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격발(3권) (8/20)

두 번의 밤을 건너다 3

4 격발

레인은 뜻하지 않게 왕궁에서 갑작스레 하루 머무는 호사를 누리고 다음 날 아침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레인이 쓰러진 일로 옆에서 지스킬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 댔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말하지 말걸.’

은혜도 모르고 괴상한 망상에 사로잡혀 그걸 고스란히 떠들어 대다니. 어제의 설명은 마치 무고한 레인을 유르딘이 누명을 씌우고 외면했다는 이야기 같지 않았나. 유르딘이 레인에게 정이 떨어졌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레인은 온종일 고민에 사로잡혀 초조했다. 카이렌이 다가오거나, 그와 지스킬이 서로 기 싸움을 하는 소란에도 상관 않고 오로지 유르딘에 대한 고민에만 빠져 있었다. 화가 나서 두 번 다시 레인을 찾지 않게 된다면 어떡하지. 만약 그리된다면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가진 것 없는 차남인 레인이 렘샤이트 후작이 된 유르딘에게 선뜻 손을 내밀 방법은 없었다.

온종일 이어지는 불안감은 단순히 도움이 되는 후원자를 잃기 때문이라기에는 과했다. 레인만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는 얼굴. 타인을 향할 때는 서늘하지만, 레인을 향할 때는 낮고 부드러운 다정한 목소리. 가끔 레인을 붙드는 단단한 손과 체온, 모든 것을 더는 마주할 수 없다면.

결국, 레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레인은 유르딘을 좋아하고 있다. 그토록 남의 애정을 의심하고 경계한 주제에 금세도 사랑에 빠진다고 자신을 비난해 봤자 감정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유르딘은 지나치게 레인에게 이상적인 사내였다. 다정함, 레인이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의중을 알아차리는 예리함, 한결같이 보내 주는 애정, 그 모든 게 처음부터 레인을 위한 것처럼 안배되어 있었다.

심지어 레인 자신의 마음조차도 미리 준비되어 있던 듯이 자연스러웠다. 평소라면 훨씬 더 부담스레 느껴질 행동조차 오히려 기쁘게 따랐다. 아주 예전부터 유르딘을 사랑했던 것처럼.

레인은 통째로 도려내진 기억 외에도 자신이 잊어버린 다른 기억이 있는 건지 의심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곁에 둔 상자와 목걸이의 존재를 잊을 정도로 지금의 자신은 무언가 이상했다. 혹, 자신이 잊어버린 기억 속에 유르딘을 사랑하던 기억과 감정들이 있어서 희미한 기억이 남긴 감정의 잔재에 물들었을지도 모른다.

감정은 기억을 기반으로 한다. 기억이 없는데 감정이 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기억이 없어도 감정이 남을 만큼 깊은 마음이었던 걸까. 하지만 지나친 추측이다. 한 사람에 대한 기억과 감정만 잊는다니, 세상에 그렇게 편한 방법이 이미 사라진 마법 이외에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이렇게 허황된 추측을 해 볼 정도로 모든 게 갑작스러웠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유르딘이 보고 싶었다. 위험한 짓이라도 하면 유르딘이 오지 않을까? 자해 공갈에 가까운 계획을 짜 보던 레인이 실행하기 전에 다행히 유르딘이 찾아왔다. 레인이 아카데미에 돌아온 그다음 날 저녁 유르딘이 다소 어색한 얼굴로 기숙사 방까지 올라왔다. 잠깐 못 봤는데 몹시도 반가웠다. 굳어 있던 유르딘은 레인이 눈에 띄게 반가워하자 곧장 안심했다.

“그제는 내가 그렇게 나가 버려서 미안하다.”

“저야말로 죄송해요, 유르딘. 결코 제가 나쁜 의도로 한 말은 하나도 없어요.”

“알아. 괜찮아.”

유르딘은 레인이 한 말에 대해 화는커녕 지난 일은 신경 쓰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날 표정을 보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유르딘의 권유로 식사하러 나온 길에도 지난번 일의 잔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내내 유르딘은 평소의 태도를 유지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던 중, 유르딘이 이야기를 꺼냈다.

“레인, 어제 디프랑 후작을 만났다던데.”

“……네?”

“그제 그가 도서관에서 책을 꺼내 줬다고 하더구나.”

그 사람이 디프랑 후작이었구나.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 디프랑 후작의 기록을 봤으니 최소한 디프랑 후작가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어도 후작 본인일 줄은 몰랐다.

“마력 결핍증에 대해 알아보고 싶으면 저택에 한번 오라고 초대했다. 생각을 해 보고, 생각이 있으면 내게…….”

“갈게요.”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왕궁에서 떠나기 전, 아침 일찍부터 도서관에 들렀으나 일기장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 몰라 사서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런 책은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디프랑 후작이 가져간 게 분명했다. 레인이 간다고 말하니 정작 권유한 유르딘은 무언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르딘을 통해 승낙의 의사를 전하자 다음 날 바로 초대장이 왔다.

바로 그 주의 주말에 레인은 디프랑 후작저를 찾게 되었다. 디프랑 후작 렌피르와 후작 부인이 레인을 저택을 찾은 정식 손님으로 신경 써 준 덕에 나름 성대한 점심까지 대접받았다. 낯선 저택에 와서 긴장하던 레인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렌피르와 독대하게 됐다. 렌피르는 비밀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문단속하곤 레인을 안내했다. 렌피르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짐작하고 있을 것 같지만, 그 일기장은 제가 끼워 넣은 겁니다. 선조의 유언이 있었거든요.”

느긋한 어조로 설명이 이어졌다. 에일리야 베델은 오슐렘 디프랑이 죽고 나서 디프랑 후작이 된 자신의 오라비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오슐렘의 일기장과 자신의 연구 자료를 디프랑 후작가가 보관해 두었다가, 후일 마력 결핍증을 앓는 사람이 나오면 넘겨 달라는 것이었다. 일기장엔 가문의 수치라고도 할 수 있는 전 후작 부인의 자살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몸이 약한 여동생을 아끼던 후작은 에일리야의 간곡한 부탁이 반복되자 결국 수락했다. 후작의 의지는 그가 죽고 나서도 유언 때문에 이어졌다. 마력 결핍증을 앓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 에일리야가 죽고 나서도 몇 십 년간 유언을 이행할 일이 없었지만, 약속은 고스란히 남은 채 현재의 렌피르에게 이어졌고 그는 성실하게 선조의 유언을 수행했다.

“하필이면 베델 후작가의 마지막 핏줄인 당신이 마력 결핍증에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100여 년을 이어진 유언에 회의적이었으나, 베델 후작가를 이은 당신에게라면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델 후작께서는 훌륭한 분이셨죠.”

“베델 후작을 알고 계십니까?”

“어느 정도는요. 가문 간의 교류도 있었고요. 당시에 죄 없이 몰린다고 생각하면서도 돕지 못했습니다. 당신이라도 돕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겠지요.”

렌피르는 품에서 열쇠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곧장 집어 들지 못하고 레인은 입술을 사리물며 눈물을 삼켰다. 레인을 평생 괴롭게 만든 후작가의 죄를 짓지 않은 것이라고 부정해 준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렌피르는 그런 레인을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한참 후에야 레인은 감정을 추스르고 열쇠를 집어 들었다. 렌피르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부드럽게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에일리야 님께서 남긴 연구들이 이 저택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에일리야 님은 생전에 자신의 마력 결핍증이 어떠한 마법 때문에 발병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자연적인 질병이 아닌 겁니까?”

“저도 겉핥기식으로 살펴본 거라 잘은 모릅니다. 최소한 그분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방 안에 있는 자료를 빼 가는 건 안 됩니다. 다만 자료를 살피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편하게 와도 좋아요.”

“감사합니다.”

레인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디프랑 후작이 만족스레 웃었다.

렌피르가 직접 안내해 주는 걸 따라 레인은 에일리야 베델의 과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방을 찾았다. 옛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방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료가 쌓여 있었다. 에일리야가 모은 마법 서적은 분야가 어마어마하게 다양해, 이 세상 모든 종류의 마법 서적을 긁어모은 것 같았다. 옛 시대의 마법 술식이 적힌 책부터 신관이나 연금술사, 소드 마스터들에 대해 연구한 책, 마력을 늘리는 방법에 대해 적힌 수상쩍은 책, 심지어는 악마 소환서 같은 허무맹랑한 책까지 종류가 엄청나게 다양했다.

가끔 남은 에일리야의 수기로 그녀의 생각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에일리야는 자신이 마법을 사용해 마력 결핍증을 앓게 된 불완전한 마법사라는 생각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일종의 가설을 세우기도 했다. 몸이 약한 에일리야가 낫게 된 이유가 마법 때문이며, 약한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마법을 쓰다 보니 마력이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코웃음 치던 레인도 반복해서 에일리야의 가설을 읽다 보니 조금은 설득됐다. 생각해 보면 몸이 약한 것치고는 용케도 죽지 않고 살아 있지 않은가.

설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기적처럼 옛 시대의 마법을 써서 목숨을 이어 갔다거나……. 상상만 해도 굉장해서 조금 가슴이 뛰었다. 어차피 혼자 있는 데다가 마법을 써 볼 환경이라는 상황에 넘어가 레인은 마법을 시도해 보게 됐다. 마법 서적의 가장 첫 페이지에 적힌 가장 기본적인 마법, 작은 불꽃을 불러내는 마법을 시험하기 위해 레인은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와 정신을 집중했다.

“…….”

당연하지만 반응은 조금도 없었다. 불씨는커녕 욕실은 레인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를 제하면 무섭도록 조용했다. 휘몰아치는 마력의 흐름은커녕 산들바람조차 없다. 서너 번 더 에일리야가 수상한 상인에게서 구매한 지팡이를 힘껏 휘두르며 주문을 외워 봤지만, 공연히 힘만 빠졌다.

“…….”

몇 번 실패하고 나니 레인은 혹시라도 불씨가 튈까 봐 욕실에 틀어박혀서 지팡이를 휘두르는 얼간이 같은 꼴이 부끄러워졌다. 레인은 새빨개진 얼굴로 도망치듯 욕실을 나와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책을 밀어 두었다. 열 살 먹은 꼬맹이도 아니고 진작에 성인식도 치른 주제에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한창 책에 몰두해 있을 때 렌피르가 찾아왔다. 직접 차를 가져온 그는 잠시 머리 좀 식히라며 직접 따라 건네주었다.

“어디, 소득은 있으십니까?”

“애매하네요. 사실, 책을 보고 뭘 생각하든 제 추측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레인의 대답에 빙그레 웃은 렌피르는 옆에 쌓아 둔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당신이 마법을 써서 마력 결핍증에 걸린 거겠지요.”

“설마요. 저는 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마법에 대해 알지 못해도 마법을 쓸 수 있어요. 마법사들이 쓰는 마도구들 중에는 직접 강대한 마력을 주입해 사용하는 종류도 있습니다. 옛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착용자의 마력을 억지로 빼앗는 저주받은 마도구들도 숱하게 존재하고요. 그러니까…….”

렌피르가 잠시 레인의 눈치를 보며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 아프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런 물건을 접하신 것은 아닐는지요.”

“그게…….”

아팠던 사실이 은연중에 알려졌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져 부정하려던 레인이 멈칫했다. 아팠던 후에 갑자기 사라진 목걸이가 떠올랐다.

“걸리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의 유품이 사실은 저주받은 물건이라니,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이었다. 사실이라고 해도 남에게 알려서 좋을 것도 없고. 거짓말하는 레인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렌피르는 책을 펼쳐 들었다.

“마법사가 아니라도 마법을 쓰는 방법은 그 외에도 제법 있어요. 타인이 당신의 몸에 마법 발동 술식을 새겨 주면 조건이 충족될 때마다 당신의 마력을 써서 마법이 발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의 마법사들은 무리지요. 그도 아니라면 언령 마법이라거나……. 마법을 전혀 모르더라도 강력한 마법의 소유자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지요. 하지만 이건 인간이 쉽게 쓸 수 있는 마법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순수하게 한 가지만을 바라야 쓸 수 있는 마법이라서요.”

“그게 어려운 건가요?”

“어중간하게 소망하는 게 아니라 단 한 가지만을 제 목숨조차 바쳐도 좋다는 각오로 강렬하게 소망하는 게 어렵지요. 예를 들어, 제가 칼에 찔렸다고 칩시다. 물론 살고 싶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그것만 생각할까요? 아프고,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고,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남을 사람을 걱정하고……. 온갖 생각이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던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레스터나 카이렌에게 얻어맞으며 레인 또한 수없이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다거나 누군가 구해 줬으면 좋겠다거나 차라리 예전에 죽는 게 나았다거나, 그런 식으로 한 가지만을 강렬하게 소망해 본 적은 없었다.

“기적의 마법, 또는 구원의 마법이라고도 부른다지요. 보통 자신을 위해서 쓰기보다는 타인을 위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눈앞에서 연인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본 사람, 죽어 가는 제 아이를 본 부모들처럼요.”

“……어머니가 절 살렸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글쎄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기적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마력을 필요로 해요. 사실이라면 당신 어머니는 옛 시대에서 대마법사라 불릴 정도의 존재였겠죠. 하지만 그런 거라면 당신이 마력 결핍증에 걸릴 이유도 없지요.”

그도 그렇다. 레인은 한숨을 쉬었다. 타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라니, 레인에게는 그러한 각오가 존재하지 않았다. 제 목숨 이어 가기도 벅찬데.

결과적으로 대화의 소득은 없었으나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기는 했다. 한때 마법사가 되면 어떨지 상상했던 적도 있으니만큼, 일련의 이야기들이 전반적으로 몹시 흥미롭게 느껴졌다.

“마법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

“아무래도 집에 책이 이렇게 많으니까요. 흥미를 갖고 읽었죠. 당신도 흥미가 있다면 조사를 끝낸 후에 얼마든지 찾아와도 좋아요.”

신사적으로 웃는 렌피르의 호의가 고마워 레인도 마주 웃었다. 그렇게 주말 내내 디프랑 후작가에서 머무르며 방 안을 조사했어도 얻을 수 있었던 건 별로 없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간만에 난생처음 보는 분야의 책들을 잔뜩 읽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하루 더 머물고 아침에 가라는 권유를 물린 레인은 밤에 돌아가기로 했다. 마차를 타려는데 후작가에 손님이 찾아왔다. 그란델 니제스였다. 그란델은 디프랑 후작에게 갑작스러운 방문을 사죄하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곧장 레인 쪽으로 다가왔다.

“니제스 백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친애하는 렘샤이트 후작께서 여기로 달려오시려다가 국왕 전하의 명으로 발이 묶였거든. 그래서 대신 왔어. 바래다줄게.”

레인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란델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자주 본 사이가 아니라 어색해하는 레인과 달리, 그란델은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레인에게 친한 척을 하더니 옆자리에 앉아 노골적으로 얼굴을 관찰했다. 어색함을 참지 못한 레인이 물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니, 형이 목을 매는 상대잖아. 궁금한 게 당연하지.”

그란델의 말은 거침없었고, 레인을 그만큼 당황하게 만들었다. 레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말씀을.”

“설마 몰랐어?”

“그…….”

이미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그란델에게 강경하게 반박하지 못했다. 그란델은 얼굴이 빨개진 레인을 재밌어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모르지는 않는 것 같고. 하긴 형이 얼마나 지극정성인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티가 납니까?”

유르딘이 레인을 좋아한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걱정하는 레인에게 그란델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 정도 되니까 알지.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를걸? 네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래 봬도 형도 나름대로 조심하고는 있거든.”

가는 곳마다 나타난다니……. 그러고 보면 확실히, 아카데미나 아이제나흐 저택 외의 장소에서는 모조리 유르딘을 봤던 것 같기는 하다. 더더욱 새빨개지는 레인을 보며 그란델은 숫제 배를 잡고 웃었다. 간신히 진정한 그란델의 시선이 부드럽게 레인에게 가 닿았다.

“어릴 때부터 난 형이 갖고 있던 걸 많이도 빼앗았어. 몸이 약했으니까. 부모님의 관심도, 지원도, 모조리 내가 다 가져갔거든. 형은 그런 게 없어도 혼자 뭐든지 잘했으니까 부모님도 그런 형을 믿고 더욱 신경을 쓰지 않았어. 후계자라 많은 압박을 느꼈을 텐데. 결국은 후계자의 자리마저 내게 주고 떠났어. 그런 형에게 항상 미안했어. 네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형이랑 어떻게든 잘됐으면 싶기도 하고.”

“…….”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그냥 최소한 계속 이런 식으로 잘 지내 줬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말을 마친 그란델은 후련하게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붉어진 얼굴을 가린 채로 레인을 힐끔 그란델을 살폈다. 그란델의 모습 위로 희미하게 유르딘의 모습이 겹쳐진다. 사이좋은 형제였다.

문득 레스터가 떠올랐다. 레인에게 모든 걸 뺏어 가고도 부족해서 레인을 미워하고 죽일 뻔했던, 레인의 이복형. 형제간의 우애라는 것이 레인에게는 불가해한 영역에 있었다. 조금, 부럽기도 한 것 같았다. 레스터의 허무맹랑한 친한 척처럼 이제 와서 친해질 수는 없겠지만.

***

디프랑 후작가에서 돌아온 레인은 다시 아카데미 생활에 열중했다. 학업과 함께 디프랑 후작가에 찾아가 종종 마법 서적을 들여다보기까지 하는 일상은 바쁘기가 그지없었다. 레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급생들도 바빠졌다.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게 바로 레인처럼 귀족이지만 가문을 이을 예정이 없는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는 레인과 달리 지스킬은 전쟁터에서 충분한 공을 세운 데다가 이미 실전을 치른 검사이니만큼 검술 성적도 최상위라 공부는 안 하고 연애편지나 쓰고 있었다.

그즈음 해서 유르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져 한동안 만날 수 없었다. 소문으로는 왕가 쪽에서도 앞으로 다가올 왕국의 큰 행사인 건국 기념제 때까지 일을 마무리 지을 작정으로 서두른다고 했다. 건국 기념제는 원래 라인셀에서 가장 큰 행사이지만, 올해는 특히나 성대한 규모로 준비 중이었다. 일을 마무리 짓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축제로 왕국 내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전환하겠다는 수로 보였다. 덕분에 건국 기념제와 겹치지 않게 조정된 아카데미의 일정이 일단락됐을 때, 유르딘의 일도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주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던 날에 딱 맞춰서 레인은 건국 기념제 기간 동안 자신의 저택에 초대하고 싶다는 유르딘의 초대장을 받았다. 어차피 반겨 줄 사람 없는 처지인 레인은 올해도 아카데미의 기숙사에서 머물 예정이었다. 레스터는 레스터대로 저택으로 돌아가 정신이 없을 테고, 평소라면 레인을 갖고 놀 카이렌도 이 시기에만은 영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곧장 답장을 쓰려던 레인은 불청객을 맞았다. 요즘 통 보이지 않던 레스터였다. 그는 레인의 방을 제 방인 양 당연히 열고 들어와서 명령처럼 통보했다.

“이번 건국 기념제는 최소한 기념행사 당일까지는 저택에서 머무르라는 아버지의 명이야.”

“나는 왜? 평소처럼 알아서들 할 것이지.”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며 인상을 찌푸리는 레인에게 레스터가 천천히 다가왔다. 아주 잠깐 레스터의 시선이 레인의 책상 위에 닿았다. 짧은 찰나 편지 봉투 위 유르딘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레스터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레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레인의 어깨에 손을 얹은 레스터는 천천히 손에 힘을 줬다. 억센 힘에 레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의자에 강제로 주저앉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레스터를 올려다본 레인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아무리 미워도 거의 한평생 계속 봐 온 형제였다. 그런 만큼 레스터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마주한 얼굴은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설었다. 빛을 등지고서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은 마치 시체가 살아 움직이는 양 딱딱해, 차라리 가면이 생기 있을 정도로 생기가 없었다.

레스터를 낯선 사람 보듯이 관찰하는 레인처럼 레스터 또한 자신을 어색해하는 레인을 관찰했다. 여전히 가느다랗지만, 볼품없을 정도로 깡말랐던 예전과 달리 조금은 살이 오른 몸과 혈색이 도는 피부, 모든 걸 포기했던 때와는 딴판인 생기 있는 눈. 모든 걸 확인한 레스터의 눈이 광기로 형형하게 번들거렸다. 레인의 어깨를 부술 듯이 세게 잡은 레스터가 몸을 숙여 시선을 맞췄다.

“가족끼리 사이좋게 지내면 좋잖아, 레인.”

전혀 그럴 생각 없는 눈으로 거짓을 속삭이며 레스터는 과장된 연극처럼 천천히 레인의 뺨 위에 입을 맞췄다. 평소라면 레인과 닿는 것조차 싫어하던 레스터다. 자신이 아는 레스터가 맞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레인은 손등으로 뺨을 문질러 닦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그거 알아, 레인? 나 예전에는 널 좋아했어.”

“무슨 헛소리를…….”

“정말이야. 너는 날 여섯 살의 그날 이후 처음 봤겠지만, 나는 이전에도 먼발치에서 널 봤었거든.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 모두의 사랑스럽고 소중한 도련님. 집 안에서조차 눈치를 보며 사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네가 빛나 보였어.”

레스터의 어린 시절은 깊게 회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선대 공작은 레스터를 손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레스터와 마주치면 몹시 화를 내며 ‘이런 게 내 저택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 레스터는 저택에서 사용인들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더 나빴다. 일은 하지 않았지만, 입는 옷이나 먹는 음식은 오히려 사용인보다 질이 좋지 않았고 공작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당시의 딜란은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아나벨에게 크게 신경 써 줄 수 없었다. 딜란이 오지 않을 때 아나벨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고 레스터에게 화를 냈다.

반면에 아주 어린 시절의 레인은 두려울 게 하나도 없는 소년이었다. 어릴 때만 하여도 그 누구도 레스터가 공작 위를 받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니, 레인은 유일무이한 공작가의 후계자나 다름없었다. 주변에서 온통 떠받들어 주는데도 오만하지 않고 다정하고 상냥하면서도 쾌활한 도련님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작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겠지만, 매일같이 레인에게는 진귀한 선물이 들어왔다. 레인은 그 모든 걸 맘껏 누리며 사랑스럽게 성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레스터는 레인을 종종 훔쳐봤다. 하인이 부르는 걸 들어 레인이 아나벨이 싫어하는 그 레인 아이제나흐란 걸 알 수 있었지만, 어린 레스터는 모든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레인은 누구도 이견을 표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소년이었다. 아나벨이 말하는 끔찍한 레인과 눈앞의 레인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아나벨은 레인 때문에 모든 걸 빼앗겼다고 말했지만, 레인은 그 무엇도 타인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소년이었다.

레스터가 자신의 착각을 깨달은 순간은 선대 공작의 품 안에서 밝게 웃는 레인을 봤을 때였다. 레스터를 보면 혐오스러운 벌레를 본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씩씩거리던 공작이 레인을 안고 들어 올리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레스터는 몸을 돌려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아나벨의 말을 그제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레스터가 꿈도 꾸지 못하는 것들을 레인은 자연스레 누리고 있었다. 똑같은 아버지를 두었는데 차이가 이렇게나 크다. 그걸 모르고 멍청하게 좋아했다.

“나중에야 이해했지. 네가 내 모든 걸 앗아 갔다는 사실을.”

“내가 네 무엇을 앗아 갔다는 거야.”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 네가 6년간 갖고 있었던 것.”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오랜 증오가 깔려 있었다.

“원래 넌 내 존재에 대해서조차 몰랐지. 진창에 떨어지고 나서야 나에 대해 알았어. 그런 주제에 내게 도와 달라고 손을 내뻗다니,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레인이 이를 악물고 레스터를 노려보았다. 확실히 레인은 어렸을 적에 레스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낯설고 머나먼 존재로 느꼈을 뿐, 제대로 인식하게 된 건 레스터가 별채로 처음 찾아왔던 날이었다. 하인에게조차 완벽하게 무시당하며 변해 버린 처지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허덕이던 레인이 단박에 현실을 깨닫게 된 그날.

아직 일곱 살에 불과하던 레스터는 별채에 오자마자 다짜고짜 레인을 끌어내 걷어찼다. 레인은 어설프게 저항했다가 하인에게 붙잡힌 채 엉망이 될 때까지 얻어맞았다. 레인의 명령, 버티다 못해 이어지는 구걸에 가까운 애원에도 묵묵히 사지를 억압하고 일방적인 폭력에서 눈을 돌리는 자들을 보며 더는 제가 귀한 도련님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연한 분노가 레인의 위로 또렷이 드러났다. 새파랗게 날이 선 시선을 마주하며 레스터가 증오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네가 비굴하게 울며 애원하고 매달리는 꼴이 보고 싶었어.”

“하, 저질스러운…….”

“구질구질하게 굴면서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완전히 망가지지 않아. 좀 더 심하게 해 줬어야 네가 망가졌을까?”

낮게 중얼거리며 레스터는 핏대 선 레인의 주먹과 조금 위의 손목에 시선을 주었다. 소매 아래 드러난 손목은 조금만 힘을 주어 잡으면 분지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희고 얇았다. 레스터가 비웃었다.

“가소롭긴.”

레스터는 레인의 허벅다리를 무릎으로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고정하고는 레인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레인의 얼굴이 희게 질리며 눈에는 두려움이 스몄다. 완전히 망가뜨리진 못했지만, 레인이 완전히 멀쩡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폭력은 오랜 시간에 걸쳐 확실하게 레인에게 각인되었다.

“원래 내 장난감에 불과했으면서 말이야. 건방지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레스터는 많은 감정을 담은 손길을 뻗어 천천히 레인의 마른 몸을 손으로 쓸었다. 레스터는 레인에게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네가 모조리 망쳤어. 날 망쳐 놨어. 날 망쳤으면 똑같이 돌려받아야지.”

“헛소리하지 마!”

레인이 주먹을 휘둘렀다. 레스터는 얻어맞은 부분을 손으로 문지르며 레인을 어떻게 벌줄지 생각하는 모양새로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기억을 잃은 레인의 입장에서는 레스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명백한 약자는 레인인데, 왜 레스터가 상처받은 것처럼 말하는 건지. 감히 레스터가 레인을 탓할 자격이 되는가? 지금껏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아 놓고 혼자 꽁해져서는 누구를 뻔뻔하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뭘 망쳤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 망쳤다고 쳐. 네가 그걸 내게 말할 자격이 있어? 네가, 네 부모가 내 인생을 망쳤잖아! 너는 지금까지 10년도 넘게 날 패고 짓밟아 놓고는, 지금 누구더러 망쳤다는 거야!”

“넌 살아 있잖아.”

의미를 모를 말에 레인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다시 찌푸렸다. 지금의 레인으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아마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레스터는 레인의 그 태평함이 부러웠다. 유르딘 니제스가 증오스러운 만큼 레인 또한 죽여 버리고 싶었다. 레스터는 유르딘을 광인으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레스터도 충분히 광인이었다.

레스터의 눈에 흉흉한 기운이 서렸다. 레스터가 손을 드는 걸 본 레인은 피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손을 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레스터가 레인의 머리채를 콱 붙잡았다.

“큭!”

“얼마나 좋기에 그 새끼가 그 지랄을 떠는 거야?”

레스터는 발버둥 치는 레인을 의자에 꽉 내리누르고 손에 힘을 더했다. 고통 때문에 레인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무슨 개 같은 소리를…….”

“네 뒷구멍이 얼마나 좋으면 발정이 나서 그 지랄을 떠는 거냐고, 씹새끼가.”

“대체……. 싸웠으면 나한테 그러지 말고 그 새끼한테 가서 말해. 왜 나한테 그래?”

유르딘 니제스에게 가서 말하라고? 의문을 품었던 레스터는 한발 늦게 레인이 카이렌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헛웃음이 나왔다. 하긴 레인에게 미쳐 있는 건 유르딘뿐만이 아니기는 했다. 둘씩이나 환장을 해서. 레스터는 카이렌과 레인이 몸을 섞는 걸 지금까지 몇 번인가 봤었다. 레스터는 두 사람의 관계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에 정사 중에도 용건이 있으면 태연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순간 흘끗 본 수치심에 물든 새빨간 얼굴은 천박하고 직설적인 단어를 사용하자면 꼴릴 만한 얼굴이기야 했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워만 하던 레인의 얼굴도 시간이 지나자 쾌락이 섞였다. 그만큼 잘 길들인 몸이다. 왕명을 받아 북방으로 갔으면 할 일이나 잘할 것이지 대체 유르딘 니제스를 어떻게 꾀어 놨기에 반듯하던 인간이 처돌아서 미친개처럼 광증을 보인단 말인가.

“네 몸이 제법 괜찮기는 괜찮은가 봐.”

단순히 밤을 보내는 사이는 아니었을 터다. 그 이상의 뭔가가 있으니 유르딘이 저렇게 미쳐 날뛴 거라고 레스터는 추측했다. 설마하니 저렇게 집착하면서도 제대로 입맞춤 한 번 하지 못한 관계라고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다소 추론 과정에 오류가 있으나, 결과를 예측해 내는 데는 결과적으로 무리가 없었다.

최근 유르딘의 행보는 되는대로 죽이던 이전과는 달랐다. 그는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대신에 합법적으로 단죄했다. 사심을 섞어 보복할 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도를 넘지 않는다. 괴물은 미쳐 날뛰는 대신 사냥감을 물색해 하나하나 계획적으로 죽였고, 과거와 달리 유르딘은 비난받지 않는 데다가 오히려 빠른 일 처리라며 명성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아이제나흐를 치기는 쉽지 않았다. 규격 외의 괴물 유르딘은 두려우나, 정치판 위의 유르딘이라면 대적할 만했다. 문제는 그자가 언제 미쳐서 날뛸지 모른다는 점이다. 죽을 걸 알고 목숨을 내놓았던 놈이니 최후에는 동귀어진을 각오할 수도 있었다.

손쉬운 방법을 두고 굳이 돌아가는 건 레인을 배려하기 때문이다. 유르딘이 레스터를 죽이지 않는 이유 또한, 레스터의 공포를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레인이 죽으면 레스터 자신이 보복당할 거라는 공포. 그 공포에 떨며 레인은 손도 대지 못한 채 몇 번이나 거액을 들여 암살자를 보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그중 세 번은 암살자의 머리가 자는 사이 레스터의 침대 위에 던져져 있던 일도 있었다. 어제가 세 번째였다. 악몽에 진저리 치며 눈을 뜨니 사지가 분해된 몸뚱어리가 레스터의 발치에 널려 있었다. 침실에 흔적도 없이 들어오는 유르딘이니, 레인에게 직접 손을 댄다면 죽는 쪽은 레스터였다. 아이러니한 이해관계로 레스터는 죽지 않기 위해 레인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고, 그걸 위해 유르딘은 레스터를 살려 두고 있었다. 한 번에 죽이지 않고 사냥해서 차례로 죽이려면, 그사이에 레인의 안전을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유르딘의 뻔히 보이는 그런 사고방식이 레스터를 돌게 만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안심하고 있는 유르딘을 엿 먹이기 위해 지금 눈앞에 있는 레인을 강간하고 시신을 똑같은 방식으로 선물하고 싶었다. 레스터의 명줄을 잡고 있다는 듯 오만한 유르딘의 앞에 레인의 참혹한 죽음을 전시하고 여유로운 낯짝을 벗겨 내고 싶었다. 그건 매우 쉬운 방법이라 매 순간 레스터를 유혹했다. 레스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더는 갈 길 없는 막다른 곳에 몰려서 해도 되는 방법이다. 아직은 쥐고 있는 수가 있었다.

