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4/34)

3장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황태자가 그렇게 말했을 때, 앞으로 내가 처할 상황이 리안의 대용품으로 있을 때보다 더욱 좋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황제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은 리안과 그의 대용품이었던 나. 우리 세 사람의 관계는 비정상적이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규칙이랄 것은 있었다.

황제는 내 몸만을 원했지 내게 리안처럼 행동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 나는 그저 사랑하는 이와 비슷하게 생겨 욕정을 풀기에 좋은 도구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황태자는 나와 라파엘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의 맹목적인 애정은 라파엘을 향하는 동시에 내게도 향한다.

그래서 불안했다. 내가 멋모르고 착각할까 봐. 내 것이 아닌 애정을 내 것이라 착각할까 봐. ……그래서 또다시 불운한 결말을 맞을까 봐.

사랑을 받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다. 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황태자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동시에 불안했다. 그 달콤한 시선이 멍청한 나를 근본부터 뒤흔들 것 같았다.

그런 시선으로 날 바라보지 마.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나는 라파엘이 아니라고.

그 열렬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창밖을 보며 말을 돌렸다.

“……근데 여기가 라파엘 드마뉴 백작의 집인가요?”

말을 돌리기 위함이었는데, 뱉고 나니 진짜 궁금해지기는 했다.

이런 멋없는 건물이 라파엘의 집? ……조금 당황스럽다. 내가 아는 귀족들은 이런 곳에서 살지 않았다. 그들은 집만이 자신의 권세를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것처럼 최대한 호화롭고 아름답게 지으려 노력했다.

황후의 아버지만 해도 황도 저택의 기둥을 모두 금으로 칠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라파엘 드마뉴 백작의 집은 이런 모습인 걸까? 어떻게 건물에 곡선이 하나도 없을 수 있지?

창문도 직선, 발코니도 직선, 게다가 모든 창문은 크기와 형태에 있어 조금의 차이도 없다.

위로만 높게 치솟은 건물은 상자를 켜켜이 쌓아 올린 것 같았다. 설마 창고인가? 그럼 저택은 뒤에 있나?

그런 생각에 창밖을 둘러보았지만 비슷한 형태의 건물이 몇 개 더 있었을 뿐, 저택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건물은 한 채도 없었다.

진짜 이상하게 생겼다……. 굳이 말하자면 흉물에 가까운 건물을 보며 울상을 짓자, 황태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건 아파트라고 하는 거야.”

“아파트요?”

“여러 사람이 같이 사는 집이라고 해야 할까?”

그건 또 뭐지? 여러 사람이 같이 사는 집이라니.

“……구빈관인가요?”

“구빈관?”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데려다 재워주는 곳이요.”

“아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음…… 당신이 있었던 병실 있지? 그런 크기의 방을 여러 개 붙여놓은 게 집이고, 그런 집들이 몰려 있는 건물이 아파트야.”

맙소사.

“그게, 그게 집이라고요?”

“응.”

“……말도 안 돼.”

정말 말도 안 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좁고 단편적인 공간에서 살 수 있는 거지?

황궁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내게 병실은 은근히 좁았다.

길바닥에서 굴러먹던 시절을 생각하면 손바닥만 한 방도 감지덕지할 일이지만, 역시 씀씀이는 커지기는 쉬워도 줄어들기는 어렵다고,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서울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했더니 그 정도 크기의 병실이 약간은 갑갑하게 느껴진 것이다.

평민인 내가 이럴진대 백작이라는 라파엘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걸까.

“드마뉴 백작은…… 취향이 독특한가 보네요.”

좁게 사는 게 취향이라든가. 내가 떨떠름하게 말하자 황태자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라파엘이 들으면 울겠네. 이 아파트 꽤 고급이라고. 신식이거든.”

“…….”

고급이든 신식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크기였다. 귀족이 살 만한 크기가 아니란 말이지.

내가 살던 시대의 귀족들에게 이런 곳에서 살라고 하면 그들은 아마도 이런 곳에서 사느니 차라리 명예스러운 죽음을 선택하겠다 했을 거다. 집의 크기와 화려함에 목숨을 거는 종자들이니까.

라파엘 드마뉴 백작은…… 뭐 하는 사람일까.

라파엘이 살았다는 건물을 심란하게 바라보는데 갑자기 황태자가 물었다.

“근데 당신, 집에 들어가는 방법은 알아?”

“예?”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출입 키가 있어야 하는데, 당신 꼴을 보아하니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출입 키요?”

“열쇠 말이야.”

열쇠? 그게 왜 필요하지?

“문지기가 백작을 알아보지 않을까요?”

그런데 문지기는 어디 있지. 문지기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는데 황태자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푸하하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파트는 황실처럼 누가 문을 열어주는 곳이 아니야. 문지기 따위는 없다고.”

그 말에 나는 또다시 경악하고 말았다. 직접 대문을 여는 귀족이라니.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평민인 나를 극진히 대접했던 리안조차도 문은 문지기가 여는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라파엘 드마뉴 백작. 왜 이런 곳에서 살았어요?

경악한 채로 굳은 나를 보던 황태자가 간신히 웃음을 갈무리하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당신 혼자 집에 못 들어갈 것 같다.”

“…….”

“어차피 이런 좁은 집은 당신이랑 맞지도 않고. 그렇지?”

좁은 것은 사실이지만 평민인 내가 못 살 것은 없다. 답답하기야 하겠지만 곧 익숙해지겠지.

하지만 라파엘 드마뉴 백작은 이런 곳에서 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백작인데…….

그런 나를 보며 황태자가 세워 뒀던 차를 다시 움직였다.

“당신에게 딱 맞는 집을 하나 알고 있어.”

“딱 맞는 집이요?”

“가자. 거기라면 괜찮을 거야.”

황태자가 호언장담한 그곳은 황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3층짜리 저택이었다.

예배당이 있는 안쪽 정원을 품고 있는 형태로 기다랗게 펼쳐진 저택.

그 앞에는 양 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 벌판이 있었다. 그리고 저택의 옆으로는 작은 강줄기가 흐른다. 황태자가 자랑스럽게 물었다.

“어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좋아요.”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백작이 살 만하지. 라파엘 드마뉴 백작, 보고 있어요? 아까 거긴 정말 아니에요. 이 정도는 되어야 당신의 신분에 걸맞는다고요. 거기는 나 같은 평민이나 그보다 못한 죄수들에게나 어울리는 곳이에요.

내 대답에 황태자가 마주 웃었다.

“다행이네.”

“이곳은 전하의 소유인가요?”

“응. 외조부께서 물려주셨어.”

그 말에 기분이 묘해졌다. 역시 황태자는 황태자구나. 이런 아름다운 저택을 당당히 자신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나는 황궁에 있을 때도 감히 이런 저택을 가질 생각조차 못 했다. 돈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내 앞으로 배당된 내탕금은 평민은 죽었다 깨어나도 만질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금액이었다.

