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지금 여기가 시작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된 아정은 태운이 혼자 살고 있던 아파트로 퇴원했다. 태운이 혁진과 호텔에서 반쯤 동거하면서 잘 가지 않게 되어 방치되어 있던 곳이었는데, 아정의 퇴원을 앞두고 깔끔하게 다시 정리했다.
자연히 태운은 호텔에서 짐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번번이 태운의 귀가를 막았던 혁진도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태운은 최소한의 스케줄만을 진행하면서 아정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자연히 태운은 혁진과 보내는 시간이 줄었다. 아정의 어머니가 집에 오실 때 혹시라도 불편하실까봐 잠깐 자리를 비워 혁진과 저녁 식사만 함께하거나 그조차도 여의치 않으면 아정이 잠들고 나서 호텔에 잠시 들러 얼굴만 보고 헤어지곤 했다. 하지만 혁진과 얼굴을 보지 못하고 통화로 대신하는 날이 다수였다.
태운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송구하고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태운이 들떠 하는 것이 느껴져 혁진은 오히려 기꺼워했다. 태운을 재촉하지도 탓하지도 않고, 태운이 호텔로 들르면 평소처럼 대했다. 태운이 오지 않으면 먼저 찾지도 않았다. 여태처럼 가만히 태운과 아정의 사이를 한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 * *
아정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꿈결을 걷는 듯했지만 때때로 혁진의 단단한 품이 생각나곤 했다.
태운은 아정이 완전히 잠들고도 한참을 뒤척이지는 않는지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집에서 나왔다. 호텔에 도착하니 시간은 새벽 한 시를 조금 넘겨 있었다.
혹시라도 혁진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죽이고 객실 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었지만 혁진은 없었다. 태운의 눈이 당황으로 조금 커졌다.
혁진의 스케줄은 출장을 제외하면 거의 규칙적이었다. 스케줄을 일일이 설명하는 태운만큼은 아니었지만 호텔을 비워야 할 때는 항상 이야기를 해 줬다.
혁진의 품에서 새벽까지 자다가 혁진의 출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혁진도 개인 일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태운은 숨을 길게 내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혁진이 언제쯤 귀가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레도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태운.”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들고 혁진과의 통화 기록을 하나씩 눌러 보고 있던 태운은 문이 열리며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샤워를 한 건지 혁진의 머리카락에 물기가 살짝 남아 있었다.
“안, 계신 줄 알았어요.”
태운이 침을 꿀꺽 삼켰다. 보지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보게 되니, 괜히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운동했어.”
“이 시간에 말씀이십니까.”
“잠이 안 와서.”
혁진의 덤덤한 말에 태운의 뺨이 붉어졌다. 홀로 침대에 누우면 계속 뒤척이게 되는 자신처럼 혁진도 그럴까. 태운이 민망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혁진을 향해 걸어갔다.
“죄송해요.”
태운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계속 무언가 잘못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촬영 때문에 이따금씩 호텔에 들르지 못했던 날들이 있었는데, 그때보다도 요즘 혁진의 얼굴을 보는 횟수가 더 줄었다.
“왜 이렇게 눈치를 봐.”
“동생은 괜찮다고 하는데…… 혼자 두는 게 제가 너무 불안해서요. 너무 제멋대로 드나드는 것 같아요…….”
“편하게 들르라고 했잖아.”
혁진의 말에 태운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한 채 난감한 얼굴을 했다. 다시 혁진에게 돌아온 이후로 혁진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용해 주었다. 태어나 처음 받아 보는 무조건적인 이해가 간지럽고 들뜨는 기분이라 태운은 민망하면서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 태운의 얼굴 위로 혁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태운이 몇 번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완전히 눈을 감았다. 혁진의 입술이 태운의 입술 위로 닿았다. 태운이 조심스럽게 혁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자고 가도 괜찮을까요?”
“동생은.”
“잠 들어서. 출근하실 때 같이 나가서 집에 가려고 합니다.”
태운의 말에 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운을 침대에 눕히고 혁진도 그 옆에 눕자 태운이 조심스럽게 옆으로 붙어 왔다.
아정은 정신과 치료와 심리 상담을 병행하고 있었다. 혁진과 자신의 처음을 아정이 알고 있는지, 그래서 혹시 지금 관계조차 오해하지는 않을지 태운은 알 수 없었다. 치료 내용은 비밀 보장이 원칙이었다. 알려고 하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겠지만 태운은 동생이 말해 주지 않는 이상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태운은 섹스가 조심스러웠고 그것을 아는지 혁진도 태운에게 섹스를 강요하지 않았다. 가끔은 스킨십 자체를 혁진이 조심스러워하고 있다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같이 침대에 눕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침대에 누워 태운은 많이 좋아진 아정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요즘 계속 새로운 시나리오들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집에서는 잘 오지 않던 잠이 혁진의 옆에 눕자 쏟아졌다.
잠결에 호텔에 자주 들르고 싶다는 이야기와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태운의 입술에 혁진이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맞췄다.
“일어나.”
“아.”
오랜만에 푹 잠들었던 태운이 혁진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생각보다 더 푹 잔 것인지 혁진이 출근 준비를 마칠 때까지 그가 일어난 것조차 눈치채지도 못했다.
“몇, 몇 시입니까?”
“아직 새벽이야. 간단하게 씻고 나와. 아침 같이하고 출발하지.”
혁진이 손목에 찬 시계로 태운에게 시간을 확인시켜 줬다. 혁진의 손목을 쥐고 시간을 확인한 태운은 아직 동생이 깨어나기에는 이른 시간이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몇 시간 자지 않았는데 몸이 지나치게 가벼웠다. 씻고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에 가까워지자 태운은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또 오겠습니다.”
“그래.”
혁진과 같이 주차장까지 내려온 태운은 아쉬움이 진하게 남은 얼굴을 하고 혁진을 배웅했다. 혁진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태운은 출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자 당연히 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정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
“왔어?”
태운은 민망한 얼굴을 했다. 태운이 맞은편에 앉자 아정이 아침 줄까? 하고 물어 왔다. 혁진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한 태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빠. 나 자는 척하는 것도 힘들다.”
“무슨 소리야.”
조용히 아침을 먹던 아정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말했다. 장난 섞인 목소리에 태운이 화들짝 놀랐다.
“그 오빠지?”
“오빠?”
“맨날 병실에 같이 와 주신 키 크고 엄청 잘생긴 오빠. 오빠 애인 아냐?”
태운은 도저히 아정의 언어를 따라갈 수 없었다. 혁진이 아정의 병실에 함께 있어 줬던 것은 맞지만 도저히 키 크고 엄청 잘생긴 오빠라는 단어와 혁진이 어울리지 않았다. 혁진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단어였다.
“감사하다는 말씀도 못 드렸는데. 오빠가 전해 주라.”
정신없이 튀는 아정의 말에 태운은 머릿속이 다 멍해졌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정은 가끔씩 기분이 저조해져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며칠씩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때를 제외하면 태운이 알던 나쁜 일을 겪기 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정아. 그게.”
“나 진짜 괜찮으니까 오빠도 너무 집에만 있지 말고 데이트도 하고 그래. 촬영도 좀 가고. 오빠 영화 보니까 재미있더라.”
“보지 말라고 했잖아. 아니 그것보다…….”
태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아정이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빠 그리고 나도 좀 혼자 나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내가 알던 날들이랑 너무 많은 게 변해서 정신없기도 하고. 오빠한테 매일 고맙고 미안한데 좀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 언제까지 오빠 옆에서 이러고 살 수도 없잖아.”
“계속 이렇게 살아도 돼.”
“어우 내가 그건 싫다. 나 시간을 너무 많이 까먹어 버렸잖아. 당분간은 오빠 도움 조금만 받으면서 나도 이제 공부도 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
아정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 말을 하려고 꽤 고민했을 아정이 기특하고 대견했다. 그래서 아정에게 무언가를 해명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 * *
촬영이 끝나고 핸드폰을 확인한 태운의 눈이 커졌다. 혁진에게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태운이 받지 않으면 다시 전화를 할 때까지 재촉 없이 기다리는 혁진인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태운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덜덜 떨면서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은 길게 울리지 않았다.
“무, 무슨 일 있으십니까?”
―동생이 잠시 쓰러졌었어. 의료진은 일시적인 쇼크라고 했고 지금은 안정제 맞고 잠시 잠들었어. 큰 문제는 없고. 차 보냈어. 내가 계속 옆에 있을 테니까 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안전하게 와.
혁진에게는 동생이 없었다. 그렇다면 아정이 쓰러졌다는 말이었다. 태운은 다리가 풀려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태운.
“…….”
머릿속이 멍해진 태운은 빨리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귀에 붙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허둥거리는데 혁진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어 정신을 깨웠다.
―대답해, 이태운.
“……네, 네.”
―안전하게 와.
“네, 네.”
곧 혁진이 보냈다는 사람이 태운을 찾아왔다. 가족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말에 매니저조차 혼비백산했다. 매니저에게 전화하겠다는 말을 하고 자신을 이끄는 사람을 따라 차에 탔다. 어떻게 병원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차는 빠른 속도로 달렸지만 태운에게는 한없이 느리게 느껴졌다.
병원에 도착해 수행원에게 안내를 받아 아정이 있는 병실까지 뛰듯이 도착했다. 병실 앞에서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고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었는데 눈앞에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보였다.
“어. 오빠 왔어?”
“아정아!”
병실에는 혁진과 아정만 있었다. 아정이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동안 뒷모습만 보이는 혁진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태운을 발견한 아정이 손을 흔들었다. 태운에게 등을 돌리고 아정만 바라보고 있던 혁진이 몸을 돌렸다. 혁진과 아정이 한 공간에 있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야.”
“오빠 그게…… 나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지하철을 탔는데 순간적으로 숨을 못 쉬겠어서. 그대로 주저앉은 것까지는 생각나는데, 일어나니까 병원이었고 오빠가 계속 같이 있어 주셨어.”
“어머님은.”
“일부러 엄마한테 나 연락 안 했어. 엄마 감기 기운이 심하다고 하셔서 엄마 집에 가려고 했다가…… 택시 타려고 나왔는데 지하철도 탈 수 있을 것 같아서 탔다가 갑자기 어지러워서. 미안.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 주라.”
아정의 말에 태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써 괜찮은 척하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아정의 얼굴은 핼쑥했다. 더 할 말이 없어서 시선을 돌려 혁진을 바라봤다. 아직 낮 시간이었다. 혁진은 평소 출근할 때의 복장이었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먼저 연락을 받고 온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감사하고 죄송하고 여러 마음이 섞여 혁진을 보자 혁진이 태운의 등을 두드려 줬다. 긴장이 풀리면서 휘청이는 기색을 보이자 혁진이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에 태운을 앉혔다.
“미안. 일어나자마자 바로 연락했어야 하는데. 방금 일어났는데 오빠가 옆에 계셔 주셔서 인사하느라.”
“오빠라니…….”
“응. 내가 오빠라고 불러도 되냐고 여쭤 봤는데 괜찮다고 하셨어.”
아정의 대책 없음에 태운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혁진의 눈치를 살폈지만 불쾌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아니, 태운은 표정이 없는 혁진의 감정을 잘 읽지 못했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난감한 표정의 태운과 눈이 마주친 혁진은 괜찮다는 뜻으로 웃었다. 분 단위로 짜인 일정을 소화하는 남자가 그 일정을 다 취소하고 자신의 동생의 병실에 와서 계속 옆을 지켜 주었다는 것이 너무 고맙고 또 미안했다. 그래서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일정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래도, 이제 가 보셔도 괜찮아요.”
“잠깐 더 있을 수 있으니까 교수님 뵙고 와.”
혁진의 다정한 말에 태운이 입술을 악물었다. 동생을 남겨 두고는 갈 수 없는 자신을 배려해 주는 혁진의 마음이 느껴졌다. 태운은 혁진의 시간을 더 뺐지 않기 위해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아정의 담당 교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발생한 일시적인 공황 장애라고 했다. 씩씩하게 회복하고 있지만 아직 아정의 정신이 많이 불안정한 상태라 발생한 일이고, 이 또한 앞으로 같이 치료를 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후유증이 있을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고쳐 주고 싶었다. 진료실을 나와 한숨을 길게 내쉰 태운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몸조리 잘하고 있어. 미룰 수 없는 일정만 끝내고 다시 들를게.”
“네. 오늘 진짜 감사했어요!”
혁진의 인사에 아정이 발랄하게 대답했다. 혹시 혁진이 무례하게 느끼거나 하지는 않을까 태운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혁진은 자신에게 보여 주는 것처럼 작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미 너무 감사합니다.”
혁진은 인사를 하는 태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그대로 “다녀올게.” 하고 등을 돌렸다. 그런 혁진을 태운이 서둘러 잡았다.
“저기 잠깐만…….”
“왜.”
“아뇨, 다녀오세요.”
혁진을 밖까지 배웅하려고 했지만 아정을 두고 나갈 수 없어서 조금 난감한 얼굴을 했다. 혁진은 그런 태운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고는 문을 나섰다.
“오빠 나 뭐 실수한 거 아니지?”
“무슨 실수.”
“그래도 애인 사이인데 오빠가 너무 어려워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니야 그런 거.”
자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 아정에게 태운은 네가 쓰러지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랬다고 신경 쓸 것 없다고 아정을 달랬다.
“너 퇴원하면 면허를 따야겠다. 어머님 집에 못 오시고 나도 집에 없을 때 너도 움직일 일이 있을 텐데, 대중교통은 조금 더 괜찮아질 때까지 안 될 것 같아.”
“미안해.”
“뭐가 미안해.”
태운이 누운 아정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아정이 그 손길에 졸린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데 평소에도 그 오빠 그렇게 불러? 저기 하고.”
“뭐?”
예전에 혁진을 직책으로 부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혁진의 직책은 그 당시 불렀던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 거리감 있게 느껴져 따로 호칭을 불러 본 적이 없었다. 불러야 할 때는 저기나 잠시만, 같은 단어를 이용하곤 했다. 생각해 보니 이상해서 그것을 아정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아니야. 그냥.”
“그냥?”
“……형.”
아정이 혁진을 오빠하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불렀던 것이 생각났다. 혁진에게 부르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붉어졌다. 아정에게는 혁진과 자신의 관계가 평범하게 느껴졌으면 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을, 그리고 그 후 시간을 아정이 알게 되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게 싫었다. 지금 혁진은 너무 다정하고,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몇 번이라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되겠지만 그걸 아정이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태운의 망설임을 연애 사실을 가족에게 말하는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생각한 아정은 태운의 말을 듣자 조금 안심한 얼굴이 됐다.
약 기운이 남았는지 아정이 이내 다시 잠들었다. 태운은 그런 아정의 얼굴에 닿는 잔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언제쯤 괜찮아질까. 언제쯤 아정의 이 길고 긴 아픔이 끝날까. 항상 괜찮은 척 웃지만 혼자 몰래 힘들어하는 아정을 태운은 알았다.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정을 행복하게 잘 살게 해 주고 싶었다.
한참이나 아정을 바라보던 태운은 매니저에게 동생은 괜찮다고,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방문객용 소파에 앉아 가지고 온 가방에 두었던 대본을 손에 들었다. 하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생각의 끝은 혁진으로 향했다. 아정이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는 항상 혁진과 함께 병실에 갔었다. 혁진과 함께 가면 어딘지 안심이 됐었다. 그러다 아정이 정신을 차리곤 혁진이 방문을 줄였고 같이 오더라도 병실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혁진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었다.
아정과 혁진이 단둘이 병실에 있는 모습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아정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혁진이 가장 먼저 병실에 도착하리라고도. 자신이 오기 전까지 아정의 곁에 있어 준 이가 혁진이라고도. 정말 죽어서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이었다.
잠깐 대본을 보다가 식사가 준비되어 아정을 깨워 밥을 먹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조금하자 금세 늦은 시간이 되었다. 아정의 기분이 괜찮아 보여서 태운도 한시름 놓았다.
“잠깐 들어갈게.”
“오셨어요.”
곧장 병원으로 퇴근한 혁진도 병실로 들어왔다. 혁진의 손에는 쇼핑백이 여러 개 들려 있었다. 평소 혁진이 이런 것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본 적 없던 태운이 서둘러 쇼핑백을 혁진의 손에서 받아 들었다.
“이게 무슨.”
“무료할까 봐.”
쇼핑백 안에는 게임기와 팩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태운이 멍하니 그것을 아정에게 건네자 아정이 확인하고 감사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식사는.”
“저희는 했습니다. 드셨습니까?”
말을 하고서야 혹시 아정에게 자신의 말투가 너무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아차 싶었다.
