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락
레인의 어머니인 슈리아 베델은 왕국에서도 명문가로 손꼽히는 베델 후작가의 사랑받는 막내딸이었다. 활발하고 건강하게 자란 소녀를 보며 사람들은 입을 모아 남편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며 떠들어 댔다. 성장한 슈리아의 아름다움은 왕국의 자랑거리가 될 정도였으니, 그들이 헛된 말을 불어넣은 것은 아니었다. 귀족가의 영식들은 슈리아가 웃어 주기라도 하면 마음 떨려 밤을 지새웠으며, 혼기가 찬 슈리아에게 청혼하고 싶어 하는 영식들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았다.
원래 슈리아의 꿈은 결혼이 아닌 다른 것에 있었지만, 여성의 목표를 결혼으로 여기는 라인셀 왕국에서 제 아버지의 뜻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왕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제 가치로 여기며, 슈리아는 왕국의 모든 귀족 여성들이 그러하듯 같은 계파의 귀족과 정략혼을 했다. 슈리아의 남편이 될 상대는 개국 공신의 명문가인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유일무이한 후계자 딜란 아이제나흐였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슈리아와 딜란이 행복할 것이라고 축복의 말을 건넸고, 슈리아 또한 장밋빛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고 행복한 꿈에 부풀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딜란에게는 결혼하기 전부터 깊은 관계를 맺어, 그들 사이에 아이까지 생긴 애인이 있었다. 당시의 왕국 풍습은, 부유한 귀족에게 애인이나 첩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성적 매력과 부유함이 없다며 흠이 되는 일이었다. ‘투기(妬忌)하지 말라’. 왕국은 여성에게 보수적인 가치를 요구했고 슈리아는 그에 순종해 딜란의 애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인정받을 수 없는 정부와 사생아 하나 따위 뭐가 문제겠냐고 모두가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딜란과 그의 애인인 아나벨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선대 아이제나흐 공작 디고르는 혈통도 권력도 재력도 보잘것없는 평민에 가까운 몰락귀족과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일한 후계자를 잃고 싶지 않으면 애인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고집을 부리는 딜란에게, 디고르가 머리끝까지 흥분해 차라리 후계자의 자리를 방계에 물려줄 테니 가문을 나가라고 못을 박으며 소리친 일도 있었다. 딜란은 디고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딜란은 아버지와 타협해 애인을 별채에 두는 대신 정식으로 아내, 슈리아를 들여 제대로 된 후계자를 생산하기로 약속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추잡한 뒷사정 따위는 모른 채 슈리아 베델이 순결한 신부의 상징인 새하얀 베일을 쓰고 공작과 결혼식을 올릴 때, 인정받지 못한 정부인 아나벨은 자신의 배에 든 아이를 끌어안고 슈리아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다. 언젠가 복수할 날을 꿈꾸면서.
7년이 지나 공작인 디고르가 죽고 딜란이 아이제나흐 공작이 됐다. 파멸의 서막이었다.
지난 7년간 슈리아는 몹시 행복했다. 슈리아의 남편인 딜란은 정부를 미워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충실했으며 몹시 다정했다. 별채의 정부는 제 아이를 내치지 못해 두고 있을 뿐이란 듯이, 별채에는 거의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고 오직 슈리아만을 보았다. 순진한 슈리아는 금세 딜란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별다른 위기의식도 없이 남편이 가볍게 묻는 베델 후작의 일정에 대해 모두 알려 주었다. 교묘한 말솜씨로 캐낸 후작가의 정보는 오랜 세월간 상당한 양이 됐다.
공작이 된 딜란은 7년간 슈리아를 통해 모은 정보와 자신이 지닌 정보를 합해 교묘하게 조작해서 베델 후작가를 반역죄로 고발했다.
‘베델 후작가는 반역을 준비하고 있으며, 슈리아 베델은 그에 가담하여 반역을 준비했으나 죄책감을 느껴 자수했다.’
무려 7년을 준비해 온 배신이었다. 파렴치한 거짓은 몇 가지 사실 관계와 교묘하게 섞인 채 그럴싸한 진실로 위장됐다. 용서 없는 왕의 처벌로 하루아침에 베델 후작가가 멸문했다.
딜란은 자신의 검은 속내를 모두 숨기고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편인 양, 자신의 아내는 제 가문조차 배신한 패륜아지만 동시에 왕국에의 충성을 잊지 않은 여인이니 자비를 베푸시어 부디 그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왕에게 빌었다. 왕은 모든 사실을 밝혀낸 아이제나흐 공작가와 슈리아의 충정을 생각해 자비를 베풀겠노라 말했다.
그렇게 슈리아와 그 자식인 레인은 목숨을 구명받았다. 마음에도 없던 공작의 애원은 대중의 입맛에 맞게 포장되어 소문이 퍼졌다. 애초에 그걸 노린 행동이기는 했다. 왕국에 충성하며 흠이 될 만한 아내를 포용하는 딜란에 대한 평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반대로 슈리아는 가문을 배신한 변절자이자 패륜아, 더러운 반역자의 피가 흐르는 여자로 전락했다.
슈리아에게는 미칠 노릇이었다. 남편에게 배신당한 것도 억울한데, 죄를 조작한 남편은 영웅이 되어 있다. 아내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바깥의 반지르르한 소문과는 달리 딜란은 제 애인인 아나벨과 승리의 축배를 들며 슈리아를 제대로 한 번 찾지도 않았다.
견디기 힘든 날을 보내던 와중에 슈리아의 앞으로 독약이 배달되었다. 아내에게 말없이 독을 보내는 남자를 밖에서는 다정하고 포용력 강한 남자라고 입을 모아 떠든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억울했지만, 슈리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독을 먹을 결심을 한 슈리아는, 감시하는 하녀에게 자신과 떨어져 격리된 어린 아들 레인을 불러 달라고 말했다. 며칠 만에 본 레인은 저택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는지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고작 며칠 새 살이 빠진 게 눈에 보이는 제 아이가 안쓰러워서 슈리아는 자신을 감시하던 하녀에게 푸짐한 식사를 부탁했다. 하녀는 딜란의 수하였지만, 죽을 각오를 하고 제 아이에게 마지막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부탁을 거절할 정도로 모질지는 않았다. 곧 평상시에 먹던 식사보다도 푸짐한 상이 차려졌다. 레인은 그간 배운 예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집어 먹으며 배를 채웠다. 슈리아는 레인의 모습을 정신없이 눈에 새겼다.
레인이 태어난 이후 단 하루도 아이를 사랑스럽다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제나흐의 후계자에 어울리게 키운다는 명목으로 언제나 엄하게 대했다. 저 아이가 아이제나흐의 후계자가 될 일이 없을 걸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를 하며 슈리아는 레인과 거짓된 행복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냈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아이는 제 엄마의 미소에 안도해 힘든 걸 잊고 방긋방긋 웃었다. 그렇게 슈리아는 사랑하는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늘 없는 행복함은 아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거짓 일상을 마친 슈리아는 표정이 자꾸 무너지려는 것을 다잡으며 아이에게 손수 옷을 갈아입혔다. ‘죽은 자가 돈이나 패물을 갖고 있어야 죽음의 강의 뱃사공에게 삯을 건넬 수 있다’는 왕국의 관습을 믿는 슈리아는 아이에게 자신이 가진 장신구를 몽땅 걸어 주었다. 그 흔한 목걸이며 반지조차 걸치지 않은 슈리아와는 대조적으로 레인은 어머니의 보석을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걸쳐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지나친 화려함이 오히려 비극을 여실히 드러냈다. 경직된 채 눈을 깜박이는 레인을 보며 결국 슈리아는 눈물을 흘렸다.
“너와 내가 살아서 무엇하겠니. 아무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단다. 우리의 긍지는 모조리 꺾이고, 살아도 이제 치욕만이 남은 삶이 되겠지…….”
딜란이 용도가 다한 슈리아와 아이를 멀쩡하게 살려 둘 리가 없었다. 평생 가둬 두고 감시하거나, 암살자를 보내 결국에는 살해할 것이다. 살아도 비참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딜란이 최소한의 긍지를 지켜 줄 때, 제 손으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다.
슈리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 아이의 입에 약이라고 속인 채 독을 한 모금 넣어 주었다. 눈물로 흐려진 눈으로 얌전히 독을 받아먹는 아이를 본 슈리아는 남은 독을 모두 제 입에 털어 넣었다. 딜란이 보낸 독에는 최후의 자비조차 없었다. 목구멍으로 독을 넘기는 순간 슈리아는 끔찍한 고통에 몸을 뒤틀고 한참을 괴로움에 떨며 경련하다가 눈을 까뒤집고 피를 토했다.
레인은 그런 어머니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올해 여섯 살 난 레인은 영리했고 눈치가 빨랐다.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으며 어머니가 제게 해가 될 무언가를 먹였단 걸 눈치챈 레인은 미심쩍은 독을 삼키지 않고 입에 머금고 있었다. 독을 마신 어머니는 이상하다 못해 무서웠다. 똑같이 될 거라는 두려움에 입안에 머금고 있던 독을 헛구역질까지 하며 뱉어 냈지만, 한참을 물고 있었던 탓에 결국 어중간한 양을 삼켜 버렸다.
“레…….”
레인이 제대로 독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슈리아가 뒤늦게 레인을 붙잡으려 했으나 그녀는 고통으로 인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슈리아는 자신이 뭘 어찌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는 채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레인은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어머니의 손을 피하며 뒷걸음질 쳤다. 항상 꽃처럼 아름답고 다정하게 웃던 어머니가 시뻘겋게 눈을 뜬 채 몸을 기이하게 뒤틀며 경련하는 모습은 어린아이가 보기에 너무나 무섭고 징그러웠다. 울며 도망치던 레인이 고꾸라졌다. 아직 작은 아이인 탓에 독은 소량으로도 극적인 효과가 났다. 결국, 레인 또한 끔찍한 고통 속에 역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안돼, 레인. 레인!’
슈리아의 마음속 외침은 아이에게 닿지 않았다. 그르륵 하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슈리아는 최후의 최후까지 아이를 바라보다가 죽었다.
한편 슈리아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아이도 사경을 헤매던 그때, 한 기사가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저택을 찾아왔다.
이제 막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받은 새파랗게 어린 기사, 유르딘 니제스는 아버지들의 친분 덕에 슈리아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친구라기에는 슈리아 쪽이 연상으로 나이 차이가 제법 났지만, 두 사람은 나이를 떠나 몹시 친했다. 어릴 적에는 검을 갖고 놀기 좋아하던 슈리아는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는 남자 친구나 검을 잡아 본 적도 없는 여자 친구들보다, 아직 어려 편견이 없어 슈리아에게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씩씩대는 유르딘을 좋아했다. 두 사람은 체면 차리지 않고 한 덩어리가 되어 풀밭을 구르기도 했다. 유르딘에게는 슈리아가 첫사랑이기도 했다. 7년 전, 슈리아가 결혼한 날에 마음을 접기는 했어도 여전히 소중한 친구였다.
오래 알고 지냈으니만큼 유르딘은 슈리아를 잘 알았다. 사랑받고 자란 슈리아는 정치적인 음모와 거리가 멀었다. 고작 숨바꼭질할 때도 거짓말을 하면 티가 났다. 불과 몇 달 전에도 만났는데, 그때의 슈리아는 가족을 배신할 준비를 하는 중이라기엔 여전히 천진난만했다.
터무니없는 음모의 냄새가 났다. 그러나 유르딘이 수도로 귀환했을 때는 이미 빠르게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제게도 화가 미칠까 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쉬쉬하는 상황에서 새파랗게 어린 기사일 뿐인 유르딘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르딘은 최소한 상심했을 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공작가를 찾았다.
그렇게 찾아간 공작가는 어딘지 모르게 소란스러웠다. 유르딘을 본 집사는 귀찮게 됐다는 속내를 애써 감추는 얼굴로 그를 응접실에 밀어 넣었다.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집사는 한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성가신 유르딘의 존재 따위는 그대로 잊은 듯했다.
‘기사라면 모름지기 위기의 상황에서 스스로 판단해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 기사 수업 때 배운 것을 사정 좋게 끼워 맞춘 유르딘은 스스로 이 소란의 원인을 알아보는 쪽을 택했다. 응접실을 빠져나온 유르딘은 곧 소동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슈리아가 독을 마시고 자결했고, 그 아들인 레인은 중태에 빠졌다. 그 소식은 몹시 충격적이었다.
다행히 죽음을 듣는 것이 익숙한 기사인 덕분에 유르딘은 대상이 첫사랑일지라도 금세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물론 슈리아와 아이가 모두 죽었다면 슬픔을 오래 곱씹었겠지만, 아직 아이가 살아 있다. 산 자는 언제나 죽은 자보다 중한 법이다.
유르딘이 레인의 상태를 묻자 어째서인지 한참을 망설이던 하녀는 딱히 좋진 않다며 애매한 대답을 하더니, 주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눈짓으로 아이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공작가의 핏줄이 중태에 빠졌다는데 소란스러워지긴커녕 목소리를 낮추려 드는 어색한 행동이 몹시 불길한 느낌을 줬다. 하녀가 가리킨 창문 너머에는 화려한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낡고 허름한 별채가 있었다.
별채에서 유르딘은 홀로 죽어 가고 있는 아이를 마주했다. 아이는 신관이나 의원은 물론, 돌봐 주는 사람도 하나 없는 허름한 별채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화려한 보석을 걸친 채 천천히 홀로 죽어 가고 있었다.
라인셀에서는 죽은 이에게 보석을 걸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망자가 죽음의 강을 건너기 전 뱃사공에게 삯으로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다만 공작가에서 이렇게 화려한 보석을 걸어 줬을 리 없으니 분명 슈리아가 걸어 준 보석일 터였다. 차라리 죽음으로써 편해지라는 슈리아의 마지막 애정은 실현되지 않았고, 그녀가 가장 원치 않았을 방식으로 방치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은 지나치게 잔인했다.
유르딘은 곧장 딜란에게 달려가 당신의 아이가 죽어 가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딜란은 반역자의 핏줄이 독을 먹고 자진한 것에 별다른 처치는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애초에 딜란은 아이를 살릴 생각이 없었다. 아이가 죽어 가고 있음에도 노골적으로 사람 하나 없는 별채에 던져 놓고 내버려 둔 것만 봐도 뻔했다.
그러나 슈리아의 아들을, 아니 설령 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죄 없는 어린아이가 이 거대한 저택 안에서 마땅히 받을 수 있는 치료를 받지 못하고 악의 속에서 죽는 것은 참담한 일이라고 유르딘은 생각했다. 외부인이 멋대로 공작저에 사람을 들일 수는 없으니 유르딘은 끈질기게 설득했다. 집요함에 패배한 딜란은 귀찮다는 듯이 그러라고 대답했다.
뒤늦게 고위 신관이 와서 레인을 치료했지만 오랜 시간 심각한 상태에서 방치됐던 탓에 레인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대체 얼마나 지독한 독이었던 건지는 죽은 슈리아의 상태를 캐물은 덕에 알 수 있었다. 온몸이 뒤틀리고 안에서 장기가 녹아내려 지독한 냄새가 나는 끔찍한 몰골이었다고, 하인은 아직도 속이 안 좋은 듯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니 같은 독을 섭취한 레인의 상태도 알 만했다.
한참을 치료에 몰두하다 땀을 한 바가지씩 흘리며 물러난 신관은 레인이 끔찍한 상태라는 말을 전했다. 장기가 모두 상해서 오랫동안 요양을 해야 하고, 요양한다 해도 평생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은 무리였다. 어쩌면 평생 침대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나마 이런 상태로 살아난 것이 기적이었다.
