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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일상의 박물관
태운은 초조하게 시계를 보고 또 봤다. 시계를 본다고 꽉 막힌 토요일 저녁의 도로가 뚫리는 것도 아닌데 움직이는 초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혁진을 반나절 가까이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 촬영이 지연되어서 도착이 늦어질 것 같다고 미리 연락해 둔 상태였지만 이렇게 길이 막히는 것까지는 계산에 넣지 못했다.
대략적으로 도착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던 시간 또한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재촉 없이 자신을 기다리는 혁진에게 송구해서 태운은 입술이 바짝 말랐다.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운전을 하는 매니저가 “형, 무슨 일 있으세요?” 하고 물어 왔다. 태운은 아니라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 시계를 눈으로 보고 있지 않으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시간은 태운의 초조한 마음과는 달리 빠르게 흘렀고 도로에서 한참 더 시간을 버린 끝에야 혁진과 살고 있는 빌라로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가 멈추자 태운은 매니저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조금 뛴다고 늦은 게 만회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혁진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죄, 하아, 죄송합니다.”
혁진은 편한 차림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태운이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인데 정작 태운은 읽을 시간이 없어서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한 책들이었다.
언젠가부터 그 책들은 혁진의 서재에서 가장 눈에 띄고 손이 잘 닿는 곳에 정리되었고, 또 언젠가부터는 한 권씩 혁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왜 뛰어와.”
“일찍 오려고 했는데 촬영이 너무 길어져서.”
태운은 주말을 챙길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지만, 바쁜 일이 있지 않으면 주말에는 쉴 때가 많은 혁진의 스케줄에 맞춰 가끔 근교로 나가 하룻밤을 보내고 왔다. 두 사람 다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졌기 때문에 대부분 장소는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된 혁진의 사유지에 있는 별장이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을 걷고, 아무렇지 않게 햇빛이 내려쬐는 길에서 가끔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 아무렇지 않음이 좋아서 태운은 그 시간을 기다렸다.
“식사는?”
“차 안에서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언젠가 태운에게, 너에게는 나를 기다리게 만들 가치가 없다고 말했던 혁진은 자신을 반나절이나 기다리게 한 태운을 질책하는 대신에 밥은 먹었냐고 먼저 물었다. 태운은 민망하고 송구스러워서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피곤할 텐데 씻고 자.”
혁진의 말에 태운이 행동을 멈췄다. 기대하던 선물을 뺏긴 것 같은 얼굴에 혁진은 조금 웃었다.
“……피곤하지 않습니다.”
가자고 조르는 것도 아니고, 혹시 자신에게 다른 일정이 생겼을까 봐 한껏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에 혁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준비하고 나와.”
태운이 샤워하기 위해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빠르게 씻고 거실로 나오자 태운의 덜 마른 머리를 혁진이 지적했다. 태운은 어쩔 수 없이 드라이기로 머리까지 말리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운전은, 제가.”
운전석으로 향하는 혁진을 보며 태운이 사색이 되어 말했지만 혁진은 대답하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 태운이 서둘러 뛰어와 조수석에 탔다. 운전을 하는 혁진의 모습에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태운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했다.
“중간부터는 제가 운전하게 해 주세요.”
운전이 뭐라고 애원이 섞인 태운의 말에 혁진이 웃었지만 대답을 해 주지는 않았다.
차가 도로로 빠져나가고 실내 온도가 올라가자 밤샘 촬영으로 피곤했던 태운은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준 태운을 보고 혁진이 낮게 웃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에 아예 푹 자라고 혁진은 태운의 시트를 눕혔다. 그러자 청개구리처럼 태운은 눈을 부릅뜨고 졸음을 쫓겠다며 앞만 노려봤다.
“자. 왜 그러고 있어.”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잠에 잠겨 있었다. 차가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추자 혁진이 고집을 부리는 태운의 얼굴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얼굴이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덮이자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감았던 태운은 잠들기 직전, 필사적으로 속눈썹을 들어 올려 다시 눈을 떴다.
신호가 바뀌자 다시 혁진이 차를 출발시켰다. 여전히 제대로 잠이 깨지 않는 태운은 민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럼 조금만, 일어나면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태운은 민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혁진이 차 안의 온도를 조금 더 높였다. 서울을 벗어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유리에 떨어졌다가 규칙적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응시하던 태운은 결국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
차가 멈춘 느낌에 태운이 눈을 뜨자 조수석 문이 열렸다. 우산을 손에 든 혁진의 어깨가 젖어 있었다. 방울방울 떨어지던 빗줄기가 거세져 있었다. 상상해 본 적 없는 혁진의 모습에 태운은 아직 자신이 꿈에서 깨지 않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들어가서 자.”
혁진이 눈만 깜빡이고 있는 태운에게 말했다. 태운이 무의식중에 혁진에게로 손을 뻗었다. 단단한 혁진의 허리가 만져졌다. 차 밖으로 나오지 않고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은 태운의 모습에 혁진이 허리를 굽혀 태운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태운이 그제야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차 밖으로 나와 보니 차 안에서 봤을 때보다 빗줄기가 더 굵었다.
“우산 제가 들겠습니다.”
심하게 젖은 혁진을 보면서 태운이 우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혁진은 태운의 등을 감싸 안고 그대로 걸었다. 별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옷이 다 젖은 혁진과는 달리 태운은 별로 젖지 않아 있었다.
“아.”
혁진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우산을 건넸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니 그 후로도 자신을 위해 우산을 들고 옷이 젖는 혁진은 감히 상상도 해 보지 못했었다.
태운은 눈가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고 눈 위로 손을 올렸다. 요새 이렇게 자꾸 눈물이 나왔다. 걱정이 되어 찾아가 본 의사는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이 밖으로 분출되는 것이라고, 나쁘지 않은 징조라고 말했다. 하지만 혁진의 앞에서 매번 이렇게 눈물을 보이게 되는 건 난감한 일이었다.
왜 또 우냐는 말 대신에 혁진은 축축하게 젖은 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벗은 셔츠로 대충 몸에 남은 물기를 닦고 태운을 품에 안았다. 혁진의 맨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태운은 느껴지는 단단함에 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좋아합니다. 좋아해요. 할 수만 있다면 제 모든 걸 다 드리고 싶을 만큼.”
“바라지 않으니까 네 건 네가 가지고 있어.”
커지기만 할 뿐 진정되지 않는 감정에 태운은 허겁지겁 혁진의 입술을 찾았다. 혁진은 태운이 더 쉽게 키스를 할 수 있도록 턱을 숙여 줬다. 혁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춘 태운은 조심스럽게 혁진의 입술 안으로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경애가 담긴 입맞춤이었다. 태운이 조심스럽게 혁진의 목을 양팔로 안았다. 그 간지러운 키스를 받아 주던 혁진은 태운의 얇은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태운이 자신의 입안을 헤집도록 놔둔 혁진은 태운의 등을 쓰다듬는데 집중했다.
“다음 촬영일이 언제야.”
“흣, 모, 모레요.”
태운의 키스가 점점 깊어지자 태운을 살짝 떼어 낸 혁진이 물었다. 애가 탄 태운이 혁진의 어깨에 턱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어떻게든 해줬으면 좋겠는데,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 진한 키스 정도로 끝내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 정도로 몸이 약하지는 않은데. 태운은 혁진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전, 괜, 괜찮…….”
다시 태운의 입술에 입을 맞춘 혁진이 혀로 태운의 입안을 헤집으며 태운의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그 본격적인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한 태운은 그저 혁진에게 몸을 기댔다.
태운의 엉덩이를 움켜쥔 혁진은 제법 근육이 붙은 태운의 엉덩이를 주무르다가, 엉덩이 살을 벌리고 숨겨진 밀지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 움직임에 태운이 흠칫 굳었다. 하지만 이내 혁진의 목을 감싸고 완전히 매달렸다.
“읏!”
가볍지 않은 태운을 가볍게 든 혁진은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운의 등 뒤에 푹신한 침대 시트가 닿았다. 어떻게 침대까지 온 것인지 태운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태운을 침대 위로 눕혀 두고 혁진이 몸을 일으키자 태운이 조심스럽게 그를 잡았다. 하지만 태운의 머리를 쓸어 준 혁진은 다시 움직였다. 태운은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하고 눈으로 혁진을 쫓았다.
혁진은 협탁 서랍에서 콘돔과 젤을 챙겼다. 태운은 그가 좀처럼 이성을 잃는 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태운이 혁진을 당기자 혁진이 태운의 위로 올라타 태운의 입술에 키스했다. 태운이 그런 혁진의 목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혁진은 애가 닳은 태운을 달래며 태운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태운은 혼자 참고 견뎌야 했을 때보다 쾌락의 역치가 낮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희 없이 한 번에 들어와 줬으면 좋겠는데 요즘 혁진은 태운이 진저리를 칠만큼 전희가 길었다.
“하아, 저 좀 어떻게 해주, 읏.”
결국 침대 위에서 말이 별로 많은 편이 아닌 태운이 눈가가 붉어져 애원할 정도가 되어서야 혁진은 단단해진 자신의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뭐든 도우려고 태운이 손이 허공으로 올라왔지만 혁진은 그 손을 잡아 자신의 어깨를 쥐게 했다.
