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살아 있는 욕망들의 밤
“뭐가 어떻게 돼 가고 있다 가타부타 말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태운이 사장실로 들어오자마자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태운은 말없이 문가에 가만히 섰다.
“뭐야 빈손이야? 그치가 네가 직접 건네도 이건 못하겠다고 그러디? 그렇다고 빈손으로 와? 그치 앞에서 죽겠다 협박이라도 해서 사인 받아 왔어야지.”
사장의 말투가 어딘지 조급해 보였다. 태운은 그냥 그런 사장을 말없이 응시했다. 태운은 사장이 자신과 남자의 관계를 조금 더 말랑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죽는다고 협박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할 남자가 아닌데.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사장의 얼굴에 당황과 함께 노기가 어렸다. 독기 찬 눈을 하긴 했지만 오 년 동안 순순히 따랐던 태운이 면전 앞에서 이렇게 거절을 말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았다. 사장이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소리가 요란했지만 태운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절 내치실지언정, 한 번 정하신 일 재고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씨발, 우리 톱 배우님이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 수 있게 됐나.”
사장이 어이가 없는지 다시 한 번 웃었다. 태운은 입안에서 말을 골랐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태운이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지쳤다. 침대에 누워 며칠이고 눈을 감고 자고 싶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은 고통이었다.
“왜, 이제는 아주 날 가르치려고?”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분, 제가 눈앞에서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하실 분 아니십니다. 한 번 아니라고 하신 일 재고하실 분도 아니시고요. 하지만 선을 넘지 않는 이상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사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태운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오 년 동안처럼은 안 되겠습니까. 그분이 내어 주실 수 있는 만큼만…….”
태운의 말에 사장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태운은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태운아. 오 년 동안 네가 얼마나 노력한지 내가 알지. 얼마 안 남았어. 그리고 이대로는 못 멈춰. 멈추면 내가 죽어. 그리고 너도 같이 죽어.”
“…….”
“네가 얼마나 깊숙이 일에 개입되어 있는지 모르지는 않잖아? 너도 이익이 될 것 같으니 그냥 보고만 있었던 거 아냐? 이대로 발을 빼겠다고? 내가 갈가리 찢겨지면 너도 무사하지는 않아. 재성에서 널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아, 강혁진 그치가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나? 아니 그 인간은 절대 겉으로 드러나면서까지 널 구하지는 않을걸?”
사장이 하하하. 웃었다. 웃고 있지만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정신 차려 이태운. 강찬혁이 뭐 때문에 그 모양이 됐는지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 놓고 이런 말이 나와?”
“…….”
“나 돌겠네. 씨발, 태운아. 강찬혁이랑 좆질하던 그 새끼가 강찬혁한테 얼마나 잘했는지 아냐? 강찬혁 앞으로 건물에 증권에 주식에…… 근데 지금 강찬혁 꼴을 봐. 그게 그 새끼들 생리야. 그치들은 자기들한테 불리하다 싶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발 빼.”
“…….”
“강찬혁이랑 영화 찍는다고 하더니, 강찬혁이랑 똑같이 멍청하게 구네.”
사장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태운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그것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태운 똑똑하게 굴어. 내가 이렇게 그만둘 것 같아? 네가 그치한테 서류에 사인 못 받아오면 내가 이렇게 아 어쩔 수 없네. 하고 넘어갈까 봐? 태운아. 내가 직접 나서면 너도 나도 같이 죽는 거야.”
“…….”
“그때는 내가 가릴 게 없지. 하루라도 내가 살아야 할 것 아냐? 내가 그치한테 뭘 들고 갈 거 같아?”
“…….”
“네가 찍은 비디오야.”
태운은 태연한 얼굴을 가장했지만 하얗게 질리는 하얀 얼굴을 가릴 수는 없었다. 눈을 길게 감았다 뜨자 티 나게 초조한 기색의 사장이 태운의 눈에 들어왔다. 태운은 한 번도 사장의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태운 자신이었다.
태운은 확연히 드러난 사장의 기색에 자신의 안색을 가다듬었다. 이대로 사장에게 말려들어 갈 수는 없었다.
“그분이 가만히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뒤에서 이를 갈겠지만 내가 비디오를 들고 있는데 당장 날 어쩔 건데? 호모란 게 드러나면 한국에서 사업 못해. 그치들 이미지가 니들 딴따라들만큼 중요하다고. 이를 갈면서도 당장은 내 요구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걸. 그 다음에는 나를 죽이려고 하겠지만 난 그만큼 시간을 버는 거야. 난 어떻게든 내 살 구멍을 찾아 낼 거고.”
“…….”
“태운아 근데 우리가 그렇게 죽을 자리인 걸 알면서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생각을 해. 이번 일만 잘 끝나면 난 재성으로 들어갈 거고. 본사 입성만 하면 너랑 이런 실랑이도 벌일 필요 없어. 좋게 좋게 마무리하자고. 이제 와 이래서 너한테 남는 게 뭐야. 이번 일 잘되면 네 앞으로 돌아가는 돈이 얼만지 몰라서 그래?”
사장이 파랗게 웃었다. 그 미소는 탐욕 그 자체였다. 돈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태운의 돈을 움켜쥐고 자신의 것인 양 휘두르는 사장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태운은 점점 더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죽음에 순응하고 있어도,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도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똑같다.
“곁에 사람 안 두기로 유명한 강혁진이 넌 그래도 오 년이나 끼고 있었잖아. 네가 대체 어떻게 그치를 녹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탁하자. 일만 잘 되면 그치한테도 나쁜 일은 아니야. 외가 경영권 다툼에 손댄다는 오명은 금방이지. 사람들 다 잊을 거라고. 그럼 남는 것은 손에 들어오는 이익이야. 위임장 하나 써 주는 건 네 생각만큼 그치한테 어려운 일도 아니야. 태운아, 응? 어떤 게 너랑 나랑 둘 다 사는 방법인지 생각을 해. 내가 네 동생 목줄 쥐고 너 흔들기를 바라는 건 아니잖아.”
사장의 말에 태운은 힘이 빠진 웃음을 지었다. 다급하고 초조해 보이는 사장은, 태운을 오 년 동안 무던히 괴롭혔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 교활하고 뱀 같은 이는 없었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인 것 같았다. 태운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소용없다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 * *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태운은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태운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사장은 대답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무슨 비가 이렇게 오냐.”
태운이 차에 타자 매니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비치고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태운은 눈을 감았다. 매니저가 그런 태운을 돌아보며 히터 온도를 높였다.
태운은 촬영장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매니저는 그런 태운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운전을 조심했지만, 태운은 잠에 들지 않았었다.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촬영 마무리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얼마 안 남았지. 오늘 촬영까지 5회차 남았어.”
매니저의 말에 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굴은 창백했고, 생각에 빠진 듯 표정이 없었다.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태운에게 묻지는 않았다. 차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비는 매서운 추위를 함께 몰고 왔다.
“오늘 촬영할 수 있으려나.”
매니저는 혀를 찼다. 세트 촬영은 모두 끝난 상황이었고 남은 촬영은 모두 야외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오늘 촬영이 시작된다면 이 빗속에서 해야 하는 것이었다. 매니저는 차라리 촬영이 취소되기를 바랐다.
태운은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는 법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표정이 전부 드러났다. 드러난 표정은 정말로 좋지 않았다. 매니저는 시동을 끈 뒤 커다란 우산을 들고 태운이 앉아 있는 문 쪽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차문을 열고 나오는 태운은 어둠속에서 더 창백해 보였다.
일단 대기실로 걸어가는데 우비를 입고 있는 촬영 스태프가 태운을 발견하고는 뛰어왔다. 태운과 매니저가 발걸음을 멈추자 잠시 숨을 고른 스태프는 말을 시작했다.
“감독님이 촬영 진행된다고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리허설 없이 한 번에 가신다고 촬영 준비 전부 하고 나오라고 하세요.”
매니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칠 것 같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빗속의 추격신이라. 아무도 반기지는 않을 테지만 감독은 좋아할 만한 그림이었다.
“괜찮겠어?”
“네.”
매니저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태운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매니저는 그런 태운이 왠지 더 걱정이 되었다.
“담배 줄까?”
