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밤을 건너다 4
5 악의 기원 (2)
아직 아카데미에 들어가기도 전, 공작가의 별채 안 초라한 방이 유일하게 레인이 쉴 수 있는 장소였다. 기억 속의 레인은 잔뜩 얻어맞은 채 침대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머리를 얻어맞아 깨진 상처에서 피가 나와 붕대며 머리카락에 엉켜 있었고 졸린 목은 잔뜩 쉬어서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으며, 온몸은 시퍼렇다 못해 검게 변색한 멍으로 뒤덮여 처참했다.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레인에게 그자가 말을 걸었다.
“도련님은 왜 그렇게 아득바득 버티시는 겁니까?”
레인은 대답하는 대신 시선만 굴려 남자를 노려보았다. 별채의 하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레스터에게 가담하여 레인을 괴롭히는 자들과 아예 무시하는 자들이다. 눈앞에서 괴이쩍은 질문을 하는 남자는 후자의 부류였다. 레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레인이 쓰러질 때면 마치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던 양 때맞춰 다가와 방으로 데려다주었다.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뭘 포기하라는 건지. 애초에 레인이 포기할 만큼 쥐고 있는 게 있나? 의아함으로 인상을 찡그리자 남자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삶요. 슬슬 죽어도 좋잖아요.”
“미친, 놈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한마디 쏘아붙인 레인은 구질구질하게 상대하는 대신 무시하고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레인의 어깨를 꽉 잡고 돌려 고정했다. 레인의 위로 남자의 새카만 그림자가 졌다. 이상할 정도로 어두운 얼굴에서 눈동자만이 이질적으로 빛났다.
“몇 년쯤 더 기다린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지만, 그래도 예상보다 너무 잘 버티잖아. 대체 왜 안 죽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남자는 비웃으며 이죽거렸다.
“뭐 하러 살아 있어? 이렇게 산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뒈지는 게 낫지 않아? 그냥 뛰어내려. 그럼 다 끝나.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가고 싶어? 이해가 안 가네.”
듣자 하니 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레인은 더는 참지 못하고 남자를 세게 밀어내고 소리쳤다.
“닥쳐!”
“설마 삶에 미련이라도 있어? 별채 사용인들이 도련님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알아? 왜 사느냐고. 나라면 저렇게 사느니 죽겠다고 그래.”
듣지 않아도 이 삶에 희망 따위는 없다는 사실은 레인이 가장 잘 알고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이, 비루먹은 개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기어 다니며 삶을 구걸해야 하는 인생. 그 누가 그 삶에 가치가 있다고 할까.
하지만 가치가 없는 인생이라고 해서, 아직 살아 있는데도 사물을 치워 버리듯이 그렇게 간단하게 죽어도 된단 말인가? 레인은 죽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살고 싶었다. 죽음이 두려웠다. 왜 사느냐고? 그걸 누군가가 레인에게 물을 자격은 없었다. 살아 있을 이유가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거라면 이 세상에 죽는 게 나은 쓰레기들이 얼마나 많은데.
잔뜩 노려보는 레인을 향해 남자가 기분 나쁘게 실실 웃으면서 다가왔다.
“저기 도련님, 그러면 내가 도와줄까?”
“너 따위가 뭘…….”
“도련님은 자신을 모두 던져서라도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어? 말해 봐. 들어줄게. 공작가에 복수하고 싶어? 어머니를 살리고 싶어? 말만 해.”
쓸데없이 달콤한 목소리를 무시하려고 했으나 남자가 레인을 붙잡았다. 죽은 사람처럼 차가운 손이 레인의 눈물 고인 눈가를 매만졌다.
“내 손을 잡아. 내가 뭐든 이루어 줄 테니까.”
“꺼져.”
“못 믿는 거야? 정말로 들어줄 수 있는데.”
“정신병자의 말을 믿을 이유가 있어?”
“절박하면 정신병자의 손이라도 잡게 되는 법이지. 아직은 아닌가 봐. 애초에 슈리아 그년이 제대로 된 걸 빌었으면 이 수고를 안 하잖아.”
레인의 눈이 번뜩였다. 제대로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걸 가볍게 피한 남자는 한 손으로 레인을 억압했다. 침대에 내리꽂고 눈가를 손으로 덮는다. 그대로 몸을 숙이자 말하는 숨결이 뺨 위에 닿았다. 남자의 입에서는 기분 나쁜 냄새가 났다. 구취가 아니라 타오르고 남은 기름처럼 괴상한 냄새였다.
