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5/34)

4장

그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아무리 잠들려고 애써도 쉽사리 눈이 감기지 않았다. 전면창에 드리운 얇은 커튼을 뚫고 달빛이 방 안을 적셨다.

달빛은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은빛.

300년 전, 지하 감옥에서도 저것과 똑같은 달빛을 봤다. 그때는 저 달빛이 참으로 그리웠다. 바깥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 지옥에서만 꺼내 준다면. 저 달빛을 마음껏 맞을 수 있다면.

‘채스터턴.”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루이 채스터턴. 그를 떠올리면 반사적으로 몸이 떨린다. 따뜻하던 손끝이 차갑게 식는다.

나는 주먹을 꼭 말아 쥐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떨지 마. 무서워하지 마.

어차피 그는 300년 전 사람이다. 난 지금 이곳에 있잖아. 다시는,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아.

국무대신 루이 채스터턴은 델루니안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신하 중 한 명이었다.

적군에게 악명 높은 기사 리안이 황제의 검이었다면, 채스터턴은 그의 방패나 다름없었다.

리안은 섬세한 외모와 달리 주군을 위해서라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달려드는 면이 있었는데, 채스터턴은 그와 정반대였다.

몸을 낮추고 기회를 노린다. 리안이 장기판의 말이라면 채스터턴은 장기판을 조작하는 기수라고 해야 할까.

황궁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루이 채스터턴을 경외했다. 황제가 검을 쥔 폭군이라면, 루이 채스터턴은 속을 알 수 없는 실권자였다.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 해도 루이 채스터턴이 인정하면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루크 님. 국무대신 루이 채스터턴입니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

모든 사람이 나를 껄끄럽게 바라보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미소로 나에게 인사했다.

그의 정중한 인사로 불안했던 나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참 신기한 노릇이다. 황제가 나를 후궁으로 넣었을 때는 모두가 반대했지만, 채스터턴이 인정하자 모두의 불만은 수그러졌다.

그만큼 채스터턴의 입지가 황제에 비견할 만큼 높았던 게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그만큼 입지가 높은 채스터턴이었지만, 그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황제의 어린 시절 벗이라는 리안과 달리, 채스터턴은 황제가 보위에 오른 이후에 만난 인물이었지만 황제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황제가 정복 전쟁을 위해 황궁을 비울 때 실무를 처리한 사람이었으니 그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높았는지는 잘 알 수 있다.

아마 채스터턴이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황제를 몰아낼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는 그러지 않았지만.

채스터턴은 나를 존중했다. 나는 평민이었고, 남자 후궁이라 떳떳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채스터턴은 그런 조건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나를 황비 대하듯 대접하였다.

황궁에 적응하기 힘들어 쩔쩔매는 나에게 찾아와 이런저런 조언을 주며 내 사정을 헤아려 준 사람도 채스터턴이다. 무지했던 나는 당연히 채스터턴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런 절대적인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황제의 근위기사단장인 리안이 내 호위 기사가 되었을 때부터다. 황제가 나를 리안의 대용품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너무 좌절하지 마십시오.”

채스터턴은 그렇게 말했다.

“루크 님도 마음만 먹으면 폐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분명 위로였다. 그런데 뭔가 거슬렸다. 정말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가 거슬렸다.

나는 그 말을 한 채스터턴을 바라보았다. 채스터턴은 항상 그랬듯 흐트러짐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린 것처럼 보이는 미소.

이후로 그런 일들은 계속되었고, 나는 점점 채스터턴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는 항상 내게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으라 격려했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그가 나를 업신여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언젠가 한 번은 ‘제가 그럴 주제나 되겠습니까’ 하고 나름대로 반박을 하였는데, 채스터턴은 ‘저런……’ 하고 안타깝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는 외궁의 사람이었고 나는 내궁의 사람이었으니 그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마주칠 일은 없었다.

나는 그가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으나, 그는 잊을 만하면 찾아와 내 속을 은근히 긁고 돌아갔다. 평민의 신분으로 나를 찾아오는 백작을 물릴 수도 없어서 속만 끓이던 7년.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온 건, 황제와 리안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가 물었다.

어떻게 할 거냐고? 글쎄…… 나는 그때 황제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에서 머무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기에 그냥 마지막 인사나 할 생각이었다. 그에 별생각 없이, 늘 그랬던 것처럼 대답했다.

“폐하의 처분을 기다릴 생각입니다.”

그때 채스터턴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짓고 다닌, 그린 것처럼 번듯한 미소와는 조금 다른 표정이었다.

