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밤을 건너다 2
1 밤의 그림자
성을 떠나올 때만 해도 레인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금세 정리될 줄 알았다. 레인과 떨어지고 나서야 유르딘은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달았다.
매일 만날 때는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들이 시시때때로 유르딘을 지배했다. 유르딘을 향할 때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달콤하게 녹아내리던 표정, 안마해 준다며 닿았던 마른 몸의 감촉,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함께 있을 때 나는 약 냄새 섞인 옅은 체취들. 유르딘은 그 모든 것을 기억했고, 다시 새기며 또 느꼈다.
레인을 사랑한다. 행복을 빌며 보내 주는 게 아니라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다. 제 감정을 억누른 채 상대의 행복만을 빌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행복을 빌며 떠나보냈던 소중한 첫사랑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놓아주느니 다소 고난이 있더라도 붙잡아 행복하게 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유르딘은 고민했다. 괜히 다가오지 않은 불행을 상상하는 것보다 자신을 믿고 행동하며 행복을 쟁취하는 쪽이 유르딘의 성미에 맞기도 했다.
유르딘은 가진 것이 많았으며 그 이상으로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제 재능이면 스스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품은 채 가만히 있어도 굴러 들어올 후계자의 자리를 걷어찬 것부터가 남들은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려운 선택을 했음에도 유르딘의 삶은 전반적으로 평탄했다. 전쟁터를 전전하며 나름의 고민을 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무던한 성미라 크게 괴롭지는 않았다. 압도적인 재능은 시기보다 선망을 낳았으며, 누가 봐도 잘생긴 외모에 가꿔진 몸은 쉽게 사람의 호감을 얻었다.
지금까지 괴로운 일도 고난도 없었기에 유르딘은 막연히 이전까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평탄한 길이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무난하게 레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어리석은 믿음이었다.
금방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야만족들은 카니예의 잔당과 합세해 마약을 만들어 왕국 북부에 팔아넘기면서 자금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눈이 지독하게 많이 왔는데도 눈을 뚫고 아득바득 약을 유통했다. 겨우내 할 일 없이 술에 취해서 살던 자들은 비교적 싼값에 약을 접하고 쉽게 빠져들었다. 한번 빠져든 다음에는 열 배가 넘는 가격을 불러도 중독된 채니 울며 약을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약에 취한 자들은 영혼 빠진 시체처럼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이유 없이 헤실헤실 웃거나 울었다. 그러다가도 약이 떨어지면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벽에 머리를 찧고 손톱이 다 빠지도록 바닥이나 제 살을 긁어 댔다.
한심한 몰골이라고 유르딘은 생각했다. 유르딘은 본래 세 종류의 인간을 제일 혐오했다. 첫째가 적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자였고, 둘째가 힘없는 자를 폭행하는 자였고, 셋째가 술이나 약에 중독된 자였다. 유르딘의 성미가 건실한 편이라 술이나 약에 중독되어 현실을 회피하는 인간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결되지 않는 방식으로 회피해 시간만 죽이는 자들은 몹시 경멸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중독자를 깡그리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들 또한 왕국민이었기에 외면할 수는 없었다. 부하에게 중독자들에 대한 것을 일임한 채 유르딘은 악의 근원을 쫓았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준비하는 양 적들은 몹시 필사적이었으나, 동시에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완벽히 치밀하지 못해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겼다.
약의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며 야만족과 카니예의 잔당을 추적하며 천천히 더듬어 간 끝에 마침내 야만족의 수뇌부가 머무는 거처에 대한 단서를 잡았다. 드디어 기나긴 전쟁의 끝이 보였다.
그러나 유르딘이 기뻐할 새도 없이 성에서 최악의 급보가 도착했다. 성에서 큰 폭발과 화재가 있었다. 보급품을 보관하던 창고에서 시작된 폭발은 창고의 내용물을 모조리 태우며 큰 화재로 번졌다. 사망자만 백이 넘고 부상자까지 합하면 몇백에서 천을 넘는 최악의 사태였다. 날이 건조하다고는 하나 의문의 폭발과 화재는 대단히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화재가 시작된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이 엄중히 관리되는 마법 도구가 있는 쪽이라는 것이 더더욱 수상했다.
성도 중요하지만, 당장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오랜 세월 추적해 온 적이 코앞에 있다. 최선을 다해 추격했지만, 야만족 우두머리의 목을 베었을 때는 이미 사흘이 흘러 있었다. 남은 처리는 부하에게 맡긴 채 유르딘은 최대한 빨리 말을 달려 성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레인이 관리하는 보급품이라니. 음모에 휘말려 고초를 겪고 있을 레인을 생각하니 몸은 피곤했지만 쉴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데 그런 일에 신경을 쓰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치솟았다.
성에 도착한 유르딘은 가장 먼저 레인을 찾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베른이 성문 앞까지 나와 유르딘을 맞았다. 급한 보고가 있다는 말에 유르딘은 베른을 따라갔고 그곳에서 레인의 죄목이 빼곡히 적힌 보고서를 받았다.
레인의 ‘죄’를 밝힌 결정적인 단서는 발터의 죽음이었다. 성이 폭발하기 이틀 전에 어느 기사가 발터의 실종을 눈치챘다. 성에서 쫓겨났으나 차마 영지로 돌아갈 면목이 없어 마을 주변을 전전하던 발터는 사실 유르딘의 명으로 감시당하던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기미를 보이면 봐줄 것 없이 목을 치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러나 발터는 감쪽같이 사라졌고, 사건이 일어나기 나흘 전 살해당해 산에서 늑대에게 뜯어 먹힌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와 동시에 발터의 숙소에서 다량의 편지 다발과 일기가 발견됐다. 편지 속에는 발터가 불온한 무리와 나눴던 대화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발터는 불온한 무리와 손을 잡고 무언가를 반입시켰다. 발터는 물건을 반입하는 몇 가지의 경로를 제시했다. ‘무언가’에 대한 정확한 단어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정황상 화재를 일으킨 불량 마법 도구임에 분명했다. 불온한 무리가 발터에게 보낸 편지에는 레인 아이제나흐가 적극적으로 협력해 물자 반입에 대한 승인을 받았으니, 그편에 물건을 섞여 들여보내겠다는 계획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상황이 모두 꼭 들어맞는 완벽한 증거였다.
한편 일기장에는 아카데미에서부터 음탕한 성미였던 레인이 자신을 유혹했다가 유르딘에게 들통날 상황에 부닥치자 자신을 가차 없이 버렸으며, 상황상 유르딘을 유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뜬구름 같은 추측 담긴 내용이 원망 섞인 심정의 토로와 함께 가득 담겨 있었다.
“상황이 나쁩니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베른을 유르딘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떠났는데 부관이라는 놈이 수사한답시고 레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물론 베른이 일부러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끔찍하게 나빠 그를 고운 눈으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수사 결과가 알음알음 퍼지며 지금 당장에라도 레인을 지하 감옥에 처넣고 고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아이제나흐’를 들먹여 막아 내고 있던 자 또한 베른이었다.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그대로 지나쳐 레인에게 가려고 했으나, 베른은 온몸을 던져 유르딘을 막았다.
“레인 아이제나흐에게 가셔서는 안 됩니다.”
“비켜.”
“플랑 경의 일기장 때문에 유르딘 님에게도 의혹이 미치고 있습니다. 물론 유르딘 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네, 그러실 법도 하지요. 믿고 아끼던 분이니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받아들이기 힘드시겠지요. 하지만 레인 님의 죄는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아직 병사들 선으로 퍼지진 않았지만, 기사들 사이에서는 레인이 베델가의 원한을 갚기 위해 불온한 무리와 손을 잡은 게 아니냐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레인이 손을 잡은 자들은 왕국을 무너뜨리고 북방을 손에 넣기 위해 호시탐탐 틈만을 노리던 야만족과 카니예가 연합한 무리였다. 이는 명백한 반역 행위다.
야만족의 꼬리가 잡혀 본거지가 들통나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내부 협력자의 도움을 보다 안정적으로 받아 성공적으로 계획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당초의 계획이 이루어졌다면 북부의 본거지인 성은 완전히 무너지고 왕국군이 몰살당해 상황 역전을 꾀할 만한 극단적이고 절묘한 계획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야만족의 계획은 불완전한 실패로 돌아갔고, 살아남은 야만족들은 죄다 꼬리가 잡혀 고문실에 들어갔다. 남은 것은 아직 처벌받기는커녕 여전히 성 꼭대기 층에서 유유자적하게 쉬고 있는 내부 협력자에 대한 성난 분노뿐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이 병사였지만 개중에는 기사도 있었다. 부상자 중에는 제법 유력한 가문 출신의 기사도 존재했으니 아이제나흐고 뭐고 당장 레인을 잡아들이라는 압박이 거셌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반박할 증거 없이 고작 레인에 대한 애정이나 동정을 이유로 레인의 편을 든다면. 아무리 그래도 야만족과 유르딘이 내통했다고 믿는 자는 없겠지만, 소문대로 레인 아이제나흐의 유혹에 넘어간 유르딘의 눈이 흐려져 내부의 내통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내버려 뒀다는 식으로 실책이 부풀어질 수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후계자를 잃은 귀족 가문 또한 합세해서 유르딘을 공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탄탄대로가 보장된 유르딘의 앞날에 먹구름이 낄 것이 뻔했다.
베른이 최선을 다해서 유르딘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마쳤음에도, 여전히 그의 태도는 완고했다.
“비키라고 했다, 베른.”
“유르딘 님.”
“레인이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어. 그 애는 그럴 성정이 못 돼.”
“유르딘 님!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넌 내가 반쯤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충분히 이성적이다. 그러니 비켜.”
대체 어디가? 유르딘의 태도는 아끼고 사랑하는 이의 위기를 보고 흥분한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힘으로라도 베른을 밀어낼까 고민하던 유르딘은 폭력적인 생각을 접고 숨을 골랐다. 유르딘과 전장을 계속 함께 누빈 베른을 한 번의 판단 실수로 무정히 뿌리치고 싶지는 않았다. 유르딘은 베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성적인 이유를 입에 올렸다.
“레인에게는 동기가 없어.”
“외가가 몰살당했고 후계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얼마든지 원한을…….”
“베델가의 복수를 위해 레인이 직접 그런 저급한 수를 쓸 필요는 없어. 내가 해 주겠다고 했으니까. 아이제나흐든 뭐든, 내가 몰락시켜 주겠다고 했는데 뭐하러 나서서 위험을 감수하지?”
“…네?”
베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베델가가 멸문한 일이 아이제나흐가 뒤집어씌운 누명이라는 추측은 베른 또한 유르딘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유르딘이 개인적으로 아이제나흐를 미워하는 줄은 알았지만 레인에게 나서서 직접 복수를 해 주겠다고 말한 줄은 처음 알았다. 아이제나흐를 무너뜨리겠다니,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면 농담하지 말라고 비웃었을 테지만 유르딘은 이런 일로 농담을 하는 성미가 아니었다. 놀라서 굳어 버린 베른을 노려보던 유르딘은 레인에 대한 의혹으로 가득한 보고서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
“유혹이라니. 말도 안 되는 오해지만, 이 빌어먹을 추측대로 만에 하나 레인이 날 방심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접근해서 날 유혹했다고 치자. 그래, 유혹은 성공했지. 레인의 유혹에 넘어간 얼간이가 나서서 아이제나흐를 망하게 해 주겠다고 까지 말했는데 그 당초의 계획이란 것을 계속 이끌어 나갈 필요가 있나? 나 정도면 아무 힘도 인맥도 없는 레인이 쥘 수 있는 패 중에 가장 강력한 패지. 더 이상 아무런 위험 부담도 지지 않고 복수를 시도할 수 있는데, 뭐하러 확률이 낮고 위험한 수를 골라 가며 내게 타격을 입혀서까지 왕가에 복수하지?”
유르딘의 말이 맞았다. 아무 힘도 없는 레인 아이제나흐에게 있어서 왕국에서 가장 명성 높은 기사인 유르딘 니제스는 최고의 패다. 고작 야만족을 이용해 왕국에 타격을 입힌다는 확률 낮은 도박을 시도하느니 차라리 손잡았던 야만족을 배신하고 유르딘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게 훨씬 나았다. 유르딘에게 약속을 들은 이상, 성에 대한 공격은 최악의 악수였다. 북방이 흔들리면 이를 도맡는 유르딘 또한 흔들리고, 결과적으로는 아이제나흐에게 대적할 만한 힘이 꺾이게 된다.
베른은 곧장 이해했으나, 유르딘의 말이 해당 사건의 반박에 대한 증거는 될 수 없었다. 베른이야 전적으로 유르딘의 아군이니 대범한 맹세에 놀라는 정도로 그쳤지만, 다른 사람이 이 약속에 대해 안다면 레인과 유르딘의 공모 자체가 아이제나흐에 대한 지독한 모함이라며 유르딘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꺼낼 수 없어 소용없는 증거다.
이걸 어찌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아 복잡한 얼굴을 한 베른을 지나쳐 레인에게 가려던 유르딘의 시도는 다시 한번 막혔다. 유르딘이 짜증스레 베른을 돌아보았다.
“놓으라고 했다. 이다음은 경고에서 끝나지 않아.”
“유르딘 님,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아뇨, 아닙니다. 이해했습니다. 레인 님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후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유르딘이 잠시 멈춰 선 사이에 베른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유르딘 님이 지금 가서 레인 님에게 도움을 준다 칩시다. 네, 유르딘 님이라면 무리해서라도 레인 님을 보호할 수 있겠죠. 그사이에 저는 반박할 만한 증거를 찾고, 빠듯하게 무리하면 레인 님은 무탈하게 이번 사건을 넘길 수도 있을 겁니다. 일단은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악수입니다.”