“먹었어. 이것 전해 주고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어서 온 거야. 이제 가볼 테니까 푹 쉬어. 아정이 몸조리 잘하고.”
“네. 감사합니다! 들어가셔서 푹 쉬세요.”
“저기…… 형. 잠시만.”
오자마자 등을 돌려 나가려는 혁진의 뒤에 대고 태운이 말했다. 병실을 나가려고 하던 혁진은 몸을 돌렸다. 태운을 보자, 아정을 등 뒤에 둔 채 태운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잠깐만 나와. 십 분이면 돼.”
“저 혼자 있을 수 있으니까 우리 오빠 오래 데리고 나갔다 오셔도 돼요!”
아정이 끼어들었다. 민망해진 태운이 아정과 혁진을 번갈아 보다가 혁진 쪽으로 걸었다.
병실을 나오자마자 혁진은 보호자용으로 마련된 침실에 태운을 밀어 넣었다. 태운이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밀려 들어가자 혁진은 문을 닫고 태운의 입술에 키스했다.
“하읍.”
키스는 평소보다 거칠었다. 고작 키스를 할 뿐인데 꼭 섹스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태운은 혁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숨이 찼지만 맞댄 입술을 떼고 싶지 않았다.
머리에 열이 올랐다. 아정이 옆 병실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아랫도리가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숨이 부족해서 태운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때쯤에야 혁진이 태운을 놓았다.
“하아, 하아.”
태운이 그대로 혁진에게 무너졌고, 혁진은 그런 태운을 감싸 안았다. 머릿속은 엉망진창인데 미칠 것 같이 좋았다. 태운이 혁진의 품에 머리를 비볐다. 혁진의 단단한 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좋아서 태운은 한참을 더 그렇게 안겨 있었다.
“동생이 항상 저기냐고 부르냐고 물어봤어요. 동생한테는 그냥 평범한 사이로 보이고 싶어서…….”
“편하게 불러.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여전히 붉은 얼굴의 태운이 혁진의 품 안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런 태운을 품 안에서 떼어 낸 혁진이 다시 길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병원에서, 그것도 아정의 병실 옆에서 키스 이상을 할 수 없는 태운은 혁진과 나란히 앉아 가만가만 이야기를 나눴다.
“동생 퇴원하면 이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이제 조심스럽게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지금 사는 곳 치안도 별로고 동생을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보안이 확실한 곳으로 이사해야 할 것 같아. 준비해 둘 테니까 그쪽으로 동생 퇴원시켜.”
혁진이 하는 말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던 태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조심스럽게 만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아정이 다 알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까지 느리게 따라간 태운의 뺨이 다시 붉어졌다.
동생을 언론에 노출시킬 수 없다는 것은 태운도 계속 하고 있던 고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결론이 어째서 혁진이 집을 준비하는 쪽으로 났는지는 따라갈 수 없었다. 혁진이 그 의아한 얼굴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바로 덧붙였다.
“집값은 시세대로 치르게 해 줄게.”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태운은 거절을 말할 수조차 없었다. 혁진은 피식 웃으며 그런 태운을 당겨 안았다. 태운은 민망한 얼굴을 숨기듯 혁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 * *
태운은 혁진이 보낸 변호사가 준비해 온 서류에 사인을 하고 대금을 치렀다. 입구에 보안 초소뿐만 아니라 개인 주차장과, 주차장과 연결된 개인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을 정도로 보안이 확실한 빌라였다. 혁진이 호텔 생활을 접고 태운의 집 바로 위층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은 이사를 한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정은 계속 그림을 그렸고 레슨도 받았다. 원래 공부 욕심이 있던 아이라서 대학 진학을 위해 검정고시와 수능 준비도 시작했다. 계속 심리 상담을 병행하고 있었고 의사가 놀랄 만큼 빠르게 안정을 찾고 있었다. 아정이 바쁜 일상을 보내기 시작하자 태운도 개인 시간이 조금 늘어서 주말은 온전히 혁진과 보내곤 했다.
아정은 태운과 함께 병실에 자주 들렀던 혁진을 기억하는지 혁진을 가깝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혁진은 한 발 물러서 태운과 아정을 지켜보기만 했지만 무엇인가 문제가 생기면 태운이 손 쓸 틈도 없이 개입해 처리했다. 매일매일 평화롭고 같은 하루가 반복되기를 바라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 * *
혁진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태운을 끌어다 자신의 허벅지를 베게 했다. 촉박한 촬영 일정 때문에 일주일 만에야 집으로 돌아온 녀석은 계속 이렇게 옆에서 졸기만 했다.
차라리 편안하게 자라고 침대 위에 눕혀 놓았더니 잠에서 깬 건지 휘청휘청 걸어 나와 다시 이렇게 곁에서 졸고 있었다. 눈도 제대로 못 뜰 정도로 피곤한 몸을 하고도 일주일이나 얼굴을 보여 주지 못한 것이 겸연쩍어서 이러리라. 그리고 자신도 살에 닿는 태운의 온기가 나쁘지 않았다.
함께 침대로 가면 둘 다 편하게 누울 수 있겠지만, 다시 잠에서 깨게 된다면 어떻게든 잠을 자지 않고 버티려고 할 태운이 눈에 보여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계속 경직된 태도를 보였던 태운이 이렇게 긴장을 풀고 옆에서 눈을 붙일 수 있는 정도가 된 것이 제법 기껍기도 했다. 혁진은 그렇게 잠든 태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태운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에 빠진 상태였다.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혁진은 식사를 위해서 태운을 깨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 싶어 수면제를 한 움큼씩 쥐어 먹었다던 녀석이 이렇게 자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혁진은 태운을 깨우기 위해 태운의 양팔을 힘을 주어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살면서 정을 받아 본 적이 없다는 태운은 이렇게 체온이 전해질 정도로 몸이 닿으면, 난감해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무의식중에 그 체온을 계속 쫓았다. 잠자리 끝에 무리하게 사용된 태운의 근육들을 이렇게 주물러 주면 당황한 얼굴로 얼굴을 붉게 태우기도 했는데…….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힘에 태운이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초점을 잡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다시 잠들었다는, 그것도 혁진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다는 사실에 잠이 확 달아났다. 태운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제가 오래 잤습니까.”
“글쎄.”
태운은 민망함에 눈을 가늘게 떴다. 해가 떠 있을 때 잠들었는데 이미 해는 지고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불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별로.”
태운은 면구스러움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자신이 베고 자던 혁진의 허벅지를 손으로 꾹꾹 쥐어 눌렀다. 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단단한 혁진의 허벅지는 빈틈이 없었다. 태운이 그 행위를 몇 번 반복하기도 전에 혁진은 그런 태운의 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쥐었다.
“저녁 먹어야지.”
“식사도 못하셨습니까.”
태운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혁진은 대답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혁진은 태운을 조금 알았다. 태운이 저런 얼굴을 할 때에는 생각을 오래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좋았다. 혁진이 식당 쪽으로 걷자 태운이 그의 뒤를 따랐다.
혁진이 인덕션의 전원을 켰다. 인덕션 위에는 냄비가 올려져 있었다. 혁진이 호텔 생활을 접으면서 몇 가지 불편한 일들이 생겼는데 식사가 그중 하나였다. 언제든 식사가 준비되던 호텔과는 달리 집에서는 둘 중 누군가가 움직여야만 했다.
사실 오전 중에 오시는 가사 도우미분이 준비해 놓으신 음식을 그대로 데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처음 혁진이 주방에 들어갔을 때 태운은 너무 놀라 눈물까지 흘렸었다. 혁진은 대체 이게 뭐라고 우냐고 물었지만 태운은 본인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앉아 있어.”
태운이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수저를 놓은 후 또 할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자 혁진이 말했다. 음식을 데우는 혁진이라니, 이제 태운도 익숙해졌지만 적응이 되는 모습은 아니었다. 태운은 애매하게 웃었다. 하지만 혁진의 말을 거역하지는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을 태운의 앞에 내려놓은 혁진은 태운의 손에 수저를 쥐어 주었다.
혁진은 요즘 태운을 이렇게 먹이고 재우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태어나 누구에게도 이렇게 보살핌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태운은 처음에는 한껏 어색해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겨우 적응하는 중이었다.
혁진이 먼저 젓가락을 들고 그 후에 태운도 국을 조금 떠 입안으로 넣었다. 정갈하고 솜씨 좋은 음식은 기분마저도 좋게 했다. 입맛이 돌아 태운은 따스한 국을 입안으로 떠 넣고 뜨거운 쌀밥을 몇 번 씹어 삼켰다. 이내 속이 채워지고 뜨거운 음식들에 의해 따뜻해지자 이상하게 다시 잠이 쏟아졌다.
촬영을 하는 일주일 내내 밤을 새다시피 한 후유증이었다. 제작 기간이 촉박해 감독도 촬영을 서둘렀고, 집을 오래 비우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태운도 거기에 힘을 보탰다.
하루에 두세 시간을 채 못자며 촬영을 끝내고,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지쳐 쓰러져 잠들었을 때 홀로 서둘러 서울로 올라온 참이었다.
식탁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음식을 씹는 태운을 보며 혁진은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손수 수저를 들어 태운의 입안으로 음식을 날랐다. 반쯤 잠에 빠진 태운은 얌전히 음식을 받아먹다가 다시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제 버릇을 너무 나쁘게 들이고 있으신 것 같습니다.”
태운이 푹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혁진이 낮게 웃었다.
“버릇이 조금 나쁘게 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태운이 난감함과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혁진이 다시 태운의 손에 수저를 쥐어 주었다. 태운이 평소 먹던 만큼 밥을 먹을 때까지는 다시 재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 * *
태운은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몸을 적셨다. 일주일 만에 만난 혁진의 단단한 온기가 그리웠다.
둘의 섹스는 이제는 혁진이 태운의 사정에 전적으로 맞춰 주고 있었다. 태운은 촬영으로 인해 외박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고, 또 혁진의 섹스는 좀 거칠고 흔적을 남기는 편이라 카메라 앞에 몸을 드러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상 촬영 전에는 할 수 없을 때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잠자리의 선택권은 태운에게 있었다. 태운이 민망한 얼굴을 하고 혁진에게 몸을 부딪치면 그렇게 섹스가 시작되었다. 태운은 몸에서 비누 거품을 모두 씻어 내고, 샤워 부스를 나와 수납장에서 관장약을 꺼내 들었다.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태운은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몇 번 깜빡깜빡해 보았지만 물줄기 사이로 보이는 혁진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금방, 씻고 나가겠습니다.”
당황으로 태운은 말을 더듬으며 손에 든 것을 몸 뒤로 숨겼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태운은 곧이어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얼굴을 붉히며 허둥지둥했다. 그러나 가벼운 실내복 차림인 혁진은 멈추지 않고 태운에게로 다가왔다. 태운이 민망하고 난감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혁진이 태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태운의 눈동자 움직임이 멎었다. 혁진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태운은 혁진이 웃는다고 생각했다. 태운은 고개만 저었다. 민망한 일이었다. 또 혁진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혁진은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제가, 금방…….”
태운이 말했지만, 혁진은 여전히 손을 거두지 않았다. 하얗게 변한 얼굴을 하고 태운은 내용물을 손안으로 감추며 힘을 주었다.
“고작 섹스를 하는 건데 너 혼자 감당해야 할 일들뿐이군.”
혁진의 입에서 나온 섹스라는 단어에 태운은 그 뒷말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혁진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너무도 야하게 들렸다.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겨우 그 단어에 몸이 달아올랐다. 태운은 화끈한 눈가를 깜빡이며 뒷걸음질 쳤다. 지독한 자극이었다.
“그런 말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
“섹…… 그거.”
서로 알몸을 마주한 게 몇 년인데 고작 말 하나 하는 게 어렵다고 태운이 잔뜩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이내 혁진도 침음을 삼켰다.
가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걸로 이상하게 사람을 돋우는 구석이 있었다, 이태운은. 혁진이 가만히 서서 태운에게 손짓했다. 여전히 손을 등 뒤로 숨긴 태운이 조심조심 혁진에게 다가왔다.
혁진이 그런 태운을 안았다. 태운의 젖은 몸에서 닦이지 못한 물기가 혁진에게로 묻어났다. 혁진은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운의 맨 등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촬영은.”
“당분간은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혁진이 태운의 입술을 크게 물었다. 혁진이 입을 크게 겹친 채 혀로 입술을 훑어 주자 태운이 말랑하게 안겨 왔다. 하지만 여전히 등 뒤로 숨긴 손안에는 단단하게 무엇인가를 쥔 채였다.
태운은 이제 몸을 부딪치며 안겨 오는 것에는 제법 익숙해졌지만, 그 외에는 도무지 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와 입을 겹치고 타액이 섞이는 행위 자체를 비위생적이라 생각해 누구와도 해 본 적 없다던 혁진은 키스만으로도 태운을 달아오르게 했다. 태운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힘 있는 혁진의 키스를 반쯤은 그에게 기대어 견디던 태운은, 자신의 등을 쓸던 혁진이 손을 길게 뻗어 제 손에 쥐고 있던 걸 빼 가는 것도 몰랐다. 손이 빈 것 같은 느낌에 제 손을 쥐었을 때는 이미 그렇게 감추고 싶어 하던 물건이 없어진 후였다.
태운이 영 집중하지 못하자 혁진이 태운과 연결되어 있던 입술을 떼었다. 태운의 눈이 당황으로 깜빡여지지 않았다.
“이건 저 혼자 감당해야 할 일, 입니다.”
태운이 제법 강한 어조로 말했다. 혁진이 품 안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태운을 고쳐 안으며, 다른 손으로는 태운에게서 빼앗은 관장약의 설명서를 한 자 한 자 읽어 나갔다. 차마 혁진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아 올 수도 없는 태운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혁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몸이 붕 뜨는 느낌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혁진이 욕조 턱에 걸터앉아 태운을 제 허벅지 위에 앉히고 난 후였다.
태운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것보다 혁진의 굵은 손가락이 태운의 엉덩이 골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이 더 빨랐다. 태운이 화들짝 놀라 튀어 올랐지만 혁진의 단단한 팔에 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
“매번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나.”
태운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태운이 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거부의 의사 표현이었다. 하지만 태운이 변한 만큼이나 짓궂어진 혁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손가락으로 태운의 항문을 찾아내었다. 태운이 잔뜩 놀란 신음성을 터뜨렸다.
“이태운.”
“…….”
“이젠 아무것도 너 혼자 감당하게 하고 싶지 않아.”
태운이 동공이 확대된 눈으로 혁진을 올려다보았다. 겨우 그 말 한 마디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태운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혁진은 비어 있는 손으로 태운의 등줄기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곧 짓궂게 태운의 엉덩이 골 사이를 지분거리던 손도 떼고 태운이 진정될 때까지 한참 태운의 맨살을 쓸어 주었다.
이어 혁진은 태운을 가볍게 들어 욕조 안에 엎드리게 했다. 태운의 몸은 잔뜩 경직되어 근육이 도드라졌다. 혁진이 계속해서 그런 태운의 몸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질척하게 태운의 엉덩이 골 사이를 매만졌다. 태운이 참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읏……!”
서서히 그 질척한 손길에 적응이 될 때쯤, 태운은 얇고 뾰족한 주둥이가 자신의 항문을 가로지르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얼마 되지 않는 양의 용액은 쉽게 태운의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태운은 숨을 삼켰다.
플라스틱 용기 안에 들어있던 용액을 태운의 항문 안으로 밀어 넣은 혁진은, 다시 태운을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로 앉혔다. 그리고 단단한 팔로 태운은 감싸 안았다. 태운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악물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태운의 등에서 땀이 몽글몽글 새어 나왔다. 태운은 불편해진 속을 표현해 낼 길 없이 입술을 아프게 깨물며 참았다.
혁진은 그런 태운을 가볍게 안고 계속해서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땀을 쓸어 주었다. 그 손길은 기꺼웠으나, 태운은 홀로 하는 것보다 혁진이 직접 해 준 것이 견디기 몇 배로 더 힘든 기분이었다. 혁진 앞에서 추태를 부릴 수 없다는 심리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악문 태운의 치아 사이로 혁진이 손가락을 모로 물려 주었다. 혁진의 손이 들어오자 태운이 무의식중에 잇새를 벌렸는데 그사이에 혁진이 태운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태운은 더 이상 이를 물지도 못했다.
이미 물기가 마른 태운의 몸 위로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태운은 몸이 절로 꼬이려는 것을 엄청난 인내심으로 버텨 내었다. 금세 눈 밑이 축축하게 젖었다. 혁진이 자유로운 손으로 태운의 눈 밑까지 훑어 주었다. 어찌할 바 없이 몸까지 덜덜 떨던 태운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기분에 혁진을 향해 고개만 저었다.
