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낙원으로 가는 길
태운과 아무리 해도 연락이 닿지 않았을 때. 매니저는 태운의 빌라에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다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태운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할 생각이었다. 매니저가 아는 태운은 절대 이렇게 무책임하게, 오랫동안 연락을 끊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그것도 굉장히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참 잘나가는 인기 배우의 실종. 엄청난 혼란과 논란이 될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그때는 언론이든 경찰이든 도움이 될 수 있는 누구의 힘이라도 이용하는 길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경찰에 연락하기 바로 직전, 태운의 빌라로 찾아온 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자신을 변호사라고 소개한 뒤 태운을 안전한 곳으로 모셨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놓고 마냥 기다리고 있는데 소속사 사장이 재성 엔터 주식을 전부 매매하고 보직에서까지 물러났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얼마 안 가 새로운 사장이 부임하면서 그 소문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십 년 동안 연예인들을 가지고 포주질을 하며 왕으로 군림했던 이의 최후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말 그대로 증발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고, 변하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보다 밝게 빛나는 별들의 세계였지만 그들의 현실은 처참했다. 전 소속사 사장이 사라지면서 비어 버린 재성 엔터테인먼트의 사장 자리를 차지한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로운 포주를 자처했다.
스폰서나 그 외 접대들로 배역을 꿰어 차고 제법 인기를 얻은 배우들은 재성 엔터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지만, 새로운 포주는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태운의 빌라에서 보았던 남자가 다시 매니저를 찾아왔다. 재성 엔터테인먼트와 태운 사이의 계약이 정리되었으니 광고 등의 계약 승계를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매니저는 태운이 생각했던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소속사 대표가 바뀌어도 아무 문제 없이 계약 파기가 된 것은 이태운 하나였다. 태운의 뒤로 대단한 스폰서가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는 바였다. 태운의 행보들이 너무 말이 안 돼서 오히려 뒷소문이 깨끗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인 활동을 같이한 매니저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속사 사장까지 갈아 치우면서 태운을 소속사에서 빼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소속사 사장은 서자라는 소문이 있기는 했어도 미디어 제국이라고 이름 높은 그룹의 직계였고, 새로 부임한 사장도 그랬다. 그런 그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으려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소속사 내에서도 매니저는 이태운과 함께 나갈 외인의 대우를 받았다. 남아 있을 수도 없는 분위기였고 남아 있고 싶지도 않아 매니저 또한 태운과 함께 소속사를 떠났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태운을 기다리기를 몇 달. 태운은 돌아왔지만, 다시는 연기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힘없이 웃었다.
웃고 있었지만 절대 웃는 얼굴로 보이지 않는, 어딘지 넋이 나간 것 같은 태운을 매니저는 그냥 둘 수 없었다. 매일 찾아와 끼니를 모두 챙겨 먹이고 하루에 십 분이라도 햇빛을 보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태운아.”
“오셨어요.”
매니저가 포장해 온 도시락을 들고 현관을 들어가는데 소파에 앉아 있는 태운과 눈이 마주쳤다. 눈에 초점도 없이 멍하니 앉아 대화도 어려웠던 초반과는 달리 요즘은 시선이 마주치고 대화를 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잠은 잘 잤어?”
“네.”
“다행이다. 아침 같이 먹자.”
매니저가 식탁 위로 도시락을 펼쳤다. 소파에 앉아 있던 태운이 걸어와 일을 거들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살이 빠져서 안타까울 만큼 핼쑥하기만 했던 몸도, 매니저의 헌신에 거르지 않고 끼니를 챙겨 먹으면서 평소 정도로 돌아왔다.
왜 연기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건지 넋이 나가서 꼭 단백질 인형처럼 움직임이 없던 태운에게 직접 묻지는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자신이 태운과 함께 회사를 차릴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해져서 알음알음 연락이 와 전해지는 대본들을 테이블 위에 가져다 두면 조금씩이라도 읽고 있는 듯했다.
