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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광기의 발현 (6/20)

2.5 광기의 발현

유르딘은 자신의 파멸이 기꺼웠다. 처음부터 복수의 대상에는 유르딘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끔찍하게 죽어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기를 소망하던 유르딘은 또다시 눈을 떴다.

그가 처음 눈을 뜬 장소는 다름 아닌 전쟁터의 한복판이었다.

‘말도 안 돼.’

누구의 외침인지 모를 혼란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최후의 꿈일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장소로 돌아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풍경을 다시 보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레인이 보고 싶었다. 레인을 지키지 못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흘려보낸 이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 시기에 최소한 수도에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이런 놈들에게 발목 잡혀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했다.

짜증이 났다. 이어진 행위는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유르딘의 검기가 길게 뻗어 나가 성채를 향해 쇄도했다. 이전 같으면 성채에 있을 민간인을 걱정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강력한 일격에 성채가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졌다.

유르딘은 그 순간 공포에 섞인 적들의 익숙한 시선과 아군의 환희를 받았다. 이 또한 그가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해 왔던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불러올 학살일 뿐이다. 왜 환희하고, 왜 절망하는가. 왜 각각의 반응이 다른가? 유르딘은 그 답을 알았다. 한쪽은 아군이고, 다른 한쪽은 적이라서. 한쪽에서는 이득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단순한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너무 지긋지긋했다. 다 부숴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에 베른이 다가왔다. 도저히 적이라 규정짓기 힘든 유르딘의 아군, 그의 부관은 어딘가 상태가 이상한 상관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극도로 조심했다. 대꾸해 줄 기력도 없었다.

전쟁의 뒤처리인지 뭔지를 한다는 베른을 무시하고 방에 틀어박혀 아무 소득도 없는 꿈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레인을 볼 수 없다면 차라리 영원히 쉬고 싶었다. 유르딘을 일어나게 만든 건 베른의 한마디 말이었다.

“레인 님께 보내시기로 한 선물, 이번에는 안 보내도 되겠지요? 조만간 귀환할 테니까요.”

“레인에게 선물을 보내?”

“네. 저번에 신이 나서 포장하셔 놓고, 무슨…….”

당황하는 베른의 얼굴이 들어오지 않았다. 단순히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 꿈은 지나치게 오래 이어졌다. 유르딘은 그제야 현실을 자각하고 뺨을 세게 내리쳤다. 아릿한 통증이며 자신을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는 베른의 경악까지, 모조리 현실의 감각이었다. 레인이 살아 있을 리가 없는데 살아 있고, 유르딘은 이미 끝난 전쟁터에 서 있고……. 마치 시간을 돌려 과거에 떨어진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하니 기적과도 같은 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이곳이 정말 과거라면. 과거로 돌아온 것이라면.

레인이 살아 있다.

기적이었다. 레인이 살아 있다니, 수없이 했던 상상 그대로 레인을 지켜 줄 수가 있다니. 벌떡 일어나 곧장 수도로 떠난다고 하는 유르딘을 베른이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여전히 현실감을 되찾지 못한 채 베른이 내미는 일들을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자마자 말을 달려 수도로 향했다.

레인이 살아 있고, 레인을 지켜 줄 수가 있다. 처음에는 가정만으로도 그저 기뻤지만, 수도가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걱정이 더욱 커졌다. 레인을 완벽하게 지키는 건 유르딘의 희망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이 세상에는 쓰레기들도 위험한 것들도 너무나도 많았다. 전장을 돌아다니면서부터 귀족들을 학살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유르딘은 수많은 죽음을 봤다. 인간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도 쉽게 죽는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약한 레인이라면, 누군가가 목을 조르거나 어설프게 칼을 휘두르거나 그 외에 간단한 악의만으로도 한순간에 죽을 수가 있었다. 레인을 죽일 경우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상상만 해도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양 끔찍하게 숨이 막히며 두려웠다. 견딜 수 없다.

누군가를 안전하게 지키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레스터 아이제나흐나 카이렌 모드, 딜란 아이제나흐는 가장 위험한 독이었다. 그 외에도 무엇 하나 안심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이전 생에서도 별거 아닌 버러지들의 사소한 악의들이 모여 레인을 양분 삼아 진한 비극의 향취를 풍겨 냈다. 끔찍한 결말은 유르딘에게 뿌리내려 과거로 돌아온 지금도 기억 속에 심어져 있었다. 언제 또 그런 식의 악의가 발현되어 레인을 찌를지 알 수 없었다. 이 세상은 너무도 불안하고 위험하다.

완벽하게 레인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독소가 많다면 모두 제거하면 된다. 레인에게 있어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위험 요소를 하나하나 모두 뿌리 뽑으면 된다. 벌레도 추위도 없는 유리 온실을 만들자.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따스하고 안온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지키자. 그 어떤 버러지들도 레인에게 손을 댈 수 없도록, 그 어떤 고통도 레인을 스칠 수 없도록 안전한 세상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모조리 쓸어버리는 게 얼마나 걸릴까? 지난 생에서는 이백 일이 넘게 걸렸다. 이번 생에서는 지난 생에서처럼 도망자가 될 수 없으니 더욱 신중해야 했다.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이 년 이상은 걸린다. 그 동안 레인이 위협에 노출된다면? 가정만으로도 끔찍하다.

