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ret Scene
여름 휴가철이었다. 혁진은 공식적인 휴가였고 태운도 간간이 화보와 광고 촬영만을 하며 휴식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정까지 방학을 하자 짧은 일정으로나마 다 같이 휴가를 보내기 위해 별장을 찾았다.
모래사장의 모래가 햇살을 받아 금가루를 뿌린 듯 반짝거렸다.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 바닷가에서 태운은 편안한 차림으로 혁진보다 세 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파도가 태운의 발목까지 넘실거렸다. 태운의 발자국이 모래사장에 새겨졌고 또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파도 덕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계속해서 걷는 태운을 바라보며 혁진도 천천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태운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종아리를 살짝 가리는 바짓단이 다 젖도록 태운은 파도를 따라갔다 돌아 나오기를 반복했다. 파도가 신기한 어린아이처럼 파도 사이를 들락날락하는 태운의 모습을 혁진은 풀어진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여름 휴가였다. 한참을 파도 위를 넘나들던 태운이 문득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혁진도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파도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태운의 얼굴이 밝았다. 물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항상 바닷가에서의 촬영은 곤욕이었다. 당장이라도 심연이 자신을 집어 삼킬 것만 같아서 잔뜩 긴장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파도 위를 걸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게 신기해 태운은 정신없이 파도를 따라 걸어왔다. 뒤에서 묵묵히 자신을 바라봐 준 혁진에게 고마웠다. 또 이렇게 도움을 받았다.
태운은 감사하다는 말 대신 혁진에게 다가가 양 뺨에 입을 맞췄다. 정중함이 담긴 입맞춤이었다. 혁진이 목 안쪽으로 낮게 웃으며 입술을 끌어 올리자 태운이 볼을 붉히며 혁진의 입술에 다시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맞닿은 입술 안에서 혁진이 웃었다.
오랜 입맞춤을 끝내고 혁진과 태운은 다시 별장을 향해 걸었다.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처럼 발걸음이 느긋했다.
“오빠!”
그러나 별장 쪽에서 뛰어나오는 작은 인영에 두 남자의 발걸음이 모두 빨라졌다. 거의 뛰듯이 그 인영 앞으로 간 태운은 단번에 동생의 등 뒤를 받쳤다.
“뛰지 말라고 했잖아.”
태운이 동생을 책망했다. 이제 아정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동기들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문제없이 적응해서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거나 동기들과 MT를 떠나 있는 동안엔 혹시라도 또 발작이나 공황이 올까 봐 태운의 애를 태우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의사 선생님도 이제는 괜찮다고 하셨다 뭐.”
“조심하라고도 하셨지.”
혁진은 한 걸음 뒤에서 남매의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자신의 앞에서는 순하게만 구는 녀석이 동생 앞에서는 엄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아정을 이기지 못했다.
“수영할래.”
입을 삐쭉이며 아정이 말했다. 아주 어릴 적 기억이라 아정에게는 물에 빠졌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태운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 정말 괜찮다니까. 나 요즘 진짜 완전 멀쩡해.”
“바다는 위험해.”
태운과는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아정이 이번에는 혁진을 공략했다. 자신보다 배는 나이 많은 남자들도 어려워하는 혁진을 아정은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대했다.
“얌전하게 놀게요. 오빠. 네?”
혁진의 앞에서 찡얼거리는 동생을 보며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안 된다고 했잖아.”
“잔소리 대마왕.”
아정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발로 파도를 튕겨 내 태운에게 뿌렸다. 혁진의 상의까지 물방울이 튀겼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리는지 손으로 물을 퍼 태운에게 뿌리던 아정이 아차 하는 눈으로 동작을 멈췄다. 태운의 물 트라우마를 떠올린 것이었다.
동생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태운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얼굴로 같이 물을 퍼서 아정에게 뿌렸다. 아정은 지지 않았다. 때 아닌 두 남매의 물싸움을 구경하며 혁진은 웃었다.
평화로운 한때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그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아정은 자신 앞에 남은 시간을 꽉꽉 채워 썼다. 꿈 많은 아정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가끔은 태운을 당황스럽게 할 때도 있었지만, 태운은 그저 모든 게 기꺼울 뿐이었다. 싱그러운 봄처럼 피어난 아정은 나쁜 일은 겪어 보지 않은 것처럼 밝게 웃었다. 태운만큼이나 강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태운은.
“……형.”
아정이 물을 뿌리기 좋게 자신을 단단히 감싸 안은 혁진을 향해 태운이 말했다. 아직은 어색한 호칭이었다. 아정이 혁진에게 대뜸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정리된 호칭이었다. 어쩐지 부끄럽고 어색한 호칭이었지만 혁진은 제법 그 호칭을 마음에 들어 했다.
아정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태운에게 물을 뿌렸다. 태운을 안고 있던 혁진까지도 젖어 버렸다. 햇살에 물방울이 보석처럼 빛났다. 혁진도 태운도 아정까지도 그 물방울보다 환하게 빛났다.
정말 평화로운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