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2/34)

1장

개국기년 513년, 서기 1983년 8월 29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한 여름밤.

그때 라파엘 D. 드마뉴는 수도 북위 경무청사에 막 도착한 상태였다.

“왔어?”

그가 경무청사 안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사내는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왔어?”

그 깜찍한 인사에 라파엘은 순간적으로 그의 목을 졸라 버릴 뻔했다.

아마 그에게 이성이 1%라도 부족했다면, 그는 필시 사내를 죽이고야 말았으리라.

경무청사 내에서 살인은 안 된다는 희미한 이성의 속삭임 덕에 살아난 사내는 제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도 모르고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전, 하.”

라파엘은 씹어 먹듯 사내를 불렀다. 전하라고 불린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근데 꼴이 그게 뭐야. 자다 왔어?”

“…….”

“아무리 휴가라지만 그 꼴은 좀 심하네.”

사실 라파엘의 꼴은 빈말로도 보기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무릎이 튀어나온 추리닝이나 까치집이 된 머리, 푸석하게 일어난 얼굴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백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누구 때문인데!’

사흘에 걸친 철야 끝에 겨우 얻은 휴가였다. 아무리 황실 비서관이라지만 쉴 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휴가를 박살 낸 인물이 누군데 지금!’

간신히 억누른 살의가 다시 치솟았다.

이대로 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가는 이성이고 뭐고 살인을 저지르고 말 것 같아, 라파엘은 경관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멋쩍은 표정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 그게…… 전하께서 클럽에서 시비가 붙었습니다.”

“클럽이요?”

“예. 아실지 모르겠지만, ‘듀드’라는 클럽입니다. ……그, 게이 클럽이요.”

그 순간 라파엘이 고개를 휙 돌려 사내를 쏘아보았다.

‘듀드라니! 내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곳 아닌가! 도대체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황태자 체면에 게이 클럽이 가당키나 하냐고! 아니, 갈 거면 경호관이라도 대동하고 가든가! 그럼 시비라도 안 붙을 거 아니야!’

라파엘의 매서운 시선에 황태자가 씩 웃었다.

“좀이 쑤셔서.”

‘아, 혈압.’

라파엘은 뻐근한 뒷목을 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상대는요?”

“저기 있습니다만…….”

경관이 가리킨 곳에는 노랗게 탈색한 곱슬머리의 건장한 청년이 황태자를 갈아 마실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입가가 터진 거로 봐서는 황태자의 주먹에 몇 대 얻어터진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친 겁니까?”

“……전하께서요.”

경관이 침통하게 대답했다.

라파엘은 진짜 이번에야말로 황태자를 칠 기세로 노려봤다. 그러자 황태자가 조금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다.

“저 못생긴 놈이 먼저 치근댔다고. 그래도 봐준 거야.”

봐준 건 맞다. 곱상하게 생긴 황태자는 안 그렇게 생겨서 특공무술의 달인이었다.

특공무술뿐인가? 어지간한 체술은 모두 익힌 황태자는 사실 인간 병기나 다름없었다.

본인이 마음먹고 쳤다면 이미 저 청년은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봐준 건 사실이다. 아마 귀찮은 파리 쫓듯 한두 대 팼겠지. 그러나 문제는, 상대는 봐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소할 거야!”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청년이 소리쳤다. 발음이 형편없는 것으로 보아 이도 몇 개 나간 것 같다.

‘아이고, 혀도 씹었나 보네. 아프겠다…….’

라파엘은 잠시 피해자 입장에 빙의하여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니까 왜 저놈을 건드려, 건드리기를. 저놈은 나도 상종하고 싶지 않은 놈이란 말이야. 불쌍한 사람…….’

라파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청년이 다시 소리쳤다.

“신문사에도 다 퍼뜨릴 거야! 각오해!”

그 소리에 라파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그렇게는 안 되지. 그럼 내가 깨지거든.’

신문사에 퍼뜨린다고 해서 막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악독한 비서실장은 그거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서 이 난리를 피우냐며 자신을 쪼아 댈 것이다.

라파엘은 사악한 비서실장을 떠올리며, 나름의 절박한 심정으로 천진한 미소를 띤 채 청년을 향해 다가갔다. 같은 비서실 사람들이 ‘천사의 미소’라고 부르는 그것.

‘참 신기해. 어디로 보나 평범한 얼굴인데, 웃으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거든.’

심지어 악독한 비서실장도 인정한 미소다.

라파엘의 이름이 괜히 라파엘이겠는가.(물론 그의 조모가 라파엘이라 이름 붙인 이유는 미소와 전혀 상관없었다. 꿈에서 천사 라파엘이 귀한 알을 갖고 왔다나 뭐라나.)

그는 평소에는 분명 평범하기 그지없는 남자였지만, 웃을 때만큼은 비서실의 얼굴마담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청년이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청년의 두 귀가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라파엘은 더욱더 화사하게 웃었다.

청년은 게이였고, 라파엘은 자신이 가진 무기를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황실 비서관 라파엘 드마뉴입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예? 아, 아, 예, 예, 그럼요.”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청년이 엉거주춤 일어났고 라파엘은 미소를 유지한 채 안쪽 특별 면회실로 들어갔다.

안에서 담판을 짓고 나올 셈이었다. 경무청은 아무래도 듣는 귀가 많은 곳이다.

합의는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합의하는 조건으로 얼마를 주기로 했다, 이런 말이 떠돌면 안 되니까.

라파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들어갈 때.

황태자는 그 모습을 조금은 아니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등을 돌린 라파엘은 몰랐지만.

* * *

“아, 피곤해.”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합의를 끝내고 나온 라파엘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저보다 더 피곤하시겠습니까.”

합의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무청에 도착했을 때가 새벽 1시였는데, 지금이 새벽 3시다. 청년은 두 시간이나 질질 끌었다.

‘나랑 한 번만 자 주면 안 돼요? 그러면 합의해 줄 수 있는데.’

너는 내가 게이로 보이냐? 라파엘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애써 꾹꾹 눌러 참으며 ‘저는 게이가 아니고 아내와 아이가 있어서 안 됩니다’라고 없는 아내와 아이까지 만들어 내며 거절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망나니야.’

라파엘은 핏줄 선 눈으로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진짜 자다가 나온 거야?”

“그럼 이 시간에 뭘 했겠습니까.”

“음, 섹스?”

“……저를 전하와 똑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말아주십시오.”

“왜, 섹스가 나쁜 것도 아닌데.”

“저는 전하처럼 짐승 체력이 아니라서요. 섹스도 체력이 있을 때나 합니다.”

‘사흘이나 철야를 해놓고 섹스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넘치는 인간이 어디 흔한 줄 아나. 사흘 밤낮 침대에서 구르고 또 섹스를 해대는 당신과는 다르다 이 말씀이야.’

언젠가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라파엘이 중얼대자, 황태자가 굉장히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라파엘은 괜히 배알이 꼴렸다.

‘왜, 내가 체력이 없다니 신기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당신이 쓸데없이 행사 파투 내고 튀지만 않았어도 사흘이나 철야 안 했어. 알아?’

