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기르지 않는 카나리아 (6/15)

6. 기르지 않는 카나리아

태운을 만나기 전까지 혁진은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람이 어려웠던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혁진은 조부에게 숫자로 세상을 확인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을 배웠다. 곁에서 복심을 숨기고 입안의 혀처럼 구는 수많은 사람을 조부가 어떻게 다루는지 지켜봤다. 그런 혁진에게 사람은 조금 복잡한 숫자일 뿐이었다.

태운을 만났을 당시 혁진은 인생에서 가장 짜증스러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혁진이 성인이 되기 전 이미 조부는 혁진의 제어권을 잃었다. 조부에게는 더 이상 혁진밖에 후계의 선택지가 없었고, 혁진은 후계 자리에 크게 미련이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혁진을 억압한다면 그는 미련 없이 후계 자리를 던져 버릴 것을 알아서 조부는 혁진에게 아무것도 강제할 수 없었다.

조부는 본인의 건강이 나빠지는 신호가 보이자 혁진의 빠른 귀국을 바랐지만 그는 기어코 하고 싶은 공부를 전부 마친 후에야 귀국을 택했다.

조부는 귀국한 혁진에게 경영 전반을 위임했다. 새파랗게 어린 이십 대 후반 후계자의 경영 참여에 대해 반발과 우려가 엄청났다. 하지만 혁진은 거칠 것이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어 살아온 인생이었다.

방만한 부분은 쳐내고 취할 것은 취했다. 새파랗게 어린, 손자뻘도 되지 않는 애송이가 핏줄을 잘 타고났다는 이유로 본인들이 한평생 가꿔 놓은 인생과도 같은 회사를 상의도 없이 정리해 나가자 임원들의 저항이 엄청났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무작정 이를 드러내는 사람, 조부의 사후를 준비하며 우선은 몸을 굽히고 보는 사람, 그리고 어떻게든 혁진과 친분을 만들어 혁진을 조종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더 나아가 본인의 손녀나 딸을 혁진과 혼인 관계로 맺어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혁진이 머무르는 객실의 키를 빼돌려 그 안에 접대부를 넣어 놓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다.

귀국을 하고 조부는 혁진이 본가로 들어오기 바랐지만 혁진은 거처를 호텔로 정했다. 따로 집을 구하지 않은 것은 조부에 대한 배려였다.

잠깐의 휴식을 위해 객실로 돌아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태운을 발견했을 때 혁진은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천박한 로비를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기에 이렇게 천박한 수를 쓰는지 짜증이 치밀었다.

심지어 상대는 남자였다. 혁진은 그때까지 살면서 한 번도 같은 성별을 가진 남자와 몸을 섞을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질린 얼굴 때문인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며 하는 애원 때문인지 처음에는 태운이 성인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었다.

그 와중에도 예쁜 얼굴이라고는 생각했었다. 몸을 파는 것보다 차라리 매체에서 웃음을 파는 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스쳤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접대는 절대 혁진이 용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태운을 알몸으로 객실에서 쫓아내고 배후를 색출해 내는 데까지는 채 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혼비백산한 얼굴을 한 호텔 사장이 헐레벌떡 내려와 몸을 숙이고 배후를 술술 발설했다.

그 배후는 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을 혁진의 외가 쪽 친척이라고 칭하는 인간이라 했다. 워낙 손이 귀한 집안인 탓에 조부를 제외하면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혁진에게 줄 댈 곳이 없었는데 외가 쪽 친척이라고 하니 호텔 사장도 넘어가 키를 넘겨준 것 같았다.

소식을 들은, 이 모든 일을 계획한 박재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에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모친의 유산으로 상속받은 주식 때문인지, 자신들을 혁진의 외가로 칭하는 재성의 핏줄들이 어떻게든 혁진과 줄을 대 보려고 하는 건 이따금씩 있던 일이긴 했다.

혁진은 모친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우유부단한 아들의 성정이 제 아내의 과보호 때문이라고 생각한 혁진의 조부는 쉽게 휘두를 수 있는 집안의 성품이 곧고 똑똑한 며느리를 직접 골라 아들과 짝지었다.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파트너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혁진을 조부가 빼앗아 가려고 하자 혁진의 부친은 양육권을 혁진의 모친에게 넘기고 이혼을 준비했다. 그것은 부친이 태어나 처음으로 제 아버지에게 했던 반항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당연히 실패로 돌아갔다. 분노한 조부는 며느리의 친정에 대한 모든 원조를 끊었다. 태경의 원조만 믿고 사업을 규모를 키우던 재성은 당연히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혁진의 모친이 이혼 후 혁진의 친권과 양육권을 포기하고 다시는 찾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위자료로 받은 것이 지금은 재성 화학으로 사명을 변경한 태경 화학의 지분이었다. 현금이 아닌 지분으로 위자료를 지급한 이유는 끝까지 며느리를 제어하겠다는 조부의 집요함이었다.

조부가 알짜 기술은 다 거둔 후 회사를 며느리에게 넘겼지만 태경화학은 작아도 꽤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던 회사였고, 거기서 나오는 자금으로 재성은 계속해서 사업 규모를 키워 나가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재성 화학이 보유하게 된 계열사들의 지분은 후계 싸움이 한참 진행 중인 와중에 판도를 흔들 정도였다.

