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당신과 나의 마법
깊은 새벽, 시종일관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가 잠든 유르딘이 일어나는 소리에 레인은 눈을 떴다. 뭔가 끝까지 하진 않았으니 몸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지쳐서 유르딘이 떠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잠결에 유르딘을 배웅한 레인은 아침까지도 늘어져 있다가 간신히 마차에 올랐다.
유르딘이 가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 떨어졌지만 지난번에 같이 떠들었던 덕에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최소 유르딘보다 동년배이거나 그보다 나이 많은 수하들은 유르딘이 가고 나서는 오히려 더 레인을 정중히 대우했다. 여행은 평탄했다. 레인 한 사람만을 호위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수의 인재들이었다. 어려움 없이 수도 근처에 도착한 레인은 지스킬을 만날 수 있었다. 곧장 지스킬에게 달려간 레인은 그의 온몸을 살폈다.
“지스킬! 괜찮아?”
“난 완전 괜찮은데.”
“뭘 또 완전 괜찮아. 붕대나 풀고 말해.”
지스킬은 머리와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으나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 무사하단 말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레인이 큰일을 겪는 사이 수도에서도 많은 일이 차근차근 해결되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은 제법 큰 소란을 불러왔으나 생각보다 간단하게 마무리되는 중이었다. 몇몇이 심한 상처를 입었으나 사상자는 없었고, 귀족들은 치료하면 낫는 상처에 그친 터라 큰 여파는 없었다. 왕국이 전력으로 범인을 추적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데다가 하필 운 나쁘게 카니예의 잔당으로 보이는 무리가 다른 소란을 일으켜 주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레인은 왕을 알현했다. 일단 왕명으로 긴급 소환된 것이니 당연한 절차였다. 리처드 알쳄 아그리스, 서른 살의 젊은 왕은 최근의 소란 탓인지 낯이 푸석했다. 보좌관에게 자료를 건네받은 왕은 사정을 알고 있으니 돕겠다는 의사를 선뜻 내비치며, 형식상의 조사만 할 예정이니 긴장하지 말고 성에서 편히 쉬다 가라고 말했다. 공적인 이야기가 끝나자 왕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이제부터는 사석이니 조금 편하게 있게.”
리처드는 권위적인 왕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젊은 귀족들과도 제법 친하게 지내는지라 대하기 어려운 자는 아니었다. 가까이 지내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푸석한 낯에 서서히 밝은 미소가 돈다. 밝다고 해야 할까, 레인에게 지대한 흥미를 보이며 실실 웃는 얼굴이 무언가 불길했다.
“흠, 자네가 그 렘샤이트 후작의…….”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레인을 쳐다보는 왕 때문에 레인은 진땀을 흘렸다. 올해 서른 살의 왕에게서는 장난기가 넘쳐흘렀다.
“공자가 아니라 영애였다면 왕실의 일원으로 들여서 후작과 결혼시키는 건데 말이야.”
“죄송합니다만, 전하. 대체 어디까지 아시는 것인지요?”
“알 만큼? 뭐, 렘샤이트 후작이 오로지 자네를 위해서만 움직이는데 계획을 모조리 들은 짐이 모르는 게 이상하지.”
히죽히죽 웃던 왕은 소파에 몸을 묻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짐이 아닌 그대를 위해서만 움직인단 건 조금 불안한 일 아닌가. 후작의 오러는 성채를 갈랐어. 그건 즉, 그가 마음먹으면 짐이 있는 왕성 또한 단칼에 갈라 버릴 수 있다는 뜻 아닌가?”
“…….”
틀린 말은 아니었다. 또한, 레인이 보기에, 유르딘은 레인이 걸린 일이라면 반역도 불사할 것만 같았다. 왕은 아이제나흐 공작이나 다른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유르딘에게 힘을 실어 줬지만, 자칫하면 그 힘이 왕을 향할 가능성도 있었다. 레인이 긴장하자 왕은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 없네. 정말로 진지하게 염려했다면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겠지. 다만 짐이 그런 걱정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달라는 말일세. 후작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게 자네인 것 같아서.”
심각한 상황인데도 뺨이 달아올랐다. 대체 얼마나 노골적으로 행동했으면 저렇게까지 말한단 말인가. 하긴, 레인을 구하겠답시고 왕을 끌어들여 왕명을 전한 것부터가 노골적이긴 했다. 레인은 붉어진 얼굴을 숨길 겸 고개를 숙였다.
“저는 언제나 라인셀의 영원한 영광을 바랄 뿐입니다.”
“그래. 다만, 조금 더 확신하기 위해 짐은 자네에게도 제안하고 싶을 뿐이야. 이야기는 이미 들었겠지? 짐은 후작과의 공통의 목적을 위해 앞으로도 후작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네. 게다가 공작은 여러모로 성가셔서 말이지. 게다가 레스터 아이제나흐에 이르면……. 그런 미친놈이 공작이 되면 왕국이 어찌 되겠나? 미치광이 살인마 놈.”
왕이 혀를 찼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귀족이 평민을 함부로 죽일 수 없도록 법이 선 이후로도 권력의 상하 관계를 이용해 평민을 찍어 눌러 살해하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귀족이 평민을 살해했을 경우에는 대부분 무엇이든 살해당한 평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거나, 죄를 뒤집어쓸 다른 사람을 구해서 처벌을 피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살해당하는 평민의 수가 많을 것 같지만, 정도가 심해지면 귀족 사회에서도 손가락질을 받고 최악에는 누군가에게 꼬투리가 잡혀 처벌받기 때문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더욱이 레스터의 경우는 치정이나 제 이익을 위해, 또는 한 순간의 분풀이를 위해 평민을 살해하는 자들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누군가를 제 흥미 본위대로 고문하고 죽였다. 연쇄 살인마나 다름없는 이가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를 지닌 가문의 공작이 되면 이를 어찌 바로 잡겠는가? 왕은 통탄했다. 그러나 레스터는 아이제나흐다. 어중이떠중이와는 달랐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권세가 지금처럼 강력해서는 절대로 레스터를 건드릴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카데미를 건드릴 줄이야. 불태워 봤자 변변찮은 소득은 없고 잘못했다가는 덤터기만 쓰게 될 텐데. 제 아들이 미치니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도 당황스러운 모양이지.”
왕은 씩 웃었으나 이내 생각에 잠겼다. 제정신이라면 아카데미를 불태우는 짓은 하지 않는다. 아직 젊은 귀족들이 모인 아카데미는 상징성만 있고 실질적인 힘은 없어서 공격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물론 왕에게는 그게 레인을 손쉽게 빼돌리기 위한 공작임을 설명하지 않았다. 굳이 약점이 될 수 있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레인이 신중하게 침묵을 지키는 사이 생각을 끝낸 왕이 몸을 바로 세웠다.
“어쨌든 자네도 한배를 탄 게 아닌가? 성공적으로 공작을 치워 버리면 자네에게 공작가를 주지. 아이제나흐의 이름을 잇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베델 후작가의 명예를 씻고 승작시켜 베델 공작 위로 물려줄 수도 있어. 재산과 영지만 받아도 괜찮네. 물론 기존 아이제나흐 공작가가 지닌 몇몇 특권이나 사병, 공작이 뒤에서 쥐고 있는 불법적인 거래망 같은 건 줄 수 없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그 정도로도 왕국에서 손꼽는 가문을 유지하는 데는 충분할 걸세.”
지나치게 파격적인 제안이라 오히려 떠보는 게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
“그런 것을 약조하지 않으셔도 전하께 거스를 생각은 없습니다.”
“짐도 딱히 자네가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말했지? 이건 제안이라고. 배신하지 못하게 할 탐스러운 미끼이기도 하지만, 이건 자네를 위한 투자일세. 짐은 인재를 좋아해. 선왕의 낡아 빠진 방식에만 몰두하는 늙은이들을 치워 버리고 왕국에 젊은 피를 수혈해야만 해. 공자는 몸은 약하지만 훌륭한 재원이지. 먼 미래까지 보는 거야.”
흘긋 본 왕의 눈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하긴, 왕과 유르딘의 계책이 세워진다면 왕국에서 가장 큰 공작가가 무너진다. 그러면 아이제나흐가 지닌 영지도 통째로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레인은 베델 후작가의 누명만 벗는다면 완벽한 후계자라고 볼 수 있었다. 그가 공작 위를 물려받는다면 아이제나흐의 기반이 흔들릴 일도 없이 모든 게 깔끔하게 해결된다. 레스터를 지지하던 자들이야 흔들릴 수 있겠으나 어차피 딜란이 무너지는 순간부터 잡음 없이 깔끔하게 공작가를 분배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후에 아이제나흐 공작가를 장악하는 건 레인의 재량이다. 왕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장악에 성공하면 강력한 힘을 지닌 새로운 아이제나흐 공작을 심복으로 얻을 테고,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한쪽으로 쏠린 권력을 재분배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지금보다야 낫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스스로 고난을 이겨 낼 힘이 필요했다. 애초에 힘이 있었더라면 매번 습관처럼 체념하고 맥없이 끌려가서 모진 일을 당할 필요도 없었다. 왕과 손을 잡고 나니 한시름 놓였다. 사건의 참고 조사라며 레인을 불러들인 왕은 개인적인 초대라는 명목으로 레인을 왕성에 며칠 더 묶어 두었다. 아카데미는 화재로 탄 걸 복구하고 안전을 강화하는 동안 잠시 휴교 중이었고, 레인은 꼼짝없이 공작가로 돌아가야 할 처지였기 때문에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물론 공작가에 가면 상황 파악은 더 쉽겠지만 유르딘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돌아가는 건 호랑이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괜한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왕은 이번 일을 핑계 삼아 요양을 떠난 유르딘을 자연스레 불러들일 거라고 했으니, 곧 올 그와 함께 조사해 봐도 늦지 않았다. 유르딘이 없을 때는 그 없이 할 일을 끝내 두면 된다.
아카데미가 수리되고 다시 수업이 재개되기 하루 전, 레인은 곧장 아카데미로 향하는 대신에 디프랑 후작가로 향했다. 성에 머무르는 동안 마법을 배우기 위해 도서관을 뒤졌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물론 왕궁에도 마법사들은 존재하지만, 그들이 지닌 자료는 기밀 취급을 받기에 공개된 도서관에 놓여 있지 않았다. 마법에 대한 자료만 따지자면 디프랑 후작가가 보유하고 있던 장서의 질이 더 좋았다. 배우는 것도 배우는 거지만, 레인이 알아보고 싶은 마법은 옛 시대에 제 몸뚱이만을 사용해 자유자재로 마력을 움직여 기적을 만들어 내던 진짜 마법이었다. 기적은 왕궁보다 디프랑 후작가가 더 가깝다.
에일리야 디프랑. 150년 전에 마력 결핍증을 앓았던 사람. 마력 결핍증을 치료했으나 저택에서 몸을 던지거나 갑자기 마법 따위를 조사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사람. 공통점이 없지 않다. 무언가 두 사람의 행동이 연관이 없을 리 없었다. 확신을 하고 디프랑 후작가에 도착한 레인은 미리 마중 나와 있던 디프랑 후작 렌피르를 보고 조금 당황했다. 미리 간다고 연락은 해 뒀지만, 렌피르가 미리 나와서 기다리는 정도의 성의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후작님.”
“오랜만이군요.”
“기다리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시간이 남았는데 마침 온다고 했던 게 생각이 나서요.”
말하는 내내 디프랑 후작의 시선은 레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중한 후작의 안내를 받으며 레인은 곧장 에일리야의 방으로 안내됐다. 전에 받은 열쇠가 아카데미에 있는지라 후작이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레인이 잠시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무언가 기묘한 감각이 레인의 신경을 거슬렸다. 그러나 찰나였으므로 레인은 후작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편히 보세요.”
후작은 희미하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레인은 방을 죽 돌아보았다. 책을 보호하기 위해 조금 짙은 색 커튼이 쳐져 있는 방 한가득 온갖 책들이 가득 쌓여 있다. 저번과 같은 풍경이다. 같은 풍경인데도 계속해서 무언가가 레인의 신경을 거슬렸다. 그러니까 저쪽에, 무언가가 쳐다보는 듯한데. 자각한 순간 시선이 강렬해졌다. 레인은 시선이 느껴지는 쪽을 돌아보았다.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평범한 벽일 뿐인데.
다가가서 벽 위에 손을 얹었던 레인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벽이, 아니 벽인 줄 알았던 곳이 물에 녹듯이 스르르 흐려지며 비밀 계단이 드러났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계단은 시커먼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저번에도 이런 게 있었나? 잠시 망설이던 레인은 계단 위로 발을 올렸다. 발을 올린 순간 주변이 밝아졌다. 한 계단 더 올라가니 올라간 만큼 밝아진다. 세 칸을 올라갔을 때, 계단 끄트머리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누군가를 부르는 대신, 레인은 곧장 계단을 올랐다. 좁은 계단 끄트머리에 서자 새카만 색의 문이 레인을 가로막았다. 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문은 잠겨 있지 않다. 뒤는 어느새 어두워져 새카만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망설임은 짧았다. 천천히 문고리를 쥐고 돌리자, 부드러운 빛이 레인에게로 쏟아졌다.
안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나이가 짐작 가지 않을 정도로 늙은 여인이었다. 피부는 매끈한 곳 하나 없이 자글자글한 주름과 검버섯으로 뒤덮여 있었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으나 그조차도 힘들어 보였다. 레인을 보고 희미하게 웃어 보인 노파가 숨을 골랐다. 레인은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노파와 노파 주변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노파가 기다리고 있던 방 안은 계단 아래에 있던 방 이상으로 기묘한 분위기였다. 방 한가득 채워진 수많은 고서적과 수정구, 바싹 마른 채 늘어진 덩굴 식물은 평범한 축에 속했다. 한낮인데도 방 안은 희뿌연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머리 위로 난 창에서 충분히 햇빛이 들어올 만했으나 무언가 막에 투과된 것처럼 바닥에 닿는 빛은 흐렸다. 단지 부족한 빛뿐만이 아니라 이 방의 분위기 전체가 무언가에 짓눌려 숨죽이듯 고요했다. 그러나 바닥에 그려진 정체불명의 무늬들만은 간간히 오색찬란하게 빛나며 생기가 일었다. 노파가 앉아 있는 소파는 언뜻 보면 평범했으나 아래 다리가 크리스털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안쪽에서 푸른 불길이 일었다.
기묘한 방 안과 노파를 차례로 둘러본 레인이 입을 열었다.
“에일리야… 디프랑?”
확신 없는 추측이었으나 칭찬하듯이 노파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처음 보는구나. 보고 싶었단다.』
에일리야는 입을 열지 않고 말했다. 또렷한 목소리가 머리에 직접 울렸다. 마법의 힘임을 이해하기도 전에 실감했다. 레인은 얼어붙은 채로 150년 전에 태어난 노파를 바라보았다. 현 시대, 인간의 평균 수명은 60세 언저리였다. 영유아 사망률이 낮고 병에 걸려도 치료하기 쉬워 평민보다 수명이 긴 귀족도 평균 수명은 고작 70세 근처였다. 자신이 말해 놓고도 믿기지 않게 눈앞의 노파가 정말로 에일리야라면 그녀는 평범한 사람의 두 배를 산 셈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레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에일리야가 부드럽게 웃었다.
『라시아를 많이 닮았구나. 그래, 슈리아 그 애가 라시아를 닮았었지.』
언뜻 들어서는 기억 속에서 떠오르지도 않는 이름은 레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외조모의 이름이었다. 레인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어머니를 아세요?”
『한 번 본 적이 있어. 그 애가 어릴 때 한 번……. 무척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너처럼 말이다.』
레인은 다정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노파는, 피가 섞여 있지 않은 머나먼 친척은 정말로 그리운 얼굴로 다정함과 상냥함을 담아 레인을 바라보았다.
『근처로 와 보련? 손을 잡고 싶구나.』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레인은 에일리야에게 다가가 주름진 손바닥 위에 제 손을 포갰다. 에일리야의 손에 미약한 힘이 들어가며 레인의 손을 맞잡았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에일리야는 힘겨운지 몸을 벌벌 떨었으나 레인을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잠시 그렇게 레인을 매만지던 에일리야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진작부터 너를 만나고 싶었어. 그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든 너를 빼돌렸을 텐데.』
“그자라니요?”
짐작 가는 바가 있었으나 에일리야가 말하기 전까지 섣불리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비현실적인 공간이 현실감을 흩트려 놓기는 했으나 분위기에 홀리지는 않았다. 눈앞의 에일리야는 진짜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나 제 맘대로 얼굴을 바꿔 가며 레인의 곁을 머무는 미엘의 존재를 안 이상 제 감을 섣불리 믿을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가 진짜 에일리야 디프랑이라고 해도 그녀가 레인의 편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에일리야는 베델 후작가와 가족이 됐으니 레인의 먼 친척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혈연이 얼마나 가벼운지는 레인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 지경이었다.
『글쎄, 어디부터 말해야 좋을까……. 이야기가 길어지겠구나.』
레인의 그런 의심을 훤히 들여다보듯 에일리야의 깊은 눈이 레인의 얼굴 면면을 살폈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 태도로 에일리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신뢰하지 않는 레인의 앞에서 너무나 손쉽게 제 패를 늘어놓았다.
『짐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마법사야. 사실 고대의 마법사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해서, 마법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지. 원래대로라면 마력을 느끼고 제어하는 건 꿈도 못 꿨겠지만, 내가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건 내 몸에 마법이 새겨졌기 때문이란다. 다른 사람이 새긴 마법이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력을 사용했으니까. 나는 처음엔 내가 마법을 쓴 줄도 몰랐지.』
마치 레인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처럼, 익숙한 말이었다. 에일리야는 동의를 구하는 사람처럼 레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레인이 대답하지 않아도 에일리야는 목소리를 이어 갔다.
『그 마법이 발동하는 순간, 마력은 내 몸 안을 날뛰고, 그렇게 마력에 익숙해져 갔지. 남들보다 마법사가 되기 쉬운 조건을 부여받은 거란다. 이걸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나는 그럴 수 없었어.』
그늘진 에일리야의 얼굴이 몹시 침통했다.
『죽음이 다가온 마지막 순간, 강제적인 부활을 꾀하는 대마법. 그게 내게 걸려 있어. 내가 새긴 마법은 아니지만, 내 몸에 새긴 마법이니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내 마력을 써야만 했지. 물론, 나는 대단한 마법사가 아닌지라 견디기 힘들었단다. 몸속에 있는 내 마력을 모두 쥐어짜도,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내 생명을 구성하는 마력마저 쥐어짜도, 대마법을 발동시키는 건 한 번조차 힘들었어. 병은 나았지만, 아버지가 마력 결핍증의 치료법을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결국은 오래 살지 못했을 테지. 나는 내게 닥쳐 온 이상과 기묘한 주변 환경을 추적해 내게 마법이 걸린 걸 알아냈고……. 사람들이 기인이라고 하는 말들을 무시하며 마법에 대해 끈질기게 알아내어 마법사가 됐지. 그 후로는 마력을 늘릴 수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먹어 치우며 마력을 늘렸어. 그런 식으로 죽을 때마다 되살아나며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말했듯이 나는 약하고 한계가 있어서……. 이렇게 끝이 오고 있는 거란다.』
어둠에 둘러싸인 얼굴을 음울했고 동시에 비통했으나 반면에 묘한 해방감이 깃들어 있었다. 레인은 그녀가 죽음을 기꺼이 여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때가 되면 죽음을 맞는 자연의 섭리를 비틀어 가며 에일리야는 남들의 배나 장수했다. 누군가는 그걸 부러워할지도 모르겠으나 최소한 에일리야는 제 기나긴 삶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는 게 분명하다. 오히려 에일리야는 기나긴 삶을 연명한 자기 자신을 희미하게 혐오하고 있었다. 끈질긴 자기혐오를 품었던 건 레인도 마찬가지라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레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 세지 않은 레인의 힘으로도 세게 쥐면 으스러질 듯이 연약한 노파의 손을 억압하지 않기 위해 손을 빼냈다. 힘이 들어간 주먹이 새하얗게 질렸다. 목 안이 까끌까끌했다.
“……대체 누가 당신에게 마법을 새겼단 말인가요?”
『궁금한 건 그것만이 아니지 않니? 마법은 네게도 걸려 있단다. 모르고 있는 얼굴은 아니구나.』
안쓰러워하는 목소리가 부드럽게 레인을 간질였다.
『평생을 함께해 온 마법이니 알 수 있어. 지금 너는 마력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구나. 최근 마법을 썼니? 어떻게 깨쳤니? 너는 나 따위와는 비교되지 않는 강력한 마법사의 자질을 가진 걸 테지. 그런 마력을 갖고 마력 결핍증을 앓게 될 정도로 마력을 잃었다니……. 대체. 네 재능이 어쩌면 네게는 불행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여러모로…….』
모난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심처에 도사리고 있다가 표면 위로 들끓으며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레인이 인내에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입 밖으로 말을 토해 냈을 것 같다. 자신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불안한 증오와 원망 따위를.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에일리야의 마력이 어루만졌다.
『내게는 내 어머니가, 그리고 네게는 아마 네 어머니가 건 마법이겠지.』
“어머니가 마법사였다는 말인가요? 어머니는 그럼……!”
『아마 네 어머니는 마법사가 아니었을 거야.』
곧장 부정한 에일리야의 목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내 어머니가 마법사가 아니었듯이, 네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누군가를 죽음에서 되살리는 마법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마법이지. 마법을 새긴 건 다른 이야. 네 어머니는 그저 제 삶의 끄트머리에서조차 제 목숨이 아닌 단 한 가지만 바랄 정도로 필사적인 소원을 품은 사람이었을 뿐이란다.』
“소원이라니…….”
절대 잊을 수 없는 경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기억과 꼭 같은 모습을 한, 익숙한 이야기였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떠올리던 한 사람의 모습. 레인은 마지막까지 단 한 사람이 자신을 돌아봐 주기를 소망했다. 이루어지기 불가능한 소망은 기적이 일어나 시간이 되돌아온 덕에 이루어졌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어. 매개체는 제 주인의 죽음에 반응해, 생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단다.』
“어머니는… 제게 독을 건넸어요. 저와 함께 죽기 위해서…….”
『답을 이미 알고 있잖니?』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 위로 잔뜩 혼란스러워하는 레인의 얼굴이 비쳤다.
어머니는 앞으로 이어질 삶에 절망하고 미래를 부정했다.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단정 지으며 레인에게 독을 건넸다. 어린 레인은 사랑받고 자란 아이였다. 제게 쏟아지던 애정이 모조리 사라지고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어딘가 서늘한 시선을 보내는 순간, 무언가 틀렸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독을 뱉었고, 결과적으로 죽은 건 어머니뿐이었다.
사람의 행동이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진실한 소망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갈림길이 나타나고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를 모른 채 섣부른 길을 향했다가, 제 선택을 후회하고 나서야 자신이 진정으로 깨닫던 바가 아님을 알아차린다. 때로는 실패했기 때문에 제 선택이 옳지 않았던 일이라고 부정하기도 한다.
슈리아는 레인에게 독을 먹인 걸 후회했다. 제 어린아이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순간, 자신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혹은 후회했기에 제 선택을 부정하고 싶었다. 레인이 죽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랐다.
레인은 질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숨이 끊어지던 마지막 순간까지 독에 죽어 가며 고통에 몸을 비틀면서도 레인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레인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그 모습뿐이었다. 초상화는 모조리 불태워지고 유품도 값나가는 대부분을 빼앗겨 추억할 물건조차 거의 없었다. 충격을 받아 앓고 깨어난 후로는 어머니와 함께한 즐거운 기억조차 흐려졌다. 검은 피를 토해 내면서도 어머니는 레인에게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어머니가 왜 레인에게 손을 뻗었는지는 몰랐다. 혼자 살아남는 레인의 어리석음을 꾸짖기 위함인지, 마저 독을 먹이고 싶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슈리아가 레인을 살리기 위해 움직였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어렴풋이 부정적인 사고만을 추측할 뿐이었다.
“아…….”
천천히 레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눈물이 차올라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진다.
