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기쁨의 뼈대 (9/15)

2. 기쁨의 뼈대

“태경 광고를 안 하겠다고?”

매니저가 곤란을 넘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재성 엔터테인먼트와 태운의 계약이 만료됐다는 발표를 하고부터 태운에 대하여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았다. 게다가 스타 감독의 제작비가 많이 투자된 대작들만 찍어 오던 태운이, 저예산 영화로 눈을 돌리자 그 소문들은 더 부풀었다. 매니저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하고 싶은데. 많이 곤란합니까?”

“다른 광고들은 모두 그만두고 태경 광고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 정도야.”

태경은 재계 순위 1위를 찍는 굴지의 대기업이었다. 광고 모델에 대한 대우가 업계 최고 수준인 것을 넘어서, 광고 모델을 까다롭게 뽑기로도 유명했다.

태경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톱스타라는 증명이면서, 엄격한 태경의 선정 기준을 통과했다는 뜻이기도 해서 사생활 등에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다는 보증이기도 했다.

매니저는 업계의 생리를 잘 알았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 증명하여야 한다. 증명하지 못한다면 사실이 아니더라도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런 의미에서 태경의 광고는 좋은 증명 방법이자 해결책이었다.

“좀 더 사실대로 말하면, 재성 나오고 뒤에서 이런 저런 소문들이 많아. 내 입으로 말하기도 싫은 질 나쁜 소문들도 있고. 아무래도 재성 엔터 전 사장이 증발하고 바로 네가 계약 만료 발표했으니, 거기 엮여서 말들 나오는 거지. 재성에서 네 활동 방해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있고. 너도 알겠지만 이런 소문 방치해서 좋을 거 없잖아. 모델 선정 과정 까다롭기로 유명한 태경 광고는 좋은 탈출구지.”

태운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올려 혁진의 온기가 묻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입술을 매만졌다. 그런 것이라면 더 내키지 않았다.

혁진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받았고, 혁진이 베푼 자비는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더 받아 버리면 아직도 입술에 남아 있는 것 같은 혁진의 온기가 사라질 것 같았다.

태운은 자신의 쓰임새가 무엇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혁진은 대답 대신 키스로 태운이 자신의 곁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지만 태운은 혁진의 곁에서 내쳐진다면 그의 온기를 갈구하다가 무너져 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태운의 얼굴을 보며 매니저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 * *

태운의 분위기가 주변에서 느낄 정도로 부드러워졌다. 그를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촬영장의 스태프들이었다. 평소 태운의 성격이 모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분위기가 어려워 다가가지 못했던 스태프들이 태운에게 간간이 대화를 걸어왔다. 태운도 조금 편한 마음이 되어 그 말들을 짧게나마 전부 돌려주었다. 팔월의 햇살은 뜨거웠고, 일은 고됐지만 촬영장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오셨어요?”

태운이 차에서 내리자 저번에 태운이 짐을 들어 준 이후로 제법 친해진 스태프가 지나가다 발견하고는 반겼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들만이 덩그러니 몇 채 놓여 있는 산골 마을이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로 활기를 채웠다.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요. 감독님 저기압이시라…….”

매니저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고 태운은 난감하게 웃었다. 꽤나 잘나가던 CF 감독 출신의 감독은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화판으로 뛰어들었다. 첫 작품은 그의 명성 탓에 제법 투자를 받았던 모양이지만, 예술성은 있어도 대중이 원하는 장르는 아니라는 평과 함께 처참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어떤 장르보다 상업적인 CF계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보여 주던 감독이 만든 영화의 평치고는 굉장히 아이러니했다. 감독은 예술성과 함께 영화에 어떤 메시지를 담았는데 그것이 투자자들의 의견과 부딪쳤고, 결국 투자가 제대로 되지 않아 본인의 재산까지 전부 털어 넣고 빚더미 속에 앉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영화를 찍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돈을 벌기 위해 CF를 찍다가도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다시 영화판에 뛰어드는 것을 반복했다. 태운과는 CF를 찍으며 안면이 있었는데, 태운이 영화든 드라마든 그 어떤 것도 찍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 감독은 매일같이 태운을 찾아와 설득해 결국은 태운이 이 자리에 서 있게 했다.

물론 최종 결정에는 혁진이 내보인 무언의 동의가 가장 힘을 더해 줬지만, 감독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태운은 정말로 다시 연예계로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태운의 캐스팅은 감독에게 가장 큰 복이자 문제였다. 태운의 캐스팅이 확정되고 유명 배급사에서 독립 영화 발전을 위한 기금을 지원받게 됐다. 몇 년이 걸려도 자비로 제작하려 했던 결심이 깨지게 되었는데, 그 후로 배급사에서 촬영 방향에 대해 계속해서 간섭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지원받은 기금을 토해 내기에는 이미 많은 돈을 써 버렸기에, 감독은 이 불편한 신경전을 계속해서 벌이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왔어?”

태운이 감독을 찾았을 때 그는 지친 표정으로 스태프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는 집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 CF 감독 출신의 이점은 세세한 연출에서 잘 드러났는데, 미장센이 태운이 그동안 작업했던 그 어떤 감독에 비할 수 없이 뛰어났다.

“왔으면 촬영 준비나 하지 왜 여기로 와.”

태운을 타박하면서도 감독은 웃었다. 태운은 감독들이 싫어할 수 없는 배우였다. 어떤 감독이 제가 맡은 일은 확실히 하는 데다가 주변과 트러블조자 일으키지 않는 배우를 싫어할 수 있을까.

기 싸움의 연속인 촬영장에 익숙하던 감독들은 쓸데없는 신경전이 필요 없는 태운을 기꺼워했지만, 눈앞의 이는 그것보다 조금 더 가까운 감정을 태운에게 가지고 있었다. 태운이 자신의 아들 또래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인적 없는 산골에서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 그런 것 같았다.

태운이 말없이 산 밑에서 사온 테이크아웃 커피를 감독에게 건넸다. 숙소와 촬영장을 오가는 배우들과는 달리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산속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 산 밑의 물건들이 귀했다. 꽤나 오래 산길을 거슬러 올라왔지만 에어컨을 켜 놨었기 때문인지 얼음이 다 녹지 않고 작게라도 남아 있었다. 감독이 그 커피를 받으며 웃었다.

“또 누가 쓸데없는 말을 했군.”

“그런 거 아닙니다.”

“이런 환경은 처음이지? 모든 게 부족하고 모자라고.”

감독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얼마든지 편하게 살 많은 방법들을 알았지만, 가슴속 품은 예술은 그를 편안한 삶 속에 두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게 해준다고 했는데. 내가 자네한테는 미안해.”

태운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감독은 민망한지 커피만을 챙겨 등을 돌렸다. 태운은 가만히 서서 그런 감독의 등을 응시했다.

삶이 무거워 자살을 선택한 희율은 인적이 드문 산속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매력적인 외향을 한 ‘그’를 만나게 된다. 본인을 산속에서 수천 년을 산 용이라고 칭하는 ‘그’는 굉장히 장난스럽고 진지하지 못하다.

