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저는…… 두 번이나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요.”
라파엘이 말했다.
“누군가 저를 보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은 지금 내가 해야 할 상황이었다.
당신은 도대체 나한테서 누굴 보고 있는 거야?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그가 보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와 닮았다는 그 ‘정이 깊은 사람’인가.
그가 거부할까 마음이 초조해졌지만 성급하게 대답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전하의 마음이 어떤지는 알 것 같아요.”
“…….”
“그 사람도…… 전하와 비슷한 얼굴을 했거든요.”
아주 옛날에. 먼 옛날에.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저한테는 소중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 사람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일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
“그래도 그게 한 세상이 끝나는 것과 같다는 정도는 알고 있어요.”
도대체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나는 도저히 그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었다.
루크라는 이름을 가진 라파엘 안의 인격은 라파엘의 기억을 전혀 공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다른 사람인 것처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고통을 모른다고?
나는 그날 당신이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알아. 당신이 그 고통을 모를 수가 없잖아.
“전하께선 제가 원망스러우시겠지요? 제가 백작의 몸을 차지했으니…….”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 직후, 나는 몇 분 정도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구겨진 차체 안에서 피를 흘린 채로 정신을 잃은 라파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고 직전 라파엘이 나를 껴안으며 보호했기 때문에 나는 자잘한 상처를 제외하면 거의 멀쩡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아니었다. 그는 몇 분 내로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심장이 아찔하게 떨어졌다.
어떤 정신으로 구급차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어 몇 분 내로 구급차가 도착했고, 나는 정신을 잃은 그를 보며 신에게 간절하게 빌었다.
살려 달라고. 제발 살려 달라고. 아직 좋아한다는 말도 한 번 제대로 못 했는데,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고.
장시간의 수술 끝에 그는 다행히도 살아났다. 내상이 깊었지만 제국 최고의 의료진들이 총출동한 덕에 그는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고, 중환자실에서 이틀을 보낸 후 일반 병실로 옮겼다.
하지만 그는 일주일이 넘도록 깨어날 생각을 안 했다. 수술은 분명 성공적이었는데 어째서 깨어나지를 못하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다. 혼수상태는 아니었다. 의사들은 그저 그가 잠들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사고가 난 지 일주일이 넘어가던 날.
드디어 라파엘이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라파엘이 아니라고 했다. 나를 보며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살았으니까.
다른 인격의 그와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 나름대로 제법 유쾌했다. 그는 정말로 과거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일상적인 생활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래도 좋았다. 사고가 나기 전의 라파엘은 내가 챙겨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 않은가.
그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고, 또 비서관이었다. 나는 오히려 돌봄을 받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게 싫어 일부러 어깃장을 놓기도 하고 일부러 그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그는 다르다.
마치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처럼 나를 따른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라파엘과 사귀는 사이였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자, 처음에는 기겁하더니만 이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가 만약 루크인 척하는 라파엘이었다면 더 이상 연기를 포기하고 ‘제가 전하와 교제를 하고 있다고요? 어디서 사기를 치십니까. 못된 것만 배워 와서는’ 하고 혀를 찼을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그가 잠깐의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것쯤은.
그는 모르겠지만 그를 홀로 좋아한 게 벌써 3년이다. 제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조금 더 못 기다리겠는가. 그리고 얌전히 기다리기만 할 생각은 아니니, 그가 내 마음이 상했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라파엘은 지독하리만큼 틈을 내주지 않았다. 3년이나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대체로 모두에게 상냥한 라파엘은 내게는 좀 공격적이었지만(내 잘못이 크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래도 다정한 무관심을 유지했다.
그건 일종의 선이었다.
상사와 부하의 관계라는 선.
나는 차마 그 선을 넘을 수 없었다. 그의 다정한 무관심이 그가 그어 놓은 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라파엘은 그 자체로도 별로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였기에. 그래도 언젠가는 나를 돌아봐 주겠지, 하면서 기다린 게 3년이다.
……그런데 연애를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여러 가지 감정이 휘몰아쳤다. 제일 처음 느낀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당신이 나 모르게 연애를 했다고? 이 배신감은 사실 불합리한 것이었다.
