불을 매만졌다. 옅게 피가 묻어나는 귓불이 따끔따끔했다. 피가 묻은 손을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뭘 기대한 거야.

황제가 나를 걱정할 리가 없잖아.

내 상처를 조금이라도 신경 쓸 리 없잖아. 자기가 만든 상처고, 또 나는 고작 ‘저딴 것’인데.

나는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황제가 벗겨 낸 잠옷을 껴입고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황제가 머물렀던 침대는 조금 넓게 느껴졌다. 옆으로 돌아눕자 황제가 깨문 귓불이 아프게 느껴졌다.

아파라. 좀 살살 깨물지.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한다. 나는 추하게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귓불뿐만 아니라 그 뒤에 난 거미 모양의 흉터가 다시금 아파 왔다.

내 착각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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