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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실과 거짓을 섞고, 거기에 궤변을 더하면 그것은 훌륭한 논변이 된다. 시간이 지나 진실을 파헤치면 금방이라도 드러날 궤변. 그러나 당장은 유용하다.
난 이것만 넘기면, 그래서 왕궁에 입성하기만 하면 되거든.
“자, 알았으면 비켜.”
왕자에게 가능한 선택은 몇 없다. 왕이 결백하다고 주장하며 여기서 죽던가. 얌전히 물러가던가. 이렇게 보니 딱 두 가지군.
신성력을 사용하며 인물도 준수. 병사들의 반응을 봐선 능력도 있고 인망도 있다. 뭘 선택하려나.
“돌아간다.”
이를 꽉 물고 왕자가 발길을 돌린다. 왕성에서 한 번 더 덤벼볼 생각이겠지. 현명한 판단이다. 여기서 덤비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냥 핏길에 뿌려질 피가 하나 더 늘어날 뿐이다. 왕족의 피. 아주 비싼 피가.
돌아가는 왕자에게 나비가 절망적인 눈빛을 보낸다. 나비는 바보가 아니다. 내 궤변 정도야 간단하게 논파하겠지. 그러니까 입을 막았다. 주인의 일에 애완동물이 끼어들면 못 쓴다. 떼끼.
“끼이잉!”
벌로 목에 전기충격을 주자 나비가 진짜 동물처럼 불쌍한 소리를 낸다.
저렇게 다니면 보기 흉한데, 팔다리 정도는 나중에 달아줄까.
막힘없이 가마가 왕성으로 향한다. 나는 아공간에서 외투 하나를 꺼내 대충 걸친다. 좆집들은 다 알몸인데 나 혼자만 옷을 입기로 그렇고, 높으신 분들을 만나러 갈 예정인데 아예 알몸이기도 뭣하다.
그 절충안이 이거다.
가마가 왕성에 도착한다. 문을 이미 열려있다.
왕자가 사정을 모두 듣고 왕성으로 돌아갔다. 만반의 준비를 끝마치고 있을 것이다.
뭐, 그 준비가 뭐든 간에 그냥 때려 부수고 나올 거니까 소용없다... 영락없이 그렇게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나.
가마가 들어오자 성문이 닫힌다. 수십 미터 크기의 성벽과 성문이 닫히자. 바깥에서는 안쪽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인간들이 나타났다. 사람이 아닌 인간. 인류를 총칭하는 단어. 수인 왕국에서 마지막에 같은 인류가 내 앞을 막아섰다.
이건.
“재미있게 됐어.”
이 나라에 오고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올 곳을 알고 포위할 수 있었을까? 특수한 탐지 방법을 쓴 건가? 아니면 예지 능력?
어느 쪽이든 성가시다.
“마족이었나?”
후드를 뒤집어쓴 놈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날 둘러싸고 있는 놈들은 모두 후드를 푹 내려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성문 좌우의 성벽에 간격을 두고 서 있고, 내 앞에도 원형으로 간격을 두고 우릴 포위하고 있다.
“마족이었냐고? 몇 시간 전에 마족으로 전직했지.”
“너는 베다의 성스러운 율법을 어지럽혔다. 그것이 네가 죽는 이유다.”
“베다는 인도의 경전이에요.”
유상민이 툭 던진다. 오늘도 설명에 수고한다. 있는 줄도 몰랐는데, 안 떨어지고 잘 있었구나.
“야쥬르 베다. 인도의 과격파 조직인데요. 구성원은 전원 브라흐만과 크샤트리아. 쉽게 말하면 경찰하고 법관이요.”
인도의 경찰하고 법관이 나 하나를 잡기 위해 출두하셨다는 거군. 나를 잡으려는 놈들도 갈수록 거물이 되어간다. 인도에서 여기까지. 출장비는 나오냐? 텔레포트 마법진은 비싸잖아.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군. 공투교주. 카스트를 어지럽히는 자는 베다의 법으로써 처벌받을 것이다.”
““처벌받을 것이다.””
후드들이 일제히 낮게 복창한다.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할 속셈인 것 같지만, 비슷한 일을 하도 많이 당해 아무런 감흥도 없다. 나를 동요시키고 싶으면 아카펠라라도 연습해 와라.
여기서 진짜 아카펠라를 했다면 나도 조금은 동요했을지도 모르지. 식상한 전개는 집어치우고 창의성을 추구하란 말이다.
시대가 변하는 걸 넘어 차원이 변했는데도 카스트란 케케묵은 제도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런 꼴인 거다.
“무시하지 마라!”
“아, 미안. 어쩐지 귀가 가려워서.”
귀를 후비던 손가락을 빼니 옳커니, 왕건이 걸렸다. 손을 털어 귀지를 털어낸다.