희율은 자신이 산속에 찾아온 목적조차 잊은 채 그에게 정신없이 휘둘리기만 한다.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죽고 싶은 마음에 산을 찾았던 희율은 그에게 역시, 피해를 줄까 봐 산을 내려가려고 하지만 갑작스러운 폭우에 결국 그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난인줄 알았던 인간이 아니라는 그의 말을 신비한 그의 행동을 보며 믿게 되는데.

태운이 맡은 역할은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의 역할이었다.

“허허.”

감독은 모니터를 보며 웃었다. 숫기가 없어서 예쁜 얼굴의 여배우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던 태운인데, 그가 연기하는 ‘그’는 능수능란한 말주변으로 산속으로 들어온 희율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감독은 그동안 내향적인 성격의 배우들과도 많은 촬영을 했지만, 태운처럼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배우는 없었다. 카메라 안의 태운과 카메라 밖의 태운은 얼굴만 같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마치 타인인 것처럼.

요 근래 카메라 밖에서도 태운은 환한 빛을 뿜어내며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카메라 안의 태운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카메라 밖의 태운이 뛰어난 외모 때문에 존재감이 없을 수 없는데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다면 카메라 안의 태운은 세상 모든 빛을 끌어들여 반짝였다.

감독은 태운이 천생 배우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현실 속에서도 비할 데 없이 빛났지만 카메라 안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빛을 내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빛이었다. 아무리 예쁘고 멋진 이라도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빛이기도 했다.

태운은 카메라 안에서 상대역인 희율을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넣으면서, 개구지게 웃고 있었다. 세상 모든 빛이 태운에게 쏟아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카메라 안에서 여배우에게 장난을 거는 태운은 햇빛 아래 반짝였다. 감독은 그것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도록 카메라 감독에게 주문했다.

* * *

로드 매니저에게 운전을 맡기고 조수석에 앉아 졸고 있던 매니저는 어느새 눈을 떴는지 고개를 돌려 건물 외벽을 가득 채운 홍보 전광판을 바라봤다.

전광판 안에서 강찬혁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화려하게 활동을 재개한 강찬혁은 다시 재성 엔터테인먼트의 간판으로 떠올랐다. 태운과 찍은 영화는 아직 개봉 전이었지만, 그사이 이미 공중파 드라마 하나를 성공시켰고, 그 후로 태운과 계약 만료된 재성 그룹 계열의 CF를 모두 꿰차며 다시 성공적인 재기를 알렸다.

“강찬혁이네. 활동하는 걸 그렇게 방해하더니, 새로운 사장은 강찬혁을 재성에서 제일 밀어주는 모양이야.”

매니저가 혀를 쯧쯧 하고 찼다. 사람일은 참 알 수 없었다. 강찬혁은 남자 스폰서와 눈이 맞아서 재성 엔터테인먼트를 벗어나기 위해 계약 무효 소송을 냈다가 패소하고, 아주 엿 먹어 봐라 하는 재성 전 사장의 방해 속에 활동에 지장을 받으며, 소속사에 활동을 그만둘 수조차 없는 약점을 잡혀 여기저기 쓰레기 취급 받으며 붕 뜬 상태로 떠돌았던 기간이 오 년이었다.

소문이 빠른 연예계에서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고, 그랬기에 대중들에게까지 공공연하게 퍼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치욕의 세월이 무색하게 강찬혁은 재성 엔터테인먼트의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금세 다시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강찬혁을 마음껏 깔보던 이들은 모두 다시 강찬혁에게 허리를 굽혀야만 했다. 더러운 바닥이었다. 다시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 매니저는 태운이 짓고 있는 불편한 표정을 보지 못했다.

* * *

태운은 조용히 호텔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본래 혁진에게는 촬영 때문에 들를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해 놓은 날이었다.

촬영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태운은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매니저는 태운이 거주하고 있는 집 주차장에 차를 세워 주었지만, 태운은 다시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그 길로 호텔에 들어섰다. 답답한 마음 때문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혁진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수도 있었다. 태운에게 혁진이 있는지 침실을 들여다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소파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라도 좋으니 아침에 출근하는 혁진에게 할 말이 있었다.

태운은 들고 온 대본을 꺼내 손에 들었다. 하지만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는데 잠이 밀려왔다. 불면증은 많이 가셨지만 여전히 편안하게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서울까지 차로 올라오는 긴 이동이 피로하기는 했는지 자꾸 눈이 감겼다.

그러다 문득, 태운은 어딘가로 눕혀지는 기분에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받치고 있는 혁진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 태운은 목에 힘을 주어 뻣뻣하게 앉았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자.”

태운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입을 닫았다. 얼굴을 보고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데자뷔처럼 자신이 잠들자 혁진이 어딘가에 눕혀 주던 장면이 오버랩 됐다.

볕이 잘 드는 창가. 그 앞으로 세워진 편안한 의자. 그리고 햇살과, 자신. 태운은 통유리로 된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푹신한 느낌의 의자는 없었지만 이 장소가 맞았다.

“꿈이 아니었어요.”

여전히 꿈결인 것 같은 얼빠진 태운의 말에 혁진은 미간을 좁혔다. 태운은 벌어진 입을 미처 다물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렇게 해 주신 적이 있어요. 다정…… 하게.”

대답 없이 혁진이 픽 하고 웃었다.

“들어가서 자.”

혁진은 말을 하며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곧장 태운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여름에도 혁진은 긴팔 정장을 갖춰 입었다. 그 등에서는 힘을 가진 자 특유의 서늘함이 묻어 나왔다. 혁진이 나가자 태운은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태운은 두 발로 서서 걸었다. 걸음걸음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기억의 빈 부분들이 듬성듬성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퍼즐 조각이 몇 개 채워지지 않은 빈 판처럼 원래 모양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기억이 점점 채워지면 그 본래 모습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었다.

꿈속에서라도 갈구했던, 하지만 현실성이 없어서 그저 꿈이라고만 치부했던. 그럼에도 그 한 조각의 어떤 것이라도 다시 받고 싶어서 혁진에게로 돌아오게 만들었던. 그 따스함이 꿈이 아니었다.

태운은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꿈에서 깨어 버릴 것만 같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태운은 자신이 보다가 내려놓은 대본 위로 하얀 A4용지 뭉텅이가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걸 올려놓은 기억이 없어 태운은 의아한 마음으로 하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아.”

무엇인가로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이런 게 여기 놓여 있는지 사고가 이어지지 않았다. 태운은 이렇게 대본 위에 올려 둘 수 있는 사람은 혁진밖에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멍한 기분으로 태운은 페이지를 넘겼다. 떨리는 손길이 더디게 움직였다. 광고 매출 보고서였다. 태운이 광고를 맡기 전과 후로 나눠진 그래프에는 매출 신장 효과에 대한 주석이 덧붙여져 있었다. 일반 공개용이 아니라 기업 내에서 쓰이는 평가 보고서인지 복잡하고 전문적인 내용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면 또 다른 광고와 매출 효과, 기대 효과 등이 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보고서는 태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그에게 기업 이미지 광고를 맡길 때 나타날 예상 효과와 함께 태운이 광고 모델로 적합하다는 평가가 내려져 있었다.