신관이 떠나간 후, 유르딘은 레인의 옆에 앉았다. 슈리아와 만날 때 레인을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유르딘은 손수 땀에 젖은 아이의 몸을 정성스레 닦았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레인이 힘겹게 눈을 떴다. 유르딘은 레인을 살짝 일으켰고, 물을 따라 바싹 마른 입안에 흘러 넣어 주었다.
“괜찮니, 레인?”
“엄마…….”
눈앞의 유르딘 대신 기억 속의 슈리아를 떠올리며 레인은 다 갈라진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유르딘의 낭패한 얼굴을 본 레인은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은 채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어머니는 죽었나요?”
감정까지 메마른 듯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래.”
거짓을 말하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레인은 이미 모든 것을 아는 눈치였다. 솔직히 대답하자 레인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눈만 굴려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더니, 작은 숨을 삼키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유르딘은 잘게 떨리는 레인의 어깨를 붙들었다. 레인의 푸른 눈동자가 유르딘을 돌아본다. 불안과 공포가 깃든 눈동자를 마주 보던 유르딘은 레인을 제 품 안에 끌어안았다.
“참지 않아도 돼, 울어도 괜찮아.”
잠시 안긴 자세 그대로 가만히 굳어 있던 레인은 유르딘이 재차 얼러 주듯 꽉 끌어안자 그제야 작은 손으로 그를 더듬거려 붙잡았다. 손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이는 레인의 등을 토닥여 주자 꽉 붙잡고 그제야 눈물을 흘렸다. 그나마도 펑펑 큰 소리로 목 놓아 울지는 못하고 서럽게 끅끅거리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차라리 크게 울라고 어르고 달랬지만, 레인은 실신할 때까지 유르딘의 품 안에서 상처 받은 짐승처럼 서럽게 소리 죽여 울었다.
이 거대한 공작가에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홀로 죽음을 맞을 뻔한 불쌍하고 안쓰러운 아이다. 품 안의 작은 체온이 필사적으로 유르딘을 붙들고 있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자꾸만 손에서 힘이 빠지는데도 필사적으로 유르딘의 옷자락을 쥐려고 했다. 애정과 함께 동정심이 피어났다. 울다가 지쳐서 잠든 레인에게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 조심스레 잡은 손을 빼냈다.
문밖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하녀에게 두둑하게 돈을 찔러 주고 잠시 살펴 달라고 부탁한 유르딘은 곧장 딜란을 찾았다. 딜란은 유르딘이 찾아오는 것이 몹시도 귀찮았지만, 차마 니제스 백작가의 후계자를 앞에서 쫓아낼 수가 없어 억지로 만나 주었다는 티를 잔뜩 내며 그를 맞았다. 유르딘은 딜란의 노골적인 태도에 이를 악물었다.
“아이제나흐 공, 자기 아들을 저렇게 내버려 둬도 되겠습니까? 공작가의 후계자가 아닙니까.”
“반역자의 핏줄이 섞인 것을 후계로 둘 수는 없지. 원래대로라면 굳이 살려 둘 필요도 없는 놈 아닌가?”
“공, 하지만…….”
“집안 문제다. 니제스 경이 신경 쓸 바는 아니라고 보는데.”
딜란의 태도는 완고했고 틀린 말이 없었지만, 유르딘은 물러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실컷 이용하고 이제 쓸모가 없어졌단 말씀이십니까. 슈리아는 가문을 배신할 여자가 아니고, 베델 후작도 주제 모를 과욕을 부릴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비열하게 레인을 괴롭힌다면 저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당신을 무너뜨릴 겁니다.”
“니제스 경.”
공격적인 비난을 들은 딜란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유르딘은 어렸다. 기사 작위를 받았다지만 아직 십 대 소년에 불과한 유르딘은 경험이 부족했고 말에 거리를 둘 줄도 몰랐다. 머리에 피가 몰린 어린놈이 순간의 치기를 빌어 제멋대로 떠들며 저를 위협하고 있다는 생각에 딜란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이대로 모욕하고 협박하여 쫓아내기엔 니제스 백작가의 이름은 제법 무거웠다. 딜란은 짜증이 치미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그 녀석은 죽어도 경 외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아이다. 설령 죽는다 해도 동정조차 받지 못할 아이지. 그리고 그 아이는 내 자식이고, 내 저택에서 살며 내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받지. 알고 있나?”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부러 돌려서 하는 협박에도 유르딘은 적당히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냉정을 찾고 생각해 보면 딜란의 말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국왕이 슈리아와 레인의 삶을 용인해 줬다지만 어디까지나 당장 처벌을 면했을 뿐, 죄까지 없는 것으로 사면받은 것은 아니다. 이제 와서 레인이 의문사를 당한다고 해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이를 악물고 노려보는 유르딘을 딜란은 여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니제스가와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이 없네, 경.”
“…저도 아이제나흐가와 대적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닙니다.”
유르딘이 가까스로 냉정을 찾고 답하자 딜란 또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그래. 문제는 레인이 아닌가?”
다시 발끈하려 드는 유르딘을 침착하게 제지하고 딜란은 아까보다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겠네. 레인이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대접을 받게 해 달라, 그런 말 아닌가. 하지만 그런 평판 나쁘고 흠 있는 아이를 후계자로 삼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일세. 슈리아가 독을 먹을지는 몰랐어. 나로서는 레인이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가문을 나가 줬으면 싶었으니까. 어쨌든 이대로 멀쩡하게 가문에 남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능숙하게 거짓을 말하며 딜란은 유르딘을 가리켰다.
“그런데 그런 레인에게 니제스가의 후계자이자 왕국에서 촉망받는 기사인 자네가 친밀하게 굴면 사람들이 어찌 보겠나? 자네가 아무리 순수한 호의만을 보낸다 해도, 정치판은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고려하지 않아. 다들 니제스가가 후계자의 자리에서 밀려난 레인을 위해 힘을 실어 준다고 생각할 테지. 이건 자네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네.”
유르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의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후계자 다툼은 때때로 암투 끝에 자기 형제를 암살하는 일도 있을 정도로 치열했다. 더욱이 비옥한 영지를 여러 개 가진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가주 자리에는 수많은 이권이 얽혀 있었다. 아무리 평판이 나쁘고 상황이 불리한 자식이라도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는 한, 딜란이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일단은 한발 물러선 유르딘에게 딜란이 한결 친근한 목소리로 설득했다.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겠나, 경. 앞으로 레인을 별채에 두되, 별채를 수선하고 하인도 늘려 이전에 생활하던 대로 살도록 하겠네. 나이가 차면 아카데미에도 보내고, 그 아이가 이 집안을 나가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을 하지. 단, 그러한 대우를 해 주되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다른 귀족들과 만나는 건 철저히 제한하겠네. 자네를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야. 이걸 지켜 준다면 나도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네. 레인의 존재가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나, 그 아이도 일단은 내 핏줄이 아닌가. 나도 굳이 극단적인 방법을 쓰고 싶지는 않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의 죽음을 내버려 두려던 자가 말만 잘한다 싶었다. 자신도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망설이는 유르딘에게 공작이 한마디 덧붙였다.
“아, 정 그렇다면 궁인으로 들여보내는 방법도 있지. 궁인도 대우는 꽤 좋으니까.”
“…아니, 그냥 전자의 방법으로 하시지요.”
왕궁을 구석구석 관리하는 궁인은 왕실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특성상 나름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었지만, 왕실의 여인과도 접촉할 일이 많기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모두 거세한다. 그 과정에서 죽는 사람도 있을뿐더러, 어린 궁인은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니 독을 먹고 약해진 레인에게는 절대로 무리였다. 게다가 거세라는 건 심리적인 거부감도 어마어마하다. 결국, 유르딘은 허겁지겁 결정을 내렸다. 일단은 이 정도 흥정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며 유르딘은 딜란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방을 나왔다.
그대로 사흘간 레인을 보살피다가 유르딘은 저택을 떠났다. 유르딘이 간다고 하니, 레인은 열이 오른 얼굴로 그를 붙잡은 채 잔뜩 울상을 지었다. 더 있어 주고 싶었으나, 막 기사가 된 유르딘이 기사단의 소집을 언제까지나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레인을 돌보는 동안 무단으로 빠진 벌로, 유르딘은 왕국 남부의 소모전에 몇 달간 투입됐다. 다행히 지난 몇 달 동안 딜란은 약속을 지켰다. 멀리 떠날 수는 없어서 레인이 본채에서 요양하는 동안 별채가 그럴듯하게 수리됐다. 전쟁에서 돌아온 유르딘은 딜란의 자비로 레인을 몇 번 더 만날 수 있었다.
연달아 조부와 삼촌들,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레인은 아이답지 않은 피폐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달 만에 유르딘이 찾아가니 기운을 차리고 희미하게나마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잔뜩 약해진 레인은 작은 정원을 산책하는 것도 힘들어했으나, 침대 신세를 피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유르딘은 레인의 손을 잡고 정원을 걷다가 레인이 지치면 목말을 태워 주고 함께 돌아다녔다.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레인이 별채로 돌아가도 될 정도로 안정됐단 이야기를 들은 날이 바로 두 사람이 작별하는 날이었다. 언제나 웃던 레인은 이제 한동안 유르딘을 못 볼 거라는 말에 화가 나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레인.”
“…….”
“레인, 날 안 볼 거야?”
유르딘은 다정한 목소리로 레인을 달랬다. 딜란과 나눴던 대화를 레인에게 자극적인 요소는 빼고 최대한 풀어서 설명했으나 아직 어린 레인이 그걸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해가 바뀌어 이제 일곱 살이 된 레인이 즐겨 읽는 책은 역사서였다. 열서너 살쯤 되는 아이들도 힘겨워하는 책을 술술 읽는 걸 보면 또래보다 똑똑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였다.
한참을 달랜 끝에야 겨우 레인이 고개를 들었다. 고사리처럼 작은 손이 유르딘을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번, 안아 주세요.”
“물론이지.”
지나치게 소박한 부탁에 유르딘은 웃으며 레인을 끌어안았다.
얼마 전 딜란과 아나벨은 정식으로 결혼했고, 딜란은 정식으로 아들이 된 사생아를 후계자로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정당한 후계자로 태어났으나 사생아에게 모든 걸 뺏길 처지가 된 레인은 보잘것없어진 제 처지와 모든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더더욱 안타까웠다. 그러나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일인지라 외부인에 불과한 유르딘은 이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나중에 또 볼 수 있을 거야.”
부디 다음에는 건강하게 자란 레인과 재회하기를 빌며 유르딘은 작별 인사를 마쳤다.
허락된 만남이 끝난 이후로도 유르딘은 몇 번이나 먼발치에서 레인을 지켜보았다. 일방적인 관찰이었으나 멀리서 보이는 레인은 유르딘이 만나던 때처럼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듯 보여 안심했다.
그러나 느긋하게 레인을 지켜볼 수 있었던 시간은 채 몇 달이 되지 않았다. 곧 왕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기사인 유르딘에게 온갖 임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르딘은 서서히 레인을 지켜보러 가는 발걸음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신입 기사의 임무와 훈련량은 숨 돌릴 새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
몸을 몇 조각으로 나누고 싶을 정도로 바빠지다 보니 자연스레 이전처럼 레인을 떠올릴 수 없게 됐다. 유르딘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몇 달에 한 번, 문득 생각날 때마다 레인의 상태를 하인에게 알아 오라고 하는 것밖에 없었다. ‘잘 지내고 있답니다.’ 언제나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유르딘은 그 단순한 말에 안심했다. 레인의 사정을 아는 하인은 레인의 생일이라며 선물을 보낼 것을 권했다. 처음 한 번은 유르딘이 직접 골랐지만, 이후에는 하인에게 선물을 보내는 일을 일임했다.
불행하게 어머니를 잃었지만 잘 자라고 있을 아이. 레인은 그렇게 유르딘의 기억 속에 추억으로 자리했다.
하지만 레인의 생활은 유르딘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 있어, 레인? 잘 숨는 게 좋을걸.”
해맑은 아이의 웃음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이제 막 열 살이 된 레인은 벽난로 안쪽에 숨어 웅크려 앉아 떨고 있었다.
레인이 머무는 별채는 조용한 편이었다. 별채의 하인들은 특별히 입이 무거운 자들로만 구성되었다. 별채의 하인들은 시간 대부분을 1층에서 머무르며 레인이 있는 2층까지 올라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외부와 유리된 별채의 2층은 레인에게 있어서는 지옥이었다. 밖에서는 장난기 넘치지만 예의 바르고 선량하다고 통하는 공작의 장자 레스터는 레인의 앞에서 악마로 변했다. 레스터가 무슨 짓을 하든 별채에서만은 그의 행동을 흠잡고 소문을 퍼뜨릴 사람은 없다. 오히려 쉬쉬했다.
애초에 레인을 괴롭히기 위해 입이 무거운 하인을 선별해 넣은 게 공작 부인인 아나벨이었다. 그녀는 아들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겼다. 딜란은 애초에 레인을 여기에 가둬 둔 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장난으로 시작된 괴롭힘이 이제는 악의적인 학대로 변질되어 이어지고 있었다. 레스터가 신은 구두의 발소리가 복도 위에서 비명처럼 울려 퍼지며 점점 가까워졌다. 레인은 두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고 공포로 거칠어진 숨을 꾹 참았다. 발소리 뒤로 금속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 레스터가 손에 든 장난감은 끝에 금속으로 된 징이 박힌 채찍이었다. 레스터가 ‘장난감’이라고 표현한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아이가 갖고 놀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레인은 어렵지 않게 채찍이 줄 고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극심한 공포에 몸이 쉴 새 없이 떨렸다.
“레인, 레인, 레인! 쥐새끼 같은 놈. 어디에 숨었을까.”
레스터가 동요에 가사를 붙여 흥얼거렸다. 발랄함으로 포장된 잔혹함이 끔찍하게 두려웠다. 점점 가깝게 발소리가 다가오더니, 마침내 레인이 있는 방의 문이 열렸다. 레인은 소리라도 나서 제 위치를 알아차릴까 온 힘을 기울여 숨을 죽였다. 레스터의 구두 소리는 방 주변을 원처럼 빙 돌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들켰을까? 초조하게 내달리는 공포감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레스터는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숨이 막혀 기절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레인이 뒤로 넘어가기 전에 구두 소리가 먼 곳을 향했다. 문이 다시 열리고, 닫힌다. 그리고 조용해진다.
“하아……. 하…….”
레인은 입을 막았던 손을 떼고 숨을 급하게 내쉬었다. 코로 벽난로의 재가 들어가는 바람에 기침이 나서 멈추질 않는다. 레스터가 방을 나갔을 거라고 믿고 제대로 숨을 쉬기 위해 레인은 급하게 네 발로 기어 나왔다.
반쯤 빠져나왔을 때 잘 닦여 반질거리는 바닥 위에 선 검은 양말과 다리가 보였다. 방을 나가는 척했던 레스터가 어느새 소리 없이 맨발로 다가와 있었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가득하다. 레스터가 불이 붙은 성냥을 들고 있는 게 똑똑히 보인다. 급히 뛰쳐나왔지만, 레인이 다 빠져나오는 것보다 레스터가 성냥을 벽난로에 던지는 속도가 조금 빨랐다. 레인의 옷자락에 튀어 오른 불씨가 붙었다.
“아, 아악, 싫어, 싫……!”
타 죽을 거야. 이대로 죽어 버릴 거야. 끔찍한 공포에 레인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불씨가 옮겨 붙은 레인의 등을 레스터가 채찍을 들고 강하게 후려쳤다. 레인이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지만, 대신에 작은 불씨는 꺼졌다.
