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사단 (17/20)

마법사단

레인이 정식으로 베델 공작이 된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본격적으로 공작 위를 물려받은 후부터 정신없이 일이 쏟아지기 시작해 레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갑작스레 팔자가 핀 것도 마냥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3개월이었다.

유르딘도 기사 작위만 갖고 있다가 후작 위를 받게 되기는 하였으나, 원래부터 제 가문의 지지를 받았던 데다가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전장을 구르며 신뢰할 만한 동료를 만들어 왔기에 경우가 달랐다. 레인은 아무런 준비 과정 없이 제 손에 넘치도록 쥔 것을 바닥부터 쌓아 올려야 했다. 얼기설기 쌓아 올리는 꼴이었으나 다행히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친척들로 영지 내의 빈자리를 채우고 저택의 사용인들도 완전히 교체했다. 기초는 쌓아 두었으니 남은 몇 년은 뼈 빠지게 일하면서 제가 쌓아 올린 것들을 단단하게 보강해야 했다.

힘들기는 했어도 일단 주변을 갈아 치우고 나니 마음은 편했다. 영지도 영지이지만, 일단 저택이 슬슬 제집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좋았다. 특히 레인은 정원과 공작 부인이 쓰는 방을 신경 써서 갈아엎었다. 아나벨의 취향으로 꾸며져 있던 정원은 기억과 최대한 흡사하게 고쳐 꾸몄다. 레인의 대에는 쓸 일이 없는 공작 부인의 방도 최대한 어머니가 살던 때와 비슷하게 꾸미고 나니 만족스러웠다.

본격적으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봄, 레인은 왕의 칙서를 받았다. 마법사단 창설에 관한 내용이었다. 공작가의 일이 끝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새로운 일을 주다니. 왕명이 적힌 칙서를 못마땅하게 보던 레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왜 한다고 해서…….”

“하하, 기왕 하기로 한 거 열심히 하도록 하세요.”

레인을 도와주기로 되어 있는 렌피르가 사람 좋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니 더 이상 불평불만을 하기가 힘들었다. 유르딘이 전장으로 떠나고 쓸쓸해하던 차였다. 레인은 이런 상황에조차 그를 챙겨 주는 렌피르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얼마 전 에일리야가 죽었다. 대외적으로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택 한편에서 조촐히 치러진 장례식에는 렌피르와 그의 아내, 주치의였던 의사, 가문의 집사, 그리고 레인까지 모두 다섯 명이 참석했다. 차마 자신이 가도 좋을지 확신을 못 하던 레인에게 렌피르는 꼭 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레인 덕분에 에일리야는 평생 꿈꾸던 소망을 이루고 편히 죽었다면서 레인이 와야 에일리야도 편하게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설득했다.

미엘을 봉인했음을 알린 후 에일리야는 더없이 만족한 얼굴로 평온하게 몇 달간 잠으로 목숨을 이어 가다가 고통 없이 숨을 멈췄다. 하루를 울며 보낸 렌피르는 다음 날부터 에일리야의 죽음을 잊으려는 사람처럼 일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쓰러진 게 불과 얼마 전 일이다.

렌피르는 한동안은 수도를 떠나 후작령으로 요양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며칠 후면 출발이라 신경 쓸 일이 많을 텐데도 막판까지 일부러 와서 레인에게 신경을 써 주고 있었다. 레인은 더 이상의 군말 없이 렌피르가 건네는 명단을 받아 들었다. 왕의 승인을 받았다는 표식이 제일 앞장에 찍혀 있었다.

“전하께서 인사를 맡긴다고 하시긴 하셨지만, 경험도 없는 당신에게 덜컥 모든 걸 위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당신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기에는……. 글쎄요, 전하께서도 원하는 사람을 심어 놓고 싶지 않겠습니까?”

마법사단을 창단하며 단장은 레인이 맡기로 결정 났고, 그 아래에 부단장은 두 명을 뽑기로 되어 있었다. 한 명은 왕이 준비해 준 명단에서 뽑는다. 선택은 레인이 하지만 1차적으로는 왕이 뽑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는 셈이니 자연스레 왕의 의견이 들어가는 셈이다. 다른 한 명은 기존의 왕실 마법사들 중 마법사단에 입단하기로 결정된 마법사 중에서 뽑는다. 아무래도 기사단처럼 직접 체계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이니만큼 원로 마법사들 중에서는 마법사단에 들어가는 것을 사양한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명단만 해도 많네요. 이 사람들을 다 살펴봐야 하는 건가요?”

“열넷이면 많은 수도 아닙니다. 일의 규모를 봤을 때는 지원자가 수십 배는 모였을 테니까요. 이것도 나름 많이 추린 것으로 보입니다.”

뭘 해도 넘쳐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레인은 왕이 건넨 명단의 열네 명을 살피고, 그다음으로는 왕실 마법사들을 살폈다. 나흘간의 면접과 심사숙고 끝에 결정된 부단장은 이카레스 백작가의 차남인 로빈과 마렐 남작 대리인 셀리나였다.

로빈 이카레스는 귀족가의 차남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을 걸어온 남자였다. 차남이지만 가문에서 지원하는 사업을 도우며 차기 백작이 될 형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했다. 올해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결혼 적령기를 맞아 다른 가문의 영애와 약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고 사교계의 평판도 좋은 데다 능력 있는 것으로 평가되니 그야말로 무난한 인사였다. 그냥 로빈을 뽑으라고 나머지를 대충 명단에 올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특출 났다.