“그래서, 여기 왕은 어디 있냐? 그놈이 나와야 이야기가 되는데.”
“그건 걱정 마시게나.”
후드들이 갈라지고, 뒤에서 수인 몇이 나온다. 중앙에는 반백의 수인이 금빛 왕관을 쓰고 있다.
성군이랬지? 인상만 보면 그래 보인다. 온화하고 인자한 분위기에 눈에서는 예지가 엿보인다. 저게 연기가 아니라면 진짜로 성군일 것이다.
“왕사의 왕림에 나오지 않으면 제자 된 도리가 아니지.”
그러나 왕이 자신의 사부를, 나비를 바라보는 눈길은 날카롭다.
“읍읍!”
나비가 무어라 말하려 하지만, 여전히 입은 다물려 있다. 좀 풀어줄까.
“서, 성아! 나는 그런 게 아니다! 전부 이 남자가!”
성이라, 그리운 별명이네. 우리 엄마도 날 저렇게 불렀었지. 왜 진휘라는 이름에서 성이라는 애칭이 나오는지는 아직도 전혀 모르겠다만.
“스승님. 거짓말은 그만두시죠.”
싸늘한 왕의 한마디에, 나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나비의 시간이 멈춘다. 눈을 크게 뜨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비의 반응은 개의치 않고, 왕이 계속 입을 연다.
“세력을 모을 때부터 혹시나 했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군요. 마족과 계약해 그 꼴이라니. 그건 그냥 창녀가 아닙니까. 그렇게까지 하실 정도로 제가, 제가 이끄는 나라가 못마땅하셨습니까? 사사건건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개입해오는 것도 이제 질립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건 나라를 위해! 새롭게 새워질 질서 속에서 왕국이 버티기 위해서!”
나비가 입을 연다. 필사적으로, 땅에 엎드려서 왕을 설득한다. 잘리지 않고 남은 위팔과 허벅지의 움직임은 벌레를 떠오르게 한다.
아마 다른 사람들에겐 징그럽게 보일 것이다. 나에겐 그 혼신의 몸부림이 귀엽게만 보인다. 애완동물은 애정으로 보살펴야지.
“그렇다면! 저를 조금은 믿어 주셔도 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마족 따위와!”
“나는 계약 같은 건.......!”
“어머님은! 어머님의 성정을 보고 싹을 잘라야 한다고 하신 건 스승님이셨습니다!”
왕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악비(惡妃)였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음해했으며, 심한 사치도 부렸다. 권력을 쥐여 줘서 좋을 게 없는 전형적인 인간이었다고 한다.
막 실권을 잡았던 왕은 선왕부터 은밀히 권력을 행사하던 어머니보다 영향력이 약했다. 왕사였던 나비는 왕에게 패륜을 제안했다.
그리고 왕은 패륜을 저질렀다. 흔한 일이다. 역사서를 보면 수백 개는 나올 법한 흔한 일.
“모후의 권력은 이미 왕권을 넘어서고 있었다! 놔두면 네가 괴뢰로 전락하는 일이었어!”
“다른 방법도 충분히 있었지 않습니까!”
“네가 그년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내게 나비의 외침은 변명으로밖에 안 보인다. 누가 보더라도 변명으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아아, 즐겁다. 실로 즐겁다.
모든 사정을 아는 나에겐 왕의 외침이 아이의 투정으로 보인다.
쾌락에 미쳐 나에게 모든 것을 불어버리며, 나비는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가 내 아이라는 심정으로 키웠어요.
내 아이 같아서 걱정되어 참을 수 없습니다.
성군이라 불리지만 지금도 불안하고 걱정스러워서, 그래서 탐사대를 만들었어요.
저 말 사이에 헐떡임과 자지를 조르는 말들이 잔뜩 들어갔지만, 그걸 모두 써버리면 멋없으니 생략한다.
나비는 왕을 자기 아이처럼 키웠다. 그리고 나라에 대한 애국심도 진짜다. 나라를 위해 죽으라하면 웃으며 죽을 정도의 진짜배기 애국자다.
차분히 대화했다면, 또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풀릴 오해였고, 감정의 골이었다. 그런데 내가 끼어들어 진창이 되었다.
왕도 나비도, 진흙탕에 발을 담갔다. 내가 발을 잡고 끌어들였다.
“그년이라니, 그래도 어머님은 왕족이십니다. 스승님의 왕족에 대한 예우는 겨우 그 정도입니까!”
“그년이 어떤 년인지 네가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업어 키운 아이의, 왕의 투정이 나비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 나비는 절박한 감정을 전하지만, 원래 투정부리는 아이에게는 부모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왕도 억울할 것이다. 어미까지 죽일 정도로 스승을 따랐는데, 그 결과가 배신이다. 가장 추악하게 아픈 곳을 찔러 들추는 배신.