태운은 대답을 하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매니저는 태운의 손 위로 담배와 라이터를 올렸다. 태운은 바로 불을 붙이는 대신 조금 걸어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 * *
강철은 살인에 대한 준비를 한다. 손 안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동생을 죽은 ‘그’를 죽이고 자신조차 목숨을 끊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는 발버둥을 치지만 눈이 돌아 자신을 잡으려는 강철의 손에 잡힐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겠어?”
태운이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다른 방법은 없었지만 매니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었다. 비로 시작된 물방울은 지면에 내려와 얼었는데, 눈이 아니라 얼음 조각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비가 몰고 온 찬 기운에 몸이 절로 움츠려 들었다. 발목까지 오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음에도 추위가 살을 파고들었는데, 촬영 때 태운은 패딩마저 벗어야 했다.
“추워 뒤지겠네.”
두꺼운 패딩을 입고 그 위에 또 패딩을 덮어쓴 강찬혁이 욕설을 내뱉으며 다가왔다. 강찬혁의 옆에는 감독이 서 있었다. 태운과 그쪽에 있던 스태프들이 감독을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그러게. 추워서 어쩌지.”
감독이 너털너털 웃으며 조연출에게 핫 팩 준비된 것이 없는지 물었다. 조연출은 찾아보겠다며 뛰어갔다. 태운은 이미 코디들에 의해 보이지 않는 옷 안쪽에 잔뜩 핫 팩이 붙어 있었지만, 추위를 막아 주지는 못했다. 화장으로 태운의 창백한 안색은 가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몸 상태가 나아지지는 않았다.
“오늘은 진짜 한 번에 가자고. 내가 추워서 안 되겠다.”
감독이 태운과 강찬혁을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감독과 제법 친분이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강찬혁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고 감독은 몇 마디를 더 받아줬다.
“너는 근데 볼 때마다 얼굴이 안 좋아지냐.”
감독에게 틱틱거리며 대꾸를 하던 강찬혁은 태운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태운은 괜찮다고 대답을 했지만, 감독마저 정말 얼굴이 안 좋다며 괜찮냐고 물어 왔다. 태운은 또 괜찮다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야, 살살 하자. 살살.”
때리고 쫓는 역의 태운도 고생인 촬영이었지만 쫓기면서 맞기까지 해야 하는 강찬혁은 더 고생인 촬영이었다.
“우리 영화 액션 영화 아닙니다. 배우님들. 멋있게 액션 연기하려고들 하지 마세요. 처절하게 갑시다. 아주 처절하게.”
감독의 너스레에 촬영장은 잠시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곧이어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고 슬레이트가 쳐졌다. 카메라 속의 태운의 눈빛이 단번에 바뀌었다. 지켜보던 스태프들이 흠칫 놀랐을 만큼 독기 어린 눈빛이었다.
“니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겁에 질린 ‘그’가 겁먹지 않은 척 애써 소리친다. 이미 목이 쉬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방금 전까지 태운에게 흰소리를 늘어놓던 강찬혁이 아니었다. 아무 말 없이 거친 숨만을 내쉬며 ‘그’를 노려보는 강철도 몸이 좋지 않아 대본조차 읽지 못했던 태운이 아니었다. 태운의 눈에는 사람을 질리게 할 정도의 광기가 반짝였다.
두 배우는, 아니 그와 강철은 처절하게 거리를 뛰고 또 뛰었다.
“일단 옷부터 벗자.”
차가운 비에 홀딱 젖어 얼굴까지 파랗게 변한 태운에게 패딩을 걸쳐 주고 수건까지 건넨 매니저가 말했다. 촬영은 배우들 외적인 이유 때문에 생각보다 길어졌고, 컷 사인이 났을 때는 태운도 강찬혁도 파랗게 질린 후였다.
태운은 수건을 받아 머리에 물기를 털었다. 그래도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감독은 촬영의 끝을 알리며 배우들을 서둘러 대기실로 이동시켰다. 대기실에 오자 후덥지근할 정도로 따뜻한 실내 온도가 설정되어 있었다.
“옷은 여기. 아무래도 옷 갈아입게 나가 있는 게 낫겠지?”
매니저의 배려에 태운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찬 기운에 태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매니저가 모두를 데리고 나가자, 태운은 젖은 옷을 벗었다. 지난 오 년 동안 태운과의 잠자리에서 태운을 자위 도구처럼, 아무런 애무도 동작도 없이 태운의 그곳을 이용하기만 했던 남자는, 최근에는 좀 이상했다. 태운은 남자가 이로 씹어 붉게 남은 자국들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태운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운전대를 놓고 머리를 헤드레스트에 쿵쿵 찧었다. 몸살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머리가 징하고 울렸다.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매니저를 물리고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확 트인 어디로든 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언제나 극으로 몰리면 찾게 되는 곳은 이곳이었다.
태운은 한밤중에도 환한 빛이 새어 나오는 거대한 병원을 올려다보았다. 저 병원 어딘가에는 동생이 있었다. 밤에는 호텔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한 남자의 명령이 생각났다. 태운은 머리를 계속해서 박았다.
눈 밑이 시큰했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새어 나오면 조금 괜찮아질 것 같은데,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가슴 밑에 무엇인가 얹힌 듯 답답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숨을 쉬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숨을 내쉬어 보았지만 목이 막힌 듯 숨이 내쉬어지지 않았다. 목에서는 윽윽 하는 괴로운 소리만이 났다.
태운은 조수석에 던지듯이 놓아둔 코트 주머니에서 다급하게 신경 안정제를 찾았다. 손에 집히는 대로 알약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약을 있는 대로 씹어 삼키고도 한동안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뇌가 문제인건지 어디가 문제인 건지. 태운은 억지로 짧게 호흡을 끊어 내었다. 한참이 지나자 약기운이 드는지 몸이 나른해지면서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태운은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내리치다가,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을 쐬자 조금 답답함이 가셨다. 태운은 그렇게 서서 병원을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었지만 동생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태운은 아정을 최고의 의료진과 시설을 갖춘 요양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녀에게 해 주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서 태운은 그 어떤 것이든 아정에게 최고로만 해 주었다. 하지만 아정은 제정신을 찾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었다.
겉에서 보기에 환한 건물과는 다르게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병원 안은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보안이 확실한 병원이었기에 태운은 동생을 담당하고 있는 간병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간병인이 로비까지 태운을 데리러 나왔다.
태운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15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15층까지 올라갔다. 태운은 등을 벽에 기댔다. 약 기운이 돌면서 몸에 힘이 풀렸다.
태운이 추적추적 걸었다. 창문 밖으로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동생이 있는 병실로 가기 위해 이동 통로를 건넜다. 통로는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 비 오는 어둑한 밤의 서울이 보였다.
동생은 잠이 들었다고 했다. 태운은 간병인에게 잠시만 자리를 비켜 달라고 말했다. 간병인은 이야기를 나누시라며 복도를 빠져나갔다.
오 년이었다. 아정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 저명하다는 의사도 그녀가 다시 본래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확답을 주지 못했다.
무서웠다. 동생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어서 자신이 끔찍해진 걸까 봐. 자신이 진저리가 나도록 끔찍해서 자신을 보면 발작을 하는 것일까 봐.
동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동생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까 두려워 동생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오 년이었다. 하지만 동생과 관련한 일들은 절대 무뎌지지 않았다.
태운은 그렇게 문 앞에서 망설이다가 등을 돌렸다. 도저히 병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죽어야지만 이 모든 것들이 끝나게 될 것 같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것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을 혼자 남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았다. 하지만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죽는다면 차라리 동생도 함께……. 이어지는 생각에 화들짝 놀란 태운은 서둘러 병실 앞에서 도망쳤다.
* * *
태운이 남자의 객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아침이 밝아 오는 시간이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태운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태운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긴 복도를 걸어 응접실로 들어오자, 응접실을 둘러싸고 있는 통유리에서 햇빛이 쏟아져 태운을 감쌌다.
태운은 눈이 부셔서 눈을 찡그렸다. 햇살이 피부에 닿아 따스한 잔상을 만들어 냈다. 그제야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햇살이 너무 따스해서 태운은 스스로가 너무 추악해 보였다. 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태운은 믿을 수 없었다.
태운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물을 닦아 낼 수도 없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 발자국을 뗄 힘도 없어 태운은 그렇게 서 있었다. 남자가 욕실을 빠져나온 것은 그때였다.