“……형.”
혁진이 크게 애를 태운 것도 아닌데 혼자 애가 닳은 태운이 잘 하지도 않는 말을 했다. 혁진이 픽하고 웃으며 태운의 허리 밑으로 베개를 넣어 줬다.
그리고 태운의 양 발목을 잡고 양쪽으로 벌리며 한 번에 쭉 밀고 들어왔다. 안쪽 근육이 노곤할 정도로 풀려 있는 상황이라 삽입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아, 아으.”
태운이 말이 되지 못하는 소리를 계속 내뱉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목에 걸려 계속 말이 단어로만 나왔다. 더 빠르게 움직여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안쪽으로 끝까지 들어와 줬으면 좋겠는데, 혁진은 태운의 안쪽이 완전히 적응하기를 기다리며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태운이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 근육을 바짝 조이며 혁진의 움직임을 보챘다. 혁진이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를 높였다.
“아, 아아.”
태운은 혁진이 들어오기 쉽도록 다리를 조금 더 벌렸다. 그러자 혁진이 태운이 좋아하는 깊은 곳을 한 번에 찾아 쳐올렸다. 태운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침대 시트에 파묻혔다. 흣, 흣, 하는 뜨거운 숨이 태운의 입술 사이에서 내뱉어졌다.
입술을 깨물며 비참함도, 고통스런 신음도 삼키지 않게 된 것은 꽤 오래전 일이었다. 더 이상 비참하지 않았고 혁진은 태운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태운이 고통받는 것을 경계했다.
뇌에 직격하는 것 같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쾌락에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뜨면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혁진과 눈이 마주쳤다.
천천히 혁진이 몸을 숙여 태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좋아, 좋아해요.”
더 이상 깊게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했던 혁진의 성기가 태운의 더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태운이 파들파들 떨었다. 그런 태운의 성기를 혁진이 쥐었다. 그리고 빠르게 쳐올리기 시작하자 태운이 다시 눈을 꾹 감았다.
몸에 열이 오르고 감은 눈앞에 빛이 튀었다. 양쪽으로 느껴지는 자극에 머리를 시트에 비볐다. 좋았다.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흥분한 태운의 몸에 힘이 들어가 안쪽을 쥐어짤 듯 조였다. 혁진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그리고 다시 안쪽에 길을 내듯 움직이며 태운의 앞쪽을 애무하는 데 집중했다.
“아, 으으…….”
참을 수 없는 쾌락에 태운이 몸을 떨었다. 배가 당기고 사정감이 올라왔다. 태운의 성기가 완전히 단단하게 발기하자 혁진이 노골적으로 태운의 요도구 주변을 문질렀다. 태운이 시트를 말아 쥐며 사정감을 버텼다.
“하아, 나올 것 같아요.”
“왜 참고 있어.”
사정을 하고 나면 몸에 탈력감이 생겨 그때부터는 정말 혁진에 의해 몸이 휘둘리기만 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혁진과 비슷하게 사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는다고 참아지는 감각이 아니었다.
“아, 아!”
태운의 성기에서 하얀 탁액이 떨어졌고, 혁진이 손으로 문지르며 사정을 도왔다. 정액이 혁진의 배에도 태운의 배에도 튀었다. 태운이 가늘게 눈을 떴고 다시 혁진과 눈이 마주치자 혁진이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를 다시 높였다.
사정할 때의 혁진의 얼굴이 좋았다.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표정이 없는 남자였지만 그래도 침대 위에서는 조금 풀어진 얼굴을 했다. 그리고 사정을 앞두고는 더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그 얼굴이 보고 싶어서 탈력감에 제대로 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태운이 애써 힘을 주어 혁진의 사정을 도왔다.
“이태운.”
“읏, 네, 네…….”
“사랑해.”
“아아…….”
예상치 못한 혁진의 말에 태운이 허리를 흔들며 혁진의 사정을 보챘다.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하얗게 재가 된다고 하더라도 전혀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주체가 되지 않았다.
삶이 달았다. 너무 달아서 이대로 녹아 없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혁진이 태운의 안에 길게 사정했고 태운은 혁진의 목을 끌어당겨 다시 깊은 키스를 시작했다.
* * *
“더 자.”
태운이 눈을 뜨자 혁진이 작게 말했다. 편안한 상황에 다시 눈을 감으려던 태운은 잠의 경계에서 겨우 눈에 힘을 주었다. 혁진이 있었고 창밖에는 해가 쨍하고 떠 있었다. 혁진은 운동을 하고 샤워까지 마친 것인지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차림이었다.
침대는 잠을 자는 장소로만 이용하고, 한번 잠에서 깨면 다시 잠을 자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아 꼭 기계처럼 보였던 혁진이다. 그런 그가 다시 침대에 누워 자신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일들이 익숙해진 게 신기했다.
“……운동하셨어요?”
“아침에.”
혁진의 말에 태운이 급하게 시계를 찾았다. 낮 열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제일 신기한 것은 이 시간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잔 자신이었다.
“깨우시죠.”
“자는 걸 왜.”
오랜만에 온전하게 같이 보내는 시간이었는데 잠으로 낭비하는 것이 아까웠다. 그래도 오래 잔 탓인지 몸이 개운했다. 태운이 몸을 일으켰다.
“식사는.”
“아침은 먹었고, 점심은 같이하지.”
“제가 준비할게요.”
태운이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이미 주방에는 덜기만 하면 되는 음식들이 보온 용기에 담겨 배달되어 있었다. 태운이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혁진이 그런 태운을 낚아채 식탁 의자에 앉혔다.
“몸은.”
“괜찮습니다.”
근육이 조금 뭉친 곳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좋았다. 밤에 혁진에게 씻겨질 때 보니 몸에 자국이 남은 곳도 없었다. 음식을 그릇에 더는 혁진의 움직임은 능숙했다. 하지만 태운은 그런 움직임이 가끔 민망하고 어색해서 넋을 놓고 보게 될 때가 있었다.
“먹어.”
혁진이 식탁에 앉았다. 음식들은 갓 만든 것처럼 온기가 유지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를 맡자 허기가 졌다. 태운은 혁진이 수저를 들자 그 후에 수저를 들었다.
“아침에 운동 같이하고 싶어요.”
“몸 안 좋을 때는 무리하지 마.”
“그래도.”
벌써 하루에 절반이 지나 있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냥 이렇게 하루를 또 보내는 게 아쉬웠다.
“그럼 밥 먹고 같이해.”
“아니요, 그게 아니라.”
운동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태운은 그것을 혁진에게 잘 말할 자신이 없었다. 변덕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태운의 말에도 혁진은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혁진의 시선은 어느새 멈춰 있는 태운의 젓가락에 닿았다.
“우선 먹어.”
태운이 난감하게 웃으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냥 이 시간들이 다 좋았다. 혁진과 이렇게 보내는 시간들이 편안하고, 또 이런 시간들이 지나는 것이 아쉬워서 신기하기도 하고, 또 어쩐지 가슴 한쪽이 묵직해지기도 했다.
밥을 먹고서는 근처를 혁진과 함께 걸었다. 한 걸음 뒤에서 걸어오는 태운을 혁진이 당겨 안았다. 태운이 가볍게 끌려오자 혁진이 태운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맞췄다. 태운이 익숙하게 혁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 * *
“오늘 저녁에 사장님이랑 감독님이랑 식사하시기로 하셨어요. 사장님이 감독님이랑 완전히 담판 지어 버리신대요.”
“말씀드리지 말라니까.”
태운의 말에 어린 매니저가 분개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팡팡 치며 답답해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온 데에는 분명히 형 책임도 있어요. 계속 괜찮다, 괜찮다 이해해 주니까 사람들이 형이 정말 괜찮은가 보다 하는 거 아니에요.”
처음에는 여느 영화와 다름없는 준비 과정이었다. 제작진과의 미팅도 전에 연락처를 어떻게 안 것인지, 같이 출연하기로 한 배우가 먼저 연락해 왔다.
그렇게 연락해 온 현성은 좋은 선배를 자처하며 태운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몇 번 술자리도 같이 했었다. 그에 태운은 꽤 괜찮은 촬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현성은 대본 리딩 이후 완전히 변해 버렸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검사 역인 태운과, 뺀질뺀질하고 자유로운 영혼인 사기꾼 역인 현성이 대립하고 협력하며 거대한 주식 사기 음모를 꾸미고 있는 일당을 추적하고 그들의 사기를 막는다. 그것이 영화의 줄거리였다. 둘 다 연기 경력이 탄탄했고 역량 있는 배우들이었기에 감독은 둘 사이의 합을 기대하고 있었다.
둘 다 겹치는 부분이 없게 매력이 있는 캐릭터였는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태운의 존재감에 현성이 먹혀 버렸다. 현성은 겨우 감초 역할 정도로 전락해 버려 감독의 골치를 아프게 했다.
게다가 연기에서 밀려 제대로 자존심이 상한 현성은 그 후로부터 노골적으로 카메라 밖에서 태운을 적대하기 시작했다. 현성 혼자 화를 내고 태운은 난감해하는 것이긴 했지만.