레스터가 쓰러진 레인의 앞에 쪼그려 앉아 씩 웃었다. 그는 채찍을 감아쥐고 끄트머리로 레인의 얼굴을 엉망으로 짓눌렀다.
“살려 줬으면 감사합니다, 해야지. 이 시궁쥐 같은 새끼야.”
“우윽…….”
복받쳐 오르는 설움과 분노에 레인이 눈물을 흘리자 레스터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채찍을 거세게 후려쳤다. 제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서너 차례 신나게 채찍질한 레스터는 흥이 오른 발걸음으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벗어 뒀던 구두를 다시 신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고는 복도에 대고 쩌렁쩌렁 소리친다.
“내가 쥐새끼 잡았다!”
의기양양한 외침이 2층을 쩌렁쩌렁 울렸다. 곧 복도를 가로지르는 신경질적인 소리가 쿵쾅거리며 가까워졌다. 방에 달려들어 온 소년은 레스터에게 바락 성질을 냈다.
“쥐새끼 아니라고, 개새끼라니까!”
“쥐새끼나 개새끼나 그게 그거지. 무슨 상관이야?”
“쥐는 더럽잖아. 개새끼는 귀여운 맛이라도 있지.”
소년은 발끝으로 레인의 머리를 꾹꾹 눌러 밟으며 웃었다.
“귀엽잖아, 우리 레인.”
“카이렌, 너는 눈깔이 병신이야. 이게 뭐가 귀여워?”
“진짜로 귀엽잖아?”
방금 들어온 소년은 카이렌 모드, 아이제나흐 공작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모드 백작가의 후계자였다. 아이제나흐 공작가와 모드 백작가는 주종 관계인 동시에 긴밀한 협력 관계이기도 했으니 두 사람이 친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였다. 그리고 근 3년간 두 사람의 가장 좋은 장난감은 레인이었다.
안팎으로 뾰족한 징이 달린 개 목걸이와 줄을 들고 온 카이렌은 엎어져 있는 레인에게 손을 뻗었다. 레인이 몇 대 얻어맞아 머리가 핑핑 도는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손을 휘둘러 카이렌을 밀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카이렌은 또래보다 체격이 좋은데다가 검술을 수련하고 있는 재능 넘치는 소년이라 멀쩡한 상태에서도 병약한 레인이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카이렌은 아예 레인의 위를 타고 올라앉아서 그의 목에 개 목걸이를 채우기 시작했다. 목걸이는 무척 커서 레인의 가느다란 목에는 여러 번 감아야 겨우 맞아 들었다.
“근데 그건 어디서 난 거야?”
“우리 집 개새끼 거 가져왔지. 말 안 듣는 놈들 훈련용이라나, 뭐라나.”
모드가는 사람만 한 큰 개들을 키웠다. 그 큰 개들을 훈련할 때, 보다 쉽게 고통을 줘서 제압하기 위한 목걸이였다. 레스터가 개 목걸이에 달린 줄을 잡아당기자 날카로운 징이 레인의 목을 찔렀다. 카이렌은 레스터의 손에서 줄을 잡아 빼며 또다시 성질을 냈다.
“내 건데 왜 네가 잡아당겨?”
“이게 왜 네 거냐. 굳이 말하자면 우리 집 거지.”
“개 목걸이는 내 거잖아!”
두 사람이 줄을 잡아당기는 동안 레인의 목은 엉망이 됐다. 한참을 이어지던 둘의 다툼은 카이렌의 승리로 끝났다. 누가 이기든 레인에게는 조금도 좋아질 게 없었다. 레인은 의기양양하게 줄을 잡아당기는 카이렌의 손짓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처음에는 제자리에 납작 엎드린 채 따라가지 않고 버티려고 했지만, 목걸이의 징이 목을 찔러 대는 게 너무 아팠다. 목이 찔리다가 결국에는 목이 뚫려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패배해 네 발로 간신히 길 수밖에 없었다. 비참한 모습의 레인을 보고 레스터는 배를 잡고 웃어 젖혔다. 한참 동안 레인을 끌고 돌아다니던 둘은 이내 질렸는지 간식이라도 먹자며 레인을 두고 쪼르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떠나기 전 카이렌은 짐짓 자비로운 얼굴로 개 줄을 던져 주었다.
“오늘 고생했으니 선물이야.”
혼자 남은 레인은 힘이 없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목걸이를 벗겨 냈다. 개처럼 목줄에 매여 끌려다니는 건 기분이 나쁘긴 해도 오늘은 덜 아픈 편이다. 지금 이 상황에선 불행하게도 레인은 무척 똑똑한 아이였다. 비상하게 머리가 좋았고 이해가 빨랐으며 한 번 들은 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별로 없었다.
레인과 레스터를 동시에 맡아 가르치고 있는 가정 교사는 레스터를 가르칠 때 종종 레인과 레스터를 비교하곤 했다. 가정 교사로서는 후계자인 레스터의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던진 악의 없는 말이었겠지만, 비교당할 때마다 자존심이 상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레스터는 레인을 마구 폭행했다. 일부러 멍청한 척 모르겠다는 얼굴로 수업을 받으며 문답을 틀리면 그건 또 귀신같이 알아, 자기를 무시하는 거냐며 화를 냈다.
답이 없는 놈이었다. 기분이 좋으면 기분이 좋은 대로, 자기 친구인 카이렌이 놀러 오면 그와 논다는 명목으로, 검술 수업을 받으면 연습용으로 쓴다며 습관적으로 레인을 두들겨 팼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레스터는 언제나 레인을 팼다. 레인은 레스터와 카이렌의 장난감일 뿐이다.
레인은 매끈한 줄 끄트머리를 꽉 쥐었다. 카이렌이 준, 선물이라고 하고 싶지도 않은 선물은 끔찍해서 당장에라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아무 데나 던져뒀다가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레인은 지친 채로 꼴도 보기 싫은 개 목걸이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와 옷장, 탁자와 의자 하나만이 놓인 삭막한 방이 눈에 들어온다. 필요한 게 턱없이 부족하지만 약 만큼은 어느 의원 부럽지 않은 수준으로 가득 있었다. 아이제나흐의 저택에는 전속 주치의가 있지만, 그는 레인이 크게 다치지 않는 한은 한 달에 한 번 레인을 찾아와 대충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전부라 레인은 스스로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그나마 약이라도 잘 주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잘 닿지 않는 손을 뻗어 등에 간신히 약을 발랐다. 이제는 혼자서도 붕대를 제법 잘 감았으나, 기쁠 것 없는 우울한 사실이었다.
치료하고 있는데 조용히 문이 열리고 하녀가 식사를 가져왔다. 하인들이 먹는 것과 거의 똑같은 식사는 오늘도 보잘것없었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른 것이 눈에 띄었다. 하녀는 레인이 없는 것처럼 인사조차 하지 않고 천천히 식사를 차리고, 작은 선물 상자를 의자에 내려 두고는 소리 없이 나갔다.
레인은 식사에 눈길도 주지 않고 상자를 침대로 가져왔다. 고급스러운 리본과 포장지가 상하지 않도록 풀어 곱게 옆에 접어 둔 레인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상자를 열었다.
“와아……!”
레인이 드물게도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안에는 고급스러운 표지의 동화책이 들어 있었다. 벌써 열 살이다. 글보다 삽화가 훨씬 많은 동화책은 쳐다도 안 본 지 오래됐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선물임에도 레인은 소중하게 책을 들어 올렸다. 책 사이에 이니셜이 쓰인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Y. N.」
유르딘이 보낸 선물이었다. 선물을 보고 나서야 레인은 오늘이 제 생일이란 것을 기억해 냈다. 카드를 뒤집으니 정갈한 글씨체가 레인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다.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아 본인조차 잊은 생일을 유르딘은 매해 챙겨 주고 있었다.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는 삶을 오로지 유르딘만이. 가슴이 온통 따뜻한 감정들로 벅차올랐다.
레인은 침대 아래로 기어 들어가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몇 안 남은 어머니의 유품과 함께 화려한 선물 상자들과 그걸 장식했던 포장지, 리본, 카드, 그리고 선물로 왔던 각종 장난감들이 차곡차곡 모두 다 들어가 있었다. 매년 생일마다 유르딘이 보내 준 선물들이었다. 레인은 그것을 몽땅 보관해 가장 소중한 제 보물인 양 넣어 두었다. 오늘 받은 상자도 레인의 보물 목록에 추가됐다. 색색의 리본들을 보며 레인은 오래간만에 방긋 웃었다.
식어 버린 식사조차 즐겁게 마친 레인은, 식사하는 내내 더러워질까 봐 멀리서 뚫어져라 바라만 보던 책을 끌어안고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림책이라 그런지 글씨가 몇 자 없었다. 그림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 아무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간단하고 짧은 동화책을 한참 동안 읽어 내려갔다.
책은 아이가 읽는 동화답게 다정다감한 내용이었다.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하고 미움만 받던 아이가 옛 마법 시대의 대마법사로 성장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본인 또한 행복해진다. 아름답게 빛나는 이야기였다.
그 다정함이 마치 유르딘의 상냥한 편지처럼 느껴졌다. 레인처럼 불행한 처지였던 어린아이는 마침내 행복해졌다. 그러니 너도 이렇게 될 수 있어.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레인은 그 후로도 어른이 될 때까지, 아니 어른이 되어서도 책을 끼고 살았다. 마치 사랑의 열병에 빠진 소년처럼 짧은 동화책 속 내용을 마음속에 새겼다.
***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 가던 레인이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왕국에는 전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왕이 왕국 북방 영토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야만족과의 대대적인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총사령관으로는 유르딘 니제스가 발탁되었다. 왕국은 물론이고 대륙에서 유례가 없는 최연소 총사령관이었지만 반대의 소리는 적었다. 그는 역사상 최연소 소드 마스터, 천재라는 말조차 부족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개인이 군대와 같은 위력을 지녔다는 검의 경지에 다다른 검사가 지닌 강력한 카리스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군의 사기를 북돋웠다.
유르딘은 떠나기 전에 딜란에게 기별을 넣어 떠나기 전 한 번만이라도 레인을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한창 바쁠 시기에 일부러 시간을 내기까지 했다는 사실에 레인은 그 어떤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 기뻐했다.
매일 유르딘과 만나기까지 남은 시간을 재며 레인은 재회의 순간을 수십, 수백 번 상상했다. 이 끔찍한 환경에서 구해 주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따뜻한 손으로 레인의 손을 맞잡아 준다면, 품을 빌려 안아 준다면, 단 한 번이라도 속 시원하게 제 속내를 털어 내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레인은 만족할 수 있었다.
짧은 만남과 재회 사이에 무려 십일 년이라는 긴 세월의 간극이 존재했다. 막상 만나면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유르딘을 다시 본 순간 염려가 무색하게도 강렬한 그리움과 함께 빛나는 추억이 레인을 덮쳐 왔다.
처음 만났을 때 여섯 살이었던 레인이 보기에 유르딘은 다 큰 어른처럼 보였다. 하지만 재회한 순간에야 당시의 유르딘이 제 또래로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인이 어린아이에서 청년에 가까운 소년으로 자라나는 동안, 유르딘은 앳된 티를 벗고 완연히 성숙한 남자가 되었다.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가슴이 유르딘이 입은 검은 제복과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무표정할 때에는 조금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지만, 레인과 시선이 맞닿는 순간 시원스러운 인상으로 고쳐 그려 낸다. 화려한 금발 아래에서 반짝이는 푸르른 잎사귀처럼 맑은 눈빛은 이전처럼 레인을 향할 때 다정함에 물든다.
이상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레인은 유르딘이 걸어오는 동안 정신이 팔린 채 멍청하게 서 있다가 그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야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인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에 뵙네요.”
“그래,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화답하듯 레인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유르딘에게 하고자 고민했던 말들은 무엇 하나 목구멍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몇 년에 걸쳐 쌓아 올린 단단한 가면은 습관처럼 씌워져 레인을 그늘 없이 자란 소년으로 보이게 한다. 레인이 지금까지 잘 지낸 줄 알고 다정스레 말을 건네는 유르딘에게 도저히 제 불행을 알아 달라고 호소할 수 없었다.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유르딘의 체온이 기이할 정도로 뜨겁게 느껴져 레인의 얼굴은 계속해서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레인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 괜찮다고 대답했다. 어색한 답변임을 인지한 유르딘은 분위기를 풀어 보려 계속해서 부드럽게 웃었다.
“너무 어색해할 것 없다. 뭐, 어릴 때 몇 번 본 게 전부니 어색한 게 당연하겠지만.”
“……죄송해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나도 그런걸. 베른이라면 이럴 때 좀 더 잘 대했을 텐데.”
베른은 누구일까? 편하게 말하는 것으로 봐선 물어보는 게 실례가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레인은 결국 묻지 못했다. 말도 못 하는 머저리가 된 거 같아 레인은 속으로 자책했다.
계속해서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유르딘이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편지라도 주고받을까?”
“……편지, 요?”
낯선 단어였다. 레인은 편지를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짧은 문장이 적힌 카드만으로도 기뻤는데, 무려 편지라니. 듣기만 해도 감격에 목이 멜 것 같았다.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는 레인이 싫어한다고 여긴 것인지 유르딘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긴, 한창 놀 나이의 남자애인데 나랑 편지나 보내고 있는 건 칙칙하겠지. 그냥 못들은 걸로…”
“아니요, 보낼게요!”
화들짝 놀라 처음으로 큰 소리를 냈다. 너무 급하게 소리친 게 부끄러워 레인의 얼굴이 달아오르자, 유르딘의 얼굴에 슬그머니 귀여워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유르딘의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레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러면 가서 어느 정도 한가해지고 시간이 나면 보내마. 자주는 못 보내겠지만.”
레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몇 가지를 더 물어본 유르딘은 안심하고 돌아갔다.
유르딘에게 품었던 막연한 기대와 실망이 한 번에 녹아내린다. 그저 기뻤다. 일 년에 한 번 오는 짤막한 카드를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눈물 나게 기뻤다. 막상 전장에 나가면 어린애 하나한테 편지 쓸 시간은 없을 테니 편지 교류는 형식상으로 몇 번 오고 가다가 끊길 확률이 높다고 부정적인 추측을 하면서도 그저 마음이 두근두근 설렜다. 설령 바빠서 약속과는 달리 편지 한 통 보내지 않는다 해도 레인은 유르딘이 이 순간 약속해 준 것만으로도 좋았다. 유르딘을 보내고 나서도 레인은 한동안 행복에 젖어 있었다.
***
유르딘을 떠나보내고 겨울이 지나 이듬해 봄, 레인은 레스터와 함께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자신의 영지에 머물면서 후계자의 교육을 가문 내에서 하던 시기를 지나, 귀족들이 수도에 모이게 되면서 더욱 전문적인 교육을 위해 생긴 교육 기관이 바로 왕립 아카데미였다. 그해에 성년이 되는 왕국의 남자라면 누구든 입학할 수 있다지만, 사실상 귀족들의 교육기관이었다. 평민은 막대한 기부금을 낼 정도로 부유하거나 특출 난 재능이 있어 귀족가의 후원을 받는 소수뿐이다.
아카데미는 교육 기관인 동시에 미래에 작위를 받거나 관리나 기사가 되어 왕국을 지탱할 어린 귀족들의 사교장이기도 했다. 바깥에서의 위치는 자연스레 아카데미 내에서 그대로 적용됐다. 그러니 현 왕국의 실세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후계자인 레스터가 아카데미의 작은 왕으로 군림하는 것도 당연했다. 주로 하급 귀족으로 이루어진 교사들 또한 아카데미 바깥의 권력 구조에 영향을 받는지라 학생들이 수습이 힘든 사고를 치지 않는 한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레인은 갇혀 있던 별채에서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크게 만족스러웠다. 일곱 살 때부터 무려 13년을 이어 온 악의와 폭력은 해가 지날수록 수위가 올라만 갔다. 솔직히 레인은 매일같이 얻어맞고 골골대는 제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신기했다. 의식을 잃고 사나흘 기절해 있다가 깨어나는 일이 예사인데도 끈질기게 죽지 않았다.
