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가 원하던 천사
태운은 까마득한 높이의 건물 위에서 떨어지는 놀랍도록 가벼운 물체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그것은 곧 바람과 함께 흩어져 마치 모래처럼 태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심장이 뜯겨져 나가는 것 같은 절망 가득한 비명 소리가 을씨년스러운 팔차선 도로 사이를 울렸다.
혼란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비명을 입 밖으로 내질렀던 것인지 목이 아팠다. 꿈과 현실의 어렴풋한 경계 속에서 태운은 저를 단단하게 붙드는 손아귀 덕분에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독하게 생생한 꿈이었다. 태운은 그 모든 절망이 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은 진정되지 않았다. 꿈속에서 동생은 수백 번 수천 번 태운의 눈앞에서 낙화했다.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동생은 먼지처럼 부서져서 꽃송이처럼 흩어졌고 바람결에 나부꼈다.
“또 나쁜 꿈을 꾼 건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잠결에도 끙끙 앓는 태운을 현실로 건져 올려 준 건 단단한 목소리였다. 현실로 끌어 올려진 태운은 목이 아파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저었다.
나쁜 꿈은 없었다. 아픈 꿈을 꾸었을 뿐. 동생은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었다. 태운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동생이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태운은 그 장면이 눈앞에서 본 듯 선명했다. 동생은 태운의 꿈속에서 또 그렇게 스스로에게도, 태운에게도 잔인한 선택을 했다.
“이태운 내가 말한 적 있지.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혁진이 몸을 일으키며 보조 조명을 켰다. 태운도 혁진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어렴풋한 빛에 혁진과 눈이 마주치자 태운은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지만, 보지 않아도 자신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알 수 있었다. 혁진의 앞에서는 이렇게, 카메라 앞에선 어떤 상황에서도 환하게 웃을 수 있던 자신이 나오지 않았다.
“꿈에 내가 나와?”
“……아닙니다.”
혁진의 말은 태운에게도 느껴질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그 기색에 태운은 더 강하게 부정했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꿈의 내용을 해명하기 위해 입을 열지는 못했다. 무엇이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악몽이 아니라 그저 아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혁진은 그런 태운을 재촉하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차올랐다. 혁진은 일정을 취소하기 위해서인지 핸드폰을 가지고 잠시 자리를 비웠었지만 곧 돌아와 계속 기다려 주었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태운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혁진에게 숨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이 오려 낸 것처럼 없다는 이야기. 기억의 첫 시작이 허공에 목을 매단 엄마라는 이야기. 냉장고의 반찬들을 먹고 버티다가 먹을 것이 없어서 물만 먹었다는 이야기. 옆집 아주머니에게 발견되어 보육 시설로 옮겨졌다가, 자신이 손에 꼭 쥐고 있던 메모의 전화번호를 발견한 사회 복지사가 그 번호로 연락했더니 그게 친부였다는 이야기.
자신 때문의 친부와 계모가 매일 싸웠고 결국 계모가 집을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친부는 두 아이를 곁에서 돌보겠다는 결심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동생이 숨차도록 뛰어 놀 수 있었던 큰 식당을 했지만 잘되지 않아, 어느 날부터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가끔씩 들어오는 아버지가 놓고 가는 돈으로 동생과 그래도 잘 살았던 이야기. 하지만 어느 순간 아버지가 그 돈마저도 주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두고 동생과 함께 살아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했던 이야기. 그 와중에 틈틈이 공부를 했고 검정고시에 합격한 이야기. 잠시 대학에 다녔던 이야기. 그리고…….
태운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자신의 입으로 말을 꺼내는 것이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혁진은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태운의 입으로 다시 확인하는 동안 혁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동생과 저는 세상에 둘밖에 없는 가족이었어요. 둘 중에 한명이라도 없으면 집에 혼자 있어야 했는데 동생은 그걸 정말 싫어해서…… 그래서 항상 서로의 위치랑 일정을 알렸어요.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연락이 되지 않았어요……. 집에 와도 동생이 없어서 버스 정거장까지 동생을 데리러 갈 생각이었는데 옆집 아저씨가 어떤 남자들이 아빠를 찾다가 아정이를 아버지 빚 대신 팔아넘긴다고 끌고 갔다고 말해서…….”
태운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동생의 얼굴이 생각났다. 말없이 입술만 짓씹는 태운을 혁진이 끌어다가 품에 안았다. 태운이 그 품 안에서 한숨을 털어 내었다.
“그러다가 아버지랑 연락이 됐는데, 동생의 위치는 알게 됐는데 평범한 방법으로는 그 큰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러다 생각 난 게…….”
잠시 숨을 고르다 태운은 말을 이었다.
“전 소속사 사장이랑은 그 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길거리 캐스팅 같은 것이었어요. 큰돈을 벌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바란 적은 없어서 따로…… 연락을 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안정적인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장 돈이 필요했고, 아무것도 없는 제게 그 돈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계약금을 받았다.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 그 돈으로 동생을 구했다. 동생은 어딘지 우울하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태운은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돈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그 대가는 혁진도 잘 아는 것이었다. 스스로 옷을 벗고 알몸으로 저를 안아 달라고 처절하게 매달리던 하얀 얼굴. 그것을 사람을 시켜 쓰레기처럼 치워 버린 자신.
태운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었고 혁진이 오히려 태운을 안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혁진의 객실 안에서 태운이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하고 돌아오자 전 소속사 사장은 태운에게 강찬혁을 비롯한 소속 배우들의 강간, 윤간 동영상을 태운에게 보게 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똑같이 구르게 해 주겠다는 협박도 함께였다.
태운이 그 처참함을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면, 다시 눈을 뜰 때까지 폭력이 이어졌다. 고통뿐인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대가를 받았기에 태운은 묵묵히 그 시간들을 견뎌야만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태운에게 심심풀이처럼, 사장의 기분에 따라 가해지던 폭행은 멈췄다. 몸에 멍이 없어질 무렵 태운은 자신을 호출한 혁진에 의해 갈가리 찢겨졌다. 가난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훼손되었다.
“호텔에서 나와서 서울을 끝없이 걸었습니다. 제가 걷고 있는 것도 몰랐어요. 헤매고 헤매고 헤매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동생이 친부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빚을 갚고 돈이 조금 남은 상태였어요……. 동생을 위해서 하고 싶다는 거 뭐라고 해 주려고 했던…… 얼마 되지 않는 돈이었는데…….”
몇 배로 불려 주겠으니 한 번만 자신을 더 믿어 달라는 친부를, 동생이 실랑이 끝에 있는 힘껏 밀어 버렸다. 얼결에 중심을 잃은 친부는 그대로 넘어졌고 난간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며 정신을 잃었다.
사고였다. 하지만 축 늘어진 친부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동생은 그대로 굳어 버렸고, 태운은 자신이 동생 대신에 죄를 덮어쓸 생각이었다.
상황을 수습한 것은 혁진의 객실에서 나와 그대로 증발해 버린 태운을 찾던 전 소속사 사장이었다. 태운은 좀처럼 진정을 하지 못하는 동생을 방에 눕히고, 소속사 사장을 따라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움직였다.
“제가 다 덮어쓸 생각이었습니다. 동생한테도 그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요. 동생은 제가 자기 죄를 덮어쓸까 봐 두려웠던 것 같아요. 동생을 그렇게 두는 게 아니었는데…….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머리가 어떻게 됐던 것 같습니다.”
태운이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제가 겪어 온 수없는 지옥들을 말할 때는 그저 덤덤했던 녀석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혁진은 그런 태운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그저 어깨를 쓸어주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속에 있는 검은 것이 전부 밖으로 나오길 바라며.
“자살을 하려고 했던 거였습니다. 제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다고, 저는 연예인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이 허물이 되면 안 된다고요. 그 모자란 녀석이. 그 미련한 녀석이.”
동생의 유서도 아닌 편지를 읽는 동안 태운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정신을 놓을 수조차 없었다. 병원에 갔다. 아정이 깨어날 때만 기다리며 밤을 새고 있는데, 눈을 뜬 아정은 자신을 끔찍한 얼굴로 보면서 발작했다.
“……너무 무섭습니다. 동생이 혹시라도 알게 됐을까 봐. 그래서 제가 역겨워졌을까 봐. 그래서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은 것일까 봐.”
그 모습이 떠올라 태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내 움직임은 멈췄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저는 그때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하지 않습니다. 몇 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아요. 그 당시 제가 가진 선택지 중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선택이었고, 그 지옥 속에서 저를 구해 주신 것도 알고 있어요.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말로 감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동생이 알지도 모른다는 건, 알게 된다는 건 무섭습니다.”
자신이 끔찍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동생의 병원비를 위해 소속사 사장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만 했다. 기계처럼 혁진에게 몸을 내주고 그 대가로 CF를 찍었다. 고통스러웠고 치욕스러운 나날들이었지만 태운은 정신줄을 단단히 붙든 채 견뎌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동생이 나오는 아픈 꿈을 꾸기 시작했다. 태운은 현실을 잊기 위해, 삶을 버티기 위해, 자신이 아니게 될 수 있는 연기에 매달렸다. 살아가기 위해선 매달릴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이태운.”
“저, 저 때문에 죽으려고까지 했던 애에요. 그런 애가 저를 보자마자 발작했습니다. 끔찍한 것을 보는 것처럼……. 자신을 그런 방법으로 살렸다고, 살게 했다고, 동생에게 제가 끔찍한 것이 됐을까 봐 너무 무서워요. 그렇게 끔찍하게 번 돈으로 사느니 죽겠다고 다시 삶을 포기할까 봐 무서워요…….”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혁진의 손이 태운을 끌어안으려다가 멈칫했다. 혁진답지 않은 손짓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 손길에 괜히 서러워진 태운은 입술을 꾹 물고 혁진의 품에 제가 먼저 안겼다. 태운의 몸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혁진에게까지 전해졌다.
제 품에 파고드는 태운을 보며 혁진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주 깊은 곳에서 짙게 터져 나오는 숨이었다. 동생을 위해 겨우 버티고 있었던 녀석을 끝까지 몰아 죽음을 택하게 했다. 상황을 극단적으로 만든 건 소속사 사장이었지만, 태운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한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이었다.
태운을 품에 안은 혁진의 손안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자신이 건넨 지옥을 견디고도 이렇게 자신의 품에 안겨 오는 녀석이 혁진은 정말 이상했다.
“사람이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어야 했어.”
혁진이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하지만 태운의 귀에는 한 단어도 빠짐없이 흘러 들어왔다.
혁진은 협탁에서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연기가 마치 한숨처럼 주변으로 흩어졌다. 담배 연기를 길게 들이마신 혁진은 태운의 입에도 담배를 물려 주었다. 침실 안에는 한숨과도 같은 담배 연기가 자욱해졌다.
“너는 나에게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평생 알지 못하고 살게 했었어야 했어. 그것이 네가 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였을 텐데.”
혁진은 정말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그는 살면서 한 번도 지나온 과거를 후회해 본 적 없었다. 후회란 현실을 바꿀 힘이 없는 이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혁진은 과거를 후회했다.
그때밖에 할 수 없는 복수였다. 이미 곁에 붙어 오는 따뜻한 것을 알아 버린 지금 태운이 떠난다고 해도 그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평생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게 했어야 했다. 혁진은 태운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태운은 혁진의 동요가 손에 잡히는 것만 같아 조심스럽게 혁진의 등을 감싸 안았다. 혁진의 동요를 알고 있다는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혁진의 품에 이마를 비볐다.
