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소환된 남자-128화 (128/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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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느님 맙소사. 아니, 진휘님 맙소사.

이게 뭔 일이래? 저게 왜 저기 있어? 판타지에서 우주를 논하다니 반칙 아냐? 대체 어떻게 가란 건데?

혼란스러우니 온갖 잡생각이 머리에 떠오른다.

“후. 하.”

심호흡으로 간신히 진정하고, 냉정하게 생각한다.

우주, 딱히 못 갈 장소는 아니다. 몸을 보호하는 마법이야 넘치고, 산소도 만들 수 있고, 우주는 온도도 낮던가? 우주선처럼 마력을 고밀도로 뭉치면 되겠지. 연속 텔레포트라면 도착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그냥 가면 된다. 우주라고 쫄 거 없네. 우주라는 단어의 신비감에 괜시리 겁이나 집어먹어서는.

“우리가 식량을 얼마나 챙겼지?”

“일 년은 충분히 먹을 만큼은 챙겼어요.”

사랑이가 대답한다. 일 년이라,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달을 탐사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먹겠다.

방법도 있고, 목표도 있다. 그렇다면 실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좋아, 가자.”

“네?”

“고고싱.”

유상민이 얼빠진 소리를 내고, 라팔이 내 등에 달라붙는다. 찬란한 금발이 내 볼을 간지럽힌다.

가마를 메던 66마리의 스켈레톤이 후드득 무너지고, 가마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모처럼의 우주여행이다. 텔레포트로 한 번에 가는 것도 멋없지. 오늘은 하늘을 나는 양탄자 버전이다. 뭐, 양탄자가 아니라 가마다만.

“내가 바로 알라딘이다!”

양탄자를 탄 건 알리바바던가? 그 사람은 40인의 도적단 두목 아니었나? 누가 누군지 하나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는 만화 영화까지 봤던 것 같은데, 내 동심은 어디로 가버렸나. 서글플 따름이다. 아, 동심이여.

알리바바인지 신밧드인지 알라딘인지가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탔다면, 나는 하늘을 나는 가마를 타고 우주를, 달을 향한다.

빠른 속도로 상승한 가마는 구름을 뚫고 더더욱 날아간다. 피오라가 바닥에 납작 달라붙고, 사랑이는 당장 환호라고 지르고 싶어 하는 얼굴이고, 라팔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지그시 달을 바라본다. 느긋하게 즐기고 있다.

굴러 떨어지려는 나비를 마법으로 잡아줬더니 지레 겁먹고 가마에 납작 엎드린다.

구름의 높이를 아득히 넘어, 산소도 희박해졌다. 맨몸으로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온도도 내려갔다. 나와 라팔이는 괜찮지만, 다른 셋은 신체 버티기 힘들 정도다. 마법을 사용한다.

막이 가마를 감싸고, 훈훈한 온도와 신선한 공기를 제공한다.

어느새 가마는 행성이 한눈에 보일 정도까지 올라왔다.

“사진으로만 보던 걸 직접 볼 줄은 몰랐어요. 비록 지구는 아니지만요.”

사랑이가 신기한 듯 중간계를 본다. 지구의 별명이 푸른 행성이었던가? 여기도다. 푸른 바다가 있고, 초록색 풀들이 있고, 흰 구름이 떠다니는, 지구와 같은 행성이다.

남대륙과 북대륙이라는 두 개의 대륙으로 나눠져 있다는 것만 빼면.

중간계를 벗어나는 것까지는 신났지만, 역시 달까지의 거리는 멀다. 속도를 올린다.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달이 가까워진다. 10분 정도 걸릴까?

우주 구경이나 하고 있으면 딱 되겠다. 너무 오래 보면 지루하고, 그렇다고 짧으면 더 보고 싶다. 10분 정도면 적당하겠지.

지나가는 별들과 저 멀리 보이는 행성과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이 한눈에 담긴다. 휘유. 아갈리에서는 여유가 없어 못 해봤는데, 가끔 우주로 휴가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모두 시선이 우주 여기저기로 향하는 가운데, 피오라만은 중간계의 행성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저 푸른 행성을 넋을 잃고 보고 있다.

“냐냥! 냐앙!”

가마에 엎드려 있던 나비도 일어나 방방 뛰며 구경하기 바쁘다.

푸른색 행성. 우리한테는 익숙해도 피오라한테는 충격일 것이다. 행성의 모습은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장엄하며, 저걸 어떻게 하면 부술 수 있을까하는 도전 의식을 불태우게 만든다. 핵으로 내핵을 날려버리면 되려나? 그러면 내핵의 좌표를 알아야하는데....... 그건 나중에 고민하자.

피오라의 어깨를 두드린다. 피오라가 날 보고 흠칫 겁먹는다.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조교한 거지만, 얼굴만 보고도 이러면 조금 상처받는데.

난 피오라에게 말을 꺼내는 대신, 손가락으로 태양과 그 뒤에 있는 별들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린 피오라가 활활 타르는 태양에 눈을 빼앗기고, 이어서 총총히 떠 있는 별들에 사로잡힌다.

중간계의 하늘도 별이 잘 보이는 편이긴 했지만, 우주에서 직접 보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반짝이는 것들이 눈에 가득 들어와 촘촘히 머리에 박힌다.

달이 가깝다. 목걸이가 영혼과 공명하며 유적의 위치를 알린다. 달의 표면에는 장소 착오적인 오두막이 있다. 심지어 달의 표면을 뭉쳐 만들었는지 색이 같다.

“저기네.”

“뭐가 보여요?”

유상민이 내 옆에서 눈살을 찌푸린다. 저게 안 보여? 이 거리라면 저놈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거리다.

“저기 저거 안 보여?”

“그러니까 뭔데요?”

툭툭. 라팔이 내 팔을 찌른다. 왜? 라는 뜻으로 눈길을 보내자 라팔이 목걸이를 가리킨다.

“그거 때문 아냐?”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유상민에게 목걸이를 건네주니. 내 눈에 보이던 오두막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보이네요.”

반대로 유상민이 보인다고 한다. 라팔도 목걸이를 받아 오두막을 확인한다.

흐음, 신기한데. 목걸이에만 반응하는 은폐라.

달에 유지를 남긴 것도 그렇고, 저 오두막은 만든 인간은 예사롭지 않은 인간 같다. 가마가 달 표면에 착륙한다. 아마 이게 우주에 착륙한 첫 가마가 될 것이다. 우주 비행 가마 1호 달에 착륙 완료.

가마에서 내려 오두막으로 향한다. 보이지 않으니 들어가지도 못하지 않을까... 하고 예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모두 함께 오두막의 결계를 넘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오두막의 문에 손을 가져간다. 까끌한 감촉은 확실히 달의 흙과 비슷하다.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연다.

“빠빠라밤!”

여자의 육성으로 된 팡파레가 터진다. 오색빛깔의 빛 알갱이가 떨어지고, 오두막 중앙에 반투명한 여자가 둥둥 떠 있다.

짝짝짝. 여자가 박수를 친다.

“손님이 온 건 5천 년만이야. 빠라빠빰! 수고하셨습니다!”

혼자 신나서 부산스럽게 날아다닌다. 오두막 안을 날아다니다가, 벽을 관통해 왼쪽으로 나갔다 오른쪽으로 들어오고, 아래로 사라졌다가 위에서 나타난다.

반투명한 신체와 저 특징. 그리고 영혼을 보고 느끼는 내 능력까지 더해 판단한 결과. 저건 유령이다. 사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여자 본인이 나 유령이요! 하고 온몸으로 주장하고 있다만.

“자자, 앉아 앉아. 앉으라고 해도 앉을 곳도 없지만. 차라도 내올까? 5천년 이상 된 상한 차라도 좋다면 줄게!”

“너나 먹어라.”

5천년 된 차가 남아 있으면 그것만으로 훌륭한 독극물이다. 초대면부터 극독 먹고 죽으라니 악질도 저런 악질이 없다. 보스턴 차 사건에서 바다에 풀린 차가 저 차였다면 지구는 불모의 행성이 되었을 것이다.

5천년 동안 살더니 미친 게 분명하다. 하긴, 지금도 조금 위험해 보이긴 해.

“에이, 너무하네. 5천 년이나 기다렸다고. 조금 어울려 주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몇 년 전에도 인간이 와서 잔뜩 기대했는데, 달 반대편에 이상한 건물이나 만들고 있고.”

달 반대편에 건물? 인간이? 이건 또 뭔 소리야.

“대단하다고? 완전히 도시를 만들어 놨던데, 사람도 많고, 텔레포트까지 해가며 이상한 자재를 잔뜩 들여오고.”

여자가 신나서 떠든다.

우주에 자리 잡은 인간, 그것도 세력이 있다라....... 나도 왔으니 못 올 건 아니지. 미국에선 제다이 광선검까지 만들어 쓰는 판에 고작 달에 기지 하나 못 만들까. 이 경우 역시 미국이나 인류 연합이 했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뛰어난 기술을 가진 제 삼 세력?

나중에 보면 알겠지.

“그래서, 당신은 뭘 연구했는데?”

“그 전에 묻겠는데. 너희들은 누구누구를 만나고 왔어? 핀? 자키라? 펠? 아란? 필로소머? 또 누가 있더라...?”

그렇게 말해도 난 그놈들 이름은 하나도 모른다. 사막의 노인의 이름이 아란이라고 했던가?

“신의 탄생, 신이란 무엇인가,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사막의 노인에게서 신의 탄생 비화를 들었고, 검은 늪지의 유적에서 신이란 무엇인가를 알았다. 또, 로스앤젤레스에서 얻은 지팡이로 시스템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대답을 얻었다.

신을 죽이는 법에는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건 빼앗겼지. 그리고 그 대가로 애완동물, 나비를 얻었고.

“아란, 자키라, 필로소머인가. 정답은 다 알아버린 것 같네. 그래서, 너희는 신을 죽일 거야? 안 그러면 내가 줄 건 얼마 없는데? 고작해야 이야기 정도?”

“전부 알고 있냐?”

내가 묻는다.

“무엇을? 시스템? 신? 영혼? 전부 알지. 내가 괜히 달에 왔겠어, 괜히 5천년 동안이나 유령이 되어서 떠돌고 있겠어.”

여자가 자신만만하게 선언한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음이라고.

“모든 대답은 영혼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나는 영혼을 들여다보고 답을 얻었어. 대단하지? 나 진짜 천재? 역시 여자의 직감은 틀리지 않는다니까.”

찾았다. 만났다. 그렇게 염원하던 인물을.

남들이 신에 대해, 또 시스템에 대해 연구할 때. 홀로 영혼에 대한 화두를 던진 인간. 가장 핵심에 다가간 인간.

만나길, 정확히는 그 인간이 남긴 유적을 찾는 일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만나버렸다. 이건 조금 많이 의외다.

그리고 그 인간이 5천 년 동안 맛이 가버렸다는 것도 의외고, 아. 이건 당연한 건가? 5천 년이나 이런 골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그야 미치겠지.

“그런데 저건 애완동물이야? 예쁘네. 영혼도 예뻐. 이리 온.”

여자가 나비에게 손짓하자, 나비가 엉덩이를 치켜들고 갸르르 울며 여자를 경계한다. 갈수록 동물의 피가 깨어나 수인이 아닌 동물이 되어가고 있는 나비다.

“음, 미움받고 있네.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런데 저 영혼은 어떻게 된 거야? 지나치게 깨끗한데? 중간계의 생물이 저렇게 깨끗한 영혼을 가질 리가 없어.”

“영혼을 볼 수 있나?”

“그 말은 너도 볼 수 있다는 거구나?”

“사막의 노인에게 얻었지. 영혼을 정화하는 방법은 신에 대해 조사한 인간한테 얻었고.”

“아란하고 필로소머인가. 진실에 도달한 것을 너머 거기까지 해내다니. 방심할 수 없는 녀석들이라니까.”

여자는 혼자서 만족한 것처럼 음음, 고개를 끄덕인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해주니 이쪽은 편해서 좋다.

“여기 온 건 영혼에 대해 알고 싶어서겠지?”

“그래.”

내가 답한다.

“영혼, 신을 신으로 만들어주며, 신이 우리를, 생물을 옭아매고 있는 근본적인 족쇄. 원죄. 그걸 설명하려면 우선 내가 달에 온 이유부터 설명해야 하려나.”

여자의 상태창이 보인다.

이름은 핀, 진명은....... 마을 처녀.

반신이 된 엑스트라A를 보지 않았다면 많이 놀랐을 것이다. 엑스트라A는 엑스트라라기엔 지나치게 강했다. 나에게 죽었다는 점에서 엑스트라였지만, 나한테 걸리기 전까지는 엑스트라랑은 거리가 멀었다.

이건 더 하다. 엑스트라는 작품에서 비중이라도 있다. 그러니 엑스트라 아니겠는가.

마을 처녀. 엑스트라조차 아니다. 작품으로 치면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다. 한낱 마을 처녀가 세계의 진리에 가장 접근해 있다. 작품 설정이 붕괴했군. 누구야 이런 막장 소설을 써 갈긴 녀석은.

시스템과 진명을 통째로 부정하는 수준의 일이다.

“난 소설도 좋아하거든. 인류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챙겨 읽을 정도로 말이야. 가끔 위협을 무릅쓰고 하계로 내려가 찾아 읽기도 했고. 그런데 마을 처녀는 작품에서 아무 역할도 아니잖아? 가끔 강간당하고 죽는 역할? 대부분은 언급되지도 않지. 그래서 나는 반대로 생각했어. 그리고 그 결과가.”

여자의 상태창이 바뀐다.

핀이라는 이름은 그대로고, 진명이 변한다.

[진명 : 신]

“이거라는 말씀.”

여자가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마을 처녀에서 신이 된 여자가 내 눈앞에 있다.

============================ 작품 후기 ============================

kill the god.

충분히 자랑해도 된다. 그렇게 생각한다. 마을 처녀가 신이 되었다. 이보다 더한 출세가 어디 있을까. 인생역전을 넘어 인생환생이다. 다시 태어난 것과 진배없다.

상태창이 사라지고, 여자가 입을 연다.

“물론, 난 시스템에서 벗어난 존재니까. 꼭 이렇게 보여줄 필욘 없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그런 거야. 지금의 내 위치는 신. 너희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놈들과 똑같아.”

“달에 자리를 잡은 것도 그거랑 관계된 건가요?”

유상민이 묻는다. 호기심에 눈이 초롱초롱하다. 저놈은 저런 놈이었지. 무슨 일이든 재미만 있으면 좋을 놈.

문득 저놈에게 합법적인 인체실험 현장을 마련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다고 달려들 것 같다.

“오오. 그걸 알아보다니, 너도 꽤 머리 좋은 놈이구나.”

“제가 좀 그렇죠.”

서로서로 띄워주는 놈들, 이건 뭘까. 한 방 쥐어박고 싶어진다.

“왜 때려요?!”

“그냥 손이 나갔어.”

무심코 말이야. 무심코.

“아란하고 필로소머에게 갔다 왔다면 알겠지? 저기는 네 마리의 신이 꽉 잡고 있단 말이야. 나 같은 영혼이 저길 돌아다니면 끽 짓밟혀 죽어 버려요. 그래서 나는 내가 인간을 초월했다는 걸 안 순간 달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지. 덕분에 이렇게 유령으로나마 살아 있다는 말씀.”

여자가 손으로 자기 목을 스윽 긋는 시늉을 한다. 저런 현대적은 제스쳐는 어디서 배웠데. 음, 제스쳐는 만국. 아니, 만차원 공통일 수도 있겠다.

“신이 네 마리라고 확신하는 이유라고 있나? 그 사람은 네 명 이상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내가 묻는다.

“내가 몇 년을 여기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필로소머가 택한 방법은 뭐였는데? 참고로 나는 신성력의 종류를 보고 분류했어.”

“그 사람도 같은 방법.”

거 보란 듯이 여자는 여유만만하게 웃는다.

“연구 방법이 같다면 표본이 많고 관찰 기간이 긴 쪽이 훨씬 신뢰성 높겠지? 난 여기서 5천 년을 관찰했어.”

그런데 이상하게, 하고 여자가 말을 덧붙인다.

“최근 두 마리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단 말이야. 영혼이 덩어리로 뭉쳐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하는 여자. 저 여자가 아무리 우리가 찾던 그 사람이라고 해도, 우군은 아니다. 믿을 수 없는 년이라는 뜻이다. 내가 신을 죽였다는 사실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지. 그리고 우리 중에서 간단하게 포커페이스가 무너지는 사람도 없다.

“자기 차원에 숨어 살던 놈들에게 문제가 생겼으니. 남은 건 지상에 남은 두 마리인가아.......”

“잠깐. 지상에 남은 두 마리?”

간과할 수 없는 말이 나왔다.

“아, 필로소머도 여기까지 알아내진 못했나? 인간과 수인의 신, 그리고 오크, 고블린, 오우거 등등 피부가 초록색인 놈들의 신은 자기가 만든 특수한 공간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거든. 그리고 엘프와 요정, 드워프를 관장하는 놈하고 마족을 관장하는 놈은 지상에 있어.”

“위치는?”

“으음... 북대륙이라는 것밖엔?”

“쓸모가 없네.”

이미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다.

“무슨 소리를! 내가 이거 알아낸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어쨌든 못 알아냈잖아?”

“아아. 난 모릅니다. 아무것도 안 들려요.”

여자는 떼쓰는 아이처럼 귀를 틀어막고 허공에서 몸을 웅크린다. 그러다가 팟! 허리를 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영혼이 뭔가에 관한 질문이었지?”

“신이 어디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영혼이 뭔가에 관한 질문이었지!”

떽! 소리 지르며 억지로 화재를 돌리려 한다. 약점 잡힌 아이처럼 구는 그 모습에 관대하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장난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북대륙이라는 것도 내 예상에 불과했지. 여자에게 확신을 얻은 것만 해도 아예 쓸모가 없는 정보도 아니고.

내가 어울려주자 여자가 또 신나서 떠들기 시작한다. 사람이 5천 년 동안 혼자 있으면 이렇게 되는 건가. 난 절대 5천 년은 살지 말자. 살더라도 옆에 좆집 하나는 두고 살아야지. 슬쩍 시선이 라팔이를 향한다.

“영혼이란 개체의 고유 식별 번호 같은 거야. 가령, 흑마법으로 두 사람의 뇌를 바꾸면 두 사람의 기억과 인격도 바뀌잖아? 그럼 뇌가 사람을 정하는 기준일까? 내 뇌가 곧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 그러면 불사신, 불사의 진면을 가진 사람은 만나봤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비가 냐옹 하고 울었다. 애완동물이 사람 말을 알아듣다니 나중에 따로 벌을 줘야겠어.

“그놈들 중에는 뇌를 부숴도 살아나는 놈이 있단 말이야. 그것도 기억이 멀쩡하게!”

그건 나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던 일이다. 현대 지구의 과학을 신봉하는 몸으로서 적어도 인간의 기억 중추는 뇌라고 배웠다. 그런데 나는 골통이 깨져도 멀쩡히 재생한다. 기억의 결손도 없다.

명백히 이상하다. 과학은 물론 마법에도 위배되는 일이다.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있지만, 내 상식과는 어긋나는 일.

“그러면 뇌도 개체를 식별하는 단서가 될 수 없다는 거지. 뇌를 복제하면 그 사람도 왕창 늘어나 버리잖아? SF소설에서 봤어.”

5천 묵은 유령은 사고가 아주 지구적이며 취미도 아주 현대적이다. SF소설이라니. 혼자 살면서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리고 뇌를 바꿨다는 이야기 말인데, 사실 뒷이야기가 있거든. 그 상태로 두 사람을 놔두니까 점점 성격이 변하지 뭐야. 원래 몸이 가지고 있던 습관이나 행동, 식성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뇌를 따르던 것이 몸을, 정확히는 영혼을 따르기 시작한 거야. 결국 그 두 사람은 둘 중 누구도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자살했지.”

짝, 여자가 손뼉을 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 영혼이란 개체의 고유 식별 번호. 그리고.......”

“잠깐만요. 유전자라는 말 알아요?”

유상민이 말을 끊고 질문한다. 영혼의 영향이 아닌 몸의 유전적 요인이 아닌가 하는 질문인가. 난 그쪽이 전문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 난 문과라고.

“알지. 염기서열의 집합. 게놈 지도가 뭔지도 아는 걸?”

어때? 대단하지? 라는 얼굴이다.

“그럼 유전자 발현에 대해선.......”

“우리 때도 범죄자의 자식이 범죄자가 된다는 편견은 있었어. 내가 그것도 실험 안 해봤을 것 같아?”

밝은 목소리로 미친 말을 지껄인다. 영혼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얻을 때까지, 확신을 얻을 때까지 생체 실험을 반복해 왔다는 뜻이다.

쾌활한 척해도, 본성은 또라이군. 유령이 되고 또라이가 된 것이 아니라 유령이기 전부터 또라이였다.

“영혼이란 개체의 식별 번호, 지문 같은 거지. 당연히 거역하는 것은 극히 어려워. 시스템이란 영혼에 새기는 각인이고, 진명은 영혼의 성질을 발현하고 언어로 나타내줘. 진명 중에서도 이상한 거 많잖아? 투명한 해파리. 날아다니는 똥강아지. 불사의 필멸자. 영혼에 새겨진 고유 번호와 특정을 언어로 나타내려니 이상해질 수밖에.”

“그럼 영혼은 어디서 오는데요?”

이럴 때는 유상민이 참 편하다. 내가 할 질문 안 할 질문 전부 다 알아서 해주니까, 나는 옆에서 듣고 있기만 해도 된다.

“그건 몰라, 내가 아는 건 저 망할 새끼들이 저 행성에 있는 모든 생물의 영혼을 오염시켰다는 것뿐. 영혼이 어디서 오냐고? 그건 가짜 신이 아니라 저 위에 있을 진짜 신에게라도 물어야지.”

“유난히 신을 혐오하는 것 같은데?”

내가 묻는다. 신을 언급할 때만 저 쾌활한 음성이 험악해지고 살기가 담긴다. 그 살기도 보통이 아니다. 자길 신이라고 자처하는 것은 겉치레가 아니었다. 진짜 그 격은 신에 걸맞았다.

“영혼에 노예 낙인이 찍히고 신들에게 도망쳐서 달까지 왔어. 이 정도면 혐오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아.”

“그렇지.”

“영혼이 개체 번호라는 것까지 알아낸 나는 영혼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어. 사실 그 시도는 내 진명을 처음 본 순간부터 해왔지. 마을 처녀. 소설에 나오지도 않고, 간혹 나오더라도 강간당하거나 죽는 역할. 별 볼 일 없는 인생. 그런 거에 만족할 사람이 있겠어?”

여자의 눈이 활활 타오른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눈동자 안쪽에서 불길이 인다.

반항심 가득한 눈이다. 그도 그렇다. 누가 자기 인생이 마을 처녀. 주연은커녕 조연도 못 된다는 사실에 만족할까. 시스템이, 진명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나름대로 자위라도 가능 하련만, 진명이라는 잔혹한 이름은 그것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애초에, 중간계에서 진명이 가지는 힘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 상식과 법칙을 무시하고 발현되는 힘. 내가 봤던 반신 중 진명을 사용하지 않는 놈은 엑스트라A 하나가 끝이다. 나머지는 전부 마력으로 인한 마법이나 무공과 진명을 함께 사용했다.

“우선 처녀라는 이름부터 버리고 싶었어. 창녀가 되었지. 3년을 그렇게 일했어. 그다음에는 마을을 떠났어. 사막을, 숲을, 산을, 늪을,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땅을 돌아다니는 한이 있어도 마을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고, 절대로 정착하지 않고 살았어. 더럽게 힘들었지. 영혼에 새겨진 내 특성, 특질에 반대되는 일이었으니까. 죽을 만큼 힘들었고, 죽을 생각도 했어.”

여자는 영혼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전부터 영혼에, 진명에 반항하고 있었고, 자신의 천명을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반투명한 유령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삶이 묻어나는 단어 하나하나는 광기와 집착으로 얼룩져 얼룩덜룩했다. 그 소리는 색을 가진 것처럼 귀와 눈으로 동시에 들어왔다. 붉은 광기가, 검푸른 집착이 오두막에 떠다녔다.

“그러다 친구들을 만났고, 전쟁이 터졌지. 학문은 떠돌이 생활을 하며 틈틈이 익힌 거야. 어쩌다 보니 그게 우연히 신학이었고, 신학을 공부했기에 친구들을 만났지.”

오두막에 떠다니던 광기와 집착이 사라지고, 다시 여자가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로 말한다.

“신을 죽일 방법을 찾아 각자 주제를 정하자고 했을 때, 솔직히 이거다 싶었어. 영혼. 그것밖에 없다고 여자의 감이 말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영혼을 주제로 삼고, 연구를 하고, 내 영혼을 키워서. 신이 되었지.”

말을 멈춘 여자가 거하게 한숨을 쉬었다.

“신이 됐을 때. 정확히는 내가 곧 신이 될 거라고 깨달았을 때 동시에 알았어. 네 명의 신의 존재와, 내가 신이 되면 그들이 날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는 걸. 그리고 난 완전하지 않다는 것도. 내 영혼은 깨끗하지 않았으니까. 순수하지 않은 영혼으로 육신의 탈을 벗는다. 어떻게 될지 짐작돼?”

“신들의 꼭두각시.”

“그래. 꼭두각시. 아니면 냠냠 먹혀서 시스템을 유지하는 제물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순수한 영혼만이 신을 죽일 수 있다. 순수하지 않은 영혼은 신을 죽일 수 없다. 한 발짝 더 나아간 발성을 떠올려 보자면, 신들에게 조종당할 수도 있다.

오크인 반역자가 그러했다. 강신을 통해 언제 신에게 몸을 빼앗길지 모르는 인생. 그걸 거부하고 놈은 신을 죽였지. 죽인 건 나지만, 결정적인 일격을 제공한 건 그놈이다.

“신들의 눈이 닿지 않는 장소, 그러면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어. 그렇게 찾은 게 여기, 달. 달에 자리 잡고 육신을 벗은 다음 영혼을 꾸준히 정화했지. 그래서 봐. 아름답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

여자의 영혼은 확실히 맑고 투명하다. 순수하며 질도 높다. 질이 높다. 질이 높다...... 키가 크다? 이거 성추행이었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길 가던 여자를 붙잡고 무기를 가리키며 질이 좋으시네요. 라고 하면 여자는 뭐라 반응할까. 어떤 반응이 돌아오든 재밌겠다.

지랄 맞은 생각은 물려두고, 확실히 여자의 영혼은 내가 본 신들의 영혼과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처음의 질문에 아직 대답 안 했네? 그래서, 신을 죽일 거야?”

“그러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죽여야지.”

“좋아. 그럼 나도 선물을 줄게.”

여자의 영혼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받아들여. 내 영혼이 바로 내가 후예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야. 신을 죽이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될걸?

머리로 소리가 들린다. 나는 굳이 들어오는 영혼을 막지 않는다. 여자의 영혼이 내 영혼과 섞인다. 그리고 내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여자의 영혼이 내 영혼을 잡아먹으며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다른데?

-히히히! 확실히 좋은 몸이야. 어떻게 이렇게 크고 강한 영혼이 순수할 수가 있지? 내가 잘 써먹어 줄게! 이 몸으로 신을 몽땅 죽이면 되잖아. 그럼 너도 소원을 이룬 거지?

몸에서 힘이 빠지고, 정신이 흐릿해진다. 나는 속으로 웃는다.

멍청한 년.

-뭐, 뭐야 이거? 이 기억은 뭐야?! 이 몸은, 이 심장은, 이 마력은 뭐야?!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넌 누구야? 어떻게 살아 있을 수가 있어? 왜 죽지 않아? 이게 뭐야! 뭐냐고!

남의 머릿속에 쫑알쫑알 시끄럽다.

불사 능력자의 경우, 영혼이 기억의 저장소이기도 하다고? 그래, 실컷 맛봐라. 내가 경험한 지옥을.

인간일 시절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5천 년간 홀로 기다렸다?

그으래, 참 대애단한 삶을 사셨어요. 그래서, 그 지옥이 내가 본 지옥보다 더 하냐? 더 하냐고.

내가 한 자살 시도가 몇 번이나 되더라? 일단 천 단위는 확실하게 넘었지. 내가 죽인 인간은 7자리 수를 넘었고.

내 정체성은 지구와 중간계와 아갈리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어디도 날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내 고독은 영원불멸하다. 세계와 나 사이에 놓인 괴리는 너무나 거대해 앞으로 발을 디딜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모든 고통을, 모든 감정을, 모든 광기를. 손수 내 안에 들어와서 이해해 준다고 하는 친절한 사람이 있는데 어찌 거절할까.

자, 나는 마음을 열었다. 내 모든 것을 마음껏 물고 뜯고 맛보고 즐겨라.

-어차피 상관없어! 영혼만 모두 차지하면 내 승리야! 기억 따위 모두 지워버릴 테다!

영혼이 변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영혼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라팔과 유상민이 옆에서 뭐라 말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끝까지 해볼 생각인가.

아아, 멍청한 년. 마지막 기회까지 놔 버리다니. 역시 신이란 것들은 제대로 된 놈이 없다. 박멸해야 할 대상이야.

안타깝게도 지금의 나는 영혼에 직접 간섭할 수 없다. 필히 먹혀버리겠지. 그러나 영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놈의 영혼이 내 안에 있다.

본다는 것은 간섭한다는 것이고, 그건 곧 영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영혼을 자유롭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해도, 영혼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내 영혼, 내 안에 있는 어떤 영혼에게.

-자, 영혼술사 일할 시간이다.

-들켰으니 어쩔 수 없네요. 맡겨만 주시죠.

내 안에 있는 난 놈에게.

========== 작품 후기 ==========

드디어 그분이 오셨습니다.

영혼술사가 힘을 발휘한다. 내 영혼을 잡아먹던 미친년의 영혼이 주춤한다. 그리고 이내 밀리기 시작한다.

-뭐, 뭐야! 어떻게 한 영혼에 두 사람의 의지가! 넌 또 누구냐! 어떻게 영혼의 힘을 다루는 거야! 미쳤어! 이건 완전히 미쳤어!

-아아, 네. 아가리나 닥치시죠. 신이라 해서 기대했더니. 영혼을 다루는 기술은 삼류구만.

미친년은 내 영혼을 반도 먹지 못했고, 내 남은 영혼의 통제권은 난 놈에게 넘어갔다. 잠깐 내가 스스로 넘겨줬다. 영혼술사. 영혼을 다루는 술사. 그 이름은 겉멋이 아니다.

내 영혼을 되찾아오는 것은 물론, 멋지게 여신의 영혼까지 잡아먹고 있다.

-아아, 정말로 잘못 걸렸네요. 신이라는 게 이 모양인 줄 알면 중간계에서 훨씬 더 살기 편했을 건데. 당신에게 걸려서는.

여유롭게 푸념까지 늘어놓으며 난 놈은 여신을 먹어치운다. 여신의 삶과 기억이 내 머리로 들어온다.

뭐야, 별거 아니네. 재능과 직감을 뛰어났다만, 인생은 별 볼 일 없고, 홀로 버텼다는 5천 년도 중간계에서 책을 조달해 보거나 혼자 자위하거나 하면서 즐겁게도 살았다.

이런 걸 두고 내 앞에서 5천 년이니 뭐니 세월을 논하고 앉았었다니 웃기는 노릇이다. 차라리 림돔팔인가 하는 아저씨한테 걸려서 갇혔던 그 검은 상자 속이 9배는 더 끔찍했다. 10배로 하지 않는 건 내 마지막 자비다.

이 년의 모든 인생은 내 10년보다 못하다. 급이 다르다, 이 말이야.

난 놈의 말에 동감한다. 신이라는 놈이 이 모양이다. 난 놈이 날 만나지 않고 중간계에서 힘을 키웠다면, 나 대신 신을 죽이고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거 참, 너도 운이 없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난 놈과 대화도 주고받는다. 내 영혼, 내 일부라 그런가. 신기하게 난 놈을 봐도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영혼의 대부분을 삼켰을 무렵, 여자의 영혼이 내 몸 밖으로 튀어나온다. 원래 반투명한 유령이었지만, 이제 반투명을 넘어 희미하다. 그 존재감도 마찬가지. 생동감은 찾아볼 수 없다.

-야, 헛짓하지 마라.

은근슬쩍 자기 영역을 넓히려던 난 놈을 막는다. 이럴 때까지 방심할 수 없는 놈이다. 난 놈이 실실 웃으며 물러난다.

-뭐냐고. 넌 진짜 뭐냐고...... 대체 어떻게 인간이.......

“인간이?”

-어떻게 너 같은 인간이 살아 있을 수가 있어?

헛짓거리하더니, 이제 헛소리까지 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냐고?

“뒤지지 않았으니까 살아 있다.”

그것뿐이다. 차원이동도 겪었고, 모르모트가 되었다. 내 몸에서 온전히 나였던 부분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모두 개조되고 이식받은 부위들이다. 나는 분명 나지만, 내 몸은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닌 것들이 뭉치고 조립되어 나를 이루고 있다.

어쨌든, 난 살아 있다.

전쟁을 겪었다. 말단부터 지휘관까지 전부 해봤다. 정치를 겪었다. 하급 관리부터 황제까지 모든 지위를 막론해봤다. 배신도 당해봤다. 수많은 목숨이 내 손안에서 스러졌다.

그래도, 난 살아 있다.

그것뿐이다. 살아가는데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 살아 있으니까 사는 거다. 죽지 않았으니까 사는 거다.

5천 년을 질기게 살아온 망령의 마지막 유언치고는 하찮은 질문이다.

-만질 수 있게도 가능하냐?

-식은 죽 먹기죠.

난 놈의 능력이 내 몸에 작용한다. 진명의 영혼의 힘. 영혼만 남은 난 놈은 여전히 자기 진명을 사용하고 있다.

희미한 힘이 감도는 손을 뻗어, 여자를 머리채 잡고 끌어내린다.

-아악!

“시끄러 창녀야.”

바닥에 쓰러진 여자의 머리를 밟는다. 내 몸에서 마력이 뿜어진다. 마력이 여자의 영혼을 속박한다.

여자가 두려운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그래, 그거야. 그게 바로 마을 처녀에게 어울리는 포지션이지. 강간당하고 능욕당하는 역할. 5천 년을 넘어 본래 역할을 되찾은 기분이 어때?”

-니가, 니가 뭘 안다고! 나의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지껄여!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어!

역린을 건드리자 여자가 발버둥 친다. 그래도 힘의 대부분을 빼앗긴 데다, 난 놈의 진명까지 잠깐 빌릴 수 있는 나한테는 어불성설이다. 마을 처녀 주제에 마왕에게 덤비려 하다니. 억만년은 이르다.

“시끄러.”

실실, 여자를 비웃는다. 창녀이고, 하찮은 삶을 살아온 년이지만, 이 년은 나름대로 자기 삶에서 최선을 다했다. 마을 처녀라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운명이 수포가 되었다.

지금 이년의 포지션은 영락없는, 악당에게 짓밟히는 마을 처녀다.

“여긴 네가 아는 사람도 없네? 구해줄 용사는 어디 있냐? 아, 마을 처녀는 원래 죽는 역할이었지.”

5천 년 노력을 갈가리 찢어발겨 주마. 수포로 돌아간 노력 속에서 허우적대며 죽어라. 거품이 되어버린 노력의 맛은 아주 각별할 것이다. 실컷 즐겨라.

“자, 불러봐. 용사님! 도와주세요! 없지? 없지? 없지? 보지에 거미줄 안 치게 혼자서 자위나 해온 년한테 용사는 무슨, 남자도 없는데. 마을 처녀. 확실하네. 진명 그대로야.”

낄낄대며 웃는다. 여자의 노력을 비웃고, 인생을 비웃는다.

네 인생은 의미 없는 인생이었다. 여자가 가진 쾌활함과 낙천성의 원인. 그 자부심의 원천을 부정하고 부순다.

이년이 자기가 신이라고 떠버릴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으아! 으아아아!

지랄발광하지만, 그 저항은 너무나 허약하다. 딱.......

“딱 마을 처녀 수준의 저항이군.”

내가 생각해도 자못 유쾌한 농담이다. 역시 유머는 중요하다. 유머야말로 삶의 원동력이다.

내 농담이 마을 처녀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나 보다. 더욱 발작하며 소리를 꽥꽥 지른다. 꽥꽥 오리냐. 오리는 구워야 제맛이지.

마력에 불길을 담는다. 여자의 영혼이 불길에 휩싸인다.

-꺄아아아악!

“뭐야, 그것도 못 참아? 5천 년이나 살았다며. 좀 더 참을성을 발휘해봐.”

여자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머리에 올려둔 발에 힘을 준다.

영혼을 태우는 불이라. 이름 붙이자면 지옥의 업화? 신을 자칭하는 마을 처녀에게는 딱 맞는 벌이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죽기 싫어. 제발! 제발 아무거나 할게!

애처로운 애원에, 불길을 잠깐 멈추고 묻는다.

“대줄 수 있냐?”

-뭐?

“창녀라며, 대줄 수 있냐고.”

-내가 몸만 있으면.......

“창녀가 뭘 그렇게 따지는 게 많아. 꺼져.”

다시 지옥의 업화가 여자를 불사른다.

-몸만 있으면! 쟤! 아니면 쟤나! 저 팔다리 잘린 년이라도, 몸만 주면 할게! 할 테니까!

“지랄. 저건 전부 내 꺼야. 누구 껄 탐내고 있어.”

좆집들은 내 꺼다. 몸부터 영혼까지 전부 내 소유. 그걸 달라니 창녀 주제에 너무 건방지다. 몸도 대줄 수 없는 창녀가 무슨 가치냐? 무가치하지. 그러니까 소각한다. 활활 타서 사라져버려라 이 마녀야.

여자의 고음이 짜증날 정도로 고막을 찌른다. 몸에 붙은 화염이 거세지고, 여자의 영혼은 점점 더 약해져, 이윽고 사라진다.

흩어진 영혼을 모두 내 안으로 흡수한다. 전이라면 흡수를 거부했겠지만, 이젠 다르다. 여자의 지식 중에서 흡수한 영혼을 정화해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었거든.

5천 년 동안 알뜰살뜰 모아 정화해온 영혼이 그냥 손에 들어왔다. 아주 아낌없이 주는 여자다. 아니, 몸은 안 대줬으니 아낌없이 받은 건 아니구나.

정정한다. 쩨쩨하게 주는 창녀다. 창녀가 몸을 안 대주면 무슨 소용이야.

퉤. 여자가 있던 자리에 침을 뱉는다. 지식과 영혼, 아주 좋게 써먹어 주마.

니 영혼이 신을 죽이는 데 이바지하면 너도 목적을 이루는 거잖아 그렇지?

여자도 분명 이해할 거다. 왜냐고? 내 몸을 뺏으며 지 입으로 이렇게 말했으니까. 영혼이 소멸해 윤회도 불가능해진 년에게 뭐가 들릴 리가 없지만.

자, 하나를 처리했으니 하나가 남았다. 오래전부터 내 몸에 불법 체류하던 불법 체류자에 대한 안건이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마무리해 볼까? 꺼질래? 죽을래?

-그 전에 하나,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니가 움직이고 대충 한 달쯤 후부터 짐작은 했지.

나는 난 놈, 영혼술사 김백령의 영혼을 흡수했다. 튜토리얼, 영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기도 전의 일이라 그건 나에게도 불가항력이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영혼술사라 불렸을지 모르지만, 그놈은 죽었으니까.

그 뒤로도 쭉 잊고 살았다. 단서가 된 것은 영혼을 정화하는 마법진을 나에게 직접 사용한 것.

인간을 상대로도, 동물을 상대로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마법진이 나에게만 작동하지 않을 리 없다. 진명과 달리 이건 마법이다. 조건만 맞춰지면 누구에게나 정당하게 작동하는.

그게 나에게만 거부 반응을 보인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나는 내가 난 놈의 영혼을 흡수했음을 떠올렸다. 그게 그로부터 한 달 즈음이 지났을 때였다.

그때부터 나는 내 안에 있는 이놈의 영혼을 의식하고 있었다.

-역시 그때 움직인 게 나빴나요. 안 그러면 그대로 정화되어 버릴 위기였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만요.

역시, 그때 마법진을 거부한 것은 이놈의 짓이었다.

-그래서, 내 몸 안에서 뭘 하려고 했냐?

-짐작하는 그겁니다. 당신이 흡수하는 영혼들을 제가 먹어치운 다음, 저 신 나부랭이가 하려 했던 것처럼 몸을 뺏으려 했죠. 그런데 설마 영혼을 하나도 흡수하지 않을 줄이야.

뭐, 흡수했다고 해도 쓸모없었겠지만요. 라고 난 놈이 한탄하듯 덧붙이고, 씁쓸하게 입을 연다.

-이계 소환자. 그것도 시스템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힘을 키운 진짜배기. 무슨 농담도 아니고.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기색이 전해진다. 영혼으로 감정도 전달하고 재주도 좋은 놈이다. 그러니 난 놈이지. 날 놈, 하늘로 날 놈. 이제 진짜 하늘로 돌려보내 줄 때다.

-유언은 끝이냐?

여자의 영혼을 흡수하며, 나도 영혼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되었다. 복잡한 것은 차차 익혀나가야겠지만, 영혼을 없애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파괴야말로 내 전공이다.

-이대로 나가봤자. 윤회도 못 하고 시스템을 유지하는 에너지원으로 쓰이겠죠. 그건 사양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안이 있습니다.

-뭔데.

-시스템을 우회해 진명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절 버리는 건 시스템을 부순 다음으로 해주시면 안 됩니까?

진명. 영혼을 다루는 법을 익혔지만, 그게 진명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은 되지 않는다. 진명이란 시스템의 고유 권한. 신들만이 가진 기술 특허와 비슷한 개념이다. 특허를 사용하기 위해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내 영혼의 오염이라는 대가를.

그건 절대로 사양이다. 난 놈은 영혼의 오염 없이 내가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하고 있다.

고민해본다. 내 영혼에서 난 놈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0.001퍼센트가 될까 말까 한다. 저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내가 영혼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고민되신다면, 이런 계약도 가능합니다.

난 놈이 내 머리로 하나의 계약 마법을 제시한다. 엄밀히 말하면 마법과는 다르다. 영혼과 영혼 사이의 계약. 어기면 한쪽이 사라지는 계약이다.

-서로 악용의 여지가 없도록 최대한 쉽게 썼습니다.

난 놈의 계약서는 단순했다. 난 놈은 내가 진명을 비롯한 시스템의 힘을 쓸 수 있도록 해준다. 나는 난 놈의 영혼을 윤회의 흐름에 놓아준다.

악용의 여지도 없고 오인의 여지도 없는 깔끔한 계약서다.

-좋아.

내가 동의하자 즉시 계약이 체결된다.

진명이란 거, 한번 써보고 싶었다. 궁금하기도 했다. 내 영혼에 새겨진 특질, 운명이라 할 만한 무언가는 무엇인지. 난 놈이 공짜로 해준다는데 안 할 이유가 없다.

통수? 그럴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안 했지. 저 계약서는 정말로 깔끔하다. 심지어 난 놈은 저놈이 나에게 해를 입힐 의사가 있다면 자기가 소멸한다는 독소 조항도 알아서 추가했다. 어지간히 소멸되기 싫은 모양이다.

나는 저놈을 죽일 수 있고, 저놈은 날 못 공격한다. 이 정도면 사기계약이다.

-그럼 전 시스템 우회나 하고 있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그걸 끝으로 난 놈의 영혼이 내 영혼 깊숙한 곳에 틀어박힌다. 맑고 투명한 여신의 영혼이 서서히 내 영혼과 동화되어간다. 서비스입니다. 하는 난 놈의 말이 들려왔다.

남은 하나도 끝냈고, 나는 내부에서 외부로 눈을 돌린다.

모두 살짝 긴장한 상태로, 나에게서 거리를 두고 있다. 유상민의 영혼이 요동치며, 그 힘이 나에게 작용하는 것이 모두 확실히 보인다. 무슨 작용을 하는 지도.

저게 저놈의 진명인가. 예상했던 대로 탐색 계열이군. 영혼을 다룰 줄 알게 되니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색다른 감각이다.

“역시 신이라는 것들은 제대로 되먹은 놈들이 없다니까. 달 반대편으로 가자. 누군지 모를 놈들이 만들어둔 달 기지가 있다며.”

유상민이 힘을 빼고, 라팔이 나한테 달라붙는다. 다른 좆집 둘은 작게 한숨을 내쉰다.

“냐아!”

나비가 커다란 엉덩이를 씰룩이며 앞장섰다.

========== 작품 후기 ==========

system : 떡밥을 완벽하게 회수했습니다.

보상으로 연참이 주어집니다.

로스앤젤레스가 현재와 미래를 적당히 섞어둔, 근미래 SF소설의 느낌이었다면 달 기지는 진짜 미래에나 나올 법한 모습이다.

달 반대쪽의 상당 부분을 돔 형태의 막이 감싸고 있고, 안쪽에는 원형 건물이 주르륵 들어서 있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우주복 같은 건 안 보이는데.”

“저 막이 환경을 보호해주는 걸로 보이는데요.”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주복 같은 건 걸치고 있지 않다. 옷차림은 전부 간소하다. 저 막이 생활환경을 구성하고 있다.

저 막을 따라 흐르는 마력의 흐름이, 막 내부에 흐르는 마력의 흐름이 전부 보인다. 영혼이 커지며 내 능력도 늘었다. 당장 체감하는 것은 마력을 더 섬세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

무슨 능력이 더 늘었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겠지.

“야, 달에 기지가 있다는 말은 들어 봤냐?”

“아뇨. 귀띔으로도 못 들었는데요.”

유상민이 말한다.

“라팔이 너는?”

“나도 못 들었어.”

“그럼 저건 최고 기밀이라는 소리군. 아니면 새로운 세력이거나.”

세계에서도 한 몫 꽉 잡고 있는 나라 대표의 측근도 모르고, 세계 최정상 클랜의 한 명이었던 인형도 모른다.

어지간한 비밀이군.

그것도 그런가. 달 기지라니. 꿈에도 예상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는 아직 지상도 제대로 정복하지 못했다. 검은 늪지처럼 마력을 빨아들이는 지형은 모두 없앴지만, 그걸 빼더라도 사람이 살기 힘들 정도로 몬스터가 많고 살기 힘든 험지들이 존재한다.

세종과 맞닿아 있는 신단 산맥이라거나. 거기는 마력을 흡수하는 지형이 아닌데도 나오는 몬스터의 수준이 높아 개척하지 못하고 있다.

“들어가 볼까.”

“감지 마법 같은 건 어떻게 하게요?”

유상민이 묻는다. 달 뒤쪽에 만들 정도로 비밀스러운 기지다. 보안도 엄하겠지.

“대충 해결될 것 같으니까, 따라와.”

그러나 그 보안이 뭐든 상관없다. 마법적인 것이라면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하고, 진명이라고 해도 이제는 대충 읽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진명으로 된 보안 시스템은 일단 보이지 않는다.

안쪽이 어떨지는 들어가 보면 되겠고.

“이리로 붙어.”

나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뭉친다. 우릴 감싸고 있는 보호막에 새로운 마법을 입력한다.

“가자.”

기지를 보호하는 보호막과 내 보호막이 자연스럽게 합쳐지며, 우리는 기지 안쪽으로 진입한다. 누구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투명화 마법은 기본이지.

“단독행동은...... 못하겠네요.”

복잡하게 깔린 마법들을 보고 유상민이 단념한다. 마법이 쫙 깔려있다. 마법사가 아닌 이놈이 혼자 행동하긴 무리다. 마법뿐만이 아니라 전자기기로 된 잠금과 보안 설비도 많이 보인다.

