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림자 옆으로 한 발자국
혁진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태운이 보던 대본을 집어 들었다. 혁진은 펼쳐서 쭉 훑어보았다. 태운이 새로 찍고 있는 영화 대본이었다. 손때 묻은 대본엔 단정한 글씨로 주석이 잔뜩 붙어 있었다.
태운은 혁진의 손에 들린 대본이 지저분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쩐지 부끄러워서 태운은 푹 하고 고개를 숙였다. 정수리가 동그랗게 보일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이며 민망해하자 혁진은 다시 대본을 태운 앞으로 밀어 놓았다.
태운이 다시 호텔로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둘은 시간이 맞으면 종종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냈다. 둘 다 말이 없었고 별다른 행동도 없었지만 태운은 예전만큼 혁진과 있는 것이 숨 막히지 않았다.
“내일부터 일주일 정도는 들르기 힘들 것 같습니다.”
태운은 일정에 변동이 생기면 늘 먼저 혁진에게 보고했다. 혁진은 강요하지 않았고 자신의 일정을 말해 주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태운은 꼬박꼬박 일정을 보고했다. 혁진이 말없이 태운의 얼굴을 응시했다. 태운은 마치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처럼 일정을 늘어놓았다.
“지방 촬영이 있습니다. 내일 내려가서 다음 주 목요일쯤 올라올 것 같습니다.”
혁진은 여전히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운은 자신과 이렇게 시간을 함께 보내 주는 혁진이 이상했다.
고지식한 구석이 있는 태운은 처음 혁진이 가끔 들르라고 말한 날 이후로 매일 호텔을 찾았다. 혁진이 필요하다면 자신을 사용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필요가 없어 축객령을 내린다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혁진은 자신을 내치지 않았고, 그렇다면 자신에게 무슨 쓸모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을 오 년 동안이나 죽지 않게 해 준 사람이었다. 갚지 못할 은혜라고 생각했다. 혁진이 원한다면 다시 몸을 내던질 각오까지 했었다. 하지만 혁진은 자신을 그렇게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빈 시간을 와서 보내라고 하면서도 무리하면서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혁진이 왜 아직도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지 태운은 알 수 없었다. 이곳이 거처인지 아니면 가끔씩 머무르는 장소인지도 알 수 없었다. 혁진이 객실에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더 많았지만, 그래도 태운은 이곳에 와 시간을 보냈다. 예전만큼 견디기 힘들지 않았다.
가끔씩 떠오르는 장면의 조각들이 있었다. 꿈이었다. 아니,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곳에서 혁진은 자신을 안아 주었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가끔씩 자신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때때로 그런 기억들이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신지…….”
태운이 말꼬리를 흐렸다. 혁진의 시선이 태운의 얼굴로 꽂혔다. 다시 살이 올라 하얗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예쁘장하던 선은 그대로였지만 어딘지 더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시선을 받은 태운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왜.”
태운은 이를 물었다. 난감한 마음이었다.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는 혁진은 이상했다. 자신의 몸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혁진이 이렇게 자신과 시간을 보내 줄 이유가 없었다. 태운은 문득 며칠 전 보았던 신문 기사가 생각났다. 흥미성 기사였지만 남자의 한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그의 한 시간은 수십억 원을 호가한다는 내용이었다.
태운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혁진의 시선이 그런 태운의 움직임을 따라붙었다. 태운의 발걸음에는 망설임과 난감함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태운은 혁진의 발치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이게 절대 답이 될 수 없는 것을 알았다.
혁진과의 시간은 나쁘지 않았지만, 불안했다. 그 불안감은 혁진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심해졌다.
“너를 팔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태운은 입술을 물었다. 하지만 혁진의 손이 그런 태운을 제지했다. 태운의 눈이 흔들렸다. 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팔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이었다. 혁진이 손가락으로 태운의 입술을 쓸었다.
“그럼.”
태운이 살포시 웃었다. 억지로 그리는 것이 분명한 곡선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스크린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태운의 말에 혁진이 웃었다. 태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항상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끝이 어땠는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태운은 습관적으로 입술을 물려고 했지만 혁진이 다시 제지할 것을 알기에 그러지 못했다. 한참 동안이나 태운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단어들을 고를 수 없었다.
“드릴 수 있는 게 저밖에 없습니다.”
지독하게도 없는 말주변이었다. 겨우 생각해 낸 말이 이것이었다. 혁진은 다시 웃었다.
“일어나.”
혁진의 말에 태운은 말없이 일어섰다. 창백해진 태운의 얼굴은 익숙한 것이었다.
“넌 어떤데.”
“무슨 말씀이신지…….”
“나랑 자고 싶어?”
그렇다고 말해야 하는데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태운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됐어.”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혁진이 자신과 시간을 보내 주는, 자꾸 찾아오는 자신을 받아 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코끝이 시큰한 느낌이었다. 자신을 품에 안고 잠을 자던 혁진의 온기가 문득 떠올랐다. 꿈일 수도 있었다. 아직 한 번도 혁진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다. 아니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그 온기들이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당하게 된다면 그대로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태운은 입술만 깨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음 주에 또 올 건가?”
침묵 끝에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태운이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태운은 대답보다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고 목에서 울리는 대답은 그다음이었다.
* * *
언젠가 선배 연기자 한 명이 제작 발표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카메라 앞에서 배우는 것보다, 카메라 밖 현장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다고.
그 당시 촬영장에서 카메라 밖의 스태프들을 피하기 급급하던 태운으로서는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번에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산골 마을에서 최소한의 스태프들과 촬영하면서 사람과 부딪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태운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태운은 가만히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혁진이 촬영이 끝나면 다시 오겠냐고 물었다. 태운은 그가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예전처럼 혁진이 시간을 정해 호텔로 들어오라고 메시지를 보내 올 리도 없었지만 태운은 걸으면서도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처음에 이곳으로 내려와서는 태운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던 매니저는 일반인은 찾기 힘든, 스태프들뿐인 마을에서 태운을 해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태운에게 이렇게 혼자 걸을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태운은 걸으면서 촬영장 곳곳을 눈에 담았다.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라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뛰듯이 다가오던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따가운 여름 햇볕에 피부가 까맣게 탄 스태프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시야가 가릴 정도로 높게 쌓은 짐을 들고 오던 스태프가 태운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태운과 부딪친 것이었다.
스스로도 주위를 살피지 않았던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태운은 말없이 스태프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촬영 소품을 나눠 들었다. 물론 태운 스스로가 부주의하지 않았다고 해도 태운이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태운은 스태프들과 가까이 어울리지 않을 뿐 그렇게 무례한 성품은 아니었다.
