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 교수의 기록
리스는 리세티 왕국이 자랑하는 학원 이크람의 마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다. 마력이 없어서 직접적으로 마법을 쓸 수는 없지만, 옛 시대부터 내려오는 사료를 해석하고 복원하여 현대에도 쓸 만한 마법 수식을 개발하거나 그 지식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마법 수식을 창조해 내는 게 리스의 역할이었다.
여자에 외국인, 나이는 고작 스물아홉 살. 아무리 리세티 왕국이 개방적이라지만 교수직을 맡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린 나이였다. 애초에 마법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연구가 시작된 지 오래되지 않아 전반적으로 연구자들의 연령이 젊은 편이 아니었더라면 리스는 절대로 교수가 될 수 없었을 터였다. 어찌 보면 그러한 배경조차 리스의 행운이었다.
2년 전 교수가 됐을 때부터 리스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젊고 유능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리스는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그 인기 때문에 이상한 놈들이 꼬여 피곤할 때도 많았지만, 요즈음 각광받고 있는 마법학을 배우는 학생들은 진지했고 젊은 나이에도 깊은 학식을 지닌 리스를 마음속 깊이 존경했다. 덕분에 리스는 만족스러운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작년에 리스는 결혼도 했다. 학문과 결혼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남자에 관심이 없던 리스가 택한 사람은 리세티 왕국의 신생 마법사단에 재직 중인 젊은 마법사 테오도르였다. 결혼하지 않으리란 공언을 깰 정도로 리스의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다정다감한 성격은 물론이요, 리스가 아이를 갖지 않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며 일하는 걸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는 대륙을 통틀어도 몇 없었다.
그런 리스는 요즘 들어 다소 긴장한 상태였다. 라인셀 왕국으로 가는 사절단에 리스와 테오도르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뭐니뭐니해도 대륙에서 마법이 가장 발달된 곳을 찾으라고 하면 누구나 이견 없이 라인셀 왕국을 꼽았다. 라인셀이 마법사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건 라인셀 마법사들의 장인 베델 공작 때문이다.
레인 아이제나흐 베델은 마법이 저물어 가던 현 시대에 새로이 마법의 길을 연 대마법사였다. 20년 전 라인셀 수도에 나타났던 고대의 유산인 검은 탑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사이기도 했다. 20년 전 이후로 탑이 다시 수도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지만, 공작은 자신이 가진 힘만으로도 대륙의 모든 마법사를 압살할 수 있는 마력과 실력을 지녔다. 덕분에 대륙에는 베델 공작에게 마법을 한 수 배우고 싶어 하는 자들이 넘쳐났다.
베델 공작이 공작위를 물려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인셀은 주변 왕국을 상대로 대대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베델 공작은 직접 전쟁에 나서지 않았지만, 이제 대륙 유일의 소드 마스터가 된 유르딘 니제스가 쉽게 승전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대륙 북부 유일의 왕국이 된 라인셀은 호전적인 모습을 감추고 평화적인 정책을 장려하며 내실을 다지기 시작했다. 대륙 북부는 물론이고 중부와 남부를 합쳐도 라인셀만한 왕국이 없는 상황이다. 절대적인 강국이 평화와 화합을 내세우며 손을 내밀자, 다른 왕국들은 그 분위기에 우르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강제적인 화합의 분위기가 조성된 채 1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제법 어색하지 않은 평온함이 대륙 전체를 맴돌고 있었다.
한편 10여 년 전부터 시작한 정책의 일환으로, 라인셀은 각국의 마법사들을 받아들여 학문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위대한 마법사가 이끄는 라인셀은 전 대륙에서 마법사나 마법 학자의 수가 가장 많았다. 라인셀이 마법으로 앞서 나간다고 해도, 현재의 마법은 아예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보다는 일단 옛 시대의 술식을 기초로 연구하는 수준이었기에 자료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어떠한 마법의 기초가 되는 술식을 입수한다면 이를 활용해서 다른 마법의 연구 또한 한층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니 타국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교류는 빼먹을 수가 없었다.
라인셀 왕국 쪽에서도 노리는 게 있으니 부르는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리세티 쪽이 조금 더 절실했다. 이번 교류는 리세티의 발전을 위해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리스는 테오도르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사절에 합류했다.