라파엘이 그렇게 속으로 구시렁거릴 때, 황태자가 물었다.

“근데 당신, 섹스를 해보긴 한 거야?”

“……예?”

“아니, 신기해서. 동정처럼 생겨서 섹스를 한다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라파엘은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이거 상사 성희롱으로 고소 못 하나. 법무청에 문의를 해봐야겠다, 라파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절 무슨 고자로 아십니까? 저도 당연히 섹스를 합니다.”

“진짜?”

“예.”

“말도 안 돼.”

황태자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말도 안 되긴 뭐가 안 돼. 내 나이가 몇인데?’

라파엘은 벌써 서른 줄에 가까워진 자신의 나이를 떠올리며, 한편으로는 마지막으로 관계를 가진 게 언제였는지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두 달이나 흘렀네.’

여러 문제로 엠마와 헤어지고(사실 차이고) 그 이후로는 아무와도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뭐, 두 달이면 양호하지. 친구 중에는 아직도 동정을 떼지 못한 놈도 있었다.

라파엘은 역시 나 정도면 괜찮지, 라고 생각하며 차 문을 열었다.

“타십시오. 황궁까지 태워 드리겠습니다.”

“진짜로 섹스를 한다고? 누구랑?”

“아, 여자 친구랑요! 그러니 그 얘기는 그만하고 타기나 하세요. 예?”

황태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안전 벨트 꼭 매세요.”

“마지막으로 언제 섹스했는데?”

“……왜 그렇게 남의 성생활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직장 내 성희롱으로 고소할 수도 있습니다.”

“딴소리 말고 대답해 봐. 언제 했는데?”

‘하아…….’

라파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대답했다.

“두 달 전입니다.”

“뭐?”

“왜요, 너무 오래전입니까?”

라파엘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경무청을 빠져나가 한산한 도로를 달릴 때까지 황태자는 말이 없었다.

그에 라파엘은 조금 마음이 상했다.

‘아니, 두 달 전이 그렇게 옛날도 아닌데 뭐 그렇게 반응할 것까지야 있나.’

진짜 고자가 된 기분이다.

라파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차를 황궁 쪽으로 몰 때, 황태자가 말했다.

“당신, 언제부터 나랑 같이 일했지?”

“음…… 한 삼 년 된 것 같습니다.”

“그럼 그때도 계속 섹스를 했단 말이네.”

‘아니, 이 사람은 섹스에 환장했나.’

라파엘이 인상을 찌푸리고 슬쩍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황태자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어딘지 상처를 받은 것 같은 표정에 가까웠다.

“뭐, 그렇죠. 그나저나 이 얘기는 제발 그만 좀…….”

“당신, 남자랑 자 본 적은 있어?”

끼이익──!

“뭐, 뭐요?”

“남자랑 자 본 적은 있냐고.”

차를 급정거한 라파엘은 입을 쩍 벌렸다.

‘이 인간이 미쳤나.’

“저는 게이가 아닙니다!”

“없다는 소리야?”

“제가 전하 같은 사람인 줄 아십니까?! 전 남자에 관심 없어요!”

“없다는 소리네.”

“그럼 있겠습니까!”

‘왜 이래, 정말!’

라파엘은 신경질적으로 황태자를 쏘아보았고, 이쯤이면 웃으면서 ‘농담이야’라고 해야 할 황태자는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신, 나랑 잘래?”

“……미, 미쳤습니까?”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나랑 자자.”

“…….”

“잘해 줄게.”

황태자가 말했고, 라파엘은 정말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래. 진짜 미친 걸까. 아까 그 청년한테 머리라도 얻어맞은 걸까. 아니지, 날 놀리는 건가?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단 말인가.’

“농담이죠?”

“진심이랬잖아.”

“거절하겠습니다.”

“왜?”

“전 남자에 관심 없다고요!”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미치겠네.’

라파엘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당혹스러움에 손이 벌벌 떨렸다. 살다 살다 별일 다 겪어 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3년이나 같이 일한 상사가 갑자기 같이 자자고 유혹하는 꼴이라니.

‘아니, 이건 유혹도 아니지. 이게 무슨 유혹인가. 이건 분명히 나를 놀리려는 수작임에 분명…….’

그때 라파엘의 두 눈이 커졌다. 그의 시선은 황태자가 아니라 그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 달려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의 두 눈을 비췄고, 그 순간 라파엘은 몸을 틀어 황태자를 껴안았다.

그때 라파엘은 황태자의 연녹색 두 눈이 당혹으로 물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꽝!

라파엘은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지난 29일 새벽, 서북 방향 5지구 교차로에서 황태자가 탑승한 차량의 추돌 사고가 일어났다.

차량에는 황태자 샤를마뉴 멜링턴(26)과 그의 비서관 라파엘 드마뉴(28) 백작이 탑승해 있었다.

추돌 사고를 낸 운전사 A 씨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황태자는 기적적으로 경상에 그쳤지만, 비서관 라파엘 드마뉴는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황실 대학 부속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경무청은 사고 경위를 파악 중이며, 황실 일가는 아직까지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 * *

긴 꿈을 꾸었다.

황제와 그의 아름다운 기사, 리안이 등장하는 꿈이었다.

아름다웠던 고백의 밤. 하얗게 질린 기사 리안과 그를 품에 안은 황제의 모습.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대화는 그대로 내 눈앞에 재현되었다.

그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 발치에 물이 잔뜩 고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물에는 내 모습이 비쳤다.

나는 울고 있었다.

어째서? 왜 울고 있는 거야. 울지 마, 왜 울어. 알고 있었잖아. 알고 있었으면서, 서럽기라도 한 거야? 배신감이 들어? 애초에 황제의 마음에는 내가 없었다.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물이 파동을 일으켰고, 곧 해일처럼 일어나 황제와 리안의 모습을 거두어 갔다. 그리고 그곳에 남은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검은 공간과 나. ……그리고 내 눈물이 일군 바다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

나도 모르겠다. 나는 그곳에 가만히 있었다. 위태한 평형을 맞추듯, 그냥 그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주 문득,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있기는 너무 외로운 곳이야. 나가고 싶다. 너무 춥고, 외롭잖아.

그러자 그 어둠뿐인 공간에 한 줄기 빛이 찾아들었다.

저곳이구나.

나는 그곳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아주 멀게만 느껴졌던 그곳은 끝없는 발걸음에 차츰 가까워졌고, 내 한 몸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빛의 구멍이 커졌을 때, 나는 잠시 뒤를 돌아 내가 걸어왔던 곳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적막.

……나가자. 더 있을 이유가 없어.

나가자.

그리고 망설임 없이 빛의 구멍으로 나를 던졌다.

* * *

“……!”

눈이 반짝, 떠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가슴 부분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아, 아파. 아파. 살려줘. 너무 아파…….

황제의 단도가 가슴을 꿰뚫었으니 아플 만도 하지.

나는 신음을 간신히 참으며 몸을 벌벌 떨었다.

너무 아파. 아프다고. 살려줘.

그때 누군가 내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였다.

누구지?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여자가 말했다.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네?”

“으…….”