“……루크 님은 항상 그렇게 말씀하시는군요. 모든 권리를 폐하께 맡기는 식으로요.”

채스터턴의 말에 나는 힘없이 웃었다.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황궁에 남겠다 떼를 쓰겠는가.

그때의 나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채스터턴도 내 대답이 정답인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도 힘내십시오. 혹시 압니까? 폐하께서 루크 님을 못 잊고 되돌아오실지.”

7년 동안 내 속을 긁었던 그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 그래도 기적은 있다, 희망을 가져라, 하고 영혼 없이 격려하는 것 같은 말은 차라리 안 듣느니만 못했다. 희미하게 비웃음마저 느껴지는 위로.

그것 때문이었다.

채스터턴이 나가려는 순간, 그에게 7년 동안 꾹꾹 참고 있던 말을 토해 낸 것은.

“그 말, 진심이십니까?”

문을 열고 나가려던 채스터턴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정말로 폐하께서 저를 못 잊고 돌아오실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채스터턴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때 그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한순간이었지만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북해의 빙하보다 더 차가웠다. 마치 경멸하는 것을 보는 듯 싸늘한 그 시선에 몸이 얼어붙었다.

“……물론입니다.”

그가 다시 웃었다. 그 얼굴에 나타난 미소는, 늘 보던 그 미소였다. 그는 그 미소만 남기고 떠나갔다.

하지만 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은 차가운 얼굴에 까닭 모르게 불안해졌다.

그리고 한 달 뒤.

원인 모를 불안이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끌고 가라.”

갑자기 끌려온 지하 감옥. 그곳에서 채스터턴은 나를 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신문하라고. 고문하라고. 어떤 방법을 써도 좋으니 사실을 토해 낼 때까지 쥐어짜라고. 나는 소리쳤다.

“각하!”

왜 이러십니까!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채스터턴 각하! 알려 주세요!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 밤중에 나를 이렇게 끌고 온 겁니까!

내 물음에 채스터턴은 싸늘한 목소리로 고문관에게 말했다.

“감히 역모에 가담한 자다. 철저하게 신문하도록.”

“예!”

“채스터턴 각하!”

그게 마지막이었다. 신문하라는 말만 남겨 두고 지하 감옥을 빠져나간 채스터턴과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때의 그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신문하라. 신문하라. 철저하게, 사실을 토해 낼 때까지.

난 아무것도 몰랐는데.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다시 300년 전의 지하 감옥으로 처박혔다. 손이 벌벌 떨렸다.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바깥으로 꺼내 줘. 난 정말 아는 게 없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덜덜 떨었다.

누군가의 따뜻한 온기가 절실히 필요한 밤이었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 * *

그 밤이 지나고, 나는 서재에 처박혔다. 역사가 오래된 귀족 가문에는 가문의 역사가 정리된 책이 있게 마련이다.

채스터턴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샤를마뉴의 외조부가 썼다는 3층 서재에 올라가니 아니나 다를까 채스터턴 가문의 역사를 정리해 놓은 역사서가 한쪽 구석에 있었다.

채스터턴 가문은 귀족 중에서도 아주 오래된 가문이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델루니안 시절의 채스터턴 가문을 찾아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루이 채스터턴은 백작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백작의 호칭이 들어간 책을 찾았다. 몇 권을 지나 중간쯤에서 루이 채스터턴이 등장했다.

책에는 간단하게 쓰여 있다. 황제 델루니안으로부터 전공을 인정받아 발자크 후작이 되었다가, 이후 백작으로 강등되었다는 단 두 줄의 설명이 전부였다.

사망 연도는 내가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해로부터 3년 후였다.

좀 의외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튼튼한 사람이었는데. 아무튼 별로 소득은 없었다.

나는 책을 놓고 내려와 2층 서재에 처박혀 델루니안 시대가 조금이라도 언급되는 책은 다 읽었다.

달라진 문자 체계 때문에 한 장 읽는 데에도 몇십 분이 걸렸지만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왜 죽었는지 그게 너무 궁금했으니까.

며칠을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찾으려니 황태자가 와서 기웃대기 시작했다.

괜히 서재 앞에서 얼쩡거리면서 큼큼, 하고 제 존재를 알린다거나 ‘아아, 심심하다’ 등등의 말을 중얼거리며 문을 슬쩍 열어 보고는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왜 저러실까 의아하여 그저 바라만 보았으나, 며칠 전 그와 내가 조금 다투었던(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이 생각나자 조금 난감해졌다.

음, 아직도 그때 일을 마음 쓰시는 걸까. 그래서 저렇게 말도 못 하고 기웃대기만 하시는 건지.

“전하.”