노령의 몸을 이끌고 미국까지 찾아온 외조부가 이 지난한 다툼이 정리될 때까지 지분을 가지고 있으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 몸을 숙인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혁진은 그 주식을 처분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힘을 실어 주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혁진은 그 일을 계획한 박재열과 호텔 사장을 비롯해 이 기회로 곁을 노리던 승냥이들을 단숨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귀국한 지 채 반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후로 다시는 혁진에게 얕은 수를 쓰는 사람이 없었다.

일이 마무리 될 때까지 삼 개월. 살면서 가장 정신없었던 시간이 지나고 입지가 공고해지자 왜인지 자꾸만 어색한 몸짓과 웃음으로 애원하던 물기 있는 하얀 얼굴이 생각났다.

남자와 잘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끝나기 전에 혁진은 포주에게 대가를 내어 주고 태운을 눈앞으로 데려왔다. 혁진의 인생에서 최초로 한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행동의 결과로 수족이 다 꺾여 있던 포주는 크지 않은 대가에도 반색을 했다. 혁진은 포주와 직접 상대를 하고 싶지 않아 변호사에게 일임했다.

두 번째로 눈앞에 데리고 왔을 때 동성과의 잠자리가 가능할까 생각을 하기 전에 혁진은 태운을 침대에 눕혔다. 혁진은 태운을 제외하면 이렇게 사람을 충동적으로 대해 본 적이 없었다. 이태운과의 관계는 그런 식이었다.

울먹이는 얼굴을 보며 대체 왜 그런 얼굴밖에 할 수 없냐고 묻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그렇게 묻지 않았다. 다만 이태운에게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지시했다.

만남의 횟수가 점점 늘어 가면서 태운은 처음처럼 울음 가득한 얼굴도 어색한 웃음도 짓지 않게 되었다. 건조했다. 마치 도구라도 된 것처럼 버석하게 굴었다. 만족하지 못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대신에 연예계의 더 높은 곳으로 이태운을 끌어 올리라고 다시 지시했다. 하지만 이태운은 정상에 올랐을 때에도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섹스 토이라도 되는 듯 구는 태운에게 혁진도 점점 익숙해졌다.

그렇게 지속된 관계였다. 왜 자꾸만 찾게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계속 이태운을 호출하고 있었다. 태운이 계속 울었다면, 아니 차라리 환하게 웃어 주었다면 조금 더 빠르게 태운을 품 안에 넣게 되지 않았을까. 뒤늦은 생각이었다.

* * *

혁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혁진의 표정 변화에 그의 앞에서 정자세로 대기하고 있던 비서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혁진이 지금 미간을 좁히고 읽고 있는 서류는 비서실을 통하지 않고 혁진에게 직접 보고된 것이었다.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어 더 초조했다.

혁진은 수천억 원의 손실을 보았을 때도 결코 한 톨의 표정 변화도 없이 이후 수습 방안들을 지시할 정도로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언론에서는 그런 그를 기계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 면모는 측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에게조차 마찬가지였는데, 혁진의 앞에 정자세로 서 있는 비서는 그를 유학 시절부터 십 년 넘게 수행했지만 이 정도로 혁진의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후 일정이 어떻게 되나.”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던 비서는 머뭇거림 없이 오늘 스케줄을 전부 말했다. 점심 오찬을 시작으로 잡혀져 있는 회의들. 예정되어 있는 일정들을 열거하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전부 취소해.”

분 단위로 짜인 스케줄은 취소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오찬은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직접 주관하는 것이었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비서의 입에서는 그렇게 처리하겠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어차피 혁진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서는 맹렬한 속도로 남아 있는 스케줄을 정리할 방법을 강구해 내기 시작했다. 그런 비서에게 나가 보라고 손짓한 혁진은 코트를 걸쳐 입었다. 비서가 혁진의 뒤를 따랐지만 혁진은 따라붙지 말라고 지시했다.

전례 없는 일에 비서진들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서로 눈짓했지만,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처음에는 정말 태운을 그대로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딴따라 하나 죽여 버리는 일 따위는 혁진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태운이고 그 포주고 싸잡아 죽여 버릴 생각이었는데. 손을 쓰기도 전에 알아서 죽어 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속에서 알 수 없는 것이 치받아 올랐다.

성관계가 찍혔다는 웃기지도 않은 동영상을 회수했다. 보안에 신경을 쓴 것 같았지만, 그것을 해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너무 쉬운 회수에 혁진은 소속사 사장에게 사람을 붙였다. 전문가에게 이미 회수한 비디오가 원본이고 복사의 흔적은 없다는 답변을 받았지만 혹시라도 비디오가 더 존재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렇게 붙여 준 이에게 무엇인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연락이 왔다. 재성 엔터테인먼트 사장인 박재열과 이태운이 만나 함께 움직인다는 보고였다. 확인해 보라는 지시를 내리자 한참 후에야 이태운을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는 보고를 해 왔다. 상황이 급박해 우선 구조해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차를 몰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했다. 사고보다는 고의로 추락한 것 같다는 보고였다. 그때서야 혁진은 세상에서 사라지면 동생을 살려 달라고 말했던 태운이 생각났다. 그 처연했던 얼굴이 첫 만남 때 하얗게 질려 울먹거리던 어린 얼굴과 겹쳐지자 혁진은 속에서 무엇인가가 역하게 치받아 올랐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과 타협했다. 살면서 한 번도 결정한 일을 스스로 그르쳐 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스스로를 어겼다. 그렇다면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분칠하는 광대 따위 다시는 보지도 않겠다. 살려서 병원이든 어디든 눈에 띄지 않게 처박아 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태운에게서 신경을 끄려 했다.