모든 페이지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밖이 어둑해져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자 일곱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태운은 욕실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씻어 냈다. 무엇이든 주고 싶은데 줄 수 있는 게 몸밖에 없다는 건 씁쓸한 일이었다. 샤워 가운을 입고 응접실로 나왔다. 복도를 서성이노라니 혁진이 들어왔다. 태운은 혁진과 두 발자국 정도 남겨 놓고 멈춰 섰다.

“다녀, 오셨습니까.”

태운 스스로도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인사말이 어색했다. 그것을 느꼈는지 혁진도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을 하여야 하는데 그것보다 먼저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잘 울지 않는 편인데 이상하게 혁진의 앞에서는 자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왜 그래.”

혁진의 목소리가 나직했다. 태운은 서둘러 눈에서 흐르는 액체를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감사합니다.”

“뭐가.”

혁진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세상 어려울 것 없이 살아온 혁진에게도 이태운은 복잡하고 어려웠다.

“전부…… 감사합니다.”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었다. 아니 속에 든 말이 많아서 오히려 입 밖으로 꺼내지지 않았다. 혁진은 태운의 턱을 쥐고 자신과 시선을 맞췄다. 태운의 머릿속에 들은 것을 전부 꺼내 볼 수 있다는 듯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태운은 숨을 들이마셨다. 꿈속에서도 꿈이란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현실성 없었던 따스함이 현실이었다. 혁진이 왜 그렇게 자신에게 베풀어 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혁진은 대가를 지불했고 자신은 그 대가를 받았다. 태운은 강제로 몸을 내주었지만, 그것은 혁진과는 상관없었다. 전 소속사 사장과 태운 사이의 일일 뿐이었다.

게다가 태운은 혁진과의 성관계 동영상을 찍어 전 소속사 사장에게 넘겼고, 혁진은 그것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종국엔 비디오에 관련된 사실들을 모두 고백했음에도 혁진은 다시 태운을 받아 주었다. 무척 단단하고 따뜻하게.

“제게 이렇게 잘 대해 주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혁진은 하, 하고 긴 숨을 토해 냈다.

“도대체 너는 왜 이렇게 복잡한지 모르겠군.”

태운은 대답하지 못했고 혁진은 고정되지 못하는 태운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유가 필요한가?”

“…….”

“네가 신경 쓰여. 네가 죽는다면 내 옆에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병원에 있는 널 데리고 왔고. 네가 눈을 뜨고 나서는 널 놓아줄 생각이었어. 하지만 넌 정신을 놓았지. 그다음에는 널 놓더라도 멀쩡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라고 생각하게 되더군.”

“…….”

“그래서 네가 완전히 깨어나고 나서는 널 놓아줬잖아. 하지만 다시 날 찾아온 건 너야. 네가 가지 않겠다면 나는 널 억지로 끌어낼 생각 없고.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태운이 습관적으로 입술을 물었지만, 혁진이 태운의 턱을 힘주어 잡으며 제지했다. 태운은 복잡한 마음과 혁진이 턱을 쥔 아픔에 미간을 찌푸렸다. 태운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넘쳤다. 태운의 커다란 눈에서 다시 눈물만 줄줄 흘렀다.

“나도 묻지. 넌 다시 왜 내게 온 거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정신을 놓았던 시간의 기억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제게 해 주신 것들이 꿈,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연기에 대한 모든 기회는…… 사장님께 받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땅에 발을 딛고 설 수가 없었습니다. 무너질 것 같아서. 그때 따뜻한 기억이 저를 잡아 주었습니다. 머리를 만져 주셨던…….”

무엇인가 태운의 안에서 무너진 듯 깨져 나갔다. 횡설수설, 태운은 입안에 맴도는 많은 말들을 드디어 뱉어 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혁진은 말없이 태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쓰다듬지도 매만져 주지도 않은 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태운의 기억 속에 남은, 혁진이 해 주었던 위로였다. 태운은 다시 울었다. 가슴속에 남은 미처 말하지 못한 말들 대신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이 밖으로 나가기를 바라며 울었다.

태운의 울음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짧은 울음 끝에도 눈가와 코끝, 그리고 뺨이 붉어졌다. 피부가 흰 편이라 색도 금방 번지는 모양이었다. 눈가에 번진 붉은 기가 태운의 얼굴에 묘하게 색을 더했다.

태운은 손등으로 북북 얼굴에 물기를 닦아 냈다. 혁진이 태운의 머리 위에 올리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태운은 그 온기가 사라짐에 허전함을 느꼈다.

“괜찮으시다면.”

태운은 뒷말을 삼켰다.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속에서 나오는 말은 먹먹하기만 했다. 태운은 말을 하는 대신 입고 있던 얇은 가운을 벗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태운의 흰 몸이 드러났다. 혁진의 눈동자의 검은빛이 더 진해졌다.

“뭐 하자는 거야.”

“괜찮으시다면…….”

태운이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이 이상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태운은 말을 더하는 대신 멀거니 혁진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너를 내 침대 위로 올리지 못해서 이러는 것 같나.”

혁진의 목소리가 노기를 띠고 있었다. 뻔히 보이는 태운의 의도를 혁진이 읽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태운의 행동에 담긴 복잡한 감정까지는 혁진이 읽어 낼 수 없었다. 태운조차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혁진이 짐작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태운은 나오지 않는 말을 대신하여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태운.”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태운은 말을 끝내자마자 푹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무엇이 필요 없다는 것인지 태운은 잠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깨달았다. 혁진은 대가를 치르겠다고 자신과 자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혁진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태운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하얗게 굳었다.

그렇지 않았다고, 좋아했다고, 그리워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융통성은 태운에게 없었다. 사실 정말로 그 행위를 즐겨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혁진과의 관계는 항상 고통이었고 수치였다.

하지만 태운은 맞닿았던 살들을 기억했다. 혁진과 가장 가까이에 닿는 법이었다. 태운은 말없이 혁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혁진에게 안기는 것도, 혁진을 끌어안는 것도 아닌 그 애매한 자세가 태운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용기였다.

“괜찮으시다면…….”

태운은 다시 또 같은 말을 반복했다. 혁진은 그런 태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혁진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태운의 얼굴을 감싸 쥐고, 태운이 말하고 있는 동안 계속 눈을 들여다보았다. 태운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번에도 거절당한다면 다시는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았다. 태운은 모든 용기를 끌어왔다.

“후회하지 않겠나.”

혁진의 말에 다시 멎었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태운은 처음으로 그 말에서 혁진의 감정을 엿봤다. 자신의 생각보다 혁진에게 진한 감정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혁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혁진의 굵은 턱선이 당겨졌다. 태운이 어설프게 침대 위로 누웠다. 침대 끝에 선 혁진이 그런 태운을 가만히 응시했다. 태운의 얼굴이 붉은빛을 띠었다.