반면에 셀리나 마렐은 몹시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어떤 점에서 파격적이냐면, 일단 셀리나는 여성인데다 미망인이었다. 마법사들은 워낙 인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왕실 마법사가 될 수 있었지만 언제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마녀니 뭐니 공공연하게 불릴 정도라서 이번 인사 또한 무언가 부정이 있는 게 아니냐며 공공연히 떠들어 댈 정도였다.

당연히 부정은 없었다. 왕실에 소속된 기존 마법사들 중 지원자를 대상으로 마력을 측정해, 일정 이상 높은 수치를 기록한 자들을 후보로 세웠다. 객관적인 수치를 기준으로 후보를 선발했으니 이 과정에서 삿된 의도가 개입될 여지는 없었다. 이렇게 선발된 후보 중에 셀리나의 태도가 부단장에 가장 적합했을 뿐이다.

다른 마법사들은 레인이 상급자가 된다는 걸 납득 못 하는 건지 그냥 단순히 무시하는 건지는 몰라도 엄연히 그들을 살피러 온 레인을 가르치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니면 반대로 레인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과하게 아부를 떨었다. 레인에게 비교적 담백하면서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예의를 차리고, 무엇보다 일에 진중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셀리나의 열정은 레인이 본 적 없는 어머니의 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머니도 한때는 저런 눈으로 꿈을 꾸다가 결국 세상에 저항하지 못하고 딜란과 결혼했을 터였다.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았다면 불행으로 걸어갈 필요도 없었을 텐데. 파격적인 인사가 될 것을 알았으나 어머니를 떠올린 이상, 성별 때문에 셀리나의 기회를 박탈하고 싶지는 않았다.

로빈이 셀리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찌하나 걱정을 했지만, 로빈은 사교적인 태도로 셀리나와 나름 가깝게 지냈다. 주로 외부와 마법사단의 조율은 로빈이 맡았고 레인과 셀리나는 내부의 일을 맡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되어 막 발족한 마법사단은 어설프지만 나름 무난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법사의 충원이었다. 기사단처럼 체계적인 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절대적으로 더 필요했다. 에일리야가 모아 둔 서적과 왕궁에 유물로 남아 있던 사료를 분석하고, 기존 왕실 마법사들과 마도구를 제작하는 장인들이 총동원되어 기존의 마력 측정 장치가 개조되었다.

왕국 곳곳에 일정 수준의 마력을 지닌 자들에게 마법사단의 입단 자격을 준다는 소식을 널리 알렸다. 마법사단에 소속되면 기사와 같이 준귀족의 작위를 받는다. 사람들은 반쯤은 확률 높은 도박을 거는 심정으로 수도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라인셀이 호황인지라 평민이라고 해도 평균적인 형편이 좋은 편이어서 수도로 올 만한 돈과 시간을 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측정은 기존 왕실 마법사 중 마법사단에 입단한 마법사들이 맡았지만, 레인도 마냥 놀 수는 없었다. 하루 평균 30, 40명 정도가 장치에 반응을 보였고 개중 마법사단에 입단할 만큼 강력한 마력을 지닌 사람도 사나흘에 한두 명 정도는 꼭 있었다. 그렇게 석 달 정도 부지런히 검사했더니 마법사단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채워졌고, 그 외에도 마법사의 자질을 가진 사람의 수만 몇 천 명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수에 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3,000명을 모두 기사단에 넣을 수는 없으니, 궁리하던 왕은 자주 쓰지 않던 왕가의 별궁을 개조해 마법 교육 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중 뛰어난 일부는 마법사단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왕국 전역으로 퍼져 라인셀에 마법을 정착시키는 근본이 될 것이다.

순식간에 별궁이 개조되고 학사 일정이 잡혔다. 나머지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어도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결국 왕은 또 레인에게 매달렸다.

“베델 공, 타인에게 공의 지식을 베풀어 준다면 그것이 곧 왕국의 자산이 되겠지. 무척 보람차고 기쁜 일 아니겠는가?”

언제나 왕의 말투는 우아했지만 매일같이 듣다 보니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레인은 처음부터 마법의 극의인 마법진을 접하고 마법을 배워 나가는지라 남들과 배운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들어 거절했다. 교수직을 맡는 대신, 교수로 내정된 기존 왕실 마법사들 위주로 상위의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셀리나를 비롯한 왕실 마법사 출신의 단원들은 레인에게 마법을 배워 이번에 완전히 새로 들어온 신규 단원들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그야말로 정신없는 날들이 훅 지나갔다. 왕실에서 많은 인력과 금을 투입해 도왔음에도 레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마법사를 충원하는 것 외에도 조직을 굴리기 위해서는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꽃잎이 흩날리던 창문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어이 해가 바뀌어서야 쉴 틈이 났다. 원래는 식사도 10분 만에 끝내다가 요즘은 차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내일은 무려 휴가를 받아 쉴 수 있게 됐으니, 창단 초기에 비하면야 엄청나게 편해진 셈이었다.

레인은 멍하니 휴식 시간을 누리며 창문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지만 새하얗게 눈 쌓인 모습은 또 새로웠다. 다른 뭔가를 할 기력이 없어서 그저 하염없이 눈발 흩날리는 바깥을 보고 있는데, 눈에 익은 마차가 옆 건물 쪽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앗…….”

“단장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레인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입으로 내뱉었다가 셀리나의 의아한 눈빛을 받았다.

“아냐. 오늘은 피곤해서 역시 퇴근해야겠어.”

