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악의 기원
감옥에 갇힌 채 수도 없이 유르딘을 원망했고, 원망하는 것 이상으로 그리워했다. 죽어 가면서 수도 없이 생각하고 부른 이름의 주인이 바로 그였다. 넘치는 마음이 흘러넘쳐서 눈물이 유르딘의 손 위로 떨어진다.
레인은 유르딘의 손을 꼭 붙잡은 채 한참을 울었다. 이 사람 덕분에 살았던 날들이 많았다. 유르딘이 아니었더라면 레인은 진작에 죽어서 땅속 시체로 묻혔을 터였다. 그렇게 몇 번이나 레인의 목숨을 살렸던 유르딘이 이제는 정말로 인간다운 삶을 틔워 주려 하고 있었다. 당신이 아주 작은 호의를 내어줬을 때도 사랑했는데, 온 힘을 다 바쳐 아껴 주는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를 울었는지 모를 정도로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너무 많이 울어서 이제는 울 기운도 없었다. 수분이 모조리 사라진 것처럼 빽빽한 눈가를 문지른 레인은 잠시 침대 위에 내려 둔 유르딘의 손이 움찔거리는 걸 발견했다. 황급히 손을 붙잡았다. 서로의 온기가 다시 맞닿았다.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위화감 없이 체온이 감겨든다.
천천히, 마치 기적처럼 유르딘이 눈을 떴다. 며칠 만에 들어 올려진 눈꺼풀 아래 녹색 눈은 평소의 총기가 흐려져 뿌연 빛이다. 레인은 다급히 유르딘의 이름을 불렀다.
“유르딘, 유르딘. 정신이 들어요?”
초점이 맞지 않던 눈이 레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빠르게 예리한 빛을 되찾는다. 흐린 구름이 걷히듯 순간 드러난 맑은 눈빛이 레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름다운 녹색이었다. 홀린 듯이 바라보던 레인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요, 지금 의원을…….”
“레인.”
급히 일어나려 했으나 유르딘의 목소리가 레인을 붙들었다. 며칠 내내 의식을 차리지 못했던 탓에 유르딘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돌아보는 레인을 유르딘이 붙잡았다. 평소 레인을 한 손으로도 들 기세였던 유르딘이라기에는 너무도 미약한 힘이라, 안타까움에 서둘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마음이 조급한 레인과 달리 유르딘은 느릿했다. 빠르게 말하고 행동할 여력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천천히 유르딘이 레인에게로 손을 뻗어 뺨 위에 손을 올렸다. 셔츠 아래 드러난 손목은 여전히 레인과 비교할 수도 없이 단단했으나, 느릿한 몸짓 덕에 이번만은 어딘지 연약해 보였다. 레인은 제 뺨에 올라온 유르딘의 손을 붙잡고 그 손에 얼굴을 비볐다. 레인의 손과 뺨 사이에 갇힌 유르딘의 손이 깜짝 놀라 움찔 튀었다. 숨을 멈춘 채 긴장한 기색으로 빳빳하게 굳은 유르딘은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가늠하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이내 유르딘이 손가락을 움직여 뺨 위를 손으로 덧그려 몇 번이나 실재하는 레인을 확인한다. 유르딘의 목소리가 안타깝게 속삭였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
상하기로 치면 독약을 먹고 며칠을 앓다가 깨어난 유르딘이 훨씬 더 심한데, 간신히 정신을 차린 제 몸의 안위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두 눈에 레인만을 담는다. 드러난 안타까움 속, 맞닿은 체온이 불러일으킨 욕망과 애정 담긴 눈빛은 혼란스러운 만큼 의심할 바 없이 진심이라서 레인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갑작스레 돌아온 기억이 자신의 것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너무도 갑작스레 되돌아온지라 현실과 과거가 기억 속에 혼재되어 약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먼 과거가 조금 전의 일 같기도 했고, 조금 전의 일이 이전의 일보다 훨씬 과거에 일어난 일인 듯도 했다. 개중 가장 강렬한 기억은 레인의 기억을 이루는 중심축으로 자리해, 죽는 순간의 기억은 조금 전에 겪은 일인 양 생생했다. 덕분에 지금의 레인은 이 시간을 살아온 레인인 동시에 과거의 삶을 살아왔던 레인이었다. 과거의 레인은 유르딘이 자신을 사랑할 리 없으며 사랑하기는커녕 그대로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순간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정반대였다. 절망을 뒤엎을 현실이 레인을 뒤덮어 격정적인 환희에 휩쓸린다.
“걱정했으니까요.”
감정이 지나치게 넘쳐흘러서 지금 당장에라도 유르딘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끌어안아 입을 맞추고 싶었다. 치미는 감정에 고작 한 마디를 내뱉기가 힘들다. 욕망과 두려움이 함께 넘실댔다. 유르딘의 손을 꽉 잡자 그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손이 지나치게 뜨겁다.
“레인……. 나는.”
유르딘은 쉽게 입술을 떼지 못하고 한참이나 말을 망설였다. 레인은 유르딘의 말을 기다렸으나, 다음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천천히 유르딘의 호흡이 느릿해지기 시작했다. 레인의 뺨을 감싸 쥔 손에서 힘이 빠진다. 유르딘은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유르딘?”
조심스레 불러 보아도 눈 감은 이는 대답이 없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레인은 혼비백산해서 의원을 불렀다. 레인이 숨넘어갈 것처럼 놀란 상태라 같이 당황했던 의원은 유르딘을 살피고 나서야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았다.
“의식이 돌아오셨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갑자기 쓰러지셔서…….”
“쓰러지신 게 아니라 잠이 드신 것뿐입니다. 해독제 성분 중에 수면제로 쓰이는 게 있어서요.”
“그렇다고 그렇게 갑자기 잠이 드실 수 있나?”
“네, 물론이지요. 안심하십시오. 이러다가 공자께서 쓰러지시겠습니다.”
의원의 말에도 레인은 조금도 안심하지 못했다. 라사 켈슨이 유르딘을 배신했듯, 이 의원도 헛소리하고 있을 줄 누가 알겠는가? 초조해하는 레인을 본 의원이 결국 베른을 불렀다. 의심을 품은 채 전전긍긍하는 레인을 잡아 밖으로 안내한 베른은 ‘저 의원이 믿을 만한 자이며 대신관님께서 회복세라고 말씀하셨으니 유르딘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요지의 말을 10분도 넘게 한 끝에야 간신히 레인을 설득했다. 다시 유르딘의 방으로 들어가려 하는 레인을 의원이 막았다.
“안색이 나쁘십니다. 여기서 초조해하지 마시고 방에 가셔서 편히 쉬세요.”
“괜찮아.”
“괜찮지 않습니다. 후작께서 의식을 차리신 건 아주 좋은 징조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공자의 건강이 더 안 좋아 보이십니다. 쉬십시오.”
단호한 말에 결국, 레인은 쫓겨나 터덜터덜 계단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돌아가니 지스킬이 레인을 반겼다. 지스킬이 이끄는 대로 침대 위로 올라갔던 레인은 자리에 누웠다가 돌연 벌떡 일어났다.
“레인?”
지스킬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으나 대답할 정신이 없이 급히 외출복을 챙겨 입고 그대로 방을 나와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을 내려갔다. 레인의 돌발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지스킬은 얌전히 따라왔다.
급하게 저택의 마부를 부른 레인은 곧장 목적지를 말하고는 뭐라 할 새도 없이 마차로 뛰어올랐다. 주인이 아닌 손님의 명이지만 마부는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뒤따라 들어온 지스킬은 마차가 움직이자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아카데미는 왜 가려는 거야?”
“확인할 게 있어.”
“확인할 거라니?”
대답을 망설이던 레인이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짚었다. 머리가 아팠다. 기억을 잃었을 때처럼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머리를 쑤시는 듯한 두통이 아니라, 단순히 골치가 아파서 이는 두통이었다. 애초에 시간을 거슬러 온 것부터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지스킬이 당황해 레인을 살폈다.
“왜? 어디 아파?”
“그건 아냐……. 나중에, 조금만 나중에 설명해 줄게. 지금은 나도 혼란스러워서…….”
지스킬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달리는 동안에 쉬지 않고 생각했으나, 실제로 확인하지 않고는 생각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마차가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레인은 곧장 마차에서 뛰어내려서 성큼성큼 아카데미의 계단을 올랐다. 두세 계단씩 올라가는 걸음을 지스킬이 만류했지만, 얌전히 올라갈 정신이 없었다. 마침내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레인은 문 앞에 서서 침을 한 번 삼켰다. 비장하게 문을 열었으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옆에 선 지스킬은 너무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단 얼굴이었다.
“레인, 대체 무슨 일이야? 여긴 왜 온 거고?”
“미엘 데이막…….”
“미엘이 왜?”
“찾아야 해.”
제대로 된 대답 대신 레인은 곧장 몸을 돌려 다른 곳을 살폈다. 마침 휴일이라 아카데미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레인은 성큼성큼 돌아다니며 곧장 미엘이 있을 법한 곳을 죄다 뒤지기 시작했다. 평소 가던 약재실, 산책할 만한 건물 뒤편의 도보, 옥상, 숙소까지 전부.
그러나 며칠 전부터 미엘을 본 사람이 없었다. 하필 사라진 시기가 유르딘이 쓰러지고 다리우스가 잡혀 간 시기와 겹쳐서, 미엘이 약초를 불법 거래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돌고 있었다. 짐이며 가구도 모조리 들고 사라진 탓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단서조차 없었다. 미엘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으나 제보조차 들어온 게 없다. 미엘 데이막은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미엘 데이막.
그건 기억을 잃은 후부터 줄곧 레인의 곁에 머무르던 의원의 이름이었다. 항상 레인의 곁에 머무르며 몸 상태를 살피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깝다면 가까운 사이였다.
동시에, 미엘 데이막은 과거에 북부에서 카니예와 싸우던 왕국 기사의 이름이기도 했다. 레인은 북부에서 만난 기사의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지스킬의 옛 친구, 같은 연배의 기사 중에는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검의 귀재. 과거에 미엘의 친구였던 지스킬은 미엘에 대해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점이야 단순히 미엘이 왕국군에 합류한 시점이 이번 시간대에서 전쟁이 끝난 시기보다 뒤라고 하면 이해가 가지만……. 그것만은 아닐 거라는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이름이 같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의 얼굴은 마치 같은 사람인 양 얼굴이 매우 닮아 있었다. 하지만 말수가 적지만 성실하던 기사인 미엘과,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것 같은 의원 미엘은 성격부터가 판이하게 달랐다. 게다가 기사인 미엘 데이막은 레인과 비슷한 연배로 나이가 많아 봤자 스물다섯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의원인 미엘 데이막은 서른을 조금 넘은 나이였다. 동일인일 수가 없는데, 너무나도 지나치게 닮았다. 수상한 인간. 아니, 애초에 그자가 인간이기는 한 걸까?
‘그럼 안 돼.’
기억 속의 ‘미엘’이 레인의 손을 붙들었다. 유르딘에 대한 애정을 접기 위해 그가 준 선물을 모조리 불태우던 날, 북부에 있어야 할 20대의 미엘이 갑작스레 아카데미에 나타났다. 미엘이 그런 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미엘은 전쟁터에 있어야만 했다. 미엘은 의뭉스레 웃으며 레인을 잡아당기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제멋대로 지껄였다. 레인을 당겨 안은 미엘의 입술이 레인의 귓가에 닿았다. 섬뜩한 숨이 귓가를 파고든다.
‘되찾고 싶다면, 네 소망을 기억하면 돼.’
당시의 레인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잃어버린, 스스로 던져 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다면 최후의 소망을 기억하면 된다고.
기억을 지운 건 그날 찾아와 알 수 없는 말을 건넨 미엘 데이막이었다. 하지만 왜 하필 소망을 기억하는 게 조건이었을까. 레인이 마지막 소망을 기억하는 게 무언가 의미가 있었을까? 미엘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지금, 레인은 어떤 것도 섣불리 추측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수를 써서 미엘이 레인의 기억을 지운 건지, 무슨 목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미엘은 레인의 기억을 지웠고, 과거 기사였던 미엘이 지스킬과 함께 레인을 찾아왔듯이 레인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형태로 자연스레 레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소름이 끼쳤다.
미엘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만난 시간이 많지 않으니 당연했다. 지스킬조차 과거에 그리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는데, 미엘 데이막은 지스킬과 함께 본 게 다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달리 특별했던 것은…….
‘체스.’
항상 셋이서 함께했으나 단 한 번 미엘이 혼자서 레인에게 다가왔던 적이 있었다. 유르딘도 지스킬도 성을 비웠던 날, 아무 일도 아닌 양 다가와서 홀로 두고 있던 체스판에 껴든 미엘과 체스를 총 세 판 두었다. 결과는 레인의 승리로 끝났다. 자신의 패배를 선선히 인정하면서 미엘은 쓸데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원래 내기가 걸리지 않은 체스는 안 하는데. 그래도 한 판 빚졌지. 나중에 갚을게.’
당시에는 시답잖은 소리라고 생각하며 넘겼으나, 과거로 돌아온 지금은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과거와 현재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미엘 데이막은 단연코 특별했다. 절대자의 마법과도 같은 기묘한 회귀에 손을 쓴 자가 미엘이라면, 대체 무엇을 위해서 시간을 되돌린 걸까. 생각에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어쨌든 미엘을 찾아봐야 한다.
그러나 수배령까지 내려진 상황에서 감쪽같이 도망 다니고 있는 작자를 잡을 방법이 레인으로서는 전혀 없었다. 유르딘의 손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자꾸 도움만 청하는 건 미안하지만, 유르딘도 미래를 겪고 이 시간으로 되돌아온 거라면 연관자이긴 했다. 그 외에도 유르딘이 정신을 차리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건물 밖으로 나간 레인을 기다리고 있던 건 공작가의 마차였다. 직접 제 보좌관을 보낸 딜란의 뜻을 대놓고 거역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레인은 지스킬과 헤어져 가문의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오르는 걸음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딜란 아이제나흐는 그 무엇보다도 가문의 위신을 중요시했다. 왕국을 뒤흔든 사건에 휘말리다니 최악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구금도 명목상의 구금이었을 뿐, 레인을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알면서도 불안했다. 언제는 레인이 잘못해서 비난받았던가. 언제나 죄 없이도 죄인이 되는 게 레인의 오래된 역할이다.
마차는 저택이 아닌 왕궁 쪽을 향해서 달렸다. 마차가 왕궁의 문을 넘는 순간, 레인은 알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윽…….”
“괜찮으십니까?”
“아니.”
레인은 딜란의 보좌관에게 괜히 쏘아붙이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보좌관도 더 이상 레인에게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회귀하기 전에도 한 번 찾아왔던 왕궁은 여전히 거대했다. 마법이 사라지기 전인 옛 시대서부터 내려온 유산이나 다름없는 라인셀의 왕궁은 수백 년 동안 벽돌 한 장 깨지지 않고 온전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 외에도 외부의 공격 마법을 막는 수십 개의 방어 마법이 걸려 있다고도 하는데, 어차피 대단위의 마법 공격을 할 수 없는 이 시대에는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었다.
마차로 갈 수 없는 영역이 있었기에 내려서 한참을 걸으며 레인은 생각했다. 과거로 되돌아온 일이며 제 기억이 지워진 일, 자유자재로 제 위치를 바꾸는 미엘 데이막의 존재까지. 마법이 없는 시대라고 해도 눈앞의 왕궁이나 마력 결핍증을 앓는 레인처럼 여전히 마법의 존재는 이 시대에 남아 있었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또한 마법에 의해 벌어진 기적일지도 모른다.
보좌관을 따라가 도착한 곳은 왕궁 내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인 지하 감옥 앞이었다.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지 몰라도 이 지하 감옥 근처는 항상 서늘한 기운이 맴돌아 유령이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괴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전에는 딱히 그런 소문을 믿지 않았으나, 죽었던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와 살아 있는 판국에 유령의 존재를 믿지 못할 것도 없었다. 정말로 유령이 존재한다면 감옥 앞에서 저를 기다리듯 서 있는 아이제나흐 공작의 목을 베어 주면 좋겠다고 레인은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정체불명의 상냥한 유령이 딜란의 수급을 베어 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아팠다고 들었다.”
“왜 여기로 부르신 겁니까?”
“힘들었겠구나.”
딜란은 레인의 뾰족한 질문은 무시한 채 멋대로 말을 이었다. 노골적으로 한숨 쉬는 소리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며 대신 앞장서서 성큼성큼 지하 감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수가 화들짝 놀라 딜란의 앞으로 달려가 꼴사납게 허리를 굽힌 채 어둡지도 않은 길을 발치까지 손수 밝혔다. 말은 안 했지만 따라오라는 뜻이겠지. 레인은 얌전히 뒤를 따랐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올 때마다 두꺼운 돌벽 너머로 섬뜩한 냉기가 느껴져 몸이 잘게 떨렸다. 하도 몸을 떠니 딜란이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걸쳐 줬다. 추억 속의 향수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레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재킷을 손에 쥐었다. 추워서 받지 않을 수 없었으나 지하 감옥의 냉기는 고작 재킷 한 장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레인이 느끼는 싸늘함은 지하 감옥 고유의 냉기에 더해 옛 기억과 이어진 공포 때문일지도 몰랐다. 수없이 괴로워하며 차디찬 돌로 만든 바닥을 긁던 고통이 떠올라 다시금 몸을 긁고 싶어졌다. 휘청거리며 걷던 레인은 헛구역질을 하며 계단 중간에 주저앉았다.
“윽…….”
창백하게 질린 얼굴 위로 식은땀이 나 있었다. 어지럼증 때문에 지금 당장이라도 이 지하 감옥 깊은 곳으로 끌려갈 것만 같았다. 딜란이 레인에게 손을 뻗었다.
“부축해 주마.”
“……괜찮습니다.”
오기를 부리며 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딜란이 괜한 고집을 부린다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한 채 벽을 짚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뒤에서 딜란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잠시 레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딜란이 뒤를 따랐다.
마침내 도착한 지하 깊숙한 감방 앞에서는 기분 나쁜 냄새가 훅 끼쳤다. 간수는 미리 명받았는지 두 사람만 두고 물러났다. 딜란은 레인에게 감옥 안의 인물을 일부러 내어 보이듯 비켜섰다. 레인은 떨리는 걸음으로 걸어가 감옥 안의 두 사람을 보았다.
감옥 안에 있는 자는 라사와 회귀하기 전에 북쪽에서 보았던 의원, 두 사람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라사는 레인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희미한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며 빛나는 꼴이 섬뜩했다. 조금 더 다가가자 오물 썩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레인에게 라사가 달려들었지만 벽에서부터 이어진 쇠사슬과 수갑 때문에 중간에 멈춰 섰다. 묶인 팔을 마구 흔들며 라사가 비명을 질렀다.
“이 씨발새끼! 여기는 어떻게 왔어! 왜 온 거야!”
“왜 나를 죽이려고 했지? 넌 어머니의 시녀였잖아.”
“슈리아, 그 개 같은 년!”
거의 죽어 가는 몰골로 어떻게 저렇게 기운차게 소리를 지르는지 기이할 정도였다. 슈리아에 대한 상스러운 욕을 모조리 쏟아 내는 라사에게서는 지난 세월 켜켜이 쌓이기만 한 뿌리 깊은 증오가 느껴졌다.
“예전부터 그년이 싫었어. 멍청한 년, 머저리 같은 년. 그년 때문에 다 망쳤어! 다 망쳤다고!”
“무슨 소리를…….”
슈리아는 잘못이 없었다. 레인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뭔가 물어보기도 전에 딜란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 어머니의 가문이 반역죄를 저질렀을 때…….”
몹시 느긋한 목소리였다. 레인은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고 부정하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며 딜란 대신 라사를 노려보았다. 라사는 이를 악물고 증오심에 불타는 눈으로 레인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치고 있었다. 이를 악문 라사 대신 딜란이 이어서 설명했다.
“저 계집의 연인은 베델 후작가의 사병이었던 탓에 잡혀 들어가 사형당했지만, 저 계집은 슈리아와 함께 죄를 피했다. 비밀스레 연애해 온 탓에 운이 좋았지.”
반역죄를 지은 가문이라고 해도 보통의 사용인들은 조사 정도만 해 두고 방면됐으나 귀족가의 사병 정도가 되면 사정이 달랐다. 사병은 해당하는 가문에 충성 맹세를 하고 고용되는지라, 최소한 가문에 고용되어 일하는 동안에는 해당 가문의 명운과 제 운명을 함께했다. 더욱이 사병이란 건 실재하는 무력이요, 반역죄를 뒤집어쓴 상황에서는 반역죄를 위한 실질적인 무력으로 받아들이니 사면의 여지가 없었다.
사병만큼은 아니라도 주인을 직접 옆에서 모시는 사용인들도 주인과 거리가 가까웠다. 주인의 내밀한 곳까지 돌보는 특성상 주인과 관련된 게 함부로 바깥으로 새어 나가면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보통 주변 관계를 조사한 후 고용된다. 다른 가문과 내통할 염려가 있다고 여겨 각기 다른 가문의 사병과 시녀쯤 되면 깊은 관계를 맺는 게 금지된다. 발각당하면 최소 해고를 당하고, 가문 간의 사이가 나빠 내통의 의심을 받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라사와 그녀의 연인은 베델 후작가에서 처음 만나 라사가 슈리아를 따라 아이제나흐 공작가로 적을 옮긴 후에도 교류를 이어 가며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당연히 한쪽은 일을 그만둬야 했지만, 무작정 그만두기에는 베델 후작가의 사병이나 공작 부인을 모시는 시녀, 둘 다 봉급이 어마어마했다. 몇 년 정도 둘이 바짝 벌고 나면 어디 한적한 영지로 내려가 커다란 가게 하나를 차릴 정도의 금액을 넉넉히 마련할 수 있다.
“천한 것들이 주인 눈을 피해 가며 몰래 만나다가 돈을 모으면 그만둘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베델 후작가는 레인, 너도 알다시피 반역을 저질렀어.”
딜란은 아까부터 몸이 좋지 않아 휘청거리는 레인의 어깨를 감싸 쥐고 속삭였다. 꽉 주먹을 쥔 레인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노골적인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레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저 계집의 연인은 죽었을 테고, 그 일로 공연히 네게 원망을 품었겠지.”
“아니야!”
가만히 듣고 있던 라사가 발악하며 소리 질렀다.
“슈리아, 그년에게 부탁했어. 제발 그 사람만은 죄가 없다고 말하고 빼내 달라고! 그런데 그년은 충격받은 얼굴로 너까지 날 속이고 있었냐고 말하면서 날 저택에서 쫓아냈어! 이 씨발, 개 같은 년! 패륜녀! 제 아비가 죄를 저질렀어도 입을 닥치고 있었어야지! 난 돈 한 푼 못 받고,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쫓겨났어! 그 씨발년 때문에……. 흐, 흐흐……. 사흘 뒤에 난 유산하고서야 그 사람의 애가 내 배 속에 있는 걸 알았어. 아니, 있었던 걸 안 거지……. 죽어서 나왔는데……. 그년 때문에 난 다 잃어버렸어! 제 애비를 팔아 놓고 살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는지 뒈졌지만……. 그래, 뒈져야지……. 어딜, 뻔뻔스레……. 더러운 년이…….”
라사의 목소리가 갈수록 낮아지다가 잠시 끊어졌다. 고개 숙인 채 숨을 고르던 라사는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반쪽만 빛을 받는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오싹했다. 라사의 광기는 레인에게로 똑바로 닿아 있었다.
“근데 그 갈보 년의 애새끼가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 내 애는 죽었는데. 그년의 애도 죽어야 하지 않겠어?”
“말 다 했나?”
받아치는 레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라사는 태연한 태도가 믿기지 않는지 경악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떻게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을 수 있느냐고 힐난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 우습고 끔찍했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새까맣게 타들어 간 분노가 레인을 갉아먹고 있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과거에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었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차가운 냉기가 바닥부터 올라와 발목을 감싸고 몸을 타고 오른다. 죽음의 냄새는 조금 전에 겪은 양 생생하다. 슈리아는 죄가 없는데 가까이서 지켜봤으면서 믿어 주지도 않고. 지금 자신이 잘못한 건 생각도 하지 않고 벌어진 일에 대해 원망만 하면서 애꿎은 화살을 슈리아와 레인에게로 돌리는 뻔뻔한 태도가 경멸스럽고 증오스럽다. 애초에 당신이 미워해야 할 건 어머니가 아니라 아이제나흐 공작인 딜란이라며 사실마저 모조리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설 것인가? 어머니를 모욕한 자의 심장에 직접 칼을 꽂아 넣지는 못하더라도 할 수 있는 복수는 해야 했다. 레인은 숨과 함께 분노를 골랐다. 레인에게 유일한 무기가 있다면 바로 말이었다. 고작 피 한 방울 나게 할 수 없는 말이 사람을 얼마나 처참하게 짓이길 수 있는지 레인은 지난 17년간 체득했다. 이 상황에서는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지난 세월 수도 없이 학대받으면서도 굴한 적이 없었던 혀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의 분노 앞에서 매끄럽게 돌아갔다.
“어차피 실패한 주제에 시끄럽게도 짖는군.”
“뭐?”
“실패했잖아. 나 하나 죽이려고 몇 년을 기다린 거야? 오랫동안 노력했을 텐데. 봐, 멀쩡하지.”
오만하게 웃으며 레인은 철창 끄트머리를 발로 툭 찼다. 비록 별채에 갇혀 개처럼 사육당했을지라도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 덕분에 레인은 아득바득 자신의 긍지를 지켰다. 호화로운 비단옷으로 피멍과 원치 않는 정사의 흔적을 가리며 고통받지 않는 여유로운 귀족인 양 머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아무도 봐 주지 않아도 부득불 예법을 지키며 제 자존심을 챙겼다. 비록 권위 없이 텅 비어 허울만 좋다고 해도 레인의 태도는 분명 귀족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오만함과 당당함이 있었다. 비록 손찌검 한 번에 꺾일 허망한 태도라 한들, 라사가 그런 사정까지 알 리 없다.
레인은 라사에게 그녀의 실패를 똑똑히 보여 주었다. 뭐라고 한들 레인 아이제나흐는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았고, 앞으로도 받지 않을 것이며, 라사 켈슨의 복수는 그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단 걸 확인시켜 주었다. 라사의 눈이 절망과 허탈함에 물드는 걸 보며 레인은 잘 벼린 말을 꺼냈다.
“네 연인과 아이가 죽었다고 했어?”
꺼져 가던 라사의 눈에 화르륵 불길이 일었다. 레인의 눈썹이 아래로 부드럽게 내려갔다.
“참 안됐네. 불쌍하기도 해라.”
“너, 이……!”
“걱정하지 마. 네 아이랑은 달리, 난 죽지 않을 거야. 앞으로도 잘 먹고 잘 살 거고.”
부드럽고도 다정한 조롱에 라사는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흉하게 구겨진 얼굴로 과거에 자상하게 웃으면서 레인에게 마약을 주사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차가운 약물이 혈관으로 스며들어 가고 온 정신이 혼곤해지며 이성이 일그러지던 당시, 라사는 레인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공포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를 완전히 잃고 발악하며 소리만 내지르고 있다.
레인은 시선을 돌려 과거 자신을 강간했던 늙은 의원에게로 향했다. 과거 저 남자는 발정 난 것처럼 몇 번이고 레인을 강간했다. 약에 취한 레인은 남자에게 복종했다. 저 보잘것없는 썩어 빠진 놈에게 순종하고 벌벌 떨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린 건지 눈에 초점이 맞질 않았다. 침을 질질 흘리며, 뭔가 앉은 채로 싸기라도 한 것인지 악취가 지독했다. 저자에게도 뭐라 한마디 해 볼까 고민했다가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과거와 벌어진 사건은 판이하나 근본은 같은 사람이다. 과거에는 성공했으나 현재는 처참하게 실패한 인간들에 불과했다. 선명한 증오를 품고 노려보는 라사도,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린 늙은 의원도 실패했을 뿐. 저들의 손에 마음껏 휘둘리는 과거이자 미래는 시간을 거슬러 오며 백지가 되어 사라졌다. 레인은 라사가 피가 터지도록 외치는 비명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렸다. 이제 더는 두 사람이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몸을 돌리자 딜란이 가만히 서서 레인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레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딜란의 뻔뻔한 낯짝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지독한 피비린내와 악취가 멀어지자 그제야 마음 놓고 숨을 쉴 수 있었다. 악취도 악취지만, 라사의 증오 어린 광기와 넋 나간 의원의 조합은 공간 자체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걸음을 옮기는 레인의 발걸음 뒤로 딜란이 가만히 따라오는 발소리가 커다랗게 울리며 신경을 거슬렸다. 빨리 올라가서 딜란을 떼어 내고 싶었으나 애초에 나쁜 몸 상태로 장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변함없는 체력을 과시하는 딜란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부득불 이를 악물고 올라가던 레인은 중간에 지쳐 나가떨어졌다. 오기로 버티던 몸이 한계를 드러냈다. 만약 딜란이 빨리 걸으라고 채찍질을 한다 해도 도저히 못 걷겠다. 걸치고 있던 딜란의 재킷을 벗어 더러운 계단 위에 놓고 그 위에 주저앉자 딜란은 걸음을 멈추고 레인의 앞에 섰다. 레인은 멈춰 선 딜란을 노려보았다. 레인의 앞에 위압적으로 선 딜란은 오히려 몸을 숙여 시선을 맞췄다.