어깨 위에 올려진 짐이 너무 무거워 혁진에게 기대지 않고는 제대로 설 수 없을 것 같았다. 도저히 혼자 걸을 수 없어 혁진에게로 돌아온 것이었다.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라 자신이 기대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혁진이 자신 때문에 동요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괜찮았다. 가끔씩 가슴이 너무 아파 피가 날 정도로 살을 쥐어뜯으며 눈을 뜨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혁진에게 자신이 진 짐을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태운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혁진의 품에 파고들었다.
“동생에게 널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 줄게.”
“그, 그게…….”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혁진의 말에 태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살짝 고개만 들어 마주한 혁진의 눈빛은 태운이 읽기 힘들었다. 다정한 것 같기도 하고 죄책감이 가득한 것 같기도 했다.
“동생이 이해해 줄 때까지 계속 말해 줄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태운은 다시 혁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강하고 냉정한 남자가 이렇게 말을 해 주자 얼마나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혁진은 태운을 품에 안고 어르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태운의 동생이 입원해 있는 병원은 보고를 받아 이미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 줄 생각이었다. 이미 지난 일들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지금부터라도 걱정 없이 잘 살게 해 주고 싶었다.
태운의 동생이 입원해 있는 병원은 혁진이 소유하고 있는 재단 소속이었다. 신경을 쓰라는 지시를 해 놓았기에 계속 확인하고 있었는지 연락을 받은 병원의 책임자는 아정의 상태를 상세하게 보고했다. 태운은 숨도 멈추고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집중해서 들었다.
면회가 가능하냐는 혁진의 물음에, 상대는 최근 안정된 상태를 보이는 중이지만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 의료진 입회하에서라면 가능하다고 답했다.
“준비가 되면 말해. 같이 가 줄게.”
여전히 혁진의 품에 안긴 채 태운은 대답하지 않고 혁진의 등을 감싸 안았다. 혁진의 품은 너무 단단해서 자신이 이렇게 기대어 있다고 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 * *
감독들은 종종 자신이 연출가인지 아니면 연예인들의 보모인지 구별을 할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 특히 어느 정도 급이 있는 연예인들만을 촬영하는 CF 감독은 더했다.
연예인들과 마찰이 생기면 갈려 나가는 쪽은 감독이었다. 어느 광고주도 촬영장에서 트러블이 났다고 해서 모델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 세 살 먹은 아이처럼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연예인들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카메라 앞에 세우는 것이 감독의 또 다른 역할이었다.
감독은 머리를 짚으며 힐끔하고 태운의 눈치를 살폈다. 촬영 장비에 문제가 있어 촬영이 무기한 연기된 상황이었다.
당장 신제품 광고가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 시일을 더 미룰 수도 없었다. 전문가들이 와서 장비를 보고 있지만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이태운이 이대로 촬영장을 벗어난다면 죽어나는 건 감독이었다.
태운은 또래의 스태프와 이번 광고 제품인 카메라를 만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감독이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었다.
이태운에 대한 업계 평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조금 예민하고 사람을 가린다는 평이 있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같이 일하기 좋다는 식의, 업계에서 해 줄 수 있는 평 중에 가장 좋은 평들이 들려왔다.
감독은 눈치를 보면서도 역시 직접 겪기 전까지는 소문들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촬영이 몇 시간째 지연되고 있는데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처음 봤을 것이 분명한 말단 스태프와 저렇게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저게 어딜 봐서 예민하고 사람을 가린다는 것인지 의아했다.
“이렇게 하시면 조리개 값이 조절이 돼요. 확실히 밝기가 다르죠?”
태운은 손 안의 카메라 모니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이 지연되어 촬영장 한편에서 광고 제품인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자, 지나가던 스태프가 옆에서 조작법을 설명해 주었다.
확실히 스태프가 설명해 주는 것처럼 설정을 조절하니 화면의 색감이 달랐다. 태운은 카메라를 들어 주변을 카메라 렌즈 안에 담아 봤다. 항상 찍히기만 하다가 카메라를 드니 기분이 이상했다.
옆에 있던 스태프가 찍기 좋게 포즈를 취해 줬다. 태운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태운이 카메라의 액정을 보여 주자 스태프가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저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시면 안 돼요?”
한참을 태운에게 카메라 조작법에 대하여 설명해 주던 스태프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운의 뒤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매니저가 제지하기도 전에 태운이 네 하고 대답했다. 매니저가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췄다.
“아, 카메라로 말고 제 핸드폰으로요.”
태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태프의 핸드폰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당황한 얼굴로 스태프가 얼결에 태운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태운의 사진을 찍겠다는 의미였는데 태운이 오해를 한 것 같았다. 태운이 어서 자세를 잡으라는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자 스태프가 어쩔 수 없이 태운의 앞에 서서 어설프게 브이를 그렸다.
“사실은 이게 아니라 태운 씨 사진을 찍겠다는 말이었어요.”
스태프의 고백에 태운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스태프의 얼굴이 붉어졌다. 태운과 같은 성별을 가진 스태프가 보기에도 태운의 웃음은 예뻤다. 태운이 다시 핸드폰을 스태프에게 내밀었다.
“동생이 태운 씨 완전 팬이에요. 오늘 여기 간다니까 따라온다고 계속 억지를 부려서, 결국 빠져나오려고 사진 찍어다 주기로 했는데…….”
스태프가 변명처럼 말을 이었다. 태운이 다시 웃었다.
“여동생입니까?”
“네. 일단 성별은 여자인 것 같긴 한데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말끝을 흐리는 애매한 말에 태운이 해사하게 웃었다. 자신의 여동생도 엄청난 말괄량이였다. 그랬을 때도 있었다. 태운은 길게 드리우는 여동생의 그림자에 다시 웃었다. 얼굴이 흐려지는 웃음이었다.
“저도 여동생이 있습니다.”
태운의 뜬금없는 고백에 스태프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이태운의 가족 관계는 밝혀진 바가 없었다. 태운은 영화 공식 스케줄을 제외하고는 인터뷰조차 하지 않는 신비주의 노선을 걷는 배우였다. 영화 시사회에서도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동생분이 태운 씨랑 닮았으면 엄청 예쁘실 것 같아요.”
“동생이 훨씬 더 예뻐요.”
동생을 이야기하는 태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태운의 말에 남자 스태프의 눈이 반짝였다. 이태운보다 더 예쁜 여자라니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스태프의 앞으로 태운이 어색하게 섰다. 커다란 카메라 앞에서는 그렇게도 반짝이던 태운이 그보다 훨씬 작은 핸드폰 앞에서는 어색한 얼굴이 되었다. 엄청난 갭이었다.
그사이에 스태프는 카메라의 셔터 버튼을 계속 눌렀다. 어색한 얼굴이어도 이태운은 반짝반짝 빛났다. 아니, 순하게 웃는 이태운은 그 어떤 광고 속에서보다 환하게 빛났다.
* * *
시간이 흐를수록 태운은 초조해졌다. 혁진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태운은 여전히 촬영장 안이었다. 혁진은 태운을 강제하지 않았다. 다시 만난 이후로는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태운이 먼저 스케줄을 혁진에게 말했고 태운은 그 스케줄을 전부 지켰다. 한 번도 이렇게 늦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촬영 장비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촬영에 쓰려고 했던 카메라는 워낙 고가인 데다 국내에 몇 대 없는 장비라 대여조차도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방에서 겨우 대여한 카메라를 가지고 올라오고 있다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았다.
태운은 핸드폰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혁진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까 계속 고민 중이었다. 잠시 호텔을 들렀다 올까 하고 생각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참 망설이던 태운은 결국 핸드폰을 들고 비상구 쪽으로 향했다.
전화로 전달하면 어쩐지 무례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방법이 없었다. 태운은 핸드폰의 다이얼 창을 내려다보았다. 혁진의 개인 핸드폰 번호이자, 항상 혁진에게 통보를 받기만 했었던 번호였다.
어쩐지 딱딱한 숫자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며, 태운은 망설임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혁진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렸다. 태운은 숨을 멈췄다.
“이태운입니다.”
―그래.
전화로 듣는 혁진의 목소리는 직접 듣는 것보다 거리감이 있었다. 태운이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나직한 혁진의 음성에 턱 끝이 어쩐지 간질간질했다. 태운은 손등으로 턱 끝을 긁었다. 이상할 정도로 목이 탔다. 말없이 입술을 물었던 태운은 다시 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촬영이 지연돼서 밤새 촬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어디십니까. 하는 말이 태운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밖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호텔 안이었으면 좋겠다. 태운은 올라오는 이상한 생각에 다시 혀를 물었다.
둘은 별다른 대화가 나누지 않았지만 누구도 통화를 그만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끊고 싶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혁진이었다.
―내일은?
“촬영이 끝나면 다른 스케줄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둘의 숨소리만이 통화 스피커로 오갔다. 태운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끊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마음이었다.
귀에 대고 있는 핸드폰이 여름이라 그런지 금방 뜨거워졌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장비의 수리가 끝났는지 비상구 문 밖에서 태운을 찾는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장비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태운은 전화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내일…… 뵙겠습니다.”
둘 다 한참을 끊지 않는 전화는 이상했다. 태운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매니저의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이번에도 누구도 끊지 않았다.
“끊어 주세요.”
태운이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잠시간의 시간이 또 흐른 후에야 끊어진 수화음 소리가 들렸다. 태운은 뜨거운 전화기를 움켜쥐었다. 전화보다 손이 더 뜨거운 것 같았다. 쿵쿵쿵 맥박이 뛰는 소리가 전화를 쥔 손에서 시작해 머릿속까지 울렸다. 이상했다. 이건.
촬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조명에 닿았던 피부가 화끈거렸다. 눈앞에 조명이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장시간 눈을 뚫을 듯 환한 조명에 노출되었던 탓이었다.
태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기다란 속눈썹이 허공을 나풀거렸다. 하지만 몇 번을 반복해도 눈에 새겨진 조명이 사라지지 않았다.
태운은 포기하고 그냥 눈을 감은 채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조명 속에서 나오면 항상 이상한 두근거림이 몸에 남았다. 각성제를 필요치 이상으로 들이켰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장비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촬영은 예정되어 있던 시간과 비슷하게 끝났다. 감독은 가볍게 웃었고, 광고 기획 담당자는 입이 귀에 걸려서 회사로 복귀했다.
진정되지 않는 감각에 태운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머릿속을 채우는 혁진이 이상하기만 했다. 꼭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조명 같았다. 그 산란한 빛처럼 혁진은 계속해서 눈앞에 어른거렸다.
태운은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혁진을 받아 낼 준비를 한 후 호텔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에 가면 눈앞을 채우는 감정이 조금 진정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저 몸을 씻어 내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럽고 또 굴욕스러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기억이 수없이 많았다. 이가 덜덜 떨렸고 꽉 쥔 주먹이 부들거렸던. 그랬을 때도 있었는데.
대가를 받지 않기 때문일까? 태운은 자신의 몸을 씻어 내는 순간이 더 이상 두렵지도 굴욕스럽지도 않았다.
* * *
객실 안으로 들어서며 태운은 난감하게 웃었다. 손에 들린 가방이 무거웠다. 이제 겨우 정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에서 책을 챙겨 왔는데, 이렇게 많은 글자들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소파에 걸터앉았다. 이곳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한 것은 자신과 혁진뿐인 듯했다. 이상하게 가슴께가 간지러워 태운은 서둘러 들고 온 책을 펼쳤다. 여전히 눈이 피로했지만 눈에 글자를 담지 않으면 이 이상한 감정을 떨쳐 내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가져온 책을 손 안에 들자 이상하게 집에서는 그렇게 오지 않던 잠이 쏟아졌다. 태운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계속 책을 읽어 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태운은 까무러치듯 잠에 빠졌다.
태운이 다시 눈을 뜬 것은 환한 조명 때문이었다.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는 사람의 움직임에 자동으로 조명을 밝혔다. 혁진이 도착한 것이었다. 불편하게 소파에 구겨져 잤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개운했다.