태운은 남자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그렇게 햇살 속에 서 있었다. 남자는 태운의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남자는 태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태운을 응시했다. 태운이 남자의 기척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어 올릴 때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태운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을 때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태운은 도무지 참담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죄송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태운의 말에 남자의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태운은 입을 열었다. 입에 맴도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가 않았다. 무엇인가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얽매였다. 구토가 밀려 올라올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태운에게는 여전히 햇빛이 쏟아졌다. 창백해진 안색 때문에 정말로 햇빛 속으로 사라질 것 같은 처연함이 있었다. 남자가 태운에게로 고갯짓을 했다. 태운은 손목의 소매로 눈물을 대충 훔쳤다.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남자에게 걸어갔다.
남자의 고갯짓이 의미는 항상 펠라티오였기 때문에 태운은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으려고 했지만, 태운이 남자에게 세 발자국 정도 남기고 다가오자 남자가 등을 돌렸다. 태운은 남자의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멈칫하다, 곧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남자의 뒤를 따랐다.
남자가 들어간 곳은 식당이었다. 태운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태운은 남자에게 다가가 남자 옆자리의 의자를 앞으로 빼내었다.
태운의 행동에 남자가 태운을 보았다. 하지만 태운은 의자에 앉는 대신에 의자는 멀찍이 밀어 놓고 식탁 밑으로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태운의 의도를 이해한 남자는 어이가 없는지 웃었다.
“시키지도 않은 짓 하지 말고 앉아.”
아, 태운이 남자의 말을 이해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먼저 남자가 가리킨 의자를 당겨서 앉았다. 남자와 나란히 앉은 어색한 모양새가 되었다. 태운은 반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남자가 식사 일 인분을 추가하는 소리를 들었다.
태운은 남자의 행동에 입을 악물었다. 아직 태운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함부로 입안을 맴도는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태운은 손톱이 살 안으로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침묵은 한참 이어졌다. 태운은 식탁 밑에 자신의 손만 응시했다. 남자는 무엇을 하는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태운은 그 숨 막히는 침묵을 또 견뎌내었다. 미칠 것 같은 자기혐오에 태운은 먹은 것도 없는 속이 울렁거렸다. 벨이 울렸다. 태운이 일어섰지만 그보다 남자가 일어서 걷는 것이 빨랐다. 남자가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태운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 서 있었다.
태운이 트레이에 붙어서 음식을 덮은 커버를 열자 남자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쟁반이 두 개 있고 그 위에 각각의 밥과 반찬, 김이 올라오는 국이 있었다. 태운은 쟁반 하나를 들어 남자의 앞에 내려놓았다. 자신의 몫으로 보이는 쟁반을 들고 남자의 앞으로 앉았지만 밥이 넘어가지는 않았다. 넘기는 대로 전부 토할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됐어.”
남자의 어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남자는 식사를 시작했고 태운도 억지로 입안으로 밥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어쩐지 단맛이 나는 따스한 밥이 입안에 들어오자 허기가 졌다. 태운은 웃었다.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제 몫의 식사를 마친 뒤 말없이 일어섰고, 태운은 반쯤 비운 자신의 밥공기를 뒤로하고 남자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남자는 태운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고 어떤 명령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제 뒤를 따르는 태운은 말없이 힐긋 보고는 객실을 나섰다.
남자가 출근을 하고 나서도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응접실에 서있던 태운은 코트를 뒤져 매니저에게서 받은 담뱃갑을 꺼내었다. 입 안이 썼다. 담배가 당겼다.
* * *
촬영장 분위기가 유독 소란스러웠다. 두 달 동안의 촬영이 마무리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런 어수선함도 태운의 대기실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태운은 소파에 길게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듯 미동이 없었지만, 가끔씩 내쉬어지는 깊은 숨이 태운이 잠들지 않았음을 인지시켰다.
그렇게 눈을 감고 어수선한 현장의 분위기를 뒤로하고 있던 태운이 눈을 뜬 것은 꾹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 때문이었다. 핸드폰에 진동이 시작되자 태운은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힐끗하고 매니저가 그런 태운을 응시했다. 이 주에 걸친 지난 세 번의 촬영 동안 태운은 한 번도 대본을 보지 않았다. 이따금씩 읽던 책도 손에서 놓았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했다. 챙겨 주면 식사를 했고 잠을 잤다. 하지만 대본을 보지 않는 태운이라니. 이상했다. 매니저가 아는 한 지금까지 한 번도 태운은 이렇게 대본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얼굴에 창백함이 짙어진 것 빼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매니저는 태운에게 물을 수 없었다. 태운은 테이블 위에서 낮게 진동하는 핸드폰을 집어 들지 않고 내려다보기만 했다. 액정에 표시되는 번호는 무거웠다. 벨은 끊기지 않고 오래도록 울렸다.
매니저는 그런 태운을 보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대기실에 혼자 남자 한숨을 내쉰 태운은 핸드폰을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전화 받을 수 있니?
핸드폰 스피커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미약하기만 했다. 태운은 낮은 숨을 내뱉었다. 아정의 친어머니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동생의 발작이 너무 심해져서 보호자가 병원에 오셔야겠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었다. 자신은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아정을 두고 집을 떠난 그녀의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아닌 척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동생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어머니의 번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가끔 고민하는 얼굴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 줬었다. 아는 척하면 아정은 분명 들고 있던 종이를 북북 찢어 낼 성격이었으니까.
태운은 항상 동생이 들고 고민하기만 하던, 색이 바래고 꾸깃꾸깃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연락이 되지 않거나 연락이 되더라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던 아정의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 낳았던 자식의 좋지 않은 상태를 알고는 그래도 한걸음에 달려와 줬었다.
하지만 동생은 마치, 자살 전 괴롭게 하였던 모든 걸 잊은 듯 어머니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태운을 볼 때처럼 발작하진 않았다고 해서 태운은 쓰게 웃었다. 그 후로 어머니가 종종 병원을 찾는다는 사실을 간병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껄끄러운 관계였고 그날 밤 이후 이렇게 직접적으로 연락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의례적인 안부 인사조차 할 수 없는 관계였다. 서로가 죄인인 탓이었다. 스피커 안쪽에서 중년이 되어 버린 여자의 망설이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태운은 아는 척하지 않았다.
―……이런 말 하는 거 염치없는 거 아는데, 혹시 아직 네 아버지 빚이 남아 있는 게 있나 싶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정이 병원에서 나오는데 좀 분위기가 이상한 남자들이 아정이랑 무슨 사이냐고 묻더라고. 느낌이 이상해서 그냥 도망쳤는데 계속 따라붙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한참 걷다가 보니까 없어졌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해서. 나는 괜찮은데, 아정이가 남자들만 보면 상태가 안 좋아져서……. 병실에라도 들어가면 큰일 날 것 같아.
동생의 어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태운은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빚은 전부 정리했다. 혹여 그때 알지 못하는 빚이 있었다고 해도 오 년 만에 갑자기 그 빚이 나타날 리도 없었다.
짐작 가는 곳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렇게 더러운 방법으로 경고를 남길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이었다.
“……제가,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미안해. 태운아.
망설임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태운은 그 목소리의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목소리 자체를 듣지 못했다. 가슴속에 묵은 감정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울고, 소리치고 싶었다. 태운에게서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사과를 한 아정의 친모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긴 줄도 모르고 한참을 멍하니 핸드폰을 귀에 붙이고 있던 태운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다른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태운의 목소리에는 고통이 절어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우리 배우님 내 전화 다 피하다가 이렇게 전화하는 거 보면 내가 배우님 동생 병문안 다녀온 보람이 있군.
“동생은 아무 상관없지 않습니까.”
태운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전화 안쪽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태운은 핸드폰을 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동생 여전히 존나 예쁘더라. 정신만 멀쩡했으면 나라를 말아먹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 미쳤어?”
―지금 감히 어디다 대고 소리를 질러? 왜 지금이라도 알아봐 줄까? 남창을 하는 새끼들도 있는데 정신 나간 년이랑 한 번 자고 싶어 하는 새끼는 없을까 봐? 오히려 더 인기 있을 수도 있어. 너 원하면 한번 알아봐 주고.
