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4. 얼굴 없는 입 (4/15)

4. 얼굴 없는 입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게 망가져 버린 그 날은 삼월 초입이었다. 따뜻했던 낮이 갑자기 눈이 오는 밤이 되어 버린 변덕스러운 계절의 시작과 끝이 공존하던 날.

예전 같았으면 때 아닌 눈에 신이 나서 마당에 나와 한껏 들뜬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 아정은 이제 없었다. 다시 학교에 나가기 시작한 동생은 눈에 띄게 말이 줄었다. 말수가 없는 태운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하얀 얼굴로 방긋 웃으며 종알종알 떠들던 아정은 이제 태운이 말을 걸어도 잘 대답해 주지 않았다.

태운의 아정은 강하고 밝았지만 겨우 열여덟이었고 아직 어렸다. 태운이 보지 않는 곳에서 끼니를 거른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울었다. 태운은 그런 동생의 방문 앞에 서서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수많은 밤을 함께 깨어 있었다.

남자들에게 끌려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동생은 말해 주지 않았고 그도 묻지 않았지만, 가장 최악의 상황이 자꾸만 떠올랐다. 태운은 아버지도, 동생을 끌고 간 남자들도 할 수만 있다면 전부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끔찍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숨기고 아정을 돌보기엔, 태운 또한 본인의 마음을 추스르는 것도 어려웠다. 소속사 사장에 의해 억지로 호텔에 밀어 넣어진 날. 그날 이후 태운도 엉망이었다. 그때, 태운은 알몸으로 복도로 끌려 나왔고 누군가가 던진 옷을 사방이 뚫린 복도에서 꿰어 입어야 했다.

그것은 엉망의 시작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태운을 소속사 사장은 정말 험하게 대했다. 성적인 의미의 무엇은 시키지 않았지만 손찌검을 마다치 않았다. 태운을 남자의 침실로 밀어 넣었던 대가로 수족이 잘린 소속사 사장은 잔뜩 초조한 얼굴로 하루에도 몇 번씩 샌드백에게 하듯 태운을 오랜 시간 동안 때리기도 했고, 다른 배우들의 강도 높은 레이프 영상을 몇 개씩 연속으로 재생시키고 저렇게 굴려 줄 것이라며 폭언을 일삼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태운의 몸도 마음도 정상이 아니어져 갔다. 그러던 날 중 하나였다. 태운이 아직도 후회하는, 돌이킬 수 없는 날이기도 했다.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태운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악물었던 입에서는 아직도 피 맛이 났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소속사 사장은 친절했다. 태운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렇게 자신을 호텔 밖으로 던져 버린 남자가 왜 다시 소속사 사장에게 연락을 넣은 것인지, 왜 자신을 불러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잘된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남자가 마구잡이로 제 안에 파고들 때까지 태운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고통, 고통, 고통뿐이었다. 몸이 반으로 갈라지고 항문이 찢어지다 못해 내장이 전부 파열되는 느낌이었다. 수치심도 모멸감도 들지 않았다. 태운이 느낀 것은 그저 공포였다. 소속사 사장에게 엉망으로 얻어맞을 때에도 느껴보지 않은 엄청난 두려움이었다.

그저 마구잡이로 자신을 범하는 남자를 태운은 견뎠다. 그가 비로소 수치감과 모멸감에 몸을 덜덜 떤 것은 사정을 마친 남자가 자신에게 대가라며 수표 몇 장을 지갑에서 꺼내 건넸을 때였다.

호텔에서 새벽에 빠져나온 태운이 집에 돌아온 것은 다시 저녁이 됐을 때였다. 반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는 태운 자신도 기억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태운은 그저 걸었다. 도착한 곳은 결국 집이었다. 이런 몸을 하고 아정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태운은 갈 곳이 없었다.

태운이 동네에 들어섰을 때는 하늘에서 갑자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태운은 멍하니 그 눈을 보며 하얀 눈꽃송이 같은 아정을 떠올렸다. 눈이 오는 것을 보면 동생의 기분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 골목 모퉁이에 있던 태운의 귀로 아정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태운은 몸이 아픈 것도 잊고 뛰었다.

철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피를 쏟을 듯 고함을 지르고 있는 아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빠, 아빠가 이러면 안 되잖아!”

아정과 아버지는 무엇인가를 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태운은 그 손들 사이의 가방을 발견했다. 소속사 사장에게 받았던 계약금 중 사채업자들에게 아버지의 빚을 갚고 남은 돈이었다.

아정이 울고 있었다. 태운은 하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은행권에 있는 아버지 빚 때문에 태운은 통장을 개설할 수 없었다.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동생의 미래를 위해 큰 가방에 넣어 깊숙한 곳에 잘 숨겨 둔 돈이었다.

아정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었지만, 그림을 배우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되고부터는 언제부턴가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됐다. 그런 동생이 미술 학원이라도 다닐 수 있게 되면 기운을 차릴까 싶었다.

이 돈을 벌기 위해 소속사 사장의 폭언도, 폭행도, 역겨운 비디오를 보는 것도, 남자에게 몸을 내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돈을, 그런 돈을.

“아정아. 아빠가, 두 배로, 두 배로 불려 줄게.”

“미쳤어. 아빠 미쳤어. 아빠 때문에 내가…… 내가 무슨 짓을 당했는데. 아빠 제정신 아니지? 또 도박? 또 도박을 하겠다고 어떻게 내 앞에서 말할 수 있어? 미쳤어, 미쳤다고!”

아정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태운은 들고 있던 가방을 대문 앞 플라스틱 신발장 위로 던지듯이 올렸다. 가방 안에는 소속사 사장이 신신당부하며 직접 쥐어 준 비디오카메라가 들려 있었지만, 그것이 망가지든 말든 지금 태운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동생이 아버지를 힘껏 밀치는 것이 빨랐다. 그 둘 사이로 뛰어 들어가던 태운의 눈에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허리 높이의 수납장에 머리를 부딪치는 장면이 느린 움직임으로 들어왔다.

태운이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주저앉았을 때 이미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 이상했다. 피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태운의 눈에 덜덜 떨고 있는 동생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금방 정신 차리실 것이라고 아정을 안심시켜야 하는데 당황한 태운의 입에서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계속 때 아닌 함박눈이 흩뿌려졌다.

사태를 수습한 것은 태운의 소속사 사장이었다. 남자와의 섹스 장면을 찍은 비디오와 함께 사라진 태운을 직접 찾아다니던 소속사 사장이 태운의 집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고 난 후였다. 태운의 아버지는 바닥에 쓰러져 눈을 뜨지 못했고, 동생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탈진해 있었다. 태운은 그런 동생에게 방 안에 들어가 가만히 있으라고,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라고, 다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어이가 없는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던 소속사 사장은 플라스틱 신발장 위에서 익숙한 가방을 먼저 발견했다. 그 가방에서 초소형 캠코더를 꺼내자 태운이 종료하지 않은 촬영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사장은 그 안에서 테이프를 수습해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태운의 아버지를 비밀리에 병원으로 옮겼다. 태운의 아버지는 한 달 정도 의식이 없는 상태로 살아 있었지만 결국 숨을 멈추고 말았다.

소속사 사장이 경찰에 힘을 써 태운의 아버지는 술을 먹은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수납장에 머리를 부딪쳤고 뇌진탕으로 사망한 것으로 사건을 끝냈다. 실제로 그때 태운의 아버지는 만취 상태이기도 했었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숨이 끊어지고 태운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정이 없었다. 그녀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은 경찰서에서 온 전화 때문이었다. 횡설수설하며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전화상으로 자수한 동생은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아정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유서.

[오빠는 연예인이 되어야지. 난 더 이상 오빠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두서가 없는 말이었지만, 태운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그리고 절망했다.

다행히도 떨어질 때 커다란 나무에 걸려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동생은 한참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밤낮을 잊고 동생의 옆에서 병간호를 하던 태운이 며칠간 축적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시 눈을 붙였을 때, 태운은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함 소리에 눈을 떴다.

아정은 “싫어요.”와 “잘못했어요.” 같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말하면서 발작했다. 어떻게든 아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태운이 그녀를 껴안으려고 하자 아정의 발작은 더 심해졌다.

이제는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비명을 내뱉는 동생은 태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아니, 심지어 태운을 끔찍한 어떤 것처럼 보고 있었다.

태운은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아정이 자신의 검은 면을 다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검고 어둡고 더러운 그 일을 알고 있기에 자신을 끔찍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태운은 덜덜 떨리는 다리로 병실에서 도망쳤다.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서워서 동생의 병실로 다시 찾아갈 수 없었다. 동생이 자신을 역겹게 느낀다면, 그래서 자신을 원망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멍하니 며칠을 보내던 태운은 아정의 병원비를 위해 다시 소속사 사장이 시키는 대로 기계처럼 움직였고, CF 한 편으로 단번에 핫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뒤로도 다시 동생의 병실로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아정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루에 절반 넘게 잠을 자고,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며칠씩 눈을 뜨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눈을 뜨고 있긴 하지만 의식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특히 남자를 보면 발작하기 시작했는데, 태운은 그것이 남자를 보면 자신을 떠올려서 그러는지 아니면 정말 겪어서는 안 되는 나쁜 일을 겪어서인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어느 쪽이든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아정이 없는 태운의 삶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거지 같은 현실 따위 잊게 해 주는, 자신이 자신으로 살지 않아도 되는, 자신과는 정반대인 좋은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라나 밝고 반듯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는 캐릭터에 태운이 집착하게 된 것은 좀 더 나중이었다.

남자와의 관계는 그러는 동안에도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계속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생의 병원비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병원비를 걱정해도 되지 않을 만큼 돈을 벌고 난 후에는 동생을 지키고 연기를 계속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연기를 통해 현실 도피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만 같았다. 소속사 사장은 태운의 약점을 쥐고 흔들었고 태운은 사장이 흔드는 대로 흔들리면서 남자와의 관계를 지속했다.

그렇게 아정이 없는데도 연기를 하고 삶을 살고 남자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스스로가 역겨웠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살아졌다. 그리고 오 년이 지났다. 태운은 자신이 그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하하, 하하하.”

병원을 마주하고 멈춘 차 안에서 태운은 웃고 또 웃었다. 다시 배우로 돌아가는 것은 태운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배우가 되어야 하는 태운이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건물의 형태만 힐끗하고 바라보던 태운은 곧바로 차를 움직였다. 평소에는 지날 일이 있어도 멀리 돌아가던 병원이었다. 자신이 곁에 있으면 아정이 또다시 스스로를 놓아버리려고 할 것 같아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태운은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목적지 없이 무작정 운전해 나가도 다음번에 도착하는 곳은 또 병원 앞일 것만 같았다.

주차장에 차를 댄 태운은 집에 올라가고 싶지 않아서 시트에 앉은 채로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 들었다. 언제든 대본과 배역에 몰입을 하다 보면 항상 자신이 긍정적인 인물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연기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니까. 하지만…….

영화 속에서 여동생을 성폭행한 후 유기한 범인은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이 전혀 없었다. 경찰조차도 직접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범인의 직업은 변호사였고 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요즘은 세트 촬영이 끝나고 야외 촬영을 이어 가고 있었는데, 태운은 카메라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괴감에 빠진 무능력한 오빠 연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덕분에 태운이 연기로 도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태운은 독하게 입술을 물었다. 병신같이 착각할 것도 따로 있지 연기를 한다고 정말로 다른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었나. 설마 카메라 앞에서 복수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었나. 하지만 누구에게. 태운은 읊조렸다.

태운은 대본을 다시 덮었다. 시트에 늘어지듯 기댔다. 모르겠다. 대본조차도 보고 싶지 않았다.

* * *

태운은 남자가 젖히는 대로 침대에 눕혀졌다.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전부 잊을 수 있을 정도로 고통을 받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남자의 온기를 다시 한 번 느껴 보고 싶었다.

“읏.”

남자가 손에 쥐어 준 콘돔의 비닐을 벗기고 있는데 남자가 태운의 유두를 꼬집었다. 스스로 긁어 피까지 냈던 유두는 어느새 아문 상태였다. 남자의 손길에 태운은 잊어버리고 있었던 감각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거 같으면서 발가락 끝까지 간질간질한 감각이었다.

“아, 아…… 읏!”

남자는 처음에는 유두를 부드럽게 지분거렸다. 하지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에 태운이 몸을 지르르 떨자 남자는 다시 아프게 유두를 비틀었다. 그러나 태운이 고통에 신음을 내뱉으면 다시 부드럽게 유두 주변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았다.

태운은 손안의 콘돔을 꾹 쥔 채로 간지러움과 고통을 오가는 그 감각을 견뎠다. 어느 순간 성기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유두가 만져진 것만으로 빳빳하게 일어선 태운의 성기를 보며 남자는 하 하고 웃었다.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미칠 것 같은 감각을 견디고 있던 태운은 수치감에 이를 악물었다.

느껴지는 감정과는 다르게 아랫배에서 시작해 턱밑까지 간질간질한 감각에 태운은 또 미칠 것 같았다. 사정 직전의 감각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대로 손을 뗐다. 태운은 갑자기 사라진 자극에 몸이 들썩거렸다. 하지만 감히 자신의 몸에 손을 댈 수 없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태운은 눈을 내리감고 남자의 처분을 기다렸다.

남자는 태운이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의 성기를 감싸 쥐게끔 했다. 남자의 의도가 명확해 태운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프게 혀를 물었다. 하지만 성기를 쥐자 참을 수 없었다. 남자가 몸을 일으켜 멀찍이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실내 온도는 따뜻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덮듯이 누르고 있던 남자가 물러서자 태운은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태운은 남자가 쥐어 준 자신의 성기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성기는 이미 단단히 세워진 상태였고, 다시 자극이 찾아오자 금세 사정했다. 곧 몸에 힘이 빠져서 태운은 축 늘어졌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태운은 그제야 자신의 손에 콘돔이 쥐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의 손 안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태운이 자신이 하겠다는 뜻으로 손을 뻗었지만 단번에 콘돔의 비닐을 벗긴 남자가 자신의 성기에 콘돔을 씌우는 것이 빨랐다. 태운의 몸은 다시 뻣뻣하게 굳었다. 고통이 받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몸에 기억된 통증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지독했던 탓이었다.

“으.”

남자는 태운의 낭창하게 마른 두 다리를 모아 잡아 무릎이 가슴까지 닿게 했다. 몸이 반으로 접히는 불편한 자세에 태운은 신음했다. 하지만 남자는 태운의 항문 안으로 질척한 젤을 잔뜩 짜 넣기만 했다. 젤의 차가움에 태운은 몸을 떨었다.

태운의 구멍 안으로 젤을 잔뜩 짜 넣은 남자는 단단하게 발기된 성기를 한 번에 태운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엄청난 고통에 상체에 맞닿아 있던 태운의 다리는 허공을 박찼다.

“아읏!”

태운이 어떻게든 고통을 견디기 위해 시트를 말아 쥐었다. 하지만 그 고통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남자가 안으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내장을 진동하는 고통에 태운은 손발을 전부 가누지 못했다.

