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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2/5)

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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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규는 지친 얼굴로 카페 안에 앉아 있었다. 딱히 더운 날씨도 아닌데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목 뒤엔 땀이 맺혀 있었다. 그는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찬물로 세수부터 했다. 그러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의 어머니도 아마 선규가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테다.

그래도 찬 음료를 마실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따뜻한 음료를 주문해 놓고 반쯤 나간 넋을 서서히 되찾았다. 긴장이 풀리자 허기가 몰려왔다. 아침 이후로 먹은 게 없으니 이제야 배고픔을 느낀 게 신기할 정도였다. 빈속에 진한 카페인이 들어간다면 내일까지 고생하게 될 게 뻔했다. 선규는 커피 한 모금으로 입안만 적신 뒤 다시 일어났다.

“루꼴라 샌드위치 따뜻하게 데워 주세요.”

“네. 준비되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규는 희미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아직 저녁까지는 시간이 많았고, 태훈과의 약속 시간까진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애완동물도 아닌데 자꾸만 무언가를 먹이려고 하는데, 내가 그렇게 안쓰럽게 생겼나 했다. 선규는 불이 들어오지 않은 휴대폰 화면으로 얼굴을 한 번 확인했지만 매일 보는 똑같은 모습이었다.

할 일이 없는데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집에 있었더라면 아버지의 동선이야 뻔하니, 적당히 피해 가면서 돌아다니면 금방 하루가 가곤 했다. 이렇게 서울에 올 때엔 회사 일과 관련된 약속, 거래처의 결혼식 등으로 하루가 전부 가는 일이 많았다. 오늘처럼 여유롭기만 한 날들은 선규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선규는 몇 번이고 휴대폰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그 사람도 자기만의 주말이 있어야지. 선규는 카페 직원이 웃으며 샌드위치를 들고 오는 걸 보곤 휴대폰을 아예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잠깐 레스토랑에 들른 태훈은 고 실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활짝 비웃었다. 약간 부어 있는 얼굴을 보아하니 어제 철진 양조에서 도착한 술을 들이부었나 보다.

“갑자기 나오게 되서 어떡하냐.”

“박 팀장이 부탁하는데 별수 있나요. 저도 지난번에 갑자기 주말 근무 바꾼 적 있고요.”

“네가 주문한 건 어땠어?”

“칼럼을 몇 페이지나 쓸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노트북 앞에 앉으면 이 생각들이 전부 날아가겠지만요.”

“술기운이랑 같이?”

“잘 알면서 놀리시긴.”

고 실장은 두 달에 한 번씩 외식 산업 관련 잡지에 주류에 대한 짧은 글을 써왔다. 그의 최근 패턴으로 보아하건대 이번엔 와인이 아닌 철진 양조의 술이 등장할 모양이었다. 태훈은 아직 한 종류밖에 마셔 보지 않아서 길게 말할 건 없었다.

“마지막에 추가한 거 있잖아요. 기억나세요? 오디주인데 탄산 들어간 거요.”

“아, 기억나. 그 종류치고 맑은 색이 나는 건 처음이라 머릿속에 콱 박혔지.”

“저도 그래서 주문했잖아요. 오는 길에는 오디 얼마 안 들어간 거 아니냐고 웃고. 그런데 그게 물건이더라고요.”

고 실장은 흐릿하던 눈에 힘을 주고 자신의 감상을 늘어놓았다. 태훈 역시 흥미로운 얼굴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사실 태훈이 그 술을 기억하는 이유는 시음용 술을 아주 조금 따라 주던 선규의 얼굴과 손이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맥주 광고를 보면 발효가 어쩌고 하면서 직원들의 손이 부드럽다고 하던데, 그래서 선규의 손이 유난히 부드러웠나.

“대표님. 듣고 있어요?”

“당연하지. 안 그래도 내가 생각 중인 게 있는데 말이야.”

“생각 다 끝나면 말해 주세요. 부담만 늘리지 마시고.”

“건방진 놈.”

태훈은 고 실장의 대답에 입술을 양쪽 끝으로 끌어 내렸다. 고 실장은 태훈이 분명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당장에라도 사무실을 나갈 것처럼 굴던 고 실장은 미적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요.”

“이 옆 매장 임대 내놓는다더라.”

“장사 잘되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래.”

“그 속사정이야 나도 모르지.”

“설마 여길 늘리려는 건 아니시죠? 지금 규모에 딱 맞는 인원으로 돌아가서 얼마나 손발이 척척 잘 맞고 있는지 아시잖아요.”

“사서 걱정하기는.”

태훈은 고 실장의 염려에 살짝 웃으며 제 생각을 늘어놓았다. 옆 매장은 규모로 봤을 때 레스토랑으론 적합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 중인 건 가벼운 와인 바였다. 너무 고가의 주류만 늘어놓은 매장이 아닌, 다양한 종류와 젊은 연령층도 부담 없이 올 수 있는 분위기의.

태훈이 생각만 하는 중이라며 말을 늘어놓았지만 고 실장의 눈빛은 조금 달랐다. 그의 눈빛은 흥미로움과 제발 그곳의 담당자는 나로 해달라는 눈빛이었다. 태훈은 우선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며 그를 달래야 했다.

고 실장이 나가자 태훈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직 선규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그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며칠 전 선규가 먼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한번 보았다. 이게 만약 종이에 쓰인 메시지였다면 벌써 그 종이가 헤졌을정도였다.

“아직 안 왔나.”

태훈은 턱을 괴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얼른 보고 싶다. 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선규의 얼굴을 시야 위에 새겼다.

첫 번째 음료는 커피, 두 번째 음료는 따뜻한 허브티였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로 고생하는 를 카페인에 푹 절였다간 몇 주 내로 또 병원을 들락거리게 될 터였다. 선규는 천천히 차를 들이켜며 그 향을 음미했다. 이름이 많이 알려진 허브들과는 조금 다른 향이었다. 사과와 박하, 레몬 향이 동시에 나는 허브였다. 잡냄새를 없애고 끝 맛을 위해 가향하면 좋겠는데. 선규는 그 허브의 이름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 넣었다.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메시지 알람 창이 상단에 떴다. 태훈의 메시지였다. 선규는 저절로 올라가려는 입매에 힘을 주며 메시지 창을 눌렀다.

「아직 서울 안 온 거야? 나 네 연락 기다리다가 방금 목 빠졌어.」

「와서 차 한 잔 마시는 중이에요.」

선규의 메시지를 금방 확인했는지, 태훈은 바로 전화를 걸어 왔다. 선규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상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어쩜 그러냐. 왜 왔는데 연락을 안 했어.

“아…… 시간이 조금 애매해서요. 그리고 요즘 계속 주말마다 저 만나느라 제대로 못 쉬시는 것 같아서요.”

선규의 긴 해명에도 태훈은 대답이 없었다. 선규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냥 아직 도착 안 했다고 할 걸 그랬나. 굳이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한 건데. 선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어. 어디에 있어?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

“올 수 있어요?”

―당연히 갈 수 있으니까 어디인지 물어봤지.

이제야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웃음기가 묻어 나왔다. 선규는 내심 안도하며 대략적인 위치와 카페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태훈은 금방 갈 수 있겠다고 대답했다. 선규는 재빨리 차를 가지고 나왔다고 말해 주었고, 태훈은 그럼 선규가 운전하는 차 좀 얻어 타보자며 택시 타고 가겠단 말을 덧붙였다. 태훈의 목소리 하나에 이렇게 금방 긴장하고 또 금방 풀릴 줄이야. 선규는 허탈함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금방 도착할 수 있다던 태훈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온 태훈은 오늘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머리를 포마드로 만져 준 모습이었다.

“왜. 너무 멋있어서 넋 놓고 본 거야?”

“음료나 주문하세요.”

“얼굴에 열이나 빼고 계세요.”

태훈은 선규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며 장난을 쳤다. 하지만 선규는 그저 장난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태훈의 말은 선규의 정곡을 찔렀고, 선규의 얼굴에선 열이 빠지긴커녕 더욱 달아올랐다. 태훈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들고 금방 자리로 돌아왔다.

선규는 그가 통화 내용을 두고 따지진 않을지,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따위를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 번 지나가 버린 일을 다시 꺼내진 않는 편이구나. 선규는 태훈의 음료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그의 성격에 대한 카테고리 항목을 늘렸다.

“오늘도 레스토랑에 간 거예요?”

“어지간한 일이 있는 게 아니면 잠깐이라도 매일 가는 편이야. 사실 나보다도 지배인들이 할 일이 많지만.”

“그렇구나.”

“병원에는 잘 다녀온 거야?”

“네. 날씨가 좋아서 산책도 좀 했어요. 과일도 챙겨 드리고.”

“착하네.”

태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선규의 손가락 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런 태훈의 말과 행동에 선규의 얼굴은 식을 줄을 몰랐다. 어쩜 이런 행동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하는지 모르겠다. 태훈은 커피를 들이켜며 입을 뻐끔거리며 숨소리로 말했다. 운전은 내가 할게. 내일 가.

호텔 안으로 들어온 태훈은 선규를 꽉 끌어안았다. 이제야 단둘만 남았다. 카페에서도, 함께 간 식당에서도 어찌나 사람이 차고 넘치는지 그의 손가락 하나 만지기 어려웠다. 선규는 그의 등을 쓸며 한 발자국씩 움직였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었어.”

“체온을 좋아하는 쪽은 태훈 씨인 거 아니에요?”

“그 앞에 네 이름이 붙는다면 맞는 말이긴 하지.”

태훈의 대답에 부끄러워진 선규는 슬며시 팔에서 힘을 풀었다. 태훈 역시 그를 살짝 놓아주며 의자 위에 앉았다. 아무래도 선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도통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단둘이 남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전히 고민 중인 얼굴이었다.

“부탁이 있는데요.”

“뭐든 말해 봐.”

“오늘은 그냥 끌어안고 자면 안 돼요?”

“……저기 말이야, 안 될 이유는 없는데 그걸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해야 해?”

“항상 그, 호텔 오면 했었고…….”

선규가 눈을 피하며 말하자 태훈은 크게 소리 내며 웃었다. 누군가의 품에서 잠들고 싶다고 생각한 걸 보면 이렇게 웃을 일은 아닌데,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태훈은 얼른 선규의 옆으로 다가와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서늘한 방 안에서 이렇게 끌어안고 밤새 있을 수 있다면 기쁜 쪽은 나지. 태훈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부비며 대답했다. 태훈은 그를 끌어안고 있느라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어떤 얼굴일지 예상이 됐다. 부끄러워하는 거야 둘째 치고 금방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겠지.

“꼭 해야 하는 게 어디 있어. 서로 하고 싶으면 섹스하는 거기야 하지만.”

“그냥 오늘은 그렇게 잠들고 싶었어요.”

“병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 없었어요. 거긴 아무 일도 없기 때문에 힘든 곳이에요.”

“…….”

“처음에 나한테 그랬었죠. 체온이 고프냐고. 맞아요. 나에게 닿는 타인의 애정 어린 체온에 금방 녹아내려요.”

선규는 태훈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얼굴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에 태훈은 굳이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선규는 낮은 목소리로 어머니가 있는 병원에 다녀오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피곤하다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태훈은 말없이 그의 머리카락 위에 입술을 내렸다.

늘 그랬지만 오늘 태훈은 거의 선규의 말 한마디에 넘어가는 도미노 조각 같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려던 선규는 문득 침대에 누워 여유롭게 대화하고 싶었는지 샤워부터 하고 싶다고 말했다. 태훈은 바로 그게 좋겠다며 선규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선규는 여전히 태훈을 끌어안고 있었다.

“같이 샤워하면 안 돼요?”

“중요한 이야기 해주는 줄 알았는데 고문이 목적이었구나?”

“그런 건 아닌데.”

“장난이야. 같이 들어가자. 전혀 안 믿기겠지만 나 의외로 인내심 강해.”

“정말 안 믿기긴 하네요. 벌써 잊으셨나 봐요.”

선규는 첫날밤을 떠올리며 태훈의 앞에서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하기야, 참지 못하고 샤워 부스 안에서 한 일을 생각한다면야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태훈은 선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셔츠를 벗었다.

선규가 티를 벗으며 뒤를 돌았다. 그 모습에 자연히 태훈의 몸엔 반응이 왔지만 오늘은 진짜 참아야만 했다. 선규의 지나온 시간과 그것들 사이에서 구겨진 채로 놓인 감정들을 듣고 싶었다. 주름 하나 없이 펴줄 순 없지만 태훈의 두 손으로 종잇장처럼 구겨진 감정들을 꾹꾹 펴서 눌러 주고 싶었다. 그가 언제 이것들을 꺼내 보든지,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도록.

“아, 따뜻하다. 얼른 이리 와.”

“그것 좀 어떻게 하고 부르세요.”

“생리적인 거라니까? 당연한 반응인데 왜 그러지. 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완전히 다른 모습인데 무슨 소리세요.”

“아닌데? 점점 고개를 들잖아.”

“자꾸 그런 말 하면서 보니까 그렇죠!”

선규가 몸을 배배 꼬아 가며 그 나름 큰 목소리로 대꾸하자 태훈은 입술을 깨물어 가며 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선규는 따뜻한 물을 틀곤 그 아래에 섰다.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는 태훈의 품도, 떨어지는 물도 따뜻하기만 해서 몸이 금방 노곤해졌다. 물론 엉덩이에 닿는 그것만 빼면.

태훈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샤워는 빨리 끝났다. 물론 태훈의 의도이기도 했다. 볼에 몇 번 입을 맞춘 걸 빼곤 스킨십도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태훈은 지난번처럼 선규의 머리를 털어 주곤 드라이어를 꺼냈다.

“오늘은 누워 있을 거니까 말려 줄게.”

“제가 할게요.”

“너는 나 해줘야지.”

선규는 저에게 묻지도 않고 할 일을 정해 놓은 태훈이 꽤 귀여웠다. 그는 부드러운 타올로 선규의 머리를 털고 손가락 끝으로 지압까지 해주며 피로가 좀 풀리느냐고 물어 왔다. 선규의 피로는 그의 품 안에서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굳이 지압해 주지 않아도 침대 위에 함께 누워 있으면 금방 풀릴 터였다. 이걸 다 말할 순 없으니 선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키 차이 때문에 서서 말리긴 어려운 태훈이 금방 의자를 끌고 왔다. 어떻게 해서든 선규의 손이 닿았으면 한다는 게 느껴졌다. 이미 어느 정도 물기가 가신 머리 위에 따뜻한 바람이 앉았다. 숱은 많지만 옆을 쳐서 짧기도 하고, 선규의 머리를 말리느라 시간이 꽤 지난 탓이었다. 태훈의 머리는 금방 말랐지만 선규는 그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던 선규는 아쉬움을 손끝에 매단 채로 거뒀다.

“기분 좋았는데. 아쉽다.”

“나중에 또 해줄게요.”

“응. 이제 가서 눕자. 내가 안아 줘야 잘 수 있다니, 어서 팔도 내주고 품도 내줘야지.”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어요.”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태훈은 선규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한 걸음씩 뗐다. 선규는 이렇게나 빨리 자신의 어깨와 몸에 태훈의 팔을 두르고 있는 게 익숙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런 놀라움도 아주 잠시였다. 그는 태훈의 단단한 팔을 붙잡고 침대 위로 향했다.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은 곧바로 서로를 향해 몸을 틀었다. 자연스레 목 뒤로 태훈의 팔을 끼워 넣은 선규는 태훈의 몸 위로 팔을 올렸다. 태훈 역시 선규의 몸을 살짝 붙잡고 있었다. 이렇게 누워 있음에도 담백한 공기가 흐를 수도 있구나. 선규는 내심 태훈이 진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들어 주려는 게 느껴져 감동했다.

“원래부터 어머니 몸이 약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신 건 다 제 탓이에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돼.”

“정말인걸요. 우리 처음 만나고 며칠 동안 연락을 못 했던 건…… 그때가 형 제사라서 그런 거였어요. 연락할 정신이 없었거든요.”

태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따스한 눈으로 선규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선규는 벌어진 가운 사이로 보이는 태훈의 살결을 보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붙잡고 괴롭히던 일련의 사건들을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선규의 입에서 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순간부터 그의 등에 놓여 있던 태훈의 손이 움직였다. 그 큰 손은 아주 느리게 선규의 등을 쓸어내리며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형이 죽은지도 모르고 누워 있던 게 며칠이나 된 건지 나중에서야 알았죠.”

“충격이 컸겠네. 네가 많이 아프니까 말해 주지 않은 걸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낫긴 하더라고요. 아무도 나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태훈은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선규의 말에 눈썹 사이가 무섭게 굳었다. 선규는 필요 이상으로 자신이 무시당하는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규는 고요 속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그때 제 병실에 찾아와서 왜 그랬느냐고 말했어요. 왜 남자를 사랑했느냐고, 왜 들켰냐고, 왜 집을 나가서 형을 그렇게 만들었냐고.”

“형을 그렇게 만든 건 선규 네가 아니야.”

“하지만 책임을 아예 피할 수도 없죠. 어머니의 말이 맞는 것도 있으니까요. 내가 그렇게 무턱대고 나가지 않았다면 형이 나를 데리러 오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하여튼 이 일 이후로 어머니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어요.”

선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뒤로 아버지에게 겪은 일을 전부 말할 때까지 선규는 눈을 뜨지 않았다. 태훈과 눈이 마주치면 그대로 펑펑 울 것만 같았다. 이런 일을 누군가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한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지겹고, 아프기만 한 이야기를 멈추라고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선규에겐 큰 위로였다. 아버지가 저지른 짓에 대해 말할 때엔 태훈의 손에 살짝 힘이 실렸지만 그는 첨언하지 않았다.

“집을 나올까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여러 차례 생각했지만 나올 수가 없었어요.”

“그 일을 많이 사랑해서?”

“아뇨. 이 일을 형이…… 많이 사랑했으니까요. 처음엔 이게 이유였어요. 그리고 몇 년 지나니까 이 일을 통해서라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목표도 생겼고요.”

“목표가 있다는 건 좋은 거지. 나도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거든.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긴 했지만 하여튼 무언가를 해내고 나면 조금은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싶었어. 또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나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도 무시 못 할 장점이었고.”

“우린 비슷한 듯 많이 다르네요. 나는 아버지 옆에 어떻게든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둘 다 자신이 원하는 거라면 맞는 길인 거지.”

