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죄지은 자들의 밤 (7/20)

3 죄지은 자들의 밤

레인의 의식은 또다시 정체를 알 수 없는 머나먼 겨울로 옮겨 가 있었다. 아스라한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 레인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레인에게서 등을 돌려 사라지는 남자의 모습에 가슴 시리다. 이 세상 모든 것에게 버림받아도 유르딘에게만은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레인이 최후까지 품고 있던 소망은 그렇게 짓이겨졌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 지금의 유르딘은 레인을 구했고, 레인은 그런 유르딘에게 가슴 설렜다.

‘또 버려질 뿐이야.’

속살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 걸까?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버려지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 관계도 아닌 편이 나았다. 천천히 레인은 눈꺼풀에 힘을 줬다. 어스름한 환상은 망막이 아닌 그의 영혼에 새겨져 있었지만, 마치 그렇게 하면 이미 떠올린 제 감정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어설프게 발악했다. 눈꺼풀이 밀려 올라가며 이미 예전에 흘러간 환상이 아닌 현실이 눈앞에 담긴다.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레인은 여전히 혼란 속에 잠겨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렌다니. 대체 어떻게 조금 전의 유르딘을 보고 설렐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 유르딘은 레인에게 줄곧 자상했다. 굶주린 개가 먹이를 주는 사람을 따르듯이 유르딘의 다정함에 게걸스레 매달려 애정을 구걸하게 됐다면, 차라리 지금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조금 전 유르딘이 보인 모습은 명백한 폭력과 집착의 일면이었다. 비록 레인을 향한 폭력은 아니었지만, 쉽게 사람의 신체 일부를 자르고 그 사람의 인생 자체를 망가뜨리는 강압적인 행위 그 자체가 두려웠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열렬하게 레인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를 질식하게 만들었다.

평생 레인은 그 두 가지 때문에 망가졌다. 쉽사리 타인에게 휘두르는 폭력도, 다른 걸 뒤로 밀려나게 하는 맹목적인 애정도 모두가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얻어맞는 건 몹시 힘든 일이다. 열이 오르고 온몸이 욱신거렸으며 머리가 핑핑 돌아 제대로 설 수도 없다. 자신을 간단하게 짓누를 수 있는 상대에게 매일같이 화를 내고 저항하는 건 몹시 힘겨운 일이다. 레인이 지치고 버틸 수가 없어져서 차라리 빨리 끝내기 위해 카이렌의 요구를 따를 때마다 그는 웃으면서 속삭였다.

카이렌이 어딜 만지든 입에서 자꾸만 제 의지에 반하는 달뜬 신음이 터진다. 처음에는 구역질만 났던 삽입도 갈수록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뭔가가 들어오기만 해도 성기를 세웠다. 꼴사납게 울고 애원하는 목소리는 레인 스스로 느끼기에도 좋아하는 것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성이 바스라진다. 자신은 정말로 이런 걸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싫었더라면 개처럼 맞고 굴종하는 일을 견뎌 내는 대신에, 길거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도망쳤어야만 했다.

‘차라리 죽어 버리지.’

살아서 견디고 있기 때문에 이걸 즐기는 게 되는 건가?

‘봐. 사실은 넌 이런 걸 좋아하는 거잖아.’

개처럼 굴종해 누군가에게 소유 당하는 삶. 애초에 아이제나흐의 후계자 따위는 레인과 어울리지 않는 머나먼 자리였고, 카이렌의 곁에서 그저 쥐 죽은 듯이 지내는 게 레인에게 어울리는 자리인 동시에 그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레인은 저 자신과 싸웠다. 자신은 나쁘지 않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 약하고 덜떨어져 보일지는 몰라도 최소한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쁜 건 그들이지 레인이 아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삶은 계속해서 레인을 좀먹었다. 끈질기게 몇 년을 버텼으나 이미 카이렌의 말에 세뇌당해 인간 이하로 전락해, 폭력과 억압을 애정으로 착각하는 개가 되어 유르딘에게 가슴이 뛴 걸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이런 의혹을 품고도 유르딘을 사랑할 수는 없었다.

다짐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이성을 쉽게 배반했다. 유르딘은 여전히 피를 뒤집어쓴 채 레인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달라진 게 없음에도 여전히 심장이 뛰었다. 난처해하던 레인은 차라리 여기가 어두워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밝았으면 분명, 새빨개진 얼굴이 유르딘에게 그대로 보였을 테니까.

천천히 유르딘이 뻗는 손길에 놀라 움찔했으나 그는 힘이 빠진 레인 대신에 옷을 추슬러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당황해 괜찮다고 유르딘을 밀어내고 허겁지겁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그사이 유르딘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전신을 핥는 듯이 집요한 시선에 레인의 얼굴이 더더욱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작 시선일 뿐인데도 너무나 강렬해 손까지 떨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유르딘의 시선이 완전히 떨어졌다. 유르딘은 다시 레인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레인이 간신히 옷을 다 입었을 때쯤, 유르딘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레인이 어찌할 줄 모르니 유르딘은 괜찮다며 그를 진정시켰다. 이내 발소리의 주인이 레인과 유르딘 두 사람의 앞, 정확히는 소리 지르다가 기절한 발터 플랑까지 세 사람의 앞에 찾아왔다.

“대체 무슨…….”

발걸음의 주인은 지스킬이었다. 보자마자 낭패한 신음을 내뱉은 지스킬은 한순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레인은 이미 옷을 다 추스른 후이지만, 발터는 하의가 벗겨진 상태 그대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지스킬은 유르딘의 앞에 곧장 부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스킬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유르딘이 검집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어찌나 강한 힘인지 단련한 기사인 지스킬이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지스킬이 휘청거리면서 바로 서자, 유르딘은 한 대를 더 내리치려 하다가 검을 꾹 쥐며 인내했다. 유르딘은 검을 다시 허리춤에 차고 지스킬을 일으켰다.

“관대하게 넘어가는 건 이번뿐이다, 마이어 경.”

“죄송합니다.”

“레인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가라. 남의 눈에 띄지 말고. 지금 당장.”

“네? 잠깐만요, 무슨…….”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인이 갑작스러운 명령에 반발했다. 여기서 레인이 가 버리면 발터의 죄를 입증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유르딘이 왕국에 공을 세운 영웅이라지만, 엄연히 왕국의 귀족이자 왕실에 소속된 기사인 발터를 공격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단순한 상해도 아니고 순식간에 거세당하고 팔이 잘렸다. 한 번에 기사로서, 그리고 귀족 남성으로서의 생명이 끊어진 셈이다. 사실 유르딘의 행동은 과잉 방어였다. 레인에게야 끔찍한 일이지만, 피해자가 손가락질받는 라인셀에서 강간은 어지간해서는 중범죄 축에도 못 끼었다. 레인이야 물론 이 일에 얽히기 싫었지만 유르딘이 나서 준 덕분에 끔찍한 일을 피했으니 당연히 그를 도울 생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르딘이 두려워진 것과는 별개로 발터가 꼼짝 못하고 당한 건 속 시원하기도 했다. 게다가 상황이 힘들다지만 믿는 구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최근 레인에게 너그러운 데다 평소에도 가문과 연관된 추문이 도는 걸 싫어하는 딜란이 몸소 나서 준다면, 추문이 퍼지는 건 최소화한 채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증인을 이대로 보내 버리며 레인을 이 일과 연관이 없게 배제시키겠다니.

“어서 데려가. 사람이 몰려든다.”

“레인, 가자. 설 수 있겠어?”

“잠깐…….”

“레인, 어서 들어가.”

유르딘의 기세가 단호해서 결국 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생각해 둔 게 있는지 설명을 요구하기에는 이미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발터가 커다란 비명을 질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레인은 지스킬과 함께 정원의 어둠으로 몸을 숨겼다. 뒤돌아서 본 유르딘의 모습이 누군가가 들고 온 등불의 빛에 먹히는 걸 마지막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피해 빠르게 건물 안쪽의 사람이 없는 복도까지 들어갔다. 불이 켜진 실내에 들어오니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지스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 피 나잖아.”

“원래 머리는 조금만 까져도 피 많이 나.”

지스킬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런 걸 고려해도 많이 난다고.”

레인의 반박에 지스킬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괜히 레인의 손만 꽉 잡았다. 점점 걸음을 빨리한 지스킬은 계단에서 레인이 빠르게 걷지 못하자 결국 기다리지 못하고 둘러업더니, 순식간에 레인이 머무르는 방까지 도착했다. 지스킬은 레인이 머무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그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러고 있지 말고 피 좀 닦아. 사람을 부르는 게 낫겠는데.”

“됐어. 괜히 의심받을라. 너무 걱정하지 마.”

수건으로 피를 닦은 지스킬은 품에서 포션을 하나 꺼내 레인에게 보란 듯이 보이더니 그대로 머리에 부었다. 깊은 상처는 아닌지라 다행히 피는 금세 멎었다. 지스킬은 서랍을 뒤져 그나마 품이 큰 옷을 꺼냈다.

“나도 옷 좀 갈아입어야겠네. 넌 좀 씻는 게 어때?”

다친 곳은 거의 없지만 바닥으로 떠밀려 옷이 엉망이었다. 지스킬에게 떠밀려 레인은 욕실로 들어갔다. 다친 데가 없는 줄 알았는데 흙을 털고 보니 은근히 긁힌 상처가 많았다. 긴장한 탓인지 몸이 여기저기 아팠다. 아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기도 했지만, 이 상태라면 씻다가 그대로 잠들 것 같아서 가볍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욕실에서 나오니 지스킬은 시야에 없었다. 방 안을 뒤지던 레인은 침실이 있는 방의 소파에서 지스킬을 발견했다. 지스킬이 와서 쉬라는 듯이 손짓했다.

“넌 안 쉬어?”

“네가 자면 조금 쉴 거야.”

“지금 편히 쉴 만한 상황이 아니잖아. 후작께서…….”

“괜찮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지금 네게 필요한 건 걱정하는 게 아니라 휴식이야.”

레인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수긍했다. 유르딘이 뭔가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괜히 나서는 게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포기하고 자리에 편히 눕자 지스킬이 심각한 얼굴로 레인의 이마에 난 작은 생채기에 포션을 펴 발랐다.

“미안해. 오늘 일은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널 잘 지켰어야 했는데.”

“내가 가라고 했었잖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가서는 안 됐어. 다음에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지스킬이 중얼거리며 손등 위의 상처에도 포션을 펴 발랐다.

“너 아까 나한테 머리를 맞은 것치고도 피가 많이 난다고 했었지.”

“응. 그게 왜?”

“넌 그런 일을 볼 만한 상황이 별로 없는 귀족이잖아. 그런데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

“본 적 있어? 아니면… 네가 그렇게 피가 나 본 적이 있어?”

왜 없겠는가. 그러나 레인은 대답하는 대신 괜히 소매를 아래로 꾹 내렸다. 내포된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지스킬은 피가 날 만한 일을 겪을 상황이 많았느냐고, 또는 아까 발터가 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일을 당할 뻔한 적이 많았느냐고,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생활했으니 지스킬이 레인에 대한 소문을 전혀 모를 리도 없었다. 깊이는 몰라도 최소한 표면적인 소문은 들었을 테고, 오늘 소문을 확신할 만한 근거를 얻었다. 레인은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대신 가볍게 웃었다.

“설마, 그나저나 계속 이러고 있으려고? 부담스러워서 오던 잠도 달아나겠어.”

말을 돌리는 레인에게 지스킬은 끝까지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신중한 얼굴로 말을 고르더니 다른 화제를 꺼냈다.

“레인, 아까 한 이야기 말이야.”

“아까?”

“연회장에서. 내가 널 지키고 있다는 거…….”

지스킬은 뭐라 말해야 좋을지 잘 모르는 사람처럼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맞아. 사실 후작께서 널 살펴보라고 해서 네게 접근했고, 지키기 시작한 거야. 하지만 그다음 행동들이 모두 거짓인 건 아니었어. 지내다 보니까 괜찮은 녀석이더라, 너. 나랑 정반대 성격이라 안 맞는 게 많은데 오히려 그런 점이 참 좋았어. 같이 지내다 보니 너랑 정말로 친하게 지내고 싶어졌어.”

술에 취하고도 못할 만큼 낯부끄러운 소리였다. 지스킬도 제가 하는 말이 몹시 노골적이라 부끄러운 건 아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지스킬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후작께서 왜 너를 지키라고 말했는지 나는 정확한 이유를 몰라. 그래서 조금은 가볍게 생각했어. 별 이유 없다고. 지금도 여전히 이유는 모르지만, 이제는 몰라도 상관없어. 그분이 네게 위험이 물러났다고 판단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라도 내가 널 지켜 줄게. 기사의 맹세를 걸고, 너를 목숨 바쳐 지킬게.”

