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짓눌린 잠
머리가 징징 울려 걸을 힘도 없는 태운을 호텔까지 픽업하러 온 매니저는 태운의 연락 두절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런 것으로 짐작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목이 따갑고 여전히 머리가 울렸다. 자신은 용서를 받지 못한 것 같았다. 눈을 감은 태운은 생각했다. 남자는 허가를 말하지 않았고, 반쯤 패닉 상태에 빠진 자신에게 정신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으라고만 말했다.
그때 절대 정신을 놓으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하지만 공황은 갑자기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찾아왔다. 아무리 태운이 스스로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해도 일단 막연한 공포가 가슴을 좀먹기 시작하면 일시적으로 호흡이 불가능해졌다.
다행히 태운의 발작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매니저였다. 매니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본인의 이름으로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를 타다 주었다. 태운은 약을 먹는 것으로 불안을 잠재워야 했다. 그나마도 요즘은 잘 듣지 않았지만. 아마 죽지 않는 이상 이러고 살아야겠지. 태운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정말 그 첫날밤처럼 자신이 발밑에 꿇어앉아 제발 자신을 범해 달라고 빌기를 바라는 것일까. 하지만 그날 밤 남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끔찍하게 내려다보았던 것을 생각해 내고는 태운은 고개를 저었다.
매니저에 의해 응급실에 끌려가 링거를 맞으며 잠시 눈을 붙이고 촬영장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약에 취해 한숨 자고 일어나자 몸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다행히 목소리도 돌아왔다. 하지만 언제 목소리가 다시 변할지 몰라 계속 물로 목을 축여야만 했다.
서초에 있는 재계 그룹 본사 건물의 로비와, 통유리로 되어 풍경이 제법인 라운지를 빌려 쓰고 있었는데 평일에는 촬영 허가가 나지 않아 주말에는 거의 이곳에 붙어 촬영을 하다시피 했다.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쯤 매니저는 드라마 연장 논의는 없던 일이 되었다고 흘리듯이 말했다. 태운은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고, 그를 발견한 스태프들은 모두 몸이 많이 안 좋냐 하고 물어 왔다.
촬영 시간에 임박해 도착한 것이기 때문에 촬영장은 한참 준비로 부산스러웠다. 밖에는 비가 계속해서 내렸고 장소 대관 시간이 임박해 결국 실내 촬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태운은 무던한 성격이었다. 사교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성격이라 스태프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고, 장난을 치는 편은 아니었지만, 촬영장의 모든 환경을 내게 맞추라는 톱스타 특유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편도 아니었고 스태프라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기에 촬영장에서 꽤나 인기가 좋았다.
게다가 드라마 촬영 외의 다른 스케줄이 있으면 촬영 스케줄이 잡히기 전에 미리 조정을 하는 편이었지, 이런 식으로 당일에 촬영을 미룬 것은 처음이었기에 주연 여배우가 촬영장을 이탈했을 때처럼 한편에서 잠들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불만에 가득한 표정들은 아니었다.
태운에게 다가오는 걱정들을 매니저가 대신 유연하게 받아 넘겨주었고 태운은 빠른 걸음으로 대기실로 향했다. 매니저는 스태프의 부름에 대기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운은 아무도 없는 대기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의자 위로 무너졌다.
“대본 받아 왔어.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대본 같네.”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 온 매니저가 비꼬듯 웃으며 대본을 건넸다. A4 용지가 아닌 정말로 번듯한 대본이었다. 매니저가 들어오자 태운은 반듯하게 몸을 일으켰다. 매니저가 벽에 붙어 있는 온도 조절계로 실내 온도를 좀 높였다.
“죽이라도 먹어야 촬영하지. 주환이 근처에 다 왔다는데 사서 들어오라 할게.”
“별로 먹고 싶지 않습니다. 그보다 형. 약 다 먹었어요.”
“이태운 너 진짜…….”
무슨 말을 하려던 매니저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한숨을 후 하고 내쉬었다. 둘뿐이어서 조용한 대기실 안에 그 한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약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태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해 받은 대본의 장을 넘겼다. 열이 내리기는 했지만 잔열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머리가 울려 대본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태운은 고집스럽게 대본에 집중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태운을 보며 매니저가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른 스태프들이 대기실을 찾기 전까지 대기실에는 긴 침묵만이 계속 이어졌다.
태운의 연기력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론가는 그의 연기가 밝은 감정에만 치중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어떤 평론가는 그것이 지나치게 뛰어난 외모를 가진 이태운이라는 배우의 한계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또 다른 평론가는 좋은 가정에서 훌륭한 가정 교육을 받고 자라났음이 분명한 태운은 어두운 감정을 알지 못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면을 연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태운은 그 칼럼을 보고 드물게 웃었었지만 사실 평론가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 상상하는 태운도 거기서 많이 다르지 않았다. 좋은 집안에서 반듯하게 자란 재벌 2세. 그것이 태운이 데뷔 후 줄곧 맡아 온 배역들의 이미지였고 거기에 덧씌워진 이태운이란 배우 자체의 이미지였다.
그들은 모두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사랑을 했다. 그리고 태운은 그들을 완벽하게 연기해 냈다. 하지만 밝은 연기만 한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운이 연기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태운은 연기를 하면서 마치 그 배역들이 가진 환경이 제 삶인 것 같은 만족을 느꼈고, 거기에 동화되었다.
물론 연기가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모르지는 않았지만, 연기를 할 때만큼은 자신이 밝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스타일리스트가 가져온 슈트를 입고 메이크업을 마치자 태운은 스태프들마저 돌아보게 만들 만큼 태가 났다. 원래도 피부가 희고 깨끗한 편이라 메이크업을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이 차이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윤곽을 뚜렷하게 정리하고 속눈썹을 매만지자 현실 속 사람 같은 느낌이 없었다.
실제 카메라 앞 배우들의 메이크업은 TV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진하고 음영을 뚜렷하게 그리기에 잘못하면 경극 화장을 한 것 같은 배우들도 있었는데, 태운은 그것마저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것은 동종업계 종사자들에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은근히 던져지는 배우들의 추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스태프들이 단체로 사인을 해 달라고 촬영을 앞둔 태운을 둘러싸, 감독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는 이딴 식으로 일할 거면 다들 집으로 꺼지라며 할 말 못 할 말 다 한 적도 있었다.
“다음 영화도 TW 픽처스에서 투자 들어가기로 했다네.”
죽을 떠 입안으로 가져가고 있는 태운에게 매니저가 살짝 말을 꺼냈다. 그 말에 태운은 들고 있던 플라스틱 숟가락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남자에게 용서를 받은 것 같았다.
“왜 그래. 더 못 먹겠어?”
태운은 말도 못하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TW 픽처스라는 것 자체가 남자가 태운의 활동에 투자하기 위해 차명으로 설립한 투자 회사였다. 태운도 소속사 사장에게 들어 알게 된 내용이었다. 괜한 의심과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 태운의 활동 외에도 연예계 전반에 투자하고 있었는데 한 번에 많은 투자금을 지불하는 것치고는 제작에 관한 간섭이 거의 없기로 유명했다. 그곳에서 손댄 작품 대부분이 소위 대박이 나서 안목이 높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태운이 캐스팅된 모든 영화에 투자하며 태운이 스크린 흥행 신화를 쓰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제작비가 모자라 처음보다 규모가 줄고 찍던 영화도 엎어지는 판에 제작비 걱정 없이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축복이었고 좋은 영화가 나오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곳에서 투자금 지원이 된다면 아마 자신은 용서를 받은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는 용서를 말하지 않았다.
“더 안 좋아진 거야?”
“아니, 아닙니다. 그냥 조금…….”
“끼니를 자꾸 거르니 그렇지. 밥 좀 제대로 챙겨 먹어. 주환아, 나가서 소화제 좀 사 와.”
새로 로드 매니저로 들어온 주환이 “네.” 하고 태운이 말릴 새도 없이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너 이대로 촬영은 할 수 있겠어?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을 텐데, 정 안 좋으면 일단 감독이랑 이야기는 해 볼게.”
“아닙니다. 그냥 좀 어지러워서, 지금은 괜찮습니다.”
태운이 고개를 털어 냈다. 매니저가 혀를 쯧 하고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태운은 살이 너무 많이 빠진 상태였다. 원래 촬영이 들어가면 살이 빠지는 편이기는 했지만, 요즘은 안 그래도 살집 없이 길쭉하기만 한 몸이 더 말라 밀랍 인형이 휘청휘청하고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거기에 얼굴 살까지 내려 버려 안 그래도 날카롭던 턱과, 멀리서도 보이는 우뚝 솟은 코가 더 두드러져 메이크업을 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조차도 태운의 얼굴에서 눈을 못 뗐다. 스타일리스트들은 옷이 더 태가 난다고 기꺼워하는 모양이었지만 패션쇼에 설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살이 빠지자 걱정이 먼저 되는 매니저였다.
“결정은 오늘 난 겁니까?”
“결정?”
“TW 픽처스 말입니다.”
평소 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것이 확실한 일들임에도 전혀라고 할 만큼 제작사도 투자자도 상관 않던 태운의 물음에 매니저는 조금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논의는 전부터 있었겠지만 확정은 오늘 난 거겠지. 대본 받으러 내려가면서 통화하다가 들은 거니까.”
태운은 입술을 깨물려다 메이크업이 완료된 상태임을 깨닫고 그만뒀다. 용서를 받은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차라리 남자에게 멋대로 몸이 휘둘려지는 것은 그나마 참을 수 있었다. 아니 참기보다는 견뎌 내야 하는 거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남자의 발치에 꿇어앉아 제 입으로 제 속을 드러내며 다시 깨어지고 부서져야 한다면 태운은 자신이 그때도 견딜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미친 듯이 담배가 당겼다. 담배를 즐겨 피우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 가다 이렇게 미친 듯이 담배 생각이 간절해질 때가 있었다. 대부분 남자와의 정사 후에 남자의 장소에서 빠져나올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때만큼이나 미친 듯이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형, 담배 좀…….”
갈구하는 듯한 태운의 목소리에 매니저가 주머니를 뒤져 태운의 입에 담배를 물려 주고 불을 붙여 주었다. 얇은 입술에 담배가 물리자 얼굴이 퇴폐적으로 그늘졌다. 연기를 빨아들이느라 숨을 마시자 움푹하게 파이는 보조개가 두드러졌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매니저도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예쁘다고 감탄하는 얼굴이었다. 누구든 다시 한번 돌아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담배 연기가 곧 대기실 안으로 가득 찼다. 담배 연기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올 때마다 태운은 조금씩 흐려졌다.
