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되돌아온 밤
긴 꿈을 꿨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꿈속에서 레인은 끝이 없는 황야에서 끝나지 않는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불빛 한 점 없는 밤이었다. 레인은 몇 번이고 부딪치고 넘어지면서 길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같은 자리만을 빙빙 맴돌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조금도 밝아지질 않았다. 그 어둠을 짓누르듯, 더욱더 무거운 빛이 눈꺼풀 위로 쏟아졌다. 귓가를 가득 메우는 누군가의 조롱 소리와 함께 레인은 눈을 떴다. 따사로운 햇볕과 보드라운 감촉이 생생하게 몸에 닿았다.
“죽지…….”
죽지, 않았어. 잔뜩 메마르고 갈라진 목구멍을 타고 절망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살아 있는 것이 가장 큰 절망이었다. 영혼까지 시리게 만드는 차디찬 감옥의 돌바닥 대신 푹신한 거위 털 이불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처럼 더웠다. 내뱉는 숨이며 눈꺼풀마저 뜨거워 몸이 모두 말라붙은 것만 같았다.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몇 번 깜박거리다 포기한 레인은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차디찬 지하 감옥과 달리 너무도 따스하지만, 동시에 갑갑했다. 지하 감옥은 해방의 공간이었다. 이 비참하고 끔찍한 삶을 끝낼 마침표였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고통 속의 삶을 이어 가는 감각이 온몸을 둔중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저릿저릿한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관절 부위에 녹이 슨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손을 움직였다. 대체 이불로 사람을 어떻게 싸매 놓은 건지 손을 이불 밖으로 빼내는 것도 힘들었다.
간신히 손을 빼낸 레인은 희미한 열에 잠겨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비볐다. 시야는 천천히 또렷해졌다. 눈에 들어오는 건 하얗고 황량한 벽이다. 북방의 성은 커다란 암석들로 성을 건조하고 태피스트리를 걸어 장식하는 형태라 이런 반들반들한 하얀 벽은 많지 않았다. 저릿한 손으로 간신히 이불을 밀어내고 레인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한 번 더 눈을 비벼야만 했다.
최근까지 생활했던 북방의 성보다도 훨씬 익숙한 방이 보였다. 하얗고 커다란 방, 한쪽에 난 커다란 창, 그곳에 걸린 푸른색 커튼과 책이 빼곡한 책장, 그리고 정돈된 책상까지. 이곳은 완벽하게 레인이 지내던 아카데미의 기숙사였다. 목이 메어 왔다.
이건 죽기 전의 마지막 꿈일까? 그렇다면 왜 하필 이곳일까. 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장소였는데, 왜 하필 이곳으로 돌아온 걸까. 레인은 참담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에 달뜬 몸을 간신히 움직여 휘청거리면서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태양이 하늘 끝자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휘몰아쳐 레인을 덮쳤다. 바람이 흠뻑 젖은 땀을 훔쳐 오싹한 한기가 몸을 덮쳤다. 레인은 따끈따끈한 양 뺨을 감싸 쥐었다. 지긋지긋한 세상이 여전히 실재하는 듯한 생생한 감각이다.
마치 현실과 같은 꿈속에서 뭘 해야 좋을지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긴 적이 별로 없는 문고리가 자연스레 돌아가는 소리에 레인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실소했다.
“카이렌.”
“아프면 얌전히 자빠져서 잠이나 잘 것이지, 왜 그러고 있어?”
조금 전까지 검술 수련을 하다 온 것인지 간편한 옷차림에는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다. 카이렌은 레인을 핀잔주며 들고 온 것들을 차례차례 내려놓는다. 아직 김이 나는 수프에 가볍게 먹기 좋은 음식들은 레인이 아플 때마다 종종 카이렌이 직접 가져오곤 했던 식단 그대로였다. 카이렌은 툭하면 죽기 직전까지 레인을 패는 주제에 정작 레인이 혼자 비실대다 아파하는 꼴은 보기 싫어했다. 레인이 아플 때면 직접 음식을 가져오고 물수건을 갈아 주고 몸을 닦아 주며 간호를 하는 일이 잦았다.
물론 내킬 때의 이야기다. 간호하다가 결국에 아파하는 레인을 침대에 짓누르고 욕정을 채우는 일도 많아,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간호를 해 주든 해 주지 않든 레인이 고마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찬 바람을 맞아도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는 머리는 눈앞의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제 몸이 죽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북방의 긴 지하 감옥에 갇혀 초라한 생을 마감한 비참한 최후가 레인 아이제나흐의 마침표여야만 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마저 카이렌을 볼 정도로 자신은 카이렌에게 길들여졌던가. 마지막 순간조차 그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억울하고 또 카이렌에게 얽매인 스스로가 역겨웠다.
“항상… 이곳에 서서 생각했지.”
카이렌이 레인을 돌아봤다.
“…그냥 도망치면,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고.”
웃으며 레인은 몸을 움직였다. 정말 지쳤다. 과거의 흔적을 보는 것도, 그것에 여전히 상처 받는 자신도, 그런데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까지도 너무 끔찍했다. 꿈이든 뭐든 눈앞의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 카이렌이 뒤에서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레인은 무시한 채 창문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렇게 쉬운 걸 왜 지금까지 하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간단했다.
꿈이 깨질 것이라 흐린 머리로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끔찍한 고통이 레인을 덮쳤다. 바로 바닥에 떨어지지 못하고 커다란 나무에 걸렸다. 굵은 나뭇가지에 걸린 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나무 위를 구르던 레인은 바닥에서 떨어졌다. 충분히 죽을 만한 높이였는데 나무에 걸려 죽지 못했다. 너무 아프다. 이게 정말 꿈일까?
아픈 와중에도 이다음이 없길 바라며 레인은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레인의 기대는 완전히 박살 났다. 하긴 레인의 기대가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소독약 냄새를 맡으며 깨어난 레인은 눈앞에 던져진 참혹한 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나무에 걸려 충격이 완화됐어요. 다행인 일이죠. 떨어지면서 오른팔이 부러지고 양다리도 금이 가서 당분간은 제대로 된 운신이 힘들 거예요. 그래도 바로 신관님이 치료해 주셨으니까,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멀쩡하게 나을 거고요. 이틀을 꼬박 혼수상태로 계신 거 아세요? 한동안은 여기서 꼼짝도 하시지 마시고 얌전히 요양하세요. 아직 열도 남아 있으니까 한 사나흘은 문병도 받지 않는 게 좋겠네요.”
의원의 말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피곤하다. 그러나 아무리 쉰다 한들 해소될 성질의 피로가 아니었다. 삶에 대한 좌절과 절망이 레인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의원이 나가고 레인은 말없이 부러지지 않은 왼손을 들어 부러진 오른손 끝에 올렸다.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그러나 시체라기에는 너무 따뜻했다. 레인의 왼손이 차츰차츰 올라가 부러졌다는 팔에 가 닿았다. 부목을 덧대 고정한 팔 위에 잠시 손을 올려 두었다가 뗐다. 아주 잠시 망설이던 레인은 이를 악물고 오른팔을 벽에 세게 내리쳤다. 절로 억 소리가 나게 아팠다. 눈물이 맺힐 지경이지만 아픔에 신음하기는커녕, 레인은 주먹을 쥐고 부러졌다는 다리를 내리쳤다. 아팠다. 끔찍하게,
아파.
아픔을 느끼는 자는 오로지 산 자뿐이다.
살아 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살아 있을 리가 없다. 눈앞의 상황보다 훨씬 미래에서 레인은 죽었다. 눈앞의 광경이 현실일 리가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벽에 부딪치고 자학하며 주변의 물건을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화병이 바닥에 깨져 날카로운 파편을 남겼다. 레인은 왼손으로 파편을 꽉 움켜쥐고 제 목을 찔렀다. 오래 앓은 탓인지 손에 힘이 하나도 없어 제대로 박히질 않았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오른팔을 무시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양손으로 파편을 쥐어 목에 가져다 그었다. 세게. 더 세게. 얇은 실선만 남기지 말고, 이 목을 잘라 버릴 정도로 더 세게!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레인의 몸을 억눌렀다. 마구잡이로 비명을 지르는 레인의 눈 위를 누군가의 손이 덮었다. 레인의 의지를 박탈하는 수면 마법이 시전되어 그렇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비슷한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자기 자신을 내리치고 집어 던지고 상처 입혔다. 매번 아팠다. 끔찍하게 아팠다. 아프다는 사실이 정말 끔찍했다. 빌어먹을 꿈이 끝나지를 않는다. 마치 이것이 현실인 것처럼 계속해서 이어진다. 말도 안 된다.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다. 현실의 레인은 죽었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나 평온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었다. 현실이 아니라면 현실로 만들면 된다. 비굴하고 비참하게 삶을 이어 가는 몸뚱이를 난자하고 목을 졸라 죽여 버리면 된다.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좋겠지. 나무 따위가 레인을 살리지 못하도록, 떨어져서 머리가 깨져 죽어 버릴 수 있도록 몸을 날리는 방법도 좋을 터였다.
정신이 든 레인이 자학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그를 침대에 묶어 두고 나흘이 지났을 때에야 레인은 비로소 인정했다. 이것이 현실이다. 안온한 죽음보다 훨씬 끔찍한 현실이 별빛 한 점 없는 밤처럼 펼쳐져 있었다.
레인 아이제나흐, 스물세 살. 아카데미의 생활을 일 년 반가량 남긴 학생.
현재 자신의 정보를 상기하며 레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레인이 간신히 현실을 인정한 지는 이틀이 지났다. 거울을 달라는 말에 하녀는 잔뜩 긴장하면서 손바닥만 한 작은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여전히 마르고 병들어 죽음만 기다리는 보잘것없는 모습이 보였다.
레인은 거울을 내려놓고 상처투성이가 된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미쳐서 말도 안 되는 미래의 꿈을 꾼 것인지, 무언가 신이나 악마의 장난으로 시간을 거슬러 온 건지, 고민할 기운도 없었다. 그전에는 유르딘을 한 번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지만,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부터가 막막했다.
유르딘. 그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꽉 막혀 왔다. 속에서 얽힌 감정이 눌러지지 않고 결국 범람해 눈물은 양 뺨을 흘러 이불 위로 뚝뚝 떨어졌다. 레인에게 화를 내고 가 버리던 그 뒷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레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었으며, 어머니가 죽은 후 유일하게 애정을 보내 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유르딘도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레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모두 포기하자고 결심했거늘 왜 함부로 기대했을까. 기대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절망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양 뺨에 흐른 눈물이 완전히 말라 버릴 때까지 레인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죽고 싶었다. 그러나 마약에 취하듯 수면 마법이나 수면제에 취해 몽롱하게 잠이 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해를 멈췄다. 약물 따위에 취해 자신을 잃는 감각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간의 행동이 어지간히 불안했던 듯,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자해라도 할까 봐 잔뜩 긴장하는 시선이 항상 따라붙었다. 감시에 가까운 눈길에 숨이 턱턱 막혔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해하는 것은 완전히 멈췄지만, 도저히 음식을 입에 넘기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살아 봤자 병실을 나가면 또다시 카이렌의 장난감이 되고, 끝내는 죽는 선택지만이 레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신히 먹어도 대부분은 토해 버려서 레인은 점점 더 비쩍 말라 갔다.
그런 레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아직 극도로 불안정하다는 판단하에 면회가 허락되지 않은 레인을 찾아온 사람은 친족이라는 미명을 내세운 레스터였다. 누가 들어오든 말든 등을 돌리고 누워서 쳐다도 보지 않는 레인에게 가볍게 인사한 레스터는 능청스럽게 침대 맡에 앉더니 다짜고짜 레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인이 몸을 돌려 레스터의 손을 쳐 냈지만, 레스터는 등 뒤에 의원이 있기 때문인지 화도 내지 않고 부드럽게 웃었다.
“전보다 더 말랐네. 식사를 안 한다며.”
“잘 말라 죽어 가고 있나 확인하러 온 거야?”
뾰족한 반문에 레스터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신관이 동생 좀 잘 챙기고 돌봐 달라더군. 마침 아버지도 날 불러서 꾸짖으셨고.”
“…공작이 왜.”
“공작이라니, 아버지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레스터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대답했지만, 생각보다 화가 난 것 같지 않다. 이상했다. 원래 제 혈육, 그러니까 레인을 제외한 혈육은 끔찍하게 아껴서 레인이 자그마한 모욕만 해도 화를 내는 놈인데. 의심스러워하면서 살피자 레스터는 미미하게 치켜 올라갔던 눈썹을 내리며 말을 돌린다.
“그건 됐고, 알잖아? 아버지 성격. 가문에 흠집 나는 일은 두고 못 보는 분이시지.”
“…….”
“혼났지 뭐야. 너 좀 그만 몰아붙이고, 슬슬 유치한 장난질은 그만하라고. 어머니께도 보기 드물게 경고하셨어. 어차피 졸업하면 넌 시골 영지로 쫓아낼 테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문제없도록 좀 내버려 두라고 하시더라.”
하기야 가문의 일원, 그것도 직계 혈통을 이은 귀족이 자살하는 일은 굉장한 추문이었다. 신전에서 자살을 엄청난 죄로 규정짓기도 했고, 자살할 정도로 가문 내부 사정이 나쁜 것이냐며 손가락질받기도 했다. 고분고분 털어놓는 이유라는 것들이 몹시 짜증 나긴 해도 레스터가 이유도 없이 레인을 찾아와 호의를 드러내 보이는 것보다야 나았다.
레스터는 베개 몇 개를 겹쳐 놓더니 레인의 양팔을 붙잡고 앉혔다. 팔을 몇 번 주물럭거리던 레스터는 재차 말랐다고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공작의 명을 받고 왔다지만 이 호의는 평소의 레스터에 비해 심하게 지나치지 않나? 레인이 이게 미쳤나 싶어 쳐다보고 있을 때 미리 언질을 해 둔 듯 하녀가 작은 테이블 위에 간단한 식사를 차리고 나갔다. 레스터는 손수 곡물을 쑤어 만든 죽 그릇을 들고 한 숟갈 뜨더니 후후 불어 레인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자, 입 벌려.”
“…….”
소름이 끼쳤다. 몹시 기분 나쁘다. 이 정도로 미친 것 같으면 충격에 욕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레인은 깨달았다. 레인은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최대한 뒤로 빼서 레스터와 멀어진 후 소담히 죽을 푼 숟가락을 노려보았다. 아, 설마 독이 들어있나? 놈이 친절한 걸 보느니 차라리 대놓고 독을 먹이는 게 낫겠다. 노골적인 경계 태세를 본 레스터가 한숨을 푹 쉬었다.
“경계하지 마. 네가 밥을 안 먹는다고 다 늙은 신관이 와서 부탁한다고 굽신거리는데 내 알 바 아니라고 해야겠어?”
“넌 그러고도 남잖아?”
맞는 말인지라 레스터는 잠시 반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잠시 후, 반문을 포기한 그는 레인의 말을 무시하며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먹어, 얼른.”
“내가 먹을 테니까 줘.”
“오른팔 부러졌잖아?”
“괜찮아.”
레스터가 떠먹여 주는 걸 먹느니 차라리 부러진 오른손으로 먹거나 익숙지 않은 왼팔로 먹다가 흘려서 멍청한 꼴을 보이는 게 나았다. 애초에 숟가락으로 죽을 퍼먹는 건 흘릴 정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레인이 강하게 반발하자 결국 레스터가 뜻을 꺾었다. 손수 작은 테이블을 꺼내 레인의 앞에 두더니 그 위에 죽이 든 그릇과 숟가락을 가지런히 두었다. 심란하게 그릇을 보고 있으려니 한마디 덧붙였다.
“다 먹기 전까지는 안 나갈 거야.”
선언하는 말에 레인은 너도 설마 죽을 때가 됐냐고 질문할 뻔했다. 이놈이 이러는 걸 보니 이건 아직 꿈일 수도 있겠다. 반쯤 소망에 가까운 현실 도피를 하며 체할 것 같은 기분 속에 레인은 죽을 먹기 시작했다. 레스터가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거의 갈아 버려 씹을 것도 없는 죽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간단한 일조차 힘들었다. 괴롭히지 말라는 공작의 명에 걱정하는 척 레인의 피를 말리는 방식이 매우 교활했다. 따지자면 지금까지 괴롭힌 방식 중에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별로 씹을 것도 없어서 입안에 넣고 대충 삼키자 레스터가 혀를 찼다.
“씹어 삼켜야지. 그러다가 부담 돼. 적어도 열 번은 씹지그래?”
“쿨럭, 컥…….”
미치겠다. 왜 저러지? 제 사랑하는 여동생 유니를 대할 때처럼 자상하고 다정한 형의 모습이 심히 당혹스러웠다. 목이 막혀 캑캑거리자 레스터는 손수 물을 떠다가 바쳤다. 그 후로도 레스터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은 계속됐는데, 친절하게 말을 거는 것은 기본이고 왼손이 익숙지 않아 음식을 흘렸을 때는 한마디 나무라는 말 없이 닦아 주었다. 배려가 점점 섬세해질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너무 긴장하는데? 다 나을 때까지 매일 올 건데, 익숙해지도록 해.”
마지막으로 물을 마시고 있던 레인은 결국 독하게 사레가 들려 버렸다. 레스터는 자상한 형처럼 레인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발걸음도 가볍게 방을 나선다. 레스터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레인은 눈을 깜박이다 얌전히 몸을 뉘였다.
그래, 저 인간이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이 틀림없다. 독살은 어머니의 기억 때문에 제일 꺼리는 형태의 죽음이었지만 이미 먹어 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죽는 수밖에. 레인은 가만히 누워 죽음을 기다렸으나 이상하게도 몸은 심하게 멀쩡했다. 심지어 그릇을 치우러 들어온 하녀가 식사를 하셔서 어제보다 안색이 좋아지신 것 같다는 헛소리를 했다. 레인은 그날 저녁 식사를 하고 씻고 잠이 들 때까지 멀쩡했고, 다음 날도 멀쩡하게 일어났으며, 레스터가 또다시 찾아와 다음 음식을 가져다주는 그 순간까지도 멀쩡했다.
레인은 자신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 내렸다. 레스터는 자신이 한 말대로 레인이 반기든 말든 정말 꾸준히도 찾아왔고, 그때마다 몸에 좋다 온갖 것들을 다 날라 왔다. 레스터의 괴상한 태도를 제외하면 레인은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강간을 당하지도 않았고, 얻어맞지도 않았으며, 그냥 제때 먹고 방 안을 빙빙 돌며 걷다가 책을 읽고 또 먹고 그러다 자는 한가한 생활이 이어졌다. 덕분에 레인의 심기가 심히 불편함에도 상태는 이전보다 순조롭게 회복되었다.
이 정도로 회복되었으면 밖에 돌아다녀도 되겠다는 의원의 말에도 레인은 다 나을 때까지 있겠다며 꿋꿋이 병실 안에 틀어박혔다. 그런 레인을 레스터는 믿기지 않게도 걱정했다. 그는 정말 자신이 자상한 형이라도 된 것처럼 레인을 대했다.
“바깥 공기도 쐬고 그래야지, 안에만 있으면 안 좋아.”
레스터의 그답지 않은 행동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레인은 반박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거부 의사를 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왜, 카이렌 때문에 그래?”
레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레인의 고집과 자해하겠다는 협박으로 병실 앞엔 여전히 면회 사절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지만, 밖에 나가는 순간 카이렌이 레인을 찾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게 끔찍해서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게 아닌가.
레스터는 레인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자신을 보도록 돌렸다. 강압적인 행동은 일부러 자제하던 레스터가 벌인 짓에 레인은 순간적으로 숨도 쉬지 못하고 바짝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때는 늦은 오후였고, 두꺼운 커튼을 쳐 실내는 조금 어두웠다. 폭력은 이런 시간대에 자주 레인을 찾아들곤 했다. 아카데미의 일과가 끝난 나른한 오후. 다른 이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의 시간을 맘껏 구가할 때 레인은 갑작스럽게 끝날 수 있는 자신의 삶을 상상하고는 했다. 혹시라도 누군가 보거나 들을까 봐 두껍게 커튼을 치는 레스터나 카이렌의 뒷모습을 볼 때면, 자신의 인생은 얻어맞으며 기절하는 순간마다 끝나고 다시 최악의 삶으로 태어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침묵이 깔린 방 안에서 레스터의 검은 눈이 진득하게 반짝였다. 순간 소름이 돋아 레인은 참지 못하고 레스터의 손을 쳐 냈다. 레스터는 레인이 쳐 낸 자신의 손과 레인을 번갈아 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씩 웃었다.
“맞잖아. 카이렌이 그렇게까지 불편하면 네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 줄까?”
레인은 눈을 깜박였다. 레스터와 카이렌은 친한 친구 사이였다. 레인이 두 사람을 알지 못하던 시절부터 함께한 그들은 레인이 이해할 수 없는 우정과 유대감으로 얽혀 있었다. 한쪽은 친구의 이복동생을 안고, 그걸 뻔히 알면서도 방관하는 관계라니. 레인의 몰이해나 혐오감과는 별개로 두 사람은 정말로 친했다. 카이렌이 레인에게 집착하는 걸 뻔히 아는데 그걸 끊어 놓겠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레인에게 득이 될 호의와 제안은 기쁘긴커녕 꿍꿍이를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레스터는 레인이 쳐 냈던 손을 뻗어 레인의 왼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맞닿은 체온이 기분 나쁠 정도로 뜨겁다. 밀어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레스터가 레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우린 가족이잖아. 이젠 같이 좀 있자.”
그린 듯한 미소와 목소리. 가족, 그건 지금에 와서 꺼내 봤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들 사이를 연결하는 데는 아무 의미도 없던 단어였다. 레인이 레스터를 힘껏 밀치자 그의 몸은 순순히 밀려났다. 레인은 웃고 있는 레스터를 노려보았다.
“네가 날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다고.”
“뭐 어때. 그러면 넌 카이렌에게 강간당하는 게 좋다는 거야?”
“닥쳐.”
“너무 화내지 마. 널 위해 주겠다는 거잖아. 내가 말려 줄게.”
“무슨 수작이야? 카이렌도 싫지만 네 말도 못 믿어.”
“수작이라…….”
레스터는 몸을 일으켜 레인을 여유롭게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오만이 가득하다. 승자의 얼굴이며 약탈자의 얼굴이었다. 언제나 저 표정을 뒤집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레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네게 수작씩이나 부릴 필요가 있나? 어차피 넌 아무것도 못 하고 졸업하면 집을 나갈 거잖아? 내가 누릴 수 있는 이득이 없는 것도 아냐. 곧 사교계에 나갈 텐데 미리 네 이미지를 정리해 두는 것도 좋지.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넌 나를 싫어하잖아.”
“싫어하는 것도 격이 맞아야 계속 싫어하지. 너 따위를 내가 평생 동안 악에 받쳐 미워할까 봐?”
노골적인 조롱에 수치를 느낀 레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웃기지 마! 필요 없어. 집어치워!”
“그럼 몸을 굴리는 게 나아?”
레인이 반응하기도 전에 레스터가 그를 홱 잡아당겨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레스터의 아래에 깔린 레인이 얼어붙은 사이, 레스터의 손은 레인의 허벅지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점차 안쪽으로 향하는 것을 막으며 레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비열한 방식이야.”
“내게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고집스럽게 노려보는 레인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레스터가 웃었다.
“왜 그렇게 고집스럽지? 그냥 평화롭게 가자, 평화롭게. 나도 바쁘니 널 갖고 놀 여유 따위 없다고.”
레인은 가만히 레스터를 노려보았다. 틀린 말은 없었지만, 곧장 결론 내리기엔 지금까지 그들이 살아온 삶이 걸렸다. 레스터가 레인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레인 또한 레스터에 대해 잘 알았다. 레스터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 만한 인간이 절대 아니었다. 레인의 가까이에서 획책하려는 것이 분명히 있다.
“정말 내 제안을 거절할 거야?”
그리 생각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약자에 불과한 레인은 재차 물어 오는 말에 확실한 거절을 선언할 수가 없었다. 물러 터져 썩기 직전의 과실처럼 달큰한 향을 풍기는 유혹이었다. 긍정은 없었지만, 부정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레인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레스터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레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레스터는 자신이 한 제안을 지켰다. 애초에 지금까지 카이렌이 오지 않은 것도 그가 뭔가 수를 써 둔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레인은 계속 방에서 머물렀다.
레인의 퇴원이 사흘 정도 남았던 날이었다. 왕국은 한 가지 소식에 열광하고 있었으나, 홀로 병실에 처박힌 레인만은 몰랐다. 그 소식을 물고 온 것은 다름 아닌 근래 레인의 자상한 형이 되어 주고 있는 레스터였다. 한창 책에 몰두하고 있던 차라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달갑지 않은 방해자를 흘겨보는 레인을 무시하고 레스터가 대뜸 입을 열었다.
“레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니제스 경이 압도적인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
레인의 손에서 책이 굴러떨어졌다. 너무나도 빠르고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레인의 기억보다 너무 빠르다. 원래대로라면 내년, 레인이 스물네 살이 된 해에 전쟁이 끝났을 텐데. 레인의 충격이 수습되기도 전에 레스터가 즐겁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정말 압도적인 대승이야. 스콜리아의 성채를 아예 날려 버렸대.”
“그런 게 가능해?”
“보통은 불가능하지. 니제스 경이 보통이 아니라는 증거 아닐까? 전령이 그렇게 보냈으니 과장된 헛소문은 아니겠지.”
레인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게 가능했던가? 레인의 기억 속에서 스콜리아 공략은 두 달 뒤에나 이루어졌다.