나라는 존재가 두 사람의 모든 것을 일그러뜨려 부수고 있다.
좋구나, 좋아. 흐뭇하게 두 사람의 엄마와 아들의 말싸움을 구경한다. 가족끼리 싸우면 한동안 꿍하다가 화해하는 것이 수순이지만, 저 모자에게 그럴 기회는 없다.
둘 중 하나는 여기서 죽을 테니까. 풀지 못한 감정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며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오가는 말은 두 개지만, 두 말 사이의 교류는 없다. 오고 가는 말들은 평행으로 뻣뻣하다. 단지 외침이 오갈뿐, 그게 뜻을 지닌 말이 되어 상대에게 닿는 일은 없다.
서로를 이토록 믿지 못하다니. 서글픈 일이다.
이 사달을 낸 내가 할 말은 아닌가?
“결국 이렇게 되는군....... 앞으로는, 부탁함세.”
“할리발 왕국의 선의를 인도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왕이 등을 돌리고, 후드들이 앞으로 나선다.
나비는 죽어있다. 숨은 쉰다. 육체는 살아 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죽어버렸다.
아이에게 버림받고 나라에게 버림받고.
평생을 바쳐온 모든 것에게 버림받았다.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고, 기댈 기둥은 무너졌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 기분 나도 알지. 나비가 느끼고 있을 그 기분은 내가 항상 느끼고 있는 그것과 비슷할 거다.
검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나 홀로이니. 외롭고 외로워 미칠밖에 도리가 없더라.
뭐, 그런 느낌이다. 익숙해진 이 소외감도 처음 겪을 적에는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했으니까.
연극은 끝났다. 내가 각본을 쓰고 두 배우가 열연해준 공연은 막을 내렸다. 자, 현실을 보자. 인도의 경찰과 법관께서 이 먼 곳까지 왕림해 주셨다.
홀대하면 내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다.
후드들 사이로 마력이 연결되고, 증폭된다. 무협지에서 말하는 합격진하고 비슷한 건가. 뭐든 어때. 내 앞에선 어린이 재롱이다.
“플랜 A를 우선 시도한다.”
후드들이 덮쳐온다. 단, 노리는 것은 내가 아닌 내 좆집들. 짧은 시간에 라팔이와 눈을 교환한다.
나도 해야 돼?
아니, 내가 할게.
무언으로 대화가 오간다.
피곤할 정도로 놀아주었으니, 쉬게 해줘도 된다. 물건을 관리하는 것도 주인의 의무다.
그러면, 이 가마에는 손도 하나 못 대게 해야겠지.
가마와 스켈레톤들을 아공간에 넣는다. 내 아공간은 생물이 들어가도 상관없다. 피난처로는 최고지.
스켈레톤도 이런 전투에서 써먹을 게 못 되니 덤으로 넣었다. 꽤 신경 써서 만들긴 했어도 저런 수준의 놈들을 상대로는 부족하다.
맨발로 땅을 딛고 선다. 신발이랑 옷은 좀 챙겨둘걸, 실수했다. 내가 걸치고 있는 것은 외투 하나가 끝이다. 이렇게 된 이상, 마초 흉내나 좀 내볼까.
익숙한 마법대신,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한다. 전백귀후십귀도 꺼내지 않는다.
그저, 우직하게. 주먹을 휘두른다.
퍼억. 펑. 퍽!
호쾌한 소리가 들릴 때마다 사람의 몸이 풍선처럼 터져나간다.
“마법사가 아니었나?! 진형을 바꾼다. 대 무인용 진형을 짜라!”
후드들의 위치가 바뀌며 마력의 흐름도 바뀐다. 고밀도의 마력이 압력을 가지고 날 누른다. 내가 즐겨 쓰는 기술이다. 마법도 아닌 순수한 마력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나에게 효과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마력의 압박을 여유롭게 물리치고 후드들을 박살 낸다.
반수 이상이 죽자 후드 대장이 명령을 내린다.
“칫, 후퇴한다.”
“어딜 가.”
결계를 펼친다. 왕성 전체를 둘러싸는 거대한 결계. 특별히 신경 써 신도 잠깐은 잡아둘 수 있는 강도로 만들었다. 공간 좌표도 꼬아놔서 텔레포트도 못 쓴다. 날 죽여야만 빠져나갈 수 있는 감옥이다.
“마법사...?”
후드 중 하나가 아연해한다. 나는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고 한 적 없다. 니들끼리 지레짐작해놓고 놀라기는.
후드들을 전멸시키고, 아공간에서 다시 스켈레톤과 가마를 꺼낸다.
지하도로 도망가다 결계에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왕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