아무런 근거를 내보일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무턱대고 레인을 보호한다면, 발터 플랑의 일기장이 말하는 대로 레인이 유르딘을 유혹했기에 사적인 감정으로 구했다고 보이게 된다. 레인의 무죄가 밝혀진다고 해도 유르딘이 무턱대고 레인을 보호했다고 하는 사실만은 수많은 증인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이런 부류의 가십은 입에서 입을 타고 부풀어지며 쉽게 퍼진다. 서른이 넘도록 결혼조차 하지 않은 왕국의 영웅 유르딘과 베델의 피가 섞인 어리고 아름다운 청년 레인의 조합은 누가 봐도 흥미로웠다. 발터 플랑이 적은 일기의 내용, 반역자의 피가 섞인 레인의 핏줄, 누군가를 유혹하려 작정하면 그걸 쉽게 가능하게 만드는 지나치게 빼어난 외모, 모든 요소가 레인을 물어뜯기 딱 좋았다.
더욱이 유르딘은 아이제나흐를 무너뜨리고자 마음먹은 상태다. 레인과 지저분한 소문으로 얽혀 있는 상태에서 아이제나흐를 공격하기는 힘들어진다. 아무리 내세우는 대의명분이 뚜렷해도 어린 연인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추잡한 짓거리로 보일 수 있었다.
유르딘은 베른의 말을 이해했다. 이해했으나 머리에 오른 열이 식지는 않아 짜증이 치밀어 의자를 걷어찼고 두꺼운 나무로 만든 의자는 가볍게 벽에 날아가 그대로 박살 났다.
“그럼 어쩌라는 거냐. 레인을 감옥에 처넣기라도 하라고? 그 약한 애를?”
“지금은 그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책상이 반으로 쪼개졌다. 난생처음 보는 상관의 분노에 베른은 떨면서도 간곡히 부탁했다.
“일주일만 주십시오. 일주일 후에도 증거를 잡지 못하면 제가 레인 님을 몰래 빼돌리기라도 하겠습니다. 책임은 제가 지지요. 최대한 꼭꼭 숨을 테니 절 추적하는 척하시면서 레인 님의 무고를 밝히십시오. 그렇게 하면 두 분 다 피해 없이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겁니다.”
유르딘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끓어오른 화를 식히고 베른의 진심 가득한 눈을 마주했다. 유르딘과 베른의 첫 만남은 어느 영주에게 능욕당하던 베른의 여동생을 유르딘이 구하면서 시작됐다. 그 후 베른은 언제나 유르딘을 은인으로 생각하며 한결같은 충성을 바쳤다. 그런 베른에게 괜한 화풀이를 할 필요는 없었다. 유르딘은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인정했다.
“아니, 미안하다. 그러란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네가 그런 희생을 치를 필요는 없어.”
“하지만 유르딘 님…….”
“그런 쓸데없는 각오 하지 말고 사흘 안에 증거를 잡아.”
유르딘의 사과에 잠시 녹아들던 베른의 마음이 다시 쨍하게 얼어붙었다. 사흘이라니. 터무니없는 기간에 베른이 입을 떡 벌렸다. 순 억지였다.
설마 농담이겠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르딘은 몹시 진심뿐인 얼굴이었다.
“레인은 몸이 약해. 지하 감옥에 일주일씩이나 놔둘 수는 없어.”
“차라리 제가 당장 데리고 튀는 게 낫겠습니다. 사흘로는 아무것도 못 해요. 가뜩이나 짐작 가는 것도 없는데…….”
유르딘의 말을 믿는다 해도 화약 섞인 보급품에 레인이 허가를 내려 준 일은 사실이다. 명백하게 증거가 남았는데 이를 뒤집는 일은 사실 일주일로도 부족했다. 독심술이라도 익혀서 증인을 쑤시고 다니지 않는 한은 무리다. 어떻게든 유르딘을 설득할 말을 짜내려는데 밖에서 신경질적인 노크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베른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조금 이따가 와라.”
“급한 일입니다, 베른 님. 기사들이 잔뜩 화가 나서 레인 아이제나흐의 방으로 몰려가고 있다고요! 당장에라도 죽일 기세입니다!”
정말로 급한 일이었다. 유르딘과 베른, 두 사람 모두 급하게 레인의 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면서 유르딘은 베른에게 짧게 레인의 현재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유르딘이 떠나고 나서 며칠 후부터 레인은 계속 병을 앓았다. 보름 전에 간신히 열은 내렸으나 돌아다닐 만큼 몸이 회복되지 않아 방에서 요양하고 있었고, 사건이 터진 후에도 병을 핑계로 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아픈 몸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레인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바로 안아 주고 위로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최소한 얼굴이라도 확인하고, 눈짓으로라도 안심시켜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유르딘은 베른이 쫓아올 새도 없이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레인의 방문 앞에 기사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뒤에 선 일부 기사들은 유르딘을 알아보고 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앞에 서서 문을 걷어차고 있던 기사들은 유르딘을 보지 못하고 기어이 방문을 부쉈다. 그렇게 활짝 열린 방 안에서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커다란 소란에도 여전히 깊게 잠들었는지 레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침대에 축 늘어져 있었다. 창백한 낯빛은 마치 시체 같았으나 다행히 가슴이 느릿하게나마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레인의 몸 위에는 처음 보는 노인이 반쯤 흘러내린 바지춤을 붙잡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레인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방금 빠져나온 성기가 흉하게 축 늘어져 번들거렸다. 충격적인 장면에 얼어붙어 있는 동안 노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신에게 영광 있으라!」
야만족의 언어로 지껄인 노인이 그대로 이를 악물었다. 유르딘이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 입안에 넣고 있던 독을 깨문 노인은 검붉은 피를 토하더니 그대로 볼품없이 축 늘어졌다.
노인의 몸이 쓰러지는 순간, 방 안을 얼어붙게 한 지독한 침묵이 산산이 조각났다. 더러운 새끼가 야만족이랑 붙어먹으면서 수를 썼다는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온 것을 시작으로 온갖 모욕과 경멸의 말들이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끔찍한 증오의 한가운데서 레인은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깡마른 몸이 성난 분노에 짓눌려 곧 살해당할 것처럼 안쓰러웠다.
유르딘이 레인에게 다가가자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당장에라도 돌아 버릴 것 같았지만 유르딘은 다행히 이성을 붙들고 있었다. 유르딘은 레인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공작을 죽일 수 있다면 저는 어떻게 되어도 좋아요.’
어떻게 되어도 좋다니. 유르딘은 레인이 복수에 휩쓸려 가지 않기를 바랐다. 베델 가문의 피가 섞여 후계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레인이 지금까지 겪은 것 이상의 괴로움을 겪지 않도록 지켜 주고 싶었다. 유르딘은 지금까지 쌓아 올린 제 명성이 박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레인만은 아무런 추문에도 휩쓸리지 않게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더러운 말들이 레인을 뒤덮고 있었다. 여기서 유르딘이 레인을 챙겨 준다면 구르는 눈덩이만큼 불어난 말이 왕국 전체를 들쑤실 터였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노련한 기사 유르딘 니제스가 아니라 막 기사가 된 애송이 유르딘 니제스였다면 상황 모르고 날뛰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세월은 그에게 어떤 상황에서든 참을 수 있는 인내를 주었다. 유르딘은 레인 위에 축 늘어진 노인을 발로 걷어차 치우고 무심한 척 시트를 끌어 내려 레인의 몸을 덮는 동안에도 어떻게든 태연함을 가장할 수 있었다. 다만 목구멍에서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노인은 뭐 하는 자냐.”
“성안의 의원입니다. 레인 아이제나흐가 이자를 통해 야만족과 결탁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레인 아이제나흐의 치료가 필요하다며 계속 여기에 붙어 있었습니다만은……. 설마 저들끼리 배를 맞추고 있을 줄이야.”
부하의 마지막 말에서 숨길 수 없는 경멸이 가득 묻어 나왔다. 방 안이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웠다. 유르딘은 레인을 더럽고 천박하며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모욕하는 소리를 외면했다. 분노는 진실이 드러난 후에 터뜨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레인.”
의식을 잃고 잠든 레인을 불렀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몸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가 불안했다. 손을 뻗어 몸을 흔들어 보려던 찰나에 레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다시 한번 레인을 부르려던 유르딘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레인의 시선은 초점이 맞질 않고 어딘가 이상했다. 눈앞에 있는 유르딘조차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고 시선은 자꾸만 엉뚱한 곳을 부유했다. 유르딘은 이런 모습을 바깥에서 수도 없이 보고 오는 길이었다. 이건 약을 한 자들의 특징이다. 레인은 유르딘에게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느릿하게 굴리며 입을 열었다.
“유르딘.”
“마약을 했나?”
“유르딘.”
미련스레 이름만을 부르며 레인이 웃었다. 언제나 유르딘에게 보여 주던 모습 그대로 고요하고 온화한 분위기로 웃는 것이 아니라, 이지를 잃은 채 마치 백치처럼 헤실대고 있다. 레인의 책상 위를 뒤지던 기사가 마약이 있다고 소리쳤다. 원래 주변 분위기에 예민한 성격이었는데 지금은 주변의 분위기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지 분위기에 맞지 않게 여전히 레인은 얼빠진 얼굴이었다.
가슴이 자꾸만 불안하게 뛰었다. 레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유르딘의 시선이 느슨하게 헤쳐진 셔츠 안쪽 하얀 살결에 닿았다. 창백한 피부 위에 죽어 나자빠진 노인이 남긴 게 분명해 보이는 자국들이 몇 개나 있었다. 머리가 돌아 버리는 것 같았다. 저 노인이 계속 이곳에 붙어 있었다고. 계속 여기에 붙어서 레인을, 레인을…….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골적인 망상을 지우려 애쓰며 유르딘은 한 가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이제나흐고, 베델이고, 유르딘 니제스고, 왕국이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린 채 머나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주위의 그 누구도 레인을 옹호하지 않고 모욕하며 죽이라고 외친다. 증거가 명백하다고? 유르딘은 그 증거라는 것조차 우스웠다. 만약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레인이 아니라 왕족이거나 고위 귀족의 후계자라면 다들 한목소리로 레인을 죽이는 게 정의라고 외치겠는가? 제 몸을 사리거나 아예 거짓 증거라며 조작의 증거를 찾으려 들겠지.
아무 죄 없이 누명을 뒤집어쓴 새파랗게 젊은 청년을 죽여 없애는 것이 정의라고 외치는 상황에 유르딘은 현기증을 느꼈다. 세상은 레인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다. 어쩌면 유르딘이 몰랐을 뿐, 사실 이 세상은 누구에게든 가혹할지도 모른다. 지금껏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가? 죄질의 흑과 백을 가르는 것은 그 사람의 죄가 아닌 권력이다.
진저리가 났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장소에 레인을 보호하고,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마른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장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수많은 시선이 유르딘에게 따라붙고 있었다. 유르딘은 제 감정을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레인은 약을 했다. 아주 명백한 사실에, 더는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유르딘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따라붙은 기사가 레인의 처우를 물었고 유르딘은 없는 정신으로 감옥에 넣되, ‘아이제나흐’임을 고려해 두라고 명령을 내렸다. 아이제나흐는 유르딘이나 레인에게 공통된 증오의 이름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만은 쓸모가 있었다. 설마하니 아이제나흐가 버려둔 차남을 이제 와서 옹호하지는 않겠지만, 괜히 아이제나흐의 직계를 함부로 다뤄 꼬투리 잡히고 싶어 하는 자는 없었다. 지하 감옥행까지 피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왕명을 받을 때까지 며칠의 시간은 벌 수 있었다. 남은 시간과 증거에 관한 요소들을 계산하고 따져 보며 빠르게 방으로 돌아오자 뒤따라온 베른이 황급히 문을 닫고 잠갔다.
“유르딘 님, 레인 님이 약을 하시기는 하셨지만…….”
돌아본 베른은 이상할 정도로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도 알아. 봤다.”
“스스로 하셨으리라는 보장은 없고요. 아마 강제적으로…….”
“당연한 것 아닌가?”
“네?”
대체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것인지. 유르딘은 짜증스레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유르딘보다 머리가 훨씬 좋은 베른이다. 갑자기 그가 멍청하게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안 돌아가나? 레인이 약을 했어. 아마 야만족들이 만든 약이겠지. 그건 인간을 순간이지만 완전히 백치로 만들어.”
“네. 그건 저도 압니다만…….”
“그리고 계속 머무르고 있던 그 빌어먹을 놈은 의원이지.”
“네, 그야 그러……. 어? 어어?”
“이제 알았나?”
멍청하게 눈을 부릅뜬 베른을 보며 유르딘이 혀를 찼다. 등록된 정식 마법사일 확률은 낮지만, 얼치기 마법을 쓰는 하급 마법사일 확률이 높았다.
인간을 세뇌하는 마법은 고난위도의 마법이지만, 약에 취한 인간에게 단순한 행동을 명령하는 것은 훨씬 쉬웠다. 물론 옛 시대의 마법처럼 완벽하지는 않아서 세뇌당해 타의로 움직이는 인간은 어딘가 어색하게 행동해 티가 나게 된다. 하지만 병을 핑계로 매일같이 방에 틀어박혀 사람들과의 만남을 최소화하던 레인이라면 충분히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었다.