레스터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어색하게나마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경계하고 있는 레인의 구겨진 옷을 손으로 폈다.

“하긴, 내 동생이 좀 예쁘기야 하지.”

“…….”

레인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레스터를 보았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레스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퍽 미친놈처럼 보일 것 같기야 했다. 레스터는 레인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고 웃었다.

“미안, 조금 흥분했네.”

“두 번 흥분하면 죽이겠네.”

“설마, 내가 사랑하는 동생에게 그럴까.”

“닥쳐.”

웃는 낯으로 레스터는 레인을 살폈다. 긴장했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아득바득 자존심을 세우려 드는 꼴이 짜증 나면서도 조금 귀엽긴 했다. 레스터는 언제 날을 세웠냐는 듯이 깔끔한 태도로 물러났다.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준비하고 내려와.”

레인의 의사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통보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유르딘에게 거절과 사죄의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건넨 레인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느릿하게 계단을 내려와 건물을 빠져나왔다.

레인은 한숨을 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마차에 올랐다. 맞은편에 앉은 레스터는 아까 전의 일을 잊은 듯 친한 척 말을 걸었다.

“요즘 어떻게 지냈어?”

“그러는 너야말로.”

최근 들어 레스터는 아카데미의 수업에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공작가의 후계자 자리가 확정되어 있으니 성적이 중요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성실히 수업을 따라가던 레스터답지 않았다. 레스터는 답하는 대신 지팡이를 들어 레인의 발치를 툭 쳤다.

“내가 묻고 있어.”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알아서 뭐 하게? 왜, 어서 빨리 안 죽나 싶어서?”

“대답해 주는 게 훨씬 간단할걸. 나랑 말싸움하면 안 피곤해?”

“그러면 말을 걸지 말든가.”

쏘아붙이는 말에 레스터가 한숨을 쉬었다. 천하의 둘도 없이 한심한 놈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레스터가 타일렀다.

“나는 네 오만불손한 태도를 넘길 수 있지만, 아버지와 손님 앞에서도 그럴 거야?”

“손님?”

“그래. 몇 년 만에 저택을 찾아온 중요한 손님이야. 정중히 대해.”

그럴 생각 없다고 쏘아붙이려던 레인은 일단 꾹 눌러 참았다. 원래 손님을 자주 받지 않는 아이제나흐 공작가가 받아들인 손님이니 중요한 인물이다. 며칠만 참으면 될 걸 괜히 딜란의 성미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점차 기분이 가라앉았다. 멀미하는 걸지도 모른다. 레인이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자, 레스터도 더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저택 따위 가고 싶지 않았다. 유르딘이 보고 싶었다. 답장 따위 쓰지 말고 초대장을 받자마자 곧장 뛰쳐나갈 것을. 후회가 밀려왔다. 다정한 얼굴과 목소리가 그리웠다. 레스터는 말이 없는 레인을 관찰하듯이 지켜보다가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저택으로 들어가니 카이렌이 레인과 레스터를 맞았다. 레인의 얼굴이 구겨지든 말든, 카이렌은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인 양 레인을 힘껏 포옹했다가 놓았다. 안 그래도 저조했던 기분이 바닥 아래까지 내려간다. 손님이 온다고 했었는데. 카이렌을 손님이라고 하기에는 평소에도 너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때, 레인의 머리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구나, 레스터.”

“예.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남자는 중앙 계단 위에 서 있다가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의아한 얼굴로 레스터를 따라 짧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레인의 귓가에 카이렌이 작게 속삭였다.

“우리 아버지야.”

아버지라고? 레인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남자를 다시 보았다. 카이렌을 한 번 보고, 다시 남자를 한 번 본다. 무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카이렌이 찢어 죽이고 싶은 놈이란 것과 별개로, 겉모습이 잘났단 건 레인도 인정하는 바였다. 카이렌은 입만 다물면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 덕에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는 고전적 미남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헤레일은 카이렌과는 딴판이었다. 헤레일은 험상궂은 인상에 얼굴에 상처까지 있어 악독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깨가 넓고 단단해 보이는 몸을 하고 있었지만, 어지간한 영애들보다 작을 법한 키나 짧은 데다 휘어진 다리 때문에 육체적인 매력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닮은 건 고작 머리카락 색과 눈 색 정도였다.

레인과 헤레일의 눈이 마주쳤다.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나 싶어 사죄하려는데 헤레일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네가 레인이냐?”

“네. 처음 뵙겠…….”

“어릴 때도 봤었는데. 조금 멍청하군.”

말을 자른 헤레일이 혀를 찼다. 아무리 헤레일이 백작이라지만, 말을 자르는 일도, 혀를 차는 일도 같은 귀족에게 하기에는 심각하게 무례한 태도였다. 레인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마주하자 헤레일의 눈빛이 노골적인 조롱의 기색을 띠었다.

“주제도 모르고 고개를 빳빳이 들기는. 천한 년의 배 속에서 나온 새끼는 이래서…….”

헤레일은 더러운 걸 보듯이 치를 떨며 몸을 돌렸다. 한 박자 늦게 욕을 내뱉으려 하는 레인의 입을 카이렌이 틀어막았다. 어지간히 힘든 상황에 닥쳐서도 레인은 어머니를 욕하는 일만은 참지 않았다. 카이렌을 팔꿈치로 찍고 발을 밟아도 꼼짝하지 않는다. 뒤에서 들리는 소란에 헤레일이 잠깐 이쪽을 봤다가 노골적으로 비웃고는 계단 위로 올라갔다. 카이렌은 그런 헤레일을 눈짓으로 살피더니 레인을 질질 끌어 가까운 방으로 밀어 넣었다. 안에 들어가서야 카이렌은 레인의 입을 틀어막은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레인을 붙든 한 손은 여전히 그를 얽매고 있었다. 카이렌은 한숨을 쉬며 레인을 타일렀다.

“나나 레스터야 너그러우니 그렇다 쳐도, 네가 백작님께 대들 처지가 돼?”

부드러운 어조로 개소리가 일품이었다. 레인은 어이가 없어 바둥거리던 것도 멈추고 카이렌을 노려보았다.

“뭐? 너희가 너그러워? 헛소리 좀 작작해.”

“이 정도면 너그럽지.”

“그럼 이 손이나 놔.”

“안 돼.”

단호하게 거부하는 카이렌은 최근 들어 가장 즐거워 보였다.

“화내지 말고, 레인.”

카이렌이 레인의 허리를 잡아 끌어안았다. 몸이 꽉 맞닿는 감각에 레인이 질겁하며 카이렌을 밀어냈다. 카이렌은 밀려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세게 레인을 끌어안으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는 감각이 오싹했다. 차라리 두렵기만 하면 좋으련만, 간만의 접촉인지라 쾌감에 불이 지펴졌다. 자기혐오가 스멀스멀 밀려 올라온다.

“할까?”

레인은 눈을 질끈 감고 외면했다. 이성을 배반하고 금세 달아오르는 몸이 제 것이 아니었으면 했다. 카이렌의 입술이 이마와 뺨, 입술에 와 닿았다. 흥분하는 몸이 끔찍했다. 지난 몇 달간 레인은 카이렌과의 접촉이 없었다. 자유로웠다.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카이렌에게 몰아붙여진 채 레인은 분명히 흥분했다. 몇 달의 자유는 사실 자유가 아니었다는 것처럼, 마치 아무런 접촉도 없던 시기에 카이렌의 손길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그렇게 발정했다. 발정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말이 없었다. 수치도 모르고 길들여져서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에게 흥분하는 천박한 꼴을 고상한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천박한 몸이라서, 싫다고 하면서, 사실은 즐기고 있으니까.

카이렌이 레인의 안에 새겨 넣을 것처럼 자주 속삭이던 말이 귓가에 또다시 떠올랐다. 레인은 카이렌을 부정하면서도 그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몸뚱이. 더럽고 역겹고 천박하다. 레인은 익숙하게 자기혐오를 집어삼켰다. 미련하게 따라붙는 쾌감과 학습된 두려움을 떨쳐 내려 애를 쓰며 레인은 눈을 떴다.

“치워. 사방에 떠들어 댈 생각이야?”

카이렌이 급한 대로 레인을 끌고 들어온 곳은 필요한 자재를 넣어 두는 작은 쪽방이었다. 소리도 샐 테고, 남의 눈도 신경 쓰일 터다. 게다가 이곳에는 헤레일 모드, 카이렌의 아버지도 있었다. 설마 제 아버지와 한 지붕 아래에 있는 상황에서도 발정이 날까. 약혼을 앞둔 시기에 남의 저택에서 관계를 벌인 게 발각되면 경을 칠 텐데. 이전에 카이렌이 말한 대로 자제할 때였다. 레인은 초조하게 카이렌의 말을 기다렸다. 절대적 약자인 레인은 카이렌의 자비에 기댈 수밖에 없다. 거부해 봤자 폭력이 과정에 추가될 뿐, 결과는 같았다. 다행히도 카이렌은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네. 약혼이 코앞인데 너랑 내가 씹질 하는 사이인 게 발각되면 곤란하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이렌은 미련스레 레인의 몸을 더듬었다.

“약혼하면 약혼녀 사이에 끼고 뒹굴까? 너 여자랑 해 본 적 없잖아. 이번 기회에…….”

“더러운 입 좀 닥쳐!”

결국, 레인은 참지 못하고 카이렌을 쳤다. 맞은 뺨이 새빨갛게 물들었지만, 카이렌은 오히려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는 웃는 낯으로 레인에게 입을 맞췄다. 질척이는 입맞춤이 끝나고 나서야 카이렌은 마침내 레인을 놓아주었다.

“농담이야, 농담. 아무리 내 영지를 공유할 사이라지만 너까지 공유할 수는 없지. 넌 내 거니까.”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레인은 도망치듯이 방을 빠져나왔다. 결혼하고 나서도, 아주 먼 미래까지 이런 관계를 이어 갈 생각인가? 대체 무슨 낯으로.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카이렌과 결혼할 사람이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에게는 레인이 지금의 공작 부인인 아나벨 같은 존재로 느껴질 터였다. 가장 증오하는 상대 중 한 사람과 똑같은 꼴로 전락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한 것도 없는데 삽시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방에 올라가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 위로 풀썩 엎어졌으나 오래 쉴 수도 없었다. 레인은 저녁 만찬에 초대받았고, 시녀가 옷을 들고 들어올 때 거부할 수 없는 자리란 걸 깨달았다. 레인의 몸에 딱 맞춰 재단된 정장을 입고 내려가는 길에는 내내 도망치고 싶었다.

만찬에는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일원 전부와 헤레일과 카이렌이 앉아 있었다. 딜란은 유쾌하게 대화를 주도했다. 그가 주로 말을 거는 건 주로 레스터와 헤레일이었다. 레인은 저를 한 번도 만찬에 초대한 적 없다가 갑자기 부른 딜란의 속내를 알아내기 위해 대화에 귀를 기울였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아나벨은 가끔 무서운 눈으로 레인을 노려보고, 그 옆에 앉은 유니는 어색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하고 레인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방긋방긋 웃었다.

카이렌은 레인이 있는 쪽으로는 눈길 한 번 던지지 않고 대화 중간중간 거들며 흥을 돋웠다. 카이렌은 그답지 않게 아버지에게 제법 살가웠고, 헤레일도 무뚝뚝하긴 해도 그런 카이렌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막연히 버릇이 없거나 아버지에게도 오만불손하지 않을까 예상했던 레인이 약간의 충격을 받을 정도로 태도가 부드러웠다. 생각해 보면 평소에 듣기 싫은데도 미주알고주알 제 이야기를 해 대는 통에 알고 싶지도 않은 카이렌의 친구나 취향에 대해 꿰뚫고 있었지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가족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막연히 사이가 나쁠 거라고 추측했던 것과 달리 사이가 제법 좋아 보였다.

고개를 들었다가 헤레일과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보고 있었던 건가? 딜란과 대화할 때는 나름 웃기도 하던 얼굴이 레인을 볼 때는 영 딴판으로 일그러진다. 눈썹을 치켜 올린 채 포도주를 한 번에 들이켠 헤레일은 취기가 얼큰하게 오른 얼굴로 옆자리의 아나벨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아나벨 님, 못 보던 얼굴이 보이는군요. 이제 별채에서 나와도 무리가 없나 봅니다.”

“저는 아직 부족하다고 보지만……. 글쎄요, 어쨌든 모자라도 한 사람 구실을 하려면 남들 하는 양 흉내는 내야 하지 않겠어요?”

돌리지도 않고 똑바로 레인을 겨냥하는 말에, 식기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딜란은 두 사람을 힐끗 쳐다봤을 뿐 별다른 제지를 하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쌓인 게 많았던 아나벨은 기회를 잡자 열변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부족한 점이 많은 아이니까요. 짐승처럼 천박해서는, 교정하는 데 힘들었지요.”

숫제 짐승 취급이었다. 레인의 새파랗게 타오르는 시선이 아나벨에게 똑바로 꽂혔다. 그걸 보며 헤레일이 즐겁게 웃었다.

“교정입니까.”

“네, 교정이죠. 아직도 완벽하게 버릇을 들이지는 못해서, 오늘처럼 중요한 자리에서도 저렇게 버릇없는 태도를 보이고는 한답니다. 아직 어린 유니조차도 자리를 가리는데 눈에 뵈는 것 없이 날뛰는 꼴을 보세요.”

자리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식사 시중을 들던 이들도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침묵 속에서 레인이 식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얌전히 있던 딜란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섰다.

“레인, 앉아라.”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레인은 의자를 꾹 쥐며 자리에 앉는 대신 딜란을 바라보았다. 무얼 원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알 수 없었다. 모욕하기 위해서인가? 레인은 주먹을 꾹 쥔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 합니다. 제가, 속이 좋지 않아서.”

부담스러운 분위기 속에 식사하느라 얹힌 것 같으니 영 거짓은 아니었다. 새하얀 안색이 레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딜란은 못마땅한 얼굴로 레인을 보다가 물러가는 걸 허락했다.

레인은 휘청휘청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넘어질까 봐 겁이 났는지 하인이 레인의 옆에서 초조하게 붙어 있다가 반쯤 올랐을 때는 아예 부축했다. 계단을 거의 다 올랐을 때쯤 레인은 견디지 못하고 깔려 있는 카펫 위에 아까 먹은 걸 모두 토했다. 레인을 멀리서 지켜보던 하녀 하나가 저걸 다 어떻게 걷어서 청소하느냐고 짜증을 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최악이다.

간신히 방 앞에 도착해 의원을 부른다는 하인의 말을 거절하고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심리적인 문제는 의원이 온다고 나아질 종류의 상태가 아니었다.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그자마자 레인은 욕실로 들어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었다. 입가에 묻은 토사물과 함께 질척한 감정 또한 함께 쓸려 보내고 싶었으나 생각처럼 잘은 안 되었다. 레인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레인을 사람 이하의 짐승처럼 대하는 태도는 어제오늘 시작된 게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 난리를 치고 질색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레인은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눈을 꽉 감았다. 눈을 감은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다정한 온기에 취해 버린 나머지 더는 이전과 같은 차디찬 멸시를 견딜 수 없게 됐다.

항상 그런 온기를 받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무언가에 욕심을 내기에는 레인이 너무도 욕심 부릴 수 없는 삶을 살았다. 혼자 헤쳐 갈 뿐인 비참하고도 외로운 삶. 계속해서 함께 있어 줄 수 없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런 온기도 주어지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부정적인 가정은 간절한 소망의 이루어지지 않는 양면이었다.

사실은 당신이 함께 있어 줬으면 좋겠어. 언제나 항상, 내 곁에.

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바랄 수 없는 소망이며 터무니없이 사치스러운 가정이다. 항상 함께 있을 방법은 없다. 그 카이렌조차 결혼을 하는데, 분명 언젠가는 유르딘도 제 마음 접고 그 마음을 다른 이에게 가져다줄 날이 올 것이다. 레인은 자신이 유르딘의 옆자리에 서는 상상을 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뚜렷하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이 없었다. 가정조차 힘든 소망이다.

참지 못하고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에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잡음에 레인의 감정은 터져 나가려던 걸 멈췄다. 무시하려 했으나 소리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레인은 신경질적으로 일어났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카이렌이나 레스터가 수작을 부리러 온 것인지. 레인은 얻어맞는 한이 있어도 상대의 얼굴에 쌍욕을 뱉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문을 열려던 순간, 뒤에서 다시 한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 앞이 아닌, 뒤. 다른 이가 있을 리 없는 뒤. 레인은 뻣뻣하게 굳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어…….”

입에서 멍청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인 남자는 마치 방문을 열고 들어오듯 태연하게 창문을 열고 들어왔다.

“레인.”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유르딘이 태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레인은 화들짝 놀라 어찌할 줄 모르다가 일단 유르딘이 열고 들어온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러고서도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랐다. 잠시 그런 레인을 묵묵히 지켜보던 유르딘은 레인이 진정하기는커녕 점점 더 흥분하자 결국 붙잡아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레인은 심호흡하고 침착하려 애쓰며 물었다.

“여,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담을 넘었지.”

상식적인 대답을 기대했으나 애초에 유르딘이 갑자기 아이제나흐 저택 한복판에서 솟은 이상 그런 게 나올 리가 없었다. 담을 넘다니. 다른 곳도 아니고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저택, 그것도 본채를? 라인셀에서 왕궁 다음으로 잠입하기 힘든 곳일 텐데 그런 장소를 무슨 시골 마을 담 넘듯이 말한다. 말이야 쉽지, 들키면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일이 아니다. 레인은 유르딘의 입에서 부정의 말이 나올 희박한 확률에 걸며 다시 한번 물었다.

“농담이시죠?”

“정말이다.”

“……무단 침입이잖아요.”

“그렇기야 하지.”

“…….”

상식을 가볍게 무시한 태연자약한 대답에 레인이 말문을 잃었다. 유르딘이 너무 당당한 태도로 당연한 듯이 말해서 더 이상 반박할 말도 없었다. 이쯤 되면 뻔한 걸 묻고 있는 자신이 바보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구나. 무단 침입을 했구나……. 소드 마스터쯤 되면 공작가 담 넘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다. 와, 대단하다. 나도 소드 마스터나 할걸. 레인은 반쯤 현실 도피를 했다.

“대, 대단하시네요.”

“고맙다.”

칭찬이 아닌데, 유르딘이 너무 태연하게 말하니 레인의 감각도 마비될 것만 같았다. 레인은 간신히 현실 감각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대체 어쩌시려고 침입을……. 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그야 물론 네가 걱정되니까…….”

무언가 대단한 이유가 있을 줄 알았더니 별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단순하고 보잘것없는 이유가 레인의 가슴에 아릿하게 박혀 왔다. 레인은 잠시 숨을 멈췄다. 정말로 그런 이유만으로 아이제나흐 공작 저택의 담을 넘어 이곳까지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유르딘을 보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했음에도 정말로 그가 레인의 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고작 걱정된다는 이유 하나로, 발각당한다면 유르딘의 지위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을 정도로 크게 경을 칠 일인데 그걸 각오하고서 이런 극단적이기까지 한 방식으로 와 줄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레인이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자 유르딘이 어찌할 줄 모르는 게 눈에 고스란히 보였다. 유르딘은 몸을 숙여 레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부드럽게 푸른 녹색 눈이 레인을 똑바로 마주했다.

“안색이 나빠. 뭔가 나쁜 일이 있었나?”

“아뇨, 딱히 그런 건…….”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아까 먹은 걸 모두 다 게워 낸 탓에 안색이 좋을 리가 없기는 했다. 레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야 뭐, 딱히 저택에 들어오는 게 좋을 건 없으니까요.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괜찮아요.”

“기분이 좋지 않은 게 괜찮지 않은 거지.”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유르딘은 이 세상 가장 중대한 문제를 마주한 사람처럼 심각한 얼굴이었다. 조금 망설이던 유르딘이 레인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운 걸 느낀 유르딘은 조심스레 제 뜨거운 체온으로 레인의 손을 쥐어 따스하게 녹여 갔다. 다정한 온기가 손끝부터 전신으로 번져 가는 것을 느끼며 레인은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모든 걸 받아 줄 것처럼 구는 유르딘이 너무나도 좋았고, 동시에 두려웠다. 어느 순간에 유르딘이 등을 돌려 버리면 어떡하지. 근거도 맥락도 없는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와 레인을 잠식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울면서 온기를 구걸하고 싶었으나, 그런 짓을 했다가 유르딘이 레인에게 정이 떨어져 등을 돌릴까 봐 두려웠다.

타인과의 관계는 누군가가 떠밀 수 있는 외줄 타기처럼 느껴져 모든 게 두렵다. 레인은 소망하는 일보다 포기하는 일에 익숙하다. 희망은 책 속에나 존재하는 삶을 살며 부정을 자신의 동반자로 삼았다. 단 한 번도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준 적이 없었고 도리어 거절당하기만 한 레인이기에 유르딘의 절대적인 애정을 받으면서도 의심할 줄밖에 몰랐다. 희망과 두려움의 추를 저울 위에 올리고 그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할 뿐.

레인이 내비치는 의사 표현은 제가 제어할 수 없는 창백한 낯빛 정도였다. 눈물이 떨어지지는 않지만 울 것만 같은 얼굴에서 감정을 유추한다. 그리고 그걸 두고 볼 유르딘이 아니었다.

“같이 있을까?”

“네?”

레인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유르딘을 향해 샘솟는 애정과 뿌리 깊은 자기혐오 사이에서 번민하며 레인은 유르딘에게 잡힌 손을 꼼지락댔다.

“하지만 바쁘신 거 아닌가요?”

“바쁜 일은 끝내고 왔으니 괜찮아.”

“하지만 굳이… 여기에서 이렇게 계실 필요는…….”

“안 된다면 돌아가겠지만…….”

여기 남아 있으면, 침입한 게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위험하다. 당연히 돌아가라고 해야 하는데, 그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함께 있어 준다는 가정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얌전히 있을게.”

간절히 속삭이는 말에 결국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홀리듯이 승낙은 했으나 걱정은 계속 스멀스멀 올라왔다. 문의 잠금쇠를 몇 번이나 확인하는 레인과 달리 유르딘은 태연했다.

“걱정하지 마라. 기사와 사병 300명이 넘게 대기하고 있는 저택도 조용히 침투할 자신이 있으니까. 이 정도 경비 규모는 아무것도 아니지. 누군가가 다가오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어.”

레인은 입을 딱 벌렸다. 사람이 그게 가능한가? 저게 가능하면 단독으로 왕국을 무너뜨릴 수도 있겠다. 전쟁터에서 남의 저택에 침입할 일은 없을 텐데, 유르딘은 저택에 수십, 수백 번은 침입해 본 사람처럼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허황되어 보이기까지 한 자신감이라 레인은 그다지 유르딘의 말을 신용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문과 창문의 잠금을 마저 부지런히 점검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소파에 축 늘어진 레인의 배 속이 허기를 호소했다. 속이 안 좋던 건 순식간에 말끔하게 나아 버렸다. 레인은 유르딘을 잠시 서재에 밀어 두고 하인을 불렀다. 느릿하게 방으로 찾아온 하인에게 간단히 요기할 걸 응접실 테이블 위에 차려 두도록 명한 레인은 편한 옷을 갈아입는다는 핑계로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왔다.

유르딘과 떨어지고 나서야 레인은 지금껏 빠르게 뛰던 심장을 자각했다. 머무는 방이 별채가 아니라 본채라 다행이라고, 레인은 본채로 방을 옮긴 이래 처음으로 방을 옮긴 게 잘됐다고 생각했다. 본채에 새로 받은 레인의 공간은 응접실과 침실, 업무를 볼 수 있는 작은 서재로 여러 개의 방이 나뉜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에 비해 별채는 침대와 책상 하나만 놓는 것도 빠듯한 좁은 방이라 한 순간도 유르딘과 떨어지지 않고 계속 밀접하게 된다. 생각만 해도 낯부끄러웠다.

유르딘과 한 공간에 있었던 일은 많으나, 자신의 방처럼 내밀한 공간에 둘만 있는 건 처음이다. 새삼 단둘이 남을 걸 생각하니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유르딘은 아무렇지 않은가.’

유르딘이 레인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거의 확신이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에 무단 침입 해 만나러 오는 건 단순히 친구의 아들에게 하는 행위라기에는 도를 넘었다. 지금뿐만 아니라 레인은 유르딘이 그 때문에 평정이 깨어져 흔들리는 걸 몇 번이나 봤다. 태연한 얼굴은 유르딘이 늘 두르고 있는 가면 같은 것이니 겉으로는 태연해도 속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안다.

레인은 느릿한 손길로 단추를 풀어내며 유르딘이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생각해 보면 유르딘은 처음 재회한 순간부터 맹목적인 애정을 한결같이 보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다는 건데 도저히 좋아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마 얼굴인가? 레인은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살폈다. 제 얼굴이 괜찮은 걸 넘어서 한 번쯤 잠자리를 갖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반반한 얼굴이란 건 안다. 하지만 레인은 제 얼굴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얼굴만 아니었어도 레인을 향한 성적인 의미를 품은 조롱이 반으로 줄고, 고생 또한 반으로 줄었을 테니. 하지만 그런 종류의 욕정이라면 이렇게 오랜 기간 공을 들이기보다는 적당히 침대로 끌어들이면 될 일이다.

조금 더 드러내야 레인 자신 또한 태도를 확실히 할 것 아닌가. 유르딘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알아보자 결심하고 방을 나가니 하인이 다녀갔는지 응접실 테이블 위에 간단한 음식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를 살피던 레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술?”

아무리 도수가 약한 술이라고 해도 레인은 평소에 전혀 술을 즐기지 않는 데다가 아까 토하기까지 했다. 조금만 신경 썼다면 술을 가져오지 않았겠지만, 적당히 바구니를 던져둔 꼴을 보아하니 귀찮아서 대충 가져온 게 눈에 보였다. 얼마 전, 유르딘의 영지로 떠나기 전에는 극진히 대접하더니만 그의 그늘이 사라지자마자 이런 꼴이다.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헤레일에게 거하게 무시당하고 식사 시간에도 아나벨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니 다시 슬슬 얕잡아 보는 것이다. 조금 늦게 서재에서 나온 유르딘 또한 술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술은 마시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레인은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는 대신 아무렇지 않은 척 숨기는 편을 택했다.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음을 널리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유르딘은 전혀 이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약 먹고 있잖나.”

“오늘은 괜찮아요. 매일 먹는 약도 아니니까.”

“하지만…….”

“안 돼요?”

레인이 유르딘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물빛 눈동자가 유르딘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자, 맑은 눈동자에 유르딘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레인과 시선을 마주한 유르딘은 깊은 침음을 흘리다가 결국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유르딘이 레인에게 승리할 방법은 없었다.

유르딘의 허락까지 받은 레인은 거침없이 술잔을 채웠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애초에 마시려 했다 생각하고 거침없이 마셔 볼 작정이었다. 도수 낮은 술이니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지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유르딘은 가득 찬 레인의 술잔을 예의 주시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레인은 그런 유르딘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쿡쿡 웃었다. 심술맞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단 한 번도 남의 제대로 된 걱정을 받아 본 적 없는 레인에게 좋아하는 사람의 걱정은 마약보다도 황홀했다.

한 잔 마시는 순간부터 레인은 살짝 취했다. 레인은 계속 들뜬 채로 홀짝홀짝 술을 마셨다. 틈틈이 유르딘이 레인을 저지하며 손수 먹을 걸 집어 줬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받아먹는 사치까지 누리니 술이 술술 들어갔다. 결국은 지켜보던 유르딘이 레인을 저지했다.

“레인, 그만 마셔라.”

“별로 취하진 않았는걸요.”

“안 돼, 조심해야지. 저번에 들은 네 상태는…….”

잔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이번은 아까처럼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레인은 유르딘의 말에 수긍하고 술잔을 내렸다.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기분이 이상하게 즐겁고 동시에 조금 어지러웠다. 이게 취한 걸까. 나른한 몸이 축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기우는 몸을 바로 세우는 대신 소파에 반쯤 드러누웠다. 그대로 눈을 감으려는 레인을 유르딘이 흔들었다.

“레인, 들어가서 자라.”

“으음……. 네.”

자리에서 일어나던 레인이 가볍게 휘청거리자 유르딘은 대경실색하며 레인을 붙들더니 이내 안아 들었다. 아무리 레인이 말랐어도 키가 제법 커 가볍지만은 않은데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가벼운 동작이다. 기분 좋아. 레인은 자신을 놓는 유르딘의 목을 끌어안은 채 맞닿는 체온에 얼굴을 비볐다. 유르딘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진다. 침대에 도착한 유르딘은 레인의 손을 단호하게 떼어 내고 침대에 내렸다. 레인은 방을 나가려고 하는 유르딘을 급하게 붙잡았다. 언뜻 본 유르딘의 귀 끝이 붉었다.

“유르딘은 어디서 주무실 거예요?”

“뭐?”

“주무시고 가는 거 아니었어요?”

“그럴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좀.”

고개를 저으며 슬그머니 레인이 붙잡은 옷깃을 빼려 드는 유르딘을 강하게 붙들었다.

“왜요? 여기서 주무세요. 침대도 넓은데.”

레인은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별채는 레인이 누우면 딱 맞는 치수였지만, 지금 침대는 두 사람이 자기에도 충분히 무리 없는 크기였다.

“아니, 난… 다른 곳에서.”

“저랑 자는 게 싫으세요……?”

“…….”

레인의 목소리 끝이 떨린 것만으로도 유르딘은 더 거부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처참한 연패였다. 유르딘은 머뭇거리면서도 침대 위로 올라왔다. 고작 침대에 올라오는 데 백만 대군을 앞에 둔 듯한 비장함을 보이는 유르딘이 이상하게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레인은 제 옆에 누운 유르딘을 끌어안았다. 유르딘의 단단한 몸은 레인이 양팔로 끌어안기에도 조금 벅찰 지경이었다. 레인은 꽉 끌어안는 걸 포기하고 유르딘의 몸에 손을 감은 채 너른 품으로 파고들었다.

“레인, 잠깐…….”

“따뜻해요.”

작은 중얼거림에 어떻게든 레인을 떼어 내려던 유르딘의 움직임이 멈췄다. 안타까운 한숨이 레인의 머리 위를 간질였다. 레인은 어정쩡하게 자신을 막으려 손을 든 유르딘에게 더욱더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다.

“여긴 너무, 춥고, 외로워서…….”

간절한 속삭임은 어딘지 레인의 최후를 연상시켰던지라 결국, 유르딘은 잔뜩 긴장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레인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체온이 한데 섞여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호흡조차 잊은 채로 유르딘은 레인을 안은 채 손이 닿는 등이며 허리를 만졌다. 레인은 제 몸을 만지는 손길을 눈을 감은 채 만끽했다. 평소라면 끔찍하게 싫었을 타인의 손길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유르딘의 행동에는 성적인 함의가 조금도 없었다. 다만 필사적이고 절박했다. 유르딘은 레인이 곧 죽어 버릴 사람인 양 어루만지며 필사적으로 체온을 확인했다. 한참이나 그러던 유르딘이 손을 멈췄다. 참고 있던 숨이 목덜미에 닿고, 그대로 다시 깊은숨을 들이마신다.

“윽…….”