나도 안다. 그러나 그다음에 밀어닥친 섭섭함이라는 감정만큼은 그도 인정해야 한다.
어떻게 3년을 같이 일하면서 연애를 하는지 안 하는지,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 한마디 언질도 없냐.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무심해?
만약 내가 라파엘의 친구였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이다. 아니, 최소 직장 동료라도 되었다면 그가 언제 여자 친구가 생겼는지, 그리고 또 어쩌다 헤어지게 되었는지 건너서 듣기라도 했겠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은 그에게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그래서 맥락 없이 그에게 자자고 헛소리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남기 싫었다. 상사와 부하라는 관계를 뛰어넘고 싶었다.
연애할 거면 다른 사람 말고 나랑 해. 내가 잘할게.
그 말 때문에 그런 끔찍한 사고가 날 줄 알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뒤늦은 후회였지만.
하지만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루크로 깨어난 라파엘.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까지 잊은 것은 조금 섭섭했으나 우리 사이에 그어진 상사와 부하라는 선도 그의 기억과 함께 휘발되었으니 그까짓 섭섭함이야 금방 잊을 수 있었다.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다. 라파엘에게 못 보일 꼴만 보인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순백의 도화지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치근덕대며 헛소리를 늘어놓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기회에 도장을 찍어 놔야지. 내 거라고, 나중에 제정신이 돌아와도 빼도 박도 못하게 서서히 길들일 것이다.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길든 상황에서 매몰차게 잘라 내지는 못할 것이다.
기가 막혀서 헛웃음만 치다가 또 유야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기를 칩니까, 언제 철이 들지 모르겠네, 하며 내버려 둘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단호한 것 같지만 은근히 무르고, 또 은근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
그래서 나는 언제라도 들통날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약간의 진심을 섞어.
“원망하지 않아.”
그 말에 라파엘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라파엘 드마뉴 백작이 계속 돌아오지 못한다면요?”
그렇게 된다면 어쩔 거냐고 묻는 라파엘은 충분히 가련해 보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언뜻 비쳤다.
“……당장은 원망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제가 싫어지실 텐데요.”
라파엘과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건가. 울 것처럼 눈물을 매단 그가 안타까웠다.
어째서 저렇게 자신감이 없는 거지? 내가 라파엘만을 사랑하고 루크인 자신은 싫어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거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인데.
울지 마, 라파엘.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며 나는 대답했다.
“당신이 누구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변함이 없어.”
“…….”
“절대로 원망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내가 사랑할 수 있게 허락해 줘.”
그 말에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기어코 눈물이 그의 뺨을 가로질렀다.
그는 한참 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마음을 정하는 것 같았다. 그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게 운명일지도.”
“응?”
운명? 그게 무슨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는 찰나 그가 눈을 떴다. 눈물로 젖은 속눈썹이 촉촉했다.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
“애초에 이 몸은 제 것이 아니니…… 거부할 권리 따위는 없겠지요.”
정말로 자신과 라파엘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바뀐 인격의 라파엘은 너무나도 처연했다. 그리고 너무 자신감이 없었다. 정말 다른 사람인 것 같다.
그게 싫지는 않지만 안타까웠다. 꼭 끌어안고 위로해 주고 싶을 만큼.
그때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전하를 사랑할 수 없어요. 그러니…….”
“어째서?”
어째서 사랑할 수 없다는 거야?
라파엘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저는 너무 지쳤어요.”
“…….”
“상처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었고…… 그러면서 모든 힘을 다 써 버려서, 남한테 무언가를 나눠줄 힘이 이젠 없어요.”
‘죄송해요’라고 라파엘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라파엘의 얼굴이 정말로 300년의 세월을 홀로 겪은 사람처럼 피로에 지쳐 있어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문득 새로운 인격은 아마도 그의 잠재의식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라는 의사의 설명이 떠올랐다.
라파엘의 잠재의식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떤 상처를 그리도 심하게 받은 걸까.
그 와중에도 나를 생각해서 미안하다 하는 것을 보니 다정한 성격은 천성인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나는 일부러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도 괜찮아.”
“…….”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라파엘은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그에게 무언가를 돌려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저 주고 싶을 뿐이다.
