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악한과 소녀 (3/15)

3. 악한과 소녀

“괜찮겠어?”

환자복을 벗고 사복을 꿰어 입는 태운을 보며 매니저가 물었다. 태운은 일주일 동안 정말 심하게 앓았다.

연락이 되지 않아 집에 들렀더니 침대 위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태운을 발견하고 매니저는 머릿속이 하얘졌었다.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몸, 그리고 축 늘어진 손. 아주 오래전 겪었던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떠올라 매니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태운을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깨워도 태운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혼비백산해서 태운을 병원에 입원시켰다. 의사는 피로 누적과 영양실조가 겹친 것이라며 수액을 맞고 기운이 돌아오면 곧 눈을 뜰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태운은 꼬박 하루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창백하다 못해 파리한 안색을 보며 매니저는 정말로 태운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게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태운은 눈을 뜨자마자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평소에는 전혀 고집이라고 없는 녀석이 고집을 부리자 정말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매니저에게는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호되게 앓고 난 태운은 다시 살이 올라 있었다. 그래 봤자 드라마 끝나고 빠졌던 살이 다시 찐 정도밖에 안 됐지만 병원에 입원해서 나름대로 규칙적인 식사를 했던 탓에 외견상으론 제법 건강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태운의 대답에도 매니저는 영 마뜩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미 스케줄이 나온 상황이라 일정을 변경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태운이 정말 심하게 앓은지라 퇴원을 하려니 걱정이 먼저 되었다.

“첫 촬영부터 빡빡하지는 않을 테니 다행이기는 한데.”

매니저는 어깨를 으쓱했다. 병원에서 죽은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죽이기보다야 차라리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태운이 훨씬 생기 있을 것 같았다. 카메라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녀석이니, 어쩌면 촬영에 들어가는 쪽이 병원에서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 * *

“안녕하세요.”

딱 고등학생 그 나이대의 발랄함이 있는 여배우가 태운을 보자 반가움을 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달려와 인사를 했다.

어린 여배우와는 미팅 때나 대본 리딩 때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그저 데면데면 인사를 하는 정도였었는데, 아무래도 세트장 밖에 작게 마련된 고사장에, 낯선 스태프들과 처음 보는 취재진들 사이에 있다 보니 그나마 얼굴을 아는 태운이 반가워진 모양이었다.

밝게 웃으며 뛰어오는 여배우를 보며 태운은 멈칫했다. 학교를 마치고 바로 온 건지 여배우는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청색 교복이 동생이 다니던 학교의 교복과 비슷했다. 태운은 자신도 모르게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하얀 얼굴과 눈앞에 선 여배우의 얼굴에서 공통점을 찾기 시작했다. 동생도 저렇게 머리칼이 길었다. 얼굴이 희었다. 생김새가 닮지는 않았지만 웃는 모습이 비슷한 것도 같았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아정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태운의 상상 속 하얀 얼굴을 가지고 환하게 웃는 아이가 태운과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발작했다. 태운은 덜덜 떨리는 양손을 모아 쥐며 숨을 참았다.

“……네, 안녕하세요.”

가까스로 태운은 답인사를 했다. 어린 여배우는 태운에게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생각나는 말은 없는지 자꾸 입만 뻐금거렸다.

여동생 아정과는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았지만, 태운에게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동생은 태운 때문에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평범하게 자랄 기회를 빼앗겼다. 하지만 한 번도 아정은 태운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 아정이 가장 고통스러웠을 그때 태운은 집에 없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동생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발걸음을 서둘러 집에 도착했을 때 아정은 집에 없었다. 태운은 의아한 마음에 동생을 마중 나갔다.

그때 태운을 발견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뛰어온 옆집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난데없이 집에 쳐들어 온 남자들이 돈을 빌리고는 사라져 버린 아버지를 찾으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겨우 열여덟이던 아정을 술집에 팔겠다며 끌고 갔다고 했다.

동네와 근처 유흥가들을 뒤지고 다녔지만 동생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운은 며칠 밤낮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길을 헤매고 다녔다.

그때 겨우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다.

동생의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동생을 구할 수 없다고 했었다. 태운은 경찰에 연락했지만 이미 그치들과 한통속인 경찰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은행에서는 대출이 어렵다고 했고, 대부 업체에서 빌릴 수 있는 금액으로는 아버지의 빚을 갚을 수 없었다. 애가 탔지만 태운에게 큰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태운은 결국 언젠가 자신에게 큰 계약금을 지불하겠다던 소속사 사장에게 찾아갔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서야 아정을 구해 올 수 있었다.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 아정은 괜찮다고 웃었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결코 말해 주지 않았다. 아니,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워 보여서 태운은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때 동생은 저 여배우 또래였었다. 태운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뭐하냐? 얘는 너무 어리지 않냐?”

어린 여배우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태운의 시야에 느리게 들어왔다. 태운은 목소리만으로 여배우를 그렇게 만든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 선배님! 안녕하세요.”

여배우가 허둥지둥하며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했다. 찬혁은 그 모습이 웃긴지 낄낄대고 웃었다. 찬혁의 웃음소리에 태운은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 자리를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태운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던 것 같기도 했다.

두 배우 사이에서 빠져나온 태운은 대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태운은 신경을 다른 곳에 집중하기 위해 대본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대본 또한 쉽지 않았다. 태운은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을 후회했다. 시작부터 하나도 쉬운 것이 없었고 그 뒤로는 더 어렵기만 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이십 대 중반의 남자. 직장을 다니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을 자식처럼 친구처럼 키웠다.

고 3인 동생은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가 학교를 마치면 독서실에 들러 새벽에야 들어왔다. 그는 사회 초년생으로 회사 일에 치여 동생의 얼굴은 아침에 잠시 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동생이 소중했다.

평소 동생은 독서실에서 운행하는 차를 타고 새벽 두 시에 집으로 귀가했다. 하지만 운행하는 차에 문제가 생겨 그날을 차가 운행하지 않기로 했다고 동생은 하루만 오빠가 데리러 올 수 없냐고 출근하는 그에게 묻는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공부에 지친 동생이 안쓰러운 그는 그러겠다고 허락하는데……. 거실에서 동생을 데리러 나갈 시간을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고 만다.

이것이 오늘 첫 촬영 장면이었다.

“태운 씨 옷 갈아입어요.”

스타일리스트가 얇은 잠옷과 그 위에 걸치는 베이지색 카디건을 내밀었다. 태운이 옷을 받아 들자 스타일리스트는 잠시 대기실을 빠져나갔고 태운은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다 갈아입자 얇은 잠옷 사이로 태운의 낭창한 뼈대가 드러났다.

다시 대기실로 들어온 코디는 잠시의 틈도 없이 분주하게 태운의 얼굴에 분장을 시작했다. 태운은 긴 시간 동안 인형처럼 눈을 감고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 * *

슬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카메라 리허설 때까지만 해도 첫 촬영의 긴장이 채 가시지 않아 어색하기만 했었는데 본 촬영에 들어가자 준비했던 것보다도 훨씬 잘해 내고 있었다.

슬아는 그것이 태운의 다정한 눈빛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첫 촬영의 어색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태운의 눈빛은 다정했다. 태운이 정말로 오빠 같아서 슬아는 준비했던 것보다 훨씬 연기에 어리광을 섞었고, 덕택에 슬아에게는 까마득하게 어려운 감독에게 준비를 제대로 해 왔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사실 리허설 때까지만 해도 슬아는 태운도 어려웠다. 태운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태운은 한참 어린 자신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줬고 정중하게 대해 줬지만 왠지 다가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메라가 켜지자 태운은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다. 슬아는 그 순간 자신을 보는 태운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태운이 애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는데, 그것에 마음이 풀어져서 슬아는 마치 집에서 아빠에게 하는 것 같은 어리광이 절로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감독에게서 컷 사인이 나자 슬아는 태운을 쳐다보았다. 덕분에 첫 촬영을 잘한 것 같다고 감사 인사라도 하려고 태운에게 다가가던 슬아는 순간 멈칫했다.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를 하는 태운의 눈에는 촬영 중에 느꼈던 그 다정함이 없었다. 그 간격이 너무 크게 느껴져 슬아는 차마 태운에게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 * *

세트 촬영 마지막 날이었다. 스케줄은 빡빡하지 않았고, 촬영장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아서,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태운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덤덤히 넘겼을 상황에도 짜증을 섞기까지 했다. 이렇게 예민한 태운의 모습은 그와 오 년이나 함께한 매니저조차도 처음 보다시피 하는 것이었다.