하지만 오전 중 서류로 받은 보고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서류에 기록된 이태운은 생각보다 더 어이가 없었다. 혁진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는 태운을 호텔 객실로 데려다 놓으라고 지시했다.

혁진은 비서들을 물리고 직접 운전해 호텔로 들어왔다. 항상 현관 복도와 응접실 사이에 부품처럼 서서 혁진을 기다리던 태운이 없었다. 혁진은 따로 태운을 찾는 기색 없이 침실 문을 열었다.

그곳에 태운은 온몸에 깁스를 감고 침대 위에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혁진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던 태운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혁진을 올려다보았다. 혁진은 마주쳐진 태운의 눈동자를 보고 미간을 더 좁혔다. 마주친 태운의 눈동자가 꼭 싸구려 까만 플라스틱 같았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태운.”

평소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한 기색의 얼굴로 고개를 푹 하고 숙이던 태운은 그저 가만히 혁진을 응시했다. 아니, 초점 없는 눈은 응시를 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확인이 되지 않았다.

혁진이 태운에게 다가가 뺨을 쳤다. 정신을 차리라는 의도로 별다른 타격 없이 친 것이었지만 태운은 자극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태운.”

혁진이 다시 한 번 불렀지만 태운은 전혀 미동이 없었다. 혁진이 태운의 앞으로 가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저항 없이 고개가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태운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이태운.”

혁진은 태운의 이름을 세 번째 불렀다. 하지만 태운은 소리를 듣는 기색이 없었다. 손에 쥔 머리채를 당기자 태운이 무게 없이 딸려 왔다. 머리채를 잡았던 손을 놓고 다른 손으로 억지로 턱을 쥐어 눈을 맞췄는데도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 앞을 보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이태운.”

다시 불렀지만 태운은 답하지 않았다. 혁진은 그대로 태운을 놓았다. 태운은 전혀 몸에 힘을 주고 있지 않았던 것인지 그대로 침대 위로 무너졌다.

태운은 눈을 뜨고는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몸이 스스로 생명 유지를 위한 활동을 할 뿐 정신은 깊숙한 어딘가에 묻혀 올라오지 않았다. 혁진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빈틈없이 고정되어 있던 머리가 혁진의 움직임을 따라 흐트러졌다.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그 행동은 혁진이 살면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행동이기도 했다.

혁진은 태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보고받았던 서류의 내용을 되짚었다. 혹시라도 있을 다른 비디오를 대비하여 혁진은 이태운과 그의 포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그렇게 보고받은 서류에는 이태운은 존재했지만 또 존재하지 않았다.

섹스가 끝나면 건조하게 요구 사항을 적어 혁진이 붙여 준 변호사에게로 보내오던 태운이 오 년 동안 개인적인 용도로 쓴 돈은 본인의 드라마 한 회 출연료보다도 적었다. 사치를 하는 것도 아니고 동생의 병원비를 제외하면 고작 책 몇 권을 사는 것 정도가 다였다.

자신에게서 태운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된 주식이나 토지 등은 전문가에게서 운용되다가 재성과 관련된 주식을 매입하는 데 사용됐다. 그리고 그것에는 모두 소속사 사장이 관여되어 있었다.

이태운이 그동안 몸을 팔아 얻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혁진은 생각을 했다. 이태운을 스타로 만들기 위해 초기에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하기는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활동에 도움을 준 것은 광고 몇 개와 돈뿐이었다.

심지어 이태운의 영화나 드라마에 투자한 돈은 배로 수익이 돌아오기까지 했다. 업계 관행보다 큰 투자금을 지불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태운의 캐스팅에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 후에는 오히려 주식이나 토지로 화대를 지불했다. 그러다 비디오까지 그 생각이 확장되자 혁진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겨우 그 정도로 이태운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혁진은 방향을 정했고 다시 정한 방향대로 조사를 지시했다. 죽어 가는 것을 살리라고 명령했을 때 이미 혁진은 태운을 죽이는 것에 실패한 셈이었다.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다시 보지도 않겠다. 혁진은 핸드폰을 꺼내 태운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우라고 명령했다. 혁진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에 침실에서 빠져나갔다. 미닫이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태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

다시 전달받은 자료에 따르면 재성 내부의 후계 싸움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재성은 장남의 모친과 차남과 차녀의 모친, 그리고 소속사 사장의 모친이 모두 달랐다. 다른 남매들이 모두 외가의 지원을 바탕으로 경영권 싸움에 참전한 것과 달리 소속사 사장인 박재열은 배경이 없었다.

그래도 오 년 동안 차명으로 모아 온 재성의 지분이 상당했다. 그 지분의 매입 자금으로는 자신이 태운에게 주었던 것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태운도 알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경고도 했었는데 정황상 태운은 정말 몰랐거나 알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밀리에 진행한 일임에도 박재열은 내부에서 정보가 새고 있었던 것은 몰랐던 듯했다. 강찬혁이라고 했던가, 그런 이름의 배우였다. 박재열은 그 배우에게도 굉장한 원한을 산 것 같았다.