“벌써 몇 시간째예요 정말. 들어 보니까 찍을 때마다 더 나아지는 것도 없다던데. 연출부 애들이 윤현성 노망난 거 아니냐고 그래요. 이거 진짜 형 엿 먹이겠다고 작정하고 저러는 거잖아요. 평소에는 다른 촬영 간다고 쌩하니 사라지더니.”
현성은 평소에도 사사건건 태운에게 시비를 걸었지만 태운은 전혀 타격받지 않았는데, 최근 며칠은 정말 심했다. 촬영이 계속 지연되어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귀가 시간 또한 늦어지다 보니 태운도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정말 사소한 일이었다. 완전히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던 현성이 NG를 수십 번 내는 바람에 본인의 촬영 시간에 맞춰 촬영장에 도착한 태운도 세 시간 가까이 대기를 했었다. 그렇게 겨우 촬영을 끝낸 현성은 그대로 휑하고 사라졌다.
바로 뒤에 촬영에 들어간 태운은 큰 NG 없이 씬을 하나씩 지워 나갔지만 현성 때문에 촬영이 너무 많이 지체된 터라 감독도 스태프들도 지친 상태였다.
그렇기에 감독은 태운이 찍은 그날 마지막 씬이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썩 나쁘지는 않아서 약간 아쉬운 마음으로 촬영 종료를 선언했었다. 하지만 뭔가 찝찝했던 태운이 딱 한 번만 더 촬영하게 해달라고 감독에게 부탁했었고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씬이 탄생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현성은 어디선가 이야기를 듣고 그 후로는 별로 나쁘지 않은 씬도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계속해서 한 번만 더 찍게 해달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감독이 그 정도면 괜찮다고 말해도 왜 이태운은 허락해 줬으면서 본인은 안 되냐고 어린애처럼 떼를 썼다.
게다가 본인이 태운보다 선배라는 이유로 본인의 스케줄에 촬영 스케줄이 맞춰지길 바랐다. 그러다 보니 태운의 촬영이 현성의 뒤로 밀렸는데, 현성이 이런 식으로 고의로 촬영을 지연시키면 계속 대기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형 약속 있으신 거 아니에요?”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태운을 보며 매니저가 물었다. 따로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지연되는 스케줄이 난감하기는 했다.
일부러 촬영 종료 시간을 더 넉넉하게 말했지만 그 시간마저도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혁진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꼭 거짓말쟁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스케줄을 가기 전날 아침에 태운은 보통 혁진에게 언제쯤 집에서 나가는지, 어디서 촬영하는지, 촬영이 언제쯤 시작하고 끝나는지, 언제쯤 다시 집에 도착하는지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종종 새벽에 일어나 혁진과 같이 운동을 할 때면 어떤 씬을 촬영하는지까지 주절주절 이야기하기도 했다. 가끔 혁진이 자신의 대본을 읽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대본에 흥미를 가지는 것 같아 시작한 일이었는데 태운의 이야기를 혁진은 가만히 들어 주었다.
보통 때에는 그 스케줄이 대부분 비슷했다. 하지만 현성이 아예 대놓고 훼방을 놓기 시작하자 집에 도착하는 시간에 대중이 없어졌다. 늦을 것 같다고 먼저 주무시라고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내놓은 날도, 늦게 집에 돌아가면 밤중이나 새벽녘에 침실에 있는 미니바에서 혁진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가 있어 태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약속은 아니야.”
태운이 다시 한 번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아무 메시지도 알림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전화를 걸면 혁진이 바로 받을 것이고 메시지를 보내면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전화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오늘도 늦을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잠깐 나가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확인하고 올게요.”
태운이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매니저가 눈치껏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태운은 망설이던 손으로 키패드에 익숙하게 외운 번호를 찍었다. 신호는 얼마 울리지 않았고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운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꽉 줬다.
―오늘도 늦어?
“네. 촬영이 조금 지연되고 있어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운이 빠진 목소리였다. 겨우 이런 일로 타격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황이 다소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먹었지. 넌.
혁진은 태운의 많은 것들을 궁금해했지만 태운은 아직도 이런 물음들이 어색했다. 혁진에게 질문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요……. 왜 아직도 안 주무세요.”
―촬영은 언제쯤 시작될 것 같은데.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알았어.
전화가 그렇게 끊겨 버렸다. 태운은 핸드폰을 들고 잠시 가만히 멈춰 있었다. 드문드문 대화가 오가긴 했지만 이렇게 전화가 끊겨 버린 적은 최근에는 없었다.
자꾸만 촬영이 지연되어 혁진이 짜증스러운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다. 촬영 따위는 접어 버리고 집에 들어오라고 할 혁진이 이제는 아님을 알지만 차라리 그렇게 말을 해 줬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진짜 또라이도 아니고 씬 두 개 찍어 놓고 힘들다고 쉰다고 했대요……. 어, 형 무슨 일 있으세요?”
귀신같이 다른 사람이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만큼 미미하게 굳어진 태운의 표정을 읽어 낸 매니저가 물었다. 하지만 태운은 고개를 젓고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태운이 대답을 하지 않자 매니저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감독의 눈앞에 신경 쓰이라고 얼쩡거릴 생각으로 대기실을 나갔다.
태운은 계속 눈으로는 대본을 읽었지만 글자가 조각조각 분해된 것처럼 내용이 이해되지 않았다. 빨리 촬영에 들어가 어서 끝내고 집에 가고 싶었지만 오늘따라 현성은 더 시간을 끌고 있었다.
현성의 촬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대본에도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그냥 소파에 길게 늘어져 있는데 잘 울리지 않는 태운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깜짝 놀라 액정을 확인하자 혁진이었다.
“네.”
―나와. 주차장 쪽이야.
“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발은 대기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촬영장 뒤쪽에 주차장으로 쓰는 빈 공터가 있었는데 우선 그쪽으로 태운의 발이 움직였다. 핸드폰을 계속 귀에 붙이고 있었지만 태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공터에서 유일하게 헤드라이트가 켜진 차가 눈에 들어왔다. 태운도 종종 보는 혁진의 차였다. 출퇴근용으로 이용되는 차는 아니었고, 거의 주말에 혁진이 태운과 함께 움직일 때 운전하는 조금 가벼운 디자인의 차였다.
태운의 다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숨이 거칠어질 정도로 뛰었다. 수많은 스태프들의 차와 촬영용 차들이 빽빽하게 주차되어 있어 혁진의 차까지 가는 거리가 제법 멀었다.
하지만 단숨에 차까지 뛰어간 태운은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차 안으로 정말로 보고 싶었던 혁진의 얼굴이 보였다.
태운이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화장한 얼굴을 보이는 게 어쩐지 민망해서 대충이라도 지우고 올 것을……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 버린 생각이었다.
“여긴 어떻게.”
“일단 타.”
태운이 서둘러 차 안에 타 문을 닫았다. 정말 혁진이었다. 혹시 자신이 대기실에서 잠든 것은 아닌지 말이 되지 않는 상상을 했다. 혁진을 여기까지 오게 할 만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간에 혁진이 촬영장에 찾아올 만큼 큰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나한테?”
태운의 말에 혁진이 낮게 웃었다. 태운은 의미를 알 수 없어 난감하게 혁진을 따라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혁진을 곤란하게 할 만한 일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일은 너한테 있는 것 같은데.”
“전 아무 일도…….”
정말 별다른 일이 없었다. 생각나는 건 현성의 일이었지만 그건 그냥 조금 난감하고 불편할 뿐이었다. 혁진이 신경 쓸 만큼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기운 없고. 피곤하고. 자꾸 내 눈치만 보고.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내가 몰랐으면 하는 문제인 거야, 아니면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거야?”
태운이 입술을 달싹였다. 난감하고 민망하고, 그러면서도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어쩐지 들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로 별일 아니라.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 다 뒤집어엎어 버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면 빠르게 해결해야 할 거야.”
혁진이 손을 뻗어 태운의 볼을 쓸면서 말했다. 태운이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여길 뒤집어엎으시겠다고요?”
태운이 난감하게 물었다. 혁진과 그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촬영장을 뒤집어엎는 혁진의 모습은 정말로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왜 내가 못할 것 같아?”
“안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현명한 대답에 혁진이 태운의 등을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까지 태운이 딸려 오자 혁진은 그런 태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태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거세게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태운은 콘솔박스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손을 혁진이 꽉 쥐어 왔다.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습니다. 그냥 조금 난감한 일인데…….”
말을 하다가 너무 어리광스러운 말투가 아닌가 싶어서 괜스레 민망해졌다.
“신경 쓰실 만큼 곤란한 일은 아닙니다.”
태운의 말에 혁진은 대답이 없었다. 믿겠다는 의미인지 조금 더 지켜보다가 해결되지 않는 것 같으면 정말 촬영장을 뒤집어엎어 버릴 생각인지 태운은 알 수 없었다.
“촬영은 언제쯤 끝나?”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어요.”
“같이 올라가자.”
태운이 잠깐 눈을 깜빡였다. 여기서 기다리겠다는 의미일까. 자동차 내부는 꽤 넓었지만 혁진이 시간을 보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좁았다. 대기실로 안내할까 했지만 누군가에게 보인다면 문제가 커질 것이었다.