간단한 명령을 내리는 수준이라지만 인간의 정신에 관여하는 마법은 난이도가 높은 축에 속한다. 군에서도 정보를 빼낼 때 단순한 세뇌나 자백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유르딘도 잘 알았다. 지정한 행동을 명령할 정도로 정교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마도구와 비약, 희귀한 약초들을 필요로 했다. 아무리 증거를 철저하게 지워도 눈에 띄는 희귀한 재료를 사 모은 흔적들을 모두 지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꼬리가 밟혀 성 출입이 갑작스레 막혔으니 노인이 있던 곳을 털어 보면 뭐가 나와도 확실히 나올 터였다.
일단 의원이 세뇌 마법을 사용했다는 증거만 찾아도 레인에게 빠져나갈 구멍은 생긴다. 어느 정도 결백에 대한 가능성이 보인다면 아이제나흐 공작은 꼬리 잘라 내듯 레인을 버리기보단 결백을 밝혀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게 이득이라는 계산을 마치고 행동할 확률이 높다. 추문을 뒤집어쓴 채 죽는 것보다야 억울하게 몰렸다는 결백을 밝혀내는 편이 공작가에게 훨씬 더 나았다.
“그렇네요. 그런 거라면 일단 의원 쪽만 파헤치면 되니까……. 사흘, 사흘 정도면 확실히 레인 님을 감옥에서 꺼낼 수 있을 겁니다.”
다행히 완벽하게 이해한 모양이다. 중요한 일을 맡아야 하는데 갑자기 멍청해진 베른이 못 미더워 유르딘은 못마땅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 그렇게 간단한 걸 왜 오늘따라 멍청하게 구나?”
“왜냐니요, 유르딘 님이 레인 님을 죽일 듯이 노려봤으니까 그렇죠.”
“…내가?”
유르딘이 눈을 깜박였다.
“네. 그렇다니까요. 유르딘 님이 중독자를 혐오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유르딘 님 이야기를 다 들었던 저도 순간 레인 님을 그대로 베어 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니까요.”
“내가 무슨……. 뭘 그렇게 화냈다고.”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화났던 것은 맞았다. 레인 쪽이 아니라 의원에게. 약을 먹여 놓고 제대로 의식이 없는 상대를 강간했다니, 남의 일이라도 화가 나는데 피해자가 레인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분노와 증오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독을 먹고 곱게 나자빠진 놈을 되살려서 사지를 찢어 놓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그래도 최대한 이성적으로 감정을 추스르고 일단 레인의 결백을 밝혀내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표정이 몹시 험악했던 모양이다.
처음으로 유르딘의 표정이 불쌍할 정도로 누그러졌다.
“…레인이 내가 화났다고 오해했을까.”
“당연하죠. 얼마나 살벌했는데요. 저라면 무서워서 오줌이라도 쌌을걸요.”
“레인이 너처럼 얼빠진 멍청이인 줄 알아?”
진지하게 되돌아오는 반박에 베른은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농담한 거라면 좋겠는데 진지하기 짝이 없는 유르딘의 얼굴을 보건대 진심인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휴일 반납하고 유르딘의 곁에서 봉사한 세월이 몇 년인데 말 한 번 잘못했다고 한순간에 얼간이로 만들지? 어이가 없었지만 서른 중반에서야 생애 두 번째 사랑을 하는 불쌍한 상관을 응원하는 처지에서 그냥 참고 넘기기로 했다.
“장점도 있어요. 유르딘 님의 그런 태도를 봤으니 당분간 두 분 사이에 대한 쓸데없는 소문은 쏙 들어가겠죠. 어쨌든 이 일은 사흘 안에 끝내겠습니다, 유르딘 님. 제 모든 것을 바쳐서요.”
“그래.”
별로 안심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베른은 한마디 덧붙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사흘 뒤에 찾아가서 무릎 꿇고 손잡고 사과라도 하세요. 당장은 화내실 수도 있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면 이해해 주실 겁니다.”
“그럴까…….”
골똘히 고민하는 유르딘을 보며 베른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설마 유르딘이 귀엽게 보일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상관의 변화를 즐겁게 감상한 베른은 이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귀여운 상관이 다시 악마처럼 변하지 않게 하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사흘 내에 레인의 세뇌에 대한 증거를 찾아내야만 했다.
증거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레인을 보살피던 하녀 라사가 쓸데없이 입을 놀리며 거짓 자백을 했고 그로 인해 한차례 성안이 뒤집혔지만, 유르딘은 그녀를 감금하고 무시했다. 레인의 무고가 밝혀지면 개 같은 수작을 부리는 여자의 혀를 뽑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르딘과 베른은 역할을 분담했다. 유르딘은 성 내의 분위기를 감시했고, 베른은 의원의 거처를 찾아가 증거를 조사하기로 했다. 유르딘은 레인 아이제나흐의 내통자가 더 없는지 감시한다는 명목을 내세워서 기사들을 감시했다. 괜한 시비가 아니라 정말로 수상하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베른이 비밀에 부친 수사 내용이, 특히 레인과 유르딘의 추문이 퍼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자신들에게 괜한 불똥이 튈까 두려운지 다들 몸을 납작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유르딘은 레인을 은밀히 보살폈다. 잔뜩 약해져서 제대로 의식조차 차리지 못하는 터라 추궁조차 받을 수 없는 레인의 병약한 몸이 핑계가 되어 주었다. 레인은 안타깝게도 중독된 상태에서 약이 끊기자 몹시 괴로워하는 모양이었다. 그것만은 유르딘이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베른이 죽은 의원의 집에서 증거를 모아 올 때까지 추궁이 가능한 상태로 만든다는 핑계하에 감옥 주변에 화로를 몇 대나 놓고 이불과 식사를 넣어 주었다.
레인이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고 모조리 토해 낸단 소식을 들었을 때는 증거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레인을 챙겨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인은 몹시 쇠약해져 도망칠 수 있는 상태조차 아니었다. 저런 곳에 둘 만한 상태가 아닌데. 일분일초가 지날 때마다 유르딘은 돌아 버리는 줄 알았다.
초조한 시간이 지나고 베른이 약속한 지 이틀째가 되던 깊은 밤이었다.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유르딘이 느끼기에는 지난 이틀이 이 년과 같이 길었다. 야만족을 추적하던 때부터 성에 도착해 시간을 보내는 닷새의 시간 동안 유르딘은 합쳐서 채 두세 시간도 잠들지 못했다. 성에 도착하기 전에는 한시라도 빨리 성으로 도착하기 위해 무리했고, 성에 도착한 후로는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레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 있을 것만 같아 늘 불안했다. 심각하게 잠이 부족했지만 졸리긴커녕 점점 신경만 예민하게 당겨졌다.
결국, 유르딘은 참고 참다가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깊은 밤에 레인을 찾아갔다. 옆에서 유르딘의 일을 돕던 기사 하나가 감옥까지 동행했다. 간수 또한 유르딘을 주목하고 있었다. 아직 유르딘과 레인의 관계에 대한 의혹은 걷히지 않았다.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을 참고 기회를 잡아서 레인에게 원하는 복수와 영광된 길을 돌려 줘야만 했다. 단 사흘. 그래, 내일까지만, 몇 시간만 더 참으면 된다. 유르딘은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유르딘은 무형의 사슬에 얽매인 채 철창 너머에서 레인을 내려다보았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든 레인의 얼굴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했다. 분명히 숨을 쉬고 있는데도 시체 같은 얼굴이었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혹시 나는 굉장한 실수를 하는 게 아닐까?
낮에 베른이 전서구를 통해 몇몇 증거와 암호로 된 기록물을 찾았고 내일까지 확증을 만들어 가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하루만 더 기다리면 레인의 명예에 흠집을 내지 않고 온전하게 빼내 줄 수 있었다. 오늘까지만 고생하면 된다. 그날 그렇게 등을 돌렸다고 레인이 화를 내며 유르딘을 외면해도 좋았다. 레인이 바란다면 제 감정을 포기하고 누군가에게 보내 줄 수도 있었다. 유르딘은 오직 레인의 행복을 바랄 뿐이었다. 오늘 하루만 고생하면, 오늘 하루만 버티면, 몇 시간만 더 참으면 된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초조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근거 없는 불안이 유르딘을 감쌌다. 얼굴만 보고 떠나려 했는데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대로 도망칠까? 충동이 자꾸만 샘솟았지만, 자신의 근거 없는 불안 때문에 레인의 인생을 도망자의 고달픈 삶으로 망쳐 놓을 수는 없었다. 하루. 딱 하루만 더.
“니제스 경.”
뒤에 선 기사가 조용히 유르딘을 불렀다. 아직 채 10분도 머무르지 않은 것 같지만, 성안의 시선이 몽땅 유르딘에게는 모여든 지금은 사실 이 정도의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르딘은 레인의 창백한 얼굴을 눈에 새기고 간신히 몸을 돌렸다. 이렇게까지 불안해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 못 자서 신경이 예민해진 게 분명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뜨끈한 물로 목욕하고 한잠 자고 나면 불안이 가시리라고 유르딘은 생각했다. 불안해할 필요 없었다. 내일이면 모두 무난하게 끝난다.
스스로 세뇌하듯 한 생각이 무색하게도 유르딘은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 불안감이 유르딘을 바짝 쫓아와 자꾸만 덮쳤다. 지나치게 혹사당한 육체가 한계에 달해 가끔 깜박깜박 잠이 들긴 했지만 채 1분도 졸지 못하고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유르딘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깨어 있음에도 정신이 흐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또렷해졌다. 유르딘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날이 어스름히 밝아 오고 있었다.
여전히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르딘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셔츠에 바지, 가벼운 차림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레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눈에 담고 싶었다. 왕국 제일가는 기사라는 이름이 아깝게 어설프게 걷다 두 번쯤 구를 뻔하며 지하 감옥을 내려가던 유르딘은 레인에게 붙여 두었던 간수와 맞닥뜨렸다. 레인이 피를 토했다느니, 저대로면 죽을 것 같다느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간수를 무시하고 유르딘은 비틀비틀 걸어 감옥 아래로 내려갔다. 간수가 한 것인지 철창으로 된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리고.
차가운 감옥 안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싸늘한 시신만이 누워 있었다.
시야가 온통 붉었고, 레인은 온통 희었다. 코에 손을 대 보았으나 숨이 올라오지 않는다. 레인의 삶은 모두 바닥에 흩뿌려져 텅 빈 육신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유르딘은 차갑게 얼어붙은 몸을 달달 떠는 어설픈 손길로 끌어안았다. 차다. 몸이 딱딱하다. 맥을 짚고 가슴에 귀를 대어 보고 숨을 몇 번이고 확인하지만, 그런다고 레인이 살아나지는 않았다. 죽은 몸은 벌써 사후 경직이 시작되고 있었다.
레인이 죽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야 하는데, 죽었다. 하루. 하루도 아니고, 오늘 해가 저물기 전까지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이미 죽어 있었다. 유르딘의 손이 주체하지 못하고 덜덜 떨렸다.
“안, 돼……. 말도 안 돼, 레인……. 이런, 건 말도 안 돼. 레인…….”
뜨거운 눈물이 레인의 차가운 살갗 위로 떨어졌다. 품에 끌어안아 따뜻하게 해 주면 숨이 돌아올 것처럼 유르딘은 계속해서 레인을 붙잡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참지 말고 바로 달려갈 것을.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노력한 걸까. 레인의 미래를 위해서라며 죽어 버릴 아이를 내버려 뒀다. 명예나 오지 않을 미래 따위를 걱정하지 말고 목숨을 지켜 줬어야 했다. 감옥에 밀어 넣고, 오해한 채, 이렇게 비참하게 죽게 만들어서…….
유르딘은 레인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의식의 끈을 서서히 놓았다.
하루를 꼬박 잠들었던 유르딘이 깨어났을 때는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넋이 나가 앉아 있는 유르딘을 대신해 베른이 부지런히 움직였고 진상은 하나둘 속속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레인 아이제나흐는 병을 앓았다. 의원이 암호로 남긴 기록에 따르면, 레인이 앓고 있는 병은 마력 결핍증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갖고 있어야 할 마력이 부족해 육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점점 약해지는 병이다. 이 시대에는 불치의 병이지만, 꾸준히 신관의 축복을 받는다면 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이 병에는 로인 차처럼 마력을 흐트러뜨리는 성질이 있는 것들이 최악이었지만, 레인은 의원에게 속아 자신이 앓는 병이 마력 과다증인 줄 알고 로인 차를 복용했다. 증상은 같았지만 치료법은 정반대다. 신관의 축복을 받아 마력을 부어도 모자랄 마력을 일부러 흐트러트린 셈이었다.
감옥에서 괴로워하던 건 마약의 중독 증상보다는 마력결핍증이 심각해져 육체가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레인이 감옥에 들어가기도 전에 마력은 이미 한계까지 고갈됐을 것이고, 최후의 순간까지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치료받지 못해 죽었을 것이다.
의원과 손을 잡고 있던 라사는 옛 과거의 일을 이용해 성공적으로 레인에게 접근해 두 사람을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의원은 라사와 짜고 로인 차로 레인을 무력화시키고, 마약으로 레인을 중독시킨 후에 그대로 세뇌했다. 세뇌한 레인은 그들의 뜻대로 움직였다. 레인 아이제나흐가 의원의 손에 떨어지자 성에 대한 무모한 총공격을 감행하려던 야만족의 계획은 성 내부를 폭발시키는 비교적 확률 높고 유효한 전략으로 바뀌었다.
하늘이 잠시 야만족의 손을 들어 주었는지 그들은 술집에서 레인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쏟아 내는 기사 발터 플랑을 발견했다. 발터 플랑은 버려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사였던 자라 성안의 상황을 잘 알았다. 야만족들은 어떻게든 레인을 궁지에 몰아넣어 복수하고 싶어 하는 발터와 협력해 성공적으로 불량 마법 도구의 반입에 성공했다.