시종들은 몇 번이고 이 기회에 한몫 챙기라 권했지만, 돈도 써본 사람이 잘 쓴다고, 평생을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온 내가 갑자기 그런 큰돈을 펑펑 쓸 수 있을 리 없다.

시종은 사고 싶은 것 마음껏 사셔도 된다며 나를 부추겼지만 나는 결국 그 돈으로 책이나 몇 권 사고 말았다.

‘겨우 이거 사려고 그렇게 고민하셨어요?’라고 말하며 황당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시종들의 얼굴에 나는 그저 멋쩍게 웃었다.

하급 귀족의 자제인 당신들은 모르겠지. 평민들에게는 책도 사치품이라는 걸.

책 몇 권을 사는 데에도 손을 떨었던 내가 비단옷이나 향유, 좋은 가구 같은 것을 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사실 뭐가 좋은 건지 알아볼 안목도 없었으니 그냥 주어진 대로 만족하고 사는 게 최선이었다.

또 그러다 보면 황제가 ‘궁상도 작작 떨어라’라며 가끔 자신의 고매한 취향에 맞는 가구들을 내 침소로 보내고는 했다.

황제의 애첩이 궁상떨면서 산다는 소문이 듣기 거슬린 모양이었다.

“……부럽네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툭, 하고 진심을 내뱉었다.

아차. 입 간수를 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했으나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응?”

황태자가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이를 어쩐다. 감히 황태자를 시기하였다 말할 수 없어서 나는 그저 웃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묻는다.

“말해봐, 뭐가 부러운데?”

그냥 모른 척해 주시지. 어쩐지 부끄러웠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간신히 대답했다.

“……이런 저택을 물려주는 가족이 있어서 부럽다는, 뭐 그런 뜻이었어요.”

거짓말은 아니다. 저택도 저택인데, 사실은 그런 저택을 물려줄 수 있는 가족의 존재가 더 부러웠다.

나는 길에서 태어났다. 초가을의 어느 날, 숲에서 나무를 하던 나무꾼은 고목 그늘에서 앙앙 울어대는 아기를 발견하고 자신이 데려다 키우기 시작했다.

나무꾼과 그의 아내에게 아이가 한 명도 없었기에 살아난 목숨이다. 나무꾼의 아내는 불임의 몸이었다. 본인의 몸으로 낳은 아이가 아니라 그런지 그녀는 나를 싫어했다.

내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떻게 그녀를 어머니로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나만 보면 벌레를 보듯 흠칫 놀라는 여자인데. 허울뿐인 가족의 울타리는 나무꾼이 죽은 날 허물어졌다.

나는 집을 나섰고, 여자는 나를 잡지 않았다.

그걸로 끝.

내게는 가족이 없다.

라파엘 드마뉴 백작에게도 가족이 없다고 했지. 부모님이 무슨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참, 그런 걸 보면 내 인생도 참 기구하다. 어떻게 고르고 골라서 이런 몸이냐.

부유하지 않아도 좋으니, 나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이 진짜 내 아버지 어머니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괜히 우울해졌다. 황태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움찔움찔, 뭐라고 말할 것처럼 떨렸다. 위로라도 하려는 것일까. 참 다정한 황태자 전하다.

나는 괜찮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밝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전하.”

“……라파엘.”

“혹시 제가 저택 구경을 해도 괜찮을까요?”

그의 부름을 못 들은 척하며 저택 구경을 해도 괜찮은지 묻자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인 후 저택의 문 쪽으로 향했다. 뒤에서 따끔따끔 황태자의 시선이 박혔다.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은데. 우리 시대에는 고아가 흔했다. 나 같이 버림받은 아이들이 발에 챌 정도로 많았다. 그래도 나는 잘 자란 편이다.

질병에 걸린 적도 없고, 다른 아이들처럼 물건이나 훔치다 걸려서 손이 잘린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는 총애받는 후궁까지 되었으니까.

……물론 그런 식으로 버려지긴 했지만.

나를 안타깝게 보는 황태자의 시선이 싫어 일부러 경쾌하게 걸었다.

절 불쌍하게 보지 마세요, 다정한 황태자 전하. 저는 정말로 괜찮으니까.

* * *

드넓은 외관과 다르게 저택의 내부는 꽤 단순한 편에 속했다.

1층에는 응접실과 부엌, 다과회를 즐길 수 있을 법한 거실이 있었고, 2층에는 침실과 서재, 음악실 등이 있었다.

3층은 샤를마뉴의 외조부가 통째로 썼다고 한다. 별로 볼 건 없다는 말에 굳이 올라가지 않았다.

저택 자체는 내가 살던 시대의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당황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건 바로,

“……이건 뭔가요?”

“아, 그건 텔레비전이라는 거야.”

“텔레……?”

“텔레비전. 영상 기기야.”

집안에 즐비한 이상한 기구들 때문이다!

“영상이 뭔데요?”

“음?”

내 물음에 황태자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상은,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황태자가 ‘흐음……!’ 하고 기다랗게 한숨을 내뱉었다.

“영상이라는 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거야.”

“음…… 환각인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걸 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냥 직접 보는 게 빠르겠다.”

그가 그 텔레비전인지 뭔지 하는 것을 만졌다. 그러자 핏,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상자에 사람이 나타났다!

[오늘 현지시각 7시에 화국 동북주에서 독재정부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무력시위가 있었습니다. 시위대에 참여한 시민은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되며, 화국 정부에서는 강경진압의 의지를 드러냈…….]

동화 속 요정님처럼 작은 크기의 여성이었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뭐라고 빠르게 중얼거리자 갑자기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건물이 불타오르는 모습이 상자에 나타났다.

맙소사.

“사, 사람들이 돌을 던져요!”

“원래 시위는 저런 거야.”

“맙소사, 불이 붙었어요!”

물!

내가 부엌으로 달려가려 하자 황태자가 급하게 내 팔을 잡았다.

“진정해. 이건 그냥 화면일 뿐이야.”

“예?”

“당신이 보고 있는 화면은 저기 먼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지금 내 눈에 훤히 보이는데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혼란스러웠다. 전하, 죄송한데 이해가 안 가요…….

그런 내 모습을 본 황태자가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당신, 신문이 뭔지는 알지?”

“예.”

“텔레비전은 신문과 비슷한 거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 주지. 저 검은 상자를 통해서 말이야. 영상이라는 건 그런 소식들을 마치 직접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거야. 방금 봤던 것처럼.”

“그럼 저 상자 안에 사람이 들어간 건가요?”

“아니, 실제로 들어가는 건 아니고, 신기루같이 생기는 거야.”

‘신기루는 뭔지 알지?’ 하고 황태자가 물었다.