깜빡깜빡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던 태운은 눈앞을 드리우는 그림자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혁진이었다. 태운은 버벅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잠에 취한 몸은 태운의 의지를 배반하고, 뜻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오셨, 습니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거슬거슬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색해 태운은 목을 긁적였다. 혁진은 그런 태운을 뒤로하고 몸을 숙여 태운이 소파 위로 던져 놓은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펼쳐 한번 쭉 훑어본 혁진은 테이블 위에 반듯하게 다시 책을 올려 두었다.
태운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혁진은 매번 이렇게 태운이 읽고 있는 책이나 대본을 확인했는데 어쩐지 혁진이 집어 들 때 한 번도 그것이 제대로 반듯하게 있었던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은.”
“전입니다.”
혁진이 태운의 거뭇한 눈 밑을 쓸었다. 성적인 의미가 전혀 담기지 않은 담백한 손짓이었는데 태운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언제 왔어.”
“점심때쯤 왔습니다.”
계속 질문을 하는 혁진이 낯설었다. 태운은 혁진이 질문하기 전 먼저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와서 책을 좀 보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식사하셨습니까?”
조심스러운 태운의 말에 혁진이 짧게 웃었다.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시간을 인지 못하는 것은 자다 일어난 태운뿐이었다. 혁진의 웃음에 태운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더 민망한 얼굴이 되었다.
“편해진 것 같군.”
태운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혁진이 먼저 태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인터폰으로 향했다. 인터폰을 들어 한 사람분의 식사만을 주문하는 혁진은 태운에겐 역시 이상하게 보였다.
“저기.”
태운은 생경한 눈으로 혁진을 바라보았다. 식사가 준비된 식탁 맞은편에서 혁진은 책을 읽어 나가는 중이었다. 그가 조금 전 훑어봤던, 태운이 가져온 책이었다.
혁진과 마주 앉아 혼자만 식사를 해야 하는 이 상황도 민망했지만, 태운은 혁진의 손에 들린 책이 더 민망했다. 지금 찍고 있는 영화의 감독이 추천해 준 책이었다. 그 책에 실린 고전 설화에서 영감을 받아 시나리오를 썼다는데, 처절한 사랑 이야기였다. 그런 사랑 이야기는 혁진이 읽기에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태운은 보이지 않는 볼 안쪽 점막을 혀로 쓸었다. 살을 아프게 깨무는 대신 생긴 버릇이었다. 책을 읽던 혁진이 눈을 들어 태운을 마주했다. 태운은 입이 바짝 말랐다.
“……읽으실 만한 책이 아닙니다.”
“읽던 거잖아.”
너는 읽던 것이 아니냐는 말에 태운은 할 말이 없었다. 태운은 더욱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태운은 말끝을 흐렸다. 입안에서 말을 고르는 태운을 혁진이 가만히 응시했다.
“별로 흥미 가지실 만한 내용이 아닙니다.”
“무슨 내용인데.”
“……사랑에 관한, 설화입니다.”
사랑. 겨우 입에 담기만 해도 손끝이 간지러운 단어였다. 태운은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었다. 간지러운 손끝을 의자 시트에 비볐지만 간지러움은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수없이 많이 연기하고 또 흉내 내었지만 결코 자신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하고 상상했던 단어. 태운의 두 볼이 확 붉어졌다.
그 감정을 혁진에게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이 이렇게 절박한 감정일 리 없었다. 혁진이 없으면 자신의 발로는 세상에 설 수 없다는 절박함이 동반된 불안, 초조. 이런 것이 사랑일 리 없었다. 태운이 대본 속에서 배운 사랑은 조금 더 다정하고 달콤한 감정이었다.
“……지금 촬영 중인 영화 시나리오의 모티브 설화입니다.”
태운이 괜히 뒤에 말을 덧붙였다. 혁진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려놓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혁진은 책을 놓지 않았다. 혁진은 여전히 책을 든 채로 통 비워지지 않는 태운 앞 음식을 응시했다.
“입맛에 맞지 않아?”
“아닙니다.”
태운은 민망한 얼굴로 다시 수저를 들었다. 책을 읽는 혁진이 신경 쓰여 제대로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허기가 졌던 탓에 음식은 계속해서 입안으로 들어갔다.
태운이 음식을 모두 비울 때까지 혁진은 그 앞에 앉아 태운이 가져온 책을 읽었다.
“다, 먹었습니다.”
태운의 말에 드디어 혁진이 책을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태운은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페이지가 넘겨져 있었다. 태운은 식기를 정리해 트레이 위로 올렸다.
태운은 몸에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보통 이렇게 함께 식사를 하고 몸을 겹치는 것이 제 발로 호텔로 돌아온 후의 일상이었다. 대가를 받고 몸을 내주던 예전만큼 행위가 두렵고 치욕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몸이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씻고 오겠습니다.”
혁진이 책을 들고 일어섰다. 씻고 오겠다고 말은 했지만 혁진을 앞질러 나갈 수는 없었다.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기다리던 태운은 식당을 빠져나가는 혁진의 뒤를 따랐다.
응접실 테이블 위에 책을 올려둔 혁진 역시 씻으려는 것인지 드레스 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운도 늘 사용하던 욕실로 움직였다.
* * *
최대한 털어 냈지만 태운의 몸에는 물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얀 피부에 물 기운이 서리자 축축하면서도 색스러운 인상이 되었다.
태운이 응접실로 나왔을 때는 이미 혁진이 가운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혁진의 손에는 또 그 책이 들려 있었다. 태운은 도대체 책의 어떤 점이 혁진의 관심을 끄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혁진과는 지독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고전 로맨스 소설이었다. 사랑해서 결국 상대를 죽여 버린, 잔인하고 맹목적인 사랑 이야기.
그 모습을 보는 사이 행위에 대하여 남아 있는 부담감으로 잔뜩 긴장했던 태운의 몸에 힘이 풀렸다. 태운이 가만히 서 있자 혁진이 눈짓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태운은 또박또박 걸어서 난감한 얼굴로 혁진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물이 마르면서 몸이 차가워져서 그런지 닿지도 않은 혁진의 체온이 뜨겁게 느껴졌다.
다시 태운의 얼굴이 화끈거리며 붉어졌다. 태운의 찬 피부 위로 뜨겁게 느껴지는 혁진의 살이 닿았다. 태운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대로 혁진은 태운의 찬 입술을 빨아들였다. 혁진의 키스는 난폭한 구석이 있었다. 혁진은 태운의 모든 걸 빨아들이고 씹어 삼키고 싶어 했다. 혁진의 혀는 극렬한 침략자였다.
혁진의 키스에 보조를 맞출 수 없던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혁진의 팔을 잡아 몸을 기댔다. 입안을 빨리고 혀를 씹히는 것만으로도 몸에 힘이 빠졌다. 츄읍츄읍 하는 침이 섞이는 음란한 소리가 태운을 더 붉게 만들었다.
혁진이 태운을 제 입안에 넣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태운의 머리를 당겼다. 짧게 잘라 거슬거슬한 머리가 혁진의 손 위로 비벼졌다. 거친 숨이 혁진의 뺨 위로 뿌려졌다. 그럴수록 혁진은 태운의 입안을 더 격렬하게 휘저었다. 태운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태운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숨이 차 가슴이 아플 때까지 혁진은 유린을 멈추지 않았다. 힘이 달린 태운이 혁진의 가슴으로 팍 늘어지고 나서야 혁진은 입을 뗐다. 어느새 태운의 몸이 말랑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태운은 입안이 얼얼했다. 어느새 자신이 혁진의 품에 기대 있는 것을 깨닫고 혁진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혁진이 그런 태운을 품 안으로 다시 고쳐 안는 바람에 실패했다. 태운은 혁진의 품 안에서 긴장한 채로 굳었다.
혁진이 태운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대로 등 근육을 꾹꾹 누르다가 손을 앞으로 해 유두를 건들자 태운이 잘게 떨었다. 태운의 숨이 흔들리는 게 혁진의 귓가에 느껴졌다.
“벗, 벗고.”
태운이 먼저 말했다.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티셔츠 안에 손을 넣은 혁진의 움직임이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태운의 가슴 주변을 크게 모아 쥐던 혁진이 태운의 티셔츠를 잡아 올렸다. 태운은 마치 말 잘 듣는 아이가 옷을 갈아입히는 부모에게 하듯 얌전히 손을 들었다.
티셔츠가 벗겨지고 소파 위로 태운의 옷을 올려 둔 혁진이 태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운의 뺨은 이미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드러난 태운의 하얀 어깨에 혁진이 이를 박아 넣었다. 폭력적이지는 않았지만 혁진은 집요했다.
“으!”
물고 핥고 빨아들이는 혁진의 치아에 태운이 진저리 쳤다. 언제나 그랬듯 태운은 혁진을 밀어 낼 수 없었다. 태운은 그저 혁진의 팔을 붙잡고 아리면서도 간지러워 미칠 것 같은 감각을 견뎠다.
“아, 읏.”
태운의 어깨에 붉은 꽃을 피운 혁진의 치아가 태운의 유두까지 내려왔다. 유두를 깨물자 태운이 팔딱 뛰어 올랐다. 예민한 성감대였다.
무너지려는 태운의 겨드랑이 사이로 자신의 팔을 끼워 넣은 혁진은 태운의 등 뒤에서 양손을 깍지 껴 무게를 지탱했다. 참을 수 없는 찌릿한 감각에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혁진의 치아 사이로 자신의 가슴을 내밀어 비볐다. 태운의 살을 물고 있던 혁진이 바람이 새듯 웃었다.
혁진은 태운의 유두를 태운이 만족할 만큼만 아프게 깨물었다. 자국이 남을 만큼 거센 동작이었지만 태운은 혁진의 혀가 유두를 간질이는 감각보다 차라리 깨무는 것이 좋았다. 태운이 목 안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혁진은 등 뒤로 점점 무너지는 태운을 그대로 소파에 눕혔다. 덩치가 일반 이상인 두 남자가 겹쳐져도 넉넉할 만큼의 크기의 소파였다. 혁진이 집요하게 한쪽 유두만을 괴롭히자,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쪽의 유두를 주변 살에 붉은 손톱자국이 나도록 긁었다. 혁진이 그런 태운의 손을 제지했다.
태운이 당황스런 마음에 눈을 깜빡였다. 유두를 긁은 것은 무의식중의 행동이었지만, 그것을 제지당하자 참을 수 없이 더 간지러웠다. 다른 한쪽 손은 자유로웠지만 태운은 그저 젖은 얼굴로 혁진을 올려다보았다. 그 젖은 얼굴이 기가 막혀 혁진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태운.”
“네…….”
“간지러워?”
혁진이 지나치게 가깝게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혁진의 눈이 자신의 눈과 마주해 있었다. 태운이 입술을 짧게 깨물었다.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혁진이 원하는 대답이 무엇일지 알 수 없었다.
“……네.”
피할 수 없는 혁진의 집요한 눈길에 태운이 결국 솔직하게 대답했다. 의식을 하자 더 간지러워졌다. 차라리 혁진이 물어뜯어 줬으면 좋겠다. 태운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숨을 멈췄다.
혁진이 다시 웃다가 태운이 붉게 손톱자국을 낸 부분을 손으로 쓸어 줬다. 하지만 그것은 그 간지러운 감각을 해소시켜 주지 못했다. 오히려 더 부채질할 뿐이었다. 태운의 눈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혁진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이 있었지만 태운은 그 손을 사용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태운이 상체를 들썩였다. 대가를 받고 몸을 내어줄 때도 달아오르곤 했던 야한 몸이었다. 혁진이 조금 다정하게 대해 주자 그 강도가 더 심해졌다.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나직하게 터져 나온 혁진의 말에 태운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런 것을 묻는 혁진이 이상했다. 태운의 눈이 젖었다. 혁진은 짓궂게 계속 태운의 가슴께를 살살 쓸었다. 태운이 고개를 저었다.