“하여튼, 오늘 어머니께 다녀왔는데 병실에 들어갈 때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태훈은 이젠 괜찮다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는 그저 팔에 더 강한 힘을 실어서 선규를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선규 역시 태훈의 허리에 놓여 있던 팔에 힘을 주어 당겼다. 물론 당긴 것은 선규의 팔이었지만 끌려간 것도 선규의 몸이었다. 선규는 그게 퍽 웃겼는지 미소를 지으며 태훈의 살결에 얼굴을 묻었다. 서로의 피부 위에 뜨거운 숨이 퍼졌다. 부드럽게 흐르는 숨은 그들의 주위에 모여 온기가 떠나지 않게끔 두 사람을 품어 주었다.

눈을 뜬 선규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태훈의 얼굴을 감상했다. 두 개의 블라인드 틈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태훈의 머리맡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얼굴로 내려와 단잠을 방해하진 않았다. 선규는 그가 잠에서 깰까 봐 미동조차 않고 품에 안겨 있었다.

어젯밤의 일들이 전부 꿈은 아닐까. 선규는 늘 이런 순간을 상상해 왔다. 마음이 동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과거를 전부 털어놓는 것 말이다. 속에서 썩어 문드러진 채 피고름을 흘리는 상처를 보여 주며 위로를 얻는 이런 순간이 언젠가 자신에게도 오지 않을까 기대해 왔다.

꼭 마음속에 품어 둔 것들을 전부 고백해야만 진실한 관계가 되는 게 아니란 것쯤은 선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듣고도 누군가 자신에게 팔을 벌려 주는 것만큼 따뜻한 위로가 있을까. 선규는 어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품에 안겨 모든 것을 말했고, 그는 기꺼이 선규를 쓰다듬어 주며 위로해 주었다.

“지난번이랑 똑같네. 언제 일어났어.”

“방금 전에요. 막 일어난 차였어요.”

“우리 조금 더 자도 될 것 같아.”

“태훈 씨는 더 자요. 난 좀 더 누워 있을게요.”

태훈은 선규의 말에 웃으며 그를 좀 더 당겨 안았다. 이제 내 이름도 곧잘 부르네. 태훈은 그간 묘하게 호칭 없이 존대만 해오던 선규의 변화를 금방 눈치챘다.

선규는 정말 호칭을 부르지 않으면 헷갈릴 만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태훈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인지 무언지 알 수 없었지만 태훈은 그 점을 짚고 넘어가진 않았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도 그의 이름을 말하는 변화에 속으로만 기뻐할 뿐이었다. 태훈은 행복한 마음을 품은 채로 다시 수마에 이끌렸다.

이런 태훈의 생각까진 눈치채지 못한 선규는 그가 미소 지은 채로 잠든 걸 보며 따라 웃었다. 선규는 태훈이 생각보다 부지런하기에 다시 잠들었다고 해도 금방 눈뜰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누군가의 품 안에선 숨만 쉬고 있어도 마음이 가득 차오른다는 걸 태훈 덕분에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한 번 달콤함을 맛봤는데 이 온기가 없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선규는 고개를 저으며 태훈의 품을 파고들었다.

선규의 예상이 맞았다. 조금만 더 자겠다던 태훈은 정말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그러곤 여전히 품 안에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선규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잠들어서 심심했겠네.”

“아니에요. 이런저런 생각 하다 보니까 시간이 금방 갔어요.”

“미안. 오늘도 천천히 가도 돼?”

“네. 특별한 일이 없어서요.”

“다행이다.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어서.”

태훈은 선규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안도했다. 어젠 그의 기준에서 늦게 만난 거고, 오늘은 일찍 가야 한다면 퍽 슬펐을 것이다. 늦은 밤 내내, 선규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응어리를 하나씩 풀어냈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싶진 않았다.

태훈은 무엇보다도 오늘은 헤어지기 전까지 그의 손가락 하나라도 놓치지 않은 채 닿아 있어야겠다며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모든 순간이 즐겁기만 한 주말이었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의 일과는 지난번과 같았다. 선규는 오늘도 레스토랑에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태훈을 보내려 했지만 쉽게 꺾일 태훈이 아니었다. 사람이 많고 복작거리는 곳을 걸어가던 태훈의 걸음이 멈추었다. 한 건물을 다 쓰고 있는 모 기업의 캐릭터 숍이었다.

“들어가서 볼래?”

“여기를요? 나랑 태훈 씨가요?”

“응. 구경도 할 겸. 보니까 위에는 카페인 것 같은데.”

“이 주위에 널린 게 카페일 텐데요.”

“네가 싫다고 하니까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선규는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 그들은 형형색색으로 꾸며진 건물에 들어갔다. 속된 말로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곳이었다. 매장에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았던 선규는 의외로 열심히 판매 물품들을 구경했다. 이곳에 들어가자고 했던 태훈은 살 게 있었는지 직진뿐이었다.

언제 여길 또 와보겠어. 자신이 살 만한 건 하나도 없으리라 여겼던 선규의 손에는 볼펜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 외엔 사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들이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규는 태훈을 찾기 위해 1층을 돌아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못 찾은 건 아닌가 싶어서 다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지만 역시 없었다. 선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2층으로 향했다.

“세상에.”

태훈이 서 있는 곳은 바로 대형 인형 앞이었다. 저걸 대체 왜 저렇게까지 열심히 보고 있는 거야. 선규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입으로 가리며 태훈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다가온 선규를 보자마자 씨익 웃었다. 불길한 예감이 선규의 등을 훑었다.

“마음에 드는 캐릭터로 하나 골라. 내가 사줄게.”

“……그 말 하는 건 아니겠지 싶었는데 진짜 하네요.”

“인형이 왜? 네 거 고르고 나면 그거랑은 다른 캐릭터로 하나 사야겠어.”

“설마 태훈 씨가 가지려고요?”

“내가 가지려는 건 아닌데 지금 설마, 라는 단어에 상처받았어. 나는 인형 사면 안 돼?”

“그런 건 아니고요. 이렇게 큰 걸 사서 뭐 하겠어요. 침대맡에나 두면 모를까.”

“바로 그거지.”

태훈의 말에 선규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훈은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선규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때 나 대신 끌어안고 자라고. 선규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장난이죠? 됐어요. 전 이거 사서 나갈 거예요.”

“볼펜 두 자루? 나랑 커플 볼펜인가? 나는 두꺼운 건 잘 안 쓰지만 네가 사주면 쓸 의향이 넘치지. 고마워.”

“아, 진짜…….”

“그러지 말고 하나 골라 봐. 나도 조카도 아닌 사람한테 인형 사주는 건 처음이라 이 앞에 서 있는 게 엄청 어색하다고.”

태훈의 눈을 보아하니 방금 한 말은 진심이었다. 선규는 한숨을 푹 쉬며 이마를 짚었다. 어제 그런 이야기를 나눠서 지금 밤에 끌어안고 잘 인형을 사주겠다고 이러나? 어쩌다가 이 건물 앞을 지나가게 된 걸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말들이 선규의 머릿속에서 반짝이다가 금방 사라졌다.

태훈은 그 앞에서 선규의 머릿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선규의 성격상 태훈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갈 사람도 아닐 뿐이거니와 설사 그가 고르지 않는다면 태훈은 제 눈에 귀여워 보이는 인형을 마음대로 결제할 계획이었다. 인형이 스스로 열을 내며 선규를 품에 안아 주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한낮의 열기를 깊은 곳에 품고 있다가 밤이면 선규의 마음이 식지 않게끔 도와줄 수는 있으리라. 태훈은 괜히 진열된 인형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건들며 선규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는…… 노란 거요.”

“와, 노란 애가 절반은 되는 것 같은데 정말 뭔지 한 번에 알겠다.”

“아니, 그러니까 저거요. 앉아 있는 거.”

항상 장난을 잘 치는 태훈이었지만 오늘처럼 얄밉기는 처음이었다. 선규는 인형을 사는 게 큰일도 아닌데 괜히 민망해했다. 이걸 산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사준다는 사람이 태훈이란 점이 부끄러운 거겠지만.

하여튼 선규의 인형을 고른 뒤엔 그것과 겹치지 않는 것들 중 하나를 골라 태훈이 들고 내려갔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선규의 몸에서 진이 다 빠졌다. 이런 그의 모습과는 반대로 태훈은 낄낄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내 차를 안 가져와서 어떡해. 항상 글러브 박스에 넣고 다니는 향수까지 뿌려 줘야 완성인데.”

“1절만 하세요. 애국가도 아니고.”

“우리 어젠 그렇게 애틋했는데 이렇게 냉정해지기 있어?”

“자꾸 절 놀리니까 그렇죠.”

선규는 이제 그만 가겠다며 차로 돌아가려 했지만 태훈은 다시 한번 고집을 부렸다. 넓은 매장을 돌고 또 돌았더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다며 선규를 붙잡았다. 그가 과장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선규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렇게 헤어지면 또 잘해야 다음 주말에나 볼 텐데. 선규는 결국 차에 인형만 놓고 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한식으로 식사를 금방 끝낸 두 사람은 다시 차로 돌아왔다. 태훈이야 출근에서 자유롭다 쳐도, 선규는 아니었다. 그는 운전해서 집에 간 뒤 푹 쉬며 출근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헤어지는 게 가장 적당한 시간이기도 하고.

“나한테 줄 거 없어?”

“갑자기 뭘…… 자요, 줄게요.”

“잘 쓸게. 이제 일하면서 이것만 써야지.”

기어이 볼펜 하나를 얻어 낸 태훈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천진한 얼굴에 선규는 결국 못 말린다는 듯 웃고 말았다. 항상 택시를 타고 선규가 먼저 떠나고 나면 태훈이 레스토랑으로 갔던 모습이 바뀌었다.

오늘은 선규가 부득불 태워다 주고 싶다 하여 레스토랑 앞에서 태훈을 내려 주었다. 태훈은 인형이 들어 있는 커다란 쇼핑백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선규가 준 펜을 든 채로 인사를 했다. 흔들거리는 손 사이에 들린 펜이 자꾸만 선규의 눈에 들어왔다.

집에 도착한 선규는 조수석에 놓인 쇼핑백을 보곤 한숨을 쉬었다. 오늘이 일요일인지라 집과 양조장에 사람이 별로 없을 거란 점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무슨 쇼핑백까지 저렇게 요란한지. 선규는 그것을 챙겨서 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본다고 해서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선규는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웠다.

“친구 집에서라도 자고 오시나 봐요.”

“아― 집에 계셨어요, 김 과장님?”

“예. 미뤄질 뻔했던 납품이 오늘 들어온다고 해서 급히 왔습니다.”

“저한테 연락하지 그러셨어요. 그럼 제가 알아서 확인할 텐데.”

김 과장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는 쇼핑백을 한 번 흘끔거리다가 선규와 눈이 마주쳤다. 선규는 어색하게 웃으며 속으로 몇 번이고 왜 하필, 이라 외쳤다. 물론 김 과장이 이 일을 어디다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선규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서 특별히 들어 주는 이도 없을 테고.

“어제 병원에는 잘 다녀오셨어요?”

“그럼요. 지난번보다 좀 더 나아지신 것 같더라고요.”

“대표님은 이제 그만 사모님의 퇴원을 생각 중이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그러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시겠죠. 이미 납품 확인하신 거면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김 과장님도 들어가서 쉬세요.”

“예. 내일 뵙겠습니다.”

김 과장은 넌지시 아버지의 생각을 선규에게 알려 주었다. 그가 아니라면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선규는 알 길이 없었다. 어머니의 퇴원도 전혀 듣지 못했다. 토요일에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로 미뤄 보건대, 어머니 역시 모르는 듯이 보였다.

선규는 저답지 않게 집 안에서 신발을 살짝 끄는 소리를 내며 걸었다. 흙바닥에 신발이 마찰할 때마다 먼지가 일었다. 그는 이 작은 먼지바람 사이로 쓸쓸히 방으로 향했다. 선규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한 것은 다름 아닌 인형 꺼내기였다. 태훈의 앞에서 무슨 인형이냐고 한 것과는 달리 양손으로 인형을 꽉 쥔 채 그것과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없는 것보다 낫긴 하네.”

선규는 멍한 표정의 인형을 침대맡에 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곤 뒤를 돌아보자 그 인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때 나 대신 끌어안고 자라고.”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규는 늘 이 집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어딘가의 벽은 노려보는 것처럼, 어딘가의 기둥은 숨 뱉는 것 하나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다고. 그러다가 실수라도 하나 하면 그것을 귀신같이 안 아버지에게 혼이 나고 말 거라는 그런 모난 상상이 십수 년간 선규를 괴롭혀 왔다.

그런데 인형 하나 둔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 따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시끄럽다는 고함을 듣지 않기 위해 조용히 움직여야 된다는 강박도 없었다.

“이러고 있으니 너 진짜 그 사람…… 대신인 것 같다.”

선규는 인형을 붙잡은 채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인형 앞에서 질색을 하던 선규는 태훈의 말대로 그것을 품에 안고 침대 위에 누웠다. 잠이 오진 않았지만 꽤 포근한 기분이 드는 게 마음에 들었다.

* * *

Mulbora직 타싸X재업X교환X요게X

홀에 앉아 제 엄마와 식사를 하던 은율의 눈이 커졌다. 태훈이 내민 인형 때문이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 제 삼촌의 품에 안길 기세였다. 물론 그 앞엔 유진이 있었기에 불가능하겠지만.

“삼촌, 뽀뽀!”

“그래. 이쪽 볼에 했으니까 요쪽도.”

“웬 인형이야? 나한테 돈으로 줬으면 모를까, 직접 장난감을 사다 준 적은 없는 애가.”

“이게 인기가 좋다고 해서 지나가다가 한번 사봤어.”

“진짜 집에 가려고?”

“아버지 골프 치러 해외 나가셨다며. 지금 다녀오는 게 낫지.”

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식전 빵에 버터를 발랐다. 웬일로 태훈이 먼저 전화를 걸었나 싶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는 줄은 몰랐다. 은율은 엄마가 주는 빵을 한 입 먹고는 인형을 끌어안은 채 의자 주위를 뱅뱅 돌았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던 태훈은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야 엄마가 너한테 전화 좀 해달라고 하시니까 했지만 네가 가기 싫은데 꼭 가야 할 필요는 없어.”

“알아. 나도 필요해서 가는 거야.”

“무슨 일 있어? 혹시 레스토랑에 문제 있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어. 얼마나 잘되는데. 엄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일 터지는 건 아닐지 괜히 걱정되네. 내가 같이 가줘?”

“괜찮아. 큰일 날 것도 없으니까 걱정 마. 어차피 가는 방향이 같으니까 여기서 밥이나 먹고 가라고 연락한 것뿐이야.”

태훈의 긴 설명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걱정스럽다는 눈초리를 지우지 않았다. 역시 우리 누나야. 감이 너무 좋다니까. 태훈은 내심 놀라며 얼굴 위에 가식적인 미소를 덧입혔다. 그걸 눈치채지 못할 유진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디 이태훈이 별다른 목적 없이 그저 아들 얼굴 한번 보자는 엄마 말에 움직일 인물이던가. 유진은 곧 이 녀석이 작든 크든 폭탄 하나를 엄마에게 던지겠군, 하며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월요일은 피곤해서, 화요일은 왠지 가고 싶지 않아서. 태훈은 결국 수요일이 되어서야 본가에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아주 당연히 레스토랑에 출근하기 전, 집으로 향했다. 여차하면 급한 일이 생겨 얼른 레스토랑으로 가봐야 한다고 핑계를 대야 하니까.

태훈은 차를 세워 놓고도 한숨을 몇 번이고 쉬며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마지막으로 손등 위에 이마를 얹은 그는 어차피 할 말은 해야 하니까, 라며 차에서 내렸다. 익숙한 대문 앞에 선 태훈은 차임벨을 누르기 전 그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장 이사를 가서 네가 기어 들어와도 가족들은 이 자리에 없을 거라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태훈의 머리채를 잡았다. 태훈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몇 번 저었다. 벨을 누르며 누군지 말하기도 전에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태훈은 다시 같은 소리가 날 때까지 조심스레 대문을 밀었다.

정원은 이전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름 모를 꽃나무가 더 늘어난 듯했다. 그 옆엔 태훈의 어머니가 사랑하는 영국 장미의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이전과 같은 종인지, 다른 종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태훈아, 왔니!”

“예. 잘 지내셨어요. 이거 받으세요. 송이가 좋은 게 들어왔더라고요.”

“뭐 하러 이런 걸 사 왔어. 얼른 들어와. 시원한 것 좀 줄까?”

태훈은 제 팔과 등을 붙잡는 어머니의 손길에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눈썹에 힘을 주었다. 원래 이렇게 친근하셨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소파에 앉은 태훈은 테이블에 시선을 꽂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뭐가 바뀌었고, 뭐는 그대로고 따위의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지만.

“집이 많이 바뀌었지?”

“잘 생각이 안 나서 모르겠네요.”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 그때 우리가 그렇게 가서 그래?”

“그럴 리가요. 요즘 제 친구들은 얼굴 좋아 보인다고 난리던데요.”

태훈의 대답에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태훈을 비롯한 자식들이 어렸을 때에 혼내던 방식이었다. 이름 뒤엔 늘 설교가 따라붙곤 했다.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아나. 태훈은 옆으로 다가와 어떤 음료를 내올지 묻는 아주머니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대답했다. 빨리 나갈 거라는 태훈의 뜻을 확인한 어머니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몇 년 만에 집에 온 건데 이러기니, 정말?”

“부르신 이유가 있을 텐데요. 그것부터 설명해 주세요.”

“아들을 이유가 있어야만 불러?”

“지금까지 안 보고도 잘 사셨잖아요. 며칠 전에도 봤고요.”

어머니가 태훈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커피를 내오던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훈은 교장실에서 나오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날 그렇게 레스토랑에서 나온 게 마음에 걸려서 부른 거야. 그런데 꼭 이래야겠니?”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셨어요?”

태훈은 많은 의미를 담은 말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그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에 걸릴 일, 그렇게 많이 해놓고선 고작 며칠 전의 일 때문에 보고 싶어졌다는 건 핑계에 가까웠다. 고등학생 때에 알려졌던 것에 비해 지금은 잘만 숨기고 사니까 이 정도는 교류하며 지내도 괜찮겠다고 판단한 거겠지. 태훈은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누구 비위를 맞춰야 할지 모르겠네요.”

“무슨 뜻이니.”

“아버지는 저를 아들로선 절대 보고 싶지 않다 하시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부르시고.”

“정말 네가 싫었으면 투자해 줬겠어? 다 널 생각해서…….”

