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34)

프롤로그

“폐하…….”

아름다운 신하를 품에 안은 황제는 7년의 전쟁을 끝내고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찬란한 금발을 늘어뜨린 신하는 평소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기사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긴 한 사람에 불과했다.

참으로 그림 같은 풍경이 아닌가.

나는 비죽 웃으며 그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좋아 죽는 저 표정을 좀 보라고.

황제의 평생소원은 단 두 가지였다.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1년 전 대륙을 통일하며 이루어졌으니 남은 소원은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는 것 하나뿐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살면서 단 하나의 소원도 이루기 힘들지만, 황제는 달라도 뭐가 다른지 결국 두 가지 모두를 이루고야 말았다. 과연 정복 군주다웠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지만, 사실 웃을 처지가 못 되었다.

사랑하는 두 연인의 장밋빛 미래와 나의 인생은 반비례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황제가 연인을 손에 얻었다는 말은 곧, 나는 버려질 운명이라는 뜻이다.

이 호사스런 생활도 끝인가?

황궁에 들어온 지 7년.

처음에는 무서울 정도로 호사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런대로 익숙해졌다. 씀씀이가 커지기는 쉬워도 줄어들기는 어렵다는데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나름 총애받던 후궁인데 한 푼도 안 주고 쫓아내지는 않겠지.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만 주면 조용하게 떠날 생각이었다.

그냥 경치 좋은 곳에서 여생을 보내다 죽으면 족했다. 황제가 거두기 전까지 나는 바닥을 굴러먹던 비루먹은 평민이었다.

후궁이 되었지만 신분은 평민이라 몇몇 연이 닿은 귀족들이 자신의 양자로 삼아주겠다 제안을 했지만, 이 생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몰라 거절했다.

그 모습에 호사가들은 ‘황제만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후궁’이라며 칭찬을 했지만, 글쎄다.

나는 그저 죽기 싫었을 뿐이다.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서 들어와 호사스럽게 꾸며진 침실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취향대로 꾸며진 침실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나를 안았다.

“리안……!”

거친 행위의 끝, 내 몸속에 파정할 때면 그는 내가 아닌 신하의 이름을 불렀다.

황제는 신하, 리안을 사랑했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 나는 갑작스러운 행운에 얼떨떨해하면서도 행복해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평민 출신으로 믿을 건 반반한 외모밖에 없어 굶어 죽느니 몸이라도 팔겠다고 나섰고, 그곳에서 잠행을 나온 황제를 만났다.

포주는 새로 들어온 놈이라며 나를 소개했다. 그리고 황제는 내 처음을 가져갔다.

그는 내 금발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며 자신과 함께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고, 그가 그저 평범한 귀족인 줄 알았던 나는 따라가겠다고 했다.

인생 역전도 그런 인생 역전이 없지.

황제는 퍽 다정했고, 제법 살뜰히 나를 챙겼다. 멋모르는 평민 소년을 후궁에 앉힌 그는 자신의 취향대로 나를 꾸미고 안았다.

나는 황제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그랬기에 조금 자만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루크 님.”

처음 리안을 보았을 때, 나는 무척 놀라고 말았다. 나보다 키가 조금 더 크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는 나와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싶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때 리안은 평민에 불과한 나에게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지체 높은 후작이자 영광스러운 황제의 근위기사단장이 고작 남자 후궁을 호위하게 된 굴욕적인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안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을 보며 벼락같이 깨닫고야 말았다.

황제는 자신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하얗게 질린 낯으로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던 것이다.

리안이 물러나고 황제에게 물었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저는 누군가의 대용품입니까?”

황제는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단박에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긍정이나 다름없는 대답에 나는 웃었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제 주제를 파악하고 싶어서요.”

“…….”

“제 주제를 알았으니, 폐하께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행동하겠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황제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때까지 나를 보며 웃은 적은 많았지만, 그것은 모두 내게 덧씌워진 리안을 향한 웃음이었음을 그때 알게 되었다.

“제법 머리를 굴리는구나.”

“…….”

“나는 멍청한 것들이 싫어. 그러니 네게 상을 주마.”

“예?”

“뭐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다. 괜한 분란만 만들지 않으면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원한다면 귀족 작위라도 주겠다.”