허겁지겁 얼버무린 레인은 급하게 겉옷을 걸쳤다. 쉬라고 해도 조금 더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레인이 왜 갑자기 서두르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셀리나는 큰 의문을 갖지 않고 인사한 후 이내 일에 마저 집중했다. 복도로 나간 레인은 1층으로 내려갈 시간조차 견디지 못하고 창문 아래로 뛰어내렸다. 건물은 높았지만, 바람으로 몸을 띄우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생각보다 마법사단의 규모가 커져서 현재는 원래 쓰기로 했던 건물을 증축 공사하고 있는지라 현재는 기사단의 건물 한 채를 빌려 쓰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옆으로 들어간 것은 분명 기사단장인 유르딘의 마차였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레인은 바깥에서 잠깐 기다리다가 눈발이 굵어져 사람이 없어졌음을 확인한 후 제 몸을 도로 띄워 곧장 꼭대기 층에 있는 유르딘의 방 창문으로 다가갔다.

똑똑. 창문을 두드리자 유르딘이 놀란 얼굴로 창문을 열었다. 언젠가와 정반대의 그림에 웃음이 나왔다. 기겁을 하며 레인을 받아 든 유르딘은 창문을 닫고 차가워진 몸을 끌어안았다. 그 행동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음……. 전 물러나 보겠습니다.”

옆에서 베른이 눈치를 보다가 방을 나갔다. 무려 상냥하게 문까지 잠그고 나가 준다. 레인은 거기에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유르딘을 붙잡고 있었다. 무려 열 달 만의 재회니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베른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르딘은 레인에게 입을 맞췄다. 눈앞에 있는 레인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겠다는 듯이 양 뺨을 감싼 채 잡아당기고 혀를 밀어 넣었다. 조급했으나 난폭하지는 않도록 몇 번이고 레인의 입술과 입 안을 탐했다. 양 뺨을 감싼 손이 목 뒤를 감싼 채,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로 들어왔을 때는 오싹한 기분마저 느꼈다.

“읏…….”

그도 그럴 게 열 달이나 성적인 접촉이 전혀 없었다. 예민한 반응에 유르딘은 레인의 다리 사이로 제 다리를 밀어 넣었다. 조금씩 반응하던 성기가 유르딘의 허벅지에 닿고 눌리자 역으로 조금씩 부풀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레인이 사랑스러워서 유르딘은 손을 뻗어 끌어안았다. 포옹이 끝났을 때 레인은 옷매무새가 헝클어진 채로 책상에 앉아 유르딘을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잠깐 보고만 듣고 네게로 바로 갈 생각이었는데, 설마 창문으로 올 줄은…….”

“제가 얼마나 심장 떨어질 것 같았는지 좀 아시겠어요?”

“그래. 너무도 잘 알겠어.”

레인에게도 이제 유르딘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놀라는 모습을 보니 조금 자제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단계적으로 조금씩 익숙하게 만들면 언젠가는 익숙해지지 않을까? 레인은 즐겁게 상상하며 유르딘에게 몸을 기댔다.

“그보다 베른이 오늘은 어째 순순히 가네요.”

“널 만났다가 중간에 가는 게 너무 아쉬워서, 이번에는 미리 짧게 전하를 알현하고 왔다.”

“잘하셨어요. 느긋하게 있을 수 있겠네요.”

만족스레 웃자 유르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얼굴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다시 입을 맞춰 온다. 아까까지만 해도 옷 위로 더듬고 주무르기만 하던 손길이 옷을 벌리고 틈새를 파고든다. 레인은 약간 낭패감을 느꼈다. 여기서 끝까지 하자는 말은 아니었는데…….

“괜찮겠나?”

망설임을 알았는지 유르딘이 먼저 선수 쳐서 질문한다. 이미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것은 레인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거의 1년 만의 재회인데 장소가 중요할까. 대답 대신에 어느새 구두가 떨어져 양말뿐인 발끝으로 유르딘을 문질렀다. 단단해진 유르딘의 열기가 두꺼운 겨울옷 너머로도 숨길 수 없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되어서야 어디 갈 수도 없을 거 아니에요.”

웃으며 말하고는 레인이 입술을 핥았다. 붉은 혀가 입 밖으로 나와 요염하게 날름거리고는 다시 입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뚫어져라 보던 유르딘이 레인에게 달려들었다. 레인은 제 몸을 더듬거리는 유르딘의 손길을 느끼다가 참지 못하고 손가락을 핥아서 적셔 뒤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유르딘이 쳐다보는 것을 깨닫고 손을 멈췄다.

“계속해.”

낮은 목소리가 잔뜩 흥분에 잠겨 갈라졌다. 제 말투가 명령조란 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유르딘은 머리끝까지 흥분해 있었다. 과거에도 본의 아니게 경험이 많았지만, 스스로 남이 보는데 뒤를 손가락으로 자발적으로 쑤셔 본 적은 처음이었다. 흥분에 젖어 어설프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내내 애가 탔다.

“아흑, 읏, 응…….”

“…….”

“아아, 앗. 유르딘…….”