아버지에게 버려졌다. 어머니에게조차 버려졌다. 레인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오직 유르딘뿐, 그러나 그도 레인을 구하지 않는다. 17년의 세월 동안, 레인은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익숙한 고독에 시달렸다. 부모에게조차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비참한 삶.
그런 비참한 삶이 아니었다. 슈리아는 소망으로 레인에게 마법을 새겼다. 슈리아의 진실한 소망과 레인의 마력이 마법으로 엮인 결과물이 바로 이 자리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레인이었다. 비록 그 결과물로 레인이 수없이 고통받았다고 해도, 모욕을 뒤집어썼다고 해도, 슈리아가 레인이 살아남기를 원한 마음만은 더럽혀질 수 없다. 뿌리로부터 부정당한 목숨이 아니다. 간절한 소망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아 누군가의 삶의 목적이 된 목숨이었다. 그저 죽어 사라져도 좋을 때와는 전혀 다른 묵직한 무게감이 아득하다.
에일리야의 마력이 부드러운 바람이 되어 레인의 눈가를 스쳤으나, 눈가는 마르기는커녕 계속해서 치솟는 눈물에 축축하게 젖어 갔다. 레인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는 레인을 묵묵히 기다려 주던 에일리야는 인자한 눈이었으나 그럼에도 조금 부끄러워졌다.
“죄송합니다. 조금…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
『아니야, 이해해. 그럴 만도 하지.』
흐르던 바람이 레인의 눈가를 스치고 눈물을 닦아 냈다.
『슈리아가 매개체의 존재를 알았는지는 모르겠구나. 아마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알았다면 그 전까지 멀쩡했던 네게 그런 마법을 걸 리는 없을 테니까.』
“당신은… 매개체니 뭐니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알았나요?”
『의심과 의혹, 그리고 집요함이지. 나는 어머니가 나만 두고 죽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든.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 돈도 정보도 많았으니까 어떻게든 알아냈단다. 마법과 매개체에 관한 것들.』
이미 사장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부터가 어마어마한 업적이지만, 에일리야는 조금도 기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최초의 목적, 떠오른 의심을 지워 내지 못했거나 어떤 식으로든 해소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매개체는 보통 지니기 쉬운 장신구의 모습을 하지. 혹시 떠오르는 물건이 있니?』
“설마 그 목걸이…….”
듣자마자 떠올랐다. 어머니의 유품. 값나가는 물건은 모조리 빼앗겼으나 목걸이만은 레인이 끝까지 지니고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기 전에는 북방까지 가져갔던 물건이지만, 지금은 불길과 함께 사라진 물건이다. 다름 아닌 미엘의 손에 의해.
『본 적이 있니?』
“어머니의 유품이에요. 제가 갖고 있었는데…….”
『그럼 아마 그게 맞을 거야. 보여 줄 수 있겠니?』
“지금은 사라졌어요. 누가 이제 쓸모없는 물건이라면서 난로에 던져서 태워 버렸는데…….”
혹 에일리야가 미엘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려던 레인은 상상 이상의 격한 반응에 입을 다물었다. 충격을 받은 에일리야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당장에라도 쓰러져 죽을 법한 몸으로 거칠게 숨 쉬는 모습이 아슬아슬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말도 안 돼. 그건 쉽게 부술 수 있는 게 아닌데, 게다가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소원을 빌지도 않았는데 대체 왜 불태우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설마 내가 지금까지 다 틀렸나?』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생각 위로 파격적인 사실이 던져져 생겨난 파문 때문에 지독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레인은 당황한 에일리야를 붙잡았다.
“그건 아마 제가… 소원을 빌어서 그런 걸 거예요.”
『매개체는 죽는 순간에만 소원을 이루어 준단다. 네 경우에는… 부활의 마법이 걸려 있으니, 최후의 순간에야 매개체가 발동하겠지.』
“그게 제가… 죽었었거든요.”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으나 레인은 에일리야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허무맹랑한 비밀이니 누군가에게 발설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터였다. 레인은 회고하듯이 과거의 일을 늘어놓았다. 과거, 아카데미 졸업 전까지 끝나지 않은 전쟁 때문에 북방으로 향했다가 그곳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으며, 눈을 떴을 때는 지금의 시간대였다는 점까지. 아무리 그래도 유르딘과 관련된 부분까지 모두 털어놓는 건 망설여졌기 때문에, 유르딘과 관련된 부분은 조금 모호하게 설명했다. 집중해서 설명을 모두 들은 에일리야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렇구나……. 이런.』
에일리야가 피로한 얼굴로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떨어지는 목소리는 굳게 다물린 입술과 정반대로 곧장 이어진다.
『마법은 누가 가르쳐 주었니? 혹시 네 목걸이를 태운 자가 가르쳐 주었니?』
“아니요. 저는… 마법을 배운 적이 없어요. 딱 한 번 써 봤을 뿐이에요.”
『배우지도 않고? 어떤 마법을 썼는데?』
“그게, 언령 마법을…….”
눈을 감고 있던 에일리야가 다시 눈을 떴다. 거듭 놀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노파를 무리시키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될 정도다.
『언령 마법이라고. 정말로? 그건 고대의 마법사들도 쉬이 쓸 수 없는 마법이란다. 착각한 건 아니니?』
“저는 마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제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냥 그 순간에 절박했을 때 바라던 바가 이루어졌을 뿐이니까……. 게다가 그 순간에는 이게 언령 마법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짐작한 것뿐이니, 착각일지도 모르지요.”
『그럼 맞는 것 같구나. 언령 마법은 내가 넘볼 수 없는 마법이라 시도조차 해 본 적이 없어서…….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니.』
“저도 그냥, 정신 차려 보니 마법이 발동한 후라서……. 제가 원하던 것을 이룬 후에는 마력의 잔해를 조금 움직여 공격을 하기도 했어요. 공격한 상황… 까지 설명하기는 조금 곤란하지만요.”
에일리야가 진이 빠진 얼굴로 ‘굉장한데’ 하고 중얼거렸다. 아까 전의 경악조차 잊은 순수한 감탄이었다.
『너를 봤을 때부터 네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사실은 알았단다. 대부분의 마법은 마력을 엮어서 그걸 구현해 내는 것까지가 하나의 과정이며 모두가 지극히 까다로워. 그 과정을 모조리 무시하는 언령 마법은 굉장한 거야. 게다가 마력의 잔해를 마법을 배우지도 않은 네가 움직였다는 건, 운용력도 어마어마하게 좋다는 건데…….』
“그게 중요한 건가요?”
『중요하지. 애초에 마법은 마력이 많다고 다가 아니란다. 네가 호수만큼의 물을 갖고 있지만 컵으로만 물을 퍼낼 수 있다고 생각해 봐. 보잘것없지 않니? 마력의 운용력이 좋다는 건 호수의 물을 컵으로 퍼내는 게 아니라 수로를 뚫어서 자유자재로 물을 다루는 격이지. 여러모로 축복받은 재능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 굉장히 대단한…….』
에일리야의 목소리는 마법으로 전달되는 것이었고, 그 때문인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금 에일리야의 목소리는 온통 열망으로 들떠 있었다. 그저 순수한 열망이라기에는 진득한 집념과 한마저 서린 눈빛이 번뜩였다.
『너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뭘 말인가요?”
『마법을 배우지 않겠니, 레인?』
마법을 배우려면 뭘 내어주고 거래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찰나에 반가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대가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다.
“가르쳐 주신다면야 감사하지만……. 오히려 제가 부탁하고 싶을 정도인걸요. 하지만 뭐가 가능하다는 말씀이신지요?”
대체 무얼 바라고 레인을 기다렸으며, 이렇게 원하는 설명을 늘어놓고 마법까지 가르쳐 준단 것인지가 궁금했다. 에일리야는 레인을 똑바로 응시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작은 숨소리를 대신에 마법이 레인의 머릿속을 채웠다.
『내게는 복수이고 네게는 안정적인 삶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까.』
복수를 입에 올리면서도 에일리야의 태도는 지극히 차분했다. 천천히, 최초의 시발점부터 에일리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법의 시대가 갑작스럽게 저물며 천사도 악마도 이 세상에서 모조리 사라졌단다. 자신들의 세상이 아닌 이곳에서 그들은 제대로 된 힘을 쓸 수 없으니,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어. 그래서 모두 사라진 거야. 사실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란다. 어쩌다가 이 세계에 남게 된 자들은 뒤늦게 돌아가고 싶어도 제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닫혀 있어서 돌아갈 수가 없게 됐지.』
마법을 직접적으로 경험해 보지 못했던 때의 레인이라면 노파의 허황된 망상으로 치부해 버렸을 만큼,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에일리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시 문을 열면 가능하겠지만, 문을 여는 데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모된단다. 동족상잔까지 해 가며 마력을 쥐어짜 문을 열려고 시도했으나 다른 세상에 근본을 두고 있는 악마들의 마력으로는 이 세계에서 차원을 여는 문을 열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닫게 됐어. 문을 열기 위해서는 이 세계의 마력, 이 세계의 존재가 지닌 마력이 필요했던 거야.』
말하다가 조금 분이 치미는지 에일리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이내 진정하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인간을 쥐어짜서 마력을 모으면 될 것 같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어. 이곳은 신의 사랑을 받는 세계란다. 아주 약하디약한 마법사들만이 남은 시대에도 여전히 신관들은 강력한 신성 마법을 쓰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저들끼리는 죽고 죽일 수 있지만, 이 세계에서 함부로 인간을 살해했다가는 신의 저주를 받아 죽게 돼. 결국,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인간의 소망을 이용하는 방법이었어. 정당한 대가를 주고받는다면 저주 또한 발동하지 않지. 그들은 네가 갖고 있던 목걸이와 같은 많은 매개체를 만들어 놓고 세상에 뿌려 두었어. 낚시꾼이 미끼를 드리우듯이 말이야.』
레인은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목걸이에 대해 떠올렸다.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이 인간을 낚기 위한 미끼였다니, 쓴웃음만 나왔다.
『매개체를 지닌 이들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제멋대로 그걸 이루어 주고 그 인간의 마력을 거두어 가. 네 어머니도 내 어머니도, 그리고 이전의 너도. 죽음을 불러온 요소는 따로 있겠지만, 최후에는 매개체에 의해 마력을 뺏겨 죽은 거란다. 마력 결핍증에 걸린 인간이 죽음에 이르듯이, 마력을 모두 소진한 인간은 죽게 되니까……. 그렇게 마력을 거두고 소원을 들어줄 때는 간단하게 해결하지. 누군가의 죽음을 바랐다면 계약에 의한 일이니 죽이면 그만. 지속하는 소원을 빈다 하더라도 너와 내게 마법을 새겨 놓고 내버려 뒀듯이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처치만 해 버리면 계약 위반은 아닌 게 돼.』
인간이 마력을 채울 수단으로만 보였기에 쓸 수 있었던 수법이었다. 조금이라도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있었더라면, 아들을 살리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마법을 걸어 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마력을 모으기 위한 일이니 마력은 한 톨도 낭비하지 않으려 하지. 소원에 대한 비용은 남은 인간이 치르게 하는 거야. 이후 우리의 삶이 어떻게 어그러지든, 그건 우리가 그들이 제공한 마법에 필요한 마력을 지급할 능력이 없었을 뿐이니까.』
“악랄한 놈들이네요.”
『여기서부터는 내 추측이지만, 너는 예상 밖의 요소였음이 틀림없어. 그 악마는 네 마력을 먹어 치우려고 기다렸을 거야.』
담담한 설명에 소름이 돋았다. 레인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저는 마력 결핍증에 걸려서 마력을 소진해 죽었는데…….”
『그래. 그 때문에 아마 많은 마력을 먹을 수 없었겠지. 모조리, 남김없이 먹어 치울 작정이었을 텐데.』
“그러면 또 저를 죽여서 소원을 빌게 할 작정인 걸까요?”
『처음에는 그런 게 아닐까 했는데… 모르겠다. 사실 나는 악마가 너와 계약하려는 수작이 있지 않을까 싶었어. 매개체를 통해 대가를 주고받는 건 일종의 거래인지라 섭취할 수 있는 마력에 한계가 있어. 그런데 계약은 달라. 인간도 악마도 자신의 전부를 걸고 계약해서, 악마는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평생소원을 도와주고 인간은 그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바치지. 죽는 순간에 마력을 섭취하는 것과 영혼 자체를 온전히 취하는 것의 차이는 당연하지만 어마어마하단다.』
그럼 설마 필요할 때 저를 부르라고 말한 게 그런 의미였던 것일까. 딱딱하게 굳은 레인의 얼굴을 보며 에일리야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럴 거였으면 내게 오는 길을 끝까지 막았겠지. 아니면 진실을 알게 되고 나서도 너와 계약할 자신이 있다는 걸까? 아니면 이번에도 죽이는 걸로 만족하겠다는 걸까……. 이유를 모르겠구나. 네게 접근하려고 했으나 계속해서 실패했었어. 나는 많은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나와 만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겠지.』
“제게 접근하려고 하셨다고요?”
『그래. 켈딘이나 렌피르……. 디프랑 후작가의 힘을 빌려 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어. 우리뿐만이 아니라, 베델 후작께서는 꽤 인망 있으신 분이니까……. 게다가 슈리아도 인기 있었고. 널 좋은 의도로 구하려던 사람, 나쁜 의도로 빼내려던 사람, 꽤 여러 부류의 인간들이 공작가에 접근했지. 간신히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감시를 뚫고 보낸 이들도 중간에 목적을 잃거나 다른 유혹에 빠져 임무를 망각했지. 인간을 살해하는 건 힘들지만, 악마에게 그 정도의 조작은 어렵지 않으니까. 게다가 수백, 수천 년을 살아온 악마이니 마법을 쓰지 않아도 육신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강하고.』
매우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천사니 악마니 이 세계로의 문이니 하는 이야기들보다 더더욱. 지금까지 아무도 레인에게 관심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당장은 실감나지 않지만.
에일리야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미뤄 두고 물었다.
『그보다 네 목걸이를 불태운 자의 이름은 뭐니?』
“미엘 데이막……. 미엘 데이막이에요.”
『미엘, 데이막.』
주름진 입술이 이름을 달싹였다. 쓰러져 가는 노파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형형한 살기가 눈에 맴돈다.
『100여 년간 쫓았지만, 이제야 그 이름을 알았어. 어머니를 죽게 한, 어머니의 원수. 어머니는… 떠돌이 점술사에게서 그 매개체를 샀다고 해. 며칠 동안 허황한 말을 듣고, 믿어서, 죽음을 각오하며 몸을 던졌지. 결과적으로 어머니의 소망은 이루어졌지만 이런 건 내가 바란 게 아니었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어머니만 행복하다면 아무래도 좋았는데…….』
말을 하다 말고 에일리야가 마력이 아닌 몸을 움직였다. 가느다랗게 뼈만 남은 몸을 부축하려 다가가니, 에일리야는 억세게 레인을 붙잡았다.
『그자를 죽여야 네가 살아. 네가 그자를 죽여야…….』
형형하게 말하던 에일리야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레인은 그대로 미끄러져 엎어질 위기에 처한 그녀를 다시 푹신한 의자에 앉혔다. 반쯤 눕듯이 기댄 에일리야가 한숨을 쉬었다. 살기등등했던 기세는 금세 꺼진다. 평생을 바라 왔던 의지조차 강렬하게 불태우기도 힘들 만큼 에일리야는 노쇠해 있었다.
『널 보듬어 주지 못하여 미안하단다. 하지만 나는 평생 악마를 쫓았고, 또… 지금 이 순간까지 그걸 놓아 버릴 수 없어서…….』
“이해해요. 물론 모두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요.”
『미안하구나. 대신… 너를 렌피르가 도와줄 거란다.』
디프랑 후작의 이름을 입에 올린 에일리야가 책 더미로 눈짓했다. 다시 한번 마력이 들썩이더니, 에일리야는 책을 한 권 꺼내 레인에게 건넸다. 낡은 수기였다.
『그자를 쫓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 말을 끝으로 에일리야가 몸을 떨었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며 틈새로 비친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마치 유언과도 같은 말에 레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급히 호흡을 확인하니 미약하지만 당장은 숨을 쉬며 버티고 있었다. 누군가를 불러올 요량으로 계단 아래로 내려갔던 레인은, 분명 떠난 줄 알았던 렌피르와 마주쳤다. 그는 레인의 표정을 보자마자 바로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갔다. 에일리야의 용태를 살핀 그는 레인을 힐끗 돌아보았다.
“괜찮습니다. 이야기를 나누셨다면 아시겠지만… 이미 한계이신 몸이라, 예전부터 거의 주무시며 생을 이어 오셨지요. 이렇게 오래 깨어 계셨던 것도 간만입니다.”
후작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약간의 여유를 되찾았다.
“이분을 조금 살펴봐야겠으니 내려가 계시지 않겠습니까? 왔던 복도로 죽 나가면 시종이 적당한 방을 내어줄 겁니다.”
여전히 호의적인 렌피르의 태도에 안심하며 레인은 방을 나섰다. 대기하고 있던 건지 나이 든 의원 하나가 급히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고작 한 명의 의원으로도 충분할지는 의문이었으나, 에일리야의 존재 자체가 비밀인 모양이니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레인은 시종을 만나 안내를 받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가 되니 그제야 맥없이 긴장이 풀렸다. 자리에 주저앉았던 레인은 간신히 소파 위로 걸어갔다. 에일리야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레인은 생각을 정리했다.
하나, 악마는 매개체를 인간에게 건네 죽는 순간 최후의 소원에 매개체가 반응하게 한다. 이로써 일방적인 사기 계약이 성립된다.
둘, 인간이 빈 소원은 단발적인 경우에 악마가 처리하고, 지속적인 소원은 마력을 소비하지 않게끔 간단하게 처리한다. 대가는 대상이 된 인간이 지급하게 한다.
그로써 악마의 볼일은 끝났어야 정상인데, 레인은 예외였다는 소리다. 독을 마신 직후 느껴지던 몸을 찢어발기는 고통, 몇 번이나 잃었던 의식……. 당시 목걸이는 레인이 걸고 있었으니, 악마로서는 한 번 정도는 더 소원을 들을 수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고. 레인은 그날도 제가 최소한 두세 번은 죽었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에일리야는 한 번도 견디기 힘들었다는 대마법을 연거푸 견뎌 내는 어린애를 보면서, 놈은 레인과 계약을 맺게 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그랬다면 왜 지하 감옥에서 레인을 찾아오지 않았을까. 하긴, 인간도 제 전부를 걸고 진심으로 응해야 한다는 계약을 인간 불신에 빠진 당시의 상태로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레인의 막연한 소원을 시간을 되돌리는 형태로 이루어 멀쩡한 상태로 되돌려 놨다거나…….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무슨 수로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썼단 말인가? 사람 한 사람을 살리는 마법도 엄청나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의 규모가 그보다 작을 리는 없었다. 답 없이 고민하던 레인은 책을 펼쳤다.
에일리야가 직접 쓴 수기는 적은 내용이지만 나름 잘 정리되어 있었다. 중요한 부분들은 아까 에일리야가 설명한 그대로였다. 책을 눈으로 훑던 레인은 어느 구절에서 시선을 멈췄다.
「죽는 순간의 마력을 모조리 거둬 간다.」
유르딘은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그걸로 시간을 되돌리는 데 필요한 마법을 발동할 마력을 충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유르딘이 본의 아니게 미엘을 위해 인간을 죽여 마력을 충당했다면……. 인간의 죽음은 악마가 모으는 마력의 밑거름이 된다. 즉, 악마는 인간을 죽이는 것으로 마력을 충당할 수 있다. 그러나 악마들은 함부로 인간을 죽일 수 없다. 그러나 만약에…….
인간이 악마를 대신해서 인간을 죽인다면?
유르딘이 나타난 직후 레스터는 갑작스레 이상 행동을 보이며 미쳤다. 발작을 일으켰고, 이어서 알 수 없는 기행을 벌였다. 심지어는 기숙사에 사람을 끌어들여서 죽이려 들었다. 레스터에게 살해당할 뻔한 소년은 미엘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후 소년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레스터. 레스터가 미쳤다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본인이 직접 레스터를 죽였다는 유르딘조차 그가 미쳤다고만 생각했지, 그가 인간을 죽이는 걸로 무언가를 획책하리라고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든 의심은 의뭉스레 구는 딜란에게만 쏠렸을 뿐, 저를 버림 패처럼 여기는 레스터에게는 자연스레 이목이 줄어들었다. 느슨해진 감시. 누군가와 모의하기 위한 최적의 환경. 그저 미친 짓의 일환으로 보일 법한 살해까지. 하지만 애초에 그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쓸데없이 이목을 끌지 않고 인간을 살해하기 위해서 미친 척 가장했다면?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지나친 걱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소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까. 레스터에게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점점 확신을 더해 갔다.
***
깊은 새벽, 한창 병실에 누워 있어야 할 레인이 쥐새끼처럼 침실을 빠져나오는 걸 발견한 레스터는 뒤를 따랐다. 놈은 상자 하나를 들고 병실로 돌아갔다. 조심스레 문틈을 열어 레스터는 레인을 살폈다.
레스터는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알았다. 유르딘 니제스가 매년 레인에게 보내 주던 선물이 담긴 상자였다. 레스터는 그걸 소중히 보관하는 레인이 아주 우습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신경 쓴 흔적도 없는 보잘것없는 물건 따위, 소중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데. 그딴 물건이 갖고 싶었다면 레스터에게라도 빌면 됐을 일이다. 레스터는 아주 오래전부터 레인이 제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애원의 말을 쏟아 내더라도, 언제나 진심은 한 조각도 없었다. 제법 비싼 줄 알았던 레인의 진심은 저런 쓰레기 같은 물건들이나 보내는 유르딘 니제스에게 쏠려 있었다. 아주 기분 나쁘고 역겨운 일이다.
그리도 소중히 여기던 상자를 레인은 불에 처박았다. 우는 얼굴을 보며 레스터는 레인을 마구 비웃고 싶어졌다. 하긴, 레인의 입장에서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르딘 니제스, 그 미친놈이 레인의 복수를 한답시고 왕국의 귀족 반절을 죽이고 관계된 자를 죽이고 목격자를 죽인 수를 모를 테니까.
하지만 레스터는 레인을 비웃을 수 없는 처지였다. 이미 있던 미래가 사라지고, 과거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유르딘이 기억이 있다면 또다시 레스터를 죽이려 들 게 뻔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뭐든지 해야만 했다. 그 뭐든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레스터의 속을 뒤집어 놨다. 사실은 이렇게 눈치를 보며 착한 척, 선량한 척, 좋은 형으로 변한 척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눈앞의 레인을 쓰러트리고 싶었다.
“…….”
정신없이 이어지던 레스터의 생각이 딱 멈췄다. 눈앞에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리는 눈빛이 대단히 기분 나쁜 방면으로 인상적인 남자였다. 남자는 입가에 검지를 대며 조용히 하라는 의지를 표하고 방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남자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레인을 끌어안았다. 레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자 레인은 잠시 버르적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줄이 끊긴 인형처럼 픽 쓰러졌다. 남자는 그런 레인을 한 손으로 안은 채, 똑바로 레스터를 바라보며 모든 걸 꿰뚫는 듯 오만한 얼굴로 여유 있게 웃었다.
“또 유르딘 니제스에게 살해당하고 싶지는 않지?”
“……뭐?”
“계약하자, 레스터.”
마치 오래된 친구인 양, 또는 우군인 양.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손을 뻗었다.
레스터는 자신을 악마라고 소개한 남자의 손을 곧바로 잡지 않았다. 남자가 늘어놓는 수상쩍은 계약도 믿을 수 없거니와, 사실이라 하더라도 영혼을 건다는 중대한 계약을 그 자리에서 수락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의심 많은 얼굴을 한 레스터를 보며 남자는 여유로운 태도로 물러났다. 마치, 언젠가 레스터가 자신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는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미엘이라고 소개한 악마는 그대로 사라졌다.
