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한 겹 아래 (10/15)

3. 한 겹 아래

촬영을 앞두고 대기실에서 대기하던 중 울린 핸드폰 벨 소리에 태운이 화들짝 놀랐다. 최근 들어 통화 횟수가 많아진 혁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둘러 액정을 확인하였지만 액정에 보이는 이름은 혁진이 아니었다. 하지만 태운은 바로 전화를 받아 들었다.

“네, 어머님.”

―태운아 전화 괜찮아?”

정신을 차리고 아파트에 돌아와서 다시 연락을 드렸을 때 어머님이 많이 우셨다.

연락도 되지 않아서 많이 걱정했다고 하셨다며,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라는 목소릴 들은 후로 그는 종종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은 병원에 들를 때마다 아정의 이야기를 해 주셨고 태운은 그 목소리를 통해 아정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의료진에게 확인하던 것보다 훨씬 다정하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네. 괜찮습니다.”

―별 건 아니고 오늘 날이 좋아서 아정이 데리고 산책 나갔다 왔다고. 병원 옥상에 있는 정원 올라갔다 온 거긴 하지만, 아정이도 기분 많이 좋아 보였어.

“그런, 가요…….”

―요즘은 아정이 컨디션 많이 괜찮아졌어. 선생님도 계속 이렇게 안정된 상태라면 다음번에는 조금 더 멀리 나갔다 와도 될 것 같다고 하셨고.

“감사합니다.”

―매번 감사할 게 뭐가 있어.

핸드폰 속에서 중년의 여자는 민망한 듯 웃었다. 이렇게 챙겨 주시는 어머니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머님이 없었다면 태운이 가 볼 수도 없으니, 아정을 다른 사람의 손에 온전하게 맡겨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태운이 너 걱정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고, 병원에 오지 못하니 얼마나 가슴 아플지 네 마음도 충분히 이해되는데.

“…….”

―그래도 아정이라면 널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어. 아정이랑 네 사이는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단단해 보였거든. 많이 바쁜 게 아니라면 태운이 네가 아정이 한번 보러 오면 어떨까 싶은데. 시간 어떠니?

아정 어머니의 말에 태운은 말문이 막혔다. 몇 번째 듣는 권유였지만 그때마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자신을 보고 발작하던 아정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때 아정은 정말 끔찍한 걸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최근 들어 급격하게 상태가 좋아졌다는 아정이 자신을 확인하고 다시 발작한다면 정말로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안정되었다는 아정의 상태가 태운 자신 때문에 다시 나빠진다면 회복할 수 없이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제가 촬영 때문에 많이 바빠서요.”

―참 그렇지. 그래도 시간 날 때 한번 들렀으면 좋겠어. 나도 너 돌려줘야 할 것도 있고. 의사 선생님 허락 맡고 근교로라도 나갔다 오자.

“네.”

태운이 지킬 수 없는 대답을 했다. 물론 보고 싶었다. 보고 싶지 않을 리 없었다.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는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아정 또래의 학생들을 마주치면 아정 생각이 났다.

아무 나쁜 일도 겪지 않았다면 지금 아정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수천수만 번 상상해 보기도 했다.

―바쁜데 내가 시간 많이 뺏은 것 같네. 태운이 너도 항상 몸조심하고. 다치지 말고. 혹시 결심이 서면 연락해 주라. 무슨 일 있으면 또 연락할게.

전화가 끊기고도 태운은 멍하니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아정과, 끔찍한 얼굴을 하고 발작하는 아정의 모습이 머릿속에 교차되었다. 태운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눈을 꾹 감았다.

* * *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우두커니 앉아 있는 태운에게 매니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태운이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지만 여전히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보통 대기실에서 태운은 대본에 몰입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지친 듯 소파에 늘어져 눈을 감고 있었는데 오늘은 이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 정신이 없어 보였다.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었다.

매니저는 의아하게 태운을 보다가 다시 배급사에서 받은 사전 질문지를 검토해 나갔다. 그리고 참석 기자 명단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재성 엔터와 유착 관계에 있는 특정 신문사 기자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태운이 단기간에 톱스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태운의 스타성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언론의 도움도 컸다. 태운은 당대 최고의 톱스타였기에 당장 기자들도 태운에게 함부로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잠깐 모여들 봐요.”

매니저가 다시 한 번 스테프들을 불러 모아 진행 상황을 하나씩 체크해 나갔다.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었는데도 매니저는 꼼꼼하게 모든 지시를 내렸다.

태운으로서는 재성을 나오고 처음으로 강찬혁과 마주하는 날이었다. 강찬혁과 겨울에 찍었던 영화가 어느덧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그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태운은 영화를 찍었던 작년이 멀게만 느껴졌다.

오늘은 영화를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하는 언론 시사회 날이었다. 강찬혁 쪽은 정말 철저하게 준비한 모양이었다. 재성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사무실에 있던 태운의 매니저는 현장으로 나왔다. 아무 일 없이 일정을 끝내기 위해서 제반 상황에 관하여 확실하게 준비해 나갔다.

하지만 그 준비는 가장 걱정하던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단숨에 깨져 버렸다. 갑자기 대기실 문이 열리고 강찬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운의 매니저는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고, 찬혁을 따라 들어온 찬혁의 매니저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태운.”

강찬혁을 발견한 순간, 태운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태운에게 강찬혁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조각이었다.

얼마 전 소리를 내어 웃어 주던 혁진의 모습이 멀어져 갔다. 태운은 어쩌면 지금 아주 달콤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태운의 매니저가 강찬혁에게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대형 소속사를 등에 업은 강찬혁을 자극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무례를 계속해서 참아 넘겨 줄 이유도 없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이태운, 나랑 이야기 좀 해.”

강찬혁이 매니저 너머의 태운을 응시하며 이야기했다. 태운의 매니저가 찬혁을 막아섬으로써 찬혁의 시야를 차단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저랑 하시죠.”

매니저는 태운이 강찬혁과 전혀 친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둘 사이에는 결코 단둘이 나눠야 할 이야기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태운 나랑 할 이야기가 있잖아?”

태운이 혀를 티 나지 않게 악물었다. 혁진이 제지하면서 고쳐지다시피 한 버릇이었지만 버틸 수가 없었다. 무엇을 알게 된 것일까. 찬혁에게 태운은 아무것도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소속사 사장은 데뷔 초부터 강혁진이라는 거대한 뒷배를 가지고 있던 태운을 건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태운에게는 본보기가 필요했고, 그를 옭아매기 위하여 소속사 사장은 소속사에게 반기를 들다가 스폰서에게까지 버려진 찬혁을 비롯한 다른 소속 배우들을 철저하게 괴롭히는 것으로 태운을 구속했다.

전 소속사 사장은 의외로 고집 있는 태운이 튕겨져 나갈 때마다 태운을 억지로 앉혀다 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소속 배우들을 강간하고 윤간하고 인간에게 할 수 없는 수많은 짓들을 벌였다. 태운은 그 행위들의 목격자였고, 또 어떤 면에서는 가해자였다.

매니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태운을 응시했다. 태운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허락을 말했다. 찬혁과 이야기하겠다는 의미여서 매니저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태운이 매니저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강찬혁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태운은 강찬혁과의 대화를 거부할 수 없었다.

