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배우는 벨을 세 번 울린다 (1/15)

1. 배우는 벨을 세 번 울린다

[20시 호텔]

다시 한 번 문자를 확인한 태운의 입에서 나온 것은 초조한 한숨이었다. 문자에 통보된 여덟 시까지는 이제 이십 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대본이 늦어져 방송 당일까지 촬영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라 신경이 한껏 날카로운 감독 앞에서 같은 장면을 여섯 번이나 NG 낸 여배우는, 감독에게 좀 심하다 싶을 정도의 말을 듣고 울면서 촬영장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두 시간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모두들 감정을 수습하고 금방 돌아오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그것이 삼십 분이 넘어가고, 촬영장을 사색이 된 채로 뛰어다니는 그 여배우의 매니저를 발견하고 나서부터 촬영장에 있는 모두에게 비상이 걸렸다.

안 그래도 쌀쌀하던 차에 저녁이 되면서부터는 온도가 영하까지 내려가 버렸다. 이런 날씨에 촬영용으로 얇은 잠옷 하나만을 걸친 여배우는 자신의 매니저에게도 알리지 않고 말 그대로 촬영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늘 방송되어야 할 분량의 마지막 컷을 아직 찍지 못했다. 평소 촬영이 지연되거나 하면 태운에게 대기실로 들어가 잠깐만이라도 눈을 붙이라고 했을 감독이 창백하게 질려 촬영장에 대기해 달라고 부탁까지 한 상태였다.

방송 시작 시각은 열 시. 그 시각까지는 두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지금 촬영을 완전히 끝냈다고 해도 편집까지 하려면 빠듯했다. 여배우가 돌아오는 대로 촬영을 마치고 편집실에 넘긴다고 해도 방송 시간 전까지 편집을 마치기는 이미 늦어 버린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금 찍어야 할 장면은 오늘 방영될 방송 중간—그것도 스토리에 꼭 필요한—부분이었기 때문에 건너뛰고 다른 장면을 우선 붙여 편집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여배우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정말 커다란 방송 사고가 날 상황이었다. 예정대로라면 태운은 촬영을 마치고 호텔로 가 있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철없는 주연 여배우가 친 대형 사고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촬영장에 발이 묶여 버렸다.

이제 약속 시간 십 분 전. 호텔은 촬영장 근처였지만 여전히 여배우는 실종 상태였다. 태운이 긴 망설임 끝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길게 신호음만 갈 뿐이었다.

남자의 명령이라면 촬영이야 어떻게 되더라도 이대로 남자에게 가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태운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 * *

세트장 구석에서 울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는 여배우는 방송 한 시간 전에 매니저의 손에 끌려 들어왔다. 앵돌아진 여배우의 표정은 그녀의 매니저가 해명한 내용의 신빙성을 떨어지게 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감독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애써 화를 누르며 촬영 재개를 위하여 스태프들을 재촉했다.

모든 스태프들이 언제라도 다시 촬영할 수 있도록 대기하던 상태였기에 촬영은 곧바로 재개되었고 다행히 정신을 차린 여배우는 더 이상의 NG 없이 한 번에 촬영을 마쳤다. 하지만 촬영을 마쳤을 땐 이미 방송 시간 십 분 전이었다.

일단 먼저 편집된 부분까지 송출하고, 마지막으로 찍은 장면은 대기하고 있던 오토바이 퀵으로 방송국까지 배달되어 편집을 한 후 이어 방송할 예정이라고 했다. 방송 사고가 날지 아닐지는 정말로 신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촬영이 끝나자 여배우는 쌩하니 돌아갔고, 여배우의 매니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촬영장에 있는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백배사죄를 했다. 서둘러 촬영장을 빠져나가려던 태운까지 붙잡고 한참이나 사과의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태운은 생각보다 더 늦어졌다.

열 시 사십 분.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태운은 호텔 객실 문 앞에서 심호흡을 두어 번 내뱉었다. 그리고 객실 문 옆에 위치한 벨을 눌렀다. 조심스럽게 벨을 한번 누르고 문 옆쪽으로 물러서자, 한참 후에서야 샤워 가운만을 걸친 남자가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현관으로 들어온 태운이 허리를 굽혀 남자에게 인사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리를 굽힌 태운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태운은 남자가 객실 안으로 들어가고 한참 후에야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보이지 않는 안쪽을 응시하며 태운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럽게 긴 복도를 걸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니, 남자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태운이 응접실을 가로질러 남자의 지척까지 걸어왔지만 남자는 태운을 보지 않았다.

잠시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던 태운은 남자의 발치에 무릎을 굽히고 꿇어앉았다. 태운의 눈높이가 점점 낮아져 이제는 시야에 가운 사이로 드러난 남자의 다리가 들어왔다. 남자는 그제야 태운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피우고 있던 담배 연기를 태운의 얼굴에 뱉어 냈다.

태운은 수치심에 잠시 몸을 떨었다. 태운의 표정이 잠시 굳었지만 곧 여느 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담배 연기에 눈이 따가웠다. 하지만 태운은 눈을 감지는 않았다. 남자는 그런 태운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태운의 얼굴에 뱉었다.

“요즘 많이 바쁜가 봐.”

늦은 이유에 대하여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태운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도 남자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변명 같은 것이 통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태운은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태운을 보며 다시 어이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태운은 마땅히 할 대답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문 채였다. 하지만 태운의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남자는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끝나는 대로 호텔로 들어와.”

남자의 말에 태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지금 찍고 있는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바로 영화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미 계약서를 작성했고 세부 문제를 제외하면 거의 협의가 끝난 상황이었다.

태운이 며칠 전 남자에게 허락을 구했을 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운은 그것을 무언의 긍정으로 이해하고 일을 진행했다. 남자가 벌써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테니 아무래도 영화 촬영을 취소하라는 것은 이번 지각에 대한 벌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각에 대한 벌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호텔에 들어와 있으라는 것은 하루 종일 스물네 시간 내내 남자를 맞을 준비를 하라는 말과 같았다. 남자가 언제 찾을지 몰라 함부로 밖에 나갈 수도 없고 깊게 잠들 수도 없었다. 게다가 몸 또한 언제든지 남자에게 내어 줄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바쁜 사람이었고 태운을 자주 찾지는 않았다. 아마 태운이 호텔로 들어온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런 남자를 기다리며 스물네 시간 내내 긴장한 채로 일주일을 보내고 한 달을 보내면 무덤덤을 흉내 내고 있는 태운조차도 미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지만…….

태운은 마디 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요 며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어떤 대본을 생각하며 띄엄띄엄 말을 시작했다.

“영화…… 촬영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취소해.”

오랜 고민 끝에 겨우 내뱉은 말이었는데 남자는 너무 쉽게 취소를 말했다. 익숙한 일이고, 남자의 명령은 절대로 거부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태운은 자꾸만 딱딱하게 굳어지는 입매를 막을 길이 없었다.

태운은 애교나 교태를 부려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정도로 약삭빠른 성격이 되지 못했다. 데뷔 초 감독들이나 방송 관계자들에게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뻣뻣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남자의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죄송하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으니 벌을 취소해 달라고 발치에 엎드려 빌기라도 해야 하는데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태운은 한참 동안 입술을 깨물고 말없이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그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태운이 한참 고민 끝에 입술을 달싹하는 순간 남자가 자신의 다리 사이를 눈짓했다. 결국 태운은 무엇 하나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목적을 잃은 입술 끝이 부들부들하고 떨렸다.

남자의 눈짓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 없는 태운은 수치를 견디며 무릎걸음으로 기어 남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눈을 꾹 감으며 속으로 한숨을 한 번 삼켜 낸 태운은 빨간 혀를 길게 내어 입술을 축축하게 적셨다. 이쪽으로 거의 무지했던 태운에게 남자가 취향대로 직접 가르친 것들이었다. 남자는 태운이 입술을 축축하게 적시다 못해 타액이 입술 밖으로 흐를 정도가 되어서야 그다음 행동을 허락했다.