“응?”

서재의 문을 열고 그 앞 소파에 앉아 있던 황태자를 부르자, 그가 재빨리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모습이 내가 한때 잠시 길렀던 강아지를 닮은 것 같아 조금 우스워졌다.

“……들어오시겠어요?”

그 말에 황태자가 입을 헤, 벌리며 대답했다.

“응!”

역시 강아지 같다.

“뭐 찾고 있어?”

쏜살같이 서재로 들어온 그가 내게 바짝 붙으며 물었다. 나는 그에게서 살짝 몸을 떼며 대답했다.

“음, 역사책이요.”

“역사책?”

“예.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그래? 뭐가 궁금한데? 나한테 물어봐! 내가 대답해 줄게!”

‘나 이래 봬도 제국 대학 차석 졸업자야!’라고 그가 당당히 소리쳤다. 차석 졸업자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것이겠지.

그러십니까, 하면서 웃어주자 그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쭉 내밀었다.

“그렇다면 감히 여쭙건대…… 이곳에 있는 책은 이게 전부인가요?”

그 말에 황태자가 노골적으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묻고 싶다는 게 그거야?”

“예, 전하.”

“뭐 좀 더 대단한 거 없어?”

“……대단한 거요?”

대단한 게 뭐지. 으음…… 딱히 없는데.

내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은 정말로 저게 전부였다. 이곳에 있는 델루니안 시기의 역사책들은 거의 다 읽었으니까.

내가 어색하게 웃으려니 황태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책은 이게 전부야.”

“아…….”

“무슨 책을 읽고 싶은데? 내가 구해 줄 수 있는 건 구해 줄게.”

구해 준다니 그것이 참말인가. 역시 친절한 황태자 전하다. 연인에게 지조는 없을지언정.

“제국 통일기에 관한 책이요. 어떤 것이든 다 좋습니다.”

“제국 통일? 당신 그런 것에 관심 있었어? 대단하네.”

그의 칭찬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사실 제국 통일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다. 그 시대가 딱 황제 델루니안의 시대였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대단하다는 칭찬을 받다니 뭔가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를 속이는 나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해서 민망함에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제국 통일기라…….”

황태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 중얼거리더니 미안하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너무 포괄적인걸. 구체적으로 읽고 싶은 책이 있어?”

“아니요, 그런 것은 따로 없고…….”

“그럼 어쩌지. 당신이 원하는 책이라면 다 사 주고 싶은데, 너무 광범위해서 그렇게 하면 밑도 끝도 없을 것 같네.”

“아, 굳이 사 주실 필요는 없어요. 그저 잠시 읽을 수만 있으면 족합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도서관에 갈래?”

도서관? 또 모르는 개념이 튀어나왔다.

“도서관이요……?”

그러자 황태자는 ‘아, 참. 당신은 모르겠구나’ 하면서 간단히 설명했다.

“도서관은 책을 모아 두고 읽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빌려주는 곳이야.”

그 말에 나는 또다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이 다 있나. 책을 무료로, 그것도 아무에게나 빌려준다니!

내가 살던 시대에 책은 사치품이었다. 귀족들만의 전유물인 책. 평민들은 책 한 권 사기도 힘들었고, 산다고 해봤자 글을 몰라 읽을 수가 없었다.

나도 황궁에 들어가서야 글을 배우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책을 손에 쥐었을 때 얼마나 떨리던지.

그런데 요즘은 책을 사람들이 막 읽는단 말이지. 그럼 다들 글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 멋진걸. 참 세상 좋아졌다.

막연히 감탄하자 황태자가 웃으며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우리는 차를 타고 도서관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운전은 새로 나타난 경호관이라는 자들에게 맡겼다.

나와 함께 차의 뒤편에 앉은 황태자는 도서관을 향해 가는 내내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금발 벽안 취향에 대해 은근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부정하지는 않을게. 내가 그런 사람들을 만났던 것은 사실이야.”

“그런가요.”

“하지만 그건 당신을 만나기 전이었어. 그러니까, 라파엘을 말이야.”

흐음.

“라파엘은 너무 부끄러움이 많아서 차마 비서실 사람들에게도 알리지 못했고, 음…… 그래서 비서실장이 나를 오해하고 있던 거야.”

“그렇습니까.”

“제발 나를 믿어줘. 당신을 마음에 둔 이후로 아무도 만난 적 없어. 이것만은 사실이야.”

과연 사실일까. 고개를 돌려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황태자는 초조한 표정을 감추며 억지로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저런 것을 보면 사실 같기도 하고…… 근데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게.

“알겠습니다, 전하.”