결국 혁진의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태운은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것은 지그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려 주고 있는 혁진의 손길 때문이었다. 태운은 그 행동에서 어쩐지 혁진의 망설임을 읽은 것 같았다.

한참을 태운의 머리칼만 지분거리던 혁진은 이내 손을 내려 태운의 턱을 쥐었다. 턱이 들리며 태운은 혁진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만두고 싶어지면 말해.”

한 톤 눌린 혁진의 음성에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혁진이 태운의 턱을 단단히 쥐더니 이내 입술을 뚫을 듯 물어왔다. 느껴지는 따끔한 아픔에 태운이 입을 벌렸다.

그러자 혁진의 혀가 태운의 입안으로 단번에 침입했다. 혁진은 태운의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어 쓰다듬다 머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목젖에 닿을 듯 깊숙하게 들어온 혀가 그 앞의 여린 살을 쓸었다. 태운은 주어진 자극에 저도 모르게 미약한 신음 소리를 내었다.

여린 살을 간질이는 감각에 태운은 몸에 힘이 풀렸다. 그런 태운의 입안을 혁진이 강하게 휘저었다. 태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혁진은 태운에게서 입을 떼었다. 그러다 다시 입술을 내려 태운의 가는 턱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혁진이 빠져나가자 다물어졌던 태운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혁진의 입술은 다시 하얗고 긴 태운의 목덜미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가는 목에서 유일하게 도드라진 목젖을 씹었다. 태운의 목젖이 아래위로 가늘게 떨렸다. 태운의 목젖을 따라 움직이며 그곳을 잘근잘근 씹던 혁진이 손을 뻗었다. 손이 태운의 연갈색 유두에 닿았다. 그가 힘을 주지 않고 유두를 비틀자 태운의 몸이 움찔 떨렸다.

태운의 목젖에서 입을 떼고 몸을 일으킨 혁진이 본격적으로 태운의 유두를 지분거렸다. 태운은 소리를 참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술을 물었다. 간지러운 듯한 감각은 태운의 몸에서 힘을 앗아 갔다. 몸에서 힘이 풀리는 감각이 태운에게는 생경했다.

“입술 물지 마.”

“하, 지만…….”

“소리 내.”

태운의 목소리가 벌써 잠겨 있었다. 혁진은 태운의 치아 사이에 검지를 물리며 뻣뻣하게 일어선 태운의 유두를 씹었다.

“으…….”

태운은 혁진의 손가락을 물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의 감각은 예민한 편이라 참으려고 해도 소리가 새어 나왔다. 태운에게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자 혁진은 이 대신 혀로 태운의 유두를 굴렸다. 그건 더 견디기 힘든 자극이었다. 온몸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간지러웠다. 태운의 몸이 스스로의 의지를 벗어나 들썩거렸다.

“으, 으으……!”

앓는 듯한 소리를 내며 눈가까지 달아오를 것 같은 감각을 견뎌 내던 태운은 다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혁진이 몸을 일으켜 태운의 다리를 잡아 벌려 왔기 때문이었다. 태운의 몸은 내장이 뚫릴 것 같은 고통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태운은 애써 몸의 긴장을 풀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혁진이 행동을 멈추자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혁진의 손가락이 입안에 남은 터라 다물어지지 않은 입술 사이로 흐른 타액에 태운의 얼굴이 축축했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움직여 태운은 스스로의 성기를 쥐었다. 반쯤 발기해 있는 성기를 태운은 스스로 흔들었다. 말을 할 수 없는 태운이 혁진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긴 한숨을 내쉰 혁진은 성기를 쥐고 있는 태운의 손을 잡아챘다. 갑자기 사라진 감각에 태운이 다시 짓눌린 신음성을 뱉어 내었다. 빳빳하게 발기한 태운의 성기를 혁진의 커다란 손이 다시 쥐었다. 혁진이 성기를 단단히 쥐고 탁탁 쳐올리자 혁진의 검지가 빠져나간 태운의 입안에서 신음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사정이 가까워진 감각에 태운은 침대 시트에 닿은 머리를 이리저리 비볐다. 혁진의 손에 사정을 할 수 없어 그 감각을 참아 내었지만, 참을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태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런 태운의 얼굴을 보며 혁진은 손에 힘을 더했다. 태운이 자신의 성기를 쥔 혁진의 손을 잡았다.

“제, 읏, 제가…….”

태운이 감각을 견디기 위해 머리를 침대 시트에 비비며 말했다. 태운의 몸이 이리저리로 비틀렸다. 그러나 픽 하고 웃은 혁진은 도리어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쿨럭이며 태운의 성기에서 하얀 탁액이 터져 나왔다. 태운은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핥아서라도 혁진의 손에 묻은 자신의 정액을 처리하기 위해 태운은 혁진의 손목을 양손으로 쥐고 자신의 입 쪽으로 끌고 가려고 했지만, 아무리 태운이 힘을 줘도 혁진은 끌려오지 않았다.

끌려오는 대신 혁진은 태운이 쥐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협탁 위에서 티슈를 뽑아 태운의 정액을 닦아 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젤을 들었다. 태운의 얼굴에 다시 붉은 기가 번졌다.

혁진은 태운의 무릎을 접어 양쪽으로 벌린 다음 그 사이로 들어가 앉았다. 그가 벌어진 무릎 뒤쪽으로 다리를 쥐자 태운의 엉덩이가 자연스레 들렸다. 혁진이 태운에게 다리를 그대로 잡고 있게 했다.

근육이 잡혀 둥그런 태운의 하얀 엉덩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선홍빛 항문을 혁진이 엄지로 쓸었다. 항문에 닿은 혁진의 손가락에 태운이 펄쩍하고 튀어 올랐다. 태운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혁진의 손가락이 직접적으로 태운의 항문에 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혁진은 태운의 항문에 젤을 짜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태운의 항문에 집어넣었다. 틈이 벌어지는 감각에, 아니, 혁진이 직접 틈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에 태운은 다시 소스라쳤다. 그러면서도 혁진이 잡게 한 제 다리는 놓지 않았다.

“더러, 더럽습…… 흣!”

관장을 하면서 스스로 안을 풀었는데도 금세 좁아진 항문은 손가락 두 개가 버거웠다. 혁진의 손가락은 태운의 여린 안쪽 살을 꾹꾹 누르며 전진했다.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에 태운은 다시 몸을 떨었다.

“이상, 합니다.”

항문 안쪽 살들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태운은 낯선 감각을 견디기 위해 항문에 힘을 주었고, 혁진은 손가락을 더 깊숙이 넣는 대신에 태운의 둥근 엉덩이를 쥐고 주물럭거렸다. 손가락이 빠져나갔는데도 느껴지는 이물감에 태운은 진저리를 쳤다.