태운의 뜻을 최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는 매니저는 불안한 눈을 하면서도 태운의 스태프들을 모두 이끌고 나갔다. 기획사가 크지 않았고, 모두 믿을 만한 사람인데다 그것조차 소수인 탓에 매니저와 함께 대기실을 빠져나가는 인원은 몇 되지 않았다.

태운의 스태프들이 모두 나가자 찬혁은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자신의 매니저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꺼지라고 소리 질렀다.

“씨발, 너는 왜 이렇게 만나기가 어려워.”

잔뜩 흥분한 표정의 찬혁이 왁스로 고정되어 있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태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찬혁을 응시했다. 조금 창백해진 안색 말고는 태운은 지독히도 표정이 없었다. 강찬혁은 태운의 표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긴말 안 해. 박재열 어디 있어?”

소속사 사장은 사라졌고 태운은 그전에 소속사의 주식을 팔아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중간에 개입된 혁진의 존재를 알 수 없는 강찬혁은 태운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박재열의 흔적을 찾기 위해 찬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하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인가 관련되어 있을 이태운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도 이태운의 사생활을 알지 못할뿐더러, 소속사와 연결되지 않은 개인 번호 또한 알지 못했다. 이태운은 상상 이상으로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한편 태운은 정신이 들 정도로 아프게 혀를 씹었다. 박재열. 낯설지만 그럼에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태운을 혁진에게 팔아 넘겼고, 태운에게 동생의 수술비를 걸고 혁진과의 섹스 비디오를 찍게 했으며, 혁진에게 태운의 이름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어 냈고, 또 그 비디오를 바탕으로 혁진을 협박하려 했던. 태운의 인생을 저당 잡아 휘두르던 사람이었다.

강찬혁의 입에서 그의 행방을 묻는 질문이 나오다니, 예상 밖의 일이라 태운은 다시 굳었다.

“넌 알잖아! 박재열 어디 있어?”

강찬혁은 말하다가 감정이 북받치는지 언성을 높였다. 태운의 기억에 있어 전 소속사 사장은 가장 거대한 어둠이었다. 오 년 동안 태운을 정신적으로 지배했고, 강압했으며 또 강제했다. 그의 그림자는 태운의 깊은 곳에 남았다.

태운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표정이 생겨났다. 찬혁이 하 하고 웃었다.

“모른 척하지 마. 이태운. 대체 너 뭐야?”

“…….”

“박재열이 사라지면서 회사 나가고 주식 챙기고. 제일 이득 본 게 넌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전…… 모르는 일입니다.”

태운은 정말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가 죽지는 않았을 거라 짐작했지만 어디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혁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찬혁은 태운의 얼굴에서 혼란을 읽어 냈다. 찬혁은 오랫동안 연기를 했고, 그렇기에 지독하게 잘 꾸며 낸 연기와 진실을 구별할 수 있었다. 태운의 얼굴엔 진실뿐이었다.

“말도 안 돼. 네가 모른다고? 그게 말이 돼?”

애써 감정을 참는 찬혁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

찬혁은 정말로 뭐든지 다 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박재열은 사라졌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잠수를 탔는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서 사라진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강찬혁이 몸을 팔았던 박재열의 이복형조차 그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애를 먹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이태운을 찾아온 것이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태운의 혼란은 진짜였다.

태운이라고 짚이는 바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자신이 일으킨 사고, 그 현장에서 구해졌을 때 그 또한 구해졌으리라. 그러니 그를 사라지게 한 사람은 혁진일 것이었다. 혁진은 소속사 사장에게 비디오를 회수했다고 했고 태운은 그것이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씨발. 내가 그 새끼 인생 망쳐 버릴라고 무슨 짓까지 했는데. 내가 그 새끼 망가뜨리고 싶어서, 얼마를 참았는데. 시발…….”

찬혁의 눈에 언뜻 투명한 액체가 비쳤다. 그 형언할 수 없는 분노에 태운은 이를 악물었다. 찬혁의 감정을 전부는 아니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찬혁이 견뎌 왔던 오 년은 태운이 견뎌 온 오 년과도 일치했다. 태운이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아야 했던 강찬혁의 역경은 그가 겪어야 했던 일 중 일부에 불과할 것이었다.

소속사 사무실 지하에는 소속 연예인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공간이 있었다. 박재열은 뜻에 따르지 않는 소속 연예인들을 상대로 린치를 가하는 것을 즐겼다. 박재열은 교활하고 자비가 없는 사람이었고, 그곳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은 또 촬영되어 훗날 약점으로 이용되었다.

데뷔 전부터 혁진의 침실로 들어가게 된 태운은 한 번도 그 안에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수도 없이 밖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그 방의 안에서는 그저 밖이 벽으로 보였겠지만, 밖에서는 안이 유리처럼 환하게 보였다. 박재열은 가학심을 드러내며 태운을 그 밖에 앉혀 두었다. 태운은 그곳에 앉아 인간에게 가해져서는 안 되는 고문들을 모두 지켜보아야 했다.

태운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와 머리를 짚었다. 동생이 약점으로 잡힌 탓에 어느 순간부터 체념하고 입을 다물어 버린 태운과는 달리 강찬혁은 끊임없이 저항하고 또 저항했었다.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태운에게도 그 독기가 보일 정도였다.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태운이 잠시 말을 쉬었다. 태운이 오 년 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결코 확답을 줄 수 없는 일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단 거였다. 말은 또 다른 말을 낳았고, 커져 버린 말은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버리니까. 하지만…… 태운은 혼자만 너무 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지옥 속에 있었으면서.

“확인해 볼 곳이 있습니다. 연락처를 알려 주시면…….”

눈앞의 남자가 강찬혁이기에 태운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찬혁은 태운의 표정을 읽으려고 했지만 태운의 하얀 얼굴에서는 읽혀지는 것이 없었다. 다만 그 어떤 엄정한 날카로움을 발견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찬혁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이태운은 마지막 끈이었다.

과연 도움이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태운이 가방을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태운이 채 찬혁에게 건네주기 전에 마음이 급한 강찬혁이 태운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키패드를 눌렀다. 태운이 우두커니 그 모습을 응시했다.

“전화해. 찾았어도 전화하고 못 찾았어도 전화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찬혁은 태운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면서 스스로의 처지가 웃겨서 웃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씨발 하고 다시 욕을 뇌까렸다.

“부탁한다.”

자존심 강한 찬혁에게서 나온 부탁의 말에 태운이 혀를 다시 물었다. 찬혁은 들어왔던 때와 같이 순식간에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창백한 얼굴을 한 태운은 소파 위로 주저앉듯 앉았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소리 없는 한숨이었다.

* * *

오랜만에 서 보는 카메라 앞이었다. 처음 감독이 입장하고 그 뒤를 따라 태운과 찬혁이 입장하자 찰칵찰칵 소리가 나면서 플래시가 터졌다.

무대 위의 다른 관계자들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한 그 빛에 눈을 감으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태운은 그 빛을 받으며 웃었다. 눈을 찌를 듯한 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소파 위에 축 늘어져 있던 태운이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자, 태운의 매니저는 한숨을 돌리면서도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이태운은 천생 배우였다. 감독이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태운에게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건네받은 양손으로 마이크를 감싸 쥐자 마디가 긴, 남자답게 예쁜 태운의 손이 유독 도드라졌다.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 속에서 차분하게 태운은 작품을 소개하고, 배역을 소개해 나갔다. 카메라 빛을 받은 태운의 얼굴이 생기를 띠었다.