둘만이 남은 방 안에서 레스터는 레인을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레인의 뒤로는 아까 불태워 버린 상자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레스터는 차갑게 식은 레인의 손을 매만졌다. 레스터의 온기가 레인에게로 옮겨 간다. 손을 놓는 순간부터 싸늘하게 식어 갈 보잘것없는 온기다.
몇 년 전부터, 레스터와 카이렌은 헤레일 모드를 살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헤레일은 제 피를 이은 자식이 아닌 카이렌을 증오하는 동시에 질투했다. 명목상으로는 제 아들인데도 마치 원수를 보듯 미워했다. 동시에 카이렌이 어느 모로 보나 자신보다 뛰어난 걸 견디지 못했다. 카이렌의 얼굴에 불을 지르려다가 가문의 기사에게 간발의 차로 저지당한 적도 있었다. 정말로 헤레일이 자신을 살해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카이렌은 레스터에게 도움을 요청해 살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레스터가 알기로 카이렌은 10년도 더 전부터 레인을 좋아하고 있었으나, 손을 대지 못한 건 헤레일 때문이었다. 헤레일은 뒤틀리고 삐뚤어진 인간이었다. 레인은 슈리아와 같은 사람이 아닌데도 둘을 동일시하며, 자신은 슈리아를 차지하지 못했는데 카이렌이 레인을 차지하는 건 부당하다고 여겼다. 카이렌이 레인을 찾아갈 때마다 집요하게 비난하고 비꼬았다. 어쩌면 헤레일이 막았기 때문에 카이렌이 반발 심리로 더욱 레인에게 집착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말로 꺼낸 적은 없었다. 가끔 레스터조차 카이렌이 레인을 사랑하는 건지 죽이고 싶은 건지 헷갈릴 정도로 도가 넘는 폭력을 휘두르기는 했어도 일단 카이렌이 레인을 사랑하는 건 확실했다.
카이렌은 계획이 성공할 날을 꿈꾸며 납작 엎드려 살았다. 동시에 헤레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레인에게 손대지 않았다. 애초의 계산과 어그러져 다른 놈들이 손을 대기 전까지는 그랬다. 레인이 윤간당한 걸 안 카이렌은 범인인 세 명을 모조리 찢어 죽일 기세였다. 레스터가 헤레일의 경계를 사지 않으려면 참아야 하는 때라고 말리지 않았더라면 청년들은 죽은 채 발견됐을 터였다.
복수는 막았으나 카이렌이 레인에게 손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카이렌은 제 소유물처럼 여기던 레인을 다른 놈에게 빼앗겼다는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몇 년을 참았으니 똑같이 몇 년을 더 참으면 될 것을 한 번 손대기 시작하자 자제할 줄 몰랐다.
당연하게도, 동시에 어이없게도 레인과 조금의 연관도 없는 헤레일은 저 혼자 진노했다. 그는 삐뚤어진 열등감과 해묵은 소유욕으로 똘똘 뭉쳐 곧장 수도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딜란에게 레인을 제 정부로 달라고 요청했다. 딜란은 불같이 화를 냈다. 딜란의 우스운 점은 레인을 평소에 그렇게 무시하면서도, 정작 제 앞에서 레인이 가족 이외의 인간에게 모욕당하면 참지 못한다는 부분이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언제나 레인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면서 정작 결정적일 때는 물렀다. 레인이 아이제나흐 성을 단 제 아들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레스터가 죽었을 때를 대비해 후계자를 남겨 놓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두 경우 모두 레스터에게는 끔찍하게 짜증 나는 일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틈을 타 헤레일의 암살 계획에 대해 딜란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됐다. 최소 10년을 더 잡고 바라봤던 계획은 딜란의 협조로 앞당겨졌다. 모드 백작가의 내부에서도 포악한 헤레일보다는 대외적으로는 신사적인 카이렌이 백작이 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들이 많아졌다.
계획이 어느 정도 물살을 탔을 때, 카이렌은 딜란에게 졸업 후 레인을 제 영지의 관리인으로 임명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모드 백작가의 영지 관리인이라면 제 가문에서 일하기는 껄끄러운 레인에게 나쁘지 않은 직위였다. 물론 레인은 그걸 바라지 않으며, 지금도 가문과 카이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야기를 꺼낸 카이렌도, 듣는 딜란도 레인을 영지로 끌어들이려는 본심이 표면상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영지 관리인이라는 명목으로 끌려간 레인은 카이렌 인생의 최대 전리품이 될 터였다.
그러나 며칠 고민하던 딜란은 허락했다. 일단 형식상으로라도 레인을 대우하겠다고 한 게 헤레일보다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젊은 시절 앞뒤 분간 안 하고 슈리아에게 달려들었다가 망신살이 뻗친 헤레일과 달리, 카이렌은 최소한 소문이 안 나게끔 처신하고 있단 점도 나아 보였을지 모르겠고.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레스터는 아버지의 속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종종 레스터는 딜란의 심기를 거슬렸다. 딜란은 레스터에게 이상적인 아버지였지만, 레스터는 딜란에게 이상적인 후계자가 아니었다. 딜란은 자상했으나 공작으로서는 가차 없었다.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수도 없이 혼이 났고, 아주 가끔 답답할 때마다 딜란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딜란이 시선을 향한 곳에는 별채가 있었다. 레인이 있는 곳이었다.
레인. 그놈이 항상 문제였다. 어린 시절부터 레인은 레스터보다 조금 더 우수했다. 만약 두 사람이 동복형제였다면 필시 딜란은 레인을 후계자로 점찍었을 것이다. 열등감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카이렌에게 휘둘려 서서히 마음부터 말라 죽어 가는 레인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슈리아 대신 아나벨의 손을 잡았듯, 딜란은 레인이 아닌 레스터를 후계자의 자리에 올린다. 거슬리는 레인은 치워 버리면 그만이다. 물 흐르듯 계획은 차질 없이 흘러갔다. 계획이 그대로 완벽하게 성공했다면 헤레일 모드가 죽고 카이렌이 백작이 되는 때가 레인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해의 겨울이었다.
그러니까 그 겨울. 레인이 북방으로 떠나 빌어먹을 유르딘을 만나지 않고, 뒈지지도 않았더라면, 성공적으로 카이렌은 헤레일을 죽이고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레스터는 레인이 카이렌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그리도 소중하게 여기던 상자를 레인의 눈앞에서 찢어발겨 줄 생각이었다. 그 남자는 네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며, 널 진정으로 위해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며, 조롱하려고 했다. 거창하게 세워 둔 계획은 아니었지만 레인 앞으로 선물이 들어올 때마다 떠올리던 즐거운 추억이기는 했다.
그러나 레인은 떠났고, 모든 게 박살 났다. 레인은 죽었고, 상자는 영원히 레스터의 손을 떠났다. 이후 끔찍한 비극이 왕국을 덮쳤다. 비극은 레스터를 피해 가지 않았다. 오히려 레스터가 목적이라는 양 달려와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죽었다. 모든 게 끝났을 때는 차라리 안도감마저 느꼈으나, 레스터는 구질구질하게 시간을 되돌아왔다. 시간을 거슬러 온 레스터는 지난 기억을 떨쳐 내기 힘들었다.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어지던 폭력, 그 무참한 힘과 고통들……. 레스터는 레인을 떠올렸다. 10년 넘게 도망칠 길 없는 저택 안에 갇혀 폭력에 노출되어서도 끝내 자신을 굽히지 않던 이복형제를 떠올렸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도 고통을 감내하며 굴복하지 않던 모습들을 떠올렸다. 불쌍하고, 애처롭고, 그러나 그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살인자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올라서, 죽여 버리고 싶었다.
고뇌하던 레스터가 생각한 생존의 방식은 굴욕을 감내하더라도 납작 엎드리는 쪽이었다. 레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그대로. 그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처럼 사랑스럽고 증오스러운 이복형제를 아끼고 사랑하며 종이 된 것처럼 굴면서. 레인을 유르딘에게 떠밀어 보내고, 어떻게든 자비에 빈다면, 어쩌면 그자도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또 만났군.’
희망은 금세 박살 났다. 유르딘을 만난 순간 레스터가 꿈꾸고 있던 대단히 낙천적인 희망은 희박한 확률 그대로 가차 없이 박살 났다. 평정을 지키지 못했다. 레스터는 도저히 저 미친놈의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양 웃을 자신이 없었다. 눈앞에서 피가 튀었다. 살점이 튀었다. 자신의 비명이 거슬릴 정도로 시끄러웠다. 비명을 지르는 목이 아팠다. 사실 그 정도는 아픈 것도 아니었다. 가르고, 찢고, 긋고, 부수고, 밟고, 던지는 감각들이 조금 전의 일인 양 생생했다. 정체 없는 통증이 레스터의 온몸을 뒤덮었다. 시뻘건 피가 튄 쥐새끼의 이빨이 살을 갉아 먹는 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살인자의 눈. 레스터를 고문했던 놈은 태연한 얼굴로 평정을 가장한다. 레스터는 그럴 수 없는데, 놈은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죽여 버릴 거야.”
꽉 쥔 주먹에서 피가 흘렀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놈이 살아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혼이든 몸이든 뭐든지 바쳐서라도 죽여 없애 버리고 싶었다. 놈에게 똑같은 고통을 안겨 줄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을 버려도 좋은데.
“좋은 다짐이야, 레스터.”
허공에서 내려온 악마가 기분 좋다는 얼굴로 웃었다. 레스터는 악마와 손을 잡았다.
***
레인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레인은 흐트러진 모습으로 렌피르를 맞았다. 레인보다 더 피로해 보이는 얼굴로 들어온 그가 자리에 앉았다.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깨워서 죄송하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에일리야 님께서는…….”
“괜찮으십니다. 조금 오래 깨어 계셨지만…….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몇 년 전부터 준비한 일이니까요. 인사도 진작부터 나눴고요.”
렌피르의 말투는 담담해서 레인이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게 실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어물거리는 레인을 바라보던 렌피르는 시녀를 불러 차를 내오라 시켰다. 기다리는 동안 렌피르는 사소한 일들을 물었다. 날씨라든가 레인이 입은 옷에 대한 칭찬, 이 저택에서 편하게 머물라는 배려의 말 따위가 오고 갔다. 마침내 시녀가 내온 차를 마시며 렌피르는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식으로 인사하지요. 저는 디프랑 후작인 렌피르 디프랑이라고 합니다. 동시에 에일리야 님의 제자인 보잘것없는 마법사 렌피르이기도 하지요.”
“마법사라고요?”
“네.”
놀랍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자 렌피르가 작게 웃었다.
“당신이 절 신기하게 보시니 재미있군요. 저는 당신 쪽이 훨씬 대단하게 느껴지는데 말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제가 온갖 마력석을 퍼부어 가며 마법을 쓸 때의 수십 배나 되는 마력이 느껴지는데요.”
“……저는 후작께서 마법사라는 게 훨씬 더 신기한데요.”
번듯한 고위 귀족이 자신을 마법사라고 당당하게 소개하는 모습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렌피르라고 부르십시오. 이제부터는 많이 볼 사이니까요.”
“네?”
“마법을 배우겠다고 수락하신 것 아닙니까? 에일리야 님이 가르쳐 주실 수 있을 리는 없고, 제가 가르쳐 드리지요.”
“후작께서요?”
에일리야가 렌피르가 도와줄 거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다. 눈만 깜박이는 레인에게 렌피르가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렌피르요.”
“…….”
그래, 이렇게 이름까지 부르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레인의 어색한 눈빛에서 수상쩍어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렌피르가 소리 내 웃었다.
“어색하신 건 이해합니다만, 본래 마법사들의 사제 관계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야만 해서요. 나름 가까워지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신뢰… 입니까? 왜요?”
“저도 잘 모릅니다.”
“네?”
“저랑 에일리야 님도 책에서 그렇게 봤고, 본 대로 했을 뿐이라서요. 마법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건 아니니, 하라는 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마법사, 신뢰……. 뭐 그런 대목을 책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이런다고 어색한 걸 가깝게 느낄 것 같지는 않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니 레인은 렌피르의 뜻에 수긍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름을 막 부르기는 어색해서 대충 스승님으로 협의를 보았다. 어색한 호칭을 불러 가며 레인은 마법에 대해 궁금한 일들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스승님… 께서는, 주로 어떤 마법을 사용하십니까?”
“제가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건 제 아들이 납치됐다가 돌아온 후였습니다.”
몇 년 전, 렌피르의 아들이 정적에게 납치당한 적이 있었다. 무슨 요구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도 유일한 후계자이던 아들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확률이 낮았다.
그때 렌피르를 도운 사람이 에일리야였다. 렌피르가 후작이 됐을 때 이미 에일리야는 많이 쇠약해져 마법을 손에서 놓고 있었기에, 아버지에게 그녀가 마법사라는 말을 들어도 실감이 오지 않던 차였다. 그러나 에일리야는 도시 전체에 탐색 마법을 드리워 단번에 렌피르의 아들을 찾아냈다.
그 일로 렌피르는 에일리야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고, 이후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처음에는 위험하니 가르쳐 주지 않으려던 에일리야도 렌피르가 마법사로서 지녀야 할 자질이 썩 괜찮다는 사실을 알고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에일리야가 죽은 후에는 마법으로 디프랑 후작가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점도 그녀의 결심에 한몫을 했다.
그렇게 에일리야에게 은혜를 입은 렌피르는 그녀의 계획에 전적인 도움을 주기로 했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그녀의 일을 도왔다. 레인을 돕는 것도 에일리야를 돕는 것의 일환이었다.
“저는 이야기책에 나오는 대단한 파괴 마법 같은 건 사용할 줄 모릅니다. 하지만 탐지 마법 같은 건 마법석을 빌리긴 해도 제법 넓은 범위로 사용할 수 있지요. 당신을 만나러 갔을 때는 몸에 보호 마법을 두르고 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게 접근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실패했다고 하셨는데, 후작, 그, 스승님께서는 제게 한 번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때요. 사실 너무 쉽게 접근한 터라 내심 당황했었습니다. 에일리야 님께 상담하자 당신이 이미 악마에게 주도권을 뺏긴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셨고요. 원래 당신에게 접근이 가능해지자마자 모든 걸 알릴 생각이었으나 최악의 가능성을 고려해 천천히 지켜보기로 했었지요. 아닌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기에 당신을 이곳에 들인 겁니다.”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레인의 눈앞으로 렌피르의 손이 다소 경망스레 흔들렸다. 제게 주의를 돌린 렌피르가 화제를 돌렸다.
“의아한 건 많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당신이 마법을 배우는 일이지요. 에일리야 님께 대략 당신의 상태에 대해 들었습니다. 대단하시긴 한데……. 사실 그게 좀, 어찌 보면 위험한 상태기도 해서요. 이쪽이 급합니다.”
“위험하다니, 어째서입니까?”
“당신은 마법을 배우지도 않고 아무 노력도 없이 당신이 가진 힘을 휘둘렀습니다. 막혀 있던 둑을 튼 상태지요. 전에는 미약하게 맴돌던 마력이 활성화되어 당신 주변을 흐르고 있어요. 다음번에는 당신이 받는 작은 충격이나 충동에 따라 그 힘이 마구잡이로 휘둘러질 수 있습니다. 저 정도의 마법사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당신 정도의 마력이라면 그저 휘둘러지는 것만으로도 당신 자신이나 타인을 다치게 할 수도 있지요.”
“……그런가요.”
너무 어마어마한 이야기라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만, 조심하는 게 좋겠지요. 저는 마력을 모으는 방법부터 배웠지만 당신은 마력을 제어하는 방법부터 배워야 할 듯합니다. 제대로 된 마법을 배우는 건 그다음이고요. 생각 같아서는 일주일 정도는 진득하게 붙어서 당신을 가르치고 싶은데…….”
“그럼 그렇게 하지요.”
마력이 있고 그걸 써 보기도 했으니 마법을 배우는 건 순식간일 줄 알았는데……. 뭐든 뚝딱 쉽게 나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레인이 시원스레 대답하자 오히려 렌피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까? 아카데미의 수업에 무리가 갈 텐데요.”
“괜찮습니다. 시험은 완벽하게 치를 자신이 있으니까요.”
지나치게 자신감 넘치는 말에 렌피르가 혀를 내둘렀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기억이 돌아온 이상 시험 문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 조금 가물가물하기는 해도 마법 쪽이 훨씬 더 급했다.
결정을 내리니 일 처리는 빨랐다. 레인은 아파서 쉬겠다는 편지를 아카데미에 한 통,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디프랑 후작가에 체류한다는 편지를 니제스 백작가와 렘샤이트 후작가에 한 통씩 보냈다.
편지를 보내고 채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손님이 들이닥쳤다. 반쯤 쳐들어오듯 레인의 앞까지 도달한 상대는 지스킬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지스킬은 레인이 이미 다쳤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꽉 붙잡은 채 여기저기를 살폈다. 딱 봐도 멀쩡한 걸 알 텐데,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지스킬? 나 괜찮아. 여긴 어떻게 온…….”
“어떻게긴! 네가, 네가 갑자기 혼자 여기에 머무른다고 해서…….”
레인은 천천히 지스킬의 창백한 얼굴을 살폈다. 거의 확신을 하고 달려온 걸 보건대, 유르딘에게 미리 주의라도 들은 모양이었다. 하긴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유난을 떠는 것도 이해가 갔다.
“괜찮아. 디프랑 후작께 배울 게 있어서 일주일간 머물 거야.”
“위험하잖아.”
“안 위험해. 꼭 필요한 일이야. 게다가 여긴 위험하지 않아. 안전하다고.”
거듭되는 설득에도 지스킬은 고집스러웠다. 평판도 좋은 디프랑 후작이 뭐가 위험할 데가 있다고. 지스킬은 반드시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처럼 보였다. 제자리만 맴도는 대화에 결국, 레인은 지스킬에게 자신이 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마법을 배울 거라는 사실까지 털어놓았다. 나름 고심해서 털어놓은 건데 이야기가 끝나자 지스킬이 레인을 보는 눈빛은 사기꾼이나 미친놈을 보는 눈빛이었다. 유르딘도 이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니 그제야 못 미더워하면서도 조금이나마 표정을 풀었다. 레인은 제 말은 안 믿으면서 유르딘의 말은 신뢰하는 지스킬을 걷어찼다.
“야, 넌 난 안 믿고…….”
“너도 내가 같은 말 했으면 똑같았을걸. 그러다가 렘샤이트 후작께서 설명하면 그제야 들었겠지.”
“어, 그거야…….”
레인은 받아칠 말을 찾지 못했다.
어쨌든 여전히 경계를 풀지 못하는 지스킬과 함께 레인은 후작저에 머물며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렌피르는 자신의 일정을 모두 빼고 모든 시간을 레인에게 투자했다.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니 마력을 느끼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렌피르의 보조가 있으니 오히려 쉬웠다. 눈을 감고 집중한 지 10분 만에 레인은 제 마력을 느꼈다.
“간단하네요.”
“그렇지요?”
“책에서 본 건 뭔가 더 복잡했던 것 같은데…….”
“이 시대의 마법은 옛 시대보다 많이 후퇴했으니까요. 에일리야 님이 고서적을 보고 연구해서 이 시대에 되살린 마법 시대의 방식입니다. 훨씬 쉽지요.”
하지만 마력을 제어하는 일은 몹시 어려웠다. 마력을 조금만 쓰려고 했는데 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가다가 넘어지는 것처럼 제어하지 못하고 마력을 넘치게 쓰는 일이 많았다. 렌피르의 말대로 레인의 마력은 지나치게 넘쳐흘렀다. 차디찬 겨울의 밤바다처럼 고요하고 서늘한, 동시에 깊이 없는 마력이 제 안에 고여 있었다. 제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종종 서늘해질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었다. 보통은 마력을 느끼고 조금씩 꺼내서 작은 마법을 시험해 가며 마법을 배운다. 처음부터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마법을 써 보고 마력 제어부터 배우는 레인의 경우는 옛 시대에도 드물었다.
조심스럽게 배움이 이어졌다.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행히도 레인은 제법 빠른 속도로 습득해 나갔으나, 아무래도 일주일만으로는 부족했다. 일주일이 지나 아침 연습을 나온 레인은 제멋대로 흔들리는 마력을 느끼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한 달쯤 더 쉬어 버릴까.”
갑작스러운 발언에 검을 손질하고 있던 지스킬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카데미는 어쩌고?”
“이게 더 급해.”
“하긴…….”
지스킬은 레인이 마법으로 만들어 낸 불을 불안하게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원래 허공에서 손톱만 한 크기로 타오르던 불꽃은 잠시 집중이 흐트러진 사이 레인의 몸통만 한 크기로 불어났다. 그걸 보자마자 지스킬은 거의 반사적으로 도망쳤다. 레인은 허탈하게 불을 꺼트렸다.
처음에 마법을 제대로 믿지 못하던 지스킬은 렌피르가 꽃병을 들어 올리는 걸 보고 입을 떡 벌렸다가, 레인이 마력 제어에 실패해서 연무장 기둥 하나를 박살 내자 아예 의자 뒤로 넘어갔다. 그 후로는 레인이 마법을 쓸 때마다 굉장히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레인을 사기꾼처럼 보던 시선은 사라졌지만, 대신 위험한 폭발물을 보듯이 극도로 조심스레 대했다. 지스킬의 태도가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자신도 완벽하게 제어 못 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렌피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시 쉰다고 전갈을 보내지요. 아파서 쉰다고 해 두면 문제없을 겁니다.”
그 와중에도 렌피르가 만들어 낸 불은 얇은 일자 모양으로 기둥 근처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얼핏 보면 벽을 태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벽에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떨어진 허공에서 타오르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단 한 번도 벽 근처로 불씨가 튀지 않는 대단히 정교한 솜씨였다. 타고난 마력은 적을지라도 몇 년간 노력했다는 렌피르는 레인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솜씨를 자랑했다. 저 정도 수준은 아니라도 최소한 제어에 실패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다른 일에는 신경을 꺼 둔 채 마법에만 열중한 지도 며칠. 레스터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던 니제스 백작가에서 연락이 왔다. 레스터가 아카데미를 비우고 수도 밖으로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추적했으나 중간에 놓쳤다. 그러나 수도를 떠난 것만은 확실했다.
“레스터의 방을 한번 살펴보고 싶은데…….”
“미쳤어?”
“내가 직접 가겠다는 건 아냐.”
솔직한 심정으로는 직접 가서 보고 싶었지만, 사정을 들은 렌피르가 대신 나서 주기로 했다. 레스터의 방 안까지 들어가진 못하더라도 오랫동안 마법을 수련해 온 렌피르라면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카데미를 향해 렌피르는 저택을 떠났다.
초조해져서 제대로 집중이 되질 않아 잠시 쉬기로 하고 레인은 홀로 방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부터 마력을 움직인 탓에 피곤했다. 잠시 쉴 생각으로 침대로 다가가던 레인은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발견했다. 며칠 동안 레인만 쓰던 방이다. 청소하던 하녀가 흘린 걸까? 레인은 대수롭지 않게 목걸이를 주워 들었다.
어머니의 목걸이였다.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자세히 보니 생긴 모습이 닮았을 뿐,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과 달리 완전히 새 목걸이다. 왜 하필 이런 물건이 여기에 떨어져 있지? 설마… 레스터가.
짤막한 이름을 떠올린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목걸이에서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힘이 레인을 얽맸다. 제멋대로 소원을 이루어 주는 매개체. 레인은 그 존재를 정확하게 실감했다. 목걸이는 멋대로 레인의 마력을 빨아들이며 마법을 구성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레인은 어두컴컴한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제멋대로 레인의 마력을 빼내 마법을 사용했던 목걸이는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이 고요했다. 레인은 천천히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고 눈앞의 기분 나쁜 어둠으로 떨리는 시선을 던졌다. 꾸덕꾸덕하게 습한 공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휘감았다. 스멀스멀 올라온 냉기는 역하고 비릿한 냄새를 품고 있었다. 속이 나빠졌다. 도망치고 싶다. 그대로 몸을 돌려 이 어둠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걸 꾹 참고 레인은 마법으로 작은 빛을 꺼내 들었다. 혼란스러운 탓인지 평소보다도 마력의 제어가 잘 안 되었다.
