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5. 행복의 둘레 (12/15)

5. 행복의 둘레

오랜만에 돌아온 촬영장은 여전히 엄청난 활기를 가지고 있었다. 감독에게 투자금을 지급한 후에 주연 배우가 이태운으로 캐스팅되자, 시나리오에 이것저것 참견하던 배급사와 말이 잘된 것인지 감독의 얼굴도 한결 편해져 있었다.

“소속사에는 이미 설명했는데 자네한테도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서.”

“따로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도 촬영이 이렇게 지연됐는데 내가 직접 설명해야지. EMM이랑은 이야기 잘 끝났어. 그냥 가난하게 찍는 한이 있어도 투자금 반납하겠다고 강짜를 놨거든. 먹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네. 진짜 태운 씨 커리어에 이렇게 막 가는 환경 없었을 텐데 내가 미안하다.”

“감독님 대본이 좋아서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푹 쉬었어요.”

“그렇게 말해 주면 내가 고맙지. 무슨 문제 있으면 나한테 먼저 이야기하고. 태운 씨 편의는 내가 봐줄 테니까.”

몇 번이나 더 태운에게 감사 인사를 한 감독은 시간을 많이 뺏었다며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공치사가 어색해서 태운은 민망하게 웃었다.

산속 공기는 마음을 편하게 했다. 가을이 가까이 오는지 하늘은 푸르렀고 나무들은 더할 나위 없는 푸른 잎들을 자랑했다. 태운은 잠깐 이 자연 속에 파묻힌 혁진을 생각했다. 도회적인 혁진과는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또 어울렸다.

태운의 볼이 티 나지 않게 붉어졌다. 태운은 고개를 저으며 이미 촬영한 장면도 포함해 낡아 버린 대본을 전체적으로 읽어 나갔다. 쉬는 동안에도 대본을 꾸준히 파헤쳤지만, 대본의 배역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조금 어색했다.

오늘 첫 촬영은 떠나려는 희율을 ‘그’가 잡는 장면이었다. 그 과정에서 보여 주는 신비에 희율이 ‘그’가 정말로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고 홀린 듯이 자신의 인생을 털어놓게 된다.

태운은 머릿속으로 대본을 그려 보았다.

좋지 않았던 가정 환경, 오랫동안 뒷바라지한 연인의 배신. 바닥난 잔고. 희율에게 남은 것은 전 애인을 위해 받았던 대출 빚뿐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이 남은 것은 빚뿐인 희율은 사는 대신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살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왔지만 마주친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다시 떠나려고 한다.

태운이 완전히 감정을 정리하자 스태프가 촬영 준비가 되었다고 알려 왔다. 매니저와 함께 한참 산길을 걸어가자 어떻게 옮겨 왔는지 알 수 없는 살수차와 촬영 장비들이 숲을 둘러싸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다 태운은 촬영장에 막 도착했을 때 짧게 인사를 나눴던 여배우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여배우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여배우는 촬영이 없었는데도 태운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태운과 눈이 마주친 여배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독에게 간단한 지시를 받은 태운이 환한 조명 속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감독이 컷 지시를 내리자 단번에 표정을 바꾼 태운은 한없이 신비스러운 ‘그’가 되었다.

짐을 싸는 희율을 보며 ‘그’가 손짓하자, 살수차가 굵은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희율은 그 신비스러운 광경에 압도당하게 된다.

“컷. 오케이.”

단번에 오케이 사인이 나자 스태프들이 밝은 얼굴로 작게 박수를 쳤다. 태운은 NG가 많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시작부터 좋았다.

그들 사이에 섞인 여배우도 태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고 어여쁜 얼굴을 한 그녀의 눈이 태운을 향해 반짝였다. 그녀의 얼굴에 장미꽃처럼 홍조가 피었다.

한 장면의 촬영을 마치고 잠시 카메라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있던 태운은 그의 무던한 감각에도 걸리는 뚫릴 듯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얼굴이 잔뜩 붉어진 여배우와 눈이 마주쳤다.

태운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얼굴이 붉다 못해 잘 익은 사과처럼 완전히 빨갛게 익은 여배우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채 갈무리하지도 못하고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좋을 때야.”

태운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카메라 감독이 태운과 함께 고개를 돌려 여배우를 보며 말했다. 눈치가 좀 늦된 구석이 있는 태운은 지금에서야 발견한 것 같았지만, 여배우의 순정은 촬영장 내에서는 이미 말단 스태프까지 다 알 정도로 유명했다.

“태운 씨 만나는 사람은 있어?”

카메라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여배우에게로 화제를 돌리는 카메라 감독의 말에 태운은 그저 살짝 웃었다. 만나는 사람. 그런 간지러운 단어가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혁진과 나누는 것들도 그런 간지러운 단어로 정의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운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것을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카메라 감독이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저기 수아는 어때? 내가 보증하는데 예쁘고 착하고 싹싹해. 두 사람 다 내가 잘 아니까. 예쁘게 잘 만날 것 같은데. 어때 생각 있으면 내가 중간에 다리 놓아 줄게.”

태운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카메라 감독이 툭 하고 그런 태운의 어깨를 쳤다. 무엇인가 해 주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태운과 눈이 마주치자 카메라 감독은 더 능글거리는 얼굴로 웃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여배우에게 뛰어가 자신과 연결시켜 주려는 카메라 감독을 태운이 황급히 붙잡았다. 여배우에게 관심이 없다고 하면 여배우에게도 카메라 감독에게도 무례인 것 같아 태운은 입안에서 말을 골랐다. 그러다 보니 진실과 비슷한 답을 내놓아야 할 것만 같았다. 태운은 민망한 마음에 볼가를 긁었다.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그보다 더 간지러운 단어들을 수도 없이 연기하고 입 밖으로 내뱉어 보았지만 이렇게 민망했던 적은 없었다. 한참 만에 태운은 결국 입을 열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마친 태운은 턱 끝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되었다. 제 입으로 토해 낸 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간질거리는 단어로 정의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는데. 말을 하고 보니 혁진과 자신을 한 단어로 묶어 버린 것 같아서 애틋한 기분이 되었다.

한편 능글거리는 표정이던 카메라 감독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주변은 허허벌판이고 대화가 들릴 만한 거리에는 아무도 없는데도 카메라 감독은 수상해 보일 정도로 큰 동작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태운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속삭여야 할 말이 아니었음에도.

“하긴 태운 씨 한창 나인데 없는데 이상하지. 내가 실수했어.”

“아닙니다. 괜찮아요.”