매니저의 걱정과는 다르게 스포트라이트는 태운에게 쏠렸다. 태운이 메인 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재성 엔터테인먼트와 유착이 있는 기자들이 대거 참석했기에 매니저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는데, 잔뜩 인상을 찌푸린 강찬혁을 보고 이 기자들이 소속사 손에서 벗어난 태운을 물 먹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강찬혁을 최대한 포장하기 위하여 대거 참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잘 포장된 질문들을 받으면서도 강찬혁은 시큰둥하게 굴었다.

* * *

수정이 끝난 영화는 촬영할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내었다. 태운의 매니저는 기자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으며 태운에게 다가갔다.

“잘 나왔네.”

“그렇습니까.”

“몸은 좀 괜찮아?”

매니저의 질문에 태운이 쓰게 웃었다. 몸은 괜찮았다. 카메라 플래시들이 사라지자, 다시 가슴 한편이 답답해져 왔다. 카메라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태운은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은 다시 길게 이어졌다. 의식 없이 침대 위에 누워 있을 여동생이 떠올랐다. 같이 시사회에 참석했던 어린 여배우를 보자 그 생각이 더 짙어졌다.

그리고 다시 강찬혁. 그리고 박재열. 분노가 체념으로 변하고 그 체념이 다시 무감각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감정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태운은 마른세수를 했다. 밟고 있던 늪이 단단한 땅으로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그 단단한 땅이 진창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았다. 문득 태운은 혁진을 떠올렸다. 익숙해진 그 단단함이 그리워졌다.

* * *

태운은 소파에 아무 미동도 없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긴 목에서 오르내리는 목젖만이 태운의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던 태운이 복도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객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혁진뿐이었다. 태운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오셨습니까.”

뛰듯이 응접실 복도까지 움직인 태운은 혁진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자 발걸음을 멈췄다. 혁진과는 두 발자국도 남지 않은 거리였다.

태운은 그제야 자신이 복도까지 나와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어쩐지 지금까지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것들이 모두 잊힌 기분이었다. 혁진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태운이 옆쪽으로 비켜섰다.

“나가는 길이었나?”

“아닙니다.”

옆쪽으로 비켜서서 움직이지 않는 태운을 혁진이 한참 동안 응시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태운이 따랐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혁진을 태운이 잡았다.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혁진은 대답 없이 태운의 얼굴을 응시했다. 말을 해 보라는 뜻이었다. 그저 묻는 것인데 태운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박재열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조각이었다. 하지만, 부탁한다 하고 말하던 강찬혁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말해.”

태운이 입술을 씹는 것을, 혁진은 습관처럼 제지했다. 태운은 다시 제지당할 것을 알기에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꿈에서 깰 시간일지도 몰랐다.

“혹시…… 제 전 소속사 사장의 행방을 알고 계십니까.”

돌려 말하는 것이 가능한 성격도 아니어서 태운은 직접적으로 사실을 물었다.

“지금에서야 그것이 궁금한가.”

“…….”

“그자를 다시 네가 마주할 일은 없어.”

태운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무슨 말인지 막연했는데 그럼에도 북받치는 감정이 몸에 퍼졌다.

“세상에 없는 사람이야.”

“그게…… 무슨.”

창백하게 질린 태운의 얼굴을 혁진이 손에 쥐었다. 엄지로 태운의 이마를 쓸었다. 그리고 손을 내려 태운의 눈두덩이와 하얗게 질린 뺨까지. 누르듯 태운의 얼굴 전체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참 후 태운의 얼굴에 다시 붉은빛이 돌아오자 손을 떼었다.

태운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막연하게 전 소속사 사장이 어디선가 살아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태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각해 보지 않은 결말이었다.

“그게 왜 뒤늦게 궁금해.”

혁진은 태운의 전 소속사 사장의 최후에 대하여 더 말할 생각이 없는 듯 태운의 얼굴을 응시했다. 태운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열 수 없었다. 사실 정말로 오늘 강찬혁을 보기 전까지 전 소속사 사장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무의식중으로 전 소속사 사장에게 분노를 태우면 그 끝에는 혁진이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찬혁을 보는 순간 무엇인가 속에서 밖으로 넘쳤는데, 그것이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태운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계속 꿈을 꾸고 싶다고 생각했다.

태운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혁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없이 태운의 눈만을 응시했다. 태운이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나쁜 습관이야.”

혁진이 툭툭 태운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쳤다. 감겨 있는 태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눈 떠.”

결국 태운은 다시 감았던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혁진의 단단한 얼굴이 다시금 태운의 시야로 들어왔다. 태운이 순순히 눈을 뜨자 혁진은 태운의 눈가를 한번 쓸어 주었다.

“한잔할 텐가.”

혁진의 말에 태운이 “네.” 하고 순하게 대답했다. 혁진이 다시 한번 태운의 눈가를 섬세하게 쓸었다. 마치 칭찬과도 같은 느낌이라 태운은 어쩐지 가슴 한편이 저렸다.

알록달록한 안주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지만 두 남자 모두 안주에는 관심이 없었다. 혁진이 양주의 마개를 개봉해 먼저 태운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 주었다.

그리고 태운이 병을 넘겨받아 혁진의 잔을 채우려는데 혁진이 그런 태운을 제지하고, 스스로의 잔에 술을 채웠다. 태운은 손을 내려 술잔을 매만지다가 혁진이 술을 넘기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술을 마셨다.

“내가 알아야 하지만,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또 있나.”

태운의 안색이 단번에 하얗게 변했다. 번득 떠오르는 기억들은 처참했다. 검은 기억들. 자신의 손으로 찍었던 섹스 비디오. 그런 것. 혁진의 말이 가리키는 건 그런 종류임이 분명했다.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럼.”

그러나 이번엔 혁진이 말하는 의미를 알지 못해 태운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씀, 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궁금한 게 아니잖아. 넌 지금까지 그의 존재를 지우고 싶어 하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태운은 입이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등 뒤에 한기가 몰려왔다. 그게 무슨, 그걸 어떻게.

“지금 네 얼굴이 그걸 궁금해하는 얼굴이라고 생각해?”

“…….”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혁진의 눈동자가 짙어지자 태운의 입술 끝이 애처롭게 떨렸다.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설명할 수 있는 일인데 그것이 어려웠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혁진이 말없이 태운의 잔에 술을 채웠다. 태운은 다시 한 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행방을 궁금해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태운의 빈 잔에 다시 혁진이 술을 채워 주었다. 여전히 시선은 태운을 향한 채였다. 태운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혹시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태운이 말을 끝마치고 다시 고개를 돌려 혁진이 채워 준 잔을 비웠다. 다시금 혁진의 잔이 비워진 것을 보고 손을 뻗어 병을 집으려고 했지만 혁진에게 제지당했다. 혁진은 이번에도 자신의 잔에 스스로 술을 채웠다. 두 번째로 제지당한 태운은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술까지 따르게 하고 싶지 않아.”