박재열은 연예인을 데리고 포주 짓을 하는 것 외에도 고급 텐 프로를 운영하면서 정보를 모으고 접대를 했는데, 그곳을 박재열의 정부가 관리하고 있었다.

강찬혁은 굉장히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그 정부를 꾀어내 정보를 빼돌린 뒤 후계 싸움에 가장 앞서 있던 장남 박주열에게 넘겼다. 박주열은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역으로 강력한 경쟁자인 차남과 차녀를 함정에 빠뜨렸다. 처음부터 박재열은 경쟁 대상조차 아니었다.

박재열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장남인 박주열에게 승기가 확실하게 넘어간 후였다. 태운을 이용해서 혁진이 가지고 있던 재성 화학의 주식의 의결권을 위임받아 어떻게든 승기를 뒤집으려 했던 것 같았지만, 실패였다.

그 과정에서 박재열이 태운의 동생의 병원 앞으로 조직폭력배를 보내 무력시위를 했던 정황들 또한 확인됐다. 그렇다면 태운은 얻는 게 하나 없음에도 처음에는 돈 때문에, 나중에는 협박을 당해서 제게 몸을 내어 준 것이었을까. 혁진은 난생 처음 막막하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 * *

시간이 흘렀지만 태운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의사는 정신적인 문제라고 진단을 내렸다. 스트레스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결국 태운은 스스로를 놓아 버렸다는 것이다.

약물적인 치료를 겸하고 있었지만 회복에 필요한 것은 태운 본인의 의지라고 했다. 스트레스를 최대한 받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치료의 전부였다.

태운은 하루의 대부분을 잠을 자는 데 사용했다. 별다른 외부의 자극이 없으면 하루 종일 잠에서 깨지 않기도 했다.

태운의 위로 따스한 봄 햇살이 창 밖에서 쏟아졌다. 그리고 그 햇살이 태운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눈이 부시지도 않은지 태운은 움직임이 없었다. 태운은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 떴다. 인형 눈의 깜빡임처럼 움직이기는 했지만 생기는 없었다.

태운의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말랐던 몸은 뼈밖에 남지 않아 있었다. 손목에는 영양 주사를 꽂았던 흔적들이 가득했다. 격식을 갖춘 실내복 차림을 한 혁진은 문가에 멈춰 서서 표정 없는 얼굴로 팔목에 링거가 꽂힌 채 잠들어 있는 태운을 내려다보았다.

혁진은 답이 명확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었다. 혁진의 세상 속의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었고 거기서 발생한 어떤 문제라도 답이 있었다. 그리고 혁진은 그 문제들의 답을 알고 있었다.

혁진 인생에서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는 지금까지 이태운이 유일했다. 대체 이태운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의 감정조차 답이 보이지 않았다. 혁진은 태운의 머리맡으로 걸어갔다. 협탁에서 수면제가 들어 있는 통을 집어 들었다. 분 단위로 짜인 일상을 사는 데 있어 잠은 필수였다.

잠이 들기 위해서 수면제만 들고 다른 침실로 이동할 생각이었는데, 이태운을 보자 그것이 되지 않았다. 이태운을 다시 호텔로 데려오라 그랬을 때와 같은, 살면서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었던 명확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이태운.”

오 년 동안 몇 번 불러 본 적 없던 이름이 혁진의 입안에서 다시 울렸다. 하지만 소리가 되어 퍼지는 것은 알 수 없는 이의 이름이었다. 혁진이 답을 알 수 없는 것은 태운뿐이었으니까. 태운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다시 모든 것의 답을 알고 있는 명확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에게 느껴지는 살의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는 혁진에게 낯설었고 동시에 어떤 답답한 감정을 갖게 했다. 그 감정은 분노의 어느 한 면과 맞닿아 있었다.

혁진은 태운의 얇은 목 위로 손을 올렸다. 살면서 한 번도 사람에게 이렇게 감정적으로 동요되어 본 적이 없었다. 이태운은 혁진에게 많은 것들을 처음 겪게 했다. 혁진은 태운의 목을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자극에 태운은 힘없이 눈을 떴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태운은 그저 눈만을 규칙적인 속도로 깜빡일 뿐, 다른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그대로 죽음을 순응하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태운.”

혁진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는 짐승처럼 낮았다. 태운은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붉어진 얼굴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하지만 태운은 그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낯선 한숨을 내쉬는 혁진의 손에서 힘이 풀었다. 켁켁 하고 기침을 내뱉던 태운은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분노인지 뭔지 저도 모르는 감정이 혁진의 가슴에 숨어들었다.

답답하고 숨이 쉬어지지 않으면서 뱃속에 있는 뜨거운 짜증이 머릿속까지 올라가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시트 밑으로 숨어든 태운은 어느덧 진정되었는지, 시트 위로 드러나는 등의 오르내림이 규칙적으로 변했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혁진은 등을 돌렸다. 대체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몸속에서 뽑아낼 수 있는지 혁진은 알 수 없었다. 침실을 빠져나가는 혁진의 입에서는 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 * *

그날 이후 혁진과 태운의 기묘한 동거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는 않았다.