정보를 주워섬길 겸. 걷기 시작한다. 한 시간 정도 걸었지만, 들리는 대화는 전문적인 것들과 잡담뿐이다.

어제 누가 뭘 했니. 어디 문제가 있으니 뭐가 필요하니, 대충 이런 것들.

기지의 안쪽으로 점점 들어간다. 사람이 많은 편이 아니라 부딪히지 않게 조심할 필요는 없어서 편하다. 대신, 건물마다 방음이 철저해 건물 안쪽을 엿듣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흠이다.

“누구 하날 잡아야 하나.”

그편이 빠를 것 같다.

“너희는 잠깐 들어가 있어라.”

정보 조사에 도움이 안 되는 셋. 사랑이랑 피오라, 나비를 아공간에 넣고, 나랑 라팔이랑 유상민만 남는다.

경험자끼리 움직이는 것이 빠르고 효율적이다.

“어떻게 해야 돼?”

“제가 정해요?”

“니가 제일 잘 알 것 같으니까.”

첩보, 스파이 노릇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난 주로 힘에 의존한 타입이라서 전부 부술 게 아닌 이상에야 나서지 않는 게 좋다. 라팔이를 보니 라팔이도 수긍하는 분위기다.

“먼저 아무 건물이나 침입해서 자료부터 찾아보죠. 음... 저기로요.”

연구원으로 보이는 사람 하나가 향하는 건물을 가리킨다. 연구원이 흰색 돔 형태의 건물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좌표는요?”

“찍었다.”

이 보호막 안은 공간좌표가 꼬여 있지 않다.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다. 마을 처녀가 텔레포트로 이것저것 옮기는 것을 봤다고 하니, 그 때문일 거다.

라팔, 유상민과 함께 텔레포트로 이동한다. 건물 안쪽은 전체적으로 매끈한 인상으로, 역시 미래라는 느낌이다.

연구원을 따라 안쪽을 이동해 연구실로 보이는 장소에 도착했다.

“이제 시작하죠.”

유상민이 연구원에게 다가가더니, 주저 없이 뒷목을 때려 기절시킨다. 그리고 자료를 털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서류를 몽땅 챙기고, 어디서 났는지 컴퓨터에 usb까지 꽂는다. 어디긴 어디야 아공간이겠지. 아날로그 방식만 고집하던 놈이 usb를 꺼낸 게 의외긴 하다. 망설이지 않고 타자를 두들기는 모습을 보면 맹탕은 아닌 것 같다.

“전자기기도 쓸 줄 아냐?”

“지구에서는 해커였어요. 이 정돈 기본이죠. 세종에서도 이런 프로그램은 설비가 없어서 못 썼는데, 설비 참 좋은 거 쓰네요.”

말투는 평소처럼 여유롭지만, 손가락은 그렇지 않다. 타자 위를 춤추고 있다. 모니터 위로는 나는 알지도 못하는 말들이 촤르륵 지나간다.

“진명을 쓰니 10시간 걸릴 작업도 금방 끝나겠네요. 5분만 기다려주세요. 해킹 방지가 전혀 안 되어 있는데요. 달이니 당연한가.”

타자를 치는 손가락이 더 빨라진다. 일반인의 동체 시력이 따라잡을 영역을 넘어섰고, 유상민의 눈동자가 쉬지 않고 화면을 훑어 내린다.

“라팔아 이리 온.”

나는 도도도 달려온 라팔이를 품에 안고 얼굴을 문지르며 기다린다. 촉촉하고 보송보송하고 말랑말랑한 피부는 언제 만져도 최고다. 밤에 만질 때가 제일 최고지. 이 기분 좋음은 반칙이다.

만지고 있으면 나도 말랑말랑하게 녹아버릴 것 같다. 으어어. 성불하고 싶다아아.

5분이 지나자 유상민이 개운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컴퓨터 앞에서 일어났다. usb를 뽑아 아공간에 넣는다.

“뭐 좀 알았냐?”

“회귀 시스템이요.”

“뭐?”

“이 기지. 여기 전부가 회귀를 위한 준비라고요. 대단한데요. 어디서 회귀 준비를 하고 있을 줄은 알았는데. 그게 달일 줄이야.”

유상민이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얼굴로 투명한 창문 밖으로 지어진 건물들을 바라본다.

“주체는?”

“인류 연합인데요.”

헛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 나온다. 라팔이의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빛나는 금발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허, 참. 그런 거였나. 달에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나 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일을 하고 계셨구려.

인류 연합이 건설한 달 기지. 거기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인류 회귀 프로젝트.

미소가 지어진다.

“사악한 생각을 할 때의 미소.”

“사악해야 살아남는 세상이지. 안 그래?”

“그렇지.”

우리 라팔이, 참 똑똑하다. 오늘 밤에는 귀여워해 줘야지. 간만에 나비도 데리고 놀아볼까. 내구도 최강의 좆집과 애완동물의 조합이라. 좋구나, 좋아.

“그 회귀 시스템, 완성된 거냐?”

그럼 곤란하다. 내가 죽인 놈들이 벌써 세 번째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는 소리니까. 그리고 나는 회귀에 포함될지 어떨지도 애매하다. 타임 패러독스라고 하던가. 그 시간 모순이 날 포함한 이 세계에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는 이상 회귀 시스템이 완성은 나에게 있어 독이다.

“아뇨. 연구 과정만 보면 한참 멀었는데요. 단, 도박을 한다면 회귀 자체는 가능한 모양이에요. 회귀는 일단 한 번 성공한 비술이니까요. 지금은 변수를 줄이고 성공률을 높이는 작업 중이고요.”

기회는 내 편이군.

보나 마나 이건 인류 연합 최후의 한 수겠지. 이종족의 손이 닿지 않는 달에 만들었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이종족과 전쟁을 치르고, 또 다시 최후에 몰리면 사용할 비장의 한 수.

유상민에게 물으니 마찬가지로 긍정한다. 이 회귀 마법, 회귀 시스템은 인류 연합 최후의 보루며 최고 기밀이다.

인류가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것을 번복하기 위한 장치.

뤠인이라는 영감이 그랬지. 자신은 세 번째 기회를 노리는 놈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한 번이 있었으니, 두 번도 있을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발상이다. 이 달 기지만 있으면, 또 이게 성공하면 인류는 아마 멸망할 것이다. 확실하게.

생존이 아닌 멸망이다.

“라팔아, 넌 세 번 살고 싶냐?”

라팔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번은? 다섯 번은? 여섯 번은? 또.......”

“그만큼은 싫어. 내가 못 버텨.”

여덟 정도 되었을 때. 라팔이 고개를 붕붕 흔든다.

“유상민 너는?”

“저는 열 번까지는 괜찮을 것도 같은데요. 못 가본 유적이나 모두 탐사하면 미련은 없겠네요. 이 세계의 진실은 이미 전부 알아버렸고.”

라팔이는 여덟 번, 유상민은 열 번이다. 그러면.......

“우리처럼 미친놈들 말고, 평범한 사람은 몇 번이나 버티겠냐?”

“세 번째에 미쳐.”

“사람에 따라서는 네 번까지는 버티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런 대답이다.

빈민. 세종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어딜 가나 있던 그놈들, 그놈들의 반은 칼을 보고 피를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놈들이다. 죽음의 트라우마로 싸우길 포기한 인간들.

한 번 죽은 것 가지고, 그 트라우마로 그 꼴이다. 그것 말고도 회귀의 부작용으로 미쳐버린 놈들을 나는 많이 봤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역린만 건드리면 발작하는 놈들이 태반인 것이 이 세상이다.

모두 장대하고 심각한 정신병을 안고, 그걸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살고 있다.

-하나의 유령이 중간계를 배회하고 있다. 광기라는 유령이. 인간이 낳은, 갈 곳을 잃은 유령이 세계를 오염시키고 있다. 주인 잃은 증오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내가 중국에서 연설하며 했던 이 말은 사실이다. 덧붙이고 뺄 것도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사실.

중국을 봐라. 그 미친 학대와 증오와 광기의 나라. 그 미친 나라가 가장 큰 증거이며 이유다.

중간계는 미쳐있다. 미쳐 돌아가고 있다. 한 번의 회귀가 모든 것을 이만큼이나 부수고 찌그러뜨려 원형을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네 번이 되면?

세상 전체가 미쳐버린다. 신들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세계가 반복될수록 인간들은 미쳐갈 것이고, 세계가 반복될수록 기술은 발전할 것이다.

세상을 덮을 광기와 세계를 뒤엎을 기술력. 이 두 개가 합쳐지면?

아주 바람직한 세계가 탄생하겠지. 피와 광기가 난무하는, 신들도 어찌할 수 없는 종말 그 자체.

내 마음에 쏙 드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세계에 있으리란 확신이 없다는 사실. 그러니까 그 세계를 기다리는 건 없던 일로 해야겠다.

라팔과 유상민도, 처음의 질문으로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닌데요.”

라팔은 단순한 감상이지만, 유상민의 말과 눈에는 그런 발상을 바로 떠올린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가볍게 웃어넘긴다. 내가 언제 제정신이었던 적이 있다고.

“그러니까, 이 시설을 부수고 인류의 회귀를 막아야지. 인류도 구하고 세계도 구하고. 명분으론 딱이네.”

“명분만 거창하고 사실은 깽판 치고 싶을 뿐.”

“쉿. 그런 건 숨겨야 하는 거야.”

나와 라팔이 장난치다 들킨 아이처럼 키득키득 웃는다. 쿡쿡거리는 라팔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반대하지만요.......”

유상민이 반대하고 나서지만, 막으면 바로 죽는다는 것을 잘 아는 눈치다. 미친놈끼리는 통하는 게 있다니까. 도움이 되지만 날 막는 순간부터 봐주는 건 없다. 저놈이 뛰어나긴 해도, 대체재를 구하려 하면 못 구하는 것은 아니다.

“결정했으면 바로 실행해야지. 시스템의 중추는?”

“기지 중앙 건물, 그 안에 있는 마법진이요.”

가자. 인류의 멸망을 막으러! 또 인류 최후의 보루이자 인류 마지막 희망을 짓밟으러!

내가 영웅이요, 내가 마왕이로다.

========== 작품 후기 ==========

전면 전쟁 전에 뒤치기를 당해버렷.....!

신경써서 깐 떡밥을 완벽하게 해석한 사람이 있어.... 독자 무서워.....

거리를 걷는 나는 개선 장군처럼 당당하다. 투명화 마법도 모두 풀었다. 꿀릴 게 하나도 없다. 정의와 명분은 모두 내 편이다.

내 머릿속에선 인류 모두가 내 편을 들어주고 있는 그림이 선히 그려진다. 인류가 다 내 편이니 거칠 것이 없다.

어제는 적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 나에게 한 표를 던질 것이다. 정당한 민주주의의 법칙에 따라 소수의 권리는 무시하고 밟아버려도 된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얼마나 좋은 말인가. 대를 위해선 모든 게 허용된다.

대를 위해서, 대를 위해서, 모든 명분은 거기서 나오지. 대(大). 큰 대가리를 위해서. 많은 대가리를 위해서. 바글거리는 대가리들이 바로 정의고, 명분이고, 진실이고, 역사다.

그것들을 모두 따다가 나무에 걸어주고 싶다. 그러면 대가리가 자라나는 나무가 생기지 않을까?

풀마다 나무마다. 모든 식물 저마다 마디마디 꽃 대신 열매 대신 대가리가 피어서 저마다 제 입으로 떠들 날이 오면 틀림없이 인권은 비약적으로 신장하겠지.

대가리 하나에 인권 하나. 대가리 하나에 명분 하나. 머릿수로는 인간이 식물을 이길 수 없으니 오히려 사람 대가리와 식물 대가리 사이의 의견 대립이 일어나 전쟁이 일어나겠다. 인간과 식물의 대전쟁이다.

꽃이 피고 꽃이 지듯 대가리가 피고 지면 계절마다 철마다 풀마다 숲마다 마다마다 산천에 피와 뇌가 차겠지. 그것들은 좋은 붉음이 될 것이다.

대가리가 피는 나무. 꼭 만들어보자. 인권에도 좋고 미관상에도 좋으니 이거야말로 일거양득, 일석이조라는 녀석이다.

기지의 중앙이 가깝다. 반구형의 커다란 건물이 보인다. 다른 건물들과 달리 창문도 없고, 들어가는 문도 보이지 않는 밀폐 공간이다. 이 앞은 금지구역이군.

내가 멈추자 다른 둘도 거의 비슷하게 걸음을 멈춘다. 진명이다. 이 앞은 누군가가 가진 진명의 영역이다.

쯧. 다른 곳의 방범이 허술하더라니. 중요한 곳만 딱 막으면 된다는 건가.

“확 전부 부숴 버릴까.”

“날려버리면 아깝잖아요.”

“응. 아까워.”

“그것도 그렇단 말이야.”

없앨 거라면 뭐, 내가 숭배하는 그분이자 그 녀석으로 기지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편이 쉽다. 직접 귀한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는 그 마법진과 시스템이란 것을 한번 보고 싶어서다. 혹시 나중에 쓸 일이 있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내가 실패하면 최후의 수단으로 써먹어야지.

기적을 체현하는 마법을 눈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도 한몫한다.

남은 건? 악당들이 목표를 노릴 때 하는 전형적인 행동을 해야지.

테러.

내 머리 위로 수십 개의 마법진이 생겨난다. 선전포고 대신이다.

불덩이가 날아간다. 건물 안쪽에서 뛰쳐나온 인영이 불덩이를 쳐낸다.

대머리 스님이 키보다 긴 봉을 땅에 강하게 찍는다. 쿠웅! 둔중하게 땅이 울린다.

“인류의 비지를 침범하려는 그대들은 누구요?”

“용사.”

“그 살기, 평범한 살귀가 아니구려.”

“용사라니까, 동문서답하고 그러네.”

인류의 적인 신도 죽이고, 인류를 광기의 길로 빠뜨리려는 인류 연합의 야망도 저지하고 있다. 이걸 용사가 아니면 뭐라고 부를까. 노예 해방에도 앞장서니 인간의 용사가 아닌 만인의 용사다.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나, 이 앞으로는 한 발짝도 갈 수 없소.”

스님이 무언가를 조작하자 붉은 경보가 울리고 기지가 부산스러워진다. 어디서 무장한 인간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온다. 뭐야, 제대로 경비도 갖추고 있잖아.

그 제대로 된 경비라는 것도 내 앞에선 찍찍 때는 쥐새끼와 다르지 않아 내 마법에 녹아내린다.

문자 그대로, 녹는다.

“으아아!”

“살려줘!”

마력을 녹이는 염산, 처음 당하면 대부분 당하는 그런 거지. 바닥을 타고 흐르는 염산에 다리가 녹고, 위에서 떨어지는 염산에 머리가 녹는다. 위아래가 모두 녹아내리니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이다. 아이스크림 대군이 몰려온다! 그리고 오기도 전에 모두 녹아버린다.

어이쿠, 불쌍해라. 아이스크림은 차가운 곳에서 나오면 안 되지. 이 경우 그냥 집 밖에서 나오면 안 되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 아이스크림에게는 이불 안도 위험하겠지만. 음, 진퇴양난인가. 저 아이스크림들에게 기다리는 운명은 죽음뿐이구나. 어차피 아이스크림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건가. 먹히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

어차피 다 똑같구만.

인간이나 아이스크림이나 중간계에선 누군가에게 먹힐 뿐이다. 사람에게 먹혀 그 사람의 영혼의 일부가 되던가, 시스템에게 먹혀 이 빌어먹을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던가.

인간과 아이스크림이 모두 같으니, 저 아이스크림 인간이야말로 생물의 이상적 형태의 체현이다.

녹아가는 몸이 죽음을 향해 치달리는 우리 운명을 상징하고 있으니 예술적 가치 또한 훌륭하다. 현대 미술에 한 획을 그을 멋진 작품이다. 감상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는 우리밖에 없다는  것이 아주 아쉽다.

저건 길이길이 보전해 인류 역사에 남겨야 한다. 좋아, 그러자. 녹아가던 인간들이 얼어붙는다. 최상급 빙결마법. 걸린 모든 것을 영구 동토에 가둬 버리는 봉인술이다.

봉인된 상태에서도 오감은 살아 있어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이 포인트. 봉인된 대상을 미치게 하는 기술이지.

내 너희에게 달과 인류의 최후를 볼 기회를 내리노라, 대신 너희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품으로서 여기 남아 줘야겠다.

보는 사람도 없는 예술품. 나중에 인류가 달에 다시 올 날이 있다면 그때야 빛을 볼 예술품이다.

“그자다! 수배령에 있는 그자라고!”

“지원! 지원은 아직인가!”

“텔레포트 마법진이 작동하지 않아!”

상대의 도주로를 막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공간좌표를 헝클어뜨리는 것을 비롯해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도망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그리고 하나 더.

“보호막이 부서진다아아아아!”

달 기지를 감싸고 있는 보호막을 없애버렸다.

굉음과 함께 사람들이 하늘로 날아간다. 숨도 못 쉬고 발버둥 친다. SF영화에서 많이 봤던 장면이군. 우주선에 구멍 났을 때의 그림이 딱 이랬다.

건물들도 비교적 작은 건물들은 뿌리 뽑혀 우주로 날아가 버렸다. 그런 가운데, 기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건물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만약을 대비해 만든 자동 방어 시스템이네요.”

“그 말은 저것만 걷어내면 끝이란 거네.”

“그렇겐 안 될 것이오.”

최종 저지선 안쪽에는 스님이 봉을 땅에 꽂은 상태로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이 방어막이 저지선이라면 저 스님이 최종 방어 시스템이 되나.

인류 마지막 희망을 지키는 방어선답게 기백이 심상찮다. 스님의 몸에서 황금빛의 성스러운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다. 신성력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신성한 힘이다.

“저 악귀를 죽이고 지옥에 간다면, 기쁜 마음으로 가겠사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의 등 뒤로 거대한 불상이 나타난다. 팔이 몇백 개나 달린 불상은 건물을 보호하는 보호막을 넘어 하늘 높이 닿을 듯 솟아 있다.

저게 진명이라고? 진명을 사용하는 반신을 여럿 만나 봤지만, 저건 규격이 다르다. 전해지는 기백이 다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저 스님의 영혼은 깨끗하다. 아예 더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전체에 비하면 티끌만하다.

저 스님의 힘은 시스템에 의지한 것이 아닌 수련의 성과라는 뜻이다. 수련의 성과를 진명이라는 기술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유상민이 거대한 불상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 핀이라는 그 여자보다 위험해 보이는데요?”

“동감한다. 라팔아, 저 사람은 누구냐?”

“몰라.”

재야에 묻혀 있던 고수, 그것도 초고수다. 반신 둘이나 셋 정도는 저 스님 혼자 씹어 먹겠다. 이런 자리에서 만나지만 않았어도, 꽤 즐길 수 있는 싸움이 됐을 건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나쁘다. 나한테 나쁜 게 아니라 저 스님한테.

무릇,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강해지기 마련이나. 사람이 강해진다고 지켜야 할 물건도 덩달아 강해진다는 법칙은 매우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날 믿는 만큼 내 눈을 믿어라. 내 눈이 인정한 나의 적을 믿어라.

그러니 나는 저 스님을 믿는다.

그러니 스님, 부디 완벽하게 막아주시길.

“이런 간악한!”

날 노려보던 스님이 급박하게 하늘로 눈을 돌린다. 하늘에선 마법이 쏟아지고 있다. 내 상징과 같은 마법이지. 마법의 비가 하늘에서 주룩주룩 내린다.

불상에 달린 천 개가 넘는 팔들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며 건물에 직격하는 마법을 모두 걷어낸다. 내가 보고도 말이 나오지 않는 장관이다.

나는 추가로 몇 개의 마법을 스님을 향해 쏘아 보낸다. 스님은 이를 악물고 손을 놀려 마법을 쳐낸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법이 늘어난다. 스님을 향하는 마법도 점점 더 강해진다.

스님이 한계에 부딪힌다. 마법에 건물 일부가 부서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갑자기, 불상의 움직임이 변한다. 너울거리며 하늘을 헤엄치고, 내 마법들이 거기에 붙들려 이리저리 곡선을 그리며 모두 빗나간다. 내 마법이 허공에서 서로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킨다.

“이제 그건 통하지 않소이다.”

스님이 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영혼의 크기가 확연히 더 커졌다. 불상의 힘도 더 늘어났다.

미친. 설마 그거냐? 싸우면서 깨달음을 얻어 더 강해지는 그거?

저건 어디 사는 괴물이냐. 안 그래도 반신 둘은 씹어먹을 땡중이 더 강해지면 반칙 아니야?

물론, 스님이 얼마나 더 강해지든 내 우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스님은 지켜야 할 물건이 있다.

핵탄두 두 개가 중앙 건물 상공에 출현한다. 무언가를 느낀 스님이 즉시 불상의 손을 움직여 구슬을 감싼다. 성스러운 금빛이 손을 감싼다.

쿠웅! 폭음 대신 진동이 울린다. 저 미친 땡중. 손으로 탄두를 감싸 폭발을 안쪽에서 막았다. 본인도 멀쩡해 보이진 않는다. 여유는 사라지고, 표정이 확연히 구겨져 있다.

“그래도 통하긴 하니 다행이네. 계속 막아봐.”

“그대는 지옥에서도 영겁토록 고통받을 것이오!”

스님이 악에 받쳐 소리친다.

“그건 염라대왕 앞에 가보면 알 일이지. 그리고 당신이 선이라고 누가 그러디?”

인류를, 나아가 세계를 광기에 덮인 멸망으로 이끌려는 놈들을 방해하는 일이다. 다른 일에선 몰라도, 이 일에 한해서는 내가 선이다.

나는 꿀릴 게 하나도 없이 당당하다.

“부동명왕의 이름을 걸고, 이곳을 수호할지어다!”

불상이 찬란한 빛을 뿜는다. 내 눈에는 그게 마지막 발악으로 보인다.

“그럼 막아 봐.”

내 손에 검은 구슬이 나타난다. 인류 최종 방어선은 몇 개나 버텨줄까? 즐거운 마음으로, 핵탄두가 공간을 가로지른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수호하는 최후의 수호신은 핵탄두 10개에 무릎 꿇었다. 역시 화력이 최고야. 핵이야말로 이상적인 폭력이요, 신앙이다. 핵 만세!

수호신은 마지막까지 역할을 다했다. 본인은 죽었지만, 건물은 외견이 조금 부서진 것 빼면 멀쩡하다.

“이거 전자 락 걸려있는데?”

“제가 할게요.”

최후의 전자 잠금장치도, 자칭 해커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돔 형태의 건물의 문이 열리고, 거대한 마법진이 드러났다. 건물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마법진이 땅은 물론이고 벽면까지 가득 메우고 있고, 안쪽에는 몇 개의 심장이 맥동하고 있다.

“저건 뭐냐?”

“드래곤 하트.”

라팔이 대답한다.

이게 회귀 마법. 인류 최후의 희망인가. 마법진을 이루는 요소를 모두 머리에 담고, 마법진 자체를 지워버린다. 드래곤 하트는 라팔이 먼저 가서 챙겼다. 나에게는 필요 없으니 보고만 있었다.

혹시 모를 남겨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까지 지워버리기 위해 달 기지에 핵폭탄을 사용해 깡그리 지워버렸다.

무음의 열풍이 퍼지고, 최첨단 기지가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만이 남았다. 기지 대부분이 우주로 날아갔고, 남은 것도 완벽히 지웠다.

여기서 무슨 흔적을 찾으려 해도 못 찾겠지. 내 마력의 잔향이 남아 있으니 사이코메트리를 써도 무리다. 완벽한 뒤처리다.

“가자.”

아공간에 넣었던 셋을 꺼내고, 달 반대편에 있는 가마에 올라탄다. 우리는 지구로 귀환했다.

내가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나흘 후였다.

========== 작품 후기 ==========

달 : 아놔.......

북대륙으로 돌아온 우리는 아직 낮임에도 퍼질러 잤다. 우리가 달로 출발한 것이 밤이고, 달에서는 밤낮 구분이 없어 자지도 않고 활동했다. 그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와 쿨쿨 잤다.

그리고 이틀간 밤하늘은 보지도 않았다. 나흘 뒤 밤,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이상했다. 떠나기 전까지는 보름달이었는데, 한쪽이 휑하다.

“야.”

불안감에 내가 유상민을 불렀다.

“왜요?”

여유가 없는 건 이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가마 타고 나올 때, 뭔가 쎄 했지?”

“달이 움직였어.”

“달은 항상 움직이고 있고.”

그래, 달은 항상 움직이지. 그러니까 내가 예상한 그게 아니길 빌자. 예이, 설마. 그랬겠어. 그렇지?

“그거랑은 조금 달랐는데요.......”

“야, 너 세종하고 연락할 방법 가지고 있지?”

“탐지 당할지도 몰라서 어지간해서는 쓰면 안 되는 물건인데요.”

“이게 안 어지간한 상황으로 보이냐?”

“그러게요......?”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꺼낸 유상민이 어쩔 수 없이 세종과 연락한다.

-무슨 일이야?

꼬맹이가 전화를 받는다.

-팀장님. 하늘에 달 한 쪽이 비는데요?

-어디 틀어박혀 있다 나왔어? 달 떨어졌다. 어젯밤에.

.......

일동 침묵. 나를 포함해 모두가 침묵한다.

최악의 상상이 떠오른다. 하하, 아니겠지. 다른 표현일 거야. 떨어졌다는 말 많이 쓰잖아? 시험에서 떨어졌다. 직위가 떨어졌다. 권위가 떨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졌...... 아니, 이거 말고.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닐 거야.

-달 일부가 분리되었는데, 얼마는 우주로 흩어졌고, 또 나머지는 중간계에 떨어졌다. 떨어진 건 바다인데, 그거 때문에 해일이 일어나서 해안가가 초토화됐어. 남대륙과 북대륙 사이에 있는 바다가 죽음의 바다가 됐다. 그나마 땅에 안 떨어진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그랬다면 지금쯤 우리는 태양도 못 보고 있을 테니까.

떠들던 꼬맹이가 전화 너머로 우리 반응을 느꼈는지 잠깐 침묵한다.

-야, 설마....... 아니겠지? 아니라고 해봐. 야! 야!

농담조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꼬맹이가 다급하게 소리친다.

차마 통화를 계속하지 못하고 유상민이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말한다.

“떨어졌다는데요. 여기에.”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그리고 진휘님.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해 요만큼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무죄입니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암요, 아무도 모르고 말고요.

핵폭탄 하나 터뜨린 거 가지고 달이 분리될 줄 알았겠냐고.

전부 인류 연합이 잘못 한 거고, 달이 잘못한 거다. 왜 그렇게 허약해. 폭탄 하나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질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지.

그런데, 달이 조금 부서져서 떨어진다고 무슨 큰일이야 있나? 아무 일 없으면 된 거잖아. 밤에 조금 어두운 것 정도야 마법으로 해결 가능한 일이고.

“유성이 떨어지면 무슨 큰일이라도 생기냐?”

“글쎄요......? 생물이 멸종하지 않을까요.”

아무 일 없는 게 아니었다.

“그쪽 전공은 아니라 잘 모르겠는데요. 일단 해양 생태계부터 망할 거 같은데요?”

“결론만, 결로만 짧게.”

말을 끊는다. 길게 듣고 있다간 내가 패닉에 빠질 것 같다.

“생물이 멸종할 거 같은데요? 멸종까지는 안 가도 생태계가 완전히 바뀔 거 같은데요.”

안 들을 걸 그랬다.

저놈이 말한 거지 완벽하게 들어맞진 않아도, 비슷하게는 들어맞겠지. 인류를 구하려다 생물을 멸종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다. 판다가 개코원숭이 같은 종족 하나가 아니라 생물 전체가.

인류도, 몬스터도, 이종족도, 모두 멸종위기종으로 등록하고 관리해야 할 입장이다. 어디 등록, 관리해줄 외계인은 없나........

없어도 문제고, 있어도 문제군. 인류의 미래는 동물원 동물 아니면 부패한 시체다. 썩은 시체에서 다른 생명이, 문명이 꽃피길 기도하자. 정말로 간절히 기도하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아, 이건 아닌가?

인류는 인류고 나는 나다. 생명이 멸종하든 말든 나와는 모두 관계없는 이야기다. 최우선 목적과 차우선 목적을 잊지 말자. 신을 몽땅 죽이고, 인류 연합을 쓸어버린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난 신과 인류 연합을 깨부수고 죽겠다. 지구가 멸망한다고 내가 죽을 것 같지도 않지만.

유상민에게 묻는다.

“신이 있는 장소를 특정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냐?”

“봐야 알겠지만, 자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요. 근처에 나라가...... 하나 있네요.”

“그건 털자는 소리 맞지?”

“네.”

나라 하나 말아먹자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나랑 같이 다니더니 더더욱 미쳐가고 있다. 내 광기는 혹시 전염성이 있는 건가?

이거, 생각보다 신뢰도 높은 이론일지도 모르겠다. 내 주위에 멀쩡한 인간이 있었던 적은 단 거의 없다. 아무리 내가 운이 없다고 해도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미친놈들이 득실대는 중간계야 납득하겠지만, 아갈리에서도 그랬다면 조금 다르다. 이건 명백히 이상하다.

과연, 나는 광기의 근원이었던 건가. 내가 맘먹고 세계 일주 한 번 하면 세상이 맛이 가겠구나.

실증도 이미 있다. 남대륙은 이미 맛이 갔고, 북대륙도 이미 죽음의 땅이 하나 생겼다. 이론에 실증까지 완벽하다.

관찰 결과. 내 광기는 전염성이라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나도 내 광기가 두려워진다. 내 진명은 혹시 파괴신이나 이런 것이 아닐까? 난 놈의 작업이 끝나는 날이 기대된다. 깊은 곳에 틀어박혀 있단 말이지.

통수 맞을까 항상 경계하고 있는데 큰 문제는 없다. 뭐, 통수치면 그날이 난 놈이 소멸하는 날이다.

“주변에 다른 나라는 없냐?”

“마족 나라랑 드워프 나라가 하나씩 있는데요.”

“가자.”

66마리의 스켈레톤이 땅에서 솟아나 가마를 들고, 가마가 이동을 시작한다.

***

인류 연합의 거점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약 삼 개월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어느 기점을 기준으로 하나둘씩 일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이제 악덕 기업에 근무하는 모양새가 되어 야근에 철야는 기본. 쉴 시간도, 잘 시간도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중국붕괴. 기술 유출. 생산 시설 강탈. 사상의 전파.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기술과 사상이 특히 그렇다. 그것들은 미래에 전쟁 발생의 촉매가 되는 만큼, 최대한 숨겨야 했다.

떠들썩하고 번잡스러운 분위기의 복도를 지나 중년인은 한 방 앞에 도착한다. 복도에 있는 여느 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디자인과 장식의 문에는, 어쩐지 범접하기 힘든 기세가 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중년인은 안으로 들어갔다. 진재윤이라는 명패가 놓여 있는 자리에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서류를 보고 있는 사람. 저 사람이 바로 인류 연합의 연합장이었다.

“음, 아. 왔나. 달 기지는 어떻게 됐지?”

“영상, 녹음. 그 어느 것도 송신된 흔적이 없습니다. 누구의 짓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달 기지가 무사하길 바라는 건 무리겠지.”

달 분리의 원인이 된 폭발 자체가 달 뒷면에서 일어났다고 추측되고 있다. 그렇게 폭발로 분리된 파편 중 일부가 지구로 추락한 것이 이번 사건의 진상이다. 진상이라고 해도 예측도일 뿐. 정확한 건 아직 나오지 않았다.

급한 대로 선박을 수배해 유성이 떨어진 자리로 파견 보내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유성을 건질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 달 기지의 상태가 어떨지는 더더욱 절망적인 상황이다.

유일하게 다행인 점은 유성이 떨어진 자리가 바다라는 것과, 충분한 관측이 이루어져 흔적을 찾기는 비교적 쉬울 거라는 점. 바다라는 장소의 제한성이야 마법과 진명으로 해결하면 되었다.

“하필 이 시점에.”

연합장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필 이 시점이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이 시점.

회귀 마법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극소수지만, 그 소수는 모두 막중한 임무와 자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희망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다. 그 희망, 마지막 희망이 꺼져버렸다. 땅으로 꺼져 저 바다 밑에 존재한다.

연합장이 신색을 다잡고,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예상되는 범인은?”

“전혀 없습니다.”

“후우.......”

그러나 그 신색은 금방 무너졌다. 모든 것이 구렁텅이였고, 꼬인 실타래는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엉망으로 진창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빠지고 있었다.

“그건 뭐지?”

연합장이 중년인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서류 다발을 가리켰다.

“과학부에서 보내온, 이후 상황의 시뮬레이션입니다..”

“줘보게.”

서류를 들여다본 연합장은 우선 한숨부터 쉬었다. 보고서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운석 충돌 직후 생태계가 극변 또는 멸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그리고 그로 인한 전쟁 준비의 필요성.

첫 소절부터 이렇다. 충돌의 충격으로 인한 자전축의 변화니, 급격한 온도 변화니 하는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전쟁. 그토록 미루고 미룬 일이 또 한 발 가까워졌다.

“설마, 이것도 그자가 관련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달 뒤편입니다. 보통은 떠올리지도 못하는 장소엘 굳이 갈까요.”

말로는 그러면서도 둘 다 그렇지 않다고 확신은 못 하고 있었다. 이런 일에는 꼭 그자가 한 발 걸치고 있었다. 이번 일도 그럴 것만 같은 예감이 자꾸 들었다.

“회귀 마법의 원안만 가지고 다시 사람을 차출해 연구를 시작해야겠어.”

“드는 자원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달 기지 설립도 그랬다. 마력이라는 무한의 동력원이 있으니 달까지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기지 건설에 사용된 자재와 인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인류 연합 입장에서는 기지를 잃은 것보다 상주하던 인재들과 그들이 연구한 연구 자료를 잃은 것이 더 뼈아팠다. 기밀을 위해 달의 자료는 중간계로의 반출이 금지되어 있었다. 심지어 머릿속에 담아 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전생의 마지막에 회귀가 성공한 것은 기적, 확률이 소수점 아래로 몇 개나 찍히는 기적이었다. 그걸 확실한 수단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 그 연구였고.

자료가 사라졌으니 연구도 백지화되었다. 이보다 절망적일 수가 없다.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인류가 처한 상황은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고, 언젠가 회귀 마법이 다시 필요해질 날이 올 수도 있었다. 그럴 날을 대비해서라도 연구는 진행되어야 했다.

다시 시작하려면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인력이 들 것이다. 한 번 파괴된 전적이 있으니 다시 달에 짓는 것도 무리일 것이고.

굳이 심정을 말하자면, 막다른 길에서 올인을 던지는 도박꾼의 심정.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만큼 우리가 열심히 움직여야지.”

“후.......”

연합장과 중년인의 낯빛은 암울했다.

***

중간계에서 마족이란 나쁜 놈들이 아니다. 마족(魔族), 마법(魔法). 마력(魔力). 전부 비슷한 말이다. 마력으로 마법을 쓰고, 마족이란 마력을 다루는 것이 뛰어난 종족을 말한다.

판타지에서 나오는 마냥 그런 놈들은 아니다.

‘대신 마력에 자신 있는 만큼 거친 종족들이 많은데요.’

라는 것이 유상민의 설명이다. 우리는 마족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사람 셋에 라미아 하나, 애완동물 하나의 극히 정상적인 집단이다만, 누구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려 하지 않는다.

호전적인 종족이라더니 여긴 낯가림 심한 부끄럼쟁이들의 땅인가 보다.

그런가 싶으니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앞쪽에서 소음이 인다.

“이놈들아! 그게 뽑는다고 뽑히는 줄 아느냐!”

“아니, 그럼 아가씨가 뽑아 보든가!”

“그걸 뽑을 수 있으면 내가 뽑았지!”

“제길, 뭐가 전설의 마검이냐! 이 땅과 함께 뽑아주마! 끄아아아!”

“야, 그러면.......”

“끄으윽!”

“반동 돌아온다니까.”

땅에 꽂힌 검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시끌벅적 떠들고 있다.

뽑는다? 전설의 마검? 뻔한 사건의 냄새가 난다.

아주 뻔한 사건은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는 법이다.

========== 작품 후기 ==========

중간계와 유성이 충돌했습니다. 충격으로 중간계 행성의 자전축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생물 멸종 카운터가 작동합니다.

내가 다가가자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이 술렁인다.

“저게 뭐야?”

“수인인가......?”

“아니, 그래도 저건.”

눈들은 나비와 나 사이를 왕복한다. 목줄도 똑바로 해놨는데, 왜 그래? 역시 수인은 애완동물이 아닌가? 수인, 반은 동물이잖아.

어딜 가나 꽉 막힌 놈들이 문제다. 마음을 넓게 먹고 너그럽게 봐주면 세상만사가 모두 여유로워 걸릴 것이 없을 건데, 몸도 마음도 머리도 꽉꽉 막혀서는.

“비켜봐.”

인파를 헤치고 검 앞에 선다.

그에 따라 시선이 분산된다. 나한테 반, 나비한테 반.

바지가 불룩해진 놈들도 있군. 애완동물에 발정하다니. 저것들은 변태인가. 나? 나는 미친놈이고.

“이거 뽑으면 뭐 주냐?”

“달에서 떨어진 마검이라오, 형씨. 그걸 뽑으면 엄청난 힘을 준다던가.”

머리에 뿔 난 악마가 친근한 척 말을 건다. 이죽거리며 낮잡아보는 눈빛이 재수 없다. 뿔을 잡고, 부러뜨려 주었다.

“끄아아!”

“시끄러.”

명치를 발로 차 닥치게 만든다. 악마가 웅크려 앉아 컥컥댄다. 좋아, 조용해졌군. 침묵은 중요하다. 조용한 건 중요해 시끄러운 것들은 전부 죽어야 한다.

그나저나 마검이라. 생긴 건 보검이나 명검처럼 생겼는데, 보석 장식도 달려 있고, 손잡이 부분의 장식도 거창하다. 그리고 은색으로 빛나는 검신. 보통 검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달에서 떨어져?

달에 이런 것도 있었나? 모르겠다. 달을 전부 둘러 본 게 아니라서.

어쨌든, 달의 추락과 비슷한 시기에 여기 나타났다는 거겠지.

검의 손잡이를 잡고 힘을 준다. 뽑히지 않는다. 땅과 함께 뽑을 기세로 더욱 힘을 주자 검에서 짜릿 전류가 타고 올라온다.

주인을 가리는 검이라. 재미있군. 주인을 가리는 무기는 몇 개 만나봤지만, 전부 하나같이 날 거부했다.

마검이라면 주인을 가릴 리 없으니, 주인을 가리는 검은 모두 성검이나 보검이라는 소리인데, 그런 놈들은 어쩐지 날 싫어하더라. 성검이라 불렸던 검들의 최후는 처참했다.

주인도 골라가면서 가려야지.

검의 저항이 강해진다. 팔을 타고 전기가 흐르고, 옷이 불타 재가 된다.

“형씨, 거기까지 하라고! 팔이 타고 있잖아!”

“그냥 확 가버려! 사내가 팔 하나 정도야!”

구경꾼들이 환호한다. 하지 말라는 놈도 은근히 내가 더 해주었으면 하는 눈치다. 그러나 나는 손을 떼고 물러난다.

“포기해?”

라팔이 내 옆에서 묻는다. 라팔이도 검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다른 우리 일행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니들 차례는 없다. 이놈은 나에게 이빨을 드러냈어.

“설마.”

어깨를 으쓱하고 아공간에서 전백귀후십귀를 뽑는다.

이놈이 보검이나 성검이라면, 전백귀후십귀는 광검이다. 미친검.

전백귀후십귀를 땅에 찔러 넣는다. 이름 모를 보검의 바로 옆에다가.

식물을 번식시킬 때는 이런 식으로 접붙인다고 들었다. 검끼리 접붙이면 뭐가 태어날까. 광검과 보검이 접붙여진다. 광검이 부르르 떨리고, 이어서 보검도 진동한다.

오오, 이놈들끼리 뭐가 하는 모양이다. 내 눈에는 광검이 좋아서 날뛰는 걸로 보인다. 뭔지 몰라도, 저 보검은 암컷인가보다. 암컷 검이라, 진짜 접붙이면 임신이라도 하려나? 새로운 종족의 탄생인가. 난 어쩌면 역사적인 장면을 눈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검의 진동이 강해진다. 보검이 번개를 뿜어내고, 전백귀후십귀가 방사능으로 보검을 감싼다. 저건 그건가. 강간.

검이 검을 강간하다니.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눈이 의심되는 광경이다. 뭐야, 진짜 접붙이고 있어?

부르르 떨던 보검이 침묵한다. 그리고 제멋대로 땅에서 뽑혀 나왔다.

-꺄악! 저 미친놈 좀 어떻게 해봐! 해보라고!

보검이 하늘을 빙빙 날아다니며 말하기 시작했다.

“말하는 검이라는 것도 있냐?”

“에고 소드. 가끔 있어.”

“그렇냐.”

주인을 가리는 검도, 인격이 있다고 생각되는 그런 검도 봤지만, 진짜 말하는 검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날아다니던 검이 내 앞에서 딱 멈춘다. 검끝이 내 미간을 향한다. 어쩐지 눈이 마주친 기분이군.

검에서도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다. 마치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을 들켰다는 듯이. 검임에도 감정의 동요가 확실히 느껴진다.

나는 전백귀후십귀를 뽑아, 하늘에 있는 검에 가까이 가져간다.

-꺄아악!

보검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난다. 훠이, 훠이 훠이.

-꺄악! 꺄아악! 하지마! 가까이 오지마아아!

검이 소리 지르며 하늘을 난다. 요리조리 검신이 휘어져서 하늘에 있는 지렁이 같다. 전백귀후십귀가 닿지 않도록 하늘로 올라간 검이 소리 높인다.

-아아! 들켰다아아아!

무릎 꿇고 좌절하는 소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소녀인가. 목소리도 소녀에 가깝군.

하늘로 올라간 검을 낚아챈다. 검이 몸부림치며 번개를 뿜어댄다.

엄청 시끄럽다.

-싫어어어! 놔 줘어어! 너같이 나쁜 사람은...... 히이익!

전백귀후십귀를 가까이 가져가자 기성과 함께 검이 조용해진다.

검이 말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거지만, 검이 말할 때마다 검의 안쪽에서 작은 영혼이 명멸하고 있다. 진짜로 영혼을 가지고 있다. 소녀틱한 에고 소드다.

“너, 이름은?”

-누가 너 같은 악마에게...... 히이이익! 란페이에요오오!

전백귀후십귀를 가져가자 바로 대답한다. 야, 대체 무슨 짓을 하면 에고 소드가 이런 반응을 보이냐. 진짜 강간이라도 한 건가? 검이 검을 강간하다니, 이건 무슨 미친 소리야. 둘이 접붙이면 뭐가 나오는 건데.

에고 소드가 하나 더 나오나? 내가 떠올려서 실행한 일이지만, 결과를 통 모르겠다. 어디 이런 검이 흔해야지.

란페이가 내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발버둥 치길래, 아예 전백귀후십귀랑 엎어버렸다. 사람으로 치면 전형적인 덮치는 자세다.

-싫어어! 살려줘어어! 싫어어어!

번개가 튀고 란페이에서 뿜어진 마력이 돌풍을 일으킨다. 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꽉 쥔 내 손가락은 단단하다. 신체 내구도적으로는 아직 여유가 있다.

나는 아예 전백귀후십귀와 란페이를 비비기 시작했다.

-아, 안 돼! 거긴 안 돼에에에! 흐아아앗!

음, 이건 그건가? 세계 최초의 검 공개 교미 공연? 검끼리 노출 플레이?

처음에 돌풍과 번개에 놀라 도망가던 구경꾼들도 이제 이 세기에 다시없을 공연을 구경하기 위해 모였다.

나는 아예 판을 깔아주었다. 연금술로 단단한 지반을 만들고, 거기에 두 검을 접붙인 상태로 v모양으로 꽂았다. 뽑히지 않도록 마력으로 꽉 잡아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침실 문을 잠갔다.

전백귀후십귀가 방사능을 뿜어대고, 란페이가 번개와 마력을 뿜는다. 반항도 오래가지 않았다. 란페이가 잠잠해진다. 포기했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란페이가 찬란한 빛을 뿜는다.

눈이 아플 정도의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한 명의 소녀가 내가 마련한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소녀라기엔 나이가 많고, 처자라기엔 적다. 처녀 정도가 적당할 듯하다. 처녀라 하니 마을 처녀가 생각난다. 나한테 지렁이처럼 밟혀 죽은 마을 처녀.

처녀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도망친다. 세 발짝도 못 가서 내 마력에 붙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처녀가 발버둥 친다. 옷 사이로 붉은 유두와 음부의 균열이 그대로 보인다.

날개옷이라고 할까. 처녀의 옷은 음부와 유두만 간신히 가리는 얇고 노출이 많은 옷이다. 움직일 때마다 보여선 안 될 부분이 엿보인다.

빠져나가려는 처녀를 내 앞으로 옮긴다. 바둥거리는 소녀의 음부로 손가락을 쑤욱 넣는다.

“힉?!”

처녀가 동작을 멈춘다.

“역시 급소를 제압당하면 멈추는 건 다 똑같아.”

사람뿐만 아니라 검에게도 통하는 기술이었다니. 고환 가격과 더불어 음부에 손가락 넣기는 궁극의 비기로 전승될 필요가 있다. 나는 계파 창시자 겸 제1 전승자로 널리 이름을 날릴 거다.

문파 이름은 뭘로 할까. 고환 가격파? 음부 제압파? 남녀평등파면 되겠다. 남녀 가리지 않고 제압해 버리는 최고의 방중술을 배우는 실전 방중술 방파다.

“그, 그만!”

실전 방중술 1장 1절. 손가락을 넣었으면 쑤셔라. 손가락이 깊숙이 들어가자 처녀가 기겁하며 손으로 음부를 가린다. 그러나 그러면 더 깊이 들어갈 뿐이다.

음부가 손가락을 전부 삼킨다.

실정 방중술 1장 2절. 쑤셨으면 발정을 써라.

“흐아아앙!”

야릇한 비음과 함께 처녀가 무너진다. 허공에 축 늘어진 처녀를 땅에 떨어뜨린다. 음부에 직접 발정 마법을 걸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고문부터 제압까지 발정 마법의 발전은 무궁무진하다. 침 흘리며 기절한 여자의 발목을 잡는다.

“아까 봐둔 여관으로 가자.”

얼빠진 구경꾼들 사이를 헤치고 나간다. 의식 없는 처녀가 안면으로 엎어진 상태로 땅에 질질 끌린다. 검 이름이 란페이였으니 처녀 이름도 란페이인가? 깨어났을 때 물어보면 알겠지.

“저, 저기요! 자, 잠깐만요!”

처녀를 끌고 가고 있으니 뒤에서 누군가 누가 내 팔을 잡는다. 아까 이 에고 소드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아가씨다. 작은 체구에 구리빛 피부. 그리고 여섯 개의 손가락, 드워프인가. 팔을 잡은 손아귀 힘도 약하지 않다.

“왜?”

“그, 검...... 아니, 그 여자를 양보해 주면 안 될까요? 원하는 무기가 있다면.......”

드워프답게 무기로 협상해보려는 모양이지만, 번짓수를 한참 잘못 정했다.

“이것보다 좋은 무기 줄 수 있냐?”

전백귀후십귀를 들이민다. 드워프 아가씨가 얼굴을 찌푸린다. 자기 애인을 빼앗긴 것 때문인지 이놈은 자기가 왜 광검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쉽게 말해 지랄 발광을 떨고 있다.

