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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켈레톤이 가마를 끈다. 가마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아까 거긴 어디야?”
어느새 옷까지 입은 라팔이 내 옆을 차지하고 묻는다. 얼굴엔 놀란 기색이 서려 있다.
“아공간.”
“아공간?”
라팔이 눈을 끔뻑인다. 내가 아공간 인테리어에 신경 좀 썼지. 안에 정원도 꾸미고 성도 세웠다. 정확히 말하면 성 하나와 그 주변 환경을 통째로 수납했고, 몇 가지 마법으로 그걸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했어?”
마법사의 본능인지 라팔의 눈이 반짝인다.
“우연의 산물이지.”
진짜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생물을 수납할 수 있다는 점만 빼면, 내 아공간은 그렇게 좋은 사양이 못 된다. 시간이 지난다는 건 여러 가지로 성가셔서 물건을 넣어두고 오래 방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몬스터의 사체. 보통 아공간에는 사체를 넣으면 안에서 그 상태를 유지하지만, 내 아공간에 넣으려면 부패 방지 마법을 걸어야 한다. 여러 가지로 불편한 것이다.
지금은 익숙하게 쓰고 있지만, 처음 아공간이 만들어졌을 때는 실패작을 억지로 쓴다는 느낌이었다. 아공간은 영혼이나 그 주변과 연결되는 마법이라 한 사람당 여러 개 가질 수도 없어 버리지도 못했다.
스켈레톤들이 왕성을 철거하며 나아간다. 수천의 스켈레톤과 내 가마가 지나가기에 왕성의 복도는 너무 좁다. 덕분에 적어도 백 살은 넘어 보이는 왕성이 스켈레톤들에게 무자비하게 부서지고 있다.
왕성에 남겨진 하인들이 멀리서 그걸 구경하고 있다.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라도 있는 건지 몇몇이 스켈레톤에게 덤볐다가 흙으로 돌아갔다. 심심했으므로 그들도 언데드로 부활시켜 왕궁 철거 작업에 동참하게 했다.
“내 손으로 300년 역사의 왕궁을 부술 수는 없다! 차라리 날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이 악마야!”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집사복 차림의 노인이 절규한다. 그러나 노인의 잘 단련된 근육은 망치를 들고 왕성을 때려 부수고 있다.
말과 몸이 따로 논다. 노인의 눈에 핏줄이 터지고 피눈물이 흐른다. 그래도 일은 참 잘한다. 근육에서 나오는 파워가 왕궁을 팍팍 부순다.
스켈레톤이 동작을 멈췄다. 지하도의 입구에 도착했다. 지하도는 가마가 다니기에는 아무래도 좁다. 좁으니까 넓혀버리자.
드드드드! 굉음이 울리며 지하도가 강제로 넓어진다. 고밀도의 마력을 드릴처럼 만들어 지하도를 뚫는다.
오오 창백해졌다. 앞쪽에 있는 왕과 측근들의 안색이 창백해졌어. 지하도가 무너지랴 급히 마력으로 기둥을 세우고 있는 모습이 깜찍하다. 전부 부질없는 짓인데.
지하도가 적당히 넓어진 시점에서 가마를 끄는 스켈레톤만 남겨두고 다른 언데드들은 땅으로 돌려보낸다.
“복수하겠다! 지옥에서 돌아와 모두 죽여 버릴 것이다!”
근육질 집사 노인도 그렇게 죽어갔다. 귀신이 돼서 돌아와도 전혀 안 무섭다. 네크로맨서가 귀신에게 쫄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
“가자.”
가마가 지하도를 나아간다. 드르륵. 드릴 소리가 끊기지 않고 들린다. 앞쪽 지하 통로가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돌무더기와 흙먼지는 모두 마법에 의해 깔끔하게 소멸한다.
빠르고 친환경적인 굴착 작업이다.
내 완전한 굴착 기술에 가마는 빠르게 전직했다. 가마를 발견한 왕이 심장이 떨어져라 놀란다. 왕자도 옆에 있다. 왕자로 보이는 사람은 저놈 하난데, 외동인가? 아무렴 어때.
“여, 왕자. 진실을 안 기분은 어때?”
왕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왕에게 진실을 들을 것 같다. 그 과정이 어떻든, 왕이 자기 어미를 죽인 건 사실이고 그건 건드려선 안 될 금단의 영역이다.
“어미를 죽이고, 자기를 아들처럼 생각해 키운 스승까지 내치다니. 참으로 잔인한 왕이야. 국민에겐 성군일지 몰라도 가정사는 꽝이네.”
나는 마치 왕이 먼저 나비를 버렸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상한 세력을 만들어 먼저 오해받을 행동을 한 건 나비고 그걸 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만든 것은 나라는 사실은 쏙 빼놓는다.
