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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밤을 건너온 아침 (14/20)

8 밤을 건너온 아침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밤은 저물고, 앞을 가로막는 적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축배를 들 일만이 남았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몸이 약해서 걱정이야.”

“제가 약해서라기보다는 누구든 앓았을 거예요.”

미엘이 사라진 지도 벌써 일주일 가까이 지났다. 레인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침대에서 자리보전하는 신세였다. 얼마 전까지도 골골대며 하릴없이 매일 앓아누워 있던 것 같은데, 또 누워 있자니 그게 몹시 따분했다. 물론 그때와는 상황이 완벽히 달라져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도 꼬박꼬박 레인을 찾아와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 보듯 안쓰럽게 대하는 유르딘이 조금 부담스럽단 걸 제외하면 몸도 마음도 매우 편했다.

지금 레인이 누워 있는 장소는 아이제나흐 공작가 저택 안에 자리한 공작의 침실이었다. 즉, 얼마 전까지는 딜란이 쓰던 장소였다. 굳이 여기에서 쉬어야 하느냐고 유르딘은 조금 찝찝해했지만 레인은 침구만 바꾼 뒤 태연하게 공작의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공작의 식기로 밥을 먹었다. 게다가 저를 괴롭히던 사용인들을 여전히 주변에 두고 태연하게 부렸다. 별로 찝찝하진 않았다. 오히려 명백한 승리의 증거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아주 유쾌했다.

이 저택의 주인은 이제 레인으로 바뀌었다. 현재, 레인을 제외한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일원은 모조리 임시 감옥에 가 있었다. 원래 쓰던 감옥은 일주일 전의 사건 이후로 완전히 폐쇄돼, 죄인들은 임시로 예전에 노예들이 쓰던 건물 지하에 수용됐다. 아직 가 본 적은 없지만 편히 먹고 자는 레인과 달리 무척 불편한 상황이겠지. 레인은 즐거운 심정으로 며칠간의 일을 회상했다.

일주일 전의 그날. 레인은 레스터가 연결해 둔 시야로 딜란이 있는 장소만을 봤었기에 모든 상황을 파악하진 못했었다. 알고 보니, 레인이 난리를 겪는 동안 지상에서도 상상 이상의 아비규환이 펼쳐졌던 모양이었다.

미엘과 레스터가 마법진을 발동시킨 이후부터 회의장은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레스터가 마법진을 제어해 딜란에게 마법을 부여했다. 그 힘으로 딜란은 왕이 된 것처럼 성 안을 활보하고 다녔다. 위협이 될 만한 주변의 병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평소에 눈엣가시이던 귀족을 죽였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자는 그대로 끄집어내 본보기로 죽였다. 달린은 왕을 무릎 꿇리고 자신이 왕이 됐음을 선포했다.

궁 안은 물론이고 수도 전역이 혼란스러운 지옥으로 변했다. 지하 감옥에서부터 흘러나온 검은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퍼지며 노약자가 쓰러지거나, 기묘한 환상을 보거나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위험했던 건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난생처음 보는 마물이었다. 어둠에서 튀어나온 마물은 촉수 같은 팔을 뻗으며 사람들을 습격했다. 이 모든 지옥은 달을 가릴 정도로 높이 솟았던 감옥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모조리 사라졌다.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이지만 사람들의 충격과 공포는 엄청났다. 그런 상황에서 레인은 딜란을 단숨에 제압하고 왕을 구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와 확실하게 선을 긋고 제힘을 내보임으로써 레인은 단숨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도약했다.

통칭 ‘검은 탑의 이변’이라고 이름 붙은 이번 사건은 적당한 각색이 들어간 채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고대의 유산인 지하 감옥의 마법진을 우연히 레스터가 발견했고, 이를 시험해 보려 사람을 죽이고 아카데미를 공격했다. 레스터가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 고대 마법사의 핏줄이 섞여 있기 때문이었고, 그가 레인을 지하 감옥으로 내몬 건 레인을 제물로 바쳐서 마법진을 더욱더 강력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다만 똑같이 마법사의 핏줄이던 레인이 레스터에게 반격해 역으로 마법진의 제어를 빼앗아 수도를 구했다. 이게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이 모든 사건을 종식시킨 걸로 알려진 레인의 이름이 쉴 새 없이 사람들의 입에 영웅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영웅이라니. 처음 유르딘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레인은 얼굴이 새빨간 사과처럼 물들어서 그대로 이불 속으로 도망쳤다. 평상시라면 레인의 기분을 어련히 이해하고 따라 입을 다물었을 유르딘이지만, 그때만은 눈치를 갖다 버린 인간처럼 굴었다.

‘네가 이 세상을 구하러 온 사도라더구나.’

‘……네?’

‘네게서 후광을 봤다는 사람도 있어.’

‘자, 잠깐만요. 그날 이후로 나간 적이 없는데 그 무슨…….’

‘500년 전에 죽은 성녀의 환생이라고도 하던데.’

‘정말 아무거나 갖다 붙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이 세상 그 누구를 너와 비교할 수 있을까. 그 어떤 기적도 너와 비교한다면 빛이 바라겠지’

‘…….’

이런 식이었다. 평소 최악이던 레인의 평가가 뒤바뀐 게 좋은지 몇 번이고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강조하고 또 반복하다가 결국 쫓겨나기도 했다.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뭣 모르고 떠드는 사람들보다 유르딘이 한술 더 떴던 것 같다.

동시에 왕과 귀족들은 강한 힘을 지닌 레인을 주목하고 있었다. 딜란을 잡는 것에 레인이 앞장섰던 데다, 이후로도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기 때문에 경계하기는 해도 완전히 적대적인 분위기만은 아니다. 오히려 조금씩 간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레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게 수도를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원한다면 왕을 갈아 치울 수도 있는 힘이 레인에게 있었다.

실제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지자마자 마법진의 제어권을 놓았기에 그날 수준의 기적을 보여 주는 건 불가능했다. 레인이 제어를 놓자 마법진은 원래대로 없던 것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시험 삼아 잠든 마법진을 다시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굳이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레인에게는 넉넉하게 쓰고도 남을 마력이 있었으니 다시 마법진을 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강대한 마력을 몸에 담았던 부담은 고스란히 남아 제어를 놓은 직후에는 피를 토하며 진통제를 삼켰고, 이후로도 지금처럼 며칠째 자리보전하게 만들었다. 마력의 여파, 말하자면 피로와 같은 상태인지라 치유 마법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 이런 고생을 두 번이나 하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도 곧이곧대로 마법진을 다시 쓸 수 없다고 밝히지는 않았다. 언제든 레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 힘을 쓸 수 있을 것처럼 말하되, 이런저런 부작용이 있으니 딱히 쓸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 두었다. 수도에 살고 있는 이들이 모두 그 악몽 같던 밤을 기억하는 한은 더 이상 그 누구도 레인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조금 긴장하던 왕에게는 진상을 털어놓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어차피 왕도 완벽한 레인의 아군은 아니었다. 당장은 손을 잡고 있다고 해도 언제든 레인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던 그날처럼 이해득실을 따져 손을 놓을 수 있었다.

유르딘은 왕위를 빼앗아 보지 않겠느냐고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질문을 했다. 레인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충성하고, 누릴 것은 누리고, 받을 것은 받는 걸로도 충분하다. 스물 몇 해를 치열하게 살아왔더니, 할 일도 많고 신경 쓸 일도 산더미인 왕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미 아이제나흐 공작가만으로도 충분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레인은 막 따라와 제게 바쳐진 찻잔을 입술에서 뗐다. 체온보다 조금 따스하게 데워진 차의 온도, 방 안을 향긋하게 물들이는 차향, 모두가 마시기 딱 적당했으나.

“차갑잖아. 어느 누가 차를 이렇게 차갑게 마시지?”

레인은 차갑게 웃으며 찻물을 가져온 하인의 머리에 고스란히 부었다. 벌써 다섯 번째 차를 타 왔다가 지나치게 뜨거운 두 잔은 발치에, 차가운 두 잔은 머리에 부어졌던 하인은 체념한 얼굴이었다. 레인은 하인의 머리에 찻물을 모조리 붓고 그대로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혹시나 찻잔이 깨져서 경을 칠까 봐 하인이 찻잔을 몸을 날려 붙잡는 것을 확인한 레인이 코웃음 쳤다.

“다시 타 와.”

하인이 깊이 허리를 숙이는 걸 보며 레인은 코웃음 쳤다. 누군가를 저열하게 괴롭히는 취미는 예전에도 지금도 없다. 다만, 방금 나간 하인은 어린 시절 별채에서 레인을 지독하게 괴롭히던 자였다. 그때 레인을 괴롭히며 레스터에게 잘 보여서 지금은 저택의 다른 하인들을 관리하는 높은 자리에 올라 있던 자를 제 전담 하인으로 들였다. 차를 머리에 붓고 쓸데없는 고생을 시키는 건 보잘것없는 데다 질 낮은 심술이지만, 단순한 만큼 직설적인 통쾌함이 있었다. 레인을 괴롭히던 사용인들은 모두 비슷한 종류의 괴롭힘을 받고 있었다. 어중간하게 레인을 떨떠름한 눈으로 보던 다른 사용인들은 같은 취급을 당할까 두려워 언제 친하게 지냈냐는 듯이 멀어지거나 괴롭히고 있었다.

하인이 나가자마자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 있던 유르딘이 침대 위 레인의 옆자리로 올라와 손을 붙잡았다.

“귀찮게 이러지 말고 끓는 기름에 튀겨 버리면 될 텐데.”

“나중에 상황 봐서 쫓아내야죠.”

사람 죽인다는 소리를 동화책 읽듯이 다정하게 속삭이는 유르딘에게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레인은 느긋하게 말하며 유르딘에게 몸을 기댔다. 당장 저택에 내버려 두고 있는 건 효율성의 문제기도 했다. 레인을 괴롭혔던 하인이나 다른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충성스러웠던 사용인들은 곧 모두 갈아 치울 생각이었다. 어림잡아 세어도 갈아 치워야 하는 사용인의 수가 상당한데, 당장은 수도 상황이 난리인지라 사람을 대량으로 해고하고 고용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당분간 지켜보면서 쓸 만한 사람을 적당히 털어서 솎아 내어 죄지은 놈은 경비대에 넘길 생각이었다. 섣불리 도망치게 놔두는 것보다 여기 잡아 두면서 써 먹는 게 훨씬 낫다. 나름 이성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도 조금은 못마땅한 얼굴로 유르딘이 레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내 생각만 해 줬으면 좋겠는데.”

“하, 하고 있는데요.”

당황해서 레인은 말을 더듬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본심까지 모두 고백한 후, 유르딘은 지나치게 솔직해졌다. 집착적인 말도 다정한 눈으로 하면 순수한 사랑 고백처럼 들려서 무섭다기보다는 가슴이 뛰었다. 다만 틈만 나면 저런 소리를 진심으로 해 대는 건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눈을 굴리는 레인을 가볍게 잡아끈 유르딘이 입을 맞췄다. 게다가 입을 맞추는 것까지야 좋지만 뭔가, 아래에 딱딱하게 발기한 게 닿는 것 같은데. 레인의 얼굴이 새빨개지자 유르딘이 다정하게 웃으며 조금 떨어졌다.

“이제 쉬어야지.”

유르딘이 뻔뻔하고 솔직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래가 불투명해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하나부터 열까지 새삼스레 부끄러웠다.

***

열흘째에야 자리보전을 마치고 침상에서 일어나자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카데미의 졸업까지는 아직 1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아이제나흐 가문에 제대로 남은 게 레인뿐이었으므로 한가롭게 공부나 하고 있을 형편은 아니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아이제나흐 공작인 딜란의 반란으로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모든 걸 빼앗기는 게 옳았다. 그간 딜란이 저지른 비리들은 속속들이 밝혀지는 중이었는데, 반역죄를 제하고서도 죄가 너무나 무거웠다. 그러나 동시에 왕국의 수도에 갑작스레 닥친 위기를 해결한 자도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레인이었다. 레인이 행한 것이 일회성의 구원이었다면 정치적인 이해들이 작용해 보기에만 그럴싸한 직함과 명예만 돌려주고 실속은 빼앗아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인은 마법이 쇠락한 시대에 다시 강력한 마법을 선보이며 가치를 증명했다. 이해득실을 따져서라도 왕국이 레인에게 등을 돌릴 리 없다. 더욱이, 딜란의 비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베델 후작가의 무고가 밝혀졌다. 무죄가 밝혀졌으니 베델 후작가의 유산 또한 레인이 물려받는 게 옳았다. 그러나 이미 17년 전에 끝난 일인지라 영지도 재산도 진작에 왕국으로 넘어가 왕실과 귀족이 나눠 가졌다. 새로이 영지를 내리기보다는 아이제나흐 공작가를 물려받는 게 훨씬 더 간단하고 자연스러웠다.

이 모든 과정은 레인이 힘을 쓰지 않아도 지극히 자연스레 흘러갔다. 모든 게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동시에 실감이 나질 않고 어색했다. 그도 그럴 게 모든 사람이 레인을 호의적으로 의식하며 신중하게 대하는 분위기 자체가 생을 통틀어 난생처음이었다. 왕을 독대했을 때 그 어색함은 정점에 달했다.

“짐은 자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려고 하네.”

“보상 말씀이십니까?”

“그래, 보상.”

레인을 살피며 신중하게 말하는 왕의 태도는 확실히 이전과 달랐다. 친숙하게 대한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레인의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며 제 입맛에 맞춘 제안을 건네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은 어디까지나 동등한 입장에서 거래하려고 한다는 느낌이었다.

“반역자로 전락한 베델 후작가의 신분과 작위를 복권할 걸세.”

충분히 예상하던 일이었지만 레인은 왕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무죄가 밝혀지면 당연히 그리돼야 했을 일이지요.”

“하지만 베델 후작가의 영지와 재산은 대부분이 다른 귀족에게 돌아갔으니 돌려주기가 힘들어. 대신,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영지 중 시디페와 레밀을 제외한 영지, 남은 재산 전부를 베델 후작가에 귀속시키도록 하지.”

“그 두 지역만 제외하고 전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전부… 라고는 해도, 불법적인 자산은 환수하겠지만. 당시 베델 후작가의 영지 남단에 자리하던 별장과 일대 숲과 토지는 현재 왕가의 소유네. 그곳 또한 자네에게 주도록 하지.”

“황공하옵니다, 전하.”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한 게 아닌지. 시디페와 레밀이 제법 좋은 땅이기는 해도 아이제나흐 공작가가 지닌 영지 중 핵심적인 곳은 아니다. 레인인 입 안에 맴도는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 심정을 안다는 듯이 왕은 레인이 생각할 시간을 주듯 느긋하게 기다렸다. 왕의 제안이 레인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비대한 아이제나흐 공작가를 조금은 쪼개 둘 좋은 핑계였을 텐데, 왕은 오히려 보상을 덧붙였다. 당연하지만 단순히 호의에서 넘겨줄 리 없다. 계산의 결과다.

“이는 앞으로 공작이 될 자네를 위한 성의이며, 앞으로 할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줬으면 해서 건네는 제안일세.”

“……공작요?”

“딜란 아이제나흐를 생각하면 아이제나흐 가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게 옳으나, 자네가 원한다면 계속 그 이름을 써도 좋네. 영웅의 이름이기도 하니까. 물론 원하지 않으면 아이제나흐의 성을 버리고 앞으로 베델의 성을 잇고. 어느 쪽을 택하든 자네는 공작이 될 걸세.”

“망극하옵니다.”

왕이 씩 웃었다. 계산이 있을지언정 겉보기에는 솔직하고 친숙한 태도가 나쁘진 않았다. 지금까지 안 좋은 쪽으로만 솔직하던 놈들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지금의 왕은 선왕보다 훨씬 세간의 평도 좋았다. 가신으로서 모시기에는 제법 적합한 왕이다. 레인이 제대로 경청할 태도를 보이자 왕이 벌써 만족스레 웃었다.

“왕국에 기존의 기사단처럼 마법사들의 조직을 세울 예정이네. 그곳의 장을 자네가 맡아 주었으면 해서.”

레인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시대에는 옛 시대 기준으로 따졌을 때 제대로 된 마법사 자체가 없고 관련된 기관이나 조직 또한 전무했다. 옛 시대에서는 마법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조악한 마법만이 남은 시대에 최초로 창단되는 마법사의 조직, 그 선봉인 셈이다. 왕국 라인셀뿐만 아니라 주변 왕국, 넓게는 대륙 전체가 주목할 너무도 무거운 자리였다.

“그런 일을 맡아서 하기에는 제가 너무 어립니다. 말씀은 감사하오나 제게는 과분한 자리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자네는 능력이 있어. 짐은 자네가 그런 자리를 맡을 만한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네. 어차피 앞으로는 주로 젊거나 어린 인재들로 채워질 테니 연령 또한 문제 될 게 없지.”

“하지만 저보다는 디프랑 후작께서 적임일 겁니다. 마법도 그분께 배웠고요.”

마법에 대해 밝혀지고 허둥대는 귀족들 사이로 나선 렌피르가 이런저런 설명을 하며 혼란을 잠재웠다. 렌피르가 어설프게나마 마법을 써 오던 일 또한 밝혀졌다. 어설프단 건 어디까지나 100여 년간 마법사였던 에일리야에 자신을 빗댄 렌피르의 기준일 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또한 이미 충분히 능숙한 마법사였다. 렌피르는 이미 유능함이 알려진 귀족이니 그가 훨씬 더 적임이었다. 그러나 왕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디프랑 후작과도 상담했네. 자네가 적격일 거라 하더군.”

“전하, 저는 몸도 건강치 않은 데다 경험 또한 턱없이 부족합니다. 차라리 다른 자를 내세우심이 어떨지요.”

“확실히 렘샤이트 후작은 그렇게 말하긴 하던데.”

“…….”

미묘하게 변한 레인의 얼굴을 보고 왕은 확인 사살 하듯이 덧붙였다.

“자네가 어리고 몸이 약하여 중책을 맡기에는 힘에 부칠 거라고. 정말로 그런가?”

그래, 어디까지나 맞는 말이긴 하다. 레인에게 어떻게든 최대한 무리를 시키려 들지 않는 유르딘이 왕의 앞에서 얼마나 걱정하고 염려하며 팔불출 티를 내며 말했을지 생각하면 얼굴이 절로 화끈거렸다. 게다가 레인 자신이 말할 때랑 달리 아무리 유르딘이라지만 타인이 저를 그렇게 설명하는 게 조금 자존심 상하기도 했다. 레인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전하께서 친히 제안해 주시니…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일단은 원하던 대답을 얻어 낸 왕이 만족스레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레인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왕의 뜻에 따를 경우 한 가지 원하는 것을 내어주도록 거래를 제안했다.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왕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레인의 부탁을 기꺼이 허락했다.

왕과의 독대를 마치고 나가는 길목에 렌피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복잡, 미묘하게 변하는 레인의 표정을 바라보는 렌피르는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을지 다 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특유의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레인에게 다가와 남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공작이라고 부를까요, 단장님으로 부를까요?”

“놀리지 마십시오……. 아무리 봐도 스승님께서 그 자리에 더욱더 어울리는데요.”

“왕국 초기에 기사단은 가장 강한 자가 단장이 되는 게 원칙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달라졌지만, 초기의 마법사단도 가장 강한 자가 단장이 되어야겠지요? 뭐, 저도 당신을 도울 테니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드럽게 레인을 격려하는 렌피르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었다. 레인은 렌피르의 장단에 맞춰서 조금 더 대화하다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뒤돌아 걷는 렌피르의 모습 그 어디에도 과거의 무게에 짓눌리는 모습은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레인은 검은 탑으로 불리게 된 지하 감옥이 솟아오르고 모든 기억을 강제적으로 떠올리게 된 날 하루의 기억을 렌피르의 머릿속에서 지웠으니까.

그날, 레인은 모든 일을 마치고 마법진의 제어를 놓기 전에 마지막으로 렌피르를 찾아갔다. 저택에는 수십 수백 겹의 방어 마법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마법진을 제어하고 있는 레인에게는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평범한 마력을 지닌 렌피르에게는 그간 모아 둔 마력석을 모조리 털어 넣어야 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법이었다.

마법을 헤집고 들어간 레인은 유르딘의 피로 물들어 있는 렌피르를 발견했다. 수도를 가득 채운 비명 속에서 아내가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도록 잠재운 렌피르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처절하고 절박했다. 아내를 꽉 끌어안은 채 레인조차 경계심에 찬 눈으로 보는 렌피르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스승님.”

조심스러운 부름에 렌피르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그렇게 부릅니까? 내가 누구를 찔렀는지 알고 있을 텐데요.”

“그 일은 유르딘이 잘못한 거니까요.”

레인은 유르딘을 두둔하지 않았다. 그제야 렌피르가 아내를 꽉 붙잡고 있던 손에 조금이나마 힘을 풀었다. 렌피르가 고개를 떨구고 맥없이 웃었다.

“……그 사람, 이전 생과는 많이 달라졌더군요. 당신이 변하게 한 건가요?”

“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죗값… 을 치르게 하고 싶으신 거라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렵게 말을 잇는 레인에게 렌피르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저 너무 불안해요. 자꾸만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불안해 견딜 수가 없어.”

“스승님…….”

“이건… 내가 떠올린 게 아니지요. 그렇죠? 누군가가 잡아 비틀어 꺼낸 것처럼, 그렇게 떠올랐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렌피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혹시 지금의 당신이라면 이 기억을 잊게 만들 수도 있습니까?”

“아마도요. 그걸 바라시나요?”

“바랍니다. 당신이 유르딘 니제스가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할 수 있나요?”

“물론 그러지 못하게 할게요. 이제 그럴 이유도 없어졌어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요.”

“그렇다면 기억을 지워 주세요, 레인.”

“정말로 그래도 괜찮은가요?”

유르딘이 렌피르를 참혹하게 죽인 걸 아는데도 레인은 여전히 유르딘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최소한 렌피르가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 원수가 생생히 살아 있음을 알면서도 기억을 지우는 게 불안하지 않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렌피르의 뜻은 단호했다.

“나약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그걸 기억하고 계속해서 행복하게 살 자신이 없어요. 내가 지키려던 것들이 모두 허무하게 무너지던… 그, 기억. 피로 물든 기억이 지금도 자꾸만 떠올라서…….”

점점 더 렌피르의 목소리가 울음과 섞여 무너졌다. 렌피르의 태도는 단호한 동시에 나약하다. 하지만 레인은 그런 렌피르를 이해했다. 레인은 눈물로 젖어 드는 렌피르의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결국, 렌피르의 소원대로 그의 기억을 지웠다. 렌피르의 기억을 지우고 왔다는 레인에게 유르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처럼.

레인은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저를 지켜보는 유르딘에게 먼저 다가갔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던 레인은 일단 정산부터 하기로 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레인은 유르딘의 뺨을 꽉 꼬집었다. 소드 마스터는 얼굴 가죽도 단련되는지, 그다지 붉어지지조차 않은 얼굴을 하고 유르딘이 옅게 인상을 쓰며 레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레인을 붙잡은 유르딘은 사람 없는 복도로 향했다. 조금 어두운 복도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유르딘은 레인에게 보복 대신 가벼운 입맞춤을 뺨과 목덜미와 입술 위로 퍼부었다. 레인은 백기를 드는 대신 유르딘의 발을 가볍게 밟았다. 그제야 유르딘이 멈췄다.

“레인, 대체…….”

“전하께 무슨 말을 한 거예요? 아니, 그보다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내가 타인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잖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 대담한 짓이다. 할 말이 끝나지도 않은지라 레인은 유르딘을 확 밀었다.