허공에서 부유하던 태운의 팔은 마지막 동아줄을 잡듯 남자의 목을 감았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접촉이었다. 태운의 장기를 빻을 듯 추삽질을 하던 남자가 조금 속도를 줄이면서 태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어떻게 해 줄까?”

뭐든지 해 주겠다는 것 같은 남자의 말에도 태운은 그저 이를 악물며 견딜 뿐이었다. 태운은 남자에게 들리지 않도록 얕은 심호흡을 계속했다. 고통을 견디는 일 외에는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모든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것은 태운이 바라던 일이었다.

“……버리지, 버리지 말아 주세요.”

태운은 원하는 것이 오직 그것뿐인 양 말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머뭇거리며 내뱉는 태운의 그 말에 남자는 잠시 태운의 안을 들락거리던 움직임을 멈췄다. 가만히 태운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남자의 얼굴이 제 얼굴 위로 점점 다가오자 태운이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울 것처럼 일그러져서 둥글게 솟은 태운의 볼을 남자가 아프게 짓씹었다. 태운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이로 혀를 악문 채로 견뎠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태운은 단발성의 비명을 속으로 끅끅하고 삼켰다.

하지만 남자는 한참을 더 태운의 둥근 뺨을 잘근잘근 씹었다. 남자가 태운의 뺨에서 이를 떼었을 때는 뺨에 잇자국이 심하게 남은 상태였다.

태운은 멀어져 가는 남자의 얼굴을 멀거니 응시했다. 얼굴에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이 방금 남자가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지만, 태운은 그 행동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윽.”

허리를 완전히 세운 남자가 태운의 항문에 느슨하게 걸쳐져 있던 성기를 안으로 훅 하고 쳐올렸다. 그 생경한 감각에 참고 있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태운이 처음부터 항문 성교로 쾌감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자와의 관계를 이어 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태운은 그 감각 자체를 치욕으로 느꼈고, 한 번도 그것이 제대로 된 쾌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문 성교만으로도 쾌감을 느꼈단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태운이 느끼는 곳은 꽤나 깊었다. 하지만 남자는 한 번도 그곳을 알고 제대로 자극해 준 적이 없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남자가 찍어 눌러 오는 곳이 태운이 심하게 느끼는 곳이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남자는 허리를 쳐올렸고 태운은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태운은 그 하얀 감각을 견디기 위해 구명줄처럼 쥐고 있던 남자의 목에 힘을 더했다.

“윽, 윽!”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저 견디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쾌락은 진한 치욕감과 함께 고통을 동반했다. 태운이 그 감각을 견디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입을 벌리고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입을 벌리고 숨을 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으로 들어오는 숨은 얼마 되지 않아 숨을 내쉬고 마실수록 태운의 숨은 가빠졌다. 그러자 남자는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태운이 느끼는 깊은 곳으로 성기를 내리눌렀다.

“악, 아앗!”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다시 까매지는 감각에 태운은 이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자가 사정을 했다.

남자의 성기에는 콘돔이 씌워져 있어서 그럴 리 없겠지만, 태운은 내부 가득 정액이 채워지는 느낌에 잘게 몸을 떨었다. 한 번 사정을 마친 남자가 콘돔을 갈아 끼우기 위하여 태운의 내부에서 성기를 빼냈다.

눈앞을 하얗게 만들게 하던 강력한 쾌감이 갑자기 사라지자 태운은 축 늘어졌다. 부피를 더한 태운의 성기만이 태운의 몸에서 유일하게 힘 있는 부분이었다.

침대에 바싹 붙은 태운이 무의식중에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남자를 빤히 응시했다. 어느 정도 의식은 남아 있지만 자신이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몽롱한 기분이었다.

분출되지 못한 쾌락 때문에 아랫배에서 시작해 성기까지 전부 저릿해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태운은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가질 때 한 번도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태운은 남자와의 성행위 중에 한 번도 자신의 몸에 자의로 손을 대어 본 적 없었다.

무의식중에도 마찬가지였다. 태운은 저릿한 성기에 손을 대는 대신에 손을 뻗어 남자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조금만 손을 뻗어도 닿을 거리에 남자가 있었지만 태운은 바로 앞에서 손을 멈췄다.

힘을 잃은 태운의 손이 뚝 하고 침대 위로 떨어졌다. 태운은 순간적으로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른하게 감길 것 같은 눈을 감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남자가 단번에 그 노력을 부질없게 만들었다.

“윽.”

콘돔을 묶어 침대 밑 휴지통에 던져 넣은 남자가 태운의 단단한 성기를 쥐어 왔기 때문이었다. 축 늘어져 있던 태운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런 곳을 남자가 직접 손으로 만질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태운의 쾌락에 관심 없었던 것만큼 남자는 태운의 성기에 직접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가끔 태운을 벌주기 위해서 태운이 자신의 성기를 직접 쥐게 하고 자위를 시키는 정도가 전부였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있어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태운의 눈이 당황으로 커지자 둥글한 모양이 되며 인상이 순해졌다. 당황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도 태운은 차마 자신의 손으로 남자를 제지하지 못하고 당황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악!”

남자가 물건을 쥐듯이 태운의 단단한 성기를 쥐었다. 고통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 태운은 스스로도 깜짝 놀라 혀를 아프게 깨물었다. 혀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치아가 혀를 뚫고 서로 맞닿을 듯 가까웠다.

남자는 계속해서 물건을 주무르듯 태운의 성기를 쥐었다. 태운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 고통을 견뎠다. 태운이 전혀 저항하지 않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이를 부들부들 떨며 고통을 감내해 내자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의미에 대해 정신이 없는 태운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남자조차도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손아귀의 힘을 빼고 태운의 성기를 가볍게 쥐고 주물렀다.

갑작스러운 감각 변화에 눈을 가늘게 뜬 태운이 남자를 응시하는 눈길이 길었다.

“으…… 읏.”

태운이 달뜬 소리를 냈다. 고통에 가라앉았던 성기가 겨우 그 정도에 다시 발기했다. 태운의 손은 차마 남자의 손 위로 뻗어지지도 못하고 아랫배 위의 허공을 배회했다. 소리를 죽이기 위해 태운이 이로 입술을 악물었다. 태운의 손끝이 떨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손길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 태운의 쾌락을 끌어내고 있었다. 다른 의도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태운은 착실하게 쾌락의 끝에 도달했다. 남자의 손길은 투박했지만 쾌락으로 도달하는 역치가 낮은 태운에게서 쾌락을 끌어내기에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으!”

태운이 부르르 떨며 사정했다. 울컥하고 남자의 손 위로 미끌미끌한 액이 뿜어졌다. 태운은 입술을 깨물며 감각을 견디는 순간에도 남자의 손을 더럽힌 자신의 액체가 먼저 보여서 하얗게 질렸다.

그냥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태운의 이가 덜덜 떨렸다. 이를 악물었지만 잔떨림은 전부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남자의 손을 닦을 만한 티슈나 옷가지들이 보이지 않았다. 침대의 시트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는 않아서 태운은 눈을 꾹 감고 남자의 손을 끌고 왔다. 창백하게 질린 태운의 얼굴은 남자의 손보다도 작아서, 태운의 얼굴 위로 까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남자의 손이 태운의 얼굴 위로 더 내려오자 태운은 혀를 내밀었다. 씁쓸한 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자신의 정액을 혀로 핥는 태운을 남자는 짙어진 눈을 하고 응시했다.

* * *

늦은 밤부터 시작된 행위는 새벽 다섯 시, 남자의 핸드폰에 누군가 전화를 걸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핸드폰 벨 소리에 단번에 태운에게서 떨어진 남자는 한참을 핸드폰을 들고 무엇인가 보고를 받는 듯 대답을 했고, 또 지시를 내렸다.

통화 내용을 들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남자가 전화를 받기 시작하자 태운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지만 움직이지 말라고 남자가 손짓하는 것이 먼저였다.

절대 남자의 통화에 자신의 목소리가 섞이게 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태운은 알몸으로 벌을 받는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 옆에 서 있었다. 남자는 태운이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이나 전화로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더니 마지막으로 “재성 보고서 가지고 올라와.”라는 말을 덧붙였다.

남자의 다른 말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었지만, 그 마지막 말은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운은 무의식중에 아랫입술을 악물다가 쓰라린 느낌에 입술에서 이를 떼었다. 밤새 입술을 악물고 참았던 후유증이었다. 입안의 여린 살들이 치아에 의해 다 헤져서 입안에서는 피 맛까지 감돌았다.

입안에 퍼지는 피 맛에 태운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밤의 기억이 드문드문했다. 신경 안정제를 너무 많이 복용한 부작용인지 아니면 남자와의 행위 중 정신을 놓았던 탓인지 확실치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남자가 물었었다. 아니 정말 그것을 남자가 물었는지는 기억이 또렷하지 않았다. 남자가 물었던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 속으로 자조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했던가, 아님 할 말이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입을 열지 못했던가. 자신이 어떤 대답을 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자와의 시간을 도려내고 싶었던 적은 많았지만 정말 이렇게 도려내진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드문드문 이어지는 기억만으로도 태운은 아연해졌다.

“죄송합니다. 가 보겠습니다.”

남자가 통화를 끝내고 협탁 위로 핸드폰을 내려놓자 태운이 말했다. 태운은 온몸이 다 삐걱거렸다. 불편한 자세로 몇 번이나 남자를 받아 내야 했던 탓에 허리가 뭉쳐서 아팠고, 다리가 부들거려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몸 상태가 최악이라도 객실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차라리 길 한가운데서 아픈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씻고 나와.”

하지만 태운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닐 텐데도 남자는 자신이 할 말만을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방에 홀로 남은 태운은 망연히 남자가 나간 방을 응시했다.

* * *

태운은 식당에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남자의 명령대로 태운은 욕실에서 대충 샤워만 끝내고 나왔다. 온몸이 찝찝해서 살이 벗겨질 때까지라도 씻어 내고 싶었지만 남자의 욕실 안에서 늦장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욕실에서 나온 태운은 망부석처럼 서서 한참을 또 남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남자는 샤워 가운을 입고 욕실에서 나와 태운에게 식당으로 들어가라고 눈짓했다.

들어온 식당에는 김이 나는 식사가 태운 몫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태운은 응접실에서 한참을 서 있으면서도 사람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고 무엇인가가 준비되는 소리조차도 듣지 못했다.

남자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반듯하게 서 있던 태운은, 남자가 앉으라고 턱짓하고 나서야 남자의 맞은편 자리에 허리를 펴고 곧게 앉았다.

남자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은 태운에게 곤욕이었다. 남자는 그런 태운을 신경 쓰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는 일 인분씩 따로 준비되어 있었는데, 각각 개인 식기에 반찬이 덜어져 있어서 남자와 태운 사이에는 긴 경계선이 있는 것 같았다.

“왜 안 먹고 그러고 있어?”

“……죄송합니다.”

남자의 말에 태운은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태운은 밤을 샌 상태라 입으로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가 지적한 이상 먹지 않을 수는 없었다. 뜨거운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가자 헤진 입안이 잔뜩 따가웠다.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이었지만 태운은 전혀 음식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태운은 그저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으로 넣으며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속으로 음식이 들어가자 태운은 헛구역질이 절로 올라왔다. 그것을 밖으로 티내지 않으려니 쉽지 않았다.

“이게…….”

식사를 마친 남자가 식탁 한쪽에 치워져 있던 서류 봉투를 아직도 기계적으로 입으로 음식을 밀어 넣던 태운에게 건넸다. 태운은 수저를 소리 나지 않게 식탁 위로 내려놓고, 양손으로 남자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밖으로 돌아도 상관없는 서류야.”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태운이 남자를 따라 같이 일어났지만, 식당을 나서는 남자를 부를 수도 그렇다고 잡을 수도 없었다.

남자의 객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태운은 바로 새로운 객실에 체크인했다. 그리고 뛰듯이 들어가 남자 앞에서 억지로 입안으로 밀어 넣었던 음식물을 다 토해 내었다.

단단히 체한 나머지 태운은 머리마저 핑 도는 듯했다. 들고 온 가방에서 언젠가 매니저가 넣어 놓았던 소화제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목으로 약이 넘어가자 다시 토기가 올라와 태운은 다시 한 번 물과 약을 게워 냈다. 이젠 다시 약을 넘길 힘조차 없었다. 태운은 겨우 양치를 하고 한참 동안이나 남자의 객실에서 마치지 못한 샤워를 다시 했다.

그런 후에야 태운은 침대 위로 축 늘어졌다. 잔뜩 고통을 받고 싶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겨우 이 정도에 또 발밑이 전부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다가 태운은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서류 봉투 두 개에 시선이 닿았다. 소속사 사장이 건네준 서류는 확인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만 남자에게 받은 서류는 어쩐지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류 봉투를 집어 들며 태운은 잔뜩 헤진 입술을 다시 악물었다. 서류 봉투를 앞에 두고 한참을 망설이던 태운은 서류를 밀봉하고 있는 끈을 풀고 서류를 꺼냈다.

막상 서류를 눈앞에 두었지만, 사실 본다고 해서 태운이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태운에게만 보여 주려고 작성된 서류가 아닌 듯 종이에는 알 수 없는 용어와 기호들이 가득했다.

남자는 서류가 밖으로 돌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어도 된다는 의도인지는 알 수 없었고, 또 남자에게 받은 서류를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조언을 얻는다는 것은 태운의 선택지에 처음부터 없기도 했다.

생소한 용어들과 그래프와 표로 가득한 서류였지만 태운은 꼼꼼히 읽어 나갔다. 서류 마지막 장은 비교적 명확하게 결론지어 있었다.

소속사 사장은 본사의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다른 계열사의 주식을 암암리에 사들이고 있었는데 시중에 있는 주식을 전부 모아도 경영권을 손에 넣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에 문외한인 태운이 보기에도 당연한 결론이었다.

재성 그룹은 JS 텔레콤을 필두로 영화 투자사와 유통사, 배급사, 영화관 프랜차이즈를 포함해, 케이블 방송사와 음반 유통사 그리고 태운의 소속사인 재성 엔터테인먼트의 모기업으로 손꼽히는 미디어 재벌 그룹이었다. 그런 그룹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의 주식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검은돈이 수없이 많이 오가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축적할 수 있는 부에는 한계가 있을 터였고, 소속사 사장이 그룹의 경영권을 찬탈하려고 하는 것은 태운이 보기에도 가능해 보이지 않는 일이었다.

앞 장의 수많은 표와 그래프들은 최근 재성 그룹과 계열사의 주식 동향과 많은 변수를 넣어 소속사 사장의 경영권 찬탈 성공 확률을 계산한 것 같았는데, 사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태운은 도출된 결론이 당연하다고 느꼈다.

능구렁이 같은 소속사 사장과는 맞지 않는 행보였다. 하지만 사장의 행보를 헤아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만큼 태운 자신이 여유로운 마음 상태도 아니었다.

태운은 마지막 장까지 읽어 나간 서류들을 잘 갈무리해 다시 서류 봉투 안으로 집어넣었다.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한계였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구겨지지 않도록 협탁의 위로 서류를 치운 태운은 쓰라린 살갗을 느끼며 남자가 이렇게까지 해 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 * *

“태운 씨, 미안한데 잠깐 나 좀 봐.”