파격적인 대우에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자, 황제가 비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절대로 그를 위협해서는 안 돼. 절대 용서치 않겠다.”

파격적인 대우의 조건은 그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황제가 물러가고 나는 리안을 불러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무릎을 꿇지 말라고 부탁했다.

리안은 그럴 수 없다며 완강히 고개를 저었지만, 생사가 걸린 나보다 더 절박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긴 사람은 나였다. 황제는 그 처사에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황제가 나를 두는 것은 리안을 자극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리안은 고리타분한 기사였다. 그는 남성과 남성이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인지조차 못 하는 상태였다.

그런 그를 보며 황제는 일말의 초조함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애정을 우정이라 착각하는 남자에게 자신이 오랫동안 그를 사랑해 왔음을 은연중에라도 드러낼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이것은 모두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일부러 그를 내 곁으로 보낸 것으로 보아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남자를 안을 수 있고, 내가 안는 대상은 너를 똑 닮은 사람이다’라고 알리기 위해.

게다가 내가 보기에 리안 역시 스스로 인지하지는 못 할 뿐 황제를 사랑하고 있었으니, 나는 그들의 사랑놀음에 놀아난 꼴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황제는 리안을 사랑했으나, 자신의 애정이 그에게 독이 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불안한 전쟁의 시대였고, 전투는 변방과 황궁 두 곳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호시탐탐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노리는 귀족들로부터 리안을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니 보는 사람만 있다 하면 그렇게 나를 귀애하는 척 연기했겠지. 둘만 남으면 그렇게 찬바람을 날려 대었으면서 말이야.

그래도 그 대가로 나는 평민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고, 남부럽지 않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도 이제는 끝이다.

리안은 결국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고 황제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하얗게 질린 낯으로 감히 폐하를 마음에 품었다고 속삭이는 리안은, 정말 애처롭게도 아름다웠다.

당장 죽을 것처럼 바들바들 떠는 리안을 품에 안은 황제는 나 역시 너를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노라고 고백했고, 두 사람은 기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는.

“짐을…… 꾸려야겠지.”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다.

* * *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사랑에 미친 황제는 내 수비 범위 바깥에 있었다.

황궁을 떠나겠다는 말을 할 기회도 없었다. 리안과 마음을 통한 황제는 나를 찾지 않았고, 나는 감히 황제를 오라 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기 때문에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나마 그를 만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나갈 거니까, 나가면 다시는 못 볼 테니까, 그냥 7년 동안 몸 섞은 사이로서 그냥 얼굴이나 마지막으로 보자고. 그래서 기다렸다.

석 달이 흘렀다.

황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를 석 달째.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찾아온 사람은 황제가 아니었다.

……역모라니.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황제는 진정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역모라니. 그 어이없는 죄목으로 나를 처리하려는 황제는, 이 기회에 귀찮은 귀족들도 쓸어버리려는 심산이었는지 옆방에서는 평소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웃음이 나온다.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서 웃음이 나온다.

……너무하잖아.

나, 그래도 제법 열심히 했는데.

쓸데없는 분란 안 만들려고 다른 아가씨들이 내 침대에 뱀을 풀어놔도 참았어.

아이도 못 가지는 평민 사내놈이 요사스럽게 황제를 홀리고 다닌다고 모욕해도 못 들은 척 넘어갔어. 분란 만들기 싫어서. 괜히 시끄러워지면 당신이 짜증 낼까 봐.

그리고 당신 혼자였으면 리안을 가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내가 7년 동안 얼마나 티 나지 않게 리안을 자극했는지 알기나 해?

그 겁쟁이 바보를 당신 품에 안기려고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느냐고.

알면 이런 짓 못 해. 절대 못 해. 고마워서 상을 주면 상을 줬지.

……왜 그랬는지 당신은 궁금하지도 않겠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특이하지.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라 그런 걸까.

마음 주면 몸도 준다는 여자들과는 달리, 몸 주면 마음 간다는 남자라서, 그래서 그런 걸까.

당신을 사랑한 건 분명 아니었다.

사랑은 분명 아니었는데, 그래도 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나를 보며 리안을 찾는 당신이지만 어쨌든 정이라는 게 생겨서.

가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리안은 이렇게 부드럽지 않다며 어린애처럼 투덜대는 당신에게 정이라는 게 생겨서. 그래서 당신을 도왔다.