“……긁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운의 입에서 나온 말에 혁진이 다시 웃었다. 혁진은 쥐고 있던 태운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태운이 그 손을 당겨 스스로의 몸을 긁기 전에 태운의 가슴으로 이를 가져다 대었다. 살짝살짝 그 주변을 깨물어 주자 다시 태운이 낮게 튀어 올랐다.
태운의 상체 전체로 혁진은 자국을 남겼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붉게 변했다. 태운의 얼굴이 정욕으로 짙게 젖었다. 혁진이 태운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발끝에 힘을 준 태운이 엉덩이를 들어 혁진이 바지를 벗기는 것을 도왔다. 태운을 알몸으로 만든 혁진은 태운이 소파를 짚고 서게 했다. 태운은 떨리는 손끝으로 소파의 등 받침 위를 꾹 쥐었다.
당장 몸을 가르고 들어올 줄 알았던 혁진은 태운을 그렇게 남겨 둔 채로 멀어졌다. 태운은 이유를 알 수 없어 창백하게 질렸다. 부끄러운 마음이 훅 하고 밀려온 것이다. 하지만 쉽사리 달아오른 몸의 열은 가라앉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혁진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운은 그제야 혁진이 콘돔을 가지러 다녀온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 콘돔을 성기에 씌운 것인지 혁진이 질척이는 젤을 태운의 항문으로 짜 넣었다.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태운이 덜덜 떨었다. 혁진이 손가락으로 잔뜩 짜놓은 젤을 태운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작게 닫혀 있던 태운의 항문으로 혁진의 손가락이 침입했다. 젤과 함께여서 그런지 꾹 닫혀 있던 아래로 무리 없이 혁진의 검지가 밀려 들어갔다.
손가락 하나로 태운의 속살을 꾹꾹 누르며 벌린 혁진이 다른 손가락을 또 밀어 넣었다. 그제야 손가락 두 개를 태운의 항문이 빽빽하게 물었다.
혁진은 지루할 정도로 꼼꼼하게 태운의 안을 늘리는 것을 반복했다. 안달이 난 건 오히려 태운이었다. 이미 혁진의 성기가 닿아 본 더 깊은 곳은 이어질 쾌락을 알고 있었다.
태운의 은밀한 곳이 벌름거렸다. 태운은 참지 못하고 허리를 움찔거렸다. 그 추태를 보고 있던 혁진이 가운을 벗고 태운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흐읏!”
굵은 핏줄이 설 정도로 혁진의 성기는 발기해 있었다. 하지만 혁진은 바로 태운의 몸을 단번에 가르고 들어가지 않았다. 완전 발기해 엄청난 두께를 가진 혁진의 귀두를 태운은 무리 없이 삼켰다. 그 정도로 공들여 풀어 놓은 것이었다.
혁진의 성기가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자 태운은 뻣뻣하게 굳었다. 혁진은 태운과 결합한 채로 태운의 등 뒤에 이빨 자국을 남기며 태운이 긴장을 푸는 것을 기다렸다.
이미 쾌락을 알고 있는 태운의 몸은 뇌와 다른 판단을 내렸다. 날름거리며 혁진의 성기를 쥔 항문을 조였다. 그 조임에 혁진이 진저리 칠 정도였다. 안쪽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태운이 참을 수 없어 혁진의 것을 꽉 물자 혁진이 참지 못하고 태운의 안으로 깊게 파고 들어갔다.
“윽!”
하읍. 소리를 참는 태운의 입안으로 혁진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정제되지 않은 태운의 신음 소리가 허공으로 퍼졌다. 혁진은 망설이지 않고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읏, 흣!”
혁진이 내부로 치고 들어올 때마다 태운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팔로만 지탱하고 있는 몸이 흔들렸다. 태운이 제대로 서기 위해 발끝에 힘을 주며 몸을 뒤로 하는 순간 혁진은 더 거세게 태운의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태운을 더 힘들게 하는 엇박자였다.
태운의 몸이 휘청이자 혁진이 팔을 앞으로 해 태운의 배를 끌어안았다. 태운이 혁진의 손에 들린 채로 흔들렸다.
“흐읏, 너무, 너무…… 깊!”
태운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혁진의 성기가 배를 뚫을 것처럼 처박혔다. 태운은 본능적으로 혁진의 허리 짓에 보조를 맞춰 같은 방향으로 몸 중심을 기우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태운이 얄팍하게 허리를 흔들어 대자 혁진이 참지 못하고 태운의 등에 이를 박아 넣었다. 다시 한번 태운의 가장 깊은 곳으로 허리를 쳐올린 혁진은 한쪽 손으로 태운의 성기를 주물렀다. 축축하면서도 음란하게 힘이 들어간 성기가 혁진의 손에 감겼다.
혁진이 몇 번 약한 힘으로 주무르자 태운은 높은 신음 소리를 내며 온몸을 잘게 떨었다. 혁진의 손에는 미끈거리는 점액질이 남았다. 그리고 혁진도 태운의 안에 정액을 뿜었다.
배 속을 가득 채울 것처럼 끊이지 않고 쏘아지는 액체에 태운은 진저리를 쳤다. 배가 터질 것 같았다. 태운이 나른함에 앞으로 늘어지려고 하는 몸을 부들거리는 팔로 지탱하고 있는데 갑자기 팔에 준 힘이 사라졌다.
“어, 저기…….”
콘돔을 묶어 옆으로 던져 놓은 혁진이 그런 태운을 가볍게 든 것이었다.
“제가, 제 발로, 걷겠습……니다.”
더듬더듬 내뱉은 태운의 말은 묵살되었다. 혁진은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태운을 침대 위에 눕혔다. 어린 아이처럼 들려 왔다는 생각에 태운의 귓가까지 붉어졌다.
혁진이 다시 태운의 다리를 가르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태운이 혁진의 손에 들린 콘돔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혁진이 태운에게 콘돔을 넘겨주며 태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태운은 제법 익숙해진 움직임으로, 하지만 여전히 더듬거리며 혁진의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그 어린애 같은 손길로 혁진의 성기를 어루만지자 혁진은 참지 못하고 다시 태운의 항문에 성기를 처박았다.
“윽. 흐으…….”
츄입츄입 하는 음란한 소리와 두 남자의 짐승 같은 교성밖에는 남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태운은 혁진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 몸짓에 혁진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런 웃음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태운이 그것을 눈에 완전히 새길 시간도 주지 않고 혁진은 거칠게 허리 짓을 시작했다. 고통과도 비슷한 하얀 쾌감과, 웃음의 잔상이 태운의 안에 남았다.
* * *
객실 내 인터폰의 벨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다. 그 소리 때문에 태운은 눈을 떴다. 혁진의 기상 시간에 맞춰 인터폰으로 모닝콜이 울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기계적으로 세 번 울리고 끊어졌다. 지금처럼 이렇게 끊이지 않고 울린 적은 없었다.
태운이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자 이미 일어나 있던 혁진이 더 자라는 듯이 태운의 상체를 눌렀다. 하지만 태운은 이미 잠이 완전히 깬 후였다. 태운이 팔을 뻗어 조명을 켜자 혁진이 인터폰을 들었다. 혁진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이 보였다.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준비했던 대로 처리해. 내려가지.”
혁진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낮았다. 혁진의 감정을 읽어 내는 것은 태운에게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혁진에게 굉장히 짜증스러운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했다.
무슨 일인지 묻는 말이 목 위로 올라왔지만, 묻는다고 해서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주제넘는 질문 같기도 해 애써 말을 삼켰다. 어느새 악문 태운의 입술을 혁진이 쓰다듬어 입을 벌리게 했다.
“일주일 정도 들어오기 힘들 것 같아.”
“……기다리겠습니다.”
태운이 혁진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혁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픽 하고 웃었다. 그리고 태운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혁진은 다른 설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태운 또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태운의 상체를 힘을 주어 눌러 다시 침대로 눕힌 혁진은 문 밖으로 나갔다. “다녀오십시오.” 하는 태운의 말만이 허공에 남았다. 그래도 태운은 귓가에 계속 혁진의 웃음소리가 맴도는 것 같다 느꼈다.
이유 같은 건 정말로 묻지 않을 셈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태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혁진이 아침 일찍 나가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 * *
“사람 한 명이 죽었다고 설마 우리나라 경제가 망하기야 하겠어요?”
연일 뉴스에서는 몇 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살아 있던 대기업 총수의 죽음과, 그 죽음이 끼칠 경제 문제들에 대해 전문가들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태운은 몸을 완전히 시트에 기대고 그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태운이 뉴스에 집중하는 기색을 보이자 태운의 로드 매니저가 관련 화제로 말을 걸어왔다. 태운은 쓰게 웃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몇 년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던 거 아닌가? 벌써 옛날에 죽었다 살았다 말 많았잖아요. 경영도 진작에 강혁진이 하고 있었고.”
“…….”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는 혁진의 이름이 낯설었다.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뉴스 화면은 어느새 방금 전까지 전문가들이 떠들고 있던 스튜디오에서 전환되어, 까만 양복을 입고 장례식장 정문에 정차된 차에서 내리는 혁진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지독하게도 빈틈없이 단단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저 분위기만으로 주변에 머리가 희끗한 중역들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나이 어린 경영자의 앞에 대기하고 있던 노년의 중역들은 발끝에 닿을 듯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강혁진 보면 돈 있다고 세상 다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닌가 봐요. 아빠는 자살. 엄마는 암으로 죽고. 강진묵도 의학적으로 살 가능성 없는데 약물로 억지로 숨만 붙여 둔 거니 어쩌니 말 많았잖아요. 그러다 죽었고. 외동에 형제도 없고. 저 집안 친척들이랑 사이 안 좋은 거는 세상이 다 알고. 이제 완전 혼자네요.”
가벼운 가십처럼 말해지는 혁진의 가족사에 태운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화면 속에서 혁진은 여전히 단단한 얼굴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이끌며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혹시 당신도 당신만의 삶의 무게를 지고 있습니까. 태운은 언젠가 혁진의 침실에서 발견했던, 자신의 것과 같은 종류의 수면제 병을 떠올렸다.
혹시 당신이 가진 무게에 짓눌려서 당신에게 기댄 제 무게가 버거워진다면 당신 없이는 세상에 두 발로 설 수 없는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태운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남자의 얼굴이 눈을 감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웃음소리가 여러 소음을 뚫고 귀에 환청처럼 울렸다.
* * *
마음이 무거웠다. 영상이 아니라 순간이 포착된 사진으로 남는 화보 촬영이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태운은 기계적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찌는 듯한 여름에 한 계절 앞선 긴팔 옷을 입고 태운은 뜨거운 조명 앞에 서 있었다.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음에도 뜨거운 조명 때문에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사진작가조차도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태운은 더위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하는 듯 카메라를 향해 웃었다.
이렇게 환한 조명 속에서 혼자 빛나도, 평소처럼 반짝이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충족감이 들지 않았다. 그저 혁진과 함께했던 그 침대 시트 속에 몸을 말고 누워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태운이 자신을 이상하다 생각하는 동안에도 촬영은 계속되었다. 몇 번째 옷이 갈아 입혀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혁진이 온통 씹어 놓은 붉은 자국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혁진의 소식은 뉴스를 보면 나왔다. 장례식장 안까지는 기자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소식은 여러 전문가들을 통해 흘러나왔다. 혁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상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지 않은 것은 오직 태운이었다. 태운은 계속해서 휘청거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몸에 기댔던 몸이 홀로 서게 되자 배로 더 무거워졌다. 쉬는 시간, 태운은 평소 잘 가지고 다니지도 않던 핸드폰을 계속 들고 있었다.