그 기세는 눈으로 봐도 보일 정도. 불길한 붉은 기운이 검을 감싸고 흐른다.

드워프 아가씨가 주춤하며 물러난다.

“없지? 그럼 꺼져.”

팔을 뿌리치자 드워프 아가씨가 나동그라진다. 남녀평등? 개나 줘라. 적당한 여관을 찾는다. 따라다니는 시선이 귀찮아 살기를 한 번 비춰주자 전부 기절해버렸다. 쯧. 마력이 강한 종족이면 뭐해. 정신력이 글러 먹었다.

“자, 잠깐만요!”

글러 먹지 않은 놈도 하나 있다. 놈이 아니라 년이지. 드워프 아가씨가 파리한 얼굴로 날 따라 잡는다.

“일단, 일단 저희 나라에 오시면 어떻게든 될 거예요! 저희 할아버지가 명장이시거든요!”

“명장?”

“드워프 나라에선 실력이 곧 권력. 명장이면 권력자야.”

라팔이 말한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이년과 이 검 처녀를 미끼로 하면 드워프의 나라에서도 날로 먹을 수 있다는 말이지?

“좋아. 가서 생각해보지.”

“정말이죠? 정말이죠?”

드워프 아가씨의 얼굴이 환해진다. 몇 번이나 나에게 확인하고는, 내일까지 준비해올 테니 기다리란 말만 남기고 달려가 사라진다. 기껏 마족 나라에 왔는데 바로 드워프 나라로 가게 생겼나.

신에 대한 단서만 잡을 수 있다면 됐나. 영혼을 소멸시키는 방법도 알았다. 이제 신과 싸워도 된다. 죽여도 그 영혼이 흩어질 걱정은 없다.

처녀를 끌고 여관방을 오른다. 쿵쿵쿵 계단에 머리를 찧는 충격에 처녀가 깨어난다.

“놔! 이거 놔! 노라고!”

정신을 차리더니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 여관방으로 들어간다. 방은 두 개 잡았다. 유상민 하나. 나와 좆집들 하나. 나와 좆집들이 쓰는 방 3개를 합친 커다란 방이다.

애완동물도 데려올 수 있는 여관이라 다행이다.

“냥!”

발버둥치는 처녀의 손에 맞고 나비가 계단을 구른다. 굴러떨어져도 상처 하나 없겠지만, 흠. 내 물건에 손을 댔다 이거지?

여관방에 들어와 밧줄을 꺼낸다. 천장에 처녀를 묶는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마력! 내 힘!”

그냥 간단하게 봉인했을 뿐이다. 굳이 그걸 가르쳐줄 필요는 없겠지.

아공간에서 메스를 들고, 처녀의 배를 가른다. 선혈과 함께 가죽이 벌어지고, 핑크색 내장이 보인다. 중력에 따라 내장이 앞으로 흘러내린다. 으, 징그러. 아니, 아름답나? 핑크빛이 참 예쁜데.

“검이 인간으로 변한 건 처음 보거든. 내장도 사람하고 같을까?”

“사, 살려.......”

“마법의 발전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 될 거야.”

대를 위한 희생이니 너의 죽음과 고통은 정당하다. 악당들이 가장 잘하는 말이 이런 거였지 아마?

========== 작품 후기 ==========

자기 주인한테 ntr 당한 전백귀후십귀..... 주인 잘못 만나 검도 고생입니다.

p.s 저번화의 내용 일부가 수정되었습니다. 메인 스토리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니 변한 내용을 보시려면 저번화의 작가의 말 정도면 참고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발전하는.... 무리수두지 않는, 생각하는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문과를 쥬깁시다.... 문과는 나의 원수.

처녀의 내부는 사람하고 똑같다. 다른 점은 깨끗하다는 점? 사람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오염이 전혀 없다. 창자 안을 벌려 봐도 마찬가지. 사용되지 않은 새것이다.

소꿉놀이, 아니. 창자놀이는 예전에 졸업했다. 창자 줄넘기는 뜻밖에 어렵단 말이지. 창자가 끊어지지 않도록 2단 뛰기 하기가 제일 어려웠다.

“으아. 으아아.......”

처녀는 언어가 되지 않는 말을 입에서 뱉는다. 고개를 내리면 훤히 드러난 자신의 장기가 보이는데 무리도 아니려나. 뱃가죽이 벌어져서 심장과 폐, 간 등이 전부 보이는 것이 인체모형이다.

이대로 초등학교에 가져다 놓으면 좋은 인체 모형이 될 것이다. 아이들의 과학 시간을 책임질 뛰어난 교재. 초딩들이 트라우마에 걸릴 것 같다. 아니면 좋지 않은 취미에 눈 뜨던가.

개복한 건 상반신만이라 하반신, 그러니까 음부는 훤히 드러나 있거든. 옷이야 입으나 마나한 날개옷이었으니 옆으로 걷으면 꾹 다문 음부가 훤하다는 뜻이다.

이런 장면을 보고 성적으로 흥분하면 그 꼬마는 미래가 유망할 거다. 내가 데려다 키우고 싶어질지도.

“야, 어이. 검.”

뺨을 때려 넋이 나간 처녀를 일깨운다. 어버버 방어하는 처녀에게 묻는다.

말 못하는 입과 달리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이 예쁘다. 짙은 붉은색의 심장이 힘차게 뛴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소리까지 들린다.

근본적인 고통, 생명의 고동이다. 음. 이걸 손에 쥐고 힘을 주면, 퍽. 하고, 펑. 해서 꼴까닥. 인가.

“삼초 안에 말 안 하면 터뜨린다? 셋, 둘, 하나.......”

“란페......!”

“늦었어.”

심장을 움켜쥔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진다. 내 손아귀에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심장조차도 이런 데 그 주인은 꼴사납게 기절이나 하고 있다.

심장은? 멀쩡하다. 그냥 겁만 줬다. 협상 카드로 써야 하는 손패를 내가 직접 찢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짜 심장을 터뜨려도 대체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개복했던 배에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린다. 뱃가죽이 자라나 멋대로 들러붙는다. 깔끔하게 붙은 배에는 흉터 하나 없다.

개인적인 화풀이는 이 정도면 됐고, 본격적인 심문의 시작이다. 여관에 있는 탁자에 란페이라고 판명난 처녀를 앉히고,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는다. 그리고 양손을 포개서, 그 위에 송곳을 꽂는다.

“꺄아악!”

란페이가 깨어난다.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일단 손톱 두 개를 뽑는다. 비명이 더 거세진다. 마력과 힘이 모두 봉인된, 허약한 처녀의 몸으로 하는 반항이 효과가 있을 리 없다.

이건 강간당하기 좋은 여성의 표본이군. 예쁘고 힘없고, 성깔 있고. 삼박자를 모두 갖췄다. 어디 술집에 들여보내면 10분 내로 납치당하거나 그 자리에서 강간당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저항하다 약 몇 번 놔주면 스스로 허리를 흔들 것 같다. 어떻게 그리 잘 아냐고 물으면 본 것과 들은 것과 직접 해본 것의 삼박자가 내 머리에서 트위스트 추고 있으니까.

그냥 보고 듣고 해봤다는 뜻이다.

강간에 대해 큰 가치를 두지는 않지만, 여자를 망가뜨리는데 이것만큼 유효한 수단도 잘 없다. 그래서 몇 번 써먹었다. 반대로 남자 인생을 망치려면 여자가 최고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천적이며 공생 관계다. 복잡 미묘한 관계다.

란페이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손톱이 뜯겨 나가고 드러난 연약한 피부를 바늘로 꿰뚫는다.

란페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비명도 토하지 못한다. 고통에 비명과 호흡이 콱 막혀 목에서 넘어오지 않고 있다. 눈코입은 눈물, 콧물, 침으로 범벅이다. 의자도 축축해져 아래로 오줌이 떨어진다.

책상과 바닥이 모두 질퍽질퍽하다.

“야, 숨 쉬어.”

등을 두드리자 그제야 란페이가 막혔던 숨을 몰아쉰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침과 콧물이 뚝뚝 떨어진다.

알몸으로 처녀가 체액을 뚝뚝 흘리며.avi

이 영상을 저장해서 저런 제목을 붙이면 불티나게 팔리겠지? 내용물은 야동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고문 영상일 거다.

“그 눈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해 탁하고 어두운 눈이다. 잘난 척 떠들더니 고작 이 정도인가. 실망감까지 든다. 우리 사랑이는 이 정도는 웃으면서 받는다고. 웃는 걸 넘어 좋아 죽으려 해서 문제지.

지금도 옆에서 부럽다는 듯 란페이의 손을 보고 있다. 포개어져 송곳에 꿰뚫리고 손톱이 뽑힌 손을.

“너는 누구도 어쩌다 거기 떨어진 건지, 전부 말해.”

입이 열리지 않는다. 강제로 입을 벌리고, 앞니 하나를 비틀어 뽑는다. 잇몸이 파열되며 피가 쏟아진다.

“삼초 줄게. 삼, 이, 일.......”

“나, 나는 한때 인간이었, 악......!”

“말투가 영 불순하다?”

“인간이었슙니다.”

잇몸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란페이가 입을 연다. 이빨 두 개가 없어서 발음이 조금 샌다.

이야기는 이렇다. 란페이는 인간으로 5천 년 전, 아마 쩨쩨하게 주는 창녀와 같은 세계에서 소환된 인간이다.

인간이 멀쩡히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시간대는 자칭 신, 타칭 마을 처녀인 몸도 못 대주는 창녀보다는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란페이의 진명은 인간. 사람의 진명이 인간인 것이 무슨 쓸모란 말인가. 그러나 어딜 가나 미친 인간은 존재했고, 그 인간은 이렇게 생각했다 한다.

-인간이 아닌 사물이 인간이라는 진명을 가지면 어떨까.

공교롭게도 그 미친놈은 영혼계열 진명을 가지고 있었고, 란페이의 영혼을 검으로 옮겨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에고 소드가 탄생했다.

그 후 자신을 검으로 만든 미친놈을 죽이고 탈출, 우여곡절 끝에 주인을 찾았다.

좋은 주인, 좋은 동료와 함께 여행을 하던 란페이의 파티는 마지막에 드래곤을 상대하다 전멸. 그녀는 달에 봉인 당했다. 그랬다가, 얼마 전 달이 분리되며 봉인이 풀려 여기 떨어졌다는 것이다.

드래곤이 왜 이 검을 달에 봉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 빼면 발언에 모순되는 점은 없다.

그것보다, 이년. 중고잖아.

전 주인과 질펀하게 놀아났다. 전 주인과 연인이었다는데, 연인과 여행을 하며 성관계 한 번 안 했을 리가 없잖아. 처녀라고 부리기는 아깝고, 앞으로 중고라고 부를까.

여자에게 처녀를 요구하는 그런 짓은 안 하지만, 처녀라 판단한 년이 중고라니 내 예감이 빗나가서 순수하게 불쾌하다. 처녀를 가릴 거라면 내 좆집은 전부 탈락이잖아, 안 그래?

잠깐의 고문으로 중고는 피폐해졌다. 내 딴에는 약하게 한 것이다만, 중고에게는 버거웠던 모양이다. 중고 주제에 내구도도 약하다니. 이거 팔면 제값도 못 받겠다.

중고가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에 죄인용 족쇄를 채워두고 방치한다. 마력이 봉인되어 검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못하는 신세다.

손등에 뚫린 구멍과 뽑아낸 손톱은 치료하지 않고 놔뒀다. 저 상태로 검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변할지 보고 싶어서 그랬다.

기절한 중고의 음부에 전백귀후십귀의 손잡이 부분을 쑤셔 박는다. 이 새끼가 아까부터 자꾸 지랄이다. 아공간에 쑤셔놨는데, 공간을 뛰어넘어서도 전해지는 광기라니. 광견병 걸린 미친개도 이 정도로 미치진 않았을 거다.

그래도 음부에 쑤셔두니 조용해진다. 축 늘어져 음부로는 검을 물고 있는 여자. 초현실적인 광경이군.

중고를 놔두고, 내려가서 저녁을 먹었다.

슬슬 잘 시간이다. 오늘 밤 상대는 누구로 할까. 라팔이랑 사랑이를 둘이 놀게 하고 난 피오라랑 나비랑 놀아야지. 나비도 피오라라 궁합이 잘 맞는다. 고양잇과라 그런지 겁먹은 상대를 괴롭히길 좋아한다.

좆집과 애완동물 중에 어째 피오라가 서열이 제일 아래다. 불쌍한 피오라.

피오라를 불러 침대에 눕힌다. 하반신이 길어 꼬리끝을 말아야 겨우 침대 안에 들어온다. 두려운, 한편으로 기대감이 담긴 눈으로 피오라가 날 바라본다.

나에 대한 공포도 몸을 섞을수록 옅어지고 있다. 이런 반응을 즐기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떡정이란 생각보다 무섭구나 싶다.

정작 나는 그 떡정이란 것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일그러진 것인지, 지금도 필요하다면 라팔이 건 누구 건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다. 마음과 현실은 다르니 막상 상황이 닥쳐봐야 알겠지만.

역시, 정이란 것은 못 느끼겠다. 내 뇌리에 오가는 것은 호르몬 신호로 인한 한순간의 쾌락. 뇌내 마약이 제공하는 일시적인 감각일 뿐이다.

호르몬 이상 작용에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라니 그거야말로 비정상이다.

피오라에 나비까지 끼워서 한탕 즐긴 후, 피오라의 꼬리를 이불 대신 덮고 잠을 청한다. 변온 동물인 뱀과 달리, 피오라는 적정 체온이 확실히 있다. 이 거대한 꼬리도 자체로 따듯해 이불대신 덮고 자기 좋다. 무게가 조금 무겁지만, 그건 내 신체 능력으로 어떻게든 되는 부분이다.

몇 시인지도 모르겠다. 피오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숙면하는 중에, 불쾌감과 함께 눈을 뜬다.

“씌벌.”

질 낮은 살기. 아주 저열하고 짜증나고 귀찮은 살기는 노출되는 것만으로 불쾌해진다. 정제된 살기를 받으면 그 자체로 짜릿한 맛이 있다. 날 죽이겠다는 일심, 일념. 그건 사랑과도 닮은 감정이다.

열렬한 구애를 받고 기분 나쁜 사람은 없다. 적어도 나는 기분이 좋다.

반면 이건 그것과는 정반대. 사랑으로 비유하면 몸만 노리고 입에 발린 칭찬과 사랑을 지껄이는 것과 동급이다. 받아도 짜증만 나는 사랑이다.

본능적으로, 습관적으로 탐지 마법으로 사방을 살핀다. 낮에 나한테 뿔이 잘린 악마다. 그놈이 동료를 잔뜩 끌고 왔다.

얍삽하게 생겨먹었더니 하는 짓도 얍삽하구나. 마음에 든다. 정면 승부로 안 되면 측면, 후면을 때려서라도 이겨야지.

모든 권리는 승자에게서 나온다. 야비해도 일단 이기고 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저놈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질 싸움은 하지 말고, 그러기 위해선 상대를 알아야 하거늘. 내 초화상야 널린 게 수배서니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알았을 것이다. 정보 수집을 게을리한 것이 저놈들 패착이다.

-매직 미사일.

가장 기본적인 마법에 모두 머리가 꿰뚫려 죽는다. 꿰뚫는다 하니 좋은 생각이 났다. 그건 내일의 즐거움으로 두고, 잠이나 자자. 아직 새벽이다. 아침까지 세 시간은 더 잘 수 있을 것이다.

***

“저, 저건 뭐죠?!”

“검집.”

“저게 어딜 봐서 검집이라는 거야!”

그러는 너는 어따 대고 반말이야. 내가 불평하든 말든, 드워프 아가씨는 말을 쏟아낸다.

“저건 사람이라고! 사람을 저렇게 묶어두는 법이 어디 있어!”

“저건 검인데? 그것도 혼자서 날아다니는 위험한 마검.”

까놓고 말해 마검보다는 성검에 가깝지만.

“그러니까 마검을 담아둘 정도의 검집이 필요하지 않겠어?”

“저건 고문 기구잖아!”

“가시는 뺏어.”

드워프 아가씨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강철의 처녀. 아이언 메이든이라고 불리는 고문 기구가 있다. 내가 연금술로 제작한 특주품으로 내부의 가시를 제거하고 편안함과 안락함을 제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물건이다.

애꿎은 검에 찔려 다치는 사람이 나오면 안 되잖아?

“그래도.......”

따지고 드려는 드워프 아가씨에게 내가 쐐기를 박는다.

“저거 혼자 날아다니는 검인데, 날아서 도망가면 어쩌려고? 저 검이 필요한 거 아니었어?”

“.......”

드워프 아가씨가 침묵한다. 그래, 그렇지. 착한척해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결국 소수의 인권은 져버린다.

저 아가씨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종이었다.

날아다니는 검을 내버려두면 위험하지, 누구 머리를 꿰뚫을지 모른다. 그래서 특제 검집을 준비했다. 아주 튼튼한 놈으로다가.

검집도 구한 김에 드워프 나라까지 느긋하게, 가둬놓고 조교나 해볼 생각이다. 아이언 메이든 안에서 말이지.

========== 작품 후기 ==========

꿰뚫는다 -〉 마검이 날아다니며 사람을 꿰뚫는다. -〉 위험하다. -〉 위험하니 검집이 필요하다. -〉 아이언 메이든을 만든다.

의식의 흐름기법.

검집 하나가 추가되며, 안 그래도 기묘하던 우리 일행은 더욱 기묘해졌다. 사람 둘에 인형 하나, 라미아 하나, 애완동물 하나, 드워프 하나, 거기에 아이언 메이든까지.

이게 무슨 공통분모를 가진 집단인지, 어떻게 하면 이런 집단이 나오는지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지나가는 행인도 모른다.

모든 것이 우연이며 예언이고, 운명의 일치라. 운명을 관장하는 건 내 소관이 아니라서 이 일행이 만들어진 것도 어떤 운명의 조화로서니 할 뿐이다.

운명에게 항의하고 싶은 심정이다. 일해라 운명, 서류 처리가 엉망이잖아. 다른 누군가에게 갈 인과가 나에게 잘못 온 것이 틀림없다.

“너희 나라까지 얼마나 걸리냐?”

“오토바이를 타고 사흘이 걸렸어. 걸어서 이 주면 되지 않을까.”

이 아가씨, 아까 처음 말을 트더니 다시 말을 높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뭐, 상관없다. 내 권리만 침해하지 않으면, 기어오르지만 않으면 반말 정도야 너그럽게 봐줄 수 있다. 나부터가 연하든 연상이든 기본이 반말이니 남 말 할 입장도 아니다.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드워프 아가씨의 입에서 이상한 단어가 들렸다.

“오토바이?”

“5000cc에 석유 연료에 최신 마력 압축기술이 들어간 연료 탱크 장착! 부스터 기능 내장! 드워프의 최신 기술이 집약된 괴물 머신! 보고 싶어?”

“그다지.”

“아니야, 보면 분명 생각이 달라질걸?”

조그마한 가슴을 펴고 당당한 드워프 아가씨다. 돌연, 드워프 아가씨 앞의 공간이 흔들리며 오토바이 한 대가 나타난다. 할리라고 했던가? 그 오토바이와 비슷한 외견이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의 디자인은 이쪽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

“뭐, 좋아 보이긴 하네.”

“그렇지? 부품부터 디자인까지 내가 직접 만들었다고!”

“디자인은 어딜 봐도 할리인데요.”

유상민이 한마디 한다. 이놈도 남자인지, 오토바이가 보이자 관심을 보인다. 연료통으로 보이는 부분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그냥 최신 기술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 그건...... 진리끼리는 통하는 게 아니겠어!”

드워프 아가씨는 눈을 돌리며 얼버무렸다. 니가 봐도 티가 심하게 나긴 했구나. 진리라니, 할리의 숭배자냐. 드워프가 어디서 할리 데이비슨을 봤는지 미스테리다. 할리 데이비슨이 풀네임 맞지?

“그... 그런데, 저건 뭐야?”

떼굴떼굴 눈알을 굴리며 필사적으로 화재를 돌린다. 그 손가락을 나비를 가리키고 있다.

“애완동물.”

“어딜 봐도 사람이잖아!”

“사람을 키우지 말라고 누가 그랬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 상식은 누가 만든 거고?”

드워프 아가씨가 이놈 뭐냐는 눈으로 날 본다. 말싸움으로 날 이기려면 5년은 멀었다. 정치판에서 5년은 구르다 와라. 빌어먹을 정치인 새끼들의 궤변으로 단련된 것이 내 혓바닥이다.

“나비야.”

“냐앙.”

나비가 내 다리에 머리를 비빈다. 나는 허리를 굽혀 나비의 머리와 허리를 쓰다듬어준다. 본인이 좋다는데 타인이 어떻게 뭐라 하겠어?

드워프 아가씨는 망연하게 나비를 보고 있다. 나비가 한때 반신이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나름의 기밀이니 알려줄 수는 없다. 반신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비법이 있다고 하면 거짓말 안 보태고 모든 지성체에게 노려질 거다.

지금도 인간의 도시에는 못 들어가는데, 여기서 더 사회생활의 행동 범위가 줄어드는 것은 사양이다.

마을을 나와 방향을 잡는다. 아이언 메이든은 내가 끌고 이동했다. 내 손에 감긴 쇠사슬이 아이언 메이든과 연결되어 있다. 아이언 메이든이라고 부르니 길어서 귀찮다. 검집이라고 하자. 쇠사슬과 연결된 검집이 대각선으로 질질 땅에 끌려오다, 지금은 완전히 땅에 누워 있다.

일으켜 세우기도 귀찮다. 검집을 잠깐 땅에 두면 어때. 참고로 방음, 방광(防光)은 완벽하다. 검집 내부와 외부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이동 수단은 있어?”

드워프 아가씨가 할리를 꺼내 다리를 걸치고 묻는다. 작달막한 키로 큰 할리에 타려니 매달린 건지 올라탄 건지 구분이 안 된다. 혹시 그냥 할리는 키 때문에 못 타니까 직접 개조한 거 아닐까.

페달과 손잡이의 위치를 보니 가설이 신뢰성을 얻는다.

“있지.”

아공간에 주차되어 있던 가마를 꺼낸다. 66마리의 스켈레톤이 땅에서 일어나 가마를 짊어진다.

“이걸로 따라올 수 있겠어? 내가 천천히 가줘도 상관없긴 하지만.”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우월감이 드러난다. 할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구나.

“보면 알겠지.”

그 자부심을 산산이 조각내 주마. 이 가마가 누구의 가마던가? 내 가마다. 내가 만들었고, 내가 만든 언데드들이 들며, 하늘도 날 수 있는 마법의 가마다.

오토바이 하나가 우쭐댈 상대가 아니다.

“그래? 일단 한 바퀴 달려보고 올게.”

우렁찬 엔진음과 함께 할리가 달려간다. 흙먼지 일으키며 달려가는 속도가 꽤 빠르다.

“우리도 가볼까.”

“어떻게 따라잡아?”

할리는 벌써 저 앞을 달리고 있다. 걱정 없다. 이 언데드가 무엇인가. 네크로맨서의 실력에 따라 얼마든지 성능이 달라지는 놈들이 바로 언데드다. 그리고 지금 저 66마리 스켈레톤의 주인은 지상 최고의 마법사다.

스켈레톤의 안광이 푸르게 빛나고, 쩍쩍 갈라져 있던 낡고 변색된 뼈다귀들이 새것처럼 변하다. 흰색에 윤까지 흐르는 뼈를 가진 스켈레톤들.

“달려.”

내 명령에 따라 그놈들이 달린다. 이놈들은 스켈레톤이지만, 스켈레톤이 아니다. 스켈레톤을 초월한 스켈레톤이다. 가라 스컬 라이더! 가자 해골 가마!

가마가 질주를 넘어 폭주한다. 앞서가는 할 리가 시시각각 가까워진다. 뒤를 돌아본 드워프 아가씨가 사색이 된다. 가마가 오토바이를 따라잡는다.

“뭐야 그거! 이상하잖아!”

“늦으면 두고 간다.”

스켈레톤에 공급하는 마력의 양을 늘린다. 스켈레톤이 더욱 폭주하며 속도를 높인다. 할리가 저만치 뒤처지다가, 다시 가마에 따라붙는다.

부스터 기능도 달렸나. 안장 뒤쪽에 달린 파이프가 불을 뿜고 있다. 뭐야, 저거. 쓸데없이 멋지잖아.

“제길! 이것도 한 번 따라잡아 보라구!”

분한 듯한 드워프 아가씨의 외침과 함께 할리가 한 번 더 가속. 다시 앞으로 치고 나간다. 레이스로 도전한다 이거냐? 좋다, 그 도전 받아주지.

가마와 오토바이의 싸움이 시작됐다. 그리고 내가 이겼다.

“말도 안 돼...... 내 할리가 고작 저런 가마에.......”

드워프 아가씨가 할리에 엎드려 좌절한다. 애처롭게 자신의 애마를 쓰다듬는다. 할리야, 할리야. 중얼거리는 게 무섭다. 저 아가씨도 조금 이상해.

“내일 중으로 국경선을 벗어나겠는데요.”

지도를 보던 유상민이 말한다. 서로 폭주해 달리다 보니 예상보다 일정이 빨라졌다.

아이언 메이든, 검집을 땅에 내려두고, 입구를 연다. 보통의 아이언 메이든이 반으로 열린다면, 이건 앞쪽의 1/3 정도가 문처럼 열린다.

문을 열자마자 안쪽에서 날카로운 검격이 날아온다. 검이 내 목을 반쯤 가른다. 동맥이 제대로 잘렸군.

피가 솟구친다.

“꺄아악!”

드워프 아가씨가 소리치고, 이빨을 세우고 검집 안으로 뛰어드려는 나비를 목줄을 잡아 말린다. 동시에 밖으로 탈출하려는 검 하나를 잡아다 검집 안쪽에 거칠게 던진다.

전백귀후십귀를 꺼내 중고의 검신에 꽂아 버린다. 전백귀후십귀가 중고를 관통한다.

-꺄아아아악!

검에서 비명이 들린다. 내 광검이 미쳐 날뛴다. 저건 좋아서 날뛰는 거다. 어제 욕구 불만은 해소시켜 줬잖아. 역시 검끼리일 때가 마음에 든다는 거냐.

목의 상처가 재생된다. 중고가 요동치며 전백귀후십귀에게서 빠져나오려 하지만, 중고처럼 움직이지 못할 뿐이지. 자체적으로 가진 능력만 따지면 전백귀후십귀가 몇 단계나 앞선다.

저 광검은 무려 신을 죽이고 진화한 검이다.

몸부림치던 중고가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몰골이 엉망이다. 배는 전백귀후십귀에 관통당해 있고, 어제 고문의 흔적도 그대로다. 한 마디로 처참하다.

“제발, 제발 이 검 좀 뽑아주세요!”

“괘, 괜찮아?”

중고가 부탁하고, 드워프 아가씨가 나한테 와서 호들갑을 떤다. 쌍으로 시끄럽다. 그냥 둘 다 죽일까. 아서라. 얻을 게 있다. 화풀이는 적당히,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내가 중고에게 이러는 이유? 내 물건에 손을 댔다는 것. 내가 즐겁다는 것. 이 두 개.

그런 면에서 보면 중고야말로 나라는 재액에 대한 순수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겠다. 선량한 피해자. 날 보고 온갖 욕설을 해도 되는 존재다.

다른 놈들은 글쎄? 난 내가 먼저 시비 건 적이 그다지 없어서 말이지. 대체로 저쪽에서 먼저 날 건드렸다. 날 건드리고 대가를 치렀지.

내 목숨을 노려서 목숨으로 되갚아주니 마지막에 나 보고 나쁜 놈이라니 웃긴 노릇이다. 무슨 논리가 그래. 뇌가 빈 놈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런 면에서 중고는 나에게 복수를 주장할 수 있는 세 번째 사람 즈음 된다.

첫 번째는 서울에서 강원으로 가는 길에 만난 실망이와 걔들 파티다. 걔들은 어찌 지내고 있으려나. 망한 강원에 남겨졌으니 반은 죽었겠지? 안타깝게 됐다. 나에게 합법적, 아니, 합리적으로 복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간인데.

그놈들이 복수하러 온다고 곱게 죽어줄 마음도 없지만. 그래도 쬐금 봐줄 마음은 있다. 봐줘서 곱게, 편하게 죽여줘야지.

마력이 봉인됐을 때는 파들파들 떨더니, 봉인을 풀어주니 기가 살아 설친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입장에서 얌전한 것도 이상한가. 힘이 없을 때라면 모르되, 중고가 가진 마력은 적지 않은 양이다. 내가 만났던 반신들의 평균에 조금 못 미친다.

전백귀후십귀를 중고의 배에서 뽑아낸다. 철철 흐르는 피에 내 피를 떨어뜨린다. 피가 철철 흐르다. 피에 철분이 있으니 철철 흐르는 건가. 그러고 보니 피가 흐를 때 말고 철철 흐른다는 말을 쓰는 것도 잘 못 들었다.

이거 신빙성이 높아지는데.

배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중고는 여전히 구멍이 있던 자리를 매만지고 있다.

“어때, 좀 살만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억울함이 절절히 묻어나는 말이다.

“맞아. 넌 아무 짓도 안 했어.”

어디까지나 선량한 피해자지. 그냥 나한테 걸린 시점에서 운이 나빴다.

“그럼 왜...?”

“니가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어서.”

내 옆에 있는 드워프 아가씨를 눈짓한다. 중고가 표독스럽게 드워프 아가씨를 노려보자, 드워프 아가씨자 뒤로 물러선다.

“나, 나는 그냥!”

“위험해서 검집에 가둬둔다는 말에 납득했잖아? 그리고 아까 그 공격. 내가 아니었으면 죽었다고.”

재생된 목덜미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린다. 드워프 아가씨가 본 것도 사실이고, 중고가 선량한 피해자라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나라는 필터를 걸쳐 두 사람이 보는 풍경이 약간씩 다르다.

드워프 아가씨에게 중고는 위험한 마검이고, 중고에게 드워프 아가씨는 자길 여기에 가둔 사람 중 하나다.

뭐, 내가 아니었어도 상황은 비슷했을 것이다.

처음 내가 이 둘을 보았을 때 드워프 아가씨는 중고를 뽑는 것에 실패한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중고를 가져가려면 이런 강경 수단을 써야 했겠지. 아니면 그냥 포기하던가.

둘의 인연은 꼬이거나 평행하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평행하려던 인연을 중간에 내가 끼어들어 꼬이게 만든 게 전부다.

나라는 필터로 인해 두 사람의 인연도 바뀌고, 서로를 보는 시각도 바뀌었다.

인연이란 참 재미있어. 안 그래?

========== 작품 후기 ==========

본격, 검 조교 소설. 장르가 뭐 이래?

여행을 평화로웠다. 국경선을 벗어나기 전까지. 여행 이틀째에 국경선에 도착했으니, 평화로웠던 사실 딱 하루였던 셈이다. 왜 내가 가는 길에는 평화가 없는 걸까.

국경 앞에는 우릴 기다리는 것으로 보이는 군대가 깔렸다. 숫자는 천 내외지만, 사실 그 정도 숫자만 되도 군대라고 부르기에는 충분하다.

만 단위의 군대를 혼자서 상대하는 전쟁만 해온 내가 이상한 거다.

군대가 경계하는 것은 국경 밖이 아니라 안. 밖에서 오는 사람에게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에게 볼일이 있다는 뜻이다.

마침 우리가 딱 나가려는 타이밍에 이럴 수 있을까.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우리를 발견한 군대가 움직인다. 넓게 퍼져 우리가 오길 기다린다. 할리와 가마의 속도라면 그냥 돌진해서 뚫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정규군까지 동원하는 놈들을 후환으로 남겨두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가마 옆에서 할리를 타고 달리는 드워프 아가씨에게 다가간다. 팔다리 보호구까지 차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헬멧은 안 차고 있다.

“어떡해?”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드워프 아가씨가 말한다. 여섯 손가락이 달린 손으로 능숙하게 오토바이를 다루고 있다.

“멈춰.”

“멈춰? 뚫고 가는 게 안 좋아?”

가마와 오토바이의 속도는 상당하다. 여기서 더 올릴 수도 있다. 작정하고 뚫으려 하면, 저 포위망이 완성되기도 전에 일각을 뚫고 따돌릴 수 있다.

“안 멈추겠다면 난 그냥 내 갈 길 가고.”

“멈추면 되잖아, 멈추면.”

군대와 대화가 통할 거리에서 가마와 할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멈춘다. 할리는 몰라도 이쪽은 66마리의 스켈레톤이 수동으로 브레이크를 밟는다. 먼지가 장난 아니라고.

우리가 멈추자, 저쪽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놈이 나온다.

“얌전.......”

펑. 머리를 터뜨려주었다. 병사들이 동요한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군대가 날 상대할 때의 반응이지.

최근 대놓고 날 사냥하려는 놈들을 포함해 괴물들하고만 싸워왔더니 군대에 대한 내 이미지가 퇴색됐었어.

한 사람을 죽이겠다고 거품 물고 달려드는 집단은 그냥 미친개 무리지 군대가 아니다. 암, 그렇고말고.

“다음으로 높은 놈 나와.”

아무도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 뒤쪽으로 슬금슬금 도망가려는 병사 하나에게 번개 한 발을 선물해준다. 까맣게 타서 죽었다.

“안 나와? 그럼 아무나 한 명 나와. 도망가려하면 저렇게 된다?”

번개 맞고 뒈진 놈을 가리킨다. 나와 대화할 거라면 군대가 아니라 전달자 한 명만, 하다못해 편지 하나만 보내도 된다.

대화하자고 오는 놈까지 모조리 죽일 정도로 나는 막돼먹지 않았다. 그러나 군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군대, 적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 그런 게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날 죽이겠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래서 나도 똑같이 대응해주고 있다. 날 죽이려는 놈들에게 똑같은 죽음을. 피의 복수를. 복수라 하기에는 너무 일방적인가? 정정하자. 피의 학살을.

“그래, 관용을 베풀게. 말단. 제일 아랫놈이 나와.”

저놈들이 제들끼리 소곤대더니, 한 명을 앞으로 밀어낸다. 밀어내는 놈들은 악착같이 밀어내고, 밀려나는 놈은 곧 죽을 얼굴이다.

이상한 노릇이다. 내가 나오는 놈을 죽인다고 한마디라도 했던가? 그냥 나오라는 말밖에 안 했는데.

나는 순수하게 이 군대가 왜 날 노리는지를 묻고 싶다. 순수한 호기심이 왜곡 당하니 슬프기 그지없다. 서글퍼서 눈물이 나온다. 흑흑.

쫄병 하나가 거의 굴러 나오듯 억지로 떠밀린다. 장비도 볼품없다. 선임들이 쓰고 남은 가장 싸구려 장비나 쓰고 있겠지. 장비까지 안 챙겨줄 정도면 왕따는 덤이다.

팔자가 꼬여도 제대로 꼬인 놈이다. 내가 그 팔자를 펴주마.

“제일 죽이고 싶은 놈 있지? 열 놈만 불러봐.”

열 놈이 너무 많아 보인다고? 이놈 입장에서는 안 그럴걸?

죽을상을 하고 있던 쫄병이 이게 뭐가 싶은 얼굴이 되고, 약간 늦게 뒤쪽에서 지랄이 난다. 욕설과 애원이 난무하는 저건 소란이 아니라 지랄이다.

지랄지랄 쥐 떼가 떠드는 것 같다. 크고 시끄럽고 악독한 쥐떼. 박멸해도 끝없이 나타나는 쥐떼. 어디서나 있는, 약자를 먹고사는 쥐떼.

쥐떼가 죽을 위기가 되니 찍찍 운다. 쥐떼는 언제나 시끄럽고 성가시지. 빨리 치워버릴 필요가 있다.

“자, 불러봐. 열 놈.”

쫄병이 고개를 든다. 가마 위에 있는 날 본다. 간절함과 그 밖의 감정이 눈과 표정에서 섞이고 바뀐다.

“칼슨, 니폴라, 나리온.......”

“아니다. 말해도 모르겠으니 니가 직접 손가락으로 찍어.”

콕콕콕. 손가락이 움직이고, 지명받은 놈들이 앞으로 끌려나온다. 도망도 치지 못하고, 아군한테 끌어내어 진다. 지휘관 하나 죽였다고 아주 개판이다. 이건 군대가 아니라 도적이군.

끌려나온 쥐떼가 울기 시작한다.

찍찍. 찍찍.

안 그랬어요. 안 그랬습니다. 모르는 일입니다. 저놈이 잘못한 겁니다. 저놈 잘못이에요.

저들은 모두 종족도 다르고, 하는 말도 다른데, 내 귀에는 모두 똑같이 들린다. 찍찍. 쥐 우는 소리. 귓바퀴를 타고 들어온 쥐새끼가 내 고막을 갉아먹는다. 고막을 바늘로 쑤시는 기분이다.

시끄러운 쥐새끼들.

쥐새끼들은 심장이 뻥 뚫려 자리에 눕는다. 여기가 니들 묏자리다.

“무슨 명령으로, 왜 여기 왔냐?”

내가 쫄병에게 묻는다. 원수 같던 놈들을 죽여줬는데도 쫄병은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 죽이고 싶은 놈을 골라라 해서 고른 놈을 죽여줬더니 왜 그래? 이놈도 정신이 조금 이상한 것 같다.

안 그럼 안 골랐으면 됐잖아.

“야, 대답해.”

대답하지 않아서 죽였다. 목이 땅에 떨어진다. 조금 친절해 대해준다고 살려줄 거라고 생각했어? 안타깝게도 전혀 안 그래. 날 잡겠다고 여기 있는 시점에서 전부 죽는다.

불쌍하지 않냐고? 전혀. 군인이란 누굴 죽이거나 누구에게 죽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그리고 자의인지 타의인지 몰라도 군인이 된 시점에서 죽거나 죽을 운명이다.

여기서 내가 놔준다면, 저놈들을 포함한 추가 병력이 날 위해 출장 올지도 모르고 말이지. 먼 길 출장 오기 전에 친절히 휴식 시간을 줄 거다. 영원한 휴식을. 나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너. 대답해봐.”

다른 하나를 가리킨다. 도마뱀 인간. 리자드맨이다. 도마뱀이면 피오라와 친적인가?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죽였다.

“너.”

어디서나 서식한다는 오크시다. 대답하지 못했으므로 죽였다.

“어딜 가려고.”

100명 정도가 한꺼번에 도망치려 했으므로 죽였다.

너. 너. 너.

나는 묻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때마다 땅바닥에 드러눕는 사람이 늘어난다.

나는 영면을 원하는 게 아니라 대답을 원한다. 니들 재워주는 자원봉사자가 아니라고, 자장가 불러주게 생겼냐. 그러니까 대답 좀 해봐라. 응?

반쯤 줄었을 때였나? 직급 높아 보이는 악마 하나가 나와서 근근이 입을 연다.

“폐하의 친척이 살해당했다고.......”

“누구한테? 나한테?”

그것참 대단하군. 내가 죽인 놈 중에 아무래도 왕의 친척이라는 놈이 있었던 모양이다. 짐작 가는 놈이...... 없진 않네. 중고 근처에서 알짱거리다 뿔이 부러진 그놈.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내가 싫어하는 인종의 눈빛이었지.

설마 왕의 친척이었다고는.

“그래? 수고했다.”

남은 3백에 가까운 병사가 일시에 쓰러진다. 편하게 보내준 것이 내 일말의 자비다.

왕의 친척이 죽었고, 그 살인자가 다른 나라로 망명 간다면 전쟁이 일어나거나 외교적으로 쌈바를 출 것이다.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 왜 나는 가는 곳마다 이따구야. 왜 이런 변방에 왕족이 건달 노릇이나 하고 있냐고.

빌어먹을. 중고 때문이구나. 땅에 박혀서 뽑히지 않는 신비한 검.

드워프 나라의 실세와 이어진 것도 이 검 때문이고, 성가신 일을 불러온 것도 이 검 때문이다. 사건 사고를 다 몰고 다니네, 중고 주제에 건방지다.

“꼭 이랬어야 했어?”

아, 얘도 있었지. 드워프 아가씨가 내가 신설한 공동묘지를 보고 하얗게 질렸다. 머리 없는 시체가 많아 골통 묘지고. 시체를 묻지 않아 누구든 구경할 수 있는 공통 묘지다.

지금이라면 조건 없이 고통 없이 묻어주는 서비스도 하고 있다. 어서 오세요, 즐거움과 행복이 넘치는 공통 묘지에.

“안 죽였으면? 너희 나라까지 따라왔을 건데?”

이 아가씨의 나라 이름이 뭐였지? 테리스라고 했지 싶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해? 안 죽였으면 우리가 죽었어.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곳을 향할 병사가 더 늘어났겠지.”

“애초에 당신이 그 왕족이라는 사람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안 일어났잖아.”

“그놈? 그놈도 날 죽이려 했지. 그래서 죽였고. 솔직히 말해봐. 저쪽이 날 죽이려 하는데 나는 저쪽을 죽이면 안 돼? 그냥 곱게 죽어줄까?”

“그 정도 힘이 있다면 자비를 베풀어도 되잖아.”

“그래서, 그놈이 힘을 키워오거나 더 큰 세력의 힘을 빌려 날 죽이러 오면? 그래서 내가 죽으면? 내가 신도 아니고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누가 알아?”

그 신이라는 놈들도 내 손에 픽픽 쓰러지는데, 내가 죽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 나라도 방심하면 훅 가는 수가 있다.

“그래도.......”

“좋아. 내가 저놈들을 살려줬다 치자. 왕족을 살해한 사람이 다른 나라로 망명 갔는데 왕이란 놈이 가만있을까? 그놈들이 제대로 준비를 하고, 군대를 끌고 와 너희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그 책임은 니가 질 거야? 저 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뺏은 목숨의 목숨값은 니 거야? 갚을 수 있어?”

히야, 정상적인 논리를 갖다 붙이는 건 정말 힘들다. 그냥 내가 꼴려서 죽였다 하면 편할 것을. 귀찮아도 이건 필요한 작업이다. 적어도 거래가 끝날 때까지는 드워프 아가씨가 나를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거래가 성립할 거니까.

말도 통하지 않는 미친놈과 거래라니. 나라도 하기 싫다.

“처리했으니까. 다시 가자.”

“응.”

드워프 아가씨가 풀이 죽어 끄덕이고는, 세워둔 할리에 올라탄다.

다시 출발이다.

***

중고에게는 세 끼 식사가 지급된다. 나는 책임감 강한 사람이다. 책임지고 기를 테니 애완동물을 사달라고 부모님께 조르더니, 사흘 만에 질려서 결국 애완동물 관리는 부모님이 맡게 되는 그런 책임감 없는 애새끼들과는 다르다.

세 끼 식사도 주고 있고, 애교도 받아준다. 나쁜 짓을 하면 체벌도 하고, 밤놀이도 해준다. 책임감 강한 사람인 나는, 일단 맡았으면 그게 검이라도 책임을 다한다.

검이지만 동시에 인간인 중고에게는 나비와 같이 세 끼 식사가 제공된다. 검집의 입구도 식사 때에 맞춰, 하루 세 번 열린다. 배설물 처리도 그때 함께 한다. 화장실이 따로 없으니 중고는 검집 안에 아무렇게나 똥오줌을 싸지른다.

중고의 상태는 제멋대로다. 아침에는 검이더니 점심에는 인간이고 저녁에는 다시 검일 때도 있다. 종일 검으로 있을 때도 있고, 종일 사람으로 있을 때도 있다.

인간일 때는 식사도 한다. 그러니까 배설물이 나오지. 똥오줌은 항상 내 손으로 닦고, 내 손으로 수거해버린다. 검집 내부의 상태는 깔끔하게 유지된다. 주인된 몸으로서의 자존심이라는 것이다.

중고의 반항은 여전하다. 인간의 모습일 때도, 검의 모습일 때도 나를 죽이고 탈출하려 한다. 그러나 반항은 점점 더 약해지는 추세다.

슬슬 깨달았겠지. 날 죽일 수도 없고, 검집을 부술 수도 없다는 것을.

반신의 평균에 조금 못 미치는 마력. 내 마력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내가 만든 검집을 부수겠다니 언어도단이다.

검에 부서지는 검집이라니, 그건 검집도 아니다.

테리스에는 진작 진입했고, 내일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나는 오늘도 중고에게 아침을 주기 위해 검집을 연다.

오줌으로 축축한 바닥에 중고가 날개옷만 걸치고 주저앉아 있다.

눈에는 빛이 없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중고가 눈살을 구긴다.

“아침 먹어라.”

아침밥을 담은 쟁반을 내려놓고, 나는 걸레로 검집 바닥을 닦는다. 중고는 묵묵히 숟가락을 든다.

평범하고 평안한 아침이다.

========== 작품 후기 ==========

애완동물에 애완검까지. 주인공이 이렇게 자상한 사람입니다.

중고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중고는 밥을 뜨면서도 나를 힐끔힐끔 곁눈질한다. 원래라면, 나는 바닥을 닦고 바로 문을 닫고 중고는 어두운 곳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대충 그런 일상이다.

곁눈질하면서도 숟가락은 꾸준히 움직이고 밥은 입으로 들어간다. 검으로 있을 때는 이틀 동안 굶어도 괜찮더니. 사람으로 있을 때는 꾸역꾸역 밥을 넘긴다.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다.

“내일은 중요한 날이야.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탁한 눈동자를 보면 알아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의례상 하는 말이고, 이게 날뛰어도 크게 관계없다.

언제나 바로 제압할 자신이 있다. 이년이 도망치려 할 때는 늘 그랬다.

대답도 듣지 않고, 검집을 닫는다. 두꺼운 철문이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움직여 미세한 틈끼리 맞물리려는 순간, 그 틈으로 손가락이 끼어든다. 중고가 그 틈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검푸르고 흐릿한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본다.

“나가고 싶어.......”

다 죽어가는 목소리다. 꺼질 듯 희미하게 흔들리는 목소리. 나는 태연하게 반문한다.

“내가 왜?”

“말 잘 들을게. 반항도 안 할 테니까...... 제발.”

간절함이 묻어나는 대답이다. 너무 궁지로 몰아서 최악의 선택을 하게 하는 것도 좋지 않나. 밀고 당기기는 중요하다. 적당할 때 풀어주지 않으면 죽어버린다. 자살이라는 건 쉬운 듯하면서 어렵다.

정신이 죽어도 자살이고, 신체가 죽어도 자살이다.

나는 스스로 정신을 죽여서 백치가 된 놈도 봤고, 지하 감옥에서 혼자 바닥에 머리를 찧어 죽은 놈도 봤다. 사람은 쉽게 죽는다. 너무나 쉽게.

중고는 아직 죽으면 안 되는 귀한 몸이시다.

“나와.”

중고를 가둔 강철 처녀의 문이 열리고, 중고가 밖으로 나온다. 처녀 안에서 중고가 나오다니 이건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모순? 패러독스? 연금술의 혁명이군.

주춤거리며 일어선 중고는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온다. 환한 햇살이 눈 부신지 눈을 뜨지 못하고 손으로 태양을 가린다.

바깥으로 나온 중고를 보고 드워프 아가씨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그리고 무시하듯 시선을 돌린다. 드워프 아가씨는 내가 중고를 가두고 조교 하는 것을 보고도 무시한 입장이다.

둘 사이가 좋아질 일은 여간해서 없겠지.

스켈레톤이 식기를 정리하고, 가마를 든다. 드워프 아가씨가 할리에 올라탄다. 그때까지 중고는 하늘을 보다가, 자신의 손을 보며 주먹을 몇 번 쥐어보거나 하고 있었다.

마치 현실감을 확인하는 듯했다. 암흑에서 탈출한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를 판별하는 그런 거.