견디다 못해 태운이 축 늘어지자 혁진이 다시 태운의 항문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세 개가 한 번에 태운의 안으로 넣어졌다. 태운은 “흐으, 흐으.” 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내부를 꾹꾹 눌러 오는 감각을 견뎠다. 태운은 혁진의 손가락이 안쪽으로 녹아드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태운이 그 감각들에 익숙해졌을 때 혁진의 손가락이 단번에 태운의 안에서 빠져나갔다. 곧바로 엉덩이에 닿는 혁진의 단단한 성기에 태운은 다시 흠칫하고 굳었다. 태운은 몸에 경직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혁진은 재촉하지 않고 제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혁진의 단단한 성기가 태운의 좁은 구멍에 닿았다. 혁진은 바로 태운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일으켜 태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후회하지 않겠어?”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혁진은 절대 같은 것을 두 번 말하지 않는 남자였지만, 한 번 더 물어봐 주었다. 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혁진은 서두르지 않고 태운의 좁은 구멍 안으로 귀두 부분을 넣었다. 태운은 익숙하지 않은 이물감과, 또 안으로 넣어 주지 않고 입구만을 자극하는 혁진의 움직임이 견디기 힘들었다.

참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입에서 억눌린 신음성이 터져 나올 것 같아, 태운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혁진이 그런 태운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태운은 버티지 않았고 혁진에 의해 손은 금세 끌어내려졌다. 혁진은 제 손가락을 태운의 입안으로 넣어 태운의 여린 살을 헤집었다.

여전히 혁진의 손가락을 깨물 수 없는 태운의 입 밖으로 결국 참지 못하는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윽!”

혁진은 태운이 적응할 때까지 귀두 부분만 태운의 밀지 안으로 넣었다 뺐다 하며 태운을 안달 냈다. 배 속이 간질간질했다. 차라리 혁진이 단번에 깊은 곳까지 꿰뚫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태운의 허리가 의지를 배반하고 흔들리며 혁진을 재촉했다. 혁진이 참지 못하고 태운의 내부를 거칠게 꿰뚫었다.

젖은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태운의 귓가를 빨갛게 달아오르게 했다. 혁진이 밀고 들어오면서 내부가 요동치는 것 같은 낯선 느낌에 태운의 몸이 경직되며 힘이 들어갔다.

“윽. 힘 빼.”

혁진의 입에서 억눌린 음성이 터져 나왔다. 태운은 의도적으로 몸에서 힘을 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혁진이 다시 힘을 빼라고 말하며 태운의 엉덩이를 쳤다. 찰싹하고 나는 소리가 야하게 들렸다. 혁진의 손이 지나간 자리의 살이 붉어졌다. 태운은 견딜 수 없이 그곳이 간지러워졌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에 태운의 눈가가 젖었다. 태운은 고개만 저었다. 힘을 주지 않으려고 할수록 더욱 힘이 들어가는 몸이 이상했다. 혁진이 느릿하게 그런 태운의 내부에서 성기를 조심스럽게 빼내었다가 다시 천천히 치고 올라갔다.

“으읏!”

태운은 다시 머리를 시트에 비볐다. 태운의 숨소리가 벌써 거칠었다. 혁진의 성기가 태운의 안쪽으로 계속해서 쳐들어왔다. 내부에 준 힘을 풀려고 할수록 더욱더 안쪽으로 힘이 들어갔다. 견딜 수 없는 감각에 태운은 몸을 떨었다.

“힘 빼.”

다시 한번 혁진의 입에서 억눌린 음성이 나왔다.

“그게, 그게, 흣, 잘 안돼서…….”

힘이 들어간 태운의 내벽이 혁진의 성기를 쥐어 짜냈다. 혁진은 태운의 안으로 퍽 하고 파고들었다. 완전히 안으로 치고 들어오자 혁진의 고환이 엉덩이에 닿는 느낌에 태운이 진저리쳤다. 혁진은 시트를 움켜쥐고 버티는 태운의 손을 떼어 내 자신의 목에 감게 했다.

“흣, 너무, 빨, 하응…….”

혁진이 성기를 빼냈다가 단번에 치고 들어오기를 반복하자 태운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흔들렸다. 혁진의 목을 감은 손이 마지막 구명줄인 것처럼 매달렸다.

“거기, 이, 이상, 읏……!”

추삽질을 하던 혁진의 성기가 태운의 내벽 깊은 곳을 찍어 눌렀다. 태운은 눈앞에 하얀 빛이 번쩍이며 몸이 튀어 올랐다. 태운의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 그만, 윽!”

몸이 이상했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았다. 태운은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태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혁진이 더 깊숙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태운의 얼굴이 쾌감으로 이지러졌다.

“으, 으으.”

바들바들 떠는 태운의 안쪽을 혁진이 가장 깊은 곳까지 쳐올렸다. 울컥울컥 혁진의 성기에서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콘돔에 막혀 있었지만 태운은 내부가 뜨거워진다고 느꼈다.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안을 채우는 그 감각에 태운은 바들바들 떨었다.

“아, 아…….”

진저리 치는 태운을 혁진이 내려다보았다. 태운이 하얀 얼굴이 젖어서 야하게 일그러졌다. 혁진은 여전히 얕은 절정을 느끼며 허리를 얕게 쳐올렸다. 그리곤 단단하게 일어나 있는 태운의 성기를 쥐었다. 탁탁하고 몇 번 쳐올리지 않았는데 금세 태운의 성기에서는 하얀 액이 터져 나왔다.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태운은 침대에 축 처졌다. 꾹 힘을 주고 있던 발가락에 힘이 풀리며 발이 저렸다. 혁진은 콘돔을 갈아 끼우기 위해 허리를 뺐다.

태운은 깊은 곳을 채우던 뜨거운 것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다시 가벼이 몸을 떨었다. 안에 눌러 붙은 것만 같은 혁진의 성기가 빠져나가자, 자신의 내부 또한 함께 딸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혁진의 손을 쥐었다. 혁진과 눈이 마주치자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태운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못하겠어?”

“아니…… 아닙니다.”

태운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혁진이 땀으로 눌러 붙은 태운의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그 행동은 태운의 몸을 더 안달 나게 했다. 조금 더, 조금 더 쓰다듬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금세 콘돔을 갈아 낀 혁진은 태운을 반으로 가를 듯 한 번에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젖은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태운의 귓가를 달아오르게 했다.

“후우…….”

혁진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 번의 행위로 조금 풀어진 태운의 밀지는 이전보다 쉽게 혁진의 성기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좁아서 혁진은 태운이 익숙해 질 때까지 조심스럽게 허리 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태운은 아까 혁진의 성기가 닿았던 아랫배 근처의 어느 곳이 너무 간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곳으로 혁진의 성기가 닿기를 바라며 태운이 허리를 얕게 흔들었다. 태운의 그 몸짓에 혁진이 빠르게 허리를 쳐올렸다. 그 견디기 힘든 감각에 태운의 허벅지가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혁진은 태운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행위를 계속했다. 견딜 수 없는 감각에 태운이 눈을 내리감았다. 자신의 심장이 쿵쿵 하고 뛰는 것이 태운의 귓가에 들렸다. 숨을 쉬는 것이 힘들었다. 태운은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려고 노력했다.