그 간절한 눈을 읽은 것인지 혁진이 태운의 입안에 들여 놓았던 손가락을 빼고 태운을 들어 두 발로 세워 주며 몸을 일으켰다. 태운의 눈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다시 한번 태운의 눈가를 훑어 준 혁진은 태운의 머리까지 꾹꾹 눌러 준 후 등을 돌려 욕실을 빠져나갔다. 태운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 * *
태운이 샤워 부스 안에서 다시 한 번 물로 몸을 씻어 내고 있을 때 혁진이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샤워를 한 것인지 샤워 가운 차림이었다. 태운은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이 되어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잠갔다. 태운이 샤워 부스 밖으로 서둘러 나오자 혁진이 낮게 웃었다.
제게 다가오는 태운을 낚아챈 혁진은 태운에게 깊게 키스했다. 태운은 혁진의 단단한 허리를 감으며 그 키스를 버텨 내었다.
키스를 받아 내면서 태운은 점점 뒤로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발이 욕실 문턱에 걸렸다. 끝을 알 수 없는 뒤를 향해 걷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 태운은 그대로 침대 위로 눕혀졌다.
멍한 얼굴로 침대 위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태운을 보자 혁진은 그대로 태운의 어깨를 씹었다. 참을 수 없는 자극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태운을 입 안으로 전부 털어 넣고 싶었다.
오랜만이라 제법 예민해져 있는 태운은 겨우 그 자극만으로도 입안에서 낮은 신음을 터뜨렸다. 거기에 자극받은 혁진은 태운의 살을 아프게 물고 태운이 신음소리를 내면 다시 힘 있게 혀로 핥아 주었다. 태운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태운의 쇄골에 잔뜩 흔적을 남긴 혁진은 그대로 태운의 가슴에 툭 튀어나와 있는 살덩이를 물었다. 태운이 제 팔을 잡아 올 때까지 그 살덩이를 아프게 씹던 혁진은 태운의 신음성이 점점 높아지자 그 살덩이를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태운이 주먹까지 쥐고 그 자극을 견뎠다.
태운의 몸은 자극에 굉장히 예민한 편이었지만, 유두는 특히 심했다. 이제는 혁진이 힘 있게 죽죽 빨아 주는 것만으로도 발기할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한쪽 유두는 손으로 아프게 꼬집었다 부드럽게 쓸어 주기를 반복하고 다른 한쪽 유두는 입으로 애무해 주자 쾌락에 휩싸인 태운의 손이 갈 곳을 잃고 공중에서 허우적거렸다.
“읏, 이상, 이상해질 것 같…… 읏!”
태운이 견디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유두가 닳아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혁진은 태운의 유두를 입안에 문 채로 웃었다. 간지러운 웃음이 태운에게 전해졌다.
“으…….”
혁진이 태운의 유두에서 입을 떼어 내자 태운이 앓는 듯한 안도의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혁진은 거기서 그만두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손으로 매만져 주던 유두를 입안에 물고, 입으로 빨아 당기던 유두는 손을 써 비틀었다.
태운이 이번에는 정말로 팍 하고 튀어 올랐다. 하지만 혁진은 멈추지 않았다. 태운의 유두가 두툼하게 부풀어 올랐다. 태운의 성기가 완전히 단단해졌을 때야 유두에서 입을 떼어 낸 혁진은 그대로 태운의 허벅지를 접어서 안쪽의 여린 살에 이를 박아 넣었다.
성기와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태운은 그대로 미칠 것만 같았다. 성기가 터질 것 같았지만 매정한 혁진은 그곳에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지 않았다. 태운이 혁진의 어깨를 잡았지만 혁진은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조금 더 태운을 애태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혁진을 앞에 두고 제 성기에 손을 가져다 댈 수 없는 태운은 혁진의 어깨를 움켜쥐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태운이 아무런 소리 없이 훌쩍거리자 혁진이 입안으로 웃으며 계속해서, 태운의 허벅지 안쪽에 자국을 남겼다.
혁진이 남기는 흔적은 점점 태운의 성기와 가까운 쪽으로 이어졌다. 태운이 허리를 이리저리 틀어 보았지만 혁진은 태운의 허벅지를 단단히 쥔 채라 태운의 뒤틀림에 방해를 받지 않았다.
“왜, 왜.”
태운이 울음기 섞인 소리를 내었다. 잔뜩 발기한 성기는 물론이고 아랫배까지 당겼다. 하지만 더 큰 자극을 알고 있는 성기는 무엇인가 미진한 자극에 마지막까지 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이것을 해결해 줄 사람은 태운에게는 혁진밖에 없었다.
하지만 혁진은 태운의 사타구니 안쪽의 여린 살을 자리를 옮기며 힘껏 빨아들이고 아프지 않게 깨물 뿐, 직접적으로 태운의 성욕을 풀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계속해서 커지기만 할 뿐 해소되지 않는 쾌감에 태운은 허리를 들썩이기만 했다.
이내 혁진이 그 움직임을 보며 입안으로 웃었다. 태운의 살을 물고 있는 채였기 때문에 그 진동이 태운에게 그대로 느껴졌다. 태운의 눈매가 울먹이듯 가늘어졌다. 혁진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살에서 입을 떼었다. 갑작스럽게 혁진이 멀어지자 태운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으로 혁진을 쫓았다. 혁진이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혁진은 일부러 애를 태우듯 태운의 젖은 머리를 정리해 이마 뒤로 넘겨 주었다. 미지근한 자극마저 멎자 온몸이 자극으로 예민해진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시트에 비비며 혁진을 눈으로 따랐다.
“원하는 걸 말하는 거야.”
“그게, 그게 무슨…….”
태운의 목소리가 정염으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혁진은 그런 태운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혁진도 이미 한계에 가까워져 있었다.
“할 수 있잖아.”
태운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혁진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뭉근하게 태운의 유두를 쓸었다. 태운이 버티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혁진은 멈추지 않았다. 꽉 쥐어진 태운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말도 해야 느는 거야.”
“그런 건, 늘지 않아도 괜…… 하읏!”
하지만 태운은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혁진의 손이 태운의 성기를 가볍게 쥐어 왔기 때문이었다. 성기를 간질이듯이 훑는 그 감각에 태운은 더 미칠 것만 같았다. 원하는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조금 더 세고 강렬한. 태운은 입술을 악물었다.
혁진의 빈손이 태운의 입술을 쓸었다. 입술을 깨물지 말라는 신호였다. 혁진의 다른 손은 여전히 태운을 놀리듯 성기를 간질이고 있었다.
태운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양손으로 혁진의 단단한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태운의 입술 끝이 떨렸다. 태운은 가만히 혁진의 손가락 끝을 제 입안으로 넣었다. 손가락 두 개만으로도 입안이 묵직해졌다. 그리고 마치 펠라티오를 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핥고 빨아들였다. 태운의 이마에 땀이 번들거렸다.
“도와, 주세요.”
태운이 손가락을 입에 문 채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한계였다. 참을 수 없었다. 제대로 된 문장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태운의 말이 끝나자 혁진은 칭찬을 하듯 태운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고 태운의 성기를 입안으로 물었다.
혁진이 단단하게 세운 혀끝으로 귀두 사이의 팬 부분을 자극하자 태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혁진은 계속해서 혀를 움직이며 꽉 쥔 태운의 주먹 사이로 제 손을 밀어 넣어 태운의 손과 깍지를 꼈다. 그리고 그대로 태운의 기둥을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강한 흡착력에 사정감을 느낀 태운은 혁진은 밀어내려고 했지만 깍지 끼어진 손은 단단하게 혁진에게 묶여 움직이지 않았다.
“읏.”
결국 태운은 몸을 부르르 떨며 혁진의 입안에 사정하고 말았다. 혁진의 목젖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몇 번을 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라 태운의 얼굴은 색을 잃었다.
태운이 사정을 했음에도 멈추지 않고 혁진은 애무를 이어 나갔다. 이제는 당연한 순서가 된 일이었다. 사정을 해서 잠시 말랑해졌던 태운의 성기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어 놓은 혁진은 고개를 들어 협탁에서 콘돔을 꺼냈다.
태운이 혁진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혁진이 태운에게 콘돔을 넘겨주며 입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더듬더듬 콘돔의 비닐을 벗겨 낸 태운은 단단하게 발기한 혁진의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젤을 손에 든 혁진은 태운의 양발을 잡아 올리며, 태운의 항문에 젤을 가득 짜 넣었다.
“으…….”
태운이 다시 몸을 떨었다. 혁진이 젤로 질척이는 태운의 항문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겨우 손가락 하나에 태운이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관장을 해서 풀어 놓은 아래는 쉽게 혁진의 침입을 허락했다. 태운의 안이 움찔움찔 조여졌다.
“흐읏.”
태운은 자신이 콧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혁진의 성기도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혁진은 조심스럽게 태운의 안에서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듯이 항문을 넓히는 작업을 계속했다.
관계에 들어가면 반쯤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태운조차도, 혁진이 다시 관계를 이어 가고부터 본인의 쾌락보다도 자신이 느낄 쾌락을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다시 그것을 떠올린 태운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펴고 제 항문을 풀어 주고 있는 혁진의 손목을 잡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왜.”
혁진의 물음에 태운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혁진은 태운을 다시 침대로 눕히지도, 왜 그러는 것인지 두 번 묻지도 않고 그저 몸을 일으키는 태운을 지켜보았다.
태운은 무릎으로 혁진의 허벅지 위에 섰다. 혁진과는 마주보는 자세였다. 태운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혁진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어 태운은 눈을 꾹 감고 더듬더듬 혁진의 성기를 잡았다.
그제야 태운의 의도를 눈치챈 혁진이 태운의 움직임을 막으려 골반을 잡았지만, 그것보다 태운이 혁진의 성기를 감각으로 맞추고 주저앉듯이 내려앉는 것이 빨랐다.
“흣, 으흣.”
혁진이 공을 들여 풀어 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커진 혁진의 성기는 태운이 받아들이기 버거운 것이었다. 항문이 찢어질 듯 아팠고 배 속이 꽉 채워진 느낌이었다. 속이 더부룩해진 것 같았다.
배 속이 꽉 찬 것 같았는데 손으로 뒤를 짚어 보자 겨우 반쯤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태운의 이마가 땀으로 번들번들해졌다. 태운은 그대로 멈춰서 심호흡을 했다. 혁진 또한 편치 않은 자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태운을 재촉하지 않았다.
“흐…….”
한참을 숨을 몰아쉬던 태운은 숨을 멈추고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혁진의 성기를 끝까지 물었다. 내장이 전부 위로 밀려 올라가는 느낌에 태운은 몸을 떨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
혁진의 목소리가 지독하게도 낮았다. 성욕이든 화든 그것이 무엇이든 눌러 참고 있는 것이었다. 눈가까지 잔뜩 붉어진 태운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태운은 혁진의 어깨를 단단히 쥐며 발가락 끝까지 힘을 주었다.
“흐읏!”
그 상태에서 엉덩이를 들자 혁진의 성기와 함께 이번에는 내장이 밑으로 전부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태운이 덜덜 떨었다.
땀을 빗물처럼 흘리면서도 태운은 쉬지 않았다. 혁진의 귀두 부분이 항문에 걸리는 느낌이 들자 태운은 다시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이 눈물 때문인지 땀 때문인지 열기 때문인지 뜨거워서 제대로 뜨는 것조차 어려웠다.
“흐으, 흐으.”
하지만 어려운 건 처음 몇 번 만이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태운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혁진의 성기가 태운의 안으로 사라졌다 드러났다를 빠르게 반복했다. 혁진의 숨소리마저 점점 거칠어졌다.
혁진은 태운의 골반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태운은 자극적이었고, 혁진은 한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끝에 다다르자 오히려 거친 숨을 내쉬며 혁진은 태운의 성기를 잡았다.
태운은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한 채 제 성기를 잡은 혁진의 손을 바라봤다. 혁진이 성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태운이 바스스 떨며 아래를 꽉 조였다. 혁진이 낮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너무, 조여.”
태운의 성기를 쥐고 흔드는 혁진의 움직임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태운의 허리가 낭창하게 휘었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움직임이 느려진 태운이 혁진의 어깨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 아예 혁진에게 기대어 계속해서 엉덩이를 들었다 내렸다만 반복했다. 빠르게 움직이고 싶은데 점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혁진의 거대한 중심이 태운의 안에서 빠졌다 끝까지 처박혔다를 반복했다.
“흣.”
“윽.”
농염한 혁진의 손길에 힘이 풀린 태운이 그대로 혁진의 위로 주저앉았다. 태운의 따스한 구멍이 혁진을 끝까지 삼킨 그 순간, 혁진은 그대로 태운의 안에 제 욕망을 풀어 내었다.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에 태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정을 마친 혁진은 그대로 태운의 안에서 성기를 빼내어 콘돔을 정리하고, 다리에 힘이 풀린 태운을 침대로 눕혔다. 그러면서도 태운의 성기를 쥐고 흔드는 움직임에 속도를 높였다.
“흐으.”
태운이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두 번째 사정을 마쳤다. 처음과는 다르게 몸에 탈력감이 상당했다. 태운은 괜스레 민망해져서 눈을 내리감았다. 태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혁진은 그것을 보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태운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혁진은 그렇게 웃으며 콘돔을 순식간에 갈아 끼웠다. 그리고 축 늘어져 있는 태운의 다리를 잡아 자신의 옆구리로 붙였다. 태운이 눈을 떴다.
두 번째의 삽입은 처음보다 쉬웠다. 그리고 겨우 몇 번의 피스톤질만으로도 태운은 자신이 스스로 움직일 때는 느낄 수 없었던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쾌감을 느꼈다. 태운은 전체적으로 다 잘 느끼는 편이었지만, 특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지점이 있었다.
“읏, 읏, 흐읏!”
그리고 혁진은 그곳만을 퍽퍽 쳐올렸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운의 성기에서 다시 맑은 액체가 번들거렸다.
태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태운이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입안에서는 신음성이 멈추지 않았다. 혁진의 허리 짓이 점점 거세어졌다. 움직임이 거세질수록 미칠 것 같은 쾌감에 태운은 혁진이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맑게 새어 나오던 액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태운의 골반을 잡고 움직이던 혁진은 한 손으로 그 액체를 만졌다. 그리고는 액이 나오는 구멍을 비비기 시작했다. 앞뒤로 전해지는 자극에 이미 한껏 높아진 교성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몸이, 녹는 것, 같…… 흣.”
태운이 머리를 시트에 무자비하게 비볐다. 견디는 것만으로도 힘든 쾌감이었다. 그런 태운의 반응을 보며 혁진은 점점 더 속도를 높였다. 쾌락에 무너지는 태운의 모습은 혁진에게도 큰 자극이었다.
“흐으, 흣, 흣……!”
태운은 오래 달리기를 한 사람이 내는 것 같은 숨소리를 내었다. 온몸을 적신 땀이 태운을 더 습해 보이게 했다. 혁진은 이제 아예 태운의 성기를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듯이 주무르고 있었다. 태운의 하얀 몸 위로 혁진의 땀이 뚝뚝 떨어졌다.
태운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혁진이 태운의 가장 깊은 곳에 성기를 처박았다. 사정의 전조였다. 혁진도 태운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점액질을 뿜어내었다. 태운은 다시 축 늘어졌고 혁진은 축축해진 태운의 몸을 끌어안았다.
태운은 혁진이 자신에게 느끼는 부채감 같은 감정을 어렴풋이 느꼈다. 언젠가부터 혁진은 그것을 짐작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자신을 대했다. 그 무거운 혁진의 마음은 절대 말로써 밖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태운은 벅차오르는 마음에 입술을 물며 대신 혁진에게 살포시 몸을 기대 살을 맞대었다.
편안한 기분이었다. 사정 후 나른함 때문인지 잠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태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혁진에게 기대 잠이 들었다. 혁진은 자신의 품에 기대 잠든 태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조심스럽고 정중하면서도 경계심 많은 녀석이 이렇게 품에 안겨 오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것이 이제는 익숙하면서도 또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혁진은 태운을 품에서 재웠다. 태운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혁진이 소리 없이 웃었다. 이 녀석은 가끔씩 사람을 이렇게 웃게 했다.
태운이 완전히 잠들었을 때 혁진은 태운을 안아 들었다. 워낙 가볍게 든 덕인지 태운은 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혁진은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태운을 욕조 안에 기대 앉혀 놓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태운이 뒤척였다. 혁진은 그런 태운을 다시 잡아 욕조에 안정적으로 기대 놓았다.
“아…….”