매니저가 생각했을 때 태운은 연기가 천직이었다. 하지만 자의가 아니라 여러 상황들이 얽혀 타의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들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태운이 직접 이야기해 주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
조금 늦은 아침을 먹고 낮에는 인적이 없는 아파트 옥상의 공원을 조금 걷다가 매니저가 태운에게 물었다. 아무리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없대도 누군가 들을 수도 있는 공개된 공간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 다시 집으로 내려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맨정신에는 할 수 없는 이야기 같아서 매니저는 언젠가 제작사에서 선물 받았던 독한 양주를 찾아와 컵에 따랐다. 태운에게도 냉장고 안에 있던 맥주를 권했지만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계속 말해야지 했는데 미루다가. 너 지금은 괜찮아 보여서 이야기하는 거야. 혹시 아직 이런 이야기할 기분 아니면 말해. 내가 어떻게든 더 해 볼 테니까.”
“저 괜찮아요. 이야기하셔도 돼요.”
“너 아직 계약 기간 남은 광고들 너 챙겨 주셨던 변호사님 통해서 내가 다 넘겨받았다는 이야기는 했지? 재성에서 이상할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해서 넘겨줘서 지금까지는 내가 적당히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도 한계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알아야 나도 거기에 맞춰 정리할 수 있어.”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지금 그런 이야기 듣자고 하는 이야기 아닌 거 알지? 나도 사실 이렇게까지 너한테 깊게 관여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돼 버렸네. 너 이야기할 준비가 안됐으면 내 이야기 먼저 해도 될까?”
매니저는 독한 술을 한잔 들이마시고 십 년 가까이 품안에 가지고 있었던 이야기를 담담한 척 꺼냈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에서 담대하다고 소문난 매니저에게도 쉽지 않은 이야기임이 드러났다.
지금은 그 누구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재능 있던 어떤 배우의 이야기였다. 매니저도 막 초짜 티를 벗었을 때였다. 처음 막 배정을 받았을 때는 그 배우도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단편 영화 몇 편의 촬영 경험만 있는 신인이었다. 재능도 있었고 외적인 모습도 뛰어났는데 그 배우는 채 제대로 재능을 꽃피워 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찬찬히 단계를 밟아 나갔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분명히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가장 최악의 상대의 눈에 들어 버렸다. 연예계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는 스폰서의 존재였다.
드라마의 조연 역에 캐스팅되며 작지만 광고도 찍게 되고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이상하게 배우는 조금씩 생기를 잃어 갔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고, 맞은 것처럼 부은 뺨을 하고 매니저의 품에서 펑펑 울기도 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채근을 하자 배우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소속사 사장의 연락을 받고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드라마 감독에게 오디션 겸 인사를 드리는 자리라며 불려 갔다고 했다. 잘 보여야 되겠다는 생각에 예쁘게 꾸미고 갔었고 작품을 위해 가끔 감독이 연락하면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라는 소속사 사장의 말을 스무 살 어린 배우는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했다. 그것은 매니저는 모르게 진행된 일이었다. 그는 태운의 소속사 사장과는 다른, 또 다른 나쁜 놈이었다.
몇 번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먹으며 정말 그 감독의 드라마에 조연으로 캐스팅되고 꿈결을 걷는 것 같았던 어느 날, 어린 배우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 신고하겠다고 우는 배우에게 감독은 당당했단다. 해 보라고, 너랑 나랑 밥 먹고 술 먹은 증거가 수백 개라고, 아무도 네 말을 믿어 줄 것 같지 않은데 부모님이 아셔도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도 상관없겠냐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돌아온 작은 광고. 도망을 치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것 같다고 배우는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울었다.
그때는 매니저도 지금보다 물정을 모르던 어릴 때였다. 그 배우를 담당하기 전에는 인기 아이돌 그룹의 로드 매니저로 일했었다. 극성팬들과의 싸움에는 익숙해졌지만 스폰서 같은 일들은 겪어 보지 못했다. 어떻게든 구해 내야겠다고 매니저가 발버둥 쳤지만 지금보다 더 어렸던 그에게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 가던 배우는 어떻게든 도움을 구해 보겠다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매니저를 말렸다. 부모님에게 알려지느니 혼자 참는 것이 낫다고. 자기가 조금 참으면 부모님도 동생도 모두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순응하려고 하는 배우에게 매니저는 안 된다고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희망을 줬다.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배우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유하고 계속해서 희망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초짜 매니저와 신인 배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없었다. 상담을 받으며 조금씩 생기를 찾던 배우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되찾은 조금의 생기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매니저는 십 년 동안 계속해서 차라리 그때 모른 척했다면, 희망을 불어넣지 않았다면 그 배우는 성공해서 살아 있지 않았을까 수십 수백 번 후회를 했다.