“어디 연락 올 데 있으세요?”
로드 매니저가 짓궂은 얼굴을 하며 물어왔다. 태운이 “아니.” 하고 쓰게 웃었다. 감히 그런 것으로 묶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태운이 아니라고 말하자 어쩐지 로드 매니저의 얼굴에 장난기 섞인 의심이 더 짙어졌다. 태운은 거기에 어울려 주지 않고 들고 있는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전화가 울리지 않았다. 촬영 중에 어떤 연락이 와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혹시 하는 생각에 태운은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지도 못했다.
혁진의 번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태운은 그에게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그런 사이였다. 열 시간이 넘는 촬영을 끝낸 뒤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태운은 혁진의 객실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그대로 침대 속에 파묻혔다.
* * *
검은색 정장을 단단하게 갖춰 입은 혁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운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객실 불은 환하게 켜진 채였다.
“다녀오셨습니까.”
혁진은 일주일 전 새벽에 인터폰을 받고 나갈 때 모습에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태운은 여전히 그가 지고 있는 짐이 결코 가볍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린 건가.”
침대에 푹 파묻혀 자고 있었던 것이 민망해서 태운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다시 마주한 것만으로 태운은 들고 있던 짐이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짐이 혁진에게로 옮겨 간 것 같아서 태운은 송구해졌다. 자신의 짐은 자신이 지고 가야 하는데. 태운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태운의 말에 혁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어디가 웃긴 것인지 태운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혁진의 유쾌한 웃음소리에 태운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랑 돌아가신 그분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세상이 다 아는 줄 알았는데.”
혁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서 태운은 그저 혁진을 말갛게 올려다보았다. 혁진이 그런 태운의 머리를 꾹꾹 쓰다듬었다.
“괜찮냐니, 일주일 만에 처음 듣는 말이야.”
태운은 혁진만큼 눈치가 비상하지는 않았지만 혁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단번에 깨달았다. 그의 안부를 물은 것이 일주일 만에 자신이 처음이라는 소리였다.
“걱정, 했습니다.”
태운이 말끝을 흐렸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혁진의 눈치를 살폈지만 혁진은 다시 또 읽을 수 없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건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말 같은데.”
혁진이 자신을 걱정했다고 말하는 말랑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태운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태운의 숨을 모두 빨아들인 혁진이 다시 자신의 숨을 태운에게 채워 넣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키스였다.
혁진은 태운의 숨을 가졌고, 태운은 다시 혁진의 숨을 받았다. 혁진은 끊임없이 태운을 얽었고, 또 태운을 자신에게 얽었다. 태운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고 또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운에게 넘겨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태운은 그 뜨거운 감정이 전해지는 키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태운을 짓눌렀던 짐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태운은 혁진에게 매달렸다. 자신이, 자신의 짐이 너무 무겁지 않기를 바라면서.
반듯하게 누운 혁진은 태운의 등 뒤로 손을 밀어 넣어 태운을 모로 안았다. 태운은 그 힘에 당겨져 혁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태운은 어색하게 굳어 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안고 있는 혁진이 팔이 단단하다고 생각했다. 혁진에게 안겨 있는 자세가 불편했지만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혁진과 지나치게 가까이 닿은 탓에 혁진의 묵직하면서도 시원한 향이 코로 올라왔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 맞닿아 있어 혁진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태운은 혁진처럼 강하고 단단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을 이끄는 등이었다. 그의 등에 지워진 사람의 무게가 태운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기감이 예민해서 태운의 작은 움직임에도 눈을 뜨는 혁진인데, 금세 잠든 것인지 낮고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혁진의 얼굴을 확인했다. 혁진의 눈꺼풀은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
태운은 그대로 멈칫 굳어 있다가, 혁진의 목을 꽉 죄이고 있는 넥타이가 불편해 보여 조심조심 손을 뻗어 넥타이에 가져다 대었다.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넥타이를 풀고 단단한 단추를 몇 개 풀자 혁진이 태운의 손을 쥐어 왔다. 태운은 놀라 튕겨지듯 혁진에게서 멀어졌다.
“잠들 때까지만 옆에 누워 있어.”
혁진이 다시 태운을 품으로 당겼다. 태운은 어색한 움직임으로 끌려갔다. 태운은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하며 그렇게 가만히 혁진의 옆에 있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혁진이 편안하게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꽤나 오래 잤던 것 같은데 혁진의 옆에 누워 있으니 태운도 몸이 노곤해졌다. 혁진의 낮은 숨소리는 규칙적이었다. 태운은 잠시 눈을 감았다. 혁진의 팔이 단단하기 때문일까. 태운은 하던 고민을 모두 잊고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오래 잔 듯이 몸이 개운했다. 혁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성적인 관계 없이도 이렇게 혁진과 한 침대에서 잠이 들고 또 깨고 하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겨우 두 계절 전인 지난겨울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아직도 자신의 등을 안고 있는 혁진의 팔이 저릴까 생각한 태운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는데도 몸을 일으키자 혁진은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항상 그렇지만 혁진은 방금 잠에서 깬 것 같지 않게 늘 얼굴에 잠이 묻어 있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기라도 한 듯 변함없었다.
“죄송, 합니다.”
“충분히 잤어.”
혁진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태운은 송구스러운 마음에 혁진의 팔을 응시했다.
“한잔할 건데. 옆에 있어. 같이 마셔도 좋고.”
“저도 마시겠습니다.”
태운의 대답에 혁진이 협탁 위에서 인터폰을 들고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남자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혁진도 태운도 그렇게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혁진은 언젠가부터 태운에게는 위스키의 병조차 잡지 못하게 했다. 잔에 얼음을 채우고 위스키를 따라 태운의 앞으로 밀어 놓아 준 남자는 정작 본인의 잔에 담긴 술에는 아무것도 섞지 않았다.
태운은 혁진이 굉장히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혁진이 자신에게 술까지 따르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그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서 박혔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겨우 술을 따르는 것이 이제 와서 다른 의미가 될 리도 없었다. 몸을 섞는 것도 조금 긴장이 될 뿐 예전처럼 치욕스럽거나 모멸감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고작 술 한 잔 따른다고 해서 자신이 접대부라도 된 것 같은 치욕을 느낄 리 없는데.
하지만 태운은 이것 또한 혁진의 배려라고 짐작했다. 정말로 그런 관계였기 때문에. 그것이 떠올리기 쉬운 얕은 수면 어딘가에 침잠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잔을 비운 혁진이 병을 집으려고 했다. 그보다 태운이 먼저 위스키 병을 집는 것이 빨랐다. 혁진의 눈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태운은 의연하게 병을 집어 들었다. 긴장을 감추기 위하여 태운이 어설프게 웃자 혁진이 태운에게 병을 건넸다. 혁진이 잔을 들었다. 태운이 정중하게 병을 들고 혁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잔이 채워지자 혁진은 마시지 않고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원래 꿈이 배우였나?”
태운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한 표정을 하고 혁진을 응시했다. 혁진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태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태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띄엄띄엄 입을 떼었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사실…….”
태운은 말끝을 흐렸다. 동생이 옆에 있었을 때는 꿈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배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태운은 주섬주섬 뒷말을 이어 붙였다. 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탄 태운이 눈앞의 술을 목으로 넘겼다. 그러다 문득 태운은 혁진의 꿈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무엇인가 대단한 꿈이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혁진에게 직접 물을 용기는 없었다.
말이 끝났는데도 혁진은 태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민망해진 태운은 눈을 내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연기를 하는 것은…… 즐겁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 어쩌면 저는 꿈을 이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운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혁진은 계속해서 말없이 연거푸 술잔을 들이켤 뿐이었다. 태운은 몇 번이고 혁진의 빈 잔을 채웠다. 태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혁진의 생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혁진은 입을 열었다.
“나는 한 번도 꿈을 가져 본 적이 없어.”
태운은 황망한 얼굴로 혁진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는 혁진이 이상했다. 이런 이야기를 자신이 들어도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혁진은 하얗게 질린 태운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부친이 살아 계실 때 내게 무엇인가가 결핍되었다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어. 내 삶에는 한 치의 결핍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내게 무엇인가 결핍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혁진의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꼿꼿했다. 하지만 일주일이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피로한 채로 술을 들이부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조금 풀어진 표정이었다. 혁진의 눈치를 살피는 것에 익숙한 태운이 아니면 눈치채기 힘들 정도였지만.
태운은 조심스럽게 빈 혁진의 잔을 다시 채웠다. 혁진의 말에 답을 할 수도 그렇다고 다른 무엇을 할 수도 없으니, 그저 술잔을 채우는 것밖에는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나 끊이지 않고 잔을 채우는 태운을 향해 혁진이 자신의 곁을 턱짓했다. 태운이 망설임 없이 테이블을 빙 돌아 걸어 혁진의 앞에 섰다. 혁진이 앉지 못하고 서 있는 태운을 자신의 옆으로 힘을 주어 당겨 앉혔다.
테이블 맞은편으로 손을 뻗어 태운의 잔을 당겨온 혁진은 빈 잔을 채워 태운의 앞에 놓아 주었다. 태운은 꽉 채워진 잔을 보며 이런 상황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혁진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태운은 혁진을 둘러싼 추문들을 문득 떠올렸다. 그가 조부상을 치르는 동안 매스컴을 필두로 온 나라가 혁진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태운도 촬영장을 오가며 몇 번이나 서로 다른 상대방에게 그 대화들을 들었을 정도였다. 평소에 주변 가십거리에 대해 전혀라고 할 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던 태운이었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그를 낳은 어머니가 그의 양육권과 친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그의 조부로부터 수천억 원의 주식을 받았다든가, 그의 부친의 유한 성향을 끔찍하게 싫어한 조부가 아들 부부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빼앗은 어린 그를 수행원들과 함께 미국으로 보냈기에 학창 시절을 미국에서 자랐다든가 하는 등의 진실이 반쯤 섞여 있는 추측과 짐작, 그리고 저열한 호기심이 섞인 가십들이었다.
“내 부친은 내가 꿈을 가지고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라셨지. 하지만 지금까지도 꿈을 가져 본 적이 없어. 조부가 돌아가시면 무엇인가 변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군.”
태운은 그의 삶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짐작하려고도 하지 않고 추측 또한 하지 않았다. 다만 말없이 혁진에게 자신의 몸을 기댔다. 다정한 말도, 그렇다고 그에게 해답을 줄 수도 없는 태운은 그저 입술을 악물었다. 태운은 혁진에 팔에 자신의 머리를 비비며 그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묵직한 제 마음이라도 혁진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잔망스러워졌어.”
혁진은 자신에게 기댄 태운의 머리를 꾹 눌렀다. 태운이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했다. 조금 더 환하게 웃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았다. 혁진은 더 이상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어색하게 자신에게 기대어 있는 태운의 머리를 매만졌다. 태운은 그대로 굳어서 가만히 혁진의 손길을 느꼈다.
“왜 너냐고 물었던가.”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혁진이 한참 만에 입에 올린 화제에 태운은 멍하니 고개를 들고 혁진을 응시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의문이었다. 애교가 있는 것도, 그렇다고 입안에 혀처럼 구는 것도 아닌 자신을 혁진이 선택한 이유. 혁진의 뒷말을 기다리며 태운은 숨이 차고 입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했었어. 널 그렇게 보내고 무언가를 고민하기도 전에 널 다시 내 앞으로 데리고 왔지. 그리고 몇 번씩 나를 어겼어. 살면서 이렇게 충동적으로 굴어 본 건 전부 다 너와 관련된 일이었어. 진짜 원하는 건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태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기억은 태운에게도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처참하게 부서지고 처박혔던 기억. 혁진은 태운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고, 혁진에게 자비를 구하는 태운은 짐승과도 같았다.