“장난 아니야. 스콜리아의 성채가 완전히 날아간 걸 보고 카니예에서 종전을 제의해 왔어. 레넨을 포함해서 다섯 군데의 지역이 우리 쪽으로 넘어올 거야. 야만족들은 완전히 겁을 먹어서 동요 중이지. 엄청나지 않아? 니제스 경은 병사 몇몇을 북부에 남기고 돌아온다고 해. 전하께서 니제스 경에게 동부의 비옥한 영지를 내려 주실 거란 소문이 있어.”
“…뭐?”
심지어 기억과는 전쟁의 전개조차 다르다. 레넨 지역은 카니예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땅 가운데 하나로, 철광석 광산이 있어 전에는 끝까지 필사적으로 사수했던 장소다. 게다가 레인의 기억 속 유르딘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야만족을 처리하느라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했었다. 유르딘을 쫓아 북방으로 향한 레인은, 그 차가운 땅에서 전쟁의 끝을 보기도 전에 죽었다.
과거가 틀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뭐가?”
왜 바뀐 거지. 대체 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레인을 레스터가 잡고 흔들었다.
“레인, 괜찮아? 잘된 일이잖아. 왜 충격을 받아? 얼마 전부터 계속 승전 소식만 들려왔었다고.”
“아……. 아, 응……. 그래.”
“니제스 경과 종종 연락했었지? 북방으로 떠나기 전에도 널 찾아왔었고. 아마 곧 수도에 돌아오면 찾아올 텐데…….”
레인은 숨을 삼켰다. 유르딘이 찾아온다고? 상상조차 괴로웠다. 레인의 머릿속에는 유르딘의 한 가지 모습만이 맴돌았다. 약에 취해 잔뜩 흐려진 시야 너머, 레인에게 실망해 돌아서던 차가운 뒷모습. 단 한 순간의 외면이 레인의 마음속 유르딘의 다른 모습을 모조리 짓눌렀다. 차가운 유르딘이 다정한 유르딘을 목 졸라 살해하고, 레인의 목마저 졸랐다. 견디기 힘들었다.
“잘됐네. 그렇지?”
“…….”
“만나기 전에 기운 좀 차려야지, 레인.”
레인을 격려하는 레스터의 목소리 따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레스터는 혼란스러움에 사로잡힌 레인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대로 방을 떠났다.
홀로 남은 레인은 끓어오르는 감정들에 사로잡혔다.
그저 꿈으로 치부하고 가볍게 넘겨 버리기엔 자신이 가진 기억들이 너무도 생생했다. 병상에서 시간을 죽이며 정리해 본 기억들은 어디 한구석 모순된 곳이 없이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기억을 조작하는 마법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해 보려 했으나, 옛 마법 시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이렇게 선명한 기억을 새기는 게 불가능했다.
북방으로 올라가던 길목의 풍경과 그걸 즐길 틈도 없이 찾아들던 끔찍한 멀미, 야만족과의 전투, 유르딘과의 재회, 지스킬과 라사, 유르딘의 모습, 유르딘과의 대화, 유르딘에게 점점 더 깊이 빠지던 감정의 깊이, 약에 취해 보내던 시간,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매달리며 다리를 벌리고 낯선 사내를 받아들인 기억, 유르딘의 외면, 거부, 버림받아 지하 감옥에서 맞은 최후까지. 모든 기억들이 끔찍한 죽음과 절망의 냄새를 풍기며 실감 나게 레인에게 달라붙었다. 누군가가 끼워 넣은 거짓 기억이라기에는 얼어붙던 손끝의 감각이며 죽어 가던 고통마저도 지나치게 생생하다.
마치, 정말로 과거에 일어났던 일처럼.
지나친 망상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레인의 삶은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이대로라면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어느 순간 미쳐 버려 말도 안 되는 망상을 사실처럼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통 미친놈이 자신이 미쳤다는 자각을 하던가? 레인은 자신이 망가졌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부정하고 싶었다. 당장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상황 속에서도 아득바득 버텼다. 미쳐서 망상 따위에 매달리는 미래를 위해 자신이 그 오랜 풍파를 견뎠던가. 인정하고 싶지 않다. 자신이 가진 끔찍한 기억들이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미친 망상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부터가 힘들었다.
조작된 기억이 아니다.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 자신을 제외한 타인이 모조리 미쳤거나, 아니면 무언가의 기적이 일어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거나. 둘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 어느 것 하나 확신을 가질 수가 없지만, 제 가정이 진실이라 가정했을 때 걸리는 것이 있었다.
유르딘은 어째서 이전과 달리 스콜리아의 성채를 날려 버리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걸까. 다른 일도 아니고, 수만 군대가 부딪치는 전쟁의 결말이 간단하게 비틀어질 수 있는 일인가?
레인은 하인 하나를 붙잡은 채, 기억 속에 있던 사건들이 지금도 똑같이 일어났는지 질문을 퍼부으며 제 기억과 맞는지 확인했다. 자연 재해, 커다란 사고, 누군가의 죽음, 비리의 고발, 모든 게 자신의 기억과 같았다.
“아카데미 구교사 쪽에서 난 화재는?”
“화재라니요? 구교사는 멀쩡합니다만…….”
말을 흐리는 하인을 보며 레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카데미의 직원이라면 이 일을 모를 수가 없었다. 구교사에서 난 화재로 세 명의 귀족과 열 명이 넘는 평민이 크게 다쳤다. 기억이 잘못 되었나 되짚어 봤지만, 이 시기에 있었던 일이 맞았다.
레인은 고민 끝에 하인에게 은화를 건네주며 밤마다 구교사 쪽을 순찰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하인은 불안정한 도련님의 기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돈을 건네줬기 때문인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틀 후, 구교사에서 화재가 났다. 레인의 기억대로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와 구교사에서 방탕하게 놀던 귀족 학생의 실수로 난 화재였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근방을 순찰하던 하인 덕분에 불은 금세 진압되었고 인명 피해도 없었다.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과거에 벌어진 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었다.
여전히 무리한 가정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이 터무니없는 기적이 현실에서 일어난 건 아닐지 믿고 싶었다. 유르딘도 레인처럼 미래를 기억하고 있기에 이번에는 승리했을 수도 있었다.
유르딘이 레인과 똑같이 시간을 거슬러 왔다면?
그렇다면 유르딘은 이 시간에서도 여전히 레인의 부정을 기억하고 있는 셈이 된다.
가정일 뿐이다.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자꾸만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튀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티끌만 한 의혹조차도 견디기 힘들었다. 정말로 유르딘이 기억하고 있다면, 또다시 자신을 외면하고 떠나간다면.
몇 번이고 반복했던 자해 충동이 다시 몰려온다. 지금 당장 이 멱을 따 버린다면 더는 살아갈 필요도 없을 텐데. 이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 해방되어 모든 고민과 절망을 함께 벗어던지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레인을 가장 괴롭게 하는 사람은 카이렌도 레스터도 아닌, 유르딘 니제스였다.
사랑한다. 사랑했다. 어쩌면 버림받아 죽어 버린 지금까지도 계속,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삶을 연명할 수 있던 과거와 달리, 지금 이 순간은 유르딘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레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여전히 과거를 기억해 레인을 경멸할 유르딘은 마지막 한 번이 아니라 앞으로도 여러 번, 레인에게 등 돌리고 떠나갈 수 있다. 그건 정말이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설령 유르딘이 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얼굴을 보면 언제나 자신에게서 등 돌리던 뒷모습이 생각날 텐데.
무엇 하나 견딜 자신이 없었다. 레인은 절망에 잠긴 채 한참을 웅크리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레인을 뒤흔들다가 마침내 차분히 가라앉은 건 모두가 잠든 깊은 밤중이었다.
레인은 정신없이 제 방을 찾아가 침대 아래에서 커다란 상자를 끄집어냈다. 유르딘이 보낸 선물들이 담긴 상자는 그가 레인에게 건네준 추억이자 보물이었다. 레인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얼굴로 선물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쓸어 보았다. 진작에 죽었어야 할 레인을 스무 해 넘게 살도록 해 준 희망이고 기쁨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필요 없다. 버려지고 싶지 않다. 또다시 외면당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유르딘이 제 삶의 구원이고 지표인 양 그만을 바라보고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설령 유르딘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한 번 자신을 버렸던 이가 두 번을 못 버리겠는가?
레인은 이를 악물고 상자를 통째로 집어 든 채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추운 계절이 아님에도 밤이면 추위를 타는 레인을 위해 난로가 항상 불타오르고 있었다. 새빨간 불길이 날름거리며 장작을 탐욕스레 집어 먹었다. 새빨간 불꽃을 노려보던 레인은 마지막으로 상자 안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안을 뒤적거리던 레인은 그대로 안을 헤집어 목걸이를 하나 끄집어냈다. 몇 남지 않은 어머니의 유품 중에서도 특별한 물건으로, 어머니가 죽기 전 레인의 목에 손수 걸어 줬던 목걸이였다. 레인은 어머니의 온기를 바라듯 빛이 바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죽은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어머니의 유품을 빼내고 나니 이제 남은 건 유르딘의 선물뿐이다. 레인은 상자를 불 속에 통째로 집어 던졌다. 이내 불꽃은 날름거리며 레인이 소중하게 여기던 보물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모든 게 순식간에 타오른다. 기억 속에서 이미 짓밟히고 버려진 감정의 잔해들도 함께 재로 변한다. 눈이 매워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계속 흘렀다.
레인은 이제 더 이상 유르딘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레인은 사랑받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 지금까지 레인을 진심으로 사랑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르딘마저 그랬다. 유르딘의 애정은 작은 의혹이 움트면 금세 말라 죽어 버릴 만큼 보잘것없었다. 더 이상은 누구도 믿고 싶지 않았다. 유르딘이 레인을 버렸듯이, 레인도 유르딘을 버리고 싶었다. 불타오르는 유르딘의 선물처럼 그에 대한 제 마음도 불살라 사라지길 바랐다.
정신없이 울던 레인은 불길 속으로 던져 버린 물건 중에 어머니의 유품이 아직 하나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아까 그 목걸이. 분명 빼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당황한 레인은 불길 속에서 건져 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손을 붙잡혔다.
“그럼 안 돼.”
“…….”
손을 붙잡은 상대를 본 레인의 눈이 커졌다.
“미엘?”
미엘 데이막. 이 시기에는 북부에 있어야 할 기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게다가 분명 혼자 있는 방이었는데, 미엘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레인의 곁에 서 있었다. 미엘은 의뭉스레 웃으며 레인을 잡아당겼다.
“쓰임을 다한 물건은 불타도록 내버려 둬.”
“네가 왜 여기에…….”
“네가 잊기를 바랐기 때문이야. 거짓말쟁이. 죽을 때까지 그리워해 놓고.”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다. 레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네 감정을 부정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겠지. 상관없어. 어차피…….”
미엘이 레인을 조금 더 당겨 끌어안았다. 미엘의 입술이 레인의 귓가에 닿았다. 악마와 같은 속삭임이 이어지고, 레인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뜨인다.
“대체 무슨 소리를…….”
“잘 들어, 레인.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되찾고 싶다면…….”
미엘이 자장가를 부르듯 조곤조곤 속삭였다. 달콤한 척 속삭이지만 실상은 조금도 달콤하지 않았다. 이내 레인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감겼다. 그대로 모든 것을 놓고 잠에 빠졌다.
두 사람의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누군가가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잠이 든 레인은 그대로 긴 꿈을 꿨다. 누군가가 레인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정작 중요한 부분이 들리지 않았다. 애원했다가, 화를 냈다가, 눈물을 쏟아 봤다가, 사정을 해 봐도 남자는 처음과 똑같은 말을 할 뿐이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는데. 꿈속에서 레인이 오열하며 외쳤다. 아무것도 없던 내가 유일하게 갖고 있던, 온전한 내 것이었는데. 버릴 수 없어서 발악해 본 것뿐인데. 사실은 잃고 싶지 않았는데. 내 것인데. 온전한, 내 것.
내 기억.
나의 마음.
아침이 되어 레인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지독한 악몽을 꾼 것 같은데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눅눅한 습기와 기분 나쁜 감촉이 생생하게 몸에 닿았다.
“…….”
여긴 어디지? 레인은 낯설어하는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밤은 아니다. 해는 떴는데, 비가 내리고 있는지 주변이 어두컴컴하다. 열린 창문으로 비가 들이친다. 어제 창문을 열고 잤던가? 잠시 고민하던 레인은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방이 아니라 의무실임을 알아차렸다. 언제 실려 온 것인지 기억이 없다. 뭘 하다 쓰러진 거지? 떠올려 보려 했으나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으…….”
“아이제나흐 님, 깨어나셨어요?”
하녀의 발랄한 목소리에 레인은 고개를 돌렸다. 상태를 묻는 대신에 익숙하게 인사하는 걸로 봐서는 병실에서 제법 오래 머무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레인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기, 난 왜 여기 누워 있는 거지?”
“네?”
하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벌써 몇 주 전부터 여기 계셨는데…….”
“무슨 소리지?”
당황해 설명하는 하녀의 말을 들으며 레인은 천천히 기억을 떠올렸다. 아. 그랬다. 충동적으로 기숙사에서 뛰어내렸다. 무슨 용기가 났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 후, 몇 번이고 발작했다. 미치기라도 했던 걸까, 왜 갑자기 그랬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몇 번을 그랬더니 레스터가 찾아와 레인에게 이상한 수작을 부렸다. 몇 번을 그러다가……. 그러다가. 그러다가…….
“윽…….”
모르겠다. 어제 뭘 하다가 잠든 것인지는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을 이어 가려 하자 머릿속이 깨질 듯 아파졌다.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 레인은 먹은 것도 없이 토했다. 하녀가 소란을 떠는 소리를 들으며, 레인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레인은 기억을 잃었다. 과거의,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기억들을. 그리고 유르딘 니제스에 대한 감정을 수반하는 기억들을 모두 잊어버렸다.
쓰러진 레인은 그대로 며칠을 앓았다. 지독한 열이 올라서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픈 것에는 익숙하지만, 이번 열병은 유독 힘들었다. 힘든 이유는 육체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에 있었다. 이 세상에 혼자 남은 양 외롭고 힘들었다. 툭하면 눈물이 흘러서 눈가가 다 짓무른 지 오래였다.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손을 빠져나간 것처럼 공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아무나 좋으니 옆에 있어 줬으면 했다. 그러나 레인이 의무실에 머무르는 동안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는 레스터조차 도통 찾아오지 않아서 레인은 계속 혼자였다.
열이 내리고 레인이 눈을 떴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익숙한 일인데도 두려웠다.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사람이 드나들자 그나마 안도감이 들었다.
레인의 감각으로는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일단 첫째로 종종 아카데미에서 보던 의원의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갑작스레 레인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책임을 지고 싶으면 이렇게 반병신을 만들어 둔 아이제나흐 공작가에 책임을 물을 것이지. 하긴, 그자들 눈치를 봐서 의원을 바꾼 걸 테니 말도 안 되는 트집이기는 했다.
깨어난 레인은 제 기억이 몇 주나 통째로 사라진 일에 당황했다. 기억이 사라진 몇 주간 사고로 건물에서 떨어졌고, 이후 병실에서 갑작스레 여러 차례 히스테리로 발작을 일으켰다는 말도 의심스러웠다. 카이렌이 반죽음 만들어 둔 걸 적당히 위장한 게 아닐까? 지금까지 레인의 처지를 생각해 봤을 때, 그게 제일 합당한 추측이었다. 추측이 맞아서인지는 몰라도, 카이렌은 한동안 레인을 찾아오지 않았다. 레인을 어디선가 떠밀어 놓고 찔렸는지, 아니면 겹쳐 버린 시험 기간이 바빠서인지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중간에 레스터가 한 번 찾아와 개소리를 늘어놓고 갔다. 레인이 건물에서 떨어진 일도, 히스테리로 발작을 일으킨 일도 모두 사실이며, 덕분에 공작이 공작 부인과 레스터에게 경고해 괴롭히는 걸 그만두겠다는 말이었다. 레스터가 한 말은 기억을 잃기 전과 다른 부분이 없었지만, 레인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반응만은 똑같이 했다. 레스터는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레인을 보며 신기해했다.
“정말로 기억을 잃었네.”
“그래. 너희가 머리라도 친 거 아니야?”
“정말로 아니야. 의심하다니 안타깝네. 내가 얼마나 열심히 널 돌봐 줬는데.”
레인이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치든 말든, 레스터는 여유로운 태도로 침대 옆자리에 앉았다. 레스터의 새카만 눈빛이 레인을 탐색하듯 살핀다.
“그러면 그 소식도 까먹었어? 니제스 경이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다는 소식.”
“어제 하녀에게 들었는데. 그게 왜? 중요한 소식이야?”
“돌아오면 널 한 번쯤 찾아오지 않을까?”
“니제스 경께서 나를 왜 찾으시겠어?”
지나간 기억과 함께 유르딘에 대한 추억과 감정도 잊어버린 레인은 승전 소식이 제게 중요하다는 것조차 잊었다. 어릴 적 유르딘이 저를 구한 것이며 이후 전쟁터로 떠나가기 전에 다시 한번 찾아왔던 것은 기억하지만, 그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의 레인에게 유르딘은 그저 한 번 자신을 도와준 고마운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서로 어색한 사이일 텐데 유르딘이 저를 찾아올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레인은 생각했다.
레스터는 아무것도 모르는 레인을 의뭉스레 보다가 가 버렸다. 그 이후로는 바쁜지 찾아오지 않았다. 혼자가 되어 한가해진 레인의 옆자리를 채운 사람은 새로 온 의원이었다. 기껏해야 서른 조금 넘은 젊은 나이임에도 명성이 자자하다는 의원답게 레인의 몸 상태는 빠르게 안정됐다. 그런 유능한 의원도 레인이 갑작스레 기억을 잃은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기억을 잃으시기 전날 아이제나흐 님이 새벽에 복도를 돌아다니시는 걸 봤다는 하인이 있는데 말이죠.”
“내가 새벽에 왜?”
“그게 이상하죠. 하인이 잘못 봤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 가만 계셨던 거라면 어디 굴러 떨어지셔서 기억이 사라지신 것도 아닐 테니, 어디 돌아다니시다 잘못 부딪치셨다는 쪽이 신빙성 있기는 한데……. 그렇잖아요? 아무리 연약하신 분이라지만 방 안에서 혼자 머리를 박아 기억을 잃으셨겠어요?”
“입 조심해. 급여도 못 받고 쫓겨나고 싶어? 그리고 내가 돌아다니다 다친 거면 여기 누워 있겠어?”
레인이 뾰족하게 말하자 의원은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누가 떠밀고 나서 증거 인멸을 위해서 여기로 옮겨 왔을지도 모르잖아요.”
레인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의원은 조금 더 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어디 부딪친 걸로 이렇게 기억이 몽땅 날아가기는 힘든데. 아무리 연약하셔도 머릿속까지 연약하신 건 아니잖아요? 기억이 홀랑 날아가는 건 도통 쉬운 일이 아니라…….”
“연약 소리 좀 그만해.”
“네, 머릿속과 입은 아주 튼튼하시죠. 입은 공격적이기까지 하시고요. 어째 60년간 욕쟁이 할배로 살아오신 제 스승님보다 더…….”
결국 조잘대는 소리를 견디지 못한 레인이 의원의 머리에 베개를 집어 던졌다.
사실 빠르게 상태가 호전된 건 의원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저 성격 덕도 있었다. 의원이 함께 있는 낮 동안에는 정체 모를 외로움에 시달리며 우울감에 허덕일 새가 없었다.
다만 수다스러운 의원이 사라지고 주변을 살펴 주는 하인들이 물러나고 혼자 남는 시간이 오면, 결코 행복하지 않은 밤이 찾아왔다. 고독감, 그리고 외로움. 지금 두 발 딛고 선 게 현실이 아니라 그저 꿈처럼 막연하게 느껴지는 불안감이 까마득하게 이어졌다. 고작 며칠의 기억이 사라졌을 뿐인데 마치 자신을 유지하고 있던 커다란 조각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불안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옆에 있어 줬으면…….
“레인.”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어느 밤, 수면제에 의존해 잠들었다가 정신을 차리자 카이렌이 바로 곁에 있었다. 뜨거운 체온이 맞닿고 익숙한 체향이 레인을 감싸자, 허공에 떠올라 헤매다가 마침내 발을 딛고 선 듯이 현실감이 레인을 붙잡았다. 비록 맞잡은 손이 항상 그를 절망으로 밀어 넣는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카이렌이 현실로 레인을 끌어 내렸다. 레인이 짜증을 내거나 쳐 내지 않자, 잠시 굳어 있던 카이렌은 이내 손을 들어 레인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왜 이렇게 말랐어.”
지금까지 레인을 말라 죽게 한 놈이 내뱉기에는 퍽 우스운 말이다. 마치 지금까지 레인이 말라 죽어 간 데 대해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레인은 제 감정을 감추지 않고 비웃었다. 날을 세우기도 지쳐 독기가 빠져서인지 그냥 다정다감한 웃음 같기도 했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카이렌의 목덜미에 닿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카이렌이 레인에게 입을 맞췄다. 레인은 눈을 뜬 채 입맞춤을 받으며 여전히 괴롭고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온기를 바란다. 하지만 카이렌이 주는 온기 따위, 레인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었다. 그런데도 영원히 이어질 법한 추위에 너무도 외로웠다. 아무에게나 매달리고 싶었다. 눈앞의 카이렌에게라도.
그러나 아무리 외롭다고 해도 거기까지 추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카이렌을 있는 힘껏 떠밀자, 그는 예상외로 순순히 밀려났다. 검은 눈이 잠시 레인을 응시했다. 카이렌의 눈빛은 평소처럼 강렬한 집착으로 일렁이는 대신에 어딘지 괴로워 보였다.
“쉬어, 레인.”
짧은 말을 끝으로 카이렌은 그대로 방을 나갔다. 평소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갔을 리가 없는데. 순간 불안함이 밀려왔지만, 계속 괴로운 고민을 이어 가기도 지쳤다. 레인은 이불을 끌어안고 눈을 꽉 감았다.
실체 없는 누군가가 지독하게 그리운 밤이었다.
힘들게 잠들어도 매일 악몽을 꿨다.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 다만 무척 괴로웠다는 감정만이 또렷이 남아 아침마다 괴로웠다. 식은땀을 닦으며 주변을 확인한 레인은 거친 손길로 물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중간에 사레가 들려 혼쭐이 났지만, 그렇게라도 정신을 차리는 게 차라리 기꺼웠다. 오전 내내 바닥을 친 기분은 올라올 줄을 몰랐다.
축 처진 레인은 방문한 의원과 대화라도 나누며 기분을 풀어 볼까 했으나, 의원은 뜻밖에 혼자만 열광할 만한 소식을 들고 왔다. 내일이면 유르딘 니제스가 수도로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검술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직업을 가진 주제에 의원은 신이 나서 유르딘의 무용담에 대해 떠들었다. 전쟁은 레인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므로 금세 흥미가 떨어져서 감흥 없이 적당히 고개나 끄덕였다.
그런 레인으로서도 유르딘의 공적은 놀랍긴 했다. 마지막의 공적, 성채를 부쉈다는 일 같은 건 현실성이 너무 떨어져서 과장 같았다. 하지만 그걸 본 카니예가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는 종전문서에 서명해 레넨을 포함한 다섯 개의 지역을 모두 넘겼다는 사실로 볼 때, 완전히 허풍은 아니었다.
설마 유르딘이 레인을 찾아올까? 이제는 얼굴이나 목소리조차 가물가물한 유르딘을 떠올리려 애썼으나, 결국은 모두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솔직히 도와준 게 있다고는 해도 유르딘은 레인에게 있어서 조금 어려운 상대였다. 물론 어린 시절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레인을 구해 준 건 고맙긴 하다. 하지만 유르딘은 결국 레인을 아이제나흐 저택에 내버려 뒀다. 물론 당시의 유르딘은 지금의 레인보다 어린 십 대 소년이었으니 최선을 다한 결과일 테고, 애초에 유르딘이 그 이상으로 뭔가를 해 줄 의리까지 요구하는 건 과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레인의 삶을 돌이켜 보면 차라리 죽게 놔두는 게 편할 수도 있었다. 나름 신경을 써 주려는 건지 북방으로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기는 했다. 하지만 십여 년 만의 만남이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함께하는 자리는 내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나이 차도 많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다. 어머니의 친구라는 접점이 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은지라 대화의 접점을 찾기 힘들었다.
비록 마지막에 편지 교환을 하기로 했었지만…….
“…으.”
“아이제나흐 님, 어디 편찮으세요?”
갑작스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졌다. 뭔가 이상했다. 며칠간이라지만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기 때문일까……. 기억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기억도 기억이지만 얌전한 레스터도 카이렌도, 주변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이상했다.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래, 물론 유르딘이 어린 시절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자신을 구해 살려준 건 고맙긴 했다. 그러나 결국 그뿐이었다. 이후의 삶은 살아남은 것을 기뻐할 수 없는 절망이었으니, 최초의 감사조차 의미가 흐려진다. 지난번의 만남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어서 서로 서먹하게 인사말만 나누었다.
그냥 그게 끝이었다.
미련스레 떠올리려 드는 기억이 지워지자 감정의 흐름 또한 함께 바뀐다. 레인은 제 생각에 대한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 했다. 자연스레 다른 생각을 이어 나갈 뿐이다.
유르딘은 조금 어려운 상대긴 해도 딱히 레인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니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유르딘과 만날 확률도 낮다. 만약에 만나더라도 얼굴을 한 번 더 보는 정도로 끝이겠지.
계속 인상을 찡그리고 있자 호들갑을 떨며 의원이 건네준 약을 삼켰기 때문인지, 아니면 생각을 멈췄기 때문인지, 어쨌든 두통은 서서히 멎었다. 더 생각해 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관계없는 일이니까.