왕국으로 들어와 수도로 가는 길은 놀라움뿐이었다. 작은 마을에조차 마력 등이 반짝이며 길을 밝히고 있었다. 중간에 거쳐 간 렘샤이트 후작의 영지는 특히나 화려했는데, 아예 성에 대단위 방어 마법을 건 것을 보고 테오도르는 흥분으로 실신할 지경이었다.
감탄 속에 리스와 사절단은 라인셀의 수도에 도착했다. 수도에는 렘샤이트 후작령 이상의 호화로운 마법 도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지만, 이번에는 거기에 신경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수도에 도착한 그들을 베델 공작 레인이 직접 만나러 올 거라는 전갈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뭐가 그리도 급한지 사절단을 위해 마련된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공작이 도착했다.
“우와……. 잘생겼다.”
사절단 안의 누군가가 자제를 못 하고 솔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공작은 익숙한 건지 뭔지, 그 감탄사를 듣고도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확실히 대단히 잘생긴 남자였다. 올해 마흔이 넘었다고 하던데 서른 언저리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옛 시대의 대마법사들은 평범한 인간들보다 두세 배를 살고 노화도 느리다던데 공작이 이를 직접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어릴 때는 요정같이 아름답게 생긴 소년이었다고 하던데, 성인이 되고 나이를 먹은 지금은 완숙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섬세한 이목구비는 몹시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단단하게 여물어 성숙한 남자의 매력을 풍겼다. 제법 큰 키에 요정이 저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늘씬하고 우아하게 쭉 뻗은 몸 위로 걸친 마법사단의 제복은 레인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뒤로 펄럭이는 망토에 손을 모두 가리는 장갑까지, 몸을 거의 완벽하게 가리고 있지만 팔을 들어 올릴 때 보이는 장갑과 소매 사이의 흰 살결을 본 누군가가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단정한 생김새인데도 공작에게서는 어딘가 나른하게 고혹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잠깐 주변을 돌아보던 공작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시선을 받고 있는 사절단은 가만히 있는데, 정작 옆에 서 있던 공작의 부관이 놀라서 딸꾹질을 했다. 공작의 시선이 제 부관에게로 돌아갔다.
“아셀.”
“네, 끅, 넵.”
“나가.”
목소리도 대단히 좋았으나 내용은 가차 없기 짝이 없었다. 부가적인 설명 한마디조차 없는 축객령이다. 부관은 잔뜩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갔고 공작은 깊게 한숨을 쉬며 옆에 선 여성에게 한탄을 늘어놓았다.
“로빈만 못해. 너까지 관두면 10년은 늙을 거다, 셀리나.”
“좀 나이 드셔도 괜찮아요. 지금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지 않나요? 공작께선 지나치게 젊으시다구요.”
잠시 공작의 외모에 홀려 있던 사절단이 경직했다. 상대는 베델 공작이다. 그 무시무시한 베델 공작.
라인셀에 종종 마법 유학을 다녀오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베델 공작의 무시무시함을 알았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마법사단을 장악했던 영향력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마법사단 단장은 큰일이 있으면 베델 공작을 찾는다고 했다.
단장에서 은퇴한 지금은 라인셀 왕립 마법 학원의 교수직을 맡고 있는데, 아카데미 시절부터 승마나 검술 등의 과목을 모조리 낙제하고도 꼬박꼬박 전체에서 손에 꼽히는 성적을 유지하던 천재답게 타인의 무능에 가차 없었다. 오죽하면 어느 나라의 왕족이 낙제점을 받으면 제 나라에서 공작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협박하는데 거기에 대고 왕족의 머리카락을 반쯤 그슬려 뽀글뽀글한 모양으로 만들어 준 다음에 모조리 낙제점을 줬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돌까.