……알면 이런 짓 못 해.

못 한다고.

“폐하…… 폐하를, 불러 주십시오.”

맞고 터지고 피부가 뜯기고, 그러는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바싹 마른 목으로 고문관에게 말했다.

고문관은 무슨 헛소리냐는 듯 비웃었다.

“폐하를 불러 달라고!”

어디서 큰 소리냐고 또 맞았다.

“황제! 황제를 불러!”

감히 황제 폐하를 막 부른다고 또 맞았다. 고문관은 쉴 새 없이 때리고, 지지고, 졸라 댔다.

뼈와 뼈 사이를 벌리고 잠깐 기절이라도 할라치면 뜨거운 물을 뿌렸고, 송곳으로 피부를 긁어 댔다.

하도 비명을 질러대니 시끄럽다고 혀를 자른 바람에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기름을 짜듯 온몸이 쥐어짜지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당신이 내게 이래.

내가 뭘 거창한 걸 바란 게 아닌데.

귀족들이 내미는 양자 자리도 거부했는데.

그냥, 조용히 물러날 생각이었어. 당신이 얼굴 한 번만 보여 줬더라면.

그 냉정한 얼굴 하나 보여 주고, 잘 가라고 한 마디만 해줬으면 구질구질하게 안 매달렸을 거라고.

근데 왜.

……왜 그랬어?

고문관들은 역모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사실 물을 게 없었다.

나는 아는 게 없었고, 그들도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혀를 잘랐겠지.

며칠이나 흘렀을까.

시간도 알 수 없었고,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고문도 멈추었다.

고문의 목적은 고통을 주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것인데, 나는 더 이상 고문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죽음이다.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운 것은 죽음.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루크 님…….”

나를 루크 님이라 부르는 자는 리안이었다.

“…….”

리안, 이라고 소리 내어 부르고 싶었지만 혀를 잘려 말할 수 없었다. 하도 맞아 안압이 높아진 눈을 간신히 뜨고 바라보자, 초점이 안 맞아 화려한 금발만 간신히 식별할 수 있었다.

여긴 왜 온 거야?

“이제야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어째서 너는 나를 믿는 걸까. 왜 너만 나를 믿는 걸까.

가까이 다가온 리안이 뼈가 드러나 흉측한 내 팔을 자신의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쥐며 말했다.

“당장, 당장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루크 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당장 말씀드려서…….”

“여긴 왜 온 거냐, 리안.”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폐하!”

“몸도 좋지 않으면서 여기까지는 왜 왔느냐고 물었다.”

“폐하, 루크 님이 그러실 리가 없다는 건 폐하께서 더 잘 알지 않으십니까! 어째서 이렇게까지 모질고 끔찍하게 대하시는 겁니까!”

“당장 돌아가.”

“아니요, 못 돌아갑니다. 루크 님을 풀어주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시끄러워.

“리안!”

“폐하께서 7년이나 아끼고 귀히 여긴 분입니다. 폐하께서 더 잘 알지 않으십니까!”

시끄럽다고. 시끄러워.

네가 그렇게 나올수록 역효과만 나온다고.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이를 아득 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반역자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모든 증거가 그를 반역자라 가리킨다. 안 그래도 오늘 마지막 처분을 내렸지.”

처분?

황제가 나에 대해 처분을 내렸단 말인가.

“즉결 처형이다.”

“……!”

“그러니 이제 돌아가서 쉬어라. 나도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아, 아, 안, 안 돼, 안 돼! 루크 님! 루크 님!”

처형이란 말이지.

……처형.

리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황제는 나가지 않았다. 그의 형체가 눈앞에 맺혔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로 추정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미안하다는 말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왜 그랬는지 그 이유라도 말해줘.

그리고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무엇을?

“그를 위협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뭐?

“다 죽어가는 너를 죽이는 것으로 이 분이 풀릴지 모르겠지만.”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화끈한 감각이 가슴을 내달렸다. 가슴에 검이 꽂혔다는 것을 깨달은 건 다음이었다.

“7년의 정을 보아 이 정도로 넘어가 주지.”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황제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내가 마지막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순간을 끝으로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나 싶다.

“……어째서.”

“라파엘?”

“어째서!”

어째서 살아 있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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