3년간 숨겨온 사랑을, 보여 주지 못한 열정을 그에게 전부 주고 싶었다.
당신은 그저 받기만 하면 돼. 그러다 보면 혹시 모르잖아. 마음은 화수분이니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 누가 알아?
끝이 보인다 싶으면서도 눈 깜짝할 사이에 차오르는 것이 마음이다.
그러니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하지 마라.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다시 사랑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홀로 다짐했다.
당신이 기억을 되찾지 못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어.
당신이 어떤 상처를 가졌든 내 품에서 쉬게 할 거야.
3년 전, 내가 처음으로 당신에게 빠진 그날처럼.
* * *
그날은 L항공 여객기 참사 12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화국에서 출발해 제국으로 돌아오던 L항공 여객기가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피랍되었다는 소식이 들린 지 2시간 만에 추락했다. 추락의 원인은 내부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그 참사로 여객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을 포함한 승객 256명 전원이 사망했다.
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여객기가 난기류로 추락해도 충격적일 판에 테러라니!
게다가 그 여객기에는 화국 총통의 취임식에 초대받아 다녀온 귀족들이 여럿 탑승해 있었다.
황실은 사태를 수습하는 한편, 무정부주의자들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몇 달 동안 대대적인 검거 작업이 시행되었다.
무정부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은 사람은 모조리 조사실로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일각에서는 지나친 인권 탄압이라고 항의를 했지만, 국민이 256명이나 죽은 대형 참사 앞에서 누구도 쉽게 들고일어나지는 못 했다.
그날 아침은 유독 흐렸다.
나는 어떤 이유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 별것 아닌 이유였을 것이다. 사실 그맘때의 나는 뒤늦은 사춘기로 방황하고 있었다. 그냥 모든 게 다 짜증 났다.
황태자라는 빌어먹을 신분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전하,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전하, 그런 행동을 하면 국민이 싫어합니다. 전하, 게이 클럽은 가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전하. 전하. 전하.
기분이 바닥을 쳐도 하하 호호 웃어야 하는 신분은 차라리 폭력에 가까웠다.
그맘때 즈음 비서관으로 들어온 라파엘은 사실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했다.
흔해 빠진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콧대.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잘생긴 것도 아니었다.
내 취향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도도한 미인이었으므로, 라파엘은 외모지상주의자인 내게 성적 매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한낱 인간 존재에 가까웠다.
시비를 걸면 받아치는 모습이 꽤 재미있는 사람. 딱 그 정도.
“오늘따라 유독 못생겼네. 눈은 왜 또 그렇게 퉁퉁 부었어?”
출근한 라파엘을 보며 늘 그랬던 것처럼 시비를 걸었다. ‘오늘 진짜 못생겼다. 피부 관리 좀 하지?’ 내가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면 라파엘은 웃으며 ‘눈곱이나 떼고 말씀하십시오. 칠칠치 못하게’라며 맞받아치고는 했다.
그런 반응이 재밌었다.
오호라, 이것 봐라? 신입 주제에 잘도 받아치는구나. 남들은 기겁하고 바라봤지만 정작 우리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알아서 그랬다. 그런 시비들이 우리에게는 굿모닝 인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날도 그런 반응을 기대했다. 너라도 내 기분을 좀 풀어줘. 그런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그렇습니까.”
라파엘은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당황하지도 않고 차분하게 손을 들어 눈덩이를 꾹꾹 눌러댔다.
뭐야, 왜 저래? 안 그래도 기분이 바닥을 기었던 나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반응이 왜 그따위야?”
“죄송합니다.”
라파엘은 웃지도 않았다. 그는 피곤한 기색으로 무미건조하게 죄송하다고 대답하며 그날의 일정을 줄줄 읊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바닥을 기는데 그 모습을 보니 갈수록 신경질이 났다.
일정을 말하며 라파엘은 단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하, 저게 이제는 대놓고 무시하네.
“L항공 여객기 참사 12주기 추도회가 2시에 있습니다. 참석하겠다고 알렸으니 12시 30분까지는 준비를 마쳐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 맘대로?”
“……예?”
“누구 맘대로 참석하겠다고 알려? 네가 뭔데.”