촬영장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일주일 만에 재개된 촬영이었다. 스태프들은 태운의 눈치를 살폈다. 같은 장면에서 오늘만 벌써 네 번째 끊어 가는 상황이었다. 일주일 전 촬영 때 감독이 태운에게 시간을 주게 만들었던 장면이기도 했다.

영화에 중요하지 않은 장면은 없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중요도가 덜한 장면이었다. 이렇게까지 어렵게 촬영할 만큼 섬세한 연기가 필요한 장면도 아니었다.

더 섬세한 감정 연기가 필요한 장면들도 NG 없이 해내서 스태프들을 기겁하게 하였던 태운이 계속해서 감정에 대해 지적을 받자 스태프들은 촬영이 지체되고 있다는 짜증보다도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이렇게까지 힘들게 찍어야 할 장면이 아니었다. 게다가 태운의 연기가 썩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감독이 세 번째 끊어 냈을 때도 ‘대충 넘어가지.’라고 속으로 생각했었을 정도였다. 스태프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힐끗하고 태운의 눈치를 보았다. 이번에야말로 태운이 폭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었다.

촬영장에서 태운은 굉장히 무난한 성격이었다. 본인의 성격 자체가 그런 듯했다. 대하기 조금 어렵다는 것만 빼면 힘든 일정에도 촬영을 펑크 내거나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고, 고된 촬영에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은, 인간이기는 한 것일까 의심이 들 정도의 성격이었다.

하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장면에서 벌써 오늘만 네 번째—지난 촬영까지 생각하면 더 많이—감독이 촬영을 끊자 이번에는 정말 태운이 폭발할 것 같아 스태프들은 다들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태운은 고개를 한 번 숙여 촬영 지연에 대해 카메라 뒤의 스태프들에게 사과하고 카메라 앵글 앞에서 벗어나 감독에게로 다가갔다. 감독은 자신 쪽으로 쏠린 시선들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다가오는 태운을 보며 촬영장 한쪽에 마련된 대기실로 가자고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에 태운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매니저에게 올 필요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매니저가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감독은 자신의 대기실로 태운을 데리고 들어갔다. 한창 촬영 중이라 대기실과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감독의 대기실로 들어가자 담배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태운은 담배가 당겼다. 태운과 감독밖에 없는 조용한 대기실은 정적만이 가득했다. 감독은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말을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어렵게 갈 장면이 아닌데. 대체 왜 그래, 태운 씨.”

“죄송합니다.”

태운은 쓸데없는 데 자존심을 세우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세울 자존심 자체가 없었다.

“난 대체 태운 씨가 왜 이렇게 힘이 들어갔는지 이해가 안 돼. 영 감정을 못 잡는 것 같아서. 길게는 아니지만 잠깐 휴식까지 줬잖아. 근데도 아직도 태운 씨 연기에는 분노밖에 안 남아 있어.”

“…….”

“아, 물론 화가 나는 게 맞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이전 씬은 잘 찍어 놓고 왜 그래. 연장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지금은 힘을 좀 빼고 동생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무너져야 된다고. 그런데 태운 씨 지금은 너무 독해. 범인 죽이고 나서 눈 형형하게 빛내는 것처럼 독하다고.”

“…….”

“나 이렇게까지 감정 세세하게 잡아 주는 거 좋아하지 않고 배우들 준비해 온 거 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하는 편인데. 나 정말 지금 태운 씨 연기는 너무 이해가 안 돼서 그래. 태운 씨가 만약 이 장면을 지금 태운 씨 감정으로 해석해 온 거라면 차라리 지금 여기서 나를 이해시켜 줘. 그럼 앞으로 촬영 방향을 바꾸더라도 한번 태운 씨 감정대로 가는 걸 고려해 볼게.”

결국 책망하는 어조가 되어 버린 것을 깨달고 감독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이라고 해서 태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이 장면 전까지만 해도 태운은 감독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훌륭했었다. 십수 년 경력의 감독조차도 태운처럼 무난한 성격에 연기 또한 만족스러운 배우를 본 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태운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담배가 당겼다. 감독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태운을 주무르기 쉽도록 기를 누르려고 시도하거나 촬영장을 휘어잡기 쉽도록 일부러 태운에게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촬영장 분위기를 잡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태운을 따로 대기실까지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내가 말을 부드럽게 못해. 혹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태운 씨 감정 다시 잡는 것으로 생각할게. 미안한데 시간은 많이 못 줘. 일단 점심 먹으면서 생각해 보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말해 줘. 다른 장면 먼저 찍고 가자.”

“네.”

태운의 어깨를 한번 도닥인 감독이 대기실을 먼저 빠져나갔다. 그 후에 태운이 대기실을 나오자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대기실 앞에 서 있었다.

“괜찮아? 감독이 뭐라 그러는 거야?”

“……형, 담배 좀 주세요.”

매니저는 더 묻지 않고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와 라이터를 건넸다. 태운은 담배를 태우기 위해 건물을 빠져나가 촬영장 뒤편 공터로 향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훅하고 태운의 뺨을 스쳤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담배 끝에 불이 붙고 연기를 빨아들이자 태운의 볼이 홀쭉해졌다. 그리고 다시 숨을 내뱉자 뿌연 담배 연기가 태운의 시야를 흐렸다.

다시 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그 감정이 자꾸만 카메라 앞에서 터져 나왔다.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태운은 한숨과 함께 다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연기 속으로 태운은 흐려졌다.

지금까지는 인물에 자신을 대입하며 마치 그 인물이 된 것처럼 상상하며 연기했지만, 이번 영화의 장면들에서는 자꾸만 현실의 감정이 묻어 나왔다.

온몸에 힘이 빠져 태운은 대기실로 돌아와 소파에 길게 늘어졌다. 마침 점심시간에 가까운 시간이었고 눈치가 빤한 매니저는 이미 스태프들을 다 내보내고 자신마저 자리를 비워 준 후였다.

태운은 수만 번 후회했다. 그때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떤 방법을 써서든 동생을 구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가 절망한 시간 동안 동생은 이미 더 큰 결정을 했다. 태운이 데뷔한다고 했을 때 기뻐하던 아정의 어린 마음은 아버지를 죽인 자신이 오빠의 발목을 잡게 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태운의 호적은 여전히 죽은 친모에게 있었고 호적상으로는 동생인 아정도 친부와도 전혀 연관성이 없었다. 자신만 사라진다면 태운은 아무 문제 없이 데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아정의 어린 마음은 아정이 남겨 놓은 유서에서 드러났다.

하지만 태운은 병실에서 자신을 보고 발작하던 동생을 보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오빠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정이 알게 된 건 아닌지, 그 사실이 너무 끔찍해져 버린 것이 아닐지 두려웠다. 동생은 정말로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태운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을 가려도 떠오르는 하얀 얼굴은 깜짝 놀라 눈을 떠도 사라지지 않았다. 태운은 생각을 비우기 위하여 노력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감히 떠올릴 수 없는, 아니 떠올리면 안 되는 얼굴이었다. 태운은 자신이 동생을 계속해서 떠올리면 그 착한 아이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 아이도 자신도 다시 평안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은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자신이 너무 무능력했다. 태운은 머리를 소파 헤드에 쿵쿵 하고 박았다. 잊어야 했다. 자신은 감히 떠올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머리가 징징 울렸다. 간간히 숨만 내쉬며 소파에 길게 기대어 있던 태운은 무심코 자신의 뺨을 만졌다. 그날 드문드문한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기억 중의 하나는 뺨의 살점을 뜯어 낼 듯이 이를 박아 넣던 남자의 모습과 그 끔찍한 고통이었다.

태운은 피식하고 웃었다. 정말로 그 순간, 그가 준 고통으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던 스스로에 대한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비웃음이었다.

* * *

점점 나빠지고 있다. 태운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남자와의 관계 중 기억이 듬성듬성 잘려 나갔던 그날. 신경 안정제를 과다 복용한 부작용이라고 생각해 그날 이후로는 정해진 용법대로만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약을 과다 복용하지 않았음에도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가 돌아왔다.

게다가 정해진 용법대로의 복약은 이미 내성이 생긴 태운에게 아무 효과도 주지 못했다. 약을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신경 안정제를 먹지 않을 수도 없었는데 약을 먹지 않으면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불면이 계속되고 자꾸만 기억이 끊기고 있었다. 남자와의 행위 중처럼 기억이 뭉텅이로 잘려 나간 적은 아직까지는 없었지만 짧은 순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괜찮겠어?”

요즘 매니저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면 괜찮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태운은 그때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식사를 끼니마다 토할 것 같을 때까지 억지로 밀어 넣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고작 체중을 유지하는 것이 전부였다.

태운은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맨 마지막으로 빼놓았던, 집안에서 동생의 흔적을 발견하며 그 아이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절망에 빠져 가는 장면이었다.

몇 번이나 촬영이 미뤄졌음에도 여동생 역인 슬아는 태운을 보자 불평 없이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해 왔다. 그녀는 죽은 후에도 집 안에 남은 흔적들을 연기해야 해야 했다. 태운은 그녀에게 목례를 해 대답했지만 그 희고 환한 배우와 제대로 눈을 마주칠 수는 없었다.

동선 체크와 카메라 리허설을 몇 번이나 했던 탓에 감독은 바로 본 촬영에 들어갈 것을 알렸다.

“전체 샷으로 먼저 갈게요.”

감독의 지시에 카메라 감독들이 일사분란하게 카메라를 조정했다. 태운은 아프게 혀를 물며 감정을 정리했다.

“레디, 큐!”

터벅터벅 집 안으로 들어온 태운이 찬기가 느껴지는 집 안을 한번 둘러봤다. 집 안 어디에도 동생의 흔적이 없는 곳은 없었다. 촬영장은 각종 기계들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소영아.”

이름을 부르면 당장이라도 동생이 달려 나올 것 같은 기분에 태운의 배역인 강철은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한참을 기다려도 동생은 나오지 않았다. 태운은 신발을 벗고 뛰듯이 동생의 방 안으로 달려갔다. 동생이 방 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영아!”

동생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태운이 환상을 본 것으로 편집이 되겠지만 실제 동생 역의 배우인 슬아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감독은 끊지 않았고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태운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슬아를 쓰다듬었다. 소영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기던 강철은 갑자기 침대를 주먹으로 쳤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쓰다듬었다는 듯이.

여기까지는 대본 그대로였다. 감독도 후, 하면서 다시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다음이 중요했다. 이전까지의 태운은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방 안에서 모든 분노를 쏟아 부었다. 감독조차도 침을 삼키게 하는 처절한 분노였다.

하지만 그다음은 감독이 머릿속으로 그렸던 상황과는 달랐다. 태운은 분노를 쏟아 내는 대신에 다시 한번 슬아를 쓰다듬었다. 울음을 삼키며 마치 동생이 만져진다는 듯이.

태운은 순간적으로 다시 슬아의 모습에서 동생의 모습을 찾았다. 동생이 없는 집. 동생이 없는 방. 항상 동생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던 그 집.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나갔다.

태운은 아득한 절망을 알았다. 한 치의 미련도 없이 그저 태운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자살을 시도한 동생. 그러나 실패한 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것처럼 정신을 놓아 버린 동생.

태운은 아정의 빈자리를 견딜 수 없어서 하루 종일 수백 번도 넘게 현관문을 나갔다 다시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동생이 집 안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동생이 집 안에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백 번이나 현관문을 들락거렸다.

그때 느꼈던 절망을 태운은 기억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절망스러웠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절망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하여야 할지 갈팡질팡 답이 없는 문제를 풀고 있었다.

카메라 앞으로 선 태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오 년 동안 스스로를 놓았지만 아직도 오 년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다. 촬영장 한가운데 태운은 망연하게 멈춰 섰다. 대본대로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다. 촬영장이 고요해졌다.

태운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눈에서 시작된 눈물이 볼을 타고 턱밑으로 떨어졌다. 어떤 움직임도 없이 그렇게 태운은 눈물만 흘렸다.

그 상황이 한참 계속되고 약간의 수군거림이 시작될 때까지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깊게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던 감독은 한참 후에야 컷을 외친 뒤 여전히 망연하게 움직이지 않는 태운에게 다가갔다.

“대본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나쁘지 않다. 태운 씨 감정 너무 뺀 거 같은데 조금만 쉬자.”

감독이 사람 좋게 웃으며 자신보다 머리 하나만큼이 더 큰 태운의 어깨를 쳤다. 태운은 아직도 자신이 무엇을 한지 인식이 되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촬영 시작한 지는 얼마 안됐지만, 좀 더 쉽시다! 대본 조금만 수정하면 될 것 같으니까. 다들 식후 커피라도 한잔씩 드시고 계세요.”

감독이 웃으며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양해를 구하자 다들 삼삼오오 모여 흩어졌다. 태운의 매니저도 가만히 서 있는 태운에게 다가와 옷 위로 두꺼운 패딩을 걸쳐 주었다.

“좀 쉬고 싶어요.”

태운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태운이 마음에 있는 소리를 입으로 내뱉는 경우는 몇 번 되지 않아서 매니저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패딩만 툭툭 털었다.

오 년 동안 드라마와 영화 촬영을 병행하느라 하루에 두 시간을 채 못잘 때도 태운은 쉬고 싶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촬영이 끝이 나고 좀 쉬라고 할 때조차 쉬지 않고 다시 다른 촬영에 들어가겠다고 말해서 놀라게 만들었다.

그런 태운이 쉬자고 하다니. 매니저는 그 말이 예삿말로 들리지 않았다.

“영화만 끝내고, 푹 쉬자.”

“…….”

“담배 줄까?”

매니저가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건넸지만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분장 때문에요.”

태운의 얼굴을 감싼 두꺼운 화장을 보며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곧게 편 태운이 그런 매니저를 뒤로하고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기실에 들어가서야 딩딩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소파 위로 누웠다. 뒤따라온 매니저는 그런 태운을 위해 문을 닫고 대기실 불을 껐다.

* * *

“실장님, 근데 태운이 형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되긴 뭐가?”

“요즘 회사 분위기 이상한 거 실장님도 아시잖아요. 태운이 형 계약 올해까지 아니에요? 태운이 형도 회사 옮기면 우리도 같이 나가는 거 맞아요?”

가볍지 않은 성격이라 데리고 다니는 녀석이었는데. 매니저는 운전과 각종 잡심부름을 주로 하는 주환의 말에 쯧 하고 혀를 찼다.

사장의 구설수로 회사가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아직 연초라 계약이 거의 일 년 가까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매니저는 태운이 쉽게 소속사를 옮길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기도 했다.

“아직 일 년 가까이 남은 일을 벌써부터 호들갑이야.”

“회사 분위기가 진짜 이상해요. 같이 입사한 동기가 오진혁 매니저라 몇 개 들은 게 있는데, 사장님 곧 망하고 재성 그룹에서도 팽당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대요. 오진혁만 해도 계약 한참 남았는데 소속사를 옮기니 마니 하고 있다던데…….”

“입조심해. 어디 가서 함부로 말 옮기지 마.”

매니저가 목소리를 낮추자 주환은 잔뜩 기가 죽어 푹 하고 고개를 숙였다. 매니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말단 녀석들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이니 회사에 무슨 일이 크게 벌어지고 있는 것은 맞는 모양이었다.