“아프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가 저런, 하고 혀를 차더니 재빠르게 무엇을 꺼내 내 팔에 찔러 넣었다. 따끔, 하는 느낌이 들었고 곧 가슴의 통증이 줄어들었다.

“안정제 투입했어요. 곧 편해지실 거예요.”

“…….”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 잠들지 말고 기다리세요.”

의사? 가슴의 통증이 줄어들자 생각이 머리로 돌아왔다.

황제가 나를 위해 의사를 불렀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의아한 상태로 기다리자, 곧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들어와 내 눈을 뒤집으며 물었다.

“홍채는 정상이고…….”

“……저기.”

“환자분,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혼란스럽다. 여기가 어디냐고? 글쎄, 황궁인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의사가 어라,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환자분, 어딘지 모르시겠어요?”

“……황궁…… 인가요?”

내 대답에 의사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의사가 종이에 무언가를 막 적기 시작했다.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름?

이름. 내 이름이 뭐더라.

이름을 생각하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모진 고문의 후유증일까. 머리가 아팠다.

나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루크, 루크요.”

“…….”

의사가 말을 잃었다. 그는 무척 당혹스런 표정으로 뒤에 선 의사들을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넷…… 스물넷일 거예요.”

아마 그럴 것이다. 그 고문실에 끌려갔던 것이 스물셋의 겨울이었고, 그곳에 꽤 오랜 시간 있었으니 아마 스물네 살이 되었을 것이다.

의사들 무리에서 탄식이 튀어나왔다. 한 명이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곧 그와 함께 누군가 들어왔다.

저 사람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 안 돼. 안 돼.

오지 마.

싫어.

“싫어!”

비명처럼 내질러진 내 목소리에 들어오던 사람이 흠칫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발작적으로 몸을 떨며 앉은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손에서 무언가 뽑히며 피가 터져 나왔다.

의사가 놀라서 ‘간호사! 진정제!’ 하고 소리쳤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정말 싫어.

왜 여기 있어? 당신이 뭐라고 여기 있어. 왜 나를 찾아왔는데. 나 또 죽이려고 그러지. 싫어. 정말 싫어. 제발 꺼져. 내 눈앞에서 사라져. 사라지라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 있으려니 여자가 다가와서 내 팔에 무언가를 꽂아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탁 풀리며 눈앞이 혼미해졌다.

아…….

또 그곳으로 끌려가는 건가.

갑자기 땅 밑이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밀물처럼 어둠이 다시 찾아들었다.

안 돼, 안 되는데. 다시 그곳에 가기는 싫은데.

점점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주었지만 어둠이 밀려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때 깜짝 놀란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

황제 델루니안 멜링턴.

그는 깜짝 놀란 듯 파리하게 질린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가슴에 칼을 꽂아 넣은 사람이 뭐가 무섭다고 그렇게 질린 낯을 하는 걸까.

정말 싫어.

……당신을 저주해.

그 생각을 끝으로 암전이 찾아왔다.

* * *

다시 깨어났을 때는 곁에 아무도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통증도 많이 줄어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안정된 상태로, 온통 하얀색 천지인 실내를 둘러보며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황제의 손에 심장을 찔렸다. 날카로운 칼날이 심장을 관통했다. 그때의 격렬한 고통을 잊을 수 없다. 더 빠져나갈 피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문을 당했는데, 막상 심장을 찔리니 분수처럼 피가 튀어 올랐다.

뜨거운 피를 맞으며 고문실을 빠져나가는 황제의 흐릿한 뒷모습을 보다가 정신을 잃었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지금 살아 있다.

붕대로 둘둘 말려 있는 손을 들어 가슴께를 짚었다. 심장은 느리지만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움푹 파여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매끄러운 상체에는 어떤 흔적도 없었다. 마치 꿈인 것처럼.

……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게 어떻게 꿈인가. 뼈 사이를 벌리는 고통이, 혀가 잘리던 고통이, 심장을 꿰뚫린 고통이 어떻게 다 꿈일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지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고통을 내 몸으로 직접 체험했는데 그게 어떻게 꿈일 수 있어.

그리고 꿈이라면 내가 이곳, 의원으로 추정되는 이곳에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니까 그건 분명히 현실이다. 그 이후로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전혀 유추할 수 없지만.

실내는 깨끗했다. 황궁에서 보았던 어느 방보다 단출했지만 깨끗하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요즘 의원은 이렇게 시설이 좋은가. 황제에게 주워지기 전까지는 아파도 돈이 없어서 의원에 갈 수 없었고, 후궁이 된 이후로는 의사가 직접 왕진을 왔기 때문에 역시 갈 이유가 없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의원이구나. 시

설로만 따지자면 황궁보다 더 좋은 것 같다. 왕진 온 의사는 기껏해야 청진기로 살피는 정도였는데 여기는 별별 것들이 다 있다.

쉴 새 없이 이상한 소리를 내는 네모난 상자 같은 것들이 뭐에 쓰는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실내를 둘러보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꽤 오랜 기간 누워 있었는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옆에 세워진 긴 막대에 몸을 지탱했다.

……그런데 어쩐지 시선이 조금 높아진 것 같다. 오랜만에 일어나서 그런가?

나는 또래보다 키가 좀 작은 편이었다. 원래 잘 먹어야 잘 크는 법이다.

황제에게 주워지기 전까지 나는 평민 중에서도 지지리 궁상으로 가난한 평민이었으니 또래 애들보다 못 먹고 큰 것은 당연했다.

황제도 리안과 나를 비교할 때면 늘 키 얘기를 꺼냈다.

‘네가 조금만 키가 더 컸더라면 리안과 똑같았겠군.’

어딘지 아쉽다는 듯한 말투에 나는 못 먹고 자라서 그렇습니다, 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면 황제는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더 먹어라, 하며 황공하게도 직접 내 앞에 쟁반을 끌고 왔지. 그런 때도 있었다.

……이런 생각은 그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하면 뭐해.

어차피 다 끝난 일이다. 황제가 무슨 생각으로 의원을 불러서 나를 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그때와 같은 관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제는 리안을 얻었고, 나는 그에게 질렸으니.

질렸다, 라는 말이 우습다. 내가 그를 질린다고 생각할 자격이나 있을까.

그는 만인지상의 황제이고 나는 그에게 이용당하다 버려진 일개 평민에 불과하다.

아니, 이용당했다는 말에도 어폐가 있다. 나 역시 그를 이용해 분수에도 맞지 않는 호의호식을 즐겼으니 어쩌면 피장파장일지도 모르겠다.

고문까지는 좀 지나쳤다는 생각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양심의 가책은 좀 느꼈던가. 칼을 찔러 놓고 보니 또 미안하던가.

그래서 의사를 불러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 준 걸까. 어쩌면 이걸로 우리 관계는 정말 끝이라고 선언하는 걸지도 몰랐다.

문득,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황제의 파리한 얼굴이 떠올랐다.

몹시 충격을 받은 듯, 혹은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뭐가 무서웠을까. 비명을 지르는 내가?

그래. 7년 동안 단 한 번도 비명은커녕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던 나이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그 황제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는 건 좀 의외다. 시끄럽다고 또 죽이지나 않았음 다행인데. 황제는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른 걸까.