“알아요. 그거라도 먹고 떨어지라는 거잖아요.”

“태훈아!”

“어차피 집에 남아 있으면 형이랑 회사 나눠 먹어야 했잖아요. 그런데 제 발로 나가 준다니까 걱정거리 덜어 낸 거지. 제 말이 틀려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훈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태훈의 일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그에 따라 위협이 될 일이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처음엔 치를 떨고 혐오감을 드러내어 태훈을 배척했지만 살아 보니 크게 문제 될 일도 아니었다. 자신들 앞에서만 티 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됐어.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오랜만에 이렇게 보는 건데 싸워서야 쓰겠니. 점심 준비하라고 할까?”

“아뇨. 금방 일어나야 합니다. 레스토랑에 가봐야 해서요.”

“그럼 좀 여유로운 날에 오지 그랬어.”

“오늘이 그나마 제일 시간 여유가 있는 날이었어요. 그리고 드릴 말씀도 있고요.”

지금까지 날을 세우던 태훈의 목소리가 한풀 너그러워지자 어머니 역시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러곤 무슨 할 말이 있느냐며 그를 돌아보았다. 태훈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또 뺨 맞을지도 모르겠군. 태훈은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하며 어머니를 불렀다.

“저는 두 분이 원하시는 대로 해드렸어요.”

“……무슨 뜻이야.”

“눈앞에서 꺼지라고 해서 바로 나왔고, 대학 생활 내내 손 한 번 벌려 본 적 없습니다.”

“알아. 아는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느냐고.”

“저에게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네가 진짜……!”

“아버지께 제 연락처를 알려 드린 건 어디까지나 사업상으로 알려 드린 것뿐입니다. 그걸 통해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너 필요할 때에만 가족들 찾는 건 괜찮고, 내가 연락하는 건 안 된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필요 없어지니까 버리려 한 건 기억 못 하시면 곤란해요, 어머니.”

어머니는 태훈의 말에 손을 번쩍 들었다. 학생 때의 태훈은 아버지든 어머니든 이럴 때마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렸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보다가 고개를 슬쩍 치켜들었다. 달달 떨리는 팔과 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치고 싶으면 치셔도 상관없어요.”

“이태훈, 입 안 다물어!”

“사업을 확장하려 했는데, 그것보단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지분을 매입하는 게 낫겠네요. 그래야 더러운 제 얼굴 안 보고 평생 사실…….”

태훈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살갗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넓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태훈은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바로 잡았다. 눈앞의 어머니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태훈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애증이라고 말하기엔 그 ‘애’의 감정이 너무 적지 않나. 태훈은 입안을 혀로 훑으며 어머니를 향한 눈길을 거뒀다. 더러우니 꼴도 보기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러실까.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나. 태훈은 흐트러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건강히, 안녕히 계세요.”

태훈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걸핏하면 손 올리는 저 버릇은 두 분 다 여전하시군. 그는 애써 덤덤한 척을 하며 차에 올랐다. 그나저나 이렇게 한쪽 볼만 시뻘겋게 한 채로 레스토랑에 어찌 간담. 태훈은 차에 시동을 걸어 익숙한 길을 빠져나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확실히 집 주변은 이전과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약국이 있던 자리엔 카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 어차피 급한 일도 없는데 하루 쉬는 게 좋겠다. 태훈은 자신의 오피스텔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태훈은 오피스텔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약국에 들어가 쿨링 파스를 샀다. 나이가 지긋한 약사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태훈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탁 트인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오니 막혀 있던 숨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트레칭을 한 뒤 고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왜 안 오세요? 오실 시간이 지났는데 안 오셔서 전화해 볼 참이었어요.

“별일은 아니고 오늘은 안 나가려고. 급한 일 없잖아.”

―그렇긴 한데 대표님이 안 오신다고 하니 이상하네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없으니까 걱정 마. 혹시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전화하고.”

―예, 맞다! 주 대리님이 전화하셨는데.

“누구, 주…… 아. 어? 왜 전화했대?”

―철진 양조 제품들 잘 판매되고 있나 궁금해서 해보셨나 봐요. 그래서 또 한참 이야기 나눴네요.

“고 실장. 그런 전화가 왔으면 나한테 연결을 해줘야지 왜 니가 전화를 붙잡고 있어.”

태훈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점점 볼이 부어올라 짜증 나는데 선규가 먼저 전화를 건 것마저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머리에 열이 올랐다. 고 실장은 없는 대표님을 만들어 와서 전화 받게 할 순 없는 거 아니겠느냐며 항변했다. 그로서는 억울할 만했다.

고 실장은 태훈이 선규와 통화하기 위해 전화를 끊겠다고 하자 이제 막걸리 숙성실로 들어가 봐야 하기에 전화를 끊었다고 알려 주었다. 태훈은 절망했다. 양조장에 갔을 때 발효실이나 숙성실에 들어가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일을 봐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던 게 떠올랐다.

태훈과 고 실장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잠이나 자야지. 태훈은 흐느적거리며 침대로 향했다. 평소의 태훈이었다면 이런 여유 시간에 운동을 갔겠지만 누가 봐도 뺨을 얻어맞은 얼굴을 하고 피트니스 센터에 갈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었다. 그는 오지 않는 잠을 찾아다니며 한참 뒤척이다가 얕은 잠에 빠졌다.

태훈은 머리맡에서 나는 진동 소리에 팔을 뻗었다. 지금이 몇 시지. 그는 더듬더듬 손을 움직이며 흐릿한 시야 속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잤어요?

“응. 레스토랑으로 전화했었다며?”

―그…… 판매량이 어느 정도 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럴 때엔 내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고 해야지.”

태훈은 옆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이렇게 장난을 치면 당연히 선규가 아니라고 대답할 줄 알았다. 하지만 휴대폰 너머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태훈은 천천히 눈을 껌뻑이며 선규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렸다.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 하니까.

―맞아요. 듣고 싶었어요.

“나도 그랬어. 오늘은 레스토랑에 못 나가서 고 실장이랑 통화하다가 네 이야기가 나왔거든.”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엄청 아파. 지금 부서질 것 같아.”

태훈은 장난을 가득 담아 말했지만 듣는 이의 심정은 그게 아니었다. 선규가 갑자기 횡설수설하며 병원은 아니, 비상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태훈은 결국 푸스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놀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태훈의 웃음소리를 들은 선규가 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프다는 거 다 거짓말이죠? 왜 그런 장난을 쳐요.

“아냐. 아프긴 진짜 아파. 어머니가 찾으셔서 집에 갔다가 뺨 맞고 돌아왔거든.”

태훈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선규는 태훈의 이름을 한 번 부를 뿐 무어라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태훈은 끊지 말아 달라며 천천히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우선 목이라도 축이고 선규와 통화를 이어 가고 싶었다. 바로 끊는다면 이거야말로 오늘 겪은 일 중에 가장 슬픈 일이 될 테니까.

태훈이 찬물을 한 잔 마시는 동안 선규는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가. 태훈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머리 위에서 느낌표가 반짝거림을 느꼈다.

“잔뜩 부었어. 쿨링 파스도 붙이긴 했는데 가라앉기는 할까?”

―멍은 안 들겠어요? 입안이 터진 건 아니죠?

“안 그래도 조금 헐었던 부분에서 피 맛이 나긴 하는데 심각하진 않아. 입안이야 금방 낫겠지. 아참, 이번 주말에도 볼 수 있어?”

―시간이야 있긴 한데 괜찮겠어요?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야? 내가 어디 팔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아뇨. 혼자만의 시간이 좀 필요하다거나.

“나야 매일 혼자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데 밖으로 나가는 건 좀 어렵겠어.”

―그럼요?

“우리 집에 올래?”

대답이 없었다. 태훈은 너무 일렀나 생각하며 다시 물을 받았다. 찬물이 한 차례 쏟아지고 나자 정수기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태훈은 컵을 뺨에 한 번 가져다 댄 뒤 다시 물을 들이켰다.

―알겠어요. 주소 보내 주세요.

“뭐? 진짜로? 와! 나 지금 너무 기쁜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 문병이라는 셈 치고 가면 되는 거니까요. 진짜 아프기도 하고.

“그래, 맞아. 나 환자잖아. 당연히 선규가 문병 와줘야지.”

태훈은 무조건 네 말이 다 맞다고 대답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선규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태훈은 다시 슬슬 선규의 눈치를 보며 말꼬리를 늘려 가며 선규를 불렀다. 선규는 불안해하며 대답했다.

“금요일은 조금 어렵겠지?”

―아, 진짜.

“알았어, 알았어. 이제 일 끝났겠네.”

―네. 집에 들어가려고요. 저녁 꼭 챙겨 먹고 주말에 봐요.

태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태훈은 아쉬운 얼굴을 하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선규에게도 말했듯 이젠 저녁을 먹을 시간인데 낮의 일로 인해 입맛이 죄다 도망을 갔다. 태훈은 소파 위에 늘어지며 소파의 시원한 면에 뺨을 가져다 댔다. 서늘한 가죽의 표면이 미처 쿨링 패드가 감싸지 못한 부분의 열을 앗아 갔다.

“처량 맞네, 진짜.”

인연 끊고 살기를 원할 때엔 나가도 안 붙잡더니 이젠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랬을까.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포기했다고 말한 태훈도 사람이었다. 오늘 같은 일을 겪어도 아무렇지 않을 순 없었다. 이런 날을 위해서 술을 잔뜩 주문했었나 보다.

태훈은 근처의 짜장면 집에서 짬뽕과 탕수육 세트를 주문해 놓고 얼려 놓았던 물티슈를 뺨에 덧대었다. 그는 금방 도착한 음식들과 양조장에서 사 온 술들 중 가장 진한 것을 꺼내 전부 비운 뒤 다시 밤의 나라로 향했다.

* * *

고 실장은 다시 한번 태훈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확실히 한쪽이 조금 부은 것 같은데.

“왜 자꾸 그렇게 봐.”

“대표님이 여행을 간 것도 아닌데 이틀이나 안 나온 게 처음이라서 눈치 보는 중이었어요.”

“그냥 좀 쉬고 싶었어. 나 없어서 좋았을 거 아냐.”

“그렇긴 했죠.”

고 실장의 대답에 태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제 이런 식으로 말대답하는 거야 일상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내가 그렇게 편한 스타일인가, 전혀 아닌데. 태훈은 고 실장의 옆구리를 찌르는 말을 뱉으며 서류를 넘겼다. 고 실장은 목을 가다듬으며 이야기 주제를 바꿨다.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거 있잖아요. 옆 매장에 와인 바요.”

“아, 그거. 어렵겠어.”

“네? 왜요? 관심 있다고 하셨잖아요!”

“별거 아니긴 한데 이 레스토랑에서 내 지분 늘리는 데에 쓸 거야. 곧 계약 갱신일이잖아.”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투자금 회수가 안 된다면 매출 중에서 가져가는 파이를 늘려 달라고 할 텐데 그건 곤란해. 지금도 꽤 높은 편이긴 하지만.”

“그러게 왜 그런 계약을 하셨어요. 딱 봐도 엄청…….”

“불공정하지? 아들이 망해서 바닥에 설설 기며 집에 들어오길 바라는 분이었으니 어쩌겠어. 하지만 난 이 일을 하고 싶었고. 그러니 받아들일 수밖에. 그런고로, 와인 바는 조금만 미루자. 괜히 바람 넣어서 미안하다.”

태훈의 사과에 고 실장은 두 손을 저었다. 자신은 그저 일을 맡을 적임자 정도이지 그 사업의 파트너도 아닌데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었다. 고 실장은 아무래도 그 계약 속 투자자인 태훈의 아버지와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예상했다. 최근에 그의 가족이 찾아온 것도 그렇고. 고 실장이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태훈의 말로 짐작컨대 그가 가족들과는 굉장히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거야 너무도 자명했다.

“철진 양조 술들 판매량이 좋네.”

“시중에서 판매는 안 하고 접할 수 있는 곳도 드물어서 그런가 봐요. 그쪽 사측에서도 슬슬 발을 넓히려는데 잘됐죠. 요즘 같은 때에 아는 사람만 아는 좋은 제품이란 게 무슨 메리트가 있겠어요.”

고 실장의 말에 태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훈은 부은 볼에 버릇처럼 차가운 컵을 가져다 댔다. 그러다가 문득 제 앞에 아직 고 실장이 있다는 걸 인지하곤 천천히 컵을 내려놓았다. 고 실장은 결국 제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누구한테 뺨 맞기라도 하셨어요?”

“……티 많이 나?”

“조금 부어 보여서요. 맞은 게 맞다면 수요일엔 엄청났겠는데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어머니한테 나 없는 자식인 셈 치고 잘 사시라고 했다가 맞았다.”

“그래도 한 대만 때리셨네요.”

“고 실장, 너는 내 편을 들어 줘야지.”

태훈은 서류철을 덮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사정 모르는 고 실장한테 화풀이할 일은 아니지. 태훈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 실장은 방금 전 태훈의 말에 조금 찔렸는지, 평소엔 궁금해하지도 않던 태훈의 저녁 식사 따위를 물어 왔다. 태훈은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던 대로 하라는 면박만 늘어놓았다.

차에 오른 태훈은 그래도 내일은 선규를 볼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다. 이렇게나 금방 온 마음에 가득 차게 될 줄이야. 그는 웃는 낯을 하며 핸들을 돌렸다. 주말엔 아무래도 쉬지 않는 밤을 보내게 될 듯하니 근육에 바짝 힘을 넣어야 했다. 태훈은 얼른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운동을 할 생각으로 차를 몰았다. 집에서 대충 옷을 갈아입고 3층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은 알아챌 수 없을 정도의 붓기이기도 하고,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있을 일 따위 없다고 생각한 태훈은 얼른 피트니스 센터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이 정도의 얼굴을 누구 하나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으니까.

“치과라도 다녀오셨어요?”

“예? 아, 예.”

“어쩐지. 태훈 씨 잘난 얼굴 한쪽이 조금 부어서 물어봤어요.”

“선생님도 참.”

태훈은 트레이너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쓰다듬었다. 아니, 다 알잖아? 그는 몰려오는 민망함을 숨기려 애썼다. 다음 운동 기구는 혼자 해도 괜찮다며 트레이너를 보낸 태훈은 아무렇지 않은 척, 창피함을 무릅쓰고 죽어라 운동을 해댔다.

태훈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운동한 뒤엔 간단하게 셰이크 한 잔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이로써 귀찮게 움직일 필요가 없어졌다며 천천히 집으로 올라왔다. 창문을 열어 놓고 다녀온 덕분에 저녁의 서늘한 바람이 온 집 안을 채웠다.

아직은 한 번씩 봄이라는 날씨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서늘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정도였다. 여름의 더위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쯤 얼마든지 고맙게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이제 뭐 하지.”

태훈은 아직 밤이 아닌 저녁 시간임을 확인하며 소파에 편히 앉았다. TV가 있긴 하지만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다. 운동을 조금 더 하다가 올 걸 그랬나. 태훈은 온몸으로 지루함을 표현하듯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때, 1층에 손님이 왔을 때 나는 소리와 함께 인터폰이 반짝거렸다. 천천히 그 앞으로 간 태훈은 화면 안에 보이는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목소리 듣는 것도 잊은 채 문 열림 버튼부터 눌렀다. 다름 아닌 선규였다.

방금 전까진 시간이 그냥 천천히 간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아예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보다도 느렸다. 태훈은 문을 열어 놓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은 퇴근한 이들이 몰려올 시간이었다. 태훈은 자신을 믿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안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선규에게 입 맞춘다면 다른 쪽 뺨은 주먹으로 쥐어 터지게 될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고장 난 거 아냐?”

태훈은 현관 앞을 몇 번이고 왔다 갔다 움직이며 바깥의 소리에 집중하려 애썼다. 수많은 발자국 소리들 중에서 선규의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거란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이윽고 여러 개의 구두 소리와 하이힐 소리, 둔탁한 소리들이 바깥에서 흘러 들어왔다. 태훈은 가까워지는 소리를 듣자마자 얼른 현관을 열었다.

“놀래라! 다행히 집에 있었―”

태훈에게 손목을 붙잡힌 선규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입술을 마주하는 움직임에 또 놀라고 말았다. 거칠게 파고드는 입술과 혀에 정신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선규의 뒷덜미와 허리를 안은 태훈은 그간 하지 못한 키스를 지금 다 하려는 것처럼 집어삼켰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물기 어린 소리가 났다. 태훈은 살짝 굳어 있는 선규의 몸을 느리게 훑었다. 마른 허리 위에서 태훈의 두 손 끝이 살짝 겹쳐졌다. 그제야 선규는 힘주어 붙들고 있던 짐을 떨어뜨리며 태훈의 목을 끌어안았다. 부드럽게 걸치는 팔에 태훈은 미소 지으며 살짝 입술을 뗐다. 흐릿하게 풀려 있던 초점이 맞춰지며 태훈의 얼굴이 선규의 눈에 들어왔다.

“오늘 올 줄 몰랐어.”

“흐음…….”

이번엔 좀 더 야릇하게 입술이 닿았다. 태훈은 선규의 입술을 부드럽게 삼키며 두 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살짝 쥐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길은 섬유를 타고 피부 위로 전해졌다. 태훈은 선규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밀어 넣으며 자신의 중심을 선규의 다리에 비볐다. 벌써 열이 몰린 게 느껴졌다. 선규는 좀 더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끌어안았다.

입술을 간지럽히듯 빨던 태훈은 손에 힘을 주어 선규의 몸을 허벅지 위로 당겼다. 사타구니가 쓸리자 선규가 목을 울리며 얕은 소리를 냈다. 태훈은 제 목에 실리는 힘과 무게에 슬며시 웃으며 두 몸 사이에 틈이 없을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태훈은 선규의 몸을 들어 올리다시피 하며 침대로 향했다. 발끝만 살짝 닿은 선규는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분명 상처받았을 게 뻔한 태훈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에 일이 끝나자마자 달려왔다. 이렇게나 열성적으로 기뻐하며 달려드는 걸 보자니 기쁜 마음과 무언가 부끄러운 마음이 뒤섞여 열을 냈다. 그것들은 선규의 몸 안에서 뒤섞이며 태훈의 손이 닿을 때마다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선규는 가슴과 배에 여러 개의 붉은 자국을 달고 몸을 떨었다. 선규의 허벅지 뒤를 부드럽게 잡은 태훈은 손가락을 거칠게 쑤셔 대며 거친 숨을 쉬었다. 그는 혀를 내어 제 아랫입술을 핥는 와중에도 선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발기한 태훈의 성기가 허벅지 안쪽에 닿을 때마다 선규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럴 때마다 가득 맺혀 있던 눈물이 땀과 섞여 흘러내렸다. 이제 그만 넣었으면 좋겠는데. 선규는 차마 이 말을 밖으로 꺼내진 못한 채 잘게 흔들렸다.