“먼저 가시지요. 아니면 옷 드릴까요?”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진정해라. 그것들은 곧 처형될 거다. 죽기 전까지 편하게 두지는 않을 거야. 감히 널 노리고 아이제나흐의 권위를 위협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주제도 모르고 아이제나흐에 발톱을 세우는 무식하고 저열한 것들이 죽기 전까지 주제를 파악하도록 만들고 나서 목을 칠 거다.”
크고 단단한 손이 마치 어린 시절처럼 레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레인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쳐 냈지만, 딜란은 레인이 짜증을 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압도적으로 레인의 머리 꼭대기에 있으니 나올 수 있는 여유란 걸 알아서 속이 뒤틀렸다.
“별 볼 일 없는 것들이 억울하다며 발악해 봤자, 결론은 저런 거다. 쓸데없는 복수심은 보잘것없는 결과를 낳지.”
말하는 대상이 라사인지, 아니면 눈앞의 레인인지 알 수 없이 모호한 말이었다.
“아까 인상 깊은 모습이더구나. 잘했다, 레인. 쓰레기를 상대로 흥분할 필요 없지.”
“그래서 당신을 상대하면서도 흥분하지 않고 있지요.”
노골적인 조롱에도 딜란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여유가 거슬렸으나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짜증스레 시선을 피하는 레인에게 딜란이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으나 딜란은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알고 있느냐? 레인. 내 아이들 중에는 네가 가장 나를 닮았다.”
뜬금없는 소리였다.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리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목소리가 분노와 황당함에 젖어 있다. 시린 원망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딜란은 다소 즐거워 보였다.
“네 어머니가 그렇게 된 후로 나랑 제대로 마주친 적도 없으면서 내 의중은 기가 막히게 잘 파악해서 날 거스르지 않았지. 그만큼 네가 날 잘 안다는 것 아니냐. 지금도 그래. 내가 꼴도 보기 싫고 가능하면 죽여 버리고 싶은데 네 생각대로 끌어가기 위해서 참고 있지. 다 참지는 않아. 상대가 내 속을 뻔히 알 텐데 모두 속일 필요는 없지 않으냐? 꾹 참으며 필요한 만큼 적의는 드러내지만, 오히려 그런 식으로 주의를 돌리면 깊은 곳에 있는 본심을 감출 수 있지. 내가 내 아버지에게 너와 똑같이 행동했으니 안다. 넌…….”
“아냐.”
결국 화가 치민 레인은 멋대로 지껄이는 딜란의 멱살을 쥐었다. 닮았다니. 레인은 제 목적을 위해 아내를 죽여 버리고 아들을 죽든 말든 내버려 두는 남자 따위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금수만도 못한 파렴치한 놈이 누굴 비교한단 말인가.
하지만 모조리 부정하기에는 딜란이 제 속을 들여다본 듯 지껄이는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딜란 아이제나흐를 부정하려 해도 레인이 눈앞에 선 남자의 혈육이란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레인의 성격은 자라 온 환경을 제하고라도 어렸을 때부터 침착하고 신중한 편으로 명랑한 슈리아와는 닮지 않았다.
‘행동이 딜란 님이 어리셨을 때를 똑 닮으셨습니다. 의젓하시네요.’
나이 많은 친척들이나 조부가 했던 말들이 새삼 떠올랐다. 어머니를 벼랑 끝까지 몰아넣고 죽인 남자와 닮았다는 가정만으로도 혐오감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아니라고! 당신과 내가, 뭘, 대체, 대체 어디가……!”
“레인.”
다정한 부름이 레인을 찔렀다. 딜란이 레인을 조금이라도 위한다면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힘이 쭉 빠져 레인은 딜란을 잡은 손을 놓쳤다. 그대로 무너지려는 몸을 딜란이 붙잡았다. 레인을 붙든 커다란 손을 마치 그리워하기라도 한 것처럼 잊지 못하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이 꽉 차오른 울분이 눈가를 따라 흘렀다. 딜란은 우는 레인을 아무 말 없이 잠시 지켜보다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지금껏 내버려 둔 주제에 이제 와서 서로 간의 공통점을 꺼내며 친근한 척하는 그가 가증스러웠다. 적의를 흩트려 보려는 목적이 너무 뻔히 보여 넘어가려야 넘어갈 수가 없는 얄팍한 수다.
제 뺨에 와 닿는 손을 치워 내도 곧장 따라붙는다. 꾸준히 수련해 단단한 손이 레인의 젖은 양 뺨을 부드럽게 훑었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넘겨 드러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끌어안아 도닥이는 손길이 어색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가끔 공부가 하기 싫어서 저택에 숨으면 어린 시절부터 레인을 돌봐 오던 유모도 찾지 못하는 걸 딜란은 항상 대번에 찾고는 했다. 딜란은, 아버지는, 항상 레인을 가볍게 안아 들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손수 레인을 옮겼다. 도닥이는 손길에 칭얼대다가도 품에서 잠든 기억이 여럿이었다. 떠올릴 가치도 없는 기억이었다. 그러나 한 번 떠오른 기억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옛 기억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한 번이라도 도와주지, 왜 지금까지 고통 속에 내버려 둬 놓고 이제 와서 다정한 아버지를 연기한단 말인가. 거짓일 뿐이다.
레스터는 레인에게 증오라도 드러냈지, 딜란은 그런 것조차 없었다. 어머니가 죽은 후로 레인에 대한 용건은 깔끔하게 끝났다는 듯이 걸음을 멈췄다. 아주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와서 그동안 내버려 둬서 미안했다며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춰 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게 비참할 정도로 철저히 무관심했다. 증오조차 없어서. 생겼으니 낳았고 이제 용건이 끝난 도구일 뿐이라서. 가증스러운 딜란이 미웠다. 다정했던 과거는 거짓일 뿐인데 괜히 과거를 떠올리는 자신은 더더욱 미웠다. 진저리를 치며 레인은 딜란을 밀어냈다.
“이거 놓으십시오.”
“그럼 눈물 닦고 일어나라. 추운데 언제까지 여기 있을 생각이냐?”
실소가 나왔지만, 딜란의 말을 듣고 나니 새삼 추위가 느껴졌다. 눈물을 멈추자 딜란이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괜한 고집 부려 봤자 네 몸만 상할 뿐이다. 뭐가 이득인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그런 건 모릅니다.”
레인은 주먹을 꽉 쥔 채로 간신히 대답했다. 적당히 굽힐 때라는 걸 알지만, 아까 딜란이 자신과 닮았다는 말을 해서인지 괜한 오기가 샘솟았다. 고집스레 대답하는 레인을 빤히 보던 딜란은 결국 한 걸음 물러났다.
“내 얼굴을 보기 싫은 것 같으니 일단 먼저 올라가마. 난 일이 있어서……. 마차는 대기시켜 둘 테니 저택으로 돌아오거라.”
딜란이 올라가고 레인은 혼자 남았다. 고작 그런 인간의 온기도 온기라고 곁에서 사라지자 추위가 더욱 매섭게 몰려왔다.
“하, 하하…….”
꼴사나운 몰골이다. 딜란이 자신을 얼마나 머저리로 봤을까? 레인은 일부러 괴로운 기억을 되새겼다. 왕국에서 제일가는 미녀였다던 어머니 슈리아의 초상화는 모조리 불태워지고, 레인의 기억 속에서조차 독을 먹으며 고통스레 죽어 가던 모습만 남았다. 비통한 슈리아의 심정과 고통은 이전 북쪽의 겨울 성에서 홀로 죽어 갔던 레인보다 억울함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슈리아를 그렇게 몰아간 자가 딜란이었다.
얄팍한 딜란의 다정함에 흔들려 죽은 슈리아에게 당당하지 못한 행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남자의 죄도, 가증스러운 거짓도, 모두 다 알고 있다. 속아 넘어가 제 증오를 번복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몰라서 흔들리는 게 아니다. 마음 한구석에 밀어 둔 어린 날의 레인이 지금의 레인의 발목을 잡았다. 긍지를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 죽여 버렸던, 남의 온기에 기대고 싶어 하던 연약함이 과거를 추억하며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감정이란 때때로 이성을 배신하기 마련이다.
차라리 감정 없이 복수에만 모두 매달리는 악마가 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제 원수에게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복수를 위해서는 피를 흘리는 걸 개의치 않는 살인귀가 되는 게 나았다. 어차피 이 세상에 레인의 온전한 편이라고는 몇 없었다. 소수의 예외만 제외하면 레인의 고통도, 죽음도 내버려 둔 다른 인간 따위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레인은 허탈한 숨을 내뱉으며 일어났다. 이런 식의 사고는 좋지 않았다.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유르딘이 보고 싶었다.
좁디좁은 계단을 느릿하게 올라 간신히 바깥에 도착했다. 머리 위를 내리쬐는 햇살에 그제야 몸이 조금 녹았다. 마차에 타고 내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공작가의 저택을 가로질러 방 안으로 돌아간 레인은 유르딘이 찾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창문을 열고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유르딘…….”
이름을 부를수록 간절함이 더해진다. 유르딘을 만나고 싶었다. 저 편한 대로 레인이 필요할 때만 내어주는 거짓된 온기가 아니라, 정말로 레인을 원하는 다정한 온기가 필요했다. 필요할 때 레인을 구원하는 온기.
거기까지 생각했던 레인의 걸음이 순간 멈췄다. 하지만 유르딘도 과거에는 레인을 직접 지하 감옥으로 밀어 넣지 않았던가? 구원은커녕 유르딘이 레인을 죽음 속으로 떠밀었다. 차라리 그때 한 번이라도 레인의 해명을 말이라도 들어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비록 현재 유르딘이 달라졌다고 해도 이미 한 번 외면당했던 기억은 과거가 바뀌어도 레인의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을 잃었던 때에도 반복해서 제게 등 돌리는 유르딘의 뒷모습을 떠올렸을 정도로 괴롭고 강렬한 기억이었다. 온갖 모욕 속에서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 시간을 잴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온몸이 쪼개지던 고통에 괴로워했던 순간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 자신이 여태 유르딘을 사랑하는 게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래도 역시 보고 싶어.”
비록 유르딘이 과거에 레인을 죽도록 버려뒀다고 해도 만나고 싶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어떤 부정적인 이유를 대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과거야 어쨌든 이 순간에는 진심인 뜨거운 애정 담긴 온기가 필요했다.
차라리 유르딘이 레인이 죽은 과거와 연관이 없는 사람이면 좋을 텐데. 유르딘의 행보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 수가 없었다. 재회했을 때 레인을 보던 온갖 격정이 담긴 눈은 지금 생각해 보면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대한 감격이었다.
이후 이어진 행동을 하나하나 짚어 보던 레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다가, 어찌할 줄 모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도로 침대에 앉아 허겁지겁 바지를 걷었다. 손이 벌벌 떨려 마음처럼 제대로 걷어지지 않자 포기하고 아예 바지를 벗어 버렸다. 자잘한 흉터 몇 개는 남아 있으나 눈에 띌 만한 커다란 흉터 없이 새하얀 다리가 보였다. 두 눈을 부릅뜬 레인은 아무런 상처 없이 매끈한 허벅지 안쪽을 매만졌다. 과거에 카이렌이 제 가문의 낙인을 찍어 둔 자리였다. 옛날에도 중죄를 저지른 노예에게만 찍는 낙인이 레인의 몸 위에 뚜렷이 남은 걸 보며 만족스럽게 웃던 끔찍한 얼굴이 기억 속에 선명했다.
이전부터 유독 다리만은 흉터가 남지 않게 조심하던 놈의 속내가, 낙인을 찍을 위치가 더럽혀지지 않기 위함이었음을 알았더라면 진작 제 손으로라도 상처를 냈을 것이다. 카이렌은 낙인에 흠을 내면 다음번엔 얼굴에 남길 거라고 윽박질렀지만, 레인은 카이렌이 떠나자마자 낙인을 지웠다. 제대로 지울 방법도 없어서 생살을 불로 지져 태워서 커다란 화상 흉터로 뒤덮었다. 누가 봤다면 미쳤냐고 할 정도로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불타 죽을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싫었고 끔찍했다. 화상 흉터로 지우고도 그 아래에 여전히 낙인이 남은 것만 같아 언제나 신경 쓰였다.
“……하, 하하…….”
레인은 웃었다. 이제 어떤 수를 써도 완벽하게 지울 수 없었던 흔적은 되돌아온 시간과 함께 너무도 간단하게 사라졌다. 비록 쓰라린 기억은 잊을 수 없어도 레인은 죽음조차 거슬러 새로 시작할 기회를 열었다. 그리고 지금 레인에게 많은 길을 열어 준 사람은 다른 이가 아닌 유르딘이었다. 그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죽게 내버려 뒀다고 화를 낼 생각도 없었다. 그저 왜 그랬는지 묻고, 솔직하게 털어 내고, 거리껴지는 감정 없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싶었다. 어서 유르딘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고 싶다.
***
금방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레인의 생각과는 달리 유르딘을 만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딜란은 나쁜 소문에 휩쓸렸던 레인을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한참 동안 붙잡아 두었다. 아카데미로 돌아간 후에도 만날 수 없었다. 딜란이 당분간 괜한 헛소문이 커지지 않도록 유르딘을 만나는 걸 삼가라고 경고했기 때문에 찾아갈 수도 없었다. 자유로운 지스킬 편으로 꽃이나 편지를 보내 상태가 괜찮다는 답장을 받았으나 그런 걸로는 부족했다. 글로는 전할 수 없는 말이 너무나도 많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무리해서라도 한 번쯤 찾아왔을 유르딘은 이제 제법 많이 나아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도 레인에게 걸음 하지 않았다.
거의 보름이 지나 도착한 편지에는 유르딘이 당분간 수도를 떠나 있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상태가 호전되기는 했으나 당분간 안정을 위해 영지로 떠나 요양한다는 내용 자체는 문제 될 게 없었지만, 당분간 떠나 있는다면서 레인을 한 번 보러 오지도 않는 게 이상했다. 처음에는 섭섭했다가 나중에는 덜컥 겁이 났다.
설마 뭔가 화가 나서, 혹은 레인에게 정이 떨어져서 찾아오지 않는 걸까? 유르딘이 아픈데 한 번도 찾아가질 않아서. 편지로는 사정을 설명했지만 무언가 오해할 만한 문장을 썼을지도 모른다. 유르딘이 갑자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인은 유르딘이 과거에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일을 생각했다. 실상은 레인이 의식이 없을 때 찾아온 적이 있었지만, 그걸 레인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순식간에 불안은 절망적인 확신을 품은 불길함으로 증식했다. 편지를 내려놓고 레인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지스킬을 붙잡았다.
“따로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어?”
“출발하기 직전이라, 그냥 널 잘 부탁한다고만……. 뭐라고 쓰여 있는데?”
“유르딘을 만나야겠어.”
대답하는 대신 다짜고짜 일어났다. 당황할 줄 알았던 지스킬은 오히려 기다렸단 듯이 씩 웃었다.
“그래. 그럼 가자.”
“……같이 가자고?”
“이미 출발했을 텐데 어떻게 따라잡으려고? 말을 타야 하는데, 너 말 못 타잖아.”
“그야 그런데……. 괜찮겠어?”
일부러 떠나는 길에 지스킬에게 편지를 보낸 건 레인이 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섞여 있을 터였다. 어찌 보면 명령 위반인 셈이니, 유르딘을 따르고 있는 지스킬의 돌발 행동을 곱게 볼 리가 없다. 그러나 지스킬은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괜찮아, 살면서 한 번쯤은 남의 사랑싸움에 끼어서 도와줘 보고 싶었어.”
“그, 그런 거 아니거든?!”
“그래, 그래.”
제대로 듣는 눈치가 아니다. 어차피 맞서 봤자 질 게 뻔한 싸움이라 맞받아치는 대신 황급히 자리를 피해 일어났다. 귀까지 빨개진 레인을 보며 지스킬은 킥킥대며 따라나섰다.
여러 가지 이유로 쏜살같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니 미리 레인이 할 말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준비를 해 둔 게 보였다. 제법 큰 준마 위에 지스킬과 레인, 두 사람이 탔다.
지스킬은 날렵하게 말을 몰아 왕도에 있는 유르딘의 저택으로 향하는 대신, 왕도에서 유르딘의 영지가 있는 남부로 향하는 커다란 대로 쪽으로 말을 돌렸다. 한참을 달린 끝에 두 사람은 제법 여유롭게 유르딘의 마차를 따라잡았다.
평소 번잡스러운 건 질색인 데다 딱히 필요도 없다며 호위를 많이 대동하지 않는 유르딘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얼마 전 있었던 암살 시도에 대한 경계와 요양이 필요한 상태를 고려해서인지 제법 호위가 많았다. 다들 유르딘의 근처에서 얼굴 한 번씩은 본 적 있는 사병들인 걸 보니 구성에 나름 신경을 쓴 것 같았다. 그중에서 일행을 이끄는 건 위풍당당한 자세의 기사였다. 비록 갑옷을 입지는 않았으나 체격 좋은 명마를 타고 고급스러운 여행복을 걸친 차림새로 남자가 꽤 중요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기사는 체격이 유르딘과 비슷할 정도로 크고 단단했으며, 친척인 듯 인상도 조금 닮아 있었다. 귀족 중에는 가문을 잇지 못할 때 기사가 되는 자가 많으니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마차와 나란히 말을 달리던 기사는 이쪽을 경계했다가 얼굴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두 사람에게 손을 내저으며 그냥 가라는 의사를 표했다.
이대로 물러나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찰나, 유르딘이 바깥의 기척을 느끼고 마차에 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말에 탄 레인을 본 유르딘은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마차 문이 휙 열리더니 옆에 선 기사가 말리기도 전에 유르딘이 달리는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제법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던 마차였는데 멈춰 있는 마차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유르딘은 지스킬을 노려보았다.
“이런 식으로 무리시키라고 한 적은 없는데.”
“지스킬은 절 도와준 것뿐입니다. 제가 후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억지를 부렸어요. 죄송합니다.”
더 혼나기 전에 레인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유르딘도 더 뭐라고 하지는 않고는 한숨을 쉬며 레인을 돌아보았다.
“레인.”
짧게 이름을 부르는 한 마디에서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이전보다는 많이 말랐으나 며칠 내내 의식을 잃고 있던 때보단 훨씬 괜찮아 보이는 얼굴에는 오직 레인에 대한 염려와 걱정스러운 기색만이 서려 있다. 어느 모로 보나 레인에게 실망해서 연락을 끊으려는 얼굴은 아니라 마음이 탁 놓였다. 레인은 유르딘이 뻗은 손을 잡고 말에서 내려왔다.
보는 눈이 많은지라 일단 마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기로 하고 두 사람만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에 오르기 전 혼나는 걸 면해서인지, 응원하기 위함인지, 어쨌든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엄지를 척 드는 지스킬이 보였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건데 후자 같았다. 레인의 얼굴이 빨개졌다.
“힘들었나? 얼굴이 붉어.”
“아뇨, 이건 그냥…….”
“돌아갈 때는 마차를 타고 가도록 해. 마차를 보내라고 연락을 해 뒀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별로 그렇게까진 힘들진 않고, 지스킬이 당신과 내 사이를 갖고 나만 놀려 먹어서 그렇다. 그리 해명할 수는 없어서 레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달려온 거냐.”
“그게…….”
레인은 말을 망설이다 입을 다물었다.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무작정 달려왔으나 변함없는 유르딘의 태도를 확인하고 나니 섣불리 판단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말없는 레인을 살피던 유르딘이 괴롭게 중얼거렸다.
“많이 말랐구나.”
“그야 유르딘이 제게 말도 없이 사라지려고 하니까요.”
“그건…….”
기회를 잡아 추궁하자 유르딘이 잔뜩 당황했다.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줄 거라 예상했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하기야 요양을 떠난다는 것부터가 너무 갑작스럽기는 했다. 가까운 것도 아니고 왕국 끄트머리에 있는 영지는 요양을 떠나기엔 너무 멀었다. 유르딘은 그저 사과했다.
“미안하다.”
“왜 말도 없이 떠나려 하신 건가요? 저는 제게 화라도 나신 줄 알았어요.”
“내가 네게 화를 낼 리가……. 그런 건 아니다.”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한 달쯤 후에…….”
“머네요. 편지만 남기고 떠나셨으면 절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려 하신 줄 알았을 거예요.”
우울하게 가라앉는 목소리에 유르딘은 난처해했다. 어떻게든 해명하려 노력하던 유르딘은 말 대신에 행동으로 내보였다. 레인은 주저 없이 바닥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는 유르딘의 모습에 기겁했다.
“유르딘? 잠깐…….”
“절대로 그럴 일은 없어. 미안하다. 조금 사정이 있을 뿐이야.”
너무나도 열렬한 애정, 애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복종에 가까운 숭배였다. 회귀하기 이전의 유르딘은 결코 이렇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다정한 어른이었다. 어쩌면 그 속내에 조금쯤은 레인을 연애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랑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리도 맹렬한 기세로 제 마음을 내어 보일 정도로 노골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레인은 다분히 충동적으로 유르딘에게 몸을 숙여 바싹 다가갔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에 순간적으로 유르딘이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넓다고는 해도 마차인지라 물러날 곳이 없었다. 레인은 손을 뻗어 조심스레 유르딘의 어깨 부근을 붙잡았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이내 입술이 맞닿았다. 유르딘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고 노골적인 당황과 혼란을 드러내는 걸 보며 그대로 레인은 괜히 유르딘의 옷만 손에 꾹 쥐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몸이 흔들리며 절로 입술이 문질러지는 감각에 온몸의 신경이 집중됐다. 조금 더운 숨이 섞였다.
망설이던 레인의 혀가 유르딘의 입술을 조심스레 핥았다. 유르딘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레인을 보고 있었다.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제 얼굴이 새빨개졌음이 굳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망설이며 이대로 물러날까 고민하던 순간에 레인의 몸이 뒤로 홱 밀렸다.
조금 거칠게 미는 움직임에 마차 벽에 머리를 박을 뻔했지만, 그 전에 유르딘의 손이 레인의 머리를 감쌌다. 잠깐 떨어졌던 입술이 황급히 다시 맞물렸다. 레인의 머리를 받쳤던 유르딘의 손은 떨어지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유르딘을 붙들었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유르딘이 레인의 입술을 가볍게 물고 핥고 그대로 빨아올렸다. 그리고 이내 벌어진 레인의 입 안으로 유르딘의 혀가 침입했다.
“으응…….”
안으로 밀고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훑자 절로 앓는 신음이 나왔다. 미약하지만 분명한 반응에 지나친 흥분이 몰려와 유르딘이 미간을 찌푸렸다. 레인의 몸은 조금 더 떠밀려 좌석 위로 넘어갔다. 거친 움직임에 레인이 유르딘을 잡은 손을 놓쳤다가 이내 팔로 목을 감싸 안았다. 유르딘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곧이어 아까의 어린애 장난 같은 입맞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집요하게 혀가 얽혔다. 이게 처음 해 본 입맞춤은 아니다. 지금까지 수백, 수천 번은 해 왔다. 그러는 동안 물컹물컹한 혀가 입 안을 드나드는 감각을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도 언제 그랬었냐는 듯이 솜털까지 바싹 설 정도로 오싹한 쾌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휩쓸었다. 배 속이 간질거렸다. 마치 처음 키스해 본 어리숙한 소년처럼 레인은 유르딘이 주는 감각에만 몰두해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결국, 숨이 차서 레인은 유르딘을 밀어냈다.
유르딘은 레인의 위에 올라탄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흥분감에 젖어 붉어진 얼굴이며 조금 거칠게 몰아쉬는 숨, 조금 젖어 반들거리는 입술까지. 지금도 충분히 미쳐 있는 유르딘을 다른 의미로 돌아 버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이대로 손을 뻗어 완전히 가질 수만 있다면 제가 쥔 모든 걸 던져 버려도 아쉽지 않았다.
그러나 유르딘은 눈앞의 레인을 억누르고 제 것으로 만드는 대신 주먹을 꽉 쥐고 욕망을 참아 냈다. 제 안의 짐승을 다스리는 건 레인의 수호에 대한 강박을 지닌 유르딘에게도 조금 어려운 일이긴 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유르딘은 숨을 고르며 레인과 떨어져서 앉았다.
“보고 싶을 거예요.”
“레인.”
레인은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유르딘을 보았다. 강렬한 감정이 고스란히 읽힌다. 품고 있는 감정들은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말로써 확인받는 대신 레인은 가볍게 웃었다.
“돌아오시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돌아오시면 말씀드릴 테니까, 늦지 마세요.”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조금 더 느긋하게, 감정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미 흘러가고 묻혀 버린 과거에 대해,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보내온 감정들에 대해. 좋아한다는 말은 모든 걸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된 다음에 해도 충분했다.
***
이제 슬슬 학기의 마지막 시험을 준비할 때였다. 이전번에는 의원 노릇을 하던 미엘에게 도움을 받았었는데. 미엘, 그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다만 한 가지 기묘한 점이 있었다. 레인이 미엘을 정신없이 찾았던 직후, 지스킬이 나름 혼자서 미엘에 대해 조사를 했던 모양이었다. 레스터의 방에서 구해 미엘에게 밖으로 빼돌려 부탁했던 소년의 행방이 묘연했다.
“마지막으로 발견된 곳이 어딘데?”
“그조차 모르겠어. 미엘 그자의 방에 맡긴 후, 본 사람이 없어.”
오싹한 이야기였다. 혹시 몰라 지스킬이 아카데미를 전부 다 뒤져 봐도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걱정스러웠으나 그란델에게 편지를 보내서 한 번 찾아봐 달라고 하는 것 외에 레인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동안 레인은 시험공부조차 미뤄 두고 소년을 찾았다. 처절하게 숨던 소년의 모습이 자꾸만 기억 속에 밟혔다.
“죽었을지도 몰라. 내가 제대로 살펴야 했는데.”
“네 탓이 아니잖아.”
“내 탓이 아니라도, 내가 도와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딱 자르는 말에 지스킬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레인을 위로했다. 소년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아카데미를 뒤지던 레인은 서고에서 마법에 대한 서적을 발견하고 꺼냈다. 아카데미 학생들이 흔히 읽는 마법 개론서였으나 레인은 신중한 얼굴로 책을 넘겨 뒷장을 펼쳤다. 미엘 데이막은 마법을 사용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마법에 가끔 사용되는 것, 산 제물. 제물을 바치는 마법은 금기인지라 짤막한 설명만이 적혀져 있었지만, 레인의 불길한 상상을 키우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연히 다루기 쉬운 소년을 손에 넣은 미엘 데이막이 그를 마법의 산 제물로 사용한 것이 아닐까?
“지나친 망상이라고 생각해?”
“솔직히 말하면 그래.”
지스킬은 황당무계한 헛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레인을 보았다. 하긴, 레인도 한 번 죽었다가 과거로 되돌아온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런 허무맹랑한 가능성을 내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게 일어난 일은 마법이 아니고서야 설명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은 마법, 그리고 미엘 데이막과 연관된 점이 있다.
레인은 풀리지 않는 답이나 찾을 수 없는 소년에만 매달리는 대신 틈틈이 공부를 시작했다. 지스킬은 그 옆에서 지루한 공부를 하는 대신 틈틈이 잠을 자거나 혼자 검을 휘둘렀다.
평화로울 줄 알았던 일상은 사흘 후 갑작스레 깨어졌다. 저녁이 되자 며칠 내내 공부하던 레인의 곁에서 좀이 쑤셔 어찌할 줄 모르던 지스킬은 잠시만 한바탕 검을 휘두르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실전을 겪은 놈이 학생에 불과한 애들과 함께 검을 휘두르는 게 뭐가 재밌을까 싶기도 했으나 어쨌든 지스킬은 신이 나서 나갔다.
지스킬이 나가고 채 10분이 지나지 않았을 때, 갑작스레 카이렌이 레인의 방에 들이닥쳤다. 이전이라면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얼마간 평화롭게 지낸 탓인지 보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그러나 카이렌은 전처럼 레인을 다짜고짜 바닥에 엎어 놓거나 침대로 떠미는 대신 굳은 얼굴로 다가와 끌고 가기 시작했다. 기겁해서 카이렌의 손을 떨쳐 내려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끌려 나온 복도는 개미 한 마리 없이 조용했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강한 힘에 레인은 속절없이 끌려가며 그동안 가라앉았던 불안한 생각들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그간 잠시 평화롭게 지냈던 건 아무 소용 없이, 순식간에 공포가 레인을 잠식했다. 계단 아래로 끌려 내려가며 레인은 꽉 막힌 숨을 간신히 토해 내다 입을 열었다.
