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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류 대 이종족 전체로 진행된, 인류가 멸종 직전까지 몰린 대전쟁. 그 전쟁에 신의 입김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과거 전쟁의 이유는 인류의 높은 기술력과 생산력에 다른 종족이 위협을 느껴서였어.”
라팔이 말한다. 참전 당사자, 그것도 최상위 집단에 속해있던 라팔이 하는 말이다. 거의 확실한 정보겠지.
“그 뒤에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흠, 이쯤 되면 내가 신을 죽이는 것이 필연으로 느껴진다. 신을 죽이고 인류를 구원하라는 계시를 받은 기분이다. 그 과정에서 작은 희생 정도는 감수해야지. 중국이 망한 것도 전부 사소한 일이다. 암, 그렇고말고.
“일단 이건 숨겨야겠는데요. 잘못하면 지금 바로 세계 대전이 일어나요.”
중국에서 봤듯이, 이종족에게 죽은 인간들의 이종족에 대한 원망은 보통이 아니다.
이게 자연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주도하에 일어났다고 알려지면, 바로 이종족을 전부 없애버리자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설령 그 흑막이 신이라 하더라도. 아니, 신이라 더더욱 나온다. 자신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 초월자를 누가 놔두려 할까. 신을 죽일 방법을 찾으려고 혈안이 될 것이다.
“나도 찬성.”
최고참 두 사람이 찬성한다. 나도 마찬가지. 안 그래도 세계에 주목받는데 여기서 더 할 생각은 없거든. 백년해로하려면 사고도 골라가면서 쳐야 한다. 음,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나.
“가자.”
라팔을 안고 일어선다. 어디로 가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다. 이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 노인 왈. 진실의 끝자락이 있다는 방향이다.
“저도 갈래요.”
“10분 준다.”
“준비 끝났는데요. 바로 가죠.”
“그래, 가자.”
***
그래서 왔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신단 산맥 깊숙한 곳에 있는 던전이었고, 도착까지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간에 유상민이 멀미하지 않았다면 30분은 더 빨리 왔을 거다.
세상 어디든 텔레포트면 금방이다. 하루도 안 돼 도착할 자신이 있다. 빠른 텔레포트 두고 굳이 걸어갈 필요가 없다.
“던전이란 건 참 노골적인데.”
깊고 높은 산맥,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산등성이의 동굴에 들어가니, 거기에 검은 구멍이 있었다. 새까만, 빛을 비춰도 모두 흡수하기만 하는 검은 구멍.
“아직 발견된 적 없는 던전이네요.”
지도에 던전 위치를 기록하는 유상민은 즐거워 보인다. 일행은 나와 라팔, 유상민. 이렇게 셋. 던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사랑하고 피오라는 잠깐 버려뒀다.
싸움이 일어나면 둘 다 짐밖에 안 된다. 유상민은 지가 오고 싶다 했으니 자기 몸 관리는 알아서 하겠지.
앞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가니, 강렬한 햇살이 눈이 부시다. 뜨끈한 열기가 땅에서 올라온다. 사막이다.
“밖은 만년설이 쌓인 고산인데 여긴 사막이냐.”
변덕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지. 그래도 통일성 정도는 지켜달라.
마도서는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화살표 회전하며, 한 방향을 가리킨다. 라팔이 옷깃을 잡고, 유상민이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사막 여행은 지랄 맞게 힘들지만, 텔레포트는 그걸 모두 무시하는 사기적인 마법이다. 배워둬서 잘했다고 백번 생각한다.
열 번.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사용한 텔레포트 횟수다. 사막 위에 혼자 서 있는 모래로 만든 건물. 화살표는 그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만들어지고 천 년은 족히 넘었어요. 그런데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니. 대단한데요.”
“3천 년은 일단 확실히 넘었다.”
3천 년은 족히 넘은 건물은 막 어제 만든 것처럼 벽에 금하나 가지 않은 모습이다.
“들어가죠.”
유상민이 앞장선다.
자물쇠도 걸려 있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멀쩡한 건 겉뿐만이 아니었다. 건물 안쪽에도 먼지 하나 없다.
유지 마법이라도 걸었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다. 이 건물에는 아무런 마법, 마력이 작용하고 있지 않다. 마법이라도 걸린 기분이군.
내부는 분명 깨끗한데, 그게 수천 년 동안 방치되었다고 생각하니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도 화살표는 기능하고 있다. 마도서가 빛을 내며 더 강하게 방향을 가리킨다.
단단한 모래 바닥을 밟으며 화살표의 안내에 따라 걷는다. 화살표의 끝에는 문이 하나 있다. 열고 들어가니 본 적 있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낡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벽에 붙어 있는 책장.