“아…… 이러시면 안 돼요. 짐 저 다시 주세요.”
태운이 짐을 나눠 들자 스태프는 잔뜩 당황했다.
“어디까지 가세요. 들어다 드릴게요.”
“제가 들게요. 감독님 보시면 저 진짜 혼나요.”
스태프는 태운에게 짐을 넘겨받기 위해, 이미 잔뜩 짐이 들린 자신의 손을 내밀었지만 태운은 가만히 웃을 뿐 다시 짐을 넘겨주지는 않았다.
이번에 태운이 찍기로 한 영화는 제작 예산이 많지 않아 현장에도 인력이 많이 부족했다. 그래도 주연 배우까지 나서서 짐을 옮겨야 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스태프는 안절부절못했다. 게다가 그 주연 배우가 감독이 삼고초려 끝에 겨우 영화를 찍기로 마음을 정한 톱 배우 이태운이라 더 그랬다.
“감독님 보시기 전에 빨리 옮겨요.”
태운은 스스로 말하면서 자신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 많이 편해졌다고 느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서 강제로나마 벗어났기 때문일까. 전처럼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스태프는 다시 한 번 짐을 혼자 옮길 수 있음을 피력했지만, 태운은 그저 웃었다. 스태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빈집 중에 촬영 장비 보관소로 쓰이고 있는 집이었다.
“감사합니다.”
스태프가 서둘러 자신의 손에 든 짐을 바닥에 내려두고 태운의 손에 든 짐을 빼앗았다. 짐 정리를 하는 것도 도와주려고 했지만, 스태프가 너무 부담스러워해서 태운은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리 걸어도 보이는 것들은 고즈넉한 산골 마을과 푸른 숲, 그리고 분주히 움직이는 스태프들뿐이었다. 태운은 마을을 벗어나 조금 더 걷다가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공터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태운이 기억하는 혁진과의 마지막은 태운 자신의 손으로 찍은 섹스 비디오가 있다고 고백했을 때 차갑게 분노하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비디오 같은 것은 더 이상 세상에 없으니, 몸을 팔지 않겠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보내 주겠다고 말하던 모습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또다시 문득, 꿈결처럼 남자가 자신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주는 모습이 기억났다. 자신을 품에 안고 얼러 주던 남자가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몸에 열이 올랐다. 태운은 익숙하지 않은 몸의 변화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머니를 뒤적이자 매니저가 넣어 준 담뱃갑이 손에 잡혔다. 태운은 긴 담배를 손으로 빼어 들어 입에 물었다. 칙 하고 담배에 불이 붙자 태운은 다시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을 밖으로 내보냈다. 흰 연기가 태운의 얼굴을 뒤덮었다.
태운에게 성(性)이란 부정적인 것이었다. 혁진에게 몸을 내어 주기 전에 어찌 생각했는지는 스스로도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남자를 만난 이후로는 그랬다. 돈에 팔리는 것이었고, 대가를 얻을 수 있는 상품이었다. 태운에게 섹스란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굴욕감마저 느껴지는 그러한 행위였다.
그 행위들은 전부 트라우마로 남았다. 때때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신체적 변화들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종종 이렇게 몸이 달아오르는 묵직한 변화에 대해 면역력이 없었다.
태운은 몸의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때때로 이렇게 혁진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달아오르는 신체는 태운이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혁진이 자신을 몸을 원한다면 줄 수 있었다. 혁진이 한 번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자신을 믿지 못해 외부와 단절시키고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가둔다고 해도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혁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를 향해 몸을 던지겠다는 태운을 오히려 제지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을 만나러 오겠냐고 물었다. 그 말을 하던 혁진은 태운이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낯설지만 어딘지 익숙한 꿈속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그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던 태운의 얼굴이 담배 연기에 흐려졌다.
손끝까지 느껴지던 뜨거움이 가라앉고 나서야 태운은 겨우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괜스레 느껴지는 난감함에 머리를 쓸어 올리자 짧게 잘린 머리칼이 뾰족하게 손을 찔렀다. 태운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고 촬영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촬영 전에 대본을 잠시 읽을 시간 정도는 있을 것 같았다.
촬영장으로 돌아오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매니저가 태운에게 달려왔다.
“어디 갔다 와. 한참 찾았는데.”
“그냥 조금 걸었어요. 무슨 일 있습니까?”
“배우 하나가 입구를 못 찾고 빙 돌다가 고속도로로 잘못 빠졌다나 봐. 스태프가 데리러 갔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촬영이 좀 지연될 것 같다네.”
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따로 포장된 길도 없고 내비게이션에조차 표시가 되지 않는 마을이라, 태운 일행도 처음 촬영장으로 올 때 많이 헤맸었다. 중간에 촬영 장비를 실은 차량을 발견했기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더 헤맸을 수도 있었다.
“밥 먹을래? 가마솥에 직접 지은 밥이라는데 맛있어.”
매니저는 한쪽에 밥상보로 덮어진 쟁반을 가리켰다. 식사는 손맛 좋은 스태프들이 준비하고 있었는데 집밥과도 같은 맛이 나서 인기가 있었다. 태운은 평상에 걸터앉았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지 않아도 되는 밥은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너도 편해 보이네.”
매니저의 말에 정갈하게 젓가락질을 하던 태운이 “네?” 하고 대답했다. 여전히 혁진을 보는 가슴은 돌덩이를 얹은 듯 무거웠지만, 그와는 별개로 혁진에게 드나들게 된 날 이후로 마음이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자기 위안을 일삼는 스스로가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매니저 또한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웃었다. 동생을 돌봐 달라는 이상한 말 한 마디만 남기고 사라졌다가, 몇 달 만에 겨우 나타난 태운이 어두운 방 안에서 하루하루를 죽어 가고 있는 걸 보았을 때는 정말로…….
그래도 결국 극복해 낸 태운이 다시 마음을 잡자, 매니저는 태운의 일을 도왔던 스태프들을 불러 모아 작게 기획사를 설립했다. 임신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빠진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제외하고 모두가 그런 매니저의 부름에 응했다.
그때, 그렇게 죽은 얼굴을 하고 있는 태운을 보았을 땐 어쩌면 다시는 태운이 카메라 앞에 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태운은 다시 이겨 내었고, 요즈음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이런 편안한 얼굴을 종종했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어떤 얼굴이 있었다. 매니저는 지금도 가끔씩 태운의 얼굴을 마주 볼 때면 그때 정말 방법이 없었을까, 다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자고 했으면 어땠을까 수십 번 수백 번 후회했다. 그래서 이렇게 건강해진, 결국은 극복해 낸 태운을 보면 고맙고 또 미안했다. 태운마저 잘못됐다면 자신 또한 버티지 못했을 것 같았다.