“전하께 무슨 말을 했느냐고요.”

“별말 안 한 것 같은데.”

“절 너무 부족한 사람처럼 말했잖아요.”

“부족하다니? 왕이 그러더냐?”

유르딘은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마법사단의 단장 자리를 맡는 데 대해서 제가 어리고, 몸도 약하고, 경험도 부족하다고 말했다면서요. 전하가 저를 뭐로 보겠어요?”

“경험이 부족하다는 말은 안 했어.”

“앞의 두 개는 하셨고요?”

“하기야 했지만……. 넌 딱히 그런 중책을 맡을 생각은 없지 않나.”

그거야 그랬다. 원래는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관리가 되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었지만, 높은 작위와 풍족한 재산이 통째로 굴러와 온전히 레인의 소유가 되는데도 고생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처음 몇 년간은 느긋하게 영지로 내려가서 휴양이나 할 생각이었으니, 맡았다간 최소 몇 년은 휴가를 받기도 힘들 법한 중책은 레인에게 맞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앞으로 평생 모실 왕인데 단점만 늘어놓으면 레인을 어찌 보겠는가. 한숨을 쉬며 못마땅해하는 레인에게 유르딘이 변명을 덧붙였다.

“단점만을 말하지는 않았어. 네가 아름답고, 명석하고, 매력적이며 누구에게나 끌릴 만한 인물이라고도…….”

심히 팔불출적인 감상을 듣다 못한 레인이 황급히 유르딘의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이 절로 화끈거리는 말을 왕에게 했다고?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아, 아예 저희가 연인 관계라고 소문을 내지 그러세요?”

“그게 힘드니까 아는 사람에게 자랑하는 거지.”

“……그 대상이 전하라고요?”

애인 자랑을 늘어놓기에는 제법 까마득한 상대 아닌가. 그렇게 느끼는 건 레인뿐인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서 두고 혼자 마차를 타고 돌아갈까 고민하는데 유르딘이 레인을 안은 손에 힘을 더하며 속삭였다.

“잠시 보러 온 거다. 저녁에는 서부로 떠나야 해.”

딜란이 왕국을 은밀히 쑤셔 놓은 데다가 수도에서 일어난 혼란이 더해져 라인셀은 산발적인 국내외의 문제를 겪고 있었다. 작은 규모의 반란이나 이때를 노린 타국의 침략과 같은 무력 충돌은 유르딘이 나서는 게 제일이었다. 레인이 나을 때까지 수도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던 유르딘이지만, 이제 다 나았으니 막을 핑계도 떨어진 모양이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담뿍 젖어 든 목소리가 레인을 약하게 만들었다. 레인은 유르딘을 밀어내려던 손에 힘을 주어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유르딘이 기꺼이 사양 않고 레인을 꽉 끌어안았다. 유르딘의 체향이 레인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레인은 어쩐지 추궁하던 게 어영부영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설마 레인의 신경을 돌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

“레인.”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낮고 달콤한 목소리가 레인을 부른다. 흠칫 놀라 몸을 움츠리는 레인을 붙잡고 유르딘이 입을 맞췄다. 다른 생각이 모두 녹아내릴 정도로 길고 진하게 이어지는 입맞춤이었다. 그대로 레인을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저택까지 바래다준 유르딘은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그대로 떠났다.

정말이지 유르딘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치게 바쁘다. 왕국 라인셀에 인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유르딘만 한 인물은 드물다. 앞으로도 전무할지도 모른다. 유르딘은 미엘에게 몸을 빼앗겼다가 되찾은 이후로 오러가 검게 물들었다. 뭔가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조사했지만, 딱히 어딘가 이상한 점은 없었고 오히려 강해진 것 같다는 결론만이 나왔다. 미엘이 외쳤던 대로 악마의 마력을 뺏은 거라면 강해진 것도 당연했다.

레인은 나중에야 유르딘에게 들어서 알게 된 거지만, 회귀한 직후에도 미엘은 유르딘의 몸을 빼앗으려는 시도를 했었다. 미엘의 시도가 무산되고 유르딘이 그 여파로 기억만을 되찾았을 때, 유르딘은 오러로 성벽을 잘라 냈다. 아무리 유르딘이 소드 마스터라 한들 성벽을 무너뜨리는 건 힘든 일이었건만 숨조차 차지 않았다. 당시에야 레인에게 미쳐 있어서 별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생각해 보면 본의 아니게 그때도 미엘의 마력을 빼앗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남은 악마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마의 마력을 두 번이나 뺏을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무후무하다고 할 법했다.

그렇게나 강력한 인재를 왕은 앞으로 얼마나 살뜰하게 활용할 것인가. 직접 묻지 않아도 답은 뻔했다. 아무리 유르딘이 한 번 완전히 미친 전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본질은 성실한 기사였다. 제게 맞는 옷을 입은 유르딘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태도로 과중한 직무를 수행했다.

쥐고 있는 모든 걸 버리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이대로 도망치자고 하면 유르딘은 기꺼이 레인의 말을 따를 터였다. 그렇다고 모든 걸 버리고 떠나는 삶이 반드시 행복할지는 알 수 없었다. 둘만의 세상은 행복하겠지. 시간이 지나 싸울 수도 있고 마음이 식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삶의 마지막까지 유르딘과 함께할 수 있다는 확신이 레인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무엇 하러 도망을 치지? 이제 와서는 레인도 별로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픈 마음이 없었다. 더 이상 살아남기 위해 궁리해야 하는 삶이 아니다. 레인은 얼마든지 원하는 걸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레인은 강제적으로 소박한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이지 본질은 그리 소박한 성미가 아니었다.

유르딘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잠드는 게 아니라 옆자리에 설 수 있다면, 유르딘의 일을 도와줄 수 있다면 모두에게 좋지 않을까, 레인은 고민했다.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마법사단의 단장 직위를 받고 베델 공작이 되어 아이제나흐 공작가 자산을 모두 차지한다면 이전과 달리 레인이 할 수 있는 일의 폭은 어마어마하게 넓어진다. 대신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레인을 험담하고 물어뜯으려고 할 게 분명했다. 장단점은 명확하다.

며칠간 이어지던 고민은 유르딘이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날에야 간신히 결론을 맺었다. 결심하자마자 레인은 곧장 왕을 찾아가 왕의 제안을 수락했다. 대신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왕은 미묘한 표정이었다.

“크게 상관은 없네만……. 자네도 참.”

고개를 젓는 왕의 심정이 이해가 가서 레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제안만 제대로 받아들여서 성실히 해 주겠다면 알아서 하도록 해.”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레인이 향한 곳은 반역자들을 가두고 있는 임시 감옥이었다. 예전에 노예들이 쓰던 건물의 지하를 활용한다기에 허름해도 나름 방의 구색을 갖춘 곳을 상상했었는데 실제로 와 보니 환경이 상상 이상으로 나빴다. 벽면 전체가 창살로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문 대신 창살이 끼워져 있어서 감옥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간수에게 물어보니 과거에 노예를 교육시키는 일종의 체벌방이었다는 모양이다.

“교육이라니……. 그런 걸 위해서라기엔 좀 심한데.”

“예전에 노예는 인간도 아니었다고 하니까요. 끔찍한 일이지요.”

간수는 허리를 굽히며 레인의 말에 동조했다. 레인은 문득 제 허벅지 위에 남겨졌었던 낙인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나 인간으로 보지 않았으면 그런 걸 찍었을까. 이 시대에 태어난 걸 다행으로 여기는 동시에 이 시대에 태어나서 그런 게 찍힌 제 처지가 새삼 비참하게 느껴졌다. 카이렌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으로 돌아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제는 낙인이 찍혔던 과거조차 사라졌으니.

레인은 감옥 안을 눈으로 훑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궁에 머물렀던 노예의 수는 수백이 넘는다. 그 많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 안에 죄인들이 짐을 쌓아 두듯 차곡차곡 포개어져 갇혀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제법 보였다. 대부분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사병이나 하인들이었다. 레인이 지나갈 때마다 그들은 증오에 서린 눈으로 욕설을 외쳤다. 개중에는 간수에게 얻어맞으면서 발악하는 자도 있었다.

수많은 적의와 욕설을 짊어지고 있었으나 힘을 지니고 역전된 레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간수의 안내를 받아 점점 안으로 들어갈수록 욕설도, 비명도 잦아들고 차츰 조용해졌다. 안쪽에는 딜란의 손을 잡았던 귀족이나 그들의 가족이 있었다. 많다면 많지만, 왕국의 전복을 꾀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기에는 규모가 적다. 어차피 귀족들의 힘을 빌려 시도한 반역이 아니기는 해도 성급했단 게 눈에 보였다. 아니, 아무리 딜란이 성급했다지만 이 인원은 역시 지나치게 적었다.

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 가며 레인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깊숙한 곳에 다다른다. 바깥쪽은 깊은 심부에 비하면야 깔끔했다. 어차피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노예들의 징벌방이다. 다들 쉽게 죽어 나갔으리라. 죽인 건지 고문한 건지 모를 피가 여기저기 흘러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붉게 남아 있다.

그 흉흉한 장소에서 레인은 지금까지 찾던 얼굴들을 발견했다.

가장 먼저 레인을 알아차린 건 유니였다. 유니 아이제나흐의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을 레인은 말없이 살폈다. 한참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사랑받으며 자라 왔던 공녀는 하루아침에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잠을 자다 끌려나온 건지 슈미즈 차림에 뻣뻣한 싸구려 남성용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누군가가 동정심으로 건네준 모양새다.

유니의 앞에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누운 공작 부인, 아나벨은 유니와는 차림새가 전혀 달랐다. 그녀는 앞으로 찾아올 승리를 기념하기라도 하듯 화려한 붉은 드레스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었다. 끌려오며 심하게 저항했는지 머리는 드레스와 어울리지 않는 산발에 군데군데 얻어맞은 상처와 멍이 얼룩덜룩하게 피부를 덮고 있다. 유니가 두르고 나왔을 법한 작은 숄이 떨고 있는 소녀 대신에 창백하게 질린 채 누워 있는 아나벨을 감싸고 있었다.

“오…….”

오라버니. 무언가를 말하려던 유니의 입술은 소리 없이 달싹이다가 허망하게 닫혔다. 소녀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저 추위에 창백하게 질려서 떨리는 손으로 아나벨을 감쌀 뿐이다.

유니의 중얼거림에 아나벨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기운 없이 눈만 데굴데굴 굴려 이쪽을 돌아본 아나벨은 곧장 레인을 알아보았다. 흐릿했던 눈이 순식간에 증오와 광기로 불타오른다. 벌떡 일어나는 아나벨을 유니가 겁에 질려 붙잡았지만, 아나벨은 그런 유니조차 세게 밀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며칠 새 바짝 말라 볼이 움푹 팬 아나벨은 창살 틈새로 손을 뻗어 레인을 붙잡으려 애썼다. 옆에서 간수가 기겁하며 들고 있던 몽둥이로 아나벨을 내려쳤지만 피멍이 들 만한 상처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이, 더러운 창녀의 자식! 죽어! 죽어, 죽어 버려! 너 때문에 다 망쳤어!”

레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하니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레인을 모욕하고 증오를 쏟아부을 줄은 몰랐다. 레인은 아나벨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봤다. 노골적으로 살펴보고 비웃는 시선에 아나벨의 얼굴은 금세 수치로 붉게 물들었다.

“누가 누구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어머니가 살아 있던 시절부터 아내 있는 남자와 잔 건 당신인데.”

“네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그년을 그렇게 죽여 버릴 필요도 없었어! 내 아들이 자연스레 후계자가 되고 그년은 불임으로 끝낼 수도 있었다고!”

더 이상 거칠 것 없이 아나벨은 비밀을 입에 올렸다. 레인은 화를 내는 대신 아나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나벨의 말이 조금의 타격도 입히지 않았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레인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슈리아는 추문을 뒤집어쓰고 이혼당할지언정, 죽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악하듯 말하는 상대가 감옥에 갇힌 아나벨이어서야 치명적인 상처는 입지 않는다.

한숨을 쉰 레인은 금세 평정을 되찾고 아나벨에게 손을 뻗었다. 붙잡으려고 애를 쓴 주제에 정작 레인이 잡으니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레인은 아예 몸을 빼려 드는 아나벨을 붙잡고 주문을 외웠다. 경악한 얼굴로 무언가 소리치려던 아나벨이 주저앉았다.

“어머니!”

유니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 아나벨을 살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유니에게 레인은 작게 속삭였다.

“그냥 마비시킨 거야.”

일견 다정하게도 들리는 목소리에 유니는 희망을 품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레인은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차가운 눈으로 아나벨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니는 겁을 먹은 채 몸을 잘게 떨면서 크게 움직이지 못하는 아나벨을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레인은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조금 더 걸었다.

바로 옆에 레스터가 누워 있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누운 레스터는 순간 알아보지 못했을 뻔할 정도로 초췌하게 말라 있었다. 반복되는 악몽 때문이다. 차라리 진작 죽었다면 편했을 텐데.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몸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레스터가 마법진에서 몸을 강인하게 변형시켰기 때문이었다.

레인은 레스터가 겪었을 생을 가늠했다. 수천, 수만 번은 쉬이 겪었을 비극이 무겁게 읽혔다. 레인에게는 단 며칠이었지만 레스터에게는 수만 년이었을 세월, 피폐한 정신은 몸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쩌면 처형 때까지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잠시 지켜보던 레인은 레스터조차 내버려 두고 걸었다.

어차피 감옥의 끄트머리. 목적지에는 금방 도착한다. 그러나 그곳까지 발을 떼는 몇 걸음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레인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감옥 앞에 섰다. 미리 언질을 들은 간수가 창살을 열고 레인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간수의 발소리가 조금 멀어지는 걸 들으며 레인은 꼿꼿이 앉아 있는 딜란을 마주했다. 아무리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 해 봤자 폭력과 고문에 시달린 딜란의 몸에 남아 있는 힘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딜란은 화를 내거나 애원하지도 않은 채, 나름 평온한 표정으로 레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생각보다는 편해 보이시네요. 당신 때문에 다들 이 난리가 났는데.”

“그러는 너는 좋아 보이는구나, 레인.”

얼굴을 찌푸리는 레인을 보며 딜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네가 앞으로 잘할 거라고 믿는다.”

기가 차서 레인은 짧게 웃었다. 딜란의 말은 허세다. 하지만 완전히 거짓 같지도 않았다. 아이제나흐 공작가는 사라질지언정 아이제나흐의 정통된 핏줄은 남는다. 보잘것없다면 보잘것없지만, 어차피 모조리 망한 상황에서 그 사실은 딜란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 주고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레인을 제 목적선상에 두고 만족하는 모습이 역겨웠으나 동시에 너무나도 딜란다웠다.

과거, 레인이 죽었을 때도 딜란은 레인의 죽음마저도 철저히 저를 위해 활용했다. 레인은 레스터의 기억을 통해 자신이 죽은 이후의 과거를 모두 보았다. 레인이 죽었던 북부와 아이제나흐 영지의 거리가 꽤 되는지라 소식은 며칠 간격을 두고 차례로 날아왔다. 레인이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단 걸 알게 된 딜란은 화를 내며 고문당해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곧, 레인의 억울함이 밝혀지고 죽어 버리자 태도를 바꿨다.

레스터의 기억을 먼저 봤었더라면 딜란의 말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딜란은 이전에도 레인 또한 자기 아들이라며 달콤한 말을 속삭였지만, 딜란에게 있어 레인은 혈육이라는 그럴싸한 금박을 씌워 둬 언제든 값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패에 불과했다.

딜란에게 가장 소중한 건 가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딜란은 제 가족을 사랑한다. 물론 그 가족이라는 범위에 레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딜란은 가문 내에서의 입지가 약해지는 위험마저 감수할 정도로 아나벨을 아꼈고, 아무리 봐도 미쳐 버린 듯한 레스터의 말을 들어줄 정도로 아들을 아꼈으며, 그저 순진하기만 한 유니에게는 사랑만을 퍼부었다.

소중한 두 가지가 위험하게 얽힌다면?

미쳐 버린 후계자가 가문을 위협할 건 불 보듯 뻔했다. 딜란은 레스터를 사랑했지만, 전적으로 레스터의 편을 들어줄 정도로 그를 사랑하지는 못했다. 몇 달의 시간 동안 레스터의 말을 듣고 진지하게 반란을 생각했다면 바깥에 갇힌 귀족은 배가 넘을 것이다. 레인에게 호의적인 태도가 전부 다 거짓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딜란은 가문에 중점을 두고 레스터와 레인을 저울질했다. 사랑하지만 미쳐 버려 신용이 가질 않는 아들의 말을 믿을지, 아니면 안전한 후계자를 선택할지.

마지막에 딜란이 레스터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저울이 레스터에게 제대로 기운 적은 없었다. 레스터의 계획이 거의 다 완성되어 승리가 확실해졌을 때에야 딜란은 레스터의 손을 잡았다. 만약 레스터의 계획이 중간에 실패했더라면 딜란은 레스터의 손을 잡았을까? 알 수 없다. 레스터는 아마 지금 레인이 하는 이 고민을 수십, 수백 번은 반복했을 게 뻔했다.

레인은 이 일에 관해서만은 레스터를 동정했다. 승자이기에 할 수 있는 가벼운 동정뿐이지만. 레스터의 입장에선 자신과 가족을 무참하게 살해한 인간 때문에 미쳤고 어떻게든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아버지가 그런 자신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비참했을까.

애초에 눈앞의 딜란이 모든 악의의 근원이었다. 레스터가 레인을 질투하며 미워하게 된 것도, 레인이 이런 처지가 된 것도, 전부 다 그가 원인이다. 그런데 홀로 제멋대로 만족하고 처형당하겠다니,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아버지.”

레인은 딜란에게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굽혀 그와 시선을 맞췄다. 피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딜란을 마주한 게 몇 년 만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아득히 먼 옛날에는 거리낌 없이 딜란을 마주했다. 머나먼 기억이었다. 이제는 더럽혀진 추억에조차 매달리며 행복을 추억하려 애쓸 필요가 없었다. 눈을 마주하고 입을 맞추며 사랑을 속삭이던 다정한 얼굴이 기억에서 잊히기도 전에 딜란은 레인과 슈리아를 배반했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슈리아를 죽인 일로 딜란은 이득과 손해를 동시에 보았다. 평민에 가까운 하급 귀족의 딸을 공작 부인으로 맞아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정통성에 흠이 갔다. 하지만 동시에 선왕과 손을 잡고 그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이득을 얻었다. 딜란 아이제나흐는 가문에 완벽한 손해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딜란이 아나벨을 사랑해 기꺼이 공작가의 이름에 흠을 내면서까지 보잘것없는 아내를 부인으로 맞으며 그녀를 위해 주었다고 말한다. 정말로 그런가?

아나벨은 증오스럽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가 마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딜란은 아내와 애인 사이를 오가면서 아무런 피해도 겪지 않았다. 세상은 강자에게 호의적이다. 레인은 약자에게 던져지는 시선과 말을 잘 알았다. 레인 자신이 숱하게 들어 왔기에, 아나벨이 들었을 말들도 쉽게 상상되었다. 딜란이 슈리아와 결혼 생활을 이어 가던 몇 년간 아나벨은 정말로 괴로웠고 낫지 않는 상처를 입었을 터였다. 아나벨이 상처 없이 정말로 행복했더라면 악의에 받혀 집요하게 레인을 증오하고 모욕하는 데 열중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딜란이 정말로 아나벨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면 진작 도망치는 게 나았다. 그러나 딜란은 아나벨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할 때 소중한 이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그저 최대한 제 편의에 사랑하는 이를 끼워 맞췄을 뿐이다.

“아버지는 뭐가 더 중요했어요? 레스터와 아이제나흐. 어떤 게 더 중요했느냐고요.”

다정한 척 속삭이는 질문에 딜란은 대답하지 못한 채 말의 의도를 추측해 보려 애썼다. 살다 보면 때로는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할 때가 온다. 그러나 딜란은 무엇 하나 놓지 않고 탐욕스레 모든 걸 손에 쥐기를 바랐다. 무엇이 더 소중한지는 명백한데도 딜란은 두 가지를 끝까지 가늠하며 끝까지 재어 보았다.

“레스터는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그 소중한 가문과 저울질해 볼 정도로만, 딱 그 수준으로만 레스터를 사랑했다는 걸. 그래서 레스터가 무너졌어요. 내게 패배했어요.”

“무슨…….”

처음으로 딜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딜란이 레스터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딜란은 레스터에게 아이제나흐라는 최고의 자리를 주고 싶어 했고, 그 완벽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레스터가 멀쩡한 상태로 가문을 이어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레스터가 바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처참하게 살해당한 악몽 속에서 몸부림치며 그 어떤 상황에서조차 자신을 지탱해 줄 보호자로서의 아버지를 바랐지만, 딜란은 처음부터 그런 것을 줄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딜란이 사랑하는 아들의 완벽한 지지대가 되어 주었다면 계획은 성공했을 텐데.

“아버지가 나랑 레스터를 가늠하고 있다고 걔한테 말했거든요. 레스터는 그 말에 무너졌고요. 내가 레스터가 무너진 틈을 파고들어서, 레스터에게서 마법을 빼앗았어요.”

당신이 망쳤다. 이 모든 걸 망친 게 당신이다.

그렇게 선언하는 순간, 딜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지금까지 레스터의 실책으로 일이 실패했을 거라고 책임을 돌려 왔을 딜란의 얼굴에 깊은 절망이 서렸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까지 모든 걸 제 의지대로 해 온 남자이니, 가문의 명운을 건 싸움에서 진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는 힘들 터였다.

조금씩 무너지는 딜란을 보며 레인은 몸을 바로 세웠다. 딜란과 아나벨, 그리고 레스터.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이 미웠다. 제 행복을 박살 내 놓고 그걸 양분으로 행복한 이들이 미웠다. 그들을 박살 내기 위한 복수는 이걸로는 부족하다.

“당신에게서 모조리 빼앗고 박살 낼 거야.”

“……레인.”

“당신의 가문도 가족도 최악의 형태로 박살 낼 거라고요.”

레인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간수가 자물쇠를 잠그는 걸 보면서 자리를 뜨는 대신에 여전히 감옥 안의 딜란을 노려보며 손만 까딱였다. 미리 내려 둔 명에 따라 간수는 착실히 움직인다. 왕의 제안을 수락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데 대한 추가적인 대가로 왕이 내려 준 것을 받아 갈 때였다.

몸이 마비되어 쓰러져 있던 아나벨이 처절하게 신음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유니가 크게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겁에 질려 흐느끼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 소리에 불안함을 느꼈는지 딜란의 표정에 점차 균열이 갔다. 레인은 딜란이 창살 앞까지 무릎걸음으로 기어오는 걸 막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간수를 제 앞으로 불러 보여 주었다.

유니 아이제나흐가 입을 틀어막힌 채 간수에게 붙잡혀 있었다. 레인은 눈물로 젖은 소녀의 눈가와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유니가 몸을 바르르 떤다. 아나벨의 비명이 감옥 안을 뒤흔든다. 딜란의 시선이 따갑다. 레인은 천천히 유니의 눈 위에 손을 얹고 마법을 외웠다. 그러자 뻣뻣하게 굳어 있던 유니의 몸이 축 늘어졌다.

“유니……!”

레인은 여전히 유니에게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딜란을 돌아보았다. 일견 다정해 보이는 손길과 달리 차가운 눈빛은 냉정했다. 레인이 다시 한번 손짓하자 간수가 허리에 매어 뒀던 커다란 자루 안에 유니를 밀어 넣었다. 잠이 든 소녀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시커먼 자루 안으로 툭 떨어졌다. 딜란이 황급하게 레인을 붙잡았다.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려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차례차례 무너지던 허세가 모두 부서졌다.