처음부터 야만족들은 발터와 레인, 두 사람 모두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약에 취해 있었다고는 해도 레인은 야만족군의 첩자인 의원을 지나치게 자주 접했다. 로인 차를 장기간 다량 복용시킨 시점에서 레인에게는 죽음이 예견된 거나 다름없었다. 살아 있는 동안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레인을 죽이고 가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만약의 경우 갑작스레 떠나게 되어 레인의 목숨을 끊지 못할 때를 대비해 알아서 죽어 나자빠지도록 수를 썼다.
발터도 계획을 진행하는 동안 야만족들의 얼굴을 많이 마주했기에 죽여야 했다. 다만 야만족들은 계획의 끄트머리에 발터를 살해할 계획보다 빠르게 발터를 살해했다. 하지만 발터는 야만족의 생각만큼 멍청하지 않았고 금세 자신이 나르는 물건이 단순한 불량품이 아님을 알아챘다. 이걸 바로 왕국군에 알리지 않았던 점이 발터의 실책이었다. 발터는 이 일을 밝혀내고 해결해 공을 독식하여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발터의 계획은 발각됐고 야만족들은 입을 막기 위해 발터를 죽이고 시체를 유기했다가 덜미를 잡혔다.
그와 별개로 몇몇 기사들이 유르딘에 대한 악의를 품고 발터의 일기장에서 본 내용을 과장스레 떠벌렸다. 고작 삼십 대의 젊은 나이에 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 된 유르딘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그들이 입을 가볍게 놀린 이유였다. 대단한 악의는 아니었을 터다. 사교계에서 가십이 떠돌고 악의적인 소문에 의해 유르딘의 평판이 조금 깎아내리긴 하겠지만, 그저 그뿐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놀렸다.
서로 잘 맞아떨어진 악의와 음모의 한복판에 있었으나 레인은 아무것도 몰랐다. 알 기회조차 없었다. 그저 레인이 재능 있는 귀족이라 인정받고 북부에 왔기 때문에, 하필이면 하는 일이 마법 도구를 관리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과거에 라사와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하필 의원을 부를 정도로 병약했기 때문에 레인은 희생양으로 낙점됐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던 게 레인의 비극이었다. 탐욕과 음모와 악의, 이 세상의 온갖 더러운 오물들에 휘말려 레인 아이제나흐는 살해당했다.
유르딘 니제스는 그 살해에 손을 보탰다. 베른이 그렇지 않다고 몇 번이나 유르딘을 설득했지만, 그런 허울 좋은 말은 하나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유르딘이 괜한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레인이 살아 보겠다고 급하게 의원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고,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레인에게 이상이 생겼을 때 바로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고, 그날 지하 감옥에서 레인을 구했다면 레인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는데 모조리 놓쳤다는 사실에 유르딘은 좌절하고 절망했다. 힘겨운 감정에 허덕이던 유르딘은 커다란 선물 상자를 받았다. 건네준 상대가 베른이 아니었다면 자신을 조롱하는 줄 알고 당장 검을 휘둘러 머리를 베어 버렸을 것이다. 베른은 유르딘의 무거운 시선을 받으며 힘겹게 입을 뗐다.
“레인 님의 유품입니다.”
유품이라니. 그런 물건을 감히 유르딘이 받을 수는 없었다. 사양하려 했으나 베른이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게 더 빨랐다. 나무로 만든 화려한 선물 상자 안에 든 것은 스물 넘은 남자가 이런 곳까지 가져와 지니고 있었다기에는 지나치게 유치한 장난감이나 동화책들이었다.
“맨 아래에 비밀스러운 칸이 하나 더 있더군요. 조작해 뒀으니 쉽게 열릴 겁니다.”
베른은 그 말만 남기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감히 레인의 물건을 만져도 될지 몰라 유르딘은 망설이는 시선으로 상자 안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상자 안에는 유치한 동화책이나 장난감뿐만 아니라 알록달록한 포장지와 리본까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과거에 레인이 받은 선물들인 걸까. 남에게 받은 선물을 유르딘이 유품이라고 받아도 될지 몰라 어색하게 상자 모서리만 만지작거리던 유르딘은 익숙한 물건을 발견했다. 유르딘이 레인과 편지 교류를 시작하면서 종종 약재를 함께 포장할 때 사용하던 황색의 포장지였다.
유르딘은 홀린 사람처럼 선물을 하나하나 꺼냈다. 대여섯 살 난 아이가 쓸 법한 유치한 선물들이 여럿이었고 고루한 시집이나 장식용 단검도 있었다. 모조리 기억에 없는 물건뿐이다. 상자를 비운 유르딘은 바닥의 엇나간 나무판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Y.N.」
유르딘의 짧은 이니셜이, 그의 것이 아닌 필체로 적힌 카드들이 유르딘이 보낸 편지와 함께 뒤섞여 숨겨진 바닥 아래에 깔려 있었다. 레인의 생일이 다가오면 바빠서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유르딘 대신 하인이 날을 기억해 두었다가 선물을 보낼지 물었다. 그렇게 무심한 마음으로 보낸 선물이다. 1년에 한 번 보낸 게 고작임에도, 선물의 대부분이 자라나는 아이에게 주기에는 지나치게 유치한 물건들이었다. 아이의 성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아이들이란 해가 다르게 훌쩍 자라는데도, 몇 년이나 일곱 살짜리의 생일을 축하하듯 비슷한 선물만 보냈다. 상대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선물인 게 뻔히 보였다.
자신이 써서 보낸, 또는 남이 대충 서명한 카드와 편지들을 모두 들어 올리고 나니 레인의 필체로 적힌 카드들이 보였다. 유르딘은 손에 든 것을 내려 두고 레인이 보내지 않은 답장을 하나하나 읽었다.
「선물 감사해요, 니제스 경.」
「올해도 감사해요. 책 너무 예뻐요.」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읽기에는 조금 유치한데 그래도 좋았어요.」
「언제나 감사해요. 제 생일을 챙겨 주는 사람은 니제스 경뿐이에요.」
삐뚤빼뚤했던 글씨들이 차근차근 가지런해진다. 유르딘은 마지막 카드를 들었다. 유르딘에게 직접 전하는 편지로는 미처 전하지 못한 레인의 진심이었다.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요. 당신이 준 가장 큰 선물이 제 삶이에요. 제가 감사한 만큼 뭐라도 돌려 드리고 싶은데, 저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사랑해요.」
유르딘의 무심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레인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양 이곳 북방까지 가져왔다. 유르딘 때문에 죽은 아이가, 유르딘에 의해서 살았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들은 아무것도 아닌데, 레인 혼자 불쌍하게 착각해서는.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었다고…….”
후회만이 빛바랜 추억 위에 내려앉았다.
유르딘은 더는 추문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솔직하게 절망했고 분노했으며, 성내의 기사들은 적에게 속아 넘어가 아이제나흐의 차남을 모욕한 죄를 알았기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끔찍한 정적이 머무는 성에 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객 따위 신경 쓰지 않았을 상태의 유르딘이 객의 방문을 알 수 있었던 건 그가 도착하자마자 곧장 유르딘이 있는 곳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유르딘이 머무는 곳은 바로 레인의 관이 자리한 지하 석실이었다. 남자는 레인의 관 앞에서 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레인.”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말을 달려온 남자의 몰골은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머리는 산발에 원래 고급품이었을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진흙이 묻어 엉망이었다. 그렇게 경황없이 온 힘을 다해 이곳까지 달려온 남자는 언제 굳건하게 서 있었냐는 듯 레인의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남자는 창백하게 질려 있는 레인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제 손이 더러운 걸 깨달은 남자가 레인에게서 손을 거두고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바닥에 내리쳤다.
“레인, 레인…….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왜, 왜……. 왜 네가. 왜?”
난폭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주먹에서 피가 터졌다. 손이 너덜너덜해진 후에야 자학을 멈춘 남자는 몸을 웅크린 채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오열했다. 성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사람 하나 죽일 것처럼 사나운 기색을 하고 있던 남자가 레인의 앞에서 세상이 끝난 것처럼 절망하며 우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동정을 샀다. 남자는 오열하다가 끝내 의식을 잃었다. 베른이 찾아와 하인들에게 명해 남자를 옮기고 나서야, 남자의 감정에 동조해 다시 한번 울던 유르딘은 눈물을 닦고 남자의 정체에 관해 물었다.
“카이렌 모드. 모드가의 유일한 후계자입니다.”
모르는 이름은 아니었다. 아이제나흐 공작의 정치적 동반자인 모드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로, 레인의 친구이기도 했다. 동시에 만나면 멱살을 잡고 흠씬 패 주리라 생각했던 상대이기도 했다.
레인이 죽은 후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그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무기를 다루는 유르딘은 그 상처 중 상당수가 타인에 의해 생긴 상처임을 알 수 있었다. 몽둥이나 채찍에 피가 날 때까지 얻어맞은 상처나 작은 불씨에 덴 상처가 흔했다. 어딘가 부딪힌 상처 또한 너무 많았는데, 신중한 성격의 레인이 수십 개의 상처를 남길 만큼 실수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특히나 심한 상처는 허벅지에 남은 커다란 화상 자국이었다. 직접 살을 불에 지져 버리지 않고서야 남을 수 없는 끔찍한 상처였다.
레인의 편지에서는 친구 ‘카이렌’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다. 자주 어울리는 친구인 주제에 친구의 부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수가 있을까? 어쩌면 놈이 원흉일지도 모른다. 유르딘은 멍청한 놈의 낯짝을 갈아 주리라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카이렌은 레인의 죽음에 진심으로 절망해 오열하고 있었다. 소중한 친우를 잃고 오열하는 카이렌을 유르딘이 질책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 때문에 친구를 잃은 카이렌을 생각하니 미안한 감정마저 치밀어 올랐다. 하긴, 유르딘은 레인을 마주하고서도 그가 죽어 가는 것조차 몰랐다. 카이렌도 충분히 레인의 상태를 모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밀려드는 죄책감에 유르딘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레인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절망하며 비탄의 눈물을 쏟을 사람이 세상에 하나 더 있는 게 다행이었다. 여전히 힘겹지만, 오늘 하루를 추스를 정도의 위안은 얻었다.
여전히 남은 일은 많았고, 유르딘은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사람이었다. 유르딘은 카이렌을 잘 대접해 주라고 말하고는 레인이 있는 석실을 떠났다.
절망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더럽혀진 레인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가 증오하던 아이제나흐 공작가를 부숴 버리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누가 레인에게 폭력을 휘둘렀는지는 몰라도 공작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징벌할 자가 많았다.
깊은 밤. 유르딘은 밀린 일에 몰두해 있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을 멈추려면 차라리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나았다. 종이가 제 원수인 듯 뚫어지라 노려보며 쓱쓱 서류를 넘겼다. 곁에서 베른의 염려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솔직히 거기까지 신경이 닿질 않았다. 어차피 말려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유능한 부관은 그저 조용히 피로에 좋다는 차를 연거푸 따라 줄 뿐이다.
온종일 일을 하다가 한밤중이 넘어서야 유르딘은 레인을 찾아갔다. 내일, 레인의 시신은 수도로 옮겨져 장례를 치르게 된다. 죽은 얼굴이나마 볼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그만 레인의 죽음을 인정하고 작별해야 할 때였다.
유르딘은 병사의 인사를 대충 받고는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레인의 시신은 깨끗한 천에 덮인 채 누워 있었다. 천의 윗부분을 조심스럽게 걷어 내자 잠든 것처럼 보이는 레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수도에 도착해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는 멀쩡히 보존하기 위해 간단히 방부 처리를 해 둔 시신은 살아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조금 다르다. 어스름한 어둠 아래 그림자 진 레인의 얼굴이 오늘따라 왠지 더 슬퍼 보였다. 유르딘을 책망하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자신의 기분이 우울한 탓이겠거니 하며 조금 헝클어진 레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천을 들어 올리며 흐트러졌다기에는 너무 많이, 마치 누군가가 그의 시신을 움직인 것처럼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유르딘은 어딘가에 질질 끌려다니며 눌린 듯한 뒷머리를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유르딘의 심장을 긁어내렸다.
유르딘은 아주 천천히, 빨리 내리면 레인이 터지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럽게 천을 밑으로 내렸다. 곱게 다려 입혀 둔 수의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대체 누가 시신에 손을 댔단 말인가. 화가 치미는 의문과 목이 졸리는 듯한 감각을 안고 유르딘은 레인을 살폈다. 어딘가에 긁힌 듯, 말끔했던 시신 위로 난 추가적인 상처를 보자 화가 치밀었다. 대체 어느 놈이. 병사를 문책해야겠다 생각하며 유르딘은 새 수의를 입혀 줄 요량으로 구겨진 수의를 조심스레 벗겼다. 끈으로 묶어 둔 수의는 유르딘의 손안에서 쉽게 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르딘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
뭐라 표현할 말이 없어 그저 울림이 된 소리가 목구멍 너머로 허무하게 올라와 방 안을 울렸다. 싸늘하게 식은 몸을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절망적인 감정들이 유르딘의 속을 어지럽히고 마구 두들겼다. 정갈하게 누운 레인의 몸 위로 누군가의 욕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창백한 몸 위에 흩뿌려져 이제 막 말라붙으려는 정액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유르딘은 일단 구겨진 수의로 더러운 것들을 닦았다. 상식 밖의 상황에 유르딘은 참담한 두려움마저 느꼈다.