매니저는 울컥하는 감정 때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태운의 앞으로 반찬들을 밀어 놓았다. 태운이 그런 매니저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
* * *
“안 들어오고 뭐 해.”
막 욕실에서 나오던 혁진이 말했다. 응접실로 들어서는 복도에 선 채 열린 문을 두고 망설이던 태운을 발견하고 꺼낸 말이었다.
태운은 혁진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응접실 안에 발을 들였다. 촬영이 끝나는 대로 집에 가서 간단한 샤워 후 옷만 갈아입고 나오는 길이었다.
‘다음 주에 또 올 건가?’
태운은 그것이 어떤 약속으로 느껴져 촬영이 없는 시간에 멍하니 앉아 몇 번이나 곱씹었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만이 적힌 그 명령을 문자 메시지로 받을 때 느껴지던 그 초조함과 굴욕적인 기분은 결코 느끼지 않았다.
그랬는데, 막상 응접실로 들어오고 나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태운이 응접실 입구에 어정쩡하게 서 있자 혁진은 눈짓으로 태운에게 소파를 가리켰다. 태운이 다시 발걸음을 떼어 소파로 다가갔다.
“앉아.”
태운이 앉지 않고 소파 옆에 서 있기만 하자 혁진이 먼저 소파에 앉아 태운에게 말했다. 태운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마땅히 할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아 태운은 그저 소파 테이블만을 응시했다.
“밥은 먹었나?”
“네.”
“그럼 한잔할 텐가.”
“네.”
태운은 지독하게도 없는 말주변을 탓했다.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혁진과는 공통된 주제가 전혀 없어서 더 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혁진이 몸을 일으켰다. 태운도 함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혁진이 제지했다. 혁진은 복도를 지나 미니바에서 쟁반에 잔과 위스키, 얼음 버킷을 들고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태운은 계속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혁진이 소파테이블 위로 쟁반을 내려놓고 다시 소파에 앉자 그제야 어색하게 서 있던 태운도 혁진을 따라 앉았다.
“안녕하셨습니까.”
태운은 어렵게 입안에서 뒤늦은 인사말을 꺼내었다. 잔을 태운 쪽으로 내려놓던 혁진이 코로 웃었다. 난감함에 태운은 혀를 물었다.
혁진은 대답을 하는 대신에 마개를 개봉한 병을 태운 쪽으로 밀었다. 태운이 그것을 받아 들자, 혁진은 빈 잔에 얼음을 가득 채워 태운 쪽으로 다시 밀었다. 태운이 그 잔에 공손하게 잔을 채워 혁진에게 내밀자 혁진이 웃으며 그 잔을 태운 쪽으로 다시 밀어 놓고, 태운에게 술병을 받아 자신의 앞에 있는 빈 잔을 채웠다.
그렇게 한참 동안 두 남자는 말이 없었다. 혁진의 잔이 비면 태운이 채웠다. 그리고 혁진 혼자 마시게 할 수는 없어 태운이 또 자신의 잔을 채워 술을 목으로 넘겼다. 경직되어 있던 몸이 나른해질 때까지 말없이 술잔만 나눴다.
“제게 이렇게 시간을 나눠 주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태운은 긴장이 풀리긴 했지만 술기운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언제까지 이렇게 혁진의 시간을 뺏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야 할 정도로 혁진의 시간은 가치 없지 않았다.
태운이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말을 뱉어 냈다. 하지만 다시 술을 한 모금 넘긴 혁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태운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불편한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시 또 두 남자는 말이 없었다. 태운은 술로 입을 헹궈 목으로 넘긴 다음 몸을 일으켜 혁진의 앞으로 향했다.
“이태운.”
태운이 자신의 앞에 서자 혁진이 나직하게 태운을 불렀다. 태운이 입술을 물었다. 태운은 스스로 혁진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무릎을 굽혔다.
“이태운.”
다시 한번 혁진이 태운을 불렀다. 태운이 듣지 않고 혁진의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이려는데 혁진이 양손으로 뺨을 잡아 태운의 고개를 들게 했다.
“뭐가 그렇게 초조해.”
태운은 혁진의 말에 그제야 스스로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방 촬영을 내려가기 전에도 그랬다. 다시 돌아오고 싶어서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운은 대답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혁진이 한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하고 나면 네 초조함이 조금 나아질 것 같나.”
혁진은 무얼 한다고 정확히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태운은 그 의미를 알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사라진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 초조함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 것 같습니다.”
태운의 대답에 혁진이 소리 없이, 감싸 쥐고 있던 태운의 뺨을 놓았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혁진의 가운을 풀었다. 혁진이 다리를 벌려 태운의 움직임을 도왔다. 태운의 입에 씁쓸한 침이 고였다.
더 이상은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태운은 혁진의 귀두를 입술로 물고 입안을 조였다. 혁진이 손을 태운의 머리 위로 올렸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태운은 입술을 조이는 힘을 더했다. 그러자 혁진의 성기가 힘을 더했다.
자연스레 혁진의 손이 태운의 머리를 쓸었다. 부드럽기보다는 묵직한 힘이 있는 손짓이었다. 태운은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혁진의 성기를 입안으로 넣을 수 있는 만큼 넣었다. 입술이 찢어질 것 같았다.
“윽.”
혁진이 낮게 신음했다. 혁진의 무릎 옆에서 꽉 쥔 태운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혁진이 그런 태운의 손을 잡아서 자신의 허벅지를 쥐게 했다. 움켜쥘 것이 필요했다. 태운이 손에 힘을 주자 혁진의 단단한 근육이 잡혔다.
태운은 목 안으로 침을 넘기며 물고 있던 혁진의 성기를 뿌리까지 삼켰다. 살살 매만지기만 하던 혁진의 손이 태운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입술로 조이는 힘을 유지하며 태운은 고개를 움직였다. 혁진의 성기를 끝까지 뱉었다 다시 목 안으로 넣었다. 짧은 태운의 머리칼을 쥐지 못한 혁진의 손이 미끄러지기도 했다.
태운이 고개를 움직이는 속도를 빠르게 했다. 혁진의 신음 소리가 간간이 공기 중으로 내리깔렸다. 입안이 얼얼해질 때쯤 태운은 고개를 쭉 빼고 숨이 차 가슴이 답답해질 때까지 혁진의 귀두를 쥐어 짜내듯 빨아들였다.