손가락을 빼낸 태훈이 몸을 숙여 왔다. 뜨거운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 자리했다. 그것을 밀어낸 단단한 몸은 피부를 겹치게만 할 뿐, 선규의 아래에 삽입은 없었다. 선규는 재촉하듯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마주했다. 하지만 짙은 키스도 없었다. 태훈은 선규의 귓가를 핥으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이 보였다.

“왜요…….”

“엎드려 볼래?”

선규는 태훈이 원하는 게 뭔지 바로 깨달았다. 그는 입안을 살짝 씹으며 뒤돌았다. 이래선 태훈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선규가 작은 불만을 품는 사이 태훈의 손이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낯선 느낌에 선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역시 이상해. 그가 고개를 젓는 사이 태훈의 말캉한 입술이 엉덩이 위에 닿았다.

“읏…….”

“부드러워라.”

“엉덩이에 대고, 말하지 마요……!”

선규는 그 낯선 감촉에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태훈은 더욱 느꼈으면 좋겠다는 듯이 엉덩이를 핥고 입술로 살짝 깨물기를 반복했다. 가슴에 남긴 자국처럼 빨아들이자 이불을 쥐고 있던 선규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혀가 엉덩이를 핥는 것뿐인데 그 감촉이 너무도 자극적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흐음…… 뭐가 여기까지, 흣!”

태훈은 선규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듯 손가락 끝으로 훑으며 말했다. 선규는 보이지 않는 태훈의 얼굴이 충분히 예상됐다. 그는 분명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선규의 예상이 맞았다. 태훈은 입꼬리를 한껏 위로 끌어 올린 채 선규의 구멍 주위를 매만졌다.

“선규 구멍이 넣어 달라고 벌름거려.”

선규는 태훈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말은 당장 박아 대겠다는 하나의 신호였다. 태훈은 선규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든 채 잔뜩 부푼 제 성기를 거칠게 삽입했다. 선규의 구멍은 그것을 기다렸던 만큼 뿌리 끝까지 한 번에 먹어치웠다.

“아…… 선규야, 급했어? 금방 다 삼켰네.”

“읏― 아아!”

태훈은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하며 선규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태훈이 허리를 쳐올렸다. 선규는 짧게 끊기는 신음을 토해 내며 눈을 감았다. 이전엔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태훈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목덜미 뒤로 태훈이 뱉는 천박한 말들이 쏟아졌다. 이불을 붙잡고 있던 선규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그의 팔에서 힘이 풀리고, 마른 몸이 무너졌다.

“으응, 깊……어요…….

선규는 부드러운 이불 위에 이마를 부비며 뜨거운 숨을 쉬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단순한 신음이 아닌 비음까지 섞여 나오고 있었다. 좋아 죽을 것 같다는 소리처럼 들려서 선규는 아랫입술 안쪽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로 태훈의 그림자가 내려와서 선규를 응시하고 있었다.

선규는 이 열락 속에서 몰려오는 사정감을 참아 낼 힘이 없었다. 그는 무슨 말도 하지 못한 채 파정했고, 그의 정액은 이불 위에 흩뿌려졌다. 하지만 태훈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전보다 쳐올리는 힘은 강했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깊이 파고든 태훈의 성기는 한 번씩 선규의 내벽이 조여들 때마다 빨리 움직이고 싶은 걸 참는 중이었다. 이렇게까지 인내하는 이유야 당연했다. 선규의 신음이 이제껏 들어 왔던 것보다 더욱 끈적거렸기 때문이었다.

“흐응, 태훈 씨…… 아― 너무…….”

“너무, 뭐. 나한테 말해 봐.”

선규는 무얼 말하려다가 고개를 다시 돌렸다. 태훈은 천천히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선규는 이젠 울듯이 교성을 뱉고 있었다. 굵은 성기가 느리게 드나들며 선규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일깨웠다. 평소에도 충분히 깊게 들어왔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럴까.

“내가, 고팠어?”

“흐으…… 아, 읏……―”

“네 구멍이고 안이고, 엄청 조여 대고 있어. 빠져나가는 게, 아쉽다는 듯이.”

태훈은 한 번씩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선규는 고개를 푹 숙였고, 마른 목 뒤엔 뼈대가 드러났다. 태훈은 그 뼈를 입술로 빨고 핥으며 움직이는 속도를 높였다. 사정한 지 얼마 안 된 선규의 성기가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선규는 그것을 보며 떨리는 숨을 쉬었다.

모든 공간이 탁 트여 있는 태훈의 오피스텔 안은 음란한 소리로 가득 찼다. 땀에 젖은 살이 찰박이며 내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 그리고 선규의 신음까지. 그것들은 두 사람을 에워싼 채로 끝인 줄로만 알았던 흥분의 새로운 막을 열었다. 더, 더.

빠르게 쳐올리던 태훈은 선규의 뒤에서 그의 가슴께를 꽉 끌어안았다. 팔의 움직임까지 구속하는 그의 품과 팔은 모순적이게도 선규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등 뒤에 닿는 젖은 피부와 크게 뛰는 심장 소리가 선규의 박동 위에 겹쳐졌다. 태훈은 선규의 어깨 위에 입술을 문지르며 낮은 신음을 냈다. 뜨거운 숨과 함께 선규의 아래를 가득 메우고 있던 성기가 제 흔적을 안에 남겼다.

“돌아 버리겠어. 너랑 몸을 섞고 있으면 제정신이 아니게 될 것 같아.”

“이미 그런 것처럼 흐으…… 보여요.”

“그래서 싫었어?”

선규는 대답 대신 가슴 위에 놓인 태훈의 손을 잡았다. 이 행동을 긍정으로 생각하든 부정으로 생각하든 태훈의 마음이었다. 물론 그가 어떻게 해석할지야 뻔했지만. 선규는 후희에 몸을 살짝 떨었다. 태훈은 그런 선규를 품에 안은 채 조심스레 옆으로 누웠다.

태훈의 성기가 빠져나가자 선규의 가쁜 숨이 점차 잦아들었다. 태훈은 입술로 간지럽히듯 선규의 온 얼굴에 입 맞췄다. 선규는 그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에 손을 뻗어 천천히 앞으로 넘어오는 태훈의 머리를 감쌌다.

귀여우리만치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던 태훈의 입술은 선규의 입술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방금 전은 지금을 위한 순간이었던 것처럼 뜨겁게 들러붙은 입술은 짙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선규의 고개가 살짝 꺾이자 태훈은 좀 더 깊게 파고들었다. 태훈의 몸은 이미 선규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그는 선규의 젖은 엉덩이를 받치며 천천히 피부를 음미했다.

“으음…….”

목을 작게 울리던 선규의 신음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사라졌다. 태훈은 방금 전의 움직임과는 조금 다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마주 닿은 두 개의 성기가 마찰할 때마다 두 사람의 신음과 손길이 짙어졌다.

“밤새 울리고 싶어.”

“하아― 잠깐만……!”

선규의 작은 외침은 그대로 묻혔다. 목을 입술로 씹어 대던 태훈은 다시 선규에게 키스했다. 거친 움직임과 성기에 닿는 감촉에 선규는 태훈의 등을 쓸었다. 태훈은 선규의 다리를 더 벌리며 부푼 성기를 엉덩이 골에 대고 비볐다. 그사이 흘러나온 정액은 선규의 살에 들러붙어 질척이고 있었다. 태훈은 손끝에 닿는 감촉에 속으로 욕을 삼키며 빠르게 삽입했다.

“아아― 흑, 태훈 씨, 어떡, 해……!”

“내가 좆을 뺀, 게 아쉬웠어?”

“으흑―!”

선규의 교성이 한층 커졌다. 태훈은 평소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선규를 쾌락에 젖게 만들었다. 선규의 성기가 다시 한번 정액을 토해 내자 태훈의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 선규는 한쪽 팔을 뻗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태훈의 목덜미가 선규의 손에 닿았다.

선규는 한눈에 봐도 태훈이 어느 쪽 뺨을 맞았는지 알 수 있었다. 선규는 태훈의 뺨을 쓸며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쉼 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태훈의 볼을 쓸어내리는 그 손가락 끝에는 약간의 서글픔과 아픔, 그리고 따스함이 서려 있었다. 태훈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야하게 핥고, 빨았다.

선규는 이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으려 하지 않았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깊은 쾌락의 늪 속에서 신음을 참는 데에 힘을 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참지 않는 편을 태훈이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선규는 쉼 없이 흐르는 신음 사이로 몇 번이고 태훈의 이름을 불렀다.

“너 진짜…… 내 이름 부르면서, 자꾸 조이면 어떡해.”

“내가 언, 제 그랬―어요, 하윽― ”

태훈은 신음하는 와중에도 대꾸하는 선규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짐짓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과 하반신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선규는 정말 모르고 있는 듯했으나 태훈의 말은 사실이었다. 태훈의 이름을 부를 때면 엉덩이가 움찔거리며 입구로 태훈의 성기를 오물거렸다. 이성이고 뭐고, 다 놓고 달려들고 싶을 정도로 야한 모습이었다.

태훈은 선이 다 드러난 선규의 목에 이를 박고 싶었지만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선규의 가슴을 한 손으로 만지며 유두를 손으로 굴렸다. 자극을 받는 쪽은 선규인데, 태훈의 손가락 끝이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태훈은 다시 한번 강하게 성기를 박아 넣으며 깊은 곳에 사정했다.

“이리…… 와요.”

“응. 꽉 안아 줄게.”

“오늘은 내가, 안아 줄게요.”

태훈은 땀이 맺혀 반짝이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쳐 내곤 선규의 옆에 누웠다. 그는 선규의 허리를 받치며 움직이기 쉽게끔 도왔다. 선규는 다시 태훈의 뺨을 매만졌다. 눅눅한 손길에는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태훈은 아까의 욕망 어린 행동과는 다르게 그 손을 살며시 쥐곤 손등과 손바닥, 손목 안쪽에 입 맞췄다.

“얼른 오고 싶었어요.”

“고마워, 그 정도로 생각해 줘서.”

“그렇게 고마워할 건 아닌데…….”

“아냐. 나 진짜 기뻤거든. 급한 마음에 인터폰 눌렀는데 네 목소리를 못 들은 게 그제야 생각난 거야.”

“그게 중요해요?”

선규는 흐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태훈은 강아지처럼 머리카락을 부비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우리 집에 처음 오는 날, 내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대답하는 그 목소리를 못 들은 게 너무 아쉽다고.”

“다음에 올 때엔 꼭 물어봐 줘요. 처음인 것처럼 대답할게요.”

“그러지 않아도 돼. 언제 어떻게 대답하든 다 좋을 거야.”

태훈은 품으로 선규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선규는 태훈을 위로하려고 온 건데 어째 자신이 더 위로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랬나. 선규는 그의 가슴 위에 이마를 살짝 부비며 태훈의 곧은 등을 당겨 안았다. 태훈은 선규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방금 전에 거칠게 움직인 건 전부 잊은 듯, 귀하게 여기는 행동에 선규는 소리 없이 웃었다.

“씻겨 줄까?”

“조금만 쉬고 내가 씻을게요.”

선규는 피하려던 게 아니라 정말 괜찮았기 때문에 태훈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입꼬리를 살짝 내린 채 선규만 보고 있는 태훈의 표정을 보자니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 선규가 알겠다고 짧게 대답하자마자 태훈은 방금 격한 섹스를 한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는 움직임과 힘으로 선규를 안아 올렸다. 선규는 발가벗은 채 이렇게 욕실로 향하는 게 창피한 나머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태훈은 그가 보지 못하는 사이 웃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걸어갔다.

함께 샤워를 하는 거야 좋긴 하지만 그만큼 커다란 고역이었다. 태훈은 선규의 안에 싸지른 것들을 긁어내며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또다시 선규를 품에 안고 욕실을 빠져나온 태훈은 엉망인 침대를 확인하곤 그를 소파에 뉘였다.

“혹시 안 입는 옷 있으면 그거라도 주세요.”

“자러 오는 거면서 옷도 안 가지고 왔어? 나 유혹하려고?”

“그걸 집에서 다 챙겨 나오면 너무…… 이상하잖아요. 오늘은 직원도 많아서 마주치는 사람도 꽤 있었는데.”

“너무 본격적이라 이거지. 알았어. 그런데 속옷도 안 가지고 온 거야?”

“네. 어쩌다 보니 먹을 것만 챙겨서 나오는 바람에요. 원래 밤에 사러 나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 밤에 하는 거야 뻔하니까 여유롭게 사러 가려고 했구나.”

태훈의 말에 선규는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그는 장난으로 말한 것일지 모르겠으나 선규는 정말 태훈의 말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훈이 자신을 그냥 재우지 않을 테니 그전에 마트라도 다녀올 계획이었다. 태훈은 이불과 패드, 매트리스 커버를 들고 소파 옆을 지나가다가 선규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세탁기에 세탁물들과 혹시 몰라 선규의 옷을 전부 넣은 태훈은 건조까지 한 번에 눌러 놓았다. 이 시간에 빨래만 돌려서 널어 놔봤자 이슬만 맞고 마르지 않을 거야 뻔했다. 선규도 뽀송하게 마른 옷을 좋아할 거야 당연했다. 세탁실에서 돌아오는 동안 선규가 입을 만한 티셔츠와 반바지를 찾아낸 태훈의 얼굴 위로 다시 한번 음흉한 미소가 지나갔다.

“자, 이거 입어. 긴 바지는 마땅한 게 없어.”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속옷은요?”

“새 거가 없어. 어차피 우리 둘이 있는데 하룻밤 안 입는다고 큰일 안 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세탁기 건조까지 돌려 놨거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일찍 잠들지 않으면 입고 잘 수 있어.”

선규는 태훈의 말을 듣자마자 그가 장난을 치는 거라 여겼다. 그래서 당연히 조곤조곤 따지려 들었지만 세탁기를 건조까지 돌렸다고 말하는 얼굴 위에서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사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단 얼굴에 선규는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표정마저도 태훈의 연기란 걸 모른 채 말이다.

“어쩔 수 없죠. 잘 입을게요. 고마워요.”

“별걸 다. 햄버거 왔나 보다.”

“맞다. 현관에 놓고 온 거요. 별건 아니고 집에서 가져온 건데 안 파는 술이랑 안줏거리예요.”

“그래? 햄버거 먹고 한 입씩만 먹어 볼까.”

태훈은 옷을 다 입은 선규를 한 번 돌아보곤 현관을 열었다. 금방 계산을 마친 태훈은 식탁 위에 음식을 먼저 펼쳐 놓은 뒤 선규가 가져온 것들을 확인했다. 천천히 앞으로 다가온 선규가 오랫동안 집에서 일해 온 아주머니가 담갔다는 술에 대해서 설명해 주며 의자 위에 앉았다.

“이건 올갱이 묵이라는 거예요. 옛날에는 이걸 따로 재배하는 게 어려워서 먹기 힘들었대요. 지금은 수익성 문제로 특별히 키우진 않지만.”

“그래? 키우기가 꽤 힘든가 봐.”

“논바닥에서 자라는데 알맹이가 너무 작아서 다듬기가 어렵대요. 그래서 우리도 한 번씩 별미로만 해먹어요.”

“그런 귀한 걸 가져오다니, 고마워. 이건 뭐야?”

“호박 술이요. 색깔 예쁘죠?”

“완전 처음 들어 봤어. 맛이나 향 때문에 호박 조각을 조금 넣는다는 이야기는 몇 번 들어 봤지만.”

“냉장고에 뒀다가 자기 전에 한 잔 마셔 봐요.”

선규의 말에 태훈은 그것들을 전부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두 사람의 늦은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주위가 죄다 오피스텔 건물뿐인지라 밤에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배달이 꽤 늦긴 했다. 하지만 그만큼 따뜻해서 먹기 나쁘진 않았다. 선규는 햄버거 먹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는 말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태훈은 내심 놀랐지만 그의 집 위치를 생각해 볼 때 배달이 어려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소파로 향했다. 선규도 TV 보는 걸 즐기진 않는다는 말에 가벼운 대화들이 오갔다. 물론 이것들은 태훈의 가슴속에 맺힌 것들을 슬슬 풀어 놓기 위한 예열에 불과했다. 태훈은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말이 없는 선규가 꽤 노력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하여튼 이번 일로 와인 바는 어렵게 됐어.”

“고 실장님이 아쉬워하셨겠네요.”

“그렇긴 한데……. 걔도 내가 가족들이랑 가깝지 않은 거 알아서 괜찮다고 하더라. 애초에 아버지가 아들 사업에 이런 투자 계약서를 쓰는 게 어디 있냐는 뉘앙스로도 말하고.”

“태훈 씨도 상심했겠어요.”

“나야 뭐. 더 편히 살려면 이 길밖에 없으니까. 하여튼 이런저런 구실로 너랑 일 때문에라도 더 자주 보려고 했는데 이게 뭐람.”

태훈의 마지막 말을 듣고 나니 선규의 마음속에도 아쉬움이 피어났다. 거기까진 생각도 못 했는데 태훈은 어떻게 하면 잠깐이라도 얼굴을 더 보고, 통화 한 번을 더 할지만 연구하는 듯했다. 선규가 아쉬움 반, 미안함 반을 섞어 웃자 태훈은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일어났다.

“이제 그 술 시원해졌겠다. 잠깐 냉동실에 넣었다가 마시면 되려나?”

“네. 배부르니까 올갱이 묵은 내일 먹어요.”

“알겠어. 그쪽으로 가져갈게.”

태훈은 두꺼운 유리잔에 술을 담으며 내심 놀랐다. 철진 양조에 탁주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누가 봐도 색이 곱다, 싶은 것들은 죄다 맑고 투명한 빛을 내고 있었다. 색 때문에라도 한번 사보고 싶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약간의 금빛이 도는 아이스 와인과도 다르고 양주들과도 전혀 다른 빛깔이었다.

배가 부르니 술 한 잔으로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에 술이 가득 든 유리잔만 들고 선규의 옆으로 다가갔다. 선규는 잔을 받아 들자마자 자신의 앞에 살짝 기울이는 태훈의 잔에 건배를 했다. 이런 날이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이야. 첫날엔 차 한 잔 마시는 것마저 어색해서 죽을 판이었는데 말이다.