거기까지 말한 지스킬은 부끄러운지 레인의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시뻘게진 얼굴로 레인의 머리를 이불로 끝까지 덮었다. 죽일 셈이냐고 따지자 슬그머니 손을 놓았으나, 레인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도망가고 옆에 없었다. 아예 객실을 나간 것 같지는 않고, 다른 방으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얼떨떨한 시선으로 레인은 지스킬이 조금 전까지 앉아 있었던 의자를 그 대신 바라보았다. 기사의 맹세까지 들먹이며 지키겠다는 감정은 레인을 향한 동정일까? 전부는 아니라도, 동정이 아예 없지는 않을 터였다. 지스킬 마이어는 사람을 죽이는 게 일인 기사치고는 몹시 선량하고 이타적인 성품이다.

레인과는 정반대다. 자신을 생각하는 데만도 벅찼다. 이유가 뭐든 상관없다. 자신을 지켜 준다면, 손을 뻗어 준다면 그게 누구의 손길이든 기꺼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뻐하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자신만 위해 주는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 주는 일은 레인이 평생 꿈꿔 온 망상이다.

생각은 한 바퀴 돌아 결국 유르딘에게로 돌아왔다. 기억을 잃었던 동안 유르딘에 대한 어떠한 일들이 있었던 걸까? 그게 은연중에 남아 유르딘을 좋아하게 된 거라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레인에게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유르딘 니제스를 좋아하는 게 카이렌이 말하던 것처럼 자신의 안에 내재한 비굴한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자연스러운 감정의 소산이라는 걸 증명해 줄 수 있는 이유를 원했다.

더는 정체불명의 기억을 외면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환상의 정체를 알아내고 유르딘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야만 했다. 제 감정을 끝내는 것이든, 아니면 자신 또한 유르딘에게 끌리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든 결론을 내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지스킬은 레인이 눈을 뜨자마자 안심하라는 듯이 웃었다.

“발터 플랑이 반역죄를 저질렀고, 자백했어. 곧 수도로 이송될 거야.”

반역죄라니. 어떻게 하필 이 순간, 고작 하룻밤 새에 발터의 반역죄가 밝혀진단 말인가? 마치 예전부터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준비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던 오전 중에 유르딘이 레인을 찾아왔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북부에서 돌아와서부터 지금까지 죽 조사해 둔 게 있었지. 수도로 돌아가면 슬슬 사건을 터트릴 생각이었다만……. 일이 이렇게 된 김에 바로 터트린 거다.”

지난 몇 년의 세월 동안 레인의 왕국인 라인셀은 카니예-펠든의 연합군과 끊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줄곧 유리한 고지에 서 있던 라인셀 또한 피해의 규모는 상당했는데, 피해의 이유는 우습게도 라인셀 내부의 배신자들 때문이었다. 라인셀은 제법 넓은 땅덩이를 지닌 나라로 이번에 침략한 카니예, 남부의 아벨라드와 함께 북부 대륙을 커다란 세 덩이로 양분하고 있었다.

그 견고한 균형이 유르딘 니제스라는 강력한 소드 마스터 한 명에 의해서 깨어졌다. 소드 마스터들은 일당 천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중에서도 유르딘은 특별했다. 고작 이십 대의 나이에 오러를 발한 유르딘의 재능은 천재 중의 천재였다. 라인셀은 유르딘의 기세를 타고 순식간에 북부의 야만족을 짓밟고 카니예 정벌을 시작했다. 당시 유르딘의 나이는 고작 서른. 소드 마스터들의 전성기는 노년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주욱 이어진다. 유르딘이라는 역사상 손꼽힐 만한 패를 쥐고서 카니예와의 전쟁에만 활용할까? 그럴 리 없었다.

자칫하면 삼국의 균형이 깨어질 만한 상황인지라 라인셀과 카니예, 펠든은 물론이고 아벨라드나 기타 소왕국들이 얽힌 전쟁은 온갖 음모가 판을 쳤다. 거액의 금이 오고 가니 타국에 정보를 파는 자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첩자가 판을 치는 건 당연지사였다. 라인셀이 입은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일단 전쟁부터가 유르딘이라는 패를 쥔 것치고는 어마어마하게 길어졌다. 분노한 왕은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적국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귀족들을 조사하며 용서 없이 처벌을 내렸다.

수도에 있던 발터가 반역죄의 혐의를 얻게 된 까닭은 그가 예전부터 북방에 있는 기사 에타드 레민에게 보낸 군사 자금이 원인이었다. 발터가 보낸 자금은 에타드가 군 내부에 풀어 둔 몇몇 첩자에게 활동비의 명목으로 지급되었다. 에타드는 첩자들에게 별거 아닌 정보들을 수집하고, 수집한 정보들을 끼워 맞춰 쓸 만한 정보로 만들어 팔아 치우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다. 첩자에게서 정보를 수거하는 모든 과정을 하수인에게 일임하여, 첩자 간에도 서로를 모르게 하고 발각될 것 같으면 꼬리를 자르거나 스스로 처단하는 신중한 수법을 사용했다. 머리가 대단히 비상한 자였다. 덕분에 아직까지 발각되지 않고 오히려 라인셀에서 높은 지위를 쌓고 있었다.

“발터 플랑은 에타드 레민에게 기사가 되게 해 달라고 뇌물을 건넨 모양이다. 북부에서 연일 승전 소식이 들려오니, 아카데미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것보다야 북부로 가서 뭐라도 하나 공을 쌓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겠지. 뇌물을 건네야 할 정도로 능력 없는 놈이 와서 뭘 하려고 했겠냐만은.”

유르딘의 말은 가차 없었으나 사실이었다. 다만 궁금한 건 전쟁이 끝난 후, 어떻게 에타드를 의심하고 발터까지 추적할 실마리를 잡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당연하지만 일을 실행하고 있을 때가 일이 끝난 뒤보다 발각되기 쉽다. 몇 년 씩이나 첩자 노릇을 한 에타드가 쉽사리 행적을 흘릴 리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알아내신 거예요?”

“알아서 말하던데.”

유르딘의 답변은 전혀 어려울 게 없었다는 투였다. 에타드 레민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걸 쉽게 말할 리가 없었다. 믿기지가 앉았다.

“알아서 말했다고요?”

“내가 찾아가니까 제 발 저린 것처럼 털어놓더군. 예전에 첩자질을 한 것 때문에 찾아온 거면 전 재산을 줄 테니 제발 살려 달라고. 알아서 불길래 잠시 들어 줬지.”

“…그, 그랬나요?”

레인이 얼떨떨하게 답했다. 농담일까? 유르딘이 너무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지라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유르딘이 이처럼 확신을 갖고 말하는 걸 보면 물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발터가 반역죄에 직접 연루되었을지는 불분명했다. 물론 발터가 보낸 돈이 에타드에 의해 첩자들의 손에 들어갔으니 죄가 없지는 않았지만, 반역죄를 짊어질 정도냐고 물으면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뇌물을 보내는 발터의 입장에서 돈의 사용처를 물을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끝까지 연관이 없다고 잡아떼면 회생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유르딘은 에타드뿐만 아니라 발터에게도 자백을 받았다고 했다. 특별히 밤사이에 자백을 부추길 만한 고문도 없었다고 하니, 발터가 제 스스로 털어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자백이 정말로 발터의 의지에서 나온 것일까? 약간의 정황 증거만 있으면 죄는 권력자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키워질 수 있었다. 유르딘이 그 권력자였다. 가주가 아닌데다 특별한 권력이나 재력을 쥐지 못한 발터가 혼자만의 능력으로 거금을 운용할 수 있을 리는 없다. 돈은 플랑 가문에서 나왔을 테고, 일을 키우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플랑 가문에도 책임을 물을 수가 있다.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자백해서 혼자 죄를 뒤집어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당신이 죄를 뒤집어씌운 건가요?

레인은 차마 그렇게 묻지 못했다. 유르딘은 어제의 모습은 연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남자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가차 없이 사람을 찔러 죽인 모습을 목격한 이상, 그저 간단하게 어제의 모습을 지금의 유르딘에게서 분리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지나친 상냥함이 가면 쓴 모습이고 지난번의 그 모습이 본성인 양 느껴졌다. 레인의 굳은 표정을 본 유르딘이 조심스레 손을 맞잡았다. 뜨거운 손이었다.

“레인,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그냥 힘든 생각 하지 말고 편안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다정한 속삭임에 홀리듯이 이끌려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유르딘의 말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두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이상한 환상의 정체를 밝혀낼 다짐을 하며 레인은 수도로 향했다. 유르딘은 돌아오는 길에 죄인의 호송이나 다른 일 처리 때문에 함께할 수 없었다. 대신 레인의 옆자리를 지스킬이 채웠다. 자신이 했던 다짐대로 지스킬은 레인을 열과 성을 다해 보호했다. 사실 그 보호라는 게 조금 과할 때도 있어 귀찮기도 했지만, 레인은 거절하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과 안전 중 하나를 택하자면 당연히 후자였다. 레인이 거절을 각오하고 손을 뻗는 게 아니라, 상대가 먼저 손을 뻗는 안온한 보호가 기뻤다.

수도에 도착한 레인은 저택으로 가는 대신에 곧장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어차피 곧 학기가 시작될 것을, 굳이 저택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방문을 열자마자 누군가의 그림자가 툭 튀어나왔다.

“레인.”

밝고 들뜬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것과 정반대로 레인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었던 목소리가 현실로 다가왔다. 카이렌은 레인을 끌어안은 채로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우악스러운 힘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레인은 언제까지나 약자일 뿐이다.

“놓지그래.”

뒤에 서 있던 지스킬이 카이렌의 팔을 붙잡았다. 카이렌은 의아한 얼굴로 레인과 지스킬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가소롭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운 하인인가?”

“지스킬 마이어. 너와 같은 학생인데. 본 적 있잖아?”

“아, 그랬던가? 몰랐네. 미안.”

카이렌이 별거 아니란 듯이 웃었지만, 같은 귀족 학생을 하인 취급 한 건 대단히 무례한 일이었다. 정말 모르는 사이라고 해도 귀족과 하인은 엄연히 복식에서 차이가 났다. 그걸 모를 카이렌이 아니니 이건 장갑을 던진 것과 다름없는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그러나 지스킬은 화를 내는 대신에 웃으면서 카이렌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놓기나 해. 레인이 불편해하잖아.”

“레인이라고 부르네. 나 모르는 사이에 많이 친해졌나 봐?”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 섬뜩했다. 카이렌의 눈이 집착으로 번들거리고 있으리란 걸, 마주 보지 않고서도 알고 있었다. 카이렌은 언제나 레인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생기는 걸 못 견뎌 했다. 하물며 이름을 부르는 친구라니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불편해, 레인?”

카이렌이 붙들어서 불편하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카이렌은 그런 점을 모르는 사람처럼 웃으며 지스킬의 손을 떨쳐 내고는 레인과 얼굴을 마주했다. 평소라면 충분히 흥분하고도 남을 만한 상황인데도 카이렌의 얼굴은 평온했다. 어색하게 굳어 버린 레인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지 카이렌이 씩 웃었다.

“우리 사이에 불편할 리가 없지.”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사이지.”

“미친놈.”

어이가 없어 욕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러나 카이렌은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 네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일 텐데. 네 친구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하지 않을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괜찮아, 지스킬.”

지스킬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발터의 일이 일어났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레인도 전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기숙사는 귀족들이 쓰는 곳이라 방음이 좋기는 해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지스킬을 문 앞에 세워 둔 채 레인이 아예 문 앞에 서서 대화한다면 유사시에 곧장 들어올 수가 있었다.

“잠깐이면 돼.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레인이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여차하면 들어오고. 알았지?’

지스킬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레인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레스터의 꿍꿍이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와 관련되어 있을 카이렌이 무언가 이야기를 해 주겠다는 건 무언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유르딘은 레인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지만, 정말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지스킬은 레인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지스킬은 있지도 않은 볼일을 운운하며 빨리 나오지 않으면 처들어오겠다는 무언의 경고를 남기고 앞에 대기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카이렌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레인이 그 뒤를 따랐다. 방에 들어가 카이렌은 자연스레 침대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떤 식으로든 침실에서 이루어졌으니 습관과 같은 행동일 수도 있지만, 경계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레인은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그대로 문고리를 잡았다. 카이렌이 레인을 돌아보았다.

“이대로 이야기해.”

“이대로?”