“흐앗, 흐아!”

혁진의 허리 짓은 거세졌고 태운은 도무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마냥 흔들리는 수밖에 없었다. 혁진은 그런 태운의 손을 다시 자신의 목에 감게 했다. 구속에서 풀어진 태운의 다리가 공중에 제멋대로 흔들렸다. 태운의 코로 훅 하고 혁진의 진한 향이 밀려들어 왔다.

태운은 혁진의 단단한 목에 매달렸다. 그러자 조금 견딜 만해졌다. 혁진이 이번에는 태운이 방금 전 가장 느꼈던 곳을 한 번에 꿰뚫었다.

“읏!”

배 속 깊은 곳까지 혁진의 성기가 닿은 기분이었다. 확 하고 태운의 눈앞에서 하얀 빛이 터졌다.

“흣…….”

태운의 숨이 달리기라도 한 듯 마냥 거칠어졌다. “흣, 흣!” 하고 참지 못한 더운 숨이 태운의 코와 입으로 터져 나왔다. 혁진은 계속해서 같은 곳을 쳐올렸다. 태운이 무의식중으로 혁진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몸이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아니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찌르르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뇌에까지 전해졌다. 태운의 몸이 짧게 들썩거렸다. 혁진이 계속해서 허리 짓을 하며 태운의 깊은 곳에 성기를 박았다. 징 하고 머리가 울렸다. 혁진이 만져 주지 않았는데도 태운의 성기에서 하얀 점액질이 토해져 나왔다. 혁진의 단단한 복부가 태운의 액으로 젖었다.

땀과 정액이 섞여 혁진의 잘 짜인 근육이 번들거렸다. 얇게 트인 태운의 시야 사이로 그런 혁진의 상체가 들어왔다. 닦아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태운은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때, 혁진이 다시 한 번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더 깊은 곳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꿰뚫린 곳은 아득하게 깊기만 했다. 뱃가죽이 뚫릴 것만 같았다.

“으, 으으!”

체력이 모자랐다. 태운이 얕게 경련했다. 그러자 단번에 혁진이 더 깊은 곳을 쳐올리며 하얀 액체를 뿜어냈다. 혁진이 사정하자 태운은 혁진의 목에 감은 손을 풀어냈다. 아니, 의지 없이 힘에 부쳐 손이 떨어졌다. 태운은 침대 위로 늘어졌다. 잔뜩 긴장했던 몸에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태운의 시야가 가물가물해졌다.

태운이 눈을 떴을 때는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하지만 태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 혁진이 잠들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기척을 낸다면 혁진이 눈을 떠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번 잠에서 깨면 혁진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태운은 한 번도 혁진이 침대 위에서 다시 잠들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매번 눈을 뜨면 그대로 몸을 일으켜 침실을 빠져나갔다. 태운은 이제 조금 혁진을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자 훅 하고 혁진의 향이 태운의 코로 들어왔다. 싸늘한 바람 향을 닮은 향. 자신의 위에서 몸을 겹치던 혁진이 떠오르자 태운은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고통과 수치가 어우러진, 하지만 대가를 받고 있기에 차마 그렇다고 내색조차 할 수 없던, 심지어는 가끔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던 관계였는데. 그랬는데 다시 자신을 내어 주었음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태운은 이상했다.

자신이 밟고 있던, 점점 깊이를 모를 땅속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가던 늪이 어느 사이에 단단한 땅으로 변한 기분이었다. 더 이상 언제 가라앉을까 땅 위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태운은 다시 눈을 감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얼핏 정신이 들었을 때 느껴지는 옅은 담배 향기. 그 위로 느껴지는 시선. 태운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혁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눈을 뜨려고 했는데, 무엇인가 눈꺼풀에 매달린 듯 눈꺼풀이 무거웠다. 더 자라는 속삭임이 들린 듯도 했다.

* * *

태운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옆에 혁진은 없었다. 태운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삐걱거리는 몸은 움직일 때마다 싸한 고통이 밀려왔다. 잠귀가 어두운 편이 아닌데 혁진이 나가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태운은 머쓱해졌다.

공기 중에 알싸한 담배 향이 남아 있어서, 태운은 자신이 잠결에 느꼈던 그 감각이 꿈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어쩐지 민망해졌다. 삐걱거리는 다리를 땅에 내닫자 찌르르 하는 통증이 척추를 타고 목 위로 올라왔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다가 발걸음을 막는 트레이를 발견했다.

투명한 플라스틱 커버 안으로 간단한 샌드위치와 죽통 같은 보온병이 비쳤다. 커버를 열자 사기그릇과 수저가 놓여 있었다. 보온병을 열자 묽은 죽이 보였다.

태운이 객실 안에 있을 때는 절대 직원들이 안으로 드나들지 않으니 분명 혁진이 직접 옮겨 온 트레이일 것이었다. 태운은 사기그릇에 여전히 김이 올라오는 죽을 따르며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좋지 않았다. 혁진의 따스함에 어쩐지 기대 버릴 것만 같았다. 태운은 침대에 걸터앉아 죽을 모두 비웠다. 빈속에 따뜻한 것이 들어가자 몸 상태가 조금 좋아졌다.

죽을 먹고 샤워를 하고 나오자 찌뿌둥하던 태운의 몸이 노곤해졌다. 하지만 태운은 잠을 자는 대신에 옷을 꿰어 입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별다른 일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호텔에 있다 보니 계속해서 기억이 되새겨지며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차에 시동을 건 태운은 에어컨을 세게 틀었다. 온몸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태운은 소속사 사무실로 방향을 정했다. 마음 한쪽에 있는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태경 그룹의 광고 모델 제의가 유효하다면 승낙할 생각이었다. 혁진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었는데 계속해서 거절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태운은 사무실이 위치한 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탔다. 소속사 사무실은 한 층을 전세 내어 쓰고 있었는데, 그 층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른 회사들이 입주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마다 새로 탄 사람들은 태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태운은 모자를 고쳐 썼다. 이런 시선들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왔어? 덥지?”

“아닙니다. 운전해서 왔는데요.”

소속사의 재정적인 부분은 전문 경영인을 고용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은 매니저가 전담하고 있었다. 재성 엔터에서도 관리직에 있다가 태운을 맡으면서 현장으로 복귀한 것이었다. 능력 있는 매니저 덕에 태운의 소속사는 단기간에 자리를 잡았다.

“얼굴 진짜 많이 좋아졌네. 살도 좀 붙은 거 같고. 요즘은 잠을 잘 자?”

“좋아요.”

매니저는 한결 편한 얼굴을 하였다. 이렇게 마주하니 태운은 보기 좋게 살이 붙어 인상이 조금 부드러워 보였다.