혁진은 태운을 무시했다. 자신이 평소 사용하던 침실 안에 태운이 머물고 있었지만, 혁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던 공간인 양 그곳에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은 계속해서 혁진을 강타하고 다시 깊은 곳으로 숨었지만 혁진은 그 감정조차도 무시했다.

한 번씩 태운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 충동은 혁진 스스로도 끊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혁진의 일상은 평소와 전혀 다름없이 분 단위의 스케줄로 이행되었고, 호텔에서 상주하고 있는 의료진들에 의해 태운의 치료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 년에 겨우 몇 번, 혁진이 이르게 귀가한 날이었다. 일주일 동안 유럽 다섯 개국의 지사를 방문해야 했던 빠듯한 스케줄과, 그에 따른 장시간 비행 탓에 혁진의 몸에는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본사에 들러 긴급한 사안들에 한하여 간단한 보고를 받은 혁진은 오전 중 호텔로 귀가했다. 피로를 풀기 위하여 개인 피트니스에서 운동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혁진이 퇴근하리라고 의료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의료진이 태운에게 한쪽 벽이 전부 통유리로 되어 햇빛이 쏟아지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곳에서 햇볕을 쬘 것을 권유해 태운은 의자에 앉아 유리를 마주보고 있었다.

현관 복도를 걸어 응접실에 들어오던 혁진은 발걸음을 멈췄다. 햇빛 속에 갇힌 것 같은 태운을 발견한 탓이었다. 혁진은 한참 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이태운에게 햇빛이 참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신체에 남은 부상들은 치유가 되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전혀 나아지지 않은 상태였다. 식사를 하고 간단한 거동도 하고 있었지만 결코 그것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는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햇볕을 쬐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가끔은 이렇게 자신의 의지로 창가에 나와 앉아 있기도 했다.

이태운을 무시할 생각이었는데 햇볕에 갇힌 것 같은 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심지어 무시할 수조차도 없게 되어 버렸다. 혁진은 자신이 태운에게 왜 이렇게 안달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놓아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눈앞에서 치워 버리더라도 적어도 이 꼴로는 안됐다. 혁진은 태운을 향해 걸었다. 혁진의 발걸음에는 소리가 없었지만, 상대로 하여금 느껴지게 하는 위압감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태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혁진이 태운의 앞으로 서서 말없이 태운의 턱을 들어 올렸다. 홀쭉해진 뺨 때문에 태운의 이미지는 더 날카로워 보였다. 하지만 혁진은 저 얼굴이 얼마나 연약하게 일그러지는지 알고 있었다.

툭툭 하고 손가락으로 뺨을 두드리는데도 태운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목이 졸렸을 때도 그랬으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파랗게 자국이 남았던 태운의 목에서는 어느새 멍 자국이 전부 빠져 있었다.

태운의 목으로 손을 내린 혁진은 다시 태운의 목을 쥐었던 것처럼 힘주지 않고 감싸 쥐었다. 따뜻한 태운의 체온이 혁진의 손 안에 느껴졌다. 이 체온을 알았다.

다시 손을 내려 태운의 앙상하게 드러난 어깨를 쓸었다. 둥그스름한 어깨는 살이 내려 있었다. 혁진이 그 어깨를 계속해서 쓸자 태운은 그 체온에 나른해졌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혁진에게로 쓰러졌다. 그 꼴을 보고 있자 혁진에게도 그동안 잊고 살았던 졸음이 몰려왔다. 혁진이 그런 태운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태운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다행히도 앉아 있는 의자 밑으로 떨어지지는 않고, 가슴과 허벅지가 닿는 불편한 자세가 되었다.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태운을 그렇게 두고 갈 수 없었다. 혁진은 태운을 품에 안았다. 인형처럼 푹 안겨 오는 품이 이상했다.

결국 혁진은 태운을 품 안에 넣은 채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난방이 되고 있는 대리석은 딱딱했지만 차지는 않았다. 태운은 인형처럼 혁진의 품 안으로 축 늘어졌다. 밀려오는 졸음에 혁진은 눈을 감았다. 침대가 아닌 바닥에 누워 잠에 드는 것은 자라면서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행동이었다.

혁진은 눈을 떴다. 품에는 여전히 태운이 축 늘어져 있었다. 밀려오던 졸음이 지나가자 혁진은 저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혁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태운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태운의 머리칼에서 느껴지는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태운의 머리는 제법 길어 있었다. 혁진은 그 머리를 휘어잡으면 태운에게 드러나는 굴욕 어린 표정을 알았다. 하지만 그 머리칼이 이런 느낌인 것은 알지 못했다. 혁진은 태운의 머리칼들을 손안에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손 안에 감기는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낯설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애초에 태운처럼 그런 천박한 방식으로 접근해 오는 인간을 다시 찾은 것부터가 혁진답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손 안에서 튕겨져 나가려고 하는 태운에게 혁진은 몇 번씩이나 다시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처음부터 자신답지 않은 선택이었음을 혁진은 인정했다.

품 안에서 태운을 놓고 혁진은 일어섰다. 태운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혁진이 사라지자 태운은 둥글게 몸을 말았다. 그 모습에 혁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태운을 뒤로하고 욕실로 걸어가던 혁진은 소파에서 태운이 사용했을 것이 분명한 얇은 담요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태운에게로 발걸음을 돌려 태운의 위로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러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완전히 품에 안아 들고 침실로 걸어 들어갔다.