카이렌은 레인의 굳은 얼굴이나 문고리를 잡은 손을 훑어보더니 씩 웃었다. 불길함을 느낀 것과 레인의 입이 틀어막힌 것이 거의 동시였다. 제대로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카이렌은 그대로 레인의 턱을 단단히 쥐고 입을 맞췄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목뒤를 느릿하게 주물렀다. 카이렌은 레인을 지나치게 잘 알았다. 혀와 입안의 점막이 자극됐을 뿐인데 순식간에 쾌감이 달아오르며 벌써 몇 달이나 성적 자극을 받지 않았던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수치심에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카이렌의 웃음이 입술 위에 닿는 감각마저도 역겹도록 황홀했다. 카이렌은 웃으면서 레인의 붉어진 뺨 위에 입을 맞췄다.

“마저 할까?”

말없이 밀어내니 카이렌은 의외로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욕망은 일단 한 번 갈무리했지만, 얼굴에 서린 웃음기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귀여워. 설마하니 네가 단련한 기사를 상대로 쉽게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뭘 모르는구나, 레인.”

지스킬 때와는 달리 정말로 순수하게 귀여워하는 태도가 레인의 복장을 뒤집었다. 순진하게 그리 생각한 것이 맞아서 이번에는 반박할 말도 없었다. 그래도 까짓 입술 정도야. 레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긴장한 얼굴로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런 레인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한동안 감상하던 카이렌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가구 위에 걸터앉았다.

“이 정도면 아무리 내가 빨리 다가가도 네가 문고리를 잡아 여는 게 빠르겠지. 이제 대화할 준비가 됐어?”

레인은 두 사람의 거리를 가늠했다. 열 걸음.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할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곱게 말할 것이지, 왜 괜히 가만있는 사람을 건드려?”

“네가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잖아.”

개소리는 무시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낯 뜨거울 소리지만, 상대가 카이렌이라 당연한 개소리가 되어 버린다. 카이렌과 대화하는 게 기껍지는 않았으나 레스터가 의뭉스레 굴고 있는 상황에서 한통속인 카이렌이 하려는 이야기가 궁금하기야 했다. 카이렌은 조금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 약혼할 거야.”

너무 예상 밖의 소리라 레인은 곧장 반응할 시기를 놓쳤다. 약혼은 결혼의 전초전이다. 즉, 언젠가 결혼을 해서 아내를 두고 가정을 꾸린다는 소리다. 카이렌 모드, 레인밖에 모를 것처럼 굴던 남자가 결혼한다니. 믿기지 않았다. 고작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레인만 바라볼 것처럼 굴던 놈이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레인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떠올랐다.

“왜? 아쉬워?”

아쉬울 리가. 그저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몇 년이나 카이렌을 지켜보며 느껴 왔던 그 지긋지긋한 집착. 레인을 모조리 불사를 것처럼 굴던 지독한 열정과 애정이 한순간에 모조리 휘발되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카이렌이 보여 준 감정이 쉬이 꺼질 것이었다면 애초부터 레인은 그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무슨 꿍꿍이일까. 의심이 따랐다. 그간의 경험에서 뒤따른 의심일 뿐이라, 짐작 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심각한 얼굴을 본 카이렌이 씩 웃었다.

“아니면 질투해?”

“그럴 리가 있어?!”

레인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러자 바깥에서 확인하듯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인은 괜찮다고 외치고는 카이렌을 노려봤다.

“잘됐네. 너랑 결혼할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나처럼 개 패듯 패거나 강간하지는 않겠지.”

“당연하지. 난 너한테만 그러는걸.”

“이 개새끼가…….”

레인이 이를 악물었다. 가끔 보면 카이렌은 레인을 화나게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처럼 그의 속을 잘 긁었다. 그런 화나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아마 알 것이다- 카이렌이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정략결혼의 상대에게 그렇게 공을 들일 필요가 있겠어?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 그만이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레인은 분노로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이를 악물었다.

공을 들인다고. 카이렌의 언사 모두를 참을 수 없었지만, 그중에서 특히나 화나는 게 저런 식의 패고 강간하는 행위를 사랑해서 하는 행위로 승화해 묘사하는 표현이었다. 울며불며 애원하고 때로는 죽을 정도로 고열에 시달리는 상대를 억압하는 건 사랑이라 할 수 없었다. 그리 아름다운 단어로 명명하고 싶지 않았다.

레인은 카이렌을 노려보았다. 카이렌은 관찰하는 시선으로 계속해서 레인을 주시하고 있다.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아도 실상 카이렌의 언변은 실로 교묘한 편이었다. 주로 레인을 화나게 하는 데 쓰인다는 게 문제지만, 카이렌은 타인의 성향을 파악하고 교묘하게 공격할 줄 아는 뱀 같은 놈이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휘말린 게 몇 번이던가. 레인은 분노를 삼켰다. 표면에는 새파랗게 달궈진 날카로운 이성만이 남는다.

“약혼 준비나 잘할 것이지. 나는 왜 찾아온 거야?”

“약혼? 아직 한참 남았어. 최소한 아카데미는 마쳐야지.”

“마치고 하든 지금 하든,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뭐냐고. 너 알아서 해. 결혼할 거면 이제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말라고.”

제발. 제발 신경 쓰지 말았으면. 말하면서도 레인은 가망성 없는 희망임을 알았다.

“그러게. 너한테는 신경 쓰지 않아야지.”

그러나 카이렌의 입에서는 선선히 쉽게 동의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레인이 놀란 눈을 깜박였다. 몇 년간의 기나긴 집착을 끝맺음하러 왔다기에는 카이렌은 지나치게 태연자약한 얼굴이었다.

“언제까지 널 갖고 놀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잖아? 슬슬 그런 건 이제 졸업해야지. 이걸로 끝을 내자고 말하러 온 거야.”

거짓말. 바라 마지않는 일이기야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카이렌이 그렇게 쉽게 레인을 포기할 수 있을 리 없다. 좋든 싫든, 레인의 거의 평생을 카이렌과 함께했다. 카이렌의 장난감으로 유년기를 보냈고, 이후에는 훨씬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끔찍하게 짓밟힌 날이 있었지만, 주제에 다정하게 굴며 간호를 해 준 날이 있었고, 욕설과 모욕을 들은 날이 있었지만, 단단하게 안아 주는 품 안에서 잠든 일도 있었다. 차라리 카이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지언정, 카이렌의 집착은 차마 레인으로서도 부정하기 힘들 정도로 명확한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일의 선례는 하나 더 있었다. 레스터의 일이다. 소꿉친구, 거기에 미래의 정치적 동반자이기까지 한 두 사람의 믿기지 않는 행보를 따로 떼어 볼 필요는 없었다. 카이렌이 지나치게 얌전해진 시기가 레스터가 이상해진 시기와 같다. 아니, 이상해진 건 레스터와 카이렌뿐만이 아니다. 레인 자신도 이상했다. 갑작스러운 자살 시도와 발작, 이후의 기억상실은 어느 모로 보나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다시금 찾아오는 두통에 레인은 머리를 가볍게 눌렀다.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추궁이었다. 문고리를 돌리거나 소리를 지르는 대신에 레인은 천천히 문에서 떨어져 스스로 카이렌에게 다가갔다. 레인이 바로 앞까지 다가올 동안 카이렌은 시선 한 번 떼지 않았다. 관심이든, 분노든, 애원이든, 순간의 흔들림이든 카이렌은 레인이 주는 모든 걸 기꺼워했다. 레인은 이를 악물고 카이렌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거짓말 집어치워. 무슨 개수작이야.”

“안 믿나. 하긴, 믿을 리가 없겠지?”

카이렌이 손을 들어 레인의 뺨을 손으로 쓸었다. 몸을 움츠리면서도 레인은 피하지 않았다. 맞닿은 체온이 피부를 문지르고, 숨결이 이마에 와 닿는다.

“난 이래서 네가 좋아. 언제나 당당하고, 비굴하지 않고…….”

천천히 뺨에서 손을 뗀 카이렌은 갑작스레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레인의 위로 진 그림자. 수백 수천 번 반복된 기억. 카이렌의 손은 허공에서 레인의 살갗 위로 비스듬히 떨어진다. 단순한 행위가 주는 결과는 처참한 고통이다. 제대로 설 수 없어 쓰러지고 붓거나 멍이 든다. 맞는다. 레인은 저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가올 때 어느 정도 각오는 했으나 반사적으로 몸이 떨리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카이렌이 소리 높여 웃더니 그대로 레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사실은 이렇게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주제에.”

달콤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레인은 눈을 떴다. 가까이 마주한 두 눈동자에 겁먹은 레인의 얼굴이 비치고 있다. 그게 못마땅해 레인은 잔뜩 얼굴을 구겼다.

“그딴 소리 할 거면 차라리 때려.”

“느긋하게 이야기하러 온 거야. 넌 왜 그렇게 맞는 걸 좋아해?”

“…….”

“이 세게 악물지 마. 치아 상하잖아.”

레인의 입술 위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린 카이렌은 레인이 힘을 빼고 나서야 허리를 감은 손을 풀었다.

“결혼 전에 괜한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되니까, 한동안은 이렇게 느긋하게 지내려고. 네가 괜한 소동을 벌인 일도 있고……. 뭐, 그런 거지.”

한동안은. 배려하듯이 말하고 있지만 그건 결국 언젠가는 이전처럼 되돌아가겠다는 이야기다. 결국, 저 좋을 대로.

죽여 버리고 싶어.

레인은 치미는 살의를 숨기지 않고 카이렌을 노려보았다. 카이렌이 죽든, 레인이 죽든. 둘 중 한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이 지긋지긋한 연결 고리는 끊어질 수 없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카이렌을 죽여야만 했다.

동시에 생각했다. 유르딘은 레인의 방패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레인을 강간하려고 한 발터 플랑의 성기와 팔을 단번에 망설임도 없이 잘라 낼 정도로 가차 없이 단죄했다. 아무리 발터를 끌어내릴 수 있는 물증이 있다고 해도,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는 건 유르딘에게 있어 불리한 일이 될 수 있었다. 굳이 화풀이에 가까운 보복을 저지른 건, 유르딘이 레인을 위해 어느 정도 피를 뒤집어쓸 생각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과연 유르딘이 해 줄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일까. 레인을 위해 카이렌을 죽여 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발터 플랑과 카이렌 모드는 격이 달랐다. 발터 플랑은 별것 아닌 플랑 가문에서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아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카이렌은 달랐다. 그는 모드 백작이 결혼하고 몇 년 동안이나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겨우 갖게 된 유일무이한 후계자였다. 모드 백작가는 손이 귀한 편이라 가까운 친척도 없고, 사촌이 하나 있기는 해도 후계를 잇지 못하는 딸이었다. 현 모드 백작은 괴팍하고 신경질적인 성정으로 유명했으나, 단점을 상쇄할 정도로 유능한 자이며 동시에 아이제나흐 공작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죽을죄를 저지른 발터 플랑과 모드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 카이렌 모드의 죽음은 무게가 다르다. 레인과 레스터의 목숨값이 확연히 차이 나듯, 이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다.

유르딘은 레인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편안히 있으라고 말했다. 마치, 그가 알아서 레인의 적을 치워 내 주겠다는 듯이. 유르딘이 생각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발터 플랑을 죽이는 일보다는 더 무거운 곳까지 닿아 있는 듯했다. 하지만 만약 그 범위가 모드 백작가의 후계자 카이렌을 죽이는 수준까지 뻗어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고민이 생겨난다. 카이렌의 목숨값은 절대 가볍지 않다. 카이렌의 죽음을 위해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급해야 할지 레인은 차마 가늠할 수 없었다.

레인은 아무런 대가 없는 호의를 믿지 않았다. 선량한 마음에서 기인한 호의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건 최소한 누군가의 살해에 발휘될 만한 성질의 일은 아니다. 유르딘이 카이렌을 죽임으로써 레인을 도와주는 건 대가 없이 보낼 수 있는 호의의 수준을 까마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르딘이 보내는 호의의 원인을 죽은 어머니와의 인연 때문이라 추측했으나, 지금은 유르딘이 레인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유르딘이 속에 품고 있는 게 단순한 욕정인지, 혹은 연정인지, 그도 아니면 카이렌 이상으로 미쳐 있는 집착인지 레인은 알 수 없었다.

유르딘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숨기는 게 오히려 그를 더더욱 의뭉스럽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차라리 분명히 말했으면 경계하거나 혹은 안심할 수 있으련만. 레인이 직접 물어보기에는, 자신이 물어본 말이 방아쇠가 되어 집착에 불을 당길까 봐 두려웠다. 특정한 일을 계기로 감정이 폭발하는 건 카이렌의 선례가 있어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최악을 가정하자면, 당장은 가문의 후계자일 뿐인 카이렌보다 렘샤이트 후작인 유르딘이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원하는 걸 들어주는 대가로 유르딘은 뭘 요구할까? 유르딘에게 손을 뻗는 일은 결국 레인에게 일종의 도박이었다.