마음속을 떠도는 감정을 짓씹듯 뱉어 내자 라파엘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폭발할 것처럼 일렁이는 나와 달리, 그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네가 뭔데 내 일정을 함부로 정하냐고. 내가 갈지 안 갈지 어떻게 알고?”
“황제 폐하와 황후께서 참석하시는 행사인데 황태자 전하께서 참석하지 않는다면 남들 보기 좋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하.”
또 그놈의 체면 얘기인가. 짜증이 확 치솟았다. 괜히 울컥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 가.”
“……전하.”
“가고 싶으면 너나 가든가. 12년이나 지난 일 가지고 질질 끄는 것도 지겨워.”
그 말에 라파엘이 흠칫 몸을 굳혔다. 그가 까만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 저거 보게. 이제는 노려보기까지 한단 말이지?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비서관이라는 사람까지 속을 긁어대니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뭘 봐.”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틀린 말 했어? 벌써 12년 전 일이야. 언제까지 추도하고 그럴 건데. 그것도 다 정치 공세라고. 몰라?”
“…….”
“혼자 죽은 사람들 기리는 척, 애도하는 척하지 말라고. 보기 역겨우니까.”
라파엘이 입술을 꾹 물었다. 수첩을 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 배알이 더 뒤틀렸다.
나는 툭 내뱉듯 한마디 말을 던져 놓고 방을 나왔다.
“뭐, 꼬우면 그만두든가.”
전하, 전하! 그 상황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다른 비서관들이 나를 부르며 쫓아 나왔지만 다 무시하고 황궁을 벗어났다.
이유 없이 화가 났다. 늦사랑이 더 무섭다는 것처럼, 뒤늦은 사춘기는 그렇게 잔인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그렇게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애먼 곳에 분통을 터뜨렸다.
이후 그 일을 회고하며 나는 몇 번이나 주먹으로 입을 쳤다. 아무리 내가 막되어 먹은 놈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12시 30분. 그리고 2시.
라파엘이 고지한 시간을 훌쩍 넘어서까지 나는 황궁에 돌아가지 않았다. 차를 몰아 게이 클럽이 밀집한 12번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대낮부터 술을 마셔 댔다. 속을 태우는 화기를 술로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독한 술은 오히려 화를 부추기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웬 트렌스젠더랑 시비가 붙었고, 대판 싸움을 벌였다. 거의 죽일 기세로 상대를 두드려 패고 있자니 사람들이 달려와 뜯어말렸고, 경무청에 끌려갔다.
연락을 받은 비서관이 경무청으로 달려올 때 즈음에야 나는 술에서 깼다.
곧 라파엘이 오겠군. 갑자기 그를 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풀렸다. 아침에 싸운 건 기억도 나질 않았다.
들어오자마자 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겠지. 그러면서 그 예의 영업용 미소로 상대방과 합의를 볼 것이다.
생각하니 우스웠다. 왜 다들 그놈한테 목을 매는 걸까? 뭐, 그놈 미소가 좀 예쁘긴 하지만 웃을 때를 제외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놈이다. 정말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그런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경무청의 문을 열고 비서관이 뛰어 들어왔다.
“전하!”
그런데 들어온 사람은 라파엘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어라, 싶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안 다치셨…….”
“라파엘은?”
“예?”
“라파엘은 어디 가고 당신이 와?”
내 물음에 라파엘의 선임 비서관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그 사람을 찾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침에 라파엘 비서관보고 그만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그래서 아까 짐 챙기고 나가던데요…….”
비서관은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나를 타박했다.
“아무리 전하께서 성질이 지랄…… 흠흠, 별종이라 하셔도 해야 할 말과 안 해야 할 말은 가리셔야지요. 라파엘 비서관 부모님이 그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가까운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 전하께서 그렇게 나가시고, 그 사람 한참 동안 화장실에 들어가서 안 나왔습니다.”
그때 심장이 떨어진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처음 깨달았다.
“뭐라고?”
“이번 일은 전하께서 잘못하신 겁니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우울해해서 다들 알게 모르게 신경 써 주고 있었는데, 전하께서 대미를 장식하셨네요. 아주 잘하셨습니다.”