태운의 머리칼을 쥔 혁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울컥울컥 태운의 입안으로 비린 액체가 밀려들어 왔다. 태운의 눈가에 생리적으로 눈물방울이 맺혀 흘렀다. 태운이 비린 액체를 목 안으로 넘겼다. 혁진은 태운의 머리를 내리 만지며 그런 태운을 응시했다.
숨이 부족한 태운의 얼굴이 붉었다. 입가로 흘러내린 침과 섞인 혁진의 정액을 태운이 소매로 훔쳤다. 축축한 태운의 얼굴을 보며 다시 혁진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초조함이 나아졌어?”
태운의 거친 숨소리와는 다르게 혁진의 말소리는 전혀 열기를 띠고 있지 않았다. 태운은 알 수 없었다. 어디에서 비롯된 초조함이었는지, 또 지금 느끼는 안도감과도 비슷한 감정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태운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고 혁진도 그런 태운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태운의 입에서 한참 만에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 달싹거리던 태운의 입술이 완전히 벌어졌다.
“제 쓰임을 다하고 싶습니다.”
“네 쓰임?”
태운은 재차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손을 들어 입고 있던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어냈다.
“네 쓰임이라.”
태운이 어린아이 같은 미숙한 손길로 자신의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내자 뜨거운 햇빛 속에서 일주일을 촬영했으면서도 전혀 타지 않은 하얀 살이 드러났다.
“저를 믿으실 수 없겠지만, 정말로 한 번도 제 몸을 통해 대가를…… 무엇인가를 원한 적 없습니다. 정말로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제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저를 이용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장님 곁에 있으면 조금 낫습니다. 하지만 제게 시간을 내주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술기운이 뒤늦게 오르는 것 같았다. 태운은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혁진은 태운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것인지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
태운은 반문 없이 굽혔던 다리를 펴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릿했다. 혁진은 그런 태운의 팔을 당겨 자신의 옆으로 앉혔다. 태운이 입술을 악물었다.
“이게 네 쓰임이야.”
혁진의 옆에 앉혀진 태운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지만 태운의 얼굴이 혼란스러워졌다. 아몬드형으로 길게 치켜 올라간 눈에 당황이 담기자 순식간에 인상이 변했다.
“네가 널 팔겠다면 아주 비싸게 사 줄 생각이야.”
“…….”
“너를 팔 생각도 없다고 하면서 너 스스로 네 값을 왜 이렇게 후려쳐.”
혁진의 말에 태운은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닿지 않은 살이 마주 닿은 듯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혀에 추를 달아 놓은 듯 입이 무거웠다. 태운은 입에서 씁쓸하면서도 단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혁진이 무엇이라도 답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는 내릴 수 없는 답을 혁진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이 답이 될 수 없더라도, 무슨 말이든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해. 너를 억지로 나에게 떠넘기려고 하는 것을 제외하고.”
태운은 고개를 숙였다. 혁진은 손을 뻗어 태운이 마시던 잔을 들어 그 잔에 넘실거리는 호박색 액체를 채웠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앉은 태운의 앞으로 내려놓았다. 잠시 잔을 응시하던 태운은 거절하지 못하고 양손으로 술잔을 쥐고는 쓴 액체를 입안으로 넘겼다. 답 대신 혁진이 건넨 노란 액체는 태운을 더 혼란스럽게 했다.
그때 혁진이 태운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태운은 움찔했지만 혁진의 손은 가볍게 태운의 이마 위에 올려졌다.
따뜻하고 단단한 느낌이었다. 이마에서 시작된 느낌은 짧은 머리카락 위로 이어졌다. 투박하게 머리를 쓸어 넘겨 주는 느낌이 어쩐지 익숙해서 몸에 긴장이 풀렸다. 반복되던 꿈속에서 느꼈던 감각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주량이 약한 편이 아니었지만, 독한 술 몇 잔은 태운을 늘어지게 했다. 운전을 해서 호텔로 온 탓에 자고 가라는 혁진의 말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혁진은 태운을 자신이 늘 쓰던 침실에서 재우는 대신에,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는 다른 침실을 내주었다.
덕분에 태운은 곤란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혁진이 준비해 준 침실에서 자는 것이 결코 편하지도 않아서, 저도 모르게 긴장한 채로 얕은 잠에 빠졌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또 같은 꿈이었다. 자신을 혁진이 옆에 앉히고 투박하지만 다정하게 쓸어 내려 주는 꿈. 태운은 이번엔 진짜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 어설픈 다정함에 충족되었다.
“하.”
태운이 눈을 떴을 때는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아침이었다. 협탁 위로 손을 뻗어 시간을 확인한 태운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올라간 입꼬리 위로 깊게 보조개가 파였다. 주량을 아슬아슬하게 넘겼다고는 하지만 이 시간까지 잠에 빠져 있었던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잠을 깊게 잔 탓인지 숙취조차 없었다.
태운은 마른세수를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혁진은 이미 출근했을 시간이었다. 당분간은 스케줄이 없었지만, 침대 위에서 더 머물고 싶지는 않아 간단하게 씻은 태운은 챙겨 온 가방을 들고 호텔을 나섰다.
* * *
“왔어?”
태운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문 앞까지 마중을 나온 매니저가 태운을 반겼다. 태운이 멀끔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온 화분을 내밀었다.
“뭐 이런 걸 다 사 와. 앉아. 덥지. 커피 줄까?”
태운이 매니저에 의해 소파로 앉혀졌다. 매니저가 세운 새 기획사는 시작부터 번듯했다. 태운의 매니저는 업계에서 제법 뼈가 굵었고, 그를 따라 나온 재성 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도 있어 짧은 시간 동안에 제대로 된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소속 배우는 이태운밖에 없고 앞으로 늘어날 예정도 없었지만 태운이 일 년에 벌어들이는 돈을 생각하면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닌 곳이었다. 태운이 “네.” 하고 대답하자 매니저는 인터폰을 통해 밖에 있는 비서에게 음료를 부탁한 후, 사무용 책상 위에서 서류를 정리해 태운의 앞으로 앉았다.
“내가 갈까 했는데, 사무실에 너 한 번 와 봐야 할 거 같아서.”
“한 번 들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잘 쉬었어?”
“네.”