“어… 어딜, 어딜 가는 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사고로……. 바로 가 봐야 해.”
“거기에 내가 왜 가?”
카이렌이 레인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레인은 카이렌의 얼굴이 자신 이상으로 창백하단 걸 알아차렸다. 레인은 반듯한 이목구비를 보며 카이렌과 전혀 닮지 않은 헤레일 모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레인을 강간하려 들던 남자의 악귀 같은 얼굴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 레인을 죽일 기세로 목을 조르고 너무나도 간단히 제압하던 헤레일 모드는 오늘내일하던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니만큼 카이렌은 정신이 없어 보였다.
“네 가문과 우리는 오랜 우방이야.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일원이 모드 백작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게 이상해?”
“레스터를 부르든가. 왜 하필 나야? 갈 생각 없어, 그 인간은……!”
애초에 가문의 이름 따위 레인에게 있어 별다른 무게감도 없었던 데다 더욱이 헤레일 모드는 레인을 모욕하고 강간하려던 자였다. 죽든 말든 레인이 신경 쓸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카이렌도 레인의 생각 따위를 신경 쓸 놈이 아니었다. 레인이 화를 내려 하자, 카이렌이 그대로 레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걷지 않으려고 하자 성가시다는 듯이 아예 어깨에 짊어졌다.
강제로 끌려 내려간 곳에는 모드 백작가의 사병 둘이 말을 준비한 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인을 말에 올린 카이렌은 괴로운 얼굴로 속삭였다.
“함께 가 줘, 레인.”
“하.”
제법 애절한 목소리에 레인은 코웃음 쳤다. 제가 뭐라고 연인이라도 된다는 양 애절하게 속삭인단 말인가. 부모가 죽든 친척이 죽든, 설령 카이렌 본인이 죽어도 레인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필요한 일조차 없었다. 아마 즐거워서 웃을 게 뻔하니까. 어린 시절, 슈리아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악몽을 꾸거나 때로 눈물을 흘리는 레인을 레스터와 함께 조롱한 놈이 그런 건 기억도 안 난다는 듯이 아버지의 장례에 함께 가 달라고 부탁하는 꼴이 우습기까지 했다. 하필이면 지스킬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쳐들어오다니.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저 멀리서 치솟아 오르는 검은 연기를 발견했다.
“뭐야……?!”
해가 저물고 있는 하늘에서도 뚜렷이 구분되어 보일 정도로 짙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매캐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조금씩 코를 간질였다. 화재였다. 게다가 저 방향은 아마 지스킬이 갔을 검술 대련장이 있는 장소 쪽이었다. 카이렌은 무성의하게 시선을 던져 한 번 돌아보더니 이내 무시하고는 그대로 레인의 뒷자리에 올라왔다.
“가자.”
무언가 불길했다. 카이렌이 레인의 몸을 바로 세우고 곧바로 말을 출발시켰다. 차라리 뛰어내릴까 고민했던 레인은 꼼짝없이 카이렌의 품에 갇힌 채 이를 악물었다.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리는 건 개죽음이었다. 결국 초조하게 안장 앞부분을 잡은 레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하니 전장에서 수없이 사선을 넘었을 지스킬이 다쳤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걱정되는 건 레인 자신 쪽이다. 왜 하필 며칠간 레인의 곁을 머무르던 지스킬이 밖으로 나갔을 때 불이 났으며, 정확히 그때 카이렌이 찾아왔을까. 미친놈처럼 카이렌을 폭행하던 헤레일의 모습이 기억 속에서 떠오른다.
근친 살해. 끔찍한 가정을 떠올렸던 레인은 불길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려 애썼다. 만약 정말로 카이렌이 헤레일을 죽였다면 홀로 가서 조용히 장례를 치르는 쪽이 사리에 맞는다. 구태여 이상한 정황을 발견하고 증인이 될 수 있는 레인을 데려갈 필요성은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정신없이 말을 달리는 카이렌의 모습은 제가 죽인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간다기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것처럼 너무도 다급했다.
너무도 다급했던 탓에 레인은 하염없이 떠오르는 걱정을 멈출 수 있었다. 정확히는 강제로 멈춰야만 했다. 최고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 타는 건 몸이 약한 레인에게는 너무도 고역이었다. 자신이 달리는 것도 아닌데 아래위로 정신없이 흔들리는 말 위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곧 죽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레인은 자신을 받치고 있는 카이렌 쪽으로 축 늘어졌다.
어두워지고 나서도 한참을 더 말을 달려 가던 카이렌은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평범한 여관 앞에서 말을 내렸다. 자신을 지탱하던 카이렌이 내려가자마자 레인은 말 위에서 크게 휘청거리며 떨어질 뻔했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떨어지려던 레인을 가볍게 내려서 안아 든 카이렌은 여관방으로 올라가 레인을 침대에 눕혔다. 긴장한 얼굴로 노려보는 레인을 한 번 쳐다본 카이렌은 그대로 옆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은 레인을 안고 손으로 도닥였다.
“설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한가하게 널 건드릴까 봐? 잠이나 자자.”
“씻지도 않고?”
“일단 자자.”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로 곧 카이렌은 곯아떨어졌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렸으니 피곤하기는 피곤한 모양이었다. 꼭 감고 있는 팔을 풀려고 하는 순간 깨어나리란 걸 레인은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험 삼아 팔을 풀어 보려 했다가 더 억센 손길에 휘감겼다.
“움직이지도 못하게 덮치기 전에 자.”
경고를 했으면 다음번에는 정말로 실행하는 놈이었다. 몸을 억누르는 타인의 체중과 피로가 너무도 무거웠다. 도망쳐야 하는데. 아니면 뒤늦게라도 지스킬이 추적할 수 있도록 표시라도 남겨야 할 텐데. 그 생각을 하다가 레인도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레인과 달리 하룻밤의 휴식으로 체력을 회복한 카이렌이 손수 침대에 아침을 차려 주었다. 레인이 식사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자 카이렌이 웃으며 침대로 올라왔다. 레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카이렌은 달콤한 척 귓가에 입을 맞췄다.
“또 그렇게 고집 부리지 말고, 레인. 빨리 출발해야 하는데 억지로 먹여야 먹을 거야? 도망 못 친다는 거 잘 알잖아.”
그렇게 당연한 것을 왜 모르냐는 듯이 아이를 채근하는 말투에 발끈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식기를 들었다. 식사하는 레인을 보며 카이렌은 조금 여유를 찾은 얼굴이었다.
“간만에 이렇게 보니까 좋네. 여전히 예뻐.”
“빨리 먹길 바라면 입 좀 닥쳐.”
“하지만 너무 오랜만이잖아. 건국제 때 보고 제대로 못 봤지.”
아카데미에서 스쳐 지나가긴 했어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간만이었다. 레인은 음식을 씹어 삼키며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다. 유르딘의 저택에서 저를 밀어붙였던 카이렌에 대한 기억은 정말 단순히 꿈이었던 걸까? 이후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카이렌은 그 시간에 유르딘의 저택에 오지 않았고 올 수가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그날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해서 자꾸만 실제로 있었던 일 같았다. 레인은 카이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하고 싶어?”
인상을 찌푸리며 식기를 음식에 거칠게 꽂아 넣자 뭐가 즐거운지 카이렌이 작게 웃었다. 레인은 음식을 입 안에 밀어 넣으며 쓸데없는 생각 또한 안으로 꾹꾹 밀어 넣었다. 범인도 밝혀졌으니 더 이상 그 일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말에 올려졌다. 레인은 씻지도 못했는데, 카이렌은 저 혼자 씻었는지 혼자 뽀송뽀송한 냄새가 났다. 욕을 된통 해도 한 마디 받아치지도 않는 카이렌은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여관에서야 어떻게든 여유로운 척을 했지만, 말에 오르기만 하면 필사적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또다시 온종일 식사도 하지 못한 채 말을 달리고 나서 밤에 도착한 여관에서는 목욕이고 뭐고 정신을 못 차리고 기절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레인은 며칠 만에야 냄새나는 거지꼴로 간신히 모드 백작가의 영지에 도착했다. 도착할 때까지 정말 헤레일이 죽었는지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성 곳곳에 죽음을 뜻하는 검은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영주관에 도착하니 집사가 놀란 얼굴로 일행을 쳐다봤다.
“도련님, 일찍 도착하셨군요. 이틀은 더 걸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주인님을 먼저 보시겠습니까?”
안 봐도 되니 씻고 싶었으나 레인은 카이렌에게 질질 끌려 헤레일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 와 보는 영지의 분위기는 기묘했다. 백작이 죽었으니 분위기가 딱딱한 거야 당연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심한 공포에 질려 있었다.
헤레일의 시신을 확인하고 나서야 레인은 공포의 정체를 확인했다. 헤레일은 몸통 대부분은 물론이요, 머리의 반까지 몬스터에게 뜯어 먹혀 참혹한 몰골로 발견됐다. 몬스터의 배 속에서 헤레일의 머리로 추정되는 살점을 발견했으나 그걸 이어 붙일 수는 없어서, 빈 머리 부분에 석고 조각을 놓고 가발을 씌워 그 위를 꽃으로 덮었다. 온전한 부분은 머리 반의 반쪽밖에 없었다. 식인 하는 몬스터가 드물지는 않으나 그런 흉악한 것들이 사냥터까지 내려오는 일은 드물었다. 헤레일은 사냥감을 쫓다가 아슬아슬하게 몬스터의 서식지까지 들어갔다. 주기적으로 토벌해도 끈질기게 남아 있는 몬스터는 제 구역에 들어온 인간을 사냥해 먹었다. 종종 몬스터에게 습격당하는 영지민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공포로 다가왔으리라.
슬퍼하거나 공포에 질린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감정에 무엇 하나 공감하지 못한 채, 레인은 와서는 안 될 곳에 온 사람인 양 불편함을 느끼며 방으로 안내됐다. 라인셀의 장례식은 시신에 가볍게 방부 처리를 하고 관을 열어 둔 채 고인과 작별 인사를 치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호상일 경우다. 저렇게 참혹하게 죽었으니 장례는 금방 끝날 것 같다. 감흥 없이 생각하며 레인은 며칠 만에 따스한 물에 몸을 담갔다.
조금 기력을 회복한 레인은 도망칠 궁리를 했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방문 앞에는 사병이 지키고 서 있었다. 우울한 장례 따위야 별것 아니다. 굳이 도망치지 않아도 금방 끝난다. 그러나 한 번 두려움을 느낀 심장은 쉬이 진정하지를 않았다. 침대에 누웠으나 깊게 잠들지 못하고 자꾸만 깨며 실속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깊은 밤, 카이렌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당장 꺼지라고 말하고 베개를 던졌던 레인은 곧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침대 위에서 몸의 대화를 할래. 아니면 다른 데서 이야기를 할래?”
두말할 것도 없이 후자였다. 어차피 이 장소 자체가 카이렌의 공간인 한은 거역해서 좋을 게 없었다. 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이렌의 뒤를 따랐다. 좁은 복도를 따라가 도착한 곳은 헤레일의 집무실이었다. 방 안은 쓸데없이 호화로운 장식물들로 가득했다.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웅장하고 화려한 세기의 예술품이겠으나 그런 걸 여러 개 방 안에 몰아서 넣어 두니 오히려 조잡하게 보였다. 그다지 좋지 않은 취향과 허영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방이다. 카이렌은 자리를 권했고 레인은 사양하지 않고 앉았다. 다른 가구나 장식품들에 뒤지지 않게 커다란 소파도 앉은 자리가 편하지 못해 쓸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죽어서까지 마음에 드는 인간은 아니다.
여러모로 불편한 자리였기에 레인은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 한쪽에 걸린 헤레일의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 저렇게 생기질 않았었는데, 초상화 속의 헤레일은 실제 본인보다 백배는 잘생긴 외모였다. 초상화를 미화하는 거야 흔한 일이니 그러려니 싶지만, 그 미화한 초상화를 굳이 자기 방에서 걸어 놓고 싶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카이렌은 레인의 시선을 따라 헤레일의 초상화를 보더니 그 앞에 섰다.
“나.”
카이렌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레인은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모호한 표정으로 카이렌을 주시했다. 헤레일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좋은 데다가 그 아들인 카이렌이 슬퍼하든 말든 레인이 알 바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뻤다. 그러나 아무리 쳐 죽일 놈들이라지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놈 앞에서 웃는 건 인간 이하의 행동처럼 느껴졌다.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카이렌을 비웃겠는가 싶기도 했다. 결국, 레인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한참 뜸을 들이던 카이렌이 고개를 들어 레인을 돌아보았다.
“나 잘생겼지?”
“…….”
뜬금없이 나온 말이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미친놈인가, 이건? 아니, 미친놈 맞지. 레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걸 보며 카이렌은 제 뒤의 초상화를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기껏 잘생기게 그린 그림도 영 아니잖아. 내가 훨씬 잘생겼지. 우리 아버지는 참 못생겨서……. 음, 워낙 시체가 갈갈이 뜯겨서 화장하기로 했거든. 이제 재가 될 테니 못생긴 얼굴은 신경 안 쓰셔도 되겠네. 그거 하나는 잘됐어.”
“미친 새끼.”
진지하게 고개 숙인다 했더니 기껏 한다는 말이 죽은 제 아버지의 외모 품평이라니. 물론 백번 동의하기는 하는데 그야 레인이 헤레일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거고, 카이렌에게는 제 아버지인데 고인을 모욕하는 정도가 심했다. 헤레일에게 악감정이 많은 레인조차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태연히 내뱉은 카이렌은 소파 바로 옆자리에 와 앉더니 뻔뻔스레 레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치워.”
“불쌍해, 우리 아버지도 참.”
“…….”
“그런 아버지 아래서 산 나도 불쌍하지 않아?”
레인이 눈살을 찡그렸다. 카이렌의 뻔뻔스러움을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도 이건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을 가볍게 넘어선 뻔뻔함이었다.
“네가 왜 불쌍해? 넌 전혀, 조금도 안 불쌍해. 넌…….”
“하긴 그렇지, 너에 비하면 정말 난 아무것도 아니지.”
그걸 아는 놈이 잘도 뻔뻔한 소리를 한다. 레인은 참지 못하고 주먹을 쥐고 카이렌을 내려쳤다. 당연하단 듯이 막힐 거야 예상했지만, 카이렌이 레인의 손목을 잡고 일어났을 때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요즘 들어 레인의 행동을 봐주고 넘어간다고 해도 결국, 그는 폭력적인 수단으로 레인을 지배하려 했던 놈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도와줄 이가 없는 카이렌의 공간이 아니던가?
카이렌은 레인의 겁먹은 얼굴을 보고 만족스레 웃더니 뺨을 툭툭 건드리고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쌍한 레인. 고작 이런 것에 매일 겁먹고.”
빈정거리는 말투에 레인의 얼굴에는 열패감이 서렸다. 카이렌은 장식장에서 술병과 잔을 꺼내 자리로 돌아와 레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술에 대해 잘 모르는 레인이지만 몇 십 년 전의 라벨이 찍힌 걸로 봐서 어마어마하게 비싼 술이란 건 알 수 있었다. 카이렌은 호박색 술을 한 잔 따르고 레인에게 권했다. 한 번 거절하자 두 번은 권하지 않고 자신이 마셨다. 이런 상황이니 한 잔 쭉 들이켜지 않을까 했는데 고작 한 모금만 마셨을 뿐이다. 술 상대라도 하라고 데려온 걸까. 나가려다가 한 대 맞고 머리채를 잡혀 끌려올까 봐 차마 일어나지는 못하고 멀뚱히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앉아 있는 레인을 보며 카이렌은 한 잔을 마저 마셨다. 원래도 말술인 놈이니 취하지는 않았을 텐데 순식간에 기분이 고양된 게 보였다.
“심심할 텐데 옛날얘기나 해 줄까?”
“심심해서 뒈져도 좋으니까 그냥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들어 봐.”
“이 개새끼.”
꿋꿋한 무시다. 카이렌은 제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고 레인은 대충 흘려듣기로 마음먹었다.
“사랑에 실패한 남자가 있었어.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에게 처절하게 차였지. 사실 두 사람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어. 그런데도 남자는 여자를 미워했어. 아름다운 여자가 자기보다 더 좋은 조건의 잘생긴 남자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차 버렸다고 생각했지. 이게 진짜 웃긴 게, 남자가 여자를 좋아한 건 여자가 아름답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거든. 얼굴 보고 발정 나서 덤벼든 주제에 여자가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천하의 쌍년 취급한다니, 얼마나 웃겨? 하긴, 그 남자는 좀 자격지심을 가질 만했어. 가문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잘나가는 귀족의 오른팔로 불리는, 말하자면 남의 똥 치워 주는 역할에 남자는 부모의 단점만 골라서 물려받아서 매력을 느끼기 힘든 외모였거든. 여자한테 차이고 영지로 쫓겨난 한심한 신세가 됐지만, 더럽고 음험하게 생긴 남자여도 나름 능력은 좋은 데다 가문의 장자였던 탓에 작위를 손쉽게 물려받았지. 외모를 제외하고는 괜찮은 조건 덕에 남자는 나름 괜찮은 가문의 영애와 결혼할 수 있었어. 결혼한 영애는 남자가 차인 여자만큼은 아니지만 일대에서 알아줄 정도로 아름다웠어. 게다가 순종적인 모습은 남자가 바라는 이상의 여성이었지.”
잠시 말을 쉬며 술을 마저 입에 털어 넣은 카이렌은 그대로 잔을 내려 두었다. 목이 말랐는지 잔을 만지작거렸으나 술 대신 물을 마시고 그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남자는 여자와 결혼해 안정을 찾는 것처럼 보였어. 몇 년이 지나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을 때까지는 말이야. 남자는 아내를 탓했어. 그러면서 동시에 정부를 여럿 만들어 매일같이 자고 다니기 시작했지. 보통은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사생아가 되겠지만, 후계자가 없으니 아이가 생기면 귀족 가문에 정식으로 입양될 수도 있을 테고, 그리되면 정부에게도 한몫 단단히 챙겨 주지 않겠어? 그러니 다들 남자에게 달려들었지. 하지만 그 어떤 정부에게도 아이는 들어서지 않았어. 문제가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떠돌 무렵 아내가 임신했어. 경사였지. 남자는 홀대하던 아내를 다시 끼고 살며 애지중지 대했어. 후계자를 임신한 것보다 자신에 대한 치욕스러운 소문이 사라졌다는 게 더 기뻤을지도 몰라. 뭐, 그 정도 그릇인 남자였거든. 열 달 후에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나서 남자는 뛸 듯이 기뻐했어. 가문의 후계자를 세웠으니 이제 모든 불안이 사라졌지.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다시 비극이 발생했어. 아이가 남자를 닮지 않았거든. 닮은 거라고는 머리카락 색과 눈 색뿐. 그 애가 너무 잘생긴 거야. 자신은 찌그러진 감자처럼 생겼는데 아이는 누가 봐도 어릴 때부터 너무 잘생겨서……. 아내를 닮았다기엔 다른 점이 너무 많았어.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지. 마치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처럼, 그 애는 혼자만 달랐어.”
이쯤 되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이’는 바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카이렌 본인이었다. 아직 어렸던 슈리아에게 치근덕대다가 영지로 돌아간 헤레일은 결혼했고, 몇 년 후에 그의 아내는 카이렌을 낳았으니 상황 또한 꼭 들어맞았다.
“남자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어. 남자는 자신과 정반대인 동생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지. 사실 열등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어. 동생은 키도 크고 잘생겼지만 반대로 능력은 별로 없어서 사업에 투자했다가도 말아먹고 집안의 돈을 야금야금 까먹으면서 사는 그런 인간이었거든. 하지만 남을 무시하는 게 일상인 남자와 달리 동생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착해서 모두가 그를 좋아했어. 심지어 부모님도 기대는 남자에게 했지만, 사랑은 동생에게 더 퍼 줬어.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열등감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안 좋은 감정을 쌓아 두고만 있었는데……. 그래, 하필 그 아이가 동생을 똑 닮아 있었던 거야. 형제가 닮은 건 머리카락 색과 눈 색뿐이었는데, 제 아이와 남자가 닮은 것도 머리 색과 눈 색뿐이야. 뻔한 이야기잖아? 남자는 가장 먼저 아내에게 분노했지. 남자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던 아내에게 달려갔어. 아이의 앞에서 아내에게 모든 의문을 떠벌리며 소리치다가 두들겨 패고, 우는 아이의 앞에서 아내의 목을 조르면서 강간했어.”
“…….”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 어머니가 꺽꺽거리면서 바닥을 기었어. 몇 번이나 얻어맞아서 추한 얼굴로 살려 달라고 빌다가도 나를 발견하면 제발 보지 말라고 울부짖었어. 헤레일은 내게 나가면 죽여 버린다고 협박했어. 놈은 괴성을 지르면서 어머니의 목을 조르며 흥분했지. 그 씨발새끼.”
욕설을 내뱉는 카이렌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더는 어쭙잖게 이름을 숨기는 것도 관둔 카이렌의 두 눈에서 맹렬한 증오가 불타올랐다.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이어지고, 삼촌이 내게 찾아왔어. 삼촌……. 아니, 그냥 아버지라고 하자. 헤레일은 취해서 아무나 안고 다녔으니 내가 자기 애라고 착각했던 모양이지만, 나를 임신했을 시기에 어머니는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이랑 한 적이 없었대. 헤레일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조금씩 어머니에게 손찌검했기 때문에 헤레일이 밤에 침실로 찾아오면 술에 약을 타서 잠자리를 피했어. 그리고 상냥한 아버지와 눈이 맞았던 거지. 결국 불륜이지만. 뭐, 그래. 어쨌든 아버지는 내게 도망치자고 말했어. 나는 그러겠다고 했지. 결과적으로 그건 실패로 돌아갔어. 오, 착하고 다정하지만 무능한 우리 아버지.”
카이렌은 연극조로 중얼거렸다. 슬픈 것인지 조롱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조였다.
“헤레일은 모든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함정을 판 거지. 아버지를 잡아 죽일 수 있도록. 추격자가 다가오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날 내버려 두고 둘이서만 도망치자고 했어. 후계자가 없는 헤레일이 나는 죽이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착한 아버지는 차마 날 버리고 가지 못했어. 우리는 추격자에게 따라잡혔지. 어떻게든 나와 어머니만은 도망치게 하려는 아버지를 조롱하고 사냥감을 몰듯이 갖고 놀다가 병사들에게 명령해 강간하고는 잔인하게 찢어 죽였어. 그걸 빠짐없이 지켜본 어머니와 나는 성으로 끌려왔지. 그리고 헤레일은 어머니에게 독약을 보냈어. 어머니가 죽음으로써 영원히 침묵하면 나만은 살려 주겠다고 하면서. 어머니는 망설이지도 않고 독을 마셨지. 나를 똑바로 보면서.”
똑바로. 다시 한번 중얼거리며 카이렌이 레인을 응시했다. 평소와 같은 눈빛이었다. 지독한 소유욕에 잠겨 있는 눈빛.
“네 어머니는 너와 같이 독을 마셨지?”
“…….”
“우리 어머니는 혼자 마셨어. 그게 헤레일의 조건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어머니는 날 생각해서 마신 건 아니었을 거야. 아버지가 붙잡힌 순간부터 어머니는 날 쳐다보지도 않았거든. 나를 버리고 갔으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나 때문에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애초에 헤레일의 피가 섞인 순간부터 날 사랑하는 데 한계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어머니는 날 버려두고 혼자 죽었어. 그리고 헤레일은 나를 후계자로 삼고 약속대로 내게 손대지 않았어. 아니, 아마 약속이 아니라도 손 못 댔을걸? 고자잖아. 새 아내를 들인다고 한들 후계자를 생산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고 젊은 나이에 양자를 들이자니 예전의 소문이 다시 재발할 게 뻔하고. 결국 제 체면 때문에라도 나를 후계자 삼을 수밖에 없었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한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덧붙이면 새 아내를 들이지 않아도 이상하게 볼 사람도 없으니까. 그렇게 살려 두기는 했지만 내가 마음에 들겠어? 그자는 나를 적당히 내버려 두고 정부를 갈아 치워 가며 살았어.”
조금도 상처 입지 않은 무덤덤한 목소리다. 하지만 과연 어린 시절에도 그랬을까?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자가 어머니를 눈앞에서 목 조르며 강간하고, 이후 새로이 아버지로서 따를 수 있는 자가 나타났는데 그조차 잔인하게 유린당하고 살해당하다니 완전히 정신을 놓고 미치지 않은 게 용한 지경이었다.
레인은 카이렌이 괴물로 변한 이유를 처음 만난 지 10년도 넘게 지나서야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전보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됐다. 카이렌이 겪은 비극은 레인 못지않게 끔찍하고 잔인했다. 그러나 레인은 자신에게 미친 비극 때문에 수없이 무시를 당하고 자신 또한 연약하게 꺾일지라도 똑같이 힘없는 상대를 짓밟아 화풀이하는 방식으로 풀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겪어 보았기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렌은 제 비극을 광기 어린 폭력성으로 재생산해 또다시 비극을 낳았다. 레인은 광기의 가장 큰 희생자였다.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화나게 하려던 거면 충분히 성공했으니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으나 카이렌은 말을 그만둘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다음 순간의 말을 꺼내기 위해 장황한 서론을 늘어 두었단 듯이 두 눈빛이 방금까지와는 다른 즐거움으로 반짝였다.
“아버지의 부정.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 나와 닮은 네 얘기를 들었을 때 난 널 동정했어. 얼마나 불쌍해? 불륜으로 낳은 더러운 사생아일 뿐인 내가 백작이라는 놈이 고자라서 대체할 이가 없었던 탓에 당당히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모든 영광을 거머쥘 수 있게 됐는데, 너는 나랑 정반대로 정당한 혈통이면서도 사생아인 레스터에게 자리를 뺏겼지. 닮았는데 완전히 반대잖아. 원래대로라면 내가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으신 분께서 내가 좌지우지하는 장난감이 됐다는 게 얼마나 짜릿했는지. 내가 그때 얼마나 흥분했었는지 넌 모를 거야.”
레인의 두 눈에 분노와 증오가 어리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며 카이렌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비굴하고 불쌍한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래, 난 그래서 네게 사랑에 빠진 거야.”
“닥쳐!”
엉망진창으로 테이블 위의 술병이 엎어졌다. 무릎이 엎어진 술에 축축하게 젖어 드는 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레인은 카이렌의 멱살을 잡았다. 화를 내고 소리치고 싶은데 온몸이 엉망으로 떨려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를 않았다. 이 순간 느끼는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분노? 조금 달랐다. 억울함과 원망, 그리고 비참함이 한데 뒤섞여 레인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카이렌은 레인에게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건 빌어먹게도 부정하고 싶었으나 너무 강렬해서 거짓으로 몰아붙일 수도 없었다. 그렇게나 거대한 감정에 짓눌리면서도 왜 자신을 사랑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고, 항상 이유라도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얼굴이나 몸, 성격, 사소한 습관 따위가 취향이었나,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내가 고통받았다고 수백 수천 번을 생각했다.
진상은 훨씬 더 끔찍했다. 레인을 사랑한 이유가 그가 비참했기 때문이라니. 그런 어처구니가 없는 이유는 차마 가정조차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제 비극이 괴물의 유흥거리로 소비되어 연정을 불렀다고 생각하니 울분이 터졌다. 레인의 삶은 누군가가 좋아하고 즐기라고 겪은 비극이 아니었다. 언제 울기 시작했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울고 있었다.
“너, 너, 너도……. 내 심정, 알, 거 아냐? 왜 나한테 그래? 너도 네 어머니가 죽었잖아. 그리고 너도, 너도, 당했으면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하하. 바보구나, 레인. 왜 날 두고 혼자 뒈져 버린 어머니를 그리워하겠어? 아버지가 뒈진 게 내 잘못이야? 무능해서 뒈진걸. 게다가 죽어 나자빠져도 상관없는 너랑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내가 같을 리가 없잖아. 헤레일은 어머니를 끔찍하게 미워한 만큼 나도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손을 대지는 않았어. 애초에 체면치레하려고 남겨 둔 후계자인데, 아내가 의문사한 후에 나까지 학대를 받으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헤레일은 날 그냥 내버려 두고 놀러 다녔어. 백작가는 내 세상이었지. 좀 자라고 나서는 내가 그를 끌어내리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 손찌검하기 시작했지만, 뭐 그땐 이미 내가 백작가를 반 정도 먹은 후였으니까 괜한 분풀이 정도야 간지럽지도 않았지. 하하……. 내가 너처럼 불쌍한 놈이라고 생각했어? 착각하지 마, 레인. 불쌍한 건 너뿐이거든.”
카이렌은 제 멱살을 틀어쥔 레인의 손을 쳐 냈다. 벌벌 떠는 레인과 달리 카이렌은 저 혼자 여유가 넘치는 태도였다. 단 한 번도 굴복당한 적이 없다는 듯이, 오만한 태도는 카이렌의 말을 뒷받침했다.