환한 빛이 한 순간 방 안을 환하게 비췄다. 밝은 빛 아래에서 어둠보다 음습한 광경이 고개를 들었다. 피로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이 방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붉은 염료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방 안에 스민 냄새는 분명 피 냄새였다. 바닥뿐만 아니라 벽과 천장까지도 빼곡히 그려진 마법진 중심부에 자리한 것은 시커멓게 말라 죽은 시체였다. 텅 빈 두 눈에서 구더기가 들끓었다. 입을 틀어막는 레인을 향해 시체의 목이 돌아갔다. 레인은 입을 틀어막은 채 뒷걸음질 쳤다. 무언가를 알아보아야 한다든가, 침착해야 한다든가 하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뒷걸음질 치던 레인은 문고리에 부딪쳤다. 정신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건물 한 층의 반을 모조리 다 쓰는, 다른 학생들과 차별화된 고급스러운 방 안의 내장이 눈에 들어왔다. 레스터의 기숙사 방이다. 아까 빠져나온 방은 기존의 침실인 듯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레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어디선가 카이렌이 뛰어나와 습격할까 공연한 걱정도 했지만, 그의 기척 또한 없었다. 카이렌도 아직 제 영지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중이다. 부상에 대해 수도로 전해지는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레스터의 계약자로 추정되는 미엘 또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여기로 불렀나. 불안을 억누르며 레인은 비어 있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전과 지금은 달랐다. 눈에 보이는 명확한 힘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빌리거나 기댄 게 아니라 레인을 지금까지 살아오게 하였던 강력한 힘. 비록 제어가 서툴지라도 아무것도 없이 맨손이던 때보다야 훨씬 낫다.
생각에 빠져 있느니 빨리 움직이기로 했다. 렌피르가 레스터의 방을 살피러 와 준다고 했으니, 여차하면 그와 합류해도 될 터였다. 뭐가 됐든 이 방에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기숙사의 제 방으로 가서 기다릴 요량으로 레인은 문을 열었다가, 누군가와 맞닥뜨렸다. 거대한 그림자에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상대는 애초에 레인을 공격할 의도는 아닌 듯했다. 아니, 오히려.
“레인 아이제나흐…….”
상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곰처럼 커다란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유순한 얼굴에 떠오른 건 먹잇감에게서나 떠오를 긴장과 초조함뿐이지 공격성은 없었다.
하지만 레인은 그런 상대에게서 해묵은 공포를 느꼈다. 설령 누군가의 구두 밑창을 핥고 있거나 뒷골목에서 사지 온전하지 못한 채 구걸을 하고 있다고 해도 레인이 이자에게 마음을 놓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터였다.
칼 레히드. 그는 몇 년 전 레인을 윤간한 사내 중 하나였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가치도 없었다. 칼을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지만, 레인은 문을 열자마자 뒷걸음질로 물러난 탓에 방에 들어와 있었다. 갈 데 없이 막아 선 칼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오더니 문을 닫았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별거 아니다. 고작 문을 닫았을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날 일을 벌인 세 사람, 동조자이자 방관자인 레스터를 합한 네 사람 중 벌써 절반인 두 사람이 죽었다. 모든 일의 시발점이던 그날의 일은 재현되지 않는다. 악몽이 시작될 일은 없다. 알고 있는데도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는 걸 완전히 막을 수가 없었다. 레인은 공포를 몰아내려 애썼다.
굳어 있는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칼이 갑작스레 무릎을 꿇었다. 칼은 어안이 벙벙한 레인을 향해 팔을 뻗었다. 레인이 다시 뒷걸음질 치려고 했지만, 칼이 레인의 바짓단을 붙잡는 쪽이 빨랐다. 비굴한 태도로 칼이 애처롭게 쳐다보는 눈빛을 외면하려 레인은 애썼다. 몇 년 전인지 몇 달 전인지 모르는 예전에 레인이 피를 흘리다가 벽에 머리를 박아 생긴 붉은 자국만 공연히 노려보았다.
“레인……. 사,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무슨 헛소리야.”
“마렌도 다리우스도 죽었잖아. 너랑 가까이 지내는, 렘샤이트 후작과 연관되어서…….”
다른 곳만 보던 레인이 칼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야 모든 걸 알고 있는 칼 레히드로서는 타당한 추측이었지만 그걸 왜 제게 말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정확히는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감정으로는 저 개소리를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칼이 몸을 떨었다.
“다들 모르지만 난 알아, 네가 복수하는 거 아니야? 우, 우리가 널 강간했다고.”
“입 닥쳐.”
싸늘한 경고에 칼이 잠시 몸을 움츠렸다. 그는 창백한 레인의 얼굴을 살피더니 더더욱 몸을 숙이며 구두 위에 이마를 비볐다. 옛날 노예들이나 보일 법한 굴종이었으나, 그 처절한 복종은 레인의 동정을 끌어내지 못했다. 도리어 분노를 부추겼을 뿐이다. 해묵은 감정은 곧장 폭발하는 대신에 천천히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모르는 칼은 조금 먹히고 있다고 여겼는지 더더욱 불쌍한 체했다.
“미안해, 계속 미안했어……. 난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고…….”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단 건 대체 어느 선까지 할 생각이었다는 걸까. 레인은 그날 일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박살 나고 어그러졌다.
“며, 몇 번이나 사죄하려고 했는데, 마, 마렌이랑 다리우스가, 말려서… 사죄 못 했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사물일지라도 한 번 부서진 건 돌아오지 않는데, 이자는 말뿐인 사과로 레인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화를 내려던 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레스터의 공간이다. 뭐가 있는지 모르는데 섣불리 행동하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목걸이라는 작은 매개체로도 공간을 건넜는데 아까 본 마법진이 무슨 작용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적당히 상황을 봐서 물러나야 할 때이겠지만.
“사과하지 마.”
이자가 멋대로 사과를 받아 줬다고 여기고 자기만족과 안심을 얻도록 거짓을 꾸며 내야 한단 말인가? 그게 칼이 말하는 대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면 그따위 말 못 하지. 정말로 미안하면 내 앞에서 뻔뻔스레 미안하다는 말 따위 입에 못 담겠지.”
“미, 미안해…….”
“닥쳐. 아무 말도 하지 마.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꺼져. 난 네 사과 따위 받아 줄 생각이 없으니까!”
감정이 격하게 튀었다. 미안하다는 말만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더는 감추지도 못하고 얼굴에 선연한 분노를 드러내는 레인을 보며 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건장한 사내의 얼굴에 억울한 눈물이 맺힌다.
“그렇지만 너, 너무하잖아. 하, 한 번일 뿐이었다고. 딱 한 번.”
“…….”
“딱 한 번 실수했을 뿐이야. 그것 때문에 죽는다니 말이 돼? 말도 안 되잖아…….”
비굴한 모습에서 레인은 몇 년 전을 회상했다. 지독하게 아프고 비참했던 첫날. 칼은 유독 레스터와 친구들의 눈치를 봤었다. 한 순서도 마지막이었다. 흥분이 가시고 엉망진창이 된 레인을 보고는 뒤늦게 죄책감 어린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강압에 못 이겨서, 레스터나 친구들의 보복이 두려우니까, 하지만 그 어떤 이유를 대든 레인을 박살 내는 데 적극적으로 손을 보탰다는 사실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차라리 제가 나쁜 걸 아는 뻔뻔스러운 놈들이 나았다. 칼은 가증스러운 위선자의 낯짝으로 발버둥 치는 레인을 짓밟았다.
“잘못했어……. 미, 미안해, 살려 줘, 레인.”
“들을 생각 없으니 꺼져.”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자 아예 칼은 레인의 다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뿌리칠 재간 없이 붙들렸다. 닿은 부분부터 소름이 돋았다. 경멸에 찬 레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칼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너 요즘 잘 지내잖아. 용서해 줘도 되는 거잖아.”
“뭐?”
“그렇잖아. 네가 국왕 전하를 알현했다고 들었어. 렘샤이트 후작과도 친한 사이고, 넌 원래부터 공작가 출신이고……. 자, 잘 지내잖아. 이 정도 지났으면, 잊어버려도 되잖아. 어디 하나 잘못된 것도 아니잖아?”
바짓단이 점점 축축하게 젖어 갔다. 칼은 숫제 오열하며 처절하게 외쳤다.
“살려 줘, 레인. 죽고 싶지 않아. 나… 나, 나한테는 어린 동생들이 셋이나 있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들 좋은 분이야. 가난한 영지지만, 영지민들 모두 부모님을 사랑해. 청렴한 분들이야. 내가 저지른 일로 죽어도 좋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바닥까지 드러내며 삶을 구걸하는 놈을 내려다보았다. 유르딘의 복수는 레인에게 직접 위해를 끼친 놈들을 정당한 방식으로 단죄하는 것이다.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셋 중에 순서가 가장 마지막으로 밀려 아직 목숨 붙이고 있는 것도 이해는 갔다. 마렌이나 다리우스와 달리 직접 찌를 구석이 없다. 놈이라면 모를까, 놈의 가족이 죽는다면 그야말로 공연한 휩쓸림일 뿐이다.
레인의 불행이 그랬듯이.
동정보다는 분노만이 더욱더 치밀었다. 흥분 때문에 거칠어진 숨소리가 귓가에 요란할 정도로 화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제게 위협이 가해지면 이렇게 울며 애걸복걸할 거면서 너무도 쉽게 레인을 윤간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칼 레히드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놔.”
“레인, 제발……. 제발.”
“놔, 놓으라고! 미안해? 정말로 미안하다면 사과하지 마! 네놈의 사과 따위 들을 생각 없어. 난 널 용서하지 않아! 절대로! 네가 죽더라도!”
악에 받쳐 외쳤다. 커다란 소리에 칼은 충격을 받고 떨어졌다. 내심 빌면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을까.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레인이 무슨 일이 있어도 용서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은 얼굴은 조금 볼 만했다. 어쭙잖은 희망이 박살 나고 목에 칼이 들어온 사람처럼 벌벌 떠는 얼굴이 그럴싸했다. 레인은 칼을 짧게 노려보고 고개를 돌렸다. 더는 상대하다가는 제 머리마저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레인이 채 방을 나가기 전, 거센 손길이 레인을 벽으로 밀었다. 레인을 벽에 가둔 칼이 이를 악물고 노려보고 있었다. 가증스럽게 사죄하는 낯짝보다는 이쪽이 더 그럴싸하게 어울렸다. 무시하고 가려는 레인을 칼이 세게 잡았다. 그리고 발악하듯이 외쳤다.
“그러면 너도 똑같은 놈이잖아!”
“……뭐?”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몰라서 레인은 받아치지도 못했다. 악에 받쳐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칼은 화를 냈다.
“그렇잖아? 강간과 살인 뭐가 더 나쁜지는 명확하잖아. 강간 한 번 했다고 죽인다고? 네가 뭐, 임신을 했어? 몸을 망쳤어? 그게 뭐 별거라고, 잘만 살면서 지랄이야!”
레인이 숨을 삼켰다. 고작 한 번이라고? 그들에게는 한 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한 번으로 레인의 일상은 완전히 박살 났다. 잘만 살았다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가련한 척하던 피해자의 가면을 벗어던지자 저열한 본심이 밑바닥까지 드러났다.
“씨발, 고작 한 번으로 사람까지 죽이는 너는 얼마나 깨끗하다고……!”
큰 소리로 외친 칼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예리하게 벼린 단검이었다. 그 끝이 어딜 향할지는 명확했다. 눈으로 보고 판단하기도 전에 거의 반사적으로 레인은 제 마력을 휘둘렀다. 지나치게 많은 피가 튀었다. 피는 두 사람 모두에게서 흘렀다. 필사적으로 휘두른 칼의 단검은 레인의 왼팔을 스치고 상처를 냈다. 아프기는 했지만, 피부가 베였을 뿐인 상처는 그다지 깊지 않았다.
“으윽…….”
칼이 입힌 상처가 아프다. 단순히 다쳤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가 다른 느낌이다. 시선을 내리니 칼의 단검이 스친 곳이 검푸르게 변해 있는 걸 발견했다. 검은 재처럼 생긴 무언가가 상처 위에 탐욕스레 번져 가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대충 모양만 봐도 불길했다.
“너, 무슨 짓을…….”
눈앞의 칼은 레인에게 대답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사실 심각한 건 레인보다는 칼 쪽이었다. 칼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사납게 일어난 마력이 칼의 몸을 휘갈기고 가는 장면은 지나치게 잔혹해서 되레 현실감이 부족했다. 부릅뜬 레인의 눈동자에 칼의 처참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칼은 휘청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왼쪽 어깻죽지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사선으로 난 상처가 깊었다. 살이 갈라진 틈새를 보던 칼의 입에서 피가 왈칵 터져 나왔다. 끔찍한 비명이 뒤를 이었다.
“으아, 아, 아, 아아아아아악!”
“큭…….”
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칼을 공격하는 건 이걸로도 충분하다. 애초에 레인은 칼을 이 정도로 공격할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막으려고 했을 뿐인데 심각한 결과가 나왔다. 여기서 더 공격하면 칼이 죽을지도 모른다. 멈춰야 한다는 생각과는 정반대로 레인의 마력은 제어되지 않은 채 제멋대로 흔들리며 압축됐다. 검에 스친 상처가 지나치게 쓰라렸다.
“자, 잠깐…….”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도 모를 탄식은 이어지는 끔찍한 소리에 묻혔다. 쿵, 쿵, 쿵. 거대한 무형의 힘이 몇 번이나 칼을 내려쳤다. 칼은 순식간에 잔혹하게 짓뭉개졌다. 처참한 시신이 바닥에 무너지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단검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피와 살점이 묻은 채로도 단검은 기이할 정도로 섬뜩하게 빛난다. 무언가 불길하다. 조금 전에 본 마법진만큼이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레인은 단검을 향해 손을 내뻗었으나, 다음 순간 주저앉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누군가가 동그란 공 안에 밀어 넣고 마구 굴리는 것처럼 머릿속이 흔들리며 당장에라도 기절할 듯이 어지러웠다.
칼을 으깨고도 만족하지 못한 듯 탐욕스레 뭉친 마력이 방 안 기물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레인의 마력인데, 그의 의사는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마력을 거두는 것도, 제어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레인은 아무 힘도 없었을 때 이상의 무력감을 느끼며 바닥에 무너졌다. 서 있을 힘도 없었다. 이래서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민폐가 되고 있지 않은가. 정말 여전히 하나도 쓸모없어서…….
순간 피비린내가 나는가 싶더니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피부 위로 와 닿는 비릿한 온기에 레인은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넋 놓고 있으면 쓸모없단 사실을 증명할 뿐. 레인은 목구멍 너머로 올라오는 핏물을 느끼며 오른손으로 상처를 누른 채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이유 없이 마력이 제멋대로 폭주할 리 없었다.
상처, 그리고 마법진. 애써 정신을 집중하자 마법진이 있던 방에서 기묘한 마력이 공명하는 게 느껴졌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저게 원인이라는 것 하나는 분명했다. 마법진의 규모가 컸으니 범위도 클 터. 섣불리 도망가다가 다른 피해가 날 수 있으니,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마법진을 부수는 쪽이다.
마법진을 박살 내면 어떤 식으로든 이 흐름은 깨진다. 순간적으로 레인에게 악영향이 올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제가 지닌 마력이 많다지만, 마력의 소모는 점점 가속화되며 레인의 마력을 한계까지 쥐어짜고 있어서 오래 버틸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도해 봐도 마력을 제어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방을 부수려던 마력은 어이없이 빗나가며 창문 쪽 벽을 부쉈다. 벽이 무너지고 잔해가 떨어지자 바깥에서 놀란 비명이 들렸다. 자칫 실패했다가는 누군가가 다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신중해야…….
왜 그래야 하지.
어지러운 와중에도 해묵은 원망이 또렷이 떠올랐다. 아카데미는 아이제나흐 공작가와 함께 레인이 오랫동안 고통받아 온 악몽의 한복판이었다. 여기 있는 이들 중 누구도 레인을 돕지 않았다. 설령 레인이 무참하게 살해당한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이들인데 무엇 하러 레인이 섬세하게 그들 목숨을 신경 써야 한단 말인가. 멀리서 울리는 비명을 들으며 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고 제 손으로 누군가를 살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왜?
붉은 피가 시야에서 어른거렸다. 레인은 거칠어지는 숨을 고르며 헐떡였다. 그야, 당연히, 그러니까. 여기서 레인이 칼 이상으로 누군가를 죽인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레인은 제 사고에 이유를 덧붙였다. 안 그래도 반역자의 핏줄이라며 멸시받던 레인 아이제나흐는 지금 이상으로 공격당하고, 유르딘의 계획도 어그러져서…….
레인은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가려진 세상은 온통 어두컴컴해 답답했다. 여전히 마력은 제멋대로 뻗쳐 간다. 이 모든 상황이 지긋지긋하게 힘겨웠다.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한숨을 내쉰 레인은 시험 삼아 제 발치로 마력을 휘둘렀다. 거대한 마력은 초보 마법사인 레인이 제어하기 힘들었으나, 가까운 곳이라면 그나마 수월하게 레인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그렇다면.
“나는 안 죽으니까…….”
당장 죽어 버리면, 마력을 쓸 주체조차 사라지면, 마력은 멈출 수밖에 없다. 미친 짓이란 건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유르딘의 경악하는 얼굴이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레인은 짓뭉개진 칼을 내려다보았다. 저렇게 끔찍하게 고통스럽고 아프겠지. 하지만 칼과 달리 레인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돌아온다.
“안 죽으니까.”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마른침을 삼키며 레인은 마력의 방향을 틀었다. 마구잡이로 휘몰아치던 마력이 레인을 덮쳤다. 거대한 힘에 숨이 막혀 왔다. 어떤 끝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는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며, 레인은 의식을 잃었다.
기나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왔다.
레인은 한 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눈을 떴다. 눈을 떠서 처음 본 제 손과 발이 몹시도 작았다. 혼란에 빠져 있던 레인은 자신이 아직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신반의하던 레인은 칭얼대는 아들을 달래러 온 슈리아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 조금 당황하던 어머니는 레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자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레인을 안아 입을 맞춰 주었다. 맞닿는 온기가 지나치게 따스해서 황홀했다. 이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딜란을 만난 건 사흘 후였다. 영지에서 돌아온 딜란은 레인을 살갑게 안아 주었다. 자상한 모습과 달리 그 속내에 차가운 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의 레인은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가 잔혹한 계획을 실행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레인은 딜란에게 빌지 않았다. 너무나도 어설픈 수였다.
대신 레인은 조부에게 달려가 아버지의 부정을 고발했다. 혀 짧은 소리로 칭얼대는 말은 고발이라기보다는 투정이었지만, 조부인 당대의 아이제나흐 공작은 손자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딜란에 대해 미심쩍은 감정을 버리지 못하던 공작은 당장에 진상을 조사했고 모든 음모를 알아냈다. 공작이 분노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아나벨을 저택에서 내쫓고 아예 왕국 구석 영지로 보내 버렸다. 레스터를 인질로 삼은 채 공작은 딜란의 계획을 모조리 박살 냈다. 혈통을 대단히 중요시 여기는 조부다. 몰락한 시골 귀족을 어머니로 둔 레스터가 작위를 잇는 꼴을 두고 볼 리 없었다. 공작은 불안의 씨앗을 제거하겠다며 레스터를 제 휘하의 기사 가문에 정식으로 입양시켰다. 레스터는 정식으로 귀족가에 편입됐다. 공작은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레스터가 아이제나흐에 양자로도 들어올 수 없도록 철저히 서류를 꾸미고 제 가신들에게 신신당부해 두었다.
1년이 지나 아나벨이 딜란을 포기하고 공작이 주선해 준 외국의 부유한 귀족과 결혼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반년 정도는 어떻게든 딜란과 접촉하려 들던 아나벨이지만, 자유를 찾고 보니 그간 공작가에서 참고 참던 설움이 폭발해 돌아올 생각이 사라졌는지 연락조차 뚝 끊겼다. 몇 달 후, 아나벨은 외국의 돈 많은 귀족과 함께 왕국을 떠나 버렸다.
거짓된 행복으로 이루어져 있던 가족은 처참하게 깨어졌다. 딜란은 더는 슈리아와 레인에게 자상한 아버지를 연기하지 않았다. 처음에 딜란의 마음을 돌리려던 슈리아도 이내 체념했다. 그리 절망에 가득 찬 체념은 아니었다. 후계자인 레인이 있고 자신은 의무를 다했으니, 이제 저 좋을 대로 살겠다는 선언을 하고 정말로 슈리아는 자유로이 살기 시작했다. 슈리아에게 귀부인의 예절을 강요하던 베델 후작조차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자신이 밀어 넣은 결혼이 파멸을 가져올 뻔했다는 걸 안 그는 슈리아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레인은 허름한 별채가 아닌 본채에서 계속 생활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전과 달리 레인은 공작가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였다. 공작이 죽고 잠시 다른 꾀를 부리려던 딜란은 새로 즉위한 왕에게 흉계가 완전히 막혀 얌전히 생활했다.
그 무렵 레인은 유르딘을 만났다. 막 바빠지기 시작한 유르딘은 전장으로 떠나기 전 슈리아와 검술 대련을 했다.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슈리아를 용서 없이 몰아붙인 유르딘은 기어이 슈리아를 이겨 먹으며 씩 웃었다.
10대의 레인은 그 속이 20대인 레인이 보기에는 남동생처럼 귀여운 얼굴이었다. 유르딘에게 안긴 채로 그가 했던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어이없어하면서도 시원스레 웃었다.
유르딘은 종종 레인에게 선물을 보내왔다. 그러나 이미 레인의 삶의 궤도는 이전과 달라져, 그가 보낸 선물이 이전과 같은 가치를 지니지는 않았다. 유르딘 외에도 소중한 것들이 저 하늘에 뜬 별처럼 많아서, 차마 그 모든 것을 저버리고 그를 선택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레인이 유르딘을 생각할 때면 슈리아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어머니에게 고민거리를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몸이 멀어지고 유르딘의 빈자리를 다른 이들이 채우기 시작하자, 전처럼 자주 그가 생각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삶은 다른 궤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두 번 다시 겹쳐질 일 없을 터였다.
카이렌을 만난 건 조금 더 뒤였다. 무시해도 쫄래쫄래 쫓아오는 걸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마냥 외면할 수 없었다. 카이렌은 레인의 호감을 사고 싶은지, 제가 생각하기에 재미있는 장소로 레인을 데려가고는 했다.
그러다가 찾아간 곳이 레스터의 새로운 집이었다. 입양된 저택에서 레스터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주인이 나름 아끼는 사생아이며 미래의 주인인 레인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존재. 막 대하기는 껄끄럽지만, 서글서글하게 대하기도 불편한 입장이었다. 덕분에 레스터는 저택 안에서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지내고 있었다. 표정 없이 인사하는 레스터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카이렌은 부지깽이를 들어 레스터의 머리를 후려쳤다.
“너 뭐 하는 거야?”
“얘를 우리 개로 기르는 거야. 재밌을 것 같지 않아?”
기가 막혔다.
“아니, 전혀. 역겨우니까 그거 내려놓고 꺼져, 카이렌 모드. 대신에 널 개로 기르기 전에.”
“이런, 화났어? 무서워라.”
조금도 무섭지 않은 얼굴로 카이렌은 웃으며 물러났다. 도움을 받은 레스터는 조금도 호의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네가 왜 날 도와줘?”
“네 꼴이 불쌍해서.”
레인 또한 레스터에게 호의를 보일 이유가 없었다. 레스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이제 와서 과거의 해묵은 원한을 풀 생각은 없었다. 이미 이 처지부터가 옛날의 레스터에게는 굉장한 굴욕이었을 테니.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용서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레인은 꾸준히 레스터에게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선량하고 다정한 형제인 척 그를 보듬고 도와주면 굴욕스러워하는 모습은 꽤 볼 만했다. 저열한 만족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만족스러운 레인과 결과적으로 처지가 좋아지는 레스터 둘 다 좋은 결과 아닌가? 하찮은 레스터는 더는 밉지 않았다.