내 말 속에서는 왕만이 나쁜 놈이다.
“아들처럼?”
왕의 심정을 건드린 것은 전혀 다른 말인 듯했다. 왕의 가슴 속에 일어난 작은 파문, 나는 돌덩이를 던져 그 파문을 더 크게 키운다.
“부모 마음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아이가 장성해도 항상 아이처럼 보이고,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불안하고. 그게 뛰어나다 평가받는 성군이라 하더라도 말이야.”
드디어 왕이 진실을 깨달은 것 같다. 나비는 죄가 없고, 오로지 내가 악의 근원이라는 진실을.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나비는 내가 잘 키워줄게. 저승에서 편히 구경하고 있어.”
서로 오해를 풀지 못한 채, 또는 싸우고 화해하지 못한 채로 죽어야한다. 한쪽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남기고서. 서로 화해하고 웃으며 죽는 헤피엔딩은 내가 바라지 않는다. 죽는다는 점에선 해피가 아닌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보다는 낫겠지.
왕의 목이 잘리고, 왕은 그걸 깨닫지도 못한다. 목이 땅에 떨어지고 나서야 입을 끔뻑인다.
목을 잃은 몸에서 피가 뿜어지고 왕의 몸이 넘어간다.
나비는 혼이 나간 얼굴로, 생기 없는 눈동자로 넘어가는 왕의 시체를 바라본다. 죽어버린 눈동자 속에, 안쪽으로 숨어버린 나비의 인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나는 모른다.
나비가 느끼는 고독과 절망은 내가 느끼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레온이라는 수인은 죽었다는 것 하나. 내 애완동물 나비가 존재한다는 것 하나.
애완동물 하나 얻으려고 나라 하나를 말아먹은 셈인가. 나라를 기울인 애완동물. 경국동물이다.
왕이 죽었으니 측근들도 모두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왕자다. 내가 진짜 마왕이라면 이놈을 살려주며 ‘복수하고 싶나? 그렇다면 강해져라.’ 이런 대사도 해볼 건데, 나는 겁 많은 녀석이라 후환을 남겨두지 않는다.
찌질한 고삐리에 불과하던 내가 세상을 상대로 깽판 칠 힘을 얻었다. 그 과정은 고통과 인내와 광기와 우연의 산물이다.
세상일은 이토록 불안정하다.
기연을 얻어 진짜 이 왕자가 나를 죽일 힘을 얻어 돌아오면 어쩌려고 후환을 남겨둘까. 그러니까 죽인다.
스윽. 툭. 왕자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고 내장이 바닥에 쏟아진다. 잘생기고 잘난 왕자라도 까고 보면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없다. 내장이 있고, 뇌가 있고, 몸이 반으로 갈라지면 죽는다.
나는 죽어버린 나비에게 다가간다. 턱을 잡고 들어 올려 날 보게 한다.
“네 이름은 오늘부터 나비다.”
나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는 시간이 약이다. 놔두면 알아서 살아난다.
후환은 대강 없앴고, 애완동물도 얻었다. 얻을 건 전부 얻었으니 이제 북대륙으로 돌아가자.
목걸이의 쿨타임이 다 될 때까지. 여행이나 계속하며 어딘가 무력적으로, 정치적으로 위태로운 나라를 찾자.
***
아쥬르 베다에는 뛰어난 탐지 능력자가 있다. 스토커라는 진명을 가진 그는 그 진명대로 한번 찍은 인간이 어디에 있든 반드시 찾을 수 있으며, 스토킹을 오래 하면 그 사람에 한해서는 행동을 예측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스토킹한 스토커가 스토킹하는 사람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극히 한정된 미래시라도 해도 좋았다.
그 능력자와 다른 한 사람이 독대하고 있었다.
“다시 예측 불가능해진 건가.”
야쥬르 베다의 수장 비슈누가 말했다. 인도 신화의 창조와 질서를 담당하는 신의 이름을 자청하는 그가 바로 아쥬르 베다의 수장이었다.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조직의 수장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스토커가 스토킹할 수 있는 건 인간뿐인데, 저건 인간이 아니야. 이만큼이나 행동을 예측해낸 나를 칭찬해줬으면 하는데.”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스토커라는 으슥한 진명과 달리 남자는 매우 쾌활한 면이 있었다. 그것도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일 뿐이고, 그 속내는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진명은 그 사람의 미래나 과거를 나타내거나 그 사람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알바트로스에서 협력 요청이 들어왔다. 그자의 행동을 예측하게 되면 알려달라는군.”
“그 자존심 높은 영웅님들께서? 별일인데.”
비슈누가 작게 눈썹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남자가 재빨리 말을 부정했다.
“미안미안. 진짜 영웅은 우리지. 그런 영웅 놀이나 하는 꼬맹이들과는 다르고말고.”