당장 소리쳐 범인을 찾으라 외치려 했는데 목소리가 떨려서 나오질 않았다. 잠시 후에 차라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이 밝혀지면 레인의 죽음은 천박한 자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조용히 처리하되, 범인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유르딘은 떨리는 손으로 레인의 몸을 닦고 새 수의를 입혔다. 일련의 과정을 의식을 치르듯 신중하게 진행한 유르딘은 점차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가장 먼저 유르딘은 병사를 문책했다. 병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저 갑작스러운 총사령관의 문책이 의아하고 두려운 듯 조금 겁에 질려 얌전히 대답했다. 애초에 이자가 제대로 지켰어야 하는 게 아닌가. 화가 치밀어 병사의 목을 잘라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으나 유르딘은 간신히 참았다.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카이렌 모드. 일부러 깊은 밤중에 이곳 석실까지 찾아와 꽤 긴 시간을 머물다 갔다는 그놈 외에 일을 저지를 만한 자가 없었다. 처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보잘것없는 눈물 따위에 넘어가지 말고 놈을 의심해 몰아붙였어야 했다. 한 번 후회해 놓고 어떻게 또 후회할 일을 만들 수가 있지? 유르딘은 이제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무능하고 멍청한 천치 새끼.
유르딘은 욕을 삼킨 채 검을 들고 카이렌의 방으로 향했다. 이제 유르딘의 얼굴엔 아무 번민도 없었다. 혼란도 슬픔도 분노도 자책도 모든 것이 부서지고 그저 껍데기만 남았다. 더는 인내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카이렌의 방에 도착한 유르딘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방 안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카이렌이 다 풀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본 적이 있는 익숙한 표정이다. 레인에게서 보았던, 수많은 중독자에게서 봤던 그 표정. 약을 하고 침대 위에서 죽어 가던 얼굴. 물론 두 얼굴이 느끼게 하는 감상은 확연히 달랐다. 유르딘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그저 사무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뭘 하는 건가, 카이렌 모드.”
“이게, 레인이… 한 거라고 들어서.”
카이렌은 조금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의 발치에는 약을 주입하고 남은 빈 병과 주사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유르딘은 그것들을 밟으며 다가가 발로 침대를 걷어찼다.
“레인을 욕보인 자가 너인가.”
“욕보여? 욕보인다, 욕보인다라…….”
같은 단어를 십수 번은 중얼거리던 카이렌이 몸을 뒤로 젖히며 격렬하게 웃었다. 약에 취해 감정이 심하게 고조된 상태였다. 소리 높여 웃던 그의 웃음이 차츰 잦아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카이렌이 중얼거렸다.
“아니지, 그건. 그건 그런 것이 아니지.”
다시 몸을 낮추며 속삭이는 카이렌의 눈이 번들번들하게 빛났다.
“내 것을 내가 취한 거지. 언제나 그랬듯이.”
진득한 목소리가 점차 낮아졌다. 유르딘은 표정 없는 얼굴로 카이렌을 살피다가 옆자리에 약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몸을 심하게 비틀거리는 카이렌에게 다가간 유르딘이 그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레인이 네 소유물이라. 지금껏 그 애를 안고, 폭행했어? 시체조차 욕보일 정도로 우습게 보면서 그 애를 짓밟은 건가?”
“그랬지……. 영원할 줄 알았는데. 왜 죽은 거지?”
행복감에 들어찬 카이렌의 목소리가 방 안에 진득하게 눌어붙었고, 유르딘이 짧게 숨을 삼켰다. 잠시 자기 생각에 도취하여 있던 카이렌이 유르딘의 멱살을 잡았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유르딘은 피하지 않았다.
“당신이 지웠어?”
“무엇을 말인가.”
“레인에게 내가 남겨 둔 낙인.”
“낙인?”
“몰라? 내가 레인에게 손수 남겨 준 낙인이야. 허벅지 안쪽에, 우리 가문의 낙인을 찍었어. 멍청해서 몇 번을 강간해도 주제를 모르는 거 같길래 흔적으로 남겼어. 너는 내 것이라고 알려 줬지.”
짚이는 상처가 있었다. 가장 큰 상처, 가장 아팠을 것 같은 허벅지의 커다란 화상 자국이었다. 대체 누가 상처를 지운 것인지는 유르딘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애초부터 그런 끔찍한 것을 고의적으로 남겼다는 사실에 유르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유르딘이 카이렌의 머리채를 홱 잡아당겼다. 고개가 단번에 뒤로 꺾이는 강한 힘에 신음을 내며 멱살을 쥔 손을 놓친 카이렌에게 사납게 속삭였다.
“네가 그랬군. 네가 줄곧 레인을 찍어 누르고, 그 애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어.”
“그래. 소유물 주제에 스스로 뭔가를 원할 필요는 없어. 그건 오직 내 곁에서만 가치를 가져.”
“미쳤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카이렌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죽은 자조차 놓아주지 않겠다는 지독한 정복욕과 소유욕이었다.
“레인은 내 거야. 죽어서도 도망칠 수 없어. 시체라도 범할 거야. 크, 흐흐흐…….”
희번득하게 눈을 빛내던 카이렌이 손을 들어 유르딘의 가슴 위를 쿡 찔렀다.
“너도 레인한테 발정 난 새끼야?”
“…….”
“너 같은 새끼들 잘 알지. 몇 놈이고 있었어. 씨발 놈, 차라리 창녀가 더 조신할 지경이지. 하긴 화대도 안 주고 돌려 먹어도 좆이 좋다고 환장하는 새끼니까 어쩔 수 없나? 넌 얼마나 따먹었어? 씨발 새끼야.”
짜증스레 말하는 카이렌을 보며 유르딘이 웃었다. 약에 취한 카이렌이 유르딘을 미친놈처럼 봤지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러고도 인간인가? 아니면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였던가? 인간이란 저열한 본성을 도덕이라는 규범으로 가려 뒀을 뿐일지도 모른다. 수없이 많은 악의 중에 단 하나만 없었어도 레인은 죽지 않았을지 모르는데. 크고 작은 악의들, 그중 하나라도.
광기와 집착에 물든 카이렌을 보면서 유르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이해했다. 지금 이 순간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들이 카이렌의 앞에서 낱낱이 떠올랐다.
“고맙군, 카이렌 모드. 내가 할 일을 알려 줘서.”
약에 취해 몽롱한 머리로 반박하려는 순간, 유르딘의 번뜩이는 칼날이 카이렌의 입안을 쑤셨다. 혀가 잘리며 피가 튀었다. 비명을 지르려는 목을 잡아 조르며, 유르딘은 검을 들어 카이렌의 배를 쑤셨다.
그날 밤, 모드가의 후계자 카이렌 모드는 실종 처리되었다.
유르딘은 실종 사건을 다른 기사에게 일임하고 수도로 떠났다. 레인의 장례를 치른 후, 유르딘은 레인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왜 진작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캐는 대로 정보는 속속 굴러 들어왔다. 어릴 적에 무심하게 그저 잘 지내겠거니 했던 집에서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아카데미에서는 어떤 소문이 돌았는지, 며칠 지나지 않아 유르딘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받아 온 그 무도한 폭력의 나열들을 유르딘은 조용히 곱씹었다.
너무나도 지나치게 조용한 반응이 폭풍의 눈을 연상케 했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베른은 그저 그가 빨리 안정을 되찾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르딘은 며칠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국가적인 영웅 유르딘 니제스의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뒤집혔다.
소리 소문 없는 잠적인지라 온갖 추측이 떠돌았다. 타국으로의 망명, 또는 타국의 암살이라는 과격한 예상부터 오랜 전쟁에서 유르딘에게 살해당한 악령들이 유르딘을 망자의 세계로 끌고 갔다는 허황한 소문까지 나오면서 그의 실종은 연일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그러나 수사 결과 유르딘이 제 발로 잠적했을 확률이 높다는 결과만이 나왔다. 주변 사람에게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는 하였으나, 유르딘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 금화로 환전하고 무기를 챙겨 나간 정황으로 볼 때 어디까지나 유르딘은 스스로 사라진 것이었다. 왕국뿐 아니라 전 대륙에서 가장 명예 높은 기사가 말없이 잠적할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연신 입방아를 찧어 댔으나 뾰족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유르딘에 대한 소문이 점점 잦아들 무렵 왕국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살인 사건이었다. 그것도 무려 평민이 아닌 귀족이 대낮에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올해 고작 스물다섯 살 먹은 젊은 백작 다리우스 로닐이 사냥터에서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짐승이나 마수에게 뜯어 먹힌 것이 아닐까 추측했지만, 시체에는 심한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상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온갖 성의를 다 들인 듯 멀쩡한 곳이 없는 시체는 사지조차 제대로 붙어 있질 않아 결국 매장 대신 화장을 해야 했다.
그 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연이어 유사한 방식으로 세 명의 귀족 청년이 죽었다. 처음 죽은 남자는 그나마 홀로 사냥터를 돌아다니다가 습격당한 것이지만, 네 번째로 죽은 남자는 연이은 살인 사건을 대비해 가문 휘하의 사병들을 끌고 산을 넘다가 살해당했다. 목격자는 없었다. 병사나 기사는 물론이고 수발들던 평범한 하녀까지 가리지 않고 모조리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왕국은 벌집을 들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평민을 대상으로 그런 잔혹한 연쇄 살인이 일어나도 시끄러워질 텐데 하물며 이번에 살해당한 자들은 모두 호위까지 끌고 다닐 능력이 되는 고위 귀족이었다. 죽은 꼴만 보면 미치광이 살인마의 짓일 것 같기는 한데 목격자를 모조리 죽여 버린 일의 규모로 볼 때 도저히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대한 암살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느니, 타국의 암살이라느니, 정치적인 싸움이라느니, 온갖 추측이 떠돌았으나 증거를 남기지 않는 범인의 방식 때문에 어느 소문 하나 명확한 근거가 없었다.
사람들은 두 명 이상 모이면 무조건 이 화제만을 떠들어 댔고, 극심한 혼란과 공포 속에 왕국은 아직 얼굴조차 밝혀지지 않은 범인을 잡는 자에게 수도 주변의 기름진 영지와 남작 위까지 포상으로 걸었다. 왕국의 전력이 총동원된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범인은 수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사람을 죽여 나갔다. 희생자의 범위는 점점 더 확대됐다. 젊은 청년들뿐만 아니라 나이 지긋한 귀족부터 아직 어린 귀족 영애까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왕국이 범인의 꼬리나마 잡아낸 것은 귀족 피해자가 백에 가까워지던 때였다. 휘말려 죽은 자들의 수는 이미 수백에 달했다. 일방적으로 살해당하는 난전 속에 시신 아래로 기어들어가 살아남은 어린 시동이 있었다. 도를 넘은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반쯤 미쳐 버려 덜덜 떨기만 하는 시동을 어르고 달래고 약과 마법을 쓰고 웬만한 왕족 대우하듯 보살핀 끝에야 간신히 살인마의 단편적인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범인은 190에 가까운 키에 화려한 금발을 지닌 남자였다. 검 하나만 달랑 들고 저택에 쳐들어온 남자는 새파랗게 빛나는 검을 휘두르며 모두를 도륙했다고 했다. 큰 키에 화려한 금발, 무엇보다 빛나는 오러.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소드 마스터는 대륙에 단둘뿐이었고 한 사람은 70 먹은 노인이었다. 그런고로, 화려한 금발에 큰 키를 지닌 소드 마스터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유르딘 니제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유르딘이 범인이었다.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다들 어린 시동이 미쳐서 무언가 착각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 급히 유르딘과 가장 가까운 부관인 베른을 잡아들이려 했으나, 베른은 왕국 안에서 이미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뒤였다. 조금 더 강한 확신을 하고 왕국은 니제스 백작가를 털었다. 하루아침에 니제스가는 발칵 뒤집혔다. 젊은 니제스 백작 덕분에 날아오르고 있던 가문의 명예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니제스가는 일련의 살해에 연관이 없음을 주장하며 총력을 다해 유르딘의 추격에 애썼다. 그러나 니제스가에서도 이렇다 할 확신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주목받은 자가 카이렌 모드였다. 그는 유르딘이 아직 북방의 성에 머물던 시절에 그곳으로 갔다가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연쇄 살인이 시작된 때와 카이렌의 실종은 조금 시기가 떨어져 있었지만, 작은 실마리도 놓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방의 성을 이 잡듯 뒤진 끝에 왕국은 폐쇄된 비밀 통로에서 토막 난 시신을 발견했다. 썩어 문드러진 시신이 끼고 있는 모드가의 문장이 찍힌 반지만이 그가 카이렌 모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비밀 통로 안에 은밀하게 숨겨진 시신. 성 내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비밀 통로의 열쇠는 유르딘이 머물던 방구석에서 나왔다.
이제 범인의 윤곽이 확실해졌다. 귀족이 줄줄이 살해당했을 때 이상의 충격이 왕국을 강타했다. 왕국의 가장 명예롭고 이름 높은 기사 유르딘 니제스가 바로 미치광이 살인마였다.
심한 폭우가 쏟아졌다.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폭우 속에서도 경비를 서는 사병들을 내려다보던 레스터는 마른침을 삼키고 한숨을 쉬었다. 지난 몇 달간 이어진 유르딘 니제스의 살인은 왕국 귀족의 3분의 1 이상을 죽였다.
사람들은 무차별적인 귀족 살인 사건이라고 떠들어 대지만, 레스터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귀족의 3분의 1이 죽었을 뿐인데, 레스터의 아카데미 동기는 지스킬 마이어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이제 레스터, 카이렌과 같은 해에 아카데미를 다녔던 자들은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졌다. 최초에 죽은 자는 레스터의 단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 카이렌이었다. 레인이 죽고 북방으로 떠났던 친구는 몇 달 뒤에 썩은 시신으로 돌아왔다.