다음 날 이른 아침, 하인이 발작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레인은 눈을 떴다.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그대로 누워 버릴까 하다가 꾹 참았다. 앓고 난 후로 계속해서 악몽이 이어져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날카로워진 레인의 성정을 알기에 언제나 조심스러운 하인이 이른 아침부터 난리를 치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레인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손으로 다듬으며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하인의 얼굴이 지나치게 들떠 있었다.
“손님이 오셔서요. 내려가 보셔야겠습니다.”
“내게 올 손님은 없는데. 레스터랑 착각한 거 아냐?”
“아뇨, 분명히 레인 아이제나흐 님을 불러 달라 하셨습니다.”
“누군데 그래? 짜증 나게. 올 거면 자기가 오라 그래.”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인 레인은 하인의 눈앞에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문 너머에서 하인이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말이나 전하라며 쫓아냈다. 손님은 무슨 놈의 손님. 뭔가의 착오이거나, 그도 아니면 대단히 레인을 우습게 보는 무례한 작자임이 틀림없었다. 아침 식사도 하기 전인 이른 시간에 다짜고짜 불러내는 손님이라니. 하인이 레인의 태도를 고스란히 전했을 테니 여기까지 올라올 리도 없겠지만, 만약 올라오면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리란 예상과는 달리 곧 문이 벌컥 열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레인은 갑작스레 문을 열어젖힌 무뢰한에게 욕을 한바탕 쏟아 내 주기 위해 이불을 걷어 올렸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문이 열린 자리에 유르딘이 서 있었다.
몇 년 전 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그러나 어딘지 그때보다 수척한 인상을 한 유르딘이 가만히 서서 레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인은 그제야 하인의 당황을 이해했다. 오늘 수도로 돌아올 왕국군의 개선 행렬 선두에 서 있어야 할 유르딘이 고작 아카데미의 별 볼 일 없는 애송이를 직접 만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다니, 확실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대체 왜? 물론 두 사람의 사이는 조금 특별하긴 했다. 유르딘은 어린 시절 죽을 뻔한 레인의 목숨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 유르딘은 레인을 만나려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잘 쳐줘야 마음 좋은 후견인과 불우한 귀족 소년의 관계일 뿐이다. 두 사람의 관계 어디에서도 유르딘이 이른 아침 얼굴이 벌게져서 레인이 머무는 곳까지 뛰어올 만한 근거가 없었다.
“레인.”
더욱이, 저렇게 애타게 유르딘이 레인의 이름을 부를 만한 이유는 없다.
어째서인지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던 유르딘은 한참이나 강렬한 시선으로 레인만을 바라봤다. 성큼성큼 다가와 인사하려던 레인을 덥석 끌어안았다.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레인을 끌어안은 유르딘의 품에서는 새벽부터 막 달려온 상쾌한 아침의 냄새가 났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두 번 다시 놓지 않을 것처럼 레인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고 쥐었다.
“레인…….”
제 이름이 저렇게 안타까운 빛을 띨 수도 있구나, 레인은 막연히 생각했다. 유르딘의 마른 입술이 레인의 이마 위에 닿았다. 놀란 레인이 고개를 들어 유르딘을 마주 보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유르딘이 레인을 다시 한번 강하게 끌어안았다. 레인도 그리 작은 체구가 아닌데도 유르딘은 워낙 큰 편이라 품에 쏙 안겼다. 레인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양 강하게 끌어안고 쥐는 힘이 제법 억셌다.
유르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레인을 가만히 안고 있었다. 유르딘의 품에 안겨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있던 레인은 그의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고스란히 들었다. 한참을 안고 있어도 진정될 기미가 없이 유르딘의 심장이 쉴 새 없이 빠르게 뛰었다.
뭘까, 이건.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레인이 유르딘을 밀어낼 수 없었던 건 단순히 유르딘이 그에게 어려운 상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르딘에게 안겨 있는 상황이 묘하게 편안했다. 마치 이 품을 기다렸던 것처럼 제 몸에 꼭 맞았다. 슬그머니 손을 들어 유르딘을 붙잡고 있으면, 어젯밤까지 느끼던 지독한 외로움이 모두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영원히 붙어 있을 것만 같던 접촉이 끝난 건 순식간이었다. 갑작스레 온 유르딘은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이제 와서 왜 새삼스레 놀라는지 의아했으나, 유르딘은 대답해 줄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는 어색하고 낯선 얼굴로 레인을 보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실례를 저질렀구나, 레인.”
“아뇨. 괜찮습니다. 고개 숙이지 않으셔도 돼요.”
아예 허리를 숙여 사죄하려는 유르딘을 말리느라 레인은 한참 진을 뺐다. 겨우 사과가 일단락되고 나서 유르딘은 갈등하는 얼굴을 했다.
“잠깐 빠져나온 거라서 다시 가 봐야 해.”
“네, 그럼 어서 가 보셔야지요.”
“미안하다.”
“괜찮아요.”
“너무 갑작스레 찾아왔지, 내가.”
“저는 괜찮아요.”
대체 왜 저렇게 미안해하는지 모르겠다. 딱히 미안해할 만한 사이도 아닌데. 지나친 저자세에 레인은 무조건 괜찮다고 답했다. 나중에는 반쯤 자동인형처럼 기계적으로 같은 답변만 내놓고 있었다. 그렇게 반복된 답변 탓에 참사가 일어났다.
“그러면 이번 휴일에 보자. 바쁜가?”
“괜찮아요.”
“그래.”
“괜찮… 네?”
“휴일을 기다리고 있으마.”
휴일에 보자니, 어떻게? 설마 둘이서만 만나자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생각만 해도 어색했지만 대충 대답했다고 변명하며 무르기도 애매했다. 결국, 레인은 유르딘과 어영부영 약속을 잡았다.
떠나기 전, 유르딘은 자신을 본 하인에게 오늘 온 일을 함구할 것을 요청했다. 왕국의 영웅을 봤다는 흥분감에 얼굴이 시뻘게진 채 마구 고개를 끄덕이는 하인의 태도를 보건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유르딘이 가고 나서 레인은 하인이 자신을 존경의 눈으로 보는 것을 느꼈다. 아니, 자신이 뭘 했다고?
한 것도 없이 유르딘의 방문만으로 레인을 다시 볼 정도로 그의 위세는 대단하긴 했다. 레인은 오후에 정식으로 개선하는 왕국군의 선두에 선 유르딘을 보고 여러 번 느꼈다. 신이 난 의원을 따라 얼결에 구경하게 된 개선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유르딘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거대한 준마 위에서 위풍당당하게 선 유르딘의 모습은 왕국 제일의 검사, 가장 존경받는 기사, 국왕의 첫 번째 검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레인은 유르딘의 모습에서 어딘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레인이 알던 유르딘보다 훨씬 더 서늘하고 날 선 분위기가 지금의 유르딘을 맴돌고 있었다. 몹시 우스운 생각이었다. 몇 번이나 봤다고 차이를 구별하려 드는 건지. 대부분 대중은 그 분위기를 왕국 제일의 기사답다고 칭송했기에, 이내 레인도 이상한 생각을 지워 냈다.
수도에 돌아온 유르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쉰 건 첫날뿐이다. 첫날조차도 개선식 이후에 국왕을 알현했으니 제대로 쉬었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다음 날부터 유르딘은 그야말로 쉴 새 없이 부지런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왕국군이 귀환한 첫 사흘은 저녁마다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거대한 연회가 열렸다. 최소한 1년은 더 이어질 것으로 예측하던 전쟁을 순식간에 단축하고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영토를 빼앗아 온 유르딘의 공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수도의 모든 귀족이 유르딘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유르딘은 빼지 않고 하루도 빠짐없이 밤마다 연회에 참석했고, 낮에도 귀족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찾아가 사교를 다졌다. 북방으로 떠나기 전에는 일과 훈련만 하던 유르딘을 생각하면 굉장히 의외의 행보였다. 이전까지의 그는 권력 따위는 원하지 않는 그야말로 청렴결백한 기사처럼 굴었었기 때문이다. 유르딘의 변한 행보에 대해 이리저리 떠들던 귀족들은 순식간에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결혼! 유르딘 니제스도 벌써 서른네 살이었다. 조혼 문화는 사라졌으나 라인셀 왕국의 평균 결혼 연령은 이십 대 중반이다. 그걸 따져 봤을 때 유르딘은 굉장한 노총각이었다. 다행히 나이가 많은 것이 유르딘에게 큰 흠이 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소드 마스터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너끈히 이삼십 년은 더 오래 사는 편이어서 젊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면 유르딘보다 나이를 더 먹어서 결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과는 별개로 오랜 시간을 전장에서 떠돌았으니 외로웠을 법도 하다. 이번 공적으로 왕이 유르딘에게 작위를 내릴 거란 소문이 자자했다. 큰 가문을 보살피는 데는 안주인이 꼭 필요하니, 작위를 받기 전에 적합한 여성을 물색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결혼한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사람들의 설레발 속에서 유르딘은 순식간에 왕국에서 으뜸가는 신랑감으로 떠올랐다. 검사를 높이 쳐주는 라인셀이니 소드 마스터라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신랑감이다. 거기에 더해 당장 이번 승전으로 왕이 내린 재화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다가 노른자위에 자리한 성 한 채는 가볍게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그는 권력과 명예만 있는 게 아니라, 키가 크고 체격도 좋으며 잘생기기까지 했다.
사교계의 소문은 아카데미까지 흘러 들어왔다. 아카데미에 있는 귀족 중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 귀족들은 상당히 많았다. 만약 가족이 유르딘과 결혼한다면, 그 유르딘과 친척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부풀기 시작했다. 유르딘의 제일가는 광신도나 다름없는 게 바로 레인 나이 또래의 사내애들이었다. 아카데미는 영애들 이상으로 불타올라, 유르딘의 여성 취향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레인의 주변과는 별 연관이 없는 일이었다. 레인의 이복동생인 유니 아이제나흐는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였고, 카이렌은 외동아들이었다. 관심 없는 레인을 붙잡고 의원은 또다시 소문의 화제에 대해 떠들어 댔다.
“아카데미 내의 여론은 ‘성숙한 여자를 좋아할 것이다’가 5, ‘청순한 여자를 좋아할 것이다’가 4 정도랍니다.”
“나머지 1은 뭔데?”
“‘아직 여물지 않은 미성년 취향이거나 남색가일 것이다’가 1 정도요? 소수 의견이죠.”
단체로 미친 거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쑥 내려갔다. 여물지 않은 미성년 취향은 대체 뭔가. 아무리 그래도 왕국의 영웅에게 지나친 소문이 아닐까. 레인이 불쾌해하자 의원이 손사래를 치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정색을 했다. 그러면 말을 하지 말든가. 의원은 허겁지겁 변명을 덧붙였다.
“사창가도 한 번 안 갔다던 성실한 분을 제가 그리 오해하겠습니까?”
남이 사창가에 간 전적까지 조사하는 건가. 하긴 바늘만 한 흠이 소처럼 커다랗게 부풀어지는 게 바로 사교계였다. 곧 유르딘을 만나게 되겠지만, 소문의 중심에 선 그가 레인에게 오랜 시간을 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일로 만나려 했든 만남이 길지는 않을 거라고 레인은 막연히 추측했다.
주말이 되어 만난 유르딘은 단정히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갑작스레 쳐들어와 다짜고짜 레인을 끌어안은 정체불명의 무례함은 원래 없었던 양 자취를 감췄다. 유르딘은 시종일관 흠잡을 데 없이 다정하고 상냥했다. 마차에 오르내릴 때마다 다정하게 손을 받쳐 에스코트하는 건 좀 과하다 싶었지만, 머리채를 손잡이처럼 잡고 움직이는 놈들보다 만 배는 나았던 탓에 레인은 지적하지 않았다.
요즘 소문의 핵심인 유르딘은 타인의 시선을 즐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마차는 대단한 위세를 떨치는 유르딘이 타기에는 단출해 주위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 예약해 둔 레스토랑은 복잡한 통로를 지나야 개별적인 방이 나오는 형태로 비밀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다른 사람의 눈이 없는 곳에 와서까지도 유르딘은 타인의 움직임을 소리 없이 주목하고 있었다. 마치 어떠한 적이 갑자기 달려들어 유르딘의 목을 조를 것처럼 희미한 경계가 서린 눈빛이었다. 유별나다 싶긴 했지만 몇 년이나 전장에 있었던 유르딘이니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다만 전장이란 곳이 그렇게 피폐한 곳이구나, 하고 조금 안쓰러움 섞인 추측을 했을 뿐이다.
유르딘과의 식사 시간은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바꿔 말하자면 뭔가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정도로 불편한 점 없이 편한 시간이었다. 심지어 식사마저도 레인에게 딱 맞았다. 독으로 내장이 망가진 레인은 조금만 부담스러운 식단이어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속에 부담 될 만한 음식이 없었고 자극적이지 않은 간도 레인에게 딱 맞았다. 유르딘의 식사 메뉴는 레인과 완전히 다른 걸로 봐서 일부러 신경 써 준 모양이었다.
예전에 만났을 때는 유르딘과 이야기를 나눴던 게 꽤 어색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지금의 그는 레인과 이야기가 잘 통했다. 대부분 유르딘이 묻고 레인이 대답하는 식이었지만, 유르딘은 레인의 생활보다는 요즘 읽는 책과 그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그건 제법 즐거운 대화였다. 무엇보다 거짓으로 꾸며 내 유르딘에게 변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제일 편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차까지 모두 마시고 나서야 유르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볼 곳이 있는데 같이 가 주지 않겠나, 레인?”
“제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요. 어디에 가시려고요?”
“아이제나흐 공작 저택으로 갈 생각이다.”
레인은 사레가 들려 괴롭게 기침했고 유르딘이 부드럽게 등을 두드려줬다. 사레는 금방 가라앉았지만, 한번 술렁인 감정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아카데미와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수도 저택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음에도 레인은 방학 때를 제외하고는 저택에 돌아가 본 적이 없었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데 갈 이유가 없었다. 레인이 뜻밖의 제안에 당황하는 사이 유르딘은 손수 하인에게서 겉옷을 받아들여 레인에게 입혀 주었다.
“가자, 레인.”
“아니. 하지만…….”
“싫은가?”
당연하지요. 그 쉬운 대답이 어쩐지 목구멍 너머로 나오지를 않았다. 레인은 결국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레인이 가면 단 한 번도 반겨 준 적 없는 곳이 바로 그의 집, 아이제나흐의 저택이었다. 심지어 레인은 사생아도 아니고 정당한 가문의 차남이면서도 레스터나 카이렌에게 얹혀 오는 게 아니라면 정문으로 드나들지도 못했다. 그러나 유르딘과 함께 가자 평소 레인을 우습게 보던 하인들이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황급히 저택에 알리는 꼴을 볼 수 있었다. 좋고 싫고를 떠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유르딘의 기세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응접실로 안내된 지 채 십 분도 안 돼서 아이제나흐 공작 딜란이 직접 나와 두 사람을 반겼다. 딜란은 레인에게 눈짓조차 하지 않고 유르딘을 반겼다.
“오랜만이오, 니제스 경. 북부에 가기 전에 잠시 스쳐 지나가듯 봤었지.”
“네. 승리를 기원해 주셨지요. 덕분에 승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때와 다름없이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내가 무탈히 지낸 것도 다 니제스 경과 왕국군이 왕국을 훌륭히 수호해 주었기 때문 아니겠소? 왕국의 영웅이 방문할 줄 알았더라면 제대로 준비라도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오.”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인데 환영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 이러지 말고 앉으시오.”
두 사람은 잠시 체면치레에 가까운 인사말을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레인은 옆에 조용히 앉아 저택에서 마실 일이 별로 없던 값비싼 차를 홀짝였다. 바다 건너 대륙에서 들여와 금화로만 거래된다는 비싼 차는 향뿐만 아니라 맛도 좋았다. 그간은 레스터가 종종 레인의 머리 위로 차를 부을 때 입술을 축이며 본의 아니게 먹어 본 게 다였다. 귀한 걸 들였으면 곱게 마시기나 할 것이지. 레인이 속으로 레스터를 욕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마시는 동안, 딜란은 유르딘에게 방문한 목적을 묻고 있었다. 수도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유르딘이 굳이 아이제나흐 저택에 약속도 하지 않고 들른 이유는 레인도 궁금하던 차였다.
“공께서 그간 레인을 잘 보살펴 주신 것 같아서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참으로 무례하게 굴었잖습니까.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딜란의 눈에서 잠시 당황이 스쳤다. 잘 돌보기는커녕 레인을 지속적인 학대에 노출시켰다. 딜란은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막을 수 있었음에도 방치했다. 그러나 능구렁이 같은 딜란은 당황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낼 정도로 어수룩한 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내 당황을 갈무리하며 레인 쪽을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소. 경이 깨닫게 해 주어 감사하게 생각한다오.”
딜란은 그대로 두어 번 헛기침했다. 아무리 뻔뻔한 자라도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할 때는 조금이나마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레인,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구나.”
퍽 우스운 말이었다. 딜란이 방금 레인에게 건넨 말이 이 방에 들어와서 처음 건넨 말임을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몇 달 만에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 아들에게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는 주제에. 속으로는 신랄하게 비난했으나, 레인은 빈정거리는 대신에 속내를 숨겼다. 난감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기는 했으나 한순간 욱해서 딜란의 눈앞에서 함부로 말했다가는 보복당할 게 뻔했다. 졸업하자마자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다닌다며 저택에 감금당한다거나. 레인의 얼굴에 정말로 기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레스터가 도와주어서요. 아버지께서 신경 써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래.”
딜란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프지 말아야지, 레인.”
보아하니 레인이 자살을 기도하고 아팠던 사실조차 잊고 있던 것 같았다. 저 머리로 어쩜 그리 정치를 잘하는지. 어릴 때는 그렇게나 듣고 싶은 말이었는데, 가식임을 알고 있는 지금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유르딘이 입을 열었다.
“레인을 보살펴 준 일에 대해서 레스터 공자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군요.”
“하하. 그리 말해 주니 레스터도 기뻐할 것이오.”
“공자에게도 꼭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군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도리에서 등을 돌리고 혈육조차 등한시하는 파렴치한 자들이 많은 세상이지요. 제가 무찌르고 온 야만족들처럼 말입니다. 아이제나흐 공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그 어린아이가 이렇게 잘 자랐다고 생각하니 기쁩니다.”
속사정을 모를 텐데 유르딘은 딜란을 꽤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방에서 막 돌아온 그가 레인의 사정을 알고 있을 리 없으니 결과적으로는 그럴듯한 칭찬처럼 보였다. 유르딘의 태도 또한 딜란에게 호의적으로 보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딜란은 흡족하게 웃었다. 유르딘은 아이제나흐에게 유리하게 왕국에 다른 흐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바람이었다. 반목만 하지 않아도 감사할진대, 심지어 먼저 찾아와 입안의 혀처럼 좋은 말만 늘어놓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건 당연했다.
일련의 대화를 들으며 레인은 반 이상 빈 찻잔을 손으로 꾹 감싸 쥐었다. 레인과 만난 건 아이제나흐 공작을 만나기 위한 빌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혹이 부풀기도 전에 유르딘이 레인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쌌다. 레인은 힐끗 시선을 돌렸다가 유르딘의 푸른 눈을 마주했다. 다른 이익이나 목적을 노린다기에는 너무도 다정하고 상냥한 얼굴이다. 어릴 적부터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알려진다면 평판이 떨어질 수 있는데도 선뜻 레인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바로 유르딘이다. 그런 유르딘이 자신을 도구로 사용했을 거라 의심하다니, 아무리 인간 불신이 심해도 그렇지 무례한 생각이었다.
유르딘은 어딘가 불안한 기색을 띤 레인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안심하라는 듯이 부드럽게 도닥였다. 유르딘의 손길에 이상할 정도로 열이 올랐다. 무례한 생각으로도 모자라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까지 하다니. 레인은 자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막 나가는 인간이었는지 자조했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라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레인은 급하게 차를 모두 삼키고는 차를 따른다는 빌미로 자연스레 유르딘의 손을 떨쳐 냈다. 레인보다 빨리 찻주전자를 쥔 유르딘은 자연스레 레인에게 차를 따라 주고 씩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레인은 여전히 말랐군요. 몸이 안 좋은 아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요.”
“그렇소. 집안에서도 나름 신경을 쓰고는 있지만……. 워낙 몸이 약한 아이라 한계가 있소이다.”
“전하께서 제 기력이 쇠했을까 보내 주신 의원과 신관이 있습니다. 당분간 제 저택에 상주할 예정입니다만, 그들에게 레인을 보여도 되겠습니까? 어디 아픈 데가 있어서 마른 걸지도 모르잖습니까.”
미리 준비했던 것처럼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말에 딜란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하오. 아카데미의 공부가 바쁘다고 들어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리 보니 내가 조금 무심하기는 했구려. 니제스 경이 신경 써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소만, 허나 니제스 경을 위한 이들 아니오?”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신뢰하시는 아이제나흐의 공자를 위한 일인데 탓하시겠습니까? 일부러 그들의 시간을 뺏는 것도 아니니 문제없습니다.”
“나중에 전하께 감사를 드려야겠구려.”
자연스레 흐르는 대화를 붙들지 못하고 레인은 입만 벙긋거렸다. 왕이 내준 의원 같은 건 부담스러워서 만날 생각은 없었지만 사양할 틈이 없었다. 눈 깜짝할 새 딜란과 유르딘은 멋대로 레인의 일정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다음 휴일에 레인이 유르딘의 저택을 방문하기로 결정됐다.
딜란은 다정한 아버지처럼 정말 기쁘고 감사하다고 거듭 웃었다. 어린 시절 이후로 딜란과 길게 대화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먼발치에서 봐 왔기 때문에 가까이서 직접 이렇게 오랫동안 목소리를 듣는 것도 간만이었다. 위선자의 목소리가 가증스러워 레인은 몇 번이고 아버지에 대한 욕을 씹어 삼켰다. 그런 심정을 알 법도 한 딜란은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계속해서 자상한 연기를 했다. 레인을 위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게 유르딘을 위하는 연기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만,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는지라 일단 일어나야겠소. 혹 저녁에 일정이 없다면 식사에 초대해도 되겠소?”
“아이제나흐 공작께서 해 주시는 초대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요. 저는 그때까지 레인과 못 나눈 회포를 풀고 있겠습니다.”
공작은 흡족한 얼굴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준비하도록 하겠소. 레인?”
“…네.”
“네 방은 지금 수리 중이라 거기로 안내할 수는 없겠구나. 날이 좋으니 정원이나 온실이라도 안내해 드리거라.”
“알겠습니다.”
공사 중인 게 아니라 관리가 되고 있지 않을 게 뻔한 별채를 보여 줄 수 없어서 그러는 거겠지만, 레인은 웃으며 수긍했다. 딜란은 웃는 낯으로 레인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어 번 두드려 주고 방을 나갔다.
“그럼 가시지요, 경.”
평소에 본채에 드나들 일이 없는 레인이 길을 모를까 봐 걱정한 하인이 눈치를 보며 앞장섰다. 다들 잊고 있는 듯하지만, 레인도 여섯 살 때까지는 이 거대한 저택을 제멋대로 쏘다녔다. 건강한 몸으로 여기저기를 마음껏 탐험하다가 걸리면 걱정 섞인 핀잔 한 번 받고 끝나는 사랑받는 도련님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레인이 고작 정원 가는 길을 모르겠는가. 레인은 신경질적인 눈초리로 하인을 물리고 앞장서서 유르딘을 안내했다.
기억 속의 정원에는 언제나 새하얀 꽃이 만개해 있었다. 당시의 유행이었는지, 아니면 어머니의 취향이었는지는 모른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안주인의 소관이었으니 어머니의 의사가 반영된 정원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침마다 레인의 머리맡에 이슬이 맺힌 새하얀 꽃이 소담히 꽃병에 꽂혀 있던 광경을 기억한다. 아직 다정한 아버지를 가장하고 있던 딜란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던 날들을 기억한다. 작은 꽃나무 아래 새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풍경 속에서 아름다운 가족인 양 함께했던 순간들을 하나도 잊지 못하고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지금, 정원에는 어디에도 어머니의 흔적이 없었다. 심지어 정원은 레인의 기억 속 정원과 구조조차 달랐다. 스쳐 지나가며 또는 먼발치에서 몇 번이나 정원을 뒤집어엎는 걸 봤지만, 과거 흔적의 편린조차 남기지 않았을 줄 몰랐다. 붉은 꽃이 피어난 정원은 화려하게 아름다웠으나 레인은 황홀한 풍경에서 오래된 절망을 느꼈다.
때는 여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바람과 함께 코끝을 간질이고 폐부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진한 꽃향기에 숨이 막혔다. 난생처음 보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레인이 멈춰 섰다. 울창한 이파리가 만들어 준 한낮의 어둠 아래에서 문득 레인은 울고 싶어졌다. 엉망으로 울고, 소리치며, 지금의 이 질척한 감정들을 모두 흘려보내고 싶었다.
지금까지 딜란 따위는 저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레인은 믿고 있었다. 어머니를 배신하고 레인을 별채에 처박아 내버려 둔 그자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정원처럼, 애초에 그자의 마음속에는 어머니도 레인도 없었다. 이제 와서 순진하게 딜란이 레인을 봐 줄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설령 딜란이 레인을 봐 준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이득 관계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어린 날의 기억이 끈질기게 레인에게 눌어붙었다. 자상한 아버지의 가면을 쓰고 있는 딜란을 보고 있자면 어린 시절 다정하게 웃어 주던 아버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머니의 죽음조차 헤치고 기어 올라와 레인을 짓눌렀다. 악마처럼 끔찍한 짓을 했지만, 딜란은 악마가 아니었다. 그는 레스터와 유니에게는 나름 자상한 아버지였다. 딜란은 그 애정을 한 톨이라도 레인에게 나눠 줄 수 있었다. 이전처럼 매 순간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산된 가짜 애정이지만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진심으로 보이는 행동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방금 전처럼 아주 약간의 자비와 배려만 있었더라도 레인의 삶은 훨씬 나아졌을 텐데.