타액으로 입술을 빨갛게 적신 태운이 손을 뻗어 남자의 샤워 가운을 가르자 곧바로 흉흉한 크기의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속으로 다시 한숨을 들이켠 태운이 남자의 귀두를 혀로 감아 적셨다. 샤워 코롱 향이 코끝에 와 닿았다.

태운은 입술을 오므려 자신의 이를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 축축해진 성기를 입에 담았다. 아직 부피를 더하기 전이었지만, 남자의 성기는 태운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익숙해질 법한 일이었음에도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태운은 눈을 감았다. 혀로 남자의 성기를 감싸듯 할짝대며 남자의 성기를 점점 목 깊은 곳까지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그 상태로 태운이 잠시 망설이자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찼다. 태운은 그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느껴졌다. 태운이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셔 흡입력을 크게 만들고 고개를 천천히 빼 왕복 운동을 시도했지만 이미 늦어 버린 것인지 남자가 태운의 뒤통수를 쥐어 왔다.

“읍, 읍읍.”

태운의 머리채를 잡아챈 남자가 거칠게 머리채를 당겨 자신의 성기를 태운의 목구멍 깊은 곳까지 밀어 넣었다가 다시 빼기 시작했다. 태운은 차마 반항하지 못하고 힘이 빠진 인형처럼 남자의 손을 따라 휘둘렸다.

“혀 움직여.”

태운이 넋을 놓고 휘두르는 대로만 휘둘리자 남자가 다시 태운의 목 깊은 곳에 성기 끝까지 처박으며 말했다. 태운이 미약하게 혀를 움직여 봤지만, 남자의 성기는 점점 부피를 더해 턱이 다 아릴 정도인 데다 워낙 그 손길이 거칠어 무엇을 하기가 힘들었다.

“제대로 해. 이것마저 쓸모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면.”

생리적으로 눈에 눈물이 그렁하게 맺힌 태운이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남자가 태운의 머리채를 잡고 무자비하게 움직이던 손을 떼어 냈다. 그러자 밀리는 힘에 의해 태운이 뒤로 넘어졌다. 입에서는 남자의 성기가 확 하고 빠졌다. 태운은 모자랐던 숨을 몰아쉬며 다시 몸을 일으켜 망설임 없이 남자의 성기를 물었다.

다시 숨을 들이마신 태운의 뺨이 홀쭉해졌다. 태운은 입술로 감싼 치아로 남자의 성기를 살살 긁으며 혀로는 귀두를 할짝거렸다. 그리고 성기 끝을 쪽 하고 빨면서 고개를 움직여 남자의 성기를 목구멍 끝까지 밀어 넣었다가, 다시 뱉으며 숨을 내쉬었다.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그제야 남자가 흠 하고 목 안쪽에서 끓는 소리를 냈다. 턱이 빠질 듯 아파 왔고 침이 턱밑으로 줄줄 흘렀다. 한참을 그 행위를 반복하고 나서야 남자가 왕복 운동을 하는 태운의 둥근 머리를 지긋하게 눌렀다.

어느 순간 태운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밀어낸 남자가 태운의 얼굴 위로 정액을 뿜어냈다. 태운은 얼굴 위로 뿜어진 미적지근하고 비린내 나는 액체를 느끼며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태운의 머리 위에서 어느새 일어난 남자가 픽 하고 웃었다.

“너한테 나를 기다리게 할 만큼의 가치는 없어. 계속 이런 식일 거면 그만둬.”

그 말을 남기고 남자는 침실로 걸어갔다. 태운이 그 뒤에 대고 “저기, 잠시만…….” 하고 말했지만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모멸감과 비참함이 잔뜩 밀려왔다. 그대로 닫히는 침실 문 밖에서 태운은 주먹을 말아 쥔 채로 한참이나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얼굴을 닦지도 못하고 심호흡을 했다. 태운은 한참 후에야 겨우 마음을 정리하고 일어서서,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던 탓에 저릿한 다리로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렀다.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 아니 드라마 끝날 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 전까지만……. 한숨을 또 내쉰 태운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눌어붙은 것 같은 비릿한 점액질을 대충 닦아 내고는 도망치듯 서둘러 객실 안을 빠져나갔다.

매니저에게는 호텔에서 하루 묵는다고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오라고 말해 놓았다. 태운은 정말로 체크인을 할까 하다가 더 이상은 이곳에 있고 싶지 않은 기분에 무심히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 몸이 고되더라도 집에 가고 싶었다. 태운은 매니저에게 호텔이 아니라 집으로 오면 된다고 문자를 넣었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호텔 로비로 걸어갔다.

객실 외부 화장실에 들러 세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서 여전히 남자의 유쾌하지 못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태운의 기분은 더 가라앉았다.

* * *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태운은,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건네준 A4 용지 한 장을 받고는 정말 기분이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하루 만에 다음 회 대본이 뚝딱하고 나오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고작 A4 용지 한 장에 겨우 반만 채워진 활자들을 보자 태운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드라마는 최종회까지 이제 겨우 4회만이 남았고 지난주부터는 정말 대본도 촬영도 실시간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촬영과 동시에 편집하면 바로 송출이 되는 상황이니 생방송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촬영 전 몇 번이나 대본을 보며 대사 하나, 지문 하나까지도 분석해야 하는 태운에게는 정말 난감하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어제는 하늘이 도운 탓에 방송 사고를 면했지만, 아슬아슬한 촬영 여건상 어제 같은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사실 어제도 방송 사고가 날 뻔한 표면적인 이유는 철없는 여배우의 촬영장 이탈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계속되는 쪽대본과 방송 당일까지 이어지는 생방송과 다를 바 없는 촬영에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이었다. 촬영 시작 초기라면 웃으며 넘어갈 일도 지금은 싸움이 됐다.

벌써 한 달 가까이 매일매일을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 탓에 다들 예민하고 짜증이 늘었다. 스타 감독이라 촬영 초기에는 현장의 독재자로 군림하던 PD도 자존심을 굽히고 배우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다독이고, 스태프들의 입단속까지 해 가며 어제 일을 외부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쉬쉬 묻고 있을 정도였다.

“이게 다…… 입니까?”

“……그게, 다음 씬은 탈고가 되는 대로 바로 보내 준다네.”

태운은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워지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매니저도 대본이라고 전달 받은 것이 A4 용지 반 장 분량에 그저 씬 하나인 것을 보고는 황당해 AD에게 한소리를 한 상황이었지만, 태운의 신경이 날카로워 보이자 제가 잘못한 것처럼 태운의 눈치를 살폈다.

“촬영은 언제랍니까.”

“세 시간 있다 여의도. 앞으로 한 시간 정도는 대본 볼 여유 있을 거야.”

매니저의 말을 듣자 태운은 다시 어이가 없어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감독이고 작가고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주연을 합쳐 이번이 일곱 번째 드라마였는데 이 정도로 경우가 없는 현장은 없었다. 촬영이 후반으로 갈수록 쪽대본이 나오는 것은 사전 제작 드라마가 아닌 이상 비슷했지만 한 번도 촬영 세 시간 전에 반 장짜리 A4용지를 대본이라고 받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태운은 안 그래도 끊어지기 일보 직전인 신경줄이 점점 더 죄어 오는 느낌이 들었다. 팽팽하다 못해 끝이 타들어 가다가 정말 말 그대로 펑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저 이런 식으로는 촬영 못합니다.”

이렇게 말해 봐야 매니저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재촉한다고 해서 대본이 빨리 나오는 것도 아님을 알았지만 그래도 태운은 이 말을 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자를 만나고 돌아온 날이면 항상 드는 자괴감을 태운은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더 깊은 늪에 빠질 뿐이었다. 돌파구는 없었다. 그 현실을 잊기 위해 태운은 자신을 잊고 타인으로 살 수 있는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연기에 몰입할수록 자신은 지워졌고 배역만 남게 됐다.

하지만 요즘은 전혀라고 할 만큼 몰입이 되지 않았다. 대본을 외울 시간도 빠듯해 카메라 앞에서 그저 머리로 외운 대사를 기계적으로 읽고 있었다. 하루 종일 스스로로 삶을 사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좀만 더 참으면…….”

“그게 아니에요. 전 요즘 카메라 앞에 서서 외운 대사를 그대로 말하고 있어요.”