하지만 물이 가슴께까지 차자 태운이 잠에서 깨고 말았다. 자신이 물속에 잠겨 있다는 것을 알고 얕게 버둥거리던 태운이 혁진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태운의 트라우마는 여전했다. 물과, 물에 더 공포를 느끼게 한 혁진에 대한 트라우마.
행위가 끝나고 혁진이 씻겨 주려 했을 때, 그 트라우마가 되살아나 욕조에 담가져 덜덜 떨기만 했었던 적이 있었다. 혁진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고, 태운은 물에서 나와 덜덜 떨면서도 트라우마에 대해 모든 것을 이야기했었다.
아주 어릴 때, 물가에서 놀다가 동생이 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 태운은 그런 아정을 구하기 위해 물에 들어갔다 죽을 뻔했었다. 그 뒤로 깊은 물에는 들어가지 못했었는데, 언젠가 물속에서 혁진을 받아내다가 그 트라우마가 심화되었고, 그 이후에는 욕조에조차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태운이 더듬더듬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혁진은 아주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혁진은 태운을 욕조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이렇게 혁진을 보면 안정이 되는 것이었다.
“왜…….”
“씻어야지.”
태운이 눈을 깜빡이며 혁진을 바라보았다. 눈을 떴을 때 욕조에 있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혁진이 들어 주는 목욕 시중에까지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픽 하고 웃은 혁진은 태운의 머리에 거품을 만들어 냈다. 태운은 딱딱하게 굳어서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혁진이 가볍게 태운의 머리를 감기고 다시 머리를 욕조에 기대게 한 뒤 머리에 물을 뿌렸다.
뻣뻣하게 굳어 혁진의 손에 머리칼을 맡기고 있던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물과 섞여서 바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혁진은 물을 멈췄다.
“왜 울어.”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울고 있었나. 손을 올려 눈가에 대어 보았지만, 묻어나는 건 물뿐이었다. 하지만 금세 자신의 눈에서 뜨거운 무엇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태운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괜찮았잖아. 눈물 날 만큼 다시 물이 무서워진 건가.”
“아닙니다. 그런, 건…….”
태운이 어느새 더 잠겨 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혁진이 가운을 벗어서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태운을 당기자 태운이 가볍게 끌려왔다. 혁진이 다시 태운을 품에 안았다.
혁진은 소리 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끔씩 태운이 이렇게 굴 때마다 혁진은 후회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혁진이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감정은 오직 태운에게만 향했다.
“그냥, 이렇게 저에게 해 주시는, 것들이 익숙하지 않아서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어렸을 적부터 한 번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보살펴진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무엇이든지 혼자 했어야 해서…….”
태운은 그 말을 마치고 푹 고개를 숙였다. 혁진이 그런 태운을 뒤에서 안았다. 태운이 혁진의 품 안으로 파묻혔다. 단단한 혁진의 품속에서 태운은 조금 울었다. 혁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운의 얼굴이 붉었다. 따뜻한 물속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참을 울었기 때문도, 어린아이처럼 혁진에게 씻겨진 게 민망한 탓도 있었다.
욕실에서 나와 아무 반응 없이 태운에게 그저 생수병을 건넨 혁진은 곧 공손하게 그것을 받아 드는 태운의 젖은 머리를 문질렀다. 태운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혁진은 그런 태운의 고개를 들게 해서 자신과 눈을 맞췄다. 이렇게 눈을 맞추는 데도 이제 태운은 조금 익숙해져 있었다.
“앞으로 네가 무엇을 하더라도 내가 책임져 줄게.”
그 단단하고 무거운 한 마디. 태운은 거기에 담긴 의미를 모두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목이 메어서 그 말을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 * *
“다들 들으셨죠? 우리 영화가 어제 천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다 여러분들이 수고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축하드립니다. 진짜 감사할 일들이 너무 많은데, 아 모르겠다! 오늘 같이 좋은 날 그냥 다 같이 마시고 죽자고요. 기분이다, 내가 다 쏜다!”
감독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배는 들떴다. <이유 있는>이 어제 천만 관객을 돌파한 것이었다.
감독의 부름 아래 촬영이 끝나고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던 배우와 스태프들이 오랜만에 모두 모였다.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 입에는 전부 웃음꽃이 피었다.
“태운 씨는 벌써 주연으로만 두 번째 천만 아냐? 태운 씨가 스물여섯이었던가? 일곱이었던가? 대단하네. 자 제일 많이 고생한 우리 태운 씨, 태운 씨가 제일 먼저 한 잔 받아!”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구석 테이블에 매니저와 둘이 앉아 있던 태운에게, 축배사를 마친 감독이 술병을 들고 제일 먼저 찾아왔다. 태운이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받았다.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천만 관객 돌파는 신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어도, 흥행에는 여러 가지 변수들이 많았다. 그 여러 변수들을 뚫고 천만 관객을 돌파한 것이었다. 기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진짜 고생 많았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영화 선택해 줘서 고맙다. 태운 씨 오늘 제일 많이 마셔. 내가 다 계산한다!”
감독이 낄낄 평소답지 않게 웃었다. 태운이 감독이 따라 준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있던 병을 들어 감독에게 내밀었다. 감독이 웃으며 잔을 받고는 단번에 잔을 비웠다.
“다음은 우리 찬혁이.”
감독은 까칠해서 다른 사람들은 다가가기 힘든 찬혁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 술잔을 채워 주었다. 감독에게 찬혁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감독이 힘들 때 개런티 없이 영화에 출연해 주었던 인연이었다. 진창에 구르는 것을 보며 마음을 많이 썼었는데, 이렇게 다 잘되니 좋은 것이었다.
감독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다니며 술잔을 나눴다. 태운에게도 계속 사람들이 오갔다. 축하를 하고 축하를 받고, 태운도 제법 정신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들뜬 기분이었다. 이미 한 번 천만 관객을 돌파해 본 적도 있고, 연말마다 시상식 상을 휩쓸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이렇게 들떠 본 적이 없었다. 태운에게 중요한 것은 연기였고 시상식 같은 건 연기를 하기 위한 내키지 않는 과정들에 불과했었다. 가만히 시상식 테이블에 앉아서도 속으로 대본을 외우곤 했었다.
축하주를 건네는데 거절할 수 없어, 전부 마시니 태운도 금방 취기가 올랐다. 잘 취하는 편은 아닌데 짧은 시간에 주량을 넘겨 버렸다. 태운이 빼지 않고 마시자 평소에는 태운을 조금 어려워했던 사람들도 분위기를 타고 다가와 한 잔씩 건넨 탓이었다.
오랜만에 태운의 스케줄에 동행한, 이제는 소속사 사장이 되어 버린 매니저가 어느 순간부터 중간에서 잘라 주기는 했지만 태운은 자신에게 건네지는 술을 계속 마셨다. 기분이 좋았다.
“무슨 술을 정신을 놓을 때까지 마셔.”
태운이 쓰러지려고 하자 자리가 파하기 전인데도 매니저가 태운을 들쳐 메서 나왔다. 아직도 안에서는 다들 네 발로 선 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감독조차 얼큰하게 취해 가보겠다고 인사를 하는데도 알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매니저가 축축 늘어지는 태운을 부축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태운이 이렇게 기분 좋게 술을 마시는 건 그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아무리 술을 먹어도 풀어지는 법 없던 녀석이 이렇게 축축 늘어지는 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집으로 갈 거지?”
태운을 보조석에 앉혀 놓고 매니저가 확인하는 것처럼 물었다. 대답이 나올 거라곤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운은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시트에 축 늘어져 있었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제법 또렷했다. 태운은 이사를 한 뒤로는 호텔로 가지 않았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찾던 호텔에 더 이상 가지 않는 태운의 상황에 매니저는 의아한 마음도 있었지만 직접 물을 생각은 없어서 그냥 운전대를 잡았다.
일찍 나온 편인데도 시간은 벌써 새벽 세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새벽의 도로는 한산하기만 했다. 빌라에 도착하자 태운이 눈을 떴다. 비틀거리면서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뒷모습을 매니저는 끝까지 응시했다.
엘리베이터는 주차장과 카드로 인식되는 층만을 오갔고 그 층에는 집조차도 하나뿐이었다. 태운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움직이는 곳마다 자동 센서로 불이 켜졌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혁진이 자고 있었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걷는다고 걸었지만 휘청휘청 발소리를 냈다. 감각이 예민한 혁진은 단번에 눈을 떴다. 태운에게서 알코올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이태운.”
“네.”
목소리가 이상하게 늘어진다고 태운은 생각했다. 휘청휘청 마저 걸어 태운은 혁진이 누워 있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얼마나 마신 거야.”
“조금, 많이. 마셔서 얼마나, 마신 건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태운은 정확한 양을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혁진이 낮게 웃으며 침대 위에 상체만 걸쳐져 있는 태운을 제대로 끌어 올렸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너무 많이 마셔서.”
말을 하며 태운이 혁진에게 가까이 붙었다. 앉아 있는 혁진의 다리에 자신의 머리가 닿자 태운이 어린 강아지처럼 머리를 비볐다. 이번에는 정말로 어이가 없어서 혁진이 웃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운 녀석이 대체 얼마나 마셨기에 이렇게 스스럼없이 붙어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게 나쁜 기분은 아니라 혁진은 태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다듬어 주시면, 잠이 와서.”
술이 들어가면 속에 있는 말을 하는 것이 태운의 주사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솔직한 모습은 혁진도 처음이었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영화가 잘된 것이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혁진은 대답 없이 태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말을 들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태운의 얼굴이 유독 밝아 보였다.
“영화, 찍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운의 말에 눈치가 기민한 혁진은 태운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챘다. 대가를 주고 태운과의 섹스를 사던 많은 날 중 하루.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한 태운에게 벌을 내리듯 모든 일정을 정리하고 호텔에서 몇 달이고 자신을 받을 준비를 하며 대기하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태운은 영화를 찍게 해 달라고 혁진의 발치에 엎드렸었다. 오 년 동안이나 인형 같았던 녀석이 첫 만남 때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인간처럼 보였던 어느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태운을 보는 시선이 조금 이상해졌었다.
“사실, 오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그 영화 찍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자꾸만 대본 들고, 찾아오시는 감독님이 부담스러워서…… 피해 다니기도 하고 했었습니다.”
태운은 혁진의 살에 꼭 붙어서 주절주절 말을 이어 갔다.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고, 술기운에 이렇게 혁진과 누워 있는 것이 좋아서 평소보다 말이 늘었다.
“행복하고 밝은 역할만 했었습니다. 들으시면 웃으실지도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해도 안 웃어.”
“부모님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재벌. 돈 때문에 고민도 하지 않고, 남에게 사랑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연기를 하다 보면, 제가 정말로…… 그렇게 밝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어서…….”
거기까지 말한 태운이 숨을 멈췄다. 술에 절어 알딸딸한 머리로도 그냥 조금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태운이 다시 혁진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혁진이 가만히 그런 태운의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 없는 속마음이었다. 술기운을 빌렸지만, 혁진이 아니었다면 태운이 결코 입 밖으로 낼 리 없는 말들이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계약서에 사인을 했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 망설였습니다. 근데 영화를 찍을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어딘지 답답하고, 오기가 생겼었습니다. 그래서…….”
태운은 말을 멈췄고, 혁진은 한숨과도 같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태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인지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영화, 찍게 해 주셔서.”
혁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결국 견디지 못하고 태운을 일으켜 안았다. 차마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 듯 태운이 혁진의 품으로 축 늘어졌다. 그리고 혁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지금 저는 꼭 연기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태운이 말을 삼켰다. 그리고 가만히 혁진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술기운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혁진은 말없이 축 늘어지는 태운을 받아 주었다.
“카메라 앞에서만, 어설프게 흉내 낼 수 있었던 감정들을, 알게 되어…… 버렸습니다.”
몸은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늘어졌다. 태운이 몸을 붙여 오자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혁진에게도 전해졌다. 하지만 취한 사람답지 않게 이상할 정도로 태운의 발음은 또박또박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말하기가 힘에 부친 듯 중간중간 숨을 내쉬기 위해 말을 끊지 않았다면 전혀 티 나지 않을 정도였다.
“가끔은 무섭습니다……. 다시 잃어버린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말이야말로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일까. 태운은 한참 망설임 끝에 칭얼거리듯 입안에 있던 말을 밖으로 밀어내었다. 술에 취한 뇌는 태운의 공포를 몇 배 더 극대화시켰다.
혁진이 제게 끝이라고 말한다면,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릴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 매일매일 깨닫게 되는 벅찬 감정들은 모두. 춥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태운의 이가 덜덜덜 부딪쳤다.
“아니. 그것은 내가 준 것이 아니야. 네 스스로 깨달은 것이지. 나를 매개로 얻은 감정일 수는 있어도 내가 그 감정의 전제가 될 수는 없어. 네 감정의 주인은 너다.”
혁진의 말에 태운은 부서질 듯 웃으며 그저 혁진의 어깨에 턱을 묻고 고개를 저었다. 말로 하는 부정이 더해지지 않았을 뿐, 그것은 태운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부정이었다.
혁진이 없었다면, 배울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보통 사람의 평범한 감정. 그것을 그리며 연기를 하면서도 한 번도 직접 느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런 것이었다.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던 태운이 연기에 간절했던 것은 그렇게라도, 연기를 하는 그 카메라 앞에서의 짧은 순간이라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벗어날 수 없는 지옥 같은 현실을 잊고 싶어서.
“이태운.”
태운은 대답 없이 가만히 웃었다. 혁진의 어깨에 기댄 상태라 혁진에게는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태운은 목소리를 끌어 올리려 했지만 술기운에 평소보다 감정이 배가 되어서인지 목이 잠겨 밖으로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태운아.”
하지만 혁진은 곧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다시 한번 불렀다. 태운이 그래도 대답이 없자 혁진은 자신의 어깨에 파묻혀 있는 태운을 떼어 내 태운의 턱을 쥐고 눈을 맞췄다.
“대답해야지. 이태운.”
턱이 죄여진 태운은 간신히 목소리를 끌어내었다.
“……네.”
“고작 몇 년의 유희를 즐기자고, 내가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이렇게 너를 옆에 둔 것 같아?”
태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모르게 태운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었다. 울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태운이 혀를 아프게 깨물었다.
혁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첫 시작부터 지금까지, 태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최악의 연속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는 건 변명밖에 되지 않았다. 분명 어느 순간부터는 알면서도 방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혁진은 받아 주었고, 아무 대가 없이 보내 주었고, 다시 찾아온 자신을 또 받아 주었다.
“너 이런 얼굴 하는 것 보고 싶어서 하는 말 아니니까 혀 깨물지 마.”
혁진이 힘을 주어 태운의 뺨을 쥐었다. 태운은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태운이 가만히 입을 벌리자 손에 힘을 푼 혁진이 태운의 뺨을 툭툭 쓸었다. 태운은 멍한 얼굴로 혁진을 응시했다.
“너를 내 옆에 이렇게 두기까지 난 수도 없이 내 원칙을 어기고 또 어겼어.”
“…….”
“이태운. 사업하는 사람이 원칙을 어긴다는 건 그만큼의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너를 옆에 두는 것 절대 가벼운 마음 아니야.”
혁진의 단단한 말에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술에 취해 멍한 머리로도 혁진의 말이 한 글자씩 박혔다. 태운은 인형처럼 멍하니 앉아 그 말을 곱씹고 또 생각했다. 평소에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입 밖으로 표현이 잘 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지금 그 말들을 조합해서 입 밖으로 내는 건 더 어렵게 느껴졌다.
“죄송, 죄송합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아니,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웃어.”
태운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눈물방울과 웃음이 뒤섞였다. 혁진이 마주하고는 픽 웃었다. 그러자 태운의 웃음이 자연스러워졌다.
태운은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감정은 아니었다. 태운은 눈가가 시큰해질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심장이 빨리 뛰고 목이 먹먹했다. 그래도 태운은 웃었다. 웃기만 하면 된다면 태운은 평생을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태운은 계속 해사하게 웃었다. 어찌나 방긋방긋 웃는지 반달로 접힌 눈꼬리와 입술 끝이 닿을 듯 가까웠다. 술기운에 빨갛게 달아올라 혈색이 도는 것 같은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자 혁진조차 웃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
너무 환하게 웃어 얼굴 근육이 아플 것 같아 혁진이 태운의 입꼬리를 잡고 내렸다. 하지만 태운은 다시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태운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혁진이 태운을 침대 위로 눕혔다. 축 늘어진 태운은 이상할 정도로 혁진에게 가볍게만 느껴졌다.
침대 위로 눕히고 브리프를 제외한 모든 옷가지를 벗길 때까지도 태운은 눈을 뜨지 않았다. 혁진은 잠결에도 올라간 태운의 입꼬리를 쓰다듬었다. 머릿속으로 문득 어느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이십 대 초반, 절박하게 자신의 발치에 엎드려 입꼬리를 올려 웃던 얼굴.