유르딘 니제스는 레인 아이제나흐의 복수를 하고 있다. 레인을 괴롭혔던 아카데미 동기나 레인을 공개적으로 조롱했거나 욕보였던 귀족 또한 모조리 죽이고 있었다. 모두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살해당한 이들 중 몇몇은 확실히 레스터의 기억 속에 있었다. 특히 수도 근교에서 처음 살해됐던 자들은 예전에 레인을 윤간하고 양호실로 데려간 자들이었다. 다리우스 로닐, 마렌 돌브, 그리고 칼 레히드까지.
세 사람의 죽음이 가장 끔찍했다. 귀족가의 체면을 위해 모든 정보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그자들은 몬스터만 반응하는 흥분제를 온몸에 바른 채 내장이 파열되어 죽어 있었다고 했다. 하필이면 정확히 그자들만.
하지만 레스터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제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아 왕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살인귀의 목적이 고작 한 명의 복수를 위한 일이라니, 레스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없기는 했다. 유르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라인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주변국에 형편없이 위협당하는 신세가 됐다. 최근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주장은 역시 타국의 청탁 쪽이었다.
레스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와인을 따랐다. 컵 바닥에 깔린 수면제와 피처럼 붉은 와인이 섞여 들어간다. 이제는 술과 수면제를 섞어 마시지 않으면 한시도 잠들 수가 없었다. 유르딘이 죽어야만 레스터가 편하게 잠들 수 있다. 경악할 만한 살인마는 마지막 살인을 저지르고 3주째 소식이 없었다. 세간에서는 지난번에 입은 상처로 죽은 게 아니냐는 여론이 팽배했지만, 레스터는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레인의 복수를 하고 싶은 거라면 가장 죽이고 싶은 상대는 아이제나흐 공작가일 테니까.
술과 약에 취해 의식을 잃듯이 잠들었던 레스터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처음 보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레스터가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피부 가죽이 모두 벗겨져 신음하고 있는 고깃덩어리였다. 분명 살아 있는데도 고깃덩어리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그만큼 참혹한 몰골이다. 남자의 시뻘겋게 핏발 선 눈이 공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레스터에게 달려들었고 레스터는 반사적으로 남자를 걷어찼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가 지독하게 아팠고 몸이 무거웠다. 레스터는 살기 위해 남자를 넘어뜨리고는 시야에 들어온 칼을 휘둘러 남자를 찔렀다.
“…에으…어…….”
혀가 잘린 남자가 기괴한 발음으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어째서인지 두 눈 가득 경악과 배신감을 가득 품은 남자는 짐승처럼 끄르륵거리다가 비참한 몰골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성기가 난도질된 흔적이 보였다. 이런 방식으로 고문하는 자가 누구인지 안다.
짝, 짝, 짝. 삭막한 어둠 안을 건조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레스터는 공포에 질린 채 시선을 들었다.
유르딘 니제스.
…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눈앞의 남자는 레스터가 몇 번 봤던 유르딘 니제스와는 완전히 정반대인 남자였다. 구정물에 빠졌다 나오기라도 했는지 남자에게서는 지독한 악취와 함께 피비린내가 풍겼다. 옷과 로브는 몇 겹이나 겹쳐 입은 게 무색하게도 잔뜩 찢어져 곳곳에 맨살이 드러났다. 찬란하게 빛나던 금발은 온데간데없고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잔뜩 길어져서 엉망으로 눈을 찌르고 있다.
추레하고 지저분한 몰골에서 예전 왕국의 영웅을 떠올리는 건 몹시 힘든 일이었다. 아마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누구든 걸인이라고 판단해 매질해서 내쫓을 모양새였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얼굴은 살이 빠져 날카로워졌고 길고 짧은 흉터로 난자되어 있어 몹시 험상궂은 인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얼굴에 남은 수많은 흉터보다 남자를 흉흉하게 만드는 것은 퀭하게 푹 들어간 눈빛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안광이 번뜩이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남자의 눈빛은 광기가 흘러넘쳤다.
레스터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가 자신이 죽인 남자를 밟았다. 그걸 본 유르딘이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대단하군, 레스터 아이제나흐.”
“…무슨…….”
“이복형제를 윤간하라 지시할 정도의 미친놈이면, 제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 정도는 가볍게 해내는 모양이지.”
레스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덜덜 떨면서 방금 자신이 살해한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체격은 아버지와 같았다. 죽어 나자빠진 남자의 눈은 확실히 제 아버지와 같은 색이었다.
“아, 아냐.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
“줄까?”
뭘? 물어보기도, 대답하기도 두려웠다. 레스터가 대답하든 말든 유르딘은 레스터에게 뭔가를 던졌다. 레스터의 가슴을 맞고 발치에 툭 떨어진 것은 인간의 가죽이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누구의 것인지는 잘 알 수 있었다. 레스터는 그걸 집어 던지고 귀를 틀어막았다. 마구 비명을 지르는 레스터에게 유르딘이 다가왔다. 지독한 악취가 풍겨 토할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토하는 레스터를 보며 유르딘은 다소 즐거운 듯이 말을 걸었다.
“마법이란 거 참 편해. 고작 마법 하나로 인간 하나를 완전히 망가뜨려 버릴 정도니까, 사람 가죽 하나 예쁘게 벗겨 내는 것 정도야 아주 쉽더라고. 이렇게 깔끔하게 벗겨 낸 건 처음이지만.”
더는 나오는 게 없을 때까지 토한 레스터는 붉어진 눈으로 유르딘을 노려보았다.
“그거야?”
“그거?”
“레인, 그 새끼 때문에 이러는 거야?”
유르딘의 발이 레스터의 배를 콱 내리찍었다. 한 차례 토했음에도 신물이 올라와 레스터의 입가를 적셨다. 유르딘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답했다.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레인 때문에 그랬느냐고 묻는다는 질문에는, 그래. 레인 때문이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간단하게 대답하니까 오히려 맥이 탁 풀렸다. 이 미친놈은 뭐가 자랑이라고 태연하게 대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레스터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왕국 귀족 삼분의 일을, 그놈 때문에 죽였다고?”
“그래.”
“삼분의 일씩이나? 레인은 그놈들 다 만나 보지도 못했을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
유르딘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죽이다 보니 내가 다 조사하지 못한 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물어봤지. 레인 아이제나흐를 괴롭힌 자를 알고 있느냐고. 세 명의 이름을 댈 수 있으면 죽여 주겠다고. 그렇게 말하면 이름을 줄줄이 읊던데?”
“…무, 슨……. 미친…….”
‘살려 주겠다’도 아니고 ‘죽여 주겠다’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심한 고문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외칠 정도로 고통받은 상대에게 이름을 말하라고 하면 아무나 적당히 되는대로 읊을 것이 당연했다. 레스터가 놀라 눈을 부릅뜨는 걸 본 유르딘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 죽인 건 아냐. 듣다 보면 중복되는 이름이 있더라고. 개중에 평판도 낮고 레인을 모욕했을 만한, 그런 놈들만 가서 죽였지.”
“…그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그래. 불운하게 우연의 일치로 중복됐을 수도 있지. 하지만 어쩌겠어? 그놈이 몹시 불행했던 거겠지.”
“고작 그딴 이유로, 학살을…….”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우습군. 하지만 복수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나? 사정 봐 가면서, 죄의 경중을 따져 가면서 적절한 형벌을 내릴 거면 살인을 하는 게 아니라 재판장에 데려갔겠지. 애초에 귀족이 아니라도 많이 죽였어. 그냥 그딴 주군인 줄 모르고 충성했을 뿐인 기사나, 아무것도 모르는 하녀 애들이나, 우연히 사건 현장을 발견한 불운한 꼬마……. 아무 이유 없이 살해당한 그들에 비하면야 이름을 부르면 죽일 게 뻔한 상황에서 이름을 불릴 정도인 귀족들 쪽이 훨씬 더 죽을 만한 것 같은데.”
“…고작 그런 놈 때문에.”
레스터가 작게 중얼거린 말이 도화선이 되어 유르딘의 기세가 확 변했다. 초점이 엇나간 미친놈처럼 유쾌함을 가장하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단숨에 천 명도 넘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만이 남는다.
“고작이라고? 누구 때문에 그 애가 죽다 살아나서 약해졌는데. 그런 애를 강간하고, 폭행하고, 십 년을 넘게 그래 놓고, 고작이라고?”
유르딘이 분을 못 이기고 레스터를 걷어찼다. 레스터의 몸은 가볍게 날아 벽에 처박히고 축 늘어졌다. 쓰러진 몸을 세우며 레스터는 미친놈처럼 킥킥대며 웃었다.
“고작 강간이지. 그 개년은 좆만 쑤셔 박아 주면 좋아서 환장했거든.”
레스터는 유르딘의 진노를 예상했다. 그러나 생각밖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괴물처럼 태연한 유르딘의 얼굴을 보며 레스터는 불안감을 느꼈다. 음울한 녹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은 분노로 매섭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고작 강간이라. 참 쉽기도 하지……. 고작 강간. 네게는 정말 별거 아니지?”
유르딘은 몸을 돌려 구석으로 향했다. 레스터는 눈치를 보다가 검을 주웠다. 상대는 천 명을 넘게 죽이고 왕국군에 쫓기면서도 잡히지 않은 희대의 살인마였다. 교양으로 검술을 배운 레스터가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알고 있음에도 무기를 쥐지 않고는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쥐었다가 떨어뜨려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유르딘은 레스터 쪽에 신경도 쓰지 않고 구석에 있는 자루를 들고 다가왔다. 커다란 자루였다.
사람 하나 들어갈 법한 자루에서 툭, 사람이 떨어졌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작은 소녀. 소녀를 본 레스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유니.”
유니 아이제나흐,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소중한 보석. 사랑하는 여동생이 얼굴에 피칠을 한 채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여동생의 이름을 외치며 눈앞의 살인귀에게서 막아서기 위해 다가갔지만 유니의 목에 유르딘의 칼이 겨눠져 레스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레스터는 핏기 없는 얼굴로 유니를 살폈다. 다행히 코피가 났을 뿐 유니는 멀쩡해 보였다. 어디까지나 몸만은 멀쩡해 보였다. 레스터가 의식을 잃은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유니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겁을 먹은 채 얌전히 엎어져 있었다.
“유니!”
“여기가 어딘지 아나?”
유르딘은 두 사람의 처절한 몰골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었다.
“여긴 벤젠 거리의 가장 깊숙한 곳, 구 지하 하수도에 있는 낡은 굴이다. 이 거리에 영애를 놓아주면 어떻게 될까?”
벤젠 거리. 왕국 서부의 반쯤 버려진 영지에 자리한 거대한 뒷골목 중에서도 가장 더럽고 가장 위험천만한 거리였다. 온갖 위험천만한 범죄자들이 숨어들어 낮에도 함부로 돌아다닐 만한 곳이 아니었다. 왕국에서 영지를 방치하는 벤젠 거리 지하에 자리한 거대한 하수도 때문이었다. 워낙에 복잡한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옛 시대의 마수들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완전 소탕은 포기하고 최근에는 벤젠 거리의 범죄자가 밖으로 나오지만 못하게 막고 있었다. 사람이든 마수든 어느 쪽이나 극도로 위험해 유니처럼 곱게 자란 여자아이가 돌아다닐 수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니다. 유르딘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알다시피 치안은 최악이지. 뭣 모르는 뜨내기가 왔다가는 몇 분 만에 속옷까지 털리고 살해당하기 쉬워.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마수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누군가에게 발견된다면 죽지는 않겠지. 죽지는 않을 거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너도 잘 알겠지?”
“씨팔, 미친 새끼!”
“왜? 고작 강간인데.”
“닥쳐, 닥쳐, 닥쳐!”
레스터가 피맺힌 비명을 질렀다.
“나한테만 하면 되잖아! 나를 죽여! 나를 죽이라고!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래……. 미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유니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유니는 그냥 어린애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라고!”
“레인도 그런 어린애였지.”
서늘한 중얼거림에 레스터의 외침이 뚝 멈췄다.
“레인도 네가 말하는 아무것도 모르고 죄 없는 어린애였어. 죽을 뻔했던 당시의 레인은 네 여동생보다도 작고 어렸는데. 네놈들의 악의에 짓밟혀 도움조차 요청하지 못하는 아이로 자랐어. 나는 그걸 알아주지 못했지, 멍청하게도.”
회한이 담긴 중얼거림은 난생처음으로 그를 살인마가 아닌 인간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다운 유약함은 금세 지워진다. 유르딘은 레스터가 떨어뜨린 칼을 주워 레스터의 손에 친절하게 쥐여 주었다.
“…뭐…야, 이걸, 왜…….”
“나도 열 살 난 영애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 하지만 어쩌겠나?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에 있어야 할 공작 부인은 날 보자마자 자진해 버려서.”
“유니는……. 아직, 어린…….”
“알아. 불쌍하고 가엽겠지. 네 이중적인 모습은 몹시 역겹지만, 나도 사랑하는 동생이 있어. 나 때문에 괜한 고초를 겪고 있는 동생이야. 손위 형제의 일로 죄 없이 불행을 겪는 동생이라니, 불쌍하지. 이 아이는 아무 죄도 없는데. 그래서 나도 답지 않게 자비를 베풀어 주려고 해.”
유르딘은 웃으며 문 쪽을 눈짓했다.
“죽여. 네가 죽여서 편하게 해 줘.”
레스터는 절망적인 눈으로 유니를 바라보았다. 최악의 범죄자들이 모인 위험한 거리. 그런 곳에 딱 봐도 귀하게 자란 귀여운 여자아이를 풀어놓는다면, 비참하게 살아가다가 죽는 운명밖에는 없었다.