카메라 감독은 겸연쩍은지 말을 돌려 다시 카메라에 대해 태운에게 설명했다. 태운도 반듯하게 서서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얌전히 웃으며 그 설명을 들었다.

촬영이 중단되고 무료한 와중에 태운이 곁에 있길래 대화를 시작했는데, 태운이 생각보다 잘 받아 주자 카메라 감독은 태운에게 카메라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줄 기세로 쏟아붓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도 여배우의 눈길은 더더욱 노골적으로 태운을 쫓았다. 워낙 주변에 무던한 성격이라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태운은 감정을 꺼내 반으로 갈라 보면 예쁜 핑크빛일 것이 분명한 애정을 담고 자신을 응시하는 여배우의 눈빛이 어쩐지 조금 민망하고 난감했다.

하지만 태운에게 으레 그런 눈을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든 태운과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어떻게든 몸을 겹쳐 보려고 하던 것과 별개로 그 여배우는 태운과 마주치면 멀리 돌아가고 심지어 도망치기까지 했다.

자신에게 핑크빛 감정을 내어 주고 있는 그녀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었지만 꼭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여자아이들의 풋풋한 감정과 닮아 있어 태운은 그 여배우가 귀여웠다. 언젠가 있었을 동생의 모습들과 겹쳐 보였다.

그리고…….

태운은 속으로 ‘만나는 사람’ 그 단어를 되뇌어 보았다. 어쩐지 이 간지러운 단어는 잊을 만하면 머릿속에 떠오르고는 했다. 정말 별것 아닌 단어인데.

어쩐지 담배가 당겼다. 담배를 태우면 혁진이 제 속으로 깊게 들어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태운은 문득 어둠 속에 손을 뻗어 베개 옆에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찾았다. 화면을 켜 보아도 별다른 알림이 없었다. 태운은 다시 화면을 꺼서 핸드폰을 엎어 놓았다. 자꾸만 무엇인가 확인하게 되는 자신이 이상했다.

목이 간질간질한 느낌은 담배를 피우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태운은 결국 일어나 짐을 뒤져 언젠가 매니저에게 받은 담배를 찾아냈다. 잘 피우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렇게 때때로 당길 때가 있었다. 창문을 열어 놓고 태운은 담배를 길게 들이마셨다. 연기를 깊게 삼키자 태운의 목젖의 움직임이 어둠 속에서도 도드라졌다.

매니저에게 받은 담배는 혁진이 피우는 것이기도 했다. 때때로 혁진은 섹스를 끝내고 기진맥진하게 무너져 있는 태운에게 자신이 태우던 담배를 한 입씩 물려 주고는 했다. 그 생각이 나서 태운은 귓가가 붉어졌다.

그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태운은 몸에 열이 올랐다. 자신의 감정은 촬영장에서 매일 마주치고 있는 그 여배우의 것처럼 맑고 투명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주 질척하고 검붉은 색을 띤다면 모를까.

결국 태운은 온몸을 지배하는 질척하고 붉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하의 지퍼를 열었다. 잔뜩 열이 오른 살보다도 더 뜨거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어쩌지 못하고 태운은 입술을 악물었다. 자신의 것을 만지려니 어쩐지 어색하다고, 머릿속조차 붉고 뜨거운 감정이 지배하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긴 망설임 끝에 태운이 자신의 성기에 손을 가져갔을 때, 하루 종일 조용하던 핸드폰이 요란스러운 진동을 울렸다. 태운은 숨을 멈췄다. 손을 뻗어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보았을 때 태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온종일 기다리던 전화였다.

핸드폰의 벨소리는 고작 세 번밖에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태운의 심장은 수도 없이 밑으로 처박혔다. 이를 악물며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을 때, 수천 가지 망설임이 지나갔지만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은 수신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네.”

핸드폰 마이크로 흘려 넣는 목소리는, 태운 자신이 듣기에도 열에 들떠 있었다. 내뱉는 숨소리가 뜨거웠다. 태운은 다시 입술을 악물었다.

―출국 수속 중이야.

핸드폰 안쪽에서 들려오는 혁진의 목소리에 태운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먼저 숨을 들이마셨다. 혁진의 지독하게도 낮고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네.”

태운은 대답을 하면서도 혁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말이 뇌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 그저 심장께 어디로 직접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심장이 이렇게 뛸 수 없었다.

태운은 자신의 들뜬 목소리를 억누르는데 집중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숨소리까지 억눌러야 했다. 태운의 눈 밑이 짙게 붉어졌다. 눈가가 너무 뜨거워서 태운은 핸드폰을 잡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눈을 눌렀다.

핸드폰 안쪽의 혁진은 말이 없었다. 그제야 태운은 혁진이 말한 단어가 머릿속에서 조합됐다. 출국이라니. 태운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지만 아, 하는 깨달음이 섞인 떨리는 목소리에서 뜨거운 열기와 함께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이 터져 나왔다.

“다녀, 다녀, 오, 오세요.”

머릿속까지 깊은 열기가 잠식한 태운은 스스로 억누른다고 생각했지만 같은 단어를 두 번씩 반복하고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태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혁진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쿠퍼액을 질질 흘려 내고 있는 성기로 손을 가져다 댈 것만 같았다.

―이태운.

혁진의 목소리가 한 꺼풀 더 낮아졌다. 태운은 찌르르 발끝부터 울리는 감각에 울고만 싶었다. 성기는 완전히 까닥이면서 일어나 있었다. 태운의 숨이 거칠었다.

“네, 네.”

태운이 울음이 섞인 소리를 냈다. 온몸의 신경이 전부 성기에 연결된 기분이었다. 하복부가 묵직해졌다. 당장이라도 성기를 쳐올리라고, 태운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본능이 아우성쳤다. 통제를 듣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는 몸은 이상했다.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한 꺼풀 벗겨진 혁진의 말은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태운에게는 자극이 되었다. 자극을 견디기 위해 태운은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부들부들 떨며 양 무릎을 서로 비볐지만 그럴수록 몸에 퍼지는 열기가 더 뜨거워졌다.

“아무, 것도.”

―이태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지나치게 뜨거워진 몸은 결국 태운의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했다.

―대답해, 이태운.

결국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소리 없이 태운은 흐느꼈다. 핸드폰 안의 혁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태운을 기다렸다.

“몸이, 몸이 이상합니다. 너무 뜨거워서.”

막다른 상황에 몰렸을 때 마지막으로 태운이 찾을 수 있는 자비는 언제나 혁진이었다. 태운은 수화기 건너편의 혁진을 갈급히 찾았다.

―몸이 안 좋은가?