레인에게 있어서 제 명줄이 긴 건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그저 제 운명을 저주하기만 하며 목적 없이 살던 레인은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딜란이 아직까지 저를 살려 두고 아카데미 입학까지 시키는 것을 보면 이제 와서 돌발 행동을 하지 않는 한은 새삼 죽이려 들지는 않을 듯했다. 여섯 살 이후로 제대로 대화해 본 적도 없는 아버지였지만, 먼발치에서 지켜보거나 때로 경고를 들으며 대충 그가 지닌 생각에 대해 알게 됐다. 딜란은 체면을 중시하고 낭비를 싫어한다. 제 가치를 증명할 수만 있다면, 아이제나흐 공작가에서 도망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저택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아카데미의 생활은 적응할 만했다. 아무리 레인이 반역자인 베델 후작가의 핏줄이 섞인데다가 아이제나흐 공작가에서 내놓은 자식이라고 해도, 엄연히 아이제나흐의 성을 달고 있는 공작가의 일원이기 때문에 모두가 눈치를 봤다. 친구를 만들 수는 없었지만, 괴롭히는 사람도 없다. 입학한 직후에는 레스터도 바빠서 레인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고, 한 학년 위의 카이렌 또한 검술 대회다 뭐다 해서 바쁜지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불안을 품은 한정된 평화. 그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진 건 카이렌의 사소하고도 노골적인 악의가 타인의 앞에서 발현됐을 때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석 달이 지나가던 날이었다. 식당 한복판에서 웬일로 혼자 식사를 하러 나온 카이렌과 레인의 시선이 맞닿았다. 눈이 마주쳐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레인은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카이렌이 다가와 레인을 잡는 것이 더 빨랐다. 카이렌은 레인의 앞에 있는 그릇을 손으로 쓸어 모조리 바닥에 엎었다. 식기가 떨어지며 부딪치는 소리가 커다랗게 나면서 식당 안의 시선이 단번에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쏠렸다. 학생들은 숨죽인 채 카이렌과 레인을 응시했고 하인들은 괜한 불똥이 튀는 게 두려운지 물러나거나 시선을 돌렸다. 레인은 나서지 않는 군중을 한 번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건방진 개새끼가.”
깡마르고 병약한 레인과 본격적으로 검술 수련에 매진해 키도 체격도 다부지게 자란 카이렌 사이에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었다. 카이렌이 레인의 뺨을 내리치자 순식간에 레인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조용한 식당 안에 뺨을 맞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경악이 가득 들어찼다. 이렇게 직접 모욕을 주는 일은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조차 드물었다. 주변의 경악은 아랑곳하지 않고 카이렌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레인을 발로 걷어차고 머리를 발로 바닥에 콱 박았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물 위로 레인은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카이렌은 그 위로 레인의 머리를 사정없이 짓누르다가 홱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한차례 음식물 위를 뒹굴었던 레인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옷에는 고기나 샐러드 조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얼굴은 노란빛의 수프와 소스가 범벅이 되어 온통 엉망이었다.
그 꼴을 본 카이렌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숨죽인 채 웃었다. 노골적인 경멸이 비처럼 쏟아졌다. 비참해진 레인이 빠져나가려 발버둥 쳤지만 카이렌의 손아귀가 레인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어서 발악할수록 꼴이 우스워질 뿐이었다. 사방에서 잔혹한 웃음이 잦아들 때쯤, 카이렌이 빈정거렸다.
“넌 개새끼야. 누누이 말해 왔으면 좀 알아라. 이해를 못 해? 알아서 눈치껏 기란 말이야.”
카이렌이 웃으며 손을 놓자마자 레인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지만, 자리를 피한 정도로 간단하게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학생들은 제 이복동생이 받은 모욕에 레스터가 어찌 나올지 궁금해했고, 다음 날 레스터가 레인의 머리에 물을 부으며 의문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레인은 별채에서 나와 봤자 또 다른 새장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공작가의 자제인지라 레스터나 카이렌을 제외하고는 대놓고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면전에서 모욕을 주거나 모르는 척 발을 걸고 가는 등 치졸한 괴롭힘이 이어졌다. 숨이 막혔다. 레인은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이 드는 순간까지 단 한시도 편하게 지낼 수 없었다. 잠을 자도 악몽에 시달렸다. 꿈에서 자꾸만 어머니가 나와 레인에게 독을 건넸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레인을 죽이려 들었다. 레스터가 레인을 경멸했다. 카이렌이 레인의 목을 졸랐다.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레인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했다. 언제나 쫓기고 살해당해 꿈에서조차 비참한 꼴이 됐다.
그럴수록 레인은 더욱더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저들이 보내는 경멸의 시선은 레인의 삶의 무게에 비하자면 한없이 가벼웠다. 타인의 조롱에 짓눌리고 지레 겁을 먹어 자신을 포기하는 한심한 인생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레인은 혼자 다니면서 최대한 공부에만 파고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레인은 머리가 좋았다. 필사적으로 수업을 듣고 잠드는 순간까지도 그날 배운 것을 되뇌었다. 덕분에 교양 수업인 승마를 통으로 날렸음에도 수석을 거머쥐었다. 경멸과 조롱에 시기의 감정이 섞였다. 차라리 시기의 감정은 견디기 쉬웠다. 오히려 괜찮았다. 제멋대로 열등감을 품는 일 따위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 그건 대단한 착각이고 실수였다. 레인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성적을 시기하는 학생은 많았고, 집단이 모이면 순식간에 악의는 유형의 공격성으로 변화한다.
나흘간 이어지는 시험 중 사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는데 세 명이 레인의 뒤를 따라 억지로 함께 들어왔다. 레인은 순식간에 방 안에서 여럿의 남자에게 둘러싸이는 신세가 됐다. 갓 성년이 된 청년들은 얼굴에는 앳된 티가 남아 있었지만, 몸은 다 자라 몹시 위협적이었다. 그래도 레인은 겁먹지 않았다. 저들이 해 봤자 뭘 어쩌겠느냐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딱 잘라 거절하는 레인에게 그들은 거듭 부탁했고, 레인은 끝까지 거절했다. 언성이 높아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연이은 거절에 화가 치민 누군가가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고, 레인은 그대로 형편없이 떠밀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레인이 몸을 세우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의 몸을 억눌렀다. 상대를 노려봤다가 뺨을 맞았다.
“그러게 좋게 말할 때 승낙했으면 좋았잖아.”
레인의 위에 올라탄 남자가 분노로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레인의 옷을 걷어 올렸다. 쭈뼛 소름이 돋았다. 지금껏 성적인 조롱은 몇 번 받아 봤다. 하지만 조롱은 조롱일 뿐, 설마하니 진짜로 실행하려 드는 미친놈이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아예 성적인 행위 자체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옷 속으로 들어오는 손길은 지독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으며 동시에 끔찍했다. 레인은 저항할 생각조차 못 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만히 내려다보던 다른 남자가 몸을 숙이며 씩 웃었다.
“얘 겁먹었나 봐. 이러는 건 좀 귀엽네.”
“미친놈.”
낮게 웃으며 레인의 위에 올라탔던 남자가 옷 속에 밀어 넣은 손을 움직였다. 조금 땀이 밴 손이 기분 나쁘게 달라붙었다.
“안 그래도 한 번쯤 따먹고 싶긴 했어.”
“근데 진짜 해도 될까? 얘, 얜 아이제나흐고…….”
뒤에 엉거주춤 서 있던 한 명이 제지했지만, 다른 둘은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일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상관없어. 어차피 가문에서 버림받은 놈이잖아. 신경 안 쓸걸? 소문만 안 내면.”
저들끼리 멋대로 떠드는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레인이 무슨 짓을 당하든 공작가는 자신들에게 손해가 오지 않는 한 신경 쓰지 않을 게 뻔했다. 잠시 무의미한 저항이 이어졌으나 금세 꺾였다. 애초에 병약한 레인과 건장한 남자 세 명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세게 얻어맞은 탓에 머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그들은 축 늘어진 레인을 이리저리 만져 대기 시작했다. 온몸에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으나 무력한 몸은 자꾸만 기울어져 도리어 상대의 품에 안겼다. 낄낄거리며 비웃는 소리가 현실감 없이 귓가를 맴돌았다.
막 셔츠를 벗겨 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남자들은 레인의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였다. 그러나 발소리가 멀어지는 대신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 앞으로 모였다.
제 방인 양 태연하게 들어온 사람은 레스터였다. 레인의 시선이 절박하게 흔들리다가 레스터의 시선과 맞닿았다. 아무리 평소에 레인을 무시하고, 때리고, 미워한다고 해도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추문으로 남을 수 있는 사건이니 구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레인의 기대를 짓밟듯 레스터는 태연하게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 문을 잠그고 다가왔다.
“있는 거 다 아는데 건방지게 무시한다 싶었더니 이런 짓을 하고 있었네.”
“아……. 레스터, 저기, 이건…….”
레스터의 난입으로 정신이 들었는지 엉거주춤 남자들이 물러났지만, 레스터는 조금도 분노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추겼다.
“왜? 괜찮아. 계속해. 역겨운 창녀의 자식이라 써먹을 게 이딴 데밖에 없는데, 써먹어야지. 돌려먹든 말든 마음대로 해.”
모욕적인 언사에 레인의 머릿속이 분노로 새하얘졌다. 태어나서 그토록 분노한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죽은 지도 벌써 14년이 지났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끔찍하게 죽어 가던 모습이었다. 사랑하던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모든 걸 잃은 채 불쌍하게 죽어 가던 어머니의 죽음에 끔찍한 음모가 얽혀 있음을 지금의 레인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성정과 아이제나흐 공작의 성격, 공작 부인의 열등감, 두 사람의 관계, 모든 정황을 볼 때 정확히는 몰라도 아이제나흐가 베델 후작가의 몰락의 원인이 됐음은 분명했다.
아이제나흐 공작가가 잡아먹은 불쌍한 어머니를 감히 레스터가 모욕하다니.
레인은 분노를 내지르며 일어나 레스터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겼다. 순간이라지만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레인 자신도 몰랐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의지의 발현이었다.
레스터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가 천천히 레인 쪽을 향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그것도 언제나 경멸하며 내려다보던 레인에게 얼굴을 얻어맞은 레스터는 충격을 받고 잠시 굳어 있었다. 방 안의 남자들 또한 경악해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응시했다. 레스터는 한 번의 주먹질로 힘이 다해 꼴사납게 바닥에 쓰러진 레인을 바라보다가 입가에 고인 피를 뱉었다. 분노가 지나치게 끓어올라 오히려 차갑게 식은 얼굴이다. 레스터는 긴장해서 서 있는 남자들에게 차갑게 명령했다.
“뭐해? 계속해야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과 달리 표정은 무섭도록 침착한 괴물 같은 얼굴이었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넌지시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이걸 짓밟아.
레스터의 숨기지 않은 검은 속내가 날것 그대로 드러났다. 그들은 심기가 사나워진 레스터의 눈치를 보며 레인에게로 다가갔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계속할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뒤에서 노려보는 레스터의 눈길이 매서웠다. 괜히 거부했다가는 레스터의 분노가 그들에게까지 돌아갈 것이 뻔했다. 망설임은 짧았다.
누군가가 레인을 걷어찬 것을 시작으로 주먹과 발길질이 연이어 날아왔다. 잔뜩 얻어맞아 더는 움직일 기력도 없을 때 억지로 다리가 벌어졌다.
“칼, 네가 먼저 해.”
제일 소극적인 태도의 남자가 레인의 앞으로 떠밀렸다. 완벽한 공범자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레인에게 몸을 숙인 남자가 입술을 달싹였으나 한참 전부터 귓가에는 이명만이 가득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끔찍한 감각이 이어진다. 머리가 울려 흐릿한 시야로 남자들의 웃는 얼굴이 깜박였다.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레인은 마치 제가 고장 난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행위는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돌아가면서 여러 번. 모든 게 끝났을 때 레인은 얻어맞고 바닥에 구르며 난 상처로 온몸이 얼룩덜룩했다.
레스터가 침대 위에서 이불을 가져와 레인의 위에 덮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레인의 뺨을 쳐 자신을 보게 하더니, 답지 않게 상냥하게 웃었다.
“아프겠다, 레인. 자, 이대로 양호실이라도 데려가야지?”
“무슨…….”
레인과 동시에 행위에 가담한 남자들의 눈동자까지 불안하게 흔들렸다. 레인의 몸에는 폭력적인 정사의 흔적이 완연했다. 아무리 아카데미가 외부의 권력에 의해 돌아간다지만, 막을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이런 짓은 확실한 징계감이었다. 그러나 레스터는 문제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까 이대로 안고 들고 가. 대충만 가려서 무슨 짓을 당했는지 다 확인할 수 있도록 당당하게 안고 가서 말해. 레인이 이 상태로 쓰러져 있어서 데려왔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고 잡아떼. 어차피 이놈은 제 자존심 세우느라 말 못 해. 문제가 생기면 아이제나흐가 도와줄 테니까……. 물론 너희들이 입단속은 해야겠지. 어디 가서 떠벌리지 말고.”
아이제나흐의 이름이 주는 가치와 무게는 왕국 내에서 백지 수표에 가까웠고, 레스터는 제멋대로이긴 해도 허언을 하는 자는 아니었다. 불안해하면서도 나갈 준비를 하는 남자들의 얼굴과 달리 레인의 표정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레스터는 정말로 레인을 이대로 양호실에 데려갈 생각인 듯했다. 레인이 덜덜 떨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까지 겪어 온 수많은 경멸이 스치고 지나갔다. 레인이 엉거주춤 레스터의 바지 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레스터, 하지 마, 제발…….”
“그래?”
애걸복걸하는 레인의 손에서 바지 자락을 빼고, 구두로 레인의 손을 밟으며 그는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용서받고 싶다면 따라 해 봐. ‘슈리아 베델은 더러운 창녀입니다’, 라고.”
레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 몸 하나 살자고, 제게 오는 모욕을 피하자고 불쌍한 어머니를 더럽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분을 못 이긴 레인이 바닥을 손으로 박박 내리 긁는 손짓에 손톱이 투둑 부러져 피가 떨어졌다. 한 번 더 그를 내리치고 싶었지만, 한계가 다가온몸에 두 번의 기적은 없었다. 레스터가 무언가 말하는 목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데려가.”
레인은 이불에 돌돌 말린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번쩍 들렸다. 더 이상 의식을 잇는 것도 힘겨워 순식간에 의식이 멀어졌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기절해 깨어나지 않기를 소망했으나 레인의 소원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며칠을 앓던 레인은 끈질기게 눈을 떴다.
레스터의 예상대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교사들에게 레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인정하면 끝이다. 계속 부정한다면 세월이 흘러 그저 추문으로 남을 수 있는 일을, 인정하는 순간 아카데미가 처벌하기 위해 움직여 기록이 남고 레스터가 해 뒀던 입막음도 소용없어진다. 이게 레스터가 바라는 방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제 가치를 재어 보던 아버지가 추문을 남긴 레인을 멀쩡하게 살려 둘 리 없다. 레인이 입을 다물면 최소한의 명예만은 지켜진다. 그 누구도 처벌할 수는 없겠지만.