종종 신문 일 면에 얼굴이 등장하기도 하는 혁진은 일반 대중에게도 얼굴이 익숙했다. 감히 촬영장에 있는 혁진의 모습을 지면에 싣는 신문사는 없겠지만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셔도.”
“빨리 끝내고 와.”
혁진이 그렇게 말하자 태운도 더는 권유하지 못했다.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갑작스럽게 혁진을 마주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걱정된다고 혁진이 먼 길을 와 주었기 때문일까. 심장이 울렁울렁한 기분이 들어서, 태운은 평소보다 몇 배는 들떠서 혁진에게 촬영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혁진 또한 평소보다 가벼운 얼굴로 그런 태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주었다. 마주 잡은 손은 떨어질 줄 몰랐고 밤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오겠습니다.”
촬영이 곧 시작될 것 같다고 어디계시냐는 매니저의 전화를 받은 태운이 혁진에게 다짐을 하듯 말했다. 혁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지만 태운은 혁진을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는 태운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촬영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 그냥 혁진과 집에 가고 싶었다.
태운이 택한 방법은 정면 돌파였다. 가장 태운다운 방법이었다. 두 시간이 넘는 촬영 동안 태운은 한 번도 NG를 내지 않았다. 감독을 재촉해 장면 사이에 쉬는 시간을 줄이고 씬마다 호흡까지 길게 했는데 현성이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현성은 정신없이 태운에게 휘둘렸다. 깽판을 치려 해도 그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평소라면 몇 번이고 끊어 갔을 현성도 어느 순간부터는 자존심으로 버텼다.
안 그래도 자꾸만 태운에게 밀리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는데, 태운과 이렇게 붙는 씬에서 완전히 눌려 버리면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을 것만 같다는 자격지심이 이유였다.
촬영이 빠르게 진행되는데 감독이 반기지 않을 리 없었다. 지금까지 현성에게 쌓인 것이 태운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았던 감독은 태운의 의도를 읽고 평소보다 촬영의 스퍼트를 올렸다.
“컷! 오케이!”
“씨발.”
현성이 태운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태운의 귀에는 들렸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였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을 겪어 본 적 없는 태운은 그냥 현성에게 묵례를 하고 카메라 앞에서 벗어났다. 그 대처에 현성의 기분은 더 나빠졌다.
“좆같은 새끼, 시발 내가 가만 두나 봐.”
대기실에 들어가 소파와 테이블을 차며 화풀이를 시작했다. 익숙한 일인 듯 현성의 매니저는 밖의 인기척을 살피며 그런 현성을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차 타고 가. 난 데리러 오신 분이 계셔서.”
“엄청 적극적인 여자분이신가 봐요.”
촬영 때가 아니면 대기실에서 잘 나가지 않는 태운이 한참이나 사라졌다가 촬영 시간에 맞춰 간신히 돌아온 데다가 평소와는 다른 귀가 방식에 분명히 연애라고 생각한 매니저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아예 틀린 예측은 아니라 클렌징 티슈로 화장을 지우는 중이던 태운은 난감하게 웃고 말았다.
대충 화장만 지운 태운은 다 안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매니저를 두고 혁진이 기다리고 있는 차에 올라탔다.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혁진과 함께 차에 탈 때마다 하는 말이었지만 운전대를 넘겨받은 적은 몇 번 없었다. 업무용 탭을 확인하던 혁진은 잠깐 웃다가 시동을 걸었다.
“운전하는 거 좋아하나.”
태운이 잠시 눈의 깜빡임을 잊었다. 뭔가 대화가 어긋난 기분이었다.
“생각해 본 적 없, 아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집에서 촬영장으로, 촬영장에서 집으로 이동할 때는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량을 탔고, 혁진과 움직일 때는 항상 혁진이 운전하는 차를 탔다.
가끔 아정과 움직이거나 혼자 움직여야 할 일이 있을 때 직접 운전하기도 했지만 그냥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할 뿐이지 차에 관심이 있거나 운전하는 게 재미있다거나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해야 운전대를 넘겨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이상한 말이 되어 버렸는데. 혁진이 피식 웃으며 “벨트.” 하고 말했다. 혁진을 이길 수 없어 안전벨트를 매면서도 태운은 어쩐지 미련 가득한 얼굴을 했다.
“눈 좀 붙이고 있어.”
“피곤하지 않습니다. 제가 운전할게요.”
고집스런 태운의 말에 혁진은 대답하지 않고 태운의 시트를 내려 버렸다. 태운은 다시 시트를 올리지도 못하고 난감한 얼굴을 했다.
“바로 출근하셔야 하잖아요.”
“하룻밤 정도는 괜찮아.”
혁진의 눈치를 살피며 태운이 조심스럽게 시트를 세웠다. 운전을 하던 혁진이 다시 웃었다.
혁진은 운전대를 넘길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창밖은 점점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차가 멈춰지는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태운은 밤을 샌 탓인지 점점 졸음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이대로는 정말 운전하는 혁진의 옆에서 잠들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태운은 주절주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촬영을 마치고 혁진과 함께 귀가하는 비일상적인 상황에 태운은 평소보다 들뜬 상태인데다가 졸음기까지 섞여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 많아졌다. 혁진은 간간이 태운의 말에 대꾸를 해 주며 웃었다.
집에 도착해서 혁진은 출근 준비를 위하여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이제 혁진이 출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쉬워 조심조심 혁진의 뒤를 따라 움직이던 태운이 욕실까지 들어갔다.
뒤늦게야 아차 한 태운은 욕실을 벗어나려 했지만 혁진에게 잡혀 샤워를 당했다.
함께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 혁진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는데 태운이 또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혁진은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지는 않는데 뒤를 따라다니는 태운에게 정장과 넥타이, 그리고 넥타이핀과 시계, 커프스단추까지 고르게 했다. 그리고 태운이 고른 걸 고민도 없이 착용했다.
태운은 자신의 선택대로 착장한 혁진의 모습에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 민망한 얼굴을 했다. 혁진은 그런 태운의 턱을 잡고 입술을 맞췄다.
“왜 이렇게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녀.”
집에 돌아와서 계속 혁진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것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라 태운은 민망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혁진이 발걸음을 옮겼다. 태운이 그 뒤를 다시 조심스럽게 따랐다. 현관으로 나갈 줄 알았던 혁진은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누워.”
“가시는 것만 보고…….”
“진짜 강아지면 집어 들고 움직일 수라도 있지.”
태운이 난감한 마음에 눈썹을 긁적였다. 하지만 혁진은 정말 태운을 눕혀 놓고 출근할 생각인지 움직임이 없었다. 태운이 결국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리모컨을 들어 커다란 창에 암막 커튼을 친 혁진이 말했다.
“급한 일만 처리해 놓고 올게. 자고 있어.”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누워서 배웅하는 것이 민망해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태운을 일어나지 못하게 한 혁진이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어둠이 가득 찼다. 태운은 무언가 허전해진 기분이 들었다.
태운은 시트를 머리끝까지 덮었다. 느껴지는 혁진의 체취에 뺨이 살짝 붉어진 태운은 눈을 감았다. 밤을 샌 탓에 참았던 피로가 몰려왔다. 밤을 샌 것은 혁진도 마찬가진데 혼자 이렇게 누워 있는 게 면구스러웠다. 하지만 피로를 이길 수는 없었다. 잠이 쏟아졌고 태운은 결국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오래 잔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창을 완전히 가린 암막 커튼 때문에 시간이 가늠이 되지 않아, 태운은 우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협탁 위에서 리모컨을 찾아 커튼을 걷으니 아직도 날이 밝았다.
기지개를 쭉 켠 태운이 운동을 할 생각으로 방을 나섰다. 하지만 곧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언제 오셨어요?”
“좀 됐지.”
혁진을 따라 주방으로 가니 혁진이 준비한 것인지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퇴근해서 식사를 준비하고 끼니도 거르고 자는 자신을 깨우려고 했던 것 같아 태운의 뺨이 붉어졌다.
“오신 줄 모르고 운동하려고 했었어요.”
“점심 먹고 같이해.”
시계를 확인하니 두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조금 늦은 점심이었다.
“조금 주무셔야 하지 않으실까요? 밤에 못 주무셨는데.”
“너 체력이 너무 약해.”
갑작스러운 혁진의 지적에 태운이 또 애매하게 웃었다. 체력이 그렇게까지 나쁜 편은 아닌데. 하룻밤을 새고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 혁진이 조금 이상한 것이었다.
“저 운동 안 하고 다시 누워 있어도 괜찮을까요?”
“마음대로 해.”
이왕 체력을 지적받은 김에 혁진을 조금 쉬게 하고 싶은 마음에 낸 꾀였다. 하지만 그 얕은꾀를 눈치채지 못할 혁진이 아니었다. 혁진의 얼굴에는 잔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이제는 사장 형이라고 불러야 할 매니저 형이 감독을 만나 어떻게 담판을 지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로지 현성만의 편의를 위해 꼬였던 스케줄도 다시 조정됐다.
원래도 드라마보다는 영화 촬영 스케줄이 많이 널널한 편이었지만, 스케줄이 조정되자 촬영 중임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혁진이 출근하는 모습을 배웅하고 혁진이 퇴근하는 모습을 현관에서 맞을 수도 있었다.