태운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다시 한번 스피커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태운은 바들거리는 입술을 혀로 자국이 날 정도로 아프게 물었다.
―니 동생 지금처럼 멀쩡하게 병원에서 치료받는 거 원하면 똑똑하게 굴어. 나 돌아 버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떨리는 양손을 태운이 마주 잡았다.
“당신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나한테 시간을 좀 주십시오.”
다시 전화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몇 마디 자기 할 말만을 다 한 사장이 멀어지며 전화는 끊겼다. 태운은 쥐고 있던 핸드폰을 벽으로 던져 버렸다.
큰 소리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가 놀란 눈으로 들어왔다. 괜찮냐고 매니저가 물어왔지만 태운은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엉망진창이었다. 괜찮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동생의 하얀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오로지 동생만을 위해서.
* * *
강철은 ‘그’를 칼로 찔렀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지만 손과 발이 묶여 있어 그저 몸부림에 그쳤다. 마트에서 구입한 칼은 사람의 살을 단번에 베어 내지 못했다. 그래서 강철은 ‘그’를 찌르고, 찌르고 또 찔렀다. 붉은 피가 그에게서 울컥울컥하고 흘러나와 강철의 손도 붉은 색으로 젖었다.
깊숙한 곳으로 박혀 들어간 칼은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강철은 그것을 뽑아내기 위해 힘을 잔뜩 주었다.
여고생을 강간하고 살인한 사이코패스. 그의 몸속에서 흐르는 피도 붉었다. 강철은 몇 번이나 칼을 찌르고 더 찔렀다.
“아악!”
그는 몰려오는 고통에 다시 몸부림쳤다. 바닥을 기었지만 움직임이 크지는 않았다.
“왜 그랬어? 왜, 왜, 내 동생은, 내 동생은 아무 잘못이 없잖아?”
서서히 죽어 가는 그를 처참하게 난도질하며 강철은 말했다. 모니터를 응시하는 감독은 숨을 죽였다. 칼을 쥔 태운의 손이 덜덜 떨려 왔다.
더 이상 ‘그’가 미동조차 하지 않을 때, 모니터 속의 태운은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내려다보며 울고 있었다. 그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이 터지듯 태운은 울었다. 소리조차 내지 않고 우는 태운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온몸에 튄 피와 같은 질감의 액체가 기괴함을 더했다.
아아. 하고 태운은 결국 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속에 있는 장기가 끊어지듯 고통스러운 비명이었다. 카메라 속의 그는 완벽한 강철이었다. 하지만 강철이 아니기도 했다.
감독은 그런 태운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뱃속에 무엇인가가 끓는 기분이었다. 지켜보는 이의 감정마저도 답답하게 만드는 비명이었다.
“너 정말 괜찮아?”
다시 물어오는 매니저의 말에 태운이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만들어 낸 웃음이었다. 매니저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매니저의 눈동자가 떨렸다. 나쁜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생기 없이 하루하루 죽어 가던 얼굴을 본 적 있었다. 태운이 꼭 사라질 것만 같아서 매니저는 태운의 어깨를 꽉 쥐었다.
“너 진짜 요즘 불안하게 왜 이래. 무슨 일 있는 거면 말해 줘. 내가 도움은 못되더라도 같이 고민해 줄 수는 있잖아.”
태운이 다시 웃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배려 있고 따뜻하고, 오 년 동안 예민하고 불안정한 자신을 추슬러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게 해 준 사람이었다. 항상 홀로 서야 했던 태운의 인생을 처음으로 돌봐준 사람이기도 했다.
“가끔 시간 나실 때 동생을 들여다봐 주세요.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태운은 또다시 웃었다. 좋은 사람이라 다시 짐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태운이 직접 입 밖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매니저가 태운에게 아픈 동생이 있다는 것과 그 동생에게 갈 수 없는 사정을 복잡한 가정사로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태운은 알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매니저는 태운이 동생에게 갈 수 없는 사정을 요즘 태운이 불안정한 이유와 연관 지었다. 애써 불안을 밀어내며 매니저는 걱정 말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태운은 매니저와 마주하고 쓰게 웃었다.
“형한테는 항상 감사하고 죄송해요.”
“내가 뭐 별일 했다고. 이제 촬영도 완전히 끝났으니까 좀 쉬면서 너 기운 좀 차리자. 살이 너무 빠졌어.”
“정말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매니저는 찝찝한 얼굴로 차에 올라타는 태운을 바라봤다. 무엇인가 기분이 이상했지만 콕 집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찝찝함이었다.
손 안에 든 서류 봉투를 내려다보는, 태운의 눈가가 붉었다. 촬영장에서 지나치게 눈물을 흘린 탓에 시간이 지나도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평소 배우 활동과 관련하여 도움을 받았던 변호사를 만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손 안에 준비된 서류는 태운이 지금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괜찮아?”
잠깐 변호사를 만나러 간다고 차를 세우고 갔다 오더니 넋이 나간 것 같은 태운을 보며 매니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태운은 듣지 못한 듯 대답이 없었다. 촬영은 무사히 끝났다. 감독은 마지막 장면을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편집에 따라 추가 촬영이 있을 수 있지만, 공식적인 촬영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간단한 회식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태운은 기운이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평소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집으로 가던 중 한 시간 가까이 상의할 일이 있다고 변호사를 만나고 와서는 아예 정신을 놓은 듯 이상했다.
“태운아?”
매니저가 다시 한 번 불렀지만 태운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매니저는 바람 빠진 웃음을 한번 내뱉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운전해서 도로로 빠져나오는데 태운이 그때 웅얼거리듯 말했다.
“……형. 호텔로 가 주세요.”
* * *
서류 봉투를 손 안에 쥔 채 태운은 응접실을 서성였다. 겨울이라 해가 길지 않았음에도 창 밖 하늘은 이제 조금 짙은 파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태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택에 자신은 없었다. 아니,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선택이 최악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욕실에 들어간 태운은 오래도록 남자를 맞을 준비를 하고 나왔다. 평소보다 더 시간을 들여 준비했다. 창백하기만 한 얼굴이 너무 최악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해서 밀려오는 역겨움을 참고 한참을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욕실에서 나오니 날은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남자의 귀가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호텔에 머무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확답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태운의 움직임이 점점 더 초조해졌다. 생각은 항상 더 최악으로만 치달았다. 초조함에 결국 손끝을 뜯다가 피까지 보고 말았다.
눈앞이 까맣게 변해서 태운은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태운은 계속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태운이 움직일 때마다 자동 센서가 부착된 응접실에 환하게 조명이 들어왔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태운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발끝만을 바라봤다.
찾아보면 다른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시간을 끌다 보면 다른 방법이 나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태운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소속사 사장에게 도움을 주면 소속사 사장이 재성의 본사를 차지하게 될 수도 있었다. 소속사 사장은 그렇게 하면 비디오를 폐기해 주겠다고 말했지만 태운은 믿지 않았다.
한 번 달콤한 지름길을 찾은 사장은 다시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지름길 대신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동생이 인질로 사용될 것이었다. 그 방법이 이번처럼 동생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의 경고일 것이란 보장도 없었다. 다시 아정을 인질로 이용하려고 든다면, 그래서 아정에게 나쁜 일이 생긴다면 태운은 정말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로 만약에 너무 지쳐 버린 자신이 혹시라도 자신이 동생을 놓고 싶어지는, 그래서 동생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질 것 같은 그 어느 때가 올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창밖의 하늘은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복도를 걷는 남자의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태운은 서류를 꽉 쥔 채로 남자를 맞았다. 태운이 혀를 꾹 물었다가, 눈앞의 남자를 상기해 내고는 이를 떼었다.
“……오셨습니까.”
한참을 뜸 들이던 태운이 뱉어 낸 망설임 가득한 말에 남자는 픽 하고 웃었다. 태운은 평소보다 한 발짝 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 한 걸음에 수많은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태운은 정말로 필사적이었다.
남자는 다른 말 없이 태운이 입고 있는 얇은 샤워 가운 사이로 손을 넣었다. 밖에서 들어온 탓인지 서늘한 손이 맨 어깨에 닿자 태운은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남자가 더 편하게 자신을 만질 수 있도록 몸에 힘을 풀었다.