레인이 입을 다물자 아카데미 측에서도 이런 추문을 널리 알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눈에 뻔히 보이는 사실을 묵인했다. 레인은 평소의 지병이 악화되어 입원한 것으로 처리됐다.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은 없었던 레스터가 소문을 단속시키자 조용히 들끓던 추문은 의혹으로 남아 서서히 가라앉았다. 레인이 실려 온 모습을 직접 본 사람들의 시선과 남아 있는 의혹만으로도 레인은 괴로웠으니, 레스터는 훌륭하게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의식을 차리고도 오랫동안 아팠다. 거동이 가능해지자마자 레인은 아직 안정해야 한다는 소리를 무시하고 기숙사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 견디기 힘들어, 레인은 독한 술과 약을 함께 마시고 잠이 들었다.
깊은 밤, 자고 있던 레인은 숨이 막혀서 눈을 떴다. 누군가가 레인의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고 있었다. 레인이 의식을 잃기 전에야 손을 놓은 상대는 아무 말 없이 괴로워하는 레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구름에 가린 달이 드러나자 어둠에 적응된 눈이 상대의 모습을 제대로 담았다.
“카이렌…….”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부름에 답하듯 카이렌이 어둠 속에서 가만히 미소 지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에 빠질 만한 매력적이고 근사한 미소였지만, 카이렌이 웃을 때 레인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던 적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에 레인은 습관처럼 팔을 들어 방어하려고 했지만 카이렌의 손이 레인의 뺨을 내리치는 것이 더 빨랐다. 몇 대 연거푸 얻어맞자 어두운 시야에 불이 번쩍번쩍 튀며 새하얗게 점멸한다. 이어서 순식간에 몸이 뒤집혔다. 카이렌은 레인의 양팔을 뒤로 돌려 묶더니 그대로 덮치듯 내리눌렀다. 마치 며칠 전의 일이 반복되는 것만 같아서 숨이 턱 막혔다. 귓가로 카이렌의 잔뜩 가라앉은 위협적인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 씨발, 더러운 개새끼가……. 다리를 아무 데나 벌리고 다녔다지?”
“누가 그랬다고, 난……!”
“다 듣고 왔는데, 뭐가 아니야.”
카이렌은 반박하려는 레인의 뒤통수를 잡고 베개 위에 강하게 내리눌렀다. 지금만큼 제 약한 몸이 저주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남들보다 서너 배 힘이 좋은 카이렌은 레인을 종이 인형처럼 가볍게 다루고 제압했다.
“개 같은 게……. 건방지게, 감히…….”
화를 낼 사람은 레인인데 오히려 카이렌이 머리끝까지 분노에 차 있었다. 대체 왜? 의문을 이어 갈 새도 없었다. 저지할 틈도 없이 카이렌이 레인의 바지를 벗겼다.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그동안 세워 오던 자존심도 이 끔찍한 유린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시든다. 고작 타액으로 적셨을 뿐인 손가락이 레인의 안을 자비 없이 쑤신다. 카이렌은 다른 손으로 레인의 몸 여기저기를 내리치고 꼬집거나, 이따금 이를 세워 목뒤나 허벅지를 물어뜯기도 했다.
“안 돼. 안 돼…….”
레인의 신음은 베개에 먹혀 허망하게 사라졌다. 천천히 살을 가르며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감각은 한 번 겪어 봤음에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제대로 버티지 못하는 몸이 힘겹게 축 늘어진 채로 파들파들 떨렸다. 찢어져서 피가 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카이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읏……. 큭, 하, 하지… 마, 제발, 부탁이니까…….”
“레인……. 헉, 레인.”
카이렌이 손을 뻗어 어느새 눈물이 고인 레인의 눈가를 훔쳤다. 입술은 부드럽게 레인의 귓가와 목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다정하게도 보일 수 있는 행동이지만, 여전히 허리 아래는 강압적으로 움직이며 레인을 폭력적으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카이렌, 악, 제발……. 흐윽……. 제발, 제발 그만…….”
“그러지 말고 집중해.”
집중하라니. 대체 이 끔찍한 행위 어디에 집중할 만한 구석이 있단 말인가. 카이렌이야 좋을지 몰라도 레인에게는 오직 고통과 수치뿐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는 레인을 카이렌이 잡아 돌렸다. 순식간에 가볍게 몸이 돌아갔다.
“윽…….”
“기분 좋아. 후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할걸. 진작, 내 것으로…….”
머리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귀가 썩을 정도로 달았다. 정면에서 보이는 카이렌의 눈빛에서 진득한 소유욕과 독점욕, 그리고 애정이 제어를 잃고 강렬하게 흘러넘쳤다. 언제나 레인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자의 애정이라니. 생경한 시선이 품은 감정들은 레인의 이해 너머에 있었다.
지난 십여 년의 세월간, 레인은 항상 폭력에 꺾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폭력은 결코 마음먹은 대로 떨쳐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습관처럼 이어지는 폭력은 저도 모르게 사람을 굴종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의연하게 행동하려 노력했으나, 생각지도 않게 접촉했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비슷한 목소리만 들려도 움찔하며 놀라는 반사적인 행동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의 레인은 오기로 간신히 세워 올린 사상누각에 불과했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레스터와 카이렌이다. 그런데 몸을 겹친 이 순간, 레인은 카이렌이 지금까지 억누른 채 가만히 품고만 있던 감정을 명명백백히 깨달았다.
카이렌 모드는 레인 아이제나흐를 사랑한다.
나를 짓밟아 놓고, 감히 어떻게 애정을 품을 수가 있지? 박제된 표본처럼 굳어 하얗게 질린 레인의 얼굴을 카이렌은 사랑스럽단 듯이 쓰다듬더니 그대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레인이 구역질이 난다는 표정을 짓자 그대로 손바닥이 날아온다. 상대를 강간하고 매질해 제 뜻대로 꺾으려 드는 것을 애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의문이 솟아나는 와중에도 잔뜩 흥분한 숨이 자꾸만 레인을 간질였다. 카이렌은 레인에게 욕정하고, 흘러넘치는 애정을 주체하지 못해 강제로 손에 넣은 상황에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머릿속이 어지럽게 도는 게 맞아서인지 아니면 이 상황 때문인지 모르겠다. 모든 게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모욕하고 때리는 것이 낫지, 레인을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는 카이렌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카이렌, 그만……. 내가, 내가 잘못했으니까.”
도저히 견디지 못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한 애원에 카이렌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들어 뺨을 툭툭 쳤다.
“네가 뭘 잘못했는데?”
천연덕스레 날아오는 질문에 말이 막혔다. 내리꽂힌 의문이 레인에게 불을 질렀다.
뭘 잘못했느냐고? 레인은 잘못한 게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었다. 무언가 잘못을 저지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레인의 죄는 살아남았다는 것뿐이다. 살아남은 게 죄가 될 수는 없지만서도,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죄 또한 강자의 선택으로 나누어진다. 강자이자 승자인 제 아버지의 입맛에 맞게 레인은 멍청하게 눈치도 없이 살아남은 죄인이 됐다. 살아남은 게 죄라면, 레인이 죄를 씻을 방법은 죽음밖에는 없다.
“난, 나는……. 난, 잘못한 게 없어…….”
이 순간에도 강간하며 죄를 짓는 사람은 카이렌인데 죄인처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감내해야 하는 쪽은 레인이다. 십 년이 넘는 폭력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도망치지도 못하는 이유. 윤간당하고도 레인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강간당하면서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이유. 모두 레인이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힘을 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새삼스레 서러운 마음이 치솟아 레인은 오열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서럽게 우는 레인을 본 카이렌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더니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연인처럼 레인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레인은 카이렌을 주먹으로 치면서 밀어내려 애썼지만, 카이렌은 드물게 제게 반항하는 레인을 때리지도 않고 부드럽게 손으로 얼렀다. 연인처럼 다정한 행동이 거슬렸다. 레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외쳤다.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잘못한 게 없단 말이야! 왜, 왜 너는……. 너희는……. 왜 나를…….”
“알아.”
카이렌은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다정하게 눈물 젖은 레인의 양 뺨에 입을 맞췄다. 끔찍한 기만이었다. 아무리 주먹을 휘두르고 발악해 봤자 레인이 떨쳐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제나흐의 핏줄도, 뒤통수에 따라붙는 경멸도, 눈앞의 카이렌도 평생 어딜 가든 레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운명 같았다.
한참을 오열하다가 진이 빠진 레인에게 카이렌이 입을 맞췄다. 숨을 쉬기도 버겁게 따라붙는 입술과 아까보다 더더욱 흥분한 숨소리가 두렵다. 그러나 여전히 도망칠 곳은 존재하지 않았고, 레인은 점점 더 벗어날 곳 없는 어둠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지독했던 밤 이후, 카이렌은 본격적으로 레인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감정을 눌러 참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카이렌은 진득한 애정과 소유욕을 드러내며 레인에게 집착했다. 강렬한 애정과 집착은 어느 한순간에 생긴 감정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손대려면 얼마든지 손을 댈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폭발하기 전까지 그 감정들을 억눌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어보면 알려 줬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아서 묻지 않았다. 카이렌의 애정에 대해 어느 것 하나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폭력과 마찬가지로 참고 견뎌 내야 할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카이렌은 폭력적일 때도 있었지만 다정할 때도 많았다. 시간이 갈수록 차라리 폭력적인 편이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점차 레인은 카이렌의 손길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프고 끔찍한 일이어야 마땅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어느새 호응하는 레인의 몸을 발견했을 때, 카이렌은 만족스레 웃었다.
“너는 이런 걸 좋아하는 거야.”
레인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기는커녕 당장에라도 카이렌을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자신도 죽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고 싫었다. 몇 번은 화가 나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냥 끔찍할 뿐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레인은 곧장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차가운 반박 대신에 호응과도 같은 달콤한 신음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성기를 쥐고 억지로 틀어막았는데도 자꾸만 치미는 성감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제발 가게 해 달라고 눈물로 애원했다.
행동이 사고를 잠식한다. 날이 갈수록 레인은 자신이 이 행위들을 달가워하는지 아니면 끔찍해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별것 아닌 손길에도 반응하고, 사소한 동작에서도 성적인 행위를 연상하게 됐다. 그만해 달라고 말하면서도 카이렌의 손길이 거둬지면 어딘지 부족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카이렌의 말대로 정말 자신은 이런 행위를 좋아하는 걸까? 한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자신이 더럽고 역겹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레인은 병약한 몸을 핑계로 수업을 빠지기 시작했다. 카이렌은 레인의 핑계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방까지 찾아온 의원에게 뒷돈을 주고 서류를 조작해 문제없이 쉬도록 만들었다. 한번 틀어박히기 시작하자 점점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수많은 사람이 레인을 보며 비웃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그날처럼 레인을 밀치고 강제로 억누르고 강간하는 망상이 떠올라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레인은 방 안에 완전히 틀어박혔다. 햇빛조차 저를 탓하는 듯해 보고 싶지 않아서 두꺼운 커튼을 달아 낮도 밤처럼 새카맣게 만들었다. 낮인지 밤인지 구별도 못 하는 상태에 무기력증이 겹쳐져 레인은 계속 잠만 잤다. 그런 레인을 찾아오는 건 방을 정리하는 하인과 카이렌뿐이었다. 레인은 순식간에 세상과 단절됐다. 소리 없이 들어왔다가 소리 없이 나가는 하인과 달리 카이렌은 올 때마다 레인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레인이 잠들어 있든 깨어 있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카이렌은 그의 육체를 만끽했다. 카이렌이 이미 제 안에 들어온 것을 느끼며 깨어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세상으로부터 도망쳐도 결국 레인은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긋지긋한 현실의 공포는 마침내 꿈속까지 따라왔다. 레인의 공포는 흉측한 벌레나 살점 따위로 형상화되어 꿈을 가득 채웠다. 제대로 된 형태를 잃고 덩어리진 살점들이 수십 개의 남근처럼 다가와 레인의 구멍이란 구멍은 모조리 다 꿰뚫었다. 강간당하다가 죽어 버리고 나면 그 위를 까마득하게 많은 벌레들이 뒤덮었다. 끔찍한 악몽은 쉬는 날 없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레인은 산 채로 바싹 말라 갔다. 악몽에 시달릴 때면 카이렌이 레인을 깨웠다. 레인이 자신의 공포에 짓눌려 벌벌 떨 때면 카이렌은 절대로 난폭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괜찮아. 내가 네 곁에 있어. 내가 널 지켜 줄게.”
카이렌은 입속의 혀처럼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연인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안아 주었다. 카이렌이 우울증과 공포의 원인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악몽에 시달려 현실감을 잃을 때면 저를 안아 주는 카이렌에게 매달렸다.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이 카이렌인데도 우습게도 그 품속은 더없이 안온했다.
삐거덕거리며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증오와 생각을 멈추고 사랑스러운 장난감처럼 순종하면 카이렌은 레인을 때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하게 말을 걸고 상냥하게 사랑해 줬다. 그러면 편안했다. 편안하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굳이 이득도 없이 저항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을까? 뭘 하든 괴로울 뿐이라면 차라리 몸이라도 편한 게 낫지 않을까? 유혹은 마약처럼 달콤하게 레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저항을 완전히 멈추자 카이렌은 레인을 괴롭히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카이렌은 인형처럼 축 늘어진 레인의 몸을 정성스레 자신의 취향대로 개발해 나갔다. 레인은 거부하지 않고 그가 명령하는 대로 행했다. 피곤하기는 해도 더 이상 아프지는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니 마음도 편했다. 악몽 속에서 가끔 죽은 어머니가 나와 레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사라졌다. 사지가 뒤틀린 초라한 몰골로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시간을 보내던 중, 한 번은 레스터가 찾아왔다. 카이렌은 자랑하듯 레인을 내보였고 레스터는 차가운 눈으로 레인을 내려다보며 조롱했다.
“맛이 갔군.”
레스터는 레인의 상태를 짤막하게 평했다. 그 이상 뭐라고 말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갖고 노는 고급스러운 인형에 박힌 보석이나 단추로 만든 눈이 차라리 레인의 눈보다 생기 있을 지경이었다. 침대에 늘어져 무기력하게 흔들리며 신음하는 레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레스터는 이내 시시하단 듯이 혀를 차고 나가 버렸다.
한심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러나 그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력 속에 묻혀 사라졌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날이 몹시 무더워 가만히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 땀이 뱄다. 게다가 자던 사이에 왔다 간 건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이 시트를 잔뜩 더럽히고 있었다. 카이렌이 와서 씻겨 줄 때까지 무시하고 잠이나 자려고 했으나, 몇 번을 짤막짤막하게 자다 깨는 일을 반복해도 카이렌은 바쁜 건지 도무지 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는 무슨 일이 그리도 바쁜지, 아예 오지 못하거나 와도 금세 떠나는 날이 많았다. 어지간하면 무시하고 잤겠지만, 축축할 지경인 시트가 불쾌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레인은 간만에 제 발로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대충 물을 받고 보니 더운 날씨에도 지하수를 끌어 온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침대에서 내려왔는데도 여전히 몸이 뜨끈뜨끈한 걸 보면 단순히 제 몸이 차가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귀찮게 데우는 수고를 하고 싶지는 않아서 레인은 그대로 찬물로 씻었다. 차가운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간신히 씻고 덜덜 떨면서 욕실을 나왔다. 이불 속에 몸을 파묻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기껏 씻고 나와서 더러운 시트에 몸을 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몇 주인지 몇 달인지 만에 처음으로 커튼을 걷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눈부신 태양이 반갑다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웠다. 빛을 너무 오래 보지 않은 탓인지 해가 제법 넘어갔는데도 시릴 정도로 눈이 부셨다. 급히 커튼을 닫았지만 두꺼운 커튼 너머로 전해지는 따끈따끈한 온기는 유혹적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레인은 커튼 너머를 더듬더듬 짚어 창문을 열었다. 커튼 틈새로도 후끈후끈한 바람은 충분히 밀려 들어왔다. 한차례 휘몰아친 바람이 레인의 코끝을 선선한 공기로 간질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떠드는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렸다. 누군가가 벌써 여름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벌써 그런 계절이 됐다. 태양이 높게 떠올라 머리 위를 내리쬐고, 누군가는 더위를 피해 그늘을 찾아 부채질하고, 누군가는 시원한 물가를 찾아 물장난을 치기도 하는 시기다. 여름이 온 줄도 몰랐지만, 레인은 처음부터 여름을 좋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땀에 젖은 채 바닥을 뒹구는 건 상당히 고역이었다. 하긴 어느 계절이든 그랬다. 레인에게는 힘겨울 뿐인 순간도 다른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추억이 있을 시간이다. 세상은 이토록 행복하게 돌아가는 데도 레인의 삶은 여전히 송두리째 타인에게 지배당해 짓밟힐 뿐이다.