“아, 왜 그 얘기를 이제 해!”
“전하께서 말릴 틈도 없이 나가셨잖습니까.”
비서관이 혀를 쯧쯧 찼다.
“그 사람한테는 안됐지만, 이번 기회로 가까운 사람 한 명 잃는다는 게 얼마나 슬픈 건지 좀 아십시오. 그래도 라파엘 비서관만큼 전하 신경 써 준 사람도 없습니다. 아까도 나가면서 전하께서 요즘 예민하신 것 같다고 신경을 가라앉히는 차 몇 개를 두고 나갔습니다. 효과 좋다면서요.”
미치겠네.
“걔 어디 있어?”
“찾아가시려고요?”
“아, 빨리! 걔 어디 있냐고!”
“뭐, 집에 가지 않겠습니까.”
“주소 내놔.”
그 말에 비서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지금 어떻게 가시려고요? 아직 합의도 제대로 못 봤는데요.”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고. 주소 내놔!”
아이고, 머리야…….
비서관이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쪽지를 건네주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알아서 수습해.”
경무청을 뛰쳐나가자 경관들이 우르르 뛰쳐나왔지만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비서관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비서관은 그러라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경무청 앞에 주차되어 있는 비서관의 차를 몰아 쪽지에 적힌 주소로 차를 몰았다.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하지? 미안하다? 내가 몰라서 그런 소릴 했다?
근데 아무리 몰랐다고 해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한다.
아, 나 진짜 쓰레기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하지도 못했는데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라파엘은 집에 없었다.
1103호.
분명히 이 집이 맞는데 아무리 바로 차고 두드려도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온 줄 알고 숨는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꺼지라고 대놓고 소리 지를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다는 것은 지금 집에 없다는 의미였다.
허탈해졌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큰맘 먹고 여기까지 왔는데 도대체 어디로 튄 거냐고.
이쯤 되자 라파엘에게 화가 났다.
아니, 내가 아무리 막말을 했다고 그렇게 단박에 그만둘 필요까지야 있냐고. 당신 너무 극단적이야. 알아? 평소에는 뭐라고 시비를 걸어도 웃으면서 넘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그러는 거 아니라고.
……여기서 계속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철문에 머리를 박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슬슬 저녁이니까 돌아올 것 같긴 한데 장담할 수는 없다. 아예 안 돌아올 수도 있다.
사람 마음이라는 건 모르는 법이니까, 상처받은 마음 다스리겠다고 훌쩍 여행이라도 떠났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라파엘이 있을 법한 곳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오늘, 예정대로라면 참석했을 추도회는 공항 인근의 추모 공원에서 이루어졌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망망대해에서 숨진 250여 명의 사망자를 위해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추모 공원을 조성한 것이 11년 전 일이었다. 어쩌면 거기에 있을지도 몰랐다.
추모관은 6시에 문을 닫지만, 추모 공원은 24시간 개방이니까.
라파엘의 부모가 그 사고로 죽었다면 오늘 같은 날 있을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라파엘의 아파트에서 추모 공원까지는 대략 한 시간이 걸렸다. 가면서도 ‘이러다 길이 엇갈리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파트 안에서 무작정 기다리기에는 좀이 쑤셨다. 갔다가 없으면 다시 돌아오지 뭐.
마침내 추모 공원에 도착했다.
이미 어둑해진 7시 30분. 바다의 일몰은 다른 곳보다 빨랐고, 가로등 몇 개만으로 겨우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다.
추모 공원 입구에는 안내도가 붙어 있었다.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붙인 나무들의 식별 코드가 적힌 안내도였다.
라파엘의 부모라면 성은 드마뉴겠지. 어두운 빛에 익숙하지 않아 침침한 눈으로 안내도를 살피며 찾고 있을 때였다.
“……전하?”
하고, 라파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깜짝이야. 고개를 돌리자 라파엘이 당황한 얼굴로 멀뚱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엔 왜…….”
멍청히 묻는 꼴을 보자니 갑자기 알 수 없이 속이 확 뒤틀렸다.
저 꼴이 뭐야. 아무리 낮에는 따뜻하다 해도 밤이면 찬 바람이 부는 4월이다.