사실 모르지만 여기서 더 캐물었다가는 그가 싫어할 것 같아 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는 여기에 없지만 있는 것처럼 비치는 것. 그게 텔레비전이야.”

“……어렵네요.”

알 듯 말 듯 모르겠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시위대는 사라지고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나와 내일 날씨를 예언하고 있었다.

“그럼 저 여자는…… 사제인가요?”

“응?”

“날씨를 예언하고 있는데, 사제가 아니라면 혹시 점성술사…….”

그 순간 황태자가 푸하하, 격렬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깜짝이야.

“아, 미치겠다. 당신…….”

끅끅대며 웃고 있는 꼴을 보자니 괜히 민망해졌다.

아니, 뭐가 그렇게 웃긴 건가요.

황태자가 폭소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살던 시대에 날씨를 예언하는 사람은 사제나 점성술사였다. 그들은 신의 세계를 엿보는 위대한 존재들이었기에 황제도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들이 벼락이 내린다고 하면 진짜로 벼락이 내렸고, 우박이 내린다고 하면 우박이 떨어졌다.

순백, 혹은 해와 달이 새겨진 감청색 의복을 입고 근엄하게 앉아 세상의 이치를 읊는 그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노란 옷을 입고. 심지어 발랄하게 조잘대며. 이상하다 여기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황태자는 웃음을 멈출 줄을 몰랐다. 이제는 아예 울고 있었다.

이제 그만 웃어도 될 것 같은데…….

“……언제까지 웃으실 거예요?”

“아, 배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뭐가 웃긴 건지 이유나 좀 알려 주고 웃으시면 안 될까요.

그러자 황태자가 간신히 웃음을 진정하고 대답했다.

“저 여자는 기상 캐스터야.”

“예?”

“날씨를 알려 주는 사람이라고.”

“그럼 역시 사제가 맞네요.”

“아니, 사제 같은 게 아니라…….”

이걸 정말 어떻게 설명한담. 그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관측하는 거야. 내일 날씨를 말이야.”

“과학이요?”

“세상이 돌아가는 명확한 원리. 해는 어째서 뜨고, 달은 어째서 지는지. 바다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흐르는지. 꽃은 왜 피고 지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원리.”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게 바로 사제가 하는 일 아닌가.

사제는 신의 이치를 탐구한다. 신께서 왜 해와 달을 만드셨는지, 바다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흐르는지, 꽃을 창조한 까닭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연구하는 사람이 사제다.

내가 이렇게 되묻자, 황태자는 뭐라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당신 정말 옛날 사람 같다.”

그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아직도 내가 라파엘이라고 믿고 있었다.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다.

“그야 옛날 사람이니까요.”

300년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한순간에 적응할 수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그렇게 위안을 해봐도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 정신은 300년 전 시간 속에 갇혀 있다. 하지만 육체는(비록 빼앗은 육체라고는 하지만) 300년 후의 시간을 살고 있다.

정신과 육체의 불협화음.

그 와중에 줄곧 다정했던 황태자마저 옛날 사람이라고까지 하니, 나는 마치 이 세상의 불청객이 된 것처럼 느꼈다.

차가운 우울함이 투명한 물처럼 차올랐다.

피곤하다. 쉬고 싶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안락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면 이 우울감을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전하, 죄송한데 욕실이 어디인지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씻으려고?”

“예, 조금 피로해서요.”

“그래? 씻고 쉬어야겠네. 욕실은 이쪽이야.”

그가 내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 왼쪽 복도의 가장 안쪽에 욕실이 있었다.

꾸준히 관리했겠지만 오랫동안 사람이 쓰지 않은 흔적이 역력한 것을 보니 자연스럽게 황궁에서 쓰던 욕실이 떠올랐다.

그곳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후궁이지만 남자인지라 다른 후궁들과 함께 공용 욕실을 이용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방으로 욕조를 들고 왔었다.

하지만 거의 매일 찾아오는 황제 덕에 씻을 일도 많았으니 욕조를 나르다 시종들이 지쳐 나자빠졌고, 그 꼴을 보다 못한 황제가 내 방과 가까운 곳에 따로 욕실을 만들었다.

그 덕에 다른 후궁 아가씨들의 시기 질투가 심해졌지만 그 욕실, 참으로 화려하긴 했지.

지금은 누가 사용하고 있을까. 아니면 없어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데, 그런 내 모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황태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왜? 어떻게 씻는지 모르겠어? 도와줄까?”

“아…… 아니요,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예. 감사합니다, 전하.”

흐음. 그가 뭔가 불만족스럽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도 참 황제를 많이 닮았다. 정말 피는 못 속이나 보다. 어쩜 저렇게까지 똑같을 수 있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조금 아파 왔다.

황태자는 욕실을 벗어나며 몇 번이고 당부했다.

“혹시 갑자기 아프다거나, 넘어지거나, 아니면 어지럽거나 하면 불러. 바로 앞에 있을 테니까.”

“……그러실 필요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알았지?”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요, 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선수를 쳤다. 하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그가 만족스럽게 웃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이제 욕실에 남은 사람은 오직 나뿐. 불편하게 몸을 죄이고 있던 옷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일단…… 물부터 받아야겠지.”

너른 욕조는 텅 빈 채였다. 목욕을 하려면 물부터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물은 어디서 받는담. 평민일 시절에는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고, 황궁에서는 내가 물을 받기도 전에 항상 뜨거운 물이 대기하고 있었으니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로서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일단 찬물을 받아서 끓여야 할 텐데. 그런데 찬물은 또 어디 있지?

그때 욕조 가장자리에 설치되어 있는 아기 천사 동상이 내 시선을 잡아채었다.

정확히는 천사가 들고 있는 물 항아리가. 그 물 항아리가 영 수상했다.

그 기울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 저기서 물이 흐른다면 바로 욕조로 떨어질 것 같았다.

혹시 저게 수도라도 되는 걸까? 수도라고 하기에는 물이 흐르지 않아 의심스럽지만 일단 확인은 해야 할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항아리 안쪽으로 아기 머리통만 한 수로가 뚫려 있었다.

여기로 물을 받을 수 있는 거구나. 그런데 어떻게 받는담? 물이 흐르지 않잖아.

우리 시대의 수로에서는 사시사철 물이 끊이질 않고 흘렀다. 필요하면 언제든 가서 물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수로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욕실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아 물이 마른 수도는 아닐 터인데 어째서 물이 흐르지 않는 걸까.

망연자실해서 동상의 이곳저곳을 살펴볼 때였다. 두 개의 은색 바퀴가 눈에 띄었다.

“이건가?”

이걸 돌리면 혹시 물이 나오는 걸까?

손을 뻗어 왼쪽에 달린 바퀴를 살짝 돌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음, 이게 아니었나…… 하고 다른 곳을 찾아보기 위해 몸을 돌린 그 순간.