매니저가 단단히 주의를 준 탓에 대기실을 오가는 스태프들 모두 발소리조차 조심하고 있었다.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대기실에서 태운은 계속해서 대본을 읽었다.

하교하고 독서실에 들렀던 동생이 실종된 지 일주일 만에 집 근처 고속 도로에 시신으로 유기된 채 발견됐다는 연락을 경찰로부터 받는 것이 오늘 태운이 촬영하는 장면이었다.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던 동생은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됐고 경찰은 성폭행의 흔적마저 있다고 추정했다. 무참하게 유린된 딸의 시신을 발견한 어머니는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 만다.

태운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느꼈던 알 수 없는 끌림은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운은 그것을 이제야 깨달아 버린 자신이 한심하다 못해 경멸스러웠다. 어쩌자고. 대체 어쩌자고. 태운은 입안에서 결국 피가 날 때까지 혀를 물었다.

“태운아 밥은 어떡할래?”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뭐가 입안으로 들어갈 것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한 번 더 권하고, 억지로 손에 수저라도 쥐어 주었을 매니저는 태운의 기분을 고려해선지 더 권하지 않고 그냥 물러섰다.

다시 대본으로 눈을 돌리던 태운은 징징 하고 울리는 소리에 눈으로 핸드폰을 찾았다. 테이블 위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방금 수신된 메시지를 확인한 태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에게 온 메시지였다. 평소에는 표정이 얼굴에 결코 드러나는 법이 없는 태운이었지만, 오늘은 표정을 숨기는 것이 힘들었다. 태운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이었다.

감정이 격해져서 아무것도 못하고 눈물만 쏟아 내던 태운은 결국 리허설이 끝나기도 전에 카메라 동선 밖으로 벗어났다. 카메라로부터 멀어져 비틀비틀 걷는 태운은 걸음마저 위태로웠다.

“이래서야. 태운 씨 일단 진정하고 메이크업 수정하고 와. 리허설 없이 가자고. 안 그랬다가는 카메라 돌기도 전에 태운 씨 진 다 빠지겠다. 저희 조금 쉬다가 다시 갑시다!”

태운은 감독을 향해 꾸벅하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부탁하려 했던 것인데 먼저 알아채 줘서 감사했다. 촬영장을 빠져나오자 재빠르게 메이크업 담당 스태프가 달라붙어 태운의 눈에 얼음주머니부터 가져다 대었다.

“괜찮아? 왜 그렇게 울어. 물부터 좀 마셔.”

매니저가 건네는 생수를 받아 들며 태운은 자리에 앉았다. 리허설이 취소됐지만 아직도 채 수습되지 않은 울음 때문에 태운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대본에는 그저 감정대로 진행하라는 지시문이 쓰여 있었다. 태운은 영화를 준비하면서 최대한 담담하게 그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동생의 시체를 발견하는 순간 태운은 그대로 무너졌다. 대본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태운을 매니저가 부축해 촬영장 한쪽에 마련된 대기실까지 갔다. 아무래도 사람들 속에 머무르기보다는 대기실에 있는 쪽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눈물 멈추셔야 눈에 약 넣는데…….” 

충혈을 가라앉히는 안약을 든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태운의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운 것인지 메이크업이 그대로 쓸려 나가 있었다.

메이크업을 두껍게 하는 편이 아니라 수정은 금방이었지만, 얼굴이 붉어진 것을 수습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듯했다. 거기다가 태운이 계속 울면 몇 번을 고친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지은 씨 잠깐만 나가 있어. 태운이 진정되면 바로 부를게.”

“네……. 실장님 이거 얼음이에요. 눈 부으면 진짜 큰일인데…….”

손에 들고 있던 안약과 얼음주머니를 모두 매니저에게 건넨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소파에 앉아 눈물을 계속 떨어뜨리고 있는 태운을 보며 발을 동동거리다 대기실 밖으로 나섰다.

태운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때로는 친구 같았고 때로는 엄마 같았던 동생에 대한 생각이 고정되었다. 자신은 가족들과 평범할 수 있었던 아정의 유년 생활을 망쳐 버렸고, 그녀가 겪어야 했던 지독한 일들 또한 막아 주지 못했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이 지옥 같은 진창에 발을 들였지만, 그 또한 결국에는 태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일 뿐이었다. 아정이 원한 건 이런 것이 아니었을 텐데……. 차라리 그때 아정과 같이 죽어 버리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태운은 이가 덜덜 떨려 와 이를 악물었다.

그건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어떻게 촬영을 끝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촬영에 들어가서도 태운은 많이 울었다. 연기를 하면서, 아니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살면서 이렇게 많이 울어 본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태운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었지만 감독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고 촬영은 무사히 끝났다. 감독은 촬영된 영상에 굉장히 만족을 나타냈다.

하지만 촬영을 마친 태운은 제대로 설 수조차 없었다. 진이 빠질 정도로 눈물을 쏟아 낸 탓이었다. 대기실에 들러 메이크업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는 것까지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가평 세트장에서 서울에 있는 호텔까지 오면서 어느 정도 회복이 되기는 했지만 태운은 여전히 몸에 힘이 없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 비해 발걸음은 지나치게 무거워 호텔의 복도를 걸으면서 몇 번이나 멈춰야 했다.

태운은 객실 문 앞에서 신경 안정제 병을 꺼내 약 한 움큼을 물 없이 삼켜 내었다. 입이 말라 잘 넘어가지 않아 조금 힘들었다. 손끝이 지나치게 차가워 태운은 손을 말아 쥐었다. 꽉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긴 한숨을 내쉰 태운은 차가운 손끝을 움직여 객실 호출 벨을 눌렀다.

남자가 호출한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왔으니 남자가 객실에 있을 일은 없었지만 가끔 남자가 먼저 도착해 있던 때의 트라우마인지 태운은 항상 객실로 들어가기 전에 긴 텀을 두고 세 번 정도 벨을 눌렀다.

두 번째 벨까지 누르고 세 번째 벨을 남겨 두고 있을 때쯤 정말로 벌컥 객실 문이 열려서 태운은 깜짝 놀랐다. 문 안에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태운은 당황을 감추기 위해 혀를 꾹 깨물었다.

말없이 꾸벅하고 허리를 숙이는 태운을 잠시 응시하던 남자는 문을 밀어 고정해 놓고 태운이 허리를 채 피기 전에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몸을 돌리는 것을 느낀 태운은 그제야 허리를 폈다. 그리고는 남자의 등을 보고 객실 복도를 지나 응접실까지 걸었다.

“……씻고 오겠습니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태운이 남자에게 허락을 구했다. 무의식중에 아랫입술을 물며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하며 허락을 말했다. 태운이 긴장감을 숨기며 욕실로 몸을 옮겼다. 여전히 몸에 힘이 없었고 발걸음은 무거웠다.

* * *

준비를 하고 욕실 밖으로 나오자 응접실에 남자는 없었다. 태운은 남자를 찾지 않고 바로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경 안정제의 효능인지 몸이 조금 나른했다.

침대 옆에 서서 태운이 어느 정도 시간을 견뎌 냈을 때 샤워 가운 차림을 한 남자가 침실로 들어왔다. 남자를 보자 태운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어색한 몸짓으로 가운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말없이 그런 태운을 응시하던 남자도 가운을 벗고 바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섹스를 하면서도 서로 체온을 나누지는 않는 건조한 행위는 익숙한 일이었다. 남자는 단단한 손으로 태운의 무릎 양쪽을 접어 젖혀 왔다. 태운은 남자가 자리 잡기 편하도록 허리를 들었다.

하지만 바로 다리를 가르고 태운 안으로 들어올 것 같던 남자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태운은 남자가 행동을 멈추자 의아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에 태운은 고개를 돌려 피했다.

“아…….”