* * *
태운은 얼굴이 절로 일그러지는 것을 억지로 막았다. 왠지 익숙한 이름이라고 했더니,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 같은 소속사에서 오 년을 넘게 활동을 하면서도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는데 실제로 만나게 되자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새로 들어갈 영화의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고 감독과 출연이 확정된 주요 배우들이 모여 미리 얼굴이나 익힐 겸 술이나 한잔하자는 가벼운 자리였다.
원래 내정됐던 배우는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내정자는 몇 년 전에 찍었던 드라마가 일본과 중국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되면서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게 되자, 해외 진출을 앞두고 영화와 저울질하다가 촬영을 겨우 한 달 앞두고 하차를 알렸다.
그 후, 촬영 이 주를 앞두고 가까스로 새 배우가 캐스팅되었다는 소리는 흘리듯이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감독이 원래 이런 쪽으로는 깨끗하고 철저한 사람이었기에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어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이름을 들은 것도 같은데 태운이 한껏 불안정할 때라 스스로 추스르기도 바빠서 그냥 듣고 흘렸다.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온 것이다.
“태운 씨 어서 와.”
“안녕하셨습니까.”
친근하게 손을 내밀어 오는 감독에게 태운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마주 잡은 손이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감독이 사람 좋게 웃으며 태운을 맞았다. 태운이 허리를 꾸벅하고 숙여 인사하자 감독이 고개를 숙여 맞인사를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해외 유수의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커리어에 맞지 않게, 감독은 나이도 젊고, 괴팍한 성격도 아니었다.
“둘은 소속사가 같다고 했으니까 내가 따로 인사 안 시켜도 되겠지? 이렇게 놓고 보니까 둘 다 훤칠하네. 앞으로 눈이 즐겁겠어.”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굳이 사람들 앞에서 밝힐 필요가 없어 태운이 먼저 날카로운 인상의 배우를 향해 목 인사를 했다. 태운도 워낙에 섬세한 생김새 덕분에 평소 무표정으로 있을 때는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인데, 태운의 인사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고 마는 배우는 유독 더 날을 세운 생김새였다.
공중에서 둘의 눈이 부딪쳤지만, 그는 태운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고, 태운도 더 마주할 자신이 없어 저를 이끄는 감독에게 그대로 끌려갔다.
태운은 드라마 촬영을 마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왔지만, 그럼에도 약속 시간보다 늦어 태운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미 서로 먼저 인사를 나누고 한 잔씩들 한 상황이었다. 감독은 그런 이들을 따로 태운에게 인사시켰다.
태운도 낯을 가리기는 했지만 무례한 성품은 아니었기에 감독이 인사를 시켜 주는 대로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나눴다. 룸 안에 있는 모든 스태프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태운이 앉혀진 자리는 감독의 옆자리이자 그 배우의 맞은편이었다.
어느 순간 문가에 선 매니저가 더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 것이 태운의 눈에 들어왔다. 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몸이 느껴졌다. 나가서 잠깐 술이라도 깨고 올 생각이었다.
태운은 원래 이렇게 술을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애초에 몇 번 거절하면 끝까지 권하는 사람도 없었고, 있다 해도 중간에서 차단이 되는 편이었다. 원래 술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고 업계 사람들이 다 주량이 어마어마해서 대작을 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을 알아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미 태운이 오기 전부터 술잔을 돌리고 태운의 잔을 채워 주면서 저는 병째 들이켜던 감독은 전혀 취한 눈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태운을 제외한 룸 안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태운의 맞은편에 앉은 배우 또한.
태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그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태운에게는 곤욕이었다.
태운의 소속사 사장은 판이 큰 포주였고 성 접대 브로커였다. 연예인을 데리고 포주 노릇을 하니 절로 부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얻게 된 부로 다시 연예인을 사고 키워 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데리고 포주 노릇을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소속사 사장이라는 명함이 꽂혔다.
스물둘의 태운은 급하게 큰돈이 필요했고, 그런 인간에게 제 가치를 팔았다. 계약금을 받았음에도 몸을 굽히지 못하는 태운에게 사장은 낄낄 웃으며 네가 선택한 게 무엇인지 알려 주겠다며 태운을 억지로 앉히고 강제로 동영상을 보게 했다.
소속사 사장은 태운이 차마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으면 뺨을 내리치며, 저렇게 구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정신 차리고 행동하라며 윽박질렀다.
맞은편에 앉은 그는 그렇게 태운이 강제로 시청한 여러 동영상 중 하나의 주연 배우였다. 협박용으로 찍게 한 동영상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레이프 동영상이었다. 그는 본보기였다고 했다. 스폰서를 끌어안고 소속사를 옮기려고 했다던가 하는 이유였다. 사장이 낄낄거리며 무슨 말을 했었는데 사실 공황 상태에 가까웠던 태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화간으로 시작했던 동영상은 강간이 되고 윤간이 되었다. 재생 시간이 흘러갈수록 동영상 속 배우는 처참해졌고 비참하게 일그러져 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정신을 놓고 인형처럼 흔들리기만 했다. 태운은 그 모습에서 몇 번이나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무슨 술을 그렇게 먹어?”
태운이 룸을 빠져나오자 매니저가 뚜껑을 연 생수를 건넸다. 태운이 그 물을 벌컥벌컥 한 번에 들이켰다. 그래도 목이 타는 느낌이었다. 태운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술 깨는 약이라도 사다 줄까?”
태운이 다시 고개를 저으며 비상구로 향했다. 찬 바람을 쐬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룸 안의 어두운 조명에서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밝은 밖으로 나오자 얼굴이 희게 질린 것이 보였다. 매니저는 그저 술이 취한 상태라고 여기는 듯했지만, 태운은 몸에 피가 돌지 않아 손끝이 저릿한 것이 느껴졌다.
밖으로 나와 마주한 새벽에 가까운 바람은 차가웠다. 겨우 주차장 한편에서 맞는 바람이었지만 태운은 그 바람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태운은 거절했지만 매니저는 아침부터 촬영이 있는데 고생할 것이 뻔하다며 숙취 해소 음료를 사러 태운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모서리에 세워 놓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태운은 담배가 당겼지만 이미 멀어져 버린 매니저를 붙잡을 수도 없어 그냥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숨을 들이마셨다.
태운은 비록 상대는 느끼지 못했을지라도 제 행동이 무례했다는 걸 알았다. 워낙 더러운 바닥이었고 저조차도 깨끗하지 않으면서 이러는 것도 웃기지만, 남자에게서 버려지고 나면 자신이 겪게 될 미래 같아 태운은 그 배우가 불편했다.
“담배 줘?”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태운이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지금 태운에게 가장 불편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입에는 이미 담배가 물려 있었는데, 그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를 맡자 태운은 담배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태운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상대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뱃갑을 꺼낸 후 태운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태운이 거절하지 못하고 입 앞에 놓인 담배를 물자 남자는 칙 하고 불까지 붙여 주었다.
“내 소개도 해야 하는 거냐?”
“아닙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태운입니다.”
태운이 불이 붙은 담배를 손에 쥐며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상대 배우가 의외라는 듯이 웃었다. 이태운급 되는 배우라면 선배는 물론이고 저보다 나이가 곱절은 많은 감독도 턱 끝으로 부리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그래도 꾸벅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니 제법 영악한 편이라고 찬혁은 생각했다.
사방에서 자신을 떠받들어 주면 정말 자신이 뭐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라 중심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찬혁은 태운의 깍듯한 인사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내가 참 비싼 인사 받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혁은 비꼬듯이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태운은 타들어 가는 담배 끝을 보며 처음과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는 따로 인사를 드릴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태운이 깍듯하게 사과했다. 사실 이렇게 마주한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러면 정말 자신이 그를 피한다고 느껴질 것 같아서 피가 돌지 않아 저릿한 손끝을 느끼며 그저 견디는 중이었다.
“파워. 피우라고 준 건데 왜 보고만 있어.”
찬혁의 말에 그제야 태운이 타들어 가는 담배를 입에 물고 길게 숨을 빨아 들였다. 태운은 담배 연기가 속을 채우자 조금 진정이 되는 것도 같았다.
그런 태운을 보며 찬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찬혁은 태운에게 이전부터 제법 흥미가 있어 왔다. 아니 태운에게 흥미를 가진 사람은 찬혁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소속사의 배우들은 대부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동질감이든지 아니면 혐오감이든지, 아무튼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했다.
접대 자리나 술자리에 우르르 한 번에 모두가 불려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어도 둘씩 셋씩 같은 자리에 불려 다니는 것은 빈번한 일이었다. 그런 자리들이 몇 년씩 반복되다 보면 모두들 한두 번씩은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중에 태운을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완전히 뜬 후에는 몰라도 뜨기 전에는 스폰서를 잡기 위해서라도 최소 한두 번쯤은 불려 다니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도 그랬다.
그것을 용납지 않는 대단한 스폰서를 잡고 있으면 그 또한 소문이 나는 바닥인데, 이상하게 그쪽으로는 어떠한 소문도 없었다. 소속사에 들어오기 전에도 이렇다 할 소문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런 쪽으로 소문이 빠른 녀석 중 하나가 아무리 파도 건진 것이 없으니 이쪽으로는 완전히 깨끗하다는 말인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태운이 회사에서 받는 지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말 흘리기 좋아하는 간악한 사장도 입을 다물고 있는 상태여서 다들 이태운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찬혁은 제 앞가림하는 것이 바빠 잊어버리고 있었던 흥밋거리였지만, 신인도 아닌 주제에 술자리에 들어와 감독에게 어깨가 안긴 채 여기저기 인사하고, 감독이 주는 술을 거절하지 않고 마시는 요령 없는 태운을 보자 다시 흥미가 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한편 태운은 찬혁과 마주 보고 서있는 것이 곤욕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영상 속에서 정신을 놓고 여러 남자들에게 윤간당하며 인형처럼 흔들리던 찬혁과 남자 밑에 깔려 울부짖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러다 문득 자신은 그 지경까지 내몰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가면 태운은 자기 혐오감에 구역질까지 드는 것이었다.
“야, 괜찮냐?”
안 그래도 창백한 태운이 안색이 파랗게 질리고 구역질까지 시작하자 찬혁은 등이라도 두드려 주려는 듯 태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태운이 먼저 손을 내저어 찬혁을 거부하는 것이 빨랐다.
“괜찮, 괜찮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 마시니 탈이 나지.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닐 거면서 미련하게 그걸 왜 다 처마셔.”