“아니, 네. 네. 뜨겁고……, 간지럽고. 불타 버릴 것 같습…… 도와, 도와주세요.”

열에 들떠 색기 어린 태운의 목소리에 핸드폰 안에서 혁진은 낮은 숨을 내쉬었다.

―기다리고 있어.

태운은 계속 핸드폰에 대고 흐느꼈다. 전혀 만져 주지 않았음에도 앞은 이미 질척질척하게 새어 나온 액으로 성기 주변이 다 번들거렸다. 태운에게 직접적으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혁진이 주변에 무엇인가를 말하는 소리가 났다. 몇 초 되지 않는 그 시간이 태운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이태운.

“네. 네.”

숨이 막혀서 태운은 제대로 말을 끝내지도 못했다. 제발 혁진이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몸이 어떤데.

아. 태운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단음만을 내뱉었다. 몸의 열기가 이성을 잠식해 가는 와중에도 혁진에게는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해.

“이상, 이상합니다. 모르겠어요……. 도와, 주세요. 뜨거워서.”

본능에 잠식된 뇌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태운은 그저 혁진에게 도와달라고 흐느꼈다.

―안면 없는 사람이 준 음식이나 음료 먹은 것 있는지 생각해 봐.

“없는 것, 같습니다.”

저녁은 밥 차로 모든 스태프들과 함께 먹었고 물조차도 직접 뚜껑을 딴 생수만 먹고 있었다.

―잘 생각해 봐. 최음제 섞인 걸 먹었을 수도 있어.

“없는 것, 같, 습니다. 저녁 먹은 지, 오래…… 됐, 그 후에는 먹은 게, 없습니다. 갑자기, 자려고 누웠는데. 담배, 태우시는 담배가 생각나서, 그래서 몸이 뜨거워…… 그래서. 흣,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태운은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로 횡설수설했다. 핸드폰 안에서 혁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리 벌려.

한참 만에 내뱉어진 혁진의 말에 태운의 눈동자가 커졌다. 혁진의 목소리는 평소에도 울림이 큰 편이었는데 한 톤 더 낮아지자 그 느낌 또한 더 강해졌다. 당황으로 얼룩진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태운은 혁진의 말대로 다리를 벌렸다.

“벌렸, 벌렸습니다.”

―옷 벗었나.

“네, 네.”

제발 이 뜨거운 몸을 식혀 주었으면. 하지만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혁진의 음성은 태운이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네 성기를 쥐어.

태운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아무리 이성이 날아간 상황이라도 혁진과 통화를 하면서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건…….”

태운은 다시 흐느꼈다. 완전히 발기하다 못해 질척한 액을 뿜어내고 있는 성기는 새파란 핏줄까지 도드라져 있었다. 한계였다.

―이태운.

혁진의 나직한 부름에 태운은 고개를 저으며 결국 성기에 손을 가져갔다. 축축해진 성기가 손에 착 하고 감겨 왔다.

“했습, 했습니다.”

가벼운 마찰에도 태운의 하복부가 묵직하게 조여 왔다. 이미 잔뜩 힘을 주고 있는 허벅지에 힘이 더해졌고, 아랫배가 당기다 못해 아팠다. 태운은 거친 숨을 뿜어내며 핸드폰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흔들어.

태운의 눈동자에 하얀 빛이 팟 하고 터졌다. 혁진의 목소리가 너무 낮았다.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한 줌 남아 있는 이성이 그런 태운을 제지했다.

“못 하겠, 못 하겠습니다.”

눈물이 한 줄기 다시 태운의 뺨을 타고 흘렀다. 한번 혁진의 목소리를 들으니 제 성기를 단단하게 쥐어 오는 혁진의 손도 생각났다. 혁진은 항상 태운의 정액을 모두 뽑아내기라도 하듯 아플 정도로 쥐었다. 하지만 예민한 성기에 닿는 힘은 이상하게 태운을 흥분시켰다.

혁진이, 혁진이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성기가 터질 것처럼 커져서 이따금씩 점성 있는 액체를 뿜어냈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혁진의 단단한 손길이 필요했다.

“하아.”

태운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비비며 허리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엉덩이 사이의 구멍이 간지러웠다. 뾰족한 막대기 같은 것으로 안쪽을 긁고 싶었다. 태운은 엉덩이를 시트에 비볐다.

―내 손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다시 성기를 쥐어. 성기가 짓눌리는 감각이 들 때까지 힘을 주는 거야.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혁진의 나직한 말을 따라 태운은 홀린 듯이 제 성기를 쥐는 손에 힘을 주었다. 예민한 성기는 그것만으로도 당장 사정을 할 것 같았다.

―할 수 있잖아. 그대로 성기를 흔드는 거야.

태운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성기를 쥐고 손을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었다.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태운의 이마가 땀으로 번들번들 젖어 갔다. 질척질척 젖은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태운의 손에서 이어졌다.

점점 성기를 흔드는 태운의 손이 빨라졌다. 태운이 “흣!” 하는 숨을 참는 소리를 계속 내었다. 결국 성기는 더 이상 사정이 지속되는 것만 같은 감각을 견디지 못했다.

“할 것, 할 것 같아서.”

―해.

수화기 밖에서 혁진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태운의 성기에서 잔뜩 모아 두었던,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짙은 액체가 터져 나왔다. 태운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랫동안 참았던 사정은 그 참았던 시간만큼이나 길게 이어졌다.

정신이 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자신이 혁진에게 무슨 추태를 부린 건지 태운은 믿겨지지가 않았다. 태운은 망연자실하게 자신이 뿜어낸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통화는 끊기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태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혁진 또한 아무 말도 없었다. 태운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제가, 무슨…… 죄송합니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태운의 말에 전화기 안쪽의 혁진이 낮게 웃었다. 눈가에서 번진 빨간 기운은 얼굴 전체에 퍼졌다. 얼굴은 물론 목가, 귓가까지 붉게 물든 태운은 딱딱하게 굳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만을 짓이겼다.

집도 아니고 스태프들과 함께 쓰는 펜션에서 무슨 짓을. 태운은 여전히 핸드폰을 한쪽 손으로 든 채 협탁 위에 있던 티슈를 잔뜩 뽑아 제가 저질러 놓은 액체들을 수습했다.

다행히도 화려한 무늬의 짙은 시트에는 흔적이 남지 않았다. 하얗게 변한 얼굴로 태운은 자신의 손과 바지에 튄 점액질을 북북 닦아 냈다. 너무 부끄러워서 이대로 정말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태운은 차마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이미 옅어진 흔적들만 한 번 더 티슈로 문질렀다. 그때 수화기 안쪽에서 구원과도 같은 혁진의 말이 울렸다.