태운은 촬영이 없는 지난 몇 주 사이 낮에는 집에서 혼자 책을 보거나 대본을 읽었고, 밤에는 호텔로 들러 혁진과 시간을 보냈다. 지독하게도 말이 없는 둘이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도 그 시간만큼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태운이 혁진에게 조금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혁진은 굉장히 규칙적이고 건조한 생활을 했다. 그리고 결코 태운에게 신체적인 접촉을 해 오지 않았다. 성적인 행위에 대하여 거부감이 있는 태운에게는 어느 정도 위안이 되는 일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손을 뻗어 오지 않는 혁진 때문에 불안하기도 했다. 태운은 아직도 혁진이 자신과 시간을 보내 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노크를 한 비서가 들어와 커피를 양쪽으로 내려놓았다. 비서가 사무실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태운은 컵의 손잡이를 응시하다가, 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이것 때문에 오라고 했어. 안에도 정리해 놓기는 했는데 내가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여기 들은 건 계약 갱신 요청 들어온 광고 제안서고, 여기 들은 건 새로 계약 요청 들어온 광고 제안서야. 했으면 하는 광고랑 그만뒀으면 좋겠는 광고는 안에 자세하게 정리해 놨어. 읽어 보고 이제 결정은 네가 해.”
매니저가 제법 두툼한 서류 봉투 두 개를 태운에게 내밀었다. 전 소속사에 있을 때는 회사에서 권하는 광고는 전부 찍었다. 약점이 잡혀 있는 이상, 태운은 소속사 사장에게 철저하게 을인 입장이었다. 거부할 수도 없었고, 거부하려는 시도조차 해 보지 않았었다. 그래서 태운은 자신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낯설었다.
“전부 찍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태운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매니저는 반쯤은 예상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드라마나 영화와는 달리 태운은 CF를 찍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태운은 그것을 잘 숨겼지만 항상 함께하는 매니저에게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연기를 할 때와 CF를 찍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빛부터가 달랐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시기가 좀 애매해. 광고 수보다 질을 늘려야 할 때이기는 한데. 재성 엔터에서 나오고 난 직후라 갑자기 광고가 줄면 없는 말도 만들어져서 나돈다. 알잖아, 이 바닥. 내 생각으로는 자잘한 광고는 자르더라도, 큼직한 거는 당분간은 계속했으면 좋겠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급한 건 없으니까 가지고 가서 천천히 읽어 봐.”
“네.”
“점심 아직 전이지? 근처에 괜찮은 한정식집 있는데. 먹기 전이면 같이 밥이나 먹자.”
서류 봉투를 챙겨 든 태운과, 매니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운은 문득 손목에 찬 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혁진의 퇴근 시간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아 있었다.
* * *
식사 시간이 제법 길어져 태운은 식당에서 바로 호텔로 이동했다. 혁진을 기다리며 서류를 읽어 볼 생각으로 태운은 매니저에게 받은 서류 봉투를 챙겨서 객실로 올라왔다.
항상 혁진에게 몸을 내어 줄 준비를 하며 불안하고 초조하게 머물던 장소였다. 또 혁진에게 몸을 내어 주며 견디기 힘든 기억이 심어진 공간이었는데,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이 태운은 낯설었다.
현관에서 응접실로 이어지는 통로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소파에 앉은 태운은, 봉투를 열어 서류를 살폈다. 꼼꼼한 성격의 매니저는 광고를 권하거나 혹은 권하지 않는 이유와, 광고를 찍을 시에 예상되는 효과를 세세하게 적어 놓았다. 하지만 태운은 매니저가 가장 권한다고 적어 놓은 첫 장에 위치한 광고 제안서를 보며 더 이상은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유명 스포츠 스타와 함께 모델로 제안된 대기업 브랜드 이미지 광고 제안서였다. 혁진이 대표로 있는 기업의 광고이기도 했다. 태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커리어는 모두 혁진이 쌓아 준 것이었다. 그렇게 혁진의 뒤통수를 쳐놓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 서지 않을 생각까지 했었다. 그때의 태운을 다시 카메라 앞으로 세운 것은 혁진이었다.
하지만 다시 혁진을 찾아왔을 때 이런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곁을 내어 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태운은 그것만으로 무너지는 땅 위에서 설 수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태운이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혁진이 눈앞에 있었다. 태운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혁진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혁진은 그런 태운을 다시 소파로 앉혔다.
태운의 옆쪽으로 앉은 혁진은 태운이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던 서류를 들어 위에서부터 읽어 내렸다. 혁진은 처음 보는 서류였지만 태운이 왜 이런 얼굴로 앉아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태운이 아프도록 혀를 물었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자신은 정말로 대가 같은 걸 바라지 않았다는 마음만이 확실할 뿐. 하지만 전부 태운은 오해라고 감히 혁진에게 말할 수 없었다.
혁진이 손을 뻗어 꾹 다물어져 있는 태운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훑고, 이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태운은 거부하지 못하고 순순하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엄지손가락이 태운의 혀에 닿자 혁진은 그대로 검지까지 태운의 입안으로 넣어, 엄지와 검지로 태운의 혀를 꾹 쥐었다. 태운은 저린 듯한 고통을 참으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물지 마.”
그 말을 하고 혁진은 태운의 입안에서 손을 빼냈다. 태운이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다시 이로 물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태운은 결국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는 것을 택했다. 눈앞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비참함에 비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익숙했지만, 숨겨지지 않는 감정은 더 심하게 휘몰아쳤다.
“이태운.”
태운의 턱을 잡고 혁진이 태운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태운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혁진과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느껴지던 동물처럼 새카만 눈이었다. 태운은 공포에 젖어 숨을 들이켜는 대신에 몸을 이완시키며 숨을 내쉬는 것을 택했다.
“……네.”
태운의 대답에 혁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편안하게 옆에서 풀어졌던 태운의 몸에 다시 긴장으로 경직된 것이 느껴졌다.
“이태운.”
“……네.”
“뭐가 문제야.”
“문제…… 없습니다.”
태운의 대답에 혁진의 미간이 더 깊게 패였다. 혁진은 쥐고 있는 태운의 턱에 더 힘을 주었다. 태운의 눈동자가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이태운.”
혁진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태운이 무의식적으로 다시 입술을 물려다가 턱을 쥔 혁진에게 제지되었다.
“뭐가 문제냐고.”
“…….”