거절을 무시하고 태운의 뒤로 간 찬혁은 퍽퍽 하고 등을 내리쳐 주었다. 애초에 토기가 올라온다기보다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이라 등을 두드린다고 속에서 무엇이 밀려나오진 않았다. 그래도 태운은 속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편해지는 속과는 별개로 태운은 찬혁의 앞에서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찬혁이 다시 마주하지 않을 사람이라면 즉시 이 자리에서 도망치듯 뛰어 사라졌을 것이다. 태운은 정말로 찬혁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피하고 싶은 자신의 현실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태운은 자신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찬혁의 손을 피해 허리를 단단히 세웠다.
“대체 짬밥을 어디로 처먹은 거냐?”
찬혁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하룻밤 만에 깜짝 스타가 된 인간들도 본인이 뭐라도 된 것처럼 스타 병에 걸려 정신을 못 차리고 미쳐 날뛰는 바닥인데, 발을 막들인 생초짜 신인도 아니면서 이런 어수룩함이라니. 그동안 개소리로 치부되었던 사장조차 함부로 못하는 재벌이나 국회 의원의 사생아라느니 차남이라느니 하는 소리가 영 뜬소문도 아닌 모양이었다.
경황 중에 바닥에 떨어진 담뱃불을 신발로 눌러 끄며, 찬혁이 다시 한 개비를 꺼내 제 입에 물고 담뱃갑을 태운에게 넘기자 태운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태운도 구역질을 하면서 자신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린 후였다.
다시 태운이 담배를 꺼내 물자 찬혁이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제 입에 물린 담배 끝을 질겅질겅 씹었다.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술에 취해 얼굴이 하얗게 질려 구역질까지 하는 상대에게까지 물을 정도로 궁금한 것은 아니라 찬혁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새벽을 머금은 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찬혁 씨?”
편의점 봉투를 한 손에 들고 오던 매니저가 태운과 마주 서 있는 찬혁을 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같은 소속사라고는 하지만, 찬혁은 근 몇 년간 활동이 없어서 매니저 또한 찬혁과 안면이 거의 없었다.
평소 사람과 친근하게 지내지 않는 태운이 누군가와 이렇게 마주 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것은 의외인 상황이라 태운에게 무슨 일이냐는 듯이 눈짓했지만,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태운은 그저 담배 연기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좀 마셔. 찬혁 씨도 좀 드세요.”
매니저가 편의점 봉투에서 술 깨는 음료를 꺼내 하나는 태운에게 내밀고 다른 하나는 찬혁에게 내밀었다. 태운은 음료를 받아 들어 쥐고 있을 뿐이었고, 전혀 취하지 않은 것 같은 찬혁은 물고 있던 담배를 회색 기둥에다가 눌러 끈 다음에 바닥에 꽁초를 던지고 음료 뚜껑을 따 한 번에 들이켰다.
매니저가 합류했지만 셋 사이에 별로 나눌 대화는 없었다. 그 침묵이 지루했는지 찬혁은 말없이 손을 흔들며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등장만큼이나 뜬금없는 퇴장이었다. 찬혁의 그림자도 사라졌을 때쯤 매니저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강찬혁이랑 원래 아는 사이야?”
“……아닙니다. 오늘 처음 봤어요.”
“뭐 네가 어린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하겠지만 혹시 사석에서 둘이 따로 만날 일 생기면 나한테 먼저 연락해 줘.”
매니저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태운도 묻지 않았다. 태운의 담배가 끝까지 타들어 가자 매니저가 말했다.
“밑에는 끝날 기미도 안보이니 내려가서 인사하고 근처에 숙소 잡고 눈이나 좀 붙이자. 한 시간이라도 좀 자야지. 그러려면 집까지 갈 시간도 없다.”
매니저의 말에 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장은 완전히 없었던 일이 되었고 이제 2회분의 방송만이 남은 드라마는 새벽부터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이 네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으니 씻고 움직이기만 해도 넉넉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태운이 촬영 때문에 이만 가 보겠노라 고하자 아쉬움의 함성이 룸 안에서 터져 나왔다. 태운이 바람을 쐬러 룸을 나섰을 때보다 더 진해진 취기가 그 안에 넘실거렸다.
다들 술기운에 태운이 룸을 빠져나갔다 들어왔다는 것도 몰랐던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시고 죽자 판에서 중도 이탈자가 나온다고 하니 다 마시고 가라며 널린 술을 온통 섞어 태운에게 내밀다가 감독에게 저지를 당하기도 했다.
찬혁은 아까와 똑같은 자리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다시 태운과 눈을 마주쳤는데, 가라는 듯 획획 손을 흔들고는 이제 관심을 다했다는 듯이 다시 테이블에 코를 박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태운 씨 촬영 중이란 거 알았는데 일정 짜다 보니 오늘밖에 모일 시간이 나지 않아서 날을 이렇게 잡았어.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이렇게 가서 어떡해.”
배웅을 하겠다며 따라 나온 감독은 대단한 주당이었는지, 잔에도 따르지 않고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취한 기색이 아니었다. 평소에 전혀 술을 입에 대지 않는 태운치고는 많이 마신 편이었지만, 감독은 성에 안 차는지 나중에 술 한번 거하게 사 줄게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한국 영화계의 최고 거장이라고 불리면서도 소속사로 대본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태운의 촬영 현장에까지 직접 찾아와, 대본을 주며 한 번만 봐 달라 말했던 감독다운 호탕함이었다.
“가 보겠습니다.”
“내가 나중에 진짜 제대로 살게. 드라마 마무리 잘하고. 다치지 말고. 아무 문제 없이 다시 이대로만 보자고.”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는 태운의 뒤로 곧 봅시다 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남자와의 섹스를 위해서는 준비할 것이 많았다. 그리고 모두 태운이 견디기에는 고통스러운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태운의 보기 좋은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태운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기 싫어 눈을 감았다. 이대로 녹아서 물이 되어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오 년을 했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행위였다. 몇 번을 반복해도 뒤로 남자를 받기 위하여 준비하다 보면 참을 수 없이 치욕스러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남자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랬다.
십 분 정도 치욕스러운 순간을 견디고 난 후 태운은 불편한 몸을 질질 끌고 변기에 앉았다. 태운의 눈꼬리에는 생리적인 현상으로 길게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그 순간, 태운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이 행위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수치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살갗이 벗겨질 듯이 태운은 씻었다. 씻어도, 씻어도 역겨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살갗이 붉게 피어올랐지만, 태운은 다시 한 번 몸을 씻어 내었다.
물기를 털어내고 알몸에 샤워 가운만 걸친 채로 욕실 밖으로 나서면 그것은 그것대로 고역이었다. 태운은 보통 남자와의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장소에 도착해 준비를 마치고는 했는데, 샤워를 끝내고 나오면 그때부터 남자가 룸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대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을 때울 요령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태운은 그저 묵묵히 서서 시간을 견딜 뿐이었다. 먹은 것이 없는 속이 더부룩하게 뭉쳤다. 오늘은 신경 안정제조차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다. 받아다 준다 말했던 매니저 또한 정신이 없어 병원에 다녀오지 못한 탓이었다.
이 긴장감을 견디어 내는 것이 태운에게는 너무 벅찼다. 제가 서 있는 곳이 온통 어둠으로 물든 기분이었다. 덜덜덜 떨리는 두 손끝을 서로 마주 잡았다.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내쉬고 또 들이마셨다.
지금까지는 그런 적이 없었지만 혹시라도 남자 앞에서 공황 증세가 일어날까 걱정이 들었다. 공황 발작까지 일어나는 자신의 몸을 남자가 지금까지처럼 이용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연예계는 하루에도 몇 명의 스타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곳이었다. 남자는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그들 중 누구라도 자신의 밑에 무릎을 꿇릴 수 있는 위치라는 말이기도 했다.
사실 태운은 남자가 자신에게 왜 이런 비용을 지불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라면 더 예쁘고 나긋한 누구라도 무릎 꿇릴 수 있었을 텐데, 결코 제게 그들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이대로 창밖으로 몸을 던질 것이 아닌 이상 아무리 힘들고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어도 남자의 소유로 있는 쪽이 나았다. 남자는 자신을 자주 찾지 않았고, 그에 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여 주었다. 태운은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문득 얼마 전 술자리에서 스치듯이 만났던 찬혁을 생각하자 더 그랬다. 그에 비하면 아직 자신은 최악을 겪지 않은 것이 맞았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올라왔다.
의식적으로 숨을 내뱉었다 들이마시고 있는데 남자가 들어오는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태운은 눈을 다시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남자는 빈틈없이 단단한 복장 그대로였다. 태운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태운보다 반 뼘 정도 키가 더 큰 남자는 위압적이었다.
태운은 순간적으로 다시 숨이 멎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태운은 정중할 정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남자는 그런 태운을 그냥 지나쳤다. 아프도록 혀를 깨문 태운은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신경 안정제 생각이 간절했다. 그것을 먹으면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조금 진정이 될 것도 같았다.
사실 신경 안정제를 한 움큼 입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손에 쥔 것이 없으니 그래도 있었다면 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에 대한 갈망이 더욱 간절하게 치솟는 것이었다.
입고 있는 샤워 가운을 벗어 내는 태운의 손이 덜덜하고 떨렸다. 정말로 이런 건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샤워 가운을 벗어 방 안에 위치한 화장실에 걸어 놓은 다음 태운은 침대 옆쪽에 어설프게 섰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며 남자가 씻고 침실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때 드는 자괴감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그 발소리가 침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의 발소리는 무거웠다. 태운은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손끝부터 차가워지기 시작한 몸은 소름이 오슬오슬 돋을 정도로 차가워져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음 주부터, 영화…… 촬영을 하기로 했습니다.”
목이 멨다. 사실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몰랐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떠오른 말이 바로 입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왜 이 소리가 남자를 마주하자 나오는지도 몰랐다. 그냥, 그냥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이후로 태운은 남자를 만나지 않았고, 확답을 들은 적도 없었다. 어쩌면 남자가 허락을 말한 것 같다 여겨지는 모든 상황적 증거가 제 착각일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마음속에 남은 까닭이기도 했다.
“그래.”
남자의 건조한 음성이 침실을 채웠다.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태운을 짓누르는 것 같은 힘이 있었다. 남자의 음성은 완전히 허락을 말하는 것도 같았다. 태운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올려 떴다. 건조한 눈이 뻑뻑했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이럴 때 감사하다 남자의 품에 달려들 수 있는 성격만 되었어도 훨씬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태운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가끔은 그런 제 자신이 너무 착잡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이미 몸을 팔고 있는 주제에 자존심을 지켜 봤자 그것은 자존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와 얼굴을 마주하기조차 곤욕인 태운에게 그런 모든 것들은 아직도 너무나 힘들었다.
“정말…… 감사, 합니다.”