그래도 학생에게는 그나마 너그러운 편이었다. 연구원이나 마법사들에게는 더욱더 가차 없었다. 어이없는 마법 수식을 짜 오거나 시연하면 이보다 더 멍청이를 본 적이 없다는 표정을 짓거나, 아예 쳐다도 안 보고 고개를 돌리거나, 구제불능이라 판단되면 다정한 목소리로 ‘재능이 없으니 다른 길을 알아보라’고 진지하게 충고했다. 무능한 놈이 입만 살아서 하는 말이면 타격을 안 받겠지만, 공작은 실패한 마법 수식을 손봐서 즉석에서 훌륭한 마법을 선보이고는 했으므로 그 누구도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마법이 발달한 라인셀의 마법사들도 그 지경인데, 상대적으로 리세티는 어떻겠는가? 사절들은 잔뜩 긴장했지만, 정작 공작은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긴장할 필요 없어. 마침 근처를 지나던 길이라 한 번 들렀을 뿐이니까. 라인셀은 높은 학식을 지닌 마법사와 학자들의 방문을 환영하네. 특별히 신경 쓰라고 일러두었으니, 오늘은 편하게 여독을 풀도록 해.”
부드럽게 웃는 공작의 표정을 본 누군가가 또다시 숨을 삼켰다. 어디선가 앓는 소리도 들렸다. 공작은 주변을 죽 둘러보다가 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이쪽을 오래간 쳐다보는가 싶었지만, 공작은 별다른 말 없이 그대로 몸을 돌려 숙소를 나갔다. 공작이 나가자마자 리스는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고, 그런 리스를 테오도르가 부축했다.
“괜찮아?”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하긴 했지만 긴장한 것도 사실이라, 리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얌전히 테오도르에게 몸을 기댔다.
그 후로는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공작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다들 잔뜩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공작을 마주할 일은 별로 없었다. 아주 가끔 찾아와 라인셀과 리세티의 총 책임자들에게 연구 결과에 대한 보고를 듣는 게 다였다. 하긴,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매일같이 찾아올 리는 없었다. 긴장하는 것도 몇 번이지, 왔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는 공작의 행동에 긴장을 풀며 리세티의 마법사와 학자들은 새로운 환경에 열정적으로 적응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허투루 날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바쁜 생활을 보내는 와중에도 공작에 대한 말들은 리스의 귀에 차곡차곡 들어왔다.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공작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워낙 잘생긴 공작인지라, 공작이 사교계 활동을 한 이후로는 여성에 비해 단조롭던 남성들의 옷차림에도 유행의 흐름이 빨라지기까지 했다.
하루는 귀엽게 생긴 귀족 영식이 연구소를 찾아왔다. 연구소의 높은 사람들이 자신의 허리 반밖에 되지 않는 소년에게 연거푸 허리를 굽혔다. 아무리 높은 사람이 와도 저렇게까지 굽실대는 일이 별로 없어서 모두 소년의 정체를 궁금하게 느꼈다.
“누구예요, 저 사람은?”
“어머, 리스도 기회 되면 잘 보이는 게 좋아요. 베델 소공작이니까.”
“베델 소공작요?”
리스는 소공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 잘생겼지만 조금 예민한 인상의 소유자인 베델 공작과 달리 소공작은 곱슬곱슬한 고동색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 유순하고 다정다감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한마디로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안 닮았네요.”
옆에 있던 연구원은 소공작이 나가는 것을 보고 구석으로 가서 알려 주었다.
“친척 아이를 입양해서 데려왔어요.”
“그… 베델 공작께서는 독신이라면서요. 왜 결혼을 안 하시고 입양을 하신 거죠?”
안 그래도 베델 공작이 미혼이라는 소문은 외국에서도 유명했다. 그에게 구애하는 온갖 사람들을 뿌리친 일화가 전설처럼 남아 있는 수준이었다. 리스의 질문에 연구원이 더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아는 사람만 아는 소문인데……. 리스는 입이 무거워 보이니 알려 주는 거예요. 베델 공작과 렘샤이트 후작께서는 연인 사이세요.”
“네? 말도 안 돼요. 그런…….”
가십 수준의 이야기를 이리도 진지하게 말하다니. 리스는 말을 하다 말고 끄트머리를 흐렸다. 그러나 연구원은 여전히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사실 몇 년 전까지는 의혹만 있던 수준이었는데, 한 3, 4년 전 부터였나? 소공작께서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신 후부터는 제법 노골적으로 티를 내셔서요. 대놓고 연회장에서 둘만 방으로 사라지신다거나, 정식으로 초대해서 며칠이고 함께 계신다거나. 수상하죠?”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저게 무슨 짓이냐며 손가락질하던 귀족도 있었는데, 뭐어……. 두 분 다 명망 높은 귀족이시고 하니, 전반적으로 라인셀에서 시선이 조금 바뀌었어요. 게다가 또 렘샤이트 후작께서는 로맨틱하셔서, 드러내기 시작한 후로는 공개 석상에서 수정으로 만든 꽃을 선물하시질 않나…….”