복잡한 생각이 오갔으나 실제로 흐른 시간은 짧았다. 카이렌은 언제나 익숙하게 받아 오던 레인의 시선을 마주하는 대신, 손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왜 내가 널 좋아하게 된 건 줄 알아?”

알 리가 없었다. 카이렌이라면 레인보다 훨씬 더 괜찮은 상대를 얼마든지 고를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레인을 좋아하게 된 건지 언제나 궁금했다. 그러나 수도 없이 물었어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답해 준 적이 없었다. 카이렌은 천천히 눈가에서 손을 떼고 시선을 마주했다.

“네가 가여워서 그래.”

“…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다. 레인을 가엾게 만든 원인 중 하나면서 태연하게 지껄이는 말이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레인은 주먹을 쥐고 있는 힘껏 카이렌을 때렸다. 맞을 소리를 한 줄은 알았는지, 미리 예상한 모양새로 잽싸게 피했다.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며 카이렌이 큰 소리로 웃었다.

요란하게 들리는 소리에 기어이 지스킬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카이렌은 레인에게서 물러나 열린 문틈으로 잽싸게 몸을 빼냈다. 레인이 집어 던진 장식품은 애꿎은 지스킬을 맞출 뻔하고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하지만 정말인걸.”

“닥치고 꺼져!”

“하하. 그럼 다음에 봐, 레인. 그리고 하인.”

일거양득이다. 카이렌은 끝까지 두 사람의 속을 긁으며 사라졌다. 가운데 낀 지스킬이 묘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다가왔다.

“왜 그래. 저 새끼가 무슨 짓 했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언제나처럼 속을 긁는 헛소리일 뿐이다. 휘말리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결국 참는 대신에 레인은 욕을 내뱉었다.

“재수 없는 새끼.”

“동감이야.”

지스킬이 긍정하며 씩 웃었다. 그 어이없이 밝은 얼굴을 보니 묘하게 진정이 됐다. 레인은 맥이 풀린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며칠간 마차를 타고 이곳에 온 것보다 카이렌과의 대화 몇 분이 훨씬 피곤하다니. 참으로 대단히 빌어먹을 놈이다.

“그보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별일 없었어.”

“별일이 없었으면, 작은 일은 있었어? 아무 일도 없는 건 아니잖아.”

“시답잖은 소리.”

무시하고 대충 넘기려고 해도 지스킬은 꿋꿋이 레인에게 되물었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괜찮다니까.”

“하지만… 정말 괜찮아? 안색이 별로 안 좋아.”

“언제는 좋았다고. 이제 의원에게 갈 거야. 가서 진료받으면 돼.”

지스킬은 레인이 떠밀어 들고 있는 짐 꾸러미에 못마땅한 시선을 힐끗 던졌다. 의원에게 선물하려고 챙긴 물건들인데 들지를 못하게 해서 본의 아니게 짐꾼으로 부려 먹고 있었다. 묵직한 짐을 들어 올리며 지스킬의 투덜거림이 이어진다.

“이런 거나 들고 가고. 놀러 가는 거잖아.”

“그건 그냥 선물이고. 간 김에 진료도 받을 거야.”

“하지만 의원이 딴 맘을 품은 놈일 수도 있잖아.”

“아냐. 그놈은 안 그래. 권력에 껌벅 죽거든.”

“권력에 껌벅 죽는 놈이 더 위험한 거 아냐?”

“수작을 부려도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부릴 수 있겠어?”

게다가 그 의원은 안전제일주의를 표방하는 인간이다. 진료실로 들어가자마자 귀족인 두 사람을 확인하고 버거울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혀 인사하는 의원을 보더니 지스킬도 조금은 납득했다. 레인은 오늘은 여기서 머무르겠다는 말과 함께 지스킬의 등을 쳐서 방으로 올려 보냈다. 지스킬도 여독이 상당히 쌓였을 텐데 레인을 위해 계속 일을 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스킬이 내려놓고 간 짐 꾸러미를 건네며 레인은 의원을 살폈다. 다행히 의원은 마지막에 나눈 대화나 갑작스레 떠난 일에 대해 불쾌감은커녕 관심도 없어 보였다. 하긴 그 일이 있은 지 몇 주는 지났는데 아직 신경 쓰는 건 조금 치졸하기야 했다. 이어진 진료도 나름 순조로웠다.

“아주 좋네요. 예전에 비하면 건강하세요. 이대로 조심하시면 되겠는데요.”

“그래.”

레인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의원을 보니 즐거웠던 지난여름 동안 잊고 있었던 문제가 떠올랐다.

“뭔가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아니, 그냥…….”

레인은 이전에 알아냈던 사실에 대해 떠올렸다. 백오십 년 전 마력 결핍증을 앓았던 에일리야 디프랑에 관한 일이다. 레인과 직접적인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똑같이 마력 결핍증을 앓았던 그녀가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베델 후작가에 시집온 일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마법사들의 시대가 끝난 이후 찾아보기 힘든 병을 지닌 두 사람이 모두 베델 후작가와 연관이 있던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조사하기가 까다로운 문제였다. 일단 두 사람의 공통점인 베델 후작가는 현재 반역죄로 멸문한 상태다. 그들의 후예인 레인이 베델 후작가에 대해 조사하는 게 세간의 눈에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직접적인 조사는 불가능하다. 레인은 직접 알아보는 대신 조금 돌아가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마력 결핍증에 대한 연구 기록을 볼 수 있는 곳이 없을까 해서.”

애초에 에일리야 디프랑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도 마력 결핍증을 조사했기 때문이다. 마력 결핍증, 특히 그에 대해 연구하던 디프랑 후작의 연구 일지를 입수한다면 무언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력 결핍증을 앓고 있는 레인이니, 병 자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의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한 연구 기록은 역시 백오십 년 전에 디프랑 후작님께서 남기신 기록이 정확하지요. 디프랑 후작가에 요청하거나……. 사본을 찾아보시는 게 정확할 것 같네요.”

“사본?”

“네. 희귀병에 대한 유일무이한 연구 기록이니 다른 곳에 많이 옮겨 뒀다고 들었습니다.”

백오십 년 전이면 인쇄술이 지금처럼 발달했을 때가 아니다. 손으로 써서 옮겼을 테니, 그 수가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깝게는 수도 대신전이나 왕실 도서관에 있을 법도 하지만 둘 다 레인으로서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레인은 일단 기억해 두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레인을 보고 의원이 빙그레 웃었다.

“요즘 좋아 보이시네요.”

“뭐……. 처음 봤을 때보다야 나쁘지 않겠지.”

“그때는 심각하셨으니까요.”

자살 기도에 자해까지 했던 때보다야 당연히 낫겠지. 그리 편한 화제는 아니라 어물쩍 대답을 회피하려고 했으나 의원은 다소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렘샤이트 후작께서 여러모로 도와주신 덕분일까요?”

“그게 진료에 필요한 내용인가?”

날카롭게 대답하자 의원은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러나 불쾌해진 레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방으로 돌아왔다. 남의 눈에는 레인이 유르딘 덕분에 좋아졌다고, 그렇게 보이는 걸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순순히 인정하기에도 껄끄러웠다. 유르딘의 감정을 아는 이상, 단순한 후원자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서 지레 찔렸다. 이제라도 멀리해야 할까?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생각을 이어 가려고 했으나 여독 때문인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레인은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잠깐 누워서 쉬려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시간이 언제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이 어두웠다. 불을 켜려고 더듬거리는데 갑자기 반대쪽에서 불이 켜졌다. 레인은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굳어 버린 레인을 뜨거운 손이 붙잡았다.

“싫어……!”

눈을 질끈 감은 채 레인은 상대의 손이 자신을 살해하기라도 할 것처럼 놀라 밀쳐 냈다. 손끝에 상대의 살갗이 닿아 긁히는 감각이 났다. 맞을 거야. 레인은 재빨리 머리를 감쌌다. 안 그래도 두통이 심한데 머리를 맞는 건 최악이다. 제 머리를 감싼 채 벌벌 떠는 레인의 머리 위로 낮은 속삭임이 떨어졌다.

“미안하다, 레인. 놀라게 해서.”

“아…….”

레인이 떨리는 손을 내려 상대를 똑바로 보았다. 레스터나 카이렌이 아니라 유르딘이었다. 안도와 함께 부끄러운 감정이 밀려왔다. 겁쟁이처럼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질겁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무예를 숭상하는 라인셀에서는 쉽게 겁을 집어먹거나 약한 남자를 매우 우습게 보고 조롱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유르딘이 레인을 그리 비웃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였다. 희미한 불빛에 흔들리는 유르딘의 위로 심각함이 떠올랐다. 비웃는 것도 부끄럽지만 심각하게 고민하는 쪽도 부끄러웠다. 레인은 이대로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미안하다. 네가 잠들었다기에 잠시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마침 깼길래, 불을 켜 준다는 게…….”

“아뇨. 제가 괜히 질겁해서……. 죄송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서너 번쯤 주고받은 후에, 레인이 잠에서 깬 걸 확인한 유르딘은 불을 조금 더 밝혔다.

“식사도 못 했다며. 하고 자라.”

듣고 보니 확실히 배가 고파서 하인을 불러 급하게 식사를 차렸다. 유르딘도 식사를 하지 않았는지 함께 간단한 음식을 가져오라 일렀다. 식사하며 유르딘과 드문드문 대화를 나눴지만, 어쩐지 영 레인과의 대화에 완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내가고 나서 레인은 궁금증을 입 밖으로 꺼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으셔서.”

“좋은 일은 아니지. 그렇다고 나쁜 일이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만…….”

말끝이 흐려졌다. 레인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유르딘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유르딘의 손가락이 일정한 박자로 가볍게 의자 끝을 두드렸다. 손끝이 의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열 번이 넘었을 때에야 유르딘의 입이 열렸다.

“발터 플랑이 죽었다.”

확실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닌 소식이었다. 죽여서 수도로 데려가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만, 죄가 확정적인 이상에야 어차피 수도에 도착해도 고문당하다가 죽을 운명이니 어차피 결과는 같았다. 발터의 고민 자체는 그렇게 유르딘이 심각해질 일이 아니다. 고민은 따로 있었다.

“누군가가 독을 먹여 죽인 것 같아. 입막음하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입막음이요?”

“네가 수도로 떠나기 전에, 그날 일은 아무래도…….”

그리 길지도 않은 말을 유르딘이 몹시 힘겹게 내뱉었다. 레인에게 유쾌하지 않았던 밤의 기억은 유르딘에게도 최악의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한숨 소리가 천근처럼 무거웠다.

“누군가의 사주가 있었던 모양인데.”

“글쎄요……. 발터는 원래 열등감이 들어찬 인간이니 돌발 행동을 해도 이상할 건 없는데요.”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구나. 어쨌든 조사는 해 보마……. 그보다 오늘 무슨 일 없었나?”

“네? 아무 일도요.”

태연하게 답했지만, 유르딘은 무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신중하게 레인의 안색을 살폈다. 레인에게 무언가 일이 있었을 거라 확신하는 수준의 신중함이다. 조금 의아했지만 이내 짚이는 답이 나왔다. 카이렌을 만난 일을 지스킬에게 보고받았을지도 모른다.

“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으시는 건가요?”

“뭐?”

긴장하다 보니 평소의 날카로운 말투가 그대로 튀어 나갔다. 유르딘이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 이미 한 번 뻔뻔하게 나간 거 마저 뻔뻔하기로 마음먹었다.

“지스킬은 결국 후작께서 제게 보낸 사람이잖습니까. 아무리 좋은 의도셔도 감시는…….”

“아니, 아니다. 오늘 일은……. 그럴 만한 상황이라고 판단해서 보고한 거다.”

오늘 일은 보고를 했다는 소리다. 레인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지자 유르딘이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일상생활 전부를 감시하라고 했다거나 그런 건 결코 아니야. 무슨 일이 생길 줄 모르잖나. 지난번처럼, 누군가와 둘만 떨어진 상황이 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유르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평정이 무너진 채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은 레인이 보기에도 조마조마했다.

“…어쨌든, 그런 위험한 상황이 있었을 때만 보고하라고 해 뒀다. 불쾌하면 그것도 철회하마.”

“아니오. 도와주시는데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확실히 자신이 너무 예민하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별채에 갇혀 살 적에는, 레스터와 카이렌이 없어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몇 년이나 귀한 도련님들에게 당하고 사는 레인은 사용인들에게도 만만한 존재였다. 방에 틀어박혀 있지 않으면, 답답해서 잠시 창문을 열어 바깥을 보거나 복도를 돌아다니는 일도 큰 흠으로 부풀어져 사용인들의 입에서 레스터와 카이렌의 귀로 전해졌다. 결과물이야 뻔했다. 그 시절의 강박은 너무도 자연스레 레인 속에 스며 있다.