사장이 주식을 끌어모아 본사 입성을 노린다는 소문은 이미 팽배했다. 다들 사장의 필패를 점쳤지만 그 대치가 기묘하게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니 사장이 준비한 한 수가 제법 큰 모양이었다.

게다가 매니저는 사장의 뱀 같은 성정을 잘 알았다. 그의 일처리가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었다. 승산이 없다면 결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매니저는 인간적으로 사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지독한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 * *

“이열.”

복도 끝에서 강찬혁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태운도 촬영장에 늦지 않게—아니 오히려 촬영 예정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도착한 편이었지만, 강찬혁은 그보다 먼저 도착한 것인지 아직 대기실에 들어가지 못해 두꺼운 코트 차림인 태운과는 다르게 얇은 티와 바지만을 걸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코 반갑지 않은 찬혁의 인사에 태운의 매니저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태운은 그런 찬혁에게 단정하게 목례할 뿐이었다.

“야.”

소리를 내어 태운을 부른 찬혁은 태운의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을 떠보듯 오랫동안 응시했다. 하지만 그저 표정을 살피기만 해서는 태운에게 얻어 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다. 됐다. 이따 보자.”

찬혁은 다시 손을 두어 번 흔들고 자신의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찬혁을 보며 매니저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매니저는 강찬혁에 대하여 꽤나 자세하게 알고 있는 편이었다. 독립 영화와 상업 영화의 경계에 있는 영화를 주로 찍는 대학 동기가 언제나 술만 먹으면 주절거리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재성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기 전 강찬혁과 마지막 작품을 함께했던 동기는, 언제나 망가져 버린 강찬혁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강찬혁이 그렇게 되어 버린 것에 대해 강한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들어 보면 이십 대 초반, 그 시절의 강찬혁도 그렇게 평판이 좋았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무명으로 몇 년이나 그 바닥을 구른 주제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고 했다. 그래도 성격이 시원하고 연기를 잘해서 현장에서 제법 예쁨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친구는 크게 성공한 작품은 없었지만 항상 손익 분기점은 넘는 영화를 찍어 왔다. 무난한 충무로 성적표를 원하는 이제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한 배우들이나, 한물갔다는 평가를 들으며 재기를 노리는 배우들은 그의 영화에 출연하기를 원했다.

그 당시, 완성된 영화 시나리오를 배우들에게 돌렸을 때 친구는 생각지도 못한 배우에게 출연을 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좋아했었다. 그때 연락을 해 온 배우는 이십 대 톱 배우 소리를 들었던 이우재였다. 이우재는 연기도 괜찮고 마스크도 나쁘지 않았으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기까지 했다.

성격적인 면에서 결함이 있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친구는 그와의 작업이 투자를 불러들여 규모 있는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기에 단번에 그의 출연을 승낙했다. 보답을 하듯 이우재와 계약을 마치자 투자가 쏟아지듯이 밀려들어 왔다. 친구가 행복감에 비명을 지를 정도였었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우재는 생각보다 성격이 더 안 좋았고 이미 출연이 확정되어 있었던,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했던 강찬혁과 촬영 중 사사건건 시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친구는 언제나 강찬혁을 붙잡고 네가 한 번만 더 참으라고 애원을 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그 날, 두 사람은 촬영장에서 치고 박고 싸우기 직전까지 갔었고 이우재는 참지 못하고 자신을 빼든 강찬혁을 빼든 둘 중 한 사람은 촬영장에서 빼 버리라고 억지를 부리며 촬영을 거부했다고 했다. 그냥 부리는 억지 정도인 줄 알았지만 그 다음 날에 이우재는 정말로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친구는 강찬혁에게 한 번만 더 참고 사과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강찬혁이 이우재를 찾아가 사과까지 했지만, 이우재는 투자자들을 불러 놓고 강찬혁이 빠지지 않으면 촬영을 못하겠다고 생떼를 부렸다고 했다.

이미 돈을 투자한 투자자들은 촬영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대로 이우재를 다시 촬영장에 복귀시켰다가 나중에 같은 일이 또 벌어져 촬영이 지연되고 구설수에 오르느니, 차라리 강찬혁을 빼 버리자고 입을 모았고 친구에게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

결국 친구는 견디지 못하고 강찬혁에게 몇 번이나 사죄하며 도중하차를 알렸다. 하지만 고작 그 몇 번의 사죄 정도로는 결코 도중하차가 정당화될 수 없었다.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강찬혁은 재성 엔터테인먼트의 뱀 같은 사장이 내민 손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거쳐 가는 감독마다 언젠가는 크게 성공할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 몇 년을 무명으로 견뎌 내었던 강찬혁은 소속사를 옮기는 것만으로 단번에 톱스타가 되었다. 그 후로 몇 년간 강찬혁은 눈부시게 잘 나갔었다. 연기력은 무명이었을 때도 감독들 사이에서는 인정받는 편이었고 외모는 특출난 편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못 뜬 것이 이상하다는 평을 받았었다.

하지만 강찬혁에 대한 소문은 점점 나쁘게 변해 갔다. 무명 때마저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해야 했던 성격은 건방지고 제멋대로라는 평이 되었다. 대마를 한다, 스폰서가 있다 등 온갖 좋지 못한 소문은 다 그의 뒤에 꼬리표처럼 붙었다.

친구는 그때에도 어느 정도 강찬혁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그저 소문일 뿐이라고 웃었지만 강찬혁은 점점 나락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 많았던 강찬혁의 연예계 인생에서 정점을 찍은 소속사와의 전속 계약권 분쟁.

그 일 년이 넘는 소송 기간 동안 그가 부렸던 패악에 소속사가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소문까지 더해져 강찬혁은 다들 복귀가 힘들다고 혀를 찰 만큼 망가졌다. 그리고 역시 찌라시 성으로 퍼졌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진실인 것을 아는 스폰서의 존재.

친구는 그 소리를 듣고 엄청난 죄책감에 휩싸였었다. 그런 더러운 길을 걷지 않아도 언젠가는 크게 성공할 녀석이었다고 친구는 꿈같은 소리를 했었다. 자신 때문에 강찬혁이 망가져 버린 것이라고 한탄을 늘어놓았다.

법원은 소속사의 편을 들어 주었고 강찬혁은 남는 것 하나 없이 패소했다. 남은 계약 기간을 모두 이행하라는 법원의 명령에 결국 소속사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강찬혁은 그렇게 너덜너덜한 상태로 카메라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이태운이 서 있었다.

매니저는 사라져 버린 강찬혁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알고 있는 강찬혁은 결코 사람에게 이렇게 친밀감 있는 태도를 보일 인간이 아니었다. 매니저로서는 자꾸만 태운의 근처에 기웃거리는 강찬혁에게 뭔가 나쁜 의도가 있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강찬혁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매니저가 무안해질 정도로 촬영 내내 강찬혁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강찬혁이 부렸던 패악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들 때문에 매니저가 더 촉각을 곤두세운 면도 있었지만, 강찬혁에 대해서는 결코 소문이 아닌 부분들도 존재했고 소문으로 전해지지 않은 부분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강찬혁은 예상 외로 성실하게 촬영에 임했고 촬영 중간 잠시 쉬는 시간에도 대기실로 들어가거나 자신의 매니저조차 떨어뜨려 놓고 구석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원래 성격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태운만큼이나 주변과 쉽사리 친해지지 못하는 모양 같았다.

* * *

여동생은 강간 흔적이 있는 채로 유기당해 시체로 발견되고 어머니는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한다. 그리고 심증이 확실한 범인은 철저하게 준비된 알리바이로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눈이 벌게져 자신을 쏘아보는 강철을 비웃기까지 한다.

강철은 법으로는 절대 범인을 잡을 수 없음을 깨달고 직접 범인을 처단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처절한 추격전.

점점 살인마로 변해 가는 강철.

태운과 강찬혁이 함께 찍는 씬은 서로 마주하게 되는 오늘을 시작으로 촬영 분량의 절반이 넘었다. 극중 가장 클라이맥스인 장면들이기도 했고 처절한 추격전에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이기도 했다.

감독은 종종 둘의 합에 영화의 성공이 달렸다고 말했는데 매니저가 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카메라 속에서 태운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찬혁을 바라보았다. 알리바이가 확실해 강철조차도 그의 범행을 확신하면서도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찬혁이 맡은 캐릭터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강철을 비웃으며 조롱한다.

강철은 그리고 확신한다. 제 여동생을 잔인하게 강간하고 살해한 범인이 ‘그’임을. 그리고 절대 그를 법으로 옭아맬 수 없다고 생각한 강철은 자신이 직접 그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감독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오늘 촬영 분량의 끝을 말하기 전까지도 강찬혁은 태운에게 카메라 밖에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촬영이 끝나고 강찬혁이 제일 먼저 촬영장을 빠져나가자 매니저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태운에게 들고 있던 겉옷과 핸드폰을 건넸다.

핸드폰을 확인하던 태운의 눈동자가 굳었다. 태운의 인간관계는 협소했고, 번호를 묻는 사람들에게는 매니저가 관리하는 핸드폰 번호를 알려 줬기에 외부 유출도 없었다. 아이돌처럼 번호를 캐내려는 극성팬도 없었기에 데뷔 전과 같은 번호를 쓰고 있기까지 했다.

태운의 개인 핸드폰으로 연락을 넣을 사람은 손에 꼽혔다. 매니저, 소속사 사장, 그리고 남자.

[10시 호텔]

남자의 문자였다. 그것도 찍힌 시간은 오전이었는데, 촬영이 끝난 지금에야 확인한 것이었다. 문자를 확인한 태운은 핸드폰 상단의 시계를 응시했다. 여덟 시. 서울의 호텔까지 올라가기에는 조금 촉박할 것 같았다. 태운은 초조한 한숨을 내쉬며 차에 오르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태운이 호텔에 도착한 것은 아홉 시 반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남자가 통보한 시각보다 늦은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와의 관계 전에 준비할 것이 많은 태운에게는 결코 이른 시간도 아니었다.

객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남자의 구두가 현관에 놓여 있었다. 태운은 그 뒤로 멀찍이 자신의 신발을 벗어 두고 서둘러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접실까지 들어왔지만 남자는 없었다. 태운은 손목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열 시가 되기 이십 분 전. 남자가 통보한 시간보다는 일찍 도착했지만, 남자가 말한 시간은 그 시각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라는 뜻이었다.

태운은 열 시까지 준비를 마칠 수 없을 것 같아 남자에게 양해를 구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태운이 길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별로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남자가 한결같이 같은 객실에 묵었기에 태운은 이 객실로 오 년을 불려왔다. 그러나 현관을 들어와 처음 이어지는 응접실과, 욕실, 침실, 그리고 최근 들어갔던 식당을 제외하고는 태운이 들어가 본 곳은 없었다.

남자가 없을 때 태운이 여기저기 들어가 보는 편도 아니었고, 남자도 제한된 공간을 제외하고 태운을 따로 부르는 일이 없었기에 태운은 남자가 어떤 공간에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태운이 들어온 방향 그대로 현관 복도와 응접실이 마주치는 공간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태운이 들어가 보지 못한 방의 문이 열리면서 슈트 차림의 남자가 나왔다. 남자를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발끝만을 응시하던 태운이 허리를 굽혀 남자에게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남자에게서 시작된 독한 술 냄새가 태운의 코끝까지 전해졌다. 마치 술을 몸에 뒤집어쓴 것처럼 냄새가 독했다.

“됐어. 들어가 있어.”

“하지만…….”

태운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남자는 듣지 않고 태운을 지나쳤다. 남자에게서 술 냄새가 짙게 나기는 했지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등만 보이는 남자의 발걸음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았다.

남자의 등이 사라지자 태운은 남자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남자가 나온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로 쓰이는 곳인지 커다란 사무용 책상이 있었고 그 앞으로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별로 생활감이 묻어나지는 않았다.

소파 테이블 위에는 남자가 마시던 것으로 보이는 양주 병들과 술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숨을 의식적으로 내쉬었다 들이마셨다 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숨이 가빠 왔다. 숨이 모자라 어지러움이 느껴질 때쯤 남자가 다시 문가에 서 있는 태운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들고 온 위스키 병과 잔 하나를 테이블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태운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 태운은 남자의 명령 같은 눈짓에 머뭇거림 없이 무거운 발을 옮겨 남자 맞은편에 앉았다.

태운이 자리에 앉자 남자는 태운에게 스트레이트 잔을 건넸다. 태운은 양손을 겹쳐 남자가 내미는 잔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남자가 자신에게 잔을 건네는 이유를 알지 못해 태운은 잔을 받아 자신의 앞에 내려놓았다.

남자가 위스키 병의 마개를 열어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고 태운에게 병째로 건넸다. 태운이 그것도 양손으로 받아 들었다. 남자가 자신에게 술병을 건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었다. 태운은 숨을 멈췄다. 남자와 마주앉아 있는 상황 자체가 태운에게 결코 편할 수 없었다.

“뭐 해.”

한 번에 잔을 비운 남자가 여전히 병을 들고 있는 태운을 향해 말했다. 태운은 혀를 짓씹으며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공손하게 남자의 잔을 채웠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그 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태운의 잔은 비워지지 않았다.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꼿꼿하게 앉아 움직이지 않는 태운을 신경 쓰지 않고 남자는 계속해서 독한 술을 비워 냈다.

남자와 술잔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를 맞춰 줄 만큼 태운은 유연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남자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실 만큼의 대담함도 없었다. 태운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가만히 앉아 시간을 견뎌 내는 일뿐이었다.

계속해서 입안으로 술을 털어 넣고 있었지만 남자는 전혀 취한 기색이 없었다. 남자는 말없이 태운을 빤히 바라봤다. 태운은 그 눈빛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크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남자의 술잔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술병이 금방 비워졌다. 테이블에는 병이 벌써 두 개였다. 얼마나 독한 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스트레이트로 두 병이나 비워 낼 만큼의 술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태운은 감히 남자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고 권유할 처지도 아니었다. 태운은 그저 입술을 물었다. 그냥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태운은 문득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라디오로 들었던 뉴스를 떠올렸다. 십 년 동안 매년 이맘때쯤 되면 비극, 자살 혹은 타살 등의 키워드로 논란이 되는, 이제는 마치 연례행사 같은 일이었다. 올해는 네거티브적인 선전으로 한 영화감독이 그 사건을 영화로 제작하겠다고 해서 유난히 더 떠들썩하기도 했다.

십 년 전, 팔순이 넘는 나이에도 대한민국 경제를 손에 쥐고 흔들던 국내 최대 기업의 총수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후계자인 아들을 능력 없는 머저리라고 비난하며 아들을 건너뛰고 손자에게 재산과 경영권을 전부 상속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 선언 이후 얼마 뒤, 상속에서 제외된 아들은 자신 소유의 별장 근처에서 차가 전복되어 숨을 거둔 채 발견됐다.