“믿어주는 거야?”

“……루크인 제가 믿고 말고 할 일은 아니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백작의 육체는 전하의 말씀을 믿겠지요.”

그러자 황태자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차는 빠르게 도로를 달렸고, 우리는 곧 도서관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가 도서관이라는 곳인가요?”

그런데 도서관이라는 곳, 내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도서관이라기에 발끝부터 천장까지 책이 쌓인 곳을 생각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이곳은 그저 커다란 마을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상점과 음식을 파는 식당, 그리고 종탑 등이 보이는 큰 마을.

내 물음에 황태자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여긴 황립 대학이야.”

“예?”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 도시지.”

대학 도시라고? 그게 무엇이냐고 되묻자, 황태자는 대학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400년 전, 제국에는 황립 아카데미라는 것이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귀족의 자제들을 데려다가 인질 겸 재원으로 기르려던 소기의 목적이었다고 하는데, 귀족들이 자신의 아들을 입학시키는 것을 꺼려 실제로 아카데미를 채운 것은 힘이 없는 하급 귀족의 자제들과 평민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이 훗날 황실에 소속된 관원이 되어 델루니안 시기 중앙집권체제의 토대를 닦게 되었다.

권력을 갖게 된 평민 각료들은 자신들의 등용문인 아카데미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평민 관리가 많아져야 박해를 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카데미는 점점 규모를 키우게 되었는데, 이후 더 이상 그 규모를 감당할 수 없었던 아카데미는 분과별로 분리․독립하여 각각의 독립된 칼리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런 칼리지들이 모여 이룬 것이 대학 도시다. 처음에는 각각의 칼리지들이 독립된 대학이었으나, 70년 전 당시의 황제가 교육정비사업을 통해 황립 대학이라는 이름하에 각 칼리지를 묶어버렸다고 했다.

그런 일련의 설명을 끝내며 황태자는 자신도 이곳 막시밀리안 칼리지 출신이라 자랑했다. 그게 대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앙 도서관 건물은 저기 있어. 모든 칼리지 학생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야.”

황태자가 가리킨 곳에는 낡고 거대한 원형 건물이 서 있었다. 저기가 도서관이란 말이지.

“저 도서관에는 오래된 기록물도 있나요?”

“제국 내에서 황실 서고 다음으로 장서 규모가 큰 곳이야. 있을 건 다 있어.”

그럼 델루니안의 기록도 있겠군.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좋아, 저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도서관 쪽으로 발걸음을 뗄 때였다.

“샤를?”

하고, 낯선 목소리가 황태자를 불렀다. 나와 황태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갈색 머리에 옅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지?

그때 황태자가 깜짝 놀랐다는 듯 소리쳤다.

“시드니! 너 벌써 돌아왔어?”

“오랜만이다, 샤를.”

시드니라고 불린 남자는 인상 좋게 웃으며 황태자를 향해 다가왔다.

아, 황태자의 ‘친구’로군.

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드니라는 남자가 황태자와 가볍게 포옹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다. 정말로 황태자에게 친구라는 존재가 있긴 하구나.

“사고 났다는 소식은 들었어. 해외에서도 1보로 실렸거든.”

“그래? 난 멀쩡했는데.”

“그래서 행운아 황태자라는 헤드라인으로 실렸지.”

“뭐야?”

내게는 제법 살벌하게 들리는 농담을 나누며 웃는 것을 보니 꽤 오래된 친구인 모양이다.

역시 신기해. 두 사람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황태자가 갑자기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인사해. 내 비서관이자 연인인 라파엘 드마뉴라고 해.”

유독 연인에 강세를 넣는 황태자를 보니 순간 웃음이 나왔다. 차에서 그렇게 열심히 변명하더니. 피식 웃고 있자니 시드니가 ‘아……’ 하며 내게 악수를 청해 왔다.

“저번에 뵀었죠?”

“예?”

“2년 전인가, 그때 샤를마뉴를 보러 왔다가 만났는데. 저 기억 안 나세요?”

라파엘과 만났다고? 황태자도 처음 듣는 눈치다. 만났었나?

나는 모른다. 나는 라파엘 드마뉴 백작이 아니니까. 그에 입을 다물고 있자, 황태자가 끼어들어 적당히 이야기를 잘라 냈다.

“사고 후유증으로 기억이 조금 사라졌어. 네가 이해해.”

“아, 그렇구나. 그럼 다시 인사해야겠네. 저는 시드니 카턴입니다. 샤를마뉴의 친구예요.”

“지난번에 말한 그 친구가 얘야.”