최소한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전까지는 레인을 숨겨 둬야만 했다. 어디가 좋을까. 수도? 아니면 곧 하사받을 영지? 아마 국왕은 유르딘에게 사람 죽인 공으로 영지를 하사할 터였다. 자신의 영역 안에 숨기는 게 간단하기는 했지만 다만 죽일 놈들이 수도에 몰려 있기 때문에, 레인을 바로 곁에서 지켜 주기가 힘든 게 단점이었다.

역시 수도에 숨기는 게 좋겠다. 거대한 저택을 사서 개조하자.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담을 높게 쌓고 원래 있던 문은 모두 막아 커다란 문 하나만 남기자. 그래, 앞에는 커다란 개를 키워서 접근하는 버러지들을 모두 물어 죽이게 하자. 안에서도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누군가 훔쳐보는 것도 위험했다. 창에는 모조리 못질을 할 생각이었다. 배신할 확률이 있는 사용인 따위는 두고 싶지 않지만, 레인을 극진하게 보살피려면 어쩔 수 없이 두어야 했다. 배신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협박? 인질을 잡아야 하나? 언제나 인간이 가장 위험하다. 신중히 믿을 만한 사람을 고르지 못할 거면, 어느 정도는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저택 전반의 관리만을 맡기고 레인의 수발은 직접 드는 게 낫겠다. 가장 깊숙한 방 안에서 레인을 보살피자. 레인에게는 그 누구도 함부로 접근하게 놔둘 수 없었다.

레인. 창백한 뺨과 감긴 눈동자, 말라붙은 입술. 죽어 있던 몸에 온기가 돌아온다면 유르딘이 못 할 게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사랑한 걸까. 왜 이렇게 사랑한 걸까? 유르딘의 사랑은 절망과 광기가 키워 낸 것이었다. 정신없이 말을 달려 레인에게로 향하는 내내 유르딘은 제 사랑과 광기에 먹혀 있었다.

간신히 아카데미에 도착해서 자신을 막아서는 하인을 베어 넘기려다가 현실을 간신히 자각하고 불러 달라고 말했다. 하인은 급히 올라갔다가, 눈치를 잔뜩 보는 얼굴로 저 혼자 내려왔다. 난처한 얼굴로 레인의 말을 전하는 걸 채 다 듣기도 전에 유르딘은 거침없이 계단을 올라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이 열린 방 안에 레인이 있었다.

레인은 기억과 완전히 달라진 얼굴을 하고, 싱그러운 생기를 머금은 채 유르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죽음을 겪지 않은 레인이었다.

재회는 곧 개벽의 순간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이래, 더 이상 날 리가 없는데도 자꾸만 제 몸을 잠식한 채 코끝을 맴돌던 지하수로의 악취와 피비린내가 책과 잉크의 냄새에 묻혀 옅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어둠으로 물들었던 세상에 그제야 태양이 뜬 것처럼 천천히, 바닥을 물들인 황금빛이 보였다. 절규와 원망의 환청 대신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시들어 말라붙은 감정이 다시 열기를 품고 맥동하기 시작한다. 따스한 체온과 맞닿는 순간, 흉포하게 들끓던 감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나는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한순간에 정신이 들었다. 병적으로 이어 나가던 생각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강압적인 폭력과 악의가 레인을 말라붙게 하고 끝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만든 자들을 수도 없이 원망했으면서, 레인을 보호한답시고 감히 똑같은 생각을 품었다. 조금 전까지 유르딘이 하던 생각은 레인을 지키는 게 아니라 말려 죽이는 행위에 불과하다.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껍데기를 썼을 뿐, 실상은 유르딘의 광기와 집념의 발현일 뿐이다. 사랑해서 그런 짓을 했다고 주장하는 카이렌 모드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너는 어차피 나와 똑같아.’

꿈속에서 들은 카이렌의 목소리가 유르딘을 내리치고 짓이겼다. 유르딘은 그 무도한 자와 같았다. 레인이 뭐라고 말을 했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유르딘은 어색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차마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유르딘은 오직, 레인의 앞에서 참담하고 끔찍한 살인마를 치워 내는 데만 열중했다.

그사이에 하인이 준비시킨 마차에 오르며 유르딘은 얼굴을 손으로 쓸며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품이 넓은 로브를 입어 다행이었다. 사춘기 청소년도 아니고 할 건 다 해 본 나이인데, 자책이 우습게도 고작 잠깐 끌어안은 정도로 흥분했다. 붉어진 귀 끝이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몇 달간 광기에 젖어 있던 유르딘 니제스는 그제야 천천히 현실로 끌어 올려졌다. 이미 바뀌어 버린 사고방식까지 정상인의 것으로 돌아올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서른 해가 넘게 살아온 방식을 연기라도 할 수 있는 이성을 붙들었다. 레인의 곁에서 위험 요소를 치워 내야 했다. 그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다만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유르딘 니제스, 자신이었다. 원한다면 하나의 왕국을 찢어발길 수도 있는 최악의 학살자가 가장 위험했다. 유르딘은 머리를 마차 벽에 세게 가져다 박았다. 수치도 도리도 모르는 끔찍한 짐승이 그였다.

“미치겠군…….”

자책하면서도 몸 안의 열기는 가라앉을 줄을 모른다. 유르딘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레인을 지워 내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학살자 유르딘은 레인을 마주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몇 달 만에 제대로 보는 거울이 어색했다. 얼룩덜룩하게 염색했던 머리칼은 눈이 부신 금발로 되돌아와 있었고, 피부는 그을음이나 피부병, 흉측한 상처 없이 깨끗했다. 어딘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던 몸은 거짓말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피폐해진 인상은 기억 속의 유르딘과 달랐다.