연구원이 뺨을 발그레하게 밝혔다. 리스는 그런 연구원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십이야 대단히 흥미롭고 신빙성이 높지만, 렘샤이트 후작은 오십이 넘은 아저씨가 아니던가? 물론 여전히 검사를 높게 쳐 주는 라인셀이니만큼 전설적인 검사인 유르딘에게 열광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리스 또래의 연구원이 저리도 소녀처럼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렘샤이트 후작을 직접 본 리스는 생각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리스는 예전에 렘샤이트 후작을 본 적이 있었다. 화사한 금발과 녹음을 닮은 푸른 눈을 가진 후작은 어린 리스의 눈에 마치 왕자님처럼 보였다. 그 시절과 후작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리스는 공작과 후작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기류를 기억해 냈다. 어려서 몰랐으나 다시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노골적인 애정이 느껴졌었다. 일이 그렇게 됐던 거구나. 납득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 억울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복잡한 심정으로 후작을 바라보는데,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여전히 후작은 리스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관심 갖지 말걸, 그냥 죽은 듯이 있을걸. 아니, 아예 리세티 왕국을 떠나지 말아야 했다. 문책당할 각오를 했지만, 후작은 별다른 말 없이 자리를 떴다.
한 번 온 이상 되돌릴 수는 없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거, 그날 이후 리스는 작정하고 공작과 후작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기 시작했다. 평민에 외국인인 리스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점은 별로 없었다.
공작은 현 니제스 백작은 물론이고 선대 니제스 백작 부부와도 몹시 친했다고 한다. 라인셀에서는 보통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장례식에는 가볍게 얼굴만 비추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공작은 드물게도 선대 백작 부부의 장례식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있어서 한동안 화제가 됐다.
그래도 베델 공작에 대해서는 그보다 많은 소문을 접할 수 있었다. 최근 건강을 핑계로 일선에서 물러난 공작이지만, 베델 공작가가 워낙 거대한지라 여전히 정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는 전설로 여겨질 정도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공작이 지닌 영향력은 그가 지닌 힘에서 기인했다. 그러나 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공작이 지닌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많은 귀족들은 베델 공작을 잔인하고 가차 없다고 평했다. 그러나 공작이 잔혹한 성품인 것은 아니었다. 이득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잘라내기는 하지만, 이득을 볼 수 있다고 해도 그게 부당한 일이라면 단칼에 거절했다. 청탁이 익숙한 귀족들에게야 그런 태도가 냉정하게 느껴지겠지만, 오히려 평민들 사이에서는 신분을 막론하고 기회를 주는 너그러운 공작으로 알려져 있었다.
강자에게는 강하나 약자에게는 관대한 태도 덕분에 리스가 접하는 사람들은 모두 공작을 좋게 보고 있었다.
물론 이런 소문으로는 공작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없었다. 리스는 공작의 생각이 알고 싶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리스가 베델 공작의 생각을 알아볼 만한 기회가 찾아왔다.
연구에 몰두하던 리스는 어느 날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모를 베델 공작이 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공작은 이내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 공작이 리스를 불렀다. 마법으로 만든 전령 새를 보내서 나올 시간과 장소를 알린, 몹시도 비밀스러운 연락이었다. 전령을 받은 리스보다 남편 테오도르가 훨씬 더 겁을 먹었다. 테오도르가 당황하자 오히려 리스는 침착해졌다.
“다녀올게.”
“같이 가, 리스.”
“아무 일 없을 거야.”
“무슨 일이 있으면? 공작이 널 죽이기라도 하면 어떡해?”
“테오도르.”
공작은 함부로 누군가를 해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벌어들이고 있는 수입의 대부분을 빈민가에 풀어 불쌍한 이들의 구제를 도울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이 순간만은 공작이 리스를 해칠 가능성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완벽하게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혼자 가야지.”
“같이 가게 해 줘.”