태운이 대답이 없자, 혁진은 태운의 턱을 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말없이 멀어지는 혁진을 태운이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태운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목이 탔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태운은 소파 등에 머리를 찧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태운은 초조해졌다. 혁진의 환상 같은 따스함에 기대고 있었다는 생각에 태운은 아득하게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잘못된 시작이었다. 돈으로 얽혀서, 몸을 내어 주고 대가를 받는 관계로 시작되었고, 그 끝도 깔끔하지 않았다. 다시 이렇게 자신이 혁진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혁진의 용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혁진이 신경 써 준 것에 대하여 거절할 권리가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하지만 태운이 원한 것은 정말로 대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원하지 않는 걸 받으면서 방긋 웃는다니, 정말로 대가를 받으면서 몸을 내어 줄 때조차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태운은 반사적으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혁진에게로 움직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호텔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인지 태운의 머리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데, 손에 위스키 병과 잔 하나를 든 혁진이 응접실을 가로질러 태운에게로 다시 걸어왔다. 태운은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었다.
“앉아.”
서 있는 태운의 옆으로 앉은 혁진은 태운을 옆으로 내려 앉혔다.
“입술.”
혁진의 말에 태운은 화들짝 짓씹고 있던 입술을 뱉어 내었다. 그런 태운의 손에 혁진은 잔을 들려 주었다. 태운이 양손으로 잔을 잡자 그 위로 혁진은 술을 따랐다.
잔에 가득 채워진 액체를 태운은 혁진에게서 고개를 돌려 한 번에 마셨다. 술이 당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혁진이 채워 준 잔이기에 한 번에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목이 화끈거렸다.
비워진 잔에 혁진이 다시 술을 채웠다. 태운이 다시 술을 들이켜는 것을 보며 혁진은 담배를 꺼냈다. 그는 담배 연기를 태운의 얼굴을 피해 정면으로 내뱉었다.
태운이 술을 들이켜고 혁진이 다시 따라 내기를 몇 번. 불편한 분위기에서 급하게 술을 넘긴 탓에 곧 태운의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언제까지 이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태운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올라오는 취기에 태운은 결국 입을 열었다.
“믿어 주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이런 것을 원하고 다시 온 것이 아닙니다.”
태운이 테이블 위에 놓인 광고 제안서를 보며 말했다. 그를 보던 혁진의 눈동자가 검게 짙어졌다.
“그럼.”
“…….”
“다시 내게 온 이유가 뭐야.”
태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발끝을 응시했다. 심장으로 향하는 혈관이 막힌 듯 답답했다. 숨이 막혔다. 혁진이 픽 하고 웃었다. 태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내가 네게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했었지.”
“……그러셨습니다.”
혁진은 말을 하며 다시 담배를 물었다. 회색의 연기가 씁쓸한 향을 남기며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어.”
혁진이 다시 태운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태운은 굳어지는 표정을 어쩌지 못하고 몇 번을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내가 너에게 건넨 것이 아니니, 네가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마.”
혁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에 눈짓을 하며 말했다. 태운은 결국 눈을 내리감았다.
* * *
태운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무엇에 묶인 듯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답답함에 뒤척였으나 아무리 움직여도 그것에서 풀려나지 않자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파란 새벽빛이 창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빛이 미약해 태운의 시야는 어둑했다.
태운은 손을 내려 자신의 가슴을 구속하고 있는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짚어 내다가 깜짝 놀라 정신이 들었다. 손에 닿은 것은 혁진의 단단한 팔이었다.
혁진의 팔이 태운의 가슴을 끌어안고 있었다. 익숙한 단단함이었다. 잠시 그 단단함을 매만지던 태운은, 잠에서 깨기 위하여 숨을 참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가끔씩 태운은 이렇게 꿈 안에서 단편적으로 혁진의 무심하고 따뜻한 단단함을 마주하고는 했다.
하지만 자신을 지탱해 주는 그 단단함에 기대면 다시 꿈에서 깨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 단단함을 매만지며 그렇게 한참을 있어도 잠에서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태운의 뒤척임에 잠에서 깬 것인지 혁진이 곧 몸을 일으켰다. 태운은 깜짝 놀라 눈을 뜨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혁진의 몸짓이 감각으로 느껴졌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혁진이 자신을 잠시 내려다보는지 감은 눈꺼풀 밖으로 혁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이 일어나느라 흐트러진 이불을 정돈해 태운에게 다시 덮어 주고 객실을 빠져나가는 혁진의 손길조차도 태운은 느껴 버리고 말았다.
혁진이 나가고 문을 닫는 소리가 났지만 태운은 여전히 눈을 뜰 수 없었다. 정신은 점점 또렷해져 왔다. 하지만 태운은 해가 환하게 객실 안을 비출 때까지 그 상태로 누워 있었다. 다시 잠들지 않았다. 그 감각들은 꿈이 아니었다.
감고 있는 태운의 시야 안으로, 몇 번이나 혁진의 움직임이 상상으로 덧입혀져 그 형상이 만들어졌다. 표정, 눈빛, 움직임. 태운은 그 모든 것을 어디에선가 한 번씩 보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되지 않지만, 그것은 어쩌면 도려내진 기억 속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혁진의 움직임을 떠올리던 태운은 아랫배가 당기는 느낌에 이를 악물며 욕실로 향했다. 태운은 욕조에 걸터앉았다. 가만히 앉아서 아랫배가 뭉근하게 당기는 감각이 사라지길 바랐지만 사라지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 거세게 휘몰아쳤다.
태운의 얼굴이 땀으로 젖었다. 태운은 마른세수를 하며 물기를 닦아 내었다. 해소되지 않는 욕망은 고통으로 변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몸 전체가 하나의 혈관이 된 기분이었다. 온몸에서 맥박이 뛰는 것 같았다.
태운은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감각이 가라앉을 때까지 견디려고 했지만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하반신이 간질거렸다.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바지춤을 풀어헤쳤다. 묽은 액으로 이미 앞섶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태운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태운은 걸치고 있던 옷을 전부 벗어 내었다. 번득거리며 서 있는 성기를 보고 태운은 쿵쿵하고 벽에 머리를 찧었지만 감각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태운이 뱉는 숨의 온도가 올랐다. 입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창백한 뺨에도 붉은 홍조가 올랐다. 샤워기의 물을 틀고 태운은 그 물을 맞으며 섰다. 찬 물줄기에도 몸의 온도는 내려가기는커녕 점점 달아올랐다.
태운은 눈을 꾹 감고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샤워기의 물과 쿠퍼 액으로 젖은 성기는 습하고 미끌미끌했다. 성기의 기둥을 쥐고 흔드는 태운의 손길은 여전히 미숙했다. 마치 자위를 처음 시작한 어린아이의 손짓과도 비슷했다.
혁진에 의해 강제적인 행위에 익숙해진 태운은 스스로의 성욕을 푸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혁진은 가끔 태운이 심기를 거스를 때 벌을 주듯 자신의 앞에서 자위를 시키고는 했었다.