남자가 손에 힘을 더하자 갑자기 가슴이 요란하게 뛰었다. 눈앞에서 하얗고 검은빛이 명멸한다. 온몸이 뜨겁다. 남자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무형의 힘이 레인을 옥죄고, 반대로 레인의 몸은 끝없이 반발하고 있었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데도 남자는 몹시 즐거워하며 웃었다.
“정말 대단해. 마력조차 깨치지 못한 애송이 주제에……. 흐, 하하, 하지만 그래도 아직 애송이지.”
기분 나쁜 예감에 손을 마구잡이로 휘둘렀지만 눈앞에 새파란 빛이 터지는 게 빨랐다. 저항하던 레인의 몸이 축 늘어졌다. 남자는 손을 뗐다. 얼굴은 실핏줄이 다 터져 얼룩덜룩하고 코와 귀에서 피가 흐르는 처참한 꼴이다. 죽어 가는 레인을 보며 남자는 여유롭게 웃었다.
“기억해 둬, 레인 아이제나흐.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어. 언제든 필요하다면 나를 불러. 나는 항상 네 소원을 이루어 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레인은 또 한 번 죽었다. 죽음으로 기억은 갑작스레 끊겼다. 눈을 떴을 때는 유르딘을 자연스레 잊었던 것처럼 그날 있었던 일을 통째로 잊었다. 하인의 존재는 여전히 알고는 있었으나 워낙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던 자라 여기며 신경 쓰지 않았다. 레인이 기억하는 미엘과는 얼굴이 조금 다르지만 세세한 부분이 같다. 왜 그동안 떠올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분명 같은 사람이다. 한 번 떠올리자 기억 여기저기에 그 남자가 등장했다. 정말로 미엘은 언제나 레인의 곁에 있었다.
“소중한 물건이시죠. 들키지 않게 챙겨 두세요.”
레인이 어릴 적 가출했다가 지니고 있던 패물을 모두 뺏겼을 때, 목걸이를 되찾아다 준 남자도 미엘이었다. 레인의 손에 목걸이를 쥐여 준 남자는 이번 생에서는 반대로 목걸이를 빼앗아 갔다. 쓰임을 다한 물건은 불타도록 내버려 두라면서. 한 번 돌려줘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목걸이는 무언가 마법의 매개체였던 것일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떠올리려고 할수록 숨이 막힐 뿐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레인은 여전히 유르딘을 꽉 붙잡은 채 매달려 있었다. 레인의 악력이 그리 센 것도 아닌데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유르딘의 옷이 엉망이었다. 세게 쥐고 있어서 저릿한 손을 떼자마자 유르딘은 황급히 레인을 살폈다.
“레인! 레인, 정신이 드나?”
“유르딘……. 제가 얼마나…….”
“잠깐이야. 잠깐이었지만 너무 괴로워 보여서……. 걱정했어.”
레인은 의원을 부르려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르딘을 재빨리 붙잡았다.
“의원을 불러서 될 일이 아닌걸요. 그냥… 마법이 깨진 여파 같으니까, 기다리면 나아요. 그보다 과거로 돌아와 유르딘을 기억 못 하던 것도, 그런 하인이 있다는 걸 제가 잊고 있었던 것도 전부… 그자가 한 짓이에요. 미엘, 미엘이……. 아마 마법으로 제 기억을…….”
반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레인은 이상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유르딘은 왜 미엘을 기억 못 하는 거죠? 미엘 데이막. 지스킬과 함께 있던 기사 말이에요.”
의원인 미엘 데이막을 누군가와 연결 지으려면 몇 년 전에 접점이 있었던 하인보다는 북쪽 성에서 함께 지낸 기사 미엘 데이막이 훨씬 더 가깝다. 의심하려면 기사 미엘 데이막을 의심해야만 했다. 하지만 애초에 유르딘은 기사 미엘과 의원 미엘을 연관 짓지 못했다. 레인의 설명을 들은 유르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이름의 기사는 없었어. 지스킬 마이어의 곁에 있던 기사는 카딤 셰비드, 네가 죽고 나서 얼마 후에 사라졌는데……. 이런.”