“안 돼. 당신까지 위험에 빠지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더더욱 가야지. 만약 당신이 잘못된다면 내게는 평생의 후회가 남아.”
리스는 테오도르의 애원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 공작저로 향했다. 준비된 장소로 향하니 공작의 심복이 두 사람인 것을 보고 잠시 눈살을 찌푸렸으나 당황하지 않고 둘 다 마차에 태웠다. 마차는 비밀스럽게 공작가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공작의 저택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오랜 역사를 가진 저택은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채 굳건히 서 있었다. 저택의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눈에 담던 리스는 사용인을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리스는 별세계처럼 아름답게 꾸며진 낯선 정원을 어색한 눈으로 살폈다. 새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은 아름다웠다. 노을을 받아 금빛으로 물든 꽃은 스스로 빛을 냈다. 누구나 감탄할 모습이었지만, 리스는 조금 실망했다. 고개 숙이는 리스의 손을 테오도르가 꽉 붙잡았다. 맞잡은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공작이 와 있었다.
“초대는 한 사람에게만 보냈는데.”
리스는 테오도르의 손을 놓고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테오도르가 어설프게 귀족의 예법을 따라해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베델 공. 저는 그저…….”
“아니, 괜찮아. 오히려 잘됐어. 그대의 남편도 한 번 보고 싶었으니까.”
리스의 변명을 짧게 자른 공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원래도 공작이 웃는 낯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딱딱한 얼굴이었다.
“잠시 걸을까?”
세 사람은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정원을 걸었다. 공작은 마음이 편할지 몰라도 갑작스레 끌려오다시피 초대받은 두 사람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완전히 긴장해서 팔과 다리가 같이 나가는 테오도르보다는 리스가 훨씬 더 금세 적응했다. 어색한 정원이지만 나무와 수풀 사이로 보이는 건물은 추억과 닮은 풍경이었다.
앞서 걷던 공작이 멈춰 서서 꽃을 꺾어 리스에게 건넸다. 리스가 얼떨떨한 심정으로 바라보자 공작이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었다.
“예전에 여기서 내 여동생이 나와 렘샤이트 후작을 훔쳐본 적이 있었지.”
“…….”
리스는 받은 꽃을 꽉 쥐며 고개를 숙였다.
“이크람 학원의 교수이자 연구원이라. 젊은 나이인데 대단하네. 힘든 일이 많았겠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원한 일이고요.”
“그건 참 다행이야. 남편도 좋은 사람 같네.”
“네. 물론이지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쯤, 공작이 리스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며 짧게 웃음을 흘렸다.
“리스티 시에란.”
“네.”
“레스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리스는 저도 모르게 휘청거리려는 몸을 간신히 버텼다. 공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런 리스를 관찰하듯이 주시했다.
“내 형의 이름인데, 이름이 조금 비슷한 느낌이지.”
“…….”
“내 이복형은 반역죄로 죽었어. 감옥에서 미친 그놈은 제 발로 사형대까지 걸을 수도 없어 수레를 타고 사형대로 갔어. 그런 자와 비슷한 이름이라니, 불길하기 짝이 없군.”
마치 옛날이야기를 늘어놓듯 단조로운 어조였으나, 리스와 테오도르 두 사람 모두 불안을 느꼈다. 참다못한 테오도르가 벌벌 떨면서도 앞으로 나섰다.
“리스는 어떤 불충한 의도로 이름을 지은 게 아닙니다. 그저 가족을 추억하고 싶어서……! 죄인이라지만 가족이잖습니까. 그녀에게는 죄가…….”
“밝히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네 남편은 너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구나.”
서로 모르는 척하던 것이 부서지자 베델 공작, 레인 또한 일말의 거짓을 벗어던졌다.
“유니.”
여자의 이름은 리스티 시에란이었다. 동시에 과거에는 유니 아이제나흐라는 이름을 지녔던 소녀이기도 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저택에서 9년을 살다가 간신히 목숨을 구명받고 리세티 왕국으로 흘러간 소녀는 훌륭하게 자라 홀로 섰다. 유니가 아닌 리스티 시에란으로. 리스는 레인의 심중을 꿰뚫기 위해 날카로운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왜 왔어. 수상쩍게 보이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 안 해 봤어?”