“…흐……. 으, 윽, 으으…….”
아무리 그래도 여동생을 직접 찌를 수 있을 리가 없다. 레스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검을 든 채 벌벌 떨었다. 유르딘은 길게 기다려 주지 않았다.
“셋을 세지.”
벼랑 끝까지 몰린 레스터는 검을 들어 올렸다. 셋. 유니의 공포에 질린 눈이 제 오빠를 괴물 보듯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둘. 유니는 오줌을 지리며 울었다.
“오, 오라, 버니, 저, 저……. 저, 죽, 죽기, 싫, 싫, 싫……. 으, 무섭, 무, 무, 서워…….”
하나.
죽기 싫다고 처절하게 우는 유니에게 레스터는 차마 검을 내리치지 못했다.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르딘은 유니를 질질 끌고 가서 문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때 괴상하게 생긴 몬스터가 튀어 올라와 유니를 감쌌다. 동물인지 식물인지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괴상하게 생긴 몬스터였다. 레스터는 자세한 정체를 몰랐지만, 늪에 살며 촉수로 사람을 끌고 와 빨아 먹는 종류로 이런 도시에 있을 법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유르딘이 처음부터 유니를 살해하기 위해 안배한 마수는 그 뜻에 따라 유니를 감싸 들어 올렸다. 창백하게 질린 소녀는 악마에게 바치는 제물처럼 안쓰럽고도 아름다웠다. 레스터가 달려 나가는 것을 유르딘이 막았다. 마수의 입이 벌어지고 처참하게 피가 튀었다. 마수는 서두르지 않고 만찬을 즐겼다. 쉬운 죽음조차 아니었다.
“아……. 아, 아, 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미친 사람처럼 레스터가 검을 휘둘렀다. 그런 레스터를 향해 코웃음 친 유르딘은 단번에 레스터의 검을 두 동강 내고 몸을 발로 찍어 눌렀다.
“나쁜 오빠군. 최소한 네가 죽여 줬더라면 고통스럽지 않게 갔을 텐데.”
“컥……!”
반박하려고 했지만, 유니의 처절한 비명이 자꾸만 귓가에 울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잔인하게 죽었다. 차라리 죽여 줬더라면. 레스터는 망가진 사람처럼 공허한 얼굴에 눈물을 흘렸다. 유르딘은 벌써부터 넋이 나간 레스터를 비웃었다.
“네놈을 죽이려고 지금까지 아득바득 살았어.”
유르딘이 책상 위에 덮인 천을 치워 냈다. 검붉은 피가 잔뜩 말라붙은 온갖 공구들이 즐비했다. 책상 아래 놓인 상자를 유르딘이 툭 건드리자 사람 팔뚝만 한 시궁쥐가 몸을 뒤틀며 일어나더니 철창 밖으로 나가고 싶어 요란하게 울었다. 쥐의 털색이 피로 물들어 시뻘겠다. 레스터는 마비된 사고를 그대로 굴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외면하는 레스터의 뺨을 유르딘이 툭 쳤다. 이미 반쯤 녹슨 공구를 어떻게 쓸 건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반쯤 넋을 놓은 레스터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유르딘이 태연히 웃었다.
“사실 적당히 하고 너는 살려 둘까 생각했어. 가족을 네 손으로 살해하고 친구도 모두 죽어 버리고, 널 반쯤 폐인으로 만들어 비참한 삶을 보내게 하면 그럴싸한 복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지.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잡을 줄 안단 말이지. 레인, 불쌍한 레인. 그 애가 아무 희망도 없는 처지에서 보잘것없는 내 호의를 소중한 꿈처럼 품고 살아왔듯이, 살아 있다면 네놈에게도 언젠가 기회가 돌아오지 않겠어? 살아 있는 게 고통일 수 있지만, 동시에 살아만 있으면 기회를 잡을 수 있어. 반대로 죽는다면 아무것도 못해. 살아갈 기회도, 회생할 기회도, 구원받을 기회도, 모조리 박탈당해. 레인은 그렇게 모든 걸 잃었어.”
유르딘이 공구를 들었다.
“최소한 그 애에게서 모든 걸 박탈한 자들은 모조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다시금 피가 튀었다.
벌써 스무 시간째 레스터의 비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진작에 혀가 잘리고 쉬어 버린 목에서는 바람 빠지는 쇳소리만 났지만, 그 소리 없는 비명으로도 유르딘은 만족했다. 동시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러운 몰골로도 우아한 자세로 의자에 앉은 채 유르딘은 레스터를 응시했다. 말하지 않으면 레스터인지도 못 알아볼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아, 레인.”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레인이 복수를 원했을까? 공작에게 피의 복수를 원한 레인이라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자들을 모두 죽이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르딘이 죄를 쌓아 올리며 죽인 자들의 피를 모조리 바친다고 해도 이미 오래전에 죽어 매장된 레인이 살아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자신이 죽인 이유를 만천하에 밝힐 수도 있었지만, 유르딘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유르딘은 공연히 레인의 불행한 과거가 가십처럼 소모되는 걸 원치 않았다. 어차피 이 살해극은 레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유르딘의 복수극일 뿐이다. 저열하고 치졸한 자기만족. 어린아이가 개미집을 들쑤셔 무너뜨리는 일과 규모와 잔혹함만이 달랐을 뿐 본질은 똑같았다. 이런 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레스터에게 말한 대로, 죽는 순간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끝난다. 복수극은 레인이 죽은 후에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유르딘이 벌인 발악에 불과했다. 그 발악으로 인해 왕국이 박살 나고 유르딘은 모든 걸 잃었으나 복수 자체는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후회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안쓰러운 사람을 구하지 못한 저 자신의 미련한 과거였다.
만약에 레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끝까지 아무것도 몰랐었더라면. 레인은 그저 불행하게도 끔찍한 음모에 살해당했다고만 생각했더라면 슈리아 때처럼 자신을 추스르고 어떻게든 멀쩡하게 살아갔을까, 하고 만약의 경우를 가정한 적이 있다.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유르딘은 절망 속에서 레인을 떠나보낼 준비를 했었다. 이전의 유르딘이라면 복수 따위는 결과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을 테니까, 죽은 후에야 뒤늦게 후회하며 죽은 이의 명예를 세워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선에서 일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최초에 유르딘을 무너뜨린 건 카이렌의 인간 이하의 행동이었다. 그 끔찍한 자가 아니었더라면, 시신에조차 욕정하는 광기가 없었더라면 유르딘은 아무것도 모른 채 슬픔 속에 레인을 묻어 버렸을 것이다. 아무것도 몰라서 카이렌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했고, 카이렌이 무도한 짓을 저질렀기에 진실을 알게 됐다. 무지의 소산. 유르딘은 진실을 마주한 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사실, 카이렌을 무참히 살해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은 없었다. 수도에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르딘은 그럭저럭 자신을 잃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유르딘이 무심하게 떠난 순간부터 레인이 고통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참혹한 삶의 궤적을 확인한 순간부터 유르딘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유르딘에게는 레인이 고통받아 온 시간만큼의 기회가 있었다. 이십 년에 가까운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직접 레인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더라면. 레인의 편지를 읽고 안심하는 대신, 단 한 번이라도 의심했더라면. 단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레인을 돌아봤더라면.
엄밀히 말하면 유르딘은 죄가 없었다. 무지는 죄로 명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무지가 레인을 죽음으로 몰았다. 유르딘의 안에서 유르딘은 죄인이었다.
그래도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유르딘은 자신을 잃지 않았다. 미칠 듯한 자책감, 슬픔, 그리고 분노에 휩싸인 채 잘 벼린 검을 들고 니제스가의 저택을 나설 때만 해도 나름 멀쩡했었다. 정황상 레인을 윤간했을 거라 추측되는 다리우스를 찾아가면서도 유르딘의 머릿속에는 아직 학살이라는 단어조차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감정이 울컥 치밀어서 다른 계획은 세우지 않고 무작정 찾아갔을 뿐이었다. 책임을 물을까, 사죄하라고 할까, 네놈을 어떻게 해서든 끌어내릴 거라고 경고할까. 침착하려 애쓰며 온갖 생각을 했다. 원망과 증오 섞인 질문들을 가정하면서 놈을 찾아갔다.
사나운 발걸음이 멈추고, 죄인을 먼발치에서 본 순간. 유르딘이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간신히 이성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던 질문들이 산산이 조각나서 부서졌다.
다리우스 로닐은 웃고 있었다. 더없이 행복하게, 그리고 오만하게. 자신이 짓밟은 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날은 레인의 장례가 끝난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레인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차남이 억울한 죄로 몰려 죽었다는 데 대해 아이제나흐 공작인 딜란은 분개하고 있었지만, 그건 레인 아이제나흐의 죽음을 방조한 기사들이나 배후에 있는 귀족 가문들과 왕국에 책임을 지게 만들어 빚을 만들어 두려는 정치적인 쇼였다. 죽어 가던 레인을 별채에 처박고 버려둔 남자는 위선자의 가면을 쓰고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장에 있는 그 누구의 머릿속에도 레인에 대한 추모는 들어 있지 않았다. 장례식은 한 편의 희극이었다.
위선자들이 가득한 장례식에서 처음 놈들의 얼굴을 봤었다. 다리우스 로닐, 마렌 돌브, 그리고 칼 레히드. 그들 모두가 슬픈 얼굴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때도 뻔뻔한 위선자의 가면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인간이라면 죄책감을 지니고 있을 줄 알았다.
현실은 훨씬 더 끔찍했다. 다리우스는 자신이 비참하게 짓밟은 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환한 얼굴로 웃는다. 타인을 짓밟고도 세상에 뿌리박고 살아가고 있는, 앞으로도 살아갈, 생기 넘치는 얼굴을 보는 순간 속이 뒤집혔다. 죽어야 하는 자는 웃고 있고, 죄가 없는 자가 무표정하게 땅에 묻혔다. 선량하게 살아온, 악해질 기회조차 없이 짓밟히며 죽어 버린 레인의 창백한 얼굴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밝았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최소한 인간이라면 벌써부터 저렇게 웃으며 행복한 삶을 구가해서는 안 된다. 레인을 죽인 것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즐기며 살아간다니, 이 세상은 너무도 불합리하다. 레인이 죄인이 되어 갇혔던 순간부터 유르딘을 좀먹기 시작하던 사고가 단숨에 그를 지배했다.
다리우스의 행복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던 유르딘의 저울 위로 분노와 증오의 추를 더했다. 무게를 넘긴 저울은 단숨에 기운다.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달려온 건지 모르겠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도덕과 선의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세상은 이상에 의해 굴러가지 않는다. 욕망과 악의, 권력자들의 입맛에 따라 재편될 뿐이다. 레인은 죽었는데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다. 행복하게 살아간다. 납득할 수 없는 불합리에 유르딘은 방향을 잃었다.
선을 넘기는 쉬웠다. 검을 뽑아서 긋는 걸로 간단하게 끝난다. 사람을 숱하게 죽여 본 유르딘에게는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행하는 게 너무나도 쉬웠기 때문에 금세 행동에 불이 붙었다. 하나를 죽이든 둘을 죽이든 유르딘에게는 특별히 어려울 게 없었다. 죽이면 죽일수록 확신이 섰다.
미친 자 특유의 제 생각이 옳다고 믿는 확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유르딘은 노련한 학살자인 동시에 뛰어난 전략가였다. 한동안은 들키지 않고 마음껏 베어 나갔다. 그러나 유르딘도 결국 인간인지라 사소한 실수를 해서 생존자가 남았다.
정체를 발각당한 후로는 일이 확실히 어려워졌다. 유르딘은 큰 키에 화려한 금발을 지닌 데다 강렬한 인상을 지닌 미남인지라, 여러모로 눈에 띄었다. 아무리 로브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려도 한계가 있었다. 돈만 주면 범죄자라도 재워 주는 뒷골목의 여관에서조차 유르딘을 받아 주지 않고 도리어 신고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유르딘이 인간을 초월한 무력을 갖고 있다 한들 결국은 인간인지라 잠을 자고 꼬박꼬박 식사도 해야 했다. 처음에는 순진하게 금화와 협박이면 먹힐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돈을 받고 줄곧 유르딘을 돕던 남자가 식사에 약을 타고 신고해 죽을 뻔한 이후로는 어지간해서 민가에 내려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유르딘을 원망했다. 학살자 유르딘이 그의 새로운 이름이 됐다.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다. 그는 끔찍하게 인간을 살해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의문이 들었다. 유르딘이 전장에 있었던 십오 년간 죽인 인간의 수가, 최근 몇 달 새 죽이는 인간의 수보다 많았다. 단순히 수로 따지자면 전쟁에서 죽인 인간의 수가 몇 배는 많았다. 지난 세월은 영웅이라 불리고, 이 몇 달간의 살인은 학살자라 불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기 때문일까? 그러나 전쟁 중에 고문한 행위는 필요해서 한 행위라 하여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 죽은 자들이 더 가여운 자들이었기 때문일까? 물론 죄 없이 죽은 사용인들이나 휘말려 죽은 어린애들은 그럴 수도 있었다. 유르딘은 인간이 가장 해서는 안 될 살인이라는 행위로 손가락질받았지만, 귀족 가문의 후계자들이야말로 타인을 짓밟아 호의호식하고 사는 자들이었다. 가족이나 연인을 전쟁에 두고 차출되어 뛰어든 병사, 휘말린 민간인들은 전쟁터에도 엄청나게 많았다.