“어쩔 생각이냐? 유니를…….”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귀한 보물. 딜란이 가장 귀애하는 자식. 그 어떤 이해득실도 따질 필요 없이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인 딸에게 딜란은 모든 사랑을 퍼부었다. 어차피 죽음이 예정되어 있던 딸이지만,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는 건 체감되는 무게가 달랐다. 딜란의 눈이 미약한 희망과 공포로 물들었다. 유니는 누구나 사랑할 만한 사랑스러운 아이다. 감옥에서 빼내 혹시 유니만을 구해 주려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인은 딜란의 기대를 산산이 부쉈다.

“당신이, 당신 아내가, 당신 아들이 내게 한 것과 똑같이 할 거예요.”

“대체 뭘…….”

“못 알아들어요?”

레인은 웃으며 몸을 낮췄다. 그리고 아나벨에게까지 또렷이 들리도록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당신이 한 것처럼 가족을 빼앗고, 당신 아내가 한 것처럼 멸시하고 모욕하고, 당신 아들이 한 것처럼 때리고, 그다음은…….”

아무리 입이 무겁다지만 간수가 있어 말을 흐렸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어질 말을 모를 리 없었다.

강간. 딜란을 상처 내기 위해 레인은 잔혹한 가면을 뒤집어썼다. 말로 꺼내기만 해도 입과 혀가 썩어 문드러질 것같이 더러운 말이다. 말 이상으로 끔찍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니, 더러운 말이라도 입에 올리기 쉬웠다.

딜란이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레인을 붙잡았다. 있는 힘껏 붙잡아서 자르지 못한 손톱 때문에 상처가 났지만, 레인은 딜란의 처절함과 비굴함을 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즐겁게 웃는 레인을 딜란이 끔찍한 괴물 보듯이 했다. 사실, 즐겁다기보다는 입맛이 썼다. 사랑하는 딸이 겪는다고 생각하면 그리 끔찍하게 느껴질 일을 레인을 상대로는 10년이 넘게 방치했다. 끝까지 우위에 선 모습을 보이기 위해 레인은 필사적으로 치미는 분노를 억눌렀다.

“……유니는…….”

“유니는 잘못이 없죠. 어릴 때의 저처럼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는 딜란을 대신해 레인이 말을 받아 이었다. 유니는 죄가 없다. 지금은 아홉 살. 과거에 죽었을 때도 고작 열 살이었다. 여섯 살의 레인은 죄가 있었는가? 딜란에게 반박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차라리 내게……. 내게, 해라. 내가 미운 것 아니냐? 유니는 그래도 네 동생이 아니냐?”

왕국을 좌지우지하던 딜란이었지만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지금 내밀 수 있는 패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던 레인은 몸을 조금 뒤로 뺐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다가 씩 웃었다.

“그러면 아나벨을 데려갈까요?”

“뭐?”

“아버지 말이 맞아요. 유니는 그래도 저랑 피가 반 섞인 여동생이니까, 저로서도 불편하긴 해요. 하지만 아나벨이라면 피도 섞이지 않은 제 원수일 뿐이니까 대신할 수 있어요.”

다 들리도록 말하며 레인은 아나벨을 돌아보았다. 창살 앞에서 쓰러져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던 아나벨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부릅떠져 있었다. 유니가 잡힐 때와는 다른 의미의 불안이 아나벨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감옥과 복도는 오직 딜란의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선택하세요. 지금 당장.”

레인이 유니가 든 자루 위로 손을 얹었다. 그저 얹었을 뿐이지만 딜란이 보기에는 충분히 위협적이다. 레인이 자루 안으로 손을 뻗으려 하자 위협을 느낀 딜란이 결국, 비명처럼 소리쳤다.

“아나벨을!”

황급히 소리쳤지만, 딜란 자신도 제가 한 말이 믿기지 않는 얼굴이다. 레인은 계속해서 자루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웃었다.

“똑바로 말해 주세요.”

“유니 말고, 차라리 아나벨을…….”

“아나벨을 데려가라는 말씀이시죠.”

확인 사살처럼 말하니 딜란은 부정하지는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차마 아나벨이 있는 방향으로 눈짓하지도 못하고 흐느낀다.

“아나벨의… 딸, 이기도, 하니까……. 아나벨도 분명, 기꺼이…….”

“좋은 선택이네요.”

레인은 절망으로 범벅된 아나벨의 얼굴을 흘낏 보며 말했다. 만약 아나벨에게 직접 물었더라면, 아나벨 스스로 유니를 대신하겠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딸을 선택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다. 방금 아나벨은 딜란에게서 한 번 더 선택받지 못한 채 버려졌다. 슈리아 때 그랬듯이, 이번 역시도.

“하지만 농담이었어요. 전하께서 허락하신 건 딸인 유니지 아나벨이 아니니까요.”

제법 그럴듯한 상황이 연출됐다. 레인은 만족스레 웃으며 간수에게 명령해 자루를 닫았다. 딜란의 황망한 시선이 뒤따른다.

“참고로 말이죠. 레스터는 단순히 잠든 게 아니에요. 제가 악몽을 선사했거든요. 내가 살던 거랑 똑같은 삶을 반복해서 살도록. 최후를 맞으면 또다시 살도록, 꿈속에서 당신들에게 지독하게 당하도록.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악몽을 꾸고 있겠죠. 우리가 대화하는 순간에도 수십 번씩 죽어 가며, 끝나지 않는 악몽을 꾸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레인은 레스터에게 덧씌워진 마법을 거뒀다. 바르작거리던 레스터에게서 악몽이 끝나고 짧은 안식이 찾아온다. 그러나 지쳐 쓰러진 잠은 영원히 이어질 수 없다. 깨어났을 때는 수만 년의 세월이 고통으로 남아 레스터를 짓누를 터였다. 깨어난 레스터가 정상일 리 없다. 그는 딜란에게 저주를 퍼부을까, 원망할까? 어느 쪽이든 딜란에게 고통을 선사할 터였다.

“이 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당신이, 당신들이 한 만큼만 할 거니까.”

상냥한 가식조차 집어치우고 속삭였지만, 딜란은 더는 들을 여력도 없어 보였다. 그는 엎드린 채 소리 없이 오열하고 있었다. 딜란이 낸 상처를 치료하고 옷매무새를 깔끔하게 정돈한 레인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스쳐 지나가며 아나벨에게 걸어 둔 마비의 마법을 풀자, 그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돌아서는 길은 온통 비명과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기나긴 감옥을 지나 나오는 길까지도 그곳에서 느꼈던 어둠이 따라붙는 듯 느껴졌다.

짧게 햇살을 받은 레인은 황급히 미리 준비해 둔 마차에 올랐다. 도착지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린다. 잠시 고민하던 레인은 자루를 열고 유니를 깨웠다. 무거운 잠에서 눈을 뜬 소녀가 레인을 보고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레인은 겁을 집어먹은 유니를 잠시 물끄러미 응시했다. 유니 아이제나흐. 레인과 그리 닮지는 않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어딘가 남매라고 부를 수 있는 구석이 분명히 존재했다.

차디찬 저택에서 홀로 다가와 주었던 작고 어리고 사랑스러운 아이. 그러나 유니는 증오하는 자들의 피를 이은 자식일 뿐이다. 동정할 필요 없다. 동정할 필요 없다고, 머리로는 생각한다. 무거운 침묵을 레인의 갑작스러운 질문이 부쉈다.

“살고 싶어?”

“……네?”

“다 죽더라도, 너 혼자라도 살고 싶으냐고.”

레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박이던 유니는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겁을 먹은 소녀는 두려움에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덜덜 떨면서 울었다. 그도 그럴 게 유니는 죽음을 직면하기에는 아직 지나치게 어렸다. 하지만 더는 유니는 보호자의 울타리에서 안온하게 생존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레인은 잠시 유니를 바라보다가 무너지는 몸을 붙잡아 똑바로 세웠다. 딸꾹질하는 소녀를 몰아붙이듯 되물었다.

“살고 싶으냐고 물었어.”

“오, 오라버니…….”

“그런 게 아니라면 돌려보내 줄게. 나를 제외한 아이제나흐가의 처형일이 나흘 후로 정해졌어.”

유니가 몸을 파드득 떨었다. 레인의 손에서 도망치고 싶은지 몸을 바르작거렸지만, 레인은 되려 유니를 몰아붙였다.

“반역 죄인이니까 명예로운 죽음을 맞지는 못할 거야. 감옥에서 광장까지 맨발로 걸어가야만 해. 돌부리 정도는 아프지도 않을 거야. 사람들이 아이제나흐에 품은 증오는 어마어마하거든. 왕국은 그걸 막지도 않을 거야. 쌓여 있는 울분을 풀 대상이 필요하고, 반역 죄인은 딱 맞는 희생양이지. 사람들이 네게 돌이며 썩은 달걀이나 오물을 집어 던질 거야. 그렇게 간신히 도착해서 사형대 위에 올라가. 네 죽음은 구경거리가 되고, 마지막에는 네 시체가 걸친 옷가지까지 깡그리 벗겨 갈 거야. 머리와 분리된 시신은 다른 죄인들과 뒤섞여 파묻히겠지.”

일부러 잔혹한 말을 고르자 유니는 숨도 쉬지 못하고 떨었다.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잖아.”

“저, 전…….”

“살고 싶지?”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의 유니를 꽉 붙잡고 레인은 계속해서 채근했다. 겁을 집어먹은 소녀가 내뱉을 말은 하나뿐이다.

“사, 살고 싶어요…….”

“그럼 살려 줄게.”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나오는 답변이 실감 나지 않는지 유니가 눈물 젖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상황이 이해 가지도 않을 터였다. 되갚아 줄 생각도 없으면서 일부러 왕과 거래해 유니를 꺼낸 것은 다른 이유였다.

딜란에게는 유니를 강간하겠다고 말했지만, 처음부터 복수라고 해도 그런 잔혹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설령 대상이 아나벨이라 한들 마찬가지다. 강간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필요하다. 어디서 가해자를 구하란 말인가. 돈만 주면 하겠다는 쓰레기들이 널려 있겠지만, 돈을 받고 제 욕망을 충족하며 타인을 짓밟겠다는 자들과 상종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레인은 유니의 눈물을 닦아 줄까 싶어서 내밀었던 손을 도로 거뒀다. 동정심과는 별개로 울고 있는 이복동생의 눈물을 닦아 주는 역을 맡을 수는 없었다. 대신 짐짓 냉정한 얼굴로 제 코트를 벗어 소녀의 머리 위에 씌웠다.

“너는 공식적으로는 감옥에서 버티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처리돼.”

“……네?”

“그리고 난 이대로 널 리세티로 보낼 거야.”

유니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리세티는 왕국보다 훨씬 더 남쪽에 있는, 라인셀과는 교류가 전혀 없는 낯선 왕국이었다.

“리세티에 이크람 학원이라는 곳이 있어. 리세티 왕국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라인셀보다 자유로운 나라야. 이크람 학원은 평민도 자유롭게 입학하는 곳이고, 거기서 뭐라도 공부하다 보면 네가 커서 할 만한 일을 찾을 수 있겠지. 널 거기로 보낼 거야. 네가 살아 있는 게 밝혀져선 안 되니 과거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해야 해. 신분을 위조해서, 너는 시에란이라는 성의 평민이 될 거야. 대신 이름은 네가 원하는 대로 바꿔. 서류 작업을 해야 하니까 무슨 이름이든 빨리 생각하도록 하고. 일단 지금 가는 저택에서 머물다가 사람들의 눈이 다른 곳으로 쏠렸을 때 널 국외로 빼돌릴 거야. 아마 나흘 뒤에 출발하게 될 테니까…….”

“자, 잠깐만요.”

유니가 당황해서 말을 잘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게 살아갈 수 있는 선택지를 준다는 이야기야.”

비록 자신이 지니고 있던 걸 대부분 잃어버릴지라도 자유로이 살아갈 기회. 과거의 레인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기회를 유니에게 줄 생각이었다.

반란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는 이가 한둘이 아닐 텐데도 레인은 계속 유니가 마음에 걸리고 불쌍했다. 레인은 유니의 괴로움과 혼란을 알았다. 내막과 자세한 상황은 달랐지만, 하루아침에 뒤바뀐 상황에 던져진 어린아이란 점에서 유니의 존재는 레인 자신의 과거가 생각나게 하였다. 레인 자신과 동일시하는지도 모른다. 유독 눈에 밟히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어색하게나마 레인에게 손을 내밀었던 과거가 있어서일지도 모르고, 유니가 레인의 이복동생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레인은 유니를 구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원래는 이대로 널 결혼시킬까도 했었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더라.”

신분을 숨겨야 하니 제대로 된 혼처에는 보낼 수 없다. 제대로 된 혼처가 있다고 해도, 애정 없는 정략결혼이 불러온 최악의 경우를 레인은 제 몸으로 겪어 봤다.

유니의 거처를 라인셀에 국한해 쉽게 해답을 찾지 못하던 레인에게 답을 준 건 유르딘이었다. 어렵고 힘들지라도 제 손으로 무언가를 쥘 기회를 주자고, 과거에 소녀를 죽였던 남자가 직접 도움을 자처했다.

“보호자가 붙을 거야. 감시자이기도 하지. 학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과 같이 살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그 사람에게 부탁해. 학원의 최소 입학 연령은 열세 살이니까 그때까지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공부하는 게 좋겠지만……. 물론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돼. 공부하겠다면 학비까지 대 주겠지만, 안 해도 어른이 될 때까지 생활비는 대 줄게. 어디까지나 네 자유고 네 선택에 맡길 거니까.”

이크람은 한때 슈리아가 가고 싶었던 학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레인은 처음 알게 됐다. 만약 슈리아가 결혼 대신 학원을 선택했다면 그녀에게 다른 미래가 왔을 것이다. 과거의 어머니가 얻지 못했던 기회를 레인은 제 이복동생에게 쥐여 주기로 했다.

“날 미워하고 복수하려고 해도 상관없어.”

당황스레 이야기를 듣던 유니가 복수라는 말에 숨을 삼켰다. 레인은 고개 숙인 유니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겁을 집어먹은 것도 같고, 아니면 복수에 불타고 있는 듯도 했다. 어차피 얼굴 마주한 적도 몇 번 없는 낯선 여동생이다. 표정 속에 감춰진 속마음 따위 알 리가 없었다. 후환을 뿌리 뽑아야 안전하며, 살려 두는 게 어리석은 짓이란 건 알았다. 반역자의 신분이 되어 외국으로 쫓겨나는 소녀가 뭘 얼마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치면 레인도 과거에는 위협이 될 리가 없다고 판단해 딜란이 살려 둔 소년이었다.

“물론 날 죽이려 하면 더는 봐주지는 않을 거야.”

기어이 유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단순히 두려워한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유니의 표정도, 제 결정이 옳은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유니를 살리기로 한 걸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날 죽이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네게 손대지 않아.”

안심하라고 한 말인데 그리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럴 법도 하지. 레인에게 꼭 맞춘 코트는 유니에겐 지나치게 커서, 커다란 코트에 파묻혀 덜덜 떠는 유니는 한없이 작아만 보였다. 차라리 마부석에 앉을까, 고민하는데 유니가 입술을 뗐다.

“그런 생각… 안 해요.”

“…….”

“한 적도, 없어요. 감옥에서도…….”

“……그래.”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레인은 이 애가 진지하게 딜란과 아나벨의 자식이 맞을지 고민했다. 레인이 피식 웃자 유니가 몸을 움츠렸지만, 더는 아까처럼 곧 죽을 듯이 두려워하진 않았다. 여전히 우울해 보이지만 그건 레인이 어찌해 줄 수는 없는 영역이다.

마차는 커다란 저택의 뒷문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본채로 가기 전,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별채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레인은 유니에게 덮어씌운 제 코트를 더더욱 단단히 여며 머리까지 푹 씌웠다. 코트에 가려지기 전에 유니가 뭔가 말하려고 했으나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커다란 저택 한쪽에 자리한 별채를 눈으로 살핀 유니는 별다른 저항 없이 얌전히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들을 따랐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야 할까? 레인이 바란다면 얼마든지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다시 한번 만날 때는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다른 인원이 모두 처형되는 날일 텐데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레인의 목 안에서도 꺼내지 못한 말이 껄끄럽게 걸려 있었다.

레인은 눈앞에 보이는 렘샤이트 후작저를 눈에 담았다. 레인에게 아무리 타인을 무릎 꿇릴 마법적인 힘이 생겨났다고 한들, 지금 당장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생길 리는 없었다. 자연스레 레인이 도움을 요청한 이는 유르딘이었다. 유르딘이 자리에 없어도 유르딘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레인을 따랐다.

별채를 지나 본채로 향했다. 주인이 부재한 저택에서 레인을 맞은 건 유르딘의 부관인 베른이었다. 베른은 웃으며 레인을 반겼다.

“레인 님, 마침 잘 오셨네요. 유르딘 님도 곧 도착하실 겁니다.”

“지금은 후작님을 뵈러 온 게 아니야. 카이렌에게 안내해 줘. 따라 들어올 필요는 없어.”

베른은 못마땅한 속내를 숨기려 신음을 억눌렀다.

“레인 님 혼자 만나기는 많이 불편하실 겁니다.”

“불편하지 않아.”

“유르딘 님이 곧 오실 텐데요. 오시고 나서…….”

“괜찮으니까 그냥 안내해 줘.”

고집을 부리니 결국 베른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이었지만, 차라리 제 주인인 유르딘이면 모를까 레인에게는 강경하게 나가기 힘들었다.

레인은 요 몇 달 새, 갑작스레 변한 유르딘의 뒤를 쫓으며 온갖 걱정과 일감을 떠안았을 베른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도 이것만은 유르딘이나 타인의 도움 없이 레인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레인은 베른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 내려갔다. 아래로, 조금 더 깊은 아래로.

유르딘이 저택을 손에 넣자마자 증축한 지하는 사용한 일이 별로 없어서 비교적 깨끗했다. 무슨 목적으로 유르딘이 은밀히 지하를 넓혔을지, 레스터의 기억을 엿본 레인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내려갈수록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깊은 지하까지 안내한 베른은 레인에게 열쇠를 건넸다. 레인에게 더는 호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베른은 불안해했지만, 레인은 한사코 사양하며 베른을 바깥으로 물렸다. 앞으로 이어질 대화가 어떤 내용이든 남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베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레인은 열쇠를 꽂아 넣고 커다란 철문을 천천히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며칠 만에 레인은 만신창이가 된 카이렌과 대면했다.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의 카이렌은 꼴이 엉망이었다. 피에 절어 잔뜩 지쳐서는 누가 들어온 걸 곧장 알아채지도 못하는 듯이 보였다. 바깥에서 모드 백작가는 아이제나흐 공작가에 협력한 반역 혐의로 가문이 조각났다. 현재의 가주인 카이렌 또한 왕국 전역에 수배된 처지였다. 그대로 뒀어도 감옥에 수감되어 처형됐을 카이렌을 굳이 그 난장판에서 꺼내 와 가둔 이유는 하나뿐이다.

복수.

모든 비극을 불러온 딜란이나 저를 학대한 아나벨과 레스터도 미웠지만, 레인이 가장 증오하고 있는 상대는 카이렌이었다. 단순히 그가 레인을 강간했기 때문은 아니다. 폭력이나 행위와 함께 쌓아 올려진 기만과 조롱. 카이렌은 레인의 일상을 좀먹고 사고를 망가뜨렸다. 레인은 제게 애정을 속삭이며 짓밟고 모든 게 사랑이었다고 뻔뻔하게 속삭이는 카이렌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카이렌 모드.”

이름을 부르자마자,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카이렌은 피를 먹어 무거운 육신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양 가볍게 고개를 들었다. 똑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열렬한 애정을 품은 눈은 카이렌이 제 폭력적인 애정을 레인에게 드러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두 사람의 처지가 뒤바뀌어 레인이 카이렌의 목숨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여전히 카이렌은 레인을 사랑하며 동시에 갈망한다.

레인에게 조금도 공감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내리붓기만 하던 애정. 레인은 아직도 카이렌이 제 머리 꼭대기에 선 것 같아서 불쾌했다. 저 눈. 저 애정. 모든 것을 박살 내면 카이렌에게서 해방될 수 있을까? 레인은 입 안의 살을 깨물며 평정을 가장했다. 여기까지 와서 카이렌에게 짓눌려 꼬리 만 개처럼 도망칠 수는 없었다.

“레인, 날 보러 온 거야?”

목소리가 달다. 피와 오물로 더럽혀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잘생긴 외모가 어둠 속에서 싱그럽게 빛을 발한다. 카이렌의 티 한 점 없는 미소가 레인을 썩어 들어가게 만든다. 여전히 악몽을 거니는 레인과 달리 카이렌을 흔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아서 괴롭다. 눈살을 찌푸린 레인을 본 카이렌은 고통에 낮게 신음하면서도 나른하고 배부른 미소를 짓는다.

“아니면 날 죽이러 온 건가?”

“……카이렌.”

“그럼 죽여야지.”

카이렌이 레인에 대해 잘 알듯 레인 또한 카이렌에 대해 잘 알았다. 죽이라는 말은 거짓 한 점 없는 진심. 카이렌의 어디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미친놈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애초에 카이렌을 고작 죽이는 것으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카이렌에게도 레스터와 같은 악몽을 선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레스터에게 건 마법은 마법진의 힘을 빌렸던 것이라, 마력은 강하지만 초보 마법사에 불과한 레인이 그토록 정교한 악몽을 선물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깨지 못하는 악몽을 주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복수는 되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레인은 만들어진 악몽에 의한 절망이 아닌 그에 의해 내려지는 순수한 절망을 원했다. 똑같이 갚아 주기를, 평생 굴복당했던 이를 역으로 무너뜨리기를. 레인이 악몽을 선사하기 전부터 바닥으로 미끄러진 레스터처럼, 그렇게 바닥으로 떨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제 부모의 죽음조차 조롱하던 미친놈을 무슨 수로 절망 속에 휘두른단 말인가. 레인이 공작에게 가서 한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계획에 의한 연극이었다. 유니를 죄인 취급하듯 묶어 두고, 그 애가 더러운 말을 듣지 못하도록 잠재우는 것을 마치 참혹한 범죄의 일환인 양 행동하고, 아나벨과 딜란 모두에게 절망을 선사할 제안을 하고. 그 사이를 잇는 행동과 말들은 즉흥적이었지만, 중요한 말은 몇 번이나 생각하고 되짚었다. 그 말과 행동이 과연 상대에게 먹힐지를.

하지만 카이렌에 대해서는 계획을 세울 수 없었다. 유르딘이 없는 레인의 곁에는 쉽사리 악몽이 날아들었다. 카이렌에 대한 생각은 늘 그가 곁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몸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밤중에 몰래 찾아오던 손길이, 숨소리가, 뜨거운 체온이 곁에 없는데도 생각날 것 같아서 레인은 카이렌에 대한 상념으로부터 도망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레인만을 향하는 열렬한 눈동자를 물끄러미 마주한다. 오직 단 하나만이 중요하단 듯이 맹목적인 눈을 향해 몸을 숙였다. 이마가 맞닿을 듯이 가까워진 채 레인은 충동적으로 속삭였다.

“안 죽여.”