남자는 그대로 태운의 어깨에 걸쳐진 가운을 끌어 내렸다. 태운의 한쪽 어깨와 함께 가슴 일부가 드러났다. 태운의 동그란 어깨를 문지르던 남자는 그대로 손을 내려 태운의 평평한 가슴에 유일하게 튀어나와 있는 유두를 문질렀다.
건조하지만 힘이 들어간 남자의 손길에 태운은 참지 못하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었다. 저절로 남자를 제지하기 위해 움직이려는 두 손을 스스로 제지하기 위함이었다. 손 안에서 서류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차라리 마냥 아프기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프면서도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태운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혀를 악물었다. 숨을 멈춘 태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태운은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자신을 떠올렸을 때 짜증스러워서 남아 있는 무엇인가를 망치고 싶지 않게, 그렇게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남자의 다른 손이 그런 태운의 입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태운은 당황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남자의 손이 마구잡이로 태운의 입안을 헤집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태운은 헛구역질을 견디기 위해 마주 쥔 두 손을 더 아프게 잡았다.
결국 생리적인 현상으로 태운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었다. 겨우 가라앉았던 눈가가 다시 붉은색을 띠었다. 태운의 입안을 헤집던 남자의 손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채 수습되지 못한 타액이 남자의 손을 따라 흘렀다. 태운은 입고 있던 가운으로 그런 남자의 손을 닦아 냈다.
그 순간 태운은 숨을 멈췄다. 손 안의 서류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남자의 얼굴이 태운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남자와의 첫 키스였다. 남자의 키스는 그가 하는 섹스만큼이나 거칠었다. 자신의 숨을 뺏으며 입안을 거칠게 유영하는 혀에 태운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키스를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 마음이 맞은 상대와 다정한 키스는 해 본 적 없었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꽤 많은 수의 키스를 했다. 하지만 남자와 오 년이나 몸을 섞으면서도 한 번도 이런 행위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남자가 태운의 가운을 완전히 벗겼다. 어깨 위로 둘러진 손이 태운의 등을 쓸었다. 태운은 허공을 배회하던 팔로 남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단단하고 거친 근육이 느껴졌다. 남자가 질색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당장 풀어낼 생각이었지만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태운은 완전히 남자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남자의 혀가 태운의 혀를 자신의 입안으로 끌고 와 잘근잘근 씹었다. 태운이 견디지 못하고 뜨거운 숨을 뱉어 내었다. 혀에서 입천장으로, 그리고 입안 전체 어디인지 모를 곳들로 간지러움이 퍼져 나갔다.
그것을 해소해 주듯 남자의 혀가 거칠게 태운의 내부를 누볐다. 숨이 차서 다리에 힘이 풀리는 태운을 남자가 다시 단단히 안았다. 태운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한참 후에 숨이 모자라 머리가 띵해질 때쯤 남자가 태운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태운을 밀었다. 남자에게 밀려 뒷걸음질 치던 태운은 침실까지 밀려 들어와 침대 위로 쓰러졌다.
태운을 침대에 눕힌 남자는 태운의 턱을 씹었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자신의 벨트를 풀어내었다. 차가운 벨트 끝이 맨살에 닿자 태운은 몸을 떨었다. 그러자 남자가 풀어낸 벨트를 침대 밑으로 던졌다.
남자에게 할 말이 있는데 이 상황에서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런 자신을 남자가 더 괘씸해하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허벅지를 붙잡아 오는 남자 때문에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발기한 성기가 태운의 안으로 들어왔다. 관장을 했지만 시간이 지난지라 태운의 밑은 빽빽했다. 남자는 귀두 부분만 집어넣었다 빼내면서 태운의 밑을 풀었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남자에 의해 들어 올려진 하체를 보니 남자는 콘돔 없이 자신의 내부에 성기를 밀어 넣고 있었다. 불쾌한 마음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태운은 아래쪽에 힘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아마 이번이 남자와의 마지막일 것이었다. 남자와의 섹스는 항상 괴로운 것이었지만, 태운은 그래도 남자가 마지막만은 만족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태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의 허벅지를 단단히 고정하고 있는 남자의 단단한 팔을 잡았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태운과 눈을 마주했다. 무엇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그 손을 풀어내지는 않았고 태운도 가만히 잡고 있을 뿐 손을 떼지 않았다.
한동안 반복적인 행동을 하며 들어갈 공간을 넓히던 남자는 어느 정도 태운의 밑이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한 번에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태운은 그 느낌에 작게 몸을 떨며 남자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는 힘을 풀었다.
“읏…….”
끝까지 빠져나간 남자가 다시 치고 들어왔다. 태운의 입에서 견디지 못한 신음이 빠져나왔다.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웃는 표정을 해 보이는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허리짓의 속도를 높였다. 태운은 그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고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남자의 팔목을 쥐고 버텼다.
“하아, 하아…….”
몸에 힘이 풀렸다. 하얀 감각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태운의 숨도 남자의 숨도 거칠어졌다. 그 감각을 견딜 만해졌을 때 태운은 골반을 튕겨서 남자의 행위를 도왔다. 남자가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태운의 어설프기 그지없는 행동에 남자의 움직임이 더 거칠고 빨라졌다. 나중에는 태운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꾸만 움직임이 어긋났다. 그게 더 태운을 미칠 것 같게 만들었다. 태운이 억지로 동작을 맞춰 가는데, 남자가 다시 웃으며 움직일 수 없도록 태운의 몸을 눌렀다.
“아, 아읏.”
그리고 남자가 더 깊숙하게 태운의 안쪽에 성기를 박아 넣었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태운은 신음하며 남자가 안쪽에 박아 넣는 쾌락을 견뎠다. 태운의 눈가가 이지러지고 꾹 감고 있는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그 순간 남자가 태운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내부를 가득 채우는 이상한 느낌에 태운은 오히려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노력했다. 한 번 사정을 마친 남자는 태운의 안에서 빠져나가는 대신에 다시 태운의 내부에서 느릿하게 피스톤 질을 했다. 남자의 성기가 다시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한 손으로는 여전히 태운의 허벅지를 잡아 고정시키고 다른 한 손으로 반쯤 발기한 상태인 태운의 성기를 잡았다. 그 이상한 느낌에 태운이 진저리 쳤다. 남자의 손길은 다정하지는 않았다. 기계적으로 태운의 성기를 흔들며 사정을 부추겼다.
“잠, 잠시만…….”
자위조차 하지 않는 태운은 성기에 닿는 생경한 자극에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손안에 할 수 없어 어떻게든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남자는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태운의 성기를 훑기 시작했다.
결국 태운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정액을 쏘아 내었다. 자신의 정액이 남자의 손을 더럽히자 태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태운이 빠르게 손을 뻗어 남자의 손을 닦아 내려고 했지만, 남자가 협탁에서 티슈를 뽑아 닦는 것이 빨랐다.
태운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했다. 손이 남자의 손의 뒤만 쫓았다.
“윽.”
대충 손을 닦아 낸 남자가 태운의 어깨에 이를 박아 넣었다. 태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평소와는 무언가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어쩐지 이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태운은 조심스럽게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한참을 태운의 몸에 잇자국을 남기던 남자가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태운의 몸을 뒤집었다.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주제넘은 행동에 대한 벌은 아닌 것 같았다.
태운이 떨리는 손으로 시트를 집고 엉덩이를 들어 올리자 남자의 몸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가 태운의 골반을 단단하게 쥐어 왔다.
“하읏…….”
잠시 사이에 다시 완전히 발기한 남자의 성기가 완전히 풀린 태운의 안을 한 번에 파고들었다. 태운의 몸이 앞쪽으로 쏠렸지만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 남자가 재차 빠르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얼굴을 보고 하는 섹스보다 이렇게 뒤로 하는 섹스가 좋았다.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았고, 남자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남자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아정이 없는 세상에서 태운이 유일하게 잡고 있던 동아줄이었다. 그래도 자신을 정말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해 준 단단한 구원이었다.
자신을 맨 처음 사 준 것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지금까지 아정을 붙잡고 있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지치고 힘들어서 아정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게끔 지금까지 태운을 살게 해 준 것이 남자였다.
그리고 또 자신을 살게 해 주려고 손을 내밀어주었다. 남자의 손을 잡았다면 달라지는 것이 있었을까. 자신에게 다시 또 손을 내밀어 준 남자가 고마웠다.