레인은 커튼을 붙든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햇빛을 보지 않아 그저 새하얗기만 한 손이 시체처럼 창백해 보였다. 레인은 언제나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살아남아도, 치욕만이 남아 있는 삶이 되겠지.’
어머니의 말이 오래된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그녀가 옳았다. 대여섯 살 난 작은 아들과 함께 죽으려던 게 어디 좋아서 한 선택이었겠는가. 레인은 그때 어머니의 마지막 자비를 감사하게 여기며 그녀가 눈물과 함께 넘겨준 약들을 모두 들이마셨어야 했다. 그때 죽었다면 지금의 치욕도 고통도 없었을 텐데.
죽음만을 기다릴 뿐인 삶이라면, 차라리…….
레인은 한참 동안 커튼에 기댄 채 바깥을 노려보았다. 천 너머로 스며드는 햇살에 마침내 눈이 익숙해지고, 저녁놀이 질 때까지 하염없이 서 있다가 창문을 열었다. 피처럼 붉은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한 번 노려본 레인은 창 아래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뜻밖에 바닥까지의 거리가 가까워서 이곳에서 떨어진다고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바람이 훅 불어와 레인의 몸을 흔들었다. 휘청거리던 레인은 바닥으로 무너져 오래전에 망가지고 이제 서서히 부서지고 있는 몸을 끌어안았다. 잘게 떨리는 몸은 더운 날씨에도 여전히 조금 싸늘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차디찬 품을 놓은 레인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바깥으로 나갔다. 저녁 시간이라 다들 청소며 식사 준비에 바빠 레인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는 틈에 비품실을 찾았다. 사람 없이 짐만 가득 찬 방에서 레인은 원하던 걸 찾아냈다. 싸구려 쥐약이었다. 레인은 반질거리는 갈색의 약병을 꾹 쥔 채 방으로 돌아왔다.
레인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최후의 순간까지 괴로워하며 온몸을 뒤틀고 피를 토하며 죽어 가던 모습뿐이다. 막연히 죽게 된다면 어머니처럼 고통스러운 방법만은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평생 아팠는데 마지막까지 아프게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편히 죽는 방법조차 지금의 레인에게는 사치였다. 고상한 수단을 찾기보다는 당장의 죽음이 급하다. 이대로 독을 마시면 살아가며 느끼는 모든 고통과 번민에서 해방될 수 있는데 고작 순간의 고통 때문에 미룰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미지의 고통은 레인을 두렵게 만들었다. 강렬한 충동과 공포가 서로 부딪치며 레인은 한참을 갈등했다. 노을마저 내려앉는 까만 어둠에 지워지고 주변 형체가 어둠 속에 뭉그러질 때쯤에야 레인은 마침내 결심할 수 있었다.
이대로 죽자.
레인은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열었다. 간단한 동작에도 손이 떨려 몇 번이나 병을 떨어뜨렸다. 마침내 병을 열어 캄캄한 입구를 노려보고 있을 때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레인은 놀라서 병을 숨기려다가 그대로 엎질렀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도 새하얀 이불 위로 갈색의 액체가 번지는 모양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레인은 병과 흘린 자국을 숨기기 위해 황급히 이불을 덮고 문 쪽을 노려보았다.
매일 보는 익숙한 얼굴의 하인이 노크도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무례하다면 무례한 태도지만, 방에 틀어박힌 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인에게 반응하지 않았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하인은 제게 반응해 노려보는 레인을 보고 놀라워하는 얼굴이었지만, 금세 노련한 하인답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 숙여 무례를 사죄했다. 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까지는 바라지 않았는지 하인은 멋대로 고개를 들고 하던 일을 마저 계속했다.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고 가져온 식사를 테이블 위에 차려 둔 하인은 평소처럼 곧장 나가는 대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편지 봉투였다.
하인이 나가고 레인은 급히 이불을 걷어 악병을 살폈다. 내용물이 반 이상 이불 위로 쏟아졌지만, 이 정도 양이면 죽는 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마시면 모두 끝나겠지만……. 바로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는 대신, 레인은 병을 침대 아래에 세워 두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도 그럴 게 레인은 단 한 번도 편지란 걸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죽음을 결심한 인생 최후의 순간에 받아 보는 최초의 편지는 충분히 호기심을 끌 만했다. 다가가서 보니 편지가 한 통도 아니라 아예 묶음이었다. 한 통도 받아 본 적 없는데 무려 여러 통의 묶음이라니. 오랫동안 모아 온 걸 한 번에 보냈는지 낡고 바랜 봉투와 지저분한 뭔가가 묻은 봉투와 비교적 하얗고 빳빳한 봉투들이 섞여 노끈에 묶여 있었다. 레인은 편지를 들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발신인. 유르딘 니제스.」
이 상황에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레인의 태연함은 그대로 박살 났다. 편지를 쥔 손이 아까 전 독약을 먹을 결심을 하고 병을 열 때보다 더 떨렸다. 레인은 휘청거리다 의자에 주저앉았다. 레인은 편지 봉투를 손상 없이 뜯기 위해 벌벌 떨리는 손끝으로 봉투를 긁다가 몇 번이나 실패하고 나서야 지칼의 존재를 기억해 내고 급히 방을 뒤져 찾았다. 뻔히 책상 서랍 가장 위 칸에 올려 뒀던 걸 바로 못 찾아서 방 안의 물건을 모조리 다 헤집었다. 그 정도로 당황했다.
마침내 레인은 급하게 가장 오래된 편지 봉투를 열었다. 내용이 쓰인 건 단 한 장뿐, 두툼한 두께는 안에 든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 겹겹이 싼 종이들이었다. 보내온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편지 봉투는 온통 더러웠지만, 편지지만은 군의 총사령관이 쓸 법한 귀한 금박 장식을 입혀 두어 무척 고급스럽고 깨끗했다. 그 귀한 종이 위에 유르딘이 직접 쓴 딱딱한 글씨들이 병사가 사열식이라도 하듯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레인,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편지를 보내겠다고 한 지 석 달 만에야 펜을 드는구나. 하지만 이걸 바로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기 상황이 썩 좋지 않거든. 지난번에는 어디서 정보가 샜는지 전령이 죽임을 당해서 본국에 뭔가 보내는 것도 조심스러워. 개인적인 편지는 순위가 밀릴 것 같다. 하지만 나아지는 대로 바로 보내도록 하마. 부디 건강하게 지내고 있기를 빈다.」
마치 보고서 같은 짤막한 편지를 보고 레인은 그간 들은 북방의 소식을 떠올렸다. 쉽게 끝나리라 예상했던 전쟁은 모두의 예상 이상으로 판이 커졌다. 야만족들은 제 영역보다 더 북부에 자리 잡은 왕국 카니예와 연합했다. 카니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습했고, 예상치 못한 습격에 왕국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다행히 유르딘이 퇴로를 뚫고 군을 추슬러서 간신히 성으로 피했지만, 한번 수세에 몰리니 역전이 쉽지 않았다.
원래부터 카니예와 왕국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선왕의 시절, 왕국이 카니예의 영토 일부를 빼앗은 전적이 있어 카니예는 그 후로 호시탐탐 왕국의 영토를 노렸다. 카니예와의 전면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유르딘이 편지에 쓴 대로 왕국군의 이동 경로가 발각된 일로 첩자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퍼져 있어 연락책들을 점검하고 경계하느라 사사로운 편지를 보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르딘은 그런 상황에서조차 부치지는 못했어도 꼬박꼬박 편지를 썼다. 보잘것없는 레인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레인은 편지를 하나하나 뜯었다.
「날도 추워지는데 잘 지내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모르겠구나. 수도는 조금 더 따뜻하니 괜찮으려나. 하지만 너는 다른 아이들보다 몸이 약해서 걱정이다. 여긴 눈이 많이 오는 고장이라 겨울이 되면 전쟁은 쉴 수밖에 없단다. 편지를 보내기엔 제격인 때라고 생각했지만 눈 때문에 어차피 보낼 수가 없다는구나. 겨우내 준비해서 봄에는 편지를 보낼 수 있도록 하마.」
「눈이 많이 오는구나. 수도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어. 매일 눈을 치우다 보니 이곳 병사들은 눈을 악마의 똥가루라고 부르는데……. 음, 이런 이야기는 재미없으려나. 내가 말주변이 없어 미안하다.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재밌게 볼 수 있을지 몰라서 내 부관에게 물어봤는데, 편지를 아예 안 보내는 게 제일 재밌을 거라고 하더구나. 정말로 그런가? 대답은 안 해도 괜찮아. 너는 재미없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네가 걱정되니까 조금 귀찮아도 편지를 계속 보내 줬으면 좋겠다. 어디 아프지 말고 건강하기를 빌며.」
「이제 봄인데 아직도 편지를 보낼 만한 상황이 아니구나. 아, 아주 나쁜 건 아니야. 그냥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했을 뿐이지. 잘하면 카니예의 성을 점령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휘른 지방을 점령하면 야만족을 치기도 쉬워지겠지만, 전하께서 휘른 지방을 얻게 된다면 그 김에 카니예를 아주 꺾어 놓을 생각도 하고 계시니 전쟁이 길어질지도 모르겠어. 저번에 해 준 게 없어 다음에 만나면 맛있는 거라도 사 주고 싶었는데, 계획이 늦어질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건강하렴.」
어째 단 한 번도 건강하라는 소리를 빼먹은 적이 없다. 레인은 제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자각하며 마지막 편지를 열었다. 가장 빳빳하고 하얀 편지 봉투 안의 편지는 여름에 쓴 내용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편지를 보낼 수 있겠구나. 늦어서 미안하다. 소식 들었겠지만, 휘른 지방의 성을 점령했다. 돌아가는 건 무리지만 조금 여유가 났어. 수도 부근은 올해 몹시 무덥다는데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기는 여름에도 그렇게까지 덥지는 않아. 지내기에 좋은 곳이야. 공기도 좋고 경치도 아름다워. 언젠가 네가 이곳으로 요양을 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물론 전쟁이 끝나야 가능하겠지만, 그건 한참 멀었지. 물론 최대한 빨리 끝낼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전쟁이 끝나면 널 데리고 요양을 오든, 어디 여행을 가든……. 한 번쯤 그렇게 함께하고 싶구나.
어쨌든 상황이 풀려 이제는 정말로 편지 교류란 걸 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몇 통이나 보내서 놀랄지도 모르겠다만, 싫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무리는 하지 말고, 시간 날 때 편지해라. 그럼 건강하게 지내렴.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보자.」
레인은 떨리는 손으로 마른 잉크 위를 매만졌다. 무덤덤한 듯하면서도 다정함이 어린 문장에서 유르딘이 느껴져서, 글씨와 와 닿는 손가락 끝부터 따스한 온기가 번져 나갔다. 한여름의 태양조차 어찌하지 못하던 냉기가 고작 몇 자의 글자에 자취도 없이 녹아내린다. 레인은 편지지 위로 코를 가져다 대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느껴질 리 없는 유르딘의 체향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머릿속이 아찔했다. 레인의 안에서 밑바닥까지 꾹꾹 내리눌러 둔 무언가가 왈칵 터져 나왔다. 눈물이 편지 위로 순식간에 떨어져 내려, 레인은 잉크가 번질까 봐 화들짝 놀라며 편지지를 테이블 위로 밀어두었다. 흐린 시야 너머로 보이는 편지에서 느껴지는 애정이 낯설고 기뻤다. 레인은 입을 벌려 소리 없이 이름을 불렀다.
유르딘.
그가 레인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편지를 하겠다고 말했어도 기대는 없었다. 왕국의 최전방에서 군을 통솔하는 그가 보잘것없는 애송이에게 신경 써 줄 리가 없다고 단정 짓고, 불신했다. 불리하게 돌아가는 전황을 뻔히 알면서도 유르딘이 편지를 보내지 않는 걸 지레짐작해 그가 약속 따위는 잊었을 거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레인도 그대로 잊어버렸다. 레인조차 잊었는데 유르딘은 잊지 않았다. 아무도 챙겨 주지 않아 본인조차 잊어버렸던 레인의 생일을 유르딘 혼자서 챙겨 줬듯이, 이번에는 레인도 잊어버린 약속을 주워 이렇게 편지를 보내 줬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보자.’
큰 의미를 담고 적은 말은 아닐 것이다. 으레 하는 인사치레에 불과하거나, 진심이라고 해도 레인처럼 절실하게 만나고픈 소망이 담긴 말은 아닐 터였다. 유르딘은 알고 있을까? 레인이 유르딘의 가벼운 애정 한 조각까지도 게걸스레 원하며 긁어모으고 있다는 것을. 그가 주는 것이라면 싸구려 동정이라도 좋았다. 그 어떤 감정이라도 좋으니 유르딘이 레인을 봐 줬으면 했다.
조금 전까지 죽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고작 한 문장이 레인을 지배하고 뒤바꿔 놓았다.
한참이나 편지를 보던 레인은 침대 아래 깊숙한 곳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몇 달이나 방치된 상자 위로 두껍게 먼지가 쌓여 있는 걸 꼼꼼하게 걷어 내고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어린 시절부터 유르딘이 보내 준 선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어머니와 유품과 함께 들어 있었다. 이 상자 안의 물건들은 레인이 평생 지고 갈 레인만의 보물들이었다. 레인은 다시 한번 편지를 읽고 나서 곱게 접어 상자 안에 넣었다.
레인은 얼굴을 적신 눈물을 닦아 내고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먼저 창가로 가서 안과 밖을 단절시키고 있는 커튼을 완전히 걷고 창을 활짝 열었다.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덕에 바깥을 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이 유독 맑았다. 기분 나쁘게 후덥지근하거나 차갑지 않고 그저 시원한 바람이 불어 레인의 마른 눈물 자국 위를 스치는 감각이 상쾌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서 있던 레인은 몸을 돌려 침대 위로 다가갔다. 엉망으로 더러워진 침대 아래에 바로 세워 뒀던 약병이 보인다. 반이 빈 약병은 죽음이 도사린 무저갱의 어둠처럼 깊었다. 레인은 약병을 들고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아래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레인은 주저 없이 병을 거꾸로 들어 안에 있던 내용물을 모조리 쏟아 버렸다. 빈 병은 그대로 복도에 버려 눈앞에서 완전히 치웠다.
그리고 다시 살아갈 마음을 다졌다.
레인이 다시 방 밖으로 나가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해도, 그의 처지가 달라질 리는 없었다. 비참한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빠질 수도 있었다. 이대로 살아 봤자 끝나지 않는 절망과 괴로움만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나중에 보자.’