일자무식의 평민으로서는 황제의 고매한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 없다.

어쨌든 골치 아픈 생각은 그만. 살아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자.

나는 원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세상, 더 골 아프게 살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저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도 꽤 질긴 목숨인가 봐. 심장을 관통당했는데 죽지도 않고 말이야.

나는 바퀴가 달린 막대에 몸을 의탁해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흰옷 아래로 배가 뻐근하게 당겼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여기가 정확히 어디쯤인지 궁금했다. 황궁은 아닌 것 같고 의원이라면 수도 어디쯤에 있는 의원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새로운 삶을 살 터전을 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드륵, 하고 문이 옆으로 열렸다. 옆으로 열리는 문도 있단 말인가, 하고 상황에 맞지 않게 놀랐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옆으로 열리는 문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것이 참인지는 몰랐다.

신기하네. 그렇게 생각할 때, 문을 연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얼굴을 인식한 순간 간신히 막대를 쥐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졌다. 그와 동시에 나는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괜찮아?”

코가 깨질 줄 알고 눈을 감았지만 예상한 고통은 없었다. 땅바닥 대신 나는 단단한 무언가에 받쳐졌다.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누군가의 가슴팍이라는 것쯤은.

그리고 그 누군가가 황제라는 사실이, 내게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느껴졌다.

“놔, 놔!”

거세게 반항하며 뿌리쳤지만, 황제는 억센 팔로 내 어깨를 잡고서 놓지 않았다. 악력이 너무 강해 움켜쥔 어깨가 아플 정도였다.

몸이 벌벌 떨렸다. 보이지 않을 때는 괜찮았는데, 그와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 제발 사라져.

“왜 이래!”

“싫, 싫어…….”

“라파엘 드마뉴!”

황제가 소리쳤다. 고막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순간 속에서 화가 울컥 치받았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소리쳐.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소리를 질러. 당신이 뭔데. 왜?

“놓으라고 했잖아……!”

안간힘을 써서 황제를 뿌리쳤다. 강한 악력으로 나를 붙들고 있던 한순간 황제는 나를 놓쳤고, 나는 그를 밀친 반동으로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쿵!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자, 나보다 더 놀란 것은 황제였다.

“라파엘!”

그가 황급히 다가와 나를 일으켰다.

싫어. 손대지 마!

나는 날카롭게 그의 팔을 쳐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팔을 쳐 내려고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찌릿하게 팔목이 쑤셨다.

“악……!”

비명을 삼키자 나를 일으켜 부축하던 황제가 당황한 얼굴로 내 팔을 살폈다.

“다쳤어? 응? 접질린 건가?”

“만지지 마!”

“어느 쪽이야. 오른쪽? 왼쪽?”

“무슨 상관이야!”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

그렇게 소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공교롭게도 황제의 손이 다친 부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여기구나. 그렇지?”

황제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환부를 눌렀다. 찌릿한 고통이 팔을 내달렸다.

“아파!”

“무식하게도 접질렸네. 간호사!”

이윽고 흰 가운을 입은 여성이 들어왔다. 황제는 내 팔목을 붙잡은 채로 간호사에게 무어라 빠르게 지시하고는 그녀를 내보냈다.

나는 통 정신이 없었다. 황제에게 붙잡힌 팔이 너무 싫었다. 그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간호사가 나가고 황제와 단둘이 남은 방 안.

나는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날 놔 줘…….”

그 말에 황제는 대답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찬 연녹색의 눈이 똑바로 나를 향했다.

폭발할 것처럼 일렁이는 눈동자가 너무 두려웠다. 두려움에 토할 것 같다. 그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내 팔을 잡고 놓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지만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사정없이 몸이 떨렸다.

그렇게 보지 마.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당신이 날 그렇게 보면 죽을 것 같아.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 또 언제 날 찌를까 두려워.

그 끝 모르는 연녹색의 눈동자로 날 바라보면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연녹색의 눈?

7년간 황제를 봐 오며 그에 관한 것은 거의 속속들이 꿰고 있다고 자부했다.

정만 통하는 사내라 하더라도 공으로 보낸 시간은 아닌지라, 외적인 것은 물론이고 그 스스로도 모르는 사소한 습관들까지 알았다.

그는 표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을 때면 살짝 눈꼬리를 휘었다.

화가 날 때면 오른쪽 입술만 들어 올리며 작게 웃었고, 고민이 있을 때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이런 정도의 습관은 리안도 알았지만, 잠자리에서의 습관은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 내부를 찔러 오는지, 흥분할 때의 숨소리가 얼마나 색정적인지, 사정할 때의 굳은 표정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아는 사람은 황제의 유일한 후궁인 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모를 수 없었다.

수십 번도 넘게 본 그의 눈동자 색이 흑갈색이라는 것을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분명히 똑같은 얼굴이다.

길게 뻗은 콧대나, 조금은 고집스러운 턱 끝, 그리고 날카롭게 위로 뻗어 나가는 눈썹은 그와 똑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눈이 달랐다.

분명 다 똑같은데, 정말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똑 닮았는데.

눈이.

……눈이 달랐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연녹색 눈동자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야.”

“라파엘?”

“당신이, 아니야.”

당신이 아니야. 당신이 아니라고.

이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당신과 한방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두려웠는데,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분명 기뻐야 하는데. 당신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서 기뻐야 하는데.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정말로 버림받았다는, 이런 기묘한 기분이.

갑자기 힘이 쑥 빠졌다.

황제, 델루니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더 이상 어떤 반항도 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멍했다.

‘당신이 아니라면야.’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리를 맴돌았다. 두려움도, 격한 감정도 그를 위한 것이었던가. 정말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자조하고 있을 때였다.

황제, 아니, 황제와 똑 닮은 사내가 말했다.

“……의사에게서 당신이 아프다는 소리를 들었어.”

“…….”

“교통사고 후유증일 거라더군.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고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교통사고? 그게 뭐지.

나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남자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닮은 외모에 조금 꺼려지기는 했지만 두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현실 감각이 없었다. 어째서 당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내게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너무 믿기지 않는 상황이라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근데 ‘저런 표정’을 뭐라고 하지? 아무도 내게 ‘저런 표정’을 지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내가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정의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때, 남자는 숨을 고르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자기 스스로도 못 알아본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물어볼게.”

“…….”

“나, 누군지 모르겠어?”

남자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아, 알겠다.

저건 절박함이었다.

아무도 내게 지어주지 않은 표정이라 답을 알아내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저 표정은, 황제가 항상 리안을 바라볼 때 짓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애절하고 간절하고 단 한 번이라도 자기를 돌아봐 주기를 바라는 그런 절실함이 묻어나는 표정.

대체로 표정이 없는 황제의 얼굴에 나타나는 유일한 표정이 그것이었다.

황제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나를 향해 그런 절박한 표정을 짓는다.

……이상해. 정말로 이상해.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당신과 똑 닮은 사람은 알고 있어요.”

“……누군데?”