과거에 노인이 혼잣말하던 그 장소다. 서가에 들어서자 마도서가 내 손을 떠나 날아간다. 그리고 마치 제 자리를 찾아가듯, 책상 중앙으로 올라간다.
책을 중심으로, 책상 전체에 균열 달리고, 책을 봉하고 있던 자물쇠가 풀린다.
나는 봉인이 불린 마도서의 사슬을 걷어내고, 책을 편다. 일단, 내용은 얼마 되지 않았다. 표지를 비롯한 잠금장치로 사용된 부분이 지나치게 많아서 두꺼운 것처럼 보였다.
“비교적 익숙한 고어네요. 다른 던전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것들이에요.”
다행히 유상민이 언어를 읽을 줄 알았다. 여기까지 와서 책을 읽을 모른다면 그게 개고생이야.
“몇 줄 읽어봐.”
“만약 그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봉인을 풀고, 그 이후 이 문장을 읽는 데까지 성공했다면, 다시 과거를 봐주길 바라는 바이네.”
“첫 줄부터 그거냐.”
아주 직관적이라서 마음에 든다. 개인적으로는 세 줄 요약 정도는 해주면 좋겠다.
그런 기대를 담아 황금 태엽을 책에 쑤셔 박는다.
수천 년 분량의 마력이다. 한 방에 끝내버리자는 생각으로 무식하게 마력을 흘려보낸다.
파지직. 마력이 튄다. 마도서가 펼쳐지고, 마도서와 책상, 그리고 이 서가까지 포함하는 마법진이 생겨난다.
마력이 뭉치고,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 책의 과거를 들여다 보며 봤던, 그 노인이다.
“진짜 이게 성공할 줄은 몰랐군.”
노인이 자기 몸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자기가 한 일에 자신도 신기해하고 있다.
라팔이 노인을 경계하고, 유상민은 도망칠 준비를 한다. 싸우지도 않고 도망이냐. 합리적이긴 하지만, 선택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우릴 그냥 버릴 생각이다.
미친놈이니 이해하자.
“왜 때리는데요.”
“겨우 딱밤 가지고 뭘 그래.”
“두개골에 금 갔는데요? 이거 잘못했으면 뇌출혈인데요.”
암, 내가 이해해야지.
“이거, 어지러운데요....... 진짜 뇌출혈인데요.”
휘청거리던 유상민이 겨우겨우 포션을 꺼내 마시고는 조금 낫다는 표현을 한다.
노인은 기막히다는 얼굴로 우릴 보고 있다. 놀라는 모습을 기대했나? 아깝게 됐다. 우리 모두 그런 감정하고는 거리가 먼 인간들이다.
“그래서, 영감. 할 말은?”
“흠흠. 그대들은 인간인 것 같은데, 맞소?”
“맞아.”
“나는 델 세포이라는 인간의 파편, 영혼의 조각이오. 특수한 방법으로, 조건을 만족시켰을 때 이렇게 잠시 세상에 나타나게 되어 있소.”
“본론부터 말해. 본론부터.”
“그래도 수천 년 선배인데, 예의나 그런 걸 기대하는 건 잘못이오?”
“응, 잘못했어.
영감이 당황한다. 늙으면 전부 대접받을 줄 아는 건 착각이다. 나같이 노인 공경 못 하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노인 공경은 못해도 노인 공격은 자신 있다.
“영감이 어떤 상황을 예측했든 간에, 지금 세계는 훨씬 더 미쳐있거든.”
한번 멸망한 인류가 회귀했고, 중국이 망해서 세계 밸런스가 흔들리고 있다. 미친 세계가 너무 미쳐서 오히려 정상으로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그게 무슨 일인지 궁금한 참이오만, 시간이 없군. 시간에 따라 내 영혼은 너무 마모되었던 모양이오.”
“그래서?”
“그대들은 소환되기 시작한 첫 세대요?”
노인이 나에게 묻는다.
“그런데? 이거 꼭 중요한 거야?”
“아주 중요하다오. 그래야 내가 이 다음 말을 할 수 있으니까. 그 차원이 어딘지는 모르겠다만, 그곳에서 끌려왔다는 것은 그곳에서의 생활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겠지. 그대들은, 자신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 자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소?”
왜 안 할까. 내 남은 인생을 전부 거기에 걸고 있는데. 내 꿈은 아갈리에서 돌아가서 보석을 팔아 돈을 마련한 다음 집 한 채 사서 평생 혼자 노는 거였다.
서울 중심가의 빌딩에 옥상은 내가 쓰고 나머지는 세주고. 나는 치킨과 피자와 콜라와 게임기에 둘러싸여 여생을 마감할 생각이었다. 조물주 위의 건물주가 내 꿈이었단 말이다.