그리고 태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남자가 행위를 멈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와 얼굴을 적셨다. 행위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길다고 하면 길다고 할 수 있는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처음이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태운은 재빨리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고장 나 버린 감정은 수습이 되지 않았다. 왜 갑자기 눈물이 나오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닦아도 멈추지 않는 눈물 때문에 태운은 난처했다. 여전히 남자가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어 더 그랬다.

“죄송합니다…….”

태운은 당황해서 고장 난 기계처럼 사죄의 말을 반복해서 내뱉었다. 손으로는 연신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촬영장에서처럼 억지로 멈추려고 해도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 싫은가?”

태운의 눈물의 의미를 그렇게 해석한 것인지 남자가 물어 왔다. 태운은 아니라고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순간적으로 목이 메어 그냥 고개만 저었다. 태운이 남자에게 고갯짓으로 의사를 표현한 것은 그와 알아 온 오 년 중에 처음이었다.

이십 대 중반의 남자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리다니, 얼마나 꼴사나운 짓일까 태운은 생각했다.

이렇게 남자를 앞에 두고 눈물만 질질 흘리고 있는 것은 남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요즘 자꾸 자신의 몸만을 원하는 남자에게 손해를 입히고 있었다. 이래서야 남자에게 버려진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죄송…… 읍, 죄송합니다.”

억지로 눈물을 멈추려고 하자 목 속에서 끅끅 하는 듯한 소리가 올라왔다. 태운은 더 당황해서 이제는 입까지 막았다. 항상 그렇듯 마음처럼 되지 않는 몸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차라리 자신이 잠에 빠지든 아니면 울음을 터뜨리든 그냥 남자가 아무 반응하지 않고 그냥 제 몸을 취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남자가 자신의 몸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더 눈물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그게, 하기 싫어서…… 우는 게, 그런 게 아닙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저도…….”

끅끅거림을 멈춘 태운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남자에게 해명을 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밖에는 없었다. 자신의 위에서 남자가 피식하고 웃는 것이 들렸다. 그 소리에 태운의 온몸이 떨려왔다. 태운은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눈에서는 눈물이 새어 나왔다.

눈물은 태운의 얼굴을 잔뜩 적셨다. 평소에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얼굴에 냉기가 돌면서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얼굴이 잔뜩 젖고 눈가와 코, 그리고 볼까지 붉게 물들자 꼭 어린애 같은 유약한 얼굴이 되었다.

한참을 태운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태운은 무의식중에 경기를 일으키며 남자의 맨팔을 잡았다. 남자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시간을 조금만, 조금만 주시면…….”

거칠게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 낸 태운은 붉은 기가 감도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태운은 다시 덜덜 떨었다. 하지만 잡고 있는 남자의 팔은 놓지 않았다. 이렇게 간절했던 것이 언제였는지 태운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남자와의 첫 만남 때를 제외하고 한 번도 이렇게 간절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운의 바람과는 다르게 남자는 가볍게 힘을 줘 태운의 손에서 풀려났다. 남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태운은 망연한 얼굴로 멈추지 않는 눈물을 저주했다.

“죄송합니다…….”

태운은 침대에서 벗어나는 남자의 등을 향해 마지막으로 사죄의 말을 내뱉었다. 다시 붙잡고 싶은데,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하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것조차 되지 않았다. 정말 저주스러운 몸뚱이였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갈 것 같은 남자가 향한 곳은 방 한쪽에 있는 미니 바였다. 작은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을 꺼낸 남자는 그것을 들고 태운에게 다시 걸어왔다.

태운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아랫입술을 악물고 남자의 행동을 살폈다. 침대로 걸어온 남자가 태운에게 병을 건네자 태운은 순간적으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감사, 합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태운은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어색하게 감사 인사부터 내뱉었다. 그 당황이 너무 커서, 어느 순간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눈물마저 멈췄다.

“마셔.”

태운이 멍하니 생수병을 들고 있자 남자가 말했다. 태운은 남자의 명령에 따라 물을 마시기 위하여 병의 뚜껑을 열면서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과 달리 태운의 몸은 입력된 명령을 따르는 로봇처럼 물을 마셨다. 자신도 모르는 갈증이 있었던 것인지 입안으로 들어오는 물이 달았다. 병에 물을 반쯤 마시자 더 이상을 넘기는 것이 버거웠지만 태운은 꾸역꾸역 병에 있던 물을 모두 마셨다.

빈병을 태운은 협탁 위로 올렸다. 여전히 남자의 시선이 따라붙자 태운은 조금 난감해졌다. 행위 중 잠에 들었을 그때처럼 남자가 그대로 자신을 젖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태운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하셔도 괜찮습니다.”

한참 만에 태운이 힘겹게 내뱉은 말에 남자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태운은 다시 혀를 아프게 물었다.

“왜 운 거지?”

곧이어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태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태운은 반사적로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닫았다.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남자에게 설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이런 것을 궁금해하는 남자가 익숙하지도 않았다.

“죄송합니다.”

태운의 입에서 나온 사죄의 말에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자 태운은 바닥에 발을 댔다. 남자의 것을 입으로라도 풀어 줄 생각이었다. 태운은 남자의 명령 없이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도록 교육됐다. 하지만 약속 시간에 늦었던 날 이후로 자신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구는 일들이 잦아져서 이렇게 스스로 무릎을 굽히고 필사적으로 남자에게 용서를 빌게 되는 일들이 잦아졌다. 태운은 그것이 너무 버거웠다. 하지만 이대로 남자와의 관계를 끝낼 수는 없었다.

“섹스를 시작도 전에 잠드는 상대도 울음을 터뜨리는 상대도 재미없어.”

다리를 질질 끌고 걸어 겨우 남자의 앞에 도착해 바닥에 무릎을 굽히려는데 머리 위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이대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태운은 다시 멈췄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동요하지 않기 위하여 이를 악물었다.

“……죄송합니다.”

“요 근래 대체 그 말을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군.”

“…….”

태운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사죄의 말을 해야 하는데 방금 전 질책을 받은지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가 봐.”

남자의 말에 태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태운의 얼굴이 밀랍을 부어 놓은 것 같은 색이 되었다.

“그만둘 게 아니라면, 제대로 정리하고 와.”

남자가 뱉어 낸 말은 태운의 예상 밖이었다. 말을 마친 남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객실 안을 빠져나갔다. 태운은 혀를 물며 남자를 따라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남자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태운은 멍하니 남자의 위협적인 등을 응시했다.

태운이 응접실로 나갔을 때는 남자는 없었다. 태운은 욕실에 벗어 두었던 옷을 꿰어 입었다. 다시 응접실로 나갔을 때까지도 남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태운은 그 공간에서 쫓기듯 나왔다. 손목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자 저녁 아홉 시가 좀 넘어가고 있었다. 다음 촬영 때까지는 사흘의 말미가 있었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려던 태운은 발걸음을 돌려 호텔 안에 있는 한정식집으로 들어갔다. 룸으로 안내 받은 태운은 두 사람 몫의 음식을 시켰다. 태운은 식욕이 별로 들지 않았지만,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음식을 입안에 밀어 넣자 헛구역질이 먼저 나왔다. 하지만 태운은 꾸역꾸역 음식을 삼켰다.

남자가 관계를 이어 갈 기회를 주었으니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음식을 몸 안으로 밀어 넣을 때마다 계속해서 구역질이 나왔지만 태운은 전부 씹어 삼켰다. 상에 있는 음식들이 몇 번씩 바뀌고 배가 부르다 못해 움직이지 힘들 정도가 되어서야 태운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앞이 핑 하고 돌고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남자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몸이었고 자신이 남자에게 줄 수 있는 것도 몸이었다. 억지로 밥을 먹고 약을 먹고라도 잠을 자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컨디션을 관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봤자 남자가 자신을 버리기 전까지의 시간을 연장시킬 뿐이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남자의 옆에 붙어 있을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태운은 진저리가 났다.

* * *

뉴 페이스 씨. 내가 자선 사업가는 아니잖아. 돈 받은 값은 해 줘야지. 그리고 뉴 페이스 씨한테도 나쁜 일 아니야. 그치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싶어 하는 연놈들이 한둘인 줄 알아?

근데도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건 네가 처음이라고 해서야. 그치는 닳고 닳은 년들, 누가 먹다 버린 줄도 모르는 것들 거들떠볼 인간이 아니니까.