누구냐고? 당신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당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에게 당신에 대해서 얘기하라니 뭔가 이상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지금 황제 폐하라고?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날 미친 사람 취급할지도 몰라. 네가 어떻게 황제의 얼굴을 아느냐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또 붙잡혀서 들어가는 건 아닐까. 감히 황제 폐하를 사칭하고 다닌다고 말이야.

또 그 모진 고문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두 번 감당할 수는 없을 거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쏟아부은 정이 깊은 사람.”

그래. 당신은 내게 그런 사람이다.

쏟아부은 정이 깊은 사람.

7년의 정이 깊은 사람.

……정이 깊었던, 사람.

내 대답에 남자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사랑했다는 뜻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은 아니었어요. 말 그대로 정이 깊었을 뿐.”

내게 있어 사랑이 반짝이는 유리라면, 정은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늪이었다.

유리는 깨지기 쉽고, 늪은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들 하는 소리가 있지 않은가. ‘그놈의 정이 뭐라고.’ 싫어하는 사람들끼리는 미운 정도 든다는데, 그래도 황제와 나는 몸을 섞은 사이였다. 정이 안 들면 이상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저 깊은 정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나름대로는 신뢰하고 있었던 사람.

나는 남자에게 잡힌 팔을 살며시 잡아 빼며 말을 이었다.

“……당신과 무척 닮았어요.”

사실 황제는 개성 넘치게 잘생긴 사람이었다.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이 넘쳐 난다는 황궁에서도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정말 다 가진 사람이다. 부와 권력,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게 잘생긴 외모라니.

그런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부와 권력은 몰라도 얼굴은 똑 닮은 사람이 내 눈앞에 있다.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이 둘 있다더니 사실인가 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한참 침묵하던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미안한데 라파엘, 지금 당신이 하는 말, 잘 이해 못 하겠어. 뭐가 다른 거지?”

남자는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한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라파엘?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나를 그런 이름으로 불렀다. ‘라파엘 드마뉴!’ 정확히는 이렇게 불렀던 것 같다.

……도대체 그 귀족적인 이름은 뭐지?

나는 루크. 평민 루크. 가문의 성도 없고 헌금할 돈도 없어 축복의 이름도 없는 루크.

한때는 황제의 후궁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평민인 신분은 바뀌지 않은 별 볼 일 없는 남자.

“저기요.”

“음?”

“근데 왜 아까부터 저를 라파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 말에 남자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루크. 가문의 성도, 축복의 이름도 없는 평민인데요.”

“…….”

“혹시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건 아닌지…….”

내가 당신을 황제로 착각했듯, 당신도 나를 라파엘이라는 사람과 착각한 거 아니야? 정말 그렇다면 기가 막힌 우연이겠지만.

내 말에 남자가 두 눈을 깜빡였다. 연녹색 눈동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반복하기를 몇 번.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저 남자를 바라보았고, 갑자기 남자가 아아, 하면서 작게 웃었다.

“그렇군. 당신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지.”

“…….”

“미안. 내가 잠깐 잊었어. 바보 같네. 우선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말이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니. 나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한다고?

내가 멀뚱히 바라보고 있을 때, 황제를 똑 닮은 남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폭탄을 던졌다.

“당신은 스스로를 루크라는 이름의 평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당신의 이름은 라파엘 드마뉴야.”

“……뭐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라파엘 드마뉴 백작. 델라윈 공작의 외손자이자 대대로 황가를 모셔 온 드마뉴 백작가의 수장이지. 당신은 믿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이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내가 멍청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뭐라고? 내가 무슨 집안 사람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

“그리고 내 소개를 하지. 나는 샤를마뉴 멜링턴. 당신이 모시는 사람이자 이 나라의 황태자야.”

뭐?

“말도 안 돼.”

“뭐가?”

“거짓말하지 마세요.”

거짓말이다. 나는 그렇게 단정 지었다.

“거짓말 아니야. 못 믿겠다면 증거를 보여줄 수도 있어.”

“아니, 아니야. 거짓말이야.”

증거를 보여줘도 못 믿어. 거짓말일 게 뻔하니까.

나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의사를 피력하기 위해 고개를 휙 돌렸다.

“왜 거짓이라고 단정 짓는데?”

“지금 황제한테 후계자가 없다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아는 사실이니까!”

“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황제, 델루니안 멜링턴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건 정말로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

황후가 있었지만 그녀는 몸이 너무 약했고, 황제는 몸도 약하고 기도 약한 그녀를 찾지 않았다.

사실 황제가 찾는 것은 나뿐이었다. 후궁도 적진 않았지만, 황제는 고집스럽게 나만을 안았다.

딸을 후궁으로 밀어 넣은 귀족들은 반발했지만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화살 받이가 되는 것은 나였다. 저 요망한 사내놈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 후사를 볼 생각을 안 한다는 이유였다.

후궁의 아가씨들이 나를 괴롭히는 것도 그 까닭이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황제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근데, 황태자라고?

“차라리 갓난쟁이 아기를 데려다가 황제의 핏줄이라고 하시죠. 그편이 훨씬 신빙성이 있으니까.”

내가 고집스럽게 거짓이라 주장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있던 남자가 웃음을 지우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봐, 라파엘.”

“그리고 죄송하지만 전 라파엘 아니에요. 사람 잘못 봤어요.”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루크. 어쨌든 당신은 지금 황제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의 황제?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야. 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건 왜 물어요?”

“말해봐. 현 황제가 누구지? 아니, 올해는 몇 년도야?”

그러니까 도대체 올해는 왜.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착실히 대답했다.

“초대 막시밀리안 황제께서 하늘을 연 이후로 173년이 지났죠. 그리고 지난해에 황제께서 대륙을 통일하셨고요.”

내 대답에 남자가 하, 하고 한숨을 토해냈다.

“왜요?”

“라파엘. 아니, 루크.”

“…….”

“올해는 개국기년 513년이야. 서기로 따지자면 1983년이고.”

……뭐?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황제가 14대 황제 델루니안이라면, 그가 내 선조라고 말해주고 싶네.”

물론 당신 말마따나 델루니안은 후계자가 없어 죽기 직전에야 누이에게서 본 조카를 후계자로 세웠지만. 남자가 덧붙이며 말했다.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충격에 빠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이 몇 년이라고?

그리고 델루니안이 뭐?

“지금…… 뭐라고…….”

“델루니안이 내 선조라고.”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델루니안이 죽은 지 대략 300년이 지났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300년이라니. 그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믿을 수 없다.

아니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보며 남자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이리 와, 라파엘.”

남자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멍하니 남자의 손길을 따라 창가로 향했다.

“봐봐. 루크인 당신에게는 낯설겠지만 라파엘에게는 익숙한…….”

촤악!

남자가 커튼을 젖혔고, 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1983년의 세상이야.”

창문 밖으로 펼쳐진 세상은, 눈이 아플 정도로 삐죽삐죽 솟은 도형들의 세상이었다.

그곳에서 익숙한 건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황금빛 돔. 황궁 본당의 지붕. 그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생소한 것들뿐이었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첨탑과 거대한 나무토막처럼 서 있는 건물들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세상의 완만한 건물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말도 안 돼…….”

비명처럼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 어떻게?