그런 내 원대한 인생계획을 모두 망가뜨린 게 신이란 놈들이다. 내 인생을 걸 이유로는 충분하다. 콜라 한 잔 먹고 나서 소환됐으면 내 생각도 달라졌을 건데, 그놈들은 나한테 콜라 한 잔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콜라 단 한 잔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할 거야. 그리고 이미 하고 있고.”
“하고 있다?”
노인이 의아하게 묻는다.
이 자리에는 라팔도 있고 유상민도 있다. 그러나 괜찮겠지. 중국 사태를 봐서라도 국제 수배될 몸이다. 내 남은 여정이 평화로울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여기서 조금 더 적이 늘어나 봐야 기별도 안 간다.
중간계에서 처음으로, 이 말을 입에 담는다.
“벌써 신을 두 마리나 죽였거든.”
떠올리니 또 웃음이 나온다. 여신은 얼빠져서 방심하다가 한 방에 뒈졌고, 오크의 신도 발악했지만 결국 뒈졌다. 신이란 것들이 픽픽 죽어 나간다.
노인이 눈을 크게 떠 놀라고, 두 미친놈은 반응이 없다. 요만큼도 없다.
“알고 있었냐?”
“모르면 바보.”
“인과관계가 너무 명확했으니까요. 저랑 팀장님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요. 그래도 죽였다는 사실에는 좀 놀랐지만.”
하긴, 내 행동이 좀 뻔하긴 했어. 신을 만날 방법을 찾아주고 얼마 되지 않아 오크와 고블린을 비롯한 몇몇 종족이 신성력을 잃었다.
좀 많이 뻔했네.
“무, 무슨 소리요? 신을 죽였다고? 어떻게?!”
“그냥, 잘. 찌르니까 죽던데?”
진짜다. 진짜 잘 찌르니 죽었다. 이 이상 뭘 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죽인 거요?”
“그냥 찌르니까 죽었다니까.”
“영혼은, 신의 영혼은 어떻게 했소?”
“그거, 세계로 퍼졌는데.”
그래서 지금 세계에는 성녀와 성자가 넘치고 있다. 성(聖)스러운 자들이 넘치는 성(性)스러운 시대다.
“그나마, 다행이군...... 기껏 얻은 시간이 필요 없어질 뻔했어.......”
노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마도서로 시선을 돌려, 한 부분을 펼친다.
“신이란 작자들은 다른 차원에서 인류를, 그 차원을 통째로 소환하고 있소. 그리고 뒤에서 조종해 그들이 멸종하도록 하고 있다오.”
“알고 있어.”
내가 말하고.
“알아.
“알고 있는데요?”
라팔과 유상민도 대답한다.
“자, 자료도 남아 있지 않은 일일 텐데? 우리도 함께하던 이종족 사제가 은밀히 알려줘 겨우 알았거늘!”
“있던데요. 자료?”
나왔다. 유상민의 주특기. 따박따박 존댓말 하면서 신경 긁기. 노인은 당황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다.
“자료가 있다고? 신이 기록하지 말라고 신탁까지 내린다고 들었는데? 우리에게 비밀을 발설한 그 사제는 이단으로 몰려 죽기까지 했소!”
“하지 말라는 걸 하는 놈은 꼭 하나씩 있잖아요. 알기 어렵게 꼬아놨어도 있기사 있더데요?”
“허허, 허허허.......”
미친놈 셋의 합동공격에 정상적인 감성을 가진 노인의 정신에 금기가기 시작했다. 전문용어로 멘붕 했다고 한다.
“신을 죽이고, 흩어버린 영혼 중에, 당신의 몸에 흡수된 영혼은 없소?”
“아니. 그거 버렸는데.”
노인은 멍하니 나를 보더니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다잡는다.
“잘했소. 그걸 흡수했더라면, 훨씬 더 귀찮은 일이 생겼을 것이오.”
노인의 눈이 진지해진다. 마도서의 과거를 보았을 때 혼잣말하며 앉아 있던 그 책상, 그 의자의 뒤에 서서. 그때와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꿰뚫는다.
“수인 사제에게, 엘프 사제에게 인류 멸망의 명령이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우리는 복수를 결심했소. 그러기 위해서 우선은 신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우리는 판단했소. 큰 문제는 없었다오. 우리는 원래 신학자였으니까. 수십 년간 끈질기게 조사한 끝에 나는 작은 흔적 하나를 발견했다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노인의 광기서린, 신에 대한 원한이 듬뿍 서린 눈빛을 정면에서 받는다.
이윽고 노인이 입이 열린다.
태초에 하극상이 있었다.
============================ 작품 후기 ============================
re : 하극상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신화