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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소환된 남자-106화 (10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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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인 신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누, 누군가?”

극한 상황에서는 사람의 본성이 나온다. 거지부터 황제까지 여러 사람의 멱살을 잡아본 나는 멱살잡이의 프로라 할 수 있다. 경험에서 나온 반응으로 보면 이 신사의 심성은 나쁘지 않다. 삐뚤어진 놈이면 여기서 먼저 욕을 하거나 표정에서 드러난다.

물론, 내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니 틀릴 수도 있다.

“미국에 선전포고 당한 선량한 시민? 아직 선전포고는 안 당했구나.”

곧 당할 것 같지만.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군.......”

“극심한 인종차별 피해자라 이거야.”

“...... 결국, 터질 게 터졌군. 원하는 게 뭔가? 경매에 나오는 물건?”

만사 포기한 태도로 신사가 말한다. 좀 더 방방 뛸 줄 알았는데.

“선선히 포기한다?”

“차별 문제는 없애려고 노력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경매에 나올 물품을 원한다고? 안내할 테니 이것 좀 놓아주게.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아. 여기까지 침입해 왔다는 시점에서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거겠지. 나도 목숨 아까운 줄을 알아.”

멱살을 놓는다. 신사는 양복을 정돈하고는 앞장서 방을 나간다.

“따라오게. 경매 물품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까지 안내하지.”

신사의 태도가 너무 시원스럽다. 함정이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순순히 따라간다. 순순히 협조하는 사람을 고문하는 건 또 분위기 깬다.

가다가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신사를 향해 가벼운 농담과 함께 인사를 건넨다. 어지간히 행실이 좋은 모양이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표시된 버튼은 지하 5층까지. 신사가 센서에 카드를 대자 지하 10층까지의 버튼이 나타난다.

엘리베이터는 매끄럽게 움직인다.

라팔의 시선이 바깥을 향한다. 벽을, 그 너머를 바라보며 라팔이 입을 연다.

“텔레포트 불가능.”

“알아.”

광역 공간좌표 교란. 중국에서 겪은 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텔레포트의 사기성을 생각하면, 대응책은 당연히 마련되어 있겠지. 예상했던 일이다.

본격적인 대책에 들어가는 것 같다. 자, 뭘 보여줄지 기대된다.

지하 10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휑한 공간에 드문드문 유리 케이스가 있고, 그 안에는 물건들이 하나씩 고이 놓여 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물건들이다.

“이 층에 있는 모든 물건이 경매 물품이오.”

“좋아. 다들 챙겨.”

나와 라팔이 앞장서고, 사랑이가 뒤따른다. 피오라가 어색하게 움직인다. 유상민은, 정작 저놈이 제일 신나 있다. 유리창을 깨고 물건을 담는다. 경보가 울리지만 무시한다. 어차피 오래지 않아 들킨다. 조금 일찍 들킨다고 달라질 건 없다.

나는 유리 케이스 사이를 누비며 원하는 물건을 찾는다. 케이스 아래에는 물건에 대한 설명이 쓰여 있는데, 내가 원하는 물건이 보이지 않는다.

아티팩트는 가장 안쪽에 있었다. 이중삼중 보안이 날 반긴다. 반기기만 하고 제 역할을 다하지는 못한다.

조잡한, 어린애가 찰흙으로 빚은 듯한, 엉망으로 만들어진 공 모양의 덩어리. 그 덩어리가 들어있는 유리 케이스 아래에는 뤠인 이라고 확실히 적혀 있다.

케이스를 부수고, 공 모양 아티팩트를 챙긴다.

다른 얘들도 경매 물건을 거의 다 챙기고 있다. 바깥 상황도 대충 마무리된 것 같다. 우리 위치를 특정한 경찰과 군대가 빌딩을 전체를 포위하고 있다. 빌딩 내부의 사람들도 모두 빠져나가고 빌딩이 비었다.

탈출 수단으로 뛰어내리는 건 좀 어떨까 하는 심정이다. 단체로 뛰어내리니 단체 자살을 보는 줄 알았다. 판타지 세계에서만 가능한 탈출법이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다. 이곳도 인적은 없다.

“날 인질로 잡는다고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할 거요.”

신사가 결연하게, 한편으로는 해냈다는 듯이 말한다. 처음부터 인질 같은 걸 잡을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인질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잡는 거고, 난 인질을 잡아서 저들에게 요구할 것이 없다.

정문을 열고 빌딩을 나선다. 포위망은 지상과 하늘을 가리지 않는다. 보병이 땅을 차지하고 마법사와 미래적인 디자인의 탈것들이 하늘을 막고 있다.