가서 예쁜 척 눈 이렇게 뜬 다음에 바지 끄댕이 잡고 박아 달라고 존나 빌어. 콧소리 슬슬 내면서 야하게 웃으란 말이야. 그리고 그치가 홀려서 니한테 좆질하면, 구멍 존나 조여서 너한테만 박고 싶게 만들라고.

알아들어? 그렇게 억울한 표정 짓지 마. 나한테 그 돈 공으로 받아 간 거 아니잖아. 그 돈 받아 가면서 이런 일 생각도 안했어? 그렇게 피해자인 얼굴도 하지 마. 내가 계약서 쓸 때 말 안 해 준 것도 아니잖아. 돈만 주면 뭐든지 하겠다며. 이게 그거일 뿐이야.

뉴 페이스 씨. 가서 잘하고 와 그치는 존나게 바쁜 인간이라 니가 공사 친다 해도 한 달에 두세 번 박는 게 전부일 거라고. 처음에만 존나 힘들지 한 달에 두세 번 그 짓해서 돈 버는 거 생각해 봐. 개고생 안 해도 되고 돈 벌기가 얼마나 쉽냐. 좀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란 말야.

근데 너 그거 실패하면? 좆으로는 늙은 아줌마들한테 존나 박아야 하고 뒤로는 똥꼬가 헐 때까지 남자들 받아 내야 돼. 잘 생각해. 뭐 매일 그 짓 하다가 똥구멍이 존나 넓어져서 똥 줄줄 새면 복원 수술도 해 줄 테니까.

내 밑에 있는 연놈들 내 말 안 듣다가 존나 굴려져서 그런 연놈들이 한둘이 아니라 내가 병원도 잘 알아. 그러니까 너무 겁먹지는 말고.

니는 같은 거 달린 새끼들이랑 추삽질이라면 이가 갈리는 나도, 박아 보고 싶을 정도로 존나 꼴리게 생겼으니까 그치도 끝까지 버티지는 않을 거다.

잘하고 와.

* * *

소속사 사장에 의해 억지로 앉혀져 보게 된 영상들은 충격이었다. 그 영상 속 인물들이 하나같이 꽤나 유명한 배우들이란 것도 충격이었지만, 태운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남자끼리 하는 섹스 장면은 더 충격이었다.

태운은 불안하게 호텔 객실 안을 서성였다. 소속사 사장은 잘하고 와 하는 말과 함께 낄낄 웃으며 저를 호텔 객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인형처럼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룸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하지만 느린 뇌는 룸 안에 발을 들여놓고도 제가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식을 하지 못했다.

몸에 힘이 없었다. 사장은 이틀 내내 물도 입에 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강제로 화장실에 갇혀 관장을 해야 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고 정신을 놓으면 앞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초조하게 시간은 계속 흘렀다.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자 이곳으로 밀어 넣어진 지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이 흘러 있었다. 이곳에서 뛰쳐나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동생의 하얀 얼굴이 떠올라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계약금으로는 이미 수억대에 달하는 아버지의 빚을 갚았다. 하지만 아직도 계속해서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줬다는 사채업자들이 집을 찾고 있었다.

사채업자들에게 받은 번호로 겨우 연락이 된 아버지는 미안하다며 사죄했다. 아버지가 두 남매를 두고 집을 나간 지 삼 년 만에 처음 하는 통화였다.

아버지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돈이 필요했고 겨우 천만 원을 빌렸다. 하지만 이자가 말도 안 되게 늘어났고 순식간에 억대의 돈이 되었단다. 큰 판에서 한 번만 크게 따면, 한 번에 메울 수 있는 돈인데 돈을 갚으라고 닦달을 하니 잠시 숨어 있었다. 정말로 그 인간들이 거기까지 가서 아정이에게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단다.

아버지의 말에 태운은 상황을 파악했다. 갚아야 할 돈은 있는데 아버지란 인간은 잠수를 탔고, 사채업자들은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아 낼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 동생에게 대신 아버지의 빚을 갚게 하기 위해서 납치를 했던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는 무책임한 아버지의 말에 태운은 치가 떨렸다.

그러나 그런 만큼 여기서 태운은 물러날 수 없었다.

차마 더 안쪽으로도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만 서성이던 태운을 더욱 긴장하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뭐야?”

문을 열고 들어 온 남자는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차마 느끼기도 전에 남자에게서 나오는 차가운 분위기에 태운은 뻣뻣하게 굳었다. 남자에게는 위에 서 있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유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무엇인가 대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태운은 마땅히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한 시간이 넘게 현관 앞을 서성이면서도 설마 남자가 자신의 존재를 모를 것이라고는 무의식중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태운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옷에 단추를 풀었다. 죽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돈을 받았으니 그 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자 이 상황이 서럽고 무서웠다.

태운이 가슴께까지 단추를 풀어 내렸을 때, 희미하게나마 픽 하고 웃는 남자의 웃음이 들려왔다. 기도 안 찬다는 투의 웃음이었는데 태운은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 쓸데없는 짓을 기획한 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실패야. 나가.”

말을 하며 남자가 태운을 밀치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태운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바지를 잡고 한 번만 박아 달라고 빌라는 소리가 이것이었나. 태운은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제 귀에서 재생되는 것을 느꼈다.

이가 덜덜 떨렸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분노인지 처절함인지 치욕스러움인지 스스로 감정의 종류를 감히 판단할 수조차 없었다.

안쪽으로 들어간 남자는 무엇을 하는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들어간 곳은 긴 복도를 넘어 희미하게 보였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태운은 입술을 꽉 물며 입고 있던 옷을 한 겹씩 벗었다.

태운은 성관계 경험이 없었다. 이성과의 관계도 없는데 동성과의 관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옷부터 벗었다. 사장 말대로 발치에 엎드려 빌기라도 할 작정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간접 경험도 소속사 사장에 의해 억지로 보게 되었던 동성 간 섹스 동영상이 다였다. 그 동영상 속 배우는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약에 취한 듯 눈이 풀려 있었다. 그 모습만큼이나 동영상의 내용은 헛구역질이 올라올 만큼 참혹했다.

태운은 떨리는 손으로 최대한 빨리 남은 옷가지들을 벗어 내었다. 입고 있던 옷이 간소해 태운은 금세 알몸이 되었다. 싸늘한 공기가 알몸에 닿자 소름이 올라왔다. 그리고 죽고 싶을 만큼 치욕스러워졌다.

발이 땅에 붙은 듯 무거웠다. 족쇄를 찬 채로 땅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땅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기어코 태운은 남자가 들어간 공간에 발을 들였다.

남자는 소파에 앉아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태운을 발견하자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태운은 들어오면서 “안에 귀찮은 게 들어왔어. 끌어내.” 하는 짜증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태운은 일단 남자의 발치에 무릎부터 꿇었다. 쿵 소리가 나면서 무릎이 땅에 닿았지만 아픈지 잘 알 수 없었다. 참으려 했지만 눈물이 먼저 흘러 나왔다. 태운은 이를 악물면서도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입꼬리도 억지로 끌어 올렸는데 기괴한 얼굴이 되었다.

“제발…… 제발 절 범해 주세요.”

“나가.”

태운은 뇌가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심장 근처 어딘가에 위치한 산산조각 난 무언가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남자의 눈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불쾌한 이물질을 바라보듯 태운을 보았다. 태운은 정말로 죽고 싶었다.

“나가서 네 포주한테 전해. 이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입찰권 따고 싶다면 가장 좋은 조건으로 서류를 준비해 입찰에 참여하라고.”

태운은 남자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빈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로 검게 찬 것 같기도 했다.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며 태운은 버텼다. 알몸으로 무릎을 꿇고 자신과 같은 성별을 가진 남자 앞에 꿇어 앉아 있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것이었다. 그것이 성적인 의도를 전하는 것이라면 더욱.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나? 나가라고.”

한참을 미련하게 버티는 태운을 보며 남자가 불쾌한 한숨을 내쉬었다. 태운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대로 나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끝까지 이렇게 버텨야 하는 것일까.

차마 정면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시선을 둘 수 없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얗게 질린 손은 비참했다. 머리 위에서 남자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나가지 않겠다면 내가 나가지.”