―사흘 일정이야. 호텔에 들를 필요 없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돌려준 혁진이 고마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태운은 부끄러움에 정말로 한동안 혁진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와중에도 태운은 혁진의 말에 담긴 배려를 깨달았다. 자신이 혹시라도 호텔로 가서 그를 기다릴까 봐. 태운은 간질거리는 손끝을 침대 시트에 비볐다.

“건강하게, 다녀오세요.”

태운의 말끝이 떨렸다. 혁진이 그 말 속에서 좀 웃었다. 아직도 민망함이 하얗게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태운은 연신 혀로 입술을 축였다.

―보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진정됐던 태운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혁진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태운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고 생각을 멈추었다. 설마 혁진이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운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가슴속이 뜨거운 무언가로 메워졌다. 하얗게 식었던 머릿속이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과 간질거리는 무엇인가로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태운이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녀오시면 그때…… 그때 뵙겠습니다.”

그 이후로도 통화는 길게 이어졌지만 둘 사이에 오간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다. 대화보다 정적이 더 길게 이어졌지만 두 사람 다 그 침묵을 기꺼이 여겼다.

한참의 침묵 끝에 수화기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며, 혁진은 끊어야 함을 알렸다. 태운은 아쉬움에 자신도 모르게 말소리를 길게 끌었다. 혁진이 낮게 웃었고, 그대로 전화는 끊어졌다.

전화가 끊어지자 태운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혁진의 낮은 웃음소리와 보고 싶다는 말의 울림. 그리고 혁진에게 보여 버린 추태. 그 모든 것이 다시 태운의 몸에 열기를 더하게 했다. 두 번째는 처음보다 쉬었다. 다시 또 단단해진 성기를 태운은 스스로 쥐었다.

그리고 떠올렸다. 능숙한 동작은 아니었지만 힘 있게 자신의 것을 빨아들이던 혁진. 자신의 다리 사이에 혁진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었지만, 그는 거대했었다.

태운의 눈가가 젖었다. 보고 싶다는 게 이런 기분인 것 같았다. 혁진이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흐.”

태운의 성기가 다시 터질 듯 단단해졌다. 혁진이 해 주던 것처럼 태운이 성기를 쥐었다.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단단하게 성기를 말아 쥔 태운은 다시 한번 자신의 손을 쳐올렸다. 두 번째 행위는 조금 전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언젠가 혁진에게 대가를 받으며 몸을 내어 줄 때가 떠올랐다. 혁진과 관계를 가진 뒤 혁진이 채 풀어 주지 않은 정욕에 몸이 달아올랐었다. 도망치듯 혁진의 객실에서 나와 새로운 객실을 체크인하고, 그 욕실에 숨어들어 자신의 것을 애무할 때. 머리를 깨 버리고 싶어 벽에 박았던, 그때 느꼈던 자괴감은 없었다. 오히려 혁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태운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후으…….”

탁탁탁 쳐올리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가득 울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태운이 정액을 성기에서 짜내었다. 하지만 혁진의 손아귀에서 모든 것이 짜내질 때처럼 눈앞이 하얗게 변할 정도의 쾌감은 없었다. 태운이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미쳤다. 태운의 머릿속은 혁진의 굵고 긴 무엇인가가 자신의 안으로 처박히는 생각으로 지배되었다.

혁진이 자신을 꿰뚫어 줄 때 느꼈던 미칠 것만 같은 쾌감을 알고 있는 몸은 손으로 앞만을 매만져 주는 감각에 만족하지 않았다. 미쳤, 미쳤어. 태운은 서둘러 핸드폰을 찾았다. 하지만 그것을 집어 들지는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혁진은 말을 해 주었어야만 했다. 이럴 때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

붉게 젖은 눈으로 태운은 다시 반쯤 선 자신의 성기에 손을 가져갔다. 지금 모든 감각이 몰린 곳은 앞이 아니라 뒤였지만, 차마 뒤를 자신이 만질 수는 없었다. 그것은 금기였다. 그곳에 손을 대는 순간 태운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태운은 앞을 붙잡고 수음했다. 더 이상 점액질을 만들어 내지 못할 때까지. 긴 행위 끝에 결국에는 맥이 탁 하고 풀린 태운은 다시 한번 티슈로 손 안을 수습하고 침대 위로 늘어졌다.

하지만 완벽한 개운함은 없었다. 오히려 혁진의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가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미친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미친 것만 같았다. 태운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 * *

촬영장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순간적으로 어젯밤 자신이 부렸던 추태를 떠올린 태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지만, 금세 그런 추문과는 조금 다르게 궁금증이 가득한 활기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촬영 준비를 마치고 천막으로 만든 간이 대기 장소에 앉아 있는 여배우와 자신을 번갈아 가며 힐끔거리는 분위기가 노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태운은 오늘 찍기로 한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에 단 한 번밖에 없는 키스신이었다. 활동하면서 수십 번 키스신을 찍어 보았지만 태운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 상황이 묘하게 부담스러웠다.

여배우의 순정은 이미 촬영장 내에서 유명했다.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사춘기 아이처럼 얼굴을 붉히고 태운을 피해 촬영장을 빙 돌아 뛰어다니는 모습이 인적 드문 산속에서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스태프들은 그런 여배우를 제법 귀여워했고, 태운 앞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태운과 잘해 보았으면 하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전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걷던 태운은 어느 순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여배우와 눈이 마주쳤다.

이미 붉은 얼굴을 하고 있던 여배우는 태운이 인사를 하자 마주 인사하고는 갑자기 허둥지둥 뒤로 돌아 뛰었다. 여배우가 뛰어간 쪽은 인적이 드문 산길이었는데, 여배우 쪽 스태프 중 누군가가 뒤따르는 것을 보고 태운은 조금 웃었다. 여동생을 보는 것 같아 그저 귀여운 마음이었다.

“저 아가씨를 정말 어떡하면 좋아.”

카메라 감독과 함께 카메라가 세팅되는 것을 지시하던 감독이 웃으며 태운에게 다가왔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여배우의 순정은 촬영장의 활력소이자 골칫덩어리였다. 태운은 소리 없이 웃었다.

감독은 가볍게 말하면서도 태운의 눈치를 살폈다. 태운이 불쾌한 기색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여배우에게 주의를 줄 참이었다. 본인만 즐겁고 상대는 불쾌한 감정은 질 나쁜 추행이라는 게 감독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여배우의 행동은 시간이 갈수록 지나쳐지는 감이 있었다. 그 행동에 변화가 크지는 않았지만, 지속된다는 것 자체가 그랬다.