억지로 꾸며 낸 것이 역력해 보이는 미소였지만, 자신의 객실에 무단으로 침입해 천박한 유혹을 하는 태운을 알몸으로 쫓아낸 후에도 그 웃는 얼굴이 계속 생각났다. 그때 처음으로 혁진은 스스로의 원칙을 어겼다. 하지만 다시 침대 위로 눕힌 태운은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 꾸며 낸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그저 인형처럼 혁진의 손아귀에서 흔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오 년, 대가만 지불하면 언제든 섹스를 할 수 있는 태운은 편했다. 징징거리지도 않고 애정을 갈구하거나 침대 위에서 노골적으로 대가를 요구를 하지도 않았다. 살아 있는 섹스 돌. 혁진은 태운을 그렇게 취급했고, 태운은 담담하게 정말 섹스 돌이라도 된 듯 굴었다.
그래서 영화를 찍는 것을 허락해 달라며 다시 그 억지 미소를 지었을 때, 혁진은 조금 당황했었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을 찍은 섹스 비디오가 있다고 고백했을 때의 그 미소.
감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저 태운을 품에 안고 얼렀던 것도 이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얼굴 때문이었다. 혁진은 손끝으로 태운의 입꼬리를 만졌다. 이불을 덮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운지 태운이 온기를 찾아 혁진에게로 몸을 붙여 왔다.
혁진은 다시 한번 태운의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태운이 다시 잠결에 웃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이 내리는 계절이 되었다. 혁진과 태운의 시간도 소복하게 쌓였다.
침실 안에는 빛이 한 줌도 들어오지 않아 태운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새벽에 혁진이 자신을 깨웠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도무지 눈을 뜨지 못하자 혁진은 그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는 푹 자라 말하고서 커튼을 치고 나갔다.
거기까지 떠오르자 태운은 순간적으로 잠이 확 달아났다. 많이 건강해진 아정은 수능을 치고 어머님과 장기 여행 중이었다. 덕분에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대부분 혁진과 같은 시간에 일어나 함께 운동하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했다.
오늘은 같이 운동할 수 없겠구나.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내쉬며, 커튼을 조절하는 리모컨을 찾아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협탁을 더듬어 리모컨을 찾아 들고 버튼을 누르자, 커튼이 걷히며 겨울 특유의 회색빛이 섞인 햇살이 방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태운은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망연하게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베개 위에 올려져 있는 검은색 상자를 발견했다. 주먹을 두 개 붙여 놓은 것보다 조금 큰 상자는 제 머리맡에 있었지만 태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태운은 문득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 머리맡의 선물.
하지만 태운은 연상되는 생각을 끊어 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의미를 두어 본 적 없는 날이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말랑말랑한 날에 의미를 두기에는 태운의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혁진도 의미를 둘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 혁진의 물건이 떨어졌으리라 짐작하며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들어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태운은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을 탐내면 스스로가 비참해진다는 것을 살면서 배워 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침실을 빠져나가면서도 그 상자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운동 후 샤워까지 마치고 응접실로 돌아오던 태운은 소파에 앉아 있는 혁진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이제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혁진이 퇴근하기에는 일렀다.
태운을 등지고 있던 혁진도 태운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것인지 고개를 돌려 태운을 보았다. 태운이 가만히 멈춰 서 있자 혁진이 제 옆자리를 손짓했다. 태운이 끌리듯 그곳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내 혁진의 손에 들린 검은색 상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침실에서 본, 이상하게 눈길이 가던 그 상자였다.
“왜 그래.”
“아닙니다.”
태운은 대답을 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떼어 결국 혁진이 눈짓한 자리에 앉았다.
“열어 보지도 않았군.”
혁진은 상자를 손안에 들고 말했다. 조금은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상자를 열었다. 상자 밖으로 꺼내져 혁진의 손에 들린 물건은 유리처럼 투명한 원으로 만들어진 지구본이었다.
“손 내밀어 봐.”
태운은 의아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양손을 붙여 혁진에게 내밀었다. 혁진은 그 위로 손에 들고 있던 지구본을 내려놓았다. 태운은 눈을 깜빡이며 제 손안에 올려진 지구본을 내려다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어 그대로 그것을 들고 있던 태운은 이내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 혁진과 함께 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허름한 지도를 주면서 했던 말.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네게 줄 수 있는 게 없지만, 언젠가는 세상을 전부 네 발아래 놓아 줄게.’
태운이 두 손바닥을 겹친 채 그것을 가만히 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머리맡에 올려져 있던 선물. 말랑말랑한 상상. 그 상상을 기대하게 되는 자신이 싫었는데……. 그런 태운을 향해 혁진이 입을 열었다.
“네게 세상을 주지는 못 해.”
“……그런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가 살아갈 세상에 평화를 만들어 줄 수는 있어.”
태운은 숨을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세상은 이미 혁진의 것이었다. 혁진이 그저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세상은 지탱되었다.
“이미…… 제게 세상을 주셨습니다.”
혁진이 웃으며 태운을 품으로 당겼다. 태운이 혁진의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혁진의 향이 전해지자 태운은 정말로 진정이 되지 않았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혁진의 등을 끌어안았다. 수런거리는 마음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태운이 혀를 내밀어 조심스럽게 혁진의 와이셔츠 위를 핥았다. 혁진의 향이 너무 진해서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와이셔츠를 핥았을 뿐인데 태운은 입안에 혁진이 들어온 것만 같았다. 머리가 핑 하고 도는 느낌이 들었다.
혁진이 아무 반응이 없자 조금 대담해진 태운은 혀를 조금 더 길게 내어 혁진의 와이셔츠에 자국을 내었다. 자신의 품 안에서 제법 귀엽게 구는 태운을 내려다보며 혁진이 소리 없이 웃었다. 혁진이 가벼운 손길로 제법 길어진 태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
하지만 태운은 자신의 타액에 축축하게 젖은 혁진의 와이셔츠를 확인하고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태운의 눈치를 빤히 읽은 혁진은 그대로 와이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태운의 표정이 아득해졌다.
결국 와이셔츠의 단추를 끝까지 푼 혁진은 그대로 와이셔츠를 벗었다. 혁진의 단단한 상체가 드러났다. 태운의 목울대가 길게 움직였다. 혁진은 그대로 태운의 고개를 다시 자신에게 묻게 했다. 태운의 얼굴이 당황으로 굳었다.
혁진은 계속해서 태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멍한 얼굴이 된 태운은 곧 혁진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다시 혀를 내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강한 남자의 향이 태운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단단한 혁진의 살이 태운의 혀에 닿았다.
조심스럽게 혁진의 맨살에 혀를 가져다 대던 태운은 다시 대담해져서 마치 어미의 젖을 빠는 어린 짐승처럼 춥춥 소리까지 내며 혁진의 살을 빨아들였다. 말랑말랑한 어미의 가슴은 아니었지만, 태운은 아주 깊은 곳에 결핍되었던 무엇인가가 충족되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동안 어깨를 태운에게 내어준 혁진은 그대로 태운을 소파로 눕혔다. 태운은 눕혀지면서도 혁진의 살을 물고 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배를 채우기 위한 어린 짐승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혁진은 태운의 뺨을 잡고 몸을 세웠다. 태운의 입에서 혁진의 상체가 떨어졌다. 태운은 온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대신에 혁진은 태운에게 입을 맞췄다.
드물게 적극적이 된 태운은 제 입안에 침입한 혁진의 혀를 조심스럽게 혀로 맞았다. 혀와 혀가 얽혔다. 태운은 제 안을 침입한 약탈자의 약탈을 도왔다. 자신의 입안의 모든 곳들을 혁진이 가져갈 수 있도록 움직였다.
태운이 숨이 모자라 색색거리는 소리를 냈다. 혁진이 태운의 양 뺨을 잡고 입술을 떼었다. 태운이 무의식중에 목을 세우며 혁진의 입술을 따라갔다. 혁진이 소리 없이 웃었고, 태운은 양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건 내 앞에서만 하는 거야.”
붉게 달아오른 태운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태운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 끝을 씹었다. 혁진이 검지로 조심스럽게 물려 있는 태운의 입술을 빼내더니 자신의 이로 아프게 그 입술을 물었다.
입술에 느껴지는 고통에 태운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지만, 태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카메라 앞에서도 안 돼.”
혁진이 태운의 입술에서 치아를 떼며 말했다. 태운이 그제야 얕은 숨을 내뱉었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이태운.”
“아무하고도…… 안 할 겁니다. 아니 아무하고도, 안 합니다.”
당신을 제외하고는. 이 생략된 말이었지만 혁진은 말없이 태운을 다시 품에 넣었다. 태운이 혁진의 맨살에 다시 머리를 묻었다. 태운을 안고, 드러난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어 태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자국을 남긴 혁진이 다시 그를 소파에 눕혔다.
“나도 네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이렇게 품을 내어 주지 않아.”
혁진의 말에 태운이 홀린 것처럼 혁진의 목을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맞닿은 혁진의 입술의 온기를 느낀 태운이 조심스럽게 혁진의 입안으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태운다운 정중한 입맞춤이었다. 혁진은 태운의 간지러운 입맞춤을 가만히 받아 주며 태운의 등을 끌어안았다. 조심스럽게 혁진의 치열을 더듬기만 하던 태운은 더 이상은 못하겠는지 마지막으로 입술을 길게 맞댄 후에 입을 떼었다.
그 풋내 나는 스킨십을 제지하지 않고 가만히 견뎌 주고 있던 혁진은 태운이 입술을 떼어 내는 순간, 태운이 입고 있던 샤워 가운을 벗겼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혁진의 열기에 맞닿은 태운의 얼굴이 붉어졌다.
태운의 하체를 들어 제 다리 위에 걸쳐 놓는 혁진의 손길이 성말랐다. 혁진이 그대로 태운의 입안으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태운이 그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핥았다. 어느 정도 손가락이 축축해지자 혁진이 태운의 비부 속에 그것을 밀어 넣었다.
“흣.”
태운이 흠칫하고 혁진의 손가락을 담은 부분을 조였다. 혁진이 그 안에서 손가락을 둥글렸지만 빽빽한 태운의 항문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젤 없이 손가락만으로 안을 푸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혁진이 품에 안고 있던 태운을 바닥으로 내렸다. 태운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혁진은 그대로 태운의 입안에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었다.
태운이 습관적으로 자신의 입안에 꽉 들어 찬 성기를 죽 빨았다. 혁진의 성기는 이미 잔뜩 발기해 있는 상태였다. 혁진의 성기를 애무하면서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거렸다. 허리 밑 은밀한 부분이 부들부들 떨렸다. 겨우 손가락 하나가 들어찼던 곳이었다. 하지만 태운을 안달 나게 하는 곳은 손가락이 들어갔던 부분보다 훨씬 더 깊은 곳이었다. 혁진의 성기가 아니면 닿을 수 있는 게 없을 만큼 깊은 곳.
스스로는 인지하지도 못할 태운의 움직임을 보면서 혁진이 단번에 성기를 태운의 목 안으로 깊이 처박았다. 태운이 숨이 멎는 듯한 소리를 냈다. 혁진이 그대로 태운의 입안에서 성기를 뽑았다. 태운이 바들바들 떨었다.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태운을 소파 테이블을 짚고 엎드리게 한 혁진이 성기를 태운의 항문 안에 맞추고 그대로 사정했다. 점액질이 일부는 태운의 안으로 밀려 들어갔고 일부는 태운의 하얀 살을 더럽혔다.
“읏, 하응!”
혁진이 한 손으로 역시 발기한 태운의 성기를 주물렀고, 한 손으로는 태운의 항문을 마저 풀었다. 앞으로는 혁진의 손길에 견딜 수 없는 자극을 받고, 뒤쪽으로는 깊은 곳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게 되자 태운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자꾸만 휘청거렸다.
혁진은 제대로 서는 것이 불가능한 태운을 등이 소파에 닿도록 눕혔다. 태운은 자신이 눕혀진 줄도 몰랐다.
“빨리, 빨리요.”
어떤 자극을 빨리 해소해 달라고 하는 것인지 태운은 애가 닳아 미칠 것만 같은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사정해 조금 여유가 생긴 혁진의 손길은 느긋하기만 했다. 태운이 다시 엉덩이를 흔들며 안달했다.
“이상, 합니다. 빨리…….”
태운이 자신도 모르게 혁진을 재촉하며 몸을 뒤틀었다. 눈가에 기어코 눈물이 고였다. 혁진이 혀를 쯧 하고 차며, 태운의 성기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짐승의 젖을 짜내는 것처럼 죽죽 하고 성기를 짜내자 태운이 기어코 혁진의 손안에 정액을 뿜어내었다. 태운의 얼굴이 당황으로 질릴 틈을 주지 않고 어느 정도 풀어 낸 항문 안으로 혁진이 어느새 단단해진 귀두 부분을 처박았다.
“흣, 더, 더.”
양손으로 허벅지를 잡고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태운이 애가 닳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혁진이 손으로 어느 정도 풀어 놨는데도 불구하고 태운의 안쪽으로 혁진의 귀두가 빠듯하게 들어갔다. 이대로 안으로 처박으면 안이 찢어질지도 몰랐다.
혁진이 태운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그 살을 뚫을 듯한 고통조차 태운은 밑이 간지러워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태운은 다시 엉덩이를 흔들었다. 혁진을 조금이라도 깊게 받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관계 중에 조심스럽게 혁진의 목에 팔을 감는 것이 거의 유일한 능동적인 행동이던 태운은, 가끔 이렇게 분위기에 취해 성감이 고취되면 가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고 움직이곤 했다.
하지만 혁진은 그것에 휩쓸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태운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안달 난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안팎으로 문제였다.
느리게 전진하는 혁진의 성기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태운의 내벽은 지나치게 조여, 안으로 더 파고들 수가 없었다. 혁진이 쉽사리 닿아주지 않는 내벽 깊은 곳의 간지러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태운이 온몸에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몸에, 힘, 빼.”
태운은 몸에 힘을 빼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혁진은 온몸에 힘을 주고 자신을 조이고 있는 태운의 볼기를 손으로 짝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몸에 힘을 풀라는 뜻이었지만 역효과로 몸에 힘을 더 들어가게 할 뿐이었다.
태운은 울먹이며 몸에 힘을 풀기 위하여 노력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은 이상했다.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수 있었다.
“아악.”
성기를 밖으로 조금 물렀다 더 깊이 안으로 파고들기를 반복하던 혁진은 결국 한 번에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태운은 장기가 뒤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에 진저리 쳤다.
태운은 혁진의 목이 구원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붙들었다. 혁진이 태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번 내벽 안으로 낸 길을 빠져나왔다가 단번에 다시 처박았다. 태운의 입에서 비명이 되지 못한 신음이 턱 하고 흘러나왔다.
하지만 고작 고통만으로는 치부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던 부위들을 혁진이 지나가면서 전부 긁어 주었다. 태운은 참았던 숨을 내쉬면서도 혁진을 끌어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는 혁진의 거센 허리 짓의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허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하면 조금 편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었다.
“하으, 읏, 으윽.”
어느 순간 태운이 팍 튀어 올랐다. 태운의 성기에서는 맑은 물 같은 액체가 움찔움찔 새어 나왔다.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혁진이 다시 한번 그곳을 찍어 눌렀다. 태운이 몸이 덜덜 떨렸다. 지독한 쾌감이었다.
못을 박듯 그 부분에만 허리 짓을 하던 혁진은 다시 태운 안쪽 깊숙한 곳으로 허리를 처박았다. 태운이 다시 몸을 떨었고 그대로 혁진은 태운의 안에 정액을 쏟아 넣었다.
내부가 뭉근한 액체들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에 태운은 혁진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더했다. 완벽하게 혁진과 결합된 기분이었다. 다시는 둘로 갈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카메라 앞에 섰을 때와 비슷했다.
태양빛과도 같은 조명이 자신만을 유일하게 비춰 주는 것 같은 감각. 그 뜨거운 빛에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태운의 눈가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대한 눈물이었다. 혁진은 마치 태운의 그 마음을 아는 것처럼 몸을 숙여 태운의 눈물을 핥아 주었다.
“이렇게 맞닿은 것, 만으로도…… 완전해지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시트에 푹 늘어진 태운이 말을 골랐다. 이 감정을 도대체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고르던 태운은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수백 번도 넘게 말했던 단어를 떠올렸다.
“사랑……, 일까요.”
겨우 그 말을 한 것뿐인데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혁진은 대답 없이 눈물이 흐르는 태운의 뺨을 길게 핥아 주었다.
