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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1등급 몬스터들을 모두 처리하고 돌아온 나는 마법진 분석에 열중했다. 검은 늪지의 유적에서 얻은 영혼의 불순물을 지워주는 마법. 그것을 사용하게 해주는 마법진.
유적이 멀쩡했다면 이 마법을 내가 쓸 필요는 없었다. 그뿐이랴. 유적의 주인이 남긴 다른 물건을 추가로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괴물 하나가 모두 망쳤지.
사실, 11등급 몬스터들을 처리하기 전에 이것부터 해두고 싶었지만, 그게 말처럼 잘되지 않았다. 내가 외워버린 마법진은 마력을 흡수하는 유적의 기능과 연동되어 있던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을 분석해 유적과 연동된 부분을 삭제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순수한 마법진을 얻어냈다. 오늘은 마법진의 첫 실용이다.
대상은 나. 나리도 나쁘지 않지만, 여신의 영혼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 섣불리 손댈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나는 제자의 집 지하실 가장 깊은 곳을 더 파고 들어가 완전히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조용한 장소에서, 완전히 혼자가 된 건 오랜만이다.
마력을 이용해 마법진을 그린다. 1도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정밀한 그림이 바닥에 그려지고, 마력을 공급해 작동한다.
저번과 똑같다. 내 영혼으로 스며든 마력의 끈이 오염된 부분을 감싼다.
내 영혼의 오염된 부분을 떼어내고, 다음으로 마력이 내 영혼을 코팅한다. 이것이 이 마법이 펼쳐지는 과정이다. 몬스터와 사람을 상대로 실험을 해봐서 마법의 과정은 꿰뚫고 있다.
오염된 부분, 내 영혼에 흡수된 내 영혼이 아닌 영혼들이 떨어져 나가려 한다.
이미 발동한 이상. 마법은 문제없이 이루어질 터였다. 그러나, 나에게 보이는 광경은 조금 달랐다.
오염된 부분들이. 내 영혼의 불순물들이 자신을 감싸는 마력의 끈에 저항하고 있었다. 실험할 때는 보지 못했던 현상이다. 반항하던 불순물은 끝내 마력의 끈을 떨쳐낸다. 동시에 마법진도 정지한다.
예상외의 일이 일어났을 때의 안전장치가 작동한 것이다.
“뭐야?”
무심코 소리 내어 말한다. 영혼이 스스로 움직여? 실험할 때는 없었던 현상이다. 나는 안전을 중요시하는지라 순수한 마법진을 얻고도 수십 번이나 임상 시험을 거쳤다.
그러나 이런 적은 처음이다. 무슨 일이지? 영혼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자체는 처음 보는 현상이 아니다.
여신의 영혼과 나리의 영혼이 그랬다. 두 영혼은 지금도 줄다리기를 펼치는 중이다. 커져 가는 여신의 영혼에 대항해 나리의 영혼이 자체적으로 크기를 키우고 있다.
나는 그걸 영혼의 생존본능으로 이해했다. 여신의 영혼에게 먹히지 않기 위한 나리의 영혼의 몸부림. 그건 이해할 수 있다. 영혼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이라고 먹히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이것도 같은 경우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다른 놈들의 경우에는 뒤섞인 영혼이더라도 문제없이 작동했고, 나리는 특수 케이스라 도움이 안 된다.
한참을 고민하다 결론을 내린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마법진의 안전장치를 푼다? 그건 너무 위험하다. 처음 보는 현상에 무모하게 도전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나는 자살 지망자가 아니다.
내 영혼의 오염도가 심각하면 모르지만, 당장은 괜찮다. 내 영혼은 신이 인증한 순수한 영혼이다. 인증 딱지 붙여도 될 정도로 순수한 영혼이란 말씀.
그럼 당장 영혼을 정화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을 생각하자. 영혼을 보고 느끼는 능력. 그 능력을 키우는 것이 시급하다. 일단 봐야 뭐가 일어났는지 알아도 알 테니까.
***
유상민이 말한 한 달이 지나는 것보다. 내가 목걸이를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 더 빨랐다. 세종 길거리에서 영혼들을 관찰하다 문득 목걸이를 보니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알았다.
유상민을 불렀다. 우리만 가도 상관없지만, 유능하고 할 일 없는 놈을 굳이 놔두고 갈 필요도 없다. 그리고 꼭 불러야 하는 이유도 있었다.
“이거 움직이는데 우짜냐?”
목걸이의 힘을 사용한 상태로 세계 지도를 노려본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끌림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지도상 위치는 캘리포니아고, 동시에 이동 중이다. 얼마 전까지는 캘리포니아 바깥에서 감지됐었다.