“선규야. 너는 하고 싶은 게 뭐야?”

“저요?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내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한 것 같은데 너한테 미래를 들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

태훈의 무거운 시선이 선규의 얼굴 위에 앉았다. 선규는 고민하는 듯 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선규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태훈이 질려하진 않을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훈은 열릴 듯 말 듯 들썩이는 선규의 입술만 볼 뿐 재촉하지 않았다.

“전에 잠깐 이야기했었던 거 같은데, 제가 만든 술이 정식 판매 품목이 되는 거예요. 그러려면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 하니까요.”

“나는 네가 이 일을 그렇게 사랑하는지 몰랐어.”

“사랑이라. 저도 모르겠어요.”

선규는 무릎을 모아 앉았다. 한 팔로 다리를 안으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켠 선규의 눈에 슬픔이 가득 찼다. 태훈은 그가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양조업에 매달리는지 일주일 전에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형이 이 일을 사랑해서. 선규가 저 꿈을 품고 있는 것도 오로지 형을 위한 것이라면 조금 슬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태훈의 슬픈 예감은 엇나가지 않았다.

“형이 늘 꿈꿔 오던 거거든요. 물론 형이 레시피 같은 걸 남겨 준 건 아니었지만요. 그때엔 형도 본격적으로 일을 돕기 시작한 때라서요.”

“하긴, 지금의 너는 형보다 더 커버렸으니까.”

“응, 그렇네요. 나는 더 큰…… 아니, 나이만 더 먹은 어른이 됐고 그만큼 일도 많이 했고.”

태훈은 선규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술잔을 꺾었다. 달고 향이 좋은 술이 목을 적셨지만 어설프게 떠다니는 마음을 적시진 못했다. 선규는 무릎 위에 한쪽 볼을 올리곤 태훈을 돌아보았다. 그는 슬픔을 담은 눈으로 선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팔고 싶다는 술의 레시피는 내가 개발한 거니까. 온전히 내 거인 거예요.”

“어떤 건지 물어봐도 돼?”

“안 가르쳐 줄 거예요.”

“너무하다. 힌트라도 좀 줘. 응?”

태훈은 소파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고 선규의 몸과 다리를 한 번에 끌어안았다.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선규의 한쪽 볼과 입술 위에 콧대를 부비자 선규가 술 내음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태훈은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선규의 입술을 핥고 턱에 입을 맞추며 계속 알려 달라고 말했다. 선규는 잠시 고민하다가 태훈이 입술을 핥을 때 살짝 내밀며 키스에 응했다.

“알려 줄 순 없지만 완성되면 가장 먼저 맛보게 해줄게요.”

“정말? 너만 마셔 보고 그다음은 나인 거지?”

“네. 이제 다 됐다는 생각이 들면 레스토랑이든 오피스텔이든 찾아올게요.”

“약속해 줘.”

태훈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선규는 그 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약속을 받아 낸 태훈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는지 얽힌 손가락 위에 입 맞추곤 다시 선규를 풀어 주었다. 방금 전까지 품어 주던 온기가 사라지자 선규는 몸을 살짝 떨었다.

술잔을 다 비운 뒤, 태훈은 다음 주엔 상운이 클라이언트와 함께 올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 번씩 얄밉고 모자란 짓을 하긴 해도 착한 녀석이라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엔 꼭 레스토랑을 찾는단 태훈의 설명에 선규는 설핏 웃었다. 서로에게 한 번씩 모나게 굴어도 꽤 친하다는 걸 몇 마디의 대화만 들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술기운과 피로가 뒤섞여 선규의 몸에 들러붙자 태훈은 그와 함께 보송한 새 침구 위에 누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선 얼굴에 미소를 띤 채로 잠들었다.

새벽녘, 잠시 잠에서 깬 선규는 온 집이 어둠에 차 있는 것을 보곤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하지만 반짝거리고 있는 태훈의 눈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 안 자고 있어요?”

“나도 방금 전에 깼어. 자다가 꼭 한두 번씩 깨는 편이라서.”

“나 때문에 깬 줄 알았어요.”

“너는 미동도 않고 자던데. 오히려 내가 너 깨운 건 아닌가 싶어.”

선규는 고개를 저었다. 자다가 깨는 거야 늘 있던 일이었다. 태훈은 따뜻하게 데워진 손으로 선규의 등을 끌어당겼다. 품에 갇히다시피 한 선규는 입가에 웃음을 걸친 채로 안겼다. 그런데 어째 태훈의 손길이 묘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게.

“뭐 해요, 진짜.”

“이 새벽에 네가 내 품부터 찾아드는데 내가 무슨 수로 참아.”

“도대체 지금 어느 포인트에서 꽂힌 건지 난 이해가 읏…….”

이러려고 속옷 안 준 게 분명해. 선규는 세탁기 안에 보송하게 말라 있을 제 속옷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태훈을 탓했다. 태훈은 한 팔로 제 가슴 위에 올라와 있던 선규의 두 팔까지 끌어안으며 속박했다.

그는 벗기기 쉬운 트레이닝팬츠를 엉덩이만 끌어내린 채 한 손으로 간지럽히듯 주물렀다. 손가락이 은밀한 곳 근처를 스치듯 지나갈 때마다 선규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딱딱한 태훈의 가슴이 손끝에 느껴졌다. 선규는 모든 것을 포기하듯 그의 가슴을 쓸었다. 길고 뜨거웠던 저녁에 이은 새벽의 시작이었다.

늦게 눈을 뜬 선규는 천근만근 같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어제 저녁부터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전부 꿈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비명을 지르는 허리 근육과 삐그덕거리는 골반의 느낌으로 보아 절대 꿈일 수는 없겠다고 생각을 고치긴 했지만.

“잘 잤어?”

“그럴 리가요.”

“냉정하긴.”

태훈은 부루퉁한 얼굴로 대답했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불퉁한 대답을 뱉는 선규는 꼭 처음 만난 날 같았다. 그가 약간의 짜증을 내는 이유까지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웃기기도 했고. 태훈은 이미 아침을 차려 놓았다며 선규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선규가 입술을 깨물며 바로 앉자 자신이 새벽에 좀 심하긴 했단 죄책감이 아주 조금, 정말 조금 일었다.

“이거 먹고 조금만 더 쉬었다가 가. 이젠 진짜 안 그럴게.”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분명 새벽에도 한 번만 하고 그만할 것처럼 말해 놓고선.”

“진짜야. 이번엔 믿어 줘. 나에 대한 믿음이 그 정도밖에 안 돼?”

“다른 건 믿어도 잠자리에 대한 건 안 믿어요.”

선규의 말에 태훈은 결국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식탁 앞에 앉은 선규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곱씹다가 얼굴을 붉혔다. 다른 건 믿어도, 라. 누가 들으면 알고 지낸 지 몇 년은 되는 줄 알겠다. 물론 몇 년을 알고 지냈다고 해서 다 믿고 사는 건 아니지만. 태훈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의에서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선 절대 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단 태훈의 성격이 꽤 좋은 결과를 몰고 왔다.

식사를 시작한 선규는 생각보다 훨씬 좋은 음식 맛에 깜짝 놀랐다. 방금 끓인 게 분명해 보이는 국은 간이 아주 잘 맞았고 다른 반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밥은 선규가 딱 좋아하는 수준의 된밥이었다.

“근처 반찬 가게의 맛이 꽤 괜찮은가 봐요. 국은 직접 끓이신 것 같지만.”

“반찬 가게? 글쎄. 많긴 하던데 가본 적이 없어서. 국이 괜찮다니 다행이다.”

“가본 적이 없어요? 그럼 마트에서 샀나 봐요.”

“내가 만든 건데. 자취한 지 10년 넘어가는 사람의 요리 실력을 뭘로 보는 거야.”

“진짜요? 이걸 다?”

“게다가 내 직업이 뭐야, 레스토랑 대표잖아. 물론 이 요리들이랑은 아무 상관 없지만.”

선규는 태훈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찬들과 그의 얼굴을 몇 번이고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 행동에 태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요리 비법까지 줄줄 읊어야 했다. 그럼에도 믿을 수 없다는 선규의 표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건 단순히 이게 당신 요리라니 말도 안 돼, 가 아니었다. 이렇게 요리를 잘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인지라 딱히 기분이 나쁠 이유 따윈 없었다.

“입맛이 굉장히 까다로울 줄 알았어요.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게 쉬운 건 아니니까.”

“그렇긴 한데 밖에서 사 먹는 거 비싸잖아. 나 대학 때엔 진짜 엄청 엄청 쪼들렸거든. 나중에 더 괜찮은 방으로 옮기면 거기서 요리도 해 먹어야지, 하는 상상을 했지.”

“그…… 정도였어요?”

“몇 년은 그랬어. 꼭 그렇게까지 살진 않아도 되는데 아무래도 돈을 모아야 한다는 강박이 심해서 그랬나 봐. 그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의외야?”

“조금은요. 아까는 레스토랑이랑 상관없다고 했지만 요리를 잘하니까 맛도 더 잘 아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건 아닌 것 같아. 나 의외로 먹는 데엔 이 맛 저 맛 안 가리거든. 주는 대로 다 잘 먹어.”

그거야 자기 요리가 맛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선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식사를 이어 갔다. 어쩐지, 태훈이 직접 만든 요리들이라고 생각하니 더 맛있게 느껴졌다. 선규가 제 생각보다 식사를 잘 하자 태훈의 기분이 좋아진 거야 당연했다. 천천히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벌써 오후가 된 시간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태훈이 이불을 잘 개어 놓는 동안 선규는 어제 저녁에 이 집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곳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사실 구경이랄 것도 없었다. 집엔 벽이 거의 없었으니까.

“이런 집 구조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오피스텔은 이렇게 많이 고쳐. 별로야?”

“아뇨, 태훈 씨 마음에 들면 그걸로 된 거죠. 욕실 말고는 벽이 없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요.”

“창마다 블라인드 달려 있잖아. 자기 전에 그거 하나씩 내리면 오늘 하루도 다 끝났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자기 전에 바깥 구경도 한 번 더 하고.”

선규는 태훈의 말에 천천히 거실 앞의 창으로 향했다. 다른 곳의 창에 비해 훨씬 큰 창밖으로 높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가는 자그마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선규는 늘 타인의 존재가 너무 크고 버겁다고 생각해 왔다. 이렇게 멀리서 보면 다 별것 아닌데.

이불을 다 개켜 놓은 태훈은 장난스런 얼굴을 하곤 선규의 옆으로 다가왔다. 선물이라도 되는 양 선규의 속옷을 건네며 웃자 선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뽀뽀 정도는 괜찮겠지. 태훈은 가볍게 입술을 마주 대곤 몇 번 입을 맞췄다. 역시 뽀뽀는 괜찮았나 보다.

“저녁 전에는 가봐야겠어요.”

“하루만 더 자고 가라고 하면 화내겠지?”

“아침에만 해도 조금 더 쉬었다가 가라면서요.”

“아침부터 내일 가라고 하면 당장 가버릴 것 같아서 그랬지.”

선규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태훈은 그의 어깨를 살짝 끌어안으며 다가갔다. 내일은 집에서 푹 쉬게끔 아침 일찍 데려다줄게. 너 부담스럽지 않게 조금 먼 곳에 내려 줄게. 선규는 계속되는 태훈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는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알겠다는 대답을 들은 태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크게 표현했다간 민망해할 선규를 위해 잘 생각했다는 말 한마디로 기쁨 표현을 끝내야 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고 해서 대단히 큰일을 하진 않았다. 선규는 태훈과 함께 그의 노트북에 담긴 사진을 구경했다. 레스토랑 초반의 분위기와 각각의 메뉴들이 담긴 사진, 거기에 붙어 있는 설명들, 어울리는 주류와 음료. 모든 파일들에 이 사업을 향한 그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제와는 다른 저녁이 찾아왔고, 태훈의 약속대로 조용하지만 따뜻한 시간이 소리 없이 흘러갔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선규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태훈은 한 번씩 선규의 얼굴을 흘끔거렸지만 당장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태훈은 선규의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선규는 살짝 웃으며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태훈과 오랜 시간 동안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외로움이 배가 되었다.

“저기서 내릴게요.”

“걸어가기 좀 멀지 않아? 조금만 더 가자. 진짜 조금만.”

“날씨가 좋아서 천천히 걸어가려고요. 뒤로 넘어가면 바로 공장 후문이거든요.”

“일요일인데 공장에 가려고?”

“공장 사무실에 잠깐 가보려고요. 길게 안 걸리니까 괜찮아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또 보자.”

잔뜩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말만큼은 괜찮은 척하느라 애쓰긴. 선규는 살짝 웃으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 소리가 나자 태훈은 여적 잡고 있던 선규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선규는 당황스런 눈으로 태훈의 눈을 마주했다.

태훈은 늘 짓고 있던 장난 어린 표정이 아닌 진지한 얼굴이었다. 선규는 주위를 몇 번이고 둘러보다가 얼른 태훈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훈의 손에서 힘이 빠질 줄을 몰랐다. 선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고집을 누가 꺾을 수 있으랴.

선규는 다시 태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번엔 태훈의 입술 위에 선규의 입술이 여러 차례 닿았다가 떨어졌다. 짧은 키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태훈은 이런 선규의 행동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손에서 힘을 뺐다.

“진짜 안녕.”

“운전 조심히 잘 들어가요.”

“응. 집에 가면 메시지 보낼게.”

태훈은 점점 작아지는 선규의 뒷모습을 계속 응시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다 보니 헤어짐을 견디기 더 어렵네.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선규에게 중요한 약속이 없어야만 토요일에나 볼 수 있을 텐데. 더욱 인상이 구겨질 즈음 갑자기 선규가 뒤를 돌았다. 태훈이 갔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태훈은 방금 전까지 인상을 안 쓰고 있었던 사람처럼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었다. 그냥 갈 줄 알았던 선규도 아주 자그마하게 손을 딱 한 번, 정말 딱 한 번 흔들곤 다시 걸어갔다. 선규가 골목 속으로 사라지자 태훈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자꾸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데 이를 어쩌지. 토요일까지 무슨 수로 기다리지. 태훈은 잔머리를 어떻게든 굴려 볼 생각만 하며 다시 서울로 향했다.

제2장

-2-

김 과장과 함께 이번 달과 다음 달에 쓸 찹쌀의 재고를 확인하고 돌아온 선규는 통화를 하며 자신에게 손짓하는 직원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문제가 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줄곧 웃는 낯으로 전화를 끊은 직원은 손님이 올 것 같다며 밝은 얼굴로 말했다.

“손님이요? 누가 오시는 건가요?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알려야겠어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번에 계약한 세시 셀라 대표님이 오신대요. 고 실장님이랑 같아요.”

“그……렇구나. 알겠어요.”

선규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곤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는 주위를 몇 번 둘러보며 직원이 보일 때마다 가볍게 묵례를 했다. 그렇게 결국 집 근처까지 오고 말았다. 태훈에게 전화를 건 선규는 그가 얼른 받기만을 기다렸다.

―여보세요. 해가 떠 있을 때 통화하는 건 오랜만이네.

“태훈 씨.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여길 온다뇨.”

―직원분께 못 들었어? 입소문에 SNS 타고 홍보가 꽤 된 모양이야.

“그거랑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 먼 곳까지…….”

―맞아. 별 상관없지. 하지만 주중에 네 얼굴 보려면 이 방법밖에 없잖아.

태훈의 말에 선규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일요일 아침에 헤어져 놓고 그날 밤에도 한참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다음 날에는 메시지론 부족했는지 전화를 했고, 어젠 그 통화가 꽤 길기까지 했다. 상운이 다녀간 이야기를 듣느라 길어진 탓이었다.

금방 가니까 이따 보자는 태훈의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선규는 그 자리에 서서 이미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잠시 주시했다. 이렇게 거침없이 다 표현하는 거에 비해서 나는 맨날 뭐든 받으며 감사하다는 말만 하네. 선규는 미안한 마음을 품고 조심스레 사무실로 돌아왔다.

모니터 속의 숫자들과 날짜는 선규의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몇 번이고 부산스레 시간을 확인했고 그답지 않은 행동에 옆에 앉은 직원들은 무슨 일이 있나, 속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손님이 도착했다는 소리에 선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께 가셨다는 말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태훈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기쁘지만 불편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원치 않았다. 선규의 과거와 현재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곤 해도 그의 눈앞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모르니까.

“안 가보셔도 될까요?”

“저요? 제가 굳이…… 직원들도 많은걸요.”

“지난번에 보니 이야기도 많이 나누시고, 두 분이 따로 계시길래 물어봤습니다.”

“예? 아, 그게…… 산책할 때 말동무가 필요하다고 하셔서요.”

“저는 두 분이 구면인 줄 알았네요. 주 대리답지 않게 표정이 많이 풀어진 것 같아서요.”

김 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선규는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괜히 찔려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렇게나 조심한다고 했는데 타인의 눈에 띄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김 과장의 눈에. 선규는 어색하게 웃으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다음 주에 오는 중국 바이어에게 소개할 주류들을 정리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당장 나가서 태훈을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그 옆엔 당연히 아버지가 있을 터였다. 선규는 괜히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다시 집중하려 애썼다. 이번엔 휴대폰이 그의 집중을 방해했다. 메시지가 올 때마다 하염없이 반짝거렸다. 여러 차례 시선을 빼앗긴 선규는 그것을 뒤집어 놓았다.

한편 잠시 밖으로 나와 있던 태훈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구실을 만들어 내는 데엔 태훈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주 대표에게 철진 양조의 술과 함께 가장 잘나가는 메뉴들을 맛보게 해드리고 싶다는 핑계를 댔다. 살갑게 구는 태훈에겐 와도 좋다는 대답만이 나왔다. 그래서 여길 오면 선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통화하는 목소리에서도 약간 상기한 게 느껴졌는데!

“주 대표님, 입맛에는 좀 맞으십니까?”

“아주 맛이 좋습니다. 나중에 서울에 갈 일이 생기면 레스토랑에 꼭 한번 들러 보죠.”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납품 물량도 늘리고 좋은 일이 많네요.”

“이렇게까지 정성스레 찾아와 주는 곳은 거의 없어서 연락받고 많이 놀랐습니다.”

태훈은 잘 만들어진 가면을 쓰듯 웃으며 물을 들이켰다. 흐트러지지 않게끔 잘 준비해 온 음식들을 맛보던 주 대표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는 진정으로 태훈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 선규를 보려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태훈은 웃고 있었으나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메시지는 대체 왜 안 읽는 거야.