“오늘 촬영 끝나면 저 아가씨 주의 한번 줄게. 이쪽 경력 하루 이틀도 아닌데, 저렇게 감정 숨기는 게 어려워서야.”

감독이 태운에게만 들릴 정도로 거의 속삭였다. 태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을 보태면 어떻게든 상황이 꼬일 수 있었다. 말을 아꼈다. 태운이 대답이 없자 감독은 요령 좋게 말을 돌렸다. 연예인을 어르고 달래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감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전히 붉은 얼굴을 한 여배우가 숲속에서 다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옆에서 매니저나 코디로 보이는 여성이 연신 여배우에게 뭔가를 속닥거렸고, 여배우는 마치 로봇처럼 걸어서 태운의 앞으로 왔다.

태운은 다시 여배우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뻣뻣하게 선 여배우는 아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태운은 작게 미소 지었고 감독은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좋아해요.”

여배우가 선봉에 선 장군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핑크빛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기는 했었지만, 그것이 여배우의 입에서 나오자 당황스러운 말이 되었다. 감독이 중간에서 여배우를 제지하려는데 이 말괄량이 아가씨가 그런 감독조차 멈추게 할 만큼 어이없는 말을 뱉어 냈다. 태운은 물론 중년의 감독까지 얼음처럼 굳었다.

“키스신 찍는 거 정말 좋아해요.”

감독과 태운이 아무 말도 없자 여배우는 연신 자신이 키스신을 찍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 늘어놓았다. 뒤에서 여배우에게 연신 무엇인가를 속닥거리던 여자가 그것이 아니라는 뜨악한 표정을 지어 상황을 더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키스신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는 여배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이제는 정말 태운의 목 위로는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대로 도망쳤던 여배우는 촬영 시간에 임박해서 매니저의 손에 끌려 나왔지만 촬영은 쉽사리 진행되지 못했다. 그녀가 맡은 배역도 수줍음이 많은 캐릭터라 어느 정도 리얼한 연기라고 포장이 가능한 부분이었지만, 딱딱하게 굳어 대사조차 뱉지 못하는 것은 문제였다.

그때 태운의 특기가 발휘되었다. 상대 배우를 단번에 카메라 앞의 배역으로 끌어오는 것은 태운의 힘이었고 장기였다. 태운이 카메라 앞에서 빛을 뿜어내면 상대 배우도 그 빛에 잠식되어 연기와 현실의 경계에 들어가곤 했다.

태운은 보다 본격적으로 상대 여배우를 이끌었다. 가볍게 끝내는 것이 좋았다. 키스신을 찍는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부터 불편한 감정은 혁진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비가 그치면 산을 내려가라고 말한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거센 비에 희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같이 보내는 신비스럽고 꿈같은 일주일. ‘그’는 매력적인 남자였고 희율은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리고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맑은 날. ‘그’는 희율에게 산에서 내려가면 죽을 것이냐고 묻고 희율은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런 희율에게 ‘그’가 입을 맞춘다.

태운은 여배우와 입술을 겹치면서 혁진의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카메라 앞에서는 이런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태운은 불편한 감정을 머릿속에 가득 채우면서도 착실하게 연기를 해 나갔다.

감독은 여러 각도로 키스신을 연출하는 것보다 카메라에 리얼리티 그 자체를 담아낸 다음 편집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태운은 정말로 여배우와 입술을 겹칠 수밖에 없었다. 혁진과 종종 입술을 겹쳐 왔던 태운은 그것에 이미 익숙했다.

살수차는 계속해서 빗방울을 공중에 뿜었다. ‘그’와 희율은 빗속에서 비밀을 발밑에 둔 채 계속해서 키스했다. ‘그’의 눈이 빗속에서 섬뜩할 정도로 까만빛을 냈다.

한참이나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은 감독은 만족할 만큼 촬영을 한 후에야 컷을 외쳤다. 끝나자마자 여배우는 감독이 한 마디 말을 하기도 전에 터질 듯한 얼굴을 감싸고 촬영장 밖으로 사라졌다. 그 걸음은 여전히 로봇처럼 뻣뻣했다.

* * *

서울로 돌아갈 짐을 챙기기 위해 숙소로 돌아온 태운은 화장을 지우는 것보다 먼저 양치부터 했다. 가슴 깊은 곳에 들어찬 찌릿한 불편함은 시간이 갈수록 그 크기를 키워 갔다.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한 것만 같았다.

결국 태운은 양치를 하다가 잇몸에 피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양치를 멈출 수는 없었다. 태운은 입안이 얼얼해질 때까지 양치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미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때까지 커져 버린 감정은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았다. 칫솔을 든 손이 비할 데 없이 무거웠다. 양치를 몇 번이나 했지만 입안이 찝찝하기만 했다.

키스신을 찍은 후 여배우는 태운에게 향하던 감정의 색을 더 짙게 만들어 내보였다. 짐을 챙겨 차를 대 놓은 공터까지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태운은 본인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러는 동안 벌써 몇 번이나 입술을 매만졌다.

“형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

사무실에서 업무 처리를 하는 전 매니저 대신 태운의 스케줄을 따라다니게 된 어린 매니저가 물었다. 태운은 자신의 표정이 밖으로 드러났다는 생각에 어쩐지 좀 겸연쩍어졌다.

“저기…….”

공터에 다다랐을 때쯤 키스신 촬영을 끝내고 어디론가 사라져 결국 돌아오지 않았던 여배우가, 겁 많은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태운에게 다가왔다. 하는 행동은 사춘기 여고생이었지만 외향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육감적인 화려한 미인이었다.

하지만 눈을 내리깔며 부끄러워하는 것이 동생을 생각나게 하면서 태운에게는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동생의 생각이 한풀 지나가고, 그 다음에는 전혀 예쁘다고 할 수 없는 남자가 생각났다.

혁진은 어디를 봐도 예쁜 구석이 없었다. 손가락 끝까지도 남자다웠다. 하지만 어쩐지 저 여배우와 혁진이 자꾸만 반사 작용처럼 연관되었다. 그곳에서 불편함이 시작되었다.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제가, 실수를 많이 해서…… 죄송해요.”

여배우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태운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이러는 게 실례인 걸 알지만, 그래도 실례가 되시지 않는다면, 아니, 그래도 실례인데, 혹시 사귀는 사람이 없으시면 서울에서 저랑 밥 한 번 드시지 않으실래요?”