태운은 눈을 내리감았다. 긴 속눈썹에서 나오는 음영이 눈 밑을 너울거렸다. 입술을 물고 견뎠다. 차라리 억지로라도 웃고 싶은데 웃어지지조차 않는 얼굴이 끔찍하게 싫었다.
“이제 네 차례야.”
태운은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며 조금 의아한 얼굴로 침대맡에 멈추어 선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태운이 드물게 남자의 말에 반문했다. 평소 태운은 남자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 몸을 동하게 해 보라고 했잖아.”
“그건…….”
가슴이 쿵쿵하고 세차게 튀어 올랐다. 얼굴이 경직되어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제가 들은 말은 마치 환청인 것만 같았다.
태운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것을 제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남자가 다시 자신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끗 훔쳐본 남자는 표정 없이 태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까만 눈이 메마른 색을 띠고 있었다. 그 얼굴이 제법 사무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경직되어 있던 몸이 벌써부터 뻣뻣하게 아파 왔다. 다시 한번 태운은 남자의 눈치를 힐끗 봤다.
“넌 무조건 무릎부터 꿇으려고 하는군.”
남자의 발치에 무릎을 꿇으려던 태운은 남자의 날카로운 말에 저지되었다. 엉거주춤 선 자세가 미칠 듯이 수치스러웠다. 남자가 대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태운은 황망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운은 정말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남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운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곤란한 표정으로 그저 남자의 턱 끝을 응시했다. 감히 얼굴을 마주할 자신조차 없는 것이었다.
남자가 말없이 발걸음을 옮겨 침대 옆 티 테이블 의자에 걸터앉았다. 본격적으로 구경을 해 주겠다는 반응이어서 태운은 숨이 짧아졌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숨이 찼다.
“뭘,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태운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지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다만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눈의 깜빡임조차 의식이 될 정도로 신경이 곤두섰다. 차라리 남자가 노골적으로 지시를 내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치아가 마주쳐 부딪쳤다. 그 소리가 남자에게 들릴까 봐 태운은 이를 악물었다.
남자는 무감정한 얼굴로 그런 태운을 지켜보았다. 태운은 의식적으로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그럼 적어도 공황 상태까지 몰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 펠라를.”
“아니. 내 몸에는 손대지 마.”
태운이 남자 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서면서 말하자 남자는 말로써 제지했다. 태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는 정말 깨져 버릴 것 같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전, 뭘…….”
“뭐. 혼자라도 해 보든가.”
태운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다시 한번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자신이 지금 들은 말이 무엇인지 뇌가 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혼자 해 보라니 무엇을, 무엇을.
한참 만에 남자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이 하나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태운은 겨우 이런 것으로 남자가 흥분할지는 잘 알 수 없었다.
태운은 덜덜 떨리는 손이 남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깍지를 껴서 마주 잡았다.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다리로 뒤로 물러났다. 태운은 남자에게 들리지 않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부터 자신이 할 행위를 생각하니 정말 뇌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 말고는 별다른 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제발 남자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몸을 이용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치욕적이었다. 태운이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넓게 벌리자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깨달았는지 남자가 후 하고 코로 웃었다. 태운은 혀를 이로 악물었다. 정말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태운은 축 늘어진 제 성기를 손으로 잡았다. 턱이 덜덜 떨렸다. 이게 맞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답을 구하기 위해 힐끗하고 올려다본 남자는 말이 없었다.
태운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성기를 살살 쥐었다. 젤이라도 있다면 좀 나았겠지만, 맞닿은 살은 건조하기만 했다. 극도의 긴장감 때문인지 축 늘어진 살은 주물러도 좀처럼 변화가 없었다.
긴장으로 손바닥에 땀이 차 축축해졌다. 태운은 다시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자세의 변화조차 없이 남자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가 자신을 왜 그렇게 보는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의 미숙한 행동에 짜증을 내며 더 이상 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남자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땀 때문에 미끌미끌해진 손으로 성기를 훑었다. 태운은 샤워 가운으로 가려진 남자의 성기를 응시했다. 차라리 이런 수치스러운 행동 없이 남자가 제 안으로 들어와 가만히 누운 저를 흔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남자의 앞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제 성기를 스스로 흔드는 것은 정말 죽고 싶을 만큼의 용기가 필요했다. 태운은 질끈 눈을 감았다. 뒤늦게 자극 받은 성기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태운은 고르게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거칠어진 호흡 때문에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살끼리 마주 닿아 마찰열이 발생한 손이 불덩이를 쥐고 있는 것처럼 점점 뜨거워졌다. 이를 너무 악물어서 아래턱이 당겼다. 태운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져 갔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의 앞에서 수음을 하는 것으로 발기하는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몸이 부르르 떨리며 성기에서 묽은 액체가 쏘아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태운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하아, 하아, 태운이 삼켜 내기만 했던 거친 숨을 몰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태운은 다시 한 번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의자에서 일어난 남자는 맨발임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걸음으로 태운에게 다가왔다. 태운은 안도와 수치와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 혼합된 어떤 감정으로 그런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되었으면 좋겠다. 태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태운은 남자가 누르는 대로 침대로 젖혀졌다. 태운의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할 수 없이 창백하게 질렸다. 온몸에 피가 돌지 않는 기분이었다. 태운은 최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제 끝은 얼마 남지 않았고 자신은 그저 남자가 흔드는 대로 몸이 흔들리면 되는 것이었다.
남자는 펜을 잡는 일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근육이 발달해 있었다. 탄력 없는 고무를 만지는 것 같은 단단한 근육은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남자의 밑에 깔린 태운은 그 근육이 얼마나 단단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남자는 살집은 없었지만 뼈대가 굵어 덩치가 있는 편이라 언뜻 보기에 낭창한 태운과 몸집 차이가 컸다.
태운은 워낙 섬세하게 생긴 외모라 예쁘장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단독으로 런웨이에 설 정도로 키가 컸고 날렵하게 근육이 잘빠진 몸이었다. 콧대 높은 여배우들마저 뒤에서 한 번 만나고 싶어 안달을 나게 할 정도로 남자다운 매력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악어도 잡아먹는 재규어가 사자 앞에서는 먹잇감으로 전락하듯, 남자 앞에만 서면 태운은 사자 앞발에 잡힌 것처럼 되어 버렸다. 남자의 시선이 태운의 얼굴에 닿았다.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남자에게 들릴까 무서워, 태운은 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숨 쉬어.”
태운은 순간적으로 남자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는 침대 위에서는 평소보다 말이 느는 편이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태운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명령이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남자가 여상하지 않았다.
태운은 남자의 말대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미 의식해 버린 터라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남자의 손이 태운의 발목을 거칠게 잡고 양쪽으로 벌려 왔다. 다리를 찢는 것 같은 불편한 자세에 절로 찌푸려지는 표정을 풀려고 애썼다. 차마 눈을 감을 수도, 남자를 응시할 자신도 없어 태운은 남자의 턱에 시선을 고정했다. 남자답게 단단하고 선이 굵은 턱에 거뭇한 수염이 나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시선을 처리하는 것은 익숙했다. 하지만 왜 현실에서는, 아니 남자 앞에서는 그것이 잘 되지 않는지 태운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가 곧 샤워 가운을 벗었다. 남자의 몸에서 벗겨진 가운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운의 숨이 점점 얕아졌다. 드러난 남자의 상체는 위협적이었다. 태운의 하얀 피부색과 대조되어 더 그랬다.
태운의 어설픈 자위를 본 것만으로도 남자의 성기는 발기한 상태였는데, 태운도 관장을 하며 어느 정도 항문을 풀었지만 남자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꽤나 흘러서 아래는 다시 오므라들어 있었다. 아니, 완전히 풀어져 있는 상태라고 해도 남자의 성기는 태운의 좁은 구멍이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는 크기였다.
남자가 협탁에서 콘돔을 꺼내 태운의 손에 쥐어 줬다. 콘돔을 받아 든 태운의 손이 덜덜 떨렸다. 남자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태운이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어리숙한 손동작으로 콘돔의 포장지를 벗겨 내었다.
콘돔만을 든 태운의 손이 남자의 성기로 다가갔다. 남자의 성기를 타고 내려오는 핏줄이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남자의 귀두까지 건드린 태운은 잠시 망설였다. 세게 물고 있는 혀가 아팠다.
콘돔 끝을 잡고 벌어진 쪽을 남자의 귀두에 가져다 대었다. 살짝 맞닿은 남자의 성기가 너무 뜨거웠다. 덜덜 떨리는 양손으로 콘돔의 말린 부분을 쥐고, 남자의 성기 위로 조심스럽게 폈다. 몇 번이나 해 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태운의 손길은 미숙하기만 했다.
남자는 태운이 스스로 허벅지를 안아 벌리게 만들었다. 태운은 다가올 고통에 이가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계속 부족했다. 차라리 짐승처럼 엎드린 상태에서 남자를 받는 것이 태운은 더 좋았다.
태운은 개개의 선호를 말할 정도로 이 행위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뒤로 하면 남자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더 편했다. 남자가 보고 있으면 함부로 입술을 짓씹을 수도 없었다.
방긋방긋 웃지는 못하더라도, 인상은 찌푸리지 말라고 소속사 사장이 말했었다. 죽을상을 쓰고 있으면 꼴리던 좆도 식겠다는 게 말의 의도였다. 태운은 그 말을 듣고부터는 남자 앞에서 함부로 인상을 찌푸릴 수도 없었다. 물론 방긋방긋 웃는 것은 더 어려웠다.
태운이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 남자가 젤을 태운의 구멍 안으로 쏟아 넣었다. 젤을 바른다고 해도 남자를 받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꽤나 관대한 처사였다.
차라리 제 손으로 먼저 구멍을 넓힌 다음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청할 용기도 없었다. 남자가 허락한다고 해도 남자가 보는 앞에서 제 구멍에 손가락을 넣을 용기도 없었다.
무릎으로 태운의 엉덩이 가에 선 남자가 태운의 엉덩이를 더 들어 올렸다. 허리에 무리가 오는 자세였다. 태운은 얕게 숨을 내쉬었다.
“아, 아아악.”
남자의 귀두 부분이 단번에 구멍을 가르고 들어왔다. 태운은 제 몸 안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진저리를 쳤다. 정말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도저히 반응을 막을 수 없는 본능적인 감정이었다.
이제 겨우 귀두 부분이 들어온 것인데도 태운은 벌써부터 속이 꽉 찬 기분이 들었다. 찢어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압박감이 상당했다. 남자의 손이 태운의 허리를 잡아 왔다. 태운은 그것이 모두 곤욕이었다.