한편 올 때마다 레인에게 차가운 말을 들으면서도 꾸준히 찾아오는 카이렌은 지긋지긋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놈은 또 레인에게 반한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공포는 희석되고 가당찮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딜란이 아나벨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포기한 건 공작이 죽고도 몇 년이 지난 후였다. 피폐한 얼굴로 딜란은 제 주변에 남은 가족에게 손을 뻗었다. 그가 내뻗은 손을 슈리아는 붙잡지 않았다. 어리석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레인은 딜란이 내민 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처럼 다정하고 따스한 아버지는 아니었으나, 어색하게나마 저를 생각하고 위해 주는 아버지는 아주 오래도록 바라던 이상이었다.
레인이 딜란을 받아들이니 슈리아도 대놓고 그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조금 얼기설기 이어지기는 했어도 세 사람은 그럭저럭 가족의 형태를 이어 나갔다.
과거의 그늘은 차츰 거둬지고 삶에 볕이 들었다. 원래대로 자리가 맞춰져 어긋남 없이 레인의 삶은 선로 위의 바퀴처럼 매끄럽게 굴러갔다. 레인은 행복했다. 그토록 바라던 평범한 삶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레인은 과거의 기억을 잊어 갔다.
당신이 내 삶에 없어도 꿈은 여전히 달콤하다.
레인은 장성해 아름다운 영애와 약혼했다. 어머니가 가꾸는 정원의 꽃처럼 보드랍고 아름다운 영애는 레인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레인은 그녀가 말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약혼자로서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사랑해서 결혼하는 건 아니다. 불처럼 격렬하게 타오르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니라면 안 된다고 느끼지 않아도 얼마든지 결혼은 할 수 있다. 행복을 꿈꾸는 얼굴로 레인을 바라보며 여자가 웃었다. 눈 안에는 초콜릿처럼 달콤한 사랑의 감정이 녹아 있다.
갑작스레 목이 탔다. 그녀에게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뿐이지, 레인은 이미 사랑에 대해 알고 있었다. 레인의 사랑은 이리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꿈이 아니었다. 살고자 하는 처절한 발악이었고, 단 한 사람에게 미련스레 매달리는 집착이었으며,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맹목이었다.
당신을 사랑해서 살았고, 당신을 사랑해서 죽었고, 당신을 사랑해서 구원받았다.
레인은 제 앞에 선 영애를 밀쳐 냈다.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여전히 레인을 사랑하는 눈빛에서 그는 도망쳤다. 이런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애초에 레인이 원하는 사랑은 단 하나뿐이다. 당신이 없다면 행복 따위는 필요 없었다. 아니, 애초에 당신 없이 내가 현실에 남아 있을 리 없는데. 유르딘이 제 옆에 없는 세상 따위가 현실일 리 없다.
가짜는 필요 없다.
자각과 동시에 거짓된 환상이 깨어졌다.
시린 눈꺼풀 위로 희미한 붉은 빛이 쏟아졌다. 싸구려 양초가 만든 인공적인 불빛이다. 희미한 눈에 초점을 맞추며 레인은 제 안에 남은 까마득한 기억을 몰아내려 애썼다. 환상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건너뛰고 어느 정도 강렬한 부분만 보여 주는 식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체감상 몇 년분의 기억이다. 꿈이 실재하는 현실처럼, 현실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지는 지독한 감각. 다행히 실재하는 기억들이 레인을 조금씩 현실로 끌어 내렸다.
현실감을 얻고 나서야 레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집중하느라 흘렸던 땀이 차디찬 공기에 식으며 몸이 떨렸다. 뒤늦게 자각한 서늘한 냉기가 쭈뼛하게 레인의 몸을 덮쳤다.
“여긴…….”
입 안이 바싹 말라 목구멍에서도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얕은 기침을 내뱉으며 레인은 주변을 살폈다. 딱딱한 돌벽과 창살이 보인다. 감옥 안이다. 반사적으로 숨이 멎었다. 죽음의 기억이 레인의 목을 옥죈다. 타닥, 하고 불꽃이 튀는 소리가 얼어붙던 레인의 이성을 깨웠다. 돌아보니 발치에는 화로가 놓여 있고 허름한 침상 위에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침구가 깔려 있었다. 레인은 침구를 손으로 쓸었다. 몸 상태를 신경 쓰는 걸 보니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좋은 상황도 아닐 테지만. 쓰러진 레인의 주변에는 이미 살해당한 칼 레히드의 시체가 있었을 테니, 레인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다.
고민하고 있을 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긴장하며 고개를 든 레인은 의외의 얼굴을 마주했다. 익숙한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레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두 눈에 물기가 어린다.
“레인.”
“……유르딘.”
입을 열어 직접 부르고 있었으나 그런데도 어딘지 실감이 나지 않는 이름이었다. 조심스레 레인의 이름을 읊조리는 목소리가 우울감 때문인지 한껏 낮았다. 그대로 검을 뽑아 든 유르딘은 말릴 틈도 없이 오러로 창살을 잘라 냈다. 안으로 들어온 유르딘은 레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도망가자.”
절박한 얼굴이 절망적인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레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유르딘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간 무리한 것인지 뺨이 거칠고 두 눈이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유르딘은 지친 얼굴로 레인의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칼 레히드의 살인죄. 거기에 이번 아카데미에서 폭파에 지난번 방화죄까지 네게 물으려 하고 있어. 네가 범인이라는 날조된 증거가 있지. 버티기가 힘들어.”
“하지만 도망치면… 제가 죄를 고스란히 덮어쓸 텐데요.”
절로 레인의 주먹에 힘이 실렸다. 도망이라니. 뒤집어쓴 오명을 벗어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도망가야 한다고? 절망적이다 못해 최악이었다. 망설이다 고개를 든 유르딘이 레인의 주먹 쥔 손을 잡아 펼쳤다. 손톱자국이 세게 남은 손바닥을 안타깝게 문지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기에 널 둘 수 없어. 알잖나. 너는 지난번에도 이런 곳에서…….”
“하지만 유르딘.”
“부탁이다, 레인. 도망치자. 명예도 중요하지만, 목숨은 그 이상이다. 네가 죽는 걸 두 번은 보지 않게 해 다오.”
“그럴 수 없어요. 이대로 도망치면… 다 끝인걸요. 돌이킬 수 없어요.”
유르딘의 눈이 까마득한 절망에 물든다. 유르딘의 안에서 레인의 죽음이 상처로 자리한 것은 알았다. 하지만 레인은 도망칠 수 없었다. 모든 오욕을 뒤집어쓰고 죄인의 낙인이 찍힌다. 설마 바로 처형장에 끌려가기야 하겠는가. 만약 끌려간다고 해도 레인은 단번에 죽지 않는다. 최대한의 시도를 해 봐야 했다.
레인이 단호하게 말하자 유르딘은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숙였다. 레인의 말에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다. 레인은 몸을 숙여 바닥에 무릎 꿇은 유르딘의 양 뺨을 감싸 쥐고 들어 올렸다.
“유르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안타까운 얼굴로 유르딘이 고개를 든다.
“초조하세요?”
“아무래도 몰래 들어왔으니까.”
“누구 몰래요?”
“그야 당연히…….”
유르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인은 양손에 힘을 주고 단단히 고정했다. 절로 레인 쪽으로 당겨지는 몸을 발로 걷어찼다. 명치 부근을 세게 때리자 아무리 유르딘이라도 괴로운지 뒤로 넘어갔다. 바닥에 쓰러진 유르딘에게 상처 입은 기색이 가득하다. 레인은 그런 유르딘을 비웃었다.
“도망을 가? 누구 마음대로.”
“레인, 네 목숨이 걸린 일이야.”
“목숨이 걸리기야 했겠지. 따라가면 내 인생이 망할 테니까.”
“레인…….”
“입 좀 닥쳐. 작작하지그래?”
레인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유르딘의 뺨을 쳤다. 여전히 충격받은 얼굴을 한 유르딘의 멱살을 쥔 레인이 험악하게 속삭였다.
“미엘 데이막.”
유르딘이 눈을 깜박였다. 죽음처럼 무겁고 끔찍한 정적이 흘렀다. 충격과 슬픔에 일그러져 있던 푸른 눈이 무기질적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유르딘은, 아니, 유르딘의 모습을 한 가짜는 여전히 겉껍데기를 유지한 채로 입을 쭉 끌어 올려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인데도 이렇게 구역질 날 수 있다니. 미엘은 느릿하게 레인의 손을 떼어 내고 웃었다.
“이거 놀랐는데. 알아챌 줄은 몰랐어.”
“설마하니 너 같은 쓰레기랑 유르딘을 구별도 못 할까.”
“어떻게 알아차린 거야?”
“내가 네게 소원을 빌어야 한다며. 구질구질하게 굴면서 내 대답을 요구하잖아.”
“고작 그런 걸로? 그 남자는 네 허락이 있어야 움직이는 사냥개 같은 놈이잖아.”
“그따위로 말하지 마.”
터무니없는 모욕이다. 레인이 신경질적으로 미엘의 손을 밟았지만, 악마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애초에 유르딘이 내게 그런 식의 설득을 할 리가 없거든. 내겐 목숨만큼이나 명예도 중요하고, 유르딘도 내가 뭘 더 중요시할지 알아. 그걸 더럽히지 않는 게 우리 둘 모두의 바람이야.”
“놈은 너만 걸리면 눈이 뒤집히는 놈이잖아?”
“그래, 그렇지. 명예고 뭐고 정말로 내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한가하게 설득하면서 시간을 보낼 사람이 아냐. 내게 미움받더라도 일단 데리고 도망칠 사람이지. 확실히 유르딘은 내 목숨이 걸리면 이성을 잃긴 하더라고.”
“대단히 충직한 개새끼네.”
끝까지 빈정거리는 말투에 레인은 한 번 더 미엘을 걷어찼다. 정확히는 차려고 했으나, 막혔다. 이번에는 맞아 주지 않고 레인의 다리를 붙잡은 채 미엘이 씩 웃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 무섭지도 않아?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럼 뭐. 겁에 질려서 네게 빌고 애원하기라도 하라고?”
제법 큰 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아까부터 마법을 쓰려고 시도해 봐도 소용없었다. 절망적이라면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레인은 차가운 눈으로 미엘을 노려보기만 했다. 미엘은 천천히 레인을 잡은 손을 놓고 일어났다. 여전히 유르딘의 모습을 하는 터라,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나란히 서자 키 차이 때문에 제법 위압적인 그림자가 레인의 몸 위로 드리워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차근차근 다가와 레인의 바로 앞에 선 미엘이 고개를 숙였다.
“응, 해 봐.”
레인의 두 눈이 커졌다. 다정한 목소리, 녹아내릴 듯이 달콤한 눈길, 실체를 알고 있는데도 겉껍데기만큼은 유르딘과 위화감 없이 똑같았다. 감히 가짜 주제에 누구를 흉내 내 뒤흔들려 드나. 혐오감으로 모든 감각이 곤두섰다.
“미친놈.”
명백한 거부를 읽어 낸 미엘이 만족스레 웃었다. 그의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며 레인은 비로소 깨달았다. 제멋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데다가 마법이 없어도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악마라는 자가 레인을 손에 넣기 위한 계획을 짰다기에는 지난 17년간의 행적이 몹시도 허술했다. 십수 년을 소득 없이 레인의 주변에서 맴돌다가 이제야 어기적어기적 움직이는 무계획성. 레인이 분노에 휩싸여 있는 지금도 미엘은 부드럽게 휘어진 눈을 하고 레인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레인을 궁지에 몰아넣은 채 즐기고 있었다. 레인의 비극 그 자체를. 혐오와 분노에 물드는 레인의 얼굴을 보면서, 미엘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양 여유롭게 웃었다.
“내가 지금까지 네 곁에서 뭘 했을까.”
질문인지 약 올리려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말투다. 확실한 건 저 말을 듣고 있자니 속이 뒤집힌단 점이다. 레인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도 이렇게 짜증 나게 만드는 게, 참으로 대단하다고도 할 수 있는 재주였다.
“지켜봤겠지. 내가 언제 절망할까, 남의 고통을 즐기면서.”
“정말 그것뿐일까?”
레인의 분노가 짙게 떠오를수록 미엘의 얼굴에는 더욱더 환한 미소가 번졌다. 웃는 낯이 불길했다. 미엘이 지금 아는 것 이상의 비밀을 쥐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 비밀이란 게 레인에게 좋은 요소일 리가 없었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술을 틀어막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모른 채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내 얼굴을 봐. 그리고 생각해 봐, 레인. 그 좋은 머리를 조금은 굴려 보라고.”
힌트를 줄까? 선심 쓰듯 미엘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르딘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던 악마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끔찍한 변화라며 경악할 새도 없이, 이목구비는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다. 매끄럽게 변한 미엘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레인은 가장 끔찍한 게 아까의 기괴한 얼굴인지 아니면 지금의 멀쩡한 얼굴인지 알 수 없게 됐다.
바뀐 얼굴은 카이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긴 그랬다. 제 얼굴을 아예 연관도 없는 타인인 유르딘의 얼굴로 바꿀 수 있는 놈이라면, 카이렌으로 바꾸는 일도 가능한 게 당연했다. 안 그래도 싫은 놈인데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얼굴까지 하고 있으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낯을 일그러뜨린 레인을 보며, 미엘이 카이렌을 똑 닮은 미소를 지었다. 지나치게 오만하여 레인을 제 통제 속에 완벽히 구겨 넣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뻔뻔스러운 얼굴이었다. 표정이 꼭 같았다.
순간, 불길함이 레인을 덮쳤다.
“왜 카이렌 모드는 매일같이 널 감시하면서도, 단 한 순간도 널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네 부정을 의심했을까. 단지 놈이 의심 많은 성격이라서?”
“몰라.”
레인은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대체 미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레인은 미엘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균형이 무너져 바닥으로 무너지는 레인을 미엘이 붙들었다. 미엘은 마치 연인처럼 다정한 손길로 레인을 끌어안고 손을 뻗어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달콤함을 가장한 채 독을 품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
너무나도 익숙한 카이렌의 말이다. 목소리도 말투도 모든 게 레인이 알고 있는 카이렌과 같았다. 말뿐만이 아니다. 눈물이 어린 눈가에 입을 맞추고, 젖은 뺨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욕망으로 가득 찬 몸을 맞대는 행동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마치 레인과 오랜 시간을 함께해 왔던 것처럼. 설마, 아니겠지. 제 생각을 부정하며 고개 젓는 레인에게 미엘이 쐐기를 박아 넣었다.
“나와 함께 너를 공유했으니까.”
말도 안 돼. 더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막으려고 했지만, 미엘이자 카이렌이기도 했던 악마는 단호한 손길로 레인을 저지했다.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 쏟아진다.
“카이렌은 언제나 널 살피는 눈과 귀를 두었어. 네 방문을, 창문을, 모조리 잠그고 감시했어. 그렇게 개미 한 마리 네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는데도 종종 자신이 남긴 게 아닌 흔적을 네 몸에서 발견했지. 알잖아? 놈이 얼마나 집착하는 성미인지. 끔찍했겠지. 아주 끔찍했을 거야. 그런데 누가 들어왔다는 증거가 없어. 그러니 모르는 흔적을 남겨 놓고 있는 당사자를 의심할 수밖에.”
“그럴 리가…….”
“지난번에도 만났지? 유르딘의 저택에서.”
레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했던 카이렌과의 재회. 그러나 카이렌은 그 시간에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저 꿈이었다고 안심할 수 있었다. 안심할 수 있던 명제가 뒤집힌다. 처음부터 카이렌 모드가 두 사람이었다면 두 장소에 나타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레인이 몸을 떨자 미엘이 다가와 다정한 척 감싸 안았다.
“우리에게도 추억이 많잖아. 야외의 테라스에서, 아카데미 창고의 지하에서, 아무도 남지 않은 교실에서 사랑을 나눴잖아. 응?”
“거짓말이야, 그런……. 그런 일이 있을 리가…….”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작년, 카이렌 모드가 겨울에 영지로 돌아갔을 때.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반나절 만에 되돌아왔던 적이 있었지. 아무리 미친놈이라지만 반나절 갔던 길을 되돌아오기는 좀 힘들지. 그때는 내가 당분간 널 안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아쉬워서 말이야. 무리수를 뒀지. 그때 정말 죽여줬는데. 잠들어 있던 널 보자마자 난 터질 듯이 흥분했거든.”
아무리 미엘이 신의 감시하에 당장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다고는 해도, 부활의 마법이나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꿰뚫고 있는 높은 경지에 이른 악마다. 아무리 카이렌이 날을 곤두세우고 한시도 빠짐없이 주변을 살피고 그걸로도 모자라 레인의 주변에 다가오는 것들을 죄다 차단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만약 레인과 카이렌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다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레인과 카이렌, 당사자들도 모르게 거짓 가죽을 뒤집어쓴 악마는 두 사람의 관계에 완벽하게 숨어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이었어. 지켜만 볼 생각이었지.”
창백하게 질린 레인의 얼굴을 보며 미엘이 웃었다. 그는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를 레인의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마법이 사라졌을 때, 불행하게도 나는 내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계에 남았지. 차원 문을 열기 위해 인간들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며 마력을 모으는 과정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어. 그러다가 너를 발견한 거야. 레인 아이제나흐. 동족들을 뛰어넘는 마법사가 종종 보이던 옛 시대에도 드물었을 만큼 강력한 마력을 지닌 인간.”
잔뜩 고조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미엘은 흥분으로 거칠어진 숨을 내뱉었다.
“단언컨대 너보다 뛰어난 인간은 옛 시대의 대현자뿐일걸. 그 작자도 마법이 저물며 함께 사라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강한 인간을 발견했으니 활용해야 하지 않겠어? 정말 재밌더라. 옛 시대에 태어났으면 분명히 마법사로서 성공했을 텐데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그 마력을 갖고도 불행해 빠지다니. 어차피 수백 년간 기다린 거, 흥미로워 보이니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 금세 죽어 버리거나 절망 속에서 체념할 줄 알았더니 아득바득 벌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더라고. 우습기도 하고 짜증도 났는데……. 글쎄, 언제부터인가 깊은 관심이 가더라고.”
미엘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져, 마지막에는 쉰 것처럼 갈라졌다.
“깊은 관심 말이야.”
다시 한번 반복하는 말은 형태 없는 목소리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끈적하게 레인의 귓가에 달라붙었다.
“그때쯤 카이렌 모드가 널 안길래 나도 같이 안아 봤어. 인간을 안은 게 처음도 아닌데, 아……. 죽여주던데. 정말 좋았어, 레인. 절망으로 범벅된 채 후장으로 내 좆을 받아먹는 게 완벽했다는 말이야.”
“…….”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감상하며 여유롭게 웃는 얼굴, 묻지도 않은 사정을 레인이 절망하는 꼴을 보기 위해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점까지 카이렌과 똑같았다. 레인은 비틀거리다가 미엘의 품 안으로 넘어졌다. 미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레인을 토닥이며 즐겁게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언제나 제자리를 맴돌더라고. 카이렌 모드로 연기를 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그래서 처음으로 네 앞에 나를 드러냈어. 미엘 데이막이라는 기사로 너와 동등한 위치에 섰지. 원래는 조금 더 진득하게 기다리며 접근할 생각이었지만… 북부의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더라고. 그토록 바라던 유르딘 니제스를 만난 네가 배신당하면 내게 소원을 빌 수도 있겠다 싶었지. 네가 유르딘 니제스를 죽이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다면 좋았을걸. 그런데 정작 빈 소원이란 게……. 참 우스운 인간이야.”
말을 맺는 미엘의 웃는 입꼬리가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다시 얼굴이 변했다. 남을 빌린 거짓된 모습 대신, 저 스스로 만든 인물로 레인의 앞에 섰다. 의원인 미엘 데이막. 언제나 밝고 쾌활하던 남자의 뺨이 기쁨으로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기억과 같은 모습이지만, 위화감이 들 수밖에 없다. 미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더 진득하게 레인을 쓰다듬었다.
“너무 그런 얼굴 하지 마. 그래도 우리 제법 즐겁게 지내지 않았어?”
“……개소리 하지 마.”
“그 빌어먹을 놈만 아니었어도 훨씬 즐겁게 지냈을 텐데. 하필이면…….”
레인을 잡고 있던 미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마지막 소원조차 그놈이었지? 널 배신한 줄 알고 있었으면서.”
“큭…….”
잡힌 곳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팠다. 레인이 창백한 신음을 흘리자 미안하다고 속삭이며 손을 떼어 냈지만,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가 한 말을 곱씹으며 분노하고 있다. 화를 내며 대답을 요구하는 대신에 미엘의 손이 레인의 옷과 피부 사이를 가른다. 살갗에 닿는 체온이 끔찍하게 차가웠다. 미엘은 레인의 목덜미에 코를 박아 넣고 숨을 들이마셨다. 레인이 발버둥 쳤지만 물리적인 저항은 소용이 없었다.
마력이 폭주할까 불안해도 마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쓸 수 없었다. 미엘의 이야기에 집중한 체하며 진작부터 은밀히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마력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레인을 똑바로 보며 미엘이 비웃었다. 모든 걸 파악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스멀스멀 올라온 절망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소용없어, 레인.”
다정한 연인처럼 속삭이며 달래려 드는 미엘의 위선은 지난날의 악몽들과 닮아 있었다. 마법이 막힌 이상 육체적인 힘만으로는 대적할 수 있을 리 없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레인은 바르작거리며 도망치려 애썼다. 가만히 미엘을 감내하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간 레인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게 사실은 둘이었으며, 카이렌의 의심이 더해진 게 눈앞의 미엘 때문이고, 혹시라도 미엘이 없었더라면 카이렌이 지나친 의심을 접고 덜 괴롭혔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들이 원망과 함께 떠올랐다가 뭉개졌다.
사소한 일들을 하나하나 따질 필요가 있을까.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사소하게 별일 아니란 듯이 말하는 모든 일이 더해져 한데 뭉쳐서 레인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비극으로 변했다. 차오르려 하는 눈물을 꾹 참았지만, 시야가 또렷할수록 처한 현실이 명확히 보일 뿐이다. 과거가 현실에 덧씌워진다. 색조차 시린 돌로 만든 감옥 안에 또다시 버려진 채, 또다시 강간당할 처지였다. 어느 것 하나 레인의 의지대로 되는 게 없었다. 제 구명줄이 된 줄 알았던 마력조차 구원이 되지 못한다. 제가 지닌 마력이 이런 미치광이를 불렀으니, 어찌 보면 비극의 시발점일지도 몰랐다.
지쳤다. 죽음을 목전에 앞뒀던 때와 꼭 같은 비참한 패배감이 레인을 휩쓸었다. 제대로 이뤄 낸 것 하나 없이 쥐고 있는 거라고는 이름 두 자뿐인 하찮은 삶. 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지치고 피곤했다.
하지만 미련 가질 게 남아 있지 않다고 아득바득 오기를 부리던 때와는 달리, 지금의 레인에게는 강렬한 소망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저를 위해서 제 모든 걸 바쳤던 사람이다. 그를 생각해서라도 이대로 맥없이 무너져 파멸 속에 가라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미엘의 힘에 꺾여 강간당하고 죽음을 맞게 된다고 해도. 여기서 포기하는 건 유르딘이 한결같이 보내 준 애정과 믿음을 저버리는 짓이다. 설령 무가치한 일이 된다 하더라도 레인은 유르딘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무력하게 꺾여 있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차갑게 식고 딱딱하게 굳은 손끝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텅 빈 손 안에서 느껴지는 건 뜨거운 타인의 체온이었다.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붙잡고 있는 듯한 기묘한 온기다.
자각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지난 십수 년은 결국, 꿈속의 꿈이었다. 지금의 레인이 있는 곳은 여전히 꿈속이다. 꿈이라서 이 차디찬 지하 감옥에 아무도 찾아오질 않고, 꿈이라서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다. 꿈은 실체 없는 환상일 뿐, 마력이 존재할 리가 없으니까. 진실을 깨닫는 순간 환상은 빠르게 부서지기 시작했다. 부서지는 풍경 속에서 무섭게 일그러진 미엘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헛수고하지 마. 네 삶은 괴로울 뿐이야.”