횡설수설 말을 내뱉은 여배우의 눈에 잔뜩 기대가 차올랐다. 태운이 난감하게 웃었다. 이럴 때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거절할 수 있는 요령 같은 건 태운에게 없었다.

“죄송합니다.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을 내뱉는 순간, 가슴속에서 더 커질 수 없을 때까지 커졌던 불편한 감정이 더 크게 자라나 머릿속까지 팽창했다. 여배우의 기대 어렸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죄송해요. 비밀로, 비밀로 할게요.”

여배우는 그 말만을 남기며 자신의 벤으로 뛰어가 버렸다. 민망하고 심장이 밑으로 떨어질 듯 묵직해졌다.

* * *

오랜만에 들른 집이 낯설었다. 태운은 피곤에 절은 몸을 씻어 내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어쩐지 어딘가가 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태운은 또다시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물컹한 여배우의 입술 감촉이 생각났다. 부드럽고 말랑한 여자의 느낌. 하지만 그것에는 어떠한 성적인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 까칠하고 단단한 느낌의 다른 누군가의 입술이 생각났을 뿐.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고 초조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지금까지 찍었던 수없이 많은 키스신들의 직후를 생각해 보았지만, 카메라 밖으로 벗어나면 자신을 감싸고 있던 빛들이 산산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 감정들도 모두 다 사라졌었다.

어쩌면 그 여배우가 내뿜었던 열렬한 애정 때문일지도 몰랐다. 결국 태운은 목이 타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방으로 가 한 컵 가득 물을 들이켰다. 하지만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태운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벽에 몸을 기댔다.

촬영장에서부터 가지고 온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감정은 시간이 흐르고 있음에도 도무지 수습이 되지 않았다. 태운은 답답한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무엇인가 이곳에 얹힌 것 같았다. 몇 번 가슴을 내리쳤지만 겨우 이런 것으로 해결이 될 리 없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태운은 대본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글자만을 읽어 나갈 뿐 그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운은 긴 목이 전부 드러나도록 소파 뒤로 고개를 젖혔다. 태운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태운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밑으로 긴 속눈썹이 음영을 만들어냈다.

눈을 감자 혁진의 감촉이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감각은 태운을 더 불편하게 했다. 태운은 다시 또 한숨을 내쉬었다. 뇌 속까지 바짝 마르는 듯한 갈증은 도무지 가시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들었다. 혁진의 목소리를 들으면 답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 혁진에게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태운은 그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혁진에게 전화가 오기를, 그가 그런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무심한 태운의 핸드폰은 혁진의 전화를 알리지 않았다. 태운은 답답한 심장께에 손을 올리고 한참을 가만히 핸드폰을 바라보기만 했다.

* * *

모처럼 주어진 휴식이었지만 태운에게는 그 시간들이 지독히도 느리게만 흘렀다. 태운은 사흘 동안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것이 없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제대로 쉰 것도 아니었고 제대로 무엇인가를 끝낸 것도 아니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태운은 호텔로 들고 갈 짐을 챙겼다. 언제 혁진이 귀국하는지 알 수 없어 호텔에서 혁진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여전히 입술에 남은 감촉은 이제 그 여배우의 것인지 아니면 혁진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직 하늘이 어스름한 새벽에 도착한 객실 안에는 당연하게도 혁진이 없었다. 태운은 집에서 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양치를 다시 한번 하고 샤워도 한 뒤 편안한 차림으로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현관에서 이어진 복도와 연결된 문이 열리는 것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였다. 태운은 들고 온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 무릎 위로 올렸다. 혁진이 돌아올 때까지 사흘 동안 한 페이지도 채 제대로 넘기지 못한 대본을 읽을 생각이었다.

혁진의 공간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일까, 태운은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들고 온 대본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의 이성을 되찾았다. 그것을 느낀 태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도 잠시, 태운은 다시 모두가 공인하는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태운은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대본을 읽었다. 들어오는 혁진을 확인하기 위해 문과 정면으로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본 위로 혁진의 그림자가 질 때까지 태운은 혁진이 온 것을 알지 못했다. 태운이 괜스레 민망해져서 대본을 옆으로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녀오셨습니까.”

인사말을 내뱉는 태운의 얼굴이 붉었다. 태운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혁진이 태운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하지만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혁진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혁진이 다시 한 발자국 태운에게 다가왔지만 이번에도 태운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혁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죄송합니다.”

혁진이 태운에게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말이었다.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깨물었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혁진을 보면 감정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이태운.”

혁진의 말에 태운은 물러났던 걸음을 스스로 좁혀 왔다. 발걸음을 좁히는 태운은 얼굴 위에 밀랍을 덧씌운 것 같은 이상한 표정이었다. 마치 억지로 몸을 내어 주어야만 했을 때처럼. 그래서 혁진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아니 밖으로 드러날 정도로 표정이 딱딱해졌다.

“왜 그래.”

혁진의 목소리는 마치 귓구멍에 날카로운 송곳이 꽂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냉랭한 목소리가 뇌 속까지 뚫고 들어갔다. 태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입술의 감촉. 그것이 누구의 감촉인지 뒤섞여 버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혁진을 마주 볼 수 없었다.

혁진의 눈 밑으로 음영이 짙어졌다. 태운은 딱딱하게 굳었다. 온몸이 짓눌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지닌 엄청난 위압감은 태운을 작아지게 했다.

“이태운, 뭐가 문제야.”

태운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젓지도 못했다. 뇌가 내린 명령이 중간에서 차단되었다. 태운이 혁진에게 자비를 구해야 할 때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혁진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의도한 행동이라기보다는 혁진에게 짓눌렸을 때를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혁진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혁진은 가만히 태운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태운의 이마에 꽂혔다. 태운은 입술을 악물었다. 제 손끝만을 응시한 채, 태운은 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짐작하려 애썼다.

태운이 사흘 동안 핸드폰만 내려다보면서 기다린 혁진이었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혁진이기에 얹힌 것처럼 답답한 제 마음의 이유를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혁진으로부터 누적된 공포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혁진이 표정을 굳히는 것만으로도 튀어나올 만큼 수면에 가까운 얕은 곳에 잠식되어 있었을 뿐.

태운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그마치 오 년 동안 축적되어 온 공포였다. 손끝을 미세하게 부들부들 떨고 있는 태운을 혁진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이태운.”