이걸로는 부족하다. 애타는 눈길로 올려다보자 유르딘이 참지 못하고 레인의 손을 붙잡아 뺐다. 레인은 저를 책상 위에 올리려 하는 유르딘을 급하게 저지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상체만 기댄 채 유르딘에게 등을 돌리고 섰다. 책상 위는 서류가 가득했고, 책상 위에 누운 채로 하다가 넘어져서 망가지는 일은 없어야 했다. 소파라는 선택지도 있었으나 남이 앉을 것을 생각하면 그 또한 찝찝했다. 제외하고 제외하다 보니 한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마법사단은 옛 전통을 중시한다는 이유로 셔츠와 바지 위에 옛 시대에서나 입던 고전적인 로브를 제복으로 선택해 착용하고 있었으므로, 바지가 벗겨지고 로브만 반쯤 걷어진 채 보이는 흰 살결이 몹시 매혹적이었다. 유르딘은 손을 뻗어 제 앞에 보이는 레인의 엉덩이를 가볍게 쥐었다가 손을 뗐다. 유르딘이 느끼기로는 자신이 밀어붙이는 힘을 레인이 선 채로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유르딘.”

레인이 흡사 조르듯이 조심스레 유르딘을 불렀다. 유르딘은 망설임을 내던지고 천천히 레인의 허리를 붙잡았다. 성기 끄트머리가 구멍 입구에 맞물리자 레인이 조금 긴장한 듯이 몸을 움츠린다. 유르딘은 천천히 성기를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지난번 했을 때는 제법 쉽게 유르딘을 받아들였던 것 같은데, 워낙에 간만이라 그런 건지 진입이 쉽지 않았다. 레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긴장해서 꽉 쥔 주먹이나 긴장으로 가볍게 떠는 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흐……. 으, 읏……. 다 들어왔어요?”

“……아직 반인데.”

“뭐 이렇게, 큰… 거예요, 윽…….”

“또 도발하는 거야?”

“아니, 이건 한탄… 흐, 아앗, 아!”

레인이 조금 힘을 뺀 틈을 타, 유르딘은 제 성기를 끝까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깊은 곳까지 밀려 들어온 성기에 레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몸을 떨었다. 그런 와중에도 제 소리가 크다는 것을 느꼈는지 레인이 입술을 깨물고 숨을 몰아쉬었다.

“후으……. 하아…….”

“소리 내도 괜찮아, 레인.”

“하지만…….”

마법을 실용화하기 시작하며 왕국 수도 내의 중요한 장소에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지속적인 마법을 걸어 둔 상태였다. 왕국군의 기밀을 다루는 유르딘의 집무실 또한 마찬가지다. 마법을 직접 걸고 실험해 봤으니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더라도 바깥에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건 기분상의 문제였다. 유르딘의 일터에서, 공적인 장소에서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도 모자라 수치를 모르고 신음을 지른다는 게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자신이 있는 장소를 되새기자 기묘한 죄책감과 함께 흥분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변화에 당황할 새도 없이 잠시 기다려 주고 있던 유르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레인이 적응할 시간을 주듯 유르딘은 천천히 움직였다. 커다란 성기가 거의 밖으로 빠져나올 듯이 나왔다가, 안쪽 깊숙한 곳까지 밀려 들어갈 때면 내벽이 모조리 유르딘의 움직임을 쫓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길고 굵은 성기는 한참을 빠져나가다가 다시 진입한다. 두꺼운 부분이 내벽을 비비며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끄트머리까지 모두 들어오면 안을 찍어 누르고는 느릿하게 빠진다.

“으윽, 읏, 하……. 아, 아앗…….”

소리 내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무색하게 벌어진 입에서는 언어가 되지 못한 쾌감의 형태가 연거푸 흘러나왔다. 느린 움직임 덕에 성기의 생김새가 제 내벽 안에 새겨지는 것만 같았다. 고통이 쾌감에 흐려질수록 갈증이 일었다. 느릿한 움직임은 조금씩 빨라졌지만, 레인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레인은 팔을 뒤로 뻗어 허우적거렸다. 그 의도를 알아채고 유르딘이 손을 잡아 주었다.

“유, 유르딘…….”

“힘들어?”

이름을 부르자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잔뜩 흥분한 열기가 제 몸 안을 고스란히 들락날락하는 것을 느꼈는데도, 지나치게 목줄을 바짝 조인 개처럼 유르딘은 제 욕망을 충실하게 멈춘다. 레인은 흥분이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책상 위에 비비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아픈 건가?”

“……아니…….”

너무 잘 참는 거 아니야?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이 몇 달이나 헤어졌다가 다시 재회했는데도 유르딘은 지나치게 침착했다. 굳이 사소한 행위나 말 하나하나에 수줍어하기에는 더한 짓도, 말도 많이 해 봤는데, 정말로 순수하게 걱정하는 유르딘을 보니 답지 않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다행이다. 안 그랬다면 빨개진 얼굴이 다 보였을 테니까. 레인은 귓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세, 세게…….”

“…….”

“부족하니까, 세게… 해 주세요.”

잠시 말이 없던 유르딘이 레인의 다리를 잡고 홱 몸을 돌렸다.

“힉, 흐아앗……!”

안에 들어가 있던 성기 때문에 뒤에도 자극이 왔다. 내벽 전체가 마찰되며 오싹하게 뜨거운 소름이 돋았다. 엎드렸던 자세에서 몸을 돌려 반쯤 마주 보게 된 자세가 됐다. 단지 참는다고 표현하기에는 지나친 인내가 들러붙은 얼굴이 레인을 마주하자마자 폭발하듯 욕망을 드러냈다. 괜한 말을 한 걸까. 레인이 어색하게 웃자 유르딘 또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으나, 지나치게 욕망을 내리누르는 기세가 흉흉해 웃는다는 느낌이 영 안 들었다. 유르딘은 레인의 한쪽 다리를 제 허리에 끼워 넣은 채 안을 파고든 성기를 꾹 누르며 몸을 숙였다.