쏴아아―

“으악!”

아기 천사 동상에서 물이 쏟아졌다!

“라파엘?! 무슨 일이야?!”

이럴 수가.

하필 그 밑에 서 있던 나는 홀딱 젖고 말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축 처져서 눈을 덮었다. 그 와중에도 물은 계속 쏟아지고 있어 나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거, 이거 어떻게 멈추는 거지?! 더듬더듬 손을 뻗어 은색 바퀴를 잡았다.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려서…….

쏴아아아―

“으아악!”

맙소사. 수압이 더 강해졌다. 아무래도 잘못 건드린 모양이다. 그 조그마한 항아리에서 얼마나 많은 물이 쏟아지는지 앞이 보이질 않는다.

어푸어푸. 아무래도 안 되겠다. 물을 끄는 것은 차치하고 일단 나가서 도움을 요청해야지.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렸고.

“라파엘! 무슨 일이야!”

문 앞에 앉아 있겠다던 황태자가 놀란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간신히 물세례로부터 벗어난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으……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며 그와 시선을 마주하길 몇 초.

“……미안.”

하고, 그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

뭐지.

태풍처럼 들어왔다가 바람처럼 나간 그의 잔상을 멀뚱히 그렸다.

왜 그랬지. 뭐가 미안한 거지. 얼굴이 조금 붉었던 것 같은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아까까지는 멀쩡했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고 사라진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포기하며 나는 다시금 몸을 돌렸다.

항아리에서는 아직도 물이 콸콸 흘러넘치고 있었다. 저걸 꺼야 하는데 어쩐담.

그러다가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이 제법 목욕하기에 알맞은 온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물을 끌 필요는 없겠다. 그냥 이대로 목욕하면 되겠구나.

물은 빠른 속도로 욕조 안에 차올랐다.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아기 천사 동상을 바라보았다. 참 세상 많이 좋아졌다.

예전에는 목욕하려면 찬물을 받아 끓인 후 또 찬물을 섞어 적절한 온도가 될 때까지 식혔는데, 이제는 바퀴만 돌리면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구나.

그때 나를 위해 그렇게 고생하던 시종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원통해서 피눈물을 흘릴 거다.

괜히 쓴웃음이 흘렀다. 어차피 그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겠지. 내가 죽으면서 같이 끌려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모시는 사람 하나 잘못 만나서…….

괜히 미안해졌다. 나도 억울하게 그렇게 된 것일 뿐인데. 미안하다고 해도 당신들은 나를 원망할 테지.

우울감은 짙은 피로를 동반했다. 눈을 뜨고 있을 힘도 없어 무릎을 세운 채로 눈을 감았다.

조금만 이렇게 쉬자. 피로가 사라질 때까지 이렇게 있자. 그동안 힘들었으니까.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간절히 바랐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이 이 깊은 상념까지도 씻어가기를.

* * *

“……엘? 자는 거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웅웅 울렸다. 귀에 익은, 그러면서도 조금은 낯선 목소리였다.

뭐라는 건지 제대로 들리지 않아.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나를 깨우려는 듯 끊임없이 무어라 속삭였지만 웅웅대는 목소리는 오히려 자장가처럼 들릴 뿐이었다. 몸이 따뜻하고 나른한 것이 딱 좋았다.

그래. 이 상태라면 계속 잘 수 있어. 혼몽 중에도 그 나른함이 마음에 들어 조금 웃자, 끊임없이 말을 걸던 목소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차라리 자.”

그 목소리는 조금 곤란한 것 같았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한담…….”

한숨처럼 그가 속삭였다.

어떻게 하긴. 항상 그랬잖아. 내가 욕실에서 잠들면 깨우지 않고 그대로 안아다 침실로 데려간 사람이 당신이면서.

그러면서 욕실에서 잠들지 말라고 화낸 사람도 당신. 후궁 따위를 안아 옮긴 게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라고 비몽사몽 간에 생각했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알 수 없다. 잠시 깨어날 것처럼 일렁이던 의식이 다시 가물가물하게 가라앉았다.

아, 모르겠다. 이번엔 당신이 자라고 했어. 나한테 화내지 마.

.

.

.

눈을 뜨자 황제가 보였다.

헉. 깜짝 놀라 눈만 껌뻑이자 황제가 차가운 얼굴로 말을 건넸다.

“잘 잤나.”

“……폐하?”

“또 그대로 잠들었더군. 아주 잘하는 짓이야.”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나는 황제에게 안겨 있음을 깨달았다.

또다. 또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욕실에서 목욕하다가 그대로 잠든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그리고 황제가 직접 나를 안아다 침실로 옮긴 것도 마찬가지로 세 번째.

황제가 후궁을 안아다 나르는 상황이라니. 이런 황공한 일이 다 있나. 민망해서 내리려 하자 황제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제지했다.

“거의 다 왔으니 가만히 있어.”

“……송구합니다.”

“익사가 취향인가?”

아니요. 그런 취향은 없습니다만.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름대로 민망한 상황을 타개하려 지은 웃음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며 낮게 경고했다.

“웃지 마.”

“…….”

“지난번에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잠들 것 같으면 시종을 물리지 말고, 물리려면 잠들지를 말라고.”

예. 그러셨죠.

나는 혼나는 아이처럼 가만히 고개를 수그렸다.

“도대체 학습능력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건가?”

한심해 죽겠다는 듯한 말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민망하면서 또 억울했다. 아니, 저도 자려고 잠드는 건 아니거든요. 피로가 쌓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리고 피로가 쌓인 원인을 따져 보면 전부 폐하 때문입니다. 아세요?

매일 밤 수많은 후궁을 물리치고 찾아와 밤이 깊도록 안은 후에야 잠드는 황제 때문에 죽어나는 건 나였다.

안는 쪽보다 안기는 쪽이 더 힘들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안 그래도 대물인 황제를 받아들이는 밤이면 나는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폐하께서는 그냥 욕정만 풀고 잠들면 되지만 저는 아니거든요. 폐하께서 하지 않는 뒤처리를 제가 다 해야 한단 말입니다.

몸 안에 고인 정액을 빼내고, 잠든 황제와 내 몸에 진득하게 달라붙은 향유와 체액을 닦고 누우면 거의 아침이었다.

해가 중천에 걸리기 전까지는 무조건 일어나 있어야 하는 황궁 예법 때문에 퍼질러 잘 수도 없었다. 피곤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그러니까 욕실에서 잠드는 건 전적으로 내 탓만은 아니었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억울해도 황제에게 따지고 들 수는 없었다. 감히 어떻게 황제에게 시시비비를 가린단 말인가.

황제는 법이고 정의였다. 황제가 네 잘못이다, 하면 사실 여부야 어떻든 내 잘못인 것이다. 고분고분한 대답에 황제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아예 얼굴까지 담그고 자더군.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코랑 입은 띄워 놓고.”