목소리가 뭉개지고 흐려지는 와중에도 미엘은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
“네게 안식을 줄게. 소원을 빌어, 레인.”
마지막까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미엘의 얼굴이 흐려지는 의식과 함께 순식간에 멀어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레인은 눈을 뜨기도 전부터 제 손을 감싸 쥔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끔찍한 악몽 속에서 레인을 건져 내 현실과 이은 온기였다.
“레인.”
레인은 눈을 떴다. 쏟아지는 빛이 눈부셔 인상을 찌푸리자 눈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섞인 체향이 서서히 레인에게로 스며들어 애정이 다시금 듬뿍 차올랐다. 유르딘. 목이 바싹 말라 입술만 달싹이는 레인을 유르딘이 끌어안았다. 십 몇 년 만에 보는 것처럼 미치도록 그리운 사람에게 몸을 기댔다.
손을 까딱여 마력을 일으켰다. 마법으로 채 구현되지는 못했지만, 미약한 마력이 희미한 빛으로 반짝이고는 이내 사라진다. 현실임을 확인하고 나서야 따스한 체온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유르딘. 몇 번이나 이름을 입 속으로 되뇐다. 유르딘. 사랑하는 사람. 언제나 나를 구원하는 사람.
“레인, 괜찮나?”
대답하는 대신, 유르딘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입을 꾹 다물며 노골적으로 답을 피하자 유르딘은 두 번 묻는 대신 레인을 도닥였다. 언제나 레인을 안정시켜 주던 다정한 손길에도 불안은 쉬이 가라앉을 줄 모른다. 슬픈 일이지만, 레인이 아무리 유르딘을 사랑한다고 해도 함께 지낸 시간이 짧아 유르딘의 모든 걸 파악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말투도, 버릇도, 생각도 완벽히 익숙지 않다. 싫어도 17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카이렌조차 구별하지 못했다. 만약에 미엘이 유르딘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다가왔는데, 구별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유르딘으로 가장한 미엘에게 입 맞추고 사랑을 속삭인다면…….
두려움이 해일처럼 밀려와 레인을 덮쳤다. 잠시 눈을 뗀 사이에 무언가가 바뀌었을까 봐 정신을 기울이고, 대화를 나누다가 눈을 뗐을 때,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곁에 있는 유르딘이 미엘인지 정말로 유르딘인지 그렇게 항상 의심하고 경계하는 삶을 상상하니 숨이 막혔다. 제게 닥쳐 올 악몽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어야 한다니.
‘네 삶은 괴로울 뿐이야.’
맞는 말이다. 간신히 행복해진다고 생각하면 다시 불행에 거꾸러지고, 일어나서 걷기 시작하면 무언가에 발목이 잡힌다. 지긋지긋한 굴레는 죽지 않는 한 끊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 차라리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을 때가 나았을지도 모른다. 맞닿은 이 온기가 거짓으로 기만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괴롭다. 언제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대체 언제까지.
레인은 지친 얼굴로 유르딘을 붙든 손을 놓았다. 창백한 안색의 레인에게 유르딘이 컵에 물을 따라 입에 대어 줬다. 기운 없이 물을 받아 마신 레인을 지켜보던 유르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인은 놀라서 다시 유르딘을 붙잡았다.
“가지 마세요.”
“멀리 안 가. 사람을 불러오마. 벌써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었고…….”
곧장 이어지는 대답마저 어딘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모든 게 두려웠다. 레인이 겁을 먹고 안정하지 못하자 유르딘은 방을 나가는 대신 줄을 잡아당겨 시녀를 불렀다. 복식과 표식을 보건대 성에서 일하는 시녀였다. 아카데미에서 기절한 채 끌려온 모양이었다. 레인은 조금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은 고급스럽지만, 창이 부자연스럽게 작았다. 감옥에 가두기에는 죄가 확실치 않으며 신분이 고귀한 자들을 일시적으로 가둬 두는 방 같았다.
지친 얼굴로 유르딘을 놓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시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유르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잡아 주었다. 이내 식사가 들어왔다. 가둔 사람에게 제공하는 식사라기에는 제법 질이 좋았다. 몇 번 숟가락을 놓치자 유르딘이 아예 떠먹여 주었다. 유동식이었지만 그나마도 몇 입 먹지도 못했다. 누군가 몸을 닦아 준 것인지 찝찝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이 와중에도 유르딘에게 보이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단 게 우스워서 짧게 웃으니 그가 마주 웃었다. 짧은 식사를 마치고, 차로 입가심을 하고 나서야 레인은 입을 열었다.
“그냥 도망칠 걸 그랬나 봐요.”
식사하는 내내 유르딘에게 할 말을 고민한 게 무색하게도 본심부터 툭 튀어나왔다. 애초에 복수에 열을 올리지 말고 도망쳤어야 했다.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방자하게 군 대가가 지금의 상황, 안정감의 박탈이다. 레인은 헌신적인 연인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저희 둘만.”
단단한 손이 레인의 손 아래에서 움찔거린다. 레인은 고개를 들어 유르딘을 마주했다. 유르딘은 변화가 두려운 사람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레인은 경직된 얼굴을 살피며 제 생각을 곱씹었다. 어차피 도망간다고 해서 의심이 거둬질 리 없었다. 상대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은 마법에 대해 통달한 악마다. 미엘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레인은 무지했다. 밑도 끝도 없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레인의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켜보던 유르딘은 제 손 위에 얹어진 손을 쥐었다. 손등 위에 입을 맞추고, 이어 속삭이는 숨이 살갗 위에 달짝지근하게 들러붙었다.
“네가 바란다면 떠나자.”
긴 고민도 없이 유르딘은 곧장 레인이 원하던 말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걸 원해?”
곧장 이어진 말을 들으며 레인은 눈을 깜박였다. 어느 쪽이든 레인이 원하는 말이다. 동시에 원하지 않는다. 떠나고 싶었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무엇도 끝맺지 못하고 도망치고 싶지 않았으나, 이 자리에 서서 버티기에는 너무나도 지쳤다. 확실히 미엘의 환상은 성공적이었다. 자신감은 뿌리째 뽑히고 이토록 불안하게 흔들리며 안식을 갈구하고 있으니.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도망치기로 한 게 아닌 이상은 직면한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레인은 긴 한숨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수도로 돌아와 에일리야와 이야기를 나눈 내용과 확신에 가까운 추측, 디프랑 후작의 저택에서 갑작스레 레스터의 방으로 이동한 일부터 시작해서, 칼 레히드를 만나 죽이게 된 과정과 이후 꾸게 된 꿈에 대한 내용까지. 제가 겪고 생각한 모든 일을 솔직하게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다만 한 번 자살했다는 이야기만은 솔직하게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미쳤다고 할 수도 있을 법한 내용이지만, 유르딘의 태도는 진지했다.
현실도 레인의 꿈만큼이나 복잡하고 정신없이 흘러갔다. 정체불명의 폭발이 이어지고 아카데미 내에 조사를 위해 주둔해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완전히 박살 난 레스터의 방 안에는 레인과 칼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칼은 이미 죽어 있었고 레인은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정체불명 괴한의 소행으로 결론 내리고 주변을 수색하려 할 때 하필이면 방 밖에 쓰러져 있던 하인이 방 안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레인은 칼 레히드 살해의 혐의를 쓰고 구금당했다.
현장에는 레인이 지니고 있던 목걸이도, 칼이 들고 있던 단검도 사라지고 없었다. 흉기도 없는데 한 사람은 살해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상처를 입었다. 사건은 미궁 속에 빠졌고, 사람들은 미지의 공포에 두려워하는 대신 하나뿐인 생존자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치 않았으므로 단순 구금된 상황임에도 여론은 썩 좋지 않았다. 때마침 유르딘이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레인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단검이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하지만, 미엘이 가져간 거라면 지금껏 그랬듯이 흔적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레인은 시선을 내려 팔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보았다. 칼이 공격했던 팔은 여전히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로 붕대를 푸는 레인을 유르딘이 말리고 싶어 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붕대를 모두 풀고 드러난 팔은 손바닥 하나 크기 정도의 시커먼 멍과, 정체불명의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살이 우그러진 것처럼 징그러운 흉터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유르딘이 괜히 죄책감을 느끼는 얼굴을 했다.
“……신관을 불러 봤는데 치료가 안 되더구나.”
“무슨 수작을 부린 것 같기는 하네요.”
이 흉터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계속 몸이 무거웠다. 자꾸만 축축 처지는 게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무슨 목적일까. 단지 꿈속에서 레인을 유혹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굳이 거대한 마법진을 설치해 가며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없었다. 칼 혼자서 그런 단검을 손에 넣었을 리는 없고 분명 미엘과 레스터의 계략이 섞여 있을 터였다. 일부러 마력 폭주를 이끌어 냈다면 레인이 칼을 죽이는 것까지 예상했을 텐데 계략의 끝이 어디에 닿아 있을까. 레인은 조금 뜨거운 흉터를 매만졌다.
칼이 죽었다. 마렌이나 다리우스와 달리 칼은 레인이 직접 죽이기까지 했다. 제 마력이 칼을 짓누르던 감각이 생생했다. 칼이 뭉개지고 으깨졌다. 비릿한 피 냄새와 제게 튀는 파편들. 최후까지 죽고 싶지 않아서, 살고 싶어서 발버둥 치던 비명이 귓가를 가득 채운다.
사람을 죽였다. 누군가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레인이 직접 죽였다. 마력이 폭주한 영향이기는 했으나, 제 마력이 저지른 일임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수없이 학대당하면서도 레인은 제 아랫사람에게 폭력조차 행사한 적이 별로 없었다. 난생처음 의도를 품고 행사한 폭력이 살인이다. 죄책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당한 걸 똑같이 돌려주고 자신처럼 울부짖는 상대의 외침을 무시하며 죽여 버리는 상상을 수백, 수천 번 했다. 정말로 죽일 수만 있다면 기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후련하지도 않았다.
괜히 칼의 생각을 했다가 기운만 빠졌다. 위로받고 싶어서 레인은 유르딘에게 몸을 기댔다. 조금 긴장한 채 레인만 살피고 있던 유르딘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기운 없이 유르딘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그제야 유르딘은 레인을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이 천천히 레인의 몸 위를 쓸어내렸다.
“무엇이 두려운 거지? 말해 줘, 레인.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도록.”
“전 당신을 놓칠까 봐 두려워요.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당신이 사라질까 봐, 당신이 사라지고 그놈이 나타날까 봐, 당신을 보면서 계속… 의심해야 하나, 싶어서. 무서워…….”
붙어 있는데도 놓칠세라 레인은 유르딘을 꽉 붙잡았다. 자존심을 세울 새도 없이, 두서없지만 솔직하게 흘러나오는 진심이 유르딘에게 닿았다. 유르딘은 레인이 보지 못하게끔 강하게 끌어안은 채 이를 악물었다. 레인을 위해서 이 삶도, 목숨도 바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레인은 또다시 상처를 입었다. 자신을, 그리고 적을 용납할 수 없었다.
“걱정할 것 없어, 레인.”
얼굴에 떠오른 분노를 안으로 욱여넣은 유르딘이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레인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레인은 유르딘의 눈 안쪽에서 타오르는 의지를 곧장 마주했다. 서로 다른 상대를 향하는 애정과 살의였다.
“그 악마를 죽여 버리면 되잖아.”
“무리하지 마세요. 너무 약한 소리 해서 죄송해요. 저도 노력할 테니까…….”
미엘 데이막은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악마다. 레인은 북부의 성에서 본 마법사와 검사를 위시한 수많은 토벌대들이 힘을 모아 악마를 죽이던 벽화를 떠올렸다. 그 시대에도 강대한 존재였는데 죽이는 게 가능하리란 확신이 없었다.
“레스터가 계약자라면 놈을 치면 되는 일이야. 할 수 있을 거다, 분명.”
강한 어조로 속삭이는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르딘은 살포시 웃는 레인의 입술 위로 충동적으로 제 입술을 맞댔다. 며칠이나 쓰러져 있었던 탓에 거칠어진 입술 사이로 방금 마신 청량한 차의 향이 풍겼다. 입술을 핥고 유르딘을 환영하듯 벌어진 틈새로 혀를 밀어 넣어 안을 건드린다. 뒤따르는 반응은 유르딘의 안에 충만한 애정을 채워 넣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유르딘은 끝이 없는 기갈을 느꼈다. 조금 더 완벽하게 손에 넣고 싶기도 했고, 확실하게 지켜 주고 싶기도 했다. 유르딘은 입술을 떼고 숨을 헐떡이는 레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못 할 것이 없어.”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아깝지 않다. 레인이 들으면 화낼 말을 속으로 삭이며 유르딘은 다시 한번 레인에게 입 맞췄다. 레인은 제게 상냥하게 입을 맞추는 연인을 끌어안았다. 안온한 연인의 품에서 언제까지고 안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정한 연인들의 시간은 결코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유르딘을 제 시야 밖으로 떠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나빴다.
레인이 의식을 잃은 사이 바깥에서는 온갖 불온한 추측들이 들끓고 있었다. 아카데미가 두 번이나 공격을 받았다. 고작 학생들이 모인 아카데미라고 가볍게 치부하기에는 미래에 왕국을 이끌어 갈 젊은 귀족들이 잔뜩 모인 장소다. 게다가 이번에 정체불명의 폭발이 일어난 장소는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후계자인 레스터의 방이었다.
레스터의 방에서 일어난 폭발이지만 그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슨 수를 쓴 건지 레스터의 방 안에서 수상쩍은 흔적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검은 속내야 어찌 되었든 표면적으로 딜란은 유능한 공작으로 유명했고, 그 아들인 레스터도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호감 가는 청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레스터가 굳이 제 방을 굳이 폭발시킬 이유가 없었다. 감히 아이제나흐 공작가에 밉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소문이 사그라드는 데 한몫했다.
대신 다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왕국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느니, 카니예의 잔당이 벌인 짓이라느니 하는 근거 없는 흉흉한 소문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이다음 차례는 아카데미가 아닌 수도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마저 나돌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범인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 왕국 전체가 소란스러웠다. 소란의 중심부에 레인과 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즉사한 칼 레히드는 비극적인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반면에 레인은 흔적 없는 범죄 현장을 직접 겪은 단 하나의 생존자이자 용의자였다. 폭약조차 발견하지 못한 정체불명의 사건 현장에서 칼에 베인 상처만 남아 있을 뿐 그을음 하나 없던 레인이 수상쩍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수도로 올라온 레히드 남작이 칼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조용히 지인의 저택에서 머무르는 걸 보며,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은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압박을 받은 게 아니냐며 그에게 동정표를 던졌다. 점점 더 여론은 레인에게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말로 아이제나흐 공작가가 압력을 넣은 거라면 편하겠지만, 딜란과 레스터는 불안할 정도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수도 바깥으로 나갔던 레스터는 저택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있었고, 딜란 또한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제나흐 공작이 움직이지 않는 데다가 당장 왕이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니 귀족들 또한 섣불리 나서지 않고 침묵했다. 레인이 눈에 띄는 부정을 저지르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침묵이 소름 끼치게 익숙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이미 세간의 의견이 한쪽으로 쏠린 상황에서의 침묵은 긍정일 뿐이다.
모든 상황이 레인의 숨통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레스터와 미엘이 대체 뭘 획책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은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모두가 침묵을 택한 상황에서 바삐 움직이는 귀족은 셋밖에 없었다. 렘샤이트 후작 유르딘, 니제스 백작 그란델, 그리고 디프랑 후작인 렌피르.
유르딘이야 당연하고 그란델도 도와줄 걸 예상하기는 했다. 그러나 렌피르가 직접 나섰단 건 의외였다. 마법을 가르쳐 주면서 자신을 스승이라고 칭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에서인 줄 알았다. 정치적인 문제까지 도와줄 줄 몰랐던지라 렌피르의 행보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레인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렌피르는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갑작스레 렌피르를 맞은 레인은 어색하게 인사했다.
“저, 감사합니다……. 스승님.”
“뭘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제가 스승이니까 이 정도는 해야겠지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아직은 스승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조차 조금 어색한 사이일 뿐이다. 다른 귀족들이 침묵하는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던 디프랑 후작가가 특정한 누군가의 편을 드는 일이 부담 가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힘들다는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은 채 렌피르는 오히려 미안해했다. 렌피르의 시선 끝에는 레인의 팔에 남은 상처가 있었다.
“이게 뭔가 마법적인 역할을 하는 건 분명한데, 부족한 제 실력으로는 알아볼 수가 없군요.”
“……그런가요.”
“보통 이렇게 몸에 흉터를 남기는 건 저주인 경우가 많기는 합니다.”
“하지만 신관의 치료나 성수에도 반응하지 않았어요.”
“그게 문제지요. 이게 저주라면 아무리 정교하게 감췄더라도 아예 반응이 오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렌피르가 자신 없이 말을 흐렸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도 알 정도로 풍부한 지식을 지닌 악마와 연관된 마법이다. 그걸 옛 시대의 잔재를 긁어모아 간신히 초보 마법사 수준이 된 렌피르가 꿰뚫어 보는 게 애당초 무리였다. 렌피르가 한숨을 쉬었다.
“저주는 아닌 것 같은데……. 마력 간섭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음, 몸은 계속 무겁고요?”
“네. 지금도 조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레인의 안색은 희게 질려 있었다. 레인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렌피르가 벌떡 일어나더니 과장된 동작으로 레인에게 이불을 덮었다.
“이런, 아픈 사람을 제가 무리시켰군요. 누우세요, 레인.”
“……네.”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요. 잘될 겁니다.”
위로하기 위해 과하게 밝게 말하는 렌피르의 말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란 건 레인도 잘 알고 있었다. 잘될 수 없는 상황이다. 레인은 렌피르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도움을 주는 렌피르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대로 다시 밑바닥까지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더 부탁할 게 많았다. 병환을 핑계로 조사를 미루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주변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지나친 불안 때문에 조금씩 갉아 먹히는 레인의 정신 상태도 한계였다.
그 언젠가처럼 갑작스레 문을 밀고 들어온 기사와 병사들이 레인을 차디찬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는 상상을 했다. 물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낮았다. 아무리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도 사형 선고를 받거나 왕국 추방령을 받지는 않을 터였다. 지금은 유르딘이 있다. 레인을 저버리는 순간 유르딘과도 척을 지게 될 걸 알고 있으니, 왕은 어떻게든 레인을 끌고 가야만 했다.
그게 한계다.
레인은 어디까지나 유르딘의 부속물일 뿐이다. 물론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레인의 재능은 뛰어나지만, 아직 제 가치를 실질적인 성과로써 증명해본 적이 없었다. 우수하다고 해서 누구나 성공적인 결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레인이 지닌 재능이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수준에서 끝날지, 실제로 사회에 나와 성공할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현재의 레인이 실질적인 가치를 지니는 건 오직 하나, 유르딘의 연인이라는 자리뿐. 유르딘의 비밀스러운 연인이라는 자리를 유지하는 데에 레인의 결백이나 명예는 그다지 필요가 없다. 정신이 온전하고 사지만 멀쩡히 붙어 있으면 충분하다.
수도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 상황에서 무리하게 무죄를 주장하는 게 부담된다. 그렇다고 레인을 버릴 수는 없다. 레인을 추방하듯 연고 없는 지방으로 내려보내 시간을 벌고, 어떻게든 범인을 잡거나 아카데미의 미숙한 경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게 왕이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수다. 이미 왕은 시종장을 통해 레인의 건강을 염려한다는 말과 함께 약을 보내오고 있었다. 사담인 양 공기 좋은 지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수도를 떠나라는 속내조차 숨기지 않았다.
이대로 떠나면 오명을 벗을 수 없다. 레인이 조금만 더 뻔뻔하고 이기적이었다면 모든 상황을 무시한 채 끝까지 수도에 남아 있겠지만, 레인은 유르딘을 지극히 사랑했다. 유르딘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유르딘은 폐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레인은 그런 게 싫었다. 본래 명예는 타인에게 기대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장자이면서도 외가가 반역죄에 휘말려 평생을 죄인의 핏줄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숨죽이며 살아온 레인 아이제나흐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렌피르가 다녀갔던 바로 그날 밤. 레인은 부족함 없이 성장하고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는 길에 레인은 처음 보는데도 낯설지 않은 남자를 마주했다. 칼과 너무 닮은 얼굴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칼의 부친인 레히드 남작이었다. 매일 틀어박혀 있는 동안에는 근처에 오지도 않더니, 하필 방을 나서는 날에 마주칠 줄이야. 당장에라도 달려들며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뜻밖에 레히드 남작은 레인을 노려보기만 할 뿐 가만히 서 있었다. 오히려 주변에 선 병사들이 안절부절못하며 검 손잡이만 움켜쥐었다.
처음 본 레히드 남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레인은 그에게 과거의 제 모습을 투영했다. 제대로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저 권력자에게 찍어 눌린 채, 분하고 억울해도 토로할 데가 없던 삶이 떠올랐다. 남작을 마주하며 오히려 결심이 더욱 확고하게 섰다. 자신을 응시하는 강렬한 시선을 무시한 채 레인은 복도를 걸었다. 남작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끝까지 레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성을 가로지른 레인이 향한 곳은 왕이 머무르는 사실이었다. 갑작스러운 알현 요청을 승낙한 왕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레인을 맞았다. 겉치레에 불과한 인사를 짧게 끝내자마자 레인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하께오서는 제가 당분간 수도를 떠나 요양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돌려 말하지를 않는군.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그대는 명석하니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 않나? 그대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가 없고, 정황은 지나치게 수상하며, 여론 또한 그대의 적이지.”
“…….”
“바레스 쪽으로 보내지. 사람 없는 곳이라 남들 이목이 없어 불편하지는 않을걸세. 한동안 거기서 머무르다가 렘샤이트 후작의 영지로 가도 좋네.”
갑작스레 찾아와 다짜고짜 본론부터 늘어놓을 정도로 레인이 흥분했다고 생각한 왕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설득했다. 왕의 말은 그저 보기 좋게 포장했을 뿐이다. 지금의 레인은 그 정도의 가치였다. 방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힘이 들어가 있던 주먹은 이제 살을 파고들 정도가 됐다. 잔뜩 긴장한 채 방 안을 한 번 죽 둘러 본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범인을 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당장은 잡을 수가 없어.”
“잡을 수 없다면 범인을 만들면 되겠지요. 제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의심을 받는다면, 그 자리에 있던 자는 한 명 더 있지 않습니까.”
왕이 헛웃음을 지었다. 명석하다고는 해도 아직 젊다 못해 어린 청년이니 침착하다고는 해도 한계가 있어서, 궁지에 몰리니 앞뒤 가리지 않고 허황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칼 레히드? 그자는 하급 귀족일 뿐이야. 그런 일을 저지를 능력이 없어. 물론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사정 모르는 자들이 보기에는 그대가 고위 귀족이니…….”
“전 가능합니다. 애초에 제가 한 짓이니까요. 아카데미의 방화는 제가 벌인 짓이 아닙니다만, 최소한 그날 있었던 폭발은 제가 한 짓이 맞습니다.”
감히 왕의 말을 그 면전에서 자르는 무례를 저질렀음에도, 왕은 그걸 지적하지도 못할 정도로 놀랐다. 뜻밖의 자백에 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지금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있나?”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아카데미를 부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칼과 다툰 후 그에게 공격받아, 정당방위로 그를 공격했습니다. 폭발은 제가 한 공격의 여파입니다. 제 실력이 미숙하여 국가의 재산인 아카데미를 부순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말이 이어질수록 왕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말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애초에 대화만으로 설득할 생각도 없었던 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가 앉았던 자리를 응시했다. 순식간에 조금 전까지 레인이 앉아 있던 두꺼운 소파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왕의 두 눈은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레인은 여전히 소파에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채 물었다.
“증명하고 싶습니다. 이걸 부숴 봐도 괜찮을까요?”
“뭐라?”
“대단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거나, 대체할 수 있는 게 없는 진귀한 물건이라거나…….”
“……그런 물건은 아니다.”