“그런데 렘샤이트 후작께서는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건가요? 아무 이유도 없이 도와주시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딱딱한 질문에 유르딘 얼굴의 난처함이 걷힐 줄 몰랐다.

“네 어머니를 돕지 못했으니까…….”

유르딘의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자신이 없었다. 그리 신뢰가 가는 목소리는 아니다. 아마도 꾸며 낸 이유. 레인은 신중하게 유르딘의 말을 기다렸으나, 그 이상 말이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대가도 치르지 않고 유르딘에게 너무 많은 호의를 받았다. 무언가 원하는 바를 말한다면 최대한 지급할 생각이었는데.

“제게 뭔가 바라시는 건 없나요?”

“바라는 거라니…….”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원하시는 게 있다면 드리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요.”

“뭐든이라니. 넌 그런 말을 함부로…….”

지나치게 대범한 발언에 유르딘의 표정이 절로 심각해졌다. 순수한 말이었는데 설마 이상한 의미를 포함해서 들은 건 아니겠지. 설마 유르딘이 레인을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하겠냐만은. 레인은 현실과 제법 동떨어진 추측을 했다.

한참 후에야 무언가를 말하기는 하려는 듯 유르딘의 입술이 달싹였다. 거절이라면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될 텐데, 망설이는 걸 봐서는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과연 무슨 말이 나올까.

“유르딘이라고 부르거라.”

“네?”

“니제스 경이라든가, 렘샤이트 후작 같은 호칭 말고……. 유르딘이라고. 사석에서만이라도 좋으니까.”

잔뜩 긴장한 후에 나온 부탁이 호칭 문제라니. 유르딘이 해 준 일들에 비하면 보잘것없을 정도로 작은 부탁일 뿐인데 유르딘은 세상에서 가장 긴장한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유르딘의 긴장이 레인에게 옮겨 붙었다. 이름 한 마디를 부르는 게 마치 옛이야기 속 마법사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긴장된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유르딘.”

작게 부른 이름은 긴장한 탓에 목소리도 살짝 갈라져 있었다. 볼품없는 부름인데도 순식간에 유르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핀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을 얻은 사람처럼 맑은 미소다. 레인은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을 향한 환한 미소에 절로 얼굴이 붉어진다. 유르딘의 순수한 애정은 뭐든 의심하고 계산해 따져 보는 레인의 날카로움마저 녹아내리게 한다. 유르딘의 행동 중 쉽사리 산 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광기와 고작 호칭 하나로도 기뻐하는 순수한 애정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운지 모르겠다. 극단적인 간극이 마치 광인이었다. 레인은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외면하며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아무리 의심하고 따져 봐도, 지금 이 순간에는 경계가 아닌 애정만이 피어오른다.

“레인.”

“…네.”

“한 번 더 불러 줘.”

“유르딘…….”

아까보다는 침착하지만,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다. 유르딘이 한 손으로 레인의 뺨을 감쌌다.

“레인.”

“유르딘.”

유르딘의 얼굴이 다가왔다. 레인의 몸이 가볍게 움찔 튀었다. 이어지는 행동을 상상하는 몸이 잔뜩 긴장해 굳었다. 다가오는 얼굴을 보다가 레인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유르딘의 입술은 레인의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을 뿐이다.

“…….”

레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래서야 기대한 것 같은 모양새다. 슬그머니 눈을 뜨니 유르딘은 웃음을 참고 있다가, 레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모른 척 말을 돌려 주었다.

“내가 네게 바랄 게 뭐가 있겠어. 언제든 날 편하게 의지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나는 네가 웃기를 바랄 뿐이야.”

서서히 웃음기를 가라앉힌 유르딘이 레인의 손을 붙잡았다. 너무 세게 쥐지도 약하게 쥐지도 않은 손이 레인을 단단하게 붙들고 온기를 전한다.

여전히 종종 두통과 함께 찾아오는, 유르딘이 제게서 등을 돌리는 환상이 뿌리 깊게 레인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지도 않은 환상 속의 광경이 두려워 아예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예 뿌리치기에는 레인이 너무도 외로웠고 절박했다. 마치 마법처럼 유르딘이 레인의 곁으로 다가와, 레인은 난생처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행복한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이 목소리와 온기에 기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레인이 배신당한 역사가 길다지만, 지금의 정체 모를 불안은 조금 과한 면도 있었다. 온전히 기대는 게 두렵다면 조금씩 손을 뻗기 시작하면 나아질까. 레인은 망설이다가 유르딘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면 부탁드릴 게 하나 있어요.”

“뭐든 말해 봐. 들어줄 테니까.”

유르딘이야말로 뭘 말할 줄 알고 뭐든 들어준다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레인은 가볍게 웃었다.

“별건 아니고……. 왕실 도서관의 출입증을 얻고 싶습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대단한 게 나올 걸 기대했는지 유르딘은 조금 맥 빠진 얼굴이었지만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니지만, 지금의 레인에게는 가장 필요한 자료였다. 왕실 도서관은 귀족이나 왕실 학자들을 대상으로 개방되어 있기는 해도, 왕궁 내부에 있는 탓에 허가받지 않은 사람은 아예 출입할 수가 없었다. 가문에 부탁할 수도 있겠지만 제대로 된 출입증을 내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모든 자료를 읽기 위해서는 특별한 출입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출입증은 왜 필요한 거지?”

“조금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필요한 거라면 내가 알아봐 줄 수 있어.”

그리 말할 줄 알았기에 레인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어머니의 친구라 말하는 유르딘이라면 베델 후작가와 얽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정보를 찾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의 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

“제가 직접 알아보고 싶어요. 여유가 있을 동안에는요.”

“그래, 그럼 그러마. 갈 때는 날 부르고.”

“바쁘시지 않을까요?”

“최대한 시간을 내 보마.”

과연 가능할까. 유르딘은 신신당부하고 떠났다.

다음 날 유르딘이 보낸 출입증이 도착했다. 레인은 유르딘의 제안대로 함께 갈 날을 가늠했으나, 들려오는 소식을 보면 유르딘은 어마어마하게 바빠 절대로 레인과 동행할 수 없을 듯이 보였다.

수도로 이송되던 중에 죽어 버린 발터 플랑의 죽음을 시작으로 수년간 이어진 전쟁의 사후 처리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공을 세운 자들에게 충분히 상을 주었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죄지은 자들을 처벌할 시간이었다. 발터 플랑의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에타드 레민의 사건이 터졌다. 일부는 유르딘이 발터에게 과한 처벌을 내린 일을 두고, 발터의 죽음이 유르딘의 개인적인 분풀이이며 그와 연계된 에타드에게 일부러 죄를 뒤집어 덮어씌우려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개중에는 숨겨 둔 정부가 강간당해 화풀이를 한 거라는 억측도 있었다. 유르딘은 짧게 해명했다.

“발터 플랑은 사용인 중 하나를 강간하려고 했으며 이를 처벌한 것뿐이다. 기사의 덕목은 약자를 보호하는 것. 이를 어기고 약자를 희롱한 발터 플랑을 즉결 처벌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기사는 많으나 기사들의 덕목이라는 기사도를 실천하는 이는 많지 않은 현재, 기사로서 타의 모범이 되는 유르딘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유르딘의 발언은 알음알음 퍼져 나가며 그의 인기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원래부터 유르딘이 지휘하던 군대는 현지의 부녀자를 강간하는 일을 금하고 이를 어길 시 강하게 처벌했다. 원래부터가 도덕적이며 타의 모범이 되는 기사가 유르딘이다. 그런 남자가 설마하니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발터 플랑을 처벌했겠는가? 사람들은 한때 억측을 뿌리고 다니던 이들을 욕했다. 발터의 죄가 없는 것도 아니니 ‘희롱당했다는 사용인’에 대한 일은 자연스레 묻혔다.

왕 또한 유르딘을 지지한 데다 플랑 가문은 죽은 발터의 명예를 회복하는 대신에 발터를 아예 제 가문에서 추방해 버렸다. 좋게 말하면 명석하고 나쁘게 말하면 매정하고 약삭빠른 결정이었다. 기사 작위를 몰수당하고 귀족 명부에서도 제외된 죄인 발터는 제대로 된 묘는커녕 다른 죄인들의 시신과 함께 불타서 버려졌다. 초라한 최후였다.

에타드 레민이 잡혀 들어간 건 시작에 불과했다. 귀환한 유르딘이 왕에게 고하고 조사를 맡아, 짧은 시간에 알아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이들의 죄를 밝혀냈다. 에타드 레민과 연루된, 또는 독자적으로 죄를 저지른 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끌려 나왔다.

무를 숭상하는 라인셀의 풍습 때문에 기사 계층에는 가문을 이어받지 못하는 귀족들이 많았다. 고위 귀족들이야 굳이 불안하게 타국과 손을 잡아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으니, 기사 중 죄를 저지른 자들 상당수는 하급 귀족이었다. 왕은 귀족을 상대로도 가차 없이 처벌했다. 비교적 죄가 가벼운 자들에게도 막대한 금을 받고, 죄가 무거운 자들은 처형당했다. 개중에서 특히나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의 경우에는 직계의 친족까지 처형했다.

굉장히 강경한 처벌에도 왕국은 숨을 죽일 뿐 차마 강하게 반발하지는 못했다. 유르딘 니제스, 렘샤이트 후작. 지금까지 비등하게 싸워 오던 카니예를 말 그대로 꺾어 버린 전쟁의 주역이 왕의 검으로서 명을 충실히 수행했다. 게다가 지금의 이 처벌은 단순히 카니예와의 전쟁만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이후 아벨라드와의 전쟁까지 내다본 처벌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북부 대륙의 통일은 대를 이은 라인셀의 왕들의 공통적인 소망이었다. 유르딘이라는 패를 지닌 이상 언젠가는 아벨라드를 짓밟을 테니 미리 경고하는 것이다.

귀족 가문 두 개가 무너지고, 처형당한 자들의 수가 서른을 넘어갔다. 죄인들의 죽음은 구경거리가 되어 수도에 피바람이 불었다.

귀족 학생들이 대부분인 아카데미도 수도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경직되어 있었다. 그 분위기가 폭발하듯이 터져 버린 건 어느 이른 아침의 일이었다.

지스킬과 함께 기숙사를 내려가던 레인은 학생들이 1층에 구름처럼 몰려 있는 걸 발견했다. 몇몇 병사들이 길목을 막지 못하도록 학생들을 제지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저마다 속삭이는 소리는 수가 많아 파도처럼 귀를 먹먹하게 채웠다. 아카데미에 중죄인의 친족이 있다는 모양이었다. 분위기를 보건대 참고인 수준이 아니라 죄인의 연행이었다. 이 시기 실수면 이렇게 잡혀갈 죄목은 하나밖에 없었다. 카니예나 펠든과의 첩자 행위, 즉 반역죄다.

대체 누가 연루된 것인지 궁금해하는 학생들 사이로 지스킬이 요령 좋게 파고들더니 구경하기 좋은 사각을 찾아냈다. 보기에 유쾌한 장면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스킬은 레인의 기분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닌 듯이 보였다. 카니예와의 전쟁은 지스킬이 직접 겪었던 일이니 그와 연관된 죄인의 연행은 동료를 죽인 원수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레인은 발걸음을 돌리길 포기하고 지스킬의 옆에 섰다. 저 멀리서 끌려 나오는 죄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

레인의 눈이 부릅뜨였다.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났으나 여전히 레인의 악몽 속을 찾아오는 얼굴이었다. 까마득히 비참했던 기억이 어둠 속에서 떠오른다. 그냥 잊어버리면 좋으련만 너무도 참담해 차마 잊히지도 않던 기억들. 여섯 개의 손이 뻗어 나와 레인의 몸을 뱀처럼 더듬고 뜨겁고 끈적한 체온이 레인을 짓눌렀다. 살을 갈랐던 끔찍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면 뜨겁고 습한 체온이 시체처럼 굳어 버린 살갗 위로 내려와 레인을 조롱했다. 울고 애원하던 레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던 무도한 자 중 하나였다.

마렌 돌브.

그동안 레인도 마렌도 서로를 무시했기에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보는 건 몇 년 만이었다. 성인식은 치렀으나 여전히 소년다운 태가 남아 있었던 그때와는 달리, 이제는 앳된 티가 사라진 완연한 성인 남성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그늘 따위 모른 채 희희낙락 살아갔을 파렴치한 모습이다. 그러나 어제까지만 해도 행복을 누렸을 마렌은 고작 몇 분 만에 바닥까지 추락했다. 단정하게 차려입었을 옷은 반항하는 과정에서 볼품없이 구겨지고 뜯어졌다. 저항하다 얻어맞기라도 했는지 눈 한쪽이 퍼런 데다 입술은 피가 터져 있었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꼴로 마렌은 우락부락한 병사들의 손에 처절하게 끌려가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애원하는 얼굴은 보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만큼 안타까웠다.