태운은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매니저는 그런 태운을 보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태운은 자신이 하는 말이 말해 봐야 소용없는, 그저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 이 순간 대본을 보는 게 현명하다는 것 또한 알았다. 하지만 정말 투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런 행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매니저가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매니저가 아니라 소속사 사장, 아니 방송국 국장이 나선다고 해도 그저 작가를 재촉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현장은 이런 상황인데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시청률 덕분인지 방송국에서는 연장을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까운 소문들이 여러 매체를 통하여 쏟아졌다. 감독, 작가, 출연 배우 모두 난색을 표하고 있지만 방송국 수뇌부들은 날로 높아져만 가는 광고 수입 때문에 현장 상황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박 감독한테 다시 한 번 전화해 볼게.”

매니저의 말에 태운은 “감독이 작가를 재촉하는 것밖에 뭘 더 할 수 있습니까.”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한숨과 함께 그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태운이 그 말을 그대로 소리라도 지를 수 있는 성격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속을 까맣게 좀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태운이 다시 숨을 삼켜 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약통에서 알약을 두 개 꺼내 물 없이 삼켰다. 매니저가 그런 태운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물기 없이 말라 버린 목구멍으로 두개의 약이 뻑뻑하게 넘어갔다. 약이 잠시 머물렀던 입 안이 썼다. 매니저가 매니저 본인의 이름으로 대신 병원에서 처방받아 온 항정신성 신경안정제였다.

“……죄송해요. 그냥 좀 예민했습니다, 감독이라고 별 방법이 있겠습니까.”

매니저가 정수기에서 물을 떠다가 태운에게 건넸다. 태운은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테이블에 내려놨다.

“약이 독해서 물 많이 마셔야 돼.”

매니저가 거의 물이 줄지 않은 컵을 테이블에서 들어 다시 태운에게 건넸지만, 태운은 “괜찮습니다.” 하고 거절했다.

“그것보다. 이거 다 먹어 가요. 한 병 더 부탁드릴게요.”

“악 타 온 지 얼마 안됐잖아.”

“…….”

“이태운 이거 비타민 아니야. 이런 식으로 막 먹으면 안 돼.”

매니저가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고 태운을 바라봤다. 태운은 “저도 알아요. 근데 없으면 버틸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고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처방받아 온 지 채 이 주가 안 된 약이었다. 한 병에 한 달 치라고 했으니 한 달 분을 태운은 이 주 만에 복용한 것이었다.

별것 아닌 소문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바닥이라 정신과 같은 곳에는 절대 갈 수 없는 태운을 위하여 어울리지 않는 우울증 환자 흉내까지 내며 정신과에서 수면제와 안정제를 처방받아 주고 있지만, 매니저는 지금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태운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유하는 편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태운의 상황에 개입을 하는 것이 맞는 선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버티고 있던 어리고 나약했던 인생에 끼어들었다가 모든 것을 망쳐 버린 기억이 떠올랐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급격하게 활력을 찾는 것 같았던 어린 배우는 그 활력을 끌어모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태운에게 그때와 같은 권유를 할 수 없었다.

“수면제…… 수면제는 얼마나 남았어?”

“그건 좀 남았습니다.”

어쩐지 다급하게까지 느껴지는 매니저의 말에 태운이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매니저가 그래도 조금,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어진 말에 다시 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요즘 거의 잘 시간이 없었지 않습니까.”

할 말을 찾지 못해 한숨만 내쉬던 매니저는 결국 핸드폰을 꺼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회피를 선택했다. 일부러 열어둔 것인지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매니저가 총감독에게 전화를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운은 매니저의 통화 소리를 메트로놈 삼아 A4 용지에 적힌 대본을 읽어 나갔다. 매니저가 자신을 걱정하는 척하며 약을 타 오는 것을 거절하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정신과 상담을 권유하는 편보다 이쪽이 편했다.

매니저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는 성격이었다. 호텔로 별장으로 불려 다니는 태운을 보면서도 그 뒤에 있는 존재를 물은 적 없었다. 심지어는 무슨 말을 하려는 태운을 제지하면서 내가 평생 네 매니저 일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있냐며, 날 어떻게 믿냐고 네 비밀은 너 혼자만 품고 있으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A4 용지 반 장에는 겨우 대사 세 개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태운의 대사는 그중 하나밖에 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책 중간에서 어떤 페이지인지도 모르게 반만 찢겨져 나온 종이만큼이나 뜬금없는 것이었다. 태운은 그 활자들을 연속해서 몇 번이나 읽었지만 자신이 연기해야 할 캐릭터를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어떤 대본이 생각났다. 정말로 잘 짜인 대본이었다. 줄거리만 확인하고 꺼림칙한 기분에 한쪽으로 치웠었는데, 감독이 직접 찾아와 태운에게 출연을 권했다. 무작정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읽어 나간 대본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끌리기도 했다.

칸 영화제에 세 번이나 작품을 출품한 감독은 그 작품들이 모두 새로 찍을 이 영화를 위한 시도들이었다고 말하며 선선하게 웃었다. 태운은 자꾸만 그 감독의 미소가 생각났다. 그것은 정말로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를 마주한 태운은 결코 그 작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

촬영장은 오늘따라 소란스러웠다. 다들 쉬쉬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젯밤에 일어났던 사건의 여운이 촬영장을 조여 오는 탓이었다. 여배우는 이미 촬영장에서 마음이 떠 버린 듯 행동했고 그 때문에 감독의 신경은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워졌다.

심지어 방송국 쪽 스태프들은 배우들과 배우들의 관계자들까지 피해 다니고 있는 상황이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배우 측 관계자들은 A4 용지 한 장을 준 다음에 그 이상은 소식이 없는 대본에 대하여 묻기 바빴다. 대본을 재촉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방송국의 일개 스태프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다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소란도 잠시였다. 촬영장엔 그들 모두를 경악시킬 만한 커다란 폭탄이 다시 떨어졌다.

“조감독, 이게 무슨 소립니까. 누구 맘대로 연장이 확정이에요? 저는 기억 안 나는데 혹시 우리 회사에서 누구랑 협의하셨습니까? 설마 아무 협의도 없이 기사 먼저 내신 건 아니겠죠?”

드물게 화가 난 목소리로 태운의 매니저가 조감독에게 소리를 높였다. 입으로는 계속 사과의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사실 조감독조차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송국 관계자가 했다는 말을 인용해서 드라마의 8회 연장 결정이 내려졌다는 기사 하나를 시작으로 비슷한 내용의 기사들이 포털 사이트를 뒤덮었다.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배우 이름과 드라마 제목이 오르내렸다.

촬영 준비를 하고 있던 촬영장은 촬영이 진행이 안 될 정도로 어수선해졌다. 평소 진중한 성격인 태운의 매니저조차 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대한 항의 표시로 카메라 앞에서 촬영 준비 중인 태운을 대기실로 밀어 넣었다.

태운을 필두로 배우들이 촬영장에서 다 철수해 버리자, 스태프들은 혼비백산했다. 철수하는 태운의 뒤를 조감독이 따랐다.

“죄송합니다. 근데 저희도 전달받은 바가 없습니다. 지금 감독님께서 확인 중에 있으니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드라마국 국장님이 인터뷰하셨다는데, 감독님이 모르신다는 사실을 지금 믿으라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연장 밀어붙이려는 생각인 것 모를 줄 알아요?”

A4 용지 반 장에 달랑 쓰인 대본을 넘겨주면서 8회 연장이라니, 그것도 오늘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소리가 없었었다. 그저 뜬소문이라고 취급할 수도 없는 것이 기사에 방송국 드라마국 국장의 이름이 명확하게 언급되고 있었다.