놀라움과 의심이 섞인 얼굴로 왕이 대답하자마자, 레인의 거대한 마력이 소파를 종이 찢듯이 찢었다. 찢고 또 찢고 아예 바스러뜨려 가루가 된 잔해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레인은 왕을 돌아보았다. 왕은 숨도 차지 않은 레인의 평온한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저는 마법사입니다, 전하. 흉내나 내는 얼치기가 아니라 고대의 마법을 직접 재현할 수 있는 마법사입니다. 그때 아카데미를 부순 건 제 힘의 일부이고요.”
“그래서?”
되묻는 왕의 얼굴에는 아까까지의 사무적인 태도는 깨끗이 사라지고 없다.
“전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제가 직접 전하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겠습니다.”
왕도 아카데미의 피해 상황을 직접 보고 들었다. 건물 외벽이 완전히 박살 난 힘은 이미 존재하는 마도구에 마력을 불어넣는 이 시대의 마법사들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서서히 변하는 왕의 얼굴을 보며, 레인은 왕이 제 손을 잡아 주리란 걸 확신했다.
아무 가치가 없어 내팽개쳐져야만 한다면, 스스로 제 가치를 인정받으면 된다. 이 시대의 둘뿐인 마법사인 에일리야와 렌피르는 물론이고 악마인 미엘조차 레인의 마력이 강대함을 인정했다. 그런 걸 쥐고서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약간의 사기가 들어가기는 했다. 상처가 생긴 후로 레인은 제 마력을 제대로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렌피르에게 이 상황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한 몇 가지 마법이 새겨진 마법석을 부탁했었다. 결과는 완벽했다.
순간적으로 레히드 남작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평생 레인이 도망치지도 못하고 저항하지도 못한 이유는 그를 내리찍는 권력과 힘 때문이었다. 힘은 권력을 불러온다. 쥘 수 있는 걸 쥐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왕이 레인을 돕는다면 정치적인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문제는 딜란이다. 선왕과의 공모로 베델 후작가를 무너뜨린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권력은 강했다. 오죽하면 왕과 공작이 왕국의 권력을 양분한다는 소리까지 나오겠는가. 일이 끝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나름 성공적으로 대화를 끝마치고 방을 빠져나왔으나, 잘 풀린 대화가 개운하다기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대한 중압감이 몸을 짓눌렀다.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는 끝냈으니 최소한 오늘 밤은 편하게 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밤의 끝자락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레히드 남작이었다. 방에 돌아왔을 때 없기에 포기하고 돌아간 줄 알았더니 끈질기게 다시 찾아왔다. 깨어난 후로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당장에라도 쓰러져 잠들고 싶었지만, 레인은 할 이야기가 있다는 남작의 방문을 막지 않았다. 긴장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오는 레히드 남작을 레인은 서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이곳까지 직접 들어왔을까. 혹시나 아들에 대한 복수를 직접 할 생각이라면 한 번쯤 죽어 줄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방에 따라 들어오겠다는 병사조차 막았다. 남작이 레인을 공격한다면 공격하는 대로 그를 옥죌 수단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흥분해서 달려들거나 욕설을 쏟아 낼 거라는 레인의 추측과는 달리 방 안으로 들어온 레히드 남작은 우울한 눈으로 레인을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연한 척 차를 마시던 레인의 인내가 바닥나 그냥 쫓아낼지 고민하던 무렵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칼을 자네가 죽였소?”
얼굴 생김만큼이나 칼과 닮은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힘이 없었다. 레인은 찻잔에서 시선을 떼고 남작을 돌아보았다. 노려보던 시선은 온데간데없고 우울하고 지친 남자가 초라하게 앉아 있었다. 레인은 남작을 비웃었다.
“남작은 저에 대해 잘 모르시나 본데, 저는 몸이 약해 승마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런 제가 무슨 수로 그 덩치 큰 남자를 죽이겠습니까.”
“그러면 죽이고 싶었소?”
“왜 제가 그를 죽이고 싶어 했겠습니까? 저는…….”
“칼이 자네에게 몹쓸 짓을 했소?”
치고 들어오는 말에 여유롭게 차를 마시던 레인의 움직임이 굳었다. 순간적으로 미끄러진 손에서 찻잔이 기울어 바지에 짙은 얼룩을 남긴다. 감색 바지가 검게 물드는 걸 보면서 낭패감이 함께 떠올랐다. 이미 모르는 척 넘기기에는 노골적인 반응을 보인 후다.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 둔 레인은 가식조차 집어던진 채 남작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정말인가 보군. 정말로 그 애가…….”
남작이 낮게 탄식하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레인은 칼을 추모하며 비참함과 슬픔으로 얼룩진 남작의 얼굴을 지켜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당신 아들은 쓰레기였어.”
“솔직하게……. 솔직하게 말해 주시오. 내 아들을 죽였소?”
“죽였다면 어쩌려고?”
“…….”
“네 아들이 불쌍해? 난 그 개자식 때문에 망가졌어.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죽여 버리고 싶었어. 죽었다니 참 잘됐지. 축배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야.”
거침없는 모욕과 도발에 남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한 대 얻어맞을 각오를 했으나 남작은 두 눈을 끔벅이며 한숨만 쉬었다.
“……그렇군. 죽기 일주일 전에 그 애가 내게 편지를 보냈소. 자신이 한 짓에 대해… 적으면서, 곧 자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고, 잘못 가르쳤소.”
“맞아.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다 죽고 나서. 당신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서?”
“나는 자네가 원망스럽소. 아무리 잘못했어도 그 애는 내 아들이니까.”
기가 찼다. 제멋대로 말하는 건 아버지나 아들이나 똑같았다. 이 인간도 죽여 버릴까. 살의가 피어오르는 건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훨씬 더 쉬웠다.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다고는 해도 온 힘을 다해 휘두르면 이 인간 하나쯤 죽여 버리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충동이 걷잡아질 수 없이 커지기 전에 남작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게는 자네를 미워할 자격도 없지. 그 애가 초래한 일인 것을.”
천천히 차오르던 분노가 뚝 끊어졌다. 너무 힘을 줘서 부들부들 떨리는 제 손을 맞잡은 채 남작이 갈라지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자격이 없는 자로서, 대신 알려 주러 온 거요. 아이제나흐 공에게 제안을 받았소. 그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라는 제안이었지. 그리한다면 내 아들의 복수를 해 주겠다고 했어.”
“…….”
“나는 하지 않을 생각이오.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겠지. 자네 아버지가 자네를 끝장내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레인은 남작의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그가 레인을 노려보던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일부러 경고까지 해 주는 남작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보통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레인이 끝장낸 건 다른 것도 아닌 칼의 목숨, 되돌릴 수도 없는 절대적인 가치였다.
“제안을 거부하면 공작의 눈 밖에 날 텐데.”
“그건 어쩔 수 없겠지.”
“부득불 내게 알려 주는 이유가 뭐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어. 잘못 때문에 모든 게 어그러졌는데, 또다시 잘못을 저지른다면 더더욱 어그러질 뿐이지 않겠는가.”
거기까지 말한 레히드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사이에 몇 년은 늙은 양 잔뜩 지친 얼굴이었다. 화가 잔뜩 난 레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레히드 남작은 입술만 달싹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깊이 몸을 숙였다.
“나를 원망하시오.”
짧은 말을 남긴 남작이 그대로 방을 나갔다. 레인은 레히드 남작이 나간 문을 향해 찻잔을 집어 던졌다. 찻잔이 깨져 산산이 조각났지만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멋대로 나가 버린 남작에 대한 분은 풀리지 않았다. 사실 남작이 무슨 말을 했어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 아들의 죄를 인정하고 복수를 포기한다. 저런 부모도 있구나. 심사가 복잡하게 어그러졌다. 짜증스레 인상을 쓰는 레인을 멈춘 건 레히드 남작과 교대하듯 들어온 유르딘이었다. 유르딘은 멍하니 자신을 돌아보는 레인의 앞으로 다가와 찌푸린 미간과 딱딱하게 굳은 뺨 위에 입을 맞췄다.
“뻔뻔한 놈이로구나.”
문밖에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혼란스러워하는 레인의 앞에 유르딘이 무릎을 꿇었다. 위로의 입맞춤이 입술 위로 닿았다가 떨어졌다.
“괜찮아, 레인. 조금 전까지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곧 네가 바라는 대로 해결해 줄 테니까.”
“…….”
레인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비비 꼬인 복잡한 심사 때문인지 답이 곧장 나오지 않았다. 제 앞에 무릎 꿇은 유르딘을 잡아당겨 일으킨 레인은 천천히 단단한 몸에 제 무게를 기댔다.
“들으셨죠? 공작은 어떻게든 제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은 모양이에요.”
“……그렇더구나.”
잔뜩 짓눌려 있지만, 계기만 있다면 폭발할 살의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레인은 유르딘의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몸을 조금 떼어 냈다.
“유르딘, 혹시 상황이 불리해져서 제가 끌려가더라도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저는 괜찮으니까.”
“하지만 레인…….”
“반드시요. 섣불리 움직여서 다 수포로 돌릴 수는 없어요.”
구금당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더더욱 악화한다면 갈 데는 지하 감옥이나 고문실 정도였다. 레인은 유르딘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웃었다.
“물론 무작정 가만히 두고 보란 뜻은 아니에요. 정 안 될 것 같으면 도망가요. 그래도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고 버텨 주세요.”
“그런 건…….”
“유르딘, 부탁이에요.”
낭패한 얼굴이었지만, 유르딘은 처음부터 레인의 부탁을 끝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겠다.”
상상만으로도 죽을 듯이 괴로운 상황을 지켜보라니. 유르딘에게는 가정만으로도 고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쪽이 반드시 다른 한쪽을 무너뜨려야만 이 상황이 끝날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한 유르딘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초조하게 방을 나갔다.
일은 그날 밤부터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왕은 거짓 증거와 증인을 내세워 레스터의 방에서 있었던 폭발 사건의 진범을 따로 만들었다. 칼은 범죄에 휘말린 공범자가 됐다. 거짓으로 꾸민 게 밝혀진다면 아무리 왕이라 해도 추궁을 피할 수 없고, 권위 또한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아무리 마법사를 얻는다지만, 발각될 경우에는 손해가 더욱더 치명적이다. 왕은 전력을 다해 레인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렇게 모든 건 순조롭게 풀려 가는 듯 보였다.
딜란이 직접 나서기 전까지는 그랬다.
딜란 아이제나흐가 나서자마자 순식간에 상황이 뒤바뀌었다. 그는 방화를 레인이 사주했다는 명확한 증거를 들고 나왔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에서 흘러나온 금이 아카데미에서 방화를 도운 공범자들의 집에서 나왔고 그간 아이제나흐가 두려워 밝히지 못했던 목격자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아이제나흐의 하수인이 아카데미 내부의 범인과 몇 번이나 접촉한 걸 본 자가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꾸며진 목격자가 아니었다. 애초에 레스터가 저지른 짓이었으니 아이제나흐 공작가와 연관된 증거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범행을 저지른 주체가 바뀌었을 뿐이다.
성에서 구금당해 있던 레인은 순식간에 왕과 귀족들이 자리한 회의실로 끌려 나왔다. 항변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레인이 말할 때마다 딜란은 가슴 아파하는 척하며 깊이 탄식하고 반박했다. 왕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딜란이 바닥에 머리를 몇 번이나 찧었다. 제 아들의 죄를 자백하는 딜란의 얼굴은 괴로움에 젖어 있는 아버지처럼 보였다.
어머니를 변호할 때도 저런 얼굴을 했을까? 레인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공작의 멱살을 쥐고 묻고 싶었다.
“소신이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전하. 아들의 죄를 청합니다. 소신 또한 이에 대한 책임을 얼마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공작, 그럴 필요는…….”
왕이 낭패한 얼굴로 머리를 짚었다. 아카데미 방화 사건의 배후가 레스터라는 사실은 왕과 고위 귀족들 모두가 알았다. 물증이 없고 심증뿐이라 잡아 내지 못했을 뿐이다. 당장은 레인에게 죄를 물을 수 있어도 증거를 바탕으로 조금만 더 자세히 조사해 보면 레스터가 진범이란 사실이 금세 밝혀질 터였다.
“소신의 아들은 죄인입니다. 부디 죗값을 치르게 해 주십시오.”
늘 왕 앞에서도 뻣뻣했던 아이제나흐 공작이 머리를 깊이 숙이자 주변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진범이 레스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는 해도 지금 당장은 레인을 범인으로 잡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곤란한 얼굴로 왕이 무어라 말하는 소리, 딜란이 죄인인 양 무릎 꿇고 바닥에 머리를 찧는 소리, 귀족들이 저마다 쑥덕거리는 소리가 가깝고도 멀게 울렸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레인을 향한 손가락질이 그를 살해하기 위한 창처럼 날카로웠다. 속이 울렁거렸다. 바닥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하는 걸 느끼고 나서야 레인은 자신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휘청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인은 필사적으로 유르딘을 찾았다. 군중들 사이에서 유르딘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레인 이상의 공포에 물들어 시체처럼 굳어 있었다.
그때 건틀렛을 낀 차갑고 무도한 손이 레인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검을 쥐려 하는 유르딘에게 레인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작게 입술을 달싹이는 일이 레인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손을 떼지 못하는 유르딘에게 레인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레인은 결백했다. 증거를 샅샅이 뒤져 본다면 얼마든지 풀려날 수 있었다. 그렇게 여전히 무죄인 채로, 레인은 이번 생에서도 또다시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끌려간 곳은 지난번 딜란과 함께 라사를 만나러 갔던 바로 그 지하 감옥이었다. 역사가 오래된 수도의 왕궁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지하 감옥은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원념과 피를 머금은 채 아가리를 벌리고 레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멈칫하는 레인을 병사가 잡아끌었다. 레인은 반쯤 끌려가듯 지하 감옥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윽…….”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레인의 무릎이 맥없이 꺾였다. 예전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기야 했지만, 부자연스러운 현기증과 구역질이 갑작스레 치밀어 버틸 수가 없었다. 병사가 레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공자, 한참을 더 내려가야 합니다. 일어나십시오.”
“아니, 진짜로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레인을 붙들고 있던 병사 두 명이 안색을 살피고는 혀를 찼다. 백지장처럼 질린 얼굴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굳이 레인이 아니더라도 몸이 약하거나 정신력이 약한 죄인 중에서는 이 지하 감옥에 끌려오는 것만으로도 실신하는 자들이 많았다. 병사는 짜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레인을 업었다.
“나 참, 귀족은 까다로워서 귀찮다니까…….”
투덜대면서도 병사는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말랐다고는 해도 성인 남성인지라 축 늘어진 몸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병사들은 둘이 번갈아 가며 레인을 업었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간수 하나가 나와 더 내려가려던 병사들을 불렀다.
“그쪽이 아니야. 이쪽으로 와.”
“이쪽은 폐쇄된 거 아니었어?”
“다시 쓸 거야. 따라와.”
왜 굳이 여기를 다시 쓰는 거지. 병사들은 저들끼리 쑥덕거렸지만, 길게 의문을 표하지 않고 간수를 따라갔다. 매우 나쁜 곳인가 의심했지만 좁은 복도를 지나 나타난 장소는 생각 외로 평범했다. 물론 지하 감옥인 이상 썩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딱히 따로 폐쇄할 정도로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별다를 게 없었는데 안쪽으로 들어가자마자 속이 뒤집혔다. 레인이 견디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토사물이 어깨에 묻자 병사가 짜증을 냈지만 사과할 기운도 없었다. 앞장선 간수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레인을 적당히 밀어 넣은 병사는 레인의 발치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저들끼리 레인을 힐끗거리며 욕설을 하고 낄낄대더니 그대로 올라가 버렸다.
혼자만 남은 채로 레인은 힘없이 몸을 웅크렸다. 자꾸만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차라리 한 번 더 토하면 나아질까 싶어서 토하려고 노력했지만 더 이상 나오는 게 없었다. 머리를 바닥에 댄 채 레인은 고통스레 신음했다. 바닥에 닿은 이마가 차갑게 식은 채 지끈거렸다. 대체 뭐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어차피 조금만 자세히 조사해 보면 들통 날 만한 얄팍한 수인데. 어떻게든 상대의 생각을 짐작하려고 해 봐도 축축 늘어지는 몸은 쓸 만한 추측 대신에 절망만을 생산할 뿐이다.
눈물로 젖어 시야가 온통 흐린 와중에 레인은 유르딘에 대해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애타게 바라보는 모습은 절박해 보였다. 레인 이상으로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그가 레인의 충고를 무시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막지 말 걸 그랬나.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막연한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차디찬 감옥 안은 죽어 버린 날들에 대한 기억을 이 장소로 생생하게 끌고 오기에 충분했다. 이미 한 번 겪었고, 또 겪을지도 모르는 비참한 최후에 대한 상상을 반복하던 레인의 귀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혹시 유르딘일까 싶어서 애써 몸을 일으켰지만, 찾아온 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레스터.”
못 본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레스터는 레인의 기억과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지난번에도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나빴다. 살이 빠져 푹 파인 뺨과 분노로 형형한 눈빛은 귀족이라기보다는 뒷골목의 부랑자를 연상시켰다. 레인과 시선을 마주하자 레스터는 마치 승자처럼 나른하게 웃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귓가에 또렷하게 박혀 왔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레스터는 창살에 바싹 붙은 채 레인을 내려다보았다.
“왜 죄를 저질렀어, 레인.”
“뻔뻔한 새끼…….”
“건방지게 입을 놀리는 건 변하지 않는구나.”
“입 닥쳐.”
“힘들어 보이네. 몸도 약한데… 이렇게 고생하고.”
마치 안쓰럽기도 하단 듯이 웃음을 흘리며 레스터가 창살을 붙잡았다. 쇠로 만든 창살은 레스터의 손 안에서 너무도 간단하게 휘었다. 휜 창살을 벌린 틈으로 레스터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레인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레스터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무슨, 짓이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두려워?”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며 레스터가 레인을 바닥에 짓눌렀다. 저항하려던 레인은 몇 대나 얻어맞았다. 무리해서라도 마력을 쓰려고 한 순간 머릿속이 핑 돌았다. 사지가 제멋대로 축 늘어졌다. 제대로 몸을 세우지도 못하는 레인을 붙잡아 바닥에 눕힌 레스터가 웃는 낯으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예리한 빛이 어둠 속에서 불길하게 반짝였다. 레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거…….”
“칼이 널 찔렀던 검이지. 그 자리에서 회수했어.”
짧게 설명한 레스터가 단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느리게나마 아물어 가던 상처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온통 쓰라리고 아팠다. 동시에 주변의 마력이 마치 감응하듯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더욱 더 강렬하게 찾아왔다. 단조롭게 설명하며 레스터가 단검을 세게 쥐었다.
“상처 하나로는 좀 부족한 거 같아서.”
천천히 검이 레인의 살을 파고들었다. 두통보다도 훨씬 강렬한 고통이 레인을 덮쳤다.
레인이 끌려간 후의 회의장은 벌집을 들쑤신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병사에게 붙들려 끌려가는 레인의 모습은 유르딘의 옛 기억을 불러온다. 이미 사라진 일이 되었지만, 아직도 유르딘의 기억 속에는 죽어 있던 레인의 모습이 선명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레인의 주변에 흩뿌려진 피와 온통 차가운 돌벽 사이에 갇혀 차갑게 얼어붙는 몸. 잠깐 눈을 뗀 사이 무도한 인간에게 유린당한 참혹한 시신. 기억과 감정은 조금 전의 일인 양 쉽게 떠오른다. 유르딘은 두 번 다시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록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소란 속에서 몸을 일으켰던 유르딘은 아까까지 처절하게 아들의 죄를 주장했던 딜란 아이제나흐를 살펴보았다. 딜란은 슬퍼하지 않았으나 아까처럼 침착하지도 않았다. 어딘가 초조한 사람처럼 눈가가 파르르 떨리다가 질끈 감긴다. 그 위로 떠오르는 희미한 후회는 결코 딜란에게서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감정이었다. 후회라니. 무엇에 대한 후회인가? 레인에 대한 후회일 리가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무리해서까지 나선 건 분명 그 정도의 위험을 질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다. 지체하지 않고 유르딘은 곧장 밖으로 나섰다. 레인은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고 했지만, 유르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레인을 구할 생각이었다. 레인의 안위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설령 레인이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평생 유르딘을 원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 자리에서 레인을 끌고 가는 놈을 당장 베어 버리지 않은 게 유르딘이 지닌 인내심의 한계였다. 그 자리에서 레인을 구했다가는 왕국 전체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테니 참았을 뿐이다.
레인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기 전에 구해야 했다. 머릿속으로 계획이랄 것도 없는 난폭한 상상이 이어진다. 끌고 간 병사는 일단 죽여서 입막음하고 곧장 레인을 영지로 데려가 보살피자. 성 안에서 사람을 죽인 게 문제가 되겠지만,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 그만이다. 누군가가 본다면 목격자를 죽이면 된다. 익숙하다.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사정을 알고 있는 왕에게는 들통 날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왕은 유르딘을 쉽게 내칠 수가 없었다. 만약에 배신하려 한다면 역으로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진작에 이렇게 해야 했는데. 그렇다면 더러운 놈들이 레인을 끌고 가는 걸 가만히 지켜볼 필요도 없었을 게 아닌가?
난폭한 상상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도가 지나치단 걸 깨달을 즈음까지도 그는 여전히 성의 정원 한구석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자 한 순간에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유르딘은 평범한 인간의 신체 능력을 몇 배나 웃도는 존재다. 아직 레인에게 도착하지 못하고 빙빙 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애초에 상대는 정체불명의 마법을 다루는 악마. 가는 방향을 흐트러뜨리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터였다.
막연한 심정으로 유르딘은 검을 뽑았다. 예기가 서린 시퍼런 날 위로 빛나는 오러가 맺혔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마법은 실존하는 힘이다. 똑같이 마법의 영역에 닿아 있는 오러라면 베지 못할 리가 없었다. 확신보다는 바람을 품은 채 유르딘이 검으로 허공을 베었다. 검이 지나가는 궤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가 잘려 나가며 유르딘의 주변에 존재하고 있던 마법이 부서지고 다시 현실이 드러났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해는 아까 회의장에서 보던 것보다 조금 더 기운 것 같기도 했지만, 나올 때부터 정신이 없었던지라 확신할 수 없었다.
유르딘은 검을 채 넣지도 못하고 달렸다. 긴장과 공포로 땀이 후두두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간을 끌고 있단 건 확실히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뜻이다. 애초에 레인을 데려가지 못하게, 제 눈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붙잡았어야만 했다. 눈앞에서 놓쳤다가 완전히 잃어 놓고도 어리석게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또 후회하게 되는가? 까마득한 어지럼증이 유르딘을 덮쳐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그런 유르딘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렘샤이트 후작.”
반사적으로 상대를 베어 버릴까 했던 유르딘은 상대의 목소리에 살의를 억누른 채 몸을 돌렸다. 유르딘을 부른 건 디프랑 후작인 렌피르였다. 일단은 레인에게 믿음을 준 몇 안 되는 이를 죽일 수는 없었다. 렌피르 또한 급하게 나왔는지 흐트러진 옷차림에 유르딘 못지않게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와 관련된 일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중에 듣지.”
“급합니다. 정 급하면 가면서 이야기할까요?”
“그래.”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당장 레인의 안위보다 중요한 건 없다. 유르딘의 정신은 온통 레인이 있을 방향에만 쏠려 있었다. 그래서…….
푹, 살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렌피르의 마법이 너무나도 쉽게 유르딘을 찔렀다. 심장을 노린 공격이다. 찰나의 순간 피해 일격에 살해당하는 일만은 막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치명적인 상처였다. 상처 입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르딘이 반격했다. 렌피르와 유르딘을 가로막고 있던 마법의 벽이 한 순간에 깨지며 렌피르에게도 사선으로 그어진 긴 상처가 났다. 렌피르의 상처도 제법 컸지만, 유르딘에게 그럴싸한 일격을 먹인 대가치고는 쌌다. 유르딘은 검을 쥔 채 렌피르를 노려보았다.
“누가 사주했지?”
“사주라고?”