외투 하나 없이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외투까지 껴입은 내가 더 추웠다.
안 그래도 가로등 밑으로 드러난 라파엘의 얼굴은 하얗게 얼어붙은 상태였다. 게다가 아침보다 눈이 더 부은 것이, 아무래도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나는 대답 없이 다가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의 어깨에 걸쳤다.
“전하?”
“안 추워?”
“아, 물론 춥긴 춥습니다만…… 전하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왜긴 왜야. 너 찾으러 왔다.
어쩐지 그렇게 대답하기는 민망해서 말을 돌렸다.
“몇 시간이나 여기 있었던 거야?”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았습니다. 짐도 정리하고 옷도 갈아입고 나오느라 한 세 시간 있었던 것 같아요.”
“세 시간이나?”
충분히 오래 있었다. 아니, 그전에.
“당신 진짜 독하다.”
“예?”
“말 한 번 잘못 했다고 바로 때려치우냐?
그 말에 라파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두라고 말씀하신 건 전하이지 않습니까.”
“그야 잠깐 욱해서 그런 거고.”
“애초에 욱할 거리가 없었습니다만.”
“…….”
“전하를 오래 모신 건 아니지만 더 이상은 못 하겠습니다. 갑자기 이유도 없이 혼자 화내고, 그러다가 갑자기 풀리고. 사춘기 여고생들도 전하만큼 예민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이게 진짜 입은 안 죽었네.
근데 또 맞는 소리라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또 뭐라고 반박했다가는 또 그만두라는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대답 없이 괜히 라파엘의 옷깃만 여몄다. 라파엘은 쌩한 표정으로 땅만 바라보았다.
스산한 바닷바람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참 후,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였다.
“미안.”
“…….”
“몰랐어.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그럴 것 같았습니다. 전하께서 그 정도로 섬세한 인간은 아니니까요.”
한마디를 안 지지.
“그리고 그 말도 진심은 아니었어.”
“무슨 말이요? 그만두라는 말?”
“그것도 그렇지만, 지겹다고 했던 거.”
“…….”
“……내가 잘 몰라서 그랬어. 미안해.”
나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몰랐다. 비행기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다.
그래서 그냥 남의 일인 줄만 알았다. 그게 라파엘의 일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항상 그늘 없이 얄밉게 조잘대던 사람이었으니까 더.
내 열없는 고백에 라파엘이 낮게 한숨을 흘렸다.
“전하께 화가 났던 건 사실입니다.”
“…….”
“그런데 화보다는, 사실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왜냐하면……. 말을 잇던 라파엘이 갑자기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저도 가끔, 12년이나 지났으니 잊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
“평소에는 정말로 잊고 지내기도 했고요. 그래서 전하의 말이 더 마음 깊숙이 와 닿았습니다. 혼자 슬퍼하는 척, 애도하는 척하지 말라는 말이요.”
그건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당신 속 긁으려고 한 말이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짱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어서 그저 고개를 숙였다. 무신경함이 부른 참사였다. 이건 명백한 내 실수였다.
“잘못…….”
“잘못했다고, 부모님께 빌고 왔습니다.”
잘못했어, 라고 말하려는데 말이 겹쳤다. 그리고 그 순간 라파엘의 턱 끝으로 눈물이 타고 흘렀다.
“정말 잘못했다고, 잊고 살아서 죄송하다고…….”
“…….”
잊지 않는다. 라파엘은 그 말로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 같았다.
잊지 않는다는 것, 좋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절대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참사가 그렇고,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이 그렇다.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억만금의 돈을 준다고 해도 바꾸고 싶지 않다. 그런 경우에는 잊으라 하는 것도 폭력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까지 욕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가족을 잃은 고통, 부모를 잃은 고통. 그런 고통을 바로 잊을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어느 정도는 무뎌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누구도 그 무뎌짐을 욕할 수 없다. 평생 슬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 날 떠난 사람이 생각나면 그 순간 진심으로 슬퍼하고, 그러다가 또 눈물을 닦고 일어나는 것이 사람의 삶이다.