이유를 따져 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나도 모르게 건너온 300년의 시간이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지독한 피로감에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1983년의 세상은, 그렇게 다가왔다.

* * *

“뇌파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신경도 모두 살아 있고요. 몸은 거의 회복이 다 되셨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얼굴을 한 번 살펴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인지능력도 멀쩡하고 평형감각도 완벽한데 어째서 기억만 사라졌을까요? 게다가 다른 인격이 나타나다니……. 이런 경우는 참 드문데 말입니다.”

“…….”

“아무튼 발작적이거나 폭력적인 증상도 없으니 곧 퇴원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대답한 건 자신을 황태자라 밝힌 샤를마뉴였다.

“기억이 아직 안 돌아왔는데 퇴원을 해도 됩니까?”

“예, 뭐. 계속 병실에 있다고 해서 기억이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고, 오히려 환자분께 익숙한 환경에서 기억이 돌아올 확률이 더 크거든요. 그리고 병원은 오래 있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건강을 되찾는 게 최선이에요.”

황태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이 제 비서관인데, 다시 업무에 복귀하기는 힘들겠죠?”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무리겠지만, 그래도 사고 전의 생활과 자주 접촉시켜 주면 좋습니다. 뇌 어느 부분에 숨어 있는 기억을 자극해 주면 금방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만약에 환자가 발작을 일으키거나,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병원으로 꼭 데려오세요.”

“예.”

의사와 황태자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멍하니 의사의 사무실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벽에 걸린 하얀 가운과 바닥부터 천장까지 잇닿은 책장.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책. 네모난 상자처럼 생겨서 빛을 내뿜는 기계가 올라간 테이블. 사람의 몸을 형상화한 모형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본 것은 의사의 테이블 위에 놓인 탁상용 거울이었다.

내가 살던 시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맑고 깨끗한 거울 안에는, 낯선 얼굴의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특이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저 평범하게 생긴 사내.

……저게 나란 말이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내 기억 속 나의 얼굴은 저것과는 판이했다.

절세가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했지만, 적어도 황궁에서 지내기에 부족한 외모는 아니었다.

황제가 사랑한 리안의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다. 리안은 악독하기로 소문난 기사였지만 분명 미인이었다.

부드러운 금발에 바다를 품은 듯 반짝이는 푸른 눈. 내 것도 그와 똑같았으니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소리는 안 들었다.

그런데, 이 얼굴은 좋게 봐줘도…… 평범하다.

내 눈이 높은 걸까? 아무리 봐줘도 그냥 피부 좋고 좀 어려 보이는 평범한 남자다.

웃으면 좀 귀여운 상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평범한 남자.

나는 이 평범한 남자의 몸을 ‘빌렸다.’

며칠 전, 처음 이 두 눈으로 1983년의 세상을 본 직후 나는 기절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에 이성이 터져 버린 것이다. 도대체 기절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큰 종이 뭉치를 읽고 있는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큰 종이 뭉치는 신문이라고 한다.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매일매일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일종의 관보란다.

정확히 말하면 관보도 아니지만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황태자는 설명했다.

‘읽어 볼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거 읽을 정신이 아니다. 대신 신문의 제일 첫 장은 잠깐 살펴보았는데, 첫 장의 제일 꼭대기에는 날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1983년 9월 13일.

……정말 1983년이란 말이지. 황제 델루니안이 죽은 지 300년이 넘은 세상.

나는 또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황태자가 무리하지 말라며 말렸지만 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거울 좀 가져다주세요.’

제일 궁금한 건 내 모습이었다. 황제 델루니안이 죽은 지 300년이 지나도록 나는 도대체 어떻게 존재했단 말인가.

나는 귀신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가 나와 대화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황태자뿐만 아니라 간호사와 의사들이 나를 보고 만진다. 귀신이라면 어떻게 만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제일 중요한 증거로 심장이 뛴다. 심장이 뛴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300년이나 사람이 살 수 있나? 답은 아니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거야.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거울을 좀 갖다 달라는 내 부탁에 황태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황태자한테 심부름을 시키는 비서관은 당신밖에 없을 거야.’

황태자는 내가 그의 비서관이라고 했다.

비서관이라는 게 뭘까? 문득 궁금해졌으나 그건 나중에 물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침대에 얌전히 앉아 거울을 기다리자 그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여기.’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드디어 내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옛날 모습 그대로일까? 사실 그러면 좀 무서울 것 같기도 했다. 내 추측대로라면, 나는 300년 전 황제의 손에 죽었으니까. 죽은 사람이 거울에 비치면 무섭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예상한 대로인지, 아니면 예상과는 다르게인지. 아무튼, 낯선 얼굴을 한 남자가 있었다.

‘……이게 저인가요?’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남자. 실망스럽지 않았다면 거짓일 게다. 내 목소리에서 실망을 읽었는지, 황태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게 당신이야.’

‘……이름이 라파엘이라고요?’

‘음, 그렇게 말하니까 좀 무서운데. 아무튼 라파엘은 맞아.’

라파엘……. 이름과 전혀 안 어울리는 칙칙한 남자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거울 속의 남자도 인상을 찌푸렸다.

무서워라. 나는 거울을 치우며 황태자에게 물었다.

‘저…… 라파엘이라는 분은 어떤 분인가요?’

‘응?’

‘아, 그냥 궁금해서요. 음…… 일단 몸을 빌리기도 했고. 알아 둬야 폐를 끼치지 않을 것 같아서.’

그 말에 황태자가 모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당신은 라파엘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네.’

라파엘이 아닌 것처럼 말한다고? 당연하지 않은가.

‘그야 저는 라파엘 드마뉴 백작이 아니니까요.’

‘…….’

‘제가 언제 사라질지는 모르지만, 이 몸을 빌리고 있는 한 폐를 저질러서 백작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니 부디 드마뉴 백작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전부 알려 주세요.’

황태자는 잠시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연녹색 눈동자는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이렇게 자주 눈을 바라보니 이제는 황제 델루니안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실히 이쪽이 더 낫긴 하지. 성격도 좀 더 인간적이고.

사실 델루니안은 성격 파탄자에 가까웠다.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평생 전쟁만 하며 살았던 인물이라 그런 건지 하극상은 죽어도 못 참았다.

자고 일어나면 신하들 목이 두어 개는 잘려 있던 시절. 내가 눈치가 빨라서 설설 기었으니 그래도 7년이나 버틴 거지, 아니었으면 목이 날아가도 열두 번은 더 날아갔을 거다.

‘나중에.’

‘예?’

‘지금은 말고. 퇴원할 때에 알려 줄게.’

‘……어째서요?’

‘여긴 듣는 귀가 너무 많거든.’

그렇게 말하며 황태자가 검지를 입에 갖다 댔다.

저게 무슨 뜻이지? 눈짓으로 묻자 그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비밀이라는 뜻이야. 당신이 살던 시대에는 없었나 보지?’

없었다. 그런 게 있었을 리가. 손짓 하나만 잘못 해도 목이 잘리는 시대였는데 감히 황제 앞에서 이런 손짓을 했다가는 손가락이 썰리고도 남았다.

확실히 요즘 세상은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 문득 아주 오래전 내가 황궁에 처음 들어갔을 때가 생각났다.