“나는 이걸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다른 것들은 우리 사무실 직원들도 맛보는 게 어떨까요?”

“예. 그럼 가져가도 될까요?”

“우리 직원들 시키게 내버려 둬요. 이 대표가 굳이 그럴 필요야.”

주 대표의 말에 태훈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허벅지를 찌르는 고 실장의 움직임에 얼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거 가지러 선규가 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싶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과 간 곳은 선규의 책상이 있던 사무실이었다. 태훈은 그곳의 문을 여는 직원의 손을 보자마자 속으로 피스트 범프를 할 정도였다.

“어라. 주 대리님은 어디 가셨어요?”

“어디 가신다고는 안 했는데. 공장이라도 가신 거 아닐까?”

“공장에는 딱히 갈 일 없을 텐데. 자, 이것 좀 다들 드시고 하세요.”

“전 급히 전화할 곳이 있어서. 그럼 맛있게들 드세요.”

고 실장이 태훈을 잡기도 전에 그는 밖으로 나왔다. 점점 태양빛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선규를 처음 보던 때만 해도 태양빛은 강해도 기온이 낮아서 서늘했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나다니. 태훈은 새삼 지나간 시간을 곱씹으며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린 쪽은 다른 곳이었다.

“전화 안 걸어도 돼요.”

“어디 갔었어?”

“급히 할 일이 좀 있었어요. 올 때 차는 안 막혔어요?”

“원래 잘 막히는 곳은 아니잖아. 안에 들어가서 가져온 거 몇 입 먹어 봐.”

“점심 먹은 거 아직 내려가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먹어 보라 말하려던 태훈은 움직임을 멈췄다. 선규가 손가락으로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에 가볍게 걸었던 곳이었다. 태훈과 선규는 나란히 서서 낮은 담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은 오늘 같은 볕에 아주 훌륭한 아이템이 되었다.

“메시지는 왜 안 봤어.”

“중국 바이어가 다음 주에 오거든요. 그거 관련 서류를 좀 보느라 바빴어요.”

“아까 주 대표님도 그 이야기 하시더라. 손이 장난 아니게 크다며?”

“네. 그래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거든요.”

“나도 그만큼 커야겠다, 그렇지?”

“갑자기 무슨.”

“그래야 너도 나 신경 써주지. 원 참, 서러워서. 여기 온다고 통화할 때엔 분명 좋아하는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얼굴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 보기도 힘들고.”

선규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태훈과 통화를 할 때만 해도 약간의 기대감과 함께 기뻤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음울한 생각들 때문에 그의 앞에 나설 수 없었다. 이런 선규의 표정을 본 태훈은 말없이 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햇빛이 닿는 부분이 밝은 갈색을 내며 흩날렸다.

선규는 자신의 머리에서 멀어지는 태훈의 손길이 아쉬웠다. 그래도 주중에 이렇게 볼 수 있다니. 그것도 온전히 태훈의 노력에 의해. 선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피어오르는 미소를 숨기려 애썼다.

“오늘도 이럴 줄 알고 내가 사 왔지.”

“네? 아―”

선규가 입술을 깨물자마자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태훈은 하얀 립밤을 하나 꺼냈다. 선규가 입술이 틀 때마다 바르던 무향의 제품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최근엔 거의 바르지 않게 됐지만 이걸 태훈이 준비할 줄이야. 선규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놀란 사이 태훈은 립밤을 잘도 발라 놓았다.

“반짝거리네. 키스하고 싶게.”

“안 돼요.”

“말투 봐. 내가 강아지야? 하긴 뭐, 강아지 취급해도 좋아. 연락만 잘 확인하면.”

“오늘 메시지 바로 안 본 건 미안해요. 강아지 취급한 것도 아니에요. 그냥 지난번에 같이 있었을 때 아무도 못 본 줄 알았는데 김 과장님이 보셨더라고요. 신경 쓰고 있었나 봐요.”

“같이 있는 걸 누가 보면 큰일 나는 거야?”

“그런 건 아니에요. 김 과장님은 다 알고 계셔서요.”

이야기를 할수록 선규의 고개가 앞으로 숙어졌다. 죄 지은 거 하나 없는 사람이 왜 이리 죄인처럼 굴까. 태훈은 작게 코를 울리며 심기가 편치 않음을 드러냈다. 태훈은 다시 선규의 머리와 어깨를 쓸려다가 말았다.

방금 전의 대화가 마음에 걸렸다. 선규에 대해 다 안다고는 해도 말이 맞지 않았다. 남자랑 붙어 있는 것만 봐도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렇게 보일까 봐 겁이 난다는 걸까. 태훈은 이곳에 올 때마다 선규가 미처 가리지 못한 날것의 삶을 목도하게 되니 기분이 복잡해졌다. 얼굴을 볼 수 있다는 행복함과 목표 하나를 위해 이런 삶을 견디고 있는 선규를 향한 애석함은 술보다도 진해서, 금방 해소되지 않았다.

“안 막히는 때에 가려면 곧 출발해야겠어요.”

“혹시 너희 양조장 서울에 사무실 낼 생각은 없어? 당연히 네가 올라오는 걸로.”

“주말에 갈게요.”

선규는 얼굴을 잔뜩 붉히고 다짜고짜 가겠다는 말부터 꺼냈다. 태훈은 잠시 이마를 으쓱거렸다. 지금 선규의 얼굴을 보아하니 그가 어디로 오겠다는 것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훈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네 기분이, 내 기분이 별로란 이유로 너무 처져 있기만 했지. 태훈의 장난기 가득한 성격은 쉽게 사라질 놈이 아니었다.

“어디를? 레스토랑에? 나 주말에는 그냥 얼굴만 비추는 거 알잖아.”

“아니, 그게…….”

“그럼 어디?”

“아시잖아요. 장난은 그만 치세요.”

“모르겠으니까 모르겠다고 한 것뿐인데.”

미심쩍은 표정으로 태훈의 얼굴을 살피던 선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입으로 들어야겠는 모양이었다. 선규는 마당에 기어 다니는 개미처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피스텔이요. 태훈은 잘 안 들린다며 그를 놀리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늘 선규가 말해 왔듯, 1절로 끝내기 위해 매끄러운 미소만 지었다.

오늘따라 유독 구름이 많이 낀 하늘이 낮아 보였다. 그래도 이토록 푸른 하늘이라니. 하늘 위로 시선을 꽂은 선규의 눈은 돌아갈 줄을 몰랐다. 태훈은 그런 선규의 옆얼굴을 보다가 천천히 손등으로 그의 볼을 쓸었다. 그제야 태훈에게 다시 고개를 돌린 선규는 아주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이제 안 그럴게.”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미안해요.”

“본능에 너무 충실한 내 탓이지. 이제 서울 올라가면 또 주말이 언제 오려나 목 빠지게 기다려야겠네.”

누군가 나를 이렇게 기다려 준 적이 있던가. 선규는 문득 태훈의 말에 오랫동안 가슴속에 응어리가 져 있던 말을 다시 한번 속으로 읊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무슨 말을 하든 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선규의 모든 기분을 알아챈 건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의미에서 가라앉았다는 걸 안 태훈이 그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이제 그만 사무실로 들어가는 게 좋을 듯싶었다.

음식을 나눠 먹은 몇몇 직원들과 주 대표가 태훈의 차 근처로 다가왔다. 그냥 가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사를 위해 굳이 나와 준 것이었다. 물론 태훈은 이 상황이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선규는 주 대표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직원들 틈에 섞여 뒤편에 서 있었다. 얼굴 가려지잖아. 태훈은 운전석을 향해 쏟아지는 햇빛 때문인 것처럼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소식으로 만났으면 합니다. 이 대표.”

태훈이 선규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몇 잔의 술을 얻어 마신 고 실장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조수석에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내가 앓느니 죽지. 태훈은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는 방향에서 고 실장을 살짝 노려보았다.

태훈은 서서히 시동을 걸어 길로 나가는 사이 직원들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특히나 선규와 눈이 마주쳤을 때엔 입을 귀에 걸 정도로 웃으며 손까지 흔들었다. 그걸 본 선규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태훈의 차가 빠져나가자 직원들은 오늘 그가 가져다준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흩어졌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선규의 뒷덜미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갔다.

“주 대리는 나랑 잠시 이야기 좀 하지.”

“예? 예! 알겠습니다.”

주 대표의 뒤에 선 선규는 저도 모르게 벌벌 떨리는 손을 숨길 수가 없었다. 주 대표가 다른 이들도 있는데 자신을 부르는 일은 흔치 않았다. 선규가 해야 하는 일들은 대부분 다른 직원을 통해 하달받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나를 불러서 시키실 일이라도 있는 걸까. 선규는 묘하게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주 대표가 향하는 곳은 사무실이 아닌 집이었다. 양조장에라도 가시려는 걸까. 그것도 나랑 같이. 선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태훈이 발라 준 립밤의 미끈거리는 감촉이 혀에 엉겼다. 하지만 주 대표가 향하는 곳은 양조장이 아닌 선규의 방이었다. 선규는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이 방에 단둘이 남았던 그 날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생각이 있는 놈이냐?”

“아, 아버지. 갑자기 그게 무슨…….”

“네가 누굴 만나든,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 누굴 어떻게 꾀어내든 내 알 바 아니다.”

“……예?”

“거래처 사람에게 더러운 추파를 던져 대는 게 너 같은 인간들이 하는 짓이냐?”

잘 갈린 칼날보다도 전혀 갈리지 않은, 녹슨 칼이 무서운 순간도 있는 법이었다. 이가 뒤틀린 칼날은 한 자리를 그냥 베어 버리는 것이 아닌 살점을 뜯어내며 큰 상처를 남겼다. 녹슨 부분은 그의 마음에 질 나쁜 병균마저 옮아 놓았다.

똑바로 처신해라.

아버지는 다시 한번 선규의 몸을 강하게 내리치는 말을 던진 뒤 방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신 걸까. 선규는 바닥 위로 무너졌다. 선규의 아버지가 대체 어떤 모습을 봤는지 조금도 예상이 가지 않았지만 이젠 그런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선규가 고개를 뒤로 젖히자 침대맡이 그의 머리를 받쳐 주었다. 흐르는 눈물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태훈이 선물한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선규는 그것을 품에 끌어안고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인형은 품고 있던 온기를 나눠 줄 뿐만 아니라 작은 울음소리마저 숨겨 주었다.

* * *

책상을 두드리고 있는 태훈의 표정이 꽤 험악했다.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그만 나가 봐도 좋을 터였다. 평소처럼 운동을 하러 가도 좋고, 사랑해 마지않는 조카를 보러 가도 좋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태훈은 한 번씩 입술을 씹으며 책상만 괴롭힐 뿐이었다. 그는 휴대폰이 한 번 반짝인 후에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전처럼 요란하게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저 얼굴만 더욱 굳어 갈 뿐.

「바빠서 이제야 봤어요. 말한 대로예요.」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건데?」

「지방에서 사는 친구가 올라왔다고 해서요. 그래서 일요일에만 잠깐 갈게요.」

「알겠어. 그 친구 만나는 곳에 데리러 갈까?」

「괜찮아요. 도착할 즈음에 전화할게요.」

내용만 보면 크게 거슬릴 것도 없는 문자였다. 하지만 태훈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요 며칠 사이 선규의 행동을 함께 고려한다면 이는 단순한 내용이라고 치부할 게 아니었다. 태훈이 철진 양조에 다녀온 이후 선규의 태도가 아주 미묘하게 변화했다. 전화는 받지 않기 일쑤였고 문자엔 늘 이렇게 바빠서 확인이 늦었다는 말이 붙었다. 단 며칠뿐이었지만 태훈은 선규의 예상보다 더 기민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주말이면 붙어 있기 바쁜 태훈과 선규였으나 갑자기 생긴 약속으로 인해 일요일에만 잠깐 들르겠다니. 지방에서 올라오는 친구를 만나느라 토요일에 못 오고, 일요일에도 함께 있을 예정이라니.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태훈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선규가 말을 하지 않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태훈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야겠단 생각뿐이었다. 그는 그대로 피트니스 센터로 가, 그의 근육들을 열심히 움직였다. 외로운 밤은 선규가 가져다줬던 것과 사 왔던 술로 달랬고 다음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규에게 문자라도 하나 보내 볼까 싶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중요한 사건 하나 없는데 거리를 둘 선규가 아니었다. 적어도 거리를 둘 만한 일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때까진 입을 다물고 선규가 하는 양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선규가 태훈의 오피스텔에 온 건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선규가 어떤 이유에선지 자신을 피하고 있으니 잠깐 와서 얼굴이나 비추고 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 정오가 지났을 무렵 1층에서 태훈이 문을 열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라고 할 참이었는데. 너 무슨 일이야. 얼굴이 왜 그래.”

“얼굴이요? 왜요?”

“엄청 상했잖아. 살을 빼긴커녕 찌워야 할 사람이 다이어트를 할 리는 없고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런 거 아니에요. 항상 이맘때면 일이 많아서 바쁘거든요. 지금부터 한여름이 지날 때까진 여러 모로 국산 재료 수급이 어려워서요.”

“……진짜지?”

선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 온 것들을 늘어놓았다. 그냥 오려고 했는데 빵이 맛있어 보였다며 빵 봉투를 내려놓는 선규의 표정은 정말 그의 말대로 바빠서 상한 것인지,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파악이 어려웠다. 태훈은 그의 옆에 서서 빵 하나를 꺼내 조금 뜯어냈다. 선규의 입 가까이에 가져가자 선규는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그것을 받아먹었다. 이것만 보면 내 상상력이 너무 과했나 싶고. 태훈은 뒤돌아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다음 주엔 못 올 것 같아요.”

“왜? 무슨 일 있어?”

“어머니께 가는 날이거든요.”

“아, 하긴. 그때 이후로도 몇 주 지났지. 그럼 지난번처럼 뵙고 여기로 오는 건 어때.”

“자주 찾아뵙지 못하니까 이번에는 자고 오려고요.”

선규는 태훈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래, 내 생각이 과했을 리 없지. 하지만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태훈은 얼굴을 펴지 않고 그 위에 아쉬움까지 얹어 선규의 앞으로 다가갔다. 태훈의 표정을 본 선규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태훈은 선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목과 어깨에 입 맞췄다.

“그럼 다음 주는 아예 못 보는 거네.”

“그렇게 됐네요.”

“어머니 만나러 가는 거니까 투정 안 부리고 싶긴 한데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나 봐.”

선규는 그의 말에 특별히 대답하지 않았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마땅한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 선규가 어떤 시간을 보내 왔는가. 그는 단 몇 시간조차 마음 편히 잠들지 못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퍼부은 말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온갖 일들을 나서서 처리하려 돌아다녔다. 집안일을 돕는 아주머니가 돌아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내내 안 그래도 깨끗한 집을 쓸고 닦느라 바빴다. 물론 아버지가 머무는 곳 근처도 가지 못했지만. 그렇게 선잠이라도 들기 전까지 태훈이 사준 인형을 품에 안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태훈 씨. 해요, 우리.”

“어?”

태훈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선규의 입술이 부딪쳐 왔다. 그는 굶주린 사람처럼 태훈의 입술을 빨며 나름 강한 힘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태훈은 순순히 품과 입술을 내어 주며 그의 머리와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지금 이것 외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애석하게도.

선규에게 피곤하냐고 묻더니 오히려 그런 쪽은 태훈이었나 보다. 태훈은 오늘도 함께 샤워하자며 선규를 끌어안았지만 선규는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태훈이 먼저 씻는 동안 선규는 그의 오피스텔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 뒤론 태훈이 한 번 말했던 것처럼 창밖을 응시했다.

세상은 너무도 넓고, 그 안의 선규는 너무도 작은 사람이었다. 제 구실을 해보겠다고 열심히 톱니바퀴를 굴려 보지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톱니바퀴의 크기가 훨씬 커서, 아무리 열심히 자신의 몸을 돌려 본다 한들 헛수고만 하고 있는 그런 존재. 그게 주선규, 내가 아닐까. 선규는 눈을 천천히 끔뻑거리며 태훈이 나온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로 들어간 선규는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마주했다. 몸에는 태훈이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평소처럼 달려드는 게 아니라 온갖 애무를 하며 서로의 몸을 탐하기 바쁜 시간이었다. 몇 번이고 옮겨 다니던 부드러운 입술과 혀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으면 싶을 정도의 진한 자국을 남겼다.

영원히, 라. 선규는 입술을 깨물었다. 선규는 샤워를 하고 태훈의 품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그가 눈을 떴을 때엔 태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선규가 워낙 선잠을 잔 탓도 있었다.

선규는 태훈의 목과 가슴, 쇄골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태훈과의 첫 만남 이후로 선규의 시간이 빠르게 흐른 기분이었다. 매일이 흘러가는 게 이렇게 즐거웠던 때가 언제였지. 선규는 눈을 감아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금방 차오른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나 좋아서, 그래서 얼굴을 안 보고 사는 것에 대해 조금도 상상이 안 되나 보다. 선규는 그렇게 답을 내렸다.

“안 자고 뭐 해. 얼굴이 안 좋아서 오늘은 더 안고 싶은 것도 꾹 참았는데.”

“그게 참은 건지는 몰랐네요. 아뇨, 아뇨. 고개 숙이지 마요.”

“왜. 어차피 안 자니까 얼굴이나 잔뜩 보고 싶은데.”

“그냥 이렇게 있어요.”

태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규의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췄다. 선규는 태훈의 몸을 끌어안으며 깊은 숨을 쉬었다.

“회사 일 바쁜 거 다 끝난 거지?”

“갑자기 그건 왜요?”

“전화를 자주 못 하니까 너무 아쉬웠어. 고작 3일인데.”

“미안해요.”

선규는 여러 의미를 담아 사과했다. 태훈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으나, 말은 짧아도 깊은 사과였다. 길고도 짧은 주말은 순식간에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유진은 집에 온 동생의 얼굴을 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과거에도 은율이 보고 싶을 때마다 한 번씩 오곤 했는데 이렇게 조카가 없는 틈에 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 마셔.”

“땡큐. 그래도 새끼라고 보고 싶었나 봐? 누나는 속도 좋아. 그 새끼한테 은율이를 보내 주고.”

“어차피 자기가 키우는 건 원치 않아 하는 사람이니까.”

“개새끼. 이혼이나 해달라니까 왜 안 해준대.”

“흠결이 남는 게 싫대. 흠결은 지가 사방에 다 내놓고 다니면서 이혼으로 흠은 무슨.”