레인의 귓가에 억눌린 신음이 들렸다. 울음소리 비슷하게도 들렸다. 설마, 울 리가. 레인은 점점 다가오는 수마에 유르딘의 얼굴을 확인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조금 빠듯할 정도로 끌어안는 손길에 안온함을 느끼며 레인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평온한 밤이었다. 그날은 두 사람 모두, 꿈조차 없는 잠을 잤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깬 레인은 인생에서 손꼽힐 만큼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유르딘이다. 레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어제 뭐라고 했더라? 술은 두세 잔 정도밖에 안 마신 것 같은데. 원래 술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이라 제대로 된 주량을 몰랐는데 고작 그 정도에 뻗어서 괴상한 헛소리를 한 걸 보면 약하긴 한 모양이었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두 번 다시 술을 마시면 인간이 아니라고 레인은 속으로 다짐했다. 유르딘에게 매달려서 징징댄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레인은 쪽팔림의 눈물을 속으로 삼켰다. 이대로 소리 없이 빠져나가 도망치고 싶은데 벗어날 수가 없다. 유르딘의 한쪽 팔은 레인의 머리 아래에서 베개 대용이 되어 있었고, 다른 한쪽 팔은 레인의 허리를 꽉 안고 있었다. 벗어나기를 반쯤 포기한 레인은 망설이다가 슬쩍 유르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평온하게 잠든 유르딘의 얼굴은 레인이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젊게 느껴져서 낯설었다. 유르딘을 까마득하게 어리던 시절에 다 자란 모습으로 봤던 데다가, 비록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친구라지만 그래도 일단은 어머니의 친구라는 위치나 왕국의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덕에 까마득하게 멀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나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칼이 앞으로 내려와 부드럽게 눈가 위를 덮고, 딱딱하던 표정 또한 유순하게 풀어져 유르딘을 어리게 보이게 만들었다.

실제 나이 차도 생각보다는 적긴 하다. 스물 셋과 서른 넷. 열한 살 차이는 또래 친구까지는 아니어도 몇 살 많은 형처럼 보이기에는 충분했다. 아니, 그냥 레인 스스로가 유르딘을 가깝게 느끼고 싶을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레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들어 유르딘의 등 위로 천천히 손을 얹었다. 잘못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록 한쪽 팔뿐이지만, 지난밤처럼 레인은 유르딘을 끌어안았다. 이 정도면 유르딘이 갑작스레 깨어나도 자연스레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다. 어느 순간, 유르딘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절대 놓지 않을 듯이, 레인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강한 힘이다. 레인의 귓가에 절박한 목소리가 닿았다.

“레인.”

이유 모를 소름이 돋으며 오싹했다. 레인은 슬쩍 유르딘을 밀어냈으나, 밀려나기는커녕 오히려 레인을 꽉 끌어안았다. 몸이 꽉 맞게 붙자마자 유르딘은 레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평온한 숨소리에 레인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레인, 다시 한번 부르는 이름이 살갗 위에 닿았다. 순식간에 몸에 열이 올랐다. 레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유르딘에 비하면야 애처롭기만 한 힘이다.

“레인…….”

이름을 부르는 말끝이 짓뭉개졌다. 짓뭉개진 숨은 레인의 귓가에 닿았다. 뜨거운 숨에서 유르딘이 레인을 원하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레인은 숨을 멈췄다. 좋은 것도 같고, 끔찍한 것도 같았다. 머릿속이 쾅쾅 울렸다. 갑자기 물속으로 처넣어진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바라던, 기꺼운 온기가 아닌가? 숨결 다음에는 차례로 입술이 닿아 문질러진다.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 접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읏…….”

아무것도 결론 내리지 못한 채,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작은 목소리를 들은 유르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을 뜬 유르딘은 잠깐 현실 분간이 안 되는지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가 품 안의 레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 미안하다. 내가 대체…….”

새파랗게 질려 몸을 떼어 내는 유르딘을 보며 레인은 가슴에 지긋한 통증을 느꼈다. 무의식중에 유르딘과 카이렌을 동일시 여겼다. 접촉을 모조리 같은 것으로 여기고 혐오했다. 레인은 둘을 같게 느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놀란 가슴은 선뜻 유르딘에게 괜찮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침묵이 이어지자 유르딘은 심각한 얼굴로 제 팔을 들어 올렸다.

“팔을 자를까?”

“네?!”

“팔은 당장은 무리지만 손가락 정도라면 괜찮다. 원한다면 팔은 나중에…….”

어디까지 진심이지? 레인은 파격적인 유르딘의 말에 깜짝 놀랐다. 괜히 과장스레 허풍 떠는 말이 아님을 증명하듯 유르딘은 침대 아래에서 검을 집어 들었다. 레인은 새파랗게 질려 곧장 유르딘을 붙잡았다.

“아, 아뇨. 아뇨! 괜찮아요. 정말, 정말 괜찮아요. 저, 전 상관없어요. 유르딘, 일단 내려놓고…….”

놀라서 새파랗게 질린 레인을 바라보던 유르딘은 얌전히 검을 내려 두었다.

“미안하다. 놀라게 했구나.”

“정말 그래요.”

“내가 파렴치한 짓을 해서…….”

자책하는 말을 레인은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갑자기 날붙이를 꺼내 드는 바람에 놀란 터라 조금 전에 느꼈던 공포는 날아가고 없었다. 파렴치하다면 할 수 있겠지만 잠결의 포옹일 뿐이다. 포옹보다 조금 더 이런저런 걸 하긴 했지만, 그렇게 치면 어제 레인부터가 유르딘에게 매달려 갖은 추태를 보이지 않았던가. 레인은 고개를 젓고 멀리 밀려난 유르딘의 검을 눈짓했다.

“아뇨, 그거 말고 자르겠다고 하신 거에 놀랐다는 거예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제가 유르딘에게 얼마나 감사해하고 있는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요. 어, 어제도 제가 붙잡아서, 같이 잔 거고…….”

유르딘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잠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피곤하시잖아요.”

안 그래도 바쁜 데다 무려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저택 담을 넘느라 고생했으니 아예 곯아떨어져 자도 이상하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유르딘은 매일같이 일하고 남는 시간에는 틈틈이 연회에 참석해 귀족들과의 친교를 다지고 있었다. 코 한 번 골지 않고 평온하게 죽은 듯이 잠든 게 신기할 정도다.

“며칠 정도는 안 자도 상관없다. 어차피 잠도 잘 안 와. 다음부터는 실수 없도록 하지.”

“며칠이라니……. 유르딘, 설마 잘 못 주무시는 건가요?”

“조금.”

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르딘의 얼굴을 살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어제보다 확실히 안색이 좋아 보인다. 감정뿐만 아니라 피곤함 또한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라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간도 상태가 안 좋았을 수 있었다.

“괜찮으신 거예요?”

“그래. 어차피 잠이 잘 안 와서…….”

“수면제라도 드시는 게 낫지 않아요?”

“수면제를 먹으면 잠을 통제할 수 없으니까. 그런 상태는 불안해서 말이다.”

불면은 전장에 있었던 탓일까. 지스킬에게 가끔 전쟁에 나갔던 기사 중에 불면증이나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전장에서의 안 좋은 기억이 원인이 된다는데, 레인도 전장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경험 때문에 잠들지 못한 일이 많아 이해할 수 있었다. 취한 데다가 졸고 있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유르딘이 자신을 꽉 끌어안았고 그 자세 그대로 잠든 것 같았다. 최소한 자신의 존재가 곁에 있어서 불안한 게 아니라, 쉽게 잠들 정도로 편한 상대라는 확신을 받은 느낌이라 레인은 조금 기뻤다.

레인이 생각하던 사이 옷을 모두 입은 유르딘은 거울을 한 번 보고 후드를 눌러썼다. 눈에 띄는 금발이 순식간에 후드 안으로 사라졌다.

“슬슬 바깥에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 같구나. 나중에 오마.”

“지금 나가시려고요?”

“그래. 낮에 처리할 일도 있고.”

레인은 유르딘이 창문을 여는 걸 조마조마한 눈으로 보았다. 주변이 벌써 밝아져 있었다. 멀리서 사용인들이 소란스레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어제 잠들지 말고 새벽에 유르딘을 보냈어야 했던 게 아닌가 싶어 덜컥 후회됐다.

“최소한 사람이 적어지면 나가시는 게 낫지 않아요? 지금은 너무 밝고…….”

“하지만 계속 밝을 텐데.”

걱정스러움이 가실 줄 모르는 레인에게 유르딘이 다가와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괜찮다, 안 걸려.”

그렇게 말하는 유르딘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다.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레인이 몹시 귀엽다는 말투다. 레인으로서는 이 밝은 아침에 남의 눈에 걸리지 않는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유르딘이 그리 말하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저녁에 오마.”

또 이런 조마조마한 짓을 벌인다는 걸까. 벌써 긴장되는 느낌이다. 오지 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레인은 제 이성의 속삭임과 정반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본심을 가릴 수가 없었다. 지독했던 기분이 유르딘이 찾아와 준 순간 모두 달콤하게 한데 녹아내리는 경험은 황홀했다. 유르딘이 다시 와 준다면 이 저택에서의 생활도 버틸 수 있었다. 먼저 내미는 손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

“네. 기다릴게요.”

“그래.”

유르딘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창문을 연 유르딘은 그대로 훌쩍 뛰어내렸다. 여기 2층인데. 레인이 놀라서 창문 아래를 봤으나, 이미 유르딘의 모습은 어딘가로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꿈을 꾼 건 아니겠지.

무언가 홀리기라도 한 것 같다. 방금 일어났는데도 괜히 지쳐서 비척비척 침대로 누웠던 레인은 베개 위에서 금빛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얼굴을 붉혔다. 꿈도, 무언가에 홀린 것도 아니다. 조금 전까지 유르딘이 이 자리에 있었다. 레인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주워 창밖으로 내다 버리려다가 짧은 몇 가닥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손에 쥔 채 누웠다.

“어디 넣어서 보관할까.”

그건 너무 이상할까. 유르딘이 곁에 있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있고 싶었다. 그가 함께 있어 준다면 정말로 좋을 것 같은데. 상상만으로도 황홀했다.

안타깝게도 그리도 황홀했던 기분이 바닥에 처박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유르딘이 저녁에 다시 온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버티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아이제나흐 저택에서의 생활은 평소와 달랐다. 차라리 별채에 처박아 두고 없는 인간으로 취급하면 좋으련만, 본채로 굳이 데려온 이유가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짜증 나는 일뿐이었다. 레인에게 거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싫어하면서도 계속 끌려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딜란은 건국 기념제를 맞아 지방에서 수도로 올라온 귀족 몇을 저택으로 초대했다. 아이제나흐의 먼 친척도 있었고, 뜻을 함께하며 긴밀히 지내는 귀족도 있었다. 손님들은 레인이 자리에 있는 걸 보고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이 혀를 차거나 눈살을 찌푸렸으나 개중에는 묘한 시선으로 훑어보는 자들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무엇 하나 레인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아나벨은 레인이 레스터와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분이 치미는 모양이었다. 정작 레스터는 원래 남들 앞에서 이 세상 둘도 없는 친절한 신사인 척하는 놈이라 얌전했는데, 아나벨은 시도 때도 없이 우아하게도 레인을 비꼬았다. 익살스러운 농담이랍시고 지껄이는 말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소리 높여 웃을 때마다 레인은 아나벨을 목 졸라 죽여 버리는 상상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에 그쳤을 뿐이다. 딜란은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는 레인을 관찰했는데,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카이렌도 레인의 눈에 계속해서 거슬렸다. 카이렌은 어지간한 건 다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헤레일의 곁에 찰싹 붙어서 그의 수발을 들고 비위를 맞췄다. 정말 드물게도 카이렌은 레인에게조차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레인은 카이렌이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만큼이나 타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낼 때 불쾌했다. 자신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놈이 타인에게 좋은 사람인 양 구는 모습은 괴물이 인간의 탈을 쓴 것처럼 느껴져 끔찍했다.

카이렌 대신 레인의 신경을 직접 긁은 건 헤레일이었다. 부자가 쌍으로 레인을 환장하게 하는 것도 참으로 재능이었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면 헤레일과 어김없이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더러운 오물을 본 듯이 인상을 구겼다. 쳐다보지를 말든가. 나중에는 아예 무시했더니 큰 소리로 레인에 대한 욕을 늘어놓았다. 나름 유능한 자라고 들었는데 하는 짓은 왜 이렇게 상식 이하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제나흐 저택에 머무는 이들 중 오직 유니 아이제나흐만이 레인을 온전히 호의적인 눈으로 봤다. 아예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때는 몰랐던 게 눈에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자 유니는 레인을 동정해 이리저리 편을 들었다. 시종일관 안절부절못하며 공작 부인 아나벨이 한마디 할 때마다 옹호하는 맘씨는 분명 고왔지만, 그 덕분에 아나벨이 바싹 약 올라서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걸 눈치챘는지 시무룩하게 풀이 죽어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발만 동동 구르다가 아나벨에게 혼이 났다. 유니는 오후의 티타임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레인에게 종종걸음으로 몰래 다가왔다.

“오라버니, 죄송해요.”

어찌할 줄 모르는 유니의 손에는 정원에서 딴 탐스러운 꽃이 들려 있었다. 레인은 유니의 말간 얼굴을 응시하며 다른 이들의 반응에 대해 생각했다. 이걸 아나벨이 알면 화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레스터도 화를 낼지 몰랐다.

‘누가 네 형이라는 거야.’

어린 시절, 레스터에게 들었던 말이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피가 반이나 다른데, 주제도 모르고. 레스터는 분개해서 레인의 머리를 바닥에 찧고 죽일 작정으로 물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카이렌이 구하지 않았다면 분명 죽었을 터였다. 이는 레인이 레스터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완전히 버린 순간에 대한 기억이기도 했다.

고작 반쪽의 피를 나눈 혈육이다. 제게 직접 피를 나누어 준 아버지조차 레인을 위하지 않는데 고작 혈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유니 아이제나흐가 내민 꽃을 순순히 받아 들기에는 두 사람 사이의 악연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레인은 순순히 꽃을 받았다.

“고마워.”

유니는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으려는 듯 레인을 찾아왔다는 것을 들키지 않게 먼 길로 돌아 사라졌다. 정말로 착한 아이긴 했다.

레인은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일찌감치 올라왔다. 저 대인원 속에서 식사했다가는 백이면 백 체할 게 뻔했다. 딜란에게 어제 일을 핑계로 대니 그는 조금 못마땅해하면서도 수락했다. 레인을 남들 앞에 세우는 걸 싫어하던 작자가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빠지는 거라도 허락해 주니 다행이었다.

레인은 방문을 걸어 잠근 채로 유르딘을 기다렸다. 유니에게 받은 꽃을 텅 빈 화병에 꽂아 장식하자 방 안에 훨씬 생기가 돌았다. 중간에 사용인이 레인에게 식사를 가져다줬다. 공작이 무슨 말을 하기라도 한 것인지 식사는 지난밤 가져다줬던 야식보다 레인에게 신경을 쓴 구성이었다. 식사를 깔끔히 마치고, 시간이 충분히 지났음에도 유르딘은 오지 않았다. 점점 손끝이 차가워졌다. 설마 이대로 영영 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저택에 몰래 들어오다가 걸렸다거나. 최악을 상상할수록 몸에서 힘이 빠졌다. 유르딘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상상을 하며 초조하게 창을 내다보고 괜히 방 안을 빙빙 돌던 레인은 곧 완전히 진이 빠졌다.

유르딘은 오지 않을 거야. 그때도 오지 않았잖아. 끔찍하게 괴로워하며 몇 번이나 유르딘이 좁은 계단으로 내려오기를 바랐는데,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어. 다시금 정체를 알 수 없는 망상이 피어올라 레인을 좀먹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괴로운 감정에 눈물이 흘렀다. 지친 레인은 포기하고 침대에 엎어졌다. 이내 눈물이 말라 흐르지 않게 될 때쯤 레인은 탈력감에 젖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설핏 잠들었을 때,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인은 곧장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절망이 자취를 감추고 기쁨만이 떠오른 얼굴이 유르딘을 마주했다. 유르딘 또한 레인만큼이나 기쁘고 또 약간은 상기된 얼굴이었다.

“내일 공작과 백작은 후계자를 데리고 사냥터로 떠난다더구나. 공작 부인과 공녀는 외출할 모양이고.”

잠이 확 달아났다. 놀라 눈을 깜박이는 레인에게 유르딘이 시원스레 웃어 보였다. 아까 낮에 사냥터로 떠나는 건 얼핏 들었지만, 계속 저택 안에 있으면서도 아나벨과 유니가 따로 외출하는 줄은 레인도 몰랐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비밀스러운 정보는 아니지. 그러니 내일 밖으로 놀러 갈까, 레인? 안에서만 있으면 답답할 테니까.”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밖으로 놀러 나가다니, 레인이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다. 도망친 이후로는 문 근처로만 가도 감시의 눈길을 받았다. 외출을 한 번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카이렌과 레스터의 유흥에 따라가거나 혼자서 용건이 있어 잠깐 나갔다 온 게 전부였다. 무려 밖으로 놀러 나가다니.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허락을 받을 수 있을까요?”

“몰래 가야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게 슬슬 적응된다. 하긴, 무단 침입도 하는데 몰래 나가지 못할 건 또 뭔가. 무단 침입에 비하면 몰래 나가는 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택이 비는 내일만큼 적기가 없었다. 고민은 짧았다. 레인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유르딘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이어서 유르딘은 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레인은 그제야 유르딘이 이 제안을 하기 위해 미리 축제 거리를 둘러보고 오느라 늦었다는 걸 알게 됐다.

라인셀의 건국 기념제는 왕가가 건재함을 과시하는 의식인 동시에, 수도에서는 타국에서도 구경 오는 유명한 축제이기도 했다. 요 몇 년간은 큰 규모의 전쟁이 이어져 타국에서 온 관광객은 없었으나 올해는 전쟁이 끝나고 수도가 안정됐으니 예년보다 많은 사람이 몰렸다.

구경할 곳들에 대해 떠드는 유르딘의 얼굴이 마치 소년처럼 싱그러워서 레인은 절로 웃음을 지었다.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금발에 녹음처럼 푸른 눈을 지닌 동화 속의 왕자님 같은 생김새도, 왕국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는 영웅이라는 점도, 또한 레인 자신을 웃게 해 준다는 점도 전부. 그런 유르딘이 너무도 좋아 샘솟는 애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함께 즐거워하며 한창 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순식간에 밤이 깊었다. 종일 신경이 날카로웠던 터라 주체할 수 없이 피로가 몰려왔다. 점점 졸려하는 레인을 침대에 눕힌 유르딘은 레인의 침대 옆자리에 앉았다. 그걸 본 레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거기 앉아 계세요?”

“그야…….”

유르딘은 말을 흐렸지만,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아침의 일을 의식해서 자지 않으려는 거다. 내일 둘이서만 나가게 되면 신경 쓸 일이 한두 개가 아닌지라 피곤할 텐데 공연히 밤을 새운다니 정말 말도 안 된다. 레인은 최대한 단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지 말고 주무세요.”

“괜찮다. 어차피 잠도 잘 안 와.”

“어제 저랑은 잘 주무셨잖아요, 유르딘. 같이 자요.”

“레인…….”

곤혹스러운 투가 역력한 유르딘의 목소리가 레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제도 몇 번이나 생각한 건데 유르딘은 레인의 억지에 정말로 약했다. 애초에 레인의 말을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사람처럼 굴며 모든 말에 따랐다. 항상 남의 말을 거부할 수 없어 순순히 따르던 레인에게 있어서 유르딘의 반응은 너무도 새로웠다. 신선함과 기묘한 충족감이 레인의 내부를 가득 채웠다.

조금 망설이던 레인은 과감하게 유르딘의 손을 잡아끌었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레인은 유르딘이 자신에게 무도한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좀 어색하기는 해도 어차피 한 번 잔 거 두 번 자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유르딘은 레인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게 당황했지만, 결국에는 레인의 힘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왔다. 침대가 한 번 크게 출렁이고 유르딘이 레인의 옆자리에 누웠다. 과감하게 올라오라고 할 때는 좋았는데 막상 진짜로 한 침대에 멀쩡한 정신으로 누우니 부끄러워졌다. 레인은 베개에 얼굴을 박은 채 중얼거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유르딘.”

“그래.”

올라오기 전에는 난처해했으면서, 막상 눕게 되니 유르딘은 자연스레 레인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부끄러워하는 레인을 보며 유르딘이 낮게 웃는 소리가 간지러웠다. 레인은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깨어났을 때는 다시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어째서 분명 조금 떨어져서 잠들었는데 끌어안은 채로 일어나는 걸까. 레인은 유르딘의 한쪽 팔을 베고 잠든 채로 눈을 떴다. 애도 아니고, 유르딘의 셔츠를 꽉 잡은 제 손을 확인하자 이대로 숨고 싶어졌다. 지난밤과는 상황이 정반대였다. 이미 깬 유르딘은 팔을 내어준 채 가만히 레인을 보고 있었다.

“잘 잤나?”

“네……. 으음, 네.”

방금 깨서 그런지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졌다. 유르딘은 그걸 보고 웃는 대신 자상한 얼굴로 머리맡에 놓인 물병에서 물을 따라 레인에게 건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자라.”

부드러운 속삭임을 들으며 레인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스르르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유르딘이 단추를 하나 푼 셔츠에 면바지를 차려입은 다소 느슨한 차림새로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레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레인은 반사적으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원래 죽은 듯이 자는 편이긴 한데, 혹시 추한 꼴을 보인 건 아닌지 괜한 걱정이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다행히 침을 흘렸다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다.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지?”

“아뇨, 그냥…….”

레인은 우물쭈물하며 이불 밖으로 나와 쏜살같이 욕실로 도망쳤다. 거울을 확인하고서야 그리 이상한 꼴이 아님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레인은 곧장 씻고 나와 사용인을 불렀다. 원래 레인이 먹는 양이 적기에 특별히 일러 조금 푸짐하게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평소에 워낙 조금 먹다 보니 식사는 두 사람이 먹기에 턱없이 적었다. 나가서 사 먹기로 하고 적은 걸 둘이 즐겁게 나눠 먹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택은 부산스러웠다. 저들끼리 바빠 아무도 찾지 않는 소란 속에서 레인은 유르딘과 느긋한 아침을 즐겼다. 대충 아침에 할 만한 일을 모두 끝마쳤을 때 즈음 유르딘이 어제 한 말대로 저택의 남자들은 사냥터로, 아나벨은 유니와 함께 외출했다. 건강한 몸이었다면 저기에 억지로 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약한 몸이 처음으로 좋아졌다. 모두 외출한 걸 창문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유르딘이 언제 가져온 것인지 모를 짐을 하나 꺼냈다. 짐을 풀자 안에는 변장용 옷과 가발이 들어 있었다.

“제대로 준비하셨네요.”

“필요하니까.”

고작 외출에 변장씩이나 하는 게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레인과 달리 유르딘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레인은 칙칙한 밀짚 색 가발과 커다란 안경, 후드 달린 로브를 뒤집어썼다. 제법 서늘해진 가을인데도 이대로 나가면 더울 것 같았다. 유르딘은 레인보다 한술 더 떠서 후드를 뒤집어쓰고 입 주변을 반 이상 가려 눈만 내놨다. 변장을 마친 레인의 감상은 간단했다.

“축제 특수를 노린 강도 2인조 같아요.”

“조금 그렇긴 하군.”

조금이 아니라 그냥 그거다. 준비해 온 유르딘도 과한 걸 인정은 하는 모양이었다. 키 크고 체격 좋은 유르딘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레인 또한 키는 제법 큰 편이라 로브로 가느다란 체격을 가리니 유약한 사내로는 보이지 않았다. 따로 떼어 놓고 봐도 그런데 둘이 같이 서면 당장에라도 왕궁 경비대에 신고하고 싶은 조합이 됐다. 두 사람 중 더욱 위협적인 건 유르딘이니, 최소한 유르딘의 얼굴을 가린 수상쩍은 변장이라도 가리면 낫겠지만.

“하지만 내 얼굴은 너무 많이 알려졌잖나.”

그런 이유로 유르딘의 얼굴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전에 수도 개선 행렬 때 수도 인구가 다 몰려든 수준이었다. 근처 건물 옥상까지도 꽉꽉 들어찼으니까. 유르딘은 누구나 한 번쯤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숭고한 왕국의 영웅이었다. 그가 축제 한복판에 나타난다면 순식간에 사람이 몰릴 터였다. 고민하던 레인은 자신이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어 던졌다.

“그럼 유르딘만 그렇게 입고 있기로 해요. 전 딱히 얼굴이 알려진 것도 아니라 이대로도 충분하니까……. 그냥 제 옷 아무거나 입을게요.”

개중 수수한 옷으로 골라 입으면 그렇게까지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르딘은 심각한 얼굴로 레인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얼굴을 드러내면 안 될 것 같은데.”

“왜요? 전 얼굴이 알려진 것도 아닌데.”

“그런 게 아니라 위험하잖아. 납치를 당할 수도 있고.”

“납치라니…….”

농담이면 좋겠는데 유르딘의 얼굴이 심각한 걸 보니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말을 흐리던 레인은 문득 지스킬에 생각이 미쳤다. 유르딘의 과보호도 그렇고, 일부러 우수한 기사인 지스킬을 보내 레인을 호위하게 하는 것도 그렇고 혹 레인도 모르는 사이에 저를 노리는 세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레인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혹, 누군가 저를 노리고 있나요?”

“그건 아닌데…….”

“말하기 곤란하신 건가요?”

난처한 얼굴로 유르딘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곧장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최소한 말하기 힘든 내용인 건 분명했다. 설마 엄청난 상대가 레인을 노리고 있는 걸까? 왕국 제일의 검사인 유르딘이 곁에 있는데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세력이라거나. 하지만 굳이 레인을 노릴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레인의 고민이 끝도 없이 깊어지며 심각한 얼굴이 되자 유르딘이 결국 입을 열었다.

“네가 너무 예뻐서.”

“……네?”

농담이겠지. 농담한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유르딘의 얼굴이 참으로 진지하다. 유르딘이야 항상 진지한 얼굴이기는 하지만, 이건 특히나 진지했다. 레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걸 본 유르딘이 결국 작게 웃었다.

“이럴 것 같아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부끄러워해도 취소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말한 본인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왜 레인만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인지 조금 억울하기까지 했다. 레인은 정색했다.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이 아닌데.”

“설마 지스킬에게 제 호위를 명하신 것도 같은 이유는 아니시죠? 그런 거라면 당장 그만…….”

“아니야.”

다행히 유르딘은 곧장 부정했다. 이 바보 같은 이유가 아님에 안도를 해야 할 지경이라니. 레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쨌든 납치 같은 건 안 당해요. 누가 절 납치하겠어요?”

“불법 노예상 같은 것도 있어. 설마 축제 때 활개를 치지는 않겠지만…….”

“전 안 노릴 거예요.”

유르딘이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영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레인은 유르딘이 뭐라고 반박하기 전에 잽싸게 선수를 쳤다.

“유르딘이 절 지켜 주면 되잖아요?”

예상대로 유르딘은 조금 곤란해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나갈 준비를 마친 레인은 밝은 얼굴로 유르딘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나갈 때는 어떻게 나가요?”

“내가 널 안고 가야지.”

“제 발로 갈 수 있는데요.”

“여기서 바닥으로 착지할 수 있나?”

“당연히…….”

못 한다. 유르딘이야 쉽게 드나들지만, 여긴 2층이었다. 게다가 1층 천장의 높이가 높은 탓에 다른 건물로 따지자면 3층 높이쯤 되었다. 하긴, 몰래 나가는 거니 떳떳하게 방문으로 나갈 리가 없었다. 들어올 때 창문으로 들어왔으니 나가는 것도 창문으로 나가겠지.

이것만은 레인이 반대할 수도 없는 일이라 결국 레인은 유르딘에게 몸을 맡겼다. 유르딘은 레인을 가볍게 안아 들고는 어딘가에 부딪치지 않게 머리를 제 몸 쪽으로 고정해 손으로 감쌌다. 레인은 유르딘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은 채 진정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몹시 부끄러운 자세였다. 유르딘에게 안긴 게 처음은 아니지만, 말짱한 정신으로 안기니 자꾸만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이것보단 어깨에 둘러메는 쪽이 편하시지 않나요?”

“네 배가 눌리잖나.”

“아니, 상관없는데…….”

“괜찮다. 이게 편해.”

본인이 그렇다는데 더는 말릴 말이 없었다. 유르딘은 레인을 안아 들고 불편하지 않게 몇 번 자세를 고쳤다. 불편해도 되니까 그냥 빨리 끝내 줬으면 했다.

창문을 조금 연 유르딘은 바깥으로 귀를 기울이고 흘끗거리며 잠시 살피더니, 어느 순간 창틀을 딛고 가볍게 뛰어 바닥에 착지했다. 마치 계단 한 칸 아래로 뛰는 듯한 가벼운 몸짓에 레인은 낙하의 충격조차 느끼지 못했다. 순식간에 레인을 안은 채 정원의 그늘을 훌쩍 뛰어넘어 구석으로 간 유르딘은 물병을 든 여인 조각상 앞에 섰다. 설마 아니겠지. 비밀 통로가 나온다거나 하는 건…….

설마가 정말이었다. 유르딘은 조각상 근처를 몇 번인가 두드리더니 비밀 통로를 열었다. 쩌저적 열리는 조각상 아래에 입을 벌린 통로를 보며 레인의 입도 같이 벌어졌다.

“여길 어떻게 아신 거예요? 저도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라니…….”

아이제나흐 저택 한복판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어쩌다 보니 알 방법은 없다. 별로 대우받지 못하기는 해도 일단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혈통인 레인조차 존재를 모르는 통로다. 분명 극비로 취급되는 통로가 분명했다. 잠시 혼란을 느끼던 레인은 이내 정신을 수습했다.

“……뭐, 아무래도 좋겠죠.”

공작가의 보안 따위 알 게 뭔가. 망해 버리면 더 좋은 것을. 하도 유르딘이 레인의 상식 밖에 있는 행동을 많이 보여 주다 보니 조금씩 적응이 되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양 느껴졌다. 레인은 더 물어보려던 걸 관두고 얌전히 유르딘을 따라갔다.

은밀한 비밀 통로는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도 쓸 수 있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좁고 어두운 길이라 조심조심 한참을 걷고 나서야 두 사람은 비밀 통로의 끝인 작은 주택가의 뒷골목으로 나왔다. 제법 걸었더니 힘들었다. 레인은 바람을 쐬고 조금 쉬고 나서 거리로 나갔다.

주택가를 벗어나자마자 가득 찬 사람들의 물결에 파묻혔다. 덤덤히 뒤를 따르던 레인은 멈춰 섰다. 공포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군중 속에서 레인은 많은 걸 떠올렸다. 아카데미의 수없이 많은 학생이 레인을 보며 조롱하고 비웃던 야유가 기억 속에서 재생됐다. 속이 나빠졌다. 지금이라도 제 모든 것을 바깥으로 쏟아 내고 싶었다.

“레인?”

유르딘이 멈춰 선 레인을 돌아보았다. 레인은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저었다. 오지도 않을 두려움 때문에 기껏 밖으로 나온 오늘 하루를 망쳐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유르딘이 힘들면 쉬어 가자고 몇 번을 말했지만, 레인은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결국, 레인의 고집에 진 유르딘이 앞장섰다. 두려운 감정을 꾹 억누른 채 레인은 용기를 내 유르딘의 로브 끄트머리를 붙들고 뒤를 따랐다. 유르딘은 수많은 사람 속에서 느릿하게, 그러나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넓은 등은 결코 멀어지는 일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레인이 보이는 곳에 머물렀다.