그리고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태운은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남자가 나간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지 소속사 사장은 알려 주었다. 밑구멍이 헐 때까지 매일매일을 다른 남자에게 굴려 주겠다 말했다. 자신은 영상 속 인기 배우처럼 참혹해지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것이 영상으로 찍혀 이곳저곳으로 떠돌게 되는 걸까. 차라리 죽고 싶었다. 혀를 깨물어 죽을 수만 있다면, 아니 그냥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소속사 사장은 자선 사업가가 아니었다. 태운이 죽으면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 돈을 회수하려고 할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 동생인 아정이 책임을 떠맡게 되겠지.

그건 안 됐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누구도 다시는 아정에게 해를 끼치게 할 수 없었다. 태운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생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아정을 생각하며 태운은 이를 악물었다.

태운은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걸어 나가는 남자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기분이었다. 남자가 짜증을 넘어 위협적이기까지 한 눈빛을 내며 태운을 내려다보았다.

“처, 처음입니다. 하지만 잘…… 잘할 수 있어요.”

남자가 헛웃음 짓는 소리가 태운의 귀에 꽂혔다. 남자는 발길질을 하거나 손을 내려 우악스럽게 태운을 떼어 내지 않았다. 그리고 태운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남자에게 태운은 그럴 가치조차 없었다. 태운의 등 뒤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한 공간에서 발소리는 태운에게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졌다. 태운은 더할 나위 없이 하얗게 질렸다. 부릅뜬 눈에서 팟 하고 실핏줄이 터졌다. 눈물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멀리서 어렴풋이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태운은 그대로 숨을 멈췄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그래서 누굽니까.”

“네? 그게 무슨.”

“내 침실 열쇠 빼돌린 인사가 누군지 물었습니다. 그거 알아보고 안팎으로 재 보느라 늦은 거 아닙니까.”

“그, 그렇지 않습니다.”

들리는 목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지만, 태운은 이미 여러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여러 명의 발소리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태운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했다. 이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또 보이고 있다는 것이 비참했다. 꽉 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기분이었다. 손에 힘이 절로 풀렸다.

머리가 지끈하고 아팠다. 헛구역질이 올라왔지만 먹은 게 없어 넘어오는 것은 없었다. 태운은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았다. 창기. 아마 다른 이들은 그를 그렇게 보고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성 상납 동영상 속 인기 배우를 보았을 때처럼 자신을 역겹게 보고 있을 것 같았다.

“내 침실의 열쇠 값이 얼마인지는 곧 알려 드리겠습니다.”

태운이 둥글게 말아 숨긴 얼굴에 달려 있는 귀 안으로 상황이 들리기만 했다. 꼭 감은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일단 이 물건부터 치워. 나는 집으로 들어가지.”

남자가 지금까지 대화하던 남자와는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하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남자와 대화하던 사람이 뭐라 비명 같은 변명을 내지르는 것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곧이어 자신의 뒤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끌려 나갈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남자들의 대화 내용만으로 제가 모두 망쳤다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일을 망친 채로 이렇게 끌려 나갈 수는 없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애써 웃던 동생의 얼굴이, 동영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하던 배우들이, 야비한 얼굴의 소속사 사장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증오스러운 얼굴이 생각났다.

“저, 정말 잘하겠습니다……. 내, 쫓지 말아 주세요. 정말, 잘하겠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태운은 부서졌다. 그리고 깨졌다. 남자의 발목을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라도 된 듯이 움켜쥐었다. 그것이 정말 동아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태운이 매달릴 곳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저를 끌어내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태운은 그럴수록 남자의 발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남자 몇이 태운을 떼어 놓으려고 매달렸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태운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태운이 움켜 쥔 발목이 불편한지 남자가 인상을 쓰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일단 떨어졌다. 바지 끄댕이를 잡고 박아 달라고 빌면서 무엇을 하라 했더라. 태운은 그 와중에 생각했다. 아니 머릿속에 모든 생각을 밀어내고 떠오르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박, 박아 주세요. 정말, 잘, 잘할게요.”

악문 입술에서는 피 맛이 올라왔다. 태운은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반달처럼 눈을 접었지만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와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호텔 안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잊었다.

태운은 “흐응, 흐응.” 하며 오기 전 보았던 동영상에서 배우가 내었던 소리를 흉내 내었다. 태운의 하얀 얼굴이 비참하게 질려 갔다.

* * *

빼곡한 글씨들로 가득한 대본은 이제 어떤 것이 인쇄된 대사고 어떤 것이 직접 단 주석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태운은 대사는 물론이고 직접 쓴 주석까지 모두 외워 버린 대본을 다시 한 번 훑었다. 이미 전부 외운 내용이었지만 이렇게 읽다 보면 다른 것이 또 떠오르곤 했다.

그렇게 호텔을 빠져나온 지 이 주가 좀 지났다. 남자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남자에게 이렇게 몇 달씩 연락이 없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태운은 남자에게 쓸모를 다하지 못했다는 불안감에 이렇게 대본을 보는 도중 혹은 촬영을 하다가도 진저리 쳤다.

이 주 동안 태운은 촬영과 겹치지 않는다면 꼬박꼬박 끼니를 챙기고 잠을 자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비록 음식이 몸에 받지 않아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계속 헛구역질을 하고 수면제를 먹어야 겨우 잠에 들었지만 어쨌든 태운은 남자의 말대로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남자에게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몸뚱어리에 남자가 지불하는 대가가 컸다. 자신에게는 그럴 만큼의 가치가 없었다. 남자가 자신에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면 태운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한 진창을 구르고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남자의 입장이라도 자신보다는 방긋방긋 웃으며 교태를 떨 줄 아는 그런 상대가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살갑게 굴어야 하는데 남자 앞에만 서면 몸이 굳고 손이 떨렸다. 태운은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서 화장품의 맛이 났다.

태운은 놀라서 치아 사이에서 입술을 빼냈다. 카메라 앞에 설 것을 생각해 좀처럼 자국이 남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데, 초조한 나머지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한숨을 길게 내쉰 태운은 주머니 속에서 신경 안정제 병을 꺼냈다. 도저히 초조해서 버틸 수가 없었다. 약병의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손바닥으로 쏟아 내었다. 가벼운 병에는 겨우 알약 두 개가 전부였다. 손바닥에 꺼내어진 알약 두 개를 입안에 넣고 오독오독 씹으며 태운은 물을 찾았다. 입안이 너무 써서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톱 배우라고 칭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허상이었다. 여전히 자신은 약자였다. 남자에게 버림받는다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 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기에 파고들었다. 무엇에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카메라 앞에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 자신은 없었다. 이제는 연기를 하지 않는 삶은 생각할 수 없었다.

태운은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연기를 할 수 없게 된다면 계속해서 삶을 유지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동생을 지키려면, 그리고 연기를 하려면 앞으로 평생 동안 소속사 사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남자에게 버려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태운은 그 상상 속 끔찍함에 덜덜 떨었다.

남자에게 버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운은 다시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대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있었다면 태운은 어떻게 해서든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매니저는 잠시 자리를 비웠고, 스태프들에게는 따로 대기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참을 헛구역질하던 태운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파에 길게 늘어졌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너무 엉망이라 태운은 어쩐지 눈가가 시큰거렸다.

* * *

남자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그날로부터 이 주 하고도 삼 일이 지난 후였다. 태운은 시간이 적힌 문자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였을까. 어쩐지 그런 기분인 것도 같았다.

태운은 통보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로 도착했다. 늘 준비를 하기 위해 통보받은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일렀다. 객실 문 앞에 선 태운은 무의식중에 주머니에 든 신경 안정제 병으로 손을 가져가려다가 멈췄다.

약이 남아 있지도 않았지만 몸을 이완시켜 나른하게 만드는 약이라 앞으로 남자와의 관계 전에는 먹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관계도 전에 잠에 빠지는 일이 다시 생겨선 곤란했다.