유르딘이 그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레인 아이제나흐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해도, 유르딘의 말 한마디가 레인에게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제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틀어박혀 있다가 나와 보니 어느새 석 달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레인이 회복한 것을 본 카이렌은 생각보다 많이 화내지 않았다. 그냥 조금 의외란 듯이, 아쉽단 듯이, 그러나 어느 한구석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굴었다. 정말로 카이렌이 레인에게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레인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완벽하게 순종적인 태도를 버리자마자 다시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카이렌은 몹시 바쁜 몸인지라 매일 찾아올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의 공부 외에도 뭔가 더 볼일이 있는지 제대로 자리에 붙어 있는 날이 드물었다.
카이렌이 자리에 없는 동안 레인은 그저 흘러가 버린 시간을 아쉬워하는 대신 열심히 노력했다. 그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탓에 근육이 다 빠져 걷는 일조차 힘들었다. 한동안은 체력도 성적도 곤두박질쳐서 회복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심한 운동은 무리라 부지런히 평탄한 길을 빙글빙글 걸으며 머릿속으로는 그날 읽은 책을 외우고 또 외웠다.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가는 듯하면서도 빠르게 흘러갔다. 하루하루 버티기가 죽을 듯이 힘들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 있었다. 레인은 스무 살이 넘어서도 키가 꽤 자라 평균에도 못 미치던 작달막한 키에서 벗어나 제법 훤칠한 외형을 갖췄다.
레인이 완연한 청년으로 자라나는 사이, 북방에서도 몇 번의 승전 소식이 들려왔다. 유르딘이 이끄는 군대는 패배를 모르고 용맹하게 진군했다. 용맹한 군대 이상으로 유명한 게 유르딘에 대한 소식이었다. 소드 마스터로서 총사령관인데도 최전선에 선 유르딘은 커다란 부상 한 번 입지 않고 거침없이 적을 베고 승리를 가져왔다. 현재 대륙에는 유르딘을 포함해 두 명의 소드 마스터가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늙은 노인인데다 전성기일 때도 유르딘만큼의 실력은 없었다. 몇백 년간의 기억을 뒤져 봐도 유르딘만큼의 실력자가 없었다. 유르딘은 마법의 시대가 저문 후 가장 강력한 실력자였다.
마법의 시대. 몇백 년 전, 갑작스레 전 대륙에 퍼져 있던 마력이 약해졌다. 대마법사라고 불리던 자들도 힘을 잃고 평범한 사람 수준으로 전락했다. 백여 년에 걸쳐 마력은 서서히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지만, 이미 쓸 만한 마법사들은 모두 죽어 버린 지 오래였다. 마법사들이 보안을 위해 특수한 방법으로 남기는 기록은 마법으로만 읽을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대다수의 마법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커다란 마력 없이도 구동시킬 수 있었던 생활 편의를 돕는 마법 도구들뿐이다. 정해진 설계대로 도구를 만들어, 마력을 조금 불어 넣어 가동시키면 되는 간단한 수준인지라 옛 시대에는 평민들도 자유롭게 썼던 것 같지만 지금은 부유한 사람들만이 한정적으로 쓰고 있었다. 옛날에는 마법사 소리도 못 듣는 마력을 지닌 노동자가 하던 일이지만, 지금은 그조차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대단한 마법사 취급을 받으며 큰돈을 벌었다.
그렇게 마법과 멀어진 시대이지만, 간간이 나타나는 소드 마스터는 예외였다. 애초에 소드 마스터가 쓰는 오러는 마법적인 힘이지만 구동 방식이 보통의 마법과는 달랐다. 마력을 안정적으로 담을 수 있는 단련된 육체와 경지에 오른 검술 실력이 있다면 누구든 자연스레 오러를 깨우쳤다. 오러를 덧씌운 검은 강철도 종잇조각처럼 잘라 낸다. 더더욱 높은 경지에 오르면 오러를 날려 폭발시켜서 대단위의 공격을 퍼부을 수도 있었다.
이렇듯 소드 마스터는 개인이 일당 천의 무력을 지닌데다가 상징적인 의미도 엄청나서 카니예의 기사 중에는 유르딘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 대적하지 않고 투항하는 자도 있었다. 왕국의 기세가 이처럼 대단하니, 처음 전쟁의 계기가 된 야만족들은 차마 대적하지 못하고 산에 얌전히 틀어박혔다. 왕국은 기세가 올라 야만족 정벌 대신에 선제공격을 감행한 카니예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최근 유르딘은 카니예-펠든의 왕국 연합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두 개의 왕국을 상대하면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덕분에 요 몇 년 새 라인셀의 영토는 많이 늘어났다.
빛나는 소식들에 레인은 자신이 초라해지는 걸 느꼈다.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초조해하다가 유르딘에게 편지를 받고 안심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하기야 유르딘에 비교하면 누구든 초라해지기는 했지만, 레인의 처지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빴다.
몇 년이 지나도 카이렌과의 관계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카이렌은 점점 더 바빠졌다. 레인보다 일 년 빨리 아카데미에 입학한 카이렌은 졸업하고 나서도 부지런히 레인을 찾아왔다. 자주 오지는 못했지만, 대신 가끔 레인을 찾아올 때마다 그간 쌓인 성욕을 모두 풀기 위해 한 번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카이렌과 만나는 간격이 벌어질수록 그는 난폭해졌고 더욱더 레인에게 집착했다. 얻어맞고 목이 졸리고 기절하는 일은 예사였다. 레인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만 나눠도 험악한 얼굴로 구석으로 끌고 가서 행위를 강요하기도 했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정사는 점점 습관이 됐다.
“가둬 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카이렌이 험악한 얼굴로 속삭이는 말을 흘려들으며 레인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운도 더럽게 없었다. 최소한 침대로 올라가서 하면 좋았을걸. 등이 나무에 기대어 있기는 하지만, 양다리까지 들어 올려져 카이렌에게 매달리는 자세는 레인이 가장 싫어하는 체위 중 하나였다.
오늘 일은 교정을 지나던 외부인이 길을 물어보기에 대답해 준 게 화근이었다. 재수도 없게 아카데미를 찾아왔던 카이렌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 성큼성큼 다가온 카이렌은 그대로 레인을 인적 드문 건물 뒤편으로 끌고 가 몰아붙였다. 레인은 힘겨운 감각에 신음하면서 카이렌 너머의 풍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매미 우는 소리가 요란해 카이렌의 숨소리가 조금이나마 가려지는 게 좋았다.
“집중해, 개새끼야.”
“큭, 으읏…….”
카이렌이 레인의 머리채를 잡아 그대로 뒤에 두어 번 처박았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쓰러질 것처럼 골이 울렸다. 레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리자 카이렌이 그의 뺨을 꽉 잡고 제게로 돌렸다. 저를 보는 애정 가득한 시선에 숨이 막혔다. 레인은 눈을 질끈 감으며 외면했다가 그대로 한 번 더 얻어맞았다.
강제로 레인의 의지도 존엄도 짓밟히는 행위는 몇 년이나 이어지고 있었지만, 익숙해질 듯하면서도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런 건 별거 아니라고 태연하게 응수하다가도, 어느 순간 도저히 견딜 수 없이 힘들어 그냥 죽어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카이렌을 죽여 버리고, 레스터와 아버지도 죽여 버리고, 마지막으로 저도 죽어 버리고 싶었다.
레인의 증오를 알면서도 카이렌은 증오의 감정 자체에는 화내지 않았다. 레인이 저를 무시하지만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레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착이었다. 어릴 적 레인에게 목줄을 채우고 그 손잡이를 제가 잡겠다고 떼를 부리던 시절부터 카이렌은 레인에게 집착했었다. 그게 대체 언제, 왜 성욕이 섞인 애정으로 변했는지는 레인도 몰랐다.
레인은 카이렌에게 있어서 제 장점을 외모 한 가지밖에 찾지 못했다. 레인의 얼굴은 제법 반반한 수준을 넘어서기야 했다. 레인의 어머니인 슈리아 베델은 오명을 쓰고 죽은 지금까지도 그 시대에 슈리아를 봤던 귀족들 사이에서 으뜸으로 회자될 정도로 아름다웠고, 레인은 그런 슈리아를 빼다 박듯이 닮았다. 어릴 때는 정말 똑같아서 여자아이로 보이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여자로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훤칠하고 시원시원하게 자라서 제 어머니와는 다른 매력을 풍겼다. 하지만 레인의 기준으로는 자신은 이목구비만 번듯할 뿐,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에 비쩍 말라 성적인 매력을 느끼기 힘들어 보였다. 건강하고 풍만하고 정식으로 결혼해 아이까지 낳을 수 있는 미녀에게 집착하는 게 나을 터였다. 만약 카이렌이 여자를 상대로는 서지 않는 남색가라고 해도 남자 중에서 레인보다 나은 상대는 얼마든지 있었다.
성격으로 가면 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졌다. 레인은 어린 시절부터 자주 아팠던 탓에 예민했다. 맞고 자란 놈답지 않게 자존심이 세서 폭력 앞에서도 순종하거나 길들여질 줄 몰랐고, 하는 말마다 받아쳐서 효과적으로 성질을 긁을 줄도 알았다. 워낙 오래 알고 지낸 터라 카이렌이 싫어하는 말을 모조리 꿰뚫고 있으니 더더욱 성질을 잘 긁었다. 만약 건방진 상대를 꺾어 놓는 취향이라 레인이 좋은 거라면, 레인보다 막 대했을 때 후환도 없는 사람이 차고도 넘쳤다.
머리가 모자란 놈이 아닌 이상에야 일부러 레인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카이렌이 어디 모자란 놈인 것도 아니었다. 물론 레인에게 있어서야 상종하기도 싫은 개새끼일 뿐이지만, 그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남자였다. 훤칠하게 자란 레인보다도 카이렌이 거의 반 뼘만큼은 더 컸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검술을 수련해 어깨도 딱 벌어졌고 몸도 흠잡을 데 없이 좋았다. 소년기를 지나 이제 완연한 청년으로 자라나며 앳된 티가 사라진 이목구비는 조금 날카로운 느낌을 주지만 이견 없이 잘생겼다. 간단하게 말해서 매력적인 외형이다. 속내야 어쨌건 대외적으로 보이는 성격도 나쁘지 않았다. 카이렌이 폭력적으로 구는 건 레인뿐이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서글서글한 성품에 매너까지 좋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지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아이제나흐 공작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드 백작의 하나뿐인 후계자다.
모르긴 몰라도, 카이렌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영애들을 죽 세우면 아카데미를 빙 두르고도 남을 터였다. 그런 놈이 왜 저 좋다는 사람을 마다하고 끔찍해 죽겠다는 레인에게 매달리는지 알 수 없었다. 레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발버둥 치려고 하자 카이렌의 손아귀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축축한 혀가 목덜미를 핥는 감촉이 소름 끼쳤다.
“다리를 분지르고 걷지도 못하게 만들어서 내가 없으면 살아갈 수도 없도록 만들고 싶어.”
“그 지경이 되면 차라리 뒈지고 말지, 뭐하러 너랑 살겠어?”
기가 막혀서 한 소리 해 줬더니 또다시 손바닥이 날아와 얼굴을 쳤다. 어린아이 무게만 한 검도 가볍게 들고 휘두르는 놈이 연거푸 치니 순간적으로 의식이 끊어졌다. 의식을 찾았을 때는 이미 카이렌이 제 안에 사정하고 난 뒤였다. 속이 나쁘더라니, 카이렌이 용건을 끝내고 레인을 놓아주자마자 바로 토했다. 카이렌은 그런 레인을 비웃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가 버렸다.
평소라면 옷 정도는 추슬러 줬을 텐데, 오늘 제 태도가 유독 거슬리긴 했던 모양이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볼까 봐 급하게 흐트러진 옷을 바로 입었지만, 몸을 일으켜 세우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아무리 맞았어도 그렇지 지나치게 어지럽고 속이 안 좋았다. 이렇게까지 어지러웠던 적이 있던가? 몸을 세우려 해 봐도 머리가 핑핑 돌아서 레인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누웠다. 누웠는데도 어지럼증은 가라앉지 않고 계속해서 구역질이 났다. 차라리 토하면 편해질까 싶어서 팔로 상체만 간신히 세운 채 토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레인은 힘없이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고개를 숙이니 이제는 머리까지 깨질 듯이 아파졌다. 차라리 침대로 가서 눕고 싶은데 움직일 기운조차 없었다.
“저기, 어디 아파?”
갑자기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 대신 작게 몸을 뒤틀자 상대는 기운 없이 늘어진 레인의 몸을 잡고 돌렸다. 레인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제 얼굴을 확인했으니 버리고 갈 거라고 생각했다.
아카데미에서 레스터와 카이렌은 언제나 왕처럼 군림했다. 카이렌은 레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그와 똑같은 취급을 하며 조롱했다. 남의 눈이 있을 때는 결코 레인을 성적으로 괴롭히지 않았다. 급할 때는 이렇게 사람 없는 장소로 끌고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소문을 내기도 전에 호된 입막음을 당했다. 카이렌은 졸업했지만, 레스터가 남아 있었기에 영향력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카이렌이 레인을 싫어해서 집요하게 괴롭히는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모두가 카이렌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레인에게 말을 걸지 않고 피했다.
그러나 상대는 레인의 얼굴을 보고도 피하지 않고 손에 힘을 줘 일으켰다. 레인은 가물가물한 눈으로 상대를 살폈다. 레인 또래의 남자가 걸친 건 아카데미 검술 학부를 상징하는 망토였다. 그제야 남자가 왜 자신을 피하지 않는지 이해가 갔다.
아카데미에서 검술 학부는 제법 특이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라인셀 왕국은 무를 최고의 가치로 치며 재능 있는 귀족들이 기사 작위를 얻어 전쟁에 나가는 걸 장려했는데, 최근 이십여 년 사이에 귀족들 사이에서 아카데미의 졸업장을 기본으로 여기는 풍조가 생겼다. 그러나 아카데미 입학은 성년이 되는 해부터 가능했기에 한창 젊은 기사로 활동할 수 있는 나이와 겹쳤다. 이에 아카데미는 검술 학부에 입학한 학생 중 기사 작위를 받은 자들에 한해 명단만을 올려 두고 기사단의 허가서를 받으면 출석 일수를 인정한다는 묘한 제도를 내세웠다. 아카데미는 입학금을 받아서 좋았고 기사가 된 학생들은 만약 전장에서 상처를 입어 쉬거나 이르게 은퇴하게 되더라도 뒤늦게나마 아카데미에서 남은 시간 동안 수업을 들으며 사교에 힘쓰고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쨌든 눈앞의 남자가 검술 학부에 소속된 기사라면 레인의 얼굴을 모르고 접근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중에 해코지당하기 싫으면 물러나라고 할까 하다가 레인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카이렌은 다른 곳으로 가 버렸을뿐더러 남자의 도움을 거절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일어설 수 있겠어?”
“…도와주면, 아마.”
“걷는 건 무리일 거 같은데……. 업어 줄까?”
“괜찮아. 그냥 일어나는 거나 좀 도와줘.”
레인은 고집스레 남자의 말을 거절하고 기대서 섰다. 양호실로 가자는 걸 부득불 사양하고 레인은 기숙사까지 부축을 받았다. 도움을 받는 건 거기서 끝낼 생각이었는데, 레인이 난간에 기대 휘청거리며 올라가는 걸 본 남자는 기어코 그를 업었다. 나중에는 고집을 피울 정신도 없어 얌전히 업혀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레인을 침대에 눕히고 물을 찾아 건넸다.
