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에필로그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 해로 넘어가기 며칠 전인 어느 날. 레인의 작위 계승식은 다른 귀족들의 계승식과 함께 열렸다. 죄인을 모두 처형한 왕국은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다소의 절차를 무시한 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덕분에 갑작스레 작위를 계승받게 된 여러 귀족의 계승식이 한 번에 처리됐다. 레인은 그중 첫 번째로 베델 공작 위를 계승받았다.
레인 아이제나흐 베델.
원래 버리려고 했던 계획과 달리, 레인은 아이제나흐를 중간 성으로 남겼다. 딜란 아이제나흐와 직계의 가족들은 반역자로 처형당해 귀족의 명부에서 사라졌으나 왕은 아이제나흐의 성 자체를 박탈하지는 않았으며 연루되지 않은 아이제나흐의 친척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이미 베델 후작가의 누명으로 오랜 세월 반역자의 혈통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상황에서 레인이 또다시 같은 모욕을 듣지 않도록, 왕이 내린 나름의 배려였다.
아무리 이유가 있다지만 계속 아이제나흐의 성을 쓰는 게 처음에는 조금 떨떠름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그 이름을 피할 이유 또한 딱히 없었다. 스무 해 넘게 써서 익숙해진 이름인데 그 이름을 피할 이유는 사라진 망자들 외에는 없지 않은가. 신경 쓸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레인은 아이제나흐의 이름을 깔끔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베델 공.”
모여드는 귀족들과 인사하고 대화하다가 간신히 홀로 빠져나오는데 복도에서 즐거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란델이었다.
“축하합니다, 공. 앞으로 더 바빠지시겠군요.”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유르딘의 동생인 그가 존칭을 사용하는 게 너무도 어색했다.
“아니, 그……. 원래 하던 대로 말씀하세요.”
“사석에서는 그럴까요?”
“네.”
레인의 거부감을 예상하고 있던 그란델은 씩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손을 잡자 신나게 두어 번 흔들고서야 놓았다.
“어쨌든 일단락된 거 축하해. 정식으로 공작이 되었으니 전하께서 신나게 부려 먹겠구나.”
“축하하는 게 맞나요, 그거?”
묘하게 신나서 말하는 그란델에게 떨떠름하게 답하자, 그가 눈썹을 아래로 축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애도야. 마법사단 쪽도 신경 써야 하니까 앞으로는 진짜 정신없겠다.”
“최대한 노력해 봐야지요.”
“부탁한 일은 대충 다음 주쯤이면 끝날 거야. 그때까지만 참아.”
“네. 감사합니다.”
레인은 그란델에게 부탁해서 저택의 사용인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저 채워 넣을 준비다.
저택의 사용인 괴롭히기도 질렸을 무렵, 레인은 그간 모은 증거들을 모조리 수도 경비대에 넘겼다. 그간 딜란이나 레스터가 수도에서 저지른 짓을 실행했다거나, 아나벨의 명으로 타인을 해코지하거나,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각종 비리에 연루됐거나, 레인을 괴롭혀 귀족 모독죄로 잡혀 간 사용인의 수가 전체 사용인의 반을 넘어갔다. 말없이 소소하게 괴롭히기만 할 뿐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 않아 레인이 봐줄 줄 알고 조금 안심하던 사용인들은 대부분 도망칠 기회도 없이 한 번에 일망타진됐다. 일부 눈치 빠르게 도망친 자들은 경비대가 알아서 추격하고 있었다.
갑자기 인원이 확 빠져서 저택에 남은 사용인들은 정신없이 일에 허덕이고 있었다. 추가적인 보수를 두둑이 약속해 둔 상태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한계까지 부려 먹을 수는 없는지라 저택의 꼴이 조금 엉망이었다. 저택의 일에 익숙한 숙련자의 부재로 새로운 인원을 뽑는 데도 한계가 있어서 사람이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해 그란델에게도 부탁을 해 두었다.
인력난은 저택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었다. 아이제나흐 공작령은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절대로 레인 혼자 관리할 수 없었다. 지금 남아 있는 친척들은 예전에 레인을 가주로 올리고 싶어 했던 자들로, 대부분 딜란에게 미움을 사서 영향력이 좁아진 상태인지라 이 상황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레인은 남은 친척들을 새로이 기용했다. 어떻게든 사람을 뽑아 채워 넣는 것은 쉽지만 믿을 만한 사람을 고르고 또 신뢰를 쌓아 가는 것은 어렵다. 한동안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데, 이런 때 도와주는 사람은 어찌나 고마운지.
“백작께서도 바쁘실 텐데…….”
“그 정도야 뭐, 평생 결혼도 안 하고 살 줄 알았던 형의 연인인데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 음.”
말하다 말고 그란델이 잠시 생각에 빠져 제 턱을 손으로 쓸었다.
“레인, 언제 한 번 우리 부모님도 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제, 제가요?”
“응. 부담 되면 당장 연인이라고까지 소개할 필요는 없어. 인사야, 인사. 그 정도는 이상할 것 없잖아?”
“네. 뭐…….”
그다지 동의하지 못하는 어조로 레인이 말을 흐렸다. 한 번 만나게 되면 두 번 만나게 될 거고, 두 번, 세 번 만나면서 속일 수는 없을 것이고, 결국에는 사실대로 말해야 할 텐데. 뭐라고 말하지? ‘제가 왕국 제일의 남편감 유르딘 니제스를 꼬셨습니다. 보시다시피 남자고요. 후계자를 생산할 수는 없으니 손주를 볼 수는 없으시겠지만……’ 여기까지 말하면 선대 니제스 백작은 레인의 뺨을 날리며 ‘이 더러운 놈이!’라며 호통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당장 부담 갖지 말라니까. 설령 알린다고 해도 좋으신 분들이고.”