태운이 멍한 표정이 되었다. 생각지도 않은 배려를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혁진에게도 그 검은 기억들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혁진이 그때처럼 자신을 대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태운은 기꺼이 감내해 내었을 것이었다. 애초에 태운은 혁진에게 갚지 못할 은혜를 받았다. 혁진이 죄를 물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한다고 해도 태운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혁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태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니 다시 병을 건네받는 것이 맞을지,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잊고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하얗게 변한 태운의 머릿속을 다시 혁진이 헤집었다.

“그 말을 하는 게 이렇게 힘들었어?”

“전…….”

태운이 고개를 푹 숙였다. 혀로 입을 축였다. 입술이 말랐다.

“넌 아무렇지 않나.”

“무슨.”

“박재열의 죽음에 대하여. 박재열과 좋지 않은 관계였잖아.”

태운의 얼굴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색도 사라졌다.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전 소속사 사장과 좋았던 관계라는 것이 아니라, 전 소속사 사장과 좋지 않은 관계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따라올 결론이 두려웠다.

태운은 절박했다. 다시 만난 이후로 혁진이 자신을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의지로 혁진의 옆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강제로 옆에 있었을 뿐이라고, 혹시라도 자신이 혁진에게 어떤 원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다시 자신에게 가 버리라고 할까 봐 겁났다. 가고 싶지 않았다.

“전…… 괜찮습니다.”

태운은 사뭇 초조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혁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태운.”

“원망……,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 소속사 사장이 아닌 혁진에게 하는 말이었다. 전 소속사 사장에 대한 마음을 인정해 버리면 혁진의 곁에 있는 것이 힘들어질 것 같아, 누르고 눌렀다. 태운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태운의 무의식이 그렇게 했다. 일부러 기억하지 않았고 떠올리지 않았다. 태운의 표정에 물기가 어렸다.

“이태운.”

“곁에……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운의 말에 혁진이 하, 하고 웃었다. 혁진은 눈치가 귀신같은 남자였다. 아무리 그라도 아무 단서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추측할 수 없었지만, 단서가 잡히면 추리는 쉬웠다.

“나를 원망하나.”

“그게 무슨……. 절대 아닙니다.”

혁진의 말을 끊고 들어온 태운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혁진은 스스로 잔을 채워 단번에 술을 목으로 넘겼다.

“그럼 나를 원망하게 될까 봐 두려워?”

태운은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태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혁진의 말에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비슷한 종류의 마음이었다. 혁진과의 관계를 부정해 버리면 설 곳이 없어질까 두려웠다.

“이태운. 지금 여기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선택이야.”

“…….”

“우리가 마주 앉아 있는 것에는 어떤 누구의 개입도 없어.”

혁진의 말은 태운에게는 어려웠다.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태운은 그 속에서 자신만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얻었다. 태운의 얼굴이 울 듯 일그러졌다.

“계속 이렇게 앉아 있거나, 혹은 이곳을 벗어나거나 그것은 모두 네 결정이라는 말이야.”

물기 있는 태운의 눈이 혁진과 마주쳤다.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잘 죽었어요…….”

태운의 입에서 억눌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혁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태운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묵묵히 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태운은 시야가 하얗게 번져서 눈을 계속 깜빡거렸다. 하지만 흐려진 시야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연거푸 마신 술이 머리를 멍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죽었습니까?”

태운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혁진은 말없이 태운의 잔을 채워 주었다. 태운이 채워진 잔을 또 들이켰다. 목이 타고,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토할 것만 같았다.

“박재열의 부친이 사적인 관계로는 내 외조부가 되셔. 처음에는 네가 정신 차리면 박재열의 처분을 네게 맡길 생각이었는데 내 외조부에게 박재열을 넘겨달라는 요청을 받았어. 박재열이 널 매개로 요구하던 주식이 그분의 역린 같은 것이라. 뭐 네가 정신 차리기 전에 네 인생에서 치워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

“…….”

“두 번 다시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감금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리고 그 후에 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자살인지 내 외조부가 직접 손을 쓴 건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결코 내 눈을 피하기 위해 위장한 죽음은 아닐 거야. 자식이라도 본인의 재산을 욕심내면 용납하시지 못하시는 분이라.”

“하, 하하하하하.”

그의 악행에 어울리는 비참한 최후였다.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태운은 지난 설움과 분노,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모두 쏟아 내려고 하는 것처럼 울었다. 혁진은 그 앞에서 묵묵하게 태운의 잔을 채워 주며 태운이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혁진의 입에서는 긴 숨이 몇 번이나 흩뿌려졌다.

24시간을 연속으로 촬영해도 독하게 카메라 앞에서 버티던 태운이, 울다가 힘이 빠져 테이블 위로 쓰러질 정도가 되었다. 혁진의 입에서 다시 긴 숨이 토해졌다.

“그만.”

혁진의 짧은 음성에 태운이 숨을 잠시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붉어진 눈가로 눈물이 줄줄 새었다. 눈물을 멈추기 위해 숨을 참았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속으로 쌓아 둔 것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태운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그저 억누르기만 했던 감정들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이리 와.”

혁진의 손짓에 태운은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까매지면서 휘청했지만 태운은 걸음을 떼었다. 위태로이 혁진에게 가는 길이 길었다.

몸에 힘이 없기 때문인지 결국 혁진의 앞에 다다라 주저앉고 말았다. 공복에 한 시간 가까이 눈물을 뽑아냈으니 체력이 버텨 주지 않았다.

“그만 울어.”

“……읍, 네.”

태운이 말을 하며 고개까지 끄덕였다. 혁진이 주저앉아 있는 태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태운은 혁진의 손길에 기댔다. 유년 시절부터 이어져 온, 이제는 짧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태운의 기억 속에서 타인의 든든함을 느껴 본 것은 혁진에게서가 처음이었다.

부모에게조차 태운은 한 번도 보호를 받는다는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태운을 낳은 어미는 미혼모였고,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태운과 함께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어미는 죽고 태운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냉장고에 있는 썩은 음식과 물만 먹으며 버텼다.

그 충격으로 태운은 그 이전 시절의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머니에게 애정을 받았었는지 알지 못했다. 태운의 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일곱 살 태운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친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태운의 양육을 맡기는 했지만 이미 가정이 있었다. 그는 태운을 집 안으로 데려다 놓기만 했을 뿐 그대로 방치했다.

그리고 남편의 부정의 씨앗인 태운을 견딜 수 없어 진저리 쳤던 아버지의 부인.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을 깨 버렸다. 어린 태운의 동생을 두고 집을 나갔다. 집을 나간 부인과, 집안이 깨지며 망가져 버린 태운의 아버지는 아홉 살 어린 태운에게 그보다 더 어린 동생을 맡기고 가끔씩 돈을 놓고 갈 뿐 몇 주씩, 몇 달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홉 살 태운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누구에게도 기대 본 적 없었고 누구보다도 단단해져야만 했다. 기억이 남아 있는 시절부터 한 번도 누군가에게 기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처음으로 단단함을 전해 준 혁진의 곁을 떠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혁진의 손을 놓으면 버틸 곳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깊은 늪에 빠져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 단단함이 좋아서 태운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마셔.”

혁진은 생수병의 마개를 벗겨 태운의 손에 쥐어 주었다. 태운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혁진의 말에 일단 입에 가져가 대었다. 차갑게 들어오는 액체에 태운은 뒤늦게 그것이 물이란 것을 알았다.