미련한 가정이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이니 레인도 신경 쓰지 않는 게 낫다. 알고 있는데도 그런 것도 아버지라고, 새삼스레 심란해지는 자신이 너무나 미련해서 싫었다.
“레인.”
조금 갈라진 유르딘의 목소리가 들려 레인은 몸을 돌렸다. 눈부신 황금빛 아래 유르딘이 서 있었다. 유르딘의 눈동자가 걱정스럽게 일렁인다. 뭐라도 대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입을 열면 눈물이 흘러넘칠 것 같아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레인을 대신해 유르딘이 다가왔다.
양지에서 음지로, 아무런 그늘 없는 눈부신 태양 아래에서 빼곡히 들어찬 어둠 속으로. 유르딘은 성큼 들어왔다.
순식간에 유르딘의 위로 그늘이 졌다. 같은 어둠 아래로 들어온 눈은 어느새 음울한 빛을 띠었다. 레인 이상의 음울한 빛. 순간 레인은 그 어둠이 유르딘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어딜 봐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기사 유르딘 니제스인데, 레인은 그 모습에서 어딘지 모를 서늘함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사소한 위화감은 레인이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금세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왜 그러나, 레인.”
“뭐가요?”
“네가 울 것 같아서.”
망설이던 유르딘이 조심스레 레인의 팔을 매만졌다. 볼썽사나울 정도로 마른 몸이라 유르딘의 한 손안에 가볍게 잡혔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려 레인은 유르딘의 손을 쳐 냈다. 무례할 정도로 노골적인 거부였음에도 유르딘은 딱히 지적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 레인을 살폈다.
“네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울어도 괜찮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레인은 감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저었다. 어린 날의 추억과 맞닿아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유르딘의 앞에서는 자꾸만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타인을 속이고 자신마저 속이며 무심을 가장하는 방식은 레인이 자신을 위해 마련한 방어 장치였다. 감정을 숨기고, 자신을 숨기고, 타인에게 괜한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 레인은 단지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수히 상처 받아 왔다. 더는 상처 받고 싶지 않았다. 유르딘과도 지나치게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지난번처럼…….
“윽…….”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레인은 생각을 멈췄다. 뭐였을까? 생각하려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져서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의 이상을 자각했음에도 레인은 문제와 직면하기보다는 회피했다. 더 이상 아픈 일은 질색이었다. 숨을 고르고 눈앞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유르딘에게 레인은 애써 웃어 보였다.
“저는 괜찮아요, 유르딘.”
실제로 괜찮든, 괜찮지 않든 언제나 레인이 내뱉을 말은 하나였다. 유르딘 니제스가 어떤 감정을 품은 인간이든 간에 그는 결국 타인이었다. 레인에게 타인이란 완벽한 신뢰도 믿음도 줄 수 없는 불안점일 뿐이다. 괜찮다는 말을 그리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르딘이 무어라 더 입을 열기 전에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인은 듣고 있던 사람이 있단 사실에 화들짝 놀랐지만, 유르딘은 기척을 모르지는 않았는지 한숨을 쉬며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보드라운 풀숲 사이로 머리에 꽃잎을 매단 자그마한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말간 뺨이 붉게 달아오른 사랑스러운 소녀는 아이제나흐의 사랑받는 보석, 그리도 차가운 딜란이 귀애하는 막내딸, 유니 아이제나흐였다. 유니는 풀물 든 원피스를 꼭 잡은 채 꼬물대며 유르딘을 보다가 시선이 마주하자 수줍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니제스 경. 유니 아이제나흐예요.”
어린 동생에게 아무런 감흥이 없는 레인조차 희미하게 미소 지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인사였다. 그러나 유르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유니를 내려다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당황한 유니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울상 지을 때쯤, 그제야 유르딘은 굳은 표정을 풀고 유니의 앞에 무릎 꿇어 손을 내밀었다. 유르딘이 내민 커다란 손 위에 고사리처럼 작은 손이 얹혔다. 다 큰 영애들을 대하듯 손등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춰 인사를 한 유르딘의 얼굴은 언제 굳었었냐는 듯 그저 다정했다.
“미안합니다, 아이제나흐 공녀. 공녀께 크나큰 무례를 범했군요.”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유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찌할 줄 모르고 몸을 비비 꼬는 유니를 보며 레인은 속으로 탄식했다. 유르딘은 아직 젊고 잘생겼다. 밀짚처럼 마른 색이 아니라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에 녹음처럼 푸른 눈동자, 큰 키와 탄탄한 체격까지 더해져 마치 동화 속의 왕자님 같은 외모였다. 어린 꼬맹이가 풋사랑에 빠지기에는 충분한 첫 만남이다. 나이 차가 워낙 많아 유니의 일방적인 동경으로 끝나겠지만, 한동안은 애탈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유르딘이 물러나자 유니는 붉어진 얼굴로 슬그머니 레인에게로 다가왔다.
“오라버니, 먼저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해요.”
“괜찮아.”
레인은 어색하게 인사했다. 차라리 가식으로 무장한 딜란이 대하기 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순진한 애정을 곧이곧대로 받아 주기에는 레인의 아이제나흐에 품은 원망이 너무 깊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인 거부를 드러낼 정도로 레인이 모질지는 못했다.
결국, 할 말을 잃은 채 가만히 멈춰 선 레인 대신에 유르딘이 말을 건넸다.
“공녀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죄송해요. 예법에 어긋난다는 걸 알면서도, 니제스 경이 오셨다기에 제가 호기심을 참지 못했어요.”
“그렇습니까?”
“제 말은,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니제스 경께서는 왕국에서 제일 훌륭한 기사분이시니까, 그러니까…….”
말을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다. 똑똑한 아이라고 들었는데, 한눈에 반한 멋진 기사님 앞에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게 뻔히 보였다. 유르딘은 몸을 낮춰 유니와 시선을 마주하고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아이제나흐 공녀께서 저를 좋게 봐 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유니의 얼굴이 다시 한번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유르딘은 제가 가진 것들의 파괴력을 아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은 유르딘은 유니에게 제법 살갑게 말을 건넸다.
“마침 레인에게 정원을 안내받던 중이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레인보다는 항상 여기에 머무르는 공녀께서 정원에 대해 더 잘 알고 계실 듯하니,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오라버니, 함께하는 걸 허락해 주시겠어요?”
정중하고 격식 있는 인사였다. 살갑게 오라버니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두 사람은 일 년에 얼굴을 열 번도 마주치지 않는 서먹한 사이였다. 그래도 다행히 제 오빠를 닮지는 않아 성격이 좋은 아이 같았다. 레인은 자꾸만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제나흐 공작가가 증오스럽다고는 해도 유니 아이제나흐는 죄가 없었다. 죄 없는 자가 누군가의 원망과 증오를 받는 일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끔찍한지 레인이 잘 알고 있었다. 순수하게 호감을 표할 수는 없는 상대지만, 최소한 어린 여동생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게다가 정원 안내는 제 증오를 꺾어야 할 정도로 대단한 일도 아니니까.
“그래.”
짤막한 허락이 떨어지자 유니는 몹시 들떠 두 사람을 데리고 정원 이곳저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인은 자신이 열 살 난 어린 소녀보다 체력이 안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레인은 현기증을 느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유르딘은 레인의 안색이 나빠진 걸 빠르게 알아차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유르딘이 레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잠깐 실례해도 괜찮겠나?”
“네? 아, 네.”
레인이 얼결에 대답하자마자 유르딘이 레인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레인은 입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니, 니, 니제스 경?”
귀족 영애에게나 할 법한 행동을 남자인 레인에게 하니 놀라기도 놀랐지만 부끄러움에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라 홧홧해진다. 그러나 부끄러운 짓을 한 장본인인 유르딘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안색이 안 좋아.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무리하고 있지?”
“아니, 산책 좀 했다고 쓰러지지는 않는데요.”
“하지만 분명…….”
뭔가 말하려던 유르딘은 낮은 신음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궁금했으나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앞장서던 유니가 다가와 두 사람을 살폈다.
“오라버니, 많이 힘드세요?”
“아니, 난 괜찮은데…….”
“방까지 데려다주지.”
방이라니. 이러고? 아까 방을 수리 중이라고 변명을 해 뒀으니 본채의 여유 있는 방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거기까지 가는 길에 몇 명의 사용인들을 만날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 레인은 정색했다.
“내려 주세요, 니제스 경.”
“하지만 창백하잖나, 레인.”
“아무리 경이 제 과거의 은인이시라지만 무례하십니다.”
명백한 거절의 말에 순간적으로 유르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레인을 가볍게 안아 든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나 굳은 기색은 곧 사라졌고 유르딘은 다시 다정하고 상냥한 남자로 돌아와 레인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나는 네게 무례를 저지를 생각은 없었어. 용서해다오.”
“용서까지야……. 화가 난 것은 아니에요. 내려 주시기만 하시면 돼요.”
“안색이 안 좋은걸.”
“니제스 경.”
“저어, 그러면 온실로 가는 건 어떠신가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유니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어머니께서 온실에서 쉬는 걸 좋아하셔서요. 바로 요 앞인데다가 몸을 기댈 만한 의자도 있으니까, 거기서 쉬시면 될 것 같아요.”
유니의 중재안이 제법 쓸 만했다. 이 꼴로 저택을 활보하는 건 죽어도 싫지만, 사실 멀쩡한 척하며 본채까지 갈 자신이 없기도 했다. 레인이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르딘은 다시 레인을 단단하게 안아 든 채 유니의 안내를 받아 온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온실에 가자는 말에 동의한 거였지 계속 안고 가는 걸 동의한 건 아니었는데. 정확히 말을 하지 않은 제 잘못도 있으니 지적을 포기한 채 레인은 유르딘에게 몸을 맡겼다. 다소 서먹하게 안겨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려 줄 때가 되니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르딘이 하인에게 차를 부탁하겠다고 나간 사이 유니가 레인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창백한 뺨에 땀이 맺힌 걸 본 유니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오라버니에 대해 듣기는 했는데 제가 잘은 몰라서 배려하지 못했어요.”
“나에 대해 무슨 말을 들었는데?”
“그게…….”
난처해하며 유니는 말을 흐렸다. 유니의 표정에는 이복 오빠에 대한 연한 애정과 짙은 동정이 깔려 있었다. 하긴, 어린아이라도 저택 전체에 깔린 분위기를 파악할 정도로는 자란 나이다. 이 저택에 레인에 대해 좋은 말을 할 사람이 없으니 유니가 들은 소문에 대한 건 듣지 않아도 내용이 뻔하다. 표정에 혐오가 깃들지 않은 것만 해도 유니 아이제나흐의 다정한 성품을 칭찬할 만했다. 레인의 인내는 여기까지였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레인이 입을 꾹 다물자 유니도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곧 유르딘이 돌아왔기에 어색한 분위기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유르딘이 돌아오고 채 오 분이 지나지 않아 하녀들이 들어와 차를 따랐다. 서둘러 온실로 달려온 게 분명한데도 이마에 맺힌 땀 외에는 어디 하나 흐트러진 점 없는 모습이 굉장히 숙련가다웠다.
유르딘은 처음에 레인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며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유니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은 레인이 조금 쉬고 싶다며 대화를 사양하고 담요를 덮은 채 차를 마시기 시작하자, 결국 포기하고 유니와 어울려 주기 시작했다. 유르딘은 유니에게 소매를 붙잡힌 채 티 테이블 주변을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었다. 사랑받는 게 익숙한 소녀는 유르딘의 관심과 다정함에도 금세 적응했다. 부끄러움이 가시자 유니는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주변에 난 꽃에 대한 전설을 소개하거나 자신이 겪은 일화들을 설명했다. 그러다가 아까 서먹하게 끝난 대화가 마음에 걸렸는지 종종 레인에게도 말을 걸어오고는 했다. 확실히 착한 아이였다.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선량함과 다정함, 명랑한 성품, 모두가 지금의 레인이 갖지 못한 요소들이다. 암울한 생각을 몰아내려 애쓰며 얌전히 차나 마신 덕분에 평화로운 분위기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따스한 온실 기온만큼이나 부드럽게 흐르던 분위기는 갑작스럽게 깨어졌다. 누군가의 거친 손길이 온실을 부숴 놓을 것처럼 거칠게 문을 열었다. 평화를 깨고 침입한 무뢰한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문에서부터 곧장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무도한 발걸음에 여린 꽃잎들이 짓이겨졌다. 유니 아이제나흐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오라버니?”
“유니!”
갑작스레 평화를 깨고 들어온 자, 레스터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초라하게 겁에 질려 있었다. 이곳은 왕국에서 제일가는 명문가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저택 한복판이다. 그곳의 작은 왕이나 다름없는 레스터가 겁에 질릴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처음 보는 오빠의 무섭게 굳은 얼굴에 유니도 놀라서 굳어 버렸다. 레스터가 들어왔을 때 그대로, 유니는 여전히 유르딘의 소매를 잡고 있었는데 그걸 본 레스터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레스터가 칼을 뽑자 뒤에서 헐레벌떡 따라온 하인들이 놀라 헛숨을 삼켰다. 유르딘이 인상을 찌푸리며 새파란 칼날 앞에서 유니를 보호하듯 제 뒤로 감추자, 더더욱 흥분한 레스터가 당장 달려가 검을 휘두르며 발작적으로 유니를 세게 잡아당겼다. 유르딘이 재빠르게 피하지 않았다면 깊은 상처를 입었을 만한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거칠게 검을 휘두른 힘의 반동과 갑작스럽게 더해진 유니의 무게 탓인지 레스터가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모두가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레스터를 부축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레스터는 한 손에는 검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유니를 강한 손길로 제 품에 숨겼다. 레스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마치 유르딘이 유니를 뺏어 가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레스터는 유르딘 니제스를 몹시 경계하고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주인의 적의를 받는 유르딘이 아닌, 주인인 레스터를 미친놈처럼 봤다.
“공자.”
아무도 레스터의 기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악의 한가운데서 유르딘만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놀랄 법도 한데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에 긴장된 이목이 쏠렸다. 모두에게서 등을 지고 있어 유르딘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딱히 노기가 서린 목소리는 아니라 모두가 안심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잔뜩 흥분한 레스터를 진정시키려는 듯, 유르딘은 침착하게 양손을 어깨 위로 들어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표현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레스터는 안심한 기색이 아니었다.
레스터에게만 보이는 유르딘의 얼굴은 침착하기 짝이 없었다. 유르딘은 숨길 수 없는 긴장과 공포에 잠식된 레스터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절대로 사라지지 못할 뿌리 깊은 공포를 확신한 유르딘은 자신이 쭉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침착하고 무표정했던 얼굴 위로 광기가 떠오른다.
‘또 만났군.’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만으로 건넨 말을 레스터는 분명히 알아들었다. 왕국 최악의 살인마가 이제는 수배령조차 걸리지 않은 채로 태연하게 일상 속에 침투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레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발작했다. 갑작스레 발작을 일으킨 레스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픽 쓰러졌다. 그 와중에도 유니는 꼭 잡고 쓰러진 탓에 옮기는 와중에 소란이 일었다. 제 오빠가 기절한데다 사용인들까지 소란을 부리자 놀란 유니는 계속 엉엉 울었다. 사용인들은 레스터와 유르딘 사이에서 어찌할 줄 몰랐다. 간단하게 줄여 말하자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레스터가 소란을 피웠단 소리를 들은 딜란이 급하게 온실로 내려왔다. 레스터를 상대할 때는 비교적 부드럽게 대하던 유르딘의 태도는 단지 흥분한 그를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던 듯, 순식간에 날이 서 있었다. 레인의 앞에서는 언제나 부드러운 남자였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했으나 그는 수천 군대보다도 용맹한 위용으로 왕국에 승리를 가져다준 대륙에서 제일가는 기사였다. 조금 전까지 부드러운 온기에 둘러싸여 있던 온실 안에 팽팽한 긴장이 들어찼다. 딜란을 마주한 유르딘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렸다.
“공자께서는 제가 살인마로 보이는 모양이더군요. 아이제나흐 공, 공께서 공자께 무슨 말씀이라도 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소. 미안하오, 니제스 경. 내 아들이 경에게 대단한 무례를 범했소.”
“이게 고작 무례로 설명될 일입니까? 이번 전쟁만 해도 왕국을 위해 사 년이나 수도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검을 휘둘렀습니다. 제가 저지른 것이 단순한 살인입니까?”
“경의 공적은 왕국의 누구든 잘 알고 있소. 나도 그렇고 물론 내 아들들도 그러하오.”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직설적인 투로 유르딘이 신랄하게 비꼬았지만,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딜란은 화를 내지 못했다. 레스터의 돌발 행동은 딜란의 인생에서 손꼽히게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장남인 레스터는 언제나 딜란의 기대를 모두 충족시켜 주는 훌륭한 아들이었다. 최근 들어 약간 이상하기는 했지만 실망시키지는 않는 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나 믿고 있던 레스터가 대낮에 왕국의 영웅인 유르딘 니제스에게 검을 휘두르다가 발작해 실려 가다니.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이미 벌어진 사실이었다. 한참 동안의 침묵 후에 유르딘은 굳은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이제나흐 공. 공자께서 왜 저러시는지 알 수 없으나, 제가 있는 게 공자의 상태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요.”
“니제스 경, 정말로 미안하오. 나중에 저 아이가 정신이 들면 사죄하도록 경께 보내겠소.”
“아닙니다. 공자에게 불편한 자리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공작께서 그리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다른 말을 듣지 않겠다는 태도로 유르딘이 말을 맺었다. 딱딱하게 말하던 유르딘은 공작에게 짧게 묵례하고 그대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뒤쪽에 멀거니 선 레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놀란 표정의 레인을 본 유르딘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 레인.”
오직 레인에게만 다정한 미소를 건넨 유르딘은 그대로 온실을 떠났다. 유르딘이 나가고 나서야 굳어 있던 온실 안의 사람들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딜란은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나마 유르딘이 보인 레인에 관한 호의에 조금은 만족한 모양이었다. 유르딘에게 검을 휘두르다가 그대로 발작이라니. 검을 휘두른 것도 정치나 사교적으로 대단히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발작이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는 쥐고 있는 것이 많은 만큼 적 또한 많았다. 권세가 굳건한 지금에야 모두 아이제나흐 가문에 허리를 조아리지만, 조금만 틈을 보이면 아귀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을 자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틈을 보일 수 없는 상황에서 후계자가 별다른 이유 없이 발작했다는 사실이 바깥에 알려지면 굉장한 추문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레스터가 입힌 타격으로 가문이 몰락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한동안은 구설에 시달리며 세가 꺾일 수 있었다.
사용인들은 입단속을 할 수 있어도 대륙 제일의 기사이자 왕의 신임을 받는 유르딘을 입단속 시키긴 어렵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아이제나흐 공작이라도 한 수 접어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불쾌해하기는 했어도 마지막에 아이제나흐의 사람인 레인에게 호의를 드러냈으니,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니며 함부로 입을 놀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딜란이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짚으며 레인에게 다가왔다.
“다음에 네가 니제스 경을 보거든 기분을 잘 풀어 주도록 해라.”
“…네.”
딜란은 무표정하게 대답하는 레인을 잠시 알 수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온실을 빠져나갔다.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해져 레인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온실을 나갔다.
***
짐승이 날카롭게 우는 소리가 귓가를 찢는다. 한 번 갈라졌다가 얼기설기 봉합된 배 속이 끔찍할 정도로 간지러웠다. 진작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처인데도 레스터는 기절조차 하지 못하고 바닥을 기고 있었다. 툭. 검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몸을 부르르 떨며 뒤를 돌아봤다. 느긋하게 뒤따르는 살인마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툭, 다시 한번 검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내리찍은 곳은 레스터의 발치다. 레스터는 손끝도 발끝도 성치 않은 몸으로 필사적으로 기었다.
‘10초에 한 번씩, 한 걸음씩 걸을 거야. 느리지? 내가 널 따라잡기 전에 도망쳐. 그러면 살려 줄게.’
대단한 호의를 베푸는 양 한 제안이 실은 레스터를 조롱하기 위한 말일 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무서워서. 괴로워서. 끔찍해서. 마침내 도망치지 못한 레스터의 발끝을 살인마의 검이 찔렀다. 잘렸나? 잘렸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죽였으면. 죽여 줬으면. 더는, 더는…….
‘죽고 싶나?’
레스터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 여덟 시간도 안 지났는데. 네가 그 애를 괴롭힌 날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어떻게 될까. 수천 시간은 되겠지?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지.’
그만큼은 해야 하지 않겠어? 살인마는 웃으며 작은 자루를 가져왔다. 작아도 레스터의 시야에 끔찍한 어둠을 가져오기에는 충분한 크기다. 순식간에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늦은 밤중에 레스터는 눈을 떴다. 과거로 돌아온 후 어둠 속에서 잠들지 못하는 레스터를 배려해 방 안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지만, 자루 속의 어둠은 자연스럽게 레스터를 따라와 가볍게 먹어 치웠다. 레스터는 한동안 숨도 쉬지 못하고 벌벌 떨며 제 몸을 더듬었다. 귀가 뜯어지지도 않고, 손가락도 발가락도 모두 멀쩡하고, 배는 매끈하고, 제대로 말하고 볼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난 후에야 현실감은 아주 느릿하게 되돌아왔다.
어스름한 빛 속에서 눈을 깜박이던 레스터는 쓰러지기 전의 추태를 기억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유르딘을 만나 평정을 잃을 것까지는 각오했다. 그자와 만나는 순간을 몇 번이나 상상하며 연습한 끝에 평정을 유지할 수준은 됐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레스터의 착각에 불과했다. 그자가 유니와 함께 있는 걸 본 순간 레스터는 순식간에 과거의, 또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어둑한 창고로 끌려들어 갔다.
유르딘 니제스는 인간이 아니라 악마였다. 그자가 범인으로 지목되고 잡히기 전까지 왕국 전체에 깔렸던 두려운 분위기를 레스터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왕국민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집에 틀어박힌 채 공포에 떨었다. 유르딘은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귀족들을 학살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자들은 귀족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유르딘의 수배지가 뿌려졌을 때, 딱 한 번 그자를 잡을 뻔한 일이 있었다. 유르딘을 돕던 자의 밀고로 벌어진 일이었다. 왕국의 정예 기사들이 모인 골목에서, 밀고한 자가 차에 탄 약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유르딘은 큰 상처를 입고 간신히 도망쳤다. 그 후로 유르딘은 목격자를 모조리 죽이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나 여자, 노인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운 나쁘게 골목의 어둠에서 유르딘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모조리 죽었다. 경악할 만한 희대의 살인마였다.
그리고 현재. 왕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살인마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데 그 위험성에 대해 말해 봤자 미친놈 취급 받을 건 레스터 쪽이다. 아무도 유르딘이 살인마라는 말을 믿어 주지 않는다. 만약을 대비해 자신이 죽으면 유르딘 니제스가 범인일 거라는 유서를 남겨 뒀으니 살해당하고 나면 유르딘을 수사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죽기 전까지는 미친놈의 망상으로만 남을 뿐이다. 아버지에게 말할 때를 잡고 있었으나 오늘 추태를 보인 이상, 레스터가 사실을 말해도 미쳤다고 생각하며 한동안 영지에 처박아 둘 게 뻔했다. 제 말을 증명하자고 그자의 손에 살해당할 수도 없으니, 방법이 없었다.
레스터는 자신이 심각하게 한 말을 듣고 웃던 친구의 모습을 떠올렸다.
‘뭐야, 그게. 공부를 너무 해서 머리가 돈 거 아니야? 피곤하면 쉬어라, 지랄 말고.’
유르딘에게 첫 번째로 살해당한 카이렌 또한 아무것도 몰랐다. 처참하게 토막 나 성에 버려졌던 죽음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또래의 친구들처럼 유르딘의 귀환을 설레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카이렌뿐만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유르딘의 소매를 붙잡았던 유니도, 유르딘과 긴밀한 관계가 되길 원하는 아버지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레인마저도 기억이 없다. 분명 처음에는 레인 또한 과거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진작 죽어 나자빠졌으니 유르딘의 학살에 대해서는 몰라도 최소한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는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과거와 다르게 발작하듯 자살 기도를 할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레인은 정말로 모든 것을 깔끔하게 잊었다. 부러울 정도로 속 편하고 멍청한 놈이었다. 레스터는 예전부터 그런 레인이 항상 너무 싫었다. 괴롭히고 궁지에 몰아넣어 이쯤 되면 죽을 법하다고 생각해도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털고 살아가는 레인이 끔찍했다.
공작가의 격에 맞지 않는 핏줄.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기 전에도 후에도 레스터는 항상 그 말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았다. 차마 제게 그 피를 물려준 어머니를 미워할 수는 없었기에 레스터는 레인을 미워하는 쪽을 택했다. 어느 순간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한 증오는 폭력이 더해질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자제할 수 없게 됐다. 품어 온 증오는 유르딘 때문에 제 모든 게 무너지고 죽음을 맞으며 극에 달했다.