담담하게 말한 레인은 의아해하는 시선을 무시한 채, 카이렌을 얽매고 있던 수갑 위로 손을 얹었다. 작게 주문을 외우자 마법이 금속을 잘라 낸다. 몸을 억압하는 동시에 고정하던 수갑이 사라지자 카이렌의 몸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인은 도저히 설 만한 상태가 아닌 카이렌에게 손을 뻗어 치유 마법까지 썼다. 이내 회복한 카이렌은 비틀거리면서도 레인을 붙잡았다.

“무슨 생각이야? 너…….”

“쉿.”

카이렌의 목소리가 높아지려 하자 레인은 제 입술 위로 검지를 세웠다. 카이렌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제법 고분고분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날 죽이려고 데려왔잖아? 고문해서 죽이려고. 아냐?”

“널 데려온 건 내가 아니라 유르딘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긴 유르딘의 저택이었고, 지금까지 드나든 사람이라고 해 봤자 유르딘 본인이나 그의 수하 정도였을 테니까. 뭔가 더 말하려는 카이렌의 입을 레인이 막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건 알겠는데, 나가서 하자. 이대로 걸리면 잡혀서 죽을 테니까.”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

“카이렌.”

레인이 재촉하며 카이렌을 불렀다. 적의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다. 카이렌은 레인을 의심 품은 얼굴로 보았다.

“도망치려면 서둘러야 해.”

믿기지 않는 말로 다시 한번 재촉하면서 레인은 카이렌의 손을 잡았다. 의심만을 하던 카이렌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진다. 카이렌은 믿기지 않는 장면을 보듯 제 손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숨을 삼켰다. 카이렌의 명령이나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의 애원이 아니라면 레인이 카이렌에게 먼저 손을 뻗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카이렌은 레인의 손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맞잡은 손은 끈적끈적한 피에 젖어 있었다. 레인의 손에서 스민 땀과 카이렌의 피가 엉망으로 뒤섞인다. 그 가운데서 카이렌은 사랑을 느끼고 희망을 품는다.

레인은 크게 심호흡하고 자신과 카이렌에게 마법을 덮어씌웠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기척이 공기 중으로 녹아내려 사라진다. 레인은 그대로 카이렌의 손을 잡아끌었다. 카이렌은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레인의 뒤를 따랐다. 문을 닫고 굳게 걸어 잠가 다른 사람이 두 사람을 확인하기 힘들게 만들어 시간을 번 레인은 망설이지 않고 계단 위로 나아갔다.

통로 끄트머리에 베른이 있었다. 레인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베른을 빠르게 마법으로 잠재우고 지나쳤다. 기척을 지웠지만, 보이는 모습까지 감출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이 많은 바깥으로 나가는 대신 레인은 지하 비밀 통로로 향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유르딘이 알려 준 비밀 통로를 레인은 모두 빠짐없이 외우고 있었다.

카이렌의 손을 놓고 직접 통로를 조작한 레인은 다시 손을 맞잡는 대신에 검은 통로로 앞장섰다. 레인은 좁은 통로 안을 빠르게 걸었다. 평소에 조금만 걸어도 금세 지치던 레인답지 않았다. 고문 때문에 카이렌은 평소보다 훨씬 더 약했다. 느릿한 걸음은 레인을 놓치지 않고 간신히 뒤쫓는 게 최선이었다. 통로 끄트머리에서도 레인은 멈추지 않았다. 카이렌을 남겨 두고 혼자 밖으로 나간 레인은 통로 구멍으로 머리를 내민 채 속삭였다.

“피가 너무 많이 묻어서……. 그 차림으로는 눈에 너무 띄어. 옷 가져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햇빛을 등진 채 레인이 웃었다.

천천히 통로의 입구가 닫히고 어둠 속에서 홀로 남은 카이렌은 얼떨떨하게 레인이 쥐었던 손을 어루만졌다. 생각이 엉망으로 얽힌다.

도망치게 해 주겠다니, 대체 왜? 진심으로 그런 말을 꺼낼 리가 없다. 레인은 카이렌을 증오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이렌이 그렇게 만들었다.

카이렌이 레인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던 건 아니었다. 별채에서 채찍으로 레인을 내려치던 어린 시절, 레인이 지금처럼 가면을 만들어 뒤집어쓰지도 못하고 벌벌 떨던 유약한 시절에는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눈에 띄었고 비틀어진 호감은 있었지만 그 시절부터 연정은 아니었다. 어쩌면 연정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일 뿐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결과는 같았다.

제 마음을 자각한 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순간보다는 훨씬 더 자란 후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레인이 이미 카이렌에 대한 증오를 깊이 품었던 때. 카이렌은 저를 노려보는 눈을 보며 흥분했다. 카이렌의 꿈에서는 매일 밤 레인이 나와 온갖 음란한 행위를 하며 그를 유혹했다. 다른 이와 밤을 함께해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레 깨달았다.

제 첫사랑은 실패하겠다고.

카이렌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제 양부이자 삼촌인 헤레일에 대해 생각했다. 헤레일은 넘볼 수 없는 상대를 사랑하다가 실패했고, 아내와의 결혼생활에서 다시 한번 실패했다. 최소한 헤레일은 어머니에게만은 사랑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 기회를 영영 잃은 건 전적으로 헤레일의 탓이었다.

폭력은 상처가 아물어도 깊은 흔적을 남긴다. 카이렌은 레인에게 잘해 줄 기회가 있었다. 그 기회를 놓친 건 카이렌이었다. 카이렌은 사소한 폭력 따위는 개의치 않았지만, 레인은 달랐다. 이대로 카이렌이 레인에게 잘해 주고 애정을 부어 줘도 이미 늦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헤레일을 사랑할 수 없었듯이, 레인 또한 카이렌을 사랑할 수 없다.

차라리 처음부터 사랑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제대로 저를 사랑하도록 길들일 수 있었을 텐데. 조금 후회했지만,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증오해 마지않는 멍청한 헤레일 모드처럼 제 사랑에 실패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제라도 잘해 준다는 선택지가 존재하기는 했다. 레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빌면서 이제라도 잘하겠다고 하면, 구원을 바라는 레인이 언젠가는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카이렌의 손을 잡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카이렌은 처음부터 가능성이 낮은 데다 잘되어도 제 마음대로 레인을 휘두를 수 없는 선택지를 무시하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 레인이 카이렌을 사랑할 수 없다면 차라리 공포와 증오로라도 레인에게 자신을 깊이 새기기로 결정했다. 그걸 위해 카이렌은 레인을 더더욱 개처럼 짓밟고 굴복시키며 죽여 가면서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렇게 짓밟아 죽이다가 애먼 놈의 사소한 호의에 목을 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동시에 자상하고 다정하게 사랑 또한 속삭였다. 증오와 공포로 카이렌을 기억하며 동시에 타인의 애정 또한 의심하고 불신하도록.

레인은 제게서 도망치지 못한다. 만약 카이렌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레인에게는 이미 지워질 수 없는 상처가 새겨졌다. 카이렌은 은밀히 준비 중이었던,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는 이미 레인의 몸에 찍었다던 낙인을 떠올렸다. 단순히 제 흔적을 남기는 거라면 문신이라는 비교적 온건한 방법이 있음에도 굳이 노예에게나 찍는 낙인을 택한 건 지울 수 없는 수치를 위해서였다.

레인과 카이렌은 카이렌이 수도에 있는 동안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있었다. 덕분에 카이렌은 제 계획을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카이렌이 레인에게 모든 것을 줬기에 레인은 모든 것을 불신했다. 작은 호의조차 의심하는 기억과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고 포개어져 레인은 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않게 됐다.

완벽한 줄 알았다. 카이렌은 헤레일을 죽이고 레인을 완벽히 제 손에 넣는 순간만을 꿈꿨다. 그렇게 성공할 줄만 알았다.

계획은 실패했다. 카이렌은 자신에게 많은 진실을 숨겨 온 레스터에게 분노했지만, 이미 일은 한참이나 어그러진 후였다. 하지만 카이렌이 지금껏 정성 들여 쌓아 올린 집착의 잔재는 여전히 레인의 안에 남아 있다. 유르딘이 레인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여전히 카이렌은 레인에게 있어서 어떠한 의미로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공포와 증오.

레인이 자신을 죽이기를 바랐다. 목숨은 조금도 아깝지 않다. 카이렌은 레인의 증오와 분노에 찬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나 보던 얼굴이라 몹시도 자연스러운 이목구비가 섬세하게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그 얼굴이 증오를 품고 카이렌을 찌른다면, 그로 인하여 영원히 기억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죽음일지.

어둠에 물든 통로가 천천히 열렸다. 찬란한 빛과 함께 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는 고급품은 아니어도 말끔한 옷 한 벌이 들려 있었다. 레인은 옷을 내밀며 담담하게 말했다.

“갈아입어.”

아주 오래간 본 레인의 얼굴인데도 몹시 낯설었다. 평정과 협력은 카이렌이 의도한 바가 전혀 아니었다. 이건 카이렌이 만든 레인이 아니다. 제가 아는 레인이라면 이럴 리가 없었다. 조금 더 자신을 증오하고 두려워해야 하는데. 그간 카이렌이 닿을 때마다 겁에 질리던 게 무색하게도 레인은 카이렌의 손에 직접 옷을 쥐여 주었다.

카이렌은 옷을 갈아입는 대신 손에 쥐고 성큼 통로 밖으로 나왔다. 제 말을 듣지 않는 카이렌을 향해 레인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밖으로 나온 카이렌은 주어진 자유에 기뻐하는 대신 의심하는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사람 하나 없는 허름한 골목이지만 저 멀리 보이는 건물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수도 끄트머리의 남쪽이다. 이대로 수도를 빠져나가 모드 백작가의 충복들과 합류해 타국으로 도주할 수만 있다면 살아남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레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카이렌의 머리 위에 후드가 달린 망토를 씌웠다.

“뭐 하는 짓이야. 이대로 들켜서 끌려가고 싶어?”

“끌려가도 상관없는데.”

이대로 도망치게 놔둘 리가 없다고 생각해 가정만을 머릿속에 그릴 뿐, 마음마저 들뜨진 않았다. 담담한 어조에 레인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기껏 도망치게 해 주려고 했더니…….”

“대체 왜?”

카이렌은 자못 위협적으로 레인에게 다가갔다. 바로 코앞으로 다가가 섰지만 레인은 카이렌을 피하는 대신에 눈을 똑바로 뜨고 카이렌을 바라보았다. 곧게 응시할 뿐 적의를 드러내지 않은 푸른 눈이 유순하게 깜박였다. 천천히 레인의 손이 위로 들리는 것을 카이렌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응시했다. 레인의 손이 카이렌의 뺨을 쓸었다. 단순한 몸짓이지만 반향은 컸다. 레인이 먼저 나서서 손을 잡는 것도, 이렇게 다정하게 카이렌을 만졌던 것도 모두 처음 있는 일이다.

방심시키고 무너뜨리기 위한 뻔한 수작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카이렌은 레인의 손을 떨쳐 내지 못했다. 카이렌은 레인을 사랑했다. 레인에게서 관심을 돌리고 보호하기 위해 저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삼촌의 아래에서 순종적인 아들을 연기하는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을 할 정도로 사랑했다. 레인은 카이렌에게 유일한 것이다. 빛나고, 사랑스럽고, 그렇기에 부숴 버려 제 손안에 욱여넣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

진작에 레인에게 사랑받는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유순하게 올려다보는 눈빛이 다디달았다. 만에 하나 레인이 저를 용서하고 사랑하겠다고 하면 기꺼이 무릎 꿇고 사죄할 수 있을 정도로 중독적이다.

천천히 카이렌의 성마른 뺨을 쓸던 레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옷깃을 잡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카이렌은 너무도 쉽게 레인에게로 끌려갔다. 카이렌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이 기다린 순간이 지금인 양 느꼈다. 원래대로라면 레인의 이성도, 사고도, 가치관도 모조리 부숴서 미치게 만들어 제 성에 가둔 후에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모든 상황이 지나치게 달았다. 이어지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네게는 고마워, 카이렌.”

“뭐?”

“네가 아니었더라면 유르딘을 잡을 수 없었을 테니까.”

카이렌은 행복의 절정에서 레인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커다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몇 번이고 레인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손이다. 매끄럽게 쭉 뻗은 목을 조르고 입을 틀어막아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카이렌은 여전히 저를 보는 레인의 시선 때문에 희망을 놓지 못했다. 레인은 카이렌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몸을 기댔다. 어깨에 레인의 뺨이 얹히는 감각이 생생하다. 레인은 카이렌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네가 알려 줬잖아. 입을 맞추고, 애무하고, 다리를 벌려서 남자의 성기를 직접 받아 잘 조이는 방법을 말이야.”

“…….”

“네 덕분이야, 카이렌.”

달콤하게 속삭이는 말이 끔찍하다. 카이렌이 저를 더듬는 레인을 떼어 냈다. 배신감이 들었다. 애인으로서의 배신감이 아니라, 지금까지 제가 만들고 쌓아 올린 레인에 대한 배신감에 가깝다. 무섭게 굳어진 얼굴을 보며 레인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네가 알려 준 거, 참 알차게 잘 써 먹었어.”

“……너.”

“보답으로 살려 주는 거야. 일단 도주 경로를 확보해서…….”

레인의 말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카이렌이 레인의 어깨를 잡고 벽으로 세게 밀쳤다. 며칠간 고문당했으면서도 여전히 힘이 좋아서 잡힌 어깨가 욱신거렸다. 분노와 흥분에 시뻘겋게 물든 카이렌을 보며 레인은 조소했다.

“왜 화났어? 이해를 못 하겠네. 설마 우리가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네가…….”

“내가 언제까지나 네 의도대로 벌벌 떨고 살 줄 알았어?”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팔았다고?”

레인의 웃음소리가 스산하게 뒷골목에 내리깔렸다. 입술이 터져 번진 피를 핥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레인은 당장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내리눌렀다. 지금까지 저와 한 건 대체 뭐였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저항하지 못했을 뿐 합의되지 못한 관계. 레인에게는 짓밟히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정말로 몸을 팔았다고 한들, 카이렌이 추궁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너한테 언제까지 처맞으면서 당하는 것보다야 아직 얼굴이 봐 줄 만할 때 팔아 치우는 게 낫지.”

기어이 카이렌이 레인의 얼굴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입술과 볼 안쪽에서 피가 터지고 몸이 휘청거렸지만, 바닥으로 무너지기 전에 레인은 벽에 기대며 웃었다.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카이렌을 봐 온 레인이다. 그가 뭘 원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카이렌은 차라리 레인이 자신을 죽이기를 바란다. 죽음은 카이렌에게 있어서 두려운 게 아니다. 목숨이나 가문, 쥐고 있는 재산 따위는 카이렌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것들이다. 카이렌 모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건 레인이다. 최고로 바라는 것은 레인을 손에 넣는 것, 만약 손에 넣을 수 없다면 레인에게 자신을 깊이 각인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다.

안타깝게도 카이렌의 목적은 성공했다. 레인은 카이렌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몸에 새긴 낙인은 시간을 되돌리며 지워졌지만, 괴로운 기억도 감정도 여전히 남아 레인을 괴롭혔다. 잠이 든 밤이면 레인은 언제나 악몽에 시달렸다.

그래도 당장 아프지 않은 척은 할 수 있었다. 조롱조차 하지 않고 담담하게, 정말로 그간의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레인은 카이렌을 재촉했다.

“더는 얼굴 보기 싫으니까 도망치기나 해. 길게 시간 끌 수는 없단 말이야.”

카이렌은 레인을 붙든 손을 뿌리치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네가 날 도망치게 만들어서 얻는 게 없어.”

“왜 없어? 내가 널 도망치게 하면 내가 네게 미련이 있는 줄 알고 유르딘이 질투하고 집착해 줄 텐데.”

무심한 눈길이 카이렌을 훑었다. 더는 증오심으로도 카이렌은 레인에게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모든 상황과 레인의 태도가 말해 주고 있었다. 레인은 이대로 방해가 되는 카이렌을 제 인생에서 치워 버리려고 할 뿐이다. 카이렌은 레인이 스스로 이 연결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용납할 수도 없었다. 카이렌의 분노는 점점 더 치솟아 살의에까지 물들었다.

“후작이랑 계속 붙어먹겠다고.”

화가 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카이렌을 보며 레인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아무렇지 않은 척 벽에 문질렀다. 오랜 세월 제 것인 줄 알았던 레인이 완벽하게 제 손에서 도망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 카이렌의 심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빠듯하게 들어찼다. 몸에 각인된 공포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몇 대 정도야 더 맞아 줄 의향이 있었다. 카이렌이 레인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음을 확신할 수 있도록, 레인은 카이렌을 그대로 두었다.

똑바로 눈을 뜬 채 시선을 마주하고 웃었다. 카이렌은 분을 참지 못하고 레인의 머리채를 홱 잡아 그대로 벽에 밀어붙인 채 반대쪽 손을 뻗는다. 살이 눌리고 피부가 맞닿는다. 카이렌의 왼쪽 팔에는 과거에 사냥을 나갔다가 다친 흉터가 한 뼘 크기로 자리 잡고 있다. 한쪽 팔이 다쳐 붕대를 감고도 남은 한쪽 팔만으로도 레인을 제압했던 우악스러운 힘을 레인의 몸이 기억한다. 지난 과거는 켜켜이 쌓인 채 레인에게 그대로 새겨져 있다.

아.

착각했다.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고, 더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앞으로도 아무 공포도 느끼지 않을 줄 알았다. 지나친 오만이었다.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머리 위부터 내리부어진 공포가, 딛고 선 바닥이 흔들리는 불안이 순식간에 레인을 잠식했다. 레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뻣뻣하게 굳은 손을 움직이기조차 힘들다.

태연한 척 복수는 무슨.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도,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죽여 버릴까. 손끝이 맥없이 카이렌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카이렌의 몸이 레인의 위를 짓눌렀다. 차마 나오지 못한 비명이 목구멍에서 들끓던 때, 카이렌의 몸이 뒤로 휙 넘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카이렌이 서 있던 자리 뒤로 누군가의 부츠가 보였지만, 확인할 새도 없이 레인은 몸을 숙였다.

“우욱…….”

뒷골목의 바닥은 평소라면 걸어가기도 싫을 정도로 더러웠지만, 그런 걸 가늠할 새도 없이 바닥을 짚고 레인은 먹었던 걸 게워 냈다. 이대로 모든 걸 쏟아 내고 싶었다. 카이렌을 이길 수 없는 제 약한 면모를 모조리. 모두 토한 레인은 손을 들어 카이렌과 닿았던 살을 세게 문질렀다. 모조리 벗겨 내도 죽었다 깨어난다면 말끔하게 사라질 텐데 이대로 닿았던 곳을 모조리 뜯어내도 괜찮겠지. 손톱을 세워 살갗을 긁어내려던 그때, 누군가가 레인을 붙잡았다.

“레인.”

낮고 딱딱한, 유르딘의 목소리였다. 레인은 희게 질린 얼굴을 들어 유르딘의 얼굴을 보았다. 유르딘의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이 레인을 향했던 건 그가 레인을 등지고 가 버렸던 과거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레인은 유르딘을 보았다가, 그의 뒤에 쓰러져 있는 카이렌을 차례로 번갈아 보았다. 유르딘의 저택에 있다가 여기까지 빠져나온 카이렌을 보며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하기가 무서웠다.

유르딘은 굳은 얼굴로 레인에게 손을 뻗어 일으켰다. 레인은 유르딘이 뻗은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유르딘,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

“카이렌을 여기로 데려온 건, 그게, 그러니까…….”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레인을 보던 유르딘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생각 안 해.”

“하지만 화가 나셨잖아요? 제가… 여기로 데리고 나와서 화가 나신 것 아니에요?”

“설마. 그런 것 때문에 화가 났을 리가 없잖나. 내가 화난 건 저놈이 네게 들러붙어 있었기 때문이야.”

붙어 있었기 때문에. 레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간 들어온 수많은 모욕이 떠올라 레인을 휘감기 전에, 유르딘이 레인을 붙잡았다.

“이상한 쪽으로 생각을 몰아가지 마. 널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비난이 아니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단 말인가.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말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충동적으로 카이렌을 여기로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 비난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방금 그건 비난해야 마땅한 모습이 아니던가.

“뭘 두려워하는 거지.”

“그냥, 제가 천박하고 더러운 꼴을 보여서…….”

평소엔 매끄럽게 잘만 굴러가던 혀가 뻣뻣하게 굳은 것 같다.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제 감정에 취해 허우적거리던 레인은 마침내 제 감정의 실체,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진심을 끄집어냈다.

“제가 싫어져서……. 이제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쩌나, 싶어서…….”

레인은 유르딘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언제나 유르딘이 레인에게 실망할까 봐 두려웠다. 지금까지 유르딘은 대체로 레인의 좋은 모습만 보아 왔다. 과거에 누명을 쓴 채 흐트러진 모습을 보기야 했지만, 그건 약에 취했다고 변명할 수 있다. 하지만 방금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유르딘이 레인을 붙잡아 고개를 제게로 돌렸다. 찌푸린 얼굴에서 희미한 분노가 읽혔다. 터질 듯이 끓어오르던 분노가 마침내 터졌다. 유르딘은 레인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였다.

순식간에 레인의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유르딘은 레인에게 입을 맞췄다. 레인이 놀라 눈을 부릅떴지만 차마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르딘이 저를 적극적으로 원하는 게 좋았다. 고작 입술이 닿은 것만으로도 머리에 열이 올라 낮게 신음을 흘리는 입술이 벌어졌다. 유르딘이 벌어진 입술 틈새를 파고들더니 레인의 입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입 안 점막을 문지르자 절로 신음이 샜다.

한동안 신음을 흘리는 것 외에 움직일 생각을 못 하던 레인이 유르딘을 붙잡았다. 잠깐 유르딘의 몸이 멈칫했지만, 레인이 유르딘의 목을 끌어안자 이내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몸이 뒤로 밀려 레인은 벽과 유르딘 사이에 갇히는 꼴이 됐다. 발 디딜 곳 찾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던 레인에게 안락한 구속이 주는 안도감은 대단했다. 레인은 적극적으로 유르딘에게 호응했다. 혀가 얽히고 타액이 섞여 입 맞추고 여린 살을 빨아올리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천천히 입술을 뗀 유르딘의 숨이 레인을 간질였다.

“피가 났어.”

“아, 그게…….”

조금 비릿한 맛이 나는 것 같더라니, 아까 한 대 얻어맞았을 때 입술이 터진 모양이었다. 레인이 손을 들어 입가를 치료했다. 어색하게 손을 내리니 유르딘이 다 나은 살갗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가 화가 난 건 네가 다칠 수 있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했기 때문이야. 나는 네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아.”

“……어디서부터 본 거예요?”

“놈이 네게 다가가던 순간부터.”

최악의 순간은 아니다. 레인이 카이렌에게 한 말들은 모두 거짓말이었지만, 그래도 유르딘이 그런 말들을 듣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한 천박한 말을 유르딘이 들었다면 분명 돌이킬 수 없었을 거라고 레인은 저도 모르게 단정 지었다. 말없이 바로 선 레인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싼 유르딘이 레인의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운 키스였다.

“레인, 네게 화가 난 건 사실이지만…….”

“…….”

“화가 날 수도 있어. 살아가면서 화 한 번 안 내고 살 수는 없겠지. 나뿐만 아니라 너도 내게 화가 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저는 화 안 내요.”

유르딘은 레인의 삶의 이유였고 구원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화를 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유르딘은 고개를 저으며 레인을 부정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물론 화를 안 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약 정말로 화가 났다고 해도 뭔가 끝난 것처럼 굴지 말라는 이야기다. 고작 한 번 화를 냈다고 나는 널 내치지도 않고, 널 포기하지도 않아. 넌 내게 화가 나면 그대로 내게서 떠나갈 생각인가?”