“그래도 대외적으로는 사이좋은 부자를 연출하는 게 좋잖아? 그 구역질 나는 놈 곁에서 살랑거리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 줬지. 특히 지난번 공작가에서는 신경 많이 써서 참았어. 굽신거리니까 신나서 잘난 듯이 지껄이는데 반은 네 욕이더라. 욕은 욕인데……. 하하, 네가 네 어머니를 닮았다고 꼴린단다. 씨발새끼, 누굴 넘봐. 내 건데.”
진심으로 분노하는 카이렌은 진정으로 레인을 제 것처럼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화를 내던 카이렌의 입가에 곧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린다. 보는 사람이 오싹해지는 불길한 표정이었다.
“마지막 날은 선물로 약을 탄 술을 줬어. 그 작자, 널 덮칠 때 지나치게 이상하지 않았어? 며칠 내내 네 이야기를 해 뒀으니까, 흥분한 놈은 반쯤 이성을 잃고 곧장 떠오르는 네게 갔겠지. 나는 적당히 바깥에서 보다가 네 방으로 들어가서 널 구해서 후작가로 보냈지. 너는 후작에게 모든 걸 말했겠지? 헤레일 모드가 널 강간하려고 했다고. 후작은 화가 났겠지. 헤레일 모드는 제어할 수 없는 위험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래, 당장 죽여서 없애야 할 위험인물이라고. 요양은 수도를 떠나기 위한 좋은 핑계였겠고. 안 그래?”
마치 카이렌의 말은 유르딘이 요양을 핑계로 이곳 모드 백작가의 영지로 숨어들어 와 헤레일을 살해했다는 듯이 들렸다. 레인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으나 이번에는 역으로 카이렌이 레인을 붙잡았다.
“약간은 모험이었지. 하지만 훌륭하게 성공했어. 헤레일 그자는 몇 십 년 동안 이 근방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놈이야. 그런 놈이 몬스터에게 먹혀 살해당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원래 유르딘은 시간을 거슬러 온 후로 레인의 안전에 극도로 신경을 썼다. 그런 유르딘이 변심한 것도 아닌데 레인을 피해, 레인이 없는 곳으로 요양을 떠났다. 요양이 목적이 아니라 수도를 비우기 위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함이었다면? 남부로 내려가는 길에 유르딘과 함께하던, 그와 똑같은 체격의 기사가 떠올랐다. 갑작스레 사라진 유르딘의 행방을 설명하기에 어긋남이 없다.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레인과는 대조적으로 카이렌은 몹시 즐거워 보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예전부터 미워하던 헤레일이 깔끔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살해당한 날이니 최고의 하루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기쁨을 감추지 않는 카이렌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이날을 10년도 넘게 기다렸어. 축배를 드는 날에 네게 내 사랑에 대해 말해 주겠다고 마음먹었지. 마음에 들어?”
“끔찍해. 난 네가 너무 끔찍해. 기분 나빠. 꼴도 보기 싫어. 꺼져. 죽어 버려.”
모조리 진심이었다. 친부는 아니더라도 저를 키워 준 아버지를 죽이고 환희하는 카이렌이 끔찍했고, 자신의 처지가 그와 닮은 꼴이라는 사실 또한 끔찍했다.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들은 카이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기분 나쁘고 렘샤이트 후작은 좋아?”
“그게 뭐? 내가 미쳐 돌아도 널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어.”
“렘샤이트 후작은 어떻게 좋은 건데? 존경해? 아니면 나이를 뛰어넘는 친우로서 좋아해?”
“네 알 바 아니잖아.”
“사랑해?”
갑작스러운 말에 레인은 입을 다물었다. 사랑한다. 그러나 그걸 카이렌에게 말할 이유는 없었다. 소중한 마음을 카이렌의 앞에서 꺼내 놓는 것조차 제 마음에 대한 모독으로 느껴졌다. 잠시 레인의 침묵을 즐기던 카이렌이 돌연 웃기 시작했다. 레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왜 웃어?”
“핫, 하하……. 화났어? 아니, 그렇지만 너무 우습잖아. 대체 어떻게 사랑하는 거야?”
“너 따위보다 훨씬 나아.”
“그야 그렇겠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이야기가 아니야.”
이죽대는 목소리를 듣기 싫었다. 기분도 나빴을뿐더러, 더는 들어서 좋을 게 없다는 불안감이 레인을 잠식했다. 카이렌과 레인은 서로를 지나치게 잘 알았다. 카이렌의 말은 레인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효과적으로 찔러 죽인다. 폭력과 가시 같은 말로 카이렌은 몇 번이고 레인을 꺾어 놓았다. 자리를 피하고자 벌떡 일어났으나 붙잡혀서 도로 앉혀졌다. 이를 악물고 노려보는 레인은 카이렌에게 있어서 가소로울 뿐이었다.
“왜 하필 사랑이야?”
“내가 유르딘을 사랑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넌 사랑 그 자체를 지긋지긋하게 여긴 거 아니었어? 애초에 네 아버지가 공작 부인을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네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게다가 너도. 내가 널 좋아하지 않았으면 지금보다 멀쩡할지도 모르지. 닿을 때마다 끔찍하다고, 내가 널 좋아하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했잖아. 그랬으면서 그놈과 섹스 하고 싶어?”
“넌 머릿속에 그거밖에 든 게 없어?”
“그러면 사랑하는데 안 할 거야? 만약 이루어지면 결국에는 할 거 아냐.”
조곤조곤 속삭이며 카이렌은 양손으로 레인의 뺨을 감쌌다. 레인이 진저리를 쳤지만 오히려 손에 힘을 주고 똑바로 자신을 보게 하였다.
“내 말이 틀려?”
카이렌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레인이 먼저 유르딘에게 입을 맞췄다. 접촉이 끔찍하다고 했으면서 먼저 다가가서 입을 맞췄다. 그 이상을 상상하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었던가? 레인의 얼굴에 혼란이 떠올랐다. 카이렌은 그 혼란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찔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간 늘 그랬잖아, 레인. 남과 닿는 게 싫다고 말했잖아. 너는 이런 걸 원하지 않는다고,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하고 싶지 않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왜 하필 사랑이야? 널 도와주는 사람에게 하필 사랑에 빠진 이유가 뭔데. 보통은 안 그럴걸. 나 같은 파렴치한 짐승 새끼도 그러지는 않는다고. 날 불쌍하게 여긴 사람은 은근히 많았어. 나는 그들에게 감사했지만,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어. 보통은 그래. 하지만 너를 봐. 네게 조금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생겼다고 곧장 사랑에 빠져서는. 모두 다 싫다고 했으면서, 이런 건 하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서. 어떻게 곧장 그래?”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의문이 레인에게 내리꽂혔다.
“그 입, 닥쳐.”
“닥치라고? 넌 항상 그런 식이야. 말로만 싫다고 하지, 아무것도 안 해. 네게 아무런 힘이 없어서 그런다고? 힘없어서 좋겠네. 정말 좋은 핑계야. 항상 말만. 싫어, 하지 마, 그만해.”
카이렌이 웃는 소리가 레인의 머릿속을 쪼갤 듯이 요란하게 울렸다.
“네 평판이 좋아진 거, 네 아버지가 너를 후계자로 점찍은 거, 네 스스로 한 게 하나라도 있어? 다 후작이 한 거잖아. 넌 아무것도 안 해. 그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안 했을걸. 그냥 가만히 있잖아. 자살 시도, 그래. 자살 시도 한 번 했네. 정말로 죽을 정도로 내가 싫었으면 어떻게 해서든, 죽든 도망치든 벗어나려고 노력했어야지. 아무것도 안 했잖아. 왜 네가 아무것도 안 한 줄 알아? 넌 사실 이런 게 좋은 거니까.”
레인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레인의 인생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이 왕국에서 살아가는 자라면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아이제나흐 공작가가 근원이다. 도망 따위 칠 수 있을 리 없었다. 대체 레인이 대체 뭘 했어야 한단 말인가? 레인은 그저 괴롭게 사는 게 아니라 남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똑같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매 순간 고통을 곱씹으며 괴롭게 살아야지만 그 고통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까? 매 순간 괴로움만을 되새기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과한 것을 바란 것도 아닌데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사랑하고 싶었던 것조차 매도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건 너무나도 억울했다.
“솔직해져 봐, 레인. 넌 모든 걸 지긋지긋하다고 했었잖아. 그런 주제에 언제나 몸은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르고 날뛰었지. 내가 널 안을 때 느꼈잖아. 스스로 허리를 흔든 적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어?”
카이렌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레인을 공격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카이렌의 손이 느릿하게 레인의 몸 위로 올라가 그 위를 더듬기 시작했다. 레인이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는 걸 집요한 손길이 따라붙는다.
“강간당했으면 보통은 내가 싫고 무섭고 역겨워서 견딜 수 없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넌 아니잖아. 봐.”
귀 기울일 필요 없었다. 허무맹랑한 개소리일 뿐이다.
정말로?
레인은 무너졌다. 지금까지 정말로 진심으로 매 순간 싫어했는가? 싫었다. 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카이렌의 손에 길들어 자극을 주는 것만으로도 반응할 정도로 느꼈다. 바로 지금처럼.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는데, 한편으로 몸 안에서 퍼지는 쾌감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싫어해야 정상이다. 강간당한 여인이 끔찍해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택했다는 이야기를 몇 번인가 풍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레인은 한 번이 아니라 수십 수백 번을 당했다. 레인은 죽어도 수백 번을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죽지 않았다. 도리어 길들어 느꼈다.
“좋아하고 즐겼으면서.”
좋아했나?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좋았나 보다. 싫었으면 진작에 제 멱을 따든 매달든 창에서 몸을 던지든 어떤 식으로든 뒈져 버렸어야 했는데 뒈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음탕하고, 더럽고, 역겹고. 몸을 팔아 가며 살아남은 거나 마찬가지다. 아니, 그냥 제 삶을 위해 몸을 팔았지. 강간을 당한 주제에 멀쩡하게 살아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삶을 그리는 순간부터 레인은 더러운 창부요, 죄인이었다. 그래, 정말로 싫었으면 죽었어야지. 아니면 어떻게든 극복했어야지. 이야기 속의 영웅들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일어서서 원하는 것을 쟁취하지 않나? 레인은 의지가 부족했다. 현실에 안주했다. 그렇게 더러워졌다. 타락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벌벌 떨렸다. 정말로 왜 하필 사랑이었을까. 발정이 나서, 그저 누군가가 안아 주고 박아 줬으면 해서, 그런데 힘드니까 조금 더 편하게 기분 좋게 만들어 줄 상대를 만들었을 뿐. 레인이 겪는 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러워, 레인. 네가 그 인간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해?”
“닥쳐, 제발…….”
레인은 제 안의 부정적인 사고를 멈추려고 애썼다. 이런 식으로 사고가 부정적으로 튄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카이렌은 수년에 걸쳐서 레인을 깎아 내리고 의지를 밟아 두었다. 자기혐오를 학습하고 무기력에 짓눌린 채 레인은 수십, 수백 번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성이 내린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가해자가 나쁘고, 레인 자신에게는 죄가 없었다. 설령 죄가 있다고 한들 파렴치한 자들의 죄보다 더 크겠는가? 하지만 느꼈잖아. 즐겼잖아. 살아 있잖아. 증오하는 자의 품에 안겨서 잠을 자고 그 곁에서 살아가고, 결국 원해서 그런 거 아니야? 정말로 싫었으면 확실히 저항했어야지. 죽어서라도 저항을 했어야지. 죽지 않았으니까. 삶을 영유했으니까. 살아 있으니까. 레인이 나빴다.
정작 죄지은 자는 뻔뻔스레 웃고, 죄 없는 자만이 눈물을 흘린다. 레인은 숨도 쉬지 못하고 괴롭게 꺽꺽거리며 울었다. 카이렌은 눈물로 젖어 엉망이 된 얼굴을 손끝으로 쓸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직 진짜 용건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울어서 어떡해. 정말 너무 약하다니까……. 괴물 새끼 주제에.”
카이렌이 천천히 손을 떼자 레인의 몸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무너진 채 레인은 헐떡거리면서도 카이렌을 올려다보았다. 괴물이라니.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더럽고 천하다고 경멸받을지언정 레인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이렌에게 괴물이라는 모욕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 오늘내일할 정도로 매일같이 골골대잖아. 그런데 나한테 처맞으면서도 잘만 살아 있는 거. 이상하지 않아?”
“이젠 하다 하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가 아니라 안타깝게도 사실이야. 넌 안 죽어.”
미친 게 틀림없었다. 놀랍게도 카이렌은 괴상한 망상을 확신에 찬 채 이어 갔다.
“가장 처음 알았던 건 레스터가 네게 화냈던 그날이었어. 네가 레스터를 형이라고 불렀다고 널 물에 처박고 죽이려고 했던 날이야. 기억나지?”
잊었을 리가 없다. 정말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카이렌이 레인을 살렸다. 정말 미친 소리도 교묘하게 끼워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카이렌의 망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내가 널 끄집어냈지만 이미 늦었었지. 숨이 멎어서 이미 죽어 있었어. 몸이 딱딱했어. 슬펐어. 헤레일이 뭐라고 하든 한 번쯤 해 보는 건데, 아쉽기도 했어. 그런데 넌 살아났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분명 죽은 걸 확인했었는데. 한 번은 착각일 수도 있잖아? 내내 궁금했어. 그러다가 네가 화나게 하길래 나중에는 아예 목을 졸라 기절시키고 칼로 찔러도 봤어. 근데 또 살아나더라? 죽기 전에는 안 낫는데, 죽으면 상처가 순식간에 원상태로 복원돼. 신기하지 않아?”
“말도 안 돼.”
“여덟 번.”
단호한 부정에 단호한 답변이 따라왔다. 카이렌이 양손으로 여덟을 표시하며 씩 웃었다.
“하루 밤 만에 여덟 번까지 죽여 봤어. 언제였지. 네가 반항이 너무 심해서 맞았던 때였는데, 기억나려나. 하긴 매일 맞았으니 기억할 리가 없나. 왜, 네가 네 방 청소하는 새끼한테 눈웃음쳤잖아.”
기억난다. 그자는 몇 안 되게 레인에게 친절한 이였다. 친절이라고는 해도 다른 이들과 달리 레인의 말을 노골적으로 무시하지 않고 가끔 부탁하면 무시하거나 일부러 골탕을 먹이는 대신 성실히 이행하는 정도였다. 굳이 레인에게 친절했던 게 아니라 그저 자기 맡은 일에 충실했던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레인의 기준으로는 분명 친절함이었다.
그날은 이불이 부족해 이불을 갖다 달라고 했더니 거위 털 이불을 두 채나 가져왔길래 고맙다고 인사했을 뿐이었다. 고작 그 정도 일에 카이렌은 불처럼 화를 냈다. 그는 언제나 레인의 부정을 의심했다.
몇 번을 맞다 기절했는지 모른다. 카이렌은 레인을 홀딱 벗긴 채 창을 모조리 열었다. 한 시간 넘게 방치당해 얼어 죽을 것 같아서 제게 다가와 곧장 삽입하려 드는 카이렌의 온기에 몸을 붙이려 했다가 헤프다며 얻어맞았다. 목을 졸렸다. 모두 끝나고 나서도 고통은 이어졌다. 잠깐 눈을 떴다가 까무룩 기절하는 일이 많았다. 죽을 만큼 아팠다. 카이렌의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레인의 귓가를 울렸다.
“나한테 맞아서 한 번, 목이 졸려서 두 번, 잘못 부딪쳐서 한 번, 막 살아나려던 널 칼로 쑤셔서 한 번, 쇼크를 일으키면서 한 번, 기절했길래 식사하고 왔더니 얼어 죽어서 한 번, 침대에 그대로 내버려 뒀더니 두 번……. 아, 미안. 여덟 번이 아니라 아홉 번이네? 계속 살아났는데……. 갈수록 회복 속도가 느려지더라고. 한계가 있겠구나 싶어서 의원을 불러서 치료했지. 마지막으로 살아날 때는 슬슬 무리인지 한 여섯 시간을 내리 괴로워서 어쩔 줄 모르는데……. 아, 정말이지. 너무 예쁘더라. 그때 진짜 장난 아니었는데.”
카이렌의 눈빛이 황홀감에 젖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원래도 미친놈이지만 그나마 이성은 있는 놈이었다면, 지금은 상식도 붕괴할 정도로 돌아 버린 모양이었다. 미쳐도 어떻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카이렌은 몸을 숙여 새파랗게 질린 레인과 시선을 맞췄다.
“레스터가 그러더라. 레스터도, 후작도, 그리고 너도. 과거에서부터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다고.”
레인의 표정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무언의 긍정에 카이렌이 씩 웃었다.
“아는 모양이네. 잊은 것 같다고 하더니.”
태연한 목소리에 레인은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어차피 알고 있다면 레인이 어찌 반응하든 별 차이는 없을 터였다.
“그래, 난… 죽었어. 분명히 죽었다고. 내가 안 죽는다며, 그때 죽은 거잖아, 나…….”
“나도 레스터에게 들은 것뿐이지만 말이야. 너 그때 감옥에서 며칠 만에 죽었는지 알아? 사흘이야. 갇혀 있던 시간은 이틀도 안 돼. 그동안 딱히 아무것도 한 게 없고 오히려 죄인이라기에는 극진하게 보살폈다던데……. 아홉 번 죽였을 때는 점점 되살아나는 속도가 느려졌지. 네 부활에도 한계는 있으니까 가만히 놔둬도 죽었을 만큼 네 몸이 한계였던 거야. 넌 그 안에서 몇 번을 죽었을까, 레인?”
레인의 몸이 덜덜 떨렸다. 끔찍하게 긴 시간이었다. 최소한 한 달 이상이 지났다고 착각했을 정도로, 레인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기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상상도 하기 힘든 지독한 고통이 모두 다 죽음의 기억들이라면? 카이렌의 말에 넘어갈 뻔했던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살아난다니. 말만 들어도 기분 나쁜 괴물이었다.
“아냐.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너 아마 헤레일에게도 죽었을 거야. 그자는 창녀들 목을 분질러 죽이는 게 취미인 미친놈이거든.”
“말, 말도, 말도 안, 돼. 그런…….”
“확인시켜 줄까?”
카이렌이 장난스레 웃었다. 그러나 손속은 조금도 장난스럽지 않았다. 카이렌은 바닥에 무너져 앉아 있는 레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질질 끌고 가, 책꽂이 앞에 서 아래 어느 부분을 발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벽 한쪽이 갈라지며 좁은 복도가 생겼다. 비밀 통로였다. 카이렌은 어둠이 도사린 좁은 통로로 레인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저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레인은 계단에 엉망으로 부딪치며 끌려 내려갔다.
좁은 통로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방에는 섬뜩한 무기와 고문 도구들이 가득한 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카이렌은 구석에 있는 거울 앞으로 레인을 데려갔다. 위쪽이 깨진 거울로 카이렌의 웃는 얼굴이 조각나 보였다. 거울 속의 레인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안쓰럽고 한심할 정도로 벌벌 떨고 있었다. 언제 챙긴 것인지 카이렌의 손에 단검이 하나 들려 있었다. 날카로운 은빛이 위로 들리며 섬뜩하게 번뜩였다.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단검은 정확히 레인의 목에 꽂혔다. 그대로 검이 죽 그어졌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죽음은 갑작스레 레인을 찾아왔다. 언제나 겪던 것과 똑같은 어둠이 지나가고…….
천천히 눈을 떴다. 기절했다 깨어날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웠다. 흐릿한 시야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보였다. 분명 목 정 가운데를 찔렀던 단검은 이제, 레인의 목 오른쪽을 겨누고 있었다. 목 주변이 푸르스름한 색으로 변색하여 있기는 했으나 언제 찔렸냐는 듯이 매끈했다.
레인은 되살아났다.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시야가 어지러운 가운데 죽어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넘쳐 떨어졌다. 정말로 죽었다가 되살아난다고? 대체 왜? 자신도 모르는 새에 언제부터 이런 몸이 된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괴물이라는 말이 틀릴 게 하나도 없었다. 목이 반절 이상 잘리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게 괴물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카이렌은 혼란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레인의 몸을 추슬러 의자로 끌고 갔다. 레인을 바닥에 무릎 꿇린 카이렌은 뒤에 놓인 의자에 앉더니, 레인의 머리채를 쥐고 목에 날카로운 단검을 들이밀었다.
“지금부터 네게 조금 괴로운 짓을 할 건데, 진실을 아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해 준 거야.”
대체 무슨 일을 또 하려고. 질문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단순히 충격으로 호흡이 곤란한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목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 안 나오지? 지금 독을 먹였거든. 조금 느린 시간에 걸쳐 죽어 가는 독인데, 가장 먼저 목 쪽이 붓고 혀가 마비되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돼. 희귀한 독이야. 간신히 살아남아도 후유증이 남는데……. 걱정하지 마. 넌 한 번 죽으면 어지간한 건 깔끔하게 회복되거든? 한 번 더 죽여 줄게.”
레인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괴롭게 헐떡였다. 카이렌의 말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비슷하게 기절했던 적이 지금까지 대체 몇 번인지 모두 셀 수도 없었다. 못해도 수백 번이다. 그 수백 번을 매번 죽고 살아났다니. 이 순간 멀쩡하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이 순간 멀쩡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이 더욱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이전보다 훨씬 더 죽는 게 두려웠다. 목에서 절망과 비탄이 끓는 낮은 신음만이 나왔다. 혼란스러워하는 레인의 뺨을 카이렌의 손이 부드럽게 쓸었다. 하필이면 단검을 들이댄 손이라 오히려 공포심만 자극했다.
“안 죽는다니까. 확인했잖아. 혹시 무서워? 귀엽네, 레인.”
눈앞에서 흔들리던 단검이 레인의 목 근처로 내려와 작은 상처들을 남겼다. 아무래도 그 괴물 같은 힘은 레인이 죽어야만 발동되는 것인지 목에 난 쓰린 상처는 아물 줄을 모른다. 카이렌이 뒤에서 레인을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레인은 계속 카이렌을 무서워했으나, 이 순간의 공포는 그 어떤 때보다 강했다. 죽지 않는 몸이란 걸 몇 년 전에 알아채고, 지금까지 망설임 없이 장난스레 레인을 수도 없이 죽였을 카이렌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레인이 죽음을 겪으며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걸 보면서도 아홉 번이나 죽인 놈이니 앞으로도 수백 수천 번은 가볍게 더 죽일 수도 있었다. 울며 덜덜 떠는 레인을 바로 세운 카이렌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레인, 내가 왜 너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내가 헤레일의 죽음이 슬퍼서 널 데려온 게 아니라는 건 이제 알았잖아. 이유가 짐작이 가?”
레인은 울음을 멈추고 카이렌을 돌아보았다.
“일단 내 공간으로 널 끌어들여야 했거든. 내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데다 증원이 오기 힘든 공간. 일부러 소란을 일으켜서 널 빼돌리는 과정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 뭐, 그 정도야 별것도 아니지. 수련장이 불타긴 했을 텐데 지스킬 마이어는 무사할 거야. 대신 지스킬의 친구들은 꽤 다쳤겠지. 몇몇은 불이 난 수련장에 깔렸을지도 모르고. 그 인간은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 외면할 정도로 모진 인간은 못 돼. 하여간……. 무엇이 우선인지 몰라서야 기사 실격이라니까. 덕분에 안정적으로 널 빼낼 수 있었지만. 친구들을 구하고 네게 돌아와도 이미 너는 없겠지. 큰일 났네. 니제스 백작에게도 알리고 사방팔방으로 이리저리 뒤져 보다가 내가 널 빼돌렸단 걸 알았을 거야. 그렇게까지 무능하지는 않으니 곧 내 행선지도 알아낼 테고. 수상하다고 여기지 않겠어? 수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 머저리지. 네가 잡혀 있는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게 널 구할 수 있는 인간이 누굴까?”
카이렌은 레인의 동요를 음미하며 만족스레 웃었다.
“렘샤이트 후작. 위험 요소인 헤레일을 죽이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고 있었을 후작. 거리상 후작의 영지에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 테고, 아직 백작령 근처에 있겠지. 그자가 이쪽으로 널 구하러 오지 않겠어? 뭐, 확실하지는 않은 계획이었지만. 네가 강간 미수를 당해도 후작이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었고, 중간에 시간이 어긋날 확률이 있었고. 그래도 지금까지는 생각대로 잘 풀렸네. 그자가 올까?”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카이렌의 말대로 어느 것 하나 확정된 게 없어서 어긋나면 그대로 틀어지는 계획. 하지만 그가 가볍게 말하는 것처럼 운에만 매달렸을 리는 없다. 최소한 헤레일 모드가 레인을 만나기 전부터 세워 뒀던 계획이다. 그리고 만약, 성공해서 유르딘을 이쪽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한다면.
목에 닿은 칼날이 제 죽음 이상으로 섬뜩했다.
“인질로 쓰기에는 조금 더 너덜너덜한 쪽이 어울리지 않을까?”
장난스레 속삭인 카이렌은 레인의 옆구리를 슬슬 문질렀다. 어디를 찌를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차오르는 두려움에 레인은 마구 비명을 질렀다. 정확히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들끓는 신음만을 흘렸을 뿐이다. 눈물과 피에 젖은 얼굴을 사랑스레 바라보던 카이렌은 엉망이 된 뺨에 입을 맞췄다. 단검을 세워 그대로 내리 찌르려던 찰나,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왔네. 참 때를 잘 맞춰.”
빈정거리는 카이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단 위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자세히 볼 것도 없이 유르딘이었다. 정말로 왔다. 레인은 유르딘의 등장을 기뻐하지도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이미 뽑아 든 검을 꽉 쥔 채 유르딘은 레인을 살폈다. 온통 피에 젖은 몰골과 푸르게 변색된 목을 본 유르딘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그러나 더는 다가오지 못한다. 레인의 옆구리를 노리던 단검은 어느새 위로 올라가 레인의 목에 닿아 있었다. 섬뜩한 감촉이 피부에 붉은 금을 남겼다.
“레인.”
“렘샤이트 후작.”
말을 할 수 없는 레인 대신 카이렌이 대신 대답했다. 유르딘은 시선을 들어 카이렌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 손 떼.”
“잘난 척 말할 처지야? 다가오면 죽일 거야. 아무리 당신이 잘난 검사라지만 내가 이놈 목을 썰어 버리는 게 더 빠르지 않겠어?”
그 말대로, 유르딘이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고 해도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상당했다. 유르딘만큼은 아니어도 카이렌은 또래에서 손꼽힐 정도로 훌륭한 검사다. 유르딘이 다가와 카이렌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카이렌이 손에 힘을 주는 게 빠르다. 단검을 반 뼘 정도만 내리그어도 레인은 죽는다. 카이렌은 신중하게 한 손으로 레인의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단검을 쥐고 있었으나, 말투는 진중함이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태도로 빈정거렸다.
“만에 하나 당신이 구한다고 쳐도 독을 먹여 놨거든. 여기, 변색된 거 보여? 당신도 아는 독일걸. 카니예의 첩자가 이걸로 당신 부하를 죽였다고 들었는데. 이제 한두 시간 남았나? 레인은 약하니까 더 짧을지도 모르지. 해독제는 성에 딱 하나 있는데, 당신이 그걸 시간 안에 찾을 수 있을까?”
“네가 레인을 죽인다고?”
“내가 레인을 안 죽일 거라고 생각했어? 난 당신과 달라. 물론 나도 죽이고 싶지야 않지. 하지만 네놈에게 뺏기느니 죽이는 게 나아.”
“…….”
유르딘의 표정이 사나웠다. 진작 죽여 버릴 것을,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하는 얼굴이었다. 유르딘이 꼼짝도 하지 못하는 걸 확인한 카이렌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승리감이 떠올랐다.
“죽이고 싶지 않지?”
“바라는 게 뭔가.”
“죽어.”
간단하지 않은 일을 너무도 간단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까까지 입을 틀어막힌 채 헐떡이던 레인조차 숨을 멈췄다.
“자살하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
“여차하면 레인을 죽인다고 했지만, 나도 레인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당신이 죽어. 그러면 레인은 살려 둘게. 레인이 죽는 것보다 당신이 죽는 게 낫지 않겠어?”
터무니없는 말이다. 레인의 몸이 떨렸다. 자살을 종용하며 카이렌은 선택을 돕겠다는 듯이 단검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다. 아직은 피부가 베였을 뿐이지만, 유르딘은 눈에 띌 정도로 동요했다. 레인은 아까 카이렌이 한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진실을 아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레인은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진실을 알았다. 그러나 유르딘은 그걸 모른다. 이대로 유르딘이 카이렌의 말을 따라 목숨을 끊는다면 그건 개죽음일 뿐이었다. 어떻게든 유르딘에게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야 했다. 그러나 막 죽음을 겪고 깨어나 독을 먹고 카이렌에게 붙들린 채로는 레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진실을 알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전히 레인은 너무나도 나약했다. 레인은 침착하려 노력했다. 어떻게든 생각해 내야만 한다. 자살이라니, 쉽게 결정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니 아무리 유르딘이라도 길게 고민할 터였다. 그동안 어떻게든 최대한 시간을 벌어서, 생각해서, 유르딘이 살 방법을 모색해야…….