유진은 제 남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성질이 났는지 컵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건 태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누나한테 도움 좀 청하려고.”

“나한테?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누나랑 은율이가 내 연애 사업을 좀 도와줘야겠어.”

연애 사업을 도와 달라는 말에 유진의 눈이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태훈의 성향에 대해 알게 된 이후로도 멀어지지 않은 가족은 유진뿐이었다. 그럼에도 연인의 얼굴 한 번 보여 주질 않았다. 유진이 태훈에게 우연인 척 한 번만 보자고 해도 어련히 알아서 만나고 다닐 테니 신경 끄라는 날카로운 대답만 돌아오곤 했다. 그래 왔던 이태훈이 연애 사업을 도와 달라 하다니.

“뭔데.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그거 도와주면 나 네 애인 얼굴 한번 볼 수 있는 거야?”

“그럼. 당연하지. 게다가 아주 유익한 일이라고,”

태훈은 휴대폰을 내밀며 싱긋, 웃었다. 아주 불길한 미소였지만 유진은 그것을 받아서 내용을 보는 동안 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다 하다 내가 가족까지 이용하는구나. 태훈은 웃음 뒤에 애교 섞인 눈물을 감추며 유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태훈이 보여 준 것은 다름 아닌 ‘어린이 양조 체험 및 공장 견학’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술을 마셔 볼 순 없지만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눈앞에서 보고 또 직접 만들 수 있는 코스였다. 어른들도 참여할 수 있으니 같이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좋은 추억거리를 하나 만들기 아주 좋아 보였다.

“은율이 친구들이랑 가면 아주 좋지 않겠어? 갈 수 있는 다른 학부모님도 한 분 더 모셔 가고.”

“너도 같이 가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왜 이 짓까지 하는데.”

“아이고, 제대로 코 꿰였나 보네.”

“코가 꿰이다 못해 인생 저당 잡힌 기분이야.”

“……그 정도야? 갈 테니까 누군지 제대로 알려 줘야 해. 알겠지?”

태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이마 위에 얹었다. 평소 같았다면 이번 주말 내내 선규와 집이나 호텔에서 노닥거렸겠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묘하게 자신을 피하는 듯했던 선규의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는지 이번 주엔 곧잘 답장도 보냈다. 물론 전화는 여전히 잘 받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 주 중에 선규를 보러 가지 않으면 또 이상한 핑곗거리를 들고 와 주말 만남을 피하지 않을까, 하는 기분 나쁜 예감이 태훈의 머리를 강타했다. 더는 레스토랑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머리를 쥐어짜서 생각해 낸 게 고작 이것뿐이었다. 태훈은 유진의 집에 오는 내내 우리 조카가 재미있는 체험도 하고 얼마나 좋아, 따위의 합리화하기 바빴다.

“그래서 언제 가야 하는데?”

“돌아오는 주 내로 시간 되겠어?”

“안 될 건 없지. 유치원이야 하루 빠지면 되니까. 친한 애들 엄마한테 한번 물어봐 볼게.”

“진짜 고마워. 내 차도 있으니까 자리 걱정은 말고.”

“그렇게 많이 데려가면 우리가 힘들어서 안 돼. 애들이 보통 기운 넘치는 줄 아니?”

유진은 태훈을 향해 뭘 모른다는 듯이 손짓을 하곤 연락을 넣기 시작했다. 태훈은 곧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선규의 얼굴을 떠올리며 요 며칠 중 가장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병원에 들어선 선규는 차라리 여기가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집이나 병원이나 그에게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요즘의 집은 그에게 고문 장소와도 같았다. 어머니는 선규를 향해 손짓하며 반갑게 맞이하곤 침대 옆을 툭툭 쳤다. 와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선규 얼굴 다 잊어버리는 줄 알았어.”

“죄송해요. 그래서 오늘은 자고 가려고요.”

“정말? 간이침대가 엄청 불편할 텐데.”

“하룻밤인데 못 견딜 것도 없죠.”

선규의 말을 들은 어머니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선규의 이름을 불렀다.

“선규야. 혹시 집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네? 아무 일도 없는데요?”

“선규가 갑자기 자고 간다고 하니까, 이런 적이 없는 앤데.”

선규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짐을 정리할 뿐이었다. 집에서 가져온 건강 보조제와 아주머니가 준비해 준 간식거리를 냉장고에 넣고 나자 이제 더는 할 일이 없었다. 선규는 마지못하다는 얼굴은 잘 숨겨 둔 채 어머니의 옆으로 향했다.

“어머니 컨디션 괜찮으시면 저녁은 외출해서 먹을까요? 보호자 동의서 쓰면 몇 시간 정도는 괜찮다던데.”

“그래. 그러자. 지난번에 너희 아버지 왔을 때 근처 나가서 밥 먹었는데 꽤 맛이 좋더라고.”

“그러셨구나.”

“다음에는 아버지랑 같이 와. 선규야.”

“…….”

“아니다. 엄마가 나가면 되지. 안 그래? 이제 몸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집에 가서 같이 지내면 되는데. 그렇지?”

“예. 좋아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선규는 어머니의 말과는 맞지 않는, 하지만 아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순 없는 대답을 꺼냈다. 어머니는 선규의 등을 쓸며 요즘 회사 일은 어떤지 따위를 물었다. 늘 물어보는 말이었고 선규는 늘 좋다고 대답해 왔다. 이번에도 그렇게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친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는, 그런.

“선규야?”

“아, 요즘 하도 모니터를 보는 시간이 많아져서…… 눈이 너무 시려서 그래요.”

“괜찮니? 안과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인공 눈물 좀 넣으면 나아지더라고요.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해요.”

“부모 자식 간에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있니.”

부모 자식 사이. 선규는 그 단어를 듣자마자 입안을 꽉 깨물었다. 최근 무리한 탓에 헐어 있던 여린 살들이 비명을 질렀다. 선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괜히 가방을 뒤져 보는 척하며 어수선하게 굴었다. 어머니는 그런 선규의 등을 보며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선규는 적당히 대꾸하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태훈의 메시지가 몇 통 와 있었다.

「병원에는 잘 갔어?」

「아직 도착 안 했어?」

「메시지 보면 연락 줘.」

“저, 어머니. 급하게 통화 좀 하고 올게요.”

“회사에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친구가 연락이 와서요.”

선규는 재빨리 병실을 빠져나왔다. 복도 끝으로 가 조용히 통화하려는 생각으로 재빨리 통화 버튼부터 눌렀다. 그제야 선규의 목을 옥죄고 있던 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선규는 창문 옆으로 다가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은 서늘한 공기가 선규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여보세요.”

―응. 지금 간 거야?

“어머니랑 이야기하느라 휴대폰 확인을 못 했어요.”

―착한 아들이네.

“그럴 리가요.”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잘 도착했나 궁금해서 메시지 한 거였어.

“저도 특별한 이유는 없고 잘 도착했다고 말하려고…… 꼭, 이유가 있어야 되는 건가요.”

묻는 말이었지만 끝은 잔뜩 처진 문장이었다. 선규가 뱉은 말들은 그대로 낙하하며 그의 발등을 찍었다. 무언가를 확인받고 싶어 하며 안달복달하면 안 되는데. 자꾸 이러면 태훈 씨도 귀찮아할 텐데. 선규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태훈은 고 실장과 외근을 나와서 식사하려는데 어찌나 입맛이 까다로운지, 차라리 도시락을 싸서 나오는 게 나았을 거란 말을 하며 웃었다. 그 이야기에 선규도 긴장을 풀며 살짝 웃었다. 얼른 시간이 지나서 얼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엔 방금 전의 걱정 따위, 선규의 마음속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옅은 미소를 얼굴에 띤 채로 금방 또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마쳤다.

아차, 통화하느라 넋이 나가서 언제 보면 좋을지 정하질 않았네. 선규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걸 구실 삼아서 태훈에게 한 번 더 통화하면 되겠다는 귀여운 생각을 했다. 그거면 주말을 버티는 데에 충분한 연료가 되리라.

* * *

공장 안으로 들어오는 승용차들을 보던 선규의 얼굴이 굳었다. 분명 예약자의 이름은 이유진이었다. 하지만 들어오는 차에는 익숙한, 선규는 물론이고 철진 양조의 사람들이 아주 잘 아는 차도 섞여 있었다. 태훈은 도착하자마자 우렁차게 인사하며 뒷좌석에 앉아 있던 어린아이들을 내려 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이 대표님?”

“예약자가 저희 누나입니다. 여기 이 귀여운 꼬맹이는 제 조카고요. 은율아, 인사해야지.”

“아이고, 이렇게 보니까 이 대표님을 조금 닮은 것 같긴 하네요.”

“우리 은율이 잘생겼다는 말씀이시죠?”

태훈은 넉살 좋게 직원들의 인사를 받았다. 유진과 그녀의 친구 역시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선규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최소 인원을 딱 맞춰서 예약이 들어왔기에 통제도 쉽고 진행이 수월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태훈이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몇 주 전의 사건 이후로, 태훈을 공장에서만큼은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그래서 통화할 때 봐서 날짜와 시간을 정하자고 했었구나. 선규는 자신이 만나자고 했음에도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던 태훈의 반응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공장을 견학할 주선규입니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네. 잘 부탁해요. 선규 씨라고 하면 되려나요?”

선규가 희미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인솔하자 유진의 눈이 반짝거렸다. 태훈의 눈이 그에게서 도통 떨어질 줄 모른다는 게 멀리서 봐도 느껴질 정도였다.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였어? 유진은 제 동생이 꽤 관능적인 사람을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 차분한 스타일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 저것 봐라, 아주 얼굴 뚫리겠네. 유진은 선규의 지도를 따라 아이들과 함께 걸어 나갔다. 그런데 어째 가장 열심히 따라나설 줄 알았던 태훈은 오지 않고 있었다.

“이태훈. 너는 안 와?”

“응. 나는 안 가.”

어라라. 태훈의 대답에 유진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선규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늘 그래 왔듯 태훈이 자신의 옆에 있고, 아주 약간의 스킨십이라도 오갈 때 아버지가 보면 어째야 하나 따위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고민들을 할 이유가 사라졌다. 선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채 견학 신청인들을 인솔했다.

태훈도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선규를 볼 수 있는 때라곤 오로지 주말뿐인데 그런 황금 같은 주말에 스케줄이라도 생긴다면 얼굴을 2주나 보지 못한 채로 넘어가야 했다. 갈수록 그 시간을 견디는 게 힘들어졌다. 그건 아마도 마음이 더더욱 깊어졌기 때문이리라. 그러기 위해선 평일에도 이 양조장을 찾을 만한 구실을 만들어야 했다. 사무실 직원들과 가까워지고, 자주 드나들어도 주 대표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그런 구실.

“이 대표는 참 좋은 삼촌이군요.”

“그런가요? 제가 한번 와서 쭈욱 보고 나니까 되게 괜찮은 것 같아서요. 매일 유치원 건물 안에만 있는 것보다야 이렇게 나오는 게 좋긴 하죠.”

“누나와도 많이 닮았네요. 형제는 위로 누나만 있는 겁니까?”

“아뇨. 형도 있는데 어째 큰형이랑은 잘 맞지가 않아요. 제가 막내라서 그런지.”

“형……이라.”

순간 주 대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태훈은 대답을 하고 난 이후에야 자신이 크게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가고 난 후에 이 대화로 인해 어딘가에 꽂아 두었던 화살이 선규에게 향하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이런 예상과는 다르게 금방 주 대표의 안색은 방금 전과 비슷해졌다. 가볍게 대화 몇 마디 나누고 있을 즈음 김 과장이 공장 안쪽으로 오며 주 대표와 태훈에게 인사했다.

“대표님. 첫 출하한 매실이 양조장 마당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럼 가보지. 이 대표도 누나와 조카가 올 때까지 여기 있지 말고 함께 가겠습니까?”

“비법이라도 알려 주시는 건가요?”

태훈의 당돌한 말에 주 대표는 크게 웃으며 비법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가자고 손짓했다. 태훈은 주 대표의 뒤를 따라 양조장으로 향했다. 태훈은 마당에 놓인 매실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 작은 동네의 노는 손들은 전부 이 마당에 모인 듯했다. 다들 모여 매실의 꼭지를 따내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고 있었다.

그 구경을 시작으로 주 대표의 안내는 계속되었다. 누나는 공장 견학을 하는 동안 태훈은 이곳에서 또 다른 견학을 하는 셈이었다. 양조장에서만 따로 소량으로 제작하는 술을 위해 작업하는 것이란 설명에 태훈의 고개가 절로 주억거렸다. 태훈은 호기심을 숨기지 않으며 일을 거들려 했다. 그나마 주 대표와 김 과장이 말렸기에 망정이지, 그들이 없었더라면 철진 양조의 직원인 양 일을 할 뻔했다.

마당을 둘러본 세 사람은 다시 공장으로 향했다. 그사이 다른 이들이 내온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태훈이 방금 설명 들은 것들 중 궁금한 내용에 대해 질문하며 눈을 빛내자 주 대표는 답지 않게 인자한 표정으로 태훈의 어깨를 토닥였다. 태훈은 그 온도 차에 이질감을 느꼈다.

“이 대표 같은 사람이 내 아들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이렇게나 호기심도 많고 생각도 깊으니 어떤 부모인들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제 아들이었다면 이 회사는 물론이고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줬겠어요. 아까 그랬죠, 따라가면 비법이라도 알려 주시는 거냐고요. 알려 주다마다요.”

“하, 하하…….”

태훈이 어색하게 웃고, 조금은 굳은 얼굴의 김 과장이 주 대표와 함께 건물 코너를 돌자마자 그들을 찾아오려던 이와 마주쳤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선규였다. 그의 입술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전부 들었구나. 방금 전, 주 대표가 실없이 떠들어 대던 그 이야기들을. 태훈은 저도 모르게 선규를 향해 뻗어 나갈 뻔한 손을 마주 잡았다.

“견학을 모두 마쳐서 이 대표님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일행분들이 양조 체험은 같이 하고 싶다 하셔서요.”

“알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선규는 태훈에게 말을 전하는 와중에도 제 아버지, 주 대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방금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을 향해 한 말이 전부 진심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는 주선규니까. 내가 주선일이었더라면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거냐고 장난 섞인 화라도 내볼 텐데, 나는 주선규니까 그럴 수 없어.

선규가 고개를 돌리지 않자 먼저 움직인 건 주 대표였다. 그는 살짝 인상을 쓴 얼굴로 선규의 시선을 튕겨 내다가 태훈에게 말을 걸었다. 이따가 조심히 잘 들어가라는 인사였다. 지금의 선규는 그 인사마저 너무나 슬프게 다가왔다.

“김 과장님. 이 대표님 안내와 체험 인솔 좀 부탁드릴게요.”

“예, 알겠습니다.”

선규는 말없이 태훈의 옆을 지나쳤다. 태훈은 차마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형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품고 살아온 세월이 10년이 넘는 선규였다. 그런 일생을 부정당한 사람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태훈은 깊은 숨을 쉬며 김 과장의 뒤를 쫓았다. 태훈의 등 뒤로 퍼지는 선규의 작은 발자국 소리가 몇 번이고 그의 몸을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 * *

선규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어젠 대체 무슨 정신으로 일을 하고 잠들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무언가에 집중하고 저녁도 거른 채 방에 들어온 것까진 떠올랐으나 거기까지였다. 울다가 지쳐서 잠든 것인지 아니면 그냥 기절하듯 잠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선규는 어지러운 시야를 바로잡으며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미지근한 물을 들이켰다. 흐렸던 정신이 돌아옴에 따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말들도 고개를 들었다.

“제 아들이었다면 이 회사는 물론이고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줬겠어요. 아까 그랬죠, 따라가면 비법이라도 알려 주시는 거냐고요. 알려 주다마다요.”

방을 나서려던 선규는 다시 책상 앞 의자에 주저앉았다. 내 나이의 앞자리가 1이었다면, 나도 열심히 했다며 투정 부려도 될까. 무엇이든 묻고 싶었지만 나에겐 대답해 주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알아서 김 과장님께 묻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집에서 일해 오신 아주머니에게 물었다고 해볼까. 그럼 나도 인정해 주시려나.

선규는 눈꼬리를 따라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 아, 나는 이제 어쩌면 좋지. 부족한 사람이라 형의 꿈을, 어느 순간부터 내 꿈이 되어 버린 걸 이룰 수 없는데. 영원히.

“도, 도련님? 어디 많이 안 좋으십니까?”

“일찍 나오셨네요. 자다가 이불을 걷어 찬 모양이에요. 늦봄에 감기라니, 볼썽사납네요.”

“약은 드셨어요? 아니지, 밥은요. 죽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

“아뇨. 아주머니 번거롭게 그러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김 과장은 대충 무엇 때문인지 알겠다는 눈을 하곤 선규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선규는 그를 향해 팔을 저으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미 아침으로 준비해 놓았을 밥이나 끓여서 먹고 나갈 참이었다. 선규는 천천히 밥그릇을 비우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찌르르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방에 들어와 출근 준비를 하는 내내 머릿속을 뜰채로 휘저었다. 많은 부유물들은 너른 구멍 사이로 빠져나갔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무얼 먼저 정리해야 할지 정할 수조차 없었다.

계속 여기 남아 있어야 하나. 선규는 방을 나서기 전 인형을 끌어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방은 케케묵은 기억을 전부 품고 있었다. 이곳에선 아무도 선규를 신경 쓰지 않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순적인 공간이었다. 이제야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알겠다는 듯, 선규는 인형을 베개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사무실로 향했다.

주말 특근을 나왔다가 퇴근을 하는 직원들 사이에선 선규에 대한 이야기가 몇 마디 오갔다. 그것을 뒤에서 듣고 있던 김 과장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갔다.

“요즘 진짜 굳이 안 하셔도 되는 일까지 나서서 하신다니까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안색도 파리하게 질려선.”

“설마 어디 가시나?”

“에이. 여기가 집이고 직장인데 어딜 가요.”

한 직원의 말에 김 과장은 두 다리를 멈췄다.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던 직원들이 의아하단 얼굴로 김 과장을 돌아보았다.

“먼저들 가게.”

“과장님도 일중독이에요. 아무리 집이 가깝다고 하지만요. 그러지 마시고 오늘은 저희랑 같이 들어가세요.”

“아냐, 놓고 온 게 있어서 그래. 월요일에 보자고.”