“……설마요. 하지만…….”

“잊었나, 레인? 내가 예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널 놓는 걸 걱정하느니 차라리 네 주변을 걱정하는 게 나을걸.”

레인은 입을 다물었다. 유르딘이 벌였던 일. 제 손으로 쌓아 올린 것들을 모조리 부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참극. 유르딘에게는 레인이 그 모든 참극보다 중요했다. 제 잔혹성을 말하던 남자는 말과는 정반대의 온순한 태도로 레인의 앞에 서 있었다. 그제야 레인은 유르딘을 똑바로 보았다.

“우리는 시간을 되돌렸어. 기적이었지.”

레인이 사랑했던 녹음을 닮은 푸르른 눈은 이전의 광기를 꼭꼭 숨긴 채 저녁놀에 물들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렸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원래대로라면 레인도 유르딘도 이미 죽은 자이니. 유르딘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죽은 목숨마저 되살리고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을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아. 악마는 봉인됐고, 마법진은 잠재웠으니, 이제 두 번 다시 기적은 오지 않아.”

“……무섭네요.”

무섭다. 이전에는 제 삶을 두 번이나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막상 한 번 겪고 나니 이전에는 꿈처럼 여겨지던 이야기가 아쉬운 기회처럼 느껴졌다. 텅 빈 손으로 바람이 허망하게 스쳐 지나갔다. 유르딘이 손에 힘을 더하자, 순식간에 뜨거운 살이 맞닿으며 현실감이 돌아왔다. 두 번 다시 기적이 오지 않을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더라도 표류하는 레인을 붙잡고 지탱해 줄 이가 있었다.

“무서울 것 없어. 내가 지켜 줄 테니, 너는 나를 지켜 줘.”

“제가 당신을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레인이 되물었다. 유르딘은 강하고 레인은 나약했다. 언제나 레인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어설프고 무르다.

“너는 강해.”

유르딘은 레인의 생각을 부정했다. 유르딘은 증오와 분노 속에서 모든 걸 부술 줄만 알았지만 레인은 달랐다. 멸시받으면서 레인 또한 세상을 미워했다. 가끔 보이던 거부와 불신이 레인의 상처를 짐작케 했다. 하지만 레인이 분노만을 품은 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레인은 동정할 줄 알았고 공감할 줄 알았다. 한계까지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그저 분노를 제 삶의 원동력으로 쓸 법도 한데, 레인을 지탱해 온 건 누군가에 대한 애정이었다. 쉼 없이 배신당하면서도 레인은 누군가를 믿었다. 비록 과거에 레인의 신뢰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지만, 그럼에도 레인은 아직 타인과 이 세상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제 삶과 살아가는 터전을 여전히 사랑했다.

누군가는 그게 레인의 나약함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적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약하고 무른 태도다. 유르딘 안의 레인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끌어모아 만든 생명체 같았다. 물론 레인이 그렇게 이상적이며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정말로 바르고 강인한 인간이었다면 제 안의 복수심조차 꺼트리고 포용할 수 있었겠지. 레인은 그럴 수 없었다. 여전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 많았고, 갚아 주고 싶은 마음도 넘쳤다.

하지만 유르딘은 그러한 레인이기에 더더욱 사랑했다. 정말로 레인이 순백의 무결한 존재였더라면, 피로 물든 유르딘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네가 나를 구했어, 레인.”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아니.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망가졌을 거야.”

화가 난다고는 했지만, 사실 유르딘은 레인이 갈팡질팡 헤매는 모습조차 사랑했다. 고뇌하는 인간인 레인이 좋았다. 세상을 증오할 만한 이유를 수도 없이 품고 있음에도 쉼 없이 고민해 제게 납득 가는 판단을 내리려 하는 레인의 모습이 유르딘을 구원했다. 레인의 소원과 복수,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제자리에 서서 버티며 모든 것을 헤쳐 나가려던 용기, 모든 것을 아꼈다. 수없이 짓밟혀 꺼져 가던 마음에 숨을 불어넣고 모든 것을 이루어 주고 싶었다.

레인의 소망을 이루어 주고 싶었기에 유르딘 또한 이전처럼 어둠 속에 숨거나 멀리 떠나는 대신, 제자리에서 노력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지쳐서 차라리 떠나고 싶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레인이 버텨 준 게 다행이었다. 레인 덕분에 유르딘 또한 정처 없이 떠돌며 피를 갈구하던 살인마는 제가 서 있을 곳을 찾아 안착했다.

“나는 여전히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어. 너는 자책하지만, 애초에 누군가를 짓밟고 신뢰를 배반하는 쪽이 나쁘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지금도 때때로 모두 죽여 버리고 싶어. 나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유르딘.”

다급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레인을 향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닿을 듯이 가까이 있던 이마가 슬며시 맞닿으며 살갗이 비벼졌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어. 하지만 네가 있기에 나는 살인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거다. 너는 이미 내게 넘치도록 과분한 것들을 주고 있어.”

“제가 그렇게 유르딘에게 많은 걸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건 아마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겠죠. 하지만 저는 항상 당신의 말을 믿었어요. 그러니까 그 말도 믿을게요.”

“언젠가는 완전히 믿게 될 거야.”

지금 당장 레인이 확실하게 변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레인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지만, 그는 여전히 밤마다 악몽을 꿨다. 더는 저를 괴롭힐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꿈속에서 고통에 시달렸다. 유르딘이 손을 가만히 잡아 주고 안아 주면 언젠가는 진정하지만 고통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잠에서 깨어나 유르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품속에서 빠져나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이젠 괜찮아.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아.’

여전히 괜찮지 못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한참을 서 있던 레인은 싸늘하게 식은 몸으로 다시 침대에 돌아왔다. 유르딘은 레인이 잠든 후에야 여전히 고통을 홀로 짊어지려 하는 레인을 끌어안았다.

단 한 번만. 단 한 번만 레인을 제대로 돌아봤더라면. 유르딘은 죽어 버린 레인의 시신 앞에서 후회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돌아보질 않아서 레인은 홀로 감내하는 아이로, 청년으로 자라났다. 이미 그늘을 품은 레인의 모습마저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 두 사람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이 순간과 앞으로 이어질 미래는 찬란한 기적이었다.

“관계는 조금 무너져도 몇 번이나 다시 쌓을 수 있어.”

“…….”

“조금쯤 잘못해도 괜찮아. 바로 세울 기회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기적이 되풀이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살아가다 보면 얼마든지 화를 낼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다. 벌어진 일을 수습하기 위해 더는 기적은 필요하지 않았다. 함께 노력해 나가면 될 테니까. 레인도 충분히 그 사실은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단지 오래 몸에 밴 악몽 같은 기억에서 벗어날 시간이 필요할 뿐, 언젠가는 나을 수 있을 거라고 유르딘은 믿었다.

유르딘은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났다. 더는 레인은 유르딘의 시선을 피하려 들지 않았다. 조금씩 쌓여 가는 신뢰를 확인하며 유르딘은 장난스레 말했다.

“아니면 이대로 끝낼 만큼만 나를 좋아하나?”

레인이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유르딘은 이런 와중에도 만족스레 웃었다.

레인은 유르딘과 함께 렘샤이트 후작저로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물론 얼굴을 가린 카이렌도 함께였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카이렌은 저택에 돌아갈 때까지도 깨어나지 않았다.

저택에 도착해 인상을 쓰고 투덜거리는 베른에게 고개 숙여 몇 번이나 사과했다. 옆에서 유르딘은 딱히 사과할 필요 없다며 웃었지만, 레인은 속으로 베른을 위해 따로 선물이라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유르딘이 과거에 막 나가며 생긴 최대 피해자 중 하나가 베른이다. 유르딘이 베른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기는 한데, 너무 레인을 위주로 사고하다 보니 순위가 가차 없이 밀려나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늦었기에 이대로 저택에 돌아가는 대신 유르딘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유르딘의 집에서 머무는 건 익숙한 일이다. 주방장은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레인에게 맞춘 성대한 저녁을 준비했다. 남김없이 식사를 비운 레인은 따끈한 물에 몸을 녹이고 방으로 나왔다.

유르딘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르딘도 씻고 나온 모양이지만, 목욕 가운 하나만 무방비하게 걸치고 나온 레인과 달리 단정하게 정복을 차려입고 있다.

“어디 가세요?”

“전하께 보고하러 가야겠지.”

“밤이 다 되었는데요.”

“원래 늦게 주무시는 분이라……. 새벽에는 올 거다.”

“그런가요.”

수도에서 난리가 났던 후로 레인은 쭉 유르딘과 함께 잠들고는 했었다. 레인이 아팠던지라 손잡고 얌전히 잤지만. 어쨌든 함께 잠드는 게 암묵적인 일과처럼 되어 있던 터였다. 조금 시큰둥하게 대답한 레인은 침대 위로 가서 풀썩 앉았다. 레인답지 않은 거친 움직임에 가운이 벌어져 맨살이 드러났다. 유르딘은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비스듬히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많이 먹더구나.”

“아, 배가 고파서요.”

“예전에는 많이 못 먹었는데……. 다행이야.”

“그야 어릴 때 먹은 독이 제 몸을 상하게 했으니까요. 조금만 많이 먹거나 부담되는 걸 먹으면 소화를 못 시켰죠.”

레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말했다. 다시 레인을 돌아본 유르딘은 대번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유르딘은 언제 시선을 돌렸냐는 듯이 레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다가왔다.

“그럼 지금은 괜찮나? 속이 안 좋으면 소화에 좋은 약이라도 먹어 두는 게…….”

“괜찮아요. 저 전보다는 건강해 보이지 않나요?”

확실히. 불편해 보이기는커녕, 목욕하고 나온 후라 그런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은 어느 모로 보나 혈색이 좋다. 조금 안심하는 유르딘을 가만히 응시하던 레인은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여유롭게 웃었다.

“저, 마법진의 제어를 놓기 전에 최대한 제가 쓸 만한 마법을 기억해 뒀거든요. 제 가장 큰 단점이 약한 몸인데 그걸 신경 안 썼을까요?”

마법진은 무궁무진한 지식을 제공했고, 다행히 레인은 머리가 아주 좋았다. 앞으로 써 먹을 수 있을 마법들, 공격이나 탐지 마법, 치유 마법들에 대해 최대한 많이 외웠다. 한계는 있어서 앞으로 옛 시대의 사료를 보며 마법들을 꾸준히 공부해야겠지만, 당장 필요한 마법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가. 어째 바깥에서 많이 돌아다닌 것치고는 피곤해 보이지 않더라니.”

“네. 얼마 전에 앓아누웠던 거야 지나치게 많은 마력을 썼기 때문이고……. 지금은 괜찮아요. 오히려 조금 더 걸어도 될 정도인데요?”

허공에서 까딱이던 레인의 맨발이 유르딘의 다리에 닿았다. 유르딘이 드러난 종아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매끈하게 쭉 뻗은 다리, 그 끄트머리의 발끝이 유르딘의 다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단정하게 깎인 발톱과 발가락 끄트머리가 유르딘의 바짓단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직 채 닦이지 않은 물기가 유르딘에게 스몄다.

“산책으로 지치던 예전의 제가 아니에요. 하루 정도는 밤을 새워도 문제없을걸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발을 뗀 레인을 유르딘은 웃지도 않고 어느새 무표정하게 변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다행이구나.”

“그렇죠.”

기대된다. 레인은 도발하듯이 웃었다. 동시에 지나친 긴장으로 절로 침이 넘어갔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레인은 가만히 앉은 채로 고개만 꺾어 제게 그림자를 드리운 유르딘을 보았다. 그 얼굴선은 유르딘의 그림자에 뒤덮여 무척이나 매혹적으로 보였다. 유르딘은 목마른 사람처럼 허겁지겁 레인에게 입을 맞췄다. 마치 달려들듯이, 통째로 레인을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레인의 자세가 삽시간에 무너져 천천히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이내 유르딘의 무게가 레인의 위로 실렸다.

레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효용이 없던 목욕 가운이 삽시간에 벗겨져 시트와 뒤섞였다.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집요하게 마주하던 시선 중 유르딘의 것이 아래로 내려갔다. 완전히 드러난 나신은 최근 조금 살을 찌웠다고 해도 여전히 말라 있었지만 유르딘에게는 언제나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 속에서 유르딘이 벗어 던진 장갑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간신히 코트만 벗어 던진 유르딘이 조금도 지체하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장갑을 벗어 던진 맨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지나치게 매끄럽고 부드러워 유르딘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가 충동에 휩쓸린 채 입을 맞췄다. 가볍게 입술을 맞추는가 싶더니 이내 혀를 밀어 넣었다. 작은 소리가 유르딘의 입 안으로 새어 들어가 뭉개졌다. 입술이 맞닿으면 절로 벌어지는 입술과 호응하는 혀가 사랑스럽다. 입 안 점막을 건드릴 때마다 작게 목에서 끓는 열락에 젖은 신음이 자극적이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레인의 몸을 온통 뒤덮을 듯이 쓰다듬었다. 평소보다 뜨거운 체온이 유르딘의 흥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유르딘도 레인도 그야말로 머리끝까지 흥분했다. 입술이 떨어지자 조금 숨이 찼던 레인이 막힌 숨을 토해 냈다. 발그레해진 뺨 위에 유르딘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어서 장난스러운 웃음이 뺨에 닿는다.

“정말로 체력이 나아진 건가?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데.”

“……유르딘이 그렇게 만든 거잖아요.”

첫 키스도 아닌데 흥분해서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고는 말할 수 없어서 레인은 괜히 유르딘의 탓을 했다.

사실 유르딘은 남자와의 경험이 없었다. 여자와의 경험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전쟁터에 오래 있다 보면 성욕이 들끓던 경험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창부를 찾아가느니 혼자 해결하는 쪽을 선호했다. 매번 그리 오래 만나지 못하고 헤어졌던 연인 몇 명과의 경험이 전부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크게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검 한 자루로 후작 위를 포함한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를 손에 넣은 남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행하는 일에 모자랐던 적이 없다. 색사는 종류가 다르지만 몸으로 행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다고 자만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강제적인 관계로 상처 입은 레인이니 그만큼 아껴 주고 사랑해 주어 나쁜 기억을 저와의 기억으로 바꿔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잘해야 했다. 자연스레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유르딘은 레인의 목을 길게 핥아 올렸다. 전에도 애무했었고, 레인이 좋아했던 부분이었다. 새하얀 목에서는 방금 씻고 나온 탓에 목욕제의 달달한 향과 레인의 청량한 체향이 섞여서 났다. 한 줌의 향기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다 제 안으로 밀어 넣고 싶었다. 그 욕망을 대신해서 이로 물었다. 문 채로 자극하고 살을 빨아올리자 레인의 몸이 품 안에서 가볍게 헐떡였다. 조금씩 쾌감에 젖어 가는 정신을 붙든 레인이 다급하게 유르딘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잠, 잠깐……. 유르딘, 자국이 남을 텐데.”

그러나 유르딘은 입술을 떼기는커녕 오히려 세게 깨물어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흐읏!”

“괜찮아. 오히려 남았으면 좋겠어. 어차피 겨울이니까.”

“하지만…….”

이제 한겨울이라고 해도 실내에서까지 목을 가리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유르딘은 순흔으로 여기저기 붉어진 목덜미에 만족스레 입을 맞췄다.

“자국이 사라질 때까지 침대에서 나가지 않는 것도 좋겠지.”

“……읏.”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스란히 내보이는 독점욕이 가득했다. 이미 흥분이 일었던 몸에 머리부터 타고 내려오는 저릿저릿한 쾌감이 내달렸다.

자국을 몇 번이나 남기는 집요한 애무는 비단 목뿐만이 아니었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유르딘은 레인이 마치 설탕 과자라도 되는 양 구석구석 더듬고 핥고 빨았다. 유르딘이 스치는 곳마다 아찔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유르딘은 뼈와 가죽, 그리고 약간의 살만으로 이루어진 레인의 몸을 만지다가 나지막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살 좀 쪄야겠어.”

“보기에 별로예요?”

“왜 그렇게 되는 거지. 그런 뜻이 아니야.”

벗겨 놓고 보면 안쓰럽게 마른 몸이지만, 옷을 입으면 맵시가 살아난다. 어느 모로 보나 훤칠하단 말에 딱 들어맞는 키가 크고 날씬한 체형은 우아했다. 금욕적인 차림인데도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을 때 은근히 드러나는 선은 그 안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가릴 것 없이 드러낸 섬세한 흰 목과 쭉 뻗은 손가락을 볼 때마다 유르딘이 얼마나 제 인내를 시험해야 했는지. 욕망과 안쓰러움이 별개일 뿐이다.

때마침 허리께를 더듬던 손끝이 느릿하게 위로 올라갔다. 만질 살이 거의 없어 그저 메마른 가슴을 주무르다가 툭 튀어나온 유두로 손을 가져갔다. 아직 제대로 만진 적이 없는데도 끝부분이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유르딘은 그대로 레인의 유두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안 그래도 살짝 솟아 있던 유두가 더더욱 도드라진다. 문지르며 맨살에 가볍게 눌렀던 유르딘은 레인의 반응을 살피다가 가볍게 꼬집어 올렸다.

“아읏…….”

“전혀 그렇지 않아. 그냥 안타까워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부실해 보이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레인은 무심코 유르딘의 팔을 붙잡았다. 재킷과 셔츠 너머로 단단한 팔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유르딘은 레인이 그보다 크고 단단한 몸을 갖게 되어도 같은 걱정을 할 것만 같았다. 무심코 떠올렸던 가정이 그럴싸해서 가볍게 웃음을 흘리니 유르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레인이 웃으면 뭐든 좋다는 양 마주 웃으며 장난스레 이마를 비볐다. 서로 몸을 장난스레 건드리던 것도 잠시였다. 손길은 이내 농염하게 변했다.

다시 한번 레인의 몸 여기저기에 입 맞추던 유르딘이 시트를 딛고 있던 레인의 발목을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레인이 몸을 움츠렸다. 이번에는 막 씻고 나온 터라 깨끗하긴 하지만……. 핥듯이 응시하는 시선에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런 심정을 모르는, 어쩌면 알 생각도 없는 유르딘이 발목을 쥔 채로 발목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축축한 혀가 발등을 쓸더니 이내 발목이 조금 더 들어 올려졌다. 다리가 벌어지며 성기가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부끄러워할 새도 없었다. 유르딘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발끝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유르딘이 혀가 아직도 달달한 목욕제의 향이 나는 깨끗한 발가락 위를 가볍게 굴렀다. 하나하나 전부 핥은 유르딘이 입을 떼고 발바닥에 입 맞췄다.

“하윽, 읏, 으응……!”

레인은 어쩔 줄 모르며 몸을 뒤틀었다. 설마하니 발을 핥아지는 행위로 느낄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레인은 제 발이 유르딘에게 더 닿을까 봐 발만은 경직된 채로 밀어내지도 못하고 시트만 꽉 쥐었다. 입술을 떼고 나서도 여전히 유르딘의 손 안에 잡힌 발목을 보며 레인은 신음을 물어 삼켰다.

“저번에도 그렇고, 발… 을, 왜 그렇게……. 그 부분이 좋기라도 해요?”

“내가?”

유르딘은 딱히 자각하지 못했는지 의아한 얼굴이었다. 아까보다 흥분한 게 눈에 고스란히 보이는데도 유르딘을 비난하듯 바라보는 시선에 유르딘은 오히려 짧게 웃었다.

“딱히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나쁘지는 않군.”

유르딘이 발목을 앞으로 쥔 채 발등 위에 입을 맞췄다.

“발등 위에 입을 맞추는 건 복종의 의미라고들 하지. 원하는 건 뭐든 말만 해라, 레인. 들어줄 테니.”

“괘, 괜찮은, 데…….”

“이제 뭘 어떻게 해 줄까, 레인.”

레인의 얼굴이 더 붉어질 수도 없을 정도로 새빨개졌다. 유르딘은 그런 레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몸을 위로 쭉 뻗어 서랍장을 열어젖혔다. 서랍장 안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병이 나왔다. 달달한 향이 나는 기름의 정체를 모를 수가 없었다. 유르딘을 빤히 보던 레인은 유르딘이 제 아래에 자리 잡자 여유를 되찾고 가볍게 발로 밀었다.

“하아……. 생각해서 안 할 것처럼 굴더니, 할 생각 만만이었네요.”

“어쩔 수 없잖나. 한 번도 네게 욕망하지 않은 적이 없어.”

가볍게 건넨 말에도 유르딘의 태도는 묵직하고 진중해서 조금 침착해 보려고 해도 거기에 휩쓸려 자꾸만 기운다. 뚜껑을 연 유르딘이 병을 기울였다. 지나치게 기울인지라 상당량이 쏟아져 레인의 배나 허벅지까지 끈적하게 뒤덮었다. 레인은 눈을 깜박이더니 배 위로 쏟아진 기름을 손으로 쓸었다. 기름으로 온통 더럽혀진 레인의 손을 붙잡아 유르딘은 제 소매에 닦았다. 재봉사가 심혈을 기울여서 재단했을 재킷 끄트머리가 기름을 머금은 채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레인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행복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도발하는 듯도 한 끄트머리가 가볍게 물기를 머금고 있다. 어떤 의미든 지금의 유르딘에게는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기름이 흘러내린 몸 위를 손으로 쓸자 레인이 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충분히 젖은 유르딘의 손가락 끝이 곧 제 분신을 받아들일 레인의 구멍 입구 주변을 문질렀다. 잠시 생각하던 유르딘이 그대로 몸을 숙였다. 레인의 몸이 경악으로 튀어 올랐다.

“아힉, 흐, 아아……! 무, 무슨, 흣, 으응……!”

구멍 입구를 유르딘이 핥았다. 대체 이게 무슨. 혼란으로 뚝뚝 끊어진 생각과 말이 어지러이 휘몰아치고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런 일을 계획했으니 예상해서 미리 깨끗이 씻어 두었다고는 해도, 절대로 입을 댈 만한 곳이 아니었다. 최소한 레인의 상식 속에서는 그랬다. 주변을 핥는 것만으로도 경악스러운데 유르딘의 혀가 안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말캉한 혀가 내벽을 헤집는 느낌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쾌감과 충격이 동시에 레인을 때렸다.

“하, 아앗, 흐으으, 아, 안, 안 돼, 흣……. 싫, 싫어. 으, 싫……!”

발가락 끝이 절로 곱아들어 갔다. 저도 모르게 허리가 들리고 온몸이 벌벌 떨렸다. 끔찍하게 좋았다. 레인의 목소리 끝에 물기가 어리자 유르딘이 몸을 들었다. 싫어. 레인이 정신없이 도리질 쳤다.

“더럽지 않아. 괜찮아.”

그래도 싫다. 하여간 싫었다.

레인이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걸 할 생각은 없었기에, 유르딘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차츰 익숙해지겠지.”

뭘 익숙해져? 레인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혀가 빠져나와 조금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지던 구멍 안쪽으로 유르딘의 손가락이 한 번에 밀고 들어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달라붙는 내벽은 굉장히 좁았지만, 향유를 거의 들이붓다시피 한 덕분에 손가락 하나 정도를 넣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간 손끝이 탐색하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흐읏, 아……!”