자연스레 레인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제대로 옷가지도 걸치지 못한 레인을 마렌이 제 친구들과 함께 우악스레 안아 들었다. 이불로 대충 감쌌을 뿐이라 무성의한 손놀림에 맨다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여기저기 묻은 체액이나 멍은 가려지지 않는다. 내려다보는 마렌의 얼굴이 의식을 잃기 전이지만 똑똑히 기억난다. 우습고 같잖은 걸 보는 듯한 그 얼굴.

몇 년 전의 가해자는 이제 죄인의 신분이 되어 거꾸로 타인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남자는 처절하게 자신의 무고함을 외쳤다.

“아냐. 아냐! 아버지가 그럴 리가 없어! 아버지가 그럴 리 없다고! 누명……!”

“조용히 해라. 돌브 자작은 이미 죄를 실토했다.”

마렌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쓸데없이 애를 쓰며 발을 바닥에 박고 버틴 채로 외쳤다.

“그… 그래도, 난 아무것도 몰라!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죄를 저지른 건 아버지뿐이야! 난 아무 잘못도 없다고!”

억울하단 듯이 주변에 외쳤으나 아무도 동조해 주는 사람이 없다. 당연한 일이다. 죄인이든 아니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마렌 돌브가 죄인의 친족인 탓에 죄인으로 낙인찍혔다는 사실 뿐이다. 이전에는 친구도 많은 자였으나 아무도 앞에 나서는 사람이 없다.

레인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 입가를 손으로 덮었다. 분노인지 아니면 짜릿함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감각들이 뒤엉켜 뱃속을 어지럽혔다. 타인의 불행에 웃는 저열한 기쁨이 레인의 몸을 가득 채운다. 마렌 돌브, 다리우스 로닐, 칼 레히드. 세 명의 남자들은 레인이 아무 잘못이 없었음에도 짓밟았다. 인간의 자비란 없었던 손길. 인간이 아닌 자의 불행을 비웃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보기 좋은 꼴이다.

천천히 레인은 제 입가를 가렸던 손을 내렸다. 그 순간 마렌 돌브와 시선이 마주친 건 그저 우연이었다. 기적 같은 우연. 완전히 뒤바뀐 위치에 서 있음을 자각하자 마음속에서 희열이 피어올라 레인을 가득 채웠다. 몇 년 전에 저가 잘난 듯이 짓밟았던 레인이 이제는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서서 웃고 있다는 사실에 마렌은 분개했다. 과거에 저지른 짓도 모르고, 참으로 뻔뻔한 인간이었다. 레인의 눈이 가늘게 휘며 누가 봐도 화사한 웃음을 지어냈다.

“이 씨발 새끼가!”

마렌이 버럭 소리치며 발악했다. 갑작스러운 발악에 대응하지 못한 병사가 마렌의 팔꿈치에 옆구리를 세게 얻어맞고 인상을 찌푸리며 욕을 했다. 앞서 나가던 기사가 뒤돌며 혀를 찬다.

“귀족의 명예를 생각해 마지막은 걸어 나가게 해 주려 했더니만.”

한심하다는 투의 말에 마렌이 수치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양팔이 결박된 마렌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기사가 들고 있던 검집으로 마렌의 목뒤를 세게 치자, 그대로 그의 몸이 맥없이 늘어졌다. 기사가 몸을 돌리자 아까 한 대 얻어맞은 병사가 짜증을 내며 마렌에게 침을 뱉었다. 기절한 마렌은 다리가 질질 바닥에 끌리다가 신발이 벗겨진 우스운 꼬락서니로 아카데미를 나섰다.

돌브 자작은 카니예에 유르딘을 포함한 고위직들에 대한 정보를 팔았다. 몇 번인가 들이쳤던 살수의 원흉이었다. 유르딘은 살았지만, 개중에는 정보를 얻은 내통자의 흉수에 찔려 죽음을 맞은 자도 있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죄목이 알려지자마자 마렌 돌브의 기숙사 방은 그날 저녁에 바로 비워졌다. 마렌 돌브의 짐은 하인들이 대충 나눠 가졌다. 마렌이 남긴 사소한 행적, 평소의 사소한 행동 모든 것들이 나쁜 쪽으로 과하게 크기를 키워 조롱당했다. 마렌과 친했던 자들일수록 동류로 묶이기 싫어서 더 열심히 그의 욕을 하고 다녔다.

레인은 가장 열정적으로 마렌의 욕을 하는 학생들의 무리 속에서 다리우스의 모습을 발견했다. 언제 친했었냐는 듯이 다리우스는 사방팔방에 마렌에 대한 욕을 떠들고 다녔다. 칼의 모습은 아카데미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수업조차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그 소심한 남자는 레인에게도 죄를 저질러 놓고 제 죄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피해 다니는 놈이었다.

돌브가의 죄가 확정되자마자 처형은 비교적 빠르게 이루어졌다. 일주일 뒤 돌브 자작은 제 처와 다른 아들들과 함께 수도 광장에서 모두 함께 처형당했다. 비교적 멀쩡히 걸어 나온 다른 돌브 자작가의 일원과 달리 돌브 자작과 마렌 돌브만은 제 발로 걷지 못해 바닥에 질질 끌려 왔다. 죄를 지은 돌브 자작은 그렇다 쳐도, 마렌이 왜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나 마렌은 심약한 사람이라면 제대로 보지도 못할 정도로 처참한 꼴이었다. 나중에 밝혀지길, 발터 플랑과의 결탁 여부가 의심되어 고문을 받았다고 했다. 결국은 무죄였으니 고문은 억울한 일이었지만, 어차피 대역죄로 죽는 사형수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동안 수도 전역에 불어닥친 피바람 때문에 하급 귀족의 자리가 상당수 비었다. 왕은 빈자리를 카니예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기사들에게 가장 먼저 돌리기로 했다. 가문의 후계를 이을 수 없어 기사가 된 자들에게 새로운 성과 작위를 받는 건 듣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일이다. 공을 세운 일부 병사들에게도 준귀족의 작위가 내려지게 됐다.

몰수한 귀족들의 재산으로 국고를 불린 왕은 선심을 써 수도에 식량과 옷감을 풀고 각 지방의 세율을 그해에 한해 조금 낮추기로 했다. 그렇게 해도 새로 얻은 영지 덕분에 올해의 왕실 재정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넉넉했다.

죄지은 자들의 죽음은 산 자에게 내려지는 상과 성공에 대한 갈망으로 빠르게 지워졌다. 왕국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학기가 시작된 첫 주는 마렌이 끌려간 일을 포함해 왕국 전체가 온통 혼란스러워, 유르딘이 레인을 위해 시간을 낼 짬이 없었다. 두 주가 지났을 때도 상황은 여전했고, 차마 바쁜 유르딘을 부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통솔하고 있던 군에서 첩자를 잡지 못한 건 아무리 상대가 교묘한 데다 수가 많았다지만, 유르딘의 실책이기도 했다. 유르딘의 공이 책임을 덮을 수준인 데다 완벽한 사후 처리를 하고 있어서 문제로써 주목받지는 않았으나 향후 잡음이 없게 하려면 유르딘이 이번 일을 확실하게 끝내야만 했다.

유르딘이 바쁜 사정은 이해하지만 레인도 아카데미의 학사 일정을 고려했을 때 언제까지고 왕실 도서관에 가는 일을 미룰 수는 없었다. 바쁘시다면 지스킬과 함께 가겠다고 유르딘에게 편지를 보내자, 답신은 곧장 왔다. 도서관에는 지스킬과 함께 가되, 돌아올 때는 자신이 동행하겠다는 편지였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찾아간 왕실 도서관은 실로 대단한 규모였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영지에 자리한 서고의 장서량도 상당했지만,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책들 사이에서 레인은 감탄했고, 지스킬은 보는 것만으로도 질려 버렸다. 지스킬은 투덜대다가 사서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레인은 책을 보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지스킬을 적당히 소설이 있는 쪽에 던져두었다. 관심 없는 얼굴이던 지스킬은 기사 문학 따위를 보더니 이내 흥미가 생긴 듯 책을 꺼내 뒤적이기 시작했다.

레인은 홀로 서가로 가 느긋하게 책을 살폈다. 생각보다 얻을 수 있는 자료가 많았다. 어지간한 마법적 질병에 관한 것보다 마력 결핍증에 하나에 대해 기록한 책이 많았다. 디프랑 후작이라는 자는 어지간히도 열성적으로 연구를 계속했던 모양이었다. 관련된 책을 모조리 꺼내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아 힘에 부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스킬을 데려올걸.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책을 무리해서라도 꺼낼지, 아니면 자신의 못 미더운 몸을 생각해 사다리를 가져올지 고민하는데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줄까요?”

건네진 말은 존대이기는 해도 성에서 쓰는 시종이 쓴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격의 없이 친근한 투였다. 말을 꺼낸 건 고급스러운 복식을 입은 서른 중후반 정도 나잇대의 귀족 남성이었다. 유르딘보다 몇 살 정도 더 많아 보였다. 레인은 사양할까 하다가 반복적으로 책을 꺼내며 어느새 후들거리는 팔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요. 잠깐만 기다려요. 바로 내려 줄 테니까.”

남자는 키가 결코 작은 편이 아닌 레인보다도 훨씬 컸다. 유르딘과 비슷한 정도로 보인다. 거기까지 생각했던 레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니, 왜 다 유르딘을 기준 삼아서 생각하고 있는 거람. 사실 오늘 입은 옷도, 신고 있는 구두도 모조리 유르딘이 사 준 물건이라 입으면서도 공연히 의식했다. 지난밤부터 오늘 유르딘을 만난다는 생각에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던 차였다. 레인은 고개를 휘휘 저어 유르딘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려 애썼다.

남자는 어렵지 않게 손을 뻗어 책을 내렸다.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인 손을 보건대 검을 제법 오래 쥔 자처럼 보였다.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리는데, 남자가 레인을 한 번 더 불렀다.

“안쪽에 책이 하나 더 있네요. 관련된 책일지도 모르니까, 마저 꺼내 줄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여기.”

남자가 꺼낸 건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책이었다. 왕실 도서관의 다른 책들도 오래되긴 했지만, 정성스러운 관리 덕에 조금 바랜 것 외에는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책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지금 받은 책은 표지는 무척 고급스러운데 책의 주인이 책을 함부로 다룬 듯이 이곳저곳에 잉크가 엎어져 있었다. 한 번 쓱 훑어보니 누군가의 수기처럼 보였다. 별다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레인은 군말 없이 남자가 건넨 책을 말없이 받아 들었다. 남자는 레인이 내려 둔 책을 모두 옮겨 주는 호의까지 보였다.

“감사합니다.”

“뭘요. 당신이 옮기는 것보다 내가 옮기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

태연하게 말한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그대로 가 버렸다.

남자가 간 후, 레인은 천천히 책을 살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수박 겉 핥기로만 약초학을 배운 레인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초들과 배합 방법에 대해 수십 수백 번 실험을 반복하고 기록한 일지는 난해하고 지루할 뿐이었다. 그중에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뒤져 봤지만, 성실하게 연구에 대한 내용만 기록한 터라 소득이 전혀 없었다.

한참을 읽다가 피곤해진 레인은 일단 연구 일지를 덮고 아까 남자가 마지막으로 내려 준 더러운 책에 시선을 던졌다. 인제 보니 책은 왕실 도서관의 책도 아니었다. 보통 왕실 도서관의 책은 분류를 위해 책 뒤에 번호가 매겨진 표를 붙여 두는데 이 책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레인은 머리를 식힐 겸 얇은 수기를 펼쳤다.

누군가의 일기장이었다. 결혼하면서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지 첫 장은 낯 뜨거울 정도로 결혼한 아내에 대한 찬양이 쓰여 있었다. 신분이 높은 일기장의 주인이 비교적 세력이 약한 가문의 영애에게 반해 구애했고 마침내 결혼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남자의 아내는 몸이 제법 약한 모양이었다. 출산할 때마다 난리가 났는데 아들을 낳지 못했다. 남자는 차라리 친척 중 하나를 양자로 들이고 싶어 했으나 여자의 설득으로 몇 번의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다. 간신히 후계자를 낳은 후 더는 임신이 힘들다는 판정을 들은 후에야 안심했지만, 아내는 결국 한 번 더 임신했고 극도로 몸이 상하면서도 지우지 않은 채 결국 딸을 낳았다. 그러나 무리한 출산이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딸은 몸이 약했다. 아내는 자신 때문에 딸이 약한 거라며 자신을 탓하며 사용인도 물리고 직접 딸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딸을 낳은 후에는 거의 비슷한 내용이 이어졌다. 일기장을 쓴 남자는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서도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지만, 자식들은 그저 후계자나 가문의 일원으로만 봤다. 남자는 딸이 곧 죽을 거라고 여겼으나 딸은 죽지 않았고, 딸을 보살피느라 몸이 축나는 아내를 안타깝게 여겨 오히려 딸을 미워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딸을 보살피던 아내는 딸이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자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신이나 의원에게 의지할 수 없게 되자 근본을 알 수 없는 주술에 심취했다. 어쩔 줄 모르던 남자의 일기는 갑작스레 어느 순간 끊어졌다가 한참 후에야 떨리는 글씨로 재개됐다.