“응……. 윽, 아읏…….”

견디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신음에 유르딘이 이를 악물었다.

“……레인.”

언제 조심스럽게 움직였냐는 듯이 유르딘이 레인의 안쪽으로 제 성기를 세게 찔러 넣었다. 온몸이 뒤흔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연거푸 깊숙하게 안으로 찔러 넣을 때마다 사소한 생각들이 모두 다 휘발됐다.

“하, 윽, 유르, 유르딘, 으읏, 으, 앗, 아……!”

레인은 제 몸이 제멋대로 흔들리며 머리가 책상 위에 쓸리다가 사소한 서류나 펜 따위를 치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머리끝까지 흥분했다. 유르딘이 레인의 등 뒤로 손을 밀어 넣고 그대로 들어 올리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유르딘의 체온이 이마에 닿자 그제야 한발 늦게 목을 끌어안는다. 레인은 제 낯을 유르딘에게 비비며 필사적으로 속삭였다.

“하으, 아, 응, 유르딘……. 기분, 좋, 읏, 좋아요?”

좋다는 대답이 돌아올 게 당연한데도 몇 달 만의 재회라서 그런가 괜히 조바심이 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유르딘이 그런 레인을 달래듯이 등에 올린 손을 부드럽게 아래로 쓸어내렸다. 다정한 행동도 지금의 상태에서는 그저 쾌감으로 받아들여서, 레인은 몸을 잘게 떨었다.

“흐으…….”

“좋아, 몇 천 번이나 생각하며 매일같이 꿈을 꾼 너를 직접 보고 만질 수 있으니 좋고. 게다가 네 안이 내 것을 놓치고 싶지 않단 듯이 달라붙는 감각이 황홀하고…….”

“그, 그만.”

직설적인 단어의 향연에 레인은 유르딘을 만류했다.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보며 유르딘이 즐겁게 웃더니 레인의 귓가를 가볍게 핥아 올렸다.

“으응……!”

“하긴,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겠지.”

말보다는 행동이 더 확실하다. 유르딘은 레인을 단단하게 붙잡은 채 허리를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절로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사정 봐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움직임에 레인은 정신없이 유르딘의 이름을 부르며 쾌락의 파도에 휩쓸렸다.

아무리 그래도 장소가 장소이니 한 번 정도만 할 생각이었는데, 둘 다 분위기와 쾌락에 휩쓸려서 연거푸 세 번이나 해 버렸다. 세 번이라니. 예전이라면 기절할 정도로 무리한 셈이었지만, 나아진 체력 덕에 죽을 것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대신 딱딱한 곳에 몸을 누인 채 긴장하고 있었더니 온몸이 아프긴 했다. 레인이 불편해하는 기색을 눈치채고 유르딘은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자.”

레인도 아쉬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유르딘의 집무실에서 정신을 놓고 쾌락에 탐닉했다는 게 부끄러워져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돌아가려고 옷을 입고 내려가는데 1층에 도착했을 때 바깥에서 베른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베른은 자신이 연인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잠깐 안도의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도로 심각한 얼굴로 변했다.

“유르딘 님.”

“중요한 이야기인가요?”

유르딘보다 한 발 앞선 레인의 질문에 무겁게, 그러나 잽싸게 고개를 끄덕인다. 안 가려 할 것이 뻔하니 먼저 선수를 쳐서 레인은 유르딘의 등을 떠밀었다.

“다녀오세요. 저도 제 집무실에 다녀와야 할 것 같으니까.”

“레인, 하지만 위험…….”

“집무실은 가깝고 저도 더 이상 약하지 않답니다.”

예상대로의 말이다. 미리 선수를 맞은 유르딘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급한 걸음으로 위층에 올라가는 것을 보며 레인은 기사단의 건물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걸어서 마법사단의 건물로 들어왔다. 나갈 때라면 몰라도 들어갈 때는 절차를 지키는 편이 좋았다. 마법사단의 건물 입구에 앉아 있던 마법사 벤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 일어났다.

“레, 레인 님? 언제 나가셨다가 돌아오셨어요?”

“아까 창문으로 뛰어내렸거든.”

벤은 당황으로 입을 떡 벌렸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놀랐잖습니까! 나가는 걸 보지 못했는데, 누가 변장이라도 하고 들어오는 줄 알았잖아요.”

“미안. 다음부터 조심할게.”

“에휴, 미안하시면 주방에다 사과 파이라도 갖다 주라고 해 주세요.”

“넌 네 단장을 막 부려 먹는구나.”

“헤헤.”

벤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수도까지 떠날 정도로 나름의 도전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한 젊은이들이 많았다. 덕분에 자연히 신생 마법사단의 마법사들 또한 젊은 사람이 많았다. 레인과 비슷한 연배들인데다, 레인이 격의 없이 대해 준 덕에 점점 친해져서 지금은 적당히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게 되었다.

물론 아무리 친근하게 군다고 해도 한계는 있다. 마법사단의 단장이라는 것 외에도 레인은 베델 공작의 이름을 지닌 대귀족으로 어지간한 귀족들과도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이렇게까지 친한 척하는 사람은 벤을 포함해 원래부터 사교성 좋고 간을 반쯤 내놓고 사는 두엇 정도밖에는 없었다.

과연 간을 반쯤 내놓고 사는 놈답게, 심부름을 시키는 것에 한술 더 떠서 벤은 추가적인 주문을 했다.

“웬만하면 레이카한테 갖다 주라고 하세요.”