그때도 태운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었고,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지금까지도 스스로 자위를 할 수 없었다. 태운은 성욕이 동할 때면 그저 가만히 가라앉기만을 기다렸었다.
태운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행위에 익숙하지 않아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은 태운을 더 힘들게 했다.
“……읏!”
태운의 다물어진 입에서 열에 들뜬 신음이 터져 나왔다. 태운은 소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아프게 입술을 물었다.
그때 문득, 자신의 입안을 헤집던 혁진의 손가락이 생각났다. 그 손짓은 무자비했지만 한편으로는 혼자 참지 말고 뱉어 내라는, 자신을 위하는 듯한 진득한 감정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태운은 꽉 물고 있던 입술을 벌렸다. 손짓이 익숙해지자 성기를 흔드는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태운의 숨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뜨거운 액체를 뿜어내며 태운은 벽에 기대 무너져 내렸다.
* * *
도망치듯 호텔 안을 빠져나온 태운은 차 시트에 머리를 쿵쿵쿵 하고 찧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태운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탱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혁진에게 의지하여 서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혁진에게 길들여져서, 마치 길들여진 새처럼 새장의 문이 열려 있다고 알면서도 새장 밖을 나갈 수 없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혁진에게 다른 감정이 생긴 것인지 태운은 스스로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지만, 태운은 스스로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생은 여전히 같은 상태였다. 그래서 태운은 동생에게 갈 수 없었다. 한 번 동생을 두고 떠나려고 했었다. 그것은 태운의 죄책감을 더 키웠다.
그래서 자신이 혁진의 곁에서 멀어질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태운은 생각했다. 혁진이라면, 단단하고 강한 남자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붙잡아 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태운은 다시 머리를 등받이에 쿵쿵 찧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서울 한 바퀴를 돌아 결국 돌아온 곳은 호텔이었다. 태운은 프라이빗 주차장에 다시 차를 주차했다.
여름의 초입. 다시 호텔로 돌아오고 난 후로 따로 촬영이 생겨 혁진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저녁 시간은 호텔에서 보냈었다. 갑자기 말도 없이 호텔에 들어가지 않으면 혁진이 혹시라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을 오해할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혁진을 마주하게 되면, 정말로 혁진에게 기대게 될까 봐 그것이 정말로 두려웠다. 지하 주차장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며 시간을 견디던 태운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차의 전조등 빛에 정신을 차렸다. 프라이빗 전용 입구가 따로 있고, 보안 카드를 찍어야만 열리는 주차장에 들어올 수 있는 건 혁진밖에 없었다. 태운은 빛의 꼬리를 응시하다가 차 문을 열고 내리는 혁진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차 밖으로 나갔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혁진은 혼자였다. 태운은 차 문을 열고 나오기는 했지만 혁진에게 완전히 다가서지는 못하고 멈칫했다. 오늘 아침에 욕실에서 자신이 한 행동을 떠올리니 태운은 혁진을 보는 것이 어쩐지 곤란했다.
혁진은 그런 태운을 발견하고 멈춰 서서 가만히 태운을 기다렸다.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혁진 쪽에서 더 가까웠다. 태운은 혀를 깨무는 대신 눈을 길게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혁진에게 걸어갔다. 태운이 자신의 두 발자국 정도 뒤에 멈춰 서자 그제야 혁진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웃어 봐.”
두 사람이 서 있기에는 너무 넓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혁진과 멀찍하게 떨어져 자신의 신발 끝만 응시하고 있던 태운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혁진과 눈이 마주쳤다. 태운은 다시 또 입술을 깨물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혁진의 시선은 태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태운은 난처한 얼굴로 혁진의 표정을 살폈다.
“웃어 보라고.”
태운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색한 표정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치 카메라 앞에서처럼 눈꼬리를 휘어 보였다. 태운은 몰랐지만 입꼬리 위로 푹 파인 보조개가 예뻤다.
혁진이 손을 뻗어 태운의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려 주었다.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던 눈이 다시 동그랗게 커졌다. 너무 섬세한 이목구비 때문에 웃지 않을 때면 다가가기 힘들 정도로 서늘하던 태운의 인상이 순식간에 변했다.
“어렵군.”
혁진이 살면서 몇 번 내뱉어 보지 않은 단어를 말했다.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혁진은 열린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태운은 다시 난처한 얼굴이 되어서 그런 혁진의 뒤를 따랐다.
“저녁은.”
태운을 소파에 앉혀 둔 혁진은 금세 샤워를 하고 나왔다. 소파에 앉아서 넘어가지 않는 대본을 읽고 있던 태운은 다시 고개를 들어 혁진을 올려다봤다. 혁진은 샤워 가운 차림이었다.
태운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주린지 몰랐던 배가 갑자기 주린 느낌이 들어 난감한 마음이 되었다.
“전입니다. 식사, 하셨습니까?”
혁진은 태운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인터폰을 들어 일 인분의 식사를 가지고 올라오라고 지시를 했다.
인터폰을 내려놓고 소파로 걸어와, 태운이 앉은 소파 옆 일인용 소파에 앉은 혁진은 손을 뻗어 태운이 읽고 있던 대본을 자신의 손으로 옮겨 왔다. 태운은 거부하지 않고 손의 힘을 풀었다.
혁진이 다시 태운이 읽던 페이지의 대사들을 읽었다. 며칠째 전혀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라 혁진에게도 익숙한 대사들이었다. 혁진은 항상 태운의 손에 들린 것들을 이렇게 확인했다.
처음에 태운은 혁진이 자신을 믿지 못해서라고 짐작했다. 그 물건에서 어떠한 거짓을 발견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자신이 감수해야 한다는 마음에, 피가 식는 것 같은 긴장을 그저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것이 혁진이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의 하나라는 생각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태운은 자신의 것을 내보여주는 기분이 들었다. 태운은 괜히 손으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혁진이 다시 태운의 앞으로 대본을 놓았다. 다시 또 한참이나 이어지는 건 대화의 부재였다. 공통된 관심사가 전혀 없는 두 남자는 계속 이렇게 말이 끊겼다. 그럴 때마다 태운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다시 입을 닫았다. 입술이 말랐다. 태운은 초조한 얼굴이 되어 바닥에 시선을 두었다.
“항상 넌 추궁 받는 것 같은 얼굴을 해.”
결국 태운이 다시 입술을 물었다. 그런 것이 아닌데 대답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안에서와 같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자연스러워진 얼굴이 되었다.