왜 당신은 무뎌짐을 고통스러워하는가. 그런 무뎌짐조차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맑은 걸까. 그것도 참 괴롭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라파엘의 마른 어깨를 끌어안았다. 당신, 정말 내 취향은 아니지만 가슴 정도는 빌려줄게.
“울어.”
“…….”
“모른 척해 줄게. 울어.”
짐짓 담담한 척 말하자, 라파엘이 조용히 대답했다.
“저, 여기서 더 울면 진짜 붕어 눈 되는데요.”
“기대할게.”
“…….”
“못생겼다고 놀리기만 해봐.”
라파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안 들릴 줄 알았지? 다 들었다. 그래, 이번에는 안 놀린다. 내 지은 죄가 있으니 입 닥치고 있을게.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라파엘이 실제로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그냥 장난치다 보니 못생겼다 한 거지, 실제로는 호남형의 외모였다.
웃는 얼굴은 제법 예쁜. 물론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때 문득 라파엘이 내 취향대로 생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건 좀 위험했겠다.
순간 <비서와 사장님> 따위의 AV 제목이 몇 개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이야. 당신이 내 취향이 아니라서. 아무리 내가 방탕한 게이라지만 부하 직원과 놀아나고 싶은 마음은 없단 말이지.
게다가 라파엘의 경우는 더 위험했다. 성격은 참 내 취향이란 말이야. 도도하면서도 은근히 허당인 것이 외모만 내 취향이었으면 벌써 난리가 났을 거다.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데, 가슴께가 축축이 젖어 들었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울 거면 차라리 소리 내서 울지. 괜히 입맛이 썼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어 등만 두드려 주고 있으려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나, 도대체 무슨 쓰레기 같은 소리를 한 거야. 이 미친놈의 늦바람, 아니 늦은 사춘기가 사고를 쳐도 제대로 쳤구나.
……미안해. 진심은 아니었어. 그냥, 괜히 화가 나서.
몇 분이나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대략 20분은 지난 것 같다. 라파엘은 쉴 새 없이 어깨를 떨며 울었고, 나는 조용히 등만 두드리고 있었다.
이러다 탈수 오는 거 아니야? 구급차라도 불러 놔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이제 됐습니다.”
라파엘이 제법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울었어?”
“네. 셔츠에 콧물 좀 묻혀 놨어요.”
“뭐?”
더럽게! 기겁해서 밀쳐 내자 라파엘이 씩 웃으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아니야, 진짜 묻은 것 같아.”
“안 묻었어요.”
“진짜?”
“네. 그거 다 깨끗한 눈물이에요.”
아닌 것 같은데…… 믿을 수 없다.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고 바라보자 라파엘이 웃음기를 싹 지우더니, 제법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왜요. 그 정도도 못 받아주겠습니까? 지은 죄가 있을 텐데요.”
“…….”
지은 죄를 들먹이면 또 할 말이 없다.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정곡을 찔린 채로 한숨을 푹푹 쉬자 라파엘이 다시 웃었다. 발갛게 부은 눈과 붉게 달아오른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마치 사랑스러운 강아지처럼.
……어라?
“그래도 감사합니다. 맘 좀 풀렸어요.”
“어? 어, 응.”
“사실 아까 짐 챙기면서 언론사에다가 전하의 망발을 퍼뜨릴까 고민했는데, 가슴까지 빌려준 정성을 보아 안 그러겠습니다.”
뭐라고!
“날 팔아넘기려 했다고?”
“네.”
그러면 안 됩니까? 라파엘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 바람에 부드러운 흑발이 흰 이마를 살짝 스쳤다. 역시 강아지 같다. 새끼 몰티즈…… 가 아니잖아!
나는 순간 주먹을 움켜쥐었다. 조금만 더 이성이 늦게 돌아왔으면 주먹으로 내 얼굴을 내려치는 장관을 연출했을 것이다.
정신 차려라, 샤를마뉴. 지금 저게 네 정보를 팔아넘기려고 했다잖아! 쓰다듬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그거 계약 위반이야!”
“그런가요?”
“당연하지! 계약서도 안 읽어보고 뭘 한 거야!”
“아…… 귀찮아서 대충 찍었는데.”
아쉽네. 라파엘이 한숨을 푹 쉬었다.