“……네.”
하긴, 유르딘과 그란델을 보건대 두 사람의 부모가 첫 대면에 뺨부터 날리는 격한 성질을 지녔을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부모님이 반대하거나 충격받을 것 같으면 그란델이 저렇게 가볍게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테고, 어차피 외국을 여행 중인 선대 백작 부부가 몇 년 안에 돌아올 것 같지는 않으니 걱정은 지나치게 이르다.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누군가 레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유르딘이었다.
“뭐 해?”
유르딘은 썩 밝지 않은 얼굴로 창백한 레인의 얼굴과 그란델을 번갈아 본다. 마치 저를 의심하듯 보는 형의 눈초리에 그란델이 삐딱한 자세로 서서 팔짱을 꼈다.
“형, 지금 그 눈초리 뭐야?”
“아니, 그게. 레인 표정이 안 좋아서…….”
“그래서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응? 형이 의심이 많은 거지. 진짜 서럽다, 어머니한테 편지할 거야.”
토라진 척하는 그란델을 유르딘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았다.
“넌 몇 살이냐?”
“편지 보낼까?”
“……아니…….”
“나중에 저택 와서 내 어깨나 주물러, 유르딘.”
자꾸 형에게 기어오르는 그란델의 머리칼을 유르딘이 한 차례 거칠게 헤집었지만, 약속은 또 착실히 잡았다.
얼마 전, 유르딘은 자신이 그란델에게 품고 있던 의혹을 레인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레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해서 유르딘의 오해는 간단하게 풀렸지만, 그간 알게 모르게 형의 변한 태도에 속을 썩인 그란델의 마음은 단번에 풀리지 않았다. 그란델은 저를 그런 식으로 의심했느냐며 엄청나게 화를 냈다. 그래도 다행히 둘이 대화하고 나서 어느 정도 풀린 모양이었는데, 화해하는 조건으로 그란델이 유르딘을 1년간 부려 먹기로 한 모양이었다. 무의식중에 레스터와 제 관계를 기준으로 생각해서 순간 두 사람의 사이가 완전히 끝장난 줄 알았지만, 결과물은 지금처럼 그란델이 살뜰히 형을 부려 먹고 있었다.
그란델은 시간을 한 번 힐끗 보더니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자리를 비켜 준 것도 같았다. 그란델이 사라지고 나서 유르딘은 레인의 손을 잡고 가볍게 구석으로 이끌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사각지대로 가자마자 유르딘이 거칠게 입을 맞추며 밀어붙였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다급하고 절박했다. 레인이 숨을 헐떡일 때쯤에야 유르딘은 레인을 놓아주었다.
“유르딘, 여긴 보는 눈이…….”
“차라리 누가 보면 좋을 텐데.”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레인이 대경실색했지만 유르딘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아까……. 다들 널 보더군.”
“그야 계승식이었으니까요.”
“앞으로도 널 볼 거고, 넌 매력적이니까 인기를 끌 거고…….”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그래.”
유르딘의 집착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으니 질투하는 것 정도는 예상했지만, 막상 정말로 질투심을 마주하니 뭐라 답할 말이 없었다.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해야겠다고 다짐했음에도 정작 유르딘의 우울한 얼굴을 보니 뭐든 그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고 싶어진다. 난처해하는 레인을 본 유르딘이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라는 게 아니야. 그래도 보기 좋아. 네가 바라는 일이잖나. 앞으로 조금 힘들지는 몰라도, 언제나 네가 바라는 바를 지지해. 네 꿈이 내 꿈이니까…….”
꿈처럼 빛나며 부드러운 목소리가 황홀했다. 유르딘은 레인의 손을 잡아당겨 가볍게 입을 맞췄다. 손등과 손가락을 스치는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인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만약 제가 엄청 힘들어지면요?”
“그때는 데리고 도망가는 거지.”
아주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는 대답에 레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실 도망치게 되기를 바라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닌데.”
“정말로요?”
“뭐,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네가 할 만큼 하고 나면 언젠가는…….”
슬그머니 본심을 꺼내 놓는 유르딘을 보며 레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평생 동안 왕국에 매여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유르딘의 부모님처럼 적당한 때에 물러나 세계를 여행해도 좋을 것 같다. 미래에 대한 어떤 상상이든 자유로웠다. 레인 아이제나흐 베델의 인생은 이제 곧 다시 시작된다.
레인, 아이제나흐, 베델.
이름 외에도 아주 많은 것들을 남길 인생의 시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그를 지킬 힘도, 지금까지 제가 빼앗겼었던 것도 모두 쥐고 시작하는 삶. 이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금의 레인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불행한 쪽으로 흘러가지 않으리라고 레인은 확신했다. 만약 다른 게 모두 실패하더라도 레인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
레인은 희망을 품는다. 영원히 빛날 듯이 영광된 자리에 서 있던 남자는 기꺼이 저를 위해 진창으로 몸을 던졌다. 레인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모습보다도 숭고하고 사랑스러운 남자가 레인의 가장 큰 꿈이고 희망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앞으로 살아갈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한때는 자신이 태어나 모든 게 어그러졌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애초에 태어나서는 안 되는 목숨 따위 없다.
여전히 레인은 완전히 떨쳐지지 않는 악몽을 꾼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절망의 목소리에 더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이어지는 삶에 더없이 만족하며 행복하게 미래를 살아간다.
두 번의 밤을 건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