덥지는 않지만, 숨 막히는 열기가 피부를 타고 신경을 자극한다.

“우리에게 협력해준 이 신사에게 경의를 바치며. 빵야!”

신사의 머리가 날아가고, 머리를 잃은 몸이 털썩 쓰러진다. 끝까지 친절하고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게 내가 이 사람을 죽이지 않을 이유는 안 되잖아? 죽이고 싶으니 죽인다. 매우 간단한 이치다.

“인질은 없다. 이제 어떻게 할래?”

“쏴라! 쏴!”

“일제 사격!”

로스앤젤레스의 공간 좌표는 꼬여 있다. 그 꼬인 좌표에 대고 무작위로 텔레포트를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답은 이거다.

프랜들리 파이어.

날아오는 공격을 모두 텔레포트로 날려버리니 발사된 총포가 도시 내부에 무작위로 출몰한다. 그것들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목표를 관통한다.

살기를 띤 공기가 고통과 비명에 차갑게 식는다. 포위망이 단번에 붕괴한다. 피오라를 어깨에 지고, 열린 틈으로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좌표가 틀어진 지점만 벗어나면 바로 텔레포트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아무도 우릴 잡지 못한다.

사방에서 레이저빔이 날아온다. 모두 아까처럼 되돌려주니 상대의 대응이 달라진다.

“사격 중지! 근접전으로 승부해라!”

제다이 광선검을 든 전사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파직파직. 번개가 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저런 위험한 물건을 가까이 오게 놔둘 마음은 요만큼도 없다.

흑마법으로 한 명을 미치게 만든다. 미친놈이 자기편을 찌르고,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른다. 광선검에 닿은 건 사람과 강철을 가리지 않고 불타며 잘려나간다. 무시무시한 광경이다.

하늘에서 폭격이 떨어진다. 저것들이 이제 미쳤나보다. 미쳐서 피아를 가리지도 않는다.

폭심지가 된 도심을 달려 통과한다. 도시의 끝이 보인다. 좌표가 틀어진 부분도 저 근처에서 끝나고 있다.

막 좌표 이상 영역을 탈출하기 직전에, 우리 앞을 한 사람이 막아선다. 두 번째 보는 초록머리. 초록머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빛이 나와 라팔을 감싼다.

“명예의 전장. 다른 사람들만 피난시켜.”

공간이 비틀린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유상민과 좆집 둘을 세종에 있는 제자의 집으로 텔레포트시킨다. 혹시나 해서 나도 같이 갈 수 있나 해봤는데, 안 된다. 이 빛 자체가 텔레포트를 막고 있다.

마력으로 떨쳐내자고 생각했을 땐 이미 늦었다. 나는 처음 보는 장소에 와 있었다.

“이건 뭐냐?”

“라이켄의 진명. 명예의 전장. 초대받은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는 아공간을 만들어. 보통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둘.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에는 나갈 수 없어.”

공간을 감지해보니, 이 협소한 벌판이 이 공간의 전부다. 다른 차원으로 취급되는지 텔레포트는 되지 않는다.

“라팔, 그리고 림돔팔의 원수.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번개가 초록머리의 몸을 감고, 머리가 거꾸로 선다. 초록머리가 핏발선 눈으로 우리는 노려본다.

“원수? 니들이 먼저 덤볐잖아.”

“강간범을 처단하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거지?”

“그 강간 피해자가 살인미수를 저질렀는데? 너는 자길 죽이려 한 사람은 전부 살려 주나봐? 성인군자 납셨네.”

“말이 안 통하는군.”

누가 할 소리. 날 죽이려던 놈을 강간하기만 하고 살려줬다. 오히려 내가 칭찬받아 마땅한 부분 아닌가? 그런데 여자를 강간했다고 강간범으로 몰리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날 두고 왈가왈부하기 전에 그 살인 미수범이나 죽여줬으면 좋겠다.

마력을 두르고 앞으로 나서는 내 앞을, 라팔이 막는다.

“내가 할래.”

장난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나를 대신해 초록머리가 마주 선다.

“라팔, 너도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 남자는 림돔팔의 원수다. 배신을 해도 그런 남자와 함께라니!”

“내 알 바 아냐.”

“알 바 아니라니, 우린 동료......”

“동료? 어디가?”

라팔이 초록머리의 말을 끊는다. 어조 없이 평탄한 목소리지만, 누구나 느낄 정도의 한기가 있다.

“같이 생사를 넘었잖아! 인류를 구하기 위해 분투했고!”