물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태운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500ml 한 병을 쉬지 않고 목으로 넘겼다. 물을 다 넘기자 태운은 울음이 좀 멎는 것을 느꼈다.

“……감사, 합니다.”

태운의 목소리가 잠겨서 갈라졌다. 잔뜩 울어 갈라진 목소리와 붉게 달아오른 젖은 얼굴은 이질적이었다. 태운이 손등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았다. 태운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혁진의 다리 쪽으로 기대어 있었다.

생수병을 바닥으로 내려놓는 태운의 머리 위를 혁진이 다시 한번 쓸어 주었다. 그 손의 따뜻함에 태운은 혁진의 무릎 위로 얼굴을 묻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눈물을 빼낸 태운이 결국 몸에 힘이 빠져 혁진의 무릎 위로 쓰러졌다. 그런 태운을 혁진이 받아 내었다.

한동안 그렇게 있던 태운이 혁진의 다리에서 얼굴을 떼어 냈다. 단정하게 주름이 잡힌 혁진의 바지에 눈물 자국으로 진한 얼룩이 남았다. 태운은 민망해져서 손등으로 얼굴에 남은 물기라도 닦아 보려 했지만 손이 젖어서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혁진이 그런 태운에게 테이블 위의 티슈를 건넸다. 태운은 그것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앉아.”

혁진이 말을 하며 제 옆자리의 의자를 빼냈다. 태운이 여전히 휘청이며 일어나 혁진이 빼 준 의자에 앉았다.

겨우 이 정도로 살아오면서 쌓아 둔 설움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태운은 마음이 조금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느끼자 아이처럼 주저앉아 엉엉 하고 운 모습이 생각나 부끄러워졌고, 묵묵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 준 혁진에게 감사함과 동시에 송구함을 느꼈다.

이미 울음기로 붉어진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었지만 태운은 얼굴에 열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다시 인사의 말을 내뱉는 태운을 보며 혁진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태운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이태운.”

태운이 고개를 들어 혁진을 응시했다. 하지만 혁진은 바로 말을 하지 않았다.

“말씀, 하십시오.”

태운의 말에도 혁진은 말을 잇지 않았다. 혁진의 입에서는 태운에게는 들리지 않는 긴 숨이 새어 나왔다. 혁진은 말을 이을 생각이 없다는 듯 그저 단호한 손짓으로 태운의 앞으로 사용하지 않은 접시와 포크를 밀어 주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색색의 음식들에 시선을 주었다. 태운은 착한 아이처럼 혁진이 건네주는 포크를 받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예쁘게 잘라진 딸기를 찍어 입안으로 넣자 달콤한 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그러자 태운은 밀려오는 허기를 느꼈다. 그런 태운을 혁진은 한참을 더 응시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

* * *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이 잘 뜨이지 않았다. 울면서 기운을 너무 뺀 탓인지 씻고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든 기억이 났다. 눈을 깜빡이며 시야를 회복하던 태운은 맨살에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몸을 굳혔다. 뒤늦게 코로 혁진의 향이 밀려들어 왔다. 혁진과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민망함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나자 더 배가 되었다.

혁진의 앞에서 울 수 있었던 것은 술기운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태운은 독하게 치받아 오르는 감정을 참아 냈을 것이었다.

술이 완전히 깨고, 정신을 차리자 어제 들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태운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도록 분노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눈앞이 붉어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태운은 깨달았다. 눈앞이 정말 붉어지지는 않았지만, 눈까지 뜨거운 열이 올랐다.

“왜 그래.”

잠에서 깬 것인지 혁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운은 화들짝 놀랐다. 그 분노가 이미 죽어 버린 소속사 사장을 향한 것인지, 그를 제 손으로 죽일 수 없었던 자신에게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하얗게 태우던 분노는 혁진의 목소리와 만나자 사라져 버렸다. 태운은 그 분노가 혁진을 향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일어, 나셨습…… 니까.”

아직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혁진은 어둠을 더듬어 태운의 손을 쥐었다. 태운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눌린 자국이 혁진에게도 느껴졌다.

“뭐야, 이태운.”

한참을 울고 난 후 자신을 대하는 혁진이 조심스러워진 것을 태운도 느꼈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배려였다.

“나쁜…… 꿈을 꾸었습니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 될 수 있다면. 태운은 잘하지 못하는 거짓말을 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었다. 혁진은 모른 척 다시 어둠을 더듬어 태운의 가슴께를 도닥였다. 투박했지만 나쁜 꿈을 꾸고 일어난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태운은 울컥 다시 가슴속이 먹먹해졌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도닥이는 손길이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태운은 더한 다정함을 느꼈다. 모든 것을 잊고 잠에 들 수 있을 정도로. 잠결에 언뜻 혁진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태운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태운이 완전히 잠든 후에도 혁진은 태운을 한참을 더 도닥였다. 악몽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편안한 표정이 될 때까지.

* * *

자신을 감싸고 있는 온기가 사라지는 기분에 태운은 잠에서 깨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혁진은 자신이 일어나면서 들썩여진 침구를 제대로 정리해 태운에게 덮어 주었다. 태운은 잠결에 혁진의 손을 잡았다.

“더 자.”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던 태운은 그제야 자신이 혁진의 손을 쥐고 있는 것을 알았다.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내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혁진의 단단한 손이 태운을 제지하였다. 태운은 침대에 계속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니 생각이 이어졌다. 전 소속사 사장이 죽었다고 했다. 술을 마셨고 혁진의 품에서 계속 울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유 없이 끓어오르던 분노도, 울분 섞인 감정도 이상하게 전부 꿈만 같았다.

혁진이 다시 한번 얇은 침구를 정리해 주었다. 태운의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방에 빛이 없어서 혁진이 눈치채지는 못했다. 태운은 그 상태로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박재열…… 그자의 행방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박재열에게 오랜 시간을…… 유린당한. 꼭 그자의 죽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그자의 죽음을 말해도…….”

태운은 말을 잇지 못했다. 굉장히 무례한 부탁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운의 표정이 알 수 없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혁진은 뒤의 말을 이미 듣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하지만…….”

태운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담겼다. 혁진의 손이 누워 있는 태운의 이마를 가볍게 치고 지나갔다. 혁진은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다시 한번 허락했다.

“방송에 나가서 떠든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곧 다른 경로를 통하여 말이 시작될 거다. 네가 먼저 시작한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어.”

혁진은 누워 있는 태운의 이마를 한번 쓸어 주고는 문을 향해 걸었다. 태운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몸을 일으켜 혁진의 등 뒤로 “다녀오십시오.” 하고 말했다. 혁진이 나가자 태운의 눈에서 맺혔던 눈물이 흘렀다.

* * *

박재열의 죽음을 전해 듣는 강찬혁의 얼굴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태운의 하얀 얼굴만이 일그러졌다. 강찬혁은 태운의 말을 믿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 같은 애매한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어서 그랬다. 전부 밝히려면 혁진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태운은 조금이라도 혁진의 존재를 유추 가능한 정황이라면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박재열이 죽었다는 사실 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긴장해 찬혁을 바라보던 태운의 시야에 꾹 쥐어진 채 부들부들 떨리는 찬혁의 손이 들어왔다.