어딘가 소녀틱하던 중고는 사라지고, 반쯤 죽은 인간만이 남았다.

먹고 싸고 자는 인간. 호오가 없고 자기 생각이 없고, 반응과 외견과 지성만이 존재하는 존재.

저게 정말로 인간이라는 진명에 맞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인간과 인간을 구분하는 모든 경계선을 없애버리고 남은 인간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흰색 도화지에도 비유할 수 있겠다. 그래도 저 모습을 흰색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 회색으로 하자.

인간이라는 회색의 도화지가 가마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가마와 할리가 나란히 달리고, 저 멀리 목적지가 보인다. 성벽도 없는 도시의 모습은 이질적이다.

“저건 뭐야?”

“저한테 물어도 모르는데요.”

“너한테 안 물었어.”

“그래요?”

뻘쭘한지 유상민이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드워프 아가씨를 지명하며 다시 묻는다.

“야, 저건 뭐냐.”

“말하려면 조금 복잡해.”

드워프 아가씨가 쓰게 웃는다. 날 보면서도 시선은 끝끝내 중고를 향하지 않는다. 아예 무시한다는 쪽으로 중고에 대한 태도를 굳혔나 보다. 좋은 판단이다. 자신과 안 맞는, 그러나 함께 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괜히 참견하는 것보다 무시하는 게 낫지.

할리가 속도를 늦춘다. 나도 스켈레톤에게 명령해 가마의 속도를 늦춘다. 천천히, 그러나 여전히 빠른 속도로 달리며 드워프 아가씨가 입을 연다.

“우리 드워프는 엘프와 마족에 비해 마력이 약한 대신 손재주가 좋아.”

드워프 아가씨가 할리를 잡고 있던 손 하나를 들어 보인다. 여섯 개의 손가락이 각자 다른 생물처럼 유연하게 움직인다.

여섯 개의 손가락과 뛰어난 손재주. 갈색에서 흑색까지 비교적 진한 색의 피부. 불에 대한 강한 친화력. 그게 드워프의 특성이다.

뜨거운 불 앞에서 철을 만지는 것이 운명이라고, 드워프의 종족 특성이 그렇게 말한다.

“인간들의 기술은 우리 드워프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렸어. 철을 만지는 것만이라면 모르겠지만, 다른 것들이 차이가 너무 심해. 스테인레스는 뭐고, 콘크리트는 뭐냐고. 드워프의 기술이 세계 최고라는 것도 벌써 옛말이야.”

철이나 만지작대는 드워프는 미국에 비하면 애들 장난 같긴 하다. 광선검과 광선총에 비벼보기에는 강철검이 너무 볼품없다. 마력을 두른다 해도, 강철검에 두를 마력을 광선검에 쏟아부으면 그쪽이 훨씬 더 강할 것이다. 강철검의 시대는 갔다.

“인간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드워프도 있어, 반대로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지. 우리나라는 그 중간에 있어.”

드워프 아가씨의 시선이 목적지로 향한다. 이질적인 모습의 도시를.

“그래서 저 모양이냐.”

저기 보이는 도시의 반은 기묘한 디자인의, 굳이 따지자면 현대적인 지구 형태의 건물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옛 냄새가 물씬 나는 옛 건물이다.

반반으로 갈린 그 건물들의 형식이 도시 전체를 이질적이게 만들고 있다.

“그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쪽에서 멋대로 건물을 올린 거야. 일 년도 안 돼서 저렇게 돼 버렸어. 생활이 윤택해진 걸 보고 요즘은 쇄국파보다 개방파가 많아지고 있어.”

“그런 것치고, 네가 제일 현대적이야.”

라팔의 날카로운 지적에 드워프 아가씨가 씁쓸하게 웃는다.

“사실 나도 개방파이긴 해. 이 할리를 봐 멋지잖아! 개조의 여지가 한참이나 있어. 아직 얼마든지 달릴 수 있다고.”

할리의 핸들을 두드리며 떠들던 드워프 아가씨가 계면쩍게 말한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랑 할아버지가 쇄국파거든. 이 오토바이도 사실 겨우겨우 허락받은 거야.”

전형적인 가정문제구먼. 흔히 있는 가족 싸움이다. 중고를 원해 드워프 아가씨가 타국까지 올 정도면 심각해 보이지는 않는다.

“기술을 뛰어넘은 검은 만들 수 있다. 그걸 증명할 거라면서 길길이 날뛰고 계셔. 그리고 그것만 만들면 기술 개방을 받아들인다고도 하셨고. 그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력하고 있다는 거야.”

광선검을 뛰어넘는 무기를 만든다니 불가능에 손들어주고 싶다. 무력 상승과 기술 개발을 꾀할 거라면 받아들이는 쪽을 추천하는데.

드뮈나시에서 봤던 동남아시아와 드워프 연합군. 드워프의 손재주에 인간의 기술이 더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그때 봤다. 파워드 슈트를 비롯한 각종 무기.

묘하게 촌티 나서 더더욱 근미래적으로 보이던 무기들이 그 증거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로 갈리는 검보다는 누가 쓰든 일정 이상의 효과를 내는 근미래 병기들이 훨씬 좋다.

얼마나 똥고집이면 눈앞에서 결과를 보고도 안 받아들이려는 걸까. 꼰대라는 건가.

“그러면, 이 검을 가져가 봤자 협력을 얻을 수 있을지 확신도 없다는 거네?”

“아니아니아니. 그건 내가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해볼게. 정 안되면 내 인맥이라도 동원해서 말이야. 이 할리 보이지? 보통 기술이 아니거든. 나 개방파에서도 아는 사람 많아!”

내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드워프 아가씨가 필사적으로 부정한다. 꼭 도움이 안 되면 죽여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잖아.

뭐, 그럴 거지만. 죽이진 않아도 날 헛걸음시킨 대가는 받을 거다.

입구에서 내려 가마를 아공간에 넣는다. 드워프 아가씨도 할리를 수납한다.

도시에 진입하니 위화감은 더욱 강해진다. 양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다르고 냄새가 다르고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

딱 잘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위화감이 넘쳐흐른다. 로스앤젤레스는 이런 면에서 밸런스가 잘 잡혀 있어 그런 느낌이 없었는데, 여기는 다른 의미로 자비가 없다.

정신머리 없군.

“이쪽이야.”

드워프 아가씨가 후진 거리로 우리를 안내한다. 전근대적 공업지구의 풍경을 보는 것 같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망치 소리와 수증기 빠지는 소리. 기타 등등의 소리들과 강하고 조금 역한 불 냄새와 철 냄새가 음식 냄새와 여러 소음이 섞여서 코로 귀로 눈으로 들어온다.

평화롭다면 평화롭지만 밝지는 않다. 나라가 반으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으니 뭐.

그나저나 아까부터, 시선이 장난 아니게 모인다. 알몸인 나비랑 날개옷을 입은 중고도 주목받고 있지만, 드워프 아가씨가 받는 시선은 그 이상이다.

“야.”

“내 입장이 조금 애매하잖아? 이 정도는 참아야지.”

드워프 아가씨는 꿋꿋하게 걷는다. 시선이 적대적인 것도 아니니 참는다면 참을 만하겠지. 절대 다수의 적대적인 시선? 그건 좀 아프다. 무심코 그런 눈을 한 놈들을 전부 죽여 버릴 정도로 상처받는다.

언제 한 번 길거리에서 암살자에게 당해 목이 날아간 적이 있는데, 재생된 직후의 날 보는 인간들의 반응이 장난 아니었다. 악마라느니 나가라느니 꺼지라느니.

내가 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사람들을 꺼지게 만들었다.

“여기야.”

드워프 아가씨가 우릴 끌고 간 곳은 흔한 가게였다. 간판 위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간판이 하나 더 있다는 게 특이하다. 명장을 나타내는 간판이겠지.

가게 안에는 무기와 농기구가 진열되어 있다. 먼지 낀 것들이 손질 안 한 티가 너무 난다.

“보여주기야, 보여주기. 드워프들이 만든 무기를 드워프가 사진 않을 거 아냐? 대부분 수출하는데 명장 정도 되면 전부 예약제라서 사실 가게에 진열해놔도 쓸데가 없어.”

공방과 일체형인 가게 안쪽에 있는 대장간에서는 불기운이 확 올라오고 있었다. 드워프 아가씨가 대장간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아빠, 할아버지! 그 검을 찾아왔어!”

“기다려라!”

굵은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안에서 드워프 두 명이 걸어 나온다. 작달막한 체구만 빼면 인간과 그리 다를 게 없다. 세월의 흐름도 여실히 느껴진다. 여섯 손가락은 제외하고 말이야.

“그래서, 검은 어디냐?”

흰 수염을 늘어뜨린 드워프가 말한다. 나비랑 중고를 보고도 관심조차 없다. 이 노인도 정상은 아니야. 저쪽 아저씨도 마찬가지고.

“그 전에 할아버지. 내가 검을 가져오면서 조건을 좀 걸었는데...... 무슨 조건이야?”

드워프 아가씨가 나에게 눈길을 보낸다. 조건이 있다고만 말하고 조건을 알려주진 않았었지.

“신에 대한 정보. 신화나 서적, 성서를 포함한 일체.”

“그것은 뭐에 쓰려고?”

노인이 묻는다.

“인간들의 신성력이 없어진 것에 대해 단서를 잡으려고. 그거 때문에 이쪽은 지금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 터지고 있어.”

전쟁이라 하면 조금 오바일지 모른다만, 성자 성녀를 두고 정치전, 세력전은 어딜 가든 벌어지고 있다. 직접 끼어든 적은 없어도 소문만은 항상 들리더라.

“대신관에게라도 부탁하면 되겠지. 그래서 검은 어디 있나?”

“야. 변신해.”

멍하니 있던 중고가 변신해 내 손에 들어온다. 좋아, 잘했어. 나는 말 잘 듣는 아이를 좋아한다.

두 사람은 사람이 검이 된 것을 보고 눈이 빠져라 놀라고 있다. 아직 놀라긴 이르지.

“이거랑 이거.”

나는 추가로 전백귀후십귀도 꺼낸다. 서울의 이름 모를 노인과 내가 만든 세상에 다시없을 광검. 신을 베고 스스로 진화한 진짜로 미친 검.

전백귀후십귀를 본 두 드워프는 눈이 커지다 못해 번들거리기 시작한다. 검이 움직이자 눈이 따라온다.

“이왕이면 자료가 많았으면 좋겠는데.”

노인이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인다.

========== 작품 후기 ==========

전백귀후십귀 〉〉〉〉〉〉 넘사벽 〉〉〉〉〉〉 광선검

대충 이 정도 됩니다. 저 광검은 수틀리면 핵폭탄으로도 쓸 수 있어요! 신도 죽이는 방무뎀!

서로 소개가 오갔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는 이름은 아니다. 그냥 노인은 수염으로, 중년 아저씨는 근육 아저씨라고 부르자. 같은 대장장이일 건데 근육 아저씨의 근육은 수염 할배의 배는 된다.

“들어오게.”

수염 할배의 안내로 들어간 대장간 안쪽은, 뭐. 전형적인 대장간이다. 몇몇 특이한 도구가 보이지만, 대부분 내가 아는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중세 수준의 기술이 다 그렇지. 최신 설비를 들여놓고 지구의 과학 기술을 뛰어넘겠다느니 하는 것도 우습다.

수염 할배와 근육 아저씨는 도구들을 치우고 구석에 있던 탁자를 중앙으로 끌고 온다.

“여기 놔둬주게.”

수염 할배의 요청에 따라 전백귀후십귀와 중고를 탁자에 놓는다. 두 사람은 중고와 전백귀후십귀를 들어도 보고 휘둘러도 보고 꼼꼼히 관찰한다.

중고는 가만히 있는데 저 미친검이 말썽이다. 수염 할배가 손에 들자마자 방사능을 뿜었다. 바로 막아서 다행이지 하필이면 수염 할배가 즉사할 뻔했다.

“저 웬수가 검을 가져오면 그걸 녹여서 뭐라도 해볼 생각이었거늘.......”

수염 할배가 아쉽다는 듯 두 검을 바라본다. 전백귀후십귀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고. 중고는......

“녹여도 상관없는데?”

딱히 녹여도 상관없다.

“그래도 사람이 아닌가!”

“검이기도 하지. 검을 녹여서 새로운 검을 만드는 게 문제 있어?"

못 쓰는 검을 재활용하는 일이야 쌔고 쌨다. 전쟁에서의 무기 소모율이 얼마나 되는데. 재활용이라도 하지 않으면 수요에 공급이 못 따라간다.

내 말에 중고가 검 상태로 부르르 진동한다. 그래도 직접적인 반항은 안 하는군. 조교는 순조롭다.

“그 검을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고. 이걸 보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

전백귀후십귀를 아공간에 넣는다. 여기 놔뒀다가 괜히 애꿎은 사람을 잡을 것 같다. 검을 버티지 못 하는 검집은 쓰레기라고 했는데, 전백귀후십귀를 넣어둔 검집이 쓰레기가 되어가고 있다. 검을 묶어두는 역할을 전혀 못하고 있다. 하나 새로 만들든지 해야지 원.

전백귀후십귀가 사라진 자리를 아쉬운 듯이 보고 있는 수염 할배를 채근한다.

“어이 영감. 이쪽 조건은 언제 들어줄 거야?”

“음. 아아. 대신관에게 부탁해두겠지만, 얼마가 걸릴지는 잘 모르겠군.”

“최대한 빨리 부탁할게. 그리고, 자료도 좋지만 이왕이면 신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게 제일 좋아.”

“신을 직접 말인가?”

“신의 일은 같은 신이 제일 잘 알지 않겠어?”

실상은 지들끼리도 연락이 잘 안 되는지 두 마리가 죽을 동안 남은 놈들은 움직이는 것 같지가 않다. 직접 찾아와주면 내가 훨씬 편해질 텐데. 게으른 놈들은 이래서 안 돼.

“알겠네. 그러지.”

대답하면서도 정신은 중고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근육 아저씨는 비교적 멀쩡해 보이니 제대로 전달은 되겠지.

중고를 훑듯이 살피는 부자를 놔두고 대장간 밖으로 나온다. 저 안에선 처자 한 명이 할아버지와 아저씨에게 온몸을 구석구석 훑어지고 있다. 문맥만 보면 쇠창살 감이다. 수갑 철컹철컹.

“이제 뭘 할 거야?”

드워프 아가씨가 묻는다.

“기다려야지.”

그것 말고 마땅히 할 것도 없다. 우리 중에 할 일이 있는 건 유상민 혼자다. 피오라가 가끔 유상민을 도와주는 모양이지만, 그것도 가끔이고.

여유가 있다면 드뮈나시에서 그 나라의 석학들과 함께하고 있을 건데, 자료만 찾아들고 나와버리는 바람에 유상민만 덤터기 썼다.

여기서는 조금 다를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몇 번. 나에게 간섭하려는 힘을 되돌려 보냈다. 추적 계열 진명은 통하지 않는다. 조금은 여유로워지겠지.

“좋은 여관을 찾아줄게, 따라와.”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 순순히 따라갔다. 드워프 아가씨를 따라간 곳은 허름하지만 제법 분위기가 괜찮은 여관이었다.

나비를 보고 기겁하는 주인 아줌마에게 드워프 아가씨는 나비가 죄인이라는 걸로 둘러댔다. 나비야, 니가 언제부터 죄인이 되었니.

날 적대한 게 죄라면 죄겠다.

여관은 현지인의 추천답게 나쁘지 않았다. 여관 별채를 통으로 빌렸는데 식사도 괜찮았고 넓기도 넓었다. 시설을 안내하며 시종일관 떠들어 대던 주인 아줌마에 의하면 거래를 위해 외부에서 찾아오는 대규모 상단을 위해 준비된 별채라고 한다.

일 년도 안 되는 시간에 도시의 반을 현대식으로 바꿔놓은 드워프답게 건물의 양식미는 어디 왕궁을 보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드워프는 작달막한데 건물은 모두 표준 규격이다. 자기들끼리 살면 이럴 리가 없지.

외부와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걸 보면 보수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별채에서 가장 큰 방을 골라잡자 라팔이 아공간에서 물건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한다. 텔레비전과 콘솔. 오락실 기기. 휴대용 게임기. 전부 게임 물품이다.

“오랜만에, 하자?”

“좋지.”

격투 게임에서 라팔이한테 아직 한 번도 못 이겼다. 지고만 있는 것은 성미에 안 맞는다. 한 번은 이겨야지.

격투에서 육성으로 넘어가고, 마지막은 동물을 키우는 농장 게임을 했다. 치트키를 써서 가용 최대치까지 동물을 늘린 후에, 누가 빨리 폐사시키는지 겨뤘다. 어쩌다 힐링 게임이 그렇게 된 거지?

미친놈들이 하니 게임도 미쳐간다.

낮의 게임은 졌지만, 밤의 게임은 이겼다. 압승이었다.

***

며칠이 지났다. 명장이 죽었다. 드워프 아가씨가 찾아와 미주알고주알 떠든다.

“그걸 왜 일일이 나한테 와서 말하는 건데?”

“이럴 때는 외부인을 범인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 유일한 외부인이 우리다?”

“이 지역에 있는 외부인은 당신들뿐이야. 비수기이기도 하고. 그나마도 저쪽 도시에 가 있어서.”

철검보다는 최신 기술이라는 건가. 알기 쉽다. 뜻하지 않게 나는 범인으로 몰리고 있다는 소리군.

엎어버릴까. 쩝, 아직 부탁한 자료가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아깝다. 그래도 귀찮은 것보단 나을까. 여기는 신이 실존하는 세걔고, 널린 게 신화와 성서다. 단서 하나 정도 없어져도 문제는 없다.

어떻게 엎을까 고민하고 있자니 드워프 아가씨가 절묘한 말을 꺼낸다.

“아, 할아버지 말로는 친구인 신관한테 알아보니까, 엘프 중에 신과 직접 대면한 신관이 있다고 하더라. 그 사람을 수배중이라던데?”

의식하고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랬다면 정말 절묘한 정치술이다. 말 한마디로 나라를 구했다.

“쯧.”

“마음에 안 들어도 참아줘. 당분간 외출만 삼가면 될 거야.”

“필요 없어. 그 정도 알고 있으면 다른 소문도 전부 알고 있겠지? 전부 말해.”

“찾아주게?”

유상민이 끼어든다.

“전 안 가요. 밥 먹을 시간도 아까운데 시간 낭비에요.”

시작도 전에 최고 전력이 빠졌다. 추적에는 저놈이 제격인데.

“안 한다는데?”

“저놈은 필요 없어. 그러니까 그냥 말해봐.”

까짓거 시간을 감는 태엽을 쓰면 추적 정도는 우습다. 전부 찾아줄 테니 오라고 해.

“알았어. 그러니까.......”

테리스는 인간들에게 기술 지원과 얼마간의 원자재를 공급받는다. 대신, 테리스의 드워프는 인간들이 원하는 무기를 만들어 그들에게 판다.

그런 조건으로 인간들이 10개월 전에 접촉해왔고, 그 후로 드워프끼리 갈등이 생겼다. 이 도시가 바뀌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 이 도시는 테리스에서 가장 많은 명공이 사는 도시이며, 그렇기에 갈등도 극렬하다.

그러던 차에 쇄국파의 명인이 암살당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이야기는 아갈리나 지구나 여기나 비슷비슷하다. 생물이란 놈들의 창의력이 절망적이다. 희망이 없다. 인류가 여기까지 발전한 것이 기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군, 세계는 소수의 천재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돌아가는 건가. 천재라는 놈들이 하나같이 특별하긴 했어.

“그 기술과 원자재를 제공하는 놈들의 이름은?”

“황혼의 들개... 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미국이 뒤에서 조종하는 클랜이야.”

라팔이 말한다. 요 공주님은 지정석이라는 듯 내 무릎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다. 라팔이가 품에 있으니 껴안고 뒹굴고 싶다. 결국 어제도 격투 게임은 한 번도 못 이겼고 말이지.

“사실상 뒷배는 미국인가. 거물이군.”

미국의 등장이신가. 뜻밖이진 않다. 북대륙 전체가 미국의 간접적인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지구에서도 그랬다. 지구의 지배자. 지구의 경찰. 미국은 그런 이미지였다.

“놈들이 원하는 건 빠른 합병인가.”

“아니면 상잔.”

“제3세력이 미국과 이곳을 동시에 겨냥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왜, 왜요? 저, 저 잘못 없어요!”

한마디 거들었다가 주목받은 피오라가 벌벌 떨며 말한다. 그래, 그 가능성도 있었지. 쟤도 노예가 되기 전에는 공주 비슷한 자리에 있었던가. 그러면 정치에 일가견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냐. 잘했어.”

내가 칭찬해주자 피오라가 안심하며 축 늘어진다. 여러 의미로 치마 안쪽이 축축해졌을 거다. 살짝 얼굴이 붉은데, 설마 일부러 주목 받은 건가? 그런 거라면 쟤도 변태 다 됐다. 우리 중 가장 정상인 인간이 비정상이 되어간다.

놈들이 뭘 노리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나한테 누명이 씌워졌다는 점. 그거 하나.

“암살 현장으로 가자.”

“정말?”

“책임은 내가 진다.”

“아니, 내가 질게. 진짜로, 제발.”

이 아가씨 전부터 자꾸 나를 무슨 위험인물 취급한다.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좋아. 할리나 만지게 할 게 아니라 정치를 시켜야 한다. 인재가 잘못된 장소에서 놀고 있다.

명인이 살해당했다는 장소에 왔다. 그는 자신의 방에 있는 자신의 침대에서 살해당했다. 무언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싶었는지 사건 장소는 보존되어 있다.

시간을 감는 태엽을 사용한다. 복면도 하지 않은 암살자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보인다. 태엽을 계속 사용하며 추적한다.

흔적을 지울 생각도 안 하고 놈들은 당당하게 비밀 거점으로 돌아갔다.

태엽을 만든 노인은 죽었다만, 그 유품은 내 손에서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노인은 저승에서 이를 갈고 있을까? 반대로 좋은 곳에 쓰이고 있다고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노인의 목표와 내 목표는 대강 일치하는 면이 있으니까.

본거지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던 암살자들을 제압한다. 너무 쉬워서 말이 안 나온다. 총 다섯. 다섯 모두 영혼에 금제가 걸려 있다. 저걸 믿고 안일하게 일한 거군.

“인류의 적.......”

제압당한 놈들이 날 보고 말한다. 거창한 별명 감사하다. 그런 별명이 붙은 김에 인류 멸망이라고 획책해야하나? 그러고 싶은 욕구가 팍팍 솟는데. 인류가 멸종하면 다 너희 때문이다.

“우리에게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너희는 살아서 아주 좋은 정보를 뱉어낼 거야.”

“하,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한.......”

금제를 벗겨내자 암살자들의 얼굴색이 변한다. 영혼을 느끼는 건 힘든 일이지만, 자기 영혼에 무슨 일이 있어나는지 정도는 감으로 알겠지.

“금제 없는데? 이제 말할 수 있지?”

언데드로 만들어서 불게 해도 되지만, 그러면 복수가 되지 않는다. 감히 누굴 범인으로 몰아?

“야, 이쪽 도시랑 저쪽 도시를 가르는 광장이 하나 있던데, 거기 빌릴 수 있냐?”

“아마도 가능할 건데... 그건 왜?”

“쇼나 하나 하려고. 아주 가벼운 쇼.”

웃음과 희망이 피어나는 화합의 고문 쇼.

========== 작품 후기 ==========

남자들의 끈적이고 질척이고 농후한. avi

중앙광장에는 내가 부탁한 무대가 착착 만들어지고 있다. 평범한 단상과 같은 무대라 만드는 사람들도 이게 어디에 쓰일지 모를 거다. 핵심 부품들은 모두 내 아공간에 있다.

고문 도구를 휴대하는 것은 나 같은 교양인에게 있어 일종의 교양이며 지성의 상징이다. 언제 어디서 누가 나를 노릴지 모르니 항상 철저하게 대비해 놓는 테도. 세상 모든 사람이 본받았으면 한다.

부디 1가구 1고문 기구 시대가 오길. 모두 다른 사람의 집에 그런 뒤숭숭한 물건이 있고, 그 물건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관리되고 있다면 세계 평화에 세 발짝은 다가갈 것이 분명하다.

거창한 물건은 필요 없다. 하다못해 피 묻은 호두 까는 기구라도. 호두 크기와 성인 남성의 불알 크기의 상관관계라는 내가 쓴 소논문이 있다. 아공간에 잠든 그걸 누가 발굴해 낸다면 아주 유익한 물건일 것이다.

그것뿐이랴. 호두 까는 기구는 여자한테도 쓸 수 있다. 왜 펜치로 이빨도 뽑잖아?

이빨도 신경이 있어서 건드리면 아프다. 치과의 지이잉을 생각하면 편하다. 호두 까는 기구로 이빨을 가루로 파삭! 으으, 생각만 해도 잇몸이 찌릿하다.

드워프들은 손재주 좋게 무대를 만든다. 내가 요구한 건 딱 두 개. 잘 보일 것. 잘 들릴 것.

드워프 아가씨는 사람을 모으러 갔다. 그 아가씨의 애매한 입지가 도움이 됐다. 쇄국파와 개방파, 양측 모두를 불러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오라고는 했는데, 얼마나 올지는 모르겠어.”

드워프 아가씨가 할리를 끌고 오며 말한다. 신도시 구역과 겹친 여기서는 딱히 할리를 숨길 마음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밑준비.”

나사 하나가 천 년을 정한다고 고문이라는 대업도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준비에 내 좆집들이 힘써주고 있다. 정확히는 라팔이랑 사랑이라고 해야겠지. 라팔이는 지위가 지위인지라 더러운 일에도 익숙했고, 맞아본 놈이 잘 때린다고 사랑이도 그 방면으로는 전문가 못지않았다.

내가 뭘 하려는지 진즉 알아챈 유상민은 재미없다고 빠졌다. 칫, 재미없는 놈.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크게 일을 벌이면 나도 어떻게 못 해줘.......”

“못 해주면 어쩔 건데?”

드워프 아가씨가 입을 다문다. 그래, 감이 좋고 운이 좋고 인맥도 많다고 해도 내가 관련되어 일어나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할 수는 없다.

자연이 사람을 가리나? 재액이 장소를 가리나? 나는 그런 존재다. 나를 막으려면 반신으로도 모자라다. 신을 데려와라.

그렇다고 정말 신을 데려오면 그건 내가 바라 마지않는 일이지. 땡큐다.

“오, 하느님, 제발.”

신에 대한 기도를 남기고 드워프 아가씨는 떠나갔다. 그 신이 세상을 이 꼬라지로 만든 건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하, 신이시여, 다 뒈져버리소서. 그래서 내 마음에 편안을 가져다주소서.

신이 다 뒈진다고 내 정신이 돌아올 것 같지도 않은가. 편안은 필요 없으니, 부디. 무능한 신들아 다 뒈져버리소서.

시간은 흐른다. 내가 고지한 시간이 되어간다. 드워프들이 드문드문 광장에 모이고, 그들은 자기 입장과 주장에 따라 두 갈래로 나뉘어 선다.

광장을 중앙으로 갈라진 것이 내가 모세가 된 기분이다. 모세가 바다를 갈랐다면 나는 사람을 갈랐다. 여기서 나는 기적 하나를 더 일으킬 생각이다.

깨진 물건은 붙일 수 없지만, 갈라진 관계는 다르다. 갈라졌던 홍해가 다시 붙은 것처럼 갈라진 사람들을 끈끈히 달라붙게 하리라.

시간이 되었다. 웅성이던 소음이 멎는다. 소음을 멎게 할 무언가가 등장했다.

주인공들의 등장이시다. 내 좆집 셋이 암살자 셋을 운반해온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암살자들은 팔다리가 휠체어에 묶여 있다.

암살자를 실은 휠체어가 단상에 오른다. 구속복을 입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모습이다. 유일하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기관이 바로 입이다. 입만 둥둥 뜬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휠체어 속에 잠겨 암살자들의 입만 동동 떠 있다. 저 입이 바로 오늘의 주연 되시겠다.

잠깐 침묵하던 관객들이 다시 시끄러워진다.

“이 자들은 어제, 명인 한 명을 암살했다.”

술렁거림이 커진다. 그것은 파도처럼 물결치며 군중 사이를 돌고 돌며 파장을 키운다.

짝. 박수로 잡음을 지운다.

“이제부터 그 진상을 들을 생각이다.”

아공간에서 내 전용 연장을 꺼낸다.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피 묻고 녹슬었지만, 쓸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

고문의 왕도는 눈에 보이는 부분부터다. 예를 들어 손톱. 손톱이 뽑히기 전의 긴장감과 뽑혔을 때의 고통이 이중으로 사람의 정신을 잡아먹는다.

반대도 성립한다. 무차별적인 끔찍한 고통. 대비할 시간도 없이 치고 들어와 뇌 신경 다발을 태워버리는 고통.

예를 들어 이런 거.

“끄아아아악!”

나는 방금 남자의 발가락을 잘랐다. 잘린 발가락이 데굴데굴 구르고 피가 떨어진다. 발가락이 차례차례 떨어진다. 덜그렁덜그렁 잘려 무대에 떨어진다.

“말해봐. 사주한 사람이 누구지?”

내가 묻는데 말할 사람은 말하지 않고 비명만 지른다. 목이 갈라지잖아. 불쌍하게 시리. 애꿎은 목 다치겠다. 금제도 풀리고 미약까지 빵빵하게 먹은 놈들이 고문을 버틸 리가 없다. 고문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것도 없는 단순한 행위에도 이러고 있잖아.

진정제를 한 알 먹이고. 약효가 돌 때 동안 다음 놈에게 간다.

“표정이 왜 그래? 얼굴 펴. 스마일. 스마일. 내가 무슨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정의를 구현할 뿐이야. 정의, 좋은 말이지? 나도 참 좋아해.”

배때기에 검을 쑤신다. 평범한 장검이다. 장검이 배를 관통해 휠체어 뒤를 뚫고 나온다.

“어린이도 쉽게 따라 하는 마술 시간~ 오늘을 탈출마술 이랍니다~.”

푹푹푹. 마술하는 마술사처럼 망설임 없이 검을 찌른다.

“자, 여기서 탈출해 볼까요.”

검을 뽑고, 엘릭서를 죽어가는 암살자의 목으로 한 입 넘긴다. 그러면 짜자잔.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탈출했네요!”

탈출 마술의 성공이다. 상자도 없고 모든 과정을 관객이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마술사들이 하는 것보다 훨씬 고난이도라고 장담한다.

어떠냐, 나도 일류 마술사다.

“그러면 다음.......”

“마, 말할게, 말할 테니.......”

쨍그랑! 마지막 한 놈이 무언가 말하려 한 모양이다만, 병 깨지는 소리에 묻혔다. 굴러다니던 유리병 하나를 미리 챙겨뒀지. 준비성 좋은 나는 마술사의 자질이 있나 보다.

깨진 유리병 조각을 모은다.

“아, 해.”

“시, 싫....... 우웁!”

어이쿠, 말도 잘 들어요. 깨진 유리 조각을 한 움큼 입에 넣어주었다. 먹여주기라니. 라팔이한테도 안 해준 거다. 고작 암살자 주제에 사치를 누리고 있어.

유리만 먹으면 목이 막히니 팔팔 끓는 뜨거운 물도 부어주었다. 휠체어에 구속된 암살자가 발작한다. 워워. 그래도 안 죽으니 걱정 마. 그 물에 내 피를 희석했거든.

유리 조각과 뜨거운 물로 위장 세척 제대로 하겠네. 부러운 놈.

위장 세척의 기쁨에 혼절한 놈을 놔두고, 처음 진정제를 먹였던 놈에게로 돌아간다. 눈을 보니 죽지는 않았다.

“5초간 발언 기회를 줄게. 혹시 알아? 나한테 아부를 잘하면 내가 순서를 빼먹어 줄지?”

축 처져있던 암살자의 고개가 번쩍 들리고 두 눈이 번뜩인다.

“5, 4, 3, 2.......”

“우릴 사주한 것은.......”

“늦었어.”

머리털을 한 움큼 잡고 뽑는다. 잡초처럼 뭉텅이로 머리가 뽑혔다. 월척이다. 어디 메마른 모근에 대신 심어줄 수는 없을까. 이놈은 머리가 산림이다. 아프리카 밀림.

본디 나무가 너무 많으면 빛을 가려 죽는 식물이 나오지 마련이다. 나는 원활한 광합성과 생태계 보호를 위해 밀림 개간 작업을 시행했다.

풀과 나무가 모두 뽑히고 민둥산이 남았다. 음, 밀림이 초원화 되는 것으로 모자라 사막화 되었군. 환경 파괴다. 이건 실패군. 민둥산에선 모근이 뽑힌 충격으로 피가 송글송글 맺혀 흘러내린다.

피로 샤워하는 것 같다.

봐, 머리 깎고 샤워하니 얼마나 보기 좋아. 인상이 달라 보이네.

그럼 다음 가자. 배때기를 뚫렸던 놈은 벌써 멀쩡하다. 누구 포션인데 칼빵 몇 번 맞은 걸로 죽으면 안 되지.

“우리는 황혼의.......”

“똥개들? 알아.”

눈을 부릅뜨는 두 번째 암살자. 저놈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마술사고, 마술사는 마술만 보여주면 된다.

“흐흐흥.”

콧노래가 나온다. 이번엔 무슨 마술을 펼쳐볼까. 사지 절단 마술이 좋겠다. 어떻게 하는 마술인지 봐도 봐도 신기했는데, 오늘은 내가 그 마술을 펼칠 주인공이다. 썩 좋은 기분이다. 고향에서 구천만리 떨어진 외지에서 어릴 때의 꿈을 약간이나마 이루고 있다.

피 묻고 녹슨 톱을 꺼낸다. 피를 안 닦아서 전부 녹슬었다. 이도 나가서 물건도 제대로 안 잘린다. 걱정마라. 그래도 힘주면 잘린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죽지도 않고 또 와서 이 지랄을 하는구나. 어디 날 좀 죽여줄 사람 없나. 곱게 죽어줄 마음은 없고, 날 이겨서 죽일 사람.

구속복을 입고 있지만, 팔다리는 휠체어에 고정된 모양새라 자르긴 쉬웠다. 으쌰으쌰 톱질하다 끽 막히는 부분이 있다. 음음. 역시 뼈를 자르긴 조금 힘들어. 그래도 내가 누군가. 힘으로 무인들과도 정면에서 겨루는 인간이다.

무한한 마력을 가진 나는 못 할 일이 없으리.

서걱서걱 팔다리가 잘려 뒹군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진다. 빨간 분수쇼다.

잔류하는 포션의 효과가 피를 대량으로 생성하고 있어 일어나는 현상이다. 피로 된 비가 내려요, 여러분.

저걸 돌리면 필살 풍차 돌리기 완성인가. 암살자 놈은 자기 몸에서 나오는 피에 놀라 제정신이 아니다.

“뭘 쫄아, 이건 다 마술이야. 마술. 100% 상황 통제 아래서 이루어지는 안전한 마술. 아닌가? 마술로 죽은 사람이 있었나?”

있던가 없던가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완전 기억 능력을 얻은 건 아갈리에서지 지구에서가 아니라고. 지구에서의 기억은 오히려 흐릿하다. 가끔 기억의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상념을 낚아채고 있지만, 그것도 확신 없는 공허한 상념의 뭉텅이다.

마술로 죽은 사람이 있든 없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마술로 죽은 사람이 있든 없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음, 생각이 말로 나왔군. 나온 김에 할 말은 하자.

“어차피 죽는 건 내가 아니잖아? 자자자. 마술을 계속해야지. 여러분 보시죠. 완벽하게 잘린 이 팔다리가 요렇게!”

잘린 사지를 이리저리 끼워 맞추니 알아서 붙는다.

“멀쩡하게 변했습니다! 짜자잔!”

대량 출혈 때문에 허덕이는 두 번째를 두고 세 번째로 간다. 이놈은 위장 세척이 끝났는지 안에 있는 것을 게워내고 있다. 유리 조각과 뜨거운 물과 위액과 피가 섞여서 입으로 역류한다. 내장 조각도 보인다.

으엑, 더러워.

“위장을 비웠으니 배고프지? 식사까진 준비 못 했고. 이거라도 줄게.”

아공간에서 그릇을 꺼내 물을 담고, 매운 향신료를 듬뿍 탄다. 막 세척한 위장에는 자극이 조금 강할 거다. 사람은 강하게 크는 거다. 굳세어라, 암살자야.

“아 뎨, 시져.”

“떼쓰지 말고. 그냥 삼켜.”

남정네가 어디서 혀 짧은 소리야.

사발을 입에 들이붓는다. 자꾸 뱉어내려 해서 입에 마개까지 채워줬다. 빈속은 몸에 안 좋다. 든든하게 먹어야지. 나는 너무 친절해서 탈이야.

첫 놈에게 다시 다가가 묻는다.

“누가 시켰고, 뭐가 목적이야? 다 불어.”

잠깐 갔다 온 사이에 눌변이 달변이 되었다. 놈은 자기가 첫 번째 암살자가 자기가 보고 들은 걸 전부 술술 분다.

내 쇼를 구경하던 구경꾼들도 그걸 모두 들었다.

미국이 테리스를 잡아먹기 위해 뒤에서 수작을 부렸다.

두 개로 갈라졌던 도시가 그 자리에서 단결했다.

봐, 웃음과 희망이 피어나는 화합의 쇼 맞잖아?

========== 작품 후기 ==========

웃음과 희망을 주는 아이들을 위한 마술쇼의 관람이 지금이라면 무료! 공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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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워프들이 뭉쳤다. 정해진 수순이었다. 말하자면 집안일에 생판 남이 끼어들어 분란을 조장하다 걸린 것이다. 가족 입장에서는 아주 좆같을 거다.

가족 싸움 따위 바로 그만두고 이간질한 놈들을 족치겠다고 설치겠지.

마술쇼의 성화가 너무 크다. 초보 마술사인 나로서는 감개무량하다. 마술사는 신비감이 있어야 하는 법. 부주인공은 이만 퇴장하겠다. 주연을 두고 잘 놀아 봐라.

저기, 휠체어에 앉아 구속복에 묶여 있지 사지 멀쩡한 주연들이 계시다. 정신이 멀쩡한지는 글쎄? 본인들에게 물어보라지.

“그럼, 나머지는 알아서들 하시길.”

투명화 마법으로 슬쩍 자리를 빠져나온다.

“어디로 갔어?”

“그보다 저놈들부터 잡아!”

휠체어에 앉아 움직이지도 못하는 불쌍한 중생들을 뭘 또 잡겠다고 난리인지 드워프들이 달려가 휠체어를 감싼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아니, 세 암살자와 일천 난쟁이다.

일곱 난쟁이가 백설 공주를 그냥 먹여주고 재워줬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직 동심이 남아 있는 사람이다. 미모의 공주를, 한창때의 난쟁이가 그냥 호의로 재워줬을 리가 없잖아. 분명 추잡하고 원색적인 거래가 오갔을 거다. 섹스 말이야. 섹스.

백설 공주는 주거와 보호를 담보로 몸을 판 창녀다.

동화의 원본은 잔인한 경우가 많다니 이것도 개소리는 아니다. 백설 공주는 일곱 난쟁이와 난잡한 관계였을 게 분명하다. 지금의 제목 대신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구전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성에서 쫓겨난 아름다운 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저열하고 추잡한 나날.

술자리 음담패설로, 또 당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싸구려 글쟁이들의 단골 소재였을 것이다. 공주와 난쟁이의 난교 파티. 꼴리긴 하잖아?

공주와 난쟁이의 난교 대신, 저기선 암살자와 난쟁이의 심문이 벌어지고 있다.

드워프가 작달막해서 약하다? 대장일의 기본은 풀무를 밟고 망치를 두드리는 것이다. 저놈들의 힘은 체구와 비교하면 우악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좆집들을 찾는다.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미리 골목길로 피해 있다.

“주인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사랑이가 묻는다. 나는 잠시 고민한다. 글쎄.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다.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미국과 적대하는 것은 확정 사항이고, 눈 여겨야 할 것은 미국의 반응인가.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알려져도 또 안 좋을 건데. 생각 없이 벌인 감이 좀 있지만 후회는 없다. 언제 그런 거까지 신경 써가며 돌아다녔다고.

그랬다면 인류의 적이 되지도 않았다.

“미국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다르겠지.”

뒤에는 미국이 있다 해도 겉으로는 황혼의 똥개들이 벌인 일이니 그놈들을 팽하고 다시 친교를 요청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아예 적대하고 나와 테리스라는 나라를 복속시킬 수도 있다.

저렇게 분개하는 드워프들의 결정은, 사실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미국의 뜻대로. 사이비 종교의 교구처럼 보이지만, 이게 진실이다. 미국이 놔두기로 하면 사는 거고, 미국이 나서면 죽는다.

저 건물들. 도시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마천루의 군집은 너무나 허약하다. 종이 병풍과 다를 게 없다.

기술과 자재를 제공 받는 쪽과 제공 하는 쪽. 누가 기술로, 폭력으로 우위일지 보지 않아도 뻔하다. 허접하고 허무한 몸부림이다.

그리고 극히 일부는 그걸 깨달았다.

사흘 뒤, 수염 할배와 근육 아저씨를 포함한 여섯 명의 드워프가 날 찾아왔다. 근육 아저씨를 빼면 모두 명인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도시를 양분하고 서로 싸우던 실세들이 모두 모였군.

“그 검을 보여줬으면 하네.”

수염 할배가 말한다.

“여태 중고만으로 잘하더니?”

“중고?”

“빌려준 그 검 이름.”

란페이라는 이름이 있던가? 중고가 본명이고 란페이가 별명 아니야? 중고이냐 란페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 명검의 이름이 고작 중고라니.......”

명인 중 하나가 헛소리를 한다. 중고는 어디까지나 중고다. 다른 이름은 논외. 그래, 그 검의 이름은 중고였어. 란페이가 별명이였군.

“되도록 그것만으로 해보려고 했지. 그런데 그게 잘 안 돼.”

“그 온다는 엘프 사제는?”

“떠도는 그자를 찾아냈고, 여기로 보냈다는 소식이네.”

“그건 좋은 소식이네.”

나는 여섯 명의 드워프를 쓰윽 본다. 가진 바 마력은 대단하지 않다. 가장 강해 보이는 사람이 겨우 4급에 턱걸이하는이 수염 할배다. 명인 중에서도 특출났구나.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마력을 제외하더라도 명인이라고 이름 붙은 다섯에게서는 무겁고 뜨거운 분위기가 있다. 불을 벗 삼아 평생 철을 두드려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불 그 자체랑 비슷하다.

“이번 일은 일부가 멋대로 벌인 불측한 일이었고, 지원 지원과 기술 지원을 더 늘려준다고 하더군. 미국에서 말이야. 따르기로 했네.”

그쪽으로 나왔나. 미국은 일 년 가까이 작업해두고 작은 일 하나 틀어졌다고 버리기보단 협상을 택한 듯하다.

직접 접촉하지 않고 중간에 이상한 단체를 내세운 시점에서 우릴 믿을만한 놈들이 아닙니다, 하고 광고한 것과 같은데. 그럼에도 이런 반응 보인다는 것은, 스스로 깨달은 거겠지.

자기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무엇으로 발버둥 쳐 보려고?”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

수염 할배가 굳은 의지를 담아 말한다.

“검은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도구. 우리는 그걸 직접 만들고 발전시켜 왔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네. 비록 새로운 기술에 밀려 사라질지라도, 검은, 냉병기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대답이다. 시대에 뒤처졌다고 자기 입으로 인정한 물건을 되살리고 싶다니. 시간을 역행하겠다는 소리다. 그 방법을 나한테 와서 찾지 말고 시간 여행을 하거나 문명을 역행시켜라.

세계 단위의 핵전쟁이라도 터지면 문명이 역행할 거다. 세계 3차 대전은 뗀석기가 무기가 될 거라는 말이 있던데 그것처럼 될지도 모르지.

“그거랑 내 검이 무슨 상관인데?”

“그걸 참고로 해서 다른 하나의 검을 이용하면, 만들 수 있네.”

“녹이겠다고, 그걸? 미친.”

속으로 해야 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전백귀후십귀를 참고로 중고를 녹여 새 검을 만들겠단다. 얼마 전에 중고가 인간이라던 사람 어디 갔나? 그 노인은 죽고 여기 있는 건 가짜 아냐?

“그 처자한테도 동의를 받았어.”

“걔가?”

괜찮아 보이더니 드디어 미친 건가. 자기 몸을 녹여서 자살하겠다니 나도 처음 보는 참신한 자살법이다.

“그럼 됐나.”

본인이 죽겠다는데 내가 말릴 이유는 없다. 좆집으로 쓸 마음도 없고, 중고의 역할은 수염 할배와 계약한 시점에서 끝났다. 사용 가치도 사라졌다.

내가 심심했다면 장난감으로 데리고 다녀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나는 내 좆집과 애완동물을 관리하느라 바쁘다. 물건과 애완동물의 관리는 주인 책임이지. 나는 책임감 있는 남자라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전백귀후십귀를 아공간에서 꺼낸다. 검집에 감싸여 있어도 이놈의 광기는 숨길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보면 이게 뭔지 알아?”

“명인이라 불릴 수준이 되면 광물을 보는 기능이나 진명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법이지.”

그 기능으로 방사능 검도 알아볼 수 있을까 회의적인데. 본인들이 자신 있다니 나는 따라갈 따름이다.

공방으로 자리를 옮겨 영감들이 전백귀후십귀를 요리조리 뜯어본다. 연신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대장간 한쪽의 진열대에는 중고가 다소곳이 놓여 있다.

검 상태인 중고에게 다가가 말을 붙인다.

“야, 죽겠다며?”

중고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국부만 겨우 가린 날개옷을 보고도 전혀 흥분되지 않는다. 중고에게 표정이 전혀 없다.

검집에서 나와 멍하던 것과는 다르다. 포기. 무표정 아래로 완전한 포기와 체념이 읽힌다.

도망치지 못해 선택한 것이 결국 자살이냐. 그것도 스스로 죽을 용기가 없어 택하는 타살과 같은 자살. 그러면서도 공포와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쩍쩍 금이 간 무표정이다. 저 얼굴로 뭘 하겠다고.

어찌 보면 저게 중고의 진명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며 얼굴이다.

인간. 약한고 강하며 더럽고 깨끗하고 선하며 악하고 추잡하고 상스럽지만 경건하며 신성하다.

어울릴 수 없는 모든 속성이 어울려 섞일 수 있는 혼돈의 도가니가 인간이라는 녀석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내 눈에 중고는 지극히 인간적으로 보인다. 결연하되 두려워하며 채 숨기지 못한 감정은 건드리면 터질 것 같다.

저런 인생을 살면 정말로 보람찰 것 같다. 하루하루 변하는 감정의 물결을 타고 때론 이성에, 때론 감성에 따르며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삶, 근본은 불안할지 몰라도 거기에는 삶을 가득 채우는 풍파가 있을 것이다.

마모되고 삐뚤어져 왜곡된 광기만 남아 존재하는 나와는 달리... 저건 인간이다.

짜증이 치미는군. 그나마 일어난 짜증도 내 안에서 붉은 광기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광기가 더해진 것인지 이게 광기가 이것인지. 아니면, 내가 광기일까, 광기가 나일까. 이미 나는 먹혀 사라진 건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문 잡념이 아가리를 들어 머리를 물어뜯는다. 꼬리가 머리를 뜯고 머리는 다시 꼬리를 만든다. 꼬리와 머리가 끝없이 물고 물며 머리를 헤집는다.