최대한 조용히 사건이 수습되었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논란은 엄청났다. 경찰은 단순 사고라고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엄청난 논란들에 상중이었던 노회장과 노회장의 손자이자, 자살한 장남의 외동아들은 장례 절차가 끝나자마자 검찰에 참고인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노회장과 그의 손자 모두 그저 참고인 조사를 받은 것이었지만 근거 없는 낭설과 소문들은 점점 부풀려지기까지 했다. 시간이 흘러 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장남의 기일만 되면 자살이다 타살이다 언론들은 말을 만들어 냈다.

태운은 지독한 술 냄새에 문득 이십 대의 나이에 아버지를 건너뛰고 조부에게 경영권을 상속받은 이가 눈앞에 있는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알고는 있었던 사실인데 그동안은 남자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런 것들이 떠올려지지 않았다.

그 순간 태운은 남자가 인간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태운은 여전히 남자의 술잔 끝만을 응시했다.

병에 술이 전혀 남지 않자 남자가 다시 소파에서 일어섰다. 태운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그런 태운을 보고 픽 하고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침실로 가.”

남자의 말을 태운은 단번에 이해했다. 그리고 웃음의 의미까지도. 남자의 문자를 본 순간부터 준비하고 있었기에 갑작스럽다거나 당황스럽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여전히 그 모든 상황이 불편한 자신이 어리석어 보일 뿐.

남자는 다시 태운을 남겨두고 나갔고 태운은 남자의 뒤를 따라 서재를 빠져나왔다. 태운이 서둘러 일련의 행위들을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남자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알몸에 샤워 가운만을 걸친 태운은 볼 안쪽을 깨물며 남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태운이 남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서자 남자의 머리 위로 까만 그늘이 졌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자신을 올려다보자 태운은 문득 무릎을 꿇으려다가 지난번에 툭하면 무릎부터 꿇는다고 남자에게 지적받았던 것이 생각나 멈칫했다.

하지만 남자가 나른하게 등 뒤로 손을 짚으며 다리를 벌리자 남자의 의도를 눈치챈 태운은 그대로 남자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꿇었다. 손으로 남자의 가운을 헤치고 혀로 입술을 축였다. 태운의 입술이 침으로 축축하게 젖었을 때쯤에야 남자는 눈짓으로 허락을 말했고 태운은 남자의 귀두를 입안으로 넣었다.

곧 춥춥 하고 음란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태운은 입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남자의 성기를 애무했다. 벌려진 입술이 아파 오고 혀끝이 저렸다. 성기가 입안에서 발기하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이 찢어질 듯 입이 벌려졌다. 그 상태가 되자 태운은 혀를 움직이는 것조차 여유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였다. 태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에 박혀서 아팠다. 하지만 태운은 그 고통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도무지 늘지 않는군.”

말을 하며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숨을 쉴 수조차 없게 입을 꽉 채우는 느낌에 태운은 컥 하고 숨이 막혀 왔다. 생리적으로 태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지만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허리를 튕기며 태운의 입안으로 추삽질을 시작했다.

태운의 머리채를 쥔 남자는 태운을 인형처럼 흔들었다. 태운은 정신을 차리기 힘든 와중에도 남자의 성기에 자신의 이가 닿지 않게 하려고 이를 감싼 입술에 힘을 주었다. 고통스런 감각에 머리가 징징 울렸다. 곧이어 비릿한 점액질이 입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태운의 눈에 맺힌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남자가 그런 태운의 머리채를 잡고 침대 위로 내동댕이쳤다. 태운은 이를 악물고 침대에 반듯하게 누웠다. 침대에 경직된 채 누운 태운을 남자가 잠시 내려다보았다. 태운은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눈을 길게 내리감았다.

남자의 스킨 냄새가 가까웠다. 태운은 혀를 악물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태운은 웃으려고 했지만 웃음이 지어지지는 않았다. 카메라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흉내 낼 수 있는 웃음이 남자 앞에서는 너무 어려웠다.

남자가 침대 위에 무릎으로 섰다. 태운의 다리를 벌려서 자신의 어깨 위에 그 다리를 올렸다. 태운의 허리가 들리고 그 사이에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의 단단한 어깨 위에 다리가 겹쳐지자 태운은 최대한 하체에 체중을 싣지 않으려고 했다. 불편한 자세였지만 남자가 올려놓은 것을 자신의 마음대로 아래로 내릴 수도 없었다. 지금은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자세를 잡은 남자가 태운의 손 위로 콘돔을 올렸다. 태운이 조심스럽게 콘돔을 씌우자 남자는 젤로 진득한 태운의 항문 안으로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었다. 태운이 윽, 하고 잔뜩 눌린 신음 소리를 냈다. 젤이 녹아 물처럼 시트로 흘렀다. 하지만 남자도 태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는 단번에 태운을 가르고 들어왔다. 태운은 그 느낌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태운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번에 깊은 곳까지 치고 들어온 남자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다시 태운을 내려다보았다. 태운은 그 눈길을 견디지 못하고 더 세게 혀를 물었다.

그러자 평소와는 다르게 남자가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운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쳐 대던 평소와는 달랐다. 하지만 남자의 달라진 행위에도 견딜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그곳이 간지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태운은 시트를 뜯을 듯 쥐었다.

“읏!”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고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다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태운을 혀를 더 아프게 깨물었다. 입안이 헤진 듯 피 맛이 났다.

남자의 성기가 태운의 안에서 완전하게 발기했다. 태운이 다시 진저리 쳤다. 하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간지러움에 몸서리칠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으…….”

몸이 절로 비틀리려고 하는 것을 태운은 참았다. 이미 피 맛이 나는 혀를 더 아프게 짓눌렀다. 으으, 하고 절로 참을 수 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눈 밑까지 열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태운은 견디기 위해 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픽 하고 웃었다.

웃음의 끝은 짧았다. 태운의 골반을 잡은 남자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조금 빨라지는 것 정도야 견딜 만할 것 같았는데 어쩐지 더 견디기 힘들었다.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남자가 허리를 쳐올리는 느낌이 더 생생하게 태운의 안에서 느껴졌다. 태운은 또다시 소름이 돋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 순간 태운은 남자보다 먼저 하얀 정액을 밖으로 내보냈다. 눈 밑까지 치달았던 열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쉬느라 태운의 입에서는 연신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어느 정도 정신이 생기자 태운은 자신의 정액의 남자의 가슴까지 튀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점점 허리를 쳐올리는 속도를 빨리했지만, 그것을 발견한 태운도 신경을 끌 수는 없었다.

감각을 견디기 위해 힘을 주어 쥐고 있던 시트를 끌어와 남자의 가슴을 닦았다. 시트 너머로 느껴지는 남자의 가슴은 전혀 눌리지 않는 벽처럼 단단했다. 다시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태운은 또 한 번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태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죄송, 합니다.”

태운의 뜨거운 숨이 말이 되어 울렸다. 그 순간 남자는 태운의 안에 사정했다. 태운의 이가 덜덜 부딪쳤다. 숨이 모자란 태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태운의 안에서 성기를 빼낸 남자가 콘돔을 묶어 버렸다. 태운은 남자의 성기를 닦기 위해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남자는 협탁 위에 있는 티슈케이스에서 티슈를 빼내어 자신의 성기에 묻은 정액을 닦아 내었다.

그리고 태운의 손에 비닐에 싸인 두 번째 콘돔을 올려놓았다. 태운은 이를 악물며 콘돔의 비닐을 벗겼다. 그 후로 남자는 수도 없이 더 태운의 안에 사정했다. 남자가 매번 콘돔을 끼우고 사정을 한 탓에 태운의 안에 남은 것은 없었지만, 태운은 안쪽에 무엇인가가 가득 찬 느낌이었다.

* * *

태운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커다란 창에서 빛이 쏟아지듯 밀려들어 올 때였다. 유독 집요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행위를 견디다 못해 까무룩 하고 정신을 놓았던 기억이 났다. 태운은 삐걱거리는 몸을 추스르고자 했다. 태운이 이미 헤진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겨우 멎었던 피가 입안에서 다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방 안을 벗어나기 위해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킨 태운은 아직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창백하게 질렸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경직된 태운은 남자를 깨울까 봐 더 움직이지도 못했다. 항상 행위가 끝나고 힘에 부쳐 쓰러져 있는 태운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방을 빠져나가는 남자였다.

그것이 몇 번이 반복되자 남자가 방을 나가기 전에 서둘러 불편한 몸을 일으킨 태운이 먼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남자와 정사 후에 한 공간에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태운이 자신이 움직이는 소리에 자고 있던 남자가 깰까 봐 상체만 일으킨 상태로 굳어 있는데 남자가 눈을 떴다. 잠에서 깬 것 같지 않고 잠시 눈을 감고 있다 떴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잠에서 깬 남자의 시선이 침대에 몸을 일으킨 채 앉아 있는 자신에게로 향하자 태운이 당혹스러운 마음에 이로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 합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태운의 입에서 나와 흩어졌다. 소리를 질렀던 것도 아닌데 밤새 소리를 지른 목처럼 칼칼하고 쓰라렸다. 태운이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땅에 발을 내딛자 척추부터 시작해 발목까지 찌르르 하고 고통을 호소했다.

“……쉬십시오. 가 보겠습니다.”

태운이 남자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태운의 동그란 어깨가 도드라졌다. 서 있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허리를 굽혔다 펴자 몸이 마비가 된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태운은 난감한 마음에 혀를 아프게 물었다.

“씻고 나와.”

태운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속으로 숨기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협탁 위에 있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남자의 입에서 회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태운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객실 안의 욕실로 몸을 돌렸다. 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욕실에 들어온 태운은 샤워 부스 안의 벽에 기대섰다. 등이 차가운 벽에 닿자 소름이 올라왔다.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태운은 샤워기를 틀었다. 머리 위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내렸다.

손을 들 힘조차 없어 한참을 그렇게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고 서 있었다. 그러다 힘에 부친 태운은 샤워 부스 벽에 기댄 채로 주저앉았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태운은 다리를 모아 몸을 둥그렇게 모았다.

눈을 감으면 잠에 빠질 것만 같은 나른함이 몰려왔다. 무릎에 이마를 대고 그대로 눈을 감았던 태운은 잠시 후 온몸에서 느껴지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불쾌한 감각에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하얀 살이 전부 붉게 변할 때까지 북북 씻어 냈다.

* * *

샤워를 마치고 다시 객실로 나오자 코끝에 담배의 씁쓸한 향이 느껴졌다. 태운은 갑자기 흡연욕이 샘솟아 올랐다. 하지만 담배를 가진 것이 없었다. 평소에는 잘 피우지 않는 편이었고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매니저에게 빌려 피우는 편이었다. 집에도 그렇게 매니저가 건네준 담뱃갑이 얼마 있었지만 한 갑이면 한 달을 넘게도 피우기도 했다.

밀려오는 흡연욕에 입술 끝이 메말랐다. 잔뜩 헤진 입안은 침이 닿는 것만으로도 쓰라렸다. 태운은 습관적으로 혀를 물다가 쓰라린 감각에 입을 벌렸다. 자고 싶었다. 아니, 그것보다 담배가 당겼다. 그 어느 것이라도 남자의 공간 안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태운은 다시 한 번 남자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대충 옷을 걸쳐 입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 앞에는 샤워 가운을 걸친 남자가 응접용 소파에 앉아 하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 보겠습니다.”

태운의 말에 그제야 남자는 태운을 발견한 듯 태운을 보았다. 태운이 허리를 굽혀 다시 인사했다.

“식사하지.”

이번에는 정말로 태운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태운이 당혹스런 눈을 밖으로 내보이고 있는데도 큰 관심 없이 보고 있던 서류를 갈무리한 남자는 서류를 든 채로 소파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태운은 반사적으로 남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지만 결코 그 발걸음이 편할 리 없었다. 식당에는 이미 두 사람 몫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남자가 따로 지시를 내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호텔 객실 안은 언제나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태운은 남자 말고는 객실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본 적조차 없었다.

태운이 차마 의자에 앉지 못하고 의자 뒤편에 서 있기만 하자 남자가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태운은 어쩔 수 없이 남자의 앞에 앉았다. 숨이 탁 하고 막히는 느낌이었다.

남자가 젓가락을 들었다. 태운은 그 후에 젓가락을 들었다. 남자가 식사를 시작했고, 태운은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뜨거운 음식물들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헤진 입이 아파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하지만 태운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당연히 음식의 맛이 느껴질 리 없었다. 목 안으로 삼켜질 크기 정도만으로 음식물을 씹은 태운은 그냥 그것들을 삼켜 내었다. 음식물들이 체한 듯 가슴께에 걸렸다. 코끝이 찡해지고 목이 아렸다.

남자는 말없이 식사를 이어 나갔다. 차마 남자 쪽으로 시선을 둘 수조차 없는 태운은 식탁 위의 음식물들만을 응시했다. 위액이 역류하는 기분이었지만 태운은 계속해서 음식물들을 삼켜 내었다.

“한동안은 여기에 머물러.”

태운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입안에서 다시 피가 터졌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태운이 티가 나지 않도록 가늘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들이쉬었던 것보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의식하지 않으면 숨조차도 쉬어지지 않았다.

태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곧 쓰러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식사를 이어 나갈 뿐이었다.

“지금…… 영화 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태운이 억지로 목에서 끌어 올린 소리를 냈다. 남자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태운을 응시했다. 그 시선이 태운에게 닿자 태운은 살이 찢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낮 시간에는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어.”

“하지만…….”

“대가는 섭섭하지 않게 치르지.”

태운은 입술을 떼었지만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남자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일정을…… 조정해 보겠습니다.”

겨우 뱉어 낸 태운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식사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남자는 슈트 차림으로 객실을 빠져나갔다. 없는 스케줄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어 객실을 빠져나갈 정도의 유도리가 없는 태운은 결국 남자도 없는 객실에 홀로 남겨졌다. 하지만 결코 마음도 몸도 편할 수 없었다. 여전히 몸은 삐걱거렸다. 태운은 어디에도 앉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몸으로 한참을 서성였다. 객실 안의 그 무엇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속에서 억지로 밀어 넣은 음식물이 밀려 올라와서 태운은 욕실로 뛰었다. 변기를 부여잡고 먹은 것들을 게워 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곳에서 태운이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 내고 태운은 살갗을 벗겨 내듯 씻은 탓에 쓰라린 몸의 위로 다시 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다시 몇 번이고 몸을 씻어 내었다.

* * *

눈을 떠 보니 남자의 침실의 침대 위였다. 또다시 블랙아웃의 증상이었다. 욕실 안에서 몸을 씻어 낸 기억까지는 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유난히 해가 짧은 겨울이어서인지 커다란 창밖에는 벌써 어둠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태운은 서둘러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어쩌다가 이곳에서 잠에 든 건지는 몰라도 남자의 침대에서 눈을 붙이다니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운은 쫓기듯 침실을 빠져나와 응접실에 섰다. 태운은 차마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그저 응접실 안을 서성였다.