가빠졌던 호흡이 천천히 안정된다. 유르딘과 맞닿은 곳부터 천천히 두려움이 녹아내려 간다. 소란 속에서 평온한 안온함이 찾아오고, 동시에 레인에게는 온전한 자유가 내려졌다. 레인은 유르딘의 로브 끝자락을 잡은 손을 놓았다. 여전히 손 안에 유르딘이 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소란 속에서 레인은 감상에 빠졌다. 누군가의 존재가 저를 이렇게 안심시킬 줄은 몰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유르딘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 억눌렀다. 유르딘과 함께하는 일은 언제나 놀랍다. 레인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유르딘을 향해 활짝 웃으며 나란히 섰다.

“죄송해요. 사람 많은 데 나온 적이 없어서 잠깐 놀랐었어요.”

“이제 괜찮아?”

“네. 유르딘 덕분에.”

유르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완전히 얼굴을 가려서 유르딘의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으나, 아마 가려진 얼굴이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행이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생각에 확신을 심어 줬다. 두려움이 걷히고 나니 그제야 왁자지껄한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한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 똑같이 즐겁게 살고 싶다고 소망한 적이 있었다. 지금이 바로 소망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초라했던 흑백 상상이 오색 찬연한 색을 입고, 그렇게 꿈은 현실로 내려왔다.

“그러고 보면 저, 이렇게 밖을 돌아다니는 건 처음이네요.”

“그런가.”

“네. 딱히 기회가 없어서……. 이렇게 나오니까 좋아요.”

이후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억압되지 않은 온전한 자유 속에서 며칠 새 꽉 막힌 숨통이 탁 트였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거리를 걸으며 축제의 좌판대나 길거리 연극 따위를 구경하고, 난생처음으로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 건 생각보다 즐거웠다.

물론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유르딘의 걱정이 몹시 허황한 것으로 생각했던 레인의 생각과 달리, 군중들 사이에서 레인의 얼굴은 몹시도 눈에 띄었다. 대다수는 시시껄렁한 말투로 레인에게 말을 걸었다가 뒤에 선 유르딘을 보고 말을 얼버무리며 도망쳤다. 비록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유르딘의 체격이며 기세가 보통 사람들과는 격이 다르게 범상치 않은 태가 났다. 개중 호기롭게 나선 자들은 유르딘에 의해 얻어맞고 뒷골목으로 던져졌다. 몇 번 비슷한 일을 겪고 레인은 결국 축제에서 파는 가면을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렸다.

의욕이 넘치기는 했으나 워낙 체력이 부족한지라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앉아서 쉰 시간이 반은 됐지만, 그래도 나름 부지런히 저녁이 가까워질 시간까지 돌아다녔다. 축제 야시장도 활발해 기대는 됐으나 지치기도 지쳤고 무엇보다 다른 이들이 레인보다 먼저 들어오면 곤란하니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레인은 돌아가기 전에 아카데미에서 필요한 물건을 산다며 상점에 들어와, 유르딘에게 마실 음료를 사다 달라는 핑계로 쫓아냈다. 유르딘은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다짐을 세 번이나 받은 후에 상점을 나갔다. 레인은 빠르게 상점 안의 물건들을 눈으로 훑었다.

유르딘에게 받은 게 지나치게 많아서 다 보답할 길이 없었다.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하나쯤 눈에 보이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유르딘은 검사이니 검에 관련된 선물을 주는 게 제일 좋을지도 모르겠으나 문외한인 레인이 혼자서 좋은 선물을 고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지스킬의 말에 따르면 장인이 만든 평생의 역작 같은 물건들이 하루가 멀다고 선물로 들어와 창고를 가득 채울 정도라고 했다. 그래서 차라리 레인은 자신이 잘 아는 쪽의 물건을 주기로 했다. 직접 주문을 넣어 장인이 제작한 물건의 수준은 아니라도, 최근 부유한 평민들이 이런 상점을 자주 찾다 보니 생각보다 고급스러운 게 많았다. 레인은 지체하지 않고 유르딘이 오기 전에 값을 치르고 포장까지 마쳤다.

그대로 몸을 돌려 문가로 향하려던 레인이 멈춰 섰다. 흙을 빚어 색을 입힌 작은 토끼 모양 조각은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귀여운 생김새였다. 레인은 그 조각을 보며 유니를 떠올렸다. 유니가 선물한 꽃은 조금 시들긴 했어도 여전히 레인의 꽃병에 꽂혀 있었다. 레인은 홀린 듯이 조각을 샀다. 사고 나서야 공녀인 유니는 이런 싸구려 조각보다 훨씬 더 값지고 정교한 물건들을 많이 갖고 있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작 이런 물건에 기뻐할 리가. 차라리 쓸 만한 다른 물건과 바꿀까 하던 찰나에 유르딘이 때맞춰 안으로 들어왔다. 레인은 엉겁결에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유르딘이 사 온 음료를 받아 들었다.

“구경은 다 했어?”

“네.”

얼결에 대답한 레인은 유르딘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음료뿐만 아니라 간단한 먹을거리까지 사 온 유르딘은 나무 포크로 찍어 레인의 입에 손수 넣어 주었다. 은근히 잘 받아먹는 레인을 유르딘이 뿌듯한 눈으로 보았다.

유르딘을 따라 천천히 걸어 한적한 거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유르딘이 미리 준비한 허름해 보이는 마차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름한 건 어디까지나 위장인지 마차 안쪽은 더없이 고급스러웠다. 마차에 올라 레인은 유르딘에게 선물을 건넸다. 뜻밖의 선물에 유르딘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지금 뜯어봐도 되나?”

“물론요.”

유르딘은 신중하게 상자를 뜯었다. 상자 안에는 고급스러운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워하지는 않아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물을 확인한 유르딘의 얼굴이 충격받은 사람처럼 굳어 버렸다. 만년필이 누군가에게 충격을 남길 수 있는 종류의 선물이던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무언가 실수라도 했는가 싶어서 레인은 조심스러워져 변명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그냥 무난하게 쓰기 편한 걸 샀어요. 생각해 보면 더 좋은 게 많으실 텐데……. 그냥 제가 드린 건 대충 쓰세요.”

“아니, 아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그냥 조금…….”

유르딘의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천천히 만년필 표면 위를 미끄러져 내렸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유르딘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전에 망가뜨린 물건이 생각나서. 소중한 거였는데……. 내가 신경을 못 써서 두 동강 났거든.”

조금 떨리는 목소리에서 깊은 후회와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많이 소중한 물건이었을까. 유르딘이 딱히 물건 하나에 애착을 갖는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누군가에게 받은 물건 같았다. 누구에게 받았기에 가장 소중한 보물이 망가진 것처럼 안타까워할까. 이상하게 속이 탔다. 이미 망가진 물건 따위 신경 쓰지 말라는 심술궂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간신히 집어삼켰다.

“그 물건만은 못하겠지만 써 주세요. 나중에 제가 더 좋은 걸로 드릴게요.”

“아니, 이걸로도 충분해.”

유르딘은 만년필을 상자에서 꺼내지도 않고 조심스레 상자째로 품에 넣었다.

“소중히 간직하마. 고맙다, 레인.”

품에 넣고 나서도 유르딘은 품속의 상자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물건이었기에 그러는지 궁금했지만, 막상 유르딘의 입에서 다른 이에게 받은 물건을 소중히 대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너무도 선명한 제 감정을 마주하니 낯설었다. 질투라니. 확실히 누리는 게 많아지긴 한 모양이었다. 질투씩이나 할 처지가 되고. 고작 물건 따위에 휘둘리는 유르딘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 레인은 마차에 난 조그만 창틈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풍경이 느릿하게 지나갔다.

“레인.”

낮은 부름이 레인의 시선을 다시 유르딘에게로 돌렸다. 상자에서 손을 뗐는지 신경 쓰는 자신이 참 치졸했지만, 어쨌든 유르딘은 더는 상자 속 만년필에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불러 놓고 유르딘은 한참을 망설이며 말이 없었다. 신중하게 이어질 말을 기다린 끝에 유르딘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혹시… 여기 머무르는 게 힘들다면 나와 함께 떠날까?”

“네?”

갑작스러운 말에 레인이 눈을 크게 떴다. 잔뜩 긴장한 채, 유르딘은 처음 망설였던 것과는 정반대로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지스킬을 네게 보낸 건 여기서 네가 편하게 지내지 못할 걸 알기 때문이었어. 여긴 네게 좋은 상황이 아니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너를 전력으로 도와주고 싶지만……. 너도 알다시피 라인셀에서는 한계가 있어. 만약 내가 널 거두더라도 널 못마땅하게 볼 사람이 많아질 테지. 어떻게든 네 처지를 바꿔 나가려고 하고는 있지만… 한 순간에는 불가능해. 아주 오래 걸리겠지. 당장 네가 그 저택에서 힘들어하는 것도 보기 힘들고.”

레인은 대답하지 않고 숨을 삼켰다. 유르딘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레인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레인의 처지는 최악이었다.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결국 레인은 노예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제대로 된 자아가 확립되기 전부터 레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폭력과 억압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만 했다. 레인이 저항할 때마다 그에게 쏟아지는 폭력은 더욱 거세졌다. 차라리 처음부터 납작 바닥에 엎드렸다면 진작 편해졌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끝끝내 레인이 굴복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이유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너와 내가 살아서 무엇 하겠니. 아무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단다. 우리의 긍지는 모조리 꺾이고, 살아도 이제 치욕만이 남은 삶이 되겠지…….’

한 서린 유언을 무시한 채 홀로 살아남았으면, 최소한 그녀가 염려했던 대로 긍지조차 없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인은 자신에게 불행을 안겨 준 아이제나흐의 성 외에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레인에게는 끔찍하게만 느껴지는 이름이었으나, 동시에 이 왕국에서 가장 귀한 이름이기도 했다. 그래서 증오스러워하면서도 그걸 내세웠다. 긍지를 아는 고귀한 혈통. 사실상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그 사실이 레인을 노예와 구분 지었다. 아득바득 증오의 근원마저 긁어모아야 레인은 간신히 자신을 굴종의 유혹에서 지킬 만한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인이 내세운 자존심은 누군가가 조금만 레인을 관찰한다면 무너질 만큼 얄팍한 것이다. 힘 있는 자들이라면 우습고 가당찮아 보일 정도로 보잘것없는 방어막이다.

어두워지는 레인의 얼굴을 유르딘은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마차 바닥으로 내려가 레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대로 손을 뻗어 레인의 메마른 양 뺨을 조심스레 쥐고 눈물을 참고 있는 젖은 눈가를 문질렀다. 레인은 바닥을 향하던 시선을 들었다. 유르딘의 시선이 녹아내릴 듯이 달콤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마라.”

“저, 는……. 그러니까, 그…….”

아무렇지 않다고 변명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이 보잘것없는 자존심의 사상누각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나 동시에 솔직하게 털어놓고 고통을 나누고 싶었다.

“네가 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 그런 얼굴을 해야 하는 건 네 아버지와 널 이렇게 만든 놈들이다. 수치도 모르는 인간 이하의 것들이지. 이곳에 있어서 네가 괴로운 건 네가 나쁘거나,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조차 되지 못한 쓰레기들이 이곳에 너무나도 많아. 나도 놈들과 다를 게 없지.”

마지막 말에 레인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얼굴을 보며 유르딘은 레인을 감싼 손을 빼냈다. 차마 닿을 자격도 없다는 듯이. 이내 유르딘의 고해가 이어졌다.

“어린 시절, 딜란 아이제나흐는 내게 널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어. 어린 나는 멍청하게 그 말을 믿었지. 네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어.”

“그렇지 않아요!”

다르다. 그들과 같을 리가. 어떻게 그 무도한 자들과 유르딘을 비교한단 말인가.

유르딘은 씁쓸한 표정으로 레인의 시선을 피했다. 레인은 바닥을 향해 떨어지려는 유르딘의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유르딘의 동요와 자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레인에게 있어서 유르딘은 그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몇 번이나 유르딘의 호의를 받고, 아예 좋아하게 된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다르다고요, 유르딘. 유르딘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달라요.”

참담한 세상에서 유르딘만이 유일하게 레인에게 이유 없이 다가왔다. 기억의 공백과 정체불명의 망상 속에서도 레인이 깊은 혼란을 겪지 않고 현실에 발 디딜 수 있었던 건 유르딘 덕분이었다. 레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그랬듯이, 현재의 레인도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품고 있었다. 다급한 속삭임을 들은 유르딘은 천천히 눈을 끔벅였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유르딘은 레인의 말에 긍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내가 널 제때 돕지 못했으나, 이제라도 돕고 싶다.”

“이미 충분히 도와주고 계신걸요.”

“그걸로는 부족해.”

유르딘은 시선을 들어 초조한 눈을 한 레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강한 열망을 품은 눈으로 자신을 붙든 레인의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유르딘의 목소리가 레인의 귓가로 파고든다.

“함께 떠나자, 레인. 이곳 라인셀을.”

잠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만큼 갑작스럽고 그만큼 충격적인 말이었다. 나쁜 의미의 충격은 아니다. 방금 전까지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휘발되고 유르딘의 한마디가 레인을 사로잡는 건 한 순간이었다. 왕국은 레인의 모국이었으나 동시에 고통밖에 주지 않은 땅이었다. 평생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며 죽지 못해 살아온 땅이었다. 조금도 불쾌하지 않은 당혹의 기색을 읽은 유르딘은 용기를 얻었다.

“이곳을 떠나 먼 곳으로 가자. 나도, 너도, 우리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그저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는 거야.”

떠난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향한다. 레인의 비참한 삶도, 치욕스러운 과거도, 아무도 모르는 머나먼 곳으로 가서 그토록 갈망하던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한 삶을 몇 번을 꿈꿨던가. 꿈꾸다가 몇 번을 접었는가? 레인이 평생 꿈꿔 오던, 동시에 포기했던 일이었다.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말. 목마른 자가 얻게 된 달콤한 과실이었다. 그 어떤 말보다 달콤하다.

그러겠노라고 대답하려던 레인이 멈칫했다. 레인에게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지만 이게 유르딘에게도 좋은 제안일까? 레인은 그간 바쁘게 일해 오던 유르딘의 모습을 떠올렸다. 원래 권력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남자가 일부러 귀족들을 만나고 인맥을 쌓으며 온갖 소란의 중심부에 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갑작스러운 타국으로의 소리 소문 없는 망명이라니. 가진 것 없는 레인이라면 모를까, 왕국의 영웅으로서 렘샤이트 후작 위마저 쥐고 있는 남자가 선택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길이었다.

“유르딘, 그래도 좋아요? 후작 위도 버려두고……. 이곳에서라면 유르딘은 안정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텐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내가 이곳에서 노력한 건…….”

유르딘이 말을 흐렸다. 침묵 속에서 유르딘의 말하기 싫어하는 기색이 읽혔다. 굳이 말하기 싫은 거라면 질문할 필요가 있을까? 만에 하나 유르딘이 이 생활을 놓기 싫어 안타까운 마음이 조금 있더라도 함께 떠나자고 하고 싶었다. 둘이서 떠나자. 그저 사랑한다는 말도 이보다 달콤하고 열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하려던 찰나, 유르딘이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니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였어.”

레인은 저도 모르게 유르딘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유르딘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지는 레인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날아갔다. 평생을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아버지를 저버린 패륜녀, 반역자의 혈통이라는 말은 여전히 죽은 슈리아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어머니가 죽기 전 아직 어렸던 레인에게 아무도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으니 그저 막연히 누명을 쓴 게 아닐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혹을 지금 이 순간, 유르딘은 확신하고 누명이라고 말했다. 지금 상황의 해방에 대한 열망은 강렬했으나 평생을 함께 짊어져 온 의문 앞에서 빛이 바랬다.

레인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지자, 유르딘의 눈에 떠올랐던 열망 또한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애초에 슈리아가 딜란에게 그렇게 유효한 정보를 가져올 수 있을 리가 없어. 네 어머니를 무시해서 하는 말은 아니야. 다만, 베델 후작은 보수적인 사람이었지. 애초에 후작이 반역을 준비했을 리도 없지만, 정말로 반역을 준비했다고 해도 딸인 슈리아에게 그런 중요한 정보를 말했을 리가 없지.”

언제 들떴냐는 듯이 태도를 바꾼 유르딘의 설명이 이어졌다.

후작이 슈리아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현 왕인 리처드가 즉위한 후로 조금씩 변하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왕국 라인셀은 여성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였다. 남성은 자유롭게 꿈을 꾸지만 여성의 역할은 한 가지로 정해져 있다. 아름답게 자라서 아버지가 정해 준 남자와 결혼해, 결혼한 후에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후계자를 생산하는 것이다.

슈리아는 어릴 적 말을 타는 걸 좋아했다. 자신에게 구애하는 남자들보다는 아직 어려서 슈리아의 성별을 신경 쓰지 않던 어린 소년인 유르딘과 뛰어노는 걸 좋아하던 소녀였다. 후작은 딸을 사랑하면서도 여자를 가문의 부산물로 보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슈리아의 미래를 결정했다. 아버지의 뜻을 꺾는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슈리아는 온실 속에서 왕국이 바라는 가치대로 자라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에 순종해 제게 독을 먹일 원수인 줄 모르고 딜란과 결혼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딸을 키운 후작이 반역과 연관된 중요한 문제를 슈리아에게 발설할 리 없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딸이라고 해도 계집아이가 어찌 사내들의 일에 끼어든단 말인가? 베델 후작은 그런 사고방식을 지닌 아버지였다. 그러니 애초에 슈리아가 반역에 가담해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쥐고, 가져온다는 가정 자체가 말도 안 됐다.

만에 하나 어떻게든 슈리아가 반역에 대한 정보를 접했다고 하더라도, 죄를 고발해 살아남을 생각이었다면 후작가가 멸문한 뒤에 독을 마실 리가 없다. 왕국을 위해서 고발하고 죽을 작정이었다면 굳이 후작이 처형된 후 갖은 모욕을 들은 뒤에 죽을 필요가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녀의 죽음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가정 위에 세워져 있었다.

게다가 두말할 것도 없이 미심쩍은 반역죄로 베델 후작가가 멸문한 이후 슈리아의 생존으로 가장 이득을 본 건 아이제나흐 공작인 딜란이었다. 만약 슈리아가 그대로 베델 후작가에 말려 죄인으로 전락했다면, 아무리 죄인을 고발했다고 해도 남편인 딜란은 아내의 불명예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딜란은 아내가 고발자의 위치임을 상기시켜 죄를 용서받게 해 달라고 빌면서 깔끔하게 빠져나온 데다가 반역을 알아챈 공까지 얻었다. 이후 가장 중요한 슈리아가 죽어 버리면서 딜란은 아무것도 몰라 별다른 위협도 되지 못할 어린 아들만을 남겨 둔 채로 완벽하게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슈리아가 제시했다고 알려진 증거는 베델 후작이 타국의 귀족들이나 불온한 무리를 만나 나눈 거래의 기록들이었다. 몰래 빼돌린 기록 자체는 허술한 점도 있었으나, 후작과 불온한 무리가 만난 정황과 기록에 적힌 날짜가 완벽하게 일치했고 이를 본 증인도 있었기에 적법한 증거로 인정받았다. 이점에 관해서도 의혹은 남는다. 당시 후작 저택은 수리에 들어간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영지에서 느긋하게 수리를 기다려도 됐을 것을, 결혼한 딸을 계속 보기 위해 후작은 수도에 머물기로 했고 후작가의 이름에 비하면 조금 초라한 저택을 임시로 구했다. 베델 후작가는 영지에 다이아몬드 광산을 갖고 있었는데, 사치품과 연관된 특성상 외국과도 꾸준한 거래가 이어졌다. 신중한 성격의 후작은 중요한 거래를 남에게 맡기기보다는 스스로 도맡아 했다. 수리 중인 저택에서 손님을 맞는 게 후작가의 위신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후작은 손님을 직접 찾아가거나 수도에 있는 고급 호텔을 빌려 자리를 마련해 직접 만났다. 그렇게 만난 자 중에 적국인 카니예의 귀족이나 용병단의 단장, 무기 밀수업자들이 있었다.

설명을 듣던 레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반역을 계획했다면 사람 눈에 띄는 수도가 아니라 영지에서 준비하는 게 나았을 것이고,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수도에서 준비했다면 최소한 아무리 수리 중이라도 저택에서 만나는 게 나았을 텐데.”

아무리 고급 호텔이라지만, 드나드는 사람도 많은 데다가 타인이 운영하는 곳에서 어찌 그런 중요한 일을 논의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유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도 이상하다는 말이 많았지. 그러나 슈리아가 입수했다던 증거가 너무 확실한 물증인 데다가 호텔의 주인이 후작이 몰래 몇 번인가 더 왔다고 증언하는 통에 처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처형이 이루어진 후에는 이미 벌어진 일에 이의를 제기하면서까지 위험을 감수하려던 자가 없었어.”

유르딘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 베델 후작가의 소식을 들은 그는 제대로 쉬지도 않고 말을 달려 바로 수도로 귀환했으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처형이 끝나고 슈리아와 레인은 독을 먹고 난 후였다. 베델 후작가 정도 되는 가문이 지나치게 빨리 멸문당했다. 의혹을 가졌던 이들도 이미 베델 후작가의 일원들이 모두 죽었으니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세드릭……. 그러니까 네 외삼촌은 사사건건 선대 국왕의 정책에 반대했다. 젊은 귀족들을 주축으로 모임을 만들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 나갔지. 세드릭이 죽으면서 그 주장은 모조리 꺾이고 국왕은 한결 편해졌다. 또한, 베델 후작가가 보유하고 있던 다이아몬드 광산도 왕가로 귀속됐지.”

“이해관계가 맞은 거군요. 선왕과 딜란의.”

“그래.”

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슈리아를 쫓아내기 위해서 굳이 베델 후작가에 반역죄까지 뒤집어씌울 필요가 없었다. 줄곧 딜란을 의심했지만, 왜 그렇게까지 한 건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나벨이 레인에게 보내는 증오를 볼 때, 그녀를 사랑하는 딜란이 어떻게든 슈리아와 이혼하려 했다는 정황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가 낮은 라인셀의 특성상, 슈리아에게 술을 먹이든 약을 먹이든 인사불성으로 만들고 다른 남자와 통정했다는 추문을 뒤집어씌우는 걸로도 충분했다. 물론 후작가와 잡음이 생길 테니 깔끔한 처리 방식은 아닌 데다 딜란이 그리도 중요시하는 위신은 깎이겠지만, 베델 후작가씩이나 되는 가문을 무너뜨리는 위험성보다는 그쪽이 훨씬 더 나았다. 반역죄를 허위로 뒤집어씌우는 것도 반역죄다. 고작 슈리아 한 사람 쫓아내자고 그 끔찍한 죄를 뒤집어씌우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그러나 애초에 선왕과 이해관계가 맞아 공모한 거라면 과감한 행보가 이해가 간다.

분노 때문에 시야가 깜박깜박 점멸했다. 차오르는 분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러운 수로 베델 가문을 멸문시키고 결국에는 자살로 몰고 갔으면서 그 자식인 레인을 더러운 핏줄로 매도하는 딜란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딜란은 태어났을 때부터 타고난 강자였다. 평생 이해할 수 없으리라. 단 한 번 제 의지대로 되지 않은 일이 슈리아였을 테니 그 파렴치한 자가 레인의 고통에 공감할 리가 없었다. 유르딘은 자칫하면 손톱이 박혀 피가 스밀 정도로 꽉 쥔 레인의 손을 붙잡았다.

“레인.”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유르딘이 레인의 손을 펴 잡아 내리고 양 뺨을 쥐어 가볍게 들어 올렸다. 마주한 유르딘의 눈빛이 평온을 가장한 채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 왕의 이해관계가 맞아.”

현재 라인셀의 왕은 서른 살의 리처드 알쳄 아그리스다. 리처드는 선왕인 프레데릭과 사이가 나쁘기로도 유명했다. 오죽하면 프레데릭이 병으로 죽었을 때 리처드가 아버지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을까. 리처드는 신전의 대신관에게 프레데릭의 시신을 검시하게 한 후에야 억울한 소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본래 리처드의 어머니는 프레데릭의 첫 번째 왕비였는데, 임신 중 몸이 약해져 출산 후에도 시름시름 앓더니 리처드가 고작 세 살일 때 죽었다. 몸이 약했던 첫째 왕비에게 별다른 정이 없던 프레데릭은 곧장 자신의 정부를 두 번째 왕비로 들였고, 제법 열렬한 관계를 유지했다. 프레데릭이 두 번째 왕비와의 사이에서 난 2왕자 네스를 총애하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네스가 열 살에 병으로 죽지만 않았더라면 리처드가 왕의 자리에 오를 일은 없었을 터였다. 네스가 죽은 후 프레데릭은 격분했고, 리처드의 외조부인 동시에 당시에 유일하게 리처드를 지지하던 실리엄 백작을 의심해 1년간 집요하게 조사했다. 아무리 조사해도 무죄라는 확신만 더해졌지만, 프레데릭은 의심을 거둘 줄 몰랐다. 그때부터 프레데릭은 사사건건 실리엄 백작의 일을 걸고넘어졌고, 왕의 노골적인 냉대 속에 점점 고립되던 실리엄 백작은 결국 자살을 택했다. 백작의 죽음 이후 리처드와 프레데릭은 부자 관계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해졌으나, 두 번째 왕비와의 사이에서 줄줄이 딸만 태어나자 결국 프레데릭은 장성한 리처드를 왕세자의 자리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성장 배경을 가진 리처드였으니 당연한 순서로 그는 프레데릭에 관한 모든 것을 혐오했다. 왕으로서의 이상을 위해, 그리고 아버지의 잔재를 치우기 위해 리처드는 개혁을 시도 중이었다. 그러나 다소 파격적인 리처드의 개혁안들은 기존에 프레데릭을 지지하던 보수적인 귀족들에 의해 번번이 막혔다. 아버지로서는 최악이었으나 왕으로서는 능력이 나쁘지 않았던 프레데릭이기에 현상 유지에 대한 의견 쪽에 힘이 실렸다. 리처드에게 반대하는 귀족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자가 바로 아이제나흐 공작인 딜란이었다. 베델 후작가의 반역죄를 고발한 이후 꾸준히 힘을 키운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권위는 왕가를 위협할 수준으로 커진 채였다.

베델 후작가의 멸문을 재조사해 그 죄를 밝히면 단 한 번에 프레데릭의 후광을 벗기고 아이제나흐 공작가마저 꺾을 수 있었다. 이 일이 명확히 밝혀지면 아무리 왕이라지만 본인의 사사로운 욕망을 위해 거대한 귀족 가문 하나를 멸문시킨 프레데릭의 권위가 단번에 꺾인다. 일을 주도한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타격은 죽은 왕의 권위가 꺾이는 것 이상이었다. 게다가 이미 죽은 왕이야 어찌어찌 넘어가겠으나 당시의 일에 연루된 딜란은 살아 있었다. 아무리 잘 빠져나가도 이전과 같은 권력을 유지하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고, 만약 증거를 모두 아이제나흐 공작가가 조작한 게 밝혀진다면 존속의 위기마저 겪을 수 있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가 산산이 박살 난다. 복수. 감히 상상조차 못 해 본 가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복수할 수만 있다면. 레인의 눈빛이 강렬한 갈망으로 불타올랐다. 감정이 벅찬 레인을 보는 유르딘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으나 감정의 잔해는 익숙하게 가면 속으로 숨었다.

“벌써 17년 전의 일이야. 힘든 일이 될 테고, 정말 가능할지도 알 수 없지. 아주 오래 걸릴 텐데……. 그동안 널 이곳에 가만히 두면 너무 힘든 일이 많겠지. 그렇다고 널 거두자니 걸리는 게 많고.”

사람들은 추잡한 가십을 즐긴다. 결혼도 하지 않은 미혼의 유르딘이 멀쩡히 머물 수 있는 저택이 있는 레인을 제 저택으로 들인다면 어떤 소문이 돌지 불 보듯 뻔했다. 가십 문제가 아니라도 딜란은 무자비하고 철저한 남자였다. 레인을 가문의 수치처럼 여기는 딜란이다. 차라리 제 눈 닿는 곳에 두거나 아니면 제 손안에서 죽여 버리면 모를까, 레인을 제 통제 밖으로 벗어나게 할 리가 없었다.

은밀히 빼 와서 숨겨 둔다면야 가능하겠으나, 유르딘은 이 시간으로 돌아오고 나서 제 머리를 잠식했던 추잡한 욕망을 잊지 않았다. 레인을 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게 되면 끔찍한 자들과 가까워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일을 해결하기로 마음먹었으나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레인이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일원인 이상 완벽한 보호는 불가능했다.

“차라리 복수를 접고 떠나서 편하게 사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레인. 어느 쪽이 좋지?”

유르딘은 과거와 같은 빛깔의 눈동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레인이 무어라 답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저는 복수하고 싶어요.”

복수한다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멸시받던 레인의 삶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일이 잘 풀린다면 딜란과 아나벨은 죗값을 받는다. 미래에 대한 상상보다 과거의 괴로운 기억들이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라인셀은 예로부터 무를, 동시에 강인한 남성을 숭배했다. 규격 외, 강인한 여성이나 레인처럼 약한 남성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 남자가 남자에게 강간당한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저항하거나 도망치면 됐을 것을 왜 사지 육신 멀쩡한 남자가 제대로 뿌리치지도 못하고 당하고 있느냐고 말할 놈들이 수두룩했다. 심지어 어린 시절부터 레인이 얻어맞는 걸 봐 온 하인조차도 그런 소리를 했다. 레인을 약자로 만든 게 그를 짓밟는 가해자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강자를 혐오하는 것보다 약자를 혐오하는 게 편리하니까. 남의 불행을 소비하면 제 처지는 그에 비해 행복한 듯이 느껴지니까. 저열한 사고였다. 가능하다면 도망치는 게 아니라 맞서는 방식으로 이겨 내고 싶었다.

유르딘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미 한 번은 들었던 답변이다. 유르딘은 레인을 위한, 그의 복수와 소망을 위해 휘둘릴 검이었다. 유르딘 자신의 욕망이나 소망 따위는 무의미했다. 거짓 없이 진실을 고하고 레인의 의지를 따르기로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으니.”

그러나 이어지는 레인의 말에는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덜컥거렸다. 유르딘은 손으로 레인의 입을 막았다. 레인이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걸 보고 나서야 유르딘은 손을 내렸다.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나는 네가 우선이야.”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레인의 안위였다. 유르딘은 두 번 다시 레인의 죽음을 겪을 수 없었다. 최소한 유르딘이 보호하는 동안에는 레인이 조금이라도 다치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 저택에서 상처를 받고 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기야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지켜 주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유르딘의 절박함을 본 레인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죄송해요. 유르딘.”

“그런 생각 하지 마.”

“안 할게요.”

레인은 거짓말을 내뱉었다.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에 한 톨의 희망이 깃들자 소망은 미칠 듯이 불어나 레인의 안을 가득 채웠다.

떠나자는 유르딘의 말은 이상향을 끌어온 것처럼, 그보다 완벽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완벽한 행복이라는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가 레인의 삶에도 내려온 듯이 기뻤다. 그러나 모든 걸 잊고 유르딘의 손을 잡고 떠나기에는 레인이 눈물 흘리며 분을 삭인 날이 너무도 많았다. 죄지은 자들이 변하지 않는 영광 속에서 살아갈 날들이 너무도 길었다. 이대로 떠나도 레인은 완벽하게 행복해질 수 없었다. 자신이 부서져도 좋으니 그저 복수하고 싶었다.

이어지는 대화 없이 도착한 마차는 소리 없이 아까 왔었던 뒷골목에 도착했다. 길고 긴 비밀 통로를 걷는 동안 몸은 피로했으나 아까 바깥에 나갈 때 이상으로 활력이 넘쳤다. 가능성이 레인을 살아 숨 쉬게 한다.