“사랑……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답 없이 혁진은 느슨하게 걸쳐져 있던 성기를 다시 태운의 안으로 처박았다. 성감이 고취되어 견딜 수 없는 듯, 그 움직임에 평소답지 않은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혁진의 거친 움직임에 몸이 의지를 잃고 흔들리면서도 태운은 희미하게 웃었다.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대답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혁진이 자신에게 이렇게 조급하게 구는 것이 좋았다. 혁진이 더 깊숙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태운은 움직였다. 정말로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큰 충족감이었다.
* * *
태운이 새로 들어가기로 한 영화의 감독이 가진 별난 징크스는 연예계에서도 유명했다. 주연 배우에게 변태적인 취향의 속옷을 선물하면 영화가 크게 대박 난다는, 대체 어쩌다가 생긴 것인지조차 의심되는 징크스―아내에게 선물하려고 산 속옷을 주연 남배우에게 잘못 전달했다는 이야기가 소문 중에 가장 정상적이긴 했다.―였는데, 처음 그 속옷을 선물 받은 남배우의 캐릭터가 엄청난 인기를 끌며 그 영화가 대박이 난 후로 쭉 징크스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 후 다른 작품에서 속옷을 선물 받은 주연 배우가 수치심에 길길이 날뛰며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은 후, 영화가 손익 분기점의 1/10도 채우지 못하고 망해 버렸다고 하니 감독의 징크스 신봉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징크스는 태운도 피해 가지 못했다. 태운은 대본 리딩이 끝난 후, 민망해서 얼굴을 붉힌 감독에게 제발 버리지만 말아 달라는 애원과 함께 진한 붉은색의 입술 마크가 그려진 핑크색 쇼핑백을 선물 받았다.
얼결에 선물을 받아 든 태운은 나중에 매니저에게 감독의 징크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쇼핑백을 열어 보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혁진의 집까지 들고 오게 되었다. 집에는 아정이 있어서 차마 들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어쩐지 민망한 기분에 태운은 대본을 쌓아 두는 상자 안쪽으로 쇼핑백을 밀어 넣었다. 아정이 잠들면 집으로 가져가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잘 둘 생각이었다. 쇼핑백 위로 대본까지 쌓아서 완전 은폐를 마친 태운은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태운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는 거실 소파에 혁진이 앉아 있었다. 쇼핑백을 넣어 둔 상자 근처여서 태운은 당황한 나머지 눈에 띄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그래?”
“아닙니다.”
태운이 말끝을 흐렸다. 쇼핑백이 신경 쓰였다. 매니저가 설명한 감독의 선물은 듣기만 해도 민망한 것이라 차마 혁진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이상하게 굴던 태운은 결국 상자를 통째로 치워 버리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집에 가져갈 때가 아니면 항상 소파 옆쪽으로 두던 상자라 그것을 움직이는 게 더 수상해 보인 모양이었다.
“집에 갈 건가?”
“아닙니다. 좀…… 지저분해 보여서.”
태운이 말을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몇 달을 그 자리에 있던 상자가 갑자기 지저분해 보인다는 것은 역시 이상했지만, 태운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그저 이것을 어디다 가져다 두어야 눈에 띄지 않을까 하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가지고 와 봐.”
혁진이 수상해 보이는 상자를 눈짓했다. 성인 영화의 대본이라도 받아 왔나 하는 생각이었다. 태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혁진이 유쾌하게 웃었다. 태운은 혁진의 반대편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이 더 수상해 보였다.
“괜찮, 습니다.”
“뭐가.”
뭐가 괜찮아 하고 묻는 혁진의 말에 태운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정도로 태운은 패닉에 가까운 상태였다.
하지만 혁진이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태운은 완전히 거역하지도 못하고 쭈뼛쭈뼛 상자를 들고 혁진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차마 혁진에게는 내밀지 못해 계속 손에 든 채였는데, 자리에 앉아 있던 혁진이 그것을 가져갔다.
혁진이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것을 본 태운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한 번씩은 읽어 본 대본들을 하나씩 치워 가던 혁진은 대본이 들어가지 않는 빈 공간에 깊숙이 넣어 놓은 문제의 그 쇼핑백을 발견했다.
태운이 그 쇼핑백을 꺼내 드는 혁진의 손을 무의식적으로 잡았다. 그리고 혁진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었다. 제발 이쯤에서 그만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하지만 결국 그게 더 혁진의 궁금증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쇼핑백을 열고 안에 든 내용물을 꺼내자…… 혁진도 태운도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태운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감독의 취향은 생각보다 더 고약한 것이었다. 여성용 원피스 수영복과 같은 모양의 천 쪼가리와, 토끼 귀 모양을 한 머리띠. 그리고 토끼 손 모양의 장갑과, 수갑으로 보이는 물건까지 나왔다.
“뭐야, 이게.”
혁진이 하얀색 천 쪼가리를 손으로 들어올렸다. 태운이 고개를 푹 숙였다. 무엇이라 대답을 할 수조차 없었다. 태운이 입술을 물려고 했다가 바로 혁진에게 저지당했다.
천 쪼가리는 그래도 남자인 태운의 몸에 맞춘 것인지 제법 큰 크기였다. 심지어 꼬리로 추정되는 주먹만 한 털 뭉치가 붙어 있었고 그곳에서 조금 내려가면 엉덩이 부분이 끈으로 되어 있었다.
그 부분을 집어 든 혁진을 보면서 태운은 견디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다. 이대로 쥐구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쥐구멍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잘, 못했습니다.”
태운은 그저 혁진이 저것을 빨리 눈앞에서 치워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용서를 빌었다. 입술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공기 중에서 흩어졌다.
“뭘 잘못했는데.”
태운이 고개를 저었다. 혁진은 여전히 천 쪼가리를 손에 들고 있었다. 태운은 제가 그것을 입고 있기라도 한 듯 부끄러운 얼굴이었다.
“이리 와.”
멀거니 서 있는 태운에게 혁진이 손짓했다. 태운이 재빨리 혁진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높이가 낮아지자 그 천 쪼가리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혁진은 그대로 그만둘 생각이 없는 듯, 붉어진 태운의 뺨에 손을 올렸다.
태운의 뺨에서 혁진의 손으로 열기가 전해졌다. 태운은 그 차가움이 좋아 혁진의 손에 뺨을 기대다시피 했다. 태운의 뺨을 매만져 주던 혁진이 태운과 눈을 맞췄다. 혁진의 눈빛에 태운은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입어 봐.”
“무슨…….”
태운은 혁진의 말이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그 말의 의미를 한 번 되짚어 본 태운은 화들짝 놀라 혁진의 손에서 뺨을 떼었다.
“입으려고 가져 온 것 아닌가.”
“아, 아닙니다! 그게, 감독님이, 아니 이번에 들어가기로 한…….”
태운은 완전히 패닉 상태로 변명을 시작했지만 말은 제대로 된 문장이 되지 못하고 흘러나왔고 변명을 늘어놓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이런 것에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없습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태운이 드물게 혁진에게 소리를 높였지만, 혁진은 받아 주지 않고 가만히 태운을 응시했다. 이어지는 침묵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입혀 주는 것을 원하나?”
“아닙니다, 제가 하겠, 아니, 제가 아니라…….”
태운은 잔뜩 당황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을 막 뱉어 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그리고 혁진이 본 태운 중에 가장 당황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혁진이 픽 하고 웃으며 태운에게 천 쪼가리를 건네주었다. 태운은 목까지 빨개졌다.
“잘못, 했습니다.”
“그러니까 뭘.”
태운은 눈가까지 빨개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정말로 당황한 것이었다. 하지만 혁진은 짓궂어졌다. 태운의 빨간 목덜미를 스치고 그대로 손을 내려 태운이 입고 있던 셔츠를 벗겼다. 태운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혁진이 태운의 손에 억지로 들린 천 조각에 붙은, 꼬리로 추정되는 털 뭉치를 당겨와 태운의 유두를 간지럽혔다. 태운이 다시 있지도 않은 잘못을 빌었다.
“……읏, 잘못, 잘못 했어요…….”
태운의 유두가 꼿꼿하게 섰다. 혁진이 그 유두를 꾹꾹 눌렀다. 태운이 몸을 비비 꼬지도 못하고 고개만 저으며 머리끝까지 퍼지는 이상한 감각을 참았다. 하지만 혁진은 집요했다. 혁진이 얼굴을 내려 이로 태운의 유두를 자극하자 태운은 견디지 못하고 발가락 끝까지 힘을 줬다. 태운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혁진은 태운의 유두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태운의 바지로 손을 뻗었다. 고무줄로 된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서 속옷과 함께 한 번에 끌어 내렸다.
그대로 태운을 소파 위로 들어 올리자 태운의 바지가 가볍게 벗겨졌다. 그리고 태운에게서 입을 떼자, 태운은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혁진은 얇은 천 쪼가리를 태운의 손에서 다시 가져왔다. 태운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소파에서 일어선 혁진은 태운의 다리를 일자로 쭉 펴면서 들었다. 태운이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자신도 모르는 잘못을 빌었지만 반항을 하지는 못했다. 혁진은 손쉽게 그의 다리 사이로 천 조각을 넣었다.
그리고 태운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옷을 올리자 순식간에 태운은 타이즈 같은 민망한 옷을 입게 되었다. 토끼털처럼 하얀색이라 어쩐지 아이 같고 더 야했다. 낭창하고 예쁘게 마른 태운의 몸에도 조일 정도로 달라붙는 옷이었다.
남성용으로 제작된 것인지 성기를 정리하는 공간이 있었는데, 수영복 재질의 천이 어느새 발기해 버린 그곳을 쨍쨍하게 누르며 태운을 자극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꼬리가 달린 아래로는 끈으로만 얼기설기 엮여 있을 뿐 엉덩이 부분이 크게 뚫려 있었는데, 엉덩이 사이에 탱탱한 재질의 얇은 끈이 파고 들어가 태운의 엉덩이를 두 개로 갈랐다. 수영복 재질의 천 사이로 밀려 나오다시피 한 태운의 엉덩이는 평소보다 더 탱탱해 보였다. 태운은 엉덩이 골 사이에 파고든 끈 때문에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옷을 벗고 알몸으로 서 있을 때보다 몇 백 배 더 수치스러워서 태운은 정말로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화끈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잘못, 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아까부터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뭐든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혁진은 혀를 쯧 하고 찬 후에, 양손을 모아 빌 기세인 태운의 손을 잡아 팔꿈치까지 오는 토끼 발 모양의 하얀 장갑을 끼웠다. 더해서 태운의 머리 위로는 토끼 귀 머리띠까지 씌워 주었다. 태운이 눈을 감고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잘못한 게 많아.”
혁진은 태운이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서게 했다. 엉덩이 골 사이에 끼인 얇은 천이 더 깊숙하게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태운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벗, 겠습니다.”
태운이 어깨에 걸쳐진 얇은 천을 잡았다. 혁진이 허락만 한다면 당장 끌어 내릴 기세였다. 하지만 혁진은 그런 태운의 손만 끌어 내렸다.
“뭘 잘못했는지 말하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잘못을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견딜 수 없는 수치에 눈 밑에 눈물이 맺혔다.
“……이런 걸, 받아 왔습니다.”
“그건 잘못한 게 아닌 거 같은데.”
혁진이 바짝 조여진 태운의 몸 선을 손으로 훑으며 말했다. 태운은 정말로 차라리 이대로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될 리 없었다.
“말 안 듣는 아이처럼 볼기라도 맞아야 말하려나.”
그 말에 태운이 흣 하고 숨을 들이켰다. 태운을 놀리기로 작정한 듯 능글맞아진 혁진은 태운을 가볍게 무릎 위로 눕혔다. 쨍쨍한 천 사이로 드러난 하얀 엉덩이가 산처럼 들려 올려졌다. 유독 엉덩이가 동그랗게 모였다. 태운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토끼 귀 머리띠가 이마까지 축 처져서 태운을 더 미치게 했다.
엉덩이 위로 붙어 있는 꼬리털을 쓰다듬던 혁진은 그대로 태운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짝 하는 소리가 났다. 태운이 저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줬다. 그리고 그것은 겨우 잊어 가던 엉덩이 골 사이의 천을 다시 상기시켜 버렸다. 갑자기 그 얇은 끈이 신경 쓰여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마음에 안 드시는 것은, 뭐든지, 뭐든지 고치겠습니다.”
“어쩌지. 고칠 게 없을 것 같은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이해하기에는 태운이 반쯤 정신을 놓은 상황이었다. 다시 한번 혁진이 태운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따갑다가 주위로 열이 확 퍼지는 그 감각이 이상했고, 엉덩이 사이의 천이 자꾸만 느껴져 태운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차라리 혁진이 손을 내리치는 간격을 짧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태운이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이는 것으로 혁진에게 전해졌다.
혁진은 정말로 태운의 엉덩이를 때리는 간격을 짧게 했다. 엉덩이 사이로 퍼지는 따끔한 감각에 태운의 몸은 점점 더 열기를 더했다. 태운은 정말 몸이 불타 없어질 것 같았다.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태운의 숨이 거칠어지고 양 엉덩이가 붉게 물들 때까지 태운을 내리치던 혁진은 태운이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열기를 쾌락으로 받아들여 몸을 뒤틀자 내려치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태운의 엉덩이 골 사이에 손을 넣어서 얇은 천을 튕겼다. 그 감각에 태운의 몸도 같이 튕겨졌다.
“흣!”
혁진이 천 위로 태운의 성기를 만졌다. 이미 쿠퍼액으로 천이 축축해져 있고, 성기는 단단했다. 혁진이 다시 혀를 차자 그 감각이 자각되기 시작한 태운은 수치심에 몸을 비틀었다. 정말로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혁진은 한 손으로는 천 위로 태운의 성기를 자극하고 한 손으로는 빨갛게 달아오른 태운의 엉덩이를 매만졌다.
“흐응…….”
혁진의 손도 마찰로 뜨거웠지만 상대적으로 태운의 엉덩이가 더 뜨거웠기에 혁진의 손이 태운에게는 차게 느껴졌다. 양쪽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태운은 다리를 비비 꼴 정도였다.
하지만 혁진은 태운을 완전히 풀어 주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태운은 사정감을 참기 위해 엑스자로 다리를 꼬아서 바닥에 앉았다. 하지만 발뒤꿈치가 엉덩이에 닿아 오히려 더 미칠 것 같았다.
“매저 기가 있어 너.”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민감한 몸은 쾌락을 이기지 못했지만 완전히 정신을 놓지는 못했다. 몸은 뜨겁지만 머리는 수치를 알았다. 그래서 태운은 더 괴로웠고 더 몸에 열이 올랐다.
“잘못, 했어요. 잘못했습니다.”
“볼기를 조금 더 맞아야 할까.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말하라고 했잖아.”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차게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뜨거웠다. 그리고 점점 더 뜨거워져 갔다. 태운의 턱 끝이 덜덜 떨렸다. 이를 악물었지만 몸은 제어가 되지 않았다. 점점 상체가 비틀려 혁진의 다리에 닿을 것 같았다.
그리고 손이 먼저 제어를 벗어났다. 토끼 장갑을 쓴 손을 성기 위로 가져가다 혁진에게 잡힌 태운은 화들짝 놀랐다. 정말로 이래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몸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다시 한번 쯧 하고 혀를 찬 혁진이 소파 위로 던져두었던 수갑을 집어 들어 장갑을 낀 두 손 위로 채웠다. 태운은 다시 수치심에 눈물만 쏟아냈다.
수갑을 채운 양손을 벌 서는 아이처럼 들게 한 혁진은 제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태운의 눈이 검게 달아올랐다.
“나보다 더 먼저 싸 버리면 볼기를 다시 맞는 거야.”
태운이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혁진이 태운의 볼을 양쪽으로 눌러 잡으며 대답을 해야지 하고 속삭였다. 태운이 “네, 네.” 하고 더듬거리며 답했다.
손을 든 상태라 제대로 중심을 잡을 수 없는 태운은 엑스자로 교차한 다리에 힘을 주며 고개를 내렸다. 성기는 터질 것 같고 엉덩이 사이는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게다가 목이 탔다. 정말로 제멋대로인 몸이었다.
아이처럼 손을 든 채로 태운은 입안에 혁진의 성기를 물었다. 그 순간, 혁진의 발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태운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천 위를 비볐다.
태운은 입에 힘을 주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그보다 먼저 고꾸라질 것 같았다. 정신이 없었다.
제 성기를 비비는 혁진의 발에 태운은 도무지 펠라티오에 집중하지 못했다. 습관은 있어 열심히 혀를 움직였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잔뜩 민감해진 몸은 성기게 느껴지는 자극만으로도 천 위로 묽은 액을 쏘아 버렸다. 혁진이 사정하기 전이었다. 태운이 숨까지 차 붉어진 얼굴로 혁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처음으로 잘못했네.”