어느 지점에서 레인의 신음이 뾰족하게 높아졌다. 유르딘은 레인의 얼굴을 살피며 손가락을 가볍게 뺐다가 그대로 깊숙한 안쪽까지 찔러 넣었다. 조금 빠르고 과격한 움직임이었으나 신중할 때와 과감해야 할 때를 유르딘은 정확하게 구별했다. 고작 한 부분을 찔렀을 뿐인데 전신이 뒤집히며 들쑤셔지는 느낌이다. 온몸의 감각이 모조리 아래쪽으로만 쏠렸다. 깊숙이 들어간 손가락이 내벽 안쪽을 손으로 긁었다. 한 번 요령을 알아낸 유르딘의 움직임이 거침없었다. 한 개가 들락거리던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애무도 좋았지만, 역시 삽입이 좋았다. 배 속을 가득 채우는 폭력적인 이물감을 기억했다. 오랜 세월 동안 남자의 성기를 제 몸으로 받으며 느낄 수 있도록 조교된 몸은 놀랍도록 예민하게 반응했다. 조교. 무심코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목소리가 부자연스레 튀었다.

“윽…….”

“아픈가?”

“아뇨, 그런 건, 읏, 아닌데…….”

완전히 떨쳐지지 않은 해묵은 악몽이 채 다시 찾아들려 했다. 부정은 했으나 정확하게 변명할 말도 없었다. 침대 위에서 다른 남자와의 경험과 그에 대한 공포 따위를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너무도 익숙한 악몽이라지만, 떠올린 것조차 미안하고 죄스러운데.

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 레인 자신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최소한 끔찍하다거나 견딜 수 없는 반응은 아니다. 유르딘이 계속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레인이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레인?”

“유르딘, 그냥 빨리……. 읏, 빨리, 넣어 줘요.”

차라리 정신없이 몰두하면 잊힐 것 같다. 일견 타당한 사고방식의 흐름이었으나 레인의 몸을 볼 때는 지나치게 성급한 재촉이었다. 이제 고작 손가락 두 개를 받아들였을 뿐. 처음 손가락이 들어갈 때도 유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조금 힘들어하지 않았나. 유르딘은 제 것을 힐끔 눈짓했다.

“무리다. 분명 아플 텐데.”

“괜찮아요……. 하아, 괜찮으니까, 유르딘. 제발…….”

레인은 유르딘을 잡아당겼다. 조금 발그레하게 붉어진 채 촉촉하게 젖은 눈가, 달뜬 숨만큼이나 녹아내릴 듯 야한 목소리. 이런 상황에서 연인의 간절한 애원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한술 더 떠서 레인의 손이 유르딘의 옷 위를 더듬었다. 천을 사이에 두고도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열기와 무게감이 대단했다. 옷 위로 성기를 쥔 채 가볍게 문질렀다. 지나친 자극이었다.

도발에 넘어간 유르딘은 움직임을 방해하는 재킷만 간신히 벗어 던진 채 바지만 살짝 내려 성기를 꺼냈다. 천 너머로도 충분히 느끼기는 했지만. 만지지도 않았는데 유르딘의 성기는 이미 빳빳하게 발기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긴, 지금까지 함께 손만 잡고 자던 날이 얼마나 길었던가. 레인이라고 성욕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을 꽉 끌어안는 크고 단단한 몸과 철 냄새 섞인 서늘한 체향을 맡을 때면 저도 모르게 몸이 달아오르고는 했었다. 아파서 기운이 없던 레인도 그 정도이니, 신체 건강했던 유르딘의 인내야 알 만했다.

성기 끄트머리가 구멍 입구에 맞물렸다. 곧장 삽입하는 대신 입구에 맞댄 채 뭉근히 돌렸다. 망설임의 발현이었지만, 그대로 멈추기엔 지나치게 묵직한 감촉이었다. 레인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오른 게 고스란히 느껴져서 레인은 이르게 신음했다. 기대하는 듯도, 조급해하는 듯도, 두려워하는 듯도 한 신음. 그 음란한 목소리.

애무도 조금 부족했고 손가락으로 충분히 풀어 주지도 못했으니 느리게 할 생각이었는데 언제까지 자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유르딘은 생각했다. 손가락에 달라붙던 내벽의 감촉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흥분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손가락을 넣을 때도 황홀하던 내벽이 제 성기에 달라붙어 조이면 어떤 감각일지, 뻔뻔하게도 수없이 많이 상상했다. 상상이 현실로 눈앞에 놓여 있다. 그 이상 자제할 수는 없었다. 유르딘은 아주 천천히, 느릿하게 진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레인이 목구멍에서 끓는 신음을 내며 시트를 긁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 뼈가 단단히 불거지는 게 보였다. 악문 잇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흐른다.

“아흑……. 으윽, 으…….”

이 정도 아픔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제대로 풀어 주고 정사를 한 적이 더 드물다. 그래서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타인과 몸을 섞지 않은 지가 벌써 몇 달째였다. 폭력적인 정사에 길들었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레인, 아직 무리인 것 같은데.”

“저는, 흐, 하으윽……. 괜, 찮아요.”

괜찮다고 주장한들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레인은 숨을 골랐다. 이대로 아프다고 긴장만 해 봤자 악순환이다. 느긋하게 풀어 주고 다시 시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괜히 마음이 다급했다. 아까부터 조금씩 몸이 떨리고 있다. 유르딘이 레인의 이상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레인이 두려워하고 못 견디겠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둘 게 뻔했다.

울고 싶어졌다. 이대로 과거의 공포에 짓눌려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가 유르딘이라 한들 뿌리 깊은 공포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 어쩌면 오늘 카이렌을 봤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몰랐다. 그는 존재 자체가 공포였다. 레인에게 영원히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매일 밤 꾸는 악몽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악몽은 이미 지나갔는데도 여전히 기억만이 매달려 있다. 거기에 매달려 그만둘 생각은 없다. 제 아래를 노려보던 레인은 고개를 들어 유르딘을 보았다.

“흐우, 하아……. 뭘 어떻게, 해 주느냐고… 했었죠.”

“……그랬지.”

더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유르딘 대신, 레인이 움직였다. 조금 전부터 굳어 있던 허리를 유르딘에게 가까이 붙이며 아래로 내리자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성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올려다본 얼굴이 여유를 잃고 있었다. 유르딘이 흥분하는 만큼 그에 물들어 레인의 공포심이 밀려 나갔다. 레인이 간신히 상체를 세워 유르딘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대로 박아서, 흔들고, 부디 당신이 바라시는 만큼… 해 주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르딘은 레인을 밀어내듯 떼어 내고 침대 위로 눌렀다. 유르딘은 목이 탄지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가 뒤늦게 목을 옥죄던 크라바트를 알아채고 홱 잡아당겨 풀었다. 새카맣게 그림자가 진 무표정한 얼굴이 레인에게로 기울어졌다.

“너무, 자극하지 마라.”

“일부러 한 거예요.”

“자제하지 못할 거야.”

자제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찢어지면 찢어지는 대로, 치유 마법도 있고……. 레인은 속으로 유르딘이 들으면 화낼 만한 생각을 하면서 더욱더 허리를 움직였다. 빠듯한 감각에 레인이 작게 신음했다.

“레인, 네가…….”

낮게 쉰 목소리는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

사랑한다. 사랑하고 있다.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 사랑스러운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목소리도, 말도, 생각도 모든 게 돌아 버릴 정도로 좋았다. 사랑하는 레인이, 증오하는 레인이, 두려워하는 레인이, 두려워하면서도 유르딘을 받아들이려 하는 레인이 너무나도 좋았다.

입 맞추고 살갗을 핥고 빨아올려 아프다고 몸부림칠 때까지 자국을 남기고 싶다. 레인의 안쪽 깊숙한 곳에 제 성기의 모양을 몸으로 기억할 때까지 박아 넣고 싶다. 항상 웃게 하고 싶다고는 말했지만, 사실 우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동시에 보고 싶지 않았다. 달달한 눈물을 핥으며 애원하는 레인을 달래 주고도 싶었고 무시한 채 거칠게 몰아붙이고도 싶었다.

과거에는 레인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레인의 무덤에 제 죽음을 바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와 함께 묻혀 있고 싶었다. 유르딘의 사랑은 레인의 죽음과 비극으로서 완성된 사랑이었기에 차라리 함께 죽고 싶었다. 차라리 그날 시체에 불을 질러 하나가 되었더라면 좋았을까, 몇 번이나 고민했다. 차가운 살갗과 뜨거운 살갗 사이에 놓인 것들이 너무도 까마득하게 많아서 차라리 함께 녹아내리고 싶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저열한 욕망. 고스란히 드러내기에는 끔찍할 정도의 애정. 그러나 실존하는 뜨거운 피부와 달콤한 숨과 반짝이는 눈동자. 살아 있는 레인은 죽어 있는 레인보다 몇 배는 더 사랑스럽고 안타깝다. 여전히 하나가 되고 싶었다. 굳이 끔찍한 상상을 하지 않아도 레인을 안고 입 맞추면 체온이 옮아가는 게 하나가 된 것만 같아서 좋았다. 하나가 되고 싶다는 그 강렬한 욕망.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들어가던 성기가 단숨에 안쪽까지 처박혔다.

“읏……!”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다급하게 들어올 줄은 몰랐던지라 레인이 숨을 집어삼켰다. 유르딘이 길고 낮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잘게 떠는 레인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아픔을 위로하듯 유르딘이 쇄골께와 목덜미를 핥았다. 경직된 몸에 힘을 빼며 레인이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다정한 얼굴을 하고서는 아래는 흉포하기 짝이 없었다. 이대로 움직이는 걸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아랫배를 쓸어내렸다.

“꽉, 찬 것… 같아…….”

의식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음란하게만 느껴지는 제 말에 레인이 눈썹을 살짝 휘었다. 하지만 뒤늦게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고통에 찌푸려졌던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이어진 것, 같아서……. 읏, 그러니까……. 기분, 좋네요.”

말이 감정을 이끌어 갈 때도 있다. 강제로 길든 끔찍한 쾌감도, 수치심도 없었다. 이어졌다는 실감에 두려움이 사그라졌다. 지금은 레인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다는 실감. 고작 성기와 안쪽 점막이 맞닿았을 뿐인 접촉인데, 이 행위가 끝 모를 혐오도 애정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레인은 유르딘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유르딘이 레인의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꽉 붙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억압이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도망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유르딘은 레인이 흘리는 줄도 모르고 있던 눈물을 핥았다. 달 리가 없는 눈물이 달았다.

흥분했지만 유르딘은 서두르지 않았다. 포마드를 발라 잘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인내심을 되새기려 심호흡하고 머리칼을 위로 쓸었다. 하지만 온전히 인내만을 되새기는 태도라기에는 기세가 조금 흉흉했다.

“레인.”

흥분한 게 고스란히 드러나면서도 여기까지 참으며 애를 태우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순간, 이미 아주 깊게 들어와 있다고 생각한 유르딘의 성기가 안쪽으로 조금 더 깊숙하게 밀려 들어왔다.

“윽! 흐, 으읏……!”

움직임은 얕았지만, 크고 굵은 성기가 내벽 안쪽 깊숙한 곳을 찍어 누르며 자극했다. 격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안쪽을 찍어 누르는 감각은 충분히 강렬했다. 빠듯하게 벌어진 아래쪽이 아예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지나친 쾌감과 흥분은 통증마저 마비시킨다.

유르딘의 손이 레인의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과거에는 화상 흉터로 얼룩졌던 허벅지가 이제는 상처 없이 깨끗하다. 이번에는 지켜 냈다. 그 만족과 충족감. 그 흔적을 천천히 미끄러져 올라간 손은 레인의 오금을 쥔 채로 벌렸다. 레인의 다리를 벌린 채 유르딘의 몸이 느릿하게 뒤로 물러났다. 성기가 내벽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완전히 빠지지 않고 끄트머리에서 머물렀던 것이 확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추삽질은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이어졌다. 절로 신음이 터졌다.

“아, 아읏, 으……. 흐으, 윽.”

“후우, 흐, 레인…….”

레인의 신음 사이사이로 들리는 유르딘의 흥분한 숨소리 또한 노골적이었다. 고통과 쾌감이 뒤섞여 부어져서 레인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슬아슬한 감각의 추는 금세 한쪽으로 기울었다.

“앗, 하, 유, 유르, 아!”

쾌감만이 남아 사고를 모조리 뭉그러뜨린다. 채 이름을 완성하지도 못하고 가쁜 비명이 터졌다.

“흐, 흐아, 앗, 아응, 읏, 으……!”

유르딘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레인과 닿는 곳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레인의 새빨개진 눈가가 보여 부드럽게 입 맞춰 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하반신은 의사와 관계없이 정신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새 자유로워진 레인의 손이 시트를 마구 긁어 대다가 움켜쥐었다. 도무지 몸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이전의 레인에게 몸을 겹치는 행위란 제 모든 걸 쏟아붓는 게 아니었다. 이토록 온전히 저를 쏟아붓고 몰입하여 쾌감에 도달하는 게 생경했다. 지나치게 좋아서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하으, 아, 잠, 잠깐, 앗!”

쾌감에 푹 젖은 신음이 적나라한데, 유르딘은 이번만은 레인의 말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멈출 수도 없었다. 뜨겁고 좁은 내벽이 꽉 조이는 감각이 너무도 황홀하다. 허리를 움직여 안쪽 깊숙한 곳을 몇 번이나 찌르기를 반복했다. 레인의 허리가 들썩이는 게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건지 유르딘이 밀어내는 충격 때문인지 모를 정도다. 유르딘은 그만두는 대신에 레인에게로 몸을 숙여 시트를 움켜쥐던 팔을 제 목에 둘렀다. 레인은 헐떡이면서 유르딘의 목에 기꺼이 팔을 감았다. 허공에 떠 있던 레인의 다리가 유르딘의 몸에 감겼다. 레인은 온몸을 다 던지듯 필사적으로 유르딘을 끌어안았다.

유르딘은 제 행동을 짧게 후회했다. 제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레인의 무게감이 너무나도 황홀해서 자제하겠다는 생각이 모조리 휘발됐다.

“레인, 큿, 레인…….”

“앗, 하아……. 으응, 아……!”

허리 짓이 점점 더 격렬해졌다. 유르딘의 성기가 안으로 치밀 때마다 내벽이 놓기 싫다는 듯이 꽉 물고 조였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아으응, 흐, 으읏…….”

몰아치던 쾌감에 신음하던 레인이 몸을 떨었다. 쾌락이 임계점까지 차올라 마침내 사정했다. 사정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었다. 유르딘은 여전히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높은 지점까지 치솟았던 쾌감은 떨어질 줄 모르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 유르딘, 천, 천천히, 흐윽, 더는, 읏, 으…….”

“……쉬이, 괜찮아.”

부드럽게 어르며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더욱더 자극적이라 레인은 견디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아니, 으응, 읏…….”

당사자가 괜찮지 않다는데 대체 무슨. 하지만 말릴 여력이 없었다. 곧 따뜻한 것이 레인의 안에 퍼졌다. 그제야 레인은 유르딘의 목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을 뺐다. 여태껏 정장을 그대로 차려입고 있던 유르딘의 이마 위에서 땀이 한 방울 뚝 레인의 몸 위로 떨어졌다. 힘없이 축 늘어지는 몸 위로 유르딘이 성기를 빼지도 않은 채 잘게 입을 맞췄다.

“레인……. 사랑한다.”

“……읏.”

잔뜩 흥분한 몸에는 어린애 수준의 애무조차도 예민한 자극이었다. 레인은 힐끗 시선을 내렸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엉덩이가 들려서 여전히 이어져 있는 접합부가 고스란히 보였다. 너무 정신없이 흐트러졌던 게 아닐까,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뒤늦게 밀려드는 부끄러운 생각에 레인은 눈을 가리며 몸을 뒤로 빼냈다. 스스로 뺀 것이지만, 커다란 성기가 빠져나갈 때는 아쉬움마저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달라붙어 있던 체온이 빠져나가니 허전했다. 유르딘은 제 품에서 빠져나간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한 손을 뻗어 향유로 범벅된 엉덩이를 주물렀다. 조금 억센 손아귀에 오히려 아까 내벽에 밀려들어오던 난폭한 성기의 감각을 떠올렸다. 느릿한 손길이 아래로 내려오다가 허벅지를 더듬었다. 본격적인 애무라기에는 조금 억세고, 그저 안마를 해 준다기에는 은밀한 손길이 살을 주물렀다. 허벅지에서 종아리까지 내려오던 손길은 발목에 이르러서야 떨어졌다.

“……후우.”

묵직한 숨을 내뱉은 유르딘이 제 옷으로 손을 뻗었다. 잡아 뜯기고 눌려 구겨지고 온갖 것들이 묻은 옷은 그야말로 처참한 꼴이었다. 순식간에 옷가지를 다 벗어 던진 유르딘이 맨몸으로 레인을 끌어안았다. 레인이 추울까 염려되는지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는데, 몸의 열이 올라서 오히려 더웠다. 하지만 불도 끄지 않아 방 안이 밝다. 맨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기에는 부끄러운 것도 사실이라 레인은 군말하지 않고 이불을 덮었다.

좁은 성채처럼 느껴지는 이불 안은 닿는 곳마다 유르딘이었다. 유르딘과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말없이도 상대가 제 마음을 이해해 줄 것만 같았다. 레인은 유르딘에게 머리를 기대고 가볍게 비볐다. 유르딘의 목에서 울리는 듯한 신음이 났다.

유르딘이 천천히 헝클어진 레인의 머리칼을 쓸다가 그대로 뒷목을 감싼 채 입을 맞췄다. 한 번 욕망을 온전히 쏟아 낸 후라 비교적 담백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코끝이 상대의 코나 뺨에 닿고, 이마와 이마가 맞닿았다. 입술을 떼고 나서 작게 웃었다. 레인의 뒷목을 감싸고 있던 손이 부드럽게 등골을 타고 내려가며 피부의 감촉을 만끽했다. 부드러웠던 후희가 다시 한번 노골적인 욕망을 품게 되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시야가 어지러이 난잡하게 깜박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름과 체액과 땀으로 질척질척하게 젖어 있는 시트의 감촉을 불쾌하다고 생각할 여력조차 없다. 그 무엇도 제대로,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다. 이성이란 게 모조리 죽어 버리고 본능만이 남았다. 잠깐 기절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조차도 정확하지는 않았다. 선명한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레인의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강렬한 쾌감뿐이다. 이미 쾌감은 레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역치를 넘었다.

“응, 으읏…….”

제 허리를 받친 베개에 체중을 싣고 간신히 무릎을 세우는 게 고작인 레인과 달리 유르딘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숨소리는 거칠었지만 흥분에 의한 것이지 피로에 의한 것은 아니다. 레인은 마치 제가 유르딘에게 꿰뚫린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고 느꼈다.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레인이 몸을 지탱하는 힘보다 유르딘이 움직이는 힘이 훨씬 더 거셌다. 세우고 있던 무릎이 자꾸만 부들부들 떨려서 저도 모르게 앞으로 기어 도망치려고 하자, 유르딘은 한 손으로 가볍게 레인을 잡아 그대로 죽 잡아당겼다.

“아으, 읏, 아, 아아……!”

앞으로 기어가느라 거의 빠져나갔던 성기가 거친 움직임 때문에 한 번에 레인의 안으로 밀고 들어와 내벽 깊은 곳을 찔렀다. 살이 철썩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센 삽입, 그리고 이어 안쪽을 꽉 누르는 성기의 감촉이 황홀해 레인은 사정조차 없이 절정을 느꼈다. 지나친 쾌감으로 뜨거워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온통 달아오른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살갗을 적셨다.

가볍게 가 버려 축 늘어진 레인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고정한 유르딘은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복된 정사로 지칠 법도 한데 몸은 레인의 예상과 달리 자꾸만 예민해져, 지금은 내벽 어디를 찔러도 느꼈다. 마치 온몸이 성감대가 된 것 같았다. 지친 채로 쌕쌕거리는 숨만 내뱉던 레인의 입에서 다시 달콤한 신음이 새기 시작하자, 레인을 배려하듯 느릿하던 박자가 다시 빨라졌다.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었다.

“아, 아흐, 읏, 앗, 아……. 안, 안 돼, 너무, 너무 빠르… 흐, 아, 아앗!”

“레인……. 레인, 후, 흐으, 아……. 좋아, 그렇지?”

“지, 지나치… 다고요. 멈추… 읏, 아, 아으응, 거긴…….”

어디에 박아도 느끼는 상태인데 정확하게 레인이 느끼는 부분에만 박아 넣으며 유르딘은 한 손을 뻗어 레인의 곧게 뻗은 등을 손으로 쓸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목 뒤부터 엉덩이 부근까지 느릿하게 쓸어내리던 손길은 때때로 멈춰 맨살을 더듬거나 주무르며 맘껏 육체를 만끽한다. 살집이 별로 없는 몸이지만 닿는 감촉이 부드러워 좋았다. 뻣뻣하게 몸을 굳힌 레인의 위로 유르딘의 체중이 더해졌다. 땀에 젖은 유르딘의 피부가 겹쳐져 단단한 근육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유르딘은 손을 뻗어 레인을 끌어안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귓가를 간질이는 숨결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낮고 부드러운, 지금은 다소 쉬어 있는 목소리는 이미 이어져 있는 상황에서조차 더한 상상을 부추겼다. 달콤하며 음란하고 황홀한 상상들. 레인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유르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고 굵은 성기가 구멍을 파고들어 내벽을 헤집는 감각은 레인뿐만이 아니라 유르딘에게도 갈수록 생생하게만 느껴졌다. 레인의 내벽은 유르딘의 성기가 들어올 때마다 열렬히 환영하듯 조이며 쉽사리 놓아주려 들지 않았다. 특히나 레인이 좋아하는 곳을 강하고 세게 찔러 주면 빠듯할 정도로 꽉 조이는데, 그 모두가 유르딘에게 있어서는 중독될 만큼 황홀한 감각이었다.

유르딘의 아래에서 신음하던 레인이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흐앗, 앗, 아……! 거, 기는 싫, 어……. 흐읍, 으응, 읏, 으…….”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거기는 싫다는 말이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더 견디기 힘들다는 뜻임을 알았기에 유르딘은 딱히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대신 아까부터 계속 찌르고 있던 레인의 성감대를 피해 무척 느릿하게 허리 짓 하기 시작했다. 성기를 모두 박아 넣지도 않고 일부러 엉성하고 서툴게 움직이자 레인이 도리질 쳤다. 지나친 쾌감도 힘겹지만, 느릿하게 애태우며 괴롭히는 것은 더 힘들다. 성감대가 아니라고 해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라 배 속이 간질간질해지는 쾌감이 어설프게 연거푸 레인을 휩쓸었다. 이미 강렬한 쾌감을 경험한 몸은 더욱더 강렬한 감각을 갈구하고 있다.

“유, 유르… 딘, 흣, 괴롭히지, 말고…….”

“역시, 제대로 찔러 주는 편이 좋지?”

“……유르딘.”

레인이 핀잔하듯 이름을 불렀지만, 유르딘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읏…….”

레인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까지만 놀릴까, 하다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유르딘은 인내를 갖고 기다렸다. 조금 후에, 레인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 아요, 으. 그러니까…….”

어설피 맺은 말. 거기까지가 레인의 한계인 모양이었다. 차마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는 것조차 사랑스러워 유르딘은 뜨겁게 달아오른 귓가에 입을 맞췄다. 레인의 몸이 모조리 단 것처럼 느껴져서, 유르딘은 제가 정말로 레인에게 중독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떠올린 생각이 만족스러워 미소 짓던 유르딘은 레인의 자세가 다시 무너지는 걸 발견했다. 결국, 유르딘은 자세를 바로 세워 앉으며 동시에 레인을 잡아당겼다.

“하윽…….”

갑자기 뒤바뀐 자세에 레인이 놀랐지만, 유르딘은 휘청거리는 레인을 그리 힘들이지 않고 끌어당겨 바로 세워 제 무릎 위에 앉혔다. 한참을 눕거나 엎드려만 있다가 오래간만에 앉게 된 레인은 바뀐 자세에 익숙해질 틈도 없이 자세 때문에 더욱더 깊숙이 들어오는 유르딘의 성기에 신음했다.