“레이카는 다른 일 보라고 해야겠네.”

“너무해요.”

벤이 과장되게 우는 소리를 냈다. 레이카는 벤이 한창 꼬시려고 열과 성을 다하는 하녀였다. 레인은 코웃음치고 돌아섰으나, 정작 주방에 가서는 벤이 사과 파이를 찾더라고 넌지시 말해 주었다. 하녀들이 일제히 레이카를 쳐다보자마자 레이카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며 미소가 피어오르는 게, 잘하면 봄이 오기 전에 둘이 잘될 것 같았다.

레인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성큼성큼 계단 위를 올랐다. 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레인은 부스스한 머리로 급하게 반대편 방에서 빠져나오던 로빈을 마주쳤다. 눈 밑이 퀭한 로빈이 레인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이카레스 경?”

눈을 동그랗게 떴던 로빈이 이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 들켰네요.”

“뭐가 말이야.”

“단장님 몰래 나가서 럼주라도 한 잔 마시고 올까 했는데, 마주쳤으니 그럴 수가 없잖아요.”

부스스한 몰골의 로빈을 훑어보며 레인이 가볍게 혀를 찼다.

“참 나, 아래 내려가서 주스나 한 잔 마셔.”

“알겠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로빈의 모습을 레인은 잠시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찌나 오래 마법사단에 머물러 있었는지 원래는 빳빳한 제복이 잔뜩 구겨져서는 구석에 뭉쳐 두고 잊어버린 손수건 같았다. 처음에는 사교계의 최신 유행을 따르던 귀족 청년이었는데. 출세를 대가로 깔끔함과 세련됨을 내다 버린 셈이었다.

“휴가라도 줘야 하나.”

작게 중얼거리면서 레인은 잠긴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셀리나는 이미 퇴근한 모양이었다. 꼼꼼한 성격의 셀리나가 항상 깨끗하게 정리해 두어서 집무실 안은 레인이 나갔을 때보다 더 깔끔했다. 구석의 금고로 간 레인은 마법으로 금고의 봉인을 해제하며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레인이 속으로 셋까지 셌을 때, 뒤쪽에서 날카로운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한숨을 쉬고 금고를 다시 닫은 레인이 몸을 돌렸다. 레인을 감싸고 있던 투명한 보호막은 레인을 보호하고 나서 저를 공격하는 이의 존재를 얽매는 사슬이 되어 습격자의 몸을 꽁꽁 묶고 있었다.

“큭…….”

마법의 사슬에는 마비의 효과도 있다. 레인은 움직이지 못하는 상대의 입 안에 숨겨져 있던 독약을 빼내고 암기를 빼앗았다. 그때쯤 로빈이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 레인과 암살자의 모습을 확인한 로빈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럼, 새삼 다칠까 봐.”

여유롭게 말하는 레인과 달리 위협이 있을 걸 뻔히 알면서도 자리를 떴던 로빈은 영 마음이 편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레인이 마법사가 된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일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유르딘 때문에 힘겨워하던 타국의 입장에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암살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오는 것을 막아 내기에 급급했지만, 몇 번 겪다 보니 조금 여유가 생겨 방도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 건물 전체에 일종의 감지 마법을 건다. 건물에 걸 수 있는 마법 중에는 자동으로 타인의 적의를 감지하는 마법도 있었지만, 그런 정교한 마법의 술식은 해석이 불완전해 당장 도입할 수준이 아니었다. 대안으로 건 마법은 허용되지 않은 자의 접근에 반응하는 감지 마법이었다. 마법사단의 제복에는 출입이 자유롭도록 마법진이 자체적으로 새겨져 있었으며, 그 외의 사람들은 입구에 대기하는 마법사가 신분을 확인하고 감지에 걸리지 않게 마법을 걸어 주었다.

24시간 마법사가 한 명씩은 입구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게 단점이었지만, 덕분에 누군가가 몰래 건물로 침입할 때마다 로빈이 아까까지 머무르던 방에 설치한 마도구에 반응이 왔다. 침입자가 들어올 때를 대비해 간단한 암호를 썼는데, 그게 럼주니 우유니 하는 단어들이었다. 다소 번거롭기도 한 방식이었으나 생포할 확률이 높아졌으니 결과적으로는 효율이 높았다.

이내 마법사단 건물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와 마법사들이 다가와 암살자를 끌고 갔다.

“그럼 이제 됐겠지. 오늘은 돌아갈게.”

“아, 네.”

로빈은 암살자가 잡혔는데도 곧장 돌아간다고 하는 레인이 어색한 듯이 보다가 이내 알아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평소라면 보고라도 듣고 갔겠지만, 오늘은 제 일이 더 급했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일이 끝났는지 유르딘이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정하게 웃는 유르딘의 에스코트를 받아 레인은 마차 위로 올라갔다. 마차가 출발하고, 유르딘은 맞은편에서 레인의 옆자리로 건너왔다. 레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었어요?”

“국경 부근에서 소모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인데……. 길게 이어질 전투는 아닌 것 같아서 명령을 내리고 왔으니 안심해.”

전투는 곧 유르딘의 출전을 뜻한다. 막 돌아온 유르딘이 또다시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우울해진다. 명령을 내리고 왔다고 해도, 또 언제 떠나야 할지 모른다. 레인의 얼굴 표정이 어두워지자 유르딘이 걱정스레 손을 붙잡았다.

“레인, 피곤해 보여.”