아프지도 않은지 렌피르는 상처를 쥐어뜯으며 웃었다. 웃을 때마다 피를 토하는 모습이 미치광이 같았다.
“……그래, 하필이면 지금 기억난 게 이상하기는 해. 사주는 아니어도 누군가의 의도가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참을 수가 없더라고.”
“똑바로 말해라. 인내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내가 당신을 죽이려 드는 게 이상한가?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거 같은데.”
모든 걸 꿰뚫고 있는 듯한 말에 유르딘의 검 끝이 가늘게 떨렸다.
“당신이 날 죽였잖아.”
서슬 퍼런 목소리로 렌피르는 유르딘의 죄를 고했다.
그랬다.
살인을 시작한 후, 죽일 자를 물색하던 유르딘은 비교적 빠르게 렌피르의 행적에 대한 것들을 알아챘다. 디프랑 후작가는 레인이 죽기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레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알아낼 수 있는 사실에 렌피르의 의도에 대한 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사실 유르딘은 그런 걸 깊이 고려할 생각도 없었다. 악의로 이어진 레인의 행적에서 렌피르만이 예외일 거라고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아내자마자 곧장 디프랑 후작가로 향했다.
불행하게도, 유르딘이 디프랑 후작저를 찾아갔을 때 렌피르는 아내와 함께 있었다. 차라리 잠들어 있었다면 나았을까. 깊은 새벽이었는데도 렌피르는 유르딘의 침입을 미리 알게 된 사람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한 렌피르는 경악하며 동시에 제 아내를 대피시키려고 애썼다. 방으로 병사들이 몰려들고 렌피르의 아내는 공포에 질린 채 맨발로 달려 나갔다. 끔찍한 절망을 마주하면서도 유르딘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병사들의 목이 모조리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유르딘은 울고 있는 후작 부인을 잡아 와서 목에 검을 겨눴다. 무언가 저항해 보려던 렌피르는 아내가 붙잡히자마자 살려 달라고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왜 레인에게 접근했지?’
‘무, 무슨, 소리를……. 경은 설마 아이제나흐 공자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모르는 척하는 위선이 역겨워 유르딘은 렌피르의 다리를 찔렀다. 거의 반쯤 잘린 다리를 붙잡은 채 렌피르가 울부짖었다.
‘난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해치려고 한 건 아니고?’
‘아뇨, 아뇨, 정말로 아니라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리, 리사에게는 잘못이 없잖습니까. 그녀를 놔줘요. 제발……. 제발, 부탁이니…….’
‘다들 똑같은 소리만 하는군.’
마렌과 다리우스, 칼도 그랬다. 부정만 할 뿐이다. 어차피 똑같은 소리만 늘어놓을 뿐인 변명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유르딘의 검이 순식간에 겁에 질린 후작 부인의 목을 잘랐다. 데구루루 굴러가는 목을 보고 오열하는 렌피르를 찔렀다. 렌피르의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끝내는 아내를 향해 기어가는 그의 목을 잘랐다.
그렇게 몰살하고 나서야 유르딘은 렌피르의 진의를 알 수 있었다. 다음 타깃을 찾기 위해 습관적으로 집무실을 뒤지다가 정말로 렌피르가 레인을 위해서 그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두 사람에게 제대로 된 교차점이 없다. 구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렌피르의 의도를 부정하려고 해 봐도, 그가 레인을 위하고 있었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허리에 찬 피가 묻은 검이 끔찍하게 무거웠다. 죄 없는 자를 제 분노를 풀기 위해 죽이고 있다는 진실을 다시 한번 직면했다.
유르딘은 크게 심호흡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시작한 일이다. 바닥에는 렌피르의 피로 더럽혀진 서류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희끄무레한 빛 사이로 늘어선 글자가 보인다. 레인을 구하려 했던 렌피르의 흔적과 함께, 레인의 명예를 위해 북쪽에서 그를 모욕했던 자들을 규탄하려던 흔적이 함께 뒤섞여 있다.
유르딘은 두 가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미 저지른 짓을 돌이킬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라도 멈출 수는 있었다. 복수라는 명목으로 죄 없는 자를 죽이는 살육을 멈출 것인지, 아니면 계속할지.
선택의 갈림길에서 유르딘은 제 감정에 몸을 맡긴 채 검을 쥐는 쪽을 택했다. 그게 지금의 결과물이다. 앞뒤 재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검을 휘둘렀던 결과가 가장 뼈아픈 때에 유르딘을 향한 검이 되어 돌아와 그를 찔렀다.
유르딘이 벌였던 참극은 시간을 되돌리며 모조리 지워졌다. 그렇다고 해도 손에 묻은 피가 완전히 지워지는 일은 없다. 미루어 두었던 죄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하지만 그 죗값을 지금 치를 수는 없었다. 원망에 짓눌려 이 한 몸 부서져도 좋으니, 레인, 레인만은. 일그러진 유르딘의 얼굴을 보며 렌피르는 힘없이 손을 내렸다. 바닥에 피가 후두두 떨어졌다. 유르딘은 그대로 렌피르에게서 도망쳤다.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 바닥에 넓게 퍼졌다. 기이할 정도로 얇고 넓게 퍼진 피는 서서히 바닥에 스며들어 갔다. 피와 함께 마력 또한 감옥 안으로 녹아든다. 레스터의 얼굴이 눈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아버지가 왜 네게 라사 켈슨을 보여 줬다고 생각해?”
레인은 딜란이 레인을 지하 감옥으로 데려왔던 일을 떠올렸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며 레스터가 낮게 윽박질렀다.
“내 부탁을 받고 했던 것뿐이야. 여기에 널 가두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면 레인이 못 알아듣잖아. 알아듣게 설명해 줘야지.”
낮게 웃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미엘이 걸어 나왔다.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양 자연스레 나와 허공에 다리를 꼬고 앉은 미엘은 승리자의 여유를 두른 채 만족스레 웃었다. 애초에 이렇게 느긋하게 설명하는 태도부터가 성공을 의심하지 않는 여유의 발로다.
“이 건축물 자체가 마력을 증폭할 수 있는 거대한 마법진 같은 거야. 수백 년 동안 무슨 수를 써도 아무 반응이 없어서 망가진 줄 알았는데……. 네가 처음 왕을 알현하러 성에 갔을 때, 이 마법진이 살아 있는 걸 알았어. 미약하게나마 마법진이 네게 반응했거든. 그때부터 생각했어. 이걸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걸 활용하면 비교적 적은 마력으로도 문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바로 북쪽으로 떠나 버려서 이걸 활용할 틈도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지. 그날 널 감옥으로 보내 마법진이 네게 반응하는 것을 확인했어. 하지만 여기 있는 마법진은 아무리 너라도 간단하게 움직이는 게 불가능해. 그래서 칼 레히드로 도발해 너를 흔들어 두고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게 폭주시켜서 그대로 마법진을 통해 마력을 뽑아냈어. 그걸로는 부족할지도 몰라서. 상처를 남겨 네게 마력을 뽑아내는 회로를 만든 거야.”
“누구 맘대로…….”
다시 피가 흐르는 상처가 아팠다. 지금까지 계속 몸이 좋지 않았던 건 마력이 뽑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것 하나 제대로 다룰 수 없다니. 인상을 찌푸리며 레인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애초에 여긴 성 한복판이니 레스터가 날뛸 만한 곳이 아니다. 하지만 레스터도 멍청이가 아니니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반역을 저지를 생각이군.”
“아이제나흐를 물어뜯으려 드는 왕가에 충성을 바칠 필요는 없지.”
그런 거라면 딜란이 무모하게 나선 게 이해가 갔다. 아예 왕을 거꾸러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쓸 생각인데 눈앞의 명예 따위에 급급할 이유가 없다. 가만히 생각하던 레인은 한숨 소리처럼 웃었다. 공포에 질리는 대신 웃는 모습이 레스터의 신경을 긁었다.
“왜 웃어?”
“그래서 아버지가 널 도운 거군. 가문에 도움이 되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너 같은 미친놈, 모자란 반푼이에게 계속 투자할 리가 없지.”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딜란이 미쳐 있는 레스터를 도왔을 리 없다. 유르딘이 말했듯, 딜란은 가문의 위신을 중요시하지만 때로 감정적으로 움직인다. 이번 결정도 아들을 버릴 수 없는 애정이 섞여 있을 터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레인의 일만 되면 열등감을 드러내며 감정적이 됐던 레스터는 쉽게 도발에 넘어왔다.
“닥쳐.”
“부정하려고 해도 소용없어. 원래도 나보다 못했잖아? 하물며 미치기까지 한다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는 자명한 일이지.”
“닥쳐!”
“말려들지 마.”
맥없이 휩쓸릴 줄 알았는데 미엘이 제지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엘은 레인의 앞으로 다가와, 씨근대는 레스터 대신 설명했다.
“나는 몇 번이나 좋게 해결하려고 했어, 레인. 협력하기도 싫고 계약하기도 싫다면 널 여기에 가둔 채 마력을 뽑아내는 동력원으로 쓸 거야. 그걸로 레스터를 강한 마법사로 만들 거고 왕국은 내 계약자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겠지.”
끔찍한 소리였다. 레인이 고개를 돌리자 미엘은 몸을 숙이고 손을 뻗어 레인의 턱을 단단하게 쥐었다. 억지로 마주한 시선이 욕망으로 불타올랐다.
“난 네게 그리 나쁘게 대할 생각 없어. 얌전하게, 예쁘게만 있으면 험하게는 대하지 않을게. 이번에는 진짜로 셋이 노는 것도 좋을 거야.”
레인은 미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끝까지 저항하는 레인의 태도를 조롱하며 미엘은 레인의 상처에 손을 집어넣고 그대로 쑤셨다.
“……크윽, 흑……. 허억…….”
“레인, 많이 아파? 고작 이 정도로?”
지켜보던 레스터가 웃었다. 반짝이는 두 눈은 언뜻 보기엔 평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어마어마한 광기에 휩쓸려 있다.
“난 굉장한 살인마에게 죽었어, 레인. 그 미친놈은 유망한 귀족 청년들을 살해하고, 목격자를 모조리 살해하고, 왕국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었어. 그 미친놈은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는 껍질을 벗겨서 내가 죽이도록 만들고 유니를 몬스터의 밥으로 줘서 죽였어. 마지막으로 나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 때까지 고문했지. 꼴좋다고 생각해?”
“…….”
“그럴 수도 있겠지.”
레스터가 미엘을 제지했다. 고통에 몸을 떨며 숨을 몰아쉬는 레인을 다정한 형처럼 쓰다듬고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며 레스터는 조곤조곤 속삭인다.
“레인, 시간을 돌리기 위해 몇 사람의 피가 흘렀다고 생각해? 귀족만 해도 몇 백, 다해서는 몇 천 명이야. 하도 죽여서 몇 명인지 정확하게 모른대.”
수천이라니.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많은 수였다. 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렇게 많았을 리가 없다.
“……거짓말이야. 뭐 하러 그렇게까지…….”
“그냥 죽이고 싶어서 죽인 거야. 너에 대한 건 핑계에 불과하다고.”
“아니…….”
부정하려 드는 레인의 입을 막은 레스터가 레인의 몸 위로 올라타 이마를 맞댔다. 발버둥 치던 레인은 레스터의 흰자위에 서서히 검은 물이 드는 걸 똑똑히 보았다. 새카맣게 변한 눈은 인간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레스터가 입을 벌릴 때마다 새카만 입김과 함께 벌어진 입으로 연기와 재 냄새가 났다. 미엘과 똑같았다.
“똑똑히 봐, 레인.”
순식간에 레스터의 기억이 레인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레스터를 좀먹던 지난 몇 달간의 기억이다.
다리우스가 살해당했다. 마렌과 칼의 죽음이 그 뒤를 이었다. 몇 차례나 아카데미 출신의 귀족들이 죽었다. 살인은 점점 더 대범해졌다. 제법 높은 위치에 있는 귀족들마저 살해당하며 왕국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죽은 건 귀족뿐만이 아니었다. 귀족을 호위하던 사병, 그들 주변에 있던 사용인, 모두가 죽었다. 레스터는 그 광경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찾아갔다. 족히 수십이 넘는 사람들이 모조리 죽어 있었다. 도망치려 들던 병사도, 구석에 숨었던 어린 하녀도 모조리 다 살해당했다. 눈도 감지 못한 사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공포가 서려 있었다.
“……아.”
살인마의 정체가 밝혀졌다. 살인마의 정체는 유르딘 니제스, 왕국의 영웅이었던 남자다. 부정하던 사람들조차 유르딘의 손에 살해당하면서 미약한 주장은 완전히 꺾였다. 벽이란 벽에는 모조리 유르딘의 현상 수배지가 붙었다. 그걸 조롱하듯 계속해서 살인이 이어졌다. 유르딘은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기 시작했다. 유르딘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렸던 다음 날 아침이면 골목마다 즐비한 시체를 치우는 게 일상이 됐다.
“그, 그만…….”
왕국 귀족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수도에서 활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유르딘이 살인을 저지른 지 반년이 흐르자, 해가 지면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수도 경비대마저 거리를 돌아다니지 않았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도 그 누구도 돕지 않게 됐다. 혼란이 싹텄다. 아비규환의 세계였다. 강도를 당해 옷까지 벗겨진 채 쓰레기와 뒹구는 시체나,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시체들은 모조리 유르딘의 범행으로 처리됐다. 다른 이가 저지른 살해에도 유르딘의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멸의 말로에서 레스터는 고문당하고 죽었다.
이후는 미엘의 기억이었다. 다행히도 그런 지옥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아이제나흐 공작가를 무너뜨린 걸 끝으로 유르딘 니제스는 제 동생에게 붙잡혔다. 유르딘의 시체가 갈가리 찢기는 걸 보면서 사람들은 환호했다. 끔찍한 재앙, 절대적인 폭력, 모든 악의 근원이 사라진 양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모든 기억을 읽어 낸 레인은 어느새 자신도 울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누구를 위한 눈물일까. 언제나 유르딘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은 제 감정이 유르딘을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몇몇이 희생당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제 오만이었다. 평생을 고통받은 레인은 똑같이 고통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 선량한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단 말인가. 너무나도 잔인한 기억이었다.
“울지 마, 레인. 행복한 마무리잖아? 최소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너…….”
“놈을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바쳐도 좋아. 내 몸이든 혼이든, 무엇이든 내주겠어. 똑같이 해 줄 거야. 그놈의 앞에서 몇 번이나 널 죽여 버리고 그놈도 무력하게 죽일 거라고.”
음산하게 웃으면서 레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인을 걷어찼다. 레인이 짓눌린 신음을 내며 레스터를 노려보았다. 눈앞의 뻔뻔스러운 놈은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 그렇게 처참하게 당해 놓고, 누군가의 폭력이 얼마나 괴로운지 죽음으로 경험해 놓고는 레인에게 증오의 화살을 돌리며 원망하고 있다. 뻔뻔스러운 사고방식은 본받고 싶을 정도였다. 누군가의 고통을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레인은 이렇게나 괴로운데.
서로 노려보는 두 사람 사이를 미엘이 가로막았다.
“자, 진정하고……. 주인공이 오고 있으니까.”
흘끗 위를 올려다본 레스터는 씩 웃으며 레인을 향해 빈정거렸다.
“디프랑 후작의 기억을 되돌렸어. 올 수 있을까?”
“무슨…….”
“아, 오기야 하겠구나. 또 죽이고 오겠지. 몇 명이든 죽이고 오겠지.”
죽은 사람 중에는 렌피르도 있었다. 설마, 유르딘이 정말로 렌피르까지 죽인 걸까. 모든 걸 보고 나서도 레인은 제가 본 기억들을 모조리 부정하고 싶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유르딘이 그런 끔찍한 학살을 일으켰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레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레인은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모아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다정하게 레인을 부르는 사람이 그렇게 끔찍한 학살을 자행할 리가 없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내려온 유르딘은 온통 피에 젖은 채였다. 한 손에 든 검에도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묻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보며 레인보다 레스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디프랑 후작을 죽이고 온 거야? 네가 어떤 인간인지 모두 다 말해 준 참이었는데.”
거짓말처럼 유르딘이 멈춰 섰다.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긴장한 유르딘의 눈빛이 레인을 향한다. 레스터는 웃으며 레인을 떠밀었다.
“왜? 기다렸잖아. 가 봐.”
미동도 않고 얼어붙은 유르딘의 모습을 보니 숨이 막혔다. 다정하고 상냥한 유르딘, 사람을 쓰레기처럼 잔인하게 죽여 버린 유르딘. 어떤 게 당신의 진짜 얼굴이지? 악귀처럼 웃던 유르딘의 얼굴이 자꾸만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레인이 상상했던 것보다 그는 훨씬 더 잔인했다. 왕국 영웅인 유르딘은 만들어진 가짜일 뿐. 레인에게 있어서 레스터와 카이렌이 폭력의 상징이듯, 과거의 유르딘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한 악몽이었다. 많은 것들이 유르딘으로 인해 파멸을 맞았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던 망설임은 찰나였다. 그러나 순간의 거부에도 유르딘은 쉽게 무너졌다. 괴로움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레스터는 이 순간을 기다렸단 듯이 웃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뒤늦게 레인이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무형의 힘이 레인을 억누르고 있어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당황한 레인 대신 유르딘이 움직였다. 절망에 찬 얼굴로도 레인을 구하기 위해 검 위에 오러를 피워 올리고 창살을 베어 버렸다. 그러나 유르딘이 레인에게 닿는 것보다 마법이 유르딘을 짓누르는 쪽이 빨랐다. 레인을 억누르는 미약한 힘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한 마법이 유르딘의 사지를 얽맸다. 강한 압력에 순식간에 바닥에 균열이 갔다. 사로잡힌 맹수처럼 유르딘은 이를 악문 채 바닥에 무릎 꿇었다. 미엘이 손을 움직이자 검은 어둠이 유르딘을 집어삼킬 듯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놈. 진작에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네놈, 대체…….”
“기억 안 나? 네가 날 쫓아낸 거. 잘 생각해 봐. 이 목소리, 들은 적 있잖아.”
레인이 알기로는 분명 첫 대면일 텐데. 유르딘은 어떻게든 속박을 떨쳐 내려고 애쓰며 미엘을 노려보았지만, 의미 없는 반항이었다. 유르딘의 몸에서는 점점 힘이 빠졌으나, 그를 짓누르는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강해진다. 조금씩 무너지는 유르딘을 보며 미엘은 더없이 만족스러워했다.
“넌 이미 역할이 끝난 말이었어. 아등바등 판 위에서 버티고 있지 말라고. 죽어 버려.”
미엘의 계획대로라면 유르딘은 그 순간 퇴장해야 했다.
왕국력 102년. 대역죄인 유르딘의 시신은 목이 잘린 채로 돌아왔다. 한 순간에 내려진 고통 없는 죽음은 최악의 살인마에게 사치였다. 단순한 죽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민심에 따라, 왕국은 죄인의 사지를 찢고 사방에 버려 육신과 영혼이 신에게 돌아가지 못하기를 바랐다. 예외적으로 머리만은 수도 중앙 광장에 매달아 왕국민의 분노를 받아들이며 그 벌을 받도록 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살인마의 머리에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 원래 열흘 내내 걸려 있기로 했던 머리는 단 사흘만 걸려 있었는데, 이미 이틀째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박살 나 더는 걸어 두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유르딘 니제스의 시신은 사방으로 뿌려져 죽음조차 모욕당했다. 본래대로라면 악마는 인간을 건드릴 수 없었지만, 유르딘처럼 만인의 저주를 받고 신에게조차 버림받은 자는 예외였다. 유르딘은 이 세계의 인간이라면 마땅히 보호받을 신의 요람에서 홀로 추락했다.
레인의 소망은 유르딘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소원의 주체인 레인은 이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을 터였다. 레인은 유르딘에게 상처를 입었지만, 동시에 그를 갈망하며 죽을 정도의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런 레인에게 접근하기에는 유르딘 이상의 적임자가 없었다. 미엘은 시간을 돌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 유르딘의 영혼을 제힘으로 으스러뜨리고 몸을 차지할 요량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레인.
유르딘의 내면에 빼곡히 새겨진 존재를 눈치채기 전까지는.
레인, 내가 너를 지켜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단 한 번이라도 고통스레 지내 오던 너를 돌아봤다면 좋았을 텐데.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웃게 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런 쓰레기들이 아니라 네가 살아 있어야 하는 건데. 나를 밉다고 해 줘도 좋을 텐데. 한 번이라도 돌아봐 준다면 좋을 텐데.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안고 싶다. 입 맞추고 싶다. 사랑해 주고 싶다. 쾌락에 취해 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싶다. 네 시신을 그리 놔두는 게 아니었다. 언제든 도망쳤어야 했다. 한 번이라도 먼저 손을 뻗었어야 했다. 죽어 버린 얼굴. 창백하게 질린 얼굴. 레인, 레인, 레인. 오직 레인의 생각뿐. 그 혼란스러운 사고를 관통하는 가장 간절한 바람.
지켜 주고 싶다.
만약에 너를 지켜 줄 기회가 단 한 번이라도 더 주어진다면 좋을 텐데. 과거에 소원을 빈 사람은 레인이었지만, 대가를 치른 사람은 유르딘이었다.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한 제물을 모으는 내내 유르딘 니제스는 오직 한 사람에 대한 일만을 생각했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레인에 대한 것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모든 사고와 행동이 레인을 향했다. 모든 후회와 상상이 레인과 얽혔다. 비록 피로 물들고 잔혹하게 비틀렸다고 해도, 단 하나 레인을 향한 마음만은 흔들림 없이 유르딘의 안에서 존재했다. 유르딘 니제스는 레인 아이제나흐를 지키기를 소망했다. 복수에 미쳐 죽이면서도 계속해서 레인에게 해가 되는 것을 제가 베어 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악마는 마법을 새긴다. 인간은 그 지식의 편린조차 이해하기 힘든 마법을 아는 게 대단하기는 해도 도와주는 누군가가 없다면 책 위의 활자처럼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악마가 새긴 마법과 소망을 이루어 내는 건 언제나 인간들 자신의 힘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마법으로 구현되지 못할 뿐, 소망은 누군가에겐 기적이 된다. 지금까지의 세상을 만들고 이어 온 건 절망이 아닌 소망의 힘이다.
악마는 시간을 돌린다. 시간을 돌리는 재료인 강대한 마력은 유르딘이 모은 것이다. 268일간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는 내내 유르딘은 단 한 사람에 관한 것만을 생각했다. 마법사가 아닌 유르딘에게 마법의 힘은 없었다. 그러나 영혼에조차 새겨질 법한 집념이 마력과 마법에도 영향을 끼쳤다. 악마가 무미건조하게 발동시킨 마법은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채로 전개되었다. 광기에 맞닿은 소망이 기적을 불렀다.
시간을 거슬러 온 유르딘의 몸속으로 파고들며 미엘은 여유롭게 속삭였다.
‘지쳤지? 푹 쉬어.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유르딘은 달콤한 목소리를 따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고작 몇 초 전에 발동됐던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은 소망의 주체인 유르딘을 도와주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레인 아이제나흐를 위한 검이 될 수 있기를. 레인을 집어삼킬 생각만을 하던 미엘 데이막이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 유르딘은 자각하지 못한 채 레인에 대한 의지만으로 반격을 이끌어 냈다. 유르딘을 집어삼키려던 미엘은 오히려 지금껏 모아 왔던 힘을 빼앗기고 역으로 유르딘의 영혼에 새겨진 과거의 기억을 일깨웠다.
당신을 다시 보고 싶어.
당신을 지키고 싶어.
두 사람의 마법이 세상을 되돌렸다. 돌아오자마자 유르딘은 저도 모르는 새에 레인을 구했다. 레인을 위했기에 유르딘은 악마에게 먹히지 않고 구원받았다.
마법에 짓눌려 고개 숙인 유르딘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레인은 저를 억누르는 마법을 뿌리치고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유르딘은 레인을 보지 못한 채 절망한 얼굴 그대로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유르딘을 어둠 속에 집어삼킨 채 세상에는 영원처럼 이어질 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