무너지는 태운의 표정을 확인한 혁진도 얼굴을 굳혔다. 혁진은 말없이 태운을 자신 쪽으로 당기며 쓴 얼굴로 다시 한 잔 술을 들이켰다. 독한 위스키의 빈 병이 벌써 몇 병째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젠장. 그런 얼굴을 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네가 이런 얼굴을 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져. 내가 정말 좋아하고 원하는 일을 꿈이라고 말한다면 내 꿈은 네가 그냥 잘 사는 거야.”
혁진의 말에 태운의 눈이 커졌다. 심장 아래에서 뜨거운 것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심장이 쿵쿵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뛰었다. 눈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태운은 눈물을 삼키기 위해 혀를 악물고 다시 새 술을 개봉해 혁진의 잔을 채웠다. 술을 따르는 태운의 손끝이 채 삼켜지지 않는 감정으로 떨렸다.
“지금도 꿈이 있나.”
태운의 떨리는 손을 보며 혁진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은 음을 내었다. 태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꿈. 정말 막연한 단어였다. 꿈. 그런 달콤한 것이 남아 있었던가. 그것을 마지막으로 가져 본 것이 언제였던가. 태운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혁진은 가만히 태운을 기다려 주었다.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이뤄 줄게.”
혁진은 정말로 무엇이든 이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내였다. 어쩌면 혁진 나름대로의 사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태운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태운은 결론을 내렸다. 자신에게 그런 반짝반짝 빛나는 꿈은 없었다. 그런 태운에게도 간절히 원하는 일상들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꿈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꿈이란 게 꼭 특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라면, 동생이…… 건강해지는 것과, 그저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날들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계속…… 곁에 있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박또박 제 속에 있는 말을 하는 태운을 혁진이 당겨 안았다. 태운의 뒷머리를 감싼 혁진이 태운과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는 곧장 태운의 입안을 침범했다. 하지만 그는 평소와 같은 무자비한 침략자가 아니었다.
다급하게 들어온 혁진의 혀는 그 진입과는 달리 태운의 입안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고 치아를 쓸고 혀 밑에 여린 살과 입천장까지 쓸었다. 태운이 간지럽다고 느낄 정도로 혁진은 조심스러웠다.
그 다정한 입맞춤을 가만히 견디고 있던 태운의 눈에서는 결국 눈물이 흘렀다. 혁진은 태운의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손을 앞으로 해 그런 태운의 눈물을 닦았다. 눈물이 태운의 눈에서 흘러나와 얼굴이 겹쳐진 혁진의 얼굴을 타고도 흘렀다.
축축함이 남는 입맞춤이었지만 혁진은 태운을 놓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태운은 혁진의 단단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입술을 뗀 혁진은 태운을 소파에 그대로 눕혔다.
혁진은 다른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태운과 눈을 맞추었다. 태운은 차마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민망해진 마음에 얼굴만 붉혔다. 몇 번이나 그런 태운의 이마를 쓸어 올려주던 혁진은 옷 위로 태운의 몸을 매만졌다.
힘 있는 손길로 태운의 어깨를 주무르고 팔을 주무르고 허리를 지나 골반까지 꾹꾹 눌렀다. 행동에 망설임이 있을 리 없는 혁진이었는데, 어쩐지 자신의 몸을 주무르는 혁진의 손에서 태운은 머뭇거림을 느꼈다.
태운은 혁진의 목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도 혁진의 어깨를 힘을 주어 주물렀다. 단단한 어깨는 손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이상한 자세였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손끝으로 무엇인가를 불어넣어 주고 또 살 끝으로 서로를 느꼈다. 오랜 시간 끊이지 않고 그 동작들이 반복되었지만 둘 중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성적인 의도가 섞이지 않은 동작에도 몸이 먼저 달아올라 버린 것은 태운이었다. 몸이 뜨끈뜨끈해진 것만 같았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그 모습을 혁진이 놓치지 않았다. 태운의 종아리를 쥐고 있던 혁진의 손이 태운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혁진이 옷 안에서 태운을 매만지자, 태운은 긴장감에 다시 몸을 굳혔다. 혁진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해.”
혁진이 몸을 완전히 일으키자 태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혁진이 움직이지 않자 태운은 조심스럽게 혁진에게 손을 뻗었다. 망설임 끝에 태운이 혁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태운의 손길에도 당겨진 혁진은 태운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태운과 혀를 나누며 혁진은 태운의 바지에 손을 가져갔다. 태운이 다시 희게 굳었다.
빠른 손으로 태운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속옷까지 헤친 혁진은 태운의 성기를 한 손으로 쥐었다. 혁진이 여전히 입을 맞추며 슬슬 달아올라 반쯤 단단해진 성기를 손 안에서 살살 쓰다듬자 태운의 얼굴이 희어졌다 다시 붉어졌다.
태운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닫자 혁진이 그 입술을 가볍게 혀로 쓸었다. 태운이 다시 입을 벌렸다.
“흐…….”
성기가 완전히 발기하자 태운이 혁진의 입안으로 거친 숨결을 뱉어냈다. 혁진은 맞닿은 입술을 떼고 태운의 입가를 정리해 준 후 태운의 성기를 제 입안으로 담았다.
뻣뻣하게 굳은 태운이 자신도 모르게 혁진의 어깨를 때렸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혁진은 혀를 움직였다. 태운이 위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태운의 골반을 단단히 누른 혁진의 손이 제지했다.
“제발, 잠깐.”
태운이 몸을 뒤틀었다. 혁진이 태운의 음낭을 주무르며 태운의 요도 구멍을 파고들 듯 혀로 핥았다. 태운이 진저리 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혁진은 멈추지 않고 집요하게 그곳으로 파고들었다.
겨우 그것만으로 사정감을 느낀 태운이 펑펑 소리가 날 정도로 혁진을 치며 몸을 뒤로 물리려고 했다. 하지만 태운이 움직일 곳은 없었다. 혁진에게 보일 리가 없을 텐데도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절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쾌감으로 인한 참을 수 없는 사정감과 혁진의 입안에 사정을 할 수는 없다는 긴장감으로 상반되는 감각이 뒤섞였다. 나른하게 몸이 풀어지려고 했지만 뾰족한 긴장감은 그것을 거부했다. 태운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두 감각이 번갈아 몰아치며 태운을 더 미치게 했다. 어정쩡한 감각이었다.
“흐, 싫습, 싫습니다.”
태운의 말에 혁진이 태운의 성기에서 입을 떼었다. 입술을 악물며 참고 있던 태운이 완전히 혁진이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하얀 점액을 뿜어냈다. 태운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태운의 눈꼬리 끝에 맺힌 눈물을 혁진이 손등으로 닦았다. 태운이 한참 동안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이런 건, 안 하셨으면…….”
민망함에 귀 끝까지 붉어진 태운이 말끝을 흐렸다. 혁진이 금세 땀으로 젖어 버린 태운의 머리를 매만져 주며 짧게 웃었다. 자신만 사정을 했다는 생각에 태운은 허둥지둥 소파 밑으로 몸을 내리려고 했지만 혁진이 막아섰다. 자신이 너무 앞서갔다는 생각에 태운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다시 반듯하게 태운을 눕혀 둔 혁진이 태운의 다리 사이에 익숙하게 자세를 잡고 앉았다. 태운의 다리를 들어 자신의 허리를 감게 하자 태운의 항문이 드러났다. 태운이 다시 부끄러운 마음에 경직되었다. 채 추스르지 못한 정액 때문에 이미 회음부가 질척거렸다. 혁진이 회음부 사이를 손가락으로 매만지자 다시 태운이 다리가 팍 하고 튀어 올랐다가 혁진의 어깨를 내리쳤다.
“읍, 죄송, 합니다.”
무의식적인 자신의 행동을 태운이 사죄했다. 혁진은 신경 쓰지 않고 회음부를 지나 태운의 항문까지 손가락을 뻗었다. 태운이 다시 움찔거렸으나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질척해진 손가락을 태운의 작은 구멍 안으로 밀어 넣자 태운이 터져 나오는 소리를 참았다. 혁진은 조심스럽게 태운이 스스로 참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낼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태운의 내부를 넓혔다.
“읏!”
지나치게 예민한 몸이었다. 한참 공을 들이자 태운의 항문이 벌름거릴 정도로 풀어졌다. 혁진은 오늘 조금 이상했다. 태운이 스스로 조를 때까지 성기를 안으로 넣어 주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태운은 그 배려가 지나치게 민망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근육이 멋대로 혁진의 손가락을 조였다. 그럴수록 태운의 몸은 더 붉어져만 갔다.
이미 더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혁진의 성기를 알고 있는 몸은 그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젖었다. 눈가까지 붉어졌지만 차마 무슨 말도 할 수 없는 태운은 아까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혁진의 목을 당겼다. 그래도 혁진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자 태운은 결국 눈에서 눈물을 방울방울 뿜어냈다.
혁진이 태운의 손을 잡아 자신의 벨트를 잡게 했다. 태운이 다급해져서 엉성해진 손길로 혁진의 벨트를 풀었다.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손은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쉽사리 벨트를 풀지 못했다.
태운은 거친 숨을 뿜어내며 혁진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태운이 그 과정을 끝내자 혁진이 칭찬하는 것처럼 손등으로 태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제 스스로 나머지 옷을 벗고는 태운의 종아리를 잡고 느릿하게 태운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안달 날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다.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혁진의 허리를 감은 다리를 당겼다. 태운은 혁진의 느린 움직임에 온몸이 간지러워져서 괜히 이로 입술을 긁었다.
“흐읍…….”
태운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하체에 힘을 주었다. 태운의 내부가 바짝 혁진을 조였다. 그리고 엉덩이에 힘을 주자 붕 뜬 하체가 아래로 내려오며 혁진을 깊게 물었다. 저절로 벌름거릴 정도로 안을 풀었음에도 태운의 속살이 지나치게 조여 혁진이 혀를 찼다.
태운이 자신도 모르게 팔로 몸을 지탱하며 혁진의 성기를 끝까지 자신의 내부로 물었다. 혁진도 한계인지 태운의 골반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하으!”
태운이 갈급하게 숨을 내쉬었다. 조급 세게 처박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혁진은 한계에 몰렸으면서도 지나치게 침착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느린 추삽질에 태운이 고개를 저었다. 말로 하기에는 지나치게 부끄러운 것이었다. 아니 고갯짓을 하는 것도 부끄러웠다. 태운은 제발 혁진이 알아주기를 바랐다.
태운의 마음이 혁진에게 전해진 것인지 혁진이 태운의 골반을 쥔 손에 힘을 주어 태운을 들었다. 그대로 혁진이 허리를 움직이자 태운은 혁진이 더 깊게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불편한 자세였지만 태운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혁진이 본격적으로 허리를 쳐올렸다. 깊숙하게 처박히는 느낌에 태운은 고갯짓을 멈췄다. 내장을 뚫을 듯 혁진이 제 안으로 들어오자 태운의 눈앞에 하얀 빛이 튀었다.
“흣, 흣!”
태운의 내부 깊숙이 처박혔던 혁진은 다시 거칠게 빠져나갔다. 퍽퍽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태운을 더 부끄럽게 했다. 태운은 혁진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며 그저 거친 숨만을 내쉬었다.
평소의 혁진과 비슷한 움직임이었지만 어디인지 또 달랐다. 혁진이 거칠게 태운의 내부를 꿰뚫고 들어와 태운이 가장 느끼는 어딘가를 쳐올렸다. 태운이 팍 하고 튀어 올랐다.
“으흣!”