혁진의 낮은 말에 태운이 번득 정신을 차렸다. 태운은 숨을 참았다. 머리가 띵했다. 혁진은 손이 저린 것도 잊고 여전히 바짝 치켜들고 있는 태운의 손을 내리고 수갑까지 풀어주었다.
그리고 태운이 소파 등받이를 잡고 서게 했다. 그는 볼기를 때리는 대신에 태운의 엉덩이 골 사이에 파묻힌 얇은 천을 꺼내 몇 번 튕겼다. 태운이 고개를 뒤틀었다.
혁진은 그대로 얇은 천을 힘으로 끊어 버렸다. 태운이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달라붙는 천 사이로 여전히 태운의 둥근 엉덩이만 살을 내놓고 있었다. 혁진이 자신의 반쯤 발기한 성기를 태운의 골에 비볐다.
“으읏.”
태운이 엉덩이를 꽉 조였다. 혁진이 다시 태운의 볼기를 내리쳤다. 태운은 힘을 풀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혁진이 태운의 어깨를 밀어 소파에 기대게 하고 양팔을 뒤로 돌려 제 엉덩이를 벌리게 했다. 그리고 그대로 태운의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아, 아윽!”
혁진이 오늘따라 한 번에 거칠게 태운을 파고들었다. 태운은 제대로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고 계속 휘청거렸다. 혁진은 한 손으로는 태운의 배를 받치고 한 손으로는 태운의 꼬리를 만졌다.
허리를 움직이는 혁진의 속도를 태운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양손으로 엉덩이를 벌리고 있었다. 혁진은 그런 태운의 머리를 뒤로 쓰다듬었다. 하지만 태운이 쉴 틈을 주지 않고 세게 몰아붙이는 건 여전했다.
“흐응, 흣, 윽, 읏!”
태운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크게 흔들렸다. 혁진이 크게 치고 올라올 때마다 어깨뼈가 소파 등받이에 부딪쳤다. 뒤에서 들어오는 것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혁진이 더 깊게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안이 엉망이 되는 것 같아서 태운은 엉덩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부끄러워 다시 몸이 달아오르기를 반복했다.
“앗, 안, 돼, 거긴.”
혁진이 깊숙하게 쳐올리자 태운의 눈이 풀렸다. 태운이 안쪽에서 가장 느끼는 곳이었다. 태운의 성기에서 투명하고 맑은 물이 줄줄 흘렀다. 태운이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할 정도의 자극이었다. 정말로 안이 다 진탕이 될 것만 같았다. 아니, 안이 진탕이 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윽, 으앙, 앗, 앙!”
태운의 입에서 뜨거운 신음이 터졌다. 혁진이 귀두를 태운의 항문 끝에 걸칠 정도로 길게 뺐다. 내장이 다 딸려 나가는 기분에 태운이 아래에 힘을 주었다. 그 조여 든 통로로 혁진이 다시 침입했다. 태운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 혁진이 길게 사정했다. 안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태운은 여전히 손으로 볼기를 두 개로 가른 채로 울었다. 사정으로 흥분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 혁진이 태운의 몸을 돌렸다. 그리고 태운의 눈물을 핥았다.
“울면 어떡해. 이제 혼나야 되는데. 내가 몸 숙이지 말라고 했지.”
혁진이 태운을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았다. 태운은 소파 때문에 다리를 일자로 길게 벌려야만 했다. 매질로 달아오른 살이 혁진의 단단한 허벅지에 닿자 간지러웠다. 태운은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혁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혁진이 용케도 빠지지 않고 이마 끝에 걸쳐 있는 토끼 모양 머리띠로 태운의 앞머리를 모두 뒤로 넘겨 버렸다. 태운의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런 것, 안, 좋아합니다. 선물, 받았습니다.”
“선물?”
태운이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태운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듣던 혁진이 선물이라는 말에 나른하게 반쯤 감았던 눈을 떴다. 태운이 고개부터 저었다.
“기사에도, 나오는, 나쁜 징크스, 입니다.”
‘나쁜’에 힘을 주어 태운이 말했다. 매니저가 했던 것처럼 핸드폰으로 기사라도 찾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태운이 울어서 붉어진 눈으로 더듬더듬 그 징크스를 설명했다. 혁진이 말을 끊지 않고 들어 주었다.
끝까지 말을 들은 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운은 그제야 되었다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혁진의 입에서는 태운을 경악하게 할 만한 말이 나왔다.
“그럼 너도 이제 징크스를 만들면 되겠네.”
태운의 긴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결국 태운은 눈이 짓무를 때까지 울어야만 했다.
태운이 엉덩이 사이의 끈이 끊기고 정액으로 너덜너덜해진 천 조각을 수습해 집 안에 처박아 놓고, 촬영장에서 감독을 피해 다니고, 감독은 민망한 얼굴로 태운을 보고, 영화가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스코어를 쓴 것은 그보다 한참 후의 일이었다.
* * *
일정이 지독하게 꼬여 버렸다. 예정대로라면 사흘 전에 귀국했어야 했지만 일정이 지연되었다. 심지어 그 지연된 일정은 아직 완전히 마무리되지도 못했다. 도저히 취소가 불가능한 스케줄이 있어, 그런 와중에도 태운은 새벽 비행기로 잠시 귀국했다가 밤비행기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이건 제대로 된 귀국도 아니었다. 태운은 핸드폰을 들고 혁진에게 임시 귀국을 알려야 하나 망설였다. 하지만 알린다고 해도 제대로 얼굴조차 보지 못할 터였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귀국이 하루하루 미뤄진 것이었지만, 이미 혁진에게 몇 번이나 귀국 날짜를 변경해 통보한지라 태운은 어쩐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결국 태운은 혁진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다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당겼지만 때마침 대기실로 들어온 행사 관계자 탓에 흡연실에 갈 기회를 놓쳤다. 태운은 다시 긴 숨을 내쉬었다.
“태운 씨 준비 다 되셨으면 안내하겠습니다.”
행사 관계자의 말에 태운이 몸을 일으켰다. 발걸음을 옮기며 행사관계자는 태운이 움직일 동선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안전과도 관련된 문제라 태운은 흘려듣지 않았다. 스태프들에게 듣기로 밖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행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태운이 모델로 있는 면세점이 서울 시내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매장을 오픈했다. 면세점 특성상 아이돌 그룹을 포함, 해외에서 인기가 있는 연예인들로만 꾸린 광고 모델이 수십 명에 달했는데, 그들이 대부분 오픈식에 참석한 탓에 관광버스는 이른 아침부터 연예인들을 보러 온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하지만 커팅식에 참여하는 연예인은 태운이 유일했다. 중국과 일본을 아울러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이기 때문이었다.
태운은 담당자를 따라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태운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년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면세점의 임원들이었다. 담당자의 안내에 따라 태운은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과 별다른 접점이 없는 태운은 담당자와 함께 한걸음 뒤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관망했다. 들려오는 대화 내용으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는 태운도 오래 지나지 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면세점의 모기업은 다름 아닌 태경이었다. 혁진이 어쩌면 행사에 참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태운은 혀를 악물었다.
수행원들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던 혁진의 시선이 난감한 표정을 한 태운에게 오래 머물렀다. 임원들이 혁진에게 다가가 인사를 시작하면서 곧 그 시선은 거둬졌지만, 태운은 괜스레 겸연쩍어서 볼을 긁적였다.
“이쪽은 저희 광고 모델 이태운 씨입니다.”
누군가 태운을 혁진에게 소개시켰다. 태운을 제외하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혁진의 시선이 다시 짧게 태운에게 머물렀다. 태운은 임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반듯하게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미하게 찌푸려지는 혁진의 얼굴을 유일하게 알아차린 사람 또한 태운뿐이었다.
혁진이 태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태운이 정중하게 그 손을 마주 잡았다. 혁진의 손에는 태운이 아픔을 느낄 정도의 힘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태운은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악수는 의례적인 정도의 시간 만에 끝났다. 태운은 자신의 손에 남겨진 혁진의 힘을 느끼면서 양손을 마주 잡았다. 손끝이 잘게 떨렸다. 어쩐지 태운은 초조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이라 태운은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혁진은 태운과의 잠시간의 악수가 마치 환상에 불과했다는 듯 다시 임원들에게 둘러싸였다. 태운이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행사 자체는 길지 않았다. 커팅식을 하고 태운은 자리를 옮겨 다른 광고 모델들과 함께 핸드 프린팅 행사에 참여했다. 핸드 프린팅은 면세점 안쪽에 전시될 것이라고 했다.
무대를 준비하는 가수 팀들과는 달리 태운은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행사장을 벗어났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매니저가 행선지를 물었다. 다시 공항으로 출발하기까지 여섯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매니저는 식사보다도 숙소를 잡고 한숨 자고 싶은 얼굴이었다.
태운은 매니저에게 먼저 차에 타 있으라고 말한 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정말로 거짓말을 한 것이 되어 버렸다. 태운은 한숨을 내쉰 후, 통화 목록에서 가장 최근에 통화한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귀국한 것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후로 다른 일정 있나?
“……아홉 시에 다시 출국해야 합니다.”
―그 전까지는 보내 주지. 지금 어디야.
태운은 제 위치를 설명했다. 그 장소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말과 함께 혁진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태운은 겸연쩍게 웃으며 운전석의 창문을 두드렸다. 매니저가 바로 창문을 내렸다.
“난 잠깐 볼일이 있어서. 밥 먹고 눈 좀 붙이고 있어.”
“어디 가시는데요? 모셔다 드릴게요.”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매니저는 태운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는 기어코 매니저를 먼저 보내 버렸다.
매니저가 출발하고 조금 시간이 흐르자, 태운의 앞으로 검은색 세단이 멈춰 섰다. 태운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혁진의 차라는 것을 알았다. 혁진은 창문을 내려 얼굴을 확인시켜 주지 않았다. 하지만 태운은 확인 없이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는 혁진이 타고 있었다.
“언제 들어온 거야.”
“……새벽에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다시 저녁 때 나가야 해서 말씀 못 드렸어요.”
“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들어와 있는 것도 몰랐겠군.”
“죄송, 합니다.”
태운은 고개를 숙였다. 일정이 이상하게 꼬였는데 상황까지도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말을 하지 않은 제 잘못이 맞았다.
“내 사무실로 가지.”
“네? 하지만…….”
태운이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혁진은 태연했다. 태운은 조금 전 행사장에서 혁진과 악수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엄청난 거리감이 있었는데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혁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태운은 난감했지만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 공간은 혁진의 것이었다. 자신은 그저 잠깐의 방문으로 끝이겠지만 혁진은 그곳에서 계속 일을 해야 할 것이었다. 혁진에게는 대단히 불공평한 일이었다.
“……호텔로 가시는 것이.”
태운의 말에 혁진이 진의를 묻듯 고개를 돌려 태운을 바라보았다. 그 의미를 깨달은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태운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태운은 자신이 가진 가십의 무게를 알았다.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지만 자신이 가십과 얼마나 가까운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다.
혁진의 옆에서 가십으로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것 중 혁진에게 필요한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가장 좋은 것으로 주고 싶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송곳 같은 가십이 아니라.
태운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표정이 흐려졌다. 혁진이 왼손을 뻗어 태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너한테 해가 될 일은 안 해.”
“그런 걱정하지 않습니다.”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하지만 태운은 결국 자신이 걱정하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하지는 못했다. 말할 수 없었다. 혁진이 운전하는 차는 거칠 것 없이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차가 멈춰 섰지만 태운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혁진은 그런 태운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보조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태운이 그제야 머뭇거림이 묻어나는 움직임으로 차 문 밖으로 나왔다.
전용 주차장인 듯 구역이 따로 나눠져 있었고 주차되어 있는 차들도 호텔 주차장에서 태운이 몇 번 보아 눈에 익은 차들이었다. 태운이 망설이듯 서 있자 혁진이 손바닥으로 태운의 허리를 받쳐 주듯 밀었다. 태운이 그대로 혁진이 미는 대로 걸었다.
혁진이 지갑을 센서에 찍어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혁진은 다시 태운을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침묵과 함께 문이 닫혔다.
“마주치지 않았다면 네가 한국에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야.”
태운은 입을 열려고 했지만 혁진이 누른 층수로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바람에 다시 입을 닫아야만 했다. 혁진이 태운의 등을 다시 받쳐 밀었다. 긴 복도를 걸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태운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계속 일정을 미뤄서 벌써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바로 출국해야 해서 제대로 뵙지도 못할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았고. 그럼 제가 한국에 들어왔었다는 것이 또 거짓말이 되는 기분이라…….”
태운이 입술을 깨물었다. 혁진이 꽉 다물린 태운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태운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혁진의 혀가 거칠게 태운의 안을 유영했다.
태운을 그대로 씹어 삼키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태운의 속으로 들어가고 싶기도 한 것 같은 거친 움직임이었다.
태운은 혁진의 목에 팔을 감았다. 혁진도 팔로 태운의 등을 튼튼하게 받쳤다. 중국에서의 빡빡한 일정은 피로를 몰고 왔지만, 침대에 누우면 혁진이 떠올랐다. 단단한 품이 생각나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태운이 혁진을 힘껏 끌어안았다. 너무 좋아서 눈가가 시큰했다.
혁진이 태운의 입술에서 입을 떼었다. 하지만 태운을 안은 팔을 풀지는 않았다. 태운을 제 품 안에 가득 안은 혁진은 그대로 태운의 귓가에 목소리를 집어넣었다.
“네가 어떤 이유로든 속에 있는 말을 삼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직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태운이 부르르 떨었다. 혁진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것은 그 이후였다.
“무슨 말부터 해야 네가 날 이해할 수 있을까.”
태운을 보며 사람이 부품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처럼, 면세점 개관식 행사장에서 태운을 보는 순간 설명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네 안의 모든 것을 내보이라고 태운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없다는 것 또한.
혁진은 태운을 여전히 품에 안은 채로 걸었다. 태운은 뒷걸음질 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혁진이 단단히 받쳐 주어서 안정적이었다. 태운을 통유리로 되어 있는 창에 세운 후에야 혁진은 태운을 품 안에서 떼어 놓았다.
태운의 시선이 뒤를 돌아 걷는 혁진을 따랐다. 사무용 책상까지 간 혁진은 리모컨을 찾아 유리를 가리고 있는 블라인드를 올렸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태운에게 쏟아졌다. 태운은 태양을 등진 채 환하게 빛났다. 혁진은 태운을 그렇게 태양 밑에 세우는 것을 좋아했다.
“난 혼자 결정하고 그것을 지시하는 것에 익숙해. 다른 사람에게 나를 설명하고 이해시켜 본 적이 없어.”
태생부터 그랬고 또 그렇게 자라왔다. 그것이 당연한 삶이었다. 혁진이 다시 태운을 향해 걸었다. 태운을 알고 싶으면 먼저 자신의 속을 내보여야 했다. 이태운은 혁진이 지금까지 상대해 온 누구보다도 어려운 상대였다.
순하게 굴지만 속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을 만큼 독했다. 강요한다면 무엇이든 독하게 참고 따르겠지만 그 안은 곪아 갈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제 혁진이 바라는 건 태운의 속이 곪는 것이 아니었다.
태운의 앞에 멈춰 선 혁진은 태양을 그대로 마주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태운이 멈칫하더니 곧 손을 들어 혁진의 눈가를 가려 주었다. 혁진이 다시 태운을 품 안에 넣었다. 태운이 가만히 딸려 왔다. 태운의 귓가로 혁진은 다시 말을 밀어 넣었다.
“내 부친은 사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셨어. 자유롭고 감정적이신 분이셨지. 내 조부는 부친의 그런 점을 끔찍하게 생각하셨고.”
조부와 부친은 몇 마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자 관계였다. 아비는 아들의 유약함을 경멸했고, 아들은 아버지와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아비는 아들과 제대로 말 한 마디조차 섞지 않고 보냈다.
아들의 유약함을 부인의 지나친 모성애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 아비는 아들과 며느리에게서 손자를 빼앗기에 이르렀다.
유약한 아들은 처음부터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지 못했고, 반발했던 며느리에게는 어려운 친정아버지의 사업을 회생시킬 수 있는 큰돈을 미끼로 걸고 이혼 서류와 함께 친권 포기 각서와 다시는 아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쓰게 했다.
그리고 손자는 수십 명에 달하는 수행원들의 손에서 키워졌다. 손자는 세상을 인지하는 나이부터 그들을 손끝으로 부리며 자라게 되었다. 기계처럼 무감정하고 제 학업 외에는 무관심한 손자를 조부는 굉장히 만족해했다.