“…….”

“다음번에도 그런 꼴이면 내가 직접 얼굴을 눌러 주지.”

잠들면 죽이겠다는 뜻이다.

살벌하기도 해라. 뜻대로 하소서.

나는 ‘예’ 하고 대답했다. 마침 침소에 다다랐다. 이제 그만 내려 주셔도 될 것 같은데.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황제는 무슨 바람인지 내 몸을 곱게 침대 위에 올려 두었다.

마치 어미 품에 안긴 아기가 된 것 같다. 묘한 감각에 멍하니 바라보자 황제가 하나씩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 그렇군. 안을 생각인 것이다. 어제도 했으면서……. 오늘은 좀 쉬고 싶은데.

나는 한숨처럼 보이지 않도록 작게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옷을 다 벗은 황제가 내 위로 올라탔다.

육감적인 몸이다. 매일 보지만 볼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그 육체를 홀린 듯 보고 있으려니 황제가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

“흐읏…….”

그의 커다란 손이 몸을 훑자 반사적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황제의 손이 스치고 지나가는 부분이 화끈거렸다.

“……오늘따라 더 예민하네.”

그가 말했다.

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황제가 몇 번 만지지도 않았는데 달아오른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마치 미약을 먹은 것 같았다.

목욕할 때 마사지를 하던 시종들이 오일을 발랐던 것이 떠올랐다.

그것 때문인가? 열감이 지나쳤다. 어떻게, 어떻게 좀 빨리…….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 조르자, 황제가 옅게 웃었다. 그가 미소를 보이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탐욕스러운 녀석.”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향유를 내 엉덩이골 위로 흘렸다. 차가운 오일이 닿자 흠칫, 등이 떨렸다.

황제는 오일을 펴 바른 손가락으로 내부를 넓히기 시작했다. 처음 관계를 가질 때는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럴 때면 꼭 피를 보았기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황제는 향유를 꼭 사용했다.

“하…….”

잠시 후 손가락으로 넓혀 놓은 입구에 그의 것이 닿았다. 심장이 마치 그곳에 있는 것처럼 입구가 떨렸다. 그가 꾹,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아팠다. 향유로 아무리 풀어주어도 그의 것을 받아들일 때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황제가 상체를 숙여 눈물을 핥았다. 참으라고 달래는 것 같다. 참으라면 참아야지.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고, 입구는 마치 날 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그의 것을 빨아들였다.

“아…… 흑…….”

마침내 그가 내 몸속에 자신의 것을 완전히 파묻었다. 앙다물었던 입술이 절로 숨을 토해 냈다. 뱃속이 꽉 찬 것 같다.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내 안에 완전히 자리 잡은 그가 잘 참았다는 듯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친 손이지만 묘하게 다정했다. 그가 다정해지는 유일한 순간. 그 다정함이 좋아 저도 모르게 웃었던 것 같다.

그 순간, 그의 흑갈색 눈동자가 짙어졌다.

“아, 아!”

갑자기 그가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참을 새도 없이 비명이 터졌다.

“아, 아아!”

잡아먹을 듯 나를 노려보며 거침없이 내부를 찔러 대는 그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속절없이 흔들리는 몸.

“흑, 흣! 아……!”

“후…… 흣.”

그의 허벅지가 내 엉덩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거세어졌다.

어디를 잡아야 할지 몰라 양손으로 침대보를 붙잡자 그가 양팔을 뻗어 내 몸을 끌어안았다. 절로 두 손이 그의 등을 향했다. 그의 상체가 내 가슴에 딱 달라붙었다.

거칠게 날뛰는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도 아마 미친 듯이 뛰는 내 심장을 느끼고 있겠지.

서로의 몸 밖에 지탱할 것이 없는 상황. 행위는 갈수록 거칠어졌고, 그는 이성을 던져 버린 짐승처럼 내 몸을 탐했다. 그러면서 나도 점점 미쳐 갔다.

내가 그의 몸에 익숙하듯 그도 나의 몸에 익숙했다. 여러 번에 걸친 행위로 인해 그는 내가 느끼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알았고 그 부분만을 집중해서 찔러 댔다.

나는 그때마다 쾌락에 떨며 그의 것을 조였다. 상호 교환이다. 그가 나를 기쁘게 했기에 내가 그를 기쁘게 하는 등가교환.

가장 성스럽고 애정이 넘쳐야 할 성애에도 우리는 지독히 계산적이었다.

“아……!”

어느 순간, 그가 이때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게 내부를 짓이겼다. 그와 동시에 쾌락에 들떠 있던 내가 흥분을 쏟아냈다.

하얀 액체가 울컥울컥 튀어 그의 아랫배를 적셨다. 사정의 쾌감에 들뜬 머리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현실감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해일처럼 밀려드는 쾌감에 들떠있던 내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인지, 그게 정녕 꿈속은 아니었는지.

그때 내 가장 깊숙한 곳을 찔렀던 그가 몸을 잘게 떨었다. 사정. 그리고 귓가에 익숙한 이름이 와 닿았다.

“리안.”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현실에 있었고, 그것은 거래에 불과했다는 것을.

내 내부에 마음껏 정을 토해 놓은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사정의 여운으로 아직까지 들떠 있는 눈동자가 내 얼굴을 샅샅이 뒤졌다. 리안과 닮은 부분이라도 찾는 걸까. 내 심장은 점점 싸늘해졌다.

그때.

“…….”

그의 입술이 내 눈가에 닿았다. 얼음처럼 차가워졌던 심장이 한순간에 온도를 높였다.

이게…… 뭐지?

“폐하……?”

나도 모르게 멍청하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예의 그 가벼운 키스를 내 얼굴 곳곳에 남길 뿐이다.

촉, 촉…… 혀를 섞지 않는 가벼운 입맞춤에 나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체 왜…….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내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헉?

그다음 순간 시야가 뒤집힌다. 그의 밑에 깔려 있던 내가 어느새 그를 올라탄 자세로 그의 배 위에 놓여 있었다.

아직까지도 내 내부에 박혀 있는 그의 성기가 다시금 부풀어 올랐다.

“폐하!”

“한 번으로 만족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쉿.”

아!

그가 허리를 쳐올렸다. 창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나는 파닥대었다.

조금 전의 사정으로 온몸에 힘이 빠진 내가 허리를 세우지 못하고 쓰러지자 그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내 허리를 붙잡았다.

아래에서 마음껏 쳐올리는 황제는 지독히도 탐욕스러웠다.

그가 원대로 욕구를 풀어낸 후에야 관계는 끝이 났다.