“이런 일도 고려했어야 했는데요.......”
“수천 년 지났고, 꼭 유적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발굴됐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
이때까지 갔던 2곳이 모두 유적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간과하고 있었다. 우리 선배 되는 그 사람들이 남긴 물건이 말 그대로 ‘물건’일 경우를.
책이나 검, 기타 소지 가능한 물품이라면 우연히 발견한 누가 들고 다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뺏으면 돼.”
죽이고 뺏어라! 우리 라팔이가 바이킹의 피를 각성했나보다. 나도 그럴 생각이긴 하다.
“그런데 좀 더 다를 가능성도 있잖냐.”
“마찬가지. 죽이고 약탈.”
“내 말 이해하고 있는 거 맞지?”
이 백치 아닌 백치가 하는 말이라 영 신뢰가 안 간다.
“같은 유적을 노리는 것들은 전부 적이야.”
“이해는 똑바로 하고 있구나.”
저 유물의 주인이 우연히 유물을 주워 사용하고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른 문제는 알고 사용하는 경우. 어떤 자원이 됐든, 노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한 사람의 손에 들어오는 양은 적어지게 된다.
보통 이러면 서로 싸우게 되지. 죽이고 뺏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니까.
“북대륙은 마족과 엘프가 많았지?”
“남쪽은 수인, 북쪽은 요정. 대충 이렇죠.”
북대륙은 마족을 비롯한 요정. 엘프, 드워프, 실프 등이 많다. 남대륙에도 없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그 수가 적다는 것이 정설이라는 모양이다.
마족과 요정들이 북대륙에 있으므로, 마신과 요정신도 가능성으로 따지면 북쪽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검은 늪지에 가기 전에는 몰라서 못 갔고, 갔다 와서는 늪지의 유적에서 얻은 마법진을 개량한다고 못 가고 있었다.
급하게 갈 필요는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확실함을 원한다. 성급함에서 나오는 실패는 사양이다. 실패는 곧 죽음인데, 좋을 리가 있나.
“캘리포니아. 생전 못해보던 해외여행을 해볼 줄이야.”
“중국도 갔잖아요?”
“그건 전쟁이지 관광이 아니잖아. 이번에는 천천히. 관광도 좀 해보자고. 미국은 장난 아니라며?”
“거긴 뭐, 이미 미래도시죠.”
“실리콘 밸리 주변은 이미 미래도시. 51구역도 한 수 접어줄 정도.”
유상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고, 라팔이 덧붙인다. 그런데 51구역. 거기 진짜 뭔가 있는 곳이었냐? 은근슬쩍 엄청난 소리를 하고 있다.
압도적인 생산시설과 기술력을 기반으로 미국은 이미 21세기를 뛰어넘은 모습을 보여주는 미국. 한 마디로 신세계. 전부터 가보고 싶긴 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고.”
반역자도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에 있다. 운이 따른다면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
“결정했으면 바로 가요. 일 때문에 가본 적이 있으니까, 주요 도시랑 문화는 대충 알아요. 준비해올게요.”
***
“인간이란 것들은 어찌 이렇게 학습 능력이 없을까. 응? 대답해봐.”
“읍, 으읍! 읍!”
대답하라고 해도, 재갈을 물렸으니 말할 수 있을 리 없나.
“이틀, 딱 이틀만 늦게 왔다면 나는 아주 편안하게 캘리포니아로 관광 투어를 떠났을 거야. 그런데 니가 다 망쳤다고. 알아?”
한동안 뜸하더니. 이놈의 암살자는 상황파악을 정말 못한다. 나는 캘리포니아 여행을 앞드고 살짝 들떠 있단 말이다. 그런데 새벽에 살기를 느끼고 눈떠봐라. 기분 잡친다.
애초에 나에게 살기가 행해진다는 상황 자체가 불쾌하다. 너무 불쾌해서 주변을 전부 날리고 싶어진다.
어중간한 수준의 암살자라면, 제자의 집에 침입하기도 전에 언데드의 밥이 됐겠다만, 이놈은 그 보안을 뚫고 내 방까지 침입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언데드 밥이 됐다면 편히 죽었으련만.
사서 고생하는 놈들이 꼭 하나씩 있어요.
“짜잔. 이게 뭔지 알겠지?”
집게처럼 생긴 물건을 암살자의 하반신에 가져간다. 벤치처럼 생긴 도구는, 무언가를 짓누르기 딱 좋은 형태를 하고 있다. 암살자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린다.