유르딘은 손으로 얼굴을 뒤덮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제멋대로 부수고 파괴하며 죽기만을 소망하던 시간은 끝났다. 소망과 각오를 새기며 숨을 고른다. 다시 한번 거울을 확인했을 때는 신사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왕국의 영웅 유르딘 니제스가 서 있었다. 한번 박살 난 본질이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서른 해가 넘게 살아온 방식대로 흉내는 낼 수 있었다.

여전히 레인의 적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무작정 살인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딱히 살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었다. 인간적인 감정은 이미 모조리 박살 난 후였다.

이전과 다른 점은 레인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무작정 죽여 없애는 방법으로는 레인이 뒤집어쓴 모욕들을 깔끔하게 벗길 수 없었다. 유르딘은 과거, 혹은 미래에 레인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레인은 공작가에 복수하고 싶다고 했다. 레인이 말하는 복수가 단순히 죽여 없애는 일만은 아닐 터다. 죄질을 밝혀 정치적으로 말살시키고, 레인이 경험했던 것처럼 인생을 나락으로 추락시켜야 했다. 유르딘의 손으로 직접 죽음을 내려 심판하는 게 아닌 왕국의 법에 따라 심판을 받아 동정의 여지가 없는 방식으로 몰락해야만 했다. 과거에는 레인이 죽은 상황에서 죄지은 자들이 살아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었기에 모조리 죽였지만 지금은 레인이 두 눈 모두 뜨고 살아 있으니 원수들의 몰락을 지켜보고 후련해하길 원했다. 그런 일로 레인이 입은 상처가 모두 씻겨 나갈 수는 없겠지만, 그게 유르딘이 레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자 속죄였다. 유르딘은 레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검이 되어야 했다.

레인과 직접 마주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대화는 할 수 없었다. 혹 그간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까 걱정이 됐다. 유르딘은 개선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레인의 그간 행적을 살피기 위해 아카데미에 은밀히 믿을 만한 병사 하나를 보냈다.

복잡한 심사를 마음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은 유르딘은 전장에서는 절대 입지 못할 과시용 갑옷을 입고 귀환하는 군대와 합류해 선두에 섰다. 수도는 개선 행렬을 맞으며 축제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었다. 행렬의 선두에 서서 수많은 환호를 받았지만, 그런 건 제대로 눈이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르딘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레인만을 눈으로 좇았다. 유르딘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레인의 모습을 정확히 찾았다. 가슴 설레게도 레인은 직접 거리에 나와 유르딘이 정식으로 개선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못 찾을 수가 없었다.

당장 말에서 내려 레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유르딘은 성으로 향했다. 왕의 환대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유르딘의 태도는 방자한 것이었지만, 성의 모든 사람이 유르딘이 피곤해서 그런 걸 거라며 옹호했다. 유르딘의 입장에서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를 능지처참하겠다고 외치던 자들이었다. 우스운 광경이라고 생각했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다만 천천히 이해했다. 이 세상은 적과 아군으로만 나뉘는 흑백의 세상이 아니다. 타인을 둘 중 하나로 단순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레인이 고위 귀족이지만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으며, 명석하지만 동시에 그 재능으로도 제 살 자리를 찾지 못했듯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더 이상 타인의 아픔에 쉽게 공감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이해는 했다. 레인의 존재를 자각한 것만으로도 극단적으로 흘렀던 사고방식이 조금 제자리를 찾는다.

왕은 무리하게 불러 미안하다는 말을 하더니 신관과 의원을 보낼 것을 약조하고 유르딘을 저택으로 돌려보냈다.

저택에 돌아오니 아카데미로 보냈던 병사가 돌아와 있었다. 보고를 망설이는 병사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병사가 말한 레인의 행적은 최악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살을 시도했었고, 이후에도 며칠 내내 자해를 시도해 침대에 묶어 뒀다고 했다. 이번에야말로 지켜 주기로 마음먹었는데, 떨어져 있는 사이에 또다시 레인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 병사를 물린 유르딘은 방에 틀어박혀 짐승처럼 오열했다.

재회한 레인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자살 시도를 한 날부터 며칠간의 기억을 잃었다고 했다. 원래 이 시기에 자살 기도 따위는 하지 않았던 레인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레인도 과거를 거슬러 왔을 확률이 있었다. 레인이 자신이 죽어 간 순간을 기억했다면, 확실히 그건 죽으려 든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괴로운 기억이었다. 유르딘이 그 상황을 만들었었다.

과거와 다른, 무언가 나쁜 일이 있어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가정 또한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죽으려고 했을까. 얼마나 괴로웠으면 기억을 잃었을까. 엄청난 절망감과 무력감이 유르딘을 덮쳤다.

유르딘의 심상찮은 모습에 그란델은 안절부절못하고 문 앞을 서성였다. 그란델은 밤이 깊을 때까지 방 앞을 서성이다가, 유르딘이 눈물을 그치고 기운 빠진 얼굴로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는 걸 보자마자 달려왔다.

“형, 무슨 일이야?”

“그란델, 네 도움이 필요해.”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레인을 도우려면 유르딘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마침 그란델은 유르딘이 살인을 하고 다녀 궁지에 몰렸던 과거에도 가문을 건사해 냈을 정도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다. 유르딘이 레인을 돕고 싶어 함을 밝히자, 그란델은 갑작스러운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의 존재로 유르딘은 길게 절망하는 대신 금세 기력을 되찾았다. 이전에는 증오로 살았다면, 지금은 그야말로 레인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내놓을 삶이었다.