뭐야, 평범한 광증이잖아. 이 정도는 익숙하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미쳤겠지. 수십 개로 분할된 사고가 나를 살리고 있다.

킥. 날 이 꼴로 만든 마법사 놈들에게 유일하게 감사하는 게 있다면 바로 이 머리와 심장이다. 심장까지 하면 두 개구나. 가랑이 사이에 달린 샷건까지 하면 세 개. 꽤 많네.

정신을 차리니 중고가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무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라팔이의 무표정으로 단련된 나는 그 안에 담긴 뜻도 대충 알겠다.

-도와줘.

뭐 이런 거?

싫다. 나는 중고가 내린 선택을 존중한다. 스스로 가겠다면 정중하게 배웅해줄 생각이다. 잘 가라.

한 명의 인격체로서 인간은 서로를 존중해야 하지 않겠어? 그게 사람 사는 거지.

위로도 격려도 하다 못 해 욕도 하지 않고 나는 중고에게 한 번의 눈길만 주고 공방을 나왔다.

괜히 건드렸다가 결심이 흔들리면 안 되잖아? 나는 중고의 결정을 지지한다. 지가 죽겠다는데 내가 뭘 해주겠어.

명인들이 모여 날짜를 잡는다. 검을 녹이고 새로 만드는 간단한 작업. 그렇지만 그 검이 간단하지가 않다. 사람으로 변하는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검. 영혼을 가진 검이다.

듣기로는, 사람을 제물로 마검을 만드는 비법이 실제로 있다나. 그걸 이용할 생각이란다.

명인이라 불리는 그들도 처음 하는 작업이다. 준비 현장을 잠깐 봤는데, 노쇠한 명인들의 눈에서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의 장작이 힘 앞에 굴복할 수 없는 설움인가. 아니면 단순한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인가. 나는 모른다.

그냥 그들이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을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되었다.

근육 아저씨까지 쫓겨나고, 다섯 명의 명인과 나만이 마련된 공방에 들어온다. 후끈한 열기가 올라오는 공방 구석에는 이미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중고는 검의 상태로 수염 할배의 손에 얌전히 들려 있다.

5천 년간 봉인되어 있다가 나한테 걸린 불쌍한 검과 과학 기술에 밀려 뒤로 사라지게 될 기술을 계승하고 있는 늙은이들.

옛것들이 서로 괴이한 형태로 합쳐지려 하고 있다.

수염 할배의 손에 들린 중고가 끊임없이 진동한다. 수염 할배가 용광로에 중고를 넣고, 용광로 속에서 중고가 녹아내린다.

중간계판 에밀레종. 에밀레검이 만들어지려 하고 있다.

========== 작품 후기 ==========

이계에서 공돌이와 여자를 갈아만든 에밀레검.

적을 벨 때마다 에밀레, 에밀레하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한다.

영혼을 울리는 고통에 찬 끔찍한 비명이 물질을 넘어 정신으로 전해진다. 그 충격에 명인들도 몸을 가누지 못한다.

검으로 변하는 사람이, 아니 사람으로 변하는 검을 녹여서 다시 검을 만드는 작업이다.

인신 공양이라니 최신 기술에 역해하려는 구닥다리 영감들다운 방법이다. 지구라면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고 조선 시대라면 마을 원님에게 일러다 받쳤을 거고, 현대라면 바로 감방행이다.

드워프 사이에서도 제대로 된 방법은 아니다. 그러니 마검 제작 방법 같은 걸로 기록되어 있지.

영혼의 비명에 신음하던 명인들은 바로 정신을 다잡고 작업에 착수한다. 예상했던 일의 하나다. 그들 모두 명인이고, 드워프 최고의 장인이라는 별명을 겉멋으로 딴 것은 아니었다.

비명을 곡조 삼아 중고가 용광로 속으로 사라지고 부글부글 쇳물이 춤을 춘다. 에헤라디야 춤춰라 중고야. 인생의 마지막을 불태워라. 중고의 마지막 춤사워가 내 눈에는 보인다.

다섯의 명인들이 오감으로 느끼는 건 비명 정도다. 그러나 나는 용광로 안에서, 쇳물에 녹아 요동치는 중고의 영혼이 보인다. 말 그대로 영혼의 몸부림이다. 지옥불에 악인이 심판받듯 중고의 영혼은 몸은 불길에 녹고, 영혼은 뜨거움으로 고통받고 있다.

지옥이 있다면 저곳이고, 중고의 모습은 최후의 심판을 받는 악인의 모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고는 이곳에서 가장 죄가 없는 사람이고, 모든 죄를 이고 있는 사람은 나와 이 드워프 영감쟁이들이다.

죄 있는 자가 죄 없는 자를 벌주니 세상에 정의가 없다는 것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광경이 또 있을까 싶다.

신이 있다면 마땅히 나와 다섯 난쟁이를 벌해야 할 진데, 그 신이란 놈들은 사실 세상에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60억 인구를 인신 공양해 시스템이라는 괴악한 법칙을 유지하려 드는 천하에 다시없을 개새끼들이다.

이 세계는 미쳤다는 사실이 다시금 실감한다.

명인들이 모여 영혼을 담금질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을 틀로 굳히고 망치고 때리고 물로 식힌다.

저게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단순한 고문이다. 직접 당한다면 나도 눈썹 찌푸릴 정도의 고문.

인체 실험으로 단련된 내가 눈썹 찌푸린다는 것은 보통 고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두로 지지는 것도 아니고, 불로 태우는 것도 아니고, 열기로 녹이는 고문은 나도 못 당해봤다.

명인들은 어느새 끔찍한 비명은 신경 쓰지도 않기 시작했다. 단순한 검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신 공양으로 사람을 바쳐 만든 마검이다. 거기에 필요한 마법적 준비를 하고 있다.

꽤 수준 높은 마법이다. 드워프가 마법을 못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같은 대륙의 주 종족이 엘프와 마족이라 밀리는 거지, 저놈들도 남대륙 가면 마법으로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다.

마법의 준비가 끝난다. 달아오른 용광로의 쇳물이 형태를 잡아간다. 비명은 그쳐있다. 나에겐 고통에 지쳐 축 늘어진 중고의 영혼이 보인다.

꺼질 듯 깜빡이는 영혼은 금방 사라질 것 같다. 바람 앞의 불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며 타올랐다 사그라들길 반복한다. 그래도 끝끝내 죽진 않는다. 사라지지 않고 타오른다.

어쩌면 죽고 싶어도 죽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지도. 중고의 몸과 영혼은 나도 처음 보는 상태다. 쩨쩨하게 주는 창녀의 기억에도 저런 건 없었다. 중고의 상태는 나도 완벽히 짐작할 수 없다.

마법이 준비되고 검이 연마된다. 영혼은 물결치고 요동치기도 하며 시시각각 변한다. 그 동적인 움직임을 구경하고 있자니 뚝딱, 검이 완성됐다.

과한 장식은 없는 검이다. 평범한 검신에, 손잡이 중앙에 작은 보석이 달려 있다. 화려하지 않고 투박하고 색이 탁한 보석이다. 저 보석 안에 중고의 영혼이 담겨 있다.

외형과 달리 검에 담긴 기세는 무시무시하다. 중고가 가지고 있던 마력을 모두 가진 데 더해. 저 검은 광기를 품고 있다. 전백귀후십귀와 같은 광기를. 세계에 탄생한 두 번째 광검이다.

-야, 살아 있냐.

대답 아닌 대답이 돌아온다. 정제되지 않은 광기. 그 순수한 염(念)이 내 머리로 들어온다. 미친 영감탱이들 뭘 만든 거야. 광기만 따지면 전백귀후십귀랑도 겨루겠다. 전백귀후십귀는 영혼이 없는 물질 덩어리고, 이 검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있다. 하, 성검이 마검이 되었어. 아주 제대로 된 마검이.

보석 안의 영혼은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새로운 몸에 맞춰 영혼도 변이하고 있다. 변이 끝마치면 좀 더 명확한 의사 전달이 가능하겠지.

영혼이 불태워진 원한 어린 처녀...는 아니고 중고의 원한과 광기가 스며든 검이 되었다.

위력만 치자면 월등하다고 해도 좋겠지. 다만, 저걸 손대려면 보통의 용기로는 안 된다.

검을 만들었으면 시험해보는 것이 기본이거늘. 그 누구도 검을 집을 생각을 안 한다. 검을 볼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인간들이니 알겠지. 저게 뭔지.

어중간한 마검 뺨때리는 광검이다. 투박한 외형에 낚여 잡는 순간 잡아먹힌다.

그래도 난 아니다.

망설임 없이 새로 태어난 중고를 잡는다. 중고가 새로 태어나 새 몸을 얻었으니 이제 처녀구나.

처녀의 처음은 내가 가져갈 거니 다시 중고구나. 중고는 새로 태어나서도 중고다. 불쌍한 중고. 네 처녀는 아지랑이 같구나.

중고의 광기가 나를 침식한다. 정신으로 직접 전해오는 원초적인 붉은 회오리가 내 머리를 헤집는다. 그러나 미적지근하다. 약하다. 코웃음이 나온다.

“겨우 이거냐?”

발끈한 듯 중고가 더욱 힘을 높여 날 지배하려 한다. 그러다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 잠잠해진다.

“잠깐 걸을까.”

내가 뭘 하려는지 깨달은 명인들이 순순히 따라온다. 검집도 만들어지지 않은 중고를 가지고 도시 밖으로 나간다. 도시 뒤쪽에 있는, 한때 광산으로 쓰였다는 산을 겨냥해. 중고를 휘두른다.

중고에서 붉은 검기가 날아가고, 산이 비스듬히 무너진다.

딱히 마력을 담은 것도 아니다. 그냥 베어지려나. 생각하면서 휘둘렀다. 그런데 저만치 있는 산이 잘렸다. 모두 중고가 한 일이다.

반신에 약간 못 미치는 무기였던 중고는, 한 번은 자살과 장인의 손길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 반신도 잡는 검으로. 이거라면 반신을 죽이는 것도 마냥 불가능하지는 않다.

“목적은 이뤘네.”

화기로 산을 자르려면 미국에서 봤던 레이저 총의 대구경 버전이나 중국의 대 반신용 전술 병기 정도는 필요하겠지. 그걸 검으로 구현했으니 목적은 이룬 거다.

이 시대에 뒤쳐진 장인들은 시간을 되감는 데 성공했다. 기술을 뛰어넘는 검을 만들어버렸다. 광기와 집착의 산물이라고 해야겠지. 거기에 중고의 헛된 바람까지 추가해서.

죽고 싶었던 중고는 죽지 못했다. 대신 온몸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그걸 남에게 전가하고 지배하려는 추악한 광검이 되었다.

중고야, 그게 니가 원하던 거였냐?

투박한 검에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중고는 일관되게 미쳐있다. 이성도 없이 본능만 남은 이걸 중고라 부를 수 있나?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선 뭐가 필요한지 철학적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생각하길 그만두자. 귀찮아.

홀로 돌아와 중고를 대장간에 던져두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혼자 게임하던 라팔이가 스윽 돌아보곤, 자기 옆자릴 팡팡 두드린다. 혼자하느라 외로웠구나.

우리 중에 라팔이랑 게임이 가능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사랑이는 뇌 속이 성욕으로 꽉꽉 차 승부욕이라는 놈이 들어갈 자리가 없고, 피오라는 몸치라 게임 자체를 못한다. 게임도 비슷한 사람이랑 해야지.

그런 점에서 나랑 라팔이는 신체 능력도 비빌만하고 성향도 비슷하다. 즐겁게 게임할 수 있다.

나는 라팔이의 옆에 앉는 대신, 뒤에서 그 작은 몸을 안아 올린다.

“오늘은 그 게임 대신 다른 게임을 하자.”

“요거?”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자 검은색 팬티가 빼꼼 보인다. 옷은 얘처럼 입는 주제에 속옷은 어른스럽다니까.

팬티 위로 비부를 살살 문지르자. 팬티가 서서히 젖어간다.

다들 어딜 갔는지, 별채에는 둘밖에 없다. 오랜만에 둘끼리 기분 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조금씩 호흡이 거칠어지는 라팔이를 품에 안고 그 몸을 만끽한다.

***

수염 할배가 중고를 들고 찾아 왔다. 검을 녹이면서 그쪽 하라고 완전히 줬는데, 그럴듯한 검집까지 만들어왔다. 그리고 나한테 준단다.

“나한테? 이걸 왜?”

“검은 가장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써야지.”

“솔직히 말하지? 드워프 중에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수염 할배가 살짝 눈을 피한다. 아주 미세한 반응이지만 나는 그걸 놓치지 않는다.

전백귀후십귀 수준까지는 아니라도, 중고도 광검이다. 그걸 누가 쓰겠나. 잡는 순간 미쳐버리는데. 이미 몇 명의 젊은 드워프가 객기 부리다 광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고에게서 전해지는 고통과 광기는 그냥 버티기에는 버겁지.

수염 할배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그것도 맞네. 꿈에 그리던 무기를 만들었지만,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 그걸 그냥 썩히기엔 너무 아깝다고 결론 내렸네.”

“공짜라는데 고맙게 받을 게.”

중고는 거래 조건으로 수염 할배에게 거진 넘긴 거나 다름없었다. 그걸 돌려준다니 받아야지. 그리고 나만 아는 사실이지만, 중고는 아직 죽지 않았다.

혼탁한 보석 안에서 끝없이 변화하는 영혼이 내 눈에는 보인다. 일종의 정련 과정이다. 저 정련이 끝나고 뭐가 남을지는 호기심이 인다. 중고는 다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한 번 용광로에 몸이 불타 사라졌는데도? 그 초고온을 영혼으로 버텨냈는데도?

중고의 진명은 인간. 그리고 보통 인간은 검이 되지도 않고, 그 검을 녹여 다시 검을 만드는 일도 없다.

진명은 인간이지만 인간과 한참 떨어진 인간이 중고다.

신이 된 마을 처녀가 마지막에는 마을 처녀로 죽었듯이, 중고는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 궁금해지는 참이다.

주면 고맙게 받아야지.

“그리고, 며칠 내로 수배했던 그 사람이 도착하는 모양이야.”

“그건 좋은 소식이네.”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빨리 왔다. 신을 만나본 엘프라. 엘프가 기다려지기보다는 신을 만나는 방법이 기다려진다.

영혼을 없애는 법도 알았다. 신과 싸우길 주저할 이유가 없다.

싸워서, 죽이고, 그 영혼까지 소멸시켜 버리리라. 다음은 인류 연합이다. 내 인생을 말아먹은 놈들을 모조리 정리한 다음에야 난 죽어도 편히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죽는 건 사양이다만.

나흘이 지났다. 우리가 묵고 있는 여관에 드워프 아가씨가 찾아왔다. 손님을 한 명 대동하고.

“주를 배알하고 싶으신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주를 섬기는 종, 트뤼펠이라고 합니다.”

그윽한 나이의 엘프가 앞으로 나와 인사한다. 몸에서 경건함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이놈은 진짜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그런 사제다.

나는 이런 사람을 상대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니가 대신 나가라. 그런 의미로 눈짓을 주니 유상민이 나서 응대한다.

“미약하지만 그분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대로 된 대응. 그걸 보고 피오라가 입을 떡 벌린다. 나비도 냥! 하고 등을 곧추세운다. 저놈이 저런 태도로 남을 대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나도 처음에는 놀랐다.

그야 말이 안 되잖아? 저놈이 사람을 제대로 상대하다니.

“엘프들이 섬기는 주, 그분을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유상민은 서론 결론 다 집어치우고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신록의 나무, 그 안에 있는 영원의 공간에서 저는 주를 뵈었습니다.”

좋아, 다음 타깃의 위치를 알았다.

========== 작품 후기 ==========

목표를 포착했다!

유상민은 적당히 사제와 이야기를 나누다 돌려보냈다. 사제는 매우 만족하며 물러갔다. 저놈이 지가 무슨 짓을 한 줄 알까. 자기 신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 아주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지.

사제가 했던 말 중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교단에서도 극히 일부만 아는 사실입니다만, 주를 생각하는 그 마음 모르지 않는바. 특별히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특별’이 중간계를 나락으로 밀어 떨어뜨리는구나.

본의는 아니겠지만 아주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 나중에 내 전기를 편찬할 일이 있다면 이름을 올려주마. 여러 의미로다가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이 될 것이다.

이러니 내가 꼭 선량한 사람을 속이는 악당 같잖아. 나는 오로지 진실만을 말했다. 작금의 사태를 걱정하는 것도 사실이고, 이 사태를 속히 해결하고 싶은 것도 진심이다.

신들의 농간에 날아가는 작금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원인인 신들을 모두 쳐 죽여야 하는 거지. 대의적으로 보면 내가 정의의 편이다.

대의를 위해서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잖아? 이 말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있는 불쌍한 중생들아. 내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왔노라. 그러니 제발 닥치고 내 앞길이나 막지 마라.

영혼이 오염되어 아무리 이빨을 갈아도 송곳니를 들이대지 못하는 놈들. 신들 아래에서 사육돼는 가축들과 가축들의 세계. 그게 중간계의 진실이다.

기뻐해라 개돼지들아. 내가 한 몸 바쳐 친히 너희를 구휼하리라. 빌어먹을 새끼들, 은혜도 모르고 자꾸 나한테 지랄이야.

신을 죽이면 날 귀찮게 하는 인류 연합부터 쓸어버려야지. 죽이고 죽여서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피와 살로 내 앞길을 물들일 것이다. 붉은 피의 살로 물컹한 길이 바로 내 앞길이다.

아주 탄탄대로군. 세계에 생물이 있는 한 내 앞길이 사라질 일은 없을 지언져 나는 영원히 마이웨이를 걸을 것이다. 이 길에 찬란한 피(血) 있으라.

좆같은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면 이건 좆같은 생각이니 개생각이다. 개생각을 머리에서 날려버리고 현실에 집중한다. 암, 나는 매우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다. 그런 놈이 인류와 척을 지냐? 암, 그건 매우 논리적이고 현실적이며 현명한 선택이었어. 인류여 멸망할지어다.

신록의 나무는 엘프들이 부르는 이름이고, 인간들은 그 나무를 세계수라고 부른다. 세계수와 엘프. 고전적인 이름이다. 그래서 더 잘 와 닿는다.

신록의 나무는 엘프들의 제국 나란테에 있고, 성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라는 것이 유상민의 설명이다.

테리스에서 나란테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거의 대륙 횡단을 해야 했다. 텔레포트 마법진이 대중화된 것은 인류, 그것도 선진국 정도고 그 텔레포트 마법진도 사용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중간계의 이동수단은 아직 미개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텔레포트라는 개사기 수단이 있다. 쉬엄쉬엄 이동하길 사흘. 신록의 나무가 보이는 지점까지 왔다.

“딱 봐도 세계수네.”

신록의 나무는 세계수라는 별명이 절로 생각나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그냥 크다. 엄청 크다. 기둥이 구름을 뚫고 올라가 있다. 가지 부분이 구름 위로 어렴풋이 보인다.

나무에는 그림자가 없다. 저 크기의 나무에 그림자가 생기면 그것만으로 큰일이겠지.

놀라운 건 거기서 끝이 아니다.

“신과 관련 있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네.”

“응.”

나에게는 보인다. 라팔이에게도 보이겠지. 세계수를 둘러싼 방대한 영혼이. 모든 스펙트럼을 포괄하는 빛의 군집이 세계수에 모여 찬란히 빛나고 있으며, 빛은 지금도 모여들고 있다.

세계수 자체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난다.

죽은 생물의 영혼 일부는 그 생물을 죽인 사람에게 흡수되며, 나머지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건 어디로 사라질까?

그 대답이 여기 있다. 바로 신록의 나무로 간다.

찬란하게 빛나는 세계수는 오물이 덕지덕지 묻었다. 저 영혼은 누구의 영혼인가, 어디로 가야 할 영혼인가.

모두 목적과 역할을 상실하고 신록의 나무에 채집되고 있다. 저 나무는 거대한 곤충 채집망이다.

마을 처녀가 그랬지. 영혼은 개체의 고유 식별 번호라고. 그건 개개인을 분류하는 기준이고, 그게 없으면 개인은 개인이 아니게 된다. 흔하디흔한, 그래, 마치 죽기 직전의 중고처럼 인간이라는 커다란 틀에 들어가 개체성을 상실하고 뒤섞이고 뒤채여 인식의 바다에 가라앉겠지.

죽기 전 중고가 보여준 모습은 분명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중고의 모습은 아니었다. 인간이며 검인 중고는 그때 검이며 인간이었다. 검인 중고는 없고 검인 인간이 있어 검과 인간 사이에 중고는 끼어들 자리를 상실하고 쫓겨났다.

나도 저 정도는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죽을 수 있게 해준다고. 아마도? 그에 반해 저건 수천만 명의 뇌를 꺼내 섞어버리는 행위다. 그 안에 남는 건 기껏해야 광기 정도겠지.

신들이라는 놈들이 하는 짓이 미친놈인 나보다 심하다. 패배감이 느껴진다. 분발해라 진휘야. 전문 분야에서 밀려서야 되겠니.

“저 안에 있다고 했지?”

“그런데요? 잠깐만요. 그걸로 뭐 하게요?”

검은 구슬을 손에 든 나를 보고 유상민이 질겁하며 묻는다. 나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태도로 답한다.

“폭격.”

목표는 거대하다. 빗나갈 걱정도 없다. 신이 저 안에 있어? 두드리면 된다. 두드려서 박살 내면 튀어나오겠지.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드뮈나시에서 채취한 우라늄, 그것들의 가공은 벌써 끝났다. 쏘기만 하면 된다. 거대한 목표를 맞추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 그냥 사격 연습이다.

공간이동으로 목표를 지정할 거니 사격 연습도 안 되나?

공간을 가르고 수백 개의 검은 공이 나타난다. 이미 임계 질량까지 압축된 농축 우라늄은 겉을 감싼 마력장이 없다면 바로 폭발할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다. 그 안에 더욱 마력을 주입, 방사능 마법으로 핵분열을 촉진한다.

가라.

세계수가 불꽃에 휩싸였다. 세계수를 둘러싼 영혼의 빛들도 바래 보일 정도의 강렬한 섬광이 천지를 뒤덮는다.

섬광과 열풍이 사라진다. 세계수는 상처 입었지만 굳건하다.

다시 가자. 터져라, 펑!

계속. 계속. 계속. 세계수에 폭격을 퍼붓는다. 핵을 그냥 터뜨리는 것도 아니고, 핵탄두의 폭격이다.

나도 이만한 화력을 쏟아붓는 것은 처음이다. 점점 흥분되기 시작하는데.

전부 뒈져버려라! 신록의 나무 아래에는 제국의 수도가 있어? 알게 뭐냐. 열풍의 여파로 전부 뒈져버리라지.

누가 나보고 선인이래. 난 악인. 그보다 광인이다. 내 학살에 변명할 생각은 없다. 나는 이게 신이라는 놈을 상대로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 생각했고, 선택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날 원망할 거면 원망해라. 죽이러 오면 기꺼이 싸워주마. 난 미친놈이고 개새끼다. 두 개를 합친 광견이다.

이 세상 모든 욕을 다 퍼부어도 나라는 존재에 대한 형용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러니 더 참신하게, 더 잔혹하게 나를 욕하고 나에게 폭력을 휘둘러도 좋다. 단, 그러고 살아 있을 자신이 있다면.

약간의 조미료를 곁들인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네. 승리 앞에 물불 안 가리는 건 전부 똑같잖아?

폭격을 멈춘다. 너덜너덜해진 세계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을리고 타들어 간 기둥이 위태위태하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중고를 뽑는다. 전백귀후십귀도 허리에 찬 적은 없는데, 네가 내 허리를 차지하는구나. 물론, 밤에 내 허리는 내 좆집들의 차지다.

킥킥 웃으며 중고와 교감한다. 정렬되지 않은 광기와 무의식이 내게 흘러온다. 중고의 광기는 다듬어지고 있으며, 벼려지고 있다. 규칙이 생겨가고 있다. 조만간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그게 궁금하다.

중고야, 가자.

네 첫 출전이다. 그리고 그 첫 먹이는 영광되고 영광스러운 신록의 나무. 신의 거처이자 영혼의 벌레 채집장이다.

통 안에서 날갯짓하는 벌레들의 풀어줄 시간이다. 그 과정에서 짓이겨질지도 모르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마력을 담고, 웃음을 담는다. 내 웃음이란 곧 광기다. 중고에게서 전해지는 사념이 강해지고, 검이 떨린다. 강맹한 마력이 검신을 타고 달린다.

이게 바로 신검이다. 마신검, 광신검. 무엇으로 불러도 좋다.

검을 머리 위로 든다. 검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습하는 동작. 내려치기.

일섬이 세계를 가른다. 하늘과 땅을 가르며 날아간 공격이 세계수에 닿는다.

정적이 흐르고, 거대한 나무가 둘로 갈라진다. 세계수에 묶여 있던 영혼들이 하늘로 날아가며 별무리를 만든다.

신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래도 안 나와? 설마 저기에 없는 거 아니야? 그러면 조금 실수한 게 되는데. 저게 시스템과 관련된 무언가인 이상 신이 없다 해도 없앴을 거였으니 큰 실수는 아니다.

작은 실수다.

이게 작은 실수가 될지 올바른 판단이 될지 확인해야겠다.

텔레포트를 사용해 세계수를 향한다.

도시는 대혼란이다. 죽은 사람은 많지 않지만 부상자가 많고, 나무로 만든 집들은 뿌리채 뽑혀 있다. 나무에 깔려 신음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폭탄을 터뜨린 고도가 너무 높아서 그런가. 생각보다 도시의 피해는 미미하다. 단, 내가 중고를 휘두른 궤적에 있던 것들은 모든 것이 잘려나갔다.

사람도, 건물도. 반듯하게 잘린 시체가 내가 가는 길마다 보인다. 정확히는, 내가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이게 직선거리거든. 최단거리.

신록의 나무, 세계수에는 혼돈이 강림해 있다. 사제로 보이는 자들이 광란에 빠져 지랄하고 있다.

오, 신이시여, 저흴 버리시나이까. 신록의 나무가 무너졌다, 종말이 도래할 거야! 우리는 끝이야!

세기말 사이비 종교를 보는 것 같군. 옥장판 팔면 잘 팔리려나? 죄를 사해주는 면죄의 옥장판이 지금은 단돈 2000만원! 잘 팔릴 것 같다.

“빙고.”

내가 잘못 온 건 아닌 것 같다. 세계수의 밑동이 있는 자리, 그곳은 강력한 결계가 감싸고 있어 잘리지 않았다. 느낌이 온다. 저 안에 신이 있다.

엘프들이 결계를 감싸고 있다. 그들에게 다가가 묻는다.

“이 안에 너희 신이 있다. 그렇지?”

“이, 이 망측한 일을 벌인 게... 신의, 우리의... 신록의 나무가아아아!”

착란 상태라 대화가 안 된다. 옷을 보니 계급도 높아 보이는 놈이 채신머리가 없어서야 종교의 미래가 걱정이다.

“성대모사가 뭔지 알아?”

“알아.”

“아냐, 모를걸? 내기할래?”

“싫어.”

낌새를 챈 라팔이가 먼저 발을 뺀다. 칫. 아깝게.

“저는 할래요.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거요.”

사랑이가 불쑥 끼어든다. 눈에 욕정이 가득하다. 얜 그거다. 이기든 지든 자기 성욕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그거. 오늘은 기분도 좋겠다. 어울려주기로 하자.

“땡. 성대모사는 이런 거지.”

착란하는 사제를 땡겨와 성대를 뽑는다. 그리고 연금술로 그것과 똑같은 성대를 반대쪽 손에 만든다. 내 손에는 완전히 똑같이 생긴 성대가 두 개 들려 있다.

“성대모사. 완벽하지?”

“제가 졌어요. 그래서, 벌칙은 뭐에요?”

“그건 나중에.”

눈을 빛내며 묻는 사랑이와 낄낄대며 웃는 나, 그럴 줄 알았다면서 나를 뾰로통하게 쳐다보는 라팔이. 모두 미쳤다.

오늘은 기분이 좋다. 아주 좋다. 빌어먹을 신을 찢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랫도리가 빨딱서는 것 같다.

지상 최고의 개새끼가 세계 위에 군림하는 개새끼와 만날 시간이다.

세계수를 지키는 결계를 마력으로 찢어발긴다.

자, 면담 시간이다.

========== 작품 후기 ==========

작품 소개에 미친놈 주의라고 써놨는데..... 자꾸 못 봤는지 대충 넘겼는지 읽고 피 보는 분들이 계시네요.

두 번이나 주의줬는데......

결계가 찢어지자 안에 있는 놈인지 년인지 모를 놈의 존재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너흰 잠깐 들어가 있어라.”

“바이바이.”

손을 흔드는 라팔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주고, 가마를 아공간에 넣는다. 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 그 사이 인류 연합을 비롯해 나를 노리는 놈들이 공격해오면 골치 아프다.

내 좆집 중에서 반신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라팔이가 그나마 싸워볼 정도고, 라팔이도 반신은 아니다. 그런데 날 노리는 놈들은 기본이 반신급 병력을 꾸려온다. 내가 없는데 그놈들이 공격해오면 끝장이다.

전쟁을 하려면 뒤치기와 빈집털이를 조심해야 하는 법. 질리게 당해보고 습득한 진리다.

가볼까.

찢어진 결계 안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내가 들어가자, 세계수의 밑동에 문이 생긴다.

들어오라고 유혹하고 있군. 목마른 건 내 쪽이니 찾아가는 것도 내가 되어야 맞다. 그런데 말이야... 들어가기 싫은데 어쩌냐?

문 안으로 검은 구슬을 던진다. 펑, 안에서 열풍이 몰아친다. 반응이 없다. 하나 더 던진다. 던지고, 던지고, 또 던진다.

신 상대로 결정타를 기대하진 않는다. 그냥 짜증 좀 나보라고. 저쪽이 튀어나올 때까지 살살 약 올릴 거다.

말하자면 벨튀? 세계에서 가장 스케일이 큰 벨튀다. 빨리 기네스북에 등재해라. 기네스의 연락을 간절히 기다리겠다.

이십 분 정도 벨튀를 계속했을까? 안에서 히스테릭한 비명이 들린다.

“꺄아아아악! 무슨 미친놈이야! 넌 뭐하는 놈이냐고!”

가슴을 출렁거리며 여자가 튀어나왔다. 저 가슴은 좋은 가슴이다. 여신은 큰 편이 아니더니 이년은 크네. 신만 아니었다면 좆집 삼고 싶다. 그래도 신이니까 죽인다. 여기에 타협은 없다. 가슴은 피오라와 나비의 가슴으로도 충분하다.

사랑이는 골반은 끝내주는데 가슴이 좀 빈약해서.

라팔이는 그냥 모든 게 최고고.

가슴뿐만 아니라 여자는, 엘프는 천하의 절색이다. 저년은 어떻게 울며 어떻게 죽을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입술을 핥는다. 다른 의미로도 흥분되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최고의 날이다.

“너는 크윽...!”

선빵 필승. 중고로 가슴을 노렸는데 엘프의 앞에서 막혔다. 마력은 아니고, 이건 영혼의 힘이군. 진명과는 다르다. 그건 영혼이 발하는 힘이고, 이건 영혼 그 자체의 힘.

영혼을 세계수에 묶어두던 것도 이년의 능력이었나.

“너는 누구...... 적당히 해라!”

다시 접근하려는 나를 엘프가 날려버린다.

나는 분석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년이 다루는 건 영혼 그 자체로 보인다. 오크가 시공간을 다뤘으니 신마다 모두 특색이 있는 건가? 여신은 능력을 알기도 전에 죽여 버려서 잘 모르겠다.

어차피 이놈들의 근본은 생물이다. 불사를 원한 생물이 생물의 탈을 벗어버리고 사람을 밟고 섰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누구냐.”

“두 번 소환된 남자.”

“적당히 하라고 했다!”

강력한 힘이 사방에서 날 짓누른다. 그러나 모두 마력으로 풀어버린다. 영혼은 영혼의 특별함이 있지만, 마력은 세상의 근원을 이루는 근본 에너지다. 영혼과 마력이 붙으면 마력이 꿀릴 이유가 없다.

진명의 결과로 생성된 상식 밖의 현상이 아닌 영혼 그 자체라면 더더욱.

“어떻게?”

엘프가 경계하며 묻는다.

“둘을 잡았는데 셋이라고 못 잡을까.”

“......!”

빈틈발견. 발랄하게 다가가 엘프의 목을 노린다. 엘프가 간신이 상체를 틀어 중고를 피한다. 살짝 스쳤다.

“오, 그래도 다른 놈들처럼 한 방에는 안 가는구나. 음음. 이거 힘들겠어.”

싸움에서 필요한 건 여유와 광기다. 그 둘만 있다면 죽을 자리도 살 자리로 만들 수 있다. 말없이 싸움부터 시작했던 오크와 달리, 이년은 심리전이 통하게 생겼다.

“다른 둘의 용태가 이상하다 했더니... 설마 네가 죽인 거냐?”

“말본새하고는. 그 젖탱이 좀 어떻게 하면 안 돼? 너무 출렁거려서 부담스럽잖아. 아니면 내가 들어줄 수도 있고. 크으. 몸이 저런데 속은 얼마나 쫄깃할까.”

천박한 말투로 비꼬아라, 천박한 행동으로 모욕해라. 그러며 눈으로는 날카롭게 살펴라.

엘프의 목에 난 상처가 낫는 속도가 느리다. 시간 역행에 가까운 속도로 재생하던 오크와 달리 저년은 상처 회복이 느리다.

흘러내린 한 줄기 피가 쇄골을 타고 가슴 중앙으로 떨어지고 있다. 오크의 신과는 다르다. 저년은 상처의 회복에도 영혼의 힘을 사용했다.

즉, 오크의 신 같은 재생력과 단단한 육신은 없다.

중고를 아공간에 넣는다.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중고는 베는 데는 좋으나 죽이는 데는 그저 그렇다.

죽음, 그것에 특화된 건 역시 이놈이지.

전백귀후십귀가 검집에서 뽑혀 나온다.

전백귀후십귀(前百鬼後十鬼). 베이기 전에는 백 걸음 가까이 오지 못하며 베인 후에는 열 걸음 걷지 못한다.

모든 생물의 위에 군림하는 죽음의 검이 바로 이놈이다.

전백귀후십귀가 초록색으로 빛난다. 방사능을 뿜어대고, 검신에도 방사능이 모인다.

이때까지 나는 이놈을 전백귀와 후십귀로 나눠서 사용했다. 오늘은 다르다. 이게 바로 진정한 전백귀후십귀다.

드뮈나시안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방사능이 깔린다. 죽음이 이곳에 내린다.

엘프년도 보고만 있지 않는다. 공간이 확장되더니, 나는 어느새 세계수의 안으로 들어와 있다.

여긴 낙원이다. 사방에 꽃이 만개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하다. 그러나 그건 물질의 영역. 영혼의 영역에서 여긴 명부다. 낙원 안을 영혼의 조각들이 떠다니고 있다.

영혼으로 가득한 공간, 영혼을 다루는 엘프. 여기가 네 홈 스테이지란 거구나.

나쁘지 않다. 언제는 이놈들과 내가 원할 때 싸웠나. 오크도 여신도, 전부 자기들의 공간에서 죽었다. 이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어 나자빠지게 만들어 주마.

엘프는 말이 없다. 잔뜩 집중하고 영혼을 다루고 마법을 조율한다.

킥. 이년의 특징을 알겠다. 잔뜩 긴장한 얼굴에 조잡한 심리전. 현역에서 은퇴하고 감각이 모두 녹슬어 버린 퇴물들이 이랬다.

강력한 존재들은 그들만의 세력을 구축했으며, 그중 하나가 죽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강력한 존재들은 시스템을 만들고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른다. 이년이 투쟁에 가까운 싸움을 했던 것도 아주 옛날. 그 시절의 감각은 모두 녹슬어 썩었다.

여기 남은 건 힘만 있는 초짜 싸움꾼이다. 그리고 나는 숙련된 광견이지. 사람을 몇천만 명이나 물어뜯어 죽인 광견.

낙원의 영혼이 엘프를 중심으로 통제된다. 빛무리에 눈이 아프다. 지랄났다. 지랄났어. 세계수를 먼저 쳐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그 번쩍번쩍한 영혼들이 몽땅 이 년의 힘이 되었다면 이기긴 글렀을 거다. 운까지 내 편이라니 오늘 왜 이렇게 운수가 좋지? 설마 오늘 저녁은 국밥인가? 나만 못 먹는 국밥.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영혼의 빛무리에 나는 전백귀후십귀의 방사능으로 대응한다. 모든 제약이 풀린 광검이 물 만난 고기처럼 광기탱천한다.

화살 형태의 영혼이 날 공격한다. 고개를 틀어 가뿐히 피하자 엘프가 다시 놀란다. 그만 놀라라 초짜 티 엄청 네네.

빈틈을 놓칠 내가 아니다. 스윽 파고들어 가볍게 그어주었다. 스친 옆구리의 상처. 그러나 그거면 충분하다. 충분하고도 남지.

여자의 상처는 바로 치유된다. 그래도 괜찮다. 노리는 건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타고 그 안에 파고든 독이다. 방사능이라는 이름의 독.

엘프가 방어를 굳힌다. 두 번이나 되는 공격에 상처 입은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 겹겹이 영혼을 갑옷처럼 둘러싼다.

“뭐야? 쫄았냐? 쫄았어? 하긴, 할 줄 아는 게 그 젖탱이 흔드는 것 말고는 없었을 건데. 사실 신이 된 것도 다른 년들에게 젖탱이 들이대서 된 거 아냐? 나 좀 신으로 만들어 주세요! 정액받이가 될게요!”

“그 입을 다물게 해주마!”

“입도 좀 고우면 좋을 건데. 자, 따라 해봐. 제 천박한 보지에 자지를 힘껏 쑤셔주세요.”

감정에 맡긴 공격은 너무 단순하다. 눈 감고도 피하겠어. 눈을 감아도 영혼은 느껴지므로 진짜 감아도 된다.

감고 피해 봤더니 진짜로 피해진다. 쉽구나, 쉬워.

오크의 신이 하드모드였다면 이건 이지 모드다. 쏘 배리 이지 모드.

이년이 두 번째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이년과 싸운 다음 오크의 신과 싸웠다면 내 쪽에서 방심하다가 오크의 신에게 죽었을 것이다.

영혼을 다루는 기술 자체는 날카로운데 말이야. 전성기에 싸웠으면 나도 나름 즐길 수 있었을 건데.

이건 싸움이 아니라 스트립쇼다. 얇은 옷을 입구 춤추듯 젖탱이 흔드는 엘프를 구경하는 스트립쇼.

어이쿠, 목이 베일 뻔했네. 이지 모드라도 컨트롤러에서 손 떼면 죽지. 조심하자. 조심.

건성건성 싸우며 엘프년의 몸매를 감상한다. 빈틈이 보일 때마다 한 번씩 그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하고 나한테 정신이 팔려있는 엘프의 모습이 색정적이다. 싸움에 색욕이 끼어들 틈도 있고, 여유가 넘친다, 넘쳐.

초보 상대로 최선을 다해서 나쁠 것도 없다. 느긋하게. 그러나 주의 깊게, 독이 돌기만 기다리자.

효과는 오래지 않아 나타났다.

“...?”

춤을 추듯 손과 발을 움직이며 영혼을 부리던 엘프가 균형을 잃는다. 얼굴에 당혹함이 짙게 드러난다.

빈틈 좋고요. 재빨리 파고들어 검을 찌른다. 영혼으로 만들어진 수십 겹의 방어막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간다.

전백귀후십귀에 영혼 소멸의 힘을 담았다. 파괴가 아닌 소멸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둘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엘프의 눈이 크게 찢어진다. 그 입이 열리기 전에, 전백귀후십귀가 엘프의 매끈 쌔끈한 배를 관통한다.

자, 특제 방사능 꼬치다. 요리되는 건 너고.

“꺄아아아악!”

엘프가 비명을 지르고, 낙원에 있던 영혼이 질서를 잃는다. 거친 영혼의 격류가 날 덮친다. 일단 전백귀후십귀를 뽑으며 물러나 엘프를 살핀다.

엘프의 입에서 피가 흐른다. 표독스럽게 떠진 눈이 나를 노려본다.

영혼이 낙원 전체를 거칠게 표류한다. 기세가 심상치 않다. 아 참, 여기는 저년의 홈 그라운드였지. 너무 쉬워서 깜박하고 있었다.

이런 걸 두고 페이즈2라고 하던가. 라팔이랑 즐기던 게임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나. 게임 중독을 의심해봐야겠어. 이런 잡생각이 나는 걸 보면 상황은 한참 여유롭다.

내 이성과 본능이 모두 위협을 알리지 않는다. 배리 이지 모드에서 이지 모드 정도로 난이도가 올랐군. 그래도 여전히 이지 모드다.

공격은 읽기 쉽고, 표정은 적나라하다. 눈빛만 봐도 어딜 공격할지 알겠다. 나는 그대 눈빛만 봐도 알아요. 그대와 눈으로 소통해요. 정말 천생인분이군. 우리 둘 다 똥통에서 구를 팔자다.

엘프의 공격 대부분이 내 마력에 튕겨 나가고, 큰 공격이 마력장을 뚫고 들어와 내 몸을 때린다. 그런데 이게 빌어먹게 아프다.

그냥 공격이 아니라 영혼을 직접 타격하는 공격이다. 맞으면 영혼이 깎이고, 많이 맞으면 육체의 타격과 관계없이 황천 간다.

그러나 그건 보통 사람들의 경우고, 나는 괜찮다. 영혼을 다루는 기술 자체는 저년이 훨씬 높지만, 나도 내 한 몸 지킬 정도는 된다.

“너는 누구냐! 왜 영혼을 다룰 수 있지?! 왜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거냐!”

“불친절한 창녀한테 해줄 말은 없는데, 이번엔 특별히 대답해줄게.”

매우 심플한 답이므로, 딱히 숨길 필요도 없다.

“니 새끼들 때문에 인생 씹창난 지나가던 개망나니시다. 이 창녀 새끼야!”

예로부터 한국 설화에선 지나가던 인간들이 가장 강했다. 지나가던 스님부터 지나가던 선비, 지나가던 할머니까지. 엄청난 분들이 계시다.

그리고 난 무려 지나가던 개망나니다. 지나가다 인생 조진 개망나니!

========== 작품 후기 ==========

한 편 더!

꼴에 신이라고, 엘프년의 저항이 오래 이어진다. 일단 이틀은 넘었는데, 그 이상은 모르겠다. 큰 젖탱이 흔들면서 방사능에 찌든 몸으로 잘도 버틴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반신은 생물을 벗어난 생물이다. 그놈들도 방사능에 버틴다. 그럼 그 위에 있는 신은? 단순히 생각해도 더 잘 버티겠지.

“으아아아아!”

엘프는 이제 미음으로 고성을 질러대며 낙원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 꽃이 만발해 있던 세계수의 밑동 내부는 환한 빛과 공간을 가르는 녹색의 벽만이 존재한다. 그 안에서 레이드 보스는 전능에 가까운 파괴를 휘두른다.

몸의 고통과 내가 깔짝이듯 내뱉는 도발에 반쯤 제정신이 아니다.

엘프는 무너져 가는 몸의 유지에 막대한 힘을 쓰고 있다. 눈에 보일 정도의 영혼이 실시간으로 엘프의 몸에 흡수되고 있다. 저만한 영혼을 흡수하고도, 엘프의 영혼 자체는 변화가 없다.

엘프가 영혼을 다루는 솜씨는 경이적이다. 저 음란한 몸뚱이와 멍청한 대가리에서 저런 능력이 나왔다고 믿기가 어렵다.

내 안에서 해킹 작업에 열중하던 난 놈도 잠깐 나와서 감탄하고 들어갔다.

-저년이 달에 있었다면 쪽도 못 썼겠는데요?

동감한다. 마을 처녀는 제 분수를 아는 년이었다. 진짜 신과 비교하면 그년의 능력은 얼마나 검소하고 겸손한가. 같은 신이라도 급이 다르다, 급이.

이지 모드로 게임하면서 여자를 괴롭히고 있으니 성욕만 쌓이는 기분이다.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아, 나쁜 사람 맞지.

세기의 쓰레기와 세계의 쓰레기의 대결이구나. 세기의 쓰레기는 나고 세계의 쓰레기는 엘프다. 둘 다 타는 쓰레기라서 태우면 잘 탈 거다.

승기는 확실히 나에게 기울고 있다.

몸을 유지하는데 사용하는 영혼과 내 마력에 사라지는 영혼. 엘프의 힘은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다. 확실히 세계수를 먼저 친 건 신의 한 수였다. 그 많은 영혼이 전부 저년 손에 넘어갔으면...... 상상하기도 싫다.

엘프와 달리 나는 마력 무한에 정신도 아직 쌩쌩하다. 발정 나서 더 힘이 넘치는 느낌까지 난다. 아랫도리가 울끈불끈하다.

돌아가면 피오라 안에 질펀하게 싸질러야겠어. 그나마 피오라가 저년과 몸매가 제일 비슷하다. 비슷하기만 하지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다.

이게 다 저년 때문이다. 저년이 너무 약하니 잡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거다. 상대가 여자라도 벅찬 상대라면 잡생각은 안 난다고.

“허억... 허억.......”

지친 엘프가 숨을 고른다. 땀이 비 오듯 하며 육신은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다. 그럴수록 엘프는 자신의 주위에 방벽을 단단히 하고 있다. 내가 영혼을 다룬다는 것을 안 후부터는 그에 대한 방비도 하고 있어 뚫기도 쉽지 않다.

싸움은 초짜인 주제에 자기 몸을 지키는 것은 필사적이다. 덕분에 장기전 양상이다. 핵폭탄? 당연히 써봤지. 그런데 그건 순수한 물리력이라 물리 법칙을 벗어나는 영혼에는 잘 안 통하더라.

나는 침착하고 느긋하게, 그러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기다린다. 모순되는 태도지만 숙련된 싸움꾼에게 이 정도는 교양이다.

전성기 때는 졸면서도 싸울 수 있었어. 전성기가 언제냐고? 바로 지금.

엘프년의 방어가 약해진다. 몸을 둘러싼 오색찬란한 방패가 빛을 잃어가고, 점점 얇아진다.

마무리해도 되겠다.

정신을 날카롭게, 호르몬아 신경망이 타버릴 정도로 신경을 쏜살같이 달려라. 내 감각을 벼리고 벼려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검은 폭탄을 손에 쥔다.

여신은 이거 한 방에 갔어. 너도 마찬가지일 거야. 육탄 돌격을 감행한다. 내 손이 엘프의 방어막에 닿으며 강한 충격을 일으킨다.

손에 마력을 집중시켜 억지로 파고든다. 내 돌진에 엘프가 이를 악문다. 몇 번 봤으니 저년도 이 폭탄의 위력은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영혼이라는 절대적인 방패가 있으면 모를까. 맨몸으로 맞는다면 펑!

저 야한 몸뚱아리가 피와 살로 환원되는 연금술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익...!”

엘프는 이를 악물다 못해 이빨을 깨고 잇몸을 씹는다.

겨우 그걸로 되겠냐. 안 되고말고. 좀 더 힘을 내! 넌 할 수 있어! 자, 이걸 막아 봐! 날 더 즐겁게 해보라고! 이 갈보년아. 난 감동보단 재미를 원하니까 질질 짜지마!

폭탄이 점점 방어막을 파고든다. 막대한 에너지가 사방으로 방출되며 내 몸을 때린다. 다리가 부서지고 배에 구멍이 뚫린다.

빌어먹게 아프다. 고통과 흥분으로 뇌신경이 타는 것 같다. 감각 가속 마법까지 사용했으니 그 고통까지 느리고 확실하다.