절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오는 입술을 이로 물어 막았다. 하지만 억눌린 비명이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태운은 차라리 제 감각과 연결된 모든 신경을 잠시만 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성기가 계속해서 제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태운의 손톱이 제 손바닥 살 속으로 박혔다. 망설임 없이 남자가 추삽질을 시작하자 태운의 입에서 차마 갈무리되지 못한 비명들이 흘러나왔다. 남자의 고환이 태운의 엉덩이에 닿았다. 남자가 팍 하고 치받아 오자 까끌까끌한 음모마저 느껴졌다.
수치와 고통을 견디는 태운의 얼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붉어졌다. 태운의 몸뚱이가 남자가 흔드는 대로 의지 없는 인형처럼 마구 흔들렸다.
“아아.”
그리고 어느 순간 태운의 눈가가 길게 일그러졌다. 땀에 젖은 얼굴은 어딘가 사내의 가학욕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그 얼굴에 남자의 눈동자가 조금 짙어졌다. 남자가 갑자기 빨라진 속도로 퍽퍽 하고 어딘가를 짓찧자,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태운은 “제발, 제발.”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발 그만해 달라는 의미였지만, 남자는 그곳에 계속해서 성기를 박아 넣었다. 남자의 숨도 점점 거칠어졌다. 남자의 단단한 몸에서도 땀이 흘러 태운의 몸 위로 떨어졌다.
“아아, 제발, 읏, 제발, 아아.”
갑자기 태운의 몸이 축하고 처졌다. 태운의 성기에서는 하얀 점액질이 울컥울컥하고 새어 나왔다. 태운이 가장 싫어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는 아무 자극도 받지 않고, 순전히 뒤로만 가 버릴 때. 태운은 정말 그 비참함에 죽고 싶어졌다.
그 순간, 남자가 태운의 가장 깊은 곳에 성기를 처박았다. 태운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남자가 사정을 하자 태운은 배 속이 부푸는 기분이었다.
태운의 안에서 성기를 빼내 콘돔을 정리한 남자는 다시 콘돔을 씌운 후 태운의 안으로 처박았다. 태운은 무기력하게 그의 아래에서 흔들릴 뿐이었다.
“하읏, 하아.”
태운이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한 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그런 태운의 허리를 단단히 쥐고 남자는 다시 성기를 흔들었다. 태운은 자신이 정말 섹스 토이라도 된 기분에 이를 악물었다.
움직임 없는 태운에게 다시 한번 사정한 남자는 아무 반응 없는 태운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태운의 위에서 떨어져서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몸에서 흐르는 땀이 거짓인 듯 남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불편한 자세로 남자를 받아 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태운도 곧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불편한 자세로 고정되어 있던 터라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전부 부들부들 떨렸다. 일어서려고 하다가 다리가 저려 와 흠칫하고 다시 침대 위로 주저앉았다. 극도로 긴장을 하면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런 아픔은 태운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저린 다리를 주무르던 태운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이미 방을 빠져나간 줄 알았던 남자가 문가에 서서 태운을 보고 있었다. 태운의 얼굴이 다시 확 하고 달아올랐다. 끊어지지 않는 감정은 언제나 태운에게 벅차기만 했다.
“금방, 금방 나가겠습니다.”
태운이 다시 땅에 발을 디뎠다. 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몇 걸음 걷지 않은 태운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런 태운을 남자는 건조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은 태운을 작아지게 했다. 태운은 겨우 다시 몸을 일으켜 엉거주춤 불편한 다리로 침실과 연결된 화장실로 향했다. 관장과 샤워는 밖에 위치한 욕실에서 했지만 침실과 연결된 화장실에 샤워 가운을 벗어 둔 것이었다.
대충 샤워 가운으로 옷을 여미고 나오자 미닫이 문가에 서서 태운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없었다. 푹, 한숨을 내쉬며 태운은 남자가 서 있던 문가에서 망설였다. 빨리 옷을 입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혹시라도 다시 남자를 마주칠까 밖으로 나서기가 꺼려졌다.
태운은 마음속으로 수를 세었다. 남자가 욕실에 들어갈 때까지 시간을 가늠하는 것이었다. 방 안쪽에서는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악물었던 볼 안쪽이 쓰라렸다. 언뜻 피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태운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오늘도 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요즘 들어 남자가 저를 찾는 횟수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늘로써 다시 또 한동안은 남자가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었다. 남자는 출장이 잦은 사람이었고, 출장을 가지 않는다고 해도 바쁜 사람이었다. 한동안은 이걸로 또 된 것이었다.
태운이 문 밖으로 나섰다. 욕실에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남자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태운은 당황한 눈으로 그런 남자를 보았다.
남자 곁에는 예의 그 트레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옷의 가짓수가 많은 것이 남자의 옷처럼 보이진 않았고, 태운의 몫으로 준비된 듯했다.
남자를 발견한 순간부터 태운은 발걸음을 멈췄다. 남자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태운까지의 거리를 하얗게 가렸다가 또 흐려졌다. 태운은 다시 상처가 난 입안의 살을 씹었다. 남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남자의 시선 끝에 태운이 묶였다. 태운은 다시 숨이 멎었다. 눈가의 핏줄이 빨갛게 서는 것만 같았다.
태운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발걸음을 떼면 다시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숨을 의식적으로 들이마시려고 노력했다. 휘청대는 다리가 거추장스러웠다. 벽에라도 기대서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금방, 나가겠습니다.”
남자의 눈빛에 초조해진 태운이 두 발을 억지로 끌고 남자의 곁에 있는 트레이까지 다가갔다. 담배 연기에 가린 남자의 시선이 계속해서 태운을 따라왔다. 남자가 직접 준비하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행위가 끝난 후에 이렇게 준비되어 있는 옷은 화대와도 같았다.
그 옷을 입으면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끔찍한 느낌이 들 테지만, 태운은 감히 그것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흡사 남자와의 관계와도 같았다.
“옷, 옷만 입고 바로 나가겠습니다.”
말끝이 떨리는 것을 막으며, 태운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여러 벌 준비되어 있는 옷 중에 가장 앞에 있는 옷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옷을 입기 위하여 다시 침실로 향하려는데, 남자의 나직한 말소리가 태운의 귓가에 들려왔다.
“씻고 가.”
말을 하는 남자가 낯설었다. 섹스가 끝나고 남자가 제게 말을 걸다니, 처음이라고 봐도 좋았다. 침대에서가 아니면 서로 나눌 말이 없는 까닭이기도 했다.
“……괜찮습니다.”
태운이 답했지만, 남자는 늘 그렇듯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둘을 스쳐 갔다.
한참이나 남자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나오지 않자, 난감해진 태운이 “그럼, 감사히 사용하겠습니다.” 하고 말을 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다시 연기 속으로 흐려졌다.
* * *
“결국 또 기어 나오는 거 보면 강찬혁 허리 놀림이 무시무시하긴 한가 보지. 그 난리를 치고 활동 접더니 이번에는 또 어떤 사모님을 잡은 거야.”
“그래도 성격 많이 죽었다더만. 저번에는 술자리도 나왔다고 황 선배가 감탄을 하던데.”
“지도 알아서 기어야 하는 타이밍인 거 아는 거지. 스폰서 믿고 까불다 만든 적이 어디 한둘이냐. 잘나갈 때 카메라 돌아가는 앞에서 이우재 뺨을 치고 난리를 쳤다더니, 얼마 전에 이우재 주연인 작품 캐스팅 됐다가 이우재가 강찬혁이랑은 촬영 안 한다고 개지랄을 해서, 혼자 팽당했다며.”
화장실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태운이 멈춰 섰다. 그리고 곧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자신도 이런 식의 소리를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래?”
화장실 문 앞에서 들어가지 않고 서 있는 태운을 보며 매니저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러다가 화장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쉽게 내뱉은 말 하나하나가 산더미처럼 부풀려지는 곳이라 사소한 말 하나도 조심해야 하는데,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아닙니다.”
태운이 말을 하며 화장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간 크게도 층에 하나뿐인 화장실에서 주연 배우의 험담을 하고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명은 태운의 눈에도 익은 스태프였고, 하나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둘은 화장실로 들어오는 태운을 발견하더니 기겁을 하며 놀랬다. 태운은 별 반응 없이 소변기로 향했다. 험담을 늘어놓고 있던 둘은 힐끔힐끔 태운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태운의 매니저가 뒤쪽에서 한 번씩 얼굴을 훑어봐 주자 두 사람은 도망치듯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매니저는 혀를 찼다. 하여간 사내새끼들이 감당도 못할 거면서 입은 풍선처럼 가볍지.
“입 싼 인간들 신경 쓸 거 없어.”
듣고 있는 건지 어쩐 건지, 매니저는 태운의 표정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다. 매니저가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하여간 입 싼 놈들.
사실 강찬혁의 행적은 유독 튀는 구석이 있었다. 촬영장에 난입해 연기를 하고 있던 상대 배우의 뺨을 때렸던 것은 이미 찌라시성 기사로도 몇 번이나 난 덕에 일반 대중들까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화였다.
한창 잘나갔을 때는 그보다 더한 일도 많았다는데, 그때는 어쩔 수 없어 덮어 두었던 것들이 강찬혁이 몰락하게 되자, 그가 한 짓에 더해 몇 배의 소문과 악의를 가지고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사실 이번 작품 또한 감독은 처음부터 찬혁을 물망에 올려놓고 작업을 하였는데, 제작사가 격렬히 반대해 무산될 뻔했다. 그러다 원래 캐스팅되었던 배우가 해외 진출을 이유로 하차하자, 이번에는 감독이 쇠고집으로 밀어붙여 합류하게 됐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정상에 올랐던 경력이 있어, 연기력에까지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능력을 인정받으면서도 촬영 현장에서는 여전히 나쁜 쑥덕거림을 몰고 다녔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누가 들을지 모르는 곳에서. 손을 씻고 물기를 털어 내는 태운을 보며 매니저가 다시 혀를 쯧쯧 하고 찼다. 강찬혁이 아니라 이태운 이야기였으면 자신부터가 이대로는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 새끼들 결국 사고 칠 줄 알았지.”
매니저가 혀를 쯧쯧 찼다. 대형 사고였다. 조금 전 화장실에서 강찬혁의 뒷담화를 하다가 태운과 매니저를 보고 도망친 인간 둘이 다른 장소에서 계속 강찬혁의 뒷이야기를 하다가 이번에는 정말 강찬혁에게 걸린 모양이었다.
강찬혁이 화를 낼 만한 상황은 맞았지만 대응이 과했다. 참지 않고 그 남자들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자리에 마침 제작 발표회에 참석 예정이었던 기자가 있었던 바람에 강찬혁이 남자 둘을 곤죽으로 만드는 과정이 카메라에 찍혀 비상이 걸렸다.