두 사람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레인의 방까지 돌아왔다. 누가 중간에 들어올까 봐 혹시 몰라 문틈에 끼워 둔 표식은 나갈 때와 똑같았다. 방 안을 휘적휘적 살핀 유르딘은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미안하다, 레인. 오늘은 건국 기념제 때문에 일찍 가 봐야 할 것 같아.”

“괜찮아요. 감사했어요.”

“내일도 못 올 것 같아서…….”

“오늘 함께해 주신 걸로도 충분한걸요.”

가 봐야 한다고 하면서도 유르딘은 끝내 미련이 남는지 한참을 망설였다. 그는 한참 후에야 걸음을 뗐다.

“그래. 가능하다면 내일 새벽에라도 잠깐 오마.”

“피곤하실 텐데 그냥 쉬세요.”

“추워졌으니 이불 꼭 덮고 자고.”

한참을 미안해하던 유르딘은 결국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진 방향을 보건대 아까 비밀 통로가 아니라 정말 담을 넘는 것 같다. 순식간에 유르딘을 삼킨 어둠을 노려보다가 레인은 방을 가로질러 소파 위에 털썩 누웠다.

유르딘이 왕과 손을 잡은 이상, 왕가의 가장 중요한 행사를 빠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 왕은 딜란을 치운 자리에 유르딘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 이 모든 게 유르딘을 위한 일임과 동시에 레인의 복수를 위한 길이기도 한데 싫을 리가 없었다. 끓어오르는 고양감 속에서 레인은 그대로 까무룩 잠들었다.

건국 기념제 당일, 지난밤 이불도 덮지 않고 쓰러져 잠든 탓에 레인은 열이 올랐다. 이 때문에 왕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하는 다른 가족들과 달리 레인은 저택에 머무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으니 아쉬울 건 없었다. 오히려 레인과 동행하려고 했던 결정이 의외였다. 왕궁에 가면 유르딘을 만날 수 있겠지만, 괜히 레스터나 카이렌과 엮여 안 좋은 모습을 보여 주느니 혼자 있는 게 훨씬 더 나았다.

평소엔 한 번 열이 나면 일주일은 꼼짝도 못하고 침대 신세를 졌으나, 최근 꾸준히 약을 먹은 덕분에 상태가 안정된 터라 조금 쉬니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 회복이 빠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절대로 즐겁게 지낼 수 없을 거로 생각한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저택에서 레인은 유르딘과 함께 웃고 떠들고 바깥에 나가 즐겁게 놀기까지 했다. 게다가 절대로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한 복수조차 희망이 보였다. 어둠 속에 흐려지는 저녁놀을 보면서 레인은 잠들었다.

깊은 밤중, 레인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는데도 반짝 눈이 떠졌다. 곧장 밖으로 나가려던 레인은 무언가가 조심성 없이 부딪치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유르딘이 저렇게 소란스럽게 들어올 사람이 아닌데……. 그러고 보면 열린 건 창문이 아니라 문이다. 레인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등불의 어스름한 빛으로 상대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카이렌의 부친인 헤레일 모드였다.

“백작님?”

잠이 덜 깨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레인은 상대를 불렀다. 카이렌이면 모를까 헤레일이 이 밤중에 레인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접점이 없다. 다만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헤레일이 조금 휘청거리면서도 다급한 걸음걸이로 곧장 레인을 향해 다가왔다. 레인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거대한 침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헤레일에게 간단히 붙잡혔다. 탁자에 등불을 내려놓은 헤레일은 고개를 들이밀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헤레일에게서는 술통에 빠진 것처럼 지독한 술 냄새가 났다. 헤레일은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레인을 몸으로 억누르고는 레인의 턱을 잡아 자신을 향하게 돌렸다. 헤레일의 눈은 초점이 맞지 않고 잔뜩 흐려져 있었다. 레인은 이불을 꽉 쥐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제게 일어난 현실을 부정하며 레인은 최대한 침착한 태도를 가장했다.

“많이 취하셨습니다.”

헤레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얼굴로 레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헤레일이 흥분한 게 고스란히 몸에 닿아 토할 것 같았다. 제발 얌전히 물러나기를 빌며 레인은 헤레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였다. 한참 만에야 침입자가 뻔뻔스레 입을 열었다.

“슈리아, 그 개잡년과 닮았군.”

“……뭐?”

“개 같은 년, 나랑 결혼했으면 그렇게 뒈질 일이 없었을 텐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연함을 가장했던 얼굴이 분노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딜란이 죄를 뒤집어씌워 슈리아를 죽였다면, 거기에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최측근이던 모드 백작가의 헤레일이 개입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인간 이하의 작자에게 레인이 침을 뱉었다. 헤레일은 갑작스러운 레인의 반항에 눈을 크게 떴다가 똑같이 분노했다. 헤레일의 얼굴은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솥뚜껑처럼 커다랗고 억센 손이 레인의 뺨을 쳤다. 끔찍한 힘에 머리 전체가 완전히 돌아갔다. 말이 되지 못한 신음이 나약하게 레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걸 보면서 헤레일이 낄낄댔다.

“더러운 새끼. 내 아들놈이랑 붙어먹는 주제에 고상한 척하지 마라.”

창백하게 질려 있던 가운데에서도 레인의 얼굴이 수치심에 물들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밤중에 찾아온 헤레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파서 신음하는 레인을 보며 헤레일이 더운 숨을 훅훅 내뱉었다. 염치도 모르는 짐승이 잔뜩 흥분해 하반신을 레인에게 문질렀다. 옷을 사이에 두고도 발기한 성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레인의 얼굴을 짓누를 것처럼 한 손으로 꽉 잡아 누른 헤레일은 레인이 물지 못하게 턱을 단단히 고정하고는 입을 맞췄다. 물컹하고 축축한 혀가 레인의 입술을 물고 빨며 입 안을 짓밟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토할 것 같았다. 레인은 거의 발작하듯이 몸을 벌벌 떨었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마 전까지 숱하게 경험했던 것인데도 새삼 너무나도 끔찍했다. 레인이 반항하지 못하자 헤레일은 손을 놓고 레인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레인은 그 틈을 타 헤레일의 혀를 세게 물었다.

“아악!”

조금 더 온 힘을 다해 물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레인은 헤레일이 제게서 떨어진 틈을 타 도망치려 했지만 얻어맞은 탓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멀리 도망갈 수가 없었다. 차마 침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레인은 헤레일에게 발목이 잡혀 질질 끌려갔다. 헤레일은 씩씩대며 레인의 배 위에 올라탔다.

“이 건방진 새끼가!”

바짝 열이 오른 헤레일이 손을 들었다. 한 대 맞을 각오는 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검을 단련한 손으로 주먹을 날릴 줄은 몰랐다. 입술이야 아까 진즉 찢어졌고 아예 거기에 더해 코피가 흘렀다. 무도한 힘에 머리가 쾅쾅 울렸다. 곧 죽을 사람처럼 신음하면서도 레인은 손을 휘저어 헤레일을 밀어내려 노력했다. 다시 한번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술에 취해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허공을 휘젓던 레인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얻어맞아서 어지러운 것인지 아니면 동요해서 어지러운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몸의 어느 것 하나 제어할 수 없었다.

창백하게 질린 채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레인을 본 헤레일이 더욱 흥분했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동공은 확장되고 흰자위는 기분 나쁠 정도로 새빨간 헤레일의 얼굴이 들어왔다. 막을 새도 없이 헤레일의 손이 레인의 목을 감싸 쥐었다. 작은 짐승 정도는 단번에 목을 분지를 수 있을 법한 팔뚝이 단단하게 당겨진다. 그대로 레인의 목을 쥔 커다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컥……!”

단박에 숨이 부족해졌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찾아온 고통에 반사적으로 몸은 생존을 요구했다. 그러나 헤레일의 손을 할퀴고 발버둥 쳐 봐도 파렴치한 죄만큼이나 무거운 몸뚱이는 미동도 없었다. 시야가 깜박이며 명멸했다. 사고를 이어 가기가 힘들었다. 눈물이 흘러 레인의 귓바퀴에 고였다.

온 세상이 질척이는 비탄의 소리로 가득했다. 이 세상 모든 좋은 말들은 애초에 레인과 연관이 없었다. 소망도, 행복도 레인에게는 너무도 과분한 것이라. 기나긴 어둠을 헤치는 동안 레인에게 하나도 닿지 않는 따스한 빛 무리는 환상과 다를 게 없다. 어두운 밤이, 끝없이 이어지는 절망만이 레인의 동반자일 뿐이다. 괜한 희망을 품어서는 더욱 비참한 곳으로 처박혔다. 묵직하게, 느릿하게, 레인의 의식이 지옥 같은 무저갱으로 가라앉았다. 죽음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이래서 영원히 눈 뜨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처절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 레인의 소망은 무참히 짓밟힌다. 레인의 의식은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다. 이대로 목이 졸려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살아남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렇게 끈질긴 목숨 따위는 필요 없는데. 이 목숨 내던져도 좋으니 눈앞의 헤레일을 쳐 죽일 힘을 얻고 싶었다. 헤레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괴롭게 기침하는 레인을 비웃었다.

“안 뒈졌네? 제 어미는 죽이고 저만 살아남은 놈이라 그런지 명줄 하나는 질겨.”

“이…….”

씨발놈이. 욕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눌려서 그런가 도통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데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야가 핑핑 도는 데다 귀 한쪽에서 쾅쾅거리는 이상한 소리마저 울리는 게 정상이 아니었다. 레인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발버둥을 쳤으나, 발버둥을 쳤다는 건 그저 레인의 기준일 뿐이고 의도와 달리 힘이 다 빠진 몸은 고작 들썩이는 선에서 그쳤을 뿐이다.

축 늘어진 레인을 보며 헤레일이 레인의 바지를 벗겼다. 다리를 잡아 벌리는데도 더는 저항할 기운조차 없었다. 레인은 숨을 쉬기 힘들어서 꺽꺽댔다. 익숙한 일일 뿐인데, 그냥 참고 견디면 끝나는 일인데, 평소처럼 그렇게 생각하기가 힘들어 더더욱 겁이 났다.

“제, 발, 그만…….”

레인은 다 쉰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그건 헤레일의 가학심을 끌어냈을 뿐이다.

“그래, 건방 떨지 말고 그렇게 애원해야지. 그래야 조금 예쁘게 봐 주지 않겠어.”

상대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레인의 애원이 구미가 돋는 모양새였다. 레인은 끔찍한 절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레인은 눈을 번쩍 떴다. 아까부터 울리던 소리는 머리가 아파서 나는 환청 따위가 아니라 멀리서 문을 부서져라 두드린 소리였다. 순간 유르딘이 와 준 게 아닐까 레인은 헛된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은 카이렌이었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카이렌은 한 침대 위에서 엉켜 있는 헤레일과 레인을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레인은 빠르게 기대를 접었다. 최악 속에서 또 최악이 떠오를 수 있다니, 이 빌어먹을 운은 대체 어디까지 최악으로 떨어지는 건지 그 끝을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놀란 채 서 있던 카이렌은 굳은 얼굴로 다가와 뜻밖에 헤레일을 밀쳤다. 레인이 아무리 발악해도 떼어 낼 수 없었던 헤레일이 너무도 간단하게 침대 끄트머리로 나동그라졌다. 카이렌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얼굴의 실핏줄이 다 터져 흉하게 얼룩덜룩해진 데다 목 졸린 자국이 선명히 남은 처참한 몰골의 레인을 눈으로 한 번 훑었다. 그러고는 평소와 달리 별다른 조롱도 없이 묵묵히 흘러내린 옷을 추슬러 주었다. 헤레일은 아까까지의 흥분 대신 그 이상의 분노에 찼다. 형형한 살기가 소름 돋았다.

“뭐 하는 짓이냐?”

“그만하십시오, 아버지. 이러다 죽겠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에 걱정과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레인은 얻어맞아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황당함을 느꼈다. 이러다 죽겠다고? 카이렌의 폭력은 조금 전 헤레일의 것보다 심할 때도 있었다. 지금까지 죽일 것처럼 곧잘 레인을 두들겨 패던 놈이 할 만한 걱정은 아니었다.

헤레일은 레인 이상으로 얼굴을 붉혔다. 다만 그가 얼굴을 붉힌 이유는 레인과 달리 하려던 행동이 막혔고 실패한 원인이 제 아들 때문이라는 데서 오는 분노였다. 가득 차올라 있던 분노가 폭발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 씨발새끼들이, 사람을 우습게 봐!”

헤레일이 격분해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잔뜩 취해서 우스꽝스럽게 휘청거리던 헤레일은 간신히 자세를 바로 세우고는 카이렌을 걷어찼다. 헤레일의 손찌검 한 번에 단번에 날아간 레인과 달리, 카이렌은 발 딛는 곳이 푹신푹신한 침대 위에서도 단단히 뿌리박은 양 균형을 잡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헤레일은 그것에 오히려 분이 올라 씩씩대더니 바지에 걸쳐져 있던 벨트를 빼 레인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벨트는 그대로 카이렌의 등에 내리꽂혔다. 카이렌이 레인을 가로막아 대신 맞은 것이다. 레인은 쓰러진 자신을 마치 보호하는 양 위에서 감싼 카이렌을 보며 경악해 눈을 떴다. 카이렌이 레인의 발목을 잡고 그대로 다리를 접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레인이 숨을 크게 헐떡였으나 차마 카이렌을 밀어내거나 쳐 내지는 못했다. 곧장 헤레일이 욕설과 괴성을 내지르며 벨트를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카이렌이 레인을 몸으로 감싸지 않았다면 레인의 다리라도 분질렀을 듯이 헤레일의 기세가 험악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레인은 공포에 질렸다. 꽉 졸렸던 목은 자유로워진 지금도 호흡에 어려움을 호소했다. 카이렌이 레인을 감싼 채 묵묵히 견뎌 내자 헤레일은 분을 못 이겨 한쪽에 놓인 지팡이를 가져왔다. 종종 레인이 발목을 접질렸을 때 쓰던 지팡이는 단단한 나무를 깎고 끄트머리에 금속 장식을 단 것으로 건장한 헤레일의 손에 들어가니 훌륭한 무기였다.

헤레일은 지팡이를 고쳐 쥐고 카이렌을 본격적으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미친 사람처럼 발악하며 지팡이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는 헤레일은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광인처럼 보였다. 아들을 미친 사람처럼 패는 헤레일이나, 그걸 묵묵히 견뎌 내는 카이렌이나, 두 사람 모두 모종의 광기에 익숙한 듯 보였다. 지팡이는 대체로 등을 후려갈겼으나 때로 빗맞기도 했다.

카이렌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 레인에게로 후드득 떨어졌다. 후덥지근하고 비릿한 피가 소름 끼쳤다.

“레인.”

소리치는 헤레일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카이렌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다디달고 상냥한지. 저를 끌어안은 몸이 얼마나 단단하게 보호하고 있는지. 흘러내린 피에 젖어 붉어진 눈동자가 얼마나 다정한 빛을 띠는지. 레인이 조금만 미쳐 있었더라면 그가 제 원수라는 것도 잊고 단박에 넘어갈 정도로 다정했다. 다정해서 무서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카이렌은 얼어붙은 레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몇 분을 넘게 카이렌을 패던 헤레일이 마침내 힘이 빠졌는지 지팡이를 놓쳤다. 지팡이는 큰 소리를 내며 천장에 부딪쳤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팡이를 놓친 헤레일은 손을 든 채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핏줄 선 시뻘건 눈은 획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고 침이 흐른 입가에는 거품마저 일어 있어 매우 꼴사나운 모양새였다. 그러나 몇 분을 공포에 질려 있던 레인에게는 그 모습이 두려울 뿐이었다.

코앞의 카이렌이 묵묵히 견디는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오싹하게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분노가 섞인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공포 따위는 한 점도 없는 순수한 증오에 찬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어느 모로 보나 평소에 지극정성으로 대하던 아버지에게 보일 만한 감정은 아니다. 크게 심호흡하고 눈을 깜박인 카이렌은 제 감정을 갈무리하고 나서야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멀쩡하지는 않은지 엉거주춤한 자세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 이만 쉬러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빌어처먹을 새끼들이…….”

곧 헤레일의 입에서 뒷골목의 시정잡배도 내뱉지 않을 저급한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내 제풀에 지친 헤레일은 쿵쾅거리며 방을 나가 버렸다. 헤레일이 방을 나간 걸 확인한 카이렌이 다시 몸을 숙여 레인의 옷을 정돈했다. 레인은 카이렌이 아까 다리를 놓았을 때 자세 그대로 널브러져 움직일 줄을 몰랐다.

“정신 좀 차려 봐, 레인.”

분을 억누르는 목소리에 레인은 벌벌 떨며 카이렌을 올려다보았다. 정신 차리라고 해도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중간에 의식을 잃었을 정도로 세게 목이 졸렸던 데다 잔뜩 긴장했던 탓에 당장에라도 의식을 잃을 것처럼 피곤했다.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축축 늘어지는 레인의 몸을 카이렌이 붙들어 세웠다.

“렘샤이트 후작에게 가. 가서 그에게 보호해 달라고 해.”

레인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카이렌을 돌아보았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카이렌이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남에게 레인을 뺏기느니 차라리 레인을 제 손으로 부숴 놓을 놈이었다.

“너,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어. 나는 못 막아 줘.”

뭐든 이뤄 낼 수 있다는 듯이 자신만만한 걸 넘어서 오만한 놈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동안 십수 년을 알아 오며 끔찍한 놈이기는 해도 상대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조리 박살 나고 있었다. 오늘의 카이렌은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의혹이 서린 시선을 던졌으나 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레인의 상태를 가늠해 보던 카이렌은 잠시 후 도저히 걸을 상태가 아니란 걸 확인하고는 레인을 안아 들었다. 평소라면 가볍게 안았겠지만, 얻어맞은 게 아프긴 한 건지 낮게 신음을 흘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레인이 저항하듯이 몸을 바르작거리자 카이렌이 낮게 속삭였다.

“여기 있을래? 아까 일, 마저 당하고 싶은 거야? 내가 당장 해 줄까?”

그럴 리가 없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카이렌의 도움이나마 기꺼워하며 받을 수밖에는 없었다. 레인이 못마땅해하며 인상을 찌푸리자 카이렌은 그게 또 좋다고 낮게 웃었다. 카이렌은 옷장에서 로브를 꺼내 레인을 뒤집어 감싼 채 방을 빠져나왔다.

카이렌은 그대로 중앙 계단이 아닌 하인들이나 쓰는 작은 계단으로 빠르게 내려와 막 마차와 말을 집어넣으려던 마부를 불러 세웠다. 곧장 레인을 마차 안에 밀어 넣은 카이렌은 제대로 거동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힘이 빠진 레인을 비스듬히 눕히고 나서야 덮어씌웠던 로브를 치워 냈다. 카이렌은 레인을 보며 잠깐 망설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맞췄다. 피가 터진 입술이 맞닿았을 뿐인 입맞춤은 건조하다면 건조했지만, 참고 순순히 떨어지는 게 신기할 정도로 강렬한 열망이 얽혀 있었다. 카이렌은 오래 시간 끌지 않고 곧장 마차를 빠져나가면서 그대로 문을 닫았다.

“렘샤이트 후작저로, 지체하지 말고 빨리 가라.”

마차는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인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몇 번을 미끄러지면서도 간신히 몸을 세워 창밖을 확인했다. 마차가 제대로 렘샤이트 후작저 방향으로 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간신히 바닥에 무너지지 않았던 레인은 잠깐 바닥을 보다가 그대로 토했다.

헤레일이 더럽고 역겨워서 견딜 수 없는 와중에도 레인을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건 카이렌의 태도였다. 망설임조차 없는 잔인한 손속으로 카이렌에게 도가 넘는 폭력을 행사하던 헤레일과, 그 폭력에 분노할지언정 당황도 의문도 없이 그저 감내하던 카이렌의 태도는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하루 이틀 있었던 폭력이 아니란 사실은 분명했다. 헤레일에게 순종을 가장하기 전 한 순간 드러냈던 카이렌의 분노를 레인은 코앞에서 목격했다. 언제나 오만했던 얼굴에 떠오른 선연한 분노를 떠올리자 분이 치밀었다.

차라리 카이렌이 헤레일의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저 수용했더라면 이토록 화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당하는 것은 억울해서 화를 낼 줄 아는 놈이 지금까지 잘도 레인을 마음대로 패고 짓밟았다. 그 비열한 이중성과 모순. 사랑을 속삭이면서 주먹을 휘두르는 카이렌은 인간이 아닌 괴물로 느껴졌다. 살려 달라고 비는 말도 무시하고 곤죽을 만들어 놓고 피 떡이 된 얼굴에 입을 맞추는 자를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저건 인간이 아닌 괴물이었다. 그러나 그 괴물은 사실 저도 상처 입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레인은 카이렌의 인간성이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이 끔찍했다.

“우윽…….”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기억도 감정도 모두 토해 내고 싶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머리를 좌석 아래로 빼 내밀었으나 얼마 먹지 않은 건 이미 다 토해 버린 터라 나오는 게 없었다.

그때 돌연 마차가 멈추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지스킬이었다. 마차 문을 열었던 지스킬은 잠시 말을 잊었다. 레인의 얼굴은 눈물과 피와 토사물로 더렵혀져 비참한 꼴이었다. 하지만 가장 참담한 건 비참함과 공포와 그 외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젖은 얼굴이었다. 물기 어린 푸른 눈이 지스킬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언제나 강한 척하던 여유조차 잃어버린 모습이 더없이 절박했다. 지스킬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마차 위에 올라탔다. 마차는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지스킬은 레인의 머리를 조심스레 받쳐 들었다.

“레인, 잠깐만……. 실례할게.”

지스킬은 레인의 몸에서 피 묻은 부분을 살폈다. 다행히 레인의 피는 아니었지만, 피를 제외하더라도 안심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레인의 뺨과 이마는 지나치게 뜨거웠으나 정반대로 몸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스스럼없이 자신을 만지는 지스킬의 손길에 레인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만지지, 마. 나 지금, 더러우니까…….”

“안 더러워.”

지스킬이 쓰러져 있던 레인의 머리를 제 무릎 위에 얹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급히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았다. 닦아 낼 수 있는 건 어느 정도 닦아 냈지만, 맞아서 부어오른 얼굴이나 터진 입술, 그리고 옷에 묻은 피까지 지워 낼 수는 없었다. 여전히 처참한 몰골이었다. 지스킬은 피가 묻은 손수건을 내던지고 제가 입은 코트를 벗어 카이렌이 뒤집어씌워 둔 로브와 함께 레인을 단단하게 감쌌다.

“그 씹새끼들……. 미친 거 아냐.”

지스킬은 엉망이 된 레인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분을 이기지 못한 지스킬의 목소리에는 물기마저 어려 있었다. 인간의 낯을 한 괴물의 위선이 아니라 지스킬의 진심 어린 감정이 맞닿자 안도감이 밀려들며 그제야 레인은 긴장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레인의 의식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두 사람을 실은 마차가 렘샤이트 후작 저택 안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마차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유르딘의 부관인 베른이었다. 지스킬은 레인을 안아 든 채로 베른을 따랐다. 밝은 복도는 미리 베른이 비워 둬 사람 하나 없었다. 도착한 방 안에는 미리 주치의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는 레인만을 살피기 위해 렘샤이트 후작저에 상주하는 주치의였다. 주치의는 곧장 레인을 살폈다. 처참한 몰골에 비해 기적적으로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심하게 목이 졸리긴 했어도 벌써 시퍼렇게 멍이 올라오는 것에 비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멀쩡한 편이었다. 주치의가 나가고 나서야 베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전쟁터에서부터 유르딘은 갑작스레 변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몰랐으나 유르딘을 몇 년이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며 속내를 보아 온 베른만은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베른이 아는 유르딘 니제스인데, 이따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였다. 사고방식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어 가끔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유르딘의 변화를 확실히 느낀 건 돌브 자작의 아들 마렌 돌브를 붙잡았을 때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유르딘은 고문을 선호하지 않아서 한 번 설득해 보고 정 안 될 때만 고문을 했다. 그러나 돌브 자작은 끌려오자마자 유르딘이 직접 고문했고 그는 고작 두 시간 만에 죄를 실토했다. 돌브 자작은 차라리 나았다. 마렌 돌브에 이르러서는 고문에 익숙한 지하 감옥의 간수들이 차마 버티지 못하고 자리를 피할 정도였다. 피를 본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 병사가 고문당한 마렌을 보다가 그 자리에서 토했다. 처형장으로 가는 길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렌을 보면서 베른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 정도로 유르딘의 손속이 잔인했다. 서늘한 태도는 적이나 죄인에게만 향하는 건 아니었다. 유르딘은 이전까지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던 베른이나 그란델에게조차 이따금 날카로운 감시의 눈길을 보냈다.

처음부터 헤레일이 레인에게 악감정을 가지리란 건 뻔했다. 최대한 경계하고는 있었지만 설마하니 왕궁의 중요한 연회를 중간에 빠지고 저택으로 돌아갈 줄은 아무도 몰랐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돌발 행동으로 궁을 빠져나와 레인을 덮칠 거라고는 더더욱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에 잠입시켜 둔 하녀의 말에 따르면 헤레일의 상태는 단지 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두 눈이 시뻘건 것이 영 이상했다고 한다. 사실 예의 주시하고 있던 건 카이렌 쪽이었으나, 이번 건은 정황상 헤레일의 짓임이 확실했다.

베른이 이를 악물었다. 미리 방비한다고 했는데 결과는 최악이었다. 아주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은 것 같지만, 일단 레인이 다친 것부터가 상황이 몹시 나빴다. 안 그래도 레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강력히 대응하는 유르딘이 이번 일로 어찌 나올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졌다.

“으…….”

그때 레인이 신음을 흘리며 가늘게 눈을 떴다. 지쳤을 테니 오래 잘 것으로 생각했는데 금방 깨어났다. 그러나 곧장 정신이 들지 않는지 혼란스레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베른은 일어나려고 애쓰는 레인을 도닥이며 눕혔다.

“레인 님, 정신이 드십니까? 렘샤이트 후작 저택입니다. 안심하십시오. 후작께서도 곧 오신다고 하셨으니…….”

“싫……. 오지 마시라고, 하세요.”

긴장을 푸는가 싶었던 레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엉망인 몰골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레인에게 지극정성인 남자가 얼마나 안타까워할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유르딘이다. 유르딘과 눈빛을 교환한 베른과 지스킬은 짧게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창백한 얼굴의 유르딘은 두 사람은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레인에게로 다가왔다. 급하게 치료했으나 폭력의 흔적은 여전히 레인의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레인이 어색하게 시선을 마주하자 유르딘은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레인의 손을 붙잡았다.

“미안하다. 내가 보기 싫어도 잠시만, 잠시만 지켜보다가 가마.”

“그런 거, 아니에요.”

목소리가 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문밖에서 이야기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레인은 목을 큼큼 가다듬고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움직여 유르딘의 손을 맞잡았다.

“그냥 이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리기는 싫어서…….”

애써 웃어 봐도 유르딘의 묵직한 분위기가 가볍게 바뀌지는 않는다. 옷에 피를 묻힌 채 커다란 침대 위에 파묻혀 있는 레인의 모습은 마치 하얀 꽃으로 뒤덮인 관 속의 시체를 연상시켰다. 가장 참담한 기억 속의 재현이다. 유르딘의 목이 꽉 막혀 왔다.

“나 때문이다. 지켜 주겠다고 했는데, 그거 하나 지키지 못해서…….”

예상대로의 반응에 레인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이게 왜 유르딘 잘못인가요? 백작이 그럴 줄은 누구도 몰랐으니까요.”

“내 잘못이야.”

“아니…….”

재차 부정하려던 레인의 말이 유르딘의 손길에 막혔다. 느릿하게 올라간 손이 피에 젖은 레인의 셔츠에 닿았다. 살갗이 닿은 것도 아닌데 몹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유르딘이 크게 숨을 삼켰다.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유르딘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건 누가 이런 거야.”

“제 피가 아니라 카이렌 피예요.”

“그놈이 그랬나?”

“아뇨. 오히려 정반대인데…….”

단순한 부정일 뿐인데 마치 변호하는 것 같아서 레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흐렸다.

“모드 백작이 그랬어요. 카이렌은…….”

카이렌은 레인을 도와주며, 걱정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도 한 편의 부조리극처럼 현실성이 떨어지는 문장이었다. 맥 빠지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카이렌은 절 걱정해 줬어요. 백작에게 얻어맞는 저를 구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도와주더라고요?”

같잖은 일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려 애썼지만 치미는 감정을 모두 억누르기는 힘들었다. 레인은 충동적으로 유르딘의 손을 꽉 붙잡았다. 시선을 마주할 용기까지는 없어서 공연히 새하얀 침대 끄트머리를 노려보았다.

“유르딘이 제가 겪은 일에 대해 얼마나 자세히 아시는지 모르지만, 다는 몰라도 대충은 알고 계시겠죠. 레스터와 카이렌이 저를 괴롭혔어요. 심하게 괴롭혔지요. 어릴 때는 정말 그들이 괴물처럼 느껴져서 무서웠어요. 동시에 억울했어요. 그 둘은, 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제가 죄인의 핏줄이라며 괴롭혔지만, 저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요.”

“당연하지.”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유르딘의 확신이 기뻤다. 레인이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자세가 무너지자 급히 다가온 유르딘이 레인을 일으켰다. 그대로 멀어지려 하는 유르딘에게 레인은 몸을 기댔다. 딱히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유르딘은 레인이 바라는 대로 가만히 앉아 그를 지탱했다. 다정한 온기가 레인을 안락하게 만든다.

“카이렌이 제 아버지에게 얻어맞으면서 화를 삭이더라고요. 아버지에게 맞는 아들이라니, 화가 날 만하지요. 맞는 게 억울한 줄 아는 놈이 나는 왜 괴롭혔을까…….”

“깊게 생각하지 마, 레인.”

부드럽게 속삭이며 유르딘은 레인을 끌어안았다.

“언젠가는 죗값을 치룰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아무 죄도 없는 인간을 함부로 밟는 자들은 끔찍했다. 유르딘은 그런 사람들과 달랐다. 전쟁 영웅인지라 그 손에 많은 사람이 스러졌음을 알고는 있지만 평소에는 타의 모범이 되는 완벽한 기사였다. 최소한 레인이 아는 유르딘은 그러했다.

레인은 그런 유르딘을 사랑했다.

안락한 품에서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들었던 레인은 해가 머리 위에 가깝게 뜬 시간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몸이 지독하게 무거웠다. 무리한 날에는 언제나 따라오는 익숙한 감각이다. 온몸의 기운이 모조리 소진되어 단 한 방울도 남지 않고 탈탈 털린 듯한 고갈이 느껴졌다. 무거운 숨을 내쉰 레인은 눈을 굴려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침대 옆 의자에 유르딘이 앉아 서류를 읽고 있다가 레인이 깬 소리에 서류를 밀어 놓고 있었다. 레인이 일어나려고 하자 급하게 베개를 허리에 받친 채 앉혀 준 유르딘이 물을 따라 건넸다.

“일어나지 마라. 안정하는 게 좋아.”

유르딘이 사용인을 부르기 위해 줄을 잡아당기는 걸 보면서 레인은 물을 마셨다. 물은 신경 써서 데워 둔 듯 조금 따끈했다.