“흐, 으으읏……. 너무, 깊어…….”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았을 뿐이지만, 그 말이 유르딘에게 다시 한번 불을 붙였다. 위에 올라탄 레인은 힘없이 유르딘에게 기대 축 늘어져 있을 뿐이지만, 유르딘에게는 하등 문제 될 게 없었다. 유르딘이 아래에서 세게 허리 짓 하자 레인의 몸 전체가 들썩였다. 유르딘은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레인을 붙잡으며 가슴께를 더듬었다. 계속해서 혹사당한 유두는 아플 정도로 부어 있었지만, 지금의 레인에게는 아픔보다 쾌감이 더 컸다. 오히려 아픈 감각마저 쾌감으로 치환된다.

“하앗, 읏, 으응……. 아……!”

기운이 없어 별 소용은 없지만 작게나마 레인의 허리가 들썩였다. 어디까지나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쾌감과 열에 물든, 유르딘에게 흠뻑 젖은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유르딘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직 조금 더 할 수 있으려나. 유르딘은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여전히 달콤한 밤이 오래 남아 있었다.

***

한참을 자고 나서야 레인은 정신을 차렸다. 잠든 건 분명 깊은 밤중이었는데, 두껍게 커튼을 치고도 햇살이 들어오는 걸 보니 해가 높이 뜬 모양이었다. 눈을 뜨는 대신 레인은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대체 얼마나 침실에 처박혀 있었더라. 사흘? 그렇다면 오늘은 나흘째의 낮이다. 정말이지 자제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좋기야 좋았지만……. 문득 떠오르는 지난 시간이 좋은 것과 동시에 부끄럽다. 정말 미쳤던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레인은 눈을 감은 채 뽀송뽀송한 침구의 감촉을 만끽했다.

지난 사흘간 레인은 유르딘이 왜 인간을 초월한 경지의 검사라고 불렸는지 이해했다. 그 체력과 정력이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진지하게 의심스러웠다. 미엘이 들어갔다 나오며 악마의 영향을 받아 강해져 인간의 궤도에서 살짝 벗어난 게 틀림없었다.

물론 사흘 내내 한 것은 아니다. 식사하거나 종종 씻거나, 피로에 깊이 잠들었을 때는 하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남은 모든 시간을 정사에 쏟아부었다는 소리였다.

레인은 중간중간 자신에게 회복 마법을 걸었는데, 유르딘은 그런 것도 없었다. 심지어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깨면 옆에서 유르딘이 일을 하고 있었다. 레인은 잠이라도 잤지, 유르딘은 잠도 거의 자질 않은 셈이다. 버틸 수 있나. 눈을 뜨니 레인이 깬 걸 알고 있었는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유르딘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안 돼, 계속하면 미워할 거예요.’

진짜로 미워할 생각은 없었지만, 마력으로 체력을 회복한다고 해도 몸에 피로는 조금씩 누적되기 때문에 더 하면 진짜 죽을 것 같다는 위기감마저 느껴졌었다. 마지막에 기절하기 전에 한 말이 효력이 있었는지, 유르딘은 금방 벗을 수 있는 간편한 가운 대신에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줄을 잡아당겨 사용인을 부른 유르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 레인.”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미안하다.”

유르딘의 표정이 과하게 어두워져서 레인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안해할 필요까지는 없고요, 다음부터는 제 체력을 좀… 생각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지.”

무겁게 대답한 유르딘은 레인의 팔을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역시 너무 약해.”

“……누구든 그 상황은 견딜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무리 마법이 있어도, 운동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는 몸은 격한 정사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유르딘이 만족할 만한 선까지는 절대로 무리겠지만, 가볍게라도 운동을 해 근육이라고는 필요한 만큼도 없는 몸을 조금이라도 튼튼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리 유르딘이 언질을 줘 두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들어왔다. 소식하는 레인을 고려해 양이 많지는 않지만 종류가 몹시 다양했다. 테이블 위에 펼쳐 두는 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하녀가 또다시 트레이를 끌고 음식을 잔뜩 가져왔다. 엄청난 양이다. 슬슬 테이블이 꽉 차지 않았나 싶었는데 음식을 들고 들어온다. 하녀가 나가자마자 레인은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표정을 팍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먹을 필요 없어요. 무슨… 파티라도 하실 건가요?”

“하지만 피곤할 것 같아서…….”

“아주 광고를 하지 그러세요?”

레인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른 손으로 쓸며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의 침실에 접근하는 이들은 이전 대부터 니제스 백작 가문에 충성하던 입 무거운 사용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계속 보아 온 새로운 주인인 유르딘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대단했다. 그들은 결혼은커녕 연애에도 큰 관심이 없던 주인이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 데 대해 굉장히 뿌듯해하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레인이 유르딘과 결혼할 수 없는 남자라는 점은 그들에게 사소한 문제였다. 제 주인이 고른 상대는 완벽할 게 뻔하니까! 어찌 됐든 레인은 물론이고 유르딘보다도 연상인 여인들이 다 안다는 얼굴로 무척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는 건 몹시 부끄러운 일이었다.

“시트도 다 갈았을 거 아니에요. 다 안다는 얼굴로……. 부끄러워 죽겠네요.”

“주의를 주도록 하지.”

“혼내시지는 마세요.”

유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레인에게 호의적일 리는 없었다. 아무래도 라인셀에서는 아직 남자끼리 연애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저 일회성으로 남자를 안는 것이라면 모를까, 결혼도 하지 않고 남자를 연인으로 맞으면 안주인의 자리도 빈 채고 후계자도 낳을 수 없다. 유르딘의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가 호의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고 개중에는 레인을 눈엣가시로 보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저렇게 노골적으로 기뻐해 주는 사람은 반가웠다.

생각을 정리하고 식기를 잡으려는데 유르딘이 레인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레인을 제 다리 사이에 앉혔다. 애 다루는 듯한 행동에 기가 차서 돌아보니 유르딘이 레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걸로 무마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게 무슨 아이 취급이에요?”

“아이 취급이라니, 설마. 지난밤에 내가 널 아이로 취급했던가?”

레인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으나 유르딘은 뻔뻔했다. 힐끗 노려보며 뭐라 한마디 해 줄까 하다가 관두고 유르딘에게 몸을 기대니,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머리칼을 간질였다.

그대로 레인을 끌어안은 채 유르딘은 레인에게 음식을 하나하나 먹여 주기 시작했다. 이 정도는 제 손으로 할 수 있는데. 유르딘이 몹시 즐거워 보여서 레인도 반쯤 포기하고 상황을 즐겼다. 배부르다고 해도 한 입씩 먹어 보라고 하는 통에 레인은 모든 음식을 한 입씩 모두 먹은 후에야 간신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내왔지만, 배가 꽉 차서 차를 즐기기도 힘들었다.

“배부르지? 조금 바깥이라도 걸을까.”

“그보다 유르딘.”

레인은 아까부터 시종일관 들떠 있던 유르딘을 잠시 응시하다가 시선을 찻잔으로 떨궜다.

“오늘이네요. 처형.”

지하 감옥에 다녀온 지 오늘이 정확히 나흘째였다. 유르딘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처형은 일몰 때죠?”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으니, 가려거든 얼마든지 갈 수 있다. 레인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작은 파문이 인 찻잔 안에 무표정해진 레인의 얼굴이 비쳤다. 레인이 한 모금 차를 마시고 나서야 유르딘이 뒤늦게 대답했다.

“나갈 준비를 시킬까?”

낮은 목소리에 레인이 고개를 들었다. 굳어 있는 얼굴을 보건데 레인이 묻지 않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바라지 않으면서도 레인이 원한다면 유르딘은 얼마든지 처형을 보기 제일 좋은 자리로 레인을 데려다줄 것이다. 하지만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안 볼래요.”

갈등이 긴 것치고는 대답이 너무도 쉽게 나왔다. 이미 어머니의 죽음을 목전에서 지켜봤다. 아무리 밉다지만 딜란은 레인의 아버지였다.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모두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비참할 게 뻔한 최후를 보며 저도 모르게 동정심을 품고 싶지도 않았고, 반대로 그 모습을 보며 통쾌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레인이 하고자 하는 복수는 이미 그날, 감옥에서 딜란의 모든 것을 빼앗으며 끝났다.

“……대신 카이렌을 봐야겠어요.”

반면에 카이렌에 대한 건 조금도 마무리 짓지 못했다.

“하지만 레인…….”

“봐야겠어요, 유르딘. 마지막으로 한번은요.”

유르딘은 만류했지만 레인은 제 생각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카이렌과의 마지막을 공포에 질린 제 모습으로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대로 두면 카이렌은 영원히 제 안에서 공포의 상징으로만 남을 것 같았으므로.

레인의 설득에 유르딘은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레인의 악몽이 이어지는 건 유르딘 또한 바라는 방향이 아니었다. 대신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자신이 지켜볼 거라는 제안을 수락했지만, 여전히 뭔가 걸리는 모양인지 지하로 향하는 길 내내 유르딘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레인은 유르딘의 눈치를 봤다.

“……제가 억지를 부려서 화나셨어요?”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네가 놈이랑 같이 있는 것도 싫어서.”

유르딘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노골적인 질투에 레인은 짧게 웃고 유르딘에게 다가가 뺨에 입을 맞췄다.

“마지막이에요. 저도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정말로 마지막. 그렇게 결심하며 레인은 주먹 쥔 채 카이렌이 갇힌 지하실의 문이 열리는 것을 노려보았다.

며칠 만에 다시 레인은 카이렌을 마주했다. 익숙한 얼굴이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 저번보다도 훨씬 더 초췌한 모습이었다. 제대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건지 입술이 바싹 말라 버석거리는 게 보였다. 양팔은 벽에 고정된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두 눈은 혼자서는 벗을 수 없는 눈가리개로 뒤덮여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카이렌은 유일하게 자유로운 입술을 달싹였다.

“……레인?”

심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발소리만 듣고 알아본 것인지, 아니면 그저 들어오는 상대마다 레인이라 부른 것인지 몰라도 이 상황에서조차 그만을 간절하게 바라는 부름은 레인의 입장에서는 오싹하기 짝이 없었다.

레인은 시선으로 만류하는 유르딘을 막고 카이렌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제 발치에 무릎 꿇은 카이렌을 레인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강하고 오만했던 카이렌이다. 심지어 지난번에 봤을 때조차 광기에 물들어 있을 뿐, 나약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카이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나약하고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레인…….”

간절한 부름이 애처롭기 짝이 없다. 레인은 지난번 제 허세가 먹혔음을 확신했다. 레인이 카이렌을 버려서, 증오조차도 버린다고 말해서, 카이렌은 더는 레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해서. 카이렌 모드는 오랜 세월 자신이 추구하고 있던 것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줄곧 카이렌이 두려웠다. 카이렌은 언제나 레인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고 위치가 바뀐 지금도 공포로써 속박되어 벗어날 방법 따위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쩌면 카이렌이 줄곧 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관계의 주도권은 사실 레인이 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이렌이 죽거나 사라져도 레인은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지만, 레인이 없으면, 레인의 증오라도 없으면 카이렌은 살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같잖아서.

“하.”

저도 모르게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작게 들린 레인의 목소리에 카이렌의 얼굴이 미소로 다 펴지기도 전에, 레인은 카이렌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언제나 레인을 한 손으로도 제압했던 카이렌은 더는 없었다. 레인이 걷어차면 걷어차는 대로 힘없이 나동그라진다. 그 꼴사나운 모습. 이전의 당당함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초라한 모습은 나약하고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힘없이 걷어차여 밀려났던 카이렌이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다가왔다. 눈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필사적으로 움직여 앞으로 다가온 카이렌은 마침내 원하던 대로 레인의 다리에 머리를 맞대었다. 그동안 제 것이었던 황홀한 온기에 취한 채 카이렌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애처롭게 속삭였다.

“레인, 맞지?”

“…….”

“레인, 레인…….”

“…….”

“나의 레인.”

대체 뭘 해야 저놈의 소유격이 떨어지는 걸까. 레인은 할 말을 잊은 채 조금 질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패기 있게 지하실로 내려온 건 좋았지만 막상 마주하니 화풀이를 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할 게 없었다. 이대로 무시하고 물러날까. 영원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부름을 외치다가 그대로 초라하게 죽어 버리도록.

그리 생각하고 있던 때 갑자기 소리 없이 다가온 유르딘이 레인을 제 쪽으로 홱 잡아당겼다. 당황할 틈도 없었다. 아플 정도로 강하게 레인을 꽉 끌어안은 유르딘은 그대로 카이렌을 세게 걷어찼다. 레인이 발로 찬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커다란 소리가 나더니 카이렌이 벽까지 밀려났다. 피가 터지는 광경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레인이 당황하자 그걸 두려워한다고 해석한 것인지 유르딘은 정면이 보이지 않도록 레인을 제 품 안으로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윽박질렀다.

“누가 네 레인이라는 거냐. 나의 레인을?”

……그게 문제였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소유권 주장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레인이 황당해하든 말든 눈앞의 두 남자는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빠진 이를 뱉어 낸 카이렌은 묶인 채로도 오기로 일어나더니 똑같이 으르렁댔다.

“이 씨발새끼……. 내가 그걸 어떻게 길들였는지 알아?”

“알 게 뭐냐. 알 필요도 없는데.”

“내 거야. 내 거라고! 평생 날 잊지 못해!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그래서 여기 온 거잖아?”

“네가 뭐 대단한 놈이라고 평생 못 잊는다는 건지.”

유르딘이 카이렌의 말을 곧장 비웃었다.

“네 어머니조차 널 버렸는데, 레인이라고 널 버리지 못할 리가?”

“닥쳐!”

레인은 유르딘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르딘이 빈정대자 아까보다 훨씬 더 악에 받쳐 외치는 카이렌의 목소리를 듣자니 속 시원하기는 했다.

“……그건 달라. 혈육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 돼. 못 잊어. 레인은… 내가… 내가 완벽하게…….”

“네가 레인에게 무슨 짓을 했든지 상관없어.”

더 들어 주지 못하겠던지 유르딘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설령 놓치기라도 할세라 강하게 레인을 붙든 절실한 손길은 조금 아플 정도였다. 레인이 가만히 유르딘에게 몸을 기대어 있자, 유르딘이 만족스레 씩 웃었다. 어딘가 기세등등하고 조금 살기 어린 미소였다.

“레인은 내 손안에 있거든. 너 따위에게는 머리카락 한 올도 내어줄 생각 없어. 네가 뭔 대단한 짓을 했든 상관없어. 시간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너 따위는 곧 잊히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이…….”

유르딘은 제 앞까지 기어온 카이렌의 머리를 그대로 짓밟았다.

“쓰레기가.”

“큭…….”

숫제 바닥 아래로 처박아 넣을 기세로 세게 짓누르자 아까부터 머리에서 흐르던 피가 번져 발치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사랑해? 네 주제에, 감히 누구를? 내 레인을? 웃기지 마라. 주제도 모르는 놈이.”

“하……. 그러는, 너는……. 뭐, 다를…….”

“다르지.”

유르딘은 동요하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잘난 듯이 굴지 마, 패배자 주제에.”

“…….”

카이렌의 말문이 막혔다. 레인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웃었다. 유쾌한 웃음소리에 유르딘에게 밟혀 있던 카이렌의 몸이 움찔했다. 유르딘이 눈을 깜박이면서 레인을 보고 있었지만 뭐라 말을 해 줄 정신도 없었다. 무슨 삼류 통속극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적나라하게 감정을 드러낸 날것의 말과 감정들.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고 직설적인 말인 만큼, 유르딘의 집착과 애정도 카이렌의 분노와 절망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진작 유르딘에게 부탁할 걸 그랬나. 감사의 의미를 담아, 반쯤은 카이렌이 똑똑히 들으라는 의도로 레인은 유르딘의 뺨에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이제 가요, 유르딘.”

개운하다. 음색마저 느껴지는 밝고 경쾌한 목소리에는 한 줌의 미련도 없었다. 유르딘의 발이 떨어지고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져 가자, 더는 일어나기도 힘들 것 같은 몸으로 카이렌이 아득바득 몸을 일으켰다.

“레인……. 레인, 레인. 레인!”

피를 토하는 처절한 외침이었다. 받아 줄 사람이 없어 아무런 의미 없이 공허하게 흘러갈 외침이다. 레인은 신경도 쓰지 않고 유르딘의 손을 잡은 채 지하실을 나와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제법 거리가 멀어졌을 때, 레인은 참고 있던 웃음을 다시 터뜨렸다. 유르딘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레인……?”

“……아뇨, 그냥. 당신이 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게, 음, 조금 귀여워서…….”

비꼬는 어휘와 욕설로 포장되긴 했지만, 마치 장난감 놓고 싸우는 어린애들 같지 않았나. 여과 없이 튀어나온 솔직한 감상을 들은 유르딘이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가렸지만 가려지지 않은 귀 끝이 붉어진 게 제법 노골적으로 보였다.

“지금 부끄러워하시는 거예요?”

놀리듯 말하자 더 붉어진다. 아예 도망이라도 치고 싶어 하는 얼굴이라 레인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손을 뻗었다. 천천히 유르딘의 얼굴을 가린 커다란 손을 떼어 내자 잘생긴 얼굴이 무표정한 채로 달아오른 게 보였다. 유르딘은 레인을 힐끔 돌아봤다가 여전히 웃음기 서린 얼굴을 보고 시선을 도로 슬그머니 피했다.

“어쩔 수 없잖나. 감히 주제도 모르고…….”

변명하는 게 진짜로 귀엽다. 레인은 유르딘을 홱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굳게 닫힌 입술을 핥자 환영하듯 틈새가 벌어진다.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는 대신에 입술만 할짝대고 빨아올리자 이내 유르딘이 달려들었다. 카이렌이 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게 진짜로 짜증 나긴 했는지 집요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레인이 유르딘을 잡아당긴 모양새였지만, 어느새 반대로 유르딘이 레인을 벽에 몰아붙인 채 품에 안고 있었다. 유르딘을 안은 채 천천히 입술을 떼며 레인이 시원스레 웃었다.

“고마워요, 유르딘. 이제 괜찮을 것 같아요.”

“정말로 괜찮나?”

“네. 이제 신경 쓰지 않을래요.”

“……그래.”

유르딘이 칭찬하듯 레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괜히 무언가 더 돌려줘야 할 것 같다는 복수의 미련이 조금은 털어졌다. 유르딘이 하는 말이 속 시원하기도 했고, 안 그래도 다른 사람과 접촉하던 걸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놈에게 현실을 일깨워 줬다. 물론 여기서 더 무언가 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게 많았지만…….

레인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까지 괴로웠던 만큼 복수를 하는 순간은 통쾌하다. 힘을 얻은 지금은 간단하기까지 했다. 레인은 제가 저지른 살해를 떠올렸다. 칼 레히드. 레인을 도발하려 쓰레기 같은 말을 내뱉던 그 남자를 죽였을 때, 레인은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희미하게 피어올랐던 죄책감은 더욱 큰 쾌감 앞에서 사라졌다. 복수는 간단하고 중독적이며 또한 그 끝을 모른다. 지키려던 선은 수위가 점점 낮아지고, 방식은 자극적이 된다. 과거에 유르딘이 그러했듯이. 유르딘 니제스는 복수에 몸을 던졌다. 처음부터 대량 학살을 할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증오와 분노에 몸을 내던진 채 복수에만 매달린 유르딘은 모든 사람의 공적이 됐다. 복수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종국에는 과거의 자신조차 잃어버린 괴물로 전락해 스스로 파멸했다.

복수는 이만하면 되었다. 레인은 더는 끔찍한 과거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뒤돌아보며 곱씹기보단 앞을 보고 미래로 내달리며 살아가고 싶었다. 바로 지금이 레인 스스로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더는 얽매이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후련했다.

하지만 유르딘은 다르다. 레인은 제 손을 잡은 채 계단을 오르는 유르딘을 힐긋 돌아보았다. 레인이 더는 카이렌을 신경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순간, 그 찰나에 유르딘을 스치고 간 선연한 광기를 목도했다. 유르딘은 제 손안에 있는 카이렌을 최후의 순간까지 고문할 생각이다. 레스터의 기억 속에서 봤듯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칠 정도로 잔혹하게. 그때와 달리 지금은 시간제한조차 없으니, 앞으로 유르딘이 뭘 할지 레인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레인은 유르딘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만두었다. 유르딘의 결론에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미련을 떨쳐 버렸다는 말 그대로, 더는 신경 쓸 생각은 없었으니까. 다만 유르딘에게 어느 쪽이 나을지 고민했다. 자신도 결론 내리지 못한 채 그저 생각 속에서만 머물던 말은 레인의 깊은 곳 아래로 침잠했다.

지하를 빠져나오니 베른이 급해 보이는 얼굴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르딘 님, 마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차요?”

“전하께서 오전부터 찾으셨습니다.”

레인의 질문에 베른이 마치 이르듯이 냉큼 대답했다. 오전이라니, 지금은 이미 해가 머리 위에 떠 있는 시간이다.

“빨리 가지 않고 뭐 했어요?”

“그게…….”

레인이 유르딘을 바라보자 그는 괜히 딴청을 피웠다. 어설픈 변명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뻔하다. 레인이 일어나지 않아서, 레인과 있으려고, 레인이 걱정되어서. 셋 중 하나의 이유이거나, 셋 다이거나 그도 아니면 레인과 관련된 다른 이유가 더 있겠지. 기쁘기는 한데 이건 좀 아니다. 레인은 유르딘의 등을 떠밀었다.

“안 들어도 알겠네요. 어서 가세요.”

“천천히 가도 괜찮아.”

“안 됩니다.”

혼자만 느긋한 유르딘을 베른이 온갖 애를 쓰며 끌고 갔다. 유르딘은 끌려가면서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고 말했으나 썩 믿기지는 않았다. 괜히 베른만 고생이다. 예전에 북방에서 봤을 때는 유르딘이 성실하게 일하는 편이었으니 베른에게도 여유가 있었는데, 유르딘이 태만해지기 시작하자 제일 고생하게 되는 이는 역시 부관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수도에 막 도착했을 때보다 안색이 나빠지고 눈 밑도 퀭해졌다. 북부에서 전쟁 중일 때도 저 지경은 아니었다. 나중에 치유 마법이라도 걸어 줘야 할까.

상했던 장기가 제 기능을 되찾아 이전보다 건강해지기는 했지만 바닥이었던 체력이나 단련되지 않은 몸까지 한 번에 마법으로 끌어 올릴 수는 없었다. 지난 사흘간 누적된 피로가 몸에 고스란히 남아 몸이 여기저기 쑤시는 데다 여전히 배가 불러서 조금 걷기로 했다.

때는 겨울이었지만 햇살이 좋아 날이 따뜻했다. 겉옷을 챙겨 입고 정원으로 나갔다. 코끝에서 맴돌던 지하의 쿰쿰한 냄새가 날아가고 청량하고 서늘한 겨울의 바람이 레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마주치는 사용인들은 레인에게 밝게 인사할 뿐, 주인 없는 저택을 돌아다니는 외부인에 대해 경계하지 않았다. 제 저택의 사용인들은 주인을 보면 경기하듯 놀라고는 하는데 말이다.

잎이 모두 떨어져 조금 황량하기는 해도 군데군데 놓인 조각이나 장식물을 구경하며 걷던 길의 끝에 작은 별채가 나왔다. 딱히 올 생각은 없었는데. 기왕 도착한 것 바로 걸음을 돌리지는 못하고 레인은 별채 전체를 눈에 담았다. 유니가 있는 장소였다. 레인은 심란한 눈으로 별채를 눈으로 훑었다.