태운은 약을 먹는 대신에 심호흡을 해서 뻣뻣하게 굳는 몸을 이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여섯 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당연히 남자가 객실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태운은 긴 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초조함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남자가 객실 안으로 들어온 때는 남자가 문자로 통보한 시각과 비슷했다. 준비를 마치고 한 시간이 넘게 현관이랑 복도로 연결된 응접실에서 남자를 기다리던 태운은 복도를 걸어 들어오는 남자를 확인하고 등을 굽혀 인사했다.

고개를 잠깐 끄덕인 남자는 그대로 등을 돌려 움직였다. 기다리는 동안 긴장이 너무 컸던 탓일까. 등을 돌리는 남자의 움직임에 질겁한 태운은 그대로 남자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남자의 시선이 태운은 정수리 위로 느껴졌다. 태운은 최대한 담담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무거운 손을 들어 남자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남자가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태운은 멈추지 않았다. 남자는 제지하지 않았고 단번에 남자의 속옷까지 헤친 태운은 그대로 남자의 성기로 입을 가져갔다.

드물게 적극적인 태운을 보며 남자는 태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행위 시작 전에 항상 망설임을 가득 채운 눈으로 입술을 깨물던 태운은 오늘 그 단계를 건너뛰었다. 그리고 마치 바라마지 않았던 것처럼 한 번에 남자의 성기를 입안으로 넣었다.

춥춥 하는 축축하고 음란한 소리가 넓은 공간에 가득 퍼졌다. 태운은 최선을 다하여 남자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했다. 남자가 준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발기한 남자의 성기가 입을 빽빽하게 채워서 턱이 얼얼해질 때쯤 남자는 태운의 입안에 길게 사정했다. 눈을 질끈 감은 태운은 남자의 사출액을 전부 삼켜 내었다.

“이제 제대로 할 마음이 생긴 건가?”

입안에 가득 퍼지는 비릿한 냄새를 견디며 태운은 혀를 아프게 깨물었다. 단단히 결심을 했지만 예쁜 척 애교를 부릴 방법도, 그렇다고 남자가 자신의 몸에 빠지게 만들 수 있는 방법도 잘 알지 못했다.

앞으로는 남자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각오를 봐 주지. 침실로 가.”

남자의 말에 태운은 굽히고 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망설임을 버렸다. 태운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태운의 발걸음 뒤로 따라붙는 남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맨발임에도 남자의 발걸음 소리는 묵직했다. 태운의 심장을 조여 오면서도 한편으론 이상하게도 안심시켜 주는 소리였다. 태운은 긴 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보는 앞에서 태운은 샤워 가운을 벗었다. 뭐든 남자의 마음에 들게 하고 싶은데 평소랑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태운이 그대로 침대에 눕자 남자 역시 가운을 벗으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남자는 한 번도 태운의 몸에 별다른 애무를 한 적이 없었다. 기계적으로 삽입을 했고 사정을 하고 나면 미련 없이 태운을 놓았다. 태운의 쾌락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자신을 자위 기구 정도로 이용하는 남자의 행위에도 태운은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남자가 지금까지 태운을 찾는 이유이기도 했다.

태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각오를 봐 주겠다던 남자는 다행히도 태운에게 스스로 하여야 하는 어떤 것도 명령하지 않았다. 그대로 태운의 다리를 가르고 그 안으로 자리 잡았다. 태운은 남자가 가하는 무엇이든 감내해 낼 생각이었다. 그것이 남자가 원하는 것이었고 태운의 최선이었다.

남자가 넓게 벌려져 접힌 태운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남자가 들어올 공간이 생기고 드러난 자신의 비부에 젤을 짜 넣으려던 남자와 태운의 눈이 마주쳤다. 태운은 그 순간 혀를 깨물며 눈꼬리와 입술을 접어 웃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굉장히 어설픈 표정이었다. 그리고 어딘가가 부서져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부서지는 부분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읏.”

젤만 바른 채로 한 번에 깊숙이 삽입해 오는 남자 때문에 태운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절로 나왔다. 평소에도 남자의 삽입은 친절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 풀어지지 않은 곳에 밀고 들어오는 것은 남자에게도 별로 편하지 않은 일이라 이렇게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오는 편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느껴지는 이물감에 태운은 이까지 덜덜 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운은 계속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였다.

비참한 기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지만, 그래도 태운은 웃었다. 남자는 콘돔조차 착용하지 않았다. 한 번도 콘돔 없이 행위를 시작해 본 적은 없었는데? 태운은 잠시 의아함을 느꼈지만 한 번에 끝까지 밀고 들어온 남자가 추삽질을 시작하는 바람에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읏. 아. 읏!”

태운의 몸이 쿵쿵 하고 울렸다. 허리가 들린 자세라 남자가 안쪽으로 성기를 박아 넣을 때마다 허리가 불편하게 꺾였다. 태운이 계속해서 자세를 무너뜨리자, 남자가 태운의 종아리를 단단히 잡았다. 남자는 태운의 종아리를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려 움직임을 차단했다.

태운은 이제 신음 소리를 삼키며 상황을 감내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태운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고 추삽질을 계속해 가던 남자는 자세를 바꾸다가 손바닥으로 태운의 젖꼭지 부분을 눌렀다. 그 순간 태운은 지금까지는 있는지도 몰랐던 살점에서 느껴지는 찌르르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읏!”

태운의 반응에 남자가 그 살점을 꼬집듯이 비틀었다. 간지러움 비슷한 감각에 태운은 진저리 쳤다. 간지러워서 긁고 싶은데 남자가 손대고 있는 부위라 자신의 신체임에도 태운은 감히 손을 올릴 수 없었다.

“아, 읏…… 아!”

남자가 이렇게 태운의 몸에 손을 댄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태운은 계속해서 몸을 울리는 간지러운 감각에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젖꼭지에서 퍼져 나간 감각은 발가락 끝까지 간질거리게 했다. 차라리 아프게 꼬집어 줬으면 좋겠는데 남자의 손은 그것도 아니었다.

태운은 붉게 상기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스스로는 미소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입을 벌린 채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몸이 민감한 탓인지 평소에도 남자의 친절하지 않은 추삽질에도 울컥울컥하고 정액을 뿜어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온몸에 퍼졌다. 태운은 입술을 물며 그 간지러운 감각을 참아 내었다. 어느 순간 남자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계속해서 태운의 유두를 지분거리던 남자도 사정이 가까워졌는지 추삽질이 더 거세어졌다.

“으으.”

태운은 자신의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뜨거운 액체에 몸을 떨었다. 간질간질한 감각은 전이가 되는 것인지 이제는 구멍 안쪽, 손이 닿을 수 없는 내부까지 간지러워졌다. 태운은 눈을 감으며 남자가 제 안에서 빠져나가기만을 바랐다. 평소와 다르게 잘해 보려고 했는데 이상한 감각 때문에 견디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태운이 발가락 끝을 꾹 오므렸다. 감각을 참으려면 방법이 없었다. 남자가 태운의 내부에서 성기를 빼내서 태운은 좀 안심했다. 하지만 남자는 태운을 놓는 대신 본격적으로 태운의 유두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그 감각을 견디던 태운은 결국 사정하고 말았다.

“……죄, 송합니다.”

태운은 다른 충격을 받을 새도 없이 남자의 배에 뿜어진 자신의 정액 때문에 패닉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손으로 닦아 내었지만 미끈거리며 더 퍼지기만 할 뿐 닦이지 않았다.

“됐어.”

남자는 자신의 몸을 더듬는 태운을 제지했다. 태운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몸을 일으키려는 태운을 단번에 다시 눕힌 남자는 그대로 태운의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 * *

태운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눈을 떴다. 눈을 떴는데도 불구하고 눈앞이 까맸다. 태운은 길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떴다. 한참을 반복하고 나서야 어지럽기는 하지만 그나마 시야가 돌아왔다.

흐릿한 시야에 낯선 공간이 담겼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이곳이 어디인지 떠올랐다. 태운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발이 땅에 닿자 발바닥부터 시작해 엉덩이 사이의 깊숙한 곳 그리고 척추까지 찌르르하고 울렸다. 태운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는 모르겠다. 태운은 무의식적으로 또 입술을 악물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길게 이어지던 행위가 끝나고 남자가 먼저 침대에서 일어났다. 태운은 남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보다도 더 말을 듣지 않았던 몸을 침대에서 일으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는 추태까지 남자에게 보였다. 남자는 그런 태운의 꼴을 보며 웃었다. 태운은 기어서라도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남자가 그냥 누워 있으라고 태운에게 명령한 것이 먼저였다.