실감, 내가 살아 있다는 실감이다. 고통만이 내 생존을 나에게 말한다. 광기로 덮인 희미한 이성에서 고통과 섹스가 가장 확실하게 내 자의식을 확고히 한다.

손이 방패를 통과해, 엘프년의 면상에 닿는다. 엘프년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자기 눈앞에 있는 검은 폭탄을 바라본다. 엘프년의 눈동자는 여러 색으로 다채롭게 변하고 있다. 그 눈동자에 검은 폭탄이 담긴다.

잘 가라. 지랄 맞은 년아.

“펑.”

내 왼손이 폭발하고, 방패 내부의 온도가 올라간다. 등신 같은 년. 아니, 그냥 등신. 좁은 장소에서 폭발물이 터지도록 놔두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핵폭발의 파괴력이 무너져 가는 엘프의 몸에 결정타를 가한다. 엘프의 몸이 타오르며 안쪽에서 썩은 내장 조각이 보인다. 이 지경이 되도록 버틴 것도 용하다.

과연 죽기 싫어서 신이 된 놈들이다. 삶에 대한 의지가 대단해. 아직 모자라다. 내가 왼손으로 폭탄을 쥔 건 다 이유가 있다.

네 차례다. 미친 검아.

전백귀후십귀가 공명음을 내며 엘프의 심장을 향해 날아간다. 확실한 손맛과 함께 전백귀후십귀가 엘프의 심장을 꿰뚫는다.

베인 자는 열 걸음 가지 못하리. 그래서 후십귀이로소이다.

전백귀후십귀가 방사능을 뿜는다. 막대한 에너지에 엘프의 심장이 녹아버리고, 그 탐스럽게 흔들리던 젖탱이가 사라진다. 아, 이건 좀 아깝다.

엘프년이 기어이 쓰러진다.

내 왼손은 이미 재생되어 사지가 멀쩡하다.

엘프는 여신과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왼쪽 상반신과 얼굴 일부가 사라진 모습이다. 나는 남은 오른쪽 가슴에 손을 가져간다. 내 손으로도 다 잡히지 않는 커다란 가슴이다. 가슴에 내 손이 파묻힌다.

말랑말랑하고 탱글탱글하고, 흐. 죽이기 전에 만지지 않았다면 후회할 뻔했어. 마지막 감촉이라도 즐겨둬야지.

영혼을 담아 가슴을 만지며 엘프의 최후를 기다린다. 육신이 무너지고 영혼이 빠져나오려 한다.

시스템은 궁극적으로 이놈들의 영생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모든 영혼은 죽으면 하늘로 돌아간다. 그 영혼이 지옥으로 갈지 윤회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마을 처녀가 준 지식에 따르면 그렇다.

그러나 시스템은 그 영혼을 구속한다. 불쌍한 가축들의 영혼만이 아니라 신들 자신의 영혼도. 혹여 죽더라도 이놈들은 새로운 육신을 얻어 부활한다.

전부터 예상은 해왔지만, 마을 처녀의 지식을 얻으며 확신이 되었다. 이 년놈들은 죽어도 부활한다.

확실히 죽이려면 영혼까지 먹어야 한다.

“대체... 넌, 누구.......”

“응? 아. 말하는 거 보면 아직 죽으려면 좀 남았구나. 그렇다면.”

아래쪽도 좀 쓸 수 있으려나. 내장은 방사능 무침이 돼 있겠지만 난 방사능 면역이니까.

바지를 까고 훤히 드러난 음부에 내 육봉을 비빈다. 여기저기 타고 녹은 몸이지만 여전히 예쁘긴 하단 말이지. 절대적인 미는 손상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진리를 본 기분이야.

털 하나 없는 매끈한 음부에 두툼한 둔덕이 존재감을 과시한다. 음부는 살짝 벌어져 안의 핑크색 속살이 보인다. 망설이지 않고 삽입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년이니 빨리빨리 끝내야 한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신이 필요해.

질육이 쫄깃하게 내 물건을 조여 온다. 죽기 직전이라 그런지 더 필사적으로 조이는 느낌이다. 한 짝만 남은 가슴을 주무르며 허리를 흔든다.

하, 참느라 죽는 줄 알았네.

“흐윽. 으으.......”

이건 비음이 아니라 신음이다. 녹아가는 장기를 자궁에서부터 텅텅 밀어 올리며 충격을 주는데 아마 죽을 만큼 아플 거다. 그래도 생존 의지가 끈질겨 어째 죽지는 않는다. 그런다고 살아나냐면 그건 또 아니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영혼을 끌어모으고 있지만, 그건 내가 전부 막고 있다. 엘프의 통제력이 많이 약해져 나도 간섭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 왼쪽 가슴도 있었으면 좋을 건데, 한 짝이라 손이 심심하잖아. 되는대로 음핵을 문지른다. 입술이 허전하니 몸을 낮춰 여신의 반쪽짜리 얼굴에 입을 맞춘다. 정확히는 2/3 정도 남은 얼굴이다.

말랑한 입술을 강제로 벌리고 혀가 안으로 침입한다. 입 안은 피의 맛이 났다.

빡빡하게 움직이는 질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주름 하나마다 생명을 가지고 내 물건을 조인다.

애액이 분비되며 움직임이 수월해지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엘프가 고통에 소리 지른다. 가죽이 타버린 부분에서 장기가 녹아가는 것이 그대로 보인다. 미치도록 자극적인 풍경이군. 비위 약한 사람이라면 바로 기절해 버리겠어.

이건 시간일까 강간일까. 시강간? 아직 살아 있으니 강간에 가까운가. 나도 시간 취미는 없어서리.

“크으.”

비교적 멀쩡한, 하얗고 굴곡 있는 골반을 잡고 치골을 앞쪽으로 비빈다. 물건이 자궁에 밀착한 상태로 정액을 안에 뿌리고 물건을 빼낸다. 닫히지 않은 질구에서 정액이 흘러 나온다.

좋은 물건이었어. 마지막으로 대주기까지 하다니 넌 아낌없이 주는 창녀구나. 어디 달에 사는 쩨쩨한 창녀와는 다르게 말이야.

욕구도 풀었겠다. 마지막으로 명품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감촉을 즐기고 있으니 마침내 엘프의 몸이 붕괴해 사라진다. 거대한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와 하늘로 날아가려 한다.

어딜. 가려고.

-야, 도와.

영혼을 붙잡으며, 내 안에 있는 난 놈을 호출한다. 나 혼자 없애기에는 영혼의 너무 크다.

-네네, 알아서합죠.

난 놈이 영혼술사의 힘으로 영혼을 구속하고, 내가 그것들을 손수 지운다. 윤회도 미래도 없는 완전한 삭제. 놈들이 두려워하던 죽음.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죽음을 내려주마.

얼마나 될지 모르는 세월 동안 수많은 차원의 지성체들을 가축처럼 사육한 대가치고는 싸잖아?

엘프는 마지막까지 죽기 싫어 반항한다. 의미 없는 반항이다. 순수한 영혼의 크기라면 나도 신에 필적한다. 자칭 신이라던 마을 처녀를 따먹어서 그렇다.

영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철저하게 파괴해 소멸시킨다. 거칠게 진동하던 영혼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완벽하다. 신 하나를 세상에서 지워냈다.

감개무량하군.

아공간에서 대충 옷을 꺼내 입고, 전백귀후십귀를 회수한다. 다른 차원처럼 분리되어 있던 세계수 외부와 내부가 다시 연결되었다.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밖에서 싸울 수 있다면 진작 싸웠지. 안 나간 게 아니라 못 나간 거다.

세계수의 밑동을 도려내고 밖으로 나간다. 거한 살기가 나를 반긴다.

순수한, 애정과도 닮은 살기. 나를 고양시키는 살기, 애정.

잠잠해졌던 심장이 다시 뛰고 뇌수가 들끓는다. 아, 이거야. 이걸 원했어. 엘프년과 싸우며 욕구불만이던 부분이 단번에 연소해 사라진다.

이 애정과 같은 살기를 원했다. 고통과 비견될 정도로 내가 살아 있다는 실감을 주는 이놈. 순수한 살기! 사랑! 애정!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제군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나는 날 반기는 엘프와 인간의 연합군을 보고 고한다.

========== 작품 후기 ==========

쉬는 날 기념 연참!

원 플러스 원. 신을 죽이니 인간이 따라왔다.

엘프년과의 싸움이 길어지면 날 쫓는 놈들이 내 흔적을 찾을 염려가 있다. 그래서 좆집들과 유상민도 아공간에 보내두지 않았던가.

예상은 한 치도 틀리지 않고 현실이 되었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대군이 그 증거다.

인간과 엘프가 함께 나를 향해 적의를 표출하고 있다. 그들의 기세에 허공에 아지랑이 피어오른다.

정신적 기운이 뭉쳐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통이 아닌 정신, 하나 된 거대한 일념이 나를 노리고 있다. 나에게 쏘아지고 있다.

그 기세에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다. 기쁨의 지림? 그런 지림도 있나? 더럽다.

사방에 날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사랑에 질식한 것만 같다는 건 이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특히 엘프들의 구애가 열렬하다.

세계수를 베어 넘겨서 그런가.

내가 니들 생명을 구해줬다는 사실은 알려나 몰라. 알아줬으면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분수는 알고 설쳤으면 싶다.

날 사랑해주는 건 고맙지만, 나도 사람 보는 눈은 있는 사람이라서 볼품없는 놈들이랑 놀아주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일단 가볍게 청소하고 시작하자.

지옥의 종류에는 불지옥이 있다고 한다. 정확한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죄인들이 안에서 영겁토록 타오른다는 지옥.

여기가 바로 거기다.

만능의 주이시자 폭력의 제왕이시여, 세상에 강림하여 무지몽매한 것들을 계몽하여 주소서. 그 이름 핵탄두로다.

그분이 이르되, 나는 많이도 필요 없고, 단 세 개면 된다고 하시니. 세 개에 무지몽매한 것들이 떼거지로 죽어 나자빠지더라.

“오, 주여! 이 기도에 답을!”

광신도처럼 외쳐보았다. 그런데 답이 없다. 응?

-억제 작업에 성공했습니다! 기본 원리는 고전적인 방식의 핵탄두와 똑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민하진 감각이 소음 사이로 그런 주절거림을 내 귀로 들고 온다.

억제 작업? 내가 핵무기를 쓴다는 것을 깨달았나. 슬슬 깨달을 때도 됐지. 그것 때문에라도 잔류 방사능을 최대한 줄이긴 했지만, 추측할 방법은 많으니까.

예상했던 일이다. 같은 공격에 알고도 계속 당해주면 그게 병신이지. 아갈리 놈들도 몇 번 당하더니 나중에는 핵을 막는 기술을 들고 오더라.

그래서 뭐? 막는 기술이 있으면 그걸 뚫는 기술도 생겨난다. 전쟁의 역사란 그런 거 아니겠어.

“오, 주여 어째서 저를 버리시나이까! 대답을! 대답을 해주소서!”

그분께서 이르되, 누가 날 막더라도 나에게는 무궁한 방법이 있으니 그 어떤 걱정도 필요가 없노라.

내 뒤에서 핵폭탄 하나가 터져 세계수의 밑동을 완전히 날려버린다. 열풍이 내 적들을 불태운다. 약한 놈들은 순식간에 가죽이 타고 내장이 증발해 뼈다귀만 남는다.

뼈조차 남기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폭발이 잦아든다. 뒤를 보니 아직 세계수의 잔재가 남아 있다. 쯧. 얼마나 큰 거야. 하늘까지 닿던 나무니 밑동이 작으면 그것도 이상하지만.

폭발의 여파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폭발이 적들에게 들이닥친다. 대비도 못 한 폭발과 폭풍이 적들을 휩쓴다.

열폭풍 속에서 살아남은 것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수만에 달하던 놈들이 천 정도밖에 안 남았으니 아주 적은 거지. 그리고 또 그중에 반은 폭발을 버티지 못하고 골골댄다.

그분은 위대하시니, 그분의 이름으로 되지 않는 일이 없느니라. 지구에서도 그랬다. 핵이 깡패였어. 그건 다른 의미로 깡패였지만.

“이제 제법 지옥다워졌군.”

그러나 아직 내가 원하는 그림에 다가가기에는 멀었다. 진짜의 시작이다.

양손을 아공간에 넣고, 거기에서 두 검을 뽑아낸다.

중고와 전백귀후십귀. 신검과 신살검의 이도류다. 나는 모든 무기를 자유롭게 사용한다. 마음대로 휘두르면 그게 자유로운 거지 뭐겠어.

중고에서 날아가는 검풍에 사람이 썰리고 전백귀후십귀가 내뿜는 방사능에 다가오다 피를 토한다.

두 광검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무기를 합쳐 군계일학이라 마법도 과학도 초월한 위력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중점은 그거군. 몇 명의 반신이 나서느냐. 여기 있는 반신의 숫자에 따라 도망갈지 싸울지를 정해야 할 거다.

현재까지 확인한 숫자는 둘. 따라오는 놈들을 피하며 적당히 도망치고 있다. 정면으로 싸워줘서 좋을 게 없다. 명백하게 내가 손해 볼 짓을 내가 왜 해.

우선은 뒤쪽, 내 핵폭탄을 억제한 쪽부터. 강력한 방어 마법을 걸어뒀는지 후방 기지는 비교적 멀쩡하다.

정보란 전쟁의 중심이다. 한 번 봉인 당한 것을 두 번 봉인 당하지 말란 법은 없지. 최고의 카드를 언제나 쓸 수 있도록 해두기 위해 뒤의 관측소부터 노린다.

사자 사이에 끼어든 양떼같은... 아닌가? 양떼 사이에 뛰어든 사자처럼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며 기기와 사람을 부순다.

전백귀후십귀가 지나간 자리에는 사람이 쓰러지고 기계가 연기를 일으킨다. 중고가 지나간 자리에는 뭐든지 싹둑 잘려나간다.

두 광검이 맹활약 중이다.

가로막는 공격이 거세다. 엘프년과는 다르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목을, 심장을, 낭심을, 급소를 노려온다.

가차 없다. 그래, 이게 진짜 싸움이지. 다만, 조금 더 노력해 줬으면 싶다. 내 몸에 닿는 공격이 없다. 약한 놈들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더, 더, 더. 더 강한 놈과 더 야비한 책략과 더 더러운 수법을 들고 와라.

후방 기지를 전부 정리하자 진짜들이 나온다. 온갖 마법과 검격,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능력이 날 노린다. 어이쿠, 무서워라.

내 전방을 가득 메우고 날아오는 공격들이 중고의 일격에 갈라진다. 손맛 한 번 좋구나. 신검이 괜히 신검이 아니야.

두 명이 반신이 하늘과 땅에서 나를 덮친다. 한 명을 불을 다루고, 다른 한 명은 소리를 다룬다.

불과 소리. 모두 위협적인 기술이다. 위험한 기술에 역량은 반신. 조금은 즐겁겠어.

심장이 뜀박질한다. 압도적인 마력이 모든 것을 삼키고 할퀸다. 태풍의 핵이 되어 마력의 칼날을 사방으로 방출한다.

검은 어디까지나 여흥. 내 본직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지. 내 모든 기술은 마법과 마력이 기반이다. 여신과 싸울 때도 쓰지 않았던 마법을 지금 사용하려 한다.

내 오리지널이자 내 상징과 같은 마법. 마법. 마법의 소나기.

비야 내려라. 피야 땅을 적셔라.

하늘에서 마법이 내린다. 비처럼 쏟아지는 마법을 피할 방법은 없다. 비를 맞지 않고 비 사이를 걷는 법이 있으면 모를까.

광범위하게 내리는 마법의 위력이 약하냐면 그건 아니다. 바위 정도는 가뿐히 뚫을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초인들의 신체 내구도와 비교하면 모자라지. 그런데 그게 수백, 수천 개라면 조금 다르다.

모두들 비를 피해 달아난다. 두 명의 반신을 포함한 극히 일부만이 이것을 버티며 나에게 다가온다.

어디까지 버티나 볼까? 가라, 낙뢰야. 가라, 불꽃아. 가라, 가라, 가라.

달에서 마을 처녀의 영혼을 흡수한 후, 내 마력의 총량도 늘었다. 표현을 정확히 하면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마력이 더 늘어났다.

핵탄두의 도움 없이도 반신 셋까지는 상대 가능하다. 반신이 생물을 벗어난 생물이라면 대체 나는 버그 캐릭이다. 시스템에 속하지도 않은 버그 캐릭터.

어디 버그 캐릭을 상대로 얼마나 싸우나 보자.

불꽃과 소리가 좌우에서 위협하고, 앞뒤로도 거친 힘이 날 포위한다.

힘의 총량은 엘프년보다 적다. 그러나 공격에 담긴 경험과 살기가 이것들을 엘프년의 공격보다 훨씬 위협적으로 만들고 있다.

몇 번의 공격을 허용한다. 방어 무효화 계열 진명. 그것들은 정말로 성가시다. 막아도 바로 몸에 꽂혀.

내 마력과 내 적들의 마력으로 천지가 진동한다. 오백이 하나를 상대하고 있지만, 하나가 우위를 가진다.

모종의 신호가 오가고 적들이 모두 물러간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한 남자가 나온다. 나이는 40대 후반쯤?

남자의 영혼의 크기는 다른 반신의 두 배에 가깝다. 더 놀라운 건, 그중 반이 순수한 남자의 영혼이다.

달에서 봤던 스님이 자기 발전을 통해 생물을 초월했다면, 저 남자는 자기 단련으로 생물을 초월한 데 더해 몬스터를 잡아 그 영혼까지 취한 셈이다.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린다. 저 남자는 나한테 썰린 엘프년보다 족히 2배는 더 위험하다.

이제야 싸움다운 싸움을 할 수 있겠다.

남자에게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눈은 나를 보고 있지만, 눈동자 안에는 살기조차 없다. 남자는 생과 사를 초월해 있다. 그 모습은 신보다 더 신답게 보인다.

백전을 넘어 천전을 연마하고 만전을 살아남은 노병도 저런 눈을 하지는 않는다.

남자가 손을 뻗는다. 내가 자리를 피하자 그곳에 가시나무가 자란다. 내 감각이 저 나무가 그 어떤 금속보다 단단하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달리는 길을 따라 풀과 나무가 자라고 생명이 꽃핀다. 박 터지는 싸움에 황폐해진 땅이 생명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 생명들은 내가 본 그 어떤 무기보다 위험한 향기를 풍긴다. 아, 전백귀후십귀랑 중고는 빼고.

나무가 자라나 도망갈 자리를 뺏는다. 중고 나무를 자르려 하니, 그 전에 남자가 내 앞에 도달한다.

빠르다. 공간이동? 그건 아니다. 여긴 좌표가 꼬여 있다.

남자의 손을 중고로 막는다. 중고가 삐걱대며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광기를 내게 전한다.

저 손에 담긴 것은 약간의 마력과 약간의 영혼이 전부다. 그런데 이런 위력이다. 생명을 자라게 하고 공격을 강화해? 무슨 진명이야. 갈피를 못 잡겠다.

중고를 넣고 전백귀후십귀로만 응수한다. 마력을 높여 신체 강도를 계속해서 높인다. 남자의 속도는 나보다 빠르다. 그럼 내가 더 빨라져서 쫓아가야지.

육신이 붕괴하고 재생하길 반복한다. 속도는 계속 올라가고, 싸움판은 하늘과 땅을 가리지 않는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뜬다.

내 마력에 땅이 황폐해지고, 남자의 힘에 다시 초목이 자란다.

세계가 파괴와 재생을 반복한다. 질서가 맞물리지 않고 혼돈만이 존재하던 태초의 어느 지점을 보는 것 같다.

전투력은 내가 우위. 그러나 남자가 좀 더 노련하다. 미친. 나보다 전투에 능숙한 인간이라는 게 존재할 줄이야.

엘프년과 싸우며 쌓였던 피로가 뒤늦게 찾아온다. 쉽게 싸우긴 했어도 이틀 이상을 싸웠다. 피로가 쌓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한계는 아니지만,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영혼의 크기와 역량을 살펴보면 이대로 장기전이 되면 저쪽이 유리한 것이 자명하다.

핵도 통하지 않는다. 미묘한 아공간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폭탄이 터지기 전에 그 단단함으로 몸을 감싸 보호하며 열풍 속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인다.

전백귀후십귀로 유효타도 때렸지만, 그것도 별 효과가 없다. 생명력을 다루는 만큼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이 남자는 인류 연합의 수장이다. 싸우는 틈틈이 주워들었다. 식후 운동 거리로만 생각했던 인류 연합에 이런 난적이 있었다니. 세상일은 모를 일이다.

도망갈까? 그건 아니지. 먹잇감이 알아서 찾아와 줬는데 물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죽기 직전까지 한 번 놀아보자.

방어적인 태세를 전환해, 공세로 나선다. 내 재생력만 믿고 돌진한다.

수천 발의 마법이 남자를 때리고, 남자를 그걸 버티며 다가와 내 빈틈을 찌른다. 나는 일부러 급소를 내어주며 남자의 심장을 노린다.

남자의 손이 내 급소를 찌르기 직전, 한순간 망설임을 보인다. 왜? 그렇게 물을 틈도 없이 내 검이 남자의 심장을 관통한다.

“뭐야? 왜 그래?”

나는 처음으로 대화를 시도한다. 그걸 찔렀으면 충격으로 나는 밀려났을 테고, 남자는 기껏해야 스친 상처만을 입었을 것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쿨럭. 네,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나이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남자가 묻는다. 전백귀후십귀로 심장을 찔렀다. 남자의 영혼이 흔들린다. 이건 끝이다. 죽어가는 사람 상대로 대답해주지 못할 이유도 없지.

“진휘. 나이는....... 모르겠는데?”

아갈리에서의 시간과 기타 등등 내 체감 시간을 합치면 내 나이가 얼마인지 나도 모른다.

“아버지는 있느냐?”

“아니.”

남자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든다.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그래도 난 아빠 없다고. 진짜로, 정말로. 내 기억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없다. 기억이 희미한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없다. 엄마에 대한 건 잘만 기억나는 걸 보면 확실하다.

전백귀후십귀에 심장을 꿰인 상태로, 남자가 더듬더듬 입을 연다.

“어머니 성함이 유채연 되시니? 네 생일은 10월 22일이고?”

“.......”

이번엔 내 얼굴이 굳을 차례다. 씨발. 개같은. 개좆같은! 내 머리에서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날아다니는 퍼즐은 남자의 한 마디로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성아, 정말로... 정말로 잘 컸구나.......”

60억 인류를 포함한 지구가 통째로 중간계로 소환된다. 소환된 지역과 인간에 대한 기억은 지구 사람들의 머리에서 삭제된다. 그리고 중간계로 소환되는 순간 다시 떠오른다.

세종이라는 지역이 중간계로 소환되었으면 지구 사람들은 세종시라는 도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까먹는다. 그러다 중간계로 와서 다시 떠올린다.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존재했던 가족의 기억이 한 번 사라졌다 다시 생겨난다.

그럼 나는?

이 세계의 버그와 같은, 정상적인 절차에서 벗어나 소환된 내 기억은?

빼앗긴 내 기억은!

========== 작품 후기 ==========

뿌린 대로 거두리라. 떡밥을 회수했습니다. 조금 뻔했던 거라 예상하신 분들도 많군요.

모두 신이 나쁜거에요. 신 개새끼!

왜 이걸 바로 떠올리지 못했지?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이야기다. 세종이나 서울처럼 내가 지명을 잊었다면 대번에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남들이 명동이 어쩌고 가로수길이 어쩌고 하는데 나만 기억하지 못했다면 내가 잊은 기억은 없나 의심했겠지.

그러나 지구의 지형지물이 소환되기 시작한 것은 15년차 이후이며, 그전에는 사람들의 기억 삭제만이 이루어졌다.

중간계로 소환되며 돌려받는 기억. 누구나 돌려받은 기억.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것도 돌려받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 어떤 혜택도 받지 못했다. 시스템은 날 거부했으며,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공용어조차 내 힘으로 익혔다. 그리고 이젠, 가족에 대한 기억까지 빼앗겼다.

“성아. 장휘성이라는 가수가 유행하면서... 네가 그 사람처럼 노래를 잘 부르고 싶다기에 그렇게 불러 주었지.”

성아. 우리 가족밖에 모르는 내 애칭. 왜 그런 애칭이 생겼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장휘성이라는 가수는 기억난다. 그리고 그 어렸을 때 그 사람 노래를 좋아했다는 것도. 집에서도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는 것도.

스멀스멀, 잊은 기억이 떠오른다. 아직은 희미한 기억들. 아마 몇 분 후면 덧없이 사라질 기억들이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또렷하다.

단지, 그 기억 안에 아버지란 존재는 없다. 우리 가족의 기억은 나와 엄마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엄마는 변호사인 데다가 나까지 돌보느라 친척들 간 왕래는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이 남자는 없다.

이 사람에 대한 내 태도는 냉정하다. 이 사람이 아버지라는 확증은 있지만, 그에 대한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통째로 빼앗겨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머리가 싸늘히 식고, 가슴이 끓어오른다. 아닌가? 가슴이 싸늘히 식고 머리가 끓어오른다. 머리와 가슴의 온도가 들쭉날쭉 어지럽다.

“잠깐만, 일단 치료부터.”

전백귀후십귀를 뽑고, 남자에게 내 피를 먹인다. 이걸로 상처는 아물터...... 였지만, 아물지 않는다. 오히려 검을 뽑으려 출혈이 심해진다.

“쿨럭...... 소용없다. 심장이나 뇌의 각인이 파괴되면... 영혼과 함께 소멸하는 금제가 걸려있어.”

남자의 영혼이 사라져간다. 내 눈에는 영혼에 저장된 몸의 정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건 절대로 살릴 수 없다. 영혼을 붙잡아도, 기억과 영혼이 사라진 빈껍데기일 뿐이다.

금제의 측면에서 보면 이보다 완벽한 금제는 없다. 신이라도 정보를 캐내지 못하는 원천 차단이다.

그게 하필, 왜. 지금 여기에. 연합장이라며! 대빵이면 조금 느슨하게 봐줘도 되잖아!

“금제가 생각보다 느려. 조금은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피가 줄었다. 심장에서도 피가 거의 흐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것은 전적으로 남자의 강대한 영혼 덕분이다. 사라져가는 영혼으로 진명을 사용해 버티고 있다. 내가 거기에 힘을 보탠다.

“어디서 뭘 하고 지냈는데, 이런 살인귀가 되었니?”

남자의 눈이 내 눈을 똑바로 주시한다. 보이겠지. 내 안의 살귀와 광귀가. 내가 내 안에 키우는 두 마리 귀신이.

“말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빠르겠는데요.”

기억 전달 마법으로 남자에게 내 모든 기억을 전달한다.

기억 속에서 나는 지구에서 아갈리를 거쳐 중간계에 도착했다. 그리고 패륜을 저지르고 있다.

남자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그래, 그랬구나.”

절절하게 다가왔어야 할 한 마디.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감정의 풍랑은 내 안에서 이미 모두 지워졌다.

빛이 없는 사막에는 꽃도 피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는다. 그건 고요한 죽음의 대지다. 간혹 간헐천처럼 용암이 솟아오르는 검고 텅 빈. 그러나 광적인 대지에 나는 홀로 서 있다. 그 대지 자체가 나일지도 모른다.

그냥,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어긋나고 비틀려 있다.

“하하하. 인류를 살리자고 한 일이 내 아들을 지옥으로 떨어뜨리다니.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그래, 그렇지. 내가 아갈리에 소환된 것의 상당 부분은 인류 연합 때문이다. 그놈들이 차원이동을 한답시고 여러 차원에 뿌린 아티펙트가 아갈리와 지구를 연결했고, 그 때문에 내가 차원 마법에 휘말렸다.

그 일이 없었다면? 그래도 내가 소환됐을지도 모르지. 나랑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가 아갈리로 갔을지도 모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갈리의 제국 수도만 날아가는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

그건 모두 만약의 이야기. 세상은 결과론적으로 돌아간다. 나는 아갈리로 갔고, 그 원인 제공자가 중 하나가 이 남자다.

이런 일이 있을까. 부자가 이토록 말도 안 되게 갈라서는 일이 가능할까. 인류 연합의 수장과 인류의 적.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위치. 되돌릴 수 없는 관계.

결정적으로, 내가 일그러졌다.

도저히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 차가운 내 심장이 아버지라는 말을 막는다. 아빠라는 말이 목에서 막힌다.

아빠가, 아버지가 확실한 이 남자를 보고도 내 안의 피가 반응하지 않는다. 분명 같은 피를 나눴을 텐데도.

오, 씨발. 하느님 개새... 아니, 진휘님 개새끼!

“내 진명이 궁금했구나. 진명의 이름은 시작이란다. 그리고 시작은 창조와 비슷한 부분이 있지. 생물의 생육을 시작할 수 있고, 동작의 시작을 빠르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른 것들도 시작과 창조, 두 개념을 응용하면 된단다.”

시작과 창조. 허, 이거 사기잖아. 괜히 인류 연합의 연합장을 맡은 게 아니네. 능력이 사기였어.

“쿨럭... 시간이 다 되어가는 모양이다. 인류 연합의 기지에 있는 내 방의 두 번째 바닥에 금고가 있다. 비밀번호는 너와 네 엄마 생일이다. 부디 찾아가 보거라.”

남자의 몸이 손부터 무너진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 내 마음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괴리. 감성과 이성과 도덕이 끔찍할 정도로 마찰하며 만드는 소음이 끔찍하다.

귀에서 말벌 수천 마리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난다. 환청이 골통을 흔들고 뇌를 긁는다.

돌연, 시야가 깨이고 정신이 맑아진다.

이 남자가 내 아빠라고 치자. 그러면 뭔가가 달라지나? 아니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내 기억 속에 아빠는 없다. 기억 속에 없는 걸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이 남자와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계곡이 자리하고 있다.

아갈리라는 계곡이, 시스템이라는 계곡이, 기억이라는 계곡이.

좁혀지지 않는 폭을 좁히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건 헛된 노력이다. 나는 합리성을 중시한다.

이 사람은 내 아버지가 맞고, 오늘 초면이다. 정리 끝. 지구에서의 기억은 집어치워라. 나에겐 없는 기억이다.

“인류를 잘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남자가 숨을 거둔다.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있던 나머지가 나에게 접근한다.

무시하고 텔레포트를 사용해 자리를 벗어난다. 공간좌표는 돌아와 있다.

근처의 벌판을 딛고, 아공간 안에 있는 라팔이를 끄집어낸다. 날 찾기 위한 진명 간섭이 계속 시도된다. 모두 끊어냈다.

“인류 연합의 기지가 어디야?”

“뉴욕, 이겼어?”

“이지 모드더라.

대신이라고 할까. 지랄맞은 시크릿 보스가 그 후에 기다리고 있더라.

“조금만 더 들어가 있어.”

“응.”

라팔이 대답한다. 나는 바로 뉴욕으로 이동한다. 위치는 외우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다.

인류 연합의 기지는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뉴욕 바로 옆에, 따로 소도시가 마련되어 있다. 인류 연합이라는 거창한 간판을 달고.

사람들은 나를 보자마자 일단 무기부터 들이댄다. 내 얼굴을 모르는 인간은 이 안에 없겠지.

모두 다가오기도 전에 날아가 처박힌다. 상대해줄 시간 없다. 꺼져라.

앞을 막아서는 놈들이 늘어나고, 내가 가는 길에 흐르는 피도 늘어난다.

연합장실을 찾았다. 바닥에 금고는 없다. 그럼 생활하는 방인가. 방을 찾아 나선다. 한 사람이 내 앞을 막는다.

“무엇을 찾는 거냐?”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는 인간이 등장했군.

“연합장의 방.”

중년 남자의 눈썹이 꿈틀 움직인다. 그래도 덤비진 않나. 덤빌 거면 나에게 답을 준 후에 했으면.

“연합장님은.......”

“알 것 없고. 방이나 불러.”

“연합장님이 없으면 인류 연합은 이미 무너진 것과 다름없다. 더 무엇을 원하지?”

“자식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비록 초면인 아버지지만, 내 손으로 죽인 아버지지만. 나에게 남긴 게 있다면 봐줘야지. 최소한 자식 된 도리는 해야 할 것 아니야.

킥, 이게 패륜을 저지른 놈이 할 말인가. 내 손으로 심장을 찔러 죽였으면서?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콸콸 나왔지. 따뜻한 피가 이 손을 물들였고. 내 피부에 스며들었고.

그래도 그 사람의 피가 내 몸에 흐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구나.

“자식...?”

중년인은 눈을 끔뻑이다, 이내 경악한다. 그래, 나도 놀랐어. 기적이 있다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기적이 일어났고, 기적에 기적같이 엿 먹었어.

엿이 찐득하게 머리와 심장에 들러붙었다고. 씨발.

“이름... 이름! 네 이름은 뭐냐!”

“진휘. 어머니 성함은 유채연 되시고, 변호사시지.”

엄마는 변호사에 아빠는 이세계에서 인류 최강이라. 나도 어지간한 금수저였군. 아빠 없다고 불평할 게 아니었어.

엄마는 만날 길이 없고, 아빠는 내 손으로 죽였지만.

아버지. 아빠. 아버지. 실감이 안 나.

“저기 저 건물이다. 꼭대기 층.”

손으로 이마를 짚은 중년인이 한 아파트를 가리킨다. 비틀거리는 게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아파트 꼭대기는 한 층을 하나의 방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사람 사는 냄새가 전혀 안 난다. 바닥에는 먼지가 쌓여 있다. 그나마 쓴 흔적이 있는 방은 제일 작은 침실이었다.

일만 하다 집에 와선 잠만 자고 다시 나갔겠지. 피로에 찌든 그 얼굴이 그려진다.

바닥. 두 번째 바닥이고 했지? 장판을 뜯어내고, 콘크리트 비슷한 재질의 돌덩이도 덜어내니 작은 크기의 금고가 보인다.

비밀번호는 나와 엄마의 생일. 금고는 여덟 자리 숫자를 맞춰야 한다.

12031022

12월 3일과 10월 22일. 하마터면 비밀 번호를 알고도 못 여는 일이 벌어질 뻔했다. 지구에서의 일과 나에 대한 모든 것은 가물가물해 떠올리려 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도 겨우 떠올렸다.

금고 안에는 몇 개의 봉투가 있다. 편지 봉투다. 봉투에는 내 이름과 엄마 이름까지 적혀 있다.

-휘야, 어떤 경로로 이걸 읽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편지를 네가 읽고 있다면 내가 죽고 없다는 뜻이겠구나. 네가 아장아장 걷던 때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사실은 그것 말고는 잘 기억나지 않는구나. 네 초등학교 입학식도 기억나는구나. 엄마와 떨어지기 싫다고 한참이나 징징댔지.

이 아저씨가. 그때는 내 흑역사라고. 고딩 때도 가끔 엄마가 그걸로 날 놀렸다.

-2학년에는 잘 올라갔니? 친구는 많이 사귀었고? 중학교는 어땠니? 네가 대학에는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뭘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어려서 소환되어 고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네가 소환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네 몫까지 모두 이 아빠가 지고 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먼저 온 사람으로서 너와 네 엄마가 편히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지. 그게 가장의 임무 아니겠니? 노력은 해봤지만, 생각만큼 잘 되었을는지 모르겠다. 실패도 많이 하고, 손에 피도 많이 묻혔어. 그래도 네 생각만 하면 힘이 난다. 해줄 말고 많고 듣고 싶은 말도 많다. 너무 많아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명심해다오. 몸 건강히 오래 살아라. 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빠가.

악필로 쓴 편지는 편지지 하나를 겨우 채우는 지점에서 끝났다. 나도 어지간히 악필이라는 소리 많이 들었는데, 피는 못 속인다는 걸까.

인류를 잘 부탁한다. 인류를.......

역시 피는 못 속인다. 자식이 아버지를 몰라도 아버지는 자식을 안다는 걸까. 어떤 식으로 부탁하면 자식이 거절하지 못할지 너무 잘 안다.

“네, 아버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효도 정도는 해야지. 패륜 이후의 효도. 웃기지도 않는다.

“까짓거.”

못할 것도 없다. 오히려 쉬운 일이다. 원인은 전부 하나로 귀결된다.

그 새끼들. 날 소환하고 인류를 능멸하고 내 기억까지 가져간 그 새끼들.

개새끼인 나를 패륜까지 저지른 특급 개새끼로 만든 그 새끼들.

신을 전부 죽이면 모든 게 끝난다.

“해드리죠.”

아주 확실하게.

========== 작품 후기 ==========

인류를 부탁하는 아버지나 그걸로 효도하겠다는 아들이나.......

주인공이 질긴 건 전부 혈통빨. 쟤 금수저에요! 금수저 치고 인생은 망했지만.

나에게 온 것 말고 다른 편지도 읽었다. 나와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가 한 통씩. 그리고 그 밖에 만약 인류 연합의 연합장을 이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준비된 기밀들이었다.

알아둬서 나쁠 건 없지.

아파트를 나오자 아까 그 중년인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어쩔 거지? 싸울 건가?”

“먼저 수배서 띄우고 시비 건 건 너희들이잖아. 알아서 해. 계속 나를 노리든, 이대로 봉사 단체로 전향하든. 니들이 뭘 하든 인류는 존속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신들의 농간, 이종족 연합군. 전부 내가 처리한다. 뭐야, 달라질 건 없잖아? 효도도 별거 아니구만.

요점은, 인간만 조금 덜 죽이면 되는 거다.

심플한 대답이군.

그럼 마지막, 마신을 찾아볼까.

***

요정신은 마지막으로 마신에게 정보를 보냈다. 누구보다 영혼을 잘 다루는 요정신만이 가능한 은밀한 연락이었다.

영혼으로 암호화된 정보를 읽은 마신은 미간을 찡그렸다.

적혈신과 녹혈신의 동태가 이상한 건 알았다. 별난 짓으로 심심풀이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원을 산다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느껴야 한다는 뜻이며, 세월은 자아를 풍화시킨다. 닳아가는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가끔 괴악한 짓을 할 때가 있다.

넷이 모두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 마신은 적혈신과 녹혈신의 기행을 이해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영혼을 분리해 기행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죽어 영혼이 흩어졌다.

연락을 보내온 요정신 본인도 곧 죽는단다. 어쩌면 영혼이 소멸할지도 모른단다.

요정신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다. 시스템의 유지에 필요한 영혼을 묶어두던 신록의 나무가 무너졌다. 요정신도 죽었겠지.

동력이 떨어지면 시스템도 머지않아 정지할 것이고, 그러면 신들에 의한 지배 체계. 불사체계가 모두 무너진다.

최초의 목적은 불사, 죽지 않기 위함이었다. 마신이 시스템의 기본을 구축하고, 요정신이 동력을 마련했다. 여신이 모든 생명체의 영혼에 씨앗을 심었고, 녹혈신이 공간을 연결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몸으로 몬스터를 만들었다.

마신은 불쾌했다.

그는 수만, 어쩌면 그 이상의 세월을 살아왔고, 불사와는 무관하게 이 가축장, 좋게 말하면 직접 가꾸는 정원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수만이라는 세월이 만들어낸 정 같은 것이었다.

그것까지 포함해. 마신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신은 요정신이 전한 정보를 떠올렸다. 그 남자에 대한 것들을 떠올렸다.

영혼의 힘으로 보호되는 세계수를 부수는 폭탄. 세계수 그 자체를 반으로 갈라버리는 검술. 영혼의 공격도 막아내는 막대한 마력과 영혼을 다루는 기술까지.

그 옛날, 무질서가 지배하던 투쟁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위대한 존재로서 한 종족을 이끌 종주로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 종주들이 바로 지금 신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지.’

셀 수 없는 세월이 지났지만, 마신은 더 살고 싶었다. 죽기 싫었다. 이미 셋이 죽었다. 그 남자는 홀로 세 명의 신을 죽였다. 그런 자를 홀로 상대할 만큼 마신은 어리석지 않았다.

대신, 마신은 신탁을 내렸다.

자신이 다스리는 마족뿐만 아니라, 붉은 피를 가진 자들과 녹색피를 가진 자들, 그리고 요정들에게까지.

영혼의 씨앗. 그 안에 마족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는 자라면 딱히 마족이 아니더라도 신성력을 내리고 신탁을 내리는 것이 가능했다.

마신은 인류를 포함한 전 종족에게 고했다.

-세계의 존망을 위협하는 거악이 등장했다. 거악을 물리치기 위해 뭉쳐라. 모든 종족이 힘을 합쳐 대항해라.

비로소, 세계의 적이 탄생했다.

***

신은 넷. 남은 건 하나. 마음이 편하다? 전혀. 이런 건 대게 마지막에 엿 먹는 법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 마음을 놓을 때가 내 명줄을 놓을 때다.

아니나 다를까.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이젠 진짜 이 땅 위에 발붙일 곳이 없어졌어.”

“붙일 곳은 많아.”

“라팔아, 사람은 사람과 살아야 하는 거란다.”

땅에 발만 붙이고 산다고 다가 아니라고.

“저희랑 살면 되잖아요.”

“그것도 적당히 살아야지. 넌 종일 떡 치면 안 질리냐?”

“안 질리는데요?”

사랑이의 성욕에는 나도 혀를 내두르겠다. 섹스만 하면 저 작은 몸에서 나오는 체력은 무한하다. 작다고 해도 평균에서 조금 작은 정도지만, 피오라랑 나비랑 비교하면 역시 작게 보인다. 두 사람의 체구가 큰 것은 또 아니다. 난 좆집 선정에 아주 정성을 들인다.

차이가 나는 건 특정 부분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어쩐다. 인류 공적을 넘어 세계 공적이 됐다. 신탁이라니, 마신 쪽에서 먼저 손을 쓸 줄은 몰랐다.

막 도시 하나를 방문하고 오는 길이다. 내 얼굴이 확인되자마자 완전 무장한 병사가 우르르 나오더라.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냥 그놈들만 죽이고 빠져나왔다. 도시를 지우지 않은 점에서 자비를 베풀었다.

일부러 살려둔 놈들을 고문하며 신탁이 내려와 내가 세계의 공적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마신이라는 놈들은 친절하게도 아주 광범위하게 신탁을 내렸다.

사람들은 열에 하나꼴로 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내 얼굴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랐단다.

“냐앙.”

내 무릎에 엎드린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가슴이 무릎에 눌리는 감촉이 옷을 넘어서도 그대로 전해진다.

말랑한 가슴이 좋구나, 좋아. 좋긴 무슨. 신의 위치를 알려면 나 혼자서는 안 된다. 누구 도움을 받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 방대한 땅을 다 혼자 돌아다닌다?

농담 안 하고 100년 이상이 걸릴 것이다. 내 수명이 그 정도로 다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시간을 삽질하고 싶지도 않다.

이번만 해도 봐라. 엘프 사제 한 명 만나고 요정신, 엘프년을 죽였다.

혼자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협력을 얻는 것은 원천적으로 다르다. 진짜 100년짜리 세계투어를 나서야 하나.

하루, 이틀. 시간이 허무하게 지난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누군가가 내 앞으로 텔레포트 해왔다.

덩치 큰 수인이다. 어딜 봐도 전사인데, 텔레포트 마법은 저놈이 쓴 것이다. 즉, 마법사다. 그러니까 힘법사?

“누구냐 넌?”

“공투교의 말단을 맞고 있는 미천한 자입니다.”

수인이 무릎을 꿇고 말한다.

“마신이 신탁을 내렸다는 소리를 듣고, 백방으로 교주님을 찾아다녔습니다.”

언제 내가 공투교의 교주가 되었나 보다. 내가 창시자이기도 하니 딱히 틀린 것도 아니네.

“왜. 찾아서 뭘 하려고?”

“교주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이때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주님을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어디로?”

“공투교의 영향력은 대륙을 가리지 않습니다. 북대륙과 남대륙. 교주님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실 수 있습니다. 저희가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하는 꼴을 보니, 내가 가자고 하면 그 도시를 쓸어버리고 들어갈 작정인 모양이다. 전형적인 광신도들이군. 난 한 것도 없는데 광신도를 잔뜩 거느리게 됐다.

세계에 내 편은 하나도 없나 했는데, 미친놈들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다.

“본진으로 가자.”

“분부 받들겠습니다.”

힘법사가 마법을 사용하고, 지팡이에 마력이 모인다. 장거리 텔레포트에 필요한 마력을 저렇게 담아뒀군.

텔레포트의 범위는 나와 내 가마까지. 제법 큰 마력이 필요할 터다.

텔레포트의 빛이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나를 향해 무릎 꿇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다. 내려다보는 위치다. 나는 높다란 제단 위에 올라와 있다.

“교주님께서 옥체를 끌고 왕림하셨다! 모두 경의를 표하라!”

힘법사의 외침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고 투기를 뿜는다.

-투쟁하라! 투쟁하라! 투쟁의 화신이시여!

마교에서나 할 법한 의식이다. 내가 언제 마교교주가 되었나. 공투교나 마교나 사상은 비슷한가. 강자존. 쎄면 장땡.

본의 아니게 중간계판 마교를 만들어버린 셈이군.

유상민이 눈으로 어쩔 거냐고 묻는다. 다른 얘들은 뭐. 느긋하다. 주인 닮아 가는지 좆집과 애완동물도 갈수록 강심장이 되어간다.

“고개를 들어라.”

근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판을 깔아줬으면 어울려야지. 세계와 적이 되었는데 이만한 세력이 공짜로 손에 들어왔다. 거절한 이유가 없다. 싸우는 건 나 혼자라도. 세계에 왕따 당하면 기분 나쁘잖아.

내 수발들 사람은 필요해. 수발을 들려면 그럴 자원도 필요하고.

“그리고 귀찮으니까 난 간다.”

스켈레톤이 뼈로 돌아가고, 가마도 아공간으로 사라진다. 비어 있는 제단 뒤로 내려간다. 내 좆집들도 날 따른다.

연설이라도 해? 필요 없다. 난 저놈들에게 신앙을 요구하지 않는다.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그만이다. 그냥 좋은 침대와 맛있는 먹거리. 딱 그 두 개만 주면 된다.

나머지는 세력이 붕괴하든 말든 알 게 뭐야.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자면, 광신자들은 무슨 짓을 해도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 광신자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어.

아니나 다를까. 뒤에선 환성이 들린다. 저것들은 내가 똥을 싸도 좋아할 놈들이다. 누가 교육했는지 교육 참 잘 시켰다.

“만족스러우십니까?”

힘법사가 따라오며 묻는다.

“아주.”

힘법사의 입이 귀에 걸리도록 찢어진다. 좋냐. 입에 발린 칭찬으로 저렇게 좋아할 수 있다니 참으로 부럽다. 난 사람을 믿어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칭찬이 칭찬으로 안 들린단 말이야.

“잠자리랑 식사.”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신 있게 말하고 힘법사가 우릴 안내한다. 종교적인 냄새가 강하지만, 어엿한 도시다.

“여긴 어디냐?”

“중국 자금성이 있던 자리입니다.”

“여기가? 전혀 다른데.”

자금성이야 내가 폭파했다고 해도. 도시는 건재했다.

“중국의 전투 노예 대부분이 그날 성전에 투입됐었습니다. 혼란에 빠진 수도를 제압하는 것은 손쉬웠습니다.”

그리고 그 후 중국인들을 어떻게 몰살했으며 어떻게 이 교단을 세웠는지 힘법사가 자랑스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부모에게 칭찬받길 바라는 애 같다.

거처는 내 눈으로 보기에도 고급이다. 귀족 노릇도 해보고 왕 비슷한 노릇도 해본 내 눈은 높은 편이다.

“시녀들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이용하셔도 됩니다.”