라팔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던지. 초록머리의 평정이 무너진다. 라팔이 저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건 나도 처음 봤다.

“방치했어. 하루 종일. 일주일 넘게. 때론 몇 달 동안.”

“방치?”

곤혹스러운 어조로 초록머리가 되묻는다.

라팔의 아공간에서 인형이 나온다. 라팔은 자기를 인형술사라고 칭했지만, 정작 라팔이가 인형을 쓰는 것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그나마 중국에서 썼던 건 단순한 디자인의 목각인형이었다.

진짜 사람처럼 생겼지만, 생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실감 넘치는 인형이 땅을 딛고 선다. 라팔의 손가락에서 나온 마력의 실이 인형과 연결된다.

세 개의 인형에 열 개의 손가락이 연결되고, 라팔의 손가락이 춤추기 시작했다.

인형이 일제히 달려나가 초록머리를 공격한다. 공격도 모두 제각각이다. 뿔달린 거한 인형은 육탄전을, 로브를 쓴 여자 인형을 뒤에서 마법을. 평범한 체격에 검을 찬 인형은 검술을.

세 인형의 기술이 정교하게 맞물려 초록머리를 밀어붙인다.

정교한 공격이지만, 초록머리에게는 여유가 있다. 초록머리가 방어에 전념하며 라팔에게 묻는다.

“방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널 방치한 적이 없어!”

“저주 때문에 약해진 몸을 버리고, 영혼을 인형으로 옮겼을 때. 그때 닥터가 내 심리 검사를 했어.”

“아무 문제도 없다고 나왔잖아. 그래서 다들 안심했지.”

초록머리는 정말 뭐 때문에 라팔이 이러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봤을 때 라팔이는 알바트로스 쪽에 쌓인 게 많아 보인다.

“그리고 닥터가 덧붙였지. 내 정신 연령은 8살 정도라고.”

초록머리의 방어에 틈이 생긴다. 검사 인형의 검이 어깨를 초록머리의 어깨를 스친다.

“8살짜리를 방치했어. 계속. 놀아주는 건 몇 달에 한 번. 나머지는 방치. 내 방에서 계속 가만히 있었어. 아무도 말을 안 걸어줬어.”

육아 태만에 진저리난 아이가 가출했다는 거구만.

8살. 보살핌이 필요할 나이다. 능력이 좋아도 아이는 아이. 혼자 무언가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다.

정신연령 8살짜리 아이에게 가해지는 계속되는 무관심. 가출할만 하다.

“그건... 다들 바빴기 때문에......!”

동료라고 생각했던 놈들은 모두 영웅놀이에 빠져있다. 라팔이 알바트로스의 영웅 놀이에 회의감을 느끼는 이유를 알겠다.

라팔 자신이 그 영웅놀이에 희생된 희생자니까. 인류를 구하니 뭐니 하면서 가장 가까운 것도 돌보지 않은 그놈들의 자업자득이다.

“바빠?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를 버려둬도 될 정도로?”

“인류의 존망이 달린.......”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

“어?”

알았을 땐 이미 늦다. 초록머리의 뒤로 돌아간 라팔의 손에 초록머리의 심장이 들려있다.

“방심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가르쳤는데. 또 까먹어. 동료도 까먹고, 충고도 까먹고. 라이켄, 왜 살아? 그 인생, 진짜 의미가 있어?”

라팔이 초록머리의 심장을 후벼 판다. 물리적인 의미로도, 정신적인 의미로도.

라팔아, 그건 좀 너무 심하지 않니. 초록머리가 자살할 것 같다. 분위기가 위험해. 자살하기 전에 살해당해 죽으니 자살 위험은 없나.

살인으로 자살을 막다니. 과연, 라팔이.

“나는, 정말 몰랐.......”

“응, 상관없어. 나는 내 길을 찾았으니까. 잘 가. 라이켄.”

콰득. 라팔이 초록머리의 머리를 밟아 터뜨린다. 손에 들고 있던 심장도 힘을 줘 으깨버린다.

명예의 전장이라고 했던가? 그 전장 주인이 세상에서 가장 이름값 못하고 죽었다. 명예는 더럽혀지고 어리석고 멍청하게 죽었다.

벌판이 녹아 사라지며 공간이 뒤바뀌어간다.

“칭찬해줘.”

우리 공주님, 피투성이 공주님이 내게 다가와 칭찬을 조른다. 나는 라팔을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라팔이, 착하다. 착해.”

라팔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에게 달라붙는다. 인형의 온기는,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육아가 미숙한 어른들에게 질린 아이가 가출해버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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