아, 그 친구. ……요리를 참 잘한다는 친구가 당신이군요. 그 탄화된 빵과 정어리의 원작자.

나는 어색하게 악수를 받으며 적당히 대답했다.

“루…… 아니, 라파엘 드마뉴입니다.”

이 육체가 라파엘 드마뉴 백작일 때 만났던 사람이니까 본인인 척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낯선 이름을 대며 인사하자, 시드니가 밝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참 밝은 사람인 것 같다.

“근데 여기는 웬일이야? 졸업한 이후로 한 번도 안 오더니.”

“아, 라파엘이 책을 좀 읽고 싶다고 해서.”

“책?”

시드니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아, 그렇지, 하고 황태자가 말했다.

“시드니 너, 석사 논문으로 뭘 썼다고 했지?”

“아…… 황제 델루니안의 제국 안정화 정책. 왜?”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뭐라고?

“라파엘이 지금 제국 통일의 역사에 관한 책을 찾는다는데, 네가 좀 도와줄 수 있지 않나 싶어서.”

도와주세요! 나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드니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이죠. 도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한 사람이구나. 내 대답에 시드니가 다시 웃었다.

황태자는 경호관들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했고, 시드니와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달랐다. 책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조용할 줄 알았는데, 무슨 연설이라도 하는지 한쪽이 시끌시끌했다.

무슨 얘기인가 싶어 잠시 귀를 기울였다. 화국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에 관한 토론이다.

독재정권에 반대해 거대한 시위가 있자 군사령관이 시위 진압을 명분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황태자가 일전에 설명했던 것이 떠올랐다.

학생들은 저마다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그 주제에 대해 떠들어 댔다.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다. 나랏일에 대해 저렇게 핏대 세워 소리칠 수 있는 세상이라니.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니, 시드니가 말했다.

“시끄럽죠?”

“아, 예, 뭐.”

“화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럴 겁니다. 제국은 형식적으로는 입헌군주제 국가이지만, 아직도 황제의 위상이 대단하니까요. 저렇게 혈기 넘치는 학생들은 황제의 존재를 못 견뎌 하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토론하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실질적 군주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우우, 하고 학생들이 저마다 찬반을 외쳤다. 시드니는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뭐, 이것도 시대의 흐름이라고 할까요.”

“…….”

“저는 벌써 옛날 사람이 됐는지, 군주제 폐지까지는 너무 나가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건 나도 그렇다. 나는 정말로 옛날 사람이라(무려 300년) 황제가 없는 세상은 상상을 못 하겠다.

입헌군주제라는 말도 생소하게 다가오는데 하물며 이름조차 생소한 공화정이야.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드니를 따라갔다.

“제국 통일의 역사가 궁금하다고 하셨죠?”

역사책이 즐비한 서가에 이르러 시드니가 물었다.

“예.”

“뭐 따로 찾는 책이 있으세요?”

그건 아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맘을 고쳐먹고 대답했다.

“혹시 황제 델루니안 시대에 기록된 문서들을 볼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시드니가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델루니안 시대의 문서요?”

“예, 찾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출입증만 있으면 어렵지는 않지만…….”

망설이는 기색이 보인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부탁했다.

“부탁드립니다. 꼭 찾아야 해서요.”

“…….”

나는 찾아야 했다. 내가 왜 그런 죽음을 맞았는지. 내가 얽힌 그 역모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 꼭 알아야 했다. 그걸 알아야 내가 새로운 삶을 살든, 진정한 안식을 취하든 할 것 같았다.

내 부탁에 시드니는 ‘그럼 할 수 없죠’라며 나를 이끌고 출입 통제 구역으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는 자에게 지갑에서 출입증을 꺼내 보인 시드니가 문을 열었다.

“고문서들이 보관된 서가입니다. 델루니안 시대의 문서들도 여기 있어요.”

“…….”

여기에 있단 말이지. 나는 천천히 서가를 향해 걸어갔다. 눈에 익은 책들이 몇 권 보였다.

그래, 내가 읽던 책들이다. 고급 가죽과 금사로 만들어진 책들. 나는 비싸서 감히 만져 볼 생각도 못 했던 그런 책들. 그런 것들이 여기 있었다.

서가에서 책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고 있을 때, 시드니가 묘한 기색이 엿보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국 통일의 역사보다 델루니안 자체에 더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하고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시드니의 목덜미에 있는 기다란 상처가 눈에 들어온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목덜미의 상처?

“하긴, 당신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요.”

그 상처를 어디서 봤더라, 하고 생각할 때였다.

시드니가 입을 길게 찢어 웃으며 말했다.

“안 그렇습니까, 루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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