“네 말을 믿을 수 없어.”

“…….”

“살아 있는 거지? 그 새끼 살아 있는 거지? 너 그 새끼랑 한패라 구라 치는 거지?”

태운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아득한 절망. 치솟는 살기. 누굴 향한 건지 모를 원망. 그리고 그와 함께 찾아온 모든 부정적인 감각들. 이미 태운에게 어제 몰아친 것이었다. 강찬혁이 박재열의 손에서 굴려진 것에 비하면 태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랬다. 찬혁이 지금 느끼고 있을 감정을 태운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이어지는 태운의 사과에 찬혁이 하, 하고 웃었다. 기운이 빠진 웃음이었다. 그의 독기로 차 형형하던 눈빛에서 힘이 사라졌다.

“그래 들어나 보자. 그 새끼가 어떻게 뒤졌는데?”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곧 말이 돌기 시작할 거라고 했습니다.”

태운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말을 하는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태운은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찬혁은 그저 코웃음 쳤다.

“미친 새끼. 지금 네 말을 믿으라고?”

태운이 대답 없이 눈을 감고 있자 찬혁은 하하하, 하고 웃었다. 태운의 표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중얼거리며 찬혁이 뒷걸음질 쳤다. 태운은 차마 그런 찬혁을 붙잡지도 못했다.

찬혁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태운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의자에 휘청하고 주저앉았다.

* * *

태운이 돌아올 곳은 호텔밖에 없었다. 아니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태운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혁진이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혁진이 자신을 지탱해 주지 않으면 이대로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센서가 자동으로 객실에 빛을 밝혔다. 아무 미동이 없이 앉아 있던 태운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혁진을 향해 달렸다. 필요한 건 절대 쓰러지지 않는 혁진의 곁이었다.

“무슨 일이야.”

품 안에 무너지듯 들어오는 태운을 혁진이 가볍게 안아 들었다. 아무 말 없이 태운은 혁진에게 기대어 있었다.

“이태운.”

태운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맞닿아 있는 혁진의 턱에 태운의 머리칼이 비벼졌다. 혁진은 추궁하지 않고 그런 태운을 품에 고쳐 안았다.

한참 그렇게 혁진의 품 안에 있던 태운은 귓가까지 붉어진 후에야 혁진에게서 떨어졌다.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태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혁진의 손이 태운의 입술에 닿았다. 태운이 입술을 깨물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움직임이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혁진이 아까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태운은 다시 고개만 저었다. 혁진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박재열이 죽은, 것을…… 박재열의 행방을 묻는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혁진은 더듬더듬 말을 잇는 태운을 다시 품 안으로 끌었다.

“그 말을 하고도 다시 내게 온 거야.”

태운에게 대답을 바라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혁진은 태운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태운에게 입을 맞췄다. 건조하면서도 힘 있는 입맞춤이었다. 혁진은 태운의 입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제 입안으로 넣으려는 것처럼 태운을 빨아들였다. 태운도 혁진에게서 온기를 얻으려는 듯 혁진에게 매달렸다. 서로의 타액이 섞여 질척거리는 소리만이 긴 복도에 울렸다.

잠시 입을 뗀 후 혁진은 태운의 티셔츠를 위로 올렸다. 태운이 혁진의 움직임을 도왔다. 태운의 티셔츠를 완전히 벗긴 혁진은 다시 태운의 입술을 찾았다.

“으, 으읏!”

태운의 골반을 부술 듯 쥐었던 혁진의 손이 이번에는 태운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태운이 혁진에게 몸을 기댔다. 바지와 속옷이 한 번에 내려가 허벅지에 걸리자 혁진은 태운의 살집 있는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태운이 부르르 하고 몸을 떨었다. 하지만 입술의 결합은 떼어지지 않았다.

혁진의 손이 다시 태운의 상체로 올라왔다.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는 손에 태운은 신음하며 더욱 혁진에게로 몸을 기댔다. 혁진은 자센에게 몸을 맡긴 태운을 안아들고 움직였다. 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에 눈이 감겼다.

그러나 이내, 붕 뜨는 기분에 놀라 눈을 뜨니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다. 자신의 옷을 대충 풀어 바닥에 던져 버린 혁진이 태운의 위로 몸을 겹쳤다.

“잠깐. 잠깐.”

제대로 몸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태운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혁진은 다시 입술로 말을 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태운의 이마를 쓸었다. 태운의 이마에 벌써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곧 태운의 머리 뒤로 손을 넣은 혁진은 그대로 자신을 향해 더 잡아당겼다. 태운은 정말로 혁진에게 먹혀 버리는 기분이었다.

“하아.”

숨이 모자란 태운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태운의 입술을 먹어 치우던 혁진은 그제야 태운을 놓았다. 태운은 모자란 숨을 다급히 몰아쉬었다.

태운이 숨을 보충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혁진은 태운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앉았다. 태운이 불편함을 느낄 정도의 자세로 그의 허리를 꺾은 혁진은 무릎으로 태운의 꼬리뼈 부분을 받쳤다.

“읏!”

태운의 항문이 모습을 드러내자 혁진은 그 안에 젤을 짜 넣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젤을 태운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차가운 느낌과 혁진의 손가락이 안을 드나드는 감각에 태운이 딱딱하게 굳었다. 태운은 혁진의 손목을 양손으로 쥐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거부가 아니었다. 태운의 손에는 전혀라고 할 만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태운의 손을 그대로 매단 채 혁진은 태운이 간지러운 기분에 몸부림칠 때까지 느릿하게 태운의 항문을 풀었다.

“하읏, 으으, 으.”

태운이 등을 시트에 비볐다. 혁진의 손가락이 드나드는 아래에서 시작된 간지러움이 꼬리뼈를 타고 머릿속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등을 시트에 비비는 것으로는 전혀 그 미칠 것 같은 감각이 해소되지 않았다. 태운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차라리 혁진이 자신을 꿰뚫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태운은 쥐고 있던 혁진의 손을 조금 더 힘을 주어 잡아 당겼다. 혁진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태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태운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저었다. 혁진이 그 의미를 이해한 것인지 무릎을 세워 앉았다. 혁진의 성기는 이미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윽.”

공을 들여 안을 풀어 놓았기 때문인지 혁진의 성기가 단번에 끝까지 치고 들어오는데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태운은 자신을 가득 채운 압박감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태운의 가늘어진 눈이 혁진을 향했다.

눈꼬리가 길어서 눈을 가늘게 뜨면 안 그래도 예쁘장한 태운의 얼굴에 색기가 생겼다. 그 모습을 보던 혁진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라졌다. 태운이 압박감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리던 혁진이 다시 천천히 태운의 안에 귀두 부분만을 남기고 성기를 뺐다.

그 배설감과도 비슷한 기분에 태운은 진저리 쳤다. 혁진이 태운의 골반을 단단히 잡고 다시 깊숙한 곳으로 치고 들어갔다. 태운이 견디지 못하고 혁진의 팔목을 쥐었다.

“흣!”