태운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남자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결국 태운은 남자가 나갈 때까지 잠시만 침대에 누워 있겠다 생각했는데 그대로 밀려오는 수마에 눈을 붙이고 말았다.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한숨을 쉬며 입술을 놓은 태운은 다음 촬영 날짜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사 일, 아니 삼 일 정도 남은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 카메라에 비칠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태운은 걸을 만한 상태가 되자 불편한 다리를 질질 끌고 침실을 벗어났다. 조금 걷자 엉덩이 사이에 깊은 곳에서 주룩하고 질척한 액체가 새어 나왔다. 태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태운은 길게 심호흡을 계속했다. 그렇지 않고는 정말 견뎌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자는 응접실에 없었다. 다른 침실에서 잠을 자는지, 이미 객실을 빠져나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태운은 눈앞에 보이는 옷을 서둘러 꿰어 입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찌르르하고 척추가 울렸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상의를 입은 태운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겨우 셔츠가 닿은 것뿐인데도 쓰라렸다. 문득 어젯밤 계속 남자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것에 생각이 미쳤다. 다시 한 번 사정을 마친 남자는 태운의 안에서 벗어나 오래도록 태운의 유두를 괴롭혔었다.

꼬집고 비틀고 태운은 괴로움에 떨었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고 태운은 남자의 행동을 그저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껴지던 살점을 도려내고 싶을 정도의 간지러움. 그 감각이 생각나는 것 같아 태운은 유두를 뜯을 듯 긁었다. 이미 붉게 부어오른 유두는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쓰라렸다. 하지만 태운은 자꾸 떠오르는 감각을 지우고자 정말 살점을 도려내기라도 할 듯 그곳을 긁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태운은 피를 보고 말았다. 그제야 태운은 이를 악물며 그 행동을 멈췄다. 스스로가 미친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예전에 미쳤었던 것 같지만. 태운은 욕실에 들러 수납장에서 관장 액을 하나 챙겼다. 그것을 손으로 잡는 태운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 * *

태운은 객실과 이어져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까지 내려와서 굳이 다른 통로를 통해 다시 호텔 라운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직원을 통해 새로운 객실에 체크인했다. 굳어서 더 이상 남자가 자신의 안에 싸 넣은 액체가 더 이상 흘러나오지는 않았지만 이 상태로 집까지 갈 수는 없었다.

온몸에 벌레 수천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있는 기분이었다. 일 분이라도 빨리 씻고 싶었다.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태운은 옷부터 벗었다. 그러자 좀 숨을 쉴 수 있었다. 욕실로 들어간 태운은 샤워기에 일단 몸부터 씻어 냈다. 물에 닿자 피가 맺힌 유두가 다시 쓰라려 왔다. 태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태운의 얼굴은 어쩐지 울기 직전처럼 보였다. 하지만 태운은 울지 않았다. 다리 사이에 남자의 정액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태운은 살이 붉어질 때까지 그곳을 문질렀다. 정말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어젯밤 남자는 이상했다. 평소와 달랐다. 남자가 태운의 몸에 그렇게 손을 댄 적은 처음이었다. 언뜻 보았던 남자의 표정에는 흥미가 담겨 있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대체 왜…….

태운은 자신이 남자의 행동에 가타부타를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제는 정말로 이상했다. 태운은 다시 붉게 부어오른 유두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발가락 끝까지 힘을 주고 견뎌야 했던 그 감각이 문득 다시 떠올랐다.

태운은 무엇에 홀린 듯이 어제 남자가 했던 것처럼 힘을 주어 스스로의 유두를 비틀었다.

“하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이었다면 태운이 스스로 그런 치욕적인 일을 다시 떠올리며 되새길 리 없었다. 다시 발끝까지 간지러운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태운은 다시 미친 듯이 유두와 그 주변을 긁었다. 피부가 피부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온통 붉어지고 피가 새어 나왔다.

“으윽!”

태운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벽에 머리를 쿵 하고 박았지만 여전히 태운의 성기는 일어나서 투명한 액을 뚝뚝 흘려 내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잘못된 시작으로 인해 태운에게 성은 그저 수치였고, 치욕이었다. 남자를 만난 후에는 남자의 명령이 아니고서는 한 번도 태운은 스스로의 성기를 잡고 흔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조금이나마 했었던 것 같은데, 아정과 둘이 살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서 자주는 아니었다. 남자를 만난 후에는 정말 한 번도 없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하지만 태운은 이 순간, 저릿한 성기를 견딜 수가 없어 성기를 부여잡았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 * *

“하.”

태운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어서 무작정 밖으로 나왔지만 도착하니 결국 또 이곳이었다. 어디로든 나가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할 것 같은 생각에 운전대를 잡았지만 세상 어디에도 태운이 갈 곳은 없었다.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할 친구도 없고, 연기 외에 즐기는 다른 취미도 없을뿐더러 그렇다고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도 없었다. 혹시 실수할까 두려워 혼자 술을 마시지도 못했다. 태운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하고 또 태운을 살게 해 주는 이는 동생뿐이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웃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사이가 좋았던 남매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엄마가 다른 오빠로 인해 안락했던 본인의 가정이 깨져 버렸지만 아정은 한 번도 태운을 원망한 적 없었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 모친의 학대로 트라우마가 심한 태운의 상처들을 보듬어주고 제대로 살게 만들어 주었다.

태운의 가장 첫 기억은 허공에 흔들리는 다리였다. 엄마의 다리. 그 이전에 엄마와 함께 살았을 때의 기억들은 트라우마 때문인지 도려낸 듯 없었다.

아무리 불러도 흔들어도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운은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을 정도로 어린아이여서, 언젠가 엄마가 다시 대답해 줄 때를 기다리며 얌전하게 방 안에서 기다렸다.

친자식의 목을 조르고 자신은 천장에 목을 매 자살한 여자. 여자는 그대로 목숨을 잃었지만 아이는 살아났다.

천장에 걸린 엄마의 시체와 함께, 원룸에서 냉장고 안에 있는 약간의 음식과 수돗물을 마시며 열흘을 버틴 아이는 뼈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앙상했고 숨소리마저 미약했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대원들은 쓰러져 있는 아이조차 시체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는 곧 깨어났다.

태운은 곧 병원으로 옮겨졌다. 모친이 왜 자살을 택했는지, 평소 다른 학대는 없었는지. 조금의 정보라도 알아내기 위하여 경찰과 의사, 아동 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은 태운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태운은 난생처음 보는 낯선 어른들 속에 둘러싸여서 잘못을 추궁받는 것 같은 상황이 두렵기만 해서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후에야 태운은 엄마가 자신을 학대했다는 것도, 엄마는 자살할 때 자기까지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말로 엄마와의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서……. 기억나는 것들은 그때 듣게 된 어른들의 대화뿐이었다.

연락이야 바로 닿은 듯했지만, 아빠가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은 일주일이 넘었을 때였다. 난생처음 본 남자는 한참을 자신을 내려다보더니 이제 아빠와 같이 살자고 했었다. 하지만 태운에게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목소리가 다정하지도 않았고, 태운을 반갑게 안아 들지도 않았다. 목소리에서는 짜증이 느껴졌다.

선생님은 아빠와 자신이 닮았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아빠가 맞는지도 태운은 알 수 없었다. 가기 싫었다. 가고 싶지 않아서 병원에서 내내 자신을 보살펴 주셨던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저었지만, 태운의 의사는 전혀 상관없었다.

태운은 아정을 처음 만났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가 살고 있던 집에 갔던 날, 태운은 무섭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라는 남자를 따라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가자 자신을 발견한 아정의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면서 우셨다.

훗날 어머님은 태운이 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아서 도무지 믿지 않으려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너무나 절망스럽게 말씀하셨다. 태운은 그때 아버지가 정말로 자신과 닮았다고 깨달았다. 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정의 어머니와 목소리를 높여 다투던 아버지는 짜증스럽게 쾅 하고 문을 닫고 집 밖으로 나가셨다. 태운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낯선 공간에 남겨졌다. 다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서 무의식중에 어두운 방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자신이 사라진다면 싸움도 없어질 것 같았다.