기가 막힌다. 야, 너 그러고 다니면 사기당해!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 남자가 하는 일이 저렇게 꼼꼼하지가 못해서야 어떻게 이 험한 세상 살아가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비서는 어떻게 된 거냐고. 내가 그렇게 가슴을 칠 때였다.
“근데 계약서에 부당 해고에 관한 것도 있습니까?”
“응? 아, 있긴 한데.”
부당해고?
나는 계약서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몇 조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다.
제국의 모든 계약서에는 부당 해고에 관한 조건이 필수 기재 사항이다.
나는 어울리지 않게 법학도 출신이었다. 상법 제42조였던가. 부당해고에 관한 대법원 판례도 있었던 것 같은데…… 가 아니지. 잠깐.
“나 고소하려고?”
“예.”
“…….”
“저도 먹고는 살아야죠.”
뭐, 복직까지는 안 바랍니다. 배상이나 해주세요. 라파엘이 심드렁하게 말했고, 나는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이봐, 라파엘. 당신은 내가 패소할 것 같아?”
나는 황태자다. 내 뒤에는 황실이 있다. 황실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 제국에 존재하는 로펌이란 로펌은 다 매수해서라도 이기는 재판을 만드는 곳이 황실이었다.
내가 질 것 같아? 내가 고개를 쳐들며 묻자 라파엘이 예의 그 심드렁한 태도로 대답했다.
“뭐, 제가 패소하겠죠.”
“거봐. 무리한 싸움이라니까.”
“그래도 좀 시끄러워지긴 할 겁니다. 전하의 망발과 함께 소송을 진행하면 전하의 이미지도 추락하겠죠.”
“…….”
“긴 싸움이 될 것 같네요.”
라파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쌩하고 몸을 돌렸다.
맙소사. 지금 진심이야?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라파엘을 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라파엘! 라파엘 드마뉴!”
“왜 부르십니까.”
“타협을 하자.”
“무슨 타협이요?”
무슨 타협이겠어. 이 여우 같은 인간아……. 언론사 얘기 꺼낼 때부터 미리 밑밥을 깔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소송은 소송이지만, 언론사에서 내 발언을 타깃으로 삼으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사람들은 차기 황제의 도덕성에 대해 물고 늘어질 게 뻔하고, 그 기회를 틈타 무정부주의자나 공화주의자는 황실을 폐지하자고 들고 일어날 것이다.
황태자 자리에 애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 대에서 황가가 사라지는 상황은 겪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 돌아와.”
“안 들립니다.”
“말실수였어. 해고는 없다고. 돌아와서 천년만년 내 전담 비서관이 되어다오. 부탁이다.”
“흠…….”
라파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무슨 조건을 걸려고? 경계하는 마음을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근데 왜 저 모습까지 예ㅃ…… 아니, 그만. 더 이상 나가지 마.
생각이 여러 갈래로 제멋대로 튄다. 나는 의도적으로 생각을 끊어 냈다. 지금 그 단어를 떠올리면 난 망하는 거야.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안 돌아갈 수야 없지요.”
“…….”
“대신, 약속하십시오. 다시는 그런 식으로 지랄…… 이 아니라 난동부리지 않겠다고.”
“지랄이라니.”
“그래서 난동으로 고쳤잖습니까. 그리고 아무튼, 계약서 다시 쓰죠. 전하께서 다시 한번 ‘해고’라는 소리를 할 경우에는 무조건 부당해고로 간주하여 적법한 절차에 따라 피해 보상을 받는 거로요.”
“…….”
돈이 궁한가. 그래도 백작이니까 돈이 궁하지는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말 한마디가 참사를 불러온다는 것을 방금 알았으니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해고라는 말을 꺼낼 일도 없을 거라고.
당분간 당신을 좀 지켜봐야 할 것 같거든. 내가 미친 게 아닌가 싶어서.
아무래도 안과부터 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좋네요.”
하고, 라파엘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때 심장이 한 번 크게 울렸다.
말도 안 돼. 부정하고 싶었지만, 촉이 왔다.
난생처음 자신의 취향에서 벗어난 사람한테 빠지게 된 것 같다는 그런 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