황실 예법 배우느라 말 그대로 피가 터지는 시간을 보냈지.

누구를 만나면 어떻게 인사하고, 식사할 때 포크와 나이프는 어떤 순서대로 쓰고.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행동하면 예법 선생이 참나무 가지로 손바닥을 두드렸다.

……지금도 그런 예법들이 통용될까? 황태자라는 샤를마뉴의 행동거지를 보면 그런 예법들은 사문화된 지 오래인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모든 게 다 우습게 느껴졌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 시대에 통용되던 가치들은 빛이 바래 사라진다. 후세들은 선조의 것을 참고하기도 하고, 또 선조의 것과는 별개로 자기들 나름의 가치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치도 언젠가는 빛이 바래 퇴색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 한순간의 유한한 가치에 목을 매달고 징징대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래도 그 허망한 것에 집착하는 게 또 사람이긴 하다.

‘퇴원은 언제 할 수 있나요?’

‘글쎄. 의사가 허락을 해야겠지?’

그렇구나. 또 한 가지 배운다. 과거 의사는 황제의 말에 깨갱, 하고 죽는 족속들이었는데, 이 사회에서는 의사의 권력이 막강한 것 같다.

황태자마저 허락을 받아야 한다니 말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황태자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

‘아니, 그냥.’

‘그냥?’

‘당신이 그렇게 고분고분 따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귀엽다고? 귀엽다는 말이 내가 살던 시대와 똑같은 뜻이라면, 그 말은 남자한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그건 모욕이나 다름없다. 너의 남성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실제로 나를 리안의 대용품으로 취급했던 황제조차도 나더러 ‘귀엽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 큰 모욕이니까.

지금 나를 모욕하려는 걸까. 조금 화가 났다.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대의 황태자라는 그에게 간 크게 따지고 들 자신은 없어 이불만 구기자, 황태자가 눈치 빠르게 왜 그러냐며 물어왔다.

‘……그.’

‘음?’

‘남자한테, 귀엽다는 말은…….’

모욕인데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살며시 그의 잘못을 지적하자 황태자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모습에 작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괜히 말했나? 아무래도 괜한 말을 한 것 같다.

나한테 명예 따위가 어디 있다고 모욕이네 뭐네 했을까. 초조함에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였다. 황태자가 보통 때와 변함없는 말투로 되물었다.

‘어…… 기분 나빴어?’

다행히도 그는 크게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내게 기분 나빴느냐고 묻는 그를 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한 10초 정도 고민하고 대답했다.

‘약간요…….’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 압니다. 그냥 다만…… 요즘 시대에는 남자한테 귀엽다고 해도 되는 건지, 그게 궁금해서.’

우물쭈물한 대답에 황태자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아니지만?’

‘분명 아무나 붙잡고 귀엽다고 하면 안 되겠지. 그럼 게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게이? 또 모르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게이는 또 뭐야.

하지만 지금 상황에 게이가 뭐냐고 물었다가는 흐름을 끊을 것 같아 잠자코 기다렸다. 황태자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써도 되는 경우가 몇 가지 있긴 한데…….’

‘써도 되는 경우요?’

‘응.’

그렇게 대답하며 그가 씩 웃었다.

‘그 경우에 대해서는, 다음에 둘만 남을 때 알려 주지. 라파엘에 대한 얘기도 함께.’

‘……정말요?’

‘그래. 약속해.’

약속. 황태자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건 또 뭘까. 그 손가락을 멀뚱히 보고만 있자, 그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당신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그리고 내 손가락에 감는 거야.’

‘……손가락을 감아요?’

‘응. 그게 약속한다는 뜻이거든.’

……고작 이런 걸로 약속이 된단 말인가. 인장은? 인주는? 그런 게 없이도 약속이 가능하다고? 참 이상하네.

내가 괜히 머뭇거리자 황태자가 재촉하듯 손가락을 내밀었다. 빨리 감아.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

그리고 의사와 상담을 한 오늘.

나는 퇴원을 했다. 물론 내가 직접 퇴원 수속을 밟은 것은 아니다.

황태자와 함께 온 젊은 여자가 대신 내 퇴원을 도왔다.

그 여자는 나를 보고는 ‘저 기억 안 나세요? 비서관님, 저예요, 저’라며 슬퍼했는데, 기억이고 뭐고 나는 그 여자의 드러낸 맨다리에 충격을 받아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종아리를 훤히 드러내는 치마를 입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 건진 몰라도, 정말 말세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정이 왜 그래?”

황태자가 물었다.

눈치는 빠른 황태자는 항상 이런 식으로 나를 챙기고는 했다. 나는 대답 없이 여자의 드러난 종아리를 흘끔 바라보았다.

‘아하……’ 하며 그가 눈을 휘며 웃었다.

“소냐 하워드 비서관.”

“예?”

“퇴원 수속 다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도 좋아요.”

“예?!”

소냐 하워드라는 여자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니, 제가 여기까지 왜 왔는데요? 입원하는 동안 병문안도 못 한 우리 비서관님 얼굴도 좀 뵈고, 집까지 모셔다드리려고 온 건데……!”

여자의 강력한 항의에도 황태자는 꿋꿋했다.

“퇴근하세요.”

그리고 그 결과, 나는 지금 황태자의 ‘차’에 타고 있다.

이 ‘차’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쉽게 풀이하자면 말 없는 마차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말이 없는데 어떻게 움직여? 이거야말로 마법인가? 신기해서 바라보자 황태자가 그게 아니라 과학이란다.

과학은 또 무엇이지? 황태자는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그렇게 파고들자면 끝도 없다며, ‘차츰 익숙해질 거야’ 하고 호기심을 끊어 냈다.

“전하.”

“응.”

“그…… 저번에 약속하셨던 것…… 잊지 않으셨죠?”

한참 동안 망설인 끝에 물었다. 퇴원하기 전에 손가락 걸고 했던 약속, 잊지 않으셨죠? 그 말에 그가 아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궁금해?”

“……전부요. 나이는 몇 살이고, 가족은 어떻게 되고 결혼은 했는지, 또 평소 성격은 어땠는지 전부 궁금해요.”

언제 내가 사라질지 모른다. 앞으로 평생을 라파엘의 몸으로 살아야 할 수도 있다.

당장 내일 없어질 수도 있고. 아무튼 나는 이 몸을 빌린 것이다. 빌린 물건은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법.

나는 라파엘에 대한 것을 알아내기로 마음먹었다. 황태자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하나씩 알려줄게. 나이는 스물여덟. 직업은 저번에 말했지만 황실 제2비서실 소속 비서관으로 황태자 전담 선임비서관이야. 3년 전부터 나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지. 가족은 없어. 부모님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거든. 성인이 될 때까지 외조부인 델라윈 공작이 키웠어. 현재 공식적인 작위는 드마뉴 백작이고. 또 뭐가 있었지?”

“결혼은요?”

“아, 그거. 제일 중요하지. 라파엘은 결혼 안 했어.”

스물여덟이라면서?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화사하게 웃었다.

“왜냐하면, 나랑 사귀고 있었거든.”

“……!”