정신을 놓을 것 같은 쾌감을 견디느라 태운이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태운의 내부가 지나치게 조였다. 혁진이 사납게 신음을 흘렸다. 얼마 안 가 태운의 안으로 뜨거운 액체를 뿜어내었다. 태운이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었다.
혁진이 좋았다. 그래, 좋았다. 곁에 있고 싶었고 그가 자신을 쳐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벅차오르는 감각에 태운은 혁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끌려온 혁진이 태운의 입에 입을 맞추는 대신 태운의 뾰족한 턱을 입안에 넣었다. 태운은 혁진의 목을 감싼 손을 떼지 않았다. 그와 맞닿은 살들이 불탈 것만 같았다. 태운은 결국 다시 울었다. 혁진이 좋은데 어쩐지 눈물이 났다.
* * *
짐을 챙기는 태운의 손이 느렸다.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되는 탓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국내에서 진행되는 촬영이었지만 촬영장에서 말하는 시간이라는 것은 항상 유동적인 편이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혁진의 일정과는 맞지 않았다. 번번이 새벽에 촬영을 나가느라 혁진의 수면을 방해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듯했다.
혁진은 아직 퇴근 전이었다. 짐을 많이 가져다 놓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리하다 보니 한가득했다. 태운은 마지막으로 혁진이 끝내 읽어 나가는 책을 두고 가방에 집어넣어야 할지 망설였다. 오글거리고 집요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책을 혁진은 틈이 날 때마다 계속해서 읽고 있었다.
태운은 긴 숨을 한번 내쉬고 가방 깊숙한 곳으로 책을 숨기듯이 넣었다. 혁진과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책이었다. 눈에 보이는 자신의 물건을 다 가방으로 옮겨 넣은 태운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혁진을 기다렸다.
태운은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혁진의 귀가 시간은 일정한 편이었다. 도착할 때가 되었다고 짐작한 순간 열어 둔 응접실의 문 밖에서 현관의 문소리가 들렸다. 태운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오셨습니까.”
바짝 붙지 않고 몇 걸음 떨어져 인사하는 태운을 혁진이 제 쪽으로 당겼다. 태운이 어색하게 혁진에게 붙어 왔다. 태운은 계속해서 혁진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혁진의 곁으로 바싹 붙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눈으로만 혁진을 쫓았다.
태운을 옆에 세운 혁진은 발걸음을 옮겨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태운은 혁진의 옆에서 발걸음을 같이했다.
“나가는 길인가.”
혁진이 태운의 옷을 보며 물었다.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태운은 얼굴과 손을 제외하고는 살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차림이었다. 평소 태운은 호텔 안에서는 이렇게까지 몸을 싸매고 있지 않았다.
“집에 가 보려고 합니다.”
태운이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뗐다. 집에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는 것도 같았다.
“왜.”
“저 때문에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시는 것 같아서…….”
태운은 에두르지 않고 말했다. 숨기는 것 없이 묻는 대로 어떻게든 답을 내는 것은 태운의 장점이었다. 혁진은 제법 익숙해진 손으로 태운의 머리를 내리 만졌다.
“상관없어.”
혁진이 가만히 태운이 챙겨 놓은 가방을 응시했다. 태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혁진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저녁은.”
말끝을 흐리는 태운의 말 뒤로 혁진이 평소와 같은 질문을 했다. 태운이 먹지 않았다고 말했고 혁진은 인터폰을 들었다.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 같은 하루였다. 태운은 결국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지키지 못했다.
혁진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지만 혁진은 말없이 서서 그저 태운이 짐을 푸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방에 아무렇게나 챙겨 넣은 물건들이 풀어 낼 때는 각자 제자리다 싶은 곳들이 있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혁진의 공간에 자신이 들어와 있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해진 듯싶었다.
태운이 민망한 기분에 혁진을 올려다보았다. 혁진도 훨씬 편안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간질간질한 기분에 태운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혁진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혁진이 망설임 없이 태운을 품 안에 감싸 안았다.
최근 들어 섹스를 하지 않아도 이렇게 몸을 겹치는 스킨십들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요즘은 익숙해져서 가끔은 태운이 먼저 혁진에게 매달릴 때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주 안고 있다가 태운이 민망해져서 몸을 떼어 낼 때쯤 식사가 올라왔고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자연스러운 일상에 태운은 어딘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태운이 묘하게 웃자 혁진이 그런 태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함께 밥을 먹고 가볍게 운동을 한 후 돌아와서 태운은 조심스럽게 혁진의 옆에 누웠다. 이제는 혁진의 옆자리에 눕는 것이 익숙해졌다. 동생이 나오는 아픈 꿈을 꿀 때면 항상 혁진의 단단한 손으로 깨워져 눈을 뜨고는 했다.
태운도 혁진과 함께 잠이 드는 것이 좋았다. 혁진의 품이 너무 익숙해져서 촬영 때문에 숙소에서 혼자 잠이 들 때는 어딘가 허전한 마음에 오래 뒤척이다가 잠을 설치곤 했다.
“자고 일어나면 집에 갈 건가?”
“네.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집에서 촬영장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괜찮다고 가지 말라고 한다면.”
“그래도…….”
자신을 품으로 끌어당기는 혁진 때문에 태운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가고 싶지 않았다.
“가지 않겠습니다.”
“가지 마.”
태운이 “네.” 하고 대답했다. 함께 밥을 먹고 시간이 맞으면 운동을 하고, 태운이 대본을 보고 있으면 혁진이 옆에 앉아 함께 책이나 대본을 보기도 하고. 가슴 한편을 무겁게 차지하고 있는 아정이 아니라면,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다는 생각이 들 만큼 하루하루가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다.
커다란 품에 안기자 태운은 잠이 쏟아졌다. 오 년이 넘게 계속됐던 불면증이 거짓말인 것처럼 혁진의 옆에서는 잘 자고 있었다.
* * *
고개를 드니 누군가가 휘청였다. 그 모습을 보다 태운은 눈을 크게 떴다.
“아, 안 돼…….”
동생이 다시 눈앞에서 떨어졌다.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장이 쿵 떨어지고 뇌가 조각나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 막막한 손을 뻗었을 때 손안에 단단한 어떤 것이 잡혔다. 태운은 그 손을 잡고 꿈에서 끌려 나왔다.
“이태운, 눈 떠.”
“하아, 하아.”
태운의 숨결이 거칠었다. 동생을 잊고 삶이 안정적이라고 느낄 때마다 마치 벌이라도 주는 것처럼 다시 반복되는 꿈이었다.
눈을 떴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태운의 입으로 혁진이 생수를 조금씩 흘려 넣어 줬다. 태운은 목이 타서 조금씩 물을 받아먹다가 아예 병을 잡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찬물이 입안에 들어오자 정신이 차츰 돌아왔다.
“주무시는 걸 방해해서, 죄, 죄송합니…….”
“일어나.”
태운의 사죄를 끊고 짓씹듯 내뱉는 혁진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태운을 안은 채였던 혁진은 태운을 시트 위로 내려놓고, 태운보다 먼저 침대에서 일어났다.
땀에 푹 젖고 얼굴까지 하얗게 질린 태운은 혁진의 명령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맥이 풀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이 휘청거렸다. 혁진이 뒤에서 그런 태운을 받쳤다. 태운의 등을 보는 혁진의 눈이 짙었다.
“씻겨 줄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고 내용과 등을 받친 손은 다정하기까지 했다.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심장에 손을 올렸다.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뜯어내고 싶을 정도로 아팠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가슴을 쥐어뜯으면 혁진이 자신을 다정하게 얼러 주곤 했다. 그럼 또 괜찮아졌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고 있는 태운을 혁진이 뒤에서 한 손으로 안고 천천히 밀면서 욕실로 움직였다.
* * *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태운은 자신을 보조석 문 앞에 세워 놓고 운전석으로 향하는 혁진을 자신도 모르게 막아섰다.
“왜. 내가 운전을 못할 것 같아?”
혁진의 말에 태운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혁진이 소리 내어 낮게 웃었다. 태운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혁진이 이상했다. 이상할 정도로 다정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알아.”
태운의 머리를 쓱쓱 만져 준 혁진이 보조석의 문을 직접 열었다. 다시 목소리도 평소와 같은 느낌으로 돌아와 있었다. 태운은 타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난처한 얼굴로 보조석에 몸을 밀어 넣었다. 혁진이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켜는 혁진의 동작이 자연스러워서 태운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운전대를 잡은 혁진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호텔에서 함께 머무르면서 때때로 주차장에서 마주칠 때도 있었지만 한 번도 혁진이 직접 운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벨트.”
생각이 길게 이어지려고 하던 찰나 그것을 끊고 혁진이 들어왔다. 안전벨트를 잡아매는 태운의 손짓이 성겼다.
혁진은 재촉하지 않고 태운이 완전히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태운이 벨트를 매고 다시 편하게 자세를 잡은 후에야 혁진은 차를 움직였다.
차는 금방 밝은 지상으로 움직였다. 태운은 혁진과 밝은 낮에 함께 차를 타고 움직인다고 상상해 본 적도 없어서 지금 상황이 조금 이상했다. 게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가 어딘지 익숙한 길이라는 생각에 태운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신지 여쭤 봐도 괜찮겠…….”
서서히 핏기가 돌아오던 태운의 얼굴이 다시 창백하게 질렸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길이 점점 익숙했다. 태운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스친 그곳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보자마자 발작하던 동생의 얼굴은 지금도 떠올릴 수 있었다. 태운의 얼굴이 그때의 동생과 비슷할 만큼 희게 질렸다.
“직접 마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하, 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 네가 가겠다고 할 때까지 몇 년이라도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게 네가 널 갉아먹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어. 내가 처음 기다려 주겠다고 했을 때랑 넌 전혀 달라진 것이 없군.”
“그, 그게.”
“매일 밤 악몽을 꾸고 너를 갉아먹으면서 하루 이틀 세월이 지나도 네가 도망치기만 한다면 변하는 것은 없어.”
“하지만…….”
“지금 네 공포는 네가 키워 낸 공포라는 생각, 해 본 적 없어? 의료진이 괜찮다고 했어. 넌 평생 동생 보지 않고 살 생각이야?”
태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젠가, 언젠가 동생과 마주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렸다. 자신을 끔찍하게 쳐다보던 동생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동생이 자신을 끔찍하게 생각한다면, 자신을 알아보고 혹시라도 다시 나쁜 선택을 하려고 한다면 어떡해야 할까. 치아끼리 부딪쳐 덜덜 떨리는 소리가 날 만큼 태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지금 네 동생의 생각을 내 마음대로 추측해서 네가 지금 당장 안정될 수 있는 말을 해 준다면 그건 위선이겠지.”
“…….”
혁진의 손이 조심스럽게 하얗게 질린 태운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떨고 있는 태운을 보며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동생이 너를 보고 발작한 것은 한 번뿐이었어. 그리고 그때쯤 네 동생은 발작의 횟수가 잦았고. 특히 남성을 보면 더 그랬지.”
“…….”
“너를 보고 발작한 것이 아닐 수도 있어. 우연일 뿐이었는데 네가 혼자 짐작하고 두려워하면서 공포를 키워서 동생을 지금까지 마주할 수 없었던 것이라면…… 널 갉아먹은 그 시간들이 너무 아깝지 않아?”
“하, 하지만, 그, 그게 아니라면.”
“그때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 있잖아. 네 동생이 너와 내 첫 만남이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고, 그때는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었다고 말할게.”
태운은 순간적으로 혁진이 말하는 모든 것들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일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말을 끝으로 혁진은 운전에만 집중했다. 태운은 입술 끝을 이로 깨물었다. 언제나 태운이 입술을 짓씹을 때면 제지하던 혁진이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태운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태운이라 동생이 보고 싶지 않을 리 없었다. 세상에 둘만 남아 남매로, 또 친구로, 때때로는 서로의 보호자로 의지하고 살았던 동생이었다.