* * *

태운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반년 가까이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텔레비전을 위시한 각종 매체들에서는 태운이 모델로 있는 광고들이 쏟아져 나왔고, 평소에도 매체에 사생활에 대한 노출이 없는 태운이라 대중들은 태운의 부재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슈에 민감한 기자들조차도 으레 있는 휴식기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태운은 더 좋아진 것도 더 나빠진 것도 없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그랬다. 혁진은 안정제를 맞고 잠들어 있다는 태운을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러운 발작이었다고 한다.

간호사 출신의 간병인이 의료진을 대동해 욕실에서 몸을 씻기는 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발작을 일으켰다고 했다. 의사가 바로 처치하고 안정제를 주사해 잠을 재웠다고 하지만 다시 또 한나절이 넘게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혁진은 남은 일정을 파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여간 애를 먹인다는 생각이었다. 혁진은 자신이 태운을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태운.”

요즘 들어 익숙해진 이름이었다. 의사는 물에 의한 트라우마를 예상했다. 그리고 혁진에게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혁진이 가하는 어떠한 것에도 순종하던 태운이 드물게 거부감을 나타내던 거라 혁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오 년이란 시간이 짧은 것이 아닌지 이렇게 몇 개씩의 기억이 혁진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감내하듯 기계적으로 섹스를 하고, 섹스가 끝나고 나면 마치 계산서를 보내듯 대가를 청구해 오는 태운은 어느 순간부턴가 더 이상 혁진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했다.

태운이 건조하게 구는 만큼 혁진도 태운을 더욱 더 철저하게 물건 취급했다. 그리고 태운은 오히려 그것을 더 기꺼워했다.

그렇게 관계가 망가져 가던 때였다. 태운이 욕실로 들어왔고 혁진은 욕조 안에서 태운과 섹스했다. 욕조보다는 자쿠지에 가깝던 것은 태운이 바닥을 무릎에 대고 자세를 잡자 태운의 얼굴의 구멍 모두로 물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깊이였다.

혁진은 태운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태운은 미련하게도 결국 죽음과도 비슷한 공포를 견디며 혁진을 받아 내다가 나중에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 기절까지 했었다. 그 이후로 태운은 자의로 혁진의 욕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것 또한 태운에게는 수도 없이 많이 남은 트라우마 중 하나였다. 혁진이 억지로 태운의 어깨를 잡고 태운을 일으켜 앉히자 태운이 깜빡깜빡하면서 눈을 떴다. 혁진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혁진은 태운을 물기가 전부 마른 욕조 안으로 넣었다. 태운은 다리를 모아 무릎 안으로 머리를 묻었다. 버튼을 조작하자 욕조 안으로 적당한 온도의 물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불과 몇 시간 전 발작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태운은 미동이 없었다. 물이 태운의 허리를 넘길 정도로 잘박하게 채워지자 혁진은 버튼을 눌러 물을 잠갔다. 혁진은 이제 태운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내키는 대로 이태운에게 하고 나면 놓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저 충동이었다. 씻기는 도중 발작을 해 그만두었다고 해서 혁진은 그저 한 번 태운을 헹궈 낼 생각이었다. 혁진이 투박한 손길로 샤워기를 들고 태운의 목 아래로 물을 뿌리자 태운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혁진의 의도를 읽은 것인지 태운은 그렇게 혁진의 손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그 순간 혁진은 또 뱃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견딜 수가 없었다.

혁진은 젖은 옷을 벗어 내었다. 물기에 치덕치덕 젖은 태운은 침대에 누워 다시 잠에 빠져 있었다. 축축 늘어지는 태운을 헹구는 것은 이러한 일에 익숙하지 않은 혁진에게는 조금 무리가 있는 행동이어서 옷이 전부 젖어 있었다.

침대 위로 태운을 던져 놓은 혁진은 본인의 샤워를 위하여 그대로 욕실로 다시 돌아갔다.

* * *

비가 왔다. 겨울의 끝을 알리는 비이자 봄의 시작을 알리는 비였다. 꽃이 필 듯 포근해지던 날씨는 겨우 하룻밤의 비로 다시 겨울로 뒷걸음질 쳤다.

사람들은 옷장 깊숙한 곳으로 넣어 두려고 했던 겨울 점퍼를 다시 꺼내 입어야 했다. 하지만 태운이 머무는 일 년 내내 같은 온도를 유지하는 객실 안에서는 사람들의 분주함 같은 것은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태운은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얇은 옷차림으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 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쏟아지는 비가 잡힐 듯 가까이 느껴졌지만 그 차가움까지는 태운에게 닿지 않았다. 퇴근하고 현관에서 응접실로 들어오던 혁진은 창가에 인형처럼 앉아 있는 태운을 발견했다.

그리고 문득 제 손에 우산을 쥐어 주던 어떤 겨울날의 태운을 떠올렸다. 오래되지 않은 기억인데도 불구하고 아득했다. 혁진에게 우산은 그렇게 익숙한 물건이 아니었다. 우산을 씌워 주는 사람들은 있어도 그렇게 우산을 건네주는 사람은 없었다. 혁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태운이 어지간히 독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태운이 요구하는 것들에 혁진은 아무 가치도 느끼지 못했기에 그렇게 독하게 굴어야 하는 태운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태운에게 대가를 지불하기로 하고 침대로 불러들인 초기의 어떤 날이었다.