「일리시아가 죽었다. 내 잘못이다. 내가 보살펴 줘야 했는데. 불안해하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귀족의 체면이 뭐라고. 내 눈앞에서 알리시아가 떨어져 피투성이가 됐다. 딸을 잘 부탁한다고. 그 애가 허망하게 죽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서 마지막까지 딸을 걱정하며 죽어 버렸다. 나는 생각도 하지 않고. 내가 당신을 잃고 어떻게 살라고. 하지만 이대로 죽기에는, 일리시아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에일리야를 좀 더 신경 쓰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에일리야. 150년 전, 마력결핍증을 앓았던 여자의 이름에 레인의 눈이 부릅뜨였다. 초조하게 일기장을 넘겼다.

남자는 죽은 아내 대신 아팠던 딸 에일리야에게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아내의 죽음 후, 에일리야는 기적처럼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에일리야가 낫는 건 어쩌면 아내의 가호일지도 모른다. 아내가 에일리야를 지켜보며, 동시에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한 남자는 조금씩 힘을 얻어 갔다. 자식들에게 신경을 쓰며 남자는 차츰 아내를 잃은 시름을 잊고 삶의 기력을 되찾아 갔다. 처음에는 남자를 꺼리던 아이들도 아직 어린 탓인지 금세 후작을 따랐다. 그러나 일기장의 내용이 1년이 지난 후, 다시 급변했다.

「에일리야가 난생처음 듣는 마법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마력 결핍증이라는 병이다.」

레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은 시간의 흔적만큼 예전에 살았을 귀족 남자. 아픈 막내딸. 마력 결핍증. 이 정도로 일치하는데 다른 사람인 게 더 이상하다. 레인은 곧장 도서관 한쪽에 비치된 귀족 명부를 펼쳐 백오십여 년 전의 명부를 샅샅이 확인했다. 명부에서 지워진 가문으로 시집간 막내딸 에일리야. 에일리야의 아버지 오슐렘 디프랑. 오슐렘 디프랑의 유일한 아내, 일리시아 디프랑은 에일리야가 마력결핍증 판정을 받기 1년 전에 죽었다. 사유가 나와 있지 않은 죽음은 차마 적을 수 없는 불명예스러운 죽음, 대부분은 자살을 의미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레인이 손에 넣은 더러운 책은 150년 전 마력 결핍증을 연구했던 디프랑 후작, 즉 오슐렘 디프랑의 일기장이었다. 그것도 거의 백 퍼센트의 확률로 원본이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일기장이 왕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걸까. 우연의 일치일 리는 없었다.

조금 전에 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남자가 고의로 접근해 레인에게 넘긴 게 분명하다. 남자에 대한 일도 궁금하긴 하였으나, 당장 지금은 일기를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레인은 자리로 돌아가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디프랑 후작이 에일리야의 병을 고치는 과정은 레인이 들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후작은 사람들을 모아 병을 연구하고 마력 결핍증에 유효한 치료제를 만들어 냈다. 연구에 매진하는 동안에는 후작은 일기를 거의 쓰지 않아서 자세한 뒷사정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연구가 끝나고 나서는 병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가끔 교류하는 자식들에 대한 애정 넘치는 내용이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사이좋은 가족이었다. 오슐렘은 일부러 에일리야를 자신과 친한 귀족 가문에 시집보냈다. 베델 후작의 둘째 아들로, 첫째 아들이 장성한 덕분에 후작 위에 오를 일은 없으나 본인의 능력이 출중해 에일리야를 고생시키지 않을 훌륭한 청년이었다. 에일리야는 수도에 거주하며 후작을 자주 찾았다. 여기까지는 평이했다.

이후 에일리야는 마법에 심취했던 어머니처럼 똑같이 마법에 대해 빠져 후작의 걱정을 샀다. 심하게 빠진 건 아니고 그저 서적 몇 개를 사 보는 선이라 후작은 안심하고 있었으나, 아이를 낳고 잘 살던 에일리야는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을 했다. 일리시아처럼 저택 창문에서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다. 비록 2층이었지만 귀족가의 천장은 높은 터라 2층도 상당한 높이다. 에일리야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갑작스러운 자살 소동에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했으나 후작가는 그 일을 철저히 함구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에일리야의 기괴한 행동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후로는 별로 특이한 일이 없었다.

궁금한 걸 해결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궁금한 게 늘어났다. 일리시아가 저택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건 그리 이상한 방법이 아니다. 추락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자살 방법이니까. 하지만 에일리야는 왜 저택에서 갑작스레 아무런 전조도 없이 뛰어내렸던 걸까. 사흘 전 에일리야를 만났던 후작은 딸의 돌발 행동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기억을 잃었지만, 레인도 갑자기 창문으로 뛰어내린 적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추락. 백오십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행동이 같다. 에일리야의 추락은 어머니를 모방한 돌발 행동이었던 걸까, 아니면 마력 결핍증이 광증을 유발하기라도 하는 걸까? 만약 에일리야가 미쳐서 뛰어내린 것이라면. 에일리야는 한 번이었지만 레인은 두 번이 될 수 있었다. 가정만으로도 레인은 입안이 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마력 결핍증에 대해 알아보려던 것이 결국, 최초의 의문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은 대체 왜 뛰어내렸던 걸까. 지금까지 버텨 놓고 왜 그리 갑작스레,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삶을 끊으려 했을까.

레인은 다른 것을 떠올렸다. 레인과 에일리야는 모두 어머니를 잃었다. 레인은 에일리야가 마법에 대해 연구했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했다. 애초에 마력 결핍증은 마법 관련 질병이니, 레인이 모르는 마법과 무언가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에일리야의 어머니 일리시아는 마법에 심취했었다. 그렇다면 혹시 일리시아가 행한 마법이 힘을 발해 에일리야를 낫게 만들었으며 그 부작용으로 그녀가 마력 결핍증을 앓게 된 것은 아닐까. 에일리야가 이를 눈치채서 마법에 대해 연구했을 수도 있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마법은 퇴화했을 뿐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이 시대에 존재했다. 그 옛날의 마법과 달리 조잡한 수준이지만, 딸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한 일리시아가 마법으로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면.

생각을 멈추고 레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 추측에 불과하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게 레인과 에일리야의 공통점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일리시아와 달리 어머니인 슈리아는 마법 따위에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슈리아는 기껏해야 아침에 꺾은 꽃을 머리맡에 놓아두면 하루 내내 행운이 따른다는 미신대로 레인과 공작에게 꽃을 보낸다든가, 죽은 자가 보석을 걸쳐야 죽음의 강의 뱃사공에게 삯을 건넬 수 있다는 풍습을 따르는 정도였다.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면 자연스레 마지막 모습이 기억 속에 떠올랐다. 어머니는 자신은 보석 하나 걸치지 않았으면서도 레인에게는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무거운 보석을 주렁주렁 걸쳐 주었다. 보석 대부분을 남에게 빼앗겼지만,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물건이 있었다. 어머니가 손수 걸어 준 목걸이였다.

레인은 목을 더듬거렸다. 없다. 잠시 혼란스러워했던 레인은 이내 자신이 목걸이를 걸고 다니지 않았단 걸 기억해 냈다. 라인셀은 남자가 목걸이를 착용하는 문화가 아닌데다가 괜히 목걸이를 하고 다니다가 카이렌이 부술까 봐 두려워, 평소에는 가장 소중한 물건들을 넣어 두는 상자에 넣어서 보관했다.

목걸이 하나만을 넣기에는 커다란 상자 속에는 동화책이나 인형 따위의 보잘것없는 물건들이 금은보화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레인이 받은 편지와, 미처 보내지 못한 편지까지 고스란히 그 안에.

“윽!”

순간적으로 머리를 후벼 파는 통증이 레인의 머리를 쑤셨다. 알 수 없는 환상을 떠올릴 때와 비슷한 기억 혼선이었다. 상자라니? 레인은 그런 것 따위는 모른다. 하지만 모른다고 부정하려 해 봐도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이 생생하게 차례로 머릿속을 스쳤다. 지나치게 자세한 기억이었다.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해도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의 닳아 버린 모양과 촉감까지도 온몸이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두통이 올 때, 그대로 다른 것을 떠올리면 더는 괴롭지 않았다. 기억은 머릿속에서 녹아내리고 안온한 평온함을 되찾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이대로 잊어버리고 싶다. 더는 괴로운 건 싫었다.

괴로운 기억에서 도망치는 게 뭐가 나쁘지?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레인에게 속살댔다. 레인은 살아가며 수도 없이 많은 문제를 직면했다. 맞서 싸운 결과는 늘 참혹할 뿐이었다. 고통을 외면하는 게 뭐가 나쁜 걸까. 외면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비참한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안온한 현실을 즐기는 일은 나쁘지 않다. 아프면 진통제를 쓰듯이, 레인은 괴로운 기억을 잊고 쉬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두통이 따르니 결국은 지긋지긋한 현상 유지였다.

살아오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날들이 많았다. 자신이 나서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했던 날이 있었다. 자신을 구명하거나 이곳에서 도망치거나 죽어 버리는 것조차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날들을 스쳐 지나오며, 결국 레인은 좌절을 습득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위를 제외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게 됐다. 그런 날들에 비하면 이 정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레인은 제 발로 자신에 대한 일을 조사하고 노력하고 있었다.

멈춰 있고 싶지는 않다. 이까짓 고통쯤이야. 끔찍한 고통에도 레인은 이를 악물고 생각을 이어 갔다. 분명히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떠나는 길에도 제 보물들과 함께 소중히 함께 가져갔다. 어디로 떠났던 걸까? 어쨌든 그걸 불에 던졌다. 던진 건 목걸이가 아니라 상자였지만, 어느샌가 목걸이도 이미 불 속에 던져져 있었다. 그 순간의 레인은 더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었다. 아픈 기억은 모두 불 속에 던져 버리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몸뚱어리를 저 불 속으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이제는 더는 유르딘을…….

“아윽…….”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레인은 고통 속에서도 기억을 끝까지 파헤쳤다. 몇 달째 한 장면에서 멈춰 있던 장면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레인에게 등을 돌린 유르딘은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욕설과 비난이 일제히 레인에게 쏟아졌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적나라한 모멸들. 순식간에 장면이 뒤바뀌고 레인은 아카데미의 기숙사에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목걸이를 쥔 채 불 속으로 던졌다. 그걸 마지막으로 환상처럼 펼쳐지던 기억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시간이 도저히 맞질 않는다. 기억을 잃은 짧은 순간 동안 북부의 성에 갔다가 금세 아카데미로 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해가 불가능한 기억 때문에 두통에 답답함이 섞여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눈물이 줄줄 솟아 하염없이 떨어졌다. 머릿속이 고장 난 것 같았다. 기절할 것 같은 걸 참아 내며 레인이 입술을 악물었으나 기억은 떠오르지 않고 몸에 한계가 다가왔다. 결국, 레인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레인과 함께 앞에 놓인 책이 와르르 바닥으로 무너지며 큰소리가 났다. 바닥으로 떨어진 레인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레인!”

유르딘의 비명이 들렸다. 레인은 제대로 맞지 않는 초점을 간신히 맞춰 상대를 보았다. 걱정하는 얼굴이 어쩐지 좋다고 하면 지나친 악취미일까? 하지만 좋았다. 레인은 지나친 두통 속에서도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유르딘의 눈이 크게 뜨이는 걸 보며 레인은 유르딘에게 몸을 기댔다. 유르딘은 창백한 얼굴로 레인을 바라보다가 길게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레인을 안아 들었다.

고통 속에서 언뜻 올려다본 얼굴에는 격정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레인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끔찍한 고통 와중에도 레인은 웃음을 흘렸다. 유르딘의 전신이 레인에게만 온전히 집중하는 그 감각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이토록 헌신적인 유르딘 니제스를 좋아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건 이미 무리일지도 모른다. 온전히 레인을 위하는 누군가의 체온이란 게, 이렇게나 완벽하게 좋은데. 레인이 스무 해 가까이 갈망하던 것을 주는 상대다. 애초에 혼자가 익숙한 척하면서 실은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레인은 쏟아부어지는 애정에 저항할 수 없었다.