“저는…… 저라면 정말로 감사했을 것 같아요.”
매니저의 말을 모두 들은 태운이 목이 메서 겨우 말을 내뱉었다. 밟고 선 땅이 위태롭고 외로워서 누구라도 자신을 구해 내 주길 바란 적도 있었다. 누구라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길. 괜찮다고,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해 주길 바란 적이 있었다.
“미안하다. 그렇게 해 주지 못해서. 나는 너무 겁이 났어. 내가 개입해서 네가 잘못될까 봐. 허황된 희망을 불어넣는 걸까 봐.”
“아니요. 충분히 제게 잘해 주셨어요. 형이 아니었으면 저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나눴다. 그리고 태운은 단단한 목소리로 자신은 지금 정말 괜찮다고,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매니저가 컵에 따른 양주를 다시 한 입에 털어 넣었다. 태운도 술이 필요할 것 같아 작은 잔에 따라 밀어 주자 태운은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마셨다. 태운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매니저가 말했다.
“나는 너한테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어. 너 그렇게 사라지고 나 정말 많이 후회했어. 뭐라도 해 봤어야 한다고. 내가 너무 비겁했어. 나는 더 이상 초짜 매니저도 아니고 넌 신인 배우도 아니니까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 가져다 놓는 대본 전부 보고 있잖아. 연기, 계속하고 싶은 거 아냐?”
“형…….”
“우선 재성에서는 정말 깨끗하게 계약을 마무리해 줬어. 이 정도로 깔끔한 경우는 나도 처음 봐. 쳐낼 건 다 쳐내고 정리할 건 다 정리해서 넘겨받았어. 정산도 깔끔하고. 보통 나갈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해서 넘겨주지는 않거든. 특히 재성은 알잖아. 지금까지 나간 사람들 얼마나 더럽게 끝났는지. 극단적이지만 강찬혁만 봐도 그렇고. 그런데 그런 거 전혀 없어. 재성 그룹 계열 광고는 몇 개 계약 종료됐는데 어차피 그건 재성 엔터 소속으로만 도는 광고니까. 그마저도 정산 깨끗해. 지금까지도 뒤에서 찌라시 뿌리거나 하는 것도 전혀 없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엄청난 힘이 뒤에서 널 보호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변호사님도 계속 신경 써 주고 계시고. 그래서 더 모르겠다. 지금 너는 어떤 상황인거야? 뭐가 널 방해하고 있는 거야?”
“계속이요?”
“모르고 있었어? 난 당연히 네가 아는 일인 줄 알고. 몇 번 말한 적 있잖아. 법적으로 문제될 수 있는 사항들은 그분 자문 받아 진행하고 있었어.”
변호사라는 말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최근까지 계속 도움을 받고 있는지는 몰랐다. 변호사가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은 혁진의 뜻이라는 이야기였다. 혁진이 자신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요즘 계속 꾸고 있는 꿈속의 모습이 겹쳐졌다. 다정하게 자신을 쓸어 주고 안아 주던 혁진의 모습.
태운이 목이 타서 매니저가 채워 놓은 술을 마셨다. 빈 잔에 다시 매니저가 술을 채웠다. 태운은 그것마저 다시 들이켰다. 술이 독해 태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모든 것에 지쳐 버렸고, 혁진의 대한 송구스러움에 다시는 연기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평생 죽은 듯이 혁진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숨어 지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죄송해요. 형……. 저 잠깐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요. 갔다 와서 말씀 드릴게요.”
“어딘데. 데려다줄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태운에게 매니저는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술을 마신 것이 떠올라 운전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나 술 마셔서. 그리고 너도 많이 마셨어. 깨고 내일 가면 안 되는 곳이야?”
“네. 내일은 못 갈 것 같아요…….”
태운의 말에 매니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태운의 어깨를 꽉 쥐었다. 어디를 가려는 것인지 누구를 만나러 간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태운이 말을 해 주지 않는다면 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는 없었다.
“조심해서 갔다 오고. 혼자 올 자신 없으면 연락해. 데리러 갈게.”
“네. 감사해요.”