태운이 오 년 동안 살고 있는 서초동 빌라는 혁진이 매입해 태운의 명의로 돌려놓은 곳이었다. 혁진은 개인 비서를 통해 태운에게 그 빌라의 마스터키를 건네주며 그곳에 대기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스스로 천박한 수를 내어 자신에게 접근해 온 이태운을 다시 불러들인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반년 가까이 찾지 않았었다. 거기다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어 태운 주변으로 사람을 붙여 놓았었는데, 그에게 이태운이 세 달 동안 한 번도 외출을 하지도 않았고, 집안일을 봐주러 오는 도우미 아주머니 외에는 아무도 그곳으로 출입한 기록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 어지간히 독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빌라 출입 열쇠를 건네기 전, 섹스의 대가로 건네준 CF로 한창 이태운 자체가 이슈가 되었을 때라 더 그랬다. 단번에 CF 스타로 발돋움한 그를 찾는 곳은 많았기에 그때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면 제법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태운은 그러지 않았다. 혁진은 태운이 단기간에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더 큰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섹스를 해서라도 불면을 해소하기 위해 삼 개월 만에 태운에게 내어 줬던 빌라를 찾았을 때. 어떠한 예고도 없이 방문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음에도 기다린 듯, 거실에 멀찍이 서있던 태운을 보고 다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무엇이든 그렇게 감내해 냈던 태운이 처음으로 자신의 지시에 불응했던 게 그때였다. 할 말이 있는 듯 졸졸졸 뒤를 따르던 태운은 결국 입을 떼지 못하고 제 손에 우산만 쥐어 주려고 했었다.

지금 되돌려 생각해 보면 그때 태운을 처음 보았을 적, 왜 우냐고 묻고 싶었던 그 이상한 기분이 되살아났던 것 같다. 사람과 체온을 나누며 무언가를 건네받아 본 것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혁진의 주변에는 혁진을 어려워하는 사람들밖에 없었고, 그들은 혁진에게 어떤 물건이든 절대 손에서 손으로 건네주지 않았다. 그들의 방식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말인지 들어나 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사무실이나 혁진의 개인 비서를 통해 요구 사항을 건네 오던 태운이 직접 부탁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주제 넘는 부탁이라면 잘라 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부탁이었다.

차라리 그때 이태운을 잘라 냈어야 한다고 혁진은 생각했다. 태운 앞으로 걸어갔지만 태운은 혁진을 보지 않았다. 그저 의사나 간병인이 창가에 앉혀 놔서 앉아 있는 건지, 아님 창밖을 보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혁진은 태운의 머리카락을 눌렀다. 손 안의 감촉은 이제는 익숙해진 것이었다.

태운의 과거는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었지만 찾지 못했던 것은 소속사 차원에서 자료를 차단한 덕도 있지만, 그보다 과거를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 더 컸다.

소속사의 이미지 메이킹으로 태운은 명문대 출신의 엄친아 정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태운이 지금까지 작품에서 맡아온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이기도 했다. 활동하면서 중퇴를 했지만 명문대에 재학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태운이 마지막으로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은 초등학교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동생과의 생계를 꾸려 나가야만 했다.

미성년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태운을 고용한 업주들 또한 헐값에 이용할 수 있는 인력은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미성년자를 당당히 드러낼 정도는 아니었다. 때문에 태운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거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노동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태운은 검정고시로 학력을 이수했고 손꼽히는 명문대에 입학했다. 그 이후의 기록에 따르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장학금을 받았던 태운은 정말로 독한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태운의 동생도 공부를 제법 잘한 것인지 사학재단인 고등학교에 입학 성적으로 학비를 전액 면제 받은 것도 모자라 분기마다 장학금을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남매의 평범하던 일상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졌다.

아비의 도박 빚 때문에 찾아온 사채업자들이 태운의 동생을 빚 대신 성매매 업소에 팔아넘기려고 했던 정황이 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집으로 돌아왔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비의 사채 빚은 이태운이 갚은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 시기가 소속사와 계약을 맺은 시기와 일치했다. 하지만 박재열이 의도적으로 지운 것인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이후로 바로 혁진의 침실로 넣어졌고, 엄청난 인기와 부를 쌓았다. 하지만 태운은 그 시간 동안 한 번도 행복했던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혁진에게 맡기고 스스로 죽으려고까지 했었던 태운의 행동이 과연 극에 몰려 어쩔 수 없이 한 자포자기였는지, 아니면 어떠한 의도가 있었는지 혁진은 보고서만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알게 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비디오는 회수했고 박재열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태운은 당장 어떻게 해 버릴 수조차 없었다.

인생에서 처음 마주한 답이 없는 문제를 혁진은 차근히 풀어 나가는 대신, 문제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을 택했다.

푹신한 의자에 파묻히듯 앉아 있는 태운의 앞에 선 혁진은 태운의 머리칼을 투박한 손길로 쓸었다. 제법 익숙해진 감촉이었고 그만큼이나 익숙해진 둘만의 시간 공유였다.

완연한 봄이 되었다. 빌딩 숲에서는 꽃이 보이지 않았지만, 빌딩 숲을 벗어나면 꽃들이 완연했다. 태운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객실 곳곳에는 봄에 피는 생화들로 장식되어져 있었다.