김 과장은 직원들을 돌려보낸 뒤 사무실로 바삐 돌아왔다. 마침 선규가 자신의 자리가 아닌 김 과장의 자리에서 나오고 있었다. 김 과장은 놀란 얼굴로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그 위엔 김 과장의 예상대로 사직서가 놓여 있었다.

“그간 감사했어요. 김 과장님.”

“도련님!”

“김 과장님이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디 일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이러지 마세요. 대표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저만 아니면 괜찮은가 봐요.”

김 과장은 더 이상 선규를 붙잡을 수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웃는 선규에게 어떤 말을 한들 위로가 되지 않을 거란 걸 김 과장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선규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꾹 눌러 담으려 애쓰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몰라도 입을 열 때마다 목소리가 아닌 울음소리가 나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김 과장은 그의 마른 손을 붙잡았다.

“이렇게 가버리시면 후회하지 않겠어요?”

“흐윽…….”

“이곳에 남아 있는 동안엔 대표님을 원망한다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나간 뒤에 몰려오는 후회는 온전히 도련님 몫이 됩니다.”

“아저씨, 제가 무서운 건요……. 윽, 나가서 후회하지 않는 거예요.”

“…….”

“혹은 그 후회가 집을 나온 것에 대한 게 아닌, 왜 이리도 늦게 나왔느냐고 자신을 책망하는 내용이라면 전 정말……!”

선규는 아주 약간 언성을 높이며 책상을 짚었다. 그는 평정을 찾으려 애쓰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가라앉은 눈동자는 그 깊이를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김 과장은 사직서를 다시 책상 위에 올려 두며 선규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 역시 젖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저는 아무것도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하나라도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아뇨, 없습니다. 아버지 역시 제가 나가면 좋아하실 거예요.”

“회사 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선규는 김 과장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 것인지 금방 깨달았다.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간의 감사를 담은 인사였다. 나중에는 울지 않는 얼굴로 다시 한번 인사드릴게요. 선규는 눈물을 닦는 와중에도 어색하게 웃었다. 시끄러워지진 않을지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선규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집으로 향했다.

혼자 정해 놓은 이별의 날이었다. 선규는 토요일의 늦은 낮부터 혼자 방에 틀어 앉아 술을 들이켰다. 달콤한 술은 선규의 일상을 평소와 같은 날이라고 오해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선규는 이미 정리를 끝낸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보며 현실을 잊지 않으려 했다.

나갈 때에 부엌에 편지 놓고 오는 거 잊으면 안 되는데. 선규는 다시 한번 할 일을 생각하며 잔을 꺾었다. 계획 따윈 없었다. 당장 이 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여기까지 일을 저질렀다. 등 붙이고 잘 만한 방이야 금방 구할 수 있을 테지만 그때까진 어디서 지낸담. 선규는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그것 역시 어떻게든 되리라.

선규는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양손으로 캐리어 손잡이를 빼곤, 그 위에 놓인 커다란 보스턴백의 손잡이를 끼워 넣었다. 바퀴가 요란스럽게 굴러 갔다. 선규는 밝게 불이 들어온 주 대표의 방문 앞에 섰다.

“아버지,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해도 될까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선규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저 이만 집을 나가 보려 합니다. 회사 일은 다음 직원이 인수인계하는 데에 어려움 없게끔 정리해 두었습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김 과장님이 연락해 주시기로 했고요.”

주 대표의 그림자는 한 번씩 움직였지만 이번에도 침묵뿐이었다. 선규는 입안을 세게 씹으며 눈물을 참아 냈다. 그답지 않게 눈을 부릅뜨며 떨리는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몸 건강히, 안녕히 계세요.”

선규는 김 과장에게 그랬듯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있던 아주머니는 선규를 보자마자 놀라서 뛰어나왔으나 선규는 그저 부엌에 그간 감사한 마음을 담아 둔 게 있으니 확인하라 대답할 뿐이었다.

수천 번을 지나온 대문이었지만 오늘은 그 의미가 달랐다. 선규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 행위가 너무도 별것이 아니라서, 선규는 미리 불러 놓은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크게 울었다.

* * *

고 실장은 태훈의 사무실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요즘은 태훈에게 결재 하나를 받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트집을 거하게 잡느냐, 전혀 아니었다. 차라리 꼬치꼬치 캐묻고 괴롭히는 게 훨씬 나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태훈은 얼굴을 굳힌 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농담 한마디 없이 다시 한번 봐야 할 부분만 지적하거나, 지적할 곳이 없으면 사인한 뒤에 나가 보라 손짓할 뿐이었다.

“대표님, 여기 곧 시작될 여름 메뉴 준비를 위한 매입…….”

“거기 내려놔.”

“저…… 정말 오지랖인 거 아는데요. 무슨 일 있으세요?”

“혼자 생각할 게 있어. 그러니 나가 봐.”

“그러시구나. 아참! 그거 들으셨어요? 주 대리님이요.”

“주 대리? 선규? 너 뭐 들은 거 있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고 있던 태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을 꺼내려던 고 실장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는 당황스런 얼굴을 하다가 자신의 팔을 붙잡는 태훈의 강한 악력에 정신을 차렸다. 아, 요 며칠 동안 넋 놓고 있던 게 설마 그 주선규 씨 때문인가. 고 실장은 침을 삼키며 입술을 훑었다.

“그…… 직원이랑 연락을 한 번씩 주고받거든요. 그런데 며칠간 죽어라 일하더니 갑자기 사직서를 냈다는 거 있죠.”

“사직서?”

“네. 다들 여기가 집이고, 이게 다 가업인데 어딜 가신 거냐고 난리였대요.”

“그게 다야?”

“그것도 그거지만…… 주 대표님은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는 거 있죠. 미리 말을 해놨던 거겠죠? 아버지니까.”

고 실장의 말을 들은 태훈은 푹신한 의자 위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다 그만둔 거라면 선규의 갑작스런 연락과 행동이 모두 이해가 됐다. 토요일 내내 전화를 받지 않던 선규는 일요일 새벽 무렵 문자만 한 통 보내 놓았다. 가까운 곳에 여행을 갈 계획이라 연락이 어려울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오지로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닌데 요즘 같은 세상에 연락이 어려울 것 같다니, 태훈은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은 이미 꺼져 있었다.

그렇게 벌써 며칠이나 흘렀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이것만이라도 알게 된 걸 감사히 여겨야 하나. 태훈은 한 손으로 눈 위를 꾹꾹 누르며 신음했다. 선규의 행동을 갑작스럽다고 보긴 어려울 터였다. 도화선에 불만 붙으면 금방 연소되어 사라질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태훈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눈빛을 다시 상기했다. 상처받은 것을 숨길 여력조차 없이 지친 그 눈을.

“거기 직원이랑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예? 아, 그게 그러니까. 그냥 신제품이 나오거나 그럴 때에…….”

“웃기고 있네. 그냥 썸 타는 중이라고 솔직히 말해라.”

“와! 대표님 돌아오셨다!”

고 실장은 자신을 찔러 대는 태훈의 농담에 드디어 그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며 손까지 높이 뻗었다. 태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픽픽 웃었지만 그의 속은 편치 않았다. 선규의 마음이 언제 정리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연락도 하지 못한 채로 하염없이 기다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기다리는 수밖에. 태훈은 그저 선규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기를 바라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든 연락해. 여행을 간다던 선규에게 태훈이 보내 놓은 문자였다. 정말 언제여도 좋으니까 연락만 해. 태훈은 낮게 신음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 * *

Mulbora직 타싸X재업X교환X요게X

선규는 오늘도 파도만 하염없이 응시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그것뿐이었다. TV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속이 답답할 때엔 바다를 찾기에 그들을 따라 해보았다. 그들의 묘사처럼 속이 뻥 뚫리진 않았으나 다시 돌아오고야 마는 파도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해지긴 했다. 선규는 아직 더울 때가 아니라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다시 침대 위로 파고들었다.

평소에 잠을 못 자던 것도 아닌데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이 몰려왔다. 긴장이 완전히 풀려서 그런가. 선규는 다시 감기는 눈꺼풀을 막지 않았다. 잠이 오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해가 뜨고 질 때엔 씻고. 물론 집에서도 이렇게 지내기야 했다. 하지만 그가 품고 있는 마음의 온도가 완전히 달랐다. 선규는 부드러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로 다시 단잠에 빠졌다.

그가 깨어난 건 늦은 저녁이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홀로 끼니를 해결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선규는 그제야 침대에서 벗어났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선규는 흐릿한 정신을 깨우며 머리를 굴렸다. 수요일인가, 목요일인가.

선규는 가방에 처박아 두었던 휴대폰과 노트북을 떠올렸다. 휴식은 충분히 취했으니 이젠 방부터 알아봐야 했다. 먹고 사는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이 강했다. 아직 또 다른 좌절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선규는 가방을 열고 노트북과 휴대폰을 꺼냈다.

노트북이 충전되길 기다리는 동안 선규는 떨리는 마음으로 휴대폰 전원도 켰다. 태훈에게서 아마 연락이 몇 통 와 있을 것이었다. 선규는 그 내용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일방적인 통보였으니 너 같은 꼴통이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쩌지. 선규는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로 불이 들어오는 휴대폰을 응시했다. 그러곤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본 내용은.

「언제든 연락해.」

“이 사람 완전 바보네…….”

이곳으로 내려온 이후로 어떻게 해서든 막았던, 그 덕에 단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줄줄 터져 나왔다. 자신은 외딴 섬이라고 생각했던 선규는 섬을 둘러싼 바다가 자신의 편이란 것을 느끼며 안식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어도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옆에 있어서,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제야 알게 된 기쁜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눈물뿐이라면 몇 날 며칠이고 울 수 있을 정도였다.

선규는 다시 침대로 미적미적 걸어가, 태훈이 준 인형을 꽉 끌어안았다. 지난 며칠간 이 녀석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안 됐다. 인형을 선물 받던 날,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빼지 말고 곱게 받을걸. 선규는 괜히 그날을 떠올리며 울다가 웃어 버렸다. 분명 태훈이 이 모습을 봤더라면 놀려 댈 게 뻔했지만 지금은 그래도 그가 없으니까…….

선규는 인형을 한 팔에 안은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문자 하나 보내지 않다가 갑자기 전화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아무리 언제든 연락하라곤 했다지만 자신의 행동이 너무 막무가내처럼 느껴졌다. 선규는 또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통화 연결음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여보세요. 저 태훈 씨.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요. 문자를 먼저 보낼까 하다가 통화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그렇게밖에 연락 못 해서 미안하고…….”

―네 목소리, 엄청 듣고 싶었어. 들으니까 좋긴 한데.

속사포처럼 떠들던 선규는 그런데, 로 끝나는 말에 눈에 띄게 긴장했다. 역시 화가 난 거겠지. 네 멋대로인 거 더는 못 견디겠다고 하면 어쩌지. 선규는 그 앞에 붙어 있던 말들은 듣지 못한 사람처럼 긴장했다.

―운 거야? 목소리가 운 사람 같아.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저녁은 먹었어?

“…….”

―여보세요? 선규야.

“고마워요.”

용케도 이번엔 울음이 터지지 않았다. 선규는 온전한 제 목소리로 태훈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울컥거리는 마음은 인형을 내려다보며 진정시켰다. 고요가 짧게 흘렀다. 선규는 어색함을 물리치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지만 태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밥은 지금 먹으려고요. 아픈 곳도 없고.”

―푹 쉬고 있는 거지?

“그럼요. 아…… 태훈 씨도 쉬어야 하는데 계속 전화 붙잡고 있었네요. 내일 또 전화할게요.”

―아냐. 이게 쉬는 거야. 그러니까 끊지 마.

태훈은 이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말끝을 살짝 늘어뜨렸다. 그에 따라 축 늘어진 목소리의 끝이 갈라져 나왔다. 목소리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만 절대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았다. 들뜬 선규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올라가려고요.”

―올라오면 볼 수 있을까?

“이제 남는 게 시간이니까요. 아! 말 안 했구나. 저 회사 그만뒀어요.”

―그랬구나.

“……잘했다고 해주면 안 돼요?”

―잘했어. 그간 고생 많았어, 선규야.

태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하기야, 회사에 전화해서 넌지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만한 위치의 사람이었다. 왜 그랬느냐고 묻지 않는 것 역시 이유를 어림짐작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주 대표가 끝까지 선규에겐 주지 않았던 마음 한 조각을 몇 주 만에 자신이 받았다는 걸 모를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선규는 그답지 않게 투정 어린 말을 했다. 태훈은 선규가 원하는 대로 말해 주었다. 게다가 고생 많았다는 말까지 함께. 태훈의 다정한 목소리가 선규의 귓가를 간지럽히자 선규는 살짝 웃으며 아주 작게 고맙다고 대답했다. 원하는 대로 말해 줘서.

―목소리 듣고 있으니까 더 보고 싶다. 나 이 정도는 말해도 되지?

“서울에 가면 먼저 연락할게요. 그럼 푹 쉬어요.”

―끊지 마. 그러지 말고 그냥…… 아무거나 이야기해 주면 안 돼? 아아, 저녁 안 먹었다고 했지. 밥부터 먹어. 그게 좋겠다. 잘 자고.

쪽,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선규는 그게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음과 동시에 아쉬움이 몰려왔다. 그냥 밥 먹었다고 할걸. 내가 하는 말을 토시 하나 놓치지 않는 사람인데. 본인이 생각해 놓고도 민망스러웠는지 선규는 고개를 몇 번 저으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뭘 먹어야 기운을 내서 방도 구하고 앞으로 할 일도 알아보지. 선규는 자신에게 닥친 이 많은 일들이 별거 아닌 것처럼, 저녁은 간단하게 룸서비스로 해결하곤 내일 먹어 볼 식당들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그러곤 느지막한 시간부턴 앞으로 머물 집을 찾느라 바빴다. 선규의 몸은 요 며칠간 저장해 온 에너지를 야무지게 쓸 생각으로 서서히 데워졌다.

메시지를 확인한 태훈의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나와서 점심을 먹었다는 선규의 메시지였다. 사진 속에는 맛깔나 보이는 음식과 함께 선규의 손가락 끝이 살짝 보였다. 여행 간다고 한 이후론 휴대폰을 꺼놓고 지내더니 이제야 기운을 차린 모양이군. 태훈은 관자놀이를 짚은 채 고개를 살짝 꺾었다. 자신은 잘 챙겨 먹고 있으니 걱정 말고 지내란 내용의 메시지를 괜히 다시 한번 읽어 본 태훈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나저나 서울에 올라오면 어디서 지낼 생각이지. 태훈은 선규의 거처를 두고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간 선규의 신변에 대해서만 걱정했을 뿐,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따위에 대해서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태훈의 눈이 간만에 반짝였다.

이것은 필시 하늘이 준 기회였다. 동거가 별거인가. 같이 살기 시작하면 동거지. 태훈은 선규를 어떻게 구슬려야 할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하지만 새끼손톱 아니, 발톱만 하게 남아 있던 태훈의 양심이 그를 찔렀다. 힘든 일을 겪고 나온 사람의 틈을 벌려 가며 원하는 걸 얻어 내는 게 옳은 일인가. 태훈은 턱을 괴고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 오늘은 안색이 좋으시네요. 칼럼니스트분들 오셨어요.”

“내 안색이 좋아 보인다고? 고 실장 눈 어떻게 된 거 아냐? 안과 좀 가봐.”

“좋은 날이니까 대표님을 향해 욕하지 않게 좀 도와주세요.”

고 실장은 표정으로 욕하며 태훈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여름 메뉴의 공개를 앞두고 칼럼니스트 몇 명을 모신 터라 고 실장의 심기가 한껏 날카로워져 있었다. 거기다가 시답지 않은 장난을 쳤으니 태훈이 표정으로 욕을 먹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거의 밀려나다시피 자리를 옮겼다.

“고 실장. 철진 양조 직원이랑 연락 주고받는다고 했지? 거기 요즘 분위기가 어떻다곤 안 해?”

“분위기요? 그런 이야기는 안 하던데.”

“그냥……. 아들이 갑자기 나온 거잖아. 그걸로 별말 없냐고.”

“처음엔 말이 많았는데 워낙 주 대표님이 좀…… 아, 이런 이야기 해도 되나.”

“나만 알고 있을게. 선규한테 말하는 일, 없을 거야.”

“어디서 주워 온 아들 아니냐고 할 정도로 냉정하게 굴었나 봐요. 그러니 일이 터져도 금방 가라앉았다고 하네요.”

고 실장의 걸음이 느려졌다. 봄 작물들의 마지막 납품이 끝나면 일이 급격하게 바빠져서 선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억에서 천천히 잊히는구나. 원래 그랬으니까, 라는 짧은 문장 하나로 대체되는 삶이라니. 태훈은 조금은 어두운 얼굴을 하곤 초대 손님들 앞으로 나섰다.

태훈이 이렇듯 제 일을 하고 있을 때, 선규 역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바로 당장 올라가면 지낼 방 구하기였다. 이제 차도 없으니 교통이 적당히 좋으면서, 이전에 비해 말도 못 하게 낮은 수입을 견뎌야 할 수도 있으니 월세가 너무 높아선 안 됐다. 사실 서울에서 이런 집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몇 군데를 찾아보던 선규의 입매가 축축 처졌다.

“이렇게 작은데 월세 봐…….”

선규는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살짝 벌리기까지 했다. 대학 다닐 때야 차를 끌고 다녔으니 약간 거리가 있다 해도 집값을 걱정할 일은 없었다. 대학 다닐 때에도 너무 비싸단 말은 몇 번 들었는데 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이야기인가. 선규는 멍한 표정으로 집값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마음 같아선 확 저지르고 싶었지만 지금은 일정한 수입도 없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저지른다는 방은 대체로 태훈의 오피스텔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태훈이 지내는 곳에 비해 턱없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보증금과 월세가 쓰여 있었다. 지역으로 보나 접근성으로 보나 당연하긴 했다.

차라리 고정적으로 일할 곳이라도 정해져 있다면 밤에 들어가서 등 붙이고 자기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금은 어찌 될지 확언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다면 그런 방에서 몇 시간씩 지내는 건 꽤 힘든 일이 될 게 뻔했다.

조금만 더 멀리 갈까. 버스나 지하철 타면 태훈 씨 레스토랑에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그 정도 위치면 괜찮지 않나. 선규의 집 고르기 허들은 순식간에 쭉쭉 내려가고 있었다. 아니, 무슨 일을 어디서 하게 될지 모르니까 지금은 아예 고시원 같은 데에 들어가서 지내다가 직장 잡고 나올까. 아, 어렵다. 선규는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데자 뷰』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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