그러나 레인이 길게 고민할 새도 없었다.
유르딘은 단 몇 초조차 고민하지 않고 들고 있던 장검을 거꾸로 들어 제 목에 들이댔다. 아까부터 고장 난 것처럼 계속 눈물이 흐르던 눈이 부릅떠졌다. 유르딘은 레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맹목적이었고, 그건 지금 이 상황에 지독한 독이었다. 유르딘을 똑바로 보고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제대로 앞이 보이지도 않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유르딘이 스스로 제 목에 검을 들이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유르딘이 저 때문에 죽는 것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레인이 죽음을 한 번 더 겪는 게 나았다. 그런 속도 모르고, 유르딘은 너무도 침착한 얼굴이었다. 카이렌을 볼 때는 증오와 분노만이 가득하던 얼굴이 레인을 향하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이 순간만은 그 다정함도 헌신도 싫었다. 레인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그가 목숨을 던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대책 없이 죽는 건 아니니까.”
아마 그 말은 유르딘의 사후에 레인을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뜻일 터다. 바보 같은 말이었다. 도움도 필요하지만, 레인이 살아가면서 가장 원한 건 유르딘이었다. 레인을 살게 만들고 희망을 던져 준 사람이 오직 그였다. 최후의 죽음에서조차 유르딘을 생각했고 또다시 유르딘을 사랑함으로써 잃었던 기억을 되찾았다. 유르딘이 죽는다면 레인은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
“레인.”
유르딘이 레인의 이름을 불렀다. 애절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조차 두려움이 아닌 그리움과 애정을 품고 있었다. 유르딘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한참을 망설인 유르딘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유르딘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검이 점점 유르딘의 목에 가까워진다. 아직 피가 튀지도 않았는데 시야가 온통 붉었다.
‘안 돼.’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죽었지, 유르딘을 죽일 수는 없었다. 카이렌의 손에 휘둘려 엉망으로 모든 걸 망치고 싶지 않았다. 유르딘은 이런 중상모략에 휘말려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레인은 유르딘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았다.
죽게 놔둘 수 없다.
레인의 사고도 이유도 모두 한 점으로 귀결됐다.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은 모조리 날아가고 강렬한 소망만이 레인의 안에서 자리 잡는다. 최후의 순간 삶을 바라던 마음보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소망은 단 하나. 유르딘이 죽지 않기를 바란다. 레인의 소망이 레인을 잠식했다.
그 순간.
마력이 새파랗게 빛나며 가시화된다. 의지가 마법으로 엮여 순식간에 뻗어 나간다. 유르딘의 목을 찌르려던 검은 그대로 바스러진다. 동시에 목을 짓누르고 있던 독은 자취를 감추고 자잘한 상처들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지워진다.
의지가 마법으로 구현되는 이 순간, 레인은 세상에 태어난 순간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레 제가 지닌 힘을 이해했다. 레인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천천히 카이렌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마력은 카이렌을 꿰뚫을 창이 되어 형태를 갖췄다. 그대로 마력이 내리꽂히고, 카이렌의 비명과 함께 피가 튀었다.
“언령…….”
비틀거리며 일어나면서 레인은 중얼거렸다. 일상은 수없이 많은 선택의 연속이며 무수한 선택지 속에서 갈등하게 된다. 갈등 한 점 없이, 제 생을 불태울 정도로 강렬한 의지가 한 점으로 귀결되면 마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기적의 마법이었다.
레인이 마력 결핍증에 걸린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옛 시대의 마법사들처럼 제 마력의 한계를 넘나드는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수준의 대마법을 하루 밤 사이에 아홉 번이나 사용한다거나 하는 식의. 레인은 몰랐지만, 옛 시대에도 그런 수준의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역사를 뒤져도 손에 꼽혔다. 이미 기반은 갖추어져 있었다. 거기에 의지가 더해져 레인은 이 순간, 마법사로서 서 있었다.
레인은 카이렌의 복부와 팔에 깊이 난 상처를 눈으로 살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죽지 않는다. 죽음. 중요한 것은 죽는 게 아니다. 죽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 많다는 것을 레인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통을 줄 수 있을까? 새파랗게 타오르는 마력의 창을 다시 한번 뽑아내며 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 힘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레인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종류의 힘도 아니다. 잡념이 조금도 깃들지 않은 맹목적인 마음을 갖는 건 인간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타인의 죽음을 목전에 둔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쓸 수 있었을 뿐이다. 다음번에 같은 기회가 오면 머릿속에서 언령 마법을 의식해, 생각을 하나로 귀결시킬 수 없어서 발동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레인이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건 폭발적으로 휩쓸고 지나간 언령 마법이 남긴 마력의 잔해들일 뿐이다.
그러니 지금. 지금 바로 죽여야만 했다. 가장 고통스럽게.
레인이 마력을 다루는 솜씨는 서툴기 짝이 없었다. 마법을 배운 적도 없는 레인은 마법사로서 갓난아기나 다름없는데 쥐고 있는 게 오러 소드인 셈이다. 서툴러서 제대로 조준할 수 없는 마력은 카이렌을 몇 번이나 빗나갔다. 한 번에 죽일 수 없었기에 치명상만은 피하려고 했으나 자꾸만 위험한 부위에 꽂히며 살점을 잘라 낸다. 입을 열 틈 따위 주지 않고 연거푸 레인은 카이렌을 찔렀다. 날카로운 비명이 감미롭게 레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황홀하다. 피가 튀어 레인의 뺨을 적시는 감촉마저도 좋았다. 짜릿했다. 레인의 삶을 지배하던 절대적인 상하관계는 완벽하게 역전된 이 순간, 레인은 이 쾌감을 안고 죽어도 좋다고 여겼다. 그 정도로 기쁘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레인을 죽였다고 했던가? 어림잡아도 수백 번의 죽음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수백 번의 죽음을 갚을 수 있을까. 이대로 계속해서 찌르고 또 찔러도 그간의 고통을 갚을 길이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앞으로 10년 정도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고통만을 주고 싶었다. 이 마력이 사라지고 나면 비루한 몸으로라도 어떻게든 고통을 주고 싶었다.
“레인.”
그때 유르딘이 레인을 붙잡았다. 레인을 제지한 유르딘은 카이렌의 앞으로 가 그대로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카이렌의 몸이 바닥으로 쭉 미끄러져 곧장 기절했다. 맥 빠지는 기절이다. 고작 이 정도 고통은 고통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쉽게 의식을 놓아서는 안 되는데. 아직 한참은 부족했다.
“죽이지 말라고요?”
“그래.”
“왜요? 이놈 편을 들고 싶으신 거라면…….”
“그럴 리가 없잖나.”
곧바로 부정하는 유르딘의 말에는 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런 식의 복수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하지만 이 순간 제 속이 후련해질 수는 있겠죠.”
레인의 삶을 지배하던 절대적인 상하 관계가 극적으로 역전되자마자 레인은 카이렌이 했던 것과 똑같은 폭력성을 보였다. 누군가는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선량해야만 피해자로서 존재할 수 있다면 차라리 가해자가 되는 게 나았다. 되갚는 게 나쁘다고 할 거면 진작 레인이 비명을 지를 때 구해 줄 것이지 이제 와서. 아무리 유르딘이라도 고작 선량함 따위의 가치를 내세워 말리는 걸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만……. 그래도 지금은 안 돼.”
말을 하며,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유르딘은 자신의 생각에 점점 확신을 갖는 듯이 보였다.
“분명 네가 저놈과 들어온 걸 본 놈이 있을 거다. 없어도 그렇게 되겠지. 어떤 식으로든 실패할 때를 대비해 준비를 했을 테니까. 이놈이 단독으로 움직였을 리는 없고, 레스터 아이제나흐가 함께 움직였을 거다. 어떻게든 널 끌어내리려고 할 거야. 이대로라면 네 명예만 실추될 뿐, 놈은 불쌍한 희생자로 기록될 테고 결국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너만 죄인이 되어 앞으로의 인생을 망친 채 도망자의 삶을 살 수도 있겠지. 그건 결코 행복한 일이…….”
“유르딘, 제가 죽고 복수했어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에 유르딘의 몸이 굳었다. 레인이 한 걸음 성큼 다가갔다. 지금까지 계속 궁금했던 말이었다. 유르딘이 기억하는지를 먼저 묻는 게 순서였지만, 그거야 충격을 받은 저 얼굴만으로도 충분히 답이 됐다. 헛소리를 하는 광인을 보는 표정은 결코 아니다. 레인의 말에 놀라고 두려워하는 얼굴이 레인의 질문에 그대로 답을 해 주고 있었다.
“저 이제는 기억해요. 제가 예전에 어떻게 죽었는지, 전부.”
“레인.”
유르딘이 창백한 낯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대화하는 동안 레인을 휩쓸었던 거대한 마력은 사라진 지 오래이건만, 유르딘은 마치 레인에게 살해당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두려워하는 얼굴만으로도 질문에 답은 충분히 됐다. 이는 긍정이다.
“복수했어요? 복수해서 후회하는 건가요?”
“나는…….”
“말해 봐요. 레스터에게도 복수해서 그놈은 맛이 가고, 카이렌에게 털어놓고, 결과적으로 이런 걸 계획한 게 맞아요?”
“맞다. 나는, 그러니까, 레인…….”
따지듯이 물었으나 애초에 별로 따질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복수에 대해서는 잘했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인데 왜 당황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의아한 얼굴로 유르딘을 올려다보다가 레인은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저를 죽게 만들어 놓고, 나중에서야 후회했어요?”
정곡이다. 유르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결단코 저런 표정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유르딘을 사랑하고 있다. 그 마음은 지하 감옥에서 죽어 가던 순간에조차 변치 않았다. 하지만 내심 어느 한구석으로는 원망할 곳을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제 말이 유르딘에게 칼날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유르딘이 괴로워할 말을 쥐어 짜냈다.
“너는 죄가 없었어.”
“맞아요, 저는 죄가 없었어요. 그걸 알게 됐군요.”
유르딘은 변명하지 않았다. 네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는 말도, 네 미래를 위해 그 순간만 외면할 생각이었다는 말도, 네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그 사흘간 죽을힘을 다해 애썼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유르딘은 레인에게 자신을 원망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원망해야 마땅했다. 유르딘의 의도야 어쨌든 결과는 레인의 파멸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끝을 맺은 순간, 변명 따위는 빛이 바랜다.
“미안하니까 당신은 제게 잘해 주고. 저한테 다 바칠 것처럼 굴었어요? 당신이 제멋대로…….”
“…….”
천천히 레인의 두 눈에 분노가 들끓었다. 레인이 이를 악물고 유르딘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멱살을 확 잡아당겼다. 버티려고 한다면야 굳건하게 버틸 수 있는 몸은 맥없이 레인 쪽을 향했다. 유르딘의 얼굴에는 레인을 화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은 있을지언정 여전히 제 목숨이 끊어질 뻔한 데 대한 두려움도, 살아남은 것에 대한 안도도 없었다. 분통이 터져 나왔다.
“누가 당신 목숨까지 걸라고 했어요?”
레인은 만성적인 우울증을 앓았다. 갈고 닦은 지식 덕분에 사고는 어느 정도 깨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반복적인 학대 속에 자기혐오와 경멸, 상황에 대한 순응을 익혔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면서도, 끔찍한 환경에 맞게 자라나 길들여졌다. 새장 속에 갇혀 자란 새가 새장을 열어 줘도 자신이 살던 좁은 새장 안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레인의 평소 사고는 이미 규정된 한계 속에서 맴돌았다. 그런 레인이기에, 레인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간절하게 소망할 수는 없었다. 구원받는 게 불가능하다고 학습했으니까. 누군가가 구해 주길 바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대로 끝을 내고 싶다는 소망이 자리했다. 레인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때는 자신마저 포기했던 레인이다. 뭔가를 맹목적으로 바란 적 없는 레인이 오직 유르딘만을 위해서 언령 마법을 발동했을 정도로 그 마음이 강한데, 정작 제 마음을 가져간 상대가 그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갑갑하고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르딘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대로라면 네가 죽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은 있지도 않는다는 듯이. 레인은 맥없이 손을 놓았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제 인생을 갈아 넣고 아예 부숴 버려도 좋다는 사고방식은 평범한 애정이라 불릴 수 없다. 방향성이 달랐을 뿐 이 또한 레인을 향한 맹목적인 광기였다. 유르딘은 레인을 그렇게나 간절하게 사랑한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그렇게나 갖고 싶었던 유르딘의 관심 한 조각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애정이 되어 돌아왔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두려웠다. 저 애정이 비틀려 끔찍한 것으로 변질될까 봐 두려웠고, 그런 식으로 유르딘의 애정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유르딘이 죽을 게 두려웠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목을 자르려 들던 유르딘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레인. 울지 마라.”
다정한 속삭임 덕분에 레인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눈물은 그치기는커녕 대책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필사적인 레인을 보던 유르딘이 손을 뻗어 레인의 눈물을 닦았다. 따스한 온기가 맞닿은 곳부터 천천히 온기가 퍼져 나간다. 레인은 양 뺨에 닿은 온기에 제 얼굴을 기댔다. 조심스레 뺨을 비비는 몸짓에 유르딘의 몸은 다시 한번 굳었다.
“유르딘…….”
레인이 낮게 속삭였다.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드는 목소리였다. 바닥을 향했던 시선을 들어 올리자 속눈썹에 맺혔던 눈물이 툭 떨어져 뺨을 타고 흘렀다.
유르딘은 잠시 갈등했다. 유르딘 또한 인간으로서 언제나 갈등하고 번민하는 자였다. 하지만 레인과 다른 점이라면 그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확신에 들어차 있었으며 하고자 하는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한 성격 탓에 자신이 어디까지 행할까 두려워 자신을 억눌렀으나 이 순간 욕심은 달려 나가 이성이 고삐를 놓쳤다.
천천히 유르딘이 몸을 숙였다. 뜨거운 눈가에 그 이상의 열기를 품은 입술이 닿았다. 가볍게 와 닿은 입술이 조금 더 짙은 의미를 함유한 채 접촉한다. 눈가에서 입술로 옮겨 가, 입술을 가볍게 빨아올리고 혀를 섞어 오는 감각은 오싹하면서도 안온했다. 천천히 눈을 감은 채 레인은 유르딘의 애정을 만끽했다. 유르딘의 팔이 레인을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레인의 눈물이 멈추자마자 떨어지려는 유르딘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자, 유르딘은 조금 놀라면서도 망설이며 떨어지려던 손에 힘을 더했다.
“미안하다, 레인. 네가 울 줄은 몰랐어.”
“울 줄 모르다니…….”
지금까지 레인이 유르딘에게 얼마나 의지했는지 알면서, 심지어 헤어지기 전에는 먼저 키스까지 했는데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어이가 없어서 절로 눈매가 못마땅하게 가늘어졌다.
“당신이 죽으면 제가 슬퍼할 거라고 생각 안 해 봤어요?”
“슬퍼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난 네가 슬퍼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니까. 네가 나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너는 날 원망해야 해.”
강박적인 말이었다. 그 말에 얼마만큼의 죄책감이 얽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레인은 유르딘이 쓸데없이 자학하는 말을 새겨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유르딘을 원망해야만 한다니, 카이렌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만큼이나 어이없는 말이다. 레인은 제 눈빛을 피하려 드는 유르딘의 양 뺨을 잡아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원망한다든가, 원망하지 않는다든가. 그런 건 내가 정해요. 유르딘, 당신도 제 사고방식을 억압할 생각인가요?”
딱히 유르딘을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으나, 레인에게 헌신적인 유르딘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방식이 잘 먹혀들었다. 예상대로 날카로운 말에 유르딘이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럴 리가 없잖나. 난 너를 강제할 생각 따위는…….”
“아니면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세게 나오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유르딘이 자학과도 같은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랐을 뿐, 스스로 질책하고 싶은 모습을 보고 싶던 건 아니다. 레인은 유르딘을 그대로 홱 잡아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원망하라고 말하는 주제에 저렇게까지 애정 가득한 눈으로 보면 설득력이 없지 않나. 레인은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키며 일단 뒤로 물러났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여기서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겠죠.”
들끓는 증오와 분노를 간신히 삼키며 레인은 시선을 돌려 쓰러진 카이렌을 보았다. 사실은 지금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다. 레인이 산 시간만큼 카이렌의 파멸을 기원했다고 해도 모자라지 않다. 단단한 목을 꺾어 죽여 버리는 걸 수천 번은 더 상상했다. 지금이라면 그 상상을 곧바로 현실로 끄집어낼 수 있다. 카이렌이 단숨에 죽는 게 아쉽다면 이대로 납치해서 어디에 감금해 놓고 고통을 주다가 죽여 버리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간단한 끝이다. 끝. 그 단순한 단어만큼이나 편안한 한 순간의 최후다.
유르딘의 말이 맞았다. 지금까지 죄 없는 레인만이 오욕을 뒤집은 채 살다가, 죄인의 낙인이 찍힌 채 도망자로 살아가는 삶이 완벽한 복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역사 속에 카이렌의 이름은 불행한 희생자로 남고, 지금까지 레인이 겪어 온 고통 또한 살인마의 밑거름으로 변질할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다. 레인은 카이렌과 모드 백작가의 이름에 금칠을 남겨 둘 생각이 없었다. 모조리 벗겨 내도 레인이 겪은 고통을 되돌리기에는 모자란다. 게다가 만약 레인이 죄인이 된다면 언제나 레인에게 따라붙던 베델의 이름 또한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죄에 더럽혀진다. 유일하게 가족으로 여기는 어머니의 가족들이다. 더 이상 더러운 죄를 뒤집어쓰게 할 수는 없었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한걸음 물러나야 할 때가 있었다. 그게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유르딘은 레인의 말에 따랐다. 일단 레인이 진정하고 나니 유르딘의 얼굴에는 온갖 복잡한 의문들이 떠올라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레인이 사용한 정체불명의 힘부터가 유르딘에게는 상당히 의아한 것일 테니까.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레인도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없었던 데다 이야기가 길어질 터라 일단은 뒤로 밀어 두기로 했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적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레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르딘 또한 일단 의문을 접어 두고 카이렌을 어깨에 둘러멨다. 카이렌과 닿는 것도 싫은지 몹시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여기 버려두는 것보다 적당히 위에 던져두는 게 말을 맞추기가 쉬울 터였다. 레인에게도, 카이렌에게도.
오늘 있었던 충돌은 없던 일로 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아예 손도 쓸 수 없던 때라면 모를까 유르딘이 온 지금, 레인은 이곳에서 길게 머무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빠져나가기 위해 레인은 카이렌의 상처에 대해 모른다고 잡아뗄 생각이었다. 카이렌 또한 레인을 죽이려고 끌고 온 데다가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해서 약점을 노출했으니 이 일을 쉽게 공론화할 수 없었다. 성공하기만 했어도 확실히 완벽한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 유르딘이 죽으면 뒷배가 사라진 레인의 입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쉽게 막을 수 있었을 테니까.
최소한 유르딘이 이곳에 왔다는 증거를 남겼다면 모를까, 공작가를 제집 드나들듯 드나든 데다가 이 지경이 되도록 사람 한 명 가까이 오지 못하는 걸 보니 들키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아무리 레인을 인질로 잡아 둔다 한들 유르딘이 올 걸 알면서도 대비를 안 했을 리가 없을 텐데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하긴, 워낙에 적이 많아 사병을 여럿 두는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저택도 활보한 유르딘이기는 했다.
계단 끄트머리에서 유르딘이 입을 열었다.
“왕이 보낸 전령이 이쪽으로 올 거다. 왕명을 들고 오는 거고, 여기 직접 오는 건 내 부하들이지만……. 왕명을 핑계로 널 여기서 꺼낼 생각이다.”
레인의 눈이 커졌다. 확실히 왕과 유르딘의 이해관계가 맞는다는 말을 하기는 했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직접 힘을 써 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기나긴 계단이 끝나고 처음 카이렌과 대화를 나누던 헤레일 모드의 집무실이 드러나자마자 유르딘은 카이렌을 패대기치듯 내렸다. 짜증 난다는 듯이 옷을 털어 낸 유르딘은 적당히 포션을 부어 응급 처치했다. 제법 깊게 베었다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출혈이 적었다. 유르딘은 카이렌이 지닌 보석을 확인했다.
“신관의 축복을 받은 성물이다. 자가 치유 효과가 있는데……. 제 몸은 챙기는 모양이지.”
그대로 박살 낼까 고민하던 유르딘은 그대로 넣어 두었다. 굳이 의심받을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의 너머로 아직 어두운 밤이 보였다. 레인은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밝아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으나, 상당히 긴 시간이 흐르기는 했다. 조금 초조해졌다. 안에서 시간을 너무 끌었으니 지금이라도 서둘러 나가야 했다.
유르딘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레인을 안아 들었다. 부끄러웠지만 저번에 공작가의 저택을 빠져나갈 때 보여 준 신출귀몰한 움직임을 떠올리고 얌전히 유르딘을 붙들었다. 유르딘은 잠시 딱딱하게 경직했으나 이내 레인의 팔을 잡아 제 목에 두르게 해 안정적인 자세를 갖췄다. 유르딘은 가볍게 위층의 창으로 들어가더니 복도를 가로질러 레인의 방으로 들어왔다. 대체 어떻게 레인의 방을 이렇게 정확히 찾았는지는 딱히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유르딘의 걱정은 산더미 같았고 준비한 것 또한 산더미처럼 많았으니까.
레인은 곧장 문을 잠갔다. 아무리 유르딘이 날렵한 검사라지만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에 침입했을 때보다 어찌 보면 레인에게 시선이 주목됐을 지금이 더 위험했다.
“그럼 이제 가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저번에도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했었지.”
유르딘이 심각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그게 뭐? 레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유르딘은 더더욱 인상을 썼다.
“원래 전장에서는 그런 말을 하는 놈들부터 죽어.”
“여긴 전장이 아니고, 그건 미신인데요.”
“넌 죽을 수도 있었어. 그 이상한… 힘이 아니고서야. 그건 대체…….”
“그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유르딘이 레인 때문에 제 목숨을 걸지 않게 하려면 죽지 않는 것부터 모조리 설명해야만 했다. 숨길 수 없는 문제다. 말해야 하는 건 알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죽지 않는 괴물이라고, 이전에 죽었던 것은 당신이 내버려 둬서 수십 번이나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모두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레인이 고민하는 기색을 비치자 유르딘은 당장은 됐다며 화제를 물렸다.
“두 번 너와 떨어졌다가는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구나.”
“죄송해요. 제가 여기로 와 버려서…….”
“아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일단은 물러나마. 대신 멀리는 가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있어도 좋아.”
“멀리 가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세상에서 네가 날 제일 과소평가하는 사람일 거다.”
왕국 최강인 유르딘을 비하할 의도는 조금도 없었는데 그렇게 보였을까? 레인이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화내는 게 아니다. 네가 걱정해 주니까 기뻐서 그랬을 뿐.”
조금 기쁜 낯으로 웃는 유르딘의 얼굴에서는 레인이 염려하는 감정을 찾아볼 수 없다. 조금 안심한 채 미소 짓자 유르딘은 손을 뻗어 레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면 조금 이따가 보자.”
그 말과 함께 유르딘은 훌쩍 창문을 넘어 저 멀리 사라졌다. 당장 눈에 유르딘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외따로 떨어졌다는 두려움은 희미했다. 레인은 미소 띤 얼굴로 유르딘이 열고 나간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때마침 바깥에서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인은 잽싸게 피에 젖은 셔츠를 벗었다. 어차피 잠들다 일어난 모습을 연출할 생각이었으니 어렵지 않았다. 새로 옷을 갈아입고 셔츠를 타오르는 난로 속에 던져 넣었다. 문을 두드리던 자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사이에 레인은 재빨리 피를 닦고 외출복을 벗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목욕 가운만 대충 두르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저택의 집사가 다짜고짜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 카이렌의 앞에서 보여 주던 사람 좋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뭘 하고 계십니까. 어딘가에 다녀오셨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모드 백작가는 일개 사용인의 방만한 태도를 모두 알고 있나?”
신경질적인 태도로 일어나는데 막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가운이 흘러내려 레인의 맨살이 드러났다. 집사의 굳는 얼굴을 보며 레인은 비웃었다.
“자고 있는 내 침실에 멋대로 쳐들어온 건 건 네 주인의 허락을 받고 하는 일이겠지?”
카이렌의 심복이라면 그의 비정상적인 집착을 모를 리가 없었다. 카이렌은 레인과 과하게 접촉하는 자들은 모조리 박살 냈다. 귀족이라 여의치 않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 보복이라도 했다. 아무리 심복이라지만, 레인의 맨살을 본다는 건 카이렌에게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부하라지만 최소한 화풀이로 소지 정도는 자를 수도 있겠지. 실제로 전례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쉬십시오.”
집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미친놈의 기행이 빛을 발한 셈이다. 본인에게는 불행이 됐을 것이고. 물론 이런 걸로 길게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유르딘이 말한 전령이 와야 할 텐데. 이불 속에 누워 초조하게 잠들지 못한 채 누워만 있었다. 몸이 너무도 무거운데 잠이 오질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잠이나 잘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과하게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요란해서 잠시도 안정할 수가 없었다. 한 차례 레인을 휩쓸고 갔던 충격은 밀물처럼 다시 흘러들어왔다.
죽지도 않는 괴물. 레인은 한 차례 갈라졌던 목을 손으로 더듬더듬 매만졌다. 분명히 이 눈으로 갈라지는 걸 봤었는데도 목은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다. 차라리 의식을 잃어서 다행이었다. 제 눈으로 목이 도로 붙는 걸 확인했다면 도저히 평정을 가장할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언제나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카이렌을 괴물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자신이 괴물이었을 줄이야. 허탈한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는 식사라는 명목으로 하녀들이 레인의 방으로 쳐들어와 시중이라는 명목의 감시를 했다. 안 먹겠다고 물리며 화를 냈으나 이번에는 어깃장을 놔도 소용없었다. 카이렌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두통을 잠재울 약이라도 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뭔가 집어넣을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레인은 몇 시간 후 손님이 왔다는 말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르딘의 말대로 왕의 전령이 도착했다. 왕의 인장이 찍힌 소환장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한낱 집사가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몇 시간 만에 레인은 곧 모드 백작가를 유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차가 도시를 빠져나오고도 어느 정도 더 달렸을 때, 갑자기 멈춰 서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곧장 유르딘이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나 똑바로 레인을 향하는 미소를 마주하니 새벽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던 두통이 조금은 옅어졌다.
“고생했다, 레인.”
“유르딘이야말로 고생하셨어요.”
마차가 빠져나오는 길에 영지 곳곳에 사병들이 돌아다니는 걸 똑똑히 봤었다. 어마어마한 숫자라서 레인이었다면 골목 하나를 채 지나기도 전에 발각당할 것만 같았다. 몰래 빠져나오는 건 아무리 유르딘이라도 어려울 줄 알았는데 그는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곧장 맞은편 자리에 앉는 유르딘을 심각한 눈으로 응시했다. 시간을 거슬러온 이후 대화는 언제나 핵심을 비켜 나간 채 가장자리에서 맴돈 터라 할 말이 많았다. 그건 유르딘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망설임 사이에서 유르딘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 나는 네게 사과해야만 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유르딘이 부채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유르딘의 태도는 단호했다. 살짝 고개 숙인 채로 그는 빠르게 고백의 말을 내뱉었다.
“아니, 누가 뭐라 해도 내가 널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 네 원망을 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아니, 사실은……. 나는 네게 원망받고 싶었다.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만약 네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아무 설명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널 기만하려 한 셈이지. 그 모든 걸 사과해야만 해. 변명할 생각은 없다. 다만 네가 진실을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크게 숨을 고른 유르딘은 회피하던 시선을 들어 레인을 똑바로 보았다.
“네가 죽기 전, 나는 네 결백을 믿고 있었다. 죄인이라고 널 그렇게 몰아넣은 건 아니야.”
“그게 무슨…….”
서로 간에 시선을 마주하고, 자신의 말에 거짓 따위는 하나도 없다는 확신을 담은 말은, 레인 자신이 겪었던 상황과 너무나도 달라서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유르딘은 곧장 말을 이어 갔다.
“난 네가 죄인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너를 믿었지. 게다가 네가 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빈약했으니까 몇 가지를 추적해 보다가 널 보살피던 의원이 마법사란 걸 알아내서 널 조종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상황은 몇 가지 악질적인 소문이 겹쳐져 최악이었어. 내가 너와 친하게 지내는 것조차 네가 나를 유혹했다느니……. 그런 부정함으로 몰아 세워진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널 보호했다가는 네가 더 나쁜 소문을 뒤집어쓸 것 같았다. 당장은 괜찮아도 후일 내가 수도로 돌아와 아이제나흐 공작과 대립하게 되면 치정 문제로 격하될 테니까. 그래서 일단 널 감옥에 집어넣었지. 최대한 빨리 꺼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넌 사흘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렸고… 나는 실패했지. 끝이 네 죽음이어서야 과정 따윈 모조리 가치 없는 것이야. 넌 나를 원망해도 된다. 다만 말해 둬야 할 것 같아서…….”