레스터는 과거로 돌아온 날부터 레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잔뜩 애써야 했다. 레인을 죽이면 유르딘 니제스는 다시 한번 무너지며 절망한다. 레스터가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복수였다. 영웅의 가면을 쓴 간악한 살인자의 실체를 까발리고 동시에 복수할 방법은 명확했다. 그러나 그 후에 살해당할 레스터의 미래 또한 자명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복수보다는 삶이, 공포를 회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시 살아나 새로운 기회가 왔으니 더는 레인을 괴롭히지 않으면 유르딘도 복수를 포기할지도 모른다고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재회의 순간 헛된 희망임을 깨달았다. 유르딘은 또다시 레스터를 죽일 것이다. 광인이 되돌아와 멀쩡한 사람인 척 돌아다녀도 이미 광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한 번 박살 난 인간이 온전히 되돌아올 수는 없다. 레인이 살아 있기 때문에 온건한 방법으로 죽이려 하고 있을 뿐이다. 이대로라면 과거와 똑같이 레스터는 파멸을 맞을 뿐이다.
재회의 순간, 다른 이에게는 보여 주지 않고 오로지 레스터만을 향하던 끔찍한 표정이 어둠 속에서 악몽처럼 떠올랐다. 상대도 되지 않는 먹잇감을 앞에 두고 있는 맹수처럼 노골적인 우위를 선점한 남자의 모습이 여전히 뇌리에 선명하다.
“죽여야 해.”
방심은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점부터 시작된다. 레스터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형편없이 손이 떨렸으나, 증오 속에서 천천히 피어오른 광기와 생존 본능이 공포를 내리찍는다. 유르딘 니제스에게 공포와 절망을 안겨 주고 가장 소중한 것을 산산이 부수고 싶었다. 그자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모조리 부순 다음에 조롱하며 죽이고 싶었다.
죽일 거야. 죽여야만 해.
이미 왕국 최악의 살인마는 레스터를 인지했다. 이미 한 번, 레스터의 모든 것을 박살 낸 그 작자가 레스터를 두 번은 박살 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반격당할 뿐이다. 레스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
아침에 눈을 뜬 레인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도 그럴 게, 레스터가 레인의 한 손을 잡고 코앞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레스터는 레인의 소리 없는 경악에 반응해 눈을 뜨더니 막 잠에서 깬 사람 같지 않은 싱그럽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레인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잘 잤어, 레인?”
“너, 너 뭐야? 왜 여기서 자?”
“동생 침대에서 자는 게 나빠?”
미친 새끼인가, 이건? 얼이 빠진 레인을 도닥인 레스터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커튼을 걷었다. 환한 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좋은 아침이야, 레인.”
레인은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진짜로 이상한 놈이었다. 어제 유르딘을 보고 경기를 일으키고 발작하던 일이 마치 과거의 꿈 같았다. 레스터는 아침에 약해서 일어나려면 한참 걸리는 레인 대신에 하인을 부르고 식사를 준비해 올리며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레스터의 성화로 어영부영 옷을 갈아입고 함께 내려간 1층에서 유니를 만난 일은 더더욱 현실감이 떨어졌다. 유니는 레스터를 보자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레스터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어 주자 유니는 그제야 안심하고 활짝 웃는다. 레스터는 익숙하게 유니를 안아 들고 웃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 오라버니!”
“이걸 바라고 온 것 아니었어?”
“나는 이제 숙녀인걸.”
“잔뜩 뛰어 놓고 인제 와서?”
쿡쿡 웃으며 속살대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한 남매였다. 레인은 제 키의 반만 한 유니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레인이 저 아이만 했을 때 그는 레스터와 카이렌의 장난감이 되어 개처럼 별관을 기고 있었다. 채찍을 들고 레인을 내리치던 레스터는 제 여동생에게는 손끝을 대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며 소중히 대한다.
나도 형의 동생이잖아.
어리석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심하게 열이 올라 아픈데 강제로 끌려 나와 욕실에서 차가운 물을 맞으며 그런 말을 했었다. 외롭고 슬퍼서, 누군가의 온기가 그리워서 레스터에게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그들은 반이나 피를 나눈 형제였다. 공작 부인이 된 양어머니 아나벨은 무서웠고, 아버지인 딜란은 찾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매일같이 찾아오는 레스터의 존재는 두려운 동시에 종종 온기를 구걸하게 되는 상대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레스터는 몹시 화를 내며 레인을 물에 처박았다.
‘웃기지 마. 너 따위가 내 형제라고?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심하게 화를 내는 레스터에게 몇 번이나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정말로 죽을 것 같다고, 두 번 다시 형제라는 말을 꺼내지 않겠다고 빌었다. 그러나 레스터는 레인을 용서하지 않았다. 레인은 그때 몇 번이나 기절했다. 뒤늦게 카이렌이 찾아와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때 레스터는 레인을 죽였으리라. 물속에서 나온 후에도 며칠을 앓으며 죽다 살아났다.
‘멍청한 레인. 누구도 널 구해 줄 수 없어. 너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앓던 중에 누군가가 그렇게 속삭였다. 카이렌이었을까? 카이렌의 목소리와 비슷했던 듯도 하지만,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레인은 종종 알 수 없는 환청을 듣고는 했다. 도와주기는 누가 도와준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나 당하고서도 그런 환청 따위를 들은 게 제 나약한 정신의 증거인 것만 같았다.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이 레스터와 유니의 단란한 시간 때문에 기억났다. 끔찍했던 제 과거와 비교하게 되어, 레인은 도저히 티 없이 자란 여동생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레인의 양 뺨이 딱딱하게 굳은 걸 본 레스터가 유니를 안은 채 몸을 돌렸다.
“레인, 표정이 안 좋아.”
“어디 아프세요, 오라버니?”
“자주 아픈 편이지. 몸이 안 좋거든.”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문 레인 대신 레스터가 유니의 물음에 답했다. 유니를 내려 둔 레스터가 다가와 레인의 이마 위에 손을 얹었다.
“열은 없는데. 머리 아파? 아니면 속이 안 좋아?”
“레스터.”
“응.”
“아카데미로 돌아갈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레인을 레스터가 살폈다. 레인이 레스터에 대해 잘 알듯 레스터도 레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서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않는 탓에 가끔 의중을 짐작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검은 눈이 레인을 꿰뚫어 볼 듯이 추궁하며 파헤친다. 약간의 탐색 끝에 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도 같이…….”
유니가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스터를 잡아끌었다.
“오라버니는 아버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 하셨어.”
“아……. 그래.”
레인만 해도 레스터의 발작에 관해 궁금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 레스터를 후계자로 삼은 공작은 더할 게 뻔했다. 잠시 망설이던 레스터는 미룰 수 없는 일임을 인정하고 레인과의 동행을 순순히 포기했다. 어제 레스터가 사고 친 일은 아카데미로 도망가 회피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레스터는 옆에 선 하인에게 지시했다.
“거기 너, 마차를 바로 준비해라. 그리고 레인, 조심해서 가.”
이유 없이 위선을 떠는 놈에게 장단 맞춰 주고 싶지 않아 레인은 대답 없이 레스터를 지나쳐 걸었다. 귓가로 노골적인 한숨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저택을 나섰다. 레스터가 말한 이유대로 레인의 자해를 염려할 뿐이라면 괴롭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왜 성미에 안 맞는 짓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수작인지 짐작 가는 것조차 없어서 답답했다. 그답지 않게 다정해진 카이렌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짜증스레 마차에 앉는데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대로도…….’
환청 같은 소리가 들렸다. 문장의 끝이 잔뜩 뭉개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였지만, 레인은 이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 보았다고 느꼈다. 아주 예전부터 종종 환청을 들어 왔으니 이것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겠지. 레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마차에 몸을 누였다. 머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룻밤 푹 잠든 것 치고는 썩 개운치 않아 기숙사에 돌아가서 마저 쉬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그러나 기숙사에 들어가자마자 레인을 반긴 건 카이렌의 우악스러운 손길이었다. 계단을 채 모두 올라가기도 전에 순식간에 카이렌에게 붙잡혀 벽으로 밀쳐졌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떠민 터라 부딪친 등이 욱신거렸다. 레인은 시선을 들어 분노에 찬 카이렌을 마주했다. 카이렌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 새끼 뭐야?”
“뭐?”
“유르딘 니제스.”
“…….”
설마 유르딘 니제스가 누구인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테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에 레인이 인상을 찌푸리자, 레인의 어깨를 쥔 카이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저택까지 찾아가고 지랄이야. 아무 사이 아니었잖아?”
“별거 아니었어.”
“별일이 아닌데 널 데리고 저택까지 찾아가?”
“공작님을 뵈려고 했던 것뿐이야.”
“너 때문은 아니고?”
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흡사 바람난 연인을 추궁하는 모양새에 어울려 줄 필요가 없었다. 답하지 않는 레인을 보며 카이렌은 분통을 터뜨렸다.
“전부터 수상하기는 했지. 더러운 새끼. 애초에 너 한번 따먹어 보겠다고 접근한 거 아냐?”
“니제스 경이 너 같은 줄 알아?”
세상 사람들이 다 저 같은 줄 아냐 싶어 기가 막혔다. 유르딘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작은 호의조차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카이렌이 지긋지긋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자, 카이렌은 성이 난 얼굴로 얼굴을 확 구겼다. 반사적으로 카이렌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떨쳐 내려 했으나 카이렌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코끝이 닿았다. 카이렌이 입을 열었다.
“레인.”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레인에게 닿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그러나 상처에 스며들어 영혼까지 잠식해 결코 잊을 수 없는 고통이 떠오른다. 무수한 기억들. 끔찍한 기억들은 밝은 날에도 있었고, 흐린 날에도 있었고, 더운 날에도 있었고, 추운 날에도 있었고, 저택의 방에서도 있었고, 아카데미의 기숙사에서도 있었고, 으슥한 길가도 있었고, 어둑한 창고도 있었고, 아름다운 숲과 호수에서도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레인은 보잘것없이 무력했다. 인생의 어느 순간을 들춰 보든 레인의 기억 속에는 카이렌의 뜨거운 체온, 서늘하거나 열정적인 시선, 그리고 끔찍한 폭력과 쾌락이 있었다. 일상은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당해 모조리 고통의 기억뿐이다.
지난 세월 동안 레인은 카이렌에게 굴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요구를 따를지라도, 마음마저 정복당해 그들의 착실한 개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자신을 다잡았다. 어차피 약해 빠진 몸으로 저항하는 건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무의미한 저항을 반복한 끝에 강제로 휘둘리기를 몇 차례, 레인은 차라리 순순히 몸을 내어 주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견디기 힘들 때마다 레인은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다. 여기에 내가 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건 육체적인 폭력에 불과하다. 이런 것 따위, 강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레인이 자신의 긍지를 잃지 않는 한, 그들은 레인을 완벽하게 정복할 수 없었다. 그렇게 레인은 얼마 남지 않은 긍지를 내세우고 자존심을 끌어모아 자신을 무너지지 않게 다스렸다.
다스리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자신이 겪는 일이 고작이나 따위의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레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태산이라도 세월이 흐르면 무너지고, 거대한 바위라도 파도에 휩쓸리며 깎아 내려질진대, 고작 인간에 불과한 레인이 제게 반복되는 폭력을 의연하게 이겨 내기만 할 수는 없었다. 결코, 완벽하게 익숙해질 수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데 목이 졸린 양 숨이 가빠 온다.
새파랗게 질려 얼어붙은 레인을 본 카이렌의 표정이 조금은 만족스럽게 풀렸다. 공포에 질린 레인의 굳은 뺨 위에 사랑스럽다는 듯이 입을 맞추고, 한 손은 차게 식어 버린 손을 마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딱딱한 허리를 감싸 안는다. 카이렌은 만족스레 한숨을 쉬고 레인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먹이를 앞둔 맹수와 같은 기세에 레인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익숙하게 혀가 얽히고 레인의 신음을 카이렌이 받아 삼켰다. 꽉 닿은 몸에서 흥분한 카이렌의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카이렌의 애정은 레인의 절망 속에서 싹을 틔우고 공포를 양식 삼아 자라난다. 레인의 공포와 두려움과 증오는 그대로 카이렌을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의 징표이기도 했다.
“예전부터 넌 한결같았지. 얌전한 얼굴로 나도 모르게 내 눈을 피해서 남자를 끌어들이고.”
레인은 저 의심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타인과의 접촉을 끔찍하게 혐오하는 레인이 대체 왜 남자를 침대로 끌어들인단 말인가. 레인이 저도 모르게 찌푸린 미간 위로 카이렌의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착각하지 말고 인정해. 너는 내 거야.”
집착으로 얽매고 증오로 속박됐다. 카이렌이 레인에게 바싹 몸을 붙여 왔다. 레인은 숨을 삼켰다. 바지 너머로도 발기한 성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또 강간당하겠다고 생각했던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이전까지 그랬듯이 레인은 카이렌이 자신을 방 안으로 끌고 가서 강간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린 카이렌은 레인을 놓고 몸을 돌렸다. 레인을 얼어붙게 하는 열기가 사라지고 한낮의 온기가 레인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레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왜 물러났지? 레인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멀리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똑바로 레인을 향했다. 누군가가 레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무심결에 손을 뻗었던 레인은 그 손을 맞잡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레인의 얼굴에 떠오른 의심과 의혹을 읽은 남자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상한 사람 아니야. 여기 학생인데.”
“본적 없는데.”
“그야… 기사학부의 학생이니까. 전쟁이 끝난 덕에 남은 기간이나마 아카데미에 다니려고 돌아온 거라.”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덥석 레인의 손을 잡아 그대로 당겼다. 몸이 남자가 있는 쪽으로 가볍게 딸려 간다.
“너 되게 가볍다. 잘 좀 먹어야겠는데.”
“신경 끄시지.”
“아, 미안. 무시하려고 한 말은 아닌데……. 사죄의 뜻으로 식사나 할래?”
이놈은 대체 뭐지. 레인은 다짜고짜 다가와서 친한 척을 하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 어느 나라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더라. 나 아카데미에 아는 사람도 없거든. 한가하면 좀 상대해 주면 안 돼? 응?”
차가운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남자는 너스레를 떨었다. 이후로도 혼자 잘도 떠들던 남자는 중요한 걸 잊었단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레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소개가 늦었네. 난 지스킬. 지스킬 마이어야.”
“레인 아이제나흐야.”
“아이제나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지스킬을 보며 레인은 이제 그가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레스터 아이제나흐와 레인 아이제나흐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라면 이 왕국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지스킬은 악수를 거두지 않고 오히려 이쪽으로 더 밀었다. 레인이 얼떨결에 손을 움찔거리자 그걸 놓치지 않고 붙잡은 지스킬은 아래위로 휘두르며 신나게 악수를 즐겼다.
“잘 부탁해.”
사람들 속에 파묻힌 지스킬을 보며 레인은 그가 자신과는 서서히 멀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지스킬은 레인을 가장 먼저 챙기며 친하게 굴었다. 지스킬 마이어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지 의심될 정도로 대단히 성격 좋은 남자였다. 딱히 지스킬이 수상쩍은 짓을 벌여서가 아니라 레인이 원래부터 의심 많은 성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의심과는 별개로 어머니가 죽은 후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딜란과 무슨 대화를 한 것인지는 몰라도 레스터는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잠잠했다. 한 번 같잖은 질투를 했으니 당분간은 시달릴 거라고 생각했던 카이렌도 예상보다 깔끔하게 레인에게서 떨어졌다. 두 사람이 아무런 꿍꿍이도 없이 레인을 풀어 둘 리 없었다. 희망적인 관측을 하기에는 레인이 그동안 당한 게 너무 많았다. 그러나 무언가 알아내려고 해도 레인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이제나흐 공작가와 모드 백작가는 가까우면서도 머나먼 존재일 뿐이다.
결국, 어중간한 불안은 뒤로 밀어 둔 채 일주일이 흘러가고 레인은 유르딘을 다시 만났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재회였다.
지난번에 끌고 왔던 초라한 마차와는 차원이 다른 호화로운 마차가 레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작 두 명이 타기에는 지나치게 커다란 사두마차에서 내려온 유르딘은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레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쏟아지는 시선 속에 차마 그 손을 거절하지 못하고 붙잡은 채 마차로 올라왔다.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유르딘은 요란스럽게 레인이 앉을 자리를 정돈하고 혹시 멀미가 날 것 같지는 않은지 물었다. 아직 출발하기도 전인데! 대뜸 검진을 받자는 것도 그렇고, 유르딘의 눈에는 레인이 조금만 부딪쳐도 깨질 유리 공예 인형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카데미는 수도 근교에 자리 잡고 있는 터라 유르딘이 머무는 수도 내의 니제스 백작가 저택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침 인사를 나누고 갈 때까지 멀미가 날 수도 있으니 잠시 눈을 감고 쉬려는데, 유르딘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겁고 어딘지 모르게 집요하기까지 한 시선에 덜컥 겁이 났다. 단둘뿐인 공간이다. 유르딘은 레인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검사였다. 무력만을 따지자면 그저 유르딘의 사소한 기분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레인은 짓밟힐 수 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왜 겁도 없이 둘뿐인 같은 공간으로 들어왔을까? 한낮의 마차라지만, 창에 커튼을 치고 따로 불을 밝히지 않은 마차 안은 묘하게 서늘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레인은 유르딘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나친 생각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카이렌, 그 개새끼처럼 누군가를 짓밟고 강간할 리는 없지 않나. 게다가 레인은 유르딘의 옛 친구인 슈리아의 아들이며 건드리기에는 위험한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자제다. 기껏 레스터의 일로 약점을 잡았는데 그걸 무위로 돌릴 필요는 없지 않나? 아니, 아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유르딘은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다. 유르딘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 않나? 알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지?
깊게 생각하려는 순간, 다시 한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레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머리를 짚자 유르딘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레인, 무슨 일이지. 어디 아픈가?”
“아뇨. 괜찮아요. 잠깐 머리가 아팠을 뿐이에요.”
“뭐? 그럼 당장 마차를 멈추고 잠시 쉬었다가…….”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유르딘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속해서 당황했다. 너무 당황해서 레인에게까지 당황이 옮아 붙을 정도였다. 고작 두통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게 어색하고 낯설었다. 게다가 유르딘의 태도는 마치 레인이 죽을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심각했다.
“어차피 신관에게 가는 길인데 이대로 가는 게 낫지요. 별거 아니니까요.”
걱정이 끊이지 않는 유르딘에게 웃어 보이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진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네가 그렇다면야 알겠다만……. 무리는 하지 마라.”
그리 작은 키가 아닌 레인보다도 훨씬 크고, 체격은 레인과 비교할 수도 없이 커다란 남자가 한마디에 얌전히 자리에 앉는 건 마치 말 잘 듣는 사냥개를 연상시켰다. 왕국의 영웅에게 사냥개라니, 속으로 한 감상이지만 누가 들었다가는 경을 칠 만했다. 아무래도 유르딘이 너무 잘해 줘서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자야지. 다짐하며 눈을 감았지만, 열렬하게 따라붙는 걱정스러운 시선에 결국 눈을 떠 유르딘을 마주했다.
몹시도 걱정스러워하는 유르딘을 보고 있자니 생각을 앞질러 무례한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유르딘은 굳이 레인 자신 따위를 상대하지 않아도 모두가 말이라도 한 번 섞고 싶어서 안달하는 왕국의 영웅이다. 그런 유르딘이 바쁜 시간을 쪼개 일부러 레인에게 신경 써 주고 있다. 그렇게나 좋은 사람을 파렴치한 놈들과 동일 선상에 놓다니. 확실히 너무 시달리는 삶을 살아서 생각이 극단적으로 흐르는 모양이었다. 레인은 부정적인 생각을 접고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유르딘을 향해 슬며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니제스 경, 아까 표정이 안 좋아지셨던 거 같은데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 미안하다.”
유르딘이 조금 놀란 얼굴로 어색하게 입가와 턱을 매만졌다.
“갑자기 쳐 죽일 놈들에 대한 게 생각나서 말이다……. 음, 아직 처리 못 한 야만족들에 대해서 말이지.”
평화로운 마차 안에서 뜬금없이 야만족에 대해 떠올리다니. 조금 뜬금없지만 하도 전장에서 오랫동안 구른 유르딘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적당히 응수하려는데 유르딘이 입을 열었다.
“아침에 전하의 전령이 와서……. 생각이 났지 뭐냐.”
덧붙이기까지 하니 오히려 뭔가 변명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정말로요?”
곧장 대답하지 못하던 유르딘은 한참이나 있다가 고개를 젓고는 망설이며 입을 뗐다.
“네 팔에, 흉터가 있어서.”
“네?”
“오른팔 안쪽에…….”
유르딘이 레인의 오른팔 안쪽에 남은 흉터를 정확하게 가리켰다가 손을 거뒀다. 레인은 놀란 얼굴로 눈을 깜박이다가 얼결에 이제 와서 가려 봤자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왼손을 들어 흉터가 있는 쪽을 가렸다. 벌어진 손 틈으로 보이는 흉터는 의식하고 봐도 흐린, 가끔 레인 자신도 존재를 잊을 정도로 오래된 옅은 흉터였다. 워낙 몸에 자잘한 흉터가 많아서 어떻게 얻은 흉터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훈육이야.’
카이렌은 채찍을 즐겨 썼다. 레인이 다른 남자와 잤다고 오해를 할 때마다 채찍으로 내리치며 벌을 주었다. 카이렌은 그걸 훈육으로 표현했다.
‘열 대를 맞자. 맞을 때마다 수를 세는 거야.’
그렇게 말했을 때, 정말로 열 대에서 끝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자세가 흐트러져서, 숫자를 제대로 세지 못해서, 한 번에 제대로 해냈을 때도 태도가 오만불손하다며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매를 쳤다. 레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고통에 인내하며 그 시간이 끝나기를 비는 것밖에는 없었다.
도망칠 수 없다. 유일하게 도주에 성공했던 어린 날 이후, 별채에는 레인을 감시하는 눈이 몇 배로 늘었다. 아카데미에 가서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레인의 감시자였다. 레스터나 카이렌이 오랫동안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수많은 눈이 두 사람에게 레인의 이야기를 전했다. 항상 도망치고 싶었으나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도망치면 죽는다. 어른이 된 레인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었다. 독을 먹고 진작에 죽을 줄 알았던 놈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 레스터가 후계자의 자리를 확정했다고 해도 눈엣가시인 건 변하지 않는다. 도망치면 레인의 존재를 아이제나흐 공작가에서 지워 버릴 좋은 빌미를 제공할 뿐이다. 사실 레인은 왜 공작이 자신을 아직까지 너그러이 봐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어린 시절의 유르딘과 약속했다고 해도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서서히 중독되는 독을 먹여 죽이고 병사로 위장하면 감쪽같이 제거할 수 있을 텐데.
카이렌.
레인은 그 이유가 카이렌에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레스터와 카이렌은 서로가 유일한 친구 사이인 동시에 두 사람의 가문 또한 대대로 긴밀한 협력 관계다. 본래 혼인은 가문 간의 유대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계약이다. 물론 남자인 레인이 카이렌과 혼인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고 애인으로서 넘겨주는 정도겠지만.
평소에는 무시하는 레인도 나름 제 혈육이랍시고 얕보이는 게 싫어서 아카데미에서만은 최고급품을 쓰도록 하는 공작이 거기까지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에도 레인을 카이렌에게 넘겨주곤 했던 레스터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아카데미에 들어온 후 더더욱 집요하게 굴었던 카이렌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영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마치 제집의 개를 다루는 듯한 행동과 훈육.
얻어맞아 넘어질 때 어딘가에 긁히거나, 채찍으로 심하게 얻어맞은 상처들이 레인의 몸 곳곳에 가득해 하나하나 모두 신경 쓸 수도 없었다. 다행히 약만은 성실하게 발라 줘서 흉터가 많기는 해도 크게 눈에 띄는 건 없었다. 한여름이라 더워서 얇은 겉옷을 입으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있는 줄도 모르고 넘어가는 흉터를 한 번에 알아볼 줄은 몰랐다.
“어쩌다 생긴 것인지 물어봐도 될까.”
“이건, 그게……. 계단에서 굴렀어요.”
“굴렀다고.”
목소리가 지독하게 낮아 레인은 제풀에 찔렸다. 각종 무기에 정통한 전사들은 흉터의 모양만 봐도 어떻게 생긴 상처인지 안다고 들었다. 하지만 맞아서 생긴 상처라고 자백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레인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좀… 어지럼증을 겪을 때가 많아서요.”
“그런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낮은 신음이 유르딘의 목을 긁으며 흘러나왔다. 마치 제 상처인 양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신음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상처를 보듯, 유르딘은 괴로운 숨을 내뱉었다.
“네가 입은 게 여름옷이라 알았구나. 여름이라서……. 겨울이면, 몰랐을 텐데…….”
지금이 겨울이라면 한이라도 맺혔을 사람처럼 유르딘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두꺼운 겨울옷을 입으면 모르고 넘어갈 흉터긴 했다. 남의 눈을 의식하는 공작 덕분에, 긴 옷을 입어도 가려지지 않는 얼굴과 손등이나 목과 같은 부위에는 아무런 흉터가 없이 깨끗했으니까.
너무 뚫어져라 심각하게 레인의 상처를 보는 유르딘의 시선에 괜히 땀이 났다. 마치 유르딘의 눈빛은 레인이 흉터를 안고 살아가는 시간을 모두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르딘의 도움은 물론 고마웠지만, 치부를 들키는 건 원치 않았다. 묘한 초조함에 손에 땀이 배어났다. 그래도 어차피 이미 보인 흉터다. 계단에서 굴러서 생긴 대수롭지 않은 흉터로 설명했으니 필사적으로 가리는 게 더 어색할 것 같았다.
레인은 슬그머니 흉터에서 손을 떼어 내고 괜스레 바지에 땀을 닦았다. 그런데 그걸 본 유르딘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유르딘이 핏줄이 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는 게 보였다.
“잠시, 흉터를 직접 살펴도 되겠나.”