마지막 정을 쏟아 낸 그는 성기를 빼내자마자 몸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눈을 붙였다. 허리가 욱신욱신 아팠다. 사실 허리 아래로는 내 몸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잠들었다고 나도 이대로 잠들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시종이 가져다 놓은 물그릇에 수건을 적셨다. 수건을 밑에 받치고 부끄러운 자세를 취하며 몸에서 정을 빼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날 호되게 고생하곤 했다.

적당히 정을 빼낸 후, 다른 수건을 적셔 그의 몸을 닦았다. 깊이 잠든 그는 나의 손길을 느끼지도 못 했다.

평소에는 예민하기 짝이 없는 황제도 이렇게 욕구를 풀고 나면 무방비하게 잠들고는 했다.

그 모습이 불안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나를 믿는다는 반증 같기도 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동이 틀 때 즈음에야 그의 옆에 몸을 뉘었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새벽의 파란 빛이 스며들었다. 그 빛에 의존해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굳게 감긴 두 눈에 맺힌 속눈썹과 미간 사이로 쭉 뻗은 콧대를.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을.

잘 때도 웃지 않는 당신은 도대체 무슨 꿈을 꿀까.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꿈. 꿈이라. 나는 매일 밤 꿈을 꿔. 항상 똑같은 꿈이야. 별로 시답지 않은 내용이라 당신에게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그래도 만약 당신이 궁금하다면 알려 줄게. 사실 말이야, 내 꿈은…….

우리의 성행위는 거래였다. 그는 내 몸에서 쾌락을 찾아냈고, 나는 그에게 쾌락을 주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어느 한쪽이 더 좋은 거래라고 할 수도 없는 거래. 그 관계에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그래서 내가 그런 고통을 겪었나 보다.

* * *

감긴 두 눈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아침인가.

천천히 눈을 떴다.

베개. 긴 쿠션. 이불. 그런 것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침대 위다.

내가 스스로 이곳으로 온 기억은 없으니, 아마 목욕하다가 잠든 모양이었다.

……아마도 황태자가 나를 옮겼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란 놈은 목욕하다가 잠드는 게 습관인가 보다.

잠들 거면 차라리 여러 사람한테 민폐나 끼치지 말 것이지, 300년 전에는 황제의 수발을 받더니 이제는 황태자의 수발을 받았다. 이런 황송한 일이 있나.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좁지 않은 방 안. 황태자는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도 누운 흔적이 없다. 다른 곳에서 잔 모양이다.

이 저택에는 손님을 위한 객실이 여럿 있었다. 아마 그중 한 개에서 잠들었겠지.

정작 손님인 나는 아무리 봐도 집주인의 방으로 보이는 이곳에서 잠들었는데 말이야…….

어쩌면 좋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황태자를 찾아 방 바깥으로 나오며 나는 이 일을 어떻게 사죄해야 하나, 그 생각부터 했다.

“…….”

근데 이 냄새는 뭐지.

복도로 향하는 문을 열자마자 괴상한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이런 냄새는 살면서 처음이었다.

하수도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하고, 탄내 같기도 한 괴상한 냄새.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계단을 내려가자 1층은 말도 못 할 정도로 냄새가 자욱했다. 이게 진짜 뭐람.

“전하.”

냄새의 진원지는 부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냄새 유발자로 추정되는 황태자가 서 있었다.

“어, 일어났어?”

“전하, 이게 도대체 무슨……?”

“아, 이거?”

그가 씩 웃었다.

“아침 식사야.”

“예?”

“내가 직접 만들었어.”

짠! 황태자가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아침 식사를 내밀었다.

……이게 아침 식사라고?

“……이건 뭔가요?”

나는 아침 식사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새까맣게 탄 이건 뭐지. 숯덩이 아닌가. 그러자 황태자는.

“빵이야.”

하고 당당히 대답했다. 이게 빵이라고? 아닌 것 같은데. 요즘은 이런 숯덩이 같은 빵도 먹는 건가?

나는 빵이라고 주장하는 것 옆에 놓인, 생선 대가리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찌르며 또 물었다.

“이건요?”

“그건 정어리.”

“…….”

이게 정어리인지는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요리 처음 해보시지요?”

내 물음에 황태자가 입을 다물었다.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태자가 요리를 해봤을 리 없지. 부엌에 발을 디딘 것도 처음일 것이다. 제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먹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자랐을 터이니 당연한 일이다.

……나를 위해 직접 아침 식사를 차려 주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나. 나는 음식이라 주장하는 것을 착잡하게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황태자가 부끄러운 듯 작게 중얼거린다.

“배운 대로 했는데, 부디 당신 입에 맞았으면 좋겠어.”

“배우셨다고요?”

“응, 친구한테서.”

친구?

“……전하께 친구도 있나요?”

“당연하지. 날 뭐로 보는 거야.”

‘나 이래 봬도 인기 많아’라며 그가 자랑하듯 가슴을 쭉 내밀었다.

“아, 아니요. 제 말은 그 뜻이 아니라…….”

“아니라?”

“……황태자 전하께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서요.”

친구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동등하고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신분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귀족들에게 그런 관계가 흔할 리 만무하다. 정치적 동반자쯤이야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관계를 발전시키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황제 또한 마찬가지.

황제의 곁에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기사 리안이 있었지만, 황제는 그 리안조차도 친구라고 부르지 않았다.

감히 누가 황제와 동등한 자리에 설 수 있단 말인가.

황제는 그를 자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했고, 그는 황제를 자신의 주군이라고 불렀다.

참 세상 많이 변했다. 황태자가 친구도 가질 수 있고. 나는 포크를 들어 정어리의 머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그 친구라는 분은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대학 동기야. 기숙사 룸메이트였어.”

세상에. 황태자가 대학도 가고 타인과 방도 공유하다니.

나는 정말 이 시대의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이러니까 황태자가 마치 평범한 사람인 것 같잖아.

정어리를 썰어 입에 막 넣으려는 순간,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분명 그 녀석이 하라는 대로만 했어. 그러니까 날 탓하면 안 돼.”

……예? 손이 멈칫한다.

“아, 아니. 보기에는 좀 그래도 맛은 있을 거라고. 그 녀석이 요리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거든.”

“……정말요?”

“응. 그 녀석을 믿고 먹어 봐.”

황태자는 끝까지 자신을 믿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자신의 친구를 믿으라고 했을 뿐.

……이걸 정말 먹어도 되는 걸까.

나를 위해 아침 식사를 손수 만들었다는 그의 정성을 보아 먹으려고 했는데, 저렇게 밑도 끝도 없이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두려워졌다.

후…….

심호흡을 하며 잠시 내려 두었던 포크를 다시금 쳐들 때였다. 황태자의 텅텅 빈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전하께서는 안 드세요?”

그 말에 그가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원래 아침 안 먹어.”

“…….”

거짓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건 거짓말이다.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갔다. 감히 의심하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민망한 듯 말끝을 흐렸다.