하지만 태운은 처음부터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은 남자에게도 죄인이었다.
“아읏…….”
태운이 내부에 꽉 들어찬 남자의 것을 쥐어 짜내듯 아래쪽을 꽉 조였다. 너무 조이는지 남자가 낮게 “힘 풀어.” 하고 말했다. 그리고 더 거세게 태운의 안으로 허리를 처박아 넣었다. 태운이 시트를 붙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고 여전히 안쪽은 결합된 채로 시야가 뒤집혔다.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두렵기만 한 얼굴이었지만 태운은 조심스럽게 그 얼굴을 눈에 담았다.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었다. 태운이 눈에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하지만 태운은 웃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남자가 자신을 가엽게 여겨 주길 바라며. 태운의 눈꼬리도 입가도 둥글게 휘어졌다. 웃고 있었지만 그것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아…….”
태운의 다리를 쥔 남자가 태운의 안에 성기를 깊게 처박고 다시 사정했다. 태운은 진저리 치면서도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감사…… 합니다.”
완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운이 말했다. 애써 가다듬었지만 목소리에서 울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 * *
태운이 눈을 뜬 것은 캄캄한 새벽이었다. 태운은 팔에 닿는 온기를 느꼈다. 남자는 태운의 옆에 잠들어 있었다. 잠귀가 예민한 남자였다. 태운은 남자를 깨우지 않기 위해 숨소리조차도 죽였다. 태운이 아프게 혀를 깨물었다.
끝이었다. 태운은 어딘가 떨어져 있을 서류 봉투를 머릿속으로 짚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계속 같은 시간의 반복인 것 같았다. 태운은 마주하게 될 남자의 분노가 두려웠다. 진정이 되지 않아 손끝이 차가워지면서 저려 왔다. 마지막을 각오한 주제에 사람의 감정은 끝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남자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미 자신의 존재 자체가 남자에게 피해였다. 자신의 손으로 찍어 소속사 사장에게 직접 건넨 그 비디오가 남자로 하여금 얼마만큼의 피해를 감당하게 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태운은 남자가 두려웠다. 그리고 그만큼 남자에게 미안했다. 남자의 의도대로만 움직이는 인형 흉내를 내었던 것도 남자가 두려웠기 때문이었고 또 남자에게 어떻게든 갚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은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만 그것 말고는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많은 것을 주었고 자신이 그것을 누린 현실을 태운은 부정할 수 없었다. 대단한 남자니 시간이 있으면 무엇이든 준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남자가 동생에게까지 악수를 뻗을 정도로 악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태운이 오 년 동안 알아 온 남자는 그랬다. 자신만 사라지면 소속사 사장을 징벌하는 수준에서 일을 마칠 것이었다. 화풀이로 제 동생에게까지 해를 끼칠 만큼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가 낮은 사람이 아니었다. 태운은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생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다시는 동생을 보게 될 수 없는 일이라도.
날이 밝아 오는 느낌에 태운은 소름이 돋았다. 햇살이 따뜻했다. 아정이 이 햇살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순이었지만 그녀가 알게 될 진실들이 두려웠다.
동생을 생각하자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의식을 가지고 숨을 내쉬려고 했지만 무엇인가에 막힌 듯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태운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이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태운은 바닥을 기었다.
안정제가 필요했다. 이대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각오한 일이지만 아직은 안 됐다. 문을 열고 나와 태운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고 온 옷을 찾았다. 약병을 꺼내 안에 있는 모든 약을 입안에 쏟아 넣었다. 약을 씹자 입안에 쓴맛이 맴돌았다.
하지만 목이 막힌 듯 삼켜지지가 않았다. 태운은 약을 삼키기 위해 한참을 욱욱 하고 넘어오는 헛구역질들을 삼켜 내었다. 약을 목 안으로 넘기자 토기가 올라왔지만 태운은 그저 가만히 견뎠다. 눈에는 생리적 현상으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잠시 후 진정이 되자 태운은 바닥을 기어 서류 봉투를 찾아내었다. 그 봉투를 손안에 쥐는데 잠에서 깬 것인지 샤워 가운 차림의 남자가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
네 발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태운의 모습을 보더니 남자가 혀를 찼다.
“뭘 하고 있는 거야.”
고개를 들어 남자를 확인한 태운은 서류를 손에 쥔 채 다시 무릎걸음으로 걸어 남자의 발치로 움직였다.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고 물었어.”
남자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태운은 손에 쥐고 있던 꾸깃꾸깃해진 서류를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 서류를 건네받았다. 지체 없이 남자는 서류 봉투를 열어 구겨진 서류를 꺼냈다. 한 장 한 장 읽어 나갈수록 남자의 미간의 주름이 더 진해졌다.
“이게 뭐야.”
동생이 앞으로 최대 백 년을 더 산다고 가정했을 때 동생에게 최대로 들어갈 만큼 산정한 병원비를 제외하고 남은 모든 재산을 남자에게 돌려주겠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변호사를 만나서 자신에게 그만큼의 돈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분명히 남자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고 전혀 이익이 될 것이 없는 내용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태운은 남자에게 이렇게라도 각오를 보여 주어야만 했다.
남자는 동생을 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운은 남자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믿음은 아니었다. 그저 남자에게는 동생을 망치는 것이 그럴 가치조차 없는 일임을 알 뿐. 그래서 남자가 하나도 신경 쓸 것 없도록 서류를 만들어 두었다. 자신이 없더라도 동생은 지금까지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라.
“……무슨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장님과 성적인 관계를 갖는 동영상이 제 소속사 사장에게 있습니다.”
욱 하고 밀려 올라오는 토기를 태운은 삼켜 내었다.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밀려오는 공포심에 태운의 이가 덜덜 부딪쳤다. 남자의 분노는 조용했다. 태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님에도 남자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떨리는 몸과는 다르게 태운은 담담한 척 말을 이어 갈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이 다였다.
“……제 소속사 사장은, 아마 그 영상으로 위임장을 사장님께 요구할 것 같습니다. 제 손으로 찍은 영상이니, 제 소속사 사장이 없는 영상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가 태운의 머리채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태운의 눈높이가 남자와 맞아졌다. 태운은 두 발로 땅을 짚고 섰다. 머리가 뜯길 듯 아팠지만 태운은 그 아픔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태운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남자가 태운과 눈을 맞춘 채 물었다. 이를 악문 음성이었다. 평소보다도 낮은 남자의 목소리에 태운은 혀를 악물었다.
“수작…… 그런 게 아닙니다.”
남자가 태운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태운은 그대로 쓰러졌다. 쿵 하고 거대한 소음이 났다. 태운은 남자의 발치에 매달렸다. 태운은 필사적이었다.
“제 소속사 건물 지하 이 층에, 마스터 룸이 있는 연습실이 있습니다. 벽이 미닫이처럼 열리는데 그 안쪽으로 금고가, 있습니다. 그 안에 비디오가…… 들어 있습니다. 소속사 사장은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누군가 손에 넣게 될까 두려워 복제를, 해 퍼뜨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사장을 묶을 테니, 그걸 처리해 주십시오…….”
남자의 눈이 단번에 사나워졌다. 태운은 숨을 멈췄다.
“약은 수를 쓰는군.”
남자의 다리에 매달린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온몸이 주체할 수 없도록 떨렸다. 남자는 짙어진 눈으로 그런 태운을 내려다보았다. 감히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남자의 시선을 싸늘했다.
“……서류로 묶여 있지는 않지만, 제게 있어 가장 소중한 동생입니다. 절 믿으실 수 없는 것을, 압니다.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는 결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비디오만 처리해 주신다면, 저도 제 사장도 눈에 띄지 않게 사라지도록 하겠습니다. 제, 제 동생을…… 걸고 증명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태운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하지만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태운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태운이 무릎을 꿇은 상태로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태운의 목소리가 떨렸고, 태운의 등이 떨렸다. 눈물이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이태운, 네가 지금 누굴 상대로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온몸이 굳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태운은 이마를 바닥에 댄 채 몸을 한껏 웅크렸다. 두려웠다.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제 수작이, 통하지 않으실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금방 드러날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동생…… 동생이 평안할 수 있다면 전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제 소속사 사장과 함께 다시는 사장님 눈에 띄지 않겠습니다. 제, 제 동생만, 지금까지처럼……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의사는 아정이 다시는 전과 같은 평범한 일상을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갑자기 정신이 돌아올 확률보다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크다고 말했다.