예정되어 있던 제작 발표회가 한 시간 연기되었다. 기자들의 불만이 컸지만 우선 관계자가 근처에서 식사 대접을 하는 것으로 달래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제작사로 찾아온 투자자들은 당장 강찬혁을 하차시키라고 난리였다. 감독과 제작사 대표와 재성에서 나온 본부장급 임원이 부랴부랴 영상을 찍은 기자와 협상 중에 있었다.
이대로 사건이 수습되지 않는다면 강찬혁은 하차 수순을 밟게 될 테니 제작 발표회에 참석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일이 마무리된다면 논란을 키우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작 발표회를 진행해야 했다. 태운은 대기실에서 기다려 줄 것을 부탁 받은 상황이었다.
매니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찬혁의 합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너무 사건이 커졌다. 제작 발표회 전부터 폭행설이라니. 지금 사건을 수습하러 들른 재성의 본부장이 아니었다면, 매니저인 자신부터가 강찬혁 하차를 지지하며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떠도는 소문을 다 믿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지만…… 강찬혁은, 아까 난리 치는 거 봤지? 문제가 좀 많아.”
스타일리스트를 비롯한 코디들은 제작사 직원에게 딸려 밥을 먹고 오라고 내보낸 상태여서, 대기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태운이야 남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고 좋아하지도 않으니 말하지 않으려고 했었지만, 이 지경까지 오니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라도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일반 대중들까지 다 알고 있어서 별로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야. 예전에 한 번 기자 폭행해서 공중파 아홉 시 뉴스에 나온 적도 있었는데 기억나? 그거 법정 소송만 일 년 걸렸을걸. 언론에 알려진 건 아니지만 그 사건 나고 얼마 안 돼서 취객이랑 시비 붙어서 회사에서 합의금으로 수억 내준 적도 있었어. 물론 당연히 이번처럼 이유가 있기야 했겠지. 그런데 대응이 너무 과해. 드라마 같이 찍었던 한주아랑은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트러블 메이커다. 한주아가 쳤던 사고의 배는 더 질 나쁜 사고들 칠 거고.”
“…….”
“잘 나갈 때야 잘한다, 괜찮다, 안 그러면 된다. 회사에서도 변호사 붙여서 소송 도와주고 합의금 싸들고 다니면서 합의 보고 했었는데, 계약 분쟁 있고 난 뒤로는 회사에서도 그냥 엿 돼 봐라 하고 손 놓고 있다 못해 아예 대놓고 활동 방해하는 중이고. 강찬혁은 그거 못 참아 더 날뛰고 있고.”
“…….”
“말하자면 끝이 없는데, 아무튼 같이 촬영 시작하면 더한 문제도 생길 거야. 사실 처음 합류한다고 했을 때부터 나는 별로였어. 그때 너는 괜찮다고 했고, 너 그렇게 개입되는 거 싫어하는 거 알아서 다른 말 안했던 건데. 사실 초반부터 이런 일 생기니 좀 걱정부터 되네.”
“…….”
“같이 촬영 못할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물론 아까는 그 입 싼 새끼들도 정상이 아니었지만, 그게 영상으로 찍혔으니……. 기자랑 합의 보는 데 실패하면 한동안 난리 날 거다. 아마 도중하차한다 해도 크게 구설 안 생길 거야. 박 감독 작품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한둘이 아니니, 배우야 금방 구해질 거고. 제작사야 워낙에 맘에 안 들어 했으니, 네가 같이 못하겠다고 말하면 감독도 더는 어쩔 수 없을 거다.”
태운은 말없이 대본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내용이 눈에 들어오진 않는, 의미 없는 움직임이었다. 매니저는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태운은 아둔하지 않았기에 제 말의 의미도 제대로 파악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한참 후에야 태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매니저가 기다리던 대답이 아니었다.
“저는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처음에 매니저는 태운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그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닌 상황에서 태운은 자신의 미래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넌 강찬혁이랑 전혀 달라. 왜 널 강찬혁이랑 비교하는지 모르겠지만 넌 절대 강찬혁처럼 망가지지 않을 거야.”
매니저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사실 얼마든지 입에 발린 말을 더 해 줄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그대로 믿을 태운도 아니었고, 태운의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 못하는 것도 아니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닳고 닳은 대본을 태운이 다시 한 번 읽었다. 대본에는 빈 공간 없이 깔끔한 글씨체로 빼곡하게 무언가가 적힌 상태였다. 태운 나름대로 작품을 분석해 정리한 것이었는데, 방금 전 한번 태운의 대본을 훑어본 감독이 감탄을 했을 정도로 세세한 분석이었다.
자신의 대사는 물론 상대의 대사까지 다 외우고 있을 정도로 태운은 여러 번 대본을 읽었다. 그래야만 그 역할에 완전히 동화되어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사실 이번 작품은 태운으로서도 실험이었고, 고민이었다. 감독의 이름이 그만큼 컸다. 감독은 주로 인간 내면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잘 표현했고 그 감정을 관객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에 능숙했다. 부정적인 감정과 어두운 소재를 특유의 영상미로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영화는 보통 영화제 하면 떠올리는 그런 예술적인 영화들과는 달리, 드물게 흥행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함께 작품을 할 배우를 뽑는다고 오디션을 본다고 하면 톱스타들도 줄줄이 참여할 정도였다.
영화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태운에게 대본은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감독이 직접 대본을 들고 와 한 번만 읽어 달라 부탁하기 전까지는, 태운은 그 대본을 읽지도 않았었다. 그리고 그런 장르였다.
드라마로 어느 정도 인기를 얻으면 영화로 빠지는 배우들과 달리, 태운은 흥행 성적이 괜찮은 영화들이 있었음에도 영화보다 드라마를 주로 하는 배우였다. 회사에서는 영화배우로서의 이미지를 굳히기를 바랐지만 태운의 선호도는 영화보다는 드라마였다.
영화는 드라마보다 인물이 더 다양했다. 직업도, 성격도, 상황도. 그래서 태운은 영화 작품을 더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드라마는 주된 스토리는 조금씩 달랐지만 주인공의 인물은 정형화되어 있었다.
좋은 집안에서 잘 배우고 자란 재벌 2세,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을 구하는 백마 탄 왕자님. 태운이 주로 맡는 역할이었고, 그가 밝은 연기밖에 하지 못한다는 평을 듣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 태운이 맡은 역할은 ‘강간당한 후 유기된 동생의 복수를 하고 살인마가 되어 버린 남자’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독서실에서 귀가하던 동생은 강간을 당한 후 암매장된다. 동생의 참혹한 시신에 어머니마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다. 홀로 세상에 남겨진 주인공은 끈질긴 추적 끝에 범인을 잡는다. 하지만 범인을 경찰에 넘기는 대신에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다.
그 후 연쇄 강간 암매장 사건 범인에 대하여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던 경찰에게 자발적으로 체포당한다. 동생을 살해한 범인을 잡아 죽인 것이었지만 그의 이름에 붙는 단어는, 또 다른 살인마.
가볍지 않은 영화였다. 대본은 난해했고 해석도 쉽지 않았다. 대본을 읽어 보고도 태운은 계속해서 거절을 말했었다. 사실 자신이 없다는 것이 더 맞았다. 이런 역할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감독은 계속해서 태운을 찾아왔고,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대본이 좋았고 감독의 설득에 홀려, 태운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결정해 버렸지만 사실 그 후로도 번복할까 계속 고민했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대본에 매료되었고, 결국은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까지 오고 만 것이었다.
지금까지 찍어 왔던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였다면 사실 남자가 그만두라고 말했을 때 망설임 없이 그만두었을 것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런 역할은 또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는 이번에 그만두면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어떤 예감이 들었었다.
“형 오늘 안에 제작 발표회 다시 시작할 수는 있을까요?”
운전과 각종 심부름을 맡고 있는 로드 매니저 격인 주환이 시계를 보며 태운에게 물어 왔다. 태운보다 두 살 어린 그는 꽤나 붙임성 있는 성격이었는데, 태운에게 다가가기 어려워하는 다른 스태프들과는 달리 제법 친근감 있게 태운을 대하고 있었다.
찬혁의 돌발 행동 이후로 제작 발표회는 수 시간째 중단이 되고 있는 상태였다. 영화는 노이즈적인 이슈가 아니어도 충분히 긍정적인 측면에서 많은 화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투자자들은 강찬혁이 벌인 일로 입방아에 오르는 것에 난색을 표하며 하차를 요구하고 있었다. 기자와는 잘 이야기가 마무리된 모양이었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단번에 회의가 소집되었고, 태운의 매니저도 그곳에 불려 가 있었다. 투자자, 제작사 모두가 찬혁의 하차를 요구하는데, 감독만이 유일하게 찬혁이 아니라면 촬영을 하지 않겠노라 버티고 있어 회의가 길어지고 있었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매니저는 다시 한 번 태운에게 찬혁과의 촬영에 대해 물었었다. 태운마저도 못하겠노라 입장을 밝히면 감독은 더 이상 버텨 낼 재간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태운은 다른 말 하지 않고 그저 결정되는 사항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으로 어떠한 의견도 낼 생각이 없다고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갑자기 강찬혁에게 어줍지 않은 동정심 따위가 생겨난 것도 아니었다. 태운은 누군가를 동정할 만큼의 여유도 없었고, 여전히 강찬혁이 불편했다. 찬혁으로 인해 묻어 두었던 과거의 잔상이 자꾸 떠올라 요 며칠은 통 수면제를 먹어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같이 촬영을 시작하게 된다면 더 어려움이 많을 것이었다.
하지만 태운은 그 불편함보다 누군가의 인생이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인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어. 실장님한테 문자 왔어요. 회의가 더 길어질 것 같다고 형 그냥 집에 들어가시라는데요. 감독님이 진짜 장난 아니신가 보네.”
주환이 태운 앞으로 자신의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눈으로 훑고 있던 대본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태운이 그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화면에는 회의에 들어간 매니저에게서 온 문자가 떠 있었다.
[회의가 끝이 안 난다. 태운이 집에 데려다줘라.
저녁은 꼭 챙겨 먹이고. 너도 먹고. 아, 그리고 태운이에게 끝나는 대로 전화한다고도 해 줘라.]
장문의 문자는 이 내용의 연속이었는데, 제작 발표회 때문에 호출됐던 다른 스태프들은 다 돌려보낸 후라 대기실에는 태운과 주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주환은 이미 대충 치워진 대기실을 한 번 더 정리했고 태운은 대본을 정리해서 들고 온 가방에 넣었다.
“형. 저녁은 어떡할까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럼 안 드시잖아요. 먹고 싶은 거 따로 없으시면 장 봐다가 집에서 준비할까요?”