“아니, 당신 아프기라도 하면 내가 보살펴야 하니까…….”

그러니까, 이걸 먹으면 제가 아플 거라는 소리 맞지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고 올라왔다. 그것은 감히 말하건대 작은 분노였다.

“전하.”

하고 부르자 황태자가 흠칫하며 대답했다.

“왜?”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다가가자 그가 어색한 표정으로 등을 젖혔다. 뭘 그렇게 긴장하세요.

“전하께서 손수 만드신 아침인데 감히 저 혼자 먹을 수는 없지요.”

“아니, 라파엘, 그게 그러니까 당신 먹으라고 차린 아침이니까……!”

“함께 드셔 주세요, 전하.”

내 접시에 담겨 있던 정어리의 반과 탄화된 빵의 삼 분의 이를 썰어 넣자 그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전하께서 아프시다면 제가 성심성의껏 간호해 드리겠습니다.”

“라파엘!”

“루크입니다.”

“…….”

샤를마뉴가 거의 울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일부러 그 시선을 모른 척하며 자리에 되돌아와 앉았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플지 모르는 음식을 먹으라며 내민 황태자에게 약간 울컥하긴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내 멋대로 행동한 적은 처음이라 간담이 서늘했다.

다행히 묘하게 탈권위적인 황태자는 내 무례한 태도를 타박하지 않았다. 대신 울상으로 제 앞에 놓인 그릇을 당겼을 뿐.

다행이다.

남모르게 안도하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아직도 포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정어리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 먹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다.

……내가 너무했나. 그냥 내가 다 먹을 걸 그랬나. 조금 아프고 말지. 가슴속에 치고 올라온 작은 분노는 벌써 휘발되었다.

전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 싫으시면 드시지 마세요, 라고 소심한 마음에 아뢰려던 찰나였다.

차르릉-

맑은 벨 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 * *

황태자는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이곳이 맞다니 다행이군요.”

자신을 황궁 비서실장이라 밝힌 남자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마흔쯤 되었을까? 눈가에 옅은 주름이 보이는 비서실장은 무뚝뚝한 얼굴로 황태자를 향해 말했다.

“소냐 하워드 비서관에게 들었습니다. 라파엘 비서관을 직접 데려다주기로 하셨다고요.”

“……그런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라파엘 비서관을 데려다준다는 그 마음은 참으로 탄복할 만하지만, 역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군요. 어째서 라파엘 비서관은 그의 집이 아니라 전하의 사저에 있는 것이며, 전하께서는 왜 황궁으로 복귀하지 않으셨습니까?”

비서실장이 안경 너머로 안광을 빛냈다. 순간 비서실장의 위로 이를 드러낸 독사 한 마리가 겹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뭐지. 왜 갑자기 한기가…….

내가 몸을 부르르 떨 때, 황태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사정이 있었어.”

“경호관들마저 따돌리고 사라진 사정이 도대체 무슨 사정인지, 육하원칙에 따라 제대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 당신도 알잖아. 라파엘의 상태. 자기 집도 제대로 못 찾아갈 정도였다고.”

“그럼 황궁으로 오셨어야지요. 굳이 수도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이곳까지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지금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오늘 자정까지 찾지 못하면 전하와 라파엘 비서관의 실종 신고를 하려던 참입니다.”

“…….”

과연 비서실장은 강적이었다. 황태자는 반박할 말이 없는지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비서실장은 눈썹을 한 번 꿈틀대더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흠칫, 이유 없이 몸이 떨렸다.

“라파엘 비서관.”

“…….”

대답을 해야 하나. 나는 라파엘이 아닌데. 근데 저 사람이 보는 건 라파엘이고. 대답을 하자니 애매하고, 안 하자니 비서실장의 강렬한 안광이 두려웠다. 황제 델루니안을 대할 때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실장이 흘러내린 안경을 추어올리며 말했다.

“비서관의 상태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일에 대해 당장 책임을 묻지는 않겠습니다. ……라파엘 비서관은 오늘로부터 2개월간의 유급 병가 처리를 받았습니다. 휴가 기간이었지만 전하의 일을 처리하던 도중 사고를 입었다고 판명되어 산재로 인정되었습니다. 그 기간을 넘어서면 무급 휴직으로 처리될 겁니다. 그 전까지는 돌아오십시오.”

유급 병가니 무급 휴직이니,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2개월간 쉬라는 소리겠지.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일을 하기도 힘들 것 같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텔레비전이고 뭐고 낯선 것들 투성이인 세상에 익숙해지려면 적어도 한 달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네, 하고 속으로 안도할 때였다.

비서실장이 희미하게 웃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예?”

“문병 못 가서 미안합니다. 일이 바빠서 갈 여유가 없었습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하반기 공채 지원자들에 대한 심사가 딱 이맘때에 있지 않습니까.”

“…….”

“라파엘 비서관이 마음에 든다던 사람이 최종 합격했습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할 겁니다. 그때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비서관 대신 임시로 전하의 수행 비서직을 맡을 나단에게 그의 교육을 맡겼거든요.”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멀뚱히 바라보자 비서실장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필 이맘때에 이런 꼴이 되어선…….”

그때 황태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신입 비서관을 뽑았다고?”

“예. 매년 이맘때가 아닙니까.”

“몇 명이나 들어왔는데?”

“항상 그렇듯 세 명입니다.”

“여자? 남자?”

그 말에 비서실장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여자 하나에 남자 둘입니다.”

“그래?”

“예.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제발 공과 사는 지켜주십시오.”

뜬금없는 비서실장의 부탁에 황태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 들어온 신입 비서관 한 명이, 이렇게 말씀드리기 참 그렇지만 전하의 취향이더군요. 하지만 아무리 마음에 드셔도 비서관에게까지 손을 뻗치시면 안 됩니다.”

음? 이건 무슨 소리지.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황태자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무슨 그런 농담을!”

“괜히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선례가 있지 않습니까.”

비서실장이 나를 바라보았다.

선례…… 가 나인가? 근데 손을 뻗치다니? 황태자의 취향이라는 건 또 뭐야?

황태자는 누가 들어도 당황한 게 티가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례라니, 그 무슨. 그리고 내게 취향이랄 게 어디 있어.”

“금발 벽안. 유명하지 않습니까.”

“……!”

“심지어 못생기면 쳐다보지도 않으시죠. 비서실 사람치고 전하 취향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만.”

황태자가 다급히 내 두 귀를 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 들었거든요.

……금발 벽안이라. 게다가 미인.

비서실장은 우리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확신이 생겼다. 기분이 바닥을 친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귀를 틀어막은 황태자의 손을 떼어 냈다. 그의 양팔이 힘없이 바닥을 향해 툭 떨어졌다.

하아……. 절로 우울한 한숨이 터졌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서실장을 향해 말했다.