봄이 되었고 아침이 빨라졌다. 파랗게 느껴지는 빛에 혁진은 눈을 떴다. 혁진의 품 안에는 태운이 있었다. 태운의 체온은 이상한 것이었다.

불면이 없어졌다. 그동안 혁진에게는 수면 또한 다음 스케줄을 위해 해야만 하는 필수적인 행위에 불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면이 반복적이고 의무적인 행위는 아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자고 있는 태운의 위로 시트를 덮어 주는 손은 익숙함 없이 투박하기만 했다. 혁진은 소리 없이 객실을 나갔다. 혁진이 출근을 하고나면 간병인이 올 것이었고 의사가 방문할 것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어느 봄이었다.

* * *

꿈속에서 남자는 이상할 정도로 다정했다. 자신의 머리를 쓸어 주기도 했고, 자신을 꽉 끌어안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 긴 한숨을 내쉬기도, 알 수 없는 눈으로 오래도록 자신을 응시하기도 했었던 것 같았다.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이상한 꿈이었다. 푹신한 침구에서 몸을 일으키던 태운은 밀려오는 현기증에 다시 침대에 몸을 뉘일 수밖에 없었다. 시트에 머리를 댄 태운은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두통이 겨우 잦아들 때쯤 눈을 뜬 태운은 이곳이 낯설지 않은 공간이란 것을 기억해 냈다. 태운은 이를 악물었다. 어지러움에 휘청했지만 다시 몸을 눕히는 대신 다급할 정도로 빨리 몸을 일으켰다. 기억의 끝이 희미했다. 왜 이곳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태운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소속사 사장과 가드레일을 박고 강으로 추락한 기억이 났다. 태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곳은 남자가 묵는 호텔의 침실이었다. 죽었어야 할 자신이, 아니 죽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태운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었어야 했다. 자신은 죽었어야 했다. 그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태운은 심한 두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무언가에 의해 제지되었다. 태운은 당황해서 몸을 굳혔다. 태운의 움직임에 눈을 뜬 혁진은 익숙하게 밤새 굳어 있던 태운의 몸을 주무르고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태운은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되지 않아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태운의 하얀 이마에 혁진이 입술을 맞췄다. 그 순간 태운은 갑자기 현실감이 들어 얼굴이 붉어진 채 몸을 일으켰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낯설지도 않은 천장의 모습을 보며 태운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문까지 걸어가 손잡이를 잡았지만 그것보다 밖에서 열리는 것이 먼저였다. 문이 열리며 침실 안으로 발을 들인 것은 남자였다. 남자는 태운은 알지 못하는, 편안해 보이는 낯을 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태운은 남자를 보자 일단 사죄의 말부터 내뱉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차마 입을 열 염치도 없어서 태운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악문 혀에서는 피 맛이 났다.

그러나 그런 태운을 보는 남자의 표정은 이상하게 변했다. 잔뜩 화가 난 얼굴 같기도 하고 어딘지 알 수 없게 기운 빠진 얼굴 같기도 했다.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게 어떤 처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빨리 비디오를.”

“비디오는 알아서 해결한 지 오래야. 그 영상은 더 이상 세상에 없어.”

“아…….”

상황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은 남자의 모습은 하얗게 분노하던 것이었다. 고함을 지르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 남자의 분노는 두려웠다. 하지만 덤덤하기까지 한 남자의 반응에 태운은 그 이상의 두려움을 느꼈다.

태운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태운의 치아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조용한 침실 안을 울렸다. 태운은 자신의 치아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멈추기 위해 이를 악물었지만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런 태운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응시하던 남자는 들리지 않게 긴 숨을 내쉬었다. 생각했던 끝을 내줄 때였다.

“네 소속 회사와 네가 작성한 전속 계약서도 파기했다. 그쪽에서 더 이상 네게 간섭하지 않을 거야. 만약 그쪽 일을 계속 하고 싶다면, 새 회사를 찾아.”

“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의 연속이었다. 태운은 드물게 남자의 말에 말꼬리를 달았다. 남자는 표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와 네 관계도 끝이야.”

“무슨,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널 끝내겠다는 말이야. 앞으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네 능력껏 해결해야 할 거야. 네가 내 돈으로 사는 오 년 동안 열심히 무언가를 쌓아 왔다면 지금까지와 비슷하게 살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

태운은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태운의 얼굴에는 당황이 그대로 드러났다.

“전 도저히 사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래도 만약, 내가 주었던 것들을 잊지 못해 다시 이 지옥에 발을 담가야 하겠다면 나한테 와. 가장 비싼 값을 쳐서 사 줄 테니.”

남자는 그 말만을 마치고 태운에게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태운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남자가 사라진 자리만을 응시했다.

한참 만에야 태운은 침실 밖으로 나왔다. 멍한 얼굴로 태운은 객실을 빠져나갔다. 현관에는 태운 자신의 운동화만이 놓여 있었다. 태운은 대체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인지가 되지 않았다.

프라이빗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태운은 호텔을 벗어났다. 얇은 티와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전혀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

태운은 그제야 이미 봄이 되어 버린 날씨를 인지했다. 태운의 머리 위로 분홍빛 벚꽃 잎이 흩날렸다.

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