“괜찮으니까 키 주고 들어가.”
태운의 말에 주환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회의에 들어간 매니저였으면 태운의 손에 억지로 수저라도 들려 줬을 텐데, 주환은 차마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태운이 운전해 집에 들어가게 한다면 실장에게 어마어마하게 잔소리를 듣게 될 것 같아 조금 마음이 급해졌다.
“그럼 집까지는 모셔다 드릴게요. 그건 하게 해 주세요. 안 그럼 저 실장님한테 진짜 혼나요.”
태운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주환이 안도하며 대기실을 나가려고 문을 열려고 하는데 그것보다 빠르게 바깥쪽에서 누군가 문을 급하게 열었다.
“이태운.”
반사적으로 주환이 문으로 들어오는 인영을 막아섰다. 체대 출신이라 주환은 몸이 날랜 편이었는데, 갑자기 대기실로 뛰어드는 인영에 몸이 먼저 나간 것이었다.
“어?”
하지만 눈앞에 남자를 보고는 주환은 바보 같은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강찬혁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회의의 원인.
“무슨 일로…….”
주환은 말꼬리를 흐렸다. 배우들은 각각 다른 층의 대기실을 쓰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대기실을 잘못 찾은 것도 아닐 테고 이곳에 강찬혁이 찾아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 주환의 생각이었다.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환은 여전히 어정쩡하게 찬혁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갑자기 뛰어드는 팬이나 괴한이 아니니 비켜야 한다는 생각도 있는데, 방금 전 남자 둘을 때려눕히고 사납게 날뛰던 찬혁의 인상이 너무 강해서 쉽사리 판단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있는 놈 줘 팰 정도로 돌진 않았으니까 좀 비켜 봐. 할 말 있어서 그래.”
그 말에 주환은 오히려 몸을 긴장시키고 태운을 보이지 않게 완전히 가렸다. 태운이 작은 편도 아닌데 대학 때까지 유도를 했다는 곰 같은 덩치의 주환에게 완전하게 가려졌다. 그 모습에 찬혁이 어이가 없는지 웃었다.
“괜찮아. 주환아.”
주환은 찬혁을 태운과 대면하게 해도 맞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주환은 힐끗하고 태운의 표정을 살폈지만, 태운은 카메라 앞에서를 제외하고는 제 기분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주환이 어쩔 수 없이 조금 물러섰다. 하지만 언제든지 강찬혁을 제압할 수 있는 위치였다.
“야. 아까는 존나. 아니. 미안하게 됐다.”
두서없이 그 말만 하고 얼굴이 붉어져 시근덕거렸다. 지금 찬혁에게는 술자리에서의 시니컬한 모습도 상대를 때려눕히던 사나운 모습도 없었다. 태운은 티 나지 않게 혀를 짓씹었다. 강찬혁은 여전히 불편했다. 사실 더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편은 결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해결이 될 것도 아니었다.
“아, 젠장. 내 말은 다시는 이렇게 난리 안 친다고.”
그 말까지 한 찬혁은 다시 또 한참을 시근덕대더니 태운의 반응을 확인하지도 않고 휑하니 빠져나가 버렸다. 주환은 대체 강찬혁이 왜 저러는지 얼떨떨했다.
태운은 아플 정도로 혀를 물었다. 순간적으로 그에게서 얼마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용기, 오기, 미련, 고집. 그 사이 어디엔가 위치한 어떤 단어로도 정의가 되지 않는 행동.
강찬혁은 역시 자신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그래서 태운은 그가 정말로 불편했다.
* * *
온몸이 극도로 피곤했다. 사실 요즘 태운은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무리나 다름없었다.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수면제에 내성이 생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용법만큼만 먹고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수면제를 먹고도 잠에 들지 못하면 기다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감각뿐이었다. 머리가 찢어질 듯 아팠다. 그 끔찍한 감각을 견디지 못하면 더 많은 양의 수면제를 먹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잠에서 깬 후에 똑같이 고통스런 감각이 느껴졌다.
집에 들어와 저녁을 준비하겠다는 주환을 만류하고 태운은 집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평수의 아파트에서는 전혀 사람 사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잘 꾸며 놓은 모델 하우스 느낌이었다. 눈에 보이는 곳 어디에도 태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집 안에 태운 스스로 채워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남자를 통해 얻어진 것들뿐. 오늘이라도 당장 맨몸으로 이 집에서 내처진다 해도 태운은 아무것도 챙겨야 할 것이 없었다.
태운은 무너지듯 소파에 길게 늘어졌다. 가만히 눈을 감고 시간을 견뎠다. 잠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태운은 이렇게 쉽게 잠에 빠질 수 없었다. 잠을 자려면 수면제를 한 움큼 먹고도 한참을 뒤척여야 했다.
태운이 눈을 뜬 건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길게 진동하면서였다. 태운은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뜨고는,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향해 무거운 손을 뻗었다. 발신인은 매니저였다. 태운은 핸드폰을 들고 이유 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 회의 끝났다. 잔 건 아니지?
“네.”
―강찬혁은 계속 촬영하기로 했다. 일단 감독이 너무 확고해서. 강찬혁 아니면 촬영을 엎을 기세였어. 박 감독이 강찬혁 데뷔시킨 거라던데. 박 감독 힘들 때는 강찬혁이 노 개런티로 출연도 하고. 몰랐는데 둘이 꽤 끈끈한 모양이더라고. 처음 캐스팅할 때는 강찬혁으로는 제작 자체가 안 될 판이니 강찬혁 카드 자체를 포기한 모양이지만, 이제는 엎을 수도 없으니 제대로 배짱부리더라고.
“…….”
―감독이 더 이상은 말썽 없을 거라고 보증하고. 나중에 강찬혁 들어와서 돌아다니면서 사과도 하고. 뭐 그렇게 마무리됐다. 주환이랑 통화했는데 강찬혁이 우리 대기실도 왔다 갔다며?
“네.”
―나는 여전히 걱정이기는 한데 결정 난 거 어쩔 수 없지. 더 이상 문제없길 바라는 수밖에. 밥은 먹었어?
“아직 먹기 전입니다.”
―거르지 말고 배달 시켜서라도 꼭 먹어. 일단 내일은 스케줄 없으니 푹 쉬고. 오늘 취소된 스케줄은 다시 일정 잡히면 바로 연락할게.
“네.”
푹 자라는 것과 같이 태운이 지키지 못할 몇 개를 당부한 매니저는 전화를 끊었다. 태운은 다시 쓰러지듯 소파에 길게 누웠다. 드라마를 촬영할 때가 차라리 나았다. 스케줄에 쫓겨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시간이 많아지면 생각도 많아졌다. 그리고 생각은 항상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른다. 태운은 다시 손을 뻗어 소파 위에 올려 둔 가방에서 대본을 꺼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모습을.
* * *
좋지 않았다. 태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주 찾아야 한 달에 한두 번, 길 때는 반년에 한 번. 남자가 오 년 동안 태운을 찾는 주기는 그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달에는 벌써 다섯 번째였다. 그중 한 번은 태운이 먼저 찾아간 것이었지만 그것을 제외해도 네 번이었다.
남자는 소속사 사장에게 대가를 건네고 소속사 사장은 그 돈으로 태운을 톱스타로 만들었다. 그것은 태운을 매개로 하였으나 태운에게는 선택권이 없는, 하지만 태운이 용인하고 있는 계약이었다.
그 계약에는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함이 있었다. 하지만 태운은 자신이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한 모든 부분에 남자의 손이 개입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 남자가 지불하는 만큼 자신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려다봐도 핸드폰에 전송된 메시지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태운은 들리지 않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주사는 다 들어간 거 같은데. 어떡할래? 병실 잡을까? 아니면 집에 가서 쉴래?”
“호텔로 가겠습니다.”
태운의 말에 매니저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룻밤을 꼬박 CF 촬영을 하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태운에게 거의 사정하다시피해서 병원으로 데려와 링거를 맞춘 것이 세 시간 전.
그래도 드라마 촬영을 할 때는 배역을 위해서라도 꾸역꾸역 음식을 속으로 우겨 넣기라도 했었는데, 잠시 갖는 공백기에는 그것도 힘든지 태운은 요즘 통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매니저가 힐끗, 티 나지 않게 태운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친 태운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서 매니저는 그의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결국 매니저가 더 이상 태운의 표정을 살피는 것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켜, 호출기를 누르자 금방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가 팔뚝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을 빼자 붉은 피가 방울방울 흘러나와 지혈을 하는 알코올 솜을 붉게 적셨다. 태운은 자신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있어. 수납하고 올게.”
“저 그냥 택시 타고 가겠습니다. 그게 편할 것 같아요.”
“그 몸으로 무슨.”
일어나려는 태운을 억지로 침대에 다시 앉히고 매니저는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 * *
퇴근 시간이 겹쳐서 도로가 혼잡했다. 병원에서 호텔까지 거리는 길지 않았는데 퇴근 차량과 맞물려서 도로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태운은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지루한 시간을 견뎌 내었다.
남자가 묵는 객실은 일반 투숙객들과는 다른 주차장 입구를 사용했다. 개별 라운지가 딸려 있었고 호텔에서 발급한 카드를 인식시켜야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만 올라갈 수 있었다. 철저한 보안이었다.
태운은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자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남자를 맞을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 앞에 서서, 태운은 객실 호출용 벨을 눌렀다. 남자가 없으리라는 것쯤은 알았지만 태운은 시간차를 두고 세 번 정도 벨을 눌렀다. 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그제야 출입 카드를 찍었다.
남자는 객실 안에 없었다. 태운은 그것만 확인하고 욕실로 들어가 입고 온 옷을 벗고, 잘 개어 선반에 넣었다. 태운은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섰다. 날카롭게 생겼으나 하얗게 질린 남자가 거울 안에 서 있었다.
태운은 차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되었다.
다만 거울과 등을 지고 팔뚝에 거슬리게 붙어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가 주삿바늘을 빼내고 붙여 준 거즈를 떼어 내었다. 거즈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이제 다른 준비를 할 차례였다.
태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한데도, 남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하는 준비 행위에는 적응되지 않았다. 몇 번을 해도, 아니 몇 천 번을 한다 해도 적응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태운은 눈을 떴다. 일련의 행위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와, 벌을 서듯 응접실에 서서 남자를 기다리던 태운은 몸이 극도로 피곤해 소파에 앉았다가 잠시 정신을 놓았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서 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몸이 지치면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몇 분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다. 그것을 수면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조차도 태운에게 긴 잠이 되지는 못했다.