“뵙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전 피곤해서 먼저 올라가서 쉬겠습니다. 부디 안녕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래요. 푹 쉬십시오, 라파엘 비서관.”

고개를 돌리자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연녹색 눈동자가 당황으로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다가 다시금 작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그가 ‘라파엘’ 하고 불렀다. 또 라파엘이라고 부르시네. 저는 루크라니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2층으로 향했다.

방으로 돌아가 의자에 앉자마자 노크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당연하게도 황태자다.

나는 일부러 돌아보지 않은 채 테이블의 무늬만 손으로 따라 그렸다. 황태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라파엘.”

“……루크입니다.”

“…….”

그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했다.

“루크. 내 말 좀 들어봐.”

“듣고 있으니 말씀하세요.”

“실장이 한 말, 그거 다 농담이야. 알지?”

농담이라. 황태자가 내 앞으로 다가와 앉으며 초조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진짜야. 나 그런 취향 없어. 응?”

“……그러십니까.”

“내 말 좀 들어봐. 나 진짜 금발 벽안 안 좋아한다니까?”

머리가 아프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대충 대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고 싶다. 일어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다. 침대로 돌아가려는 나를 황태자가 다급히 붙잡았다.

“루크!”

“…….”

“나한텐 정말 당신밖에 없어. 정말이야.”

그를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 가득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참 잘생기긴 했다.

어쩌면 이렇게 닮았을까. 얼굴도, 성적 취향도.

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 웃음을 본 황태자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렸다. ‘믿어주는 거야?’ 그가 그렇게 속삭였고, 나는 대답했다.

“제가 믿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

잠시 풀렸던 황태자의 얼굴이 다시금 천천히 굳어 갔다.

“전 전하의 연인인 라파엘 드마뉴 백작이 아닌 걸요.”

“…….”

“하지만 라파엘 드마뉴 백작이 조금…….”

“…….”

“가엾네요.”

정말로 가여워요.

“전하께서 그러셨지요. 지금 이 시대에 남성 간의 사랑은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결혼도 할 수 있다 하셨어요.”

“…….”

“전하께서는 라파엘 드마뉴 백작과의 관계를 떳떳하게 밝힐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던 것 같네요.”

그 말에 황태자가 화들짝 놀라 입을 떼었다.

“아니, 그건…….”

“그리고 사람을 앞에 두고 그 사람의 연인이 어떤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외모의 사람을 좋아하는지 함부로 떠벌릴 정도로 비서실장이 무례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루크, 내 말을 들어봐. 그게.”

“제가 그분을 정확히 본 거라면 그 사람은 라파엘과 전하의 관계를 몰랐던 거라고 볼 수 있겠지요.”

“맞아. 그는 몰랐어. 그는 몰랐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전하.”

도대체 얼마나 절제 없이 놀았으면, 아직 얼굴도 못 본 신입 비서관을 두고 미리 손대지 말라고 경고를 합니까?

차마 이렇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말을 조금 순화시켜 물었다.

“……전하께서는 드마뉴 백작과 만나면서 또 다른 사람을 만나셨습니까?”

내 말에 황태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답답하긴 한데 차마 뭐라고 할 수 없는, 그래서 딱 미치겠는 표정이었다.

“전하, 저는요.”

“…….”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이 제일 밉습니다.”

“루크.”

“장난치는 사람은 모르지만, 그 장난에 놀아나는 사람은 정말로 큰 상처를 받거든요.”

어쩌면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상처를.

파란 우울감이 또다시 나를 잠식했다. 나락으로 처박히는 기분이다.

어떻게 이렇게도 복이 없나…….

황제의 대용품으로 살다가 황태자의 연인의 몸에 깃든 것도 박복하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황태자는 연인을 두고 다른 이와 부정을 저질렀다고 한다.

라파엘 드마뉴 백작. 도대체 왜 이런 남자랑 사귀었어요. 당신도 참 멍청한 사람입니다. 나처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깨달으면 늦어요.

그렇게 생각하다가 숨을 골랐다.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할 권리는 없지요.”

“…….”

“저는 어쨌거나 라파엘의 몸을 빌린 군식구에 불과하니까요. 두 분의 관계에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는 거겠죠.”

황태자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애써 기분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괜찮아, 루크. 어차피 황태자가 사랑을 고백하든, 부정을 저지르든 그 대상은 내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가 배신당한 것처럼 분노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어. 그렇게 계속 되뇌자 머리 한쪽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쉬며 사죄했다.

“주제넘게 떠들어서 송구합니다, 전하.”

“…….”

“불쾌하셨다면 벌을 주십시오.”

황태자는 일렁이는 연녹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고 돌아서 나간다. 차마 벌을 내리지는 못 하겠는 모양이다.

그래, 이 껍데기는 황태자가 사랑한다는 라파엘 드마뉴 백작의 껍데기니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게 왜 네 일도 아닌 일에 분노해.

괜히 감정 이입했다. 나 진짜 멍청이인가 봐.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잖아. 감히 황태자한테 덤비다니 또 죽고 싶은 거구나, 루크.

피곤해서 낮잠이라도 자려고 했는데 그른 것 같다. 침대에 누웠으나 마음이 술렁여서 잠이 오질 않았다.

어쩔 수 없지. 한참을 뒤척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할 게 없으니 서재라도 가 봐야겠다.

300년 전의 기록을 찾자. 그때의 일에 대해 뭐든 알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복도를 나섰을 때였다.

아침에는 정신이 없어 보지 못했던 그림 한 점이 갑자기 눈에 띄었다.

“…….”

그것은 커다란 초상화였다. 실물 크기의 커다란 초상화는 내가 살던 시대에 그린 작품인지 인물이 걸친 옷이나 배경 등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가 그림을 바라보았다. 먼 곳을 바라보는 인물의 얼굴.

어쩐지 그 얼굴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당대에는 인물을 미화시키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는 화풍이 유행이었기에, 흉터 같은 것도 그림에 담겨 있었다.

인물의 목 언저리에 있는 상처가 계속 눈에 걸렸다. 저런 상처가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누구더라…….

그때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루이스 채스터턴.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쿵!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아픔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루이스 채스터턴?

루이, 채스터턴?

그때 뭔가 비장한 표정으로 계단 밑에서 올라오던 황태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라파엘! 괜찮아?”

루이 채스터턴……. 강한 힘에 부축받아 일어나며 나는 하얗게 질린 머리로 간신히 입을 떼었다.

“전하.”

“응?”

“이곳이, 전하의 외조부님께서 물려주신 곳이라 하셨지요.”

“응. 그랬지.”

“……외조부님의 성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 말에 황태자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갑자기 외조부의 성은 왜 묻는 건데? 그렇게 되묻는 것 같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채스터턴.”

그 말에 폐부 깊숙이 억눌려 있던 숨이 터지듯 하, 하고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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