한참을 잔 것 같은데 몸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결국 서 있기 힘겨워져 태운은 벽에 기대어 섰다. 조정해야 할 스케줄들이 생각났다. 남자는 한동안 머물라고 했지만 그 한동안이 얼마가 될지 태운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생각 끝에 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담담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결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의도된 인테리어인지 응접실에도 침실에도 그 어디에도 시계가 따로 걸려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시간을 확인할 방법은 핸드폰이었지만 핸드폰을 가지러 다시 침실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응접실의 한쪽 벽은 전부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점점 어두워지던 하늘은 기어코 캄캄해졌다. 태운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갔음을 짐작만 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을 벽에 기댄 채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던 탓에 몸이 마비된 것처럼 뻣뻣하고 저렸다. 태운은 입술을 물었다.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태운은 듣는 것만으로도 발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곧장 벽에서 등을 떼어 내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남자가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는 벽 앞에 샤워 가운 차림으로 서 있는 태운을 발견한 남자는 어이가 없는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태운은 허리를 굽혀 남자에게 인사했다. 잘 다녀오셨냐는 둥 잘 있었냐는 둥 그런 살가운 인사는 둘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다.

“뭐 하고 있었던 거지?”

태운을 그냥 지나칠 것 같았던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고 태운에게 물었다. 질책하기보다는 정말 궁금해하는 것 같은 어조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결국 또 사죄의 말이었다. 태운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지만, 어쩐지 남자가 인상을 찌푸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밥은 먹었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태운의 예상을 깨는 말이었다. 태운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벙긋거리다 결국 소리를 내뱉었다.

“……아직 먹기 전입니다.”

태운의 말에 남자는 말없이 식당 쪽 방향으로 고갯짓을 했고, 태운은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인 후 그쪽 방향으로 걸었다. 식당 안에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태운은 이번에도 문가에 서서 남자를 기다렸다.

편한 차림의 남자가 트레이를 끌고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을 보고 태운은 남자 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제가 하겠습니다.”

태운의 말에 남자는 트레이를 놓고 식탁에 앉았다. 음식을 덮은 덮개를 연 태운은 남자의 앞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난 됐어.”

남자의 말에 태운은 다시 혀를 깨물었다. 남자의 말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아서 태운은 난감함에 그대로 멈춰 섰다.

남자는 그런 태운을 두고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트레이 밑에서 양주와 잔을 꺼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얼음이 가득 담긴 버킷이 따로 있었지만 남자는 그것은 건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음식은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것 같아 태운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뭐 하고 있어.”

남자의 말에 태운은 급히 트레이에 있는 나머지 음식들을 자신의 앞자리로 옮겼다. 음식을 담기 전 식기들을 따로 데운 것인지 접시를 쥔 손이 데일 듯 뜨거웠지만 태운은 그 감각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음식들을 모두 제 앞으로 옮긴 태운은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갈 리 없었지만 준비된 음식을 먹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남자는 병의 마개를 개봉해 스트레이트 잔을 가득 채웠다. 태운은 울렁거리는 술병을 응시하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서둘러 젓가락을 들어 피 맛이 느껴지는 입안으로 흰 쌀밥을 밀어 넣었다. 까끌까끌한 알갱이들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태운은 하얀 밥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남자는 술을 들이켰고 태운은 입안으로 밥 알갱이들을 계속해서 밀어 넣었다. 둘 사이에 공통된 화제도 없었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대화도 없었다.

태운이 억지로 식사를 끝냈을 때쯤 남자도 한 병의 술을 어느 정도 비운 상태였다. 억지로 채워진 속이 더부룩했다. 태운은 남자와 잠자리를 갖기 위해 해야 하는 준비들에 대해서 생각이 닿았다. 몸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대가를 치른다고 했었지.”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남자가 태운을 향해 말했다. 태운은 그것이 오늘 새벽에 남자가 지시한 대로 한동안 호텔에 머물면 지불하겠다는 대가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원하는 걸 말해.”

“…….”

태운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남자는 태운을 몸까지 바쳐 가며 원하는 것들을 얻어 내고자 하는 대단한 야망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태운은 바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가장 간절히 바라는 일은 누구도 이루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태운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동생이랑 그저 아무 일 없이 평안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남자도 결코 이뤄 줄 수 없는 소망이었다. 소속사 사장의 손에서 아정을 지켜 달라고 빌어 볼까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소속사 사장이 그것을 이용하지는 않겠지만 혹시 몰랐다. 사장의 손에는 남자와의 성관계 영상이 담긴 비디오가 있었다. 그것도 태운이 직접 촬영한 영상이었다.

사장은 남자가 처음 호출한 날 태운의 손에 직접 카메라를 쥐어 주었다. 태운은 남자가 씻는 틈을 타서 들고 온 초소형 캠코더를 조작했고 비디오에는 영상이 찍혔다.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사장이 그것을 유출한다면 태운도 동생도, 사장이 아니라 남자의 손에 으깨질 것이었다. 태운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소속사 사장은 야망이 컸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태운을 이보다도 더한 지옥 속에 던져 넣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지옥 속을 헤매게 되었던가 생각이 미치자 태운은 숨을 멈췄다. 태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직은 완전한 지옥은 아니었다. 태운은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소속사 사장이 태운을 완전한 지옥 속에 던져 넣지 못하는 이유는 남자 때문이었다. 아무리 야망이 큰 소속사 사장이라도 남자의 물건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굴릴 수는 없었을 테니까.

절대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한 지옥으로 던져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삶이었다. 남자는 자신에게 완전한 지지대가 되어 주지는 못했지만, 잠시 비바람을 막아 주는 그 정도만으로도 태운은 만족했다. 더 이상 바랄 수는 없었다. 남자에게 들리지 않도록 얕게 심호흡을 하던 태운은 말했다.

“……저를 버리지만 말아 주십시오.”

속에서 겨우 끌어 올린 태운의 말에 픽하고 웃은 남자는 대답 없이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태운은 민망함과 치욕스러운 마음에 그저 입술만 깨물었다. 침묵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제 몫의 식사를 모두 비운 태운은 시선을 내린 채 의식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숨을 쉬는 게 쉽지 않았다. 아니 남자의 앞에서는 좀처럼 쉬운 게 없었다. 태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존심 따위는 태운에게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더 챙길 자존심 따위는 있지도 않은데, 그 내세울 것 없는 자존심이 쉽게 버려지지도 않았다.

소속사 사장은 가진 것이 늘어나니 자존심만 세지는 것이라며 비웃었지만 태운은 남자를 처음 만났던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이 가진 것과 지켜야 할 것은 아정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태운은 일 년에 수십 억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지만, 동생의 병원비와 가끔 책을 사기 위해 치르는 금액을 빼면 거의 지출이 없었다. 태운 명의의 신용카드로 매니저가 융통성 있게 스태프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지만 사용 내역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태운에게 재물은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남자에게 버림받을 때쯤이 되지 않을까 예상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번 돈이었지만, 자신이 그 대가들을 받을 만큼 일한 적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한잔해.”

남자가 새 잔에 술을 가득 채워 태운에게 건넸다. 태운은 두 손으로 정중하게 그 잔을 받아 들었다. 제게로 꽂히는 남자의 시선에 태운은 그대로 술을 입안으로 넣었다.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이 독한 술이었다. 혀끝이 딱딱하게 굳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태운은 그대로 잔 안의 술을 모두 목으로 넘겼다.

“……감사합니다.”

한 잔을 겨우 다 넘긴 태운은 잔은 내려놓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들고 있었다. 남자는 다시 그 안으로 술을 채웠다. 태운은 혀를 악물었다. 독한 술에 닿은 혀는 아직도 까끌까끌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태운은 다시 또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태운이 그 잔도 한 번에 비우자 남자가 다시 짧게 웃었다. 남자는 아예 태운의 앞으로 술병을 밀어 넘겼다. 태운은 차마 술병을 받지도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남자가 담뱃갑에서 담배를 빼내어 입에 물었다. 서둘러 몸을 일으킨 태운은 식탁 위에 올려진 라이터를 들고 남자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남자가 숨을 내쉬자 담배 연기가 태운의 얼굴 앞으로 뿜어졌다. 태운은 다시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침묵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태운은 시선을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끝에 고정한 채 그 숨 막히는 침묵을 견뎠다.

태운이 식탁 가운데에 있는 재떨이를 들어 남자 앞에 공손하게 내려놓았다. 남자는 필터에 가까워진 담배를 태운이 앞에 놓은 재떨이에 눌러 껐다.

“안 하던 짓을 하는군.”

“네?”

남자의 말에 태운이 드물게 반문했다. 진심으로 남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앉아.”

남자의 말에 여전히 어정쩡하게 서 있던 태운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다시 새로운 담배를 입술에 문 남자는 이번에는 자신의 손으로 불을 붙였다. 다시 태운의 앞으로 연기가 뿜어졌다.

“나와 협상하려 들지 말라고 경고했지.”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태운은 간신히 끌어 올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의 말은 정말로 이해가지 않는 것이었다. 태운은 한 번도 자신이 감히 남자와 그런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소리에 태운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잔망을 부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누구보다 네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건 너 아닌가? 오 년 동안 네가 내게 요청했던 것들. 딱 그만큼이 내가 네게 치를 수 있는 화대야.”

“정말로 전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가 다시 담배를 입술에 물었다. 말을 하느라 멈추었던 연기가 다시 뿜어져 나왔다. 잠시 생각이 잠겼던 태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반쯤은 술기운 때문이었고, 반쯤은 지독한 치욕감 때문이었다.

남자에게는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는 말이 남자에게는 침대 위에서 하는 ‘내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사랑밖에 없어.’ 정도의 입 발린 소리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태운은 어쩐지 눈꺼풀 끝까지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눈꺼풀을 깜빡거릴 때마다 눈꺼풀이 뜨거웠다.

“……정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남자가 다시 픽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태운은 이로 아랫입술을 물었다. 평소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혀를 깨물었던 것과 달리 태운의 아랫입술이 이 사이로 말려들어 갔다. 태운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겉으로 드러났다.

소속사 사장은 뱀 같은 자였다. 태운의 가치에 대하여 감히 남자와 직접 협상하지는 못했겠지만 지금까지 태운의 가치를 충분히 받아 냈을 터였다. 거기에 자신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피 맛이 나는 입술을 태운은 더 세게 깨물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자신이 오 년 만에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에는 분명 남자의 입김이, 그리고 돈이 충분이 작용했을 터였다.

그 입김이, 그 돈이 소속사 사장에 의해 요구됐을지라도. 남자의 손아귀에서 그것들이 나오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 없었다. 태운은 바닥에 무릎을 대고 내려앉았다. 남자의 앞에 앉아 버틸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태운은 무릎걸음으로 기었다.

땅에 닿는 무릎 뼈가 아팠다. 식탁을 빙 돌아 남자에게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남자의 앞에 멈춰서 올려다본 남자는 거대해 보였다. 본래 남자의 체격이 크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심리적인 요인이 더 컸다.

태운은 남자를 차마 더 올려다보지 못했다. 남자의 발끝만 응시하던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씁쓸하게 웃었다. 태운은 남자의 앞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리고 남자의 바지 지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잘게 떨렸다. 남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저 태운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태운은 머리 위로 남자의 시선을 느꼈다.

태운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바지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릴 때까지 남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저 나른하게 의자 위로 몸을 기댈 뿐이었다. 브리프 사이로 남자의 성기를 꺼낸 태운은 시선으로 잠시 망설였지만, 이윽고 혀로 축축하게 입술을 축였다.

“해도 괜찮겠……습니까…….”

태운의 조심스러운 말에 남자가 다시 한 번 짧게 웃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태운의 머리를 자신의 성기 쪽으로 눌렀다. 태운은 눈을 꾹 감고 남자의 성기를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남자의 손길에 의해 남자의 성기가 단번에 태운의 목젖까지 닿았다. 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라 구역질이 밀려나올 것 같았다. 정말 늘지 않는 기술이었다. 태운은 씁쓸하게 두 눈을 내리감았다. 태운의 눈 밑으로 긴 속눈썹이 음영 졌다.

태운은 최대한 남자의 성기를 애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발기하지 않은 남자의 성기만으로도 태운의 입안은 빽빽하게 채워졌다. 머리를 앞뒤로 움직여 남자의 성기를 애무하는 것 말고는 태운은 남자를 흥분시킬 별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태운은 주먹을 꾹 쥐었다. 남자의 성기가 목구멍 안쪽을 찌르면서 계속해서 토기가 몰려왔다. 그 토기를 참아 내야 했다. 태운의 눈꼬리 끝에 생리적으로 눈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흘렀다. 꽉 쥔 주먹 사이로 손톱이 살 안으로 박혀 들어갔다.

남자는 나른하게 숨을 뱉어 냈다. 여전히 태운의 정수리 즈음에 머물고 있는 손은 가끔 태운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태운은 그 손길을 따라 남자의 성기를 쫓았다. 오랫동안 벌린 입이 얼얼해질 때쯤, 꿀럭꿀럭 밀려 나오는 액체를 태운은 입안으로 삼켜 내었다. 성기를 태운의 입안에서 빼낸 남자는 태운의 머리를 길게 쓰다듬었다. 태운은 비릿한 혀를 깨물었다.

“같은 말 여러 번 반복하게 하지 마.”

“죄송…… 죄송합니다.”

태운은 의미도 모를 사죄를 했다. 남자는 여전히 태운의 머리를 나른하게 쓰다듬었다.

“나와 네 포주 사이에서 외줄이라도 타고 싶은 모양인데, 나는 네 포주가 튀기는 오물을 맞으면서까지 너를 옆에 둘 이유가 없어.”

태운은 남자가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지 해야 할 것 같아서 태운은 입술을 벌렸지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입을 다물었다. 태운의 입 안이 썼다.

“……믿어 주시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한참 만에 태운이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술기운이 몸에 퍼진 탓이었다. 술을 먹지 않았다면 감히 이렇게 남자의 말에 자신의 말을 이을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신까지 술에 잠식된 상태는 아니었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풀어졌을 뿐이었다.

소속사 사장이 오 년 동안 남자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얻어 냈는지 모른다. 태운은 의도적으로 그쪽에 신경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해야 견딜 수 있었다.

“……오 년 동안, 제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해 주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태운의 말에 남자가 픽 하고 웃었다. 태운은 제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남자가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깨닫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지만 태운은 말주변이 없었고 자신의 생각을 더 그럴듯하게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해 비릿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을 피해 태운은 남자의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꾹 쥔 주먹을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렸다. 태운이 초조하게 혀를 내어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제게 해 주신 것이 없다거나…… 제게 해 주신 것이, 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태운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손에 땀이 찼다.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운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숨을 골랐다. 남자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태운은 알 수 없었다. 태운은 남자의 표정을 차마 확인할 수조차 없어서 더 초조했다.

“계속해 봐, 어디.”

남자의 말은 어딘가 비틀린 것 같았다. 태운은 눈을 내리감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저는, 정말로, 잘…… 모르겠습니다.”

태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긴 음영이 태운의 얼굴을 뒤덮었다. 악문 혀가 잘릴 듯 아팠다.

“입 벌려.”

태운은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그제야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 혀에서 울컥하고 피가 새어 나왔다. 남자의 시선이 느껴져 태운은 다시 혀를 깨물려고 했다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저 눈만 내리감았다.

“연기를 한다고 하더니 제법이군.”

남자의 말에 태운은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했다. 자신의 생각을 도무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스타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그냥.”