그 이용이란 게 어떤 건지는 시녀를 보는 순간 알았다. 반쯤 헐벗은 옷차림. 족쇄를 찬 인간들도 눈에 띈다. 저건 노예 각인이다. 인간이 노예라, 놀랍지는 않다.

중국 놈들이 한 짓이 있는데, 저건 그냥 업보다.

“지원자로 모두 꾸리고 싶었습니다만. 그래도 미색을 우선시했습니다.”

“뭐, 괜찮네.”

그래도 우리 얘들한테는 딸리지만.

“신탁이 내려왔다지? 정확히 어떤 형태야?”

한 번 듣긴 했지만, 일개 도시의 병사보다는 그래도 제대로 조사한 걸로 보이는 이놈들이 아는 게 많을 거다.

“세계의 존망을 위협하는 거악이 등장했다. 거악을 물리치기 위해 뭉쳐라. 모든 종족이 힘을 합쳐 대항해라. 동시에 교주님의 얼굴이 기억에 각인되었습니다. 텔레파시 계열 진명으로 이미지를 전송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이미지를 전송받았다고 해도 난 그게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

“추가적으로 전 세계에 걸쳐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 필요 없어.”

“네?”

“성서와 성경. 신화를 가져와. 그리고 마신의 위치를 찾아. 그거면 끝나.”

마신이 먼저 선전포고했고, 내가 세계의 적이 된 상황이다. 거리낄 것이 없다.

“신탁을 내린 놈. 신을 족친다. 투쟁이란 그런 거지.”

“뜻을 따르겠나이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힘법사가 떠난다.

좋은 잠자리에는 좋은 여자가 필요하지. 그리고 내 좆집들은 모두 최고다. 쌓인 것들을 조금은 풀겠구나.

========== 작품 후기 ==========

공짜 잠자리 get!

육해공 가리지 않고 차린 진수성찬을 먹으며 잔뜩 기분을 낸다. 중국식에 가까운 요리들은 북대륙의 음식보다 훨씬 내 입에 맞다.

한식과는 많이 다르지만 적어도 동양풍이라는 느낌은 난다. 저쪽은 음식은 미국식이거나 근본을 모르는 음식인 데다 고급 음식을 먹을 기회도 잘 없었다. 중고를 가공하며 그 여관에서 먹었던 식사가 그나마 양질이었지.

침실은 아늑하...긴 무슨, 붉은 조명에 안이 비치는 얇은 천이 처져 있는, 귀족 집안에서 자주 보던 물건이다.

조명도 마냥 붉은 게 아니라 은은하게 붉은색. 사람의 욕정을 끓게 하는 절묘한 색상이다. 이거 만든 놈 누구야.

칭찬의 뜻으로 1따봉 주마.

유상민은 다른 침실을 찾겠다고 떠났고, 침실에는 나와 좆집들만 남았다. 나비의 정체성이 애매해지고 있다. 애완동물이냐, 좆집이냐. 애완좆집으로 타협하자. 분류상으로는 좆집이다.

도구 취급이니 비행기 화물칸에도 탈 수 있겠다. 비행기 화물칸에는 애완동물도 탈 수 있나? 모르겠다. 타 본 적이 있어야지. 차원이동도 해봤고, 텔레포트도 해봤는데 비행기도 안 타봤다니 이것도 이상한 일이야.

“빨리하자.”

“넌 뭘 벌써 벗고 있냐. 너도 따라서 벗지 마.”

옆을 보자 탈의를 마친 라팔이가 내 팔을 붙잡고 보채고 있다. 사랑이까지 라팔이 눈치를 살살 보며 옷을 벗는 중이다.

“안 할 거야?”

라팔이 나를 향해 묻는다. 여자의 필살기라는 치켜뜨기다. 라팔이의 초롱초롱한 푸른색 눈동자가 날 올려다본다.

똘망똘망한 눈동자 아래로 보이는 헐벗은 알몸. 작게 솟은 가슴과 티 하나 없는 완벽한 피부. 재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비율도 완벽할 것이다.

몸을 낮춰 라팔이의 허리를 받쳐 들어올린다. 라팔이 다리로 내 허리를 감으며 팔은 내 목을 두른다. 라팔이가 허리를 흔들며 내 배에 비부를 비빈다. 아직 젖지 않아 부드러운 감촉만이 전해진다.

곧 젖기 시작할 거다.

진한 입맞춤이 이어진다. 키스를 나누며 침대에 라팔이를 눕힌다.

입이 떨어지자 진한 실이 늘어져 끊어진다. 푸른색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비친다. 내 눈동자에도 똑같이 라팔이의 모습이 비치고 있겠지.

푸른색 눈동자에는 육욕이 가득하다. 살짝만 장난을 쳐보기로 할까. 다시 다가오는 작은 입술을 손바닥으로 말한다.

라팔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맛있는 건 마지막에 먹어야지?”

“우...”

“메롱이다.”

가볍게 약 올려주고 나는 잔뜩 완전 탈의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랑이를 향한다. 사랑이가 두근거림을 참지 못하고 날 본다. 그러나 난 사랑이를 그대로 지나친다.

“에?”

애달픈 소리를 내도 소용없다. 혼자서 자위나 하고 있어라. 아니, 내가 무시해서 애달픈 게 아니라 흥분한 건가. 사랑이의 가랑이 사이로 물이 흐른다.

순서대로라면 이런 날은 라팔이부터 시작해야하지만, 오늘은 역순으로 한 번 해보자.

“냐앙.”

앞으로 뭘 할지 짐작한 나비가 나한테 매달린다. 재주 좋게 의족을 내 어깨에 걸치고 나한테 매달려 얼굴을 핥는다.

수인. 동물인 인간이다. 고양이 특유의 까끌까끌한 혀가 간지럽다.

“그래, 그래. 오늘은 너부터니까.”

“냐냥!”

-좋아. 좋아. 자지! 자지!

나비의 텔레파시는 직관적이고 노골적이다. 달에 갔다 온 이후, 내가 나비에게 영혼에 대해 질문할 일은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이제 정말로 지능을 상실해가고 있다.

지능을 유지하는 대신 몸이 애완동물에 적응하며, 몸매와 피부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다. 육감적이 되어가고 있다.

나비를 땅에 엎드리게 하고, 뒤에서 깊이 찔러 넣는다. 나비가 기쁨에 몸부림친다. 찍어누르듯 허리를 움직이자 자궁 입구에 물건이 닿는다. 그러고도 질이 늘어져 육봉을 전부 받아들인다.

“냐, 냐아앙!”

자궁 입구에 물건을 살살 문지르자 질이 내 물건을 조이며 부들부들 떨린다. 배를 가르면 떨리는 내장을 볼 수 있을까?

한 번 사정을 하고도 계속 허리를 흔든다. 나비는 제정신이 아니다. 눈을 까뒤집고 쾌감에 절어 침을 질질 흘린다. 발작하듯 몸이 떨리며 그 때문에 의족이 땅에 탕탕 부딪힌다.

나에게 덮쳐져 발버둥 치는 것 같은 모습이다. 몸을 뒤집어, 나비를 내 위로 올린다.

“냐아앙?”

나비가 허리를 움직이지만, 만족스럽지 못한지 자꾸 성난 소리를 낸다.

“냥, 냐. 냥!”

그러다 조금씩 정신을 차리더니 허리힘으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스스로 허리를 움직인다. 사지가 없는데도 수인 특유의 균형감각으로 골반과 허리만으로 중심을 잡고 내 위에서 허리를 돌린다.

깊숙이 박힌 내 물건이 자궁구에 계속 비벼지고 나비가 나른한 한숨을 토한다. 허리를 잡고 인형을 다루는 것처럼 거칠게 나비의 몸으로 방아를 찧는다. 이 자세를 하면 여자가 다리나 손으로 땅을 짚어 중심을 분산하지만, 나비는 팔다리가 없어 온전히 자기 무게로 내 물건을 받아들인다.

자궁을 쿵쿵 찍을 때마다 나비의 큰 가슴이 출렁이고, 이윽고 나비가 내 위로 늘어진다. 안에 깊이 사정하고 나비를 땅에 눕히다.

라팔이는 마지막이라는 말에 관심을 끊었는지 알몸으로 엎드려서 휴대용 게임기하고 있다. 잘 안 풀리는지 다리가 신경질적으로 파닥거린다.

사랑이가 간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피오라도 비슷하다. 책을 보는 척하지만, 얼굴이 은근히 붉어져 있다. 나비와 하는 도중 힐끔거리는 시선도 느꼈다.

신경 써서 개발한 보람이 있다.

피오라의 뒤로 돌아간다. 책의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모든 신경을 나에게 쏟고 있는 것을 알겠다. 피오라를 뒤에서 껴안는다. 부드럽고 커다란 가슴에 손이 묻힌다. 포근한 가슴을 살살 문지르자 옷 위로 유두가 발기한다.

“조금 쳐진 거 아니야?”

“아, 아니에요! 얼마나 신경 쓰고... 흡!”

발정 난 우리 다른 변태들에게선 볼 수 없는 귀여운 반응이다. 그래서 다른 애들이 귀엽지 않다는 건 아니고, 귀여움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는 거다.

“그래?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렇게 신경을 쓰실까?”

피오라가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 한다. 진심이 아닌 애교에 가까운 저항이다.

강간마와 피해자가 무조건 원수인 것은 아니다. 가장 유명한 표현으로 이런 용어도 있다. 스톡홀름 증후군. 고급 용어까지 사용할 필요도 없이. 내가 그런 경우를 봐오기도 했다.

내가 죽이 놈 중에 자신을 학대한 부모도 끝까지 부모라고 감싸는 놈들도 숱하게 봤지. 아, 숱하게는 아니고 몇 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해도 몸은 솔직한데?”

가슴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던 손이 배를 지나 아래로 내려간다. 이쪽도 조금씩 젖어오고 있다.

“으읏.......”

피오라가 쾌감에 저항하듯 몸을 비튼다. 읽던 책은 이미 땅에 떨어져 있다. 나는 피오라의 목으로 입을 가져간다.

쪽.

“흐으응...!”

가벼운 키스에 피오라의 허리가 튕긴다. 감도가 많이 좋아졌다.

쪽쪽쪽. 목을 올라가 볼에 갔다가, 다시 귓불 뒤쪽으로까지 꼼꼼하게 키스 마크를 새긴다. 연약한 피부는 살짝만 빨아줘도 작은 흔적이 남는다. 귓불을 깨물자 피오라의 꼬리 끝부분이 바닥을 짝짝 소리 나게 두드린다.

피오라의 꼬리는 강아지의 꼬리 같다.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꼬리의 끝부분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

위로 올라갔던 입술이 아래로 내려온다. 이번에는 목을 깨물고 빤다. 가늘고 하얀 목덜미가 이빨 자국과 침으로 범벅이 된다.

손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딱딱하게 발기한 유두를 괴롭히며, 마찬가지로 발기한 콩알 주변도 문질러준다.

유두를 누르자 딱딱한 유두가 가슴에 파묻힌다. 가슴의 크기답게 조금 큰 유두를 엄지와 검지로 꼬집고 돌린다.

“흐으읏!”

끝까지 버티던 피오라가 뒤로 무너지며 나에게 몸을 기댄다. 이건 고의로 그랬군. 이 앙큼한 년.

내 애무에 피오라가 몇 번이나 버린다. 가슴과 콩알만을 괴롭히며 일절 삽입은 하지 않았다.

피오라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붉은 눈동자를 나에게 들이댄다.

“이제 됐잖아요.......”

자기가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인다. 뾰족한 귓불이 빨갛다.

“뭐가?”

“약 올리지 말고 어서요.”

“뭘?”

피오라의 성감대를 자극하며 묻는다. 눈동자의 붉은 기운이 강해지고, 꼬리가 움직여 내 몸을 감는다.

“넣어줘요.”

“제대로 말해야지.”

피오라의 귀에 속삭인다. 나름 달콤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고 생각했는데, 어떨까.

“자지를! 자지를 제 보지에 넣어주세요!”

잘 된 것 같네.

피오라의 몸을 돌리고 흠뻑 젖은 음부에 물건을 삽입한다. 뱀 같은 질 내부가 물건을 주무른다. 조임도 조임이지만 피오라의 안을 표현하려면 주무른다는 표현이 맞다. 질 주름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며 각기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

정말이지, 내 안목은 탁월하다. 그날 전쟁에서 피오라를 죽였으면 어쩔 뻔했어.

피오라와의 관계는 역시 체위가 제한된다. 사람의 하반신과 다른 꼬리가 방해된다. 어쩌면 이 명기와 같은 질육은 제한된 체위를 극복하기 위해 발달한 건지도 모른다.

쾌감을 위해 발전하다니. 그야말로 음탕한 종족이다.

피오라와의 관계는 질척하고 끈적하다. 완전히 달라붙어 서로 혀를, 가슴을, 허리를 움직여 상대를 느낀다. 피오라의 질 안쪽 깊은 곳이 내 물건에 달라붙고, 피오라도 꼬리를 감으며 나에게 달라붙는다.

가슴의 말랑함과 딱딱한 유두가 느껴지고, 바로 앞에서 피오라의 숨결이 느껴진다. 뜨거운 숨이 입과 코에서 나와 내 코와 입으로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내 숨결도 피오라의 입으로 들어간다.

끈끈하게 얽히며 눈이 마주치면 깊이 키스한다. 오른쪽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이며 색이 변한다.

나는 손을 들어, 피오라의 목걸이를 만진다. 왼쪽 눈알로 만들어진, 별빛을 품고 있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보석은 지금도 색이 변하고 있는 피오라의 눈이다.

목걸이를 만지자 피오라의 어깨가 떨리고 질육이 더욱 강하게 내 물건을 옥죈다. 아래로는 흥건할 정도로 물이 흐른다.

“피오라는 정말로 변태구나. 정말로 변태야.......”

“그렇지는.... 흐으아아아앙!”

부정하는 피오라의 왼쪽 눈을 손가락으로 찌른다. 닫힌 눈꺼풀을 뚫고, 눈동자가 있던 텅 빈 공간으로 손가락이 침입한다.

피오라가 날 꽉 껴안고 절정 한다. 꼬리도 날 강하게 감싼다. 라미아의 본능인지 교미 상대를 상처 입힐 정도는 아니다. 피부에 닿는 비늘의 감촉과 피오라의 체온이 기분 좋을 정도의 강함이다.

“우리 피오라. 야한 아이구나. 야한 아이야.”

텅 빈 공간과 안쪽의 외벽을 애무하듯 만지고 조심스레 긁는다. 뒤로 넘어가려는 피오라를 팔로 받친다.

노예의 증거이자 복종의 증거인 목걸이. 그리고 공포와 복종의 결심이 만든, 피오라가 스르로 뽑아낸 눈알의 상흔.

나에 대한 공포는 옅어졌어도, 이 두 성감대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음부를 애무하는 것처럼 텅 빈 눈구멍을 애무하자 음부를 애무하는 것보다 몇 배는 되는 반응이 돌아온다. 피오라는 이제 숨도 쉬지 못하고 헐떡인다. 복상사하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복상사시키는 것도 좋겠다. 죽어도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는 살릴 수 있으니까.

“우리 피오라, 착하지. 착해. 착하고 야해.”

“흐으윽. 피오라는 챠칸 아이에요오....... 챠카고 냐한 아이에요오.......”

정신이 반쯤 나간 피오라가 중얼거린다. 내 말에 반응하듯 꾸욱하고 질육이 조인다.

나는 그대로 피오라의 안에 사정한다. 피오라의 몸이 덜컥거리며 떨리고, 정액을 더욱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하복부를 밀착해온다. 질육이 정액을 짜내듯 움직인다.

========== 작품 후기 ==========

못 썼던 h씬 몰아쓰기 신공!

너무 스토리만 빼서 한 번 쉬어가는 타이밍입니다. 피오라 야캐욧, 피오라 애껴욧.

내 정액을 짜낸 것을 마지막으로 피오라가 축 늘어진다. 몽롱한 눈으로 엎어져 야릇한 숨을 내뱉는다. 가장 민감한 성감 두 개는 신체적 성감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성감으로 느낀다. 그걸 자극했으니 피곤하겠지. 스르르 풀린 꼬리를 쓰다듬으며 일어나 사랑이에게 다가간다.

“하아. 하아. 주인님, 저도요. 저도 자지 주세요...!”

이 변태는 바닥에 발라당 누워 자위하고 있다. 배를 까고 다리를 벌리고 있는 게 복종의 자세를 취하는 강아지 같다.

얼마나 자위를 했으면 사랑이의 음부는 빨갛게 부어 있고 바닥은 물이라도 쏟은 것 같다. 색이 노란 것이 애액과 오줌이 섞인 것 같다. 이제 내가 좆집의 배변 훈련도 시켜야 하는 신세인가.

소변도 못 가리는 좆집에게는 벌이 필요하겠지.

“캬악!”

사랑이의 배를 밟는다. 충격으로 바닥이 내려앉고 사랑이가 음부에서 조수를 뿜는다.

나는 발에 더 강하게 힘을 주며 잘근잘근 누른다.

“뎌뎌, 뎌 해쥬세요!”

음부를 만지작거리는 사랑이의 손이 빨라진다.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눈에서는 눈물까지 흘리며 풀어진 발음으로 말한다. 사랑이의 진명은 육체 강화 계열이다. 간단하지만 강력한 능력이라고 하는데, 그 능력을 이런 짓으로 쓰고 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성노예에 특화된 능력이기도 하다. 어떤 과격한 플레이도 버텨낼 테니까.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이 성욕의 괴물이다만.

“응? 그렇게 좋냐. 이 변태가. 응? 응?”

누르는 힘이 강해질수록 사랑이의 음부에서 뿜어지는 물의 양도 많아지고, 사랑이의 호흡도 거칠어진다. 좆집과 애완동물을 통틀어 흥분시키기 제일 쉬운 게 사랑이다. 싸다귀 한 대만 날려도 흥건히 젖는다.

다리를 치우고 몸을 걷어찬다. 사랑이가 날아가 벽에 부딪힌다. 쾌락에 신음하면서도 음부에 가 있는 손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사랑이에게 다가가 목을 잡고 들어 올린다.

“크헉, 컥. 컥컥.”

사랑이는 필사적으로 내 손을 잡고 떼어내려 한다. 그러나 힘은 내가 훨씬 더 세다. 살려고 발버둥 치지만, 역설적으로 하복부는 덜덜 떨리며 애액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대로 계속 목을 조르자 반항은 사라지고, 사랑이의 몸이 축 늘어진다. 발작하듯 몸이 간헐적으로 떨린다.

벽에 앉히고 뺨을 몇 대 때리자 사랑이가 정신을 차린다. 멍한, 동시에 몽롱한 붉은 얼굴이다.

내 싸다귀 자국이 볼에 그대로 남아 있다.

“헤헤.......”

사랑이가 바보처럼 웃는다. 마냥 좋단다. 목에는 내 손자국이 선명하다. 입에는 침이 흐른 자국도 그대로 남아 있다. 지극히 이질적인 웃는 얼굴이다. 그 이질성과 잘 가꿔진 사랑이의 알몸이 내 안의 성욕을 부채질한다.

남을 때리며 좋아하는 취미는 없었는데, 쟤 때문에 나까지 이상해졌다.

사랑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사랑이는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날 본다. 그 모습이 괘씸해서 유두를 꼬집어 주었다.

“흐으으으읏!”

작은 가슴에서 유두가 쭈욱 늘어난다. 두 개의 끊어질 유두가 늘어지며 사랑이의 몸도 덩달아 따라온다.

나는 그대로 사랑이를 들어 올린다. 사랑이가 유두에만 의지해 대롱대롱 매달린다. 늘어난 가슴은 안쪽의 핏줄이 보이고, 유두에서는 피가 맺힌다.

“흐아아앙앙!”

고문에 가까운 행위에 사랑이는 고통 대신 쾌락으로 화답한다.

“끊어져! 끊어져요! 가슴이 끊어져 버려요!”

“그래서, 싫어?”

“좋아욧!”

고통을 쾌락으로 느끼는 거지 고통이 없는 건 아니다. 사랑이의 몸은 땀으로 흥건하다. 잘 보면 가벼운 탈수 증세도 일으키고 있다.

유두를 잡고 있던 손을 놓자 사랑이가 바닥에 떨어진다. 나는 옆에 있던 물통에서 물을 머금고, 누워 있는 사랑이의 상체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 입에 내 물건을 넣는다.

사랑이의 입이 내 물건을 뿌리까지 삼킨다. 사랑이는 그 상태로 혀를 움직여 내 물건을 애무하려 한다. 그러나 입 안을 가득 채운 물건 때문에 하나 마나 하다.

나는 그대로 오줌을 싸갈긴다. 식도를 타고 오줌이 내려간다.

“읍!?”

사랑이는 처음에는 당황하다니, 곧이어 내 오줌을 기쁘게 마시기 시작한다. 전에 혀와 피를 마신 이후로 이상한 취미에도 눈을 떴다. 이상성욕으로 따지면 얘가 제일이다.

마력으로 신진대사를 조절, 오줌의 양을 늘린다. 사랑이의 식도를 타고 끝없이 오줌이 넘어간다.

사랑이의 배가 임산부처럼 부푼다. 역류하려는 오줌이 내 물건에 막혀 올라오지 못한다. 숨까지 달리는지 사랑이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뱉지 마. 알았지?”

사랑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입에서 물건을 빼내자 사랑이가 입을 막고 구역질한다. 그러나 입으로 뱉지는 않는다. 올라오는 소변을 억지로 삼킨다.

“잘했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사랑이는 입을 다문 채 헤 웃는다.

부푼 사랑이의 배를 만진다. 정말 임산부처럼 부풀었다. 배를 살살 만지자 안쪽에서 오줌이 출렁인다. 바늘로 찌르면 터질 것 같지만, 방이 난장판이 될 테니 그만두자.

사랑이가 신기한, 그리고 행복한 얼굴로 자기 배를 쓰다듬는다. 진짜로 임산부를 보는 듯한 모습이다.

사랑스러워하는 건 아기가 아니라 위 안에 든 소변이라는 게 미쳤다.

“임산부 같은데.”

“언젠가 진짜 임신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주인님의 아이를요.”

“해줄까?”

“정말요?!”

아니, 생각 좀 해 보고. 아비가 이런데 내 새끼가 어떤 놈이 될지 나도 무서워서. 심리적인 거부감도 있고 말이야. 이건 아마 내 여러 트라우마에 근거하겠지만, 결론은 그냥 싫다는 거다.

“아니, 그냥 기분만 내자.”

사랑이를 앉아 내 위에 앉힌다. 사랑이는 알아서 물건을 넣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흐읏!”

안이 가득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조인다. 사랑이가 움직일 때마다 커다란 배가 출렁이고, 안쪽에 있는 오줌이 움직이며 장기를 압박한다. 사랑이는 몸을 뒤틀며 희열에 떤다.

요분질이 점점 빨라진다. 4급 각성자에 달하는 신체 능력 덕분에 커다란 배를 하고도 움직임에 거침이 없다. 되레 이 상황이 흥분되는지 자기 배를 쓰다듬기까지 한다.

분홍색을 넘어 검은색을 띠는 눈빛이 위험하다. 그러나 나에겐 더욱 흥분을 부추기는 요소밖에 되지 않는다. 이 변태가 얼마나 더 타락할지. 얼마나 더 떨어질지 갈수록 기대된다.

쓰다가 망가져도 좋고, 내가 감당 못 할 정도로 커도 좋다. 다루기 힘든 물건을 다루는 것도 좋은 여흥이 될 것이기에.

“임신하고 싶어?”

“네, 네네! 네네네! 하고 싶어, 하고 싶어요!”

몸을 낮춰 얼굴을 나한테 들이대고 허리를 흔들어 졸라댄다. 임산부 같은 배가 눌린다.

“잘 조이면 어쩌면 임신할지도 모르지.”

“네네!”

사랑이는 허리를 세우고 움직이는 것에만 집중한다. 질육이 여태까지 없었던 정도로 조인다. 정말로 임신하고 싶은 모양이다. 피임 마법이 있으니 임신은 절대로 안 하겠지만, 희망 정도는 줘도 괜찮겠지.

사정감이 치미는 대로 참지 않고 질 내에 사정한다. 오줌과 마찬가지로 정액을 늘리자 질 안을 정액이 가득 채운다. 자궁 안까지 가득 찼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가 황홀한 얼굴로 부르르 몸을 떤다. 커다란 배도 출렁이며 떨린다.

절정의 여운에 빠진 사랑이를 들어다 땅에 눕히고 배를 발로 밟는다.

“우웨에엑!”

역류한 내 오줌이 사랑이의 얼굴과 몸을 더럽힌다. 아래로는 사정한 정액도 흘러내린다.

“정액이 새는 데, 저래서 임신할까?”

사랑이는 입으로 토하며 손으로는 음부를 틀어막는 진기를 선보인다. 흘러내리는 정액을 긁어모아 손가락으로 음부 깊이 집어넣는다. 대단한 정신력이다. 임산부 같은 배가 멀쩡해질 때까지 한참이나 오줌을 토해내던 사랑이는 손으로 음부를 꽉 틀어막고 다리까지 오므린다.

등을 굽혀 자신을 음부를 들여다보며 새어 나온 정액이 없나 살피기까지 한다.

“임신하게 해주세요. 임신하게 해주세요.”

임신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다. 오줌으로 범벅된 몸으로 저러고 있으니 다시 성욕이 일려 한다. 타락한 암컷의 끝을 보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침대로 향한다. 오래도 걸렸다. 나비와 피오라는 피곤했는지 방 한쪽에 누워 자고 있다.

라팔이는 시선이 게임기에 가 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 하반신을 중심으로 침대 시트가 축축하다. 얼레리 꼴레리, 괜히 놀리고 싶어진다. 조금 놀려볼까?

나는 라팔이 위에 엎드린다.

“으이그. 그걸 못 참고 흥분했쪄요?”

“기분 나빠.”

단칼에 잘렸다. 그래, 내가 하고도 이건 좀 아니더라.

홧김에 공격에 나선다. 아래로 손을 넣어 라팔이의 몸을 감싸고 위와 아래를 동시에 공략한다. 콩알을 집중적으로 문질러주자 음부에서 애액이 푸슉 한 줄기 애액이 뿜어진다.

“흐앗.”

라팔이가 작게 신음한다. 부드러운 몸을 껴안고 마음껏 즐긴다. 정말로, 취향과 종족을 초월한 예술적인 몸이다.

수컷이라면 이 몸을 보고 흥분할 수밖에 없다.

이런 몸이 내 손에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부드럽고, 말랑하고, 좋은 냄새가 나며 잘 느낀다. 심지어 체액도 달콤하다. 땀도, 침도, 오줌도, 애액도, 전부.

침대에 엎어진 채로 나는 애무를 계속한다.

“빨리.”

끈질긴 내 공격에 이 쪼그만 아가씨가 조금씩 안달이 난다. 붉어진 얼굴로 라팔이 날 재촉한다.

그런 눈빛을 보내도 오늘은 안 들어줄 거다.

더 큰 자극을 원하는지 라팔이 직접 허리를 움직이며 음부를 자극하려 한다. 나는 반대로 음부를 손으로 막고, 허리를 고정한다. 엎드린 상태라 내 몸무게까지 더 해지면 라팔이는 움직일 수가 없다.

“우으.......”

라팔이는 철벽의 무표정이 무너지고 약간 울상이 된다. 아, 귀여워 죽겠네. 깨물어버리고 싶다.

나는 깨무는 대신 작은 몸을 힘줘 껴안는다. 손가락 두 개를 질 안으로 넣어 바로 위쪽을 꾹 누른다. 약간의 발정 마법을 담아서.

“흐익.”

귀여운 신음과 함께 덜컥, 내 몸을 한 순간 들어 올릴 정도로 작은 몸이 튀어 오른다.

나는 계속 그 장소를 자극한다. 계속해서 몸이 덜컥이며 내 몸도 함께 진동한다. 발정 마법 앞에서 생물이라면 평등하다.

“흐으으읏! 흐아앙! 흐아아앗!”

라팔이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안면 근육이 풀려 흐물흐물 녹는다. 가슴을 애무하던 손을 떼고 녹아내린 얼굴을 만진다.

한 번 보면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만한 얼굴이다. 나 말고는 아무한테도 안 보여줄 거다. 이건 내 거다.

“햐찌마.”

입술을 붕어 모양으로 만드니 라팔이 앳된 소리로 항의한다.

“흐끅!”

그러나 손끝의 마력을 강하게 하니 한 번에 불만이 쏙 들어간다. 역시 급소 제압은 최고의 기술이다.

음부와 얼굴을 한참 가지고 놀다가 라팔이를 돌려 눕히고 정상위로 삽입한다.

기다렸다는 듯 좁은 질 내부가 내 물건을 기쁘게 맞아들인다. 라팔이 다리로 내 허리를 감싸고 힘을 줘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다.

어지간히 고팠나 보구나.

힘껏 허리를 쳐올린다. 라팔의 허리가 휘며 입에서 교성이 터진다. 소녀의 외모에 맞게 여린, 그러나 탕녀보다 야릇한 교성에 내 물건이 더욱 껄떡인다.

꽉 물고 놓아주지 않는 조임에 금방 안에 정액을 쏟아낸다. 그러나 나는 물건을 빼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라팔이랑 하면 한 번은 기본이고 두 번째는 교양이고, 세 번째는 필수다.

애액과 정액이 섞이며 거품이 일어난다. 라팔이를 엎드리게 하고, 등에서 누르듯 압박하며 삽입한다. 내 물건이 자궁을 밀어내며 침대의 감촉이 느껴진다. 앞에서 보면 라팔이의 아랫배가 불룩 튀어나와 있겠지.

나는 그대로 계속 허리를 흔들었다.

라팔이의 입에서 교성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온다.

침대 끝에 걸터앉자 라팔이 알아서 물건을 삽입한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살살 엉덩이를 흔들다가 나에게 몸을 맡기며 두 다리를 땅에서 든다.

온전히 내 물건만으로 라팔이가 몸을 지탱한다. 질육이 꾸욱 조이며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쓴다.

내가 일어서자 라팔이 육봉에 꿰인 채로 함께 들린다. 그대로 방을 한 바퀴 산책하니 걸음걸음 마다 라팔이의 음부에선 분수가 나온다. 푸슛. 푸슛. 그런 환청이 들린다.

좆집들의 애액부터 내 정액과 오줌까지. 하룻밤에 바닥이 못쓰게 되었다.

방을 세 바퀴 정도 산책하고, 라팔이를 잠시 내려놓는다. 입가로 흐르는 침을 핥아 먹는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진한 키스를 나누며 라팔이를 앞으로 숙이게 해 침대에 엎드리게 하고, 라팔이의 허리를 든다. 그대로 삽입한다. 손은 침대를 잡고 있고 하반신은 허공에 떠 있다. 그대로 허리를 움직인다.

라팔이는 침대에 푹 퍼져 입에서 신음만 뱉는다.

여러 체위를 번갈아가며 세 번 정도 사정하니 라팔이가 기절했다. 그 후로도 다시 네 번 정도 기절한 라팔이를 상대로 물을 뺐다.

========== 작품 후기 ==========

자고로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

마신은 멍청하지 않다. 스스로 만든 공간에 처박힌 적혈신과 녹혈신. 그리고 세계수 안에서 썩어가던 요정신과 달리 그는 꾸준히 살아왔다. 현실을 경험했고, 머리와 몸을 사용했다.

요정신에게 정보를 받고 신탁을 내리기 바로 직전까지 그의 직업은 북대륙에서 활약하는 용병이었다.

그때그때 종족을 바꿔가며 여러 생물을 삶을 사는 것. 그게 바로 마신의 삶이었다. 무료한 삶을 달래기 위한 여흥이지만, 그 여흥 때문에 마신의 지혜와 육신은 녹슬지 않을 수 있었다.

마신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역할에서 벗어나 신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마신은 일단 마왕을 찾아갔다. 북대륙과 남대륙을 합쳐 마족의 나라는 많지만, 그중에 마왕이라 불리는 왕은 단 하나다.

마신의 세례를 받은 라스퓌라 제국의 황제. 그는 황제이며 사제이고, 마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현실의 삶을 살면 가끔 짜증 나는 일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힘으로 해결되지만, 그러기엔 너무 귀찮은 일들. 그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마신이 만든 것이 마왕이다. 귀찮은 일들을 처리해줄 일종의 꼬봉.

마족 국가 중 가장 큰 규모를 가진 라스퓌라의 황제이며 마족의 최고 사제로 교황을 역임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는 지금 자신의 의자에서 내려와 수많은 신하 사이에 섞여 무릎 꿇고 있었다.

마왕이 앉았어야 할 그 자리에는 마신이 앉아 있었다. 마신의 뺨에는 이번 생의 역할을 나타내듯 뺨을 가르는 세 갈래로 그어진 발톱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마신이 입을 열었다.

“토벌군은?”

“순조롭게 모이고 있습니다. 그자에 대한 정보도 차근차근 쌓이고 있습니다.”

토벌군이란 말 그대로 세계의 적을 토벌하기 위한 군대다. 신탁이 내려지고 그자의 악행이 낱낱이 파헤쳐지며 종족을 가리지 않고 지원자가 날로 늘어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간이 제일 많습니다. 업보란 이런 것이겠죠.”

마왕이 말했다. 알면 알수록 터무니없고 제정신이 의심되는 자였다. 그자가 벌인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도시를 없앤 건 기본이고 몇 개나 되는 나라를 직간접적으로 부쉈다. 용을 죽였으며 마신의 말에 따르면 다른 신들의 신변에도 변고가 생겼다고 한다.

웃기는 것은 그자를 죽이기 위해 온갖 종족이 모이고 있지만, 개중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인간이다. 마왕은 인간에, 인류에, 인류가 가직 기술과 과학이라는 학문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들 때문에라도 빠른 시일 내에 다른 종족과 힘을 합쳐 인류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여론이었다. 그런데 그 기술과 학문이 저절로 손에 굴러들어오고 있다.

이 또한 그자가 인류를 묶던 거대한 끈을 잘라버린 것이 이유다. 인류 연합이 사실상 해체되며 갈 곳 잃은 기술과 자본이 토벌군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인류 연합이 조사한 그자에 대한 정보도 함께.

마왕이 아는 정보 태반이 인류 연합에서 나온 정보였다.

“첫 번째 계획으로 간다. 그자의 현재 위치는?”

“공투교에 있는 건물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공간 이동 좌표까지 얻어냈습니다.”

그자에게는 추적 계열 진명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명이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된다. 극히 원시적인 방법. 직접 발로 뛰는 것.

공투교에는 오래전에 세작을 넣어뒀다. 남대륙에 거점을 두고도 북대륙까지 방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세력을 신경 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 세작이 가져다준 정보였다.

“준비는 끝냈겠지?”

“그자의 마력이 얼마나 강하다 한들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또 그 폭탄을 아무리 터뜨려도 금도 가지 않을 밀실입니다.”

“가자.”

마신이 옥좌에서 일어났고, 마왕과 신하들이 뒤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커다란 밀실이었다. 요정신의 공간이던 세계수의 밑동과도 비견되는 크기의 밀실.

통짜 벽으로 만들어진 밀실 바깥에는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내고 있었고, 내부는 공사를 위해 설치한 인공 태양(그래봤자 마법에 불과한 것.)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신은 마력의 신. 모든 마력을 다루는 신이다. 맨몸으로도 세상의 마력을 자유로이 조절하는 그는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 자신의 힘을 강화하고, 그 외의 존재가 가진 마력을 억누르는 이런 공간까지 만들었다.

그자가 가졌다는 핵이라는 강력한 폭탄에도 버틸 수 있도록 토벌군을 부려 벽의 강도를 비약적으로 높였다. 가둬봤자 감옥이 깨지면 의미가 없다. 세계수가 무너진 것에서 얻은 교훈이다.

직접 보니 과연 만족할 만했다. 드워프를 비롯해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토벌군은 훌륭한 물건을 만들어냈다.

가장 유리한 싸움은 자신이 만든 판에서 싸우는 싸움이다. 마신은 그걸 알았다.

마왕을 비롯한 다른 자들이 모두 나가고, 밀실이 홀로 남는다. 마신의 몸에서 마력이 풀려나온다. 강대한 영혼이 호응해 마력을 증폭한다.

그자도 마법에 정통한 모양이지만, 이것에는 저항할 수 없다.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마법이 펼쳐져 좌표를 이곳에 옮길 것이다.

막대한 마력이 허공에 나열되고, 만들어진 수식이 공간과 공간을 연결한다. 좌표를 중심으로 공간을 통째로 텔레포트 범위로 잡는다. 밀실은 그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넓다.

텔레포트가 발동하고, 눈 깜작할 사이에 정원 딸린 거대한 저택에 밀실 안에 소환된다. 저택과 정원에 있던 사람까지 모두 함께.

“쯧.”

마신은 작게 혀를 찼다. 계획은 실패했다. 그자로 짐작되는 자는 이 안에 없다. 아쉽게 됐다. 그러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말했듯, 이건 첫 번째 계획이니까. 두 번째, 세 번째가 준비되어 있다.

마신은 바깥에 있는 자들을 불렀다. 그리고 정원에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자들을 제압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도박성 짙은 계획이었다. 목표가 저택 안에 없다면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그러나 또 완전한 도박이냐면 그건 아니다. 승산 있는 도박이다.

그자가 소환되면 좋고, 아니어도 좋다. 정보에 따르면 그자에게는 일행이 있다. 저택 안에 있는 자들 중 그자의 일행이 있다면 붙잡아 인질로 삼으면 된다.

그러면 인질을 미끼로 다시 한번 판을 마련할 수 있다.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는 마신의 머리 위로 드리운다. 낙하하며 행한 공격은 마신의 마력에 막혀 다가오지 못한다.

“최선은 되지 못했지만, 차선은 됐군.”

마신이 습격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녀. 그자의 일행이다.

마신은 어렵지 않게 라팔을 튕겨냈다. 두 사람 사이의 힘의 격차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거 봐요. 제가 그냥 항복하자고 했잖아요.”

꺾어지는 길에서 숨어 있던 유상민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텔레포트 멀미를 느끼는 순간 반쯤 목숨을 포기했다. 잠깐 밖에 나가 있다지만, 마법의 신과 같은 그 남자가 손 쓸 틈도 없이 이루어진 마법이다.

그것을 행한 개인, 또는 단체에 고작 둘이서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필 이럴 때 나가 있어서.’

유상민이 속으로 한탄했다.

라팔이 뒤로 물러나 유상민의 옆에 섰다. 첫 번째 공격이 막히고 라팔도 저항을 포기했다. 저항이란 것은 가능성이 있을 때나 하는 것이다. 지금은 가능성이 없는 상황이다.

“너 누구?”

라팔이 물었다. 반쯤은 알면서도 묻는 것이었다. 알면서도 확신이 필요했다.

“너희들이 마신이라고 부르는 자.”

나쁜 예감은 틀릴 때가 없더라. 라팔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어떻게 될까? 인질에 대한 인도적 처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은 외모도 있으니 남자들 사이에 던져질까? 고문을 당한 후 발정한 남자들의 자지를 받아내게 될까? 삶이 무료할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싫다. 돌아갈 장소가 있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 있다.

회귀하며 한 번, 인형으로 몸을 바꾸며 두 번 망가진 영혼이며, 기억이다. 그래도 다시 삶을 찾았다. 무료하던 시간이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아픈 건 괜찮지만 죽는 건 싫었고. 몸을 더럽히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나는 좆집.’

물건에게도 물건의 자존심이 있다. 마지막까지 그 알량한 자존심은 세우고 싶었다. 몸을 더럽힐 바에 죽으리라. 라팔이 결심을 굳혔다.

유상민도 유상민 나름대로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 남자에게 인질이 통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으니 그냥 얌전히 죽자고.

험한 꼴을 볼 일도 많고 당할 일도 많은 대한 길드의 조사관은 모두 자살 수단 몇 개씩은 가지고 있었다. 조사관에서 잠깐 은퇴했다지만, 유상민도 그러했다.

그러나 마신의 행동은 두 사람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는 걸어와 두 사람의 머리를 잡고 잠시 가만히 있더니. 그냥 뒤돌아 가버렸다.

두 사람의 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몸에는 말이다.

“기억을 읽혔어.”

“저도요.”

영혼을 보고 느낄 줄 아는 라팔과 유상민은 마신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억을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허무해.”

“그러게요.”

고문도 그 이상도 필요 없었다. 저자, 마신에게 필요한 건 딱 그걸로 끝이었다. 죽을 각오까지 했는데, 그 각오가 무색하게 끝나버렸다.

인공 태양이 비추는 밀실 안에서 두 사람은 멀뚱히 서 있었다.

밀실 밖으로 나온 마신은 마왕에게 명령했다.

“실패했다. 두 번째 계획으로 간다.”

“그럼 인질은?”

“나는 신이다.”

신 된 몸으로 그런 저속한 행위에 손을 담가야겠느냐. 그런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그리고 마왕이 알아듣기도 그렇게 알아들었다.

“미천한 저희가 주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두 번째 계획을 준비해라. 아니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 토벌군의 대장들을 불러 모아라.”

“당장 실행하겠습니다.”

마신은 딱히 인질의 안위에 관심이 없었다. 기억을 모두 얻어 고문도 필요 없지만, 고문으로 인해 싸움에 이길 확률이 올라간다면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반대로 고문이 효과가 없다면, 굳이 할 필요성도 없다.

처음부터 인질은 필요 없었다. 가장 확실한 인질, 목표가 바로 마신 자신이었다. 그 남자는 마신이 있다고 하면 세상 어디라도 따라올 것처럼 보였다.

인질은 필요 없다. 없지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다. 딱 그 정도의 위치. 차라리 인질에 쏟을 정신을 두 번째 계획에 쏟는 것이 생산적이었다.

두 번째 계획이란, 한 사람을 상대로 마신을 포함한 토벌군 전체라 벌이는 전쟁. 세계와 개인의 전쟁이다. 준비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

공간의 비틀림을 느끼고 돌아갔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정원을 포함한 저택이 사라지고 없다.

마법, 그건 마법이었다. 진명도 뭣도 아닌 마법.

마신. 마력의 신. 그래, 마지막 놈은 그런 놈이었지. 설마 선수를 칠 줄이야.

신탁을 내리며 먼저 싸움을 건 것은 저쪽이다. 그래도 진명 효과를 모두 차단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안심은 하되, 방심은 하지 않았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싸울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고, 그런데도 한 방 먹었다. 진명이 아닌 마법으로,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로.

기분이 아주 산뜻하다.

나보다 한발 늦게 도착한 힘법사에게 묻는다.

“안에 있던 사람은 누구야?”

“그게, 라팔님과 유상민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사랑이는 검을 공짜로 준다 해서 나갔고, 피오라는 동족을 만나서 나간다 했던가. 나비는 나랑 산책하던 길이다.

유상민은 버린다 쳐도 라팔이가 납치당했나. 마법의 규모랑 수준을 보면 노린 건 나 같은데 말이야.

선전포고 잘 받았다. 이제 인질과 내 목숨을 교환할 장소가 어디인지만 들으면 되는 건가. 이를 갈며 기다려주마.

그렇게 기다리길 다섯 시간. 다시 신탁이 내려졌다.

-열흘 후에 신목이 쓰러진 자리에서 신벌이 내릴지어다.

그 벌이 누가 누구에게 내리는 벌일지는 가봐야 알 일이지.

========== 작품 후기 ==========

마신의 선빵! 제대로 들어갔어요!

열흘,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시간이다. 지금의 나한테는 넘치는 시간이다.

전쟁? 난 항상 전투태세다. 싸우려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그나저나 신벌이라니 웃기는 소릴 하고 있다. 신이 내리는 벌이라면 신벌이 맞겠지. 근데 꼭 지가 내 머리 꼭대기에 가 있다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

마신이나 나나 똑같이 제정신 박힌 것들이 아닌데 신벌 운운하고 있으니 웃기지 안 웃길까.

어쨌든 나한테는 좋다. 찾아 나서야 하는 쪽이 제 발로 걸어와 준다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다.

고려해야 할 것은 열흘 후 그 자리에 마신이 있느냐 인가. 그때는 그때가서 생각하지 뭐.

그런데 라팔이랑 유상민은 어쩌나. 좋은 꼴은 못 보겠지. 이건 화나는 일인데. 유상민 그놈이야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라팔이는 내 좆집이다. 내 물건을 도둑 맞았다.

내 물건을.

곧 죽을 놈이 매를 벌고 있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 분명하다. 반대로 이런 대담한 짓을 할 정도라면 승산도 있다는 뜻이겠지.

이건 조금 골 때리네. 함정까지 써가며 싸움을 걸어온다면 적어도 나한테 죽지 않을 자신은 있다는 말이 된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는, 나도 조금은 준비가 필요하겠지.

“그놈들의 동태나 살펴.”

“그런데, 어딜?”

“수련장.”

을 가장한 내 집.

아공간을 열자 검은 공간이 나타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이다. 그 구멍으로 발을 옮긴다. 구멍을 넘자 보이는 건 나무가 울창한 숲과, 그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성이다.

여기가 바로 내 아공간이다. 시간이 흐르는 아공간.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공간이 존재한다면 적절하게 꾸밀 수도 있다. 나는 내 아공간을 휴양지로 꾸며두었다.

내가 아공간으로 대피할 때는 대게 극한 상황이었는데, 극한 상황에서 잠깐 피해 편안한 휴양지에서 쉬면 좋잖아.

성이 보이지만, 목적지는 저기가 아니다. 나는 아공간에 휴양지만을 만들어 놓지도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보다 완벽한 수련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의 방해 없이 마음껏 수련할 수 있는 장소. 그런 화려한 수련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제부터 할 작업은 혼자서 해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숲 안쪽으로 들어간다. 포르투칼이라던가 하는 용의 시체도 보이고, 내가 대충 아공간 안에 던져둔 잡동사니들도 드문드문 보인다.

드래곤 하트가 마력의 덩어리라고 했지? 드래곤의 사체로 다가가 그 심장을 뽑는다. 상당한 마력을 품고 있지만, 내가 써먹기에는 부족하다. 다시 사체에 심장을 넣고, 걸음을 재촉한다.

좀 더 가자 오두막이 보였다. 낡은 오두막이었는데 새것처럼 변해 있다.

-주인님 저 잘했죠?

한국어가 보인다. 사랑이가 한 짓인 모양이다. 괜한 짓을. 부끄러움에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괜한 짓이다. 좀 낡아야 수련하는 기분이 난다고 일부러 낡아 보이도록 만든 오두막이라고.

오두막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안쪽도 깔끔히 정리되어 있다. 그래도 다른 건 건드리지 않았네. 그래도 이불을 빨아둔 건 마음에 든다. 앞으로 열흘 동안 침대를 써야 한다.

나는 침대에 눕는다. 침대를 차지하고 있던 먼지놈들은 마법으로 치워버렸다. 어디서 내 침대를 넘봐.

눈을 감고, 나를 본다. 무한한 마력을 펌프질하는 내 심장을, 그 심장에서 나온 마력이 담긴 혈액이 순환하는 모습을. 내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더 나아간다. 나는 내 영혼을 본다. 크기만 따지면 엘프년과 달의 창녀보다 더 거대한 내 영혼. 자그마한 티끌이 난 놈이고, 그놈도 나갈 예정이니 사실상 순수한 영혼이다.

신이란 것들은 영혼으로 별짓을 다 했지. 엘프년은 영혼을 직접 활용하기도 했고. 그에 비해 나는 영혼으로 할 줄 아는 일이 없다. 기껏해야 진명의 발동을 감지하거나, 추적 계열 진명을 떨쳐내는 정도.

영혼을 다루는 것에 더 능숙해진다면 마신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하나 늘어나겠지.

그리고 하나 더.