말을 하던 유르딘 또한 이상한 점을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하인인 미엘이 저택에서 레인이 사라지자마자 사라졌듯, 기사 미엘 또한 레인이 죽음으로써 사라지자 사라졌다. 마치 레인이 없다면 이곳에 있을 필요 없다는 듯이.
“카딤 셰비드를 직접 만나 보신 적이 있어요?”
“아니, 없다.”
“그자는 단순히 기억을 지우는 것뿐만 아니라 교묘하게 왜곡할 줄도 알아요. 생각해 보면 미엘의 이름을 들은 건, 저나 지스킬 정도죠. 저야 처음부터 미엘로 소개받았으니 지스킬의 기억만 고쳤으면 됐겠죠.”
기사 미엘 데이막이 애초부터 카딤 셰비드라는 인간이었을 리 없다. 스무 해 넘게 산 기사가 되기에는 이미 레인의 주변에서 오랫동안 머문 전적이 있다. 과거에는 하인과 기사로, 현재는 의원으로. 똑같은 이름을 지닌 채 모습을 바꿔 가면서까지 레인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걸까? 이런 일을 하려면…….
“마법…….”
마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악마의 장난 같은 일을 저지를 방법은 마법 외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미지의 분야로만 생각했는데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마법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마력 결핍증에서부터 저도 모르는 사이 죽여도 되살아나는 몸이 된 것까지. 조금 전에 마법에 대해 술술 설명을 늘어놓은 유르딘도 별다른 해답이 없어 보였다. 골치 아픈데 해답은 나오질 않으니 답답해서 머리를 쥐어뜯자 유르딘이 기겁하며 레인을 말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계속 추적해 두라고 했으니까 무언가 꼬리가 밟힐 거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어차피 지금 걱정해 봤자 해결할 방법이 없어.”
맞는 말이지만 생각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애초에 자유자재로 기억을 지우는 자를 추적할 수 있을지도 회의적이었다. 미엘은 언제나 곁에 있을 테니 자신을 부르라고 했다. 레인이 기억을 되찾을 것까지 가정하고 그런 말을 남긴 셈이다. 그랬다면 이제라도 부르면 올까. 불러서 잡으면 되는 걸까? 가정을 떠올리면서도 정말로 부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꾸만 레인을 감싸던 섬뜩한 손과 이상한 냄새가 나는 숨결이 떠올랐다.
미엘 데이막은, 그것은, 인간이기는 한 걸까.
불안은 계속 이어졌지만 계속 유르딘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느껴져서 레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요. 괜히 고민하지는 않을게요.”
“그래. 그렇게 해. 내가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대답 대신 레인은 웃으며 말을 돌렸다. 뭘 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무리였다.
“그보다 엉망이네요, 제대로 땀범벅이고…….”
“그래. 기왕 좀 씻어야겠다. 내가 도와주마.”
“네?”
도와주다니, 뭘 도와줘? 목욕을?
아직 노예 제도가 남아 있던 시절에는 귀족들이 목욕 시중까지 남에게 맡겼다고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일일이 남에게 목욕 시중을 받는 일이 흔하지는 않았다. 레인은 카이렌에게 반강제로 받아 본 적이 있긴 했다. 그러나 나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상 대부분 목욕이 아닌 다른 행위로 이어졌고……. 그걸 연상하자 레인의 얼굴이 언뜻 붉어졌다. 레인이 거절하기도 전에 유르딘이 레인을 안아서 들어 올렸다.
“자, 잠, 잠, 잠깐만요, 유르딘?”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몸에 힘이 안 들어가지 않나.”
이상한 의미로 말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착각하고 과민 반응 한 게 부끄러워져서 레인은 얼결에 승낙했다. 그 생각이 착각도 뭣도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된 건 고작 10여 분 후였다. 비누 거품을 잔뜩 낸 유르딘은 씻겨 준다는 명목으로 레인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고 주물렀다. 혼자 벗고 있으려니 수치심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도, 도와준다면서요.”
“섰잖아.”
유르딘이 레인의 성기를 손 안에 넣은 채 속삭였다. 그 말대로 아까부터 성기는 제멋대로 팽팽하게 발기해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는 자기도 섰으면서.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리는 레인의 귓가에 유르딘이 입을 맞췄다.
“괜찮아. 도와주기만 할 테니까.”
“흐으…….”
“기분 좋게 잠들 수 있게 해 줄게.”
유르딘의 호언장담대로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레인은 미엘에 대한 고민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다른 생각만 품고 욕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