태운은 다시 말을 멈췄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그 말만큼 자신의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태운은 씁쓸하게 웃었다. 턱밑이 덜덜 떨리는 태운을 보며 남자가 조소했다. 태운의 이가 부딪치면서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태운은 그 소리를 멈추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바라는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해 주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버리지만 말아 주십시오.”

지금 하는 말들은 태운에게 전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모든 용기를 끌어 올려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었다. 꽉 쥔 주먹 끝을 응시하는 태운의 턱이 멈추지 않고 떨렸다.

이 위태로운 관계가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얼마 되지 않아 끝날 관계라는 것을 알았다. 소속사 사장은 이득이 되지 않는 관계를 어떻게든 찢어발기려고 들 테고 자신은 그 손에 인형처럼 흔들릴 것이었다. 태운은 그저 그렇게 되기까지의 시간을 조금 연장시키고 싶었다. 적어도 남자가 자신을 찾는 이상은 소속사 사장이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아직은 최악이 아니다. 자신이 밟고 있는 곳은 아직까지는 완전한 지옥이 아니다. 태운은 속으로 되뇌었다. 남자에게서 버려지는 시간을 조금 연장하는 겨우 이 정도가 태운이 부릴 수 있는 약은 수의 전부였다.

“연기는 카메라 앞에서 해.”

남자가 태운의 머리채를 잡고 눈을 맞췄다. 태운은 남자와 눈을 맞출 수 없어 시선을 아래로 했다. 남자가 혀를 찼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려면 조금 더 똑똑하게 굴었어야지.”

남자는 태운의 머리채를 놓고 손가락으로 태운의 이마를 쓸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도 않은 손길이었다. 태운은 남자의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죄송하지만, 정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태운이 배 속 깊은 곳에서 소리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태운은 목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숨길 생각도 없이 돈을 움직여 놓고 잔망을 떠는군.”

남자가 태운의 이마를 쓸던 엄지로 태운의 이마를 꾹꾹 눌렀다. 태운은 이를 악문 채로 남자의 손길을 견뎠다. 하지만 정말로 태운은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 경고야. 나는 네게 충분히 기회를 줬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끝이 너무 빨리 다가온 것 같았다. 태운이 덜덜 떨리는 이를 악물었다. 무엇에 대한 기횐지, 무엇에 대한 경고인지 태운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 자신과 관련 있는 일이겠지만, 태운은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태운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태운은 두 눈을 꾹 감았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태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곧 다가올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태운의 앞으로 밀어 놓았던 술병을 남자가 다시 잔에 따라 입에 가져갔다. 꿀꺽꿀꺽 목 안으로 술이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한 주방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태운은 그저 입술을 깨물며 남자의 처분을 기다렸다.

당장 버려진다고 해도 태운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병원에 있는 동생이 생각날 뿐이었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지옥을 구르더라도 살아야 했다.

“네가 정리하지 않겠다면 내가 널 정리할 거야. 똑바로 판단해.”

태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여전히 눈 끝이 부르르 떨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서 태운은 그렇게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반쯤 남아 있던 양주를 병째로 비운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 인기척에 태운이 꾹 눌러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남자는 어느새 태운의 옆쪽에 서 있었다.

남자가 발을 움직였고 그 의미를 속으로 짐작한 태운은 무릎을 피고 일어났다. 다리가 저려와 걷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태운은 자신의 발에서 느껴지는 그 감각을 무시하고 남자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은 아닌 것 같았다. 태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식당을 빠져나가 응접실에 발걸음을 멈췄다. 응접실에 있는 장식장에서 진한 보리 빛 양주를 한 병 꺼냈다. 남자의 세 걸음 정도 뒤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대기하고 있던 태운은 다시 남자가 움직이자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태운은 그렇게 남자의 뒤를 쫓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침실로 들어왔다.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양주의 마개를 열었다. 태운은 침대 옆에 멀찍이 서서 남자의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병째 술을 들이켰다. 태운은 견디듯 서 있었다. 몸 상태가 결코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서 있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남자는 아무런 지시 없이 양주를 마셨다. 태운은 입술을 깨물며 그 긴 시간을 견뎠다. 남자의 시간보다 태운의 시간이 더 길게 가는 것 같았다.

태운은 눈을 내리감았다. 머릿속은 복잡했으나, 떠오르는 생각은 없었다. 끝이 다가왔다는 불안감인지, 아직 끝이 아니라는 안도감인지. 태운은 머릿속에 가득 찬 이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태운은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었다.

“너는 가끔 사람을 돋우는 구석이 있어.”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켠 남자는 어쩐지 취한 것 같았다. 남자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결코 태운을 보며 저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태운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무슨 말인지 역시나 이해할 수 없었다. 태운이 남자의 눈치를 살폈지만 남자는 태운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협탁에 바닥이 드러난 양주병을 내려놓고 침대 헤드에 길게 기대 태운을 바라봤다.

태운은 침실을 빠져나가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남자에게 몸을 내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남자는 여전히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이제 악문 혀에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저릿할 뿐이었다. 남자는 태운에게 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하는 대신에 입을 열었다.

“나가.”

남자의 말에 태운은 입술을 악물었다. 태운의 용도에 대한 명백한 남자의 거부였다. 태운은 그 순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가라고 차게 말하는 남자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서 있다 남자들에게 끌려 나갔던 그 치욕.

한참을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망설이던 태운은 자신의 와이셔츠 단추에 손을 가져다 댔다. 태운이 하나씩 단추를 풀어 나갔다. 다급한 태운이 보일 수 있는 가장 큰 몸짓이었다. 하나씩 풀어지던 단추는 끝에 가서는 거의 뜯어지다시피 했다. 태운의 손짓이 점점 바들바들 떨려 왔다.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남자는 그제야 태운을 봤다. 상의를 거의 풀어헤친 태운을 보며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평소에 태운을 보며 짓던 조소와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하지만 태운은 남자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나가라고.”

평소라면 남자가 이 정도 말을 하면 객실을 빠져나갔겠지만 태운은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버리겠다는 그 말 때문이었을까. 이렇게 나가면 정말로 남자에게 버려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태운은 걸치고 있던 바지 버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덜덜 떨리는 손은 버클을 풀어내지 못했다. 그저 다급하기만 했다.

“당장 널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니까 나가.”

남자가 통보하듯 말했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눈을 감았다. 태운의 이가 덜덜 부딪쳤다. 태운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첫 만남 때처럼 남자가 자신을 사람을 시켜 억지로 끌어 내지 않으리란 것은 태운도 알았다. 하지만 태운은 어쩐지 자꾸 그때가 생각났다.

결국 혀를 악문 태운은 발걸음을 떼어 객실을 빠져나왔다. 태운은 큰 숨을 내쉬며 닫힌 방문에 기댔다. 어려웠다. 자신을 둘러싸고 무언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알았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눈 밑이 시큰했다. 술기운에 몸이 나른해졌다. 태운은 한숨만 내쉬었다. 숨이 내뱉어지는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유 없는 초조함에 태운은 몸을 떨었다.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렇게 방문에 기대어 남자의 부름에 대기하는 정도밖에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태운은 손가락으로 벽을 툭툭 하고 두드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을 잠식한 불안감은 더 커져 가기만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계속해서 흘렀다. 새벽의 파란 빛이 태운의 검은 머리카락을 비췄다.

태운은 아무 미동도 없이 문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한참이나 생각했지만 답은 없었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끝을 낼 수는 없었다. 끝은 다가와 있었지만 아직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태운 자신과의 잠자리를 조금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오 년이나 전혀 재미가 없는 자신을 곁에 두었던 것일 터였다. 도박이었다. 하지만 끝이라면 전혀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기회를 놓치는 일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 태운은 발소리를 죽인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웠지만 어둠이 눈에 익자 흐릿하게나마 방 안이 보일 정도는 되었다. 태운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전혀 미동 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운은 힐끗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봤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희미하게 시간이 보였다. 다섯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남자가 눈을 뜨는 시간이기도 했다. 다섯 시가 되면 객실 내 인터폰이 울린다는 것을 알았다. 모닝콜이었다. 그 시간까지 몇 분 남지 않았다. 태운은 잠시 또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결정을 하곤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췄다. 그리고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남자는 가벼운 실내복 차림이었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남자의 바지춤에 손을 올렸다.

“뭐야.”

그 조심스러운 동작에도 잠에서 깬 것인지 잔뜩 눌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단번에 이불을 걷었다. 태운은 난감한 마음에 혀를 물었다. 때마침 다섯 시가 된 것인지 객실 내 인터폰의 벨이 울렸다. 인터폰은 길지 않았다. 딱 세 번. 인터폰이 끊겼고 남자는 태운을 발견했다.

“왜 이렇게 초조하게 굴어.”

무릎을 굽힌 채 엎드려 있는 태운을 발견한 남자는 태운의 의도를 이해한 듯 다리를 벌렸다. 태운은 혀를 물며 그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쉬운 일이잖아. 넌 선택만 하면 돼.”

태운은 혀를 더 세게 물었다. 남자가 그런 태운의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태운이 거기서 더 혀를 세게 깨물자 남자가 태운의 입술 안으로 손가락을 넣고 치아를 억지로 벌리게 했다. 남자의 의도를 알 수 없어 태운은 그저 가만히 따랐다.

남자가 검지로 태운의 혀를 쓸었다. 태운은 난감한 마음에 습관적으로 혀를 깨물려고 했지만 남자의 손이 입안에 있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남자의 손은 태운이 꽉 깨문 나머지 이 자국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곳을 찾아내었다.

“얼굴에 분칠을 해서 그런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되지 않아. 이렇게 견딜 수 없어 하면서도 겉으로는 순종적이지. 그러면서도 뒤로는 네 욕망을 숨길 생각은 없고. 하지만 또 모른 척. 대체 내가 널 위해 여기서 뭘 더 해야 하지?”

태운의 입안에서 손을 뗀 남자가 물기 묻은 손가락으로 태운의 뺨을 툭툭 하고 쳤다. 태운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지적을 받은지라 차마 혀를 다시 깨물 수도 없었다. 태운은 눈만 깜빡였다. 눈꺼풀이 무거워서 다시 뜨는 것이 힘들었다.

“죄송합니다.”

태운은 그 말만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지금 태운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다. 남자의 체취가 훅 하고 풍겼다. 익숙한 것이었다. 입안이 메말라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체취를 맡자, 젖어야 한다고 아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침이 고였다. 태운은 입술이 축축해질 때까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남자의 취향이었다. 벌써 오 년이었고 도무지 늘지 않는 실력이었지만 기본적인 남자의 취향 몇 가지는 눈을 감고도 맞출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태운은 단번에 남자의 성기를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직 완전히 단단해지기 전이라 많이 어렵지는 않았다. 태운은 그 상태에서 숨을 들이마시는 것으로 흡착력을 높였다. 그 상태로 가볍게 성기를 입술로 밀듯이 뱉어 내자 남자의 성기가 부피를 더했다.

항상 하던 일인데, 태운은 어쩐지 눈 밑이 시큰해졌다. 태운은 최선을 다했다. 단 한 번도 그렇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필사적이었다. 남자가 만족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쓰임을 다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는 날이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태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눈 밑이 축축했다. 태운은 손을 들어 제 눈 밑을 쓸었다. 축축하게 물기가 묻어났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터라 남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태운은 서둘러 물기를 문질러 닦았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자존심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런 자신이 남자에게 귀찮게 느껴질까 걱정이 될 뿐이었다. 태운은 눈물을 숨기기 위해 머리를 내리며 더 깊숙이 남자의 성기를 밀어 넣었다. 몇 번 반복하자 헛구역질이 밀려 나오며 생리적으로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도 태운은 멈추지 않았다.

목이 무엇인가에 꿰뚫린 것처럼 아팠다. 컥컥하고 예쁘지 못한 소리가 목에서 나왔지만 태운은 그 행위를 계속 반복했다.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 남자의 사타구니에 떨어지고 시트를 적셨다. 태운은 이제 자신이 왜 우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길지 않은 시간 만에 남자가 사정했다. 태운은 정액을 삼켜 내었다. 태운의 흰 얼굴은 숨이 부족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물이 범벅이었다. 실핏줄이 터져서 눈가까지 붉었는데 치켜 올라간 붉은 눈매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색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남자가 태운의 팔을 당겨 태운의 팔목에 채워진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태운에게도 시간이 보였다. 다섯 시 삼십 분. 잘은 모르지만 이미 밖에는 남자의 비서가 대기해 있을 시간이었다. 남자는 미련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변호사가 연락할 거야. 마지막 기회야.”

태운은 여전히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저 혀로 바짝 말라 가는 입술만 축였다. 물기 어린 태운의 입술이 붉었다.

남자는 그 말만을 마치고 객실을 빠져나갔다. 태운은 침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주먹을 꾹 쥐자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고통이 느껴졌다. 시큰한 눈 밑을 문지르며 태운은 숨을 삼켜 내었다. 백치가 된 기분이었다. 태운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남자가 예고한 변호사의 연락은 태운의 생각보다 훨씬 정중했다. 아홉 시쯤 태운의 개인 핸드폰으로 연락해 온 변호사는 호텔 로비에서 한 번, 객실 문 앞에서 한 번 방문을 청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양한재입니다.”

“이태운입니다.”

인터폰 소리에 태운이 직접 객실 문을 열자 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변호사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태운은 공연히 민망해져서 같이 허리를 숙여 맞인사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을까요?”

태운이 어정쩡하게 서 있자 변호사는 응접실 소파를 가리켰고 태운은 긍정의 의미로 한 걸음 물러섰다. 변호사는 걸음을 옮겨 소파에 앉았고 태운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태운은 변호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변호사는 먼저 명함을 내밀었다. 까만 글씨로 반듯하게 인쇄되어 있는 명함. 태운은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 명함을 받기만 했다. 태운이 명함을 가만히 받아서 앞쪽에 놓자 브리프 케이스에서 서류 봉투를 꺼낸 변호사가 그것 역시 태운에게 내밀었다.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사장님께 다시 한 번 의중을 여쭤 봤지만 전에 박 사장님께 말씀드렸던 대답을 다시 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몇 번을 여쭈어 보아도, 재성의 후계 싸움에 중립을 유지하시겠다는 의중은 변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

“이미 재성 본사의 지분 싸움에서는 박재열 사장이 밀렸고, 본사 주식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계열사인 재성 화학의 주식마저도 시중에 풀려 있는 양을 전부 매입한다고 해도 사장님의 의결권 위임 없이는 이사 선임권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의 지분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부 부서 판단입니다.”

변호사는 태운이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태운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태운은 그저 쓰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부 부서에서 판단을 내린 근거가 된 자료들입니다. 급하게 준비한 것이라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더 필요한 자료가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해서 준비하겠습니다.”

태운은 남자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서류는 읽지 않고 내려놓았다. 읽는다고 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이건 태운 씨 자산의 운용을 제게 위탁한다는 위임장입니다. 태운 씨가 이 서류에 사인하신다면 지금 박재열 사장이 운용하고 있는 태운 씨 자금을 회수해서 이번 분쟁에서 태운 씨는 손을 떼게 하라는 것이 사장님 지시십니다.”

그제야 태운은 자신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의 실체를 잡았다. 오 년 동안 전문가에게 맡겨 놓았을 뿐 동생의 병원비 이외로 큰돈을 쓴 적이 없었으니, 아마 소속사 사장이 벌인 일 일 터였다.