공격을 위한 대비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레인을 지키는 일이다. 유르딘이 생각하는 모든 계획은 레인의 완벽한 안전을 전제 조건으로 했다. 가장 시급한 건 레인을 곁에서 지킬 사람이었다. 레인은 아카데미에 머물고 있어서 유르딘이 직접 곁에 머물며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적절한 인사는 금세 생각났다.

지스킬 마이어.

전우였던 기사들조차 모조리 학살하던 유르딘이 유일하게 손대지 않았던 남자였다. 모두가 레인을 의심하는 상황에서도 홀로 레인을 향한 굳은 신뢰를 건네고, 동료 기사들에게 야유를 받으며 자신마저 궁지에 몰리는 상황에서조차 레인을 옹호했다. 레인이 밑바닥에 몰렸을 때조차 버리지 않았던 남자라면 충분히 신용할 수 있었다.

사실 신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어쩌면 레인에게 있어서는 유르딘보다 지스킬이 훨씬 더 나은 상대일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다소 우울해졌다. 당시에 아무리 레인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었다고는 해도, 결국 레인을 지하 감옥에 밀어 넣고 죽게 한 유르딘과 실질적인 위로의 말을 건넸던 지스킬은 비교할 수도 없었다. 죽기 전, 레인에게 있어서 훨씬 더 믿을 만한 사람은 지스킬이었으리라. 복잡한 감정이었다. 단 한 번도 유르딘이 경험해 본 적 없는 열등감이 마음을 가득 채우며 들끓었다. 우울하기는 했으나 고작 사사로운 감정 따위로 인사를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유르딘은 곧장 은밀히 지스킬을 불렀다. 지스킬에게 있어서 유르딘은 하늘 같은 왕국의 영웅이요, 까마득한 상관이었기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를 믿고 특별한 임무를 내린다고 하니, 지스킬은 긴장하면서도 목숨을 다 바쳐 명령을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지스킬이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 레인을 옹호한 건 개인적인 친분과 신뢰가 기반을 둔 행동이었으니, 그러한 감정이 사라진 지금도 레인을 이전처럼 믿고 지킬까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지스킬에게 명령을 내린 유르딘은 그란델이 소개해 준 귀족들을 중심으로 천천히 친교를 넓혀 나갔다. 원래는 하지 않았을 짓을 하니 유르딘이 결혼할 영애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확실히 아니라고 부정해 두는 게 좋을까 싶었지만, 어느 정도의 주목 효과가 있는 듯하여 그대로 두었다. 애초부터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조혼 문화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결혼하는 나이가 이른 귀족 사회에서 유르딘이 여태껏 결혼하지 않고 버틴 건 그가 정략결혼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과거의 결정이 도움 됐다. 영애들은 물론이고, 결혼할 나이의 영애를 데리고 있는 많은 귀족이 유르딘에게 접근했다.

유르딘은 그들과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치적인 감각은 유르딘이 그란델에 비해 훨씬 떨어졌지만, 하나하나 알려 준 정보들을 써먹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베른이 뒤에서 유르딘을 보조했다. 자신을 성심성의껏 돕는 베른을 보며 유르딘은 확실히 제가 타고난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빛나는 재능을 갖고 수월하게 성공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두었다. 과거, 시간을 역행하기 전에 베른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유르딘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몹시 미안했다. 그러나 사죄보다는 레인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레인과 재회하기까지 일주일,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수많은 생각을 하며 유르딘은 레인을 만날 주말을 기다렸다. 동시에 주말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억지로 눌러 놓은 흉악한 본성이 레인의 앞에서 튀어나와 그를 집어삼킬 것이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유르딘은 자신이 죽인 레인의 원수들에 대해 떠올렸다.

레인을 보고 있자면, 감히 그를 짓밟은 놈들의 사고가 도저히 이해되질 않았다. 조금 걷기만 해도 픽픽 쓰러지는 레인인지라 툭 치면 죽을 것만 같았다. 물론 유르딘은 작정하면 산짐승도 주먹으로 쳐 죽일 수 있는 남자였지만, 그런 사실까지 고려해서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레인은 엄청나게 마르고 가늘었다. 유르딘 주변에 흔히 있던 사내들에 비하면 체구가 반 토막만 했다. 여기서도 유르딘은 제 주변에 흔히 널린 사내들이 왕국에서 최상위권에 드는 건장한 체구의 덩치들이라는 사실을 가볍게 무시했다.

어찌 되었든 유르딘의 기준으로는 레인이 잘못하면 죽어 버릴 것처럼 연약함의 극치를 달리는 존재였다. 타인의 기준으로 넉넉히 봐도 충분히 안쓰러울 정도로 병약했다. 그런 레인을 때리는 놈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나 카이렌은 제법 유망한 기사로, 검사치고는 비교적 호리호리한 체구에서 괴물 같은 힘이 나오기로 유명한 놈이었다. 미친놈 중의 정점인 유르딘이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카이렌도 미친놈 중에서도 궤를 달리하는 미친놈이라 할 수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레인이 위험한 바깥은 걷지도 못하게 하고 싶었다. 아니면 항상 안아 들어서 옮기고 싶었다. 걷거나 달리거나 하는 등의 무리한 노동은 레인에게 맞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책을 볼 때마다 책장도 유르딘이 대신 넘겨 주고 싶었다. 물론 유르딘이 아무리 맛이 갔어도 그게 딱 미친놈처럼 보일 거란 사실을 알 정도의 정신은 있었다.