“…그러세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기백이라 얼결에 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진 행동은 레인의 상상 범위 밖의 기행이었다.
갑자기 유르딘이 레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만 해도 기함할 일인데 유르딘은 대뜸 레인의 발목을 잡고 그의 발을 제 무릎 위에 올렸다. 덕분에 레인은 훌륭하게 유르딘을 밟은 셈이 됐다. 물론 실제로 발에 힘을 준 건 아니니 밟았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누가 보면 밟고 있다고 볼 만한 꼴이었다. 시종이 신을 신겨 줄 때 비슷한 자세를 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발 받침대에 발을 올려놓은 채로 한다. 레인의 평생 남의 무릎을 밟을 일은 절대 없었다.
경악할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레인이 뭐라고 한마디 하기도 전에 유르딘의 손이 대뜸 레인의 바짓단을 걷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팔의 흉터를 보는 줄 알았는데, 유르딘은 거침없이 레인의 바지를 걷어 올렸다. 빳빳하게 다려진 바지가 순식간에 위로 말려 올라가 무릎을 넘어서까지 맨살이 드러나자 레인이 기겁했다.
“유르딘, 무슨……!”
엉겁결에 생각만 하던 이름을 부를 정도로 당황했으나 두 사람 모두 그걸 알아차릴 정신은 없었다. 순식간에 바지가 가장 위쪽까지 걷어져서 허벅지가 드러났다. 새하얗고 깡마른 허벅지는 다른 부분과 달리 비교적 흉터 없이 깨끗했다. 오히려 반대쪽 다리에는 가구에 찢긴 흉터가 남아 있었으나 이곳만은 예외로 깨끗했다. 카이렌이 한쪽 다리에만 페티시즘이 있는 건지 의심될 정도로, 유독 이 다리에는 상처를 남기지 않게 조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 의미도 없는 맨다리를 보고 유르딘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지금은 없구나.”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도 없는 말을 감격적으로 중얼거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지금까지 대화의 맥락으로 보면 흉터가 없다는 말이겠지만, 마치 거기 흉터가 있을 거라고 확신한 사람처럼 구는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의 손에 잘 드러나지 않는 맨살이 드러났는데도 레인은 썩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르딘이 드러내고 있는 애정에서 기반을 둔 안도에 마음이 간지러워진다.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기억이 짓눌렸는데도 감정의 잔해가 남아 있는 것처럼. 마치 유르딘의 애정을 오랫동안 바란 사람처럼 감격스러웠다. 유르딘이 보이는 과한 감정에 동화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레인은 막연히 추측했다. 이상할 정도로 눈가가 뜨거워졌다.
동시에 몸 또한 뜨거워진다.
레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경직시켰다. 레인의 허벅지 위에 유르딘의 커다란 손이 얹혔다. 기다란 손가락은 오랜 단련으로 마디가 굵고 단단했다. 섬세한 작업을 하기보다는 우악스레 적을 죽이는 데 특화된 손끝이 평소와는 쓰임을 달리해 조심스레 허벅지 위에서 미끄러진다. 순식간에 생각이 모조리 새하얗게 휘발된다. 차오르려던 눈물마저 밀려 올라오는 열기에 순식간에 증발했다. 고작 피부와 피부가 맞닿았을 뿐인데 놀라울 정도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읏…….”
잇새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레인이 당황했으나, 유르딘은 그런 레인의 몇 배나 당황하며 손을 뗐다. 유르딘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끌어 올렸던 레인의 바짓단을 급히 내렸다. 유르딘은 검의 천재라고는 믿기지 않는 어설픈 몸짓으로 일어나 물러났다.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손으로 가렸으나 귀 끝마저 가릴 수는 없었기에, 유르딘이 느끼는 당황은 새빨간 귀 끝으로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었다. 언제나 평정심을 지키기로 유명한 유르딘답지 않았다.
“미, 미안하다. 네가 그쪽을 쥐기에 거기도 흉터가 있나, 하고, 착각을…….”
차라리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태연히 말했으면 같이 태연한 척 넘길 텐데. 얼굴을 붉힌 채 말까지 더듬으니 마치……. 유르딘이 레인의 맨살을 보고 이상한 감정을 품은 것 같은 착각마저 느껴졌다.
“그…….”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뗐던 유르딘은 아까 괜히 말을 덧붙였다가 어색해진 걸 기억해 냈는지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레인도 지적하는 대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비록 마차 안은 침묵에 휩싸였지만, 계속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느니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위안이 되는 점 한 가지는 그사이 유르딘의 저택이 제법 가까워졌다는 점이었다. 새빨개진 두 사람의 얼굴이 진정될 즈음에 마차는 니제스가의 저택에 도착했다. 유르딘이 한 박자 늦게 에스코트하려 드는 걸 무시하고 반쯤 뛰어내리듯 마차에서 내렸다. 두 번 다시 경험하기 싫은 어색한 분위기였다.
마차에서 내리자 얼마 전 니제스 백작 위를 물려받은 유르딘의 동생, 그란델 니제스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란델은 유르딘과 키는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컸지만, 체격은 레인과 그다지 차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말라서 탄탄해 보이는 유르딘과 달리 키만 깡충 커 보이는 남자였다. 형제답게 얼굴은 제법 닮았는데 그란델 쪽이 훨씬 더 순한 인상이었다. 그란델은 환하게 웃으며 레인을 손님으로 반겼다.
“안녕하세요. 또 보네요.”
“네, 안녕하세요.”
두 사람이 인사하는 걸 본 유르딘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아는 사이인가?”
“네. 전에 한 번 뵀었죠.”
“응, 페브람 교수님을 오래간만에 뵙고 싶어서 들렀는데 우연히 만났지 뭐야. 그래서 잠깐 이야기 나눴어. 그렇지?”
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정치학 전공의 페브람 교수와의 면담 때 만났었다.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물러나려던 찰나, 그란델이 레인의 이름을 듣더니 그대로 붙잡았다. 형인 유르딘이 레인을 도운 걸 알고 있어서 호기심에 불러 봤다며,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잠시간의 대화를 청했다. 하인이 다시 차를 내오는 짧은 시간 동안,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바쁘게 이것저것 떠들던 그란델은 주머니에서 작은 사탕 통을 꺼내 레인에게 선물하고 가 버렸다. 애들이나 좋아할 법한 알록달록한 사탕 통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백작이라니, 워낙 특이해서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던 걸 본 유르딘이 레인의 어깨를 감싸며 말을 잘랐다.
“그럼 들어가자.”
“응, 내가 손님을 서 있게 했네. 자, 아이제나흐 공자. 자기 저택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요. 우리 형이 공자가 오기 일주일 전부터 준비한답시고 저택을 뒤집어엎었거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니제스 백작가의 저택은 확실히 휘황찬란했다. 아무리 그래도 레인 하나 때문에 저택을 뒤집어엎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부정은 하지 않고 가만히 웃었다. 넉살스레 말하는 그란델의 말투가 퍽 재미있기도 했다.
앞장서는 그란델의 뒤를 따라가기 전 유르딘을 돌아봤던 레인은 순간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유르딘과 그란델은 사이좋은 형제로 유명했다. 어디 빠질 데 없는 장자가 선뜻 후계자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은 왕국의 역사상 손에 꼽다시피 했다. 그런 유르딘과 그란델인데, 순간 그가 보인 눈빛은 결코 소중한 형제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차라리 레스터가 레인을 바라보는 가식적인 시선이 따스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갑고도 날카로운 살의가 느껴졌다.
“…….”
“레인?”
유르딘의 부름에 뒤늦게 레인이 굳었던 눈을 깜박였다. 아까 본 매서운 기색은 온데간데없다. 착각이었을까. 레인은 타인의 생각이나 기분에 민감했지만, 가끔 과하게 예민할 때도 있었다. 레인은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걸 떨쳐 내려 고개를 젓고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갔다.
원래 이 저택을 방문한 목적이 검진이었으니 바로 신관과 의원을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애매한 시간이니 아직 식사하기에는 이르다며, 유르딘은 레인을 정원으로 이끌었다. 니제스 백작가의 정원은 바깥에서 대충 본 것 이상으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레인은 유르딘을 따라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산책했다. 이따 받을 검진이 신경 쓰이기 시작해 대화에 집중을 못 하는 레인 대신 유르딘이 대화를 주도했다. 정원 곳곳에는 앉아서 쉴 수 있을 법한 큼지막한 바위나 벤치가 곳곳에 놓여 있었는데, 마치 며칠 새 가져다 둔 모양새로 아래에 풀이 자라지 않았다. 아까 전 그란델의 농담이 기억난 레인은 혼자 작게 웃었다. 설마. 그래도 덕분에 지치기 전에 쉬엄쉬엄 앉아 가면서 느릿하게 정원을 한 바퀴 돌았을 때는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떠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와 유르딘, 그리고 그란델과 함께 푸짐하게 식사를 했다. 그란델은 주방장이 특별히 신경 썼다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대파와 치즈를 얹어 구운 가리비와 아스파라거스를 갈아 만든 부드러운 녹색 수프로 가볍게 속을 채웠다. 메인으로 나온 볶은 토마토와 호박을 비롯한 각종 채소를 곁들인 농어 요리는 입안에서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러워서 위에 부담이 가는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는 레인도 남김없이 비울 수 있었다. 식사 후에는 달달한 초콜릿 무스와 상큼한 셔벗이 나왔다.
유르딘은 초콜릿 무스를 한입 먹더니 정색을 하고 내려놓고는 이어서 셔벗을 먹었다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둘 다 내려 두었다. 그러더니 차를 물처럼 들이켰다. 초콜릿 무스야 단 걸 종종 즐기는 레인의 입에도 꽤 달게 느껴지지만 비교적 상큼한 맛의 셔벗 또한 질색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단 음식이 힘겨운 모양이었다. 질색을 하며 내려놓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귀여웠다. 레인이 작게 웃자 유르딘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런 형을 놀리는 그란델이 합세해 제법 즐거운 식사 시간이 끝났다.
그제야 레인은 신관과 의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레인은 자신에게 인사하는 신관의 복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신관은 금실로 소매와 가슴께에 신전을 상징하는 문양을 새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신전에서 금실을 써서 옷을 지어 입을 정도면 수도 신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고위 신관이었다. 어지간한 귀족들도 신전에 직접 찾아가야만 만나 준다는 고위 신관이 아무리 아이제나흐라지만 멸시받는 차남을 위해 직접 나섰다는 게 놀라웠다. 새삼 유르딘의 왕국에서의 위상이 와 닿았다.
놀라워할 새는 없었다. 레인은 곧바로 가벼운 셔츠에 바지 차림으로 갈아입고 검사를 받기 시작했다. 검사라고 해도 레인은 별로 할 게 없었다. 신관이나 의원들이 누워 있는 레인에게 신성 마법을 쓰거나 이런저런 기구를 써서 검사할 때마다 지시에 따르는 게 다였다. 한가하고, 배부르게 식사한데다, 아침부터 나름 바지런히 움직인 탓인지 잠이 오기 시작했다. 유르딘이 졸리면 그냥 자라고 말했지만, 여러 사람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점점 시간이 흐르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검사가 엄청나게 길어지자 레인의 몸이 정신을 배반했다. 레인은 깜박깜박 졸다가 깨는 걸 반복했다. 의원들이 들이대는 검사 기구들이 갈수록 기상천외하게 변했다. 잠깐 졸다 깼을 때는 의원 하나가 레인에게 이상한 수정구를 박아 넣은 금속 천칭을 들이대고 있었다. 순간 꿈인 줄 알았다. 아무리 봐도 기묘한 장난질 내지는 사기의 냄새가 폴폴 풍겼지만, 방 안의 모두가 진지했다. 레인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이게 뭔가요?”
“마법적인 질병이 있는지를 검사하는 도구입니다.”
말도 안 되는 황당무계한 소리였다. 마법이라니, 안 그래도 마법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세계에서 레인은 특히나 마법과 조금도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필요 없는 검사라고 거절하려 했지만, 의원은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다 해야 한다며 요지부동이었다. 레인은 바보 같은 검사라고 생각하면서도 꾹 참고 모든 검사를 받았다.
결국, 레인이 검사를 마쳤을 때는 해가 길어진 여름임에도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예닐곱 시간 이상 이어진 검사에 완전히 녹초가 된 레인은 그란델 백작가의 저택에 하루 신세를 지게 됐다. 한 것도 없이 지친 레인을 찾아온 유르딘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르딘이 불편한 곳을 묻는 사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처음 봤던 고위 신관이었다. 직접 찾아온 신관은 지친 얼굴의 레인에게 가벼운 축복을 내리고 옆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결과는 곧장 나왔다. 신관은 천천히 레인의 전반적인 상태에 관해 설명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청천벽력처럼 느껴질 만한 상태였으나 레인에게는 가볍게만 들리는 결과였다. 어릴 때 독을 먹은 이래로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온 것치고는 지나치게 멀쩡했다. 태연하게 듣던 레인에게도 마지막 결과만은 놀라웠다.
“아이제나흐 공자는 마력 결핍증을 앓고 있으니, 앞으로도 주의하는 게 좋소.”
난생처음 들어 보는 생소한 병명이었다. 마력이니 뭐니 하는 건 레인과 큰 연관이 없었다. 무심코 유르딘을 돌아봤으나, 유르딘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긴 해도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의외로 흔한 병인 걸까? 순간적으로 떠오른 의문은 곧장 신관이 박살 냈다.
“이 시대에는 굉장히 희귀한 병이오. 이 병을 앓는 자는 동시대에 공자 외에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오. 마력 과다증의 경우에는 몇몇 독초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지만, 마력 결핍증은 사례가 몹시 드무오. 마력 결핍증이 심해지면 멀쩡히 산 채로 고통을 느끼며 죽어 가니, 자칫 잘못하면 마력 과다증보다 치명적일 수도 있소. 일반적인 검사 방법만 썼다면 알아내지도 못했을 거요. 니제스 경의 신중함이 빛을 발했구려.”
신관의 칭찬에도 유르딘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머쓱하게 한 번 웃은 신관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력은 생명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기본적인 구성요소 중 하나로서, 모든 생명체에는 소량이라도 마력이 존재한다. 마법적인 질병은 보통 체내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야 할 마력 균형이 깨졌을 때 주로 발병하는데, 이러한 마력 불균형은 마법의 운용에 실패했을 때 균형이 깨지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그러니 마법이 사장되다시피 한 이 시대에는 걸릴 일이 별로 없는 질병이었다.
이 시대에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부류는 셋으로 나뉜다. 신관, 마법사, 그리고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검사다. 이들 중 신관의 마법은 신을 향한 믿음에 기반을 두며 믿음이 깨지는 순간 신성력이라 불리는 체내의 특수한 마력이 모두 사라지기에 이런 종류의 질병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 시대의 마법사들은 마력 불균형을 초래할 정도의 고위 마법을 알지 못하기에 차라리 오염된 마력을 접해서 생기는 마력 오염증에 걸리지 마력 결핍이나 과다증과는 연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소드 마스터들은 단련하는 과정에서 체내의 마력을 활용한다. 오러 자체가 애초에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마력을 제외하고 단련해 얻은 특수한 형질의 마력으로 발동되는 것이라 마법적인 질병과는 연관이 없었다. 즉 세 부류 모두 체내의 마력이 줄어드는 마력 결핍증을 앓을 일은 없으니, 이 병은 자연스레 희귀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의 마법사들은 자유자재로 제 마력은 물론이고 주변의 마력까지 끌어다 사용했다. 마력 결핍증은 주로 자신의 한계를 넘은 마력을 사용한 자들이 대가처럼 앓게 되는 병이었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마력까지 끌어다 쓴 대가로 체내의 마력 균형이 깨어지고 손상된다. 마법사가 아닌 레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결국, 원인 불명의 병인 셈이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런 원인이 없는 병이 있을까? 게다가 이런 희귀한 병인데.
원인을 고민한다고 해도 전문가인 신관이 모르는데 레인이 밝혀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처음에는 착실히 듣던 레인도 하염없이 이어지는 설명에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아카데미의 원로 교수들보다 느릿하고 고저 없는 설명에 착실한 학생인 레인조차 졸음이 오기 시작할 무렵, 유르딘이 신관의 길게 이어지는 설명을 잘랐다.
“치료법은 어떻게 됩니까?”
“흠……. 약초를 배합해 만든 약이 있소. 별 이유가 없이 마력 결핍증을 앓는 건 물론 희귀한 경우이지만, 역사상 사례가 없지는 않소. 백 년도 더 전에 당시 디프랑 후작의 막내딸이 이 병을 앓았었는데, 그때 후작이 온 나라의 유명한 의원들을 모두 모아 약을 개발했소. 낫게 하는 건 아니고 마력 결핍증으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로 하는 것이오만……. 약을 복용하고 신전에서 꾸준히 계절에 한 번 정도 축복을 받으며 고갈된 마력을 채워 준다면 몸이 아프지 않고, 흠, 그러니까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오.”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신관은 오해를 한 것인지 부드러운 손길로 레인의 어깨를 도닥였다.
“걱정 마시오. 디프랑 후작의 막내딸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일흔까지 장수했다 하오. 공자도 신경 쓴다면 오래 살 수 있을 것이오.”
“네, 감사합니다.”
대답이 편치 않았다. 따라 일어나 인사하려는 레인을 만류한 신관은 피곤할 텐데 푹 쉬라며 물러났다. 레인이 앞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는 식으로 말한 신관의 호의가 쓰라리게 느껴졌다. 굳이 따지자면 레인에게는 아파서 빌빌대며 오래 사는 것보다는 적당히 살다 빨리 죽는 삶이 나았다. 정말로 레스터가 레인을 카이렌에게 넘겨 버릴 생각이라면 도망조차 불가능하겠지만, 정말 넘길 생각이라고 해도 공작이 정정한 동안에는 힘들었다. 졸업하자마자 어떻게든 기반을 닦아 주변에 저항할 만한 힘을 길러야 했다. 쉽지 않을 것이고 방해도 들어올 게 뻔했다.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쳐야 하는 상황에서 축복을 받기 위한 기부금이며 약값을 댈 생각을 하면 정신이 까마득했다. 가문에 손을 벌리면야 쉽겠지만, 그리 돈을 쓰면 나중에 빚으로 돌아온다.
조금 답답한 심사를 억누르며 고개를 들었던 레인은, 지쳐 보이는 유르딘을 마주했다. 레인도 버텨 낸 일정을 유르딘이 버텨 내지 못했을 리는 없는데도 그는 지나치게 힘겨워 보였다. 유르딘의 얼굴은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슬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독하게 무거운 얼굴이 보기 힘겨웠다. 입 여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유르딘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왜. 왜, 너는…….”
뜻을 모르면서도 듣는 사람이 조마조마할 정도로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어딘지 방해할 수 없는 분위기에 레인은 입을 다물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으나 유르딘은 끝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 두지 않았다. 레인을 비켜 갔던 시선을 다시 똑바로 마주했을 때는 이상한 기색이 모두 사라진 후였다. 유르딘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피곤할 텐데 쉬어라.”
“니제스 경? 대체 무슨…….”
“미안하다.”
유르딘은 레인의 부름을 고개를 작게 까딱이는 걸로 대신하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유르딘의 너른 등이 보인다. 유르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레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르딘은 모르고, 유르딘이 하는 말을 레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상호 간의 몰이해와 단절, 끔찍하게도 기시감 느껴지는 갑갑함. 그 언젠가도 봤던 뒷모습 그대로, 유르딘이 레인에게 등을 돌리고 그대로 가 버리고 있었다.
“헉…….”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동시에 처음 보는 듯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딱딱하고 차가운 천장 아래, 레인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과 그 수만큼의 적의와 그리고 머리를 울리는 기분 나쁜 욕설들. 새하얀 창밖의 풍경, 그에 대조되는 붉고 검은 태피스트리. 느껴질 리가 없는데도 실제 겪은 것처럼 느껴지는 온몸의 둔통과 기분 나쁜 쾌감의 잔재. 모든 광경과 감각들이 녹아내려 끔찍한 지옥이 재림한다. 그리고 그 지옥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당신. 유르딘 니제스.
눈에 힘이 풀려 있던 기억 속의 레인과 달리, 현실의 레인은 눈을 부릅떴다. 기억 속의 유르딘이 입을 벌린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막을 수 없다. 유르딘이 무어라 속삭이는 말들이 레인에게 비수를 꽂았다. 고작 말일 뿐인데 폭력이나 강간보다도 더 두려웠던,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괴로웠던, 그때의…….
“아… 아아, 악!”
레인이 갑작스레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생각이 기억과 함께 뭉개진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속을 누군가가 제멋대로 헤집는 것 같았다. 온몸이 떨리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강렬한 공포심이 레인의 목을 조른다. 갑작스러운 이상에 놀란 유르딘이 다가와 레인을 붙들었다. 시체처럼 뻣뻣한 사지를 붙드는 유르딘의 얼굴이 참담하게 변했다. 식은땀과 눈물에 젖은 레인의 얼굴이 시체처럼 새하얬다.
“레인! 레인, 레인……! 괜찮나?”
“으윽, 흑…….”
“레인, 기다려라. 당장 의원을…….”
다급한 상황에 유르딘이 레인을 놓고 일어났다.
안 돼.
레인은 자신을 놓고 그대로 일어나려는 유르딘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마른 몸에서 나온다고는 믿을 수 없이 강한 힘이다. 레인은 필사적으로, 마치 이대로 유르딘을 놓으면 죽어 버릴 것처럼 처절하게 붙잡았다. 필사적인 반응을 본 유르딘이 침착하게 간신히 제 감정을 고르고 레인을 마주했다. 간신히 침착하게 제 혼란스러운 심사를 억누르고 다정하고 자상한 유르딘 니제스를 쥐어짜 덧씌운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하나의 소망을 담고 레인을 응시한다.
“윽…….”
그제야 조금 안도한 듯이, 레인은 울음과 같은 신음을 흘리며 축 늘어졌다. 유르딘이 안절부절못하며 늘어지는 몸을 받았다. 자신을 단단하게 품에 안아 주는 온기 속에서 레인은 엉켜 있는 기억의 실타래를 건드리는 대신에 제게 붙어 있는 체온에만 매달리고 집중했다. 레인은 뺨을 비비며 혼재된 기억과 감정을 추스르지 않고 그대로 토해 냈다.
“가지 마세요, 유르딘……. 제발.”
“레인, 난.”
“두 번 다시는 저를 두고, 또다시… 그런…….”
“뭐?”
토막토막 이어지는 말에 놀란 유르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대답해 줄 여력은 없었다. 더듬더듬 속삭이는 사이 다시금 두통이 찾아왔다. 그야말로 머리를 두 쪽으로 동강 내는 듯한 두통에 다시금 눈물이 줄줄 흘렀다. 유르딘은 버르적거리는 레인의 몸을 도닥이며 끌어안았다. 유르딘의 어깨가 레인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갔다. 잠시 말을 잊은 채 유르딘이 레인을 조금 답답할 정도로 꽉 붙잡았다. 레인의 눈물이 천천히 멈추고 떨림이 잦아들 때쯤에야, 유르딘이 꽉 끌어안은 손을 풀고 레인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지고의 보물을 대하듯 경건하게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덜어 낸 유르딘이 속삭였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안심해라, 레인.”
그런 일이라는 게 뭘까. 의문보다는 유르딘의 말이 주는 안도감이 훨씬 컸다. 한참을 오열한 탓인지 몸에서 긴장이 풀리자 순식간에 잠이 쏟아졌다. 의식의 끈을 완전히 놓기 직전, 유르딘의 목소리가 레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널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칠 테니까.”
당신의 그 간절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생각을 잇지 못하고 레인은 그대로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
남은 하루를 종일 잠으로 보냈다.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떠오른 지 제법 지난 아침인지라, 느긋한 식사를 즐기고 점심 무렵에나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니제스 백작가의 저택에서 하루 쉰 레인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레인의 병에 대한 소식이 아이제나흐 공작가로 흘러 들어갔을 텐데도 별다른 말은커녕 두어 번 레인에게 몸에 좋다는 약을 보내왔을 뿐이다. 병을 핑계로 시골구석에 처박아 둘 줄 알았는데 유르딘과의 친분 덕에 처지가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레스터와 카이렌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했다. 동시에 레인의 삶 전체에 드리웠던 폭력이나 강간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일상이되, 지금까지 구가해 본 적 없는 비일상의 나날이 찾아왔다.
두 사람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운 사람은 지스킬 마이어였다. 첫 만남 이후 꾸준히 레인에게 얼굴을 비치던 지스킬은 아예 아침마다 레인의 기숙사 방 앞까지 찾아오기 시작했다. 과한 친절은 분명 수상한 이유가 감춰져 있으며 상응할 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게 레인의 평소 지론이었기에 멀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 좋게 웃으며 매일같이 유쾌하게 인사를 건네는 지스킬에게 언제까지고 경계만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제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남자를 한결같이 밀어내기엔 레인은 고독했다.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리자마자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지스킬은 한미한 남작 가문 출신에 후계자조차 아닌지라 타고난 것은 별 볼 일 없지만, 카니예와의 전쟁 내내 혁혁한 공을 올려 장래를 촉망받는 기사였다. 최근 지스킬은 왕국에서 제법 유서 깊은 가문인 나이젤 백작가의 세이라 영애와 약혼을 맺기도 했다. 지스킬의 앞에는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지스킬은 그러한 자신의 가치를 잘 알았기에 언제나 자신만만했지만, 오만하지는 않은 유쾌한 성미로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지스킬이 인기를 끄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사실 그의 곁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건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지스킬은 유르딘 니제스와 긴밀한 인연이 있었다.