현성은 태운을 볼 때마다 노골적으로 짜증을 냈지만 태운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게 현성의 짜증을 더 불러일으켰지만 그럴수록 촬영장에서 현성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렇게 며칠 잠잠하다 싶더니 현성의 패악이 다시 시작되었다. 액션 씬이 예정되어 있어서 촬영 전에 합을 맞춰 봐야 하는데 현성이 콜 시간보다 늦었다.
삼십 분 정도 기다리다가 태운은 현성 대신에 스턴트맨이랑 연습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연습이 끝났는데도 현성이 도착하지 않자 다른 씬의 개인 촬영을 먼저 시작해야 했다.
태운의 개인 촬영이 끝나갈 때쯤에야 겨우 도착한 현성은 태운의 촬영이 먼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리며 대기실로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죄송해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진행팀에서 현성 배우님 모시러 갔는데 조금 늦으시나 봐요.”
태운의 개인 촬영이 마무리되고 함께 찍는 장면을 준비하기 위해 진행팀이 계속 오가고 있었으나 현성은 자신도 개인 촬영을 먼저 해야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태운도 배우 경력이 짧지는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기 싸움을 걸어오는 배우는 처음이라 난감할 뿐이었다.
“후.”
태운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감독이 짜증스럽게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질겅질겅 씹다가 현성의 대기실에서 돌아온 연출팀의 속삭임에 한숨을 내뱉었다. 감독의 귀에 대고 속삭인 연출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감독의 한숨 소리는 태운의 귓가에까지 들렸다.
태운은 이렇게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 현성의 고집대로 개인 촬영 먼저 하고 그 후 함께 찍어야 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어.”
하지만 감독과의 담판 이후 가끔 촬영장을 방문하고 있는 소속사 대표가 태운의 표정만 봐도 생각이 예상되는지 태운을 막았다. 이런 식의 의미 없는 기 싸움에 태운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자.”
대표가 일부러 스태프들에게 보여 주려는 듯 담뱃갑을 손에 쥐고 움직였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태운은 그냥 뒤를 따라 움직였다.
“필래?”
“괜찮아요.”
“끊었냐? 요즘 피우는 걸 못 본 거 같다.”
“가끔은 펴요.”
예전에도 너무 답답하거나 힘들어서 견딜 수 없어질 것 같을 때 주로 피웠었다. 요즘은 그렇게까지 담배가 피우고 싶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혁진이 담배를 피울 때 그 모습이 자꾸만 눈이 가서 가만히 보고 있다 보면 혁진이 입에 담배를 물려 주곤 했다. 그때 잠깐씩 담배를 입에 물 뿐 평소에는 별로 생각나지 않았다.
담배 생각이 없다는 태운과 멀찍이 떨어져 고개까지 돌리고 선 대표가 담배에 대충 불을 붙이고 말을 시작했다.
“네 호의에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한테 호의를 베푸는 건 착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야.”
그냥 귀찮을 일을 피하기 위해 했던 행동일 뿐, 호의를 가지고 했던 행동은 아니라 태운은 애매하게 웃었다.
“촬영 아직 반도 안 했는데 벌써 호구 잡히면 끝날 때까지 호구 확정이야. 주환이 단단히 일러 뒀으니까 넌 방해만 하지 말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을 다 끝낸 건지 몇 번 연기를 내뿜던 대표가 담배를 눌러 껐다.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연기만 하고 싶은 건데 그게 어렵다.
그러다 문득 혁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길 다 뒤집어엎는다고 하셨는데 혁진이라면 대체 어떤 식으로 이 상황을 정리했을까……. 궁리해 봤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신, 태운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대표와 함께 걸어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현성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서 있었다.
“선배를 대체 몇 번이나 기다리게 하는 거야?”
담배를 피우고 온 시간은 겨우 십 분 남짓. 오늘 두 시간 넘게 기다린 태운에게 현성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현성은 뻔뻔했다. 이쯤 되면 자존심 문제였다. 태운이 한 번만 더 숙이고 들어오면 못 이기는 척 촬영을 할 생각이었지만 태운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태운 배우님 계속 기다리시다가 잠깐 흡연하고 오신 거세요.”
“부장님은 자꾸 누구 편을 드시는 거예요?”
“아이고 우리 다 같은 편이지 여기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습니까.”
대표의 얼굴이 굳으면서 직접 나서려고 하는 것을 제작부장이 막았다. 제작부장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현성을 현성의 매니저가 잡았다.
현성은 그대로 매니저에게 끌려가는 듯 했으나 스태프들이 뒤에서 “또 왜 저래?” 하는 이야기가 귀에 들려오자 이번에는 스태프들에게 달려들었다. 엉망진창이었다.
결국 감독까지 나서고 나서야 소란은 겨우 마무리됐다. 액션 씬은 위험도가 높아서 몇 번이고 배우들끼리 합을 맞춰 보고 촬영을 시작하는 편인데 이미 빈정이 상할 대로 상한 현성은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조직에게 회유당한 현성이 검거를 위한 몸싸움 과정에서 태운을 각목으로 내려치며 조직의 간부를 빼돌리려고 하는 장면이었다. 촬영용으로 제작된 각목이라 쉽게 부서져서, 합이 잘 맞지 않는다 해도 부상 위험이 크지는 않았다.
감독은 현성을 잠시 노려보다가 더 이상의 지연 없이 촬영 시작을 지시했다.
하지만 촬영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다. 태운은 당장이라도 카메라 앞으로 뛰어들 모양새를 하고 있는 대표와 주환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타격은 없었다.
“미안, 미안. 입이 아직 제대로 안 풀렸나 보다.”
현성은 실수인 것처럼 이야기 했지만 분위기는 싸늘했다. 대본대로 태운을 내려친 것까진 문제가 없었으나, 현성은 이어서 해야 할 대사를 계속 실수했다. 심증은 충분하나 물증은 없었다. 그렇기에 감독은 현성에게 주의를 주고 찜찜한 마음으로 촬영을 재개했다.
그리고 사고가 생겼다.
“태운아!”
현성이 휘두른 각목의 모서리 부분이 태운의 이마를 때리고 부러졌다. 카메라가 꺼지지 않았는데도 대표가 카메라 앞으로 들어왔다. 태운이 아, 하고 이마를 짚자 손을 타고 피가 흘렀다. 대표의 뒤로 감독과 스태프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 * *
피가 조금 나다가 멈췄을 뿐 엄청나게 아프거나 어지럽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람들이 태운을 병원으로 옮기고 각종 검사를 받게 하고 그 후에는 병실에 눕혔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지만 태운의 의사는 가볍게 무시당했다.
태운은 뇌진탕이 올 수도 있다고 침대에 누워만 있으라는 대표와 매니저를, 가만히 누워 있겠다고 맹세까지 한 후에야 겨우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무료해 잠깐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눈앞에 혁진이 보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싶어서 눈을 깜빡였지만 혁진이 사라지지 않았다.
“별일이 아냐? 해결할 수 있어?”
“그게.”
태운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렇게 분노를 터뜨리는 혁진은 처음이었다. 혁진의 눈에 불꽃이 확 튀었다.
이렇게 화를 내는 사람이구나……. 당황한 와중에도 태운은 생각했다. 지금까지 싸늘하게 태운을 쳐냈던 목소리에는 전혀 분노가 섞여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태운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상황에 별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나 잘 해결했기에 얼굴을 이 꼴을 만들어 와?”
“그게.”
“말 똑바로 못해?”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혁진의 분노에 짓눌려 입술만 달싹여질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고였습니다.”
“사고? 사사건건 시비 걸고 부딪쳤던 새끼가 각목으로 얼굴을 찢어 놨는데 사고라고?”
혁진의 어투가 태운은 들어 본 적 없을 정도로 거칠었다. 대체 그걸 다 어떻게 아는 건지 태운은 말문이 막혔다.
정말 별일이 아니었다. 아프지도 않았고. 혹시나 받은 검사 결과에서도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당장이라도 퇴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혁진을 이렇게 병실까지 오게 할 만큼 큰일이 절대 아니었다.
“밴드에도 가려질 만큼 작은 상처입니다.”
태운은 무의식중에 상처 부위를 만졌는데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거울로 확인했을 때는 작은 상처였는데 붕대를 감고 있어 혁진이 더 크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어 민망해졌다.
그런 태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혁진이 태운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상처 위에 붙여 둔 거즈까지 떼어 내 꿰맨 자국을 확인하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하지만 꽤 깊은 상처였다. 혁진은 의사를 호출했다.
“이게?”
태운의 턱밑이 바르르 떨렸다. 혁진의 이런 비꼬는 것 같은 목소리는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태운이 당황해서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데 아정의 병실에서 뵌 적이 있어 이미 안면이 있는, 나이가 지긋한 의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혁진은 의사에게 다시 태운의 상처를 소독한 후 거즈를 붙이게 했다. 의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혁진의 화를 풀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드레싱을 마친 의사가 나가고 나서 태운은 우선 혁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혁진의 손은 태운의 손을 그냥 지나쳐 핸드폰을 집었다.