아무리 레인이 피곤해 봤자 방금 수도로 돌아온 유르딘보다 피곤할 리는 없었다. 레인은 괜한 걱정을 끼쳤다고 자책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밝게 웃었다.

“요즘 조금 바빴으니까요. 이제 휴일이니 쉴래요. 이렇게 된 거 하루 아프다고 할까 봐요.”

“좋은 생각이야. 따로 불편한 점은 없어?”

“네. 덕분에요.”

유르딘이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뭘요. 유르딘이 항상 도와주잖아요.”

“……그래.”

힘없이 대답하는 유르딘은 조금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피곤해 보이는 걸까? 레인은 괜히 머리칼을 손으로 매만져 정돈하며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우울한 연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마음이 아픈 일이다.

베델 공작가로 돌아간 레인은 유르딘을 위해 미리 준비해 뒀던 진귀한 식재료를 모두 써서 식사를 대접했다. 특별히 개조한 욕실의 커다란 욕조에서 목욕도 함께했고, 밤에는 그동안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몸을 겹쳤다.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하루를 빼서 다음 날에도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 무척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가기 싫은 이틀이 끝나고 마법사단으로 출근한 레인은 암살자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국내 귀족이 보낸 암살자 같습니다.”

“그래?”

레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가 건재할 때도 늘 암살자는 있었다. 베델 공작이 되어 그 무렵의 권세를 지니고 있으니 여전히 위협받는 것도 당연했다. 다들 레인에게 굽실대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일단 눈앞의 로빈부터가 레인보다는 국왕에게 속한 인물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로빈을 암살자의 배후로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상황이 녹록치 않은 것을 확실히 알고는 있었다. 차라리 적의 공격이 낫지, 내부의 싸움은 아직 제대로 겪어 보기 전인데도 벌써부터 지긋지긋했다.

“의뢰인을 정확히 아는 눈치는 아니더군요. 지금까지 보내는 족족 죽거나 잡혔으니 경계한 것이겠지요.”

“한동안은 이어지려나.”

“그렇게 봐야겠지요.”

몹시 타당한 추측이었으나 암살은 그 후로 거짓말처럼 뚝 끊어졌다. 일주일 걸러 한 번은 오던 것들이 귀신같이 사라지자 레인은 당연히 한 사람의 짓으로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유르딘이다. 유르딘은 전장에서 적을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암살에도 익숙한 숙련자였다. 암살에 익숙하니 암살자의 경로를 파악하기도 쉽고, 그만큼 기다리고 있다가 역으로 습격하기에도 용이했다.

하지만 왜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지? 유르딘은 암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레인을 가볍게 대하고 있었다.

고민이 이어진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레인은 살의를 감지하는 마법을 저택에 걸어 두었다. 아직 실용화할 단계는 아니었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거나 사용인들이 사소하게 다투는 것까지 잡아 낼 정도라서, 지나치게 예민한 감지가 주는 마력 파장에 골이 울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레인은 몰려드는 두통에도 마법을 해제하지 않고 꾸준히 마법을 유지했다.

이틀째 되던 날, 마침내 레인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평소보다도 훨씬 더 강렬한 살의를 느끼며 깨어난 레인은 살의의 근원지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조금 으슥한 정원 한복판이었다. 정원은 아름답게 꾸며 둔 것이 무색하게도 여기저기에 인간의 피와 살점이 튀어 기괴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공포와 죽음의 한가운데에 유르딘이 서 있었다. 진작부터 레인의 기척을 알아채고 있던 유르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인간을 고깃덩어리로만 보는 무심한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레인에게 닿았다. 사람을 학살한 감각에 여전히 빠져 있는 듯이 조금 위험하게 반짝이던 두 눈은 몇 번 깜박이고 나서야 조금 느릿하게 레인이 기억하는 유르딘으로 돌아왔다.

“왜 나왔지?”

“유르딘은 왜 여기에 있어요?”

“널 지키려고.”

“왜 제게 말하지 않고요?”

제 목소리가 힐난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레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이미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적 있는 유르딘이 제멋대로 또다시 살인에 빠진다면 어찌해야 할지 레인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바라지도 않는 미래였기 때문이다. 그저 오지 않기만을 바랄 미래.

레인은 유르딘을 사랑하지만, 지난 과거처럼 아무나 죽이는 유르딘과 사랑하면서 함께 살아갈 자신은 없었다. 물론 지금까지는 암살자를 죽였을 뿐이지만 잔혹한 살해를 이어 가다 보면 살의가 다른 사람에게도 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맹목적인 애정과 광기가 레인을 위한 온건한 집착으로 드러난다면 참을 수 있었지만, 타인을 향한 살의에 닿아 있다면 견딜 수가 없다.

의혹을 품는 레인을 지그시 바라보던 유르딘이 조금 퉁명스레 답했다.

“너도 말을 안 했잖나.”

“그야…….”

어떻게든 변명하려던 레인은 순간적인 위화감으로 간신히 유르딘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유르딘의 얼굴에 조금 불만족스러운 기색이 서려 있다. 목소리 또한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약간 날카로웠다. 그러니까 이건…….

토라진 거다.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유르딘이 수도에서 돌아왔던 날, 아무 일 없냐고 물었던 것부터가 토라짐의 시작이었다. 그때도 묘하게 퉁명스럽게 대답했지. 하긴 유르딘이라면 레인에게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보고받았을 거고, 처음 재회한 당일에도 마법사단에서 벌어진 공방의 기척을 건물 밖에서라도 알아챌 수 있었을 터였다. 보통의 검사라면 불가능하지만, 한계를 모르는 검사 유르딘 니제스라면 가능했다.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진 것을 뻔히 아는데 아무 일도 없다고 답했으니 확실히 기분이 나쁠 만했다. 레인은 제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다가가 피가 묻은 유르딘의 손을 잡았다. 레인의 소매가 피로 물들자 유르딘이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가만히 내려다보며 손을 빼지는 않았다. 레인은 생긋 웃었다.