“안색이 창백해. 의원이나 신관을 불러와야 할 거 같은데.”
“내가 알아서 해.”
신경질적으로 받아쳤다가 아차 싶어서 레인은 미간을 구겼다. 대화하는 상대가 대부분 카이렌, 가끔 레스터 정도라 평소에도 곱게 말하지 않고 짜증을 내는 게 버릇이 들었다.
“짜증 내서 미안. 여기까지 도와줬는데.”
레인이 미안한 얼굴을 하자 남자는 그럴 필요 없다는 양 씩 웃었다. 시원스런 웃음은 정말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성격 좋은 사람이다.
“괜찮아. 아프면 짜증도 나고 하는 거지.”
“하지만 정말로 이 이상 도움은 필요 없어.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까.”
“그래, 그렇게 해.”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도 잠시간 레인을 바라보다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기겁해 세게 쳐 낼 뻔했지만 이불을 꽉 잡으며 갑작스러운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남자는 곧장 방을 나가는 대신 욕실로 가 뭔가를 부지런히 하더니 차갑게 적신 물수건을 두 장 들고 왔다. 그는 잠시 레인의 눈치를 보더니 수건 한 장으로는 레인의 머리며 얼굴에 묻은 흙을 살살 닦아 내고 다른 한 장의 수건을 레인의 머리 위에 얹었다.
“오지랖 넓어서 미안. 더위 먹은 걸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이렇게 하면 좀 낫지 않을까 싶었거든. 그럼 정말 갈게.”
조건 없는 호의를 받아 본 게 유르딘 이후로 처음이라 레인은 놀라 눈만 깜박였다. 남자는 한 번씩 웃어 주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차가운 감촉이 따끈하게 데워진 이마를 식히자 천천히 두통도 가라앉았다. 모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뒤늦게 후회했지만, 생각을 길게 이어 나가지 못하고 레인은 까무룩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별다른 통증이 없어서 안심했지만, 이후 간헐적으로 비슷한 통증이 이어졌다. 낫기는커녕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시시때때로 어지럼증과 구토, 깨질 듯한 두통이 갑작스레 찾아와서 난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언가 병에 걸린 걸까? 원체 튼튼하지 않은 몸이니 병이 하나쯤 들어선대도 이상할 건 없었다.
혼자 방 안에서 편지를 적다가 또 한 번의 강렬한 통증을 느끼고 간신히 침대로 기어 들어왔다. 기절했었는지 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난 레인은 이대로 참고 견디기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남에게 들키지 않고 숨기고 있지만, 누군가가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였다.
병에 걸린 걸 솔직하게 누군가에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자신의 모습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직 가문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은 몸이라 모아 둔 재산도 없으니 가문에 병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가문에 살려 달라고 요청하다니, 생각만 해도 우습다.
우스움을 무릅쓰고 병을 알린다면 아버지는 레인의 치료를 핑계로 아카데미를 그만두게 할 확률이 높았다. 안 그래도 레인이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좋지 않은 소문을 몰고 다니는 걸 몹시 싫어했다. 유르딘과 모종의 거래가 있었는지 볼 때마다 레인에게 주의를 주면서도 아카데미에 다니는 걸 용납하고 있었지만, 병은 자연스레 아카데미를 그만두게 할 좋은 핑곗거리였다. 저택에 돌아가면 요양을 핑계로 어디 시골에라도 끌려가 감금되듯 갇혀서 두 번 다시 자유롭게 나오지 못할 것이다. 겪지 않아도 뻔했다.
병을 알릴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대로 버텨 졸업이라도 해서 말단 관리직이라도 얻어 아이제나흐 공작가로부터 벗어나는 게 레인의 목표였다. 게다가 저택으로 가면 유르딘과 자유롭게 편지 교류를 하기도 힘들어진다. 지금도 혹시나 누군가가 편지를 뜯어볼까 봐 조심하고 있었지만, 저택에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통제당할 터다.
생각할수록 답은 나오지 않고 지칠 뿐이다. 지쳐서 고개를 돌리던 레인의 시선이 책상 위로 향했다. 쓰다 만 편지를 본 레인은 다시 책상 앞으로 향했다. 피로에 절은 눈이 제가 쓴 편지를 훑는다.
「안녕하세요, 니제스 경.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올여름은 유난히 무더웠지요. 거긴 이곳보다 서늘한 편이라 괜찮으셨겠지만, 여긴 노인들이 더위에 쓰러지기도 했다고 하니까요. 아카데미에서는 여전히 검소함의 미덕을 내세우며 절약에 힘쓰고 있어서, 냉방 마법 장치와 같은 사치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니제스 경도 일단은 아카데미 졸업생이시니 아실지 모르겠지만, 정문으로 들어와서 우측에 보이는 커다란 나무가 있지요? 그 아래에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겼어요. 나무 아래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 더위도 그늘과 함께 가려져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는 건 참으로 즐거운 일이에요.
방학 동안에 원래는 아카데미에서 지내며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그런 식으로도 더위를 견디기 힘들어질 때가 오더군요. 열흘 정도 저택에 돌아갔었어요. 아버지와 아나벨 님은 여전히 저를 좋아하시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따뜻하게 환영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피차 얼굴 보는 게 유쾌한 사이는 아니긴 하지요. 그래도 집 안은 시원하고 식사도 훌륭해서 지낼 만하더라고요.
바로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친구가 권유해 준 덕분에 남부의 별장으로 휴가를 갔습니다. 전선에 나가 계시는 니제스 경은 몇 년째 고생하는 중이실 텐데, 저 혼자 편한 게 죄송스럽네요. 그래도 경께서 왕국을 수호해 주시는 덕에 제가 항상 이렇듯 즐겁게 웃을 수 있겠지요. 그리 감사하며 휴가를 즐겼습니다. 계곡에서 친구들과 함께 수영했는데 물이 시원해서 좋았어요. 그리고 밤에는」
문장은 거기에서 끊겨 있었다. 이다음 문장을 쓰려다가 갑자기 아파서 침대로 기어들어 왔었다.
‘밤에는’,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더라. 적으려던 말을 정리하려 애썼지만 아무런 소용 없이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 편지 위의 인물은 대체 누구일까. 눈부신 학창 시절을 마음껏 누리며, 그 청춘을 마음껏 구가하고 있는 사람을 편지를 적은 당사자인 레인조차 몰랐다.
레인은 충동적으로 손에 잡힌 편지를 구기고 갈가리 찢었다. 거짓, 거짓, 거짓. 레인이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어서 편지 위에는 오로지 거짓뿐이었다.
올여름, 레인은 단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다. 해가 유난히 뜨거운 여름이 힘겨운 건 노인들뿐만 아니라 레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찾아오는 정체불명의 통증까지 겹쳐 축 늘어진 채 창밖으로 다른 학생들이 검술 수련을 하거나 편지에 쓴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즐겁게 떠드는 걸 구경만 했을 뿐이다. 카이렌은 레인이 힘들다고 배려해 줄 성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병든 짐승처럼 축 늘어져 더운 숨만 훅훅 내뱉으며 도통 반응하지 않는 레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때렸다. 덕분에 상처가 사라질 날이 없어서 공작가로 가기 위해 마차를 타러 가는 그 순간에조차 후드를 쓰고 긴 옷을 입어야만 했다.
저택에 도착한 레인은 마차에서 내려 홀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몇 시간을 땡볕 아래에서 서 있었다. 들어오고 싶으면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 기다리라는 공작 부인의 말을 무시하고 한참을 꼿꼿이 서서 버티다가 어느 순간 기절해서 눈을 떴을 때는 제대로 청소조차 하지 않은 먼지 쌓인 별채에 홀로 누워 있었다. 얼굴도 보기 싫다는 공작 부인의 명령에 따라 레인은 별채의 먼지 구덩이 좁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열흘 내내 갇혀 있었다.
간신히 저택을 나와서 아카데미로 향하는 마차에 타기도 전에 찾아온 카이렌에게 강제로 이끌려 레스터와 함께 남부의 별장으로 떠났다. 함께 탄 마차에서 카이렌은 레인을 끊임없이 희롱했고 레스터는 그런 두 사람을 짜증스레 보다가 다른 마차로 옮겨 탔다. 간신히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지쳐 버렸으나 쉴 틈도 없었다. 산속에 자리한 계곡 물은 해가 높이 떠 있을 때가 아니면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는데, 카이렌은 레인이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머리채를 잡고 그 차디찬 계곡 물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바둥대는 레인의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보며 레스터와 카이렌은 즐겁게 웃었다.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워 견딜 수 없어져서 덜덜 떨면서 카이렌의 뜨거운 체온을 거부하지 못하고 기대면 그제야 만족스레 웃었다.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쌕쌕대는 레인을 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괴로워 죽을 것 같아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더니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더욱 죽을 것같이 만들었다.
미친놈은 그렇게나 몸을 겹쳤는데도 감기 한 번 옮지 않았다. 아픈 레인을 두고 카이렌과 레스터는 각자 남은 방학 한 달 동안 후계자 수업을 받기 위해 영지로 떠났다. 짧게나마 자유를 누릴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는 끔찍한 여름이었다.
레인은 충동적으로 새 편지지를 꺼내 잔뜩 붉어진 눈으로 미친 사람처럼 편지를 휘갈겼다.
「니제스 경, 저는 사실 너무 힘들어요. 지금까지 계속 거짓말을 했어요. 제 삶은 비참할 뿐입니다. 단 한 번도 행복해 본 적이 없어요. 처맞고 짓밟히고 강간당하고,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나아요. 전,」
마구 휘갈겨 쓴 글자 위로 눈물이 떨어져 잉크가 번졌다. 레인은 후회 속에 새로 쓴 편지지마저 구겨 버렸다. 이런 걸 보내서 뭘 어쩌려고. 몇 년이나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유르딘에게 투정을 부리려 했던 자신이 너무나도 어리석게 느껴졌다. 애초에 감시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내용의 편지는 보낼 수도 없었다. 자신이 어리석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가끔은 유르딘이 미웠다. 순진하게 공작의 말을 믿고 선선히 레인의 손을 놓아 버린 그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레인은 애먼 사람을 원망한 자신을 자책했다. 나쁜 건 어머니를 죽이고 유르딘의 신의를 저버린 딜란이고, 어머니의 자리를 탐낸 아나벨이고, 레인을 괴롭힌 레스터고, 말도 안 되는 감정을 들이밀며 레인을 강간하는 카이렌이었다. 악의를 품고 행동한 자들보다, 선의를 갖고 행동한 자를 원망을 받아 줄 법하다는 이유로 원망하는 건 비열한 짓이다. 하물며 유르딘이 레인을 구했을 때 그는 지금의 레인보다도 어렸다. 유르딘은 어린 소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을 뿐이다.
안다. 그렇게 다 알면서도 여전히 원망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멀리 전장에 나가 있는 유르딘이 미웠고, 어린 시절처럼 자신의 곁에 있어 주지 않고 떠나간 유르딘이 미웠고, 자신을 봐주지 않는 유르딘이 미웠고,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 유르딘이 미웠다. 그리고 그 미움을 다 합친 것 이상으로 유르딘이 좋았다.
이제 청년이 된 레인은 어린 시절 자신이 품었던 감정의 정체를 정확히 알았다. 유르딘이 보내 준 동화책을 마치 연서처럼 수십 번 수백 번씩 곱씹어 읽었고, 재회한 날 유르딘이 보낸 눈빛과 다정한 손길을 수도 없이 떠올렸으며,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 주는 유르딘의 애정을 확인하며 기뻐하는 행동들은 하나의 감정을 향하고 있었다. 레인은 유르딘을 사랑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제대로 봐 주지 않아서 밉다니, 카이렌의 비틀린 애정과 집착을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겪어 놓고 그와 똑같이 추악한 원망부터 하는 자신이 역겨웠다. 상대가 원치 않는 애정이 얼마나 크나큰 폭력이 될 수 있는지는 레인이 잘 알았다. 자신의 감정이 유르딘에게 있어서 거북한 감정이 될 것이라 단정 지으며 레인은 투정 부리지 말자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유르딘의 사랑을 원할 정도로 욕심이 많지는 않다. 그저 유르딘의 신뢰와 애정에 부응하고 싶었다. 최소한 유르딘에게 있어서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남도록.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데 굳이 자신의 비참한 면모를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레인은 편지지를 새로 꺼내 최초의 편지를 다시 적어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유르딘 경.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눈물 젖은 얼굴로 매끄럽게 펜을 놀려 또다시 상상 속 인물이 되어 편지를 완성했다. 완성한 편지에 레인의 눈물은 흔적조차 없었다. 유르딘이 지키고 싶어 했던, 그가 지켰다고 생각할 명랑한 레인을 편지 봉투 속에 곱게 접어 넣었다.
편지를 부치고 지쳐 며칠을 줄곧 잠으로 보냈다. 낮도 밤도 분간하지 못하고 잠에 취해 있는 레인을 카이렌이 찾아왔다. 억지로 안긴 품에서는 먼지와 땀 냄새가 섞여서 났다. 카이렌의 크고 단단한 손이 레인의 등을 부드럽게 문지른다.
“모두 다 잘되고 있어.”
앞뒤 없어 영문을 모를 말이다. 뭐가 잘되고 있다는 건지는 몰라도 카이렌의 행운이 레인의 행복과 맞닿아있을 리는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런 호응을 하지 않아도 카이렌은 레인이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흥분했다. 레인의 고통에는 공감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틀에 맞춰 꺾어 놓는 것으로 만족한다. 카이렌은 허겁지겁 목마른 사람처럼 레인에게 입을 맞췄다. 감흥 없는 감정과는 다르게 수백 수천 번 겹쳐 온몸은 금세 카이렌에게 반응한다. 순식간에 옷이 뜯기듯 벗겨진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카이렌의 눈빛이 기쁨과 광기로 반짝였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내려 레인의 맨살갗에 입을 맞추며 허벅지 안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너와 나의 징표를 새기자, 레인. 영원히 함께할 수 있도록.”
증오하는 상대와 영원히 함께한다니 이보다 더 끔찍한 말이 있을까. 어색한 표정을 사랑스럽게 바라본 카이렌이 레인의 다리를 벌리고 향유를 쏟아붓고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매번 레인을 쪼개고 갈가리 찢는 침입이다. 레인은 몸의 이상 때문인지, 참담한 심정 때문인지 모를 두통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며칠간 잠을 자며 레인은 제 상태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만약 이 병이 죽을 정도의 중병일지 모른다고 해도, 레인은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마음먹었다. 아예 방치할 수는 없으니 일단은 진통제를 먹으며 버틸 생각이었다. 살고자 마음먹었지만, 병에 걸려 운명이 저를 죽음으로 떠민다면 어쩔 수 없었다. 굳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며 저항할 정도의 의지가 레인에게는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죽기 전에 유르딘은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몇 년간 이어진 전쟁은 끝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생의 마지막 소망 정도는 이루어질 수 있을 터였다.
유르딘 니제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속으로 읊조렸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유르딘을 향한 다정함이 얼굴에 미소로 그려지자, 눈앞의 카이렌은 멋대로 착각해 다정한 키스를 퍼부었다. 뱀처럼 얽혀드는 손길조차 나른하게 웃으며 받아넘겼다.
레인의 삶은 여섯 살, 어머니가 죽은 그날부터 끝을 모르고 계속해서 아래로 추락했다. 더는 떨어질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계속해서 더 아래로 떨어지기만 했다. 정체불명의 병까지 걸렸는데 여기서 더 떨어질 곳이 있을까?
증오하는 상대와 체온을 겹치며, 제 죽음은 차라리 추락이 아닌 비상일 수도 있겠다고 레인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