“뭔가 착오가 있을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기자들 아시잖아요. 그렇게 하고 싶다는 식으로만 인터뷰해도 그렇게 하겠다. 하고 기사 내잖아요. 감독님이 국장님이랑 통화해 알아보시겠다고 하셨어요.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10%의 시청률만 유지해도 성공이라고 이야기 되어지는, 몇 년째 이어진 시청률 가뭄 속에서 수목 드라마의 시청률이 35%를 넘나들었다. 게다가 본방송에 이어 재방송까지 연이은 광고 완판 행진을 이어 가자 방송국은 오래전부터 은연중에 연장 계획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주연 배우들은 물론 감독과 작가를 포함한 스태프들까지 난색을 표하고 있어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이미 드라마가 절반이 지났을 당시부터 쪽대본으로 촬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배우들도 물론이었지만 스태프들이라고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도 배우들은 틈틈이 눈을 붙였지만 스태프들은 그럴 시간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집에 들어간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태운이야 이번 드라마를 찍기 전에도 워낙 톱 배우였지만, 이번 드라마로 단번에 톱 스타덤에 오른 주연 여배우는 요즘 밀려드는 광고 덕분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거기에 주연 배우들뿐만 아니라 조연 배우들 몸값까지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모두들 드라마가 끝나기만을 별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장을 반기는 이가 아무도 없었는데, 방송국 측에서는 천문학적인 광고 수입이 좀처럼 포기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뜬소문이든 아니든, 조감독님 확실히 해 둡시다. 연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동의 못합니다. 태운이 드라마 끝나는 대로 광고 촬영이랑 영화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어요. 거기에 지금 대본도 종이 한 장에 나오고 있는 상황인데 연장이 말 안 되는 거는 조감독님도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그저 더 이상 나쁜 일 없이 빨리 촬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윗분들께도 그렇게 전해 주세요. 감독님 오시는 대로 말씀드리고 소속사에서 정정 기사 내겠습니다.”

매니저의 말에 다시 조감독이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책임이 없다고 알면서도 말투가 절로 날카로워지는 것은 다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탓이었다. 좀처럼 재촉하거나 짜증 내는 법이 없는, 타인에게는 무덤덤한 성격의 태운조차 오늘 잔뜩 날카로워져 벌써 몇 번이나 대본을 찾고 있었다.

이쪽 업계에서 수년을 굴렀고, 태운의 데뷔 초기부터 그의 매니저를 맡고 있었지만 이토록 사건도 많고, 말도 안 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촬영 현장은 처음이었다. 다른 배우분들께도 가 보아야 한다고 조감독이 대기실 문을 나서자 매니저가 태운의 곁으로 다가왔다.

“별일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이런 식으로 연장을 밀어붙일 모양인데 어차피 바로 영화 들어갈 거라 하고 싶어도 못 해. 물론 네가 하고 싶지도 않겠지만. 영화사 측에서도 대충 스케줄 나온 모양이고. 영화 촬영 들어가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스케줄 여유 있어질 테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

매니저의 말에 태운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곤란할 때 저도 모르게 나오는 습관이었다. 영화를 생각하자 가슴 한쪽이 답답해져 왔다. 먹은 것이라고는 물 몇 모금밖에 없는데 그것이 목에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어제 남자는 영화 촬영을 취소하고 호텔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남자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었고, 태운은 대부분의 말을 거역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생각해 보았지만 절대 그 대본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꼭 하고 싶은 작품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지러운 생각에 태운이 말없이 눈을 감고 소파 등받이 뒤로 목을 젖혔다. 태운의 길고 하얀 목이 드러났다. 하얀 목 중간에 자리 잡은 목젖이 두드러졌다.

“드라마 연장에 동의하면 안 됩니까?”

여전히 눈을 감고 목을 젖힌 상태로 태운이 웅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태운이 말을 할 때마다 목울대가 움직였다. 워낙 마른 편에다 피부가 희어서 그런지 태운이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움직이는 목울대가 더 우뚝했다.

매니저가 태운에게 집중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을 만큼 미약한 목소리였다. 태운의 핏기 없는 얼굴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조그맣게 말을 내뱉으면서도 태운은 목에서 치받아 올라오는 무엇인가를 삼켜 내었다.

태운의 뜬금없는 말에 매니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닳도록 영화 대본을 읽고,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대본을 볼 때마다 가끔 영화 촬영을 하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곤 했었는데.

방금까지만 해도 드라마 촬영 같은 것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반응 같았었는데 갑자기 연장에 동의라니. 연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저 한번 해 보는 말인지, 진심인지 매니저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매니저의 표정이 복잡해지자 태운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조금 심란해서 그랬어요.”

그리고 태운은 다시 눈을 감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바보 같았다. 드라마가 연장이 되고 조금 시간이 생기면 어떻게든지 해결이 될 것 같았다.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저 그런 바람이었다. 남자가 갑자기 바빠지지는 않을까, 아니면 마음이 변하지는 않을까.

사실 남자가 바빠진다고 해도 남자가 찾지 않는 호텔에서 하루 종일 잔뜩 긴장한 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냥 어쩌면…… 하는 그런 바보 같은 바람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태운은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태운의 가슴은 잠들었을 때처럼 고르게 움직였지만, 잠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태운은 수면제 없이는 결코 잠을 잘 수 없었다.

* * *

다들 설마 했던 예상은 사실로 드러났다. 방송국 측에서는 정말로 기사를 먼저 내고 시청자들의 연장 결정에 대한 호응을 들먹이며 배우들을 설득할 모양이었는지, 통화를 마치고 촬영장에 복귀한 감독의 표정은 난감해 보였다. 많은 히트작을 제작한 감독이었지만 작가의 늦은 퇴고와 봉급을 주는 방송국의 억지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배우 측은 모두들 학을 떼는 반응이었지만, 시간 관계상 현장에서는 촬영을 하고 연장은 각각의 소속사와 방송국이 논의하기로 하자는 감독의 고개 숙인 부탁에 철수했던 배우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촬영장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연장을 반기지 않기는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여서, 양쪽이 모두 찜찜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 방송국의 악수는 촬영 현장에는 정말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촬영장에서 완전 마음이 뜬 것은 주연 여배우뿐이었고, 나머지 배우들은 이 주만 버티자 하는 분위기였다면 오늘은 드라마를 통해 인기를 얻은 신진급 연기자들 대부분의 마음이 촬영장에서 떠나 버린 듯했다. 의지도 의욕도 없이 건성건성 카메라 앞에 섰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제대로 된 촬영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시간에 쫓겨 날림 촬영을 하던 어제보다도 더 최악이었다. 배우들은 대본을 그저 읽어 나갔다.

정말로 모두들 하루라도 빨리 촬영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어서 감독은 대체 어디부터 분위기를 다잡아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망가진 분위기는 도무지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태운은 대본을 그럴듯하게 읽는 것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능력이 형편없지는 않았다. 평소 다른 작품에서처럼 역할에 완전히 동화되어 극중 역할과 자신의 경계조차 애매할 정도로 몰입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듯하게 대본을 읽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상대 배우는 태운에게 휩쓸려 카메라 앞으로 끌려 나오게 됐다.

그것은 연기를 잘한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재능이었다. 태운의 카메라 장악력은 어떤 감독이든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게 하는 것이었다. 배역에 대한 몰입도 남달랐고 상대 배우를 카메라 앞으로 끌고 오는 것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도 쉽게 가질 수 없는 대단한 재능이었다.

카메라 앞의 태운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감독은 모니터 속의 태운을 보면서 어쩌면 가장 먼저 촬영장에서 마음이 뜬 것은 태운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모니터 속 태운은 하나도 흠잡을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지만 감독은 태운을 처음 카메라에 담았을 적 그 빛이 지금 태운에게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드라마가 매번 새로운 시청률을 갱신하면서 간접 광고는 드라마의 진행을 방해할 정도로 밀려들었고, 방송국에서 스토리에 간섭하기 시작하니 작가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없었다. 스토리가 산으로 가는 것은 물론이고 작가는 더 이상 대본 같은 것을 쓰고 싶지 않으니 작가를 교체해 버리라고 드러누워 버린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원고는 매번 늦었고 촬영 현장은 거의 생방송이나 다름없었다. 촬영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감독조차도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총체적으로 난국인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배우에게 최고의 연기를 해 달라니 불가능한 바람이라는 것을 감독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감독은 태운에게서 비춰지던 그 빛을 카메라에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 어쩐지 평생 후회가 될 거 같은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 * *

일기 예보에도 없던 세찬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촬영장의 분위기가 잔뜩 엉망이 된 데다가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자 베테랑 감독도 도무지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일단 새벽까지 휴식을 줬다. 그 덕에 태운은 반쪽짜리 쪽대본으로 일찌감치 촬영을 마치고 집에서 쉬다가 비를 맞으며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다.