조금 날카로운 물음에 정신이 들었다. 유니 아이제나흐는 레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할 수 없었지만, 리스티 시에란은 이해할 수 있었다. 리세티 왕국이 라인셀에 비하면 자유롭다고는 해도 차별은 존재했다. 평민 장학생에 불과한 리스는 타인의 모멸과 손가락질을 숱하게 받아 왔다. 집 안에서조차 대놓고 무시당하던 레인의 평생이 고달팠으리란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하물며 라인셀은 리세티보다도 사람들의 편견에 얽매인 나라였으니, 리스가 겪은 일들보다 심한 일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왜 왔느냐고. 물론 리스도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다. 저를 경계해 타국으로 보낸 오라버니가 아무리 사절이라지만 라인셀에 들어오는 것을 반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오고 싶었던 이유는 전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다. 어릴 때는 레인에게 자신도 레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며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조금 자란 지금은 섣부른 이해와 공감이 레인을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그마치 20년이 지났다. 오래된 상처를 새로이 꺼낼 필요는 없었다. 전하고 싶은 말은 사죄의 말이 아니다.
“제게 기회를 준 당신께 감사드리고 싶었어요.”
조금 의외였던지 레인이 눈을 크게 떴다. 돌이켜 보면 제 이복 오빠는 헤어지기 전에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완전히 믿어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어 주려나. 놀란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무언가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줄곧 묻고 싶었어요. 왜 제게 기회를 주셨어요? 죽이는 게 훨씬 간단했을 거예요. 혈육이라고 해도 결국,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딸이고, 레스터 오라버니의 동생이었어요. 살려 주신 것만으로도 크게 감사하죠. 하지만 오라버니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저를 리세티로 보내서 새로운 기회를 주셨어요. 기회를 주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
살리기는 했어도 불안했다면 리스를 정략결혼 시키는 게 나았다. 아무래도 슈리아의 일로 정략결혼을 꺼렸던 모양이지만, 그런 거라면 산골의 신전에 박아 두는 등의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레인은 리스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 결과, 리스는 자유롭게 날아올라 제 힘으로 라인셀에 돌아왔다.
레인은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신중한 얼굴로 리스를 살폈다. 리스의 말은 지난 20년의 세월 동안, 종종 이복동생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수도 없이 생각한 의문이기도 했다.
“확인하고 싶었어.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지.”
20년 전의 질문의 답이 눈앞에 있었다. 레인은 궁금했다. 이제 와서 제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분명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이지만,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레인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레인이 살아남아 기회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회조차 잡지 못했던 사람이 있다. 가령 감옥에서 한 번 죽어버렸던 자신이라거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 독을 마신 어머니처럼. 자신은 그렇다 쳐도 어머니에게도 다른 기회가 있었더라면, 그녀는 정반대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리스의 성공은 슈리아도 성공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심어주지만, 그녀의 최후를 생각하면 조금 우울해진다.
하지만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순간의 복수심에 휩쓸리지 않고 무고한 이복동생을 구해낸 것에 대한 기쁨이 더 컸다. 아무 죄도 없이 주변 환경에 휩쓸려 파멸할 뻔한 유니 아이제나흐는 불행한 최후 대신에 번듯한 미래를 맞았다.
멀리서 유니의 소식을 들을 때야 그저 뿌듯하기만 했으나, 실제로 보게 됐을 때는 걱정이 많았다. 구해줬다고 여긴 이복동생에게 가족을 죽였다는 원망의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간 느껴왔던 뿌듯함이나 만족감이 모조리 사라지고 싸늘한 배신감만이 남을테니까.
복잡한 표정을 짓는 레인을 보며, 행복하게 온전히 살아가는 리스티 시에란은 지금이 저를 살려 준 오라버니의 은혜에 유일하게 보답할 때임을 알았다. 레인을 원망한 적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리스는 거짓 한 점 없이 환하게 미소지었다.
“전 행복해요.”
“…….”
“오라버니 덕분이에요.”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이나 리스를 바라보던 레인이 시선을 돌려 테오도르를 보았다. 뒤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던 테오도르가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리스가 놀라 등을 두드렸고 레인은 피식 웃었다.
“그래. 좋은 남편을 두었네.”