“다행이네…… 약은?”

매니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태운이 수면제도 안정제도 찾지 않은 지 꽤 되었다.

“괜찮습니다.”

“그건 진짜 다행이네. 시원한 것 좀 내오라고 할게. 진짜 너무 덥다.”

태운이 대답하자 매니저가 바로 인터폰으로 밖에 있는 직원에게 마실 것을 좀 내오라고 지시했다.

“근데 무슨 일이야. 어제 늦게 들어갔잖아. 좀 쉬지.”

“번거롭게 해 드리려고 한 건 아닌데, 아직 태경 광고 건 유효합니까.”

태운의 의도를 이해한 매니저가 반색했다. 태경에 거절의 뜻을 말했지만 태경 측에서 재고해 달라는 기색을 내비치는 통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었다. 그만큼 놓치기 아까운 광고였다.

“거절 의사는 밝혔는데 태경에서 재고해 달라고 해서 아직 유효해. 마음이 바뀐 거야?”

“네.”

“갑자기 마음이 왜 변한 거야?”

태운은 고집을 잘 부리지는 않았지만, 한번 뜻을 정하면 결코 번복하는 법이 없었다. 톱스타가 되는 지름길만을 걸어온 행보와는 다르게 정작 태운 본인은 돈에도 인기에도 별로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매니저는 태운이 마음을 바꾼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냥 찍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근데 제가 태경에게 그만큼 가치가 있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인터넷에서 안 좋은 글이라도 본 거야?”

태운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평소 태운과는 거리가 조금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매니저는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광고 판이 얼마나 예민한데. 촬영해서 방송 내보내기까지 수백억 수천억이야. 광고 모델들 계약금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텔레비전에 매번 매초 방송할 때마다 수억이 드는데, 그걸 광고 효과도 없는 사람을 쓸 리가 없잖아.”

“…….”

“게다가 태경은 그런 쪽으로 아주 유명해. 아무나 모델 안 주고, 사전 조사나 분석 확실한 걸로. 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경 쓸 거 없어.”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모르고 날뛰는 것보다는 낫지만, 태운은 가끔 이렇게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다. 매니저는 태운의 얼굴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겸연쩍어진 매니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용 책상에서 파일 하나를 찾아왔다.

“박 감독 영화 언론 시사회 날짜 잡혔어. 무대 인사는 최대한 줄이기는 했는데 그래도 평소보다는 많다. 계약서에 명시된 만큼만 하겠다고 했는데, 배급사 쪽에서 워낙 강하게 요청하는지라 어느 정도 타협할 수밖에 없었어.”

“괜찮아요.”

“그것도 문제지만, 어휴. 문제는 강찬혁이네.”

강찬혁의 이름이 나오자 별다른 변화 없던 태운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직접적으로 당한 강찬혁만 하지는 않겠지만, 태운도 살면서 그 일들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재성에서 작정을 한 것 같아. 좀 복잡하다.”

매니저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강찬혁과 겨울에 찍었던 영화가 벌써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칸 영화제에 출품 경험이 있는 스타 감독과 최초로 멜로로 천만 관객을 넘긴 이태운의 만남이었고, 거기에 다시 재기에 성공한 강찬혁의 복귀 후 첫 영화였다. 대중 관심도도 높았고, 제작사와 재성 엔터에서도 작정한 듯 홍보 자료를 뿌렸다. 영화는 순탄하게 개봉 과정을 밟았다.

개봉 과정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정작 문제는 강찬혁의 성격에 있었다. 작정하고 기자들을 구워삶고 있는 소속사와는 다르게 강찬혁은 계속 기자들과 날을 세우고 있었다.

시사회장에는 재성 쪽의 입김이 많이 들어가 친재성 엔터 쪽의 기자들이 많이 초대되었다. 그 기자들이 태운에게 어떻게 나올지 모른단 것도 불안 요소 중 하나였다. 강찬혁이 그 성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면 기껏 찍은 영화가 개봉도 전에 좋지 않은 구설수에 오를 수 있어 좋지 않았고, 기자들이 강찬혁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한다면 그건 더 좋지 않은 일이었다.

“큰일은 아냐. 재성에서 너 나오면서 빈 수익을 채우려는 건지 강찬혁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영화 때문에 계속 마주칠 생각하니까 좀 골치 아파서.”

매니저가 말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것은 매니저 자신이 처리할 일이지 태운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은 아니었다.

* * *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책까지 택배 무인 보관함에서 찾은 태운은 혁진의 귀가 전에 다시 호텔로 들어왔다.

냉방이 되고 있어 바깥보다 오히려 온도가 낮았음에도 호텔로 들어서자 귓가가 다시 붉어졌다. 태운은 몸에 열을 식히기 위해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어쩐지 화끈거리는 몸 때문에 찬물로 샤워를 할 생각이었다.

찬물을 맞으며 샤워기 밑으로 선 태운은 울긋불긋하게 혁진이 만들어 놓은 흔적들을 짚었다. 태운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가 다시 들이마셨다. 가슴 한쪽이 답답해지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찬물에 샤워한 보람이 없었다. 몸에 열이 식지 않았다.

태운은 입술을 깨무는 대신에 입술을 혀로 핥았다. 깨무는 것은 혁진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눈을 꾹 감자 눈가가 뜨겁게 느껴졌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대체 뭐 하는 짓이지 싶어서 태운은 샤워를 끝내고 가운을 입었다.

욕실에서 나와서도 어딘지 멍한 기분에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가 가운 사이로 드러난 얇은 목에 손을 대었다. 깜짝 놀라 태운이 눈을 뜨니 이미 옷까지 갈아입었는지 가벼운 차림의 혁진이 서 있었다.

“왜 이렇게 차.”

혁진의 손이 태운의 목을 뭉근하게 눌러왔다. 혁진과 닿지 않은 피부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았다. 태운은 비로소 제 몸이 차다는 것을 깨달았다.

“샤워를 해서…….”

혁진이 한 손으로는 태운의 목을 쥐고 다른 손을 뻗어 벽에 붙은 센서로 에어컨 온도를 좀 올렸다. 혁진의 손은 따듯했다. 그 열기가 다시 태운의 몸으로 퍼졌다. 단단한 손이 태운을 지탱했다. 태운은 어쩐지 그 손이 너무 따듯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있기를 잠시, 태운이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흘러 혁진의 손에까지 떨어졌다. 놀란 태운이 자신의 목을 지나 어깨를 쓸어 주던 혁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하지만 혁진의 손을 억지로 끌어 내리지는 못했다. 맞닿은 살이 화끈화끈했다.

태운의 손짓을 거절의 의사로 읽은 것인지 혁진이 태운에게서 손을 떼었다. 혁진의 손을 잡고 있던 태운의 손이 공중에서 혁진의 손과 나눠졌다.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그 온기가 아쉬워져서 자신의 손으로 혁진의 손을 따랐다. 혁진이 말없이 공중에서 태운의 손을 쥐었다. 태운의 몸이 다시 뜨거워졌다. 샤워를 한 보람이 없었다.