하긴 그때 모두가 유르딘을 영웅이라 부르며 찬양한 것은 아니었다. 적. 카니예의 사람들이나 북방의 야만족들은 유르딘을 모욕하며 아주 끔찍하게 여겼다. 그래서일까? 그때는 아군이고 지금은 적이기 때문에, 그런 단순한 흑백논리로 유르딘을 정의하는 것뿐이라면. 유르딘에게 있어서 이 세상 모든 것이 증오스럽고 저주스러운 적일 뿐이다.
도덕적으로는 이미 인간을 포기한 지 오래다. 그러나 그 아래의 바닥이 있다는 걸 유르딘은 차츰 깨달았다. 사고방식 이전에 인간다운 삶을 구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다. 왕국의 추격대가 들끓을 때면 거리의 부랑자들도 들어가기를 꺼리는 더러운 지하수로에 몸을 숨겨야 했다. 온갖 하수가 흐르는 더러운 곳에서 다 썩어 가는 물을 오물만 걸러 마시고, 가져온 식량이 떨어지면 시궁쥐나 하급 몬스터 따위를 잡아먹으며 몇 날 며칠을 버틸 때도 있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숨을 죽이고 머무를 때면, 복수조차 이루지 못하고 끝날지도 모른다는 절망이나 암담함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만이 반복됐다. 주변 모든 것들이 유르딘을 좀먹었다.
씻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냄새가 나면 은신이 힘들어지므로, 유르딘은 주로 저택에 있는 인간을 모두 몰살했을 때를 골라 목욕했다. 온갖 더러운 곳을 뒹군 탓에 몇 번이나 씻어야 검은 물이 나오지 않았다. 때로는 긴장이 풀려 욕조에서 잠깐 잠들기도 했다. 말끔하게 씻고 나오다가 널브러진 시체를 보면서도 그저 몸이 개운하다고만 느꼈다. 그렇게 뜨거운 물에 간만에 피로를 녹이고 나면 무척이나 편안했다.
선악의 경계는 진작에 무너졌다. 유르딘은 자신이 죽인 자들의 저택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자신의 추악함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지, 아니면 레인의 복수를 마치지도 않고 안락함에 안주하는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유르딘은 때때로 레인에 대한 일을 회상했다. 희뿌연 회색 하늘 아래에서, 깊은 밤의 어둠 아래에서, 또는 온기가 가득한 서재 안에서 아름답게 웃고 떠들던 레인의 얼굴을 상상하는 건 유르딘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살아 있는 레인이 그리웠다. 레인이 한마디라도 말을 걸어 줬으면 했다. 유르딘을 비난하거나, 또는 그저 아름답게 웃는 얼굴로 바라만 봐줘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유르딘의 광기 어린 머릿속에서 레인의 모습이 언제나처럼 밝게만 유지될 수는 없었다. 레인을 상상하다 보면, 가끔 모든 욕망을 연소한 듯한 몸에 불길이 일 때가 있었다. 상상 속의 말갛게 빛나는 얼굴에 입을 맞추고 안쓰럽게 마른 몸을 더듬었다. 상상 속의 행위는 끝까지 이르지 못한다. 유르딘의 손길이 닿을수록 레인에게서는 서서히 생기가 사라져 시체처럼 창백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마침내 레인의 시신은 기억 속의 시체 안치소에 누워 있었다.
유르딘은 벽에 머리를 처박았다. 피가 오물 속으로 떨어지는 걸 보며 자책한다. 레인의 삶이 어떤 식으로 유린당했는지를 봤으면서. 죽음마저 모욕당한 걸 봤으면서. 그런 걸 봐 놓고도, 이렇게 수치심도 모르고 어떻게 그런 참담하고 부도덕한 상상을 한단 말인가. 부덕한 망상을 한 날이면 꿈속에서 카이렌이 나왔다.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이 아닌 남자는 유르딘을 비웃으며 속살댔다.
‘너도 바라잖아? 너도 나랑 똑같아.’
다르다. 하지만 꿈은 유르딘이 한 사고의 소산물이다. 같을지도 모른다. 카이렌도 유르딘도, 염치를 모르고 주제도 모르는 파렴치한 쓰레기들이었다.
아주 가끔, 이 세상 전체를 증오한다고 말하며 기꺼이 자신의 것들을 내주며 유르딘을 응원하는 자들 또한 있었다. 취할 것은 취하고 모두 죽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나중에는 부상이 심해 통증을 억누른다는 이유로 마약을 하기도 했다. 삼백 일이 안 되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유르딘은 수직으로 추락해 지옥으로 떨어졌다.
유르딘은 자신의 파멸이 기꺼웠다. 복수의 대상에는 유르딘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유르딘은 지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날 죽여. 네 복수를 완성할 수 있도록.”
네 마지막 원수인 나를.
그러나 당연하게도 레인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에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익숙한 얼굴들이다. 유르딘은 그들이 한 점의 자비도 없이 자신을 곧장 왕성으로 끌고 가기를 원했다.
소망과는 반대로 얼굴에 자루가 씌워진 채 유르딘이 끌려간 곳은 텅 비어 있는 낡은 여관이었다. 미리 수배해 뒀는지 넓은 여관 안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유르딘은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목욕탕에 처박혔다. 유르딘의 몰골이 너무 더러워서 물만 세 번을 갈고 나서야 비누를 풀 수 있었다. 전장에서 몇 년을 누비면서도 상처 하나 없던 유르딘의 몸에 온갖 상처가 늘어나 있었다. 진흙과 풀을 섞어 만든 싸구려 염색약이 벗겨질 때까지 벅벅 닦인 유르딘은 구속조차 당하지 않은 채 여관방으로 올라가, 사병의 주인인 귀족을 대면했다.
눈앞에 선 귀족은 유르딘이 레인을 능욕한 자를 물었을 때 심심치 않게 이름이 나오던 귀족이었다. 그러나 유르딘은 예외적으로 이 남자의 이름만은 신경도 쓰지 않고 무시했다. 남자가 그런 더러운 일과는 조금도 관계없는 인간이며, 상대 또한 유르딘을 증오하는 마음에서 악의에 받쳐 외친 이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정부를 두는 게 흔한 귀족 사회에서 드물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자는 종종 그의 형과 비교되고는 했으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 가문의 자랑거리가 됐다. 최악의 살인마로 변한 형에 대한 충격으로 어머니가 몸져눕고 아버지 또한 두문불출하는 상황에서 휘청이는 집안을 어떻게든 건사하고 있는 유능한 백작이기도 했다.
눈앞의 남자, 그란델 니제스는 유르딘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사랑하는 동생. 동생은 몸이 조금 약한 대신에 명석했지만, 무를 숭상하는 왕국의 풍습 탓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유르딘과 그란델을 비교하는 데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이 유르딘을 따랐다. 물론 사내애들이니 싸울 때도 있었지만, 워낙 다정한 가정에서 자란지라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다. 유르딘이 니제스 백작 위를 박차고 기사로서 전장에 나갈 때, 그란델은 제게 찾아온 백작 위를 반기기보다는 자신을 위해 양보하는 형에게 화를 낼 정도였다. 그런 착한 동생이었다. 유르딘 때문에 완전히 궁지에 몰려 왕가와 귀족 가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안쓰러운 동생이었다.
유르딘의 변명 없는 침묵의 시선을 받으며 그란델은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쥐고 솔직한 분노의 감정을 드러냈다. 때리면 얼마든지 맞아 줄 수 있는 생각이었는데 그란델은 때리는 대신 맥이 빠진 얼굴로 손을 내렸다.
“형.”
“그란델.”
“왜 그랬어?”
“레스터 아이제나흐는 죽었나?”
서로 각자의 말만을 건넸다. 그란델은 무표정한 유르딘을 노려보며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어.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로 지독한 꼴이더라.”
“그래. 잘됐군.”
“잘됐어?”
그란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왜 그랬어?”
“미안하다.”
“미안하면 이러지 말았어야지!”
처절하게 소리치는 그란델과 달리 여전히 유르딘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란델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원래 유르딘은 표정이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모든 감정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란델은 차마 유르딘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딴 편지나 보내고…….”
그란델은 발신인이 쓰여 있지 않은 편지를 받고 벤젠 거리에 왔다. 시간과 장소, 그리고 ‘직접 잡아서 죄를 씻어라’라는 짧은 문구가 적힌 짧은 편지였다. 몇 년간 유르딘과 편지로 교류한 그란델이 형의 필체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보는 순간, 짧은 문구에 담긴 말을 이해했다.
니제스 백작가는 유르딘 때문에 궁지에 몰려 있었다. 왕국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의 죄인이 가문에서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의 가문이라면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을 그란델의 유능한 수완 덕에 간신히 버텼다. 버티고 있을 뿐이다. 니제스 백작가가 기사회생할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가문 내의 죄인을 잡아 죄를 사면받는 수밖에 없었다.
편지를 받은 그란델은 깊은 절망을 느꼈다. 무뚝뚝하지만 다정하고 올곧은 형이 대체 왜 살인을 저지르는지 알 수 없었다. 아예 변해 버린 건 아닌가 의심했다. 차라리 그렇게 유르딘이 괴물이 된 거라면 마음껏 원망할 텐데, 가족을 생각해 자신을 죽이라 말하는 유르딘에게서는 그란델이 아는 유르딘의 인간다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두 모습은 엄청난 괴리감을 느끼게 하며 공존했다. 여전히 그런 인간다움을 생각할 줄 아는 형이 왜 괴물이 된 건지 그란델은 끊임없이 고민했으나 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묻고 싶은 말이 많다. 그러나 길게 대화할 수는 없었다. 몇 대 전부터 니제스가에 충성하던 믿을 만한 자들만 데려왔지만, 오래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니제스 백작인 그란델을 따를 뿐이지 살인마 유르딘에게서는 진작에 등을 돌린 자들이다. 한 사람이라도 변심한다면 니제스 백작가는 유르딘과 공모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파멸한다. 길게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어차피 결심하고 온 일이다.
결국, 그란델이 검을 뽑았다. 그제야 유르딘의 표정이 조금 난처한 기색을 띠었다.
“죽이지 마, 그란델.”
“지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
“그래. 그들이 날 고문하게 둬.”
그란델이 이를 악물었다. 유르딘은 삶을 구걸하는 게 아니었다. 산 유르딘이 죽은 유르딘보다 가치 있다. 가족이나 친우, 연인을 잃은 귀족들은 유르딘에게 복수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유르딘이 이대로 왕성에 끌려간다면 치료를 해 가면서까지 최대한 오래 살려 둔 채 끔찍한 고문을 할 것이 뻔했다. 아무리 원망스러운 형이라지만, 그런 꼴을 당하도록 차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형이 한 짓은 용서받을 수 없어.”
“알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형은 돌았어.”
“미안하다.”
“미안하면, 그냥 닥치고 내 손에 죽어.”
유르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란델은 죄를 저지른 형을 눈앞에 두고도 마지막까지 상냥했다. 유르딘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면서도 여전히 애정에 대한 미련을 다 버리지 못했다. 차마 가족을 죽음보다 더한 지옥에 밀어 넣는 일을 다정다감한 그란델이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동생에게 유르딘은 지독한 짓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르딘은 여전히 제 복수를 후회하지 못했다.
“난 누군가를 탓할 자격도 없는 쓰레기다.”
“형.”
“그러니 죄책감 느끼지 마라.”
그란델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고작 칼에 찔려 죽는 편안한 죽음을 맞아도 될까 고민했지만, 유르딘이 잔혹하게 고문당하는 꼴을 볼 수 없다는 동생에게 이 이상 고뇌를 짊어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르딘은 동생의 뜻에 따르기로 마음먹고 눈을 감았다. 서늘한 검이 유르딘의 목에 닿았다.
“딱 하나만 물을게, 형.”
“…….”
“만족해?”
만족하냐고? 지은 죄가 명백한 자를 고문해 죽이고 의심 가는 자 또한 단칼에 살해했다. 전쟁터를 떠돌며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검조차 들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죽인 것은 처음이었다. 만족해야 할 만큼 죽여 복수를 이뤘다. 하지만.
“아니.”
복수를 해도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레인은 땅속에 묻혀 있었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상 또한 이전과 같았다. 레인이 없는데도 여전히 이 세상은 빌어먹을 정도로 매끄럽게 굴러가고 있었다. 흐흐, 웃는지 우는지 모를 기묘한 웃음소리를 낸 동생이 중얼거렸다.
“멍청이.”
괴로움 박힌 그 말이, 유르딘이 세상에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왕국력 102년.
대역죄인 유르딘이 살인을 시작한 지 268일 만에 벤젠 거리에서 니제스 백작 그란델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맞았다. 제아무리 악마라도 제 핏줄은 죽이지 못한 것인지, 눈앞에 나타난 그란델 니제스에게 무기를 빼 들지 못하고 어설프게 저항을 시도하다가 살해당했다. 단칼에 살해한 유르딘의 시신을 바치며 니제스 백작 그란델은 가문의 죄를 청했다. 이에 국왕은 유르딘을 귀족에서 제하고 니제스가와 유르딘의 접점을 없앰으로써 니제스가의 죄를 사면해 주었다.
대역죄인 유르딘의 시신은 목이 잘린 채로 돌아왔다. 한순간에 내려진 고통 없는 죽음은 최악의 살인마에게 사치였다. 단순한 죽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민심에 따라, 왕국은 죄인의 사지를 찢고 사방에 버려 육신과 영혼이 신에게 돌아가지 못하기를 바랐다. 예외적으로 머리만은 수도 중앙 광장에 매달아 왕국민의 분노를 받아들이며 그 벌을 받도록 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살인마의 머리에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 원래 열흘 내내 걸려 있기로 했던 머리는 단 사흘만 걸려 있었는데, 이미 이틀째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박살 나 더는 걸어 두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제, 기나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