하지만 마차를 타는 레인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 없이 몸이 근질거렸다. 결국,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시도하니 레인은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유르딘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덥석 손을 잡았다. 손에 힘을 주니 그대로 유르딘을 향해 희미하게 웃는다. 그 얼굴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간신히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둘만 마차에 타니 생각이 제멋대로 뻗어 나갔다. 괜히 남의 눈에 띄었다가 위협이 생길까 봐, 남의 눈을 피할 방법을 택했더니만 레인이 가장 위험한 짐승 앞에 놓인 꼴이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수로에서 했던 더러운 망상이 실체화한다. 유르딘은 기사 서임식 때 읊었던 기사의 맹세를 속으로 되뇌었다. 약자를 배려하며, 억압하지 말라. 기사도는 기사라는 직업이 명예를 모르던 난봉꾼이던 시절 조금 자제하라며 시작된 것이라더니, 지금 유르딘을 보면 딱 그 상황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의 레인과 달리, 현재의 레인은 유르딘에게 상당히 경직된 태도를 보였다. 경계하는 태도에 마음이 아파 왔으나, 이따금 세운 가시를 내리고 이쪽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을 때면 온 세상이 평화롭게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레인은 몹시 사랑스러웠다.

마냥 즐거운 시간만 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유르딘에게는 가장 중요한 할 일이 있었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 여전히 살아 이 세상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는 건 참기 힘든 일이다.

원래 다른 놈들은 몰라도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일원과 카이렌 모드는 바로 죽일까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무작정 죽여서는 완벽한 복수를 할 수도 없었고, 홀로 가문에서 살아남아 이득을 보는 레인에게 의혹이 돌아갈 수도 있었다. 증거가 없다면 레인을 구속할 수 없겠지만, 유르딘은 그런 어중간한 상태에 레인이 타인의 모욕을 견뎌야만 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다. 최소한 레인이 안정적으로 왕국에서 뿌리를 박고 살기 위해서 그들에게 의혹이 남는 죽음을 선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버려 두자니 살려 둘 시의 위험성은 너무나도 컸다. 지금까지 상처 입은 걸 되돌릴 수는 없지만, 최소한 앞으로는 레인이 상처를 입어서는 안 됐다.

마음을 돌리게 된 건 레스터의 존재 때문이었다. 최근 이상해진 놈의 행보를 볼 때, 어쩌면 기억을 되찾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유르딘이 레스터의 달라진 행보를 보고 추측했듯, 레스터 또한 유르딘의 달라진 행보를 보고 추측했을 확률이 높았다. 서로가 시간을 거슬러 왔음을.

진실을 알아도 레스터가 쓸 수 있는 수는 적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실세는 레스터가 아니며, 만일 실세라 하더라도 현재 왕국에서 영웅적 행보로 주목받는 유르딘을 쉽게 건드릴 수는 없었다. 동시에 시간을 거슬러 온 레스터라면 레인이 유르딘을 광인으로 만드는 방아쇠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니 당장 죽고 싶지 않다면 레인을 지키며 알아서 제 주변을 제어하는 수밖에 없다.

추측이 사실이라면 공포를 이용해 레스터를 제어할 수 있었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가 갑자기 반발할 수도 있으므로, 유르딘은 지나치게 레스터를 위협하지는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경고를 위해 적절한 도발은 필요했다. 추측에 확신을 하기 위해 유르딘은 레인과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유르딘이 레스터의 행보를 감시했듯, 사람을 쓸 수 있는 레스터라면 유르딘을 감시하고 있을 게 뻔하다. 괜히 작은 마차를 타서 자신을 시험에 몰아넣는 방식은 버렸다. 보란 듯이 유르딘은 화려한 마차를 타고 아이제나흐 공작가로 향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레스터는 혼비백산해 저택을 찾아왔다. 새파래진 얼굴로 유르딘을 올려다보며 필사적으로 제 동생을 뒤로 숨긴다. 레스터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제 원수를 죽여 버리고 싶어 하면서도,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원수의 눈치를 보며 설설 기어야 하는 상황이라. 유르딘에게는 그 상황이 몹시 유쾌하게 느껴졌다. 괴롭게 발작하는 레스터를 보며 유르딘은 간신히 웃음을 삼켰다. 레스터가 정상이 아니듯, 자신 또한 정상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공작가의 일을 마음에 들게 마무리한 유르딘은 저택을 꾸미는 데 열중했다. 유르딘의 신이나 다름없는 레인 아이제나흐를 저택으로 초대한 데에, 맹세코 불순한 의도는 없었다. 그저 레인이 유르딘 자신의 공간으로 온다는 게 무척 설렜을 뿐이다. 잔뜩 들떠서 저택을 뒤집어엎는 유르딘의 행태에 눈치 빠른 그란델은 대충 상황을 눈치챘다.

“형, 그거 알아?”

“뭘.”

“형이 한창 검을 휘두르며 신동 소리를 듣기 시작했을 때, 레인 아이제나흐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

알고는 있었지만, 말로 들으니 좀 뼈아프다. 굉장한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유르딘은 한 박자 늦게 변명했다.