“죄송해요. 유르딘과 함께하는 데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내가 미쳐서 다 때려치우고 헤집어 놓을까 걱정한 건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고 넘어가기에는 유르딘도 노련한 사람이었다. 레인의 심중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다. 레인은 거짓으로 부정하는 대신에 애매한 미소로 말을 얼버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교라도 배워 둘 걸 그랬지.

유르딘은 더 이상 뭐라고 하는 대신에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사실 그 점은 유르딘 본인도 경계하고 있는 것이라 자신 있게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괜히 제게 불리한 이야기를 끌어가는 대신에 유르딘은 말을 돌렸다.

“그래도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대응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어.”

타인의 악의에 고통받고 한 번은 아예 죽기까지 했던 레인이니 막연히 유사한 악의를 받으면 견디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레인을 지탱해 주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르딘이 먼발치에서 본 레인은 놀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단순히 익숙해서 받아들이는 거라면 언젠가는 그 고통이 터져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인은 괴로운 기색이 보이지 않는 얼굴로 가볍게 웃었다.

“예상했으니까요. 그리고 자기 이득을 위해서 절 죽이려고 하는 건데, 뭐 이유라도 있으니까 납득하기 쉽잖아요.”

“괜찮은 거야?”

“네. 허세가 아니라 정말로 괜찮아요. 솔직히 처음부터 충격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뭐, 동물들도 구역 싸움 같은 것을 하니까 비슷한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했더니 괜찮더라고요.”

“그런 문제인가.”

터무니없는 비유에 유르딘이 웃었다. 하지만 영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맞든 틀리든, 사실 레인이 그렇게 생각해서 좋아진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유르딘은 이 세상을 바꿔서라도 레인이 생각하는 세상으로 만들어 줄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왕명으로 레인을 떠나가기 전에 한창 긴장하고 경계했었다. 유르딘이 곁에 있을 때는 아직 눈치만 보던 자들이 시간이 조금 지나고 위기감을 느꼈는지 본격적으로 활개 치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레인에게 강력한 마법이 있어서 더 이상 크게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불안했다. 몸이 다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도 다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레인의 곁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힘들어하고 있을 레인을 지탱해 줄 생각이었지만 레인은 유르딘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잘 상황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며 견디고 있었다.

물론 레인의 성장은 기쁘다. 둘만의 세계를 사는 게 아니라 남들과 똑같이 어울리며 살아가기로 했으니, 이제는 보호받는 게 아니라 저를 공격하는 상황에 익숙해져 스스로 대응할 줄 알아야 했다. 잘 알고 있다. 레인은 유르딘의 기대 이상으로 충분히 잘해 나가고 있었다. 분명 만족스러워할 일인데 조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내가 없는 새에 너무 빨리 자란 것 같아.”

그다지 해 준 게 없고 지켜봐 주지도 못했는데 레인은 혼자 너무나도 빨리 앞서 나가 버린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유르딘조차 앞서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빨라서 조금 겁이 났다. 언젠가는 유르딘과 닿지 않는 곳까지 가 버리는 게 아닐까? 레인은 맥락 없는 불안을 품은 유르딘을 바라보다가 생긋 웃었다.

“유르딘을 다시 만났을 때부터 이미 어른이었는걸요.”

“……미안하다.”

“그런 말씀을 하라고 한 말은 아닌데……. 여하간 조금 마음을 놓으셔도 괜찮아요.”

“너무 빠르게 앞서 가지는 마. 조금 아쉬우니까.”

아쉽고 쓸쓸하다는 감각은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정확히 어떤 생각의 발로인지는 유르딘도 정확히 짚어 내지 못했다. 어린 시절 레인을 지켜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레인에게 더 이상 유르딘이 필사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드는 불안, 그 온갖 감정들.

레인이 유르딘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을 들었다. 잔잔한 마력이 레인의 의지에 따라 공명하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비를 뿌린다.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조금은 따스한 온도의 인공적인 빗줄기가 정원에 흩뿌려진 피를 지워 내고 유르딘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 낸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레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안 죽었네요.”

“안 죽여. 정보를 캐내야지. 그리고… 더는 죽여서 해결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일을 벌이지 않기로 했으니까.”

빗속에서 레인이 웃었다. 비록 다들 의식불명의 중태라고 해도 자신을 노리던 암살자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이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르딘에게 입 맞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짧게 입을 맞추고 비 때문에 조금 차게 식은 품에 몸을 기댄다. 뜨거운 숨결이 레인 위를 맴돈다. 코끝에서 유르딘의 체향과 함께 정원의 싱그러운 냄새가 함께 맴돌았다.

“저도 당신도 변할 거예요.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도 있겠죠.”

레인은 확신을 품은 채 말한다. 깍지 낀 손에서 서로의 체온이 얽힌다. 유르딘의 얼굴에 서서히 불안이 걷혀 갔다. 더 이상은 쓸쓸할 것도 외로울 것도 없었다. 혼자 달려 나가는 게 아니라, 서로의 속도는 다를지언정 이제 함께 달려 나갈 테니까.

마법사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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