사실 여기까지 온 것은 태운에게는 모험에 가까웠다. 남자의 연락 없이 스스로 남자를 찾아온 것도 처음이었다.

남자가 호텔에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남자가 호텔에 있다고 해도 태운을 반기지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태운은 이곳으로 올 수 밖에 없었다.

비바람은 더 거세질 뿐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온 탓에 물에 젖은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태운을 더 초라해 보이게 했다.

태운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문 옆에 위치한 호출 벨 위에서 한참이나 망설였다. 태운은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으면 좋겠는지 아니면 문이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 끝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쉽사리 벨을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태운은 손을 내려 코트 주머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 끝에 동그란 약병이 걸렸다. 태운은 그것을 꺼내 뚜껑을 열고 알약 두 개를 꺼내어 입안에 넣고 침을 모아 꿀꺽 삼켜 냈다.

약을 삼키고 나서 다시 뚜껑을 닫고 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약병을 밀어 넣은 태운은 다시 또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그 벨을 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태운은 한편으로는 그것을 바랐으면서도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없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다시 한번 벨을 눌렀다. 이번에도 문이 열리지 않으면 미련 없이 돌아가자, 돌아가자. 머릿속으로 그 말을 중얼거렸지만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자세 그대로 굳은 듯이 움직임이 없던 태운은 입술을 깨물며 벨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돌아서려고 하는데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객실의 문이 열렸다.

“뭐야?”

문을 열고 태운을 발견한 남자의 목소리에는 잔뜩 짜증이 섞여 있었다. 샤워 가운을 대충 걸친 남자의 까만 머리 위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벨 소리에 샤워하다가 나온 듯했다.

“일단 들어와.”

남자는 짜증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남자의 머리 위와 샤워 가운이 미처 가리지 못한 살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길을 만들었다. 태운은 우산을 내려놓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남자의 뒤를 따랐다.

긴 복도를 지나 응접실에 들어와 망부석처럼 멈춰 선 태운을 뒤로하고 남자는 욕실로 들어갔다. 태운은 망설이다가 한 번에 입고 온 코트와 목도리, 선글라스와 모자, 그리고 양말까지 한 번에 벗어 내고는 티셔츠의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밀어 올린 후 남자가 있을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 가운을 대충 수건걸이 위에 던져 놓은 남자는 커다란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욕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태운을 보며 남자가 날카롭게 물었다. 태운은 옷을 입고 있었고 남자는 나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움츠러들고 수치심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태운이었다.

남자의 눈이 태운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날카롭게 달라붙었다. 태운은 그 눈빛에 덜덜 떨었다. 몸에 각인된 공포였다. 그것은 평소 타인에게 무심한 편인 태운조차 덜덜 떨게 만들 정도였다. 태운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 공포를 견뎌 냈다.

“목욕, 시중을…… 들, 들고, 싶습니다.”

내뱉는 말이 뚝뚝 끊겼다. 몸을 잔뜩 경직한 채로 할 말을 내뱉는 태운의 반응에 남자는 작게 하 하고 코웃음 쳤다. 욕조에서 죽을 만큼 물을 먹었던 날 이후로 욕실로 들어오라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었는데, 이제는 제 발로 욕실에 들어와 있으니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남자는 태운이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것처럼 욕조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욕조는 욕조라기보다는 탕에 가까웠다. 크기도 컸지만 태운이 밟고 있는 바닥보다 아래쪽에 있어 꼭 땅에 묻힌 것처럼 보였다.

태운은 남자의 머리 쪽으로 조심스레 이동해 욕조 위 평평한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머리를 지압했다. 하지만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태운의 손길은 어린아이의 어설픈 손짓과 비슷했다.

“아, 그 시중.”

남자의 비꼬는 말에 태운의 손이 딱딱하게 굳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남자의 말은 노골적인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태운에게는 남자의 말처럼 다른 의미의 시중을 들며 자신의 소망을 풀어 놓을 만큼의 유연성이 없었다. 아니, 실은 그럴 목적으로 온 것이었지만 막상 남자의 얼굴을 보자 태운은 그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태운에게 남자는 공포였다.

“할 거면 계속하고, 아니면 나가.”

축객령과 다름없는 말에 태운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 끝에 다시 힘을 주었다. 손가락 끝으로 남자의 머리를 지압할 때마다 남자가 아닌 태운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태운은 제 입에서 나오는 커다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긴장한 상태였다.

다행히 태운의 미숙한 손길에도 남자는 욕조에 나른하게 기댔다. 그것은 배불리 먹이를 먹은 맹수의 나른함과도 맞닿아 있어 태운은 언제 소화를 마친 남자가 다시 사냥을 시작할지 몰라 섣불리 긴장을 풀지도 못했다.

태운의 손길이 머리를 지나 남자의 어깨에 닿았다. 옹골찬 근육이 가득한 남자의 등은 탄성 없는 고무를 누르는 느낌이었다. 남자의 기에 짓눌린 태운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도 잊을 정도였다.

더구나 물이 태운에게 주는 공포심이 엄청났다. 태운은 어렸을 적 깊은 강물에 빠져 죽을 뻔했었던 경험이 있었는데, 살면서 잊고 있다가 물속에서 남자를 받았던 어느 날 그 엄청난 공포가 되살아났다. 사람이 욕조에도 빠져 죽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의 패닉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태운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로 무자비한 경험이라서 태운은 그때 이후로는 물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욕조에조차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다른 시중도 같이 드는 건 어때?”

한참을 나른하게 욕조 턱에 기대 있던 남자가 노골적으로 물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태운의 손가락이 다시 멈췄다. 태운이 다시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새벽부터 다시 촬영이 있다는 것을 떠올린 태운은 이를 입술 위에서 떼어 놓았다. 터진 입술로 카메라 앞에 설 수는 없었다.

“왜 그건 또 싫어?”

뒤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는 태운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마치 보이는 것처럼 남자는 낮게 웃었다. 사실 태운 스스로도 자신이 여기까지 와 있는 이유에 대해 알지 못했다. 평소에 태운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태운은 요령이 없었다. 태운은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못했고, 힘들어도 힘들다 말하지 못했다. 그저 남자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했고, 남자가 주는 고통은 말없이 견뎌 내었다. 묵묵함, 그것은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성공의 척도가 될 수도 있었지만, 남자와 태운의 보편적이지 않은 관계에 있어서는 아니었다.

사실 연기 말고는 딱히 원하는 것이 없는 태운은 한 번도 남자에게 무엇을 요청해 보거나 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이 더욱 어려웠다.

“밖에서, 하면…… 안, 됩니까.”

태운의 말에 남자가 픽 하고 웃었다. 태운의 얼굴에서 핏기가 확 하고 빠져나갔다.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잖아. 뭐가 이렇게 까다로워.”

말을 하며 남자가 욕조에서 일어났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태운이 서둘러 샤워 볼을 가져와 남자의 몸에 조심스럽게 거품을 문질렀다. 무릎으로 서서 남자의 단단한 등과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로 샤워 볼을 문질러 내려가던 태운은 결국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눈을 질끈 감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물에 깊이는 겨우 태운의 하체까지밖에 오지 않았지만 태운은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아플 지경이었다. 다리가 물속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태운이 남자의 가슴 쪽으로 다시 샤워 볼을 가져다 대는데 어느새 태운의 머리채를 잡은 남자가 자신의 성기 위로 태운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남자의 손아귀 힘에 태운이 물속 깊은 곳으로 무너져 내렸다.

“읍, 읍.”

남자의 성기가 처박힐 때마다 태운의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왔다. 코부터 식도까지 이어진 부분이 전부 매웠다. 태운의 눈에서 긴 눈물이 이어졌다. 숨을 쉴 수 없었다. 태운은 고개를 저었지만 머리채를 단단하게 쥔 남자의 악력을 이길 수 없었다.