“그런 거 아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형은 진짜 난감한 상대에만 꽂힌다. 형보다는 레인 아이제나흐가 힘들어. 알지?”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레인이 유르딘의 연인이 된다면 레인이 손가락질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당장 손에 쥔 것이라고는 아름다운 외형과 고귀한 혈통뿐인, 비극적이고 조금은 추잡한 가족사를 지닌 젊은 청년. 레인을 수식하는 말들은 구설에 오르기 딱 쉬운 화려하나 내실이 없는 요소들이다. 물론 레인은 명석하며 그걸 뒷받침하듯 아카데미 성적이 아주 좋았지만, 대중의 자극적인 소문에 휘말리게 되면 그것조차 교수에게 로비한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

이전의 유르딘이 최선을 가정했다면, 지금의 유르딘은 최악을 가정했다. 의심 살 만한 행동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유르딘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그란델은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란델의 지적으로 잠시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유르딘은 다시 의욕적으로 레인의 방문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건 중요한 정보 중 하나를 입수하는 일이었다. 유르딘이 이것에 대해 지닌 정보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유르딘의 정보는 상당히 추상적인 데다가, 모든 상황에 대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요소들이 많았다. 평생은 아니라도 상당히 오랜 시간 신경 쓸 일과 연계되어 있으니 반드시 알아내서 머릿속에 각인시켜 둬야만 했다.

다행히 조사에 적합한 인물이 레인의 근처에 붙어 있었다. 유르딘은 곧장 지스킬 마이어에게 사흘 내로 정보를 알아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스킬은 훌륭하게 제 임무를 수행해 사흘 후 유르딘의 앞에 섰다. 그리고 보고했다.

“레인은 어패류를 좋아합니다. 비린 건 좋아하지 않아서 제대로 잘 조리된 것만 입에 대는 것 같습니다. 채소 종류를 많이 먹습니다. 크게 가리는 거나 피해야 하는 음식은 없습니다. 다만, 육류를 먹고 탈이 난 적이 많아서 자주 즐기지 않는 것 같고 같은 이유로 속이 편한 음식으로 대충 때우는 일이 많아 식단이 다소 부실합니다. 전반적으로 입이 짧습니다. 단 걸 좋아하는데 이것 역시 많이는 못 먹고 산뜻한 걸로 입가심을 하는 걸 즐깁니다. 새콤한 맛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습니다.”

성실하게 명령을 수행한 지스킬은, 조사의 훌륭한 성취도와는 정반대의 다소 의욕 없는 태도로 정보를 줄줄 읊었다. 유르딘에 대한 존경심 일부분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팔불출 상사에 대한 약간의 애잔함이 들어찬 모양새였다. 불손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잘 먹고 잘 자기만 해도 기본적인 상태가 나아진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오기 전부터 통틀어 봐도 레인이 썩 잘 먹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병을 제하고라도 몸이 약한 레인은 잘 먹어야 했지만, 맛없는 걸 억지로 먹이고 싶지는 않았다. 최소 몇 년은 레인을 도우며 곁에 있을 생각이니, 레인의 취향에 대해 아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한 정보라고 할 수 있었다. 눈앞의 멍청한 녀석은 모르는 것 같지만.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이 녀석보다 유르딘이 나았다. 유르딘은 치졸한 질투와 승리감을 맛보다가, 자괴하며 지스킬을 내보냈다.

마침내 레인이 오는 날, 잔뜩 긴장해 있던 유르딘은 마차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허벅지에 이전처럼 화상 자국이 남아 있는 줄 알고 레인의 바지를 걷어 버렸다. 우악스레 걷은 바지 아래 하얀 살결이 또렷이 시야에 들어와 유르딘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레인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더 무슨 일을 했을지 모를 일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저지른 것에 대해 유르딘은 다소 우울해졌다.

우울한 기분은 저택에 도착한 후 극대화됐다. 그란델이 레인을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레인의 반응을 봤을 때 이 시점에서 우려할 만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던 듯하지만, 만약에 유르딘이 모르는 공백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더라면 어찌해야 좋을 것인가. 고작 두 사람이 안다는 이유로 망상을 이어 가는 게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을 정도로 유르딘은 최악의 상상에 몰두했다.

애초에 그란델의 이름은 유르딘이 죄지은 자의 이름을 대라고 했을 때 심심찮게 나오던 이름이었다. 유르딘의 고문을 받은 자들은 짧은 시간 동안 한계까지 몰렸다. 대부분이 유르딘을 두려워하며 겁에 질렸지만, 일부는 오히려 독기가 서려 악에 받친 증오를 내질렀다. 그런 자들에게 이름을 대라고 하면, 실성해서 일부러 유르딘과 가까운 사람의 이름을 대며 악을 지르고 비웃었다. 논리 없는 억측이었다. 실제로 레인과 접점이 전혀 없는 데다 몇 년의 시간을 전쟁터에서 유르딘과 함께한 베른의 이름까지 심심찮게 입에 올랐으니, 유르딘이 아무리 미쳤어도 악의에 찬 말을 믿지 않는 건 당연했다. 유르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형제의 이름을 외치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그때는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유르딘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제 가족이 부정한 짓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허상이었더라면? 유르딘이 죽인 자 중에는 이중적인 쓰레기가 참으로 많았다. 겉으로는 신사적인 귀족인 체하면서 신분이 낮은 부녀자를 폭행하고, 사생아를 낳으면 제 자식이든 뭐든 신경 쓰지 않고 둘 다 죽여 버리는 등의 쓰레기가 넘쳐흘렀다. 레스터 아이제나흐 또한 그랬다. 다른 사람에게는 고귀한 신분의 귀족치고는 상냥하게 구는 그자가, 평생에 걸쳐 레인만은 잔혹하게 짓밟았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유르딘 부터가 현재 멀쩡한 척하는 광인이었다.