“그리고 그게 내가 당신한테 귀엽다고 해도 괜찮은 이유야. 사귀는 사이에서는 그런 말도 다 애정 표현에 속하니까.”

“저, 저, 정말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드마뉴 백작이 황태자의 애인이었다니!

황제의 남자 후궁으로 살다가 기껏 들어온 몸이 300년 후 황태자 애인의 몸이라니 나란 사람의 운 없음에 탄복할 지경이다.

“그, 그 법적인 문제는 없는 건가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황태자가 킥킥 웃었다.

“큰 문제는 없어. 이 나라는 법적으로 남성 간의 결혼을 인정하고 있거든. 오직 남성뿐이지만……. 아무튼 그래서 라파엘은 나와 약혼하기를 항상 원했어. 물론 내가 지위가 지위다 보니 미루고 있었지만 말이야.”

심지어 약혼 예정자였어. 맙소사. 나 어떡해…….

델루니안을 똑 닮은 황태자의 예비 약혼자 몸에 들어와 버렸다. 진짜 최악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울고 싶었다. 바닥을 치는 내 기분 따위 눈치채지 못한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라파엘의 성격을 물었지? 음, 라파엘은 평소 조신한 성격이었어. 부끄러움을 많이 타기도 했고. 하지만 나만 보면 항상 방긋방긋 웃었어. 그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는데…… 아, 참. 라파엘은 웃는 얼굴이 정말 예뻐. 궁금하면 거울 보고 확인해 봐.”

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그가 ‘정말 예쁜데’ 하면서 또다시 웃었다. 나는 정말로 우울해졌다.

지금 웃는 얼굴 따위를 따질 때가 아니라…….

“그럼…… 그…… 저도…… 전하의 약혼자가 되어야 하는 건가요?”

어렵사리 묻자 그가 ‘응?’ 하고 고개를 돌렸다.

“싫어?”

싫으냐고?

“그…….”

“솔직하게 말해도 돼.”

“……싫어요.”

솔직하게 말하래서 솔직하게 말했더니 황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

“내가 싫어?”

“전, 전하가 싫다기보다는…….”

“그럼? 내가 남자라서?”

“…….”

그것도 아닌데. 내게는 황태자가 남자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걸 신경 썼다면 애초에 황제에게 몸을 내주지도 않았겠지.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너무 닮았다고. ……눈만 빼고.

내 침묵이 긍정이라고 해석한 건지, 그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닮았다며.”

“사랑이요?”

“저번에 그랬잖아, 정이 깊었던 사람이 있었다고. 그 사람이 나와 닮았다면 당신은 남성을 사랑했다는 거 아니야?”

그런 말을 했었지. 하지만 나는 그때도 분명히 말했다.

사랑과 정은 다르다고. 사랑은 정이 아니야. 정은 사랑이 아니지. 어떻게 사랑이 그런 것일 수 있어?

“사랑이 아니었어요. 정이었을 뿐.”

“그럼 그 정이 어떻게 쌓였는데?”

“……그건.”

“정이 그냥 쌓이지는 않았을 거고, 그게 친구 사이의 정이라면 우정이라 했겠지. 하지만 당신은 우정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

“그게 우정은 아니었지?”

……우정은 분명히 아니었다. 사랑도 우정도 아닌 그 어중간한 위치에 놓인 ‘정’ 어쩐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곧이곧대로 대답했다간 황태자의 말에 휘둘릴 것 같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차 안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나대로, 황태자는 황태자대로 침묵을 지키는 시간.

그 침묵을 깬 것은 황태자였다.

“난 라파엘을 사랑해.”

“…….”

“아주 많이, 정말 많이 사랑해. 난 이 감정을 우정과 혼동하지 않아.”

“…….”

“나는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어. 당신이 그 남자에게 정을 품었는지, 사랑했는지 헷갈리지 않았으면 해.”

어째서?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야 당신이 내게 마음을 열 거 아니야?”

“…….”

“당신은 지금 내 심정을 조금도 몰라. 사랑하는 연인이 교통사고로 죽다 살아났는데 기억을 깡그리 잊어 먹고, 남자끼리 사랑하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 마음 자체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는 내 심정.”

“…….”

“라파엘은 언제 제정신을 찾을지 몰라. 평생 못 찾을 수도 있고.”

그가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

“아, 그럴 수 있지. 다 이해해, 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까지 죽이면서?”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이 몸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내가 라파엘의 정신을 밀어낸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그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을 탓하려는 게 아니야. 내 입장도 이해해 달라는 것뿐.”

“…….”

“사실 지금도 당신을 품에 안고 싶어. 입을 맞추고 열렬히 사랑하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보고 안기라는 거야? 눈동자 색만 다르지, 생김새는 델루니안과 똑같은 당신한테?

그럴 순 없어. 그러고 싶지 않아.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 왔다. 몸을 가로지른 띠를 꼭 붙잡으며 고개를 돌리자 그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아니, 라파엘을.

“라파엘.”

“…….”

“라파엘.”

“……전 라파엘이 아니에요.”

“그래, 좋아. 루크.”

“…….”

“내게 안기라는 소리는 하지 않을게. 그건 혼란스러운 당신에게 너무 폭력적인 방식일 테니까.”

그럼 뭘 원하는 건데? 황태자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대신, 나를 거부하지는 말아줘. 내가 당신한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막지는 말아줘. 내 마음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부정하지만 말아줘.”

부탁이야. 간절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득 이 상황이 과거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리안을 사랑하지만 차마 그를 안을 수 없어 나를 대신 안은 황제, 델루니안.

라파엘을 사랑하지만 그를 안을 수 없으니 사랑이라도 고백하겠다는 황태자, 샤를마뉴.

……차이점이라고는, 내가 라파엘의 육신을 빼앗았다는 것밖에 없다.

그것밖에.

정말 그것밖에…….

고개를 돌려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델루니안을 닮은 사내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절박했다.

나는 내 한 마디면 그를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먼 과거와 현재를 생각한다.

나는 또다시 그런 모순된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아. 누군가 나를 보며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그런 상황을 겪고 싶지 않다고.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는 이미 뼈저리게 배우지 않았던가.

……근데, 이 육체는 원래 내 것이 아니었잖아.

머릿속이 복잡하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에 대답을 미루기를 수십여 분.

황태자가 차의 속도를 늦추었고, 나는 직감적으로 라파엘의 집에 거의 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답해야 해. 어떤 방향이든 대답을 해야 해.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윽고 차가 멈추어 섰다. 벌집처럼 똑같은 창문이 수십 개가 달린 이상한 건물 앞에서였다. 차를 완전히 멈춰 세운 황태자는 웃음기 없는 연녹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델루니안.

속으로 그 이름을 불러본다.

델루니안. 델루니안. 델루니안.

그 이름을 여러 번 부르자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나는 그때의 고통을 기억한다. 나를 보며 리안을 부르던 그. 후궁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놀음에 맞춰 주었던 나.

매일매일이 달콤한 지옥이었고, 그를 볼 때면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함께 가슴을 옥죄는 슬픔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정말 힘들었잖아, 루크. 전부 기억하고 있잖아.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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