푹신한 베개에 몸을 묻고 나서 문득 내려다본 옷은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유르딘이 갈아입힌 걸까? 이런 잡다한 일은 하인에게 시키는 게 더 말이 됐지만, 워낙 지극정성인 유르딘이니 그에 한해서라면 직접 했다는 가정이 더 그럴싸했다. 잠든 레인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옷을 갈아입혔을 유르딘이 쉽게 상상됐다. 고작 옷을 갈아입히는 데 이 세상 가장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진지해졌을 표정과 섬세하게 움직였을 단단한 손끝을 상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레인?”

“아뇨, 그냥.”

레인이 웃음을 삼키는 걸 본 유르딘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밤새 혹여나 레인이 이 일로 깊이 상심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게 한 순간에 풀어졌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왔다. 레인은 침대 위에 차려지는 식사를 보다 순식간에 미소를 지우고 잔뜩 얼굴을 구겼다. 하녀가 나가고 나서 레인은 꾹 참고 있던 투정을 내뱉었다.

“이게 뭔가요?”

그야말로 괴상한 음식들의 향연이었다. 소화하기 쉽도록 조리해 으깨거나 자르거나 잘게 갈아 두었는데도 음식의 기괴함을 다 감출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색이 거무칙칙한 데다 냄새가 지독했다. 설마 이걸 먹으란 건 아니겠지. 부정해 주기를 바라며 레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유르딘을 보았다.

“몸에 좋은 음식이다. 체력을 보충해야 할 것 같아서.”

“이, 이건 너무 심한데요.”

도저히 못 먹겠다. 레인의 경악한 표정을 보던 유르딘은 갑자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레인에게 손짓했다.

“레인, 이리 와 봐라.”

“네?”

“어서.”

오라고 말하는 이유는 뻔했다. 레인은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한 번 무너지고, 침대에서 내려오려다가 미끄러져 결국 유르딘의 부축을 받아 얌전히 기대고 앉았다. 마지막 희망을 담아 불쌍한 눈으로 유르딘을 올려다봤지만, 유르딘은 전에 없이 단호했다.

“먹자.”

“……네.”

다른 것도 아니고 레인의 건강을 걱정하는 건데 어린애처럼 끝까지 고집을 세울 수도 없었다. 결국, 레인은 눈물을 삼키며 쓴 냄새가 나는 보양식을 모두 먹었다. 그래도 지독한 냄새에 비해 맛은 그렇게까지 끔찍하지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 먹을 만했다는 수준일 뿐이지 두 번 다시 먹고 싶지는 않았다. 간신히 다 먹고 입 안을 헹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르딘은 직접 성큼성큼 다가가 문을 열었다. 빼꼼 열린 문틈으로 하녀의 치맛단이 보였다.

“부른 적이 없을 텐데.”

“아이제나흐 공작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른하게 늘어졌던 몸이 단박에 긴장했다. 저택에서 일어난 일이라 어제의 소란은 분명 딜란의 귀에 들어갔을 테니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는 아니었다. 레인이 걸어오려다가 발을 삐끗해 요란하게 넘어지자 유르딘이 놀라서 달려와 레인을 침대 위에 올렸다.

침대 위로 다시 올라간 레인은 하녀가 따라 들어왔음을 발견했다. 주인의 허락도 없는데 사용인이 멋대로 방 안에 들어오는 건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짓이지만, 하녀의 태도는 참으로 방만했다.

방으로 들어온 하녀는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레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레인은 하녀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의 기시감을 느꼈으나 막상 정확하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떠오르지도 않는 기억을 뒤집는 대신, 레인은 당장 궁금한 걸 물었다.

“무슨 연락이 왔지?”

“‘당장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밖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가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유르딘이 선수를 쳤다.

“나을 때까지는 보내지 않는다고 해라.”

“후작님!”

직접 마차까지 보낸 딜란의 명을 멋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강경한 태도의 유르딘은 레인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녀가 곤란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나가.”

하녀가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유르딘은 가차 없이 축객령을 내렸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유르딘과 레인을 살피던 하녀는 결국,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가야 해요, 유르딘. 공작이 절 오해할 거예요.”

“뭐라고 하든 제멋대로 생각할 자다.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아.”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공작이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해라. 쓸데없는 개소리니까.”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결국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딜란이 레인에게 무슨 말을 할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레인을 비난했으면 비난했지 옹호하지는 않을 텐데, 본심은 굳이 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침대도 혼자 못 내려갈 정도로 상태가 엉망인 건 사실이니 변명거리도 있었다. 레인이 순순히 포기하자 유르딘에게서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유르딘이 인상을 썼다.

“마차라면 돌려보내도록 해.”

“그건 돌려보냈습니다. 접니다.”

베른의 목소리였다. 위로 치켜 올라갔던 유르딘의 눈썹이 반대로 내려갔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른이 화를 꾹꾹 참는 얼굴로 방 안에 들어왔다. 유르딘은 난처한 얼굴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고 그게 베른의 화를 돋웠다.

“대체 얼마나 여기 계시려고요? 어제 갑자기 뛰쳐나온 일의 수습은 하셔야지요!”

“베른, 여기서 말하지 말고…….”

“며칠 전에도 그래요, 편지 한 통 받자마자 다 팽개치고 쌩하니 달려가시고! 그래요, 가는 건 좋아요.”

이걸 들어도 되나 고민하면서도 귀가 열렸으니 어쩔 수 없이 듣고 있던 레인은 조금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깜박였다. 며칠 전에 편지 한 통 받고 쌩하니 달려갔다는 말은, 분명 유르딘에게 저택에 가지 못할 거라고 이야기를 남겼을 때의 일이다. 너무 갑자기 왔다 싶었는데 진상은 훨씬 더 충동적이었다. 베른이 홱 고개를 돌려 보는 통에, 레인은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잽싸게 지웠다.

“그래도 놀지 말고 일은 하셔야죠. 안 그렇습니까?”

말이 질문이지 베른의 열렬한 눈빛이 필사적으로 레인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유르딘의 편을 들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과로로 눈 밑이 퀭한 베른이 안쓰러웠다. 난처한 얼굴의 유르딘과 폭발 직전인 베른을 번갈아 보던 레인은 결국, 베른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일은 하셔야지요.”

“음…….”

베른의 수십 마디보다 레인의 한마디가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유르딘의 얼굴은 조금 우울해졌으나 반대로 베른의 표정은 활짝 폈다. 당장 가자는 베른의 말을 무시하고 유르딘은 움직이기 힘든 레인의 주변에 책이며 물을 놓아주고 자리를 정돈하는 등 온갖 것들을 손수 살폈다. 어차피 줄을 잡아당기면 사용인이 올 텐데 걱정도 참 많았다.

결국, 레인이 유르딘을 말리고 나서야 그는 미련 넘치는 얼굴로 일어섰다. 베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당장 유르딘의 등을 떠밀었다.

“자, 자. 오후에 바짝 일하고 저녁때 쉬시면 되겠지요.”

“레인,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라.”

“네, 그래요. 언제든 편하게 부르세요. 그러니 유르딘 님도 레인 님이 부르시기 전까지 딴생각 말고 열심히 일하시다가 부르실 때 오시면 됩니다.”

“저녁에 올 테니까…….”

“이렇게 시간 끌면 저녁에 못 오십니다.”

베른은 유르딘의 구구절절한 미련을 잘라 내며 기어이 방을 나서 문을 닫았다. 나가기 전 베른이 고맙단 듯이 씩 웃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두 사람이 어느 정도 방에서 멀어졌겠다 싶을 때쯤 레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냥 곁에 있어 달라고 고집을 부릴 걸 그랬나. 혼자 남자 다시금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레인을 정복할 대상으로만 보던 헤레일도, 다정한 척하던 카이렌도 모두가 끔찍했다.

카이렌의 다정함을 처음 본 건 아니었다. 레인이 모든 걸 외면하고 틀어박혀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카이렌은 전에 없이 다정하게 입 안의 혀처럼 굴었다. 무너지기 직전의 레인을 완전히 손에 넣기 위해 가장한 거짓된 다정함이었다. 그 외에는 항상 한결같았다. 카이렌의 걱정하는 말처럼 우스운 게 없었다. 한때 레인은 카이렌이 자신의 소유욕을 레인을 죽이는 것으로 완성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카이렌은 레인을 향한 폭력의 수위를 밑도 끝도 없이 높였다.

레인은 시퍼렇게 멍든 목을 매만졌다. 어제는 한 번 기절했던가? 레인은 카이렌에게 하룻밤 사이에 대여섯 번 목을 졸려 그만큼 기절했던 적도 있었다. 걷어차거나 손찌검을 하거나 발로 밟는 건 온건한 축에 속했다. 카이렌은 레인으로 사람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실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굴었다. 폭력은 집요했고 때로는 창의적이었다. 아주 조금씩 수위를 높였기에 카이렌은 매번 레인의 죽음 직전에서 능수능란하게 조절했다. 자주 기절하거나 아예 며칠간 의식을 잃으면서도 레인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차라리 한 번이라도 실수했으면 진작 편해졌을 텐데.

“아냐…….”

순간적으로 떠오른 충동을 부정하며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도래했던 악몽은 이미 끝났다.

이곳은 유르딘의 저택, 두려워할 게 하나도 없는 안락한 품이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죽을 수 없었다.

레인은 제게 찾아온 끔찍한 생각을 몰아내려 유르딘이 옆에 쌓아 둔 책을 들었다. 집중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우울한 생각은 다시 레인의 안으로 가라앉았다. 다행히도 책을 읽으니 시간은 쏜살같이 갔다.

슬슬 짧아지는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처음 보는 얼굴의 하녀가 들어와 유르딘은 저녁 식사 후에야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필사적으로 일을 일찍 끝내고 올 것처럼 말했는데 일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었다. 저녁을 가져다 달라고 말한 레인은 문득 떠오른 게 있어서 나가려던 하녀를 불렀다.

“혹시… 아까 우리 가문의 마차가 온 걸 내 방에 알리러 온 하녀가 누군지 아나?”

“아, 라사 님요?”

“라사?”

“네. 하녀장이신 라사 켈슨 님이에요.”

라사 켈슨. 기억에 있는 듯도, 없는 듯도 한 이름이었다. 이름도 성도 흔한 편이니 어디서 몇 번 비슷한 이름을 들어서 기억한다고 착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레인은 하녀를 내보내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누군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대인데, 이름을 듣자마자 갑자기 불쾌해졌다.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져서 레인은 고스란히 식사를 남겼다.

정말로 저녁때가 되어 찾아온 유르딘은 레인이 식사에 손도 대지 않은 걸 보고 몹시 걱정했다. 유르딘이 주방장을 채근해 온갖 종류의 음식을 새로 만들어 내는 걸 보고 결국 적은 양이나마 식사를 했다. 유르딘은 왜 레인이 식사를 하지 않았는지,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는지 궁금해했지만 레인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찝찝한 기분을 털어 내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행동하다 보니 금세 라사에 대한 기묘한 의심은 차츰 가라앉았다.

렘샤이트 후작저에서 머무르는 날은 금세 지나갔다. 신관에게 축복을 받은 덕에 얼룩덜룩했던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목만은 여전히 희미하게 멍이 남아 있었다. 레인은 크라바트와 깃을 세운 코트로 멍을 가렸다. 이대로 아카데미에 곧장 돌아가고 싶었으나 아래에 아이제나흐 공작가에서 보낸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르딘과 짧은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레인은 집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올렸다. 푹 자고 일어났음에도 벌써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고요한 저택은 평소보다 무거운 분위기였다. 잔뜩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집사가 레인을 딜란에게 안내했다. 레인이 향한 곳은 대대로 아이제나흐 공작이 업무를 보는 집무실이었다. 레인이 들어가자 두꺼운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딜란은 레인을 무시한 채 한참 동안 서류를 살피다가 다리가 아파질 무렵에야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레인을 바라보던 딜란은 레인의 속이 바짝바짝 마를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렘샤이트 후작과는 제법 친한 사이인 모양이구나.”

이 상황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한 적 없는 말이었다. 하필 헤레일과 지저분한 일이 있었던 상황에서 유르딘의 이름이 나온다는 게 좋은 의미일 리 없었다. 레인이나 유르딘이나 둘 다 그리 순수한 감정만을 품고 교류하는 게 아니니 더욱 그랬다. 레인은 동요를 드러내는 대신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여상히 답했다.

“조금 신경 써 주시는 모양입니다.”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레인이 유르딘을 사랑하며, 어쩌면 유르딘도 그런 것 같다는 말을 하면 딜란은 뭐라고 할까? 웃으며 축복할 리가 없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대답하는 대신 딜란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는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딜란의 손끝이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헤레일의 일은 술을 많이 마시고 한 실수니 신경 쓰지 말아라.”

대수롭지 않다는 결론이다. 예상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래도 화가 나서 레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레인을 딜란은 찬찬히 관찰하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재어 보는 시선에 더 화가 치밀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레인은 결국 속에 담아 놓고 꺼내지 않으려 했던 말을 토해 냈다.

“실수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실수로 왕궁에서 여기까지 와서, 사람이 자는 방에 쳐들어오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자는 분명…….”

“그러면 어쩌자는 거냐.”

딜란은 그리 길지도 않은 말조차 따분해하며 레인의 말을 잘랐다.

“모드 백작가가 오랫동안 우리 가문의 우군이었음을 너도 모르지는 않을 터다. 고작 술을 마시고 네게 소란을 피운 일로 헤레일을 쳐 내기라도 하라는 말이냐? 그는 유능한 자다. 고작 이런 일로 내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물론 이해받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정면으로 무시당하는 건 역시 뼈아팠다.

“더욱이 헤레일은 네가 유혹했다고 하던데.”

“말이 되는 소릴…….”

“예전부터 넌 문제가 많았지. 천박한 건 누굴 닮은 것인지 모르겠어. 네 어미가 멍청하긴 했어도 천박한 버릇은 없었는데.”

꼭지가 돌았다. 집에서 쫓겨나든, 아니면 유폐되든, 그런 계산 따위가 사라지고 순수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적의를 감추지 않고 노려보는 레인을 딜란은 모자란 것 보듯이 하찮게 봤다.

“그간 잘 참더니 말 몇 마디에 발끈해 달려드는 거냐? 네 어미가 얼굴만 반반한 천치 같은 년인 건 왕국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텐데. 제 어미에게 교육을 못 받아서 그런 건지…….”

이를 득득 갈던 레인이 어느 순간 웃었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딜란을 희번덕이며 노려보았다.

“교육은 아나벨에게 받았지. 그 여자가 별채까지 소중한 형님을 보내 주지 않았어? 그 둘이 나를 이렇게 키웠지. 내가 천박하다면 그것들에게 배워서 그런 거야. 어머니를 죽게 해 놓고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미숙하군. 요 며칠 죽 지켜봤다만 영 미숙해. 금세 흐트러지고, 감정적이고 허술하고……. 쓸데없는 말이 많아. 그래도 주눅 들지 않고 기세 좋은 것 하나는 쓸 만하구나.”

뜻밖에도 딜란은 가볍게 웃었다. 갑작스러운 칭찬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레인을 물끄러미 보던 딜란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최근 레스터가 이상한 걸 알고 있느냐.”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남들 보는 앞에서 유르딘을 죽이려고 덤벼들다가 발작하는 것도 봤으니. 답을 하는 대신 노려보자 딜란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야 영… 못 써 먹지.”

“무슨… 말을.”

써 먹다니? 20년 넘게 귀애한 아들을 칭하는 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잔혹하고 무감정한 말이었다. 마치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을 보는 것처럼.

“네가 후계자가 되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딜란은 몹시 간단하고 당연한 일을 말하듯 했다. 레인은 딜란의 얼굴을 낯설게 응시했다.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았거니와 애초에 딜란과 레인이 이런 유의 농담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당혹스러웠다.

레스터는 딜란의 아들이었다. 레인도 물론 딜란의 아들이었으나, 레인을 태어나게 한 것 외에 딜란이 별달리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레스터나 유니는 달랐다. 정략결혼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들, 진짜 그의 자식들이었다. 딜란은 슈리아는 그렇게 잔인하게 치워 버린 주제에 제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는 지극정성이었다. 레인은 별채에 갇힌 채 딜란이 손수 어린 시절의 레스터나 유니를 안고 다니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

그 모든 게 착각이었나? 아니면 사랑한다고 해도 결국 이 가문의 명예를 세우는 데는 결함 있는 아들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소름이 돋았다.

하긴, 저자는 레인을 내치기 전 6년간 모두가 속을 정도로 다정한 아버지였다. 레인을 안아 들면서 무거워졌다고 웃으며 뺨에 얼굴을 비비던 남자를 기억한다. 잠들기 전 침실에 찾아와 이마에 입을 맞추고 속삭이던 감촉과 목소리가 생생하다. 그게 다 거짓이었다. 아내가 아니라 키우는 개나 고양이라도 7년간 애정을 부으면 정이 들 법도 한데 그 긴 세월을 동침한 아내에게 기어이 독을 먹인 남자가 딜란이었다. 슈리아가 딜란에게 나쁜 짓을 했던 것도 아닌데 거슬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계략을 꾸며 가문을 몰살시킨 비인간적인 남자가 제 아들이랍시고 끝까지 안고 갈 리가 없다.

레인을 푸줏간의 고기처럼 살피고 따져 보는 냉철한 눈빛이 화가 난다기보다는 두려웠다. 이자가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아니라면 무언가? 레인이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놀라운 시선으로 딜란을 응시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만약의 이야기다. 넌 명석하기는 해도 그뿐이지. 너무 약하고 소문도 나쁘고. 욕심이 있다면 제대로 해라. 괜한 일에 흥분하지 말고. 너도 그렇게 한심하게 살기보다는 공작 위를 잇는 게 좋지 않겠느냐?”

“하실 말씀이 다 끝났다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새삼스러운 힐난이 불쾌하지도 않았다. 별거 아니란 듯이, 지극히 당연한 순리를 말하듯 태연한 딜란이 소름 끼칠 뿐이었다. 딜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몸을 돌렸다. 붙잡지는 않았으나 딜란이 뒤에서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레인은 시야에 스치는 것들을 모조리 무시했다. 계단 위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아나벨을 지나쳐 제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은 그날의 악몽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물건의 배치를 바꾸면 그만인 방 안처럼, 딜란에게는 아들들 또한 제 맘대로 바꾸는 후계자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레인에게 피와 살을 물려준 아버지였으나 이전부터 아버지로 느껴지지도 않던 작자였다. 지금에 와서는 딜란이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괴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끼던 제 아들조차 부품으로 보는 작자이니 몇 년을 속여 슈리아를 죽이고 레인을 내치는 것 정도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가 아팠다. 이 지경까지 와서도 무의식중에 딜란의 후회와 사과를 바라고 있었는가? 매번 딜란에게 새삼 실망하는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져 괴로웠다. 이 방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저택 사용인의 손을 빌리고 싶지도 않았다. 레인은 미처 챙기지 못했던 짐을 가방 속에 쑤셔 넣었다. 되는대로 쑤셔 넣던 레인이 어색하게 멈췄을 때, 문이 열렸다.

“오라버니.”

유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레인은 책상 위에 올려진 작은 조각을 손에 쥐었다. 서늘한 시선으로 돌아보자 유니는 조금 겁을 집어먹은 기색으로 레인을 살피면서도 꿋꿋이 방 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레스터 오라버니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는 게 정말이에요?”

“그렇다면 어쩔 건데?”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몸을 움츠리는 유니를 보면서도 레인은 말을 참지 못했다.

“할 수만 있다면 진작에 그랬을 거야. 그건 원래 내 자리였어. 레스터의 자리가 아니었다고.”

“전, 오라버니들이 싸우지 않았으면 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쉽게 말하지 마.”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유니가 비명처럼 외쳤다. 희게 질린 유니는 푸른색 드레스 자락을 꾹 붙잡은 채 덜덜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레스터 오라버니가 오라버니에게 뭔가 잘못, 잘못을 한 거죠. 아버지도, 어머니도… 오라버니를 괴롭히고, 저, 저희는 만난 적도 별로 없잖아요. 그래도 가족인데…….”

가족이라니. 여상히 들리는 말이었다. 아이제나흐의 성을 단 사람들 중 슈리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눈앞의 유니에게 그나마 잘해 주는 것은 소녀가 제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어린아이이기 때문이었다. 베델 후작가가 멸문한 후 제게 가족은 없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눈앞의 유니는 너무 자연스레 저를 가족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게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제 원수들의 자식일 뿐인데. 레인은 손을 내저었다.

“소리 높여서 미안해. 그런 문제는 신경 쓰지 마. 어른들 일이니까.”

“저도 이 가문의 일원인걸요. 요즘은 레스터 오라버니도 이상하고…….”

“이상하다니?”

“모르겠어요……. 오라버니랑 싸운 거예요?”

“그런 건 아니야.”

“다들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무리인 건가요?”

레스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니까, 레인이 레스터를 죽여 버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소리다. 이 아이도 자라서 얽혀 있는 사연을 알게 되면, 언젠가는 이런 순진한 질문을 하지 않는 때가 올 터였다. 레인이 대답하지 않자 유니가 울상을 지었다. 레인은 한숨을 쉬며 유니에게 제가 들고 있던 조각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선물이야. 별로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에 유르딘과 함께 축제에 나갔을 때 충동적으로 산 작은 토끼 조각이었다. 유니보다도 더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조각을 단단히 움켜쥔 유니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뇨. 좋아요. 이런 건 처음 가져 보는걸요.”

그렇겠지. 비단이나 상아로 만든 고급스러운 인형이 넘쳐날 텐데, 오히려 너무 싸구려라서 가질 기회가 없었을 터였다. 레인은 유니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대충 챙겨 둔 짐을 들었다.

“레스터는 내가 살펴볼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으나 유니는 퍽 안심한 기색이었다. 레인은 도망치듯 유니의 곁을 지나쳐 저택을 가로질러 곧장 마차에 올랐다. 어찌나 빨리 걸어왔는지 숨이 찼다. 레스터를 살펴본다고 한 말 자체는 거짓이 아니었다. 딜란이나 유니가 심각하게 여길 정도로 레스터가 이상해졌다면 어딘가 이용할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함일 뿐이다. 의심을 모르는 말간 눈이 마음에 박혔다. 유니의 존재가 지금까지 레인이 겪어 온 불행과 고통을 없던 것으로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순진무구한 동생의 존재는 그 아이에게 선물했던 작은 조각처럼 레인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자꾸만 그를 어지럽혔다.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마차는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기숙사로 돌아온 레인은 가장 먼저 지스킬을 찾아갔다. 난생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찾아가 레스터를 만나 볼 생각이었다. 하릴없이 뒹굴던 지스킬은 어디 좀 가자고 하니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가, 레스터에게 간다고 하니 가지 말라고 정색을 했다.

“그럼 나 혼자 가?”

레인의 말에 지스킬은 결국 구시렁거리면서 레인을 따라나섰다. 계단을 연거푸 오르락내리락했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생 끝에 간신히 방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없나 본데?”

잠시 문을 노려보던 레인은 말없이 문고리를 확 돌렸다. 잠겨 있지 않은 문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열렸다. 촛불 하나로만 불을 밝혀 어두침침한 방 안에서는 후덥지근하고 비린 공기가 훅 끼쳤다. 레인이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확 튀어나왔다. 지스킬이 경계해 레인의 앞을 막아섰으나, 나온 건 엉망으로 얻어맞아 얼굴 성한 곳이 없는 헐벗은 소년일 뿐이었다. 소년이 지스킬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사, 살려, 살려 주세요.”

소년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레인이 인상을 찌푸리는데 방 안에서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들렸다.

“죽인다고 한 적은 없는데. 고작 그 정도로 죽는다고 벌벌 떠는 거야?”

안에서 천천히 레스터가 걸어 나왔다.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던 레스터의 옷 곳곳에는 피가 튀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볼 것도 없이 소년의 피였다. 레스터가 소년을 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웃고 있는데도 웃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가면 같은 얼굴이었다.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말하는 레스터의 손에는 피로 흠뻑 젖은 망치가 들려 있었다.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함인지 자루에는 천이 둘둘 감겨 있는데 완전히 붉은색이었다. 지스킬은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소년을 뒤로 숨겼다. 레스터는 그걸 가만히 보면서 장난처럼 망치를 가볍게 휘둘렀다.

“그거 알아?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안 죽어. 레셈프틸이라고 보통 고문에 쓰이는 마법석이 있어. 약초와 마력을 지닌 보석을 조합해 마법석을 만드는데, 이게 있으면 누구든 간단하게 마법을 쓸 수 있거든. 그걸 쓰면 살을 갈라도 피가 많이 흐르지 않고, 마법의 효과가 다할 때까지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의식을 잃을 수도 없어. 지스킬 마이어, 너는 알걸? 군에서 고문하는 데 종종 쓰니까.”

“몰라. 렘샤이트 후작께서는 그런 걸 사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어.”

“뭐? 으, 흐, 하하하하하하!”

레스터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몸을 접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우스워 죽겠다는 얼굴로 마구 웃는 레스터의 손에서 망치가 날아가 벽에 맞고 떨어졌다. 소년은 기절할 것처럼 몸을 떨며 지스킬에게 몸을 붙였다.

“너 미쳤어?”

“그럴지도……. 후, 흐흐, 하하하…….”

레인의 말을 쉽게 수긍하며 히죽대던 레스터가 어느 순간 웃음을 갑작스레 멈췄다.

“왜, 아버지가 내가 미쳤으니까 네게 공작 위를 물려주겠대? 좋겠네, 레인.”

눈이 희번덕이며 빛나는 꼴이 완전히 미친놈이다. 레인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원래도 이상한 놈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정도가 심했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광기가 넘실대며 레스터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옆에서 지스킬이 아예 기절해 버린 소년을 등에 업고 그만 가자며 레인을 재촉했다. 레인은 눈을 희번덕거리는 레스터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지스킬을 따랐다.

일단 급한 대로 의원을 찾아가니, 의원은 소년의 꼴에 깜짝 놀라며 곧장 치료했다. 피가 여기저기 튀어서 그렇지 생각보다 출혈도 많지 않았고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준은 아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소년은 시종일관 안정하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뒷골목 애인 것 같은데요. 어느 도련님이 들였대요? 그쪽 도련님에게 말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의원이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소년이 깜짝 놀랐다.

“안 돼요! 그분께 절, 절, 저를 보내지 마세요. 그분이 절, 사… 산 채로, 여섯 조각을 낸다고 했단 말이에요. 제발요.”

“알았으니까 진정해.”

거의 거품 물고 기절할 기세의 소년을 급하게 안정시키려 했으나 겁에 질린 소년은 이내 발작하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이런 상태의 소년을 레스터에게 보낼 수는 없었다. 의원은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소년의 몸을 살폈다.

“레인 님, 어쩌실 건가요? 이대로 돌아가면 여섯 조각까지는 아니라도 죽을 때까지 얻어맞기야 할 것 같은데.”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낼 수는 없어. 빼돌리든가 해야지.”

“제가 도와 드릴까요?”

“그럴 수 있겠어?”

“아카데미에서 사람 하나 빼돌리는 건 아무래도 여기 소속인 제가 낫지요. 들키면 레인 님이 도와주실 거죠?”

“당연히.”

레인은 품에서 금화를 꺼내 건네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지스킬은 레스터의 방을 나올 때부터 시종일관 찝찝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레인의 방으로 함께 들어오자마자 질색을 하며 제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완전히 미친 거 아니냐? 네… 형.”

“그러게.”

딜란의 말을 들을 때만 해도 레스터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남들의 눈이 있는 아카데미에서 이 지경이니 영지나 저택에서는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아까 그 망치, 피를 한두 번 먹은 게 아니야. 설마 망치를 못 구해서 피 묻은 걸 주워다가 쓰겠어? 자기가 쓰다 묻은 거겠지.”

말하면서도 소름이 끼치는지 지스킬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둠 속에서도 망치는 붉은 철로 제련해 만든 양 기분 나쁜 빛이었다. 레인은 아까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있던 레스터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던 형형한 눈동자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레인은 가볍게 숨이 막혔다. 레스터가 무표정한, 혹은 광기에 어린 얼굴로 소년에게 망치를 내려치는 걸 생각하니 쭈뼛 소름이 끼쳤다. 수없이 겪었던 유사한 기억 탓에, 방에서 살려 달라고 오열하며 도망쳐 나오는 피해자가 소년이 아닌 자신으로 뒤바뀌어서 상상이 됐다. 레인을 노려보던 그 얼굴과 눈동자. 정말로 내려치고 싶은 건 눈앞의 소년이 아니라 레인이라는 듯이 두 눈은 증오에 가득 차 있었다. 레스터가 레인을 싫어했던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이번은 정도가 심했다.

숨이 갑갑했다. 또다시 레스터가 레인의 머리채를 잡아 쥐고 그날처럼 물속에 반복해서 처박을 것만 같았다. 손톱을 세워 바닥을 긁으며 도망치려 애쓰다가도 맥없이 붙잡혀 물속에 머리가 처박히고, 욕조에 머리가 찍히고, 핏물 섞인 물을 억지로 마시며 죽음을 생각했던 그날이 레인을 덮쳤다. 아니. 레인은 떠오르는 생각들을 부정하려고 노력했다. 다 지난 일이며 그런 날은 또 오지 않는다. 그러나 유년 시절을 뒤덮은 공포는 다 자란 지금까지도 얼룩처럼 남아 때때로 크기를 키워 레인을 잠식한다. 마치 이 자리에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 양 긴장에 바짝 당겨지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다.

지켜보던 지스킬이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물을 한 잔 떠다 주었다. 물컵을 받고 나서야 떨리는 제 손을 자각한 레인은 급하게 물을 마시고 손을 꾹 잡아 떨림을 숨겼다. 지스킬은 레인이 진정하기를 한참 기다렸다. 간신히 떨림이 멈추고 레인은 지스킬을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봐?”

“네 아버지가 너한테 작위를 물려주시겠대?”

“확실하게 말한 건 아냐. 그런 제안을 듣기는 들었는데… 딱히 내키지도 않고.”

라인셀에서 으뜸가는 가문의 수장이 된다는 명예와 권력, 자연스레 따라올 부, 다른 사람들이라면 환장해서 달려들 모든 요소가 레인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따로 떼어 놓고 본다면 물론 매력적일 요소들은 아이제나흐라는 이름과 조합되는 순간 달콤한 내음을 풍기며 사람을 유혹하는 독이 든 과실처럼 느껴졌다. 그냥 떠보는 것일 수도 있고, 진짜라 하더라도 공작 위를 물려받는 대가로 레인이 치러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물려받아 스스로 제 가문을 망가트린다면 나름의 훌륭한 복수가 되겠지만, 아무것도 없던 때라면 모를까 레인이 인상만 찌푸려도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안절부절못하는 유르딘의 얼굴을 떠올리면 도저히 제 발로 불 속에 뛰어드는 짓은 할 수 없었다.

지스킬은 지스킬 나름대로 심각한 얼굴이었다. 이미 확정된 후계자가 바뀌는 건 레스터와 레인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공작가의 가신들이 얽힌 복잡한 사건이었다. 레스터를 지지하는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지스킬은 품에 호신용으로 넣어 둔 단검을 괜히 꺼내서 만지작거리거나, 창밖을 힐끗 쳐다보거나 괜히 방 안을 휘적거리며 돌아다니며 제 긴장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레인은 지스킬의 초조한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남이 긴장한 모습을 보니 우습게도 역으로 제 긴장과 떨림이 가라앉았다.

“진정하고 좀 앉아.”