하지만 태운은 한숨을 쉬었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남자 곁에 있는 것은 끝없는 자기 합리화였고, 이기적인 정당화였다.

“박재열 사장은 지금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재성 텔레콤 박주열 부사장이 완전히 승기를 잡는다면 박재열 사장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

그건 무서운 협박이었다. 자신이 변호사가 내민 저 서류에 사인하지 않는다면 혁진과의 관계도 끝이 되리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만약 변호사의 말대로 소속사 사장이 몰락한다면 자신 또한 그와 같은 운명이 되리라는 것도. 태운은 혀를 악물었다.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제게 정리할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태운은 이 서류에 당장 사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태운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렇게 시간을 연장시키는 것뿐이었다.

“생각이 정리되시면 제 번호로 연락을 주십시오.”

변호사는 태운이 이렇게 말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저 서류를 정리해 태운에게 정중하게 건넸다. 태운은 변호사에게서 그 서류를 받아 들었다. 변호사는 다시 반듯하게 태운에게 인사를 한 후 객실을 빠져나갔다. 문 앞까지 변호사를 배웅한 태운은 벽을 타고 자리에 주저앉아 변호사가 건네준 서류를 천천히 읽어 나갔다.

태운은 습관적으로 혀를 악물다가 어제 밤 자신의 입을 침입했던 남자의 손가락을 기억해 내고는 그만두었다. 태운은 쿵쿵 하고 벽에 머리를 박았다. 남자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변호사 말대로라면 남자에게 이번 일을 수습하는 것은 퍽 귀찮고 이익 없는 일일 것이었다. 비록 남자의 호의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렇더라도 하룻밤을 산 상대에게 해 주기에는 과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자신에게 신경을 쓰기보다 버리는 쪽이 남자에게 더 간단한 일일 것이었다.

남자는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자신처럼 이렇게 뻣뻣하고 재미없는 상대가 아니라 방긋방긋 웃으며 훨씬 더 남자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상대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태운은 서류를 구겨지지 않도록 봉투에 넣어 한쪽으로 치웠다. 밤을 샌 탓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건강한 것은 몸뿐이었는데 요즘 들어 몸조차도 망가진 기분이었다. 태운은 벽에 기댄 그 상태로 눈을 감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 * *

태운은 눈앞이 밝아지는 기분에 눈을 떴다. 눈앞에 기가 찬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태운은 찌뿌둥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변호사를 배웅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 잠든 모양이었다. 태운은 속으로 그 와중에도 잠이 들 수 있는 자신의 몸을 자조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남자의 말에 태운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당신을 기다렸다. 그 정도 말할 요령도 태운에게는 없었다. 남자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꽂히는 것을 느끼며 태운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어이가 없는지 웃은 남자가 태운을 지나쳐 걸었다. 태운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다가 바닥에 있는 서류 봉투를 챙겨 남자의 뒤를 따랐다.

“뭐 하자는 거야?”

드레스 룸까지 남자를 따라와 머뭇거리던 태운은 남자가 벗는 코트를 받아 들었다. 무엇이든 하자는 생각이었는데 남자에게는 그저 거슬리는 행동이었던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남자가 정말로 어이가 없는지 소리를 내서 웃었다. 입에서 바람이 빠지는 유쾌하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리고는 코트 안에 입은 정장 재킷도 벗어 태운에게 마저 건넸다. 태운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마음을 정한 모양이지.”

태운이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입술을 꾹 문 채로 그저 남자가 건네는 옷을 정리했다.

“어디 계속해 봐.”

와이셔츠까지 벗어 태운에게 건넨 남자의 상체에는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위협적이었다. 트레이에 와이셔츠마저 걸어 둔 태운은 조심스럽게 남자의 바지 벨트로 손을 내렸다. 남자는 어디 할 테면 해 보라는 듯 손을 멈췄다.

“감사합니다.”

태운은 입안에 맴돌던 말을 기어코 입 밖으로 꺼냈다. 남자가 태운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으로 태운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태운의 작은 얼굴이 남자의 손에 가려졌다. 남자는 태운이 뱉은 말의 진위를 파악하는 듯 태운의 얼굴을 잡고 자신의 눈에 태운의 눈을 맞췄다.

태운의 고개가 들리며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태운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태운이 입술을 깨물려고 하자 남자가 태운의 입술 사이에 자신의 엄지를 넣었다. 아, 태운은 차마 어쩌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신경 써 주시는 것 전부…… 감사합니다.”

평소 또박또박 듣기 좋은 발음이던 것과 달리 입안에 들어온 남자의 손가락 때문에 태운의 발음이 웅얼거렸다. 남자가 픽 하고 웃었다.

“그 마음 어디 한 번 몸으로 보여 봐.”

태운은 남자 바지 벨트에 손을 올린 채 잠시 망설이다가 남자의 맨 어깨에 얼굴을 묻고 남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남자가 말하는 것은 이런 정도가 아님은 알았지만 태운이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남자가 웃는지, 얼굴을 대고 있는 남자의 단단한 어깨가 조금 떨렸다. 태운은 서둘러 남자에게서 몸을 떼어 내었다.

남자의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진 것을 태운은 느꼈다. 태운이 서류에 사인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남자는 오해한 것 같았다. 태운은 해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선뜻 그럴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자 태운은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뭐 하고 있어.”

“아, 죄송합니다.”

태운이 가만히 서 있자 남자가 나직하게 물었다. 태운은 반사적으로 남자의 벨트에 손을 대었다. 남자의 벨트를 풀고 버클까지 한 번에 내렸다. 그 상태로 태운은 바닥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아침에 마찰이 거칠었기 때문인지 태운은 목 안쪽이 부은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태운은 신경 쓰지 않고 입술을 축여 남자의 성기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읏!”

남자의 성기가 입안에서 어느 정도 발기했을 때 태운의 어깨 밑으로 손을 밀어 넣은 남자가 예고 없이 태운을 일으켰다. 태운은 마르기는 했지만 키가 커서 몸무게가 가볍지는 않았는데 남자는 태운은 인형을 들 듯이 간단히 일으켰다.

남자의 의도가 명확해 태운은 서둘러 자신의 바지를 내리고 손으로 벽을 짚었다. 남자가 옷을 벗는 듯 옷감이 부딪치는 소리가 예민해진 태운의 귀로 들어왔다. 상체를 숙인 태운은 벽을 짚은 손을 주먹을 꽉 쥐었다.

태운의 엉덩이 살을 잡고 양쪽으로 벌린 남자가 단번에 귀두 부분을 태운의 항문으로 맞춰 왔다. 하지만 젤이 없어 더 이상 진전이 불가한지 한 번에 꿰뚫을 듯 삽입하던 평소와는 달리 입구 부분에 귀두만 넣어진 채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으…….”

남자의 성기가 닿지 못한 깊숙한 곳이 간지러워서 태운은 참지 못하고 신음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남자가 삽입하는 부분은 귀두에서 조금 길어졌을 뿐 아직도 태운의 입구만을 오갔다. 태운은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버텼고 남자는 잠시 후에 태운의 입구에 대고 사정을 했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성기가 미끄러지듯 태운의 안으로 들어왔다. 태운이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기 때문인지 침대에 누워 남자를 받을 때보다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사정으로 줄어들었던 성기가 점점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태운의 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결합 부위가 조이는지 남자가 태운의 허리를 단단히 잡아 오며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서류에 사인하고 그 이후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오전에 방문했던 변호사와 연락해. 그 변호사가 앞으로 네 일을 봐줄 거다.”

잠시 행위를 멈춘 남자가 중간중간에 뜨거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 태운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주먹만 꽉 쥐었다. 남자의 변호사가 건넨 서류에 사인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장이 한 짓이라면 더더욱. 남자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엎드려 빌 수도 없었다.

모든 사실을 남자가 아는 순간 태운은 소속사 사장이 아닌 남자의 손에 망가질 것이었다. 남자는 태운의 절망 어린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저 단단히 태운의 허리를 꽉 죈 채 거칠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태운은 생각을 멈추고 남자에게 보조를 맞추기 위해 어설프게 허리를 움직였다. 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어설프기만 했다. 지금 상황에서 남자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남자가 뒤에서 웃는 것이 느껴졌다. 허리를 흔들자 절로 태운은 까치발로 땅에 서게 됐다.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한 번에 깊숙한 곳으로 치고 들어오자 태운은 순간적으로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이 태운의 허리를 단단히 죄고 있었다. 태운은 반쯤 들린 채로 남자의 삽입을 견뎠다.

“흐읏, 흐읏!”

남자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태운의 입을 비집고 신음 소리가 튀어 나왔다. 태운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태운의 의지를 벗어난 것이었다.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태운이 흣 하고 다시 주저앉을 뻔했다. 남자의 성기가 깊숙한 곳에 닿자 머릿속이 멍해지며 몸을 꿰뚫는 짜릿함이 느껴졌다.

남자의 손에 들어 올려진 채 숨을 내쉬는데, 결합부 끝에 귀두 부분만 걸칠 정도로 빠져나갔던 남자의 성기가 다시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태운은 이번에야말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실제로는 들릴 리 없는 소리였지만 쿵쿵쿵 소리가 태운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남자는 그곳을 집중적으로 찔렀다. 태운은 정말로 남자에게 완전히 들려진 채로 거친 숨만을 내쉬었다.

짜릿한 느낌이 발가락 끝까지 오므라들게 했다, 사라지고, 다시 그 느낌이 나타나기를 수십 번. 태운의 성기가 바짝 일어섰고, 다시 한 번 남자가 치고 들어오는 순간 태운의 성기에서는 말간 액이 쏘아져 나갔다. 나른한 감각이 몸에 퍼지며 태운은 눈 밑이 시큰해졌다.

“네 노력은, 여기까진가?”

태운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의 숨도 평소보다는 가빴다. 태운은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남자와 등을 지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운이 흡 하고 숨을 다시 들이켰다.

힘이 빠진 다리에 다시 힘을 주고 아까처럼 허리를 흔들었다. 엉덩이를 뒤로 빼자 남자가 가만히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성기가 자신의 안쪽을 꿰뚫었다. 남자는 태운이 하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듯 다른 움직임 없이 태운의 하얀 엉덩이를 꾹 쥐었다. 태운이 이를 악물며 다시 엉덩이를 뺐다. 남자가 태운의 마른 엉덩이를 반죽하듯 주물러 왔다.

태운이 행동을 멈추자 남자가 계속하라는 듯 손으로 태운의 엉덩이를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짝’ 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태운은 수치심에 입술을 물었다. 다시 허리를 움직이며 스스로 남자의 성기를 추삽질하기 시작했다.

“흐읏!”

태운의 둔부를 주무르며 태운의 속도감 없고 능숙하지 못한 움직임을 구경하듯이 느끼고 있던 남자는 결국 참지 못하겠는지 다시 태운의 허리를 잡고 거세게 처박았다. 남자의 성기는 더 커질 수 없이 커졌고 태운이 맞춰 갈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추삽질을 하던 남자는 사정에 가까워진 것인지 성기를 태운의 안에서 단번에 빼내었다.

그 상태로 사정을 시작하자 남자의 액체가 태운의 하얀 둔부를 타고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적지근한 액체가 엉덩이를 타고 허벅지로 흐르는 느낌에 태운은 다시 한 번 잘게 몸을 떨었다.

남자는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벽에 기댄 태운을 들었다. 남자의 품에 짐처럼 들린 채 침실까지 옮겨진 태운은 거기서 몇 차례 또 남자를 받아 내었다. 남자는 집요하게 굴었고 태운이 끝내 몸에 힘이 풀려 축 늘어질 때까지 행위는 계속되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얼굴에 닿자 태운은 눈을 떴다. 팔에 남자의 체온이 닿아 있었다. 태운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원래도 그랬지만 침대 위에 자신과 함께 잠들어 있는 남자에게는 익숙해질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인 것이었지만 잠귀에 예민한 남자가 잠에서 깼는지 몸을 일으켰다.

“……앞으론 조심하겠습니다.”

“됐어. 자.”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탓에 태운의 목소리가 잠겼다. 태운은 앞으로는 행위가 끝난 후에 이렇게 한 침대에서 잠드는 일 없이 객실을 빠져나가겠다는 의도로 한 말이었지만, 남자는 자신의 잠을 깨워 미안하다고 하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말을 한 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태운을 지나쳐 방을 빠져나갔다.

태운은 아침이 하얗게 밝아 오는 것을 느끼며 움직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방문을 열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남자가 이상했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다가 예정되어 있는 촬영이 생각나 매니저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접실에 벗어 두었던 코트 주머니에 핸드폰이 있는 것을 떠올리고는 태운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다. 날이 환하게 밝은 상태였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이미 출근을 한 상태일 것이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여덟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와있었다. 내역을 확인한 태운은 세 통 모두를 차지하고 있는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일어난 거야?

“네. 형 저 호텔이에요.”

―알았어. 거기로 데리러 갈게. 촬영 시간은 네가 말한 대로 조정을 하기로 했는데. 그것보다 촬영 전에 사무실을 잠깐 들러야 할 것 같아……. 사장님 호출이야.

“네. 준비할게요.”

매니저의 조심스러운 말에 태운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하지만 말을 마치고 입술을 악물었다. 매니저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태운은 무심히 전화를 끊고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서류만 두 개였다. 하나는 자신의 목을 죄이려고 하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죄이는 목을 풀어 주겠다 했다. 하지만 태운은 남자에게 사장의 서류를 전할 수도, 남자가 준 서류에 사인을 해서 건넬 수도 없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속에 말라붙은 것들을 긁어내는 과정은 곤욕이었지만 그뿐이었다.

조만간 소속사 사장에게서 연락이 올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떠넘기듯 남자에게 건네라는 서류를 맡겨 놨는데 태운에게 연락이 없으니 아마 그쪽도 애가 탔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장에 도착했다고 매니저가 전화를 해 왔다. 태운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올랐다.

“집에 먼저 들러 주세요.”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소속사 사무실로 가는 길에 태운의 집이 위치하고 있어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태운은 눈을 감았다. 집에 들러 소속사 사장이 건넨 서류가 무엇인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서류가 남자에게 건네질 일은 없을 것이다.

소속사 사장이 평소에 대리인 흉내를 내며 남자에게 접촉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번도 태운을 통해 일을 진행하려 한 적은 없었다. 아마 이성이 아닌 감정에 호소해야 할 만큼 터무니없는 요구거나 그런 이유로 이미 한 번 거절당한 요구가 아닐까 하고 태운은 짐작했다. 그리고 그즈음 남자가 무엇인가를 눈치를 챈 듯 선택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도 같았다.

매니저에게 잠깐 차 안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한 태운은 집으로 올라가 사장이 건네준 서류 봉투를 열었다.

의결권 대리 행사 위임서. 그것은 변호사가 태운에게 돌려준다고 처음에 건넸던 서류와 같은 것이었다. 태운은 긴 숨을 내쉬었다. 사장은 정말로 극까지 밀린 모양이었다.

태운은 서류를 갈무리했다. 서류를 손에 들고 소속사 사무실에 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걸음을 내딛는데 발걸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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