하지만 그런 조부와는 다르게 부친은 무언가를 잃은 채 자라나는 아들을 보며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결국 그 모든 상황들을 견디지 못한 부친은 마지막으로 제가 낳았지만 제 아비의 손에 큰, 사람의 감정을 배우지 못한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만을 남긴 채 자살을 택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자살이냐 타살이냐로 논란이 많은 사고사의 진실이었다.
“왜 울어.”
혁진은 담담하게 평가가 섞이지 않은 사실만을 말했다. 하지만 그 객관적인 나열을 듣는 태운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태운이 혁진에게 매달렸다. 혁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혁진의 각진 슈트 위로 흩뿌려졌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난 알 수 없어.”
혁진이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는 태운의 고개를 들게 했다. 울음으로 일그러진 얼굴 위로 뚝뚝 눈물이 흘렀다. 혁진은 손을 들어 잔뜩 찌푸려진 태운의 얼굴을 펴냈다. 왜 우는데. 다시 한번 태운에게 속삭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태운은 억지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태운은 천천히 더듬더듬 제 감정을 밖으로 꺼냈다. 혁진의 말대로 속에 있는 말을 삼키지 않았다. 그것이 혁진이 바라는 일이었다.
“……건방지다고, 주제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눈물이 납니다.”
“건방지다고도 주제넘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혁진이 태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운은 울음을 그치기 위해 입술을 물었지만 잘되지 않았다.
“해 본 적 없어서 서툴 거야. 하지만 네게 나를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눈에 울음을 가득 머금은 태운은 허겁지겁 혁진의 입술을 찾아내었다. 혁진의 숨을 들이마시고 싶었다. 감히 바란 적도, 아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말을 하는 혁진이 이상했다. 그의 숨을 들이마시지 않으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태운의 키스는 서툴고 갈급했다. 아니, 정말로 혁진의 숨을 들이마시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 혁진은 그런 태운의 키스를 가만히 받아 주었다. 지독하게 예쁜 녀석이었다.
“아무것도…… 어떤 것도, 속이지도 숨기지도, 않겠습니다.”
“그래.”
혁진의 크고 단단한 손이 태운의 눈물과 입술의 타액을 정리해 주었다. 태운은 혁진의 품 안에 자신을 묻었다. 그래도 자꾸만 눈물이 났다. 자신을 내리쬐는 햇빛이 눈부셨다. 그 햇살 밑에 혁진과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좋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 *
감독에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선물을 받았던 이후로 혁진이 드물게 탐탁지 않게 여겼던 영화 촬영을 드디어 마쳤다. 미뤄뒀던 광고 촬영까지 끝내고, 태운은 간절히 바라던 휴식기를 남겨 두고 있었다. 하지만 태운의 예상만큼 편한 휴식기가 시작되지 못했다.
태운은 허리를 곧게 편 채 응접용 소파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소파는 푹신했지만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경직되어 태운의 자세는 점점 더 반듯해졌다.
데뷔 후 처음 겪어 보는 스캔들이었다. 광고 촬영차 출국했던 유럽의 작은 공항에서 예전에 드라마를 같이 촬영한 적 있는 여배우를 만난 것이 발단이었다.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헤어졌는데, 그렇게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누군가 교묘하게 찍은 사진이 SNS로 퍼졌고, 태운이 비행 중이라 상황을 확인하지 못하는 동안 태운과 그 여배우가 밀월여행을 떠난 것이라는 루머가 이미 퍼진 상태였다.
태운은 광고 촬영을 끝내고 스태프들과 함께한 귀국길이었고, 여배우는 그때 여행 차 공항으로 입국한 것이라며 양쪽 소속사에서 진화에 나섰지만 쉽사리 소문이 진정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긴 비행 끝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국해서 상황을 전해 듣자마자 태운은 혁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국 사실을 알리자 혁진은 사무실로 오라고 짧게 말했을 뿐, 그 스캔들에 대한 언급은 따로 없었다.
사실이 아닌 스캔들에 대하여 혁진이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언급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입을 떼지 못했지만, 사무실로 오는 차 안에서 그리고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태운은 내내 가시방석이었다.
태운을 주차장에서 픽업해 온 혁진은 태운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후, 서류와 컴퓨터를 번갈아 보며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늘 있던 침묵이지만 태운은 그 침묵이 못내 불편했다.
서류를 보던 혁진이 고개를 들었다. 혁진의 얼굴에서 태운은 아무것도 읽을 수 없어 더 초조했다. 하지만 응접용 소파와 혁진이 업무를 보는 책상 사이에 결계라도 쳐진 듯, 태운은 차마 그 가까운 공간을 넘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공간은 혁진이 태운에게 걸어오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간단하게 일그러졌다. 태운이 혁진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해?”
혁진이 자신의 머리 위로 손을 뻗자 태운이 단번에 그 손을 잡았다. 침묵이 못 견디게 무거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덥석 혁진의 손을 잡았을 뿐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어, 단단하게 손을 쥔 채로 혁진의 눈치만 보았다.
“공항에서 잠깐 본 것이 다입니다. 간단하게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는데 왜 그런 사진이 찍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소속사에서 해명 기사를 내고 있고…….”
결국 태운은 자신의 입으로 술술 모든 것을 고백했다. 눈가까지 붉어진 태운을 보며 혁진은 음, 하고 알 수 없는 탄성을 내뱉었다. 태운은 그 순간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태운에게 잡혔던 손으로 다시 태운을 단단하게 쥐며 혁진은 오로지 손의 힘으로 태운을 일으켰다. 얼결에 태운은 그대로 혁진에게 당겨져 혁진의 업무용 책상까지 끌려갔다. 모니터의 보호 모드를 해제한 혁진은 인터넷 창을 열었다.
태운의 이름을 검색할 것도 없이 이미 이태운이라는 이름은 인기 검색어 일 위였다. 혁진은 그것을 클릭했다. 검색 결과를 본 태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매니저에게 들었던 것보다 사진 각도가 더 이상했다. 마치 자신이 그 여배우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인사만 나눴을 뿐 포옹은커녕 손조차 닿지 않았는데, 누군가 교묘한 각도에서 노리고 찍은 사진 같았다. 주변에 함께 있던 스태프들조차 사진상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적, 없, 없습니다.”
당황한 태운은 말까지 꼬였다. 혁진의 짙어진 눈이 태운을 응시하였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도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남자였다. 혁진은 또다시 음 하고 말았다. 초조한 것은 태운뿐이었다.
“정말,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
“……혀, 형.”
결국 태운은 제 발에 저려,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혁진을 평소에 잘 부르지도 않는 호칭으로 불렀다. 아정이 대뜸 혁진을 오빠라고 호칭하는 바람에 자신도 얼결에 혁진을 아정의 앞에서 형 하고 부르게 되었지만 어색하고 민망해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호칭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혁진을 부르면 혁진이 제법 기꺼워한다는 것은 알았다. 고작 그 말 한 마디에 태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태운은 잔뜩 민망한 얼굴을 했다.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고 하는데 혁진이 그 손을 잡았다. 혁진은 태운을 품에 안았다. 사진 속 태운과 같은 자세였다. 태운은 그제야 혁진의 안에서 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경직되었던 몸에 긴장이 풀어졌다. 하지만 이내 제 옷 속을 파고들어 오는 혁진의 손에 다시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고층 건물이라 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긴.”
태운이 몸을 비틀었다. 이곳은 혁진이 업무를 보는 사무실이었다. 이런 곳에서 할 수는 없었다. 태운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혁진은 태운을 단단히 옭아매며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겼다. 태운은 얼굴은 물론이고 귓가와 목까지 잔뜩 붉어졌다.
뻣뻣하게 굳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태운에게 입술을 맞대고 숨을 불어 넣어 주며 혁진은 마저 태운의 바지까지도 벗겨 버렸다. 브리프만 몸에 제대로 걸쳐져 있었고, 내려간 바지는 신발을 신은 발목에 걸려 버렸다. 태운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춥지도 않은데 태운의 몸이 덜덜 떨렸다. 열흘 가까이 혁진과 잠자리를 따로 한 태운의 몸은 예쁜 하얀색을 띠고 있었다.
혁진이 브리프의 허리 부분의 고무줄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태운이 자꾸만 문 쪽을 힐끔거렸다. 당장이라도 누가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한 얼굴이었다.
“제, 발. 여기선, 할 수…… 없습니다.”
태운이 울 것처럼 빌었다. 혁진이 혀를 쯧 하고 차며 태운을 안고 있는 손을 뻗어 리모컨을 집었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자 통유리로 된 벽이 드러났다. 바깥 풍경이 환하게 보였다. 이건,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혁진이 짓궂게 웃으며 태운을 안은 채로 창가로 걸었다. 투명한 유리로 브리프만 입고 있는 추태 어린 몸이 비치자 태운이 이를 덜덜 떨었다. 혁진이 혀를 차며 태운을 창밖을 보게 하고 태운의 몸에서 몸을 떼었다. 태운이 휘청거렸다.
혁진이 등 뒤에서 태운을 감싸 안았다. 혁진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태운이 흡 하고 숨을 참았다. 혁진의 단단한 손이 태운의 브리프에 감싸진 성기에 닿았다. 별다른 자극이 없었는데도 태운의 성기는 발기한 상태였다. 태운은 머리가 멍해졌다.
“이런 상황을 기대했던 것 아냐?”
“아닙, 니다.”
“네 몸은 네 생각과 다른 것 같은데.”
혁진이 브리프 위로 태운의 성기를 쥐었다. 태운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혁진이 몇 번 그것을 주무르자 점점 단단해져서 브리프가 팽팽하게 당겼다. 태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서로 알몸을 보는 것이 익숙한 사이인데도 상황 자체가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여기선 할 수 없다니 어쩔 수 없군.”
혁진은 태운의 성기에서 손을 떼었다. 완전히 발기한 성기는 브리프를 적셨다. 혁진이 쯧 하고 혀를 차면서 창에 등을 맞대도록 태운의 몸을 돌렸다. 볼록한 성기가 혁진에게 보이자 태운은 더 부끄러워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대로 혁진이 멀어졌다. 태운의 눈이 더 크게 확장됐다.
“내 눈요기나 하고 있어.”
점점 멀어진 혁진이 다시 업무용 책상에 앉았다. 태운의 눈의 크기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래가 아플 정도로 당겼다. 하지만 그곳에 손을 가져다 댈 수도 없게 되자 태운의 눈이 점차 붉어졌다. 태운은 그저 젖은 브리프를 양손으로 가렸다. 어중간한 쾌감은 조바심만을 불러왔다.
혁진은 앉은 채로 면밀하게 태운의 상태를 살폈지만, 태운은 혁진이 자신을 살핀다는 것도 모른 채 그가 자신을 방치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단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태운을 보며, 혁진이 이제 그만 괴롭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혁진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내선 전화의 벨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말 그대로 태운이 펄쩍 튀어 올랐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더듬던 태운은 혁진이 던져 놓은 티셔츠를 챙겨든 뒤 발목에 걸린 바지 때문에 휘청거리며 혁진에게로 걸어갔다. 결국 바지에 걸려 바닥으로 주저앉자 이번에는 다리를 끌고 바닥을 기었다.
혁진은 자신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어 태운을 일으키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태운은 그 기회에 바닥을 기어 그 틈으로 파고들었다. 책상 안쪽 공간에 몸을 숨긴 태운을 보면서 혁진은 혀를 찼다. 그만하려고 했는데 저렇게 굴면 그만두고 싶지가 않아졌다.
당황으로 질린 태운의 눈동자를 보면서 혁진은 내선 전화를 연결했다. 급한 업무로 보고할 것이 있다는 게 목적이었다. 혁진이 태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허락했다. 태운이 화드득 떨었다.
“잘못, 잘못했습니다.”
공항에 간 것도 잘못했고, 그 여배우를 만난 것도 잘못했고, 인사를 나눈 것도 잘못했습니다. 태운은 제 행적을 전부 사죄했다. 혁진은 피식 웃으며 태운의 턱을 들게 해 의자 위에 걸쳤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 태운의 턱이 덜덜 떨렸다.
“형, 형, 잘못했어요. 형, 형.”
태운이 형을 불렀다. 혁진의 입가에 미소가 올라 있었다. 그리고 태운의 귓가에 그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당황스러운 말을 속삭였다. 태운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혁진의 퍼스너를 내렸다. 계속 떨어지는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태운이 조심스럽게 꺼낸 혁진의 성기를 입에 무는 것과 동시에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지긋이 제 브리프 위를 누르는 혁진의 구두에 태운은 그대로 경직되었다.
그 상황에서 오럴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저 혁진의 성기에 침을 바르는 정도였다. 그것도 혀가 굳어서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소리를 죽이려고 아주 느리게나 할 수 있었다. 혁진의 성기가 점점 힘을 얻어 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혁진은 전혀 별개의 세상에 있는 듯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남자의 보고를 받았다.
태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혁진의 구두가 능숙하게 브리프 위를 눌렀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소리를 낼 수 없어 태운은 더 아프게 주먹을 쥐었다.
몸에 땀이 흐를 정도로 더운데, 또 부들부들 떨렸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견딜 수 없어 태운은 오럴을 하던 입을 떼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이 뜨거운 건지 얼굴이 뜨거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손바닥 위로 축축한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었다. 태운은 숨죽여 울었다.
“미안해.”
몸을 웅크리고 울고 있던 태운을 혁진이 일으켰다. 보고하기 위해 들어왔던 남자는 나갔는지 없었다. 혁진이 태운을 허벅지에 앉혔다. 그리고 이미 앞부분이 축축해진 브리프를 벗겼다. 축 늘어진 태운은 거부의 움직임조차 없었다. 방금 전의 상황이 충격인 듯했다.
“미안해.”
다시 한번 혁진이 사과하며 아플 정도로 발기한 태운의 성기를 손으로 쥐었다. 태운이 힘없이 사정했다. 축 늘어진 태운과는 다르게 태운이 쏘아낸 정액은 대단히 진했다. 혁진이 그것을 손안에서 비볐다.
“……그런 사진이 찍힌 건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방금 그런 건 싫어요…….”
“그래.”
혁진이 깨끗한 손으로 태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잠시 그대로 있던 태운이 화들짝 놀라 책상 위에서 티슈를 빼어 제 정액이 묻은 혁진의 손을 닦고 주변을 닦았다. 어쩐지 시큼한 자신의 정액 냄새가 사무실에 퍼지는 기분이라 태운의 얼굴에 다시 붉은색이 돌아왔다.
혁진이 여전히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태운의 신발을 벗기고 브리프와 바지를 한 번에 내려 버렸다. 태운은 다시 겁에 질려 단단히 굳었다. 하지만 혁진은 잔뜩 젖은 브리프를 벗겼을 뿐 다시 바지를 입히고 추켜올려 주었다.
책상 밑에 잔뜩 구겨진 채로 버려져 있던 티셔츠까지 집어 들어 입혀 주었다. 혁진이 태운의 신발까지 다시 발에 끼워 주었을 때 태운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단단한 바닥에 닿는 무릎이 아팠지만 개의치 않았다.
혁진이 그런 태운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태운 역시 보통 고집이 아니었다. 태운은 혁진의 흐트러진 옷차림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몸에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 평소대로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혁진이 태운의 머리를 헝클였다. 춥츕 하는 음란한 소리가 사무실 안에 가득 퍼졌다. 잔뜩 긴장한 태운의 입은 평소보다 더 조였다. 혁진은 당장이라도 태운을 바닥에 눕히고 싶은 마음 이었지만 그대로 오럴을 견뎠다. 여기서 태운을 바닥에 눕혀 버린다면 다시는 태운이 사무실로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각 없는 녀석은 목구멍 깊숙이 자신의 성기를 물고 있느라 컥컥거리고 있으면서도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그 시각적인 자극에 혁진은 손가락으로 태운의 이마를 쓸었다. 혁진이 느른하게 기대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태운의 턱이 자연히 들릴 수밖에 없었다.
참을 수 없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혁진은 그대로 허리를 쳐올렸다. 태운은 아까보다 더 힘든지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도 오럴을 멈추지 않았다. 태운의 뒷머리를 아프게 당기면서 혁진은 태운의 입안 쪽에 사정을 했다. 태운의 눈가가 금세 다시 젖어 들었다.
태운의 얼굴을 적신 물기를 손으로 닦아 준 혁진은 벌어진 옷을 정리하고 태운을 추슬러 품에 안아 들었다. 혁진의 발걸음이 평소답지 않게 급했다. 태운은 혁진에게 들린 채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 사진은, 저는 정말,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
태운이 얼굴을 가린 손바닥 사이로 말했다. 말이 울렸다. 혁진이 태운의 등을 도닥였다. 태운은 혁진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시는 그 여배우의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혁진의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