“말했지.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고. 난 네게 어떠한 부담을 지울 생각은 없어. 내게 부채를 느끼고 있는 거라면, 네가 느껴야 할 부채 같은 것은 없단 뜻이야. 그러니 억지로 나와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어.”
태운은 혁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소리가 귀로 들어와 뇌까지 전달이 됐는데 그 의미가 이해되지는 않았다. 한참 만에 태운은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말보다도 빠른 몸짓이었다. 말이 나오지 않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태운이 소파에서 내려와 혁진의 발치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혁진은 그런 태운을 제지하지 않았다. 태운은 마치 어린 강아지처럼 혁진의 무릎에 고개를 비볐다. 나오지 않는 말을 이렇게라도 전달하고 싶었다. 혁진의 검은 눈동자가 짙어진 채로 그런 태운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어떤 이유로라도 쓸모가 있다면, 곁에…… 있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혁진의 단단함을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또 언제 곁에서 버려질지 몰랐지만 그 단단함에 기댈 수 있다면, 잠시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었다.
태운이 혁진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치켜 올라간 태운의 눈매가 전혀 서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혁진이 그런 태운의 머리를 힘을 주지 않고 눌렀다.
“이태운.”
“……네.”
나직한 혁진의 음성에 태운은 긴장된 얼굴이 되었다. 혁진은 더 창백하게 변하는 태운의 얼굴을 한참 응시했다.
“네 값어치는 네가 만드는 거다. 두 번째 말하는 거야. 값싸게 굴지 마. 그리고 나는 네 채권자가 아냐. 고작 그 정도였다면 병원에서 널 데려오지도 않았어.”
태운은 혁진이 하는 말이 잃어버린 기억의 한 조각이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혁진은 더 이상은 말할 생각이 없는 듯 태운을 일으켜 세웠다. 그 손끝에 태운은 다시 심장에서 나오는 피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태운이 소파 위로 앉혀지고,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인터폰이 울리기 전까지 다시 한참의 침묵이 계속 되었다. 트레이를 끌고 와 식탁 위로 쟁반을 들어 올리는 혁진을 태운은 난감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직접 하려고 하다가 혁진에게 제지당해서 태운은 그저 혁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접시를 덮고 있던 그릇을 치우자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담백한 음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혁진이 음식을 놓은 자리 맞은편에 앉았는데도 태운은 제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있었다.
그런 태운을 혁진은 말없이 응시했다. 혁진의 눈빛에 태운은 의자를 밀어 식탁 앞에 앉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혁진의 눈빛이 불편했다. 깊은 곳까지 꿰뚫려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태운은 문득 오전에 자신이 욕실에서 부린 추태가 생각이 났다. 태운의 흰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밥을 마른 나물과 함께 두어 숟갈 입안으로 넣자 금세 배가 부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태운은 처음 혁진과 식사를 했던 그 어느 날이 생각났다. 밥을 목으로 넘기는 것조차 어려워 먹은 것을 곧장 다 게워 내었었는데,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혁진 앞에서 홀로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생경했다.
“왜.”
태운이 수저를 내려놓자 혁진이 말했다. 태운은 새삼스레 혁진과 눈을 마주쳤다. 날카로운 부분이 전혀 없는,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눈이었다. 태운은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뭐가 그렇게 복잡해.”
혁진의 말에 태운이 의자에서 일어나 혁진에게로 걸어갔다.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혼란과 불안과 초조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혁진뿐이었다. 태운이 혁진의 앞으로 서자 혁진이 시선을 마주해 왔다.
“왜…… 제게 이렇게 해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혁진은 웃었다. 태운은 처음 보는 혁진의 얼굴이었다. 금세 평소의 무표정을 찾았지만, 태운은 어쩐지 혁진이 화가 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태운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내가 시간이 남아서 너와 이러고 있는 것 같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답은 바로 나왔지만, 그렇다고 답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태운은 혁진의 선이 굵은 턱 어딘가로 시선을 맞췄다. 태운은 무의식중에 다시 혀를 씹었다. 혁진의 눈을 볼 자신이 없었다.
혁진이 양손으로 태운의 얼굴을 단단히 잡고 자신 쪽으로 당겼다. 혁진의 양 손바닥 사이로 태운의 얼굴이 완전히 들어왔다. 코가 맞닿을 듯 둘의 얼굴이 가까웠다. 태운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다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시선을 피할 수 없어서 태운은 눈을 감는 것을 택했다. 혁진이 피식 하고 웃는 것을 태운은 얼굴에 닿은 혁진의 숨결로 느꼈다. 혁진이 태운의 아랫입술을 이로 물었다. 태운은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부분이 어쩐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 아릿한 감각에 익숙해질 때쯤 혁진은 다시 잇자국이 난 태운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혁진의 혀가 태운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딱딱하게 굳은 태운의 혀는 움직이지 못했다. 태운의 치아 사이를 혁진이 혀로 쓸자 태운은 스스로 입을 더 벌렸다. 혁진은 딱딱하게 굳은 태운의 혀 밑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태운은 몸을 떨었다.
태운의 혀 밑을 쓸어 자신의 입안으로 가지고 온 혁진은 단단히 쥐고 있던 태운의 얼굴을 살짝 돌렸다. 그리고 태운의 혀를 살짝 씹었다. 질척한 소리가 입안을 오가고, 태운의 목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올라왔다.
이상하게 태운은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 같은 자괴감보다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은 것처럼 조금 홀가분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태운의 혀와 입술을 오가던 혁진은 얼굴에 닿는 물기에 태운과 마주 닿은 입술을 떼어 냈다.
“하.”
질척하게 젖은 태운의 붉은 입술 옆으로 태운의 눈에서부터 흐른 물기가 턱까지 흐르고 있었다. 혁진의 입에서 바람이 빠진 듯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태운은 핏줄이 설 정도로 강하게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혁진이 단단히 쥐고 있던 태운의 얼굴을 놓았다.
태운이 감각이 둔해진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혁진은 태운의 눈물을 강한 거절 정도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태운은 소리가 먹혀서 또다시 고개만 저었다. 어떻게 이렇게 번번이 말이 막히는지 스스로가 답답했다.
“제가……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곁에 있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혁진은 대답을 하지 않고 태운의 눈을 응시했다. 태운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집요한 눈빛이었다.
“온전한 제 의지입니다……. 곁에 있고 싶습니다.”
혁진은 말이 없었다. 초조한 얼굴이 된 태운은 혁진의 팔꿈치를 살짝 쥐었다. 태운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혁진은 다시 태운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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