말을 더 이으려던 유르딘은 레인의 눈물에 입을 다물었다. 깊은 죄책감이 서린 눈을 보며 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방금 한 말 어디에서도 유르딘이 미안해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줄곧 레인은 유르딘이 자신을 믿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거슬러 와서는 유르딘에게 경멸받을 것을 염려하며 절망했다. 기억을 잃은 순간에조차 유르딘이 자신을 믿어 주지 않은 사실을 괴로워했다. 하지만 유르딘의 지금 말은 그간의 걱정과 염려를 한 번에 간단하게 뒤집었다.
유르딘은 레인을 배반한 적이 없었다.
정말이냐고 되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이리저리 따져 보고 내린 판단이 아니다. 레인은 유르딘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리석다고 해도 좋았다. 사랑하고 있으니까, 유르딘이 레인의 삶의 이유가 되고 있으니까, 만약 이 말이 잘 지어낸 거짓이라서 언젠가 레인을 찌르게 된다고 해도 좋았다. 이 말마저 거짓이라면 모든 것에 미련조차 남지 않는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유르딘.”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일어나자 유르딘이 조금 당황했다. 레인이 좌석 위에 어설프게 한쪽 무릎만을 얹은 자세로 서자 더더욱 불안해했다. 유르딘이 레인의 허리를 붙잡았다. 언제나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가 가까이 있는 레인을 온전히 담았다. 마치 다른 것들은 볼 여유가 없는 사람처럼. 레인이 엷게 웃자 유르딘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내 생각을 억압하고 재단하려 들지 마세요. 자책만 하실 필요도 없고요.”
“미안하다.”
“그건 제가 원하는 말이 아닌데요.”
천천히 손을 뻗어 유르딘의 양 뺨을 감쌌다. 담백한 움직임에도 유르딘은 크게 반응했다. 몸이 움찔 튀는 게 맞닿은 몸으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 때문에 균형을 잃은 레인이 아래로 무너졌다. 레인의 체중이 유르딘의 무릎 위에 고스란히 실렸다. 레인은 호흡조차 잊은 유르딘의 딱딱하게 굳은 뺨을 손끝으로 덧그렸다. 잠시 그러다가 천천히 손을 내려 유르딘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아주 작은 것들만을 바랐다. 복수니, 윤택한 생활이니 하는 건 꿈조차 꾸지 못하고 그저 사람답게 살기만을 소망했다. 다른 모든 욕구를 눌러 죽인 채 그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만을 꿈꾸며 제 주변의 것들을 간신히 긁어모아 살아왔다.
시간을 거슬러 온 후로는 달랐다. 유르딘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바라게 된다. 매 순간 욕심이 샘솟는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끌어안고 싶고, 동시에 얼굴을 마주 보고 싶었다. 유르딘은 레인에게 너무나도 많은 걸 쥐여 줘서 이대로라면 마치 한참을 굶던 거지가 갑작스레 음식을 탐하다 견디지 못하고 죽듯이, 레인 또한 애정에 짓눌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터무니없는 상상이었으나 실제로 레인의 생은 척박했다. 살아온 시간에 비해 달콤한 이 순간은 너무나도 과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르딘이 주는 모든 걸 아무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도 싶었다.
굳어 있던 유르딘의 손이 벌벌 흔들리며 레인을 붙잡았다. 제 품 안에 들어온 온기를 더듬더듬 확인하던 유르딘이 손에 힘을 주었다. 떨리는 호흡이 레인의 목에 닿았다. 뜨거운 숨이었다. 다음 순간, 유르딘은 필사적으로 레인을 끌어안았다.
“사랑한다.”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레인을 제 손으로 지하 감옥에 처넣고, 시신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걸 마주하고, 그 죽음을 만든 이들이라면 자신까지 단죄한 이후로 계속해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묵혀 두었던 고백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감정들로 이루어졌어야 할 말은 달콤하기보다는 처절했다. 피맺힌 한과 스스로 품은 광기를 제 안에 밀어 넣는다고 해도 모조리 숨길 수는 없었다. 정의로운 기사 유르딘 니제스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지금 그 명예가 드높은 이름과 껍데기를 움직이는 건 제 과거를 연기하는 광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속삭이는 말에는 거짓 하나 없었다.
“두 번 다시… 놓고 싶지 않아.”
한때 왕국 최악의 살인마라 불렸던 유르딘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레인이었다. 레인이 유르딘을 필요로 하듯이 유르딘도 똑같이 레인이 필요했다. 상대를, 상대의 마음을 필사적으로 갈구하는 건 유르딘도 마찬가지였다. 필사적인 손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빈틈없이 맞물린 몸으로 체온이 얽혔다.
흘러넘치는 감정들은 차마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수없이 사랑한다고 속삭여도 부족하다. 그러나 밤새 잠들지 못한 몸은 레인의 의지를 거역하고 수마를 끌어왔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탓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 조금 진정된 유르딘이 레인을 도닥이는 손길에 집중하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꿈속에서는 슈리아가 나왔다. 낡고 허름해 폐허에 가까운 방 안에서 슈리아는 단정한 모습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언제나 화사한 색의 옷을 즐겨 입던 슈리아답지 않게 꿈속의 슈리아는 장식 하나 없는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걸 보며 레인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 꿈의 슈리아는 그녀가 죽던 날의 슈리아다. 레인은 정신없이 어머니를 응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슈리아는 레인과 비슷한 나이였다. 제 또래의 나이에 영원히 박제된 어머니. 슈리아는 고작 10대에 결혼해서 20대를 반도 넘기지 못하고 스스로 독을 먹고 죽었다. 레인의 기억 속에는 괴로움에 몸을 비틀며 죽어 가던 슈리아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고통은 산 자의 몫이라는 양 슈리아는 초연한 얼굴이었다.
천천히 슈리아가 고개를 돌려 레인을 마주 보았다. 레인은 십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슈리아의 밝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뻣뻣하게 서 있는 레인에게 다가온 슈리아는 조심스레 레인의 손을 잡았다.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행복할 수 없다면 최소한 불행하지 않기만을 바랐어.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를 때가 있는 법이지.’
알고 있다. 레인은 지난 생의 마지막 순간 두 번 다시 눈 뜨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유르딘이 자신을 다시 한번 봐 주길 소망했다. 어린 시절, 남편의 지독한 배신을 알게 된 슈리아는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을 거라며 독을 마셨다. 레인의 진짜 소망이 표면에 떠오른 생각과 달랐듯이. 사실 어머니의 진짜 소망은 다르다는 걸까? 묻고 싶었지만 꿈속이라 그런 건지 입술이 제 맘대로 떨어지질 않았다. 슈리아는 다정한 얼굴로 레인의 뺨을 손으로 쓸었다.
‘나의 사랑하는 레인, 너는 분명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작은 속삭임을 끝으로 천천히 꿈이 흐려졌다.
잠에서 깼을 때, 레인은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제법 많이 운 것인지 눈물이 흘러서 귓바퀴에 고여 축축했다. 그 위를 잔뜩 초조하고 긴장한 누군가의 손길이 스쳤다. 조심조심 눈가의 눈물을 훔쳐 내는 손길은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심하게 조심스러웠다. 레인은 눈을 뜨고 당황한 얼굴의 유르딘에게서 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았다.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하지만… 한참을 울던데.”
“정말 괜찮아요.”
거듭 묻는 말에 단호하게 대답하니 유르딘은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더 이상 캐묻는 대신 마차를 세웠다.
잠이 든 사이에 해가 머리 위에 올라 어느덧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됐다.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잠시 바깥 공기라도 쐬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레인은 마차 밖으로 나왔다. 유르딘은 수하들과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빠 보였다. 대화에 끼어드는 대신 레인은 머리에 오른 열을 식힐 겸 마차 주변을 걸었다.
아까 꾼 꿈이 그저 어머니에게 좋은 말을 듣고 싶다는 제 소망이 만들어 낸 단순한 꿈인지, 아니면 어젯밤부터 체험한 마법의 영향으로 무언가 신비한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마음이 훨씬 개운해지기야 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들끓던 오만 걱정과 고민은 잠과 함께 일시적으로나마 덮였다.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왔을 때는 바깥에서 먹는 것치고는 제법 그럴싸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유르딘은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모두 가린 채였다. 재료도 조리법도 단순했으나 밖에서 대충 조리했다고 보기에는 고기가 무척 부드러웠고 특유의 잡내 또한 없었다. 레인은 유르딘의 부하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바깥임에도 깍듯한 정자세로 식사를 시작했다.
마음 편히 먹던 건 처음 한두 입 정도였다. 유르딘의 부하들은 말없이 레인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겠거니 여겼으나 갈수록 계속해서 따라붙는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왜 저렇게 쳐다보지? 레인 때문에 괜한 수고를 해서 귀찮은 걸까, 아니면 유르딘의 곁에 레인이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자꾸만 부정적인 가정만 떠오른다. 레인이 불편해하는 걸 알아챈 유르딘이 가장 열렬한 시선을 보내던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기분 나쁘게 쳐다보지 좀 마라. 불편해하잖나.”
“아니, 후작님이 목을 매는 상대니 궁금해서 그렇지요. 베른 놈은 말도 안 해 주고.”
목을 매는……. 직설적인 단어 선정에 레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유르딘은 나름 두 사람의 만남이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신경 쓰는 것 같지만, 지스킬이 눈치챘듯 가까운 사이라면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티가 났다. 여기까지 직접 온 이들이라면 유르딘이 헤레일을 죽이는 것까지 알고 있다는 말이니 심복 중의 심복이다. 모를 리가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오, 당황한다. 당황해.”
유르딘이 날카롭게 쏘아붙인 말에도 부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즐거워했다. 단순히 수직적인 상관관계라기보다는 훨씬 더 친밀감 있는 관계로 보였다. 레인의 눈에는 당황은커녕 그냥 한마디로 일축하는 거로 보였지만, 오랜 시간을 가까이했을 이들의 눈에는 다른 모양이었다.
어찌 됐든 비난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으니 조금 나았다. 처음에 했던 염려가 무색할 정도로 유르딘의 부하들은 레인에 대해 순수한 호의를 보내왔다. 결혼하지 않는 귀족은 없다. 결혼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유르딘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몇 년이나 걱정하던 그들로서는 여자든 남자든 간에 유르딘이 애정을 쏟을 상대를 만났다니까 기쁜 모양이었다. 레인은 순수하게 기뻐하는 상대를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유르딘과의 관계가 알려지는 건 최악이니 비밀로 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타인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나 남에게 비난이 아닌 축복을 받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덕분에 레인은 조금씩 긴장을 풀고 대화를 나눴다. 한 번 대화가 트이고 나니 이후에는 거침없었다. 원래 식사만 빨리하고 일어날 생각이었던 점심 휴식은 대화로 인해 조금 더 길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마차로 돌아와 자리에 앉는데 조금 미묘한 표정의 유르딘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세요?”
“즐거워 보여서.”
“설마 질투하셨어요?”
질투라니. 평소에는 치가 떨리던 감정인데 상대가 유르딘이 되니 무척 달콤한 사랑의 단어처럼 느껴졌다. 유르딘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지만 이내 제자리를 찾으며 평정을 연기했다.
“아니. 대화할 상대가 늘어나는 건 기쁜 일이지.”
“조금쯤은 질투하셔도 괜찮은데요.”
장난스레 속삭이자 유르딘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조금…….”
그렇다고 곧장 솔직하게 말하다니, 레인보다 한참 연상인 유르딘이지만 귀엽지 않은가. 레인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 크게 웃은 것도 아닌데 유르딘의 귀 끝이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나랑 대화하는 건 그리 재미도 없을 테니…….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어.”
“유르딘은 말재주가 없긴 하지요.”
“그건…….”
직설적인 말에 유르딘은 정말로 당황해 버린 것 같았다. 여러모로 지루한 대화 상대라는 말이 기껍게 들리지는 않을 터다. 당황하는 유르딘의 모습도 새롭고 좋지만, 적당히 놀려야겠다. 원체 남의 약한 구석을 찌르거나 비꼬는 소리만 하면서 살아온지라, 악감정이 없는데도 자꾸만 교묘하게 괴롭히는 말을 늘어놓게 된다. 레인은 유르딘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유르딘과 이야기하는 게 가장 좋은걸요. 유르딘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무언가 재어 보지 않은 거짓 하나 없는 진심이었다. 레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 유르딘의 표정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잠시 마차에 난 창 밖을 바라보던 유르딘은 창을 가리고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짐작하다시피……. 나는 네가 죽고 난 이후의 시간을 살았다. 어느 정도 살다가 전쟁터 한복판으로 되돌아온 거야. 처음 네가 죽었을 때…….”
말을 할수록 유르딘에게서 여유가 사라졌다. 형편없이 흔들리던 유르딘의 손이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유르딘의 목소리는 몹시 지치고 힘겨운 어조로 간신히 이어졌다. 레인이 죽고 고작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누명을 풀 수 있었던 것, 레인의 시신에 남은 오래된 흉터를 보고 끔찍한 과거를 유추한 것, 그 일을 사주한 자들, 성 안의 끔찍한 분위기에 대해서 간단하지만 줄이는 일 없이 모두 설명했다. 그러나 이후 레인의 관을 수도로 옮기기 전에 카이렌이 왔다. 거기까지 말한 유르딘은 이야기를 갑작스레 건너뛰었다.
“나는 그 성에서 카이렌 모드를 죽였다.”
왜, 어쩌다가 죽이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설명 못 할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 이유를 레인은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카이렌은 레인이 죽으면 그 시체라도 가질 정도로 집착이 심한 놈이다. 아까 새벽에 유르딘을 협박하면서 말한, 차라리 함께 죽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닐 터였다. 자신의 시체를 마주한 카이렌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그토록 미친 집착이라면 시신마저 소유하려 들었을 테지. 막연히 짐작은 가지만, 굳이 듣고 싶지는 않아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로 돌아가서 나는 너에 대해 조사를 했어. 그, 일단 멋대로 조사해서 미안하다.”
잠시 레인의 눈치를 본 유르딘이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레인이 죽은 후의 일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데도 유르딘의 태도는 심각했다. 레인으로서는 고작 그런 걸 사과할 줄은 미처 몰랐다.
“괜찮아요. 전 어차피 그때 죽은 인간이었을 뿐인걸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너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야. 그런 식으로 깎아 내릴 필요 없어.”
별생각 없이 레인이 가볍게 내뱉은 말에 유르딘은 한 대 얻어맞은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괴롭게 중얼거렸다. 레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자신에 대해 숨겼던 게 아무 소용도 없던 셈이다. 비참한 과거에 대해 유르딘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책하는 것도 싫었고, 무엇보다 레인 자신이 수치스러워서 싫었다. 그러나 레인이 죽은 후에 필사적으로 생전의 행적을 좇았을 그를 생각하니 사소한 이유 따위 아무래도 좋아졌다.
“가장 처음, 다리우스 로닐을 찾아갔었다. 그리고 거기서……. 놈이 굉장히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봤어.”
순식간에 유르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동시에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 표정이었다. 레인이 처음으로 강간당하고 삶에 대한 의욕을 잃었을 때, 거울에서 보던 느낌과 같았다. 황야의 겨울바람처럼 성마른 목소리로 유르딘은 낮게 웃었다. 혹은 흐느꼈다. 눈물은 없었지만, 레인은 그 순간이 유르딘의 전환점이 되었음을 짐작했다. 복잡한 감정이 떠오른 얼굴을 감추듯이 유르딘은 고개를 숙였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추스르고 살 생각을 했어. 하지만 그걸 보는 순간, 글쎄……. 그렇게 나 혼자 살아가는 건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리우스를 죽이고 있었지. 그 이후로 제법 많은 자를 죽였어. 내가 죽은 자들이 거의 다 귀족이었으니 수배됐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네게 죄를 저지른 자들은 모두 다 죽였다.”
“모두 죽였다고요?”
레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너와 연관된 사람들을 모조리 다. 네 가족까지도.”
지나치게 현실감이 떨어졌다. 몇 명을 죽인 걸까. 열 명? 스무 명? 몇 십 명의 사람들? 그 소박하다면 소박한 생명의 단위가 레인의 상상력이 허락하는 한계였다. 유르딘이 때로는 한 번에 수십 명씩을 살해하며, 수백을 가볍게 넘는 수를 살해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유르딘은 자조적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괜찮은 인간이 아니야. 암살하고, 고문하고……. 내 멋대로 행동했지. 복수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화풀이였어. 그자들은 네 삶을 벼랑 끝으로 떠밀었고, 나는 널 무너지는 벼랑 끝에 내버려 뒀지. 그 모든 걸 용납할 수가 없어서……. 죽이고 또 죽였어. 모두 죽이고 나는 처형당했지.”
처형이라니. 레인은 왕국의 영웅이었던 유르딘밖에 몰랐다. 가장 처음 만났을 때, 유르딘이 아직 소년이던 시절조차 그는 촉망받는 왕국의 기대주였다. 어느 정도 자라서는 왕국 사람들이 신뢰하는 최강의 기사가 됐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영광을 손에 거머쥔 영웅이었다. 그 사실은 레인의 안에서 불변하는 태양과도 같았다. 믿기지 않았다. 처형당했다는 사실도, 유르딘의 나약해 보이는 모습조차도. 유르딘에게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가득하다 못해 지독하게 흘러넘쳤다. 오로지 절망만을 생각했던 때의 레인과 똑같았다. 레인은 자신 때문에 유르딘이 괴롭게 살아가는 건 원치 않았다.
“저는 제가 당신 때문에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한 박자 늦게 유르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시선을 피했다. 단단하게 뿌리박힌 자책감은 한 번에 뽑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레인이 자신을 내심 비하하는 것과 똑같았다.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야 레인의 말에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유르딘은 조금 부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네 가족을 죽였다고 했지.”
“그랬죠. 가족이라고 여긴 적은 별로 없지만요.”
“레스터 아이제나흐 말인데……. 놈은 확실하게 기억이 있어. 그건 확인했지. 하지만 이번 일은 확실히 레스터 혼자 벌였다기에는 일의 규모가 커. 딜란이 협력했겠지. 딜란 아이제나흐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만……. 어쨌든 후계자니까.”
말이 이어질수록 레인의 미간도 점점 더 찌푸려지며 좁아졌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딜란은 레스터가 미쳐서 그를 버릴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미친 짓에 힘을 보탰단 말인가?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협력이라니 그럴 리가요. 레스터가 미쳤다면서, 딜란은 제게 작위를 제안했는데…….”
“제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놈이 그럴 리가.”
레인은 황망하게 유르딘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들의 조합이었다. 아낀다고? 딜란 아이제나흐는 원래 거짓으로도 아들에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닌가. 언제나 사람을 자신의 패로써 사용하고, 그대로 버려 버리는 인간이다. 고개를 저으며 즉시 부정했다.
“아낀다뇨. 그 작자는 가문의 실리만을 생각하는…….”
“실리만을 따졌다면 애초에 슈리아를 내치지는 않았겠지.”
패로써 사용하는 인간에게는 가차 없는 남자가 딜란이다. 하지만 제 패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면?
유르딘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위신을 좋아하는 인간이 제 체면만을 신경 썼다면 슈리아를 버리고 평민에 가까운 아나벨을 아내로 들일 리가 없었다. 완벽한 예법과 우아한 말씨, 왕국 제일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 손꼽히게 훌륭하고 유서 깊은 베델 후작가의 피를 이은 고귀한 혈통의 슈리아. 그리고 귀족이기는 해도 거의 명목상의 귀족이라 평민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듣는 아나벨. 인간을 가치로써 판단하는 딜란에게 있어서 누가 더 값질지는 굳이 자세히 재어 볼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딜란의 저울은 아나벨 쪽으로 기울었다.
애초에 슈리아와 대보지 않아도 아나벨은 옆에 두기에는 흠이 되는 여자다. 실제로 아나벨의 행동거지와 출신에서 비롯된 열등감은 아직도 종종 무례한 행동으로 드러나며 회자됐다. 한때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해도 이후 손해를 따져 봤더라면 갈아 치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딜란은 아나벨을 계속해서 곁에 두었다. 변함없이 그녀와 같은 침실에서 잠들며 10년 전에는 유니 아이제나흐도 낳았다. 유니는 후계자도 뭣도 아닌 여자아이에 불과했지만, 딜란은 언제나 유니에게 상냥하게 대했다. 실리만을 생각하는 자였다면, 딜란은 유니를 그렇게 귀애할 필요가 없다. 목적이 있어서 그리 대한 게 아니다. 그저 사랑하기 때문이다.
레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별다른 수고도 들지 않는 시험, 같잖은 몇 마디 말들과 보잘것없는 근거들 때문에 레인은 어이없이 딜란의 말에 넘어갔다. 딜란이 했던 말은 교묘했다. 레인과 자신이 닮았다며 친밀한 척 지껄이는 말 속에는 교묘한 함정이 감춰져 있었다. 딜란은 레인이 지나치게 감정적이며 반대로 자신은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인간인 것처럼 가장했다. 반복되는 흐름에 레인은 딜란이 하는 말의 본질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외면했다.
딜란의 말에, 다정했던 기억에 흔들렸다. 자꾸만 다정했던 과거를 생각하며 그를 추억했다. 겉면에서 이루어지는 사고로는 부정했지만, 진심은 달랐을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달랐다. 어리석은 희망을 품어서는……. 다시 한번 딜란이 자신의 손을 잡아 주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조금은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레스터 또한 자신처럼 버려질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멍청하고 어리석었다. 유르딘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그, 그렇네요. 제가 무슨 멍청한 소리를……. 딜란이 제게 그런 걸 진심으로 제안할 리가 없는데.”
“믿었던 게 나쁜 건 아니야. 게다가 실제로도 그런 소문이 파다했다. 레스터 아이제나흐는 이미 사람을 여럿 죽였어.”
“죽였다고요?”
“그래. 험한 이야기라 일부러 네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창가나 뒷골목에서 죽여도 뒤탈 없는 인간을 사거나 납치해서 몇 명이나 죽였지. 그날 이후로 발작도 여러 번 있었고. 딜란이 이를 흔적도 없이 무마하려 했으나 나나 몇몇 귀족들은 이미 알고 있어. 그들 모두가 발작을 일으키거나 사람을 죽이는 레스터가 후계자가 되지 못할 거로 생각했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이번 일만 해도 그렇지. 딜란은 끝까지 레스터를 품고 갈 거야.”
유르딘은 원래 레스터와 딜란을 함께 고문하며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약에 조금 더 내성이 있는 딜란 아이제나흐가 먼저 깨어났다. 당연한 순서로 유르딘은 먼저 딜란을 고문했다. 빌어먹게도 레인에게는 더없이 비정한 아버지였던 딜란은 레스터에게만은 진짜 아버지였다. 유르딘이 레스터나 유니를 잡고 협박하면 레인에게는 한없이 잔인했던 남자가 헌신적인 아버지가 되었다. 가죽을 벗기는 순간까지도 놈은 레스터를 살려 달라고, 레스터가 무리라면 최소한 죄 없는 유니라도 무사히 살려 달라고 끊임없이 빌었다. 지금도 딜란에게 있어서 레스터는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아프기 시작한 소중한 자식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려 주지 않은 걸 유르딘은 후회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찰나 모조리 제 안에 든 것을 드러낸 레인의 얼굴은 배신감과 경악이 서려 있었다. 곧장 자책과 자기혐오로 바뀌는 감정이 안타까웠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군다 한들 레인은 아직 어렸고 동시에 나약한 면이 있었다. 강하고 단단한 건 레인을 둘러싼 얇은 껍질뿐, 학대받고 자란 청년에게는 제 내실을 단단하게 다질 여유가 없었다. 물론 아예 무르지만은 않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모자랄 데 없는 청년으로 성장한 레인의 근본은 오히려 강인했다. 진작 말해 줬더라면 자신을 두 번이나 속이려 들었던 딜란에게 조금 상처 입을지언정 지금처럼 심하게 자책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리 다 말해 주지 않아서 미안하다.”
레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이 안쓰러워 유르딘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네 아버지잖나. 저도 모르게 믿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아버지다운 일은 한 번도 해 주지 않은 아버지잖아요. 속는 쪽이 머저리지요.”
“어릴 때는 아니었지. 속인 놈이 나쁜 거다. 널 괴롭게 한 자들이 나쁜 거고. 네가 자책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어. 속인 놈이 나쁜 거지. 속은 게 나쁜 건 아니야. 그걸 욕할 수는 없지.”
또렷한 목소리는 늘 그렇듯 강한 확신에 차 있어서 흔들리는 레인을 단단히 지탱하고 이끌어 준다. 유르딘의 애정은 언제나 한결같이 무겁고 동시에 달콤하다. 조금 기운을 차린 레인은 절로 미소가 피어오르려는 걸 애써 참았다.
“멍청한 짓이기는 하죠.”
“별로 그렇지는…….”
“별로란 건 조금은 멍청한 짓이 맞다는 거네요?”
장난스러운 질문이었으나 진지하게 받아들인 유르딘이 진땀을 뺐다. 레인은 상황을 웃음으로 무마했다. 이미 머저리같이 속아 넘어간 걸 어쩌겠는가. 이렇게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도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아서다.
하지만 대체 뭘 노리고 레인을 속였던 걸까? 굳이 지하 감옥의 라사와 의원을 보여 준 이유가 무엇일까. 경고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진지한 음모의 한 수라고 보기에는 뭘 획책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문제는 일단 미뤄 두기로 했다. 사실 이야기할 게 너무도 많았다. 유르딘의 품은 안온하지만, 거기에서 안주할 수만은 없었다. 또다시 인질로 잡혀서 발목을 잡는 건 절대로 사양이었다.
“그보다 아까 새벽에요.”
레인이 운을 떼자마자 유르딘은 곧장 집중했다. 진작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걸 레인이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었다.
“제가 이상한 힘을 썼었죠. 그런데 그런 힘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제게는 특이한 부분이 있는 모양이에요.”
“특이한 점?”
“유르딘, 저는 죽지 않는 몸이에요.”
말이 제대로 사고에 입력되지 않는지 유르딘이 조금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넌 죽었었지. 내가 묻히는 걸 봤는데.”
“하지만 정말이에요. 카이렌이 제 목을 그었었어요. 이렇게 죽. 그리고 살아났죠. 멀쩡하게 목이 붙어서.”
레인은 손을 들어 목 근처에서 횡으로 긋는 시늉을 했다. 유르딘은 여전히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믿지 못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긴, 레인 자신이라도 절대 못 믿었을 거다. 차라리 또 약을 해서 미쳤다는 쪽이 신빙성이 높겠지. 분명 레인은 과거에 한 번 완벽히 죽었었다. 하지만 지난밤, 레인은 제 목을 직접 갈라 버리는 걸 똑똑히 봤다. 고통이 생생했다. 지난밤에 있었던, 이제는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라 그런지 당시의 감정이 생생하게 올라와 레인을 흠뻑 적셨다. 지금까지 항상 골골대면서도 죽지 않는 게 의아했는데, 죽었다 살아나는 거라면 말의 앞뒤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살해당할 거라고 생각했던 게 이번 밤이 처음은 아니었다. 카이렌은 손속이 가차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레인이 죽지 않으니 그랬던 게 아닌가 싶었다. 죽을까 봐 걱정하던 때의 공포 이상으로 자신이 되살아났을 때의 공포가 끔찍했다. 괴물이라고 했던가? 정말로 그랬다. 지금까지 가장 끔찍한 괴물인 줄 알았던 카이렌조차 살을 가르면 죽는 인간인데 레인은 아니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무엇이 이토록 자신을 끔찍하게 여기도록 만드는지 이유조차 모르는 채로 감정이 달아올라 흥분했다. 레인은 몸을 숙여 손을 뻗자, 바닥에 유르딘이 풀어 둔 검에 닿았다.
“안 믿기면 보여 드릴까요? 전 정말로 죽지 않아요.”
아픈 건 싫다. 정말로 그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유르딘을 과격한 방식으로라도 이해시켜야 지난번과 같은 시도를 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을 뿐이다. 말로써 차분히 설득하지 않고 다소 과격하게 구는 이유는 레인이 묘하게 흥분해 있기 때문이었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조금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도는 해 줘야 유르딘이 두 번 다시 조마조마하게 자신의 목에 검을 들이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소 섣부르고 안일한 생각이었다. 레인의 예상보다 유르딘의 반응은 몇 배나 더 격렬했다. 유르딘이 아플 정도의 힘으로 레인의 손목을 잡고 검을 뺏고 멀리 떨어뜨리려는 듯이 밀쳤다. 순식간에 레인의 몸은 균형을 잃고 무너져 뒤로 넘어갔다. 푹신한 시트가 레인을 받치고, 어느샌가 유르딘은 레인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고작 짧은 찰나에 식은땀이 흘러 레인에게로 툭 떨어졌다.