테오도르가 어찌할 줄 모르며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딸꾹질이 나고 있어서 조금 우스꽝스럽기는 했다.
“다행이야. 개차반 같은 놈이면 죽여 버릴까 했거든.”
“아니, 그, 저기?”
“살아서 다행이야, 그렇지? 테오도르.”
하고 싶은 말을 마치고, 진지한 대화가 없었던 양 레인이 가볍게 앞서 걸었다. 테오도르는 긴장이 풀렸는지 딸꾹질을 마치고 과연 소문의 베델 공작이라느니 하는 겁도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들었을 법도 한데 레인은 별말 없이 앞서 걸었다.
제법 넓은 정원을 한참이나 걷던 레인이 멈춰 섰다. 리스가 어릴 적 이 저택에서 살았을 때도 와 본 적이 없는 구석이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고민하던 리스의 눈에 작은 무덤이 눈에 들어왔다.
묘비에 세 사람의 이니셜만이 쓰여 있는 무덤은 초라하다면 초라했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았다. 그걸 보면서 리스는 다시 유니로 돌아갔다. 이미 아홉 살에 버렸던 이름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다시 유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유니 아이제나흐. 그리고 이 무덤들은……. 유니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무너졌다. 너무도 자연스레 눈물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앞에 서서 레인이 여상한 어조로 설명했다.
“부모님과 레스터의 무덤이야. 그렇다고는 해도 머리채와 소지품을 묻었을 뿐이지만.”
“왜…….”
유니에게야 소중한 가족이었지만, 레인에게는 원수나 다름없었다. 손수 감옥으로 보내 사형대에 오르는 것을 방치했다. 그렇게 최악인 사이인지라 유니는 레인이 세 사람의 무덤을 만들었을 거라고는 가정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샌가부터 정신없이 울고 있는 유니에게 천천히 레인이 다가왔다. 그는 난생처음 보는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로 유니의 이마 위에 입을 맞추고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네가 언젠가 여기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내 가족은 무덤조차 남지 않았어. 기왕 네게 삶을 줄 거라면… 죽은 이를 추억할 수 있는 장소 또한 주기로 결심했지.”
냉정한 베델 공작. 피도 눈물도 없는 강력한 마법사. 수많은 소문들이 지금까지 유니를 어지럽혔지만, 이 순간 유니는 레인이 그와는 정반대의 본질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증오에 얽매이지 않고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 그녀를 살려 주었던 오라버니.
무너지는 유니를 테오도르가 감싼다. 바람이 분다. 무덤이 있는 방향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유니를 감싸 안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욕하지만, 유니의 기억 속에서는 그저 추억만이 남은 가족이었다. 옛 추억을 그리는 정도는 해도 되는구나. 누군가에게 허락받을 필요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제야 허락을 받은 기분이 들어 유니는 안도했다.
한참을 울던 유니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레인.”
유니는 잠시 울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에 서 있는 사람을 유니는 알고 있었다. 유르딘 니제스 렘샤이트 후작. 그 언젠가 정원에서 유니와 놀아 주었던, 그러면서도 시선은 항상 레인에게 꽂혀 있었던 남자. 레인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했다가 유니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따가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
나지막이 중얼거린 레인은 마지막으로 테오도르와 짧게 눈빛을 교환하고 유르딘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유르딘은 손에 들고 온 거대한 숄을 레인의 몸에 둘렀다. 대마법사인 레인이 이 정도의 바람에 감기 따위가 걸릴 리 없는데도 다정하고 진중한 손길이었다. 울던 와중에도 조금 웃음이 났다. 그때도 과하게 허둥거리며 레인을 살폈었지.
그때의 레인은 모든 행동을 몹시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날카롭게 대응했다. 하지만 지금의 레인은 대외적인 모습은 흠잡을 데 없이 날카로울지언정, 본질은 그때보다 훨씬 유하고 안정적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목소리, 그 무엇보다도 행복해 보이는 모습.
유니 아이제나흐의 기억 속에 부채감처럼 눌어붙어 있던 레인의 우울한 얼굴 위로 지금의 레인이 덧그려진다.
당신이 행복해져서, 내가 행복한 것을 확인시켜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리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각하며 테오도르에게 몸을 기댔다.
리스 교수의 기록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