태운은 남자의 손아귀 아래에서 흔들렸다. 남자는 단번에 태운의 목 속까지 성기를 처박았다 빼내며 그 반동으로 더 거세게 태운의 입안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태운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태운의 눈앞이 흐려지고 눈동자에 힘이 풀렸다. 정말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자는 태운의 입안에 정액을 내뿜었다. 태운은 그 비릿한 액체를 반쯤은 입 밖으로 흘려 내었고 반쯤은 삼켰다. 계속해서 눈물이 새어 나왔고 헛구역질이 밀려 나왔다. 사정을 마치자 단단하게 쥐고 있던 태운의 머리채를 남자가 놓았다. 몸에 힘이 풀린 태운이 욕조 안으로 처박혀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그런 태운을 보는 남자의 눈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생명이 없는 물건을 보는 것과도 비슷한 눈이었다.

“엎드려.”

태운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남자가 말했다. 태운은 부들거리는 다리를 기듯이 끌고 욕조의 턱을 짚고 엎드렸다. 태운의 둥글고 하얀 엉덩이가 물 밖으로 드러났다. 그 상태의 태운을 그대로 두고 남자는 물 밖으로 몸을 빼내었다. 물에 젖어 묵직한 남자의 발소리가 태운을 질리게 했다.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태운은 그 치욕적인 자세 그대로 버텼다. 물이 주는 공포는 대단한 것이어서 태운의 다리는 계속해서 떨렸다.

잠시 후 남자가 다시 물 안으로 들어왔다. 지익 하고 무엇인가를 찢는 소리가 났다. 콘돔인 것을 태운은 무의식중에도 느꼈다. 콘돔을 끼운 것인지 남자가 태운의 엉덩이 사이를 벌렸다. 제대로 풀어지지 않은 아래에 잔뜩 힘이 들어가 움츠려져 있었다.

남자는 그대로 귀두를 태운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태운이 윽 하고 이를 악무는 소리를 냈다. 물속에서라 그런지 생각보다 삽입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니었다.

귀두만 몇 번 태운의 안으로 찔러 넣었다 뺐다 하던 남자는 어느 순간, 한 번에 끝까지 박아 넣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으나 태운은 욕조 턱을 쥔 손의 힘으로 버텼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래가 찢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윽, 으읍.”

남자는 기계적으로 태운의 안으로 오입질을 했다. 남자가 왕복 행위를 할 때마다 물이 철벅철벅하는 소리를 냈다. 태운은 소리를 삼키며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버텼다. 남자에게 태운은 섹스 파트너조차도 되지 못했다. 그저 성기를 처박아 넣을 수 있는 도구였다.

남자는 태운을 한참을 괴롭힌 후에야 “씻고 나와.” 한마디를 하고 욕실을 나섰다. 태운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패닉 상태인 정신을 다잡느라 한참을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태운은 죽고 싶을 만큼 남자에게 시달렸다. 물속에서 스스로의 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벅차 아직 자신이 이곳에 오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하여 남자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태운은 한참 만에 힘겨운 샤워까지 마치고 잘 움직여지지 않는 발을 끌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나간 것인가. 태운은 낭패인 표정이 되었다. 역시 무리였나. 태운은 두 번 다시는 남자를 스스로 찾아올 용기가 없었다. 영화는 이대로 접어야 하겠지. 태운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려다가 멈칫했다.

옷이 다 젖는 바람에 태운은 어쩔 수 없이 샤워 가운을 걸친 상태였다. 남자가 나간 후라면 이곳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젖은 옷을 입고 나가야 하나, 태운이 고민하고 있는데 열린 문 사이로 남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태운은 그 소리를 따라 걸었다. 그곳에는 샤워 가운만을 걸친 남자가 사무용 책상에 앉아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통화가 끝난 다음에 다시 들어올 생각으로 태운이 그곳을 빠져나가려는데, 그런 태운을 향해 남자가 테이블 앞에 놓인 커다란 소파를 눈짓했다.

하지만 태운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남자는 사업상의 이야긴지 외국어가 섞인, 태운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계속했다. 태운은 그것들을 자신이 듣고 있어도 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몇 가지를 더 지시한 남자는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태운에게 “해 봐.” 하고 말했다. 남자의 낮은 음성이 서재 안에 깔렸다. 태운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그저 딱딱하게 굳었을 뿐이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말해 보라고.”

태운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어제 말하셨던 처벌을 취소해 주시면 안 되겠냐는 말이 혀끝에 걸렸지만 그 말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습관처럼 혀를 물었다. 견디기 힘들 때마다 그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입 안쪽을 씹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어 버렸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말이 그렇게 쉽게 입 밖으로 나올 리가 없었다.

요령 있게 굴어.

지금이야 강 사장 그치가 남들이랑 자기 걸 나눠 먹는 걸 질색하니 너는 강 사장한테만 다리 벌리면 되는 거지만 강 사장이 너한테 흥미 떨어지는 순간 넌 어떻게 될 거 같아?

너 나 몰라? 강 사장이 끝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잖아. 그치가 너한테 흥미 떨어지면 나는 널 원하는 새끼들한테 다 돌려 버릴 작정이야. 그렇게 해 봐야 이미 너덜너덜해진 네 구멍 먹으려고 드는 천박한 찌질이 새끼들이 그치 혼자 주는 것만큼의 이득은 나한테 못 주겠지만.

여기서 벗어나려면 네 동생 년 네 손으로 죽여 버리는 수밖에 없어. 정신도 못 차린다는 네 동생이 네가 뒷구멍으로 뭔 짓을 해서 이 자리까지 올랐는지 알게 되는 걸 원하지는 않을 거 아냐?

잘 생각해. 이놈 저놈한테 굴려지는 것보다 그래도 한 놈한테 굴려지는 게 너한테도 나을 거니까. 그치가 너한테 조금이라도 흥미 있을 때 잘하라고. 나한테 하듯이 이렇게 사람 성질 박박 긁지 말고.

네 동생은 조용히 병원에서 치료받게 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너 지금 나한테 이렇게 눈알 부라릴 게 아니라 오히려 절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강혁진 침대에 넣어 준다 하면 나한테 밤낮으로 절할 연놈들로 건물 한 바퀴 줄 세울 수도 있다고, 전에 말했었잖아?

너도 곧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걸? 강혁진이라고 강혁진. 태경 강혁진. 그치한테 계륵도 못 되는 지분이면 재성 그룹을 먹을 수도 있다고.

섹스 몇 번 한 걸로 너 이 자리까지 왔어. 씨발 이태운. 이것보다 남는 장사가 어디 있어? 건방진 새끼가 감사는 못할망정. 눈깔 안 내려?

언젠가 들었던 말들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자 태운은 차마 입속에 맴도는 말을 공기 중으로 내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입술만 짓씹자 남자가 곧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핸드폰과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남자의 모습이 한가해 보이지는 않아 마음이 더욱 급해졌지만, 결국 태운은 다른 할 말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태운은 차마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그 고문 같은 침묵을 견뎌 내었다.

“뻣뻣하고 재미없는 너를 내가 몇 년이나 곁에 둔 이유가 뭘 것 같아?”

갑작스런 남자의 말에 태운은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남자는 굳이 태운에게 대답을 원하진 않았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주제 파악을 잘해서야.”

남자는 그 말만 마치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두었지만, 태운은 그 속에 담긴 경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든 하지 마.’ 하는 뜻이 역력한 남자의 말에 태운은 깊게 고개를 숙이는 행동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요령 있게 굴어. 그 말이 방금 들은 말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자가 제게 가진 흥미를 계속해서 붙들고 있으려면, 얼마나 약게 굴어야 하는지. 나긋나긋 애교를 부리며 남자에게 안기기도 하고, 가끔 교태 같은 것을 떨며 남자를 홀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닳을 대로 닳으면서도 태운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정말 체질상 맞지 않기도 했고, 가슴 한편에서 그것이 마지막 남은 알량한 자존심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차피 같은 진창인데.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이 속에서 치받아 올라왔다. 하지만 함부로 그것을 밖으로 뿜어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태운은 제 얼굴이 굳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표정을 정리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카메라 앞에만 선다면 연기를 할 수 있는 태운이었지만, 남자 앞에서는 그게 잘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마음먹고 시도해 본 적이 없기도 했다. 연기로라도 그 앞에서 애교를 떨고 교태를 부리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의 융통성도 태운이 가지고 있지 못한 까닭이었다.