그 자세에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혁진의 바지춤만 풀어헤쳐 그의 성기를 입안에 담는다면 불과 몇 개월 전의 태운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혁진의 입에서 긴 숨이 내쉬어졌다. 주먹을 쥔 손은 풀리지 않았다. 혁진은 태운을 도대체 어떻게 하여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혁진이 단단하게 고정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혁진은 태운이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완전히 짓누르는 대신에 태운의 허리를 잡고 태운을 일으켰다. 아이처럼 가볍게 들린 태운은 그대로 소파에 앉혀졌다.

“말하지 않으면 몰라.”

“…….”

“……이태운,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대리석의 매끈한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던 태운이 이를 악물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 또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태운은 본능적으로 혁진을 찾았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일으켜 놓았더니 이제는 잘게 떨기까지 하는 태운을 보며 혁진은 긴 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해.”

혁진의 평소보다 한 톤 낮아진 목소리에 태운은 입술을 악물고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것이 힘들었다.

“내 곁에서 이렇게 공포를 견디고 있었던 건가.”

태운의 눈동자가 떨렸다. 태운의 이지가 몸에 잠식된 공포를 다시 억눌렀다.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었다. 혁진과 다시 함께 보내게 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잊고 살았었다. 완전히 잊고 살았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만 이렇게 몸이 공포를 이겨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태운은 손을 뻗어 혁진의 손을 쥐었다. 그 손끝에 여전히 잔떨림이 남아 있었다. 혁진이 다시 긴 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태운은 지금 낼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소리로 말했다. 혁진의 말을 반박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혁진은 어미의 젖을 찾는 새끼 동물인 양 제 손을 잡고 말하는 태운을 내려다보았다. 혁진의 표정은 태운의 눈에도 들어올 만큼 복잡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 같은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태운의 눈가가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태운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을 반복하는 태운을 혁진이 가볍게 일으켜 품 안으로 넣었다. 태운이 뻣뻣하게 굳은 어색한 동작으로 혁진에게 안겼다.

“너에게는 차라리 처음부터 나와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

혁진의 품 안에서 태운이 숨까지 멈췄다.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혁진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한 박자 늦게 태운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여전히 입에서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는 몸이었다.

더듬더듬 손을 올린 태운은 혁진의 팔목을 잡았다. 놓치기 싫은 것처럼 단단하게 혁진을 잡은 태운은 그대로 다시 입술을 악물었다. 혁진이 태운의 손이 얹힌 채로 손을 들어 태운이 입술을 문 것을 제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혁진의 손이 입술가로 다가오자 태운이 다시 혁진의 손목을 쥔 채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혁진의 품 안에서 벗어나자 태운은 이상할 정도로 몸이 춥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두 사람은 마주 서 있는 상태였지만, 다시 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런 게, 아닙니다.”

혁진은 정말로 태운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 단단한 얼굴에 표정이 다 드러났다. 태운은 그저 고개를 계속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화들짝 놀란 태운은 물러났던 걸음을 스스로 좁혀 왔다. 하지만 혁진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태운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이태운. 지금 너와 나의 관계의 선택권은 너에게 있어.”

혁진이 소름 끼칠 만큼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태운의 동공이 커졌다. 태운은 혁진의 팔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혁진은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와 있는 것이 힘들다면, 넌 그저 등을 돌려 여기를 나가면 돼.”

와락, 태운이 혁진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말도 안 돼서. 이 단단한 품을 벗어난다는 것이 말도 안 돼서 태운은 혁진을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의 힘이었지만 혁진은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혁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가지 않을 것이었다. 갈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생각나고 또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혁진을 기다리면서 태운은 하루를 버텼다. 그런데 어딜 가라고.

“안 가. 가기 싫습니다.”

여전히 이마를 혁진의 어깨에 묻은 채로 태운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혁진이 그런 태운의 등을 투박한 손길로 두드렸다.

“자꾸 가라고 하지 마세요.”

태운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혁진의 새하얀 와이셔츠까지 눈물이 번졌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태운이 속으로 삼켰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혁진은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눈꺼풀 안으로 숨겼다.

“촬영장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핸드폰만 보고 있습니다. 전화해 주실 것 같아서.”

눈물 묻은 목소리로 태운이 더듬더듬 고백을 뱉어 내었다. 태운의 얼굴이 붉어졌다. 입술 끝이 덜덜 떨렸다.

“가끔씩…… 몸이 지칠 때마다, 이곳으로 돌아와…… 잠을 자는 생각을 합니다.”

말을 하던 태운은 잠시 숨을 참았다. 복잡하게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생각을 어떻게 말로 뱉어 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지독하게 없는 말주변은 이렇게 사람을 곤란하게 했다.

“……제게 그저 공포라면, 계속 기다리지 않습니다.”

태운은 더듬더듬 에두르는 것 없이 말했다. 말주변은 없었지만 돌려 말하지 못하는 성격은 다시 시작한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장점이 되었다. 태운의 말에 툭툭툭 태운의 등을 두드리고 있던 혁진이 그대로 태운을 안았다. 태운이 너무 힘을 준 나머지 힘이 빠진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심장 속으로 박아 넣을 것처럼 안았다.

“미안해.”

혁진의 입에서 결코 나오면 안 되는 말이 나왔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릴 적부터 사과를 하지도, 사과를 할 일도 만들지 말라는 오만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혁진이었다. 그의 입에서 처음 뱉어 내는 말이었다.

더듬더듬 혁진을 감싼 손에 힘을 주던 태운의 손에 힘이 풀렸다. 탁 하고 맥을 놓아 버린 태운의 눈에서 울컥 눈물이 뿜어져 나왔다. 휘청거리는 태운을 혁진이 단단히 안아 들었다. 태운이 혁진의 가슴께까지 무너져 내려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태운의 목소리가 울음 섞여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잘 나오지 않는 말을 태운이 한 자 한 자 입안에서 발음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사람이었고, 또 단단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 따위한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태운은 생각했다.

힘이 풀려 품 안에서 흘러내리는 태운을 고쳐 잡은 혁진이 태운을 아이처럼 번쩍 들었다. 태운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굳어 눈에서 눈물만 계속 뿜어냈다.

“제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태운의 말이 한 꺼풀 가벼워졌다. 하지만 머릿속이 멍한 태운 스스로는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혁진은 대답 없이 걸었다. 침실까지 걸어간 혁진은 태운을 그대로 침대 위로 눕혔다. 아직도 눈물을 멈추지 못 하고 있는 태운을 다독이고, 그의 목까지 얇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제가, 뭐라고.”

혁진이 담배를 꺼내 손에 들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태운의 눈에서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눈물을 바라보다가 젖어 있는 볼가를 꾹 눌렀다.

“이태운.”

“네.”