그림자가 진 어둠 사이로 유르딘의 푸른 눈이 어둡고 진득하게 빛났다. 낮은 신음은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거칠고 낮아서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레인을 붙든 유르딘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억센 힘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아팠다. 평소라면 레인의 표정 변화에서 느끼는 감정을 곧장 눈치채고 떨어졌을 유르딘이지만 오늘만은 거기까지 신경을 쓸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지금까지 격하게 움직이고도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던 유르딘의 호흡이 숨쉬기 힘겨워 보일 정도로 거칠었다. 검을 뽑은 것도 아니고 그냥 검집째 들어 올렸을 뿐인데, 레인이 생각하기에는 유르딘의 반응이 지나쳤다.
아까 카이렌과 대치했을 때, 레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주저 없이 목숨을 끊으려 할 때 유르딘의 이러한 과민반응을 조금은 짐작했었다. 레인이 제 머리 위로 내려칠 듯 올라오는 손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몸을 굳힌 시체처럼 구는 것처럼, 유르딘에게도 두려움이 각인되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레인의 상상 이상의 반응이기는 했지만. 아플 정도로 세게 붙들린 레인보다 유르딘 쪽이 훨씬 더 괴로운 얼굴이었다.
“단칼에 죽이면 아프지도 않을 거예요. 괜찮아요. 금방 살아날 테니까요.”
“무슨 그런 대책 없는 말을…….”
“정말로 안 죽어요. 목이 반쯤 잘렸다가도 살아났다고요.”
괴물처럼 잘도 살아났다. 목이 잘렸다가 살아난 시점에서 이미 평범한 인간으로 지칭하는 건 무리였다. 레인은 그리 생각했으나 유르딘의 의견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유르딘에게 있어서 레인은 여전히 연약하고 지켜 줘야 할 상대일 뿐이다.
“이렇게라도 보여 주지 않으면 당신, 또 제 목숨이 걸려 있을 때 자기 목숨을 버릴 것 아니에요?”
“두 번 다시 그럴 일 없을 거다. 절대로 너만 남겨 둘 생각을 하지 않으마. 그러니, 그러니 제발.”
간곡한 애원에도 꼼짝도 하지 않는 레인을 보며 유르딘이 잇새로 낮게 신음했다.
“하지 마.”
“정말로 안 죽어요. 살아났다고요.”
“믿어. 믿을 테니까, 제발. 시늉이라도… 그런, 건.”
절박하게 이어지는 말을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는 없었다. 레인을 붙든 손은 힘을 주다 못해 이제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결국, 레인은 낮은 탄식을 내뱉으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뺐다. 무겁게 간신히 쥐어져 있던 검은 바닥으로 요란하게 떨어진다. 그제야 유르딘은 조금 안심하고 떨리는 손으로 레인의 텅 빈 손을 붙잡았다.
“레인.”
유르딘이 레인을 부르며 아까까지 검을 쥐고 있던 손을 잡아끌었다. 레인의 가슴께에 올라온 손 위에 이마를 대며 유르딘은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레인, 레인, 레인……. 너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목소리는 위에서 아래로 낮게 울려 퍼졌고, 반대로 유르딘의 손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와 레인의 목을 매만졌다. 등골이 저릿할 정도로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유르딘의 목소리는 애달프기도 했으며 반대로 섬뜩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유르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모르겠다. 낯선 얼굴이었다.
“널 내 저택에 가둬 버리고 싶어. 아무도 찾아올 수 없도록 안전하게 감금해 두면 넌 위험한 짓을 할 생각도 못 하겠지.”
나름 위협적이라면 위협적인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재미있는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유르딘이 그런 걸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레인으로서는 유르딘이 한때나마 자신을 가둘 구체적인 계획까지 생각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절대적인 신뢰, 신뢰를 넘어서서 불변의 진실처럼 레인은 유르딘의 사고가 결백함을 믿었다.
새하얀 믿음을 마주한 유르딘의 사나운 기세가 한풀 꺾였다.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꺾었던 유르딘은 잠시 후에 눈을 끔벅이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 맛이 간 듯한 조금 전보다는 훨씬 멀끔한 얼굴이었으나, 지금도 피로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놈이 네 목을 그었다고.”
“네. 중앙을 찔러 넣고 그대로 횡으로…….”
개새끼. 유르딘의 입술이 달싹이며 욕을 만들어 냈다. 소리로 튀어나오지는 않은 욕 대신 치아가 맞물리는 소리가 세게 났다. 자꾸만 흘러나오려는 욕을 간신히 눌러 참은 유르딘은 레인의 목 위로 올라간 손을 움직였다. 굳은살 박인 손이 목울대 부근부터 횡으로 가로지른다. 손이 가로지른 곳에는 무언가 얇게 눌린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막 손톱 따위로 누른 듯한 흔적은 오랫동안 몸에 흔적이 남아 있을 부류가 아니다. 확실히 괴이쩍은 흔적이었다.
“많이 아팠겠구나.”
낮게 중얼거리는 말에는 의심이 없었다. 레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믿어 주는 말이 다디달았다. 죽었다가 되살아났다는 현상이 아니라 고통에 동조해 주는 상냥한 말은 그 무엇보다 안온했다.
순수한 기쁨을 즐길 새는 길지 않았다. 레인의 목 끄트머리로 간 유르딘의 손가락에 천천히 힘이 들어간다. 그리 센 힘은 아니라 피부가 조금 눌릴 뿐인 동작이지만 레인은 소름이 돋아 몸을 굳혔다. 유르딘은 목 부근의 희미한 흔적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레인의 사고는 자꾸만 다른 쪽으로 흘렀다. 자세히 보기 위함인지 유르딘이 몸을 숙이자 숨결이 목에 닿았다. 레인은 그제야 제가 느꼈던 감각이 소름이 아니라 성감임을 알아차렸다. 목은 원래 약한 부위이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예민하지는 않았다. 후덥지근한 숨이나 축축한 혀가 닿을 때면 언제나 기분 나빠 질색했던 기억들이 선명한데도 그런 날은 진작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감각은 활짝 열린 채 자극에 환호하고 있다. 레인은 헐떡이며 터져 나오려는 숨을 참기 위해 애를 썼다.
“잠시…….”
양해를 구할 뿐인 유르딘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목 뒤를 확인하려는지 유르딘이 레인의 목 뒤와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돌렸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며 들어왔다. 지나치게 긴장한 레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접촉은 지나치게 가깝다. 손가락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결국, 참지 못한 레인의 몸이 움찔 튀었다.
그제야 유르딘이 레인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얼굴은 물론 귀나 목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회피하는 레인의 모습을 본 유르딘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레인은 슬그머니 시선을 들었다. 유르딘은 잔뜩 당황하더니 못할 짓을 한 사람처럼 자책하며 일어났다. 레인은 반사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그러나 유르딘은 도망가고 싶어 하는 얼굴로 어설프게 레인의 옆자리에 앉았을 뿐이다.
팽팽하게 긴장됐던 분위기는 지나치게 당황하는 유르딘 덕에 한 순간에 반전됐다. 지금은 다른 의미로 유르딘만 긴장하며 외면하고 있다. 직접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포옹하고 이전에도 키스를 몇 번이나 했다. 다음에 이어질 건 뻔하지 않은가? 굳이 달리는 마차 안에서 뭔가 하려던 생각은 레인에게도 없었지만 이렇게 정색하며 도망치듯 내빼는 태도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질색하세요?”
“그게…….”
유르딘은 대답하지 못하고 잔뜩 망설였다. 간격의 사이, 레인은 나름의 추리를 했다. 유르딘은 항상 자신의 자격에 대해 말했다. 유르딘이 레인과 함께 설 수 없는 초라한 존재인 양 굴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무언가 또 자책하는 말이 나오면 한마디 확실하게 해 줄 생각으로 레인은 곧 이어질 유르딘의 대답에 집중했다. 그러나 유르딘의 입에서 나온 건 뜻밖의 말이었다.
“너, 넌 너무 어리고.”
지극히 도덕적인 말은 레인이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답이다. 레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긴, 나이 차이가 크게 나기는 한다. 레인의 주변에는 기본적인 도덕도 지키지 않는 놈들이 너무 많았기에 저도 모르게 거기에 익숙해졌었다. 잠시 당황했던 레인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저도 스물세 살이에요. 겨울이면 스물넷이 되고요.”
“나는 서른넷이야. 게다가 넌 내 친구의 아들이고. 몹시 파렴치한…….”
단어만 놓고 보면 좀 이상하기는 했다. 사실 많이 이상하다. 친구의 아들이라니. 관계만 똑 떼어 놓고 본다면 그렇게 파렴치할 수가 없었다. 레인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유르딘이 머쓱하게 시선을 피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반박했다.
“괘, 괜찮아요. 예순 먹은 노인이 초경도 안 온 여자애랑 재혼하기도 하는 나라인데.”
“그런 쓰레기랑 비교해야 할 정도면 죽어야지.”
그 말도 맞다. 유르딘이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게 바람직하긴 한데, 이 경우에는 그게 완벽히 좋지만은 않았다.
“괜찮아요. 다들 유르딘에게 열예닐곱 먹은 영애들을 들이대던데요.”
“다들 미친 거지.”
“음, 저는 그 영애들보다는 예닐곱 살쯤 많으니까…….”
“…….”
유르딘은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이 우중충해지는 모양새가 어째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 비교였던 모양이다. 하긴, 이런 걸로 위안이 될 수 있을 리가 있나. 말할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수렁에 빠지고 있었다. 레인은 다른 화제를 찾아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 영애들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난 건데……. 유르딘의 취향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요.”
“내 취향이라고?”
“소문이 돌던데요? 뭐라더라. 유르딘이 성숙한 여자를 좋아할 것이라는 의견이 5할이고, 청순한 여자를 좋아할 것이라는 의견이 4할이고…….”
대번에 유르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럴 리가 없잖나. 그보다 나머지 1할은 뭐지?”
“다 자라지 않은 미성년 취향이거나 남색가일 것이라고요.”
괴상한 소문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지 인상을 찌푸린 유르딘을 보며 레인이 장난스레 웃었다.
“결과적으로 나머지 1할의 소수 의견이 들어맞았네요.”
“다들 농담한 거겠지.”
“자라지 않은 미성년 취향이면, 전 너무 큰가요?”
“그건 헛소문이다.”
“제가 크기는 하고요?”
“딱히 그렇지는…….”
단순한 농담일 뿐인데도 아까부터 어지간히 당황스러운지 유르딘은 자꾸만 말려들었다. 딜란은 체격 좋은 기사들과 나란히 서 있어도 부족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훌쩍 컸고, 슈리아도 레인의 기억으로는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던지라 그 영향으로 레인도 제대로 못 먹고 앓으면서 자란 것치고는 제법 남들보다 키가 컸다. 물론 남들보다 머리 하나쯤 큰 유르딘에 비하면야 약간 작기는 한데……. 비교적 선이 고운 얼굴이라도 소년답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직 20대 초반이지만 앳된 티가 사라져 이제는 어딜 보아도 훤칠한 청년일 뿐이다.
라인셀은 동성애를 독특한 취향 정도로만 봤다. 그 독특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 선호하는 건 대게 선이 곱고 덜 자라 여자아이와 확실히 구별되지 않는 미동이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어딜 봐도 남성미가 넘치는 근육질의 사내였다. 레인은 그중 아무 쪽도 아니었다. 레인은 근본적인 고민에 사로잡혔다.
“유르딘의 취향은 어느 쪽인데요?”
“글쎄다.”
“저는 유르딘의 취향 범주 안이에요?”
“그런 게 딱히 중요하지는 않지 않나.”
중요하지 않다니. 유르딘이 자꾸 말을 돌리니 기분이 묘해졌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모호했다. 객관적으로 제 얼굴이 반반한 건 알았으나 그게 유르딘에게도 매력적으로 느껴질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로 접근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봐서 생긴 것만 그럴듯했지 연인 삼을 정도의 매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실상은 카이렌의 감시를 뚫고 레인에게 호감을 보낼 수 있는 인간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레인이 그런 뒷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건강한 것도 아니고 재치 있게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제 장점을 하나하나 소거하고 나니 내세울 장점은 어린 나이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마도 유르딘은 나이 차이가 부담되는 모양이니 장점도 아니다.
어물쩍 레인의 시선을 피하는 유르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노골적으로 몸을 피하는 유르딘에게 다시 조금 더 붙었다. 순식간에 유르딘을 벽으로 몰아넣은 레인은 더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의 허벅지를 잡아 눌렀다. 단단한 근육이 손 아래에서 더욱 단단하게 긴장했다. 여전히 레인을 쳐다보지도 않는 유르딘이 조금 얄미워서 공연히 그가 쳐다보고 있는 벽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유르딘이 놀란 눈으로 돌아본다.
“저는 별로예요?”
“아니, 아니야. 전혀 아니야, 그런 게…….”
유르딘이 얼굴을 가렸다. 가린 틈새로 엄청나게 붉어진 얼굴이 보인다. 대답을 종용하는 레인의 시선을 외면하던 유르딘이 포기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못 할 것 같아서.”
“네?”
너무 작은 목소리라 들리질 않는다. 몸을 더 바싹 붙이자 유르딘은 난처한 얼굴로 레인을 돌아보았다. 작은 목소리와 달리 얼굴에 드리워진 감정은 수줍음 따위가 아니다.
“자제를 못 할 것 같아서.”
지독한 욕망이었다.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 끄트머리가 욕망에 가라앉아 조금 쉬어 있었다. 손을 떼고 엉거주춤 물러나는 레인을 유르딘이 붙잡았다. 상황은 반대가 됐다.
“너는 나를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바른 인간으로만 봐. 한번 시작하면 자제 따위는 못 할 거야, 절대로. 너를 안고 몰아붙이고, 발정 난 짐승 새끼들과 다를 바 없이 굴겠지. 하필 내가 이런 미친놈이란 걸 아는 사람이 없어서 누군가 나를 막을 수도 없어. 지금은, 그래. 파렴치한 짐승에게 목줄이 채워져 있을 뿐이지.”
미쳐서 복수라는 명목으로 왕국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은 광인은 훈련된 사냥개처럼 이상적인 기사를 연기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줄을 쥐고 있는 건 레인이었다. 정작 유르딘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레인 본인은 아무것도 몰랐다. 다만 한 가지,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난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유르딘에게 드리워진 선연한 욕망. 그늘진 얼굴에서, 쉰 듯한 목소리에서, 레인을 원한다는 마음이 손에 쥘 듯이 보였다. 모를 수가 없다.
잠시 생각하던 레인은 손을 뻗어 유르딘의 코트 깃을 마치 멱살 쥐듯 붙잡았다. 쥔 채로 손끝을 달싹이며 엉킨 숨을 내뱉었다. 유르딘은 미동도 않고 레인이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레인은 번민했다. 하고 싶었다. 10년도 넘게 사랑하던 사람이 레인을 원하고 있는데 참을 필요가 있을까? 욕망에 쉽사리 불이 붙었다. 유르딘이 원하는 만큼 레인도 원한다. 이대로 매달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런 진심을 어지럽히는 건.
‘왜 하필 사랑이야?’
지난밤 레인을 괴롭히기 위해 속살거린 목소리는 레인의 상처 안으로 파고들어 있다가 때가 되니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카이렌의 말대로 유르딘은 선의를 보냈을 뿐인데 음탕한 사고로 제멋대로 연정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욕망하는 것이 나쁜가? 인간은 누구나 욕망한다. 더욱이 레인의 욕망은 타인을 해치지 않는다.
부정적인 사고를 밀어내려 노력했다. 레인을 사랑한다고 항상 말해 온 카이렌은 언제나 레인을 짓밟고 깎아 내 제 틀에 맞추려 드는 개새끼였고, 항상 곁에 있어 주지는 않았다 해도 유르딘은 늘 레인을 소중히 대해 주고 아껴 준 사람이었다. 그것만은 명확한 진실이다. 레인 자신의 마음에 대한 건 믿을 수 없어도 유르딘의 마음은 믿을 수 있다. 정말로 레인이 더럽더라도 유르딘이라면 그 어떤 레인이라도 받아들이고 포용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런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언제나 소망했다. 모두가 레인을 죽지 못해 살아가는 불행한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사랑받을 수 있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아 주기를 바랐다. 유르딘은 레인을 비참한 객체가 아닌 사람으로 봐 주었다. 믿고 있다. 믿고 있는데도 조금 더 익숙한 방식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말로, 그리고 몸으로. 익숙한 방식으로 정반대의 감각을 얻어 애정을 확인받고 변치 않을 사랑을 준다는 확신을 얻기를 바랐다.
유르딘의 코트를 잡고 있던 손을 가볍게 당겼다. 가벼운 움직임이지만 반향은 컸다. 유르딘의 몸이 와락 레인의 위로 무너졌다. 입술 끝에 따뜻한 감촉이 서로 맞닿자마자 혀가 난폭하게 레인의 입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긴장 때문에 말라 있던 입 안이 금세 유르딘의 타액으로 적셔진다.
고개가 꺾이자 유르딘이 레인의 목과 머리를 한 손으로 받쳤다. 손끝이 머리칼 사이를 스치는 오싹한 감각에 레인은 몸을 움츠리며 잡고 있던 유르딘의 코트를 더 세게 쥐었다. 혀를 빨고 입 안 점막을 쓸어 내는 걸 간신히 따라가는 게 레인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긴장으로 숨조차 쉬기 힘들 때쯤 유르딘이 잠시 입술을 뗐다. 유르딘은 이마를 맞댄 채 낮게 흥분한 숨을 내뱉는다. 코가 살짝 맞닿을 때마다 가볍게 비벼지고 떨어져 나간다. 유르딘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무서울 정도로 집중한 채 레인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자제할 수 없을 거라고 단언하던 유르딘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무표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이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맹렬한 욕망의 색이 번뜩였다. 남김없이 잡아먹을 법한 강렬한 시선에 배 속이 울릴 정도로 흥분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이유가 쾌감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유르딘이 레인을 보듯, 똑같이 시선을 마주하던 레인은 뒤늦게 제가 긴장에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흐.”
내뱉는 숨조차 조심스럽다. 입에서 억누른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숨이 유르딘의 숨과 섞인다. 누가 더라고 비교할 것도 없이 둘 다 머리끝까지 흥분했다.
레인이 낸 소리가 신호탄이 되어 유르딘이 손을 뻗었다. 유르딘의 손이 레인의 옷 위를 매만졌다. 다만 유르딘의 손과 레인의 맨살 사이로 있는 옷만 세 겹이다. 날이 제법 추워져 몸이 약한 레인은 마차 안에서조차 옷을 잔뜩 껴입고 있었다. 턱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채 유르딘은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잔뜩 흥분한 기색과 달리 행동은 지루할 정도로 신중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단추를 하나하나 벗기는 작업을 하면서 인내를 되새기는 걸지도 몰랐다. 생각 같아서는 모두 다 잡아 뜯고 싶은지 몇 번인가 옷을 꽉 잡아 쥐었지만 잡아당긴 옷이 잔뜩 구겨지고 뜯기기 직전에 간신히 참았다. 두 번째까지 지켜보던 레인은 세 번째가 됐을 때 유르딘의 힘이 들어간 주먹을 잡고 나직한 목소리로 부추겼다.
“그냥 뜯어 버려요, 유르딘.”
유르딘이 시선을 들었다. 푸른 눈은 깊이 침잠해 깊은 숲의 바닥없는 늪 같은 색이었다. 조금 명령조 같기도 한 말에 유르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안 그래도 참고 있으니까.”
“참지 말라고 말하는 건데요.”
레인은 유르딘의 주먹을 잡고 있던 손끝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유르딘의 살갗을 간질였다. 손등을 비스듬히 타고 올라가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레인의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달아오른 몸 위에 예민한 자극으로 찾아왔다.
“너…….”
노골적인 도발에 유르딘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이더니,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탄식이 흘렀다. 이를 악문 유르딘은 그대로 힘을 주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하나 풀려 가던 단추는 손짓 한 번에 뜯겨져 튕겨 나가고 맨살이 드러났다.
찬 공기에 노출됐던 살갗에 소름이 일었다. 큼직한 손이 가슴팍을 매만졌다. 살집이라고는 전혀 없어 만질 건 가죽밖에 없는 몸이라 벗겨 놓고 식지 않을까 걱정한 게 무색하게도 유르딘은 잔뜩 욕정 했다. 가슴을 주무르고, 빗장뼈를 어루만지다가, 허리나 배로 내려가 매만지고 더듬는다. 집요하게 만지는 손길에 레인의 몸에서는 착실히 반응이 왔다. 흥분한 레인의 가슴이 거칠게 들썩이며 오르내렸다. 잠깐 차갑게 식었던 피부는 유르딘의 손이 드러난 살갗을 빈틈없이 주무르자 금세 온통 뜨거워졌다. 이지로 빛나던 레인의 눈동자가 쾌감에 흐려졌다.
“레인…….”
천천히 낮은 목소리가 레인의 귓가로 내려왔다. 목소리 끝이 젖어서 뭉개져 있었다. 유르딘이 레인의 귓바퀴를 가볍게 깨물고 빨았다. 간간히 레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끝에 질척이는 소리가 뒤따랐다.
피가 몰린 얼굴을 손으로 가리려고 했으나 유르딘은 용납하지 않고 레인의 손을 치워 냈다. 이런 부분은 단호할 필요 없는데. 흘겨보는 눈가 위로 유르딘이 달래듯 입을 맞춘다. 원망할 새도 없이 유르딘이 허리를 더듬던 손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흥분해서인지 만지기 전부터 꼿꼿하게 서 있던 돌기를 손으로 쓸어내리는 것만으로도 차오르는 쾌감에 허리가 젖혀졌다. 가슴 위를 어루만지던 손이 이대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유르딘은 손끝으로 레인의 유두를 가볍게 힘을 줘 누르고 살갗 위로 비볐다.
“으응, 아……. 으, 읏.”
애무는 부드럽게 이어졌다. 잘게 이어지는 쾌감에 어찌할 줄 모르며 레인이 손으로 바닥을 긁고 몸을 뒤틀었다. 절로 위로 들린 무릎에 유르딘의 고간이 닿았다. 레인은 흐려진 눈으로 유르딘을 돌아보았다. 바지 너머로도 흥분해 팽팽하게 부푼 게 여실히 느껴지는데도 유르딘은 여전히 레인을 애무하는 데만 열중할 뿐 제 욕망을 해소하려 들지는 않았다. 자제할 수 없을 거라고 했으면서, 언제나 참으로 대단한 자제력이었다.
레인은 손을 뻗어 유르딘의 묵직하게 부푼 바지 앞섶을 매만졌다. 유르딘이 황급히 레인의 손목을 잡고 떼어 냈다. 흥분해 제멋대로 폭주하려는 걸 참느라 잔뜩 찌푸린 미간이 보였다. 유르딘의 욕망이, 그리고 그 욕망을 한계까지 참는 인내심이 좋았다. 그 모든 것들이 레인을 향하고 있음이 황홀했다. 차오르는 만족감과 몸을 찌르르 울리는 쾌감에 휩싸인다. 그러나 잠자리에서 언제까지나 인내심을 발휘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레인은 정신없이 헐떡이면서도 다른 손을 유르딘에게 뻗었다.
잔뜩 흐트러진 레인과 달리 유르딘은 여전히 셔츠를 목깃까지 단정히 채운 채였다. 노골적인 정욕을 드러내는 얼굴과는 달리 금욕적인 복장이 근육으로 꽉 짜인 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다. 천천히 옷 위의 몸을 더듬었다. 사실은 옷 위가 아니라 뜨거운 피부를 직접 만지고 싶다. 그저 매끈하고 단단한 살갗이라도 좋았고, 땀이 흘러 끈적끈적한 피부라도 좋았다. 언제나 혐오하던 일들이 대상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꿈같이 달콤한 일이 된다는 게 언제나 신기했다. 살과 살이 맞닿아 체온을 만끽하고 싶다. 누군가를 만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다.
어느 순간, 더는 유르딘이 참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목에 입을 맞추는가 싶더니 그대로 살을 빨아올리고 잔뜩 깨물었다.
“흐으, 아, 아……!”
목부터 시작된 쾌감이 온몸으로 내리꽂혔다. 너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목이 뒤로 젖히며 유르딘에게 매달렸다. 레인은 원래 잘 느꼈다. 특히나 목은 원래부터 약하긴 했다. 본의 아니게 긴 시간 동안 강제로 길든 몸은 쾌락을 학습해 어딜 만져도 느꼈고, 심지어 아프게 해도 느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애무만으로 이렇게까지 느낀 건 처음이었다. 너무 느껴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까마득한 쾌락은 벌써부터 중독될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너무 좋다. 좋은데 무언가 부족하다. 아까 유르딘의 손이 슬쩍 스치기만 했던 가슴이 간질거렸다. 레인은 유르딘의 몸에 눌려 있는 손을 빼내서 그대로 제 가슴을 스스로 어설프게 더듬었다. 손톱을 세워 꼬집고 세게 잡아 올려도 흥분한 탓인지 아픔보다는 쾌감이 더 컸다. 혼자 손을 움직이는 걸 유르딘이 모를 리가 없었다. 고개를 든 유르딘의 맹렬한 시선이 레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보고 있다는 건 알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보이며 흥분하는 취미는 없었고, 오히려 몹시 수치스러워하는 편인데도 기존의 사고방식은 유르딘의 앞에서 모조리 박살 난다. 유르딘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정말이지…….”
곤란하다,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발음이 뭉개져 확실치는 않았다. 유르딘은 레인이 혼자 애무하는 쪽과는 반대쪽 가슴을 아래부터 길게 핥아 올렸다. 혀끝이 유륜과 그 부근을 핥았다. 일부러 유두를 스치지 않고 피하는 감질나는 애무가 참기 힘들어 레인은 제 손이 얹어진 가슴을 공연히 쥐어뜯었으나 그런다고 반대쪽이 나아질 리 없다.
“흑, 흐으으…….”
낮게 우는 듯한 소리를 내자 그제야 유두가 유르딘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혀로 유두 주변을 굴리고 이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힉……. 아, 앗. 유, 르딘. 읏, 흐으……. 아, 아.”
소리를 죽인다고 죽였으나 멋대로 신음이 튀어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소리뿐만 아니라 몸을 통제할 수 없다. 제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레인의 손이 맥없이 아래로 떨어지자 그 자리에 대신 유르딘의 손이 올라왔다. 손과 입으로, 한 번에 양쪽 가슴을 애무당하니 죽을 맛이었다. 느끼다 못해 이제 아플 지경이 되어서야 유르딘은 가슴에서 떨어졌다. 물론 가슴에서만 떨어졌을 뿐이다. 유르딘은 드러난 레인의 몸을 구석구석 정성스레 애무했다. 힐끗 내려다본 상반신은 온통 유르딘이 남긴 흔적들로 가득했다.
“아, 하으, 앗.”
통제되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는 감각과 쾌락을 레인은 만끽했다. 솔직한 반응에 취해 유르딘 또한 흥분했다. 허리를 간질이던 손이 마침내 레인의 바지를 붙잡고 그대로 내렸다. 옷을 벗길 때 잠깐 스쳤을 뿐, 제대로 된 물리적 자극도 받지 않았던 레인의 성기는 이미 충분히 발기해 꼿꼿하게 서 있었다.
유르딘의 손이 아래쪽으로 향하는 걸 보지 못하고 레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우습게도, 지금까지 잔뜩 도발하고 유혹해 놓고서 뒤늦게 두려움이 밀려왔다. 유르딘이 자신과의 행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성적인 행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했다. 두려울 게 하나도 없는 행위였다. 시키는 대로 다리를 벌리고 증오하는 자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물며 이번은 원해서 시작된 행위였고, 상대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왜 이제 와서?
답은 금세 나왔다. 원래부터 두려웠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몸을 섞는 게 괜찮았던 적이 없는데 괜찮은 척 평정을 가장했을 뿐, 기나긴 고통과 치욕의 시간들은 여전히 레인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 팽팽히 세워 오던 긴장과 자기 합리화를 놓아 버리니 이전부터 갖고 있던 혐오가 드러났다. 두려웠다. 그랬기에 더더욱 하고 싶었다. 두려움을 떨쳐 내고 싶다. 카이렌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그에게서 해방될 수 없었다. 레인이 바뀌어야 했다. 야금야금 지배당해 좀먹은 두려움을 유르딘의 체온으로 뒤덮고 싶었다. 그러나 각오와는 무관하게 몸이 떨렸다. 역시 정말로 해 버리는 건 두렵다.
“무서워?”
혼란스러워하는 레인에게 유르딘이 짧게 입을 맞췄다. 어린애를 달래듯이 뺨과 눈가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담백하고 부드러운 키스가 쏟아졌다.
“무서워하지 마. 무섭지 않아. 무서운 게 아니야.”
다정한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달짝지근하게 레인의 귓가를 맴돌았다. 레인은 감았던 눈을 떴다. 시야에 바로 보이는 변함없이 다정한 얼굴이 막연히 밀려왔던 두려움을 조금씩 몰아낸다.
“무섭지 않아도 되니까, 이제…….”
유르딘의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다음 말을 망설이며 고개를 숙였던 유르딘은, 다시 고개를 들며 입을 열 때는 망설임을 모조리 떨쳐 낸 채였다.