태운의 손은 허공에 머물렀고 태운의 손과 엇갈린 혁진의 손은 어디론가 거칠게 전화를 걸었다. 태운은 벌을 받는 아이처럼 우두커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태운 촬영 중인 영화 엎어버려. 이태운 얼굴 찢은 새끼는 아예 매장시켜 버리고. 촬영 수뇌부들도 다시는 업계에 발 못 붙이게 만들어.”
그러나 혁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혁진의 옷자락을 잡고 고개만 흔들었다.
“왜 내가 못 할 것 같았어?”
“제발, 잘못했어요.”
태운이 혁진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혁진은 빈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혁진의 화를 풀 수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형.”
태운이 더듬더듬 혁진의 손을 찾아 쥐었다. 혁진은 이번에는 손을 놓지 않았다. 태운은 그런 손을 붙잡고 몇 번이나 손등에 입술을 맞추고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러자 혁진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얼굴을 이렇게 만든 사람의 변명까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은 잘못 없어요. 모두 최선을 다했습니다. 차라리 저를 혼내 주세요.”
“혼내?”
혁진이 어이가 없어서 물었지만 눈을 내리감은 태운은 감내하듯 얌전하게 대답했다.
“네.”
“어린애도 아니고 혼나겠다고?”
“네, 네.”
태운이 품에 안겨 올 때부터 머리끝까지 치솟던 혁진의 화는 가라앉은 상태였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대답하는 태운의 꼴을 보자 이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누워.”
“하지만…….”
“내 말 잘 들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싸늘한 듯 다정한 의미를 담고 있는 혁진의 말에 태운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그런 태운의 위로 이불을 덮는 혁진의 손길은 다정했다.
“자.”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태운은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촬영 계속하고 싶어요.”
조심스럽게 말하는 태운의 말에 혁진은 대답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 태운이 혁진의 손을 잡아당겼다. 애교를 부리는 것도 아닌, 그저 긴장한 손길에 혁진은 침대 위로 걸터앉았다.
태운이 어설프게 잡고만 있는 자신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대로 태운의 뺨을 쓸었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신경 쓸 것 없이 정리되어 있을 거야.”
“형.”
“형 소리가 이제 자연스럽지.”
태운이 애매하게 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금 그랬다. 자신이 혁진을 형이라고 호칭하면 혁진이 훨씬 다정해지곤 했다. 어쩐지 부끄러워서 평소에는 잘 부를 수 없었지만 가끔 이렇게 부르곤 할 때가 있었다. 주로 침대 위에서 너무 힘들거나 스케줄 따위로 양해를 구해야 할 때였다.
“난 인생에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네가 날 그렇게 부르면 네 가족이 된 기분이야.”
혁진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태운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런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혁진이 겨우 침대 위로 눕혀 둔 태운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태운이 손을 뻗어 오자 혁진이 태운에게로 상체를 숙였다. 태운은 그런 혁진의 입에 조심스럽게 키스를 했다. 다정하고 정중한 태운다운 키스였다.
“말 진짜 안 듣지.”
“……죄송해요.”
태운이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혁진이 그런 태운의 입가를 정리하고 다시 침대 위로 눕혔다.
“자고 일어나서 상처 아물면 촬영장으로 돌아가게 해 줄 테니까 자.”
혁진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태운은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긴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운 태운의 얼굴을 혁진이 쓸어 주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혁진의 손길에 태운은 갑자기 잠이 몰려왔다.
“말했잖아. 네 삶을 평화롭게 해 주겠다고.”
다음 날, 태운은 주환을 통해서 현성이 영화에서 하차하게 되었음을 전달 받았다. 현성도 태운과 투 톱 영화에 캐스팅될 만큼 인기 있는 연예인이었는데, 겨우 매체 몇 개에서만 건조하게 다룰 뿐 현성의 하차는 조용하고 신속하게 이뤄졌다.
하차 사유는 건강상의 문제로만 알려졌고 거기에 태운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하차에 찍고 있던 영화에 대한 우려는 조금 있었지만, 크게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았다. 개봉 전 나쁜 쪽으로 논란이 나면 전혀 득 될 것이 없어서 감독을 비롯한 제작 투자사 모두 그나마 다행이라는 반응이었다.
* * *
“더 자.”
몸을 일으키려는 태운의 기색에 혁진이 가슴께를 도닥였다. 혁진이 이렇게 다정하면 태운은 몸을 일으킬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어 난감했다.
“저 출국이 하루 앞당겨졌습니다. 일어나서 저도 준비해야…….”
“오후 비행기잖아.”
어제 촬영이 늦게 끝난 탓에 집에 돌아오니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혁진을 깨우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고 침대 위에 누웠는데 조심스럽게 움직였음에도 결국 혁진을 깨워 버렸다.
해외 촬영이 예정되어 있어 일주일 정도 다시 서울을 떠나야만 했다. 도착하는 공항의 보안 문제로 현지 에이전트가 어제 갑작스럽게 요청해 비행기 시간이 바뀌었다. 잠결에 짧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이야기까지 했었나 생각했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혁진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요즘 한 번에 말을 들은 적이 없어.”
혁진의 말에 태운이 눈썹을 긁적이며 혁진의 뒤를 쫓았다. 혁진과 함께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또 혁진이 시키는 대로 혁진의 착장을 골랐다. 자신이 고른 대로 착장을 하고 출근을 앞둔 혁진을 보면 늘 어색하고 또 벅찬 기분이었다. 현관 앞까지 따라가 서성였다.
“다녀오세요. 저는 다음 주 수요일 날 귀국하게 될 것 같아요.”
“그래. 이제 들어가서 자.”
혁진이 그런 태운에게 말했다. 태운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지만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런 태운을 혁진이 품에 안자 태운이 혁진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췄다. 그러자 혁진이 태운의 뺨을 쥐고 키스를 했다. 태운이 혁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들고 출근해 버릴까.”
혁진이 태운을 번쩍 안아 들었다. 하지만 현관을 나가는 대신 구두를 벗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처럼 혁진에게 안긴 태운은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눈 감아.”
혁진이 태운을 안아 들고 다시 침실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태운을 침대 위로 눕혔다. 태운은 이번에는 눈을 꾹 감았다. 혁진이 침구를 태운의 위로 덮고 다시 방을 나섰다.
* * *
촬영은 얼마 전에 다시 재개되었다. 현성의 하차로 대체 배우를 구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감독은 새 배우를 구하면서 그 역의 분량을 대폭 축소했다. 태운 원 톱 영화에 새 배우는 조력자 역할의 조연으로 시나리오가 수정되었다.
윤현성의 분량을 다시 찍어야 해서 제작비가 증가했지만, 윤현성이 위약금을 톡톡히 물었고, 투자사에서 통 크게 수익 배분 비율의 조정 없이 추가 투자를 진행하면서 제작비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투자에는 혁진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짐작했지만, 윤현성은 대체 어떻게 처리했기에 강제로 하차를 시키고도 언론의 관심을 먹고 사는 현성이 입 벙긋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지 태운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혁진은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태운도 굳이 묻지 않았다. 혁진에게는 푼돈일 수도 있지만 더 열심히 영화를 만들어 손해를 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 마음이었다.
“일어났어?”
“네. 깨우시지.”
조금 더 자다가 정말로 준비할 시간이 되어서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는 혁진이 있었다. 요즘 들어 혁진이 빠르게 퇴근하는 날이 많은 것 같다. 집에 오시자마자 깨우셨다면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었을 텐데. 태운은 아쉬움이 들었다.
“뭐 하러.”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태운은 그냥 혁진이 앉아 있는 소파 옆자리에 가 앉았다. 혁진이 그런 태운의 허리를 당겨 바짝 옆으로 붙이자, 태운은 어설프게 혁진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혁진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런 사소한 스킨십이 태운은 조금 어색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잘 자고 잘 먹고 있어요.”
촬영 때문에 피곤하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요즘 혁진은 자신만 보면 재우고 또 식사를 하게 하려고 했는데 아주 어릴 적부터 어른이어야 했던 태운은 일방적인 혁진의 보살핌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태운이 조금 더 편하게 자세를 잡자 혁진이 태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태운은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국을 할 생각을 하니 지금 이 시간이 갑자기 너무 아쉬웠다.
혁진의 손이 조심스럽게 태운의 머리를 쓸어 올리고 이제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흉터도 옅어진 이마를 쓸어 만졌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태운의 입매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가끔 잠을 자다 느껴지는 시선이나 만져지는 느낌에 눈을 뜨면 혁진이 이마에 연고를 바르고 있을 때가 있었다. 태운이 본인 몸에 있어서는 무신경한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흉터가 생기지 않고 잘 아문 데에는 혁진의 그런 번거로움 덕이 컸다.
“죄송해요.”
“또 뭐가.”
하지만 이어 나온 말에 혁진의 목소리는 딱딱해졌다. 혁진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었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혁진의 손을 쥐었다. 혁진이 그런 태운의 손을 마주 쥐었다. 혁진에게 받고 있는 것만큼 혁진에게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았다.
“항상 다치지 않게 조심할게요.”
“그래.”