혁진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태운의 몸이 얕게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태운은 내장 깊숙한 곳까지 혁진이 들어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혁진의 단단한 성기가 폭풍과도 같이 태운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깊숙이 채워지는 압박감에 태운은 충만감이 들었다. 몸이 조금 불편하게 꺾였지만 태운은 전혀 불편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태운의 골반을 쥐고 태운의 안으로 강하게 치받던 혁진이 태운의 엉덩이를 다시 쥐었다. 태운이 공중에서 외마디의 교성을 내질렀다.

“흐읏, 흐으…… 흐으!”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넓은 침실 안은 태운의 신음 소리와 혁진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렸다. 몸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태운이 발가락을 끝까지 오므렸다. 밀려오는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쾌락을 견디다 못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태운의 성기에서 먼저 하얀 탁액이 뿜어져 나왔다. 태운은 당황했지만 혁진이 태운의 팔목을 단단히 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혁진의 성기가 다시 한 번 힘 있게 태운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내부가 가득 채워지는 기분에 태운은 다시 무너졌다.

혁진의 뜨거운 입술이 태운의 입에 맞물렸다. 태운은 머릿속을 하얗게 채우는 쾌감에 혁진의 목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혁진은 태운이 온전하게 숨을 돌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혁진이 그대로 턱을 내려 태운의 둥근 어깨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간지러운 감각에 태운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혁진은 그대로 숨을 들이마셨다. 태운의 어깨에 얄팍하게 붙은 살이 혁진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정 후라 감각이 더 예민해진 태운은 몸을 비틀었다. 입술을 악물고 그 감각을 견디던 태운은 혁진의 동작이 더 노골적으로 변하자 견디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간, 지럽습…… 하하.”

공간을 청명하게 울리는 태운의 웃음소리에 혁진이 움직임을 멈췄다. 혁진의 움직임이 멎자 태운 또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혁진은 태운에게 다시 한번 입을 맞출 뿐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싶어 하는 것 같은 평소의 키스가 아니었다. 얕은 키스였다. 혁진의 혀는 태운의 입술을 가볍게 쓸어서 입을 벌리고 태운의 입 안쪽을 여리게 훑기만 했다.

“네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 해.”

태운은 눈을 크게 떴다. 혁진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힘이 빠진 말이었다. 당황한 태운은 머릿속을 헤매는 말을 입 밖으로 바로 꺼내지 못했다. 그저 “왜, 왜.” 하고 문장이 되지 못하는 말만을 뱉어 냈다. 혁진이 그런 태운의 머리를 투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네가 내게 돌아온 이유가 궁금해. 네게는 내가 결코 좋은 기억이 아니잖아.”

태운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혁진은 다른 말 없이 그저 태운의 어깨에서 시작해서 가슴을 지나 복부에 이르기까지, 태운을 마치 씹어 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태운의 몸에 자국을 남겼다. 그것을 가만히 느끼고 있던 태운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혁진을 밀쳐 내었다. 자의로 처음 해 보는 거부였다. 혁진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혁진은 더 이상 태운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태운은 혀를 깨물었다. 그리고 몰래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혁진과 가까이 붙어 있어 그 숨소리가 혁진에게도 들렸다. 혁진은 혀를 깨문 태운의 입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내렸다. 태운이 그런 혁진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혁진도 태운을 읽어 내지 못했다.

태운에게 한참을 그렇게 붙잡혀 있던 혁진은 일어서려는 것을 포기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태운은 그제야 혁진을 놓았다.

“살게, 살게 해 주셨다고 생각해요.”

태운이 욱 하고, 속에 잔뜩 뭉치는 것이 있는 듯한 소리를 냈다. 다정하게 만져 주는 손으로, 항상 제게 곁을 내어주는 그 품으로. 혁진은 자신을 붙들어 주었다.

“그때의 기억이 좋은 기억이라고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살게 해 주셨어요.”

하얗게 질린 태운이 자신의 중심을 내려다보았다. 겨우 깨물리고 빨린 것만으로도 뭉근하게 일어서 있었다. 태운을 따라 혁진의 눈이 그것으로 향했다. 태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 발로는, 절대 가지 않습니다.”

“이태운.”

“그리고 지금은 절대로 나쁜 기억이 아닙니다. 하루하루가 단단하고 따뜻해서 가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의 쓸모라도…… 있다면, 절 보내지 마십시오.”

태운은 마지막 말만큼은 한 음절, 한 음절 정확히 내뱉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이런 자신을 혁진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일어서서 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혁진은 그런 태운을 품 안으로 넣었다. 성긴 손짓이었지만 혁진은 태운을 도닥였다.

“그래. 가지 마.”

혁진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태운의 안에서 무엇인가 붉은 감정이 치솟았다.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며 혁진을 보챘다.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열이 올랐다. 태운의 얼굴이 붉어졌다.

바르작거리는 태운을 혁진이 품에서 떼어 놓았다. 태운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했다. 힘을 주어 발가락 끝을 굽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태운에게 쾌락은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태운은 혁진을 제외한 다른 이와는 성관계 경험이 없었다. 처음 태운이 접대를 위하여 혁진의 호텔 객실로 밀어 넣어진 이유조차도 태운이 성관계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혁진을 만난 이후에는 다른 사람과 행위를 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태운은 제발 혁진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이 불타는 것 같았고 간지러웠다. 그리고 그곳은 손이 닿을 수 없는 깊은 곳이었다. 하지만 태운은 감히 혁진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마음에 혁진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허리는 의지를 배반하고 잘게 흔들렸다.

“흐.”

태운이 입술을 깨물고 코로 한숨을 내뱉었다. 혁진은 그때까지도 태운을 만져 주지 않았다. 태운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보채는 태운이 처음이라 조금 낯선 것도 같았다.

결국 눈에 눈물이 맺힌 태운이 혁진에게 어설프게 안겨 들었다. 혁진의 단단한 살이 만져지자 태운은 더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태운만 느낀 게 아닌 듯했다. 혁진은 태운의 다리를 벌려 자신의 허리를 감도록 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들어가 태운의 안으로 단번에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이미 축축한 내부는 혁진을 기다렸다는 듯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울렁이는 감각에 태운은 혁진에게 의지했다. 둘의 살이 맞닿아졌다. 태운의 뜨거운 숨이 혁진의 가슴으로 뿜어졌다.

혁진이 불편한 자세로 태운의 몸을 들었다. 태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중으로 솟았다. 그 자세에 적응하기도 전에 혁진에 의하여 바닥으로 몸이 내려졌다.

“악!”

머릿속에 터지는 하얀 감각에 태운은 비명을 내질렀다. 혁진의 성기가 배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태운은 혁진을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 조심스럽게 자신의 배를 만졌다. 당연하게도 뱃가죽 밑으로 혁진의 성기가 만져질 리 없었다. 그 어설픈 행동에 혁진의 눈이 짙어졌다. 혁진의 손길이 평소와는 달리 조급해졌다.

그러자 혁진은 태운의 허벅지 밑으로 손을 넣어 태운의 엉덩이를 받쳤다. 그리고 다시 태운을 공중으로 올렸다. 혁진의 성기가 반쯤 태운의 아래에서 빠졌다가 혁진이 내려놓자 다시 태운의 안으로 깊게 박혔다. 태운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욱!”

혁진은 마르긴 했지만 키가 크고 기본 뼈대가 있어 결코 가볍지는 않은 태운을 마치 아이처럼 손쉽게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눈앞으로 하얗게 터지는 감각들을 견디지 못하고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태운이 혁진의 목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매달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태운은 혁진의 턱에 머리를 비볐다.