아버지도 선생님도 앞으로는 자신이 이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너무 무서웠다. 귀를 막아도 흐느껴 우는 여자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태운도 숨을 죽이고 울었다.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허공에서 흔들리던 엄마의 다리가 보였다. 꺼이꺼이 우는 울음소리가 꼭 엄마의 울음소리 같았다. 언젠가 엄마도 저렇게 울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태운은 죽음을 모르는 나이였지만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엄마가 보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오빠 울어?”

태운은 귀에 들리는 어린아이 목소리와 함께 자신을 가리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갈래머리를 한 천사처럼 예쁜 여자애가 서 있었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집에 가면 자신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 있다고 했다. 그 아이인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아이의 엄마가 아빠와 싸우고, 엄마는 울고 있으니 당연히 자신을 미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미움이 없어서 태운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아이가 계속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울지 마, 오빠.”

고개를 든 태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그 울음 섞인 눈과 눈이 마주치자 아정은 다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손안에 소중하게 움켜쥐고 금방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태운의 눈앞에서 손바닥을 쫙 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에 둘러싸인 막대 사탕이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아정은 그것을 태운에게 내밀었다.

의미를 알 수 없어 태운이 그것을 받지 않고 가만히 보기만 하자 아정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한참의 사투 끝에 사탕 껍질을 벗겨 다시 태운에게 건넸다. 태운은 얼결에 그 사탕을 받아 들었다.

“먹고 울지 마.”

그렇게 말하는 아정의 목소리는 사탕만큼이나 달콤했다. 그래서 태운은 사탕을 입안에 넣었다. 그때 그 사탕에서 나던 달콤한 냄새를 태운은 평생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입에 넣은 사탕은 너무 달아서 다시 눈물이 났다.

태운은 울면서 그 사탕을 먹었다. 아정은 그런 태운의 어깨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두드렸다. 태운은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로도 가끔 아정을 볼 때면 그때 그 달콤한 냄새가 떠올랐다.

“내 이름은 아정인데 오빠 이름은 뭐야?”

이아정. 얼굴만큼이나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이름을 말해 주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태운은 아정의 손바닥 위로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다행히 한글을 알고 있었는지 아정이 “태운? 오빠 이름이 태운이야?” 하고 다시 물어 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정의 어머니는 모진 분은 아니셨다. 태운에게도 아정과 같은 식사를 차려 주고, 최소한 태운이 집에서 지낼 수 있게 옷이나 생활용품 같은 것들을 준비해 주셨다. 하지만 태운을 정면으로 보시지는 않으셨다. 태운은 그때마다 어머님이 자신을 처음 봤을 때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정말로 꼭 닮았구나. ……소름 끼칠 정도야.’

태운은 집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았다. 태운이 아정의 집에 처음 온 날 이후 아버지와 아정의 어머니는 매일매일 큰 소리로 싸우셨다. 두 분이 싸우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태운은 도무지 모를 수가 없었다. 다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태운은 아정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실 때마다 방 안에 숨을 죽이고 숨었다.

그럼 아정이 꼭 방 안으로 들어와 태운의 손에 작은 사탕이나 과자, 인형 같은 자신의 장난감을 나눠 주곤 했다. 그래도 태운이 괜찮아지지 않으면 작은 손으로 태운의 어깨를 도닥여 줬다. 태운 때문에 엄마와 아빠가 매일 밤 싸우는데도 아정은 오히려 태운을 위로했다. 어릴 때부터 아정은 그렇게 착하고 다정했다.

아버지는 태운을 집에 데려다 두기만 했을 뿐 그대로 방치했고, 아정의 어머니도 태운에게 살갑지는 않으셨다. 반쯤 존재감이 지워진 것처럼 태운은 하루하루 집 안에서 부유했다. 유일하게 그를 살갑게 대하며 잘 따랐던 것은 아정뿐이었다.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이 또 다른 트라우마가 되어서 태운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입을 열면 또 낯선 어른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무섭게 추궁할 것 같았다. 그래서 태운은 입을 다물고 목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태운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집 안에서 아정이 유일했다.

“오빠는 인어 왕자님이야?”

어느 날인가 한참을 골똘하게 고민하던 아정이 태운에게 물었다. 태운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아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빠도 마녀한테 소원을 빌고 목소리를 준 거야?”

아정의 엉뚱한 질문이 귀여워서 태운은 조금 웃었다. 처음 보는 태운의 미소에 아정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나도 마녀를 만나면 오빠가 맨날맨날 웃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래. 마녀에게 제제도 줄 수 있어.”

아정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제제라고 이름을 붙인 인형을 들고 말했다.

“그러지 마.”

태운은 그때 집에 와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녀가 있다면 정말로 자신의 목소리를 가져가도 좋으니 아정이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섭던 그때, 아정이 아니었다면 태운은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었다. 아마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거나, 어쩌면 살아 있지 못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살게 한 사람은 아정이었다.

아버지와 아정의 어머님의 끝나지 않는 지난한 다툼은 몇 년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아버지는 점점 더 폭력적으로까지 변했다. 집기들을 집어 던졌고 주먹이나 발로 벽을 쾅쾅 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태운은 덜덜 떠는 아정을 감싸 안고 버텼다. 결국 아정의 어머니는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셨고, 아버지마저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뜸해지셨다.

아버지는 한번 오실 때마다 꽤 큰돈을 남겨 두고 가셨다. 태운은 그 돈으로 아정과 둘이 살았다. 더 이상 두 분이 싸우는 것을 보게 되지 않아 마음이 편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정에게 미안해서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태운의 기색에 아정은 오히려 그게 왜 오빠 탓이냐고, 잘못은 엄마 아빠가 했고, 두 분은 오빠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정은 어머니를 좋아했지만, 태운을 향한 어머니의 일방적인 무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오빠 아니었으면 난 지금 혼자 남겨졌겠지. ……고마워, 오빠. 고마워. 지금 오빠가 있어 줘서 다행이야.”

태운은 아정의 그 말에 평생을 버텼다. 자신이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아정 한 명만큼은 정말로 잘살게 해 주고 싶었다. 점점 아버지가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고, 남겨 놓고 가던 생활비마저 떨어져 자신이 생활비를 벌어야 했을 때도, 태운은 아정에게만큼은 정말 모자란 것 없이 전부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태운의 바람처럼 아정은 밝고 건강하게 자라났다. 하지만 태운은 아마도 평생 아정의 가정을 망가뜨렸다는 죄책감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태운은 가끔 아정이 자신이 아닌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예쁘고 다정하게 자라났을까 상상하곤 했다

“오빠 우산 있어? 데리러 갈까?”

“아냐. 나 우산 있어. 집이야?”

“응응. 빨리 와. 번개 치니까 무섭다.”

“알았어.”

“몇 시쯤 와?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게.”

언젠가 아정과 나눴던 아주 평범한 날의 대화가 환상처럼 머릿속에 흘러들어 왔다. 번개가 무서워 비가 오는 날을 싫어하는 녀석이 십 분을 걸어야 하는 버스 정거장까지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그게 싫어서 그냥 비를 맞고 뛰어 올라가자 눈을 흘기면서도 수건을 가져다주던 아정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정은 한 번도 태운을 원망하지 않았다. 태운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다. 한없이 철없는 동생으로 굴다가, 때로는 누나처럼 태운을 챙기기도 했다. 의지가 되었고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태운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어릴 때처럼 사탕이나 인형을 안겨 주지는 않았지만, 더 밝게 웃고 장난을 치며 태운의 곁을 맴돌았다.

태운은 자신이 아정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빼앗아 버린 것 같아서 항상 미안했다. 그래서 자신이 빼앗아 버린 몫들까지 정말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태운은 동생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동안 한 번도 동생을 지켜 주지 못했다.

태운은 겨우 병원의 외관만이 흐릿하게 보이는 도로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 앉아 병원의 커다란 건물을 올려다봤다. 아정은 저 건물 안 어딘가에 누워 있었다. 그렇지만 태운은 차마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면 정말 하루하루를 힘겹게 넘기고 있는 아정이 부서져 버리고 말 것 같았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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