태운이 조심스럽게 끌어 온 혁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애교를 부리는 것도 아닌 행동에 평소보다 손에 힘이 들어간 혁진이 태운을 당겨서 무릎 위로 앉히곤 깊게 입을 맞췄다.
“빨리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태운은 매니저가 주차장에 도착해 전화를 두 번 걸고 나서야 겨우 현관을 빠져나갔다.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 * *
현성 대신 촬영에 합류하게 된 배우와는 제법 호흡이 잘 맞았다. 오랜만에 모두가 마음이 편한 촬영이어서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크게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들이 모아져 해외 촬영은 일정보다 일찍 끝났다.
덕분에 태운은 예정보다 이틀이나 일찍 비행기에 오를 수 있게 됐다. 일정 내내 혁진과 통화를 했었지만 허전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자꾸 생각났고 또 보고 싶었다. 촬영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계속 혁진의 생각을 했다.
“연애하셔서 그런가 요즘 엄청 좋아 보이세요.”
스케줄을 하루 종일 같이 다니다 보면 매니저에게는 완전히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듣는 앞에서 전화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태운이 메시지를 보내면 짧게 답 메시지가 오기보다는 혁진이 전화를 걸어오는 편이라 통화를 위해 자리를 피하다 보면 매니저가 눈치채지 못 하는 게 이상했다.
“얼굴도 엄청 좋아지셨어요. 물론 예전에도 좋으셨지만. 지금은 더 좋아지셨어요.”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옆 좌석에 앉은 매니저가 뜬금없이 말했다. 태운이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매일 보는 자신의 얼굴이라 그런지 크게 달라진 점은 알 수 없었다.
“선물 안 사셔도 괜찮아요?”
“선물?”
“그래도 해외 촬영 오신 건데 기념품이라도 사 가야 하시지 않을까요.”
기념품 같은 것을 선물로 받은 혁진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말을 듣고 보니, 선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혁진에게 무엇을 준다고 해도 다 부족해 보였다.
태운은 선물의 경험이 없었고 혁진은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어서 선물을 고르는 것이 더 어려웠다. 태운이 고민하는 기색이자 매니저가 현지 통역에게 쇼핑을 할 수 있는 곳에 세워 달라고 전달했다.
어떻게 전달이 된 것인지 현지 에이전트 직원은 한국에서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모시는 프라이빗하게 쇼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태운을 안내했다.
괜찮다는 주환에게 부모님 드릴 선물을 사라고 카드를 한 장 쥐여 보냈다. 혼자 남은 태운은 무난하게 혁진이 주로 착용하는 브랜드 시계를 살까 하다가 문득 다른 곳에 시선이 꽂혔다.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구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한국은 이미 늦은 밤이라 혁진에게 따로 연락을 넣지는 않았다. 한국에 도착하면 새벽 시간이라 비행기 연착이 없으면 혁진이 출근하기 전에 잠깐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긴 비행시간 동안 태운은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작은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무슨 생각으로 샀는지도 알 수 없는, 과연 선물이 될 수 있을까 싶은 물건이었다.
“들어가세요. 스케줄 변경되는 거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운전 조심해서 가.”
“네. 형도 푹 쉬세요.”
차에서 내린 뒤 차가 다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태운은 집으로 올라갔다.
비행기 안에서는 낙관적으로 생각했지만 이륙에 약간의 문제가 생기면서 예정보다 귀국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아슬아슬하게 혁진의 출근 시간을 넘긴 상황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태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다녀왔습니다.”
다행히도 태운이 복도를 걸어 들어가자 출근 준비를 막 마친 혁진이 서 있었다. 태운이 뛰듯이 혁진의 앞으로 걸어가 멈춰 섰다.
“촬영이 조금 일찍 끝났어요. 비행기 표를 급하게 사서 미리 전화 못 드렸어요.”
“피곤하지.”
“아뇨. 전 괜찮아요. 출근하셔야죠.”
“아직 시간 괜찮아.”
혁진이 태운을 당겨서 소파에 앉혔다. 허벅지가 붙는 가까운 거리였다. 태운은 혁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혁진은 그런 태운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마주 보다가 가볍게 당겨 안았다.
문득 주머니에 있는 작은 상자가 신경 쓰여 손을 뻗자 혁진이 익숙하게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손이 쥐어진 느낌이 좋아서 손을 마주 잡았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태운의 입술을 혁진이 입술로 막았다. 태운은 혁진과 마주 잡은 손의 반대 손으로 혁진의 단단한 상체를 감싸 안았다.
“오전 일정은 비울 수가 없었어. 오후 일정은 비워 뒀으니까 쉬고 있어.”
“네, 언제.”
혹시나 차가 막혀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봐 한국에 도착해서도 미리 알리지 못했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 언제 혁진이 시간을 비운 건지 알 수 없었다. 혁진은 대답하지 않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아쉬운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태운이 현관까지 혁진을 마중했다. 그런 태운을 현관에서 품에 안은 혁진은 푹 쉬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하고 출근을 했다. 평소보다 훨씬 늦은 출근이었다.
혁진이 출근하고 샤워를 한 태운은 혁진의 당부대로 침대에 누웠다. 아마 혁진에게 선물할 수 없을 것 같은 작은 상자는 만지작거리다가 잠이 쏟아져, 일어나 치울 생각으로 협탁에 올려 두었다.
“아.”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협탁 위에 상자가 없었다. 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다 문득 확인한 자신의 약지에는 태운이 직접 고른 둥근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급하게 방을 나서자 어느새 혁진이 도착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혁진의 앞까지 달려간 태운이 혁진의 손을 확인하자 혁진의 손에도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정확한 사이즈를 알 수 없어 그냥 태운 자신의 검지와 약지에 맞는 사이즈로 산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였는데, 자신의 검지에 맞았던 반지가 혁진의 약지에 맞춘 듯 꼭 맞았다.
“어떻게.”
“선물 아니었어?”
태운이 혁진의 품으로 와락 뛰어들었다. 혁진이 품 안에 들어온 태운의 등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키스해도 괜찮을까요?”
“그런 건 허락받지 않아도 돼.”
“정말로 사랑해요. 너무 사랑해서 미칠 것 같아요.”
혁진의 말에 태운이 초조해 보일 정도로 다급한 움직임으로 혁진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맞췄다. 항상 정중하고 조심스럽던 태운의 키스는 없었다. 성욕에 처음 눈 떠 주체를 할 수 없는 어린애처럼 태운은 혁진의 입안을 더듬었다.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혁진은 자신의 입안을 더듬는 태운의 혀를 자신의 혀로 핥고 이로 살짝살짝 깨물 뿐 제지하지 않았다. 태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듬더듬 혁진의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잘 되지 않아 몇 번이나 손이 혁진의 단추 위에서 헛돌았다. 이상할 정도로 적극적인 태운의 움직임에 혁진은 태운의 입속으로 웃음을 흘려 넣을 뿐이었다.
한참의 시도 끝에 단추를 전부 풀어낸 태운은 얼굴을 내려 혁진의 가슴에 입술을 붙였다. 쿵쿵하고 뛰는 혁진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숨을 쉴 때마다 혁진의 향이 태운의 콧속으로 들어왔다. 돌아 버릴 것 같았다.
태운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쾅 소리가 났지만 무릎이 아픈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혁진의 미간이 찌푸려졌을 뿐이었다. 태운은 그대로 혁진의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그리고 갈급하게 혁진의 성기에 얼굴을 묻었다. 태운이 그곳에 뺨을 몇 번 비비자 금세 단단하게 모양새를 찾았다.
“윽.”
성기를 목구멍 안쪽까지 한 번에 밀어 넣다가 태운이 잠시 컥컥거렸다. 혁진이 그런 태운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태운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혁진은 도무지 태운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봤다. 태운은 츕츕 소리가 나도록 성기를 깊숙하게 넣었다가 뱉어 내기를 반복했다.
“흡.”
혁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태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혁진의 손에서 반지가 반짝였다. 태운은 주먹을 꽉 쥐고 있어서 손에 끼워진 반지가 보이지 않았지만, 혁진은 그 손에도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을 것을 알았다.
고작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하나로 태운을 완전히 품 안에 넣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혁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태운이 이렇게 조급하게 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태운의 머리 위에 올려진 혁진의 손도 태운과 같은 모양으로 말렸다.
“이태운.”
혁진이 이름을 부르자 태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혁진이 태운의 입안에서 성기를 빼내려고 하자 태운이 혁진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드물게 버텼다.
혁진의 밑에 무릎을 꿇고 앉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었던 날들의 기억도 있었다. 자신은 잊을 수 없고 혁진도 잊지 않은 기억이었다. 혁진은 그래서 때때로 태운이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행동을 하면 이렇게 제지하고는 했다. 정작 혁진은 태운을 애무하고 태운의 것을 삼키는 것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그래서 태운은 혁진이 제지할 때마다 고집을 피웠다.
“흡…….”
태운은 입술을 조이며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거칠어진 혁진은 태운을 떼어 내는 대신에 태운의 머리와 목덜미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힘을 주고 떼어 낸다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태운에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태운이 다시 고개를 움직이자 태운의 입안으로 혁진의 뜨거운 것이 울컥울컥 밀려 들어왔다.
“이태운.”