“탁자에 있던 것을 가져왔어. 호두 깔 때 쓰는 거.”
누군지 몰라도 참 잘 놔뒀다. 시기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도록 말이야.
단순한 고통은 내 미학에 반하는 행위지만, 자다 깨면 누구나 짜증내는 법이다. 내가 자다 깼으니 넌 깨 있다가 영면에 들게 해주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래야 균형이 맞을 거 아냐.
“호두까기 인형이 호두를 깝니다. 호두를 깝니다. 호두를, 깝니다!”
“으으으으으읍!”
아주 기분 더러운 새벽이다.
***
“캘리포니아 직행도 가능하다며?”
유상민이 가져온 텔레포트 좌표를 보며 말한다. 좌표가 가리키는 곳은 캘리포니아에서도 멀리 떨어진 산자락이다. 산자락에서 캘리포니아까지는 나라면 10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 그래도 직행도 가능한 입장에서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며 멀리 가는 좌표를 가져왔다.
“미국하고 전쟁할 일 있어요? 국제수배자를 누가 텔레포트 태워줘요.”
“국제수배자?”
유상민이 턱짓으로 날 가리킨다. 나도 손가락으로 날 가리킨다.
“내가?”
“공투 사상의 창시자. 공투교의 교주. 위협인물 리스트 제로. 인도에서는 벌써 지명 수배까지 됐는데요. 몰랐어요?”
“다른 건 이해하겠는데, 인도는 뭐냐?”
“거기 카스트는 아직도 살아 있거든요.”
나 때문에 카스트가 무너져가고 있거나, 무너졌다는 소린가. 나 때문에 인도가 고생이 많다.
“인류 연합은 어때? 국제 수배령은?”
라팔이 유상민에게 묻는다.
“팀장님하고 길마가 힘 좀 써서 진짜 수배까지는 아니고, 암묵적인 수배인데요. 이 사람이 입국하면 조심해라, 하는 정도. 인상착의는 쫙 뿌려졌어요. 저희도 정보 공유 요청을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서요. 각국 상층부와 접촉은 조심해야 할 거예요.”
“니들 무슨 소리 하냐? 인류 연합은 뭐고?”
“인류 최고위 의사결정 기관? 어쨌든 가장 높은 놈들.”
“나는 거기 준 수배자 목록에 들어가 있고, 진짜 국제 수배가 안 되도록 힘쓴 게 꼬맹이랑 마현이다?”
“대충 그렇게 되겠네요.”
라팔이 내 질문에 대답한다. 나는 국제 사회에 찍히는 걸로도 모자라 그런 단체에까지 찍힐 뻔 했던 거야? 꼬맹이란 마현에게는 감사해야겠다. 자칫하면 인류 전체랑 싸울 뻔 했잖아. 나도 내 손으로 인류를 멸망시키는 건 사양이다.
중국을 무너뜨린 시점에서 중간계의 인류 숫자를 대폭 줄여버린 느낌도 들지만. 무시하자.
좆집들과 함께 텔레포트로 이동한다. 캘리포티나 근방 산자락에서, 산자락에서 다시 캘리포니아로.
“캘리포니아 상공에는 대공망이 펼쳐져 있어서. 고도를 낮춰야 해요.”
“대공망이라니, 최신식이구나.”
툴툴 대답하면서도 고도를 낮춘다. 텔레포트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연속 텔레포트도 비슷하다. 텔레포트 직후 한순간 정도 모습이 보이긴 하는데, 눈 깜빡할 사이보다 빠르게 다시 사라지니 정확히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캘리포니아는 실제 캘리포니아 지형 일부가 소환된 지역을 중심으로 20개에 달하는 대도시가 모인 지역을 일컫는다.
그중 목걸이가 반응하는 도시는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의 중심도시이며, 현재 문화 산업, 할리우드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라팔의 말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전체가 잘 짜인 계획도시라 하니 위에서의 모습도 보고 싶다만, 대공망이 있다니 미뤄두기로 했다.
로스앤젤레스에는 성벽도 없었다. 대신, 도시 사방으로 콘크리트 도로가 나 있다.
성벽이 없는 도시는 처음 봤다. 그만큼 여기가 안전하다는 방증이다. 적당한 위치를 찾아 로스앤젤레스에 착지한다.
“배신했다더니. 진짜구나.”
인적 드문 뒷골목에 착지한 우리의 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산듯한 금발 남자가 우릴 보고 있다.
“알베르토. 오랜만.”
라팔이 태연하게 금발에게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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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이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미국이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