소년을 막 벗어난 아카데미의 젊은 청년들은 유르딘의 공적과 화려한 검술에 매료된 가장 열광적인 추종자들이었다. 유르딘이 무려 직접 지스킬을 찾아온 날, 그가 아카데미 정문에 들어선 지 5분도 안 되어 ‘유르딘 니제스가 아카데미를 방문했다’는 소식이 아카데미 전체에 퍼졌다. 그때 지스킬은 검술 학부에서 사귄 친구들이나 레인과 함께 모여 있었는데 유르딘이 지스킬의 방에 들어온 순간, 레인은 그 자리에 있던 시커먼 덩치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사랑에 빠진 표정을 짓는 걸 똑똑히 봤다. 덩치가 산만 한데다 거칠고 과격한 언동이 몸에 밴 검술부 남학생들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줄을 서서 차례로 유르딘과 악수를 나누었다. 유르딘이 그 자리의 학생들에게 ‘레인은 몸이 약하니 어려울 때 도와 달라’고 말했을 때는 아예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검술부 남학생들이 목숨 바쳐 유르딘의 명을 따를 법한 열렬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유르딘의 말은 효과가 지나치게 좋았다. 때맞춰 유르딘이 레인을 위해 마차를 보내고 직접 찾아가 저택에 초대했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지스킬에게 쏠리던 관심은 레인에게도 옮겨 붙었다. 레스터와 카이렌이라는 거대한 그늘에 가린 레인에게 선뜻 손을 뻗지 못했을 뿐, 진작부터 내심 레인에게 좋은 감정을 지닌 학생들이 많았다. 레인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레인의 왕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얼굴은 타인의 호감을 샀다. 굳이 연애적인 감정을 품지 않더라도 외형적인 미는 타인의 호감을 사기 쉬운 요소였다. 거기에 명석한 두뇌나 달관한 태도 또한 일부 학생들에게는 의연한 태도로 멋있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카데미는 외부의 권력 구조를 그대로 승계하기 때문에 하급 귀족이나 평민 출신의 학생들은 같은 학생이면서도 알게 모르게 차별당하거나 무시받기 쉬웠다. 레인은 그런 학생들만큼이나 괴로운 처지였다. 강간까지는 타인이 잘 모르는 사정이지만, 카이렌이나 레스터에게 모욕적으로 뺨을 맞거나 걷어차이는 정도를 본 사람은 제법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비굴하게 굴지 않고, 아파서 자주 병실 신세를 지면서도 높은 성적을 유지하는 레인을 동경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학생들이 슬금슬금 레인에게 다가와 살갑게 말을 걸었다. 레스터와 카이렌이 잠잠한데다 유르딘이 꾸준히 지스킬과 레인을 찾아오는 날이 이어지자 제법 세력 있는 가문의 귀족 학생들까지 레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 학생들은 순수하게 친분을 쌓기보다는 레인과 친해질 때의 이점을 계산한 것이겠지만, 레인 또한 인맥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인지라 오히려 반가웠다.
몇 년간 고립되듯 지낸 게 무색하게 순식간에 레인은 다른 학생들과 친분을 쌓았다. 다른 학생들과의 친교에 다가오는 시험까지 많은 일이 한 번에 몰렸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아카데미의 공부를 하는 틈틈이 레인은 제 병에 대해서 조사했다. 두꺼운 약초학 서적을 읽던 레인은 눈을 문지르며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에는 앞으로 약 한 달분의 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레인이 마력 결핍증 때문에 먹는 약은 신전에서 조제하고 아카데미 의원의 확인을 받아 안정성을 보장받은 물건이었다. 안전성을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약을 손에 들고 먹으려고 하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의심이 솟아났다. 원래 약이라면 지겨울 정도로 많이 먹어 무심하게 삼켰었는데, 갑자기 의심이 솟아나 약을 삼키려고만 하면 자꾸만 불안해졌다. 약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작 한 알을 먹는 데 몇십 분을 쓰는 일이 반복됐다. 이 약을 먹어서 제 인생이 파멸할 것 같다는 불길한 망상이 자꾸만 레인을 잠식했다.
망상 또한 근래의 레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니제스 가문의 저택에서 떠올렸던 근거 없는 망상은 이후로도 종종 레인의 기억을 잠식했다. 단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황량한 겨울 성과 그 아래 가장 차디찬 곳에 자리하던 지하 감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버려진 레인 자신의 모습. 안 그래도 비참한 레인의 삶을 더더욱 불안하게 할 만한 기억들은 더더욱 불안을 부추겼다.
‘어떻게든 해야 돼. 도움을 청해야 해. 손을 잡아야 해.’
자신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환청인지 모를 익숙한 목소리가 들릴 때면, 레인은 으레 유르딘을 떠올렸다. 하지만 유르딘을 떠올리면 곧장 등을 돌리고 가 버리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이후는 불안한 사고의 반복이라, 레인은 애써 헛된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원래부터 종종 환청에 시달리는 등 그다지 건강한 정신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가속화되는 것이 마력 결핍증의 영향이거나 아니면 약의 영향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망상과 환청이 이어진다는 말은 남에게 쉬이 상담할 수 없었다. 병이나 약에 대한 불안과 의심을 해소하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시작한 공부지만, 조금 버겁기는 했다.
공부를 이어 가던 레인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먹는 약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연구 일지를 접할 수 있었다. 일지를 읽던 중 레인은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아냈다.
예전에 마력 결핍증을 앓았던 디프랑 후작의 막내딸인 에일리야 디프랑은 레인과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마력 결핍증을 앓던 에일리야 디프랑은 베델 후작의 동생과 결혼해 베델 후작가의 일원이 됐었다. 베델. 지금은 멸문한, 레인의 어머니 슈리아의 가문이었다.
에일리야 베델이 된 그녀는 신관의 말대로 마력 결핍증을 앓았으나 건강하게 살았다. 그녀는 남편과의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 에일리야의 딸은 외국으로 시집갔고, 가끔 사촌인 베델 후작과 연락했다. 다만 그 이후의 대부터는 연락이 완전히 끊겨 지금은 아예 남이 되어 있었다. 에일리야 베델의 유일한 혈육이 외국으로 나갔으니, 결국 에일리야의 피는 베델 후작가에 섞이지 않은 셈이다. 그러니 두 사람이 똑같이 앓았던 마력 결핍증이 유전에 의한 병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마력 결핍증을 앓은 환자는 몇백 년간 에일리야와 레인 단둘뿐이었다. 하필이면 우연히, 베델 후작가와 연관된 두 사람이 마력 결핍증에 걸린다는 건 이상했다.
“저주 같은 걸까.”
“옛날이야기 같은걸.”
레인이 중얼거린 말에 지스킬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저주라니, 확실히 옛날이야기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물론 이 시대에도 저주와 같은 마법은 남아 있었으나 기껏해야 감기에 걸리게 하는 정도지 마력 결핍증처럼 큰 병에 걸리게 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력 결핍증이라면 마법과 연관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짐작 가는 게 정확히 없을 뿐이다.
“기왕 마력 결핍증에 걸릴 거면 옛날 마법사들처럼 깽판이라도 치고 걸렸으면 좋았을걸.”
“어째 진심처럼 들린다.”
“진심이니까 그렇지.”
무섭다며 너스레를 떠는 지스킬을 책으로 한 번 쿡 찔러 준 레인은 다시 한번 책을 펼쳤다.
이 세상에서 마법이 사라진 것은 이미 칠백 년 전의 일이었다. 옛 시대에는 마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정도로 마법이 발달했었다. 위대한 마법사들은 마법으로 기상을 조종하고 자연재해를 막기도 했다. 인간이 아닌 이종족이 지상을 활보하며 인간을 도왔다. 이토록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마법이었으나 역으로 해를 끼치기도 했다. 과도한 욕심을 부리다가 제 마력에 취해 자아를 잃은 마법사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해악을 끼친 마법사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오싹한 전설이나 동화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세상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던 마법은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몰락했다. 전 세계적으로 갑작스러운 마력 소실 현상이 발생해 위대한 마법사들조차 마력을 잃었다. 정체불명의 현상에 세상은 온통 뒤집어졌다. 당시의 고위층은 모조리 마법사였는데 힘을 잃은 마법사들은 자리를 빼앗겼고 순식간에 세상은 혼란해졌다.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암흑기가 지나가고 세계의 마력이 회복됐을 때는 이미 마법에 능통한 이종족은 사라지고 제대로 된 마법사들 또한 모두 죽은 후였다. 원래 마법사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마법 자체를 자산으로 생각했던지라 대부분의 마법은 도제식으로 다른 마법사에게 가르쳤다. 가르칠 마법사가 없으니 마법 문명 또한 회복하지 못하고 자연스레 쇠락했다. 세계 전체의 마법이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없다. 신의 심판, 자연재해, 음모, 그 외에 온갖 추측만을 이어 갈 뿐이다.
레인 자신의 병도 마찬가지다. 원인을 모른다. 마법에 대한 지식도 마법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으니 밝혀내기도 힘들다. 잡을 수 없는 원인 따위에 매달릴 필요 없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물론 거기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걱정되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게 기본 조건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좋은 상태로 공부에 임했으니, 딴생각을 조금 하기는 했어도 지금까지 중에 가장 완벽한 성적이 나왔다.
좋은 성적을 받고도 레인은 마음이 무거웠다. 여름 방학이 오기 전의 마지막 시험이다. 간신히 아카데미에서 사람다운 생활을 하게 되자마자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끔찍할 뿐이었다. 사실은 레스터도 카이렌도 손대지 않는 김에 홀로 조용히 아카데미에 남고 싶었지만, 최근 레인이 조금씩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딜란이 직접 레인을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최대한 가는 날을 미뤄 보려고 레인은 병실을 점거하고 몸이 좋지 않으니 며칠 쉬어 가겠다는 편지를 썼다. 의원의 소견서를 동봉하는 게 신빙성이 높아질 것 같아서 써 줄 것을 부탁했지만, 의원은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거 공작 각하께서 아시면 경을 칠 거라고요.”
“내 일에 그렇게 신경 안 쓰실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만약 걸려도 레인 님이야 괜찮으시겠지만, 저 같은 아랫것은 조금만 심기를 거슬려도, 꽥.”
이제 제법 친해져 성 대신 이름을 부르게 된 의원이 과장되게 손을 들어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레인이 혀를 찼다.
“여기서 얌전히 죽은 듯이 있으면 되잖아. 누가 오면 다 나았다고 하고 가면 되고. 너랑 나만 입 다물면 둘 다 편해.”
“레인 님만 편하시겠죠. 저는 일도 늘어나거든요?”
“안 아픈데 무슨 일이 늘어나. 안 들키게 잘한다니까.”
레인의 끈질긴 제안에 결국 의원이 질색하며 도망쳤다. 쫓아갈까 했지만, 도망치는 게 무슨 검술부 학생들처럼 빨라서 단번에 포기했다. 저렇게까지 질색하는 걸 보니 무리다. 하기야 이런 사소한 청탁을 하나둘 받아 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권위를 내세워 찍어 누르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겠으나 레인은 귀족이기는 해도 누군가에게 부당하고 강압적인 명령을 내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숨을 쉬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레인이 침대 위에서 버티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유르딘이었다. 얼음을 갈아 위에 시럽을 뿌린 몹시 희귀하고 비싼 간식을 챙겨 온 유르딘은 녹기 전에 먹으라며 대뜸 레인에게 건넸다. 달달한 간식을 모두 비우고 나니 유르딘이 용건을 꺼냈다.
“조금 전 아이제나흐 공을 만나, 널 내 영지에 초대하기로 허락을 받았다.”
“영지요? 전하께서 드디어 영지를 내려 주신 건가요?”
“그래. 네가 원한다면 내 영지에서 방학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저야 물론 좋죠. 아니, 그보다 축하드려요.”
가문의 후계자가 아닌 유르딘에게 새로운 작위를 내리고 영지를 하사할 거라는 소문은 그가 북방에서 귀환할 때부터 수도를 들쑤시고 있었다. 놀랍다기보다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이제 그는 유르딘 니제스 렘샤이트, 왕의 기사인 유르딘 니제스 경이자 새로운 귀족 가문의 수장인 렘샤이트 지방의 후작으로서 왕국 남부 국경선에 자리한 비옥한 영지를 하사받았다. 단번에 후작 위라니. 파격적인 인사였으나, 유르딘 덕분에 왕국의 크기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났으니 실로 타당했다. 유르딘이 하사받은 렘샤이트는 라인셀 남부에 위치한 왕국 아벨라드와 수십 년 간격으로 뺏고 빼앗기는 지방이었다. 비옥한 곡창 지대라 작물 생산량이 어마어마하지만 전투가 워낙 잦은 지역이었으나, 유르딘을 후작으로 내세우면 산발적인 전투조차 억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유르딘의 존재는 그 정도로 강렬했다. 나름 큰 책임이 따르는 땅을 받았으나, 유르딘은 그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듯 웃는 낯이었다.
“렘샤이트는 휴양지로도 유명한 곳이더군. 특히 남부에 자리한 숲과 호수가 가장 유명해. 왕족들이 여름휴가를 갔던 곳이기도 하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이라 네가 지내기 좋을 것 같아. 성도 한창 정비 중이야. 원래 국왕 전하의 직할령으로 대리인이 머무르며 관리한 곳이라 누추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네가 지내기에는 모자랄 수 있으니 당장 준비하라고 연락을 해 뒀다.”
“아니, 전 그냥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 레인, 너는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 마땅해. 일단 별장 쪽이 가까운 데다 규모도 작아 수리가 빨리 끝날 테니, 수도에서 사흘 정도 머무르다가 곧장 별장으로 떠나자. 느긋하게 지내면 좋을 거야. 시험공부가 고단했으니 좋은 휴식이 되겠지.”
“…….”
허락을 듣기 전부터 준비가 참으로 일사천리다. 레인이 수락하기도 전에 온갖 계획을 꼼꼼히 세워 두고 신이 나서 떠드는 유르딘의 모습이 마치 제 또래들 같아서 새로웠다. 환한 미소와 들뜬 목소리는 레인까지 설레게 만들었다. 병실에 한없이 누워 있고 싶다는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져, 레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르딘의 영지에 가더라도 딜란이 부른 이상 한 번은 공작가의 저택에 가야 했다. 최소한 며칠은 머물러야겠지. 그래도 곧 유르딘과 함께 떠난다고 생각하면 며칠 정도의 괴롭힘이야 웃으면서 견딜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나가려던 레인은 주인 없이 빈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의원에게 억지 부탁은 하지 말 걸 그랬다. 방에 남아 있었으면 이 기회에 유르딘도 소개해 주는 건데. 돌아올 때 선물이나 사 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곧장 따라 나오지 않는 레인을 유르딘이 불렀다. 레인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네, 가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택에 가는 게 끔찍했는데, 이제는 돌아가는 게 즐겁기까지 했다. 돌아가는 길 또한 유르딘이 함께 있어서 힘들지 않았다.
저택에 돌아가자마자 딜란을 만났다. 딜란은 별로 마음에도 없어 보이는 레인의 건강을 염려하더니, 유르딘과 함께 잘 다녀오라며 다정한 척 어깨를 두드렸다. 대체 유르딘과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인지 몰라도 제법 기분이 좋아 보였다. 레인에게도 퍽 호의적으로 구는 태도 덕에 지내기 편해진 건 좋았지만, 동시에 딜란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조금 저조해지려는 레인의 기분을 들뜨게 한 건 레스터의 부재였다. 레스터는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영지로 내려가, 레인과 만날 일이 없었다.
레인의 기분이 좋아지자 반대로 공작 부인인 아나벨은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의도적으로 피했으나 결국 이틀째 되는 날 정면으로 마주쳤다. 보자마자 아나벨은 시비를 걸어 댔다.
“네 어미처럼 뻔뻔한 낯짝이구나. 하는 행동도 똑같고. 그 꼴로 요즘 귀족 영식들을 꾀고 다닌다지?”
어이가 없었다. 레인의 어머니인 슈리아는 정략결혼의 희생양이지, 딜란을 꾀어낸 적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꾀어낸 쪽은 아나벨이었다. 물론 시기상으로는 슈리아보다 아나벨을 먼저 만났지만, 몇 달에 걸친 슈리아와의 약혼 기간에도 딜란을 만나 아이까지 가지는 선택을 한 것은 아나벨이었다. 레인은 화를 내는 대신 가만히 아나벨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나벨의 입에서 슈리아에 대한 모욕이 이어지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다른 쪽을 비꼬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님. 어머님보다야 확실히 제가 뻔뻔하게 질긴 낯짝이긴 하지요. 저와 달리 어머님의 얼굴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열한 도발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호칭 또한 아나벨의 속을 긁었다. 결국, 분개한 아나벨이 그대로 레인의 뺨을 쳤다. 레인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너 따위는 내 아들이 아니야! 이 천박한 놈이!”
“시장통에서 평민들과 함께 구르시던 분이 할 말은 아니군요.”
얼굴이 돌아간 채, 레인은 아나벨을 쏘아보며 정반대로 침착하게 속삭였다. 아나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나벨의 가문이 몰락해 평민과 별다를 바 없다는 생활을 한 일은 숨길 수도 없는 비밀이었지만, 권력의 정점에 선 아이제나흐 공작 부인으로서는 들어 본 적 없는 모욕일 터였다. 아나벨이 참지 못하고 손을 올리자 그대로 둘 수 없었던지 지켜보던 하인이 끼어들어 대신 맞았다. 아나벨이 하인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내리치려 하자, 뒤에 서 있던 하녀들이 몸을 던져 아나벨의 앞을 막았다. 레인은 사용인들의 너머에서 태연하게 아나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손부터 올리시지 않나. 천박한 생리는 모조리 깨치고 계신 듯한데……. 이십 년이나 지났는데 역시 좋지 않은 버릇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너, 감히 내게……. 너, 매를 맞고 발가벗은 채 쫓겨날 줄 알아!”
“말씀 차분히 하세요. 그 자리에 앉으신 지가 벌써 17년이 지났는데 흥분하시니 여전히 평민 같은 억양이 나오잖습니까. 조금 더 교양을 익히셔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괜찮습니다. 배움은 평생 해도 모자란 것이라 했으니, 이제부터 해도 되겠지요.”
분을 못 이겨 소리를 치는 아나벨을 비웃으며 레인은 몸을 돌렸다. 굉장히 유치한데다가 아나벨의 말마따나 천박한 대응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씩씩대는 그녀를 보니 속이 후련해서 후회는 없었다. 모든 일에 실리를 따지는 딜란이 대체 왜 아나벨을 선택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달아오른 볼을 식히기 위해 정원으로 나와 대충 아무 의자에나 걸터앉았는데 유니가 다가왔다. 제 어머니의 나쁜 버릇을 조금도 닮지 않은 어린 소녀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수건을 레인에게 건넸다. 얼결에 받아 보니 차가웠다. 레인이 가만히 손수건을 내려다보자 유니가 안절부절못했다.
“이건 왜?”
“뺨이 붉어요.”
“이 정도는 괜찮아.”
“그래도요.”
유니가 한참을 머뭇거렸다. 제 어머니의 실수에 대해 제가 사과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귀족 사회에서는 사죄의 말은 상대에게 책잡힐 여지가 있어서 쉽게 쓰이지 않는 법이다. 특히나 대신하는 사죄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물론 친한 가족 간에야 쉽게 할 법도 하지만, 아나벨이 워낙에 레인에게 날을 세우고 있으니 조금 예외였다. 어린 나이지만 귀족의 생리에 대해 제대로 꿰고 있는 것을 보니 마냥 철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어린애다. 가족들이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이복 오빠에게 와서 직접 물에 적신 손수건 따위나 건네주고 있는 것을 보면.
레인은 손수건의 물기를 가볍게 짜서 뺨 위에 얹었다. 어두웠던 유니의 얼굴에 단번에 화색이 돌았다. 해사한 미소가 귀여워서 레인은 마주 웃어 주었다.
“괜찮아.”
중의적인 말에 유니가 한결 안심한 기색을 보였다. 유니는 레인에게 손수건을 반강제로 선물하고는 주변을 살피다가 그대로 뛰어서 도망치듯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레인과 함께 있지 말라는 경고라도 들은 모양이었다. 만약 유니와 함께 있던 게 들킨다면 아나벨의 분노를 받는 쪽은 자신일 테니, 레인은 실크로 된 부드러운 손수건을 우연히 흘린 것처럼 정원 한구석에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딜란이 레인을 부르기에 혼날 것을 나름 각오했으나 뜻밖에 그는 경고로 끝낼 뿐 따로 처벌은 하지 않았다. 유르딘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었다. 대신 근신을 명받았으나, 원래 방에 틀어박혀 있는 레인에게는 평소와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저택에서 지내다가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
약속한 사흘이 지나자 유르딘이 마중을 나왔다. 레인을 마중 온 건 엄청난 규모의 마차였다. 거대한 마차 내부를 개조해 푹신한 침대를 들인 모습에 레인은 할 말을 잃었다. 이제는 일일이 놀랄 기력도 없었지만, 마차에는 두 사람이 타는데 침대는 하나뿐이라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르딘의 답은 간단했다.
“어차피 이동 중에만 쓸 침대라 상관없다. 네가 편히 쓰도록 해.”
아무리 그래도 유르딘을 앉혀 놓고 레인 혼자 편안하게 침대에 퍼질러 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절대 잠들지 않을 거라는 각오는 생각에만 그쳤다. 레인은 멀미와 피로에 못 이겨 저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처음에만 조금 부끄러웠지, 익숙해지니까 나중에는 편히 잘도 잤다. 레인은 그렇게 편안하게 이동했다.
며칠간의 이동이 끝나고 도착한 영지 외곽의 별장 또한, 마차를 개조한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눈 돌아가게 화려했다. 어째 유르딘이 사치의 규모를 조금씩 단계별로 키워 레인을 적응시키는 것도 같았다. 모든 게 레인의 위주로 맞춰진 별장에서는 일주일간 머무르기로 되어 있었다.
유르딘으로서도 처음 도착한 자신의 영지일 텐데, 그는 곧장 성으로 떠나는 대신에 별장을 머무는 일주일간 한시도 레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첫날, 신전으로 가서 축복을 받은 덕에 그 어느 때보다 상태가 좋아졌다.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 채 레인은 유르딘과 근처 산책로를 걷거나 호수 위에 배를 띄우며 나름 활동적으로 돌아다녔다. 유르딘은 하인을 물리고 직접 노를 저어 레인과 호수를 가로지르는 걸 즐겼다.
어느 때라도 레인은 유르딘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이건 마치 약혼녀에게나 하는 행동이 아닌가 싶었지만, 정신을 차려 보면 항상 유르딘의 말과 행동에 말려든 채였다.
별장에서의 꿈같은 일주일이 끝나고, 마침내 찾아간 성에는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의 정체는 베른 테일러. 유르딘의 부관이었다. 멋대로 여행 일정을 늘려 일주일씩이나 논 상관에게 화가 난 상태를 여실히 드러낸 베른은 유르딘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달려와 그대로 끌고 집무실로 사라졌다. 성에 도착해 베른에게 끌려간 후, 유르딘은 몹시 바빠졌다. 막 영지를 승계받았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일주일간 한시도 빠짐없이 붙어 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유르딘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혼자 남은 레인은 처음 한 주 정도는 렘샤이트 성의 서고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데 열중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도 시들해졌다. 시험 전까지 머리 아플 정도로 책을 본데다, 며칠간 활동적으로 돌아다녔더니 자꾸만 바깥 풍경이 눈에서 어른거렸다. 레인은 지루하게 시간을 허비했다. 언제 카이렌이 찾아올까, 또 그 짓거리를 해야 할까 고민하던 레인에게는 그 지루함마저 신선하게 느껴지긴 했다.
마음껏 시간을 낭비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작스레 지스킬이 성으로 찾아왔다. 당연히 유르딘에게 용건이 있는 줄 알았더니, 지스킬은 유르딘에겐 짧게 인사만 마치고 곧장 레인의 방으로 달려왔다. 노크와 거의 동시에 문을 벌컥 연 지스킬이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오, 친구여. 내가 몹시 그리웠겠지?”
“없으니 조용하고 좋던데.”
“이것 참 다정한 말이군.”
두 사람은 킥킥 웃고 나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인사를 나눴다.
지루해진 레인에게 지스킬은 좋은 놀이 상대였다. 중요한 임무로 여기까지 온 줄 알았더니 별일 아닌 모양이었다. 지스킬은 하루에 두 번, 십 분 정도 유르딘에게 뭔가 짧은 보고를 할 뿐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넌 대체 일을 하러 온 거냐, 놀러 온 거냐고 용건을 물어도 지스킬은 나름 열심히 일하고 있다며 의뭉스레 웃기만 했다.
부지런히 일하는 대신, 지스킬은 시간 대부분을 레인과 놀면서 지냈다. 지스킬과 책을 읽거나-정확히는 레인만 읽고, 지스킬은 책을 얼굴에 덮고 잠을 잤다- 체스를 두거나 카드놀이를 했다. 레인은 가끔 지스킬의 취미에 맞춰 검술 대련을 구경하고 때때로는 거대한 영주관 주변을 산책했다. 산책은 조금씩 범위가 넓어지더니, 어느 날은 지스킬이 번화한 거리로 구경 가자는 제안을 했다.
나가는 길은 유르딘의 부관인 베른이 따라왔다. 유르딘의 대리인이라는 베른은, 대리인인지 유르딘의 재산을 거덜 내러 온 사기꾼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돈을 펑펑 써 댔다. 베른은 보석부터 시작해서 값비싼 옷감, 가죽, 모피, 구하기 힘든 고서적, 장인이 만든 필기구 따위를 며칠에 걸쳐서 사들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레인과 지스킬은 조금 기가 죽었다. 처음에는 이제 막 후작이 된 유르딘의 체면을 위한 사치품을 사들이는 건가 싶었는데, 가만히 지켜보니 유르딘의 물건만 사는 게 아니었다.