-아직 멀었냐?

시스템 우회 작업 중인 난 놈에게 묻는다.

-열흘이라고 했던가요? 시간 안에는 맞을 것 같습니다.

나와 이놈은 현재는 한 영혼이다. 정보 공유는 한순간에 된다.

다른 하나의 무기도 시간 내로 어찌 마련될 것 같다.

그럼 최후의 준비에 착수해볼까.

눈을 감는다. 세계가 느려진다. 이 수련이 좋은 게 뭔지 알아? 몸을 쓸 필요가 없다는 거. 열흘 동안 내 정신력이 버텨주는 범위 안에서, 나는 얼마든지 시간을 늘랴 쓸 수 있다.

사고 가속 마법이 사용되고, 정신이 수십 개로 분할된다.

의식이 아래로 내려간다. 수면과 비수면 상태의 중간에 멈춘다. 관조는 계속된다. 내 몸과 영혼은 온전히 내 의식 하에 있으며, 오감 하에 있다.

영혼에 대한 지식을 떠올린다. 쩨쩨한 창녀는 마지막까지 몸도 안 대주고 쩨쩨하게 굴었지만, 그년이 5천 년 이상 탐구해온 지식은 진짜다.

경험이 섞인 방대한 지식은 그 자체로 보물이다. 영혼에 대한 이해, 영혼을 다루는 방법.

경험과 지식이 내 머리에 스며든다. 알고 바로 따라 할 수 있는 것들도 있고, 깨달음이 필요한 것도 있다. 깨달음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은 내 편이다. 얼마든지 할애할 수 있다.

지식과 지혜가 물결치며 영혼과 뇌리에 파랑을 만든다. 그것들은 갇혀 있다가도 벽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고, 서로 부딪혀 사라지기도 한다.

논리적인 영역과 비논리적인 영역이 서로 이어져 모순 없이 돌아간다. 감각과 사상이 분리와 통합을 반복한다.

천재라는 놈들은 보면 딱 보면 끝내던데, 하여튼 재능 없는 놈은 머리가 고생이다.

열흘, 어디까지 갈 수 있으려나.

***

마왕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하나, 고작 한 사람을 잡기 위해 동원되는 것치고는 모든 게 과했다.

토벌군의 숫자가 1억을 넘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다. 무기는 미국의 최신 무기, 마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지만 위력만큼은 경악할만한 것들이 동원되고 있으며, 그자의 악행 중 고룡 포루시안을 살해한 것이 포함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드래곤들까지 가세하고 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준비된 선물치고는 너무 과했다. 그런데도 마신은 계속 병력 충원과 군비 확장을 명령하고 있다.

한낱 피조물이 신의 뜻을 알 리 없으니, 마왕이 할 일은 그저 따르는 것뿐이다.

마왕이 고민하고 있을 때, 마왕의 옥좌에 앉은 마신도 고민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였다. 마왕은 마신의 생각을 몰랐다. 신록의 나무가 사라지고 시스템을 유지할 방법이 사라졌다. 죽은 다른 신들의 부활을 위해서도, 시스템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영혼이 필요했다.

‘바로 1억. 그 후에 남은 인류. 차원 융합 속도를 높여서 소환을 더 빠르게 해야겠어.’

토벌군으로 모인 전부. 나아가 인류 전체. 마신은 한 번 나선 김에 모든 일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급한 에너지는 토벌군으로 보충하고, 다시 신탁을 내려 인류를 멸절한다. 그 후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 차원 융합을 앞당겨 추가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그 사이 세계수를 세우고, 요정신이 부활하기만 한다면 손해는 있어도 시스템과 지배 체제는 무탈하게 돌아갈 것이다.

곧 있을 싸움은 마신에게 있어 큰 고민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길 거니까. 이길 싸움에 신경을 쏟기에는, 산적한 문제가 너무 많았다.

숫자도 병력도 이쪽이 압도적. 우연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마신의 생각에 이건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상대가 도망갈 경우.

그 경우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가 현재 마신이 가진 또 다른 고민이었다.

‘인질이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다면 좋으련만.’

마신이 바라는 유일한 바람이 이것이었다.

***

-이제 열흘쯤 안 됐습니까?

영혼에서 들려오는 말에 정신이 각성한다. 무의식에 빠져 시간을 헤아리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일어나서 확인하니 딱 열흘이 지났다. 결전의 날 아침이다.

결전의 날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은 없다. 아갈리에 있을 때는 하루하루가 결전의 날이었고, 생사를 넘나드는 사선이었다.

결전의 날이 하루 더 늘어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내가 죽거나, 적이 죽는다. 간단한 이치다.

“우회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았냐?”

난 놈이 하는 작업이 보인다. 잠들기 전에는 뭔지도 몰랐던 것들인데, 진행 과정이 전부 보인다. 한 손 걸쳐서 난 놈을 도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거, 영혼술사의 진명은 반납해야겠군요. 저보다 더 잘 아시니 말입니다.

“놓고 꺼지던가. 쫓아내 줄까?”

-농담입니다. 봐주시죠.

농을 던지며 경험을 되새긴다.

무의식에 잠겨 있던 시간은 정말로 길었다. 체감 시간으로 따졌을 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기분이다.

호접몽을 꾸고 깨어났다고 할까.

“그리고 그 속에서 신이 되었지.”

-뭐라고요?

“아무것도.”

호접몽 속의 나는 전능했다.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게 한 번의 꿈으로 끝날지. 깨지 않는 현실이 될지. 확인하러 갈 시간이다.

아공간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안절부절못하던 힘법사가 나를 보고 얼굴을 편다.

“무슨 일이 생기셨나 걱정했습니다!”

“정보는 착실히 모았겠지?”

“여기 있습니다!”

힘법사가 종이 뭉치를 꺼내 건넨다. 이걸 언제 다 읽고 있냐.

“요약해.”

“1억이 넘는 군대가 신록의 나무, 세계수가 쓰러진 자리에 집합했습니다. 교주님을 노리는 것이 확실합니다. 공투교도 일부가 싸우겠다며 북대륙으로 향했습니다.”

“몇 명이?”

“전부 제각각이라...... 100만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1억을 상대로 싸움을 걸려는 미친놈이 100만이나 되다니. 내가 진짜 광신도를 만들었구나.

“싸움도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투쟁은 해봐야 아는 거랬습니다.”

“누가 뭐래. 아무튼, 난 간다. 아참, 우리 얘들은?”

“모셔오겠습니다.”

힘법사가 내 좆집과 애완동물을 데려온다. 모두 멀쩡하다.

“주인님!”

나에게 안기려는 사랑이를 발로 차 떨어뜨리고, 세계수에서 떨어진 장소로 텔레포트를 사용한다. 세계수가 쓰러진 자리에는 콘크리트 건물이 자라나 나라가 들어섰다고 해도 믿을 모습이 되어 있다.

내 뒤쪽에도 군대로 보이는 오합지졸이 있긴 있다. 이놈들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그놈들이군.

1억이라. 지랄맞게 많네. 저놈들을 어떻게 한 자리에 모았는지가 더 궁금하다. 마신의 마법인가? 그거라면 가능하겠지.

날 발견했는지 저쪽에서 움직임이 있다.

열다섯 마리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수백 대의 전투기가 하늘에 뜬다. 각종 대포가 날 겨누고, 셀 수 없이 많은 마법 반응과 진명 반응이 일어난다.

“야, 잠깐잠깐. 싸우기 전에 마신 좀 불러와. 그리고 잡아간 인질은 어쨌어. 안 그러면 나 도망간다?”

-기다려라.

하늘을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날아오른다. 드래곤과도 비교되지 않는 존재감. 그리고 저 순수하고 거대한 영혼. 저놈이 마신이다.

순순히 나왔군. 예상대로다. 내가 작정하고 도망가면 골치 아프다는 건 나에 대해 조금만 조사하면 아는 사실이다. 저놈 입장에서는 그게 걱정이겠지.

“인질은?”

-데려와라.

군대가 갈라지고, 그 사이로 포박당한 유상민과 라팔이 끌려온다. 고문당한 흔적은 없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손쉽다.

“라팔아. 건강했냐? 마지막으로 대화 정도는 괜찮잖아. 나 도망갈 거다?”

마신의 마력이 한차례 지나가고, 라팔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괜찮아.

“그래, 험한 짓은 안 당했고?”

-응.

“미친놈 너는 괜찮냐?”

-먹을 게 없어 굶은 거 빼고는 멀쩡한데요. 배고파요.

좋아, 멀쩡하군. 나는 아공간에서 리모컨 하나를 꺼낸다. 직사각형에 붉은 버튼이 달린 리모컨이다.

“냐?”

그게 나비의 유언이었다. 내 발에 밟힌 나비의 척추가 으스러지고, 나비가 그대로 즉사한다. 이어서 피오라의 몸이 둘로 갈라진다. 좌우로 깔끔하게 갈라지고 안에서 내장이 흘러내린다.

마지막으로 내 손이 사랑이의 심장을 관통한다. 피 묻은 내 손에서 붉은 심장이 펄떡인다.

“주인...님?”

사랑이가 고개를 돌려 날 본다. 나는 사랑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또 보자.”

“...네”

내 표정이 어땠는지 사랑이가 웃으며 대답한다. 그리고 고개가 떨어진다. 가슴을 관통한 손을 빼내고, 심장을 쥐어 터뜨린다.

다 죽었군. 이제 날 묶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혼자로.

기이하리만치 마음이 평온하다. 역시, 나는 나다. 그게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사이코패스. 미친놈. 패륜아. 모두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내 정체성을 다시 찾았다.

인질? 지랄. 인질이란 가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이 모든 것들은 무가치하다. 돌아보면 무엇도 남지 않는 공허한 시간들과 순간들. 그리고 그사이에 존재하는 고독. 이 빌어먹을 박탈감과 외로움. 그리고 광기.

아비가 아들의 인생을 시궁창에 넣었다. 아들은 시궁창에서 돌아왔다. 아들이 아비를 살해했다. 아비가 그런 행동을 하게 한 원인은 저기 있다. 세상의 절대자를 자처하며.

모든 것이 시궁창이다. 세계가 썩은 내를 풍기고 있다. 이 썩은 세계와 나는 서로 함께할 수 없다. 그러니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

그게 세계가 될지. 내가 될지. 이 싸움으로 알겠지. 분명한 건 그 전에는 나에게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광기만이 유일한 내 정체성이 될지어다!

“마지막이다. 이 빌어먹을 인생. 이 빌어먹을 세계. 이 빌어먹을 씨발 새끼들!”

손에 든 리모컨을 조작한다. 조작이라고 해도 버튼은 달랑 하나다.

한 번은 작동 정지. 한 번 더 누르면 재기동. 다섯 번 연속으로 누르면 자폭.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버튼을 누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즐거웠다. 라팔아. 또 보자.”

-응.

-무슨 짓을!

늦었어 새꺄. 다섯 번. 모두 눌렀다.

저쪽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핵을 방불케 하는 폭발이다. 야, 자폭이 너무 심하잖아. 아군까지 전부 날리겠다. 한편으로는 그게 라팔이답다는 생각도 든다.

-완료했습니다.

난 놈의 목소리가 들리고, 시스템의 힘이 내 영혼에 작용한다. 그 힘은 내 영혼의 힘을 새로이 일깨운다.

그동안 엉망이라 볼 수 없었던 상태창이 떠오른다.

[이름 : 진휘]

[진명 : 종말]

[힘 : 9854(+99999) 민첩 : 8303(+99999) 마력 : ∞ 정신력 : ???]

스텟이 뜻하는 게 뭔지 본능적으로 알겠다. 힘과 민첩 뒤에 있는 숫자는 내 마력으로 강화된 신체 능력이다. 마력 무한은 나에게 있어 당연한 거지만, 이렇게 보니 또 감미롭다. 사기 캐릭터라는 느낌이 팍팍 든다. 정신력이 왜 저런지는 나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진명.

종말. 좋은 진명이다. 마음에 든다. 시스템의 힘으로 이 진명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도 알겠다.

세계의 종말이다, 이 새끼들아.

========== 작품 후기 ==========

히로인? 전 그런 거 모릅니다아아~

미친놈이 여자 끼고 히히덕 대면 그게 미친놈입니까, 그냥 하렘물 주인공이지.

내가 아갈리에 있을 때, 나는 지구와 아갈리 사이의 중간인이었다. 내가 지구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아갈리와 지구 사이의 중간인이었다. 내가 중간계에 소환됐을 때, 나는 비로소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외부인이 되었다.

내 사고의 근본은 지구의 것이다. 내 지식과 경험 대부분은 아갈리의 것이다. 내 힘과 기술도 아갈리의 것이다.

몸은 중간계에 있지만, 홀로 외딴 섬에 떨어져 있는 것과 같다. 나만이 이방인이다. 나에게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니, 딱 한 사람 있긴 했다.

아버지. 가족. 무슨 이야기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 그러나 내 손에 죽었지. 내가 죽였지.

이 세상에서 나만이 홀로 절대적으로 고독하다. 두 번 소환된 나만이.

세상과 나는 단절되어 있다. 나와 세상 사이는 너무나 멀다. 좁힐 수 없는 거대한 괴리가 나와 세상 사이에 가로 놓여 있다.

중간계에서 살아갈수록, 이곳의 공기로 숨쉬고, 이곳의 인간들과 접촉할수록 그것은 커져만 갔다. 좁혀지는 일 없이. 커지기만 했다.

그 괴리의 결과가 이거다. 세상이 날 죽이기 위해 찾아왔다.

나와 세상 사이에는 거대한 괴리가 있다. 둘 중 하나가 사라질 때까지 이놈은 나와 세상을 괴롭힐 것이다.

내가 사라질지 세상이 사라질지. 오늘, 그 결과가 나온다.

라팔이가 없다. 미친놈도 없다. 피오라도, 사랑이도, 나비도 없다. 나는 혼자다. 달라진 건 없다. 처음부터 난 혼자였다. 마지막까지 혼자일 것이다.

세계가 보인다. 추악한 불사의 욕망이 만든 가축장. 이 검고 퀴퀴한 탁한 세계가 내 발아래에 있다.

라팔이는 마지막까지 한 건 해줬다. 저 무식한 놈들은 1억이라는 병력으로 한곳에 모여 있다. 그렇게 당했으면서 또 폭탄에 당한다. 똑똑하다고는 빈말로도 못 해주겠다.

공격이 시작된다. 용들이 브레스를 뿜고, 미사일과 포탄이 날아온다. 핵탄두도 포함되어 있다.

다 같잖다.

아버지는 시작의 힘을 창조로 사용했지. 그렇다면 종말은 이 말과도 연결된다.

끝.

모두 끝나버려라.

하늘을 뒤덮던 공격이 모두 사라진다. 존재하는 것이라면 누구나 끝을 마주한다. 나는 그 끝을 앞당겼다. 끝을 맞이한 것들은 모두 사라질 뿐이다.

그리고 끝에는 다른 의미도 있다.

죽음.

멀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드래곤들이 차례차례 내 근처로 텔레포트 해온다. 무지막지한 마력을 뿜어대는 그들에게 나는 손가락을 든다.

한 마리 한 마리 내가 드래곤을 가리킬 때마다. 드래곤이 땅에 떨어진다. 죽음과 끝을 맞이한 그 몸은 숨이 끊어져 뼈가 되고, 그 뼈조차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공포에 질린 드래곤들이 뒤로 물러난다.

“킥.”

웃음이 나온다. 저것들이 뭐라고, 하찮다. 같잖다. 반신이 무엇이고, 고룡이 무엇이냐. 지루하다. 전부 그렇다. 세상과 나. 둘 중 사라질 것은 아무래도 세상인 모양이다.

드래곤만으로 웃을 일이 아니지. 내 손길을 바라는 것들이 저만치 남아 있다. 메인 디쉬는 아직 나서지도 않고 있다.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들어 줄게. 고고한척하는 더럽고 역겨운 종자야.

수백, 수천의 핵탄두가 공간을 넘어 폭발한다. 1억이나 10억이나 100억이나. 내가 숭배하는 절대적인 폭력 앞에서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다. 폭탄이 터지고 열풍이 분다.

마신이 폭발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한다. 그런 여유씩이나 있구나. 괜찮다. 폭발은 진짜가 아니다.

그런데 어쩌나. 그걸 막는다고 끝이 아닌데.

폭발이 끝나고, 사람들이 마신을 우러른다. 인간과 사람이 구분되는 것이 이럴 때는 불편하군. 이종족과 인간을 가리지 않고 모두 폭발을 막아낸 마신을 칭송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뒈질지어다.

꽃이 지듯 생명이 진다. 피를 토하고 몸을 뒤틀며 죽어 나간다.

핵에서 방사능을 제거하는 장치를 제거했다. 그리고 그 방사능에 죽음을 담았다.

보이지 않는 죽음이 저들을 덮친다. 내 진명에 당한 영혼이 소멸한다. 종말. 그 이름에 어울리는 죽음이다.

마신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내가 니가 한 짓을 모를까. 니가 마신이라면, 나도 마법이라는 학문의 궁극에 도달한 인간이다. 마력을 다루는, 세계의 근간을 관찰하는 학문의 끝을 본 인간이라고.

이 근방을 뒤덮고 있는 은밀한 마법. 시스템과 연결되어 영혼을 공급하는 마법. 그걸 못 볼 줄 알았냐?

열흘 전에는 못 봤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영혼에 한해서 신과 같은 위치에 선 나는 다르다. 모두 보고 느낄 수 있다.

알고만 있다면 이런 것도 가능하다.

덧씌우기. 마법을 덧씌운다. 마법이란 것은 마력을 움직여 원하는 현상을 일으키는 기술의 총칭. 형식이 달라도 근본만 알고 있다면 바꿀 수도 있다.

바꾸는 것은 검은 늪지의 유적에 있던 마법진. 영혼을 정화하는 마법진이다.

한 명의 영혼을 정화하는 것에도 막대한 마력이 필요하던 마법진이지만, 광범위한 발동도 문제없다.

나는 무한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출력에는 제한이 있었다. 내 몸과 정신력이 버티지를 못해서였다.

그것도 옛말이다.

영혼은 마력의 그릇. 영혼의 크기란 마력의 총량. 내 마력이 무한이라는 것은 곧 내 영혼도 무한이라는 뜻이다.

영혼이 마력을 키우고 마력이 영혼을 키운다. 두 가지가 공명하며 단어 그대로 무한한 마력이 된다.

진명이 아닌 영혼의 기술. 나만이 가능한 비술이다.

내 마력을 먹고, 마법진이 작동한다. 마신이 뒤늦게 끼어든다. 늦었다, 이놈아.

여기 모인 1억 중 자기 단련만으로 힘을 얻은 것들이 얼마나 될까. 내가 봤을 때는 백이 되지 않는다. 이것도 많이 쳐줬다.

타인의, 다른 생물의 영혼을 갈취해 누덕누덕 기운 더러운 영혼들이 정화된다. 군세가 힘을 잃는다.

죽음에 노출되고 힘을 잃어간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영혼이 사라진다.

1억의 군대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진다.

-잘도 해줬구나아아!

마신이 울분을 토한다. 그 얼굴이 보고 싶었어. 초조하고 안달해하는 그 얼굴. 혼자 여유 부리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더라.

키킥. 웃음이 안 멈춘다. 아, 즐거워라. 죽음이 가득하다. 이 공간 안의 모든 것이 친숙하다. 그립기까지 하다. 종말이라는 진명 때문인가?

지랄! 나는 원래 이런 놈이었다. 남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낄낄 대는 놈. 왜? 내가 아니니까!

인생은 멀리서 봐도 희극이고 가까이서 봐도 희극이다. 내 주변 일이 모두 희극이니 나에게선 웃음이 떠날 날이 없다. 즐겁고도 즐거운 인생이여! 아, 아름다운 인생이여!

광소하며 마신의 공격을 막는다. 모두 내 근처에도 오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야 끝인데 어쩌겠어. 공격은 나에게 도착하기 전에 끝난다. 끝나버린 공격이 나에게 닿을 도리가 없다.

키킥. 종말은 쓰지도 않고 파생 기술만 써도 이렇다. 이거 사기 맞다니까.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마신이 거리를 좁힌다. 마신이라는 이름답게 굉장한 마력이다. 그래도 나보다 마력이 딸리잖아? 저거 찌질이 아냐!

찌질이래요. 찌질이래요. 마신의 이름을 달고 나보다 마력이 딸리는 찌질이!

나한테 열심히 날아오니 나도 보답을 해주자.

아버지는 시작이라는 진명으로 동작의 시작을 빠르게 했지. 그럼 끝은 어떨까?

대답은 동작이 시작함과 동시에 끝난다. 내가 마신의 앞으로 가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순간. 나는 마신의 앞에 도착해 있다.

마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지 빠르게 움직인 것도 아니다.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내가 마신에게 움직인다는 시작과 마신에게 도착한다는 끝만이 결과로 나타났다.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힘. 진명의 힘이다.

마신이 놀란다. 그렇겠지. 죽음과 공간이동은 전혀 다른 영역의 힘이니까. 신이라는 놈들도 자신의 분야와 크게 동떨어진 힘은 사용하지 못한다.

그놈들이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나는 여신을 찌른 그 날 죽었다. 오크처럼 몸을 재생한 여신이 날 죽여 버렸겠지.

제한된 힘밖에 쓰지 못하는 너희 눈에는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를 거야. 그리고 내가 공격을 없애는 것들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예상도 못 할 테다.

난 시시한 비밀을 숨기는 쩨쩨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 진짜 진명을 알려줄게.

찌질한 아가야. 이게 내 진짜 힘이란다.

“끝이다.”

끝, 종말. 사실 같은 말이다. 그런데 진명이란 개인 영혼의 특질, 지문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준다. 그 과정에서 비슷한 단어를 찾고, 본래의 뜻과는 왜곡되기도 한다.

끝이라는 말과 내 진명의 종말은 조금 다르다.

이런 식으로. 내 종말은 추상적인 끝이 아닌, 직접적인 종말이다.

세계가 황혼에 물든다. 하늘에 구멍이 뚫려 무너지고, 천지가 흔들린다. 지진이 아니다.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있어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다.

내 손이 마신의 손목을 잡는다. 마신의 팔이 안에서부터 폭발한다. 뼈가 튀어나오고 혈관이 파열한다.

마신이 팔을 자르고 급히 몸을 뺀다. 팔은 빠르게 다시 자란다. 저것도 마법이다. 마법의 범용성을 생각하면 적어도 엘프년보다는 힘든 상대가 되겠다.

단, 내가 진명을 몰랐다면.

종말이란 별거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종말을 체현하는 것. 내 안의 종말을 세계로 나타내는 것이다. 내 광기가 세계로 튀어나온다. 그 결과 세계가 멸망한다. 그래서 종말이다.

종말 앞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영혼도 평등하다. 차별 없이 끝난다. 그리고 사라진다.

신이라도 그 안에서 예외는 없다. 남는 것은 오직 나 하나.

세계와 나의 맞물림에서, 사라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세계다. 이 진명은 그것이 내 운명이라 말한다.

마신이 마법을 쏟아낸다. 시시하다. 마법은 나에게 닿기도 전에 끝을 고하고, 기괴한 연금 생물은 죽음을 맞는다.

모든 공격이 소용없다.

내 종말은 굳건하다.

마신이 이를 악 물고 마력을 모은다. 나는 세계수가 있던 자리를 살핀다. 1억의 군대는 모두 죽었다. 종말을 맞아 그들이 만든 무기와 건물도 무너진다.

진명을 거두자 종말이 끝난다. 세계의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러나 부서진 자리는 여전히 부서진 채다. 처참하군. 잠깐 썼는데 일대가 지옥으로 변했어.

마신은 마력을 모으고 있다. 자신의 마력뿐만 아니라 대기 중의 마력까지 모두 마신의 통제에 들어간다. 능히 세상을 지울 힘이다.

마력이란 세상의 근원, 그걸 지배하면 세상을 지우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세계의 법칙을 바꾸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래,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그게 다냐?”

마신이 지배하는 마력에 눈길을 주며 말한다.

“대륙도 지워 버릴 힘이다! 어디 버텨 봐라!”

“확실히, 많긴 많네. 그런데, 그게 무한은 아니잖아?”

상태창의 정신력이 왜 물음표로 표시되었는지 알았다. 마력과 영혼의 공명으로 무한한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나에게 정신력이란 의미 없는 지표다. 그러니 물음표다.

영혼과 마력이 공명한다. 내 마력이 마신의 마력을 뛰어넘는다.

마신의 얼굴이 공포에 물든다. 좀 더 발악해줬으면 좋겠는데. 포기가 너무 빠르다. 질질 끌 필요도 없으니 그만 끝내자.

이게 네 끝이다.

죽음과 끝의 힘을 담은 마력이 마신에게 쏘아진다. 마신의 육신과 영혼이 그대로 붕괴해 소멸한다.

“끝났나.”

허무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폐관수련을 안 할걸. 그런 생각까지 든다. 폐관 따위 안 했어도 충분히 싸워볼 만 했다. 시간만 날렸다. 그것도 수백 년이나.

종말이 한 차례 지나간 땅을 뒤로하고, 공투교로 돌아가려는 내게 살아남은 공투교도들이 보인다. 힘이 직접 미치지 않은 구역이라 꽤 많이 살았다. 돌아가서 내 영웅담이나 전해라.

목숨을 건 대가로 평생 안줏거리를 건졌으니 저놈들에게도 손해는 아닐 것이다.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땅에서 빠른 속도로 무언가가 솟구친다.

이 기운. 신성력이다. 처음 느껴보는, 다섯 번째 신성력. 그러나 전에도 느꼈던 적이 있는 신성력이다.

검은 늪지의 괴물, 그리고 다른 마력 흡수 지형에 있던 괴물들. 그놈들이 가지고 있던 신성력이다.

내 머리에 섬광이 스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흔한가? 아니다. 인류처럼 회귀한 미친놈들이 아니라면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는 일은 오히려 적다.

그럼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자기 단련만 해온 놈들은? 그놈들이 신에게 대들면 신들은 죽을지도 모른다. 그 약삭빠른 놈들이 이런 것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놈들은 그런 상황도 예상했다. 그래서 생물체라면 누구나 걸릴 수밖에 없는 덫을 만들었다.

몬스터. 누구나 죽이고 섭취하는 그놈. 몬스터에게 흡수한 영혼도 엄연한 영혼이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몬스터를 죽이지 않고 먹지 않는 놈은 없을 것이다.

또한 몬스터의 영혼은 시스템으로 인한 성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시스템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몬스터의 존재가 필요불가결하다.

그런데 몬스터의 신이라는 존재를 나는 들은 적도 없다. 그 대답이 이거다. 몬스터의 신. 몬스터 그 자체이자 신인 존재.

인식한 순간에 그것은 이미 내 발아래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날카로운 이빨이 난 거대한 아가리가 날 삼키려 한다. 도망? 통하지 않는다. 모든 공간과 사물이 저 괴물의 아가리에 빨려들고 있다.

엄청난 힘이다. 흡입력 하나만을 단순히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 괴물의 영혼 자체가 엄청나다. 저놈은 중간계의 모든 몬스터를 조종하는 놈이다. 애매하게 종족 하나씩 나눠 가진 신들이랑은 비교가 안 된다.

종말이든 끝이든 모두 저 괴물의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대항할 수 없다.

괴물이 날 집어삼킨다. 흡입력에 이기지 못하고 어두운 괴물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끝났다고 생각했더니 최종 보스냐. 안 그래도 마신이 시시하게 죽어서 찝찝했다.

숨겨진 보스까지 전부 없애야 진짜 게임 클리어지.

안 그래, 라팔아?

========== 작품 후기 ==========

최종 보스 잡으니 최종 보스 쌈싸먹을 시크릿 보스 등장. 밸런스 좆망겜......

내 몸이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다 허공에 문득 멈춘다. 괴물의 몸이 얼마나 거대한지 모르겠다.

순수한 힘만 보면 이 괴물의 힘은 신들 이상이다.

끝까지 좆같은 세계다. 족칠 놈 다 족치니 마지막에 이런 새끼가 나와서 초를 친다. 족도 치고 초도 치고 아예 미도 치지? 미치겠네.

이 괴물의 힘은 간단하다.

흡수. 영혼과 마력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괴물이다. 간단하기에 강력하다. 왜냐? 진명도 통하지 않는다. 진명이란 영혼의 힘이다. 그리고 이놈은 영혼을 흡수한다. 진명이 발동하고 자시고도 없이 쓰면 먹힌다.

마력 흡수 능력을 가진 놈과도 싸워봤지만, 그놈들은 대게 한계가 있었다. 마력을 퍼부으면 자폭했다. 그런데 이놈은 그게 없어 보인다. 기세가 약해질 기미가 안 보인다.

내 마력도 쭉쭉 빨려 나가고 있다. 영혼은 아직 괜찮지만, 그것도 빨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좆같은 인생.”

-그러게 말입니다.

난 놈까지 동의한다. 나랑 같이 이놈도 죽을 위기거든. 사람 잘못 만나 이놈도 참 고생이다.

괴물의 능력은 단순하기에 강하다. 난 내 능력이 개사기라고 생각했는데, 더 사기적인 능력이 있다니 말세다, 말세야.

어둠을 뚫고 보이는 건 괴물의 위장 내벽이 전부다. 꿈틀대는 위벽에는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이 괴물의 몸 전체가 흡수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무한한 마력도 무한한 흡수 앞에선 바람 앞의 등불. 종말의 진명을 가지고 이게 무슨 짓인가. 한숨만 나온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괴물의 영혼을 더듬는다. 영혼은 육신과 기억의 저장소. 영혼을 읽으면 기억도 읽을 수 있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이런 미친 짓은 안 한다. 마을 처녀만 봐도 명백하다. 그년은 내 기억에 반쯤 정신을 놔버렸다. 타인의 기억은 독이 될 수도 있다. 하물며 이런 괴물의 영혼이야.

그러나, 그런 걸 가리면 미친놈이 아니지.

빨려 나가는 마력에 의지를 섞는다. 괴물의 영혼을 역산한다. 수학처럼 쉬운 작업이 아니다. 괴물의 영혼과 내 영혼을 뒤섞는 짓이다. 역시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닌 것 같다. 난 무슨 정신으로 이걸 한 거지?

무슨 정신으로 하긴, 재미로.

괴물의 정신이 흘러들어온다. 의외로 제정신 박힌 놈이군. 막 혼란스러운 그런 걸 기대했는데 그건 아니다. 아니, 혼란스럽긴 한가? 그런데 버틸 만은 해.

내가 이 괴물보다 더 미쳤다는 뜻인가. 내 진명의 효과를 보면 그럴지도. 종말이 뭐냐. 종말이.

괴물의 기억을 더듬는다. 기억은 끔찍함으로 얼룩져 있지만, 나에게는 가뿐하다.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간다.

세월의 풍화로 인해 오래될수록 알아보기 힘들어진다. 이 괴물은 바다 깊은 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이를 갈고 있었다. 그 인고의 세월이 대부분의 기억을 차지하고 있다. 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는 세월 동안 혼자서 갇혀 지냈다.

이놈도 제대로 된 인생은 아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버티기만 하는 건 무리가 없다. 그래도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다. 공격도 흡수당하고 움직이려 하면 이 자리로 빨려 들어와서 도망은 무리다.

기억읽기가 끝났다.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근원에 도착한다.

네 명의 사람이 괴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들이 말한다. 시선이 낮다. 이때의 괴물은 인간이나 이종족이었던 모양이다.

-이 체제를 완성하려면 네가 꼭 필요해.

-시스템의 완성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지.

기억이 재생됨과 함께 괴물이 울부짖는다. 충격파에 가까운 울음이 위장을 울린다. 내부에도 충격이 전해질 정도면 외부는 엉망이 되었겠다. 이게 이놈의 역린이군.

기억이 계속된다. 네 사람에게 잡힌 괴물은 말 그대로 괴물이 되었다. 네 사람은 괴물의 영혼을 이용해 몬스터의 영혼에 씨앗을 심었다.

그걸로 모자라 괴물의 영혼을 떼어다가 자신들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는 파수견을 만들었다. 그게 마력 흡수 지형에 있던 괴물들의 정체다. 신들이 만든 비밀 병기. 무한한 마력에 무한한 재생력을 가진 괴물.

마지막으로 네 사람은 괴물을 지하 깊은 곳에 봉인했다.

괴물은 한 종족을 이끌던 종주였고, 시스템을 만들려 했던 네 신에게 통수 맞은 희생양이었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당한 놈이 등신이지. 그런 놈을 뭘 동정까지 하고 있어.

괴물의 목적을 알았다. 이 새끼는 자신의 울분을 세계로 상대를 풀 작정이다. 간단히 말해, 세계를 삼키려한다. 흡수의 능력을 이용하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더 비현실적이다.

기껏 신을 죽이고 살만한 세계로 만들었더니 갑자기 툭 튀어나온 놈이 세계를 삼키려 한다. 죽 쒀서 개 줬다. 이놈이 깨어난 것도 신들이 죽고 시스템이 붕괴하며 봉인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나는 죽지 않겠지만, 놈이 삼킨 다른 것들은 모두 흡수되어 이 괴물의 힘이 되겠지.

궁금한 걸 전부 알았으니 밖으로 나가자. 모든 힘을 흡수한다면, 그 이상의 힘으로 날려버리면 된다. 괜히 기다렸다 괴물이 더 강해지면 낭패다.

마침 나에겐 좋은 무기가 있다.

전백귀후십귀. 두 명의 신을 베어낸 검. 그런데 이놈은 폭탄이기도 하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전백귀후십귀가 진동한다. 반항? 아니다. 사람이라면 분명 광소하고 있을 것이다. 이놈은 자신의 길동무가 세계를 삼키는 괴물이라는 사실에 좋아하고 있다.

전백귀후십귀에 마력을 충전하며, 진명까지 사용한다.

괴물의 흡수는 전백귀후십귀에 모이는 힘까지 삼킨다. 삼켜지는 것 이상의 힘을 퍼붓는다. 그 때문에 내 육신이 불안정해진다. 살가죽이 뜯겨 괴물의 위벽에 흡수되고, 영혼이 뜯겨 나간다.

영혼이 뜯기는 감각은 처음이군. 내가 살면서 느껴본 것 중 가장 기분 나쁜 감각이다. 나를 이루는 근본이 뜯겨져 나가고 있다. 마력과 공명하는 한 내 영혼 또한 무한하니 버티긴 하겠다만, 이 감각을 계속 느낄 바에야 죽는 게 났겠다.

됐다. 전백귀후십귀에 충분한 힘을 모았다.

신을 죽인 광검의 끝이다. 네 종말을 보여라.

전백귀후십귀가 폭발한다. 종말의 힘과 함께 터져나간 폭발은 내가 여태 봤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이다.

괴물의 흡수가 폭발을 따라가지 못한다. 위벽이 불타오르고, 괴물이 울부짖는다.

폭발의 중앙에 있는 내 몸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종말의 힘을 담은 폭발은 내 몸과 영혼까지 태워버린다. 최종 보스 상대로 멀쩡하길 바라는 것이 욕심이다. 이 정도는 돼야 할 맛이 나지.

이를 악물고 폭발에 버틴다. 신을 죽였다. 날 방해하는 것들도 모두 죽였다. 여기까지 와서 자살로 죽을 수는 없다.

폭발이 위벽을 넘어 괴물의 장기에 닿는다. 닿는 모든 걸 태우고 잡아먹는 폭력적인 불꽃과 바람이 휘몰아친다.

폭발은 종말과 광기를 담고 막힘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어둠이 일거에 사라지고 푸른 하늘이 보인다.

몸을 잃은 괴물의 영혼이 뭉치기 시작한다. 원혼이 되려 하는 괴물의 영혼에 끝을 선사한다. 거대한 영혼이 통째로 소멸한다.

하, 결국 기승전폭발이군. 역시 핵폭탄은 전능하시다. 핵을 추앙하라. 핵 만세!

시간이 꽤 지난 거 같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아무렴 어때. 죽였으면 된 거다.

끝이다. 전부 끝났다.

아니, 이제 시작인가? 할 일이 산더미다. 세계와 나 사이의 괴리가 사라졌으니, 세계를 내 입맛대로 꾸미는 일이 남았다.

일단, 이 빌어먹을 시스템부터 부숴버리자. 이 썩은 세계를 근본부터 엎어버릴 거다. 나에겐 그 수단도 있다.

창조 뒤엔 종말이 있고, 종말 뒤엔 창조가 있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파괴 뒤에 창조 있으리.

종말이여 도래하라.

세계에 종말이 내린다. 오늘로 세계는 붕괴한다.

새로 만들어지는 세계는 나를 위한, 나의 세계가 될 것이다.

신들이 하던 짓과 다른 게 뭐냐고? 그놈들은 그놈들이고, 나는 나다.

***

시스템을 무너뜨렸다. 세계에 흩어진 여신과 오크의 신의 영혼을 찾아내 없앴다. 성자와 성녀는 모두 죽거나 힘을 잃었고, 세계에 신성력이 사라졌다.

내가 신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당연히 반항이 있었다. 반항하는 것들을 모조리 죽였다. 인간도 요정도 마족도 수인도 가리지 않았다. 모두 죽이고 죽이니 세계가 넓어졌다. 대충 세계의 총인구가 반으로 줄었다.

반으로 줄일 생각은 없었는데, 이래서 종교가 무섭다.

세계를 개편했다. 공투교와 대한 길드가 내 앞잡이가 됐다. 힘과 권력을 가지고 내 멋대로, 내 맘대로 했다.

지구와의 연결은 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내 진명을 쓰면 가능하겠지만, 그냥 놔뒀다. 내 맘이다. 내가 선행을 하기 위해 신을 죽였다고 누가 그래? 전부 나를 위해서다. 지구의 인간과 기술자들이 팍팍 소환되면 나야 좋다.

소환되는 지구의 설비와 기술을 이용해 문명을 재건했다. 반도체가 만들어지고, 문화가 발달했다.

그리고 콜라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무려 미국 본토의 콜라. 본토의 맛은 확실히 다르더라.

그밖의 음식들도 지구의 것과 비슷해지고 있다.

통신이 발달하고 컴퓨터가 보급된다. 게임이 생긴다. 중간계의 모습은 점점 지구와 비슷해진다.

다른 점은 그사이에 이종족이 섞였다는 점인데, 그놈들도 나한테 죽기 싫으면 큰 사고는 안 일으킨다. 나한테 개기다가 종족의 반이 사라지는 걸 봤는데 또 덤비면 그건 또라이거나 병신이다.

때가 된 것 같다.

“또 회귀에요?”

유상민이 자기 몸을 요리조리 살피며 묻는다.

“아니, 부활. 첫 타자라 도박이었는데, 성공했네.”

난 놈이 사라지기 전에 주고 간 노하우가 조금은 도움이 됐다. 영혼을 다루는 것만이라면 내가 위였지만, 각종 노하우는 마지막까지 그놈이 위였다.

“그거 실패했다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소멸.”

“끔찍한 소리를.”

유상민이 질색한다.

“그러니까 너한테 실험했지.”

내 좆집들한테 실험할까.

실험이 끝났으니 이제 실전이다. 아공간에서 보존된 시체를 꺼낸다. 저놈은 시체도 못 건져서 몸을 연금술로 만들어야 했지만, 얘들은 몸은 몰래 챙겨서 보관하고 있었지.

시체에 상처는 없다. 생명 반응도 멀쩡하다. 영혼만이 부족해 깨어나지 않고 있다. 나는 거기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이것도 그날 얘들을 죽이고 챙겼다.

영혼이 들어가고, 시체가 숨을 쉰다.

제일 먼저 일어난 건 사랑이다. 몸을 벌떡 일으키고 날 발견한 뒤 내 바짓가랑이를 잡는다.

“주인니이임!”

“그래, 그래.”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오히려 사랑이가 눈을 크게 뜨고 뒤로 물러난다. 야, 난 조금 친절한 척하면 안 되냐?

이어서 나비가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피오라는 이게 무슨 일인지 멍하니 있던 피오라가 말한다.

“주인님, 이건...?”

“살렸지.”

“네?”

“영혼과 육신. 둘 다 있는 데 못 살릴 이유가 있어?”

“그렇지만... 그건 섭리에 반하는 게?”

“섭리는 무슨.”

살릴 수 있으니 살린다. 뭐가 잘못됐어? 섭리 같은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있다면 세상이 이 꼴이 되지도 않았다.

고르고 고른 최상급 좆집이다. 버리기엔 아깝다. 물건이 부서지면 수리해서 쓰면 되지. 그래서 수리한 것밖에 없다.

“저, 라팔은요?”

피오라가 묻는다.

“따라와.”

바짓가랑이에 달라붙은 사랑이를 억지로 떼어내고 방을 나간다.

라팔이의 몸은 인형이다. 그리고 난 인형술은 모른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직접 재료를 구해서 만드느라 죽는 줄 알았다.

환한 통로를 걷는다. 여긴 내 집에 마련한 연구소다. 공방이 필요하다니 대한 길드와 공투교에서 갖다 바치더라. 좆집들과 유상민이 뒤따라온다.

세계가 미쳤기에 나도 미쳤다. 세계가 날 이렇게 만들었기에 나도 세계를 내 재량껏 바꿨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았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은 바뀌어도 괜찮지 않을까. 세계와 나 사이에 거리가 없다면 나도 세계에 녹아들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이건 그 시작이다. 작은 발걸음? 대충 그런 거.

도착한 곳은 최첨단 기기가 잔뜩 늘어선 공방이다. 라팔이 이년이 자기 몸을 만들 때 최신 설비를 사용했단다. 그거 때문에 나는 팔자에도 없는 공돌이가 되어야 했다.

“아, 오빠!”

“스승님, 오셨습니까.”

나리랑 제자가 나를 반긴다. 나리는 성녀의 영혼을 빼내고 제자를 따라 네크로맨서가 됐다. 성녀가 네크로맨서가 되다니. 세상 말세다. 여신의 영혼과 줄다리기를 하던 것도 있어서 나리의 잠재력은 전 종족을 통틀어도 최고 수준이다. 장래에는 반신도 꿈이 아니다.

시스템이 사라지고 쉬운 성장이 불가능해진 지금 반신은 단순히 희귀 인력을 넘어 세계구급 강자다. 나리의 미래는 탄탄대로다.

“재료는?”

“막 와서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내놔봐.”

네크로맨서가 기계나 만지고, 스승 잘못 만나 제자놈도 고생이다.

제자에게 받아든 부품을 가지고 공방 안으로 들어간다. 무수한 선으로 이어진 인형이 늘어져 있다. 라팔이랑 똑같은 인형이다. 몇 년에 걸쳐 틈틈이 만들었고, 이제 마지막 단계다.

손질이 끝난 재료, 드래곤 하트를 인형의 심장에 넣는다. 보통 하트가 아니다. 나랑 똑같은 사양. 돌연변이로 만들어진 무한한 마력을 뿜는 심장이다. 내 좆집이 반신하나 상대 못 하면 내가 다 창피해서 신경 좀 썼다. 또 내 손으로 부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니야.

심장을 끼우고, 가슴을 닫는다. 그리고 라팔이의 영혼을 인형에 넣는다.

인형에 연결된 선들이 떨어져 나가고, 인형이 고개를 든다. 인형 같은 얼굴에 푸른 눈동자. 그리고 저 무표정. 확실한 라팔이다.

나와 내 뒤에 있는 녀석들을 살피는 라팔이에게 말을 건다.

“오랜만이다?”

“나 안 죽었어?”

“또 보자고 했잖아. 약속 지켰다?”

“응.”

라팔이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무표정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환하게 웃는다.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우린 바보처럼 서로 보며 웃는다.

다른 사람이 보면 숨넘어가겠다. 앞으로 남들 앞에서는 못 웃게 해야지.

해후를 즐기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내 거다. 발신자는 꼬맹이다.

“오늘 내가 뭐 한다고 했더라? 뒈질래?”

-테러 단체에서 차원 마법을 시도하다 지구와는 다른 차원과 중간계가 연결되었습니다. 사람도 넘어왔는데 시스템이 없어서 대화도 안 통하고, 여러 가지가 겹쳐서 전쟁에 준하는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다른 반정부 단체도 이때다 싶어 들고 일어나고 있답니다.

“좌표만 불러.”

조금 순해졌다고 내 본성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세상에 녹아들었어도 나는 미친놈이다. 싸움을 걸어오는 것들에게 베풀 자비는 요만큼도 없다.

“10분 뒤에 다시 보자.”

“응.”

요즘 라팔이의 몸을 만든다고 반항하는 놈들을 소홀히 다뤘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오늘 다시 상기시켜 줘야지. 내가 누군지를.

꼬맹이가 부른 좌표로 이동하자 몬스터와 인간이 뒤엉켜 싸우는 전장이 보인다.

종말의 힘을 사용한다. 세계가 지옥이 된다. 시스템이란 틀에서 벗어나 더 강해진 종말이다.

인간과 몬스터가 죽어 나자빠진다. 그래도 버티는 놈들도 있다. 그중 군계일학으로 뛰어난 녀석의 얼굴이 어디서 봤던 얼굴이다.

“야, 쫄따구. 넌 왜 여기 있냐?

내 입에서 아갈리 언어가 튀어나온다. 상대도 아갈리 언어로 대답한다.

“스승님?”

아갈리에서 키운 내 첫 번째 제자다. 그럼 저건 아갈리랑 연결된 거야? 아갈리에 저런 몬스터는 없었는데?

이거 또 귀찮아질 예감이다. 뭐, 어때. 전부 종말 한 방이면 죽는데. 오랜만에 아갈리 여행이나 가볼까.

***

라팔은 자기 손바닥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가 펴 보았다.

“조잡해.”

심장을 뺀 다른 부위가 조잡했다. 전에 쓰던 몸과 같아지려면 조정이 필요할 듯했다. 그래도 마음에 든다. 이 조잡한 솜씨가 누구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이 만드는 물건에는 그 사람의 성향이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그 사람의 손길이 닿은 이 몸이 좋았다.

라팔은 텔레포트로 사라진 그 사람을 생각했다.

‘또 보자.’

마지막 인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다시 만났다. 계속 있을 수 있다.

‘나는 좆집.’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즐거울 이 자리에.

두 번 소환된 남자(完)

========== 작품 후기 ==========

자세한 건 후기로!

---후기----

광기의 끝을 보자! 라는 심정으로 시작했는데, 역시 다 쓰고나니 부족하군요. 언젠가 더 미친 작품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벌써부터 듭니다. 그 언제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여기까지 따라오신 분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사실 결말에는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계의 독재자가 된 주인공이 지구의 문명을 발전시켜 혼자 방에서 게임이나 하는 골방 폐인 엔딩하고, 세계의 독재자가 된 다음 죽였던 히로인들을 부활시키는 엔딩으로요.

세계의 독재자가 된 시점에서 그냥 똑같네요. 두 번째 엔딩으로 보여드린 건, 미친놈을 미친놈으로 만들던 것들이 모두 해소되었으니 조금은 덜 미친놈이 되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아아, 이렇게 써놓고 보기 광기가 부족해요. 광기가. 비슷한 작품을 쓸 날은 생각보다 가까울 것 같습니다. 제 머리에 든 것의 반 정도밖에 못 보여준 것 같은데! 충분한 선작과 조회수가 따랐더라면! 뿌려둔 떡밥이 좀 더 많았더라면! 벌써 작가는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광기난무가 가까울 것 같습니다. 진휘님, 맙소사.

진-멘!

그래도 마이너한 장르에 이만큼이나 따라와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다음 작품에 대해서입니다.

광기와 위트는 한끗차이. 아마 가볍고 읽기편한 이세계물이 될 예정입니다. 한 이틀 정도 쉬고, 사흘이나 나흘 뒤부터 언제되겠네요.

다음 작품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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