“광고, 태경 그룹 광고를 하기로 했습니다.”

혁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태운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제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혁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태운은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푹 고개를 숙였다. 혁진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태운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한 마디를 꺼냈다.

“저녁은.”

“……먹었습니다, 식사, 하셨습니까.”

혁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그러자 또 대화가 끊겼다. 혁진이 태운을 소파로 앉혔다. 온도를 올렸기 때문인지 실내의 공기가 금세 훈훈해졌다. 

태운은 가슴이 답답해져서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뱉어 냈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이 쿵쿵거렸다.

“담배 태우나?”

“네.”

혁진이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대 빼어 들어 불을 붙이고는 태운에게 담뱃갑과 라이터를 건넸다. 태운이 양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혁진의 입에서 회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태운은 혁진이 건넨 담배를 태우는 대신에 담뱃갑 위에 라이터를 가지런히 모아 소파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혁진과 마주 앉아 담배를 태울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혁진이 회색의 연기를 뱉어 내며 가만가만 태운의 젖은 머리를 쓸어 주었다. 어쩐지 기대고 싶은 손길이었다.

별것 아닌 손길인데 태운은 혁진에게도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붉어졌다. 태운은 심호흡을 하며 그 열기를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태운의 얼굴을 피해 정면으로 연기를 뿜어내던 혁진에게도 전달되었다.

테이블 위에 있던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끈 혁진의 눈이 태운의 붉게 달아오른 귓가에 닿았다. 드문드문 드러내던 수치심과 모멸감을 제외하고는 결코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던 태운이었다.

혁진은 태운의 달아오른 귀에 손을 올렸다. 귀를 엄지로 쓸어내리자 태운의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며 긴장되는 것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혁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운의 몸을 돌려 양 귀를 힘 있게 쥐었다가 놓으면서 매만졌다.

“읏!”

태운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렸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태운은 힘을 주지 않은 치아로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했다. 귀가 간지러웠고, 이상했다.

태운의 어깨가 움츠러들자 귀를 만지던 혁진의 손이 어깨로 내려갔다. 가운을 사이에 두고 어깨를 쥐었는데도 불구하고 태운은 그 부분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공기가 후끈해져서 태운의 귀 옆으로 땀이 조금 났다. 태운은 원래 땀이 잘 나지 않는 체질이라 메이크업 스태프가 어떻게 한여름 태양 볕 아래서도 땀이 나지 않냐고 감탄했었다. 그랬던지라 태운은 지금 땀이 흐르는 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태운이 입술을 물었다. 다리 사이에 있는 성기가 바짝 일어나 얇은 가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태운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원한 적 없는 감각이 너무 선명해져서 태운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곧 그것을 혁진도 발견해 내었다. 태운은 귀에 이어서 뺨까지 붉은빛이 들었다.

“안, 돼.”

태운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혁진이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태운이 혁진을 따라 바닥으로 내려오려고 했지만 혁진의 단단한 손이 태운의 허벅지를 쥐고 움직임을 막았다.

태운이 고개를 저으며 몸을 굽혔다. 하지만 태운의 허벅지를 쥔 억센 손이 태운을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묶었다. 태운 앞에 무릎을 굽힌 혁진은 그럼에도 전혀 작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혁진 위에 서 있는 태운이 맹수 위에 앉혀진 초식 동물처럼 불안해 보였다.

태운이 놀랄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태운은 입을 벌리고 말이 되지 못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태운은 계속해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혁진이 태운의 가운을 가르고 태운의 다리를 벌렸다. 태운은 다리를 벌리지 않기 위하여 버텼지만 혁진은 간단하게 태운의 다리를 넓게 벌렸다. 그리고 태운의 중심으로 고개를 묻었다.

“더……럽습…… 읏.”

태운이 격하게 저항했지만 혁진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눈을 올려 태운과 눈을 맞춘 혁진은 힘 있게 태운의 성기를 빨았다. 태운이 다시 한 번 팔짝 튀어 올랐지만 혁진은 단단히 태운의 허벅지를 내리눌렀다.

받아들일 수도, 견뎌 낼 수도 없는 태운은 그 생경한 감각에 눈을 꾹 감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혁진은 자신의 시선을 피한 태운의 성기를 살짝 이로 깨물었다.

“아, 앗!”

예민한 살에 단단한 치아가 닿자 태운이 다시 한 번 펄쩍하고 튀었다. 하지만 혁진은 단단하게 태운을 잡아 움직일 수 없게 했다. 태운이 계속해서 시선을 피하자 혁진은 태운의 성기를 입에서 뱉어 냈다. 한참 후에야 태운이 다시 가늘게 눈을 뜨고 혁진을 내려다보자 혁진이 짓씹듯이 말을 뱉어 냈다.

“눈 피하지 마.”

그리고 다시 태운의 성기를 입에 넣었다. 혁진의 지시를 어기지 못하고 태운이 혁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선이 고정되지 못하고 자꾸만 떨렸다.

혁진의 오럴은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힘이 있었다. 태운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낯선 느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혁진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흡.”

태운이 입술을 물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혁진이 다시 치아를 세웠다. 태운이 숨을 들이켰다. 혁진이 치아에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닿는 것만으로도 태운은 고통스러웠다. 창백해진 태운이 무의식중에 입을 벌리자 혁진이 치아의 힘을 풀었다. 아, 그제야 태운은 자신이 입술을 물고 있어서, 혁진이 치아를 세웠다는 것을 알았다.

힘 있는 혁진의 오럴에 태운은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가 발가락이 안으로 굽어졌다. 태운의 몸이 잘게 떨렸다. 눈을 피할 수도, 입술을 물 수도 없어 태운은 그저 몸에 가득 올라오는 하얀 감각에 몸을 맡겼다. 자꾸만 몸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꽉 쥔 태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태운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태운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혁진의 단단한 몸을 밀어 냈다. 그리고 혁진과 마주하지 않게 옆으로 서서 정액을 뿜어냈다.

태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한참을 숨을 몰아쉬며 어정쩡하게 서 있던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이상했다.

“이, 러시면…… 안 됩니다.”

태운의 말투가 단호해서 혁진이 다시 웃었다.

“왜.”

“……네?”

혁진의 말에 반쯤은 패닉 상태였던 태운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태운의 커다란 눈에서 다시 눈물이 한 줄기 새어 나왔다.

“더, 럽습니다.”

태운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태운은 소파 테이블에서 티슈를 뽑아 자신이 뱉어 낸 정액을 수습했다. 그 모습을 보며 혁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태운이 아는 한 혁진이 뱉어 낸 웃음이 단음으로 끝나지 않은 경우는 이번이 최초였다.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태운은 딱딱하게 굳은 채로 얼굴을 들었다. 소리 내어 웃는 혁진이 이상했다.

태운이 멍하니 자신을 응시하자 혁진이 태운을 당겨 안으며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혁진이 웃는 이유를 태운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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