절대적으로 선량한 인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란델이 레인에게 참혹한 짓을 저질렀다면 그란델을 용서할 수 있는가? 혹은, 죄지은 자라면 그란델을 죽일 수 있는가? 유르딘은 자문했으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란델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해도 대번에 죽일 수는 없었다. 그란델은 귀족들을 상대할 준비를 하는 유르딘의 가장 큰 협력자였다. 동시에 미쳐 있는 상태에서도 소중하게 여기던 동생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고 죽이지 않는다면, 죄지은 자를 혈육이라는 이유로 죽이지 않는다면, 유르딘의 복수는 완성될 수 없었다.

유르딘의 굳은 얼굴을 본 레인이 놀란 얼굴을 했다. 지금은 완벽한 가면을 쓰는 게 가장 우선이었다. 애써 침착한 가면을 쓰며 유르딘은 그란델을 돌아보았다. 착하고 선량한 동생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었다. 그제야 유르딘은 다시 현실감을 되찾았다. 지레짐작하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다정하게 레인과 대화를 나누는 그란델을 보며, 유르딘은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없었을 거라며 안심했다. 정확히는 안심하려 노력했다. 레인의 검사가 시작되고 나서야 유르딘은 맥락 없이 솟구치던 의심을 멈출 수 있었다.

눈앞의 레인에 대한 걱정만이 유르딘을 꽉 채웠다. 검사 결과, 레인의 몸이 유르딘의 추측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는 걸 알게 됐다. 눈에 띄는 병은 마력 결핍증뿐이지만, 굳이 병명이 붙어야만 아픈 건 아니다.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기에는 지나치게 약한 몸은 타인이 누릴 수 있는 걸 모두 누리지 못할 정도로 제한이 많았다. 솔직히 이렇게나 조심할 게 많은데 레인이 쉴 새 없이 폭력에 노출된 채로 죽지 않고 버텼다는 게 기적이었다. 저 몸으로 수많은 폭력을 받아 냈다면, 진즉 죽어도 수백 번은 죽었어야 했다.

“…왜. 왜, 너는…….”

내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지? 어리석은 질문을 하려다가 유르딘은 간신히 말을 삼켰다.

어린 레인이 저택에 남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나이부터 십 년 넘게 이어진 감금과 폭행이 레인의 희망을 꺾었다. 유르딘이 죽인 자 중에는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저택 별채에서 일하던 사용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잔뜩 얻어맞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도와 달라고 내뻗은 레인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개중에는 오히려 레인이 내민 손을 짓밟거나 두 도련님의 취미에 어울려 주며 조롱한 자들도 있었다.

레인은 그렇게 어린 나이에 도움을 청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레인의 가장 큰 적은 왕국에서 권력으로 따라갈 곳이 없는 아이제나흐 공작가였다. 보금자리가 되어 줘야 할 가족들이 앞장서서 레인을 짓밟았다. 세상은 언제나 강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피해자 쪽이 약자라면, 잘못은 명백히 가해자에게 있음에도 피해자가 조롱과 의심을 받는다. 무슨 이유를 대든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인데도,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고 유혹을 했다며 죄를 전가한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레인이 유르딘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르딘 또한 방관자였다. 그날, 공작과 끝까지 맞서 싸우지 못하고 레인을 저택에 두고 간 죄인이었다. 레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외면해 놓고 이제 와서 레인을 원하는 건 뻔뻔한 일이다. 그럼에도 레인을 원했다. 유르딘은 종종, 자신이 레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곁에 붙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격이 없다. 그리 생각하며 멀어지려던 찰나에 레인이 먼저 유르딘을 붙들었다. 저를 외면하지 말라며 울었다. 오랜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순간 외로웠던 것뿐일까. 안타까운 마음이 욕망과 뒤섞여 불씨를 틔웠다.

자신을 붙잡았던 손을 핑계로 유르딘은 거의 매일같이 레인을 찾아갔다.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만족하다가, 휴일에는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심지어는 영지를 받자마자 레인을 초대하기로 마음먹기까지 했다.

영지로 떠나는 마차 안에서 단둘만 있는 시간은 꿈결 같았다. 그러나 일주일 내내 사랑하는 사람과 붙어 있는 유르딘의 욕망은 갈수록 점차 크기를 더해 갔다. 유르딘을 신뢰해 그대로 편히 깨지도 않고 잠든 레인을 볼 때면 자꾸만 몸에 불길이 일었다. 비대해진 욕망은 끔찍할 정도였다. 유르딘은 레인이 잠들면 바깥에 나가 말을 타다가 레인이 깰 때쯤 다시 마차로 돌아왔다.

이전의 유르딘에게는 나름의 꿈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니제스 백작가의 작위 계승을 포기한 유르딘에게 욕심이 전혀 없는 것이냐 물었지만, 유르딘이 그 자리를 포기한 건 원하는 걸 모두 쥘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끼는 동생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전장에서 공을 세워 새로이 영지를 얻는 정도는 무난히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설마 후작 위까지 받게 될 줄은 몰랐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작위를 얻고 나면, 치열하게 살던 걸 잠시 멈추고 사랑하는 연인, 또는 아내와 영지로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잘 꾸며진 별장에서 머무르며 평화를 즐기고 싶었다.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사랑하게 된 사람은 남자이고, 결혼할 수도 아이를 가질 수도 없으며, 유르딘의 인생은 평온함과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완전히 박살 나 버렸지만 후회는 없었다. 다만, 옛날에 막연히 꿈꾸던 상황이 왔으니 한 번쯤은 소망을 간접적으로 이루어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유르딘은 레인과 일주일을 꼬박 함께 있었다. 꿈과 같은 시간이었다. 사용인도 믿지 못하게 된 유르딘의 성미상 고용한 사람이 적었고 별장 주변으로는 호위하는 병사도 거의 없었다. 물론 레인이 알지 못하는 먼 곳에 수많은 사병을 세워 별장을 지켰지만, 최소한 눈앞에는 없다. 이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사소한 일도 직접 해야 하는 일이 잦다는 특성을 이용해 유르딘은 레인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었다.