일주일 내내 제대로 자지 못한 컨디션으로 꼬박 하루 동안 뜨거운 조명 밑에서 CF 촬영을 했던 것은 확실히 몸에 엄청난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목이 꺾인 자세로 잠이 들었던 탓에 목이 뻐근했지만 태운은 느끼지 못하고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태운은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몇 차례 눈을 깜빡거리자 조금씩 시야가 점차 돌아왔다. 태운은 무의식중에 남자의 흔적을 찾았다. 자신이 소파에서 몇 분이나 이러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이미 호텔로 돌아왔을 수도 있었다.
한참을 응접실에 망연하게 서 있던 태운은 욕실 문을 열고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는 생각에 태운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황망한 태운의 표정을 보고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턱 끝으로 침실 쪽의 방향을 가리켰을 뿐이었다. 그 턱짓의 의미를 아는 태운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혀를 아프도록 물며 표정 없이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운은 생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남자가 하는 대로 견뎌 내면 되었다. 그것이 자신이 남자에게 치러야 할 대가였다.
태운은 입고 있는 가운을 벗고 침대맡에 섰다. 무의식중에 숨을 참았다가 다시 뱉어 내기를 몇 번. 남자가 침실로 들어왔다. 가운 안으로 드러난 남자의 몸은 늘 그렇듯 위협적이었다. 태운도 뼈대가 얇은 편은 아닌데 남자는 뼈대부터가 곧고 굵었다. 그 위를 단단한 근육이 덮고 있었다.
몸이 뻣뻣하게 긴장하자 태운은 이상하게 피로감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으면 잠들 것만 같았다. 태운은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혀를 찢을 듯이 이로 씹었다.
협탁에서 콘돔과 젤을 꺼낸 남자가 태운에게 걸어왔다. 남자가 다가오자 태운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다시 인내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었다.
남자가 가운을 벗었다. 남자의 성기는 전혀 발기되지 않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위협적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성기 사이를 다시 눈짓했다. 손을 사용해서든 입을 사용해서든 성기를 세우라는 신호였다. 태운은 눈을 길게 감으며 남자의 발치에 꿇어앉았다.
태운은 바들바들 떨리는 눈꼬리를 숨기기 위해 눈을 길게 감았다. 그리고 혀로 입술로 축이고 입술로 이를 감쌌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망설였다. 매번 하는 일이지만 태운은 매번 망설였다.
“왜 그렇게 하기 싫어 죽을 것 같은 얼굴이야.”
남자의 말에 태운이 화들짝 놀랐다. 표정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태운은 아프게 혀를 깨물었다. 남자가 자신의 표정을 지적한 것은 처음이었다. 다시금 소속사 사장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방긋방긋 웃어.’
사실 남자를 처음 만났었던 그 필사적이었던 날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기억이 없었다. 남자가 지금까지 그런 자신을 잘 참아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운은 그래서 웃으려고 노력했다. 카메라 앞에 서면 노력하지 않아도 쉬운 일인데 이상하게 그의 앞에서 웃으려고 하자 웃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남자에게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남자의 성기를 물고 남자의 몸 쪽으로 얼굴을 붙이는 행동밖에는 할 수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더라. 태운은 기계적으로 입을 움직이면서 생각했다. 그저 돈이 필요했다. 막 성인이던 태운이 그렇게 큰돈을 구하기 위해서는 소속사 사장이 건네는 계약 서류에 사인을 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남자에게 몸을 내어 주는 일을 치욕이라고 느끼면서도 태운은 그만둘 수 없었다. 끔찍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태운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꾹 감았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니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자신을 지우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지만 살 수 있었다. 태운은 자기 자신으로는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태운은 연기에 더 집착했다. 적어도 연기를 할 때만큼은 그 배역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 시궁창 속에서 태운이 유일하게 도피할 수 있는 장소는 카메라 앞뿐이었다.
태운의 입안에서 남자의 성기가 어느 정도 발기했다. 태운의 입이 찢어질 듯 벅찼다. 숨이 부족해서 태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순간 남자가 쑤욱 하고 태운의 입에서 성기를 빼냈다.
남자가 침대 위에 내려 두었던 콘돔을 들어 비닐을 뜯은 다음, 스스로 발기한 성기에 씌웠다. 그리고 침대 위로 올라가라고 태운에게 눈짓했다. 태운은 여전히 혀를 짓씹은 채로 침대위에 올라갔다.
단번에 침대 위로 올라온 남자는 태운의 다리를 양옆으로 벌리며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차가운 젤이 자신의 몸에 닿는 느낌에 태운은 작게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남자는 태운의 항문 위로 젤이 줄줄 흘러내릴 때까지 짠 후 그대로 아무런 전희도 없이 귀두부터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으으.”
그 이물감에 태운이 몸서리쳤다. 소리를 죽이려고 했지만 완전히 삼키지 못한 비명이 소리가 되어 뿌려졌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태운의 골반을 단단하게 잡았다. 그리고는 단단한 육체를 태운에게 붙이며 귀두 부분만이 태운의 안에 들어가도록 얕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으, 으으!”
자신의 몸에 파고드는 단단한 이물감에 태운은 다시 한 번 길게 진저리 쳤다. 그 순간 태운은 참을 수 없이 피로해졌다. 정신을 제대로 잡고 있어도 모자란 이런 순간에 왜 잠이 몰려오는지는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혀를 짓씹으며 다시 한 번 태운은 정신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방긋방긋 웃으며 남자를 기껍게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남자를 불쾌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태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의해 인형처럼 흔들리던 태운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태운이 눈을 뜨자 담배 연기가 방 안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자꾸 이러는지 스스로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몸은 여전히 무겁고 피곤했다. 하지만 태운은 한가하게 침대 위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흐릿한 시야 속, 태운은 담배 연기 끝에서 남자를 찾았다. 남자는 침대 끝에 태운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태운을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깨우지 않은 것인지 깨웠는데도 자신이 일어나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태운은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던 상태였다.
남자 역시 알몸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보니 그나마 다행히도 긴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의 태만에 태운은 망연해졌다.
차라리 행위를 끝내고, 객실을 잡아 수면제를 먹든 아니면 그냥 잠에 들었다면 조금 나았을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 건 태운에게는 너무 버거웠다. 피로가 그를 짓눌렀지만 태운은 우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태운의 얼굴에는 채 숨기지 못한 피로가 묻어 있었다.
“막가기로 방향 설정을 바꿨나 봐.”
태운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에 남자가 태운이 깨어난 것을 눈치챘는지 나직하게 비꼬았다. 더 이상 창백하게 질릴 수도 없는 얼굴을 한 채 태운은 아랫입술을 이로 물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하는 사죄의 말인지 태운은 아득했다. 남자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몸이고 남자가 제게 유일하게 원하는 것도 몸이었다. 그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게 벌써 두 번째였다. 태운은 입이 썼다.
“말했지 않나. 하기 싫으면 그만두라고.”
남자의 목소리에는 고조가 없었다. 나직하고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더 두려웠다. 태운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제대로 사고가 되지 않았다.
태운은 스스로가 굉장히 이율배반적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와의 관계를 견딜 수 없어 하는 주제에 남자에게 버려지는 것은 두려웠다. 소속사 사장이 뻣뻣한 태운의 행동을 보며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가슴을 탕탕 치면서도 다른 소속 연예인들처럼 진창으로 굴리지 못하는 이유는 태운이 남자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었다. 태운이라고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태운은 남자가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남자를 견뎌 내고 나면 희망이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소속사 사장은 항상 태운에게 말했다. 남자에게 버려지는 순간 더욱더 심한 진창에 굴려 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태운은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수많은 소속 배우들이 바닥을 기는 모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은 태운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태운은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남자의 앞에 섰다. 머리가 징징 하고 울렸다. 남자는 여전히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태운은 입술을 악물며 남자 발치에 무릎을 꿇으려다가 멈칫했다. 남자에게 비난을 받았던 일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태운은 할 말이 없었다. 변명거리도 없었지만 있었다고 해도 태운은 말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태운이 차마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미련하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담배를 끝까지 피운 남자는 침대 위에 올려놓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몇 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태운에게는 무척 길게 느껴졌다.
“하고 싶습니다…….”
태운의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뇌가 찢어지고 몸에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태운은 속으로 몇 천 번을 깨지고 부서졌다. 태운의 말에 남자는 정말로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그것은 태운을 더 참담하게 만들었다.
“해 봐, 그럼.”
태운의 이가 부딪치며 덜덜 떨렸다. 태운은 그것을 숨기기 위해 혀를 더 아프게 물었다. 태운이 무릎을 세워 남자의 발치에 앉자 남자가 다리를 벌려 주었다. 태운은 필사적으로 망설이지 않고 남자의 성기를 입에 담았다. 생리적으로 구역질이 밀려 올라왔다.
하지만 태운은 한 번에 남자의 성기를 목구멍까지 밀어 넣었다. 그대로 숨을 참자 흡착력이 강해지며 남자의 성기가 발기하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을 오므렸다. 성기를 조금씩 뱉었다 다시 안으로 밀어 넣으며 태운은 성기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치익, 담배 끝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태운의 어설픈 모습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다시 담배를 문 것이었다. 남자의 발기한 성기가 목젖을 자꾸 건드리자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태운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태운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 태운의 보기 좋은 턱 밑을 타고 바닥으로 흘렀다. 다물지 못하는 입이 아파오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산소가 부족해진 가슴은 고통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운은 남자의 성기를 애무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
남자의 성기가 태운의 입안에서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때 태운은 꽉 감았던 눈을 떴다. 그대로 눈동자만 올려 남자를 응시했다. 이대로 입안에 사정할 건지 아니면 밑에 사정할 건지 남자의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조금 나른해 보였다. 남자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태운의 얼굴 위로 회색빛의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태운의 눈가가 일그러졌고 그 순간 남자는 태운의 입안에 사정했다.
태운은 남자가 뿜어낸 액을 모두 삼켰다. 토기가 밀려왔지만 참았다. 태운이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다였다. 이런 상황까지 몰렸으면서도 그랬다. 그런 태운의 얼굴에 몸이 동한 남자가 태운에게 침대에 누울 것을 눈짓했다. 입에 남는 비릿한 향에 태운은 다시 구역질이 밀려왔지만 남자의 눈짓에 따라 침대에 얌전히 누웠다.
침대에 눕자 몸이 비명을 질러 왔다. 태운은 침대 시트에 맨등이 닿자 그제야 자신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 성기에 콘돔을 끼운 남자가 태운을 눌러 왔다. 한 번 사정했음에도 다시 발기한 남자의 성기는 단번에 태운을 꿰뚫었다. 태운은 차마 비명을 지를 수도 없어 이를 물며 비명을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