참 귀찮은 대장이야. 남자가 속으로 생각했다. 비슈누는 질서의 신이며 화신을 내려보내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면모를 가진 신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비슈누는 이런 말에는 민감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걸 싫어한다고 해야 맞았다.
영웅 놀이하는 사람이 널리고 널린 판에 무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남자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행동을 예측하게 되면.......”
“말해달라는 거지? 당연한 걸 가지고.”
“그 어깨에 뭐가 달려 있는지 알아줬으면 한다는 거다.”
친근함을 담아 비슈누가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몇 가지 편집증적인 면만 빼면 좋은 상사인데 말이야. 남자는 멋쩍어 볼을 긁적였다.
“안 되는 걸 하라고 해도 이쪽은 난감하기만 한데. 일단 노력을 해볼게. 좋은 소식을 기다리라고 법관나리.”
야쥬르 베다의 대법관. 그게 비슈누의 공식적인 지위였다.
“알아줬으면 됐다.”
남자를 향해 작게 미소 짓고 비슈누는 남자의 방을 나섰다. 방에 혼자 남은 남자는 벽에 걸려 있는 한 남자의 사진을 노려봤다.
스토커의 진명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자, 씹변태 또라이 새끼야. 다음에는 어디서 무얼 할 거냐. 제발 상식적인 행동을 해주라.’
스토커한테서도 좋은 평가는 나오지 않았다.
***
정해진 목적지 없이 떠도는 여행이란 좋게 말하면 낭만이고 현실적으로 말하면 난민이다. 인류의 적이 된 나는 중간계에서 난민이 되었다.
그러다 난민들의 숙소를 발견했다.
“그러니까 갈 곳 없는 놈들이 모이는 마을이라고?”
“그런 마을이 하나쯤은 있어도 이상하진 않잖아요. 조선 시대에도 세금 내기 싫어도 산으로 도망간 화전민들도 있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조금 규모가 커 보인다?”
내 앞에 있는 것은 훌륭한 성벽을 가진 도시다. 몬스터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 세계의 도시와 마을에는 성벽이 필수긴 하지만, 저건 너무 훌륭하다. 난민들의 도시라곤 믿을 수 없다.
“법의 지배가 없는 도시. 감이 오잖아요?”
“범죄의 허브에요. 불법적인 거래들은 주로 저런 도시에서 이뤄져요. 불법 노예들도 구할 수 있어요. 저도 몇 번 가봤어요.”
사랑이가 말한다. 라팔이나 유상민과 비교하면 식견은 조금 부족하지만, 중간계의 더러운 부분에 대해서라면 사랑이도 안목이 나쁘지 않다.
“그건 팔려 간 거냐. 사러 간 거냐.”
“팔려서요.”
단언했다. 세종에서는 과거사 때문에 미친놈들이 많았는데, 어두운 과거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걸 보면 얘도 거물이다. 그나저나 얘는 너무 치우쳤어. 여러 가지로.......
“치외법권이라면 내가 들어가도 문제없겠지,”
“아마도요?”
스켈레톤의 가마가 도시를 향한다. 이 가마, 승차감이 좋아서 계속 쓰고 있다. 집도 없이 떠도는 신세에 이런 거주 공간은 귀중하다.
뿔은 떼고 있으니 마왕이라고 오해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여유만만하게 도시를 향한다.
“이 도시에는 무슨 볼일이냐, 네크로맨서!”
성문에 도착하자 껄렁한 태도의 문지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문지기라는 중책을 맡을 인간으로는 어디에도 안 보인다. 도시 자체가 제대로 된 도시가 아니니 문지기가 이상한 건 문제가 아닌가.
“여기도 통행증 받냐?”
“오는 자는 막지 않는다.”
“그런데 난 왜 막는데.”
“리치 따위를 도시에 들일까!”
문지기가 격분한다. 화는 내가 내고 싶다. 살가죽 멀쩡히 붙은 사람에게 리치라니. 이거 인권모독이다.
“내가 어딜 봐서 리치야! 이 탱탱한 피부 안 보여?”
“그럼 저건 뭐냐!”
문지기가 가마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나비를 가리킨다. 그날 이후로 나비는 밥도 잘 먹지 않고 야위고 있다. 나 참. 내가 잘 보살펴주고 있는데 성가신 애완동물이다.
“애완동물?”
“사람이 저런 짓을 할까 보냐! 저런 짓을 할만한 건 인간을 포기한 리치 정도다! 뻔뻔하구나!”
아니, 나 진짜 인간인데 어쩌라고.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난다. 야, 너도 범죄자잖아. 그래서 이 도시에 있잖아. 니가 그러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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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요, 인의예지의 4덕은 중요한 겁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