하지만 그런 동생이 자신 때문에 죽음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컸다. 그리고 동생이 자신을 보고 발작했던 밤 이후로 견디지 못하고 병원을 뛰쳐나갔던 이후로는, 다시는 동생을 찾을 수 없었다. 또 한 번 자신 때문에 동생이 잘못된다면, 다시는 두 발로 서지 못할 것 같았다.
태운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차는 계속 움직였다. 혁진이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도 태운은 차가 선 것도 몰랐다.
“같이 가 줄게. 네 동생이 널 원망한다면 그 원망 다 내가 받아 내 줄게. 너는 걸어갈 수 있는 데까지만 걸어가. 도저히 못 가겠으면 내가 널 업고 가든 안고 가든 같이 가 줄게.”
혁진의 말에 태운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차 유리창 너머로 가끔씩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 때 무의식적으로 찾곤 했던 병원의 외관이 보였다. 거대하고 뾰족한 병원 안에는 동생이 있었다.
“……못하겠어요. 갈, 수, 없습니다.”
태운이 입술 끝을 짓씹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간단히 움직일 수 있었다면, 동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잘못될까 죄스러워 몇 년을 고통스럽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었다. 자신이 발을 떼는 순간 애써 견디고 있는 동생이 꿈속에서처럼 다시 기회조차 주지 않고 바스러져 버릴 것 같았다.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머리끝까지 차오른 먹먹한 감정을 견디고 있는 태운의 귓가로 혁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할 정도로 나직한, 아니, 그를 만난 이래 태운이 처음 들어보는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내게 돌아온 것을 후회하나.”
“……아, 닙니다.”
“그럼 남자인 나와 관계를 갖는 것이 떳떳하지 못한 건가.”
“말도, 안 됩니다.”
“근데 왜 못 가.”
혁진은 자신이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칼로 종이를 베어 내듯 쉽게 베어 낼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하지만 스스로의 말에 모순이 있다고 알면서도 뱉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속에서 이상한 것이 치받아 올랐다.
“시간을 돌려 네가 겪었던 일들은 없던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없어. 네 동생을 건강하게 만들어 줄 수도 없지. 살면서 이렇게 무력해 본 적이 있었나 싶군.”
하얗게 질려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감고 있던 태운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혁진을 올려다보았다.
“운전을 하면서 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손을 묶어서 네 동생의 병실에 널 밀어 넣고…… 하루쯤 그렇게 있다가 네 눈을 가린 것을 치우고 동생을 보게 해서 그저 네가 만들어 낸 트라우마라고 알게 하는 것이 좋을까도 생각했었어.”
혁진이 한숨을 내쉬지 않았음에도 태운의 귓가엔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태운은 더듬더듬 손을 뻗어 혁진의 큰 손을 잡았다. 답답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태운의 속에 휘몰아쳤지만, 태운은 혁진이 제 감정에 동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네 트라우마에 또 다른 트라우마를 더할 뿐이겠지.”
혁진이 손에 힘을 주어 태운의 손을 잡았다. 태운은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태운이 손에 약간의 아픔을 느낄 때까지 그렇게 손을 꽉 쥐고 있던 혁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면 차 문 열고 나가서 한 걸음만 걸어. 그다음에는 다 내가 알아서 해 줄 테니.”
태운이 혁진의 손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태운의 떨림이 혁진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래도 태운은 도무지 차 문을 열고 고작 한 걸음, 그 한 걸음을 내딛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침묵은 계속되었고 시간은 천천히, 하지만 계속해서 흘렀다.
“이태운.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어, 그 모든 게 전부 너의 착각이라면 흘러 버린 그 시간들은 돌이킬 수 없어.”
태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혁진은 말 속에 뼈를 심었다. 혁진은 계속해서 태운의 동생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동생의 상태는 신체적인 문제보다는 마음의 병에 가깝다고 했다. 보고를 들으며 혁진은 남매가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태운이 입술을 짓씹었다. 결국 입술에 피가 맺혔다. 혁진이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숙여 손가락으로 피를 닦았다. 태운의 눈은 건조했지만 혁진은 그 눈을 손으로 덮었다. 눈물을 쏟는 것이 나올 듯해서였다.
하지만 태운은 울지 않았다. 혁진은 태운이 눈물을 쏟는 기준을 알 수 없었다. 참 잘 우는 녀석이 또 지독하게 울지 않기도 했다.
“제가 동생을 꼭 오늘 확인해야 할 만큼…… 동생의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은, 아니죠?”
태운이 곧 바스라질 것처럼 약한 소리를 내었다. 혁진은 그런 일은 없어 하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태운이 눈을 꾹 감았다. 긴 속눈썹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여전히 울지 않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 동생의 모습이 떠올라요……. 저를 끔찍하게 보던 그 눈빛이.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어서 제가 역겨워졌는지, 아니면 제가 아니었으면, 제가 없었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됐다고 생각해서 제가 원망스러워졌는지. 제가 아니었으면 잘 살았을 녀석인데……. 저 때문에, 저 때문에…….”
태운이 시트에 쿵쿵 하고 머리를 박았다. 푹신한 쿠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가 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혁진이 그 사이로 손을 넣었다. 태운이 그대로 멈췄다. 얌전해진 태운을 혁진이 끌어 와 안았다. 둘 다 불편한 자세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 녀석이…… 잘못되면, 전, 저는.”
태운이 말을 잇지 못했다. 동생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태운의 근원적인 공포였다.
[오빠는 연예인이 되어야지. 난 더 이상 오빠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동생이 남겨 둔 메모. 자신이 걸림돌이 되기 싫어서 목숨을 끊는다는 잔인한 문장. 자신이 병실에 도착하자 갑자기 나빠진 상태. 태운은 차마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속이 곪을 때까지 소리 없는 고함을 내질렀다.
“잘못되지 않아. 그렇게 해 줄게. 의사를 구하고, 우리나라에 없다면 해외에서라도 데려오고.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연구들에 전부 투자해서라도 네 잘못되지 않게 해 줄게.”
혁진이 다짐을 하듯 말했다. 태운이 윽윽 하고 소리 없이 속의 것들을 토해 냈다. 하지만 끝내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태운이 혁진을 보고 웃었다. 보이지 않은 눈물에 젖은 미소였다. 혁진이 그런 태운의 얼굴을 보고 입술을 끌어 올려 마주 웃어 주었다.
차 문을 열고 태운이 휘청휘청 걸어 나갔다. 발에 매달린 것이 너무 많았고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태운은 걸었다. 혁진이 그 옆을 묵묵히 함께 걸었다.
언젠가 잠깐 와 봤던 병실의 문이 가까워졌다. 혁진의 지시 때문인지 병실까지 오는데 사람이라곤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태운이 도저히 가지 못 하겠어 발걸음을 멈추면 혁진도 그 옆에 함께 멈춰 섰다.
“괜, 괜찮을까요?”
덜덜 떨리는 태운의 손을 혁진이 단단하게 쥐어 줬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가 병실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태운이 흔들리는 눈으로 혁진을 올려다보자 혁진이 병실의 문을 잡았다. 의사는 마치 없는 사람처럼 뒤쪽으로 물러섰다.
“잠, 잠깐.”
태운이 말했지만 혁진이 병실의 문을 여는 것이 빨랐다. 문 맞은편에는 커다란 창이 나 있었다. 그 창 안으로 햇살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그리고 동생은 그 햇살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동생은 많이 야위고 앙상하게 말랐지만 태운이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태운은 홀린 것처럼 동생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혁진은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 눈물을 닦아 줄 수 없는 혁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태운은 조금이라도 아정의 모습을 놓칠까 서둘러 눈물을 닦아 내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아정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시간은 계속 흐름에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자, 태운은 조금 욕심을 내 아정의 창백한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편안하게 감겨 있던 아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태운은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혁진을 찾았다.
그리고 아정은…….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한 아정의 몸이 작게 떨렸다. 태운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입회해 있던 의사가 아정에게 다가갔다. 태운은 곧 쓰러지기라도 할 듯 휘청거렸다.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가려는 태운을 혁진이 팔을 잡아 막았다. 순간적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태운의 눈에는 채 숨기지 못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잡혀 있는 팔을 차마 뿌리치지는 못하고 태운이 혁진에게 애원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놔…… 놔주세요.”
“이태운.”
“안…… 안 간다고. 이럴까 봐…… 내가 안 간다고.”
태운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혁진은 그런 태운을 등 뒤에서 감싸 안았다. 태운이 혁진의 품에 완전히 들어왔다.
“놔…… 놔.”
태운이 혁진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버텼지만 혁진은 놔주지 않고 아정을 보게 했다. 결국 벗어날 수 없게 된 태운은 눈을 꾹 감았다.
의사는 아정의 의식을 확인하고 있었다. 완전히 눈을 뜬 아정은 자신을 확인하고 있는 중년의 남성을 확인하자마자 발작하기 시작했다. 최근 스스로 식사가 가능할 정도로 안정적인 상태였지만,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년의 남성을 발견한 것이 어떤 트라우마를 자극한 듯했다.
“아, 아! 아!”
인간이 내는 것 같지 않은 찢어지는 고음에 태운이 입술을 악물었다. 태운의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의사는 마저 아정을 살피다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 뒀던 안정제가 담긴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 문득 고개를 들어 아정과 눈을 마주친 태운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 빠…….’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정의 입 모양은 확실히 태운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저를, 저를…….”
혹시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태운이 혁진을 올려다보았다. 태운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태운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가능한 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정은 안정제 기운에 금세 다시 잠들었다. 그런 아정과 비슷하게 반쯤 넋이 나가 혁진에게 안겨 있는 태운을 대신해, 혁진이 방금 아정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의사는 자세한 것은 검사해 봐야 알겠지만 태운을 알아본 것을 볼 때에 태운이 아정에게 어떤 긍정적인 자극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태운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줄줄 흘렀고 의사가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태운은 편안하게 잠든 얼굴을 한 아정을 보는 동안 몸에서 모든 눈물을 쏟아 내듯이 울었다. 혁진은 뒤에서 묵묵하게 그런 태운을 지켜 주었다.
* * *
오 년 동안 어떤 치료에도 큰 차도가 없던 아정의 긍정적인 반응에 병원에서는 치료 방향을 수정했다. 오랫동안 닫힌 마음의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정은 천천히 좋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태운 스스로의 용기도 한 몫을 했다. 그날 이후 태운은 꾸준히 아정의 병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아정은 여전히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태운과 눈을 마주치고 때때로 웃어 주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는 태운이 계속해서 사다 두는 미술 도구들로 느릿한 손짓으로나마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태운은 스케줄을 잠시 미뤄 두고 아정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혁진 또한 묵묵하게 그런 두 사람을 지켜봐 주었다.
혁진의 스케줄은 대부분 취소할 수 없는 것들이라 하루 종일 태운과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때때로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태운이 확인하듯 고개를 돌리면 혁진은 언제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아정아?”
그리고 하늘이 맑고 따뜻하게 태양이 내리쬐는 어느 날, 아정이 오랜 시간을 들여 소중하게 그리던 그림을 태운에게 내밀었다. 완성되는 모습을 보면서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파란 하늘 밑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오빠.”
그리고 아정이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잔뜩 갈라지고 꾹 눌린 목소리로 태운을 불렀다. 머리가 상황을 인식하기도 전에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태운은 눈물로 얼굴이 다 젖을 때까지 꺽꺽하고 울었다. 태운이 본능적으로 아정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품에 안고도 도저히 상황이 믿기지 않아 본능적으로 혁진을 돌아보았다. 혁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었다. 태운도 혁진을 따라 웃었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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