그래서 무서웠다. 악질적인 누군가가 동생을 인질로 잡고 자신을 협박하게 될까 봐. 그것을 견디다 못해 자신이 동생을 포기하게 될까 봐. 아니면 동생과 함께 죽어 버리고 싶게 될까 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생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까 봐. 그렇게 되기 전에 시간을 들여 자신이 세상에 없어도 동생이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태운이 쿵쿵 머리를 다시 대리석 바닥에 박았다. 이마에서 붉은 피가 터졌다. 남자는 그런 태운을 선 채로 내려다보며 코로 웃었다.
“내 눈앞에서 꺼져. 그리고 너와 네 사장이 누굴 상대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지 확인해.”
그대로 발을 돌리는 남자의 발목을 태운이 필사적으로 잡았다. 남자의 눈이 싸늘했다. 그 기운이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있는 태운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태운은 단단히 쥔 남자의 발목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놓지 않았다.
“네 발악 기대해 보지. 네 발악이 마음에 들면 이것도 한 번 생각해 볼게.”
남자가 태운의 웅크린 몸 위로 하얀 서류를 던졌다. 그 하얀 종이들이 태운에게 부딪쳐 바닥으로 흩어졌다. 태운이 온몸을 덜덜 떨었다. 등을 돌려 걸어가는 남자의 뒤에서 태운이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바닥을 기어 하얀 종이들을 모았다.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이 서류에 떨어지지 않도록 거칠게 훔치며 태운은 다시 종이들을 봉투에 넣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태운은 마지막으로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남자는 보지 못할 인사를 했다. 마지막이었다.
* * *
태운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차를 움직였다. 가고 싶은 곳도 가야 할 곳도 없었다. 마치 길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계속해서 운전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운전하다가 태운은 차를 세우고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에는 수없이 많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전부 매니저에게서 온 전화였다.
태운은 그 내역들을 밑으로 내려 저장되어 있지 않은 어떤 번호에 멈췄다. 번호를 누른 태운은 입술을 악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태운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조금의 신호음이 울리고 중년 여성의 놀란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태운에게 전해졌다. 아정의 친어머니에게 건 전화였다.
―무슨 일 있는 거니?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떨림이 태운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그 목소리에는 한 치의 거짓도 어려 있지 않았다. 이 마음이 진심일까 의심해야만 하는 자신이 태운은 역겨워졌다. 스스로가 너무 거북해서 눈가가 시큰거렸다.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녀에게 전화한 것인지 태운은 스스로 잘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남아 있는 동생과 피를 나눈 유일한 이였다. 하지만 한 번 떠난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없더라도 동생의 남은 삶이 평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한 번 동생을 버린 사람이, 두 번이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태운은 그저 그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계속해서 동생을 살펴 주기를 바라며 아주 낮은 가능성의 자비를 구걸해야만 하는 자신이 싫었다.
“……잠깐 만나고 싶습니다.”
―무슨…… 무슨 일인데?
“멀리, 가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내가 너무 놀라서.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아정의 친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안도에도 태운은 같이 안도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일하는 중이라, 급한 거면 혹시 근처로 올 수 있을까?
“네, 제가 가겠습니다.”
태운은 그녀가 말하는 위치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내비게이션으로 지금 태운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하니 동생이 입원해 있는 병원 근처였다. 전화를 끊은 태운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저 아무렇게나 길이 있는 대로 움직인 것인데 결국 이곳이었다. 가슴이 칼로 저민 듯 아팠다.
태운이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아정의 얼굴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었다. 태운은 더 이상 미련을 키우지 않기 위해 다시 차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숨을 죽인 채 주먹만 꽉 쥐고 있던 태운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태운이 창문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보다 훨씬 나이 든 중년 여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잠깐, 타셨으면 좋겠습니다.”
손잡이를 잡은 채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아정의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보조석 시트에 걸터앉았다. 태운이 다시 창문을 닫았다. 차체가 큰 편이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태운에게도 아정의 어머니에게도 그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졌다. 차 안으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외국으로 촬영을 오래 나가는 거니?”
태운은 이를 악물었다.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도저히 입을 열 자신이 없어 악다문 턱을 끄덕였다.
“고생스러워서 어떡해.”
“죄송합니다.”
“일 때문에 그러는 건데 뭘. 아정이는 지금처럼 내가 들여다보면 되지.”
“죄송합니다.”
태운이 계속해서 중년의 여성에게 사죄의 말을 늘어놓았다. 항상 가슴속을 채우고 있던 사죄였다. 자신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녀와 아버지는 그런 결말을 겪지 않았을 확률이 컸다. 그렇다면 그녀는 평범한 주부로, 아정은 평범한 대학생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 평범한 가정을 망친 건 자신이었다.
“왜, 왜 그래. 태운아. 무슨 일인데.”
“항상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제가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면, 제가 아버지 집으로 가지 않았다면, 아정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태운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말랐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꼬아 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태운아 내가 미안해……. 내가 너한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넌 고작 아정이보다 네 살 많았을 뿐인데. 그때 너도 어린아이었는데. 그걸 아정이 두고 집을 나와서 알았어. 다 나랑 아정이 아버지 잘못이지 네 잘못일 수가 없다는 거 너무 늦게 알아 버렸어.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말도 못했어.”
콘솔박스를 넘어온 손이 태운의 손을 쥐었다. 그녀의 눈에도 태운의 눈처럼 눈물이 가득했다. 그 손의 온도가 높아서 태운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아정이 아빠도, 나도 책임지지 못한 아정이 키운 건 태운이 너야. 정말 고맙게 생각해. 내가 어떻게 널 원망해. 네 탓 아냐. 그게 어떻게 네 탓이야. 책임을 져야 한다면 죽은 아정이 아빠 잘못이 제일 크고, 그 다음은 그렇게 너희 둘 다 두고 나간 내 잘못이야. 넌 잘못 없어, 태운아.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태운아.”
아정의 친어머니도, 태운도 멈추지 못하고 울었다. 눈물을 쏟는다고 서로의 죄책감이 덜어질 만큼 서로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 작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가서 내가 아정이 몇 번 데리고 오려고 했었어. 집으로도 여러 번 갔었는데 아정이가 얼마나 나한테 배신감이 크면 오빠랑 살 거라고 나랑은 안 간다고 했었어. 억지로라도 데려가려고 했었는데 아정이가 안 간다고 버텨서 결국 그만뒀었어. 좀 크면서부터는 찾아가도 안 만나 주고 연락도 안 받고. 내가 새 결혼하면서 연락이 끊기기는 했지만, 아정이 선택이었어. 태운이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아정이 잘 키워 줘서 너무 고마워.”
태운은 도무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멍청이가 차라리 어머니를 따라가지, 밤마다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만 붙들고……. 감정 정리가 잘되지 않았다. 아정을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멍청이가.
“아정이도 네가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닐 거야. 아, 나도 참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아정이가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대체 네 책임이 어딨어. 아정이가 태운이 너를 얼마나 좋아하고 따랐는데…….”
태운은 혀를 악물었다. 자신이 그날 집에 있었더라면, 아니 애초에 자신이 동생의 집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아정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을 하시는 일도 없고, 아버지가 도박을 하시는 일도 없지 않으셨을까.
동생에게 자신이 죄인인 것은 맞았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 때문에 동생에게 피해가 갈 것 같았다. 적어도 그것은 막아야 했다. 태운은 혀를 악물며 말을 정리했다.
“어머님, 통장으로 돈을 조금 넣었습니다. 제가 없어도…… 아정이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천박한 구걸이었다. 그녀가 자신은 하지 못했지만 동생을 돌봐 주기를,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기를 태운은 애걸했다. 동생이 계속 평안하기를 태운은 바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거야. 태운아 내가 그런 걸, 왜, 받아…….”
“아정이, 위해서 써주세요. 간병인 아주머님 좋은 분이시지만, 신경 쓰지 못하시는 부분도 있으실 수 있으니까요.”