“내가, 계속 네 곁에 있을 테니까.”
욕망이 빠듯하게 들어찬 목소리가 맹세의 말을 읊는다. 동시에 유르딘이 품고 있던 욕망의 발현이기도 했다.
놓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든 레인을 놓아줄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근거 없는 믿음은 레인과 가까워질수록 금이 가고 박살 났다. 처음에는 그저 살아 있는 레인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다음에는 레인과 대화하고 싶었고, 함께 있고 싶었고, 그가 자신을 보며 웃어 주길 원했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게 될까 봐 무의식적으로 입을 맞추거나 안고 싶다는 성적인 생각은 피했지만, 결국은 이렇게 됐다.
제 손길에 따라 솔직하게 쾌락에 젖는 레인의 모습은 유르딘에게 있어서 지나치게 위험했다. 조금 더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만을 생각하며 반응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다른 놈들이 이런 모습을 봤을 거라고 생각하니 불쾌함에 배 속이 들끓었다. 누군가가 이런 레인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역시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레인을 가둬 두고 싶었다.
하루 이틀 된 욕망은 아니다. 레인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유르딘을 충동질하던 검은 마음이다. 이 순간만은 유르딘의 부정한 욕망이 그 어떤 다짐보다 앞서고 있었다. 유르딘의 더러운 흑심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유르딘이 함께하겠다며 아름답게 꾸민 말에 안도하는 순수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더더욱 감정에 불이 붙었다. 사랑스럽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감금해 제 품에만 가둬 두고 싶다.
우습게도 끝을 모르고 달려 나가던 욕망을 멈추고 최후에 고삐를 잡은 건 레인을 위하는 마음이 아닌 유르딘 자신의 욕망이었다. 강압적인 방법을 쓰면 레인의 몸은 완벽하게 가질지언정, 손에 넣은 온전한 애정과 신뢰는 잃어버리게 된다. 유르딘은 레인의 어느 것 하나 잃을 수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육신을 모조리, 모든 애정과 신뢰의 감정들을,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갖고 싶었다. 가져야만 했다. 유르딘은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욕망을 다스렸다.
“미안하다, 레인.”
“유르딘…….”
“무서워하지 마, 제발. 부탁이니까…….”
사과하고 애원한다. 가진 건, 아니, 갖고 있지 않은 건 모조리 약탈해 바쳐서라도 레인을 온전히 영원토록 손에 넣고 싶었다. 자제할 수 있을 거라니, 돌이켜 보면 어리석은 믿음이었다. 유르딘은 레인 단 한 사람에게 미쳐서 제 왕국도, 친구도, 가족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내던졌다. 확정된 영광스러운 미래를 내던지고 제 삶까지 진창에 내던지며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서 레인을 갈구했다. 이미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 전적이 있는 주제에 뭘 그리 자신만만해했는지.
유르딘은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레인의 바지를 속옷째로 마저 벗겼다. 맨다리가 드러나자 레인의 몸이 잠시 움츠러들었으나 두려움은 많이 가셨는지 기대 섞인 눈으로 유르딘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함께. 영원을 맹세하는 말은 순식간에 두려움을 장작 삼아 욕망에 불을 지폈다. 레인이 손을 뻗어 유르딘의 목을 끌어안았다.
천천히 굳은살 박인 단단한 손이 곧장 레인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레인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느릿한 손길로 주물렀다. 유르딘을 안은 레인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깨와 목에 얼굴을 비비며 더운 숨을 내뱉다가, 느릿한 손길에 애가 타 재촉하듯이 유르딘의 목에 입을 맞췄다. 거부 대신에 호응을 확인한 유르딘은 레인의 성기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끝부분을 문질러 자극하자 꼿꼿이 선 성기가 조금씩 묽은 액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읏, 응, 으으…….”
속절없이 신음이 흘렀다. 유르딘이 기둥을 손으로 쥔 채 전체를 훑었다. 때로는 고환까지도 가볍게 주무르다가 회음부를 스쳤다. 어디가 가장 좋은지 탐색이라도 하는 모양새였지만, 어디가 더 좋다고 할 것도 없이 지나치게 다 좋았다. 유르딘을 끌어안은 팔은 더 버티지 못하고 힘이 풀렸다. 아래로 무너지는 레인을 유르딘이 한 손으로 받아 얌전히 눕혔다. 성기를 쥐고 흔드는 손길이 점점 빨라진다. 쾌감 때문에 긴장한 허벅지에 절로 단단히 힘이 들어가 반사적으로 세워졌다.
“하아, 아, 윽……. 유, 읏, 유르, 딘……. 으응, 읏……. 아, 아!”
저도 모르게 소리가 높아졌다. 제 목소리가 높아졌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레인에게 유르딘이 입을 맞췄다. 신음이 유르딘의 입 안에서 흥분한 숨과 함께 뒤섞여 뭉그러졌다. 조금 난폭한 입맞춤을 모두 따라가지 못하고 멈춰 있어도 유르딘의 혀는 집요하게 레인을 따라왔다. 이대로라면 참지 못하고 금세 사정할 것만 같았다. 쾌락은 커다란 파도처럼 연이어 몰려와 레인을 휩쓸었다.
“잠, 잠깐, 아, 흐으, 아, 유르딘, 나올… 흡, 나올 것, 같, 으응…….”
“괜찮아, 해.”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레인은 유르딘의 손 안에 사정했다. 사정의 여운이 온몸을 휩쓸고 나가자 동시에 온몸의 맥이 탁 풀렸다. 진작부터 축축하게 젖어 있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레인?”
“좋, 아서……. 그냥, 좋아서…….”
나직하게 속삭이며 숨을 뱉자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던 유르딘이 안도했다.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면서 레인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들었다. 자신만 좋은 건 원하지 않았다. 유르딘도 느끼기를 원했다.
다리를 들어 보란 듯이 무릎으로 유르딘의 바지 앞섶을 문지르자 유르딘이 이를 악물고 레인의 다리를 잡아 누른 채 제 성기를 꺼냈다. 당장 사정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팽팽하게 선 성기를 보자 기세 좋게 도발해 놓고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안 한 지도 꽤 되었는데 저렇게 흉흉한 걸 어설프게 삼키다가는 찢어질 게 뻔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유르딘의 성기를 뚫어져라 보다가 시선을 드니, 유르딘이 레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유르딘이 움직였다. 설마 곧바로 삽입하려나, 절대로 안 들어갈 텐데. 그러나 곧 레인은 제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유르딘은 삽입을 시도하는 대신 한 손으로 레인의 양다리를 모아서 잡았다. 무얼 하려는지 얼추 짐작이 갔다. 레인은 눈을 깜박였다.
“아, 안 넣으세요?”
“지금은 아무래도 무리지.”
“그냥 해도 괜찮은데요……. 아마.”
“레인.”
유르딘이 모았던 레인의 다리를 잡아서 홱 벌린 채로 하반신을 레인에게 바싹 붙였다.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가 레인의 입구를 찔렀다. 아직 들어간 것도 아닌데 레인의 몸이 놀라 퍼뜩 튀었다. 입구 주변을 뭉근하게 문지르던 성기는 그대로 뻣뻣하게 긴장한 몸을 가르고 들어가는 대신에 얌전히 떨어졌다. 유르딘이 레인의 위로 몸을 숙이자 유르딘의 성기가 레인의 것과 맞닿으며 비벼졌다. 얼굴을 가까이 한 채로 유르딘은 손끝으로 레인의 입구 주변을 만지며 낮게 속삭였다.
“나도 네 안에 넣고 싶어. 박아 넣고 잔뜩 흔들면서 기뻐하는 얼굴을 본 채 네 안에 가득 싸고 싶어.”
“네? 자, 자, 잠깐…….”
갑작스레 외설적인 말을 들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음담패설을 처음 들어 본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유르딘의 금욕적인 모습만 주로 봐 온 탓인지 위화감이 컸다. 급히 손을 들어 유르딘의 입을 막았지만, 멈추기는커녕 유르딘은 제 입을 막은 레인의 손을 길게 핥아 올렸다. 레인이 놀라 손을 떼자 유르딘은 그 손을 붙잡아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온종일 안고 싶어. 네가 아무 생각도 못 하도록, 나만 보고 내가 주는 쾌락만 받으며 나만 느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
더운 숨이 손등을 간질였다. 낮게 쉰 목소리는 위협적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레인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뭔가 잘못 건드린 느낌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레인을 보며 유르딘은 몸을 뒤로 빼며 열기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팠잖아. 여긴 마차고, 준비도 완벽할 수 없고.”
어르고 달래는 말이 다정하기는 한데 어째 지금까지와는 느낌이 달랐다. 이전까지가 정말 무해한 보호자로서의 다정함이었다면, 지금은 제 본성을 반쯤 드러낸 맹수가 산 먹잇감을 달래는 듯한 다정함이었다. 레인은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를 어설프게 끄덕였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레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유르딘은 허벅지를 꽉 잡고 끌어안았다. 유르딘의 눈이 놀라 크게 뜨였다가 다시 짙게 가라앉는다. 유르딘이 레인의 발목에 입을 맞췄다. 레인이 놀라서 발버둥 치려고 하자, 유르딘은 제 다리를 끌어안은 레인의 팔목을 잡아 고정하고는 다른 손으로 허공에 들린 발목을 붙잡고 복사뼈에 입을 맞췄다. 양말이 벗겨지는 걸 보며 레인은 기겁했다.
“바, 발은, 발은……. 더, 더러운데.”
“발목일 뿐이잖나. 그리고 안 더러워. 어느 곳 하나 더럽지 않아.”
“그래도…….”
유르딘은 레인의 손목을 잡아 고정했던 손을 떼어 냈다. 레인은 자유로워진 양팔과 양다리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유르딘이 발목을 잡고 가볍게 당기자 뒤로 물러나려던 몸이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발목을 붙든 채 유르딘의 입술이 점차 위로, 그리고 안쪽으로 올라오며 흔적을 남겼다. 거울을 보면 분명히 얼룩덜룩한 꼴이리라. 허벅지 가장 안쪽의 여린 살에 입을 맞춘 유르딘이 레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제 성기에 유르딘의 숨이 닿자 레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레인이 무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유르딘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조금도 더럽지 않아. 네가 널 더럽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네가 더러운 게 아니라 널 그렇게 생각하게 한 놈이 더러운 거야.”
“…….”
“알았지?”
부정할 수도 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에 레인은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대답하려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말을 꺼낼 용기가 없어서 막연하게 남아 있던 불안감이 흐트러졌다.
젖은 채 일렁이는 레인의 눈동자를 보며 유르딘이 레인의 성기를 입 안으로 삼켰다. 유르딘의 입 안은 뜨거웠고 축축했으며 동시에 황홀했다. 아무래도 남자의 성기를 구음 하는 건 처음인 모양인지 유르딘은 조금 어설프게 움직였다. 어디까지나 시작은 그랬다. 몇 번 혀끝으로 성기를 감싸고 입을 움직여 본 유르딘은 금세 감을 잡았다. 레인의 반응을 살피며 혀로 감싸며 깊숙이 빨아들이고, 때로는 기둥을 핥아 내리는 움직임은 순식간에 자연스러워졌다. 유르딘의 입 안이 레인의 성기를 꽉 조였다.
“으응, 읏, 흣…….”
사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유르딘의 입 안에서 성기가 순식간에 서 버렸다. 밀려드는 쾌감에 레인이 발끝에 힘을 줬다. 아무리 그래도 유르딘의 입 안에 사정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다행히 세우는 게 목적이었는지 유르딘은 입을 뗐다.
“같이, 하자. 같이.”
한 음절씩 떨어지는 목소리가 짙은 흥분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유르딘은 힘없이 늘어진 레인의 팔을 붙잡고 아까처럼 허벅지 쪽을 잡고 다리를 끌어안게 하였다. 그러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품 안에서 작은 기름병을 꺼냈다. 무기를 손질할 때 쓰는 병 같았다. 유르딘은 병을 열어 레인의 다리 위로 흘려보냈다.
“그거……. 읏, 그걸 써서 넣으면 되잖아요.”
“아무거나 네게 넣을 수는 없잖아.”
뭐라 반박하려던 레인은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 뒤로 술도 넣어 본 적이 있는데……. 하다가 기절했었지만. 당시에는 기적처럼 잘도 살았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한 번 죽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여러모로 안 하는 게 좋은 말이었다.
유르딘은 제멋대로 다리를 타고 흐른 기름을 레인의 허벅지에 발랐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마른 피부에 발라 움직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용도로 풀어 주려는 것이 아니니 상관없었다. 기름을 모두 바른 유르딘은 한 손으로 레인의 허벅지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살이 없는 허벅지지만 그리 잡으니 제법 살이 딱 붙는다.
유르딘은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곧장 자세를 잡았다. 유르딘의 성기가 맞물린 레인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며 나왔다. 그대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하며 왕복했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움직임에 레인이 어찌할 줄 모르며 눈동자를 혼란스레 굴렸다. 다리 위로 유르딘의 무게가 실려 허리가 접힌 채 몸이 아래로 눌렸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유르딘의 성기가 자꾸만 레인의 성기를 건드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뒤에 무언가를 넣어 줬으면 했다. 그러나 동시에 넣지 말았으면 했다. 다리 사이가 아니라 제 몸에 끼우고 정신없이 폭력적으로 박아 줬으면 하면서도, 고작 이 정도의 자극으로도 지나치게 느끼니 삽입하면 얼마나 미쳐 버릴 것 같을지 두려웠다.
몸을 더 숙여 조금 더 가까워진 유르딘의 입에서 더운 숨이 흘러나와 레인의 피부 위에 녹아내렸다. 유르딘은 그대로 레인의 성기를 낙낙하게 쥔 채 크게 허리 짓 했다. 그럴 때마다 넓게 남은 손 안으로 유르딘의 성기 끄트머리가 들락거리며 성기끼리 마찰했다. 목구멍에서는 신음이 들끓었다.
“아, 아아, 읏, 으응…….”
“후우…….”
유르딘이 조금 거칠어진 숨을 내뱉었다. 점차 흥분을 가누지 못하게 된 유르딘의 허리 짓이 빨라졌다. 까슬까슬한 음모가 닿아 살에 눌리고 고환이 부딪친다. 마차 안에 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허리 짓이 빨라지며 반대로 레인의 성기를 잡고 있던 손길은 느슨해졌지만, 굳이 성기를 애무해 주지 않더라도 허벅지 사이의 살이 비벼지는 행위에 어이없을 정도로 몸이 반응해 들썩였다.
허공에 들린 발끝이 자꾸만 곱아든다. 자꾸만 다리를 잡은 손이 흘러내리자 유르딘은 레인의 다리를 반쯤 끌어안아 단단하게 고정했다. 유르딘은 여유가 모두 바닥나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속도를 점점 더 올렸다. 단 한 순간도 레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게 쳐다본다. 열중한 유르딘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 레인의 위로 뚝뚝 떨어졌다.
“레인.”
낮은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낮은 부름은 마치 노래처럼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치 레인의 이름 자체가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인 양 모든 마음을 담아 거듭 부른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부르며 유르딘이 레인의 다리 사이로 세게 파고들었다.
“큿…….”
거친 신음과 함께 유르딘이 사정했다. 제법 많은 정액이 레인의 배 위로 튀었다. 사정하면서 유르딘은 고개 숙인 채 숨을 토해 내며 레인의 성기를 세게 잡고 다소 난폭하게 흔들었다. 거의 곧장 사정한 게 유르딘의 손짓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사정하는 순간 잔뜩 찌푸리고 있던 미간이 나른하게 펴지는 얼굴이 지나치게 심장에 해로웠기 때문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레인의 위에서 유르딘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건 레인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여전히 쌩쌩한 유르딘과 달리 레인은 연달은 두 번의 사정으로 완전히 진이 빠졌다. 채 숨을 다 고르기도 전에 몸을 일으켜 앉은 유르딘이 레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똑바로 몸을 세우지 못한 레인의 몸이 유르딘 쪽으로 무너졌다. 몸 위에 튄 정액은 고스란히 유르딘의 옷에 묻었다. 유르딘은 아랑곳하지 않고 레인에게 입을 맞췄다. 자꾸만 무너지는 몸을 받친 채 조금 멍하니 벌어진 레인의 입술 안을 파고들었다. 한 번 사정해 욕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난 뒤라 그런지 입맞춤은 다시 부드럽고 느릿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이조차 따라갈 여력이 없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레인은 옷이 더럽혀지는 일 따위는 포기하고 팔을 들어 유르딘의 목을 끌어안았다.
“유르딘…….”
기분 좋았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충족되는 대신 온몸의 힘을 모조리 쏟아 낸 것만 같았다. 졸리고 지친다. 유르딘의 아랫도리가 다시 부푸는 걸 무시하며 레인은 까무룩 잠에 빠졌다.
눈을 떴을 때는 낯선 방 안이었다.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키는데 유르딘이 옆에서 물을 건넸다. 유르딘을 보자마자 레인은 반대로 마차 안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욕망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얼굴이 붉어졌으나 유르딘은 여전히 담담한 태도였다. 한 모금 받아 마시니 레인도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얼굴에 서린 붉은 기가 모두 가라앉을 때쯤 레인이 입을 열었다.
“여긴…….”
생각보다 목소리가 많이 쉬었다. 그리 큰 소리를 낸 것도 아닌데……. 목에서 끓어오르는 소리를 억지로 참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목을 가다듬는 레인을 보며 유르딘은 커튼을 젖혀 바깥을 보여 주었다. 아직 잠들지 않은 도시의 불빛이 여기저기서 반짝이고 있었다.
“렘로트의 여관이다. 한 시간 전에 들어왔어.”
“그렇군요.”
마차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도 또 잠들어, 거의 온종일 잠든 채 보낸 셈이다. 아무리 그래도 마차에서 여관으로 옮기는 중에도 모르다니……. 오래 잤는데 썩 개운하지가 않았다. 어쩌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그 이후 언령 마법까지 쓴 여파일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부여잡은 채 레인은 아까 들은 지명에 대해 생각했다. 렘로트는 모드 백작령에서 왕도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영지였다. 왕국 남부로 가는 대로가 뚫려 있는지라, 이대로 남부의 영지로 가야 하는 유르딘과 헤어지게 될 장소이기도 했다.
“머리가 아픈가? 약이라도 가져다줄까.”
“아뇨, 그냥 너무 오래 자서 그런 것 같아요. 그보다…….”
레인은 시선을 내렸다. 분명 기억하기로는 옷이 뜯기고 구겨지고 엉망이었었는데……. 잠들었다가 깬 사이에 옷은 말끔하게 갈아입혀져 있었다.
“내가 몸을 닦고 갈아입혔어. 그 녀석들에게는 네가 멀미로 잠들었다고 해 뒀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 네. 고마워요, 유르딘.”
“네 무방비한 모습을 아무에게나 보여 줄 수는 없잖나. 어쨌든 당분간은 목을 가리고 다니는 게 좋겠어.”
안 그래도 마차에서 너무 소란을 부린 것 같아서 부끄러웠는데 잘 변명을 해 뒀다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너무도 태연하게 말하는 유르딘의 태도는 조금 적응이 안 됐다. 하긴, 앞으로 계속해서 빼기만 하는 유르딘에게 저돌적으로 돌진해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고개를 휘휘 저은 레인이 물컵을 내려놓자, 유르딘은 빈 컵과 물병을 들고 나갔다. 레인은 유르딘이 나가자마자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갔다.
“……엄청나네.”
목이 온통 얼룩덜룩했다. 셔츠를 걷어 보니 더더욱 장난 아니었다. 뭐라도 걸칠까 고민하던 레인은 그냥 포기하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무방비한 모습을 아무에게나 보여 줄 수 없다느니, 뭐 그런 말을 했으니까 사람을 데려오지는 않겠지. 예상대로 유르딘은 제 손으로 두 사람 몫의 식사를 가져와 손수 테이블 위에 차려 두었다. 절대 작지 않은 테이블 위가 순식간에 가득 찼다. 유르딘은 어째 평소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레인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레인이 질색했다.
“너무 많은데요.”
“많이 먹어야지. 난 설마 그 정도로 기절할 줄은 몰랐어.”
“그냥 잠든 건데…….”
거의 기절하듯이 의식이 끊기긴 했으니 큰 설득력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레인의 변명은 먹히지 않았다. 레인은 제 몫으로 떠넘겨진 음식들을 보며 비장하게 식기를 들었다. 식사를 보자 허기가 밀려와서 유르딘이 넘긴 음식을 전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해치울 수 있었다. 남기긴 했지만 유르딘도 무리하게 권하지는 않았다.
그릇을 정리해 다시 한번 방 밖으로 나갔다 온 유르딘은 차를 들고 왔다. 왕국 영웅의 수발을 받다니 대단히 호화로운 식사라고 생각하며 레인은 차를 한 모금 넘기고 테이블 위에 내려 두었다.
“유르딘은 여기서 영지로 가는 건가요?”
“그래.”
짧게 대답한 유르딘이 레인의 옆자리로 건너와 앉았다. 무언가 지나치게, 쓸데없이 얼굴이 가까워졌다는 기분이 든다. 조금 당황하는 레인을 향해 유르딘이 다소 뻔뻔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아쉬워?”
“아뇨. 어차피 가셔야 하는 거니까…….”
“아쉽지 않나?”
목소리에 섭섭하단 기색이 묻어 나왔다. 레인은 당황해서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건 또 아닌데…….”
레인이 재빨리 대답하자 유르딘이 소리 내어 웃었다. 뭔가 놀림받은 기분이라 눈을 동그랗게 떴던 레인은 이내 따라서 웃었다. 어째 거리감이 조금 좁혀진 것 같았다.
“아직은 아니고……. 눈 좀 붙이고 새벽에 갈 생각이다. 일단 너와 이야기를 마저 하고.”
아까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할 시간이었다. 특히 레인이 쓴 마법에 대해서 유르딘은 진작부터 궁금했을 터였다.
“제가 카이렌을 공격했었죠.”
“그래.”
운은 뗐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매끄럽게 설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레인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명은 조금 어설프게 이어졌다. 책에서 본 언령 마법에 대한 설명과 그것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조건, 언령 마법을 사용한 직후 남아 있던 마력의 잔해를 일시적으로 사용한 것뿐이라는 설명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설명을 마쳤지만, 어딘지 완전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유르딘의 표정이 절로 심각해졌다.
“마법이라……. 안 그래도 마력 결핍증을 앓고 있는데 마력을 쓰다니.”
“그건 괜찮을 거예요. 조금 많이 자긴 했지만 멀쩡하잖아요. 게다가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는데요.”
유르딘은 여전히 전부 납득 가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놈이 널 직접 찔러 죽였다면,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던 거겠지?”
“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본 모양이니까…….”
여차하면 동반 자살 하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레인의 목숨을 아무것도 아닌 양 내팽개칠 정도로 무른 집착을 가진 놈은 아니었다. 유르딘이 입을 가리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레인은 들어 본 적도 없는 험한 욕이 짧게 들렸다. 잠시 후 유르딘은 한숨을 깊이 쉬며 간신히 진정했다.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마법은 최소한 600개 이상의 작은 마법을 얽는 대마법이야. 발동에만 최소 스무 명 이상의 마법사가 필요하지. 다만 본인의 몸에 불사의 마법을 걸고 죽음에 가까워지는 즉시 마법이 발동되게 한다면 필요한 마법의 개수는 60개까지 떨어져. 물론 그것도 충분히 대마법이지.”
굉장히 자세한 설명이었다. 틈틈이 디프랑 후작가의 저택에 가서 마법에 대한 서적을 읽은 레인보다 훨씬 더 상세한 지식이었다. 유르딘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검사와 마법은 마법이 흔하던 시대에도 정반대의 관계에 존재했던지라 자세한 지식을 가진 게 무척 의외였다.
“마법에 대해 잘 아시네요?”
“잘 아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시간대로 돌아온 후에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조사하기는 했어. 정말 시간을 되돌리는 게 가능한 건지 궁금했으니까.”
“하긴 궁금하실 만하네요.”
기억을 더듬어 가며 유르딘은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시간을 돌리는 것도 가능해. 실제로 시도하던 마법사도 있었지만, 정말로 과거로 돌아갔다면 현재에서는 증명할 수 없으니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마법 이상으로 그 대가가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어.”
“대가요?”
“마력만으로 가능한 건 아니라고 하더군. 다만 그 책은 수상쩍은 흑마법 책이라서……. 설득력은 없어.”
설레설레 고개를 저은 유르딘이 화제를 돌렸다.
“만약 간단한 마법이라도 네 의지대로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불을 작게 일으켜서 머리에 슬쩍 붙이기만 해도 제법 위협적이지.”
“그, 그러게요.”
레인은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다. 과연 전쟁터에서 오래 머무른 유르딘다웠다.
“불을 붙이는 마법은 기초 마법이라고 책에서 본 것 같아요.”
“마법을 배울 수는 없나?”
“일단 마력을 느끼라고 하던데…….”
지금까지 레인이 체험한 마법은 모조리 대마법이라는 거창한 영역에 걸쳐져 있는데, 정작 레인 본인은 마력이고 뭐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레인은 황망하게 유르딘을 바라보았다.
“마력은 어떻게 느끼죠?”
“글쎄.”
마력의 정수라는 오러 블레이드를 쓰면서 모른단 말인가. 레인이 서먹하게 바라보자 유르딘이 어깨를 으쓱이며 변명했다.
“나야 마법사들과 같은 방식으로 마법을 쓰는 게 아니니까……. 음, 그냥 적당히 집중하고 검을 휘두르면 되던데.”
정말로 대단히 쓸모없는 조언이었다. 레인은 유르딘의 말대로 적당히 집중했다. 당연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이 기분, 디프랑 후작가에서 마법을 써 본답시고 욕실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것 같다. 공연히 기운만 뺀 레인은 빠르게 포기했다. 여기서 노력해 봤자 별 소용은 없을 것 같다. 디프랑 후작이 초대도 했겠다, 수도에 돌아가는 대로 마법에 대한 서적을 조금 더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유르딘, 묻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요. 혹시 미엘 데이막에 대해 아세요?”
“……널 보살핀 의원 말인가. 얼마 전에 사라졌지.”
“그 사람, 아무래도 수상한 게 많아서요. 살아온 배경은 전혀 다른데, 제가 과거에 알던 사람과 똑같아요.”
“확실히……. 그래.”
유르딘도 뭔가 아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수수께끼를 불러오는 말일 뿐이다.
“이름에 성까지 일치하기는 힘들지. 나머지가 모두 다르지만……. 네가 아카데미로 온 이후 행적이 끊겼었는데, 왜 하필이면 동명의 남자가 네게…….”
“자, 잠깐만요. 유르딘이 말하는 게 누군데요?”
레인은 당황해서 유르딘의 말을 잘랐다. 아카데미로 오기 전에 행적이 끊겼다니? 미엘을 만난 건 아카데미를 졸업한 다음이었다. 이야기가 형편없이 엇나가고 있었다. 레인이 당황하자 유르딘은 영문을 모르겠단 반응을 했다.
“예전에 네가 머무르던 별채에 미엘 데이막이라는 이름의 하인이 있었잖나.”
“하인이 있었다고요?”
“하긴 하인일 뿐이니 이름까지는 모르나? 네가 어릴 때부터 계속 네 별채를 담당했던 하인인데……. 네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 사라졌지. 이름이 같지만 나이가 전혀 맞지 않은 데다가 그 의원의 신원이 확실한 것 같아서 넘겼는데.”
“무슨…….”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미엘 데이막이라는 이름의 하인이 있었다고? 레인은 별채에 있던 하인의 얼굴을 모두 기억했다. 입이 무거운 자들로 선별해 뽑았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급여는 비교적 많으면서도 일은 쉬웠기 때문에 그만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미엘 데이막의 얼굴은 기억에…….
“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몹시 익숙한 통증……. 레인이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을 무렵, 유르딘에 대한 걸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레인을 괴롭혔던 정체불명의 두통과 똑같은 감각이었다.
그자가, 미엘 데이막이 기억을 손댄 건 한 번이 아니었다.
별채에 있던 하인이라니.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오래 레인을 지켜봤단 말인가?
두통이 이어진다. 당장에라도 의식을 잃고 기절할 것만 같은 걸 레인은 이를 악물고 버텨 내려 노력했으나 힘들었다. 유르딘이 당황해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레인은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제 구명줄인 양 다가가 유르딘을 붙잡고 그대로 매달렸다. 유르딘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뺨을 비볐다. 고통은 줄어들지 않지만, 최소한 레인은 고통에도 버틸 수 있는 의지를 바로 세울 수 있었다.
거칠게 가슴이 오르내린다. 그토록 움직이려 해도 제대로 되지 않던 마력이 레인의 몸속을 요동쳤다. 몸속을 흐르다 못해 흘러넘친 마력은 가시화되어 바람처럼 휘몰아치며 레인을 감싸 안는다. 안에서 터져 나온 강대한 마력은 이내 기억을 가둬 둔 빗장을 깨부순다.
마침내 떠오른 것은 오래되어 이미 빛이 바랜 기억이었다.
4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