약, 약이 먹고 싶었다. 태운은 무의식중에 신경 안정제가 들어 있을 주머니 위로 손을 가져갔다가 지금 자신이 입은 게 얇은 샤워 가운뿐이라고 깨닫게 되자 갑자기 엄청난 허기와 갈증을 느꼈다.

“나는 지금 나가 봐야 하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여기서 해.”

확인 사살이었다. 방금 전 남자의 말을 듣고도 태운이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용건을 묻는 남자는 잔인했다.

남자의 눈이 잠시 태운의 얼굴 위로 머물렀다. 그러다가 태운이 끝내는 말하지 않을 것 같았는지 그대로 노트북과 핸드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스스로 만들어 낸 깊은 늪에 빠져 발버둥 치던 태운이 현실 위로 정신을 끌어 올렸다. 태운은 이미 서재를 벗어나고 있는 남자의 발걸음을 따랐다.

‘요령 있게 굴어.’

갑자기 자각된 현실이 태운은 무겁기만 했다. 언제 준비된 건지, 아니 태운이 처음 호텔에 들어 올 때부터 있었던 건지 서재를 빠져나오자 응접실에는 양복이 걸린 트레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남자는 따라 나오는 태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툭 하고 샤워 가운을 풀어냈다. 남자의 몸에서 벗겨진 샤워 가운이 땅으로 뚝 하고 떨어졌다.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트레이 밑에 놓인 바구니에서 드로즈를 집어 다리 사이에 껴 넣었다.

태운은 눈을 한번 질끈 감고 모욕감에 이를 악물며 남자가 벗어 놓은 샤워 가운을 들어 정리했다. 고지식하기까지 한 태운이 부릴 수 있는 요령은 티가 나지도, 남자를 기껍게 할 수도 없는 이런 것들뿐이었다.

태운이 트레이에 걸려 있던 와이셔츠를 빼내 남자에게 건네자 남자는 그런 시중이 익숙하다는 듯이 와이셔츠를 받는 대신 팔을 내밀어 왔다. 태운은 단단한 남자의 팔에 와이셔츠를 껴 넣으면서 그 별거 아닌 행동에 자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자신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 오늘의 패착이었다. 일단 상황이 닥치면, 연기를 하는 것처럼 자신이 어떻게든 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자신은 그럴 수 있는 인간이 결코 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반대편 팔에까지 와이셔츠를 껴 넣은 태운은 설마 와이셔츠의 단추까지 제가 채워야 하는 건가 고민했다. 한창 바쁠 때 촬영장에서는 스타일리스트에 의해 옷이 입혀지고 가끔은 단추까지 채워지다 못해 다리를 들면 바지까지 올려 입혀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한 번도 그게 옷시중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은 태운은 그것이 정석적인지 잘 알지 못했다. 함부로 남자의 몸에 걸쳐진 와이셔츠로 손을 뻗지 못 하고 주저하고 있는데 다행히도 남자가 먼저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겨우 옷시중을 좀 드는 것으로는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태운은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미약하기 그지없어 평소의 숨소리와도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도, 태운이 한숨을 내쉬는 순간 남자의 시선이 태운의 얼굴 위로 잠시 머물렀다.

태운이 남자의 손에서 채워지고 있는 단추를 확인하고, 머뭇거리며 트레이에 걸려 있는 바지 위로 손을 뻗자 남자가 태운의 손을 탁 하고 쳐냈다.

태운이 차마 손을 거둬들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데 남자가 스스로 바지를 내려 근육으로 꽉 차 있는 허벅지에 꿰었다. 샤워 가운 사이로 빠져나온 길고 낭창한 태운의 다리와는 달리 두껍고 단단해 보였다.

“계속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할 말 있으면 해. 그게 아니라면 강아지처럼 옆에 따라붙지 말고.”

태운은 남자의 어투에 실린 짜증을 느꼈다. 원래 주변에 누가 있는 것을 끔찍하게 여기는 남자였다. 자꾸 이유 없이 옆을 얼쩡거리는 태운이 거슬릴 만도 했다. 관계를 가진 후에 태운이 옷을 제대로 여미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남자의 공간을 빠져나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직 핏기가 채 돌아오지 않은 얼굴로 남자의 눈치를 살피던 태운은 남자의 얼굴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축객령에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죄송, 합니다.”

태운은 젖어서 벗어 놓았던 제 옷을 찾았다. 강제로 욕조에 담가졌던 몸에 걸쳐 있던 옷은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심하게 젖은 채였다. 당장 호텔 밖을 나서면 살을 에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였지만, 태운은 그조차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저 옷을 대충 물기만 짜서 욕실에 걸어 두었던 것만 생각이 났다. 직원을 불러 건조를 맡길까도 생각했지만 남자가 묵는 객실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평소 본인 스스로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무덤덤하다는 평을 듣는 태운이었지만 남자의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항상 최악이라 생각했는데 그 밑에 더한 최악이 있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혼비백산한 태운을 짜증스레 한번 응시한 남자는 트레이 선반에 있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수제임이 분명한 커프스단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한밤중 술자리에 가는 것임에도 남자는 소매 끝에 커프스단추를 단단히 여몄다. 술자리라고 해서 마냥 풀어지는 자리가 아닌 것이 또 남자의 세계였다.

넥타이까지 정석대로 매고 재킷에 코트까지 걸치고 나갈 준비를 하던 남자는 물이 뚝뚝 흐르는 셔츠와 바지를 입고 나오는 태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태운이 서 있는 곳 밑으로 옷에서 떨어진 물웅덩이가 고였다. 그것 때문인지 태운은 가겠다는 말을 내뱉고도 욕실 문 앞에서 남자의 눈치만 볼 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남자는 태운에게서 시선을 떼고 현관으로 움직였다.

현관에는 태운의 것임에 분명한 젖은 운동화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남자가 오늘 오전에 신었던 신발 대신 새 구두 한 켤레가 소리 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태운의 운동화 옆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 하나가 서 있었다. 무엇이든 한 번만 사용하면 무조건 교체가 되곤 하는데, 아마 운동화 주인이 들고 온 것이라고 판단해 치워지지 않은 듯했다.

밖에는 겨울비의 기세가 매서웠다. 채 눈이 되지 못한 비는 지상에 내리면서 차가움을 더했다. 떨어지는 비는 마치 얼음송곳과도 같았다.

이제는 태운 쪽으로는 아예 시선도 주지 않던 남자가, 구두를 신고 문고리를 잡았다.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태운이 재빨리 현관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그런 태운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며 문 앞에 멈춰 섰다. 태운이 지나온 자리 위로 물길이 생겼다. 우산이 없이 나가는 남자에게 태운은 자신이 쓰고 온 우산을 건넸다. 이 정도로 요령을 부리는 것이 태운이 할 수 있는 한계였다.

“밖에 비가, 많이 옵니다. 우산 가지고 가십시오.”

남자가 이상한 것을 보듯이 태운을 바라봤다. 남자는 이미 십 년 전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는 마지막으로 제 손으로 우산을 들어 본 것이 언젠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 제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 준 것이 대체 마지막으로 언젠지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오늘 하려고 온 말 해.”

자신의 얼굴을 훑는 듯한 남자의 시선에 태운은 고개를 푹 하고 숙였다. 그리고 속으로 정말 이 말을 해도 될까 하고 한번 자조했다. 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정말로, 그것이 맞았다. 하지만.

“영화가…… 하고 싶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열망에, 태운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제 입을 틀어막으려고 올리던 손을 중간에서 멈췄다. 어정쩡한 자세였다.