사람이 많은 본채에 둘 수 없으니 여기에 두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선택이지만, 저와 똑같이 별채에 감금되어 있을 유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몇 시간 후면 제 부모가 처형될 걸 알고 있는 소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 가지 않았다. 피가 반이나마 섞인 남매로서 위로를 해 줘야 하나 싶다가도, 그 부모의 처형에 손을 보탠 게 자신이니 더없는 위선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고민하던 레인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별채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앞에 놓인 티 테이블의 의자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른하게 몸의 힘이 빠져서 레인은 그대로 늘어졌다.

“날씨 좋네.”

뜨끈한 햇살을 받고 있으면 걱정이 녹아내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해!?”

지스킬이었다. 날이 좋다지만 겨울에 바깥에 나와 있는 레인을 본 지스킬이 잔뜩 기겁하며 당황했다. 이제 몸이 괜찮다고 해 봐도 썩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들어갈 것을 종용하던 지스킬은 레인이 계속 사양하자 제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레인에게 한 겹 더 걸쳐 주고는 안에 들어가 모포며 뜨거운 초콜릿을 잔에 타 챙겨 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초콜릿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가 더더욱 몸을 늘어지게 하였다. 그대로 홀짝이고 있자니 건너편에 마주 앉아 레인을 살피던 지스킬이 만족스레 웃었다.

“얼굴 보기 힘들다. 그래도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

“미안, 신경 좀 써야 했는데.”

“아냐. 아팠다며? 그리고 한창 좋을 때고…….”

지스킬이 얄밉고 능글맞게 씩 웃었다. 레인은 테이블을 한 번 걷어차고 말을 돌렸다.

“그보다 고마워. 이런 시기에 도와줘서.”

“뭘. 어차피 가는 길인데.”

유니가 리세티 왕국으로 향하는 길목의 중간까지 지스킬이 데려가 주기로 되어 있었다. 오늘 출발이니 미리 준비해 둘 겸 저택에 온 모양이었다. 지스킬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부터 난 유르딘 님의 저택에 자주 드나들었으니까. 오늘도 그런 방문인 것처럼 해서 위장하고, 저녁쯤에 준비한 마차로 따로 출발할 거야. 문제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응. 걱정 안 해.”

“왜 안 해? 걱정 좀 해 줘. 믿음직한 날 믿는 것도 이해는 한다만.”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믿기야 하지만 그래도 어느 한구석, 걱정이 가시지를 않아서 낮이며 밤이며 가리지 않고 날 위해 기도하며 무사를 비는…….”

“뭐라는 건지.”

레인이 피식 웃었다. 본래도 낙천적이고 유쾌한 면이 지스킬의 장점이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즐거워 보였다.

딜란이 왕을 제압하고 반란을 시도했던 그날. 마침 성에 들어와 있던 지스킬은 어깨너머로 배운 마법에 대한 지식으로 딜란의 마법을 피해 숨어 있었다. 유르딘이나 레인, 렌피르가 상황을 역전하리라 믿으며 숨을 죽이고 있던 지스킬은 정말로 상황이 역전됐을 때 가장 빠르게 움직여 왕을 구했다. 결정적으로 딜란을 제압한 건 레인이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먼저 나섰던 기사라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지스킬은 왕의 신뢰를 사 이번 사태를 해결한 사람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이번 사건으로 여러 가문이 사라지고 작위가 붕 뜨게 되었고, 왕은 원래부터가 재능 있는 젊은 인재를 원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지스킬이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이번에 수도를 떠나는 일도 왕의 지시로,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된 백작의 영지를 살피고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당분간 관리하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영지를 미래에 지스킬이 다스리게 될 것은 뻔히 보였다. 결국은 앞으로 다스릴 영지에 대한 시찰이다. 지스킬로서는 하루아침에 백작령을 손에 넣게 된 셈이니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일로 지스킬은 갑작스레 찾는 손님이며 초대장의 수가 늘어났다.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을 텐데도 유니를 안내하겠다고 지스킬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지스킬에게는 제대로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이인 유니를 도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유를 따져서 도운 일이 아니다. 그냥 지스킬은 원래부터 그랬다. 레인이 아카데미에서 쓰러졌을 때,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제게 불이익이 닥칠 걸 알면서도 주저 없이 손을 뻗는 선량한 사람이 지스킬이었다.

“고마워, 지스킬.”

“뭐야? 갑자기.”

“그냥 이것저것. 많은 게 고마워.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까지.”

웃으며 진지하게 말하자 지스킬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조금 낯간지러운지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알았으면 잘해, 미래의 공작님. 지금까지 내가 고생한 거 잘 기억해 놨다가 챙겨 주기다?”

“그래.”

“순순히 대답하니까 이상하네.”

과장되게 몸을 부르르 떤 지스킬은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바쁘게 돌아가는 왕국의 정세며 작위를 승계받은 후 해야 할 일들에 대해 한창 말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지스킬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전부터 할 말이 있는 기색이더니, 자리를 뜨기 전에야 결심했는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추우니까 여기 오래 있지 말고, 또……. 음, 네 동생은 여기 2층에 있어. 너라면 들여보내 줄 거야.”

“딱히 만날 생각은 없는데.”

“지금이 아니면 평생 못 만나잖아. 불편한 것도 이해는 하지만……. 후회 없을 쪽으로 잘 생각해 봐.”

신중하게 말한 지스킬이 자리를 떠난 후 레인은 아직 온기가 남은 빈 잔을 매만졌다. 혹시 모를 후환을 막으려고 일부러 유니를 먼 왕국으로 보내는 것이라 지스킬의 말대로 유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많은 생각이 레인을 스치고 지나갔다. 잔이 완전히 차가워지고 나서야 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한 시간은 길었지만 한 번 결심한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기밀 유지를 위해서 별채의 1층에는 유르딘의 심복 몇 명 외에는 없었기에 일손이 부족한지라 다들 바빠 보였다. 그들에게 가볍게 인사한 레인은 별다른 제지 없이 유니가 있다는 2층으로 올라갔다.

왜 이런 것까지 똑같을까. 처음 보는 장소인데도 팽팽한 긴장과 적막으로 짓눌린 복도가 레인의 기억과 같았다. 얻어맞아서 피를 흘리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반쯤 기어서 가로지르던 그날들의 복도. 죽은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아버지를 원망했으며, 다친 상처보다도 외로움이 더욱 사무치게 아려 왔던 고통. 방 안에 홀로 틀어박혀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누군가의 온기를 기다리던 날들. 누군가가 와 줬으면, 손을 내밀어 줬으면, 한 번만 안아 줬으면, 수없이 소망했고 또 기도했다.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꿈이었지만, 누군가 찾아와 줬다면.

자신도 저런 얼굴을 했을까?

레인은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든 유니를 가만히 응시했다. 몸을 웅크린 제 이복동생은 여전히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다. 그러나 겁을 먹은 얼굴의 한구석에서는 저를 멀리 외국으로 보내 버리려는 이복 오빠에 대한 묘한 애정과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과거의 레인도 그랬다. 레스터가 매일같이 자신을 때리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걸 알면서도, 그들이 언젠가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어린 날에 레인의 손을 잡아 줬었더라면, 기꺼이 그 손을 잡았을 텐데. 너는 그 손을 잡을까? 레인은 유니에게로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눈물 자국이 남은 뺨을 문질렀다.

“유니, 몸조심하고 건강해라.”

어색하게 끄집어낸 말은 어딘지 딱딱했다. 레인은 경직된 목소리를 고르며 조금 더 어조를 누그러트렸다.

“잘 적응할 수 있을 거야. 괜찮아. 살다 보면 괴로운 일도 있겠지만, 즐거운 일도 얼마든지 있을 거야.”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유니가 조금 날카롭게 말을 되돌렸다. 목소리만 날카로울 뿐 어딘가에서 체념이 묻어 나왔다. 1년 전의 레인에게 물었더라면 답은 하나이리라. 불가능하다. 어떻게 노력하든 자꾸만 미끄러지며 추락하는 삶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물론.”

미래를 확신한다.

“지금은 세상에 너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살아 있으면 분명 너를 사랑해 주는 사람도, 하고 싶은 일도 생길 거야.”

내가 그랬으니까. 레인은 이어지려던 말을 제 속에만 간직한 채 몸을 숙였다. 그대로 레인은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비밀을 털어놓듯 은밀하게, 유니의 귓가에 작은 말을 속삭였다. 그건 유혹이기도 했고 시험이기도 했다. 레인의 말이 끝나자 유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유니는 한참 후에나 답을 내놓았다.

방을 나와 계단으로 내려오니 레인의 표정이 영 이상했는지 밑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레인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답하고는 별채를 나왔다.

이미 주변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광장이 있는 방향 쪽을 바라보았던 레인은 이내 미련 없이 눈길을 거뒀다. 주인 없는 저택에 남아 있는 것도 유르딘의 저택이라면 예외였다. 애초에 공작가의 저택은 레인에게 익숙한 장소가 아니었다. 십 몇 년 전, 좋았던 기억들은 모조리 풍화되어 아픔만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제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레인은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 저택은 온전히 레인의 소유였다. 언제까지나 이미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따위로 피할 수는 없었다. 광장에 모였던 많은 사람이 흩어지느라 수도가 소란스러웠다. 잠시 사람들을 바라보던 레인은 그들이 떠나온 방향으로 눈길을 던졌다. 까맣게 물들기 시작한 밤하늘이지만 끄트머리만은 피처럼 붉었다. 오래 지켜보지 않고 시선을 돌려, 잠시 눈을 붙였다.

마침내 도착한 저택은 어쩐지 추웠다.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따뜻한 차를 한 잔 통째로 털어 넣었는데도 싸늘한 냉기가 온몸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더는 불안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혼자 남게 되면 문득 실체 없는 불안이 레인의 몸을 덮쳤다. 때때로 예고 없이 찾아오는 이 불안감이 언제쯤 사그라들지는 레인 본인도 몰랐다.

이불 속에 파묻힌 채 레인은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에 대해 떠올렸다. 모든 역경을 이겨 낸 소년이 마침내 행복을 손에 쥐는 이야기. 많은 이야기는 한 줄의 결론으로 끝났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때는 완벽한 이야기라고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소년이 쥔 행복이란 몹시 불명확하고 추상적이기 짝이 없다. 소년은 제게 일어난 역경을 치워 내고 성공과 승리를 거머쥐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전부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금은보화가 생긴다고 해도, 무엇도 두렵지 않은 힘과 무소불위의 권력이 생긴다고 해도,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사랑해 준다고 해도 소년이 겪었던 역경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정말로 소년은 영원히 완벽하게 행복했을까?

레인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남은 상처는 한때 레인의 허벅지에 새겨졌던 낙인과는 달라서 억지로 지워 버리는 게 불가능하다. 지금은 힘도, 사랑도, 권력도 모두 손에 쥐게 되었지만, 그걸로 마법처럼 마음에 난 상처가 낫지는 않는다. 그 대단한 마법을 사용하던 미엘 데이막조차 마지막까지 레인의 마음을 돌리는 건 실패했듯이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마법도 기적도 소용없었다.

그건 레인뿐만 아니라 유르딘에게도 해당한다. 얼굴에 남은 수많은 상처와 지금의 유르딘만 봐서는 예상할 수 없는 잔혹성과 피폐함까지. 유르딘의 나약함은 레인에 대한 불안감으로 표출되어서 티가 나지 않았을 뿐, 그 또한 충분히 과거에 상처 입었다.

어지러운 생각들을 견디지 못하고 레인은 몸을 눕혔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몸은 피곤한데 잠이 오지는 않아서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던 레인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너무도 자연스레 창문이 열리고 유르딘이 들어왔다.

“아니, 왜 창문으로……. 정문이 있잖아요.”

“오래 걸리잖나.”

어련하시겠어. 레인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 일어나기도 전에 다가온 유르딘이 레인이 일어나는 걸 도와주면서 그대로 꽉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다, 레인. 네 생각만 했어.”

얼마나 헤어져 있었다고, 유르딘의 목소리에서는 벌써 레인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레인의 웃음소리가 유르딘의 목과 어깨를 간질였다.

“저도요.”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고민이 있는 얼굴이야.”

귀신같은 정확성이다. 레인이 연거푸 가볍게 웃자, 그제야 조금 딱딱하던 유르딘의 표정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휘감은 채로 유르딘은 봄의 온기를 몰고 왔다. 싸늘한 코트가 데워 둔 몸을 차게 식히는데도 레인은 그제야 추위가 가시는 걸 느꼈다.

“잠깐 유르딘에 대한 생각을 했어요.”

“무슨 생각?”

“예전의 유르딘에 대해서요.”

유르딘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레인은 조금 서늘하게 변한 얼굴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처음 만났을 때, 다시 재회했을 때, 아직 유르딘이 망가지기 전 옛날에. 유르딘의 다정함과 상냥함은 지금과 달리 레인만을 향하던 것이 아니었다. 유르딘은 처음부터 제 복수를 위해 사람을 쳐 죽이는 살인마가 아니었다. 자신이 불리해질 걸 알면서도 죽어 가는 어린아이를 외면할 수 없는 우직한 다정함이 유르딘의 본질이었다. 지스킬이 그랬듯, 유르딘 또한 어려운 사람을 위해 선뜻 손을 내밀 수 있는 자였다. 그러나 고귀한 가치는 잔혹한 과거 속에서 유르딘이 제 손으로 박살 냈다.

‘괴로운 기억을 지고 살 자신이 없다. 차라리 잊는 게 낫다.’

렌피르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그 말이 유르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 아닐지, 레인은 계속해서 고민했다. 레스터의 시선으로 간접적으로 보고 경험한 것만으로도 유르딘이 보낸 끔찍한 시간에 대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왕국의 영웅이라고 불리던 위치에서 곧바로 추락해 살육을 일삼았다.

차라리 레인에 대한 괴로운 기억이 없었더라면, 망가질 필요도 병적인 사랑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힘든 일이 많았겠죠, 유르딘도.”

“나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어요.”

유르딘의 얼굴을 매만지던 손이 머리로 올라간다.

“괴로운 기억이라면 제가 지울 수 있을지도 몰라요.”

렌피르는 과거 괴로웠던 기억만을 지우고 멀쩡히 살고 있었다. 마법진의 도움이 없는 지금, 레인의 마력 제어만으로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을 지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 직접 써 본 마법이니 재현하는 게 영 불가능하지 않았다.

이대로 유르딘의 괴로운 기억만을 지운다면 그의 괴로움도 사라지고, 더는 레인이 잘못될까 봐 괜한 불안과 걱정을 품을 필요도 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며, 그 스스로 말하던 제 위험성 또한 사라진다. 그렇게 유르딘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아예 제 기억까지 지운다면. 더는 고통은 편린조차 남지 않고 그늘 없이 완벽한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힘든 건 모두 잊어버릴 수 있어요.”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너는 그러고 싶나?”

유르딘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레인은 흔들리지 않고 저만을 곧게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고 싶으냐고?

물론 그러고 싶지 않다.

진작에 망가지고 미쳐 버린 남자. 어두운 광기가 넘쳐서 흘러내릴지언정, 왕국을 부숴 버릴 정도로 레인에게만 미쳐 있는 남자. 그 남자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쌓아 올려졌다. 솔직히 레인은 왕국을 등질 정도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 애정은 나의 것이다. 그 확신이 레인을 배부르게 만든다.

“나는 괜찮지만, 차라리 네 기억을 지우는 게 낫지 않겠나.”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래.”

기다렸다는 듯이 유르딘의 답변 또한 곧장 튀어나왔다. 레인은 유르딘의 머리칼을 헤집던 손을 내리며 뺨을 어루만졌다. 조금 경직됐지만 안심한 얼굴이 손끝에 만져진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네가 나에 대해서 단 하나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그리 대답하기를 바랐어.”

조심스레 말하는 유르딘을 물끄러미 보던 레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똑같은 생각. 상대의 애정 한 톨 놓치고 싶지 않은 탐욕. 제 욕망이 적나라해 치솟았던 수치심이 사라지고 같은 감정을 지녔다는 안도감이 차오른다. 더는 애정에 허기지지 않은 속이 더더욱 넉넉하게 불러온다.

레인은 나지막이 한숨 쉬며 유르딘에게 몸을 기댔다.

“사실 조금 전에 유니에게도 물어봤어요. 차라리 라인셀에서 있던 기억을 지우고 새로 출발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요.”

“그 애는 지우지 않겠다고 했나?”

“네. 괴로운 기억이라도 제 기억이니 갖고 있겠다고 하더라고요.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잊어버린다면 또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요. 저는 며칠이나 고민했는데, 그렇게 단숨에…….”

레인은 유니가 무언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부당하게 고통받는 사람을 봤는데, 고통을 주는 상대가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제 가족이다. 아직 가족이 전부일 나이에 그 어린애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울음 섞인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레인은 뒤에 이어질 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제 안위에 대한 게 아닌, 아버지나 아나벨, 레스터에 대한 구명을 원하는 말들. 레인이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유니는 훌쩍이며 입을 다물었다. 애써 죄송하다 말한 유니는 눈물을 닦으며 의연한 척 굴었다. 덕분에 유니와의 마지막은 조금 씁쓸함이 남았지만, 최악으로 마무리 짓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애도 대단한 것 같아요. 거기 가서도 분명 잘 살겠죠.”

레인이 잊지 않기로 한 건 유니와는 다른 이유였다. 생각 같아서는 모두 다 잊어버리고 싶지만, 유르딘에 대한 것까지 잊고 싶지 않았을 뿐. 누군가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자신에 비하자면 유니가 훨씬 더 강해 보이기도 했다.

“전 약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있으니까 잘 살 수 있겠죠.”

“애초에 너는 약하지 않아. 오히려 대단해.”

틈도 없이 유르딘이 곧장 반박했다.

“위로해 주실 필요 없어요.”

“빈말이 아니야. 전에도 말했지, 너는 강하다고. 나는 놈들을 최대한 잔인하게 죽일 생각만 했는데 너는 선을 넘지 않고 멈췄고, 심지어 누군가를 살리기까지 했어. 최소한 나보다는 훨씬 강하지.”

“별거 아닌데요. 전 언제나 무를 뿐이에요. 단호한 건 말뿐이죠. 당신에 비하면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렇지 않아. 나는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조차 대단히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겪은 일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웠어. 엇나가지 않고, 네 삶을 포기하지도 않고 살아온 것은 대단한 거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삶을 부정당한 채 멸시와 모멸을 받으면서도 레인은 증오를 멈출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유르딘은 오히려 레인이 왜 자신을 과소평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날 의지해 주는 것은 기쁘다만……. 자신을 가져, 레인. 너는 네 생각보다도 훨씬 대단한 사람이다. 내가 전쟁터를 누비는 동안 너 또한 네 전장에서 싸운 거야. 그때 치열하게 싸웠기에 지금의 네가 있는 거고.”

유르딘의 설득은 필사적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인은 말이 끝나고도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까지 산 건 유르딘 덕분이에요.”

“나는 아무것도 못했어. 네가 힘들 때 아무것도…….”

“여섯 살에 죽어 가던 저를 살린 것도 유르딘. 힘들어서 죽고 싶을 때마다 생일 선물을 보내 축하해 준 사람도 유르딘. 정말로 자살하려고 했을 때 저를 멈춘 게 유르딘이 보낸 편지였어요. 절 살린 건 당신이에요. 그 편지를 받은 이후로는 당신을 한 번이라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살았어요. 왕국의 영웅, 정의롭고 명예로운 기사 유르딘 니제스.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죽도록 노력하며 엇나가지 않도록 살았어요.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추억에 잠긴 부드러운 미소가 레인의 만면에 떠올라 있다. 제 괴로운 기억을 지우면 그 순간 느꼈던 감정들도 빛이 바랜다. 레인은 그제야 기억을 지우지 않은 게 옳은 선택일 수 있으리라고 완벽하게 확신했다.

“당신이 저를 살린 거예요.”

유르딘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유르딘의 안에는 레인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 있다. 설득하는 대신 레인은 말의 방향을 틀었다. 유르딘을 다루는 방법이야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기쁘지 않아요? 제가 당신 덕분에 살아 있다는 게.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게요.”

“기뻐.”

“전 이제 저와 당신을 위해서 살 거예요. 유르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괴로운 것들은 잊어 갈 때도 되었잖아요.”

“……그래.”

조금 느릿하지만 확신을 품은 채 유르딘이 대답했다. 레인의 복수는 끝났다. 이제는 실체 없는 복수에 매달려 레스터의 기억을 통해 봤던 것과 같은 고문을 카이렌에게 행하는 것을 진심으로 원치 않는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유르딘을 위해서다. 이제는 복수에서 멀어져 사람의 눈을 피해 어두운 골목으로 숨어들던 기억에서 벗어나 빛이 깔린 대로를 걷길 바랐다. 그리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고 나서야 레인은 안심했다.

유르딘에게서 조금 물러난 레인은 침대 옆에 누웠다. 그대로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리자 유르딘은 조금 망설이다가 냉큼 코트만 벗어 던지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레인은 옆구리를 내어준 유르딘의 품 안으로 들어가 몸을 기댔다.

“아까 말하다 보니까 생각났는데……. 저 이제 곧 생일이에요.”

“알고 있어.”

유르딘이 낮게 신음했다.

“깜짝 선물을 해 줄까 했는데…….”

“이대로도 충분히 기대하고 있을게요. 선물, 태워서 죄송해요. 앞으로는 다시 소중히 간직할게요.”

레인은 유르딘을 끌어안았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레인은 눈을 감았다. 유르딘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마음에 안 들면 버려도 괜찮아. 새로 사 줄 테니까.”

“아니, 그런 못된 짓을…….”

“내가 네게 뭔가를 주는 게, 네게 일상적인 게 되어서 더는 특별하지 않을 때까지 계속 선물할 테니까.”

“그건 좀 좋네요.”

웃으며 긍정했지만, 레인은 유르딘이 주는 건 무엇이든 소중하게 간직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저 꽃 한 송이를 꺾어 주더라도 그 아름다운 색과 향과 마음은 가장 소중한 책에 끼워져 한 페이지를 장식한 채 오래도록 이 세상에 남을 것이다. 레인이 살아 있는 한은 계속해서, 영원에 가깝게.

유르딘이 레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고갯짓을 따라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첫눈이 내리고 있는 하늘이 보였다. 새카맣게 물든 하늘에 새하얀 눈송이가 하늘하늘 바닥으로 떨어진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유르딘이 레인을 조금 더 제게로 잡아 끌어안았다. 온 세상에 겨울이 내렸기에 감겨드는 온기는 더더욱 특별하다. 저를 지켜 주는 온기에 둘러싸인 채 레인은 제 안에 쌓인 수많은 기억을 돌아보았다.

괴로운 시간을 건너며 수많은 애정과 고통과 희망들이 지금의 레인을 쌓아 올렸다. 절망의 기억을 딛고 섰기에 레인이라는 인간이 완성됐다.

“고마워요.”

작게 중얼거리며 레인은 유르딘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이내 손등을 보이던 손이 뒤집히고 레인의 손을 마주 꽉 잡았다.

부서지고 망가진 채 필사적으로 서로의 손을 잡았다.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에게 기대어서 나는, 우리는, 함께 완전해진다. 마침내 홀로 설 수 있는 용기를 얻어 함께 걸어 나간다. 눅진하게 눌어붙은 불행이 기억 속에서 사그라지고 마침내 더는 기억 외의 의미가 없어질 때까지, 이후로도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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