아침에 레인을 깨우고 사소하게 식사의 시중을 드는 일은 유르딘의 일과가 됐다. 사용인들은 감히 주인에게 일을 시킨다는 걸 못 견뎌 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식사는 지스킬이 추가로 물어 온 정보 덕에 레인의 입맛에 꼭 맞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눈으로 직접 보며 유르딘은 레인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을 기억 속에 새겼다. 식사를 마치면 가볍게 주변을 산책했다. 황량한 북부의 성보다 이곳 별장 주변이 아름다운 건 당연했다. 신관의 축복을 받은 데다 꾸준히 약을 먹고 있는 레인의 상태는 이전보다 훨씬 좋아서, 몇 분 걷고 쉬는 수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느긋하게 휴양하러 오는 곳이라 할 건 많지 않았다. 레인과 사냥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근처에 호수가 있어 그곳에 가 배를 띄우고 레인과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유르딘이 혼자 노를 젓자 레인은 또다시 기겁했다. 그런 레인에게 널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걱정하는 레인의 얼굴이 사랑스러우니 만족했다. 작은 배에 오르내릴 때마다 흔들리는 배가 불안한지 순순히 유르딘의 에스코트를 받는 점도 사랑스러웠다. 유르딘이 땀조차 흘리지 않고 가볍게 노를 젓고 나서야 레인은 조금 안심했다. 유르딘이 성벽을 갈라 버린 일이 왕국에 파다한데, 고작 노를 젓는 일을 걱정하는 게 귀여웠다.

어쩌면 이렇게 완벽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래서 남들 눈에도 귀해 보이니 눈독 들이는 자가 많았던 것 같지만, 지키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사랑스러움이 지나쳐 난처할 정도였다.

레인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 하나라면, 책 따위를 밤늦게까지 읽다가 불을 켠 채로 잠든다는 점이다. 성에서는 레인과 잠들기 전까지 함께 있어서 몰랐는데, 레인은 책을 가슴 위에 엎어 두거나 침대 밑으로 떨어뜨린 채 잠들 때도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이 정도면 정말로 손수 책장을 손수 넘겨 주면서 똑바로 잠드는 걸 도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삐뚠 자세로 잠든 레인을 똑바로 눕혀 주고 자리를 정돈해 주고 마지막으로 평온한 얼굴을 보고 나가는 일은 행복했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일주일간, 레인은 놀라울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처음 유르딘을 봤을 때 보이던 미묘한 어색함과 경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유르딘은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다가 잠든 레인의 무방비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레인은 경계도 두려움도 없이 이곳 생활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계속 여기서 생활해도 좋지 않을까? 레인은 이곳에서 충분히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바깥은 위험했다. 무리한 복수는 레인에게도 괴로움을 남길 수 있었다. 다 던져 버리고 도망쳐서, 여기에서 레인이 계속 머무르게 하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유르딘은 놀라 레인을 밀쳐 냈다. 툭 밀려난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붙잡았다. 품 안에 들어온 온기가 따스하다. 그저 자신이 졸다가 실수해 바닥으로 무너졌다고 생각할 뿐 유르딘을 의심하지 못하는 믿음이 사랑스럽다. 한 번 죽기 전에도 레인은 이런 얼굴을 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 모든 걸 부순 게 누군데, 감히 억압할 생각을 하나.

유르딘은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당분간 일에만 열중하며 레인을 당분간은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레인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괴로웠으나, 다행히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베른 덕분에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자신이 품는 생각과 욕망이 끔찍한 동시에 비참했다. 다른 건 다 괜찮았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고 학살자라 불리며 구정물을 마시고 쥐를 뜯어먹고 연명하며 거리의 부랑자처럼 살다가 자신을 원망하는 동생에게 죽는 일, 그 모두를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이 어그러진 끝에, 자신이 끔찍하게 혐오하던 인간과 닮게 되어 버린 건 끔찍했다. 힘으로 레인을 억압하고 제 목적대로 휘두르려 하는 사고 자체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역겹다.

잘라 버린 발터 플랑의 팔처럼 유르딘 자신의 팔도 자르고 싶었다. 유르딘은 가볍게 선을 넘어 학살자로 변했다. 검을 쥔 유르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정상이 아니란 것은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이러한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할 때가 오고 욕망에 불이 붙는다면, 과연 어디까지 제멋대로 행할 것인가. 후안무치한 짐승들과 자신이 닮은꼴이 되는 것만 같아 두렵고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렇게 되느니 죽어 버리는 게 낫다. 그러나 이대로 죽어 버리기에 적이 너무도 많았다. 아직 죽을 수조차 없었다. 무기를 들지 못하는 유르딘에게 가치가 있을 리 만무하니 이 팔을 잘라 낼 수도 없었다. 차라리 죽여야 할 자들과 모두 함께 산화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레인.”

너에게 상처를 입히는 자가 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이 세상 모든 악의들보다도 더, 오직 그것만이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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