두통으로 시작한 아픔은 고열을 수반한 온몸의 둔통으로 번져 있었다. 견디기 힘든 와중에도 레인은 흐릿한 의식을 억지로 붙들고 있었다. 요즈음 자주 쓰러진 터라 이번에는 맥없이 기절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가 지금 이상으로 걱정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조금 더 컸다. 그런 마음 한편에는 반대로 자신을 걱정하는 유르딘을 보고 싶다는 정반대의 욕망도 자리하고 있었다.

레인을 안은 채로 유르딘은 어쩔 줄을 몰랐다. 물론 겉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아서, 유르딘과 맞닿아 있는 레인만이 자신을 안은 손의 떨림으로 긴장을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침착하게 의원을 부르고 쉴 만한 방을 찾았을 뿐이다.

마침내 쉴 만한 방을 찾은 유르딘은 레인을 옮겨 받으려는 시종의 손을 뿌리치고 손수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의원은 언제 오나.”

“곧 오신다 하셨습니다.”

“가만히 서 있지 말고 필요한 걸 준비해 와라. 물수건이라든가……. 나보다는 자네가 더 잘 알 것 아닌가?”

“아, 네. 알겠습니다.”

시종에게 명령을 내리는 유르딘의 목소리에는 딱히 이렇다 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종과 시녀들이 부산스레 나가고 레인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유르딘에게서는 평정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유르딘의 손끝이 식은땀이 난 이마 위로 달라붙은 레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다가 조금 더 내려가 꽉 악물어 피가 난 입술 위에 얹어졌다. 안쓰럽게 그 위를 매만지던 유르딘은 레인의 더운 숨이 손끝에 닿자 죄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 냈다.

이대로 의식을 놓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즈음에 의원과 신관이 함께 찾아왔다. 신관의 손이 머리 위에 얹어지고 새하얀 빛과 함께 축복의 힘이 온몸을 감싸 안자 그제야 숨을 쉬는 게 편해졌다. 축복을 받자 몸이 나른하게 풀리며 힘이 빠졌다. 수마가 몰려와 순식간에 레인을 덮치는 걸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였다.

얼마나 잤을까. 레인은 어스름한 방 안에서 눈을 떴다. 아팠는데도 깨어났을 때 불쾌한 느낌이 없었다. 제 손을 잡아 주고 있는 상대 덕분인지도 모른다.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안심할 수 있는 온기가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쁠 줄은 몰랐다. 레인은 몸을 돌려 눕는 대신에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제 손을 소중하게 붙들고 있는 유르딘의 손을 맞잡았다. 찬찬히 제 손을 감싼, 제 손안의 온기를 재확인하며 레인은 고개를 돌렸다. 잠든 이를 깨우지 않기 위한 어슴푸레한 빛 사이로도 유르딘의 얼굴은 또렷이 보였다.

“레인, 걱정했어. 일어나지를 않아서…….”

유르딘의 목소리가 나약하게 떨렸다. 설마하니 깨어날 때까지 줄곧 곁에 있던 걸까. 설마, 유르딘은 왕국 전체를 뒤흔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는데. 계산적으로는 그리 판단했지마는 지금까지 유르딘이 레인에게 쏟는 정성을 보건대 아마 줄곧 곁에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경계하려 해 봐도 유르딘의 다정함을 마주할 때면 날카로운 가시들이 모두 녹아 사라진다. 간질간질한 행복감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레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전 괜찮아요, 유르딘.”

“하지만 계속 정신을 차리질 못했어. 계속 식은땀도 나고…….”

“제가 오래 잤나요?”

“그래.”

쓰러지기 전 겪었던 게 강렬한 두통이긴 해도 쓰러지지 않고 의원이 올 때까지 버텼을 정도니 태평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던 모양이다. 며칠이나 쓰러져 있던 걸까? 유르딘이 심각한 얼굴로 레인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다섯 시간 정도.”

“…….”

걱정은 한순간에 흩날렸다. 그냥 낮잠을 길게 자도 다섯 시간은 충분히 자겠다. 어이가 없었지만 유르딘의 표정이 심각해서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래, 하긴 평생 아파 본 적도 없을 듯한 유르딘이 보기에는 다섯 시간도 엄청 길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 레인은 대충 이해하고 몸을 일으켜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그러나 가벼운 태도의 레인과는 달리 여전히 유르딘은 온갖 근심을 떠안은 얼굴이었다.

“의원과 신관이 네가 왜 쓰러졌는지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던데. 오늘 쓰러진 건 마력 결핍증의 증상도 아닌 것 같다고 하고.”

“그런가요?”

“왜 쓰러졌는지 짐작 가는 게 있어?”

레인은 굉장히 자주 쓰러지는 편이었다. 툭하면 쓰러지고 기절하는 게 일이라, 차라리 이번처럼 끝까지 버티다가 잠든 정도면 아픈 일 중에도 대수롭지 않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워낙 유르딘이 진지하게 고민하던지라 덩달아 레인도 진지해졌다.

짐작 가는 게 없진 않았다. 다만 미친놈의 허무맹랑한 소리로 받아들여질까 봐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유르딘과 처음 재회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신뢰가 갔다. 최소한 이상한 기억이 떠오른다는 말을 털어놓는다고 유르딘이 레인을 미친놈으로 몰아가지는 않겠다는 확신 정도는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레인을 괴롭게 만드는 환상의 주체는 유르딘이다. 유르딘 당사자에게, 유르딘과 관련된 이상한 기억 때문에 괴롭다는 말을 해도 될까. 정체불명의 기억인지 환상인지 모를 것들을 보다가 기절했다고……. 그 정도로 솔직하게 털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도 유르딘이라면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것 같기도 했다. 고민하던 레인의 생각이 기억 속의 목걸이에 닿았다.

“쓰러지는 거야 워낙 자주 쓰러지는 거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는데…….”

“자꾸 쓰러지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으음. 그보다 한 가지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노골적인 말 돌리기에 유르딘이 잠시 못마땅한 기색을 띠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혹시 어머니가 갖고 있던 목걸이에 대해서 아세요?”

“슈리아의 목걸이?”

“네. 푸른색 조금 색 바랜 보석이 덩굴 장식……. 비슷한 것에 얽혀 있는 모양인데요.”

레인은 최대한 자세히 목걸이에 대해 묘사했다. 불에 던져 버린 목걸이가 멀쩡히 나타난다면, 종종 떠오르는 알 수 없는 기억 따위는 그저 의미 없는 망상이라 넘겨 버릴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진짜로 불타고 망가진 목걸이가 발견된다면 고민을 좀 더 해 봐야 할 골치 아픈 문제가 되겠지만. 유르딘은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워낙 예전이라 확신할 수가 없어. 미안하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묻지? 네가 갖고 있는 물건이 아니었어?”

생각난 김에 말을 돌렸는데, 유르딘은 의도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결국 또다시 원점이다. 레인의 불완전한 기억들. 잠시 고민하던 레인은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얼마 전부터 이상한 기억 같은 게 떠올라서 그랬어요.”

“기억?”

“네. 제가 한동안의 기억이 없잖아요. 기억상실이랑 연관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기억이 끊긴 때부터 때때로 갑작스레 제가 모르는… 기억 같은 게 떠올라요.”

어떻게 설명해도 이상하게 들린다. 레인의 귀에는 제 헛소리가 꼭 약이라도 해서 미친놈의 횡설수설처럼 들렸다. 유르딘은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편히 말해도 좋아.”

믿어 주는 태도가 레인에게 안심을 줬다. 그런 고마운 이를 상대로 괴상한 기억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자신의 파렴치함에 차마 유르딘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꺼낼 자신은 없었다. 레인은 제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까의 말을 이었다.

“그 기억 속에서 유르딘을 봤어요. 대체 왜 그런 걸 떠올리는지는 모르겠는데……. 항상 같은 기억이에요. 저는 처음 보는 장소에 있어요. 투박한 양식의 성안이고 바깥에는 겨울이라 눈이 쌓여 있고 저는 그 성의 방 안에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둘러싼 채 증오하며 비난하고 모욕해요. 그 시선이 굉장히 생생하게 떠올라서……. 저는 그게 너무도 치욕스럽고 괴로워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참담한 기분이에요.”

언제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떠오르던 기억이었는데, 직접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회상하는 데도 어째서인지 머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괴롭게 꽉 막혀 온다. 레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장소 한가운데에 유르딘이 서 있는데……. 유르딘은 저를 차갑게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요. 유르딘까지 몸을 돌리는 걸 보면 제가 정말 죽을죄를 짓긴 한 모양이에요. 어쨌든 그런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가 아팠어요. 지금은 좀 괜찮네요.”

너무 감상적으로 필요 없는 말까지 주절거렸나 싶었으나, 한번 묵혀 뒀던 이야기를 꺼내고 나니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오늘도 아까 말한 그 목걸이에 대해 자세히 생각하려고 하니까 머리가 아팠었거든요. 그래서 쓰러졌던 거고요.”

“그렇군.”

유르딘의 목소리가 지독하게 낮고 갈라져 있었다. 레인이 놀라 얼굴을 들자 유르딘이 시선을 피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이미 엉망인 얼굴을 레인의 두 눈으로 확인한 후였다. 화를 내거나 실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그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저, 절대로 유르딘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정반대의 기억이 떠오르니까, 그게 이상해서요.”

“아니, 괜찮다. 그냥……. 그런 게 아니야.”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다. 유르딘 본인도 아는지 눈가를 두어 번 문질렀다가 손을 뗐다. 정말로 멀쩡해진 것인지, 아니면 멀쩡한 표정의 가면을 쓴 건지는 몰라도 유르딘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레인을 재촉했다.

“마저 말해 봐라.”

재촉에 레인은 괜히 어색하게 한때 목걸이가 걸려 있었던 목 근처를 매만졌다. 아까 떠오른 기억을 다시 한번 되짚어 봐도 여전히 두통이 없다. 한 번 완전히 떠올렸기 때문일까? 마치 자신 안의 무언가가 변한 느낌이었다.

“이건 아무래도 제가 기억이 없는 동안에 진짜 있었던 일인 것 같아요. 제가 조금 중요하게 여기던 물건을 넣어 두던 상자가 있었는데요.”

“상자?”

“네. 별건 아니고……. 그냥 어린 시절부터 하나둘 모아 오던 물건이 든 상자예요. 제가 그걸 통째로 불에 집어 던져 태웠어요. 목걸이가 그때 불에 휘말린 것 같아서…….”

“왜 태웠지?”

유르딘이 조금 놀란 듯이 눈을 깜박였다. 상자에 대해 알고 있나? 그럴 리가. 레인은 곧장 자신의 의문을 부정했다. 침대 아래 깊숙한 곳에 넣어 뒀던 상자는 방을 청소하는 사용인들조차도 존재를 몰랐다. 레인과 교류가 거의 없었던 유르딘이 상자에 대해 알 리가 없다. 만약 안다고 쳐도 유르딘이 신경 쓸 만한 물건이 아니다. 그 안에 든 물건들은 레인이 기억하기로는 모두 잡동사니였으니까. 레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냥 그 상자랑 관련된 게 더는 꼴도 보기 싫었던 것 같아요.”

진실을 모르는 진심이 첨예한 칼날이 되어 유르딘을 내리쳤다. 말을 마친 직후, 레인은 자신이 이유 모를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유르딘, 죄송해요. 제가 괜히 이상한 말을 해서…….”

“아냐, 괜찮다. 그런 것에 화난 게 아니야.”

화가 났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답을 내놓는 유르딘의 목소리가 초라했다. 유르딘은 더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깨어진 가면 너머의 얼굴은 처참할 정도로 슬펐다. 울 줄도 모르는 지옥 같은 절망이다. 유르딘은 제 잘못으로부터 뒷걸음질 쳤다.

“미안하다, 레인. 내가 지금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누가 봐도 변명이었지만,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유르딘은 도망치듯이 방을 떠났다.

왕궁은 너무나도 밝았다. 어디든 너무 밝아서 유르딘의 추악한 일면을 감춰 줄 수 없었다. 유르딘은 레인의 죽음에 손을 보탰다. 그걸 자신의 죄로서 받아들여, 이전 생에는 죽음으로 치죄했고 이번 생에서도 차마 레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주제에 새삼 충격을 받았다. 레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었다. 과분한 바람이다.

유르딘은 정처 없이 걸어서 간신히 어두운 곳을 찾아냈다. 남의 눈이 보이지 않는 밤의 어둠이 내린 곳으로 숨어들었다. 차라리 영원히 해가 뜨지 않으면 좋겠다고 유르딘은 생각했다.

3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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