일단 자리에 앉기는 했으나 지스킬은 시종일관 초조해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레인이 물을 떠다가 지스킬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완전히 진정한 레인의 모습을 본 지스킬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불안하게 떨던 다리를 가지런히 바닥에 세운 지스킬은 가득 채운 물 한 컵을 벌컥벌컥 한 번에 모두 마셨다.

“네 형, 뭔가 네게 해코지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글쎄.”

“태평하게 말하지 말고 진짜 조심해. 나랑 꼭 같이 다니고.”

“그래.”

“후우우…….”

연거푸 한숨을 쉰 지스킬은 창밖을 노려보다가 그대로 커튼을 쳤다. 레인이 보기에는 조금 유난인 것 같았으나 오히려 지스킬은 어쩜 그리 걱정도 없이 태평하냐는 눈치다. 이래 봬도 태평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괴롭힘을 당하며 상시 긴장하고 산 탓에 어지간한 일로는 동요가 드러나지 않았다. 오늘 본 레스터는 평소라면 공포를 느낄 법도 했으나, 지스킬이 곁에 있고, 유르딘이 있는데 크게 긴장되진 않았다.

“나가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다. 그냥 얌전히 있자.”

“왜 나가려고?”

“곧 후작님 생신이시잖아? 선물 사자고.”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레인은 심지어 그 순간 그 전까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레스터에 대한 일들을 모조리 밀어냈다. 왕국 라인셀에 후작의 수는 생각보다 제법 많지만, 지스킬이 선물을 사자고 말할 후작님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렘샤이트 후작님 말이야?”

“응. 몰랐어? 이제 열흘쯤 남았는데.”

전혀 몰랐다. 왜 한마디도 안 해 줬지? 아니, 애초에 왜 알아볼 생각도 안 했을까? 레인은 자책했다가, 자신이 평생 생일 선물을 줄 일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카이렌이 제멋대로 제 생일이라며 이런저런 봉사를 강요한 건 선물이라기보다 강압에 가까웠으니 예외인 셈 치기로 했다.

준비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고작 열흘 남았다니. 갑자기 닥치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만년필을 조금 나중에 줄 걸 그랬나, 레인은 뒤늦게 후회했다.

“뭐 사지.”

잔뜩 당황한 레인을 본 지스킬이 히죽거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네가 주는 거면 아무거나 좋아하시지 않을까?”

“무, 무슨 소리야?”

“너 말 더듬는다.”

레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사실 유르딘과 레인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지스킬이 눈치챈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막연히 알 거라고 예상했음에도 정작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게 되는 건 부끄러웠다. 게다가 놀리고 있으니 세 배쯤 더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스킬은 값진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때를 놓치지 않고 마구 놀려 댔다. 결국, 견디지 못한 레인은 지스킬을 걷어차서 쫓아냈다.

“야, 혼자 있으면 위험해.”

“문 앞에서 대기하든가, 멍청아.”

가차 없는 축객령에 투덜대면서도 지스킬은 얌전히 문 앞에 서서 대기했다. 레인은 문을 잠가 놓고 거울을 확인했다. 차라리 말로 긍정하는 게 덜 확실할 정도로 새빨개진 얼굴이 보인다. 가라앉을 줄 모르는 얼굴을 감싸며 레인은 찬물로 세수했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얼굴을 향해 부채질하고 나서야 밖에서 소란을 떠는 지스킬을 안으로 들였다.

이후 며칠간 한참을 고민했으나 고민은 크게 의미 없는 게 되었다. 유르딘의 생일날 렘샤이트 후작가의 저택에서 열리는 연회에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이름으로 참석하라는 딜란의 명이 내려왔다. 레인이 이런 자리에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이름을 걸고 참석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만약 후계자를 바꿀 고민을 하고 있다면 레인을 슬슬 다른 사람들이 주목할 수 있도록 내보여야 할 것이고, 레인에게 호의적인 유르딘이 주인으로 있는 연회는 그 시작으로써 최상의 장소였다.

다른 일이라면 고집을 부려서라도 거절했겠지만 다름 아닌 유르딘의 일이라 거절 못 하고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작가에서는 유르딘의 선물로 순금과 보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조각품을 준비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 저택에서도 보기 힘든 화려한 선물에 레인은 떡하니 입을 벌렸다.

함께 두면 뭘 준비하든 묻힐 것만 같아 자신감이 사라진 레인에게 지스킬이 따로 조언했다. 전장에서야 건틀렛을 끼지만, 이곳에서는 검을 잡을 때 일일이 중무장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방비도 하지 않자니 불안하다. 그런 걱정을 하는 자들을 위해 따로 만든 장갑이 있었다. 건틀렛만은 못해도 마법적인 처리를 해 내구성이 뛰어나고, 낀 채로도 유연하게 휘어져 손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일상생활에서 껴도 이상하지 않도록 고급스럽게 마감한 물건은 실용도가 높았다.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일을 끝마치고 나니 발등에 불이 붙었다. 연회 날과 그 앞뒤 날의 사흘을 모두 비우려면 미리 밀린 과제를 처리했어야 했는데, 고작 선물 하나를 사는 데 걸린 시간이 나흘이었다. 유르딘의 생일에 정신이 팔려, 답지 않게 시간 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 레인은 원래부터 남들보다 많은 수업을 듣고 있었고, 한 번 밀리기 시작하니 대책 없이 밀려 쌓인 양이 무시무시했다. 레인은 유르딘의 생일 연회에 참석할 시간을 완전히 비우기 위해 전날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겨우 할 일을 끝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레인은 완전히 녹초가 됐다. 열흘 만에 찾아간 후작가의 저택에서 유르딘이 아닌 그란델이 레인을 맞았다. 형제는 닮는 건지, 에스코트가 필요 없는 레인을 그란델이 손수 에스코트해서 내렸다. 사실 그란델이 받아 줘서 다행이긴 했다. 잠이 심각하게 부족한 탓인지 레인은 마차를 내려오면서도 휘청거렸다. 그란델은 재빨리 레인을 부축했다.

“안색이 안 좋은데? 피곤하면 좀 자. 형은 저녁에나 올 거야.”

순간 다른 사람의 저택에서 태평하게 잠이나 잘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지금까지 유르딘 덕에 편하게 남의 저택에서 뒹군 이력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 내고 레인은 결국 그란델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그란델은 웃는 낯으로 직접 레인을 안내했다. 레인을 잘 꾸며진 침실로 안내한 그란델은 방을 한 번 쭉 돌아보고는 바로 나가는 대신 옆자리에 앉았다. 그대로 그란델은 아무 말도 없이 레인을 묵묵히 응시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묵묵히 시선을 감내하던 레인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백작님?”

“아, 미안. 좀… 뭘 생각하느라.”

한숨을 쉬고, 마른 손을 비비고, 초조해 보이는 동작들을 모조리 한 그란델은 힘겹게 얼굴을 감쌌다.

“형… 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

“후작님 말씀이신가요?”

그렇게 말해도 레인은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레인이 아는 유르딘은 원래부터 한결같이 레인에게 다정하고 자상하며 걱정 많은 남자였다. 종종 유르딘의 이면을 엿봤으나 어디까지나 찰나의 관찰로, 분명한 확신을 남기지 못한 채 평상시의 유르딘만이 레인이 아는 유르딘으로서 남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레인의 얼굴을 쭉 살핀 그란델에게 깊은 갈등이 새겨졌다. 그란델은 답답할 정도로 입술을 떼었다 붙이며 말을 망설였다.

결국, 그란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유르딘이었다. 표정 없이 딱딱한 얼굴로 곧장 방을 가로지르는 유르딘을 보며 그란델이 애써 웃었으나 표정의 어색함을 다 감출 수가 없었다.

“형? 갑자기 들어오면 어떡해, 매너도 없이…….”

“그란델, 잠시 나가 있어.”

이름만 불렀을 뿐,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쫓아내는 게 다정하겠다 싶을 정도로 매정하고 가차 없는 목소리였다. 무언가 항변하려던 그란델은 깊이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에게 푹 쉬라는 말을 하는 도중에도 유르딘의 시선은 날카롭게 그란델에게 꽂혀 있었다. 그란델이 나가자마자 유르딘은 옆자리에 앉아 레인을 살폈다. 호의를 보내고 뭔지 모를 괜한 오해라도 산 것 같아서 그란델을 위해 무언가 변명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나?”

“별 이야기 아니었는데요. 그냥 안내해 주신 것밖에 없어요. 제가 좀 휘청거려서…….”

레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유르딘이 깜짝 놀라 레인을 당겼다. 양 뺨이 유르딘의 손 안에 잡혔다. 전적으로 유르딘 때문에 빨개진 얼굴을 보며 그는 심각한 표정이 됐다.

“어디 아픈가?”

“아, 아니……. 잠을 못 자서 그래요. 자면, 자면 괜찮아요. 자면요.”

제 얼굴을 만지고 살피며 열을 재어 보고 다른 이상 반응이 없는지 살피는 동안 시종일관 유르딘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확인하고도 걱정이 많아 의원을 부르겠다는 유르딘을 필사적으로 말린 레인은 자는 동안 의원이 오면 그게 더 피곤하다고 강조하고 나서야 자리에 누웠다. 베개에 머리를 베자마자 잠이 쏟아진다. 그저 졸릴 뿐인 레인을 확인한 유르딘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르딘의 손이 천천히 레인의 눈가를 덮었다.

“푹 쉬어라, 레인. 나중에 깨울 테니까.”

“네.”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유르딘의 표정이 묘하게 좋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눈가가 어둠으로 덮이니 금세 노곤하게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참 자다가 깨어났을 때는 저택에 손님이 제법 많이 찾아온 상태였다. 새로운 렘샤이트 후작의 생일을 직접 축하하고 싶은 사람은 왕국 내에 발에 차일 만큼 많았다. 당연히 그들 모두를 저택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고르고 골라 몇몇 귀족만이 저택에 초대받았음에도 저택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났을 무렵, 준비를 돕기 위한 시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가의 저택에서 가져온 게 아니라 유르딘이 새로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예복은 자로 잰 듯이 레인의 몸에 꼭 맞았다. 분명 이전 유르딘의 영지로 놀러 갔을 때 치수를 맞추기는 했지만, 그때보다 살이 붙었는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맞췄는지 의문이었다. 뭐, 유르딘이 레인의 몸을 자주 만지기는 했지만…….

“더우신가요? 창문을 열까요?”

“아, 아니.”

저도 모르게 그때를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진 모양이었다. 필사적으로 사양한 레인은 얼굴에 부채질했다. 고작 감촉을 회상하는 거로 이렇게까지 부끄러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니 제가 중증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약 때문일지도 모른다. 혼자 어찌할 줄 모르는 레인을 보면서도 하녀는 익숙한 전문가의 손길로 단장을 끝마쳤다.

준비를 마치고도 시간이 조금 남았다. 부족한 체력을 생각해 소파에 앉아 있던 레인은 꾸벅꾸벅 졸다가 조금 더워서 일어났다. 난방이 조금 심한 건지 피부에 살짝 땀이 배었다. 창문을 열까 하다가 차라리 잠시 걸어 다니기로 결정한 레인은 방을 빠져나왔다.

아래층의 소란이 몹시 멀게 느껴졌다. 조금 귀가 먹먹한가 싶어서 침을 삼키며 걷던 레인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기운 몸은 순식간에 열린 문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레인.”

카이렌이 레인의 머리채를 꽉 잡은 채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있었다. 카이렌은 소리치려고 하는 레인의 입을 틀어막고 다리 사이에 제 다리를 끼워 넣었다. 입을 틀어막은 채로 턱을 꽉 잡고 돌려, 억지로 셔츠를 내리더니 그대로 목덜미를 가볍게 물고 입술을 묻었다. 천천히 카이렌의 손이 레인의 등줄기를 쓸며 내려왔다.

“읏, 읍……. 싫, 싫어…….”

“정말로?”

단단한 손에 막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저항의 말을 비웃으면서 카이렌은 레인의 바지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익숙한 자극에 이미 반쯤 서 버린 성기가 카이렌의 손에서 부피를 키운다. 노골적으로 주물거리는 손길에 자꾸만 신음이 흘렀다. 성기에서 손을 뗀 카이렌은 그대로 엉덩이를 조금 더듬는가 싶더니 구멍 입구를 매만졌다. 마치 안으로 들어올 것처럼 지분대는 감촉에 레인이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카이렌은 그런 레인을 비웃었다.

“넌 이런 걸 좋아하잖아. 싫은 척하는 꼴이 웃기지도 않아. 지금 당장 박히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면서.”

“아니……. 아니야.”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카이렌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돋우는 바람에 한 대 얻어맞았다. 간만의 폭력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지금까지 잘 참아 왔으면서 왜 갑자기,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인내심이 바닥난 얼굴로 카이렌은 험악하게 속삭였다.

“얼마 남지 않았어. 방해되는 것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너를 손에 넣을 거야.”

카이렌은 빈손으로 레인의 목을 움켜쥔 채 입을 맞췄다. 깨물려고 하자 그대로 손에 힘을 주었다. 제 아버지가 그러했듯 카이렌 또한 힘은 끔찍하게 세서, 한 손만으로도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혔다. 떨쳐 낼 수 없는 강한 힘에 저항하려고 해 봤자 공연히 힘만 빠질 뿐이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레인은 코앞의 카이렌을 바라보았다. 끔찍한 소유욕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은 채 레인을 향하고 있었다. 점점 정신이 멀어져 간다.

“헉…….”

이제 완전히 정신을 놓겠다 싶은 순간, 레인은 갑작스럽게 깨어났다. 숨이 부족해 몇 번이나 괴로운 기침을 반복하고서야 레인은 자신이 원래 잠들었던 그 방의 소파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제 옷차림을 살핀 레인은 여전히 단정한 차림을 마주했다.

꿈인가? 그렇다기에는 정말로 목이 졸렸던 것처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거울을 마주해 보니 목이 졸린 자국도 깨물었던 잇자국도 없다. 하지만 그런 건 힘을 잘 조절했으면 얼마든지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머리칼이 마치 머리채가 쥐어뜯긴 것처럼 엉망이지 않나. 강박적으로 생각하던 레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재수 없는 꿈이었다고 생각하며 레인은 시녀를 불렀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본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잔뜩 눌리셨네요. 많이 피곤하셨어요?”

“그런 건 아닌데……. 내가 많이 잤나?”

“조금요. 곧 나가셔야 해서요. 그 전에 빠르게 끝낼게요.”

시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준비가 끝나고 시녀가 나가는 때와 맞춰서 유르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게 걸어오는 유르딘을 보며 레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기는 하였으나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몸에 딱 맞는 검은 예복을 입은 유르딘의 외모는 유달리 빛이 났다. 시원스럽게 잘 뻗은 이목구비는 어딘가 긴장한 표정을 그려 내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 모습이 진중해 보여서 가슴 설레게 멋있었다. 마치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이상적인 기사님, 그 자체다.

그러다가 문득 유르딘의 손을 살핀 레인은 내심 실망했다. 분명 레인이 보낸 선물은 유르딘에게 확실히 들어갔을 텐데, 그는 레인이 선물한 장갑 대신 다른 걸 끼고 있었다. 하긴 바빴으니 아직 확인을 못 했을 수도 있는 일인 데다, 확인했어도 꼭 레인이 준 걸 오늘 끼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어떻게든 합리화를 해 보며 레인은 금세 실망을 접었다. 게다가 고작 장갑 따위에 실망하기에는 유르딘의 시선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오늘 아주 멋지구나.”

“유르딘도요. 생일 축하드려요, 유르딘.”

“고마워.”

유르딘의 얼굴 가득 미소가 서렸다. 조금 서늘한 느낌을 주는 얼굴에 봄이 온 양 날카로운 기색이 누그러지고 다정함과 열망이 서렸다. 그러나 유르딘의 손끝이 레인을 향해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졌다. 차마 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레인이 그 손을 잡아 다시 제 얼굴에 갖다 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미처 실행하기 전에 유르딘이 진지한 얼굴로 용건을 꺼냈다.

“레인, 다름이 아니라 오늘 연회가 시작할 때 네게 두 번째 잔을 줄 생각이다. 괜찮겠나?”

다른 나라에는 없으며 오직 왕국 라인셀에만 있는 ‘두 번째 잔’이라는 연회 풍습의 기원은 왕국 건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인셀의 초대 왕은 라인셀을 건국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공작을 특히 아꼈으나, 공작은 본래 평민 출신이라 다른 사람들의 무시를 받았다. 이에 왕은 자신과 공작의 우정과 신뢰를 과시하고자 연회가 시작할 때 공작의 공을 치하하고, 보석으로 장식한 은잔에 술을 채워 공작에게 건넸다. 특별히 좋은 술이나 기념주의 첫 잔을 자신이 신뢰하는 이에게 건네는 건 다른 나라에도 있는 풍습이라 거기까지는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이를 이용해 한 귀족이 몰래 잔에다 은에 반응하지 않는 독을 타 공작을 죽이려고 했고, 다행히 공작이 내성을 지닌 독이라 살아남았다. 그 후로 왕은 자신이 새로 나온 술의 첫 모금을 마셔 친히 독을 확인하고 나서야 공작에게 권했다. 공작을 최우선시하는 왕의 행동과 공작 본인의 우수한 능력으로 차츰 귀족들도 어쩔 수 없이 공작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공작이 당당하게 왕국 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나서부터는 왕이 시작한 행동은 유행처럼 번졌다.

직접 연회의 주최자가 첫 모금을 마시고 남은 술을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건넨다. 풍습은 후대에 다소 변질하여, 현재는 연회의 주최자가 장식 없이 그저 은으로만 만든 잔, 은과 보석으로 만든 잔에 각각 술을 채워, 후자의 잔을 가장 신뢰하는 손님에게 건네고 있었다. 소박한 첫 잔을 연회의 주최자가 마시고 화려한 두 번째 잔을 손님에게 건넴으로써 상징적인 의미를 유지했다. 이는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풍습이지만 잔을 받은 자와 못 받은 자 사이에 감정이 상할 때가 많아서, 지금은 가문 간의 결합이 있을 때나 긴밀한 동맹을 체결할 때 정도로 누가 봐도 줄 자가 명확한 연회가 아니라면 행하는 이가 별로 없었다.

현재 왕국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유르딘이 굳이 건네는 두 번째 잔에 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왕국 전체를 들끓게 할 게 뻔했다.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라 평판이 좋지 못한 레인 아이제나흐에게 건넨 잔이라면 무언가 나쁜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부담스러워서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제가 받을 자격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보기에도 좋지 않을 거고…….”

“레인, 네가 아니면 내 두 번째 잔을 받을 사람이 또 누가 있다고.”

언제나 유르딘의 다정함과 신뢰는 레인에게 힘이 되어 주었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레인은 유르딘이 보내는 신뢰가 이 순간만은 부담스러웠다. 둘만 있을 때 보내 주는 신뢰는 괜찮지만 유르딘의 평판을 깎아 가면서까지 그에게 무언가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르딘은 단호했다.

“상황을 생각해서라도 받도록 해. 너는 오늘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손님으로서 온 거니, 레인 아이제나흐의 이름으로 네게 건네면 너 개인에게만 주목이 쏠리는 대신 아이제나흐에 시선이 더 모일 거야. 안 그래도 이전부터 딜란에게 제법 호의적인 듯이 굴고 있으니까, 이걸로 쐐기를 박아 당분간 딜란을 안심시킬 수도 있겠지. 한편이라는 인식이 당분간 왕국 전체에 심어질 테니 말이다. 물론 잔을 준 대상이 너니까, 내가 널 두둔하는 걸 공개적으로 보이는 걸로 네 처지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 거고.”

나무랄 데 없는 논리였다. 레인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유르딘은 레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붙잡았다. 잡힌 손이 뜨거웠다.

“부디 받아 줘. 너를 위해 준비한 거야. 이미 준비는 끝마쳤으니까.”

제 기반이 없었던 레인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흔들린다. 그런 레인과 대조적으로 언제나 확고한 유르딘의 태도는 레인에게 확신을 심어 주고 안정감을 선사했다. 일말의 정체 모를 불안감을 떨쳐 내며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제가 뭔가 준비해야 하나요?”

“아니, 놀라지 말라고 미리 알려 주는 것뿐이야. 준비는 이쪽에서 끝내 뒀으니 자연스레 따라오면 된다.”

“네.”

“그럼 이따 보자, 레인.”

아무래도 그 용건을 말하려고 왔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유르딘은 곧장 방을 빠져나가려다가 멈춰 섰다. 잠시 문을 잡은 채로 고민하던 유르딘은 레인을 돌아보더니 한 번 더 인사하고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장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는지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제법 규모가 있는 저택이니만큼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많았기에 조금씩 대화를 나눠도 시끌벅적해졌다.

딱히 먼저 가서 모르는 사람의 시선을 받고 싶지는 않으니 적당히 시간이 지났을 때 나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 또다시 손님이 찾아왔다. 베른이었다. 그는 나름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하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으나 그 모양새는 영 안쓰러웠다. 베른은 두 눈 밑이 퀭하게 변한 데다 피부도 거칠고 생기가 없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잠깐 눈이라도 붙이시는 게 낫겠어요.”

“아뇨, 그냥 며칠 못 자서……. 눈을 붙이면 아예 못 일어날 겁니다. 괜찮습니다.”

절대 괜찮은 꼴이 아닌데 베른은 고집을 부렸다. 하긴, 저 상태면 눈을 감으면 바로 잠들 것 같기도 해서 레인은 더는 말하지 않고 베른의 뒤를 따르며 그를 눈으로 살폈다. 베른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설마, 그럴 리가요. 경사스러운 날이지 않습니까.”

곧장 고개를 저으며 웃는 낯은 여전히 부자연스러웠다. 위화감을 느끼며 이것저것 질문했지만, 베른의 대답에서 그 이상 수상한 구석을 찾을 수는 없었다. 짧은 문답이 끝나고 연회장에 도착하자 베른은 일이 있다며 자연스레 물러났기에 위화감의 정체에 대해서 밝힐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지스킬을 찾았으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딱히 아는 얼굴도 없어서 레인은 제게 은근히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다들 레인을 흘끔거렸다. 다가오는 사람이 없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으나.

“아이제나흐 공자.”

신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디프랑 후작 렌피르가 다가왔다. 옆에 선 렌피르는 모이는 시선이 어색하지도 않은지 여유롭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십니까, 디프랑 후작께서는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지 못할 것도 없지요. 그간 바빴나요?”

“아카데미의 과제가 밀려서요.”

“하긴, 바쁠 만도 할 때네요. 저택에 오지 않기에 물어봤어요.”

“바빠서 갈 틈이 없었습니다. 다음에 또 방문해도 될까요?”

“그럼요. 언제든지.”

렌피르는 다정한 시선으로 레인을 살폈다.

“피곤한가요? 안색이 조금 나쁜 것도 같네요. 다음에 오실 때는 만찬을 대접하지요.”

“감사합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꼭 오세요.”

가볍게 인사를 마친 렌피르가 자리를 떠났다. 레인은 음료를 마시며 짧은 대화를 곱씹었다. 그저 아는 사이니 평범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레인이 디프랑 후작의 저택에 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찌 됐든 다음에 한 번 디프랑 후작저를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인은 음료를 모두 비웠다.

곧 유르딘이 들어왔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잠깐 베른이 들어와 유르딘에게 무언가를 속삭이고 물러났다. 별일은 아니었는지 유르딘은 웃는 낯으로 인사하며 입술을 뗐다.

연회마다 으레 이어지는 특이할 것 없는 인사말에도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저 형식상의 주목이 아니라 진심으로 집중했다. 자신과 가문의 이득을 우선시하는 이들이 유르딘을 마주하며 순수한 애정과 존경, 선망의 시선을 보내는 광경은 새로웠다. 온갖 기대를 받는 가운데에서도 그게 당연한 듯이 태연하게 웃어넘기는 유르딘이 조금은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에 비하면 레인 자신은 얼마나 초라한지.

애초부터 유르딘과 레인은 시작점부터 달랐다. 거짓으로 꾸며진 가정에서 행복한 연극에 휘둘리다가 막이 내리자마자 끌려 내려와 비참한 현실을 마주한 레인, 귀족으로서는 드물게도 애정으로 결합한 가정에서 태어나 제 재능을 마음껏 펼치며 비교적 굴곡 없는 삶을 살아왔을 유르딘. 두 사람을 비교한다는 사실조차도 어불성설처럼 느껴졌다. 빛과 어둠만큼이나 두 사람의 차이가 극명하다. 사람들의 미소와 갈채 속에서 레인은 본질적인 의문을 품었다. 유르딘이 레인을 좋아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좋아하는 감정이 이해득실을 따지는 게 아니라고는 해도 정말이지 단 하나의 이득도 없었다. 유르딘이라면 레인보다 훨씬 괜찮은 영애와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초라함의 자각은 언제나 레인의 솔직한 감정에 제동을 걸었다. 감히 유르딘을 좋아해도 괜찮을까. 유르딘에게 좋아한다고 말해도 괜찮을까.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조차 이기적인 행동은 아닐까. 한 번 떠올린 고민은 멈출 줄 모르고 샘솟는다.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유르딘을 레인이 있는 곳까지 끌어내려도 될까. 확실한 건 레인 자신에게는 그 정도의 가치가 없다는 점이다. 레인은 자신을 낮춰 보며 자책했다. 저 빛나는 명예에 제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걸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반면에 제게 진흙탕이 튈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레인을 좋아해 줬으면 하는 욕망 또한 들끓었다. 저열하고도 자연스러운 욕망이었다. 욕망과 이성이 충돌했으나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유르딘이 모인 이들에게 하는 인사말이 슬슬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유르딘이 레인을 돌아보며 그를 지목했다. 제 생각을 들킨 것 같아서 순간 놀랐던 레인은 두 번째 잔에 관한 일임을 떠올리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놀란 탓인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옆으로 다가온 레인에게 유르딘이 작게 괜찮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쪽으로 몰린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놀랐기 때문인지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았다. 기묘한 불길함이 레인을 좀먹었다.

레인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는 두 개의 잔을 보았다. 렘샤이트 후작가의 집사가 은 쟁반에 고급스러운 두 개의 은잔을 받쳐 들고 오고 있었다. 유르딘은 웃는 얼굴로 제 은잔을 집어 들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잔에 뭐가 들어갔군.”

두 번, 세 번 신경을 써도 모자란 일인데 실로 어이없는 실수였다. 하필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집사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집사의 얼굴은 곧 죽음을 마주할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렇게 뻔한 실수를 할 정도로 어리숙한 사람이었던가? 레인도 은근히 유르딘의 저택에 자주 드나든 터라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철두철미한 성격이라 이런 얼빠진 실수와는 거리가 먼 자였다. 아무래도 어지간히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죄, 죄송합니다. 오면서 떨어진 모양입니다. 지금 당장…….”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없다니? 모두가 의아함을 느꼈다. 유르딘은 말로 설명하는 대신, 집사에게 첫 번째 잔을 돌려주고 은과 보석으로 만든 잔을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레인이 받아야 할 잔이다. 잔 안의 술이 죽은 자의 피처럼 검붉었다. 유르딘은 잔을 높이 들었다.

“원래의 풍습대로라면 내가 한 잔을 마시고 건네는 것이지. 옛 풍습대로, 내가 첫 모금을 확인하고 신뢰하는 우군인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레인 아이제나흐에게 잔을 넘기겠다.”

오래된 풍습을 따르겠다는 말은 그만큼 의식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말로도 들렸다. 사람들은 두 가문의 강력한 관계에 가지각색의 생각을 품으면서도 표면으로는 박수를 쳤다. 우레처럼 밀려드는 박수 소리와 눈부신 조명이 레인을 사방에서 찔렀다. 정체 모를 불안감이 다시금 엄습해 어쩐지 갑갑했다. 지금이라도 유르딘과 함께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고픈 맥락 없는 충동이 일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유르딘이 의식의 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잔에서 입술을 뗀 유르딘이 레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연회장의 조명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유르딘을 그늘 없이 뒤덮었다. 어쩌면 레인의 어둠조차 몰아낼 수 있을 정도로 빛나는 사람이다.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레인은 잔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여전히 유르딘은 잔을 잡은 어색한 자세로 굳어 있을 뿐, 여전히 잔에서 제 손을 떼지 않았다.

“후작님?”

레인이 부름에도 한동안 유르딘은 답이 없었다. 마침내 유르딘이 잔을 놓았다. 건넨다고 하기에는 다소 과격한 움직임에 잔이 요란하게 허공을 한 바퀴 돌며 레인의 예복에 피 같은 붉은 자국을 남겼다. 바닥에 떨어진 잔이 초라하게 바닥을 뒹군다. 그 위로 새빨간 것이 새하얀 바닥을 뒤덮는다. 레인은 나사가 하나 빠져 고장 난 인형처럼 어색한 움직임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유르딘의 입가도 옷도 온통 붉었다. 코앞에서 훅 끼치는 피비린내를 맡으면서도 레인은 자신이 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많은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된다. 유르딘이 피를 토할 리가 없다.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레인이 제 머릿속에서 빈약한 논리를 끌어오며 눈앞의 광경을 부정해 봤자, 현실은 잔혹했다.

유르딘은 붉어진 눈으로 레인을 바라보았다. 피에 젖은 손을 이쪽으로 뻗지만 닿지 못하고,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대로 천천히, 유르딘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비명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소란스러운 사람들 사이를 그란델이 헤집고 나왔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란델은 유르딘의 앞에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이렇게, 어, 왜……. 심, 하잖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더듬거리며 그란델은 떨리는 손으로 맥없이 쓰러진 유르딘을 더듬었다. 망가진 인형처럼 엎어진 유르딘을 바로 눕히려는 것 같지만, 손이 어찌나 떨리는지 그란델의 행동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옆에 서 있던 집사가 들고 있던 잔을 팽개치고 그란델 대신 유르딘을 자리에 바로 눕혔다. 그 옆에서 참담한 얼굴로 유르딘을 살피던 그란델은 크게 숨을 고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저택을 봉쇄해! 지금 당장!”

잔떨림이 다 감춰지지 않는 그란델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콧대 높은 귀족들이 그란델의 명을 그대로 따라 움직였다. 그란델이 상황을 정리하는 소리, 사람들의 어쩔 줄 모르는 경악과 안타까움에 가득 찬 신음, 온갖 혼란스러운 소리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아하던 연회장 안을 시장 바닥처럼 들쑤셨다.

그 가운데서 레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멀거니 서 있었다.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칠 수조차 없었다. 모든 상황이 그저 책 속의 끔찍한 비현실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새하얀 바닥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져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유르딘의 모습이 현실일 리가 없었다. 대륙 제일의 검사가 고작 한 잔의 술 때문에 이렇게 쓰러지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영웅의 서사시에서는 언제나 위대한 영웅이 승리하고 찬란한 영광의 길만을 걷지 않았나. 애써 부정하려고 해 봐도 끔찍한 현실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대신 피 흘린 유르딘은 레인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레인은 넘어질 뻔하면서도 실려 나가는 유르딘의 뒤를 따랐다. 안까지 들어가려는 레인을 피투성이가 된 집사가 붙잡고 막았다. 유르딘을 만진 탓에 묻은 피가 레인을 적셨다. 레인의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집사에게도 거기까지 신경 써 줄 정신은 없었다.

“여기는 맡기고 쉬십시오. 안색이 나쁘십니다.”

집사는 황급히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쉬라니. 방금 피를 토한 유르딘을 두고? 레인은 피가 묻은 옷자락을 꽉 붙잡은 채 문 앞에서 못 박힌 채 서 있었다. 신관과 의원이 들어가고 나서도 방 안에서는 몇 번이나 소란이 이어졌다. 위급하다느니, 어서 빨리 대신관을 모셔 오라느니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어서 꿈에서 깨야 하는데. 반쯤 현실 도피 하듯 그렇게 생각했으나, 꿈이 아닌 현실은 희망 따위는 없이 지긋지긋하게 이어진다.