혁진이 그제야 밀려난 태운의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 정액을 긁어 내고 욕실까지 안고 가 입을 헹구게 했다. 어린애처럼 혁진이 들려 주는 컵을 받아 입을 헹구던 태운은 자신이 흐트러뜨린 혁진의 차림에 얼굴을 붉혔다.
항상 날이 서 있는 것처럼 반듯했던 혁진의 와이셔츠는 풀려서 가슴이 다 드러났고 바지춤도 헤집어져 있었다. 다 태운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혁진의 얼굴에는…… 채 해소되지 못한 정염이 가득했다. 평소에는 상상도 못할 모습이라 태운은 목이 탔다. 이러다 터지지 않을까 싶을 만큼 심장이 빨리 뛰었다.
“빨리, 빨리, 저 좀…….”
태운이 혁진의 드러난 어깨에 뺨을 비볐다. 안달 난 눈으로 혁진을 올려다보자 혁진이 그대로 태운을 안아 들었다. 태운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혁진의 어깨를 혀로 핥았다.
애가 타서 눈물이 흐를 것 같을 때쯤 태운을 안고 침실까지 온 혁진이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태운을 내렸다.
“가지 말고, 빨리 그냥, 그냥 해 주세요…….”
태운이 몸을 일으키는 혁진을 잡았다. 혁진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보이자 태운이 그 위로 입을 맞췄다. 반지를 혁진의 손에 끼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 꿈인 것 같았다.
태운이 놔주지 않고 애타는 얼굴을 보이자 혁진은 태운을 바로 눕히고 태운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태운의 눈이 커졌지만, 혁진은 익숙하게 태운의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입술을 태운의 성기에 묻었다. 태운이 바르작거렸지만 소용없었다.
“하으, 이, 이거, 말고, 웃. 제, 제, 안에…….”
태운은 정말 이대로 몸이 불타 없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혁진의 입안이 뜨거웠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할 만큼 많은 경험이 있었지만 혁진에게 입으로 애무를 받는 행위는 몇 번을 거듭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혁진은 태운의 허벅지 안쪽을 움직일 수 없게 누르며 입안에 더 깊숙하게 성기를 머금었다. 키스를 했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 혁진의 손에서 반지를 발견했을 때부터 단단해진 성기가 이제는 더 커질 수도 없을 만큼 발기했다.
“아, 제, 제발.”
태운이 혁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태운은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혁진의 입안에 사정했다. 혁진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태운은 그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 이런 건, 이런 건 정말로…….”
“싫어?”
혁진의 웃음기 어린 말에 태운은 대답할 수 없었다. 싫지는 않았다. 싫을 리 없었다.
“젤이랑 콘돔만 가지고 올게.”
“싫어요, 싫어요. 그냥, 그냥 해 주세요.”
태운이 혁진의 손목을 꽉 쥔 채로 마치 칭얼거리는 것처럼 말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태운의 행동에 혁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태운의 입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태운이 반사적으로 입안에 들어온 것을 빨자 물기가 치덕하게 묻은 손가락을 빼낸 혁진이 금세 다물어진 태운의 다리를 가르고 밀지에 찔러 넣었다.
“읏.”
젤을 사용했을 때보다 손가락이 뻑뻑하게 안을 파고들었다. 젤이 있다면 더 편하게 안쪽이 풀렸겠지만 태운은 그 잠깐 떨어지는 것조차 싫은 것처럼 혁진을 놓지 않았다.
“그냥, 그냥 넣어 주시면 안 됩니까?”
“다쳐.”
“다쳐도…….”
몸의 열기를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다쳐도 좋을 것 같았다. 겁도 없이 말하는 태운의 하얀 엉덩이를 아프게 내려쳐 말을 막은 혁진이 벌을 주듯 느리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태운이 진저리를 치며 몸을 달싹거렸다.
“아, 빨리, 제발 형…….”
“왜 이렇게 보채.”
“좋아서. 너무 좋아서.”
이제는 혁진도 한계였다. 혁진이 단단해진 성기를 몇 번 손으로 흔든 후 태운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빡빡하게 안으로 들어차는 느낌에 태운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빨리 더 깊숙한 곳을 파고들어 달라고 혁진을 더 보챘다. 좀처럼 이렇게 보채지 않는 태운의 행동에 혁진도 덩달아 눈동자가 짙어졌다.
“아윽!”
쿠퍼액으로 번들거리는 성기를 몇 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빼내자 뻑뻑함이 조금 덜해졌다. 뭉근하게 풀어진 그곳에 혁진이 천천히 끝까지 밀고 들어갔다. 붉게 상기된 태운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혀, 형! 읏, 형.”
혁진이 태운의 허리 밑으로 쿠션을 밀어 넣었다. 태운의 다리가 허공을 휘저었다. 이미 꽉 찬 것 같은 밀지가 혁진이 깊게 들어올수록 점점 더 벌어지는 것 같았다. 의식을 하자 하반신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 성기가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이태운. 정말 다치니까, 힘 풀어.”
혁진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고 갈라졌다. 한 자 한 자를 힘주어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 하나하나가 태운의 귓가에 꽂혔다. 미치도록 섹시했다. 남자는 온몸으로 지독하게 관능적이었다.
혁진의 목소리에 자극받은 태운은 힘을 풀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혁진을 쥐어 짜내듯이 힘이 들어갔다.
“다쳐도. 다쳐도 좋…… 아아…….”
태운의 말에 혁진이 단번에 성기를 밖으로 빼냈다가 안으로 처넣었다. 한 번에 안쪽으로 파고드는 성기가 너무 깊은 곳에 닿았다. 태운의 눈앞에 하얀 빛이 튀었다. 무엇이라도 끌어안고 싶은데 끌어안을 것이 없어 태운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윽! 너무, 너무, 깊어서…….”
단어는 제대로 문장이 되지도 못했다. 혁진의 움직임이 더 빠르고 거칠게 변했다. 태운의 성기에 다시 쿠퍼액이 반들반들 흘렀다. 태운은 혁진의 빠른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래도 미칠 것처럼 좋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형.”
태운이 반쯤 정신을 놓고 반복하는 말은 혁진까지 정신을 놓게 했다. 태운의 눈앞에서 수도 없이 환한 별이 생겼다 사라졌다. 혁진과 가장 깊게 맞닿아 있는데도 부족했다. 할 수만 있다면 혁진에게 씹어 먹히고 싶었다.
“정말로, 정말로, 읏, 사랑합니다. 너무 사랑해요.”
태운이 미칠 것 같은 감정에 시트 위로 머리를 비볐다. 미칠 것처럼 행복했다. 죽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살아 있어 다행이었다.
그때 죽었다면, 혁진에게 구해지지 않았다면 세상에 행복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었다.
혁진이 낮고 달콤한 목소리로 태운의 귀에 고백에 대한 답을 흘려 넣었다.
너무 좋아서, 너무 느껴서 태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혁진이 손을 뻗어 그런 태운의 눈가를 닦아 줬다. 더, 더 깊숙하게 혁진과 연결되고 싶어 태운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혁진이 다시 거칠게 태운의 안을 쳐올렸다.
“아아!”
혁진의 성기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혁진이 빠져나가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에 힘을 줬다. 그 강한 자극에 혁진이 태운의 안에 사정했다. 혁진은 나른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태운의 성기에 손을 뻗었다.
“하아, 읏!”
몇 번 흔들지도 않았는데 과도한 감각에 태운의 성기에서 정액이 줄줄 새어 나왔다. 태운이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손을 뻗자 혁진이 그런 태운을 안아 들었다. 태운은 혁진과 하나가 되고 싶은 것처럼 혁진을 끌어안고 힘을 줬다.
태운이 다급하게 혁진의 입술을 찾았지만 혁진은 쉽사리 벌려 주지 않았다. 어린애들의 가벼운 스킨십처럼 한참을 태운과 입술만 맞대고 있던 혁진은 다시 태운을 침대 위로 눕히고 미친 듯이 태운을 깨물고 핥기 시작했다.
“몸이, 녹, 녹을 것 같습니다…….”
태운의 온몸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미친 듯이 다정하고 또 다정한 애무였다. 온몸에 혁진의 흔적이 남겨지자 더없이 충만한 느낌에 태운이 작게 몸을 떨었다.
“손, 손 좀, 잠시만.”
태운은 자신이 혁진에게 남긴 흔적을 찾았다. 혁진이 손을 내밀자 태운은 다시 반지를 낀 혁진의 손가락 위에 입을 맞췄다. 자신은 이 흔적이면 되었다. 혁진을 완전하게 가진 기분이었다.
“싫어요…….”
낮에 시작된 섹스는 날이 질 때까지 이어졌다. 자신이 몇 번이나 사정했는지 셀 수 없는 태운은 나른하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욕조에 앉아서 깜빡깜빡 잠들었다가 자신의 손에서 반지를 빼려는 혁진의 손짓에 눈을 떴다.
“씻어야지.”
“……안 빼고 씻으면 안 될까요?”
태운은 반지가 정말 빼고 싶지 않은 듯 반지가 끼어진 손에 꽉 하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태운의 말에 혁진이 피식 웃었다. 샤워 볼을 든 혁진의 손에서도 반지가 빠지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