하지만 혁진은 태운을 봐주지 않았다. 그대로 태운을 침대 위에 눕힌 혁진은 본격적으로 태운의 안으로 추삽질을 시작했다. 태운이 목을 감고 있어 불편한 자세가 되었지만 혁진은 굳이 태운을 떼어 낼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읏, 악!”

태운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혁진은 멈추지 않았다. 혁진의 추삽질 속도가 빨라질수록 태운의 입에서 튀어 나오는 짧은 마디의 신음성도 많아졌다. 태운이 이지를 상실한 인형처럼 흔들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쾌락에 태운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졌다.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아래에 힘을 주어 내부를 조였다. 혁진이 낮게 진저리 치는 것이 느껴졌다.

혁진이 힘을 주어 거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태운이 바들바들 떨었다. 손은 주먹을 쥐고 발가락까지 꾹 다물어 오므렸다. 혁진과 단단히 이어진 기분이었다. 혁진이 조금 더 만족을 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에 태운은 어설프게 허리를 쳐올렸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혁진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잠시 멈칫한 혁진이 태운의 내부로 체액을 쏟아 냈다. 태운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손을 더듬어 혁진의 귓가를 만졌다. 혁진은 그런 태운을 제지하지 않았다.

좋았다. 혁진이 정말 좋았다. 이런 게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인 것 같았다. 태운은 다시 혁진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힘을 주지 않은 혁진이 그대로 태운에게 끌려왔다.

* * *

샤워를 하고 나오던 태운은 멈춰 섰다. 응접실 소파에 면바지에 셔츠 차림인 혁진이 앉아 있었다.

잠에서 깼는데 옆자리에 혁진이 없어서 태운은 당연히 혁진이 출근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빈 객실에 혼자 있는 게 내키지 않아서 샤워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가 저녁 때 다시 올 생각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편한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혁진을 보니 낯설었다. 태운이 가만히 멈춰 서자 혁진이 고개를 들어 태운을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태운이었다. 태운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젯밤 침대 위에서의 일들이 생각난 것이었다. 충족감. 무엇인가 물렁하고 따뜻한 것이 태운의 심장께에 걸렸다. 두근두근하고 뛰는 심장 소리가 태운의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가는 길인가.”

“……아닙니다.”

태운이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집에 가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태운이 머뭇거리며 혁진이 앉은 소파와 마주 보고 있는 소파까지 걸었다.

힐끔하고 혁진을 좇으니 혁진의 손에 자신이 테이블 위로 늘어놓았던 대본이 잡혀 있는 게 보였다. 태운은 어지르는 성격은 아니었다. 다만 급하게 혁진을 마중하느라 치울 시간이 없었던 것뿐인데 너저분한 테이블 위가 어쩐지 민망해서 태운의 귓가가 붉어졌다.

혁진과 그의 손에 들린 대본은 지독하게도 어울리지 않았다. 대본은 절대 혁진이 살면서 쥐어 보지 않았을 물건이었다. 태운이 조심스럽게 소파 끝에 걸터앉았는데도 혁진은 손에서 대본을 내려놓지 않았다.

“출근하셔야 하지 않, 습니까?”

혁진이 그저 대본을 읽는 것뿐인데도 어쩐지 태운은 자신의 속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기분이었다. 난처한 기색이 드러나는 태운의 얼굴을 보며 혁진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주말이잖아.”

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평소 혁진이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태운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때는 정신을 놓고 있었기에 날짜의 감각이 전혀 없었고, 근래에는 같이 주말을 보낸 기억이 없었다.

창백해진 태운이 기억을 되짚고 있을 때 혁진은 계속해서 태운의 글씨로 주석이 빽빽하게 써진 대본을 읽어 나갔다. 혁진은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서야 대본을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툭 하고 테이블에 대본이 닿는 소리에 발끝을 응시하고 있던 태운이 고개를 들었다. 다시 마주한 혁진의 손에는 내려놓은 대본을 대신하여 투박한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그게 무엇이지 하고 떠올리던 태운은 무대 인사 때 감독이 편집본이라며 소속사와도 나누지 말고 보관에 절대 유의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건네준 DVD임을 깨달았다.

“……이번에 개봉 예정인 영화 편집본 영상입니다.”

망설임 끝에 내뱉은 태운의 말에 혁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했다. 하지만 그 케이스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보시겠, 습니까?”

말을 하는 태운의 눈가까지 붉어졌다. 혁진은 엄청난 금액을 영화에 투자했으니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을 물건일 터였다. 혁진이 DVD를 내려놓지 않자 충동적으로 꺼낸 말인데 어쩐지 선심을 쓴 것 같은 말이 되어 버려 태운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혁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태운에게 식사를 권했다. 태운은 그것을 거절로 여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태운은 자신의 영화를 혁진과 함께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는 꼭 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그런데 지금, 호텔에서 개인적으로 빌려주는 상영관인 듯한 스크린 앞에 태운은 혁진과 함께 서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혁진을 따라오게 된 것인데, 혁진은 이곳에서 자신이 건넨 DVD를 볼 생각인 듯했다.

눈 밑까지 붉어진 태운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혁진이 그런 태운을 보면서 잠시 웃었다. 그가 대답 없이 소파에 앉자 태운이 난감한 얼굴을 하고 혁진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혁진이 손에 든 리모컨을 조작하자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영상이 비쳤다. 태운은 영화를 차마 볼 수 없어 어두운 발끝만 응시했다. 내부 시사회를 하며 몇 번이나 본 영상이었는데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어둠 속에 감춰진 태운의 얼굴이 단단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스크린을 보고 있지 않지만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태운은 귀를 막고 싶었다. 그러나 혁진은 아무 미동도 없이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었다. 혁진의 시선이 스크린에 고정된 것을 느끼며 태운은 자꾸만 마르는 입술을 축였다.

시간은 태운에게만 지독하게 느리게 흘렀다. 자신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하여 들리는 게 갑자기 너무 낯설었다. 그 장면에서 자신이 지었던 표정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아 태운은 눈을 꾹 감았다.

화면 속에서 태운은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울분과 증오, 분노가 생생하게 스크린에서 펼쳐졌다. 태운은 울부짖는 자신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릴 때, 혁진의 시선이 잠시 자신에게 박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태운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태운에게 향했던 혁진의 시선이 다시 스크린으로 돌아가고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영화가 끝날 때쯤에 태운은 부족한 숨을 몰아쉬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혁진의 조작에 의하여 불이 켜지자 그제야 겨우 참았던 한숨을 내쉬는 태운에게 혁진이 말했다.

“괜찮나.”

태운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화면 속의 자신을 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알지 못했었다. 대답이 없자 시선을 마주해 오는 혁진에게 태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이 괜찮냐는 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영화 속 울부짖던 자신이? 아니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현재의 자신이?

태운이 답을 하지 못하고 서 있자 혁진이 태운의 머리를 살짝 눌렀다. 태운은 그것이 혁진 나름의 위로라는 걸 알았다. 태운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슴을 꾹 누르고 있는 따스한 덩어리가 더 커진 것 같았다. 그게 어떤 것에 대한 위로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든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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