택시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고 매니저는 태운을 택시 앞까지 배웅했다. 둘 다 적지 않은 양의 술을 마셨지만 진지했던 분위기 때문인지 전혀 취한 기색이 없었다.
태운의 목적지는 혁진의 호텔이었다. 여전히 혁진이 거기 묵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태운이 혁진에게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혁진을 만났던 날. 정신없이 나오느라 출입 카드를 두고 나오지도 못해 여전히 태운은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택시에 타자 그제야 술기운이 조금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어지럽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 혁진을 만나서 어떻게 할 것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냥 혁진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택시에서 내려 태운은 혁진의 객실까지 올라갔다. 다행히 가지고 있는 출입 카드로 보안이 정상적으로 해제됐다.
“하아.”
조심스럽게 호출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카드를 찍으면 문이 열릴 것도 같았지만 허락을 받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유 모를 불안감과 초조함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술기운에 눈가가 뜨거웠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혁진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열리고 혁진이 나왔다.
혁진은 태운을 발견하고 잠시 말이 없었다. 잠시 마주친 얼굴은 조금 놀란 기색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었다.
“들어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 태운이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데 혁진이 먼저 말하고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태운은 흡 하고 숨을 멈췄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애써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혁진의 뒤를 따랐다.
“너를 다시 팔러 온 건가?”
잔인한 말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꿈속에서 자신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던 혁진이 겹쳐 보였다. 말이 되지 않는,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란 것을 아는데 어쩐지 혁진이 예전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아뇨, 아닙니다…….”
“그럼.”
모르겠다. 스스로도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태운이 입술을 악물었다. 왜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도와주셨는지, 그리고 왜 계속 도와주고 계신지. 그걸 묻는다고 대체 뭐가 달라진다고.
요즘 계속 그의 꿈을 꾸고 있었다. 영원히 꿈만 꾸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꿈이었다. 꿈속의 혁진은 자신을 다정하게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었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어쩐지 정말 겪은 일인 것처럼 생생했다.
“죄송합니다.”
“술 한잔하고 가.”
혁진의 물음에 태운이 거절하지 못하고 “네.” 하고 대답했다. 이미 마신 술기운이 감정이 북받쳐 오르자 온몸에 퍼지고 있었다. 붉어진 얼굴에서 다 티가 날 텐데 자신에게 술을 권하는 혁진이 이상했다.
몇 번 들어와 보지 않은 곳인데도 혁진을 따라 들어간 곳이 어제 온 것처럼 낯익게 느껴졌다. 태운은 혁진이 건네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셨다. 이미 주량은 훨씬 초과한 상황이었지만 조금 어지럽기만 할 뿐 취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긴장한 탓에 더 그런 것 같았다. 술잔을 나누는 혁진과 태운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태운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정신이 없어서 너무 늦었지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러 왔습니다……. 앞으로는 신경 쓰실 일 없게 조용히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혁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태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태운이 그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다만 전에도 말했지만 살다가 네 힘으로 사는 게 힘들어져서 다시 널 팔고 싶어지면 가장 먼저 날 찾아와.”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절대 앞으로는 스스로를 팔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또 자신을 파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앞으로는 절대, 저를 파는 일 없습니다…….”
“그럼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태운이 고개를 들어 혁진과 눈이 마주쳤다.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태운은 다시 눈을 테이블로 내렸다.
“하지만, 제게 왜 이렇게까지…….”
혁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했다.
“대체 뭐가 문제야.”
태운은 입술을 악물었다. 혁진이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혁진이 가깝고 다정하게 느껴지는지도.
“전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같은 말 계속 반복하는 거 재미없어.”
혁진은 그렇게 말하며 태운의 잔에 술을 채웠다. 태운은 경직된 손으로 잔을 잡고 고개를 돌려 다시 또 술잔을 비웠다.
“내게 뭔가를 다시 돌려주고 싶다면 가끔 이렇게 와서 술이나 마셔.”
태운의 시야가 흐려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다시 태운이 눈을 떴을 때는 처음 들어와 보는 침실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인지 혁진에 의해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주량을 넘겼기 때문인지 물에 젖은 솜처럼 몸도 정신도 축 처졌다. 다만 가끔 와도 된다는 혁진의 그 말만이 태운의 멍한 머릿속을 떠돌았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