몇 시간을 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주 잠깐 서 있던 걸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온갖 비극적인 결말을 상상하고 끔찍한 순간을 되새기는 시간은 1분이 1년처럼 느껴졌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런데도 레인은 그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반쯤 벽에 기댄 채 간신히 정신만을 붙잡고 있을 때, 갑작스레 몹시 놀란 얼굴의 지스킬이 나타났다.

“레인! 너 왜 여기에……. 한참 찾았잖아.”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레인의 눈은 초점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생기가 다 빠져나간 얼굴을 마주한 지스킬이 이를 악물고 레인을 흔들었다.

“레인, 정신 차려. 네 심정은 알겠는데, 이러다 너 쓰러져. 일단 방으로 가자.”

“지, 지스킬.”

돌연 정신이 돌아온 레인은 지스킬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정작 나오는 말이 없었다. 들끓는 감정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며 레인은 고해하듯 말을 토해 냈다.

“유르딘, 유르딘이……. 유르딘, 이……. 나, 나 때문에…….”

“무슨 소리야. 왜 너 때문이야?”

지스킬이 확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마실 잔이었잖아…….”

누가 뭐라고 하든, 그 사실 하나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건 레인이 마셔야 할 잔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이 독을 마셔야 했다면, 둘 중 한 사람만 죽어야 했다면, 독을 삼키는 자는 유르딘이 아닌 레인이었어야만 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마셨어야 했어.”

“레인.”

조금 화가 난 지스킬의 목소리도 지금으로써는 제대로 와 닿지 않고 자책만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독이 든 잔은 레인이 마셨어야 했다. 왕국의 영웅, 모든 이들의 우상, 크나큰 번영을 가져다줄 기사, 렘샤이트 후작인 유르딘이 그런 독을 마시고 사경을 헤맬 이유가 하등 없었다. 그에 비해 레인 자신은 어떠한가. 반역자의 핏줄, 가문의 수치, 빌어먹게 약한 몸뚱어리에 별다른 가치는 없었다. 정확히는 조금 부적절한 쪽의 가치만이 있어서 몇 번이나 남에게 굴복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레인 아이제나흐. 레인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한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고민해 볼 필요도 없이 유르딘이 사는 게 옳았다.

창백한 얼굴에서 여태 흐르지 않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 번 터진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때 복수를 포기하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는 유르딘의 말대로 모든 걸 내던지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기억이 며칠 전의 그날로 되돌아갔다.

‘저는 복수하고 싶어요.’

자신이 했던 말이 우습다. 복수한다니, 대체 무슨 수로 복수하겠다는 말인가? 무슨 생각으로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을 했나. 유르딘이 레인을 끔찍하게 위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잘도 뻔뻔스러운 말을 지껄였다. 그때의 심정으로는 복수에 제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이성적인 사고는 제 목숨을 던진다고 해도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레인의 복수는 유르딘이 수단과 방법을 설계하고 하는 것이지, 레인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사실들을 정말 몰랐다가 이제야 깨달았나? 그건 아니었다. 어딘지 지쳐 있는 유르딘의 얼굴도, 그저 모든 걸 유르딘에게 떠맡겨야 한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달콤한 복수에 눈이 멀어 다른 것들은 일부러 떠올리지 않고 밀어 둔 채 모조리 외면했을 뿐이다. 그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과 각오를 드러내며, 행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다. 결론적으로는 제 대신 모든 걸 해 주겠다는 유르딘의 뒤에 섰을 뿐인데 마치 제가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더러운 위선자. 무능력한 쓰레기.

이 순간 가장 혐오스러운 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르딘이 다시 한번 복수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단박에 아니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는 점이다.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 때문에 유르딘은 수도에 남아 독을 마셨다. 한 번 시작된 자책은 그칠 줄 모르고 레인의 목을 졸랐다.

“내가, 내가 죽었어야 했다고.”

“미안, 실례할게.”

지스킬이 레인의 양 뺨을 양손으로 찰싹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아프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얼얼한 뺨의 감촉에 레인은 울던 것도 멈추고 황망하게 지스킬을 올려다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시선은 레인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정신 차려.”

“하지만……. 하지만 나 때문에…….”

“뭐가 너 때문이야?”

잠깐 주위를 살폈던 지스킬은 고개를 바싹 당겨 낮게 속삭였다.

“여긴 후작님의 저택이고, 연회에서 일어난 일은 네가 아닌 후작님의 책임이야.”

“지스킬……. 그건.”

“애초에 후작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말하지 마. 고작 독일 뿐이야. 곧 일어나실 거라고. 그분이 이런 데서 돌아가실 리가 없잖아.”

레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소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유르딘은 피를 그렇게나 쏟았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끈질기게 사투하고 있었다. 레인이 죽었어야 했다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일렀다. 최악을 가정하는 데 익숙한 레인이지만, 지스킬의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와 믿음이 레인을 붙들었다.

“방금 대신관이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갔어. 앞서 나가지 마. 괜찮으실 거야. 괜찮아. 괜찮으실 테니까…….”

절망은 조금이나마 걷혔으나, 지금까지 줄곧 긴장하고 있던 탓에 다리의 힘이 쫙 풀렸다. 주저앉으려는 레인을 지스킬이 부축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자. 너 아프기라도 하면 후작님이 깨어나셨을 때 아픈 몸으로라도 너부터 살피려고 하실걸.”

일부러 장난스레 덧붙이는 말에 웃어 줄 수는 없었으나 최소한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는 정신이 돌아왔다.

“응……. 미안.”

“알면 됐어.”

레인이 얌전히 지스킬의 부축을 받으며 복도를 가로지르던 중에 1층 중앙의 홀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는 레인을 지스킬이 재촉했으나, 고개를 저으며 지스킬을 뿌리치고는 그쪽으로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죄인을 추궁하는 소리였다. 분노와 증오가 치밀어 죄인을 마주한다면 이 손으로 직접 죽일 수 있을 듯이 살의가 들끓었다. 멀리 계단 위에서 확인한 홀의 모습은 경악에 휩싸여 있었다. 모여든 사용인들은 누군가를 피하듯 물러나, 한 사람의 주변으로 동그랗게 공백이 만들어졌다. 레인은 그 가운데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익숙하다고까지는 못 하지만, 확실히 아는 얼굴이었다. 가운데에서 궁지에 몰린 자는 라사 켈슨이었다.

“터무니없는 모함입니다! 제가 왜 잔에 독을 넣는단 말입니까?”

“그건 이제부터 알아볼 일이지.”

라사의 조금 앞에 서 있는 그란델의 목소리는 이미 죄를 확신하고 있는지 몹시 차가웠다. 라사는 그란델의 앞에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넙죽 엎드렸다. 멀리서 보기에도 라사가 몹시 떨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제가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저 같은 하녀가 무슨 수로 은에도 반응하지 않는 괴이쩍은 독을 손에 넣는단 말입니까!”

“변명이라면 고문실에서 듣겠다.”

“백작님!”

“뭘 하고 있지? 어서 끌어내라.”

후작가의 사병들은 주인의 가족인 그란델의 명을 제 주인의 명처럼 따르며 라사의 양팔을 붙잡았다. 옆에서 지스킬이 그냥 빨리 가자고 레인을 잡아당겼으나, 레인은 도리어 라사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유르딘에게 독을 먹인 파렴치한 인간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독을 약이라 건네며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 라사의 표정이 너무도 쉽게 상상이 갔다. 마치 직접 봤던 것처럼.

그저 확인만 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계단 위에서 나타난 레인을 발견한 라사가 비명을 질렀다. 최후의 발악인지 놀랄 만한 힘으로 순간 사병들을 멈춰 서게 한 라사가 레인을 마구 손가락질했다.

“저, 저자가! 저자가 시켰습니다! 의심받지 않도록 수를 쓸 테니, 자신이 마실 잔에 넣어 두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레인에게로 쏠렸다. 터무니없는 말이란 건 모두가 알았다. 대체 무슨 수로 레인이 마셔야 할 두 번째 잔을 유르딘이 마시도록 조종한단 말인가? 새로 내와도 되는 첫 번째 잔을 그대로 버리고 두 번째 잔을 입에 댄 건 유르딘의 돌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호기심과 두려움을 품었다. 설마 하는 수많은 시선이 레인에게로 향했다. 레인을 급히 따라온 지스킬이 당황해 레인을 잡아당겼으나, 차마 걸음을 떼기도 전에 라사의 발악이 이어졌다.

“당신도 절 외면하십니까! 당신의 어머님처럼!”

순식간에 경악에 찬 웅성거림이 홀 안을 번져 나갔다. 어머니는 언제나 레인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원래부터 레인은 죄를 뒤집어씌워서는 안 될 성역이 아니라 마땅히 죄인에 걸맞은 반역자의 핏줄이었다. 약간의 먹이를 던져 주자 의심을 품는 건 쉬웠다. 역병처럼 참혹한 분위기가 번져 나간다. 만에 하나 정말로 레인이 유르딘이 마실 잔을 조작했다면? 말 대신 수십 개의 시선이 레인을 향했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은 죄인을 보는 질책으로 변해 있었다.

‘더러운 새끼.’

현실이 아닌 머나먼 과거, 혹은 미래의 목소리가 잠긴 기억을 뚫고 빠져나와 레인의 귓가를 두드렸다.

‘야만족과 붙어먹는 더러운 갈보가.’

‘이 새끼가 모두 죽였어!’

‘쳐 죽여야 돼, 본보기를 보여 줘야 한다고.’

‘씨발놈, 진작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온 사방에서 묵직한 목소리들이 레인을 두드리다 내리치고 세차게 때렸다. 레인의 몸이 휘청거리며 바닥에 무너지려고 하는 걸 지스킬이 붙잡았다. 레인의 몸에서 갑작스레 열이 들끓었다. 그란델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병사를 질책했다.

“헛소리를 하는 것을 뭘 지켜만 보고 있나? 끌어내. 마이어 경, 그대는 어서 공자와 방으로 돌아가라!”

지스킬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 망설이다가 그대로 휘청거리는 레인을 안아 들었다. 쿵, 그란델의 지팡이가 바닥을 세게 내리찍었다. 그란델의 또렷한 목소리가 혼란 속을 갈랐다.

“다들 조용히 해라. 아무 증거도 없이 그저 죄인의 주장으로 아이제나흐 공자를 의심할 생각인가? 하녀장의 죄는 목격자가 있으니 명백하나, 아이제나흐 공자가 죄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죄인의 말 이외에 없다. 후작의 두 번째 잔을 받은 공자를 함부로 감금하는 건 후작 본인의 의사와도 상충할 터. 죄인 취급은 하지 말고 방으로 모셔라.”

점점 멀어져 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레인의 눈을 지스킬의 한 손이 덮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이 몸의 안위 따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유르딘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레인은 어찌 돼도 좋았다.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으나 말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레인은 구금됐다. 문 앞을 누군가 지키고 서지는 않았으나 되도록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어차피 나갈 힘도 없었다.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레인은 라사가 죄인으로 몰린 이유에 대해 알게 됐다. 이전부터 라사를 수상쩍게 보고 있던 하녀가, 라사가 잔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그란델에게 고발해 끌려 나왔다. 라사가 얼마 전부터 수상하게 굴었다는 정황이 많았다.

다행히 아침이 밝아 올 무렵 유르딘의 상태가 안정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워낙 피를 많이 토해 위험하기는 했으나, 독 자체는 유르딘이 중독에 대한 내성을 기르던 종류라 살아남았다. 이제 남은 것은 범인을 밝히는 일이었다. 밤새 한 번도 잠들지 않았던 레인을 걱정해 바쁜 그란델이 직접 찾아왔다.

“그 하녀가 정말 범인이 맞나요?”

“맞을 거야. 그러니 안심하고 이만 쉬어.”

“하지만……. 하지만 혹시 다른 사람이…….”

잠들지 못해 붉어진 눈으로 레인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전날부터 계속 깨물었던 입술은 피가 터져 엉망이었다. 그란델은 손수건을 대어 주며 의아한 낯을 했다.

“짐작 가는 자가 있어?”

“혹시 카이렌 모드가 이 저택에 오지 않았나요?”

“카이렌 모드?”

레인은 제가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카이렌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놈이 직접 말하지 않았나.

‘방해되는 것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너를 손에 넣을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생생했던 감촉이나 머리채가 쥐어뜯긴 모양새로 흐트러졌던 머리칼, 모든 게 이상했다. 그란델이 레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강하게 어깨를 붙들었다.

“정신 차려. 카이렌 모드는 저택의 초대객에 없었을뿐더러, 연회가 벌어지기 전부터 올리베 백작가의 연회에 참석해 있었어.”

“……정말인가요? 하지만 분명… 이 저택에서 본 것 같은데.”

레인이 미심쩍다는 눈으로 쳐다보니, 그란델은 한숨을 쉬고 레인을 잡아끌어 억지로 침대에 눕혔다.

“정말이야. 형은 아이제나흐 공작가와 모드 백작가를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어. 어제 오후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그곳에 머물렀으니까 여기에 왔을 리가 없어.”

“제가 헛것을 봤다는 건가요?”

“피곤해서 그렇겠지. 쉬어. 쉬면 조금 나아질 거야. 범인은 추적하고 있고, 형도 나아졌으니까. 네가 그런 얼굴이면 형도 낫질 않을걸.”

그란델이 억지로 레인의 눈을 감겼다. 마른 풀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으니 아득바득 버티고 있던 게 거짓말처럼 레인은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대로 레인은 며칠을 고열에 시달리며 내리 앓았다.

그날 오전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유르딘이 쓰러진 밤, 베른이 저택을 빠져나가던 수상한 자를 은밀히 추격해 본거지 앞에서 붙잡았다. 조사해 보니 독약을 포함한 약물 거래를 불법으로 하는 무리 중 하나였다. 이전부터 유르딘이 카니예와 내통하는 게 아닌지 의심했던 자들이라 실체를 파악하기가 쉬웠다.

그들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훨씬 전인 수십 년 전부터 라인셀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카니예 출신들이 모인 불법 길드였다. 말이 길드지, 사실상 뒷골목의 폭력 조직에 가까웠다. 카니예의 높으신 귀족들과 연이 닿아 있는 길드는 거액을 받고 라인셀 이곳저곳을 은밀히 들쑤셨다. 그러나 카니예가 대패하고 상황이 어려워지자 결국 라인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길드가 마지막으로 받은 의뢰는 유르딘의 암살이었다. 길드는 반년의 유예 기간을 두고 지금까지 쌓아 온 걸 총동원해 유르딘의 목숨을 노리기로 했는데, 암살자란 암살자는 보내는 족족 죽어 나가더니 역으로 왕국 전역의 거점들이 발각당했다. 유르딘의 추격이 턱 끝까지 쫓아오자 간신히 이어지던 거래가 모조리 끊겼다. 손발이 사라진 상황에서 곧장 철수함이 마땅했으나 길드는 부득불 라인셀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유르딘의 암살을 꾀했다. 운 좋게 유르딘의 눈에 띄어 신임을 얻은 라사가 길드의 손을 잡고 있었기에 독만 구하면 암살은 간단하게 성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약물 거래가 모조리 끊긴 자들이 일반적인 검사로 검출해 낼 수 없는 독을 구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대체 무슨 수로 독을 손에 넣은 것인지, 누군가가 추가로 연루된 게 아닌지 추적하던 중 어느 귀족이 얽혀 있는 게 밝혀지며 왕국은 다시 한번 뒤집혔다.

독과 연관된 귀족의 이름은 다리우스 로닐. 1년 전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아카데미 졸업을 포기하고 급하게 영지로 돌아와 작위를 물려받은 젊은 백작이었다. 백작이라고는 해도 로닐의 영지는 척박한 편이라 별 실속은 없었다. 수십 년 전까지는 광산에서 짭짤한 소득을 올렸으나 자원이 바닥을 드러내자 로닐 백작령은 순식간에 가난한 영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다행히 백작령 근방에 있는 바위 계곡에 해당 지방에서만 나는 희귀한 약초가 있었다. 바위 계곡은 원래 왕의 소유였지만, 로닐 백작가의 사정이 어려워지고 선대 로닐 백작이 왕가에 도움을 청하자 왕가는 바위 계곡에 나는 약초의 채집과 관리, 유통에 관한 것을 백작가에 일임하고 약초 거래에 따라 일정 비율의 세금을 걷어 가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었다. 다만 이 약초는 일반적으로는 약으로 쓰이나 특수한 방법으로 정제할 경우에 맹독으로 변하기 때문에, 매년 채집량과 유통량에 대해 철저한 보고를 받았다.

사실 이런 식으로 관리되는 왕가의 재산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라인셀은 제법 커다란 왕국이었고, 왕국 외곽으로 갈수록 왕가가 직접 관리하기가 힘든 부분이 많았다. 원칙적으로는 정확히 관리하는 게 옳으나 대부분의 귀족은 왕가에 보고하는 것 외에도 약간씩 관리하는 자원을 빼돌렸다. 엄밀히 말하면 대여니 왕가의 사유 재산이기에 멋대로 이득을 취하는 것은 중죄이지만, 대부분 들켜도 관리에게 뇌물을 찔러 주는 것으로 가볍게 해결됐기 때문에 많은 귀족이 알음알음 빼돌리며 부당한 이득을 보고 있었다.

다리우스 로닐도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그는 백작이 되자마자 갑작스레 아버지가 죽으면서 생긴 여러 가지 손해를 이런 방식으로 메꾸려고 했다. 가장 쉬운 게 바위 계곡에 제멋대로 자라난 약초를 팔아 치우는 일이었다. 선대 로닐 백작은 약초가 독으로 정제될 수 있으므로 극도로 조심하며 불법적인 거래를 지양하고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다리우스는 그런 아버지가 답답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영지에 돌아온 다리우스가 약초를 왕가에 보고하는 것 이상으로 채집해 팔아 치우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렇게 유통된 약초는 우여곡절 끝에 카니예 출신의 불법 거래상의 손에 들어갔고, 특수한 조제법을 알고 있는 의원의 손으로 넘어가, 최종적으로 라사의 손에 들어왔다.

원래대로라면 다리우스는 약초를 빼돌린 게 밝혀져도 자신이 취한 이득을 바치는 선에서 죄를 회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리우스의 영지에서 난 판별하기도 극히 어려운 맹독이 렘샤이트 후작을 겨냥해 상처 입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르딘은 상징적인 의미 이상의 실질적인 무력을 보유한 왕국의 진정한 검이었다. 치열하게 싸워 온 카니예가 한 번에 항복한 것도 유르딘이 오러로 성을 갈랐기 때문이고, 아벨라드가 호시탐탐 라인셀 남부를 노리다가 쥐 죽은 듯 잠잠해진 것도 유르딘이 귀환했기 때문이었다. 유르딘이 그간 양국에 끼치고 있던 억제력은 그가 쓰러지고 사흘 후에 확인할 수 있었다. 유르딘이 피를 토해 생사의 고비를 넘고 있다는 소식이 양국으로 순식간에 뻗어 나가자마자 국경 부근에서는 언제 잠잠했냐는 듯 도발과 함께 소규모의 전투가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고작 약초를 조금 불법으로 유통했을 뿐인데, 다리우스의 불법 행위는 규모가 불어나 왕국을 뒤흔들었다.

만약 그 독을 원래 예정대로 유르딘이 마실 잔에 발랐더라면 이렇게까지 큰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라사는 길드를 배신했다. 아니, 배신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레인을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레인의 잔에 약을 발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독을 마신 건 유르딘이었다.

일련의 사태에 대해 왕은 격노했다.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다리우스 로닐은 수도의 저택에서 체포당해 귀족 대우도 못 받으며 흠씬 두들겨 맞고 지하 감옥 가장 깊숙한 곳으로 끌려갔다. 직접 독을 먹인 건 아니니 렘샤이트 후작을 죽이려 한 죄를 물을 수는 없었으나, 왕가에서 관리를 맡긴 자산을 빼돌린 죄는 명백했다. 이전 같으면 지레 찔려서, 혹은 자신들의 이득까지 막힐까 봐 다리우스의 편을 들었을 귀족들도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일련의 조사 과정이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던 데다 많은 자료가 유르딘의 부관인 베른의 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다리우스가 유르딘의 함정에 빠진 게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무시당했다. 그도 그럴 게, 다리우스와 유르딘은 아무런 접점이 없었던 데다가, 아무리 독에 대한 내성이 있다고 해도 위험했던 건 대신관이 증언한 진실이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제 목숨을 걸고 독을 마실 리가 없었다. 왕국의 영웅을 자해 공갈단으로 모는 미친 음모론은 잠깐 들썩였다가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간신히 고비를 넘기기는 했으나 며칠째 일어나지도 못하는 유르딘은 왕국 전체의 근심이었다. 정치에 관심 없는 평민들조차 이번 사건에 대해 너 나 할 것 없이 떠들었다. 매일같이 신전에는 유르딘의 무사 회복을 비는 기도와 꽃이 가득 쌓였다. 그 누구도 유르딘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영웅은 영웅으로서 추앙받을 뿐이다.

한편 레인의 방 안에도 꽃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며칠간 앓느라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레인을 위해 지스킬이나 그란델, 렘샤이트 후작가의 집사가 꽃을 가져다주었다. 유르딘의 꽃은 없었다. 그래도 가끔 깨어나 최소한의 생활은 한 레인과 달리 유르딘은 며칠째 의식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독한 열병을 앓는 와중에도 레인은 끊임없이 바깥의 소문을 들었다. 지스킬은 병자가 골치 아픈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라 말을 아끼려 했으나, 잡혀 들어간 귀족의 이름을 듣자 도저히 듣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다리우스 로닐은 레인에게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저를 짓밟은 자의 이름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이미 죽은 마렌, 다리우스, 칼. 다리우스는 셋 중 가장 뻔뻔한 놈이었다. 저번에 죽은 마렌 돌브는 그날 일을 잊은 사람처럼 레인을 무시했고, 다른 한 사람인 칼 레히드는 그날 일을 잊고 싶은 사람처럼 레인을 외면했으나, 다리우스는 그날 레인을 안은 일이 마치 제 인생에 트로피를 하나 추가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굴며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음흉하게 웃거나 빈정거렸다. 아마 아카데미를 꽉 잡고 있던 카이렌이 아니었더라면 강간을 당해도 수십 번은 더 당했을지 몰랐다.

이제는 레인이 다리우스에게 보복하려 들지 않아도 이미 왕국 전체가 충분히 차고 넘칠 정도로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다리우스는 이번 건에 더해서, 철저한 조사 끝에 밝혀 낸 선대의 죄까지 모두 뒤집어쓰고 참수형을 당할 예정이었다. 덧붙여서 이 기회에 왕가의 자산을 점검하고 부정한 이득을 착복한 귀족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마렌에 이어, 다리우스마저 죽게 된다. 둘 모두가 유르딘과 연관이 있었고, 다른 이들은 몰라도 레인은 그 둘이 자신과 은원 관계가 있음을 알았다. 가장 큰 은원 관계인 아이제나흐 공작과 레스터는 유르딘이 복수의 대상이라고 직접 말했으며, 헤레일이 레인을 강간하려 했을 때 유르딘은 카이렌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를 의심했다.

유르딘이 이미 레인의 과거를 모두 다 알고 그들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나친 억측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정황이 너무나도 많았다. 황당무계한 음모론이 나올 정도로 두 사건 모두 유르딘은 미리 그들을 노리고 준비한 사람처럼 빠르게 일을 끝마쳤다. 지금은 유르딘이 쓰러져 있으나 결정적인 일을 처리한 건 결국 유르딘의 수족인 베른이었다.

어머니의 일 외에도 자신의 가해자들에 대한 복수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기쁨 이상의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른 건 몰라도 세 사람이 레인을 강간한 사실을 정확히 아는 건 극소수였다. 헛소문처럼 아카데미에 소문이 돌았으니 그걸 들었을 수도 있지만, 설마 유르딘이 소문만으로 움직였을 리는 없었다. 만약 유르딘이 레인이 겪은 일에 대해 다 알고 있다면 어찌 대해야 할까. 그 일은 레인의 죄가 아니었다. 레인은 행하지 않았고 그저 당했을 뿐이다. 나쁜 건 가해자일 뿐이지 피해자인 레인이 아니다.

하지만 더럽다. 더러워졌다. 존재 자체가 귀한 유르딘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오물이 묻을 게 분명하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들어찬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직 열이 펄펄 끓는 몸으로 욕조가 차가워질 때까지 처박혀 몸을 문지르고 있었다.

“레인!”

혼비백산한 지스킬이 레인을 건져 냈다. 그가 아니었다면 더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지스킬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레인을 자리에 억지로 눕혔다.

“다 잘 풀리고 있어. 뭐가 걱정이야?”

“미안해.”

아무리 지스킬이 호인이라지만 제 치부를 공유할 수는 없었다. 입을 꾹 다문 레인에게 지스킬은 차라리 푹 쉬라며 수면제를 건넸다.

레인은 약을 먹고 잠든 채로도 꿈에 시달렸다. 앓는 내내 레인은 유르딘이 쓰러진 직후 중앙 홀에서 있던 일과 이전에 꿨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성에서 비난받던 꿈을 번갈아 가며 꾸었다. 괴로운 심사가 꿈에 나타나는 것인지, 아니면 그에 꿈이 더해져 괴로운지 알 수 없었다. 레인을 더럽다고 비난하고 등 돌리는 유르딘의 모습을 지켜보는 걸 마지막으로, 레인은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막 깨어난 옆에 며칠 새 얼굴이 반쪽이 된 베른이 와 있었다. 그는 힘겹게 일어나는 레인에게 물을 따라 주고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사 켈슨에 대한 조사가 끝났습니다. 레인 님에 대한 의혹도 완전히 풀렸고요.”

“…….”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라사 켈슨을 만나고 싶다면 독대하게 해 드리지요.”

“괜찮아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의혹이 풀렸으니 구금도 끝났으며, 드디어 자유롭게 유르딘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레인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절망에 맞닿아 있는 기억들이 혼란스레 레인의 정신을 헤집고 있었다. 몸도 정신도 잔뜩 지친 상태였지만 드디어 만나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걸음은 가벼웠다. 레인은 고요한 저택을 날듯이 달렸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는 순간은 수많은 의혹들도, 죽을 뻔했다는 두려움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순간, 레인은 그저 유르딘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강렬하고 순수한, 단 하나의 열망만을 떠올리자 거짓말처럼 혼란이 가라앉았다. 대신에 열에 취한 사람처럼 발그레해진 얼굴을 하고 레인은 순식간에 유르딘의 방에 도착했다. 미리 지시를 받았던 양 앞을 지키고 있던 사병들은 자연스레 문을 열어 주었다.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유르딘은 커다란 침대 위에서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매일 레인이 시체처럼 누워 있었는데, 이제는 반대가 됐다. 강인하게 서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는데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병약한 모습을 보자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나왔다. 웃었으나 동시에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억울한 누명에 몰렸던 레인은 큰 위협 없이 위기를 헤쳐 나왔으나, 유르딘은 여전히 위기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레인은 조심스레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유르딘의 손을 붙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살아 있었다. 피가 밴 딱딱한 돌벽의 시린 냉기가 아니라 손끝에 와 닿는 온기를 마주한 순간, 눈물이 후두두 쏟아졌다.

사랑하는 유르딘. 아주 오랫동안 레인이 사랑했던, 이 세상에 유일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으나, 레인을 지금까지 살아오게 한 사람의 온기였다.

시간을 거슬러 온 레인은 유르딘에 대한 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서, 차라리 이전의 삶에 대해 모든 것을 잊기를 바랐다. 잊고 도망쳤다. 그렇게 괴로워서 도망치는 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다만 도망치고 외면해서는 아무런 해결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도망치면 편리한데 굳이 버티고 서서 괴로움을 감내해야 할까? 그건 너무도 가혹한 일이다. 결국,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가혹한 상황이 현실이었다.

이 세상은 그저 살아가는 데만도 수없이 많은 것들을 요구하면서, 정작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주어지지 않거나 오히려 박탈당할 때도 잦았다. 부조리하다. 레인의 삶은 이러한 부조리의 표본과도 같았다. 반역자의 핏줄이라며 평균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하면서, 정작 레인이 그 기준점을 모조리 충족시켜도 제대로 인정해 주기는커녕 깎아 내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거짓된 죄를 뒤집어써서 억울한 상황에 몰렸을 때도 그간 레인이 해 온 노력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의혹에만 열중해 죄인으로 낙인찍고 감옥에 처박았다.

사랑하는 이의 외면 속에서 방치된 죽음은 레인이 그간 겪어 온 부조리의 절정이었다. 지나치게 가혹했던 시간에 대한 기억은 레인이 더는 홀로 견디기엔 너무도 힘들었다. 그래서 망각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지금은 레인을 지탱하는 온기가 있었다. 혼자서는 버티지 못할 일을 기꺼이 함께 짊어져 주는 사람이 있다. 레인이 일평생 꿈꿔 오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소망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가와 빛나고 있었다.

살아가다 보면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기억이 있다. 삶은 지나간 시간을 흘려 버린 채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을 하나하나 쌓아 가며 그 위를 올라가는 것이기에. 그저 편해지기 위해 힘든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은 일을 해결하는 데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알고 있는데도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따라가지 못해서 레인은 유르딘에 대한 제 마음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저 멀리 돌아왔을 뿐. 레인은 유르딘을 이번에도 똑같이 사랑하게 됐다.

레인은 차디찬 감옥에서 몸을 산산조각 내는 고통 속에 말라 죽어 갔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삶에 지쳐 모든 걸 원망했다. 기억 속에 눌어붙은 유르딘의 그림자에조차 괴로워하며, 이제는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포기할 만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변명은 한마디도 들어 주지 않고 지하 감옥에 처박은 남자 따위, 증오하거나 원망하면 그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인은 마지막까지 미련스레 외면당한 그 순간에 대해 집착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한심한 삶의 단 하나의 미련이 기억 속에 짓눌려 박제된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결국, 레인에게 실망하고 배신당했다고 믿으며 등을 돌린 그 남자의 뒷모습이 힘겨웠던 자신의 인생 전반보다도 더 무겁게 마지막 남은 숨을 짓눌러 왔다.

그의 등을 돌려, 자신을 다정하게 봐 주는 눈을 마주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저 다시 한번 유르딘을 볼 수 있기를. 그가 자신을 보고 웃어 주기를 레인은 제 삶의 끝까지 바랐다. 최후까지도 버리지 못했던 미련한 소망이었다.

기억을 잃은 채 레인은 자신의 소망을 한껏 충족했다. 유르딘은 오로지 레인만을 보고 있었다. 예전에 레인이 유르딘을 봤던 눈 그대로,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열렬하고 맹목적으로 레인만을 바라고 레인만을 소망했다. 아무것도 잊지 않았더라면,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흘려 버린 시간이 너무도 아쉬웠다.

기억이 떠올랐을 뿐 레인은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온갖 의혹은 짙어지기만 할 뿐 해소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이 순간, 진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유르딘은 더 이상 레인을 그 차가운 감옥 속에 처박지 않을 테니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이 순간 바라는 건 오직 하나다. 당신이 눈을 떠 주기만 한다면,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었다. 레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유르딘의 손을 붙잡았다. 이 사람이 좋았다. 기억을 잃고 나서도 다시 한번 사랑할 정도로 이 마음은 레인의 깊숙한 곳까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유르딘. 나의 사랑하는 유르딘.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는 밤에 아침을 불러오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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