내려다보는 듯한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태운은 올라간 손을 억지로 끌어 내려 배 앞으로 붙였다. 하지만 여전히 본인이 느끼기에도 부자연스러운 손동작이었다. 화보를 종종 찍게 되면서 손동작을 자연스럽게 하는 법을 터득했지만 그 알량한 재주가 지금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꼭, 하고 싶은…… 대본을 받았습니다. 드라마 끝나자마자, 촬영에 들어갑니다. 드라마 때문에 촬영 일정을, 미룬 거라…… 더 미룰 수도 없습니다. 이번, 이번, 아니면…… 찍을 수 없어요. 다시는, 어제 같은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그때에는 시키, 시키시는 것, 무엇이라도 하겠으니, 영화, 들어가는 거 허락해, 주세요.”

덜덜 떨리는 말을 하는 태운의 밑으로는 계속해서 물기가 떨어졌다. 태운의 밑에 생겨난 물웅덩이가 제 몸집을 계속해서 불리고 있었다. 옷이 마르면서 체온도 같이 빠져나가서 그런지 태운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더 창백해졌다.

태운은 사실 스스로가 뭐라고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횡설수설 내뱉은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다만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영화에 대한 갈망이 더 컸던 것에 조금 놀란 상태이기도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영화를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번 말이 터지자 제 스스로 멈춰지지가 않았다.

“겨우?”

태운의 머리 위에서 남자가 픽 하고 웃었다. 그렇게 뜸을 들이더니 겨우 그 정도 부탁이었냐는 것도 같고 아니면 겨우 그 정도 뻣뻣한 행동으로 내 말이 번복되기를 바랐냐는 비아냥거림 같기도 했다.

태운은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어떤 의미였던들 태운이 대답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부탁을 할 때에는 조금 더 몸을 동하게 해 보라고.”

“…….”

“처음 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

비아냥거리는 것 같은 남자의 말에, 남자의 밑에서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 울며 빌었던 어떤 날이 떠올라 버렸다. 태운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져 갔다. 자각된 어떤 날의 기억에 태운의 눈이 확 하고 풀렸다.

남자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패닉 상태인 태운을 보고 또 픽 하고 웃었다. 얼굴에 분칠하는 광대들 따위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가끔 세상에 아무 미련 없이 구는 태운이 덜덜 떨면서도 제 할 말을 다하는 모습은 이상한 감상을 남겼다.

몸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새파랗게 질려가는 태운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남자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음을 느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로 보이지 않아 남자는 “올 때까지 정신 차리고 기다리고 있어.”라는 말을 남긴 채 태운을 호텔 안에 남겨 두고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로 나선 남자의 손에는 태운이 쥐어 준 우산이 들린 채였다. 하지만 남자는 곧 복도를 지나는 호텔 직원을 발견하고는 그 우산을 건넸다. 아마 남자는 앞으로 살아가며 다시는 제 손으로 우산을 들 일이 없을 것이었다.

* * *

홀로 호텔 안에 남은 태운은 갑자기 어지러움이 느껴져 벽에 기대어 섰다. 손발이 저릿저릿하고,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순간 정상적으로 호흡을 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태운은 극도의 긴장감으로 욱신거리기까지 하는 몸을 최대한 이완시키려고 노력했다. 일단 천천히 호흡을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억지로 숨을 내뱉었다 들이마시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다. 산소가 안으로 공급되자 가슴 한쪽이 뻐근해져 왔다. 태운은 눈을 감은 채 가슴속의 공포를 견뎌 냈다.

한참을 그렇게 벽에 기대어 의식적으로 숨을 내쉬던 태운은 갑자기 구역질이 밀려와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변기에 대고 구역질을 했지만 속에서 밀려 나오는 것은 없었다.

잊었다가보다는 뇌가 스스로 봉인해 버린 끔찍했던 어떤 날의 기억이었다. 태운은 어렸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가라는 남자의 발밑에 꿇어앉아 남창처럼 제발 자신을 범해 달라고 빌고 결국은 남자에게 자신의 처음을 팔았던 날의 기억은 되돌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 그 끔찍함은 세월이 지나도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태운은 젖은 옷이 닿으며 어느새 축축해진 코트 속에서 신경 안정제 병을 꺼내 병 안에 남은 약을 입안에 다 털어 넣었다. 그러자 다시 구역질이 밀려 나왔다.

남자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태운은 눕지도 앉지도 못한 채로 서서 밤을 새었다. 먹은 것이 없어 누런 위액까지 모두 게워 버린 채 맞는 참담한 새벽이었다.

어느새 축축했던 옷은 다 말라 있었다. 으슬으슬 춥고 뻣뻣하게 긴장했던 몸은 근육이 뭉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새벽부터 예정되어 있는 촬영 스케줄이 생각났으나, 남자의 말은 연속으로 어길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촬영 시간에 가까워지는데도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태운은 매니저에게 몸이 좋지 않다고 연락을 넣었다. 매니저는 병원에 가 보자고 말했지만 태운은 조금 자면 나을 것 같다고 거절했다.

통화를 하고 나서 잠시 후, 아직도 비가 그치지 않았으니 한나절 정도는 푹 쉬어도 된다는 연락을 감독에게 받았다고 매니저에게 문자가 들어왔다.

그 문자를 받고 태운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입안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태운은 너덜너덜해진 몸을 다시 이어 붙일 여유조차 없었다.

카메라 앞에 서고 싶었다. 그 앞에 서 있으면 이어 붙일 수조차 없이 너덜너덜해진 이태운은 없고, 반짝반짝 빛나는 그 배역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척한 검은 것으로 채워진 자신조차도 밝게 빛나는 기분이 들어서 태운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좋았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그 기분이 태운을 계속 카메라 앞으로 서게 했다.

태운은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태운이 시간을 확인하는 주기는 계속해서 빨라졌지만 남자의 그림자조차도 객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태운은 현관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자기 방어가 섞인 쇼크성 페이드아웃 증세였다.

* * *

자정이 넘은 시간 객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웅크린 채로 앉아 있는 태운을 발견하고 어이가 없어 웃었다. 태운의 옆으로 팽개쳐진 핸드폰은 웅웅 하는 진동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태운을 잠시 위에서 내려 보다가 허리를 숙여 태운의 어깨를 두드렸다. 약하지 않은 자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운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몸을 숙이자 태운의 안정적이지 않은 거친 숨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남자가 손을 뻗어 태운의 뺨에 가져다 대자 열이 오른 것인지 만져지는 살이 뜨거웠다.

남자가 힘을 주어 태운을 흔들었다. 태운이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짚으며 가늘게 눈을 떴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오는 남자를 확인하고는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키다가 휘청했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태운을 잡아 주지 않았다. 태운은 그대로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여전히 태운의 핸드폰은 바닥에서 거센 진동을 울려 대고 있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서자 태운의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머리가 아팠다.

“……죄송, 합니다.”

태운의 목에서 끌어 올려지는 목소리가 거칠었다. 촬영을 해야 하는데 낭패라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잠시 끊어졌던 진동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감을 잡을 수 없던 태운은 남자를 발견하고 시간이 조금 흐른 것이 아님을 짐작했다.

“받아.”

결국 남자가 먼저 말했다. 태운은 휘청거리며 전화를 집어 들었다. 남자 앞에서 전화를 받아도 될지 망설이다가 남자의 눈짓에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너 어디야!

화가 난 것 같은 매니저의 음성이 전화기를 뚫고 나왔다. 태운은 초조함에 이를 악물며 혁진의 눈치를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너 어디야? 내가 그쪽으로 갈게. 어디 있는 거야?

“……호텔, 입니다.”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촬영은 비 때문에 미뤄졌으니까 일단 병원부터 가자. 어디야 내가 그쪽으로 갈게.

“형, 제가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태운은 여러 개로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 뒤에서 매니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태운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죄송합니다.”

태운은 푹 하고 고개를 숙였다. 끊어버린 전화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태운은 그대로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편도가 부은 것인지 목이 아팠다. 태운은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리가 징징 하고 울렸다. 제대로 중심을 잡기도 어려워 휘청하며 벽을 짚고 서 있는 태운을 남자가 읽히지 않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요즘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

“죄송합니다.”

태운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남자는 태운을 보지 않았다.

“네 뒤치다꺼리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얼쩡거리지 말고 사라져.”

남자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와 응접실 사이에 있는 문이 닫혔다. 그대로 단절이었다. 태운은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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