아정의 친어머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태운은 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한마디씩 내뱉었다. 하지만 태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정의 친어머니는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많지는 않지만 나도 돈 벌어. 이제 와서 이런 말하는 거 내가 염치없는 거 알지만, 아정이 내 딸이야. 그 정도는 내가 해야지.”
“제가, 많이, 아주 오래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가지고 계세요. 절대 돌려받지 않을 겁니다. 절대 돌려받지 않을 거니까 필요한 데 쓰셔도 괜찮습니다.”
제발 가끔 한 번씩이라도 동생을 기억하고 찾아봐 주기를. 목돈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돈 문제로 고생하는 대신 그 돈을 사용하고 동생을 한 번 더 찾아주기를. 태운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돈을 받지 못한다는 아정의 친어머니와 태운의 실랑이는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태운은 굽히지 않았고, 결국 동생의 친어머니가 눈물 젖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 돈 내가 가지고 있다가 혹시라도, 아정이한테 큰돈…… 들어갈 일 있으면 쓰고, 아니면 태운이 너 돌아오면 돌려줄게. 근데 얼마나 오래 나가기에 이래. 꼭 안 돌아 올 길 가는 것처럼.”
태운은 대답 없이 그냥 쓰게 웃었다. 아주 먼 길을 떠날 예정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길.
* * *
같은 시간의 반복이었다. 태운은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시간을 견뎌 내었다. 일이 어그러진 것을 알면 소속사 사장은 자신을 찾을 것이었다. 자신을 다시금 남자에게로 밀어 놓으려고 하든, 차선으로 자신을 다른 누군가에게 상납하려고 하든, 어쨌든 소속사 사장은 자신을 찾을 것이었다.
그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저 스스로 동생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또 올까 두려웠다. 차라리 같이 죽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그때가 올까 봐. 그것만이 태운을 두렵게 했다.
그리고 소속사 사장이 다시 자신을 찾는 날은 남자가 이미 움직이고 난 후일 것이었다. 태운은 그 연락을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태운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 음식물들을 섭취하면서 시간을 견뎌 내었다. 충전기에 꼽힌 핸드폰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태운은 그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기다리며 멍하니 까만 액정만을 응시했다.
매니저에게는 잠시 쉬겠다고 찾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달리 연락을 해 올 사람은 없었다. 기다리는 전화는 하나였다. 깜깜한 밤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태운은 똑같은 시간을 계속해서 견뎌 내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지났을 때,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태운이 힘없이 고개를 들자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태운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소속사 사장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보였다.
성큼성큼 불을 켜고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온 소속사 사장은 커다란 손으로 태운의 뺨을 때렸다. 태운은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휘청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성난 소속사 사장의 얼굴에 태운은 웃었다. 힘이 빠진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소속사 사장은 다시 태운의 뺨을 때렸다.
“강혁진이 비디오에 대해서 알게 됐으면 그렇다고 나한테 먼저 말했어야 할 거 아냐? 너 돌았어? 씨발 그게 나만 망하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대체 너 무슨 생각이야!”
소속사 사장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다시 태운의 뺨을 때렸다. 태운의 얼굴이 붉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태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일을 이렇게 꼬아 놓은 거냐고, 이 미친 새끼야!”
소속사 사장이 태운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태운은 반항 없이 그대로 끌어 올려졌다. 그런 태운의 반응에 소속사 사장은 더 열이 뻗치는지 입에서 연신 거친 숨을 터트렸다.
“비디오로 그분을 압박하면 되지 않습니까.”
태운은 담담하게 소속사 사장이 말한 적 있던 내용을 내뱉었다. 멱살이 잡혀 피가 통하지 않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태운의 어조는 차분하기만 했다.
“강혁진이 먼저 움직였다고! 이 또라이 새끼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걸 입 하나 벙긋 안 할 수가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태운은 멱살을 잡은 소속사 사장이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픽 하고 웃었다. 끝났다. 모든 것은 끝났다. 그것을 눈앞에 있는 소속사 사장만이 몰랐다.
“비디오는요. 설마 그냥 넘겨 버린 건 아니죠?”
태운은 어조를 바꾸며 물었다. 떠보는 것이 역력했지만 소속사 사장은 인지하지 못했다. 그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태운은 웃음이 나왔다. 소속사 사장은 손에 쥐고 흔들던 태운을 던져 버렸다. 태운은 그대로 소파로 던져졌다.
“연습실을 통째로 털렸어. 뭔가 단단히 꼬였다고. 태운아. 이태운. 우리 살아야지. 우리 살아야 하잖아. 가서 강혁진이랑 다시 하나만 만들어 와. 뭐든 하나만 만들어 와. 태운아 우리 살아야지.”
소속사 사장은 다정하게 말투를 바꿨다. 태운은 소름이 돋았다. 다급해 보였다. 길게 찢어진 눈에 안광이 번들번들했다. 얼굴의 빛이 전체적으로 죽어 있어 파충류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이 더 소름 끼쳤다.
됐다. 태운은 다시 웃었다. 시시한 결말이었다. 이 정도면 됐다. 태운은 생각했다. 미련은 없었다. 자신이 살아 있는 이상 동생은 계속해서 자신의 약점이 될 것이었다. 사장이 아니라면 또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게 될 것이었다.
자신은 아정을 지킬 수 없었다. 제 손으로 동생을 포기해 버리는 날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동생을 지키게 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소속사 사장이 자신의 집까지 직접 찾아온다는 것은 태운의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계획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대체 어쩌다가 비디오가 유출된 겁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카메라 앞이 아닌 곳에서는 연기가 되지 않았었는데 어색하지 않게 말을 할 수 있었다. 불안하지도 초조하지도 않았다. 소속사 사장조차도 분명하게 확답을 내리지 못한 표정이었다.
“너 진짜 몰랐어?”
태운은 대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카메라 앞에서처럼 표정을 만들어 내었다. 됐다. 이제 끝을 낼 때가 왔다. 소속사 사장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를 갈았다.
“씨발 강찬혁 개새끼. 깔짝거리는 걸 가만뒀더니 이 사달을 만들어.”
“그분이 우리를 가만두겠습니까.”
“씨발, 그럴 리가 있어? 태운아. 영상 하나 더 만들어 와. 그것밖에 우리가 지금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태운아, 우리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태운은 억지로 참았다.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에 태운은 자조했다.
“우리 둘 다 살 수 있는 게 맞습니까?”
“그래. 시간만 있으면 돼. 시간만 있으면 방법 안 생기겠냐.”
“자주 가던 별장이 있습니다. 카메라 설치하기에는 그쪽이 더 쉬울 거예요. 조심해서 움직여야 하니까 장소 먼저 봐 주세요.”
태운이 소속사 사장에게 등을 보이고 현관으로 걸었다. 소속사 사장이 보지 못하는 태운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태운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태운이 운전석에 오르자 다급한 몸짓으로 소속사 사장이 조수석에 탔다. 태운은 바로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였다. 그 행동에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태운은 몇 번이나 예행으로 오간 길을 운전했다. 늦은 시간이라 차도 막히지 않았다.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포기하는 일이 평생 오지 않는 것.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촬영을 했던 곳이었다. 가드레일이 손상돼 있어 자칫 잘못하면 차가 바로 강으로 처박히는 사고가 날 수 있기에 모두 신경을 곤두세웠던 장소였다. 그 후로 몇 번이나 왔었지만 가드레일은 수리되지 않았다.
그 길이 시야에 보이자 태운은 미친 듯이 웃었다. 몸 안의 장기들을 모두 토해 낼 것 같은 광소였다. 마지막을 앞둔 순간인데 몸에서 희열이 솟구쳤다.
“그분이 지하 연습실 마스터 룸 금고에 비디오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을 것 같습니까? 강찬혁이 그걸 압니까?”
태운의 말을 소속사 사장은 잠시 동안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를 하고 싶지 않은 내용인 듯했다. 태운은 다시 웃었다.
“이 또라이 같은 새끼가!”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소속사 사장이 콘솔박스를 넘어와 태운을 잡아챘다. 하지만 태운이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이 먼저였다.
“당신이랑 나 같은 인간들은 차라리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게 모두에게 이득이야.”
태운의 광소가 소속사 사장의 귓가에 독처럼 박혔다. 소속사 사장은 다급하게 태운의 상체를 잡아챘지만, 차가 불안정한 가드레일을 박아 버리는 것이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