“후작님의 약혼녀분께 드리는 선물인가요?”
“약혼녀라니요?”
레인의 질문에 베른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도에 곧 결혼하실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오해라면 죄송합니다만…….”
“죄송하실 것은 없지만 전혀 아닙니다. 애초에 그 소문부터 잘못된 소문이고요. 후작께서는 결혼할 예정이 조금도, 콩알 한 알만큼도 없으십니다.”
베른은 몹시 단호한 어조로 부정했다. 저렇게까지 정색하며 부정할 게 있나? 떨떠름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던 레인은 마차 한 대로 다 싣지 못할 양의 물건들이 몽땅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기절할 뻔했다. 약혼녀가 아니라 레인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니, 이건 말도 안 된다. 레인은 당장 유르딘을 찾아갔다.
“이건 너무 과합니다. 다시 가져가 주세요.”
“선물일 뿐이다.”
“그게 너무 지나친데요. 엄청 비싼 것들뿐이고…….”
“그 정도가 내 재정에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
거기서 고개를 끄덕였다가는 유르딘을 무시하는 꼴이 된다. 귀족이 가장 중시하는 것 중 하나가 체면이다. 집에서 건더기도 없는 죽을 쑤어 먹더라도 밖에서는 반듯한 차림새를 하고 다니는 게 귀족이고, 집 안에서는 괄시할지언정 밖에서는 무시당하지 말라고 두둑하게 돈을 건네주는 게 귀족이다. 제때 대답하지 못한 레인은 결국 더 이상의 선물은 받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는 정도로 만족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산더미 같은 선물이 들어온 다음 날은 재봉사들이 들이닥쳐 레인의 치수를 재어 갔다. 얼마 후 재봉사들이 온 힘을 다한 역작들이 레인의 옷장을 빼곡히 채웠다. 예복, 코트, 평상복, 잠옷, 로브, 구두와 벨트, 모자, 장갑에 커프스 버튼이나 시계 등 필요한 모든 것들이 남부럽지 않게 가득 쌓였다.
마치 레인의 옷장이 가득 찰 때를 맞춘 것처럼, 마지막 물건이 도착했을 때쯤 해서 유르딘은 주변 영주들에게 초대장을 날렸다. 새로운 렘샤이트 후작이 여는 첫 연회에 주변 영주들이 모조리 몰려온 건 당연했다. 안주인의 부재에도 능숙한 가정부를 고용한 덕에 연회는 몹시 성공적이었다. 아니, 안주인이 부재했기 때문에 더욱더 성공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부관 왈 ‘결혼할 생각이 콩 한 알만큼도 없다’고 해도, 유르딘은 현재 왕국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연회에서 유르딘은 결혼 적령기를 맞은 아리따운 영애들에게 둘러싸였다. 유르딘은 그 가운데에서 나름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응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연회장 가장자리에서 지켜보며 레인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어째 익숙해 보이시네.”
“응?”
질문은 아니었는데, 옆에서 음식을 주워 먹던 지스킬이 대답했다.
“아니……. 예전부터 전쟁터에 나가 계셨으니 저런 류의 접근에는 약할 줄 알았더니 익숙해 보이셔서.”
“정복지에 있는 모두가 적대적인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떨어지는 이득을 노린 접근이 많았어. 하룻밤이라도 보내고 싶어서 말이지. 게다가 렘샤이트 후작께서는 그런 요소를 제하고 봐도 충분히 매력적이시잖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인기가 넘쳤지.”
“…그래?”
레인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채 목소리가 낮아졌다.
“물론 거절하셨어. 그런 거 안 좋아하시기도 하고.”
지스킬이 묘하게 변명하는 투로 허겁지겁 말했지만, 별로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게 나빴다. 그대로 술이나 잔뜩 마시려고 했으나 지스킬에게 제지당했다. 한 잔 정도는 괜찮다고 주장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조금 소란을 피운 셈이 됐는지 유르딘이 이쪽을 돌아봤다. 급히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입을 다물었으나, 유르딘은 이미 영애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연회장 모두가 유르딘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시선이 세 사람이 있는 쪽으로 쏠렸다. 마침 좋은 기회라 여겼는지 몇몇 귀족들이 다가왔다. 왕국 남부의 중요한 영지를 다스리는 고위 귀족들이었다. 유르딘은 나서서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자신을 옆에 있는 레인의 후원자라고 설명했다.
“불행하게 죽은 슈리아 님은 내 옛 친구이기도 했지요. 그녀가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할 때 막지 못했으니, 그 아들이라도 돕고 싶군요.”
작게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큰 파장을 남길 만한 말이었다. 슈리아가 자살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해 불행하게 죽은 것은 사실이나, 동시에 그녀가 뿌리를 둔 가문이 반역죄를 저지른 건 사실이었다. 슈리아의 죄가 아예 흑색은 아닐지라도 백색 또한 아니었다. 죄인의 혈통을 들였던 아이제나흐 공작가는 슈리아의 존재가 원래부터 공작가에 없었던 것처럼 흔적을 지워 나가는 걸로 추문을 없앴다.
그렇게 공공연히 사교계의 금기가 된 슈리아의 이름이 현재 가장 주목받는 인물인 유르딘에 의해 단번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미 십칠 년이 지난 일이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놀란 것은 레인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여러 위험을 감수하며 유르딘이 슈리아와 레인을 공개적으로 옹호할 필요는 없었다. 놀라는 사람들에게 유르딘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앞으로 레인이 차기 공작을 돕는 데 있어서 최소한 건강상의 어려움은 없도록, 요양을 권유해 여기에 온 것이라서요. 레인이 몸이 약해 한동안은 계속 여기에 머물 생각입니다.”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후계 개입에 대해서는 확실히 연관 없다고 잘라 두고, 동시에 레인에 대한 친밀함과 전폭적인 지지 의지는 숨김없이 드러냈다. 아무리 그래도 유르딘이 한 말의 여파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큰 소리가 나지 않고 당장은 부드럽게 무마됐다.
동시에 레인은 연회의 주인공인 유르딘만큼이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성에서 체류하며 친분을 드러내던 찰나에 지지하는 발언까지, 오늘 한 말이 완전히 결정타였다. 유르딘이 다른 곳으로 간 후에도 레인은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였다. 친해짐으로 인해 생기는 실속 따위를 바쁘게 계산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카데미보다 조금 더 계산적이 되고 판이 커졌을 뿐, 결국 같은 논리다. 레인은 사양하지 않고 사람들의 틈에 섞였다. 지금이 인맥을 쌓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이 기회를 확실히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레인은 대화에 완벽하게 집중할 수는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간 유르딘이 여러 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게 신경 쓰였다. 지스킬이 아까 한 말 때문에 이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유르딘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이 신경 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유르딘이 그 누구와도 춤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레인은 유르딘이 베른과 함께 연회장 구석으로 가 대화하는 걸 확인하고, 적당히 피곤하다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해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주저앉으며 레인은 한숨을 쉬었다. 신경 써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무척 피로했다. 지금이야 이런저런 행운이 겹쳐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으나, 약간의 책을 잡혀도 순식간에 부풀어져 평판이 떨어질 수 있었다. 애초에 레인은 슈리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남들보다 엄격한 잣대가 적용된다. 자신의 실수로 어머니까지 싸잡혀 어쩔 수 없는 놈이라는 조롱을 듣기 싫었다.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다른 기회는 곧장, 그리고 자주 찾아왔다. 첫 연회를 나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유르딘은 레인에게 함께 다른 영지로 외출하자는 권유를 계속해서 했다. 너무 많이 와서 베른이 대다수를 걸러도 매일 수십 통의 초대장이 유르딘에게 올라갈 정도였다. 수많은 초대장 중에 찾아가기 적절한 곳을 엄격히 고르고 골라 레인에게 제안을 건넸다. 아무래도 유르딘이 레인의 홀로서기를 도와주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태도가 뻣뻣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레인은 쉽게 적응해 나갔다. 말을 못하는 편도 아니라 만남은 나름 수월했다.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게 반짝이는 연회장과 웃는 낯으로 날카로운 말이 오가는 분위기에 완전히 익숙해졌을 즈음에는 짧지 않은 여름 방학이 끝나고 여름 또한 저물어 가고 있었다.
수도로 돌아가기 사흘 전, 레인은 여름의 마지막 연회에 참석했다. 마지막 연회로 고르고 골라 참석한 곳답게 연회의 규모 또한 성대했다. 비옥한 곡창 지대와 알맞은 기후 덕분에 매해 풍년을 맞는 전통적으로 부유하고 내실 있는 영지의 초대였다. 영지를 다스리는 로더슨 백작은 유르딘에게 다른 귀족들과 조금 다른 형태의 초대장을 보냈다. 심부름꾼이 애지중지 품고 온 초대장에는 근방에서 출몰하는 도적단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어서 유르딘에게 몇 가지 귀물을 대가로 전략적인 조언을 받고 싶다는 요청이 정성스레 적혀 있었다.
덕분에 로더슨 백작가의 영지에 도착한 후 유르딘은 사병들의 상태를 확인하거나 이런저런 조언을 하느라 바빴다. 연회 또한 초반에만 얼굴을 비치고 자리를 비웠다. 제법 큰 규모의 연회인데 정작 많은 사람이 기대했을 유르딘이 없으니, 사람들의 관심은 요즘 화제의 인물인 레인에게 쏠렸다. 밀려드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해가 졌을 때는 완전히 녹초가 됐다.
벽에 기대서 쉬고 있는 도중, 옆에서 같이 쉬면서 레인이 허약하다며 놀리고 있던 지스킬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시선의 끝을 따라가 보니 연회장 안으로 조금 날카로운 인상의 미인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이쪽을 보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곧장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운 인상이 봄날처럼 따스하게 녹아내리고 얼굴에 꽃이 피듯 화사한 웃음꽃을 피워 냈다.
“지스킬 님, 좋은 밤이에요.”
“세이라 님! 여긴 대체 어떻게……. 오신다는 말을 들었으면 제가 진작 준비를…….”
“지스킬 님?”
세이라가 다정하게 웃으며, 그러나 그다지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로 지스킬을 부르며 레인을 눈짓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지스킬이 레인과 세이라를 서로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소개받아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지스킬의 질문에 대답했다.
“친구분이 초대해 주셔서 근처의 별장에 머물던 중에 초대장을 받아서 왔어요. 일이 바쁘셔서 이번 여름은 못 뵐 줄 알았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기쁘네요.”
세이라의 목소리에 즐거운 기색이 어렸다. 이름이나 외모를 보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세이라 나이젤, 지스킬의 약혼한 나이젤 백작가의 영애였다. 평소에 그렇게나 자랑하더라니, 실제로 보니 확실히 약혼녀에게 푹 빠진 게 눈에 딱 보였다. 세이라 쪽도 지스킬과 마찬가지로 제 약혼자가 꽤 마음에 든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정략결혼임에도, 그저 정략으로 맺어졌다기에는 조금 더 열렬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상적인 약혼 관계였다.
짧게 대화를 나누는 새에도 서로에 대해 풋풋한 애정이 있는 게 티가 날 정도로 행복의 문턱에 들어선 연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레인은 두 사람에게 즐기다 오라고 권했다.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던 지스킬이 망설였다.
“내가 가면 네가 혼자잖아.”
“무슨 상관이야?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하지만…….”
난처해하는 지스킬을 보며 레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세이라에게 양해를 구한 레인은 지스킬을 구석으로 잡아끌어 목소리를 낮췄다.
“왜? 뭔가 위험한 일이라도 있어?”
“뭐?”
“그렇잖아. 계속 내내, 나한테 붙어서는. 너 유르딘의 명령으로 날 지키고 있는 거지?”
이쯤 되면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지스킬은 레인에게 항상 붙어 있었다. 특히나 연회 때, 유르딘이 연회장을 비운 상황이면 반드시 지스킬이 곁에 있다. 확신을 갖고 분명히 물으니 지스킬은 부정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사실 반쯤 떠본 건데, 그 태도로 레인은 지스킬이 유르딘의 명에 의해 레인을 지키고 있음을 확신했다.
만약 그렇다면 맨 처음, 친한 친구처럼 다가온 접근도 유르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을까? 그럴 확률이 높다. 그리 생각하면 조금 씁쓸하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간 지스킬이 보인 호의가 모두 유르딘에 기인할 리는 없다. 거짓말 못 하고 실토하는 것을 보니 뻔하다. 심란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채근하자, 지스킬이 애매하게 답했다.
“꼭 그런 건 아닌데.”
“아니긴 뭘 아냐. 티 엄청 나는데.”
“끙…….”
“뭐 위험한 일이라도 있냐니까. 위험하면 나도 알아 둬야 할 것 아냐.”
“아냐, 딱히 그런 거 아냐.”
레인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지스킬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지스킬이 거짓으로 안심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아무런 위협도 없어 보였다. 하긴 따져 보면 정말 위협이 될 게 없기는 하다. 커다란 승리를 거둬 기세등등한 라인셀 왕국의 기세 덕에 주변 왕국들은 눈치를 볼 뿐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 터라 타국의 암살자가 올 리가 없었다. 만약 암살자가 온다고 해도 인질의 가치가 없는 공작가의 차남보다 유용한 사람을 노릴 테니 여전히 레인이 위험할 이유가 없었다. 연회가 한창인 영주관 안쪽까지 멋모르고 외부인이 침입할 리도 없다. 어느 모로 보든 위험하지 않다.
타당한 지적에 지스킬은 슬슬 넘어가는 모양새였다. 레인은 힐끗 눈짓으로 세이라 영애를 보았다. 심각한 분위기에 차마 끼어들지는 못하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자꾸만 붉어진 얼굴로 지스킬을 힐끔거리는 게 제법 간절해 보였다. 레인은 영애에게 한 번 웃어 주고 지스킬의 등을 두드렸다.
“멀리 안 갈 테니까, 춤이라도 추고 와.”
“아니. 난 그냥 이대로도 괜찮은데.”
“나이젤 영애가 섭섭해하시잖아.”
약혼녀를 지적하자 지스킬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힐끔 약혼녀의 눈치를 본 지스킬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럼 잠깐 갔다 올게.”
“천천히 즐기다 와.”
“최대한 빨리 올게. 멀리 가지 마.”
“알았어.”
고집스레 부득불 돌아가겠다는 지스킬을 세이라 쪽으로 보내자, 세이라가 화색을 띠며 반겼다. 지스킬이 없으면 지루한 연회가 조금 더 피곤해지겠지만, 그럼에도 역시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남은 레인은 느긋하게 여름의 마지막 연회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묘하게 불쾌하게 구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그런 사람들에게 치이던 레인은 사람을 피해 정원으로 나갔다. 아예 먼 곳으로 가고 싶었으나, 지스킬이 신신당부하던 말이 떠올라 적당히 연회장의 소음이 작게나마 들려오는 위치에서 멈춰 섰다.
잠시 바깥바람만 쐬다가 돌아갈 요량으로 꾸며진 정원 한편을 차지한 의자에 앉았다. 쉬고 있자니 조금 멀리서 들려오는 연회장의 소음 사이로 풀벌레의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최근 몇 주간 바쁘게 지내다 보니 이런 조용한 분위기도 간만이었다. 곧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니 아쉬움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쉬움이라니. 지금까지는 어디에 있든 똑같이 괴로움만을 느꼈기에 감상에 젖을 새가 없었다.
여기서 사람들과 사교를 쌓는 일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으나 타인에게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부지런히 움직인다는 사실이 레인에게 힘을 주었다. 죽으려고 했던 과거가 멀게만 느껴졌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조금씩 미래에 대한 확신이 보인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희망이 피어올랐다. 이대로 끔찍한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오랜만이네, 레인 아이제나흐.”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생각이 깨어졌다. 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 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제멋대로 아는 척을 하는 남자를 본 적 있는지 레인은 기억을 헤집었다. 마침내 남자의 이름이 기억 속에서 떠올랐지만, 기억한 사실이 절대 반갑지 않았다.
“발터 플랑.”
카이렌의 꽁무니나 따라다니던 개새끼 따위, 레인의 관심 밖 영역에 있었다. 간신히 기억하고 있을 뿐인데 발터는 레인이 알아본 일을 확대 해석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걸어왔다.
“날 기억하고 있었네.”
“별로 변한 게 없길래.”
“너도 변한 게 없네. 여전히 곱상하고.”
발터가 히죽거리며 다가와 레인의 턱을 세게 움켜잡았다. 카이렌의 지인 아니랄까 봐 무례한 놈이었다. 쳐 내려고 했으나 검술 수련을 한 발터의 힘을 레인이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뒤늦게서야 연회장을 나온 걸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런 불한당 같은 놈이 있을 줄은 레인도 지스킬도 짐작하지 못했다.
“놔.”
“앙탈도 여전하고.”
“놓으라고 했어, 발터 플랑.”
“말밖에 못 하는 것도 여전하지.”
“놓으라고!”
레인이 소리치는 것과 발터가 레인을 한 대 내리치는 게 거의 동시였다. 꽉 쥔 발터의 묵직한 주먹이 레인의 머리를 내리치자, 견디지 못하고 레인의 몸은 맥없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서 버르적거리는 레인의 머리채를 발터가 세게 쥐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그대로 바지를 내리는 소리가 들려 레인은 경악했다. 발터는 바닥을 기어서라도 도망치려 하는 레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레인이 두세 걸음 정도 짧은 거리를 온 힘을 다해 도망치는 걸 보며 비웃었다. 발터는 레인의 희망을 짓이기듯 그의 발목을 잡고 그대로 가볍게 끌어당겨 도망을 무위로 돌렸다.
“귀엽네. 더 도망쳐 봐.”
명백히 조롱하는 투였다. 레인이 필사적으로 휘두른 주먹은 발터에게 간단하게 막혔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몸싸움이라고 하기도 미비한 발악 끝에 발터의 손에 바지가 반쯤 내려갔다. 맨살에 닿기에는 휑한 밤의 공기에 살갗이 그대로 노출됐다. 소름이 끼쳤다.
“미… 미쳤, 어?”
떨고 싶지 않았는데, 목소리는 볼품없이 가냘프게 떨렸다. 발터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스쳤다. 발터의 태도가 이상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아무리 발터 플랑은 별다른 뒷배도 없어 카이렌에게 굽실대던 하위 귀족에 불과하다. 그래도 이런 짓을 갑자기 할 놈은 아닌데 너무나도 당당하다.
“싫으면 소리치든가.”
“무슨…….”
“해 봐. 재밌겠네.”
소리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약자를 이해하고 도와주지 않는다. 불한당이 칼을 들이밀어 강간당한 사람에게 끝까지 저항하지 않았으니 즐긴 게 아니냐며 조롱하거나,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린 수치라며 머리를 짧게 깎아 수도원에 보내진 영애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레인도 마찬가지로 약자였다. 검을 사랑하며 강한 남자가 숭배받는 왕국에서 승마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약한 레인은 타인의 경멸을 받기 쉬운 존재였다. 이 일이 밝혀지는 순간 슈리아의 일까지 끌려 나와 모욕과 조롱을 함께 받는다. 그래서 이전에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절망적으로 무너지는 레인의 감정을 즐기며 발터가 레인에게 몸을 붙였다. 후덥지근한 숨결과 조금 끈적한 살결이 달라붙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면서 레인은 자신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이런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수백 번은 더 당한 일의 연장선상, 고작 몸과 몸을 겹치는 행위일 뿐. 두려워할 필요 없었다. 그저 참고 견디면 언젠가 끝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게 레인의 일상이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으, 흑…….”
더 이상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내세우던 병적인 방어 기제를 내세우기에는 레인이 평범한 일상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애초에 벗어날 방법이 없는 무저갱 속에서 그저 숨이라도 쉬고 살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다고 자신을 세뇌했을 뿐, 단 한 번도 괜찮았던 적은 없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자마자 이 꼴이라니. 자신이 너무 비참해 레인이 흐느꼈다.
짓뭉개진 희망과 비참함 속에서 다시 한번 정체불명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전과 같은, 여전히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억이었다. 낯선 방 안. 레인을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유르딘……. 이전과 같은 기억이었으나 조금 달랐다. 지난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조금 더 보였다. 침대에 쓰러져 있는 레인은 셔츠도 엉망으로 구겨지고 바지는 아예 벗겨져 하반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볼품없이 깡마른 몸 위로 흐트러진 정사의 흔적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 파멸의 신호탄이었다.
“아, 안 돼, 싫… 싫어.”
또다시 두통이 찾아왔다. 언제나 이렇다. 기억하지 말라는 듯이, 그러면 아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면 좋을 텐데 어중간하게 기억하도록 해 놓고서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는데, 왜 저런 환청이 들리는 걸까. 도와주기를 바랐다. 언제나 누군가가 제게 작은 선의라도 건네주기를 빌었다. 그러나 레인은 언제나 혼자였다.
‘도와 달라고 해.’
도와 달라고 말하고 싶다. 머리를 쪼개는 듯한 끔찍한 두통 속에서도 레인은 필사적으로 발터를 밀어내려 애썼다. 밀어내던 손이 강한 힘에 꺾였다. 발터가 레인의 사이에 자리 잡았다. 이제 다 틀렸다. 기억 속의 유르딘마저 레인에게서 몸을 돌린다. 도와줬으면 좋겠다. 아무나 제발 좀 도와줬으면…….
“끄아아아악!”
갑작스레 발터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레인의 위로 푹 고꾸라지던 발터의 몸이 갑작스레 뒤로 휙 젖혀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레인은 얼떨떨하게 발터를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피로 범벅된 발터의 하반신이었다. 다리 사이가 피에 젖어 있었다. 점점이 떨어진 피로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풀숲에 조금 전까지 몸에 붙어 있었던 성기 일부가 볼품없이 떨어져 있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발터의 가슴을 누군가의 발이 짓밟았다. 레인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유르딘이었다.
지난날 순간순간 봤던, 착각인 줄로만 알았던, 싸늘하고 냉정한 가면 같은 무표정을 한 유르딘이다. 유르딘은 마치 절대적인 죽음을 휘두르는 사신처럼 발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정을 도려낸 듯이 무표정한 얼굴이 감정을 담은 얼굴보다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걸 레인은 그 순간 깨달았다.
유르딘의 검에는 서슬 퍼런 오러가 맺혀 있었다. 닿기만 해도 모든 걸 잘라 내는 마법의 힘이 발터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스치는 곳마다 살점이 도려지며 피가 튀었다. 발터는 극심한 고통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유르딘을 보았다. 입만 벙긋거리며 목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겁에 질린 발터를 내려다보던 유르딘이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닿았었지?”
무엇을? 궁금증은 곧장 유르딘의 행동으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유르딘의 검이 발터의 손가락을 가볍게 툭 툭 건드렸다. 레인을 더듬었던 손이다. 인간의 손가락이 찰흙 인형처럼 후두두 떨어지는 광경이 비현실적이다. 발터는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얼굴로 짐승 같은 신음을 흘렸다. 유르딘의 검이 손목을, 팔목을 찍고 어깨를 내리쳤다. 결국, 발터의 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발터의 비명이 다시 한번 침묵을 찢었다. 검사로서 영원히 재기할 수 없는 부상이었다.
팔 한쪽이 날아가자 피가 분수처럼 튀어 유르딘의 몸을 흠뻑 적셨다. 괴로움에 어찌할 줄 모르며 바닥을 기는 발터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유르딘은 곧장 레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가면이 벗겨져 채 억누르지도 감추지도 못하는 광기가 유르딘의 위에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그 모든 격렬한 광기와 감정들이 한 점으로 모여 레인에게 향했다. 어둠 속에서 푸르게 타오르는 시선을 마주하며 레인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왜 모르고 있었을까?
유르딘의 얼굴에 떠오른 건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한 레인을 향한 애정이다. 왜 몰랐을까. 다시 한번 자문했던 레인은, 사실은 알면서도 무의식중에 외면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 내렸다. 그를 위해 모든 걸 다 바칠 정도로 헌신적인 남자의 애정을 보며, 레인은 제게 닿은 폭력적인 사랑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레인이 마주한 사랑은 모두가 무서운 결과물을 낳았다. 카이렌의 광기에 가까운 사랑은 맹렬한 집착과 폭력으로 표현됐고, 그 사랑에 레인의 인생이 박살 났다.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딜란 아이제나흐의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사랑이 한 가문마저 망쳤다. 레인은 사랑이 기껍다기보다는 끔찍했다. 정확히는 그 사랑이 가져올 비틀린 여파가 두려웠다.
지금 눈앞에 드러난 유르딘의 사랑이란, 이 세상에 오로지 레인만이 중요하다는 듯이 소중히 여기는 것과 동시에 레인을 위해서라면 피를 묻히는 일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폭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맑은 줄로만 알았던 유르딘의 푸른 눈에 떠오른 건 차라리 광기라고 부르는 게 옳았다. 몹시도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만큼 익숙한 감정.
“레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지독하게 낮았다. 사랑에 미쳐 있는 남자는 혼란스러워하는 레인의 앞에 숭배할 대상을 앞에 둔 사람처럼 경건하기까지 한 태도로 무릎을 꿇었다. 이리저리 튄 피와 고양된 감정 때문에 어딘가 오싹해 보이는 얼굴을 마주한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끔찍한, 피해야 하는 감정일 텐데 도대체 왜 가슴이 뛰는 걸까.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레인에게 등을 돌리던 남자는 온데간데없다. 눈앞의 유르딘은 절대로, 두 번 다시 레인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오싹할 정도의 기쁨이 레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휩쓸고 지나쳤다. 저릿저릿한 감정의 여파에 휩싸인 채, 레인은 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