잔뜩 눈물을 뿜어내면서도 태운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혁진이 투박한 손으로 태운의 얼굴에서 눈물을 치웠다.

“사람처럼 살게 해 줄게.”

“…….”

“행복하게 해 주겠다 같은 내 스스로도 답을 알 수 없는 말은 못해. 다만 네가 다시는 무릎 꿇을 일 없게 만들어 줄 수는 있어.”

태운이 숨을 멈췄다. 혁진이 하는 말의 의미가 직관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대로 가슴에 와서 닿았다. 가슴에 와닿는 의미는 무거웠다. 말을 하는 혁진도 그런 무거운 마음일 것 같다고 태운은 생각했다. 혁진의 마음을 태운은 가슴으로 이해했다.

“뒤돌아보면서 후회할 일 없이 앞으로만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줄게.”

혁진이 닦아 내는 양보다 태운의 눈에서 만들어 내는 눈물의 양이 많았다. 태운은 몸에 힘이 빠져 시트에 축 늘어졌다. 다만 어미를 보내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혁진의 손목을 놓지 않고 단단하게 쥐고 있었다. 태운은 그렇게 혁진을 쥐는 것밖에는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혁진은 오랫동안 그렇게 침대에 걸터앉아 불편한 자세로 태운에게 잡혀 있었다. 태운의 눈 주위가 눈물로 붉게 짓물렀다. 한참을 울다가 태운의 눈에서 더 이상 눈물조차 나지 않을 때까지 혁진은 가만히 그렇게 태운과 함께했다.

어찌나 절박하게 잡았는지 혁진의 굵고 단단한 손목에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태운은 깜짝 놀라 손을 떼어 내었다. 태운의 얼굴이 민망스럽게 붉어졌다. 태운이 손을 떼자 혁진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경직된 태운은 떨리는 눈으로 혁진을 쫓았다.

그렇게 태운에게서 멀어진 혁진은 미니바에서 생수를 꺼냈다. 태운은 다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혁진을 보면서도 경직이 풀어지지 않았다. 혁진이 다시 침대 위에 걸터앉자 태운이 조심스럽게 다시 혁진의 손목을 쥐었다. 절박함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던 혁진은 태운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로 생수의 뚜껑을 따 태운에게 건네는 대신 병을 기울여 태운의 입안으로 흘려 넣어 주었다. 물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갈증이 느껴진 태운은 얌전하게 그 물을 받아 마셨다.

“피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태운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혁진의 시선이 태운의 얼굴에 향했다. 태운의 얼굴이 울음기가 섞여 붉은 것과는 다른 의미로 붉어졌다.

“피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는데.”

혁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태운이 말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태운은 입안에서 말을 정리했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 조리 있게 말을 정리할 수 없었다.

“촬영 중에, 키스신을 여자 배우와…… 불쾌하실 것 같아서.”

태운이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태운의 눈꼬리가 부르르 떨렸다. 혁진이 그런 태운의 눈가를 꾹 눌렀다. 그리고 그대로 태운에게 몸을 숙였다. 혁진의 입술과 태운의 입술이 닿았다.

혁진은 태운이 물러날 수 없도록 뒷머리를 단단히 쥐었다. 태운은 이번에는 도저히 도망칠 수 없었다. 혁진의 혀가 태운의 입안으로 거칠게 침입했다. 평소보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태운의 입안에 머물던 숨을 당기고 태운의 입안 깊숙한 곳까지 혀를 밀어 넣었다.

태운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혁진의 팔을 쥐었다. 울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라 태운은 금세 숨이 찼다. 하지만 다급한 침입자는 조금의 자비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태운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혁진은 정말로 태운을 그대로 씹어 먹고 싶은 것처럼 입을 떼지 않았다.

아플 정도로 빨리고 씹히고 있는 태운의 혀가 뻣뻣하게 굳어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혁진은 키스를 끝내지 않았다. 오랫동안 붙은 듯이 겹쳐져 있던 입술이 떨어지자 혁진이 혀로 태운의 입술을 핥아 주었다.

눈을 감고 혀가 뽑힐 것 같은 감각을 견디던 태운이 가만히 눈을 떴다. 입술이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혁진은 눈앞에 있었다.

“앞으로는, 찍지 않겠습니다.”

얼얼한 혀로 태운은 단호한 발음을 만들어 냈다. 혁진은 대답 없이 낮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민망해진 태운이 혁진의 눈을 피했다.

“그런 장면을 자주 촬영하나?”

태운의 얼굴이 비할 데 없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이아몬드 형으로 길게 뻗은 눈이 아래위로 둥글게 변했다. 태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작품 하나에 한두 번씩…….” 

혁진이 태운의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태운이 민망함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송구함에 눈을 바짝 내리감았다.

“나는 네가 처음이야.”

“네?”

태운이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런 태운을 보며 혁진이 다시 웃었다.

“비위생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었어.”

바짝 굳어 움직이지 않는 태운을 혁진이 가볍게 주물렀다. 하지만 태운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혁진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지금은 할 수만 있다면 네 입안을 전부 씹어 삼키고 싶어.”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눈을 내리감고 있는 태운의 입술 위로 혁진이 가볍게 입술을 비볐다. 가만히 입술을 대고 있던 혁진은 그러다가 힘을 주어 태운의 입술이 뭉개질 정도로 꾹 눌렀다. 혁진답지 않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태운이 눈을 깜빡였다.

“그게 네 일이라면 간섭하고 싶은 생각 없어. 이렇게 숨기는 것 없이 털어놓기만 한다면.”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도록 가까운 거리에서 혁진은 태운에게 말했다. 도무지 피할 곳이 없는 태운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래.”

혁진이 태운의 축 가라앉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너무 울어서 기운이 풀린 태운이 가만가만 눈을 감았다 떴다. 잠이 와서라기보단 우는 데 기운을 모두 쏟았기 때문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많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태운.”

“이렇게, 곁에 계속 계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듬더듬 말을 뱉어낸 태운은 눈을 감았다. 잠기운이 쏟아졌다. 혁진이 다시 이태운, 하고 태운을 불렀지만 태운은 눈을 뜨지 않았다. 태운의 뺨이 붉었다.

태운이 완전히 잠들고 난 뒤에야, 가만히 태운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혁진이 뒤늦게 대답했다. 태운의 요청에 대한 긍정의 답이었다.

커다란 유리에서 들어오는 환한 달빛이 태운을 하얗게 비추었다. 태운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빛났다. 혁진은 가만히 지쳐서 잠에 빠진 태운을 내려다보았다. 눈물 나도록 눈부신 밤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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